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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법원, 네살배기 증언능력 인정

    대법원이 엄마의 피살 현장을 목격한 네살배기 여자 아이의 기억을 신빙성있는 증언으로 인정했다. 대법원 형사3부(주심 李林洙 대법관)는 7일 돈 문제로 이웃집 주부를 살해한 뒤 증거를 없애기 위해 불을 지른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모(35·악사)피고인에 대한 살인 등 사건 상고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증인의 증언능력은 나이와 관계없이 과거에 경험한사실을 그 기억에 따라 진술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있다”면서 “피고인을범인으로 지목한 피해자의 딸이 사건 당시 만 4세 6개월이었다 하더라도 다른 또래보다 정신능력이 우월한데다 진술에 일관성이 있는 점으로 볼 때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사건개요 이 피고인은 지난 96년 8월 서울 후암동 김모씨(당시 28·여) 집에서 돈문제로 다투다 김씨를 살해하고 딸 김모양을 목졸라 기절시킨 뒤 집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하지만 김양은 다리 등에 화상만 입고 극적으로 살아났고 이 피고인을 범인으로 지목했다.경찰은 김양의 진술 외에는 별다른증거가 없고 만 16세 미만은 선서 무능력자인 점을 감안,이 피고인을 풀어주었다.그러나 사건발생 2년이 지나도록 김양의 증언이 일관되자 검찰은 “비록 4살 밖에 되지 않지만 증거능력이 있다”고 판단,지난해 10월 이 피고인을 살인 및 현주건조물 방화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재판경과 1심 공판 때부터 검찰과 변호인단은 증인의 증언능력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검찰은 김양이 이 피고인의 외모 등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이 피고인이 살해범이라고 주장했고 변호인단은 이피고인의 알리바이와 함께 경찰이 김양의 진술을 유도,왜곡했다며 공소내용을 반박했다.그러나 서울지법은 지난 4월20일 “증인의 증거능력에 문제가없어 보인다”면서 이 피고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서울고법도 지난 8월11일 1심 선고를 그대로 인정했다. ■국내 및 외국 판례 국내에서는 지난 91년 성폭력 사건 피해자인 만 3세 여자아이의 증언을 인정,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한 바 있다.어린아이의 증언을 배척한 판례도 종종 있지만 증인의 증언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에 달라졌다.일본이나 미국 등 외국에서는 어린아이의 증거능력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있다.미국에서는 어릴 때의 ‘시각정보’는 영구기억으로 저장된다는 실험 결과를 인정하는 추세다. 강충식기자 chungsik@
  • [의열독립투쟁] (14)김시현 의사

    살아 생전 24년을 감옥살이한 투사가 있다.36세에 독립운동에 발을 디딘 후,광복에 이르기까지 26년간 일곱 차례나 일제 경찰에 붙잡혀 16년을 감옥에서 보냈고,광복 이후 20년동안 8년을 또 투옥된 것이다. 독립운동에 첫 발을디딘 후,47년의 절반을 넘는 24년을 감옥에서 보낸 인물이 있으니,그가 바로김시현(金始顯)의사다. 김 의사는 1883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김 의사를 기억하는 안동 사람들은 먼저 그의 혀짧은 연설을 알아듣느라 애쓴 이야기를 떠올리는데,이는 김의사가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비밀을 지키기 위해 혀를 깨물며 투쟁한 데서 비롯된 일이다. 처음 김 의사의 호는 학우(鶴右)였는데 검사가 “도대체무엇을 구하려는가? 차라리 하구(何求)가 좋겠다”고 빈정대 그렇게 바꾸어썼다고 한다.29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거쳐 법학과를 만학으로 다니다가 1917년 귀국한 김 의사는 경북 상주에서 3·1의거 와중에일경에 체포된 후 본격적인 항일역정에 접어들었다. 이 사건 직후 상하이로망명했다가 지린(吉林)으로 가서 의열단에 참여해 자금과 단원모집을 위해국내로 침투하였다.이로부터 그의 국내 침투와 피체,망명은 쉼없이 반복되었다. 거사를 벌이고, 체포되고, 출옥하면 곧바로 망명하여 다시 의거를 일으키는 연속된 행위를 해방을 맞는 날까지 마치 시계바늘 돌듯 계속한 것이다. 1920년 9월경 의열단의 제1차 국내폭탄반입에 가담했다가 대구에서 체포된그는 대구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출옥하자마자 다시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안병찬의 소개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가하였다.이 회의장에서 김 의사는 평생의 동지요,부부가 될신여성 권애라(權愛羅·73년 작고·건국훈장 애국장)를 만났다. 그의 본부인이 고향의 집을 지키고 있었지만(본부인은 1930년 사망) 상하이로 돌아온 뒤14살 연하의 권애라와 결혼했다. 1897년 경기도 강화에서 출생한 권애라는 개성 호수돈여학교를 다니면서 3·1의거에 참가,6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그후 이화학당을 졸업한 권애라는 상하이 애국부인회에서 활약하는 등끊임없이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하다가 신징(新京)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1923년 2월 독립운동사상 최대 대규모의 무기밀반입 거사가 있었다.의열단이 국내에 아지트를 만든 뒤 대규모 투쟁을 벌이기 위해 많은 양의 폭탄과무기를 국내로 수송한 공작이었다.1923년 2월초 김 의사는 중국 톈진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다량의 폭탄과 무기 및 ‘조선혁명선언’,‘조선관공리에게’라는 선전문서를 인수했다.“동포들에게 설날 떡을 선물한다”고 표현한 그는 평소 포섭해둔 황옥(黃鈺) 경부(警部)를 동반,안동현으로 향했다. 그러나 서울에 도착한 뒤 밀고자가 생겨 관련자들이 속속 체포되었고 김 의사 역시 검거돼 10년형을 선고받았다.1930년대 김 의사의 활동은 군사간부학교 학생모집과 배신자 처단,투옥생활의 연속이었다.1929년 출옥후 곧바로 지린으로 망명한 김 의사는 그곳에서 독립군양성소 설립을 추진하다가 중국관헌에게 체포돼 3개월 동안 고초를 겪고 중국 본토로 이동하여 1932년 의열단지도부와 재결합하였다. 마침 의열단은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초급장교를 양성하고 있었다. 그는 베이징지역에서 학생모집 활동을 하는 한편 노을룡(盧乙龍)과 함께 한삭평(韓朔平)이라는 배신자를 처단하러 나섰다.이 의거로 체포된 그는 살인미수혐의로 1935년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나가사키형무소에 수감되었다.1939년 9월 출옥후 이듬해 4월 다시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1940년대에도 그는 역시 항일투쟁과 옥중생활로 보냈다.1941년에 국내와 베이징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일본영사관 구치감에서 약 1년간 미결수로 생활했다.경성헌병대로 이감됐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또다시 베이징으로 탈출하였고,항일민족전선군을 조직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그러다가1944년 베이징헌병대에 다시 체포당한 그는 1년간 수감생활을 보내다가 1945년 서울로 이송되었고,해방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50년 5·10선거에서 민의원에 당선(안동 갑구)되어 정치활동을 펴면서 혁명가로서 그의 면모는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새롭게 타올랐다.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그러나 1952년 1월 절대 다수의 반대로 부결되자 이승만은 민족자결단·백골단 등 폭력조직과 관제 데모대를 동원,연일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7월에 국회의원을 연금시키고 테러를 벌이면서 이미 부결된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안’을 끝내 통과시켰다.이승만의 이러한 행위가 전개되는 와중에 김 의사는 동지 유시태(柳時泰)와 함께 이승만을 처단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이 거사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4·19혁명으로 석방되었으나 1966년에 서거,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김 의사는 ‘3년 이상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은 자는 포상받을 수 없다’는규정 때문에 독립유공 공적마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김 의사는 아내 권애라를 평생토록 ‘동지’라고 불렀다.마지막 가는 길에도 그는 아내에게 “권 동지,미안하오.내가 조국독립을 위해 몸바쳐 투쟁했는데 반쪽 독립밖에 이룩하지 못했소.남은 생을 조국통일 사업에 이바지해주오”라는 말을 남겼다.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 *김시현 의사 후손근황과 기념사업 김시현 의사는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김 의사의 부친은 구한말의병활동을 하였으며, 둘째 동생 정현(禎顯·건국훈장 애족장)씨는 중국에서독립운동을 하다가 관동군에게 처형돼 유해조차 찾지 못한 상황이다. 김 의사는 항일동지이자부인인 권애라 여사 사이에서 일점 혈육을 남겼다.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살고 있는 김 의사의 외아들 봉년(峯年·77)씨는 1922년 중국에서 태어났다.중국 옌지(延吉)에서 농업학교를,옌안(延安)에서 항일정치군사학교를 졸업한 봉년씨는 해방후 고향에서 면의원을 역임하였으며,대한중석에 근무하다가 정년퇴직,지금은 은퇴했다.2남2녀.장남 우일(宇鎰·40),차남 홍일(弘鎰)씨는 모두 회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한편 김 의사는 경북 예천 선영에 묘소가 마련돼 있을 뿐 뚜렷한 독립운동공적에도 불구하고 서훈은 물론 추모단체나 기념물 하나 없다. 이는 김 의사가 1954년 1월 이승만 전대통령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된 탓이다. 봉년씨는 “부친의 이승만 전대통령 암살미수사건 관련부분은 당국으로부터 특별사면을받은 만큼 원인무효가 됐다고 본다”며 “그동안 보훈처·청와대 등에 진정해봤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어 현재 서울 행정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해놓은상태”라고 밝혔다. 봉년씨는 또 “1923년 봄 의열단원들이 일제통치기관 폭파,일본인 요인처단을 목적으로 폭탄을 밀반입하다 적발된, 소위 ‘황옥 경부사건’은 주모자가부친이므로 ‘김시현의사사건’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홍석현회장 6년 구형

    대검 중앙수사부(辛光玉 검사장)는 30일 25억여원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구속기소된 보광그룹 대주주이자 중앙일보 회장인 홍석현(洪錫炫) 피고인에대한 조세포탈 사건 결심공판에서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조세포탈죄 등을 적용,징역 6년에 벌금 51억원을 구형했다. 또 함께 기소된 보광그룹 상무 이화우 피고인에게는 징역 3년에 추징금 6,791만원을 구형했다. 선고 공판은 오는 14일 오전 10시에 열린다. 서울지법 형사합의21부(재판장 金二洙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날 공판에서 검찰은 논고를 통해 “피고인의 탈루금액이 수백억원이고 조세포탈 액수도25억여원에 이르는데다 국세청에 허위자료를 제출하고 공사비를 부풀리는 수법으로 수억원을 돌려받아 보광에 손실을 입히는 등 사안이 중대하다”면서“특히 피고인이 남보다 더 큰 도덕성과 준법성이 요구되는 언론사 사주임을고려할 때 엄중한 형 집행이 요구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특가법상 조세포탈죄에 대한 법정 최저형이 5년인데다 감경사유 등을 감안하면 홍 피고인이 실형을 받을 가능성은 그리높지 않다. 홍 피고인은 최후진술에서 “재산을 개인 재산관리인에게 맡겨놓은 뒤 세밀하게 챙기지 못하고 보광그룹에 경영지도를 부실하게 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해 사죄한다”고 말했다. 변호인단도 최후변론에서 “피고인이 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고 나서 업무에 쫓겨 개인적인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재산관리에 대해 구체적인 보고를받지 못했고 탈루 세액도 이미 납부한 점을 고려해 달라”고 주장했다. 홍 피고인은 94년 11월∼96년 4월 모친으로부터 차명예금과 주식처분대금으로 32억여원을 물려받으면서 증여세 14억3,653만원 등 모두 25억2,762만원의 세금을 포탈하고 97년 9월 보광 휘닉스파크 골프장 및 호텔공사와 관련,공사비를 과다책정해 지급한 뒤 되돌려 받은 돈 6억2,000만원을 계열사 창업비에 사용한 혐의로 지난 달 18일 구속기소됐다. 이상록기자myzodan@
  • 경찰 대공수사 대부…박처원 전치안감

    박처원(朴處源·72) 전 치안감은 40여년간 대공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대공수사의 베테랑.치안본부(옛 경찰청) 5차장으로 재직하면서 대공수사요원들로 이른바 ‘박처원 사단’을 형성했다.‘고문기술자’ 이근안(李根安) 전 경감을 총애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는 팀원들에게는 신의를 강조하고 부하들과 조직의 보호욕이 유달리 강했다.이씨의 도피자금 등 보호망을 제공한 혐의를 받는 것도 그의 이런 성격 때문이다.박씨가 대공수사만을 고집한 것은 가족들이 지주계급으로 몰려 북한에서 처형당했고,단신 월남하는 과정에서 북한군에 체포돼 고초를 겪어 성장과정에서부터 반공정신이 철저하게 무장된 데 따른 것이다.박씨는 47년 경찰에 투신하면서 곧바로 대공수사에 투입돼 위험한 특수임무를 자청했다. 박씨는 87년 5월 박종철(朴鍾哲)씨 고문치사사건 은폐를 지시한 혐의로 구속되면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그 뒤 96년 ‘박종철씨를 고문하는 데 가담한 경찰관 수를 5명에서 2명으로 축소하고 고문경관들로 하여금 허위 진술을 하도록 지시한 범죄’가인정돼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었다. 노주석기자
  • [사설] 이근안 배후와 고문시효

    검찰이 ‘고문기술자’ 이근안(李根安·61)전 경감에게 고문을 지시한 ‘배후인물’에 대해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다.검찰은 85년 민주청년연합 김근태(金槿泰·현 국민회의부총재)의장 고문사건과 86년 ‘반제동맹’ 고문사건 진상 규명을 위해 당시 치안본부 대공분실 간부들을 불러 이씨의 고문에 안기부나 경찰의 윗선이 개입했는지를 집중 조사했다.조사 결과는 나와 봐야 알겠지만 ‘이근안 배후’에 대한 검찰의 본격 수사는 몇 가지 점에서 국민들의 관심을 끈다. 첫째는 고문행위의 비인도성과 반인륜성이다.고문기술자 이씨가 김의장에게 가했던 그 잔혹 무비한 고문 사실은 이미 보도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그러나 며칠 전 어느 텔레비전에 나온 ‘자수 간첩’ 함주명(咸柱明·68)씨의 경우는 이 나라에서 다시는 고문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국민적 각성을 새롭게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지난 8·15특사로 풀려난 함씨는 거의 폐인이 돼 있었다.오랜 수감생활 때문이 아니라 수사과정에서 이씨가 가한 고문의 후유증 때문이라고 했다.극심한 고문으로 폐인이 된 사람이 어찌 함씨뿐이겠는가.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자살을 한 경우도 있다. 다음으로 지적할 것은 이씨가 어떤 배경을 믿고 공안사범 수사에서 ‘저승사자’로 악명을 날릴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이씨는 ‘고문기술’을 통해 많은 표창을 받고 승진을 거듭했다.배후에 고문을 부추긴 세력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강한 의혹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군사독재 시절 이씨가 맡았던 굵직굵직한 공안사건들은 번번이 위기에 몰린 정권의 국면 전환에 이용됐기 때문이다.이씨가 10년 넘게 잠적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같은 배후세력과 관련이있을 수 있다.검찰은 이씨에게 고문을 지시한 세력과 그의 잠적을 도와준 사람들을 철저히 밝혀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고문 행위에 대한 공소시효 문제다.검찰은 이씨의고문 행위가 대부분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진상규명’ 차원에서 수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그같은 발상에는 문제가 있다.함씨를 불법감금하고 고문한 혐의로 이씨를 고발한 ‘민변’ 소속 변호사들을 비롯해 인권단체들과 일부 법학자들은 “고문 등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인정하지 않는 국제관습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헌법 제6조 1항은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은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문에 관한 한 국제관습법에 따라 시효를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 고문자를 처벌하지 않고 어떻게 고문을 근절시킬 수 있겠는가.
  • [의열 독립투쟁] (11)박열 의사

    일제 강점기 항일투사들의 최대 목표는 국적 일왕(日王)을 처단하는 일이었으나 철통같은 경비를 뚫고 일왕을 처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러나 항일투사들은 틈을 노렸다.그 중 한 분이 1932년 1월8일 관병식을마치고 돌아가는 히로히토에게 도쿄 사쿠라다몬 앞에서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李奉昌) 의사이며,이보다 앞선 의거는 박열(朴烈·1902∼1974) 의사가 일왕 부자(父子)의 처단을 준비하다가 체포된 거사이다. 박의사는 1923년 9월 일본 왕세자 결혼식 날에 일왕 부자를 한꺼번에 폭살하려고 폭탄입수를 계획하다가 비밀이 누설되어 검거되었다.일왕 부자 폭살기도사건으로 일본인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여사도 함께 구속된다.두 사람은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어 수감 중 가네코 여사는의문의 죽음을 당하였고,박의사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23년을 일제 감옥에서 보냈다. 박의사의 옥중생활을 날수로 따지면 8,091일,햇수로는 22년 2개월 1일이 된다.세계감옥사에 전과범의 옥중 생환자 중에 일수를 따져 22년의 생환기록은 있으나 ‘대역사건’이라는 일죄일범(一罪一犯)으로 햇수로 23년이란 감옥생활을 일관한 혁명가가 살아서 나온 기록은 당시까지만 해도 유례없는 일이다. 흔히 박의사를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른다.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왕을 처단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으로 만민평등의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 박의사의 생각이자 사상이었다.박의사는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의열단원 김한(金翰)을 통해 상해 의열단측으로부터 폭탄을 입수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못했다.다시 일본인 선원 스기모토에게 부탁했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신의 추종자이며 같은 ‘불령사(不逞社)’회원인 김중한(金重漢)에게 부탁했는데 이것이 사전 발각의 빌미가 되었다. 김중한의 일본인 처가 경찰에 밀고하여 관동대진재의 와중에 박의사와 가네코를 비롯,불령사 동지들이 체포돼버린 것이다.일제강점기에 수많은 항일투사가 일제의 법정에 섰지만 박의사 부부처럼 당당하게 자신들의 소신,즉 일제타도의 당위성을 피력한 사람은 흔치 않았다.그것도 적도(敵都) 도쿄법정에서. 박의사 부부는 1925년 9월 이른바 ‘대역사건’의 주범으로 일본 대심원 특정법원에 섰다.박의사는 공판에 앞서 4가지 조건을 법원에 제시했다.첫째,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조선의 왕관·왕의를 착용토록 할 것.둘째,법정에 서는 취지를 선언토록 해줄 것.셋째,조선어를 사용토록 통역을 준비할 것.넷째,피고의 좌석을 일인 판사의 좌석과 동등하게 만들 것 등이었다.박의사가 제시한 4가지 조건 중 일제는 첫째,둘째 조건은 들어주고 셋째는 거부,넷째는 재판장의 간청으로 철회했다. 이렇게 하여 박의사는 조선의 국왕을 상징하는 의관을 갖추고 법정에 서서일왕 부자 폭살의 이유를 진술하여 일본열도를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긴 재판 끝에 박의사 부부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이어 무기로 감형되었다.옥중의‘괴사진’사건으로 일본내각이 붕괴되는 등의 파란을 겪으면서 가네코는 옥중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박의사는 일본에서도 가장 심하다는 아키다형무소 등에서 복역하다가 일제 패망과 함께 맥아더사령관의 정치범 석방조치로1945년 10월27일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일본에서 신조선건설동맹위원장 등 민단 건설에 노력하던 박의사는 48년 8월 정부수립 기념행사 참석차 귀국했다가 6·25 때 서울 장충동에서 인민군에 납북되었다.납북 후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다가 1974년 1월18일 74세로 타계,평양 근처 애국열사능에 안장되었다. 박의사는 1902년 2월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경성고등보통학교 때 3·1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배달,막노동꾼 등의 일을 하면서 세이소구(正則)영어학교에 다녔다.이 무렵 일본의 사상가이며 아나키스트인 오스키,이와사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인생관과 사회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3·1운동을 전후하여 일본에는 한국인 노동자·유학생이 4만여명에 달했다. 유학생은 매국노 자제를 비롯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노동하면서 공부하는고학생이 대부분이었다.박의사도 고학을 하면서 정태성·조봉암 등과 진보적 사회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조직,재일한국인의 권익옹호와 조국해방운동에 나섰다.조직을 ‘흑로회(黑勞會)’‘흑우회(黑友會)’로 바꿔가면서 항일운동을 벌인 박의사는 부인과 ‘현사회’와 ‘불령선인’ 등 기관지를발간했지만 일본경찰은 닥치는 대로 압수·소각했다. 박의사의 ‘대역사건’이 발표되자 일본의 언론은 대서특필로 이를 보도하고 도쿄의 조선유학생 학우회가 총궐기 태세로 수감중인 박의사를 지원하고나섰다.그러나 국내언론은 검열과 통제로 사건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도하지못했다.박의사의 일왕 부자 폭살계획은 폭탄의 입수과정에서 차질과 정보누설로 좌절되었다.또한 이것이 관동대진재의 와중에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대역사건’으로 포장되고,조선인 대량학살을 호도하는 데 악용되었다.남쪽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북쪽에서 사망한 박의사는 20세기 민족사의 비극을 상징한다.89년 3·1절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지만 아직도 그의 독립투쟁과 아나키즘사상에는 ‘흑도(검은 파도)’가 덮여있는 실정이다.생가나 향리 어디에도 박의사의 추모비 하나가 세워져 있지 않다.비운의 애국투사이다. 김삼웅 대한매일 주필·‘박열 평전’저자 kimsu@*박열 의사 부인·후손들 박열 의사의 첫 부인이자 아나키즘운동의 동지였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여사는 박의사와 함께 대역죄 혐의로 1926년 3월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열흘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그런데 이로부터 4개월 후인 7월 가네코 여사는 형무소에서 의문사하였는데 유해는 경북 문경 박의사의 선산에 안장됐다.지난 73년 일본측에서 가네코 여사의 유해를 옮겨가려고 했으나 정화암·양일동 선생 등 아나키스트들의 반대로 무산됐다.박의사와 가네코 여사는 정식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으며 슬하에 자식도 없었다. 박의사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부인은 지난 76년 타계한 박의숙(朴義淑·본명 張義淑)여사이다.두 사람이 결혼한 것은 1947년.당시 박여사는 도쿄여대 일어과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일본 국제신문 기자로 근무했는데 출옥 1주년 맞아 박의사의 인터뷰를 갔다가 인연이 돼 결혼하게 됐다.박의사는 47세,박여사는 29세였다.박여사는 결혼 1년 만에 장남 영일(榮一·51·육군 준장)씨를,이듬해에장녀 경희(慶姬·현재 일본거주)씨를 낳았다.그러나 행복도 잠시,6·25 와중에 박의사는 납북됐고 가족들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이때 박여사는 남편의 뜻을 따른다는 뜻에서 성을 장씨에서 박씨로 바꾸었다.장남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당시 북한에 있던 박의사로부터 장남을 한국으로 데려가 교육시키라는 편지를 받고 박여사는 장남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67년)시켰다.박의사의 장남 영일씨는 현재 군 정보계통에 근무중이며 97년 장성으로 진급했다.현재 영일씨의 가족은 서울에 살고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朴甲哲 아이스하키협회장 2심서 추징금 더 늘려 선고

    서울고법 형사4부(재판장 朴國洙부장판사)는 10일 “체육특기생으로 선발해주겠다”며 학부모들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 박갑철(朴甲哲·57)피고인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배임수재죄를 적용,징역 1년에 추징금 1억2,000만원을 선고했다.1심보다 추징금이 5,000만원 더 늘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공소사실 중 원심에서 선고한 7,000만원 뿐 아니라5,000만원이 더 유죄로 인정된다”고 밝혔다. 박피고인은 지난해 2월 “아들을 Y대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할 수 있게 해주겠다”며 유모씨(47)로부터 6,000만원을 받는 등 96년부터 지난해까지 학부모 3명으로부터 모두 1억2,8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된 뒤 보석으로풀려났으나 징역 1년에 추징금 7,000만원이 선고돼 법정구속됐다. 이상록기자 myzodan@
  • 2년만에 벗은 계모의 ‘살인 누명’

    아픈 딸을 치료해주지 않고 죽게 내버려 둔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던 계모(繼母)가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남편과 사별한 A씨(44)는 96년 B씨(43)와 재혼했다.그러나 B씨의 아들·딸은 어린 시절 경험한 생모(生母)의 외도로 정신적 충격을 받아 심한 정서장애를 겪고 있었다.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며 송곳과 가위로 자해를 하기도 했다.A씨는 이들의 상처를 정성껏 치료해 주고 음악과 미술을 가르치며 사랑으로 보살폈다. 그러던 중 지난해 3월초 딸(당시 13세)이 집을 나가 2일만에 온 몸에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처음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만큼 아팠지만 A씨의 극진한 치료로 차츰 회복됐다.그러나 같은 달 11일 새벽 증세가 갑자기 악화돼병원으로 옮겼지만 숨졌다.A씨는 아픈 딸을 집에 방치해 죽게 한 계모로 낙인 찍혀 남편 B씨와 함께 기소됐고 지난 3월 1심 재판부는 유기치사죄를 적용,A씨에게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B씨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3부는 5일 “딸을 병원에 데려가지않고집에서 치료하다 숨지게 한 것은 잘못된 판단이지만 고의성이 있었다고 볼수는 없다”며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재판부는 “딸이 자해한 것은 아버지의 재혼에 대한 반항이라기보다 생모의 외도를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면서 “A씨는 딸을 치료해 주고 음악과 미술을 가르치는 등지속적인 관심을 보인 만큼 학대했다거나 치료에 소홀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상록기자 myzodan@
  • 아르헨 군부독재 98명 체포영장

    [마드리드 AP 연합] 스페인의 발타사르 가르손 판사는 2일 지난 76∼83년아르헨티나를 군사통치했던 호르헤 비델라,에두아르도 비엘라,레오폴드 갈티에리 등 3명의 전직 대통령과 당시 군사평의회 위원 12명 등 모두 98명에 대해 테러와 학살,고문 등의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지난해 칠레의 전 독재자 아우그스토 피노체트 체포영장을 발부해 영국에서 체포되게 했던 가르손 판사가 이번에 영장을 발부한 군 장성중에는 에밀리오 마세라 전 해군사령관,도밍고 바시 전 투쿠만 주지사와 기예르모 수아레스 마손 전 육군제1군단장 등이 포함돼 있다. 비델라 등 3명의 전직 대통령은 76년 이사벨 페론 전 대통령을 축출한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차례로 대통령에 취임,히틀러의 나치정권 때와 같은 철권통치를 펼쳤다.이 기간중 9,000명 이상의 반체제 인사들이살해되거나 실종된 것으로 공식 발표됐으나 인권단체들은 희생자가 최고 3만명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다.가르손 판사는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기간중 아르헨티나에서 발생한 스페인인 600명의 실종 및 납치사건에 이들의 책임이있다고 주장했다.피노체트 사건때와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 독재자들을 스페인 법정에 기소하려는 노력이 당사국간 외교분쟁을 야기할 우려도 있다. 그러나 체포영장이 발부됐다고 해도 이들이 곧바로 체포돼 스페인법정으로인도될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83년 민주주의로 복귀한 뒤 비델라 등을 재판에 회부해 징역형을 선고했으며 5년후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이 이들에 대해 사면조치를 발표하는 등 군부독재를 경험했던 다른 남미 국가들과 달리 나름대로의 과거청산작업을 펼쳤었다. 퇴임을 앞두고 있는 메넴대통령은 이후에도 가르손 판사의 수사협조 요청을 거부해 왔는데 차기 대통령 당선자인 페르난도 데 라 루아가 이 문제에 어떤 대응을 보일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인권단체들은 가르손 판사의 체포영장 발부를 일제히 환영했다.실종된 민간인들의 어머니들로 구성된 아르헨티나의 인권단체 ‘오월 광장 어머니회’의 알바 란질로토 간사는 군부독재시절의 납치범과 강간범,고문범들이 아직도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며 “우리를 대신해 외국에서 정의가 추구되고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 최순영 신동아회장 보석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權南赫 부장판사)는 22일 거액의 외화를 빼돌린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신동아그룹 회장 최순영(崔淳永) 피고인의 보석신청을 받아들여 보증금 1억원에 석방했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최피고인의 심장질환이 악화돼 더 이상 수감생활을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고 도주 우려도 없어 보석을 허가했다”고 밝혔다. 최피고인은 지난 96년 5월부터 수출금융 명목으로 국내은행에서 대출받은돈 중 1억6,500여만달러를 해외로 빼돌리고 대한생명보험의 공금 880억원을횡령한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돼 지난 7월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항소심에 계류중이다. 이상록기자 myzodan@
  • 姜晸薰 前조달청장 징역6년

    서울지법 형사합의23부(재판장 金大彙 부장판사)는 21일 ‘관급공사를 낙찰받게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건설업체로부터 2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7년을 구형받은 전 조달청장 강정훈(姜晸薰) 피고인에게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뇌물죄를 적용,징역 6년과 추징금 2억원을 선고했다.강씨에게 돈을 준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J건설업체 대표 전주호 피고인에게도 뇌물공여죄를 적용,징역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고위공직자인 피고가 뇌물을 받고 입찰정보를 알려줘 특정업체가 낙찰을 받게 한 것은 10년 이상의 징역형에 해당하지만 국가에 봉사한 점 등을 감안했다”고 밝혔다. 강 피고인은 94년과 96년 전 피고인에게 각각 충북공고와 충북대 응급진료센터 신축공사 입찰정보를 사전에 알려주고 현금 1억원씩 2억원을 받은 혐의로 지난 5월 구속기소됐다. 이상록기자 myzodan@
  • [의열 독립투쟁](8)김익상 의사

    1921년 9월12일 오전 10시10분경.일제의 조선 통치의 거점인 서울 남산 왜성대(倭城臺·현 중구 예장동 일대)의 조선총독부 청사(구 한국통감부 청사)2층에서 굉음소리와 함께 폭탄이 터졌다.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에 폭탄이터진 이 사건으로 일제가 초긴장함은 물론 경성(서울) 시내가 떠들썩했다.일제는 범인을 잡기 위해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하였으나 범인은 좀처럼 잡히지않았다. 일제로서도 이 사건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총독부 정문에는 항상 무장한 헌병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고 총독부 관리나 고용원이 아니면 임의로 출입을 못하게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폭탄을 휴대한 수상한 인물이,그것도 벌건 대낮에 총독부 청사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사건의 진상은 해가 바뀌고 그 해 겨울이 다 지나도록 오리무중이었다. 사건이 있은 후 6개월이 지난 1922년 3월28일 오후 3시30분 육중한 몸체의배 한 척이 상하이 부두에 입항하였다.상하이는 국제도시인 만큼 평소에도중국인·조선인·서양인·인도인·일본인 등 여러나라 사람들이 들끓었다.특히 이 날은 필리핀을 방문하고 상하이에 들르기로 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후에 수상 역임)를 맞기 위해 중국의 고관,상하이 일본 총영사관직원,각국 신문기자,일본거류민이 부둣가로 몰려나와 더욱 혼잡한 상황이었다. 배에서 내린 다나카는 출영나온 인사들의 환영을 받는 바로 그때 군중 속에서 중국인 옷을 입은 한 청년이 다나카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였다.세 발의총성이 울리자 총을 든 청년은 그곳에서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그러나불행하게도 총탄은 다나카에게 맞지 않았다.총탄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다나카 앞을 급히 지나던 젊은 서양 여자의 가슴에 박혔다. 청년은 다나카가 맞은 줄 알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이다.놀란 다나카일행은 황급히 달아났다.그런데 이번엔 양복을 입은 또 다른 한 청년이 달아나는 다나카를 권총을 쏘고 이어서 폭탄을 던졌다.그러나 이 총탄도 역시 다나카에 명중되지 않았고 폭탄도 불발되고 말았다.다나카는 두번의 피습을 용케피했고 두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중국 옷을 입은청년은 오성륜(吳成崙·본명 李正龍)이었고,양복을 입은 청년은 김익상(金益相)이었다.6개월전에 일어난 ‘조선총독부 투탄사건’은 김익상 의사가 체포된 후 심문과정에서 김 의사의 의거임이 비로소 밝혀졌다.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상하이에서 다나카에게 폭탄을 던졌던 김의사는 당시 28세로 아내와 딸 하나를 조국에 두고 온 몸이었다. 서울 태생인 김의사는 15세때부터 서울 용산역 철도노동자,용산전기회사,황해도 수안의 광업회사 등에서 노동자로 일하였다.일본인 밑에서 일한 까닭에일본어에 능통했고 일본인들의 습관까지도 몸에 익히고 있어 거사에 나섰을때 능숙하게 일본인 행세를 해 곳곳의 일경들의 경계망을 돌파할 수 있었다. 김익상 의사는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도 큰 꿈을 지니고 있었다.장차 비행사가 돼 폭탄을 싣고 일본을 향해 투하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유년시절아버지가 일본인에게 멸시·학대당하는 것을 보고 분개한 김 의사도 일본인밑에서 냉대와 학대를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김 의사는 이 고통이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고통이란 사실을자각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20년 5월 조국을 떠나,1921년 5월에는 베이징으로 가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을만난 뒤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조선총독부 투탄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조국독립을 위해 일제 통치거점에 폭탄을 안기자는 의열단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김 의사는 거사를 자청했다.1921년 9월10일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3개와 권총 1정,탄환 100발 및 현금 200원을 받아 베이징을 출발했다.김원봉 이하 동지들이 베이징역두에 나와 장도에 오르는 김 의사를 전송하였다.동지 가운데 한 사람이 “壯士一去兮 不復還일세(壯士가 한번 가면,돌아오지 못하는구나)”하고 격려의 말을 건네자 김 의사는 “쓸데없는 소리 말게.이제 1주일이면 내 넉넉히성공하고 돌아올 것이니 술상이나 잘 차려놓고 기다리게”하고 껄껄 웃으면서 화답하였다. 그처럼 담대했던 김 의사는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경계망을 돌파한 뒤 서울로 들어와,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하고 총독부 구내로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진 후 경비병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홀연히 김의사는 청사를 빠져 나왔다. 다나카 저격직후 체포된 김의사는 일본 나가사키로 이송됐고 1923년 11월 6일 항소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사형이 집행되기 전 일본 황태자(후에 昭和천황이 됨)의 결혼식으로 일제로부터 은사(恩赦)를 받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또 1932년 2월에는 만주국 독립기념 명목으로 다시 20년으로 감형됐다.1942년 김 의사는 30대의 몸으로 감옥에 들어간 이래 20년만에 50대 중노인이 돼 규슈 구마모토 감옥을 나왔다.서울로 돌아온 김의사는 해방직전한 일본인 형사에 의해 연행되었는데 그후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현재 조선총독부의 청사가 있었던 자리 인근(현 예장동 숭의여자대학 입구)에는 의열단원 김익상이 이곳에서 폭탄을 던졌다는 내용이 적힌 비석 하나만외롭게 서 있다.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 -金의사 투탄 조선총독부는… 김익상 의사가 폭탄을 던진 조선총독부 청사는 지난 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철거된광화문 청사가 아니라 남산에 있던 초기 청사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한 뒤 대한제국 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한일제는 한국통치기관으로 한국통감부를 만들었다. 청사는 남산 중턱에 있던구 일본공사관 건물을 사용했다.1910년 8월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찬탈한 일제는 남산 통감부 청사에 ‘조선총독부’ 간판을 내걸고 이 건물을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하였다.1926년 경복궁 앞마당에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건립되기까지 16년동안 이곳은 일제 조선통치의 본거지였다. 김익상 의사는 바로 이곳에 전기수리공으로 변장,잠입해 폭탄을 던진 것이다. 경복궁의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1916년 6월 25일 기공식을 갖고 공사가 시작되어 10년만인 1926년 10월 1일 ‘시정(始政)기념일’을 맞아 준공하였다.일제는 당시로서는 거액인 670여만엔을 들여 10여년에 걸쳐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건립하면서 이곳을 조선의 영구통치의 본거지로 삼고자 했다.그러나 신청사 준공 19년만에 패퇴하여 이 땅에서 물러갔다. 정운현기자 jwh59@
  • 서이석 前행장 징역6년

    인천지법 제3형사부는 9일 특가법상 수재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10년이 구형된 서이석(徐利錫) 전 경기은행장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징역 6년에 추징금 4억8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또 전 경기은행 상무 박청일(朴淸一) 징역5년 추징금 6,300만원,전무 홍순익(洪淳益) 징역4년 추징금 1억500만원,행장 주범국(朱範國) 징역3년 집행유예5년 추징금 7,000만원,영업부장 우인환(禹仁煥) 징역3년 집행유예5년 추징금 1억3,400만원,구월지점장 백종진(白鍾振) 징역3년,상임감사 고영철(高泳哲)씨 징역1년6월 집행유예3년 추징금 1,6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경기은행 임직원들은 부실 기업체에 대출사례비를받고 관행적으로 대출을 해줬다”며 “이로 인해 경기은행이 퇴출됐고 직원들은 물론 국가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쳐 중형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
  • [의열 독립투쟁](7) 백정기 의사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은 한민족의 민족해방운동 방법론 가운데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는 투쟁방략 중 하나였다.그러나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백정기(白貞基·1896∼1934) 의사는 일찍이 무정부주의사상(아나키즘)을 수용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한 선각자였다. 일제하 한국인 무정부주의자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체제는 물론,소수의 특권계급(공산당 등)이나 일당독재,약탈적 경제제도,사회적 불평등,노예적 문화·사상 등도 타도 대상으로 규정하였다.따라서 이런 한국인들의 무정부주의운동은 독립운동의 주체가 노동자와 농민 등 민중이라고 설파하고,민중이주체가 된 암살·파괴·폭동 등 폭력혁명론적 투쟁방법론을 제창한 사실은주목된다.일제에 대항할만한 군사력이나 경제력,조직적 기반 등이 별로 없는 식민지의 민중입장에서 자신의 희생을 무릅쓴 의·열투쟁은 오히려 정당한수단이 되는 것이다.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는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그러나 같은 곳에서 윤 의사와 거의 동시에일제 침략세력을 응징코자 한 영걸이 있었으니,그가 바로 백정기 의사이다.그러나 이같은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백의사는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공원 출입증을 구하지 못해 안타깝게도거사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백의사는 1896년 1월(음력)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본관은 수원으로 뒷날 호를 구파(鷗波)라 하여 ‘백구파’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어릴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활달하여 14세 전후에는 사서삼경에 통달할 정도로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또 신학문도 배워 정치·경제·사상사에 대한 식견을 갖추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서울을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의 진전상황을 목격하고 고향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이 해 8월 동지 4명과 함께 상경,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일제기관의 파괴를 꾀했으나,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 펑톈(奉天,현 瀋陽)으로 망명했다.이곳에서 후일 ‘육삼정 의거’에 같이 참여하게 되는 동지 이강훈(李康勳·전 광복회장)을 만났다. 1920년 겨울부터 1923년 후반기까지는 군자금 조달과 주요 기관·시설파괴등을 목적으로 국내와 일본 도쿄 등지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1923년 말 우여곡절 끝에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간 백 의사는 그곳에서 신채호(申采浩)·이회영(李會榮)·김창숙(金昌淑)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큰 영향을 받았다.특히 이때 이들과 교유하면서 무정부주의 사상을 수용하였다.그리하여 1924년 4월 이회영·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정화암(鄭華岩)·유자명(柳子明)등과 함께 재중 한인 최초의 무정부주의 조직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게 된다.이 연맹은 중국·일본·대만·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참여한 조직이었다. 1930년 4월에는 유자명·정화암 등과 함께 역시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조직했으며 그해 10월말 정화암 등과만주로 건너가 ‘한족총연합회’에 참여하는 등 조직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특히 백 의사는 이곳에서 일부독립운동가들의 민중 억압을 비판하는연극을 공연하여 재만 한인들의 갈채를 받기도 했다.지병이 악화로 1931년 5월경 상하이로 돌아온 의사는 몸을 요양하는 한편,영국인 전차회사의 매표원으로 일하며 일정한 직업이 없이 독립운동에 열중하고 있는 동지들을 부양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평소의 소신을 펼칠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한탄하고 있던 백 의사는 마침 일본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가 항일투쟁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중국주재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有吉明)에게 4천만 엔(圓)이란 거액을 지원,중국정부의 고관들을 매수하기 위해 상하이의‘육삼정(六三亭)’이라는 요리집에서 모임을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백 의사를 비롯해 정화암·이강훈·원심창(元心昌)등 10명의 무정부주의자들은 1933년 3월5일 상하이에 있는 백 의사의 아파트에 모여 거사를 논의했다.그런데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 의거에 나서겠다고 해 제비뽑기로 주동자를 뽑게 되었다.추첨결과 백정기와 이강훈이 결정되자 일본에서 건너온 무정부주의자 원심창도 동행을 자청,최종 3인이 선정되었다. 마침내 운명의 1933년 3월 17일.중국인 동지 왕야차오(王亞樵)로부터 입수한 권총과 수류탄,고성능 폭탄을 품에 간직한 백정기와 이강훈 등은 밤 8시경 육삼정 건너편 송강춘(松江春)이란 음식점에서 아리요시 등이 회합을 끝내고 나오기를 기다렸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의거를 눈앞에 둔 순간 미리 거사정보를 입수하고 대비하고 있던 일본·중국 관헌에게 세 사람 모두 붙잡혀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육삼정 의거’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성과는 적지 않았다.거사 직후 ‘상하이시보(上海時報)’를 비롯해 중국 신문은 물론 국내의 주요신문들도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였다. 현장에서 피체된 백 의사는 일본 나가사키(長崎)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이사하야(諫早)감옥에서 복역중 1934년 6월 5일 영양실조와 병고로향년 39세로 순국하였다.백 의사의 유해는 해방 이듬해 김구 선생의 지시로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돼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됐다.그리고 1963년 3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장세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 운동사硏 연구원‘文博 *‘육삼정 의거' 나머지 2人은 ‘육삼정 의거’의 주역 3인 중 나머지 두 동지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우선 두 동지 가운데 청뢰(靑雷) 이강훈(李康勳) 선생은 아직 생존해 있는데 생존 애국지사 가운데 최고령자이다. 이 선생은 올해 96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애국선열 관련 행사에는 빠지지않고 참석하고 있다. 금년 백범 50주기 추도식에서도 자필로 쓴 추도문을 낭독했다.젊어서 백야김좌진(金佐鎭)장군을 곁에서 모셨으며 백 의사와 함께 체포된 후 15년형을선고받고 일본감옥에서 복역중 해방을 맞았다.해방후 일본 현지에서 백의사등 3의사의 유해 봉환에 앞장섰으며 60년까지 재일거류민단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4·19혁명후 귀국해서는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60년대말부터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 편찬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자서전 ‘민족해방운동과 나’를 비롯,독립운동 관련 저서도 여러권 남겼다.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과 광복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원심창(元心昌,일명 元勳) 선생 역시 백 의사와 같이 체포되어 무기징역을언도받고 복역중 8·15해방을 맞아 투옥 22년만에 일본 가고시마형무소에서석방됐다. 해방후 민단(民團)창립에 참가,11·12대 중앙단장을 지냈다.71년 7월 4일 일본에서 타계후 ‘의사’로 추존돼 재일한국인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두 사람 모두 77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받았다. 정운현기자 jwh59@ *백정기 의사 유족근황과 추모사업 백정기 의사는 의거 당시 기혼자였으나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순국했다.현재 백 의사의 유족으로 등록된 백계현(白械鉉·65)씨는 백 의사의 동생 백진수(白珍守·46년 작고)씨의 아들로 백 의사에게 양자로 입양된 사람이다.백의사의 동생 진수씨도 국내 항일 공적으로 지난 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백 의사의 양자 계현씨는 한 때 공직생활과 개인사업을 하였으며 광복회 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백의사 추모사업은 고향인 전북 정읍에서 주로 추진되고 있다.정읍시는 수년전부터 시 예산으로 백 의사의 사당과 기념관 건립을 추진해왔으나 IMF사태 이후 자금난으로 모두 중단된 실정이다.현재 정읍에는 백정기의사기념사업회(회장 朴在福·전 정읍시의회의장)가 구성돼 추모사업을 해오고 있으며매년 4월 13일 효창공원 3의사 묘역에서 공동추모제가 열리고 있다.기념물로는 58년 전북도민의 성금으로 정읍에 세워진 ‘순국기념비’와 독립기념관경내의 ‘어록비’ 등이 있다. 정운현기자
  • [義烈 독립투쟁](5) 안중근 의사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자 일제는 이를 ‘암살’이라고 주장했다.이에 대해 안 의사는 공판정에서자신은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이토를 공격, 처단했다고설명했다. 안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의 향반(鄕班)집안에서 태어났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6년 3월 안 의사는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에 있는 가문의 재산을 모두 팔아 진남포로 이사한 후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였다.두 학교의 교장이 된 안 의사는 애국교육과 신학문 교육을 통해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안 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설치하여 자신이 지부장을 맡고 부인과제수의 패물까지 모두 헌납하는 모범을 보였다. 1907년 7월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폐위되고 한국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안 의사는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의병부대를 조직,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범윤(李範允)·최재형(崔在亨)등 연해주 유력자들의 지원을 받아 300여명의 동포 청년들을 모집하여 연추(煙秋·노보키에프스크)에서 의병부대를편성한 안 의사는 당시 이 부대의 실질적 통솔자였다. 안중근부대는 모두 세차례의 전투를 치렀다.1908년 4월 초순 두만강 최하단인 함경북도 경흥군 일본군 수비대 진지를 공격한 안중근부대는 단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는 귀환하였다.이어 1908년 7월 제2차전투에서는 함경북도 신아산(新阿山) 부근의 일본군 수비대를 수 차례 기습공격,10여 명의 일본군 병사를 생포하였다.청년 휴머니스트였던 안 의사는 일본군 포로들을 ‘국제공법’에 의거,무기만 빼앗고 석방하였는데 이것이화근이 돼 제3차 전투에서는 참패를 하고 말았다.석방된 일본군 포로들이 안중근부대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기습해온 때문이었다.겨우 목숨을 건진 안의사는 부하·동지 몇 명과 연추로 돌아왔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포신문 ‘대동공보’의 연추지국장으로 일하고있던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분할 협의차 만주로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거사를 도모하였다.1909년 10월 10일 대동공보사 사장실에서는 총무 유진율(兪鎭律),주필 정재관(鄭在寬),기자 윤일병(尹日炳)·이강(李剛)·정순만(鄭順萬),연추지국장 안중근,회계원 우덕순(禹德順) 등 7명이 모였다.이자리에서 안 의사는 “특공대를 조직하여 이토를 처단하겠다”고 자원하였고 우덕순도 자원하고 나섰다.특공대는 2개조로 나뉘어 안중근·유동하(劉東夏)조는 하얼빈에서,우덕순·조도선(曺道先)조는 채가구(蔡家溝)에서 거사키로 하였다.그러나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채가구에서 정차하지 않고 그냥 통과함으로써 결국 거사임무는 안중근조에게 넘어갔다. 거사당일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하얼빈역 주위에는 삼엄한 경계가 펼쳐졌다.안 의사는 러시아 경비병에게 ‘취재차 나온 신문기자’라고 속이고는일본인 환영객 집단 구역까지 깊숙이 진입하였다.이날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리자 안 의사는 여섯발의 총탄을 날렸는데 그 중 세 발이이토에게 적중하였다.거사에 성공한 안 의사는 그 자리에서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창하였다. 안 의사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거사는 ‘암살’이 아니라 한국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특공작전을 전개한 결과라고 누차 밝혔다.안 의사의 의거로 일제의 만주침략은 장기간 지연되었다.중국인들이 만주·중국 관내에서의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방임한 것은 바로 안 의사와 한국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신용하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안중근 의사 직계후손 근황 안중근 의사는 부인 김아려(金亞麗) 여사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장남 분도(芬道)는 6세때 사망해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분도보다 3살 위인 장녀 현생(賢生)씨는 백범 김구 선생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황일청(黃一淸·작고)씨와 결혼,은주(恩珠·71)·은실(恩實·68·미국 텍사스 거주) 자매를 두었다.은주씨는 남편 이용문(李容文·작고)씨와 미국으로 이민갔다가 남편 작고후 귀국,경기도 용인 수지에 살고 있다.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안 의사의 유일한 직계후손이다. 항주(杭州) 호강대학을 졸업한 차남 준생(俊生·1951년 45세로 작고)씨는 부인 정옥녀(鄭玉女·91년 작고)씨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현재 모두 미국에 살고 있다.안 의사의 장손격인 준생씨의 장남 웅호(雄浩·67)씨는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은퇴,새크라멘토에 거주하고 있다. 간호대학 출신인 장녀 선호(善浩·70)씨는 한국인 2세와 결혼,4남매를 두었으며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고 있다.차녀 연호(蓮浩·65)씨는 시애틀에거주하고 있다.정운현기자*白凡과 안중근家의 인연 19세의 청년 김창수(金昌洙·김구의 아명)는 1894년 양반사회를 타도하고자 황해도 동학농민전쟁의 해주성 전투에 선봉장으로 참여한다.그런데 당시 황해도에서는 반농민군 세력으로 의병이 조직되는데,그 대표적 인물이 안중근(安重根)의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이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박영효(朴泳孝)가 모집한 해외파견 유학생 70명에 선발되었다.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하자 출세의 길을 버리고,대가족을 이끌고 신천군 청계동(淸溪洞)으로 들어갔다.1894년 황해도 동학군이 일어나자 이에 맞서 안태훈은 안중근 등 그의 아들과처자들까지 편입시킨 의병을 일으켰다.그 위력과 명성이 자자하여 황해도 동학군은 안태훈 부대를 두려워하였고,김창수 부대 역시 청계동을 특별히 경계하였다. 그런 안태훈이 청년 김창수에게 밀사를 보냈다.그 결과 두 진영 사이에는서로 공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느 한 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는 공동원조까지 성립되었다.즉 안태훈은 비록 동학군을 토벌하는 입장이었지만 인재를 아끼고 있었고 개화에 뜻을 두고 있었지만 청일전쟁 전후의민족적 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창수 부대는 점차 토호화하고 있던 같은 동학접주 이동엽(李東燁)부대에의해 해체되었다.얼마간의 잠적 이후 이듬해 김창수가 찾아 간 곳은 청계동의 적장 안태훈 집이었다.청계동에서 ‘적장(敵將)과의 동거’는 청년 김창수에게 중요한 인연과 계기들을 마련해 주었다.안태훈의 각별한 후원으로 김창수는 부모님과 더불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안태훈가(家)의 식객인 고능선(高能善)은 동학의 꿈이 깨진 청년 김창수에게 새로운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또다른 식객 김형진(金亨鎭)은 같이 의기투합해 청국원정을 떠나사선을 넘나드는 동지가 되었다. 김창수는 청계동에서 스승과 동지를 얻었을 뿐 아니라,안태훈가와도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안중근의 아우 공근(恭根),조카 우생(偶生)은 임시정부 시절 백범의 측근이 되었으며,질녀 미생(美生)은 백범의 맏며느리가 되었다.또한 안태훈과의 화해,고능선의 교도로 백범은 양반이냐,상놈이냐 하는 계급의식 이상의 차원,즉 조국·민족문제에 눈뜨게 되었다.都珍淳 창원대 사학과 교수*安의사 5촌조카 民生씨 편지 발굴 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우리 나라에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가문으로 꼽힌다.그러면 안 의사 집안의 후손들은 해방후 어떻게 살았을까.지난 8월말 학술행사 참석차 중국을 방문한 본사 김삼웅(金三雄)주필이 연변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입수한 두 통의 편지에 따르면,안 의사 집안의 후손들 가운데 더러는 해방된 조국에서 대접은 커녕 분단과 독재권력에 맞서 싸우다 ‘한많은 일생’을 마친 것으로드러났다. 김 주필이 중국서 입수한 편지는 지난 88년 한국에 거주하던 안 의사의 5촌조카인 민생(民生·생사불명)씨가 중국 연길(延吉)에 있던 사촌여동생 경옥(京玉)씨에게 보낸 것으로 당시 경옥씨는 70세였다. 88년 1월 27일자 첫 편지에서 민생씨는 “지난 (87년)11월 15일 독립기념관장 춘생(椿生)형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너의 소식을 들었다”며 연락이 닿은 경위를 밝혔다.두 사람은 안 의사의 삼촌인 태건(泰健)씨의 손자녀들로 46년 7월 민생씨가 귀국하면서 서로 소식이 끊겼었다. 민생씨는 편지 서두에서 “해방후 형제·자매들이 귀국하였으나 모두 전재민(戰災民)의 신세를 면할 길이 없어 더러는 눈물을 흘리며 미국으로 떠나버렸다”며 해방후 집안 인척들의 이산을 안타까워 했다. 특히 민생씨는 “1961년 5월(‘5·16’을 지칭함) 조국의 평화통일 이념을주장했다는 이유로 나는 반국가범죄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경근(敬根) 당숙도 7년형을 선고받아 일제때 명근(明根) 당숙이 옥고를 치르시던 서대문형무소 특감(特監)8사(舍)에서 감옥살이를 했다”며 “해방,독립된 내조국에 돌아와서 또 감옥살이를 치러야 함으로써 우리 안씨 가문은 이역과조국에서 선후대(代)에 걸쳐 50여 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고 통탄해 했다. 안 의사 집안 가운데 안 의사의 사촌동생 경근과 5촌 조카인 민생씨는 해방후 유달리 험난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쳤다.두 사람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민주구국동지회를 결성,반독재 투쟁에 앞장섰으며,장면(張勉) 정권 하에서는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준비위원회(민자통)에 참여하기도 했었다.5·16후 군사정권의 혁신세력 탄압 때 두 사람은 반국가범죄 혐의로 투옥됐으며 경근은 출옥 직후 작고했다. 민생씨의 경우는 ‘최악’이었다.1933년 만주에서 만주군에 붙잡혀 혹독한고문을 당한 후 도주하다가 다시 붙잡혀 양쪽 발끝을 작두로 절단당한 민생씨는 그 몸으로 감옥살이를 한 데다 68년 가석방으로 풀려났으나,업친데 덮친 격으로 교통사고까지 당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고 말년에는 지팡이와 의족에 의존해야 했다. 편지를 쓸 때 이미 70고개를 넘긴 민생씨는 “헤어진 동료들과 형제들이 그리울 때면 저 머-ㄴ 북녁(만주땅을 지칭한 듯)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가슴 쥐고 나무밑헤 쓸어진다 혁명군/가슴속에 솟는 피는 푸른 풀에 절벅해’… 이 노래를 부른다”고 적은 뒤 “가마귀도 우름을 멈추고 바람만 스치고지나갈 무덤없는 그들의 핏자죽 위에 한 송이 들꽃이라도 받쳐들고 가서 명복을 빌어드릴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며 눈물지었다.현재 민생씨는 생사가불명이다.광복회·국가보훈처·안중근의사기념관은 물론 사촌형인 안춘생씨마저 민생씨의 생사를 모르고 있다. 5월 28일자 두번째 편지에서 민생씨는 “과거 우리들은 안중근의 집안이라는 이유 때문에 왜놈들에게 죽어야 했고,징역을 살아야 했는데 해방후에는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주구들이 권력을 잡게 됨으로써 애국자들의 피해는 여전했다”며 역대 권력자 가운데 친일경력자들의 면면을 거론하였다. 정병학(鄭秉學·79)안중근기념관장은 “안 의사 집안의 인사 가운데 민생씨처럼 해방후 불우한 삶을 보낸 인사가 적지않다”며 “이는 해방후 친일·독재정권이 들어선 것이 주원인”이라고 말했다.정운현기자* 안중근家의 독립운동가들 안중근 의사의 가문은 안 의사를 포함,모두 9명이 독립유공 공적으로 건국훈장을 받았으며 현재도 몇 명이 포상 심사중이다. 1909년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처단한 안 의사는 독립유공훈장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인 대한민국장(1등급)을 받았으며,안 의사의 두 친동생 정근(定根)·공근(恭根)은 각각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로로 독립장(3등급)을 받았다.또 사촌동생 가운데 명근(明根)은 ‘105인사건’으로,경근(敬根)은 임시정부 활동으로 각각 독립장을 받았다. 안 의사의 조카뻘인 ‘생(生)’자 항렬에서도 여러 명이 훈장을 받았다.대표적으로는 광복군 제2지대 구대장 출신으로 해방후 육사교장·국회의원·독립기념관장 등을 역임한 춘생(椿生·87·독립장)을 비롯해 춘생과 친형제로신민부에서 활동한 봉생(鳳生·애국장),그리고 안 의사의 첫째 동생인 정근의 장남으로 임정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원생(原生·애족장)과 둘째 동생공근의 차남낙생(樂生·애족장) 등이 있다. 이밖에도 납북이나 공적서류 미비 등으로 서훈이 보류된 인사도 여럿 있다. 우선 공근의 장남 우생(偶生)은 중경 임시정부 시절 임정 편집부 과원으로활동했으며 해방후에는 백범의 대외담당비서로 활동했으나 그 후 납북돼 포상이 보류돼있다.또 안 의사의 사촌 봉근(奉根)의 자제인 민생(民生)과 그의형 호생(鎬生) 역시 독립운동을 했으나 해방후 ‘반정부활동’을 했다는 이유나 서류미비 등으로 아직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정운현기자
  • [주택임대사업] 임대사업 節稅 이렇게

    주택 임대사업을 하려면 두채 이상 주택을 매입해 거주지 구청 주택과에 사업자 등록을 하면 된다.임대개시 10일 전까지 임대료 등 임대조건을 신고해야 한다.임대 중 임대차 조건을 바꿀 때도 변경 10일 전에 자진 신고해야 한다.신고하지 않거나 허위로 신고하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또 일정기간이 지난 뒤 임대주택을 팔 때는 거주지관할 세무서에 사업자등록증,임대차계약서 사본,등기부등본,임차인 주민등록등본 등의 서류를 갖춰 양도세 감면신청을 해야 한다. ? 절세 요령 취득·등록세의 경우 임대주택사업자가 임대를 목적으로 건축하거나 최초로 승계 취득(신규 분양 포함)할 때만 세제 감면혜택이 있다.그래서 주인이 한차례 이상 바뀐 주택은 임대사업으로 적당치 않다. 또 전용면적 18평 이하인 주택은 취득·등록세를 전면 면제,18평 초과 25.7평 이하 주택은 25% 감면해 주기 때문에 임대 가능성과 세제감면 혜택을 따져 주택을 사야 한다.소형 주택으로 세제 혜택을 많이 받을 것인지,임대가잘되는 중형 주택으로 사업을 하는 것이 유리한 지를 저울질해봐야 한다는얘기다. 종합토지세와 재산세도 전용면적 18평 이하의 주택만 세제 감면혜택을 받을 수 있다.전용면적 18평 이하 주택의 경우 종합토지세가 0.2∼0.5% 분리 과세되며,재산세는 50% 감면된다.전용면적 12평 이하인 영구임대주택은 종토세와 재산세가 완전 면제된다.따라서 임대주택사업자로 등록하려는 사람은 될수 있으면 소형 주택을 사야 세금을 덜 내게 된다. 양도소득세는 전용면적 25.7평 이하의 주택만 감면혜택을 받을 수 있다.임대주택을 5년 이상 임대 후 양도시 86년 1월1일 이후 취득한 사람은 50%,95년 1월1일 취득한 사람은 100% 세제 감면혜택을 받는다. 이러한 세제감면 혜택을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몇가지 절세방안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개인이 주택 임대사업을 할 경우 연간 임대료(보증금 제외) 수입을 4,800만원 미만이 되도록 보증금과 월세비율을 조정하는 게 좋다.정부는 지난 1월1일 발효된 개정 소득세법시행령에서 ‘간편장부제도’를 도입,연간 임대료수입이 4,800만원 넘는주택 임대사업자가 당해 연도 소득을 추계해 신고할경우 ‘무기장(無記帳)가산세’를 10% 물도록 했기 때문이다.따라서 연 임대료 수입이 4,800만원 이상∼7,500만원 이하일 경우 간편장부를 기록하는 것이 유리하다.7,500만원이 넘으면 공인회계사나 세무사가 작성한 ‘외부조정계산서’를 첨부해 신고해야 가산세가 붙지 않는다. 박건승기자 ksp@
  • 현장-마약중독 애인 구하려다 자신도…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지난 12일 밤 서울 성동경찰서 강력2반.히로뽕을 상습적으로 맞은 혐의로조사를 받던 황모씨(31·여)는 면회온 아버지를 보자 참았던 눈물을 끝내 터뜨렸다. 황씨는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두 오빠와 함께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황씨의 인생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 91년.서울 S여고 2학년때 교사와 학생 사이로 만난 국어교생 이모씨(40)를 볼링장에서우연히 다시 만나면서부터.서로 호감을 느꼈던 이들은 곧 연인관계로 발전했다.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얼마 가지 못했다.이씨는 걸핏하면 황씨를 때렸다. 92년 10월 말 황씨는 헤어지자는 이씨의 협박에 못이겨 처음으로 히로뽕을경험했다.이씨가 강제로 콜라에 타 먹인 것이었다.이씨가 마약중독자라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저버릴 수 없었다.이씨가 마약복용 혐의로 경찰에 붙잡히면서 황씨도 전과자가 되었다.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난 황씨는 4년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해 이씨를 옥바라지했다. 그러나 황씨에게 마약 전과는 큰 걸림돌이었다.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황씨는 이때부터 안마시술소와 술집 등을 전전,돈을 모으며 이씨를 기다렸다.하지만 석방된 이씨에게서 바뀐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95년 11월 이씨는 황씨 몰래 히로뽕을 물에 타 먹인 뒤 성관계를 요구했다.이씨의 폭행도 더해만 갔다.96년 이씨가 다시 경찰에 붙잡히자 황씨도 상습복용 혐의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마약에 빠진 애인을 구하려던 황씨는 자신도 모르게 마약중독자가 되어가고 있었다.황씨는 우울증에 빠졌다.지난 5월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증세가 심해졌다.황씨는 히로뽕에 의지했다. 지난 9일 황씨는 서울 마포구 응암동 자취방에서 주사기로 히로뽕을 맞았다. 히로뽕은 이씨를 통해 알게 된 손모씨로부터 구했다.죄책감에 시달리던 황씨는 지난 12일 남은 히로뽕을 돌려주기 위해 손씨를 만났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황씨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했지만 마약으로부터 벗어날수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할 뿐이었다”면서 고개를 떨궜다. [김재천 사회팀기자 patrick@]
  • 농지 용도변경 관련 金宗培의원에 執猶 선고

    서울지법 형사합의21부(재판장 金二洙 부장판사)는 17일 농지 용도변경 청탁과 함께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징역 5년을 구형받은 국민회의국회의원 김종배(金宗培) 피고인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뇌물죄를 적용,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과 추징금 3,000만원을 선고했다. 그러나 96년 국정감사 무마 청탁과 함께 유기산처리제 제조업자로부터 2,000만원을 받았다는 공소사실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김 피고인이 지난 97년 농지용도변경 청탁과 함께 받은 3,000만원은 대가성이 인정되나 96년 국감 전에 받은 돈은 국감에 부정한 결과를 야기하지않아 대가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김 피고인은 96년 9월 국감을 앞두고 유기산 처리제 제조업자로부터 “국감에서 유기산 처리제의 불량 여부에 대한 질문을 빼달라”는 청탁과 함께 2,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뒤 97년 농지 용도변경과 관련,이모씨로부터 3,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지난해 추가기소됐다. 이상록기자
  • [義烈 독립투쟁](1-2) 李在明 의사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지 채 두 달이 못돼 국내에서는 한 애국청년이 ‘을사오적’의 하나인 이완용(李完用)을 노상에서 습격,치명상을 입힌 의거가 일어났다.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은 일제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한국 땅에는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사실상 한국정부를 대신하였다.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 폐위당한 데 이어 한국군의 해산 등 일제의 한국침략은 갈수록 강도를 더해 갔다.이에 전국에서 의병이 궐기해 일제에 대해무력항쟁을 시도했으나 병력과 물자에서 역부족이었다.여기서 돌파구로 모색된 것이 바로 개별단위의 의열투쟁이었다.이는 일제의 침략 주동자와 친일적신들을 처단함으로써 그들의 침략의지를 분쇄시키고 동시에 동포들에게 구국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함이었다.이완용처단의거도 그 연장선상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1909년 12월22일 오전 이완용은 5일 전인 12월17일 사망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이 열리고 있는 서울종현(鐘峴) 천주교회당(현 명동성당)내 추도식에 참석하고 있었다.11시 30분경 식이 끝나자 이완용은 저동(苧洞) 자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력거에 올라 교회 오른쪽 언덕길을 막 오르려던 참이었다.이때 갑자기 한 청년이 인력거 뒤에서 달려오더니 품 속에서 단도(短刀)를 꺼내 순식간에 이완용의 왼쪽 어깨(左肩)를 내리 찔렀다. 졸지에 습격당한 이완용이 인력거 아래로 고꾸라지자 청년은 따라내려가 그를 타고 앉아 이번에는 오른쪽 허리(右便腰部)를 찔렀다.이완용은 이내 의식을 잃고 길바닥에 쓰러졌다.이를 지켜보던 인력거 차부(車夫) 박원문(朴元文)이 달려들어 제지하려 하자 청년은 그의 어깨를 찔러 쓰러뜨리고는(박원문은 왼쪽 폐를 찔린 후 나중에 사망함) 다시 이완용에게 달려들어 오른쪽 신장(腎臟)부분을 난자하였다(이완용의 생질로 그의 비서관을 지낸 김명수(金明秀)가 1927년 간행한 이완용의 전기 ‘일당기사(一堂紀事)’에서 인용).길바닥은 유혈이 낭자하고 순식간에 일대는 아수라장이 돼버렸다.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고 판단한 청년은 그때서야 ‘대한독립 만세!’를외쳤다.때마침 인근에서 호위하던 순사들이 달려들어 체포하려 하자 청년은칼을 휘두르며 대항하였다.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일경의 칼에 하체에 상처를입고 붙잡히고 말았다.이 의거로 결국 이듬해 처형된 청년이 바로 이재명(李在明)의사로 검거 당시 23세였다. 이 의사는 평양 출신으로 13세때 예수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일신(日新)학교를 졸업하였다.1904년 미국 노동이민회사의 이민모집에 응모,하와이에서농부로 일하다가 1906년 3월 재미한인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활동하기도 했다.1907년 공립협회에서 매국적(賣國賊) 숙청을 결의하자 자원,그 해 10월 배로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귀국 후 중국과 노령(露領,러시아령) 등 각지를 돌며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들과 매국노의처단을 결심한 이 의사는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서도(西道,평안도) 순시때이토(伊藤博文)가 동행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평양역에서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동지 몇 사람과 정거장에서 대기했다.그러나 이토가 자신의 신변의 위협을 우려해 순종황제에게 붙어다니므로 이토를 향해 발포하다가 자칫 순종황제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도산 안창호의 만류로 이 계획은 미수에그치고 말았다.그러나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원산을 거쳐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기회를 엿보던 중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그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일제와의 무력항쟁이 어려운 상황에서 일제 침략괴수보다는 매국노들을 먼저 처단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고 생각한 이 의사는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처단 대상으로 지목하였다.그들 가운데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은 첫번째 대상인물이었다.거사 1개월 전인 11월 하순경 이 의사는 동지들과 숙의끝에 자신은 이동수(李東秀)·김병록(金丙祿)과 함께 이완용을,김정익(金貞益)·조창호(趙昌鎬)는 일진회 회장 이용구(李容九)를 처단하기로 결의하였다.12월7일 최종모임에서 일행은 역할분담을 확정하였다.거사 결행자 이외에 오복원(吳復元)·박태은(朴泰殷)·이응삼(李應三) 등 3인은 거사자금 조달을,조창호·전태선(全泰善)은 거사에 필요한 권총·단도를 준비하여 서울로운반하는 책임을,그리고 김용문(金龍文)은 먼저 서울로 올라가서 이완용과이용구의 동정을 탐지하기로 했다. 12월12일 상경한 이 의사는 당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기사를 통해이완용이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거사 당일 아침 군밤장수로 변장,성당 정문 앞에서 군밤을 팔며 동태를 살폈다.오전 11시30분경 추도식을 마친 이완용이 인력거에 오르자 이 의사는 그를 응징하고는 현장에서 체포돼 이완용 저택 보호순사실로 끌려갔다. 의거현장에서는 이 의사 이외에 여인 2명도 같이 체포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이 의사의 부인 오인성(吳仁星)여사였다.권총을 휴대한 채 성당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동수와 조창호는 이 의사가 체포된 후 현장에서 도주하였다.이 사건으로 이 의사 등 13명이 이듬해 3월13일 정식 기소되었다. 첫 공판이 열린 5월13일 오전 9시30분경 이 의사 등 일행을 태운 3대의 호송차가 신축한 지방재판소에 도착하였다.중키에 짧게 깎은 머리,흰색 죄수복을 입은 이 의사가 동지 일행과 함께 출정하자 10시5분 개정에 이어 검사의기소장 낭독이 끝나고 재판장의 심문이 시작됐다. 문:공모자는 모두 몇 명이나 되는가?답:한 사람도 없다. 문:찬성자도 없었는가?답:2천만 동포가 모두 찬성자다. 문:거사는 언제부터 준비했나?답:을사조약 체결 후 미국에 있을 때부터 준비했다. 문:왜 이완용을 죽이려고 했나?답:죄목은 8개조(條)다.그 첫번째가 을사조약 체결이다. 거사현장에서 압수된 권총·단도 등 거사용품을 가리키며 재판장이 물었다. 문:행흉(行凶)에 사용된 무기는 이것들인가?답:행흉이라니,나는 행의(行義)를 했다.(‘일당기사’에서 인용) 18일 선고판결에서 이 의사에게는 ‘교(絞)’,즉 교살형이 선고되었고 김정익·김병록은 징역 15년,자금조달책인 이응삼에게는 최저형인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6월30일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 열린 2심 공판에서 검사는 “1심판결은 ‘완전무결’한 것”이라며 1심대로 판결을 내려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하였다.8월 최종선고에서 사형이 확정되자 이의사는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만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해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며 엄숙히 경고하였다. 9월13일 사형집행에 앞서 기독교 신자인 이 의사는 “내가 보던 찬미(讚美,찬송가)책이나 갖다 달라”고 하여 207장 ‘예수가 나를 기다리심’을 1절부터 끝까지 읽고는 조용히 순국하였다. 한편 이 의사의 습격을 받은 후 다량 출혈로 사경을 헤매던 이완용은 일제당국의 각별한 치료 덕분에 이듬해 2월14일 퇴원하였다.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그의 병실이 있던 대한의원(현 서울대병원 구관)에는 통감부 소속 일본인 고관을 비롯해 고종·순종황제가 보낸 칙사,한국정부 고관,심지어 한국거류 일본인들의 병문안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퇴원 후 내각 총리대신으로 복귀한 이완용은 이 의사 순국 20여일 전인 8월22일 한국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와 마침내 ‘한일병합조약’을 체결,강토와 국권을 일제에 내주고 말았다.금산(錦山)군수 홍범식(洪範植)은 이 소식을 듣고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 자결하였고 매천 황현(黃玹)은 ‘절명시’를 남기고 음독,순국하였다.1910년대 의열투쟁은 이로써 또하나의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정운현기자 jwh59@
  • 단체장후보 출마 기초의원 낙선돼도 의원직 보유논란

    경기지역에서 자치단체장의 구속·사망 등으로 보궐선거가 잇따라 치러지는 가운데 자치단체장 후보로 나서는 기초의회 의원은 낙선해도 현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 현행법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기초의원과 달리 국회의원,도의원,공무원 등은 보궐선거에 출마하려면 후보자등록 신청일 전까지 현직을 그만두도록 법에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논란은 8·9월중 치러질 고양·용인시장 보궐선거에 현직 기초의원들이 대거 출마를 선언,타후보들의 반발이 증폭되고 후보 난립을 부추긴다는 지적까지 나오면서 가열되고 있다. 현행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53조는 자치단체장 보궐선거에 출마하는해당 시·군·구 의회 의원은 현직을 유지하면서 입후보할 수 있도록 하는사임 예외조항을 두고 있다. 이 조항은 지난해 4월 지방선거가 치러지기 직전,선거기간의 업무공백을 방지하기 위해 개정됐으나 보궐선거에 기초의원들이 출마를 선언해 실제 적용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 변호사는 “유독 기초의회 의원만 현직을 유지하도록 한 현행법은 형평성에 정면 배치되는 법규정으로 위헌성 논란을 몰고 올 소지가 크다”고 말했다. 신동영(申東泳) 전 고양시장은 지난6월 24일 심장마비로 순직해 오는 19일보궐선거가 치러지며,윤병희(尹秉熙) 전 용인시장은 뇌물 수수 혐의로 징역6년을 선고받고 시의회에 사직서를 제출해 9월중 보궐선거가 치러진다. 고양 박성수기자 song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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