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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日 ‘징용자 유골’ 조사] 日 ‘한국인 유골’ 알고도 방치

    “유골 봉환은 최우선 해결책이 아니다.” 4일 한·일 양국 정부가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로 끌려갔다가 희생된 한국인 피해자들의 유골문제 해결에 나서자 유족과 전문가들은 ‘기대와 우려’가 교차된 지적을 내놨다. 일본의 유골정책은 자국민 보호책의 일환으로만 진행돼 왔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한국인 유골이 매몰된 사실을 알고도 발굴하지 않았거나 사찰과 지방자치단체가 소장하고 있는 관련자료에 대한 조사·공표작업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 지난 1948년부터 일부 봉환이 이루어졌지만 사망자의 신원과 사망원인 등이 파악되지 못한 상황에서 ‘봉환’에만 초점을 맞춰 수많은 문제점이 노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사망자 명부 발굴과 신원 확인, 유족확인, 미발굴 유해의 발굴작업 등 철저한 실태조사를 거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있게 들리고 있다. ●희생된 한국인 20만∼60만명 유골문제는 지난 60여년 동안 피해자의 정확한 수치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는 것부터 시작된다. 전문가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일제 말기 강제동원됐다 희생된 한국인의 숫자는 20만∼60만명으로 추산될 뿐이다. 정혜경 일제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 조사1과장은 “강제연행 시기 동원인력에 대한 부조규정은 마련돼 있지만 유골처리에 관한 규정은 없고 일부 기업들이 규정을 마련했다고 하나 규정에 따라 처리했다고 자신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망자의 신원이 확인되지 않거나 위패와 유골이 합산돼 봉환된 경우, 관리부실로 썩은 유골 등 많은 문제점이 노출됐다.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국제연대협의회에 참석했던 한 일본인 학자는 일본의 ‘자국 중심적인 유골수집’ 문제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일본 후생성은 지난 1967년부터 2004년까지 유해수집사업의 예산을 153억 7000만엔으로 산정했지만 조선인 유골문제는 제외돼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정 과장은 “무엇보다 유족들이 유골문제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큰 문제”라면서 “지난 2002년 일본 홋카이도지방에서 발굴된 유골사태는 가장 인도적으로 처리해야 할 유골문제를 얼마나 방치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실태조사가 급선무 전문가들이 유골봉환 사업을 연차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문제를 개선하자는 취지다. 김창록 건국대 교수는 “유골의 사망과정과 원인을 규명하고 강제 동원된 지역의 미발굴 유골조사, 유류품 명부 등의 관련자료를 발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유족 확인이 될 경우 봉환의사를 물은 뒤 예의를 갖추는 것은 물론, 무연고 유골을 망향의 동산에 안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부산 영산대 최영호 교수는 “이번에도 봉환중심으로만 이루어지게 되면 경색된 한·일관계를 외교적으로 타결하는 결과만 초래해 일본의 전후 책임을 자유롭게 하는 데 일조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주님께 문열면 위대한 삶 찾을것”

    |파리 함혜리특파원 외신|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4일 오전 10시(한국시간 오후 5시)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즉위 미사를 갖고 제 265대 교황으로 공식 취임했다. 이날 즉위 행사는 베네딕토 16세가 성베드로 대성당 지하의 초대 교황 성베드로 묘소에 참배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황금색 성직복을 입고 주교장(主敎杖)을 짚은 베네딕토 16세는 이날 붉은색 십자가를 수놓은 하얀색 양털 영대(領帶)와 성베드로가 고기잡이를 하는 모습을 새긴 ‘어부의 반지(페스카토리오)’ 등 교황권을 상징하는 물품들을 받는 의식을 치렀다. ●“나는 주님의 나약한 종복” 베네딕토 16세는 즉위 미사에서 “나는 주님의 나약한 종복”이라며 자신이 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신자와 비신자, 유대인 형제들도 기도해달라고 호소했다. 선출 후 처음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론에서 그는 “나의 통치 계획은 전체 교회와 주님의 말씀과 의지를 듣고 주님에 의해 인도받는 것”이라며 가톨릭의 정통성을 충실히 이행할 뜻을 밝혔다. 그는 또 인류의 목자로 세상에 온 예수가 길잃은 양떼 곁에서 한 마리 양이 되었듯이 “우리는 한 무리 양떼이자 동시에 (타인을 구원하는)목자가 될 수도 있음을 인정하자.”고 말했다. 그는 요한 바오로 2세가 78년 즉위 미사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을 향해 문을 열어라.”라고 했던 강론을 상기시키며 “주님을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에게 문을 열어라. 주님은 삶을 자유롭고 아름답고 위대하게 만드는 어떤 것도 앗아가지 않으시며 당신에게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는 말로 강론을 끝맺었다. ●요한 바오로 2세 시성(諡聖) 문제는 언급 안해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는 천국의 성인들 사이에서 편히 쉬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를 성인(聖人) 명부에 올리는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베네딕토 16세는 2시간 반에 걸쳐 진행된 미사에 이어 지난 1981년 요한 바오로 2세가 피격됐을 때 승차한 흰색 무개차를 타고 광장을 돌며 신도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전했다. 이날 미사에는 세계 각국의 정치, 종교지도자와 독일인 신도 10만명을 포함한 일반 신도 등 35만명이 참석했다. 미사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성베드로 광장 근처에서 스크린을 통해 지켜본 인원도 5만여명에 이르렀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교황의 모국인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와 프랑스 장 피에르 라파랭 총리,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동생 젭 부시 플로리다 주지사 등 각국 지도자들도 대거 참석했다. 유럽 각국 왕실 대표들과 영국 성공회의 수장 로완 윌리엄스 캔터베리 대주교, 교황의 친형인 게오르크 라칭거(81) 신부 등도 미사에 참석했다. ●한복 차림 한국인 가족 등 충성 서약 베네딕토 16세의 즉위 미사는 모든 추기경들이 충성 서약 의식으로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손에 입을 맞추던 관행 대신 12사도를 상징하는 12명만 의식을 치르는 등 전통을 현대식으로 적용한 방식으로 치러졌다. 칠레 출신 요르헤 메디나 에스테베즈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 바티칸 국무원장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 등 3명이 교황에게 차례로 충성을 서약했고 이어 주교 1명, 사제 1명, 부제 1명, 수녀 1명, 수도사 1명, 어린이를 동반한 한복 차림의 한국인 부부, 젊은이 2명이 나와 충성을 서약했다. 35만여명이 모여든 이날 행사의 안전을 위해 이탈리아 당국은 1만명의 경찰을 동원해 로마 안팎을 경비했다. 당국은 또 취임 미사가 열리는 동안 로마 상공 반경 8㎞를 비행금지 구역으로 설정했고 로마 제2의 공항인 참피노 공항의 비행 금지령도 내렸다. 로마시는 바티칸시티 곳곳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미사를 생중계했다. ●추기경 시절 집사가 관저 살림맡아 교황의 관저 살림은 추기경 시절 14년간 집사로 일해온 수녀 잉그리트 슈탐파(55)가 맡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독일 서부 클레베 출신으로 스위스 바젤에서 중세음악을 전공했으며 쇤슈타트 수녀회 소속으로 1991년부터 현 교황을 보필해왔다. 베네딕토 16세는 즉위 미사에 앞서 23일 비성직자 중에서는 첫번째로 기자들과 만나 “진리를 추구하고 인간 존엄성을 수호하는 책무를 다해줄 것”을 당부했다. 교황은 전임 교황처럼 언론과의 대화를 계속 할 것임을 약속했다. 이날 회견에는 4000여명이 참석했다. lotus@seoul.co.kr
  • [한국을 빛낼 중견기업] 애경 안용찬 사장

    [한국을 빛낼 중견기업] 애경 안용찬 사장

    “실적을 단기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판촉 활동과 이벤트 행사를 늘리는 것은 고통받는 환자에게 치료 대신 마약을 투여하는 것과 다름 없다. 당장은 약 기운에 의지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기업의 목숨을 갉아 먹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곪은 곳은 과감하게 도려내고, 새 살이 될 만한 브랜드를 키우는 것이 늦지만 가장 확실한 기업의 생존 전략이다.” 1995년 7월 취임 이후 9년 연속 흑자경영을 이어오는 안용찬(47) 애경 사장.1등군에 들지 않는 10개의 브랜드보다 단 하나의 1등 브랜드가 회사를 먹여 살린다고 역설한다.‘죽여야 산다.’는 안 사장의 ‘브랜드 경영’의 전제 조건이다. 시장에서 ‘싹수’가 안보이는 잡다한 브랜드를 과감히 죽여,1등이 될 만한 브랜드에 집중하는 것만이 ‘시장을 지배할 수 있다.’는 논리다. 양보다 질을 강조한 셈이다. 안 사장의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브랜드 죽이기’의 연속이었다. 한정된 자본에서 기업의 부채를 줄이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자본의 효율적 분배가 무엇보다 당면 과제였던 것. 다양한 브랜드로 덩치를 키워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려는 기업과는 발상 자체가 반대였다. 애경의 경영실적이 안 사장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10년전 870%에 달했던 애경의 부채비율은 지난해 205%, 올해는 200% 미만으로 떨어진다. 또 매출은 연평균 10%씩 성장, 지난해 3571억원을 기록했다. ●소탈한 전략가 생각보다 동안(童顔)인 탓일까. 국내 생활용품의 대표기업 최고경영자(CEO)인데도 얼굴에 장난기가 다분히 묻어난다. 또 ‘범생’의 모습속에 불량기(?)도 엿보인다. 다부진 체격에 웃음을 머금은 안 사장은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10년간 묻어놓은 이야기 보따리를 한껏 풀어놓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술·담배를 했었죠. 많이 한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께서 좀 개방적이셨습니다. 이왕 할 거면 밖에서 하지 말고 집에서 하라고 할 정도였으니, 당시로서는 ‘깨신’ 분이랄까. 덕분에 친구들이 저희 집에 놀러 오기를 굉장히 좋아했죠. 요즘에는 저도 딸에게 술을 자주 권하는데 싫어하더라고요.” 대학 시절에는 공부뿐 아니라 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수업이 끝나면 교내 헬스센터로 직행했습니다. 들고, 내리고 하다 보면 그렇게 몸이 상쾌할 수 없어요. 지금은 많이 (근육이) 줄었지만 그때는 몸이 남부럽지 않았습니다.”라며 은근히 자랑한다. 그는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의 맏사위이다. 재벌가(家)의 일원으로 젊은 나이에 CEO에 올랐다는 평도 적지 않게 들었을 법도 하지만 막힘이 없다.“(사위라는 점이)기업 경영에 장점이 많아요. 전문경영인은 아무래도 단기 실적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무래도 오너 가족이다 보니 그런 부문은 초월할 수 있잖아요. 기업의 중장기 비전을 세워놓고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 수도 있고, 한 해 실적 나쁘다고 자리에 위협을 느끼는 것도 아니니까…. 초창기에는 장 회장으로부터 꾸중도 많이 들었어요. 제 방 맞은 편(장 회장 집무실)에 많이 갔습니다. 집사람(채은정씨)은 지인 소개로 만났어요. 미국에서 공부하다 일시 귀국한 터여서 잠깐 연애하다 바로 미국으로 되돌아갔죠. 어느 유학생 부부와 다름 없이 고생하면서 공부했습니다.” 안 사장은 국내 생활용품 시장에서 탁월한 전략가로 통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재무통’으로 한때 위기에 처했던 애경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는 평이다. 오너가(家)라기보다 전문경영인으로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그는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을 졸업했다. 사내에서는 어떤 평판일까.‘소탈한 전략가’라는 평이 압도적이다. 권위 대신 친근함과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한다. ●1등 브랜드를 키워라 안 사장의 ‘1등 브랜드주의’는 1992년 다국적기업인 유니레버와의 합작법인이 깨지면서 시작됐다. 신제품을 비롯해 영업, 마케팅 등에서 유니레버의 의존도가 컸던 애경(당시 애경산업)은 한동안 ‘혼수 상태’에 빠졌다. 매출은 무려 50%가 줄어든 데다 영업은 적자를 기록하는 등 재무구조가 갈수록 악화됐다. 시장의 반응은 더욱 차가웠다. 일각에서는 ‘부도설’마저 나도는 실정이었다. 이를 통해 안 사장은 유니레버의 ‘폰즈’나 ‘도브비누’ 등의 강력한 1등 브랜드 제품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등만이 시장을 지배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과감히 브랜드 죽이기에 나섰습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한 ‘브랜드 경영’은 애경의 현실적 여건에서 출발한 셈이었습니다. 아깝더라도 향후 3년내 1,2위를 차지할 브랜드를 빼고는 시장에서 철수한다는 결단을 내렸죠.” 이 과정에서 ‘유탄’을 맞은 브랜드로는 분말세제인 ‘팍스’, 삼푸 ‘그랑비아’와‘나이브’, 비누 ‘생금’ 등이다. 잡다한 브랜드로 전선을 확대시켜 ‘싹수’가 엿보이는 브랜드마저 죽이는 잘못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의 브랜드 전략은 이렇다. 치약시장 전체로는 경쟁업체가 1등이지만 단일 브랜드로는 우리가 1등하는 치약을 만들자는 것. 그 대표주자가 ‘2080’이다. 성숙시장인 치약제품 사상 최단기간에 뿌리를 내린 성공적인 브랜드로 대학에서 연구사례로 채택될 정도다. 현재 이렇게 가꾼 1등 브랜드가 세탁세제 ‘스파크’와 ‘퍼펙트‘, 주방세제 ‘트리오’와 ‘순샘’ 등을 포함해 15개를 웃돈다. 그는 생활용품에 치우친 매출 구조를 바꾸기 위해 화장품 사업군을 별도로 법인화시킬 계획이다.1등 브랜드를 갖기 위해서는 고부가가치 사업인 화장품을 생활용품과 같이 끌고가기에 부담스럽다는 판단에서다. “시장에서 3등은 없다고 확신합니다.1위권 브랜드는 매장진열이나 입점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또 고객은 각 카테고리에서 1,2등을 제외한 3등 이하 제품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1등 브랜드의 파워가 있습니다.” 1등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품질 노력에도 적지 않은 공을 들이고 있다. 안 사장은 외환위기 시절 다른 기업들이 구조조정 차원에서 연구소를 매각하거나 연구원들을 줄일 때 300억원을 들여 연구소를 설립했다.“(92년에)매도 먼저 맞아서 그런지 외환위기 때는 다른 기업과 달리 재무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특히 경쟁기업들이 어려울 때 공격 경영을 추진하는 것이 1등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재가 ‘돈’이다 안 사장은 아무리 회사가 어려워도 사원 교육비는 줄이지 않았다고 한다.‘인재가 기업의 미래’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애경의 지난해 1인당 교육비는 업계 최고 수준인 200만원선. 이밖에 어학교육비(1인당 연 120만원)와 대학원 학비를 전액 지원한다.3개월짜리 미국 연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9년째를 맞은 미국 연수 프로그램은 10년 이상 근속 사원을 대상으로 현지 체험과 여행 등의 일정으로 짜여져 있다. 안 사장은 “9년연속 흑자경영의 가장 큰 원동력은 결국 사람이었다.”며 “어려운 시절에도 사원 교육비를 늘린 것은 그동안 제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잘한 일 같다.”고 밝혔다. 그는 또 직원과의 대화를 중시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산책경영’. 처음에는 건강을 위해 시작한 것이 직원과의 대화 창구로 바뀌었다. 그는 거의 매일 파트너(임직원)를 바꿔가며 1시간씩 회사 주변을 걷는다. 안 사장은 “회사의 주요 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정담도 나누고, 건강도 좋아지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애경은 어떤 회사 애경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비누제조업체로 출발, 생필품을 생산하는 국민기업으로 성장했다. 애경유지공업㈜이 전신인 애경은 1985년 4월 다국적기업 유니레버와 합작, 선진 외국기술 및 경영관리 기법을 도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지난해 창립 50돌을 맞아 ‘애경산업’에서 ‘애경’으로 사명을 바꿨다.‘깨끗함, 신뢰, 혁신’을 경영 목표로 삼아 최근 10년간 출시한 대부분의 제품을 성공적으로 상륙시킴으로써 생활용품 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다져가고 있다. 특히 지난 50년간 한우물만 판 뿌리깊은 기업으로,‘삶의 가치를 높이는 라이프 스타일리스트’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다.‘제품과 서비스로 고객에게 아름다움과 건강함, 깨끗함과 편리함을 제공한다.’는 것이 실천 목표다. 대덕연구단지내 애경종합기술원은 신제품 개발과 미래산업의 중장기적인 전략기술을 집중 연구·개발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충남 청양과 대전 공장에서는 고품질의 제품을 생산해 낸다. 안용찬 사장 취임 10주년을 맞는 올해의 매출 목표는 지난해보다 20% 늘어난 4380억원. 제 2도약을 위해 선택과 집중,1등 브랜드 전략을 더욱 강하게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 취재기자 4명 ‘초미니’ 주간지 퓰리처상 수상자 배출 ‘개가’

    취재기자가 단 4명뿐인 미국 오리건주의 한 무가(無價) 주간지 기자가 4일 발표된 올해 퓰리처상의 탐사취재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화제의 주인공은 오리건주 포틀랜드시에서 9만부 발행되는 ‘윌러메트 위크’의 니젤 재키스(42)로, 30년 동안 묻혀 있던 전직 주지사의 아동 성학대 행각을 세상에 알린 공로로 수상자로 선정됐다. 지난해 5월 6일 보도된 이 기사는, 오리건주의 유명 정치인이자 1987년부터 4년간 주지사를 역임한 닐 골드슈미트의 30년 전 비행을 심층취재한 것이었다. 골드슈미트는 부시 행정부에서 교통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포틀랜드 시장으로 일하던 75년부터 3년간 당시 14세의 여고생과 성관계를 가지며 그녀를 추행, 학대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정통 언론’들이 간과한 이 문제를 재키스 기자는 한 달여 추적, 지금은 40대가 된 피해 여성을 찾아 인터뷰해 정신적 고통을 견뎌내온 한 여인의 비극과 유명 정치인의 숨겨진 과거를 재구성했다. 골드슈미트는 기사가 나가기 직전 반론을 요청받고는 이튿날 주 고등교육위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고 사실을 시인했다. 재키스 기자는 이날 수상 소식을 듣고 “이건 너무나 엄청난 영광이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며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재키스 기자 외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이 각각 2개 부문을 수상했다. (언론)▲전국보도상 월트 보드대니치(뉴욕타임스) ▲특집보도상 줄리아 켈러(시카고 트리뷴) ▲논평상 코니 슐츠(클리블랜드 플레인 딜러) ▲논설상 톰 필립(새크라멘토 비) ▲만평상 닉 앤더슨(켄터키주 루이빌 더 쿠리어 저널) ▲속보사진보도상 AP통신 취재진 ▲특집사진보도상 딘 피츠모리스(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문학)▲역사 데이비드 피셔 ‘워싱턴의 도하’ ▲전기 마크 스티븐스와 애널린 스완 ‘드 쿠닝:미국의 달인’ ▲시 테드 쿠서 ‘기쁨과 그림자’ ▲논픽션 스티브 콜 ‘유령의 전쟁’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길섶에서] 하루만 더/ 이용원 논설위원

    금실 좋은 친구 부부와 며칠전 만나 식사를 했다. 친구가 느닷없이 “우리 부부는 세상 떠날 순서를 정했어. 이 사람 먼저 죽으면 나는 하루만 더 살고 다음날 쫓아가기로 했지.”라고 말했다. 친구 부인은 곁에서 웃기만 했다. 무슨 얘기냐고 물었더니 설명이 다음과 같았다. 집사람이 어느날 금실 좋은 부부는 죽을 때도 같이 죽는다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자기가 먼저 가자니 남은 내가 불쌍하고, 내가 먼저 가면 자기는 외로워서 못 살 것 같다고 한 걱정을 하더군. 그래서 둘이 의논해서 내가 하루 더 살기로 했어. 알다시피 집사람은 덜렁대는 편인데, 나는 좀 꼼꼼하지 않냐. 마누라 먼저 보내고 하루쯤 뒤치다꺼리하면 따라갈 수 있겠지. 그 이상 미루면 이 여자가 밤마다 꿈에 나타나 얼른 오라고 보챌 거야. 말을 마친 두 사람은 마주 보며 빙긋 웃었다. 그 친구 부인은 남편 사랑이 끔찍했다. 둘이 걸어갈 때면 부인은 달아나는 애인 붙잡듯 아예 매달리는 자세로 팔짱을 꼈다. 남편 친구에게도 잘해 새벽에 쳐들어가도 웃는 낯으로 술상을 내왔고, 아침에 깨면 해장할 국물을 차려냈다. 그래, 이들이라면 죽어서도 헤어지지 않을 거야. 왠지 믿음이 갔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국세청장 후보 인사청문회

    국세청장 후보 인사청문회

    국회 재정경제위원회는 9일 정부 사정기관의 ‘빅 4’ 중 하나로 꼽히는 이주성 국세청장 후보자를 상대로 인사청문회를 열어 직계 존·비속의 재산상황과 병역문제에 대해 의혹을 집중 제기했다. 그러나 청문회는 이 후보자의 해명에 의원들이 별다른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 등 큰 쟁점을 만들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진행됐다는 평가다. 재경위는 10일 전체회의에서 인사청문회 경과보고서를 채택, 이 후보자에 대한 청문의견을 국회의장에게 보고할 예정이다. 이 후보자는 이날 언론사 세무조사와 관련,“내년부터 언론사별로 신고가 들어오면 전산분석을 거쳐서 성실도를 분석한 뒤 시차를 두고 하겠다.”고 밝혀, 빠르면 내년부터 실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의원들 반론 제기 소극적 그는 한나라당 이종구 의원이 “후보가 언론사도 일반기업처럼 5∼7년마다 세무조사하면 성실과세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 않느냐. 지난 2001년에 이어 언론사의 세무조사 실시할 것이냐.”고 따지자,“언론사도 영리법인이기 때문에 세무조사 대상자 선정의 객관성과 공정성 차원에서 조사를 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이 후보자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정치적 외압을 버텨나갈 수 있겠느냐며 거듭 소신을 묻자 “저는 개인적 영달을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고, 국세청장이 제 마지막 자리”라는 답변을 여러차례 해 눈길을 끌었다. 이 후보자의 장남이 만 14세로 미성년자였던 지난 96년 외조모로부터 서울 개포동의 아파트를 넘겨받은 이유와 증여 이후 편법행위가 주요 관심사였다. 이 아파트는 지난 99년 재건축이 추진되면서 현재 기준시가는 5억 여원에 달하고, 시가는 6억 8000여만원에 이른다. 그는 “결혼 후 장모를 상당기간 모셨기 때문에 외손자에게 배려를 한 것 같다.”고 말했고,“증여세 388만원은 집사람이 대납했지만, 기초공제 미달액이기 때문에 증여세 대납에 대한 세금은 내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했다. ●장남 아파트 증여·병역 논란 이 후보자가 지난해 12월 압구정동의 57평 아파트를 국세청 기준시가보다 1억원 가까이 낮은 가격에 판매한 경위를 추궁하자,“그때는 시세가 10억∼11억원 정도 했고, 집이 저층이라서 6개월 동안 집보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며 “집사람이 팔아야 한다고 해서 알아서 하라고 했다.”고 이 후보자는 해명했다. 이 후보자는 장남이 전공인 경영학과 다른 분야인 병역특례업체에서 대체복무 중인 이유에 대해서도 “정보처리능력이 뛰어나고 컴퓨터 언어인 자바(취급실력)도 월등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프로그램 개발에 필수적인 영어도 잘하기 때문에 여러 군데에서 제의가 있었던 것 같다.”고 해명했다. 문소영 박록삼기자 symun@seoul.co.kr
  • 이헌재 부총리 문답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3일, 부동산투기 의혹이 일기 시작한 지난달 28일 이후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나와 사과와 해명을 했다. 다음은 이날 오후 정부 과천청사에서 있었던 기자회견의 질문과 답변. 이번 일로 청와대에 사의를 표명한 적이 있나. -답변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번 사태로 경제수장으로서 국민신뢰를 상실해 향후 정책실효성이 의심스럽다는 지적이 있다. -나 개인의 문제로 국정운영에 차질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부동산정책이나 주택정책은 차질없이 추진하겠다. (공무원사회 후배인)유지창 산업은행 총재와의 전화통화에서 부총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던데. -그런 적 있다. 58억원으로 신고한 경기도 광주 땅의 매각가격이 실제로는 100억원을 넘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있다. -매각대금은 정확하게 직접 통장으로 들어온 것이어서 한점의 차이도 없고 그대로 신고했다. 지난해말 지역특구로 지정된 전북 고창에 부인과 처남의 땅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는데. -지역특구 선정과정에 나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선정절차나 과정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며 혹시라도 문제가 있을 수 있어서 몇번씩 검토한 것으로 알고 있다. 10·29대책 직후인 2003년 10월30일 (경기도 광주땅)매매계약을 했는데, 갑자기 판 이유는 무엇이며 매각대금은 어떻게 58억원으로 확정됐나. -계약은 그때 했지만 논의는 부동산중개소를 통해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금액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최종적으로 58억원에 팔기로 하고 계약한 것이다. 그때 땅을 판 구체적인 이유는. -당시에는 내가 다시 공직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작년 2월 부총리 제의를 받았을 때도 오랫동안 받지 않겠다고 하다가 마지막에 받았다. 또 처음에 땅을 샀을 때는 그 일대에 길도 제대로 없는 오지였다. 그런데 최근 그 일대에 대한 개발이 진행돼 집사람이 땅을 보유하면서 나중에 (우리 뜻대로)개발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몇달 전부터 부동산중개소를 통해 계속 매수제의가 들어와 팔기로 했다. 김태균 전경하기자 windsea@seoul.co.kr
  • [박동섭 가족클리닉 행복만들기] 외도에 이혼요구까지 하는 아내

    [박동섭 가족클리닉 행복만들기] 외도에 이혼요구까지 하는 아내

    단란하던 가정이 아내의 외도로 파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저에게는 이미 마음이 떠났다고 하면서 이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상대 남과 재혼을 하겠다고 하니 이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싶다고 합니다. 어린 자식들을 생각해서 이혼하지 말고 예전처럼 살자고 했습니다. 이혼은 절대로 해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집에서 각방을 쓰고 있었는데 이것도 싫은지 얼마 전에는 아내가 나간다고 해 결국 제가 나와 살고 있습니다. 나와서 생활한 지 7개월째 접어들고 있는데 정말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힘듭니다. 지금은 생활비를 매달 집으로 보내주고 있고 매주 아이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통화도 자주 합니다.7개월이 지난 지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집사람은 직장을 다니면서 적잖은 봉급을 타서인지 오히려 더 큰소리 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혼을 하지 않고 예전처럼 살 수 있을까요. -이철수(가명)- 역사 이래 여자의 간통은 엄하게 다스려온 것이 사실입니다. 중동 등 아랍국가에서는 간음하는 여자는 돌로 쳐 죽이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간음으로 잡혀온 여인을 두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도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그 여인은 아마도 평생 다시는 간음하지 않았으리라 추측됩니다. 우리나라 민법도 1960년 이전에는 남편의 간통은 문제삼지 아니하고 아내의 간통만을 이혼사유로 삼았습니다. 지금도 간통죄를 근본적으로 근절하거나 방지할 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를 막을 길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전예방이고 또 하나는 사후 조치입니다. 교육과 종교로 막는 것이 사전예방이라면, 법으로 막는 것이 사후 조치입니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또는 다음 세대를 지키기 위해 간통 같은 죄는 지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선생님들이나 부모들이 행동으로 보여주고 모범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로마가 1000년간 번성하다가 결국 망한 이유 중의 하나는 성(性) 문란과 가정의 붕괴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국전쟁 후 그야말로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다가,1961년 이후 40여년간 전국민이 피땀 흘려 노력해 경제성장을 이룩했습니다. 덕분에 이제 겨우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형편이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사치와 향략, 쾌락쪽으로 흐르는 경향이 생긴 것은 아닌지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제가 맡은 사건 중에 남편이 이혼청구를 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소송 중에 아내의 간통을 포착하고, 이를 몰래카메라로 촬영해 남편이 도리어 이혼의 반소를 제기해 승소판결을 받았습니다. 철수씨는 증거를 확보해야 합니다. 아내로부터 “언제, 어디서, 누구와 관계하였다. 다시는 하지 않겠다.”라는 식의 자인서라도 작성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내와 간통한 남자를 만나 진지하게 그만둘 것을 요구할 수 있다면 그것도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약간의 협박성 발언도 이 경우에는 용납됩니다.“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아니하면 두 가정이 함께 침몰한다.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도 좋으냐.”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간통죄는 형법 241조에 따르면 2년 이하의 징역을 살아야 하고, 판례에 따르면 간통을 한 사람은 고소인(배우자)뿐만 아니라 고소인의 존속이나 자녀 등에게도 위자료를 지급할 책임이 있습니다. 간통에 따르는 이혼으로 인해 아이들은 부모 중 어느 한쪽과는 헤어질 수 있다는 점을 알아듣게 설명하세요. 그래도 끝내 반성하지 않고 계속할 경우는 고소를 해야 합니다. 고소인이 범행을 안 날부터 6개월, 범행일로부터 2년이 지나면 고소조차 할 수 없습니다. 또 이혼소장을 제출한 후 그 접수증명서를 첨부해야 고소할 수 있다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철수씨가 집을 나온 것이 과연 잘한 일인지 걱정이 됩니다. 아내는 종전과 다름없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지요. 아내가 이혼소송을 걸어올 때까지 철수씨는 먼저 소송을 걸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부정행위를 한 배우자는 이혼청구를 해도 승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儒林(288)-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88)-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며느리의 갑사저고리는 소매끝부분인 끝동과 겨드랑이와 접촉이 되는 곁막음 부분과 옷고름과 깃부분은 노랑저고리의 빛깔과는 달리 분홍색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퇴계가 분홍빛깔의 깃을 직접 자름으로써 이이(離弛)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퇴계는 남의 눈을 피해서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낸다. 마지막으로 작별의 큰절을 올리는 며느리에게 퇴계는 다시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주 멀리 멀리 떠나거라. 그리고 아들딸 많이 낳고 행복하게 살거라.” 퇴계의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는 ‘퇴계언행록’에 기록된 다른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1554년, 퇴계가 예천에 들렀을 때 어느 먼 일가의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매우 딱한 사연을 호소해 온 적이 있었다. 퇴계는 평소에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있었으므로 관청에 사사로운 일을 부탁하는 것을 금기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직접 군수에게 부탁하여 과부를 도와주었던 것이었다. 이때 퇴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언행록은 전하고 있다. “내게 있어서는 비록 먼 일가라고는 하지만 선조로 보면 똑같은 자손이니 내 어찌 길가는 사람 보듯 하겠는가.(彼之於牙 雖曰疎遠 以先祖之 一般子孫也 豈敢視若路人)” 먼 친척을 대하며 자기를 기준으로 보아 멀다고 여기지 않고 선조의 입장에서 보면 똑같은 자손이라는 의식은 퇴계가 지닌 위대한 휴머니즘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찮은 먼 일가의 과부 한사람까지도 ‘길가는 사람’으로 보지 아니하고 한 핏줄로 본 퇴계가 한순간 생과부가 되어버린 새 아기에 대해서 풍습을 타파하고 자유의 몸으로 풀어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퇴계의 에피소드는 여기에 그치지 아니한다. 그로부터 몇 년 뒤 퇴계가 선조의 부르심을 받고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상경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종자 하나만을 데리고 한양길에 오른 퇴계는 도중에 날이 저물자 어쩔 수 없이 하루 묵을 집을 찾게 되었다. 다행히 작지만 깨끗한 인가를 발견하여 젊은 집주인에게 하룻밤 묵고 갈 것을 허락받게 되었는데, 퇴계의 신분을 확인한 집에서는 대접이 융숭하였다. 퇴계가 짐을 풀고 피곤한 몸을 쉬려고 할 때 밖에서 젊은 주인이 말하였다. “어르신, 비록 없는 반찬이지만 저녁식사를 준비하였습니다.” 퇴계가 방문을 열자 젊은 주인이 상을 들고 서 있었다. “집사람이 내외를 심히 하는 편이라 쇤네가 가지고 왔나이다.” 퇴계는 밥상을 보자 깜짝 놀랐다. 시골 한촌에서는 볼 수 없는 성찬이었던 것이었다. 퇴계는 육식보다는 가지나물과 산나물과 같은 채식들을 좋아하고 있었는데, 상위에 오른 반찬들은 한결같이 퇴계가 평소에 좋아하는 음식들뿐이었다. 특히 나물국이 차려져 있었는데, 한 숟갈 떠먹은 퇴계는 간이 입에 딱 맞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니 어떻게 내 입맛에 이렇게 딱 맞을까. 꼭 우리 집 음식을 먹는 것과 같구나.” 다음날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일찍 아침상이 들어온 것이었다. 민폐를 싫어하여 일찍 먼 길을 떠나려던 퇴계의 방으로 어젯밤과 같은 성찬의 밥상이 들어 온 것이었다.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다시 교단에 서는 양성우 시인 7시간 격정 토로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다시 교단에 서는 양성우 시인 7시간 격정 토로

    ‘내일일까, 모레일까, 눈물 맺힌 30년 세월∼’. 누군가 말했다, 기다림은 차라리 고통이라고. 그렇게 30년을 지냈다. 이제 돌아가려 한다. 그곳은 어머니의 품이다. 태어나 뒹굴었다. 함께 울고 웃었다.‘품’을 떠난 뒤 강산이 세번 변했다. 파란과 곡절, 무수한 격동의 그림자를 관통했다. 돌이켜봐도 손바닥만한 가슴으로 꽁꽁 부둥켜안아야 했던 세월이었다. ●75년 시 ‘겨울공화국’으로 광주중앙여고 파면 2월 초였다. 그날따라 눈이 펑펑 쏟아졌다. 한 시인이 학교 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얗게 덮인 눈, 서산대사가 걸어갔듯이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그렸다. 시계바늘을 30년 전으로 돌렸다. 농성하던 3학년 학생들이 거울처럼 투영됐다.‘겨울공화국’이 뇌리에 생생하게 스친다.‘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영화 ‘일 포스티노’의 마지막 대사.‘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칠레의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며 읊었다. 시인 양성우(62). 요즘처럼 설렌 적이 있을까.30년만에 찾아온 ‘아주 특별한 귀향’을 맞이하고 있다.1975년 2월12일 ‘겨울공화국’이란 저항시를 낭독, 광주중앙여고에서 파면당했다. 이후 온몸으로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투옥·고문·도피의 세월을 보냈다. 최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광주중앙여고측에 양씨에 대한 복직권고 결정을 통보했다. 학교 측도 복직 절차에 들어갔다. 늦어도 한달 이내에 다시 교단에 설 것으로 보인다. 서울 마포에 위치한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실에서 양씨를 만나 7시간 동안 ‘격정’의 인터뷰를 했다. 그는 먼저 1월말 학교측에서 연락이 와서 2월초 광주에 내려가 재단(금호·아시아나)이사장과 교장, 그리고 행정실무자 등을 만났다고 했다. 다들 흔쾌하게 양씨의 복직의사를 받아들였다고 귀띔했다. 특히 30년전 같이 근무했던 동료 교사들이 아직도 있어 무척 반가웠다고 부연했다. 또 이같은 사실이 언론 등에 보도되자 당시 제자들로부터 많은 축하 전화가 걸려오고 있다며 밝게 웃었다. 광주중앙여고의 ‘총각 시인 선생님’이었던 그는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고 회상했다. 당시 학생들로부터 ‘오빠’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장남이 해직기자였던 당시 교장은 양씨를 파면할 때 “(아들 생각으로)내가 차라리 감옥에 가고싶은 심정.”이라며 괴로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학생·학부모 선동 이유 사찰로 유폐 양씨는 그해 4월15일 학교측으로부터 파면통고를 받자마자 중앙정보부(중정) 광주지부로 연행됐다. 중정 요원들은 학생들과 학부모를 선동했다는 이유를 들이댔다. 장시간 조사를 받은 양씨는 구례군 지리산 ‘천은사’로 유폐된다. 경찰 2명이 보초를 세워 출입을 통제했다. 이같은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자 면회객들이 줄을 이었다. 광주중앙여고 학생은 물론 서울의 대학생들까지 단체로 면회를 왔다. 양씨는 그해 연말 시인 고은씨한테 ‘사람 많은 곳에서 숨어 지내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서울로 올라가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고은씨는 곧장 천은사로 내려와 한밤중에 양씨와 함께 열차를 타고 상경했다. 서울에 온 양씨는 흑석동 중앙대 정문 입구에 2평짜리 쪽방을 얻었다. 쪽방 벽면 너머는 다방이었다. 때문에 날마다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들어야만 했다. 또 다방은 동료문인들이 모이는 아지트였다. 황석영·이문구·고은·이시영씨 등이 찾아와 문학을 얘기하고 군사독재를 비판했다. 중앙대 문창과 학생들도 단골로 찾아왔다. 그러던 하루는 한양대 이영희 교수가 불렀다. 중국문제연구소에서 촉탁직원으로 일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춥고 배고팠던 양씨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연구소 소속 교수들의 논문을 모아 책을 발간하는 일이었다. 양씨는 이 무렵 장편시집인 ‘노예수첩’을 썼다. 이는 당시 재야권 인사들에게 수천부씩 복사되어 언더그라운드 페이퍼로 읽혀졌다. 얼마후인 1976년 남산(중정)의 4국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재야권에 음성적으로 떠돌던 ‘노예수첩’이 일본의 ‘세계(世界)지’에 게재된 것. ●한달간 고문 국제 간첩단으로 몰려 한달간 고문 끝에 양씨는 ‘양성우 국제간첩단 사건’의 장본인으로 발표된다. 양씨와 만났던 미국인 캐서린 엘리자베스(여성민권운동가)와 폴 슈나이스(독일인 목사), 일본의 다카사키 소지 교수 등이 입국금지됐다. 양씨는 곧 재판에 회부됐다. 죄목은 ‘국가모독죄’와 ‘긴급조치9호 위반’이었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그는 6개월간 재판을 받는다. 이때 옥중에서 박정희 정권타도에 앞장섰다는 죄목이 더 추가됐다. 결국 5년형을 선고받고 청주교도소에 수감됐다. 면회는 절대금지였다. 때문에 변호를 맡은 홍성우 변호사와 고은씨 등 지인들은 옥중결혼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마침 양씨는 수감되기 전 정정순(현재의 부인)씨와 사귀고 있었다. 반대할 것으로 예상됐던 정씨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혼인신고서를 작성했고 유일하게 면회를 할 수 있는 직계 가족이 됐다. 양씨는 농섞인 말로 “결혼 얘기만 나오면 지금도 ‘깨갱’할 수밖에 없다.”며 웃었다.“집사람은 그 일로 고향인 광주집에서 쫓겨났다.”면서 (부인이)처녀의 몸으로 옥바라지한 경험담을 ‘때가 오면 그대여’라는 제목의 시집으로 출간했다고 귀띔했다. 결혼식은 출소 후 이문구씨의 사회와 박형규 목사의 주례로 올렸다. 양씨는 수감 중 찬 감옥방에서 지내느라 하반신에 악성종양을 얻어 영등포시립병원에서 수술대에 누웠다. 이때 이문구·조태일·박태순씨 등 문인들이 단체로 몰려와 “저항시인 양성우를 석방하라.”며 연일 데모를 벌였다. 탄원도 계속됐다. 양씨는 2년6개월 만에 출소했다. 수감생활 중 성경책의 여백에 못으로 꾹꾹 눌러 옥중시집 ‘북치는 앉은뱅이’를 썼다. 5·18 때에는 지명 수배돼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시인 신경림씨의 도움으로 가끔 서울에 올라와 세종문화회관 뒤쪽 ‘항아리집’에서 동료들과 비밀리에 만났다. 모이는 사람은 주로 염무웅·백낙청·이호철씨 등이었다. 항아리집 여종업원들은 프랑스의 물랭루즈처럼 운동권 인사들에게 음성적으로 많은 도움을 줬다고 양씨는 회고했다. “고은·조태일씨, 그리고 이영희 교수 등도 저를 돕다가 옥살이를 했지요.5·18후에는 문단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됩니다. 또한 자유실천문학인협의회를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명칭을 바꾸는 등 민주화 운동에도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지요.” ●87년 잠시 정치권 외도 그는 6월항쟁 때 이한열군이 사망하자 ‘꽃상여 타고 그대 잘가라’는 추모시를 써 민주화운동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이후 87년 대선 때 “법과 제도를 민주적으로 고치기 위해선 현실적인 행위가 필요하다.”는 주위의 끈질긴 권유로 정치무대로 잠시 외도한다. 전남 함평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철길’이라는 소설로 ‘학원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때 4·19시위를 주도하는 등 일찍부터 민주화 운동에 가담해 파란많은 인생역정의 길을 걸었다. 요즘 시작(詩作)에 전념하고 있다는 그는 “정년이 1년밖에 남지 않았지만 역사에 떠밀려간 30년의 세월을 매듭짓고 싶다.”면서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좋은 보약이 되는 얘기를 많이 해주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올 하반기에 신작 시집을 출간한다. 그의 시 가운데 ‘혼자 떠나는 새’ 등 10여편은 이미 가곡으로 불려지고 있다. ■ 그가 걸어온 길 ▲1943년 전남 함평 출생. ▲60년 조선대부속고등학교 2학년 재학중 4·19시위 주도 ▲61년 민통련 호남지역 고등학생 총연맹 회장으로 활동.5·16 직후 광주교도소 수감 ▲62년 학다리고등학교 편입. 학원문학상 소설당선 ▲63년 전남대 국문과 입학 ▲70년 ‘시인’에 ‘발상법’과 ‘증언’으로 등단. ▲71년 전남대 국문과 졸업 ▲71∼72년 학다리고 교사 ▲72∼75년 광주중앙여고 교사.‘겨울공화국’ 사건으로 교사직 파면 ▲76년 대한성서공회 문장위원 ▲77년 ‘노예수첩’으로 투옥 ▲79년 8월 가석방 ▲84년 자유실천문학인협의회 대표 ▲85년 서울민통련 중앙위원 ▲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대변인 ▲88년 제13대 국회의원(평민·서울 양천구) ▲91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 시집 발상법, 신하여 신하여, 겨울공화국, 북치는 앉은뱅이,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넋이라도 있고 없고, 노예수첩 등 km@seoul.co.kr
  • 프라이빗뱅커 ‘빛좋은 개살구’

    서울 강남에 있는 A은행 프라이빗뱅킹(PB·고액자산관리)센터에서 일하는 김모 팀장은 요즘 고달프다. 연초부터 예금은 물론 방카슈랑스·수익증권 등 뱅커 1인당 떨어진 할당량을 어떻게 채울지 궁리하기 바쁘다. 근처 외국계 은행 PB센터에 고객을 뺏기지 않기 위한 전략을 짜는 것도 쉽지 않다. ‘큰손’고객을 상대로 한 은행들의 PB시장 쟁탈전이 가열되면서 PB고객을 직접 관리하는 전담뱅커(프라이빗뱅커)들이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과도한 실적경쟁에 내몰려 제대로 된 PB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는 등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B은행 PB센터 이모 팀장은 올해 700억원의 신규예금을 유치해 잔액을 300억원대에서 1000억원대로 늘려야 한다. 연초 센터별 1인당 할당에 따라 방카슈랑스는 7억원, 펀드는 20억원 정도 늘려야 하는 목표도 떨어졌다. 이 팀장은 “아직 센터가 손익분기점에 도달하지 못해 1인당 할당을 채워야 한다.”면서 “그러나 지난해보다 시장상황이 어려워져 죽기살기로 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세일즈맨처럼 상품을 팔다 보니 제대로 된 PB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서 “소수의 PB고객에게 ‘집사’처럼 서비스를 제공하는 선진국형 PB와는 거리가 멀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압구정동과 방배동, 도곡동 타워팰리스 근처 등 은행들의 PB센터가 집중돼있는 곳의 뱅커들은 할당량 경쟁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다. C은행 PB센터 이모 팀장은 “PB시장이 한정된 만큼 다른 은행의 PB고객을 뺏어오려면 수익성이 좋은 상품을 먼저 팔아야 하는데 한발 늦어 고객을 뺏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면서 “PB고객들은 은행 한 곳만 거래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다른 은행에 넣어둔 예금 등을 우리쪽으로 끌어들여야 실적을 채울 수 있다.”고 말했다. 시중은행들의 프라이빗뱅커들은 실적경쟁뿐 아니라 외국계 PB처럼 성과급제가 적용되지 않아 승진 등 인사에서 오히려 손해를 본다며 푸념한다. 관계자는 “PB전문가로 자리를 잡으면 PB센터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승진할 기회도 줄어든다.”면서 “인센티브를 받는 것도 아닌데 고객들이 수수료를 챙기는 것이 아니냐며 의심어린 질문을 할 때 가장 곤혹스럽다.”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공공의 적2’ 모델된 심재륜 전 고검장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공공의 적2’ 모델된 심재륜 전 고검장

    사건의 서곡은 ‘석양의 폭탄주’에서 시작됐다. 무림의 고수들이 만났다. 전직 고검장 출신의 검객(檢客)과 스크린의 마술사. 술잔을 거푸 들이킨다. 시계바늘을 돌린다. 고민에 빠진다. 마침내 생각의 나무, 그 뿌리에서 뭔가 나온다. 느낌표와 마침표. 마술사가 무릎을 탁 친다. 얼마후 영화 ‘실미도’가 개봉됐다.1000만 관객을 훌쩍 돌파했다. 아무도 예상못했다. 사람들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이라고 했다. 사건은 계속됐다.‘공공의 적’이라는 이름으로. 심재륜(61) 전 고검장. 늘 따라붙는 수식어만 해도 간단치 않다.‘항명파동1호 검사’‘조폭과의 전쟁’‘현직 대통령 아들 구속’‘한보사건’‘장영자 어음사기사건’. 또 있다.“검찰이 이 지경이 된 것은 대통령 책임이오.”라는 직격탄을 날린 통제불능의 사나이. 우리나라 검찰수사의 대표적 ‘강력통’이며 ‘특수통’이다. 별명은 ‘심통’이다. 고집이 센 데다 성이 ‘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다름아닌 대박을 조언하는 ‘영화 코치’라는 점이다. 그렇다. 강우석 감독작품인 ‘실미도’와 ‘공공의 적’ 시리즈에서 적극적인 자문역할로 대형사고(?)를 터뜨렸다. 영화 ‘실미도’에서는 실미도 사건 의 현장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심 전 고검장은 사건 당시 인천시 부평의 특전사에서 군법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사건이 나던 날인 주말 오후, 외출을 나가던 중 불과 몇십미터 지근거리에서 실미도를 탈출한 병력의 차량을 목격하게 됐다. 아울러 군병력과의 총격전도 직접 지켜볼 수 있었다. 때문에 정래혁 국방장관이 발표한 ‘무장공비’ 운운은 믿지도 않았다. 최근에 개봉된 ‘공공의 적2’에서는 사실상 전편에 걸쳐 자문역할을 했다. 이 영화에는 꼴통검사(설경구)에서 검사장까지 등장한다. 영화의 주인공이 검사라는 점도 최초이지만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내부를 처음으로 공개한 것도 심 전 고검장의 역할이 컸다. 특히 영화의 주된 흐름인 사학재단의 비리를 파헤치는 것과 조폭검거 등의 장면에서는 그의 냄새가 풀풀 난다. ●실미도 등 강우석감독 영화 자문 서울 서초동의 ‘심재륜 변호사 사무실’에서 심 전 고검장을 만났다. 최근 개봉된 영화 ‘공공의 적2’에 대한 얘기가 가장 먼저 나왔다. “원래 ‘공공의 적’이란 해방직후에 등장한 단어지요. 좌익쪽에서는 ‘인민의 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현대적 개념의 공공의 적은 사회전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 즉 사회적으로 타도해야 할 대상을 말하지요. 영화 시사회를 봤는데 강우석 감독이 스토리구성을 잘한 것 같아요. 관객 500만명은 족히 넘지 않을까요.(웃음)” 강우석 감독과는 어떤 인연이 있는지 궁금했다. 강 감독은 평소 “심 전 고검장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는 표현을 자주해왔다. 이에 심 전 고검장은 “항명파동 직후 (자신은) 정부와는 부정적 이미지였지만 강 감독은 (영화사의)고문을 맡아달라고 선뜻 제의해왔다.”면서 “이 과정에서 폭탄주를 마시며 서로 더욱 친해졌다.”고 대답했다. 아울러 “실미도 사건 때의 현장목격담,‘공의 적1,2’를 제작할 때 강력부장과 중수부장 시절의 경험담 등을 많이 들려주었다.”고 부연했다. 그렇다면 ‘공공의 적2’에 등장하는 꼴통검사와 강력부장은 심 전 고검장의 모델이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초대 강력부장 출신이다. 그렇게 봐도 틀린 것은 아니다.”며 웃었다. 또 강 감독뿐만 아니라 설경구 등 제작진들과도 여러차례 저녁자리를 가지면서 조언을 해주었다고 덧붙였다. 시나리오를 쓴 작가도 검사장의 태도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고 말했다.(심 전 고검장은 술자리에서 강 감독을 ‘강간독’으로, 설경구를 ‘경구피임약’이라고 농이 섞인 별명을 지어주었다며 웃었다. 어느정도 친하게 지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폭탄주는 가득 채워야 부정부패가 없거든요. 칠부니 팔부니 하면 형평성이 어긋납니다. 술자리에선 선배와 후배를 평등하게 대접해야 합니다. 또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시기 때문에 탁자 밑에 쏟지 못하지요. 폭탄주는 투명하고 정직합니다.” 그는 “폭탄주를 마시고 2차 술자리를 하게 되면 주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후배들에게 1차에서 끝내도록 권유한다.”고 말했다. 폭탄주가 널리 보급된 것은 85년 이후이며 원조는 박희태 의원이라고 귀띔했다. ●개혁은 기본과 근간 흔들지 말아야 이번에는 사법개혁에 관한 질문을 했다. 그는 ‘개혁’이라는 말은 위정자들이 합리화하기 위한 단어에 불과하다고 전제했다. 아울러 개혁에는 ‘제도개혁’과 ‘인적개혁’이 있지만 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없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개혁을 하려면 기본과 근간을 흔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장기간 실험을 거치면서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우리나라 사법시험은 소수의 합격자들만을 일생동안 편하게 지내게 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지만 해방이후 오늘날까지 국가가 버틸 수 있는 지주대로써의 역할을 해온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면서 최근들어 1년에 1000여명씩 법조인이 양산되다보니 선비정신이 갈수록 퇴색되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가 사법시험을 치를 때는 달랑 5명만 뽑았다고 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플리바게닝 도입과 관련, 그는 “우리나라 법체계상 정당한 방법이 될 수는 없다.”면서 “배신논리가 법으로 보장받아서는 안 된다. 동양적 윤리로 볼 때 아들이 아버지를 배신하는 꼴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했다. ●박종철고문 조작 등 대형사건 지휘 그는 1944년 1월 충북 옥천 읍내에서 4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가 두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선친은 교장으로 퇴임한 교육자였다. 그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대전에서 보냈다. 대전중학에서 3학년 1학기까지 다니다가 2학기때 보험회사에 취직한 형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상경후 그는 동성중학을 졸업한 뒤 서울고에 진학했다.5·16의 영향으로 62년 서울대 법대를 진학할 때 정원이 300명에서 160명으로 줄어들어 더욱 좁은문을 통과했다. 졸업 이듬해에 제7회 사법시험에 차석으로 합격했다. 연수과정인 서울대 사법대학원은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1972년 정식으로 서울지검 검사로 발령받아 1993년 검사장으로 승진할 때까지 우리 사회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다뤘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 비행선 부정도입사건, 오대양집단자살사건, 부산 초원복집사건도 그가 진두지휘한 사건이었다. 이밖에도, 서방파의 두목 김태촌씨, 양은이파의 두목 조양은씨,OB파의 두목 이동재씨를 비롯한 폭력조직 3대 패밀리를 소탕한 것도 그였다. 그는 1978년 서른네살 때 결혼했다. 주례는 민복기 대법원장이 맡았다. 신부는 큰 누님 친구의 딸인 공혜경(55)씨.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으며 10년간 한양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심 전 고검장은 음악과 미술도 좋아하고 촌철살인의 농담실력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 지난 2002년 33기 사법연수원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존경받는 법조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의 투명성과 인자함,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성격 등이 각인돼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소외되고 억울한 편린들을 많이 봅니다. 인간생명의 존중함, 신체의 자유 등에 대해 새삼 배우고 반성하고 있지요.” 검찰생활 30년, 그는 “수사는 한마디로 종합예술”이라고 표현했다. 아울러 후배검사들에게 ▲피의자를 굴복시키지 말고 ▲조그마한 절차는 상사에게 양보하고 ▲외압이 들어올 것을 대비해 속도조절을 할 필요가 있으며 ▲집착하거나 너무 서둘러서도 안된다는 등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좌우명은 思無邪/德不孤必有隣/和而不同이다. 즉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고, 덕을 베풀면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 또한 화합하되 뇌동하지 않아야 한다의 뜻이다. ■ 그가 걸어온 길 ▲1944년 충북 옥천 출생 ▲1962년 서울고등학교 졸업 ▲66년 서울대법대 졸업 ▲67년 제7회 사시합격(차석) ▲69년∼72년 육군법무관(대위) ▲69년 서울대법대 대학원 졸업 ▲72년 서울지검 검사 ▲82년 밀양지청장 ▲90년 서울지검 강력부장 ▲92년 서울지검 3차장 검사 ▲93년 대검 강력부장 ▲94년∼97년 대전·광주·인천지검 검사장 ▲97년 대검 중앙수사부장, 대구고검 검사장 ▲2001년 대검 고검장(본부근무) ▲2001년 부산고검 검사장▲2002년∼변호사심재륜법률사무소 ■ 저서=사법대학원제도와 운영 km@seoul.co.kr
  • 목회자로 변신 양동생 전 대우조선 노조위원장

    목회자로 변신 양동생 전 대우조선 노조위원장

    한국 노동운동에서 전 대우조선 노조위원장 ‘양동생(52)’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군부의 폭압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1987년 대우조선 초대 노조위원장에 선출돼 3년간 강성 노조를 이끌었다. 연이은 분신 등 투쟁이 너무 극단적이어서 대우조선사태를 보려고 9시뉴스를 보는 이가 적지 않았을 정도다. 대우조선 투쟁을 보도하기 위해 국내 취재진은 물론 외신기자들까지 거제 바닷가에 다 몰렸다. 노동계의 동투(冬鬪)가 급피치를 올릴 무렵 많은 이들이 그의 근황을 궁금해했다. 투쟁강도가 세면 셀수록 또렷하게 되살아나는 ‘투사’이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을 접고 개척교회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여러 날 수소문한 끝에 그의 소재지를 알아냈다. 통화가 되기 무섭게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그가 알려준 대로 서울 양천구 신월2동 한양중앙교회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는 이 교회 담임목사였다. ●운명과도 같았던 노동운동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어서일까. 그의 모습 어디에서도 국내외 언론의 이목을 집중시킨 강성 노조위원장이었다는 사실을 찾아낼 수 없었다. 첫인상이 그처럼 편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양 목사는 그저 옛날 일이라며 이내 인터뷰에 응했다.“아마 그때가 5공에서 6공으로 넘어가는 시기일 겁니다. 경제 중진국 진입을 위해서는 특혜를 줘서라도 기업인들을 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상대적으로 노동자에 대한 탄압은 거셌습니다.” 양 목사는 당시 시대상황을 기업인에게는 특혜, 노동자에게는 탄압이라는 식으로 이분화했다. 그는 노동법을 배운 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지만 탄압국면을 맞닥뜨리면서 자연스럽게 노동운동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고 했다. 임시 노조위원장에 이어 87년 8월 대우조선 초대 직선 노조위원장에 선출된 그는 바야흐로 본격적인 투사의 길을 걷게 된다.“노조설립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정부를 상대로 두달 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싸웠습니다. 결국 거제군청으로부터 노동조합 신고필증을 받아냈지요. 대기업 가운데 최초로 대우조선 노조가 설립된 것입니다.”이를 계기로 현대 등 대기업 중심의 노조설립 투쟁이 폭발적으로 전개된다. ●투쟁원칙에 충실했다. 노조 설립은 회사를 상대로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양 목사는 “졸다가 걸리면 바로 징계를 받고 뼈 빠지게 일해도 분배가 안되는 현실은 바로잡아야 할 투쟁대상이었다.”며 인권보호와 작업환경 개선, 임금 인상 등을 주요 교섭안건으로 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그는 “국가가 있어야 회사가 있고 회사가 있어야 조합이 있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대우조선 노조가 회사를 상대로 한 투쟁에서 대정부 투쟁으로 투쟁의 본질이 급격히 변질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는 이를 주사파의 개입 때문이라고 단정지었다. 자신의 원칙이 대중에 의해 휘둘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노동운동을 그만두고 감옥에서 쉬고 싶을 정도로 심신이 몹시 지쳐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우중 회장과의 일화도 공개했다.“88년 봄으로 기억합니다만 김 회장이 ‘게스트하우스’(영빈관)에서 독대를 요구했어요.” 그는 말을 이어갔다.“대우조선 때문에 다른 대기업 노조들이 대정부 투쟁에 나서고 있다면서 정부가 시범 케이스로 대우조선을 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회사를 정리하겠다고 말합디다. 피가 거꾸로 솟았지요.” 양 목사는 이런 김 회장을 새벽 4시까지 설득했다고 말했다.“당신이 좌절하면 안된다. 존경받는 기업가가 되도록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이후 그는 3만여 조합원을 모아놓고 건전한 노조, 합리적인 노조로 가겠다고 선언한 뒤 75%의 조합원으로부터 찬성 서명을 받아냈다. 이어 DJ(김대중)·YS(김영삼)·JP(김종필) 등 야당지도자를 차례로 만나 건전한 노조로의 탈바꿈을 약속하고 회사를 없애려는 기도를 막아줄 것을 호소했다. 중앙일간지 편집국장들도 다 만나 협조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임기1년 남기고 목회자의 길로 89년 12월 양 목사는 중대결심을 하게 된다. 당시 집사였던 양 목사는 노조위원장 임기가 1년여 남았지만 떠날 것을 결심한다. 노동운동이 어느정도 정착된 만큼 목회자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이다. 양 목사는 당시 ‘서울로 올라가라.’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가족과 함께 무작정 상경했다고 밝혔다. 이 때부터는 노동운동과도 절연했다.TV도 없애버리는 등 세상일과 등을 졌다. 언론과의 인터뷰 요청도 모두 물리쳤다. 본지와의 인터뷰가 노조위원장을 그만둔 뒤 처음이라고 밝혔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구로구 궁동에 있는 연세중앙교회에 둥지를 틀었다.10년간 목사가 되기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 안수집사, 전도사, 목사고시를 거쳐 99년 11월 양천구 신월2동에 한양중앙교회를 개척했다. 경남 거제시 장목면에서 태어난 그는 YS와 같은 고향이다. 찢어지게 가난해 고등학교를 못갔다. 나중에 방송통신고를 졸업했다. 서울로 올라와 청량리시장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 군에 다녀온 뒤 77년 대우조선의 전신인 조선공사에 입사했다. 그리고 정확히 10년이 지나 한국의 노동판을 완전히 뒤바꾸는 중심 인물이 된다. 양 목사는 노동운동은 ‘공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독불장군식으로 해서는 다 깨진다는 것이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노무현 대통령조차 ‘그들만의 노동운동’이라고 비판한 대목을 잘 생각해 봐야 한다.”고 노동계에 충고했다. 최용규기자 ykchoi@ seoul.co.kr
  • 재기 몸부림 양계농가 또 조류독감 ‘비상’

    재기 몸부림 양계농가 또 조류독감 ‘비상’

    22일 광주에서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발견되고 이웃 일본에서도 조류독감 인간감염 의심자가 발생하면서 국내 닭과 오리 사육 농가는 초비상 상태에 빠졌다. 지난해 12월 국내 최초로 조류독감이 발견된 이후 1년이 채 안돼 다시 조류독감 발생 경보가 울린 것이다. 충남 천안의 한 양계단지를 찾아 조류독감의 멍에를 벗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현장을 둘러봤다. 22일 오후 천안시 풍세면 용정양계단지. 마을로 들어서자 입구에 설치된 소독시설 양쪽 분무기에서 뿌연 소독약이 안개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 시설은 맞은편 입구에도 설치돼 마을로 들어오는 외부인이나 차량을 자동 소독하고 있었다. 농가나 양계장 앞마당에는 말뚝을 박아 금줄을 쳐놓았다. 줄에는 ‘출입제한’이란 팻말이 을씨년스럽게 매달려 있다. 양계장 앞 비닐하우스 쉼터에서 연탄난로에 삼겹살을 구워 소주를 마시던 주민들 중 신원섭(52)씨는 광주에서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발생했다는 말을 듣자 얼굴빛이 하얗게 변하면서 “아이구 큰 일 났네”라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또 터지면 완전히 결딴난다” 신씨는 “올 겨울은 별 탈없이 넘어가나 했는데, 광주에서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라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이번에 조류독감이 또 오면 우리는 완전히 결딴난다. 예전에 하루 한번 치던 소독을 2∼3번 치고 조류독감에 걸리지 않도록 영양제를 먹이는 수 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신씨와 함께 소주를 마시던 한 주민은 “지난 8개월 동안 속이 상해 매일 술만 마셔 몸이 다 망가졌는데 이젠 또 어떻게 견뎌야 하나.”라고 넋두리했다. 이 마을에서 나오는 닭똥으로 퇴비를 만들어 파는 주민 권혁세(48)씨는 “부산물 이동이 통제돼 장사를 못하면서 1억 5000만원의 손해를 봤지만 보상 한 푼 받지 못했다.”고 악몽에 몸을 떨었다. 이날 마을 주민들은 기자에게 “당신 뭐야. 당신들 때문에 조류독감인지 뭔지 생기는 거야. 더 험한 소리 나오기 전에 나가라.”고 소리칠 정도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주민들은 마을회의를 열어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소독을 더욱 철저히 하기로 결의했다. 영양제를 더 많이 투입해 닭을 건강하게 키우는 수밖에 없다고 의견을 모았다. ●조류독감의 악몽과 재기의 몸부림 신씨의 양계장에 조류독감이 발생한 것은 설 이튿날인 지난 1월 23일. 이 양계단지에서 발생한 첫 조류독감이었다. 신씨는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닭들이 갑자기 시들시들해 시청에 알렸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조류독감이 발생하자 신씨의 3만 5000마리 등 이 마을 13농가의 닭 23만마리가 모두 살처분당했다. 신씨는 “자식을 잃어버린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면서 “방학중인 자식들이 학원가기가 불편해 집사람과 함께 인근 아파트로 잠시 옮겨 살게 하는 방법까지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첫 발생농가라는 이유로 신씨는 남들의 40%밖에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이웃들에게 미안해 더 보상해 달라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면서 “누가 병을 만들고 싶어 만들었나.”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신씨는 지난 8월에야 조류독감으로부터 겨우 벗어났다고 했다. 생후 70일된 영계를 사다가 키운 닭들은 최근 들어서야 계란을 출하하기 시작했다. 닭은 생후 200일이 넘어야 알을 제대로 생산한다. 그는 “보상이 많지 않아 닭 1만마리를 다시 사오면서 1억원의 부채를 더 얻어 빚이 모두 3억원으로 늘었다.”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천안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황인오 “정형근의원, 한나라 입당 권유했다”

    ‘이철우 의원 노동당 입당의혹’ 파문과 관련, 당시 사건 관련자들이 안기부 제2차장보로 사건을 총지휘했던 정형근 의원의 고문방조 의혹을 폭로해 새 국면을 맞고 있다. 정 의원은 전면 부인하면서 법적 대응을 불사할 것임을 밝히고 나섰다. 1992년 중부지역당의 총책 황인오(47)씨는 14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안기부 지하 조사실에서 20여일간 조사를 받던 도중 정형근씨가 몇차례 찾아왔다.”며 “안기부는 나와 동생인 인욱이 부부, 집사람과 네살난 아들, 환갑이 넘은 어머니를 잡아왔는데 정형근씨는 ‘순순히 협조하지 않으면 아버지도 잡아들여 집안을 거덜내겠다.’고 위협했다.”고 주장했다. 황씨는 “당시 수사관들은 정 의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폭행하고, 네살난 아들이 보는 앞에서 집사람을 폭행·폭언하고 어머니에게까지 폭행을 가했다.”고 말했다. 황씨는 “지난 2000년 정 의원이 전화를 걸어와 “한나라당에 입당해 같이 정치를 하자.”고 권유해 거절했다.”고 말했다. 또 “정 의원이 올 2월 초에도 전화를 걸어와 ‘정치할 생각이 없느냐. 한나라당에 입당하라.’고 제안해 거절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정형근 의원은 “내가 한번씩 10∼20명씩을 대동해 인권유린이나 문제가 없는지 등을 보기 위해 순시한다. 그렇게 순시하는데 무슨 고문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부인했다. 정 의원은 “황씨가 출소 직후 자기 사업과 관련해 부탁해 왔으며, 그 결과를 설명해주기 위해 전화를 했을 것”이라며 “하지만 다른 얘기는 한 적이 없다.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얘기를 할 수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전광삼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김철씨 가족 외발자전거 사랑

    김철씨 가족 외발자전거 사랑

    주말마다 골프백 매고 혼자 나가면 뒷통수가 가려우셨죠? 이제부터 가족을 내팽개치는 주말 레포츠와는 헤어집시다. 줄넘기는 어때요? 아파트 한 구석이라도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다면 뭐든 좋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우선 마음이 즐거워질겁니다. ‘하자! 하자! 아자!’는 주말을 가족과 같이 한결 알차게 보낼수 있는 레포츠의 세계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또 독자 여러분만의 즐거운 가족 레포츠 이야기가 있다면 WE에게 알려주세요. 이메일(we@seoul.co.kr)이나 전화(02-2000-9211)로 알려주시면 저희가 달려가겠습니다. 첫번째는 외발자전거로 건강은 물론 가족사랑까지 다지는 김철씨 가족를 만났습니다. 외발자전거는 ‘남과 다른 독특한 것’을 원하는 신세대 가족에게 맞는 레포츠입니다. 겨울추위, 물렀거라. 가족사랑도 추가요! ■ 외발자전거 타는 한결이네 “외발자전거는요, 계속 밟지 않으면 쓰러지고 마는 것이 우리네의 인생과 비슷하죠.”-아버지 김철씨. “위태위태하지만 운동은 많이 돼요. 많이 위험하지도 않고.”-어머니 장영아씨. “외발자전거를 타면요, 다른 사람들이 신기한 듯 바라보는데요, 그럴 땐 내가 자랑스럽습니다.”-딸 한결. “엄마·아빠랑 같이 타고요, 기술을 함께 익히니깐 너무 좋아요.”-아들 한석. 서울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남4문) 광장. 휘청휘청, 기우뚱기우뚱 외발자전거를 아슬아슬하게 즐기는 사람들이다. 제자리에서 앞뒤로 왔다갔다하고 뱅글뱅글 돌기도 한다. 난간을 붙잡고 타는 초보도 눈에 보인다. 의지할 데 없는 외발자전거를 탄 채 손에 손을 잡고 달리는 유니사이클리스트 가족이 가장 눈에 띈다. 외발자전거 가족 김철(37·경기도 용인시)씨네 식구들이다. 김씨는 딸 한결(10)양과의 레이스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하다. “우리 네 식구는 모두 취미가 같아서 주말이 즐겁고 기다려집니다. 유니사이클(외발자전거) 하이킹도 함께 하고, 기술 연습도 같이 하고요.”‘앞으로 가기’에는 자신있다는 부인 장씨의 말이다. 그러는 동안 아들 한석(7)군은 원 안에서 90도로 돌면서 뛰는 호핑 연습이 한창이다. 외발자전거를 가족들에게 소개한 이는 김씨다.2002년 인터넷에서 우연히 외발자전거를 접했던 김씨는 호기심반 재미반으로 외발자전거 동호회에 가입하고 일요일마다 나와서 배웠다.“제가 먼저 외발자전거 타는 것을 배웠고, 딸 한결이가 저를 유심히 보면서 흥미를 갖더니 배우기 시작했지요. 큰애가 하니 둘째 녀석이 따라 하고, 집사람도 외발자전거에 입문했지요.” “제가 아들에게 올라타기를 가르쳐주기도 하지만 딸이 저에게 한발타기를 가르쳐 주지요.‘아빠를 가르쳐 준다.’며 대견해하지요.”가족끼리 외발자전거 기술전수를 한다는 김씨의 자랑이다. 이들이 외발자전거 가족이 되기 이전의 토·일요일에는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전형적인 ‘방콕가족’이었다.“애들이 ‘아빠, 이번 주말 어디 안 나가?’하고 물어왔지요. 그러면 마지못해 박물관이나 고궁을 찾았고요. 하지만 이젠 일요일마다 나오니 집멀미가 싹 가셨지요.” 동네 아파트 근처 빈터에서 외발자전거를 탈 때의 에피소드도 많다. 지나가던 어른들이 “돈이 얼마나 없으면 한발만 타고 다니느냐?”며 흘깃거렸고, 딸과 같이 타고 가면 “딸이 자전거를 두동강으로 망가뜨렸느냐?”고 묻곤했다. 외발자전거가 건강에 도움이 되기는 할까? 곧바로 서야 하기 때문에 등·허리의 자세교정엔 그만이다. 어디로 넘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균형감각과 함께 운동신경도 발달한다. 글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하나라고 우습게 보지마세요 서커스단의 ‘묘기’쯤으로 치부되었던 외발자전거가 어엿한 레저스포츠로 대접받고 있다.1980년 세계외발자전거연맹(IUF)이 결성됐고, 올림픽종목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경기 종목은 크게 레이싱·아트·트라이얼로 나뉜다. 레이싱은 100m에서 10㎞까지 경주와 10m 천천히 가기·50m 뒤로가기·50m 한발가기 등이 있으며, 아트는 피겨스케이트같이 개인 및 단체 예술 경기다. 트라이얼은 계단·바위·경사로 등의 장애물 코스 경주다. 이외에도 외발자전거를 타고 하는 농구·하키도 있다. 외발자전거의 강국은 일본과 미국. 미국은 산악외발자전거가 인기인 반면 일본은 100m 레이스 남녀 세계기록을 보유하는 등 국가적으로 외발자전거 타기를 장려하고 있다. 학교에서 외발자전거를 과목으로 가르치기도 한다. 한국외발자전거동호회는 이달부터 국제연맹(IUF)이 인정하는 기술 10단계 테스트를 거쳐 인정서를 발급할 계획이다. ■ 도움말 한국외발자전거동호회(www.unicycle.or.kr) ■ 나도 배우고 싶어요 일요일마다 오전 10시면 외발자전거를 타고 들어오는 이 광장이 국내에선 외발자전거 타기를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외발자전거 인구는 동호회와 직업적으로 타는 사람(피에로)을 합쳐서 300명 남짓하다. 초보들이 오면 무료로 가르쳐 준다. 외발자전거를 연습하는 동안 빌려주기도 한다. 외발자전거는 국내에선 생산되지 않으며 파는 곳도 2곳뿐이다. 서울 마포의 자전거나라(080-715-5147)와 저글링 용품을 파는 저글링샵(02-584-9663)이다. 가격대는 어린이용이 10만원대, 성인용은 30만원대이다.
  • [누드 브리핑]이시장 “거짓말은 용서 못한다”

    “집사람이 내가 야간학교 나온 사실을 왜 말하지 않았느냐며 따지더라고…. 다른 사람이 귀띔하기를 ‘속아서 결혼하게 됐다.’라고 말했다는군.” 이명박(62) 서울시장이 지난 25일 부인 김윤옥(56)씨 사이에 얽힌 비밀(?) 하나를 살짝 드러냈다. 시청 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다.“잘못은 용서할 수 있지만 거짓말은 용서 안하는 게 내 원칙”이라면서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경북 포항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한 점에 대해 부인이 모르고 있었던 것은) 내가 말하지 않았을 따름이지 속인 게 아니다.”라며 “어느 누가 결혼하면서 초등학교 어디 나왔는지, 중·고등학교 어떻게 나왔는지를 속속들이 일러주느냐?”고 되물었다. 대학 때 맺어진 첫 사랑에 대한 얘기도 “집사람한테 다 알려줬다.”며 조용히 옛 일로 거슬러 올라갔다.1964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해 궐기한 6·3학생시위 주도로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던 때였다. 재벌가의 딸이었던 그 ‘연인’은 때때로 면회를 왔다. 운동권 학생과, 그것도 구속된 청년과 만난다는 사실은 금방 알려졌다. 서슬이 시퍼런 군사정권 시절이어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고 여긴 여자쪽 집안 어른들이 얼른 다른 재벌가와 약혼을 시켜버렸다. 그 뒤 이들 커플은 다시 만나게 된다. 청년 이명박은“아무래도 그냥 결혼하는 게 좋겠다.”고 설득했다고 덧붙였다. 이 시장의 ‘거짓말은 용서 못한다.’는 원칙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 더 있다. 지난해 말 시청 기자단과 간담회 뒤에 나온 얘기다. 폭탄주가 몇 순배 돌아가자 기자들이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비보도)를 전제로 터놓고 얘기나 나누자고 해 꺼낸 말이 사건(?)을 불렀다. 이 시장은 “얼마 전 윤덕홍 교육부총리가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 형편을 모른다.’고 하더라는 말을 했는데, 다음날 H신문에 내가 윤 부총리에 대고 ‘시골 출신이라 서울 형편을 모른다.’고 말한 것으로 썼더라.”라며 웃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씨줄날줄] 주정뱅이 구금법/우득정 논설위원

    18년 전 초겨울 새벽, 야근을 마치고 경찰서 기자실에서 막 눈을 붙이려는 순간 허리에 찬 삐삐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회사로 전화하니 내근하는 선배가 ‘술통 배달’을 지시한다. 술통은 ××경찰서에 보관돼 있단다.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욕설을 간신히 참으며 새벽길을 질주해 경찰서에 들어서니 당직 형사가 ‘저런 꼴통은 처음 봤다.’며 넌더리를 낸다. 형사가 눈길로 가리킨 유치장 안에는 창살에 연결된 수갑을 한 손에 찬 술통이 경찰서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러댄다. 어르고 달랜 끝에 차에 태워 집에 배달해주고 나니 어느새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1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대학 동기녀석이 급히 찾는다. 지방에 있는 동기가 가정파탄 일보 직전이라며 동기회 총무인 내가 나서야겠다고 채근한다. 사연인즉 평소엔 멀쩡하다가도 술만 마시면 가재도구를 부수더니 이젠 집사람에게 손찌검까지 한단다. 대학에 다닐 때 술에 취해 광화문 이순신장군 동상 앞에서 방뇨하고, 전봇대마다 붙잡고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주절거려 오가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됐던 녀석이니만큼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속담부터 떠올랐다. 망설임 끝에 전화를 했더니 누가 그 따위 유언비어를 퍼뜨렸느냐며 펄쩍 뛴다. 닭발 내미는 것도 예전의 그 버릇 그대로였다. 6년 전 겨울, 지금은 정부 산하단체장인 중앙부처 국장 K씨,L군과 함께 목젖까지 찰랑대도록 퍼마셨다. 소주 한병만 넘어서면 반말에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쏟아내던 L군이 용하게도 정신을 놓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판단한 것이 실수였다. 택시를 잡기 위해 잠시 방심한 틈을 타고 L군이 길가던 한 청년을 신나게 두들겨 패고 있었다. 건방지게 보였다는 것이 본인의 주장이었다. 경찰서에 끌려가 조서를 꾸밀 때도 ‘5∼6대 때렸다.’며 나름대로 호의를 표시하는 형사에게 ‘50∼60대 때렸다.’며 바득바득 우겨댔으니…. 폭력전과 하나에 벌금 100만원의 처벌을 받고도 몇달 후 다시 음주무용담이 소문을 타고 전해졌다. 하지만 이렇듯 호기를 부렸던 주정뱅이들에게 머지않아 족쇄가 채워질 것 같다. 경찰청이 각국의 사례를 종합한 ‘주취자(酒醉者)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의 제정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한다. 행여 주정뱅이들이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며 헌법 소원을 내려나.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 올 가계빚 472조… 내년엔 주택대출 40조 만기

    올 가계빚 472조… 내년엔 주택대출 40조 만기

    이헌재 경제부총리는 소비가 내년에 회복될 것이라고 했다. 주된 근거로 가계부채 조정을 들었다. 소비할 여력을 앗아갔던 가계빚 증가세가 최근 1∼2년간 조정국면을 거치면서 둔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난 소비가 내수경기를 자극해 체감경기가 좋아질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민간경제연구소와 금융현장의 진단은 다르다. 가계빚의 덫을 아직 벗어던지지 못했다는 경고다. 특히 2002년 끝물에 나갔던 주택담보대출의 만기가 내년에 집중적으로 돌아온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 관측이 맞다면 내년 경기의 한 축(소비)이 무너져 4∼5%대 성장에 찬물을 끼얹게 된다. 또다른 한 축인 건설경기도 붕괴 조짐이 적지 않아 우려감을 키운다. ●내년 만기도래 주택담보대출 40조원+α 18일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내년과 내후년에 걸쳐 돌아오는 주택담보대출은 76조 4000억원이다. 금융권은 ‘빚내서 집사자.’는 붐이 2002년말까지 계속됐고, 대출기간이 통상 3년이었던 점을 들어 내년에도 올해 수준(42조 3000억원)의 빚이 돌아올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은행은 주택담보대출 등을 포함한 전체 가계빚이 올 6월 458조원에서 연말에 472조 2000억원으로 불어날 것으로 추산했다. 이자부담만 39조원에 육박한다. ●정부가 낙관하는 이유 그러나… 이 부총리는 지난 15일 정례브리핑에서 “내년에 주택담보대출 만기가 많이 돌아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금융시장의 파국을 가져올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낙관하는 이유는 크게 세가지다. 첫째, 주택담보대출 만기연장률이 8월말 현재 86.4%로 매우 원활하다는 점이다. 둘째, 주택담보가격 대비 대출비율(LTV)이 은행권 평균 59.3%로 집값이 40% 이상 급락하지 않는 한 대출금을 떼일 위험이 작기 때문이다. 셋째, 일반 연체율에 비해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이 낮다는 점이다. 금융연구원 최공필 연구위원은 “금융당국의 강력한 지도로 만기연장이 이뤄지고 있지만 대부분 1년 단위로 연장시켜 놓은 상태”라면서 “정상적인 만기도래분에 올해 미뤄놓은 연장분까지 얹어져 내년에도 가계들은 빚더미에 짓눌릴 것”이라고 반박했다.LTV 비율만 하더라도 2003년 이후 은행권이 인색하게 적용하면서 평균치가 낮아졌을 뿐,2002년 대출분은 여전히 높다고 꼬집었다. 실제 금감원 조사에 따르면 전체 주택담보대출 가운데 LTV비율이 60∼90%인 대출금 비중이 42%,90% 초과도 5%나 된다. 이들 대출금은 집값이 10% 이상 하락하면 떼일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일부 은행들이 만기연장을 해주면서 LTV비율을 하향조정, 차액만큼 상환을 요구하는 것도 가계의 자금사정 경색을 야기하는 요인이다. 금융연구원 강종만 선임연구위원은 “1%를 밑돌던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이 2002년 이후 꾸준히 상승, 올 6월에는 1.6%까지 오른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내년 소비 또 발목 잡히나 재경부 김석동 금융정책국장은 “시중은행의 3년짜리 주택담보대출을 주택금융공사의 장기 모기지론으로 갈아타도록 적극 유도할 방침”이라면서 “만기연장때 종전 LTV비율을 그대로 적용토록 창구지도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만기연장 상황을 실시간 점검하고 있다.”는 그는 “현재로서는 별 문제가 없으며 뾰족한 대책도 없다.”고 털어놓았다.LG경제연구원 오문석 상무는 “금리 인하에 따른 이자부담 경감효과를 감안하더라도 내년에 돌아오는 주택담보대출이 워낙 많아 소비 여력을 기대하기는 힘들다.”면서 “내년 민간소비 증가율은 정부 전망치의 반토막인 2%에 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은행장들도 집값 하락 부담이 겹친 탓에 가계빚 후유증이 내년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최공필 연구위원은 “무엇보다 담보가치(집값)를 안정시키는 노력이 시급하다.”면서 “무조건 만기연장을 채근할 것이 아니라 악성 연체금은 과감히 부도처리해 서서히 거품을 빼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이사람] 동물사랑 외길39년 이길웅 서울대공원 사육사

    [이사람] 동물사랑 외길39년 이길웅 서울대공원 사육사

    까맣게 잊고 있던 그를 기억에서 되살려낸 건 얼마 전 신문 귀퉁이에 실린 한 컷의 사진에서였다. 서울 대학로에서 원숭이를 안고 시민들과 만나는 행사의 한 장면이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그의 외길 인생을 소개했던 게 기자가 사회부에 있던 1991년 여름이었으므로, 벌써 13년 세월이다. 수소문을 해보니 ‘사육사 이길웅(62)’은 서울대공원 유인원관의 ‘거기 그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자식 같은 고릴라 몸살에 퇴직후 컴백 가벼울대로 가벼워진 대기를 찌르고 내려앉은 햇살과 수북한 낙엽에 뒤덮인 서울대공원은 도심과는 다른 가을 정취를 흠뻑 되살려준다. 낙엽을 밟으며 고릴라·침팬지·오랑우탄이 사는 유인원관, 그의 ‘사무실’에 들어서기 앞서 가벼운 설렘이 스친다. 어떻게 변했을까, 나를 알아보기나 해줄까. 3평 남짓한 사무실에 잠시 눈을 붙일 수 있도록 개조한 손바닥만한 방에서 기자를 맞은 그의 팔에는 9개월된 오랑우탄 ‘보미’가 안겨 우유를 먹고 있다. 체중미달로 태어난 보미는 어미가 젖마저 나오지 않아 그날로 그의 차지가 됐다. 출산 직전부터 지금까지 10개월간 어미와 보미를 보살피느라 집에 가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이런 걸 두고 어떻게 집에 가요. 날 믿고 사는데. 예민한 동물들은 잠시 자리를 비우면 그때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있어요.” 그는 “맛 좋지, 아 요새끼”라며 보미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평안히 품에 안겨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보미와 그는 딱 아기와 엄마다. 이제 보미는 제 어미를 알아보지 못하고, 어미도 보미를 새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수유가 끝나기를 기다려 13년 전 신문의 복사본을 내밀자, 빙그레 웃는다. 아마도 기억을 잘 못하는 듯싶다. 그런들 어떠랴. 1999년 정년퇴직을 하고, 지금은 ‘전문직’으로 채용된 상태였다. 퇴직 후 동물들과 가까운 곳에 있고자, 과천 8단지 아파트의 경비원을 했다. 그 3개월간 그의 손을 그리워하는 고릴라, 오랑우탄들이 몸살을 앓았다. 궁리 끝에 서울대공원은 그를 다시 불렀다. “돌아오니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어요. 껴안고, 뺨에 뽀뽀하고, 머리털을 뽑으면서 애정표시도 하고. 그래서 그놈들을 붙들고 울었어요. 사람보다 낫잖아요.” 13년 전 기자는 “동물원에서는 헌신적이고 자상한 동물의 ‘어머니’로 대접받지만 집에서는 ‘0점짜리’ 남편 또는 아버지로 낙인찍힌 지 오래이다.”고 썼다. “나 듣는데서 애들(1남2녀)이 원망은 안해요, 사실 아비노릇을 못했죠. 학교다닐 때 외식 한번 안해 보고 학교에 가보지도 못했어요. 집사람에겐 고생만 시키고….” 그때처럼 그는 여전히 집이 없다. 안산에 있는 큰딸(34) 집에서 장남 내외와 손자, 부인이 기거한다. 그것도 툭하면 동물 돌보느라 집에 안가기 일쑤지만. 손에 쥐는 120만원의 절반은 어김없이 보미의 영양제, 녹용 드링크, 분유 같은 데 들어간다. 그런 그에게 부인(57)은 예나 지금이나 군소리를 하지 않는다. “난 얘들이 대공원 동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 것, 내 자식이라 생각하거든요. 재미있잖아요. 직업 중에서 내 직업만큼 세상에 좋은 게 없다고 봐요. 아픈 동물, 버림받은 동물 키우면 나한테 애정표시하고 그런데 매료되어 정들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관람객들도 좋아하고요.” 그렇다. 그를 취재하면서 천직(天職)이란 말이 꼭 어울린다고 느꼈던 13년 전이 생각난다. 변함없었다. 라면이 거의 유일한 끼니인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지 않는 요즘은 하루 세끼 라면을 먹는다. 싸고, 조리시간이 짧고, 반찬이 필요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래도 “남들보다 잘 먹는 건 아니지만 아파서 누워본 적이 없다.”는 그는 머리숱이 적어진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다. 고릴라, 오랑우탄이 좋아하는 포마드를 바르는 습관도 39년째 그대로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밤 11시에 자는 버릇도 처음 창경원에 들어왔을 때인 1965년 때부터 줄곧이다. 타고난 체력인 것 같다고 물으니 그는 “동물들이 자기들 돌봐달라고 나한테 건강을 준 것 같다.”고 그의 ‘자식들’ 치켜세우기 바쁘다. 세상물정과 등진 사람 같다.“바깥일은 잘 몰라요, 요즘은 좋지 않은 소리만 나와서, 듣기도 싫고요.” 무엇이 세상과 그를 소통시켜주는 걸까. 그는 관람객과 라디오라고 했다. 사무실에 TV가 있었지만, 고장난 지 오래다. 과천 아파트에서 버려진 걸 얻어온 고물라디오, 그리고 ‘자식들’ 보러 오는 관람객을 통해 세상과 만난다고 했다.“손님들 말로는 IMF때보다 더 힘들다고 해요. 정말 배운 사람들, 자기들 배부르니까, 없는 사람들 죽든 살든 신경 안쓰는 것 같아요.” 세상을 꼬집는 말투가 투박하긴 해도, 그 무게는 예사롭지 않다. 경기 김포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4학년때 6·25전쟁이 터지면서 그 이후론 학교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 때 구경했던 창경원이 그에게 평생 동물을 사랑하게 해줬고,11살 소년 ‘이길웅’에게 “어른되면 찾아오라.”던 사육사 아저씨(박영달·작고)는 제대하고 곧장 창경원으로 달려온 그를 따뜻이 받아줬다. 그런 인연으로 39년 9개월 동안 그의 동물사랑은 가능했다. “비록 배운 건 없더라도 하나에 집착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알아내야 속이 시원해요. 좀 더 배웠더라면 좋았을 걸 아쉬울 때도 있지만 그걸 메우려고 선배한테 기를 쓰고 매달려 배우고, 공부했어요.” ●집은 없지만 박봉의 절반 쏟아부어 예전에도 “동물은 정직하게 대해야 한다.”던 그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정직밖에 없다.”고. 동물원의 유인원들은 순해져 있을 뿐 야생동물의 습성을 고스란히 갖고 있어 가족 외에는 적으로 생각한단다. 그런 유인원의 의심과 경계를 푸는 것은 “날 믿도록 하는 정직이 최고”라는 얘기다. 영원한 사육사, 이길웅의 소원은 그의 동물원 생활 39년을 같이한 롤랜드고릴라 ‘고리롱’이 자손을 낳고, 그 자손들과 평생 곁에 지내는 것이다. 오후 1시25분이 되자 “나가야 한다.”고 보미에게 색동저고리를 입힌다. 하루 네차례 그렇게 그는 보미를 안고 ‘무대’에 서서 세상과 만난다. 소풍 나온 어린이들이 벌떼처럼 둘러싼다.“오랑우탄은 말레이시아말로 숲의 사람이고, 보미는 9개월된 아기”라고 소개하는 그에게 “둘이 닮았다.”고 관람객이 농담을 던지자 껄껄껄 웃는 그는 정말이지 보미와 똑 닮았다. 황성기 사회부장 marry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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