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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역사관 편향 장병 상당수 있다” 이상희 국방 발언 파문

    이상희 국방장관이 국군장병들 가운데 상당수가 편향된 국가관,역사관을 갖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 장관은 8일 국방부에서 열린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기조연설에서 “해마다 입대하는 20만명의 장병 중에는 대한민국 60년을 사대주의 세력이 득세한 역사로,군을 기득권의 지배도구로써 반민족·반인권적 집단으로 인식할 뿐 아니라 국가관,대적(對敵)관,역사관이 편향된 인원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이 장관의 언급과 관련,인터넷에서 논란이 벌어지는 등 적지않은 파장도 예상된다. 이 장관은 “모든 우발사태에 대처해 나가려는 군의 기본적인 임무조차도 북한을 자극하는 불필요한 행동으로 얘기하는가 하면,선진 강군을 향한 노력을 시대에 역행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지적했다.또 “장병들을 투철한 국가관과 안보관을 지닌 강한 전사,건전한 민주시민으로 육성하려는 군의 정신전력 강화 활동이 이념 논쟁화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이 장관은 “작전체제와 훈련체제,부대관리,정신전력,간부들의 복무자세 등 모든 분야에서 군을 재조형(Reshaping)해 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또 북한과의 교류협력을 군사적으로 보장하면서,동시에 “현시적이고 실체적인 적”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의 한 관계자는 “남북한이 무력으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일부 젊은 병사들의 ‘북한군은 우리 적이 아니다.’라는 잘못된 주적 개념과 해이해지기 쉬운 군 기강 및 안보 의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고 해석했다.또 군 일각에선 최근 국방부의 ‘불온 서적’ 영내반입 차단 조치와 이에 반발한 일부 군 법무관들의 헌법소원 제기 등 사회적인 논란에 대해 국방부 수장으로서 입장을 밝힌 것으로 보고 있다. 이날 회의에는 이 장관을 비롯,김태영 합참의장,육·해·공군총장,군단장급 이상 지휘관 등 140여명이 참석했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오바마의 각료·참모]⑪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서로 다른 정당에 기반을 둔 두 정권에 걸쳐 국방장관에 지명된 로버트 게이츠(65)는 ‘온건한 현실주의자’이면서도 소신있는 인물로 평가 받는다. 조지 H 부시 대통령 시절부터 각 정권에서 두루 활동한 데에는 확실하게 의견을 개진하면서도 충돌을 피하고 유연성을 발휘할 줄 아는 그의 장점이 자리잡고 있다. 게이츠가 영향력 있는 인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989년 백악관 국가안보담당 부보좌관이 되면서부터다.이후 보좌관을 거쳐 91년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됐다.당시 평직원 출신이 국장까지 오른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그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당선되자 각종 안보 현안에 대해 직접 브리핑하는 등 원만한 정권인수를 도왔다는 후문이다. 이런 초당적인 경력이 아니더라도 게이츠 장관의 유임은 일찍이 예견됐다.대선 기간에는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을 지켰지만 공화당 정부에서 일하는 동안 꾸준히 소신 행보를 해왔다.아프가니스탄 병력 증강,쿠바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 등을 주장하는 등 안보 정책에 있어서 오바마 당선인과 견해를 같이하는 부분이 많다. 오바마와 달리 이라크 조기 철군을 반대해왔지만 유임 발표 후 입장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그는 “(당선인이 생각하는) 16개월 철군 일정표에 대해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면서 “군 지휘관들이 이미 이라크에서 미군의 의무를 완수하고 16개월 내 철군을 좀 더 앞당길 수 있는 방안을 연구 중”이라고 말했다.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유임에 대한 ‘보은’으로 평가하지만 그보다는 그의 유연함이 발휘된 것으로 보인다. 66년 CIA에 입문해 CIA 국장에 오르기 전까지 옛 소련 관련 정보 분석을 주로 담당했다.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집권 시절인 87년 국장에 지명됐지만 이란에 무기를 밀매했다는 내용의 ‘이란·콘트라 스캔들’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 지명 철회된 적도 있다.93년 CIA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텍사스 A&M 대학 총장을 지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서울신문 탐사보도-기록 외면하는 정부] 권력기관일수록 기피… 정부기록 ‘빈껍데기’

    [서울신문 탐사보도-기록 외면하는 정부] 권력기관일수록 기피… 정부기록 ‘빈껍데기’

    “국무회의와 차관회의조차도 속기록을 작성하지 않는데 왜 우리 위원회만 이를 강요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위원회를 담당하는 한 공무원은 국가기록원의 속기록 대상회의 지정에 대해 이 같은 불만을 쏟아냈다.속기록 작성 중요도를 떠나 힘없는 위원회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가기록원이 추진하려다 중단한 ‘속기록 등 작성대상회의 지정 확대 계획’에 따르면 70개 위원회 회의 가운데 권력기관 위원회 상당수가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또 권력기관일수록 지정불필요 의견을 제시하는 등 반발이 컸던 것으로 나타났다. 계획안에 따르면 70개 회의 가운데 국무회의와 차관회의 등 5개 회의를 담당하는 행정안전부 등은 국가기록원에 ‘지정 불필요’ 의견을,공적자금관리위원회와 대외경제장관회의 등 4개 회의를 담당하는 기획재정부 등은 ‘지정 어려움’을 각각 이유로 들었다. 국무총리실 규제개혁위원회는 의견을 제출하지 않았고,경찰위원회는 ‘발언자의 신상은 비공개로 하겠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행정안전부는 ‘국무회의는 법령안 등 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중요 정책을 심의하는 기관으로 정보공개 등에 대한 보호근거 등이 충분히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정책 결정 이전에 주요 논의과정이 공개될 경우 국가 및 사회적 혼란이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속기록 대상회의로 지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국가기록원에 ‘지정 불필요’ 의견을 통보했다. 또 시민·사회단체들이 속기록 작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한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와 검찰청 검사장회의,국방부 전군지휘관회의 등은 계획안에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반면 나머지 2004년 한 번 개최된 사회보장심의위원회와 2006년 한 번 개최된 국가우주위원회,2002년과 2005년 한번씩 열린 기후변화협약대책위원회,2006년 각각 1회 열린 국가보훈위원회와 국제개발협력위원회 등은 속기록 작성 대상 회의에 포함됐다. 국가기록원은 2001년 12월 기획재정부 기금정책심의위원회 등 12개를 속기록 작성 대상회의로 지정한 데 이어 2005년 3월 5개 등 모두 17개 회의를 속기록 작성 회의로 지정했다.그러나 이후 3년간 속기록 지정 회의 확대에 대한 목소리가 높았지만 추가 지정된 속기록은 한 건도 없었다. 국가기록원은 지난해 본보의 ‘국가 주요회의 속기록 작성 말뿐’(2007년 7월4일 1면 보도)에 대해 당시 주요회의에 대한 현황조사를 마쳤고,2007년 말까지 속기록 또는 녹음기록 작성 타당성 검토를 거친 후 추가지정을 추진하겠다고 해명했었다. 국가기록원이 1688개 위원회 회의 가운데 70개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선정기준이 불명확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외부용역에 참가했던 교수들을 취재한 결과 이들은 “국가기록원에서 70개 위원회를 선정한 뒤 타당성을 검토해 달라고 했다.”면서 “속기록 작성 대상회의 선정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이어 “ 그 이후 진행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고 전했다.국가기록원이 자체적으로 70개를 선정한 뒤 이 회의들에 대해서만 외부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한 것이다.결국 외부 전문가들은 70개 회의 모두에 대해 ‘속기록 작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지만 나머지 회의의 선별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외부 전문가들은 국무회의에 대해 “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주요 정책을 심의하는 최고 정책 심의회의로 정책결정의 투명성 확보와 국민의 알권리 충족을 위해 속기록 등 작성대상회의로 지정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승휘 명지대 기록관리대학원 교수는 “근본적인 문제는 국가기록원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이 보장돼 있지 않고,국가기록원장을 행정안전부에서 임명하는 것”이라면서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기록물 관련 전문가가 주요 보직에서 배제되고,그 자리가 행정 공무원들로 채워지고 있다.”고 지적했다.그는 “국가기록원을 외청으로 하고 원장의 임기를 보장해야 기록관리의 근간을 무너뜨릴 수 있는 정치적 압력을 막아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탐사보도팀
  • [서울신문 탐사보도-기록 외면하는 정부] 전진한 정보공개센터 사무국장 “기록 지정권자,총리로 격상해야”

    [서울신문 탐사보도-기록 외면하는 정부] 전진한 정보공개센터 사무국장 “기록 지정권자,총리로 격상해야”

    정보공개센터 전진한 사무국장은 “공공기록물 관리법에 정해진 속기록 대상회의 지정 권한을 행정안전부 소속 1급 기관장인 국가기록원장에서 행정안전부 장관이나 국무총리로 격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무회의 속기록 회의 지정이 미뤄지고 있는데. -국가기록원의 직무유기다.2005년 이후 1건도 속기록 작성대상회의를 추가 지정하지 못하고 있다.올초 국무회의와 차관회의 등 70개 회의를 추가 지정했지만 석연치 않은 이유로 중단했다.이는 국가기록원 스스로가 속기록 작성회의를 지정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국무회의 등 추가지정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국가기록원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조직개편이 돼서 못 한다고 하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국무회의,차관회의 등 지정에 대한 의지만 있다면 조직개편 등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재 1급인 국가기록원장이 지정하는 것은 법률적 모순이 있다.지정권자를 행정안전부 장관이나 국무총리 등으로 변경,국가 차원에서 밀어붙여야 한다. →속기록 작성에 권력기관이 빠졌는데. -역사적으로 사관이 왕의 말을 빠짐없이 남겼는데 이는 기록에 대한 중요성과 함께 사후 파장이 있기 때문이다.현재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나 검찰청 검사장회의,국방부 전군지휘관회의 등은 향후 파장이 큰 회의다.속기록이 없다면 후세들이 과연 그 당시에 어떤 문제들이 제기됐는지 모른다.우리는 이 시대의 결정 과정을 후세들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다. →각종 회의에서 회의록은 남기는데. -회의록은 한마디로 요약본이다.참가자들의 발언을 1~2줄로 쓸 수도 있고,극단적으로 ‘이견없다.’며 안 쓸 수도 있다.속기록은 심지어 욕설도 쓴다.국회에서 속기록을 작성하는 것은 책임성과 투명성 문제다. →속기록이 없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나. -현재 쌀 직불금과 관련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보고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보고 받았던 동영상과 속기록이 있었다면 명확하게 정리할 수 있다. →청와대는 국무회의를 자체적으로 쓰고 있다고 하는데. -기록관리비서관실에서 대통령이 참가하는 회의만 속기록으로 남긴다.총리가 주재하는 회의는 일반 회의록만 있다. →속기록을 비공개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미국은 회의공개법이 있어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공개한다.공개문화가 정착되고,공무원들이 책임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탐사보도팀
  • [2008농구대잔치] 2차 연장 혈투 상무가 웃었다

     ‘불사조군단’상무가 농구대잔치 3연패를 노리던 대학 최강 중앙대를 꺾었다.  상무는 1일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2008농구대잔치 결승에서 2차 연장 혈투 끝에 노련미를 앞세워 중앙대를 96-86으로 눌렀다.상무가 중앙대를 꺾은 것은 2005년 전국체전 이후 3년 만.  06~07시즌 프로농구 최우수선수(MVP) 출신인 상무의 양동근은 27점 10리바운드 5어시스트로 공수를 완벽하게 조율했다.지난 시즌까지 동부에서 김주성의 백업으로 뛰었던 센터 김봉수(198㎝·18점 6리바운드)도 국가대표 오세근(200㎝·20점 15리바운드)을 상대로 실력의 120%를 발휘,승리를 뒷받침했다.  중앙대는 1차 연장에서 5반칙 퇴장을 당한 가드 박성진의 공백이 컸다.내년 2월 프로농구 신인드래프트에서 전체 1번이 유력한 박성진은 이날 3점슛 4개를 포함해 23점(4어시스트 4스틸)을 쓸어담았지만,매치업 상대인 양동근을 뛰어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승부는 2차 연장 중반에 갈렸다.피말리는 접전 상황에서 양동근이 지휘하는 상무는 노련미를 발휘한 반면,지휘관 박성진이 떠난 중앙대는 마음만 급했다.84-84로 맞선 경기 종료 2분58초 전 상무 노경석(5점)이 3점포를 꽂아넣은 데 이어 종료 2분9초 전 임효성(18점 5리바운드)이 3점슛을 터뜨려 90-84로 달아나면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이어 열린 경기에선 건국대가 고려대를 76-73으로 꺾고 처음으로 이 대회 결승에 올랐다.결승전은 2일 오후 3시에 같은 곳에서 열린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GP장 중위로 격상·교대 주기 단축

     육군은 최전방의 모든 전방초소(GP) 책임자를 군 복무기간이 1년이 넘는 중위로 상향 조정할 방침이다.  30일 국방부에 따르면 임충빈 육군참모총장은 29일 국방부에서 이상희 국방장관 주재로 열린 군 고위급 긴급대책회의에서 GP장의 계급 격상 계획 등을 보고했다.현재 일부 GP장은 소위가 맡고 있다.지난달 23일 강원 철원군 최전방 GP에서 발생한 수류탄 폭발사건을 계기로 전방지역 등에서 근무 및 작전기강 강화를 위한 조치다.  이와 함께 육군은 현행 3개월인 GP 교대 주기를 단축하고 GP와 GOP(전방관측소),해안 부대 등에 근무하는 지휘관들에게 인사상 혜택을 주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또 현재 진행되는 60여개의 GP 시설 개선공사의 주변 환경정비 작업 등에 GP 부대원을 투입하지 않고 공병 병력에게 맡겨 GP 부대원들의 부담을 덜어주기로 했다.군 고위급 대책회의에서는 오는 5일까지 1·3군사령부와 제2작전사령부 주관으로 전방 GP와 GOP,경계부대에 대해 정밀진단을 실시하기로 했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읽기] (97) 가도의 동강진 무너지다

    [병자호란 다시읽기] (97) 가도의 동강진 무너지다

    청은 병자호란을 통해 여러 가지를 얻었다. 우선 자신들을 끝까지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조선을 굴복시킴으로써 대외적으로 ‘제국’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다른 측면의 소득도 짭짤했다. 망해가고 있던 명에게 조선은 가장 충성스러운 번국(藩國)이었다. 그런데 청이 조선마저 제압함으로써 명은 이제 고립무원의 상황이 되고 말았다. 청은 또한 조선을 끌어들여 명을 공략하는 데 활용할 수 있었다. 조선의 군사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지만, 수군과 화기수들은 만만치 않았다. 청은 조선 수군과 화기수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그 첫 결과가 가도( 島)의 함락으로 나타났다. ●조선, 명 배신 위기에 처해 전세가 기울어 청에게 항복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을 때에도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오는 것만은 피하려 했었다. 하지만 인조는 결국 출성하여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런데 항복한 이후에도 인조나 조선 조정이 끝까지 피하려 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조선이 군사를 내어 청군을 원조하고, 명을 공격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1637년 2월3일, 용골대와 마부대는 창경궁으로 인조를 찾아왔다. 그들은 조선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가도 정벌에 협조하고 동참할 것을 강요했다. 당시 인조나 조정은 서슬퍼런 그들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조선은 당장 황해도의 병선 100척과 수군 3000여명을 징발했다. 징발 과정에서 민폐를 따질 겨를도 없었다. 평안병사 유림(柳琳)을 주장으로,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을 부장으로 삼아 병력을 이끌고 철산 앞바다로 진격하도록 했다. 청군의 수군 지휘관은 이신 공유덕과 경중명이었다.1633년 명에서 선단을 이끌고 귀순해온 두 사람은 청군 가운데는 드물게 바다와 해전을 아는 장수들이었다. 홍타이지의 두 사람에 대한 총애는 각별했다. 선단을 이끌고 귀순해온 것에 감격하여 공유덕 휘하의 병력을 천우병(天佑兵), 경중명 휘하의 병력을 천조병(天助兵)이라 불렀다. 두 사람을 위해 심양에 거대한 저택도 새로 지어주었다.‘천우’,‘천조’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홍타이지에게 두 사람은 ‘하늘이 청을 돕기 위해 보내준 장수들’이었다. 바야흐로 천우군과 천조군을 본격적으로 활용할 기회가 찾아왔다. 홍타이지는 조선에서 철수하면서 두 사람을 조선에 남겨 수군 전력을 정비하도록 했다. 용산과 강화도 일대에서 함선을 새로 건조하거나 수선하고, 조선 수군의 협조를 얻어내는 임무를 맡겼다. 조선을 굴복시킨 여세를 몰아 가도의 동강진을 제거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1622년 모문룡이 처음 들어가 동강진을 설치한 이후 가도는 청의 서진(西進)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다. 하지만 지척에서 빤히 바라보면서도 수군이 없고 해전에 익숙하지 못하여 발만 동동 굴렀던 지난 15년이었다. 그런데 이제 동강진을 쳐 없앨 절호의 기회가 왔다. 공유덕과 경중명의 역량은 물론, 해전에 뛰어난 조선 수군까지 동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홍타이지는 ‘가도 함락’이라는 승전보를 기대하면서 철수 길에 올랐다. 조선은 ‘오랑캐’에게 붙어 명을 배신할 수밖에 없는 위기를 맞았다. ●明 도독 심세괴의 순국 청군은 가도를 곧바로 함락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사정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형이 험하여 전함의 접근이 어려운 데다 명군이 섬 주위에 화포를 배치하여 청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가도에는 도독 심세괴(沈世魁)가 군민 5만여명을 이끌고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조·청 연합군은 1637년 4월9일, 철산 앞바다를 출발하여 총공격을 개시했다. 선단을 셋으로 나눠 상륙을 시도했지만 험한 지형과 명군의 사격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공략이 여의치 않자 청군 지휘관 마부대 등은 임경업 등에게 묘안이 있는지를 물었다. 애초부터 내키지 않는 싸움에 동참하게 된 임경업 등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마부대 등은 회유와 협박을 반복했다. 임경업은 협박에 밀려 결국 묘안을 제시했다.‘지형이 험한 북쪽 해안을 버리고 남쪽 해안으로 우회하여 공격하자.’는 것이 핵심이었다. 마부대는 임경업의 계책에 따라 자신과 공유덕 등이 이끄는 청 수군을 남쪽으로 우회시켜 동강진을 배후에서 공격토록 하고, 조선군은 의연히 북쪽 해안에서 동강진의 정면을 돌파하는 작전을 썼다. 당시 명군은 철산 등 육지를 마주보고 있는 북쪽 해안의 방어에 주력하여 남쪽 해안에는 병력을 거의 배치하지 않았다. 청군은 결국 별 어려움 없이 남쪽 해안으로 상륙하여 동강진의 배후를 기습했고, 그와 동시에 조선군이 정면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남과 북에서 협공을 받은 명군은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전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엄청난 사상자를 낸 상태에서 심세괴는 잔여 병력을 이끌고 소달금(小達金)이라는 봉우리로 퇴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청군의 철기(鐵騎) 앞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마부대는 소달금에 대한 포위망을 좁히는 한편, 섬 안에서 대대적인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청군에게 떠밀려 들어온 조선군은 고민에 빠졌다. 청군과 함께 살육과 약탈에 동참할 것인가? 아니면 옛정을 생각하여 시늉만 할 것인가? 조선군은 애초 섬에 도착했을 때, 배에서 내리는 것도 미적거렸었다. 그런데 나만갑은 ‘병자록’에서 조선군이 청군보다 더 심하게 한인들을 죽이고 약탈을 자행했다고 적었다. 작전권이 청군 지휘부에게 있고 그들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이상 조선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심세괴는 항복을 권유받았지만,‘대명(大明)의 신하가 개돼지에게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며 청군의 칼날 아래 쓰러졌다. 휘하 병력 1만명가량도 목숨을 잃었다. 조선군의 공격에 놀란 일부 한인들은 ‘명이 조선에 무슨 잘못이 있기에 우리를 배반하고 적에게 붙어 우리를 참혹하게 죽이느냐?’며 절규했다. 가도 함락 소식이 서울로 전해진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한 시대의 종언 심세괴의 죽음과 함께 가도의 동강진은 결국 무너졌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명나라의 군진(軍鎭) 하나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조선과 명, 그리고 후금이 뒤얽혀 있던 동아시아의 기존 질서가 무너진 것을 의미했다. 인조대 내내 가도는 ‘뜨거운 감자’였다. 모문룡을 비롯한 가도의 역대 지휘관들은 조선을 몹시 괴롭혔다. 수시로 군량을 내놓으라고 강요하는가 하면, 가도의 한인들은 무시로 청북 지역에 출몰하여 조선을 곤혹스럽게 했다. 정묘호란 이후에는 조선을 오가는 후금 사신들을 체포하려 드는가 하면,‘조선이 명을 배신하고 오랑캐에게 붙었다.’고 북경 조정에 참소했던 것도 그들이었다. 그럼에도 명을 ‘상국’이자 ‘부모국’으로 섬기던 조선은 싫은 내색 없이 그들에게 군량을 제공하고 편의를 봐주었다. 가도의 교란 작전과, 그것을 용인하는 조선의 태도에 후금은 격앙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데는 가도의 존재도 분명 한 몫을 했다. 그런데 가도가 붕괴되기까지의 과정은 철저하게 명이 자멸(自滅)해 가는 모습과 닮아 있었다. 애초 모문룡은 가도에 들어가 ‘요동을 수복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그저 말뿐이었다. 감시의 사각지대에 안주하면서 막대한 부를 챙기고, 안일에 빠져들었다. 자연히 후금(청)과 맞서겠다는 본래 목표는 실종되었다. 명 조정은 그것도 모르고 엄청난 군자금과 물자를 가도에 퍼부었다. 목표는 사라지고 부만 늘어나면서 자연히 파벌 다툼이 잦아졌고, 그 와중에 수차례 반란이 일어났다. 이제 가도는 청의 서진을 견제하는 거점은커녕,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날로 역량이 커진 청이 가도를 장악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가도의 붕괴는 조선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명의 분신’이자 ‘충성의 대상’이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 가도에 상륙한 조선군이 살육과 약탈에 가담했던 것은 기존 조·명관계의 파탄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조선이 ‘새로운 상국’ 청에게 서서히 길들여져 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이기도 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日장교들 조직적 참가

    |도쿄 박홍기특파원|다모가미 도시오 전 일본 항공자위대 막료장의 해임을 불러온 역사왜곡 논문 경연대회에 상당수의 일본군 장교들이 조직적으로 참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마스다 고헤이 방위성 사무차관은 10일 기자회견을 열고 “논문 경연대회에 참가한 항공자위대 장교 94명 중 62명이 이시카와현 고마쓰에 있는 한 부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면서 “이 부대 지휘관이 지난 8월 경연대회 참가를 지시한 사실이 있었다.”고 밝혔다. 문제의 부대에는 다모가미 전 항공막료장이 1998년부터 1년간 지휘관으로 근무한 바 있다.hkpark@seoul.co.kr
  • 박용하ㆍ김민정, 금융계 영화 ‘작전’서 호흡

    박용하ㆍ김민정, 금융계 영화 ‘작전’서 호흡

    배우 박용하와 김민정이 국내 최초 금융계를 다룬 영화 ‘작전’을 통해 호흡을 맞춘다. SBS 드라마 ‘온에어’에서 까칠한 PD역으로 열연을 펼친 박용하는 영화에서 찌질한 인생을 한방에 갈아타기 위해 독기를 품고 수년간 독학으로 실력을 갖춘 배짱 있는 개인 투자자 강현수 역을 맡았다. 박용하는 강현수라는 캐릭터를 통해 대박을 꿈꾸는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을 대변할 예정이다. 영화 ‘음란서생’, 드라마 ‘뉴하트’ 등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한 김민정은 탈세를 원하는 졸부들과 비자금이 넘치는 정치인들 등 상류층의 자산 관리자인 작전의 자금줄 유서연 역을 맡았다. 김민정은 유서연을 통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냉철하고 능력 있는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보여줄 예정이다. 그밖에도 영화 ‘세븐 데이즈’에서 내공이 깊은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 배우 박희순은 법보다는 주먹, 주먹보다는 돈이 앞서는 대한민국의 엄청난 경제적 진실을 깨달은 조폭 출신의 작전지휘관 황종구를 연기한다. 인기 뮤지컬 ‘쓰릴 미’, 드라마 ‘일지매’를 통해 이름을 알린 김무열은 증권 브로커이자 작전의 설계자 조민형 역을 맡았다. 한편 영화 ‘작전’은 현재까지 약 60% 촬영이 진행됐으며 2008년 상반기 최고 흥행작인 ‘추격작’를 제작한 영화사 비단길의 신작이다. 사진=영화사 비단길 서울신문NTN 정유진 기자 jung3223@seoulntn.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韓·中 분노… 아소 아시아 외교 타격

    일본 자위대의 다모가미 도시오(田母神俊雄·60) 항공막료장(공군대장)이 일본의 과거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문을 발표, 논란이 일자 일본 정부가 그를 경질했지만 파문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다모가미 전 항공막료장은 최근 “우리 나라가 침략국가였다고 하는 것은 정말 억울한 누명이다.” “조선 반도와 중국에 군대가 진주한 것은 조약에 기초한 것이다.”라는 등의 주장을 담은 논문을 민간 현상논문에 응모, 최우수상작으로 선정돼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와 중·일 전쟁 등을 정당화하는 그의 논문은 일본 정부의 기존 견해와 배치되는 것으로, 일본 정부는 주변국의 반발 등 파문이 확산될 것을 우려해 지난달 31일 그를 긴급 경질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일본 최고의 지휘관이 침략전쟁을 부정했다는 점에서 아소 다로(麻生太郞) 정권의 아시아 외교에도 큰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국과 중국 등은 이번 논문 파문에 대해 충격과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다.일본 정부는 주일 한국 대사관을 통해 “항공막료장의 개인적 견해로 일본 정부의 기본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며 양해를 구하고 양국 관계에 악영향이 없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전해왔다.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1일 외교통상부 대변인 명의의 논평을 내고 “다모가미 전 항공막료장의 주장은 역사의 진실을 호도하는 것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과거 잘못을 겸허히 반성하고 이를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 것이 국제 선린우호관계의 근간이며, 이와 같은 역사왜곡이 되풀이돼서는 안 될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美 세계최대 노포크 해군기지를 가다

    美 세계최대 노포크 해군기지를 가다

    |노포크(미국 버지니아주) 이석우기자|워싱턴에서 승용차로 국도를 타고 3시간 남짓한 거리인 180여마일(300㎞)을 남동부쪽으로 달려내려 가니 버지니아주 동부, 햄프턴 로드 지역이 나왔다. ●엔터프라이즈 등 항공모함 4대의 모항 미국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큰 해군기지인 노포크 기지(Norfolk naval station)가 자리잡은 곳이다. 미국이 보유 중인 12척의 항공 모함 가운데 USS 엔터프라이즈·아이젠하워·루스벨트·트루먼 등 4대가 이 곳을 모항으로 하고 있다. 11㎞나 걸쳐서 늘어서 있는 14곳의 부두에 ‘꿈의 전투함’이란 최첨단 이지스함을 비롯,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등 미국 해군의 주력 함선 77척이 둥지를 틀고 있다. 미군 최대 보급창고 겸 해군 항공기지 등도 주변에 배치돼 있다. 기지는 스웰스 포인트라 불리는 대서양을 향해 툭 튀어나온 작은 반도와 주위에 형성된 만(灣)에 걸쳐 조성돼 있다. 면적은 20㎢. 여의도 2.4배 넓이.“부두가 바다에서 움푹 들어가 있는 만 안에 건설돼 있어 적의 공격이나 해일, 폭풍 등에서 잘 보호된다.”고 안내를 맡던 함대사령부 데이비드 러케트 대위가 지난 15일(현지시간) 설명했다. ●美 대서양함대의 중추 기지 러케트 대위는 “미 대서양 함대 사령부가 이 곳에 있다.”고 말했다. 이 곳이 아프리카 서부해안에서 남극, 북극, 지중해, 대서양 등을 통괄하는 대서양함대의 중추다. 사령관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해군, 공군 최고 지휘관도 겸한다. 노포크 기지는 1968년 임무를 마치고 바다에 떨어진 유인우주선 아폴로 7호 우주인들을 해상에서 성공적으로 귀환시킨 일로도 널리 알려졌다. 240여년 전 해적 공격에서 상선 보호를 위해 군항이 만들어진 것이 기지의 기원이다. 그러다 1917년 전략적 차원에서 초대규모 해군기지로 확장됐다는 러케트 대위의 설명이 이어졌다. 방문 중 승선이 허락된 함정은 소형구축함형 호위함 USS 니컬러스. “3명의 여성 대원을 포함해 178명의 승무원이 근무하고 있다.”고 이 함정의 정보·공보 담당자인 보이드 중위가 말했다. 여성 대원들은 각각 회계, 화력, 정보를 담당하고 있다는 설명에, 참관하던 국방부 관계자들 입에서 “핵심 포스트를 다 잡고 있네.”란 탄성이 새 나왔다.UH-60 헬기 2대를 탑재하고 재난재해 구조 및 불법 화물수송 선박 검색임무 등을 나토회원국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맡아 왔다.1982년 진수,1983년 취역한 니컬러스의 내부는 첨단 시설로 ‘리모델링’이 이뤄져 있었다. 조타실의 탐지장비는 바다에 빠진 승조원 위치를 추적할 수 있었다. 승조원들이 입고 있는 조끼에 신상정보가 입력된 칩이 내장돼 있어 위치 파악이 가능했다. 옆 부두에 정박돼 있던 5000여명 정원의 핵추진 항공모함 아이젠하워 호는 다음날 7~8개월 기간의 긴 출항 준비로 분주했다. 예정됐던 다른 몇 척의 순항함 방문도 갑작스럽게 이뤄진 펜타곤(미 국방부) 불시 점검 탓에 취소됐다.4만t 중량의 와스프급 강습상륙함도 눈에 들어왔다. 비행갑판에는 CH-46 상륙헬기와 SH-60 시호크 대잠용 헬기, 근접지원용 해리어(AV-8)기 등이 탑재돼 있었다.2000여명의 병력과 M-1전차 5대, LAV 장갑차 25대, M-198 곡사포 8대, 험비차량 68대, 공기부양정 2대 등도 동시 탑재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군인·군무원 8만여명 근무 노포크 기지에서 일하는 군인 및 군무원은 8만여명. 4만명은 기지 안에서 상주한다고 한다. 포츠머스, 윌리엄스버그, 체사피그 등을 포함하는 햄프턴 로드 지역에는 100만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드넓은 잔디밭에 수십 동씩 흩어져있는 4~5층의 낮고 여유로운 건물들, 교회와 놀이터, 한가롭게 파도에 흔들리고 있는 수백대의 빈 돛의 요트들로, 안내소를 통과해 기지에 들어서도 한참 동안 군 기지란 느낌은 들지 않았다. 10여분쯤이나 지났을까 CH-46 상륙헬기 착륙장과 C-2 및 E-2 호크아이 수송기,C-12 허론 다목적기와 MH-53수륙양용 헬기 수십여대씩을 각각 정비 중인 여러 격납고들이 눈에 들어 왔다. 러케트 대위는 “하루 275편의 군용기가 매일 발진,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노포크 기지는 하나의 도시였다. jun88@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92) 조선,항복하기로 결정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92) 조선,항복하기로 결정하다

    1637년 1월22일 강화도가 함락되었지만, 남한산성의 조정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조정은 이 때 청군이 또 다른 조건으로 제시한 척화신(斥和臣)을 잡아 보내는 문제를 놓고 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적진에 당도하면 죽음을 당할 것이 불 보듯 뻔한데 어떤 기준으로 누구를 몇 명이나 묶어 보낼 것인가? 인조나 비변사 신료들에게나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不忍之事)’이었다. 하지만 앞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청군은 연일 인조의 출성을 독촉해댔고, 산성을 지키는 병사들의 민심도 갈수록 흉흉해지고 있었다. 결국 최명길과 김류 등이 이 끔찍한 ‘불인지사’의 총대를 멨다. ●척화신들에게 자수를 권하다 1월22일, 김류와 이성구(李聖求), 최명길 등이 입시했다. 척화신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김류는 ‘척화신들의 논의가 과거에는 정론(正論)이었지만, 결국 나라를 그르친 죄를 범했으니 그들 스스로 적진으로 나갔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최명길은, 자신이 홍익한(洪翼漢)과 같은 집안이지만 종사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를 묶어보낼 수도 있다고 거들었다. 이성구 또한 ‘홍익한의 죄가 무겁다며 청군으로 하여금 처치하도록 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인조는 너무 참혹한 일이라며 입장 결정을 유보했다. 삼사(三司)를 비롯하여 신료들로부터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인조와 대신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이윽고 조정에서는 척화신들에게 자수하라고 촉구했다.‘불인지사’를 밀어붙이는 것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비롯된 고육책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할까? 척화신 박송(縛送) 문제로 조정이 뒤숭숭할 때, 산성을 지키는 군관들과 병사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1월23일, 수원과 죽산(竹山) 출신의 초관(哨官) 수백 명이 행궁 앞으로 몰려와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척화신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체찰부(體察府)로 몰려가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겁에 질린 체찰사 김류는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며 속히 해산하라고 종용했다. 나만갑은 ‘병자록’에서, 이 날의 시위는 하급 지휘관들의 본심이 아니라 고위 무장들의 사주에 따른 것이었다고 적었다. 어쨌든 산성의 분위기는 내부 분열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척화신들을 내 놓으라.’는 시위가 위력을 발휘했던 것일까? 이 날 조정은 청군 진영에 보낸 국서에서 척화신의 ‘처리’에 동의한다는 내용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국서에서 척화신으로 확실하게 언급된 인물은 홍익한이었다. 그는 당시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재직하고 있어서 산성에는 없었다. 국서에서는 ‘홍익한이 당초 가장 열렬히 척화를 주장했기에 평양을 맡김으로써 그로 하여금 대국 군대의 예봉을 스스로 감당하도록 했습니다. 만약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청군이 철군하는 날 평양 부근에서 그를 체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사실상 홍익한을 잡아 가라는 내용이었다. ●청군의 양동작전과 최후 통첩 1월23일, 청군은 양동작전을 펼쳤다. 조선이 척화신들을 묶어 보내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남한산성에 대해 최후의 공세를 시작했다. 인조의 출성을 이끌어 내기 위한 의도가 짙게 배어 있었다. 이 날 자정 무렵, 청군은 먼저 서문 방향으로 공격해 왔다. 그들은 운제(雲梯-성을 공격하는데 사용하는 사다리)를 이용하여 성을 넘으려고 시도했다. 당시 서문 방면의 조선군은 대부분 잠들어 있었다. 청군을 발견한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의 군관이 병사들을 깨웠다. 병사들은 올라오는 청군을 돌로 내려치고, 화포를 이용하여 공격했다. 새벽 두 시 무렵에는 망월대(望月臺) 쪽으로 몰려오는 청군을 신경진(申景 ) 휘하의 병력들이 물리쳤다. 서문과 망월성을 공격하다가 적지 않은 수의 청군이 죽었다. 1월24일에도 청군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구굉(具宏)이 지키고 있는 남성(南城)을 공격해 오자 아군이 조총을 쏘아 물리쳤다. 남성에서 물러난 청군은 망월봉(望月峯) 아래 홍이포를 설치해 놓고 산성을 향해 포탄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포격은 하루종일 계속되었다. 포탄은 행궁(行宮)까지 날아와 천장을 뚫고 바닥으로 깊이 처박힐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보였다. 행궁뿐 아니라 성첩의 많은 부분이 포탄에 맞아 허물어졌다. 산성 안 사람들은 겁에 질려 우왕좌왕했다. 1월25일, 청군은 사람을 서문으로 보내 사신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덕형(李德泂)과 최명길 등이 청 진영으로 가자 용골대와 마부대는 협박을 늘어 놓았다.‘황제가 내일 귀국하실 것이니 국왕이 출성하지 않는다면 사신은 다시 오지 말라.’며 그 동안 받았던 국서를 모두 돌려 주었다. 사실상의 최후통첩이었다. 최명길 등은 변변하게 이야기를 꺼내 보지도 못한 채 돌아왔다. 최명길 등이 돌아온 뒤, 포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 무렵 청군은 한편으로는 포격을 통해 산성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 넣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강화도에서 사로잡은 조선인 포로 몇 명을 다그쳐 산성 쪽으로 급히 이동시키고 있었다.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인조를 끌어 내려는 작전이었다. 이 같은 와중에 산성에서는 더욱 절망적인 상황이 빚어지고 있었다.1월26일, 이번에는 훈련도감과 어영청(御營廳)의 장졸들이 행궁으로 몰려와 무력시위를 벌였다. 역시 척화신들을 붙잡아 청군 진영으로 보내라는 요구가 터져 나왔다.‘인조실록’에 따르면 그들을 배후에서 사주한 주체도 신경진, 구굉, 홍진도(洪振道) 등 고위 무장들이었다. 시위를 벌이는 병사들은 해산하라는 명령에도 따르지 않았다. 승지 이행원(李行遠)이 나서 나무라자 군사들은 눈을 부릅뜨며 ‘승지를 모시고 가면 적을 쳐부술 수 있을 것’이라며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김류는 ‘그들은 부모와 처자가 살육당했기 때문에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원수처럼 여긴다.’고 나름대로 진단했다. 군사들이 난을 일으킬 기미까지 보이자 인조는 다급해졌다. 인조는 세자를 청군 진영에 보내겠다며 사신을 보내 통고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세자의 출성을 통해 수습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강화도 함락’을 통고받다 이 날 저녁 최명길, 김신국, 홍서봉 등이 청군 진영으로 갔다. 왕세자가 출성한다는 사실을 통고하기 위해서였다. 청군 지휘관들은 ‘국왕이 직접 나오지 않는 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여전히 선을 그었다. 이윽고 용골대 등은 최명길 일행에게 충격적인 내용을 통고했다. 그들은 강화도에서 급히 데려온 종실 진원군(珍原君)과 내관 나업(羅業)을 보여 주면서 강화도를 함락시켰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들이 들고 온 봉림대군의 친필 편지와 윤방(尹昉)의 장계도 전해 주었다. ‘강화도 함락’ 소문이 전해지자 남한산성은 충격에 빠졌다. 인조를 알현한 자리에서 최명길은 봉림대군의 편지와 윤방의 장계가 위조되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인조는 편지가 봉림대군이 쓴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분위기는 한 순간에 바뀌었다. 홍서봉, 김류, 이홍주, 최명길 등은 모두 인조의 ‘결단’을 촉구했다.‘신하된 자로서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머뭇거리면 더욱 기고만장해진 저들에게 화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인조는 차라리 자결하고 싶다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참담한 심경을 토로했다. 왕실의 가족들까지 모두 인질로 잡혀 버린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무기력함의 표현이었다. 이 무렵 구원군이 끊어진 것은 물론, 들려오는 것은 온통 우울한 소식뿐이었다. 당시 청군의 일부 부대는 이미 경기도를 넘어 충청도 일원까지 남하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공주의 공산성(公山城)을 비롯하여 목천(木川), 청주 등지까지 출몰하여 겁략을 자행했다.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은 청주에 있다가 청군의 습격을 받아 옥천으로 피신해야 했다. 인조와 조정의 입장에서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온통 캄캄할 뿐이었다.‘강화도 함락’은 절망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인조의 면전에서 물러난 최명길 등은 국서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인조의 출성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었다. 강화도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남한산성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국군의 날 화보] ‘건군 60주년’ 맞아 5년 만에 시가행진

    [국군의 날 화보] ‘건군 60주년’ 맞아 5년 만에 시가행진

    “선진 강군, 국민과 함께 미래로 세계로” 건군 60주년을 맞은 국군이 1일 국민과 함께 제2의 창군 결의를 다졌다. 이날 오후 잠실 주경기장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기념식사를 낭독한 뒤 군 통수권자 자격으로 대형 도자(陶瓷)북을 여섯번 치면서 제2의 창군이라는 새로운 결의를 다지는 선진강군 출정을 선포했다. 도자기로 된 대형 북은 지난 7월 전적지 국토순례단이 모아온 흙과 물로 빚어서 만들었으며, 호랑이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어 진군 나팔소리를 신호로 대규모 깃발이 등장하는 깃발무와 북공연이 어우러지면서 선진 강군의 위풍당당한 진군 모습을 표현했다. 여군 특전대원들이 포함된 연합 고공 강하단 60명은 유난히 맑은 가을 서울 상공을 연막탄을 이용, 무지갯빛과 형형색색으로 수놓으면서 시민들의 환호 속에 잠실 주경기장·보조경기장·한강시민공원 등으로 사뿐히 내려앉는 강하시범으로 큰 박수를 받았다. 이어 최신예 F-15K전투기 5대를 비롯한 6개 편대 28대의 전투기가 잠실 주경기장 상공을 선회하는 축하비행을 펼쳤고, 도보부대와 각 시기별 군복을 입은 ‘국군변천제대’가 분열식을 가졌다. 기념식이 끝난 뒤 잠실 주경기장에서 역삼역까지 3㎞ 구간에서 기계화부대의 시가행진이 펼쳐졌다. 실전 배치를 앞둔 차기전차(K2), 차기보병장갑차(K21) 등이 국민들에게 첫선을 보였다. 또 현재 운용 중인 사거리 278㎞의 공대지미사일(SLAM-ER), 국산 대공미사일 천마, 자주대공포 비호, 방공무기 신궁, 올해 독일에서 도입한 패트리엇 미사일 등 24종 86대의 장비가 위용을 과시했다. 기계화부대 뒤로는 국군변천제대 장병 340여명이 광복군복을 비롯해 창군 당시부터 6·25전쟁, 베트남전, 해외파병에 이르기까지 시기별 19개 종류의 군복을 입고 삼성역∼선릉역의 2㎞ 구간을 뒤따라 행진하며 건군 60년의 역사를 조명했다. 14개 부대 1800여 장병의 행진과 24대의 최신형 군용 지프차에 나눠 탄 군 원로 및 참전용사, 순직 유가족 등 72명의 카퍼레이드도 이어졌다. 이날 행사에는 정부와 군 관계자, 군 원로 및 참전용사, 현역 장병 4000여명, 그리고 일반 시민 등 6만 5000여명이 참석했다. 김진훈(중장·육사30기) 제병지휘관은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비롯한 군 원로와 제2연평해전 및 해외파병 전사자 유가족 대표, 낙도 어린이 등 32명의 국민대표를 초청, 국민사열대에 앉도록 하는 등 국민과 함께하는 행사가 되도록 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글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사진 도준석 정연호기자 pado@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90) 강화도가 함락되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90) 강화도가 함락되다 (Ⅱ)

    청군은 강화도 공격을 처음부터 치밀하게 준비했다. 도르곤(多爾袞)은 심양에서 데려오거나 한강 일대에서 사로잡은 조선인 선장(船匠)들을 활용하여 다량의 병선을 만들었다. 크기는 작지만 매우 빠른 배들이었다. 청군은 그 배들을 갑곶(甲串)까지 육로로 운반하여 조선군의 허를 찔렀다. 한강이 얼어 있던 당시, 강화도의 조선군 지휘부는 청군이 육로로 배를 운반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다 할 방어 태세를 갖추지 않고 오로지 천연의 험세(險勢)만을 믿고 또 믿었다.‘준비된 군대’의 의표를 찌르는 작전 앞에서 강화도가 처참하게 무너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갑곶 방어선이 무너지다 갑곶은 육지와 강화도를 잇는 바다의 폭이 매우 좁은 곳이었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작은 거룻배만으로도 건널 수 있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그럼에도 김경징 등은 갑곶 방어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청군이 상륙작전의 출발지를 갑곶으로 정한 것은 까닭이 있었다. 청군이 도해(渡海)를 시도하던 날 갑곶에 배치된 방어 전력(戰力)은 충청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이끄는 병선 7척과 수군 200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당시 해안 방어의 주력은 주사대장(舟師大將) 장신(張紳) 휘하의 수군이었는데, 광성진(廣城鎭) 부근에 머물고 있었다. 강화성 방어를 맡은 초관(哨官)들 대부분도 장신의 선단에 소속된 배에 타고 있는 상태였다. 1637년 1월21일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김경징은 장신에게 휘하의 수군을 갑곶으로 이동시키라고 지시했다. 장신은 급히 선단을 움직였지만 마침 조금(潮水가 가장 낮은 때인 음력 스무사흘)을 코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조금 때문에 전진이 여의치 않았던 장신의 선단은 이튿날 새벽까지도 갑곶에 도착하지 못했다. 청군의 공격은 이미 시작되었다. 강진흔은 중과부적인 상태에서도 분전했다. 적선 3척을 침몰시켰지만 자신의 배 또한 청군의 화살과 대포에 맞아 죽은 군졸이 수십 명이나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장신의 수군이 도착했다. 장신은 정포만호(正浦萬戶) 정연(鄭) 등을 시켜 청군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했다. 덩치가 훨씬 큰 조선 전함이 들이받자 적선 한 척이 침몰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많은 청군 병선들이 방향을 바꿔 자신의 선단을 향해 몰려들자 장신은 겁에 질리고 말았다. 그는 갑자기 정연 등에게 후퇴하라고 명령하고, 광성진 쪽으로 방향을 틀어 도주하기 시작했다. 변변하게 싸워 보지도 않고 퇴각을 결정했던 것이다. 강진흔이 발을 동동 구르며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장신은 끝내 외면했다.‘인조실록’과 ‘병자록’ 등에는 격앙된 강진흔이 장신을 질타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장신, 네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도 어찌 차마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너를 베어 죽이겠다.” 하지만 장신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정연 등은 전진하여 강진흔을 구원하려 했으나 장신의 위세에 밀려 물러서고 말았다. 갑곶 방어선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청군이 강화성을 포위하다 갑곶에서 강진흔의 수군이 무너지자 청군이 상륙을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해안에 복병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여 섣불리 건너오지 않았다. 척후병이 먼저 상륙하여 주위를 둘러본 뒤, 이렇다 할 저항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다를 건넜다. 싸울 의지도 능력도 없던 김경징 등은 당황하여 해안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성 안으로 달아나려고 획책했다. 청군 대병력과 해안에서 직접 맞서봤자 승산이 없다는 핑계를 댔다. 호조좌랑 임선백이 봉림대군에게 달려가 호소했다.‘어찌 천연의 요새를 버리고 허물어진 성안에 들어간단 말입니까? 나라의 존망이 이 한번의 싸움에 달려 있는데 대장이 물러나 위축되어 군사들의 마음을 꺾어서는 안 됩니다.’ 봉림대군도 김경징을 말렸지만 그는 이미 상황 판단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지휘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해안에 배치된 병사들은 인근의 산 등지로 물러나 버렸다. 임선백은 봉림대군에게 진해루(鎭海樓) 아래를 비롯한 험한 곳에 진을 치고 결전을 벌이자고 건의했다. 그러는 사이에 갑곶 건너편에 있던 청군의 대병력은 이미 바다를 건너 상륙을 시도하고 있었다.‘병자록’ 등에서는 ‘청군이 마치 나는 듯이 바다를 건너 달려들었다.’고 적었다. 여러 곳에서 조선군의 산발적인 저항이 이어졌다.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이 지휘하는 병력은 진해루 아래에서 적 9명을 살해하는 등 분전했다. 하지만 이미 청군에게 도해를 허용하여 사기가 저하된 데다 중과부적이었다. 황선신과 천총(千摠) 강홍업(姜弘業), 초관 정재신(鄭再新) 등 항전하던 말단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했다. 그럼에도 장신의 배에 타고 있던 다른 초관들은 바라만 볼 뿐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경징과 이민구는 이미 나룻배를 타고 장신의 배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도주했다. 격분한 천총 구일원(具一元)은 장신을 꾸짖고 물에 빠져 죽었다.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 전창군(全昌君) 유정량(柳廷亮) 등의 휘하에서 강변을 수비하던 병력들도 모두 바다나 산으로 달아났다. 전투를 해본 적이 없던 유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청군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갑곶 나루를 돌파한 청군은 사시(巳時·오전 9∼11시) 무렵 강화성으로 밀려들었다. 청군은 성을 포위하고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성안에서는 원임대신 김상용(金尙容) 등이 중심이 되어 방어군을 배치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다. 조선군은 조총과 활을 쏘며 저항했지만, 집중 포격을 앞세워 몰려드는 청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미 강화성보다 몇 배나 견고한 대릉하성을 함락시킨 경험이 있는 그들이었다. 김경징 등 최고 지휘부의 오판과 태만, 그리고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수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상륙을 허용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강화성의 북문(北門)이 가장 먼저 무너지고 청군은 성안으로 밀려들었다. ●이어지는 자결, 그리고 죽음들 불과 한나절여 만에 강화성은 함락되고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저항하거나 도망치던 수많은 사람들이 청군에게 희생되었다. 또 ‘오랑캐’가 몰려오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다. 남문에 머물던 김상용은 화약 궤짝에 불을 질러 스스로 폭사했다. 그의 장렬한 죽음과 함께 문루도 사라져 버렸다. 김상용 말고도 우승지 홍명형(洪命亨), 도정(都正) 심현(沈俔), 봉상시정(奉常寺正) 이시직(李時稷), 주부(主簿) 송시영(宋時榮), 전 공조판서 이상길(李尙吉) 등이 자결했다.‘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대의를 내세워 순절한 것이다. 이시직이 죽기 전에 아들에게 남긴 글은 비감했다.“장강(長江)의 험함을 잃어 북쪽 군사가 나는 듯이 건너오는데, 술 취한 장수는 겁이 나 떨며 나라를 배반하고 목숨을 지키려 드는구나. 파수(把守)가 무너져 만백성이 어육(魚肉)이 되었으니 하물며 저 남한산성이야 조석간에 무너질 것이다.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자결하려 한다. 살신성인하려 하니 땅과 하늘을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 아 내 아들아. 삼가 생명을 상하게 하지 말라. 돌아가 유해(遺骸)를 장사 지내고, 늙은 어미를 잘 봉양하거라. 그리고 깊숙한 골짜기에 몸을 맡겨 세상에 나오지 말라. 구구한 나의 유원(遺願)을 잘 따르기 바란다.” ‘골짜기에 몸을 맡겨 세상에 나오지 말라.’ 이 한마디 속에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지식인들이 추구하던 삶의 가치가 함축되어 있었다.‘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세상에 나아가 벼슬하는 것을 삼가라.’는 당부였다. 하지만 ‘술에 취해’ 자신의 임무를 팽개쳤던 관인들 때문에 ‘도마 위의 고기’가 되어야 했던 수많은 생령들의 희생은 과연 어디서 보상받을 것인가? 강화도가 함락되던 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성인(成仁)을 도모했던 관인들의 이면에는 너무도 많은 보통 사람들의 처참한 죽음이 가리어져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軍 줄대기 금지령

    이상희 국방장관이 진급을 위해 외부에 줄대는 것을 ‘해군(害軍) 행위’로 간주하고 뿌리를 뽑겠다고 최근 강도 높게 경고했다. 이 장관은 최근 군 내부에 보낸 ‘장관 메시지’에서 “통수 및 지휘 계통 외에 (외부에) 줄대기하는 자를 발본색원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군 관계자들이 22일 전했다. 이 장관은 “정도를 걷는 대다수 구성원을 보호하고 군 지휘계통을 유지할 책임이 장관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국방장관의 이례적인 경고는 10월 대령 및 장군진급 인사를 앞두고 정치권의 인사개입 움직임 및 줄대기 등 잡음이 커지고 있는 탓으로 보인다. 이 장관은 “최근 몇 년 동안 군 일각에서 지휘계선 밖의 영향력 있는 곳에 줄대기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인식속에 비선라인을 형성하고, 진급 및 인사에 대한 왜곡된 여론을 조성하는 등 일부 장교들의 잘못된 행동에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취임 후 역점을 둬 시행 중인 ‘전문성에 기초한 인사관리’ 방침에 불만을 품고 있는 군내 일부 세력에게도 경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장관은 “가장 불만이 있다고 하는 인사·군수 특기의 경우 진급해 전문 기능직위에 발탁될 수 있고 야전 지휘관으로 발탁될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이 능력만 갖춘다면 오히려 선택의 폭과 기회가 넓어진다.”면서 “전문 능력보다 안배를 통해 진급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또 “일부 사람들이 인사·군수특기는 앞으로 사단장, 군단장으로 진출할 수 없다는, 의도적으로 곡해된 인식을 확산시켜 해당 특기 일부 장교들의 불만을 일으키고 있다.”며 “이는 제도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결과이며 의도적으로 왜곡·선동하는 것으로, 용서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원태재 대변인은 이와 관련,“형평성과 안배를 고려한 행정위계의 편의적인 인사에서 탈피해 국방 인력을 기능별로 최고의 전문가집단으로 육성하기 위해 전문성에 기초한 인사 관례를 추진해야겠다고 하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고 밝혔다.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9) 강화도가 함락되다(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89) 강화도가 함락되다(Ⅰ)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가는 문제를 놓고 마지막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던 1637년 1월22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왕실 가족들과 조정 신료들의 처자들, 그리고 역대 선왕들의 신주(神主)가 피란해 있던 곳이 강화도였다. 인조와 조정 신료들이 외롭고 추운 산성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강화도만은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 덕분이었다. 조선 군신들은 ‘변변한 수군도 없고 바다에도 익숙지 못한 청군이 강화도만은 어쩔 수 없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강화도는 무너졌고 피란해 있던 피붙이들은 모두 청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남한산성의 조정은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강화도를 장악하라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을 도발하면서 가장 크게 우려했던 상황이 바로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인조의 입도(入島)를 막지 못할 경우 전쟁은 분명 길어지게 될 것이고, 속전속결로 ‘조선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구상도 헝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홍타이지는 청군 본진의 출발에 앞서 선봉 부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했던 것이다. 1637년 1월 중순 홍타이지는 남한산성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는 한편, 출성을 완강히 거부하는 인조를 제압할 수 있는 묘수를 찾기 위해 부심했다. 묘수란 다름 아닌 강화도를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강화도만 공취(攻取)하면 인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청태종실록’에는 홍타이지가 일찍부터 강화도 공략을 염두에 두고 병선(兵船)을 제작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부하들에게 1월21일 전까지 병선 제작을 완료하라고 독촉했다. 홍타이지의 지시를 받은 청군은 심양에서 철장(鐵匠)을 비롯한 장인들을 데려오는 한편 병선 제작에 돌입했다. 한강과 임진강 일대에 흩어져 있던 선박들을 끌어 모아 수리하고, 주둔 지역 주변의 민가를 헐어 뗏목과 배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육지에서 병선을 운반하기 위해 동거(童車)라 불리는 작은 수레도 제작했다. 수군이 미약하고 해전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청군이 이렇게 병선을 제작하여 강화도를 직접 공격할 계획을 세웠던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그들은 강화도 주변에 대한 세심한 정찰을 통해 섬을 공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섬 주변에 배치된 조선군의 방어 태세가 그다지 견고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청군 가운데는 수군을 운용해 본 경험이 있는 장수들이 있었다.1633년 수군과 함선을 이끌고 명에서 귀순해 왔던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에게 수군을 이끌게 하고 홍이포(紅夷砲)의 화력을 적절히 활용하면 강화도를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무사안일에 젖은 강화도의 조선 지휘부 홍타이지는 1637년 1월18일까지는 강화도에 대한 공격을 유보했다. 적어도 이날까지는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항복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조가 나오지 않자, 홍타이지는 구왕(九王) 도르곤(多爾袞)에게 강화도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1월19일, 청군은 자신들이 제작한 작은 배 80척을 수레에 싣고 강화도로 출발했다. 당시 강화도 건너편에는 도르곤, 호게(豪格), 공유덕 등 청군 지휘부가 1만 6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대기하고 있었다. 청군은 1월21일까지 강화도를 공략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렇다면 강화도에 있던 조선군의 방어 태세는 어떠했을까? 당시 강화도 방어와 왕실 가족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던 인물은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이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는 강화도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자신의 일가와 친지들만을 노골적으로 챙겨 구설수에 올랐던 인물이다. 강화도로 들어온 뒤에도 김경징의 행태에는 문제가 많았다. 그는 강화도를 그야말로 금성탕지(金城湯池)로 여겨 방어를 위한 군사적 준비를 거의 팽개치다시피 했다. 청군이 배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 청군 내부에 해전을 경험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김경징은 광성진(廣城津) 부근에 약간의 수군을 배치했을 뿐, 다른 지역의 방어는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 강화도의 대안인 김포 주변을 감시하고, 그곳에도 병력을 배치하여 대비하는 것이 절실했지만 아무런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병자록’을 비롯한 여러 자료를 보면, 김경징은 날마다 잔치를 열고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일이었다.‘금성탕지’에서 오래 버틸 요량으로 주변의 육지 고을에서 곡식을 운반해 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저 강화도에서 오래 버틸 생각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못한 주변의 신료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방어 태세를 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하자 그는 참견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심지어 봉림대군(鳳林大君·후일의 효종(孝宗))조차 그의 위세에 눌려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인조의 어명에 의해 검찰사로 임명된 데다 그의 부친은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체찰사(體察使) 김류였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상 강화도로 피신해 있던 모든 사람들의 생사 여탈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막강한 존재였다. 검찰사 김경징을 보좌해야 할 검찰부사(檢察副使) 이민구(李敏求) 또한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가 근왕병을 이끌고 왔다가 죽자, 남한산성의 조정은 이민구를 대신 충청감사로 임명했다. 하지만 강화도에서 나가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이민구는 갖은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충청도로 부임하는 것을 회피했다.‘병자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처삼촌(妻三寸)인 전 영의정 윤방(尹昉)의 ‘백’까지 이용하여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정작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한 조처에는 손을 놓았던 것이다. ●무너지는 강화도 김경징을 비롯한 조선군 지휘부가 여전히 안일에 젖어 있던 1월21일, 심상치 않은 보고가 날아들었다. 통진가수(通津假守) 김적(金迪)으로부터 청군이 강화도를 향해 배를 운반하면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던 것이다. 김경징은, 강물이 언 상태에서 배를 운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김적의 목을 베려고 덤볐다. 그가 허위 보고를 통해 군정(軍情)을 어지럽혔다는 명목이었다. 김경징은 청군이 동거를 이용하여 배를 육로로 운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갑곶(甲串)을 지키는 장수로부터도 똑같은 보고가 들어오자 김경징은 다급해졌다. 강화유수(江華留守) 겸 주사대장(舟師大將)인 장신(張紳)의 수군을 광성진에 배치하여 갑곶 연안까지를 방어토록 하고, 충청수사 강진흔(姜晉昕)이 이끄는 수군을 연미정(燕尾亭) 아래 갑곶에 배치하여 가리산(加里山)부터 월곶(月串)에 이르는 해안을 방어토록 했다. 또 한흥일(韓興一),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 종묘령(宗廟令) 민광훈(閔光勳),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 등을 차출하여 강화성과 주변 포구 등지의 수비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강화도 수비군 1000여명을 이끌고 진해루(鎭海樓)에 지휘본부를 차렸다. 육지를 방어하는 지휘관들은 김경징 자신을 포함하여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문관과 종실들이 대부분이었다. 미리 방어 훈련을 실시해 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 이 같은 임기응변밖에는 방도가 없었다. 김경징은 장병들에게 무기와 화약 등을 나눠주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였다. 화약을 조금씩 분급하면서 그것을 일일이 기록했다는 것이다. 적의 상륙 시도가 임박한 위기 상황을 고려하면 문제가 있는 조처였다. 강화도가 함락될 경우, 화약 분급량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1월22일 새벽, 청군은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청군은 새로 건조하거나 수리한 선박 100여척에 50∼60명씩의 병력을 분승시켜 공격을 개시했다.‘청나라 오랑캐는 바다에 약하다.’라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청군의 일부 선박에는 홍이포까지 거치되어 있었다. 홍이포에서 포탄이 발사되자 조선군의 사기는 이내 꺾이고 말았다. 전투 경험도 없고, 사전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철옹성’ 강화도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기고] ‘역량평가’ 발전 방안 논의할 때다/ 유태용 광운대 산업심리학과 교수 한국 산업·조직심리학회장

    [기고] ‘역량평가’ 발전 방안 논의할 때다/ 유태용 광운대 산업심리학과 교수 한국 산업·조직심리학회장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공수부대의 활약상을 다룬 ‘밴드 오브 브러더스’라는 영화를 보면 엄격한 규율과 혹독한 훈련으로 부대원들을 최강의 전사로 육성하는 소블 대위가 나온다. 소블 대위는 훌륭한 훈련소 교관으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실전 투입을 앞둔 모의전투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모의전투에서 우유부단한 태도와 지도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는 무능으로 부대원들을 목적지로 인도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대위는 전투에 투입되지 못한다. 모의전투 상황에서 야전 지휘관에게 요구되는 역량을 효과적으로 검증했고, 이를 통해 조직과 개인에게 최적의 인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어떤 직위에서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역량을 규명한 후, 실제 업무와 유사한 모의 상황에서 보이는 행동을 통해 대상자를 평가하는 방법을 역량평가라고 한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중 독일·미국·영국 군대에서 우수한 장교를 선발하기 위한 수단으로 실시됐고, 영국 정부는 공무원 선발 과정에도 이를 도입했다. 이후 역량평가는 미국·캐나다·호주 등 OECD 선진국으로 확산됐다. 민간에서도 AT&T를 시작으로 IBM, 제록스, 필립스,GE 등 대기업에서 활발히 사용됐다. 현재 포천지 선정 500대 기업의 80% 이상이 인재선발에 역량평가를 활용하고 있다. 우리 정부에서도 2006년 고위공무원단제도가 도입되면서 고위직에 진입하려는 과장급 공무원을 대상으로 역량평가를 실시하고 있다. 고위공무원의 실제 직무 상황을 시뮬레이션으로 구성한 다양한 과제를 사용해 의사소통, 고객지향, 비전제시 등 고위공무원에게 요구되는 9개 역량을 평가한다. 고위공무원단 역량평가는 지금까지 2년여의 짧은 운영기간 동안 국제적인 가이드라인을 충실하게 구현한 모범 사례로 자리매김했고, 공공부문뿐 아니라 삼성 등 민간기업에서도 벤치마킹하는 성공적인 선례가 됐다. 또 공무원들은 고위공직자로서 국정수행에 필요한 역량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으며, 공직 사회에 자기계발 분위기가 확산되는 등 긍정적인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운영상의 일부 문제점에 초점을 맞춰 필요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향도 있다. 그 사람의 과거 실적 또는 최고경영자의 감(感)에 의한 인사가 정확한데, 많은 비용을 들여서 평가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사담당자들은 과거 고과가 다른 직위에서 그 사람의 미래 성과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을 토로한다. 또한 직원이 몇 명 안 되는 소규모 조직에서는 최고경영자의 감에 의한 인사가 가능하지만, 대규모 조직에서는 최고경영자가 직원들의 면면을 자세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영화 ‘밴드 오브 브러더스’에서도 과거 고과나 상사의 주관에 의해 소블 대위를 전장에 투입했다면 그와 부하는 모두 전장을 헤매다 죽거나 적의 포로가 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역량평가는 인재 선발에서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고, 역량있는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선진 인사관리기법인 것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지속적으로 시행되지 못한다면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역량평가제도 자체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보다 역량모델의 정교화, 결과활용의 확대, 평가후 체계적인 피드백과 보완교육 등 발전 방안을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공공부문과 민간기업 평가에서 이정표가 되어온 고위공무원단 역량평가제도가 꾸준히 보완되고 확산돼 우리나라에서 타당하고 신뢰할 수 있는 인사관리의 모범사례로 정착되기를 기대한다. 유태용 광운대 산업심리학과 교수 한국 산업·조직심리학회장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7) 최명길 국서를 쓰고, 김상헌 그것을 찢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87) 최명길 국서를 쓰고, 김상헌 그것을 찢다

    시간이 흐르면서 청과의 교섭은 조선의 ‘항복 조건’을 논의하는 과정으로 변해갔다.1627년 정묘호란 당시 맺은 ‘형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홍타이지는 사실상 ‘항복’이나 마찬가지인 신속(臣屬)을 요구했다.‘오랑캐’를 황제로 섬겨야 하는 ‘현실’을 코앞에 두고 신료들은 통곡했다. 하지만 ‘신속’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올 것, 자신들과의 화의를 배척한 척화파(斥和派)들을 묶어 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홍이포(紅夷砲)을 발사하는가 하면, 강화도를 함락시킬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참담한 사신들 이렇다 할 ‘카드’가 없는 상황에서 협상을 위해 청군 진영을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청군 진영에서는 홍타이지의 ‘노여움’을 풀고, 항복 조건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아부와 상찬(賞讚)을 늘어놓아야 했다. 자연히 산성의 척화파들로부터는 ‘오랑캐에게 고개 숙인 자’,‘대의명분을 저버린 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1월13일 청군 진영에 갔을 때, 조선 사신들은 청 측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최명길은 ‘황제는 참으로 관대하고 도량이 넓은 분입니다. 진실로 남한산성을 공격하여 도륙(屠戮)하고자 한다면 청군 또한 상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임금과 신료들은 저항하다가 힘이 미치지 못하면 자결할 것이니 그대들이 입성하는 날,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시체 더미뿐일 것입니다. 그대들이 죄를 뉘우치는 조선을 용서한다면 영원히 은인이 되는 것이니 또한 좋은 일이 아닙니까?’ 라고 청군 지휘부를 달래려고 시도했다. 홍서봉(洪瑞鳳)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 그들의 감성에 호소했다. 홍서봉은 직접 마른 풀을 집어 태우면서 청군 지휘관들에게 ‘이 풀이 비록 바짝 말랐지만 하늘이 비와 이슬로써 적셔준다면 반드시 살아날 것이오. 오늘 조선이 그대들로부터 허물을 용서받는다면 황제는 하늘이 되고, 그대들은 비와 이슬이 되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눈물겨운 노력이자 몸짓이었다. 산성에 대한 포위를 풀어달라고 요청하기 위한 호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청군 지휘관들은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1월17일에 보내온 회답서에서 무조건 항복하고 신속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청의 신속(臣屬) 요구를 받아들이다 1월18일, 논란 끝에 최명길이 청 태종에게 보낼 국서의 초안을 완성했다. 비변사 신료들이 그것을 돌려보며 문구를 수정했다. 신료들은 초안 가운데 홍타이지를 ‘폐하(陛下)’라고 호칭한 것을 지웠다. 내용은 당연히 지난번 보냈던 것보다 더 공손해지고, 스스로를 더 낮추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소방은 10년 동안 형제의 나라로 있으면서 오히려 대국의 운세(運勢)가 일어나는 초기에 죄를 얻었으니, 후회해도 소용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원하는 것은 단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구습(舊習)을 말끔히 씻고 온 나라가 명(命)을 받들어 여러 번국(藩國)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진실로 위태로운 심정을 굽어살피시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허락하신다면, 문서와 예절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의식(儀式)을 따를 것입니다.’ ‘여러 번국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라는 구절이 내용의 핵심이었다. 아직 ‘신(臣)’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홍타이지를 ‘황제’로, 청을 ‘황제국’으로 섬겨 군신(君臣) 관계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었다. 정묘호란 당시 맺었던 형제관계를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조선 스스로 접는 대목이기도 했다. 사실상 ‘항복’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인조가 성을 나가는 것만은 면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최명길은 이렇게 썼다.‘성에서 나오라고 하신 명이 실로 인자하게 감싸주시는 뜻이긴 합니다만, 생각해 보건대 겹겹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고 황제께서 한창 노여워하고 계시는 때이니 이곳에 있으나 성을 나가거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용정(龍旌)을 우러러 보며 죽음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결정하자니 그 심정 또한 서글픕니다. 옛날 사람이 성 위에서 천자에게 절했던 것은, 대체로 예절도 폐할 수 없지만 군사의 위엄 또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남한산성을 나가서 항복하는 대신 청 태종이 회군하는 날, 성 위에서 요배(遙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나마 인조의 체면과 위신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려는 몸짓이었다. ●김상헌 국서 내용 보고는 통곡 국서의 최종본을 완성하기 위해 최명길은 비변사에 머물면서 내용을 가다듬었다. 이 때 예조판서 김상헌이 들어와 내용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버렸다. 김상헌은 인조에게 달려갔다.‘저들과의 명분이 정해지고 나면 우리에게 군신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단 성문을 나서면 북쪽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로부터 적군이 성 밑에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정강(靖康)의 변(變)을 다시 볼까 두렵습니다.’ ‘정강의 변’이란 1126년 금군(金軍)이 송(宋)의 수도인 개봉(開封)을 함락시킨 뒤, 태상황(太上皇) 휘종(徽宗)과 황제 흠종(欽宗)을 붙잡아 간 사건을 가리킨다. 휘종은 금의 오지인 만주로 끌려가 눈이 먼 상태에서 객사했고, 흠종 역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은 ‘정강의 변’ 때 송이 처한 상황과 여러모로 흡사했다. 더욱이 성을 포위하고 있는 청군은 금군의 후예였고, 조선은 중국의 어느 왕조보다도 송을 존모(尊慕)해 왔다. 김상헌은, 신속하겠다고 약속할 경우 분명 성을 나가야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인조와 왕세자 또한 휘종과 흠종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김상헌은 일단 군신의 명분을 받아들이면 그나마 남아 있는 성 안의 결전 의지는 급속히 해체되어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군신 관계’에 반대하는 대다수 신료들의 의견도 비슷했다. 이식(李植)은 ‘우리가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굳게 보이면, 저들이 도륙하여 입성한 이후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임을 깨달아 포위를 풀고 물러갈지도 모른다.’는 예측을 내놓았다. 국서를 바로 보내지 말고 하루 정도 시간을 두고 내용을 다시 수정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인조는 반문했다.‘양식이 지탱하기에 충분하고, 병력이 적을 막을 만큼 강하다면 어찌 이런 일을 하겠는가?’ 그러면서 인조는 일찍 죽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며 탄식했다. 주변에 있던 신료들이 일제히 눈물을 떨구고, 인조 옆에 앉아 있던 소현세자의 통곡 소리가 서글프게 흘러나왔다. ●청군, 무력 시위를 벌이다 최명길이 다시 나섰다. 이제 신속을 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국서를 보내는 것을 늦추자는 주장도 일축했다. 늦추자고 주장하는 신료들에게 ‘그대들이 사소한 것에 매달려 일을 이 지경으로 끌고 왔다.’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몽롱한 상태에서 국사를 논할 수는 없다고 일갈했다. 1월18일, 논란 끝에 완성한 국서를 갖고 청군 진영으로 갔다. 하지만 청군 지휘부는 국서 접수를 거부했다. 인조의 출성(出城)을 거부하는 내용 때문이었다. 사신들이 하릴없이 돌아오자, 비변사는 삭제했던 ‘폐하(陛下)’라는 글자를 추가하여 다시 보냈다. 1월19일, 홍이포 포탄이 성 안으로 날아들었다. 인조의 출성을 요구하는 무력시위였다. 처음으로 포탄에 맞아 죽은 사람이 나타났다. 산성은 공포 속으로 빠져들었다. 홍타이지는 또한 강화도를 공략할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조선 왕실의 가족들과 고관들의 처자식들이 피란해 있는 강화도를 먼저 함락시키면 남한산성의 ‘결전 의지’는 결정적으로 꺾일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이미 강화도를 공략할 배를 만들어 두라고 지시해 놓은 상태였다. 인조가 나오지 않으면 항복을 받아줄 수 없다며 병선(兵船)을 건조하고 있던 청군의 압박 속에서 남한산성의 운명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한국 사업가·탈북자 100여명 납치·북송”

    “한국 사업가·탈북자 100여명 납치·북송”

    위장 탈북 여간첩 원정화(34)는 대북 정보요원 살해, 북한 노동당 비서로 귀순한 황장엽씨의 소재 파악 등 주요 지령 수행에는 대부분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미군기지를 촬영한 사진을 넘기고, 군 장교와 교제하며 포섭을 시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황장엽 거처 파악 등 주요지령 실패 남한 침투지령을 받은 원정화는 2000년 중국동포 김모씨 명의로 신분을 세탁한 뒤 다음해 10월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이후 경기 북부 지역 등에서 미군기지 촬영 임무를 수행하다가 다시 ‘원정화’로 이름을 바꿔 탈북자로 위장귀순하고 한국 남성 최모씨와 결혼했다. 원정화가 받은 주요지령은 ▲2003년 대북정보요원 중국 유인, 남한사업가 포섭 ▲2004년 대북정보요원 2명 살해 ▲2005년 국정원·하나원·대성공사(탈북자 신문 기관) 위치 파악, 군 장교 포섭 뒤 군사기밀 탐지·중국유인 등이다. 또 ▲2006년 황장엽·부시 미국 대통령 면담 탈북자 김모씨 위치 파악, 비전향 장기수 파악, 안보강연 탈북자 인적사항 파악 등도 임무였다. 하지만 원정화는 황장엽씨 거처 파악 등 대부분의 지령 수행에 실패했다. 대북정보요원 암살 지령과 함께 독침, 독약 등의 살해도구를 받았지만, 시도도 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원정화는 “원래 알던 사람들인 데다 살인을 해본 적이 없어 차마 죽일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원정화는 군 기밀을 수집하기 위해 장교들과 교제하는 방법을 이용했다. 결혼정보업체에 “현역군인과의 만남을 원한다.”고 얘기해 여러 명의 군인을 만났으며,2005년 9월에는 김모 소령을 소개받아 동거까지 하게 됐다. 김 소령에게는 “아이를 중국에 유학보내고 싶으니 함께 가서 알아보자.”고 유인을 시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원정화는 국군 기무사령부의 추천으로 군 안보 강사로 발탁돼 2006년 9월부터 9개월 동안 50여차례에 걸쳐 “북핵은 자위용”이라는 등 북한 주장에 동조하는 내용의 강연까지 실시했다. 이때는 이미 1년 남짓 기무사의 내사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원정화를 추천한 부서와 내사부서의 업무가 분리돼 있어 대공혐의점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기무사 쪽은 설명했다. 원정화는 이 과정에서 2006년 11월 정훈장교였던 황모(26·구속기소) 중위(대위 진급 예정)를 처음 만나 사귀게 됐다. 지난해 10월 황 중위에게 “나는 북한 보위부 소속 공작원이다. 내 임무는 탈북자 출신 안보강연 강사 신원을 확인해 북한에 보고하고 군 간부를 포섭하는 것이다. 너도 포섭했다고 조국에 보고했다.”고 말했지만 황 중위는 이를 신고하지 않았다. 기무사 관계자는 “황 중위가 원정화를 신고하지 않은 것은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06년 ‘정경학 사건’ 이후 2년여만 역대 간첩 사건으로는 ▲1995년 10월 충남 부여 무장간첩 김동식 ▲1997년 10월 최정남·강정연 부부간첩 ▲2006년 7월 정경학 사건 등이 있다. 정경학은 태국 국적으로 위장해 국내에 잠입한 뒤 울진 원자력발전소, 천안 성거산 공군 레이더기지, 용산 미8군부대, 국방부 청사 등을 촬영해 북한에 보냈다. 원정화가 실제로 북한에 넘긴 정보는 양주와 서울 등에 있는 주한미군 기지 6곳의 사진, 원정화의 하나원 동기 정보, 군 장교들 명함 100여장 및 인적사항과 사진, 군부대 위치와 부대의 지휘관들 인적사항 등이다. 합동수사본부 관계자는 “원정화가 넘긴 장교들의 명함에 기재된 이메일 IP를 추적한 결과 중국 방향에서 이메일을 해킹한 흔적을 찾아내 진상을 파악중”이라고 전했다. 원정화는 또 남파되기 전 1999∼2001년 중국 옌지, 훈춘 등에서 탈북자와 남한사업가 등 100여명을 납치했으며, 중국 공안과 협조해 이들을 북송했다. 이 가운데 한국인 7명은 모두 노래방 등에서 일하던 원정화를 만나 북한 관련 정보를 수집하려 한 사업가, 회사원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씨줄날줄] 탈레반의 부활/우득정 논설위원

    ‘자칼의 날’ ‘오데사 파일’‘전쟁의 개들’ 등 테러리스트들을 소재로 베스트 셀러를 잇달아 내놓았던 프레드릭 포사이드는 2006년 탈레반과의 전쟁을 소재로 한 ‘아프간’을 발표했다. 그는 이 소설에서 탈레반 전사 이즈마트 칸의 성장과정을 기술하면서 탈레반의 생성 배경을 설명한다. 미국의 지원으로 소련 침공을 물리친 뒤 아프가니스탄은 수도 카불을 중심으로 한 친미정권과 지역 군벌이 발호하는 파키스탄 접경 남부지역으로 나뉘어진다. 나지불라 정권이 무너진 1994년 여름 아프간 남부 잘랄라바드 계곡 주변은 이슬람 극단주의를 추종하는 군벌 헥마티아르의 지배에 들어간다. 난민 캠프촌의 이슬람사원에서 가르치는 것은 오로지 ‘무관용’과 ‘전쟁’이다. 계곡 곳곳을 피로 물들인다. 어느 날 칸다하르 외곽 마을에 일단의 정부군이 들이닥쳐 10대 소녀 2명을 집단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마을에서 종교학교를 운영하던 무하마드 오마르(뮬라 오마르)는 16정의 소총으로 무장한 제자 30명을 이끌고 정부군을 격퇴한 뒤 그 지휘관을 탱크 포탑에 목 매단다. 그 소식이 퍼지면서 인근 주민들은 앞다퉈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기 시작한다. 오마르의 제자들은 군벌과는 달리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해 12월까지 1만 2000명이 합류하면서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은 오마르를 본떠 머리에 검은 색 터번을 둘렀다고 한다. 이들이 파슈토 말로 ‘제자’라는 뜻의 ‘탈리브’, 복수로는 탈레반이다. 극단 이슬람국가인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아 이들이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아프간은 노래와 춤, 음악, 스포츠는 말할 것도 없고 여자들의 외부활동을 전면 금지하는 ‘칼’과 ‘잔혹함’,‘전쟁’이 지배하는 사회로 탈바꿈한다. 부패와 강간, 범죄가 사라진 대신 오로지 광적인 교리만 난무한다. 포사이드는 탈레반을 ‘중세의 추종자’라고 했다. 아프간에서 다국적군의 공습으로 어린이 50명과 여자 19명 등 민간인 90여명이 사망함에 따라 반미감정이 고조되면서 탈레반의 부활 조짐이 뚜렷하다고 한다. 탈레반의 부활이 아프간인에게는 축복일까, 재앙일까. 결국 모든 것은 인샬라(신의 뜻대로)인가.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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