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귀의 어리석음/조오현 낙산사회주·시인(일요일아침에)
불교의 윤회설에 의하면 탐욕이 많은 중생은 죽어서 아귀의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아귀란 몸집은 산보다 더 큰데 목구멍은 바늘귀보다 더 작아서 욕심껏 먹이를 먹지 못하는 중생을 말한다.이들은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먹이만 보면 서로 차지하겠다고 아우성을 치다 못해 아수라장을 만든다.「아귀다툼」이란 말도 여기서 생겨났다.그러나 아귀다툼을 벌여 먹이를 차지했더라도 목구멍이 작아서 그것을 다 먹어치울 방법이 없다.탐욕이 없어지지 않는 한 아귀는 늘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의 가르침은 비유와 상징을 통해 「이 시대」의 사람들을 일깨운다.탐욕을 못버리는 중생은 아귀의 업보를 받아 고통을 치른다는 것도 그런 의미다.따라서 아귀의 세계가 실재하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그보다는 현실에서 우리의 삶을 아귀로 만들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이것이 아귀의 업보를 말하는 본뜻이다.
○노사의 심각한 대립
그러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이와는 정반대다.최근 우리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몇가지 다툼만 봐도 그렇다.
근로자와 사용자는 임금문제를 놓고 심각한 대립을 거듭하고 있다.근로자들은 왜 고통분담의 짐을 자신들만이 짊어져야 하느냐는 것이고 사용자들은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어느 선 이상은 곤란하다는 입장이다.한의사와 약사는 한약조제권을 둘러싸고 밥그릇 싸움을 벌이고 있다.한의사들은 한약의 조제는 당연히 한의사가 해야 한다는 것이고 약사들은 약은 약사가 짓고 의사는 진료만 하라는 주장이다.
양쪽의 주장을 들어보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와 명분이 있다.허지만 그 뒷면에 숨은 뜻은 한마디로 「밥그릇」을 더 크게 해야겠다는 싸움이다.그리고 내가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는 수출이 위축되고 국민경제가 곤두박질을 치든말든,국민의 건강이야 쓰러지든 자빠지든 상관없다는 태도다.아니 도리어 생산중단과 국민건강을 담보로 투쟁을 하다보면 결국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가 올 것이라는 음흉한 계산이 깔려 있다.
이같은 질나쁜 아귀다툼,그것도 집단화된 아귀다툼은 이해당사자는 물론,국민 모두에게 피해만 준다.노사분규가 극단으로 치달아 일터가 폐쇄되면 기업은 망하고 근로자는 직장을 잃는다.더크게는 나라경제가 흔들린다.우리나라는 어느새 신흥공업국 경쟁력 순위에서 7위로 밀려났다지 않는가.한약조제권 분쟁도 마찬가지다.국민건강을 담보로 집단휴업하여 얻는 것이 무엇인가.
○사실상 밥그릇 싸움
이 집단적 아귀다툼을 해결하는 방법은 한가지 뿐이다.아귀다툼의 원인이 탐욕과 이기주의에서 비롯되었다면 그것을 치료할 방법은 양보와 이타주의를 실천하는 길밖에 다른 수가 없다.다시 말해 근로자는 사용자의 입장으로,사용자는 근로자의 입장으로,또 한의사는 약사,약사는 한의사의 입장으로 돌아가 서로가 이해하고 내가 먼저 양보하는 것이다.
양보와 이타주의는 종교인들이나 실천할 덕목이지 세속인들에게는 비현실적 대안이라고 일축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현실은 어디까지나 살벌한 생존투쟁의 마당이고 보면 그럴듯한 반론인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집단이나 개인이 모두 자기욕심만을 채우기 위해 극단적 이기주의에 빠진다면 어떻게되겠는가.나 혼자만의 탐욕과 이기주의는 결코 충족될 수 없다.욕심이 많으면 많을수록 욕심은 채워지지 않는다.아무도 양보하지 않는데 내 욕심의 배를 채울수 있을 것인가.그것은 아귀의 세계에서나 하는 어리석은 노력이다.
반대로 양보와 이타주의는 서로를 살리는 길이다.내가 먼저 양보할 때 상대방도 양보하고,내가 먼저 남을 도울 때 남도 나를 돕는다.이것이 인간의 길이다.그래서 부처님은 「욕심을 버리고 남을 위해 보시하라」고 가르친다.그래야 얽히고 설킨 실타래가 풀린다는 것이다.
○양보·이타주의 절실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힌 현실의 문제를 종교적 원리로 풀어내려는 것은 나이브한 감상주의라고 비판할지 모른다.
그러나 더 좋은 대안은 무엇인가 .뾰죽한 묘수가 없다.
아귀처럼 혼자만 먹으려는 것은 어리석음이다.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아귀적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아귀적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먹을 것을 보고도 못먹는 아귀나 진배가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