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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것만큼은 우리가 최고!”] 공무원 정보화 교육, 구로가 ‘으뜸’

    서울 구로구는 서울시 주최 공무원 정보지식인대회에서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됐다고 14일 밝혔다. 서울시내 25개 자치구를 대상으로 지난해 7월부터 올해까지의 정보화사업 성과를 평가한 이번 대회에서는 자체 선발대회 개최 실적, 정보화 학습 이수 실적, 정보화 역량 진단 참여 실적, 정보화 인력개발 계획·시책 등 4개 지표를 따져 최우수 1개, 우수 2개, 장려 3개 기관을 뽑았다. 구는 외부 강사를 초빙한 특화된 정보화 집합 교육과 개인정보 보호, 개인용 컴퓨터 관리, 사무자동화, 각종 온라인 교육 등 다양한 직원 정보화 프로그램을 진행해 모든 평가항목에서 고르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 정성자 홍보전산과장은 “업무에 필요한 기본적인 정보화 지식은 물론 교육 시스템 등 전반적인 분야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뿐만 아니라 김진규 홍보전산과 주무관이 장려상을 받는 등 개인 역량도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았다. 시상식은 다음달 열린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이기영 ‘고향’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이기영 ‘고향’

    문학 작품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오로지 작품 그 자체인가, 아니면 작품이 탄생한 시대나 작가의 환경인가. 이런 물음에 농민소설의 대표작이자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표본이라고 평가받는 민촌(民村) 이기영의 ‘고향’은 오롯이 후자라 할 수 있다. 문학은 작가의 삶과 작품을 연결지어 볼 수 있는데 이렇게 생겨난 작품은 작가의 창작 의도가 동기, 체험 등에서 나온 것이므로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을 알아야 작품을 명확히 해석할 수 있다. ‘고향’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하면서 계급문학을 추구했던 이기영의 사상과 체험이 잘 응집된 소설이다. 갈수록 왜곡되는 현실에 어쩌지 못하고 체념하고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에 눈뜨는 성장을 통해 변화의 바람이 불던 당시 농촌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사회주의적 해결책이긴 하지만) 뚜렷하게 제시한 작품이다. ‘고향’은 충청도 원터 마을을 배경으로 하루 살기에 바쁜 농민들과 이들을 갈취하는 새로운 지배계층 간의 대립을 축으로 한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 이 마을에도 전등과 전화가 가설되고 실을 만드는 제사 공장이 들어선다. 빠르게 근대화가 이뤄졌지만 농민들이 살기는 예전보다 더 어려워졌다. 자작농에서 소작농으로 몰락한 이가 한둘이 아니다.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한숨만 쉴 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고 문제를 함께 해결하도록 돕는 사람이 김희준이란 인물이다. 그는 부모에 의해 14살에 조혼하지만 일본으로 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이다. 대단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기대가 당연한데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소작농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가 고향 땅으로 돌아온 것은 고향 사람들을 ‘진리의 경종으로 깨우치려’는 것이다. 여기서 김희준은 식민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함께 깨우쳐 나가는 데 필요한 촉매 역할을 한다. 농민 스스로 어렵게 문제점을 깨닫거나 기독교적 사상을 가진 계몽자가 등장해 문제를 해결한 당시 농민 문학들과는 달리 이기영은 고향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이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며 농민들 스스로 문제를 깨우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물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일방적인 계몽 문학을 벗어난 것이다. 실제 이기영은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이었지만 ‘농촌 사람’, ‘평민’이라는 뜻을 가진 ‘민촌’을 자신의 호로 삼을 만큼 농촌 사회에 귀 기울이고 사회주의적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고향’이 발표된 1930년대는 ‘브나로드 운동’이 확산돼 지식인이라면 농촌계몽에 일조하고자 노력하던 시기였다.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 같은 농촌을 배경으로 한 계몽 소설이 잇따라 발표된 것도 이때다. 하지만 이들 작품은 이기영의 작품과는 사상적 거리가 뚜렷하다.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이들의 작품과는 달리 의식적으로 사회주의적 성향을 강조한 작품을 발표했던 이기영은 문학이 현실적 계급 문제를 등한시할 수는 없으며 더 나아가 계급적 투쟁을 이끌어 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고향’에서 새롭게 등장한 지배계층과 그 속에서 억눌려 지내던 피지배계층 간의 첨예한 갈등이 축을 이루고 이것을 무산 계급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김희준의 진두지휘하에 계급투쟁이 이뤄지고 한 인물의 영웅적 헌신과 노력으로 승리를 이끌어 갔다면 아마도 그저 그런 프로 문학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스스로 계급의식을 깨쳐 가는 다른 등장인물의 노력과 문제의 해결점을 전통적 풍습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프로 문학의 관념성이나 도덕성을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 문제의식을 자각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인물은 물론 김희준이었지만 이 작품에는 또 다른 주인공들이 있다. 제사 공장에 다니면서 노동의 가치를 깨닫고 신념을 갖게 되는 두 여성, 인숙과 갑숙이다. 이들은 봉건적 여성상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 진취적 인물로 성장하는데, 죽도록 일만 해도 남편과 자식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당시 여성들에게 제시하는 새로운 역할 모델이다. 인숙의 오빠 인동 또한 오십이 넘은 그의 아버지 원칠의 삶을 이어받는다면 결국 열심히 땅을 일궈도 삶은 더욱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활로를 모색한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따져 보는 것이다. 그리고 원칠이나 김선달, 길동아버지 같은 기성세대도 함께 힘을 모은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점을 희준의 솔선수범을 통해 깨달아 간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민촌들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두레’다. 희준은 오랫동안 내려온 두레에서 새로운 공동노동체의 가능성을 만들어 간다. 머리채를 휘어잡고 싸우던 여인들이, 아전인수에 골몰한 남성들이 두레를 통해 점차 공동의 힘을 느끼며 뿌듯해한다. 격이 다르다고만 느꼈던 희준을 자신들과 다르지 않은 농군임을 받아들이게 된 것도 두레 안에서다. 식민지 자본 논리 때문에 풍년이 와도 배불리 먹을 수 없는 ‘풍년 공황’의 자구책이 자기 것에 연연하지 않고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는 공산(共産)에 있음을 보여 주고 싶었던 저자의 의도가 확연히 드러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고향’에 등장하는 지배계급은 철저히 자본을 맹신하는 사람들이다. 일제에 의해 이루어진 근대화를 누구보다 먼저 받아들이며 신분 상승을 꾀했고 돈만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라고 생각하는 안승학과 권상철이 바로 그들이다. 이기영은 이들의 모습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자 했다. 지주보다 더 지독한 마름으로, 딸의 앞날까지 돈으로 흥정하려는 안승학이나 돈을 꿔 주지 않아 자살하는 사람이 생기든 말든 자기 부만 키우면 그만인 고리대금업자 권상철은 식민지 자본주의가 낳은 신흥 자본가들의 모습 그 자체다. 결국 돈만 아는 그들은 그 욕심 때문에 자멸하고 마는데 자본가에 대한 저자의 불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권선징악적 통쾌함을 전해 준다. 마름집 딸 갑숙이나 부잣집 도련님인 경호가 의식을 전환하는 과정이 매끄럽게 흐르지 못하고 다소 작위적이라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현실에 부딪치고 성장해 가는 과정은 지금 봐도 매끄럽고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게다가 곳곳에 드러난 농촌 현실의 예리한 관찰과 문제점을 날카롭게 파헤친 이기영의 문학적 솜씨는 카프 문학의 대표자로 손꼽기에 모자람이 없다. 1946년 김일성의 권유로 월북 후 1984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그가 북한 문학의 중심에 존재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이런 문학적 역량이 뒷받침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은 오늘도 논으로 밭으로 헤어졌다.” 그리고 희준이 인동과 갑숙을 ‘앞세우고’ 자기는 ‘뒤따라오다가’ ‘조금 높은 곳에서’ 발을 멈추고는 ‘먼동이 트는 새벽하늘’ 밑으로 흩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양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것이 이 소설의 모티브이자 구조다. 이기영은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린 고향이 동트는 새벽하늘처럼 새로운 미래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그 안에 모두 담아낸 것이다. 신언수 한우리독서토론논술 책임연구원 ●‘읽어라 청춘’은 격주로 게재됩니다.
  • 가슴에 금속 말뚝 박힌 뱀파이어 추정 무덤 발견

    가슴에 금속 말뚝 박힌 뱀파이어 추정 무덤 발견

    지난 8일,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맞서기 위해 어둠의 존재와 계약을 맺고 공포의 화신으로 거듭난 드라큘라 백작의 기원을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한 영화 ‘드라큘라 언톨드(국내 개봉 명은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가 개봉된 후, 실제 역사 속에 존재했던 뱀파이어(흡혈귀)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불가리아에서 가슴에 금속말뚝이 박힌 채 매장당한 중세 뱀파이어 추정 무덤이 발견됐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의 9일(현지시간) 보도에 따르면, 장소는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서 남동부에 위치한 유서 깊은 페퍼리온 수도원이다. 불가리아 전문 고고학 연구진에 의해 발굴된 유골 2구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상태에서 심장부위에 금속 재질 말뚝이 박혀 있었다. 이는 13~14세기 당시 동부유럽 지역에서 행해지던 의식으로 흡혈귀가 다시 무덤에서 부활할 수 없도록 심장을 파괴한다는 의미다. 동부 유럽지역에서 이런 형태의 유골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5월 폴란드 지역 언론매체 ‘카미안스키 인포(kamienskie.info)’에 따르면, 폴란드 북서부 카미안 포모르스키 마을 공동묘지에서 16세기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뱀파이어 유골이 발견됐다. 당시 이 유골은 치아가 모두 제거된 상태에서 입 안이 벽돌로 채워져 있었고 발 부분에는 못이 박혀있었는데 이는 흡혈행위와 사후부활을 막는다는 의미가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매장이 13~17세기 사이 활발했던 것으로 보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정이 존재한다. 첫 번째로 뱀파이어 시신의 실제 주인들인 당시 지식인, 귀족, 성직자들과 같은 특권층들이 많았는데 치열한 권력 암투에 밀린 희생양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는 해당 시기 유럽은 흑사병 공포가 만연했는데 일부 특권층을 뱀파이어로 몰고 병균의 원인으로 지목해 살해하는 방식으로 민중 여론을 잠재우려는 의도였다는 분석이다. 종합해보면, 과거 실존했던 뱀파이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무시무시한 흡혈귀가 아닌 역사적 흐름에서 불가피하게 희생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불가리아에서는 지금까지 5구의 뱀파이어 추정 유골이 발견됐으며 해당 유골 2구는 최근 2년 만에 6번째, 7번째로 발굴된 것이다. 조우상 기자 wscho@seoul.co.kr
  • 중국 문화대혁명이 남긴 생생한 상처

    중국 문화대혁명이 남긴 생생한 상처

    인간농장/류짜이푸 지음/송종서 옮김/글항아리/382쪽/1만 8000원 그가 기억하고 분류하는 다양한 인간의 유형이 있다. 거개가 유쾌하지 않은 것들이다. 돼지 같은 인간, 돼지만도 못한 인간, 영혼 없이 육체만 있는 인간, 꼭두각시 인간, 틀에 박힌 인간, 여기저기 눈치 보는 양서 인간, 잔인한 인간, 어리석은 인간, 늑대 같은 인간……. 중국 현대사가 남긴 생채기가 너무 깊은 탓이다.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 류짜이푸(73)는 톈안먼 사건에 연루돼 1989년 중국을 떠난 뒤 20년이 넘도록 홍콩과 미국을 오가며 지내왔다. 중국 대륙에서 들려오는 자신에 대한 비판은 ‘쥐들이 비판하고 갉아먹는 소리’ 정도로 치부하며 더 이상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며 일축한다. 냉소와 조롱 속에서도 직접 몸으로 겪었던 혼돈의 역사에 대한 기억은 강렬하다 못해 집요한 비판으로 남는다. 류짜이푸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긴 시간이 흘렀건만 1949년 신중국 건국 이후 1960년대 대약진운동과 대기근, 문화대혁명, 톈안먼 사태 등 중국이 거쳐온 일련의 현대사의 흔적은 너무도 깊고 강렬하다. 집단의 가치를 강조했던 대약진운동 시절과 공교롭게 겹쳤던 대기근 등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역설적으로,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판치는 부조리의 시기이기도 했다. 또한 ‘불과’ 10년의 문화대혁명은 인간성이 부정되고, 인간관계가 파괴되는 경험, 상식과 합리가 아닌 집단의 광기가 사회의 지배가치가 됐던 시절이었다. 문화대혁명은 단순히 ‘그땐 그랬지’쯤의 기억이 아니라 지금껏 여전히 개인의 잠재의식을 지배하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 개인의 행위를 규정하는 무형의 기준점이 되고 있다. 현대 중국 사회를 이해하는 핵심 열쇳말 중 하나다. 잡문을 모아놓은 책이다. 저자 스스로 ‘서정적이지도 않고, 서사적이지도 않은, 문명 비판과 국민성 비판의 메시지가 들어 있는, 그러면서도 가볍고 짓궂은 글들을 골라낸 산문집’이라고 규정지었다. 글 곳곳에 비판과 냉소, 풍자는 물론 독기 어린 직설적 표현들이 가시지 않는 이유다. 지식인의 눈에 비친 중국공산당의 좌우경 편향은 그저 우스꽝스러울 따름이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대한 기억들이 여전히 생생한 탓이다. 그렇다고 책이 여기에 머물지만은 않는다. 몽테뉴, 슈테판 츠바이크 등 서구 지식인들에 대한 단상도 함께 펼쳐진다. 사회와 조우하는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변형되며, 궁극적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모색이기도 하다. 중국현대사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없이 읽으면 약간 생뚱맞을 수도 있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향유하는 한류에서 ‘사유 대상’ 한국으로

    향유하는 한류에서 ‘사유 대상’ 한국으로

    한국의 지(知)를 읽다/노마 히데키 엮음/김경원 옮김/위즈덤하우스/752쪽/2만 8000원 일본에서 동시대의 한국문화는 이미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반세기 전, 아니 20년 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변화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 음악은 이 같은 변화의 첨병 역할을 했다. 공통점은 언어 자체를 매개로 하기보다 감성적 접근이 두드러진 분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지(知)’에 관한 일본인들의 인식은 어떨까. 일본의 언어학자인 노마 히데키(61)는 “망연해진다”고 했다. 한국의 문화 가운데 유독 ‘지’에 대해서만큼은 일본의 뛰어난 지식인조차 자신 있게 말을 꺼내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일본에서 감상하고 누리고 애호하는 대상으로 한국의 문화는 존재할지라도, 읽고 듣고 생각하고 함께하는 대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그는 일본과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편지를 써서 “한국의 ‘지’를 알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의 지와 만나게 해 준 책을 추천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적어 달라”고 주문했다. 편지를 받은 와다 하루키 도쿄대 교수는 리영희의 ‘분단민족의 고뇌’를 꼽았다. “한국 지식인의 지적 발자취를 알고 지적 흥분을 느끼게 해준 책”이라는 이유에서다. 가메야마 이쿠오 도쿄외국어대 교수는 김지하의 ‘불귀’를 꼽고 이렇게 평했다. “박정희 정권에 반기를 들고 두 번이나 사형판결을 받은 김지하를 생각하면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한국의 영화감독 이명세는 ‘이중섭 평전’을 추천하며 “책을 산 그날, 밤을 새워 읽었고 마지막 장을 덮으며 ‘아, 예술가의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썼다. 노마는 이렇게 모인 한·일 양국 지식인 140명의 답변을 엮어 책으로 냈다. 양국 지식인들이 추천한 400여권의 책이 담겼다. 일본인 학자가 한국의 정체성을 찾아보려 몰두하는 과정이 신선하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명화는 알고 있다, 당신의 무의식

    명화는 알고 있다, 당신의 무의식

    통찰의 시대/에릭 캔델 지음/이한음 옮김/알에이치코리아/772쪽/3만원 우리가 예술작품을 보고 느끼는 감동, 정서, 감정이입, 의식의 본질을 부분적으로나마 규명할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20년전이다. 인지심리학이 생물학과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정서적 신경미학의 토대가 마련되면서부터다. 뇌과학과 미술 사이의 대화와 상호작용을 연구해 온 노력 덕분에 우리는 미술작품을 볼 때 관람자의 뇌에서 어떤 과정이 진행되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시작했다. 신간 ‘통찰의 시대’는 세계적인 뇌과학자 에릭 캔델(86)이 뇌과학과 예술사, 심리학, 정신분석, 인문학 등의 통섭적 접근을 통해 예술에 빠져드는 인간의 무의식을 깊이 있게 파헤친 책이다. 과학과 예술이 인간의 무의식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캔델은 과학과 예술이 교류를 시작한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오스트리아 빈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당시 빈은 모더니즘의 출현을 이끌었던 유럽의 문화적 수도였다. 지적인 우수성과 문화적 성취를 강조하는 분위기에 매료된 각 분야의 지식인들이 모여들었고 건축, 디자인, 미술, 음악 등에서 새로운 표현형식을 탐구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졌다. 이런 지적·문화적 환경에서 인문학과 과학의 거리는 더욱 좁아졌으며 과학과 예술은 서로 영향을 미치며 큰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 캔델은 이 시기의 빈, 이른바 ‘빈 1900’의 대표적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오스카어 코코슈카, 에곤 실레의 그림을 중심으로 당대의 과학적 사유와 지적인 환경이 세 화가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다. 특히 이들이 남긴 모더니즘 초상화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과학과 예술이 어떻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인간의 무의식을 파헤치기 시작했는지를 살핀다. 그는 “빈 모더니스트들의 초상화와 모델의 내면 감정을 묘사하려는 그들의 의식적이면서 인상적인 시도는 심리학적·생물학적 통찰이 우리가 예술과 맺는 관계를 풍성하게 해 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상적인 사례”라며 “의학자와 생물학자뿐 아니라 정신분석학자와도 이루어진 상호작용은 세 화가의 초상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는 빈의 모더니즘이 지닌 특징 중 하나로 지식을 통합하고 일관화하려는 노력을 꼽으면서 빈 의대가 지식을 통합하려는 시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그곳에서 의사교육을 받았고, 클림트의 미술과 과학에 관한 사유에 영향을 미쳤다. 세기의 전환기에 빈에서 화가, 저술가, 의사, 과학자, 평론가, 언론인 모두가 끈끈하게 얽힌 인맥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도 과학과 인문학의 통섭이 가능했던 중요한 요인이다. 빈의 지식인들은 카페와 살롱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자신의 생각과 지식, 가치를 나눴다. 저술가이자 예술평론가인 베르타 주커칸들이 정기적으로 주최한 살롱은 빈에서 저술가, 화가, 과학자를 한데 모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학적 개념과 예술적 개념의 자유로운 교환을 내세운 베르타의 살롱에서 클림트는 생물학자와 의학자, 정신의학자들을 만났다. 빈 의대 해부학 교수였던 베르타의 남편 에밀 주커칸들은 클림트에게 시신해부 과정을 보여주면서 인체를 깊이 이해하도록 했고 발생학과 다윈의 진화론을 소개했다. 클림트가 미술과 생물학의 진리를 연결하는 길을 닦자 그의 후계자인 코코슈카와 실레는 기존관념에 대담하게 도전하는 작품들을 내놓았다. 코코슈카는 인간의 정신 깊숙이 놓여 있는 무의식적 본능을 화폭에 포착했다. 실레는 남의 무의식적인 과정을 이해하려면 먼저 자신의 무의식을 이해해야 한다고 믿었다. 클림트의 그림이 관능미를 지닌 것과 달리 비판적이고 예리한 자기분석을 시도했던 코코슈카와 실레의 그림은 어딘지 불쾌하고 불안하다. 캔델은 “클림트와 코코슈카, 실레는 관람자에게 삶의 표면 아래 놓인 무의식적인 본능적 충동에 관한 새로운 진리를 가르쳤다”고 평가한다. 캔델은 빈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피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하버드대학에서 역사와 문학을 공부한 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매료돼 뉴욕대 의대에 입학했고 인간정신의 근원을 파헤치기 위해 뇌과학자가 됐으며 2000년엔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책 후반부에서 캔델은 첨단 뇌과학이 밝혀낸 시지각에 관한 최근의 연구 성과를 다루면서 미술 작품 앞에 선 관람자에게 나타나는 감정적 기본요소와 감정이입, 창의성의 생물학적 매커니즘을 짚어본다. 서로 동떨어진 듯한 주제를 깊이 있고 명쾌하게 엮어낸 세계적 석학의 통찰력과 함께 평생 동안 그를 매료시킨 전환기 빈의 모더니즘에 대한 진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홍길동전 저자’ 이상의 사상가 허균

    ‘홍길동전 저자’ 이상의 사상가 허균

    허균생각/이이화 지음/교유서가/324쪽/1만 5000원 허균은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쯤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허균은 일반의 인식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사상가요 문장가였다.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도 일관되게 고발정신과 개혁의지를 지켰던 실천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허균 생각’은 일반의 인식과는 동떨어지게 가려졌던 그 허균의 진면모를 촘촘하게 들여다본 신간이다. 신군부가 등장한 1980년 월간 ‘뿌리 깊은 나무’가 강제 폐간된 뒤 단행본으로 출간, 금서로 지정됐던 책. 수정·보완을 통해 당대 정치, 학문, 문학에서 도드라졌던 ‘허균의 생각’을 다시 건져냈다. 허균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지만 역모죄에 얽혀 능지처참됐다. 부친 허엽은 부제학과 경상 관찰사를 지낸 청백리였고 맏형 허성 역시 빼어난 문장가이자 성리학자였다. 누이 난설헌은 해동에서 첫째가는 규수 시인으로 유명했다. 사대부의 자제로 유복하게 살 수 있었던 그는 왜 그리 험한 길을 갔을까. 순탄치 않은 가정사는 주요한 원인일 수 있다. 둘째 형 허봉은 아버지 뒤를 이어 동인의 우두머리가 됐지만 탄핵·유배됐고 누이 난설헌도 애환 많은 삶을 살다가 스물일곱에 요절했다. 서류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혀 방탕한 세월을 보낸 손곡 이달의 문하에 든 것도 주목할 이력이다. 그런 가정사 속에서 허균이 정치의 바탕을 민본에 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늘은 인재를 내리면서 차별하지 않는다는 ‘유재론’과 백성을 근본에 둔 ‘호민론’은 그 대표적인 글들이다. ‘호민’이란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 저항하고 도전하는 무리를 뜻한다. 빈민을 구제하고, 썩은 관료계급을 척결해 착취와 억압이 없는 이상국가인 율도국을 건설한다는 ‘홍길동전’은 바로 그 호민정신의 결집이다. 산림에 묻히는 선비를 썩은 무리로 보고 현실의 잘못에 적극 개입해 고치려는 자를 참선비로 보았던 허균은 반유교적인 행동과 학문태도로 일관했다. 유교 교학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한 문장을 반대하고 시는 진솔한 감정과 정서를 담아내야 한다는 그의 문학적 성향 역시 애조와 현실에 대한 저항이 주를 이룬다. 올해 방한한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은 서울대 강연에서 양국 간 우호를 상징하는 말로 ‘간과 쓸개를 늘 서로 꺼내 보이니 깨끗한 얼음 담은 병에 차가운 달이 비치는 듯하다’는 허균의 문장을 인용한 바 있다. 서문에서 저자가 밝혔듯 “극단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패거리들이 판치고 궤변을 늘어놓는 가짜 지식인들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허균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독자들의 몫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가슴에 금속말뚝 박힌 ‘뱀파이어 유골’ 발견

    가슴에 금속말뚝 박힌 ‘뱀파이어 유골’ 발견

    지난 8일,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맞서기 위해 어둠의 존재와 계약을 맺고 공포의 화신으로 거듭난 드라큘라 백작의 기원을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한 영화 ‘드라큘라 언톨드(국내 개봉 명은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가 개봉된 후, 실제 역사 속에 존재했던 뱀파이어(흡혈귀)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불가리아에서 가슴에 금속말뚝이 박힌 채 매장당한 중세 뱀파이어 추정 무덤이 발견됐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의 9일(현지시간) 보도에 따르면, 장소는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서 남동부에 위치한 유서 깊은 페퍼리온 수도원이다. 불가리아 전문 고고학 연구진에 의해 발굴된 유골 2구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상태에서 심장부위에 금속 재질 말뚝이 박혀 있었다. 이는 13~14세기 당시 동부유럽 지역에서 행해지던 의식으로 흡혈귀가 다시 무덤에서 부활할 수 없도록 심장을 파괴한다는 의미다. 동부 유럽지역에서 이런 형태의 유골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5월 폴란드 지역 언론매체 ‘카미안스키 인포(kamienskie.info)’에 따르면, 폴란드 북서부 카미안 포모르스키 마을 공동묘지에서 16세기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뱀파이어 유골이 발견됐다. 당시 이 유골은 치아가 모두 제거된 상태에서 입 안이 벽돌로 채워져 있었고 발 부분에는 못이 박혀있었는데 이는 흡혈행위와 사후부활을 막는다는 의미가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매장이 13~17세기 사이 활발했던 것으로 보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정이 존재한다. 첫 번째로 뱀파이어 시신의 실제 주인들인 당시 지식인, 귀족, 성직자들과 같은 특권층들이 많았는데 치열한 권력 암투에 밀린 희생양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는 해당 시기 유럽은 흑사병 공포가 만연했는데 일부 특권층을 뱀파이어로 몰고 병균의 원인으로 지목해 살해하는 방식으로 민중 여론을 잠재우려는 의도였다는 분석이다. 종합해보면, 과거 실존했던 뱀파이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무시무시한 흡혈귀가 아닌 역사적 흐름에서 불가피하게 희생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불가리아에서는 지금까지 5구의 뱀파이어 추정 유골이 발견됐으며 해당 유골 2구는 최근 2년 만에 6번째, 7번째로 발굴된 것이다. 조우상 기자 wscho@seoul.co.kr
  • 사물인터넷·공유 경제, 인류미래 바꾼다

    사물인터넷·공유 경제, 인류미래 바꾼다

    세계의 석학으로 추앙받는 두 거장은 닮지 않은 듯 닮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유대계 러시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노엄 촘스키(86) MIT대 석좌교수는 저명한 히브리어 연구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언어학자의 길을 걷는다. 반면 앨빈 토플러 이후 손꼽히는 미래학자인 제러미 리프킨(69)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교수는 콜로라도 덴버에서 출생해 할리우드 배우 출신인 기업가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17년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펜실베이니아대 동문이며, 무엇보다 세상에 끊임없이 화두를 던진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나눈다. 한계비용 제로 사회/제러미 리프킨 지음/안진환 옮김/민음사/584쪽/2만 5000원 리프킨은 신작 ‘한계비용 제로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한계에 이르렀고 곧 종말할 것”이라 선언한다. 300년 넘게 물과 공기처럼 인류와 뒤섞여 살아온 자본주의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아예 2050년이란 시점까지 못박았다. 그때쯤 ‘사물인터넷’과 ‘공유경제’의 부상이 자본주의를 완전히 주변부로 밀어낼 것이란 예언이다. 촉매역할을 할 사물인터넷은 한마디로 지능형 네트워크다. 센서를 통해 온도조절장치는 물론 TV, 세탁기, 컴퓨터 등을 실시간으로 읽어내고 통제한다. 소비자의 행동을 빅데이터화해 미리 어떤 제품을 생산할지 알려주는 식이다. 패러다임 변화의 동력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도의 자본주의 발달이다. 자본주의를 지탱해온 기업들이 낳은 혁신활동으로 ‘한계비용’(재화나 서비스를 한 단위 더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추가 비용)을 제로 수준으로 떨어뜨리다가 결국 이윤 없는 장사를 벌여야 할 처지에 놓인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사례는 이미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인류의 3분의1은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이용해 네크워크화된 세상에서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프로슈머)로 살고 있다. 거주지와 직장의 일부를 발전소로 개조해 태양열과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를 거둬들이고,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은 3D프린팅으로 손쉽게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쓰고 있다. 모두 한계비용 제로사회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탄이다. 어찌 보면 앞선 저서인 ‘소유의 종말’, ‘노동의 종말’과 잇닿은 듯 보이지만 1900년대 초 오스카르 랑게 시카고대 교수가 포착해낸 “인류를 위한 자본주의가 어느 시점이 지나면 인류의 진보를 막는 족쇄로 작용할 것”이란 의문과 궤를 같이한다. 리프킨은 선사시대 혹은 봉건시대 꽃피웠던 공유경제의 재도래에 대해 “나눌수록 풍요로워진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경제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존재하며 유효성을 검증받은 덕분이다. 카셰어링이나 에어비앤비 같은 공유 서비스들이 불러올 협력적 공유사회는 소유권보다 접근권을 선호하는 세대의 주도로 결국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을 것이란 전망이다. “공산주의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는 칼 마르크스의 섬뜩한 주장과 대비되는 장밋빛 낙관은 기술결정론적 사고를 배경으로 한다. 촘스키, 은밀한 그러나 잔혹한/노엄 촘스키·안드레 블첵 지음/권기대 옮김/베가북스/288쪽/1만 5000원 촘스키는 신간 ‘촘스키, 은밀한 그러나 잔혹한’에서 미래보다 현재에 논의를 집중한다. 인류의 근대사를 피로 물들인 서구의 탐욕과 살육, 그리고 은폐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며 이를 바로잡아야 희망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책은 언론인 안드레 블첵과의 대담형식으로 꾸며졌다. 촘스키는 2010년 이후 프랑스 정부의 집시 추방과 체코 정부의 집시 격리정책을 1930년대 나치의 유대인 정책과 닮은꼴이라 지적한다. 또 폴 포트 치하의 악랄한 학살은 부각되는 반면 서구가 동남아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저질렀던 대학살은 은폐되는 것은 주도적인 서구 문화가 이를 자비로운 행위로 교묘하게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피지배지의 엘리트들이 지금도 당시 서구 통치와 교육의 향취에 젖어 있을 만큼 집단세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촘스키가 추산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신식민주의로 목숨을 잃은 ‘비인간들’은 5500만명에 이른다. 서구가 일으킨 전쟁, 친서방 군사쿠데타, 기타 분쟁들 탓이다. 소설가 조지 오웰이 처음 언급한 비인간은 서구와 일부 아시아의 부국 밖에 거주하는 인류를 일컫는다. 일찍이 한국 사회 역동성에 주목해온 그는 최근 세월호 참사로 딸을 잃은 김영오씨에게 격려 편지를 보내 반체제 지식인의 면모를 각인시키기도 했다. 촘스키는 “우리는 언제나 선택할 수 있다. 무언가를 행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라며 변화를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홍콩 우산혁명] 본토서도 지지 시위… 민주인사들 ‘단식’

    홍콩 시위를 두고 중국의 친서방 지식인들이 열렬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당국의 탄압도 거세지고 있다. 30일(현지시간) 미국의소리(VOA) 방송에 따르면 중국 각지의 서구식 민주주의 지지자들은 정부의 통제와 검열에도 불구하고 홍콩 시위에 대한 지지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다. 가택연금 중인 베이징의 인권운동가 후자(胡佳)는 VOA와의 인터뷰에서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 당시 홍콩 주민들이 지지를 보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번에는 대륙의 인민들이 홍콩 시위를 공개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AFP통신은 중국 내외에 기반을 둔 각종 인권단체들의 주장을 인용, 홍콩 인근 광저우에서 대규모 지지집회가 열렸으며 이 때문에 20여명 이상의 시위 참가자들이 경찰에 연행됐다고 전했다. 몇몇 인권운동가들은 정부의 탄압에 맞서 단식투쟁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저우 외에도 각지에서 시위에 대한 탄압, 검열, 체포 등이 줄 잇고 있다고 전했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친일파 낙인… ‘애증’의 근현대 문학 선구자

    춘원 이광수(1892~1950)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애증’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이광수는 한국 근대문학 운동을 이끈 선구자이자 뛰어난 작가인 동시에, 독립운동가에서 변절한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힌 인물로 평가가 엇갈린다.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라고 부르는 학자들로 적지 않다. 3·1 독립만세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2·8 독립운동 당시 이광수는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인 600여명을 이끌었다. 그는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등의 내용을 담은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이를 영어로 번역, 세계에 알렸다. 이후 친일로 방향을 바꾼 이광수는 민족주의와 친일 사이에서 줄타기를 거듭했다.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쓰면서 저명한 독립투사의 회고록을 윤문하기도 했는데, 이 책이 김구의 백범일지다. 실제로 백범일지는 쉽고 간결한 문체로 출간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광수의 필력이 큰 힘을 보탰다는 것이 후대 학자들의 평가다. 실제 삶과는 별개로 이광수가 한국 문학계에 미친 영향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이광수는 횡보 염상섭, 육당 최남선과 함께 근대 개화기를 대표하는 3대 지식인이자 문인으로 꼽힌다. 이 중 염상섭만이 친일의 길을 걷지 않았다. ‘명량’으로 대표되는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구국영웅적 평가’ 역시 이광수와 단재 신채호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이 많다. 신채호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이순신전을 연재하면서 “지금 이순신전을 선택해 고통에 처한 우리나라 국민에게 양식으로 삼게 하노니…. 제2의 이순신을 기다리노라”라고 적었다. 이광수는 1931년부터 2년간 동아일보에 이순신전을 연재하며 ‘조선 500년에 처음이요 나중인 큰 사람 이순신’이라고 평가했다. 박건형 기자 kitsch@seoul.co.kr
  •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이광수 ‘무정’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이광수 ‘무정’

    1917년에 발표된 춘원 이광수의 ‘무정’은 한국 근대문학의 시초로 꼽히는 순한글 장편소설로, 현대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근대적인 개인주의·자유주의 사상을 담고 있고 문체도 구어체를 구사한다. 또 근대화를 겪고 있는 20세기 초 혼란스러운 사회현실에 대응하는 젊은 지식인의 자유연애, 결혼 및 근대적 자아 각성의 문제를 심도 있게 풀어나가고 있다. 1917년 1월 1일부터 6월까지 총 126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됐다. 경성학교 영어교사인 이형식과 김 장로의 딸 선형, 박 진사의 딸 영채가 주요 인물이다. 이형식이 선형의 영어를 가르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선형은 정신 여학교를 졸업하고, 내년에 미국 유학을 가려고 준비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형식의 집에 박 진사의 딸 영채가 찾아온다. 박 진사는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던 형식을 거두어 공부를 가르쳐 준 은인이었다. 7년 전 박 진사는 강도사건에 연루돼 감옥에 들어가게 됐고, 형식은 박 진사의 집을 나와 동경에 유학한 뒤 교사가 됐다. 그 당시 헤어졌던 영채는 외가에서 천대를 받다 뛰쳐나와 기생이 됐다. 영채는 아버지가 정해준 형식을 천생 배필로 삼아 정절을 지켜왔고,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그 후 영채는 경성학교 교주 김 남작의 아들 김현수와 배 학감에게 순결을 빼앗기게 되자 죽기를 작정하고 평양으로 떠난다. 형식은 영채를 좇아 평양에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김 장로에게 선형과 결혼해 미국으로 유학할 것을 권유받고 약혼을 하게 된다. 영채는 기차에서 병욱을 만난다. 병욱은 일본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유학생이었다. 그의 설득으로 영채는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영채와 병욱이 일본으로 가는 기차를 탔을 때, 우연히 미국 유학을 떠나는 형식과 선형을 만난다. 서로 그간의 오해를 풀던 중 수해가 일어나 기차는 삼랑진역에 멈추게 되고 이들은 자선음악회를 열어 수재민을 돕는다. 그리고 조선을 문명화하기 위한 서로의 포부를 다지며 각자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다. 우리는 ‘무정’을 두 가지 관점으로 접근해 볼 수 있다. 자유연애에 대한 의미와 이광수가 제시하는 계몽적 성격이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1910년대는 일제강점기로 무단통치하에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계몽소설이자 연애소설로 평가되는 이 책을 혹자는 ‘연애 없는 연애소설’이라고 평가한다. 당시는 보수적, 전통적 결혼에서 자유연애라는 새로운 풍조로 넘어가는 과도기였기 때문에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주인공들이 서로 믿음과 사랑이 없는 결혼관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선형의 경우 신식 교육을 받고 미국 유학을 생각하면서도 결혼 상대방은 아버지의 선택에 복종해 따르는 전근대적 의식의 소유자다. 형식은 선형을 사랑하는 대상이기보다 보호해 주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며, 기생이 된 영채의 정절을 의심하는 봉건적 의식이 강했다. 그러면서도 선형과의 결혼에 사랑이 없음을 걱정해 “선형씨는 나를 사랑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하기도 하며, 막상 영채가 죽으러 떠나자 정절보다는 사람의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등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영채도 부모님이 정해준 대상이라는 이유로 형식을 마음속에 품고 정절을 지킨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죽기를 결심한다. 병욱은 영채에게 그러한 마음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므로 낡은 사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참생활을 열라고 설득한다. 이렇게 ‘무정’에서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 주체적인 사랑의 관념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자유연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당시 유림들은 이 글의 연재를 항의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이광수가 ‘무정’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형식이 죽으러 떠난 영채를 찾아 평양으로 갔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온 뒤 선형과 결혼하게 되자 주인집 노파가 형식에게 무정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또 마지막에 기차에서 만난 형식과 영채는 조선을 문명사회로 이끌기로 다짐하면서 “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울 것이 아니요, 무정하던 세상이 평생 무정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가멸게 하고 굳세게 할 것이로다”라고 입을 모은다. 이광수는 형식과 영채, 선형을 통해 당시 젊은이들이 사랑을 뛰어넘어 조선의 문명화를 주도해야 함을 강조하고자 했다. 주인공들이 한마음으로 지향한 문명사회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영채는 기생 월화와 함께 평양 패성학교장 함상모의 연설을 듣게 됐는데 연설 도중 “… 여러분의 조상은 결코 여러분과 같이 마음이 썩어지지 아니하였고 여러분과 같이 게으르고 기운 없지 아니하였소….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기운으로 새로운 평양성과 새로운 을밀대를 쌓으샤이다”라는 부분이 나온다. 우리 민족은 게으르고 미개하므로 깨우쳐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형식을 통해 조선을 계몽하는 유일한 방법은 교육이라고 말한다. 문명이란 과학, 철학, 종교, 예술, 정치, 경제, 산업, 사회제도 등을 총칭하는 것으로 주인공들이 각자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도 문명화된 서양과 일본을 배워서 교육으로 조선을 계몽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일제 강점기라는 당시의 현실을 감안했을 때 명확하게 한계를 가진 인식이었다. 식민지 시기 조선인이 지향해야 할 계몽의 목표는 조선의 해방이다. 진정한 의미의 계몽이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갖추고 스스로 이성을 사용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이광수의 계몽은 서양과 일본이 만들어 놓은 근대지식을 대중에게 교육하는 것이었다. 문학작품을 볼 때 작가가 처한 시대상황과 작가의 삶을 분리시켜 평가할 수 없다. 이광수는 ‘무정’을 쓴 지 5년 뒤인 1922년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며 조선의 민족성을 비판했다. 이 글은 조선 민족을 게으르고 미개한 것으로 파악하는 식민사관의 맥락과 닿아 있다. 그 의식의 단초는 ‘무정’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재 당면하고 있는 시대적 과제를 제대로 인식함은 미래를 이끌어가는 지식인의 중요한 책무다. 이광수가 살았던 식민지 시기의 과제는 문명계몽과 동시에 민족의 독립이었다. 이광수는 이를 간과했고 결국 친일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풀어나가야 할 현재의 ‘무정’한 진실은 무엇일까. 이광수가 강조했던 계몽을 현재적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해방 이후 우리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위해 극단적인 경쟁사회 속에서 노출돼 살아왔다. 하지만 21세기는 경쟁이 아닌 개성을 존중하는 다양성의 시대, 약자와 강자가 공존하는 시대, 주체적인 의식 속에서 창조적인 의식이 강조되는 시대다. 그러므로 현재의 계몽이란 작품의 배경이 되었던 시기와 같은 과학기술을 전제로 한 문명화가 아닌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것이 21세기 진정한 의미의 ‘무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읽어라 청춘’은 격주로 게재됩니다.
  • 응시 제한 폐지된 ‘문화재수리기술자’에 도전하자

    응시 제한 폐지된 ‘문화재수리기술자’에 도전하자

    세계가 하나의 경제권이 되어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는 시대일수록 우리의 것을 보존해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 지식인들이 공통으로 생각하는 글로벌 경쟁력을 지키는 길이다. 이에 전 세계적으로 각국의 고유한 ‘전통’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으며 우리나라 역시 이 같은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세계 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우리 문화재 보존에 더 역량을 쏟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문화재수리보수기술자’의 역할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화재수리기술자는 문화재수리 관련 기술적인 업무를 담당하고 문화재수리기능자의 작업을 감독하는 전문가로, 국제적으로 사회적 인지도가 높아지고 있는 유망직종이다. 그 동안 문화재수리기술자 국가공인 자격증 취득 시험에는 응시 자격 제한이 있었지만 오는 2015년 3월 시행되는 자격 시험부터는 이 제한이 폐지된다.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문화재 수리체계의 비정상적 관행을 정상화 하기 위해 문화재 수리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시행규칙 일부 개정안을 마련해 입법 예고했다. 현재 법률 시행령안 제 8조2항에 따르면 문화재수리기술자는 관련학과 4년제 대학 졸업 후 12개월 이상 실무 종사자, 3년제 대학 졸업 후 15개월 이상 실무 종사자, 2년제 대학 졸업 후 18개월 이상 종사자를 비롯해 전공분야 기사·산업기사를 취득한 사람만이 응시자격을 갖추지만, 2015년부터 이 조항이 삭제된다. 이는 내년 3월 자격 시험부터 학력이나 경력에 상관없이 누구나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문화재를 아끼고 사랑하는 더 많은 이들이 문화재수리기술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됨에 따라 내년 3월 시험에 대비하기 위한 예비 기술자들의 대비가 분주해지고 있다. 이에 주경야독 문화재 아카데미(www.curatoredu.co.kr)에서는 문화재수리보수기술자 이론과정과 조경기술자 이론과정은 물론, 2015년 3월 시험을 대비하는 보수와 조경기술가 문제풀이 과정을 개강했다. 기존에 문화재수리 자격증을 목표로 이론공부를 해온 시험 준비생들은 이 문제풀이 과정이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주경야독 문화재 아카데미는 제 32회 문화재수리기술자시험에서 보수기술자 전체합격생 35명 중 17명 합격, 조경기술자 전체 합격생 11명 중 8명의 합격생을 배출해 수험생들의 신뢰를 얻고 있다. 시험 및 교육 과정과 관련된 자세한 정보는 주경야독 문화재 아카데미 홈페이지(www.curatoredu.co.kr)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관련 문의는 전화(02-395-3650/무료전화 080-395-7909)로 하면 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1부)신흥기업 네이버] ‘벤처 DNA’ 7인의 한발 앞선 도전… 검색시장 최강자 일궜다

    [재계 인맥 대해부 (1부)신흥기업 네이버] ‘벤처 DNA’ 7인의 한발 앞선 도전… 검색시장 최강자 일궜다

    30대 젊은이 7명이 전 직장 퇴직금 3억 5000만원을 모아 만든 벤처 기업 ‘네이버컴’은 15년 만에 연매출 3조 3122억원(지난해 기준), 시가총액 27조 3590억원(이달 29일 기준)의 한국 대표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의 개인 주식재산은 1조 3460억원(지난 8월 재벌닷컴 집계)으로 웬만한 대기업 오너 부럽지 않다. 네이버에 대한 국민 체감은 실적 이상이다. 네이버에는 매일 1600만명이 방문하고 1억개 이상의 검색어가 입력된다. 검색시장의 압도적인 1위(지난해 12월 기준 77.4% 점유율)다. 최근 조성된 모바일 환경에서도 메신저 ‘라인’으로 일본 등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끌며 제2의 부흥기를 맞고 있다.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 의장은 지금으로 따지면 ‘엄친아’(여러 조건이 좋은 젊은이)다. 삼성생명 임원인 아버지가 있었고 서울 강남구 청담동 아파트에서 살았다. 8학군인 상문고를 졸업(1986년)해 서울대에서 컴퓨터공학을, 카이스트에서 전산학을 전공했다. 배경은 좋았지만 사업가 기질이 특출했던 건 아니다. 같은 ‘86학번’으로 1994~1995년 일찌감치 창업에 나선 ‘과 동기’ 김정주 NXC 넥슨 대표와 송재경 XL게임즈 대표, ‘동네 친구’ 이재웅 다음 창업자 등이 이 의장보다는 사업가에 더 어울렸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이 의장 자신도 당시를 회상하며 “다재다능하고 자유로운 김정주와 달리 나는 전형적인 대기업 사원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1992년 삼성SDS에 입사해 ‘검색’을 접하면서 그의 인생은 빠르게 전환기를 맞는다. 입사 직후 유니텔(PC통신 서비스) 개발팀에 속해 검색 솔루션 개발업무를 맡았다. 일에 매력을 느낀 그는 1994년 윗사람들을 설득해 한글 검색엔진 개발에 도전했다. 1997년 그의 검색엔진 개발 프로젝트가 삼성SDS 사내벤처 1호로 선정됐고, 같은 해 12월 무료 인터넷 검색 서비스 ‘네이버’를 출시했다. 인터넷 이용자가 급증하고 해외 인터넷 광고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 그는 결국 회사 동료 6명과 함께 1999년 네이버컴을 세운다. 이때 이 의장과 함께 삼성SDS를 박차고 나온 사람은 권혁일(현 해피빈 이사장), 오승환(현 네이버문화재단 이사장), 강석호(현 네이버 이사), 김보경, 최재영, 김희숙 이사다. 설립 직후 합류한 김정호 전 NHN 글로벌 게임사업 총괄까지 포함해 ‘네이버 개국공신 7인’이라고 한다. 현재는 강석호 이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네이버를 떠났다. 1999년은 정부가 벤처 육성을 위해 대규모 규제완화 정책을 펴고 있던 때다. 네이버컴은 설립 5개월 만에 100억원의 투자(한국기술투자)를 유치하고 첫해 9200만원의 영업흑자를 기록하는 등 순항했다. 하지만 이듬해 2000년 3월 전 세계 벤처 버블 붕괴와 함께 국내 대표 벤처기업이었던 새롬기술 주가가 하한가를 기록하는 등 정보기술(IT) 업계에 위기가 찾아왔다. 이때 이 의장은 네이버 15년 역사상 ‘두 가지 중대 결정’ 중 하나인 한게임과의 합병(다른 하나는 2006년 검색업체 ‘첫눈’ 인수)을 결심한다. 네이버컴은 트래픽(접속자)이 필요했고, 한게임은 사람과 자금이 필요했다. 이 의장은 삼성SDS 입사 동기였던 김범수(현 카카오 의장) 당시 한게임 대표를 만나 일을 성사시켰다. 결과는 대성공. 한게임 사용자가 자연스럽게 네이버에 유입됐다. 2001년 3월 한게임 유료화까지 성공을 거두면서 수익이 생겼고, 이는 향후 네이버가 성장하는 데 종잣돈으로 활용됐다. 그래도 이 의장에게 있어 핵심 사업은 검색이었다. 2000년 8월 통합검색이, 2002년 인터넷 이용자들끼리 질문과 답변을 하도록 하는 지식인(iN)서비스가 도입되면서 2003년 네이버는 검색어 유입 순위 1위를, 2006년엔 포털 사이트 방문자 수 1위를 차지한다. 검색광고는 네이버 최대 수익원으로 떠오른다. 2001년 10월 키워드와 매칭되는 검색 결과 페이지에 광고주 브랜드를 상위에 노출하는 키워드 광고를, 2004년 7월엔 클릭 수에 따라 광고비를 내는 CPC방식 광고를 도입하면서부터다. 검색광고 등 광고는 올 2분기 기준 매출의 72%를 차지하는 네이버의 주 수익원이다. 이를 바탕으로 2002년 10월 코스닥 상장 당시 주당 4만 4000원이던 네이버 주가는 나날이 상승해 2008년 11월 코스피 상장 땐 12만 2500원까지 올랐다. 현재 주가(9월 29일 기준) 83만원에 달한다. 핵심 사업인 검색 역량을 키워 이를 수익원으로 만들어 낸 결과다. 탄탄대로만 있었던 건 아니다. 10여년에 걸친 해외 진출은 번번이 실패했다. 2000년 일본 시장 진출을 시작으로 중국, 미국 등에 게임, 검색 등을 무기로 진출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네이버에 남아 있던 벤처 DNA가 이런 ‘무모한 도전’을 가능하게 했다. 평소 이 의장은 실패한 사업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는다. 임직원들에게는 종종 “실패 경험이 곧 자산”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 스마트폰 보편화로 해외 진출은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첫눈’ 출신 개발자들이 2011년 6월 만들어 낸 라인은 일본, 타이완, 태국 등에서 1위 메신저 자리에 올랐다. 올 7월 말 기준 전 세계 라인 가입자 수는 4억 9000만명이다. 페이스북보다 성장 속도가 빠르다. 10여년 해외 공략 실패에서 얻은 교훈인 ‘현지화’에 초점을 맞춘 결과라는 게 네이버 측 설명이다. 김양진 기자 ky0295@seoul.co.kr
  • 퇴계 이황의 ‘두 번째 직업’은 시골 의사였다

    퇴계 이황의 ‘두 번째 직업’은 시골 의사였다

    조선의약생활사/신동원 지음/들녘/951쪽/3만 9000원 ‘부모가 역병으로 사망했다면 묘소를 지켜야 하나, 피해야 하나?’ ‘노비가 아프면 약을 써야 하나?’ 첫 번째 질문의 답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익(1681~1763)이 쓴 ‘성호사설’에 담겨 있다. 제13권 ‘피려’는 역병의 유행과 예절의 충돌을 심각하게 다루면서 성리학적 질서를 놓고 갈등하는 당시 지식인의 면모를 드러낸다. 역병이 돌 때 친한 친구나 부모, 형제 사이에 피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냐 아니냐는 게 논쟁의 핵심이다. 이익의 입장은 단호했다. “아무리 부자지간이라도 살아남는 것이 자손의 도리”라고 봤다. 이익은 조선 최고 유학자인 퇴계 이황(1501~1570)의 말을 인용한다. “생명을 살리는 것 우선, 산 자 우선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1599년 간행된 문집 ‘퇴계집’이 널리 읽히면서 퇴계의 언행은 후대 조선 사대부의 귀감이 됐다. 공교롭게도 퇴계집에는 병과 의학에 관한 방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향약구급방’ ‘구급방’ ‘화제’ ‘의방’ 등 유명 의약서들이 종종 인용되고, 이황이 처방을 내릴 때 어떻게 약을 썼는지 알려주는 글귀들도 상당하다. “‘도적산’으로 열을 다스려 열이 낮아진즉 ‘분청음’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식이다. ‘퇴계전서’에는 직접 처방을 내린 20여건의 약제 목록이 등장한다. 아들 준의 감기에는 순기산과 정기산을 처방했고, 조카 혜의 번열에는 반총산을 지어 먹도록 했다. 노비인 아노의 눈병에는 도체탕과 활혈탕을 달여 먹게 했다. 이쯤에서 두 번째 답도 나온다. 조선시대 대다수 사대부는 자신의 의학 지식과 약물을 노비에게 베풀었다. 노비는 집의 가장 큰 재산이며, 병 치료는 자발적 복종을 끌어내기 위한 좋은 계기였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한국과학사’를 가르치는 저자는 “퇴계의 의술 정도라면 할 이야가 어느 정도 있다”고 말한다. 이황은 명나라 주권이 쓴 의서인 ‘활인심방’의 상권을 직접 필사해 활용할 만큼 의학 지식이 풍부했다. 저자는 “이황이 언제부터 의학을 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의원이 없는 시골에서 의료 행위를 펴던 유의(儒醫)와 다름없었다”고 말한다. 이는 유성룡, 정약용 등 다른 저명한 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퇴계집에는 16세기 중후반 조선의 의료 구조를 엿볼 수 있는 대목도 나온다. 지방의 난치병 환자들이 장안 최고 의원이라는 안판서, 손사균, 조성, 유지번 등을 찾아가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들이다. 한양 출신 의원이 이황의 며느리를 침술로 고친다는 구절에선 당시 한성과 시골 간 의료 격차를 가늠할 수 있다. 저자가 꼽은 또 다른 대표적 유의는 조선 인종 때 문신인 이문건(1495~1567)이다. 승정원 부승지를 지낸 그는 손자 숙길의 성장기를 담은 ‘양아록’과 41~73세까지 쓴 ‘묵재일기’로 유명하다. 11년 11개월 분량의 10책이 현존하는 묵재일기는 3분의1가량이 질병과 의료 기록으로 채워졌다. 조선 최고의 의약생활사로 꼽히는 이유다. 거기에는 환자로서 이문건 자신을 비롯해 가족, 노비, 이웃의 발병과 대응이 날마다 적혀 있다. 그 가운데는 사또나 관찰사도 포함되며 심지어 말, 소, 돼지의 병력까지 엿보인다. 16세기 조선 사람들이 어떤 병을 많이 앓았고 치료했는지 알려 준다. 저자는 또 1786년 4~6월 유행했던 정조 때의 홍역을 다루며 혁신군주라던 정조의 질병에 대한 인식을 살펴본다. 당시 홍역은 큰 피해 없이 지나갔지만 이는 정조의 대책이 효과적이었다기보다 1775년 이후 병균의 독력이 약해진 덕분이라는 설명이다. 정조는 당시 홍역이 하늘의 기운에 따라 발병하며, 원혼을 달래 병을 낫게 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아울러 1700~1791년 조선에서는 서양의학이 ‘참으로 괜찮은 것’이란 담론이 형성됐으나 이후 천주교가 사악한 종교로 규정되면서 의학마저 부정되는 양상을 띠었다고 증언한다. 또 조선총독부 기록을 인용, 1914년 조선의 인구 1만명당 의원의 분포는 1.55명(황해)부터 15.92명(경성)이었다고 전한다. 책은 조상들이 많이 앓던 병과 병의 원인, 치료방법, 의료지식 등을 추적한다. 실제로 병을 앓은 사람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미시사의 관점으로, 방대한 분량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열린세상] 국민이 직접 법 만드는 시대/이정옥 대구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열린세상] 국민이 직접 법 만드는 시대/이정옥 대구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이곳에 논밭을 만들 거예요.” 대학 캠퍼스에 논밭이라니? 홍콩 링난대 캠퍼스는 유럽 대학처럼 건물을 빼고 나면 공터가 별로 없는 홍콩의 신계에 있는 대학이다. 링난대학은 신해혁명의 지도자 손문의 호를 딴 중산대학의 후신이다. 영국 하면 정원 아닌가. 그 정원을 갈아 업고 논밭을 조성해 달라는 학생들의 요구는 농촌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킴으로써 질주하는 시장경제와 균형을 이루게끔 하겠다는 중국의 미래발전 비전을 둘러싼 오랜 학습과 토론 끝에 나온 요구다. 학생들은 링난대학과 충칭대학의 교수들과 함께 페루와 베트남을 다녀왔다고 한다. 그들이 페루에서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마추픽추와 같은 잉카 유적이 아니라 아직도 잉카식으로 살고 있는 안데스 산맥의 산촌 농부들의 삶의 방식이었다. 현대 도시문명이 아닌 대안 문명, 안데스 산맥에 살고 있는 산촌 농민들이 지켜내고 있는 전통적 농법과 공동체 정신을 보고 배워오기 위한 프로젝트다. 인도의 케랄라 지역의 민중과학 운동과 자치공동체에 대한 현장 조사 연구도 20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해 오고 있다. 이렇게 교수와 학생이 자발적으로 특성화 프로그램을 긴 호흡으로 만들고 있고 그런 맥락에서 나온 요구를 총장이 수용한 것이다. 학생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학생들도 놀라고 교수들도 놀랐다. 이전의 영국인 총장 시절 같았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국 통치 시절에는 3인 이상이 모여 정치 대화를 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된 사항이었다. 식민통치는 구체적으로 경제활동의 자유는 주지만 정치적 자유는 철저히 제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제는 캠퍼스 안의 논밭 조성의 작은 일이기는 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일종의 주민 청원과 주민 입법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링난대 라우 긴치 교수와는 1993년부터 대안을 모색하는 아시아 지식인 교류 단체에서 같이 활동해왔다. 그동안 우리는 ‘아시아적 대안’을 화두로 삼고 인도의 케랄라와 태국의 방콕, 대만의 가오슝과 홍콩에서 1년에 서너 차례씩 만나 토론을 해왔다. 이번 링난대학의 변화를 통해 많은 대안적 실험들이 정치적 결정권과 결부돼야 비로소 틀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 누가 결정하는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당연히 국민이 주인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원칙에도 불구하고 지난 18일에 실시된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 투표를 보고 그렇게 중요한 사안이 주민 투표로 결정될 수 있다는 것에 세계가 깜짝 놀랐다. 직접민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스위스의 경우 5만명 이상의 제안만 있으면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에 대해서도 재개정을 묻는 국민투표를 해야만 한다. 10만명 이상의 유권자가 서명한 발의안에 대해서는 국민 투표를 거쳐 법제정을 결정하게 돼 있다. 의회를 거치지 않고 국민이 직접 법을 만드는 것이다. 헌법 개정 발의도 18개월 동안 10만명의 서명을 받으면 된다. 입법권이 국회의원들에게 포괄적으로 위임돼 있지 않은 것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입법권은 위임된 것이다. 위임된 권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언제든 위임의 방식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세계는 바야흐로 직접민주주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히틀러를 뽑았다는 원죄의 부담을 안고 있는 독일에서도 직접민주제를 지방 차원에서 연방 차원까지 확장하려는 운동이 한창이다. 미국도 주차원에서는 주민의 직접 발의권을 인정한 지 오래다. 유럽연합 차원에서도 100만명이 서명하면 의원을 통하지 않고 직접 발의할 수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이어 경제적으로 이익만 된다면 식민지 지배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리가 아시아적 권위주의 정권을 용인하는 것도 경험했다. 정치적 결정권의 중요성을 경제논리로 포장한 것이다. 약 500만명이 서명한 세월호 특별법안에 발의권이 부여되지 않는 제도, 대의제 만능의 제도가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참에 직접민주제를 제도화하는 청원을 같이해야 하지 않을까. 국회의 입법권 독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다.
  • 부패하거나 무능하거나 보수가 민망하다… 보수여 공부하라 제발

    부패하거나 무능하거나 보수가 민망하다… 보수여 공부하라 제발

    “요즘은 ‘보수’라는 단어가 민망하게 들립니다. 한 보수정권은 부패했고 또 다른 보수정권은 무능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라 생각하니 허무합니다.” 이상돈(63) 중앙대 명예교수는 거침없었다. ‘열린 보수’ ‘합리적 보수’라 불리며 최근 여야를 넘나드는 정치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이 교수는 국내 보수진영의 미래에 대해 “갈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명박 정권은 보수를 표방하고 들어선 첫 정권이지만 독단적 국정 운영과 부패·비리 의혹으로 얼룩졌다”면서 “박근혜 정권은 그런 오점을 청산하고 태어난 합리적 보수이기를 기대했건만 지금까지의 결과로는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일갈했다. 의외였다. 2007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합리적 보수정책을 지지했고 2012년 총선 이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으로 대선까지의 험난한 여로를 함께했던 국내 대표 보수학자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힘든 말이다. 이 교수는 “(박근혜 정부는) 합리적 보수정권이 되기 위한 모든 약속을 파기했으니 성공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적어도 정권 초기에 이명박 정부가 벌여놓은 무분별한 정책과 사업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따랐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미국에서 출간된 서구 보수 지식인의 책 100권 추려 서평 써 보수일간지 비상임논설위원을 지낸 그는 2009년부터 3년간 4대강 사업을 저지하기 위한 국민소송단의 공동집행위원장을 맡는 등 진영 논리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래서 얻은 수식어가 ‘열린 보수’였다. 그런 그가 2003년부터 2013년까지 미국에서 출간된 서구의 주요 보수지식인들의 저서 100권을 추려 요약과 서평을 묶은 책 ‘공부하는 보수’(책세상)를 펴냈다. ‘위기의 보수, 책에서 길을 묻다’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한마디로 “보수여, 제발 공부 좀 하라”는 고언을 담았다. 토니 블랭클리의 ‘미국이여 분발하라’ 등 대부분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책들이라 서평집을 만드는 데 7년이 걸렸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조지 윌은 보수운동은 지적 운동(Intellectual Movement)으로 시작했다고 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국의 사례입니다. 우리나라의 보수는 기득권을 수호하고, 부패하고 안이하며, 툭하면 색깔론이나 들고 나오는 ‘몰상식 집단’으로 인식돼 있어요.” 책은 한국과 미국의 보수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아우른다. “미국과 한국에서 잇따른 보수의 실패를 보면서 그간 읽었던 책을 정리했다”는 설명이다. 1970~1980년대 미국에서 공부했던 경험도 한몫했다. 그는 린드 존슨의 대선 불출마, 리처드 닉슨의 사임, 지미 카터의 실패와 로널드 레이건의 등장을 관심을 갖고 지켜봤다. 이어 석학 알렉산더 비켈로부터 사법 보수주의를 배우고 윌리엄 버클리의 지적 보수주의 운동에 감명받아 사상적 지향점을 보수로 전향했다. 그런 이 교수이지만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해선 날을 세운다. “부시라는 ‘전쟁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21세기가 풍요와 평화의 시대가 될 것이란 기대가 일장춘몽으로 끝났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자본주의를 놓고)진영논리만 존재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개입해 금융을 망쳤고 시장에 대한 신뢰를 보수 스스로가 무너뜨려 오늘날 위기를 불러왔다”고 해석했다. ‘테러와의 전쟁, 그 끝은 있는가’ ‘보수, 반작용으로 승리하다’ ‘부시 행정부, 보수주의에서 이탈하다’ ‘서방의 마지막 보루, 미국을 지켜라’ ‘유엔은 쓸데없는 기구일 뿐이다’ 등 책 속의 소제목들은 그대로 이 교수의 견해와 잇닿아 있다. ●메르켈 같은 합리적 보수 기대하며… 보수여, 보수철학을 깨쳐라 “세계적 흐름을 지켜보며 미국의 몰락이 가져올 혼돈을 걱정하고 민주주의와 법치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합리적 정책으로 국민화합을 이끌 보수정부가 우리나라에 들어설 가능성은 당분간 없어 보입니다.” 그가 꼽는 합리적 보수정권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나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이끄는 정부다. 이 교수는 자신의 책이 “스스로 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진정 무엇이 보수정책이고 어떤 것이 보수철학인지 이해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면서 “또 스스로를 진보라 여기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생각을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문소영의 시시콜콜] 세월호 진상규명은 ‘우공이산’의 자세로

    [문소영의 시시콜콜] 세월호 진상규명은 ‘우공이산’의 자세로

    중국 고전인 ‘열자’의 탕문편(湯問篇)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가 나온다. ‘뜻을 세우고 꾸준히 하면 마침내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이다. 옛날 중국의 익주(翼州) 남쪽 하양(河陽) 북쪽에 태행산(太行山)과 왕옥산(王屋山)이라는 두 개의 큰 산이 있었다. 이 산 북쪽에 사는 우공(愚公)은 이 두 산을 빙 둘러가는 탓에 불편하자 “가족이 전부 힘을 합쳐 두 산을 옮기자”고 결의하고 그다음날부터 작업에 착수했다. 작업의 진전은 보잘 것 없었다. 전혀 낙심하지 않고 일하는 우공에 한 부인은 자식 일곱 명을 몽땅 데려와서 일을 도왔다. 한번은 잘난척하는 지수(智?)가 이를 비웃었는데, 우공은 “내가 죽더라도 대대손손 산을 옮길 것이고, 산이야 지금보다 조금도 커지지 않을 것이니 언젠가는 두 산을 다 옮길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우공의 답변에 깜짝 놀란 산신령은 스스로 산을 옮겼다. 우직한 우공도 멋지지만, 더 싸우지 않고 ‘피신’이란 타협안을 내놓은 산신령의 정치적 감각과 실행력도 놀랍다. 세월호 진상 규명과 안전한 대한민국 건설을 위해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해 달라는 입법청원에 국민 약 500만명이 서명했다. 입법청원용 서명으로 역대 최다 서명이다. 하지만, 청와대와 여당인 새누리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봄 소풍·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가 팽목항에 10명이고, 사망자가 294명에 이르는데 두 계절이 바뀌어도 ‘적폐의 청산’이나 ‘국가개조’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시간을 끌지도 몰랐다. 지수처럼 교양있는 분 중에는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폭식투쟁’ 등의 사회적 ‘이지메’도 놓는다. 청와대와 여당이 산신령처럼 스스로 깜찍한 정치적 타협안을 내놓을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시간이 걸린다고 낙담할 일은 아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한국 현대사가 입증하고 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불온세력의 폭동이 아니라 전두환 전 대통령 등의 내란 및 내란목적의 살인행위라는 사법부의 판단이 나온 것은 1997년 4월 17일이었다. 17년의 세월이 걸렸으나 진실은 자신을 드러냈다. 1989년 6월 4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학생·노동자·시민들을 탱크와 장갑차로 해산시키면서 발포, 많은 사상자를 낸 ‘톈안먼 사건’(天安門事件)은 2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진상 규명의 과제로 남아 있다. 중국 지식인이 부러워할 만큼 한국 사회는 아직 건강하다. 그러니 세월호의 진실 규명을 위해 우리는 우공처럼 꾸준히 산을 옮기는 수밖에 없다. symun@seoul.co.kr
  • [글로벌 시대] 베이징에서 시안까지/정해문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전 주그리스 태국 대사

    [글로벌 시대] 베이징에서 시안까지/정해문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전 주그리스 태국 대사

    중국의 1000년은 베이징(北京)에서, 2000년은 시안(西安)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베이징은 개혁·개방의 성과와 2008년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라는 자신감에 힘입어 국제도시로 웅비한 자태를 과시하고 있다. 한편 옛 실크로드의 중심 시안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와 풍요를 구가한 다민족 대제국 당(唐)의 수도로서 당시 장안(長安)의 위풍을 되살려 보고자 대규모 투자와 함께 기반 시설을 확충하는 등 영원한 글로벌 도시로 거듭나려는 시도가 한창이다. 얼마 전 필자가 속한 한·아세안센터와 중·아세안센터 그리고 일·아세안센터, 즉 동북아 3국의 아세안센터 사무총장 회의가 베이징과 시안에서 있었다. 아세안 회원국과의 협력 증진을 목적으로 한국·중국·일본에 각각 설립된 3국 센터는 국제기구로서 크게는 동아시아의 협력과 통합에 대한 기여를 목표로 하고 있다. 베이징을 떠나 시안으로 가는 고속열차 속에서 과거 당나라를 중심으로 교류가 왕성했던 한·중·일이 오늘날 활발한 경제 교류에도 불구하고 왜 ‘아시아 파라독스’라는 덫에 걸려 정치와 안보 분야에서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며 좀처럼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던 중 열차는 어느새 1000㎞가 넘는 거리를 4시간 반 만에 달려 시안에 도착했다. 시안은 한(漢)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1000여년 동안 서주와 서한·수·당 등 13개 왕조의 국도였으며 중국 최초로 중원을 천하 통일한 진나라의 수도가 있었던 곳으로 불로장생을 꿈꿨던 시황제의 병마용갱으로도 유명하다. 이슬람식 독특한 문화가 그대로 살아 있는 회족거리 등을 돌아보니 당나라 시절 세계 각 지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글로벌 관문으로서 태평성대를 누렸던 도읍의 흔적을 어디서나 쉽게 느끼며 만나게 된다. 한반도, 일본, 베트남 등 아시아는 물론 멀리 파미르 고원, 중앙아시아 초원, 지중해에 이르는 실크로드의 중심에 있는 시안은 말 그대로 동아시아의 활발한 무역, 문화교류와 외교의 중심이었다. 실크로드 네트워크를 통해 글로벌 대상들과 승려 그리고 세계 각국의 유학생들이 장안에 들끓었다고 한다. 신라의 혜초·최치원 등을 비롯해 우리의 선각자들 또한 실크로드를 무대로 고대 한반도의 문화를 전 세계로 전파하고 외래 문명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석굴암은 이 비단길을 통해 경주에 유입된 로마·서역·중국의 문화가 신라의 전통 문화와 융합된 찬란한 문화 교류의 단면임을 보여 준다. 동북아 3국 협력이 현재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한·중·일은 1500년 전 지식인·사업가·상인들이 다양한 자국의 문물과 문명을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평화와 공동 번영의 동아시아를 가꾸어 나갔다.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방적 지역주의의 원조인 셈이다. 2009년 한·중·일 3국 협력 10주년 공동성명에서 정상들이 밝힌 것처럼 ‘3국이 역사를 직시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정신으로’ 협력을 모색하고 신뢰를 쌓아갈 때 ‘아시아 파라독스’는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한·중·일은 멀리 볼 것 없이 내년 아세안 공동체로 출범하는 우리 이웃 동남아로부터 더 큰 이익의 공동 비전을 향해 협력하는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다. 베이징에서 시안까지 여행하며 동북아 3국 간 갈등을 담고 있는 현재의 베이징 모습을 넘어 역동적 교류로 지역협력의 시대를 선도한 과거의 시안을 교본으로 삼아 공영의 미래를 설계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시아에 21세기 실크로드의 대동맥이 다시 꿈틀대기를 꿈꿔 본다.
  • [시론] 예술공론장과 큐레이터정신/김준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시론] 예술공론장과 큐레이터정신/김준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민주와 인권의 도시 광주가 표현의 자유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광주정신이라는 고유명사를 내걸 정도로 광주는 한국현대사를 견인한 위대한 정신적 자산을 가진 도시다. 서울정신이나 부산정신에 비해 광주정신은 선명하게 도시 정체성을 대변한다. 하지만 광주정신이라는 굴레가 오히려 광주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인구 100만명이 넘는 거대 도시 광주의 정체성을 단일한 그 무엇으로 설명하는 것은 일견 자긍심이나 선명성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은 그 명성에 걸맞은 역동적인 사유와 실천의 두께를 더하기보다는 빛바랜 훈장처럼 퇴행적인 진영 논리를 반복 재생산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작가 스스로 전시 철회를 선언함으로써 일단 봉합 수순에 접어든 홍성담 걸개그림 ‘세월오월’ 사건은 광주의 속살을 들춰냈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지 못하는 도시 광주에서 광주정신이라는 것은 확정 불가능한 허상이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만약 광주정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역사가 부여한 안정적인 기표가 아니라 역사의 유훈을 호명해 현재의 시대정신으로 재생산하는 역동성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광주는 역동은커녕 역사적 유산마저도 퇴행시키고 있다. ‘세월오월’과 함께 유폐된 것은 비단 표현의 자유만이 아니다. 그것은 광주정신의 실종과 함께 예술적 공론장의 파국을 불러왔다. 예술적 소통이 매개하는 공공영역, 즉 예술공론장은 개념이자 제도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표현의 자유다. 언론이나 시민사회의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술에서 표현의 자유는 그 자체로 예술의 전제이자 존재 이유다. 근대적 개념의 예술은 종교와 권력의 요청에 부응해 주문생산을 하던 화공과 석공, 도공들이 스스로 작품 생산의 주인임을 선언하면서 예술의 자율성을 확립한 데서 출발했다. 따라서 예술의 자율성에 근거한 표현의 자유 없이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 광주비엔날레가 홍성담 걸개그림을 전시하지 않은 것은 그 장을 온전한 예술공론장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데 제한을 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주에 비할 바 아니지만, 필자가 일하고 있는 미술관에서도 표현의 자유 문제로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다. 해당 작품은 지난 대선 운동 기간에 특정 후보 이미지를 담은 포스터를 부산의 거리에 부착해 선거법 위반으로 법정계류 상태였다. 작가는 민감한 부분에 ‘사정상 이미지를 보여 줄 수 없다’고 쓴 A4 용지를 부착했는데, 이에 대해 시민과 언론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작가가 직접 손글씨를 써 붙인 것이어서 논란이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사안의 민감성을 실감했다.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 프로젝트의 윤범모 책임큐레이터는 광주정신을 성찰하는 기획전 ‘달콤한 이슬 1980 그후’의 파행을 맞아 개막행사 이틀 후 사퇴 의사를 밝혔다가 우여곡절 끝에 복귀했다. 그가 사퇴 의사를 밝힌 것은 표현의 자유를 지키지 못한 큐레이터의 자괴감 때문이었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직위가 아니라 정신이자 명예였다. 출품작에 관한 비평적 논의나 대책 없이 행정관료의 잣대에 먼저 노출된 소통 경로와 책임큐레이터에게 권한을 부여하지 않고 N분의1로 출품 여부를 결정하는 의사결정 구조는 큐레이터 정신을 병들게 했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느냐 제한하느냐 하는 해묵은 논쟁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더욱이 진영 논리에 빠져드는 정치적 의제와 표현의 자유 문제는 생산적인 논쟁을 기대하기 어렵다.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큐레이터 정신이다. 첨예한 논점으로 사회를 일갈하는 예술가와 다양한 관점이 공존하는 대중 사이에 선 큐레이터의 판단력은 예술공론장을 지탱하는 막중한 역할을 수행한다. 큐레이터는 예술의 개념과 제도를 지탱하는 매개자이자 생산자이며, 한 시대의 정신문화를 갈무리하는 지식인이자 실천가다. 파국 이후의 지혜가 필요한 이 시점에 큐레이터 정신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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