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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군 ‘2008 환태평양훈련 분대’ 귀항

    태평양 연안 최대 규모 군사훈련인 ‘2008 환태평양훈련(림팩)’에 참가했던 해군 훈련분대가 22일 부산으로 귀항했다. 이날 부산 해군작전사령부에서 열린 귀항식에는 해군장병과 가족 등 1000여명이 참석해 지난 6월9일 출항,75일만에 귀항한 림팩분대 장병 500여명을 환영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옥근 해군참모총장이 대신 읽은 환영사에서 “해군은 바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분쟁이나 테러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어 “이번 훈련은 태평양에서 안전한 바닷길을 확보하고 세계적인 테러위협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면서 “세계 최대의 연합 해상훈련에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우리 해군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격려했다. 한국형 구축함인 문무대왕함(4200t급)과 양만춘함(3200t급), 잠수함 이순신함(1200t급), 해상초계기(P-3C)와 대잠헬기(LYNX) 등으로 구성된 림팩분대는 태평양 하와이 근해에서 미국, 일본, 호주 등 9개국 해군과 대잠전, 대공전, 유도탄전 등 다양한 훈련을 전개했다. 특히 문무대왕함과 양만춘함은 무인항공기를, 이순신함은 퇴역구축함을 각각 표적으로 함대공 유도탄 및 잠대함 유도탄(Harpoon) 사격 훈련을 4차례 실시해 모두 성공했으며 한국, 미국, 싱가포르 등 3개국 함정으로 구성된 수상전투단 지휘관 임무를 수행했다고 해군은 전했다. 올해로 21번째를 맞는 림팩은 태평양 연안 국가간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고 국지적 해상분쟁 및 테러에 공동 대처하기 위해 미국 3함대 사령부 주관으로 2년마다 실시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연합 해군훈련이다. 한국은 1990년 이후 올해로 10번째 참가했다.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5) 남한산성의 나날들(Ⅳ)

    [병자호란 다시 읽기] (85) 남한산성의 나날들(Ⅳ)

    조선이 청군 진영에 보낸 국서에서 처음으로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호칭을 쓰고, 과거의 ‘잘못’을 사과했지만 청군 진영에서는 회답이 없었다. 조선 조정은 초조해졌다.‘황제’로 인정하고 ‘잘못’을 사과하면 화친이 쉬이 이루어질 것으로 알았던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청군의 입장에서는 바로 답장을 해 줄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조선의 국서 내용이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다.‘황제’로 불렀으되 심복(心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시간은 청군 편이었다. ●그 많던 닭들은 어디로 갔을까? 청측의 회답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1637년 1월6일, 강원도관찰사 조정호(趙廷虎)와 함경도관찰사 민성휘(閔聖徽)가 올린 장계가 들어왔다. 조정호 휘하의 군병이 용진(龍津)에 머물며 대오를 수습하고 있다는 것, 함경도의 병력이 김화(金化)에 도착하여 산성을 구원할 채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 내용이었다.1월7일에는 도원수 김자점, 황해병사 이석달(李碩達),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이 보낸 장계도 도착했다. 하지만 모두 ‘남한산성을 구원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만 있을 뿐 언제, 어떻게 산성 쪽으로 진군해 온다는 내용은 빠져 있었다. 1월8일, 답답해진 인조는 영의정 김류 등을 불렀다. 인조는 신료들에게 비변사에서 마련한 대책이 있느냐고 물었다. 신료들은 할 말이 없었다. 김류가 나섰다.“밤낮으로 생각해 보아도 뾰족한 대책이 없습니다. 그저 바깥의 구원을 기다릴 뿐입니다.” 김류는 그러면서 적진에 사람을 다시 보내 회답을 독촉하자고 건의했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신료들의 이야기에 인조도 할 말이 없었다.“병졸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성을 굳게 지키는 것이 급선무일 뿐이다.”라고 말했지만 도무지 힘이 실리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병사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는 것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식량을 비롯한 물자들은 하루하루 떨어져 가고 있었다.‘병자록(丙子錄)’‘양구기사(陽九記事)’ 등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들을 보면 예외 없이 ‘닭다리’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이때 전하께서도 침구가 없어 옷을 벗지 않고 주무셨다. 밥상에도 반찬으로 다만 닭다리 하나를 놓았다. 전하께서 전교하시기를,‘처음에 들어왔을 때에는 새벽에 뭇 닭의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지금은 그 소리가 전혀 없고 어쩌다 겨우 있다. 그것은 필시 나에게 닭을 바쳤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닭고기를 쓰지 말도록 하라.” 인조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반찬이 닭다리 하나뿐인 처지에서 어느 겨를에, 또 무엇으로 장졸들을 어루만질 것인가? ●참혹한 소식들 산성 안에서는 추위와 물자의 고갈을 걱정하고 있었던 데 비해 산성 바깥의 백성들은 청군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바깥소식을 전했던 사람들의 증언 내용은 참혹했다. 적진에는 포로로 잡힌 부녀자들이 무수히 많고, 적진 바깥에는 어린 아이들의 시신이 수도 없이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병자년 연말 이후 몽골병을 비롯한 청군의 겁략(劫掠)이 본격화되면서부터 나타난 참상이었다. 당시 청군은 서울 주변에서 포로를 획득하는 데 열중했다. 그 와중에 성인 남자들에 비해 기동력이 떨어지는 부녀자와 아이들 상당수가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청군은 특히 젊은 여자들을 사로잡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다시 서술하겠지만, 인조에게 항복을 받고 심양으로 귀환했던 청군 지휘부 내부에서 나중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 ‘조선 여성 포로’와 관련된 사안이었다. 청군의 대소 지휘관들 사이에서, 조선에서 포로로 잡아 끌고 온 젊은 여성들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뺏고 빼앗기는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젊은 부녀자를 데려가려는 그들에게, 여자에게 딸린 아이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어미는 진중으로 끌고 들어가고 아이는 죽이거나 바깥에다 유기하는 참혹한 상황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아무리 참혹해도 포위된 산성에서 조정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적과 결전을 벌일 능력도, 화친을 이룰 전망도 불투명한 처지가 되자 신료들은 다른 곳에서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시도했다.1월8일, 예조는 온조왕(溫祚王)에 대한 제사를 다시 지내자고 청했다. 이미 한 번 지냈지만 정성이 부족했다며 중신을 보내 성의를 다하여 온조왕에게 가호(加護)를 빌자고 청했다. 예조는 또한 원종(元宗·인조의 生父 定遠君)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숭은전(崇恩殿)에도 신료를 보내 제사를 지내자고 했다. 인조는 숭은전에서 올리는 제사는 자신이 직접 주관하겠다고 나섰다. 포위된 성에서의 곤경이 길어지자 이러저런 이상한 행동을 벌이는 자들도 나타났다. 어영별장(御營別將) 김언림(金彦琳)이 보인 행태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1월9일 밤, 청군 진영을 습격하여 적의 수급(首級)을 베어오겠다며 성을 내려갔다. 이튿날 새벽, 그는 수급 두 개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인조는 그가 세운 공을 가상히 여겨 면주(綿紬) 세 필을 상으로 내렸다. 그런데 그가 들고 온 수급 하나가 이상했다. 수급의 살은 얼어 있었고, 피를 흘린 흔적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수급의 모양이 청군의 머리처럼 보이지 않았다. 모두 의아해하고 있는데 출신(出身) 권촉(權促)이 수급 앞에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형 권위(權偉)의 수급이라는 것이었다. 권위는 며칠 전 북문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당시까지 시신을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권촉은 형의 수급을 자신이 모셔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애걸했다. 주변의 장졸들은 경악했다. 김언림은 청군의 수급이 아니라 조선군 시신에서 목을 베어 왔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김언림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놓고 논란을 벌이다가 결국 ‘효시경중(梟示警衆·목을 베어 매달아 군사들을 경계함)’하기로 결정했다. 이렇다 할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성안의 장졸들에게는 여전히 용맹함이 강조되고 있던 분위기에서 빚어진 참혹한 ‘해프닝’이었다. ●다시 ‘재조지은’을 강조하다 1월 초 남한산성의 동문(東門) 부근으로 진출하여 탐색전을 벌이던 청군은 1월11일까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농성 중인 조선 조정의 의도와 예상되는 향후 동향을 분석하는 한편 강화도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청군은 1월11일부터 산성 주변에 대한 압박을 다시 강화하기 시작했다. 헌릉(獻陵)과 탄천 일대에 있던 병력 가운데 1만여명을 차출하여 수원과 용인, 여주와 이천 방면으로 각각 다시 배치했다. 근왕병이 남한산성으로 접근하는 것을 더 확실하게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동시에 산성의 북문과 서문 앞에 병력을 증강 배치했다. 상황은 더 엄혹해졌다 1월12일, 최명길 등이 국서를 들고 다시 청군 진영으로 갔다. 앞서 전달한 국서에 대한 회답이 없던 상황을 타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다시 써서 들고 간 국서의 내용 또한 공순했다.‘소방은 바다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시서(詩書)만 일삼았지 전쟁은 몰랐습니다. 약국이 강국에 복종하고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어찌 감히 대국과 맞서겠습니까? 잘못을 용서하고 스스로 새롭게 될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면 대국을 받들고 자손 대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머리를 숙였다. 문제는 명과 관련된 사항을 언급한 부분이었다.‘일찍이 임진년의 환란으로 소방이 곧 망할 뻔했을 때 명의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소방의 백성들은 그 은혜를 깊이 새겨 차마 명나라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조선은 ‘명이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베풀었듯이 청도 그렇게 해 달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청은 이미 ‘명=천하’라는 인식을 팽개쳐 버린 지 오래였다. 어렵사리 고쳐 쓴 국서 속에 담긴 ‘재조지은’을 해석하는 문제를 놓고 조선과 청은 새로운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2) 남한산성의 스산한 연말

    [병자호란 다시 읽기] (82) 남한산성의 스산한 연말

    포위된 이후 남한산성 사람들은 바깥 소식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했다. 근왕병이 근처까지 와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거나 패하여 물러갔다는 소식이 잇따라 들려오면서 산성의 분위기는 침울해졌다. 날로 어려워지는 산성의 사정을 바깥에 정확히 알리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청군이 산성 주변에 설치한 목책 때문이었다. 청군은 소나무를 베어 만든 목책과 목책 사이에 새끼줄을 연결하고 방울 등 쇠붙이를 매달았다. 조선군 전령이 목책을 넘으려 하면 어김없이 매복한 청군이 뛰쳐나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목책은 서서히 산성의 ‘목줄’을 조여오고 있었다. ●‘술과 고기’의 굴욕 12월27일 조정은 청군 진영에 술과 고기를 보냈다. 세시(歲時) 인사를 하면서 적정(敵情)을 떠보려는 깜냥이었다. 대사간 김반(金槃), 승지 최연(崔衍), 교리 윤집(尹集) 등은 격렬히 반발하며 적진에 사람과 선물을 보내자고 주장한 자의 목을 치라고 촉구했다. 인조는 김반 등의 주장을 일축했다. 대신을 보냈다가 혹시라도 억류될까봐 하급 관원을 한 사람 골랐다. 이기남(李箕男)이 그였다. 이항복(李恒福)의 서자인 그는 영리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는 소 두 마리와 돼지 세 마리, 술 10병을 갖고 청군 진영으로 갔다. 하지만 영리한 그도 청군 진영에서 주눅이 들었는지 실언을 하고 말았다. 연말 인사차 왔다고 했으면 되었을 것을,‘날씨도 추운데 우리 전하께서 옛정을 잊지 못해 특별히 술과 고기를 보냈다.’고 했다. 청군 장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비아냥거렸다.‘하늘이 조선 팔도를 우리에게 주었으니 술과 고기 등 모든 물자가 다 우리 것이다. 국왕은 지금 골짜기에 갇혀 있고 안팎이 가로막혀 신하들은 모두 굶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문득 획득한 물품을 국왕에게 보내려던 참이었는데 지금 이 술과 고기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다. 도로 가져가 굶주린 너희 신료들에게나 주어라.’ 그러면서 청군 장수들은 조선 근왕병들을 격퇴했다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자신들의 성세(盛勢)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이기남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적정을 엿보려고 갔다가 도리어 적이 산성 내부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한 셈이 되고 말았다. 이기남이 돌아온 직후 독전어사(督戰御史) 황일호(黃一皓) 등이 인조를 뵙자고 청했다. 황일호는 인조에게 빨리 공격하여 적의 기세를 꺾자고 촉구했다. 그는 당시 형세를 ‘주객(主客)이 뒤바뀐 상태’라고 진단했다. 청군은 병력과 목책으로 산성을 포위한 채 느긋하게 ‘주인’이 되어 기다리고 있는데, 아군은 근왕병도 들어오지 못하고 날로 피폐해져 가는 산성에서 ‘객’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황일호는, 병사들은 사기(士氣)를 먹고 사는데 이런 식으로 시간만 보내다가는 가만히 앉아서 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혹독한 추위 막을 가마니조차 부족 1636년 연말, 산성의 조선군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추위였다. 망루에 올라가 있는 군사들의 손이 곱아 활시위를 당기는 것은 고사하고, 서로 말도 제대로 나눌 수 없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유일한 ‘방한복’이라 할 수 있는 빈 가마니(空石)조차 모든 병사들에게 지급할 수 없는 것이 당시 사정이었다. 황일호는 산성의 주민들에게 벼슬을 팔거나 면천첩(免賤帖)을 팔아서라도 병사들에게 군막(軍幕)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지 않으면 병사들이 얼어죽을 것이고, 아무도 싸우려 들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자기 몸을 가리고, 자신의 입에 풀칠하기에도 겨를이 없는 산성 주민들에게 무슨 물자가 있을 것인가. 도무지 해답이 떠오르지 않는 상황이었다.12월28일, 술사(術士) 몇 사람이 ‘오늘은 싸우든 화의(和議)를 하든 모두 길한 날’이라고 일진(日辰)을 뽑았다. 도체찰사 김류는 술사들의 얘기에 솔깃해졌다. 독전어사 황일호 등으로부터 빨리 결전해야 한다는 건의도 들었던 터라 병력을 뽑아 적을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이튿날 김류는 산성 북문 아래 골짜기에 있는 적진을 공격했다. 노살(勞薩) 등이 이끄는 청군은 골짜기 여기 저기에 병력을 매복시키고 ‘미끼’를 던졌다. 다름 아닌 포로로 잡은 조선인 노약자들과 가축들이었다. 그들을 본 김류는, 달려 내려가 공격하면 조선인 포로와 가축들을 구해올 수 있다고 여겼다. ●패전 책임 하위 무관에 전가해 원성 김류는 체찰부(體察府) 소속 장졸들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일부 장졸들은 ‘함정’일 수 도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고 몸을 사렸다. 그러자 체찰부의 비장(裨將) 유호(柳瑚)가 군율을 적용해야 한다고 김류에게 건의했다. 유호는 머뭇거리는 장졸들에게 김류가 건네준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억지로 떠밀린 장졸들은 할 수 없이 달려 내려갔다. 매복한 청군은 처음에는 조선군이 포로와 우마(牛馬)들을 거두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적진이 비어 있다고 착각한 조선군 수백 명이 쏟아져 내려오자 청군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혼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조선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미 청군이 만든 ‘함정’에 빠져 당황하고 있는 상황에서 갖고 있던 화약도 금세 떨어지고 말았다. 적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오판하여 애초부터 화약을 조금밖에 지급받지 못한 탓이었다. 화약을 더 달라는 고함과 아우성 속에 조선군은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산성 쪽에서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김류는 조선군이 섬멸당하는 장면을 보고서야 초관(哨官)을 시켜 퇴각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청군의 칼날 앞에서 유린되고 있는 장졸들이 가파른 오르막을 뛰어올라 퇴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극소수의 장졸들만 겨우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한마디로 ‘대형 사고’였다. 별장 신성립(申誠立), 지학해(池學海), 이원길(李元吉) 등 중견 지휘관 8명을 비롯하여 300명 이상이 전사했다. 가뜩이나 정예병이 부족한 산성의 현실에서 이들의 죽음은 너무 큰 손실이었다. 즉흥적이고 섣부른 작전이 부른 비극이었다. 그러나 패전의 진상 파악과 책임자에 대한 처벌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호는 전사자가 40명 정도라고 축소하여 보고했다. 김류와 유호의 책임이 제일 컸지만, 군사들을 제 때 물리지 못한 과오는 김류의 퇴각 명령을 전한 초관에게 전가되었다. 그는 참수되었다. 또 혼전 중인 조선군을 제 때 구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북성장(北城將) 홍두표(洪斗杓)를 죽이려고 시도했다. 홍두표는 신료들의 구원으로 죽음을 겨우 면했지만, 패전 책임이 엉뚱하게 전가되는 와중에 병사들의 원성은 높아졌다. ●홍타이지, 남한산성 압박 본격화 이 싸움을 계기로 군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이제 누구도 나가서 싸우자는 말을 함부로 꺼내지 못했다. 더욱이 12월29일, 남하하던 홍타이지는 휘하 장수들을 먼저 도성으로 들여보내 숨어 있는 사람과 가축들을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자신은 직접 남한산성 근처로 나아가 인조를 더욱 압박할 심산이었다. 12월30일은 바람이 몹시 불고 음산한 날이었다. 이날 하루 종일 청의 대군이 광나루, 마포, 헌릉(獻陵) 등지에서 이동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산성에 대한 본격적인 압박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인조는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김류는 패전에 대해 사과하고, 적진에 사람을 보내자고 청했다. 패전을 계기로 다시 화의를 추진하려는 심산이었다. 김상헌이 당장 제동을 걸었다. 사간원 신료들도 오랑캐 진영에 사람을 보내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것도 어렵고, 저것도 되지 않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나만갑의 ‘병자록(丙子錄)’에 따르면 이 날 행궁 근처에 까치들이 모여들여 집을 지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보며 길조(吉兆)라고 좋아했다.‘길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디에선가 근왕병이라도 나타나 청군의 포위를 뚫고 산성의 난국을 타개해 줄 것을 암시하는 것인가. 실의에 빠진 산성 사람들은 까치집을 바라보며 그런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길조’가 나타난 이 날, 홍타이지는 탄천(炭川) 주변에 자신이 머물 진영을 설치했다. 1636년 12월30일, 남한산성 주변의 풍경은 스산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경찰, 인권위 ‘복무전환 구제’ 반발

    ‘육군 복무 전환’을 신청한 이모(22) 상경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의 긴급구제조치 권고에 대해 서울지방경찰청은 “인권위의 권고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25일 밝혔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이날 “외출·외박 제한에 대한 지적은 접어두고라도 인터넷 사용을 금지한 것은 문제없다.”면서 “인권위는 이 조치가 경찰청 내부지침에도 없다고 하지만 지휘관은 부하의 부적절한 행동에 상응하는 조치를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이 상경이 인터넷을 통해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데 가만히 있을 지휘관이 어디 있겠냐.”고 반문했다.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참사 부르는 軍 안전불감증

    장대비가 쏟아진 강원도 양구군 남면 적리 소재 육군 모 부대에서 배수로 작업을 하던 병사 2명이 산사태로 숨지는 어이없는 사고가 발생했다. 경북 포항의 해병대 해안초소가 붕괴돼 장병 3명이 숨지는 사고가 벌어진지 불과 이틀만에 이같은 참사가 또다시 벌어져 군의 안전불감증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강원 양구서 산사태로 장병 2명 사망 지난 24일 오후 6시20분 강원 양구군 남면 적리 육군 모 부대에서 산사태가 발생해 장기만(24) 하사와 전중일(22) 병장 등 2명이 흙더미에 매몰돼 숨졌다. 또 매몰된 병사들을 구조하던 김모(35) 상사와 이모(30) 대위 등 2명이 탈진해 군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장병 2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부대의 매몰현장은 25일 삽과 곡괭이 등 작업도구와 주인 잃은 슬리퍼가 어지럽게 널려 있어 사고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이번 사고는 집중 폭우가 예견됐던 상황에서 빚어진 참사였다. 결국, 장병 안전에 대한 군 지휘관들의 무관심과 열악한 병영 환경이 만들어낸 인재(人災)인 셈이다. 이상희 국방장관은 전날 밤 합참 지휘통제실에서 육·해·공군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과 화상회의를 갖고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장병들에게 작업을 시켜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국방부도 해병대 초소 붕괴에 이어 이번 사건이 터지자 지난 24일부터 이선철 군수관리관을 본부장으로 재난대책상황실을 가동하고 있으며, 재난대비 수준을 비상단계인 3단계로 높였다. 그러나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장병들에겐 ‘사후약방문’에 불과했다.●국방부 뒤늦게 재난대책상황실 가동 어이없는 참사가 잇따라 발생하자 국방부 홈페이지와 포털사이트 댓글난에는 군의 안전불감증을 비난하는 글이 줄을 이었다. 한 네티즌은 “어떻게 지은 지 30년 넘은 초소에서 보초를 세우고, 장대비가 쏟아지는데도 작업을 시키는가.”라며 “지휘관들이 조금만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참사였다.”고 분통을 터트렸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1) 근왕병이 패하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81) 근왕병이 패하다 Ⅱ

    당시 근왕병들이 처해 있던 열악한 상황을 고려하면,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을 구원하는 것은 애초부터 여의치 않은 일이었다. 우선 지방의 감사나 지휘관들이 병력을 모으고 행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소집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했고, 날씨가 추워 행군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병사들은 대부분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 문관 출신이 많았던 지휘부 또한 전문적인 군사지식이나 병법(兵法)에 익숙한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청군을 만나면 겁먹고 진군을 꺼리거나, 한 번 패할 경우 부하들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주도면밀한 청군의 편제 병자호란 당시 조선 침략에 투입된 청군은 크게 4개 군(軍)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마부타(馬福塔)가 이끄는 선봉 부대는 압록강을 건넌 뒤 대로를 따라 곧바로 서울로 입성하여 인조를 사로잡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특히 서울과 강화도의 연결을 차단하여 조선 조정이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다. 예친왕(禮親王) 도도(多鐸) 등이 지휘하는 좌익군(左翼軍) 3만은 선봉대의 뒤를 받치며 서울로 입성하여 서울과 삼남 지방의 연결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홍타이지가 직접 이끌었던 본진(本陣) 5만 4000은 좌익군의 뒤를 따라 남하하면서 의주, 안주, 평양, 황주 등지의 산성을 공략하고 인축(人畜)을 획득하는 임무를 맡았다. 예친왕 도르곤(多爾袞) 등이 이끄는 우익군(右翼軍) 2만 2000은 벽동(碧東), 창성(昌城) 등지의 성들을 공략한 뒤 임진강을 건너 강화도로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선봉대의 돌격을 통해 조선 조정이 강화도나 삼남 지방으로 파천하는 것을 차단한 뒤, 후속 부대를 남하시켜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서 전쟁을 끝내겠다는 복안이었다. 아직 명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속전속결로 조선의 항복을 받아 내겠다는 깜냥이기도 했다. 조선군은 초전에 이미 마부타가 이끄는 선봉군의 위세에 눌려 전의를 상실했다. 무엇보다 그들 철기(鐵騎)의 가공할 만한 전진 상황을 조정에 제 때 알리지 못하고, 또 돌격을 적절히 저지하지 못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 청군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군대였다. 병자호란을 일으키기 전까지 여러 차례 서정(西征)을 통해 명군이나 차하르(察哈爾) 몽골군과 싸워 실전 감각이 뛰어났다. 청군은 원정에 나설 때나, 명군과 그냥 대치하고 있을 때나 일상적으로 복병을 파견하여 적군 주둔지 주변의 사람을 포로로 잡아 납치했다. 이른바 착생(捉生)이 그것이다. 포로를 신문하여 적군과 관련된 정보를 정확하게 알아 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착생’은 어김없이 반복되었다. ●김자점 부대의 패퇴와 관망 조선 조정은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돌격에 대비하기 위해 이른바 청야견벽(淸野堅壁) 작전을 구상했다. 청군이 이동하는 대로(大路) 주변의 병력과 백성들을 인근 산성으로 몰아 넣고 수성전(守城戰)을 꾀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 작전은 청군 선봉대로 하여금 거의 무인지경의 상태에서 돌격할 수 있게 방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졸지에 기습을 당한 서울은 공황 상태에 빠지고, 대로 주변 산성에 있던 조선군이 거꾸로 청군을 추격하여 서울로 올라 와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상경하려는 조선군은, 뒤따라 오는 청군의 본진과 좌우익군의 공격에 다시 노출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일찍이 1619년 ‘심하(深河) 전투’에 참전하여 패한 뒤, 후금에서 포로 생활을 경험했던 이민환(李民 은 조선군 방어 태세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청야견벽 작전만으로는 청군의 돌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실제 의주에서 개성으로 이어지는 연변에 위치한 산성들은 대부분 대로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청군이 산성 공략을 늦추고 서울을 향해 곧바로 남하할 경우 속수무책의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민환은 조선군도 적정한 수준의 기마병을 배치하여 그들의 돌격을 저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민환의 경고처럼 대로에서 적을 제대로 차단하지 못한 후유증은 그대로 나타났다.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군을 비롯한 서북 지역의 병력 대부분이 청군의 후미를 쫓아야만 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초기, 김자점은 황주의 정방산성(正方山城)에 주둔하고 있었다. 마부타가 이끄는 청군 선봉대를 그대로 놓아 주었던 그는 12월14일, 봉산(鳳山) 북쪽의 동선역(洞仙驛)에서 청 좌익군을 공격하여 소소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이끄는 대군이 남하하자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병력 수천을 이끌고 토산(兎山)으로 이동했다. 토산에서도 김자점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척후병을 두지 않은 채 안이하게 행군하다가 12월25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의 기습에 휘말린 것이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은 행군하면서 수시로 ‘착생’을 통해 조선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도르곤은 중화(中和)에서 조선인 포로를 신문하여 김자점 군의 이동 경로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에 대한 정보력의 차이는 그대로 승패에 반영되었다. 약 5000명에 이르던 김자점 군은 졸지에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김자점은 단기(單騎)로 도주하여 전장을 피했다. 선봉장 이완(李浣)이 이끄는 어영청(御營廳) 포수들이 분전하여 적장 한 사람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지만, 이미 주장(主將)이 도주한 상황에서 전세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자점은 결국 남은 어영군 병력을 수습하여 양근(楊根)의 미원(迷原)으로 이동했다. 당시 미원에는 김자점 부대말고도 강원감사 조정호의 부대, 북한산 전투에서 패한 뒤 이동해온 유도대장(留都大將) 심기원(沈器遠) 부대 등이 합류했다. 모두 합치면 1만 7000에 달하는 적지 않은 병력이었다. 남한산성에 있는 인조와 조정은 이들이 청군의 포위를 뚫고 산성으로 들어와 주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김자점 부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청군이 이천과 여주 지역을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청군의 포위를 뚫어 보겠다는 의지가 약한 점이었다. ●전라도 근왕병의 승리와 철수 당시 일어났던 근왕병 가운데 두드러진 활약을 벌였던 부대가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이 이끌던 전라도 병력이었다.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종군했던 김준룡은 1637년 1월4일, 병력 2000을 이끌고 수원 광교산(光敎山)으로 이동했다. 김준룡 부대는 산 주변에 목책을 설치하여 청군의 돌격을 차단했다. 그리고 화기수를 전면에, 사수(射手)와 창검병을 후면에 배치하여 청군의 공격에 대비했다.1월5일, 청군 지휘관 양고리(楊古利)가 5천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해 오자 김준룡 부대는 집중 사격을 가하여 그들을 격퇴했다. 이튿날 양고리가 병력과 화력을 증강하여 다시 공격해 왔다. 이번에는 호준포(虎砲)까지 동원하여 조선군 진영에 맹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선방하던 조선군은, 저녁 무렵 청군이 광교산의 후방을 우회하여 광양현감 최택(崔澤)이 맡고 있던 방어선을 급습하면서 수세에 몰렸다. 김준룡은 최택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유격군을 이끌고 청군을 향해 돌격했고, 전투는 순식간에 혼전 양상으로 변했다. 그리고 혼전 중에 조선군 화기수의 총탄에 적장 양고리가 쓰러졌다. 양고리는 홍타이지의 매부로서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사살한 최고위급 적장이었다. 양고리가 죽자 청군 진영은 급격히 동요했다. 김준룡은 청군이 동요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병자호란 개전 이래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남한산성과 가까이 있는 광교산에서 날아온 김준룡의 승리 소식에 조정은 환호했다. 하지만 김준룡의 부대는 광교산에서 계속 버틸 수 없었다. 군량과 화약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김준룡은 병력을 이끌고 수원 남쪽으로 철수했다. 아쉬운 대목이었다. 청군에 길목이 차단되어 근왕병 전체의 전력이 분산되었던 데다, 작전과 보급을 총괄적으로 지휘할 지휘부가 없었던 탓이었다. 환호도 잠시뿐 산성은 다시 기다림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美쇠고기 고시 이후] 촛불 저지선 조선·동아 앞으로

    경찰의 촛불 시위 저지선이 두 달여만에 처음으로 세종로 네거리에서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 앞으로 당겨졌다. 전날 일부 시위대가 두 신문사의 촛불 보도에 항의해 정문 유리창을 깨는 등 과격 시위를 벌이자 원천봉쇄에 나선 셈이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주최로 27일 오후 7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51번째 촛불집회에는 3600여명(경찰 추산, 주최측 추산 3만여명)의 시민이 모여 ‘국민 이기는 대통령 없다.’는 현수막을 들고 정부의 고시 강행과 경찰의 강경 진압을 규탄했다. 하지만 경찰은 오후 8시쯤부터 120개 중대 1만여명의 경력을 태평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사 앞에 대기시키고 경찰버스로 신문사 앞에 차벽을 만들며 충돌에 대비했다. 이제까지 경찰 저지선은 세종로 네거리 이순신 장군 동상 인근이었다. 때문에 오후 8시20분쯤부터 행진을 시작한 시민들은 채 500m도 가지 못하고 서울신문사 앞에서 경찰에 막혔다. 경찰은 수차례에 걸쳐 “불법 시위 그만하라. 다른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고 있다. 계속 하면 전원 연행하겠다.”고 경고방송을 하며 시민들을 압박했다. 경찰이 여느 때보다 빠르게 진압을 준비하자 통합민주당 천정배 의원과 김부겸 의원 등 국회의원 12명이 인간띠를 두르고 경찰과 시민들 사이를 막아섰다. 이후 경찰이 국회의원 보호조를 투입하고 다시 진압에 들어가려하자 이번엔 예비역인 시민들이 군복을 입고 저지선을 만들었다. 경찰과 시민들은 밤늦게까지 대치했다. 앞서 통합민주당 안민석 의원은 27일 새벽 1시쯤 청계광장 동아일보사 앞 대로에서 강기정 의원 등과 함께 50번째 촛불집회현장에 있다가 경찰에 폭행당했다고 주장했다. 안 의원은 “국회의원이라고 계속 얘기했지만 마치 꿈을 꾸는 듯 (경찰로부터)차이고 밟히고 끌려다니며 욕설을 들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에 대해 “자체 조사 결과 오히려 안 의원이 현장 지휘관과 전경 등 3명을 주먹으로 폭행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안 의원이 시위자를 검거하는 김모 상경을 주먹으로 때린 뒤 국회의원이란 신분을 밝혔고, 현장 지휘관 한모 경정이 “국회의원이니 보내드려라.”라고 지시하자 그에게 가 주먹을 턱에 날렸다고 해명했다. 지난 26일 밤에는 일부 시위대가 동아일보 사진기자를 폭행하고 계란·까나리액젓·식초·새총·물총 등을 발사하며 경찰에 거세게 저항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이 조선일보사 앞에서 시민들을 흥분시킨 뒤 갑자기 철수해 폭력 조장 논란도 일고 있다. 경찰버스 위에 있던 전경들이 시위대를 향해 먼저 욕설을 퍼붓는 장면도 목격됐다. 이경주 김승훈 이경원기자 kdlrudwn@seoul.co.kr
  • [美쇠고기 고시 이후] 거세진 시위대

    [美쇠고기 고시 이후] 거세진 시위대

    정부의 장관 고시 관보 게재에 실망한 시민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국가정체성에 도전하는 시위나 불법폭력시위는 엄격히 구분해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한 뒤 경찰이 시민들을 무더기로 연행하는 등 강경 진압에 나서 심각한 불상사가 우려된다. 26일 밤 광화문 주변에서 벌어진 50차 촛불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은 9시부터 경찰버스를 끌어내기 시작했고, 경찰은 곧바로 소화기와 물대포로 응수했다. 양측 모두에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시민들은 “세종로에서 한가롭게 구호나 외치고 있을 때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의 만류에도 청와대 진입 시도가 계속됐다. 앞서 이날 오전까지 이어진 49차 촛불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은 청와대 방향으로 진입이 용이한 신문로 새문안교회 뒤 주차장으로 향했다. 경찰은 시위대가 새문안교회 뒤 주차장에 도착하자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폭이 5m도 안 되는 주차장 진입로에 시위대 300여명이 몰려 있는 상황에서 경찰은 200여명의 전의경을 투입했다.“밀리면 안 된다. 기자도 예외없다.”는 현장 지휘관의 지시도 나왔다.3m 떨어진 시민들에게 고압의 물대포가 직격으로 쏟아졌다. 차량 위에 올라가 있던 방송사 촬영기자에게도 물대포를 쐈다. 조모(53·자영업)씨는 왼손 가운데 손가락이 절단됐고,2명의 시민은 방패에 찍혀 코뼈가 내려앉았다. 서울지방경찰청 관계자는 “전·의경들도 극도로 흥분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육군하사 투신자살’ 집단 괴롭힘 탓

    지난 22일 육군 모부대 김모(22) 하사가 자신의 집에서 투신 자살한 사건을 수사 중인 육군 헌병대는 김 하사를 집단으로 괴롭힌 데 가담한 A,B 두 하사와 C 상병 등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헌병대는 23일 김 하사의 시신이 안치된 전남 함평 육군통합병원에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헌병대에 따르면 강원도 모부대 A하사 등 3명은 지난해 6월 이 부대 통신병과에 배치된 김 하사를 상대로 폭언과 욕설 등을 일삼아 인격적인 모욕을 준 혐의다.C 상병은 “밖에 나가면(제대하면) 두고 보자.”는 등 위협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헌병대는 이들이 김 하사에게 폭력이나 체벌 등 물리적인 가혹 행위는 없었다고 밝혔다. 김 하사는 투신하기 전 A,B 두 하사의 실명을 거론하고 “군인 상조보험에 들어 놓았다. 선임들의 괴롭힘을 못 이기겠다. 나 먼저 좋은 곳으로 가겠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헌병대 관계자는 “김 하사가 부대원들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었던 점이 인지됐지만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 같다.”며 “김 하사 문제가 어느 지휘관까지 보고됐는지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함평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강타·양동근 주연 軍뮤지컬 10월 첫선

    육군이 창군 이래 처음으로 뮤지컬을 제작해 무대에 올린다. 이 뮤지컬에는 가수 강타와 배우 양동근 등 군복무 중인 유명 연예인들이 출연한다. 육군은 건군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2000년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에서 지뢰폭발 사고로 곤경에 처한 동료 장교를 부대원들 대신 지휘관인 본인이 직접 구하려다 두 다리를 잃은 이종명(49·당시 중령) 대령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군인(가제)’을 제작, 오는 10월4일 대전 충남대에서 초연한다고 밝혔다. 출연진은 중견 뮤지컬 배우 박철호씨 등 일반인 5∼6명과 현역 군인 등 40여명이다. 육군은 “현역 군인 중 전공자를 대상으로 한 오디션에 200여명이 참가해 37명을 선발했다.”면서 “가수 출신으로 8사단 수색대대에서 복무하고 있는 안칠현(예명 강타) 이병과 3사단 군악대에서 복무 중인 양동근 이병이 박철호씨와 함께 주연을 맡게 됐다.”고 밝혔다. 박철호씨가 이 중령 역을 맡고, 강타는 현대무용을 전공한 아들로, 양동근은 그와 절친한 비보이로 각각 등장한다. 육군 관계자는 “27사단 수색대대에서 복무 중인 연예인 출신 김태우 상병에게도 오디션 참가를 권유했지만 본인이 수색대대원의 이미지로 남겠다며 사양했다.”고 전했다. 40여명의 출연진은 7월부터 경기 성남 육군종합행정학교에서 연습에 돌입하며 연출은 최종률씨가 맡는다. 뮤지컬은 10월4∼6일 대전 공연을 시작으로 서울, 부산, 대구, 광주에서 모두 20여차례 공연되며 객석의 30∼50%는 일반인에게 판매할 예정이라고 육군은 설명했다. 매표 수입은 전액 국고로 환수된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서울의 풍경]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 안팎

    [서울의 풍경]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 안팎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도 군졸들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다.3겹의 쾌자(겉옷) 속에 받쳐입은 바지저고리는 이미 물기를 먹어 눅눅해진 지 오래. 수은주는 어느새 29도를 가리키고 있다. 취타대를 앞세운 교대군이 덕수궁 대한문 밖으로 행진해왔다. 양측 부대의 참하(부지휘관)가 암호를 통해 신분을 확인하자 여섯 번의 북소리가 울리고 승정원 주서가 지켜보는 가운데 열쇠함이 건네진다. 이어 양측 수문장이 순장패를 교환하고 마주선 양측의 군사들이 군례를 행하는 것으로 15분에 걸친 교대의식이 마무리됐다. 수문장 정이권(27)씨는 10분 넘게 이어지는 관광객의 카메라 세례에도 꼿꼿한 지휘관의 위엄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왕릉의 무인석(武人石)이 따로 없었다. “명색이 장수인데 자세의 ‘각’이 일반 군졸들과는 달라야죠.” 정씨는 지난해 대학을 졸업한 뒤 6개월 전 친구의 소개로 덕수궁 수문군이 됐다. 말단 군졸로 시작했지만 “빼어난 풍모와 타고난 연기력을 인정받아” 2개월만에 장수로 ‘특진’했다. 대한민국에 자신만큼 외국인의 카메라 세례를 많이 받은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게 그의 자랑이다. 덕수궁 앞에서 조선시대 수문장 교대식을 재연하는 장수와 군졸들은 공익근무요원일 것이라는 풍문과 달리 20∼30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서울시와 계약을 맺은 이벤트 회사에 소속돼 매일 덕수궁 옆 서울시청 별관으로 출근한다.2006년까지는 공익근무요원들로 행사를 진행했지만 지난해부터 이벤트 회사 직원들로 전원 교체됐다. ●대부분 20·30대 비정규직… 軍의장대 출신도 운영팀장 김성헌(44)씨는 “공익근무요원들로 진행할 때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복장 안에 귀고리나 목걸이 등 액세서리를 착용한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 입방아에 오르는가 하면, 집안 일을 핑계로 예사로 결근하는 등 골치아픈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던 것. 행사요원이 일반인들로 대체되고 근태관리가 철저해지면서 운영체계는 틀이 잡혔지만 정작 요원들은 보수와 신분불안에 대한 걱정이 적지 않다. 한 30대 요원은 “월급제로 전환됐지만 급여가 110만원 남짓밖에 안 돼 생활하기 빠듯하다.”면서 “언제든 ‘잘릴’ 수 있어 조만간 다른 일을 알아볼 생각”이라고 털어놓았다. 반면 20대 초반의 한 요원은 “어차피 안정된 직장을 갖기란 어려운 것 아니냐.”고 반문한 뒤 “폼 나고 재미도 있고, 이만한 아르바이트가 없다.”고 만족스러워했다. 요원들은 오전 9시30분에 출근해 오후 5시30분 퇴근한다.11시 첫 교대의식 전까지는 간단한 조회 뒤 개인연습을 한다.‘신입’들은 이 시간 ‘사수’로부터 집중조련을 받는다. 비 오는 날엔 행사가 없다. 대신 복장·장비를 손질하거나 교육을 받는다. 교육에는 으레 팀장의 질책과 잔소리가 따르기 마련이라 요원들은 “비오는 날이 싫다.”고 입을 모은다. 요원은 모두 46명. 교대의식이 주임무인 만큼 2개조로 운영된다. 군 의장대 출신이 3명이다. 요원이 되기 위한 자격조건은 없다. 다만 키가 180㎝가 넘고 용모가 준수하면 수문장 후보 1순위다. 수문장이 되면 수염을 붙이고 복장도 화려해진다. 임무가 군졸보다 많아 급여도 20만원쯤 높다. ●‘사실적 고증’vs‘현재적 재구성’ 수문장 교대의식은 경복궁과 덕수궁 2곳에서 진행된다. 경복궁 행사는 문화재청의 위탁을 받아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주관한다.10년 새 서울을 찾는 외국인의 필수 관광코스로 자리잡았지만 모델이 된 유럽의 근위병교대식이 그렇듯 과거의 것을 충실히 재현했다기보다 지금의 필요에 맞게 각색된 것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실제 덕수궁이 왕궁으로 기능한 것은 고종황제가 아관파천(俄館播遷)에서 돌아온 1897년 이후다. 따라서 수문장 교대식이 행해졌다면 신식군대인 ‘별기군’이 나섰을 가능성이 높지만, 지금의 교대식은 영·정조대의 복식에 의례는 경국대전에 기록된 조선 초기의 것을 원용해 사실적 고증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떤가. 영국인들이 ‘천년의 전통’이라고 자랑하는 영국 왕실의 의례들도 사실은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것이 서양사학계의 공인된 진실이 아니던가.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400억 軍 금융사기’ 피해 본 중위 자살

    최근 군에서 발생한 400억원대 사기 사건의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인 육군 이모(26) 중위가 18일 오후 2시쯤 서울 노원구 상계동 자신의 아파트 방에서 허리띠로 문고리에 목을 매 숨져 있는 것을 이 대위의 어머니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창군 이래 최대 사기사건의 충격에 이어 피해자의 사망사건이 이어지자 국방부는 피해자가 750여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주시하며 긴장 속에 파문 확산을 우려하고 있다. 이상희 국방장관은 19일 오전 계룡대에서 이례적으로 육군 군사령관급 이상 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 이번 사기사건의 피해 대책을 논의할 계획이다. 이 대위는 사기사건의 주범 박모 중위의 3사관학교 1기수 선배로 박 중위에게 6200만여원을 투자 명목으로 맡긴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7일 21사단에서 대대 교육장교 보직을 마친 이 대위는 22일 중대장 진출을 위한 상무대 고등군사반 교육 입교를 앞두고 집에 머물고 있던 참이다. 육군 관계자는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면서 “수방사 헌병대에서 정확한 사인을 조사하고 있다.”고 했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유로 2008] 발라크 대포알 프리킥 전차군단 8강행 쏘다

    독일 대표팀 주장 미하엘 발라크(32·첼시)의 오른발은 필요한 순간에 딱 한 차례 번쩍거렸다. 더 이상도, 이하도 필요없었다. 조국에 12년 만의 유로대회 8강 진출의 기쁨을 안긴 한 방이었고, 상대팀 오스트리아에는 사상 처음으로 공동개최국 모두 조별리그 탈락의 수모를 안긴 한 방이었다. 독일은 17일 오스트리아 빈 에른스트하펠 슈타디온에서 열린 유럽축구선수권(유로)2008 조별리그 B조 최종전 공동개최국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후반 4분 터진 발라크의 프리킥 득점포를 끝까지 지켜내며 1-0 승리를 거두고 2승1패로 크로아티아(3승)에 이어 8강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독일은 이로써 오는 20일 4강 길목에서 포르투갈과 맞붙으며 유로96 우승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목표의식을 다잡게 됐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이 경기를 잡으면 극적으로 8강에 오를 수 있었지만 내내 잘 막던 발라크를 한 순간 놓치면서 공동개최국 스위스와 함께 개최국 동반 조별리그 탈락의 첫 사례를 유로대회 역사에 남겨야 했다. 독일 역시 이날 패하면 탈락되는 벼랑끝이었다. 주장 발라크는 전반전 내내 공격을 애써 자제하며 전방의 루카스 포돌스키(23), 미로슬라프 클로제(30) 공격 루트를 열어 주는데 치중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역시 독일 공격의 맥(脈)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경기 시작부터 독일 공격의 시발점 발라크에게 거친 태클도 마다하지 않는 육탄 수비로 독일을 압박했다. 오스트리아의 전술은 주효했다. 발라크가 막히자 전반전 독일 전방 공격수들은 별반 위력적인 모습 없이 지지부진했다. 게다가 전반 40분 그라운드 바깥에서 말싸움을 벌이던 독일의 요하킴 뢰브 감독과 오스트리아 요제프 히커스베르거 감독이 동반 퇴장당하는 유로대회 역사상 첫 사례가 벌어지며 중원의 지휘관 역할은 더욱 커졌다. 두 감독은 관중석에서 화해의 악수를 나눴다. 감독 부재 상황에서 전차군단의 정신적 지주이자, 실질적 에이스 발라크의 역할은 더욱 돋보였다. 후반 4분 아크 왼쪽 바깥에서 얻어낸 프리킥을 발라크는 121㎞짜리 대포알 오른발 강슛을 상대 오른쪽 그물에 꽂았다. 에이스가 막힌 물꼬를 터주자 경기 흐름은 되돌려졌다. 포돌스키와 토르트텐 프링스(32) 등의 슈팅이 오스트리아 골문을 연신 괴롭히며 경기 주도권을 가져왔다. 한편 크로아티아는 폴란드와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도 1-0으로 승리,3전 전승으로 ‘다크 호스’가 아닌 당당한 ‘우승후보’임을 각인시켰다.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남아공월드컵 2010] 김두현 “난 선발 체질”

    스코어로는 3-1 깔끔한 승리였지만 썩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 경기였다.15일 새벽 끝난 투르크메니스탄과의 남아공월드컵 3차예선 5차전에서 한국 수비진은 상대 기습과 세트플레이에 번번이 구멍을 내보였고 결정력 부족 등 해묵은 과제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 가운데 ‘낯익은 희망’ 김두현(26·웨스트브로미치)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었다. 해트트릭이라는 성과 덕만은 아니다. 득점 장면 외에도 중앙의 박주영(23), 좌우의 설기현(29), 이근호(23)에게 찔러주는 패스는 날카롭고 예리했다. 김두현은 프로축구 K-리그 성남에 몸담던 2006년 최우수선수(MVP)를 차지하는 등 중원의 지휘관으로서 나이답지 않게 노련한 경기 조율, 적재적소에 찔러주는 패스,2선에서 기습적으로 날리는 중거리슛, 오른발 프리킥 등 다양한 공격 루트를 확보한 톱랭커였다. 지난 시즌 잉글랜드 무대로 건너간 뒤 챔피언십(2부리그) 웨스트브로미치 앨비온을 정상에 올리는 데 일조했고 ‘5호 프리미어리거’로서 성공적인 해외 진출을 완성했다. 하지만 유독 대표팀에만 오면 작아졌다. 박지성(27·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그림자는 길고도 깊었다. 그의 백업 요원으로서 후반 잠시 출전하는 정도에 그쳐왔다. 김두현 스스로 “경기 중간에 출전하면 그라운드 감각을 찾고, 동료들과 호흡을 맞추는 데 어려움이 있다.”며 은근히 ‘선발 체질’임을 드러낸 바 있다. 이러던 차에 박지성의 오른쪽 무릎 이상은 한 줄기 빛이 됐다. 이날 김두현은 자신의 특장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스리톱 아래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 코칭스태프는 물론 팬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김두현의 재발견에 따라 허 감독은 최종예선에서의 공격 루트 다변화를 더욱 홀가분하게 그려볼 수 있게 됐다.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물류대란 ‘비상’]“운행 화물차에 돌 던지면 형사처벌”

    화물연대가 총파업에 들어가면서 고속으로 달리는 파업 불참 화물차에 돌을 던지는 등의 과격행위가 우려돼 경찰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경찰청은 13일 오전 어청수 청장 주재로 전국지휘관 화상회의를 열고 화물연대의 운송방해 등 불법행위에 엄정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경찰청 이길범 경비국장은 “항만이나 컨테이너 물류센터 등의 출입문을 화물차로 막는 행위와 운행중인 화물차에 돌을 던지고 쇠파이프로 손괴하는 행위, 운행중인 화물운전자를 폭행하는 행위 등 운송방해자에 대해선 사법처리키로 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또 집단 무단주차와 집단 서행 등 차량시위의 경우 운전면허 취소와 정치처분까지 병행키로 했다. 경찰에 따르면 2대 이상의 화물차가 줄지어 운행해 많은 이들에게 위험을 주는 공동 위험행위나 단체로 차를 밤새 세워두고 경찰관의 이동명령에 불응하는 경우 40일의 면허정지 처분을 내릴 수 있고, 일반 교통방해죄로 입건되면 면허를 취소할 수 있다. 경찰은 전국 주요 항만과 물류사업장에 57개 중대 5000여명을 대기하도록 하고 정상운송 중인 화물차 운행을 보호하기 위해 운송사에서 요청하면 경찰관을 동승시키거나 순찰차로 에스코트까지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53년만에 찾은 아버지… 묘소 지켜드릴래요”

    “53년만에 찾은 아버지… 묘소 지켜드릴래요”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데 53년이 걸렸습니다. 너무 늦게 찾아 오래도록 옆에서 모시겠습니다.” 현충일인 6일 부산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의 한 묘비 앞에 은발의 한 중년신사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캐나다인 레오 드메이(55). 그는 작은 목소리로 아버지 이름을 부르며 묘비를 어루만졌다.50여년간 잊고 지냈던 생부 ‘앙드레 아델라드 레짐발드’의 묘비다. ●태어난지 보름만에 의사 집안에 입양 레짐발드는 1952년 9월5일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두 달도 안 돼 전사했다. 당시 나이 20세. 이 와중에 드메이는 태어난 지 보름여 만에 의사 집안에 입양됐다. 그의 아버지는 파병 당시 어머니와 약혼한 상태였다. 드메이는 이후 양아버지 밑에서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고, 공직생활을 하며 가정도 꾸렸다. 하지만 생부에 관해서는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어 잊고 지냈다. 2년 전 어느 날, 캐나다에 살던 그에게 입양기관에서 전화가 왔다. 친어머니가 그를 찾고 있다는 전화였다. 친어머니를 만난 그는 아버지의 이름과 그가 한국전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生父와의 질긴 인연의 끈 드메이는 곧바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캐나다 국회의사당과 문서보관소를 뒤져 사망일, 군번 등 전사 내역을 찾아냈고 부산 유엔묘지에 아버지가 묻혀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같은 노력 끝에 그는 지난해 4월 캐나다 한국전 참전용사 재방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한국을 찾았다. 처음 바라본 유엔기념공원의 아버지 영전에 장미꽃을 바쳤고, 판문점을 찾아서는 아버지가 전사한 ‘355고지’를 먼발치에서 망원경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드메이는 “자신과 아버지간에 보이지 않는 질긴 인연의 끈이 있었다.”며 아버지를 찾은 일화도 소개했다. 우연과 행운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던 중 캐나다의 한 선술집에서 ‘KOREAN WAR VETERANS(한국전 참전용사)’라는 글씨가 적힌 모자를 쓴 70대 노신사를 발견했다. 이끌리듯 그에게 다가갔고, 한국전 참전용사인지, 그렇다면 ‘앙드레 아델라드 레짐발드’란 사람을 아는지 물었다. 놀랍게도 그 노신사는 아버지의 부대 지휘관이었고 아버지 시신을 수습해 후방으로 옮겨 준 은인이었다. 그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유엔공원 옆에서 영어 가르치며 생활 그는 아버지를 지근에서 모시기로 하고 지난해 11월 캐나다 생활을 접고 한국에 들어왔다. 지금은 아버지가 모셔진 유엔공원 인근의 한 영어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활하고 있다. “지난 3월부터는 공원관리처 직원을 도와 영문번역과 교정일을 거들고 있다.”는 그는 “앞으로 5∼6년간 부산에 머물며 묘소를 돌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토록 찾던 아버지를 늦게나마 지근에서 모셔야 하겠다는 생각에서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74) 병자호란이 시작되다(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74) 병자호란이 시작되다(Ⅰ)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까지 조정에서는 청과의 관계를 복원할지, 그것과 관련하여 사신을 보낼지를 놓고 격심한 논란이 빚어졌다. 척화파는 명분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절교가 불가피하다고 했고, 주화파는 이렇다 할 준비 없이 전쟁을 벌이는 것의 위험성을 들어 끝까지 청을 기미(羈)해야 한다고 맞섰다. 사람들은 대체로 척화파의 논의가 높고 깨끗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높고 깨끗한 논의’만으로 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갈팡질팡하는 사이 전쟁은 결국 터지고 말았다. ●준비 없이 갈림길에 서다 당시 ‘명분’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던 조선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인물은 명 감군 황손무(黃孫茂)였다. 그가 귀국 길에 보낸 서한이 10월24일 조정에 도착했다. 그는 청천강과 압록강, 그리고 평안도의 험준한 지형은 하늘이 준 것이니 병사들을 조련하고 화약과 총포 등을 제대로 갖추면 적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 신료들이 현실을 모른다고 야유했다.‘경학(經學)을 연구하는 것은 장차 이용(利用)하기 위한 것인데 나는 귀국의 학사와 대부들이 읽는 것이 무슨 책이며 경제(經濟)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소. 뜻도 모르고 웅얼거리고 의관(衣冠)이나 갖추고 영화를 누리고 있으니 국도(國都)를 건설하고 군현(郡縣)을 구획하며 군대를 강하게 만들고 세금을 경리하는 것은 과연 누가 담당한단 말이오?’ 황손무의 비판은 신랄했고 진단은 냉정했다.‘귀국의 인심과 군비(軍備)를 볼 때, 저 강한 도적들을 감당하기란 결단코 어렵습니다. 일시적인 장유(奬諭)에 이끌려 그들과의 화친을 끊지 마십시오.’ 조선을 찬양하고 청과의 싸움을 독려하는 내용을 담은 황제의 유시문을 들고 왔던 그였다. 조선을 다독여 청과 싸움을 붙이는 것이 자신의 임무였지만, 황손무가 본 조선은 전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오히려 청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말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청 역시 마지막까지 조선의 본심을 떠보려고 시도했다. 역관 박인범(朴仁範) 등이 들어갔을 때, 용골대는 새로운 제안을 내밀었다. 자신들에게 협력하여 명을 공격하는 데 동참하고,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넘겨주고 왕자를 볼모로 보내라는 요구였다. 박인범 등은 반발했다. 그러자 용골대 등은 왕자와 척화신만 보내주면 청군이 비록 압록강에 이르더라도 침략을 당장 중지하고 두 나라가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다시 제의했다. 박인범 등이 ‘예의의 나라로서 차마 들을 수 없고, 또 전달할 수 없는 말’이라고 거듭 반발하자 용골대 등은 돌아갔다. 좀처럼 좁히기 어려운 서로의 입장 차이를 다시 확인했던 것이다. ●홍타이지, 침략 결심을 하늘에 고하다 1636년 11월25일 홍타이지는 신료들을 이끌고 환구에서 제사를 지냈다. 황천(皇天)과 후토(后土)를 향해 자신이 조선 정벌에 나서게 된 까닭을 고하는 자리였다. 홍타이지는 축문을 통해 조선이 ‘저지른’ 잘못들을 열거했다.1619년 명을 도와 자신들을 공격하는 데 동참한 것,1621년 이후 자신들이 요동을 차지했을 때 도망하는 한인들을 받아들여 명에 넘긴 것, 정묘년에 맹약을 체결한 이후에도 누차 그것을 어긴 것, 후금으로 귀순하는 공유덕과 경중명 일행을 공격했던 것, 명에는 병선(兵船)을 제공했으면서도 그것을 빌려 달라는 자신들의 요구는 거부한 것, 인조가 평안감사 홍명구(洪命耉)에게 유시문을 보내 자신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운운 한 것 등이었다. 조선에 대해 품었던 불만이 모두 나열되었다.‘청의 힘과 역량이 명 못지않게 커졌는데 조선은 명만 편들고 자신들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만의 요점이었다. 공유덕 등의 귀순을 저지하려 시도하고, 명에만 병선을 제공한 것에 대한 불만이 특히 도드라져 보였다. 홍타이지는 곧이어 누르하치의 신주를 모신 태묘(太廟)에도 나아가 자신의 결심을 고했다. 홍타이지는 11월29일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유시문을 내렸다. 조선을 정벌해야 하는 까닭을 다시 강조했다. 위에서 언급한 ‘허물’에 더하여 조선이 청에서 보낸 국서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도 추가했다. 조선 조정이 몽골 버일러들이 내민 편지를 퇴짜놓았던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평안감사 홍명구에게도 ‘유시문’을 보냈다.‘조선이 패만하고 무례하므로 어쩔 수 없이 의병(義兵)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의병’들에게 조선에서의 행동 지침을 하달했다.‘인명을 함부로 살상하지 말 것, 대군이 통과하는 지역의 사묘(寺廟)를 파괴하지 말 것, 저항하지 않는 자를 죽이지 말 것, 항복한 자를 죽이지 말고 치발(髮)할 것, 망명해 오는 자를 받아들여 보호할 것, 사로잡은 백성들의 가족을 서로 이산시키지 말 것, 부녀를 폭행하지 말 것’ 등이 그것이었다. 12월1일 조선 원정에 동참할 몽골 버일러들이 병력을 이끌고 심양에 집합했다. 홍타이지는 이날, 정친왕(鄭親王) 지르가랑(濟爾哈朗)에게 심양에 남아 도성을 방어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아지게(阿濟格)를 우장(牛莊)에 배치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다. 조선을 공격하는 와중에 혹시라도 명군이 배후에서 역습해 오는 상황을 우려한 조처였다. 우장은 압록강과 발해만으로 연결되는 전략 요충이었다. 당시 청은 명이 수군을 이용하여 발해만으로 들어와 내지에 상륙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조선 침략에 나서면서도 여전히 명의 위협을 염려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2월2일 오전 홍타이지는 대군을 출발시키기에 앞서 당자(堂子)에 나아가 삼배구궤두례(三拜九頭禮)를 행했다. 당자는 까치를 신성시하는 만주족 샤머니즘 신앙의 상징물이었다. 이어 팔기의 깃발들을 도열해 놓고 주악을 울리며 다시 배천례(拜天禮)를 행했다. 홍타이지는 이어 도도(多鐸)와 마부대 등에게 병력 1300명을 따로 주었다. 그들 가운데 300명은 상인으로 변장시켰다. 그들을 신속히 서울로 진격시켜 궁궐을 포위하려는 깜냥이었다.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는 것이 홍타이지의 생각이었다. ●무너진 통신체계 조선 침략에는 만주와 몽골군뿐 아니라 명에서 귀순한 한족 출신 장졸(-漢軍)들도 대거 동참했다.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尙嘉喜)를 비롯하여 석정주(石廷柱), 마광원(馬光遠) 등 한군 지휘관들이 그들을 이끌었다. 청은 조선을 공략하기 위해 만몽한(滿蒙漢)의 모든 역량을 사실상 총동원했던 것이다. 한군들은 특히 홍이포(紅夷砲), 대장군포(大將軍砲)를 비롯한 중화기의 운용과 운반을 맡았다. 12월9일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몰려오는 상황을 인지했다.‘병자록’에 따르면 이미 12월6일부터 청군과 관련된 이상 징후를 알리는 봉화(烽火)가 여러 차례 올랐지만,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그 상황을 서울에 제때 알리지 않았다. 그는 적이 겨울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또 봉화가 알려질 경우, 서울에서 소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9일 적군이 이미 순안(順安)을 통과하여 안주를 향해 내달리는 상황에서야 김자점은 장계를 올렸다. 청군은 질풍같이 내달렸다. 조선은 청군의 철기(鐵騎)와 야전에서 맞서서는 승산이 없다고 여겨 주로 산성에 들어가 방어하는 전술을 구상했다. 하지만 청군은 조선군이 대비하고 있는 산성을 공격하여 시간을 허비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서울로 돌격하는 전술을 택했다. 사실 의주 부근의 백마산성도, 평양 부근의 자모산성도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로에서 적 기병을 차단하려 들지 않았던 것은 치명적이었다. 그나마 봉화마저 제때 올리지 않았고, 평안도 각지에서 올린 변보(邊報)는 청군 기마대에 의해 차단되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는커녕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시간적 여유조차 가질 수 없었다. 전쟁은 이렇게 시작부터 음울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경찰, 연행자 구속방침 철회

    경찰은 2일 촛불집회 참가자에 대해 불구속 입건하기로 결정했다. 경찰은 지난달 31일부터 지난 1일 새벽까지 촛불집회 참가자중 연행된 222명에 대해 전원 불구속 입건하기로 결정했다. 경찰은 당초 일부 연행자에 대해 구속할 방침이었으나 정부가 이날 전격적으로 쇠고기 고시와 관련한 관보게재를 유보함에 따라 불구속키로 방침을 바꾼것으로 알려졌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100여명의 부상자가 속출한 데 대해 어청수 경찰청장을 비롯해 현장 지휘관 등을 고발하기로 했다. 경찰은 촛불집회 주최자로 판단해 출석요구서를 발송한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박원석 공동상황실장 등에 대해 2차 출석요구서를 보내고 응하지 않으면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신병을 확보하기로 했다. 경찰의 출석요구서는 보통 3차례 정도 발송된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이날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으로 1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면서 어청수 경찰청장과 현장 지휘관, 폭행한 경찰 당사자를 3일 형사고발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책회의는 “2일 새벽 한 여대생이 경찰의 방패에 얼굴을 정면으로 찍혀 코뼈와 이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기자협회는 성명을 내고 “2일 새벽 1시쯤 KBS 영상취재팀 신모 기자가 세종로 사거리에서 취재하다 전경에 맞아 왼쪽 눈의 핏줄이 터지고 눈 주위에 멍이 들었다.”고 밝혔다. 경찰의 군홧발에 머리가 밟힌 서울대 음대 이나래(22·여)씨는 2일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경찰을 피해 버스 밑으로 숨었다가 나왔는데 경찰이 또다시 폭행했다.”고 밝혔다. 서울 자양동에 사는 김모(36)씨도 같은날 경찰이 쏜 물대포를 얼굴에 맞은 뒤 안구와 입술, 입안 등에 부상을 입었으며 사물을 구별하지도 못하는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날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시민 1500여명이 나와 쇠고기 관보 게재 철회를 요구하는 촛불집회를 벌였으나 경찰과 충돌은 빚어지지 않았다. 또 미국산 쇠고기가 보관된 부산 감만부두 컨테이너 야적장 앞에서는 민주노총 조합원과 시민단체 회원 등 800여명이 모여 쇠고기 반출 저지 집회를 가진 뒤 촛불행진을 벌였다. 이재훈 김정은기자 nomad@seoul.co.kr
  • “내가 살아있을 때 한반도 통일 보게 될 듯”

    “내가 살아있을 때 한반도 통일 보게 될 듯”

    버웰 벨 주한미군사령관이 30일 주한미군 병력 일부가 향후 아프가니스탄 등 해외 전쟁지역으로 일시 차출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주한미군 해외차출 가능성 시사 다음달 3일 한국을 떠나는 벨 사령관은 이임 기자회견에서 “한국에서 미군의 현재 병력수준을 유지하는 것과 미국의 전투 능력을 한국에서 실제 전쟁지역으로 전개하는 등의 잠재적 사안은 향후 몇 달 동안 한·미 양국의 국방 지도자들이 다뤄야 할 문제”라며 주한미군 병력이 미군의 신(新)군사전략인 ‘전략적 유연성’의 대상이 될 가능성을 내비쳤다. 주한미군 아파치헬기 부대의 일부를 아프가니스탄으로 차출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는 “미 육군 차원에서 종합 판단할 사항인데 아직 현지 지휘관이 소요를 제기하지 않았다.”면서도 “우리는 단 1명의 미국인도 적절한 전투장비 혹은 지원이 없어 목숨을 잃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한국에서 전쟁지역으로 그 어떠한 전투 능력의 전개가 요구되더라도 미국은 한국의 (대북)억지력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고 북한의 어떤 위협도 격퇴할 수 있는 능력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군사력을 전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매년 북한군의 전력이 최고조에 이르는 동·하계 훈련기간에 미군의 첨단 전투기들을 괌이나 일본 오키나와, 한국의 오산, 군산 등에 배치해 왔다.”며 첨단 스텔스 전투기인 F-22를 올여름 괌에 배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명예 서울시민증 받기도 벨 사령관은 방위비 분담금과 관련, 한·미가 50%씩 분담하자는 미측의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분담금 협상이 올해 안에 마무리돼야 내년 1월부터 주한미군 소속 한국인 군무원들에게 월급을 지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신속한 합의를 촉구했다. 또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강화하길 바란다.”는 말로 한국의 아프간 재파병을 희망하기도 했다. 그는 “주한미군 주둔은 냉전시대 유물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한·미동맹의 종말을 원하는 사람들이며,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존경받으며 매우 영향력이 있다.”고 말해 일부 반미단체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군사전문가로서 언제쯤 한반도 통일이 이뤄질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벨 사령관은 “올해 61살인 내가 20년은 더 살 텐데, 살아있는 동안 남북이 평화적 통일 방안에 합의할 것으로 판단한다. 이는 합리적이고 가능성 있는 판단이다.”라고 답했다. 한편 벨 사령관은 이날 서울시청에서 오세훈 시장으로부터 명예 서울시민증을 받았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소리없는 아우성’

    ‘소리없는 아우성’

    경찰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촛불집회에 대해 ‘정치적 구호를 외치고 플래카드나 손 팻말을 들면’ 불법으로 규정하겠다고 밝히자 일부 촛불집회 참가 시민들이 ‘침묵시위’로 맞대응하겠다고 밝혀 눈길을 끌고 있다. 경찰은 6일로 예정된 촛불 문화제가 정치성을 띤 집회로 바뀔 경우 주최자를 색출해 사법처리하겠다고 5일 밝혔다. 한진희 서울경찰청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순수 촛불문화제 자체에는 할 말이 없지만, 정치적 발언으로 동조를 얻어서 구호를 외치거나 플래카드와 손 팻말을 흔드는 등 정치성을 띨 경우 불법 집회로 규정할 것”이라면서 “현장에서 채증하고 발언 등을 검토해 관련자를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처벌할 것”이라고 말했다. ●美쇠고기 국회청문회 앞두고 침묵시위 인터넷 카페를 통해 자발적 참여를 독려했던 시민들은 즉각 맞대응에 나섰다. 지난 2일 서울 청계천 소라광장에서 1만여명이 참여한 집회를 주최했던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는 6일 오후 8시 집회장소를 서울 여의도로 옮겨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제목으로 침묵 촛불 문화제를 개최할 예정이다. 카페의 강전호(37) 공동 부대표는 “7일부터 국회에서 열리는 청문회를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에서 장소를 여의도로 옮겼다.”면서 “침묵시위는 경찰이 촛불 문화제에서의 발언을 빌미로 불법으로 규정하고 제재를 가하겠다고 하니 이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기획했다.”고 말했다. 반면 지난 3일 2만여명이 모인 집회를 주최했던 ‘정책반대시위연대’ 측은 청계천 소라광장에서 촛불 문화제를 강행할 방침이다. 한편 경찰은 문화제와 집회의 차이를 규정짓는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해 논란이 일고 있다. 한 청장은 “(문화제와 집회의 차이는) 수학 공식처럼 딱 떨어지게 말할 수도 없고, 법에도 그런 건 없다. 전체 흐름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순수한 문화제를 벗어나는 범위가 뭔지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현장 지휘관의 자의적 해석에 따라 잣대가 오락가락할 수 있음을 인정한 셈이다. 실제 경찰은 지난달 27일 중국 유학생들의 성화봉송 시위가 사전 신고도 없이 정치적으로 흘렀는데도 불법으로 규정하지 않았고 유학생들이 조직적으로 동원됐는지도 수사 대상이 아니라고 밝힌 적이 있다. 경찰청 혁신위원을 지낸 고려대 법대 하태훈 교수는 “집회에서 정권의 잘못된 정책에 대해 쓴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한데 촛불집회를 불명확한 잣대로 불법으로 규정하겠다는 건 집시법의 허점을 입맛대로 해석해 사전에 여론을 무마하겠다는 것으로 5∼6공 때나 가능했던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문화제·집회 규정은 현장지휘관 입맛따라 경찰이 집시법의 허점을 이용하고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현행 집시법은 문화제와 집회를 구분 짓는 개념이 없고 집회 자체조차 정의가 불명확하다. 처벌 규정이 명확해야 한다는 헌법에도 위배되는 셈이다. 법무법인 한결의 박주민 변호사는 “집시법 개념이 불명확하다 보니 경찰이 최근 기자회견과 문화제에서 누가 구호 하나만 외쳐도 바로 집회로 규정하고 ‘신고하지 않았다.’며 처벌하겠다고 나서고 있다.”면서 “경찰이 참가자들의 의도와 속내를 어떻게 알아내 문화제인지 집회인지 판단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재훈 김승훈기자 nomad@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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