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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찰비위 특감/경찰청,기동반투입

    경찰청은 3일 최근들어 경찰관들의 기강이 해이해져 각종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4일부터 기동감찰반을 투입,특별감찰활동을 벌이기로 했다. 이번 감찰에서는 각급경찰서 지휘관의 사정의지를 점검하고 교통·면허담당경찰관과 지·파출소근무자,사생활문란·음주·도박등 관련 경찰관등을 중점 대상으로 비위사실 등을 점검한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지청천

    ◎독립군지휘,만주태평령서 일 연대 섬멸/33년 6·10대첩 독립전쟁 최대승리로 기록/무장투쟁 한평생… 40년 광복군사령관 역임/광복후엔 대동청년단 결성,“민족단결” 호소… 제헌­2대의원도 지내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와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백산 지청천장군이 선정됐다.6월의 독립운동가 지청천장군은 일본이 대륙침략에 기승을 부렸던 1933년 6월10일 만주의 길림성에서 독립군을 이끌고 일본의 이이즈카연대를 섬멸한 공을 세우고 40년부터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사령관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했다.해방후 귀국한 지장군은 제헌의원과 2대의원을 지내고 57년1월15일 69세로 별세했다.지장군의 생애와 사상,업적을 되새겨 본다. 1933년 6월10일 만주의 길림성 태평령에서 한국독립군 2천5백명과 중국군 2천명의 연합작전을 지휘하던 지청천장군은 일본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짤막한 훈시를 했다. 『오늘의 공격은 2천만 대한인민의 원수를 갚는 것이다.총알 한개 한개가 우리 조상의 수천 수만의 영혼이 보우하여주는 피의 사자이니 제군은 단군의 아들로 굳세게,용감히 모든 것을 희생하고,자손 만대를 위해 최후까지 싸우라』 비록 몇 마디 되지 않는 짧은 훈화였으나 결전을 앞둔 독립군 병사들의 뼛속까지 사무쳐 대부분의 병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조국의 광복을 굳게 다짐했다. ○소총등 다량 노획 이날 일본의 정예부대인 이이즈카연대는 한중연합군의 맹렬한 공격에 혼비백산했다. 동서남북으로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4시간동안의 치열한 전투끝에 일본군은 완전히 전멸되고 말았다. 군복 3천벌,박격포 5문,군용물자 20마차,담요 3천장,평사포 3문,소총 1백50정을 노획해 한국독립사상 가장 큰 전승을 기록했다. 지청천장군의 태평령전투는 독립전쟁사중 20연대의 김좌진장군의 청산리전투와 함께 2대 대첩으로 평가되고 있다. 30년대의 지장군이 지휘한 태평령전투가 규모와 노획물이 더 큰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장군은 전투부대의 지휘관으로서 뿐만아니라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서 독립을 위한 청년장교들을 양성한 교육자로,광복후에는 제헌의원·청년운동 등으로 평생을 애국·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지장군은 1888년 2월15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다섯살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홀어머니(이씨)밑에서 자란 지장군은 우리나라에 종두법을 처음 도입한 아저씨 지석영의 권고로 교동국민학교를 거쳐 배재학당에 진학했다. 1904년 한국무관학교에 입학한 지장군은 1907년 일본이 한국군대를 강제해산하자 관비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유학을 떠났다. 어머니는 적의 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지장군에게 『나는 너를 죽어 없는 아들로 생각하겠다.구국의 일군이 되지 못하거든 일본에서 돌아오지도 말고 나를 어머니라고 생각하지도 말라』고 엄하게 훈계했다. ○일 정규육사 출신 적도 도쿄에 도착한 지장군은 일본의 눈부신 문물을 보고 놀라면서 일본의 앞선 기술과 제도를 하나라도 더 배워 조국을 되찾는 첨병이 될 것을 다짐했다. 일본 유년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정규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지장군은 1914년 1차대전이 일어나자 일본군 제14사단에 배치되어 중국 산동성 청도에서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경험을 하게 됐다. 당시의 전투경험이 만주에서의 독립군 전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군 중위로 진급한 지장군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군을 탈출,독립운동의 요람이던 만주 봉천성 통화현에 도착,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당시 만주에는 일본육사출신의 김광서장군과 구한말 군관출신인 신팔균 김창환 이범석 오광선등 쟁쟁한 인재들이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면서 민족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 일본 육사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지장군은 교성대장(교성대장)에 이어 교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기반이 공고해질수록 일본의 독립군 탄압도 집요해져 지장군은 신흥무관학교출신을 주축으로 하는 서로군정서군을 이끌고 백두산 부근의 밀산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김좌진장군의 북로군정서군,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 등과 합세,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여단장을 맡아 군세를 통합했다. 지장군은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독립전쟁 수행을 위해 1921년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독립군부대를 고려혁명군단으로 개편하고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치,교장을 맡아 전열을 정비하고 일본과의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일본의 사주에 의한 소련정부의 배신으로 소련군과 혈전을 벌인 끝에 장군은 체포되어 러시아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 구사일생으로 다시 만주에 돌아온 지장군은 국민대표회의 등을 통해 독립운동세력을 규합,1924년 정의부가 조직되자 중앙위원과 산하 의용군 총사령관이 됐다. 정의부소속 군대를 지휘하게 된 지장군은 일본경찰주재소를 소각하고 일본군부대를 습격하는 등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1931년 9월18일 일본은 중국침략의 마수를 뻗쳐 만주사변을 도발했다. 지장군은 만주지역의 중국군 이두·정초·고봉림장군 등과 한중연합군을 결성해 쌍성보,경박호,동경성,사도하자,대전자등 만주 각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지장군은 1919년부터 33년까지 14년간 만주 곳곳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고 강한 군대를 육성했다. 1933년 8월 일본이 만주를 석권하다시피하여 독립군의 항일투쟁이 어렵게 되자 임시정부의 김구선생은 지장군을 하남성의 낙양군관학교로 초청,한국청년들의 군사교육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임정 군무부장에 넓고 넓은 만주땅을 베개삼아 죽으리라던 지장군은 이범석·오광선 등과 함께 낙양으로 내려가 한인청년들을 교육하고 1937년에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40년 9월17일 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참모장 이범석과 함께 명실공히 한국군을 대표하게 됐다. 광복군은 중국을 비롯한 연합군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벌이는 한편 대적선전·포로심문·선전전단작성·암호해득등 다방면에 걸친 눈부신 활동을 했다. 지장군은 1946년 4월28일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반대로 개인자격으로 중국에서 귀국했다. 귀국후 장군은 혼란한 국내정세를 바로잡을 원동력이 청년에게 있음을 깨닫고 전국적인 청년운동을 일으킬 것을 구상,대동청년단을 구성했다. 지청천단장은 전국청년지도후원회를 결성하고 『뭉치라,길은 하나이다』라는 구호로 민족단결을 역설했다. 1948년 5·10총선과 50년 5·30총선에 출마하여 초대 및 2대국회의원이 된 지장군은 국방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건국의 기틀을 다졌다. 지장군은 57년 1월15일 69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정부는 62년 지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지장군은 달수씨와 복영씨등 남매를 두었는데 남매도 모두 광복군으로 항일활동에 참가했다. 달수씨는 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고 69년에 작고했으며 복영씨는 현재 지장군의 일대기를 정리하고 있다. ◎탁월한 전략·순수한 군인정신의 귀감/역사적 평가/이현희 성신여대교수 백산 지청천장군은 70평생을 조국과 겨레의 행복을 위해 보냈다. 8·15이전의 60평생을 조국광복을 위한 무장독립투쟁에 보냈으며 귀국후에는 제헌의원과 2대의원으로 국정에 깊이 관여했다. 한국무관학교 학생으로 입학해서 일본육사를 졸업한 지장군은 평생을 통해 권모술수를 모르는 순수한 참군인의 정신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해왔다. 지장군이 일본육사에 진학한 의도는 적을 잡기 위해서는 적의 소굴로 들어가는 용기와 지혜가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서 였다. 일본육사에 유학,현대 전략과 전술을 공부한 지장군은 훗날 만주에서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하면서 일본육사에서 배운 군사학을 활용했다. 열악한 무장,숫적인 열세,보잘것 없는 보급을 받으면서도 지장군은 일본정규군을 자유자재로 유린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일본의 현지 지휘관들은 『지청천이가 일본의 전술과 전략을 너무 잘 알고있기 때문에 우리의 격전이 무색하다』고 격찬 한 사실을 보아도 지장군은 탁월한 지휘관이었다고 생각된다 지장군은 1940년에는 임시정부의 직할무장부대인 광복군의 총사령관으로 5년동안 국내외 청년들을 모아 훈련을 시키고 일본군 후방교란,연합군과의 연합작전,심리전 등을펴 명실공히 독립군의 최고지도자로 역을 다했다. 그는 건국후에도 광복군의 정통성을 의병독립군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잡는데 크게 기여했다.그러나 광복이후의 혼미한 정국에서 지장군의 크고 높은 뜻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지장군이 별세한 35년이 지난 지금 그의 크고 높은 뜻이 마침내 달성되는 듯한 느낌이어서 다행스럽다 하겠다.
  • 여군 하사관/계급 정년제 문제있다

    ◎하사 3년·중사 4년·상사 5년으로 묶여/25년째 시행중… 남바는 연령정년 채택/“성차별 규정” 전역명령취소 행정심판 잇달아 호국정신이 투철한 젊은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여군하사관제도가 이른바 「3·4·5제」라 불리는 성차별적인 복무규정 때문에 안정된 전문직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3·4·5제」란 여군하사관의 계급별 복무기간으로 하사는 3년,중사는 4년,상사는 5년 이상 복무할 수 없도록 한다(군인사법 제5조 제2호)는 규정에 얽매인 제도.중·상사계급 여군하사관의 인력정체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지난 67년 신설된 당시에는 「4·4·5」였던 이 제도는 81년 하사계급의 복무기간이 3년으로 단축된 것. 이 제도는 신설 당시 보수적인 계급의식과 남녀차별의식을 배경으로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운용돼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으로 지적돼 왔다. 이와는 달리 남자군인의 경우 근무여건 개선을 위한 노력이 최근 더욱 활발히 진행돼 하사40세,중사45세,이등상사50세,일등상사53세로 연령정년을 규정해 놓고 안정된 직장생활을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그리고 만18년이상 근무했을때는 전역해당자에게도 전역을 보류,20년 연금수혜대상이 되도록 특별배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92년 의무복무만료자를 대상으로 지난해 11월 실시한 여군하사관 복무연장심사에서 하사99명,중사4명,이등상사 1명등 모두 104명이 「3·4·5제」규정에 의해 전역처분을 받게 됐다.이러한 조치에 따라 당사자뿐 아니라 15대1의 높은 경쟁률을 제치고 입대한 여군하사관들에게 큰 실망과 충격을 안겨 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전역처분 대상자 가운데 전혜자상사(38)는 16년 5개월을 근무,3년 7개월만 더 근무하면 20년 연금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도 5월31일자로 전역결정이 나자 육본 참모총장 소청위원회에 면역명령취소 소청서를 제출해 놓고 있다.또 사격특기생으로 85년 입대한 최기정중사(25)는 중사진급후 4년을 채우고 이번에 연장지원서를 제출했으나 여군 대대지원과의 요구에 따라 형식적으로 제출한 전역지원서에 의거,지난 2월11일 면역처분을 받았다.최중사는 요구에 의해 제출한 전역지원서가 「비진의 의사표시」에 해당한다며 육군참모총장을 상대로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심판을 제기했다. 최중사의 법정대리인 최일숙변호사는 『여군하사관 인사규정은 헌법상 평등원칙(제11조 제1항)과 군인사법상의 평등취급원칙(제45조)에 위배된다』는 점을 우선 지적했다.그러면서 『헌법과 법률에 어긋나는 불합리한 규정에 의해 전역의사도 없는데 면역처분을 내린 것은 위법이 명백하다』고 무효를 주장했다. 한편 국방부측은 「군의 특수성을 고려해 볼 때 위법조항이 아니므로 시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지금까지 「3·4·5제」에 의해 부당하게 제대한 여군하사관은 수없이 많지만 모두가 희망전역으로 위장되거나 복무연장 심사전에 지휘관의 퇴역의도를 알고 명예롭게 제대하기 위해 자진해서 전역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서류상의 근거가 없어 정확한 인원파악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 남북 군사공동위에 바란다/김태우 국방연 연구원(특별기고)

    ◎한반도비핵화 실천길 열어야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적지 않은 수확을 거두고 막을 내렸다.제한된 숫자나마 8·15 고향방문단 교환이 합의되어 이산가족들의 한을 풀게 되어 무엇보다도 다행스럽다.경제공동위 사회문화공동위 등 실행기구들이 설립되게 되었고 군사분야에서 군사공동위 구성에 합의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였다.이제 군사공동위가 구성되는만큼 남북한 군비통제와 관련한 국민의 기대는 각별할 것이다.그럼에도 우리측 대표들이 넘어야 할 산들은 높고 험준하다. 우선 부속합의서가 만들어져서 군사공동위가 제기능을 발휘하기까지 북한의 「선합의 후번복」협상전술을 상대하기란 무척 곤혹스러울 것이다.남북합의서에서 주한미군 문제를 제외키로 합의해 놓고 막상 군사분과위가 시작되자마자 북한대표들이 외쳐온 것이 『외세의존은 분열의 길』,『외국군에 땅·하늘·바다를 제공치 말것』등이었다.핵통제공동위나 정치분과위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북한이 우리측의 「비핵화」에 합의하여 공동선언에 서명해 놓고는 역외수단에 의한 미핵우산마저 소멸시키는 「비핵지대」를 다시 들고 나오는 것이나,『사상적 제도적 장애제거』 『상대방 소개찬양 자유』등을 외치면서 사실상 보안법 철폐,용공인사 활동보장등을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오리발」전술에 해당된다.한국의 「균형추진」 「실천성보장」등 현실적 제안이 북한의 「일괄합의」및 「동시실천」등 선언적 주장과 맞부딪쳐 왔다는 점도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북한의 대남 기본전략이 불변이라는 사실은 산중에도 태산에 해당한다.북한은 아직도 「통일전선」을 『혁명에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여러 정당,단체,개인들이 로동당의 영도하에 공동의 원쑤를 반대하여 싸우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군지휘관들의 충성맹세는 『총구에서 통일이 나온다』『1995년까지 통일이 안되면 상부지시가 없어도 부대를 끌고 남조선 해방을 위해 내려간다』는 등의 섬뜩한 구호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여기서 우리는 다가오는 신국제질서가 의미하는 바를 곱씹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국제질서의 변화는 한마디로 「다극화」와 「핵의 남북문제화」로 표현될 수 있다.걸프전이래 미국만이 초강국인 세계,즉 팩스아메리카나가 재현되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없지 않으나 이는 잠정적인 현상일 것이다.걸프전쟁이 미국의 눈부신 승리를 돋보이게 한 사건임에는 틀림없으나,이보다는 국제경찰력 불재를 틈탄 이라크의 지역패권기도,동맹국들의 전비부담,협력적 안보의 중요성등 다극화의 특징들이 부각된 것이 더욱 의미있는 일이다.그렇다면 동북아는 이미 「무증후」핵능력을 갖추고 미래세계에서 「일극」이 되기 위해 착실히 대국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일본이 중국및 러시아와 지역패권을 다투는 「각축장」이 될지도 모른다. 이와 더불어 「핵의 남북문제화」도 급속히 진전되고 있다.미국은 자신의 방위계획서에서 밝혔듯이 소련의 붕괴및 걸프전쟁 승리를 계기로 자신만이 유일 초강국인 단극시대 구축을 꾀하고 있다.독일,일본등 잠재경쟁국의 핵무장을 억제하고 남북한을 포함한 제3세계의 핵및 미사일 확산을 봉쇄함으로써 자신의 패권적 핵군사력을 유지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핵기득권유지차원에서 기존 핵국들이 단합하여 새로운 핵국의 등장을 막는 것은 당연한 홉스적 이치이며,이에 따라 핵을 가진 나라들과 없는 나라들 사이의 「압박­피압박」관계로 정의되는 「핵의 남북문제화」는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소련을 겨냥하려던 미국의 SDI가 미소가 합심하여 제3세계미사일 위협을 잠재우는 「지구방어(GPALS)」개념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 「핵의 남북문제화」추세를 대변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도 안될 것이다.힘없고 지렛대없는 국가들이 한없이 서러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심중에 두어야 할 한반도 군비통제 원칙도 분명해진다.남북한이 무조건 무엇을 줄이고 없애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며,양적인 감축을 실행하면서도 질적인 잠재력은 상호보호하는 「통일후 지향형」군비통제를 추진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순서이다.상호신뢰없이 통일후를 대비한 군비통제가 가능할 수 없고,북한이 막강한 기습공격력을 유지하며 대남「통일전선」전략을 고집하는 한 그리고 선전차원의 「선감축 후신뢰」주장을 굽히지 않는 한 남북한 신뢰구축은 어렵다.때문에 북한측 군사공동위가 올바른 수순을 밟아 갈길 먼 한반도 군비통제 협상에 물꼬를 터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우선은 신뢰구축 조치들을 서둘러야 하며,상호신뢰속에 과다한 「군살」을 빼는 것이 그 다음의 일이다.남북한이 다투듯 협력하듯 상호 잠재력을 보호하며 통일을 설계하는 것은 그 다음에 가능한 일이다.북한당국은 다극화 시대의 도래나 「핵의 남북문제화」가 한민주에게 요구하는 것이 조속한 신뢰구축과 평화공존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반면 한편으로는 부릅뜬 눈으로 우리의 안보를 재차 확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이 나아갈 먼길도 내다봐야 하는 것은 우리의 운명일 것이다.남북한 군비통제와 관련하여 군사공동위에 거는 국민의 기대는 크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무력으로 독립쟁취” 만주 항일투쟁 이끌어/한일 합방직후 망명,신흥무관학교 등 설립/독립군단체 통합 주도… 임정국무령도 역임/의병활동·교육자로 평생 구국활동… “광복전 유해 옮기지 마라” 유언도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이상룡선생이 선정됐다. 5월의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은 1896년 경북지역의 의병으로 활동하다 한일합방이후인 1911년 만주로 망명,그곳에 한인사회를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독립전쟁을 위한 인재양성과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1926년 1월 국무령을 사임한 이 선생은 32년 5월12일 74세의 노령으로 중국 길림성에서 서거했다. 이 선생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되새겨 본다. 1925년 3월23일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은 미국의 위임통치안을 제안한 이승만대통령을 탄핵면책하고 국무총리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박은식대통령은 임시정부헌법을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개헌하고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국무령에 만주지역에서 가장 큰 독립운동단체인 한족회와 통군부를 이끌던 이상은선생을 지명했다. 1911년 만주로 이주한 이 선생은 만주에 항일독립운동기지를 만들어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시키는 한편 동포들에게 독립운동의식을 고취,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이 국무령은 만주에서 독립군을 지휘하며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서온 김좌진·오동진·김동삼 선생들을 국무위원에 임명하고 임시정부가 활발한 무장독립투쟁을 이끌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국무위원들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창조파와 개조파,국내파와 해외파 등으로 나뉘어 임시정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1926년 1월 이 선생은 초대 국무령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에 돌아와 독립운동조직인 의정부·신민주·참의부의 통협에 심혈을 기울이고 힘썼다. 윤봉길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일본 군국주의 지도자들을 살해한 뒤 12일만인 1932년 5월12일 이 선생은 74세로 만주 길림성 소성자에서 『외세때문에 좌절하지 말고 더욱 면려하여 독립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노환으로 선거했다. 70평생중 반세기에 걸친 이 선생의 일관된 구국노력은 의병활동·민족계몽운동·독립군지도자·임시정부 정치지도자·교육자·사상가 등 당시의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32년 74세로 별세 이 선생의 깊은 학식과 큰 인품은 조국은 되찾겠다는 의지와 정열로 승화되어 민족진영이나 사회주의 진영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많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이 선생은 1858년 11월24일 경북 안동에서 유학자 이승목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난 이 선생은 유학자로서의 학문적인 수업을 쌓다가 1896년 일자 명성왕후를 시해하자 영남지방의 의병에 참가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지방유지들과 합자,가야산에 군사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계획을 세웠으나 자금부족과 일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선생은 김동삼 등 동지들과 안동에 대한협회 안동지부를 결성,민족각성과 청소년 교육등 민족자강운동에 헌신했다.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자 이 선생은 국내최대의 항일비밀경사 신민회에 가입했다. 신민회는 전국 13개 도의 유지들과 부호들을 규합,만주에 거대한 조선인 자치구를 설립할 목적으로 이민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시영·이회영·이동영·주진수·김창환 등 구한말의 관리와 양반·선비들은 가산을 정리하고 무인지경이던 만주로 이민을 떠났다. 1911년 4월 53세의 이 선생은 52명의 대가족을 인솔하고 만주로 이주했다. 이 선생은 만주의 땅을 매입하여 조선인 촌락을 만들고 학교와 교회를 설립,청년들을 교육시키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쟁을 일으킬 목적으로 동지들과 함께 개척이민의 선두에 섰다. 이 선생은 만주에 도착하자마자 유하현 삼원포에 거류민단조직인 경학사를 설립,사장에 취임했다. 경학사는 1914년 부민단으로 발전되고 신흥학교를 설립,인재를 양성했다. 이 선생은 3·1운동직후에는 한족회를 설립,동포들에게 민족자긍심과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한인청년들을 신흥무관학교에 입교시켜 1천여명에게 군사교육을 받게 했다. 이 선생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독립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서로군정서를 설립,총재에 취임했다. 부총재에는 여준,정무청장은 이탁,참모부장은 김동삼,독립군사령관엔 지청천을 임명,일제에 항거하는 한편 국내 진공작전계획도 세웠다. ○서로군정서 총재 당시 만주에는 3·1운동이후 일제의 탄압과 만행에 시달린 조국의 열혈청년들이 대거 이주해와 2천여명을 무장킬 수 있었다. 이 선생의 서로군정서 조직은 당시 해외독립운동단체중 최대규모였다. 1919년 4월13일 이동영·이시영선생이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자 이 선생은 『한민족에 두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고 광복운동에는 단결이 가장 큰 선결조건』이라는 이유를 들어 참모들을 대동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조직으로 들어갔다. 이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와 내치·재정을 담당하고 만주의 항일무장세력은 단결해서 군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부하들을 설득,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북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활동중인 홍범도·이동주 등과 항일연합전선을 펼 것을 모색했다. ○통군부 확대개편 이선생은 1920년초 북경에서 개최된 조선인 군사통일회에 참가,박용만·신숙 등과 군사기구의 통합방안을 협의하고 22년 6월에는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이룬 통군부를 조직했다. 그뒤 이 선생은 통군부를 다시 확대개편하여 17개 독립운동단체로 하여금 통의부를 구성하는 등 독립군의 군세확장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전통깊은 유학자집단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 선생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외교나 교육에 치중하지 않고 일생동안 무력항일투쟁만을 주장했다.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와 무력으로 싸워서 이기는 수 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중국·소련 등과 연합해서 독립군을 조직,화력과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1925년 3월 미국에 체류하면서 위임통치를 주장하던 이승만대통령이 탄핵되자 국무령에 취임한 이 선생은 임시정부를 독립군지휘관으로 구성,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려고 작정했다. 그러나 이 선생의 구상은 내분으로 결실을 보지 못하고 지리멸렬하게 되자 26년 1월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만주에 돌아와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지도하던 이 선생은 일본이 만주국을 설립한 32년 5월12일 노령으로 별세했다. 『국토를 찾기전에는 내 유해를 고국에 싣고 가지말라』고 한 유언을 남김으로써 이 선생의 유해는 광복된지 45년만인 90년 9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중국 흑룡강성에서 봉환,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유족으로는 증손자인 항회·범회씨가 서울에 살고 있으며 선생의 기념사업회 결성을 준비중이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역사적 평가/20년대 독립군총사로 불멸의 업적 석주 이상룡 선생은 70생을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민족지도자였다. 이 선생은 1896년부터 1910년까지 향리에서는 의병의 지도자로서,민족계몽운동가 또 2세교육자로 활동했으며 1911년 만주로 이전해서는 민족의 선구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이 선생은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교육·산업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을 병행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이를 동지들과 함께 실행에 옮겼다. 그는 만주의 한인사회에서산업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동포들의 법적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중화민죽회에 진정서를 제출하는등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한인들의 권익옹호에 앞장섰다. 이 선생은 이주한인들의 생업을 위해 벼농사를 적극 권장,지도해 만주에서 쌀을 생산했으며 경제적인 기반이 마련된뒤 독립군을 조직했다. 그는 경학자·부민단·한족회·군정부·통의부·정의부·혁신의회 등으로 이어지는 항일 민족독립운동단체를 직접 지도해 만주지역의 민족지도자로서 불멸의 자취를 남겼다. 이 선생은 노년에는 김동삼을 위시한 여러 혁명가들을 지도함으로 써 항일대열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1923년 해외 항일독립운동단체의 책임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상해의 국민대표회의에 김동삼을 파견,6개월동안 의장을 활동시켜 항일독립운동의 전략·전술을 수립하게 했다. 유학자로서,의병으로서,때로는 민족의 교육자요 지도자로서 다양한 역할을 하던 이 선생은 1932년 5월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망명지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조국을 위해 헌신한그의 혁명가적인 행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귀감이 되어 남을 것으로 확신한다.
  • 아주 시에라리온 대통령 해외 도주/쿠데타군 전권장악

    【아비장 AFP 로이터 연합】 아프리카 서부의 시에라리온에서 발생한 군사쿠데타로 조셉 모모 대통령이 기니로 도주했으며 5명의 장교들이 이끄는 국가임시집권평의회(NPRC)가 전권을 장악했다고 쿠데타군에 가담한 한 야전군 지휘관이 30일 발표했다. 믿을만한 소식통들은 모모 대통령이 이날 헬리콥터편으로 기니의 수도 코나크리에 도착했다고 전했다.시에라리온군부는 1일 전국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NPRC의 대변인 발렌틴 스트라세르 대위는 한 사설 라디오방송을 통해 쿠데타 지도자들이 군대와 경찰의 완전한 협력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NPRC는 야간통행금지령을 선포했으며 위반자는 즉결처분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 흑인폭동 미 전역 확산/부시,연방군투입 결정

    ◎상항·애틀랜타 등 21개 시 “비상”/LA한인상점 1천3백곳 피습 【로스앤젤레스=특별취재반】 로드니 킹사건에 대한 불만으로 촉발된 흑인 유혈폭동은 사건발생 3일째인 1일(현지시간)에도 전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 확산되고 있다. 폭동 진원지인 로스앤젤레스 인근 샌프란시스코에서도 통금실시와 함께 비상사태가 선포되었으며 미 남부 조지아주의 애틀랜타에서는 통금령과 주방위군 소집령이 내려지고 라스베이가스에서도 폭동이 일어난 것으로 전해지는 등 흑인유혈폭동은 미 전역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흑인들의 폭동은 로스앤젤레스 인근 샌프란시스코와 라스베이가스를 비롯해 미니애폴리스,덴버,캔자스시티,앰허스트,애틀랜타,탬파 등 서·중·동부를 가리지 않고 번져 미 전역 21개 도시가 시위와 폭동에 시달리고 있다. 이틀동안 격렬하게 벌어진 이번 폭동의 피해는 막대해 로스앤젤레스에서만 모두 2천곳 이상에서 방화와 약탈피해를 입은 것을 비롯해 최소한 31명이 목숨을 잃었고 1천2백명 이상이 중경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산손실도 막대해 피해규모가 25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LA내 캄튼에서 상가를 운영하고 있는 재미교포 웰터스 박씨가 1일 상오 흑인들의 총에 맞아 숨진 시체로 발견됐고 지난달 30일 밤에는 차를 타고 한인타운을 지나던 교포청년이 총에 맞아 숨지는 등 최소한 재미교포 2명이상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폭동에서는 우리교포들의 가게가 방화와 약탈의 주요 표적이 되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로스앤젤레스지역에서 영업을 하는 한인교포가게 1천6백개 가운데 80%이상이 이번 폭동으로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흑인폭동사건이 미 정국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관측되는 가운데 부시 미 대통령은 로드니 킹 폭행사건을 일으킨 4명의 백인경찰관에 대해 연방정부가 직접 기소하는 방안을 검토키로 했다고 발표하고 LA시민들이 법을 준수하도록 호소했다. 【워싱턴=이경형특파원】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1일(현지시간) 낮 로스앤젤레스의 질서회복을 위해 4천명의 연방군과 1천명의 연방경찰을 이날 자정을 기해 파견키로 결정했다. 말린 피츠워터백악관대변인은 이날 『피터 윌슨캘리포니아주지사와 톰 브래들리LA시장의 요청에 따라 연방군을 파견키로 했다』고 밝히고 『캘리포니아주 포트오드에 주둔중인 4천명의 연방군이 LA의 병력집결지로 이동할 것이며 필요할 경우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투입될 것』이라고 말했다. 피츠워터대변인은 또 LA시당국과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치안유지를 돕기위해 투입토록 명령된 1천명의 연방경찰은 바로 LA로 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부시대통령이 윌슨지사 및 브래들리시장과의 전화통화에서 『연방군이 파견될 경우 주방위군을 합동편성시켜 연방군 지휘관의 통괄지휘하에 둘 것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이날 상오 백악관에서 있은 고위보좌관회의에는 콜린 파월합참의장을 비롯,돈 애트우드국방차관,윌리엄 세션즈연방수사국(FBI)국장,스키너비서실장 등이 참석했다. □LA특별취재반 취재 임춘웅(뉴욕특파원) 홍윤기(LA특파원) 이경형(워싱턴특파원)유민(사회2부기자) 사진 왕상관(사진부부장급)
  • 아프간 과정 총리에 반군지휘관 파리드

    【폐샤와르 AFP 연합】 아프간의 과격파 반군세력인 「헤즈비 이슬라미」를 이끌고있는 굴부딘 헤크마티야르는 앞서 이루어진 반군단체들과의 합의에 따라 휘하의 반군지휘관 우스타드 파리드(41)를 과도정부의 총리로 임명했다고 헤크마티야르의 한 수석 보좌관이 28일 밝혔다. 히랄보좌관은 지난 24일 페샤와르에서 이뤄진 6개 반군단체들의 회동에서 총리임명권을 「헤즈비 이슬라미」측에 부여키로 합의했음을 상기시킨 뒤 경쟁세력인 「자미아티 이슬라미」가 아메드 샤 마수드사령관을 이미 국방장관에 임명한만큼 헤크마티야르가 서둘러 파리드를 총리에 임명했다고 설명했다.
  • 13년내전 끝내고 개선하던날

    ◎아프간반군,카불 무혈입성… 정권인수 착수/시민들 거리나와 환영… 정부군 저항없어/대통령관 장악싸고 강·온파 한때 신경전/강경파 “이제 대립은 끝… 과도정부와 협력” 【카불·페샤와르 외신 종합】 아프가니스탄의 수천명 회교반군들이 25일 수도 카불로 입성,대통령궁과 국방부 건물을 비롯,정부의 각 부처및 라디오·텔레비전 방송국등 주요시설을 무혈접수했다.이로써 아프간은 지난 13년여간 최소한 1백50만명을 희생시킨 내전을 종식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았다.아프간의 무자헤딘반군들간의 주도권싸움으로 유혈충돌이 우려되기도 했으나 온건파 마수드 휘하의 반군들이 이날 카불무혈입성에 성공했다.이에앞서 회교반군들은 24일 51인회교집권평의회구성 등 과도기 통치일정에 극적인 합의를 이끌어냈다고 발표한바 있다. ○…카불입성을 앞두고 강·온파간의 주도권 싸움으로 카불의 남북과 북문에 각각 온건파반군단체인 자미아티 이슬라미소속 반군과 헤즈비 이슬라미소속 강경파반군들이 배치돼 대통령궁 장악을 둘러싸고 한때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기도. 그러나 일부목격자들은 마수드 휘하의 반군들이 대통령궁과 국방부건물·카불공항을 장악한 반면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의 반군들은 내무부와 국회의사당을 접수한 것으로 25일 전했다. ○…반군들의 카불무혈입성이 있은 이날 카불시내의 주요거리는 트럭에 분승한 헤즈비 이슬라미소속의 회교반군들이 거리를 질주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으며 반군의 카불입성과 때를 같이해 일단의 시민들이 반군 깃발을 흔들며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이들을 환영하기도. ○군·경찰등 무장해제 ○…마수드의 온건반군파들은 나지불라대통령축출이후 비어있던 대통령궁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정부군들로부터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반군은 카불진입 과정에서 각 경찰서와 군부대를 장악하고 일부 정부군을 무장해제시켰다고 현지 모격자들이 전언. ○러시아대사관 포위 ○…반군들은 또 카불 북쪽 외곽지대에 위치한 러시아대사관을 포위했으나 대사관측이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카불주재 한 서방외교관이 전했다. 한편 아프간주재 러시아대사관은 2백50명이 넘는 자국인들을 긴급철수시켰으나 현재 25명의 외교관이 카불에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유엔사무총장은 26일 나지불라대통령의 신변보호문제를 논의하기위해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에서 반군지도자들과의 회담을 가질 예정. ○치안평의회 구성 ○…반군들의 거점인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에서는 반군들의 카불입성과 때를 같이해 카불의 치안책임을 담당하게 될 「6인지휘관」평의회가 구성됐다고 아프간 이슬람통신(AIP)이 이날 보도. AIP통신은 이와관련,일부 평의회 소속 지휘관들이 이미 카불에 도착한 상태라고 덧붙였다. 이와관련,카불정부의 압둘 와킬 외무장관은 연정구성합의를 환영한 고 말하고 정권이양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돼있다고 밝혔다.
  • 아프간 강경반군/「카불공격」 최후통첩/온건파에 내일까지 철수촉구

    ◎유엔선 특사파견… 평화해결 노력 본격화 【이슬라마바드·카불 로이터 AP 연합】 아프가니스탄의 강경 회교 반군단체 내부 분열설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강경파 헤즈비 이슬라미의 지도자 굴부딘 헤크마티아르는 22일 정부군과 온건파 반군인 자미아티 이슬라미의 전사들이 카불 주변 안전지역에서 24일까지 철수하지 않을 경우,카불을 공격할 것이라는 새로운 최후통첩을 보냈다. 헤크마티아르는 이날 헤즈비 이슬라미가 운영하는 방송을 통해 정부군및 자미아티 이슬라미 전사들에게 이같은 경고를 전달했다. 페샤와르에 본부를 둔 헤즈비 이슬라미의 대변인도 새로운 최후통첩 내용을 확인하고 이와 함께 오는 26일까지 권력을 반군 지도자 평의회에 이양치 않을 경우,카불을 공격할 것이라는 앞서의 최후통첩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혔다. 헤즈비 이슬라미의 또다른 관계자들은 헤크마티아르 휘하의 지휘관 5명이 21일 카불에서 회담을 갖고 카불 공격명령을 실행치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는 카불발 보도내용을 부인하면서 이같은 보도는 완전히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외교관들도 이와 관련,헤크마티아르가 점점 고립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하면서 헤즈비 이슬라미 병력들은 아마드 샤 마수드가 이끄는 반군 및 민병대 연합세력과 싸울 수 있는 충분한 전력을 갖고있지 못하다고 밝혔다. 달라루딘 하카니가 이끄는 수천명의 회교 반군들은 이날 카불 남쪽 1백㎞지점에 있는 나지불라 전대통령의 고향 가르데즈시를 점령했으며 카불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믿을만한 반군 소식통이 전했다. 한편 유엔의 아프간 특사인 베논 세반은 이날 카불정부를 이양받을 임시정부 구성을 제의한 마수드와 처음으로 회담을 갖고 마수드의 병력이 카불을 공격치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세반특사는 차리가르에서 열린 회담 후 이같은 다짐은 평화로운 해결을 위한 커다란 조치라고 말했다.
  • 한미연합야전사 7월 해체/월간 「서부전선」 보도

    한미연합사령부(CFC)예하의 한미연합야전군사령부(CFA·사령관 윌리암카펜터 미육군중장)가 오는 7월1일 해체된다고 CFA 월간신문 서부전선(Western Corridor)지가 보도했다. 지난 80년 의정부에서 창설된 CFA는 한반도의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해 한미연합군을 효과적으로 지휘하기 위해 설립된 사령부로 지휘관과 참모로만 구성된 병력1백여명 규모의 지휘부 부대이다.한미 양국은 지난해 11월 서울에서 열린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N)에서 CFA를 92년 7월해체하고 올해안에 한미연합사령관이 겸직해오던 한미연합사령부의 지상군구성군사령관(GCC)에 한국군 4성장군을 보임키로 합의했었다. 한미 양국의 합의에 따라 오는 7월1일 CFA가 해체되면 CFA의 명목상 편성됐던 미2사단과 한국군 2개군단이 한미연합사의 지상군구성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된다.
  • 부재자투표의 실상과 개선(사설)

    「3·24」총선직전부터 제기되어 선거자체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군부재자투표 부정시비에 대해 최세창국방장관은 3일 하오 일부 정신교육내용의 문제점을 빼놓고는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고 발표했다.이 발표대로 기표과정이나 사후표관리면에서 부정이 없었다면 참으로 불행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육군에서도 전장병의 98·5%가 고졸이상의 고학력자라서 공개투표행위는 상식밖의 일이며 서신검열기란 군부대에 없다는 점을 강조,이를 뒷받침하고있다.그러나 야당과 공선협 등이 이에 납득치않고 있는만큼 우선 그동안의 군자체조사내용을 보다 소상히 밝히도록 권고하고 싶다. 또 새로운 제보가 터져 나오고 있기 때문에 보다 엄정히 진상조사를 계속해야 할것이며 이미 조사한것도 재삼 확인조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이문제가 국민의 참정권과 관련된 중요한 것이고 따라서 국민다수가 사건의 추이를 주시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진상의 철저한 규명이야말로 모든것에 앞선다는 생각이다. 최장관이 『지금까지 제보된 사안에 대해 모든 수사력을 동원,철저히 조사하겠다』고 했고 『선거부정 개입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문책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기에 우리는 이를 믿고 하루속히 사실이 규명되기를 기대하고있다.지휘관의 사기문제나 사건이 몰고올 정치적 파장 등에 대한 고려에만 매달린다면 사실은 왜곡되기 쉽다. 그렇지만 국민의 입장에서는 군의 사기나 민군간의 이간등 여러가지 부작용에 대해 보다 진지한 고려가 있어야 할것이다.따라서 확실한 증거없이 정치적 공세에만 초점을 맞춰 건건이 부정사례라고 마구 고발아닌 고발을 하는것도 지양되어야 한다.우리는 과거 「컴퓨터부정선거」라는 야당의 허구적 공세에 직면했던 적도 있었다.만약 가상과 허구까지 고발이라는 미명아래 남발된다면 모두가 바라지않는 자해행위가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번 사건을 민주발전의 전기로 삼아야한다.그러기위해서는 당연히 진상이 규명되어야하고 그 토대위에서 처벌과 제도적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군은 엄정한 명령계통의 특수조직인만큼 지휘관의 조그만 실수라도 왜곡증폭될수가 있다.따라서 지휘관의 선거와 관련된 정신교육이나 그밖에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언행은 앞으로 당연히 자제되어야 마땅하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부재자투표의 공정한 관리를 위한 제도적 개선책도 법제화되어야 한다.입법의 주체인 국회의원들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군과 선관위 등의 의견 등을 수렴하고 국민이 바라는 방향으로 각종 선거법을 개정하는 것이 시급하다. 최장관은 이미 후방부대의 경우 영외투표,전방부대의 경우 선관위의 참관제도채택,그리고 심지어 군복무중 선거권유보 등의 방안을 제시했다.이중 선거권유보는 참정권의 제한이라는 점에서 찬성할 수 없으나 그밖의 방법은 고려할만 한것으로 보인다.이 모든 개선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도 빠르고도 엄정한 조사와 진상규명이 필요함을 거듭 강조한다.
  • 후방장병 영외투표 검토/“군부재자 공개투표주장은 사실무근”

    ◎최 국방,“현역병참정권 유보도 고려” 최세창국방부장관은 3일 『군의 엄정한 정치적 중립과 본연의 임무수행 여건보장을 위해서 의무복무중인 병사들에게 복무기간중에는 선거권을 유보하도록 법제화를 요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최장관은 이날 국방부 기자실에서 가진 군부재자투표와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현행 부재자투표제도는 군의 독자적 투표관리라는 특수성으로 결과와 상관없이 국민 뿐만 아니라 병사들에게조차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지적,『우리의 특수한 안보여건상 남미 일부국가들처럼 참정권을 유보하는 것이 군이 본연의 임무수행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최장관은 또 『군의 특성상 전방 오지에서 근무하는 장병들에 대해서는 선거관리위원회의 참관을 제도화하고 후방부대인 경우에는 영외에서 투표하여 일반 우체국을 이용하는 방법도 검토하고 있다』며 『중앙선거관리위원회나 입법기관·정당 등에서 이를 면밀히 검토하여 확실한 제도를 마련해준다면 군은 이를 충실히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최장관은 이어 『현행 제도하에서는 앞으로 어떤 형태의 선거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군은 불신을 면할 수 없다』며 『제도 자체에 불신의 요소가 있다면 마땅히 고쳐져야 한다』고 밝혔다. 최장관은 군부재자투표 수사결과에 대해 『지금까지 국방부와 각군의 수사결과 부재자투표 과정에서 공개투표·기표확인·대리투표 등 부정선거가 조직적으로 자행됐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으로 확인됐다』고 밝히고 『병사들이 기표후 중대장이나 인사계가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투표함 이송중 기표확인이나 서신검열기라는 기계는 우리 군 어디에도 없다』고 밝혔다. 최장관은 그러나 『일부 부대 지휘관들이 정신교육을 하는 과정에서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을 한 것은 조사결과 일부 사실로 확인됐다』고 시인하고 『방공포사령관의 교육내용이 과격한 표현과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했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었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최장관은 끝으로 『일부 부대에서 본의 아니게 물의를 일으켜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 드린데대해 국방을 책임지고 있는 장관으로서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했다.
  • “국민신뢰 회복의 전기로”/국방부 「사과성명」 발표 안팎

    ◎“일부 부대서 물의일으켜 송구스러워” 최세창국방부장관이 3일 군부재자투표와 관련,『사실여부를 떠나 국방책임자로서 국민들에게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는 내용의 사과성명을 발표하게 된 배경은 군이 14대 총선을 계기로 입은 명예실추를 회복하고 하루빨리 본연의 임무에 정진하도록 하기위한 고육지책으로 풀이된다. 이지문중위의 「양심선언」직후 『지금이 어느때인데 군에서 그런일이 있을수 있느냐』고 단호히 부정하던 최장관으로서는 사건이 의외로 확산되자 부정여부를 떠나 국방책임자로서 진화를 위한 입장표명이 시급한 실정이었다. 최장관은 취임초부터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고 정치인의 군부대방문 금지지시를 내렸으나 총선이후 군이 매도되는 상황에 이르자 후방장병 영외투표는 물론 극약요법으로 군복무중 선거권을 유보하는 것까지 제의했다. 선거권을 유보하는 것은 헌법위반이라는 지적이 국방부 내부에서도 있었으나 현행제도 자체에 불신의 요소가 있다면 이를 과감히 고쳐서 더이상 군이 정치에 이용되는 악습을 막아야 하겠다는 것이 국방당국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최장관은 이날 발표하기 전 김진영육군참모총장,한주석공군참모총장 등과 만나 9사단,공군방공포사령부,해병2사단에 대한 조사결과와 지휘책임을 묻는 문제를 검토했으나 뚜렷한 부정사례를 발견하지 못해 고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관계자들은 이번 장관의 발표를 계기로 악성유언비어에 말려들지 않고 군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최세창국방장관 일문일답 ­의무복무중인 사병에 대해 투표권을 유보하자는 주장은 장관의 개인적 소신인가,군의 의견을 수렴한 것인가. ▲내 개인적 생각이다.군부재자투표가 더이상의 말썽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제도가 어떻겠느냐고 생각해 제의한 것이다.최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상보다 진전된 내용이 없는데. ▲사실이 이정도다.수사를 하고난 결과다. ­이것이 최종수사발표인가,중간발표인가. ▲9사단등 해당되는 3개부대 수사는 최종적인 것이다.나머지 제보에 대해서는 계속 수사할 것이나 시간이 다소 걸릴 것같다.­인책 범위는. ▲인책 범위에 대해서는 현재로선 얘기할 수 없다. ­방공포사령관에 대한 인책은. ▲녹음 내용을 들어본 결과 선거법 위반까지 될 정도의 발언은 없었다.지휘관으로서의 소신을 강하게 표명한 것 뿐이다.그러나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아 시정토록 했다. ­이 정도의 수사발표로 사회적 파문을 진정시킬 수 있다고 보는가. ▲앞으로도 제보 내용에 대해서는 계속 수사할 방침이다. ­언론의 성격상 제보자의 신변보장을 위해서는 익명으로 표시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익명 제보자를 일일이 수사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본다. ­발표내용 수준을 놓고 국방부와 육군간에 이견이 있었다는데. ▲그 말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이번 문제로 사표를 낼 용의는 없는가. ▲언제든지 책임을 지고 물러날 용의가 있다.
  • 미군에 “북핵대비” 지시/파월 미합참의장

    【로스앤젤레스 연합】 콜린 파월 미합참의장은 23일 샌디에이고지역의 해병특수전투비행단에서 주요 작전지휘관회의를 주재한뒤 『중동과 북한의 핵사용에 대비,미공수특전요원들은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소식통에 따르면 파월의장은 이날 특수전투훈련을 하고 있는 해병전투비행단 부대원들을 격려하고 장병들에게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면서 『한국의 정치권에서는 평화통일을 염원하면서 북한과 대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그것은 매우 힘들 것이며 군인이 보는 시각은 다르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미해병대는 이달초부터 3주째 샌디에이고 지역에서 강도 높은 신속침투 및 방어훈련을 실시중인데 이 훈련이 중동국가나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지 않을 때를 대비한 훈련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군 부재자투표부정 있을수없다/최국방/「이중위 발언」명확히 규명”

    최세창국방부장관은 23일 하오 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장관이 부정선거를 지시했다는 야당측의 주장은 사실무근이라는 반박성명을 발표했다. 최장관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군이 공명선서를 치르기 위해 노력해온 상황에서 공개투표·기표확인등 부정선거는 있을수 없는 일』이라며 『야당측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간과할수 없어 반박성명을 내기로 했다』고 말했다. 최 장관은 이어 『군의 부정선거주장은 군의 사기와 기강에 영향을 미칠만큼 중대한 문제』라고 전제,『군대에 대한 신뢰 실추및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도 사건의 전말을 명확히 규명하겠다』고 말했다.
  • 일부 군장성 인사권 장관에 위임/해병대,11개병과로 부활

    ◎조종사 복무 연장·하사관처우 개선/국방부,군사법개정안 마련 국방부는 21일 지금까지 대통령이 임명해오던 소장급 장성인사의 일부를 국방장관·합참의장·각군총장에게 위임하고,군주요지휘관인사에서 각군총장은 합참의장과 사전협의를 거치도록하며,해병대의 병과를 부활하는 것등을 골자로하는 군인사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국방부는 이 개정안을 법제처 심의를 거친뒤 5월중 국무회의 의결을 받아 14대 임시국회에서 처리되는 대로 시행할 방침이다. ◇인사제도개편=대통령이 임명해오던 ▲국방정신교육원장·국방참모대학총장(소장급) ▲육·해·공군대학장(소장급)외 8개 교육기관장 ▲해외공관의 국방무관(대령이상 준장)의 인사권은 국방장관과 각군총장에게 위임한다. ◇복무기간연장=공군조종사와 기술하사관의 의무복무기간을 장기의 경우 10년에서 15년으로,단기의 경우 7년에서 12년으로 5년씩 연장한다. ◇하사관처우개선=국립묘지에 하사관 묘역을 신설하고 장교로만 구성된 하사관진급심사위원회에 하사관도 포함시켜 심사의 객관성을 유지한다. ◇해병병과부활=73년 이후 해군의 단일병과인 「해병과」를 보명·포병·기갑·공병·통신·항공·정훈·수송등 11개 병과로 부활한다. ◇해군복제환원=지난88년 새로운 복제안에 따라 폐지됐던 국제표준형인 해군복제를 88년이전 상태로 환원한다.
  • “83년 KAL기 격추명령자는/현 CIS군 코르누코프장군”

    ◎러시아 언론인 밝혀 【모스크바 연합】 지난 83년 9월1일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대한항공 보잉 747기에 대한 발포명령자가 처음으로 밝혀졌다. KAL기 사건 진상을 수년째 추적하고 있는 이즈베스티야지의 안드레이 일레슈 편집위원은 19일 연합통신과 가진 인터뷰에서 격추명령을 직접 내린 지휘관은 현재 CIS통합군 총사령부(구소련 국방부격)에서 고위직책을 맡고 있는 코르누코프 상장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일레슈 위원은 코르누코프 장군이 당시 공군소장으로 사할린 지구 항공대 사령관이었다고 말하고 그의 독자적인 명령에 의해 KAL기가 격추된지 40초후에 크렘린에서 하바로프스크를 경유,영공 침범기를 격추하라는 명령이 현지 사령부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 「캄」 공격중단 요구에/크메르루주서 거부

    【프놈펜 AFP 로이터 연합】 캄보디아 4개 정파의 하나인 크메르 루주는 14일 캄보디아 중부 전략요충지인 콤퐁송 주변지역에서의 전투를 중단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고 유엔평화유지군의 한 지휘관이 밝혔다.
  • CIS 모든 부대/분쟁지역서 철수/러시아 부통령

    【모스크바 로이터 연합】 알렉산드르 루츠코이 러시아 부통령은 카프카스산맥 이남 지역의 분쟁 국가들로부터 독립국가연합(CIS)군의 모든 부대를 철수시킬 것을 군부에 제의했다고 CIS군 고위 장성이 9일 밝혔다. 예브게니 샤포슈니코프 CIS군 최고사령관의 보좌관인 니콜라이 스톨리아로프 소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루츠코이 부통령이 군지휘관들 및 러시아 정치인들과 전화통화를 갖고 이같은 제의를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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