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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광둥성 ‘50년만의 폭우’

    |베이징 이지운특파원|중국 남부 일대에 폭우 경보가 내린 가운데 광둥(廣東)성 일부 지역이 50년 만의 폭우로 물난리를 겪고 있다. 8일 신화사 등의 보도에 따르면 양장(陽江)시와 장먼(江門)시에서는 지난주 말 24시간 동안 각각 479㎜와 474㎜가 쏟아져 50년 만에 최대 강우량을 기록했다.폭우로 장먼시 등에 있는 대형 댐 수위가 한계선을 넘어서면서 일제히 수문을 열어 물을 방류하고 있다. 선전에서는 150여 항공편이 연기되거나 취소됐다. 쓰촨(四川) 지진으로 생긴 자연호수인 탕자(唐家)산 언색호도 물이 제방위를 넘쳐 7일 자연방류를 시작했다.6일 밤부터 제방 누수로 스며나오는 물이 양이 많아지고 있고 누수지점이 한 곳으로 합쳐지면서 누수 부위가 확대되는 등 제방 붕괴위험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현지 재난지휘부는 붕괴에 대비 예비경보시스템을 가동하고 3분의1 붕괴를 전제로 이미 하류지역의 주민 25만명을 대피시킨 상태다. 이런 가운데 7일 중국의 대학입시가 전국적으로 시작돼 청두(成都)에서도 일부 재난지구를 제외한 17개 시·구의 5만 7163명이 입시에 참가했다.모두 1050만명이 응시한 이번 대입시험에서 중국 각 성(省)은 지진 재해와 구호 및 복구작업, 그리고 중국인들의 극복 의지에 대해 논술하라는 작문시험 표제를 내놓았다.42만명의 수험생이 대입시험에 참석한 쓰촨(四川)성은 ‘굳건(堅强)’을 주제로 한 시제(試題)가 제시돼 수험생들은 “비바람이 친 뒤에도 햇볕은 여전하다”,“역경 속의 미소”,“중국인의 의지는 꺾이지 않을 것” 등의 제목으로 글을 썼다.jj@seoul.co.kr
  • [사설] ‘군홧발 폭력’ 하위직급에만 책임묻나

    경찰이 엊그제 촛불시위에 참여한 서울대 여학생의 머리를 군홧발로 짓밟은 서울경찰청 특수기동대 김모 상경을 입건했다. 경찰은 김 상경이 혐의를 부인하지만 목격자 진술 등으로 폭행사실이 입증돼 사법처리할 방침이라고 한다. 부대원 관리 및 현장 지휘책임을 물어 서울특수기동대장 한모 총경과 김 상경 소속 중대장 김모 경감도 직위해제했다. 또 상급자인 서울청 기동단장 신모 경무관 등에 대해서도 서면 경고조치할 예정이라고 한다. 시위진압과정에서의 단순 폭행사고치곤 파장이 크다. 폭행장면이 동영상에 유포되면서 악화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고육책일 것이다. 그러나 책임추궁이 아랫사람에게만 가해져 용렬(庸劣)하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군과 경찰은 일사불란한 지휘체계에 의해 움직인다. 이번 사건은 청와대로 향하던 촛불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사건 당일 경찰은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고 물대포를 쏘는 등 강경대응했다. 경찰 수뇌부의 지시가 계통에 따라 현장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당연히 어청수 경찰청장 등 경찰 지휘부가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것이 먼저라고 본다. 이번 처사는 형평성에도 어긋난다. 청와대행 시위대 진압과정에서 많은 시민들이 물대포 세례를 받아 고막과 안구 등에 손상을 입었다.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하급자에게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조직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위에서부터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기강이 서고 조직이 산다. 차제에 시위대처방식에 대한 재검토도 이루어져야 한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72) 절체절명의 시간들

    [병자호란 다시 읽기] (72) 절체절명의 시간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인조는 나름대로 분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스스로 자책하는 내용을 담은 교서를 반포하여 실책을 사과하고, 내외 신료들에게 구국의 방책 마련을 위해 협조를 당부했다. 신료들도 인조의 호소에 답하여 이런저런 개혁안과 방책들을 내놓았다. 그 가운데는 노비의 수를 줄여 군역에 충당해야 한다는 등의 근본적인 개혁안도 있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청과의 관계에 못을 박다 1636년 5월26일, 인조는 다시 교서를 내렸다. 나름대로 자신감이 넘치고 무엇인가 해보겠다는 결의가 엿보였다.‘우리는 수천 리의 국토를 가지고 있는 나라인데 어찌 움츠리고만 있을 것인가? 지난 번 용골대를 보니 겁 많고 꾀가 없는 것이 우리보다 더하더라.’ 인조는 이어 수령들에게 안민(安民)의 정치를 펼 것과 변방의 장수들에게 군졸들을 무휼(撫恤)하라고 촉구했다. 청렴하고 능력 있는 수령과 장수들은 상을 주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사형에 처할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어 내탕(內帑, 왕의 개인 금고)에서 목면 1000필을 풀어 평안도에서 장졸들을 선발하는 비용으로 쓰라고 지시했다. 평소 내수사(內需司)와 관련된 비판만 나와도 고개를 돌리던 그가 스스로 내탕을 푼 것은 이례적이었다. 6월17일 홍타이지의 국서에 답하는 글을 의주로 보냈다. 격문(檄文) 형식이었다. 정묘년에 맺은 맹약이 깨지게 된 것은 조선 탓이 아니라 청나라 탓임을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귀국은 군사강국이지만 우리는 궁벽진 곳에 위치한 농업국가일 뿐이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 귀국을 능멸하고 스스로 맹약을 깨겠는가?’라는 반문으로 시작되는 국서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먼저 조선이 명을 섬겨 배신하지 않기로 한 것은 정묘 당시 합의된 약속임을 상기시켰다. 그러므로 조선이 한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문제삼는 청의 태도는 수긍할 수 없다고 했다. 조선은 이어 변방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 청 영내로 몰래 들어가 산삼을 캔 것에 대해서는 사과했다. 마지막으로 차하르(察哈爾) 버일러들은 이미 망한 나라의 포로들이니 청과 똑같이 예우할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이어 조선은 ‘명나라의 동번(東藩)’으로서 강약(强弱)과 성패(成敗) 때문에 신하의 절개를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마지막 내용이 흥미롭다.‘군사도, 재물도 없는 우리는 오로지 대의와 하늘만을 믿는다. 과거 조선을 침략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말로를 보라. 자중지란이 일어나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조선을 침략했던 그의 부하들은 다 죽었다. 반면 우리와 우호를 유지한 도쿠가와씨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 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못을 박으면서도 청의 감성을 자극하는 내용이었다. ●황손무의 충고 방어 대책 마련을 위해 분주하던 7월, 가도에서 명군 부총병(副摠兵) 백등용(白登庸)이 서울로 들어왔다.7월27일 인조는 남별궁(南別宮)으로 직접 거둥하여 그를 만났다. 평소 같으면 아무리 명나라 관원이라도 부총병 급의 인물을 국왕이 숙소까지 직접 찾아가 만나는 경우는 드물다. 아마 답답한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다. 침략은 예고되어 있는데 신료들의 의견은 분분하고, 대책 마련은 여의치 않았다. 백등용은 인조에게 조선이 비록 오랑캐와 절교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들을 기미(羈)하는 차원에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으면 노력하라고 충고했다. 조선의 사정이 딱하게 보였던 것일까? 사실 조선은 청에 대해 공식적으로 절화(絶和)를 선언했지만 일각에서는 다시 화친을 도모하는 것에 미련이 없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실마리를 과연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 것인가? 8월27일 주강(晝講)이 끝난 직후, 지경연(知經筵) 최명길이 입을 열었다.“병법에는 권모술수가 없을 수 없습니다. 추신사(秋信使)는 보내지 않더라도 우선 역관을 들여보내 청 내부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단 역관이라도 보내 대화 재개의 실마리를 풀어보자는 제안이었다. 시독관(侍讀官) 조빈이 당장 제동을 걸었다. 그는 ‘정묘호란을 겪은 뒤 자강(自强)하지 못한 것은 화의(和議)가 병이 되었기 때문이며, 강화를 하더라도 어차피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니 차라리 대의를 밝히고 절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명길의 주장을 일축한 것이다. 9월1일, 명의 감군(監軍) 황손무(黃孫茂)가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입경했다. 인조는 인정전(仁政殿)에서 황제의 칙서에 절을 올렸다. 칙서는 조선이 청의 협박에 굴하지 않은 것을 찬양한 뒤, 속히 명과 협력하여 오랑캐를 토벌하라고 격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틀 뒤 황손무는 인조에게 글을 보내 이런저런 훈수와 요구를 늘어놓았다. 그는 조선이 청과 가까운 몽골 세력을 회유할 것과 간첩을 보내 청의 내부 사정을 정탐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또 조선은 수천 리나 되는 큰 나라라고 강조한 뒤, 의주의 옛 성을 다시 쌓고 가도의 동강진과 협조하는 태세를 유지하면 오랑캐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슬쩍 청에서 귀순해 오는 한인들을 조선이 받아줄 것과 명에 말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인조는 황손무에게 조선이 군사력이 약해 오랑캐를 막기 어려우니 ‘부모의 나라’에서 구원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황손무는 조선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조선이 지독한 숭문주의(崇文主義)에 빠져 무비(武備)를 갖추는 데 소홀했고, 병농(兵農)이 구별되지 않아 군사력이 약해졌다고 진단한 뒤,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데 힘쓰라고 촉구했다. ●최명길, 평안도에 지휘본부 설치를 촉구 9월5일, 최명길이 차자를 올렸다. 그는 사간원 관원들이 ‘청과 척화하되 직접 나가서 싸워 이길 방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인조에게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여 전쟁을 피할 계책을 마련하든지, 아니면 사간원 신료들의 주장대로 직접 나가서 싸울 계책을 마련하든지 속히 택일(擇一)하라고 촉구했다. 그렇지 않고 우물쭈물하면서 적의 침략을 맞게 되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경고했다. ‘하루아침에 적의 기마병이 휘몰아오면 체찰사는 강화도로 들어갈 것이고, 원수는 황주(黃州)의 정방산성(正方山城)으로 물러날 것이니 청천강 이북의 모든 고을은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안주성도 온전할 수 없으니 생령(生靈)은 어육이 되고, 종사는 파천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최명길의 예측이었다. 당시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적의 진격 루트 가운데 방어 준비를 그나마 갖추고 있는 곳이 안주성이었다. 하지만 전쟁 지휘부가 강화도로 들어가고, 도원수가 산성으로 들어갈 경우 안주성은 고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최명길의 생각이었다. 실제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최명길의 예언은 거의 그대로 들어맞았다. 최명길은 이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마지막 계책을 진언했다. 먼저 도체찰사와 도원수를 평안도로 보내 지휘 본부를 설치하고, 평안병사를 의주로 들여보내 장졸들에게 오로지 진격만 있을 뿐 후퇴는 없다는 결의를 보여주라고 촉구했다. 그런 다음 심양에 국서를 보내 군신의 대의를 밝히고, 추신사를 파견하지 않은 이유를 알려주고, 청 내부의 정황을 탐지하라고 건의했다. 만일 그들이 혹시라도 답장을 보내오면 그 내용을 살핀 다음 우리의 행동 방향을 결정하자고 했다. 청이 우리의 충심을 받아주면 관계를 계속 유지하되, 그렇지 않을 경우 국경에서 결전을 벌여 승부를 내자는 주장이었다. 인조는 답하지 않았다. 전진하여 승부를 내는 것이 겁났던 것일까? 인조는 입을 다물었고, 삼사 관원들이 들고일어났다. 절체절명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제식구에 덤터기?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보복폭행 사건을 처음 수사했던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 오모(43) 경위를 둘러싼 각종 의혹이 7개월 만에 모두 무혐의로 밝혀졌다.결국 김 회장 사건으로 곤욕을 치렀던 이택순 전 경찰청장 산하 지휘부가 오 경위를 표적 수사한 것 아니냐는 의혹만 석연치 않은 상태로 남게 됐다.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28일 강남 S호텔 대표 김모(43)씨가 오 경위를 비롯한 경찰·검찰·소방 등 공무원들과 유착해 이들에게 유흥업소의 불법영업을 묵인해 주는 대가로 금품을 제공해 왔다는 의혹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하며 오 경위의 독직 폭행과 인사청탁 혐의에 대해 무혐의 처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오 경위는 2003년 말과 2004년 초 유흥업소 비리 수사를 벌이면서 김씨 등 업주 2명을 사무실로 불러 무릎을 꿇게 한 혐의와 2005년 6월 “특진할 수 있도록 전 청와대 비서관 조모씨에게 2000만원을 주고 청탁해 달라.”고 김씨에게 강요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특수수사과 관계자는 이에 대해 “김씨가 당초 ‘오 경위가 강요해 인사청탁했다.’고 말했다가 지난 10일 오 경위와의 대질심문에선 ‘오 경위와의 관계 형성을 위해 자발적으로 돈을 줬다.’고 하는 등 진술을 바꿔 혐의를 적용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이 관계자는 표적수사가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서는 “지난해 10월 국무조정실이 민원 형식으로 제보한 사항을 수사팀에 하달해 조사에 들어갔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 제보자가 역시 김씨이기 때문에 “경찰이 김씨를 부추겨 국무조정실에 민원을 내게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은 여전히 남게 됐다.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축산농가 6000여명 “美쇠고기 수입 철회”

    축산농가 6000여명 “美쇠고기 수입 철회”

    전국의 축산 농민들이 미국산 쇠고기의 재개방 협상 타결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 상경 집회를 열었다. 전국한우협회 소속 축산 농민 6000여명(경찰 추산·협회 쪽 추산 1만 5000여명)은 24일 전국 각지에서 버스 194대에 나눠 타고 오후 1시쯤 정부과천청사 운동장에 모여 “쇠고기 협상을 전면 무효화해 국민의 먹거리 안전을 확보하고 한우 농가를 살려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협회 남호경 회장은 “이명박 정부는 쇠고기 협상에서 미국의 요구만 200% 수용했다.”면서 “정부가 협상을 무효화하지 않으면 한우를 물에 빠뜨리거나 불에 태우는 등 극한 집단행동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쇠고기 협상 무효’라고 적힌 빨간 머리띠와 ‘국민 먹거리 안전 확보’라는 노란 머리띠를 두르고 ‘싸다고 먹은 고기 여차하면 병원간다.’,‘미국산 농축산물에 우리 한우 다 죽는다.’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집회에 참석했다. 전남 강진군 대군면에서 20년째 한우를 키워왔다는 노전남(55)씨는 “소 60마리를 키워 겨우 딸 둘을 대학 졸업시켰는데 아직 5년전 축사를 짓기 위해 축협에서 빌린 5000만원이 고스란히 빚으로 남아 있다.”면서 “소값이 더 떨어지기 전에 소를 팔려고 해도 사려는 사람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경남 사천시 농현면에서 30년째 소를 키우고 있다는 박학진(56)씨는 “5000만원을 빚내 350만원씩 주고 송아지 30마리를 샀는데 아직 팔 수 있을 만큼 크지도 않은 상황에서 송아지값이 벌써 100만원대로 떨어졌다.”면서 “제대를 앞둔 대학생 아들과 고등학생 딸 교육비는 어떻게 충당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날 53개 중대 4700여명을 동원해 비상상황에 대비했다. 경찰은 ‘도로에 소·돼지를 풀거나 경찰 질서유지선을 침범하면 현행범으로 체포하라.’는 등의 대응 조치를 요약한 현장 대처 매뉴얼을 현장 지휘부에 600부 나눠줬다. 하지만 농민들은 별다른 과격 행동 없이 오후 4시쯤 집회를 마무리하고 해산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월드이슈]국가 전산망 사수 작전

    [월드이슈]국가 전산망 사수 작전

    ‘세계는 사이버전쟁중이다’. 해커들의 공격에 각국 정부 당국들이 전전긍긍속에서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미 국방부와 국무부가 해커들에 뚫리는가 하면 영국, 독일, 프랑스의 정부 및 주요기간 전산망들을 해커들이 휘젓고 다니고 있어 보안에 빨간 불이 켜진 상태다.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총성없는 전쟁, 지구촌 사이버 대결 상황을 주요국 사례를 통해 살펴봤다. ■ 중국-1997년 해커부대 창설 사이버전 이미 선진국 |베이징 이지운특파원|“중국이 세계적으로 해커 공격의 주요 발원지임에는 분명하지만, 중국이라고 사이버전쟁에서 일방적인 승리자일 수는 없다.” 23일 베이징의 한 전문가는 “세계적인 사이버 전투는 중국과 미국을 축으로 이뤄지고 있다.”면서 “중국-미국 간의 사이버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열하다.”고 소개했다. “유럽 등으로부터 받는 공격도 적지 않지만 중국으로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역시 미국이 가장 큰 경계 대상”이라는 것이다.“한국은 중국, 미국이 연습 상대나 놀이터 쯤으로 여기고 있는 상대”라고 한다. 다만 중국의 피해 사례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중국 정부가 공개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서방 국가·언론들은 중국이 ‘해킹 부대’를 육성, 다른 나라들의 기밀을 빼가고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지난해 6월 미 국방부 해킹 사건이후 미국 언론들은 관리들의 말을 인용,“중국 인민해방군이 배후”라고 보도했었다. 이후 총리실, 외무부, 경제기술부 등 독일의 3개 정부기관의 전산망에 스파이 프로그램인 ‘트로이 목마’가 발견됐을 때도 이 해킹 부대가 범인으로 지목되면서 중·독일 간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될 뻔했다. 중국은 1991년 걸프전 이후 사이버전의 중요성을 인식,1997년 문제의 해커부대를 창설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의 정보조사센터(CIR) 보고서는 “중국은 21세기 사이버 기술 전쟁에 있어 이미 선진국”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해킹의 대상은 ‘정보전’ 측면에서 시도되는 국가기관뿐 아니라 고급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일반 기업도 해당된다. 홍콩 명보(明報)에 따르면 중국의 해커들은 지난해 미 휴스턴에 설립한 세계적인 에너지그룹 로얄더치쉘사 내부 전산망에 사이버 공격을 가했다. jj@seoul.co.kr ■ 미국-작년 국방부 해킹 ‘충격’ ‘사이버 지휘부대’ 창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미국은 최근 중국의 사이버 공격 태세를 새로운 군비경쟁으로 규정하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해킹을 막기 위해 루이지애나주 박스데일 공군기지에 ‘사이버 지휘부대’를 창설했다. 통신보안과 시설감시, 도메인 장악 같은 방어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통신보안, 시설감시, 인프라 보안 등도 담당한다. 육·해·공군, 해병대, 국가안보국에 사이버공격 조직 운영은 물론 매년 국토안보부 주관으로 사이버전쟁 모의훈련도 실시하고 있다. 국토안보부 산하에는 사이버보안 및 통신실이 설치돼 있다. 사이버 공격 위협 분석 및 취약점 보완, 사이버위협 경고 전파, 사이버공격 대응활동 조정 임무를 맡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은 미국의 주요 정부기관들조차 해커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백악관과 국방부, 국토안보부, 항공우주국(NASA) 등이 주요 공격 목표가 돼 방어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해 6월 자신만만하던 국방부 전산망이 해킹당해 충격을 줬다. 이메일을 통한 해킹이었다. 국방부 동아태국이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심지어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의 컴퓨터까지 해커들의 침입이 있었다. 국방부는 이 사건 이후 혹시 있을지 모를 피해 방지를 위해 미국 전역의 500만대 컴퓨터 단말기와 연결된 전산망을 일주일간 중단시켰다. 국방부는 이후 이메일을 통한 정보교환을 금지하는 등 대대적인 보안대책을 마련했다. 국방부측은 “기밀자료들은 안전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으나 극비로 분류되지 않은 상당량의 정보와 컴퓨터 패스워드 등이 유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미 정부는 중국을 해킹 배후로 지목했었다. kmkim@seoul.co.kr ■ 일본-경찰청 사이버포스센터 주요기관 24시간 감시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 경찰청 사이버포스센터는 전국 경찰서와 연결된 침입탐지시스템을 가동,24시간 주요 기관들에 대한 해킹 여부를 감시하고 있다. 정보통신 기관이나 은행·증권거래소 등 금융 기관, 철도·항공, 전력·가스 등의 기반 시설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또 일반적인 해킹 등의 사이버 범죄에 대한 수사뿐만 아니라 예방, 대응책도 마련하고 있다. CFC는 지난 2005년 4월 관방장관 산하에 설립된 정보보안대책센터(NISC) 하부 기관이다.NISC는 전자정부의 정보보안 확보와 함께 중요 기반시설에 대한 사이버 테러대책 등을 총괄하고 있다. 또 기본전략수립·국제전략·정부기관종합대책·사안별대응·주요인프라대책 등의 팀을 뒀다. 센터는 2000년에 신설됐던 정보보안대책추진실이 개편된 정부차원의 사이버테러에 대한 위기관리 기구다. 일본 정부는 사이버 테러의 방지를 위해 해커의 접촉을 감지해 침입을 막는 검색방지기술, 해커의 정체를 추척하는 시스템, 컴퓨터 바이러스의 인지 및 해제 기술, 데이터의 암호화 개발 등에 힘쓰고 있다. 일본은 지난 2005년 11월. 방위청(현 방위성)과 경찰청 등의 컴퓨터 시스템에서 해킹 흔적을 발견한 이후 바짝 긴장하게 됐다. 당시 피해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후속 조치로 주요 군사기구의 외부 연결망을 아예 차단했다. 해상자위대는 지난해 7월 이지스함의 핵심 기밀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한 이래 업무용 데이터의 반출을 금지한 데다 개인용 컴퓨터에서 기밀정보를 지우도록 했다. 나아가 오는 2010년까지 해상자위대의 컴퓨터를 하드디스크뿐만 아니라 이동식 저장장치를 장착할 수 있는 기능이 없는 이른바 ‘깡통 컴퓨터’로 대체키로 했다. 이 컴퓨터는 기억장치가 없기 때문에 네트워크를 통한 자료 내려받기나 복사 등이 불가능하다. hkpark@seoul.co.kr ■ 독·영·불 잇따라 해킹 피해 사이버 범죄와의 전쟁 선포 |파리 이종수특파원|유럽 주요 국가의 정부기관도 해킹에서 안전하지 않다. 특히 지난해에 독일·영국·프랑스의 주요 정부 기관들이 잇따라 해킹을 당해 충격을 주었다. 당시 언론들은 잇단 해킹의 배경에 중국의 조직적인 개입이 있다고 보도했지만 각국 정부는 중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프랑스의 경우 지난해 9월 총리실 산하 국가방위총사무국(SGDN)의 프랑시스 들롱 국장이 “최근 몇 주 동안 정부 전산망이 공격당한 흔적을 감지했다.”고 밝혔다. 당시 들롱 국장은 “일련의 사이버공격에 앞서 미국·독일·영국 등에서 벌어진 해킹과 ‘같은 진원지’에서 비롯됐다.”면서 중국이 개입했음을 시사했다. 그러면서도 “이번 공격의 배후에 중국 정부가 있다고 단언할 수 있지는 않다.”고 신중하게 대응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5월에는 독일의 정부 기관들도 해커의 희생양이 됐다. 당시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중국 해커들이 스파이 프로그램을 이용해 총리실, 외무부, 경제부 등 정부 주요 부처 컴퓨터에 침투했다.”며 “이번 공격은 중국 군대의 해커들에 의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보도했다. 영국 역시 의회와 외무부 등 정부 전산망을 뚫고 들어오려는 중국 해커들의 공격 시도에 수차례 시달렸던 것으로 확인됐다. 일간 더 타임스 등 언론은 해커들 중 일부는 중국 인민해방군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지만 영국 정부는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정부 주요기관이 해킹당한 사실이 드러나자 각국은 관련법을 정비하면서 대책 마련에 나섰다. 프랑스의 SGDN은 지난해 11월 정부기관의 해킹에 대비해 안전도를 대폭 강화한 SIS프로그램을 정부통신망에 설치했다. 또 지난 2월에는 미디어발전국과 합동으로 ‘정보 안전 기구’를 운영하면서 사이버 범죄를 예방하고 방어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vielee@seoul.co.kr
  • 축산농가 6000여명 “美쇠고기 수입 철회”

    전국의 축산 농민들이 미국산 쇠고기의 재개방 협상 타결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 상경 집회를 열었다. 전국한우협회 소속 축산 농민 6000여명(경찰 추산·협회 쪽 추산 1만 5000여명)은 24일 전국 각지에서 버스 194대에 나눠 타고 오후 1시쯤 정부과천청사 운동장에 모여 “쇠고기 협상을 전면 무효화해 국민의 먹거리 안전을 확보하고 한우 농가를 살려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협회 남호경 회장은 “이명박 정부는 쇠고기 협상에서 미국의 요구만 200% 수용했다.”면서 “정부가 협상을 무효화하지 않으면 한우를 물에 빠뜨리거나 불에 태우는 등 극한 집단행동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쇠고기 협상 무효’라고 적힌 빨간 머리띠와 ‘국민 먹거리 안전 확보’라는 노란 머리띠를 두르고 ‘싸다고 먹은 고기 여차하면 병원간다.’,‘미국산 농축산물에 우리 한우 다 죽는다.’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집회에 참석했다. 전남 강진군 대군면에서 20년째 한우를 키워왔다는 노전남(55)씨는 “소 60마리를 키워 겨우 딸 둘을 대학 졸업시켰는데 아직 5년전 축사를 짓기 위해 축협에서 빌린 5000만원이 고스란히 빚으로 남아 있다.”면서 “소값이 더 떨어지기 전에 소를 팔려고 해도 사려는 사람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경남 사천시 농현면에서 30년째 소를 키우고 있다는 박학진(56)씨는 “5000만원을 빚내 350만원씩 주고 송아지 30마리를 샀는데 아직 팔 수 있을 만큼 크지도 않은 상황에서 송아지값이 벌써 100만원대로 떨어졌다.”면서 “제대를 앞둔 대학생 아들과 고등학생 딸 교육비는 어떻게 충당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날 53개 중대 4700여명을 동원해 비상상황에 대비했다. 경찰은 ‘도로에 소·돼지를 풀거나 경찰 질서유지선을 침범하면 현행범으로 체포하라.’는 등의 대응 조치를 요약한 현장 대처 매뉴얼을 현장 지휘부에 600부 나눠줬다. 하지만 농민들은 별다른 과격 행동 없이 오후 4시쯤 집회를 마무리하고 해산했다. 글 / 서울신문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영상 / 서울신문 나우뉴스TV 손진호기자 nasturu@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관가포커스] 행안부는 ‘언론프렌들리’ 아니다?

    행정안전부는 최근 대통령 업무보고를 위해 준비한 검토안이 한 언론에 유출돼 미리 기사화되자, 문건 유출자에 대한 색출을 경찰에 의뢰했다. 이를 놓고 행안부 안팎에서는 ‘과잉대응’ 논란을 빚고 있다. 무엇보다 참여정부의 언론 정책을 소리 높여 비판해온 이명박 정부에서, 그것도 국정 수행의 주무부처라고 할 수 있는 행안부가 ‘언론 프렌들리’ 정책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비춰져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정부 관계자는 “내부 단속을 잘하면 되는 문제지, 경찰에 진정까지 넣은 것은 과잉대응”이라면서 “애 많은 집에서 돈 없어졌다고 어머니가 자식들을 경찰에 수사 의뢰한 꼴”이라고 비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직원들이 차례로 경찰 조사를 받으러 가고, 업무자료까지 압수수색하면 일이 제대로 되겠느냐.”면서 “행안부가 어쩌자고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민망하게 됐다.”며 고개를 저었다. 실제 지난주에는 언론 접촉이 빈번한 행안부 대변인실 직원 전원이 내부 조사실로 불려갔다. 문건 유출 가능성이 높은 ‘1순위’ 부서라는 판단에서다. 대변인실 직원들은 취지를 이해하면서도 내심 억울해하는 분위기다. 대변인실에는 다른 부서 직원들도 자주 와서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안부 지휘부의 이번 대응이 미숙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 것에 대해 반대 의견이 제시됐지만, 지휘부가 묵살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른 관계자는 “어떤 사안이든 최종 결정은 지휘부가 내린다.”면서 “언론에 대한 지휘부의 소신이 없다 보니 이말 저말에 휘둘리는 것 아니겠냐.”며 지휘부의 ‘귀얇음’을 탓했다. 행안부 관계자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돼야 업무도 적극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면서 이번 사안의 조속하고 원만한 해결을 희망했다.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 “안양 유괴살해 대충 수사했다”

    안양 초등생 유괴·살해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 내부에서 경찰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부실 수사를 질책하는 ‘양심 고백’이 나와 논란이 일고 있다. ‘수사본부 직원’이라고 밝힌 A씨는 24일 언론사에 보낸 이메일을 통해 “실종 사건 초기 1차 탐문수사에서 정모(39)씨가 5일 정도 집을 비웠고 동네 부녀자를 성추행하려 했다는 제보가 있었다.”면서 “하지만 ‘대리운전했다.’는 정씨의 말만 믿고 정작 대리운전회사에는 정씨가 실제 일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2개월 뒤엔 군포경찰서에서 군포·수원 부녀자 실종사건 용의자가 안양8동에 살고 있다고 알려와 정씨의 집안 수색과 루미놀 검사까지 했지만 또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3차례나 수사망 올리고도 풀어줘 그는 “3차 수사에선 정씨에게 성폭행당했던 여성의 여동생의 제보도 있었지만 또 수사에서 배제했다.”면서 “렌터카 대여자 명단도 렌터카 담당팀이 이미 지난달 초에 확보했지만 건성으로 수사하다 이달초 우연히 정씨 담당팀 직원이 정씨의 이름을 명단에서 발견하면서 한달이 지나서야 검거하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A씨는 지휘부의 무리한 지시로 ‘선증거 후체포’라는 수사의 기본원칙도 지켜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사팀이 뒤늦게라도 정씨의 지난해 12월25일 당일 행적을 찾자고 나섰지만 경기경찰청 수사 지휘부는 ‘혈흔이 나왔으니 무조건 잡아와서 족치면 다 자백한다.’고 다그쳤다.”면서 “경찰대 출신의 경기경찰청 간부들이 지시하면 후배인 안양서 형사과장은 토씨 하나 달 수 없어 현장의 의사는 전달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A씨의 주장대로라면 ▲초동 수사에서의 부실한 탐문과 증거 미확보 ▲진급 등의 논공행상만 따지는 실적 위주 수사로 인한 공조 부재 ▲경찰대 출신 수사 지휘부와 현장 형사들의 갈등 ▲증거 확보없이 무조건적인 인신 구속 뒤 회유·협박성 자백 강요 등 경찰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셈이다. ●진급에 연연… 공조수사 안돼 박종환 안양서장은 이에 대해 “1월 중순 확보한 렌터카 업체 명단 중 성범죄자 위주로 지난 11일까지 37명까지 수사 대상자를 좁혔다. 정씨가 거짓 진술도 했고 운행한 차량에서 두 아이의 DNA가 나온 점 등에 미뤄 도주 우려가 있는 정씨를 우선 검거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라고 해명했다. 박 서장은 “실종 사건은 현장이 없는 사건이라 다양한 가능성을 뒀는데 일부 수사가 지연된 건 의도적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경찰 내부에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일선서 9년차 강력팀 형사는 “요즘은 ‘살인범 하나 잡으면 진급한다.’며 진급에만 목매다는 이들이 태반이니 같은 경찰서 팀원끼리도 공조를 안해서 문제”라고 말했다. 서울 이재훈·안양 황비웅기자 nomad@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63) 엎친 데 덮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63) 엎친 데 덮치다

    공유덕과 경중명 일당의 후금 귀순은 조선에 치명적이었다. 조선은 명의 강요 때문에 ‘공경 사건’을 놓고 벌어진 명과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었다. 하지만 공경을 저지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후금으로부터 원망만 사고 말았다. 후금은, 공경의 귀순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조선이 보인 적대적인 태도를 통해 조선의 ‘본심’을 확인했다. 조선이 결코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상, 후금의 조선에 대한 공격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다만 ‘조선 정벌’은 우선순위에서 잠시 비껴나 있었을 뿐이었다. ●‘공경 사건’의 파장 ‘공경 사건’ 때문에 조선은 여러 가지로 피해를 보았다. 당장 명의 추격군에게 군량과 군수 물자를 제공하고 조선군을 압록강 부근으로 파견하는 과정에서 사회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공경 일당과 그를 저지하려는 조·명연합군, 그리고 후금군이 맞닥뜨렸던 지역에서 가까운 의주, 용천(龍川), 철산 등지의 피해는 극심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전란의 와중에 농작을 전폐하다시피 했고,‘상황’이 종료된 뒤에는 굶어죽기 직전까지 몰리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피해는 더 심각했다.‘공경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선은 후금과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명의 강요에 떠밀려 병력을 보내 공경을 저지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공경 일당에게 식량을 공급해달라.’는 후금의 요구도 거부했다. 그것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국 명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는 조선의 ‘본심’을 노출시킨 사건이었다. 후금 내부에서는 당연히 ‘조선을 손봐주어야 한다.’는 논의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1634년 무렵까지 홍타이지를 비롯한 후금 지휘부는 ‘조선 정벌’을 우선적인 과제로 꼽지 않았다. 명과 차하르(察哈爾) 몽골을 정벌하는 것이 먼저였다. 조선으로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렸을 뿐,‘공경 사건’을 계기로 후금의 조선 침략은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다. 후금은 ‘공경 사건’ 이후 조선과 가도( 島)를 ‘손 안의 물건(掌中之物)’으로 여겼다. 이미 수군을 확보한 상황인데다, 공유덕 등이 가도의 배후 기지 격인 여러 섬의 주민들을 대거 데리고 온 터라 가도의 역량이 거의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홍타이지는 이제 조선과 가도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여겼고, 우선적인 정벌 대상에서 잠시 뺐던 것이다. 그렇다고 홍타이지가, 공경의 귀순을 저지하려 했던 조선에 대한 ‘원한’을 결코 접은 것은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1636년 12월,‘공경의 귀순을 저지하려고 후금과 적대했던 것’을 병자호란을 도발하는 주요한 명분의 하나로 분명히 제시했다. ●‘호랑이’가 나타나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조선은 ‘공경 사건’의 의미와 그 파장의 끝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읽어냈어야 했다. 조선은,1619년 명을 도와 후금을 공격했던 것(심하전역·深河戰役 참전) 때문에 후금에 정묘호란을 일으키는 명분을 제공했던 점을 교훈으로 삼았어야 했다. 하지만 조선은 그러지 못했다. 조선은, 후금이 ‘공경 사건’에 조선이 개입한 것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조선은 후금의 ‘수군 보유’가 갖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후금은 이미 1631년(인조 9) 5월,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조선은 우리가 쳐들어가면 보나마나 섬으로 도망칠 것’이라는 내용으로 조롱한 바 있었다. 사실 조선은 후금의 침략이 있을 경우,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후금이 수군을 보유함으로써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의 의미가 없어질 판이었다. 당연히 대책이 필요했다. 병력과 무기를 확보하고, 청북 일대의 성지(城池)를 정비하고, 강화도의 해방(海防)을 확고히 하는 것이 시급했다. 재정이 문제였다. 하지만 ‘늑대를 피하고 나면 호랑이가 나타난다.’고 했던가. 방어 대책 마련을 위해 몰두했어야 할 1634년(인조 12) 3월, 명으로부터 ‘호랑이’가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숭정제가 환관 노유녕(盧維寧)을 조선에 보낸 것이다. 그가 서울로 오는 명목은 ‘왕세자 책봉례(冊封禮)’를 주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조선행을 자원한 인물이었다. 책봉 조사(詔使)로 낙점되기 위해 이곳저곳에 뇌물을 썼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바짝 긴장했다. 왕세자 책봉은 인조의 왕통(王統)을 확고히 하기 위해 더없이 절실했지만 시기가 문제였다. 더욱이 인조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노유녕이 청렴하지 않다.’는 소문이었다. 인조는 비변사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노골적으로 ‘한 밑천 잡겠다.’고 조선까지 오는 그를 어떻게 대접할지 방책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인조와 비변사 신료들의 우려와 푸념은 한결같았다.‘왜 하필 국고가 바닥난 지금 오느냐?’는 것이었다. 인조는 신료들에게 과거에 왔던 조사들을 접대하는 데 들어갔던 비용을 물었다. 노유녕은 보나마나 과거 조사들이 받았던 액수보다 더 많은 은화를 요구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1610년(광해군 2), 왕세자 책봉을 위해 왔던 염등(登)은 4만 냥을,1625년(인조 3), 인조 책봉을 주관하러 왔던 왕민정(王敏政)과 호양보(胡良輔)는 물경 13만 냥을 뜯어갔다. 전례를 보면 노유녕도 최소한 10만 냥 이상의 액수를 요구할 것이 명확했다. 비변사는 백성들에게 토지 3결마다 포(布) 1필씩을 거두고, 왕실에 바치는 방물(方物) 값을 모두 쓰자고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은화 5만 냥도 마련할 수 없었다. 조사가 달라고 할 것이 뻔한 인삼과 잡물(雜物)까지 마련하려면 특단의 조처가 필요했다. 비변사는 지방의 관원들에게 은과 포를 할당하고, 호남의 수군들에게 군역을 면제해주고 그 대가로 포를 받아들여 비용을 대자고 했다.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후금 사신도 인삼값 받아내려 서울로 노유녕은 예상했던 대로 만만치 않은 행보를 보였다.‘그의 목표는 왕민정과 호양보가 받은 액수를 채우는 것’이라는 보고가 날아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벽제(碧蹄)까지 이르렀지만 은과 인삼이 적다는 이유로 이틀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경기감사 이성구(李聖求)가, 책봉례를 행할 때 은 2000냥을 더 주겠다고 하자 비로소 서울로 들어왔다.1634년 6월20일의 일이었다. 노유녕은 결국 왕세자 책봉례를 마칠 때까지 10만 냥 이상의 은을 뜯어냈다. 노유녕이 서울에 머물며 은 징색에 광분하고 있던 6월26일, 평안병사의 장계가 날아들었다.‘후금 사신(胡差) 마부대(馬夫臺) 일행이 인삼 값을 받아가기 위해 서울로 오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노유녕과의 조우를 우려한 조정은 그들을 만류하라고 지시했지만 마부대 일행은 안주까지 남하했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마부대 일행이 안주로 오자 이번에는 가도의 총병 심지상(沈志祥)이란 자가 조선의 처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심지상은 노유녕에게 무공(武功)을 과시할 목적으로 마부대 일행을 공격하려 했던 것이다. 마부대 일행 역시 심지상과 일전을 벌일 태세였다. 심지상을 만류하자니 ‘오랑캐를 편들어 중국을 배신하려 한다.’는 힐책이, 마부대 일행을 설득하자니 ‘한인들을 끌어들여 후금 사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비난이 따를 판이었다. 조정은 서둘러 마부대 일행이 요구한 인삼 값을 다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을 빨리 귀환시켜 심지상과의 충돌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조선은 겨우 또 한 고비를 넘겼지만 악순환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후금의 침략을 피하려면 조선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노유녕에게 끌려다니는 것에서 보이듯이 명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병자호란을 코앞에 둔 1634년, 조선은 느긋한 후금과 초조한 명 사이에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중동, 美매파 모래바람에 휩쓸리나

    중동, 美매파 모래바람에 휩쓸리나

    미 중부군 사령관인 윌리엄 팰런(63) 제독이 전격 사임했다. 백악관의 중동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온 팰런 사령관이 부임 1년 만에 조기 사임함에 따라 이라크전 등 중동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중부사령부는 중동, 동부아프리카, 중부아시아를 관할하는 전역(戰域) 단위의 미군 조직으로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팰런 제독은 사임성명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과의 정책적 이견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그러나 그의 조기 사임으로 백악관과 군부 지휘부간의 갈등이 커지고 있다는 의혹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 또 일각에선 온건론자인 팰런의 사임으로 이란에 대한 강경 군사압박작전이 더 강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11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 등 미 언론에 따르면 팰런의 사임은 그가 부시행정부의 이란 정책을 반대해온 게 발단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는 팰런이 이란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부시 행정부의 정책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 행정부 고위 인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보도했다. 팰런 사령관은 1967년 해군 ROTC를 나온 뒤 41년간 미 해군에 복무했으며 태평양군 사령관으로 있다가 지난해 3월 중부군 사령관으로 옮겼다. 주간지 에스콰이어는 그가 이란의 핵 프로그램 중단을 위한 군사행동에 반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게이츠 장관은 팰런 사령관의 사임을 미국이 이란과 전쟁을 꾀하는 신호탄으로 여기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덧붙였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62) 반란자와 귀순자들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62) 반란자와 귀순자들 Ⅲ

    조명연합군의 필사적인 저지 작전에도 불구하고 공유덕과 경중명은 후금으로 귀순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중간에 다소의 손실이 있었지만 공경(孔耿)이 끌고 갔던 전함과 수군의 대부분은 후금군으로 넘어갔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공경이 가져온 전함을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며 환호했다. 공경의 귀순으로 불안하게 유지되어 왔던 명과 후금의 군사적 균형은 깨졌다. 후금은 기존의 철기(鐵騎)가 지닌 막강한 위력에 더하여 수군까지 확보함으로써 군사력이 배가되었다. ●후금, 공경의 식량을 조선에 요구하다 1633년 4월, 공경이 이끄는 반란군의 선단은 장자도를 거쳐 압록강으로 들어갈 때 후금군의 인도를 받았다. 진강(鎭江)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의 저지를 뿌리치는 데 성공한 뒤부터 후금은 전함들을 간수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그들은 압록강 연안을 파서 물길을 낸 다음 전함들을 진강 근처의 마이산(馬耳山) 부근으로 예인했다. 전함 주변에는 병력을 배치하여 경계를 강화했다. 혹시라도 명군이 몰래 들어와 배들을 태워버리는 사태를 막기 위한 조처였다. 4월28일, 후금 사신 용골대(龍骨大)와 녹지( 只)가 서울로 들어왔다. 용골대 일행은 공경이 귀순한 전말을 설명한 뒤, 그 일행들에게 먹일 식량을 달라고 요구했다. 용골대가 내민 국서에서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이 명군 신분으로 가도에 머물 때는 식량을 주다가 후금으로 귀순했다는 이유로 주지 않는다면 사리에 맞지 않는다.’며 급량(給糧)을 강하게 요구했다. 공경 일당이 상륙한 지역이 심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자신들이 식량을 운반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것도 조선에 손을 내미는 명분으로 제시했다. 난감한 일이었다. 조선은, 공경을 추격해 온 주문욱 일행으로부터 급량을 요구받은 상황에서 후금까지 식량을 요구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후금 사신 접대를 맡고 있던 구관소(句管所) 신료들은 용골대에게 ‘공경은 중국의 반장(叛將)이자 유흥치(劉興治)와 함께 조선을 도모하려 했던 원수’임을 내세워 식량을 내어 줄 수 없다고 반박했다. 조선이 요구를 받아들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용골대 등은 다시 ‘형제의 도리’를 들고 나왔다. 그들은 ‘명에 붙으면 식량을 주고, 후금에 붙으면 주지 않는 것은 형제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조선을 압박했다. 조선은 주문욱 일행에게는 이미 3000석의 양곡을 공급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임경업 등을 보내, 공경 일행과 합세한 후금군과 전투까지 치른 상황이었다. 이미 확실하게 명 측으로 기우는 태도를 보인 터라 후금의 식량 요구까지 거부할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후금의 요구를 거절하면서도 내심 찜찜해하고 있던 5월6일, 명 황제의 칙서가 도착했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어머니 구씨(具氏)를 왕비로 각각 추봉(追封)하는 것을 승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신료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오매불망 추진해 온 인조의 ‘숙원 사업’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인조는 고무되었고,‘명의 은혜를 배신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번지면서 후금의 급량 요구는 거부되었다. ●홍타이지, 공경을 극진히 예우하다 공유덕과 경중명이 수군과 함선을 이끌고 귀순해 오자 홍타이지는 고무되었다.1633년 5월6일,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에게 줄 양마(良馬)를 마련하기 위해 고위 관리들에게서 말 100마리를 차출했다. 그 가운데는 자신이 아끼는 내구마(內廐馬)도 포함되어 있었다.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을 각별히 대우했다. 그들을 바로 심양으로 부르지 않고, 일단 휘하 무리들을 거느리고 요양(遼陽) 근처에 머물도록 배려했다. 공경이 자신의 부하들을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재량권도 주었다. 이윽고 6월3일, 공경이 귀순한 무리들을 이끌고 심양으로 들어왔다. 홍타이지는 백관을 이끌고 궁궐 밖 10리까지 나아가 공경을 맞았다. 홍타이지는 공경과 포견례(抱見禮)를 행했다. 서로 얼싸안는 것이었다. 만주의 신료들은 누구든지 칸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세 번 큰절을 올리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조아리는 방식이었다. 후금의 신료들은 ‘투항자와 포견례를 행하는 것은 참월하다.’며 홍타이지를 만류했다. 홍타이지는 ‘공경은 등주(登州)를 장악했던 세력가로서 수많은 무리와 전함을 이끌고 귀순했으니 우대하지 않을 수 없다.’며 신료들의 반대를 뿌리쳤다. 공경은 홍타이지의 형 다이샨(代善)과도 포견례를 행했다.6월5일에도 홍타이지는 공경을 다시 불러 옆자리에 앉히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과거 조대수(祖大壽)가 투항했을 때보다 더 극진한 대접이었다. 홍타이지는 공유덕을 도원수(都元帥), 경중명을 총병관(總兵官)으로 임명하고 칙인(勅印)을 하사했다. 이윽고 두 사람에게 내린 유시문(諭示文)에서, 공경이 군민(軍民)과 무기, 전함을 갖추고 귀순한 것을 ‘위적풍공(偉績豊功)’이라고 찬양했다. 두 사람에게 ‘부귀(富貴)를 영원히 보장하고 죄를 지어도 전부 사면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파격적인 환대였다. 이 같은 환대가 뒷날 이른바 삼번(三藩)의 난(亂)이 일어나는 ‘씨앗’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함선과 수군을 얻게 된 홍타이지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를 웅변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후금, 명을 자유자재로 ‘요리’하게 되다 공경이 후금으로 귀순한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1633년 6월, 후금은 악탁(岳託) 등에게 병력 1만을 주어 명의 여순구(旅順口)를 공략하도록 했다. 공유덕과 경중명도 휘하 병력을 이끌고 이 원정에 동행했다. 공경의 안내를 받은 후금군에 의해 여순은 힘없이 함락되었고, 후금군은 5302명의 포로와 2만냥 이상의 은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여순의 함락 소식은 당장 가도와 조선에 파장을 미쳤다. 가도를 지키던 부총병(副總兵) 심세괴(沈世魁) 등은 후금군의 공격을 우려하여 가도를 포기하고 본토 쪽으로 도망갈 궁리를 하기에 이르렀다.8월16일,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가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먼저 자신들도 전함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은근히 과시했다. 이어 ‘우리가 배를 띄우면 가도를 차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조선이 놀랄까 삼가고 있다.’며 ‘향후 가도를 돕지 말라.’고 경고했다. 가도를 비롯하여 명 본토가 후금 수군의 위협 앞에 노출되자 명 조정의 조바심은 더욱 커졌다. 그들은 혹시라도 조선이 후금에 굴복하여 양자가 연합하게 되는 상황을 우려했다. 그들은 수시로 사람을 보내 조선을 견제하려 했다.10월에는 가도의 부총병 정룡(程龍)이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여순이 함락되었다고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조선을 다잡으려 했다. 그러면서 ‘조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도 가도의 명군에게 군량을 공급하라.’고 채근했다. 공경의 귀순 이후 조선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그야말로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후금의 ‘협박’과 명의 ‘호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은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전함과 수군을 보유하게 된 후금의 ‘변신’에 대처하지 못했다. 다시 언급하겠지만,1637년 1월 조선의 왕실과 중신들이 피란해 있던 강화도는 공유덕이 이끄는 후금군의 상륙작전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 강화도 수비를 책임졌던 조선군 지휘부는 ‘후금이 수군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공경의 귀순은 ‘명의 비극’이자 ‘조선의 비극’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 글로벌 이슈] (12·끝) 美 테러와 전쟁 끝나나

    |워싱턴 이도운특파원|2008년 이후 미국의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통령 선거 결과에 따라 방향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일단 조지 부시 행정부는 임기말까지 이라크 전과 아프가니스탄 전 등 현재 수행 중인 테러와의 전쟁에 큰 변화를 주지 않을 태세다. 지난해 확산됐던 이라크 철군 여론은 최근 몇달간 미군 사상자 수가 줄어들면서 다소 가라앉았다. 그 대신 탈레반이 점차 세력을 회복 중인 아프가니스탄에 병력을 더 보내야 한다는 주장들이 워싱턴에서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이와 함께 국제테러조직 알 카에다 소탕의 핵심 지역인 파키스탄과 아프리카에서 극단적인 이슬람 세력을 차단하는 전초기지인 케냐·수단·소말리아 등의 정국이 불안해지는 등 대 테러전은 또다른 고민을 안고 있다. 오는 11월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될 경우 테러와의 전쟁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올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의 유력한 후보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취임 후 14개월 안에 이라크에 주둔한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공약했다.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도 취임후 60일 안에 철군에 들어가 2013년까지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 클린턴 의원은 지난해 가을까지만 해도 취임후 가장 먼저 이라크 주둔군을 불러들이겠다고 공약했으나, 안보에 민감한 중도 성향 유권자들을 의식한 듯 최근 들어 입장이 다소 완화됐다. 존 에드워즈 전 상원의원은 취임후 10개월 내 철군 완료라는 가장 ‘급진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민주당 후보들은 부시 행정부의 오만하고 일방주의적 외교와 무리한 대 테러전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이미지가 크게 추락했다고 지적하면서 ▲외국 석유에 대한 의존 축소 ▲대체 에너지 개발 ▲국제사회와의 협력 강화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면 공화당 후보들은 현재의 대 테러전의 방향을 유지하는 쪽으로 공약을 내놓고 있다. 공화당 내에서 전국적인 지지율 1위를 기록 중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인기 하락을 감수하면서까지 부시 대통령의 대 테러전을 줄곧 지지해 왔다. 이라크 철군보다는 오히려 증원을 주장하기도 했다.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와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은 철군 시한을 정하는 것에 반대하며 이라크와 아프간이 안정될 때까지 미군을 주둔시킨다는 입장이다. 마이크 허커비 전 아칸소 주지사는 공화당 내에서 드물게 부시 대통령의 대 테러전을 비판해 왔다. 그러나 테러전에 대한 비판이 공화당 주류의 반발을 사자 “현지 군 지휘부의 건의에 따라 철군 방침을 정하겠다.”고 후퇴했다. dawn@seoul.co.kr
  • [공직 인맥 열전] 법무부·검찰 (하)

    [공직 인맥 열전] 법무부·검찰 (하)

    법무·검찰에서 검사장급 보직 이하로 가장 선호도가 높은 근무지는 법무부, 대검찰청, 서울중앙지검이다. 세 곳을 번갈아 근무하며 요직을 두루 거치는 사례도 많다. 주로 각 기수별로 난다긴다하는 검사가 발탁된다. 이같은 메리트가 200%의 능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당근책으로 활용되면서 인맥을 형성하기도 한다. 특히 법무부 감찰기획관·홍보관리관·검찰과장·법무심의관, 대검 수사·공안·범죄정보·홍보기획관 및 중수1·2과장·첨단범죄수사과장, 서울중앙지검 2·3차장 및 형사1부장, 특수1·2·3부장, 금융조세조사1·2부장 등은 선망의 자리로 꼽힌다. 이 가운데 법무부·대검 기획관과 서울중앙지검 2·3차장은 차기·차차기 검사장 후보군 중 선두그룹으로 꼽힌다. ●기수별 우수 검사 세곳에 발탁 지난해 대선 당시 선거관련 고소·고발·수사의뢰 등을 원만하게 풀어낸 신종대 서울중앙지검 2차장은 사법시험 23회 출신으로 법무부 검찰3과, 대검 감찰1과장, 대검 공안기획관 등을 지냈다.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를 둘러싼 각종 의혹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한 김홍일 3차장은 사시24회에 합격, 대검 강력과장, 서울지검 강력 부장 등을 역임했다. 후덕한 성품과 체구로 ‘김 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김종구 전 법무부장관-김각영 전 검찰총장-조승식 대검 형사부장을 잇는 충남 인맥의 중견이다. 전국 특수수사를 조율하는 송해은 대검 수사기획관은 사시25회 출신으로 대검 연구관, 인천지검 특수부장, 인천지검 2차장 등을 거쳤다. 지난 2002년 인천지검 특수부장 때는 대상그룹 임창욱 회장의 비자금 조성 비리를 원칙대로 수사하다가 지휘부와의 이견으로 이듬해 서울남부지청으로 옮겨간 일화로 유명하다. 김현웅 법무부 감찰기획관은 사시 26회로 대검 공판송무과장, 예금보험공사 파견 검사, 법무부 법무심의관,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을 지냈다. 지난해 현직 고법 부장판사가 연루된 초대형 법조비리 사건을 지휘하면서 경찰 고위간부, 현직 판사, 현직 검사의 연루 사실을 밝혀냈다. 전국의 모든 범죄 정보가 모이는 대검 범죄정보기획관실 수장인 정병두 기획관은 사시 26회로 법무부 검찰1·4과장, 송무과장 등을 지냈다. 현재 대통령직인수위에서 파견 근무 중인 그는 임채진 검찰총장이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형사1부장을 맡았고, 임 총장의 인사청문회 때 준비단장을 맡는 등 임 총장의 오른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선거·노동 사건을 총괄하는 박청수 대검 공안기획관은 사시 26회로 울산·부산·수원·서울 등 대규모 지검의 공안부장은 물론 대검 공안1·2과장을 지낸 전형적인 공안통 검사다.2005년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수사를 이끌면서 청와대와 천정배 당시 법무부장관의 의견과 달리 구속수사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기획관 등 검사장 후보 ‘선두´ 법무·검찰의 입으로 불리는 홍만표 법무부 홍보관리관과 김경수 대검 홍보기획관은 사시27회 동기로, 둘다 정통 특수통으로 꼽힌다. 홍 관리관은 서울지검 특수1·2·3부장, 청와대 민정수석실, 수원지검 특수부 부부장, 대검 중수2과장 등을 지냈다. 진승현 게이트, 한화의 대한생명 인수 비리 의혹, 황우석 사건 등을 수사했다. 김 기획관은 서울지검 특수1부 부부장, 법무부 검찰3과장,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장을 역임하며,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현철씨 비리, 이용호 게이트, 행담도 개발 의혹, 법조 브로커 윤상림씨 사건 등을 수사했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李회장 부자 ‘정조준’

    李회장 부자 ‘정조준’

    조준웅 특별검사팀이 수사 착수 닷새 만인 14일 오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집무실인 승지원을 비롯해 핵심 임직원의 자택 등 8곳을 전격 압수수색한 것은 무엇보다 삼성의 허를 찌르자는 의도가 짙어보인다. 또 삼성 최고위층의 주거지 등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됐다는 것은 특검이 이들의 범죄 관련성에 어느 정도 확신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비리 입증단서 상당부분 확보한 듯 특검은 지난 10일 출범 이후 검찰로부터 넘겨받은 수사기록 등 관련 자료를 면밀히 분석, 압수수색 대상 장소와 인물을 선별해 왔다. 그 결과 특검은 이 회장을 비롯한 핵심 임직원의 개인적 공간을 공략하는 것이 보다 실효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동안 삼성 본사를 비롯, 대다수 계열사가 하드디스크 포맷과 이메일 삭제 등을 통해 증거인멸을 시도하고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룹 최고위층부터 직원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대상자를 상대로 동시 압수수색을 실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특검팀이 이미 이들의 비리 관련성을 입증할 단서를 상당부분 확보했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또 검찰 특별수사·감찰본부에서 계좌추적 등을 통해 1000여개의 차명의심계좌를 확보했기 때문에 계열사 압수수색을 통한 기초 자료 입수보다는 그룹 지휘부가 관여한 정황, 즉 연결고리부터 파악하자는 의도가 엿보인다. 특히 특검이 처음부터 이 회장의 집무실인 승지원에 들이닥친 것은 향후 ‘특검 정국’을 성역 없이 보다 공격적으로 이끌어나가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삼성 그룹 관련 의혹을 처음 폭로한 삼성의 전 법무팀장 김용철 변호사를 비롯해 많은 시민·사회단체는 그동안 불법 비자금 조성과 경영권 승계, 정·관계 로비의 배후로 이 회장을 여러 차례 지목해 왔다. 하지만 특검 수사에 철저히 대비해온 삼성조차 특검이 설마 ‘살아있는 권력’인 이 회장의 집무실을 첫 압수수색 대상으로 삼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사무실 압수수색땐 뒷북 수사 가능성 삼성그룹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승지원에 대해 법원이 압수수색영장을 발부한 것은 비자금 조성·관리 등에 이 회장이 직접 관여했다는 사실을 시사한 것이나 다름없다. 특검 수사가 시간이 갈수록 삼성을 옥죌 것이라는 전망이 가능하다. 이번 압수수색이 이 회장 부자 소환조사의 예고편이 아니냐는 분석까지 나올 정도다. 특검은 압수물을 분석해 소환 대상자를 추려내는 한편 계좌추적을 통해 비자금 조성 과정과 사용처의 흐름을 파악해 나갈 계획이다. 승지원 압수수색으로 충격파를 던진 마당에 어떤 관련자를 소환한다고 해도 당초 예상보다 삼성측의 저항이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구조본 전략기획실과 계열사에 대한 압수수색도 뒤따를 전망이다. 하지만 삼성이 사무실 압수수색에 철저히 대비했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인 데다 자칫 뒷북을 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 향후 특검팀의 전략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홍지민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제주도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제주도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제주는 언제 가도 볼거리가 많습니다. 숨겨진 곳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지요. 요즘 같은 연말연시에는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이 더욱 이어집니다. 특히 새해 해돋이를 구경하려는 관광객들이 많지요. 자, 이쯤 해서 제주의 아픔이 서려 있는 한 곳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모슬포 인근, 우리나라 최남단 산인 송악산 주변에 ‘알뜨르’ 비행장이란 곳이 있습니다. 다소 생소하지만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답니다. 연말연시를 제주에서 보낼 계획이라면 한번쯤 들러보시지요. 가슴 뭉클한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자녀들과 간다면, 살아 있는 역사공부 등으로 더욱 값진 여행이 되겠지요. 왜냐고요?시계추를 잠시 1941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일본은 한때 태양의 제국을 꿈꾸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태양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이카루스가 죽음으로 증명했음에도, 자신들만은 예외라고 믿었습니다. 그 해 12월8일 일본은 제국건설의 걸림돌이었던 미국을 거꾸러뜨리기 위해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합니다. 일본은 승기를 이어가다 1942년 6월5일 미드웨이 해전에서 주력 항공모함과 우수한 전투기 조종사 대부분을 잃고 미국에 참패하게 됩니다. 미국 등 연합국이 여세를 몰아 규슈 등 일본 본토를 공략하기 위해 교두보로 삼을 만한 곳이 어딜까요. 일본군 지휘부는 그곳이 제주도, 특히 서남부 모슬포 해안일 거라 판단합니다. 그래서 모슬포 앞바다를 낀 알뜨르 비행장을 선봉으로 주변에 고사포 진지, 해안 어뢰정 기지 등 군사시설들로 가득 채우지요. 제주 앞바다를 1차 저지선, 중산간오름을 2차 저지선, 그리고 어승생악을 3차저지선 삼아 제주도 전체가 요새화됩니다. 이렇듯 현재 일본을 제외하고 태평양전쟁의 흔적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 제주도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제주에 결코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흔적, 알뜨르 비행장 주변을 다녀왔습니다. 이곳 일대가 ‘제주평화대공원’으로 조성된다고 하니, 번듯하게 정비된 전적지보다 다소 황량하긴 해도 현재의 모습을 보고자 한다면 가는 김에 꼭 방문해보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드네요. # 태평양 전쟁의 거점기지 모슬포 알뜨르의 ‘알’은 ‘아래’ 혹은 ‘낮다’는 뜻이고,‘뜨르’는 너른 들녘을 말한다. 즉 모슬봉 아래 너른 들판이란 뜻이다. 이처럼 정겨운 이름의 내면에는 전쟁의 아픈 기억이 숨겨져 있다. 서귀포시 대정읍 알뜨르 비행장(근대문화유산 제39호)조성계획이 처음 수립된 것은 1926년. 중일전쟁을 준비하던 일제가 중국대륙 공격의 전초기지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1931∼1936년 1차 조성공사가 끝나면서 약 60만㎡(18만평)의 비행장이 완성됐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알뜨르 비행장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된다. 중국 난징과 상하이 등을 공격하기 위해 일제는 본토 나가사키현의 오무라항공대를 제주도로 이동하고 당시 최신예 전투기였던 ‘제로젠’과 연습용 비행기 ‘아카톰보(Akatombo·일명 잠자리비행기)’의 격납고 20개를 만드는 등 2차 확충작업을 벌인다. 당시 알뜨르 비행장에서의 난징 출격횟수는 36회, 연 600기였고, 투하폭탄은 총 300t에 달했다. 알뜨르 비행장이 현재 크기와 비슷한 265만㎡(80만평)까지 확장된 것은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모슬포 해안 일대를 미군 등 연합군의 가장 유력한 상륙지점으로 꼽았던 일본군 지휘부는 ‘결(決)7호 작전(작전지역 1∼6호는 일본 본토)’을 통해 알뜨르비행장을 확장하고, 모슬봉에 레이더 기지를 설치하는 등 군사시설 확충을 서두르는 한편, 만주 관동군 소속 111사단 병력을 이동시키는 등 총 7만 5000명의 병력을 제주도에 집결시킨다. 당시 조선 내 일본군 병력이 21만명가량이었다고 하니, 총 병력의 3분의1이 제주도에 배치된 셈이다. 가미카제 특공대도 알뜨르 비행장에서 훈련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나가사키 등에 원폭이 투하되지 않았다면, 제주도가 최후의 결전지 ‘아마겟돈’이 될 수도 있었던 것.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대목이다. # 자살특공대 가이텐, 가미카제의 흔적도 현재 알뜨르 비행장 주변에는 풀로 뒤덮인 활주로와 격납고 20기, 관제탑, 지하벙커, 샛알오름 고사포 진지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나같이 제주도 주민 등 강제 노역에 끌려나간 부역자들의 밭은 숨결이 배어 있는 곳들이다. 돔형의 콘크리트 구조물인 격납고는 가로 15∼20m에 높이 6m, 두께 1∼4m로 튼실하게 지어졌다.20기 중 19기는 원형이 보전됐고 1기는 잔해만 남았다. 알뜨르 비행장 옆 송악산 해안절벽에는 섬뜩한 형상의 해안동굴들이 있다.3∼40m 크기 15개의 동굴로 이루어져 ‘일오동굴(등록문화재 제313호)’이라고도 부른다. 일제가 제주도에 만든 5곳의 자살특공전 기지 중 한 곳. 소형 어뢰정을 숨겨 놓고 미국 함대가 나타나면 어뢰정을 탄 자살 특공대가 돌진해 자폭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 졌다. 이 ‘인간어뢰’부대를 ‘가이텐(回天)’이라 불렀는데, 비행기를 타고 자폭했던 가미카제(神風)특공대와 같은 임무였다. # 지하 갱도진지의 절정 가마오름 1944년 7월 사이판이 함락되는 등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본군 지휘부는 이를 계기로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에 대비해 거대한 지하참호 건설을 시작한다. 나고야현에 천왕이 대피할 마쓰시로 대본영 등을 짓는 한편 제주도에도 지휘소, 통신실, 숙소 등이 갖춰진 지하 갱도진지를 조성하게 된다. 제주도내 지하갱도의 총연장은 32㎞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송악산 샛알오름 아래 1.2㎞짜리 동굴진지를 비롯, 제주도내 360여개 오름 중 약 120곳에 지하 갱도진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경면 청수리의 가마오름 진지동굴이다. 높이 140m의 가마오름 기슭에 자리잡은 진지동굴은 일본이 미국과 최후의 일전을 대비해 구축한 진지 중 최대 규모다. 약 2㎞ 길이의 1,2,3땅굴 가운데 제1땅굴 약 300m 구간이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지하갱도 곳곳에 강제 노역에 시달린 제주도 주민들의 피와 땀이 엉겨붙어 있는 듯하다. 참혹한 과거의 흔적 위에 현재는 평화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일제강점기 이곳에서 강제 노역했던 고 이성찬씨의 아들 이영근(55)씨가 아픈 역사를 되짚어보기 위해 2004년 사재를 털어 조성했다. 당시 일본군이 사용했던 군수품과 각종 땅굴작업용 도구들을 볼 수 있다. 관람료 3000∼5000원.peacemuseum.co.kr,772-2500.
  • 美 “아프간 병력 확대”

    |워싱턴 이도운특파원|미국이 이라크 전과 아프가니스탄 전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미 언론들이 1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조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주둔 병력을 과감히 감축하는 대신 아프간 파견 병력을 증강해야 한다는 군부의 압력을 받고 있다고 이날 보도했다. 미 군부는 이라크 내의 폭력사태가 확실한 진정세를 보이는 반면, 아프간에서는 정국 불안이 확산될 우려가 큰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미 정부의 일부 당국자들도 아프간이 빈곤과 부패, 열악한 사회기반시설, 탈레반의 재부상 등 때문에 장기적으로 이라크보다 더욱 큰 문제가 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에 따라 백악관은 빠르면 다음달 초 이라크와 아프간 전력배치 전략에 대한 정부내 토론을 시작할 가능성이 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보도했다. 이와 관련, 일부 국방부 고위관계자들은 내년 여름까지 이라크 주둔 미군을 20개 여단에서 15개 여단으로 감축한다는 백악관의 당초 계획보다 더 과감한 철군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반면 아프간 주둔 미군 지휘부는 탈레반 세력 진압을 위해 더욱 많은 전투부대와 헬기 등 지원병력의 증강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아프간 주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연합군의 사령관인 댄 맥닐 미 육군대장은 나토 회원국들에도 3개 전투 대대의 증파를 요청했다. 그러나 현지의 군 관계자들은 3개 대대의 증병이 현실화되더라도 병력이 충분한 상황은 못된다고 평가하고 있다. 현재 아프간에는 미군 2만 6000명과 나토군 2만 8000명이 주둔중이다. 워싱턴포스트는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와 아프간 현장 지휘관들의 의견을 수렴한 뒤 새 전력 배치 전략을 결정할 전망이다. 백악관은 부시 대통령이 안정화된 이라크와 아프간을 차기 대통령에게 넘겨주는 것을 임기 마지막 해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해왔다.앞서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아프간 정책 실패 우려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미군과 국무부, 나토가 아프간 전략의 전면적인 재검토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dawn@seoul.co.kr
  • “방제 지휘부없어 우왕좌왕 공무원 ‘칼퇴근’땐 한숨만”

    “방제 지휘부없어 우왕좌왕 공무원 ‘칼퇴근’땐 한숨만”

    “공무원요? 일부이겠지만 방제현장에서 칼 같이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하데요.” “사진 찍고, 밥만 먹고 떠나는 정신없는 자원봉사자도 있었어요.” “정치인은 이보다 더했어요. 기름 한삽 퍼내더니 떠났습니다.” 충남 태안 만리포해수욕장 방제작업에 자원봉사자로 참여 중인 김모(대구시)씨는 18일 사고발생 이후 1주일의 봉사기간에 느꼈던 뿌듯함 등의 소회와 도출된 문제점을 지적했다. 김씨는 일부 단체의 자원봉사자는 사진 찍고 밥만 먹고 가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중국집과 옷제작 중소업체에서 일하는 중국인 두 중년 여성이 마음에 남는다고 말했다. 이들은 자비로 이곳에서 이틀간 잠을 자면서 기름때를 닦아냈다. 김씨는 “조선족도 아닌 한족이 자원봉사를 하는 걸 보고 일부 한국인의 볼썽사나운 모습과 비교돼 미안하고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공무원들 “시키는 대로만 해라” 그는 경직된 공무원 조직의 행태도 지적했다. 현장 공무원이 잘못된 점을 군청에 건의를 하면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막무가내로 묵살해 위압적이었다고 귀띔했다. 일부 공무원의 칼같은 출·퇴근은 기름 유출 사태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직시했는지를 의심할 정도였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말한 일부 공무원의 행태는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이었다. ●정치인들 한삽 뜨고 사진 한장… 정치인도 성토했다. 기름 유출사고가 터지자 대선 후보 모두 기름방제 현장을 찾았고 많은 국회의원이 동행을 했다. 그는 “이곳에 왔던 정치인 상당수는 기름 한삽 정도 푸고서 급히 돌아가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씨는 무엇보다 초동방제가 부실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초기에 현장과 지휘부가 협조가 안돼 우왕좌왕했다.”며 “처음에 분리수거도 안 됐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기름제거 방법을 제대로 알려주는 기관도 없었다고 했다. 김씨는 “초기 자원봉사 멤버들이 백사장을 뛰어다니며 ‘모래 퍼내지 말라.’고 외치고 돌아다녀야 했다고 전했다. 교사 임용고사를 치른 뒤 자원봉사를 하러 왔다는 그는 “자원봉사의 발길은 계속돼야 한다. 만리포에 꼭 다시 놀러오겠다.”며 태안과의 훗날을 기약했다. 태안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0)자멸의 길로 들어서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0)자멸의 길로 들어서다

    우여곡절 속에 조선이 후금과의 관계를 힘겹게 이어가고 있을 무렵 명의 정세는 어떠했는가? 후금의 위협이라는 커다란 외환(外患)을 앞에 두고 명은 이런저런 내우(內憂)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극복은커녕 망하는 길로 확실히 접어들고 있었다.1630년 9월, 원숭환(袁崇煥)이 북경의 저잣거리에서 처형된 것은 명이 자멸의 길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홍타이지, 명의 허를 찌르다 1629년 10월2일, 홍타이지는 몽골의 코르친(科爾沁) 부족을 길잡이로 앞세워 북경 공략에 나섰다. 홍타이지는 원숭환이 굳게 지키고 있던 영원성과 산해관을 우회하여, 영평(永平) 관할의 용정관(龍井關)과 준화(遵化) 관할의 대안구(大安口), 희봉구(喜峰口)를 통해 직접 북경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산해관에서 영원성으로 이어지는 주공로(主攻路) 방어에 집중하고 있던 명군은 허를 찔리고 말았다. 일찍부터 혼인 정책 등을 통해 몽골 부족을 회유하여, 산해관 동북의 장성 외곽을 돌파하려 했던 후금의 시도가 성공했던 것이다. 그 같은 사태는 원숭환이 이미 예견했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황제에게 올린 상소에서 산해관을 제외한 장성 외곽지역의 방어 태세가 몹시 취약하다는 것, 후금이 몽골을 회유하여 쳐들어 올 경우 심각한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10월26일, 후금군은 황성(皇城) 코앞의 경기(京畿) 지역까지 들이닥쳤다. 영원성에 머물던 중에 홍타이지의 공격 소식을 접한 원숭환은 당황했다. 그는 병력을 끌어 모아 그야말로 미친 듯이 북경을 향해 달려갔다. 원숭환은 산해관에 도착한 직후 참장(參將) 조솔교(趙率敎)에게 병력 4000을 주어 준화를 구원하도록 명령했다.11월4일, 후금군은 준화성 공격에 나섰다. 왕원아(王元雅)가 이끄는 명군은 힘껏 저항했지만 곧 무너지고 말았다. 성안에서 후금군에게 내응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준화를 향해 달려오던 조솔교는 중간에 복병을 만나 전사하고 말았다. 성 함락 후 준화에서는 후금군에 의해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준화 함락과 대학살 소식에 북경은 전율했다. 11월17일,9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밤낮으로 달려온 원숭환은 북경 광거문(廣渠門) 앞에 이르렀다. 병사와 말 모두 굶주림도 잊고 휴식도 없이 달려온 길이었다. 부총병 주문욱(周文旭)은 일단 휴식을 취하고 상황을 보아 북경으로 들어가자고 했지만 원숭환은 듣지 않았다. 황성이 포위되려는 마당에 휴식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11월20일, 원숭환의 명군은 광거문 앞에서 후금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6시간 이상 벌어진 10여차례의 사투 끝에 후금군은 뒤로 물러났다. 무리한 행군과 굶주림 속에서도 정신력으로 버틴 끝에 얻은 승리였다. ●홍타이지 원숭환에 패해 후퇴하다 11월23일, 후금군을 물리친 뒤 원숭환은 숭정제에게 장거리 행군과 전투, 그리고 노숙에 지친 병사들이 성안으로 들어가 휴식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했다. 숭정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원숭환이 분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숭정제는 이미 원숭환에게 노여움을 품고 있었다. 후금군이 북경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 원숭환의 책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숭환 휘하의 병력은 엄동에 다시 노숙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11월27일 좌안문(左安門)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원숭환은 후금군을 격파했다. 원숭환이 있는 한 북경을 도모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홍타이지는 병력을 북경 외곽의 남해자(南海子)란 곳으로 철수시켰다. 그는 북경에서 물러나면서 숭정제에게 서신을 보내 화친을 맺자고 요구했다. 일종의 양동작전이었다. 홍타이지는 이후 북경의 상황을 관망하면서 북경 주변의 여러 지역에 병력을 풀어놓았다. 후금군은 영평(永平), 준화, 난주( 州), 천안(遷安) 등지의 성과 촌들을 마구잡이로 겁략했다. 그들은 도처에서 사람과 가축, 각종 물자를 약탈하고 저항하는 인원들을 도륙했다. 황성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던 명군은, 후금군이 외곽 지역에서 벌이고 있던 약탈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후금군은 통주(通州) 등지에서 1000척 가까운 조운선(漕運船)을 불태웠다. 수만 명의 포로를 획득하고, 후금군 병사 한 사람에게 1필씩 돌아갈 만큼의 우마를 획득했다. 잔혹한 학살과 방화, 그리고 약탈 속에서 북경 주변은 초토화되었다. 비록 황성은 어렵사리 지켜냈지만 명은 심장부가 유린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원정을 통해 또 다른 명의 장성(長城)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너뜨리게 된다. 그 ‘장성’이란 다름 아닌 원숭환이다. 후금군은 광거문 전투에서 원숭환에게 패했지만 귀중한 포로 두 사람을 사로잡았다. 마방태감(馬房太監) 양춘(楊春)과 왕성덕(王成德)이 그들이었다. 홍타이지는 이 두 사람의 포로를 활용하여 원숭환과 숭정제를 이간시킬 수 있는 반간계를 구상했다. 양춘과 왕성덕을 감금해 놓은 방 바로 옆에서 홍타이지의 부하 고홍중(高鴻中)과 포승선(鮑承先)이 밀담을 나누었다. 밀담은 ‘원숭환이 이미 홍타이지와 몰래 약속하여 북경을 공취(攻取)하기로 했고 곧 함락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겨우 벽 하나로 나뉘어진 옆 방에서 환관 두 사람은 고홍중과 포승선의 밀담 내용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홍타이지와 후금군 지휘부가 의도적으로 그 같은 상황을 연출했음은 물론이다. 11월29일, 홍타이지의 명을 받은 고홍중과 포승선은 태감 두 사람을 고의로 풀어주었다. 자금성으로 달려온 두 환관은 숭정제에게 그 사실을 고했다. 홍타이지가 북경을 기습한 직후부터 명 조정에 있던 엄당(奄黨)의 잔당들은 원숭환을 제거할 함정을 이미 만들어 놓고 있었다.‘원숭환이 오랑캐를 일부러 사주하여 북경으로 끌어들였다.’는 참소가 주된 내용이었다. 또 ‘원숭환이 병력을 이끌고 북경 옆의 통주에 다다를 때까지 후금군과 한번도 접전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야기도 떠돌고 있었다. ●원숭환, 하옥되다 당시 19세에 불과한 데다, 대국(大局)을 볼 수 있는 역량이 없었던 숭정제는 홍타이지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1629년 12월1일, 황제는 원숭환을 황성으로 불렀다. 명목은 ‘군량 문제를 의논하자.’는 것이었다. 이미 ‘원숭환이 오랑캐와 내통하고 있다.’고 믿었던 숭정제는 혹시라도 원숭환이 낌새를 채고 오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군량 문제’를 운운했던 것이다. 원숭환이 황성 앞에 도착했을 때 문지기들은 성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오랑캐’에게 북경 주변이 포위된 계엄 상태였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는 대신 성 위에서 밧줄에 달린 바구니가 내려왔다. 당시 계요총독(遼總督)이자 병부상서 직책을 갖고 있던 원숭환은 바구니에 실린 채 황성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것 자체가 치욕이었다. 황성으로 들어선 직후 원숭환은 금의위(錦衣衛)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반면에 그와 동행했던 총병 만계(滿桂)와 흑운룡(黑雲龍) 등은 황제로부터 칭찬을 듣고 승진했다. 내각 대학사 성기명(成基命)이 원숭환을 구명하기 위해 애써 숭정제에게 호소했지만 황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동림당(東林黨)에게 복수하기로 작심했던 엄당의 신료들은 원숭환을 죽이라고 아우성이었다. 원숭환은 동림당 계열의 대학사 전용석(錢龍錫)의 문인이었기 때문에, 원숭환의 ‘죄’를 물고 늘어지면 동림당 계열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홍타이지의 반간계는 완벽하게 성공했다.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성을 공격하여 선전포고했던 이래 후금군은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그 승승장구에 제동을 걸고 끝내 누르하치를 비명횡사시킨 장본인이 바로 원숭환이었다. 그가 영원성과 산해관을 막아서는 한, 아니 그가 존재하는 한 중원 정복이라는 목표는 실현될 수 없었다. 원숭환은 바로 명의 장성이었다. 그런데 그 ‘장성’이 반간계 한 방으로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요컨대 홍타이지는 탁월했고, 숭정제는 암우(暗愚)했다. 지도자의 차이가 후금과 명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광주 기무부대터 ‘역사공원’ 조성

    광주시 서구 쌍촌동 옛 기무부대 터가 ‘역사 공원’으로 조성된다. 이곳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진압군의 지휘부가 위치했고, 민주 인사들에 대한 구금·고문이 자행됐던 현장이다. 광주시는 2일 “기무부대 터 3만 8000여㎡에 대해 공원 지정을 위한 도시관리계획 절차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이달 중 주민열람과 시의회 의견청취와 도시계획위원회 심의를 거쳐 내년 2월쯤 역사공원으로 지정할 계획이다. 앞서 지난 6월 이곳을 5·18 사적지(26호)로 지정했으며 지난달 환경영향성 검토와 건축허가 제한 조치를 취했다. 이 부지를 5·18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살린 교육·체험 및 순례지로 조성해 민주정신을 기리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그러나 역사공원으로 지정되더라도 공시지가 가격으로 170억원에 달하는 부지를 국방부로부터 매입해야 하고 공원 조성 사업비 확보 등의 과제가 남아 있다.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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