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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회의 공천후유증 증폭

    ◎유준상 의원­“당에서 20억원 요구” 주장/권노갑 의원­“음해 술책”… 법적대응 비쳐/신한국·민주당선 “공천장사 드러났다” 비난 국민회의 공천후유증이 정가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공천에서 탈락한 유준상의원(보성·화순)이 『공천때 요구한 돈을 내지않아 탈락했다』는 주장이 도화선이다.13일 다른 당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변인 논평 등을 통해 『국민회의의 공천장사』라며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유의원은 공천자발표를 앞두고 지난달 29일 새벽 권노갑 지도위원의 평창동 자택을 찾았다고 말했다.권위원의 승용차를 타고 당사로 오던 도중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 앞에서 권위원이 운전기사등을 내리게 한뒤 『총재의 체면도 있고…한 두장 정도만 내지』라는 요구를 했다고 주장했다.두장은 2억원이 아니고 20억원이었다는 게 유의원측의 설명이다. 유의원은 이미 창당자금·당비·후원회비등으로 3억원을 낸 상태여서 『5억원정도를 먼저 내겠다』고 약속하고 헤어졌으나,그 뒤 사정이 여의치않아 돈을 마련하지 못해 끝내 공천에탈락했다고 강변했다. 물론 권위원은 이에 발끈했다.『국민회의를 음해하려는 술책』이라고 일축하고 『유의원이 인간적으로 불쌍하고 안됐다』며 안타까워 했다.권위원은 『유의원이 어떤 사람인지 천하가 다아는데 (내가) 돈을 요구했겠느냐』고 반문하고 『만일 사실이었다면 지난 3일 공천탈락뒤 가진 기자회견에서나 또는 「뱀소동」전에 밝혔을 것』이라며 조작으로 치부했다. 권위원은 『지난 1월 의원부인회 모임에서 유의원의 부인이 우리 집사람 핸드백에 화장품이라며 1백만원을 준 일이 있으나 바로 돌려보낸 적이 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그러면서 같이 당을 한 사람으로 당분간 기다려본 뒤 법적대응을 강구할 뜻을 내비쳤다. 이날 급작스레 드러난 권위원과 유의원 사이의 「한냉전선」은 일단 이 선에서 정지했다.그러나 유의원은 『공천을 주지도 않을 사람에게 후원회비등을 받은 것은 사기』라며 반환요구를 위한 소송을 준비중이라고 밝혔다. 신한국당의 허세욱 부대변인은 『특별당비니 후원회비니 하며 그간 떠돌던 국민회의 공천장사가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라고 비난했고,민주당의 천호선 선대위부대변인도 『국민회의의 이같은 관행이 정치를 썩게하고 선거판을 혼탁하게 하는 주범』이라며 공세를 취하고 나섰다.이에 맞서 국민회의 유종필 부대변인은 『정당후원회의 후원금을 공천장사 운운하는 것은 정치자금법 1장1절이나 읽어보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고 반격했다. 그러나 유의원 주장의 사실여부를 떠나 국민회의 공천후유증은 엉뚱한 방향으로 튈 공산이 적지 않다.특히 공천헌금 공방과 맞물려 낙천한 전남 장흥·영암의 유인학 의원,전북 김제 최락도 의원과 부안등지의 공천탈락자들이 무소속 출마를 노리며 조직을 인계하지 않는 등 곳곳에서 「반란」기미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 월셋방 자취 노총각 4억복권 “횡재”(조약돌)

    ◎약국서 생애 첫 구입… “집사고 결혼 할래요” ○…제13회 또또복권 제3차 추첨결과 사글세 단간방에서 자취생활을 하는 34세의 노총각 회사원이 1등과 2등에 당첨돼 4억원의 당첨금을 받게 된 것으로 밝혀져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있다. 행운의 주인공은 전북 전주에 사는 L모씨.직장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전주시 달동네에 있는 보증금 1백만원 월세 10만원인 단간방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L씨가 거액 당첨의 행운을 잡게된 계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이 앓고 있는 병 때문이었다. L씨는 자취 생활탓에 위장병을 앓아왔는데 전북 익산시로 출장을 가다 배가 몹시 아파 약국에 들렀다가 약국에서 팔고 있는 복권이 눈에 띄어 생전 처음으로 3장을 구입했다는 것.3장 가운데 1장은 지난 25일 있었던 추첨에서 1등 3억원에,다른 1장은 2등 1억원에 당첨됐다. L씨는 당첨금으로 집을 사 부모님도 모시고 결혼도 해 행복하게 살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다.
  • 국교동창 조미사씨 본지 전화 인터뷰

    ◎“혜랑이 자매 똑똑하고 예뻤는데…”/어린 나이 답지 않게 사회주의 사상 강해 『혜랑·혜임이 자매가 매우 똑똑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성혜랑씨와 함께 48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를 졸업한 동창생 조미사씨(61·여·서울 마포구 연남동)는 14일 성혜랑·혜림 자매의 탈출소식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조씨는 서울신문과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신문 사진을 보고 한 눈에 혜랑이를 알아보았다』며 『지금 기억에도 혜랑이는 집안의 영향으로 어린 나이답지 않게 사회주의 사상이 매우 강했던 같다』고 말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전학와 성혜랑씨와 한반이 된 조씨는 3년동안 줄곧 한반으로 지냈다.당시 을지로 6가에 있던 서울사대부속 국민학교는 남녀 20여명씩 2개반이 있었다. 조씨는 『혜랑이의 아버지가 북한에서 높은 지위에 있다는 소문이 급우들 사이에 나돌았었다』고 회고하며 혜랑·혜림 자매는 당시에도 좋은 옷을 입고다녀 부티가 났다고 말했다. 또 당시 을지로 6가는 교통편이 거의 없어 학교가 파하면 집사로 보이는 사람이 두 자매를 데리러 왔었다. 혜림씨는 조씨의 2년 후배였으나 언니인 혜랑과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친구처럼 지냈다. 자매는 어릴 적부터 상당히 예뻤으며 특히 혜랑씨의 경우는 작고 통통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웅변에 능한 「보스 스타일」이었다.성적도 항상 좋은 편이었다는 것. 두 사람의 탈출 소식이 전해진 뒤 조씨는 졸업생 5∼6명과 통화했는데 다들 『어머 저 애가 그 혜랑이네』라며 놀랐다고 전했다.
  • 하룻만에 마음 바꾼 JP(정가초점)

    자민련 김종필총재가 1일 부산을 찾았다.김진영의원의 공천잡음과 관련한 「항의성 소동」으로 『안가겠다』는 생각이 하룻만에 뒤바뀌었다.아무래도 『부산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앞선 모양이다. 총재가 시지부 개편대회(위원장 정상구)에 참석하지 않을 경우 이 지역 후보들의 사기와 총재로서의 신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특히 조계종 3대사찰 중 하나인 양산 통도사를 방문,월하종정을 친견하는 일정이 김총재에게는 보다 큰 의미가 있는듯 하다.시지부 개편대회 보다 통도사 방문에 더 비중을 두는 당직자도 있다. 최근 국방부내에서 대통령의 예배와 관련한 경호문제로 신한국당과 불교계의 갈등이 표출된 상황까지 감안하면 이번 방문은 「불교계 끌어안기」라는 것이다.김대중국민회의총재도 3일 송월주총무원장을 만날 예정이어서 경쟁적 측면도 없지 않다. 김총재는 주지인 목산스님이 주재한 법회에 참석한 뒤 월하 종정과 10분간 독담했다.『정치적 얘기를 나눴겠느냐』는 게 측근들의 말이지만 개신교 집사인 김총재와 부여출신인 큰 스님과의 「만남」 그 자체로도 정치적 해석은 충분하다.
  • 하노이 풍경/송복연세대교수·정치사회학(시론)

    먼동이 트면서 거대한 재개발지구가 나타났다.말이 재개발지구지 거대한 빈민지대나 다름이 없다.집들은 헐리기 직전처럼 모두 낡아있고,가로수는 남국답지 않게 야위고 듬성듬성하다.밤에 내린 비로 축축하던 길이 마르면서 시가지는 온통 먼지더미에 싸인듯 하다. 집들 한가운데로 도시오물로 가득찬 악취가 코를 찌르는 시궁창이 흘러가고,바로 거기에 연해서 집들이 늘어서 있다.집사이 골목길은 진창이 돼서 걸어갈 수가 없다. 어디서 나왔는지 구두닦이 어린이가 한둘 나타나면서 곧 7∼8명이 됐다.그리고 진득지게 늘어붙어 구두를 닦으라고 한다.금방 아이들과 나그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다.외국인을 태운 봉고차가 정차하기 무섭게 거지떼가 새카맣게 몰려온다.애기를 안은 엄마,아기를 업은 애가 어디서 줏어들었는지 「베이비 헝어」라는 영어를 쓰며 돈을 내놓으라고 졸라댄다.어떤 애는 「엄마 없는 애」라는 영어로 쓴 패도 차고 있다. 돈을 주면 다른 거지떼가 붙들고 늘어져 도시 차를 움직일 수가 없다.타임머신을 타고 기나긴 과거시간으로돌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자동차는 거의 볼 수 없고,거리는 모두 자전거와 오토바이 물결이다.밀물 썰물처럼 쉬지 않고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지나간다.주교통수단이 바로 이 자전거며 오토바이다.버스가 있긴 하지만 일반인에게는 별로 효용가치가 없다.오히려 유일한 대중교통은 「시클로」라고 하는 자전거 앞에 매단 리어카라 할 수 있다.이것도 자전거나 다를바 없다. 도대체 저 많은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거리가 저렇게 종일토록 자전거 오토바이 물결로 메워지고도 공장이 돌아가고 논밭에서 곡식이 생산되는 것일까.안내자는 저들 중 50%는 실업자라고 했다.공무원이나 국영업체에 일하는 사람도 아침에 얼굴만 내밀고는 저렇게 나와 돌아다닌다고 했다.월남 사회과학원의 한 교수는 저들이 대개 2∼3개의 부업을 가지고 있어,저렇게 분주하다 했다. 하지만 저렇게 「거리 위」에서 분주한 이유는 무엇일까.아마도 전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한 두마디 할것도 자전거를 타고 직접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여기서 영업하는 한국상사의 자료에 의하면 전화대수는 100명당 0.85대가 돼 있다.전화대수가 지금보다 10배가 늘어나면 거리의 시간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어렵기는 하노이 국립대학도 마찬가지다.지식을 갈고 닦는 냄새가 어디서도 나지 않는다.마치 골방과도 같은 교실에 학생 40∼50명을 모아 놓고 교수가 강의를 하고 있다.앞의 칠판이 보이지 않을 만큼 방이 어둡다.전등도 없고 건물은 공장건물이나 진배없다.캠퍼스 개념이 없는것 같다.수십년전의 국민학교에서나 봄직한 삐걱거리는 책상과 의자를 회의식으로 배열한 자리에서 하노이 국립대학총장은 방문한 우리 교수단에게 이 대학의 미래설계를 열심히 말해주었지만 실감이 가지 않는다.월남 「사회과학원」교수팀에 현재 월남전체에 대학이 몇개이고 대학생수는 얼마냐고 물었지만 우리에겐 그런 통계가 없다고 했다.그 무엇을 물어도 통계와 관련된 것이면 「통계가 없다」는 것이 대답이다. 전쟁이 끝난지 21년,그리고 「도이모이」(월남식 개혁쇄신)를 외쳐온지 10년.사회주의국가의 특성을 꼭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사회과학원」의 한 교수는 왜 우리가 통일했는가,전쟁은 왜 했는가,후회하는 말들이 여기저기 나오고 있다고 했다.통일 21년,도대체 그들은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왜 인민들은 그렇게 피흘려 싸웠는가.왜 인민들은 그렇게 조국해방을 부르짖었는가.왜 인민들은 그토록 「사이공」정부를 규탄하고 그토록 사회주의를 외쳐댔는가. 그렇게 지독한 전쟁,참담한 투쟁을 거쳐 그들이 획득한 것은 무엇인가.초강대국을 물리쳤다는 민족적 자긍심,그들의 이데올로기.그들이 내세우는 역사바로세우기­그러나 인민들은 모두 「거지」가 돼 있다.그들의 얼굴엔 핏기가 없고 옷과 몰골은 꾀죄죄하기 이를데 없다. 그러면 당간부,요직의 정부관료도 그러한가.그들은 삶의 기회가 다르고 삶이 질이 달라져 있다.인민은 누구나 평등하게 폭 4m의 집에 살아야 하지만,그들 간부는 400∼500평의 집에 좋은 정원을 두고 살고 있다. 한 지배자가 다른 지배자를 몰아낸 것 외에 그들의 역사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마침 만해 한용운의 「당신을 보았습니다」란 시의 구절이 생각난다.「아아,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줄을 알았습니다」.
  • 「예수 사랑」 실천… 참인술 한평생/성탄절에 타계한 장기려 박사

    ◎차남과 맨손 월남… 옷두벌만 생겨도 남에게/내집 한칸없이 가난한 환자 치료에 온종성 평생을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인술을 펴며 살아온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성탄절인 25일 새벽 「사랑과 희생」이라는 값진 가르침을 성탄선물로 남기고 눈을 감아 세인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고 있다. 고인은 80세가 넘어서도 하루 40여명에게 무료진료를 베푸는 등 「박애정신」을 몸소 실천했다.그에게 있어 「사랑」과 「봉사」는 이같은 삶을 걷게 한 밑거름이었다. 지난 1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난 장박사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영향으로청년시절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꿈꿨다. 장박사는 대학졸업후 평양 기독병원에서 일하다 51년 1.4후퇴 때 부인 김봉숙씨와 다섯남매를 고향에 둔 채 둘째 아들 가용씨와 단 둘이서 월남했다. 곧 돌아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성경과 찬송가책만을 달랑 들고 부산까지 내려온 그는 그해 7월 맨손으로 영도구에 「복음의원」이라는 「천막병원」을 차려 전쟁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무료 시술을 해주었다.후에 외국인 선교사 말스베리의 도움으로 부산복음병원으로 확장한 이 병원을 운영하면서 68년 이 지역의 교회집사들과 함께 한국 의료보험조합의 효시인 「부산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세워 가난한 사람을 치료하는 데 헌신했다. 장박사의 평양시절부터 교회에서 알고 지내다 부산 피난때 재회했다는 방귀자씨는 『피난 때 옷이 두벌만 생겨도 한벌은 남에게 줄 정도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또 동료 의사들은 『부산대 의대 교수시절 학비를 마련 못한 가난한 제자들에게 학비로 쓰라고 월급을 선뜻 내놓은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추모했다. 그토록 남의 불행에만 민감하다 보니 월남후 한번도 자기집을 가져본 적이없었다. 평생 병원측이 마련해 준 사택에서 묵었으며 작고하기 전에도 부산복음병원의 후신인 고신의료원 건물 꼭대기층에 마련된 10여평 남짓한 허름한 곳에서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76년 이 병원 원장직에서 정년퇴직 한 뒤에도 그는 『아직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며 거제도로 건너가 섬주민들을 위해 인술을 베풀기도했다. 장박사의 이같은 봉사정신은 해외에도 알려져 79년도 막사이사이상 공공봉사부문을 수상했다. 외롭게 사는 자신에게 주위에서 재혼을 권유할 때면 그는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못잊어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일과 재혼했다』고 재회의 날만을 손꼽아기다렸다. 아들 가용씨는 『아버님이 병원에 입원해 있던 지난 10월 「주님을 섬기다간 사람」이라고 비문을 새겨달라고 유언을 남기셨다』고 전하고 『아버님의 비범한 삶이 어두운 세상에 한 줄기 빛이 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 기아 “합병 절대 있을수 없다”/한승준 사장 회견

    ◎악성루머 피해 법적대응 강구/LG그룹 관심표명뒤 「전략제휴」 등 소문/구 회장에 항의서한… 진화될지는 의문 기아자동차는 16일 최근 나도는 합병설 등과 관련해 공식적인 해명을 했으나,기아자동차의 합병설과 전략적 제휴설 등이 과연 멈출수 있을 지 주목된다. 한승준 기아자동차 사장은 이 날 서울 여의도 본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기아는 다른 대기업들의 인수설로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다』며 『기아의 인수설이 끊이지 않는 게 유감』이라고 말했다.그는 『기아의 경영권을 뒷받침하는 지분이 50%를 넘을 뿐 아니라,안정지분을 계속 늘리는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되기 때문에 기아는 결코 다른 기업에 인수되지 않을 것』이라며 『적대적 인수합병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를 대비하여 2중,3중의 비상대책도 마련해 놓고 있다』고 덧붙였으나 비상대책의 내용을 밝히지는 않았다. 한사장이 기자회견한 것은 최근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기아자동차 인수에 관심을 표명한 뒤기아 인수설이 다시 꼬리를 물어 이를 진화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한사장은이날 구회장에게 항의서한을 보냈지만 LG그룹이나 구회장에 대해서는 「우호적」으로 말해 주목을 끌었다.그는 『LG그룹은 기업 이미지가 좋은 회사이며구회장을 개인적으로 존경한다』며 『기아는 LG로부터 자동차부품을 받는 등 LG와 기아는 서로 좋은 고객』이라고 덧붙였다. LG와 기아의 관계가 나쁘지 않다는 설이 기아자동차 최고경영진에 의해 확인된 셈이다.삼성과 기아가 「원수」같이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어서 주목되는 대목이다. 사실 기아자동차는 지난 93년 10월 삼성생명을 비롯한 삼성그룹 계열사의 기아자동차 주식 매집사건 이후 전화기나 냉장고,핸드폰 등 전자제품을 종전의 삼성에서 LG로 바꿨다.LG 임직원들도 될 수 있으면 기아의 자동차를 사는 게 좋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고있다.현재 자동차를 생산하는 회사의 모그룹은 현대·삼성·대우 등 라이벌인 탓으로 풀이된다. 한사장은 『최근 나도는 기아자동차 최고경영진간의 불화설은 악성 루머(소문) 중 대표적인 것으로,점점 루머의 강도도 깊어지고 있다』며 『앞으로는 루머로 생기는 피해에 대해 명예훼손이나 손해배상청구 등 법적인 조치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사장의 해명에도,기아의 인수설은 쉽게 그칠 것 같지는 않다.기아는 소유와 분산이 잘 이뤄져,주인이 없는 회사로 인식돼 역설적으로 인수가 쉽기 때문이다.게다가 21세기에도 유망한 자동차를 생산하므로,삼성·LG 등 주요그룹에서 눈독을 들일 이유도 된다. 삼성과 쌍용그룹도 오는 97년을 전후해서 승용차를 생산,자동차 업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것도 기아 인수설이 당분간 계속될 이유다.현대나 대우그룹 등에 비해 자본력이 뒤지는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게다가 기아의 생산직원과 사무직원들이 불화를 빚는 등 내부에서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오는 97년이면 기업인수에는 제한이 없지만,기아자동차 인수문제는 이런 단순한 경제적 요인만으로 해결될 사항은 아니다.
  • 기아/인수설 외국언론 보도에 곤혹

    ◎WSJ,지난달 “삼성과 합병 가능성”/홍콩월간지,“주인있는 회사돼야” 기아자동차의 인수설이 잊을만 하면 나오는 등 끊이지 않는다.외국언론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이에 기아는 이번 여름휴가 때에는 2만8천명의 전 임직원이 인수설에 대응하는 자료를 갖고 피서지나 고향으로 떠나 대대적인 홍보전에 들어가기로 했다. 홍콩에서 발행되는 아시아머니지는 7·8월호에서 『기아자동차는 합병을 통해 주인있는 회사로 바뀌는 게 좋다』는 펀드매니저의 코멘트를 인용,보도했다.아시아머니지는 유러머니지의 아시아지역 자매지로,격월간지다. 이에 앞서 지난달초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지는 『기아자동차의 최근 자금난은 삼성과 기아의 합병에 관한 루머(소문)를 뒷받침한다』고 보도했다. 기아 관계자는 『지난 93년 삼성생명이 기아 주식을 사들인 이후,인수설이 나돌고 있다』며 『외국언론은 사실과 거리가 먼 이런 소문에 불과한 얘기를 뒤늦게 쓴 것』이라고 말했다.다른 관계자는 『삼성은 틈만 나면 기아를 먹겠다는 욕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며삼성을 의심했다. 기아의 인수설이 끊이지 않는 것은 삼성생명의 기아주식 매집사건과 삼성의 승용차 진출이 도화선이 됐다.게다가 기아가 작년에 지난 81년 이후 13년만에 적자(6백96억원)를 기록한 데다,현대·대우·쌍용 등 대그룹을 낀 자동차 회사보다 자금력이 뒤질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대주주가 없어,주인이 없다는 말을 듣는 것도 한 요인이다.
  • “꼭 살아있을것”믿음속 구조활동/최명석군 아버지 최봉열씨(인터뷰)

    ◎“명석,하겠다면 하는 성격/실종자 가족들 포기 말길” 『한번 하겠다면 기필코 하는 성격이 꼭 애비 닮았죠,뭐』 최명석군이 기적적으로 구조되기까지는 애절한 부정도 있었다.아들이 매몰된지 11일이 지나도록 실낱같은 한가닥 희망마저 버리지 않고 사고현장에서 구조활동을 벌여온 아버지 최봉렬(51·웅진코웨이 종로지부장)씨. ­지금 심정은. ▲가슴이 마구 뛰고 눈물이 저절로 난다.이루 헤아릴 수 없이 기쁘다.하늘로 날아가는 기분이다.말로 형언할 수 없다. ­아들이 꼭 살아 있으리라 믿었나. ▲명석이는 명이 길기 때문에 50%는 살아 있을 것이라 믿었는데 집사람은 1백% 살아 있다고 늘 말했다.비가 와서 물을 마실 수 있으니 앞으로 두달은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찾아 다녔다. ­사고당시 심정은. ▲휴학을 했더라도 아르바이트는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만류했었는데 좀더 모질게 말리지 못한게 후회스러웠다.막내라 형이 입던 옷을 입히고 잘해주지 못한 것도 못내 마음에 걸렸다. ­사고당일부터 자원봉사 활동을 했다는데. ▲6형제 모두 자원봉사에 나서 명석이를 찾았고 봉용(48),봉길(46),봉선(43)등 세 삼촌과 함께 지금까지 구조작업을 해왔다.사고당시 명석이와 함께 있었던 친구 이강선(21·용인대 2년)군이 명석이가 매몰된 장소를 알려줘 이 부근을 집중적으로 찾았고 119구조대에 지원을 요청했다.구조작업이 중단될 때는 대책본부를 찾아가 항의도 했다. ­이 순간 생각나는 사람은. ▲고향에 계신 아버지(79),어머니(72)이다.그 분들이 어려운 살림속에서도 잠자리가 없는 행인들을 재워주는 등 평소 덕을 쌓으신 덕분이다.국민들께도 감사드린다. ­아직 혈육의 생사를 모르는 실종자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포기하지 말라.불가능이 없다는 생각으로 기다려야 한다.물만 있으면 살 수 있다. ◎“생환 최군 일가 12명의 “고진감래”/“명석이를 찾아라”/온가족 자원수색/24시간 현장 맴돌며 잔해 뒤져/어머니,봉사대에 음식 제공 삼풍백화점 붕괴현장 주변의 삼풍주유소에 있던 최명석군의 아버지 최봉렬(52)씨와 어머니 전인자(50)씨는 TV를 통해 흘러 나오는아들의 생존소식이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사고현장인 삼풍백화점에서 11일동안 필사적인 구조활동을 벌인끝에 『이젠 틀렸구나』 생각하고 거의 포기상태에 있었던 가족들에게 꿈만 같은 일이었다. 최군의 가족들이 처음 사고소식을 접한 것은 삼풍백화점이 붕괴된 지난달 29일 6시쯤 TV뉴스속보를 통해서였다.아들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백화점이라 가족들에게는 마른하늘에 벼락같은 일이었다.곧바로 최군의 부모와 형 태석씨(25·사업),누나 은진씨(23)는 사고현장으로 달려왔다.작은아버지들을 포함한 다른 친척들도 뒤이어 현장으로 모였다. 어머니와 누나는 삼풍주유소에서 자원봉사자들이 구조대원등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현장에 들어간 최씨형제들은 최군이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으로 확신하며 구조작업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지상·지하 가릴 것없이 이잡듯 뒤졌다. 별다른 장비도 없이 지하 굴착작업을 하던 가족들은 『명석아』를 계속 외쳐댔다.한참동안 그러다 대답이 없고 힘이 빠지면 주저앉아 너나없이 눈물을 흘렸다.최씨의 동생 봉용씨(48·식당경영 및 사무실임대업)는 고령인 형이 충격과 과로로 쓰러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격려하며 늘 붙어다녔다.사고난 지 3일뒤 전주와 나주,광주 등 지방에 살고있는 최군의 다른 두 숙부와 고모부 이선종(40·건설업),외삼촌,외사촌등 7명이 속속 현장에 합류해 12명의 가족들이 자원봉사자로 최군 구조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최군이 A동 지하1층에 살아있고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뉴스가 흥분한 목소리에 실려나왔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가족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고 최군의 어머니는 정신없이 구조현장으로 달려갔다.『하나님 감사합니다』 ◎성모병원 김인철 원장이 밝힌 최군 건강상태/“거의 정상… 일주일 뒤엔 퇴원 가능” 김인철 강남성모병원 원장은 『최명석군은 건강상태가 양호한만큼 일주일정도면 퇴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은 김원장과의 일문일답. ­최군 상태는 어떤가. ▲피검사등 기본적인 1차 건강진단을 한 결과 탈수상태와 약간의 영양실조상태에 있는 것으로 진단됐다.몸무게가 4∼5㎏정도 줄어 든 것으로 보인다응급실에 도착한 직후 혈압·맥박을 체크하고 X­선 촬영을 했으나 거의 정상에 가깝다. ­어떤 조치를 했나. ▲수액과 전해질 균형을 맞추기 위해 포도당 주사를 공급중이다.내일 정밀검사가 끝나면 일반병실로 옮길 수 있을 것으로 본다.퇴원은 일주일 정도뒤면 가능할 것이다. ­식사는 어떻게 하나. ▲현재 죽을 먹고 있으나 2∼3일 이내에는 보통 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 중,부패 수사진 대폭 증원/전국 법원·검찰 간부 등 3백명 차출

    【홍콩 연합】 중국 공산당지도부는 전국에 걸쳐 대형부패사건을 철저히 수사하라고 지시하고 이를 위해 전국각지의 검찰·법원 등 정법(정법)계통으로부터 3백명이상의 수사간부를 보강하라고 명령했다고 홍콩연합보가 8일 북경발로 보도했다. 이 지시에 따라 현재 전국각지의 검찰·법원·기율검사·감사·회계감사 등의 정법계통 간부 3백명이상이 속속 차출되고 있다고 이 신문은 한 관계자의 말을 인용,전했다. 이들 수사간부는 앞으로 부패수사 통합조정기구인 당중앙정법위원회 지시에 따라 전국에 파견돼 지금까지 수사성역이던 부문은 물론 지역과 업종을 일체 가리지 않고 광범위한 수사에 착수할 것이라고 이 관계자는 밝혔다. 현재까지 드러난 3대부패사건은 강소성 무석시에서 발생한 「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사상 최대의 금융사기사건인 인민폐 33억위안(한화 약 3천3백억원) 불법모집사건과 수도강철총공사 페루광산 구매사건 및 왕보삼·진희동사건이라고 이 신문은 말했다.
  • 기독교 재건(두만강 7백리:19)

    ◎신도 2만여명… 80년대 초부터 예배활동/문혁 이후 박해 사라지자 “자생교회” 탄생/초기 고 김성화 목사 혼자 연변 포교 활동/일부 조선족,한국 갔다 기독교인 돼 돌아오기도 우리 민족이 당시 북간도땅으로 불리던 연변지역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많은 종교를 맞아들였다.불교·기독교·천주교·유교·대종교등 자그마치 20여개나 되었다.아마도 이국 타향의 고독한 심사를 종교에 의지하여 달래보려는 것이 종교를 불러들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토록 번창했던 종교가 광복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다.토지개혁때는 종교재산만 압수되고 교회당과 같은 건물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문화대혁명 시기에는 한수 더 떠서 종교건물을 모두 창고로 사용했다.그러다 1983년 정부가 다시 종교단체에 건물을 돌려주었다.연변 사람들은 한 때 종교를 아주 버린 것처럼 보였으나 개혁개방 이후 종교주변으로 또다시 몰려들고 있다. ○한때 교회건물도 뺏겨 연변기독교의 부흥은 1978년 중국 공산당 제11기 삼중전회에서 개혁개방을 선언하고 나서 80년대 초부터 서서히이루어졌다.그러니까 예배활동을 시작한지 10여년이 좀 넘는다.신도 숫자도 2만명을 헤아리게 되었다.처음에는 김성화(작고) 목사 혼자서 연변 전체를 맡아 순회목회를 했다.그러나 지금은 세분의 목사가 연길·용정·왕청에 상주하고 있다.이들은 40세 미만의 신학교 졸업생이다.최근에는 연길시에 1년 코스의 기독교훈련센터가 세워져 해마다 20명의 예비목회자를 배출할 수 있게 되었다. 용정시 기독교회 박영호 목사(33)는 문화대혁명을 실감나게 체험한 세대는 아니다.그러나 그가 들은대로,또 어렴풋한 기억을 재생하여 들려준 종교박해의 실상은 모질었다. 『신자들은 다 잡귀신으로 몰렸다고 기래요.머리에 한발씩 되는 꼬깔모자를 씌우고 잡귀신 아무개라는 패쪽을 목에 걸었다는 겁네다.그리고 상두차에 조리돌림을 시키는 것은 약과고,장로와 권사·집사들이 자살하거나 매맞아 죽었디요.연변의 교회는 멸망의 변두리에 서 있었다 이겁네다.하디만 혁명은 육체를 소멸할 수는 있어도 정신을 깡그리 짓밟지는 못했디요.그래도 교회가 살아났으니끼리…』연변의 시골 교회당은 대개 1980년대 들어 자생교회로 출범했다.용정시 삼합진 북흥교회는 북흥촌의 조금숙 집사가 마을 신도조직을 만들어 예배를 본 것이 효시가 되었다.조집사는 자기네 집을 팔아 교회당을 세우는데 보탰다.현재는 신도가 1백명에 이르고 있다.이밖에 화룡시 노과진 노과촌 교회당은 마을 최수영씨(61)자택을 이용해 3명의 신도가 지난 1985년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출발했다.지금은 신도가 34명으로 늘어났다.농한기에 수·일요일 예배를 보고 농번기에는 일요일 예배로 국한하고 있다. ○예비 목회자 배출까지 요즘은 교회 역할도 커졌다.불행한 사람들의 안식처로 큰 몫을 하기 때문에 신도들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신도가 늘어나는 또 하나의 원인은 한국을 다녀온 조선족들에게도 있다.한국에 나가 불법체류를 하는 동안 조마조마 애간장을 녹이던 조선족들이 한국교회에서 동정과 사랑을 받다가 돌아와서는 결국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다.연길시 흥안교회당의 이상옥씨(33)는 한국에서 집사가 되어 돌아온 사람이다.그는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맹장수술을 받아야 했는데,수술비가 없어 애를 태웠다.그 때 기독교계병원에서 받은 무료수술을 인연으로 교인이 되었다. 공산주의를 종교 이상으로 받아들였던 당원들까지 신도가 되는 경우도 있다.이들은 개혁개방과 함께 현실을 직시하고 나서 자신들의 황폐한 심성을 발견한 것이다.북경 중앙민족대학 출신의 작가이자 연변대 강사였던 박길춘씨(36)가 그 대표적 사례다.그는 본래 당원이었는데 지난 92년 당에 퇴당신청을 내고 연길시 민주촌에 교회를 세웠다.현재 3백여명의 인텔리군을 신도로 거느린 이 교회는 연변에서 가장 믿음직한 교회로 성장하고 있다. 화룡시에 사는 박희남씨(34)는 화룡 건달판에서 이름난 주먹이었다.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슬금슬금 피할 정도로 불량기가 대단했다.그런데 교회의 신도들이 따뜻하게 대해주는 바람에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지금은 양처럼 순한 사람이 되어 연길 기독교훈련센터에 들어가 신앙학습을 받고 있다.종교의 힘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는 좋은 본보기가 아닌가한다.그래서 화룡에서는 아이들이 쌈질을 하면 『박희남 못 보았느냐』고 나무라는 말이 생겼다. ○탈당 후 교회 세우기도 연변의 교회는 아직 자립할 수 있는 재정능력이 없다.한국을 포함한 외국의 동포교회의 지원이 필요하고,실제 외국에서 소리없이 돈이 들어온다.두만강 연안 개산툰 천주교 성당은 수원 매산성당에서 지어주었다.좁은 방에서 예배를 올리고 있는 것을 직접 보고 돌아간 신부님이 귀국해서 성금을 보냈던 것이다.그리고 대전시 신성동에 사는 오금손 집사(66) 등 몇몇 분은 생활이 어려운 조선족 신도와 기독교훈련센터를 계속 도와주고 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연변에 긍정적 모습만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지난 1992년 화룡시 서성진 교회당에 머물렀던 미국 다미선교회의 한 선교사는 연변에 큰 파문을 던져주었다.그 선교사는 설교를 통해 「천국에 들어갈 만반의 준비」를 시켰다.그해 10월28일 하느님의 사자가 와서 영접해 간다는 그의 말을 서성진 교회 신도들은 곧이곧대로 믿었다.전기문 집사와 같은 신도는 천당에 갈텐데 농사가 웬 농사냐고 일손을 놓았다.어떤 신도는자살을 기도했다.화룡시 서성진 진정부에서 사전예방을 했기에 망정이지,큰일이 날뻔 했다. 그리고 북한에 국적을 두고 연변에 와 있는 조교(조선교포)들도 교회에 나온다.그들은 하느님 앞으로 다가서면서 모든 시름을 덜었다고 말한다.지난해 한반도에서 혈육상쟁이 일어나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린 결과 정상회담 얘기가 나오더니만,갑자기 수령님이 돌아가 애달프다는 표현도 하고 있다.남북 7천만 동포가 하나되게 기도한다는 조교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용정시 삼합진 북흥교회를 찾았던 날은 마침 일요일이었다.20리나 떨어진 마을의 노인아낙들이 새벽길을 떠나 걸어서 교회로 모여들었다.아침 9시에 시작하는 주일예배 시간에 대느라 종종걸음으로 반달음질들을 쳤다.1원이면 너끈할 버스값을 아끼는 까닭은 감사헌금으로 쓰기 위함이었다.연변의 기독교는 이렇듯 재건되고,또 부흥하고 있다.
  • “네가 원하던 워크맨 사왔는데…”/실종여학생 3가족의 애타는 사연

    ◎맞벌이 엄마 힘드실까 저녁 사먹다 참변/“아빠 삐삐 사드릴게요” 효심도 못피우고… 『수경 화이팅! 6월 28일 아빠가』 삼풍백화점 붕괴더미 속에 갇혀 엿새째 소식이 끊긴 권수경양(18·반포고3)의 책상에는 사고 전날 아버지가 전해준 메모만 쓸쓸하게 붙어있다. 못다핀 어린딸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사체가 잇따라 발굴된 4일에도 생존의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사고주변을 헤매는 수경양을 비롯한 8명의 실종 여중고생 부모의 심정은 안타깝기만하다. 수경양의 아버지 권기주씨(46)는 사고전날 입시준비에 눈코뜰새 없이 바쁜 딸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될까 싶어 평소 갖고 싶어하던 워크맨을 구입,딸의 책상에 갖다놓으며 사랑의 메모를 남겼다. 하지만 자정이 넘도록 집근처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새벽에야 돌아온 딸은 이튿날 아침일찍 등교,아버지의 선물을 써보지 못한채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어머니 김미옥씨(44·풀무원식품소장)도 사고가 나던날 아침 『엄마 힘드시니까 도시락은 필요없어요』라며 맞벌이하는 어머니를 생각해주던 딸의모습을 지우지 못했다. 『직장일을 하느라 바쁜 엄마를 편하게 해준다』고 수경양은 도시락을 싸가는 대신 학교 근처에서 분식으로 매일 저녁을 때웠다. 이날도 수경양은 하오 5시45분쯤 삼풍백화점 A동 지하1층 스낵바에서 학교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며 입시얘기를 나누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밤10시까지 자율학습을 하면서 하오 5시30분부터 6시까지 허용된 저녁 식사시간이었다. 해외파견 근무를 한 아버지를 따라 외국생활을 하다 지난 91년 귀국한 권양은 친구들 사이에 「대모」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해마다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꾸준히 하루에 2∼3통씩 크리스마스카드와 연하장이 올 정도였다. 어머니 김씨는 『도시락을 준비해 보냈더라면 학교에 있었을 것』이라고 후회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수경이를 꼭 보살피고 계시다고 믿지만 만약 죽었다면 고통 없이 하늘나라로 갔으면 좋겠다』고 흐느꼈다. 서울 선화예고 1학년 우정림양(16)은 사고당일인 29일 상오수업밖에 없어 일찍 돌아와 어머니 김현자씨(48)와 오랜만에 외식을 하기 위해 삼풍백화점에 들렀다 소식이 끊겼다. 치과의사인 아버지 우건희씨(48)는 『지금도 막내딸과 집사람이 콘크리트 더미에 묻혀있다는 생각이 들지않는다』며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담임인 선화예고 1학년 4반 이재숙 교사(47·여·수학)는 『한국무용을 전공하고 있는 정림이는 공부도 잘했지만 밝고 깨끗한,너무 착한 아이였다』고 울먹였다. 수도여고 1학년 조미경양(17)은 사고 한달전부터 지하1층 패스트푸드점인 웬디스매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다 건물 잔해에 깔렸다. 평소 효심이 지극했던 미경양은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아빠의 삐삐를 새것으로 바꿔주려고 일했던 것으로 드러나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 서구/민자 전직구청장과 무소속 3파전(기초장 격전지)

    부산의 정치 1번지 서구에는 전직 구청장 2명과 시의원이 격돌한다. 민자당의 변익규 후보(58·전 북구청장)는 이곳에서 국교와 중학교를 다닌 토박이로 부산시 예산담당관,교통관광국장,서구청장 등 35년의 공직생활을 한 전문 행정관료. 여당의 공천을 받았으므로 조직에서는 타 후보보다 월등히 앞선다며 여당표만은 확실히 챙긴다는 전략 아래 고지대 주민과 청·장년층을 대상으로 표밭을 다지고 있다. 강력한 추진력과 탁월한 행정능력을 말해주는 「일벌레」라는 별명답게 낙후한 서구를 부산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며 표를 호소한다. 무소속의 김영오 후보(56) 역시 30여년간 공직 생활을 한 행정통으로 부산시 투자관리관과 감사실장 등을 거쳤다.지난 4월 서구청장으로 재직하다 민선 출마를 위해 사표를 냈다. 청렴한 공직자로 부산의 관계에 널리 알려져 있고 정책입안 및 기획분야에 뛰어나다는 평이다.특유의 서민적 친화력으로 지역민의 폭넓은 신망을 얻고 있다. 유권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20∼30대를 중점 공략한다는 전략과함께 40∼50대 중장년층과 부산대 동문들을 상대로 지지를 호소 중이다. 지난 91년 시의원 선거 때 부산에서 유일하게 야당 후보로 당선된 이송학 시의원(50·무소속)은 23년간 이곳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토박이. 서구 위민봉사실과 영세민 자립후원회장을 역임하는 등 서민복지 향상에 힘썼다.소탈하고 사심없는 성격이 큰 강점.역시 주민들의 신망이 두터워 변·김 후보와의 치열한 접전이 예상된다. 행정편의 주의에 젖은 관료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신선한 구청장이 되겠다며 표밭을 누비고 있다. ◎남구/토박이 시의원·조세전문가 등 접전 민자당의 성재영(52·부산시 의원),이영근(56·한국조세문제연구소장),정민호(40·태양기획 대표) 후보 등 3명이 출마한다. 서민층과 중산층이 8대2의 비율인 남구는 서민층 밀집 지역인 용호동·우암동·문현동·감만동에서의 득표율이 결정적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라 후보들마다 노리는 집중 공략 지역이다. 성씨는 30년 이상 이곳에서 살아온 터주대감으로,부산고 총동창회 부회장과 민주통일 자문위원회 남구지역회장,새마을운동 남구 지회장 등을 지낸 인맥과 지연에다 여당 프리미엄까지 업고 있어 일단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것으로 평가된다. 시의원 선거에서 많은 표를 받았던 감만1·2동,우암1·2동,문현4동을 중점 지역으로 뛰고 있다.명예 회장과 고문을 맡았던 대한해외참전 전우회,자유총연맹,부산고 동문이 큰 힘이 되고 있다. 10대 총선부터 다섯 차례나 국회의원에 출마,모두 낙선하고 와신상담해 온 조세 전문가 이영근 후보(55·행정학박사)는 이번 구청장 출마를 주민들의 심판을 받는 마지막 기회로 보고 있다.그동안 5차례의 선거에서 노하우를 비축한 이후보는 선거전략과 조직의 지명도에서 타 후보에 결코 뒤지지 않는 강력한 다크호스. 경성대학에 출강 중으로 제자 및 교계(수영교회 집사),부산지역 세무사회,무료 조세상담으로 다져놓은 영세상인 및 주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뛰어난 화술과 친화력을 지니고 있어 성후보와의 치열한 접전이 예상된다. 「태양이 있는 쌍마」라는 닉네임으로 나선 무소속 정민호 후보(40·태양기획 대표)는 자동차판매왕에 오른 이색 경력의 소유자.피부에 직접 와닿는 봉사행정을 실천하겠다며 한 표를 호소하고 있으나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겠다는 입장.천주교 신자와 학연,친·인척 등을 상대로 득표 활동을 펴고 있다.
  • 「지역특권주의」 DJ발언 논란

    ◎민자­지역감정 부추겨 대결조장… 선거악용/민주­지역패권 경계… 협력필요성 강조한 것 민자당과 민주당은 29일 김대중아·태재단이사장이 지난 27일 전남 여수고총동문회 초청강연에서 「지역등권주의」 등을 주장한 것을 놓고 『지역대결구도를 옹호하는 발언』,『지역간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라는 상반된 논리로 공방을 펼쳤다. 민자당 박범진 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김씨는 진정한 지방자치시대를 열어가야 할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면서 등권주의라는 해괴한 말로 지역대결구도를 옹호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통일론자인지 분열주의자인지 국민에게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요구했다. 박 대변인은 이어 『김씨는 선거유세와 다름없이 지방선거에 영향을 주는 연설을 하는 등 사실상의 불법선거운동을 하고 있으며 이는 법과 국민을 무시하는 오만한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민자당은 김이사장의 발언이 선거법에 위반되는지에 대해 선관위에 유권해석을 의뢰하는등 구체적 대응책을 결정할 방침이라고 박대변인은 전했다. 한편 민자당의 이춘구 대표는 이날 원주시장후보 추천대회에 참석,『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우리나라가 4∼5개 지역단위로 분할되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로 지역할거주의를 노골적으로 획책하는 사람이 있다』고 김이사장을 강력히 비난했다. 이 대표는 『국민화합과 단결을 호소하기는커녕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는 이같은 정치적 분할론은 국민의 이름으로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박지원 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통해 『김 이사장의 지역등권주의 주장이 지역협력주의라는 것을 민자당 역시 잘 알고 있음에도 이를 비난하는 것은 김이사장 주장에는 무조건 반대부터 하고 보는 민자당식 구습의 발로』라고 반박했다. 박 대변인은 또 『민자당에서 유독 여수강연만 부각시키는 것은 지난 대통령선거 때 초원복집사건으로 재미를 본 것을 재연하려는 얄팍한 술수』라고 주장했다. 민주당의 동교동계 인사들의 모임인 내외문제연구회의 남궁진 대변인은 이날 성명에서 『김 이사장은 지역패권및 할거주의를 경계하고 전국민이 공존공생하는 지역등권주의를 강조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세계화를 외치며 지방등권을 반대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라고 말했다.
  • 구멍뚫린 국경(두만강 7백리:13)

    ◎예나제나 북한쪽 변방선 밀수성행/쌀팔아 소금사서 야밤 국경 넘나들고/강변주민 10명중 8명은 밀수로 생활/보초서는 민병도 거들고 북한 요원도 한몫 두만강 7백리 용정시 개산툰진 선구촌에는 도적골이라고 있다.밀수꾼들이 도둑처럼 그 골짝으로 무리져서 다녔다고 해서 난 이름이다.이름 그대로 선구,배가 들어오는 어귀라서 역래로 밀수가 성행하던 고장이다. 일제시기 선구에는 해관과 일본경찰서가 있었고 곡물수레를 배에 실어 강을 건너 종성으로 넘나들었다.밀수꾼들은 야밤 삼경 도적골에서 도둑 고양이처럼 쌀짐을 지고 살금살금 강을 건너갔다.종성장거리에서 쌀을 팔아 소금을 사서 다시 야밤 도강을 시도했다.선구촌의 같은 패거리들이 소리없는 신호를 강건너로 보내는데 감시가 심할 때는 집 문앞 빨랫줄에 빨래를 널었다.빨래가 없으면 안전하다는 신호로 여기고 강을 건넜다. ○선구촌에 「도적골」 존재 해관을 용케 통과했어도 죽음의 신은 내내 그림자처럼 묻어다녔다.용정시 삼합진 경내에는 재피골이라고 있다.「잡히는 골」이 입에 오르면서 줄어든 이름이다.광복 전에 재피골에는 공안분주소가 있어서 오랑캐령을 넘는 밀수꾼들이 많이 잡혔다.그래서 사람들은 중간 골짜기로 다녔다.그런데 그 골짜기에 중국사람 쑹(송)가가 홀아비로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았단다.산중의 외딴 그 집으로 밀수꾼들이 홀로 들어가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쑹가는 사람을 죽여서 뒷산 감자굴에 차곡차곡 쟁여놓았는데 광복후에야 비로소 발견되었다. 용정시 백금향 평정 사람이 조선에 가서 무명 다섯필을 둘러메고 강을 건너 집으로 가는 길에 백금의 김옥래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이튿날 평정으로 떠나갔는데 종무소식이었다.후에 숲속에서 나무에 목을 매고 죽은 시체를 발견했다.그런데 목을 맨 가죽띠가 김옥래의 것이었다.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결국 무사히 풀려났다.그런데 몇십년 후 문화대혁명때 그 일로 다시 잡혀 맞아죽었다고 한다. 운수 좋게도 재피골의 쑹가같은 강도를 만나지 않고 갈리골(오고 가는 길에 그 곳에 당도하면 목이 갈한다,다시 말하면 목이 탄다고 해서 생긴 이름)에 이르러 갈한 목을 축이고 집에 당도했다 해도 수시로 덮쳐드는 집사대의 눈길이 무섭다.집사대가 마을에 들어서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곤 했다.당시 소금은 금물이고 강역의 사람들은 열에 여덟은 밀수로 살아가는 판이라 두근닷근 뛰는 「일곱근」마음은 한시도 시름을 놓지 못했다.일단 발견만 되면 영창에 들어가거나 벌금을 톡톡히 내야만 했다. 내 외할아버지 허영혜는 강원도 내촌면 물레방앗골에서 양부모 시묘 6년을 해온 소문 난 효자였다.20년대 「나라가 망했는데 효자가 어찌 있으랴」고 효자문을 거절하고 오늘의 화룡시 용화향 개사냥골로 이주를 해왔었다.한번은 내 모친(허숙·78세·현재 필자와 동거)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였디.집사대가 오자 아버지가 소금을 옥수수밭에 감추었다 이기야.그런데 세상을 모르는 내가 소곰재(잠자리)를 잡느라고 「소곰재 꽁꽁 앉은 자리 앉아라.먼데 가면 죽는다」라고 하면서 옥수수밭을 뱅뱅 돌지 않았겠니.그 소리를 듣고 집사대가 옥수수밭을 수색해서 아버지를 붙잡았디.집사대 대장이 일본 사람인데 아버지의 상투를 끄잡고 물매를 안겼디 않았갔니.벌금을 내고 무사히 풀리긴 했어도 아버지는 일본놈이 더러운 손으로 상투를 어지럽혔다고 그날 저녁 머리를 잘랐디.목숨보다도 더 귀중히 다루어온 아버지의 상투는 철없는 내 불찰로 없어졌다이』 ○소장사로 떼돈 벌어 광복후 공산당은 청년들로 공안부대를 조직하고 변경을 단속했다.하지만 청년들 역시 밀수꾼 집안의 자손이고 또 그들도 밀수를 밥 먹듯 해왔으니 보초는 허수아비나 다를바 없었다.천중백옹은 대약진 시기 부동촌 촌장으로 사람들을 조직하여 대량 밀수를 하면서 민병들을 거느리고 변경을 순라했다. 무정한 법은 유정한 인정에 진다.이것을 중국 사람들은 앞문을 막으면 뒷문이 열린다고 한다.박길남옹의 부친 박학철의 밀수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광복나서 얼마간 중국에서 조선 돈이 통용되었디요.북흥촌 김영준이라는 사람이 회령에서 온 소련군한테 조선 돈을 받고 소를 팔았거든요.그 돈을 가지고 회령에 가서 소를 사자니 이미 폐지된 화폐였다 이겁네다. 그때 소장사가 좋았다구요.중국에서 소 한마리를 팔아 갖고 가면 소 두마리가 되었디요.우리가 살던 대소가 모두 17호였는데 세집을 내놓고는 모두가 소장사를 해서 한해에 몇백마리가 건너왔습네다.골안에서 잡아서 삼합장에서 팔기도 하고 용정에 갖다 팔기도 했디요.검사잠 잠장은 보고도 못본체 했구만요.그때나 지금이나 고약한 놈은 어디에나 있었습네다.한 마을에서 누군가 고자질을 해서 위에서 공작조가 내려오지 않았갔시요.집집마다 장정들이 잡혀 들어갔디요.이학균이가 공작조 조장이고 간사로 박씨가 있었는데 우리하고 동성동본이라 어찌어찌 하라고 알려주어 아버지는 30만원(지금 돈 30원)을 벌금내고 놓여 나왔디요.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2년,혹은 4년씩 거의 모두가 징역살이를 했구만요. ○53년이후 최고 극성 변강 보초를 강역 민병들이 담당했으므로 녹아나는 것은 면목을 모르는 외지 사람들이었다.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고지식하고 소박했으므로 돈보다 정으로 통했던 것이다.낯선 사람이라 해도 강하게 나오면 방임했다.밀수꾼은 모험을 하는 것이요 보초꾼은 직책일 뿐이라 각박하게 나오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1953년부터 3년동안 밀수는 고조를 이루었다.쌀을 갖고 가서는 암모니아비료며 광목이며 백곰표 크림이며 연필,종이 등을 대량 들여왔다.보초를 서는 민병들도 밀수대열에 끼어들었다.집집마다 밀수를 했으므로 처벌을 준다고 해도 기껏 경고를 하는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당시 두만강역에서 밀수에 죽은 사람은 단 하나,그것도 공포를 쏜 총알에 재수없게 맞았다.총을 쏜 민병은 당황한 김에 시체를 끌어다가 파묻었다.
  • 서해에「식인상어」출현/어제낮 보령앞바다/전복따던해녀 다리물려 숨져

    【보령=이천열 기자】 12일 낮 12시 쯤 충남 보령시 오천면 장고도리옆 명장섬 앞바다에서 전복을 따던 해녀 김순심(44·보령시 신흑동 855의18)씨가 식인상어에 물려 숨졌다. 김씨는 명장섬으로 부터 5백m 쯤 떨어진 바다에서 전복채취작업을 하다 갑자기 나타난 3∼4m 쯤 되는 검은색 상어에 오른쪽 다리를 물어 뜯겨 변을 당했다. 부인 등 해녀를 어선에 태우고 바다에 나온 김씨의 남편 편광삼씨(36·어업)는 『집사람이 한번만 더 바다에 들어갔다 오겠다며 물속으로 들어가 5분 쯤 지났을 때 갑자기 몸이 물위로 튀어올라 쳐다보니 시커먼 상어가 다리 한쪽을 물고 있었다』며 『집사람이 다시 물속으로 처박힌뒤 상어는 자취를 감췄다』고 말했다. 상어의 습격을 받은 김씨는 동료 해녀들에 의해 배로 올려졌으나 출혈이 심해 이미 숨져 있었다. 태안 양경찰서는 경비정 3척과 30명을 동원,식인상어 수색작업에 나섰으나 발목 아랫부분만 찾아냈다. 이 일대에서는 지난 59년 해수욕을 하던 대학생이 상어의 습격을 받아 숨지는 등 지금까지 모두 4명이 희생됐다.
  • 김만철 여만철 대담/서울신문사 통일안보연구소 주선

    ◎“지하철로 출퇴근… 이젠 서울사람 다됐지요”/일가 이끌고 귀순한 두 만철씨 자유의 삶을 말한다/김/“탈출때 11명이던 가족이 18명으로 늘어”/여/“서울생활 1년만에 체중 13㎏ 붙었어요”/북 주민 개방에 눈뜬 것은 남쪽방송 많이 듣기때문/최근엔 지도원까지 북체제 비판… 변화 실감/남한사람 씀씀이 헤프고 낭비많아 안타까워 『형님,오랜 만입니다.혈색 좋습니다』 『만철씨 얼굴에도 희색이 도는데…』 지난 87년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아 소형선박에 10명의 대가족을 태우고 복합을 탈출했던 김만철씨(55). 그리고 지난해 처자 4명을 거느리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죽음의 땅」을 빠져나온 여만철씨(49). 풍요로운 자유대한에 새 보금자리를 튼 두 귀순가장이 1일 서울신문이 언론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마련한 특별대담에 건강한 모습으로 자리를 함께 했다. 여씨의 귀순 1돌(30일)을 하루 앞두고 이뤄진 이날 대담에서 여섯살 아래인 작은 만철씨는 김씨를 깍듯이 형님이라고 불렀고,큰 만철씨는 반말을 곁들여 가며 여씨를그냥 만철씨라 불렀다. 추운 겨울에 가족들을 이끌고 한 사람은 망망대해를 표류하며,또 한 사람은 가슴을 죈채 두만강을 건너 동토를 탈출했던 두 만철씨의 만남은 「운명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귀순이 인연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생면부지의 남남이,잡고 잡히는 사이가 될 뻔했던 사람들이 만나 형제보다 더 끈끈한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두 귀순 가장은 형·아우가 되어 가족들과 정착해서 오붓하게 살아가는 얘기며 서로의 북한 체험담으로 장장 4시간동안 훈훈한 얘기꽃을 피우면서 7년에 이르는 간극을 좁혔다. 『형님,그동안 몸무게가 13㎏나 늘었습니다.살찌기운동을 했지요』 작은 만철씨가 불어난 체중을 자랑하자 큰 만철씨도 최근에 몸무게가 5㎏이나 늘었다면서 고개를 내젓는다.귀순초기와는 달리 이제는 체중이 느는 것이 반갑지 않다는 표정이다.북한에서 제대로 먹지 못해 삐삐 말랐다가 이제서야 살이 올라 보기 좋을 정도의 체격이 됐다고 마냥 좋아하는 여씨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이 뿐인줄 아세요,형님,막내 은룡(17)이는 키가 1년새 12㎝나 자랐습니다』 여씨는 아이들이 북한에서 제대로 먹지못해 키가 크지 않았는데 여기와서 몰라보게 자랐다고 계속 자랑이다.이에 김씨가 『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뼈만 앙상해 그당시 쉰이 안됐는 데도 예순이 넘은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지금은 그 당시보다 훨씬 젊어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아마 만철씨도 젊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을거요』라며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준다. 『만철씨 아이들은 어느 학교 다니나요』 『큰 딸(금주)은 중앙대학에 다니고 금룡이와 은룡이는 우신고등학교에 다닙니다.그런데 얘들이 얼마나 적응이 빠른지 막내아이는 남녀공학이 아닌 학교를 다니는 데도 벌써 여자친구를 사귀었다고 합니다.나 참…』 작은 만철씨는 신바람이 났는지 묻지도 않은 아이들의 이성교제 얘기까지 했다. 『형님은 어떻습니까.자녀들과 처남들은 결혼했지요』『큰 애 광규는 홍대 미대를 나와 토지개발공사에 다니고 있는데 장가들어 손녀가 둘이나 생겼지.이젠 나도 할아버지가 됐어요.함께 온 두 처남들도 결혼해 애들을 다섯이나 낳아 탈출 당시 11명이던 가족이 18명으로 늘었지』 김씨도 가족들의 근황을 전하면서 뿌듯해 한다. ○손녀 둘이나 생겨 『만철씨는 요즘 어떻게 지냅니까』 『그리 크지 않은 종합병원의 총무과에서 주임으로 일하고 있습니다.봉급은 1백10만원 받고있는데 북쪽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지하철로 출퇴근도 하고 이젠 서울사람 다 됐지요』 비교적 적응을 잘 하고 있다는 여씨 말에 귀순 선배인 김씨는 자못 안도하는 표정이다. 『형님,나는 이곳에서 새 사람 됐습니다.중국으로 탈출할 때 도와준 사람의 인도로 천주교회에 다녔는데 지난 16일 부활절때 영세까지 받았습니다』 『축하합니다.나도 김신조씨의 전도로 하느님을 믿게 돼 벌써 오래전에 집사가 됐지.요즈음은 경남 남해군 미조면에 세운 기도원을 관리하면서 이곳저곳 간증하러 다니느라 바쁜 편이지』 큰 만철씨는 신앙생활에 대해 얘기하면서 자신이 북한에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종교를 이곳에서 접하게 된 것은 자신을 구해준 것이 사람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그러자 작은 만철씨도 아직 큰 만철씨 정도로 깊은 믿음생활은 못하고 있지만 교회는 일요일마다 빠지지 않고 나가고 있다고 화답한다. 여기까지 우스갯소리를 곁들여 가며 자유대한에서 살아가는 얘기를 주고 받던 두 귀순자는 끔찍스러운 지난날의 북한생활로 화제가 옮겨가자 얼굴색이 굳어진다. 『만철씨,내가 탈출한 이후 북한 사회는 얼마나 변했습니까』 김씨가 그간의 북한소식을 무척 궁금해하자 입담좋은 여씨가 술술 얘기를 이어간다. ○집사로 간증에 바빠 『북한의 유일체제는 변함이 없지만 형님이 탈출한 이후 북한에서는 식량난이 갈수록 악화되고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참,형님 탈출얘기를 하다보니까,내가 형님을 체포하러 강추위 속에 청진 바닷가로 작전 나갔던 생각이 납니다.그당시 육해공군과 노농적위대까지 동원돼 동해안 바닷가를 사흘동안 샅샅이 뒤졌는데 배가 도망 못가고 표류하다 잡히면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습니다』『그래요? 당신이 나를 잡는데 동원됐었단말이지. 내가 그당시 3년동안 얼마나 세밀하게 연구한 끝에 탈출했는데…,어림없는 소리지』김씨는 여씨의 작전참가 사실에 새삼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그 당시 풍향에 대한 면밀한 관찰 끝에 탈출했기 때문에 표류하더라도 해안으로 떼밀려올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고 밝힌다. 『형님이 탈출했을 때 나는 청진에 있었는 데 이미 이 때 일반인들에 대한 배급량이 줄고 군인들마저 잘 먹지 못해 영양실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그런대로 곡물배급은 되는데 부식이 형편 없었어요.훈련도 심하고 중노동을 하는데 육류섭취를 제대로 못하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지요』 『내가 탈출할 당시에도 15일치 배급에서 이틀분이 공제되기 시작했었지.하루 7백g이 정량인 데 5백80g밖에 안나왔거든.그나마 배급시기가 하루 이틀 밀리더니 보름씩 늦어지더라구』 『그 때만해도 괜찮은 편이었어요.종전까지 30%였던 쌀 혼합비율이 89년 들어 10%로 낮아지고 한 두달 밀리더니만 90년엔 석달씩 지체됐고 93년 2월엔 양강도와 강원도 등지에서는 배급이 아예 중단되는 때도 있었습니다』 작은 만철씨는 북한물정을 잘 아는 사회안전부 대위 출신답게 식량배급제의 문제점까지 짚어나간다.『동해안 쪽에는 냉해로 흉작이 들어 실제 1개 협동농장의 생산량이 3∼4t에 불과한데도 이곳에 나와있는 3대혁명소조원들이 어떻게 보고한 줄 압니까.불켜서(늘려서) 5∼6t 된다고 보고하는데,탈곡하고 보관하고 운반하면서 이놈저놈이 빼가는 바람에 1∼2t 밖에 안남게 되지요.그런데 계획에는 5∼6t으로 잡아놓고 배급하니 어떻게 되겠어요.배급체계가 마비될 수 밖에』 이 때쯤 점심식사를 하는데 큰 만철씨가 밥 한그릇을 추가 주문한다.『북한에서는 쌀밥을 곡상(고봉)으로 주면 제일 좋아하지.나는 여기서도 밥을 많이 주면 아직도 기분이 좋아.만철씨는 어때?』 『나는 된장국 같은 것에 쌀밥 한 그릇이면 족해요.북한에선 얼마나 먹고 싶은 것이었습니까.북한의 식량난은 정말 최악의 상태입니다.허리띠 졸라매기,한끼 절약운동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어요.93년 12월엔 김일성이가 직접 텔레비전에 나와 하루 두끼만 먹고 죽을 쑤어먹자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직장에서는 쌀을 구하러 가겠다고 하면 아무나 허가가 납니다.못먹으면 일 못하니까 쌀 사오라고 여행허가증을 떼줍니다』 『그래요,내가 있었을 때는 어림 없었지』 ○북 군인들 영양실조 『다른 것도 변한게 많습니다.청소년들의 행태를 보면 머리는 길게 기르고 미니 스커트가 등장했어요.남한노래를 많이 부르고 디스코 춤도 춥니다』『내가 있을 때는 미니 스커트는 구경조차 못했는데…』 7년간의 시차이지만 세대차를 느낀다고 할 정도로 북한의 사회풍조가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에 김씨는 계속 놀란다. 『이런 것들은 김정일의 승인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김정일이 인민들을 다독거리기 위해 이만큼 개방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요.지금 북한 주민들의 견해는 우리가 중국처럼 개방해야 잘 살 수 있고 식량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땅의 사적소유제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씨는 주민들이 개방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남한방송을 많이 듣기 때문이라고 전한다.『예전에는 남한방송을 듣지 못하게 라디오에서채널을 통째로 빼내 고정시켰는데 요즈음은 납땜만 합니다.그래 놓으니 땜질한 곳만 적당히 손질해 대낮에 남한방송을 몰래 듣는 사람이 많아요.들키면 호기심으로 그랬다고 하면 되는 것이고,재수없이 안전부에 붙들려 가면 서너달 혼좀나지요』 이에 큰 만철씨는 그당시 남한방송 청취란 생각할 수도 없었고 탈출때 남한이 이처럼 살기 좋은 곳인지도 전혀 모르고 무조건 따뜻한 남쪽나라만을 찾아 뱃머리를 돌렸다고 회상한다. 김씨가 여씨의 얘기에 더욱 놀란 것은 체제비판에 관한 것이었다.『김부자의 유일체제가 변함이 없자 밑에서는 냉가슴 앓는 불만의 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노동자나 지도원 가릴 것 없이 같은 급이 모여서 술을 마시다가 먹을 걱정 얘기라도 나오면 공공연하게 체제를 비판하고 나옵니다』『아무리 끼리끼리라지만 그렇게 비판하고 나오다니 많이 변했네』김씨는 새로운 사실들에 연신 놀라는 표정이다. 『형님이 있을 때도 그랬겠지만 요즈음은 으레 뇌물이 오가고 뇌물로 안되는 일이 없을 정도로 뇌물이 횡행합니다.아이들을좋은 대학에 보내거나 벌목공으로 나가려면 엄청난 액수의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안됩니다.요즈음은 젊은 애들이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해 뇌물을 바치고 신체검사 때는 떨어지기 위해 별별짓을 다합니다.정말 많이 달라졌지요』 『왜 그렇지? 그전에는 군에 가면 잘 먹을 수 있고 당원이 되려면 복무를 해야하기 때문에 모두들 입대하려고 야단들이었는데….군에 가기 위해 뇌물도 바쳤지 않아요』 김씨가 잘 이해가 안간다는 반응을 보이자 여씨가 설명을 덧붙인다.『앞서도 얘기했지만 군에 들어가도 먹는 것이 시원찮아 영양실조에 걸리는 상태에서 핵문제로 국제적인 제재가 있게되면 군인들은 전장에서 모두 죽는다는 소문들이 나도는데 누가 가려고 하겠습니까.또 뇌물로 젊은이나 늙은이나 돈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달려졌습니다』 『내가 있을 때는 돈을 많이 벌어봤자 쓸 데가 없었지.어쩌다가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 은밀하게 열리는 암시장에 가보면 쌀 한되에 20원씩 했는데…』『그 때만 해도 옛날 얘기입니다.지금은 쌀 한 되에 60원씩 합니다.그리고요즈음은 돈이 없으면 살 지를 못합니다.모두들 돈 맛을 알아 금전제일주의가 판을 치고 있지요.암시장은 이제 공공연하게 열리고 당국도 묵인하고 있습니다.모든 물자가 모자라니까 사람들이 암시장을 찾게 되고 암시장에서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살 수 있습니다.암시장엔 중국등에 나가 싼 물건을 사다파는 보따리장수들이 많습니다』 ○중국마저 돕지않아 두 귀순자는 대담 후반부에 오늘의 북한문제를 얘기할 땐 강경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이들은 현재 북한에서 권력의 공식 승계가 이뤄지지 않고 있음에도 김정일체제에는 아무 이상이 없으나 혈맹인 중국마저 돕지 않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나 일본이 지원하지 않으면 경제가 파탄돼 그냥 무너지게 돼있다고 단언했다. 두 만철씨는 이어 우리가 인도적 차원에서 양곡을 지원하게 될 경우 양곡은 우리가 보낸 것이 아니라 김정일의 선물로 둔갑하고 미국이 대주는 중유도 군수용으로 전용될 것이 뻔하다면서 절대로 지원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또 북한이 한국형 경수로 수용을 계속 거부한채 전쟁운운하며 위협적으로 나오고 있는데 대해서도 몹시 못마땅하다는 반응이다. 『북한이 어디 사람이 살 곳입니까.지구상에 그런 곳이 어디 있습니까』 두 만철씨는 생지옥 탈출이 아직도 꿈만 같다고 회상하면서 헐벗고 굶주리는 북한주민들을 생각할 때 남한사람들이 너무 풍족한 나머지 씀씀이가 헤프고 낭비가 많아 안타깝다며 대담을 마쳤다.
  • 올 퓰리처상/버진 아일랜드지 “영광”

    ◎범죄율­사법체제 부패 상관관계 파헤쳐/AP는 「르완다」보도로 국제뉴스­사진상 【뉴욕 로이터 AP 연합】 미국령 버진 아일랜드의 「버진 아일랜드 데일리 뉴스 오브 세인트 토머스」지가 18일 올해 퓰리처상의 최고영예인 공공서비스부문상을 수상했다. 이 신문은 버진 아일랜드의 높은 범죄율과 사법체제 부패와의 상관관계를 파헤친 보도로 미국내 다른 대도시의 신문들을 누르고 이 상을 획득했다. 뉴욕의 뉴스데이지는 경찰의 장애자연금 남용에 관한 보도로 특종 보도상을,이 신문의 칼럼니스트 짐 드오이어스는 뉴욕시에 대한 칼럼으로 칼럼니스트상을 받았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저임금 노동자의 근로조건을 다룬 기사로 국내보도부문상을,워싱턴시 빈민층 학생들에 관한 보도로 특집보도상을 받았다. 워싱턴 포스트는 워싱턴 DC의 한 가족이 가난,문맹,범죄,마약과 싸우는 모습을 다룬 보도로 해설보도상을,아이티 위기를 담은 사진으로 스포트사진보도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지난 94년1월17일 로스앤젤레스 지진에 대한 신속하고 포괄적인 보도로 스포트 뉴스상을 수상했다. AP통신은 마크 프리츠 기자의 르완다 인종분규 취재로 국제뉴스보도상을,르완다대학살의 참상을 고발한 재클린 아르츠 기자 등 4명의 사진으로 특집사진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남부출신 작가 호턴 푸트(79)가 텍사스 작은 마을의 생활을 그린 사색적인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 「애틀랜타에서 온 청년」으로 퓰리처상의 드라마작가부문상을 수상했다. 캐나다출신 작가 캐롤 실드는 20세기를 사는 겸손한 한 여성을 부드럽고 위트있게 묘사한 「스톤 다이어리」라는 소설로 소설부문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역사부문상은 「평범하지 않았던 시대­프랭클린과 엘리노어 루스벨트­2차대전의 국내전선」이라는 책을 쓴 도리스 키어런스 굿윈에 돌아갔다.
  • 판치는 「외제」 뮤지컬(브로드웨이 “새바람”:9)

    ◎2년이상 롱런 8편중 영국작품 7편/70년대엔 「사운드 오브 무직」등 미국작품 주류/80년대이후 판도 변화… “미국은 없다” 비판 고조 『브로드웨이에 미국은 없다』 80년대 이후 런던 웨스트엔드의 영국 뮤지컬이 뉴욕 브로드웨이를 휩쓸고 있는 현상을 미국인들이 자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2년 이상 장기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8편 가운데 「그대에게 반했다오」 한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영국 뮤지컬이다.세계 4대뮤지컬로 불리는 「캐츠」「레미제라블」「오페라의 유령」「미스 사이공」을 비롯,「거미여인의 키스」「피의 형제」「후스 토미」등이 런던의 극장가 웨스트엔드를 거쳐왔거나 아니면 영국 작곡가 혹은 영국 연출가의 작품인 것이다. 이 가운데 「레미제라블」「오페라의 유령」「미스 사이공」등은 프랑스 소설을,「거미여인의 키스」는 아르헨티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또 「캐츠」「오페라의 유령」은 영국인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레미제라블」과 「미스 사이공」은 프랑스인 클로드 미셸 쇤베르크가각각 작곡을 맡았다.어디서든 「미국」은 찾을래야 찾아보기가 힘든 실정이다. ○영 작곡가·연출가 작품 이같은 현상은 브로드웨이뿐 아니라 오프 브로드웨이의 연극들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특히 올봄에 히트가 예상되고 있는 샌 마티어스의 「무분별」등 연극 네편과 트레버 넌의 새 뮤지컬 「아카디아」등 다섯편이 모두 영국인 연출가들의 작품이어서 당분간 영국의 브로드웨이 점거(?)현상은 계속될 전망이다. 따라서 「코러스 라인」「사운드 오브 뮤직」「웨스트사이드 스토리」「아가씨와 건달들」 등 수많은 미국 뮤지컬로 전성기를 이루던 70년대까지의 브로드웨이를 그리워하는 미국인들이 많다. 영국 뮤지컬의 전성시대를 맞은 요즘의 브로드웨이에서는 영국 뮤지컬들끼리의 경쟁은 물론 심지어는 같은 작곡자의 작품끼리 경쟁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뮤지컬의 황제라고 일컬어지는 로이드 웨버가 작곡한 「오페라의 유령」과 「선셋 불러바드」는 정상인과 비정상인간의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다루면서 두편 모두 장중한 스케일과 화려한 무대의 극치를 보이고 있는 작품들이다. 지난 88년 1월 브로드웨이 44스트리트의 머제스틱 극장에서 개막,「캐츠」와 「레미제라블」에 이어 세번째 롱런가도를 달리고 있는 「오페라의 유령」은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중인 뮤지컬 가운데 가장 치밀하고 정교한 구성과 기상천외의 무대장식으로 7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입장권이 매회 매진될 정도의 폭발적 인기를 모으고 있다. 「선셋 불러바드」는 지난해 11월 이 작품에 도전장을 내고 브로드웨이 45스트리트의 민스코프 극장에서 막이 올려진 작품으로 결국 로이드 웨버는 자신의 작품에 자신이 도전장을 내는 결과가 됐다.72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제작,영국 뮤지컬이 미국 뮤지컬을 압도하는 전기를 이룩했던 로이드 웨버는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위한 혼신의 몸부림으로 만드는 작품마다 대히트하는 새로운 기록을 만들어가고 있다. ○장엄한 무대·의상 인기 「오페라의 유령」은 파리 오페라극장 지하에 숨어사는 흉칙한 모습의 유령작곡가(데이비스 게인스)가 소프라노 가수 크리스틴(테리 비브)를 짝사랑하는 이야기다.크리스틴과 그녀의 애인 라울(브래드 리틀)은 유령의 방해를 받지만 끝내 이를 극복한다.극중의 오페라 공연중 갑자기 가수가 사라져,공연이 중단되는등 갖가지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토니상 7개부문을 휩쓴 이 작품은 파리 오페라극장의 화려한 무대와 「한니발」등 극중 공연되는 오페라의 무대장치와 다양한 의상이 볼 만하다.더욱이 폭발로 불을 뿜으며 대형 샹들리에가 천장으로 치솟고,유령이 크리스틴을 데리고 자신의 은신처로 가기 위해 극장지하의 호수위로 곤돌라를 타고 가는 등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박진감으로 극이 진행된다.. 1861년 완공된 파리 오페라 극장은 지하에 인조호수가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프랑스 소설가 가스통 르루는 이를 바탕으로 음산한 유령 이야기를 썼다.1911년 발표된 소설 「오페라의 유령」은 1925년부터 이미 네차례나 영화로 만들어져 일반에 잘알려져 있다. 로이드 웨버는 1986년 카메론 매킨토시와 함께 이를 뮤지컬로 제작,런던 웨스트엔드의 무대에 올려 대히트를 기록했다.이는 공연에 앞서 85년 크리스마스 시즌부터 발매되기 시작한 「오페라의 유령」 음반의 큰 히트로 예견됐던 바다.「에비타」「거미여인의 키스」의 해럴드 프린스가 연출한 이 뮤지컬은 2년후 브로드웨이 공연에 나섰을 때 1천8백만달러에 달하는 입장권 예매 실적을 올리기도 했다. 「선셋 불러바드」는 빌리 와일더 감독의 50년대 히트영화를 뮤지컬화한 것으로 로이드 웨버가 「캐츠」와 「레미제라블」의 연출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트레버 넌과 손잡고 제작,9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공연을 시작했던 작품이다.넌의 새 뮤지컬 「아카디아」가 이달 30일부터 링컨센터에서 공연되면 당분간 브로드웨이는 로이드 웨버-트레버 넌의 전성시대를 맞게 될 듯하다. 할리우드의 한 거리인 선셋 불러바드의 한귀퉁이에 있는 호화저택에 편집증적인 왕년의 인기 여배우 노마 데스먼드(글렌 클로스)가 살고 있다.빚쟁이에 쫓기다 우연히 그녀의 집안으로 뛰어들게 된 젊은 극작가 조 길리스(앨런 캠프벨)를 사랑하게 되나 그 사랑은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다.주변인물로는 노마의 충실한 집사인 맥스(조지 히언)와 조의 애인 베티(앨리스 리플레이)등이 등장인물이다. ◎이루지 못할 사랑 그려 이 극에 나오는 노마의 호화를 극한 로코코 양식의 저택은 무대장치의 제일인자 존 내피어가 설계한 것이다.연말파티 장면에 나오는 윗부분의 쓸쓸한 노마 저택과 대비시켜 아랫부분을 젊은이들로 북적대는 아파트 거실로 만든 상하 복층구조 무대는 공간 활용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오페라의 유령」과 「선셋 불러바드」는 등장인물들과 내용의 유사성에서 흔히 비교되고 있다.즉 오페라 유령과 노마 데스먼드의 성격이 비슷하다.이들이 남자와 여자,이들의 주거 장소가 오페라극장 지하의 밀실과 인적이 끊어진 대저택의 거실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둘다 편집광적 성격의 소유자다. 또한 이들에 의해 일종의 노리개가 되는 젊은 인물로 크리스틴과 길리스가 설정돼 있고 그들의 애인 라울과 베티의 설정도 이들이 남녀 성만 서로 반대일 뿐 똑같은 구도로 돼 있다. 그러나 「오페라의유령」에서는 유령이 사라지고 젊은이들의 재결합이 이뤄지는 해피앤딩인데 비해 「선셋 불러바드」에서는 길리스가 노마의 총에 죽음으로써 비극적인 결말이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작품들은 별로 뒷맛이 개운치 않은 칙칙한 사랑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완벽에 가까운 작품구성으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 설상차림·차례법/정갈한 음식에 몸과 마음 단정히

    ◎북쪽에 병풍치고 어동육서… 과일은 홍동백서 진설/한복 입을땐 두루마기차림… 헌작후 재배·여는 2배반 설날은 아침일찍 일어나 설빔으로 갈아입고 정성껏 차례상을 차리는 것으로 시작된다.설차례상은 메대신 떡국을 올리는 것만 다를뿐 특별히 어렵지 않으나 진설법을 두고 자칫 까다롭게 느껴지기도한다.원래 가가례라 하여 지방과 집안마다 다른만큼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기본법도와 집안형편에 맞게 상차림을 해도 무방하다.주부클럽연합회(회장 김천주)가 소개하는 알뜰 차례상 차림법과 차례법을 알아본다. ▷차례상차리기◁ 북쪽을 향해 병풍을 치고 상을 편뒤 신위나 사진을 모신다.음식은 제주를 중심으로 첫줄은 과실,둘째줄은 나물,셋째줄은 탕,넷째줄은 적과 전을 놓으면 된다.홀수줄은 홀수로,짝수줄은 짝수로 음식의 가짓수를 맞춰야 한다.첫줄은 오른쪽부터 대추 밤 감등 세가지 과일을 기본으로 놓고 여기에다 호두 배 약과 강정 등을 사정에 따라 곁들인다.과일은 색깔을 보아 홍동백서로 둔다. 둘째줄은 좌포우혜라 해서 왼쪽에는 북어포,오른쪽에는 식혜 건더기를 담아 놓고 그 가운데 나물류와 간장을 놓는다.나물류는 나박김치 건더기나 고사리 미나리 시금치 등이면 무방하다. 셋째줄은 육탕(고기) 소탕(채소) 어탕(생선)등을 건더기만 놓는데 한가지 탕만 올려도 된다. 넷째줄은 어동육서라 해 서쪽부터 국수 육적 전 소적 어적(조기) 어전 고물떡을 올린다.또 동두서미 원칙에 따라 생선머리는 동쪽,꼬리는 서쪽으로 오게 둔다. ▷차례법◁ 차례를 지내기 전에 제주는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한다.한복에는 두루마기를 갖추고 양복은 정장을 한다.차례때는 신위를 중심으로 동쪽에 남자 자손이 그 옆에 여자자손이 서는데 제사와 달리 술을 한번만 올리며 술대신 차를 쓰기도 한다. 제주가 경건한 마음으로 양옆 두사람(집사)의 도움을 받아 잔에 술을 따라 세번에 나눠 모사그릇에 비운 다음 2번 절한다.다음 왼쪽 집사가 잔반(잔과 받침대)을 들어 제주에게 주고 오른쪽 집사가 술을 따르면 제주는 오른쪽 향 위로 잔을 세번 돌린 다음 오른쪽 집사에게 잔을 주면 집사는 잔을 받아 상위에 올린다. 제주는 젓가락을 접시에 3번 구른후 음식위에 놓고 절을 한다.남자는 2배 여자는 2배반 절을 한다. 헌작이 끝나면 잠시 방문을 닫고 기다린다(음식을 드시라는 뜻).3∼5분후 문을 열고 들어갈때 인기척을 3번하고 들어간다.제주와 참석자들은 절을 한후 지방은 불사르고 제수를 상에서 내려 가족끼리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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