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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르웨이 극우의 테러] 93명 목숨 앗은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는 누구

    [노르웨이 극우의 테러] 93명 목숨 앗은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는 누구

    “나는 2차대전 이후 세계 최악의 나치 괴물로 불릴 것이다.” A학점만 받던 고등학생에서 채소재배업체 운영으로 24세에 백만장자가 된 노르웨이 남성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32)는 이 말을 남기고 수시간 뒤 연쇄테러로 최소 93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나의 행동이) 잔혹했지만 필요했다.”고 범행을 시인한 그의 범행 동기는 “노르웨이에 혁명을 가져오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과묵한 금발의 남성은 그렇게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를 극우테러의 공포에 빠뜨렸다. 지난 22일(현지시간) 브레이비크가 범행 2시간 반 만에 검거되자, 그를 아는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진보당원인 요란 칼미르 오슬로 부시장은 “2002~2003년 지역 당모임에서 몇 차례 만났는데 조용하고 수줍은 성격의 보통 사람이었다.”고 기억했다. 보통 사람이던 그가 왜 단일 총기사건으로 최악의 희생자를 낸 살인마로 돌변했을까. 노르웨이 국방연구소(FFI)의 안드레스 로마하임 연구원은 “브레이비크는 다문화주의와 무슬림의 이민이 사회를 파괴한다고 여겨, 노르웨이 정계를 이끄는 총리와 노동당을 압박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브레이비크는 1997~2006년 이민에 반대하는 진보당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진보당이 보다 급진적으로 반이민 목소리를 펴지 않는데 좌절해 당을 탈퇴했다. 오슬로 상업고등학교 출신의 고졸이지만 역사학, 경영학을 1만 4500시간 독학했다는 그는 범행 수시간 전 웹사이트에 무려 1500쪽에 걸친 성명서(‘2083: 유럽 독립 선언’)를 올려 이런 극우성향을 뚜렷이 드러냈다. 성명서에 따르면 그는 2009년 가을부터 테러를 준비해 왔으며, 무슬림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레이비크는 2009년부터 스웨덴 신나치 인터넷포럼 노르디스크, 유로 무슬림화 반대모임(SIOE) 등 극우 사이트를 드나들었다. 노르웨이총기협회 회원으로 총기 3개에 대한 면허증도 갖고 있다. 경찰은 그가 채소재배업체 ‘브레이비크 지오팜’을 운영했기 때문에 폭탄제조에 쓰이는 질산암모늄 비료를 6t이나 손쉽게 살 수 있었다고 했다. 일찌감치 사업에 성공한 그는 “사업도 테러를 위한 것”이었다며 편집증적 측면을 보였다. 테러 전문가 토머스 헤그해머는 “브레이비크의 글은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쓰여졌지만 오사마 빈라덴 같은 알카에다 지도자들의 주장과 괴이하게 닮았다.”고 말했다. 브레이비크는 테러 동기를 자신의 트위터, 유튜브 등 여기저기에 암시했다. 지난 21일 군복 차림에 무기를 들고 찍은 동영상에서는 폭탄제조를 위해 구입한 화학물질을 자세히 밝히고 지난 6월 13일 처음으로 폭탄 실험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무죄’ 조봉암 선생 유족 국가에 137억 손배 소송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죽산 조봉암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23일 죽산 조봉암 선생의 유족 조호정씨 등 4명은 국가를 상대로 총 137억 4200만원을 배상하라며 서울중앙지법에 소장을 제출했다. 아들 조규호씨는 71억 9300만원을, 딸 조호정·조임정·조의정씨는 각 21억 8300만원을 청구했다. 이들은 소장에서 “육군특무부대·경찰·검찰의 불법수사, 불법적인 공소제기, 법원 판결, 사형 집행으로 인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야만적인 불법행위가 일어났다.”면서 “이로 인한 유족들의 정신적 고통 등을 배상하라.”고 밝혔다. 앞서 대법원 3부는 조봉암의 유족에 대한 형사보상금을 1억 2700만원으로 결정했다. 형사보상은 구속 재판을 받은 뒤 무죄가 확정되면 구금일수만큼 보상해 주는 제도를 말한다. 지난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진보당의 당수로 북한과 내통해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혐의로 처형된 조봉암(1899~1959)에 대해 대법관 13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1959년 7월 31일 조봉암이 사형된 지 52년 만의 판결이었다.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 법원 ‘사법살인’ 인정… 죽산 반세기만에 ‘복권’

    법원 ‘사법살인’ 인정… 죽산 반세기만에 ‘복권’

    사법부가 반세기 만에 ‘사법살인’을 인정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는 20일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한 죽산(竹山) 조봉암(1898~1959)에 대한 재심에서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대해 전원일치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따라 진보당을 창당한 조봉암은 사형 집행 52년 만에 간첩 누명을 벗게 됐다. 재판부는 국가변란 혐의에 대해 “진보당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결성됐다고 볼 수 없다.”며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북한의 위장평화통일론을 따르는 것이라고 볼 증거도 없다.”고 밝혔다.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유일한 직접 증거인 육군특무부대 증인이 상급 법원에서 진술을 번복하는 등 신빙성이 없고, 증인의 진술은 일반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특무부대가 증인을 영장 없이 연행해 수사하는 등 불법으로 확보해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진보당을 창당한 죽산의 사형은 당시 이승만의 정적 제거 차원이라고 해석한 셈이다. 대법원이 죽산 조봉암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것은 1959년 당시의 사형 선고와 집행이 사실상 ‘사법살인’이었음을 고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번 판결은 이용훈 대법원장 취임 이후 ‘어두운 과거’를 바로잡겠다는 뜻이 반영된 것으로 사법부의 과거청산 결정판이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많다. 한편 재판부는 조봉암의 또 다른 혐의인 불법무기 소지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했지만, “재심에서 공소사실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뒤늦게나마 그 잘못을 바로잡고 형의 선고를 유예한다.”고 밝혔다. 재판부가 직접적으로 ‘사과’란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반세기 만의 무언의 사과’라는 분석이다. 독립운동가로 제헌의원과 국회부의장, 초대 농림부 장관 등을 지낸 조봉암은 진보당을 창당하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대항마로 부상했지만, 1958년 간첩죄 등으로 기소됐다. ▲북한의 주장과 같은 평화통일을 정강정책으로 하고 대한민국을 변란할 목적으로 진보당을 결성했다는 것(국가보안법 위반) ▲육군 특무부대 공작요원 양이섭을 통해 자금 원조 등의 북한 지령을 받았다는 것(간첩죄) ▲허가 없이 권총 1정과 실탄 50발을 소지한 것(군정법령 5호 위반) 등이 그가 받은 혐의다. 1심에서는 징역 5년이 선고됐지만 2심과 3심에서 각각 사형이 선고됐다. 1959년 7월 30일 재심 청구는 기각됐고, 다음날 사형이 집행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죽산의 사형 집행을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비인도적, 반인권적 행위이자 정치탄압”이라고 규정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황희석 변호사는 “반세기 만에 진실을 밝혔지만 만시지탄(晩時之歎)의 느낌”이라고 말했다. 임주형기자 hermes@seoul.co.kr
  • 타이완 100주년 기념 사진전 열려

    타이완 100주년 기념 사진전 열려

    중화민국(ROC·타이완) 100주년을 기념하는 사진전시회 ‘우리의 발자국을 찾아서’(Retracing Our Steps)가 20일 강원 남이섬 특별전시실에서 주한타이완대표부(대표 양잉빈) 주최로 개막됐다. 전시는 다음 달 27일까지 무료 전시되며 사진집과 팸플릿 등도 무료로 얻을 수 있다. 전시회에는 1912년 1월 1일 중국 난징에서 중화민국 임시 총통으로 취임한 쑨원(孫文)이 임시정부 관계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부터 타이완 현대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진귀한 사진 60점이 전시돼 있다. 1986년 10월 7일 당시 장징궈 총통이 워싱턴포스트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에게 30여년 동안 지속돼 온 계엄령을 해제하겠다고 밝히는 역사적 상황을 총통부 비서관으로서 통역하고 있는 마잉주(가운데) 현 총통의 모습도 소개됐다. 또 계엄 아래 첫 반정부 사건으로 불리는 메이리다오 사건(1979년), 야당인 민주진보당 창당(1986년) 등 역사적 굴곡을 증명하는 사진들과 서민들의 애환 및 생활을 담은 사진들도 공개됐다. 양잉빈 대표는 “한국의 7대 무역 파트너인 타이완을 보다 잘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사진전을 마련했다.”면서 “올 한해 국가건립 100주년을 맞아 각종 전시회와 공연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이승만 대적할 野지도자… ‘간첩’ 정치탄압

    이승만 대적할 野지도자… ‘간첩’ 정치탄압

    죽산 조봉암은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정치 지도자 가운데 한명이다. 자유당정권 시절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적할 야당 지도자로 부상했지만, 한순간에 ‘간첩’의 굴레를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죽산은 1898년 인천 강화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초 상경, YMCA 중학부에 다니다 3·1운동에 참가해 처음 투옥됐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中央)대학에서 비밀결사 흑도회(黑濤會·재일 유학생 중심의 무정부주의 사상운동 단체)에 가담, 항일운동을 하다 귀국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붙잡혀 7년간 복역했다. 이후 지하 노동단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구속됐다가 광복과 더불어 풀려났다. 1948년 7월 헌법기초위원장으로 헌법제정에 참여하는 등 건국에 이바지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30%라는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켰다. 이 같은 인기로 죽산은 이승만과 당시 야당인 민주당으로부터 협공을 받았다. 진보당을 창당한 죽산은 1957년 당기관지 ‘중앙정치’ 10월호에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 이는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론과는 어긋나는 것으로 대한민국의 전복을 기한다는 의혹을 받았고, 그에 대한 정치적 탄압의 빌미가 됐다. 임주형기자 hermes@seoul.co.kr
  • 피플파워는 ‘23년 철권’보다 강했다

    성난 민초들의 두려움을 이겨낸 투쟁이 23년간 장기집권해 온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74) 대통령을 튀니지의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튀니지를 한달 가까이 달군 ‘재스민 혁명’이 1차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그러나 전국에서 방화와 약탈이 발생하는 등 한동안 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총리 여·야 통합정부 구성 논의 모하메드 간누시 튀니지 총리는 14일 국영방송을 통해 “벤 알리 대통령이 튀니지를 떠났다.”고 밝혔다. 벤 알리 대통령은 이날 가족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 국회의장이 임시 대통령직을 맡도록 한 헌법에 따라 푸아드 메바자(77) 국회의장이 대통령 직무대행으로 취임했다. 메바자 의장은 45~60일 내 새 대선을 실시해야 한다. 정국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간누시 총리는 16일 여야 통합정부 구성을 논의하려고 주요 야당인 민주진보당의 마야 즈리비 대표 등을 만나 향후 정치 일정 등을 논의했다. 튀니지 전역에는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비상사태가 해제되기 전까지는 3명 이상 모이는 집회가 금지되고 군은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에 대해 발포할 수 있다. CNN은 수도 튀니스 곳곳에 탱크와 무장 군인 등 군병력이 배치되기 시작했으며 사복 경찰들이 거리에 나온 청년들을 곤봉으로 때리고 발로 짓밟는 등 아비규환이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또 튀니스 중앙역 청사가 불타고 튀니지 동부 모나스티르의 한 교도소에서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 재소자 50여명이 불에 타 숨지거나 탈옥을 시도하던 중 교도관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며칠 전 흉기에 찔려 중상을 입고 치료받던 벤 알리 대통령의 부인 레일라 여사의 조카 이메드 트라벨시는 이날 숨졌다. 또 벤 알리 대통령의 경호실장 알리 세리아티는 사회 불안을 일으키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중동 독재정권 연쇄붕괴에는 회의적 아랍 각국은 튀니지 국민 편을 들고 나섰다. 벤 알리를 받아들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조차 성명을 통해 “우리는 전적으로 튀니지 국민의 편에 서 있다.”고 했다. 이집트는 “튀니지 국민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했다. 튀니지 사태가 중동의 다른 독재국가에 ‘민주화 도미노’ 현상으로 번져 나갈지에 국제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튀니지 사태에 고무된 이집트 카이로의 시위자들은 장기집권 중인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에 대한 조롱과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의 동유럽처럼 독재정권들이 연쇄 붕괴할 것으로 보는 시각은 드물다. 이집트·이란·시리아·요르단 등에 정치적 불화가 있지만 집권세력이 군대를 장악, 무력으로 반대파를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인 데다 군인들이 시위에 동조할 태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 주된 근거다. 쿠웨이트와 바레인, 요르단 등은 제대로 조직된 야당이 있지만 집권층이 국부를 활용, 자국민들에게 광범위한 복지 혜택을 제공하고 있어 불만이 폭발하지 않는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호세프의 브라질 ‘룰라 도약’ 이을까

    지우마 호세프 신임 브라질 대통령이 1일(현지시간) 취임한다. 군사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총을 들고 빨치산이 됐던 여고생이 60세가 넘어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의 후계자로서 좌파정부 재집권과 남미통합이라는 과제를 이어받게 됐다. ●브라질 국민 70% “호세프에 기대” 브라질 국민들은 70%가 넘는 긍정적 전망으로 호세프 대통령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넓은 면적과 많은 인구를 가진 데다 풍부한 천연자원까지 갖춘 브라질이 중국이나 인도에 버금가는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호세프 대통령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나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을 넘어서는 여성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을 내놓기도 했다. 호세프 대통령은 룰라 전 대통령의 정책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브라질 경제와 국제적 위상을 한단계 도약시키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룰라 전 대통령은 중국·러시아·인도를 비롯한 아프리카, 중동 등과 관계를 강화하면서 국제무대에서 발언권을 높여왔다. 남미국가연합과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 등을 통한 지역협력도 궤도에 올려놨다. 전문가들은 호세프 정부도 ‘남미 우선, 중국 심화, 아프리카 영향력 확대’ 노선을 이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친미 성향으로 알려진 안토니오 파트리오타 외무차관을 장관으로 승진 기용하는 등 대미관계도 공을 들이고 있다. 미국도 힐러리 장관이 취임식에 참석하며 국제 사회에서 만만치 않은 브라질의 위상에 맞게 ‘예우’하기로 했다. ●각료 37명 구성 완료… 13명 경험 풍부 룰라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연평균 4%가 넘었던 안정적인 경제 성장세를 이어갔지만 취임할 때만 해도 국가부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에 비하면 호세프 대통령은 좋은 여건에서 출발한다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특히 최근 각종 경제지표 호전을 비롯해 오는 2014년 월드컵과 2016년 올림픽 개최에 대한 기대감도 높다. 하지만 높아지는 인플레이션 압력과 헤알화 절상 등 처리해야 할 과제도 만만치 않다. 빈부격차, 교육, 치안문제도 시급해 해결해야 할 숙제다. 호세프 대통령은 최근 37명에 이르는 각료 구성을 완료했다. 이 가운데 13명은 룰라 전 대통령 당시 각료 경험이 있다. 각료들은 연립정부 전통을 반영하듯 집권당인 노동자당(PT) 소속이 17명, 미셸 테메르 부통령이 속한 브라질 민주운동당(PMDB) 6명, 브라질 사회당(PSB) 2명, 공화당·민주노동당·진보당·공산당 각 1명씩, 무소속 8명 등이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獨 “류샤오보 12월 노벨상 시상식 참석해야”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가 올해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8일 류샤오보(劉曉波)를 호명하자 유럽 국가들은 중국의 민주화 인사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냈다. 또 외신들도 “중국 내 대표적 반체제 인사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며 주요 뉴스로 다루는 등 큰 관심을 나타냈다. 독일 정부는 류샤오보의 수상 소식이 전해진 직후 발표한 논평을 통해 “그는 중국의 민주화와 인권 신장을 원하는 용감한 인물이고 민주화가 평화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힘들고 긴 여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항상 얘기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또 “중국 정부는 류샤오보가 오는 12월 노벨상 시상식 참여를 위해 노르웨이 오슬로에 방문할 수 있도록 당장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복역 중인 중국 내 반체제 인사들의 구명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 온 프랑스는 “노벨위원회의 이번 결정은 인권이 세계 어디에서나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면서 중국 정부에 류샤오보의 석방을 거듭 촉구했다. 타이완의 주요 야당인 민주진보당(DPP) 역시 류샤오보의 수상 소식에 축하의 뜻을 전하며 중국 정부에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다. 주요 외신들도 류샤오보의 수상 소식을 머리기사로 긴급 타전했다. AFP통신은 류샤오보를 “최근 수십년간 중국의 민주화와 인권 보호를 위해 가장 크게 목소리를 높였던 인물”이라고 소개하면서 1989년 톈안먼 시위에 참여한 경력 등을 상세하게 전했다. AP통신도 “도박사들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점쳤던 중국의 반체제 인사가 예상대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고 보도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영욕의 사법 60년 고백합니다

    사법부가 지금까지 걸어온 60년 영욕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 속의 사법부’가 발간됐다. 사법발전재단 사법사편찬위원회(위원장 이진성 법원행정처 차장)는 13일 사법부 출범 60년을 맞은 2008년 9월, 사법사 정리작업에 착수한 지 1년여만에 700쪽 분량의 책을 냈다.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되고 이듬해인 1949년 9월 법원조직법이 제정되면서 비로소 근대적 사법제도의 틀을 갖춘 사법부가 출범했다. 책에서는 근대 사법제도가 도입된 개화기부터 출범 60주년을 맞은 2008년 9월 말까지 ▲사법부의 조직과 운영 ▲재판의 역사 ▲사법부의 행정 ▲사법부의 정보화와 국제화 등 5부로 나눠 다루고 있다.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현대사의 맥락에서 사법부의 치부도 드러내려고 노력한 점이 눈에 띈다. 경제성장과 국가안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과거 정권시절 국민의 기본권 보장이라는 사법부의 책무는 교과서에나 존재하던 말이었다. 19 59년 혁신계 대통령 후보였던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킨 진보당 사건에서 19 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사법부는 ‘법의 논리’보다 ‘정권의 논리’가 휘둘리는 경우가 많았다. 기존의 역사서와 차별을 보이는 점은 주요 사건들을 ‘사법의 역사’와 ‘형사소송’이란 새로운 시각에서 다루고 해설한다는 점이다. 쉽게 찾아보기 어려웠던 각종 법제도의 변화상과 주요 소송들의 숨은 뒷얘기들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문장이나 구성을 잘 다듬어 일반인을 위한 교양서로도 손색이 없다. 책은 일반 서점에서 팔지 않으며, 공공 도서관 등에서 볼 수 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노벨위 심의 초기 오바마 수상 반대” 노르웨이 언론 보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심의 초기에는 오바마의 수상을 반대했다고 노르웨이 타블로이드 신문 ‘베르덴스 강’이 1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이 신문은 복수 소식통들의 말을 인용, 수상자 심의 초반에는 위원 5명 중 3명이 수상에 반대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전했다. 진보당을 대표하는 잉에마리 위테호른 위원은 오바마 대통령이 국제사회에 공언한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반대했다. 또 보수당의 카키 쿨만 파이브 위원과 사회주의 좌파당의 아고트 발레 위원도 같은 입장이었다. 발레 위원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오바마의 수상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문제 있는’ 정책과 관련해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했다고 말한 바 있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노동당 대표이자 위원장인 토르뵤른은 오바마 대통령이 핵무기 감축 제안 등으로 국제정치의 분위기를 바꾸는 데 일조했다며 수상을 강력히 주장했다. 역시 같은 노동당 출신인 시셀 마리 뢴베크 위원이 이에 동조, 나머지 3명의 위원들을 설득했고 결국 수상은 만장일치로 결정됐다. 이 보도에 대해 위원회 측은 “매년 우리는 (위원 간에) 서로 다른 관점을 갖고 심의를 시작하며 토론을 통해 의견을 모아 나간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며 해당 보도 내용이 자연스러운 심의 과정임을 설명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노르웨이 국민 “감세보다 복지”

    노르웨이 국민 “감세보다 복지”

    경기 침체 속에도 노르웨이 국민들은 세금 경감 대신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지는 복지 제도를 선택했다. 13~14일 실시된 총선에서 중도좌파 연정이 재집권에 성공했다고 AFP통신 등 외신이 보도했다. 노르웨이에서 특정 정권이 연달아 총선에서 승리한 것은 1993년 이후 16년만에 처음이다. 개표가 99% 완료된 가운데 집권 노동당, 사회주의 좌파당, 중도당 등으로 구성된 중도좌파 ‘적-녹’ 연정은 169석 가운데 현재 의석보다 1석 적은 86석을 차지, 가까스로 과반을 넘겼다. 노동당은 64석을 얻었다. 노동당 당수이자 총리인 옌슨 스톨텐베르그(50)는 의회에서 각당 대표들과 가진 회의에서 “우리가 정권을 계속 잡게 됐다.”며 자축했다. 진보당, 보수당, 기민당, 자유당 등 4개 우파 야당은 1석이 늘어난 83석을 기록했다. 진보당은 기존 38석에서 3석 늘어난 41석을 얻었다. 최근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에서 중도 우파 정권이 들어선 것과 달리 노르웨이 좌파 정권이 다시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실업률을 3%대로 유지하는 등 전세계적인 금융 위기 속에서 선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소한 차이로 승리한 것은 스톨텐베르그 정권이 해결해야 할 숙제가 아직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노르웨이 국민들은 높은 세금을 부담하는 만큼 복지 제도에 대한 기대도 그 어느 나라보다 높다. 하지만 병원 등 공공 시설이 부족해 응급실에서 줄을 서야 할 정도로 복지 체계에 빈틈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노르웨이의 대처’를 자처해온 진보당의 시브 옌센(40) 당수는 선거 운동 기간 이같은 점을 지적하면서 세금을 낮추고 석유 수입을 인프라 개선에 사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여전히 석유 수출액으로 조성된 3950억달러(약 481조원) 규모의 국부펀드를 복지에 사용하기를 기대하면서 중도좌파 연정에 다시 한번 정부를 맡겼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씨줄날줄] 죽산 조봉암/김종면 논설위원

    1950년대 극심한 사회 혼란 속에 자유당 이승만은 반공의 기치를 높이 들고 북진통일론을 외쳤다. 이에 맞서 진보당 당수 죽산(竹山) 조봉암은 평화통일을 부르짖었다. 항일독립운동가로 제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그는 1952년 직접선거로 이뤄진 제2대 대통령에 출마하지만 차점으로 떨어진다. 모두가 명철보신하며 제 살 길을 찾고 있을 때 감연히 이승만 독재에 도전한 것이다. 1956년 제3대 대통령에 출마하지만 다시 낙선한다. 박헌영의 공산당과 결별, 진보당을 만들어 위원장으로 정당활동을 하던 죽산은 1958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다음해 처형된다. 혹자는 죽산을 미국 건국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에 견주기도 한다. 대한민국 헌법제정에 참여하는 등 건국의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고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죽산의 행적에서 무엇보다 주목할 대목은 1950년대 극우반동시대 평화통일·사회민주주의 강령을 내세운 진보당을 창당, 진보정치운동의 씨앗을 뿌렸다는 점이다. 6·25전쟁 이후 부패 특권경제 아래 신음하던 서민들에게 진보당의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은 큰 호응을 얻었다. 전후 농지개혁과 관련된 죽산의 역할과 사상은 농업의 국내총생산(GDP) 비중이 절대적이던 ‘농업국가’ 한국의 기초를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오늘날 죽산은 몽양 여운형과 함께 진보정치세력이 따라 배워야 할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꼽히기도 한다. 죽산의 진보당이 뿌리내렸더라면 우리나라도 유럽처럼 사회민주주의가 국정의 한 축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죽산은 지난 50년간 북한의 공작금을 받았다는 죄목으로 사형돼 ‘간첩’ 대접을 받아 왔다. 정치보복에 따른 ‘사법살인’의 희생자라는 사실은 애써 외면돼 온 것이다. 해방정국의 대표적인 진보정치인. 그는 과연 우리에게 잊혀진, 아니 잊혀져도 좋은 인물인가. 엊그제 여야의원과 사회원로들이 죽산 50주기를 맞아 선생의 명예회복을 청원하는 성명을 냈다. 이들도 지적했듯 진실과 정의, 인권의 문제는 이념을 떠나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다. 법원의 신속한 재심이 있어야겠다. 역사의 진실 규명에 진보와 보수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김종면 논설위원 jmkim@seoul.co.kr
  • [신경림 누항 나들이] 죽산 조봉암사건을 다시 떠올리는 이유

    [신경림 누항 나들이] 죽산 조봉암사건을 다시 떠올리는 이유

    올해는 죽산 조봉암이 사형을 당한 지 꼭 반 백 년이 되는 해다. 1958년 1월에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다음해 7월 간첩죄로 처형되었으니 실로 일사천리의 고속 재판이었다. 그가 저지른 죄라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뻔했으니 그 전전해 치러진 대선에서 너무 많은 표를 얻음으로써 보수정치인들에게 큰 위협으로 떠올랐다는 점이 그 하나요, 그때까지도 금기시되었던 남북의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것이 그 둘이었다. 그 재판이 가진 정치적 성격을 알고 있는 1심 재판부는 간첩죄에는 무죄를 내리고 국가보안법 일부에 비교적 가벼운 5년 형을 선고했으며, 진보당 간부들은 모두 무죄로 석방을 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검찰이 구형한 대로 간첩죄를 적용, 그에게 사용언도를 내렸으며, 이듬해의 상고심에서도 그대로 사형언도가 되풀이되었다. 그리고 5개월 뒤의 재심청구가 대법원에서 기각된 바로 다음날(7월31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때의 비통하고 절망적이던 느낌을 나는 ‘그날’이라는 시에서 비유적으로 형상화한 바도 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명명백백한 사법살인의 희생자인 죽산이 아직도 명예회복이 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 민주주의는 크게 퇴행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상당한 수준의 민주화를 성취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가 아직도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렇게 장황하게 죽산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고 있는 것은 그 재판과정에서 한 재판관이 보여준 용기있는 결단이 최근 새삼스럽게 생각나서다. 1심의 재판장이던 그는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죽산의 평화통일론에 손을 들어주었다. 북진통일 이외의 어떠한 방식의 통일도 논해서는 안 되는 서슬 퍼런 시대에 말이다. 매일처럼 경찰의 노골적인 비호 아래 용공판사를 규탄하는 데모가 벌어졌고, 당국은 공공연히 그에게 사퇴 압력을 가했다. 그 뒤 압력을 이겨 내지 못하고 그가 사퇴한 것으로 알지만, 그가 남긴 기록 한 대목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책(아마도 ‘어느 재판관의 고뇌’라는 책이 아니었나싶다)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육이오 때 그는 부역자들을 재판하는 고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급조된 계엄법은 재판관의 재량을 한껏 제한, 유죄인 경우 사형, 무기, 15년의 세 가지 형을 선고하는 자유밖에 주지 않았다. 그는 명확한 증거가 없는 한 거의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으며, 범법의 심증이 있을 경우에도 그것이 가벼운 것이면 무죄로 판결했다. 강제 동원되어 노래 몇 마디 부르고 박수 몇 차례 쳤다가 15년의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는 불행한 삶이 있게 하는 것이 법의 취지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법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 위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통한 죽음과 죽산의 사법 살인은 서로 닮은 곳이 없다. 그런데도 문득 죽산 사건이 생각난 것은 그 재판관이 피의자에 대해서 가졌던 태도와 노 전 대통령을 다룬 검찰의 태도가 너무나 판이해서였다. 그 재판관은 피의자는 유죄가 확정되기까지는 일단 무죄라는 생각으로 피의자를 대했으며, 피의자도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피의자를 조롱하고 망신주고 모욕하는 일을 법관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터부로 여긴다는 뜻의 진술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런 합리적이고 온유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검찰에 몇 사람만 있었어도, 전직 대통령의 자결이라는 불행한 광경을 우리는 역사에서 보지 않았어도 좋았을는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새삼스럽게 그를 생각나게 하며 죽산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법도 역시 사람을 위해서 기능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 법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인간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인간적인 사람들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의 진술도 잊히지 않는다. 시인
  • 英연구팀 “딸 가진 아버지, 진보적 성향 짙다”

    英연구팀 “딸 가진 아버지, 진보적 성향 짙다”

    딸 가진 아버지들은 진보 성향을 띤다? 최근 외국의 한 연구팀이 딸을 가진 아버지에게서 진보 성향이 짙게 나타난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영국 워릭 대학교의 앤드류 오스월드 박사는 영국 가구패널조사(British Household Panel Survey)를 분석한 뒤 “딸과 아들의 숫자에 따라 아버지의 정치적 견해가 달라진다.”고 한 경제 저널에서 밝혔다. 오스월드 박사에 따르면 셋 이상 자녀를 둔 가장 중, 딸만 가진 사람의 77%가 노동당과 자유당 등 대표 진보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아들만 가진 사람 중 진보당을 지지한 사람은 67%로 10% 포인트 정도 차이를 보였다. 또 여성이 남성보다 NHS(국민건강보험)처럼 높은 금액의 세금에 호의적이며, 공공이익을 위한 활동에 더욱 긍정적이고 활동적으로 참가한다는 사실이 조사됐다. 오스월드 박사는 이 같은 성향이 딸을 많이 둔 남성(아버지)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딸을 많이 둔 아버지는 높은 세금과 공공이익에 긍정적인 반면 아들을 많이 둔 어머니는 정반대의 성향을 띤다고 주장했다. 그는 “딸들이 아버지의 사회적인 견해를 바꿔놓는다.”면서 “딸을 많이 둔 집일수록 노동당과 자유당에게 표를 던졌다. 미국도 이와 비슷한 패턴을 보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생물학자 아서 메인 박사는 “그의 주장은 성적 고정관념에 불과하다.”며 반박하고 나섰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자녀의 성별은 남성이 결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수치가 높은 여성은 지배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며 아들을 낳는데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나온 바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미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아들을 더 많이 낳고,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딸을 더 많이 낳는 것일 뿐, 자녀 성별이 부모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사진=가디언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뉴질랜드 보수회귀 9년만에 정권교체

    뉴질랜드가 9년 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했다.8일 치러진 뉴질랜드 총선에서 보수당인 국민당이 노동당을 누르고 정권교체를 이뤘다고 AP 등 외신이 9일 보도했다. 이날 총선에서 국민당은 122석 가운데 59석을 얻어 과반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지만 5석의 액트당과 1석의 미래당과 연대해 새 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됐다. 헬렌 클라크(58) 총리가 이끌어온 노동당은 43석을 얻어 연대가 가능한 녹색당(8석), 진보당(1석)과 합쳐도 52석에 그쳐 패배했다. 이에 따라 정계 입문 4년4개월 만에 당 대표 자리에 오른 외환 전문가 출신의 국민당 존 키(47) 대표가 3년 동안 뉴질랜드를 이끌게 됐다. 이번 선거 결과는 세계적인 경제 위기와 노동당의 장기 집권으로 인한 유권자의 피로감이 집권 노동당의 패인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오바마발(發)’ 변화의 바람이 뉴질랜드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키 대표 스스로도 이날 선거 후 당선 연설을 통해 “뉴질랜드는 변화에 투표했다.”고 평가했다. 지난 2002년 총선에서 오클랜드 외곽 헬렌스빌 선거구에서 출마해 당선되기 전까지 키 대표는 잘나가던 외환 전문가였다. 캔터베리대학 졸업 후 투자은행에 들어간 그는 뉴질랜드에서 10년 정도 경력을 쌓은 뒤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 메릴린치에 입사해 싱가포르, 런던, 시드니 등에서 외환 업무를 담당했다. 런던에서 국제 외환담당 매니저로 일할 당시 그의 연봉은 225만달러 정도로 알려져 그의 이름 앞에는 ‘억만장자’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오랜 꿈은 정치인이었다.2001년 돌연 귀국, 다음해 국민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국민당 재정 담당 부대변인과 대변인을 거쳤고 2005년에는 당 서열 7위로까지 올랐다. 같은 해 총선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에 성공하면서 그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타고난 승부 근성과 달변, 경제에 대한 전문성을 내세우면서 당내에서 더욱 인정받게 됐고 결국 2006년 11월에는 당내 서열 1위인 대표 자리까지 올랐다. 짧은 기간 뉴질랜드 권력 최정점에 선 탓에 그에 대한 걱정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경제 전문가라는 점이 높은 점수를 받아 당선됐지만, 일천한 정치 경험으로 자칫 의욕만 앞세울 가능성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또 국정 운영 최우선 과제로 경제 살리기를 꼽았고 보수당의 특성상 그동안 노동당이 추구해온 사회복지나 환경 문제에는 무게를 덜 둘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그는 선거 운동 기간 탄소 배출권 시장 문제를 시장친화적으로 하겠다고 밝혔고 함께 정부를 꾸리게 될 액트당이 감세와 함께 공공 서비스 분야에 대한 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또 외교 관계에서 자주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어 향후 미국, 영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지도 관심의 대상이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인혁당 ‘사법살인’ 최대 치욕

    한국 사법 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으로는 지난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꼽힌다. 학생운동 배후세력으로 조작돼 기소된 8명에게 대법원은 사형을 확정했고, 선고 20시간 만에 가족들도 모르는 사이 형이 집행됐다. 이 사건은 재심(再審)을 통해 2007년 1월에야 무죄 판결이 났다. 권위주의 시절 인혁당 사건처럼 고문으로 나온 허위자백 등이 증거로 인정돼 유죄 판결이 나왔던 경우가 꾸준히 확인되고 있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26일 사과한 사법부의 부끄러운 과거는, 이렇듯 정치권력에 종속돼 인권을 외면한 판결들을 의미한다. 2005년 이 원장이 취임한 뒤 대법원은 1970∼1980년대 시국·공안 사건 판결 6000여건을 분석, 불법구금이나 고문 등 재심사유가 있는 224건을 추렸으나 공개하지는 않았다. 간첩사건이 141건, 긴급조치위반이 26건, 반국가단체구성이 13건, 민주화운동이 12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1975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1980년 아람회 사건,1985년 구미유학생 간첩단사건 등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현재까지 재심을 권고한 24건으로도 사법부의 어두운 과거사를 가늠할 수 있다. 재심이 개시된 9건 가운데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 태영호 납북어부 사건, 납북 귀환어부 간첩조작 사건, 차풍길 간첩조작 사건 등 4건이 무죄로 나왔다. 진보당 조봉암 사건 등 15건은 재심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이 원장의 사과가 연말에 발간될 ‘역사 속의 사법부’에 어떻게 반영될지도 관심이다. 개별 사건을 각각 언급하기보다 총론적인 내용이 담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부당한 판결을 유형별로 다룰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이 원장은 과거 잘못을 바로잡는 방법으로 재심을 강조했지만 잘못된 판결로 범죄자 낙인이 찍히고 권리를 잃은 피해자에게는 재심 또한 힘겨운 과정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이상훈 변호사는 “최소한 국정원이나 국방부가 구성했던 과거사위와 비슷한 조직을 법원도 만들어 피해사건과 당사자를 밝히고 재조사·재판결해야 한다.”면서 “법원이 피해 및 권리 회복에 적극 나서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홍지민 정은주기자 icarus@seoul.co.kr
  • [건국 60주년] 북한을 바라보는 눈

    광복 직후 찬탁·반탁 논쟁으로 촉발된 좌우 대립은 한국전쟁을 유발했다. 남과 북은 서로에 대한 분노와 불신을 키워왔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민주화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통일교육은 북한을 ‘적’이 아닌 ‘동무’로 보는 이른바 ‘어깨동무세대’를 낳았다. 전쟁 직후 남한사람들은 북한과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을 동시에 가지게 됐고, 이승만 정부는 폐허가 된 국가를 재건하는 데 이를 활용했다. 각급 학교에선 6월만 되면 반공웅변대회가 열렸고, 누구보다 우렁차게 공산당의 잔인함을 호소하면 상을 받을 수 있었다. 가정으로 발송되는 성적표에 반공의식을 평가한 학교도 있었다.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진보당 대표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4·19혁명을 거치면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평화통일론은 5·16군사쿠데타를 거치면서 싹이 잘리고 만다.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과 1·21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으로 복잡한 국내외 정세 속에 정부는 북한의 노농적위대에 대응해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병역법 개정을 통해 병역기피자를 본격적으로 색출하기 시작했고, 주민등록법을 개정해 모든 국민에게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했다. 이듬해 고등학교 교과과정에 교련이 들어갔다. 이 시기 매년 6월 열리는 반공사생대회에서 인민군의 머리에 뿔을 그리지 않은 어린이들은 ‘아차’하며 울상을 짓기도 했다. 전 사회적 동원과 반공 시스템이 정교해지던 1972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평양을 다녀오고 7·4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면서 사회 전반에는 당장 평화적 통일이 이루어지리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하지만 유신체제로 돌입하면서 이런 기대는 무너졌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북한을 재조명하는 노력이 시작된다. 나아가 1989년에는 문익환 목사에 이어 임수경씨의 방북으로 정부의 공안정국 조성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게 남북의 거리는 가깝게 줄어든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해 ‘민족·민주·인간화교육’의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통일교육을 시작했다.2000년 6·15 1차 남북정상회담과 2007년 10·4 2차 남북정상회담은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를 무너뜨렸고 본격적인 민간교류와 함께 더 이상 북한을 ‘적’이 아닌 원래부터 ‘동반자’로 생각하는 세대가 탄생했다. 남과 북의 정상이 껴안는 것부터 보기 시작했던 어깨동무세대들은 6월 사생대회에서 증오와 광기가 가득한 적대적인 풍경이 아닌 남과 북이 손잡고 들판을 노니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장형우 김정은기자 zangzak@seoul.co.kr
  • [부고] ‘진보당 사건’ 최후 생존자 정태영씨

    ‘진보당 조봉암 사건’의 마지막 생존자인 정태영씨가 지난 21일 숙환으로 별세했다.77세. 1931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한 그는 26살에 독립운동가 죽산 조봉암을 만나 진보당에 가입했다.진보당에서 청년 조직 확대를 담당했던 그는 1958년 1월 ‘북한에서 교육받은 당 이론가’로 몰려 국가변란 혐의로 조봉암 등과 함께 전격 체포됐다.3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출소한 그는 4·19 직후 혁신계 및 3선 개헌 반대특위 등에 참여하는 등 평생 진보정당에 대한 신념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고려대 정책과학대학원과 건국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한 고인의 저서로는 ‘조봉암과 진보당’(1991),‘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적 기원’(2006)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 강남성모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4일 오전 8시다.(02)590-2538.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장제스, 불명예스러운 귀향?

    공산당에 맞서다 섬으로 밀려나며 중국 통일의 꿈을 접었던 타이완 장제스(蔣介石·1887∼1975년) 전 총통의 유해가 대륙으로 옮겨진다. 이장 시기는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장제스 전 총통의 유해가 본토로 옮겨지면,1949년 타이완으로 쫓겨난 뒤 소원하던 조국통일이 아니라 단독국가로 독립을 좇는 후세들에 의해 ‘불명예스러운’ 귀향을 하게 된다. 24일 dpa통신에 따르면 유족들은 그와 아들 장징궈(蔣經國·1906∼1988년) 전 총통의 유해를 고향인 중국 저장성(浙江省) 펑화현(奉化縣)으로 이장할 계획이다.장징궈 전 총통의 며느리인 팡츠이는 “유해를 타이완에 두는 걸 정부가 반대하기 때문에 유해를 넘겨받을 예정”이라면서 “중국으로 평화롭게 이장되는 것은 부자의 소망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앞서 천수이볜(陳水扁) 타이완 총통은 장 전 총통 부자의 무덤에 배치된 인력을 철수하도록 지시했다.천 총통이 이끄는 민주진보당 정부는 지난해부터 장제스의 호를 딴 중정(中正) 공항을 타오위안(桃園) 공항으로, 중정기념당을 민주기념당으로 명칭을 바꾸고 장제스의 동상을 철거하는 등 ‘장제스 지우기’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 당국은 아직 공식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저장성 관리들은 이장을 환영한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장제스 전 총통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중국 인민해방군에 패해 1949년 타이완으로 건너왔으며 아들 장징궈 전 총통은 부친의 뒤를 이어 78년부터 88년까지 집권했다.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아버지는 다정한 분… 영화 보며 눈물 많이 흘리셨죠”

    “아버지는 다정한 분… 영화 보며 눈물 많이 흘리셨죠”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네요. 망우리에 있는 아버지 묘소에 가서 좋은 소식을 알려드려야겠습니다.” 1959년 사형당한 진보당 당수 조봉암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과 사과 권고가 나오자 조봉암의 장녀 조호정(80) 할머니는 “지금도 얼떨떨하다.”며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48년 동안 가슴에 묻어 뒀던 아버지 얘기를 할 때는 당시를 생각하며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 ●48년 동안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들 “제가 32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한국전쟁 때 납북돼서 사촌 오빠 부부와 제가 옥바라지를 해야 했지요.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경찰들이 집에 상주하면서 남편(영화감독 이봉래)을 감시하곤 했지요.” 조봉암은 1남3녀를 두었지만 조 할머니의 동생들은 해방 이후에 태어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당시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슬하에 딸 하나를 둔 조 할머니는 40년 넘게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서 딸 부부와 함께 살고 있다. 조 할머니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냉철하면서도 한편으론 정이 많고 자상한 분이었다.“영화를 같이 보면 눈물을 제일 많이 흘리는 사람이 아버지였어요. 영화를 좋아하셔서 나를 데리고 다니며 영화를 많이 봤지요. 하루는 남편 저녁을 차려 줘야 하는데 아버지가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는 거예요. 안 된다고 했더니 많이 서운해하시더라고요.” 조봉암은 1952년과 1956년 대선에 연거푸 출마했다.1956년 대선에서는 200만표 이상을 득표해 이승만 정권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조 할머니는 “부산에서 지프를 타고 선거 유세를 다니는 걸 따라다닌 적이 있다.”면서 “테러를 당할까봐 겁도 났지만 사람들이 환영해 주는 걸 보며 보람도 느꼈다.”고 회상했다. 1956년 대선에서 평화통일 공약을 내걸었을 때는 가까운 사람들도 말렸다고 한다.“무서우니까 살고 봐야 하지 않겠나 하면서 겁을 냈을 정도였어요. 아버지는 ‘이승만 박사 무서워서 대적하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 국민이 너무 불쌍하지 않느냐.’고 하시면서 주위 사람들을 설득했지요. 평화통일을 해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지 않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솔직히 자식된 입장에서 조용히 가족들끼리 오손도손 살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요.” ●“아버지는 경찰에 잡혀간 게 아니라 자진 출두” 48년이라는 세월을 지나오면서 조 할머니는 격세지감을 느낀다. 평화통일을 외쳤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한 게 어제 같은데 이제 남북정상회담이 코앞이다.“세월의 무게를 느낍니다. 세상 참 많이 바뀌었구나 싶고요. 선구자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생각도 들지요.” 조 할머니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세상에 잘못 알려진 게 있다면서 꼭 바로잡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1956년 1월 경찰들이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 아버지는 밖에 계셨어요. 연락을 받고는 자진해서 출두했습니다. 결코 잡혀간 게 아니었어요.”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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