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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LG家 ②-구인회 3代 경영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LG家 ②-구인회 3代 경영

    지난달 19일 러시아 모스크바 출장길에 오른 구본무(60) LG 회장을 수행한 사람은 차장급 직원 한명뿐이었다. 계열사 사장들과 같이 가는 출장이 아니면 수행은 늘 직원 한명이 담당한다. 공항으로 임원들이 배웅이나 마중을 나오는 것도 금지한다. 구 회장은 지난 12일 LG 계열사 사장단 20여명과 함께 국내사업장 ‘혁신투어’를 나서면서 자신의 차량인 ‘벤츠S600’을 놔 두고 대형 관광버스 2대를 빌렸다. 사업장간 이동중에도 사장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다. 지난 2003년에도 구 회장은 버스로 2박3일간 전국의 사업장을 누볐다. 이처럼 ‘격식’을 따지기보다 실용성을 강조하는 구 회장을 두고 ‘소탈한 이웃집 아저씨 같다.’는 평이 따라다닌다. 사람좋아 보이는 눈웃음 등 구 회장의 외모도 이같은 이미지 구축에 한몫했다. ●몸에 밴 검소한 생활 구 회장의 소탈한 모습은 아버지 구자경(80) 명예회장이나 할아버지인 고 구인회 창업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구인회 회장은 창업초기인 40년대 후반 부산 서대신동 시절 활동하기 편하다며 미군 파카를 즐겨 입었다고 한다. 외출할 때를 제외하곤 공장내에서 늘 입고다녀 소매가 닳고 기름때가 반지르르 묻은 옷이었다. 구 회장은 또 비싼 담배와 싼 담배를 같이 갖고 다니면서 손님에게는 좋은 담배를 권하고 자신은 값싼 담배를 피웠다.“돈이란 벌 때 아껴야 하는 법”이라는 지론이다. 사돈이자 동업자인 고 허준구 회장도 당시 판매와 구매일을 맡으면서 수금하러 거래처를 다닐 때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찰떡궁합’인 셈이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사업장이나 계열사 사무실을 즐겨 찾았는데 어떤 때는 사전통보없이 불쑥 고객서비스센터 등 현장을 방문해 생생한 고객의 목소리를 듣기도 했다. 럭키증권(현 우리투자증권) 객장을 방문했을 때는 고객들이 좁은 객장에서 불편을 겪고 있는데 반해 임원실이 한 부서보다 큰 것을 보고 “무슨 임원방이 내 방보다 커요?”라며 질책을 했다고 한다. 이같은 소탈한 이미지 때문인지 LG의 회장들은 삼성이나 현대에 비해 강한 인상을 주지 않는다. ‘시사저널’이 지난해 발표한 가장 영향력있는 기업인 순위에서도 구본무 회장은 삼성 이건희 회장은 물론 현대차 정몽구 회장보다 순위가 낮았다. 재계에서 LG가 차지하는 비중이 현대차그룹보다 낮지 않은데도 그룹총수의 영향력은 현대차가 높게 나온 것이다. LG관계자는 구 회장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는 지적에 대해 이렇게 반박했다. “구 회장은 1995년 취임 이후 지난해까지는 허씨와의 동거기간이었고 2년전까지만 해도 삼촌뻘 되는 집안어른들이 계열사 사장을 맡고 있었다. 또 취임한 지 얼마되지 않아 국제통화기금(IMF) 직격탄을 맞았고 99년에는 반도체 빅딜로 주력사업을 빼앗기는 고초를 겪었다. 사실 구 회장의 총수로서의 경영능력은 올해부터 검증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LG의 상징, 인화(人和) 구인회 창업회장은 포목상, 청과·어물전, 운수업 등 숱한 시행착오를 겪은 뒤 47년 럭키크림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사업인생을 걸었다.6형제의 장남(4명의 여자형제도 있었으나 일찍 사망함)이자 6남4녀의 아버지가 하는 사업을 돕기 위해 초기 가족들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경영도 대부분 가족이나 사돈(허씨)들이 도맡아 했다.47년 락희화학 설립당시 생산담당이었던 김준환씨를 제외하면 구 회장, 부사장 고 구정회(둘째 동생)씨, 영업담당 허준구(첫째 동생 철회씨 사위)씨 등으로 사실상 ‘가족기업’이었다. 이후에도 아래로 다섯 동생과 여섯 아들, 조카, 허씨들이 대거 경영에 참여했는데 LG의 ‘인화정신’은 이같은 독특한 가족사와 무관치 않다. 친인척들을 잘 다독여 가며 경영을 하는 것이 중요했고 이를 경영이념으로 발전시킨 것이 인화다. 창업회장부터 내려온 인화정신의 대표적인 사례는 삼성과 함께 했던 방송사업. 구인회 회장은 60년대 초반 사돈인 고 이병철 삼성회장으로부터 방송사업을 같이 해보자는 제의를 받고 50대 50 합작으로 64년 ‘라디오서울’과 ‘동양TV’를 설립했다. 하지만 방송사 경영이 시원치 않은 와중에 두 그룹에서 파견된 임직원간 알력이 심해졌고 결국 TV는 LG가 라디오는 삼성이 맡아서 하기로 잠정 합의를 봤다. 이후에도 TV와 라디오 사업의 정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구 회장은 일본으로 건너가 이 회장을 만나 TV사업까지 삼성에 넘기기로 결정한다.LG내부에서는 불만이 많았지만 구 회장은 사돈간의 ‘불화’가 더 이상 계속돼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80년대에는 택배사업 진출을 계획했다가 사돈과의 정리를 생각해 포기했다. 당시 기획조정실에서는 21세기 물류산업의 꽃이라고 불리는 택배사업을 유망한 신규 사업으로 선정, 일본의 택배사업을 벤치마킹하고 계획을 수립했지만 사돈인 한진그룹에서 택배(한진택배)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구자경 회장이 사업중단을 지시했다.LG와 한진은 구자경 명예회장의 동생인 구자학(75) 아워홈 회장의 2녀 명진(41)씨가 한진그룹 고 조중훈 회장의 4남 조정호(47) 메리츠증권 회장과 결혼하면서 사돈으로 맺어졌다. ●창업주의 사람들 구인회 창업회장은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우다 열네살때인 1921년에야 지수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한다.24년에는 서울로 상경,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녔지만 19세때인 26년 처가에서 보내주던 학비가 끊기고 본인의 뜻도 있어 낙향, 사업의 꿈을 키운다. 구 회장은 사업을 키워가면서 동생들을 뒷바라지했고 동생들은 좋은 학교를 졸업한 뒤 형의 사업을 성심성의껏 도왔다. 한때 구씨, 허씨 일가가 너무 많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지만 구씨, 허씨들 가운데는 경영능력을 갖춘 이들이 적지 않았다. 창업회장의 동생들은 초창기 외국원서를 번역해 기계 작동법을 알아내고 수출, 기술도입 등 형이 할 수 없는 해외업무를 도맡아 했다. 첫째 동생 고 구철회씨는 형과 함께 첫 사업인 포목상 ‘구인회상점’을 세웠고 둘째 고 구정회씨는 동경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남도청 토목과에 잠시 근무하다 형의 사업을 도왔다. 구태회(82) LS전선 명예회장은 일본 후쿠오카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마쳤다. 그는 경영보다는 정치권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4대 민의원과 6,7,8,9,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구평회(79) E1 명예회장은 진주고보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마치고 51년 락희화학 이사로 입사했다. 구두회(77) 극동도시가스 명예회장은 진주고보와 고려대 상대,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한일은행에서 잠시 일하다 63년 금성사 상무로 입사했다. ‘골프멤버’였던 사돈인 이보형 제일은행장·홍재선 전경련 회장·경방 김용완 회장, 효성 조홍제 회장 등도 구인회 회장과 교우가 깊었다. ●제2의 창업주 구자경 명예회장 구자경 LG명예회장은 삼촌인 구평회 명예회장과 진주고보에 같이 입학한 뒤 진주사범을 마치고 고향인 지수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50년까지 부산사범대 부속국민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는데 제자들 중에는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 사장,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부인인 한인옥씨 등이 있다. 구 명예회장은 한씨에 대해 “얼굴도 예쁜데다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었다.”고 기억했다. 신 전 부의장은 모 TV프로그램에 출연해 구 명예회장에게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구 명예회장은 50년 락희화학 이사로 입사했지만 공장에서 현장 근로자들과 같이 먹고 자며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구인회 회장은 생전에 왜 장남을 그토록 고생시키느냐는 질문에 “대장장이는 하찮은 호미 한 자루 만드는데도 담금질을 되풀이해 무쇠를 단련한다. 내 아들이 귀하니까 저렇게 일을 가르치는 것이다.”고 대답했다. 덕분에 그는 현장에서는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의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69년 12월31일 구인회 회장이 뇌종양으로 세상을 뜬 직후인 1970년 1월6일 열린 럭키그룹 시무식에서 구철회 락희화학 사장은 본인의 경영 퇴진과 구자경 당시 금성사 부사장의 회장 추대를 제안했고 이는 우레와 같은 박수로 통과됐다. 구 회장 취임 이후 1년간 그룹 기획조정실장을 맡아 준 사람은 삼촌인 고 구정회 사장이었다. 조카를 ‘보필’하는 삼촌은 LG가의 저력을 잘 말해준다. 구자경 신임회장은 “선대 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인화단결과 상호협조를 통해 그룹의 부드러운 기업풍토를 조성하는데 힘쓰고 급속한 확대보다는 내실있는 안정적인 성장에 주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락희화학, 금성사 등 11개 계열사를 갖고 시작한 구자경 회장은 95년 2월 이임할 때까지 LG를 한차원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는다. 취임 첫 해인 70년 520억원에 불과하던 그룹매출은 94년 30조원을 넘어섰고 수출은 3100만달러에서 147억달러로 474배나 늘어났다. ●늘 꿈이었던 농사일에 매진 구 명예회장은 장남 구본무 회장에게 그룹 회장직을 넘겨주면서 “앞으로 여의도 본사에는 일주일에 한번만 출근할 것이다. 모든 경영은 신임 회장에게 맡긴다.”고 약속했다. 구태회·평회·두회씨 등 창업주 형제들과 허준구·허신구 회장도 고문으로 물러났다. 충남 천안의 ‘천안연암대학’으로 내려간 구 명예회장은 버섯재배 등에 심혈을 기울이며 10년전 약속을 지키고 있다. 주중에는 천안에 머물다 주말에는 서울 성북동 집으로 올라오는데 매주 월요일에만 트윈타워로 출근한다. 하지만 구본무 회장 집무실인 30층 대신 32층으로 직행, 본인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복지재단·문화재단 업무만 보고 오후에는 천안으로 내려간다.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구 회장 얼굴을 보지 않고 그냥 가는 경우가 많다. 분재, 장미재배를 거쳐 버섯재배로 이어진 구 명예회장의 왕성한 취미활동은 요즘 된장, 생면, 만두 등 유기농 먹을거리로 확대되고 있다. 구 명예회장은 선친이 두산, 경방그룹 회장과 함께 1956년 서울컨트리클럽에서 발족한 ‘단오회’와 진주중 15회 동창회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있으며 능성구씨 대종회장을 맡고 있다. 단오회에는 김각중 경방 회장, 김상홍 삼양사 명예회장, 선친을 치료했던 이동렬 박사 등이 참여하고 있다. 진주중 동창인 고 이규호 전 문교부 장관도 생전에 절친한 사이였다. 고 정주영 회장도 전경련 회장단 활동 등을 통해 남다른 친분을 쌓았다. ●20년 경영수업 받은 ‘구병장’ 구본무 회장은 연세대 상학과에 다니다 육군 현역으로 입대했다. 재벌 총수 가운데 현역 출신은 쉽게 보기 어렵다. 보병으로 만기 제대후에는 미국 애슐랜드대로 유학을 떠났다. 클리블랜드주립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구 회장은 30세때인 75년 럭키(현 LG화학)의 심사과(사업의 적정성을 평가하는 부서로 사업전반을 이해할 수 있음) 과장으로 입사했다. 당시 심사과에서 같이 근무했던 직원이 구 회장의 ‘핵심참모’인 강유식(57) ㈜LG 부회장이다. 강 부회장은 청주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72년 럭키에 입사했다.97년 회장실(구조조정본부)로 소속을 옮겼고 99년 구조조정본부장을 맡으면서 그룹 구조조정과 지주회사 체제 전환을 진두지휘했다. 구 회장은 아버지처럼 ‘험한’ 고생은 하지 않았지만 81년에야 금성사 이사로 승진할 정도로 차곡차곡 경영수업을 받았다. 럭키 심사과장, 수출관리부장, 유지사업본부장을 거쳐 80년 금성사(현 LG전자)로 옮겨 기획심사본부장을 맡았고 83∼84년에는 도쿄 주재원으로 근무했다. 입사 10년만인 85년에야 기획조정실 전무로 그룹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95년 회장 취임사에서 ‘초우량 LG’를 약속했던 구 회장은 인터넷, 홈쇼핑, 이동통신, 통신 등에 잇따라 진출하며 사세를 넓혀갔고 필립스와 합작으로 LCD사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빅딜’과 ‘LG카드 사태’로 반도체, 금융사업에서 손을 떼는 등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1등LG를 이끄는 사람들 지금까지 LG그룹을 상징해 온 ‘인화’는 구본무 회장 대에 이르러 사실상 ‘일등주의’로 바뀌었다.LG는 그동안 ‘인화정신’이 결코 ‘온정주의’가 아니라고 항변해 왔지만 삼성그룹에 비해 LG그룹의 분위기가 다소 느슨해 보인 것은 사실이다. 요즘 LG가 거의 매일 쏟아내는 ‘강한 승부욕’,‘독종정신’,‘다이내믹’ 등은 LG가 온건하고 점잖은 반면 보수적이고 느린 조직에서 ‘환골탈태’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구 회장이 주력 계열사인 LG전자를 김쌍수(60)부회장에게 맡긴 것도 생활가전사업을 1등으로 만든 그의 ‘뚝심’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김 부회장은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부진을 면치 못하던 휴대전화 사업을 ‘비전문가’인 박문화(55) 사장에게 맡겨 새로운 도약을 주문했다. 오디오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박 사장은 LG의 ‘광스토리지’ 사업을 7년 연속 세계 1위로 끌어올린 주역이다. LG에서 독립한 다른 친척이나 형제와 달리 주력사인 LG필립스LCD 부회장을 맡고 있는 둘째동생 구본준(54) 부회장 역시 1등에 대한 집념이 남다르다. 경복고 서울대 계산통계학과, 미국 시카고대 대학원 경영학과를 나온 구 부회장은 한국개발연구원(KDI), 미국 AT&T를 거쳐 86년 금성반도체에 입사했다. 반도체를 현대그룹에 빼앗기다시피 넘겨주는 것을 눈으로 지켜본 뒤 99년부터 LG필립스LCD 대표를 맡아 세계적인 LCD업체로 키워왔다. ●숨어있던 승부사기질 발휘되나 소탈하고 인자해 보이는 구 회장의 이면에는 무서울 정도의 집념과 승부욕이 도사리고 있다는 평이다. 구 회장의 집념은 그가 하늘을 나는 모습만 보고도 무려 150여종의 새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조류학’에 조예가 깊은 것에서 잘 나타난다. 중학교때 산에 올랐다가 우연히 다친 새 한 마리를 발견, 집에 데려와 치료해 준 인연으로 새에 관심을 갖게 된 구 회장은 2000년에는 ‘조류도감’을 낼 정도로 새에 관해서는 전문가다. 여의도 LG트윈빌딩에 둥지를 튼 천연기념물 ‘황조롱이’가 구 회장의 각별한 보살핌덕에 무사히 새끼를 낳은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동생 구본능(56) 희성그룹 회장도 최근 ‘사진으로 보는 한국야구 100년’을 발간할 정도로 야구에 대한 관심이 보통이 아닌데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정은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람좋아 보이는 구 회장이 거의 ‘경멸’할 정도로 싫어하는 부류가 있는데 준비하지 않는 불성실한 사람이다. 구 회장은 연습장에서 충분히 연습하지 않고 무작정 골프장에 나타나는 초보자를 무척 싫어한다고 한다. 더 싫어하는 부류는 ‘트리플보기(이븐파보다 3타를 더 치는 것)’를 하고도 ‘히죽히죽’ 웃는 사람이다. 다시는 트리플보기같은 치명적인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계열사 사장들을 평가할 때도 이같은 기준이 적용된다. 구 회장은 특별히 운동에 소질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끈질기게 연습에 매달려 한때 핸디캡 5∼6 수준까지 끌어 올렸다고 한다. 환갑을 맞은 지금도 핸디 8∼9 정도를 친다. 구 회장은 지난 3월 구 명예회장 시절 선포한 경영이념인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와 ‘인간존중의 경영’에 ‘1등LG’를 더한 ‘LG Way’를 새로운 기업문화로 천명했다.10여년에 걸친 계열분리를 마무리지은 구 회장은 ▲고객이 신뢰하는 LG▲투자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LG▲인재들이 선망하는 LG▲경쟁사들이 두려워하면서도 배우고 싶어하는 LG를 목표로 재도약을 시도하고 있는데 그의 집념과 승부사기질이 앞으로 어떻게 발휘될지 재계가 주목하고 있다. 구 회장은 지난해 동국제강 창립 50주년 기념식에 이례적으로 참석할 정도로 장세주 회장과는 친분이 깊은 편이다. 장 회장의 숙부인 장상돈 한국철강 회장의 딸 인영(37)씨가 구 회장의 당숙인 구자은(41) LS전선 상무와 결혼해 사돈지간이기도 하다. 만화가 허영만씨와도 교류가 있는데 허씨는 인기작 ‘식객’에서 구 회장이 임직원들에게 맛있는 삼계탕을 사주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단출한 네식구 구 회장은 72년 김태동 전 보사부 장관의 딸인 김영식(53)씨와 결혼했다. 김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다닌 ‘재원’으로 서구적인 외모의 미인이었다고 한다. 시아버지 구자경 명예회장은 “보수적인 며느리를 원했는데 맞고보니 맏며느리는 개방적이고 아래 며느리들이 보수적이었다. 뒤바뀐 감도 없지 않지만 그만하면 잘 맞는 편”이라며 만족하는 분위기다. 구 회장 부부는 금슬이 좋기로 유명하지만 ‘내외’가 분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 회장이 주말에 곤지암에서 골프를 치다 부인이 일행들과 골프를 치는 것을 보고 나무랐다는 일화도 있다.LG 소유인 곤지암은 주말에 주로 계열사 임원들이 비즈니스 차원에서 애용하는데 ‘회장 부인’이 나오면 임원들이 불편해 한다는 이유다. 김씨가 다른 그룹 회장 부인과 달리 미술관을 맡지 않은 것이나 여의도 트윈타워에 한번도 나오지 않은 것도 LG가의 엄격한 ‘단속’ 때문이다. 구 회장은 지난해 양자로 들인 구광모(27)씨와 연경(27)·연수(9) 두딸을 두고 있다. 광모씨는 병역특례인 산업기능요원으로 국내의 한 IT솔루션업체에 근무하고 있다. 올해 병역을 마치면 미국 뉴욕주의 로체스터 인스티튜트공대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할 예정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양자로 입적된 뒤 ㈜LG와 LG상사 지분을 대폭 늘려 ‘경영승계’가 가시화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하지만 LG측은 “광모씨의 양자입적은 ‘제사 지낼 장손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구자경 명예회장의 뜻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4세 경영’과는 관련이 없다.”고 일축했다. 연세대 사회사업학과를 마치고 미국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있는 연경(27)씨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막내딸 윤형(26)씨와 함께 재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붓감’이다. ukelvin@seoul.co.kr ■3공화국서 “소총 만들어보라” 권유 구인회 “유망해도 무기는 싫다” 거절 LG화학은 한때 자회사를 통해 ‘비데’사업을 하다 그룹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다. 타일, 욕조 등 욕실 인테리어사업에 비데를 함께 취급하면 고객들에게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시작했지만 구본무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첨단기술로 해외시장을 노리는 제품도 아닌데 돈이 된다고 해서 ‘품위’에 맞지 않는 제품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LG에서 계열분리된 지 1년이 지난 지난해 말에도 LG카드의 부실이 해결되지 않자 채권단은 또 한번 LG그룹의 지원을 요청했다.LG측은 “이미 1조원이 넘게 지원을 한데다 그룹에서 분리된 회사를 무슨 근거로 지원하느냐.”며 강하게 반발했지만 구 회장의 ‘결단’으로 출자전환을 결정했다. 구 회장은 LG카드 기업어음(CP)을 갖고 있던 친척들에게 일일이 양해를 구해가며 출자를 부탁했다고 한다. 삼성과 공동으로 시작했던 방송사업을 넘겨준 것이나 택배사업 진출을 계획했다 직전에 포기한 것도 ‘사돈간의 불화’로 세인들의 지탄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LG가 이처럼 ‘세간의 평판’을 신경쓰는 것은 엄격한 유교가문의 장손인 고 구인회 창업회장의 경영철학에서 비롯됐다. 구인회 회장은 도박이나 술 등 사행산업은 물론 이른바 ‘먹고 마시는’일과 연관된 소비성 사업, 부동산 투자도 금지할 정도로 엄격했다. 나중에야 필요에 의해 인터컨티넨탈호텔을 설립했지만 한때는 호텔사업도 LG의 ‘금지리스트’에 올라 있을 정도였다.3공화국 당시 정부로부터 “소총을 만들어 보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도 “우리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것은 고마우나 아무리 유망한 사업이라도 무기는 만들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을 정도다. 하지만 냉혹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이같은 ‘체면 경영(정도경영)’은 자칫 수익성 좋은 사업 기회를 놓칠 수 있고 공격적인 확장에도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LG관계자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어가며 일등할 생각은 없다.”면서 “좋은 품질과 서비스를 갖추면 무리한 방법을 쓰지 않아도 고객들이 인정해준다는 것이 구 회장의 지론”이라고 말했다. ukelvin@seoul.co.kr ■구씨 3대의 반도체 인연 현대전자와 LG반도체가 합병돼 설립된 하이닉스반도체의 ‘새 주인’이 누가될 것인지를 놓고 재계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매각대금이 3조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보이는 이 대형 매물의 유력한 새 주인으로 전 주인인 LG가 거론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LG는 하이닉스 인수설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검토할 일도 없다.”며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40년 가까운 구씨 3대의 반도체 인연이 그리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중론이다. LG는 구인회 창업회장 생전인 69년 미국 NSC의 기술제공으로 반도체 회사인 금성전자를 설립했다. 초대 사장은 구자두 현 LG벤처투자 회장이었다. 금성전자는 1차 오일쇼크 등으로 73년 금성사에 흡수합병되면서 주춤했지만 74년 삼성 이건희 회장(당시 동양방송 이사)이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것 등에 ‘자극’받아 75년 반도체팀을 만들고 미국 AMI와 합작 공장을 설립하는 등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79년에는 대한전선의 대한반도체를 인수, 금성반도체를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초대 회장은 구자경 현 명예회장, 사장은 이헌조 현 LG그룹 고문이었다. 금성반도체는 이후 85년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세번째로 1메가롬(ROM)을 개발하는데 성공하고 금성일렉트론으로 이름을 바꾼 뒤 90년 1메가 D램,91년 4메가 D램을 잇따라 내놓으며 삼성전자와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하지만 LG는 98년 정부의 ‘빅딜정책’의 ‘희생양’이 되면서 반도체사업을 현대그룹에 양보하게 된다.99년 1월6일 청와대를 방문한 구본무 회장은 전자사업이 주력인 LG에 반도체사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했지만 이미 현대측과 ‘얘기’가 끝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귀에 구 회장의 ‘절규’가 들릴 리 만무했다. 이날 밤 이헌조, 변규칠, 성재갑 등 LG의 원로들이 마련한 위로자리에서 구 회장은 모처럼 통음을 했다. 일부에서는 구 회장이 ‘통곡’을 했다고 하지만 ‘통한의 눈물’을 보인 정도였다는 것이 당시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서울 한남동 구 회장의 집앞에 진을 친 기자들은 자정이 넘어 귀가하는 구 회장을 붙들고 ‘소감’을 물었고 구 회장은 “다 버렸습니다.”는 말로 3대를 내려오며 30년간 이어진 반도체와의 인연을 정리했다. ukelvin@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U사 대표 불러 1억 출처 조사

    청계천변 재개발 특혜의혹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 유재만)는 양윤재(56·구속) 서울시 행정2부시장이 설립한 도시설계용역 벤처업체인 U사 대표 김모(31)씨를 상대로 U사의 수주 내역 및 양 부시장 집무실 등에서 발견된 김씨 명의 통장 2개에 입금된 1억원의 출처 등을 집중 조사했다. 양 부시장의 제자인 김씨는 2003년 12월 U사 대표이사에 취임했으며 양 부시장의 추가 수뢰 혐의가 알려진 뒤 잠적했다가 이날 변호인과 함께 검찰에 자진출두했다. 검찰은 또 세운상가구역 32지구 재개발 시행사인 H사 대표 장모(50)씨가 양 부시장 친구의 동생인 광고업체 대표 서모(52)씨를 통해 양 부시장에게 로비를 한 정황과 관련, 양 부시장 집무실에서 발견된 서씨의 청탁메모에 적힌 대형 건설업체 P사 간부의 개입 여부를 조사중이라고 밝혔다. 메모 앞면에는 용적률 확대와 (심의)일정단축 등의 내용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시공사인 P사 임원 이름이 기재돼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양 부시장이 건축설계업체인 N사에서 1억여원을 받은 정황을 추가 포착, 돈의 성격을 조사중인 것으로 알려졌다.N사 대표 박모씨는 지난 11일 검찰의 압수수색 직전 필리핀으로 출국한 것으로 확인됐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부시 산악자전거 타던중… 라이스 보고 못받아

    백악관 상공에 바짝 접근한 경비행기 소동 때 대테러 전쟁을 진두지휘해야 할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집무실에서 인터뷰하느라 상황을 전혀 보고받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경비행기가 백악관 상공 3마일까지 접근했을 때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러시아와 동유럽 순방으로 쌓인 여독을 푼다며 메릴랜드주에서 고교 동창과 함께 산악자전거를 즐겼던 것으로 확인됐다.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에 돌아온 것은 상황 종료 후 1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앤서니 윌리엄스 워싱턴 DC 시장은 테러경보가 발령된 순간까지 어떤 보고도 받지 못해 뒤늦게 분통을 터뜨린 것으로 알려졌다. 딕 체니 부통령과 부인 로라 여사, 그리고 그녀를 찾아온 낸시 레이건 여사 등은 백악관 관저를 빠져나와 인근 지하 벙커로 무사히 대피했다. 그러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과 리처드 마이어스 합참의장은 국방부 청사에서 대피하지 않은 채 상황을 지켜본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는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2만 4000여명의 직원에게 일절 대피령이 없었던 것을 놓고 CNN은 혹시 몰랐던 것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내 인생의 등대] 서찬교 성북구청장

    [내 인생의 등대] 서찬교 성북구청장

    9급으로 공무원생활을 시작해 1급 관리관까지 올라 ‘공무원 신화’를 만들어낸 서찬교(62) 성북구청장은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나 글귀를 소개해 달라고 하자 주저없이 성경을 펼쳐들었다. 구청장 집무실에 있는 그의 책상 한쪽에는 대형 성경이 곱게 자리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온누리교회 장로가 된 뒤 목사님에게 선물받은 것이라고 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서 구청장은 이사야 41장 10절의 일부를 읽어주며, 이 구절이 지난 40년간의 ‘험난했던’ 공무원 생활을 받쳐준 가장 든든한 힘이었다고 강조했다. 승승장구했을 것 같은 서 구청장의 공무원 생활도 ‘위기의 계절’은 있었다. 그는 건설부(현 건설교통부)에서 공직에 입문해 총리실을 거쳐 서울시까지 3개 부처를 옮겨다녔다. 그런데 옮길 때마다 ‘새 직장’의 직원들로부터 보이지 않는 ‘왕따’와 ‘견제’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을 쏟아 냈을 것”이라면서 “나는 오히려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서 더 열심히 일했다.”고 회상했다. 서 구청장은 자신의 이런 모습을 일종의 ‘순응의 미학’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무리 열악하고 힘든 상황일지라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순응’은 순치(馴致)나 굴종과는 전혀 다르다.”면서 “순응을 미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 구청장의 경우 스스로를 믿을 수 있도록 해준 가장 큰 힘이 종교였던 것이다. 그는 종교 다음으로 ‘훌륭한 친구’들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다고도 밝혔다. 그가 스스럼 없이 ‘훌륭한 친구’라고 말한 사람은 삼성석유화학 허태학 사장과 고향 중학교 친구인 고(故) 제정구 의원이다. 서 구청장은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성공한 두 사람을 보면서 나 역시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면서 “제정구 의원으로부터는 정치분야를, 허태학 사장으로부터는 경영분야를 본받으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현재 성북구청장으로서 정치와 행정과 경영이 접목된 ‘행정 CEO’를 하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며 웃음 지었다.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부시, 지하벙커 대피 소동

    |워싱턴 연합|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27일(현지시간) 백악관 상공의 비행금지구역이 뚫렸다는 경보에 따라 지하 벙커로 긴급 대피했다가 즉시 잘못된 경보로 밝혀져 집무실로 돌아가는 소동이 벌어졌다고 AP통신이 전했다. 정체불명의 항공기가 비행금지구역을 침범했다는 경보는 딕 체니 부통령에게도 전달돼 안전지대로 피신했다. 백악관 일부 보좌진 역시 서관 사무실에서 대피했으며, 동관을 관람하던 관광객들도 백악관 건너편 공원쪽으로 긴급 호송됐다. 또 무장 비밀경호원들이 백악관 주변에 긴급 배치됐으나, 수분 만에 잘못된 경보로 밝혀짐에 따라 비상이 해제됐다고 스콧 매클렐런 대변인 등 백악관 관계자들이 전했다.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 경내 지하벙커로 피신한 것은 지난 2001년 9·11 테러 당일 밤 이래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호당국은 비록 잘못된 경보였긴 하지만 비행금지구역 침범 징후는 있었기 때문에 “그게 진짜 뭐였는지”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 육·해·공군 참모총장 민간정책보좌관 둔다

    육·해·공군 참모총장을 보좌할 민간인 정책보좌관제의 도입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윤광웅 국방장관은 최근 육·해·공군 참모총장을 보좌하는 정책보좌관의 신설 문제를 적극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고 국방부 관계자가 27일 밝혔다. 3군 총장들이 오랜 기간 야전 지휘관으로 있었고, 집무실이 충남 계룡대에 있는 만큼 국회관계 등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 사회에 대한 현실 감각이 다소 떨어져 이같은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추진되는 것이라고 이 관계자는 설명했다. 정책보좌관제 도입이 확정될 경우 올 상반기 중에 채용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對) 국회 업무에 해박한 민간인 출신이 맡게 될 정책보좌관은 2급 상당 군무원 계약직으로, 임기가 2년인 각군 총장과 임기를 같이 할 가능성이 높다. 국내·외 현안에 대한 정확한 상황 판단으로 지휘관이 결심을 하는 데 조언해 줄 것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일각에서는 국방부 본부 문민화 방침이 순수한 군인조직인 각군 본부로까지 확산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없지 않다. 한편 국방부는 현역 725명 중 346명(48%)을 올해부터 오는 2009년까지 207명(29%)으로 139명 줄이고 현역 장성 및 장교가 맡아온 32개 보직을 연내 민간인에게 넘기는 현역 편제 및 직제조정 계획을 확정한 바 있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⑦-한라건설·성우그룹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⑦-한라건설·성우그룹

    한라건설이 역사속으로 사라진 한라그룹을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재기의 불씨를 살리기 위한 풀무질에 매진하고 있는 주인공은 정인영(85) 전 한라건설 명예회장의 차남인 정몽원(50) 회장이다. 한라는 정주영 전 현대 명예회장의 바로 아래 동생인 정인영 한라그룹 전 명예회장이 황무지에서 일궈낸 그룹이다. 형님과 함께 현대건설 초석을 다지는 동시에 독자적으로 창업했다. 소비재·경공업 제품보다는 장치산업 중심으로 키웠고 21개 계열사를 거느리면서 재계 12위를 기록할 정도로 성장했던 기업 집단이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계열사끼리 상호출자·지급보증이 족쇄로 작용, 그룹 전체가 한꺼번에 쓰러지는 운명을 맞게 되면서 계열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현재는 한라건설이 간신히 명맥을 잇고 있다. 한라건설은 연간 매출 규모 8000억원 규모인 중견업체로 자회사도 없다. 그래서 한라건설은 한라그룹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정 회장의 직책도 ‘한라건설 회장’이고, 정 명예회장 직책도 ‘한라건설 명예회장’이다. ●미군 공병대 일감 현대건설 연결 정 명예회장은 동아일보 신문기자 출신이다.14세에 무작정 상경, 야간 YMCA야간 영어과 2년을 다닌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학으로 아오야마(靑山)학원대학 야간 영어과 2학년을 중퇴하고 귀국, 동아일보에 둥지를 틀었다. 운명은 한국전쟁이 갈라놓았다. 외신부 기자였던 그는 형과 둘이서 피란길에 올랐다. 대구에서 한 일간지 편집일을 했고, 형은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부산까지 내려간 두 형제는 두 끼 먹을 밥값밖에 없어 유일한 재산이던 손목시계를 잡히기 위해 전당포를 들렀다가 미군 사령부 통역 모집 광고를 접했다. ‘왕 회장’은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동생이 미군 통역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인영이가 통역으로 취직하면 미군 식당에서 나오는 빵부스러기를 가져와도 먹는 것은 해결될 것이라면서 통역 취직을 했다.”고 회고했다. 자서전은 “아우가 공사라도 해서 밥을 먹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공병대 장교 통역을 자원했는데 일이 뜻대로 잘 풀렸고, 공병대 일감을 현대건설에 연결해 줬다.”고 적고 있다. 이것이 현대건설이 미군 공사를 휩쓸면서 기업을 키울 수 있는 발판이 됐다. 이를 인연으로 정 명예회장은 1951년 현대건설 전무로 입사,61∼76년 현대건설 사장을 맡아 ‘왕 회장’과 함께 현대건설의 초석을 다진 장본인이다. 휴전 이후에는 국내 공사 수주에도 적극 나선다. 그러나 공사를 잘못 수주하는 바람에 미군 공사에서 알뜰하게 벌어들인 돈을 몽땅 털어넣고도 모자라 ‘왕 회장’은 자신의 집과 동생, 매제(김영주 한국프랜지공업 명예회장·85) 집까지 팔아 공사비를 충당했지만 엄청난 적자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57년 한강 인도교 공사를 수주,40%의 이익을 거두면서 ‘건설 5인조’에 들어갈 만큼 성장했다. 그 뒤 해외건설 시장에 진출,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자신감과 경쟁력을 기르고 ‘세계속의 현대건설’로 성장하는 데 한 축을 맡았다. ●현대양행에서 출발, 중공업에 치중 한라그룹은 정 명예회장이 1962년에 세운 현대양행에서 출발한다. 이 때는 정 명예회장이 ‘왕 회장’과 함께 현대건설의 초석을 다질 때였다. 정 명예회장은 현대건설 사장으로 일하면서도 “부존자원 없는 나라에서 중공업 개발 없이는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없다.”면서 62년 경기도 군포에 독자적으로 세운 기업이 바로 현대양행이다. 그는 76년 현대건설 사장직을 내놓았지만 현대양행은 80년 정부의 산업합리화 조치에 따라 포기해야 했고, 대신 중공업을 중심으로 그룹을 구성하게 됐다. 단일 공장으로 최대 규모인 130만평 부지에 창원종합기계공장(현 두산중공업)을 건설해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후 시멘트와 건설, 조선소, 제지, 자동차 부품, 중장비 등을 생산하는 기업을 잇따라 설립하면서 한라는 장치산업 중심의 그룹으로 우뚝 섰다.96년에는 자산 6조 2000억원, 매출 5조 3000억원, 종업원 2만여명이 딸려 있는 재계 12위의 대기업 군으로 성장했다. 주력 기업은 만도기계, 한라중공업, 한라건설, 한라시멘트 등이었다. 정 명예회장은 그룹을 키우는 동안 입버릇처럼 달고 다닌 말이 있다.“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경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가까이서 그를 본 사람들은 유별난 ‘독서광’이라고 말한다. 출장길이나 차안에서도 영자 신문은 물론이고 경제경영 관련 책이 손에서 떠나질 않았다. 기업 경영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캐내 읽을 정도였다. 집무실에서도 불편한 손으로 영어단어를 외우고 돋보기를 들이대면서까지 셰익스피어전집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정신력도 대단했다. 중풍으로 쓰러진 뒤에도 의지를 갖고 치료를 받았으며, 경영에 소홀하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썼던 기업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휠체어의 부도옹’‘오뚝이 기업인’‘프런티어 기업인’이란 별명을 붙여줬다. 명예회장 자신이 왕성하게 활동하였던 터라 2세에게는 계열사 사장을 맡기는 것으로 족했다. 그러나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휠체어를 타고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경영권을 2세에게 물려주기 위한 수순을 밟았다. ●재계 12위그룹, 건설이 명맥 유지 96년 말 한라그룹의 상황은 다른 대기업 집단과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계열사간 상호 출자와 지급보증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다.96년 말 한라의 경영상태는 부채비율이 현상유지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도로 악화됐다.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만도기계는 수익성이 높고 지주회사 성격을 지녔다. 역시 자동차 부품 회사인 한라공조와 한라건설, 한라시멘트 등이 흑자를 기록했다. 반면 주력기업에 속했던 한라중공업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중공업을 뺀 수익성이 좋은 3개 주력사는 다른 계열사의 지급보증과 채무를 떠안아야 했고 특히 중공업에 발목이 잡혔다.8000억원 이상이 투자된 삼호공단 조성 및 조선소, 플랜트 공장 건설이 뒤따랐다. 이 때 시작된 자금난이 그룹 부도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보아도 된다.96년 조선소가 가동되기는 했으나 막대한 투자비를 일시에 회수하지 못하고 외환위기를 맞았다. ●그룹 총수도 전셋집, 기업의 사회적 책임 충실 한라그룹이 쓰러질 때는 정몽원 회장 체제였다.97년 1월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 외환위기 파고 때문에 자신의 뜻을 펼쳐보지 못하고 그룹 해체라는 상황을 맞게 됐다. 외환위기라는 복병을 만나는 바람에 아버지가 공격적으로 펼쳤던 사업을 추스르기에도 바빴다. 결국 정 회장은 어려운 결단을 내린다. 우량 회사와 적자 회사를 가릴 것 없이 모든 계열사를 매각하거나 청산 절차에 들어갔다. 기업인으로서 사회적·도의적 책임을 통감하고 자신의 집은 물론 명예회장의 집까지 팔아치우면서까지 모든 것을 버렸다. 재계 12위 그룹 총수였던 명예회장은 지금 전셋집에서 살고 있다. 잘 나가던 만도기계, 한라건설, 한라시멘트 등을 팔고 싶어도 중공업에 서준 지급보증 때문에 매각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발상의 전환을 했다. 외국자본을 들여와 기업을 정상화시키는 방안을 찾던 중 미국계 투자은행 로스차일드가 10억달러 정도를 투자, 주력 업체를 살리는 프로그램을 내놓았고 이를 따랐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사회적 파장을 최소화했다. 기아나 한보 등은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종업원들을 거리로 내몰았지만 한라는 종업원을 그대로 유지했다. 부도 이후에도 생산성이 올라갔고 기업가치도 떨어지지 않았다. 매각된 계열사들이 곧바로 정상을 되찾고 우량 기업으로 태어나는 계기가 됐다. ●그룹 경영권 차남에게 지명 정 명예회장의 장남 몽국(52)씨는 89년부터 92년까지 한라그룹 부회장을 맡았다. 그러나 94년 말 정 명예회장은 경영능력을 인정받은 차남을 그룹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형 몽국씨는 95년 초부터 그룹 경영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유학갔다. 한때 배달학원(한라대학교)이사장을 맡고 부인 이광희(51) 여사가 총장을 맡기도 했다. 정 회장은 정 명예회장의 2남으로 고려대 상대를 졸업하고 지난 79년 현대양행에 입사해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했다.89년 만도기계 사장을 거쳐 92년 한라그룹 부회장으로 부친과 함께 한라를 키웠다. 차남 몽원씨가 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후 형제간에 약간의 갈등도 있었다.2003년 형 몽국씨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본인도 모르는 사이 그룹 기획실에서 임의 처분했다며 민형사고소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최근 대법원은 형사건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고, 민사건은 형제간의 원만한 화해로 ‘왕자의 난’을 비켜갔다. 전문 경영인으로는 김홍두 사장이 있다.78년 한라 공채로 입사,96년 관리 분야 부사장에 올랐다.2003년 이후 사장을 맡고 있다. 한라그룹의 부침을 지켜본 몇 안되는 사람으로 판단이 빠르고 부지런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단조로운 혼맥, 독실한 기독교 집안 한라그룹의 혼맥은 다른 현대가처럼 얽혀있거나 거물급이 눈에 띄지 않는다.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색다른 맛이 없다. 결혼은 자유로웠고 상대 집안도 평범했다. 몽원 회장의 어머니인 고 김월계 여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자연히 두 형제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중매쟁이도 교회였다. 두 형제가 모두 교회에서 만나 결혼했다. 장남 몽국씨는 이광희 여사와 만나 연애 결혼을 했다. 평범한 가정으로 알려졌다. 동생 정 회장도 역시 교회에서 아는 사람의 소개로 홍인화(48) 여사를 만났다. 홍여사는 TBC아나운서 출신이다. 장인·장모가 약사였고 굳이 따지자면 장모가 서상목 전 국회의원 누나다. 정 회장은 최근 다니던 교회 장로로 취임했다. 명예회장도 늦게 교회를 나왔고, 몸이 불편한 관계로 최근에는 집에서 가족 예배를 드리곤 한다. chani@seoul.co.kr ■ 성우그룹 성우그룹의 모태는 현대시멘트다. 1970년 1월 정주영 전 현대명예회장의 둘째 동생인 정순영(83) 당시 현대건설 부사장이 현대건설에서 떨어져 나온 현대시멘트㈜ 사장을 맡으면서 성우그룹의 역사는 출발한다. 당시는 성우그룹이 아닌 현대시멘트라는 단일 회사였다. 현대 방계가 대부분 그렇듯이 성우그룹도 ‘왕 회장’이 덩치가 커진 현대건설의 일부 사업을 떼어주면서 시작됐다. 경제개발 호재를 안고 있을 때라서 출발은 순조로웠다. 현대건설이 국내 시장과 해외시장에서 뿌리를 내릴 즈음이라서 분가도 쉬웠다. 성우그룹이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부터다. 성우리조트를 설립하고 사옥을 현재의 서울 서초동으로 옮기면서부터다. ●그룹 우산 키우기 미미 정순영 당시 현대시멘트 사장은 5년 동안 시멘트 단일 품목에만 손을 댔다. 그러다가 75년 현대종합금속을 세워 그룹의 덩치를 키운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룹의 위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추가 사업 영역을 넓히기 위해 고심하던 끝에 찾은 것이 자동차 부품산업이었고,87년 성우오토모티브를 설립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자동차 산업 발전 추세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룹 우산을 제대로 펴기 시작한 것은 현대시멘트를 독립 운영하기 시작한지 20여년이 지나면서부터다.95년에 성우종합레저를 설립, 강원도 둔내에 대규모 레저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같은 해 사옥을 지금의 서울 잠원동에서 서초동으로 옮겼다. 이 때부터 ‘성우그룹’이 통용되기 시작했다.92년에는 성우종합건설을,96년에는 성우전자를 잇따라 그룹사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시멘트와 자동차 부품사, 건설을 뺀 다른 업체들의 경영실적은 영 신통치 않았다. 몇몇 업체는 부도를 맞기도 했고 그룹 위상도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결국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다른 그룹보다 경영권 이양작업을 서둘러 진행했다. ●경영권 이양, 순조롭게 마무리 정 명예회장은 2세들에게 외국 유학을 다녀온 뒤 일찍부터 경영수업을 받도록 했다. 주로 시멘트를 거치도록 했다. 다만 딸과 사위들은 성우그룹 경영과 거리를 두었다. 장녀도 사위가 먼저 세상을 떴지만 단지 현대시멘트 고문으로 있다가 최근 별세했다. 차녀도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사위 역시 개인사업을 한다. 경영권은 97년 1월에 이전됐다. 경영권을 넘기는 과정에서 잡음이 거의 없었다. 정 명예회장은 가급적 자식들이 경영 수업을 받을 때 맡았던 분야를 떼어주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단순 주식분배 차원이 아닌 전공을 찾아 맡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계열분리가 이뤄지도록 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정 명예회장은 장남 몽선씨에게 그룹의 주력 기업이던 현대시멘트를 잇도록 했다. 자신과 정 회장이 오랫동안 경영에 참여했던 분야다. 현대시멘트는 시멘트 사업부와 성우리조트를 개발·운영하는 레저사업부를 포함하고 있다. 현재 국내 시장 점유율 3∼4위를 지키고 있다. 성우종합건설도 장남의 몫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일반 건설사처럼 민간 공사 수주에 적극 나서지 않고 자체 공사와 관계사 공사를 벌일 정도다. 신생 회사 성우이컴도 정 회장이 지휘한다. 골프장 관리·운영 전문 업체라고 할 수 있다. 2002년 4월에는 형제간 계열 분리도 마쳤다. 주력기업인 현대시멘트는 부실기업인 성우전자 성우정보통신 성우캐피탈 등 3개사를 계열사에서 제외해버렸다. 정몽훈(46) 성우전자 회장이 지분을 갖고 있던 회사다. 이로써 형제간 지분정리까지 마치게 됐다. 둘째아들 몽석(47) 회장은 현대종합금속을 받았다. 포항 공장에서 용접봉과 카바이트를 만들어내는 회사다. 현재는 용접봉만 생산한다. 울산 현대중공업 조선소에 많은 양을 납품한다. 3남 몽훈 회장은 성우전자, 성우캐피탈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사실상 경영에서 물러서 있다. 막내 몽용(44) 회장은 88년 성우오토모티브와 현대 에너셀을 맡아 왕성한 경영활동을 펼치고 있다. 주로 자동차 부품생산업체를 물려받았다. 오토모티브는 자동차 시트, 알루미늄 휠 등을 생산하는 회사. 포항공장에서 자동차용 주물을 생산, 현대자동차에 납품하고 있다. 충주공장에서는 자동차 알루미늄 휠을 전문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시트 생산 부문은 지난해 말 현대자동차 계열사에 매각했다. 에너셀은 자동차용 배터리 생산업체다.㈜성우는 육상 시멘트 화물 운송 회사다. ●드러내기 싫어하는 성우그룹 혼맥 현대가의 혼맥이 그렇듯이 성우그룹에도 특별히 튀는 집안이 없다. 그런데도 성우그룹은 혼맥이 드러나는 것을 극구 꺼린다. 혼맥이 비치는 자체를 싫어한다. 장남인 현대시멘트 몽선 회장과 결혼한 김미희 여사(작고)는 집안이 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다. 장남 결혼을 시키면서 말 그대로 평범한 교육자 집안과 사돈을 맺었다. 장인 김태휴씨는 뒤에 현대성우리조트 고문을 지냈다. 김수진 서울대 교수, 차연택 현대백화점약국 대표, 최동일 연세산부인과원장, 정 회장, 전동진 경원대 교수 등이 동서지간이다. 하지만 김 여사는 93년 10월 태릉 아이스링크 선수 대기실에서 둘째딸과 함께 불의의 화재사고를 당했다. 이때 대한항공 조중훈 회장이 전용기를 내주어 일본 행림대학 병원으로 후송, 치료를 받았으나 아깝게도 함께 세상을 달리했다. 이를 계기로 사업상 앙금이 있던 왕 회장과 조중훈 회장이 화해하는 계기가 돼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재혼한 진영심(36) 여사 역시 평범한 집안으로 알려졌다. 둘째아들 현대종합금속 몽석 회장 처가도 대구에서 작은 기업을 하던 평범한 집안이라는 정도밖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셋째 몽훈 성우전자 회장의 장인은 직업군인이었다. 장성으로 예편한 뒤 공기업 임원으로 근무했다는 정도만 알려진다. 하지만 넷째 몽용 성우오토모티브 회장의 결혼 때는 좀 다르다. 잘 알려진 로열 패밀리 가운데 하나인 인촌 김성수가와 사돈을 맺는다. 몽용 회장의 장인이 체육계 원로인 김상겸 박사다. 김 박사는 동아일보와 고려대를 설립한 인촌 김성수의 막내아들이다. 한국 체육 발전에 평생을 바친 전 고려대 명예교수이며 지난해 별세했다. 김 박사는 대한체육회 부회장과 대한스키협회회장, 나가노동계올림픽 한국선수단장, 고려대 사범대학장 등을 지냈다. 장녀, 차녀도 평범한 집안과 결혼했다. 그룹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전문 경영인 전문 경영인은 많지 않다. 직접 경영을 챙기고 있기 때문이다. 김희대(44) 현대시멘트와 성우종합건설 대표이사 부사장은 정 회장의 매제. 미국 하트포드대학원 경영·경제학과를 졸업한 유학파.88년 현대시멘트에 입사, 총괄 부사장을 거쳐 올 1월부터 대표이사 부사장을 맡고 있다. 성우리조트는 엄준섭(53·부사장) 본부장이 정 회장을 돕고 있다. 성우이컴 김연문(55) 대표이사 사장은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와 74년 입사해 경리파트를 맡으면서 명예회장과 정 회장을 지근에서 보좌했다.2001년 부사장에 오른 뒤 2002년부터 이컴 대표이사 사장을 맡아 골프장 개발 운영업을 이끌고 있는 전문 경영인이다. chan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극장업계 성공한 CEO 고은아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극장업계 성공한 CEO 고은아

    장 콕토는 ‘영화란 영상으로 쓰는 문장’이라고 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영화는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면서 시적(詩的) 구조론을 주창했다. 그렇다면, 배우란 무엇일까. 문득 생각해본다.‘문장’이요 ‘시구’가 아닐까. 추억의 영화를 얘기할 때 ‘맞아, 그 배우’하면서 대부분 주인공 배우를 먼저 떠올린다. 한 여인이 있다. 배우가 된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안했다. 청초한 여대생이었을 때, 미술대에서 공예가를 꿈꿨다. 어느날 한 조각가의 화실에서 친구들을 위해 우연히 모델을 했다. 며칠 후 낯선 사람들이 학교에 찾아왔다. 영화 한편 찍자고 했다. 거절했다. 막무가내였다. 결국 영화사 사무실까지 끌려갔다. 사진 한컷만 찍으면 된단다. 얼떨결에 응했다. 이후 인생의 방향이 확 달라졌다. 여대생 ‘이경희’에서 영화배우 ‘고은아’로 바뀌었다. ●은막 떠난지 26년… 97년부터 경영 대표작 ‘갯마을’로 잘 알려진 왕년의 스타 고은아(60)씨. 추억의 팬들에게는 고 육영수 여사와 닮은 ‘정숙한 여인’으로 인상깊다. 또 ‘관능미의 여인’‘과부’ 역을 자주 맡았다.1965년 1월 ‘난의 비가’로 데뷔했으니 올해로 꼭 40년째가 되는 셈이다. 은막을 떠난 지는 26년 됐다. 하지만 여전히 영화 발전을 위해 묵묵히 일을 하고 있다. 주변에서 고씨를 얘기할 때 극장업계의 ‘성공한 CEO’로 꼽는다. 지난 1997년부터 서울극장과 합동영화사 대표를 맡고 있다. 특히 서울극장은 지난해 말 11개의 개봉관을 갖춘 대형 멀티플렉스로 거듭 태어났다. 객석수만 해도 4600여석일 만큼 서울 4대문 안에서는 가장 큰 극장으로 변모했다. 또한 대구 중앙극장, 부산 대영극장, 대전 아카데미극장, 의정부극장 등 4곳의 지방극장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주 서울 종로3가에 위치한 서울극장을 찾았다.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막 타는 순간 고씨의 남편인 곽정환 서울극장회장을 만났다. 고씨를 인터뷰하러 왔다고 했다. 그러자 “난 아니야, 고 사장이 일을 다해. 난 요즘 (뒤로)빠져 있어요.”라며 웃는다. 고씨의 집무실은 서울극장 5층에 자리해 있었다. 창너머 서울시내가 환히 보였다. 이에 고씨는 “서울은 많이 복잡한 것 같아요.”라고 특유의 정숙한 웃음을 짓는다. 요즘엔 서울신문을 열심히 본다고도 했다. 창가에 붙은 포스터 하나가 보였다. 제목은 ‘행복의 나눔’이었다. 고씨는 “원래는 ‘생명의 창고’였다. 쉽게 설명하면 아프리카와 방글라데시 등 세계 각국의 기아를 위한 봉사단체인데 2년 전에 대표를 맡았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얼굴 내미는 것을 싫어하지만 CBS에서 15년 동안 (기아 관련 방송)MC를 맡은 경력도 있고 또 주위의 간곡한 요청으로 ‘행복한 나눔’을 이끌게 됐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서울과 지방 등을 오가는 일이 더욱 많아졌다. 매월 마지막주 목요일에는 젊은이들에게 극장문을 활짝 연다. 다름아닌 서울극장 2관(907석)에서 기독교 예배행사를 갖는 것. 지난 1월부터 시작했다. 대상은 서울극장을 찾는 사람들이다. 말이 예배이지 재즈음악과 가요 등을 곁들인 한마당 놀이나 다름없단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고씨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으며 요즘에는 1000여명이 참석할 정도로 입소문이 점점 퍼지고 있다. ●최근 영화출연제의 받기도 극장 운영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고씨는 “직원이 100여명에 이를 만큼 단일극장으로는 규모가 꽤 커졌다. 어떻게 하면 관람객들이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 있을까 늘 고민한다.”면서 하루에도 수십차례 극장 주변을 돌면서 관객들과 만난다고 했다. 원래 서울극장은 지금의 곽정환 회장이 지난 78년 세기극장을 인수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고씨는 “과거의 영화는 하루에 몇커트를 찍었느냐 하는 열정을 자랑삼아 얘기했지만 지금은 영화산업의 규모 자체가 엄청나게 변했다.”면서 구멍가게 같은 사고에서 벗어나 첨단 과학으로 승부할 때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아울러 97년 극장경영을 본격적으로 맡으면서 컴퓨터와 위기관리 등에 관한 책을 읽고 또 관련 강의도 자주 듣는다고 했다. 온갖 정보 속에서 세상 전체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다. 또한 영화 자체가 현실을 반영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본인 자신도 지금의 세상이 봄바람인지 여름바람인지 직접 쐬어 보려고 많이 노력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요즘 영화계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개봉영화를 대부분 보려 하지만 바쁜 일정 때문에 중간중간 토막을 내서 보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최근에는 ‘달콤한 인생’을 두번 봤고,‘말아톤’을 보면서 내가 고정 관념속에 많이 갇혀 있구나 하는 반성도 하게 됐단다. 영화 출연 제의에 대해 그는 “최근에 모 영화사로 러브콜을 받았지만 아들(서울극장 기획실장)이 ‘엄마가 나오면 서울극장 간판에 얼굴을 어떻게 걸어놓겠느냐.’하는 말을 듣고 거절했다.”며 웃었다. ●가장기억에 남는 출연작 ‘갯마을’ 때마침 남편인 곽 회장이 들어오면서 인터뷰 내용을 엿듣고는 “이 사람의 인생코드는 독실한 신자이기 때문에 영화출연 같은 거 안할 걸요.”하면서 “기독교 방송을 15년이나 한 걸 보세요.”라고 거들었다. 또 “이 사람은 배우로 살려고 하지도 않았고 한때 배우로 분에 넘치는 인기도 얻었다.”고 부연했다. 고씨 역시 “사실 영화에 뿌리 내리는 작업을 못했다. 살아오는 동안 문화적 충돌로 번민도 많이 했다.”면서 “79년 영화계를 떠난 뒤 신앙에 빠져 살면서 ‘(하나님이)왜 영화를 시켰을까. 하는 질문을 자주 던졌다.”고 했다. “처음 데뷔작은 ‘난의 비가’였지요. 청순가련형의 시한부 인생을 사는 여자 역할이었어요. 당시 영화를 찍으면서도 ‘이번 딱 한번이다.’라고 몇번이나 다짐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물론 ‘갯마을’이지요.” 고씨는 영화출연을 거절하기 위해 영화사에 갔다가 후라이보이 곽규석씨가 권하는 바람에 인연이 됐다고 술회했다. 나중에 곽씨와는 CBS에서 10년 동안 방송을 함께 했다.‘고은아’라는 이름은 한운사씨가 ‘정말 고운 아이’라는 뜻에서 붙여줬다. 고씨는 영화보다 주로 TV드라마에 출연했다. 마지막으로 ‘제2공화국’에서 육영수 여사역할에 이르기까지 출연작이 약 100여편에 이른다. “극장운영을 하면서 인생이란 운전자 마음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좌회전도 해야 하고 우회전도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또 고갯마루 올라갈 때에는 다리가 안부러지지만 내리막에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고씨는 어렸을 때부터 일기형식으로 메모하는 습관을 가졌단다. 이는 곧 인생을 살아가면서 귀중한 자료가 됐다. 고씨는 영화배우로 한창 인기를 끌던 20대에 곽 회장과 결혼했다.40년 가까이 결혼생활하면서 부부싸움을 얼마나 했느냐고 하자 곽 회장이 “아니 기운이 있을 때 부부싸움도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린 아직도 기운이 펄펄합니다.”면서 결혼해서 손해봤다는 생각을 안해봤다고 껄껄 웃는다. 고씨 역시 “둘이 오래 살다보니 성격도 비슷해졌다.”면서 사는 동안 소중한 사람으로 수첩에서 정리되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고 말했다. 건강관리를 위해서는 과식하지 않고 일주일에 한번꼴로 골프라운딩을 하며 틈틈이 헬스를 이용한다. 슬하에 1남1녀를 둔 고씨는 일주일에 2∼3회정도 곽 회장과 같이 손을 잡고 출퇴근한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46년 부산 출생 ▲64년 부산여고졸, 홍익대 미술대 공예과 입학 ▲65년 영화 ‘난의 비가’로 데뷔, 은아필름 창립 ▲67년 결혼 ▲80년∼95년 CBS방송 ‘새롭게 하소서’프로그램 진행 ▲97년∼현재 서울극장 대표이사 사장 ▲2003년∼현재 ‘행복의 나눔’ 대표. ▲상훈 72년 영화 ‘며느리’로 대종상 여우주연상,78년 영화 ‘과부’로 제17회 대종상 여우주연상.88년 제5회 문화예술상(방송부문-새롭게 하소서) ▲주요 작품 영화 ‘난의 비가’‘며느리’‘과부’‘갯마을’‘소복’‘물레방아’‘까치소리’‘여자의 얼굴’‘겨울새’‘상노’ 등. 드라마 ‘사모곡’‘추풍령’‘즐거운 우리집’‘은하의 계절’‘제2공화국’ 등.
  • [빌딩 X파일] 여의도 LG트윈타워

    [빌딩 X파일] 여의도 LG트윈타워

    LG의 총사령부격인 여의도 LG트윈타워는 4년여의 공사기간을 거쳐 탄생한 쌍둥이 빌딩이다. 동·서관 모두 135m의 훤칠한 키에 지상 34층·지하 3층 규모로, 연면적은 무려 5만평에 육박하는 매머드급 건물이다. 세계 최초로 유리 바닥재를 사용했으며 강풍에도 끄덕 없도록 풍동시험을 통해 지어졌다. 또 설계 당시부터 대형화재를 대비하기 위해 재난방지 시설도 꼼꼼하게 갖췄다. 여기에는 LG의 양날개인 LG전자와 LG화학을 비롯해 19개 계열사 직원 8000여명이 상주한다. 한강에 인접한 동관에는 화학계열인 LG화학과 LG생명과학,LG생활건강 등이 입주해 있으며 서관에는 LG전자를 포함해 LG애드 등이 자리잡고 있다. 두 건물에서 보는 경치는 동관이 낫다. 동관의 사무실은 마포대교를 오가는 차량행렬과 한강을 감상하는 특권을 지녀, 여의도공원만 눈에 들어오는 서관에 비해 가시권이 좋다는 평이다. 이런 까닭인지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집무실도 동관 30층, 그룹의 지주회사인 ㈜LG도 동관에 있다. 3층에 자리잡은 LG사이언스홀은 460평 규모로,50여년간의 LG 역사를 통해 국내 산업발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코너가 마련돼 있다. 생명과학관을 비롯해 사이언스드라마, 환상체험관, 입체영상관, 신소재ㆍ신기술관 등 8개의 코너로 구성됐다. 개관 이래 줄잡아 350여만명이 다녀갔다. 동·서관을 잇는 지하 1층 아케이드에는 식당가와 전자제품 판매점, 서점, 화장품 코너, 안경점 등 일반적인 사원 편의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같은 층에 들어선 고급 한정식점 ‘노들원’은 은은함이 물씬 풍기는 실내공간으로 아담한 느낌이다.300석 규모의 아메리칸 카페 ‘트윈팰리스’는 매월 셋째주 목요일 저녁 6시부터 무한정으로 제공되는 무료 맥주 이벤트로 유명하다. 이날은 추첨을 통해 여행권과 다양한 경품도 나눠준다. 매월 둘째, 넷째 주말에는 지하 1층 대강당에서 임직원을 위한 최신 영화 상영이 이뤄진다. 일반 사무실로 꽉 채워진 서관과 달리 동관 5층에는 기자간담회 등 각종 행사가 열리는 이벤트홀과 150석 규모의 중식당 ‘도리원’, 일식당 ‘송로’이 있다. 사무실 출입은 ID카드를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출입 통제 시스템이 갖춰졌다. 건물의 규모에 걸맞게 36대의 엘리베이터,1000여대를 수용하는 주차장 등 부대시설도 대규모다. 한때 이 건물에서는 휴대전화가 ‘019’만 수신됐으나 ‘010’의 등장으로 이제는 옛이야기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 [한국을 빛낼 중견기업] 애경 안용찬 사장

    [한국을 빛낼 중견기업] 애경 안용찬 사장

    “실적을 단기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판촉 활동과 이벤트 행사를 늘리는 것은 고통받는 환자에게 치료 대신 마약을 투여하는 것과 다름 없다. 당장은 약 기운에 의지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기업의 목숨을 갉아 먹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곪은 곳은 과감하게 도려내고, 새 살이 될 만한 브랜드를 키우는 것이 늦지만 가장 확실한 기업의 생존 전략이다.” 1995년 7월 취임 이후 9년 연속 흑자경영을 이어오는 안용찬(47) 애경 사장.1등군에 들지 않는 10개의 브랜드보다 단 하나의 1등 브랜드가 회사를 먹여 살린다고 역설한다.‘죽여야 산다.’는 안 사장의 ‘브랜드 경영’의 전제 조건이다. 시장에서 ‘싹수’가 안보이는 잡다한 브랜드를 과감히 죽여,1등이 될 만한 브랜드에 집중하는 것만이 ‘시장을 지배할 수 있다.’는 논리다. 양보다 질을 강조한 셈이다. 안 사장의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브랜드 죽이기’의 연속이었다. 한정된 자본에서 기업의 부채를 줄이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자본의 효율적 분배가 무엇보다 당면 과제였던 것. 다양한 브랜드로 덩치를 키워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려는 기업과는 발상 자체가 반대였다. 애경의 경영실적이 안 사장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10년전 870%에 달했던 애경의 부채비율은 지난해 205%, 올해는 200% 미만으로 떨어진다. 또 매출은 연평균 10%씩 성장, 지난해 3571억원을 기록했다. ●소탈한 전략가 생각보다 동안(童顔)인 탓일까. 국내 생활용품의 대표기업 최고경영자(CEO)인데도 얼굴에 장난기가 다분히 묻어난다. 또 ‘범생’의 모습속에 불량기(?)도 엿보인다. 다부진 체격에 웃음을 머금은 안 사장은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10년간 묻어놓은 이야기 보따리를 한껏 풀어놓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술·담배를 했었죠. 많이 한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께서 좀 개방적이셨습니다. 이왕 할 거면 밖에서 하지 말고 집에서 하라고 할 정도였으니, 당시로서는 ‘깨신’ 분이랄까. 덕분에 친구들이 저희 집에 놀러 오기를 굉장히 좋아했죠. 요즘에는 저도 딸에게 술을 자주 권하는데 싫어하더라고요.” 대학 시절에는 공부뿐 아니라 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수업이 끝나면 교내 헬스센터로 직행했습니다. 들고, 내리고 하다 보면 그렇게 몸이 상쾌할 수 없어요. 지금은 많이 (근육이) 줄었지만 그때는 몸이 남부럽지 않았습니다.”라며 은근히 자랑한다. 그는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의 맏사위이다. 재벌가(家)의 일원으로 젊은 나이에 CEO에 올랐다는 평도 적지 않게 들었을 법도 하지만 막힘이 없다.“(사위라는 점이)기업 경영에 장점이 많아요. 전문경영인은 아무래도 단기 실적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무래도 오너 가족이다 보니 그런 부문은 초월할 수 있잖아요. 기업의 중장기 비전을 세워놓고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 수도 있고, 한 해 실적 나쁘다고 자리에 위협을 느끼는 것도 아니니까…. 초창기에는 장 회장으로부터 꾸중도 많이 들었어요. 제 방 맞은 편(장 회장 집무실)에 많이 갔습니다. 집사람(채은정씨)은 지인 소개로 만났어요. 미국에서 공부하다 일시 귀국한 터여서 잠깐 연애하다 바로 미국으로 되돌아갔죠. 어느 유학생 부부와 다름 없이 고생하면서 공부했습니다.” 안 사장은 국내 생활용품 시장에서 탁월한 전략가로 통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재무통’으로 한때 위기에 처했던 애경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는 평이다. 오너가(家)라기보다 전문경영인으로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그는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을 졸업했다. 사내에서는 어떤 평판일까.‘소탈한 전략가’라는 평이 압도적이다. 권위 대신 친근함과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한다. ●1등 브랜드를 키워라 안 사장의 ‘1등 브랜드주의’는 1992년 다국적기업인 유니레버와의 합작법인이 깨지면서 시작됐다. 신제품을 비롯해 영업, 마케팅 등에서 유니레버의 의존도가 컸던 애경(당시 애경산업)은 한동안 ‘혼수 상태’에 빠졌다. 매출은 무려 50%가 줄어든 데다 영업은 적자를 기록하는 등 재무구조가 갈수록 악화됐다. 시장의 반응은 더욱 차가웠다. 일각에서는 ‘부도설’마저 나도는 실정이었다. 이를 통해 안 사장은 유니레버의 ‘폰즈’나 ‘도브비누’ 등의 강력한 1등 브랜드 제품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등만이 시장을 지배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과감히 브랜드 죽이기에 나섰습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한 ‘브랜드 경영’은 애경의 현실적 여건에서 출발한 셈이었습니다. 아깝더라도 향후 3년내 1,2위를 차지할 브랜드를 빼고는 시장에서 철수한다는 결단을 내렸죠.” 이 과정에서 ‘유탄’을 맞은 브랜드로는 분말세제인 ‘팍스’, 삼푸 ‘그랑비아’와‘나이브’, 비누 ‘생금’ 등이다. 잡다한 브랜드로 전선을 확대시켜 ‘싹수’가 엿보이는 브랜드마저 죽이는 잘못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의 브랜드 전략은 이렇다. 치약시장 전체로는 경쟁업체가 1등이지만 단일 브랜드로는 우리가 1등하는 치약을 만들자는 것. 그 대표주자가 ‘2080’이다. 성숙시장인 치약제품 사상 최단기간에 뿌리를 내린 성공적인 브랜드로 대학에서 연구사례로 채택될 정도다. 현재 이렇게 가꾼 1등 브랜드가 세탁세제 ‘스파크’와 ‘퍼펙트‘, 주방세제 ‘트리오’와 ‘순샘’ 등을 포함해 15개를 웃돈다. 그는 생활용품에 치우친 매출 구조를 바꾸기 위해 화장품 사업군을 별도로 법인화시킬 계획이다.1등 브랜드를 갖기 위해서는 고부가가치 사업인 화장품을 생활용품과 같이 끌고가기에 부담스럽다는 판단에서다. “시장에서 3등은 없다고 확신합니다.1위권 브랜드는 매장진열이나 입점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또 고객은 각 카테고리에서 1,2등을 제외한 3등 이하 제품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1등 브랜드의 파워가 있습니다.” 1등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품질 노력에도 적지 않은 공을 들이고 있다. 안 사장은 외환위기 시절 다른 기업들이 구조조정 차원에서 연구소를 매각하거나 연구원들을 줄일 때 300억원을 들여 연구소를 설립했다.“(92년에)매도 먼저 맞아서 그런지 외환위기 때는 다른 기업과 달리 재무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특히 경쟁기업들이 어려울 때 공격 경영을 추진하는 것이 1등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재가 ‘돈’이다 안 사장은 아무리 회사가 어려워도 사원 교육비는 줄이지 않았다고 한다.‘인재가 기업의 미래’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애경의 지난해 1인당 교육비는 업계 최고 수준인 200만원선. 이밖에 어학교육비(1인당 연 120만원)와 대학원 학비를 전액 지원한다.3개월짜리 미국 연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9년째를 맞은 미국 연수 프로그램은 10년 이상 근속 사원을 대상으로 현지 체험과 여행 등의 일정으로 짜여져 있다. 안 사장은 “9년연속 흑자경영의 가장 큰 원동력은 결국 사람이었다.”며 “어려운 시절에도 사원 교육비를 늘린 것은 그동안 제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잘한 일 같다.”고 밝혔다. 그는 또 직원과의 대화를 중시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산책경영’. 처음에는 건강을 위해 시작한 것이 직원과의 대화 창구로 바뀌었다. 그는 거의 매일 파트너(임직원)를 바꿔가며 1시간씩 회사 주변을 걷는다. 안 사장은 “회사의 주요 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정담도 나누고, 건강도 좋아지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애경은 어떤 회사 애경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비누제조업체로 출발, 생필품을 생산하는 국민기업으로 성장했다. 애경유지공업㈜이 전신인 애경은 1985년 4월 다국적기업 유니레버와 합작, 선진 외국기술 및 경영관리 기법을 도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지난해 창립 50돌을 맞아 ‘애경산업’에서 ‘애경’으로 사명을 바꿨다.‘깨끗함, 신뢰, 혁신’을 경영 목표로 삼아 최근 10년간 출시한 대부분의 제품을 성공적으로 상륙시킴으로써 생활용품 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다져가고 있다. 특히 지난 50년간 한우물만 판 뿌리깊은 기업으로,‘삶의 가치를 높이는 라이프 스타일리스트’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다.‘제품과 서비스로 고객에게 아름다움과 건강함, 깨끗함과 편리함을 제공한다.’는 것이 실천 목표다. 대덕연구단지내 애경종합기술원은 신제품 개발과 미래산업의 중장기적인 전략기술을 집중 연구·개발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충남 청양과 대전 공장에서는 고품질의 제품을 생산해 낸다. 안용찬 사장 취임 10주년을 맞는 올해의 매출 목표는 지난해보다 20% 늘어난 4380억원. 제 2도약을 위해 선택과 집중,1등 브랜드 전략을 더욱 강하게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 “교황청, 타이완 버릴 준비”

    교황청이 최근 고위급 추기경을 보내 회담을 갖는 등 중국과 외교 관계를 복원하려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타이완을 버릴 준비를 하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6일 보도했다. 교황청은 1951년 중국이 외국인 사제들을 추방하자 외교 관계를 끊었다. 중국 역시 교황청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가톨릭 신도들에 대해선 당국이 허가한 교회에서만 예배를 보도록 통제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벨기에의 고드프리드 다닐스 추기경이 지난달 31일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의 집무실이 있는 중난하이(中南海)에서 후이랑위(回良玉) 사회종교담당 국무원 부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교황청 고위 인사가 중국을 방문해 지도부와 회담을 가진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다닐스 추기경은 교황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급히 돌아갔지만 그의 방문은 바티칸이 중국과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으려 한다는 증거라고 FT는 전했다. 교황청은 500만명에 이르는 중국의 가톨릭 신도들을 배려해 외교 관계를 복원하려는 것으로 알려졌다. 교황청은 중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타이완과의 단교까지 검토하고 있다. 지난 4일 홍콩 교구장인 조지프 젠 주교는 “바티칸은 중국 내 가톨릭의 자유를 위해 타이완을 버릴 준비를 하고 있다. 다른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④-현대그룹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④-현대그룹

    “믿겨지지 않았다.” 2003년 8월 4일 새벽. 그룹 비서실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아든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훗날 지인에게 “처음엔 얘 아빠(정몽헌 회장)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그러나 남편의 죽음을 제대로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시숙(정상영 KCC그룹 명예회장)에게서 그룹을 지켜야 했다. 경영 전면에 나섰다. 스물한살에 현대가로 시집와 30년 가까이 살림만 했는데 세상에 나오는 것이, 그것도 시아버지(고 정주영 명예회장)가 평생을 일군 그룹을 덜컥 떠맡는 게 두렵지 않았을까. 지인의 얘기다.“나도 그 점이 궁금해 언젠가 한번 물어봤었다. 그랬더니 그 때는 (경영권 분쟁으로) 상황이 너무 다급해 두려워할 겨를조차 없었다고 하더라.” 그렇게 현대가의 ‘조용한’ 며느리에서 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때가 2003년 10월 21일. 그로부터 1년여. 주력 계열사인 현대상선은 ‘관리종목’의 악몽에서 벗어나 지난해 사상 최대 순익(4279억원)을 올렸다. 금강산 관광사업을 주도하는 현대아산 역시 소폭이나마 첫 흑자(8억원)를 기록했다. 현대엘리베이터(839억원), 현대증권(580억원 추정치), 현대택배(74억원), 현대경제연구원(3억원)도 지난해 흑자로 돌아섰거나 흑자를 지켰다. 그룹 경영을 맡은 지 불과 1년 만에 6개 계열사 모두를 흑자로 돌려놓은 것이다.2010년까지 그룹 매출을 20조원(지난해 말 6조 6400억원)으로 끌어올려 재계 10위권(현재 19위)에 입성하겠다는 현 회장의 ‘2010 프로젝트’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 것은 그래서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운’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왕회장(정주영 명예회장) 시절부터 현대에 몸담아온 한 임원의 해석은 다르다. “운이 좋았던 것도 사실이다.(현 회장 취임후) 해운 경기가 살아나면서 그룹의 주축인 현대상선이 살아났으니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 있다. 전에 비해 그룹의 방향이 매우 뚜렷해졌다. 현 회장은 한번 결정을 내리면 단호하다. 흔들리지 않는다. 배포와 결단력은 오히려 몽헌 회장(MH)을 능가한다는 게 임원들의 공통된 평가다.” 이와 관련해 또다른 임원의 말이 재미있다.“현 회장을 보고 있으면 사업가 유전자라는게 따로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사업가 집안의 둘째딸 현 회장은 1955년 딸만 넷을 둔 사업가 집안의 둘째로 태어났다. 훗날 현대상선에 흡수된 당시 신한해운의 현영원(78) 회장이 아버지다. 일제때 ‘호남의 거부(巨富)’로 이름을 날렸던 현준호씨의 후손이다. 어머니는 김용주 전남방직 창업주의 외동딸인 김문희(77) 현 용문학원 이사장이다. 김창성 전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과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의 친누나이기도 하다. 현 회장에게는 외삼촌들이다. 현대가의 며느리 가운데 손아래 동서 김영명(정몽준 현대중공업 대주주의 부인·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딸)씨와 더불어 친정이 가장 화려한 편이다. 현 회장은 그룹 홈페이지에 올린 ‘나의 삶 현대의 길’에서 “기업가 집안의 엄격한 가정교육 속에서 세상의 흐름과 변화에 대한 시각을 조금씩 키워나갔다.”고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임원의 해석처럼 ‘유전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업가 집안의 가풍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현 회장의 자매들 이름이다. 언니가 일선씨, 여동생이 지선씨다. 현 회장의 시조카들과 이름이 똑같다.“정씨 집안과의 혼사는 숙명”이라는 우스갯말이 나올 만도 하다. 언니 일선씨는 수입 침장(沈臧) ‘쉐르단’으로 유명한 홈텍스타일코리아 유승지 회장과 결혼했다. 유 회장은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의 친동생이자 유유산업 창업주인 고 유특한씨의 아들. 현 유유산업 유승필 회장의 친동생이다. 동서지간인 유 회장과 생전의 MH는 나이가 같아 유난히 친했다고 한다.MH가 죽기 직전 가족들과 외식을 할 때도 유 회장이 함께 했었다. ●‘군인’ MH와의 첫 만남 대학(이화여대 사회학과) 4학년때인 1975년 1월 어느날. 현 회장은 아버지를 따라 울산의 현대중공업 선박 명명식에 갔다. 당시 아버지는 사업관계로 잘 알고 지내던 홍콩 행정 장관(C.Y. 퉁)이 방한하자 때마침 열린 선박 명명식에 ‘모시고’ 갔다. 애초 맏딸만 데려갈 생각이었지만 둘째딸의 성화에 딸 둘을 대동하고 나섰다. 몇달 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쪽에서 넌지시 연락이 왔다.“군대간 아들이 마침 휴가 나왔는데 한번 만나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선박 명명식에서 ‘참한 인상의 늘씬한 재원’을 처음 본 정 회장이 단박에 며느릿감으로 점지한 것이다. 이 때가 75년 5,6월께. 현 회장과 MH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언젠가 현 회장이 사석에서 털어놓았다는 MH의 첫인상이다.“요샛말로 필이 꽂히거나 그렇진 않았다. 군인이라 머리도 짧았고…그래도 듬직해 보였다.” 첫 데이트 장소는 ‘군인 커플’답게 서울 태릉사격장. 이듬해 7월 두사람은 결혼했다. ●“나도 내게 이런 속배짱이 있는 줄 몰랐다” 현 회장은 결혼 후 첫딸을 낳고도 남편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라 페어리 디킨슨 대학원에서 인간개발론을 전공했다. 귀국해서 얘들 키우고 살림하는 동안에도 짬짬이 걸스카우트연맹(이사)·대한적십자사(여성봉사 특별자문위원) 등에서 ‘표 안나게’ 사회활동을 했지만 사업가로 나서게 되리라고는 그 자신 상상도 못했다. 현 회장을 가까이서 지켜본 임원의 얘기다.“그룹 경영을 맡은 지 1년여밖에 지나지 않아 아직 평가를 내리기에는 이르지만 확실한 것은 배포가 여간 아니라는 점이다. 경영 참여를 결심한 것도,8개월에 걸친 경영권 분쟁을 버텨낸 것도 이같은 배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겉으로 보면 전형적인 현대가의 조용한 며느리인데 어디에 그런 배포가 숨겨져 있는지 모르겠다. 본인 스스로도 ‘내게 이런 속배짱이 있는 줄 몰랐다.’며 웃더라. 지금이야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경영권 분쟁때의)그 지독했던 마음 고생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의지력도 대단하다. 더러 확신이 서기까지 결단을 늦추는 경향이 있어 답답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일단 확신이 서면 무섭게 밀어붙인다. 번복하는 일도 없다.”결단을 내려놓고도 마음이 여려 ‘가신’들의 주장에 흔들리곤 했던 MH와는 대조되는 면모다. 현 회장의 단호함을 보여주는 일화 한가지. 지난해 8월 그룹 비전을 선포할 때의 일이다. 당시는 경영권 분쟁을 매듭짓고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던 때라 사내외에 선언할 ‘비전’이 매우 중요했다. 현 회장은 ‘용기와 자부심의 현대’라고 직접 쓴 쪽지를 내밀었다. 임원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살림만 하던 사람이 기업 경영과 직원 심리를 얼마나 알겠느냐.”는 냉소도 은근히 깔려 있었다. 그러나 현 회장은 지금이야말로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용기와 ‘재계 1위 현대’에 대한 자부심이 절실한 때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선언문에는 이 문구가 그대로 들어갔다. 시간을 지체해 물건너갔다고 생각했던 가신그룹(김재수 당시 경영전략팀 사장 등)에 대한 인사도 그 해말 전격 단행해 임직원들을 다시한번 놀래켰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 숙부의 난 현 회장은 취임하자마자 다른 사람도 아닌 시삼촌과 길고 지루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정상영 명예회장이 2003년 8월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사들이면서 본격화된 경영권 분쟁은 이듬해 3월 30일 현대엘리베이터 주총에서 현 회장이 승리할 때까지 8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현 회장은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등 집안의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비즈니스가 얽혀있어 개입할 수 없다.”는 말만 들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중립이 현 회장을 도왔다. 현 회장측은 분쟁의 단초가 된 금호생명 대출 200억원에 대한 정상영 회장의 보증과 관련,“정 명예회장은 조카(MH)에 대한 의리라고 주장하지만 처음부터 경영권을 뺏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된 행보였다.”고 주장한다. 한 측근은 MH가 정상영 명예회장을 인간적으로 따랐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정상영 회장이 MH의 자금줄을 교묘하게 막았다.”면서 “이 때문에 MH가 ‘그룹을 위해 (내가) 이렇게 희생했는데 상영 삼촌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언젠가 몹시 화를 낸 적도 있다.”고 털어놓았다.KCC측에서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여전히 팔지 않고 있어 경영권 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싸움이다. ●경영수업 받는 큰딸…‘코디’ 둘째딸… 사격 좋아하는 외아들 시어머니(변중석)가 아이 잘 낳는 보약을 하루가 멀다하고 들이미는 바람에 얼떨결에 일찍 가졌다는 큰딸. 딸을 낳자 시댁보다 딸만 넷인 친정의 실망이 더 컸다고 한다. 그 딸이 지금은 현 회장의 든든한 친구이자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지이(28)씨다. 서울대 고고미술학과와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대학원을 나온 그는 외국계 광고회사에 다니다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지난해 1월 3일 현대상선 재정부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했다. 올 1월 1일 대리로 승진했다. 회사 흐름을 가장 빨리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재정부에 배치한 것을 보면, 제대로 경영수업을 받게 하려는 현 회장의 의지가 읽혀진다. 경영권 분쟁때도 현 회장은 정상영 명예회장 등 시댁 어른들과의 대면 자리에 반드시 지이씨를 데리고 나갔다. 맏이답게 찬찬하고 침착해 현 회장에게는 큰 의지가 된다고 한다.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도 평이 매우 좋다. 지난해 10월 그룹 해체후 처음 가진 신입사원 수련회때는 다른 ‘신참’들과 똑같이 텐트에서 잠을 자고 장기자랑도 마다하지 않아 주위의 경계심을 녹였다.‘싼타페’를 직접 몰고 출퇴근한다. 아직 사귀는 사람은 없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터울이 크면 아들일 확률이 높다.”는 집안 어른들의 압력에 6년 7개월만에 가졌다는 둘째딸 영이(21)씨는 서울 상명여고 1학년때 혼자서 미국 유학을 떠났을 만큼 당차다. 보스턴에서 한시간 거리인 사립 고등학교 ‘쿠싱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현재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학부에 재학중이다. 언니와 달리 성격이 매우 활달하다. 방학을 맞아 귀국하면 엄마의 의상을 열심히 조언해준다. 막내 외아들인 영선(20)씨는 모 대학 경영학과를 다니다 지금은 휴학한 상태다. 군대를 먼저 다녀온 뒤 미국 유학을 떠날 예정이다. 아버지 장례식때 고3(경복고) 수험생이었는데도 어찌나 많은 친구들이 빈소로 몰려왔던지 조문객들 사이에 화제가 됐었다. 아버지를 닮아 총쏘는 것을 좋아한다. ●옛 영광 재현 꿈꾸는 핵심 브레인들 경영전략팀이 그룹의 ‘싱크 탱크’다. 다른 그룹으로 치면 구조조정본부에 해당한다. 현 회장 사람들로 전부 세대교체가 이뤄진 점이 가장 눈에 띈다. 최용묵(57) 사장을 사령탑으로 이기승(55) 전무-하명호(47) 상무로 수직 연결된다. 현대엘리베이터 사장도 맡고 있는 최 사장은 경영권 방어전략을 촘촘히 짜 현 회장의 리더십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급진적 개혁보다는 점진적 개선파로, 조직 안정이 최우선 과제인 현 회장 체제에서는 적임이라는 평을 듣는다.76년 현대건설 평사원으로 입사,84년 현대엘리베이터 창립과 함께 관리부장을 맡으면서 조직관리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지금도 임직원들과 회사 앞마당에서 족구를 하고 삼겹살 소주 뒤풀이를 즐긴다. 이 전무는 경영권 분쟁을 겪으면서 금융전문가의 보완을 절실하게 느낀 현 회장이 지난해 6월 외환은행에서 영입해온 이다.KS(경기고-서울대 법대) 출신답게 머리회전이 빠르면서도 친화력이 뛰어나 핵심인맥의 자리를 굳혔다. 미국 디킨스대 MBA(경영학석사) 출신인 하 상무도 재무 전문가다. 현대석유화학에서 지난해 말 그룹 심장부로 옮겨왔다. 그룹의 정신적 뿌리인 대북사업은 ‘서울대 트리오’가 이끌고 있다.“대북사업에 인생을 걸었다.”는 김윤규(61) 현대아산 부회장이 단연 첫 손에 꼽힌다. 왕 회장때부터 ‘소떼 방북’ 등을 성사시키며 현대와 동고동락해 온 김 부회장은 MH가 그 앞으로 남긴 별도 유서를 통해 “자주 윙크하는 버릇 고치라.”고 농담을 던졌을 만큼 2대에 걸쳐 각별한 신임을 얻었다. 얼마전 부회장으로 승진해 대북 라인 접촉 등 대외 업무에만 힘을 쏟고 있다. 대내 업무를 떼준 것은 과중한 업무 부담을 덜어주려는 배려이자 ‘거리 두기’라는 해석도 있다. 대내 업무는 윤만준(60) 현대아산 사장의 몫이다. 고문으로 물러나 있다가 김 부회장의 승진과 함께 대표이사 사장으로 발탁된 그는 남북경제협력사업에 초창기부터 관여해 실무에 밝다. 서울법대를 나와 74년 현대중공업에 입사,MH와 함께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를 일궜다. 김 부회장의 서울대 공대 직속 후배인 심재원(58) 현대아산 부사장은 개성공단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다. 업무처리가 치밀하다. 그룹의 ‘캐시 카우’(돈버는 계열사)인 현대상선은 노정익(52) 사장이 이끌고 있다. 유동성 위기로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던 2002년 9월 사장에 취임해 1000원대이던 주가를 2만원 가까이 끌어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자동차 운반선 매각 등 뚝심으로 구조조정을 밀어붙여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때 들어온 1조원대의 현금이 없었다면 뒤이어 터진 대북송금·분식회계 등의 악재를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얘기다. 취임하자마자 승선 체험을 자청, 선원들과 거센 파도와 싸우며 하나가 된 덕분에 ‘캡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안살림을 꼼꼼하게 챙기는 안홍환(55·부사장) 지원본부장, 회사 매출의 70%를 책임지고 있는 이재현(54·전무) 컨테이너본부장, 일반화물 영업을 이끄는 이동렬(56·전무) 벌크선영업본부장, 해양대 항해학과를 나와 선장으로도 근무한 ‘마도로스’ 신용호(56·전무) 해사본부장 등도 상선의 중추 세력이다. 2003년 6월 부국증권에서 스카우트돼 온 김지완(59) 현대증권 사장은 ‘현투(현대투자신탁증권) 책임분담금’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지어 그룹의 고민을 덜어주었다.‘숙부의 난’때는 오랜 증권업계 경험을 바탕으로 경영권 방어 전략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과 부산상고 동문이어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하마평에 자주 오르기도 한다. 김 사장을 떠받치고 있는 노치용(53·전무) 도매영업본부장은 그룹 홍보도 겸하고 있어 여의도와 광화문을 오가며 ‘셔틀 업무’를 보고 있다. 경영권 분쟁때 설득력있는 논리로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숙부의 난 당시 격전지(경영전략팀) 한복판에 있었던 현기춘(51) 현 현대엘리베이터 전무도 눈에 띈다. 현대엘리베이터의 또다른 한 축인 한승준(51) 전무와는 춘천고 같은반 친구이다. 기획·관리 전문가로 ‘선 굵은 CEO’로 불리는 김병훈(55) 현대택배 사장, 경제연구원 최초로 수익모델 창출에 도전한 재무관료 출신의 김중웅(64) 현대경제연구원 회장, 미국 애리조나주립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은 김주현(53) 현대경제연구원장 등도 그룹의 핵심 브레인들이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가 있다.“경영권 분쟁이 오히려 약이 됐다. 몽헌 회장의 죽음으로 흔들리던 임직원들이 경영권이 위협받자 현 회장을 중심으로 차돌처럼 뭉쳤다. 이번 기회에 전열을 확실하게 정비해 그룹의 모태로서 옛 현대의 영광을 반드시 재현하겠다.” hyun@seoul.co.kr ■ ‘비운의 황태자’ 정몽헌 현대가 사정을 소상히 알고 있는 한 현대맨은 “90년대 들어 언론에서 빅3(MK,MH, MJ) 운운했지만 그 때는 이미 왕회장이 MH를 후계자로 형제들에게 선언한 뒤였다.”면서 “좀체 칭찬을 하지 않는 왕회장이었지만 MH에 대해서는 심지가 깊은 아이라며 믿음을 내보였다.”고 전했다. 보성고와 연세대를 나와 미국 페어리 디킨슨 대학에서 MBA(경영학 석사학위)를 딴 MH는 귀국후 1983년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를 세워 4년 만에 흑자로 돌려놓았다. 급기야 2000년에는 그룹 단독 회장에 취임했다. ‘왕자의 난’의 상처를 털고 MH시대를 여는 듯했다. 하지만 2003년 8월 4일 계동사옥 12층 집무실에서 몸을 던지고 만다.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그저 유서를 통해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고만 했을 따름이다. 대북송금 특검 등에 따른 중압감 때문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그러나 한 측근은 당시 “극심한 중압감 때문이었다면 가족들이 낌새를 알아챘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며 일축했었다. 투신하기 직전, 가족과 식사한 것을 두고 미리 자살을 준비했다는 분석도 나왔지만 이 역시 MH가 일요일에는 가족들과의 외식을 즐겼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MH는 바깥일을 집에 와 자상하게 털어놓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가급적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등 가정적인 편이었다. 한 측근의 얘기다.“(대북송금·비자금 수사 등이 진행되자) 나 혼자 책임지겠다는 말씀을 여러번 하셨다. 그때는 혼자 감옥가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살을 염두에 뒀던 것 같다. 그렇더라도 투신하기 두달 전에 받은 건강검진에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게 나오자 부인(현 회장)에게 매일 순두부를 끓이라고 했던 점으로 미뤄보아 투신 결심은 순간적으로 이뤄졌던 것 같다.” 소탈하면서도 합리적이고 머리도 좋아 따르는 이가 많았던 MH. 그는 그러나 끝내 아버지의 꿈(대북사업)을 완성하지 못하고 삶을 접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55살때였다. hyun@seoul.co.kr ■ 현대家 며느리들 현대가의 며느리들은 4월을 ‘제사의 달’이라고 부른다. 시아버지(정주영 회장)가 생전에 워낙 제사를 중시한 데다 온갖 제사가 몰려있어 4월에는 아예 청운동 시댁 부엌에서 살다시피 했다. 시아버지의 독특한 ‘밥상머리 교육’ 때문에 새벽마다 시댁으로 가 아침식사도 직접 준비해야 했다. 한 며느리는 “새벽 3시반에 갔다는 항간의 얘기는 다소 과장이고 이를 때는 4시반, 보통때는 5시나 5시반쯤 갔다. 시아버님이 대선에 출마했을 때 새벽마다 수행원들 몫까지 김밥을 엄청나게 쌌던 기억이 난다.”고 털어놓았다. 언젠가 한번은 아들들이 꾀가 나 아침식사 회동에 몇번 빠졌다. 대로한 왕회장이 “모두 들어와 살라.”고 불호령을 내려 1년간 청운동 시댁 주변에 모두 모여산 적도 있다고 한다. 여자들이 나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왕회장이지만 말년에는 겸상 식사도 허용했다고 한다. 맏며느리 이양자씨는 수도여대를 나와 한때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이씨가 91년 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실질적 맏며느리 역할을 해온 둘째며느리 이정화(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부인)씨는 당시 명문으로 꼽히던 숙명여고를 나왔다. 빼어난 미모로 유명했던 넷째며느리 이행자씨는 한양대 출신으로 세간에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숙명여대를 졸업했다. 유난히 여대 출신이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다.“여자는 여대를 가야 한다.”는 왕회장의 보수성 때문이었다. 이화여대에 수석 입학해 화제가 됐던 손녀 유희씨(고 몽필씨 딸)도 원래는 연세대 원서를 다 써놓은 상태에서 할아버지에게 ‘보고’했다가 된통 혼이 난 뒤 여대로 틀었다고 한다. 며느리든 딸이든 해외유학까지 다녀오고도 회사 경영이나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이가 거의 없는 것도 유교적 가풍 탓이다. 왕회장은 “살림에만 신경쓰라.”며 며느리들에게 골프도 치지 못하게 했다. 현정은 회장은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골프장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월이 훨씬 흐르고서야 뒤늦게 골프를 배웠지만 영 재미가 붙지 않아 골프장에 딱 세번 나가본 뒤 관뒀다고. 오는 10월 ‘금강산 골프장’ 개관에 맞춰 상징 티샷을 날리라는 임원들의 압력이 많아 여간 고민이 아니라고 한다. 한때 기체조를 배웠으며 ‘걷기’ 가 취미다. hyun@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코 튜브로 영양 공급

    |바티칸시티 외신|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현재 코에 삽입된 튜브를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고 있다고 호아킨 나바로 발스 교황청 대변인이 30일 밝혔다. 나바로 발스 대변인은 이날 성명을 통해 “칼로리 섭취량을 늘리고 기력을 효과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코 튜브를 통한 영양공급을 시작했다.”며 “느리지만 교황은 계속 회복되고 있다.”고 밝혔다. 대변인이 교황의 건강에 대해 언급한 것은 2주만의 일이다. 교황은 이날 집무실 창가에 약 4분간 모습을 드러내 성베드로 광장에 모인 수천명의 순례자들을 축복했다. 교황은 성호를 그어 축복한 뒤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에 앞서 이탈리아 일간 ‘코리에레델라 세라’ 인터넷판은 29일 소식통을 인용, 이탈리아 의료진이 교황의 위장에 직접 급식 튜브를 삽입하는 수술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아직 최종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지만 교황이 음식을 삼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의료진이 급식 튜브 삽입 수술을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급식 튜브 삽입 수술은 위장 내부로 직접 튜브를 집어넣어 음식이 입과 목구멍을 거치지 않고 위로 바로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수술이든지 올해 84세로 병약한 교황이 기력을 되찾을 때까지는 당분간 기다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정보가 로마 교황청쪽에서 나왔는지, 병원쪽에서 나왔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 [씨줄날줄] 검찰인사 청탁/ 우득정 논설위원

    ?:국민의 정부 시절, 검찰 인사를 관장하는 법무부 검찰국장 집무실.A국장의 전화기 옆 메모꽂이에는 휘갈겨 쓴 메모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주로 외부에서 온 인사청탁이란다. 불과 보름 전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이 인사청탁을 하면 반드시 불이익을 주겠다고 공언한 엄포가 무색할 정도였다. 장관과 총장의 약속대로 메모지에 적힌 당사자들만 불이익을 줘도 인사하기 쉽겠다고 하자 “동냥을 주지는못할 망정 쪽박을 깰 수는 없지 않으냐.”고 했다.A국장은 청탁한 사람들은 자신의 목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위치에 있는 실력자들이라면서 갈수록 인사청탁이 기승을 부리는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며칠 후 B 부장검사의 방. 연수원 14기(사시 24회)인 그는 13기 때문에 검찰의 물이 흐려졌다고 목청을 높였다. 사시 300명 시대의 첫 주자인 13기가 부장검사 승진을 앞두고 전방위 로비를 펼치는 바람에 당시 검찰 수뇌부가 고심 끝에 한명의 열외없이 모두 승진시켰다는 것이다. 집단적인 로비로 ‘선별 승진’이라는 보루가 무너진 만큼 인사 로비는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검찰 인사철만 되면 전국의 검찰청 주변에는 ‘∼카더라’식의 소문에서 익명의 투서에 이르기까지 인사청탁과 관련된 온갖 풍문이 나돈다. 요직에 발탁된 검사 뒤에는 ‘누구의 줄을 잡았다.’는 해석이 그럴듯한 정황 증거와 함께 덧붙여진다. 어떤 검사들은 고위층과의 친분을 과시하기 위해 ‘형, 아우 사이’임을 공공연하게 내비친다. 실제 출입기자들을 앞에 두고 고위층에 전화를 걸어 ‘형님, 접니다.’라고 떠벌린 검사도 있었다. 참여정부에서는 달라졌겠거니 싶었는데 아닌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내달 초 퇴임을 앞둔 송광수 총장이 여기저기에 인사청탁을 하고 다니는 검사는 ‘용심’을 부려서라도 옷을 벗기겠다고 경고했겠나. 고위 공직자의 도덕성에 대한 국민의 눈높이는 전례없을 정도로 높아졌는데 2년에 걸친 송 총장의 검찰 바로세우기 노력이 인사청탁 잡음으로 도로아미타불이 되지나 않을까 안타깝다. 서울 고검 검사에서 옷을 벗은 한 변호사는 사석에서 후배 검사들에게 “보직을 놓고 다투지 말라.”고 충고했다. 별 볼일 없다는 고검 검사도 변호사 3명 정도의 값어치가 있더란 말과 함께.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 “밤 10시이후엔 일하지 말라”

    “밤 10시이후엔 일하지 말라”

    기획예산처는 밤 10시면 모든 불이 꺼진다. 일을 하고 싶어도 전등은 물론 컴퓨터나 팩스 등이 꺼져 일을 할 수가 없다. 결론은 퇴근밖에 없다. 변 장관이 취임한 이후 직원들의 잦은 야근을 막기 위해 도입한 ‘10시 소등제’다. 도입 초기에는 “예산처는 원래 일이 많은 곳인데 소등제를 실시하면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냐.”는 오해도 있었다. 또 “다른 부처도 고생하는데 예산처만 일하는 것처럼 생색내는 것 아니냐?”는 비난도 있었다. 하지만 변 장관이 도입한 소등제의 취지는 업무의 효율성과 집중도를 높이자는 것이다. 저녁식사만 해도 대략 1시간 이상 식사를 하고, 동료들과 차를 마시면서 한담을 나눈 뒤 업무에 들어가면 야근 준비하는 데 2시간을 허비한다. 이같은 근무시간의 거품만 빼도 귀가시간을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이 변 장관의 생각이다. 10시 소등제 이후 예산처 업무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식사시간을 줄이기 위해 직원들이 구내식당을 이용하면서 매우 혼잡해졌다. 또 밤 10시 이후에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아침에 일찍 나와 업무를 시작해 출근시간도 빨라졌다. 야근 뒤 동료들과 갖는 술자리도 줄어들어 아침 출근시간에 늦지 않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상쾌한 상태에서 근무가 가능해졌다. 10시 소등제에 예외는 없다. 변 장관도 얼마 전 대통령 업무보고 준비를 위해 집무실에 남아 있다가 소등제가 실시되기 직전인 밤 9시50분쯤 급히 일거리를 챙겨 귀가했을 정도다. 변 장관은 “예산처의 업무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밤 10시까지 끝내지 못하는 것은 능력 문제”라면서 “소등제는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충식기자 chungsik@seoul.co.kr
  • [내 인생의 등대] 김형수 영등포구청장

    [내 인생의 등대] 김형수 영등포구청장

    영등포구 김형수(58) 구청장의 머릿 속에는 늘 두 권의 책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로부터 선물받은 에이브러햄 링컨 자서전과 고등학교 때 우연히 접한 심훈의 소설 상록수다. 어렸을 때부터 정치인을 꿈꿨던 김 구청장이 링컨에게 끌린 이유는 간단하다. 넉넉치 못한 집안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꿈을 이뤘다는 것이다. “링컨은 오두막집에서 비에 젖은 책을 읽은 적도 있다는 것을 접했을 때 ‘내 환경이 링컨보다는 낫지 않느냐.’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복한 가정 출신의 조지 워싱턴 책도 같이 선물받았지만 링컨 책이 훨씬 인상적이었죠.” 김 구청장은 이후 링컨의 자서전을 옆에 두면서 삶의 지침서로 삼고 있다. “링컨은 많은 사람들에게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정부’라는 말을 한 정치인으로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부지런하고 정직한 인간 됨됨이에 많이 끌립니다.” 김 구청장이 소개한 링컨의 일화는 이렇다. 상점에서 일을 다끝내고 결산을 해보니 아무리 계산을 해도 6센트가 남았다. 결국 밤늦게 한 손님의 집까지 찾아가 거스름돈을 건네줬다.‘거짓이 잠깐은 통할 수 있지만 영원히 통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김 구청장이 부임하자마자 직원들에게 ‘정직·청렴’을 강조하면서 집무실 벽을 밖에서도 훤히 보이는 유리로 바꿔놓은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직원들 역시 이전의 구청장 3명 모두 비리·허위 신고 등으로 도중하차한 것과 달리 다른 기대를 김 구청장에게 걸고 있다. 김 구청장은 고등학교 때 자신을 두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에버그린 김’이라는 별명을 붙였을 정도로 심훈의 상록수에 푹 빠졌다. “상록수에서 농촌계몽 운동을 주도한 박동혁·채영신이 온갖 고난과 시련을 꿋꿋이 이기고 의지를 관철시키는 과정이 감명적이었습니다. 이들의 봉사정신 밑에는 개척자 정신과 추진력이 깔려있죠.” 김 구청장은 봉사란 상대방과 주고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종교인이 봉사를 하는 것도 본인의 현생을 절대자에게 바치는 대신 내세를 구원받는 것 아닙니까. 구청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구청장이라는 명예를 얻은 대신 주민을 위해 몸바치겠다는 것은 같으니까요.”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박근혜-럼즈펠드 ‘31년만의 해후’

    |워싱턴 이도운특파원|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이 31년만에 해후했다. 워싱턴을 방문 중인 박 대표는 16일 오후(현지시간) 펜타곤에서 럼즈펠드 장관을 만나 환담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74년 9월. 그로부터 한달 전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 사건으로 사망한 뒤 박 대표가 처음으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신했던 행사가 바로 9월의 제럴드 포드 미 대통령의 방한이었다. 당시 럼즈펠드는 비서실장으로서 포드 대통령을 수행했다고 한다. 회의실에서 박 대표를 맞은 럼즈펠드 장관은 “어렸을 적 모습이 기억나는 것 같다.”며 반가워했다고 참석자들이 전했다. 럼즈펠드 장관은 박 대표를 집무실로 안내한 뒤 남쪽은 불빛이 환하고, 북쪽은 평양에만 불빛이 비치는 야간의 한반도 위성사진을 보여주며 “같은 민족인데도 한쪽은 풍요롭고 자유로운 민주주의 체제인데, 다른 한쪽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독재체제”라고 강조한 뒤 그 사진을 선물했다. 박 대표는 이날 저녁 워싱턴 특파원과의 간담회에서 방미 중 만난 미국측 인사들에게 “북한을 제외한 6자회담 참가국들이 만나서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경우 받을 수 있는 반대급부를 ‘대담하게’ 합의해 제시하고,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의 대응책도 분명히 전달하라.”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한·일간의 독도 분쟁과 관련,“일본의 일개 현인 시마네현의 주장에 우리나라 전체가 대응하고 들고 일어나는 것은 생각해봐야 한다.”면서 “독도가 속한 울릉도 등에서 문제 제기를 해야 균형이 맞다.”고 강조했다. 앞서 박 대표는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 오찬간담회에서 “북한은 통일의 대상이자 한국의 안보위협이라는 이중성이 있지만 군사적으로 한국의 주적”이라고 말했다. dawn@seoul.co.kr
  • 총수들 직원속으로 ‘스킨십경영’

    총수들 직원속으로 ‘스킨십경영’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이 남편(고 정몽헌 회장) 대신 기업 경영을 맡으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일까.“어떤 일에 대해 최종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현 회장의 18번은? 뜻밖에도 신세대 가수 왁스의 ‘여정’이다. 봄을 맞아 기업들의 ‘스킨십 경영’에도 물이 오르고 있다. 그룹 총수들과 전문 최고경영자(CEO)들이 인터넷 홈페이지나 직접적인 현장 접촉을 통해 국민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 현 회장이 사적인 심경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도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서다. ●‘총수님’ 홈피 엿보는 재미 올 초 오픈한 현 회장의 ‘CEO 코너’(www.hyundaigroup.com/ceo)를 클릭하면 연애시절의 늘씬했던 모습, 총수로서의 인간적 고뇌, 스파게티를 기막히게 잘 만들지만 한식을 좋아했던 남편 때문에 실력을 뽐낼 기회가 없었던 얘기 등을 만날 수 있다. 읽다 보면 ‘그들’도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임이 느껴진다. 코오롱 이웅열 회장의 개인 홈페이지(leewoongyeul.pe.kr)도 인간적 냄새가 물씬 묻어난다. 그의 젊은 시절 별명은 ‘3박4일’. 일할 때도 놀 때도 너무 열정적이어서 붙여진 별명이라고 이 회장은 설명했다. 올 초 계열사 임원회의 때 “탁구공은 무게가 2.7g에 불과한 힘없는 물체이지만 선수들은 이를 치기 위해 온 몸을 날린다. 우리도 온 정성 온 마음으로 일에 임하자.”며 탁구공 꾸러미를 전달한 최신 일화도 소개했다. ‘홈피 운용 6년차’인 LG 구본무 회장(www.koobonmoo.pe.kr)은 베테랑답게 콘텐츠가 다양하다. 어릴 적부터 새에 관심이 많아 집무실 창가에 대형 망원경을 가져다 놓았다는 고백이 ‘새와 나’ 코너에 나와 있다. SK 최태원 회장의 홈페이지(www.taewonchey.pe.kr)에 들어가면 가족사진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 환갑을 넘긴 삼성 이건희 회장과 현대차 정몽구 회장은 개인 홈페이지를 따로 두지 않고 그룹 홈페이지 ‘CEO 코너’를 통해 경영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사장님’이 봄맞이 현장근무? 두산 박용오 회장은 7일 두산중공업 창원공장을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이달 말까지 군산 병유리 공장, 당진 화력발전소, 강릉 소주공장, 횡성 김치공장 등을 차례로 찾을 예정이다. 하나로텔레콤 윤창번 사장은 다음달부터 봄맞이 현장근무에 나선다. 주말마다 임원들과 함께 고객센터나 고객의 집을 찾아 불편이나 불만사항을 직접 들을 작정이다. 그런가 하면 LG CNS 정병철 사장은 최근 팀장급 이상 임원 500여명과 함께 2박3일 합숙훈련을 다녀왔다.‘리더가 하나되면 1등 회사 만든다.’는 기치 아래 자신들이 직접 시스템을 구축한 KTX를 타고 경주 등을 돌며 전략회의를 가졌다. 삼성SDS 김인 사장도 350명의 임직원들과 함께 무박 2일로 야간행군을 펼쳤다. 저녁에 경기도 분당 제2사옥을 출발해 서울 역삼동 본사→반포대교→여의도 둔치로 이어지는 50㎞ 강행군이었다. 체질 개선을 위해 지난해 시작한 ‘혁신 350운동’의 일환이다. 정보기술(IT) 서비스 업계 글로벌 5위가 될 때까지 매년 행군거리를 늘릴 계획이다. 안미현 주현진기자 hyun@seoul.co.kr
  • [사설] 2년동안 한번 연 화상국무회의

    연기·공주로 상당수 부처가 내려가는 데 따른 행정불편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정부·여당이 내세우는 것은 ‘화상회의’다. 대통령과 외교·안보 부처는 서울에, 총리와 경제·사회 부처는 신행정도시에 있더라도 화상회의, 전자결재를 적극 활용하면 문제될 게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 화상 국무회의와 차관회의가 각각 한 차례씩 열렸다는 사실은 정부·여당의 장담을 무색케 한다. 공무원들이 서울 세종로청사와 과천청사를 오가는 불편을 없앤다는 취지에서 화상회의 시스템이 도입됐다. 참여정부에서는 토론을 중시함으로써 화상회의로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결국 정권 초기 한번씩 열리고는 그만이었다. 국회까지 상시 개회 체제를 갖춤으로써 장·차관과 관리들은 과천-세종로-여의도를 오가는 데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됐다. 과천 청사를 연기·공주로 옮기면 그 불편은 훨씬 커진다. 특히 비상사태 발생시가 우려된다.IMF 외환위기가 고조되던 당시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과천 집무실에서 차분히 정책구상을 할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열리는 잇따른 대책회의와 국회 참석으로 길에서 시간을 허비했던 탓이다. 과천도 이런데 연기·공주라면 오죽하겠는가. 이해찬 총리는 업무시간을 이동에 뺏기는 것을 막기 위해 국무회의를 월요일 오전에 열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장·차관이 참석하는 회의가 국무회의뿐인가. 현 정부는 지금도 온갖 위원회를 만들고 있다. 이대로 부처를 이전하면 따로 서울사무소가 생기고, 장·차관이 많은 시간 서울에 머물게 될 것이다. 장·차관들의 쓸데없는 회의 참석 횟수를 줄이고, 화상회의를 통해서도 활발한 토론이 가능하게 시스템 보완을 서둘러야 한다. 분야별 책임장관회의를 활성화하는 것도 대안이 될 것이다.
  • “부시, 북한의 미래 가장 어둡게 봤다”

    |워싱턴 외신|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 이란, 북한 등 ‘악의 축’으로 거론됐던 세 나라 가운데 유독 북한의 미래를 어둡게 전망했다고 전 백악관 대변인이 회고록에서 밝혔다. 애리 플라이셔 전 백악관 대변인은 지난 1일(현지시간) 발간한 회고록 ‘열기를 느끼며:대통령, 언론, 백악관의 나날들’에서 “대통령은 북한 전체주의 정권의 근본적인 변화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면서 이같이 술회했다. 반면 “악의 축 가운데 3분의2는 ‘선(善)의 축’이 될 것으로 믿는다.”면서 “개혁을 열망하는 젊은이들이 있어 이란의 평화적인 변화가 가능하다.”고 이란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내다봤다고 밝혔다. 2001년 1월부터 2003년 7월까지 2년 6개월간 대변인을 지낸 플라이셔는 부시 대통령이 오전 7시면 집무실에 나와 오전 8시 중앙정보국(CIA)의 보고 청취로 업무를 시작했으며 국가안보회의(NSC), 연방수사국(FBI), 국토안보부 순으로 브리핑을 받았다고 전했다. 특히 부시 대통령은 기자들의 취재활동에 관심이 높았는데 백악관 출입기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거의 매일 빼놓지 않고 물었으며, 기자들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는지 궁금해했다는 것이다. 또 부시 대통령은 TV 뉴스나 정치관련 케이블 TV는 이따금씩 보았는데 ‘TV는 대체로 주관적이며 부정적’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공보 담당자들이 이런 문제를 잘 처리해 주길 기대했다고 플라이셔는 회상했다. 부시 대통령은 언론 가운데 통신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백악관을 40년 넘게 출입한 여기자 헬렌 토머스(UPI통신)에 대해선 부시 대통령과는 정치관이 워낙 달라 골치였다고 술회했다. 한번은 그녀가 부시를 ‘미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라고 평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로 사실여부를 확인하자 “그렇다.”고 잘라 말했다면서 “80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백악관에 나타날 때마다 늘 조마조마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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