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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뒷골목 맛세상] 인천의 음식특화거리

    [뒷골목 맛세상] 인천의 음식특화거리

    1980년대 초였다.30대 중반으로 나이가 어슷비슷한 문인들 다섯 명이 소문 없이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 한 달에 한 번 번갈아 서로 살고 있는 곳을 찾아가 하루를 지내며 즐겁게 먹고 마시는 모임이었다. 마침 살고 있는 곳이 저마다 달라 찾아다니며 놀기에는 적격이어서, 선인(先人)들이 흔히 즐기던 세족(洗足)의 분위기를 본 뜬 느낌이 없지 않았다. 이제 와서 구태여 면면을 밝히기가 어딘지 모르게 쑥스럽지만, 문학평론가 최원식이 인천에, 소설가 김성동이 대전에, 시인 이동순이 청주에, 시인 이시영이 서울에 그리고 나는 경기도 팔탄의 월문리라는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었다. 소문 없는 작은 모임이지만 이름도 없지 않아 명이회(明夷會)였다. 명이는 지혜로운 최원식이 주역의 64괘 중 지화명이(地火明夷)란 괘에서 따온 이름이었는데, 한 마디로 암흑시대를 뜻하는 괘였다. 아니, 암흑시대라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암흑시대를 슬기롭게 살아남을까를 가르치는 괘라고 해도 좋았다. 명이괘는 태양이 지하에 잠겨 암흑이 오는 상(象)이며, 성인(聖人)의 밝은 덕이 지하에 묻히는 상이기도 했다. 또한 암군(暗君)이 위에 있어 지혜로운 현인들이 상하고 해를 입는 암군시대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는 어떤 간난노고가 닥치더라도 애오라지 바른 도를 굳게 지켜, 결코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기를 가르치고 있었다. 비단 지혜로운 최원식 뿐만 아니라 나머지 네 명에게도, 전두환씨가 대통령이 되어 서슬 푸르게 날뛰던 80년대란, 글을 쓰는 일은 물론 제 정신을 지니고 하루하루 살아내기마저 힘든 암군시대가 분명하였다. 그랬다. 우리뿐만 아니라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는 광주에서의 참혹한 학살을 나 몰라라 한 채, 눈 감고, 귀 막고, 입에 재갈을 물려, 스스로 자폐증 환자가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삶 자체가 치욕스러운 암군시대임에 분명하였다. 어쩌면 명이회란 한 달에 한 번 서로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자폐증을 치유하고자 한 나름대로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몰랐다. ●20년 넘게 아구와 다른 생선인줄 알아 당시의 정황을 부연하기 위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여기에 ‘꽃 피는 봄날’이라는 자작시 한 편을 인용하고 싶다. ‘어머니, 당신이 손수 물 주어 기르신 앵두나무, 사과나무, 배나무는 이 봄에도 어김없이 꽃을 피웠습니다. 밤이면 더욱 눈부신 저 꽃무더기들은, 어머니, 어찌 당신 혼자 오셔서 꽃 피우셨겠어요. 오늘밤 저렇게 많은 넋들이 함께 몰려와 잠든 자식을 깨워 눈부시게 할 때, 아직까지 미치지도 죽지도 않은 자식을, 어머니, 단 한번만 기뻐해주세요.’ 명이회의 모임이 어언 최원식의 인천에 이르러, 그날도 우리 다섯 명은 인천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먹고 마신 끝에 대취하였다. 그리고 새벽녘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깨어보니 최원식, 이시영, 나 이렇게 셋이서 무슨 은행건물의 계단에 쓰러져 자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다섯 중에서 김성동과 이동순이 어디에선가 먼저 떨어져 나가고 셋이서 다시 술집을 전전한 끝에 인사불성이 되어 은행건물의 계단을 베개 삼아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마침 추위가 닥친 무렵이라 취중에서도 셋은 서로 몸을 꼭 껴안아 체온을 아끼는 자세였다. 그런 우리를 출근길에 나선 직장인들이며 학생들이 바쁜 걸음의 와중에도 멈추어 서서 힐끔거렸고, 몇몇 여학생들은 유리알 구르듯 명랑한 목소리로 깔깔깔, 드러내놓고 웃음을 터뜨려댔다. 우리로서는 어찌 일말의 자괴가 없을 수 있으랴. 최원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가면 안 되는데….”. 이시영이 뒤를 이었다.“갈 데까지 간 모양이여.” 나도 한 마디 덧붙였다.“그래도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가슴 한 쪽이 시원하기는 하네.” 짧은 자괴 끝에 최원식이 말머리를 돌렸다.“어디 가서 해장은 해야지?” 최원식이 골목길을 한참 헤매더니 마침내 허름한 음식점의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그리고 처음 보는 기이한 생선매운탕으로 해장을 했다. 새벽까지 이어진 술끝이어서, 해장을 하자마자 머리 속의 명정(酩酊)은 물론 뱃속의 욕지기도 다시 맹렬하게 살아올라왔다. 그런 명정과 욕지기의 와중에서도 처음 대하는 생선매운탕의 맛이 참으로 시원하고 개운했다. 내가 생선 이름을 물어보자 최원식은 물텀벙이 하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날 아침의 물텀벙이탕은 나의 기억 속에 무슨 꿈결에서처럼 아련하면서도 선명하게 그 맛이 각인되어 남았다. 그런 내가 물텀벙이가 아구에 대한 인천식 사투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동안 나는 물텀벙이와 아구를 전혀 종류가 다른 생선으로 잘못 알고 지낸 것이었다. 나로서는 20년이 훌쩍 넘도록 둘을 다르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 숫제 불가사의할 지경이었다. 비록 인천은 아니지만 서울에서도 한 달에 두어 번 꼴로 즐겨 찾던 요리가 아구였던 것이다. 인하대학교 어름에 있는 용현동 네거리의 물텀벙이거리는 시쳇말로 음식특화거리의 하나이다. 인천에는 물텀벙이거리 외에도 화평동의 냉면거리, 인현동의 삼치거리, 차이나타운의 밴댕이회거리 등의 음식특화거리가 있는데, 인천시에서 10여 년 전부터 적잖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성진물텀벙’은 오늘날 용현동 네거리의 물텀벙이거리가 있게 한 원조이다. 구관(032-883-6690)과 신관(032-883-1771)이 한 건물에 나란히 있는데,1970년 1월 전병찬, 우금련 부부가 현재의 구관 자리에 비가 줄줄 새는 움막집을 월세로 얻어 인천에서는 처음으로 물텀벙이탕을 시작한 것이었다. 원래 신포동에서 왕대포집을 하다가 부부가 다 사람이 좋아서 외상만 잔뜩 주는 바람에 밑천까지 들어먹는 식으로 쫄딱 망하고, 우연히 물텀벙이에 생각이 돌아 까짓것하고 막가는 심정에서 시작한 물텀벙이탕이었다. 당시에 인천사람들은 물텀벙이 자체를 흉물스럽게 여겨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아, 그야말로 연안부두 바닥에 흔하게 굴러다니며 자칫 발에 걸리적거리는 천덕꾸러기가 물텀벙이였다. 물텀벙이라는 이름 자체도 어부들이 아무짝에 쓸모없이 흉물스럽기만 한 고기가 그물에 걸리면 당장 작살로 찍어서 바다에 버렸는데, 텀벙 하고 물에 빠지는 소리를 그대로 이름 삼아 물텀벙이라고 부른 것이었다. ●생김새 흉측해 연안부두의 천덕꾸러기 처음에는 물텀벙이탕을 작은 양은냄비 하나에 200원부터 시작하였는데, 무엇보다도 싸고 양이 많은데다가 막걸리에 곁들이는 술안주로는 그만이어서, 주로 연안부두의 부두노동자들로부터 입소문이 퍼졌다. 급기야 입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너나없이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물텀벙이탕을 처음으로 시작한 이 벤처 부부는 3년 만에 움막집을 헐고 이층집을 지을 정도로 떼돈을 벌었다. 그러자 이 부부의 성공에 힘입어 용현동 네거리 일대에 하나 둘 물텀벙이탕 집들이 늘어나게 되고, 마침내 물텀벙이거리까지 이루게 되었다. 물텀벙이탕은 한 마리에 4,5kg 나가는 큰 놈을 굵직굵직하게 잘라 바닥에 안치고, 미더덕이며 새우 같은 해물에 콩나물, 미나리, 쑥갓, 깻잎, 냉이, 목이버섯, 호박 등의 갖은 야채를 넣은 다음에 번줄이라고 부르는 말린 밴댕이를 고와낸 육수를 부어 끓여내는데, 한 입 뜨자마자 그 시원하고 개운한 입맛은 20여 년 전의 어느 날 아침에 무슨 꿈결에서처럼 아련하면서도 선명하게 각인된 기억이 당장에 살아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물텀벙이는 탕과 찜의 값이 같아 특대 4만원, 대 3만 5000원, 중 3만원, 소 2만 5000원인데, 특대며 대는 너댓 명이, 중은 서너 명이, 소는 두세 명이 족히 먹을 수 있는 양이다. 또한 탕과 찜은 각각 고기며 야채를 먹은 다음에 고소한 국물에 공깃밥을 볶아먹거나 쫄면을 넣어 쫄깃한 면발을 즐길 수도 있다. 동인천역 부근의 화평동 냉면거리는 철로의 굴다리에서 중앙시장 입구를 마주한 송월동 방면으로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소위 세숫대야냉면으로 더 알려진 냉면거리는 역시 인천시의 음식특화거리 중의 한 곳이다. 삼미소문난냉면, 웃터골냉면, 냉면천국, 화평냉면, 할머니냉면, 동그라미냉면, 일미냉면, 고향냉면, 옛날우리냉면, 아저씨냉면, 기와집냉면, 왔다냉면 등이 한꺼번에 몰려 있다. ‘삼미소문난냉면’(032-777-4861)은 화평동에 소위 냉면거리가 있게 한 원조 격으로 알려졌다.1980년 김중훈, 김현금 부부가 시작한 냉면집은 처음에는 백반도 함께 팔았는데, 둘 다 300원으로 값이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음식 인심 변함없어 동인천역 일대는 원래 동일방적, 이천전기, 대성목재, 동아제분, 대우중공업, 인천제철 등 큰 공장이 많아서 퇴근 무렵이면 젊은 남녀 노동자들이 우루루, 식당으로 몰려왔는데, 한창 젊은 나이의 노동자들은 너나없이 냉면 한 그릇이나 밥 한 그릇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결같이 하는 말은 ‘아줌마 냉면사리 하나 더 줘요.’ 아니면 ‘아저씨, 밥 한 그릇 더 줘요.’였다. 마음씨 좋은 부부는 밥그릇이야 그렇다 치고, 냉면그릇은 아예 그릇 자체를 바꾸어버렸다. 보통 냉면집보다 두 배는 커서 2ℓ의 물이 들어가고도 공간이 남는 커다란 양푼이었는데, 그러자 언제부터인가 손님들 사이에 소문이 돌아 냉면 자체가 숫제 세숫대야냉면이 되어버렸다. 물론 세숫대야냉면으로도 양이 모자라 하면 얼마든지 먹게끔 냉면사리를 시쳇말로 리필을 했다. 이들 부부가 20년이 훨씬 넘게 냉면을 팔면서 가장 많이 리필을 한 이는 일곱 번으로 기억하고 있다. 부부는 이 모든 것이 배고픈 시절의 이야기라면서 껄껄 웃었는데, 요즈음은 대부분이 세숫대야냉면 한 그릇을 비우는데도 벅차 하지만 이따금씩 세 번쯤 리필을 하는 이도 없지 않다고 했다. 세숫대야냉면이 소문이 나면서 주변에 하나 둘씩 냉면집들이 생겨나고,10여 년 전부터는 음식특화거리로 지정되면서 아예 골목 자체가 냉면거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삼미소문난냉면도 더 이상 백반은 중단한 채 냉면 하나만으로 메뉴를 고정시켰다. 그동안 냉면 값은 14년 전의 300원에서 3500원으로 껑충 뛰었지만, 냉면의 맛이나 양은 변함이 없다. 그렇듯이 손님들 또한 20년이 넘는 단골손님들이 수두룩하다. ■ 한 접시 5000원 ‘입맛대로’ 인천역 부근의 차이나타운 한 쪽에도 음식특화거리 중의 하나인 밴댕이회거리가 있다. 목포밴댕이, 제1호밴댕이, 수원집, 서산밴댕이, 터줏골밴댕이, 충남식당, 도은식당, 원조밴댕이, 포장마차밴댕이, 연화밴댕이 등이 처마를 나란히 한 채 사이좋게 늘어서 있다. 이중에서 ‘원조밴댕이’(010-0698-5023)가 이곳에 밴댕이회거리가 들어서게 한 원조 격인데,40여 년 전부터 가게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원래는 김완순씨가 주인이었는데 나이가 일흔이 넘어 일을 그만 두면서 딸인 한이정씨가 가게를 맡고 있다. 밴댕이회는 5월에 가장 많이 잡히면서 제철을 이루지만, 그 외에도 멸치나 전어잡이 등에 잡어로 함께 잡히기 때문에 철이 없이 아무 때나 밴댕이회의 고소한 맛을 즐길 수가 있다. 밴댕이회거리에는 밴댕이회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밴댕이회, 전어회, 오징어회, 병어회, 준치회 등이 한 접시에 5000원씩인데, 저마다 입에 감치는 맛이 달라서 밴댕이회 외에도 두세 가지를 함께 곁들여 술안주로 삼으면 하루저녁이 내내 즐거우리라. 이들은 횟감 이외에도 같은 값에 구이로 내놓아서 회를 싫어하는 사람도 역시 즐거울 수가 있다.
  • [녹색공간] 거북이 도배 명상/오한숙희 여성학자

    지은 지 2년이면 새집 축에 들련만 우리집은 벽에 곰팡이가 피고 바닥장판이 쭈글거리는 것이 몇십 년은 족히 산 낡은 집과 닮아 버렸다. 집들이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한지를 바른 벽이 얼룩지는가 싶더니 곰팡이균의 왕성한 번식력을 보여 주는 현장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장판과 벽지를 조금 뜯어본 우리는 경악했다. 애초에 집을 지을 때 새집증후군을 우려하여 양옥으로 지으면서도 벽과 바닥의 마감을 시멘트가 아닌 황토로 해놓고 무척 흐뭇해 했는데 장판에는 화학 접착제를 사용한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황토와 한지는 공기가 통해야 하는데 화학제가 발린 곳은 숨을 쉬지 못해 습기가 찼고 거기 물이 고이면서 곰팡이가 피어나게 된 것이었다. 집수리를 하기로 결정한 것은 새로운 고민의 시작에 불과했다. 우리의 의도를 헤아려 자연친화적으로 시공해줄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보다 못한 칠순의 어머니가 걷어붙이고 나서셨다. “얘, 예전에는 식구들끼리 집도 지었는데 방 서너개 도배 정도야 우리 손으로 못하겠니. 괜히 사람 사느라 애쓰고 돈 쓰고 할 것 없다. 우리가 해달라는 대로 안 해주면 더 속상할 수도 있고.” 솔직히 시간이 문제였다. 일요일 밥 한끼도 가족들이 다 모여 먹기 어려운 처지에 어느 세월에 이걸 끝낼 것인가. 젊은 것들이 머리만 굴리며 날짜를 보내고 있는 동안 늙은 어머니의 손은 냄새나고 축축한 종이들을 말끔히 벗겨냈다. 젊은 것들이 날 한번 잡아 싹 해치우자고 차일피일 하는 동안 어머니의 손은 거북이처럼 초배를 시작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집에 놀러 왔던 내 후배들이 담소중에도 쉬지 않는 어머니의 거북이 도배에 끌려들기 시작했다. 밀가루 풀을 쑤며 예전에는 이걸 밥처럼 간식처럼 먹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나오고 손바닥으로 풀을 주물러 한지에 바르면서 스트레스가 풀린다며 예술치료의 효과를 누리기도 했다. 풀먹은 한지를 조심조심 맞들고 가며 호흡을 맞추는 사이 서로를 깊이 느끼게 되고 협동의 아름다움도 연출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풀기를 대충 씻은 손에 따뜻한 차 한잔씩 들고 둘러 앉으면 탄성이 절로 나왔다. “어이구, 훤하네.” “다 마르면 더 이쁠거야.” 사람의 손길을 받아 변해가는 방의 모습을 품평하노라면 노동의 나른함과 뿌듯한 만족감이 함께 녹아 들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좋은 기분이라고들 했다. 거북이 도배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서둘러 끝내자고 독려하는 사람도, 지쳤다고 그만 하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쩌면 우리는 방을 도배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로 도배하는 재미에 빠져 있는 건지도 모른다. 뭐든 빨리, 속이야 어떻든 겉보기에 깔끔하게, 내 힘으로 하기보다 돈주고 해결하려는데 익숙해진 마음들이 어느 새 하나 둘 벗겨져 나가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지. 일하는 도중 걸려온 휴대 전화에 대고 후배 하나가 소리친다. “이건 도배가 아니라 명상이야. 명상.” 오한숙희 여성학자
  • [뒷골목 맛세상] ‘분당음식’의 자존심

    [뒷골목 맛세상] ‘분당음식’의 자존심

    1980년대 말 노태우정권이 수도권 4대 신도시계획을 발표하기 전까지만 해도, 성남에서 수원 가는 사이의 도로변에 있는 분당이라는 지명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서쪽으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치달리고 동쪽으로는 불곡산 산자락이 막아서서 남북으로만 협곡 비슷하게 길게 펼쳐진 보잘것없는 들판은, 그러나 신도시계획이 발표되면서 급기야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하여 하루아침에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1990년대 초에 이르러 거대한 아파트단지로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부터 분당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서의 맡은바 역할을 충실히 해내었다. 수도권 4대 신도시 중에서도 서울이라기보다는 강남의 위성도시 비슷한 중산층 주거공간의 이미지를 형성하면서, 주로 강남지역에 사는 비교적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이 너도나도 분당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강남에 살던 이가 20평,30평대의 아파트를 팔아서 분당에 오면 40평이나 50평대의 아파트를 마련하고도 돈이 남아, 여분으로 중형 자가용에다가 골프 같은 레저용품까지 장만할 수 있었다. ●인구 40만 넘지만 자족도시로는 미흡 흔히 도시의 현상을 공부하는 이들은 위성도시가 그 어미도시로부터 단순하게 인구나 기능을 나누어 갖는 데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충족되는 도시의 기능을 갖는 자족도시로 발전하려면 그 어미도시와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식이라면 고속도로나 고속화도로를 이용하여 불과 10여분 만에 오고갈 수 있는 강남과 분당은 서로 가까워도 너무 가까운 셈이다. 실제의 거리가 그럴진대 그 어미와 자식 사이의 문화적 거리는 어떠하랴. 비록 잠은 분당에서 자지만 그밖에 먹고 마시고 입고 노는 일체의 문화행위는 강남과 한 치의 오차도 없으리만큼 분당은 강남의 판박이였다. 분당은 지역의 특성에 있어서도 일산이나 평촌같은 다른 신도시들과도 달리, 강남 이외에는 주변에 서로 문화를 교류할 수 있는 전통적인 자연부락 따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고립된 공간 안에 갇힌 셈이다. 경부고속도로와 험준한 불곡산 자락에 동서로 옥죄인 채 남북으로 뻗은 일종의 호로병 형상에 갇힌 분당은 애오라지 강남 한 곳으로만 숨통이 트여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분당 특유의 공간적 폐쇄성이 문화적 폐쇄성에도 한 몫 단단히 거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실 분당은 행정적으로는 성남시의 일개 구에 불과하다. 그렇듯이 행정상으로는 분명히 성남이 분당의 어미도시이다. 분당은 서울방향 이외에도 용인이나 수원에서 분당을 관통하여 성남으로 빠지는 도로가 있지만, 분당사람들치고 행정상의 어미도시에 대한 문화적 취향 때문에 이 길을 찾는 이들은 거의 없을 터이다. 도대체 성남은 어떻게 태어난 도시인가. 일찍이 1960년대 말 ‘불도저시장’이라고 불리던 김현옥 서울시장이 무허가 판잣집 18만 채 중에서 우선 미관상 가장 볼썽사납던 청계천 일대의 판잣집들을 막무가내로 헐어낸 다음 바로 그들을 몰아붙여 대규모 단지를 조성하면서 만들어낸 도시가 아닌가. 분당 사람들로서는 그런 성남을 어미도시로서 인정하기가 어쩐지 껄끄러운 기분인 것이다. ●강남의 판박이… 고유 음식문화 없어 신도시로서 입주가 거의 완료된 분당은 자체만으로도 이제 인구 40만을 넘나드는 그야말로 큰 도시가 되어 있다. 그런 큰 도시가 자족도시로서의 문화나 사회적 기능이 전무하다면, 어쩔 수 없이 괴물스러울 수밖에 없을 터이다. 그런 괴물스러운 모습은 음식문화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인구 40만의 도시에서 나름대로의 특성이 살아있는 음식문화는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인다. 새마을연수원 입구의 먹자골목, 야탑동 일대의 먹자골목, 서현동 삼성플라자 일대의 먹자골목, 정자동 일대의 먹자골목, 효자촌 일대의 먹자골목…. 어디를 둘러보아도 이것이다, 하고 내보일 만한 분당만의 특색 있는 음식은 보이지 않는다. 애오라지 보이는 것은 분당점이라는 분당만의 희한한 간판이다. 고마다래 분당점, 정성본샤브스끼 분당점, 하야미 분당점, 사누키보레 분당점, 미다래 분당점, 아이스배리 분당점, 무교서린낙지 분당점, 암사해물탕 분당점, 예닮골 분당점, 참치명가 분당점, 천하일품 분당점, 부뚜막왕뚜껑 분당점, 놀부보쌈 분당점, 명동칼국수 분당점, 동경샤브샤브 분당점, 만다린 분당점에서부터 이화주막 분당점, 사발에 술내리고 분당점, 밀밭 사이로 분당점을 거쳐 틈새라면이라는 분식집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이 어미도시에서 유명한 음식점들의 분당점이란 간판을 달고 있다. 이를테면 음식문화 또한 철저하게 강남이라는 어미도시를 향한 자식도시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셈인 것이다. 분당점 일색의 자식도시 분당에서 당당하게 분당 본점이라는 간판을 내건 음식점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감격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정자동에 있는 ‘육남매 전주영양돌솥밥전문점’(031-713-9777) 분당본점의 주인 되는 이는 신기종씨인데, 재미있는 것은 육남매라는 상호 그대로 신씨 일가의 6남매가 모두 돌솥밥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1994년 정자동 먹자골목 초창기에 전주영양돌솥밥전문점이라는 상호를 전국에서 처음으로 내걸고 식당을 시작한 6남매 중의 둘째 신기종씨를 비롯해서, 첫째 신기원(031-703-9467)씨가 서현동 분당중앙교회 옆에 1995년 같은 상호의 식당을 내고, 셋째 신기현(031-262-0908)씨 역시 1995년에 분당 건너편에 있는 수지의 상현지구에 같은 상호의 식당을 내고, 넷째 신승희(031-707-7243)씨 역시 1995년에 야탑동 지하철 야탑역의 1번출구 관보빌딩 뒤에 있는 먹자골목에 같은 상호의 식당을 내고, 다섯째 신정희(031-718-9878)씨가 1997년에 수내동에 같은 상호로 식당을 내고, 여섯째 신기천(031-206-6090)씨가 약간 늦은 1998년에 그동안 다니던 LG산전을 그만 두면서 같은 상호의 식당을 낸 식이다. ●육남매 모두 같은 상호로 전문점 운영 이들 신씨 일가가 모두 ‘육남매 전주영양돌솥밥전문점’이라는 상호로 식당을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맨 처음 정자동에 돌솥밥 전문점을 차린 둘째 신기종씨의 예상외의 성공이 디딤돌이 되었다. 신기종씨의 부인 최순애씨는 원래 전주출신으로 솜씨가 남달라서 일찍이 한식조리사 자격증까지 땄는데, 최순애씨의 솜씨에다가 전통 전주비빔밥의 특색을 살려낸 영양돌솥밥이 손님들의 입맛에 맞아 호황을 이루자, 이에 고무된 신기종씨가 형제들을 불러 분당 일대에 신씨 일가의 음식왕국을 이룩한 것이다. ‘육남매 전주영양돌솥밥전문점’의 주된 메뉴는 역시 7000원짜리 전주영양돌솥밥이다. 전북 장수에서 나는 곱돌 돌솥에 전북 부안에서 생산된 쌀과 완두콩, 검정콩, 은행, 고구마를 섞어 밥을 해낸 다음에 달걀노른자를 고명으로 얹어내는데, 여느 돌솥밥처럼 다른 비빔그릇에 밥을 퍼내 야채와 함께 비벼먹고 누룽지는 뜨거운 물을 부어놓았다가 식사를 끝낸 후에 입가심으로 개운하게 훌훌 먹는 식이다. 이 집에서 비빔용으로 나오는 야채로는 상추겉절이, 돈나물, 콩나물이 있는데, 이 중에서 상추겉절이가 양념장과 함께 결코 6남매 외의 다른 돌솥밥집에서는 흉내 낼 수 없는 비법이 있는 모양이다. 적당한 크기로 손으로 일일이 찢은 상추에 영양부추와 참나물을 넣고 새콤한 소스로 버무리는데, 이 상추겉절이를 돈나물과 콩나물을 넣어서 고명으로 얹은 달걀노른자에 스윽스윽 비벼 한 입 가득히 넣으면 세 가지 야채의 향기가 오래 남는다. 만일 야채가 부족하다 싶으면 밑반찬으로 나오는 무시래기무침, 취나물무침, 유채나물, 도라지, 연근, 느타리나물 등을 더 넣고 비벼도 좋다. 곁들여서 된장국과 조기구이도 나오는데 조기는 비록 씨알은 적지만 맛은 빼어나서 돌솥밥을 비벼먹는 틈틈이 입맛을 바꾸는데는 부족함이 없다. 이밖에도 전주영양돌솥밥에 불고기버섯전골을 곁들인 ‘육남매정식’(1만 2000원)이 있는데, 정다운 이와 더불어 식사와 술을 겸하는 데는 이것으로 넉넉할 터이다. 성남에서 분당으로 들어오는 야탑동 초입 여수동에 몇몇 갈매기살집들이 있다. 원래 분당이 생기기 전 광주군 돌마면에 속했던 여수동은 여수동이라는 마을 이름보다는 갈매기마을로 더욱 유명하여 자연부락 형태의 30여집이 모두 갈매기살 전문집을 할 정도였다. 이렇듯 여수동이 갈매기마을이 된 것은 다름 아닌, 마을에 있는 도축장 시설 때문이었다. 이 도축장에서 부위별로 육가공 되는 돼지고기 부속물 중에 전혀 돼지고기 같지 않게 맛이 뛰어난 갈매기살만 한 부위만을 메뉴로 하여 식당을 차린 것이 전국에서도 유명한 여수 갈매기마을로 발전한 것이었다. 그 후 분당이 개발되면서 여수동은 대부분 분당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도축장은 물론 갈매기마을도 태반이 사라져버렸지만, 다행히 네댓 집이 남아 갈매기마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때 30여곳 성업… 네댓집만 명맥 유지 ‘유명갈매기’(031-752-2393)는 여수동 갈매기마을의 원조답게 옛날부터 내려오는 터전에서 오로지 갈매기살 메뉴 하나만을 고집하며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유명갈매기는 주인이 셋인데, 서로 형제 사이로 맏형 김성웅씨를 위시해서 김선호, 김선이씨 세 형제가 오순도순 식당을 꾸려간다. 갈매기살은 손님 취향에 따라 생갈매기살과 양념갈매기살로 나누어져 값은 모두 1인분에 9000원으로 같은데, 맛은 맛대로 뛰어나지만 돼지고기 한 마리에서 나오는 갈매기가 통째로 나오는 양 또한 푸짐하다. 숯불에 굽는 갈매기살은 유명갈매기에서 만들어낸 깻잎전병에 싸먹는 맛이 일품이다. 깻잎 위에 얇게 저미듯 둥글게 썬 무를 얹어, 깻잎과 무를 한 켜씩 정성스럽게 쌓은 다음에 새콤달콤한 소스를 뿌린 것이 깻잎전병이다. 이 깻잎전병에 참기름을 묻힌 갈매기살을 얹고, 마늘과 고추를 된장에 찍고, 파무침으로 마무리한 다음에 한 입 가득히 넣으면, 입안에서 어우러지는 맛의 조화가 가히 절묘하다. 이밖에도 달리 상추며 깻잎, 고구마, 당근, 순무 같은 여러 야채들이 넉넉하게 나오는데, 야채들은 겨울 한 철을 뺀 나머지 세 철에는 집 뒤의 드넓은 텃밭에서 직접 기른 것으로 내고 있다. 여기에 얼음을 동동 띄워 나오는 시원한 동치미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갈매기살과 술 몇 잔으로 배를 불리고 나오면 넓은 정원 가득히 매화나무, 살구나무, 배나무, 복숭아나무, 자두나무, 감나무, 밤나무 등 갖가지 유실수들이 제철마다 환하게 꽃을 매달고 있어 덤으로 꽃구경도 할 수 있다. ■“갈매기살은 가짜없다” 돼지고기의 횡격막에 붙은 갈매기살은 돼지고기 한 마리에서 불과 300g에서 500g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 희소부위다. 이를 아는 어떤 이들은 더러 갈매기살이 가짜가 아닌가 하고 의심도 하는 모양이다.‘유명갈매기’의 사장 김선웅은 어렸을 때부터 선친에게서 물려받은 전문적인 지식으로 그런 의심을 명쾌하게 풀어냈다. 그이의 말에 따르면 전국의 도축장 80여 곳에서 하루에 도축하는 돼지들의 마릿수가 적게 잡아 500마리에서 많게는 2000마리에 이르는데,1000마리를 평균으로 해도 8만마리라는 것이다. 이 8만마리에서 나오는 갈매기살은 합계가 모두 32t에 이르는데, 대부분의 식당에서는 갈매기살을 다른 부위와 함께 팔뿐 갈매기살만을 전문으로 파는 집은 전국적으로 따져도 불과 몇 군데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물량이 얼마든지 남아돌아 갈매기살에 가짜를 쓸 이유가 없으니 안심하고 갈매기살의 쫀쫀하고 고소한 맛을 얼마든지 즐기라는 것이다.
  • [나눔세상] 집 고치는 모임 ‘해뜨는 집’

    [나눔세상] 집 고치는 모임 ‘해뜨는 집’

    “이렇게 깨끗한 집에서는 난생 처음 살아본다우. 죽은 딸이 생각나 한참을 울었지. 너무 고맙수.” ‘해뜨는 집’ 사람들이 오면 즐거움을 잊은 지 오래인 산동네에 웃음이 피어난다. 비가 새고 천장이 내려앉아 폐가나 다름없던 오두막이 어느새 말끔해지고 구들장에는 온기가 돈다. ●비새던 천장막고 구들장엔 온기 ‘산동네 웃음꽃’ 1999년 출범한 ‘해뜨는 집’은 집 고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기초생활보호대상자와 독거노인, 편부모 가정 등 저소득 소외계층을 찾아 무료로 집을 수리하는 일을 한다.‘해뜨는 집’에는 어둡고 칙칙한 집을 밝고 따뜻하게 바꾼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해뜨는 집’은 열린사회시민연합 북부지부 김선균(39) 대표가 만든 단체이다. 건축인테리어 사업을 하던 김 대표는 주변의 친구 4∼5명과 함께 이 활동을 시작했다. 독거노인의 말벗이 되기 위해 방문한 집들이 건강을 유지하기에는 너무나도 열악했던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김진숙(34) 기획국장은 지난주에도 회원 6명과 다리가 불편한 독거노인의 집을 고쳤다.70대인 김한식 할아버지는 노인성질환으로 다리가 불편해 화장실 좌변기에서 뒤로 넘어질 때도 있었다. 좌변기를 높이고 마루에서 화장실에 이르는 손잡이를 설치했더니 할아버지는 “이제 좀 편하게 볼일을 볼 수 있게 됐다.”며 만족스러워했다. ●99년 출범 서울 250명 자원봉사… 150여채 수리 김 국장은 교통사고를 당한 장애인 청년의 집을 수리했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사업에 실패한 뒤 재기에 몸부림치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휠체어를 타게 된 청년이었다. 가족이 이 청년을 병원에 데려다 주려면 몇 차례나 집안에 있는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다. 가족들이 지쳐가면서 청년은 감정이 상하는 일도 자주 생겼다. 회원들이 계단을 고쳐주자 장애인 청년은 손쉽게 집안에서 마당으로 나올 수 있게 됐다. 청년은 “다시 하늘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며 고마워했다. ‘해뜨는 집’이 활동영역을 넓혀가면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도 늘어갔다. 현재 서울지역에서는 7개지부에서 250여명이 봉사활동에 나서고 있다. 이달에 동작지부가 출범한 데 이어 내년에는 서울에 3개, 경기도에 1개 지부가 더 세워질 예정이다. 회원들이 그동안 수리한 집은 150여채. 활동이 왕성해진 최근에는 한달 평균 15∼20채의 집을 고치고 있다. 다음 달에는 겨울을 훈훈하게 보낼 수 있도록 어려운 가정에 연탄도 나눠주기로 했다. ●장애인청년 “다시 하늘 볼 수 있어 기뻐요” 주로 주말을 이용하는 집 수리에는 보통 6∼12명의 회원이 참여한다. 집을 고치는 비용은 한 채에 50만∼80만원 정도. 회원들이 한 달에 1만원씩 내는 회비와 지역사회의 교회나 기업체들의 후원금으로 꾸려간다. 김 국장은 “지붕을 교체하고 보일러를 설치하는 등 집수리는 끝이 없다.”면서 “하지만 좋지 않은 재정사정으로 도배를 하고 장판을 까는 데 그치는 때도 없지 않다.”고 아쉬움을 표현했다. 회원들은 봉사를 통하여 기쁨을 느낄 때 가장 행복하다고 입을 모은다. 라디오에서 ‘해뜨는 집’ 이야기를 듣고 참여했다는 김문기(39·건축업)씨는 “휴일에 쉬지 못하고 나와서 일을 하지만 오히려 생활에 더 활력을 준다.”면서 “일을 시작할 때는 어디부터 어떻게 손을 봐야할지 난감할 때가 많지만 집이 깨끗해지고 나면 마치 삼림욕을 하고 나온 것처럼 상쾌하다.”고 봉사하는 기쁨을 털어놓았다.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잘먹고 잘살자] 우~아하게 잔~잔하게 찬찬찬

    [잘먹고 잘살자] 우~아하게 잔~잔하게 찬찬찬

    특정 계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와인이 시나브로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국산 햇 포도주가 나왔는가 하면 프랑스의 보졸레 누보는 더이상 새삼스럽지도 않다. 국내 한 대학은 ‘포도주 개론’이란 강의도 개설했고, 한정식집에서도 와인을 갖추고 있다. 명절이나 결혼 집들이 선물로 와인을 안길 정도로 친숙해졌다. 와인을 서비스하고 추천·관리하는 소믈리에는 청소년들이 선망하는 직업으로 떠올랐다.많이 친숙해졌다고는 하지만 와인 테이블 매너는 여전히 어렵게 여겨진다. 국제적인 비즈니스를 위해서는 와인 테이블 매너가 필수조건이 됐다. 국내 최초의 와인경매사 조정용씨는 “마을 이름이 곧 포도주 이름”이라며 “전통적인 유럽 와인은 서양의 일상문화가 녹아 있어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아는 만큼 즐길 수 있고 알수록 재밌고 매력적인 게 와인”이라고 덧붙였다. ■ 분위기 좋은 와인바 ●라포도-서울 갤러리아백화점 맞은편 (544-7636)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와인바 중에서도 라포도는 다양한 와인을 적당한 가격에 편안하게 마실 수 있는 곳이다. 정장 차림보다는 캐주얼이라도 불편하지 않은 밝고 깨끗한 분위기다. 홀 중간에 벽처럼 칸을 지은 와인셀러(와인보관창고)가 세련됐다. 야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테라스도 있다.250여종의 와인을 3만원부터 마실 수 있다. 주종은 비교적 저렴한 편인 5만∼6만원선. ●라비뒤뱅-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맞은편 (3446-3375) 최고급 케이크로 유명한 ‘카페 라리’의 최순길 사장이 지난해 국내 최대 규모로 오픈한 고품격 와인바다. 프랑스말로 ‘포도주 인생’이란 뜻이다.180평 규모의 와인바에는 동호회 모임 등을 할 수 있는 6개의 룸과 60여명이 앉을 수 있는 홀이 마련돼 있다. 구비하고 있는 와인은 300여종.4만원대부터 200만원대까지 다양하다. 프랑스에서 공부한 소믈리에와 뉴욕과 도쿄에서 오랫동안 요리 경력을 쌓은 주방장이 와인에 어울리는 음식을 낸다. 식사로는 양갈비 스테이크와 안심스테이크 등이 있다.2만원부터. 포도주를 처음 접하는 아마추어부터 까다로운 입맛을 갖춘 마니아까지 즐길 수 있다. ●살롱뒤뱅-서울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 뒤쪽 (546-1970) 서울 청담동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 뒤쪽 ‘포도주 골목’의 살롱뒤뱅(546-1970)은 한국 와인의 대명사인 마주앙을 개발하고 공장장을 지낸 김준철 부녀가 운영하는 와인바다. 그의 딸 역시 프랑스 보르도의 와인 스쿨 카파(CAFA)에서 정규 소믈리에 과정을 마친 제대로 된 소믈리에다. 와인을 향한 부녀의 애착만으로도 내놓는 와인에 대한 신뢰가 가는 곳이다.600여종의 와인을 3만∼250만원에 팔고 있다. 포도주 소매도 한다. 와인과 잘 어울리는 치즈 안주가 풍성하다. 아담한 실내에서 흐르는 샹송이 아늑하다. ●카페 티롤-삼청동 총리공관 맞은편 (732-7005) 삼청동 총리공관 맞은편의 카페 티롤(732-7005)은 한옥을 개조한 카페 분위기다. 색다르게 와인을 음미할 수 있는 곳이다.50여종의 와인을 구비하고 있다. 예약하면 리스트에 없어도 찾아 준비해 준다. 와인에 어울리는 치즈도 5가지가 푸짐하게 나온다. 저녁 시간에는 포도주 애호가들을 위해 저녁 메뉴가 따로 준비된다. ●이곳도 가보세요 이밖에 한때 입구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는 까사델비노(542-8003), 개인셀러를 갖춘 샤토21(517-3338)은 인터넷(www.wine21.com)을 통해 예약하면 1400여종의 와인을 즐길 수 있다. 강북쪽 와인바의 터줏대감격인 삼청동 까브(739-1788)는 와인창고 카브를 본떠 만들었다. 세종문화회관 뒤쪽의 매드포갈릭(722-4580)도 50여종의 와인을 갖춘 레스토랑이다. 홍대앞에 있는 비나모르(02-324-5152)는 국가별로 450여종의 와인을 부담없는 가격대에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호텔도 잘 이용하면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 손님이 포도주를 들고가서 마실 수 있는 BYOB(Bring Your Own Bottle)를 실시한다. 양식당에서 인터컨티넨탈호텔은 매주 목요일, 롯데호텔은 월요일에 BYOB를 시행하고 있다. 이날은 음식값만으로 호텔의 세련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들 와인이 음식과 궁합이 잘맞으면 시너지효과를 일으켜 음식의 풍미를 복돋워준다. 프랑스 음식에는 프랑스 포도주가, 이탈리아 음식에는 그 나라산 포도주가 잘 어울린다. 서양 요리에서 거위간 요리에는 소테른 화이트와인이, 달팽이 요리엔 부르고뉴 화이트와인, 철갑상어알 요리는 샴페인이 잘 맞다. 와인에 가장 무난한 안주는 치즈. 둘 다 발효식품인 까닭이다. 신세대들은 삼겹살이나 순대와도 같이 먹을 정도로 와인을 즐긴다. 하지만 식초가 많이 든 샐러드를 먹을 땐 와인을 피한다. 식초의 신 맛은 와인의 천적이다. 조정용씨는 “진한 맛이 나는 젓갈이나 김치를 제외한 한식은 대부분 재료의 맛을 살린 가벼운 소스로 요리되는 것이 특징이므로 백포도주가 무난하다.”고 말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의 나물은 리즐링, 소비뇽 블랑, 샤르도네 같은 화이트와인이 잘 어울린다. 하지만 명절에 먹는 쇠갈비 등 묵직한 고기 요리에는 프랑스 보르도산이나 호주 쉬라즈와인 등 적포도주가 잘 맞다. 그러나 맵고 짠 양념과 국물류에는 맞는 와인을 찾기 힘들다. 붉은색 살코기와 양고기는 드라이한 레드와인 즉 카베르네 소비농, 바롤로,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가 어울리고, 닭고기·돼지고기 등 흰살 육류에는 샤르도네와 피노 블랑이 어울린다. 해물류와 생선에는 상쾌한 맛의 화이트와인 즉 피노 그리지오 등을 권할만하다. ■ 와인경매사 조정용씨와 우아하게 와인 즐기기 ●조정용씨는 국내에선 생소하면서도 유일한 와인 경매사다.2000년까진 ‘잘나가던’ 은행 대리였던 그가 미국에 국제금융 연수차 갔다가 와인 경매로 방향을 바꿨다. 와인이라곤 ‘마주앙’밖에 몰랐던 그는 원서를 사서 매일 공부하고, 혀로 끊임없이 익혔다. 와인 관련 지식이나 품평이 웬만한 소믈리에를 뺨칠 정도의 전문가로 거듭났다. 이후 전문 와인경매회사인 아트옥션(02-2163-3126) 대표를 맡고 있다. 국내 최초의 와인 경매사 조정용씨가 들려주는 와인 테이블 매너다. 와인 주문이 까다롭다던데요? -음식점에서 와인을 잘 모를 경우 와인 전문가 소믈리에게 물어보면 된다. 단맛인지 텁텁한 맛인지의 기호와 음식, 가격 등을 말하면 된다. 주문한 와인은 호스트가 제일 먼저 맛보고 ‘좋아요.’라고 말하면 된다. 좋은 포도주를 고르는 비결은. -전문 숍에선 점원에게 물어보거나 안내 가이드를 찬찬히 훑어보면 된다. 포도주 병에 붙은 라벨이 바랬거나 깨끗하지 않은 것은 피한다. 누워있는 와인을 고르면 좋다. 오래 서있어 코르크 마개가 말랐거나 코르크가 튀어나온 것은 피한다. 코르크가 마르면 틈 사이로 공기가 드나들어 와인이 산화되기 쉽고, 코르크가 튀어나온 것은 보관할 때 심한 온도 변화로 압력이 높아진 탓이다. 레드와인은 붉은 빛이 연하면서 갈색 기운이 도는 것, 화이트와인은 색깔이 진해져 갈색 느낌이 나는 것은 변질된 것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와인을 따를 때의 에티켓이 있습니까? -포도주 병이 잔이 닿지 않게 따른다. 와인을 막 쏟아붓지 말고 시냇물이 졸졸졸 흐르듯 경쾌하게 따른다. 대개 잔의 변곡점이 있는 부분 대략 3분의 1 정도 따른다. 마무리 할때 병을 살짝 돌려주면서 따르면 와인 방울이 테이블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 와인은 첨잔을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병을 흔들지 않는다. 흔들면 와인 침전물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잔을 받을 때의 매너는. -서양에선 호스트가 따를 때 와인잔을 잡고 들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연장자나 상사가 따를 땐 무언가 잡지 않으면 2%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럴 때 잔의 다리를 잡는 시늉도 무난하다. 그러나 편하고 안전하게 따르게 하기 위해 잠자코 지켜보는 것이 좋다. 대체로 레드와인 잔은 둥글고 넓은데 반해 화이트와인 잔은 좁고 깊다. 그러면 건배를 해야지요. -잔의 다리 부분을 잡고 중앙 부분을 가볍게 부딪치며 건배한다. 잔을 돌리듯이 부딪치면 울림이 좋고, 깨질 염려도 없이 안전하다. 건배는 대개 호스트가 먼저 제안한다. 그냥 마시면 되나요? -받자마자 원샷하거나 벌컥벌컥 마시지 않는다. 먼저 색깔을 보고, 향을 맡아 와인의 풍미를 감상한 다음 한 모금 정도 입에 머금고 여운을 감상하는 게 순서다. 와인은 주량을 자랑하지 않으며, 식사할 땐 1∼3잔 정도가 적절하다. 폭탄주로 원샷하며 취해야 마셨다고 생각하는 중년들에겐 감질나는 주법이다. 와인을 보관하는 방법은. -직사광선을 피하면서도 보관 온도가 일정해야 한다. 또한 흔들림이나 진동이 있어서는 안된다. 김치 등 냄새가 강한 것 주위에 보관하는 것은 삼가야 된다. 마개를 땄을 경우 이삼일 가량은 괜찮다. 이후엔 남은 와인은 음식을 조리할 때 쓰면 된다. 오래 숙성된 와인이 좋은가요, 단맛이 나는 와인은 싸구려라고 하던데? -모든 와인이 오래 숙성되지 않는다. 보르도 등급 와인처럼 몇 십년 보관하는 것이 있고, 보졸레 누보는 금방 마셔야지 오래 보관하면 상해서 낭패를 본다. 와인은 타이밍이다. 그리고 단맛이 나는 와인은 품질이 떨어진다는 것은 편견이다. 단맛이 풍부한 디저트 와인 중에는 최고급이 많다. 식후 와인으론 단맛이 잘 어울린다. 글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사진 이종원기자 jongwon@seoul.co.kr
  • [뒷골목 맛세상] 가평의 자연과 맛

    [뒷골목 맛세상] 가평의 자연과 맛

    경춘선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남양주에서 가평으로 접어드는 어름에 ‘어서 오세요. 자연을 가슴에 담아가는 가평’이라는 선전문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 아름다운 문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덜컥, 하고 가슴에 걸리는 느낌이었다. 자연을 가슴에 담아가라고?하기는 가평이야말로 산과 물 같은 자연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고장임에 틀림없다. 군내를 관통하여 흐르는 북한강과 그 강이 군데군데 빚어놓은 청평호반이며 남이섬, 그리고 대성관광지 같은 절경들, 거기에 어울려 함께 이어지는 유명산과 운악산, 축령산, 명지산 등의 장려한 산자락들은 얼마든지 둘러보아도 결코 싫증나지 않는 풍광이다. 그러나 내 가슴에 덜컥, 걸린 자연은 그러한 풍광들보다는 그 뒤에 숨어있는 또 다른 자연이었다. 일찍이 노자는 세상살이의 지혜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말하였다.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자면 ‘꾸밈이 없이 저절로 그러하게’이다. 그 무위자연에 노자는 덧붙인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살아가는 일을 물 흐르는 것처럼 해라. 아아, 단 한번이라도 나는 자신의 삶을 ‘꾸밈이 없이 저절로 그러하게’ 놓아둔 적이 있으며,‘물 흐르는 것처럼’ 흘려준 적이 있으랴. 계절마저도 가을이 깊어지고 어느 날 아침에 하얗게 무서리가 내린 끝에 저마다 제 빛깔이며 향기를 뽐내던 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시든 대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렇듯 무릇 생명 있는 것들의 마지막이란 시들어 말라붙다 못해 앙상한 형해(形骸)만으로 바둥대다가 끝내는 거친 시간의 바람 속으로 한 줌 먼지가 되어 사라지게 마련일 터이다. 불과 엊그제까지도 불붙듯 온 산에 붉고 혹은 노랗던 단풍들마저 낙엽이 되어 하릴없이 산야에 뒹굴고, 거기에 추수를 끝낸 빈 들판들도 덧없이 적막감에 싸인 채 보는 이의 눈을 시리게 한다. 언뜻 돌이키면 늙는다는 것은 저렇듯 적막한 늦가을의 풍경과 다름 없다. 비단 사추기(思秋期)의 여인만이 아니라, 자신의 살아낸 삶 속에서 무엇 하나 손에 잡히는 것 없이 허방을 짚는 듯한 이에게는 늙어서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길이란 더더욱 적막하고 허무한 풍경이나 다름 없을 터이다. 그리하여 화려한 빛깔과 향기 대신에 시든 대로만 남은 저 많은 생명들 또한 자신의 삶처럼 처연하다 못해 추하게마저 여겨질지도 모른다. 만일 그대 또한 자신의 살아낸 삶이 처연하다 못해 추하게마저 여겨진다면,‘가슴에 자연을 담아가라’는 가평의 여행길에 나서기를 권하고 싶다. 가평에서도 운악산 가는 어름에 있는 ‘꽃무지풀무지’(031-585-4875)라는 야생 수목원에 들르기를 권하고 싶다. 그리하여 한나절을 좋이 늦가을의 햇살 아래 수목원 여기저기 한가롭게 거닐기를 권하고 싶다. 그러다 보면 누가 알랴. 번쩍 그대의 눈이 열려 그대가 전혀 몰랐던 그대의 자연을 만나게 될지. 원래 꽃무더기 풀무더기라는 뜻인 ‘꽃무지풀무지’에는 지난 계절 내내 야생 수목원을 원색으로 한껏 장식했을 온갖 야생화들의 빛깔이며 향기는 더 이상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대신 수목원 가득히 펼쳐져 있는 것은 저마다 천명을 다하고 시들어 버린 꽃대들만이 지난 화려했던 시절의 증거처럼 남아서 잿빛 풍경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수생식물원을 지나고, 습지원을 지나고, 향기, 붓꽃, 나리원을 지나, 산채원이며 덩굴식물원을 지나도 그대를 기다리는 것은 역시 잿빛 풍경뿐이다. 어거지로 찾아낸다면 수목원 가장 위쪽 그늘진 곳에 숨어있는 국화원의 한 쪽에서 쑥부쟁이 몇 다발만이 애잔하게 보랏빛 잔명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야생 수목원의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대가 위안을 받을 만한 풍경은 없다. 동자꽃, 노인장대, 맥문동, 제비꽃, 은방울꽃, 둥글레, 용담, 앵초, 금불초, 초롱꽃, 비비초, 애기기린초, 금강초롱, 말나리, 하늘나리, 참나리, 털중나리, 꼬리풀, 금낭화, 노루삼, 산작약, 마타리, 패랭이, 구절초, 해국, 울릉국화, 한라구절초, 모싯대…. 그 모든 야생화들은 이제 한낱 푯말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뿐인가. 수목원의 뭇 야생화들은 정말이지 그대에게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않고 잿빛 풍경 속으로 속절없이 사라진 것뿐일까. 아니리라. 결코 그것뿐만은 아니리라. 그대가 흡사 자신의 처연한 삶이라도 어루만지듯 푯말과 함께 남아있는 야생화들의 시든 꽃대를 어루만지는 순간, 그대는 벼락처럼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시든 꽃대는 결코 시든 꽃대로만 끝나지 않는다. 시든 꽃대는 시든 꽃대대로 그 안에 길을 열고 있다. 그리하여 그대가 시든 꽃대가 안에 열린 길을 따라 어디론가 들어가게 된다면, 그대는 마침내 그대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연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만일 그대가 그대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연만 만나게 된다면, 그대는 다시 한번 깨닫게 될 터이다. 늙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다, 늙어서 그대 또한 시든 꽃대가 되면, 그때에서야 그대는 비로소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게 될 터이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야말로 모든 생명의 현상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일이다.은방울꽃의 시든 꽃잎 안으로 들어가 보라. 안으로 들어가 보면 바로 거기에는 다가올 어느 봄날 아침에 그다지도 화려하고 향기롭게 피어날 수천수만의 새로운 은방울꽃들을 만나게 되리라. 하늘나리의 시든 대 속으로 들어가 보라. 거기에는 이미 내년 봄에 새로운 줄기로 살아날 수천수만의 하늘나리들이 더없이 아름답고 신비한 모습으로 벌써부터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터이다. 아아, 늙어서 시들어진다는 것이야말로, 그리하여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리하여 오래 잊었던 자신의 자연을 만나고, 마침내 ‘꾸밈이 없이 저절로 그러한’ 지혜의 물을 만나서 비단 그대만이 아닌, 모든 생명 있는 것들과 함께 영원한 강이 되어 흘러간다면, 어떠한 늙음이며 죽음이 더 이상 그대를 홀로 적막하게 하랴. 세상살이라는 것을 그대와 나는 자칫 저마다 가득히 채워야만 할 무슨 항아리 같은 것으로만 여겨오지는 않았을까. 그리하여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그대와 나는 애오라지 항아리를 채우는 일에만 애면글면하지는 않았을까. 남보다 더 많이, 남보다 더 넓게, 남보다 더 가득히…. 그것이 결국은 밑이 빠져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라는 것조차도 모른 채.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마저도 잃어버리고 흡사 무슨 굶어죽은 아귀라도 씌인 것처럼 헛된 일에만 매달려 아등바등 하지는 않았을까. 아아, 무릇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비운 다음에야 비로소 더욱 가득히 채워진다는 것을 그대와 나는 왜 몰랐던 것일까. ‘꽃무지풀무지’는 11월 중순경까지는 문을 연다. 비록 겉보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적막하고 처연한 잿빛 풍경일 터이지만, 그 잿빛 풍경 안에서 만일 그대가 그대의 또 다른 자연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벌써 그대의 가을 여행은 온몸 가득히 충만해지리라. ‘꽃무지풀무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운악산 등산로 입구가 있고, 거기에 손두부집들이 올망졸망 촌락을 이루며 몰려있다. 그 중에서 할머니손두부가 유명하지만 어느 집을 들어가도 늦가을의 허기를 채우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따끈한 손두부(5000원)에 묵은 김치를 가닥으로 싸먹는 맛도 일품이지만, 거기에 가평의 명산품 잣막걸리를 한 잔 곁들이면, 꽃무지풀무지에서 이미 충만해져온 그대에게 더 이상 무엇이 부족하랴. 손두부 이외에도 순두부(3000원), 두부버섯전골(1만 2000원), 순두부백반(5000원) 등이 있다. 꽃무지풀무지에서 포천으로 가는 길목에는 현리에 국수호박을 전문으로 하는 시골마당(031-585-2309)이 있다. 이 국수호박은 호박을 국수로 만든 것이 아니라 호박 자체가 삶으면 국수처럼 줄줄이 면발이 되어 나오는 것으로, 여기에 양념장만 곁들이면 그대로 요리가 되는 100% 천연국수인 셈이다. 물국수호박과 비빔국수호박이 각각 5000원인데, 가평을 지나다가 출출하다 싶으면 한 그릇 뚝딱 먹어치우는 재미가 그야말로 별미일 터이다. 그대가 좀 더 가을 여행을 만끽하고 싶다면, 이번에는 신청평대교를 건너 유명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설악면의 들풀(031-585-4322)을 찾을 것을 권하고 싶다. 블루베리 스파랜드라는 온천으로 가는 쪽에 여유롭게 자리 잡고 있는 들풀은 된장이며 청국장을 직접 담가서 팔기도 하고 요리로도 만들어내는 청국장 전문집이다. 들풀은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람 키를 두 세배는 훌쩍 넘을 것 같은 콩 낟가리를 쌓아놓아 벌써부터 왠지 마음이 푸근해져오는 기분인데, 주인이 직접 농사를 지어 수확한 것이다. 콩 낟가리를 지나면 이내 항아리가 30,40개가 넘는 커다란 장독대에 다다르는데, 해마다 된장과 청국장 제조용으로 100여 가마씩 사용하고 있다. 들풀의 김용옥씨와 김안나씨 부부는 함께 주방일도 하고 서빙도 하면서, 주로 콩요리를 위주로 한 1만원짜리 정식을 한 상 차려낸다. 청국장찌개, 된장찌개, 생청국장, 두부부침, 된장부치미에 황태구이, 더덕구이, 잡채, 들풀무침 그리고 깻잎장아찌, 더덕장아찌, 황태장아찌에 각종 나물이 곁들여져 한 상 가득히 채우고 있다. 한 상 중에서도 특별한 맛을 내는 것은 생청국장으로, 고스란히 생으로 먹게 내온 것이다. 밑에 깻잎이나 머위, 상추, 김 등을 깔아 한 잎에 싸 먹게 되어있는데, 생청국장 위에 고명으로 얹은 보랏빛 오디가 주인의 살가운 마음씨를 엿보게 한다. 흔히 청국장이라면 아무리 몸에 좋다고 해도 우선 그 역한 냄새 때문에 먹는 것 자체가 고역스러운데, 여기에서는 매실을 넣고 검정콩가루를 섞어 발효시키는 비법으로 냄새를 해결한 것이다. ■ 된장찌개에 마늘은 ‘NO’ 들풀에서는 요리와 함께 청국장과 된장도 직접 판매한다. 청국장은 800g에 1만원, 된장은 3년 숙성된 것만으로 파는데,1㎏에 1만 5000원이다. 부부는 청국장과 된장을 팔기에 앞서 먼저 청국장이며 된장을 보다 맛있게 끓이는 법을 친절하게 일러주는데, 이들의 말에 따르자면 절대로 마늘을 넣지 말 일이다. 청국장에 무, 호박, 대파, 신김치, 양파, 청양고추, 두부를 준비해서 우선 무, 호박, 양파, 대파는 썰고, 신김치는 속을 털고 썰어서 꼭 짠 뒤 기름에 살짝 볶는다. 여기에 황태나 멸치를 우려낸 육수를 붓고 두부와 청양고추를 넣은 다음에 청국장을 알맹이 그대로 넣어서 걸쭉하게 끓이는데, 채소만 익었다 싶으면 금방 불을 끈다. 청국장은 유산균이나 비피더스균처럼 장을 깨끗이 하는 작용과 면역력을 키우는 효과가 있는데 자칫 오래 끓이면 이런 좋은 효소와 균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된장찌개 역시 마늘을 넣지 않고 청국장에 들어가는 재료 외에 감자와 표고버섯을 곁들이는데, 된장을 체에 걸러 풀어서 청국장보다 2배 정도의 시간을 들여 푹 끓여내는 식이다.
  • 삭발·혈서… 한나라·헌재 화형식

    삭발·혈서… 한나라·헌재 화형식

    신행정수도 예정지 주민들이 24일 헌법재판소의 수도이전 위헌 결정 이후 처음으로 집단행동에 나섰다. 연기군 남면 주민 200여명은 이날 오후 1시 30분 남면 종촌리 성남중·고교 앞에서 ‘헌법재판소 및 한나라당 규탄대회’를 갖고 삭발식, 화형식에 이어 혈서 등을 쓰면서 헌재의 판결에 대해 거세게 항의했다. 집회는 행정수도 건설 후 토지수용에 대비해 다른 곳에 살 집과 땅을 샀다가 피해를 본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열렸다. 이들은 ‘타도하자 한나라당 해체하라 헌법재판소’,‘정부와 여당은 개혁정치 중단말고 끝까지 추진하라’,‘수도권만 국민이냐 지방민도 국민이다’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행정수도 사업중단에 대해 울분을 터뜨렸다. 주민들은 “소수의견으로나 있을 수 있는 불문헌법 논리에 근거한 헌재의 위헌결정은 서울 중심주의와 이기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서울 거주 헌법 재판관들의 법 논리적 유희에 불과하다.”면서 “헌재의 신행정수도 특별법 위헌결정을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행정수도 이전에 당이 앞장서겠다.’고 밝히고 박근혜 대표가 총선 전 ‘행정수도 이전은 차질없이 추진될 것’이라고 장담했던 한나라당의 사기극에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다.”며 한나라당도 거세게 성토했다. 시위에 참가한 종천리 주민 서상범(64)씨는 “행정수도 이전을 믿고 다른 곳에 땅을 샀다 망하게 된 집들이 한 둘이 아니다.”면서 “‘핫바지’라고 불리며 번번이 당하는 충청도민들이 더 이상 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이어 ‘역사는 헌법재판소를 심판하리라’고 쓴 흰 천을 높이 4m의 볏짚 허수아비에 두른 뒤, 불을 붙이면서 헌재와 한나라당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쳤다. 주민 3명은 삭발식을 가졌다. 연기군 체육회 부회장인 김춘배(42)씨는 ‘충청단결’이란 혈서를 썼다. 집회에 참석한 이기봉 연기군수는 즉석 연설을 통해 “정치인들이 충청도민을 필요하면 쓰고 필요 없을 때는 버리고 있다.”며 “충청도가 더이상 ‘핫바지’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함께 싸워 나가겠다.”고 분위기를 돋웠다. 주민들은 트랙터로 추수를 앞두고 있는 100여평의 인근 콩밭과 수수밭을 갈아 엎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이날 남면 소재지인 중촌리 도로 곳곳에는 행정수도 이전을 반대하던 플래카드가 걷혀지고 ‘우롱당한 자존심 정부는 보상하라’,‘수도이전 왜곡보도 조선·동아일보 타도하자’란 주민들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었다. 시위현장에는 경찰 40여명이 지키고 있었으나 별다른 충돌은 없었으며, 주민들은 1시간쯤 시위를 벌인 뒤 자발적으로 해산했다. 연기군과 주민, 지역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은 25일 오전 11시 군의회에서 모여 행정수도 사업중단에 따른 ‘주민비상 대책위원회’를 구성한 뒤 다음주 중반 전 군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로 의견을 모았다. 한편 이날 집회에 앞서 기자회견을 가진 열린우리당 오시덕 의원은 “신행정수도 건설에 대비해 준비를 해 온 주민들의 경제적 손실에 대해 정부와 당에서 깊이 생각하고 있으며 후속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기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뒷골목 맛세상] 인천 차이나타운

    [뒷골목 맛세상] 인천 차이나타운

    작가 오정희의 빼어난 단편 ‘중국인 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둡고 절망적이며 게다가 퇴폐적이다. 주정뱅이, 양공주, 아편중독자 등이 우글거리는 1950년대 전쟁 직후의 ‘중국인 거리’에서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주인공 소녀는 앞날에 대한 한 가닥의 희망도 없이 초조(初潮)를 경험한다. 기실 작가에게 있어서 ‘중국인 거리’란 갓 자의식에 눈뜨는 자신의 내면풍경에 다름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일찍이 구한말 이래 ‘청관’이란 이름으로 인천의 북성동과 선린동 일대에 자리잡고 살아온 화교들의 참혹한 생활사가 단색 판화처럼 실사적 풍경으로 드러나 있기도 하다. ‘…저녁 무렵이 되면 바구니를 팔에 건 중국인들이 몰려들었다. 뒤통수에 쇠똥처럼 바짝 말아붙인 머리를 조금씩 흔들며 엄청나게 두꺼운 귓불에 은고리를 달고 전족한 발을 뒤뚱거리며 여자들은 여러 갈래로 난 길을 통해 마치 땅거미처럼 스름스름 중국인 거리를 향했다. 남자들은 가게 앞에 내놓은 의자에 앉아 말없이 오랫동안 대통 담배를 피우다가 올 때처럼 사라졌다. 그들은 대개 늙은이들이었다. …늙은 중국인들은 우리들에게 가끔씩 미소를 지었다. 통틀어 중국인 거리라고 불리는 동네에, 바로 그들과 인접해 살고 있으면서도 그들 중국인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아이들뿐이었다. 어른들은 무관심하게 그러나 경멸하는 어조로 ‘뙈놈들’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들과 전혀 접촉이 없었음에도, 언덕 위의 이층집,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한없는 상상과 호기심의 효모(酵母)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밀수업자, 아편쟁이, 누더기 바늘땀마다 금을 넣은 쿠리, 그리고 말발굽을 울리며 언 땅을 휘몰아치는 마적단, 원수의 생간(肝)을 내어 형님도 한 점, 아우도 한 점 씹어먹는 오랑캐, 사람 고기로 만두를 빚는 백정, 뒤를 보면 바지도 올리기 전 꼿꼿이 언 채 서 있다는 북만주 벌판의 똥덩어리였다. 굳게 닫힌 문의 안쪽에 있는 것은, 십년을 사귀어도 좀체 내뵈지 않는다는 깊은 흉중에 든 것은 금인가, 아편인가, 의심인가.‘ 비단 작가 오정희의 작품 속에서만이 아니라도, 화교라는 이름으로 100년이 넘게 살아온 중국인들에게 우리나라는 척박한 황무지를 넘어 차라리 유형지에 흡사할 터였다. 애오라지 끈질긴 인내심 하나만으로 세계 곳곳에 ‘차이나타운’을 건설하여 어디에서나 나름대로 전통과 문화를 간직한 채 꼿꼿한 자긍심을 지켜온 화교들로서도 유일하게 발을 붙이지 못하고 쇠락의 길을 걸어야 한 곳이 바로 우리나라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 쇠락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의, 역시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화교들에 대한 각종 제도적인 제한과 거의 악랄하기까지 한 경제적, 사회적 차별정책 때문이었으리라. 그렇듯 어둡고 참담하고 부정적이며 어디를 둘러보아도 단 한 점의 희망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쇠락의 대명사 ‘중국인 거리’가 오늘은 관광특구 차이나타운이란 이름으로 화려하게 거듭 태어나고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 이르러 IMF 극복을 위한 외국자본 유인책의 하나로 외국인들에게 부동산 취득을 가능하게 하면서 화교들에 대한 각종 제한과 차별정책 또한 사라진 것이 빌미가 되어, 일찍이 이 땅을 떠나 타이완, 동남아시아, 미국 등으로 나갔던 2,3 세대의 화교들이 되돌아오고 덩달아 화교 자본도 함께 들어온 것이다. 실제로 지난 10월 초순 열린 ‘제3회 인천중국의 날 문화축제’때 둘러본 차이나타운은 옛날 가난에 찌든 어두운 모습은 거의 흔적조차 사라진 채 관광특구답게 보다 산뜻하고 이국적인 향취가 풍겨나는 화려한 거리였다. 중국풍의 백화점을 위시한 새로운 건물들이 곳곳에 들어서는가 하면,20여곳이 넘는 중화요리 식당과 중국잡화점, 중국식품점, 무역회사 등이 한창 번성하고 있었다. 이중에서도 새로 들어선 중화요리 식당들은 저마다 우리가 인천의 차이나타운이라면 습관적으로 떠올리는 자장면의 본고장이라는 식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젊은 세대들의 입맛에 초점을 맞추어 거의 퓨전에 가까운 새로운 메뉴들을 개발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자장면 하나에도 태림봉의 유슬자장면, 자금성의 향토자장면, 태화원의 채식자장면, 북경장의 시금치를 갈아 면을 뽑은 녹색자장면, 본토의 고구마자장면 등, 각 식당의 특성에 따라 전혀 새로운 자장면들이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었다. 태림봉(032-763-1688)은 일반 자장면을 약간 고급화하여 유슬자장면(5000원)이라는 특색 있는 자장면을 내었는데, 원래 유슬이란 돼지고기나 쇠고기를 가늘게 채 썰어서 볶는다는 뜻으로, 거기에 죽순, 표고버섯, 양파, 팽이버섯, 호박, 당근 등의 야채도 함께 채를 썰어서 자장소스를 만들어 보다 격조 높은 자장면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태림봉에서 맛본 요리 중 으뜸은 튀김초면(8000원)이라는 약간 생경한 이름이었다. 원래 팔진초면으로 더 알려져 있는데, 초면이란 일본의 라면처럼 면발을 기름에 튀겨 꼬불꼬불해진 것을 일컫는다. 팔진초면은 이름처럼 8가지 진기한 재료가 들어간다고 해 붙여진 것이다. 초면에 새우, 조개, 키조개, 오징어, 해삼, 소라 등의 해물과 죽순, 피망, 총각버섯, 샐러리, 청경채 등의 야채를 그릇 가득히 담아 내오는데,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드는 맛이 아연 일품이다. 만일 중화요리에 대하여 일가견을 가진 마니아가 있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태림봉의 기아해삼이란 비싼 요리를 권하겠다. 해삼의 내장을 빼내고 그 속에 새우며 키조개, 전복 등을 다져넣어서 통째로 찌고 튀기고 다시 볶아낸 다음에 한 입 크기로 먹기 좋게 잘라낸 이 기아해삼은 원래 쇼양해삼으로 불리는 요리이다. 그런데 옛날 기아자동차 회장이 이 요리에 심취한 나머지 거의 날마다 찾다 보니 중화요리 주방장들 사이에서 마침내 제 이름보다는 기아해삼으로 더 유명해져 버린 것이었다. 기아해삼의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드는 맛은 거의 황홀하여 비단 기아자동차 회장이 아니라도 깊게 빠질 수밖에 없는데, 한 접시에 6만원이나 되는 가격이 아깝지 않게 여겨질 정도였다. 향토자장면(4000원)으로 유명한 자금성(032-761-1688)은 태화원(032-766-7688)을 함께 운영하고 있는데 이 곳에선 채식요리들을 권하고 싶다. 태화원의 채식요리는 중국요리로는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다. 돼지고기나 닭고기, 쇠고기 같은 일체의 육류는 물론 생선마저도 사용하지 않고 대신에 콩, 표고버섯, 두부, 찹쌀, 감자 등으로 육류며 생선 맛을 내고 있다. 이를테면 콩으로 햄을 만들고 두부로 고기 맛을 내며 한천으로 해파리를 만들고 동고버섯 줄기로 생선을 만들어 내는 식이다. 이렇게 만들어내는 채식요리는 해파리냉채, 라조생선, 라조육, 탕수육, 팔보채, 샥스핀 등으로 물경 50여 가지에 이른다. 공화춘(032-766-0571)에서는 코스요리를 주문할 것을 권하고 싶다.1만 5000원짜리 코스요리에는 3품냉채, 유산슬, 팔보채, 탕수육, 새우칠리소스가 나오고 식사로는 자장면이 따른다.2만원짜리 코스요리에는 삼선샥스핀과 라조생선, 부추잡채가 추가되는데,1만 5000원짜리 코스로도 쉽게 포만감에 이른다. 차이나타운의 중화요리집은 이밖에도 부엔부, 청관, 대창반점, 본토, 신승반점, 주경루, 성림장, 황금성, 향만성, 풍미 등 많다. 만일 이국적인 향취에 취해 거리의 이곳저곳을 느긋하게 구경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한 끼를 때우기 위해서라면 하고많은 식당 중에서 구태여 어느 한 곳을 찾아 기웃거릴 필요가 있을까. 식당 주인들뿐만 아니라 주방장 같은 요리사들을 위시해 종업원 대부분이 화교출신이며 저마다 요리 전문가이다. ●자장면 나이는 121세 자장면이 처음 태어난 것은 1883년 인천이 개항되면서 청국지계가 설정되고 주로 산둥지방의 중국인들이 대거 몰려와 자연스럽게 청요리집들이 생겨나면서 부터였다. 이때 처음으로 청요리를 접한 서민들이 신기한 맛과 싼 가격에 놀랐고, 청요리가 인기를 끌자 누군가가 부두 노동자들을 상대로 싸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산둥지방에서 즐겨먹던 춘장에 생각이 돌아, 마침내 춘장으로 자장소스를 만들어 국수를 비벼먹는 자장면이 탄생한 것이었다. 자장면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메뉴로 내걸고 장사를 하기 시작한 것은 1905년에 문을 연 공화춘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공화춘은 지금은 당시 화려했던 옛건물의 자취만 남아 있지만 이미 일제 때부터 크게 이름을 날린 고급 요릿집이었다. 물론 지금 차이나타운에 있는 공화춘과는 무관하다. ●“아무거나 고르세요” 차이나타운의 식당 중에 문득 현관에 ‘자장면 없습니다.’라는 쪽지를 붙인 원보(032-773-7888)가 있다. 아니, 자장면을 팔지 않는다니!그러고도 장사가 되나? 약간은 어이없는 기분으로 슬쩍 식당 안을 들여다보면 웬걸 빈 자리가 없게 손님들이 바글거린다. 주로 중국식 만두를 전문으로 하는데 왕만두, 물만두, 찜만두, 군만두가 각각 3000원이고, 생선물만두와 별미만두국이 4000원이다. 어느 만두도 다 맛이 있지만, 별미만두국이야말로 이름 그대로 별미다. 별미만두국은 조개, 굴, 새우, 동죽살 같은 해물에다가 호박과 당근, 양파, 죽순, 송이버섯 등의 야채를 채 썰어 넣어 만두 위에 고명처럼 가득히 얹어준다. 자칫 그릇 밖으로 넘쳐날 것처럼 푸짐하지만 시원하면서도 고소한 국물 맛이 입안에 오래 머문다. 다 먹고나면 정말로 값이 4000원인가 싶게 그 양이며 맛이 뛰어나다. 원보에는 이밖에도 삼선해물탕(5000원), 오향장육이며 오향족발, 해파리냉채, 산동소계라는 닭고기요리가 저마다 1만원인데, 어느 요리든 눈 감고 주문해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원보의 유천해 사장은 굳이 자장면을 먹으려면 북경장(032-766-4455)의 자장면을 먹으라고 권했다. 그이의 주장인즉 차이나타운의 자장면이야 맛이 도토리 키재기로 거기에서 거기인데 북경장 자장면이 2000원으로 값이 가장 싸다는 것이었다.
  • [녹색공간] 부담없는 ‘밥 먹구 가’/오한숙희 여성학자

    내 별명은 ‘밥 먹구 가’ 아줌마다. 집에 온 사람들에게 언제나 “밥 먹구 가.”라고 하기 때문이고 우리 집에 와서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을 쉽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두고 살림하는 친구들은 꼭 자신들의 남편을 닮았다고 비난한다. “남자들이야 자기가 상 차릴 거 아니니까 뻑 하면 그런다지만 너는 왜 그러냐. 엄마나 언니를 믿고 그러는 모양인데 집에서 밥 한번 먹이는 게 보통 일인 줄 아니?제발 밖에서 해결해.” 나도 한때는 바깥밥을 선호했었다. 집에서 음식을 차리면 주인되는 사람, 특히 안주인은 제대로 앉아 이야기 한번 못해 보고 손님 시중 드느라 쉼없이 움직여야 하고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손님들은 미안하고 결국 헤어질 때면 먹고만 간다는 아쉬움이 드는 게 보통인지라 시켜 먹는 게 여러 가지로 편리했다. 내가 주인의 입장일 때도 집밥보다는 주문음식이 손님을 더 배려하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시킨 음식은 맛이나 내용의 신뢰성도 의심스러운데다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제대로 대접을 하자면 상당히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결과적으로 손님초대 자체를 꺼리게 되고 말았다. 사실 나는 신혼초부터 손님초대에는 겁이 없는 사람이었다.“다섯명만 모이면 아무 때나 집들이 한다.”고 호언장담했다. 나의 집들이 준비는 간단했다. 돼지삼겹살과 소주, 채소, 과일이 전부였다. 채소는 손님들에게 씻으라면 뭔가 기여한다는 마음에 좋아라 했다. 고기야 둘러앉아 구우면서 먹으면 되는 것이니 김치 썰어놓고 밥 좀 해 놓으면 상차림 끝, 말미에 밥상 앞에 앉아 과일깎기로 주인노릇도 끝이었다. 손님들의 평가는 “솔직히 처음에는 잡채 한 접시 없는 집들이가 실망스러웠지만 못 먹은 것도 아니고 이런 집들이라면 열 번도 하겠다.”는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어느 날 집근처에서 유기농 채소재배집을 알게 된 순간 나는 자신있게 예전의 ‘겁없는 손님 초대’를 되살려냈다. 채소 대여섯 가지에 현미오곡밥, 계절 나물 한두 가지, 김치 정도면 모두들 환호했다. “채소가 이렇게 고소한 줄 몰랐어요.”“잡곡밥이 거친 줄만 알았는데 꼭꼭 씹으니까 달아요.”“ 집에서 직접 차려 주니까 가족처럼 여겨주는 거 같아 더 정겨워요.”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반응은 역시 “이 정도라면 손님 초대가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는 먹을 것이 귀한 세상이 아니다. 먹을거리 자체가 모임의 핵심프로그램인 단계를 넘어섰다. 나의 진짜 손님대접은 음식보다는 말나누기에 있다. 음식의 가짓수보다 오가는 이야기가 풍성해야 하고, 혀끝을 자극하고 눈을 현혹시키는 양념덩어리의 조리음식보다 제 색깔과 모양 그대로 사람의 몸에 영양분이 될 수 있어야 좋은 음식이라는 게 나의 믿음이다. 음식 대접 때문에 사람 집에 사람이 쉬 오갈 수 없다는 것은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요즘 세상에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제는 음식을 둘러싼 체면부터 벗어 던져야 한다. 음식에 화려한 치장을 시키느라 드는 여자들의 수고를 아껴야 한다. 단순하고 건강한 식탁에 부담없이 사람들을 청할 때, 우리의 힘과 시간을 음식 준비가 아닌 만남과 사귐에 쏟을 때, 비로소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한숙희 여성학자
  • [녹색공간] 새만금, 2004년 가을/김하돈 백두대간보전시민연대 정책위원장·시인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호남정맥에서 발원하여 드넓은 호남평야를 적시며 흘러온 동진강이 바투 서해로 흘러드는 곳이다.그 광활면의 전체가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도 등장하는,하시모토라는 일본 사람이 일찍이 1920년대에 매립하여 육지가 된 간척지다. 간척 당시에 축조한 이십 리 광활방조제에 올라보면 강 저편으로 계화도 간척지와의 사이에서 서해로 흘러드는 동진강의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산이 없는 면.어디를 둘러보아도 아스라한 지평선만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그곳을 간척한 하시모토는 그저 먹고살 길을 찾아 사방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소작인으로 부렸다.젊고 건장한 부부를 조건으로 한 가구당 2㏊의 농지를 배분했다.광활방조제에서 빤히 바라보이는 용지마을에는 바로 그 소작인들의 집들이 지금도 더러 남아 있다.제대로 된 집이 아니라 ‘반쪽짜리’ 집이다.마치 부러 절반으로 자른 것 같은 이 기상천외한 집에 대하여 지금 그곳에 사는 이들도 좀체 그 내력을 모른 채 상상만 무성하다.그러나 일본의 박물관에도 번듯이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 그 집들은,소작인들을 멸시와 열등감으로 비하시키기 위해 부러 그렇게 지은 반쪽짜리 집이다. 산미증식(産米增殖)의 슬로건을 내걸고 하시모토가 매립한 지금의 광활면도 그 이전에는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동진강 하구의 드넓은 갯벌이었다.광활방조제에서 동진강 저편으로 건너다보이는 계화도 간척지는 1960년대 섬진강댐을 만들면서 그곳의 수몰민 2000여 가구가 이주하여 정착할 정도로 대규모의 갯벌을 농지로 바꾸었다.식량자급이라는 명제가 무엇보다도 급한 화두이던 시절이었다. 20세기 간척의 역사는 동진강 갯벌의 본래 모습을 상상하기조차 어렵게 만들 만큼 모든 환경을 바꾸어 놓았다.그리고 2004년 가을,마침내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어마어마한 새만금 방조제가 아예 아득히 먼 바다에서부터 민물과 바닷물이 주고받는 그 현묘한 경계 일체를 가두어 삼켜버린 동진강 하구! 그곳에 아직도 변함없이 소금기 가득 저민 바람이 불어오고,보통 영민한 중생이 아니라면 아직 별다른 기미를 알아채지 못할 풍광으로 밀물 썰물이 들고나고 있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백합과 꼬막들은 드넓은 개흙마다 다를 바 없이 무진장 새끼를 치고,다들 문 닫고 떠나버린 포구에도 여기저기 버려진 폐선 아래 망둥이가 철없이 깡충거리고 있었다. 벼 베고 그 다음날이면 시설 채소를 갈고 이듬해 봄 감자까지 한해 내내 3모작으로 쉬지 않고 일하는 억척스러운 간척지 사람들.거진 포구 백합 칼국수 식당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직은 그래도 갯물이 끊이지 않고 드나든다는 대목에다 힘을 주었다.방조제가 막혔다는 사실보다 아직은 그래도 바닷물이 드나든다는 사실이 희망이요,위안이었다. 광활면과 계화도 사이,동진강의 흐름은 짐짓 멈춘 것처럼 보였다.어쩌면 저도 그렇게는 흘러가고 싶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피 같고 살 같은 제 품 안의 갯벌 다 내주고,팔다리 잘린 도로변의 플라타너스 같은 몰골로,강이라고 그리 흘러가고 싶겠는가.그리하여 죽으나 사나 제 갯벌들 부여안고 망연히 주저앉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바라보면 볼수록 참으로 무한량의 우주와도 같은 갯벌이 아니던가.그 갯벌들 송두리째 다 바쳐야만 밥을 먹을 수 있는,정녕 그 길밖에는 없는 것일까? 김하돈 백두대간보전시민연대 정책위원장·시인
  • [월드이슈-전세계 인구감소] 범죄는 늘고 슬럼화 가속

    독일 작센주(州) 북서부의 라이프치히시에서는 27억유로(3조 8000억원)의 자금이 투입된 공사가 한창이다.독일 정부가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을 들여 추진하는 이 공사는 옛 동독 시절 지어진 교외의 아파트 수천채를 부수고 그 자리를 풀밭으로 조성하는 것이다.출산율 저하가 ‘도시 축소 현상(shrinking city syndrome)’으로 귀결되면서 슬럼화가 심해진 데 따른 고육책이다. 뉴스위크 최신호(27일자)에 따르면,현재 세계적으로 인구 감소세를 보이는 도심 지역은 전체의 25%에 이른다.10년 전에 비해 2배나 는 수치다. 1990년 인구 감소 현상을 보이던 도시가 7곳에 불과했던 러시아는 2000년 93개 도시로 확대됐고 일본도 현재 수백개의 중소 도시들이 같은 추세를 보이고 있다.최근 연평균 10%에 가까운 경제성장률을 이어가고 있는 중국에서도 이 문제는 ‘강 건너 불 구경’이 아니다.금융·경제의 중심지로 거듭난 상하이와 같은 도시로 인구가 밀려드는 것과 달리 대도시인 다롄(大連),청두(成都),난충(南充) 등에서는 인구가 계속 줄고 있다. 인구가 줄면 정부의 세수입이 감소할 뿐 아니라 청년과 교육을 많이 받은 계층은 떠나고 노인과 실업자 계층만 남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미국의 디트로이트와 영국의 리버풀에선 문을 닫는 상점과 버려지는 집들이 늘면서 범죄발생률이 급증했다.독일 라이프치히에서는 출산율이 50% 급락하면서 지역 경제가 완전 몰락했다. 도시국가인 싱가포르가 지난달 출산장려 예산을 대폭 확충,셋째나 넷째 아이를 갖는 부부에게는 최대 1200여만원의 양육 보조금과 세금감면 혜택을 주고 출산·육아 휴가를 확대한다고 발표한 것도 이런 문제 때문이었다.싱가포르는 지난해 15∼49세의 가임 여성 1명이 평생 낳는 자녀 수가 1.26명으로 사상 최저로 나타났다.싱가포르 인구 400만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2.1명에는 훨씬 못 미친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샛길 대탐사-서울~영동·경북

    샛길 대탐사-서울~영동·경북

    속초지역은 강릉을 경유해 동해안 고속도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양평,홍천을 거쳐 미시령을 넘는 것이 통상적인 코스.강릉은 영동고속도로와 이 도로를 우회진입할 수 있는 경충국도(3번국도)를 주로 이용한다. 속초는 양평,강릉은 여주까지가 짜증나는 구간.이곳만 지나면 대부분 정체구간에서 벗어난다. 경부고속도로를 거쳐 영동고속도로로 진입하는 코스는 일단 피한다.부산과 전주방향 차량들이 몰려 신갈분기점까지 주차장이다.경충국도를 염두에 두는 경우 서울 북부지역 거주자들은 서울외곽순환도로를 타거나 명절이면 한가해지는 서울 중심도로를 이용해 일단 성남까지 가야 한다. ●강남에서 성남까지(약도 (1)) 분당∼수서간 도시고속도로는 피하는 것이 낫다.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통행량이 많기 때문이다.차라리 분당과 롯데월드를 연결하는 송파·성남대로가 나은 편. 서울 강남면허시험장에서 탄천을 따라 나있는 이른바 ‘뚝방길’을 이용하면 성남방향 서울시계까지 신호없이 달릴 수 있다.도로가 왕복 2차선으로 좁지만 통행량이 적은데다 외길이어서 어려움없이 운전할 수 있다.탄천변 철새도 볼 수 있다.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서 잠실방향으로 가다가 탄천 삼성교를 지나자마자 강남운전면허시험장을 끼고 우회전하면 된다.군데군데 사거리가 있지만 20∼30여m전에 작은 우회도로가 개설돼 신호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이 도로 끝부분에는 송파대로가 연결되고 우회전하면 서울 성남 시계다.곧바로 좌회전하면 남한산성방향.직진하면 모란사거리 경충국도 진출입로다. 천호동방면 귀성객들은 차라리 하남시쪽(약도 (4)·13면에 게재)으로 차를 돌려 43번 국도를 이용하는 편이 낫다. 뚝방길을 이용하기 위해 테헤란로나 잠실까지 올 경우 88도로는 가급적 피해야 한다.고속터미털 인근 도로의 체증이 심각한 편이다. ●양재에서 성남가기 청계산 길을 타고 넘으면 성남이다.경부고속도로 양재인터체인지에서 세곡동 방향으로 가다보면 농협하나로마트를 지나 우측으로 청계산 가는 길이 나온다.청계산 입구를 지나면 분당∼내곡간 고속화도로가 가로지르고 곧바로 성남시 수정구에 위치한 대왕저수지가 나온다.이곳에서 1㎞가량 지나면 세곡동 사거리와 연결되는 23번 지방도와 만난다. 좌회전하면 세곡동 사거리와 복정사거리를 거쳐 남한산성 순환도로를 이용할 수 있다.우회전하면 분당∼내곡간 고속화도로가 나오고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성남대로다.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모란시장 앞 경충국도 진입로가 나오고 이곳이 붐비면 직진해 우회전,구시가지 도로를 관통해 직진하면 이배재도로와 만나게 된다. ●광주가는길(약도 (2)) 경충국도 모란시장 진입로는 해마다 심각한 교통체증현상이 빚어진다.분당에서 서울로 향하는 차량들과 귀성차량이 엉키는 탓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을 넘으면 경충국도 체증구간을 상당부분 건너뛸 수 있다. 서울 복정동 사거리에서 남한산성 방면으로 차를 몰다 표지판을 보고 산성으로 진입,매표소 2곳을 지나면 삼거리길(43번국도)이 나온다.여기서 우회전해 광주시청을 지나면 경충국도 광주인터체인지를 탈 수 있다. 남한산성순환도로를 이용할 수도 있다.남한산성입구 표지판에서 좌회전하지 말고 직진하면 이 도로가 산성순환도로.3∼4㎞정도 가면 터널이 나오고 계속 가면 고가도로 아래 경충국도와 광주방면으로 나누어지는 사거리를 만나게 된다.이곳에서 좌회전하면 광주로 향하는 이배재고개가 나온다.길이 높고 굴곡이 심하지만 지름길이다. 고개를 넘어 현대아파트 사거리에서 좌회전(45번국도)하면 경충국도 장지인터체인지다. 분당신시가지에서 출발하는 귀성객들은 분당열병합발전소를 지나 광주시 오포면으로 직진해 안내표지판을 따라 경충국도로 진입하는 것이 낫다. 용인지역은 죽전사거리에서 우회전해 광주방면으로 직진한다.아파트 사이로 새로 난 길이 광주까지 뻗어있다.용인·분당 경계지역으로 분당지역주민도 이용 가능하다. ●샛길로 곤지암까지(약도 (3)) 장지나 광주인터체인지 인근에서 경충국도 교통상황을 엿본 뒤 정체가 계속되면 소머리국밥집이 몰려있는 곤지암까지 샛길을 이용한다. 광주시청앞(43번국도)에서 청사를 등지고 오른쪽은 경충국도,왼쪽은 퇴촌방향이다.오른쪽으로 500m가량 지나면 파발교 못 미쳐 샛길이 나오고 이 길(500∼600m)이 끝나는 지점에서 좌회전,300m가량 지나 우회전한다. 이곳부터는 대부분 직진이다.길 초입 오른쪽에 광주소방파출소가 있고 왼쪽으로는 광주기도원이다.1㎞정도 지나면 389번 지방도와 200m가량 겹치고 삼육재활원방향으로 우회전하면 초월갈비집이 보인다.얼마 안 가 삼거리길이지만 아무곳으로 가도 다시 만난다. 삼육재활원으로 가면 첫 삼거리에서 좌회전한 뒤 다시 첫 삼거리에서 우회전해야 하고,오른쪽길로 접어들면 첫 삼거리에서 좌회전한 뒤 직진하면 된다. 두 길이 한 길로 겹쳐지면서 1㎞정도 지나면 337번 지방도이다.우회전해서 계속 직진이다.길이 중부고속도로와 나란히 나있어 어렵지 않다. 얼마 안 가 곤지암 표지판과 함께 소머리국밥집들이 눈에 들어온다.경충국도와 연결된다.나이키 창고형 할인매장이 눈에 들어오면 제대로 온 것.좌회전하면 경충국도 이천방면이다.곧바로 중부고속도로 곤지암IC가 나온다. 서울에서 대전방향으로 향하는 귀성객들도 이용하면 정체구간을 많이 지날 수 있다.곤지암IC에서는 중부고속도로를 타게된다.이곳을 거쳐 이천 하이닉스반도체공장을 지나면 영동고속도로 이천IC가 나온다.다음은 여주군이고 명성황후기념관 옆으로 영동고속도로 여주IC가 보인다. ●하남거쳐 43번 국도타기(약도 (4)) 서울 북부지역 귀성객들은 남한산성을 넘지 않고 하남시를 관통해 43번국도(광주시청 입구 연결)에 진입할 수 있다.이 국도는 서울 천호대로와 연결돼 있어 강동구 주민들의 경우 직진만 하면 쉽게 이용할 수 있지만 타지역의 경우 우회하는 것이 낫다.천호대로의 교통체증은 평소에도 심한 편이기 때문이다. 양평으로 향하는 6번국도를 이용할 경우 팔당대교를 건너면 하남시 한국애니매이션고등학교를 거쳐 43번국도로 진입이 가능하다.또 올림픽대로를 이용해 중부고속도로 강일인터체인지까지 접근했는데 진입로 교통체증이 심할 경우 이곳을 지나쳐 한강조정경기장까지 가는 것이 낫다. 조정경기장이 끝날 무렵 오른쪽으로 하남시 표지판이 붙어있다.논사이로 난 길이어서 생경하겠지만 교통량이 적다.지난해 포장이 돼 깨끗한 편.1㎞정도 진행하면 왼쪽으로 신장초등학교가 나오고 곧바로 삼거리길.좌회전하면 43번 국도다.지하차도로 차를 몰고 직진하면 광주방향이다. 경기북부지역 귀성객들은 올림픽대교로 직진한다.오른쪽으로 올림픽선수촌아파트가 끝나는 지점에 사거리가 나오고 직진하면 길이 좁아지면서 하남방향으로 접어든다.곧이어 서하남 인터체인지가 나오고 광암정수사업소를 거쳐 삼거리길에서 오른쪽으로 간다. 춘궁저수지를 지나 작은 사거리에서 좌회전,계속 직진하면 오른쪽으로 덕풍천이 나오고 이어 광주시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서해에서 부는 가을 맛바람

    서해에서 부는 가을 맛바람

    가을은 서해로부터 온다.누런 들판에 선 농부의 웃음이 그렇듯,푸른 바다를 등지고 돌아오는 어부의 하얀 웃음에서도 가을은 빛난다.포구는 살아있다.강화의 민물장어,태안의 새우,서천의 전어,남녘 끝자락 무안의 낙지….주황빛 낙조를 바라보면서 맞는 서해안의 가을,거기에 맛이 있다.넉넉한 웃음과 푸짐한 인심,이맘때 서해안 바닷가에선 누구나 행복해진다. 무안·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태안·서천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강화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태안반도 충남 태안반도에 고소한 냄새가 진동한다.‘가을의 진미’ 대하와 전어 굽는 냄새다.코를 킁킁거리면서 백사장포구로 들어가 봤더니 그물에 걸린 새우를 털어내는 어부들의 손길이 바빴다.서해안 최대의 해산물 집산지답게 포구로 돌아온 배마다 새우와 전어로 만선이다.분주한 어부들의 표정은 밝다.태안반도 천수만 일대에는 대하잡이 배들로 가득하다.올핸 대하가 풍년이다. 포구 뒤로 쭉 늘어선 횟집거리엔 ‘갓 잡은 대하 입하’라고 쓴 간판을 내걸고 있다.수족관마다 싱싱한 새우와 전어가 퍼득거리고 낙지가 꼬물거린다.고소한 냄새가 침부터 삼키게 한다.포구 곳곳에는 노릇노릇하게 구운 새우를 뒤집어가며 까먹고 있었다.한쪽에는 칼집을 넣어 굽는 전어 냄새도 난다. 포구 곳곳에는 발에 우럭을 말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우럭의 배를 갈라 손질하고 소금을 적당히 뿌린 다음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말리는 것이다.다른 지역에서 보기 힘든 태안만의 광경이다.우럭젓국은 태안의 숨은 별미이기도하다. ●맛이 담백한 대하 ‘몸통 살은 입에서 살살 녹고 바싹 구운 머리는 고소하고 씹히는 맛이 최고.’ 작년에 비해 많이 잡히지만 대하의 시세는 매일 바뀐다.얼마라고 딱 말할 수는 없지만 보통 1㎏에 4만∼5만원선.보통 어른 손뼘만한 크기의 대하가 20마리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10월이 되면 대하 씨알이 더욱 커진다고 한다. 양식과 자연산을 구분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생사여부다.일반적으로 죽은 게 자연산이고 살아 있는 것은 양식이다.그물에 걸린 많은 대하를 배에서 일일이 손으로 떼기 때문에 살릴 수 없다고 한다.양식산은 자연산에 비해 더 검다. 대하는 회나 탕으로도 먹지만 가장 인기 있는 방법은 소금구이다.프라이팬 위에 대하를 가지런히 깔고 하얀 소금을 끼얹고 굽는 것이다.소금의 짠맛이 살짝 배어 간장이나 고추장 없이 먹어도 간이 딱 맞고 담백한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안면도 백사장포구에는 횟집이 즐비하다.그 중에서도 깨끗하면서 10여년을 한곳에서 영업을 해 온 똘순이회관(041-673-6870)이 유명하다.주인 박성식(53)씨는 안면도 토박이로 항상 서해에서 나오는 해산물만을 고집한다.회도 자연산이고 대하도 갓 잡은 녀석들만 손님들에게 낸다.대하값은 보통 1㎏에 5만원.맛있는 밑반찬과 야채 등이 따라 나온다.대하를 사오면 자리와 야채 값으로 1㎏ 1만원을 내면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자리에서 대하를 먹을 수 있게 해준다.이밖에 온누리회타운 (041-673-8966),오뚜기횟집 (041-672-8659)도 있다. ●연포탕은 저리가라.태안 박속낙지 납신다 낙지를 넣고 끓인 전라도식 음식이 ‘연포탕’이라면 태안 쪽에는 ‘박속낙지’가 있다.맛은 연포탕과 비슷하지만 영양과 향 등은 훨씬 뛰어나다.박과 무 등을 넣고 끓인 육수에 산낙지를 넣고 익혀 먹는 음식을 박속낙지라고 한다.박의 싱그러운 풀냄새와 낙지의 담백한 맛이 그대로 살아있는 국물은 정말 ‘끝내준다’. 또한 낙지가 부드럽고 쫄깃쫄깃하다.한동안 끓는 육수에 넣고 삶았건만 전혀 질기지 않다.역시 태안 펄낙지는 삶아도 질기지 않다고 하더니 거짓말이 아니다.낙지가 익으면 다리 세개 정도를 젓가락에 말아 간장소스에 찍어 그냥 먹는다.중간에 자르지 않아도 정말 맛있다.도심에서는 질겨서 엄두도 못낼 일이다. 이렇게 낙지를 건져 먹고는 수제비나 칼국수를 넣어 끓여 먹는다.이것이 박속낙지다.박속낙지는 다른 이름으로 밀국낙지라고도 불린다.6∼7월에 나오는 작은 낙지로 만드는 박속낙지를 일컫는 말이다. 토박이들에게 널리 알려진 집은 정가네 박속낙지탕(041-675-8001).주인 정현규씨는 “낙지는 태안반도에서 잡은 펄낙지를 쓰고,화학조미료는 전혀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무 다시마 등을 넣고 만든 독특한 육수로 맛을 낸다.그래서 맛이 담백하고 깔끔하다.낙지 특유의 향과 맛을 즐기려면 간장소스에 찍어 먹는 것이 좋다.초고추장은 향이 강해 낙지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낙지값은 시세에 따라 차이가 많다.지금은 보통 1인분에 2만원선.낙지 5마리와 칼국수 사리 포함.낙지만을 추가해서 먹을 수도 있다.우리밀로 만든 해물손칼국수는 5500원. ●입에서 살살 가을전어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갔던 며느리 다시 돌아온다.’,‘전어는 며느리 친정간 사이 문 걸어 잠그고 먹는다.’는 가을전어가 한창이다.충남 서천등 서해안 포구에는 전어 굽는 고소한 냄새가 가득하다. 이맘때의 전어가 최고다.산란기를 끝내고 살이 오르며 기름이 올랐기 때문이다.국내 여러 연안에서 나지만 서천 토박이들은 ‘갯벌전어’로 이름난 서천전어를 으뜸으로 친다. 가을전어처럼 지방이 많은 생선은 초고추장이나 냉이고추(와사비)보다 쌈장에 찍어먹는 것이 더욱 맛을 느낄 수 있다.마른 김과 묵은 김치에 싸서 먹는 맛은 정말 별미다. 양파,당근,오이,깻잎 등 갖은 채소를 함께 넣어 초고추장에 버무려 먹는 회무침으로도 많이 먹는다. 하지만 9∼11월초까지 잡히는 전어는 지방이 많아 구워 먹는 것이 최고다.전어 몸통 양쪽에 각각 3∼4 군데씩 칼집을 낸 뒤 소금을 살짝 뿌려 석쇠에 얹어 굽는다.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햐,냄새에 집나간 며느리가 돌아올 만하군.’하는 생각이 든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전어의 꼬리와 머리를 잡고 통째로 뜯어먹는다.살과 잔뼈 채를 함께 씹는데 ‘역시 최고야’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부드럽다.고소하다.담백하다. 가을전어는 충남 서천군 홍원항과 안면읍 백사장포구가 유명하다.매일 가격이 틀리지만 보통 횟집에서는 1㎏에 2만 5000원 정도면 간단한 밑반찬과 야채를 포함해 회를 쳐주거나 구워먹을 수 있게 해준다.공판장에서는 1㎏에 1만 5000원 정도.보통 전어 11마리 내외가 올라간다. 포구의 횟집들은 모두 가격이 비슷하다.그중에서 해돋이횟집(041-951-9803)은 2대째 손맛을 대물림한 집으로 알려져 있다. ●국물 맛이 삼삼한 우럭젓국 태안의 주당들은 아침에 속풀이국으로 북엇국 대신 우럭젓국을 먹는다.삼삼하고 시원한 국물이 과음을 하고 난 아침에 속을 달래기에 그만이기 때문이다.따뜻한 국물은 마시면 ‘커 커 시원하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또한 추석 차례상에도 말린 우럭을 올린다고 한다.온 가족이 모인 추석 다음날 아침은 으레 우럭젓국을 먹는 것이 이곳의 풍습이란다. 말린 우럭포를 쌀뜨물에 넣고 끓이면 삼삼한 우럭젓국이 된다.젓갈이나 다른 양념은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짭짤하게 말린 우럭포에서 우러나온 진국이 간과 영양을 적당히 맞추어 준다.우럭젓국으로 유명한 지형수산(041-674-5610)은 자연산 우럭을 고집해 훨씬 더 국물맛이 담백하다.4인분 기준으로 2만 5000원.밥과 밑반찬 포함.우럭포만 팔기도 한다.보통 1만원선. 또한 주문하면 대하,꽃게,어패류를 박스로 택배해 준다.가격은 시기마다 다르므로 전화로 문의하면 된다. ●펄펄 뛰는 오징어 태안의 신진도에는 새벽마다 밤새 잡은 오징어를 내리는 불빛이 대낮처럼 밝다.끝물이라고 하지만 요즘도 오징어가 많이 잡힌다.크기도 동해에서 잡히는 것보다 훨씬 크고 맛있다. 요즘 배에서 막 내린 오징어 20마리가 1만 5000원선.근처 횟집에서 1만원이면 3마리 정도를 회 쳐 주는데 어른 두명이 실컷 먹고도 남는다.황성횟집(041-673-0189)은 싱싱한 오징어로 유명하다.또한 전어 대하 등 가을의 진미들로 맛볼 수 있다. ●쫄깃쫄깃한 펄낙지 “목포의 모래 낙지랑 우리 펄낙지는 비교 대상이 아니지요.펄낙지는 살이 통통하고 씹는 맛이 최고며 끓여 먹어도 전혀 질기지 않아요.”‘낙지박사’ 정현규(42)씨의 태안낙지 자랑이다. 태안반도에는 이원면 앞과 정산포구에서 낙지가 많이 나온다.특히 정산포구에서 낙지는 바지락을 먹고 자라서 영양과 맛이 최고로 친다.낙지는 2∼3월부터 자라기 시작해 7월에는 소위 세발낙지만큼 커지고 지금은 어느 정도 성숙한(?) 청년의 모습이다. ■ 강화도 민물장어는 그 생태가 다 밝혀지지 않은 신비한 물고기다.인공부화가 안 되고,비늘이 없고,실뱀장어 전단계인 렙토세팔루스의 생활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우리나라에선 전북 고창의 풍천장어,전남 강진의 목리천장어가 유명하다.민물장어는 바다에서 태어나 강과 하천 등지에서 성장한 다음 6400㎞를 역영해 필리핀 해구의 수심 400m에서 산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알이 발견된 적이 없어 일부 학자는 새끼를 낳는다고도 주장한다. 생김새 탓에 뱀장어로도 불리는 민물장어는 정력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어찌보면 남성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최근의 연구결과 불포화지방과 비타민A·B가 풍부한 것으로 나와 정력에 좋다는 말이 낭설만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장어는 한자로 鰻(만)을 쓰는데,이는 고기어(魚),날일(日),넉사(四),또우(又)로 파자할 수 있다.이를 두고 장어를 먹으면 하루(日)에 네(四)번을 해도 또(又)하고 싶어진다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시중의 민물장어는 양식이거나 수입산이 대부분이다.길이 50∼80㎜의 치어가 바다에서 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잡아 키운 것이다.5∼12년간 민물에서 살다가 8∼10월 산란하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다. 이런 민물장어의 명소로 서울에서 1시간30분가량이면 도착하는 인천 강화도가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강화도에서 올해 민물장어 40t이 생산됐고,맛도 기존의 양식 장어보다 훨씬 좋은 까닭이다.강화도에서 생산된 장어는 풍천장어와 같은 종류다. 길이 60∼80㎝의 장어를 고창 등지에서 사다가 강화 갯벌에서 3∼5개월 기른 것이다.동검수산 박용철 대표는 “기르는 동안 인공사료는 전혀 주지 않고 산소만 공급한다.”며 “첫 달은 장어가 비쩍 마르다가 두달째부터 통통해진다.”고 말했다.장어는 강화갯벌에서 먹이활동을 한다.초지대교옆의 황산도횟집 정희옥 사장은 “처음에 갯벌장어의 배를 갈랐는데 새우와 새끼게,망둥어까지 나와 놀랐다.”고 말했다.이런 먹이활동 탓에 머리는 뾰족하나 입은 뭉뚝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맛.푸드칼럼니스트 정신우씨는 “부드러우면서 쫄깃하고 담백하면서 고소하다.”며 “자연산 장어와 맛이 거의 비슷하다.”고 평했다.양식과는 달리 껍질이 두껍고 질긴 것도 특징이다.양식과 비교하면 해감과 흙냄새가 훨씬 적다.그래서 양념구이뿐만 아니라 소금구이로도 많이 먹는다.마니아들은 회로도 즐긴다. 강화지역은 옛날엔 장어로 유명했단다.노양래 강화군 어업관리팀장은 “세계 5대 갯벌 가운데 하나인 강화갯벌은 새끼물고기와 게,수생식물 등 먹이가 풍부하고,한강·임진강·예성강이 만나 바다로 합류하는 기수(汽水)지역이어서 옛날엔 장어 생산지로 유명했다.”며 “이런 연유로 30여년 전부터 강화대교 아래쪽에 수도권에서 가장 큰 장어마을인 ‘더러미장어촌’이 형성됐다.”고 말했다. 근래 들면서 자연산 장어는 구경조차 어려워졌고,급기야 양식 장어를 수송,장어마을 명맥을 이어가던 실정이다. 올해 처음 갯벌에서 키운 강화장어는 자연산과 비슷한 맛으로,초지대교를 중심으로 장어전문점이 한창 생겨나고 있다.강화갯벌장어는 어른 2명 분량인 1㎏에 6만원인 반면 자연산 장어는 ㎏에 12만∼15만원이다.강화도의 직매장에서 사면 ㎏에 4만원이다.다듬어 주기도 하고 비용을 조금 더 주면 양념과 함께 구워주기도 한다. 장어는 생강과 잘 어울린다.느끼한 맛을 산뜻하게 바꾸며 소화 흡수를 돕는다.부추와 같이 먹어도 좋다.반면 복숭아와는 상극이다. 강화갯벌장어는 갯장어와는 다르다.‘하모’로 불리는 갯장어는 전남 여수 등지의 남해안에서 많이 나며 ‘참장어’로 부른다.잔가시가 많으며,회나 탕으로 즐긴다.회로 즐기는 붕장어(일명 아나고)가 1m 전후인데 갯장어는 2m까지 자란다.‘꼼장어’로 많이 부르는 먹장어는 턱이 없고 입이 흡판 모양이다.양념구이로 많이 먹는다. ●장어 맛집들 강화군과 김포시 사이의 한강이 서해로 흘러드는 ‘염하’의 물줄기가 환히 보이는 초지대교를 넘어 강갯벌장어집들이 몰려 있다.갯벌장어 1번지는 초지대교를 건너자마자 왼쪽에 있는 황산도횟집(032-937-4337)이다.상호에서 보듯 생선회가 전문이었지만 이젠 장어에 밀렸다.가장 유명한 것이 양념구이.장어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고 달착지근한 양념과 고소한 장어 맛이 어울려 장어 초보들이 먹기는 그만이다.장어 자체의 맛을 즐기는 이들은 소금구이를 주문한다. 어른 2명이 먹을 양인 1㎏에 6만원이다.안주인 정희옥씨는 “양념구이의 양념에는 고추장과 함께 당귀·천궁·감초 등 30여가지의 약재가 들어간다.”고 말했다.양념이든 소금구이든 다 먹고 나면 장어죽을 내온다.양식장어로는 장어죽을 끓이지 못한단다.해감과 흙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에.찹쌀을 갈아 쑨 죽은 수프와 맛이 비슷하다.15번 지방도를 따라 내려가면서 초지숯불장어(032-937-8601),천미숯불장어(032-937-7766),등대참숯불장어(032-937-0749) 등도 갯벌장어를 취급한다. 초지대교에서 오른쪽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15㎞ 정도 올라가면 더리미 장어마을이 나온다.장어집 10여곳이 모여 있다.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장어굽는 냄새가 미리 마중나온다.양식 장어를 쓰다가 지금은 강화갯벌장어로 바꾸고 있다.가장 대표적인 곳이 별미정숯불장어(032-932-1371)다.양식이 ㎏에 4만원인 데 비해 강화갯벌장어는 6만원이다. 주인 한종호씨는 “손님들이 못보는 초벌구이부터 장어를 숯불에 굽는다.”고 말했다.기름이 적고 담백한 맛이 이 집의 특징.소금구이·양념구이·간장구이를 모두 맛볼 수 있는 코스가 있다.이외에도 더리미숯불장어(032-934-0787),일미산장(032-933-8585) 등이 유명하다. ■ 무안 & 목포 ●낙지 어패류는 ‘개펄’에서 맛이 우러난다.생김새도 바다 밑바닥 여건에 따라 다르다.어류의 육질과 때깔도 차이가 난다.그래서 천혜의 개펄이 발달한 서남해안 해산물은 으뜸으로 친다. 국토의 서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무안 ‘펄낙지’가 제철을 맞았다.9∼10월엔 망운,해제,운남면 등지에서 낙지잡이가 한창이다.낙지라면 전국 어디서나 쉽게 맛볼 수 있는 대중 음식이다. 그러나 대부분 중국산으로 무안 펄낙지와는 맛이나 향에서 비교할 수 없다.이곳 낙지는 다른 지역의 것이 붉은 빛을 띠는 데 비해 잿빛 윤기로 반들거린다.다리도 더 길고 육질은 여리고 부드러운 게 특징.동이 트기전 포구에서 도착하는 싱싱한 낙지들이 미식가들의 구미를 당긴다. 전남 무안읍 성동리 하남횟집(061-453-5805)은 인근 개펄에서 갓 건져 올린 낙지 요리로 손꼽힌다.이 집의 주 메뉴는 기절낙지.기절낙지는 중간 크기의 낙지를 골라내 대소쿠리에 넣고 민물로 펄을 빨아낸다.이 과정에서 낙지가 힘이 빠지고 육질이 부드러워지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기절낙지는 낙지를 잘게 썰거나 다지지 않고,발을 잘라 그대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입안에서 깨무는 질감이 일품이다. 또 한 가지 놓칠 수 없는 메뉴는 세발낙지.어른 한뼘 크기의 자잘한 낙지를 산 채로 먹는다.수족관에 오래 보관하지 않고 갓 잡아온 것을 나무젓가락에 말아 한입에 넣는다.양념없이 먹어도 비릿한 바다향이 감칠맛을 느끼게 한다.이밖에 낙지 비빔밥,연포탕,낙지 볶음,회무침,전어회,오도리 등 각종 요리를 즐길 수 있다. 기절낙지는 한접시 3만∼5만원(3∼5명기준),세발낙지 한접시(20마리) 5만∼6만원,회무침 한접시 3만원(4명기준),오도리(새우) 1㎏ 5만원 등이다. 이 집에서 공용터미널을 끼고 100m쯤 가면 무안 뻘낙지 전문점(061-452-9988)이 있다.겉보기엔 허름하지만 낙지 전골,초무침,세발낙지 등을 잘한다.낙지 도소매도 겸하고 있다. 초무침은 3만원(4인기준) 세발낙지 1마리당 3000원,굵은 낙지 한접시(20마리)당 10만∼12만원 등이다. 이들 식당이 자리한 공용터미널 뒷골목에는 무안 낙지만 전문으로 판매하는 소매상이 즐비하다.무안낙지는 지금부터 10월까지 가장 많이 잡혀,값도 이맘때가 가장 싸다. ●민어 민어 역시 잘 발달된 개펄에서 산란하는 어종이다.진상품으로 알려진 민어는 여름∼가을 전남 신안군 임자,암태,지도 등 연안에서 잡힌다.요즘이 제철인 셈이다.주로 4∼5㎏짜리지만 큰 것은 20㎏을 넘는다.열대성 어종이라 수온이 떨어지면 남쪽으로 이동한다.어부들은 회유 경로를 따라 민어를 잡는다.민어는 예부터 노약자나 임산부 등의 보양식으로 사용될 만큼 맛이나 영양이 뛰어나다. 전남 목포시 중앙동 삼화횟집(061-244∼1079)은 민어회로 유명하다.고급 어종인 민어를 사시사철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삼화횟집은 연안에서 갓잡아 올린 민어를 먹음직스럽게 썰어 내놓는다.두껍게 썰었지만 민어살을 초고추장에 찍어 입에 넣으면 살살 녹는다.쫄깃한 민어 부레와 아가미,껍질 등도 곁메뉴로 오른다.다시마와 마른 밴댕이,민어뼈를 고아 만든 민어탕도 식사용으로 나온다.또 굵은 소금에 절여 말린 건민어탕도 별미.말린 민어를 쌀뜨물에 넣고 푹 고아 만든다.건민어탕은 미리 주문해야 맛볼 수 있다. 주인 천안숙(49)씨는 “민어를 냉동실에 보관해 보면 일주일이 지나도 돔이나 농어 등과는 달리 신선도가 그대로 유지된다.”며 민어회의 ‘우수성’을 자랑한다.회는 한접시 4만원(3인 기준),탕은 한냄비 1만원,건민어탕 한냄비 3만원 등이다.
  • 서대문자연사박물관 22일부터 2개월간 ‘새들의 집들이’

    서대문자연사박물관 22일부터 2개월간 ‘새들의 집들이’

    서대문 자연사박물관은 오는 22일부터 11월21일까지 2개월 동안 새의 둥지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새의 생태와 서식처를 소개하는 ‘새들의 집들이’ 기획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회는 ‘새는 왜 둥지를 만들까’를 비롯해 산새의 둥지와 물새의 둥지,알도 가지가지,지금도 날아다니는 공룡·새,가장 큰 새의 알,멸종위기에 처한 우리새 등 모두 7가지 주제를 가지고 열린다.여기에는 새의 둥지와 알의 모형뿐만 아니라 박제,새의 생태 사진 등을 관람할 수 있으며 새의 소리를 듣는 코너도 마련됐다. 입장료는 어른 3000원,중·고생 2000원,초등학생 1000원,만 5세 미만은 무료이며 기획전 관람은 박물관 입장료에 포함된다.개관은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토·일요일은 오후 7시까지이며 월요일은 휴관. 박물관 관계자는 “이번 전시회는 ‘서울 세계박물관대회(ICOM)’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 기획됐다.”면서 “10월4일에는 각국에서 모인 전문가가 이 곳을 관람하며,세계 박물관의 교류와 협력을 위한 토론도 벌일 계획”이라고 말했다.(02)330-1733∼4.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 100년 맛 이어받은 전성근 ‘이문설농탕’ 주인

    100년 맛 이어받은 전성근 ‘이문설농탕’ 주인

    ●설렁탕 서울을 대표하는 토속음식이다.조선시대 왕이 동대문 밖 선농단(先農壇)에서 몸소 쟁기를 끄는 친경례(親耕禮)를 하면서 60세 이상의 노인에게 곰국을 대접하면서 비롯됐다고 한다.왕은 친경례에서 수고한 백성에게 석잔의 술과 음식을 내려줬다.이때 내린 것으로 술은 막걸리,음식은 설렁탕이었다.설렁탕은 현장에서 쟁기질 하던 소를 잡아 끓인 것이 아니다.소를 마구 잡는 법이 아닌데다 설렁탕은 국물이 제대로 우러나오려면 하루는 족히 끓여야 하기 때문이다.쇠고기는 성균관 인근에서 살면서 서울의 쇠고기를 독점 생산,판매하던 반촌(泮村)의 반인들이 댔다고 한다. ■“손기정·김두한·박헌영씨도 한때 단골” “맛을 한결같이 유지하는 게 100년 장수의 비결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식점으로 알려진 서울 종로구 공평동 종로타워 뒤쪽 이문설농탕 주인 전성근(田聖根·59)씨는 역사의 비결을 묻는 물음에 “오래 됐다고 손님들이 오는 게 아니라 맛이 똑같기 때문에 옵니다.”라고 말했다. 1907년 개업,한 자리에서 98년째 문을 열고있는 최고의 음식점 주인 말치곤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신선하다.하지만 그 말 속에는 너무 빨리 변해가는 세상에 대한 예리한 지적이 담겨있음을 읽을 수 있다. 우리의 역사가 반만년이 넘는다곤 하지만 100년 가까운 식당은 참으로 드물다.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등 치열했던 근세사를 건너기가 쉽지 않은 탓일 것이다. 최근 외식산업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취업도 어렵고,정년도 짧아진 세태에서 쉽게 생각하고 창업하는 것이 ‘먹는 장사’다.한 집 건너 새로 문을 열고 그만큼 간판을 내리는 업종이 외식업이다. ●70대는 ‘어린’단골 이런 까닭으로 최고(最古)의 이문설농탕이 주목받는다. 이문설농탕은 전씨 집안이 전적으로 일으킨 가업은 아니다.전씨의 어머니 유원석(2002년 작고)씨가 1960년,양모씨로부터 이문설농탕을 인수해 지켜오다 아들인 전씨에게 물려줬다. 이문설농탕의 간판을 처음 단 사람은 홍모씨로 알려져 있고 그뒤 양씨가 인수해 운영해왔다.이들은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창업 연도도 여러 갈래다.당시 경복궁 주위의 경기·배재·중앙·휘문고보 등을 다녔던 노인들의 기억에 따르면 멀게는 1902년부터 짧게는 1907년까지 거슬러 간다.그래서 전씨는 가장 짧은 1907년을 개업 연도로 삼고 있다. 전씨는 “옛날에 이 부근에서 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이 할아버지가 돼 손자들 손을 잡고 오시지요.3·4대째 단골이 많지요.저희 집에선 70대는 청춘이고 90대가 돼야 어른 대접을 받습니다.60∼70년 단골이 부지기숩니다.”라며 은근히 자랑한다. 70년대 초 건국대 농대를 졸업한 전씨는 경기도 수원에서 부친과 함께 목장을 운영했다.목장이 사실은 할아버지(田熙哲)대부터 내려온 가업.할아버지는 목원대 전신인 감리교 대전신학원 초대교장을 지낸 목회자였다. 전씨가 식당일에 나선 것은 어머니를 돕기로 한 1981년부터.2∼3년 ‘잠시’ 돕겠다고 식당에 나왔다.“당시만해도 식당일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 선입견이 달갑잖았지요.”하지만 식당일을 계속하면서 그의 생각이 달라졌다.“이집은 보통 집이 아니야.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식점이야.”하는 노인들의 격려에 힘을 얻은 전씨는 식당 운영에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였다. 그는 오늘의 이문설농탕이 있게 한 공로를 어머니께 돌렸다.그의 어머니 유씨는 1930년대에 이화여전 가사과를 나온 당시의 ‘신여성’이었다.동기로는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씨의 어머니 이원숙씨가 대표적이다.한국전쟁중이던 50년대 초 부산 광복동에서 유씨는 이씨와 동업으로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유씨는 이후 음식점 운영의 길을 걸었다. 이 집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단골들도 역사의 한 자락을 차지했다.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영웅 손기정,이시영부통령,국어학자 이희승박사,남로당 거물 박헌영,주먹천하의 김두한 등이 단골이었다.김두한은 10대때 한때 종업원으로 일했다고 전해온다. 80년대는 먹성좋은 운동선수 특히 유도 복싱 레슬링 등 격투기 선수들이 많이 찾았다.당시 유도대표 선수들은 YMCA 체육관에서 연습을 했고,유도선수들의 소개로 복싱 레슬링 선수까지 이어진 것이다.유도의 하형주,복싱의 김광선 문성길 등이 대표적이다. 단골이 많은 이 집의 한결같은 맛은 100년 전이나 똑같은 설렁탕을 끓여내는 방식에 있다.단지 장작이 연탄에서 액화석유가스(LPG)로,다시 액화천연가스(LNG)로 바뀌었고,무쇠솥이 압력솥으로 변한 것 뿐이다.건물도 일제시대 그대로다. ●퓨전을 이기는 전통의 맛 이 집의 설렁탕은 소의 거의 모든 부위를 넣고 15시간 푹 곤다.국물이 뽀얗고 맛이 담백하면서도 짙다.그래서 설농탕(雪濃湯)이라고 부른다. 농후한 국물 맛을 내기 위해 국물에 분유나 프림 등을 섞는다는 소문이 나돌아 한때 많은 집들이 타격을 입었다.하지만 제대로 끓여내는 것으로 단골로부터 인정을 받아온 이문설농탕은 오히려 더 장사가 잘됐다. “음식을 엉터리로 만들면 손님이 먼저 알아차립니다.”그는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유혹도 많지만 맛에 대한 고집으로 프랜차이즈나 분점도 내지 않고 있다. 상호는 1970년대에 이미 등록했다.“요즘 젊은 사람들이 ‘국적없는’ 퓨전 음식을 찾지만 이들도 나이가 들면 우리 고유의 음식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문설농탕은 일본 언론매체가 특집으로 다루면서 10여년 전부터 일본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특히 아침 손님은 일본인이 더 많다.전씨는 이런 이유로 이문설농탕은 이제 자신 개인소유의 식당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고 생각한다.역사의 명소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점이 된 까닭이다.“저희 집은 값도 마음대로 못올립니다.단골 어르신들에게 먼저 의향을 여쭤봅니다.”설농탕 보통 한 그릇에 5000원.수십년째 가격에 못이 박혔다. 뽀얀 국물처럼 햇빛에 바래 역사가 쌓이고 있는 이문설농탕.“전통을 잇는 장인의 각오로 이 자리를 지켜나가겠습니다.”라는 전씨의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뒷골목 맛세상]가리봉 조선족 골목

    [뒷골목 맛세상]가리봉 조선족 골목

    풍미(風味)라는 말이 있다.이 아름다운 말은 음식뿐만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함께 쓰인다.이희승 편 국어대사전에서는 ‘1.음식의 고상한 맛 2.사람의 됨됨이가 멋스럽고 아름다움’으로 풀어내고 있다. 가리봉 시장의 조선족 골목 일대를 기웃거리고 다니면서 혹은 골목 안에 있는 용성식당(龍成食堂)이나 연길양육관(延吉羊肉串),금단반점(今丹飯店),삼팔교자관(三八餃子館)의 식탁에 앉아서,풍미라는 말을 몇 번이고 입안에서 되뇌였다.나에게는 고국 아닌 고국에 돌아와 가리봉동 시장의 한 귀퉁이에 자신들만의 골목을 이루고,하루가 끝나는 저녁이면 이 골목에 돌아와 자신들 특유의 음식을 찾는 조선족들이 음식과 사람을 포함하여 두루 풍미로웠다. ●고국서 절망적으로 무너져버린 자존심 조선족이 누구인가.조선 후기부터 시작하여 일제에 이르기까지 봉건지배와 식민지배의 수탈에 못 견딘 나머지 남부여대로 한반도를 떠나 유랑의 길에 올라야 했던 바로 우리의 핏줄이 아니던가.그렇게 러시아로 흘러든 우리 핏줄은 고려인이 되고,만주벌판을 헤매던 우리 핏줄은 조선족이 되지 않았으랴. 조선족은 엄연히 국가와 민족을 구별한다.그리고 자신들이 조선족임을 단 한번도 부끄럽게 여겨본 적은 없다.비록 중국이라는 거대한 다민족 국가에 소수민족으로 편입되었지만,자신들만의 문화와 정체성을 굳게 지키며 살아왔다.그런 조선족으로서의 자존심이 다른 곳도 아닌 고국에서 절망적으로 무너져버린 셈이다. 고국 아닌 고국에 돌아온 조선족들은 이미 20만명이 넘는다.그리고 그들 태반이 불법체류자로 몰려 범죄자 아닌 범죄자가 되어 있다.불과 얼마 전만 해도 고려인과 조선족은 해외동포로 인정하지 않는 정부의 정책 때문에 고국방문이 어렵게 돼 결국 고국에 오기 위해서는 3개월의 관광비자를 받는 데만 1000만원이 넘는 불법적인 돈을 내는 것은 물론 끝내 범죄자가 되고 말았다. 중국인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데 필요한 공식적인 비용은 10여만원에 불과하지만,조선족이 ‘코리안드림’이라는 꿈을 좇아 고국에 오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조선족에게 1000만원이란 중국에 있는 가산을 팔거나 아니면 고국에서의 미래를 담보로 해 고율의 이자가 붙은 빚을 내야 가능한 돈인 것이다.도대체 무슨 수로 3개월 만에 그런 돈을 벌고 게다가 ‘코리안드림’이라는 필생의 꿈까지 이룬단 말인가. ●코리안 드림 좇다 태반이 불법체류 조선족이 가리봉 시장에 그들만의 골목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바로 옆에 있는 ‘구로동 벌집’ 때문이다.1960,70년대 경제성장을 주도해온 값싼 노동력 위주의 구로공단 전성기에,이 땅의 곳곳에서 몰려든 어린 노동자들을 노려 한 평 남짓하게 마구잡이로 지었던 많은 방들이 바로 ‘구로동 벌집’이었다.그리고 우리 경제에서 값싼 노동력 위주의 구로동 시대가 끝나고 벌집들마저 버려지게 되자,기다렸다는 듯이 이번에는 조선족들이 벌집을 채운 것이었다. 만일 그대가 이 글을 읽고 한번쯤 호기심을 일으켜 가리봉 시장 조선족 골목을 갈 예정이라면,나는 그대에게 이제 막 저녁 어스름이 지는 시간을 권하고 싶다.저녁노을을 등지고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3번 출구 옆에 서 있으면,그대는 퇴근시간이 되기 무섭게 출구를 빠져나오는 많은 인파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그 인파의 대부분이 조선족이라 해도 틀림없다.그대는 망설이지 말고 그 인파의 뒤를 따라가라. 조선족은 얼핏 보기에 그대와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옷차림이어서 전혀 그대와 분간이 안 될지도 모른다.그러나 결례를 무릅쓰고 그들 표정을 조금만 자세히 살핀다면 그대는 쉽게 조선족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약간 주눅이 든 듯 분명치 않은 표정에,보고 듣고 느끼는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안으로 갈무리한 눈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긴장 속에 얼핏얼핏 순수함이 내비치는 얼굴. 그런 얼굴들을 쫓아 몇 걸음 걷지 않으면 그대는 붉고 혹은 노란 한자 위주의 이국적 간판들을 만나게 된다.그렇게 가리봉 시장 초입 삼거리에 다다르면 그대는 삼삼오오 몰려든 비슷비슷한 얼굴들이 서로 손을 잡거나 어깨를 껴안는 풍경을 만나게 될 터이다. 언제 주눅이 들어 안으로만 감정을 갈무리했냐 싶게 드러내놓고 기뻐하며 어떠한 긴장감도 없이 애오라지 들뜬 표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대는 문득 하나의 단어가 뇌리에 스쳐 지날지도 모른다. ●주눅 든 듯한 표정에 얼핏얼핏 순수함 해방구.그렇다.조선족이란 우리 핏줄에게 가리봉 시장 골목은 단순한 골목이 아니라 일종의 해방구다.얼핏 3개월의 체류기간을 넘기고 당연히 불법체류라는 범죄자가 되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동안에,처음 겪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틀의 맨 밑바닥에서 흡사 몸에 맞지 않은 옷처럼 이질적인 문화와 가치관을 받아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그들에게,이곳이야말로 이질적인 옷 따위는 훌쩍 벗어던지고 참다운 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해방구나 다름없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좀더 용기를 내어 그들을 따라 골목에 즐비한 음식점들의 한 곳에까지 따라 들어간다면 그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맛과 사람이 함께 어울려 만드는 어떤 풍미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나는 그대가 많은 조선족 음식점들 중에서도 ‘양러우촨’(羊肉串)이라는 일종의 양꼬치구이 식당으로 따라가는 행운이 있기를 빈다. 연길양육관(02-838-0014)은 이름 그대로 양러우촨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다.조선족들은 양뀀 혹은 양고기뀀이라고 하는데,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좁은 식당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숯탄에 양뀀을 구우면서 땀을 뻘뻘 흘리는 이들을 보면 흡사 무슨 종교적 의식이라도 대하듯 숙연하기까지 하다.그만큼 양뀀이야말로 조선족 음식의 어떤 정체성을 대표한다. 양뀀에서는 양고기 특유의 지독한 노린내를 거의 맡을 수 없다.그것은 무엇보다도 양뀀에 곁들여 나오는 고춧가루와 참깨,즈란이라고 부르는 향신료 때문이다.게다가 양뀀에 껍질을 까지 않은 통마늘을 함께 구워 고기와 함께 먹다 보면 노린내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춧가루와 참깨 그리고 마늘이야말로 우리 핏줄인 조선족의 정체성이 아니랴. 혹시 중국이나 아니면 중앙아시아 지역을 여행하면서 길거리나 식당에서 양러우촨을 대하고 불쑥 일어난 호기심에서 한번쯤 맛을 본 이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그리고 그런 이들 중에 자칫 비위가 약한 사람이라면 지독한 노린내를 참지 못하여 그만 헛구역질마저 일으킨 경험도 없지 않을 터이다.그 지독한 노린내를 조선족은 다름 아닌 고춧가루와 참깨,마늘로 해결하고 거뜬히 조선족 특유의 음식으로 만든 것이리라. ●정체성 잃지 않고 고유의 맛 유지 연길양육관에 비해 용성식당(02-3281-6403)은 조선족 골목 안에서는 가장 많은 일품요리를 내는 식당이다.일품요리라고 해서 가격 따위에 겁먹을 필요는 없다.어떤 요리건 대부분이 1만원 안팎이기 때문이다.그 중에서도 조선족이 즐겨 찾는 것은 우리의 탕수육 비슷한 ‘궈바우러우’와 닭고기 요리인 ‘라지지딩’,돼지고기를 가늘게 채썰어 볶아내어 종이장처럼 엷은 건두부에 싸먹는 ‘징장러우스’,그리고 도미를 통째로 굽고 튀겨서 만든 ‘뤄붸’라는 훌륭한 요리가 있다. 그러나 조선족 골목에 있는 식당 메뉴 중에서 가장 흔하게 눈에 띄는 것은 ‘고러우훠궈’(狗肉火鍋)라는 일종의 개고기 샤부샤부이다.원래 옌볜에서는 개탕을 즐겨먹는데 거우러훠궈는 이 개탕을 또다시 우리의 샤부샤부 문화에 변형시킨 격이다. 그러고 보면 조선족들은 가는 곳마다 그 곳의 음식에 맛을 들이면서도 결코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나름대로 풍미를 만들어 내는 셈이다.이왕에 여기까지 왔으면 그대는 과감히 고러우훠궈까지 주문하기 바란다. 맛의 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애오라지 무리하게 맛만을 좇다 보면 맛 자체는 물론 사람마저도 황폐해지고 말지도 모른다.만일 맛의 끝에서 음식의 맛만이 아닌 사람의 맛까지 함께 거둘 수 있다면,그런 맛이야 말로 풍미에 다름없을 터이다. 누군가의 짧은 글에서 읽은 적이 있다.‘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빵은 눈물에 젖은 빵이다.’누군가는 바로 음식의 맛에서 사람의 맛까지 함께 풍미를 맛본 이가 틀림없으리라.그렇게 맛의 끝까지 가본 이가 틀림없으리라.그런 이라면 어떤 거친 음식인들 맛없는 음식이 있을 수 있으랴. ■집들이등 경사때 즐기는 손님 접대용 ●옌볜의 개탕 우리의 보신탕과는 다르게 옌볜의 개탕은 마늘이며 생강 파 같은 양념류나 야채 따위를 일절 넣지 않고 고기만을 맑게 끓여낸 뒤 개즙이라는 양념장에 찍어먹는다. 개즙은 개고기의 내장 따위를 갈아서 거기에 고수라는 향신채를 곁들여 조선족 특유의 양념장을 만들어낸 것이다.이를테면 고기의 맑고 순수한 맛을 지켜내면서 중국에 와서 익힌 향신료 문화를 가미하여 개탕을 즐기는 셈이다. 개탕의 맛은 바로 개즙에서 나오는 것인데,이 개즙의 맛은 집집마다 서로 달라서 개즙의 맛을 비교하여 어느 집 개탕 솜씨가 더 뛰어난가를 가름하는 식이다. 대부분 옌볜의 조선족들은 새로 집을 사서 집들이를 하거나 아니면 특히 경사로운 일이 있을 때면 반드시 개 한 마리를 잡아 개탕을 마련하여 손님을 접대한다. 그리고 남녀노소 없이 가까운 이웃이며 친척들이 모여 누구나 기꺼이 개탕을 즐긴다.그렇듯이 개탕을 못 먹으면 자랑스러운 조선족이 아닌 셈이다.
  • [열린세상] 먼저 가마를 구워야 한다/강형기 충북대 교수 ·지방자치학회 명예회장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에 올랐으므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한다.그러나 개최 도시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나라에서 개최한 월드컵은 엄청난 실패였다.경기를 앞두고 개최 도시의 관광업계는 많은 손님이 지역에서 숙박할 것을 기대했다.그러나 월드컵이라는 세계인의 축제에도 우리의 지방도시에는 숙박을 하면서 지역을 관광하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관광이란 ‘관국지광(觀國之光)’,즉 나라(지방)의 빛(光)을 보는 것이다.여기에서 빛이란 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를 의미한다.고유한 문화가 없는 관광이란 성립할 수 없다는 말이다.마찬가지로 고유한 문화가 없는 곳에서 축제만 따로 성공할 수 없다.월드컵축구대회라는 세기의 축제가 열려도 우리의 개최 도시에 외국인들이 숙박조차 하지 않았던 이유는 서울만 보면 한국을 다 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사정이 이러한데도 거의 모든 지방은 입만 열면 관광도시요,문화도시다. 축제란 그 지역의 차별화된 공간과 차별화된 시간에 참여자들을 동화시키려는 제전이다.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세기의 축제,월드컵에는 지방마다 개성 있는 건물,아름다운 경관,다양한 음식,만나고 싶은 사람 등의 차별화된 공간을 준비하지 못했다.보고 느끼고 싶은 차별화된 시간(경기장면)은 TV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배달될 수 있다.따라서 외국인들이 지역에 오고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는 차별화된 시간을 담는 차별화된 공간을 준비해야 한다.그러나 우리에게는 차별화된 그릇이 없다. 세계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도시의 공통점은 그 도시 자체가 하나의 문화상품이라는 점이다.우리가 진정으로 경쟁력 있는 나라를 만들려면 차별화된 공간을 다양하게 만들어야 한다.과거 공업사회와는 달리 오늘날 지식사회에서 지역발전의 열쇠는 얼마만큼 유능한 인재를 결집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아름다운 환경과 문화가 있는 도시에 인재가 모이고 산업도 싹트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도시들은 어떠한가.누더기 같은 간판,메뉴판이 되어 버린 식당의 유리창,어느 도시에서나 같은 이름의 아파트 단지,주택과 술집들이 뒤섞여 있는 마을에서 주민의 삶은 지역공동체와 절연돼 있다.최근 이러한 도시에 또 하나의 간판이 덧칠되고 있다.문화도시라는 간판이 그것이다.도무지 그 지역 ‘답다’는 맛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거리에서 문화도시를 자랑하는 지자체 지도자들의 모습은 절망감을 안겨준다. 도시의 모습은 그 나라의 문화와 정치를 집약하는 것이다.도시의 거주자들은 자신이 향유하고 있는 정치를 선택해온 그들의 정치의식과 함께 문화의식 내지는 문화수준을 도시라는 모습으로 표현하며 살아간다.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경관이나 관례를 통해 상식을 몸에 익히고 배우며 실천하게 된다.아름답고 질서 있는 마을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마을의 경관을 보존하고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도시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가 최고의 교육장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시민의 ‘자치’라는 역사적 경험이 없었고,집안의 정원이라는 사적 공간을 중시하며 살아 왔다.이러한 생활양식은 경제 우선의 지배원칙과 결합하면서 ‘나뿐인 시민들’이 ‘나뿐인 건물’ ‘나뿐인 간판’을 만들어 ‘나쁜 건물’ ‘나쁜 간판’을 즐비하게 했고 결국 모두가 ‘나쁜 도시’의 ‘나쁜 시민’이 되고 있다.이처럼 ‘공적 영역의 의식’인 경관이 파괴된 우리의 도시는 월드컵대회에서 참담하게 증명된 것처럼 경쟁력이 없다. 그러나 마냥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도자기가 가마에서 구워지듯이 개인의 생활은 도시에서 영위된다.도자기를 구우려면 가마를 구워야 한다. 그러나 가마는 망가뜨리면서 내 도자기만 굽겠다고 나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가마를 구워야 도자기를 굽는다.’는 기본 상식을 온 국민들이 공유하도록 대책을 세워야 한다.그래야 가정도 기업도 도시도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강형기 충북대 교수 ·지방자치학회 명예회장
  • [송기원의 뒷골목 맛세상] 피맛골

    [송기원의 뒷골목 맛세상] 피맛골

    피맛골이라는 지명을 스쳐듣고 우연히 그곳을 찾아든 이들은 대부분이 우선,‘에게,이게 뭐야.’ 하고 눈살부터 찌푸릴 터이다.당연한 반응이다.서울의 어디를 가나 흔하게 대할 수 있는 지저분하고 꾀죄죄한 풍경이 애써 나들이한 발걸음을 선뜻 골목 안으로 한 걸음 더 옮기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광화문 교보문고 뒤편에 남아 있는 피맛골은 고작 두 사람이 지나쳐도 쉽게 어깨를 부딪치게 마련인 비좁은 골목길에다가 길이도 20여m를 넘지 않는다.그렇다고 무슨 뛰어난 음식점이 즐비하게 들어찬 것도 아니다.고작해야 열차집이라는 두어 평 남짓한 빈대떡집과 대림식당이라는 생선구이집,그리고 반대편 초입에 서린낙지라는 간판의 낙지집이 한 눈에 들어올 뿐이다. ●의식주 해결할 물산의 집합소 이 교보문고 뒤편의 피맛골 말고도 종로 2가에서 인사동으로 접어드는 어름에 또 다른 피맛골이 남아 있다.서피맛골이라는 이름으로 제법 그럴듯한 장명등 간판까지 내걸고 떠들썩한 주점가로 변하여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지만,정작 인사동 일대의 관광지구 작업에 편입되어 피맛골 자체를 하나의 관광상품으로 변질시킨 듯한 싸구려 지분 냄새를 숨길 수가 없다. 피맛골이란 이름의 이 특이한 뒷골목은 원래 종로 1가 교보문고 뒤편에서 시작하여 종로 2가를 거쳐 3가에 이르기까지 연결되어 있었지만,큰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도중에 여기저기 골목이 끊기는 바람에 결국 두 곳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나로서는 이 두 곳 중에서도 피맛골 하면 역시 교보문고 뒤편의 지저분하고 꾀죄죄한 골목이 그 이름에 걸맞은 것 같아서 못내 그 언저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일찍이 조선시대에는 지금 종각이 있는 종로 네거리 부근을 운종가라고 하였는데,이 운종가는 소위 ‘상것’들이 사는 곳이었다.운종가의 이 ‘상것’들은 사농공상이라는 봉건 가치의 가장 아랫자리를 차지한 상인들로,종이나 백정 혹은 갖바치 같은 다른 상것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천한 신분이었다. 당시의 가장 윗자리 신분에 있던 사대부의 입장에서 보자면,이 운종가의 상것들은 여느 상것들과도 달리 참으로 처치곤란한 일종의 필요악이었다.애오라지 학문과 수신에만 힘써 마침내 입신출세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필생을 바쳐야 하는 사대부로서 비록 굶어 죽을망정 어찌 당장에 급하다 하여 먹고 입고 자는 따위 천한 값어치에 눈길을 줄 수가 있으랴. 바로 그런 윗자리 신분의 필요에 따라 그들 대신에 먹고 자고 입는 데 필요한 모든 물산들을 주무르는 이들이 모여 이룬 거리가 다름 아닌 운종가였다.종각 네거리 일대에 이른바 육의전이 늘어섰으니,포목 무명,명주,종이,모시,생선 등이 운종가의 주된 물품이었으며,나아가 구리개나 동대문의 배우개 저자거리에는 옥패물,유기며 사기그릇,호랑이 가죽이며 수달가죽,엽초,과일 등 조선 팔도의 모든 물산들이 빠짐없이 다 모여들었다. ●윗자리 행차 피한데서 유래 운종가가 번화하면 할수록 높은 가마 위에 앉아 물렀거라,비키거라,호령과 함께 이곳을 지나치는 윗자리들은 저마다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외로 돌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쯧쯧,선현께서 이르시되 상업이 흥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느니….’ 운종가의 상것들 입장에서 보자면 그런 윗자리들이 또한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비록 신분상 아랫자리에 위치한 천한 상것이라지만,누구보다 영리하고 사리에 밝아 윗자리들의 허허실실이며 허장성세를 뚜르르 꿰뚫는 데다가 이재와 처세술 또한 뛰어나 정도 이상의 부를 이루어 먹고 입고 자는 일에 신분에 걸맞지 않은 호화를 누리는 그들로서는 윗자리의 때 아닌 눈살이며 외고개짓이 마음 편할 수는 없었다. ‘쳇,그놈의 잘난 벼슬 좀 잡았다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란….’ 이런 아랫자리와 윗자리 사이의 눈살이며 외고갯짓이 한데 어울려 운종가 뒷골목에 언제부터인가 희한한 명칭의 골목길이 생겼으니,바로 피맛골이었다. 운종가에 한번 윗자리의 행차가 떴다 하면,아랫자리들은 재빨리 뒷골목으로 숨어들어 윗자리의 행차를 피하다 보니 뒷골목 이름 자체가 피맛골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렇듯 윗자리를 피해 숨어든 아랫자리들을 노려 다시 싸리나 간짓대에다가 술을 빚는 용수를 내건 선술집이 생기고,그 옆에는 다시 1m 남짓한 백지 괘등을 내건 장국밥,설렁탕,곰탕집들이 생겨나니,피맛골은 윗자리들은 결코 넘볼 수 없는 아랫자리들만의 공간이 된 것이다.아랫자리들이 만든 이 소중한 놀이공간은 피맛골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봉건시대 500여년을 면면히 맥을 이어왔다. 만일 그대가 아직도 이 시대의 아랫자리라고 여기거나 혹은 사는 일 자체를 힘들어한다면 한번쯤은 피맛골로 발걸음을 옮길 것을 권하고 싶다.함께 올 동료가 없다면 스스럼없이 혼자 와도 좋다.그리하여 이제 막 땅거미가 스멀거리기 시작하는 피맛골에 접어들어 열차집(02-734-2849)의 허름한 유리문을 밀치고 들어서라.벌써 빈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면 아무 자리라도 가서 낯선 사람에게 합석할 것을 부탁하라.백이면 백 기꺼이 응해줄 터이다. ●빈대떡에 소주 몇잔… 세상 시름 훌훌 마침내 자리를 잡으면 3장에 7000원인 빈대떡 한 접시에다 소주 한 병을 시켜라. 빈대떡이 아니라면 굴전이나 파전을 시켜도 좋다.그리하여 술과 안주가 탁자에 놓이면 소주 한 잔을 따라서 목 안에 깊이 털어넣어라. 그리고 문득 주변을 돌아보면 그대는 이미 혼자가 아니다.얼핏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그대에 비해 크게 잘난 것도 없고 못난 것도 없는 얼굴,한 잔의 소주 혹은 한 사발의 막걸리에 이미 불콰하게 술기운이 오른 얼굴,바로 그대 자신의 얼굴이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속에서 그대를 이 시대의 아랫자리에 위치하게 한 윗자리들의 허허실실과 허장성세에 대해 중구난방으로 떠들고 있을 터이다. 그대가 술과 함께 밥도 먹을 작정이라면 열차집만이 아니라 옆에 있는 대림식당(02-730-1665)으로 가도 좋다.삼치와 굴비,고등어 따위 생선구이 백반들이 저마다 5000원에다가 된장찌개 또한 맛이 뛰어나다.이 대림식당을 끼고 좀더 골목으로 접어들면 몇 걸음 안 가서 부산복집과 처마를 나란히 한 청진식당(02-732-8038)을 만나게 된다.불고기와 오징어볶음이 4000원에 비하면 넘칠 정도로 풍부한 양에다가 반찬은 물론 공기밥 한 그릇이라도 더 주기 위해 꾹꾹 눌러담는 주인아주머니의 큰 손이 먹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는 것 자체까지도 공연스레 즐거워지게 한다. 만일 그대가 혼자가 아니라 서너 명의 벗들과 함께라면 좀더 골목을 에돌아 5000원짜리 한정식으로 이름난 남도식당(02-734-0719)을 찾거나 교보문고 뒷길에 있는 안성또순이집(02-733-5830)에 가서 20년 동안 생태찌개 한 가지만을 지켜오는 특별하고 맛깔스러운 고집을 만나기 바란다.비록 한 냄비에 4만원이지만 네 명이 충분히 먹고도 남아 크게 비싸지는 않은 편이다. 일찍이 시인 신경림은 노래했다.‘못난 놈은 서로 얼굴만 봐도 반갑다.’피맛골 안의 여기저기에서 만나는 결코 낯설지 않은 얼굴,바로 자신을 닮은 얼굴들이 어찌 반갑지 않으랴.잘난 놈만 먹고 노는 게 아니라 못난 놈도 즐겁게 먹고 놀 수 있는 놀이공간이 피맛골이다.
  • [산 오르記]서울 인왕산

    [산 오르記]서울 인왕산

    서울 중심에서 가장 가깝고 손쉽게 오를 수 있으면서도 험한 산세를 맛볼 수 있는 산은? 등산을 좋아하는 이들은 어렵지 않게 ‘인왕산’이라고 답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맞히기가 그리 수월하지는 않을 것이다. 1968년 1·21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출입이 전면 금지되었다가 지난 93년 부분적으로 개방된 산이다.인왕산(仁旺山·338.2m)은 높지는 않지만 산세가 웅장하다.동쪽 기슭이 아늑하고 풍치가 빼어나 장안 제일의 명승지였다.북쪽 자락에 있는 부암동은 무계동(武溪洞)이라 불리던 곳으로 중국의 무릉도원에 버금갈 정도의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삼각산(북한산) 남쪽으로 보현봉이 솟구치고,다시 북악에서 한 줄기는 동쪽 낙산으로,또 한 줄기는 서쪽으로 뻗어 인왕산을 빚어 놓았다.풍수 상으로 보면 조산(祖山)인 북한산에서 주산(主山)인 북악산에 연결되고 낙산이 좌청룡(左靑龍)이며 인왕산이 우백호(右白虎)가 된다. 인왕산이란 명칭은 이 산자락에 인왕사(仁王寺)라는 절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 중종 때는 필운산(弼雲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지난주말 자하문(창의문)을 기점으로 인왕산을 올라보았다.성곽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철거하다 만 청운동 시민아파트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능선을 따라 올라가면서 보니 서울 중심부가 잘 보이는 곳마다 초소가 있어 등산객의 안전을 돕는다. 중간에 등산로가 성곽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넘어오는 곳에 부암동에서 오르는 길과 만난다.곧이어 옥인동 만수천에서 오르는 길과도 만났다.커다란 바위가 성곽을 대신하고 철 계단이 정상까지 이어졌다.정상에 웃음을 머금게 하는 바위가 튀어 올라 있다.바위를 오르려고 깎아 놓은 것인지,바위에 오르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자연스레 계단이 되었는지 모를 기묘한 모습이다.네모난 탁자가 놓여 있어 좋은 휴식터가 되는 정상에서 조망은 가히 환상적이다. 서울을 한눈에 이렇게 잘 볼 수 있는 곳은 인왕산밖에 없다.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인 것 같은 북한산의 보현봉이 우뚝하게 보이고 서쪽으로 이어진 비봉능선의 암봉들이 선경을 이룬다.북악산 자락의 경복궁의 기와집들이 네모의 집합으로 보이고 목멱산 꼭대기의 서울탑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도심의 고층 건물들은 마치 ‘레고’를 쌓아 놓은 조형물의 전시장 같다.그 뒤로 한강으로 나뉜 서울의 남북이 거대한 회색의 도시를 연출하고 있다.코앞에 보이는 치마바위 아래 황학정(黃鶴亭)의 과녁 세 개가 뚜렷이 보인다.그 아래가 사직단(社稷壇)이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널찍한 필운동 일대는 왕궁 터가 될 뻔한 곳이다. 조선이 한양 천도를 결정할 당시에 무학대사가 인왕산에 올랐을 것이다.산중턱에 선(禪)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북악과 목멱산(남산)을 좌우용호(左右龍虎)로 삼으려 했으나 정도전(鄭道傳)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무학대사가 우백호로 생각한 남산을 향해 성곽이 길게 늘어섰다.성곽을 따라 오르는 등산객의 발걸음이 느릿느릿하다.계단은 급경사를 내리 달리더니 안부에서 사거리를 만났다.동쪽이 인왕천 약수터로 가는 길이고 서쪽은 홍제동 옛 서울여상 자리로 내려가는 길이다.계단 가운데에 흰 페인트로 네모를 그려 놓은 길은 시커먼 ‘범바위’가 버티고 있는 순한 능선을 지났다. 성곽을 따라 이어진 길은 소나무 숲 사이로 간간이 빌딩숲이 내려다 보이곤 하더니 곧 도로를 만나 속세로 이어졌다.성곽에 기대서 바라보는 인왕산의 모습이 정겹다. ●볼거리 인왕산은 종로구와 서대문구의 어디에서 오르든지 30분이면 오를 수 있다.서울 성곽(사적 제10호)을 따르는 등산로가 대표적이고 조망도 뛰어나다. 청운약수·만수천약수·인왕천약수·선바위약수 등 약수터가 즐비하고 치마바위·기차바위·코끼리바위·범바위·모자바위·선바위 등 기기묘묘한 바위들의 전시장이다. 서울시 민속자료 제4호인 선바위는 중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모습 같아서 선(禪)바위라 한다.선바위 밑에는 국사당(國師堂)이 있는데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신궁을 세우면서 남산꼭대기에 있던 것을 옮겼다.무속당(巫俗堂)으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황학정은 사직단 뒤편 산기슭에 있다.원래는 대송정(大松亭)이 있었으나 1922년 일제가 헐어버린 경희궁내의 황학정을 이전한 것이다.필운동의 등과정,옥동의 등룡정,누상동의 백호정,삼청동의 운룡정,사직동의 대송정을 합하여 서촌 오사정(西村 五射亭)으로 일컬었다. 사직단은 조선시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을 모시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태조 4년(1935)에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국토의 신을 모시는 사단(社壇)은 동쪽에,곡식의 신을 모시는 직단(稷壇)은 서쪽에 설치하고,국왕이 매년 정월과 이월 그리고 팔월에 제사를 지냈다.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다. 산악문학인 안재홍
  • [부동산 in] 주택경기 침체기 내집마련 이렇게

    [부동산 in] 주택경기 침체기 내집마련 이렇게

    주택경기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입주를 시작한 새집들이 빈집으로 방치돼 있는 경우도 많다.서울시내 재건축 아파트 가운데에는 1억원 가량 호가가 빠진 경우도 많다.서울·수도권 신규 분양시장에서도 대거 미분양이 발생하고 있다.그러나 주택경기 침체가 항구적인 것은 아니다.언젠가는 회복국면에 접어들게 된다.이는 과거의 예에서 봐도 분명하다.침체와 호황은 주기적으로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이런 때가 내집마련 적기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바로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침체기에는 시장이 매수자 위주로 개편돼 보다 좋은 조건에 아파트를 분양받거나 기존 주택을 매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내집 장만에 나서는 데에도 요령이 필요하다.그렇지만 그 요령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는 게 부동산 전문가들의 얘기이다. ●미분양땐 분양가 낮춰 주택시장 경기가 좋을 때는 먼저 분양하는 아파트를 분양받는 것이 유리했다.처음에 분양하는 아파트는 첫 분양이라는 리스크를 감안,분양가를 낮게 책정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 후에 분양하는 아파트는 먼저 분양한 업체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어 분양가를 높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주택경기가 침체되면서 먼저 분양에 나선 업체에 미분양이 발생하면 분양가를 낮추는 현상이 일반화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기도 남양주 덕소에서 9월 분양하는 경남기업은 저렴한 분양가와 여유 있는 융자혜택으로 승부수를 띄웠다.7∼8월 사업지 부근(덕소리)에서 먼저 분양했던 현대산업개발과 동부건설 아파트에 일부 미분양이 나자 아예 겁을 먹었다.분양가를 평당 100만원 이상 인하하고,중도금도 무이자융자 처리로 방향을 선회했다. 서울 8차동시분양에 합류할 서울 신공덕동 삼호 역시 기준층 예상분양가를 평당 1100만원으로 책정,주변 아파트인 신공덕 삼성3차(평균 1200만원)보다 낮춰 잡았다. 내집마련정보사 함영진 차장은 “침체기에는 늦게 분양하는 아파트가 메리트가 많은 편이다.”라면서 “다만 분양가가 싸더라도 인근 아파트의 분양권 시세나 분양조건을 꼼꼼히 따져보는 청약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원가연동제 실시 전에 사야 요즘 분양하는 아파트는 웬만하면 미분양 물량이 생긴다.경우에 따라서는 통장이 필요없는 선착순 분양물량이 남기도 한다.따라서 미분양 아파트를 고르는 것도 요령이 필요하다.일반적인 원칙은 원가연동제가 실시되기 전에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원가연동제가 실시되면 25.7평 이하의 아파트는 분양가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이 경우 이미 분양에 나섰다가 미분양이 난 아파트는 분양조건을 바꿔 ‘떨이 분양’에 나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분양아파트 공략은 원가연동제 실시를 전후해 매입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평가다. 건설교통부가 밝힌 지난 6월말 현재 미분양아파트는 5만 97가구로 전달의 4만 5164가구보다 10.9% 증가했다. ●동탄 1단계는 중대형이 유리 다음달 중순쯤 경기도 화성시 동탄신도시에서 1단계 아파트 약 6500가구가 분양된다.모두 8개 업체가 참여하며 29∼60평형으로 이뤄져 있다. 동탄신도시 1단계 지구는 시범단지에 비해 입지는 뒤지지만 용적률은 시범단지(220%)보다 낮은 170∼180%여서 쾌적성은 뛰어나다. 전체 6452가구 가운데 65%(3463가구)가 전용면적 25.7평 이상의 중대형이다.앞서 분양된 시범단지(5306가구)는 90% 이상이 국민주택 규모였다. 인근 판교신도시의 경우 국민주택규모 이하는 원가연동제가,국민주택규모 초과는 채권입찰제가 적용된다.중소형은 분양가가 낮아지는 반면,중대형은 분양가가 뛸 가능성이 크다.동탄신도시는 중대형을 분양받으면 시세차익도 볼 수 있다는 게 부동산 전문가들의 얘기이다. 동탄신도시 1단계 분양가는 30평형대는 평당 730만∼750만원대,40평형대 이상은 평당 760만∼790만원대로 시범단지와 비슷할 것으로 전망된다.그러나 일부 업체가 중대형 분양가를 평당 20만원가량 높게 책정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청약시 분양가를 꼼꼼히 챙길 필요가 있다.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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