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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종교플러스]

    ●멕시코 한인 이주 100주년을 기념해 재외동포재단과 단국대 아시아아메리카문제연구소가 주최하는 ‘멕시코이민 100주년, 회고와 향후전망’이 29∼30일 이틀 동안 서울 프레스센터 19층에서 열린다.1905년 일군의 조선인들이 멕시코 유카탄 반도 끝에 있는 에네켄 농장에 첫발을 디디면서 시작된 멕시코 이민의 배경과 한인들의 독립운동, 그리고 후손들의 생활에 대한 한·멕시코 양국 학자들의 발표가 이어진다.(02)709-2350.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여성위원회와 한국여신학자협의회 등 기독교 여성단체들이 구성한 ‘주기도 새번역안 여성연구특별위원회’는 오는 30일 서울 명동 기독교회관에서 ‘주기도 새번역안 공청회’를 개최한다. 발제자로 최영실 성공회대 교수, 송순열 한신대 교수, 박혜숙 새문안교회 집사, 이근복 새민족교회 목사 등이 나선다. 앞서 KNCC 여성위는 KNCC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새 번역을 추진 중인 주기도문에서 가부장적인 이미지인 ‘아버지’라는 호칭을 빼자고 제안한 바 있다.(02)745-4943. ●천주교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는 다음달 3일 서울 동성고등학교 대강당에서 ‘제2회 청소년을 위한 순교자 현양 문화축제’를 개최한다. 사회와 교회의 미래인 청소년들을 위해 교회의 전통인 순교 신심을 신앙 유산으로 계승하고자 마련한 행사로,‘자 일어나 가자! 그대들도 순교자처럼’이라는 주제로 열린다. 공연과 애니메이션 발표, 콘서트 등으로 구성된다.(02)2269-0413∼4.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화(1)-김승연회장가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화(1)-김승연회장가

    1981년 ‘걱정 반 기대 반’속에 등장한 20대의 젊은 총수가 사반세기를 거치면서 이제는 중년의 관록이 물씬 풍기는 회장이 됐다. 재벌가(家)의 어린 도련님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경영자로 바뀌었으며, 패기만만하고 저돌적인 성격은 다소 무뎌진 대신 기다림의 여유를 알게 됐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선 지 25년째. 당시 국내 최연소 10대그룹 총수로, 풋내 나는 젊은이로 알려진 김 회장의 이미지는 싹 가시고, 어느덧 성공한 2세 경영인, 구조조정의 마술사, 의리파 총수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김 회장은 재계에서 2세 경영의 성공적인 착근을 넘어 제2의 창업을 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경영 수완을 보여줬다. 선친인 고 김종희 창업주 때보다 규모면에서 20배 이상의 성장을 이뤘으니 세간의 평가가 그리 터무니없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시행착오와 시련도 적지 않았다. 또 그의 성공을 시대상황의 결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검찰과 악연이 있기도 했으며, 생존을 위해 선친의 손길이 잔뜩 묻은 우량 계열사들을 매각해야 했다. 또 한화의 부활을 알리는 대한생명 인수 때에는 로비 의혹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환위기 시절에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각오로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왔던 김 회장의 성공 스토리는 2세 경영인의 실패가 다반사인 요즘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이너마이트 김’ “몇십 배가 남는다고 해도 난 설탕이나 페인트를 들여올 달러가 있으면 단 얼마라도 화약을 더 들여올 겁니다. 나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송충이이며, 화약쟁이가 어떻게 설탕을 들여옵니까? 난 갈잎이 아무리 맛있어도 솔잎이나 먹고 살거요.”(실록 김종희) 한화그룹(옛 한국화약그룹) 김종희 창업주가 얼마나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 집착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남들이 선뜻 하려 하지 않는 사업이었지만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 화약업이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이름보다 ‘다이너마이트 김’으로 통했다. 그가 다이너마이트를 독점 생산하는 기업인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그의 외곬 성격과 경영 방식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확히 터져야 하는 다이너마이트의 속성과 닮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리역 폭발사고.“이리역 폭발사고는 창업 이후 가장 심각한 경영위기에 봉착한 상황이었습니다. 선친은 모든 책임을 지고 그룹 전체를 내놓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정부가 당시 이리시 재건에 총예산 130억원을 잡았는데, 한화가 내놓은 돈이 91억원이었으니 선친의 책임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김승연 회장) 김 창업주는 1922년 충남 천안에서 부친 김재민(작고)옹과 모친 오명철(작고) 여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원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화약공판에 입사, 화약과 첫 인연을 맺었다.1952년 부산 피란 시절에 한국화약을 창업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무역과 건설, 정유, 기계 등 기간산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김 창업주가 손을 댄 회사 가운데 성격이 다른 유일한 기업은 대일유업(현 빙그레)이다. 여기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대일유업의 거듭된 적자로 골치를 썩던 정부는 한국화약(현 한화)에 대일유업 인수를 요청했지만 김 창업주는 기간산업이 아닌 탓에 인수를 꺼려했다. 그러나 축산농가가 쓰러지고 있다는 정부의 집요한 설득에 못 이겨 그는 대일유업을 떠안았다. ●김 회장의 뚝심경영 패기만만한 김승연 회장의 뚝심 경영은 1982년 한양화학(현 한화석유화학) 인수와 합작사인 경인에너지(현 인천정유)의 경영권 확보에서 시작됐다. 모든 임원들이 당시 한양화학 인수에 반대했지만 김 회장은 혼자서 밀어붙였다. 이 때문에 ‘젊은 혈기로 무리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김 회장은 대주주인 다우케미칼의 한양화학 철수는 본사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방편이지, 석유화학 업계의 불황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여기에 가계약으로 협박하던 다우케미칼측을 ‘편지’ 한장으로 저지한 김 회장의 놀라운 협상 전략이 더해지면서 한화는 당초보다 싼값에 한양화학을 인수하게 됐다. 이는 불안하게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을 잠재우며 ‘김승연 체제’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또 미국 유니언오일사와 합작해 설립한 경인에너지의 경영권 확보에서도 김 회장의 ‘뚝심’은 잘 드러난다. 한화측에 불리한 계약서를 고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김 회장은 유니언오일의 한국 경영진을 대상으로 ‘을사보호조약 같은….’이라는 격한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김 회장의 성공 스토리는 5공 시절에 더욱 화려해진다. 명성그룹 5개사를 인수해 콘도를 비롯한 레저산업에 진출했다. 또 한양유통(현 한화유통)을 인수, 유통 분야로의 사업 확장도 꾀했다. 전광석화와 같은 공격경영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장인인 서정화 전 내무부 장관이 전두환 정권의 실세인 탓에 김 회장의 이같은 공격경영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도 일부 있었다. 서 전 장관이 사위인 김 회장의 사업에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관측에서다. 91년에는 빙그레와 제일화재가 계열 분리되면서 2세들의 분가도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형제간 재산 분쟁으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나는 가정 파괴범”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김 회장도 외환위기 파고는 쉽게 넘지 못했다. 생존을 위해서는 계열사를 팔아야만 했다. 그는 매각 금액을 줄이더라도 고용은 100% 승계를 원칙으로 했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김 회장은 구조조정으로 50∼60명의 직원이 일터를 잃게 되자 사내 방송에서 “선대 김종희 회장이 한화를 창업한 이래 이런 대규모 구조조정은 없었다.”면서 “나는 그들의 가정에 많은 고통을 준 가정파괴범이며, 만일 내가 경영을 잘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비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당시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집에 러닝머신을 설치해서 발에 물집이 생겨 터질 정도로 뛰어보기도 했다.”면서 “스트레스로 인한 고통 때문에 체중이 5㎏ 이상 빠졌다.”고 밝혔다. 이어 “그때는 정말 회장직에서 물러날 각오로 경영에 임했다.”고 설명했다. 성공적인 구조조정이 끝나면서 그에게 ‘구조조정 마술사’라는 애칭이 붙었지만 그는 이에 대해 가슴 아픈 별명이라고 했다. 한화는 2000년 동양백화점 인수를 시작으로 2001년 대덕테크노밸리 설립,2002년 대한생명을 인수했다. 외환위기 시절 위축됐던 사세를 크게 확장시킨 것이다. 이로써 한화는 석유화학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과 대한생명의 금융, 한화국토개발과 한화유통이 포진한 유통·레저산업을 3대 축으로 하는 성장엔진을 마련하게 됐다. ●강태영 여사의 외유내강 강태영(78) 여사를 옆에서 지켜본 이들은 ‘조용하지만 강단있다.’고 평한다. 지난해 4월 김호연 빙그레 회장이 ‘한국의 경영자상’을 수상할 때다. 김호연 회장은 이 상에 자부심이 유독 컸다고 한다. 한때 ‘경영자로서 자질이 의심된다.’는 비난에 마음 고생이 심했던 탓이었다. 강 여사는 작은아들의 수상 소식에 들떠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시상식장을 직접 찾아 격려할 정도였다. 강 여사는 특히 90년대 초 형제간 재산 분쟁으로 우의가 상했던 탓에 형제가 화목하게 지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주변에선 전한다. 강 여사는 또 남편인 김 창업주와 사별한 이후 한번도 생일 잔치를 벌인 적이 없다고 한다. 김 회장의 설명이다.“2003년 어머니가 희수를 맞을 때 온 가족이 뜻을 모아 잔치를 해드리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내 생일 잔치는 하지 않겠다.’는 모친의 뜻을 꺾지 못했습니다.” 뜻을 굽히지 않는 강 여사도 김 창업주 생전에 큰 목소리 한번 내는 일 없이 묵묵히 내조를 했다고 한다. 두 아들의 평은 한결같다.“어머니는 유교적인 태도를 간직한 전형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이라고. 김 창업주와 강 여사는 1946년 장남인 김종철 전 국민당 총재가 결혼을 차일피일 미룬 덕분에 인연을 맺었다. 차남인 김 창업주가 부친의 강요에 못 이겨 집안간 혼처가 결정난 곳으로 먼저 상투를 틀었기 때문이다. ●백두진 국회의장 부인의 중매로 김 창업주 생전에 치른 혼사는 맏딸 영혜(57)씨밖에 없다. 영혜씨의 남편은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 부장의 차남인 이동훈(57) 전 제일화재 회장이다. 김 회장은 부친 타계 1년 후인 1982년 서정화 당시 내무부장관의 장녀 영민(44)씨를 배필로 맞았다. 영민씨는 당시 김 회장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신부로, 서울대 약대 3학년 재학중인 학생이었다. 김 회장과 영민씨의 만남은 국회의장을 역임했던 백두진씨 부인인 허숙자 여사의 중매로 맺어졌다. 서 전 장관과 김 회장 양가를 잘 알고 있는 백의장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연결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김 회장과 영민씨는 교제를 시작했고,82년 10월에 식을 올렸다. 동생인 김호연(50) 회장도 형이 결혼하자 곧 백범 김구 선생의 손녀인 김미(48)씨를 배필로 맞아 혼례식을 치렀다. 영민씨는 결혼 후에도 공부를 계속해 약대를 수석 졸업했다. 현모양처 스타일로 자식 뒷바라지에 애쓰며, 바깥 활동은 거의 없는 편이다. 영민씨 친가도 만만치 않은 유력 가문이다. 부친인 서 전 장관은 29세 때 군수를 지냈으며, 중앙정보부 차장을 거쳐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또 민정당과 신한국당,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서정신 전 대검찰청 차장은 서 전 장관의 친동생이며, 고 서정귀 호남석유 사장은 6촌형이다. 영민씨의 조부는 이승만 정권 시절에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고 서상환 장관이다. ●천안의 명문가 김 회장의 방계도 화려하다. 백부인 고 김종철 의원은 전 국민당 총재로 천안에서 6선 의원을 지냈다. 한화 계열사인 한국베어링(현 파그베어링)과 태평물산(현 한화무역) 회장을 맡기도 했지만 경영엔 관여치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부인 유성은(83) 여사 사이에 요섭-신연-수연-진연-규연-광연 등 5남1녀를 뒀다. 둘째숙부인 김종식(70) 전의원은 큰형인 김종철 전 총재가 작고하자 선거구인 천안을 물려받아 국회의원을 지냈다. 부인 문영숙(59) 여사 사이에 정연-서연-도연-원필 등 3남1녀를 뒀다. 고모인 김종숙(64) 여사는 미국에서 UC미클릭에서 지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영일(70)씨와 결혼했다. 김씨는 한화에너지(현 인천정유) 부사장을 맡는 등 그룹 경영에 참여했지만, 김 회장 취임 이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친인척 가운데 현재 한화 계열사 경영에 참여하는 인사는 김신연 한화폴리드리머 대표가 유일하다. 김 대표는 김종철 전 국민당 총재의 차남이다. ●‘한화호’를 이끄는 전문경영인 총자산 37조원의 ‘거함’ 대한생명을 이끄는 신은철(58) 부회장은 보험업에 30년을 몸담아온 생명보험업계의 대표적인 전문경영인이다. 사내에서는 ‘따뜻한 카리스마’로 통한다. 취임 직후 대전 영업현장을 방문, 처음 만나는 지점장 20여명의 이름을 외우고, 친근한 선배처럼 대화를 나눠 참석자들이 헹가래를 쳐주기도 했다. 신 부회장은 평소 ‘3선(先) 경영’(선견, 선수, 선제)을 강조한다. 사전에 미리 예측하고 준비해, 신속하게 실행하는 조직만이 경쟁에서 앞설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서울 출신으로 삼선고와 한국외대 독일어과를 나왔다. 진영욱(54) 신동아화재 사장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23세의 나이로 행정고시에 합격한 수재다. 재무부와 재정경제원에서 잔뼈가 굵었다.99년 한화증권 사장으로 전격 발탁돼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한화증권을 우량 금융기관으로 탈바꿈시켰다.2002년 대한생명과 함께 한화 계열사로 편입된 신동아화재를 만성적 적자 구조에서 흑자로 전환시켰다.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허원준(59) 한화석유화학 대표이사는 68년 한화석유화학의 전신인 한국프라스틱㈜에 입사한 이후 줄곧 석유화학 한 분야에 매진한 전문가이다. 엔지니어와 연구실장 등 다양한 분야를 거쳤다. 외환위기 이후 한화석유화학의 구조조정 실무 책임자로서 비핵심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했으며, 해외 자본을 유치해 재무구조를 향상시켰다. 경남 출신으로 부산고와 연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김관수(54) 한화국토개발㈜ 사장은 79년 태평양건설 입사 이후 제일화재 총무부장, 한화종합화학 기획실장, 한화석유화학 관리담당 임원, 여천 NCC 관리 임원, 한화건설 기획담당 임원 등 다양한 직무를 수행했다. 그는 변화와 혁신을 추구할 뿐 아니라 스킨십 경영을 중시한다. 서울 출신으로 경기고와 한양대 전기공학과를 나왔다. 김현중(55) ㈜한화건설 사장은 건축 기사에서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실전형 경영인’이다.2000년 개발사업 전문가로서 한화건설로 스카우트된 김 사장은 아파트 브랜드 ‘꿈에그린’과 주상복합 브랜드 ‘오벨리스크’를 내놓아 화제를 불러일으켰다.4년만에 회사 규모를 4배로 키워냈다. 인천 태생으로 서울고와 서울대 공업교육학과를 나왔다. 남영선(52) ㈜한화 사장은 78년 한국프라스틱에 입사해 인사와 총무, 기획 등 관리업무를 두루 거쳤다. 또 그룹 홍보팀장으로 재직할 때에는 폭넓은 대외 활동과 원만한 관리능력을 인정받았다. 충남 출신으로 배재고와 연세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golders@seoul.co.kr ■ 김승연회장의 자식교육관 “눈에 꿈이 담겨 있지 않으면 산 너머가 보이지 않고, 그 곳에 도도히 흐르는 강을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 평소 저의 생각입니다. 아이에게 꿈과 희망을 갖도록 하는 것이 부모로서 갖춰야 할 최고의 미덕이라고 여깁니다.”(김승연 회장) 김 회장은 동관(22)-동원(20)-동선(16) 등 3세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안 한다. 다양한 경험과 문화, 체육활동을 오히려 권한다. 이는 선친에게서 받은 자식 교육에서 비롯된다. 김종희 창업주는 평소에 “남자는 술도 먹고, 담배도 피워보고 그래야 해. 어차피 될 놈은 무엇을 하든 간에 나중에 제대로 되니까. 남자의 과정은 여자와 다르지.”라고 했다고 한다. 선친의 기대 때문일까. 자식들 모두 수재인 데다 성공한 기업인이 됐다. 김 회장은 경기고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유학, 드폴대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김호연 회장도 경기고와 서강대, 일본 히도쓰바시 대학원을 나왔다. 김 회장은 또 전인교육을 강조한다.“교육 문제는 집사람이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어 저는 큰 방향만 잡아줄 뿐 간섭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래도 공부뿐 아니라 지·덕·체를 고루 갖췄으면 하는 것이 아버지의 바람입니다.” 3형제도 김 회장의 기대대로 공부뿐 아니라 체육과 문화 활동에 관심이 크다. 특히 막내 동선은 취미로 시작했던 승마에 본격적으로 매달려 지금은 국가대표 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다. 장남 동관은 미국 하버드에 재학 중이며, 차남 동원은 예일대, 막내 동선은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golders@seoul.co.kr ■ 재계에서 손꼽히는 2대째 미국통 고(故) 김종희 한화 창업주와 김승연(53) 한화 회장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미국의 마당발’이다. 그룹 모체인 화약부문이 방위산업과 연관이 많은 데다 창업주 특유의 친화력으로 주한미군 및 미국 대사관 관계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다. 또 김 회장은 한·미교류협회 회장으로서 선친의 인맥을 미국 정계로 더욱 발전시켰다. 부자는 자연스럽게 ‘다이너마이트 김과 다이너마이트 주니어’로 불렸다. 리처드 워커 전 주한 미국 대사와의 2대(代)에 걸친 약속은 한화 김씨 부자의 미국 인맥 관리를 잘 보여준다. 창업주는 워커 전 대사의 60세 생일 잔치를 한국식 환갑 잔치로 열어주기로 했지만 1981년 지병으로 타계하면서 이를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아들인 김 회장이 82년에 환갑 잔치를 열어줌으로써 선친의 약속을 지켰을 뿐 아니라 워커 전 대사의 팔순 잔치도 2002년 서울에서 열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20년 이상의 약속을 대를 이어 지킨 셈이다. 김 회장의 설명이다.“선친은 1960년 말부터 워커 전 대사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워커 전 대사가 두세달 빨리 태어나 워커 대사는 한국의 미풍양속에 따라 자신이 형님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선친은 또 리처드 스틸웰 전 주한 미군사령관과도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세 사람은 자주 만났고, 만남의 횟수만큼 우정도 깊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워커 전 대사의 아내였던 세니도 모친(강태영 여사)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김 회장은 또 한·미교류협회를 만들어 미국 인맥을 더욱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비롯해 에드윈 퓰너 헤리티지재단 이사장, 데니스 헤스터트 하원 의장, 톰 대슐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 딕 체니 부통령, 얼 포머로이 민주당 의원, 클린턴 전 대통령 등과 꾸준히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인연은 2002년 미국 하원에서 한·일월드컵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결의서가 통과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일요영화]

    [일요영화]

    ●도니 다코(KBS1 오후 11시30분)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도 많았다. 더불어 재미없다는 말도 따라 붙었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묘한 매력에 빠져들게 하는 작품이다.2001년 선댄스영화제에서 뜨거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지구종말, 시간여행, 정신분열 등 복잡한 소재들을 500만 달러라는 저예산에, 단 28일 동안의 촬영을 거쳐 독창적인 스타일로 버무렸다.‘에코 앤 버니맨’의 몽환적인 음악 ‘킬링 더 문’등 1980년대 팝의 명곡들이 귀를 자극한다. 알 파치노의 눈빛을 닮은 이 영화의 주인공 제이크 길렌할은 ‘투마로우’(2004)에서 데니스 퀘이드의 아들로 나와 국내에서도 얼굴을 각인시켰다. 실제 누나인 매기도 ‘도니 다코’에도 누나로 출연한 점이 눈길을 끈다. 이들 남매 모두 할리우드에서 재능 있는 배우로 평가받고 있다. 리처드 켈리 감독은 사라 미셸 겔러 등을 캐스팅해 4년 만에 신작 ‘사우드랜드 테일’을 준비하고 있다. 1988년 레이건 정부 시절 미국. 내성적인 도니 다코(제이크 길렌할)는 가족들과도 서먹한 고등학생이다. 몽유병 증세를 보이던 그는 어느 날 밤 토끼 괴물 프랭크와 만나 28일 뒤 세상이 멸망한다는 말을 듣는다. 이날 도니의 방에 비행기 엔진이 떨어지는 등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한편 도니는 전학 온 그레첸(지나 말론)과 친해진다. 예고된 종말의 날은 성큼 다가오는데….2001년작.110분. ●내 남자 갓프리(EBS 오후 1시40분) 1930∼50년대에 한창 인기를 끈 스크루볼 코미디의 대표작. 스크루볼 코미디는 요즘 로맨틱 코미디의 뿌리로 볼 수 있다. 신분이 다른 커플을 등장시켜, 이들이 일으킨 좌충우돌 한바탕 소동을 통해 웃음과 사랑을 이끌어 내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들의 톡톡 튀는 대사가 재미있다. 1930년대 할리우드를 빛낸 여배우 가운데 한 명인 캐롤 롬바드는 이 영화에서 전 남편 윌리엄 파웰과 호흡을 맞춰 화제를 모았다. 롬바드는 이후 미국 남자 배우의 상징 클라크 게이블과 재혼한 것으로 유명하다. 가장 지적이고 능력 있는 여배우로 꼽혔으나 1942년 비행기 사고로 세른 넷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뉴욕 할렘가의 부랑자인 갓프리 스미스(윌리엄 파웰)에게 어느날 세련된 상류 여인 아이린 블록(캐롤 롬바드)이 찾아온다. 아이린이 그를 찾은 이유는 ‘사람들이 가장 원하지 않는 것을 자선파티장에 데려오기’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다. 결국 게임에서 우승한 아이린은 갓프리를 집사로 일하게 하고, 갓프리는 만만치 않은 불록가 식구들과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1936년작.94분.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길섶에서] 선택/우득정 논설위원

    ‘웰빙’ 바람과 더불어 ‘품위있는 죽음’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웰엔딩’이라는 단어도 생겨났다. 종교적인 가치판단과는 별개로 말기암 환자나 중증 뇌졸중 환자를 기계에 의존해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과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냐는 물음에서 비롯된 담론이다. 그 이면에는 환자 가족의 남모를 고통도 담겨져 있다고 본다. 수없는 망설임 끝에 어머니 담당 의사를 만났다.6개월 전 말기암 진단 이후 암의 진전상황, 통증 정도, 세균 감염 가능성, 내부 출혈 등에 대해 날짜별 진료기록을 펼치며 설명한다. 예상은 했지만 연세에 비해 잘 버티고 있다는 말 외에 희망의 메시지는 없다. 설명을 마친 의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질문을 던진다. 한마디로 인위적인 생명연장 조치에 찬성하느냐는 것이다. 며느리인 집사람보다는 아들의 의사가 중요하단다. 집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어머니가 얼마 전 세례를 받았으니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대꾸했다. 의사와 면담을 마치고 나서면서 “내가 병상에 누워 있으면 어머니는 반대했을까?”라고 아내에게 물어본다.“내가 과연 선택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계속되는 질문에 아내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시선을 돌린다.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 ‘배트맨 비긴스’ -탄생, 왜! 어떻게?

    올 여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리즈는 약속이나 한 듯 ‘탄생의 비밀’을 벗기는 데 초점을 모았다.‘스타워즈 에피소드 3’편이 제다이 기사 아나킨이 악의 화신이 되는 과정을 밝히더니,24일 개봉하는 ‘배트맨 비긴스’(Batman Begins)는 브루스 웨인이 왜, 어떻게 배트맨이 됐는지를 되짚는다. 배트맨의 1인 영웅담에 집중하기는 전편들과 다를 게 없으되 덕분에 드라마는 한결 강해졌다. 장기 시리즈물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매력은 뭐니뭐니 해도 주인공의 면모일 것. 마이클 키튼, 발 킬머, 조지 클루니에 이은 4대 배트맨으로 크리스천 베일이 종횡무진 스크린을 활강한다. 상처입은 영혼을 가진 배트맨의 면모를 보여주는 데 영화는 시작부터 초점을 맞춘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어이없이 길거리에서 피살되는 광경을 목격한 그날 이후 브루스 웨인은 죄의식과 분노를 떨칠 수가 없다. 악을 물리칠 방법을 찾겠다며 고담시를 떠나 들어간 곳이 범죄자들의 소굴. 그곳에서 자신도 범죄자에게 아내를 잃은 아픔을 겪었다며 접근해오는 듀커드(리암 니슨)를 만나 다양한 수련법을 익힌다. 그러나 듀커드가 범죄자들을 처절하게 응징하는 라스 알굴(와타나베 겐)주도의 강경조직으로 끌어들이려 하자 웨인은 고담시로 돌아와 사회를 구원할 자신만의 방식을 찾는다. 배트맨 탄생을 설명하는 일련의 사연들이 전반부에서 압축된 이후 스크린은 본격적인 영웅담을 풀어놓는다. 고담시에 만연한 부패와 범죄를 소탕하려는 웨인의 시도는 너무나 인간적이며, 이를 부각시키려는 흔적이 곳곳에서 역력하다는 점이 이번 시리즈의 특기항목. 충성스런 집사(마이클 케인)와 응용과학 전문가 폭스(모건 프리먼)의 도움으로 첨단소재의 배트슈트, 최신 무기들을 제조하는 과정에 진지한 시선을 보낸 것도 그런 맥락으로 읽힌다. 불굴의 의지, 강도높은 훈련, 거대한 자본으로 이뤄진 배트맨은 ‘던져진 영웅’이 아니라 ‘만들어진 영웅’이었음을 웅변하는 데 영화는 상당부분을 할애했다. 영웅담의 기본재료로 동원되는 선악의 이분법적 구도가 이번 시리즈에선 흐릿하게 뭉개진 대목도 흥미롭다. 동양무술의 달인인 라스 알굴이 어둠의 세력으로 묘사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역시 배트맨과 방식을 달리했을 뿐 악을 응징한다는 점에서는 배트맨에 맞서는 캐릭터는 아니다. 고담시로 돌아온 브루스 웨인의 대립대상은 부패권력과 밀착한 갱두목 팔코니(톰 윌킨슨). 어렸을 적 여자친구이자 검사보인 레이첼(케이티 홈즈)이 팔코니의 음모로 위험에 빠지자 신출귀몰하며 이를 막아낸다. 호쾌한 액션을 기대하는 마니아들에겐 배가 좀 고프지 않을까 싶다. 배트맨이 공포를 대면하고 그것을 초극하기까지의 내면을 보여주는 데 치중한 탓에 팬터지를 부르는 액션 시퀀스는 그리 많지 않다. 톰 크루즈의 새 애인으로 한창 외신 가십난을 채우고 있는 케이티 홈즈가 지적이고도 당찬 캐릭터로 감칠맛 나는 양념 구실을 했다.‘메멘토’‘인섬니아’ 등을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12세 관람가.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16일 TV 하이라이트]

    ●피플 세상 속으로(KBS1 오후 7시30분) 수십 년 동안 주부로 살아온 할머니는 설거지할 때 물 낭비가 많다는 것을 알고는 수돗물을 발로 조절할 수 있는 절수 밸브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고령이라는 벽을 넘어 발명가로, 기업인으로 활기찬 노년을 살아가고 있는 72세의 실버 발명가 김예애 할머니를 만난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SBS 오후 8시55분) 3살 난 도형이는 우산만 보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공포감을 느낀다. 평소 큰 개는 물론 벌레도 겁없이 만지는 씩씩한 도형이가 유독 우산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뭘까? 또 두발이 아닌 외발로 매일 아침 산을 오르는 정의갑 ‘외발 대장 할아버지’를 만나본다. ●글로벌 코리안(YTN 오후 1시25분) 한국인 여행객이나 재외동포들이 국제 마약조직의 꾐에 빠져 자기도 모르게 마약을 운반하다 적발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난 3월 한국인 한 명이 에메랄드 원석을 운반해 주면 사례를 하겠다는 제의를 받고 코카인이 들어있는 원석을 운반하려다 페루 공항에서 적발돼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 ●기획특강(EBS 오후 8시50분) 세계는 지금 디지털 기술과 인터넷 등 IT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농업혁명, 산업혁명에 이어 인류 역사상 세번째 대변혁인 IT혁명을 맞이하고 있다.IT혁명의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한국통신 전자연구원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기술센터 김흥남 단장에게 듣는다. ●굳세어라 금순아(MBC 오후 8시20분) 재희는 장 박사와 금순이 함께 장 박사의 연구실로 가는 것을 보고 뒤따른다. 장 박사는 금순에게 평생 용서받기 힘든 죄를 지은 것을 알지만 무슨 수를 써서든 집사람을 살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영옥을 살려달라고 비는 장 박사의 눈물 앞에서 금순은 머리가 휑하니 빈 느낌이다. ●부활(KBS2 오후 9시55분) 하은은 싸늘하게 식은 동생 신혁의 주검을 부둥켜 않은 채 걷잡을 수 없는 고통과 슬픔으로 오열한다. 신혁의 옷으로 갈아 입은 하은의 눈은 냉정하고 차갑게 빛난다. 자신의 모든 신분을 버리고 동생 신혁으로 부활해 20년이나 기다린 형제의 만남을 수포로 돌린 그들을 향해 복수를 다짐한다.
  • [이현세의 만화경] 애인을 보내며…

    [이현세의 만화경] 애인을 보내며…

    요즘 나는 우울하다. 꿈자리도 사납다. 억지로 잠을 청해보지만 온갖 귀신들에게 시달리다가 깨보면 아직 새벽 5시도 안 된 시간이 태반이다. 목이 타서 냉수 한 사발을 마시고 나면 그제서야 사태가 이해된다. 타는 듯한 갈증을 해소해 주고 꿈같은 시간을 주던 담배가 내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즐거울 때나 슬플 때, 심심할 때와 바쁠 때에도 함께했고 밤을 새워 술을 마실 때와 그림을 그릴 때에도 제 몸을 태워 위로해 주던 담배를 울면서 떠나 보낸 지 한 달이 넘었다. 춥고 배고플 때나 작업이 힘들 때에도 담배가 있어서 행복했다. 잠들기 전에 행여 내일 눈을 뜨면 없을까 걱정이 되어서 미리 챙겨두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들지 못했고 아침에 눈을 뜨면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제일 먼저 더듬어 손에 잡혀야 안심이 되던 담배였다. 뭐든지 과하면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 내 목과 심장이 견디지 못하고 고장이 났다. 공기와 물처럼 있을 때는 귀한 줄 몰랐던 담배가 떠나 보내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내게 생명같은 존재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달콤하고 꿈같은 담배연기가 내 주변의 모든 것들로부터 집단린치를 당하고 떠나갔다. 이 세상의 모든 욕을 뒤집어쓰고 길거리에 내 던져진 싸구려 창녀처럼…. 하루 서너갑씩을 30년 넘게 피워온 행위는 사랑이 아니라 학대다. 아무리 좋은 꽃향기도 이 정도가 되면 독이 된다. 술과 담배. 혼자서는 마시지 않는 술이 친구와 같다면 지극히 개인적인 담배는 애인과 같다. 요즘은 술이 고생이다. 담배 생각을 잊으려고 정신이 마비될 때까지 술을 마신다. 그리하여 내 온몸의 에너지가 고갈되어서야 잠이 든다. 오늘 아침의 일이다. 엊저녁 과음으로 머릿속이 덜컹대고 속이 메스꺼워서 집사람에게 꿀물 한사발을 청했더니 되돌아온 말이 걸작이다. “보소, 보약도 그 정도로 마시면 탈 나겠소!” 그러고 보니 담배를 보낸 한달동안 술 안 마신 날이 손가락에 다 꼽히지 않는다. 이러다 친구까지 잃겠다 싶어서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애인이고 친구고 있을 때 잘 해야 되는 법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만화를 그린 게 아니고 술과 담배가 내 만화를 그려왔다. 이 세상에 필요없는 창조물은 단 하나도 없다. 담배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과한 것이 문제이다. 나는 담배를 정말 사랑한다. 불을 붙이는 동시에 너무나 좋은 감촉으로 깊이 입맞추면 한모금 향기로운 담배연기가 입안 가득차고 잠시 머물던 그 향은 내 입과 코를 통해 온 몸으로 번진다. 그 황홀한 향기는 내 정신을 오로지 하나 만화에만 집중케 했고 담배 한개비가 타는 그 작은 시간의 여유는 하루종일 나를 의자에 붙잡아 둔 에너지였다. 누구든지 담배 한 모금의 여유와 행복을 영원히 즐기고 싶다면 자기 주변의 한개비 담배를 애인 대하듯 해야 한다. 이것은 담배얘기가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 하찮은 것 하나까지도 포함되는 것들의 얘기다. 모든 것들은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그것들은 언젠가는 하나하나 당신을 떠나게 된다. 어린 날 눈부신 햇살아래 꿈결 속처럼 아른한 그 가을에 떠나버린 애인처럼…. <만화가>
  • [신문법 논쟁 ‘2차전’] ‘신문 유통원’ 국고지원 대립

    [신문법 논쟁 ‘2차전’] ‘신문 유통원’ 국고지원 대립

    올 1월 국회를 통과한 신문법 논쟁 2차전이 시작됐다. 이번 신문법은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두가지 점에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받았다. 하나는 어쨌든 여론 다양성을 보장한다는 차원에서 신문에 대한 지원책을 마련했고, 다른 하나는 오프라인 매체 못지않은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인터넷 언론을 제도의 틀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성과도 구체적인 방법은 결정되지 않았다.7월 시행을 앞두고 실제 어떻게 할 것이냐를 두고 2차 논쟁을 앞두고 있는 것. 이미 전초전은 시작됐다. 세계신문협회(WAN)총회를 두고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는 각 신문들이 보도태도가 그것이다. ●신문유통원, 정부투자 vs 도덕적 해이? 신문법 가운데 유통원에 관련된 규정은 유통원을 설치하고 국가가 지원할 수도 있다는 37조뿐이다. 그 외에는 민법상 재단 규정을 원용토록 하고 있다. 국가가 주도하는 ‘공사’ 형식이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도덕적 해이’를 불러 올 수도 있다는 반대의견 때문에 ‘재단’으로 내려 앉았다. 이 때문에 문화관광부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 않다. 다만 관련자들과 6월말이나 7월초까지 협의해 8월 유통원을 출범시킨다는 계획이다. 언론노조 등 언론개혁 진영은 신문법 자체가 여론을 형성하는 ‘신문의 독특한 위상’을 인정한 법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이런 위상을 인정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신문법의 입법 취지를 생각하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것은 바로 유통원이 법인 형태라 해도 정부가 많은 지분을 출자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들 주장이 순탄하게 관철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미 조선·중앙·동아 등 몇몇 신문사들은 정부가 왜 사기업에 지원하느냐는 ‘딴죽’을 걸고 있다. 신문법 당시 논란이 됐던 “신문이 소주냐.”는 비유의 재판인 셈이다.WAN총회를 통해 다시 한번 신문법을 비판하고 정작 WAN총회에 대한 정부 지원금이 국회를 거쳐 증액됐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는 이들 신문사들이 가만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논란을 피해 나가야 한다는 ‘신중론’도 적지 않다. 한때 유통원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는 한 교수는 “초기에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는 점에는 찬성하지만 유통원이 적자를 낼 경우 정부가 계속 이 적자를 보전해 줘야 하는가를 두고 벌어질 논란에 대해서는 대비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인터넷언론, 취재 vs 편집? 인터넷언론의 인정범위를 둘러싼 논란도 여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다. 문화부는 신문법에 따라 시행령을 만들면서 크게 ▲주체는 법인 형태 ▲콘텐츠는 30% 이상 자체 취재기사 등의 기준을 제시했다. 문제는 인터넷언론이 법을 만들기 이전에 너무 다양한 형식으로 이미 분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3일 프레스센터에서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토론회는 이런 논란의 연장선상이었다. 우선 법인 형태를 요구한데 대해 변희재 통신기자협회 기획위원장은 개인이 운영하고 있는 진보언론 사이트 ‘대자보’를 예로 들며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법인 형태를 규정하기 않을 경우 개인이 운영하는 블로그나 미니 홈피도 신문법의 적용 대상이 된다는 반론도 제기됐다. 30% 이상 자체 취재기사 조건도 논란이 됐다. 언론사닷컴 단체인 온라인신문협회 엄호동 운영위원장은 “신문법은 고전적 출판 규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양방향 매체의 특성을 담고 있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또 미디어 다음이나 네이버처럼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포털사이트도 신문법 적용 대상에서 빠져 나간다는 점이 지적됐다. 이들은 편집만 할 뿐 자체 기사 생산은 없거나 일부에 그치고 있다. 이 때문에 언론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인터넷신문협회 부회장인 김봉국 이데일리 사장은 “인터넷 신문보다는 편집사로 등록해 그게 걸맞은 사회적 책임을 부여해야 한다.”고 제안해 눈길을 끌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국회 문광위 소속 의원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을 나타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여성 성직자는 시대적 요청”

    “여성 성직자는 시대적 요청”

    ‘여성의 성직 안수는 가능한가?’ 최근 여성 안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최갑종 교수(천안대학교 부총장)가 ‘교회는 여성의 성직 안수를 허용해야 한다.’고 강도높게 주장하고 나서 주목을 받고 있다. 최 교수는 천안대 부설 현대목회리더십연구소가 최근 개최한 ‘논문 발표회 및 토론회’에서 ‘한국 기독교와 사회에서의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한 초기 기독교와 고대 헬라-로마-유대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위치에 관한 연구:여성의 성직 안수는 가능한가?’란 주제발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최 교수는 “1세기 당시 헬라-로마-유대의 남존여비와 가부장적 사회 구조 안에서도 초기 기독교가 여성의 문제에 관해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앞서 나갔다고 한다면, 남녀 평등과 여성의 인권이 보장된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가 일반 사회보다 뒤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여성 안수 반대자들이 제시하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고린도전서 14:34∼35의 말씀에 대해서는 이를 남자와 여자의 교회와 사회에서의 ‘질서 회복’의 의미로 접근했다. 최 교수는 이 본문이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여 성도들, 특히 가정을 가지고 있는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일으킨 분쟁과 예배 시의 무질서를 경계하고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했다. 김경진 교수(천안대, 신약학)는 최 교수의 발표에 대해 “여성 안수에 대한 철저한 본문 분석을 통해 여성 안수를 비성경적이며 자유주의적이라고 매도하는 반대자들의 주장의 허구성을 드러낸 논문”이었다고 호평했다. 이날 패널로 참석한 김록이 목사(은총중앙교회)는 “본인의 남편은 교회에서의 직분이 집사”라면서,“이것은 성직과 가정에서의 ‘직임의 차이’일 뿐 남녀 성별의 차이는 아니다.”고 말하고, 여성 목사로서의 현장 사역에 결코 불편함이나 질서의 혼란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편 최갑종 교수(천안대학교 부총장)가 천안대학교 신학대학원과 기독교전문대학원생 12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의 80.7%가 여성 안수 허용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교회에서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는가?’란 질문에 대해 ‘동등하다.’란 응답은 6.7%에 불과했고 92.5%는 크고 작은 차별을 받고 있다고 응답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길섶에서] 아내사진/김문 인물전문기자

    며칠 전이었다. 시사평론가 J씨, 전직 국회의원 P씨, 모 방송국PD 등 여러 사람과 저녁자리를 가졌다.5월인 만큼 ‘계절의 여왕’ ‘가정의 달’ 등등이 자연스럽게 화제에 올랐다. 잠시 뒤 J씨가 신형(?) 폭탄주라며 시범을 보인다. 맥주잔에 조각얼음 서너개 넣고 소주 한잔과 녹차를 섞었다. 술마신 이튿날 숙취제거에도 아주 좋다며 술잔을 돌렸다. 도중에 누군가 “나이 먹으면 집사람 눈치를 봐야 해.”라고 불쑥 얘기했다. 이때였다.J씨가 P씨에게 “형님, 지금도 형수님 사진을 품고 다니슈?”하고 물었다.P씨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P씨의 나이가 칠순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믿기지 않는 듯 얼른 증명해보이라며 다들 보챘다. 할 수 없다는 듯 P씨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속의 사진 주인공은 까만 투피스차림의 20대 여성이었다. 추억의 부산 영도다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P씨는 “연애할 때 집사람이지.”라며 웃는다. 놀랍게도 40년 가까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 동시에 “정말 대단하네요.”라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P씨는 “다음 만날 때는 다들 집사람 사진들 갖고 나오라고.”라며 껄껄 웃었다. 김문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 은행들 ‘젊은부자 잡기’

    은행들 ‘젊은부자 잡기’

    ‘차세대 갑부를 잡아라.’ 시중은행의 프라이빗뱅커(PB)들이 20∼30대 젊은 부자들을 잡으려고 혈안이다. 젊은 갑부들은 유가증권이나 부동산 투자, 대출, 보험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보이기 때문에 목돈을 묻어두고 좀처럼 굴리지 않는 노년층보다는 훨씬 큰 이익을 은행에 안겨준다. 더욱이 아직은 PB 고객이 아니더라도 현재 PB고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60대 이상 자산가들의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예비 갑부’들도 대부분 20∼30대여서 은행들은 부모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까지 치밀하고 체계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10%를 잡아라” 시중은행에 따르면 PB고객 중 20∼30대는 10% 안팎에 불과하고, 이들의 예치금도 전체의 8% 정도로 분석된다. 반면 60대 이상 고객은 35% 이상을 차지하며 예치금도 전체의 40%에 이른다. 그러나 은행들은 젊은 고객에게서 훨씬 많은 수익을 챙긴다. 실제로 A은행의 경우를 보면 7억 5000만원을 맡긴 67세 고객으로부터는 연 307만원의 이익을 얻었지만 2억 1400만원을 맡긴 36세의 고객으로부터는 494만원의 이익이 났다. 67세 고객은 목돈을 적금이나 예금에 묻어두고 거의 움직이지 않았지만 36세 고객은 보험(방카슈랑스)을 들고, 자신의 예금을 담보로 대출도 받아갔으며, 카드나 자기앞수표도 발행해 은행에 짭짤한 수수료 수익을 안겼다. 두 고객을 함께 담당하는 A은행 PB는 “노년층에게는 병문안, 절세상담, 각종 기념일 선물, 쇼핑, 식사 등의 다양한 서비스 비용이 들어가 실제로는 은행 이익이 거의 없다.”면서 “그러나 30대 고객은 별다른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아도 투자 욕심이 많아 다양한 부대 수수료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예비 갑부’ 쟁탈전 은행들이 돈을 굴리기보다는 유지에 급급한 60세 이상의 고객들을 극진히 모시는 가장 큰 이유는 ‘대를 잇는 PB고객 창출’을 위해서다. 은행 PB들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정서상 대부분의 노년층 재력가들은 아직 자녀들, 특히 아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상속하고 싶어한다. 시중은행의 한 PB는 “노년 고객들의 상담 대부분이 상속에 관한 것”이라면서 “현재 이들의 자산 이탈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상속 과정에서는 대규모 이탈이 예상되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인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대부분의 노년층이 다른 은행과도 거래를 하고 있고, 그들의 2세들은 보다 나은 투자처를 찾으려는 욕망이 강해 ‘수성’이 쉽지만은 않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각 은행의 PB들은 노년층 고객의 ‘집사’로 나서고 있다. 특히 조만간 거액을 상속받을 20∼30대 ‘예비 갑부’들을 위해 유학 상담이나 취미 활동을 도와주는 것은 물론 ‘소개팅’이나 중매를 주선해주며 환심을 사고 있다. 또 경쟁 은행과도 거래하는 고객과 고객의 자녀들에게는 조심스럽게 자산을 자기 은행쪽으로 이동시킬 것을 권유하기도 한다. 하나은행의 PB담당 고위 관계자는 “조만간 PB 1세대 고객의 대규모 퇴장이 예상된다.”면서 “그들의 자산을 이어받아 다양한 수수료 수익을 창출할 2세대 고객을 어느 은행이 선점하느냐에 따라 PB사업의 승부가 갈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교정 대상 수상자]

    ■ 대상수상 대전교도소 보안과 이정옥 교위 “죄가 미울 뿐이지 마음은 여린 사람들입니다.” 제23회 교정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대전교도소 보안과 이정옥(54·여) 교위는 수형자들을 이렇게 표현했다.1971년 교도관으로 임용된 후 33년 7개월 동안 근무한 이 교위는 여성 재소자들의 교정(矯正)을 담당하고 있다. 항상 온화한 성품으로 재소자들을 대하는 이 교위는 그들의 대모로 통한다. 다른 직업을 마다하고 굳이 교도관의 길을 택한 것은 먼저 교도관의 길을 걸었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에서였다. 올해 여든넷이 된 아버지의 당시 직업은 어린 그에게 이상적이고 매력적으로 비쳐졌다. 대전여고를 졸업했지만 나이가 응시 기준에 미달돼 교도관 시험을 보지 못했다.1년을 기다려 ‘교도(9급)’ 계급장을 달았다. 이 교위가 교도관이 되었던 그해 3월 아버지는 공교롭게도 만 50세로 정년퇴직을 했다. 이 교위는 “처음에는 (재소자들이) 무서워서 똑바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면서 “지금은 자식같고 동생같은 생각이 들어 안쓰러운 맘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교도관을 희망을 꿈꾸며 살아가는 직업이라고 했다. 그 사람의 죄를 연결시키면 마음을 나눌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격적인 대우를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버림받아 감옥에서 연을 맺은 생면부지의 그들이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부모나 가족이 못한 일을 하는 것을 사명이자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살인죄로 복역하다 가석방된 유모(여)씨와의 인연은 동료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1986년 교도소에서 만난 유씨는 고향뿐 아니라 나이도 비슷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거친 유씨는 무서운 범죄자로 전락하면서 삶을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이 교위는 수차례 상담을 하면서 마음을 열게 해 미용기술과 뜨개질을 가르쳤고 청소 담당 책임자의 역할도 맡겼다. 가장 마음을 썼던 것은 그에게 가족의 정을 되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유씨는 목포의 복지가와 자매결연을 한 것이 계기가 돼 1993년 출소 후 결혼도 했다. 유씨가 첫 아이를 낳아 1995년 아이 돌이라며 연락이 와 참석했을 때는 너무나 가슴이 벅차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고 한다. 이 교위의 동료들은 그를 천성적으로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정부에서 출소자 옷을 준비해주지 않던 시절 자비로 옷을 사 주거나 자기 옷을 갖다 주는 일이 다반사였고 수감자들의 수술비나 치료비도 지원해주는 등의 선행을 베풀어왔다. 이 교위는 “관공서나 복지시설, 독지가 등이 많은 도움을 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공을 돌렸다. 그러면서 “교도복을 벗을 때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사무실보다는 현장에 머물고 싶다.”면서 “작은 힘이나마 재소자들이 재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대전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본상 ■ 교화상 서홍석 원주교도소 직업훈련교사 91년 원주교도소 제29공공직업 훈련소 직업훈련교사로 임용돼 13년 동안 수용자들의 직업훈련을 담당한 모범 교정 공무원이다. 건축시공산업기사 취득자 5명에게 취업을 알선해 주는 등 출소자 30명에게 자립기반을 마련해 줬다. 또 수용자 108명이 각종 경기대회에서 입상, 총 1억 2000만원을 상금으로 받는 데 도움을 줬다. 2002년에는 봉사단체인 한국기능선수회를 세워 소년소녀 가장과 독거노인들의 집을 고쳐주는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 공로상 최한기 천안소년교도소 교화위원 중학교 권투부 코치로 활약하다 87년부터 인천소년교도소에 자원해 18년 동안 스포츠를 통해 소년수용자들을 교화해 왔다. 지금까지 55차례에 걸쳐 199명의 수용자들이 각종 아마·프로 권투대회에 출전해 우수한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지도했으며, 지난해에는 한국슈퍼페더급 챔피언까지 배출해 냈다. 또 기증운동을 벌여 스포츠계 인사 등으로부터 20종에 이르는 1780만원어치의 각종 훈련장비를 받아 소년 수용자들이 효율적인 훈련을 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 ■ 창의상 구우진 마산교도소 교위 80년 교도관으로 임용돼 24년 4개월 동안 일하면서 창의적인 근무 자세로 출소자 취업 알선, 직장 화합 분위기 조성 등에 기여한 바 크다. 83∼86년 4년 동안 의무과에 근무할 때에는 전국에서 집금 수용된 정신·결핵 환자 350명을 관리하는데 최선을 다했다.85년부터는 출소자 30여명을 마산시 소재 기업체에 취업을 알선해 이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청렴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교도관일 뿐만 아니라 팔순 노모를 극진히 모시는 효자이기도 하다. ■ 자애상 신동민 원주교도소 종교위원 10년 가까이 종교활동을 하고 생활지원을 하는 등 수용자 교화활동에 참여했다. 돌볼 사람이 없는 수용자의 자녀를 보호 시설에 연계시켜 주는 일을 해 왔으며, 갈 곳 없는 수용자들이 출소 뒤 쉼터에 머물 수 있도록 지원했다. 95년 10월부터 176차례의 종파교회와 10차례의 영세식을 실시하는 등 수용자들의 정서적 안정을 위한 신앙지도를 실시해 왔다. 또 10번에 걸쳐 수용자 300여명에게 원주가톨릭 사회복지관에서 사회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 성실상 김재중 영등포구치소 교위 75년 교도관으로 임용돼 30년 1개월 동안 장기 근속하면서 불우수용자들의 벌금을 대신 내주거나 그들의 가족을 돌봐 주는 등 교정행정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88년 아내와 아들을 죽이고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김모씨를 비롯해 지금까지 197명의 수용자에게 545만원의 영치금을 지원했다. 부인과 함께 출소자 선교를 위한 참사랑교회를 세워 출소자에게 애정과 관심을 기울이며 재범을 방지하는데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 자비상 황용주 전주교도소 종교위원 정읍 일광사 주지로 1986년부터 불교 독지방문위원으로 활동하다 97년 교정위원으로 위촉됐다. 지금까지 매월 3차례 이상 총 818회 14만여명의 종파 집회를 집전하고 수용자 1종교 갖기 운동을 이끌었다. 96년부터 매월 20명씩 총 2830여명을 ‘이달의 불자’로 선정, 상담하고 영치금 등으로 1930만원을 후원했다. 이밖에 수용자 사회체험 및 봉사활동을 후원하고 교화용 기자재를 지원하는 등 수용자 정서순화와 교정교화를 위해 애써 왔다. ■ 면려상 김성봉 목포교도소 교감 75년 교도관으로 임용돼 29년 6개월 동안 장기근속하면서 수용자들의 정신교육기법 개발과 직업훈련 강화에 남다른 신경을 써왔다.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수용자에게 양복 기능사 1급 자격증을 받도록 도와 가석방 후 새 삶을 살도록 이끌었다.1994년에는 문제수 51명을 대상으로 1220여차례 상담을 실시해 이들의 심성 순화를 도왔다.2000년부터 4년 동안 목포교도소 중대장으로 근무할 때는 전 경비교도대원에게 태권도를 가르쳐 888명의 유단자를 양성해냈다. ■ 박애상 박상영 경주교도소 종교위원 포항 성결교회 목사로 수용자들의 종교활동을 지원하고 생활용품 제공, 교육실·도서실 보수, 이동도서함 설치, 정보화교육 기자재 기증, 무의탁자 지원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해 왔다. 지금까지 1만 6500여명을 상대로 238차례에 걸쳐 기독교 집회를 주관했으며 39차례 1160명에게 생일행사를 열어 주면서 1500만원어치의 생활필수품 등을 제공했다. 수용자 교육용 TV수리, 방송기자재 교체 등에 필요한 자금 2800여만원을 지원하기도 했다. 특별상 ■ 면려상 손윤규 공주교도소 교위 1992년 민원실을 교정기관 최초로 은행창구식으로 개조하고 미결수용자 영치금 반환절차를 간소화했다.1999년 불우수용자 가족을 돕는 모임인 ‘나눔회’를 결성해 회장으로 봉사하면서 수용자 451명에게 영치금과 생필품 등 1800여만원어치를 지원했다.2001년 12월 경비교도 후원회를 결성,1134만원을 지원했다. ■ 창의상 정기수 대구교도소 교위 2000년 10월부터 직업훈련담당으로 기능사 등 810명에게 각종 기술자격을 취득하게 했다.2003년 가석방으로 출소한 재소자의 생활이 어려운 것을 알고 성금을 지원받아 세탁소를 개업하도록 도와 줬다.2004년에는 한 수용자의 벌금 30만원을 자비로 대납하여 조기 출소하도록 도와 줬다. 불우수용자에게 영치금도 지원해 줬다. ■ 교화상 손기운 청송보호감호소 교회사 1986년 출소자 3명의 벌금 55만원을 대납해 줬다.1988년부터 피아노,TV, 도서 등 3560만원어치의 교화기자재를 수증하였고 김천소년교도소 재직 때는 한자교재 500여권을 확보해 소년수용자들을 가르쳤다.1991년에는 무연고 수용자를 벽돌공장에 취업시키고 무의탁 수용자를 자매결연자와 연계시켜 주었다. ■ 박애상 이숙경 영등포교도소 종교위원 동현교회 집사로 수용자 합창단 및 성가대 지도, 기독교 집회 피아노연주 및 성가대 지휘, 수형자 자매결연, 체육대회 지원, 불우수용자 영치금 제공 등 활동을 해 왔다. 지금까지 수형자 184명과 자매결연해 연간 80여차례 총 1614회에 걸쳐 7420여만원어치의 음식 등을 지원했다. ■ 공로상 심재왕 군산교도소 교화위원 16년 가까이 무의탁 수용자의 벌금을 대신 내고 학용품과 교재를 기증하는 등 교화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 91년부터 매년 10명씩 총 140여명의 불우수용자와 자매결연해 도왔다. 현재 군산교도소 교정협의회장을 맡고 있으며, 두차례에 걸쳐 법무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 자애상 홍승순 울산구치소 종교위원 96년부터 128차례에 걸쳐 3840여명의 수용자에게 천주교 집회를 주관하고,27차례에 걸쳐 405명의 예비신자에게 천주교 교리를 지도했다. 체육대회 주관과 교양도서·서화 및 생활용품 기증 등을 통해 복지향상에 기여해 왔다. 수용자들의 심성을 순화하기 위한 교정 미술공간 조성 사업에도 동참했다. ■ 자비상 윤여진 여주교도소 종교위원 봉림사 주지로 1988년 수원교도소와 인연을 맺은 뒤 93년 종교위원으로 위촉됐다. 불교종파 교회를 170차례 3만 5000여명에게 실시했다.99년 충남 천안에 장애인·소년소녀 가장·독거노인 등 소외계층을 위한 복지시설 ‘부처님 마을’을 운영하는 한편 군인과 전경을 위문하는 봉사 활동을 해왔다. ■ 성실상 김동수 여주교도소 교위 1994년부터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환자들의 수용시설인 의왕호스피스선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불우이웃을 도왔다.2000년 1월 거처할 곳이 없는 불우수형자 3명을 의정부 영농협동조합에 취업시켜 주었다.2001년 이후 의지할 곳 없는 병든 수용자들에게 사회복지시설과 연계시켜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8) 18세기 유랑지식인들 정감록을 퍼뜨리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8) 18세기 유랑지식인들 정감록을 퍼뜨리다

    ‘정감록’이 역사의 표면으로 떠오른 것은 1730년대였다. 그것도 차별의 땅 서북지방에서였다. 정감록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예고해 조야(朝野)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것인데, 금지령 속에서도 재빨리 전국 각지로 번져 나갔다. 누가, 왜 정감록을 퍼뜨렸는가? 그들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이번 호에선 18세기 황해도 출신 술사(術士)인 박서집을 만나 이 문제를 집중 검토하려고 한다.1731년 해주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어린 시절 한글본 정감록을 읽었다. 나중엔 예언에 빠져 정든 고향을 등진 채 홀로 충청도 진천으로 이주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1782년 정감록 사건에 연루돼 처벌된 사람이다. 박서집과의 대화는 물론 가상 대담이다. 하지만 그가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만은 아니다. 필자가 여러 종류의 역사자료를 읽으며 재구성한 것이다. ●술사 박서집 정감록을 발견하다 백:서북지방에서 출현한 정감록이 남부지방에 전파된 것은 대강 언제쯤이었을까요? 박:그건 좀 생각을 해봐야 알겠어요. 하지만 내 경우엔 이랬어요. 난 사실 어렸을 때 집에서 정감록을 읽었어요. 우리 집은 양반은 아니라도 선친께서 까막눈은 아니었지요. 그렇다고 한문에 능통하셨단 얘긴 아니고 그저 ‘명심보감’과 ‘소학’ 정도는 동네 서당에서 배우셨지요. 이유야 자세히 모르겠지만 하여간 우리 집엔 정감록이 있었어요. 백:술사님이 태어난 해가 1731년(영조 7년)이었다지요. 그렇다면 아홉 살 되던 1739년(영조 15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정감록이 문제가 됐습니다. 술사님은 그때 벌써 정감록을 읽으셨나요? 박:아니지요. 열두 살 때 읽었어요. 지금도 그때 기억이 아주 선명해요. 내가 여덟 살 때부터 서당을 다녔으니까 글은 제때 배운 셈이지요. 읍내 서당에서 ‘사서’(四書)도 좀 읽고 해서 문리는 제법 나 있는 편이었어요. 그래도 한문 책 읽기는 늘 까다롭게 느껴졌지요. 그런데 그해 한여름에 설사가 심해 집에서 쉬다 심심해서 벽장을 뒤졌어요. 벽장 깊이 감춰둔 정감록을 발견했어요. 한글로 된 필사본이라 단숨에 읽어 버렸어요. 너무 재밌어 그 뒤에도 가끔씩 꺼내 읽었어요. 백:첫눈에 정감록에 반하신 것 같습니다. 무엇이 술사님을 그렇게 매료시켰나요? 박:아까부터 자꾸만 ‘술사, 술사’ 하고 부르는데 듣기에 별로 안 좋아요. 그건 나를 좀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에요. 기왕이면 도사(道士)라든가 거사(居士) 같은 칭호로 부르는 게 좋겠어요. 이래 봬도 내가 실은 못하는 것이 없어요. 아픈 사람에게 약을 처방해 주지, 땅도 좀 볼 줄 알아서 지관(地官)이라고 대접하는 이들도 많았고 점도 칠 줄 알거든요. 백:죄송합니다. 그럼 거사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요새 사람들은 거사님이 살던 18세기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서당에 다닌 사람들은 유교 경전만 읽는 줄로 알고 있어요. 박:틀린 생각이지요. 서당에선 천문이나 풍수에 관한 책을 전혀 가르치지 않지요. 그러나 서당에서 배운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다들 그런 책들을 읽게 되는 거죠. 훈장님들도 실은 의술이나 풍수에 관한 지식이 풍부해 마을 사람들의 자문에 자주 응하곤 했어요. 나도 한때는 훈장소리까지 들었던 사람이지만 말예요. 백:몰라 뵈었습니다. 훈장님! 그러면 훈장님은 주리론(主理論)이니 주기설(主氣說) 같은 복잡하고 어려운 성리철학을 훤히 다 아시겠군요. 대단하십니다. 박:솔직히 말해 난 그런 건 잘 몰라요. 관심도 별로 없고, 실상 배운 적도 없어요. 내 특기라면 조금 전에 말한 대로 잡학이었어요. 대개 시골훈장들이 다들 그랬어요. 백:아마도 평민 출신 훈장님이라서 더욱 잡학에 강했다는 말씀인가 보군요. 그런데 훈장님은 52세 되던 1782년(정조 6년) 정감록 사건 때 충청도 진천에서 체포되셨잖아요. 어떻게 된 일인가요? ●서북의 술사들 남쪽으로 향하다 박:그때 그 이야길 여기서 꼭 해야 되나요?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군요. 당시 난 관가에 불려가서 아주 경을 쳤어요. 그건 그렇다 치고 내 본업이야 잡술(雜術)을 파는 사람이었지 어디 점잖은 훈장이라 할 수 있나요. 날 훈장이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거사라고 불러 주시오. 백:그래요, 거사님. 그런데 거사님은 왜 정든 고향을 떠나셨지요? 박:솔직히 말해 나와 같이 먹물 든 사람이 무슨 낙으로 농사를 짓겠어요? 속이 답답해 절대 안 되지요. 그렇다고 내 처지에 과거에 급제해 무슨 벼슬이라도 하겠어요? 그 역시 아니었어요. 차별 받는 서북지방 그것도 평민 출신인 나로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어요. 정말 답답한 이야기지만 나 같은 사람은 도무지 마땅히 마음을 쏟을 만한 일이 거의 없었어요. 나이 스물을 넘기자 난 점점 노골적으로 사회질서에 불만을 품게 됐어요. 그런 내 모습을 보는 게 서글펐지만 하는 수 없는 노릇이었어요. 물론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고 봐요. 차별이 심한 세상에서 저항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어요. 내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어요. 백:거사님의 말씀이 이해가 돼요.20세기의 일입니다만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킹 목사는 백인들의 가혹한 차별정책에 맞서 “나에게는 꿈이 있다.”라며 소수자의 꿈과 희망을 부르짖었어요. 일제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이나 1970년대 유신정권 아래서 철저히 소외됐던 특정 지역 사람들도 아마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 같아요. 똑같은 맥락에서 남성 위주의 사회구조 속에서 희생을 강요당해온 여성들의 고통도 마찬가지 일 거예요. 누구든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막다른 길목에 서면 절망하기 십상이겠지요. 박:고통스러운 내 삶에 희망을 안겨 준 것이 정감록이었지요.‘양반 놈들의 조선’이 끝나야 뭐가 돼도 제대로 될 거라는 생각뿐이었어요. 처음에 난 황해도 평안도를 두루 돌아다녔지만 마흔 살 무렵엔 아예 남쪽지방으로 이주했어요. 정감록이 약속한 구원의 땅은 남쪽에 주로 많았거든요. 난 계룡산 언저리를 배회하기도 했고, 삼남지방의 십승지며 수많은 길지를 찾아 일일이 답사했지요. 그렇게 여러 해를 지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어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더군요. 백:거사님이 남하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군요. 거사님이 남쪽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도 혹시 서북 출신의 술사들이었나요? 박:그러니까 1770년대였어요. 정감록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지요. 바로 내가 관련된 1782년 12월의 정감록 사건만 해도 실은 그 증표가 아닐까 해요. 사건 관련자들은 대부분 서북 출신의 술사들이었어요. 예컨대 반역죄로 죽은 문인방 선생님만 해도 평안도 양덕 출신이었지요. 함께 죽은 문 선생님의 제자 백천식도 참 불쌍해요. 문 선생님은 천문과 점술의 대가였어요. 우린 모두 선생님의 말씀대로 정감록이 예언한 새날이 곧 밝아올 줄로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시기상조였던가 봐요. 백:1782년 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 문인방을 선생님이라고 깍듯이 대접하는 걸로 보아 거사님도 그 부하가 분명하군요? 박:문 선생님은 당시 충청도 진천의 산골에 머물렀어요. 진천은 마침 계룡산에서 별로 멀지 않은 데다가 그곳이 십승지로도 손꼽히는 길지랍니다. 특히 목천이 아주 좋아요. 뿐더러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해서 진천이야말로 살기에 가장 좋단 말도 있잖아요. 게다가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 장군이 잉태된 곳이라지요. 그 서기가 아직 남아 있는 곳이라 문 선생님과 제자들은 진천 땅에 머물렀던 거지요. 백:정리하면 문인방과 거사님은 서북 출신으로 정감록을 충청도에 퍼뜨린 전도사였다는 말씀이 되는군요. 박:우리 말고도 여러 명이 있었어요. 황해도 평산 사람으로 지관을 업으로 삼았던 권택인이란 친구가 마침 기억나는군요. 그 친구는 신형하란 젊은이와 친했는데 정감록을 가르쳐 준 일이 있었대요. 한데 이 신형하란 친구가 1780년대 초반엔 이미 전라도로 내려와서 활동 중이었지요. 나나 문 선생님과 함께 연결이 돼 있었지요. 어쨌거나 우리가 삼남지방에 처음 내려갔을 적만 해도 거기 사람들은 정감록이란 이름만 들었지 내용은 다들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더군요. 그러다 보니 우리가 움직이는 곳마다 정감록이 차츰 퍼져나갔어요. 우린 길지도 살필 겸 직업이 풍수와 점술이라 각지를 떠돌며 돈도 벌 겸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어요. 그런데 꼬리가 길면 밟힌단 말이 있잖아요. 전국의 길지를 배회하며 정감록을 선전하는 우리에게 혐의를 둔 사람들이 있었어요. 우린 마침내 관가에 고발을 당했지요. 문 선생님이나 나나 굴비 두름처럼 한데 묶여 역모죄로 엄한 처벌을 받았어요. 우리에겐 세상을 바꿀 뜻이 있긴 했어요. 하지만 역량이 부족해 무엇 하나 변변히 준비한 것은 없었어요. 한데도 반역자란 누명을 쓴 채 관헌에 붙들려가 죽게 됐으니 참 기막힌 노릇이었지요. 백:참 딱한 말씀이네요. 어쨌거나 거사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해지네요. 요컨대 거사님을 비롯한 서북 출신 술사들이 정감록을 전국 각지에 유행시킨 주인공이었단 점은 틀림없군요. ●유랑 지식인들의 사회적 생리와 정감록 박:지금 생각해 보면 나 같은 사람들은 유랑 지식인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 같아요. 경제적인 기반이 없이 ‘글을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거나 ‘혀를 놀려서 먹고 사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라 늘 떠돌아 다녔어요. 이런 사람들이 미약하나마 하나의 사회세력을 이룬 것은 역시 18세기가 아니었을까 해요. 우리들 가운데 일부는 이른바 몰락한 양반이었지요. 그러나 대다수는 서얼이나 평민이었다고 봐요. 문인방 선생님이나 나는 틀림없는 평민이지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가난한 하급지식인으로서 연명할 수 있게 된 것은 서당과 같은, 이를테면 사설 교육기관이 전국 어디나 많이 생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훈장 목숨은 파리 목숨 같았어요. 요새 말로 고용이 불안정해 늘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고요. 백: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 정약용(丁若鏞·1762∼1836)도 18∼19세기 한국사회에 서당이 많이 늘어난 것을 냉소적으로 기술한 적이 있더군요.“군현에는 각 면마다 수십 개 마을이 있고, 대략 네댓 마을에 반드시 서당 한 개 씩은 있다. 서당마다 한 훈장이 앉아 있는데 글을 잘못 가르치는 시골의 무식한 훈장인 주제에 아이들을 수십명이나 거느린다.”라고 했어요. 박:정약용의 말이 좀 지나친 감은 있어요. 그래도 전국 어디서나 초보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서당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말은 분명히 맞아요. 이런 상황이 지속돼 평민이나 서얼 출신의 중하급 지식인이 대량으로 배출됐던 거지요. 바로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았단 이야긴데 우리들은 애초부터 과거에 붙기도 어려웠고, 요행으로 시험에 붙었댔자 벼슬길에 나갈 가능성도 거의 없었죠. 신분과 지역이란 이중의 벽을 좀체 넘어설 수가 없었다는 말이지요. 사정이 그렇고 보니 먹고 살길이 막연해 유랑의 길로 나서는 경우가 아주 많았지요. 이를테면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지식인들이라서 현실 비판적이었고 자연히 정감록을 애호하는 핵심적인 부류가 됐어요. 백:그렇군요. 남부지방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정감록을 퍼뜨린 문인방이나 거사님이야말로 18세기에 등장한 유랑 지식인의 전형이었군요. 자력으로는 당면한 정치 및 사회적 불만은 물론이고 생활고조차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사님과 같은 분들은 정치적 예언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었던 거죠. ●정감록 사건에 대한 집권층의 대응조치 박:정감록을 빌미로 역모를 꾀한다는 고발이 있기만 하면 조정은 잔뜩 긴장했던 것 같아요. 정감록을 모두 압수해 불태워 버리자든가 정감록의 출처를 끝까지 조사하자는 의견이 있었거든요. 백:그러나 미봉책을 편 것도 사실이었어요.1739년 정감록이 처음 나왔을 때도 국왕 영조는 함경도 경성에 살던 유학자 이재형 부자를 한직에 등용해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어요. 조선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는데도 초야에 묻혀 있던 한두 명의 선비를 발탁한다고 상황이 해결될 수 있었을까요? 박:아마 국왕은 민간에 퍼져 있던 정감록을 모두 거둬들이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해요. 정감록을 유포한 장본인을 체포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겠죠. 공연히 소란을 피웠댔자 민심만 자극될 테니 어떻게 하겠어요? 차라리 미봉책을 펴는 게 상책이란 판단을 한 걸 테죠. 백:그 말씀이 그럴 듯하군요. 거사님이 처벌 받은 지 한 해 뒤 해주에서 또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어요. 거사님의 고향 해주에서 말이죠. 그런데 국왕 정조의 처분은 매우 관대했어요.“‘정감록’이 안필복의 집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 집사람들이 저술한 것은 아니다. 큰 죄는 아니다.”라면서 관련자들을 모두 풀어주라고 했어요. 예언서라는 게 허무맹랑한 내용뿐이므로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말했지요. 박:그러나 국왕 정조는 정감록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이상한 일이 황해도에서 발생할까 염려한다.”고 했다는 점을 기억해야죠. 국왕은 정감록을 이용해 왕조에 대한 반역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실제로도 ‘정감록’을 빙자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지 않아요. 백:해주 사건이 터진 지 2년 지나서였죠.1785년 서울을 비롯해 각지의 인사들이 두루 가담한 이른바 이율과 양형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래서겠지만 같은 해에 전라도 구례 화엄사의 윤장(允藏) 스님은 절간에 ‘정감록’을 숨겨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적발돼 흑산도로 유배됐어요. 그렇게 본다면 1783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석방된 안필복의 경우는 오히려 예외로 생각되기도 하는군요. 박:1785년 이후에도 ‘정감록’ 사건은 계속 발생했어요. 신분차별과 지역차별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봐요. 백:조선의 통치자들은 유교적인 이데올로기를 심화시킴으로써 정감록의 유행을 차단하려 했지만 그렇게 간단하진 않았다는 결론이 나오는군요. 늦어도 1780년대엔 ‘정감록’이 전국 각지로 퍼져나간 게 틀림없어요. 정감록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평민 출신의 유랑 지식인들 특히 서북 출신 술사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네요. 거사님은 바로 그 주역이지요. 박:내가 죽은 지 200년도 더 지났지만 이렇게 회포를 풀 수 있어서 퍽 다행이었어요. 이젠 정말 편히 잠들겠어요. 나라의 평안을 축수합니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韓·日 ‘징용자 유골’ 조사] 日 ‘한국인 유골’ 알고도 방치

    “유골 봉환은 최우선 해결책이 아니다.” 4일 한·일 양국 정부가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로 끌려갔다가 희생된 한국인 피해자들의 유골문제 해결에 나서자 유족과 전문가들은 ‘기대와 우려’가 교차된 지적을 내놨다. 일본의 유골정책은 자국민 보호책의 일환으로만 진행돼 왔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한국인 유골이 매몰된 사실을 알고도 발굴하지 않았거나 사찰과 지방자치단체가 소장하고 있는 관련자료에 대한 조사·공표작업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 지난 1948년부터 일부 봉환이 이루어졌지만 사망자의 신원과 사망원인 등이 파악되지 못한 상황에서 ‘봉환’에만 초점을 맞춰 수많은 문제점이 노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사망자 명부 발굴과 신원 확인, 유족확인, 미발굴 유해의 발굴작업 등 철저한 실태조사를 거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있게 들리고 있다. ●희생된 한국인 20만∼60만명 유골문제는 지난 60여년 동안 피해자의 정확한 수치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는 것부터 시작된다. 전문가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일제 말기 강제동원됐다 희생된 한국인의 숫자는 20만∼60만명으로 추산될 뿐이다. 정혜경 일제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 조사1과장은 “강제연행 시기 동원인력에 대한 부조규정은 마련돼 있지만 유골처리에 관한 규정은 없고 일부 기업들이 규정을 마련했다고 하나 규정에 따라 처리했다고 자신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망자의 신원이 확인되지 않거나 위패와 유골이 합산돼 봉환된 경우, 관리부실로 썩은 유골 등 많은 문제점이 노출됐다.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국제연대협의회에 참석했던 한 일본인 학자는 일본의 ‘자국 중심적인 유골수집’ 문제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일본 후생성은 지난 1967년부터 2004년까지 유해수집사업의 예산을 153억 7000만엔으로 산정했지만 조선인 유골문제는 제외돼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정 과장은 “무엇보다 유족들이 유골문제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큰 문제”라면서 “지난 2002년 일본 홋카이도지방에서 발굴된 유골사태는 가장 인도적으로 처리해야 할 유골문제를 얼마나 방치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실태조사가 급선무 전문가들이 유골봉환 사업을 연차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문제를 개선하자는 취지다. 김창록 건국대 교수는 “유골의 사망과정과 원인을 규명하고 강제 동원된 지역의 미발굴 유골조사, 유류품 명부 등의 관련자료를 발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유족 확인이 될 경우 봉환의사를 물은 뒤 예의를 갖추는 것은 물론, 무연고 유골을 망향의 동산에 안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부산 영산대 최영호 교수는 “이번에도 봉환중심으로만 이루어지게 되면 경색된 한·일관계를 외교적으로 타결하는 결과만 초래해 일본의 전후 책임을 자유롭게 하는 데 일조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주님께 문열면 위대한 삶 찾을것”

    |파리 함혜리특파원 외신|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4일 오전 10시(한국시간 오후 5시)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즉위 미사를 갖고 제 265대 교황으로 공식 취임했다. 이날 즉위 행사는 베네딕토 16세가 성베드로 대성당 지하의 초대 교황 성베드로 묘소에 참배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황금색 성직복을 입고 주교장(主敎杖)을 짚은 베네딕토 16세는 이날 붉은색 십자가를 수놓은 하얀색 양털 영대(領帶)와 성베드로가 고기잡이를 하는 모습을 새긴 ‘어부의 반지(페스카토리오)’ 등 교황권을 상징하는 물품들을 받는 의식을 치렀다. ●“나는 주님의 나약한 종복” 베네딕토 16세는 즉위 미사에서 “나는 주님의 나약한 종복”이라며 자신이 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신자와 비신자, 유대인 형제들도 기도해달라고 호소했다. 선출 후 처음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론에서 그는 “나의 통치 계획은 전체 교회와 주님의 말씀과 의지를 듣고 주님에 의해 인도받는 것”이라며 가톨릭의 정통성을 충실히 이행할 뜻을 밝혔다. 그는 또 인류의 목자로 세상에 온 예수가 길잃은 양떼 곁에서 한 마리 양이 되었듯이 “우리는 한 무리 양떼이자 동시에 (타인을 구원하는)목자가 될 수도 있음을 인정하자.”고 말했다. 그는 요한 바오로 2세가 78년 즉위 미사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을 향해 문을 열어라.”라고 했던 강론을 상기시키며 “주님을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에게 문을 열어라. 주님은 삶을 자유롭고 아름답고 위대하게 만드는 어떤 것도 앗아가지 않으시며 당신에게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는 말로 강론을 끝맺었다. ●요한 바오로 2세 시성(諡聖) 문제는 언급 안해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는 천국의 성인들 사이에서 편히 쉬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를 성인(聖人) 명부에 올리는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베네딕토 16세는 2시간 반에 걸쳐 진행된 미사에 이어 지난 1981년 요한 바오로 2세가 피격됐을 때 승차한 흰색 무개차를 타고 광장을 돌며 신도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전했다. 이날 미사에는 세계 각국의 정치, 종교지도자와 독일인 신도 10만명을 포함한 일반 신도 등 35만명이 참석했다. 미사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성베드로 광장 근처에서 스크린을 통해 지켜본 인원도 5만여명에 이르렀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교황의 모국인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와 프랑스 장 피에르 라파랭 총리,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동생 젭 부시 플로리다 주지사 등 각국 지도자들도 대거 참석했다. 유럽 각국 왕실 대표들과 영국 성공회의 수장 로완 윌리엄스 캔터베리 대주교, 교황의 친형인 게오르크 라칭거(81) 신부 등도 미사에 참석했다. ●한복 차림 한국인 가족 등 충성 서약 베네딕토 16세의 즉위 미사는 모든 추기경들이 충성 서약 의식으로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손에 입을 맞추던 관행 대신 12사도를 상징하는 12명만 의식을 치르는 등 전통을 현대식으로 적용한 방식으로 치러졌다. 칠레 출신 요르헤 메디나 에스테베즈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 바티칸 국무원장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 등 3명이 교황에게 차례로 충성을 서약했고 이어 주교 1명, 사제 1명, 부제 1명, 수녀 1명, 수도사 1명, 어린이를 동반한 한복 차림의 한국인 부부, 젊은이 2명이 나와 충성을 서약했다. 35만여명이 모여든 이날 행사의 안전을 위해 이탈리아 당국은 1만명의 경찰을 동원해 로마 안팎을 경비했다. 당국은 또 취임 미사가 열리는 동안 로마 상공 반경 8㎞를 비행금지 구역으로 설정했고 로마 제2의 공항인 참피노 공항의 비행 금지령도 내렸다. 로마시는 바티칸시티 곳곳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미사를 생중계했다. ●추기경 시절 집사가 관저 살림맡아 교황의 관저 살림은 추기경 시절 14년간 집사로 일해온 수녀 잉그리트 슈탐파(55)가 맡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독일 서부 클레베 출신으로 스위스 바젤에서 중세음악을 전공했으며 쇤슈타트 수녀회 소속으로 1991년부터 현 교황을 보필해왔다. 베네딕토 16세는 즉위 미사에 앞서 23일 비성직자 중에서는 첫번째로 기자들과 만나 “진리를 추구하고 인간 존엄성을 수호하는 책무를 다해줄 것”을 당부했다. 교황은 전임 교황처럼 언론과의 대화를 계속 할 것임을 약속했다. 이날 회견에는 4000여명이 참석했다. lotus@seoul.co.kr
  • [한국을 빛낼 중견기업] 애경 안용찬 사장

    [한국을 빛낼 중견기업] 애경 안용찬 사장

    “실적을 단기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판촉 활동과 이벤트 행사를 늘리는 것은 고통받는 환자에게 치료 대신 마약을 투여하는 것과 다름 없다. 당장은 약 기운에 의지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기업의 목숨을 갉아 먹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곪은 곳은 과감하게 도려내고, 새 살이 될 만한 브랜드를 키우는 것이 늦지만 가장 확실한 기업의 생존 전략이다.” 1995년 7월 취임 이후 9년 연속 흑자경영을 이어오는 안용찬(47) 애경 사장.1등군에 들지 않는 10개의 브랜드보다 단 하나의 1등 브랜드가 회사를 먹여 살린다고 역설한다.‘죽여야 산다.’는 안 사장의 ‘브랜드 경영’의 전제 조건이다. 시장에서 ‘싹수’가 안보이는 잡다한 브랜드를 과감히 죽여,1등이 될 만한 브랜드에 집중하는 것만이 ‘시장을 지배할 수 있다.’는 논리다. 양보다 질을 강조한 셈이다. 안 사장의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브랜드 죽이기’의 연속이었다. 한정된 자본에서 기업의 부채를 줄이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자본의 효율적 분배가 무엇보다 당면 과제였던 것. 다양한 브랜드로 덩치를 키워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려는 기업과는 발상 자체가 반대였다. 애경의 경영실적이 안 사장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10년전 870%에 달했던 애경의 부채비율은 지난해 205%, 올해는 200% 미만으로 떨어진다. 또 매출은 연평균 10%씩 성장, 지난해 3571억원을 기록했다. ●소탈한 전략가 생각보다 동안(童顔)인 탓일까. 국내 생활용품의 대표기업 최고경영자(CEO)인데도 얼굴에 장난기가 다분히 묻어난다. 또 ‘범생’의 모습속에 불량기(?)도 엿보인다. 다부진 체격에 웃음을 머금은 안 사장은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10년간 묻어놓은 이야기 보따리를 한껏 풀어놓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술·담배를 했었죠. 많이 한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께서 좀 개방적이셨습니다. 이왕 할 거면 밖에서 하지 말고 집에서 하라고 할 정도였으니, 당시로서는 ‘깨신’ 분이랄까. 덕분에 친구들이 저희 집에 놀러 오기를 굉장히 좋아했죠. 요즘에는 저도 딸에게 술을 자주 권하는데 싫어하더라고요.” 대학 시절에는 공부뿐 아니라 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수업이 끝나면 교내 헬스센터로 직행했습니다. 들고, 내리고 하다 보면 그렇게 몸이 상쾌할 수 없어요. 지금은 많이 (근육이) 줄었지만 그때는 몸이 남부럽지 않았습니다.”라며 은근히 자랑한다. 그는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의 맏사위이다. 재벌가(家)의 일원으로 젊은 나이에 CEO에 올랐다는 평도 적지 않게 들었을 법도 하지만 막힘이 없다.“(사위라는 점이)기업 경영에 장점이 많아요. 전문경영인은 아무래도 단기 실적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무래도 오너 가족이다 보니 그런 부문은 초월할 수 있잖아요. 기업의 중장기 비전을 세워놓고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 수도 있고, 한 해 실적 나쁘다고 자리에 위협을 느끼는 것도 아니니까…. 초창기에는 장 회장으로부터 꾸중도 많이 들었어요. 제 방 맞은 편(장 회장 집무실)에 많이 갔습니다. 집사람(채은정씨)은 지인 소개로 만났어요. 미국에서 공부하다 일시 귀국한 터여서 잠깐 연애하다 바로 미국으로 되돌아갔죠. 어느 유학생 부부와 다름 없이 고생하면서 공부했습니다.” 안 사장은 국내 생활용품 시장에서 탁월한 전략가로 통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재무통’으로 한때 위기에 처했던 애경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는 평이다. 오너가(家)라기보다 전문경영인으로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그는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을 졸업했다. 사내에서는 어떤 평판일까.‘소탈한 전략가’라는 평이 압도적이다. 권위 대신 친근함과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한다. ●1등 브랜드를 키워라 안 사장의 ‘1등 브랜드주의’는 1992년 다국적기업인 유니레버와의 합작법인이 깨지면서 시작됐다. 신제품을 비롯해 영업, 마케팅 등에서 유니레버의 의존도가 컸던 애경(당시 애경산업)은 한동안 ‘혼수 상태’에 빠졌다. 매출은 무려 50%가 줄어든 데다 영업은 적자를 기록하는 등 재무구조가 갈수록 악화됐다. 시장의 반응은 더욱 차가웠다. 일각에서는 ‘부도설’마저 나도는 실정이었다. 이를 통해 안 사장은 유니레버의 ‘폰즈’나 ‘도브비누’ 등의 강력한 1등 브랜드 제품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등만이 시장을 지배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과감히 브랜드 죽이기에 나섰습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한 ‘브랜드 경영’은 애경의 현실적 여건에서 출발한 셈이었습니다. 아깝더라도 향후 3년내 1,2위를 차지할 브랜드를 빼고는 시장에서 철수한다는 결단을 내렸죠.” 이 과정에서 ‘유탄’을 맞은 브랜드로는 분말세제인 ‘팍스’, 삼푸 ‘그랑비아’와‘나이브’, 비누 ‘생금’ 등이다. 잡다한 브랜드로 전선을 확대시켜 ‘싹수’가 엿보이는 브랜드마저 죽이는 잘못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의 브랜드 전략은 이렇다. 치약시장 전체로는 경쟁업체가 1등이지만 단일 브랜드로는 우리가 1등하는 치약을 만들자는 것. 그 대표주자가 ‘2080’이다. 성숙시장인 치약제품 사상 최단기간에 뿌리를 내린 성공적인 브랜드로 대학에서 연구사례로 채택될 정도다. 현재 이렇게 가꾼 1등 브랜드가 세탁세제 ‘스파크’와 ‘퍼펙트‘, 주방세제 ‘트리오’와 ‘순샘’ 등을 포함해 15개를 웃돈다. 그는 생활용품에 치우친 매출 구조를 바꾸기 위해 화장품 사업군을 별도로 법인화시킬 계획이다.1등 브랜드를 갖기 위해서는 고부가가치 사업인 화장품을 생활용품과 같이 끌고가기에 부담스럽다는 판단에서다. “시장에서 3등은 없다고 확신합니다.1위권 브랜드는 매장진열이나 입점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또 고객은 각 카테고리에서 1,2등을 제외한 3등 이하 제품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1등 브랜드의 파워가 있습니다.” 1등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품질 노력에도 적지 않은 공을 들이고 있다. 안 사장은 외환위기 시절 다른 기업들이 구조조정 차원에서 연구소를 매각하거나 연구원들을 줄일 때 300억원을 들여 연구소를 설립했다.“(92년에)매도 먼저 맞아서 그런지 외환위기 때는 다른 기업과 달리 재무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특히 경쟁기업들이 어려울 때 공격 경영을 추진하는 것이 1등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재가 ‘돈’이다 안 사장은 아무리 회사가 어려워도 사원 교육비는 줄이지 않았다고 한다.‘인재가 기업의 미래’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애경의 지난해 1인당 교육비는 업계 최고 수준인 200만원선. 이밖에 어학교육비(1인당 연 120만원)와 대학원 학비를 전액 지원한다.3개월짜리 미국 연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9년째를 맞은 미국 연수 프로그램은 10년 이상 근속 사원을 대상으로 현지 체험과 여행 등의 일정으로 짜여져 있다. 안 사장은 “9년연속 흑자경영의 가장 큰 원동력은 결국 사람이었다.”며 “어려운 시절에도 사원 교육비를 늘린 것은 그동안 제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잘한 일 같다.”고 밝혔다. 그는 또 직원과의 대화를 중시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산책경영’. 처음에는 건강을 위해 시작한 것이 직원과의 대화 창구로 바뀌었다. 그는 거의 매일 파트너(임직원)를 바꿔가며 1시간씩 회사 주변을 걷는다. 안 사장은 “회사의 주요 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정담도 나누고, 건강도 좋아지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애경은 어떤 회사 애경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비누제조업체로 출발, 생필품을 생산하는 국민기업으로 성장했다. 애경유지공업㈜이 전신인 애경은 1985년 4월 다국적기업 유니레버와 합작, 선진 외국기술 및 경영관리 기법을 도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지난해 창립 50돌을 맞아 ‘애경산업’에서 ‘애경’으로 사명을 바꿨다.‘깨끗함, 신뢰, 혁신’을 경영 목표로 삼아 최근 10년간 출시한 대부분의 제품을 성공적으로 상륙시킴으로써 생활용품 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다져가고 있다. 특히 지난 50년간 한우물만 판 뿌리깊은 기업으로,‘삶의 가치를 높이는 라이프 스타일리스트’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다.‘제품과 서비스로 고객에게 아름다움과 건강함, 깨끗함과 편리함을 제공한다.’는 것이 실천 목표다. 대덕연구단지내 애경종합기술원은 신제품 개발과 미래산업의 중장기적인 전략기술을 집중 연구·개발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충남 청양과 대전 공장에서는 고품질의 제품을 생산해 낸다. 안용찬 사장 취임 10주년을 맞는 올해의 매출 목표는 지난해보다 20% 늘어난 4380억원. 제 2도약을 위해 선택과 집중,1등 브랜드 전략을 더욱 강하게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 취재기자 4명 ‘초미니’ 주간지 퓰리처상 수상자 배출 ‘개가’

    취재기자가 단 4명뿐인 미국 오리건주의 한 무가(無價) 주간지 기자가 4일 발표된 올해 퓰리처상의 탐사취재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화제의 주인공은 오리건주 포틀랜드시에서 9만부 발행되는 ‘윌러메트 위크’의 니젤 재키스(42)로, 30년 동안 묻혀 있던 전직 주지사의 아동 성학대 행각을 세상에 알린 공로로 수상자로 선정됐다. 지난해 5월 6일 보도된 이 기사는, 오리건주의 유명 정치인이자 1987년부터 4년간 주지사를 역임한 닐 골드슈미트의 30년 전 비행을 심층취재한 것이었다. 골드슈미트는 부시 행정부에서 교통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포틀랜드 시장으로 일하던 75년부터 3년간 당시 14세의 여고생과 성관계를 가지며 그녀를 추행, 학대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정통 언론’들이 간과한 이 문제를 재키스 기자는 한 달여 추적, 지금은 40대가 된 피해 여성을 찾아 인터뷰해 정신적 고통을 견뎌내온 한 여인의 비극과 유명 정치인의 숨겨진 과거를 재구성했다. 골드슈미트는 기사가 나가기 직전 반론을 요청받고는 이튿날 주 고등교육위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고 사실을 시인했다. 재키스 기자는 이날 수상 소식을 듣고 “이건 너무나 엄청난 영광이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며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재키스 기자 외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이 각각 2개 부문을 수상했다. (언론)▲전국보도상 월트 보드대니치(뉴욕타임스) ▲특집보도상 줄리아 켈러(시카고 트리뷴) ▲논평상 코니 슐츠(클리블랜드 플레인 딜러) ▲논설상 톰 필립(새크라멘토 비) ▲만평상 닉 앤더슨(켄터키주 루이빌 더 쿠리어 저널) ▲속보사진보도상 AP통신 취재진 ▲특집사진보도상 딘 피츠모리스(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문학)▲역사 데이비드 피셔 ‘워싱턴의 도하’ ▲전기 마크 스티븐스와 애널린 스완 ‘드 쿠닝:미국의 달인’ ▲시 테드 쿠서 ‘기쁨과 그림자’ ▲논픽션 스티브 콜 ‘유령의 전쟁’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길섶에서] 하루만 더/ 이용원 논설위원

    금실 좋은 친구 부부와 며칠전 만나 식사를 했다. 친구가 느닷없이 “우리 부부는 세상 떠날 순서를 정했어. 이 사람 먼저 죽으면 나는 하루만 더 살고 다음날 쫓아가기로 했지.”라고 말했다. 친구 부인은 곁에서 웃기만 했다. 무슨 얘기냐고 물었더니 설명이 다음과 같았다. 집사람이 어느날 금실 좋은 부부는 죽을 때도 같이 죽는다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자기가 먼저 가자니 남은 내가 불쌍하고, 내가 먼저 가면 자기는 외로워서 못 살 것 같다고 한 걱정을 하더군. 그래서 둘이 의논해서 내가 하루 더 살기로 했어. 알다시피 집사람은 덜렁대는 편인데, 나는 좀 꼼꼼하지 않냐. 마누라 먼저 보내고 하루쯤 뒤치다꺼리하면 따라갈 수 있겠지. 그 이상 미루면 이 여자가 밤마다 꿈에 나타나 얼른 오라고 보챌 거야. 말을 마친 두 사람은 마주 보며 빙긋 웃었다. 그 친구 부인은 남편 사랑이 끔찍했다. 둘이 걸어갈 때면 부인은 달아나는 애인 붙잡듯 아예 매달리는 자세로 팔짱을 꼈다. 남편 친구에게도 잘해 새벽에 쳐들어가도 웃는 낯으로 술상을 내왔고, 아침에 깨면 해장할 국물을 차려냈다. 그래, 이들이라면 죽어서도 헤어지지 않을 거야. 왠지 믿음이 갔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국세청장 후보 인사청문회

    국세청장 후보 인사청문회

    국회 재정경제위원회는 9일 정부 사정기관의 ‘빅 4’ 중 하나로 꼽히는 이주성 국세청장 후보자를 상대로 인사청문회를 열어 직계 존·비속의 재산상황과 병역문제에 대해 의혹을 집중 제기했다. 그러나 청문회는 이 후보자의 해명에 의원들이 별다른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 등 큰 쟁점을 만들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진행됐다는 평가다. 재경위는 10일 전체회의에서 인사청문회 경과보고서를 채택, 이 후보자에 대한 청문의견을 국회의장에게 보고할 예정이다. 이 후보자는 이날 언론사 세무조사와 관련,“내년부터 언론사별로 신고가 들어오면 전산분석을 거쳐서 성실도를 분석한 뒤 시차를 두고 하겠다.”고 밝혀, 빠르면 내년부터 실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의원들 반론 제기 소극적 그는 한나라당 이종구 의원이 “후보가 언론사도 일반기업처럼 5∼7년마다 세무조사하면 성실과세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 않느냐. 지난 2001년에 이어 언론사의 세무조사 실시할 것이냐.”고 따지자,“언론사도 영리법인이기 때문에 세무조사 대상자 선정의 객관성과 공정성 차원에서 조사를 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이 후보자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정치적 외압을 버텨나갈 수 있겠느냐며 거듭 소신을 묻자 “저는 개인적 영달을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고, 국세청장이 제 마지막 자리”라는 답변을 여러차례 해 눈길을 끌었다. 이 후보자의 장남이 만 14세로 미성년자였던 지난 96년 외조모로부터 서울 개포동의 아파트를 넘겨받은 이유와 증여 이후 편법행위가 주요 관심사였다. 이 아파트는 지난 99년 재건축이 추진되면서 현재 기준시가는 5억 여원에 달하고, 시가는 6억 8000여만원에 이른다. 그는 “결혼 후 장모를 상당기간 모셨기 때문에 외손자에게 배려를 한 것 같다.”고 말했고,“증여세 388만원은 집사람이 대납했지만, 기초공제 미달액이기 때문에 증여세 대납에 대한 세금은 내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했다. ●장남 아파트 증여·병역 논란 이 후보자가 지난해 12월 압구정동의 57평 아파트를 국세청 기준시가보다 1억원 가까이 낮은 가격에 판매한 경위를 추궁하자,“그때는 시세가 10억∼11억원 정도 했고, 집이 저층이라서 6개월 동안 집보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며 “집사람이 팔아야 한다고 해서 알아서 하라고 했다.”고 이 후보자는 해명했다. 이 후보자는 장남이 전공인 경영학과 다른 분야인 병역특례업체에서 대체복무 중인 이유에 대해서도 “정보처리능력이 뛰어나고 컴퓨터 언어인 자바(취급실력)도 월등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프로그램 개발에 필수적인 영어도 잘하기 때문에 여러 군데에서 제의가 있었던 것 같다.”고 해명했다. 문소영 박록삼기자 symun@seoul.co.kr
  • 이헌재 부총리 문답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3일, 부동산투기 의혹이 일기 시작한 지난달 28일 이후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나와 사과와 해명을 했다. 다음은 이날 오후 정부 과천청사에서 있었던 기자회견의 질문과 답변. 이번 일로 청와대에 사의를 표명한 적이 있나. -답변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번 사태로 경제수장으로서 국민신뢰를 상실해 향후 정책실효성이 의심스럽다는 지적이 있다. -나 개인의 문제로 국정운영에 차질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부동산정책이나 주택정책은 차질없이 추진하겠다. (공무원사회 후배인)유지창 산업은행 총재와의 전화통화에서 부총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던데. -그런 적 있다. 58억원으로 신고한 경기도 광주 땅의 매각가격이 실제로는 100억원을 넘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있다. -매각대금은 정확하게 직접 통장으로 들어온 것이어서 한점의 차이도 없고 그대로 신고했다. 지난해말 지역특구로 지정된 전북 고창에 부인과 처남의 땅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는데. -지역특구 선정과정에 나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선정절차나 과정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며 혹시라도 문제가 있을 수 있어서 몇번씩 검토한 것으로 알고 있다. 10·29대책 직후인 2003년 10월30일 (경기도 광주땅)매매계약을 했는데, 갑자기 판 이유는 무엇이며 매각대금은 어떻게 58억원으로 확정됐나. -계약은 그때 했지만 논의는 부동산중개소를 통해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금액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최종적으로 58억원에 팔기로 하고 계약한 것이다. 그때 땅을 판 구체적인 이유는. -당시에는 내가 다시 공직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작년 2월 부총리 제의를 받았을 때도 오랫동안 받지 않겠다고 하다가 마지막에 받았다. 또 처음에 땅을 샀을 때는 그 일대에 길도 제대로 없는 오지였다. 그런데 최근 그 일대에 대한 개발이 진행돼 집사람이 땅을 보유하면서 나중에 (우리 뜻대로)개발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몇달 전부터 부동산중개소를 통해 계속 매수제의가 들어와 팔기로 했다. 김태균 전경하기자 windse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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