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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대통령“국민·기업 방심 위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3일 “경제가 너무 빨리 좋아지니 국민이나 기업이 방심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라면서 “국민들이 개혁을 소홀히 하거나 지나친 요구를 하게 되면 과거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강원 춘천시를 방문,강원도 지방행정개혁보고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우리는 현재 위기를 넘기고 일어설 가능성이 보이는 것이지 완전히 재기한 것이 아니다”면서 이같이 강조했다.이어 김대통령은 최근 뇌물수수와 징병검사 비리 등 공무원들의 과거정권 당시 비리가 적발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 뒤 “공직자는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라는 의식속에 과거오랫동안의 관행인 부정부패 일소에 노력해야 한다”고 공직자 부정부패 척결 의지를 역설했다. 이어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대통령은 권역별 정당명부제에 관한 질문에 “여야가 모든 지역에서 고루 당선되도록 하기 위해 이 제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라며 “그러나 권역을 어떤 지역들로 나눌지는 현재 결정된 바 없다”고 말했다. 양승현기자yangbak@
  • [朴康文코너] 제 자식만 귀한가

    군대 가는 것 돈 받고 빼 주는 비리가 여전하다는 것이 또 확인되었다.“군대는 힘 없고 돈 없는 집 아들이 간다”는 믿고 싶지 않은 말을 “이래도 못 믿어”하고 다그치는 양 가끔 불쑥 터진다.징모 업무 부정이 오랫동안 국방부의 원용수 준위와 박노항 원사에게 돈을 퍼부어 준 화수분이었음이 밝혀진 것은 지난해 6월이었다.열 달 전 그 기억이 아직 생생한 참이다.이번에는구청과 병무청 직원,군의관들이 걸렸다. 병무 비리가 끊이지 않는 것은,군대 가면 손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과 돈을 주고라도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는 부모가 있기 때문이다.군대 가면 손해보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고,부모가 안심하고 아들을 군대에 보낼 수있게 해야만,이 고질병이 근본적으로 고쳐질 수 있다. 이번에 당국이 조사해 발표한 것을 보면,청탁자들이 거의 모두 어머니들이다.우리 어머니들의 자식 사랑은 유난한 데가 있다.홀로 된 어머니가 삯바느질이나 행상을 해서 자식을 대학 공부까지 시킨 이야기를 드물지 않게 듣는다.이런 강한 어머니들이 나라를 떠받치는 기둥들을 길러냈다.나라의 발전이 이 어머니들에게 힘입은 바 실로 크다.그러나,법을 어기는 모성애,이기심가득한 모성애는 기릴 바가 못된다. 남의 아들 다 가는 군대를 제 아들만 가게 하지 않으려고 저지르는 불법행위는 이기적인 행위일 뿐만 아니라 사회에 위화감을 주는 행위며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다.1,000만원이나 5,000만원을 뇌물로 쓰고 아들의 병역 의무를 면제받게 하는 어머니가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어머니는 못난 어머니인가. 군 복무하는 병사들 가운데 일부라도 “나는 힘 없고 돈 없어서 입대했다”고 생각한다면,군의 사기는 떨어지고 전력은 약해진다.이기적인 모성애의 발휘가 이렇게 결과적으로 이적행위에까지 이르게 된다. 뇌물을 건넨 어머니들은 한결같이 “아이도 남편도 모르게 한 일”이라고말한다.아마 대부분 그랬을 것이다.그러나,모든 아들과 남편이 모르고만 있었을까.수천만원의 돈을 남편 몰래 쓸 수 있는 집안의 재력은 많은 사람이부러워할 만하다.심신이 멀쩡한데도 징병검사에서 자신이 떨어진 것을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아들은 생각했을지도 모른다.사후에 알려지더라도 가족의암묵적인 동의는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 실천되었을 수 있다. 가족의 암묵적인 동의를 기대할 수 있는 바탕은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와무관하지 않을 것이다.군대 빠지는 것이 손해라는 생각이 사회 분위기로서확고하게 자리잡혀 있다면,어느 모성애가 자식 앞길 막는 일에 나설 것인가. 그런 분위기가 자리잡도록 제도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군대 빠지면 예비군도 빠지는 등,손해는커녕 이득이 많은 불합리를 바로잡아야 한다.물론,군대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 선량한 젊은이가 억울하게 되지는 않도록 할 일이다. 아들들은 입대할 때 어머니 눈에 글썽이는 눈물을 본다.어머니 마음은 다같다.병영내 가학행위를 근절하고 안전 사고 예방에 힘써 생때같은 젊은이가 뜻밖의 변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지난날의 군내 의문사 사건을 당국은 약속대로 분명하게 규명하고 그런 일이 앞으로 발생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이러면,어머니들의 근심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네 검이 짧으면 그만큼 앞으로 나서라”이런 강한 어머니들이 스파르타를 강국으로 만들었다.스파르타 같은 군사국가 시절도 아니고 스파르타 어머니들처럼 굳센 마음까지 필요한 것도 아니다.다만,어머니들이 아들 걱정을 너무 하지 않도록은 해 주어야 한다. 이번에는 돈으로 해결한 경우만 적발했다지만,힘으로 해결한 경우마저 철저히 적발해서 관련자를 엄벌해야 한다.지난해 드러난 사건의 관련자에 대한처벌이 너무 가벼웠다는 여론이 있었다.돈을 받은 이와 준 이는 예외 없이따끔하게 벌을 주고,불법적인 면제 혜택을 받은 젊은이는 사회 생활 내내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공소 시효를 늘려 불법 면탈이 10년 뒤에 밝혀지더라도 즉각 입영시키든가 중벌해야 한다.그들이 끼치는 해악은 참으로 크다.
  • 수사 문제점·병무행정 개선책

    ?嵐?제점 및 과제 27일 발표된 합동수사부의 병역면제비리 수사결과는 사상최대라는 100명 이상의 구속자 수에도 불구하고 일반 시민들의 반응은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은 것 같다.‘유전(有錢)면제,무전(無錢)입대’라는 소문은 일부 입증했지만 ‘유권(有權) 면제,무권(無權) 입대’라는 또다른 실체는전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에 따라 이번 수사가 권력이나 직위 등을이용해 각종 병역특혜를 받았을 사회지도층 인사들에게 오히려 면죄부를 준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 수사 관계자는 이와 관련,“금품이 오고간 사실이 드러나 사법처리할 수 있는 사안만 수사 대상이었다”면서 “직위나 권력 등을 내세워 병무청탁을 한 경우 비위 사실을 찾아내고 혐의를 입증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실토했다.‘돈’을 내세운 사람만 수사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번 수사는 95∼98년 서울지역 병역면제 관련자만을 대상으로 국한했다.따라서 의병전역 및 공익근무요원 판정과 관련한 비리와 더불어 서울 이외 지역에서 저질러진비리의 규명은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로 남게 됐다.병무청및 군 관계자,브로커 사이에 형성된 검은 커넥션의 실체를 찾아내는 문제도마찬가지다. ?襤┻돛? 개선책 이미 저질러진 비리에 대한 철저한 수사 및 처벌도 중요하지만 병무행정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적인 보완대책도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국방부는 군의관과 병무관계자,의사,브로커,입영대상자 부모가결탁하는 검은 커넥션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내용의 병무비리 척결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1년마다 교대근무하는 신검군의관 제도를 폐지하고 전문의 가운데 우수인력을 징병검사 전담의사로 채용,전문성과 책임감을 갖고 징병검사만 맡도록 한다는 것이다.신검군의관들이 군부대 파견요원이기 때문에 병무청의 감시·감독을 받지 않아 부조리가 개입할 소지가 많았다는 지적에 따른 조치다. 군의관과 징병전담의사·징병관 등의 도장과 서명 등록대장을 10년간 보존토록 해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소재를 명확히 가리기로 했다. 국외 체류를 악용,병역을 기피하는사례를 근절하기 위해 국외이주나 영주권자의 병역면제 연령을 35세로 높이고 병역기피자가 귀국하지 않으면 40세까지 공무원 채용을 금지하고 관청의 허가사업에 종사할 수 없도록 한다는대책도 나왔다. 김인철기자 ickim@
  • 병역비리 관련자 명단

    ● 병역면제 청탁 금품공여자(135명)●구속 이용일(67·쌍방울구단주 대행·전KBO사무총장) 임금택(55·신한은행 서초지점장) 김경희(46·서울은행 응암지점장 홍성봉의 처) 조인택(61·세무사) 한대희(66·전 총무처 소청심사위원) 서용빈(29·프로야구선수·LG트윈스·보석) 마미숙(54·충남대 교수 이원웅의 처) 안승택(57·의사·부평안병원) 김교천(49·부산동아대 강사) 김영분(57·분당자동차학원장 배병태의 처) 민옥자(57·동남유화대표 최남호의 처) 최덕광(59·숙박업) 송진화(53·신생프러덕션대표) 이외룡(59·부동산임대업) 김현숙(50·회사원 김진철의 처) 양한묵(53·음식점 전무) 박춘옥(51·원창물산 상무 이강일의 처) 유일수(51·전 대유공영 대표) 이권재(48·전 로베르패션 대표) 노창식(61·무직) 권옥순(56·대원레저대표 박완순의 처) 김예균(54·개인택시) 박춘식(51·목수) 신영환(54·㈜신성 회장) 조규완(57·대창전기 대표) 송영섭(56·척추교정치료사) 민성기(49·철강판매업) 이상용(61·출판업) 김병준(50·㈜거봉 감사) 장재순(50·농장경영 김봉일의 처) 서재설(59·㈜삼성전기 부사장) 유병국(49·화랑운영) 이낙수(59·의류판매업) 김은배(46·회사원 이창명의 처) 오정자(57·삼익주택 법정관리인 원수언의 처) 정덕남(44·수산물중매인) 허창삼(52·㈜삼전 대표이사) 이한기(56·약국운영) 정광만(56·음식점경영) 고병헌(54·㈜금비 대표이사) 박청(55·직물도매업) 오동희(56·동조무역 대표) 오동훈(49·부동산임대업)●구속(적부심 석방) 주경빈(49·한양대 의대교수) 김용문(56·의사·강서고려의원) 백명자(62·한국기공 대표 서종국의 처) 구모환(49·동우직물 대표) 박무웅(55·신성전자부품 대표) 전용배(47·부동산임대업)●불구속(영장 기각) 김종윤(56·성남시의원) 송경(54·외환카드㈜ 감사) 전영실(51·의사·전영실 산부인과) 윤원조(59·건물임대업) 장유자(55·전 농어촌진흥공사 직원 단한주의 처) 정동건(54·개인택시) 홍기식(56·풍산전기 대표) 김정태(61·동양기업 대표) 김현수(54·삼립인쇄 대표) 이정상(55·무직) 이복연(54·의류판매업) 최종태(45·㈜우림해운 대표) 정혜경(48·영남정보통신 부사장 김용환의 처)●불구속 김영욱(51·하나은행장 김승유의 처) 최순강(55·가수·예명 김상희) 홍원식(48·㈜남양유업 대표이사) 이재홍(49·㈜대우중공업 상무) 전용수(55·인하대교수) 김병만(56·관악세무서 6급) 정창호(50·김포세관 6급)박철조(49·전 신한은행지점장) 방대영(63·전 주택은행지점장) 박순철(53·전 한일은행지점장)이석도(49·전 서초구청 도시국장) 곽원문(54·전 도로공사감리단 감사) 이혜경(52·LG LCD 사장 김선동의 처) 이근옥(69·전 호서대 교수 박윤성의 처) 강대균(68·변호사 임영득의 처) 김증자(56·변호사 최병륜의 처) 박순이(49·㈜LG화학이사) 이순상(53·의사 주영철의 처) 권혁권(63·의사·대림성모병원) 김기영(58·의사·서울구치소의무서기관) 구정열(56·의사·마산중앙자모병원) 이병원(60.의사·산재중앙병원) 우영혜(47·쌍용양회 지사장 권대헌의 처) 김명수(50·㈜해태상사 이사) 정영민(53·무역업) 이기석(43·건설업) 조재린(59·크린타치오 대표) 박융길(45·의류판매업) 김정택(57·건설업) 박재명(48·한일유통㈜ 부사장) 백송수(58·동성유통 대표) 송용민(52·전 ㈜이원대표이사) 이정희(50·음식점경영) 황태리(45·의류판매업) 한택환(49·부동산임대업) 김영창(57·건축사) 감경철(55·㈜익산 대표이사) 김두환(56·스포츠용품점) 문희지(61·부동산임대업) 정석명(53·의류제조업·두손 어패럴) 허용호(51·상원산업대표) 주명희(46·주부) 김은정(56·약사) 송희순(53·주부) 채실경(46·부동산임대업) 박상석(53·다남산업 전무) 김용심(50·건화상사 부회장 정우경의 처) 이재오(44·루치아노 대표 최원만의 처) 송인복(59·주부) 전희식(58·완구제조업) 우금순(58·환경미화원 박성구의 처) 방기봉(52·무직) 한은순(45·제마트 대표 임성재의 처) 정양호(55·국세청 5급) 최승계(55·무직) 안동진(52·무직) 장신자(57·전 농협직원 최정웅의 처) 정춘자(54·신라교역 대표 박준형의 처) 김병성(55·.의류판매업)●지명수배 김찬영(61·개풍산업㈜ 대표) 정종대(53·그린웨딩홀사장) 이민우(28·프로농구선수) 갈지원(53) 김용희(56) 신정희(50) 여창대(51) 박성래(55) 박정하(51) 허계근(57) 이상도(57)●참고인 중지 이연우(59·전 상업은행과장) 이명복(50·무직) 김유진(54.주부)● 알선자 및 전직 군의관(49명)●구속 최기택(44·서울병무청 7급) 정건표(46·〃 6급) 김재우(56·〃 6급) 김종기(43·〃 7급) 김세환(40·〃 7급) 이인옥(43·〃 7급) 유남술(54·〃 6급) 정윤근(47·병무청 징병검사과 6급) 박기석(56·〃 총무과장 4급) 이영운(40·〃 감사실 6급) 이영운(40·〃〃) 송두표(47·〃 산업지원과 5급)한상태(54·〃 징모국 4급) 박용원(41·경기병무청 8급) 허주철(45·〃 6급) 이기왕(52·신길1동 병무담당 7급) 김정권(57·전 모병관·해군준위) 성치용(55·전 국군수도병원·대령) 장용기(50·〃 소령) 이승준(59·전 관악구청 5급) 유광영(54·건물임대업) 권태훈(50·평화초등학교 7급) 나춘균(48·반도정형외과 의사) 이민용(39·의사·전 군의관) 손호열(39·〃〃) 김경수(32·〃〃) 이일철(35·〃〃) 이상표(34·〃〃) 이춘오(46·울산대학병원의사)●불구속 김진우(34·의사·전 군의관) 김평호(36·프로야구 코치) 곽주표(55·예비역대령) 소병빈(53·〃) 강선호(52·건물임대업)●지명수배 김진대(51·서울병무청 6급) 김영식(42·〃〃) 김영국(55.서울병무청 6급) 성용현(47·〃〃) 이흥섭(40·〃〃) 안계영(40·〃 7급) 양태근(40·〃〃) 조진구(45·〃 기능직) 조문길(48.전 〃 직원) 한소열(52·병무청징병검사과 6급) 김종근(41·경기병무청 7급) 최경희(51·전 강남구청 병사계장 6급) 황동연(44·전 성동구청 직원) 이상진(67) 정재효(63) 이상직(61)● 군인 및 군무원(23명)●구속 임영호(37·국군수도병원 외과처장·소령) 고기복(38·〃 안과과장·소령) 최경석(34·국군수도병원 신검과장·소령) 송상현(35·국군수도병원정형외과·대위) 윤영현(34·〃 정형외과·소령) 김익수(37·〃 정형외과장·소령) 윤태일(32·〃 정형외과·대위) 김장훈(34·〃 안과·소령) 김도술(52·〃 주임원사) 김양태(48·〃 군무원·7급) 이정수(50·〃 주임원사) 김용호(52·국군부산병원 주임원사) 임종범(47·〃 행정부장·중령) 임만석(48·국군대구병원 행정부장·중령) 김경환(35·국군 백제병원 안과·소령) 김인식(37·국방부 의무실장·소령) 박종영(45·〃 합조단 군무원 5급) 허성초(36·육군본부 의무감실·소령) 윤일선(39·공군교육사 진주기지병원장·소령) 조규섭(37·공군15비행단 신경외과·중령) 김규형(48·의무사령부 인사행정처장·대령) 정인호(44·〃 인사과장·중령) 여광조(46·연합사령부 기무대·준위)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30)

    ◆前한성은행장 韓相龍2,3년전 평소 알고 지내는 고서점에서 일제말기에 출간된‘창남수장(暢楠壽章)’이라는 문집 한 권을 구입한 적이 있다. 문집 이름에 ‘수(壽)’자가 들어간 것은 흔히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기념하여 만든 것이 보통이다. 일제 당시 환갑잔치에 문집까지 낼 정도라면 고관대작이나 후학이 많은 거유(巨儒) 정도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다. 이 문집 역시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첫 장을 넘겨 보니 당시 미나미(南次郞)총독의 축하 휘호가 나타나더니 뒤 이어 일본인 육군대장의 글씨와 궁내부대신을 지낸 민병석(閔丙奭)의 서문이 곁들여져 있었다. 다시 축하시 모음란에는 당대의 명사들이자 유명한 친일파들이 대거 운집해있었다.황족 친일파인 윤덕영(尹德榮)·좌옹 윤치호(尹致昊)·후작 이항구(李恒九·李完用 아들)·중추원 참의 김사연(金思演)·은행가 민규식(閔奎植)등등. 이런 수준의 인물들이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위해 시를 보낼 정도였다면 그의 수준·성향도 짐작이 간다.알고 보니 문집의 주인공은 일제당시 경제계의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한상룡(韓相龍·1880∼?)이었다. 한때 ‘조선 금융계의 황제’로 불렸던 한상룡은 1880년 규장각 부제학 출신 한관수(韓觀洙)의 3남으로 태어났다.17세때 관립외국어학교 입학을 계기로 신학문에 눈뜬 그는 미국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밀항을 하였으나 외숙 이윤용(李允用)의 주선으로 대신 사립 성성(成城)학교에 입학(1899년)하면서군인의 길을 택하였다. 이듬해 그는 한국정부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장티프스로 학업을중단하고 1901년 귀국하였다.귀국후 그는 사립 중교의숙(中橋義塾)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이 해 경부철도 기공식에서 고종의 종형인 이재완(李載完)의영어통역을 담당한 것이 인연이 돼 공직(평식원 총무과장)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의 공직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그는 자신을 둘러싼 ‘좋은 여건’을 배경으로 야심을 키워가고 있었다.당시로선 근대문물에 대한 견문과 영어·일어 구사능력을 갖춘 인재였던데다 그의 뒤에는 당대 제일의 권력자인두 외숙(이윤용·이완용 형제)이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903년 12월 그는 한성은행(漢城銀行) 총무 취임을 계기로 금융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한일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이 은행의 전무취체역으로 취임한 그는 일제당국에 로비를 하여 당시 조선인 합방공로자에게 지급한 은사공채(恩賜公債)를 흡수,자본금을 300만원으로 10배나 증자하면서 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성은행이 조선 귀족들의 은행이라는 소문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3·1의거 당시 민중들의 표적이 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이 무렵 그는 40여년 동안 일본 제일은행의 최고책임자로서 일본 재계의 거두로 군림해온 시부자와(澁澤榮一)를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에서는 이토(伊藤博文),경제에서는 시부자와,건설에서는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目賀田種太郞)를 ‘조선에서 영원히 기억해야할 3대 은인’이라고 하면서,특히 시부자와에 대해서는 ‘일본은 물론 동양에서 공전 절후의 위인’이라고 극찬하였다.그는 시부자와의 좌우명 ‘일생일업(一生一業)’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기까지 했다.그가 대부분의 친일파들 처럼 정계로 나아가지 않고 실업계로 진출한 것은 시부자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매국에 가담한 친일파들에게 준 공채를 토대로 발전을 도모한 한성은행은 1923년 그가 두취(頭取,현 은행장)로 취임한 직후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관동대지진의 여파에 이어 영업부진·경영악화가 계속됐다.이듬해 총독부는 이 은행을 정리대상으로 지목하였으며 28년 마침내 조선식산은행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나의 한성은행인가,한성은행의 나인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한성은행에서 나고,자라고 그로써 거기에서 죽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애착을 가졌던 한성은행을 잃게 되자 그는 병석에 눕고 말았다.식민지 예속자본의 말로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밖에도 그는 한성은행 재직시절 금융계 내에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조선내 각종 기업·회사 설립에 중개자로 참여하였는데 실권은 전혀 가지지 못한채 명목상의 감투만 여럿 쓰고 있었다.이런 그를 두고 정신문화연구원 김경일 교수는 “‘한상룡의 경력은 반도 재계사의 축도(縮圖)’라는 표현처럼그는 제국주의 권력과 식민지 예속경제 사이에서 일종의 브로커 역할을 했던 정상배”였다고 평가했다.금융계에 평생을 바치고자 했던 그의 포부는 한성은행의 경영권 양도와 뒤이어 신탁회사 운영에서 배제되면서 날개를 접고 말았다. 한편 그의 친일이 겉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한성은행에서 물러나 사회활동을 본격 시작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우선 그는 조선에 업적(?)을 남긴 주요 일본인들의 동상·기념비 건립을 시작으로 친일대열에 본격 합류하였다. 첫 사업은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의 동상을 제작,1929년 10월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제막식을 가졌으며,이 해 12월에는 이토(伊藤博文)기념회의 조선측 발기인 총대를 맡기도 했다.33년 2월에는 평소 자신이 숭배해온 시부자와의 기념비 건립을 추진,12월 장충단에서 제막식을 가졌는데 이는 전적으로 한상룡의 발의와 주동에 의한 것이었다. 또 35년 5월에는 ‘조선개화의 은인이자 일한합병의 공로자’인 데라우치(寺內正毅)의 동상건설회 발기인 및 실행위원으로 참여하여 총독부 청사내홀 우측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였으며,이듬해 2월 소위 ‘2·26사건’으로 사이토(齋藤實) 전조선총독이 사망하자 부민관에서 추도회를 개최하고 39년 4월 그의 동상을 총독부 청사내 홀 좌측에 건립하였다.이밖에도 그는 러일전쟁 당시 한국주재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정무총감 출신의 시모오카(下岡忠治) 등의 동상건립에 참여하면서 식민통치자들의 업적 찬양에 열을 올렸다. 한편 한상룡이 군국주의 일제통치하에서 40여년간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보다 군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한성은행에서 물러난 후 그는 군부관련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다.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조선내 각지를 돌면서 강연·담화 등을 통해 그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였다. 또 33년 4월 경성국방의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것을 비롯해 조선국방의회연합회 설립준비위원 및 감사(34.4),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 고문(34.12),해군협회 조선본부 창립위원(35.4)등을 맡아 활동하였다.37년7월 중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관동군사령부 사무촉탁(칙임관 대우,근무기간 37.7.1∼40.7.1)으로 임명돼 군사령부를 방문,조선실업구락부 및 자신의 명의로 국방헌금을 하였다. 당시 그는 후방 전쟁지원단체인 경기도군사후원연맹 부회장이자 경성군사후원연맹 고문으로 있으면서 ‘애국금차회’ 창립을 주도,조선여성들에게 전쟁물자로 노리개 금붙이마저 내놓으라고 강요하였다.41년 태평양전쟁 개전으로일제의 인력·물자동원이 거세지자 그는 이 역시 전면에 나서서 협력하였다. 특히 43년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훌륭한 군인이 되자’라는 글에서 “반도에 불타는 애국심과 적성(赤誠)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약진 반도의 통치사상에 획기적인 징병제도가 실시되었다”며 조선청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27년 중추원 참의(칙임관 대우)에 첫 임명된 이래 해방 때까지 그는 만18년 4개월동안 줄곧 중추원의 참의·고문을 지냈다.해방 1년전인 44년 4월 그는 윤치호·박중양(朴重陽·중추원 참의)·이진호(李軫鎬·총독부학무국장)·이기용(李琦鎔·황족·백작) 등과 함께 일본 귀족원 의원에 선임됐는데 마지막까지 일제에 협력한 결과이자 끝까지 일제에 끌려다닌 형상이라고도 할 수있겠다. 그는 한성은행 경영권 양도를 비롯해 일제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의도적 배제를 당했지만 그 때마다 변신과 일관된 친일노선으로 버텨냈다.한마디로 일제하 그의 생존논리는 철저한 예속과 굴종이었다.그를 ‘친일 예속 자본가의 전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해방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鄭雲鉉 jwh59@
  • 국방부 토의내용·통일부 토의내용

    - 국방부 토의내용 金大中대통령은 24일 통일부 국정개혁보고회의에서 흔들림없는 대북 포용정책을 역설했다.흐렸다 갰다 하는 한반도 안팎의 기상과 관계없이 일관성있게 햇볕을 쪼이라는 주문이었다.북한의 긍정적 변화를 유도하겠다는 취지였다. 통일부측도 나름대로 ‘모범답안’을 들고 나왔다.보고된 정책과제는 모두남북간 화해협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특히 하반기 당국간 대화복원이라는 목표에 이르기 위한 ‘양날개’로 비료지원 등 인도적 대북 지원과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가 제시됐다. 먼저 金대통령은 북한의 하반기 정치회담 제의의 진의와 성사 가능성을 물었다.康仁德통일부장관은 희망적인 답변을 했다.즉 “북한의 대남 (혁명)전략은 불변이나,전술적·실용적으로 접근하면 뭔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것같다”는 분석이었다. 金대통령은 “금강산 관광으로 북한에 주는 외화가 군비 등으로 잘못 쓰일것을 걱정하는 국민도 있다”는 지적을 내놓았다.이에 대해 黃河守교류협력국장은 “북한의 경제회생에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金대통령은 다소 미진하다는 듯이 미국의 데탕트정책으로 옛 소련이 총 한방 쏘지 않고 무너진 사례를 예로 들었다.이어 “전쟁 말고도 선택의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부연했다.그러면서 북한에 대해 강·약점을 모두 직시해야 한다고강조했다.총체적 경제파탄,굶주림 등은 약점이지만 대량살상무기로 벼랑끝전술을 구사하는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는 얘기였다.특히 지난 정권에선 “金正日을 능력없는 사람,문제있는 사람으로 봤지만 북한을 제대로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똑바로 봐야 한다”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具本永- 통일부 토의내용 金大中대통령은 24일 국방부 국정개혁보고회의에서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대량살상무기의 위험성을 거듭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완벽한 대비태세를 갖추라고 강조했다. 金대통령은 약 15분에 걸친 보고를 청취한 후 “북한이 대량살상무기를 동원,기습공격을 감행할 경우 수도권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다”면서 “적의 공격을 초전에 분쇄할 수있는 대비방안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金辰浩합참의장과 李起炫공군작전사령관은 “한·미 연합 정보력으로북한의 화학무기 저장시설 및 탄도미사일기지 등을 24시간 감시하는 등 평시 적의 움직임을 미리 감시해 대량살상무기 사용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도록 대비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金대통령은 “국민이 북한 반잠수정 격침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격려하면서 조만간 단행될 해군참모총장 인사 대상자의 한 사람인 李秀勇해군작전사령관에게 북한의 해상침투 대책을 질문,눈길을 끌었다.李사령관은“동해안에 침투예상장소 40여곳을 선정,어초를 설치하고 서해안에도 침투예상지역에 물골지형도를 작성해놓는 등 철저히 대비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金대통령은 이어 ‘최고지식층인 군의관이 병무비리를 일으킨 것은 변명할수 없는 일’ ‘병무비리는 군의 위신을 추락시키는 최악의 행위’ ‘참으로 개탄스럽고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질타하며 李相浩병무청장에게 엄정한 병무행정을 거듭 당부했다. 이에 대해 李청장은 “최근 드러난 병무비리는 문민정부시절인 95∼97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국민의 정부에서는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면서 “징병검사 전담의사제를 확대하고 고위공직자 병역사항을 공개하는 등의 제도개선을 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金仁哲
  • [정직한 역사 되찾기]친일의 군상(29)

    반민특위 ‘검거 제1호’ 박흥식(朴興植)이 특위로 잡혀온 것은 1949년 1월8일 오후 4시30분.특위 부위원장 김상돈(金相敦)의 지시를 받은 조사관 김용희(金容熙)와 서기관 박희상(朴喜祥)은 특경대원 7명을 데리고 서울 종로 네거리 화신백화점 사장실을 급습하였다.당시 특위가 박흥식을 첫 검거대상자로 지목한 것은 그가 미국도피를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특위 조사관 일행이 화신 사장실을 급습할 당시 박흥식은 외무부 관계자들과 미국여행권(여권번호 00130호)관계로 대화를 나누고있었다.신분을 밝히고 동행을 요구하자 박흥식은 영국제 고급담배를 꺼내 조사관들에게 권하며 “정리할 서류가 좀 있으니 5분만 시간을 주시오”라며지연작전을 폈다.‘독안에 든 쥐’라고 판단한 조사관들이 이를 허락하자 박흥식은 옆방으로 들어가더니 1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그새 비밀문을 통해 박흥식은 다른 방으로 가서는 모처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그의 구원요청은 허사로 돌아가고 그의 양손에는 마침내 수갑이 채워졌다. 한 때 ‘조선 제일의 부자’로 불리던 박흥식(1903∼1994)은 평남 용강군에서 소농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그곳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가족 부양을위해 진남포에서 미곡상을 시작으로 사업에 첫 발을 내디뎠다.천부적인 상술과 뛰어난 친화력으로 그는 1924년 고향에서 불입자본금 10만원으로 선광당인쇄소를 시작하였다. 2년 뒤 그는 사업무대를 서울로 옮겨 선일지물을 창립하였다.그때 그의 나이 26세였다.자본금 25만원인 이 회사에 그는 6만5,000원을 불입하였는데 이 돈은 토지를 담보로 식산은행에서 대출받은 5만원과 나머지 일부를 그가 부담한 것이었다.그는 주로 총독부 당국과의 친교를 바탕으로 식산은행·한성은행 등의 은행돈을 최고 수 천만원까지 끌어다가 사업자금으로 활용하였다. 당시 금융가에서 그는 최고대우를 받고 있었다. 한편 종로 네거리에서 공동경영하던 금은방·잡화상을 매수,1931년 화신백화점을 설립하였는데 이 회사가 그의 모기업이 되었다.화신백화점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사은경품판매,연쇄점 운영 등의 경영기법을 도입,승승장구하였다.이어 1936년에 설립한 화신연쇄점은 최고 번성기를 구가하던 37년경에는 전국에 연쇄점 수만 350개가 넘었다. 당시 그는 총독부의 도움으로 식산은행에서 3,000만원을 대부받았는데 그로서는 자본과 신용만 중요할 뿐 자본의 성격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화신의 자본을 두고 ‘매판적 상업자본’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자본의 성격과 함께 사업방식도 그렇다.화신백화점과 함께 화신연쇄점은 일본 오사카(大阪)의 영업소를 통해 일본상품을 다량 수입,국내에 살포함으로써 국내시장을 일제상품의 소비처로 전락시켰는데 이는 당시 일제의 대표적인 식민지 지배정책이었다.이 때문에 그는 총독부로부터 은행대출과 관련,하등의 통제도 받지 않았었다. 한편 반민특위에 검거된 그는 제3조사부의 예비조사를 마치고 특별검찰부로 송치되었다.검거된지 47일만인 3월22일 기소되었는데 검찰측 조사기록은 무려 6,000 페이지에 달했다.그의 기소장에 나타난 죄명은 반민법 제4조 7항(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제7조(범죄자 옹호·도피 협조자)위반이었다. 반민특위에서 지목한 그의 대표적인 반민족행위는 일제말기 비행기공장을만들어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조한 점과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점이었다. 태평양전쟁이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을 때인 1944년 2월 그는 일본의 항공전력 증대를 목적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 설립허가를 총독부와 일본내각에제출하였다. 수차례 일본을 다녀온 끝에 자본금 5,000만원으로 회사 설립허가를 받은 그는 그 해 10월 자신이 대표가 되어 주식을 공모하였다.그는 총독부의 힘을빌어 조선직물회사와 동양방적 안양공장을 접수하였고 인근 토지를 몰수하여비행기공장을 건설하였다.비행기 생산시설은 조선군사령부 병참부의 중개로관동군의 지원을 받았는데 대가로 조선의 해산물·직물 등을 송출하였다. 공장의 노무인력은 전적으로 징용자였다.44년 11월부터 총4회에 걸쳐 1,717명을 선발한 후 1개월간 경기도 광주에서 조선군의 지도로 기본훈련을 시킨후 다시 일본 나고야(名古屋)나 만주로 보내 실습을 시킨 다음 안양공장이나만주비행기공장으로 보내 비행기 제조에 종사시켰다. 흔히 박흥식의 조선비행기(주)는 비행기를 만들려다 일제 패망으로 그만둔것으로만 알려져 있다.그러나 특위의 조사내용에 따르면,45년 5월 당시 제1호기의 주익(主翼)·동체를 위시하여 대부분의 작업을 마치고 8월에 시험비행을 하였으며 2·3호기도 부분품 제작중에 있었으며 9월말 작업을 완료할계획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박흥식은 자신이 경영하던 광신상업학교를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개편,비행기 기술공을 양성하려 했던 사실도 조사과정에서 새로 밝혀졌다.실제로 전장에 투입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비행기제조계획은 거의 완성된 단계였다. 일제패망후 그는 조선군사령부로부터 조선비행기에 투자한 금액과 격려금까지 받았으나 이중 일부를 주주들에게 나눠주고는 대부분 착복하였다. 한편 그의 친일은 각종 친일단체 활동에서도 두드러졌다.30년대 후반 그는조선총독부 주최 산업경제조사회와 시국대책조사회에 조선대표로 참여하여일제의 시국대응책에 대해 자문역할을 하였다.또 각종 전쟁협력행위에 가담하였는데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이사·배영동지회 상담역을 비롯해 임전대책협의회·조선임전보국단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특히 임전대책협의회 발족시 민규식(閔奎植) 김연수(金秊洙) 등과 함께 각각 20만원씩을 기부하였으며 전시채권 가두판매에 나서기도 했다.징병제 찬양이나 학병 권유에 나선 것은 물론이다.총독부 고관을 비롯해 군부 경찰 금융계 등 광범위한 권력층과 사귀면서 이들의 비호를 받던 그는 제6대 조선총독 우가키(宇垣一成)와 각별한 사이였는데 특위 조사과정에서 우가키를 ‘숭배’하였다고 실토한 바 있다. 바로 우가키가 총독으로 재임하던 시절 화신백화점·화신연쇄점이 최고의전성기를 누린 점은 두 사람의 친분관계와 무관치 않다.미나미(南次郞)총독과도 유착관계가 남달라 그가 조선총독에서 이임,귀국하자 ‘영원히 못잊을자부(慈父)’라는 담화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특위가 그를 ‘검거대상 1호’로 지목한 것은 그의 미국 도피음모 이외에도 그가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려 했기때문이었다.특위의 활동개시가 예견되자 그는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장직상(張稷相) 등과만나 모종의 음모를 꾀하였다.그는 당시 수도청 수사과장으로 있던 친일경찰 최란수(崔蘭洙)에게 수사비 명목으로 10만원을 지원한 사실이 특위 조사과정에서 밝혀졌다. 기소 1주일만인 3월 28일 반민특위의 첫 공판이 서울지방법원 대법정에서열렸다.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그의 재판은 구속 103일만인 4월20일 그의 병보석으로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특별재판부가 병보석으로 그를풀어주자 당시 특별검찰부 검찰관 9명은 전원 사표로 이에 맞섰고 사회·정당단체에서도 격렬한 성명으로 특별재판부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해 9월26일 그는 ‘공민권정지 2년’이라는 가벼운 구형에이어 당일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이유는 그가 군수공장을 경영하였지만 실질적으로 비행기를 제작,일제에 지원하지는 않았고,또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것은 피동적으로 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특별재판부가 이같은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내린 데는 속사정이 있었다.친일경찰의 반민특위습격사건(일명 ‘6·6사건’)에 이어 ‘국회프락치사건’으로 특위의 중심인물이었던 소장파 의원들이 대거 제거된데다 6월29일 백범 김구선생의 피살로 친일파척결의 정신적 기둥마저 상실한 상태였다.법적으로 그는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역사의 법정에서 그는 여전히 ‘유죄’로 남아있다. 해방후 그는 사업재기를 노렸지만 80년 화신산업의 부도로 마침내 막을 내렸다.부채청산을 위해 자신이 수십년간 살아오던 집까지 내놓았지만 ‘물길’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종로 네거리 옛 화신백화점 자리에는 어느새 새 임자가 나타나 그의 부(富)를 되살리려는듯 현재 빌딩공사가 한창이다. 정운현
  • “징병거부로 제적 한국인 찾습니다”

    ┑교토 교도 연합┑일본의 류고쿠대학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재학중 징병을 거부해 제적당한 한국인 학생에게 특별학위를 수여하기로 결정하고 이 학생을 찾고 있다고 18일 발표했다. 이 대학에 따르면 경상남도 출생인 이 남자는 1943년 12월 일제의 징병을거부했다는 이유로 제적당했으나 대학당국은 최근 그에게 특별학위를 수여하기로 결정했다는 것. 류고쿠대학은 이보다 앞서 타이완 거주 쉬룽빈(75)이라는 노인에 대해서도특별학위를 수여했는데 그의 학위증에는 학업 중단에 대한 책임이 대학당국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고.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27) 崔麟

    1949년 3월 20일 서울지방법원(구 대법원 건물)대법정.법정안은 발디딜 틈도 없이 초만원이었다.오후 1시 정각 검찰관과 재판관이 입장하자 재판이 시작되었다.재판관의 뒤로 법정 정면에는 중앙에 태극기를 두고 한 쪽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인 위창 오세창(吳世昌)이 쓴 ‘민족정기(民族正氣)’라는 휘호가 걸려 있고 다른 한 쪽에는 ‘3·1독립선언서’가 걸려 있었다. 피고인석에는 백발에 수척한 모습의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그의 나이 71세,이름은 최린(崔麟)이었다.‘3·1의거’ 당시 오세창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했던 바로 그 최린이었다.그는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한지 5일만인 49년 1월 13일 명륜동 자택에서 체포돼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33인중의 한 사람으로,청장년 시절 항일운동에 몸바쳤던 그가 해방된 조국의 법정에서 민족반역자로 지목돼 심판을 받는 것은 민족의비극이었다. 재판이 시작되자 서성달(徐成達) 검찰관이 그의 죄상을 읽어내려갔다.‘▒죄명:반민법 제4조 2항(중추원 참의),3항(칙임관이상의 고관),10항(친일단체의 수뇌간부)위반.▒범죄사실:피고인 최린은 함경남도 함흥 출생으로 일본 명치대학 법과를 졸업하여 보성중학교장 및 보성전문 강사를 역임하고,기미독립운동시 33인의 1인으로서 천도교회의 대표로 기독교,기타 종교단체와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였음으로 인하여 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고,그 후 천도교 중앙종리원 등 장로로 있었던 자인 바, 1)1934년 이른 봄부터 1937년까지의 약 2년여,1939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시까지의 약 5년여에 도합 7년여간 조선총독부의 유일한 자문기관인 중추원 칙임 참의로서 조선총독의 자문에 의하여 총독정치에 기여하고, 2)…’.이어서 검찰관이 기소장 낭독을 마치자 사실심리에 들어갔다. 서순영(徐淳永) 재판장이 경력을 물은 뒤에 “기미독립선언을 주도한 피고가 왜 일제에 협력하게 되었는가?”라고 물었다.그는 “기미년 당시 일제에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들은 그 후 나를 주목하고 위협하고 또 유혹하여 끝내 민족을 배반하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오직 죄스럽고 부끄러울뿐이다”며 뒤늦은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최린(1878∼?,창씨명 佳山麟)은 함경남도 함흥 태생이다.그의 집안은 중인출신으로 상당한 재산이 있었다고 한다.후에 그가 출세와 신분 상승을 위해권력에 집착한 것은 그의 출신 성분이 한 원인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같은중인 출신인 육당 최남선(崔南善)의 변절에 대해서도 이같은 논리를 펴는 견해도 있다. 청년시절 그가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애국자임은 사실이나 그 무렵그의 민족의식에 대해서는 회의론을 펴는 견해도 만만찮다.1909년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천도교 인사들과 교류하고 있던 그는 1차대전 종결후 ‘민족자결주의’ 물결과 1919년 2월 도쿄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선포하자 이에 고무돼 ‘3·1독립선언’에 가담하였다. ‘3·1의거’ 당시 그의 민족의식이 투철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그가 이 일로 체포돼 재판정에서 행한 발언을 보면 추측할 수 있다.그는 “조선이 병합된 것은 러일전쟁의 당연한 결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또 당시 조선의 정치는 지독한 악정이어서도저히 조선의 안녕·행복을 유지·증진하기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병합에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피치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1919.7.17 예심조서)고 진술하였다. 또 독립선언서 선포와 관련,“…본래의 의사는 극히 온건한 수단에 의하여선언서를 발표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인민을 선동하는 것 같은 문귀 등은피한 것이므로 우리들의 선언서를 본 사람은 그러한 폭동에 가담할 리 없으리라고 생각한다”(일자 미상)고 진술하였다. 첫번째 진술은 일제의 ‘한일합병’ 논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하다.두번째 진술내용은 자신들이 주도한 ‘3·1의거’를 ‘폭동’ 운운하고 있는 그가 과연 ‘민족대표’였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또 재판장이 ‘현재의 조선인의 지모와 실력으로 독립국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대해 그는 “일본정부의 도움을 얻으면 독립국으로 설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결국 그가 말한 ‘독립국’은 일제의 통치를 사실상 인정한 범위 내에서의 ‘자치국’ 정도에 해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이는 그가 나중에‘자치운동’에 나서는 것과 무관치 않다. ‘3·1의거’로 의거 당일 일경에 체포된 그는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1921년 12월 22일 일제당국의 ‘배려’로 가출옥하였다.‘3·1의거’ 이후 새로 부임한 사이토(齋藤實)총독은 그가 표방한 ‘문화정치’의 전위대로 최린을 이용할 작정이었다.그의 가출옥 배경에는 사이토의 정치참모인 아베(阿部充家,‘京城日報’사장 역임)의 공작이 있었다. 그가 가출옥한 직후 아베가 사이토에게 보낸 편지에 ‘…오늘날의 형세로보아 민원식·선우순 따위의 운동으로는 도저히 일대 세력을 이룩하기는 어렵고,간접사격으로…일을 꾸미자면…여기에는 이번에 가출옥한 위인들 중 최린이 안성맞춤의 친구입니다…’(1921년 12월 29일자)라는 귀절이 보인다.‘기미독립선언서’ 작성자로 최린보다 앞서 가출옥(1921.10.19)한 육당 최남선이 아베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런 내용이 들어있다.‘…이번에 최린군을비롯하여 제군의 출감을 보면서 백열(柏悅)의 정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특히 당사자들도 선생에 대해 깊이 감사드리고있습니다… ’(1921년 12월 25일자,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서 입수) 1926년 9월 그는 일제의 경비지원으로 구미 각처로 여행을 떠났다.당시 파리에 체류중이던 여류화가 나혜석(羅蕙錫)과의 염문이 떠돌던 시기가 바로이 무렵이었다.그 해 10월말 일본에 도착한 그는 다시 아베를 만나 “오늘날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데 확신을 하고 있으며 조선의회 설치가 조선민심의 안정을 꾀하는데 가장 긴요하고,나도 민중의 신임만 얻으면 조선의회의 한 사람이 되기를 사양치 않겠다”며 ‘조선자치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그가 처음으로 ‘친일’을 표방하고 나선 것은 1933년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걸고 일선융합(日鮮融合)을 외치면서 부터다.이듬해 4월 그는 중추원 칙임참의가 되더니 8월에는 ‘시중회(時中會)’라는 친일단체를 만들어 ‘동아(東亞) 제(諸)민족은 일본을 맹주로 하여 매진할 것,특히 조선은 일선융합(日鮮融合)·공존공영이 민족갱생의 길’이라고 외쳤다. 37년 다시 그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이 해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전쟁보도를 적극 독려하였다.이 무렵 그는 총독부의 전시 최고심의기구인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회,후방지원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등에 참여하면서 전쟁지원에 협조하기도 했다. 또 1941년 8월에 결성된 임전대책협의회 위원을 거쳐 10월 이 단체가 윤치호(尹致昊)계열의 흥아보국단과 통합,조선임전보국단으로 재탄생하자 단장에 취임하였다.징병제 선전과 학병권유에 앞선 것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일제 패망직전인 45년 6월에는 조선언론보국회라는 친일언론단체를 조직,회장으로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짧은 ‘항일’에 비하면 그의 ‘친일’은 길고 열렬했다.해방후 천도교측은 그의 죄를 물어 은퇴를 권고하였으나 그는 거부하다가 결국은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였다.반민특위에 구속돼 민족반역자로 심판대에 올랐던 그는 49년4월 20일 3회 공판 끝에 병보석으로 석방됐다.재판과정에서 그는 다른 피고인에 비해 비교적 솔직한 참회로 재판부와 방청객들로부터 동정을 샀다.심지어 그는 “민족앞에 죄지은 나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라”고 사죄해 법정안을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6·25전쟁 와중에 납북된 이후 그의 행적은 알 길이 없다.반민특위 재판과정에서 그는 친일한 동기를 ‘늙은 노모에게 불효를 할 수 없어 망명도,자살도 하지 못하고 일본 군문(軍門)에 항복했다’고 털어놓았다.결국 그는 부모에 대한 효(孝) 위에 나라에 대한 효,즉 충(忠)이 있음을 몰랐던 셈이다. 정운현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27) 친일승려 이종욱

    우리 역사에서 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로 자리매김돼 있다.평시에는 속세와 떨어져 구도자로 살다가도 국난을 당하면 의연히 일어나 군대를 조직하거나 민족진영에서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 우리 불교계였다.임진왜란 때의 서산대사와 사명당이 그랬고 일제강점기에는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城)이 그랬다. 항일운동을 한 승려 가운데는 이종욱(李鍾郁)이라는 사람이 있다.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로로 그는 지난 77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정부로 부터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받고 현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돼 있다.그러나 그는 지난 93년 국가보훈처가 재심(再審) 대상자로 발표한 8명 가운데 포함됐었다.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지사인 그는 왜 재심대상에 오른 것일까. 임시정부시절 이후 그의 행적 때문이었다.일제말기 그는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동시에 1급 친일승려로 활동한 인물이었다.종교인 출신이었음에도 그는 해방후 참회나 자숙은 커녕 오히려 정치권을 기웃거리며 불교계의 거물로 행세하였다. 이종욱(1884∼1969,창씨명 廣田鍾郁)은 강원도 평창사람이다.일찌기 출가하여 월정사(月精寺) 승려로 있다가 3·1의거가 일어나자 고을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이틀 뒤인 3월 3일에는 이탁(李鐸·건국훈장 독립장)등 27명으로 구성된 ‘27결사대’ 대원으로 매국 역적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3·1의거’를 계기로 서울에서 이승만(李承晩)을 집정관으로 한성(漢城)임시정부가 구성되자 그는 강원도 대표로 참가하였다.1919년 4월 13일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하이로 망명,임시정부 내무부 참사로활동하다가 이듬해 3월 임시의정원에서 강원도 의원으로 선출됐다.임정의 국내 비밀연락조직인 연통제(聯通制)조직을 위해 국내로 파견돼 활동하기도 했다.이 무렵까지 그가 독립진영에서 활동한 사실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없다.문제는 그 이후부터다. 국가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5권)에 따르면,이종욱은 1920년 6월29일 청년외교단운동으로 대구지방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그뒤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고 하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돼있다.무슨 사건에 관련돼 체포됐는지가 분명치 않아 현재 이 부분은 일단 미확인 상태로 남아있다. 다시 ‘공훈록’에 따르면 그는 출옥후 오대산 월정사에 은거하면서 송세호(宋世浩·건국훈장 애국장)와 함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지하에서 활동한 것으로 돼있다.그러나 그가 ‘은거’하면서 지하활동을 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1920년대 중반 이후 그는 불교계에 복귀하여 공공연히 활동을 하였다. 여기서부터 얘기는 역전된다.이무렵부터 그는 친일대열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3년 월정사의 사채 정리위원으로 얼굴을 드러낸 그는 26년 중앙교무원의 사무원을 거쳐 27년부터 월정사 감무(監務)로 취임하였다.29년에는 각황사(覺皇寺)에서 열린 승려대회에서 의안심사위원 7인중 1인으로 선출되었고 대회 부의장에 선출되기도 했다.이듬해 그는 31본사(本寺)의 하나인 오대산 월정사의 주지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본사 주지는 총독이 임명하는 주요 승직(僧職)중 하나였다.이무렵 그는 총독부측의 회유로 이미 친일로 기운 상태였다. 36년 8월 ‘황민화정책’의 사령탑인 미나미(南次郞)가 7대 조선총독으로부임해오자 그는 마침내 친일의 본색을 드러냈다.그는 종회(宗會) 의장및 월정사 주지 자격으로 불교계 인사들을 대동하고 경성역(서울역)으로 나가 미나미를 환영하였다.이듬해 37년에 그는 31본사주지회의에서 다시 의장으로선출되어 총본산 설립을 의결하고 자신은 총본산건설위원회의 31본사주지대표로 취임하였다.이로써 그는 조선불교의 종권(宗權)을 장악,당대 불교계의최고권력자로 부상했는데 그 뒷배경에는 총독부가 있었다. 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전쟁발발 1주일만인 7월15일 남산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참배하고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에 참석했다.이틀 뒤 그는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김대우(金大羽,일제말기 경북도지사 역임)를 찾아가 조선내 사찰에서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를 지내는 문제를 상의하고 며칠뒤 조선내 각 절에서 기원제를 지내도록 하달하였다. 또 8월5일에는 개운사에서 중앙교무원 주최로 대일본제국 무운장구 기원법회를 열었으며 다음날에는 경성 부민관에서 그의 사회로 친일강연회를 개최했다.이밖에도 그는 자신이 주도하여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나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중국으로 출정하는 일본군 송영(送迎)행사에 조선승려들을 이끌고 참석하기도 했다. 40년 2월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일본 고노에(近衛)내각의 외무대신히로다(廣田弘毅)의 성을 따 히로다 쇼우익(廣田鍾郁)으로 창씨했다.같은 창씨라도 그의 창씨는 친일성이 짙게 배어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흔히 대다수의 조선인들이 총독부의 강요로 할 수 없이 창씨는 하였지만 그래도 자신이 원래 김(金)씨였다는 의미에서 ‘김(金)’을 ‘김원(金原)’으로 창씨한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종욱은 당시 승려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불교 총본산건설을 완료하여 총본사의 명칭을 태고사(太古寺,현 曹溪寺)로 고치고 그 자신이 종단의 종무총장(현 총무원장)에 취임(41.8.18)하였다.이로써 그는 조선불교의명실상부한 1인자가 되었다.그는 종무총장 취임사에서 “지난 날 이조(李朝)의 압정하에 근근히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일한병합(日韓倂合)후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황은(皇恩)에 힘입어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사찰령에 의하여 조선불교가 발전되었다”(‘신불교’ 제31집,1941.12월호)며 총독부의‘황도(皇道)불교’ 건설을 찬양하였다. 이 무렵 그는 전시(戰時) 협력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에 참여하여 길거리에서 전쟁채권을 판매하는 등 일제의 전쟁비 조달에도 앞장섰다.또 조선내 사찰과 승려들을 쥐어짜 5만3,000원을 갹출,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전투기 1대 구입대금으로 헌금하였다.1941년 12월8일 태평양전쟁이 다시 발발하자 조선내 1,500여 사찰에 12월15일부터 일본군의 연전연승을 기원하는 법회를 열라고 전국 사찰에 명하였다. 전쟁이 말기로 치닫자 이종욱은 부족한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임시종회를 소집,국방자재헌납을 결의하고 사찰의 범종과 쇠붙이 불구(佛具)를 거두어 일제당국에 헌납했다.42년 5월에는 일본어 상용(常用)을 종용하는일제의 정책에 호응하여 ‘국어(國語,일본어) 전해(全解)운동’을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공문을 전국 본사에 하달하기도 했다. 43년 8월 드디어 징병제가 실시되자 감사법요식에서 ‘검선일여(劍禪一如)의 신생활’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7,000여 승려와 아울러 반도민중은 검선일여의 정신에 투철하여 용약 군문에 달려가 젊은이의 지성과 충성을다하여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학병권유 대열에도 그는 빠지지 않았다. 이밖에 그는 불교관련 매체에 10여 편의 친일문을 남겼다. 해방이 되자 이종욱은 8월17일 종무원 3부장과 함께 종무총장직에서 사퇴하였고 이어 9월22일 열린 전국승려대회에서 ‘친일승려 제1호’로 지목돼 승권(僧權)정지 3년의 중징계를 받았다.그러나 그는 승권정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47년 1월 강원도 교구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반탁세력과 연계해 자신의친일경력을 위장하였다. 50년 5월 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해 강원도 평창에서 당선됐으며 51년 동국대 재단 이사장,52년 7월에는 제4대 중앙총무원장에 취임했다.해방후7년만에 이종욱은 일제때의 ‘위상’을 완전 회복하였고 사후에는 건국훈장과국립묘지 안장의 예우까지 받았다.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이제는 바로잡아야되지 않을까. 鄭雲鉉 jwh59@
  • [사설]병무비리 뿌리뽑도록

    또 병무비리가 터졌다.이른바 元준위 사건의 풍파가 채 가라앉기도 전이다. 국방부는 자체특감으로 대규모 의병전역의혹을 적출해냈다.元준위 사건은 징병과정에서의 병무비리였다.이번 사건은 복무중에 꾸며졌다는 점에서 그것과 다르다.그렇지만 어느것이나 뇌물이 비리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은같다.그러니까 있는 사람들,바로 부유층의 비리다.유전무죄(有錢無罪)가 얼마나 사회적 위화감을 조장하는 말인가.병역의 유전면역(有錢免役)도 마찬가지다.기필코 뿌리뽑아야 할 비리임은 더 말할 필요없다. 국방부는 모두 198건의 의병전역의혹을 적발해냈다.국군수도병원등 전국 8개 병원만을 대상으로 한 특감을 통해서다.국방부는 나머지 의병전역 판정권한이 있는 전국 10개 병원으로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의혹이 더 커질 수 있음을 예고한다.어쨌든 이번수사가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되는 병무비리의 발본색원 계기가 돼주었으면 한다.엄정하고 철저한 수사로 비리는 반드시 적발되며 처벌받는다는 교훈을 남겨야 한다. 또 하나는 수사와 함께 비리가 발붙일 틈이 없도록 방책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의병제대 판정절차와 조건을 강화하는 조치가 그같은 일이다.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관련 법률과 규정을 집행하는 사람들의 성실성을 보장하는 조치가 병행돼야 한다는 점이다.병무비리 대책은 그동안 꾸준히 강화돼왔다.그럼에도 비리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있다.집행관들의 성실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현실이다.집행관들이 건성이거나 법과 규정을 악용하려 들면규정은 있으나마나다.주민등록초본의 제대사유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기록토록하는 것도 중요하다.두루뭉실하게 표기토록 방치해서는 안된다.정신병은정신병으로 사실대로 표기해야 가짜환자를 억제할 수 있다. 그렇다고 대증적 처방만으로 비리가 근절되지는 않는다.원인처방도 생각해볼 때가 됐다.예컨대 군이 군홍보나 실제 군운용을 통해 젊은이들이 군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군대에 갔다오면사회생활에서 여러가지로 손해보는 현실의 개선도 시급하다.그래야 군기피풍조를 근원적으로 봉쇄할 수 있다.물론부유층의 유별난 자식 과보호가 문제인 것은 틀림없다.이것도 군복무를 마친 자에 대한 제도적 프리미엄 부여를 통해 어느정도는 시정이 가능하다고 본다.여하튼 병무비리가 용납돼서는안된다.국민통합과 국가안보를 위해서다.그것이 대부분 부유층의 비리이기때문에 더 더욱 그러하다.그런 점에서 이번 수사가 빈틈없이 이루어져야 한다.수사 진행과정을 주시한다.
  • 3·1항쟁 80돌 아침에/김삼웅 대한매일 주필

    3·1항쟁 80주년이다. 1세기에 가까운 세월의 더께와는 달리 갈수록 엷어지는 항쟁의 정신을 아쉬워하면서 다시 그날을 맞는다. 해마다 3월이면 3·1정신을 계승하자는 구호는 요란하지만 정작 우리 주변은 일제 잔재로 가득차 있다. 여기서는 지식인들까지 부지불식간에 쓰고 있는 일제가 남긴 ‘역사용어’에 대해 살펴본다. 일제는 한국침략과 지배를정당화시키고자 관학자들을 동원하여 각종 용어를 만들었다. 그런 용어를 우리는 해방 반세기가 지나도록 부끄러움을 모른채 그대로 쓰고 있다. ▲정한론(征韓論)― 중·고등학교 국사책이나 역사학자들의 저서에 ‘정한론’이란 용어가 수록돼 있다. 1860년대 이후부터 일본 정부내에서는 조선을정벌하여 식민지로 만들어야 일본이 대륙에 진출할 수 있고 아시아의 패권을 누리게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일본은 이미 강호(江戶)시대의 해방론(海防論)에 이어 막부(幕府) 말기의정한론,다시 명치 이후에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일한일역론(日韓一域論)으로 한국침략의 정당성을 내세웠다. 먼저 정(征)자의의미를 살펴보면,두인변과 바를 정(正)자가 합쳐서 생긴 회의문자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 또는스승과 제자 즉,올바른 웃어른이 어린아이의 잘못을 꾸짖어 훈계한다는 뜻이다(여씨춘추). 또 다른 의미에는 정(征)이란 천자(天子)가 죄인을 호되게 꾸짖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여진정벌’이나 ‘대마도정벌’의 경우,도발하는 외적을 응징할때 주체적 의미로 쓴다. 그런데 일본이 우리를 침략하는 의미의 ‘정한론’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일제의 침략론’으로써야 옳다. ▲이조(李朝)― 우리 역사에 ‘이조’란 나라는 없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합병하면서 한국민에게 조선왕조를 격하,한 씨족사회를 합방했다는 점을 인식시키고자 만든 용어다. 즉,일본은 ‘조선’이란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씨족 대표가 지배하는 사회를 해체하고 대신 자기들이 다스리게 되었으니독립운동이나 애국심 따위를 갖지 말도록 조작한 용어다. 이런 것도 모르고 우리는 ‘이조 500년’,‘이조백자’,‘이조시대’ 어쩌고 하면서 역사를 말한다. 정식국호는 ‘대조선왕국’(1894),‘대조선제국’(1895),‘대한제국’(1897)이고 통칭 ‘조선왕조’또는 ‘조선’이라 써야 옳다. ▲의병토벌―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일본군이한국의병을 토벌했다는 기록이 많다. ‘토벌’은 관군이 반란군을 진압하는것인데,왜병은 관군이고 우리 의병은 반란군이란 말인가? ‘의병학살’로 써야 한다. ▲당쟁― 흔히 조선왕조가 ‘당쟁’으로 망했다고 말한다. 당쟁이란 용어는일본인들이 만들었다. 대한제국의 학정참여관을 지낸 幣原단이 1907년에 쓴‘한국정쟁지(韓國政爭志)’에서 처음으로 ‘당쟁(黨爭)’이란 용어를 쓰면서 조선시대를 당쟁시대로 부정적으로 규정했다. 細井이란 자는 “조선사람의 혈액에 특이한 검푸른 피가 섞여 있어서” 당쟁이 여러 대에 걸쳐 계속되고,결국 고칠 수 없는 것이라고 체질론을 폈다. 조선시대에 파쟁이 심했던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을 비롯,어느 나라든 정도의 차이일 뿐 정치적 파쟁은 있기 마련이다. 조선시대에는 ‘붕당’이란 용어가 사용됐다. ▲민비― 고종의 왕비 민황후를 일제는 민비로 비칭했다. 1895년 일본공사미우라가 일본군대와 정치낭인들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황후를 시해한뒤 정권을 탈취하는 을미사변의 만행을 저질렀다. 대한제국 정부는 1897년명성황후로 추책하고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일제는 한국의 황후를 시해한 만행이 세계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민비’라 부른 것을 우리가 그대로호칭한다. ▲모의(謀議)― 항일독립운동가들의 모임을 ‘모의’라고 표기하는 경우가흔하다. 모의는 “옳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한 음모”를 말하는데,독립운동이옳지 않은 일인가. 일본 경찰이나 헌병이 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협의’나 ‘논의’로 써야 한다. ▲징용(徵用)― 일제시대 많은 한국인이 전쟁터나 탄광으로 강제로 끌려가노역에 시달렸다. 이를 ‘징용’이라 부르는데,원래 징용은 국가가 사람을불러 일을 시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징용’당한 것이 아니라 ‘강제노역’당한 것이다. ‘징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정신대― 정신대란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일제에 끌려가 성노예 노릇을 한 여성을 어찌 정신대라 부를까. ‘일본군 강제 위안부’라 표기하자. 3·1항쟁 80주기를 맞아 일제의 용어 한가지라도 바로 잡으면서 선열들의구국정신을 기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kimsu@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 (25)

    ◆친일 미술가 金仁承·景承형제 작년 11월말 한 시민단체가 보낸 공문 한 통이 국가보훈처에 접수됐다.발신자인 신시민운동시민연합(의장 고경철)은 공문을 통해 “친일조각가 손으로세워진 애국선열의 동상을 방치하는 것은 민족사의 왜곡행위로 뜻있는 국민들의 성금으로 다시 세워 민족정기 회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보훈처의조치를 촉구하였다. 이 공문에서 신시민운동연합측은 ‘친일조각가’로 김경승을 지목하고 “해방후 역대 정권과 결탁해 비호를 받으면서 조각계의 거목으로 변신한 김경승이 그 더러운 손으로 민족사에 길이 남을 애국선열과 역사적 기념물을 제작했다는 사실은 반만년 문화민족임을 자부하는 우리민족에게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을 주는 반역행위”라고 지적하면서 “하루 빨리 친일반역자의 작품을철거하고 국민들의 정성을 모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공문에서 김경승이 제작한 애국선열의 동상으로 광화문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1953년 제작),남산 안중근 의사상(1959년 제작),백범 김구 선생상(1969년 제작),도산공원의 도산 안창호 선생상(1973년 제작),서울 종묘공원의월남 이상재 선생상(1989년 제작)등을 들었다. 김경승(金景承,1915∼1992)은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손꼽히는,유명한 조각가이다.그는 서양화가 김인승(金仁承,89·미국 거주)의 친동생으로 두 사람은형제 미술인으로도 유명하다.두 사람은 일제 강점기부터 80년대까지 한국 화단(畵壇)의 원로로 군림해온 사람들이다.이들은 일제 때는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미술전람회에서 상(賞)을 휩쓸었고,해방후에는 교단과 화단에서 다시명성을 날렸다. 특히 김경승은 국내의 대표적인 위인·애국선열들의 동상 제작을 거의 도맡다시피 했다.예인(藝人)으로서 이들 형제는 재능을 떨쳐왔지만 민족사에서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해묵은 미술사 한 페이지를 들춰 그 이유를 알아보자. 1915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법문학부를 나온 지주 김세형의 6남매중 장남과 차남으로 태어난 김인승·경승 형제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여 학생미술전에서 수차례 입상했다.1932년 김인승은 재능을 살리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였다.김경승도 2년 뒤 형을 따라 이 학교에 입학했는데 과(科)는 형과 달리 조각과를 택하였다. 1887년 일본 메이지정부에 의해 관립학교로 세워진 이 학교는 소위 서양미술을 가르치는 일본내 유일의 미술학교였다.이 학교는 일본인 외에도 조선·대만의 미술학도들을 청강생으로 받아 장학금을 주면서 미술교육을 시켰다. 이들 형제 외에도 조선인으로 심형구(沈亨求·1908∼1962)가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김인승과 심형구는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의 약칭)출품과 친일활동은 물론 해방후 이화여대에서 재직하는 동안 반평생을 단짝으로 지낸 사이다. 한편 김인승은 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평균 98점이라는 학교 최고점을 기록하면서 우등생으로 졸업(1937년)하였다.재학시절 그는 이미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皇紀) 2000년(1940년)봉축기념전’에 출품,입선하면서 화단에 얼굴을 내밀었다.졸업하던 해인 1937년에는 제16회 선전(鮮展)에 ‘나부(裸婦)’를 출품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였다. 3·1 만세의거 이후 소위 일제의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시작된 ‘선전’은 1944년까지 23회나 개최되었는데 초기 서예나 4군자를 제외하고는 모든부문의 심사위원이 주최측인 총독부가 위촉한 일본작가였다.따라서 선전에출품된 조선인 작가들의 작품은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취향을 반영한,왜색(倭色)이 짙은 작품들이 주로 입선되었다. 바로 이 ‘선전’에서 김인승은 1937년부터 연속 4회 특선,1940년 선전의추천작가가 되었다.이 때 서양화 부문에서 추천작가로 오른 사람은 그를 포함해 심형구·이인성(李仁星) 세사람 뿐이었다. 형에 이어 동생 김경승 역시 ‘선전’에서 연속 입상하였다.1939년 ‘S씨상’(흉상),40년 ‘목동’(전신상)등이 특선으로 입상하였고 41년에는 남자 입상(立像)인 ‘어떤 감정’으로 총독상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여명’이라는 작품으로 총독상을 2회째 수상하였다.‘선전’에서 관록을 쌓은 그는 43년 마침내 추천작가가 되었다.44년 그는 ‘선전’에 ‘제4반’을 출품하였는데 이는 관변조직인 애국반(愛國班)의 반원인 조선여성이 전시하 후방에서근로봉사에 나선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김경승이 ‘선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추천작가로서 출품한 작품을 포함,다섯 점 모두가 강한 ‘시국색(時局色)’을 띠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일제침략전쟁을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해 식량증산이나 근로에 동원된 조선인들을담은 것으로 이는 은연중에 전쟁협력을 부추기고 있다. 두 사람은 또 일제하 대표적인 친일미술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에서 간부로활동하였다.1941년 2월 22일 시국하의 ‘회화봉공(繪畵奉公)’을 맹세하면서 탄생한 이 단체는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鹽原時三郞)가 회장,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계광순(桂珖淳)이 이사장,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학예부장 백철(白鐵)등이 이사로 있던 관민합작 단체였다.두 사람은 각각서양화부(김인승),조각부(김경승)의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이 단체는 나중에 조선문인협회·선전미술협회·보도사진협회 등 11개 예술단체와 더불어 1943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의 예술가단체연락협의회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들은 전람회를 열어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치기도 하였다. 한편 김인승의 대표적인 친일행위는 그가 단광회(丹光會)에 참여하여 활동한 점이다.이 단체는 ‘성전하(聖戰下) 미술보국(美術報國)에 매진한다’는취지로 1943년 2월 조선인·일본인 화가 19명으로 결성됐는데 ‘선전’ 추천작가 중심의 최고 엘리트화가 집단이었다. 이 단체는 1943년 8월 조선인 징병제가 실시되자 이를 기념하여 회원 전원이 4개월간 합숙하여 100호 크기의 ‘조선징병제시행기록화’(사진참조)를제작하였다.이 그림은 징집된 조선청년을 중심으로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장,지원병훈련소장,총력연맹 사무국 총장,경기도지사,친일파 윤치호 등이 등장해 징병으로 나가는 조선인 청년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내용이다.특히 이 그림은 인물 주위로 남산의 조선신궁(朝鮮神宮)과 병사들의 행진모습등을 곁들이고 있어 일본정신 고취와 성전(聖戰)출전의 분위기를 조장하고있다. 김인승은 이밖에도 1944년까지 3차례에 걸쳐 열렸던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운보 김기창(金基昶)·심형구·월전 장우성(張遇聖)등과 함께 추천작가로 참여하였다.그는 또 작품의 제작연대를 일본식 황기(皇紀)로표기하였으며 ‘선전’ 출품작에는 작가 사인을 ‘김인승’의 일본어 발음인 ‘Jinsho,Kin’으로 표기하였다.그의 친일의식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할 수 있다. 해방후 이들 형제는 친일미술가로 낙인찍혀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당하는 수모를 겪었다.그러나 이들은 도쿄미술학교 출신,‘선전’ 추천작가등의 화력(畵歷)을 앞세워 다른 친일미술가들과 함께 승승장구 하였다.김인승은 47년 이화여대 미술과 교수로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49년 제1회 국전(國展)추천작가·심사위원,예술원 회원·목우회 창립주도,이화여대 미대 학장,미협(美協) 이사장 등을 지내면서 서양화 구상계열을 주도했다. 김경승 역시 국전 심사위원·예술원 회원 등을 비롯해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조각가로서 평통(平統)자문위원을 지냈다.특히 그는 충무공 이순신장군·백범 김구·도산 안창호 선생·안중근 의사 등 애국선열의 동상을 도맡아 제작하였다.이들 형제는 상복도 많아 문화훈장을 비롯해 ‘3·1문화상’까지나란히 수상하였다.남산의 백범 동상을 새로 만들자는 주장은 이래서 나오는것이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24회)

    ■2·8독립선언 주역 徐 椿 지난 97년 8월 독립유공자 후손 한 사람이 국가보훈처장을 상대로 ‘독립유공자 적용배제 취소청구소송’을 서울고법에 냈다.그는 보훈처가 자신의 선친의 독립유공자 예우를 박탈한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앞서 96년 10월 보훈처는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인사 가운데 친일경력자가 일부 포함돼 있다는 재야 역사학계의 지적을 토대로 재심사를 벌여 5명에 대해 독립유공자 예우를 박탈한 바 있다.해당자 5명은 徐椿·金羲善·朴淵瑞·張膺震·鄭廣朝 등이다. 소송을 낸 사람은 서춘의 아들 서인창씨(69·서울거주).서씨는 소장에서 “아버지는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혐의로 금고 9개월의 형을 받은 공적으로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은 애국지사임이 명백하다”며 “기자출신인 아버지가 일제때 쓴 기사 5,000여건 중 16건의 기사를 문제삼아 (독립)유공자에서 배제한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1심에서 서씨는 승소하였다.서울고법은 “‘예우배제’에 앞서 유족의 의견을 듣지 않은 것은 절차상 하자가 인정된다”며 서씨의 손을 들어주었다.이에 대해 보훈처는 작년 12월 대법원에 상고,현재 이 사건은 대법원 특별1부에 계류중이다. 보훈처와 유족간에 독립유공자 예우문제를 놓고 소송으로 비화한 徐椿(창씨명 大川滋種·1894∼1944)은 어떤 사람인가?그의 아들이 소장에서 언급한 대로 그는 일제하 언론인 출신으로 ‘2·8독립선언’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다.초기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독립유공자로서 공적을 인정할만 하다.특히‘2·8독립선언’에 참가한 사실이나 초창기 일제의 통치정책,특히 경제정책을 비판한 사실 등은 인정된다.그러나 그가 일제말기에 친일논조의 기사를쓴 사실도 부인할수 없다. 서춘은 1894년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태어났다.‘매일신보’(1944.4.6)에 난 그의 부음기사에 따르면,그는 정주 오산학교를 거쳐 동경(東京)고등사범 박물학과에 적을 두었다가 중도에 자퇴하고 동양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후 다시 경도(京都)제대 경제학부에 입학,대정 15년(1926년)에 졸업한 것으로나와있다.‘2·8독립선언’의 동지이자 나중에 같이 친일대열에 섰던 춘원李光洙는 “그는 재사(才士)이기보다는 근면한 사람이었다”고 평한 바 있다. 일본 유학시절 그는 조선유학생학우회에 가입,활동하고 있었는데 당시 그는 민족의식이 강한 청년이었다.1917년 연말 망년회 모임에서 그는 李琮根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역설하였다.이듬해 연말 그는 도쿄기독청년회 주최로 도쿄YMCA 강당에서 열린 웅변대회에서 연사로 나서 미국대통령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 원칙아래 독립운동을 벌이자고 역설하였다. 그는 崔八鏞 등과 함께 1919년 2월 8일을 기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의하고 국내 민족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1월 중순 宋繼白을 서울에파견했다.2월 8일 도쿄YMCA 강당에서는 예정대로 독립선언식이 열렸고 그는현장에서 체포돼 그 해 6월 26일 제2심에서 출판법 위반혐의로 9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동경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독립유공자공훈록’ 제2권) 한편 그는 형기를 마치고 나와 동양대학과 경도제대 경제학부를 졸업(1926년)한 후 귀국하여 10월 동아일보에 입사하였다.이듬해 2월 그는입사 4개월만에 경제부장에 임명되었는데 이후 그는 일제시대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경제평론가로 자리를 굳혔다. 초창기 그는 일제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주로 썼다.당시 그는 동아일보는 물론 각종 잡지에도 활발히 경제평론을 기고하였으며 각종 사회단체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 초빙되어 경제와 교양·상식에 관한 계몽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국내 민족진영 인사들의 변절행진이 시작되자 그 역시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그는 “현대전에서교전국간의 경제전이라는 것은 환언하면 협력전이다.협력! 이것은 정신의 힘이다.정부가 국민정신 총동원주간을 설치했으므로 한사람 한사람이 총후(銃後,후방)용사다.국민총력이 있고서야 총후가 공고하다”(‘四海公論’1938년 6월호)며 일제의 침략전쟁을 공공연히 찬양하였다. 이 무렵 그는 내선일체론자들로 구성된 ‘방송선전협의회’의 강사로 일하면서 친일파로서 모습을 드러냈다.1938년 그는 일제가 황국신민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내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실천하고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을 후원하기 위해 군관민 각 방면 유력자들로 조직된 ‘목요회(木曜會)’의 회원으로 가입하였으며 1940년대 들어서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등 주요 친일단체에서 간부로도 활동하였다. 그는 또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반도청년 제군,제군에게는 이제 절호의기회가 온 것이다.내선일체,이것이 제군이 취할 절호의 기회다….1.대군(大君,일황)을 위해 태어나고,2.대군을 위해 일하고,3.대군을 위해 죽는다는 정신을 갖지 않는 자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될 수 없는 것이다.…우리 일본의 대화혼(大和魂)에서 말한다면 대군을 위해 죽는 일은 신자(臣子)된 자의 본분임과 동시에 죽는 그 사람에게는 더 없는 행복이다”(‘총동원’1939년 10월호)며 지원병 출진을 권유하였다. 1943년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다시 ‘성은(聖恩)에 감읍(感泣)하며’라는 글에서 “소화 18년(1943년) 5월 13일! 징병제 실시를 앞두고 멸사봉공의 열의에 불타는 반도 1,500만 민중은 이날 또다시 광대무변한 성은에 감읍하여 마지 않을 감격과 광영에 우뢰같은 환성을 폭발시켰다”(‘春秋’,1943년 6월호)며 일제의 침략전쟁을 선전하였다.학도병 권유 역시 빠지지 않았다.그는 학도병 지원 권유 조직인 경성익찬회 산하 종로익찬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하였고 또 학도출진격려대회에서 연사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그는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조선청년을 사지(死地)로 내모는데 앞장선 인물이었다. 그의 변절은 ‘약육강식’을 합리화한 제국주의 논리를 수용한데서 비롯됐다.그는 일본유학 당시에도 “…노국(露國,러시아)이 침략하자 일본은 자위상 드디어 조선을 병합하기에 이르렀다.요컨대 약자가 강자에게 병탄되는 것을 면할 수 없는 것은 생물상의 원칙이다.…”며 이같은 의식세계를 드러낸바 있다.그런 그는 일본이 청일·러일전쟁에 이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서승리하자 조선독립에 대한 희망을 접고만 셈이다.그는 오히려 일제권력과 타협,일신의 안위를 도모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겉으로는 ‘실력양성론’을 표방하였지만 이는 사실상 일제의 강압통치를 인정한 것이다.그는 식민지하 나약한 지식인의 전형(典型)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일보에 입사한지 10개월만인 27년 8월 그는 평안도 출신들이 대세를 이루던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취체역(중역)겸 주필에 임명되었다.1940년 동아.조선이 폐간되자 그는 다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주필로 자리를옮겨 친일언론지의 논설책임자가 되었다.1944년 4월 5일 간암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이 자리에 있었다. 독립유공자들의 공적을 기록한 ‘공적조서’에는 ‘변절여부’를 확인하는항목이 있다.서춘의 경우 이 항목에 저촉되는 사람이다.따라서 1963년 그에게 추서된 대통령 표창은 심사과정에 하자가 있다고 하겠다.‘친일’문제는유족의 주장대로 친일기사의 건 수로만 따질 문제는 아니다.그런 식이라면춘원 이광수도 포상해야 한다.춘원은 ‘2·8독립선언서’ 작성자로 알려진인물이다. 이 소송사건은 엄격히 말해 그가 친일을 했느냐,안했느냐 하는 본질적인 문제보다는 ‘예우박탈’을 둘러싼 행정절차 문제에 관한 것이다.따라서 서씨의 유족이 최종심에서 승소를 한다고 해도 서씨의 친일문제를 둘러싼 논란은여전히 남는 셈이다. ‘2·8독립선언’ 80주년이 되는 오늘 도쿄 현지에서는 원로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갖는다.‘2·8선언’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그의 ‘친일행적’이 문제가 돼 소송이 진행중인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현재 그는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 鄭雲鉉 jwh59@
  • 짝눈·요실금환자도 병역면제 제외

    다음달 1일부터 몸무게가 많이 나가거나 눈이 나쁜 사람은 물론 짝눈,요실금 등의 질병을 앓고 있는 경우 현역으로 군에 입대하지는 않더라도 일정기간 동안 국가기관 등에서 공익근무를 해야 한다.(본보 1월15일자 보도) 병무청은 29일 오는 2월1일부터 전국적으로 일제히 시작되는 99년도 징병검사부터 종전 5급(현역·보충역·예비군 면제)이나 6급(병역면제)으로 판정하던 338개 신체 등위 판정기준 항목 가운데 51개 질병을 4급(공익근무요원 복무대상) 이상으로 상향 조정,병역면제 대상에서 제외키로 했다고 밝혔다. 병역면제 규정이 폐지되는 질병은 비만이나 시력 외에 비장비대,피부과 양성종양,간농양,외반족·내반족·만곡족·요족·첨족·종족,유착지(족지),선천성 구순열에 의한 안면부추형 또는 반흔(수술받은 경우 포함),포도막염,구낭염,구어장애,정계 정맥류 등 16개 질병이다. 또 기관지 천식,당뇨병,폐결핵,선천성 심장질환,간염,탈모증 등 51개 질병은 종전에는 5급(현역·보충역·예비군 면제)으로 판정했으나 앞으로는 4급(공익근무요원 복무대상) 이상으로 판정,공익근무요원 등으로 근무토록 했다.金仁哲ickim@
  • 비만·눈나쁜 사람 병역 면제 안된다

    앞으로 비만이나 시력이 나쁘다고 병역을 면제받는 일은 없어진다.현역으로 군에 입대하지는 않더라도 일정기간 동안 국가기관 등에서 공익근무를 해야 한다. 국방부는 14일 병역의무의 형평성과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국방부령인 징병신체검사 등 검사규칙을 개정,올해부터 신체조건에 의한 병역면제의 범위를대폭 축소하기로 했다고 밝혔다.오는 2월부터 시작되는 징병검사부터 적용된다. 이에 따라 종전에는 시력이 0.4 미만인 경우 전자식 자동검안기로 굴절률(곡광도)을 측정,두 눈중 한쪽 눈의 곡광도가 -10.00디옵터 이상이면 병역을면제받았으나 앞으로는 군에 입대하지 않는 대신 공익근무요원으로 소집돼 2년4개월동안 국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의 경비나 감시 행정 등을 보조해야한다. 또 키 173∼175㎝의 경우 몸무게가 113㎏을 넘거나 39㎏에 못미치는 등 신장에 따라 정해진 몸무게에 미달하거나 넘어도 종전에는 병역이 면제됐으나앞으로는 2년4개월동안 공익근무 요원으로 근무해야 한다. 국방부 관계자는 “종전에는 씨름선수 등 건장한 신체조건을갖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단순히 몸무게가 많이 나간다는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는 모순이 있었다”면서 “신체상 큰 문제가 없는 경우 누구나현역입대는 하지 않는다 해도 공익근무 등 대체근무를 하도록 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 민원행정 최우수 병무청 李相浩 청장(인터뷰)

    ◎“청탁 무조건 NO… 비리 재발 없다”/520차례 이동 상담/원스톱 민원처리 ‘호평’/정의로운 병역문화 투명성 확보 주력 “병무비리의 온상이라는 오해와 불신 속에서도 전 직원이 다시 태어난다는 각오로 맡은 바 책임을 다해준 결과입니다” 李相浩 병무청장은 지난 22일 ‘98년 정부업무 심사평가 보고회’에서 고객만족도가 가장 높은 민원행정 최우수청(廳)으로 선정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李청장은 “올 한해 동안 병무비리 때문에 상당히 고통스러웠는데 조금이나마 명예를 회복하게 돼 기쁘다”면서 “큰 상을 받았으므로 앞으로도 공정하고 깨끗하게 민원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물론 다시는 병무비리가 일어나지 않도록 불합리한 법령과 제도를 개선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국방부 군수본부장을 역임한 李청장은 치밀하고 차분하면서도 업무추진력을 갖춘 전문 행정가로 평가받고 있다. “민원인 편익시설 확충 및 원스톱 민원처리 시스템 구축 등의 노력이 높은 점수를 받은 것 같다”고 최우수청으로 선정된 이유를 설명하고 “대학별로 ‘이동병무상당’을 실시하고 전화와 컴퓨터를 통해 민원인들의 병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덧붙였다. 올해 병무청은 520여차례의 이동병무상담을 했고 537만여건에 이르는 ARS(음성자동응답장치)와 PC통신 상담을 했다. IMF 체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병역의무자들이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조기 입영의 길을 넓혀주거나 입영을 연기토록 해주었다. 특히 1,500여명의 직원들은 매달 친절교육 및 시범교육을 받으며 민원서비스를 체질화하고 있다.민원인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불평·불만·불친절 사항을 곧바로 시정한다. 李청장이 내세운 올해 병무청의 목표는 ‘정의로운 병역문화를 정착’. 李청장은 “직원들에게 비리와 관련된 부탁이나 민원은 무조건 ‘노(NO)’라고 말하라고 엄명을 내려 청탁은 거의 사라진 상태”라면서 “청탁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의식 속에 심어주어 반드시 정의로운 병역문화가 뿌리를 내리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李청장은 병무비리 사건이 터진 이후 징모·징병 관련 직원 122명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조치를 단행하기도 했다. 병무청은 지난 8월 후암동 시대 28년을 마감하고 대전청사로 이전했다. 李청장은 “내년부터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는 병역의무자들은 원칙적으로 군복무를 하도록 면제 범위를 최소화하겠다”고 밝히고 “신체검사자의 군면제 비율을 10%에서 3% 선으로 대폭 내리고 국외이주자 면제연령도 31세에서 36세로 대폭 높였다”고 말했다. 이어 “신검 전문의 제도를 새로 도입하고 면제자들은 군의관과 지역주민 등 5∼6명으로 구성된 ‘신체등위심의판정위원회’의 최종 심의를 거쳐야 면제가 확정되도록 하는 등 투명하고 공정한 병역문화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 친일문학인과 문단의 대응(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4)

    ◎문학가동맹 ‘최남선·박영희 단죄’ 성명/민족 팔고 민주주의 망친 매국노로 규정/당국에 강력히 처벌 요청했으나 무산/민족분단 현실 친일에 대한 면죄부 준 셈 광복 직후 친일문학인들의 대응 자세는 거의 비슷했다.춘원 이광수나 박영희처럼 시골로 내려가 세월을 관망하면서 그동안 친일활동으로 분주해 미루어왔던 글을 쓰거나 구고(舊稿)를 재정리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최남선도 그랬다.식민통치아래서 여러가지 면에서 유리한 처지에 있었던 이들은 학문적 바탕과 각종 자료의 확보등으로 당장 집필활동을 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최남선의 한국사 관련 저서들도 그런 산물의 하나였다.급박했던 역사적 소용돌이속에서 내용에 대한 면밀한 검토도 없이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는 친일파의 저서를 금지처분 시키라고 했는데,사실은 저술활동을 통해 이들은 충분한 자기변호를 하고 있다. ○최남선 한국사관 관제사관으로 정착 그러니까 광복 직후 혼란기가 친일파들에게는 자기변호와 재기의 기회로 활용된 것이었다.예를 들면 ‘중등국사’에서 최남선은‘독립의 회복’이란 장(章)에서 “조선 인민이 일본에게 전에 없는 부끄럼을 당하매 잠자던 민족정신이 번쩍 깨어서”라고 서두를 시작한다.침략을 ‘부끄럼’이란 수사로 대치시킨 그는 독립운동의 주류를 “국내에서는 실력양성의 노력과 국외에선 국제정세의 이용”으로 서술하고 있다.이같은 한국사관은 그 뒤 분단시대의 관제사관으로 정착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박영희는 또 어떤가.다른 문인과 달리 왼팔이 꺾일 정도의 고문과 강압으로 형식적으로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해방직후 춘천으로 내려가 공립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면서 1940년 2∼5월에 걸쳐 ‘문장’에 연재하다가 중단했던 평론을 정리해 ‘문학의 이론과 실제’란 책을 펴냈다. 이광수의 ‘꿈’이 친일행위의 보상이자 자신의 희망이었듯 회월 박영희 역시 이 저서를 통해 마르크시즘을 강력히 비판하는 사회문학을 주장했다.춘원과 회월에 대한 문학가동맹측의 성명은 아래와 같다. ‘지난 36년간 조선은 틀림없이 왜적의 철제(鐵蹄)밑에 잔인하게 짓밟혀온 것이요,그러므로왜적과 왜적의 이익을 위하여 동족을 팔아먹은 친일분자는 한 하늘밑에 함께 복받고 살지 못할 민족의 원수이다.인민을 다시 무서운 함정으로 이끄는 온갖 음모와 책동의 상습범 친일분자에게는 갈구해서 세우는 새나라의 발전을 위해 응당 여러가지 자유가 제한되어야 할 것이다. 원수를 번영하게 하는 간계가 실행되고 민족을 파는 흉모(凶謀)가 용인되는 것은 절대로 민주주의가 아닐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망치는 일이 될 것이다.매국노에게는 언론의 자유가 없어야할 것이다.친일분자의 거두에게 어찌하여 출판의 자유가 용인될 수 있겠는가.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남조선에는 친일분자의 전횡이 일제시대를 연상케 한다.정치에 있어 그러하고,경제에 있어 그러하고,우리 문화영역에 있어서도 그들의 파렴치한 작동은 계속하고 있다.금번 이광수의 작품 ‘꿈’과 박영희의 평론집 ‘문학의 이론과 실제’를 발간한 것은 이 가장 큰 예이다. 이광수가 얼마나,소위 대동아전쟁때 왜적의 편으로 조선민족의 고혈을 빠는 일에 열렬하였으며 징병제도를 만들기 위해서얼마나 미친 것처럼 날뛰었고,박영희는 문인보국회의 상무이사로 황민화운동에 얼마나 날뛰었는가(…중략) ○박영희 춘천서 교사하며 집필 활동 우리 조선문학가동맹은 조선의 민주주의 문학인 전부를 대표해서 이광수,박영희의 철면피를 단죄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조치가 있기를 당국에 바라며 일반에게 성명한다. 1.이광수작 ‘꿈’와 박영희저‘문학의 이론과 실제’를 즉시 발매금지 시킬 것. 1.그 출판한 출판사를 엄격하게 처단할 것. 1.이광수 박영희 등 친일파,민족반역자를 반역자 규정에 의하여 처단할 때까지 언론 출판 집필 등 일체 활동을 금지시킬 것. 이 격렬한 성명은 당국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보면 민족분단 현실이 친일에 대한 면죄부를 발급해주고 만 것으로 귀착되었다.문학적 대응이 아닌 정치적 대응이 도리어 친일파 문학을 부추긴 사례의 하나이다.
  • ‘주민 감사청구제’ 법제화/주요분야별 내용

    ◎지방공직자/건축·위생 등 2년마다 만족도 조사 주민에게 감사를 예고해 지역 공무원의 비위와 부당행정 사례를 신고받는다. 주민이 감사를 요청하는 ‘주민감사청구제’를 법제화해 20세 이상의 주민 50명 이상이 행정기관에 감사를 청구할 수 있도록 한다. 건축,환경,위생,소방,농지,산림 등 6개 분야의 행정만족도를 2년마다 조사한다. 조사 결과 부조리한 공무원은 처벌한다. 직무유기자를 금품수수자와 같은 수준으로 엄단한다. ◎교육/교육자료 채택 지역단위 일괄구매 촌지를 없애기 위해 ‘교사의 자존심 회복운동’을 전개한다. 학교 운영위원회,교육관련 시민단체 등을 통한 계도,홍보활동도 강화한다. 교육자료 채택은 학교별로 하지 말고 지역교육청에서 단위별로 일괄 구매·입찰한다. 시·도 교육청,대학 등에서 물품 구매 및 공사 입찰 관련 정보를 공개하고,인터넷 홈페이지에도 구매·입찰정보란 개설을 의무화한다. 교육행정직의 지방간 인사교류를 연 1,2회로 확대한다. 불법과외 욕구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학력위주의 대학입학 제도를개선,2002년부터 새로운 대학입학제도를 적용한다. 교육현장의 민감한 사안에 대해 시민단체 등이 감사현장을 참관케 한다. 감사 실시 후 수감기관에게 감사방법 및 결과에 대한 의견 개진,소명기회를 준다. 사립학교에도 학교운영위원회를 설치해 부교재 채택이나 급식시설 운영,방과 후 교육활동,수학여행,교복 등을 결정할 때 심의를 받도록 한다. ◎방위력개선/새 무기구매때 사업실명제 실시 그동안의 개선노력에도 불구하고 효율성과 투명성,전문성이 미흡한 것으로 자체평가된다. 이에 따라 방위력개선사업을 전담하는 ‘획득본부’ 창설을 추진한다. 또 사업실명제를 실시해 무기 구매담당자는 평생 책임을 지도록 할 방침이다. 무기도입을 위한 의사결정 과정을 간소화할 방침이다. 현재 8단계의 관련 협의체,위원회가 있다. 이를 4단계로 줄일 계획이다. 이와 함께 외국 무기제조업자와의 국제협상 및 계약을 위해 전문성도 강화한다. 국제 상거래에 정통한 민간 전문가와 전문 법률회사를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또 책임 법무관 제도 및 국방조달자문위원제도도 도입할 계획이다. 대형사업은 가급적 국방부가 국외업체를 직접 상대한다. ◎병무비리/신검 급수판정 세분·면제범위 축소 징병을 위한 신체검사 때 병력(病歷)자 위주로 정밀검사를 강화할 방침이다. 신체검사 규칙을 개정해 급수판정을 세분화하고,신체조건에 의한 면제범위를 축소하기로 했다. 병사용 진단서 발급병원 지정요건을 강화,지정병원수를 줄일 계획이다. 발급 병원에 본인 여부와 진단내용을 조회하고,MRI,CT는 촬영병원과 진단서 발급병원이 같아야만 참조한다. 신검군의관 운영제도도 개선해 현역군의관 파견근무 대신 징병검사 전담의사를 둔다. 신검 판정 군의관의 실명을 기록하고 자료를 보존한다. 부대배치 절차도 바꿔 입영일자와 부대 지정 때 컴퓨터에 의한 무작위 처리방법인 난수로 처리한다. 카투사를 훈련소에서 선발하지 않고 TOEIC 600점 이상 지원자 중 무작위로 전산추첨한다. ◎세무/납세자에 재심사 청구 기회줘 세무조사 결과를 납세자에게 통지해 재심사 청구가 가능하도록 하는 ‘과세 적부심사제’를 시행한다. 잘못된 과세의 세무관서 책임시정제도 병행한다. 부동산 양도신고에 따른 자동세액 전산시스템을 구축해 수동계산 때 발생할 수 있는 부조리 소지를 제거한다. ‘업소 무단방문 통제지침’의 이행을 철저히 점검,위반자는 중징계한다. 모든 신고서는 신고센터에서 일괄 접수,처리하고 각 부서의 신고접수 창구는 폐지한다.
  • 친일의 군상/前 이화여대 총장 金活蘭(정직한 역사 되찾기)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 때 어찌 여성인들 잠잣코 구경만 할 수가 잇겟습니까.이 날을 위한 마음의 준비는 이미 벌서부터 되여 잇섯습니다.내지(일본)학도들과 함께 전문대학 법문계(문과) 반도(조선)학도들은 우렁찬 진군을 이르키어 특별지원병으로서 오는 1월20일에는 영예의 입영을 하게 되엿습니다.이번 반도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거러가야될 길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가지 리유 때문에 참렬을 못하는 것입니다.…아프로는 결전하의 국가목적에 쪼차 한사람이라도 더만히 우수한 지도원을 양성하기에 전력을 다할 각오가 잇슬 뿐입니다.” 金活蘭(1899∼1970)이 1943년 12월25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新報)’에 기고한 ‘男子에게 지지안케­皇國女性으로서의 使命을 完遂’라는 제목의 기고문 중 한 대목이다. ◎이대 키운 공 크지만 ‘여성계 상징’으론 논란 여지/3·1운동 당시 한때 지하 독립운동 조직과 연계/1936년 이화학당 부교장 시절부터 변절 첫 걸음/동포청년 전쟁에 내몰고도 사과 한마디 없어/“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로 모여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을…” 일제하 지식인이 신문에 쓴 친일성향의 글 한 두편을 통해 그의 삶 전체를 평가받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거대한 감옥’또는 ‘노예선’으로 불리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쓴 글이라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그러나 여기에는 몇가지 조건이 있다.우선 생명에 위협이 있었느냐,그리고 나중에 자신의 행적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성했느냐 하는 점 등이다. 모든 지식인들에게 지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몇몇 의사·열사가 이에 속할 뿐이다.그러나 지식인이라면 자신의 과오에 대한 반성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그러나 거의 모든 친일 지식인들은 자신의 친일행위를 반성하지 않았다.친일 지식인들이 더 비난받는 이유중의 하나는 이 때문이다. 일제시대 여성 지식인이었으며 최근 그의 이름을 딴 상(賞)제정 문제로논란이 되고 있는 김활란은 역사 앞에서 용서받을 수 있을까?답은 긍정적이지 않은 것 같다.이유는 그가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따라서 그의 이름을 딴 상 제정은 지식인 사회에서 여러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흔히 김활란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수식어 가운데 하나는 ‘여성박사 제1호’다.그는 학사·석사·박사를 따기까지 세 차례에 걸쳐 5년간 미국유학을 했다.귀국해서는 미국인 선교사 아펜절러(당시 이화여전 교장)의 뒤를 이어 1939년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했다.굳이 나눈다면 그는 친미(親美)인사로 분류되는 사람이다.그런 그가 ‘대동아전쟁’이 터지자 친일,반미(反美)인사로 돌변하였다. ○전쟁 터지자 반미로 돌변 “저 흑노(黑奴)해방의 싸움을 성전(聖戰)이라 했고 십자군의 싸움도 성전이라고 했다.…제일선 장병과 보조를 같이 하여 도의를 무시한 물질제일주의의 서양문명을 박차버리고 동아(東亞)의 천지로부터 미영(美英)을 격퇴하여 버리자”.김활란은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결성식(1941.12.27,부민관 대강당)에서 ‘여성의 무장’이란 주제로 미영 타도를 외쳤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일제하 대부분의 친미·기독교계 인사들(白樂濬·申興雨 등)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다시 친미인사로 변신했다.그는 미군정 시절 초대 이화여대 총장에 취임했고 이승만정권 하에서 한미(韓美)재단 이사 등을 지냈다. 3·1만세의거 당시 김활란은 이화학당 대학과를 마치고 모교의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그 무렵 지하독립운동 조직과 연결돼 활동하고 있었다.‘7인의 전도대(傳道隊)’를 만들어 기독교 포교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단순한 전도활동 수준을 넘는,일종의 민족운동이었다.20년대 후반 좌우 민족진영의 통합으로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자 뒤이어 27년 4월 여성계 민족단체로 근우회(槿友會)가 결성되었다.그는 근우회 창립멤버로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이듬해 돌연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유학을 떠났다. 31년말 그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농촌교육 관련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 귀국했다.귀국후 문맹퇴치·봉건잔재 타파 등을 내걸고농촌운동에 주력하였는데 이는 미국유학을 한 인텔리 여성의 소박한 조국에 대한 헌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일제 침략전쟁 미화·선전 그의 친일행보는 36년 이화학당 부교장으로 있던 시절 첫걸음을 내딛는다. 그해 말 총독부 사회교육과 주최 ‘가정의 개선과 부인교화운동의 촉진’을 위한 사회교화간담회에 참석하였다.37년 1월 그는 총독부 학무국의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를 결성하였고 7월 들어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이 단체는 한일병합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들의 부인들이 주동이 돼 전쟁물자로 바칠 금비녀·가락지를 모으기 위해 결성한 친일 여성단체였다.이후 여러 친일단체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방송선전협의회,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임전대책협의회,조선교화단체연합회,조선임전보국단,조선언론보국회 등등. 그의 활동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기독교 활동이다.38년 6월 조선YWCA의 회장으로 있던 그는 “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아래로 모여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을 자기(自期)하는 의미에서…”(매일신보,38년 6월9일)라며 일본YWCA에 가맹을 발표하였다.당시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가 학교가 폐교를 당하고 구속자·순교자가 잇따르던 때였다. 39년 4월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한 이후 그의 친일행각은 본격화되었다.물론 그 배경에는 학교를 지키기 위한 목적도 없지는 않았다.그러나 김해 김씨인 그의 문중이 본관을 따라 ‘김해(金海)’로 창씨를 한 것과는 달리 그는 독자적으로 ‘천성활란(天城活蘭·아마기 가쓰란)’으로 창씨개명하였다.‘어차피 창씨를 해야한다면 정말 (일본식으로)창씨를 해서 자신의 독립된 일가를 세울 생각’이었다.(金貞玉의 저서 ‘이모님 金活蘭’중에서) ○순풍에 돛단 배처럼 살아 ‘대동아전쟁’ 개전(41.12.8) 이후부터는 강연·방송은 물론 가두로 나서서 일제의 침략정책을 미화,선전하였다.특히 여성들을 대상으로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 등 인력동원에 대한 이해와 협력을 촉구했다. 43년8월1일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황국신민의 무쌍(無雙)한 영광인 징병제는 드디어 우리에게도 실시되었다.…일시동인(一視同仁)의 황공하옵신 성지(聖旨)에 다시금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나라를 위하여 불덩이 같이 끓는 피와 몸을 통털어 바쳐 성은(聖恩)에 보답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렸으며 반도 남아의 의기를 뵈일 기회는 드디어 왔다.이 얼마나 기쁜 일이며 수 천년 역사 이래 모처럼 보는 거룩한 감격…”(‘매일신보’1943년 8월7일)이라고 썼다. 그는 해방직전 심한 눈병으로 고생하고 있던 자신을 문병차 찾아온 조카(金貞玉 전 이대교수)에게 “남의 소중한 아들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라고 연설을 하고다닌 죄값”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김정옥의 앞의 책 중에서) 당시 여기자 崔銀喜는 그를 두고 ‘모질고 악착한 역경을 맛보지 않고 순풍에 돛단 배처럼 산 행운아’라고 평했다.식민지 시대와 격동기를 산 지식인의 일생이 대체로 고뇌와 아픔으로 점철됐겠지만 그는 상류층의 한 층을 이루는 생애로 일관하였다. 그가 60년 가까이 이화인(梨花人)으로 살면서 일제하와 건국기에 학교를 지키고 가꾼 공로는 인정할만 하다.그러나 그를 여성교육계,나아가 한국여성계의 상징으로 내세우기에는 그의 일생 가운데 ‘흠결’은 큰 편이다.이대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그의 친일활동이 적극적이었다.이대측의 ‘김활란상’ 제정 추진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보다는 그의 떳떳하지 못한 삶이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김활란 연보 1899년 인천 출생 1914년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1918년 이화여전 교수·부교장 1928년 ‘근우회’ 발기인으로 참여 1931년 미국 컴럼비아대 철학박사(‘여성박사 1호’) 1937년∼45년 애국금차회·임전대책협의회·조선언론보국회 등 친일 단체 간부로 활동 1939년∼70년 이화여전 교장·이화여대 총장·이화학당 이사장 1948년∼65년 한국대표로 유엔총회 6회 참석 1950년 공보처장 1952년 ‘코리아타임스’ 사장 1954년∼61년 국제기독교선교위원회 부위 원장 1955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1959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1963년 대한민국장·막사이사이상·다락방상 수상 1965년 대한민국 순회대사 1970년 별세,망우리 금란동산에 묻힘.대한민국 1등수교훈 장추서 1996년 추모문집 발간,그의 친일 논쟁을 계기로 ‘인터넷 반민특위’이 등장 1998년 이대측의 ‘김활란상’ 제정 계획 발표로 찬반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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