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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산의 마지막 핏줄, 3·1절 앞두고 눈감다

    도산의 마지막 핏줄, 3·1절 앞두고 눈감다

    일제에 맞서려 美 해군 복무LA한인사회 정신적 지도자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이자 LA 한인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안필영(미국명 랠프 안) 선생이 지난 26일(현지시간) 별세했다. 96세. 현지 한인단체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과 LA 한인회는 안 선생이 이날 밤 LA에서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그는 최근까지 숙환으로 병원 입원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도산 선생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인 고인은 생존한 유일한 핏줄이었다. 그는 아버지인 도산이 미국에서 해외 독립운동의 기틀을 닦은 뒤 활동처를 중국 상하이로 옮겼을 때인 1926년 LA에서 태어났다. 캘리포니아주립대학 졸업 후 진주만 공습을 감행한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미 해군에 입대해 복무했다. 2차 대전 종전 이후에는 독립유공자이자 한국계 미국인 배우로 활약한 큰형 안필립 선생의 영향을 받아 배우로 활동했다. 한국전이 배경인 1950년대 영화 ‘배틀서커스’, ‘미션 오버 코리아’ 등에 출연했고 2000년대 중반까지 다양한 영화, TV 드라마에서 한국계 배우로 등장했다. 또 캘리포니아주 고등학교 체육 교사로도 재직하며 학생을 가르쳤다. 고인은 특히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형제들과 함께 LA 한인사회에서 독립운동의 역사를 증언하는 등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했다. 최근까지도 3·1절 및 광복절 기념 행사 등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등 부친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렸다. 윤효신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이사장은 “고인은 우리의 기둥이었다”고 애도했고, 제임스 안 LA 한인회장은 “3·1절을 앞두고 돌아가셔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유족으로 부인과 두 딸이 있다.
  • ‘어벤져스’ ‘해리 포터’ 달군 그 음악들, 오케스트라로 만나요

    할리우드 주요 블록버스터의 흥행을 거든 영화 음악들을 다시 듣는 무대가 잇달아 펼쳐진다. 존 윌리엄스, 한스 치머, 대니 엘프먼, 앨런 실베스트리 등 빛나는 영화 음악 거장들의 작품을 오케스트라의 웅장하고 섬세한 선율로 만날 수 있다. 위클래식은 다음달 12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과 20일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블록버스터 영화 음악 콘서트’ 앙코르 공연을 연다. 피아니스트 출신 김재원이 지휘하고 90인조 WE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공연에서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어벤져스’(2012), ‘아이언맨3’(2013)와 더불어 ‘아바타’(2009), ‘토르: 다크 월드’(2013), ‘미션 임파서블’(1996), ‘반지의 제왕’(2001) 등의 주제곡을 듣게 된다. 슈퍼 영웅들이 모여 지구를 구하는 내용의 ‘어벤져스’ 주제곡은 ‘백 투 더 퓨처’(1985), ‘포레스트 검프’(1994) 등의 음악을 작곡한 실베스트리의 작품으로 비장함이 느껴진다. 하워드 쇼어의 ‘반지의 제왕’ 주제곡은 제74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음악상을 받았고, 엘프먼의 ‘미션 임파서블’ 주제곡은 첩보물에 어울리게 긴장감이 스며든 불후의 명곡으로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다. 바통은 오는 4월 2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한스 치머&존 윌리엄스 영화음악 콘서트’로 이어진다. 할리우드 ‘히트 메이커’라는 별명을 가진 독일 출신 치머와 아카데미 음악상과 그래미상을 수차례 수상한 윌리엄스의 대표작들을 엄선했다. 1부에서는 ‘슈퍼맨’(1978), ‘인디아나 존스’(1981),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2001), ‘E.T’(1982), ‘쥬라기 공원’(1993), ‘쉰들러 리스트’(1994), ‘스타워즈 에피소드5: 제국의 역습’(1980) 등 윌리엄스의 명작을 감상할 수 있다. ‘해리 포터’와 ‘쉰들러 리스트’는 바이올리니스트 송지원의 협연으로 진행한다. 2부에서는 ‘인셉션’(2010), ‘글래디에이터’(2000), ‘진주만’(2001), ‘캐리비안의 해적’(2003) 등 치머 특유의 강렬한 선율을 만날 수 있다.
  • ‘글래디에이터’ ‘어벤져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음악 오케스트라로 만난다

    ‘글래디에이터’ ‘어벤져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음악 오케스트라로 만난다

    할리우드 주요 블록버스터의 흥행을 거든 영화 음악들을 다시 듣는 무대가 잇달아 펼쳐진다. 존 윌리엄스, 한스 치머, 대니 엘프먼, 앨런 실베스트리 등 빛나는 영화 음악 거장들의 작품을 오케스트라의 웅장하고 섬세한 선율로 만날 수 있다.위클래식은 다음달 12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과 20일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블록버스터 영화 음악 콘서트’ 앙코르 공연을 연다. 피아니스트 출신 김재원이 지휘하고 90인조 WE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공연에서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어벤져스’(2012), ‘아이언맨3’(2013)와 더불어 ‘아바타’(2009), ‘토르: 다크 월드’(2013), ‘미션 임파서블’(1996), ‘반지의 제왕’(2001) 등의 주제곡을 듣게 된다. 슈퍼 영웅들이 모여 지구를 구하는 내용의 ‘어벤져스’ 주제곡은 ‘백 투 더 퓨처’(1985), ‘포레스트 검프’(1994) 등의 음악을 작곡한 실베스트리의 작품으로 비장함이 느껴진다. 하워드 쇼어의 ‘반지의 제왕’ 주제곡은 제74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음악상을 받았고, 엘프먼의 ‘미션 임파서블’ 주제곡은 첩보물에 어울리게 긴장감이 스며든 불후의 명곡으로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다.바통은 오는 4월 2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한스 치머&존 윌리엄스 영화음악 콘서트’로 이어진다. 할리우드 ‘히트 메이커’라는 별명을 가진 독일 출신 치머와 아카데미 음악상과 그래미상을 수차례 수상한 윌리엄스의 대표작들을 엄선했다. 1부에서는 ‘슈퍼맨’(1978), ‘인디아나 존스’(1981),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2001), ‘E.T’(1982), ‘쥬라기 공원’(1993), ‘쉰들러 리스트’(1994), ‘스타워즈 에피소드5: 제국의 역습’(1980) 등 윌리엄스의 명작을 감상할 수 있다. ‘해리 포터’와 ‘쉰들러 리스트’는 바이올리니스트 송지원의 협연으로 진행한다. 2부에서는 ‘인셉션’(2010), ‘글래디에이터’(2000), ‘진주만’(2001), ‘캐리비안의 해적’(2003) 등 치머 특유의 강렬한 선율을 만날 수 있다.
  • 이승만 양아들 부부, 이승만 저서 저작권 사기 혐의로 피소

    이승만 양아들 부부, 이승만 저서 저작권 사기 혐의로 피소

    이승만 양아들 부부 사기 혐의로 피소이승만 저서 ‘재팬 인사이드 아웃’ 관련고소인 “저작권 없는데 양도 계약”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인 이인수(91) 박사 부부가 이 전 대통령의 저서와 관련한 저작권 사기 혐의로 피소됐다. 출판사 광창미디어 대표인 신우현(50)씨는 지난달 10일 이 박사와 아내 조혜자 여사를 사기 혐의로 서울 혜화경찰서에 고소했다고 7일 밝혔다. 이 박사의 장남인 이병구씨에 대해서도 신씨가 작성한 교감본을 온라인 사이트에 무단으로 게시했다며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함께 고소장을 제출했다. 신 대표는 2017년 5월 이 박사로부터 이 전 대통령의 저서인 ‘재팬 인사이드 아웃’의 저작권을 2036년까지 300만원에 양도받는 저작권 양도 계약을 체결했다. 재팬 인사이드 아웃은 1941년 이 전 대통령이 국제 정세를 분석해 출간한 저서로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예측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전 대통령은 1960년 미국 하와이에서 작성한 유언장에서 재팬 인사이드 아웃의 저작권을 아내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상속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1992년 프란체스카 여사가 별세하며 저작권은 양아들인 이 박사에게 넘어갔지만 이 박사가 재산 상속을 포기하면서 저작권은 애초부터 이 박사의 자녀가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신 대표는 이 박사가 책의 저작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계약 체결 과정에서 알리지 않아 금전적 손해를 입었다고 소송 이유를 밝혔다. 지난해 법원은 신 대표가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책의 저작권이 이 박사의 자녀에게 있어 저작권 양도 계약의 취소가 적법하다고 판단한 바 있다. 이날 경찰에 출석한 신씨는 “12년 동안 이 전 박사의 저서를 연구한 가치가 무용해졌고 그 성과물을 강탈 당했다”이라며 “이 전 박사가 재산 상속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미리 고지했다면 저작권 양도 계약을 맺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 ‘인취’ 판치던 日, 위안부 비극을 낳다

    ‘인취’ 판치던 日, 위안부 비극을 낳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해 왜 배상과 사과를 하지 않을까. 역사의 응어리는 왜 풀리지 않고 현재의 비극으로 남아 있을까. ‘일본의 노예’는 위안부 및 강제징용의 역사가 단지 현대사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역사를 통해 되짚는다. 검사 출신 변호사인 저자는 이를 역사 문제이자 인권 문제로 바라보고 피해의 기원을 따라간다. 궁극적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다. 그 출발점으로 중세 일본으로 돌아간다. 당시 전쟁의 승자가 전리품의 일부로 남녀를 납치하는 ‘인취’가 빈번했고, 납치된 사람들을 노예로 매매하는 관행이 있었다. 16세기에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수많은 조선인을 납치한 뒤 노예로 만들거나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팔아넘겼다. 임진왜란을 ‘노예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일본 여성들도 세계로 팔려나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뒤, 가라유키상이라는 윤락 여성들을 네덜란드 등 유럽 상인과 군인들에게 ‘제공’했다. 이들은 비자발적 성노예였다. 근대화에 성공하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이후에는 조선 등 점령지의 여성들을 성노예로 삼은 역사가 뒤를 잇는다. 에도 시대 말기와 메이지 시대 해외로 내보내 일본과 유럽 상인을 상대한 가라유키상이 강제성과 기망성을 더해 진화한 것이다. 역사는 우연이 아닌, 이전 경험으로 이뤄진 관행적 행위이므로 미래에도 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법조인인 저자는 왜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를 탐구했을까. 일본이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미 해군기지를 공격할 당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미국 서부에 거주하는 일본인 12만명을 3년간 수용소에 격리했다. 이후 일본인 피해자와 자녀들은 미국 정부로부터 사과와 배상을 받았다.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상황과 대조적이다. 논리적으로는 배상과 사과가 자연스러운데 왜 받지 못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고, 동료 법조인들과의 연구로 이어졌다.
  • 전쟁 책임 피했던 일왕 ‘진주만 공습 결의’ 담긴 기록 나왔다

    전쟁 책임 피했던 일왕 ‘진주만 공습 결의’ 담긴 기록 나왔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직전인 1941년 10~11월 히로히토(1901~1989) 당시 일왕이 전쟁 개시를 각오하는 태도를 측근에게 드러낸 기록이 공개됐다. 전쟁을 실시하는 데 신중했다며 추후 기소되지 않은 히로히토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방증이란 분석이 나온다. 아사히신문은 5일 왕실 업무를 담당하는 궁내청 고위직인 시종장을 지낸 햐쿠타케 사부로(1872~1963)가 이 같은 내용을 적은 일기를 공개했다고 보도했다. 이 자료는 햐쿠타케의 유족이 도쿄대에 자료 등을 기탁하면서 알려졌다. 햐쿠타케는 10월 13일 일기에 “바짝 다가온 시기에 대해 이미 각오하신 것 같은 모습”이라는 이야기를 히로히토를 면담한 마쓰다이라 쓰네오 궁내대신으로부터 들었다고 썼다. 히로히토의 마음이 앞서가는 것을 우려한 기도 고이치 내대신이 “가끔 선행하는 것을 만류하고 있다”고 발언했다는 내용도 기록했다. 또 기도는 히로히토가 “개전을 결의하는 경우 전쟁 종결 수단을 처음부터 연구해 놓을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고 적었다. 이어 햐쿠타케는 11월 20일 일기에서 “폐하의 결의가 지나친 것으로 보인다”는 기도의 발언을 적기도 했다. 패전 후 일본의 전쟁 책임자들은 연합국 측이 주도한 도쿄재판으로 처벌받았다. 히로히토는 개전에 신중했고 평화를 원했지만 “정부나 군부의 진언으로 인해 마지못해 동의하게 됐다”며 기소되지 않았다. 자다니 세이이치 시가쿠칸대 교수는 “히로히토의 자세가 개전을 향해 경도되고 있는 것에 대한 측근의 우려가 드러난 상세한 기록은 ‘쇼와텐노 실록’을 포함해 종래의 사료에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햐쿠타케의 일기가 진주만 공습을 결정한 고위 관계자들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주요한 자료가 된다는 설명이다.
  • 반미열풍 뜨거운 中… 올해는 영화 ‘장진호’ 돌풍

    반미열풍 뜨거운 中… 올해는 영화 ‘장진호’ 돌풍

    중국이 건국기념일(1일)과 항미원조 전쟁 71주년(25일)을 맞아 반미 열기로 뜨겁다. 지난해 10월 6·25를 소재로 한 영화 ‘금강천’이 애국주의를 등에 업고 인기를 얻은 데 이어 올해는 ‘장진호’가 바통을 이어받아 흥행 돌풍에 나섰다. 3일 중국 최대 영화 예매 플랫폼 마오옌에 따르면 장진호의 입장 수입은 이날 낮 12시 40분(현지시간) 현재 12억 위안(약 2200억원)을 넘겼다. 국경절(10월 1~7일) 연휴 하루 전인 지난달 30일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1시간 44분 만에 박스오피스 1억 위안을 돌파해 ‘중국 전쟁 영화 사상 최대 흥행작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 등이 제작한 장진호는 중국 영화 역대 최대 제작비인 13억 위안(약 2380억원)이 들어갔다. 스타 감독인 천카이거와 쉬커(서극), 린차오셴이 동시에 메가폰을 잡았다. 애국주의 영화의 대표작인 ‘전랑’(늑대전사) 시리즈에서 감독 겸 주연을 맡은 우징(47)이 출연했다. 이 영화는 1950년 11~12월 함경남도 장진 지역에서 벌어진 장진호 전투를 중국인의 시각으로 그렸다. 같은 해 9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세를 뒤집은 미군이 개마고원 일대까지 치고 올라갔다가 중공군 7개 사단(12만명)에 포위됐다. 미군은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17일 만에 포위망을 뚫고 극적으로 탈출했지만 1만 8000여명이 숨지거나 다치는 등 피해가 컸다. 뉴스위크는 장진호 전투를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최악의 패전’이라고 평가했다. 중공군 역시 동사 등으로 4만 8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후방으로 철수했다. 영화는 이 전투가 항미원조 승리의 토대를 닦았다고 묘사한다. 특이하게도 남북한 군인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철저하게 미국과 인민지원군의 전투에만 집중했다. 이는 지난해 금강천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기획된 중국 애국영화들이 다분히 미국을 겨냥해 제작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전체 상영 시간 176분 가운데 2시간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전투 장면이 나오고 관객에게 뭔가 가르치려는 듯한 진행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그럼에도 장진호는 마오옌에서 관람객 평점 9.5점(10점 만점)으로 최고 수준의 평가를 받고 있다. 군사 전문가 겸 TV평론가 쑹중핑은 글로벌타임스에 “영화 장진호는 중국이 국가 주권과 안보, 개발이익을 확고하게 지킬 것이고 경쟁자가 누구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정신을 조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 미국은 왜 핵폭격기 B-21 개발에 올인할까 [밀리터리 인사이드]

    미국은 왜 핵폭격기 B-21 개발에 올인할까 [밀리터리 인사이드]

    B-1B, B-2 순차 퇴출…전력 공백스텔스 갖춘 장거리 전략폭격기 필요비용 상승 억제하며 고성능 기체 개발초음속 폭격기 B-21 탄생…2025년 도입B-2보다 높은 스텔스 기능…가격은 저렴미국이 개발 중인 차세대 스텔스 전략폭격기 ‘B-21’ 레이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탄도미사일(SLBM)과 더불어 ‘3대 핵전력’으로 이 기체를 개발한다는 목표입니다. 별칭인 ‘레이더’는 진주만 공습으로 충격을 받은 미국이 곧바로 장거리 폭격기로 일본 주요 대도시를 폭격해 사기를 높인 ‘두리틀 공습’에서 따왔습니다. 기체를 자세히 보면 노스롭그루먼이 개발한 스텔스 전략폭격기 ‘B-2’ 스피릿과 비슷합니다. 이름도 흡사합니다. B-2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1기당 7억 달러(한화 8200억원)라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만든 ‘세계에서 가장 비싼 폭격기’입니다.무장과 각종 부가 장비까지 합하면 1기당 생산 가격이 20억 달러(2조 3500억원)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 말부터 개발을 시작해 1999년까지 겨우 21대만 생산됐습니다. 개발 초기엔 미래 지향적 디자인에 스텔스 기능까지 갖춰 호평을 받았지만, 이후에는 ‘돈 먹는 하마’로 불렸습니다. ●1기에 2조원…“이젠 ‘비효율’ 용납 못한다” 그러고보니 B-21도 노스롭그루먼이 개발 중입니다. 그럼 심각한 비효율과 시행착오도 그대로 승계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이 이 폭격기 도입에 전력을 다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24일(현지시간) 미 공군 글로벌타격사령부(AFGSC)는 캘리포니아주 에드워즈 공군기지에서 퇴역하는 초음속 전략폭격기 ‘B-1B’ 랜서의 모습을 공개했습니다. 최근 한꺼번에 퇴역한 17대 중 마지막 기체였습니다. 이제 B-1B는 45대만 남았습니다.B-1B는 1984년 초도비행을 한 낡은 폭격기로, 개발 당시엔 저고도 침투용 초음속기라는 기술이 부각됐습니다. 그러나 AFGSC는 B-1B의 순차 퇴출을 선언하면서 “이제 정비사들이 다른 항공기를 정비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게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기체는 1988년 100기를 마지막으로 생산이 중단됐습니다. B-2보다 앞선 1970년대부터 개발을 시작해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B-2 대비 낮은 스텔스 기능에도 가격이 그다지 저렴하지 않습니다. 1기당 도입 비용은 3억 1700만 달러(3700억원)였습니다. 운용비와 정비 비용까지 감안하면 최근엔 비효율을 더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B-1B나 B-2는 1시간 운용하는데 무려 5000만~6000만원의 비용이 듭니다. 미국의 전략폭격기 1기를 한반도로 띄우는데 10억원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미국은 과거 ‘세계의 경찰’을 천명하며 국방비를 쏟아부었지만, 최근엔 이런 낭비를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는데 총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B-21인 겁니다. ●손자도 탄 B-52 계속 간다…가성비 끝판왕‘성층권의 요새’로 불리는 전략폭격기 B-52는 1952년에 초도비행을 시작해 7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운용됐습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같은 기종을 조종했다는 전설같은 얘기도 있습니다. 기체 가격은 1기당 5400만 달러(640억원)로 비교적 ‘저렴’합니다. 정비 부담도 적죠. 대륙간 고공비행이 가능해 이른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아주 좋습니다. 그래서 미 공군은 공군력 우세를 유지하기 위해 2040년대까지 B-52를 계속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렇지만 B-52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스텔스 기능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단점입니다. B-52는 길이만 48.0m, 폭은 56.4m에 이릅니다. ‘레이더 노출 면적’(RCS)이 무려 100㎡로 은밀한 침투는 불가능합니다. B-1B는 길이 44m, 폭 41m로 적지 않은 크기이지만 RCS가 10㎡입니다. 길이 20.9m, 폭 52.1m인 B-2는 RCS가 0.75㎡로 ‘큰 새’ 정도로 보입니다. 새로 개발하는 B-21은 ‘골프공’ 크기 정도로 RCS를 낮춘다는 목표입니다. 기체 폭도 45.7m로 B-2에 비해 작습니다.B-1B는 거대한 무장량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내부에 34t, 날개 등 외부에 27t을 실을 수 있습니다. B-52의 2배입니다. 스텔스 기능이 핵심인 B-2는 내부에 무장을 모두 넣어야 하지만 무장량이 B-52에 맞먹는 27t입니다. ●더 싸고 더 좋게…신형 폭격기 개발 이유 그런데 새로 개발하는 B-21은 무장량이 13.5t으로 B-2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과거 폭격기 공격 방식은 넓은 무장창에 재래식 폭탄을 싣고 먼 거리를 날아가 쏟아붓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엔 레이더파가 도달하지 못하는 먼 거리에서 5m도 안 되는 오차로 폭탄을 꽂아넣는 ‘정밀유도폭탄’이 대세가 됐습니다. 실제로 B-21은 ‘B61-21 전술핵폭탄’과 장거리 순항미사일 등 스마트 폭탄을 주로 운용할 예정입니다.미 의회에 따르면 B-21은 이런 첨단 기능을 갖추고도 1기당 도입 예산이 평균 5억 5000만 달러(6500억원)가 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B-2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더 성능이 좋은 스텔스 전략폭격기를 도입할 수 있다는 겁니다. B-1B와 단순 비교하면 비싼 것 같지만, 1980년대 물가와 고도화된 스텔스 기능을 감안하면 가성비는 훨씬 높습니다. 이는 기존 B-2, U-2, F-22 등 첨단 기체에서 사용했던 플랫폼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이라고 의회 보고서는 설명했습니다. 또 개발 초기에는 유인기로, 이후에는 ‘무인기’ 개발도 가능하도록 한다는 내용도 담겼습니다. B-21은 장거리 비행에 초점을 맞춘 B-2와 달리 ‘초음속 비행’도 가능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은밀하게 빠른 속도로 치고 빠지는 전략에 사용할 목적인 겁니다. 미 의회와 공군은 B-1B와 B-2를 순차적으로 퇴역시키면서 2025년부터 B-21을 100여대 도입한다는 계획입니다. 이것이 세계 힘의 균형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잘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 [글로벌 In&Out] 미소의 한반도 분할 점령과 소련군 북한 진주 명령/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글로벌 In&Out] 미소의 한반도 분할 점령과 소련군 북한 진주 명령/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군의 참전으로 완전히 궁지에 몰려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해방은 한반도의 민족분단, 한국전쟁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 배경인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점령 결정을 일별해 보자.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의 미군기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시작했다. 불의의 기습으로 불리한 전황에 처하게 된 미국 정부는 즉시 소련에 참전 혹은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이 가능한 공군기지의 제공을 요청했으나 같은 해 6월 22일 독일의 침략으로 극동지역에서 군대를 이동하던 소련은 대일 참전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대일 참전을 계속 요청했다. 결국 1943년 11월 28일 테헤란 회담에서 소련의 참전 문제가 다시 제기됐다. 스탈린은 소련에 커다란 인명·재산 피해를 입힌 독일을 하루빨리 패배시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면서 미영 양국이 서부전선을 열어 주면 독일 패망 후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실시해 독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만족한 스탈린은 1945년 2월 얄타에서 열린 회담에서 독일 패망 3개월 이내 대일참전을 약속했다. 1945년 5월 9일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자 소련은 그 약속의 이행에 착수했다. 유럽전선에서 단련된 소련군 부대들은 전대미문의 속도로 극동지역으로 옮겨졌고 새로운 전구(戰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서 소련의 가장 큰 결함이 드러났다. 혁명 전 동양학자들과 코민테른 소속 한국인 공산주의들이 숙청당했기 때문에 한반도 정책고문(顧問)이 될 전문가도 거의 없었다. 88여단에서 근무했던 김일성 등 한인 공산주의자들도 대부분 군인이었고 정치적 인재로서 소련 정부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만주공세작전 당시 소련은 한반도를 일본군의 도주를 막기 위한 보조방향으로 간주했고 한국을 분단시키거나 군대를 주둔할 계획조차 없었다. 그런데 소련은 어떻게, 그리고 언제 북한 점령을 결정한 것일까.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몇 시간 전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공세작전을 시작했다. 소련군이 너무나 빠른 속도로 관동군을 격멸시켜 나가는 것이 미군 지도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일본의 항복선언까지 몇 시간밖에 남지 않은 8월 14일 밤 미국 국무·육·해군조정위원회(SWNCC) 회의에서 딘 러스크와 본스틸 대령에게 아시아 지역의 내셔널지오그래픽 지도를 건네주고 소련의 남하를 막을 수 있도록 한반도를 미소 점령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했다. 시간과 한반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두 사람은 서울 바로 위에 있는 38선을 그 분계선으로 선택했다. 미국 지도부는 이에 기초하여 일반명령 제1호의 초안을 작성했고 스탈린에게 보냈다. 스탈린은 쿠릴열도를 소련에 인도하고 일본의 분할 점령을 요구했으나 한반도 분할 점령에 대해서는 항의를 안 했다. 결국 미국은 1945년 8월 17일 쿠릴열도를 소련의 책임지대에 포함하도록 수정된 일반명령 제1호를 발표해 미군에 38도선 이남의 한반도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같은 날 밤 소련군 참모부도 제25군에 한반도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다음은 전문. ‘제25군 사령관에게. 극동지역 소련군 최고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1. 1945년 8월 18일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해주~차탄리~양양군 선(線) 이북을 그 책임 지대로 하도록 할 것. 2. 조선 주둔군에 제335, 393, 386사단과 209탱크여단을 포함시킬 것. 3. 수신을 확인하고 집행 후 보고할 것.’ 미군과 소련군이 거의 동시에 발표한 일반명령 제1호와 제25군 명령으로 한국은 분할 점령돼 분단국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 “천안함이 벼슬” 각종 막말에 與의원 “울컥, 욕 튀어나왔다”

    “천안함이 벼슬” 각종 막말에 與의원 “울컥, 욕 튀어나왔다”

    與 김병기 “상상하기 어려운 막말 계속돼”“미군, 매복 걸리고도 살아남은 경험 중요시”천안함 함장이었던 최원일 예비역 대령에 대한 막말 논란과 관련해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도 비판 목소리가 나왔다. 국정원 출신으로 국회 정보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김병기 의원은 15일 페이스북 글을 통해 “최근 천안함 폭침과 관련해 대한민국 국민이면 상상하기 어려운 막말이 계속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김 의원은 “46명 순국하신 분들의 잘못이라면 이런 자들의 안위도 지키겠다고 성실히 복무한 죄밖에 없을 것”이라며 “갑자기 순직한 국정원 동료들이 오버랩되면서 울컥하며 욕이 튀어 나왔다”고 덧붙였다. 조상호 전 민주당 상근부대변인은 최근 한 방송에 출연해 “최원일 함장이라는 분은 (처우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며 “당시 생때같은 자기 부하들을 다 수장시켰다”고 주장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폭침) 이후 제대로 된 책임이 없었다”며 “함장인데 당연히 책임져야 한다”고도 했다. ●“순직 국정원 동료 오버랩되며 울컥했다” 또 서울의 한 고교 교사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최 전 함장을 향해 “천안함이 폭침이라 치면 파직에 귀양을 갔어야 할 함장이란 XX”라며 “천안함이 무슨 벼슬이냐”라고 욕설, 최 전 함장과 전우회에 고소당했다.이에 김 의원은 과거 ‘진주만 공습’, 이라크 전쟁 ‘사막의 폭풍 작전’ 등을 예로 들며 이런 막말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그 유명한 ‘사막의 폭풍 작전’을 성공시킨 미국 장군들 중 다수는 월남전에서 매복 등에 걸려 팔, 다리를 잃은 군인들이었다”며 “미군은 매복에 걸려 부하를 잃은 책임보다 매복에 걸리고도 살아남은 경험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 경험은 수많은 군인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설명했다. 또 “미국은 경계 실패로 진주만에서 일본에게 기습을 당해 수천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책임자를 처벌하지 않았다”며 “이에 반해 일본은 패전하는 족족 자살해 종전 즈음에는 유능한 지휘관이 거덜났다. 지휘관을 대하는 방식에서 승패는 이미 결정난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 의원은 “천안함과 같은 폭침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이었다고 한다”며 “46명의 군인이 순국했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생존 장병들은 배가 두 동강 날 정도로 일격을 당한 극도의 혼란 속에서도 함장의 명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퇴함했을 정도로 훈련이 잘 된 정예군”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최원일 함장은 아마 세계에서 폭침 경험을 가진 유일무이한 장교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승패는 병가지상사다. 책임질 만큼만 져야 하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최원일 함장에게 과도한 책임만 물었을 뿐 만회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 같아 참 아쉽게 생각한다”며 “우울한 하루였다”고 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A급 전범 도조 히데키 유해 태평양에 뿌린 이유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A급 전범 도조 히데키 유해 태평양에 뿌린 이유

     1941년 일본의 미국 진주만 공격을 지휘해 태평양 전쟁으로 확전시켜 일본 군국주의를 멸망의 길로 이끈 A급 전쟁 범죄자 도조 히데키 전 총리의 유골이 태평양에 흩뿌려진 사실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확히 어느 지점에 흩뿌려졌는지는 미국 정부와 미군이 철저히 비밀에 부쳐왔다. 도쿄에 있는 니혼 대학의 다카자와 히로아키 교수가 메릴랜드주에 있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이 소장하다가 2018년에야 기밀 해제된 문서를 통해 미국 육군의 연락용 항공기에 탑승한 장교가 요코하마에서 동쪽으로 48㎞ 떨어진 태평양 바다 위에 도조와 나란히 교수형이 집행된 전범 6명 등 7명의 유해를 흩뿌린 사실을 기록한 것을 찾아냈다고 영국 BBC가 AP 통신 등의 보도를 인용해 14일(이하 현지시간) 전했다. 후손들이야 늦게라도 알게 됐으니 다행이라고 반겼지만 전쟁의 참화를 고스란히 당한 우리 민족으로선 스스로 단죄하지 못한 전범의 유골 존재가 이제야 밝혀진 것을 통탄할 일이다.  도조는 유럽에서의 전쟁을 빨리 매듭지으려던 미국 등 연합군의 관심을 아시아 지역으로 돌려 2차 세계대전을 연장하려 한 원흉이다. 영국 등 옛 제국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아시아를 손아귀에 넣겠다는 야심에서 전쟁을 시작해 수백만명의 무고한 인명을 희생시킨 전범 중의 전범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1948년 11월 사형이 언도됐고, 다음달 성탄절을 이틀 앞두고 교수형으로 처형 당한 도조의 유골이 어디에 있는지 함구해왔다. 그곳이 알려지면 애국 영웅으로 여기던 우익 지지자들이 성지로 받들며 순교자로 떠받드는 일이 벌어질 것과 한국과 중국, 필리핀 등 막대한 전쟁 피해를 입은 나라들이 들고 일어날 것을 우려해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이번에 다카자와 교수가 찾아낸 문서는 루서 프라이어슨 소령이 도조 등의 사형 집행 모습을 참관하고 유해를 화장하는 과정, 항공기에 유해를 싣고 공중에서 살포하는 과정을 상세히 기록으로 남긴 것이었다. 그는 1948년 12월 23일이라고 찍히고 ‘비밀’ 도장이 박힌 문서에다 “난 다음에 적힌 전범들의 형이 집행된 뒤 이들의 시신을 넘겨받아 화장하도록 감독하고 제8 육군 연락용 항공기에 올라 유해들을 태평양 바다 위에 흩뿌렸음을 확인한다”고 적었다. 그 밑에는 도조 히데키와 다른 6명의 전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화장을 마친 뒤에는 유해들을 빠짐없이 모았고, 유해들을 바다 위에서 뿌릴 때도 각별히 주의해 용기를 비워냈다고 적었다.  이듬해 1월 4일 작성한 문서에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시간대별 상황을 꼼꼼이 기재했다. 그날 새벽 2시 10분쯤 지문 확인을 마친 도조 등 7명의 시신을 담은 관을 2.5t 트럭에 싣고 감옥 밖으로 나와 모터사이클 호송을 붙여 요코하마의 미군 묘지 관리부대에 1시간 30분 뒤 도착해 최종 점검을 했다. 트럭은 다시 아침 7시 25분에 그곳을 떠나 30분 뒤 요코하마 화장터에 이르렀다. 관들을 차례로 트럭에서 내려 각기 “오븐들”에 들어가 10분씩 있었으며 근처를 병사들이 지켰다.  그 뒤 근처 공항으로 옮겨져 프라이어슨 소령이 탑승한 항공기에 유해들이 실렸다. 그리고 “우리는 대략 요코하마에서 동쪽으로 48㎞쯤 날아가 내가 직접 화장된 유해를 넓은 지역에 흩뿌렸다”고 적었다.  도조의 증손자 도조 히데토시(48)는 “유해가 없다는 것은 유족에게 오랫동안 굴욕이었다”는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소감을 뇌까렸다. 그는 “유해에 대한 정보가 드러나 안심된다”면서 “만약 그의 유골이 일본 영해 안에 뿌려졌다면 행운이다. 유해가 뿌려진 장소가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지면 친구들을 불러 모아 헌화하며 묵념하겠다”고 덧붙였다. 또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모든 것이 봉인됐다”면서 “유해를 보존하지 않는 것이 전범재판의 일부라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다카자와 교수는 “도조의 유해가 신성시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와 함께 미군은 유해를 일본 영토에 돌려주면 일본인이 절대적인 굴욕으로 여길까 생각했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일종의 배려를 한 것이란 해석인데 우리로서는 그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고 화가 나는 대목이다.  그는 전범으로 기소된 이가 4000명 이상이며 이 중 920명이 사형에 처해졌다며 전쟁 재판에 대한 연구를 더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참배했고 스가 요시히로 현 총리가 공물을 봉납했던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는 전범들의 유해가 없고, 대신 도조를 포함한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합사돼 오늘도 우익들이 찾아 추모하고 있다. 1869년에 세워진 이곳에 위패가 모셔진 일본인은 250만명 가량인데 전범들이 합사돼 오히려 이들의 희생 정신을 퇴색시킨다고 뜻있는 일본인들은 개탄하는데 군국주의 향수에 빠진 우익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도조 히데키는 일본 육군 참모장을 지냈으며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줄곧 일본 영토 확장을 부르짖었고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 세력을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휘해 총리에 올랐지만 1944년 전세가 기울자 히로히토 일왕의 신임을 잃게 됐고 압력 끝에 물러났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무조건 항복하기에 이르렀고, 1945년 9월 11일 미군 병사들이 집을 포위하자 권총으로 극단을 선택하려 했으나 실패해 체포됐다.  도조 히데키가 떵떵거릴 때에도 뜻있는 우익들은 공군력이 절대 열세인 일본이 미국을 끌어들여 자멸의 길로 이끈 책임이 실로 크다고 비판했다. 히로히토 일왕이 교활하게 도조 히데키 등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미군정과 결탁해 목숨과 기득권을 부지했다는 비판도 대두된다.  도조 히데키를 체포한 미군 병사 5명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 존 윌퍼스가 지난 2013년 93세를 일기로 메릴랜드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윌퍼스가 도조의 자살 시도를 막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
  • 일본 전범 유골 바다에 뿌려져…증손자 “다행, 헌화할것”

    일본 전범 유골 바다에 뿌려져…증손자 “다행, 헌화할것”

    일본의 미국 진주만 공격을 지휘했던 전쟁 범죄자 도조 히데키 일본 전 총리의 유골이 바다에 뿌려졌다는 소식에 유족들이 다행이라고 밝혔다. AP통신은 14일 사형당한 도조의 유골이 어디 있는지는 세계 2차 대전의 가장 큰 미스테리였다면서, 일본 대학의 한 교수가 미국 군사 문서를 통해 답을 밝혀냈다고 보도했다. 그동안 그와 함께 처형당한 전범 6명의 유골은 순교자로 떠받들여지는 것을 막고자 일본 요코하마에서 50킬로미터 동쪽의 태평양에 뿌려진 사실은 철저한 비밀로 부쳐졌다. 일본에 전쟁 패배는 아픈 상처인데다 보수집권층이 역사를 꾸며내려 시도하면서 중국과 한국 등에서 마찰을 빚고 있다고 AP통신은 지적했다. 니혼대 히로아키 다카자와 교수는 2018년 미국 워싱턴의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이 보유한 기밀 해제 문서에서 전범들의 유골이 뿌려진 곳을 찾아냈다. 도조의 증손자의 도조 히데토시(48)는 “유해가 없다는 것은 유족에게 오랫동안 굴욕이었다”면서 “유해에 대한 정보가 드러나 안심된다”고 말했다.이어 “만약 그의 유골이 일본 영해 안에 뿌려졌다면 행운”이라며 “친구들을 초대해서 만약 유해가 뿌려진 장소가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진다면 헌화하며 묵념하겠다”고 덧붙였다. 증손자는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모든 것이 봉인됐다”면서 “유해를 보존하지 않는 것이 전범재판의 일부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도조 히데키는 일본 보수층에서는 애국자로 존경받지만, 2차 대전을 연장한 혐의로 서구에서는 증오의 대상이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일본 국왕이 일본의 패배를 선언했을 때 도조는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도쿄의 집에서 체포됐다. 다카자와 교수는 전범으로 4000명 이상이 기소됐고, 이 가운데 920명이 사형에 처해졌다며 전쟁 재판에 대한 조사를 더 할 예정이라고 했다. 신조 아베 전 총리가 참배했던 일본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는 전범들의 유해가 없다. 하지만 도조를 포함한 전범들의 위패가 이 곳에 합사되어 아직까지 신성시되고 있다. 미국의 기밀 문서에서 사형 집행 현장을 참관하고 기록을 남겼던 루서 프라이어슨 미군 소령은 한 톨의 유해도 남기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밝혔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해리스 美부통령, 해사 졸업식 연설… 설립 176년 만에 첫 여성 연설자 기록

    해리스 美부통령, 해사 졸업식 연설… 설립 176년 만에 첫 여성 연설자 기록

    “그것(코로나19)은 우리 세계에 영원한 충격을 줬습니다. 이제 세계는 연결돼 있고, 상호 의존적이며, 깨지기 쉽다는 걸 알게 됐죠.” 첫 여성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가 지난 28일(현지시간)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코로나19에 대해 1929년 대공황, 1941년 진주만 공습, 1964년 미 민권법 제정,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2001년 9·11테러 등과 같이 “우리는 중요한 전환점에 있다”고 진단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성이 이곳 졸업식 연설자로 나선 건 1845년 해군사관학교 설립 이래 176년 만에 처음이다. 해리스는 “지금은 이전의 어떤 시대와도 다르다”며 “치명적인 전염병이 수개월 만에 전 세계로 퍼질 수 있고 해커 무리가 미국 해안의 연료 공급을 방해할 수 있으며 한 나라의 탄소 배출이 지구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졸업생 여러분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라며 “이미 배운 지식뿐 아니라 계속해 배워 가는 것”이 대비책이라는 취지로 언급했다. 종래 남성들이 전통적 무력을 강조했다면 해리스는 해킹·기후변화 등 새로운 안보 위협 대응에 무게를 두는, 결이 다른 연설로 화제가 됐다. 그는 “20파운드(9.1㎏) 무게의 배터리를 가지고 다니겠냐, 아니면 태양 전지를 말아서 가지고 다니겠냐”는 말로, 신재생에너지가 전투력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미국 대통령과 부통령은 통상 서로 다른 사관학교의 졸업식 연설에 번갈아 나선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9일 코네티컷주 해안경비사관학교에서 졸업식 연설을 했다. 워싱턴 이경주 특파원 kdlrudwn@seoul.co.kr
  • [씨줄날줄] 경항모/김상연 논설위원

    [씨줄날줄] 경항모/김상연 논설위원

    취재차 미군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에 탑승해 본 경험이 있다. 놀랐던 것은 그 큰 배도 파도에 따라 뒤뚱뒤뚱 넘실거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방심하고 탔다가 배멀미에 고생했다. 전투기가 활주로 역할을 하는 짧은 갑판 위에 착륙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비행기에서 갈고리를 내려뜨려 갑판 위에 설치된 쇠줄에 걸리도록 함으로써 순식간에 멈춰 세우는 방식이었다. 갈고리를 거는 데 실패한 전투기는 상공을 선회한 뒤 다시 착륙을 시도한다. 두 번째도 실패하면 근처의 육상 기지로 가서 착륙하는 ‘불명예’를 안는다. 항공모함은 먼 거리까지 항공기를 싣고 가서 전투하려고 만들어진 무기다.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은 영국이 1919년 만들었다. 하지만 항공모함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실전에 배치(취역)한 나라는 일본이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인 1922년이다. 유명한 진주만 공습은 일본의 항공모함 6척에서 이륙한 폭격기 400대에 의해 이뤄졌다. 오늘날 가장 많은 항공모함을 보유한 나라는 미국이고, 그 뒤를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이탈리아, 인도, 태국, 브라질 등이 잇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11척을 보유하고 있는 데 반해 나머지 나라들은 1~2척 수준이어서 1위와의 차이가 엄청나다. 가장 큰 이유는 항공모함이 ‘돈 먹는 하마’이기 때문이다. 미군 조지워싱턴호의 경우 10여년 전에 이미 하루 유지비가 최소 1억원이 넘었다. 그래서 스페인, 호주, 일본 등은 항공모함보다 규모가 작은 경항모 보유를 택했다. 지난해 기준 세계 6위 군사강국인 한국은 아직 경항모 한 척 없다. 그럼에도 해군이 지난 21일 3만t급 경항모 도입 필요성을 거듭 주장하고 나서자 또다시 찬반 논란이 일었다. 반대하는 쪽은 ‘가성비’를 든다. 주로 인접한 북한을 상대하는 나라에서 불요불급한 경항모를 만드는 것은 예산 낭비라는 것이다. 하지만 항모는 원거리 작전뿐 아니라 근해에서 벌어지는 분쟁에도 요긴하다. 전투기는 연료가 금방 떨어져 장시간 작전을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당장 독도에서 충돌이 벌어졌을 때 육지에서 전투기가 발진하면 오가는 데만 연료의 대부분을 써야 한다. 일본의 경우 본토에서 독도까지 전투기가 날아오면 1시간 넘게 걸리는 반면 경항모에서는 5분 만에 발진시킬 수 있다. 이어도 수역 등에서 한국과 경쟁하는 중국도 벌써 세 번째 항모 건조에 나섰다. 당장에 쓸모가 적어 보인다고 해서 차라리 그 돈을 다른 데 쓰자는 주장은 우주선 발사할 돈으로 아파트나 짓자는 발상이나 다름없다. 국가는 그렇게 운영되는 게 아니다. 한 번의 판단 착오가 국가의 존망으로 직결되는 안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carlos@seoul.co.kr
  • ‘만자나르 수용소 그림’ 경매 중단…아시아계 인종차별 논란 커진 탓

    미 경매사이트 이베이가 일본계 미국인들의 항의에 따라 세계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내 일본인들을 강제 이주시켰던 ‘만자나르 수용소’와 관련된 미술품의 경매를 중단했다. 당시 많은 강제 이주자들이 일본계인 미국 국적자였다는 점에서 아시아계 인종차별 사건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CNN은 11일(현지시간) “이베이가 지난 6일 경매 종료 직전 일본계 시민운동가들을 만난 뒤 캘리포니아주 만자나르 격리 캠프에서 그린 것으로 알려진 스케치 작품 20점의 경매를 중단했다”고 보도했다. 이들 작품은 1942년과 1943년에 그려진 것으로, 470달러(약 53만원)까지 호가가 나온 상황이었다. 이베이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미국 내 일본계 단체의 반발은 물론이고, 한 미술품 중개상이 경매 중단을 요구하며 올린 온라인 청원서에 1300명 이상이 서명하는 등 논란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청원서에 “일본계 미국인들의 아픔은 수집품이 아니다. 그들의 역사를 팔지 말라”고 명시했다. 1941년 진주만 공습에 미국 내 일본인들은 첩자 취급을 받았고, 12만명의 일본계가 만자나르 캠프에 강제 수용됐다. 이 중 3분의2는 미국에서 태어난 미 국적자였다. 워싱턴 이경주 특파원 kdlrudwn@seoul.co.kr
  • 시장에서 산 고둥서 나온 돌 알고보니 수천만원 ‘희귀 진주’

    시장에서 산 고둥서 나온 돌 알고보니 수천만원 ‘희귀 진주’

    무일푼 태국 여성이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멜로 진주’를 얻는 횡재를 만났다. 24일 데일리메일은 태국 사뚠주의 한 여성이 70바트(약 2500원)를 주고 산 고둥에서 수천만 원의 가치가 있는 황금색 멜로 진주를 건졌다고 보도했다. 태국 사뚠주에 사는 코드차콘 탄티위왓쿨은 지난 1월 30일 시장에서 고둥 한 움큼을 사 들고 집으로 갔다. 정성껏 손질한 고둥을 잘게 썰던 그녀는 조금 낯선 돌멩이 하나를 발견했다. 탄티위왓쿨은 “껍질 하나에 황금빛 물체가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돌인 줄 알았다”고 밝혔다.그녀가 건진 돌멩이는 다름 아닌 희귀 ‘멜로 진주’였다. 탄티위왓쿨은 “어머니께 보여드렸더니 매우 희귀한 멜로 진주라고 하시더라. TV에서 어부가 진주를 팔아 큰돈을 벌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지난 1월과 2월 태국에서는 멜로 진주를 습득한 어부와 트럭 운전사가 잇따라 나온 바 있다. 탄티위왓쿨이 손에 넣은 진주는 지름 1.5㎝, 무게 6g 정도로 그 가치는 수천만 원 정도로 예상된다. 그간 고둥을 판 시장 상인이 진주를 돌려달라고 할까 봐 겁이 나 습득 사실을 비밀에 부쳤던 그녀와 가족은 최근 진주를 팔기로 마음먹었다. 탄티위왓쿨의 아버지는 18일 현지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기를 당해 무일푼이 됐다. 아내까지 암에 걸려 병원비 100만 바트(약 3600만 원)가 필요한 상황이다. 진주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설명했다. 탄티위왓쿨도 “적당한 가격을 제시할 구매자를 찾는다”며 관심을 호소했다.멜로 진주는 육식성 홍줄고둥과(Volutidae) 멜로멜로가 만들어내는 진주로, 최고 가치는 1000만 바트(약 3억 6850만 원)에 달한다. 멜로멜로가 태국과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일부 동남아 국가에만 서식하는 데다 양식도 없어, 발견되는 멜로 진주는 모두 천연이다. 더불어 보석으로서의 가치도 꽤 높다. 색상은 갈색, 황갈색, 황금색까지 다양한데 가장 희귀한 황금색이 값어치가 많이 나간다. 과거 크리스티 경매에 등장한 건 25만 달러(약 2억 8000만 원)에 팔려나갔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바이든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 재차 사과… ‘충분히 사죄’ 日과 대조

    바이든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 재차 사과… ‘충분히 사죄’ 日과 대조

    日, 고노담화 후 과거사 재차 사죄 안 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9일(현지시간) 미국과 일본이 싸웠던 태평양전쟁 중 일본계 미국인을 강제 수용했던 일에 대해 “이런 정책으로 고통받은 일본계 미국인에게 연방정부의 공식 사죄를 재확인한다”며 재차 사과했다. 21일 교도통신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19일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에서 일본계 주민을 강제 수용한 근거가 됐던 대통령령 서명 79주년을 맞아 이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은 일본이 1941년 12월 7일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1942년 2월 19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서명한 행정명령을 근거로 일본계 미국인을 ‘적성 외국인’으로 간주했다. 이어 12만명에 해당되는 이들을 재판 등의 절차 없이 수년간 강제 수용했다. 전쟁이 끝난 뒤 피해자들이 명예 회복 운동을 벌였고 그 결과 1988년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해 공식 사과하며 시민자유법을 제정해 강제 수용 생존자들에게 1인당 2만 달러씩 배상하기도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성명에서 “미국 역사에서 가장 부끄럽게 여겨야 할 한 시대”라고 과거를 평가했다. 이어 “일본계라는 이유만으로 표적이 되어 비인간적인 수용소에서 몇 년 동안 살게 했다”며 “이는 부도덕하고 위헌적이었다”라고 비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명예 회복 운동을 이끌었던 고 프레드 고레마쓰를 거명한 뒤 “이 가증스러운 정책에 반대해 일어섰던 많은 일본계 미국인의 용기를 찬양한다”며 인권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편 미국 정부가 이처럼 과거사 문제에 대해 재차 사죄하는 반면 일본은 사죄는 이미 충분히 했다는 입장으로 강하게 대조된다. 일본 정부는 1993년 8월 당시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를 통해 위안소 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인정하고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다. 하지만 최장수 내각이었던 아베 신조 정부에 이어 스가 요시히데 현 정부는 과거사 문제에 대해 앞서 충분히 사죄했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데 그치고 있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훈장은 부하, 식량은 고아에게… 전쟁 끝나고 영웅은 더 빛났다

    훈장은 부하, 식량은 고아에게… 전쟁 끝나고 영웅은 더 빛났다

    독립운동가 김순권 아들…미국서 출생2차 대전 발발하자 미군 장교로 입대伊 피사와 로마 해방전에 결정적 공로佛 비퐁텐느엔 그의 공로 칭송 동판도 6·25 때 자원입대 ‘한인 유격대’ 조직전쟁고아들에게 전투식량 등 지원도72년 예편 후엔 정치권 ‘러브콜’ 거절‘건강정보센터’ 등 미국내 한인 지원세상엔 수많은 영웅이 있습니다. 특히 치열한 전투 속에선 영웅이 더 많이 탄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영웅은 많지 않습니다. 부풀려진 전공에 도취해 높은 자리에 앉고, 권력을 휘둘렀던 인물들이 더 흔합니다. 그런데 이 군인은 좀 달랐습니다. 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 참전했고 한국과 미국, 유럽에서 모두 훈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 전투에선 누구보다 용맹했지만, 권력을 쥐기보다 사회봉사에 앞장섰던 휴머니스트. 김영옥(1919~2005) 미 육군 예비역 대령입니다. ●‘피사의 사탑’에 처음 오른 연합군 18일 김영옥평화센터와 일대기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에 따르면 김 대령은 독립운동가 김순권씨의 아들로, 1919년 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병사로 입대했다가 장교가 됐는데, 그가 배치된 곳은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100보병대대’였습니다. 진주만 공습을 당한 미군은 이들을 ‘일본놈’이라고 공공연하게 멸시하고 조롱했지만 김 대령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심지어 일본계 부대원들도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우리는 같은 미국인으로, 같은 목표를 위해 싸운다”고 감쌌습니다.1943년 100대대는 유럽을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상륙했습니다. 독일군은 이탈리아 중남부 지역에 방어선인 ‘구스타프 라인’을 치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적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포로가 절실했습니다. 당시 대대 작전참모(중위)였던 김 대령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계가 느슨한 아침에 적진을 돌파해 포로를 잡아 오겠다”고 나섰습니다. 실제로 부대원 1명만 데리고 갈대밭을 기어가 적 2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탈리아 주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중장은 그의 초인적인 성과와 낮은 계급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특별무공훈장 수여식에서 부관의 대위 계급장을 떼어내 김 대령에게 전달하고 직접 진급을 지시했습니다. 그는 피사와 로마 해방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피사의 사탑에 처음 오른 연합군으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프랑스·한국에서도 수많은 공적 쌓아 이어 프랑스로 건너가 브뤼에르, 비퐁텐 지역을 해방시켰습니다. 비퐁텐 마을 성당 동판에는 지금도 그를 칭송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동판에는 “100대대 영웅들중 1명인 김영옥 대위, 이 성당 문 앞 왼쪽에서 부상했으나 치넨(의무병 이름)과 함께 성공적으로 탈출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는 기관총탄 3발을 맞고 사경을 헤매다 항생제 처치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박갑룡 송원대 교수가 쓴 ‘휴머니스트 전쟁영웅 김영옥 대령의 리더십 연구’ 논문에 따르면 100대대 부대원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의 리더십을 잊지 못해 그를 따랐습니다. 그가 직접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며 달리는 등 늘 선봉에 섰기 때문입니다. 부대원 나베 다카시게는 “그는 항상 전선에 있었고 선봉에 있었다”며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환준 김영옥평화센터 사무국장은 “일본계 미국인들이 훗날 그의 휠체어를 끌며 존중하고 따랐다.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겸손·헌신·용기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그의 활약은 미국의 인기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 리처드 윈터스 소령을 떠올리게 합니다. 김 대령은 이런 공로로 훗날 이탈리아에서 최고훈장인 ‘십자무공훈장’을, 프랑스에서도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는 강력한 포병 화력을 바탕으로 한 전술을 자주 써 미군 전술 교본 변화에도 공헌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모님의 나라를 구하겠다’며 예비역 대위로 자원입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정보 수집 업무를 맡으며 ‘한국인 유격대’를 조직했습니다. 1951년 5월 중공군 2차 춘계공세 때는 구만산·탑골 전투와 금병산 전투에 참전해 사기가 떨어진 부대원을 독려해 승리로 이끌었고, 북상한 유엔군 부대 중 가장 빠른 진격으로 ‘캔자스선’(38도선 인근의 전술선)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그가 이끈 부대는 휴전선을 60㎞ 위로 밀어올리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부하에게 주라” 훈장 거부한 군인 진격이 너무 빠른 나머지 미군의 오폭을 받고 부상했지만 일본 오키나와에서 치료받고 다시 전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공로로 미국에서 동성무공훈장, 은성무공훈장 등을 받았고, 한국·유럽에서 받은 훈장까지 합하면 주요 무공훈장만 19개나 됐습니다. 한국군은 물론 미군 중에서도 이렇게 많은 훈장을 받은 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공적을 뽐내지 않았습니다. 6·25전쟁 당시 특별무공훈장을 주려는 연대장에게 “훈장은 받을 만큼 받았다. 부하들에게 주라”며 거부했습니다. 그의 일대기를 쓴 한우성 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이 취재차 무공훈장을 몇 개나 받았는지 물어보자 “잊어버리고 세어 보지도 못했다”며 차고 구석 종이상자에 넣어 둔 훈장들을 꺼내 보여 줄 정도였습니다. 김 대령은 수많은 고아를 도운 ‘휴머니스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처음 도착한 부산역에서 1000명이나 되는 남루한 차림의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이에 미군 장교들에게 “나는 한국인 2세다. 여기 굶주린 아이들이 우리만 보고 있다. 우리는 미 육군 장교다. 한두 끼쯤 안 먹어도 굶어 죽지 않는다”며 전투식량을 나눠 주도록 했습니다. 전투 중에도 장병 1인당 50센트씩을 모아 ‘경천애인사’라는 고아원에 전달했습니다. 유엔군 중 특정 고아원에 지원금을 준 부대는 김 대령의 부대가 유일했다고 합니다. ●美 한인 동포 돕는 데 여생을 바치다1972년 대령으로 예편한 그는 정치권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을 돕는 데 여생을 바쳤습니다. 미국 최대 소수인종 비영리 보건기관인 ‘한인건강정보센터’와 ‘한미연합회’를 주도했다고 합니다. 또 일본계 미국인을 설득해 캘리포니아주 의회 위안부 결의를 돕고,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조사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김 대령은 늘 “나는 100% 한국인이자 미국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그렇게 원했던 ‘참군인’이었습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밀리터리 인사이드] 훈장 거부한 전쟁영웅 ‘김영옥’을 아십니까

    [밀리터리 인사이드] 훈장 거부한 전쟁영웅 ‘김영옥’을 아십니까

    한국·유럽·미국서 훈장받은 유일한 군인과감한 결단력으로 독일군 포로 생포장군이 부관 계급장 떼어내 달아주기도6·25전쟁 휴전선 60㎞ 북상시킨 주역 한국 고아 돌보고 美한인 권익 위해 애써세상엔 수많은 영웅이 있습니다. 특히 치열한 전투 속에선 영웅이 더 많이 탄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영웅은 많지 않습니다. 부풀려진 전공에 도취해 높은 자리에 앉고, 권력을 휘둘렀던 인물들이 더 흔합니다. 그런데 이 군인은 좀 달랐습니다. 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 참전했고 한국과 미국, 유럽에서 모두 훈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 전투에선 누구보다 용맹했지만, 권력을 쥐기보다 사회봉사에 앞장섰던 휴머니스트. 고(故) 김영옥(1919~2005) 대령입니다. ●피사의 사탑에 처음 오른 연합군 24일 김영옥 평화센터와 일대기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저자 한우성 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에 따르면 김영옥은 독립운동가 김순권씨의 아들로, 1919년 1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병사로 입대했다가 장교가 됐지만, 그가 배치된 곳은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100보병대대였습니다.진주만 공습을 당한 미군은 이들을 ‘일본놈’이라고 공공연하게 멸시하고 조롱했지만 김영옥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심지어 일본계 부대원들도 그를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우리는 같은 미국인으로, 같은 목표를 위해 싸운다”고 감쌌습니다. 1943년 100대대는 유럽을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상륙했습니다. 독일군은 이탈리아 중남부 지역에 방어선인 ‘구스타프 라인’을 치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적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포로가 절실했습니다. 대대 작전참모인 김영옥 중위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계가 느슨한 아침에 적진을 돌파해 포로를 잡아오겠다”고 나섰습니다. 실제로 부대원 1명만 데리고 갈대밭을 기어가 적 2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탈리아 주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중장은 그의 초인적인 성과와 낮은 계급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특별무공훈장 수여식에서 부관의 대위 계급장을 떼어내 김영옥에게 전달하고 직접 진급을 지시했습니다. 그는 피사와 로마 해방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피사의 사탑에 처음 오른 연합군으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이어 프랑스로 건너가 브뤼에르, 비퐁텐느 지역을 해방시켰습니다. 비퐁텐느 마을 성당 동판에는 지금도 ‘김 대위’를 칭송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동판에는 “100대대 영웅들중 1명인 김영옥 대위, 이 성당 문 앞 왼쪽에서 부상했으나 치넨(의무병 이름)과 함께 성공적으로 탈출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는 기관총탄 3발을 맞고 사경을 헤매다 항생제 처치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프랑스·한국에서도…수많은 공적 쌓아 박갑룡 송원대 교수가 쓴 ‘휴머니스트 전쟁영웅 김영옥 대령의 리더십 연구’ 논문에 따르면 100대대 부대원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리더십을 잊지 못해 그를 따랐습니다. 직접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며 달리는 등 늘 선봉에 섰기 때문입니다. 나베 다카시게는 “그는 항상 전선에 있었고, 선봉에 있었다”며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환준 김영옥 평화센터 사무국장은 “일본계 미국인들이 훗날 그의 휠체어를 끌며 존중하고 따랐다.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겸손·헌신·용기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그의 활약은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 리처드 윈터스 예비역 소령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이런 공로로 이탈리아에서 ‘동성무공훈장’과 최고훈장인 ‘십자무공훈장’을, 프랑스에서 십자무공훈장과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한국군은 물론 미군 중에서도 이렇게 많은 훈장을 받은 이는 없습니다. 그는 강력한 포병 화력을 바탕으로 한 전술을 자주 써 미군 전술 교본 변화에도 공헌했습니다.더 놀라운 사실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모님의 나라를 구하겠다’며 예비역 대위로 자원입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정보 수집 업무를 맡으며 ‘한국인 유격대’를 조직했습니다. 1951년 5월 중공군 2차 춘계공세 때는 구만산·탑골 전투와 금병산 전투에서 참전해 사기가 떨어진 부대원을 독려해 승리로 이끌었고, 북상한 유엔군 부대 중 가장 빠른 진격으로 ‘캔자스선’(38도선 인근의 전술선)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그가 이끈 부대는 휴전선을 60㎞ 위로 밀어올리는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부하에게 주라” 훈장 거부한 군인 진격이 너무 빠른 나머지 미군의 오폭을 받고 부상했지만 일본 오키나와에서 치료받고 다시 전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공로로 미국에서 동성무공훈장, 은성무공훈장 등을 받았고, 한국·유럽에서 받은 훈장까지 합하면 주요 무공훈장만 19개나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공적을 뽐내지 않았습니다. 6·25 전쟁 당시 특별무공훈장을 주려는 연대장에게 “훈장은 받을만큼 받았다. 부하들에게 주라”며 거부했습니다. 일대기를 쓴 한 전 이사장이 취재차 무공훈장을 몇 개나 받았는지 물어보자 “잊어버리고 세어보지도 못했다”며 차고 구석 종이상자에 넣어둔 은성무공훈장을 꺼내 보여줄 정도였습니다.그는 수많은 고아들을 도운 ‘휴머니스트’이기도 했습니다. 처음 도착한 부산역에서 1000명이나 되는 남루한 차림의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이에 그는 미군 장교들에게 “나는 한국인 2세다. 여기 굶주린 아이들이 우리만 보고 있다. 우리는 미 육군 장교다. 한두끼쯤 안 먹어도 굶어죽지 않는다”며 전투식량을 나눠주도록 했습니다. 전투 중에도 장병 1인당 50센트씩을 모아 ‘경천애인사’라는 고아원에 전달했습니다. 유엔군 중 특정 고아원에 지원금을 준 부대는 김영옥의 부대가 유일했다고 합니다. ●美 한인 동포 돕는데 여생을 바치다 1972년 대령으로 전역한 그는 정치권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을 돕는데 여생을 바쳤습니다. 미국 최대 소수인종 비영리 보건기관인 ‘한인건강정보센터’와 ‘한미연합회’를 설립했습니다. 일본계 미국인을 설득해 미 캘리포니아주 의회 위안부 결의를 돕고,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조사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늘 “나는 100% 한국인이자 미국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그렇게 원했던 ‘참군인’이었습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내 판단이 그대로 적중”…퇴임 후 자화자찬 늘어놓는 아베

    “내 판단이 그대로 적중”…퇴임 후 자화자찬 늘어놓는 아베

    “후세 사람들이 ‘아베 정권 때는 참 좋았다’와 같이 생활 체감형으로 말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다. 내가 2012년 총리에 취임하던 당시는 일본이 내리막길로 가는 것 아닌가라고들 말하던 때였다. 그것을 내가 ‘아직은 언덕 위의 구름을 바라볼 수 있는 시대’로 바꾼 것 아닌가 생각한다.”(요미우리신문 인터뷰) 지난달 16일 최악의 지지율 하락 속에 지병(궤양성 대장염)을 이유로 물러났던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자신의 7년 8개월 재임기간에 대한 자화자찬으로 퇴임 후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요미우리신문,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보수 성향의 언론들과 인터뷰를 갖고 “내 판단이 적중했다”,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등 자기 ‘치적’을 연일 강조하고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달 29일 니혼게이자이 인터뷰에서 ‘아베노믹스’(아베 정권의 경제정책)와 관련해 “금융완화, 재정정책, 성장전략이라는 3개의 화살(수단)로 (일본 경제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우선 주가가 올랐고 엔화 강세 탓에 속속 해외로 나갔던 기업이 모두 방침을 바꾸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실질소득이 제자리걸음을 한 데 대해서는 언급을 생략한 채 “신규고용을 400만명 늘림으로써 (아베노믹스의)목표를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다”고 고용 개선 측면만 강조해 말했다. 그러나 고용 개선은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가속화된 것 등 경제정책 외적인 요인이 컸다. 2차례에 걸친 소비세 증세 연기와 관련해서도 “세율을 올려도 세수가 늘어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경기가 꺾여서는 아무런 득이 없다. 그때 연기한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나 스스로 말하는 것이 좀 그렇긴 하지만, 역대 중의원 해산에서 가장 잘 적중했던 것이 2017년 가을 (내가 했던) 판단이었다”라고 스스로 추켜세웠다. 그는 “모리모토·가케 문제(아베 전 총리 본인이 직접 연관된 사학재단 부당지원 의혹)로 공격당해 지지율이 조금씩 떨어지다가 2017년 8월 지지율이 약간 상승했고, 자체 여론조사에서도 (중의원 해산 이후 선거에서) 260석 이상은 획득이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와 내가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강조했다. 모리토모·가케 학원 의혹에 대해서는 “아무런 위법 행위도 아닌 것이 분명하다. 나 자신에 관련된 위법 행위는 없었다고 판명났다”고 강변했다. 앞서 지난달 23일 요미우리와의 인터뷰에서는 “2015년 한국과의 위안부 문제에 관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하는 합의를 만들었고 이는 국제사회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며 “이를 통해 한국이 일본을 폄훼하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고 생각한다”고 자찬했다. 이어 “정치적·외교적 의도에서 역사가 왜곡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며 자신의 과거사 왜곡으로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을 비난했다. 이어 “2015년 전후 70년을 맞아 역사의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미래로 나아기기 위해 어떤 일본을 만들 것인지 세계를 향해 담화를 발표했고 이듬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 나의 진주만 방문을 실현했다”고 외교 성과를 부풀려 말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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