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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역사교과서 왜곡 실체와 해법은] (상)일본, 우경화의 실태

    [日역사교과서 왜곡 실체와 해법은] (상)일본, 우경화의 실태

    지난 주말 일본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의 주요 이슈는 대북제재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7월 제주도 정상회담 때처럼 과거사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피했다. 반면 일본 우익은 내년 역사교과서 검정을 앞두고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후쇼사(扶桑社)판 교과서의 보급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미 도쿄도에서 현실화됐고 사이타마현도 새역모 부회장 다카하시 시로(高橋史朗)를 새 교육위원에 선임함으로써 이에 동조하고 있다. 내년 본격적으로 불거질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문제를 3회에 걸쳐 짚어본다. |도쿄 이춘규특파원|내년 일본 중학교의 역사교과서 채택에 대비, 왜곡된 역사교육을 선도하는 우익단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에 맞서 양보없는 홍보전을 펼치고 있는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21(이하 네트21)’의 다와라 요시후미(63) 사무국장은 20일 인터뷰 내내 자신감에 넘쳤다. 도쿄 지요타구 사무실에서 만난 다와라 국장은 “2001년보다 일본 사회가 우경화되는 등 상황은 어려워졌지만 국민여론이 우리 편”이라고 낙관했다. 이를 방증하듯 새역모는 당시 회원이 1만 1000명 가량이었으나 7800명으로 준 반면, 네트21은 2000명에서 오히려 5200여명으로 늘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 2002년 9월 북·일정상회담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일본인 납치사실을 시인한 뒤 일본이 급격히 우경화됐지만 ‘국민들이 자학사관에서 영광사관으로의 변화를 용인할 정도’로 우경화되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다와라 국장은 “내년 1월 시작되는 정기국회가 본격적인 반대운동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년 초 정기국회서 새역모를 지원하는 극우 정치인들이 “자학사관을 버리고 영광사관을 가르치도록 하는 교육기본법 개정에 나서면 시민단체들과 연대해 역사교과서 문제를 집중 부각시킬 것”이라고 예고했다. 다시 말해 교육기본법·헌법 개악 반대투쟁과 연결지어 여론 홍보전을 펼친다는 구상이다. 그는 한국의 교과서운동본부나 중국의 학자들과도 연대투쟁을 더욱 강화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침략을 받은 다른 아시아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일본 내에 살고 있는 ‘민단’ 등 민간조직과도 연대할 계획이다. 미국, 유럽 등의 지식인들과도 네크워크를 결성, 해외에서도 여론 조성에 나선다는 복안이다. 다와라 국장이 밝힌 향후 일정은 대략 이렇다.‘역사교과서에 대한 검정 결과가 내년 3월 일부 공개되고,4월20일쯤 문부성 검정 검토의견이 나온다.5월초를 전후해 견본책이 발행되고,6월 교과서 전시회가 열린다. 그리고 7∼8월엔 교과서 반대·채택의 총력전이 벌어지게 된다.’ 새역모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궁극적으로 일본을 ‘전쟁하는 국가’로 변모시키기 위한 일본내 극우세력들의 의지가 반영돼 있지만, 일반 국민들이 이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다. 실제로 지난해 히로시마·후쿠오카·시가 현 등지에서 새역모측의 교과서 채택운동이 무산된 적이 있다. 새역모는 자민당이 당력을 집중하며 왜곡교과서 채택을 지원하고 있는 등 일본의 우경화를 유리한 조건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오히려 입지가 약화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4월부터 지난 9월까지 587명의 회원이 줄었고, 지난 7년간 1만여명의 회원이 탈퇴했다는 것이다. 올해 회원 수 8만명 목표는 고작 10분의1만 달성했고, 활동자금도 8000만엔을 책정했지만 태부족, 현재 5000만엔 모금을 독려 중이라고 한다. 아베 신조 자민당 간사장 대리나 나카야마 나리아키 문부과학상 등 자민당 의원과 민주당 일부 의원이 새역모의 역사교과서 채택을 돕고 있지만 새역모가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 정도로 격하한다. 자민당과 일부 우익세력이 1994년부터 역사교과서 개악을 시도하며,1997년 급기야 새역모를 자민당의 ‘별동대’격으로 출범시켰지만 국민들의 생각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실례로 사이타마현이 지난 20일 새역모 부회장 출신인 다카하시를 교육위원에 선임했으나 주민의 80% 이상이 그의 임명에 반대했다. 따라서 자민당이 집권당이고,47개 도·도·부·현 의회의 절반 정도를 자민당이 차지하고 있지만 실제 교과서 채택이 이뤄지는 578개 채택 지구(시·구·정·촌) 교육위원회는 새역모 교과서 반대여론을 충분히 반영할 것으로 보고 있다. 교과서를 개별적으로 채택하는 사립중학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분석한다. 하지만 다와라 국장은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무엇보다 새역모가 문부과학성에 압력을 행사, 개정 교과서 원고를 검정이 끝나는 내년 3월까지 공개하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아직 대략적인 내용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군인 현장 교원들이 검정과 채택에서 제외된 것도 썩 좋은 일이 아니다. 지금 상황에선 새역모측이 교과서 판형을 크게 하고, 도표와 사진을 많이 넣어 디자인을 중학생들이 좋아하는 식으로 고쳤을 정도로 추정하는 정도다. 네트21의 힘도 아직 약한 실정이다.250여개의 단체에 회원 수가 5200여명으로 비교적 큰 시민단체에 속하지만 47개 광역단체의 절반 정도만 지방조직을 갖추고 있다. 교과서 반대운동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특히 미디어 대책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다와라 국장은 “반대운동을 일반 국민들에게 많이 알리고 동참을 호소해야 하는데 일본의 신문과 TV는 우리 활동을 너무 작게 취급한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그는 ‘가장 큰 장벽’이란 표현까지 썼다. 그럼에도 궁극적으로는 다수인 ‘중간층’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는 “2001년 ‘새역모 교과서 NO’ 운동 때처럼 내년에도 이들 중간층이 ‘정의의 편’에 서 줄 것으로 확신한다.”고 기대했다. taein@seoul.co.kr
  • 盧대통령 ‘洪카드’ 11월초 결심

    노무현 대통령이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주미대사로 전격 발탁하기로 결심한 시점은 미국 LA 방문 직전인 11월초인 것으로 알려진다. 노 대통령은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의 리셉션에 참석하지 않고 부인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물의를 빚은 한승주 주미대사를 교체하기로 하고 후임 물색작업에 들어갔으나 인물난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미국 대선(11월2일) 결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재선됐고, 미국내 네오콘의 대북 강경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이런 미국내 강경파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바꿀 인물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19일 “노 대통령은 LA 방문 직전 외교안보라인으로부터 ‘홍석현 회장’ 카드를 추천받았다.”고 전했다. 세계신문편집인협회장을 맡고 있는 홍 회장이야말로 미국지식인 사회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바꿀 ‘빅 카드’라는 얘기다. 관계자는 “홍 회장을 추천한 외교안보라인은 광범위하게 봐야 한다.”고 말해 외교통상부·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가 아닌 별도 라인에서 추천했음을 내비쳤다. 홍 회장을 새 주미대사로 낙점한 노 대통령은 LA를 방문해 “북한에 대한 무력행사나 봉쇄정책에 반대한다.”면서 직접 미국내 지식인 사회의 대북관 변화 메시지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이 LA와 남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던 11월말쯤 여권 내에서 ‘주미대사에 빅 카드’ 임명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이 주미대사 임명과 관련해 홍 회장을 면담한 것은 지난 14일 한 번이었다. 청와대 일부 수석들이 홍 회장 주미대사 임명의 감을 잡기 시작한 것도 이날이었다. 여권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인사를 할 때 2∼3번 만나서 결심을 하지만, 홍 회장의 경우 한 차례만 만났다.”면서 “이미 연초의 인터뷰를 통해 외교·안보관을 잘 알고 있어 몇번 만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민 청와대 대변인은 홍 회장의 기용이 노 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의 전환을 의미하느냐는 물음에 “대통령이 변한 게 아니라 상황이 변했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김우식 비서실장·이헌재 경제부총리·안병영 교육부총리·오명 과학부총리 등을 임명할 때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참여정부의 엷은 인물풀을 감안한 가운데서 발탁한 것이라는 얘기다. 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홍석현 주미대사 발탁] 盧대통령 인사 ‘코드’서 ‘실용’으로

    |가고시마 박정현특파원|19일로 대통령 당선 2주년을 맞는 노무현 대통령의 가치관과 국정운영 스타일이 바뀌고 있는 것 같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주미대사로 전격 발탁한 것을 정·관계 등에서는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홍 회장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보수언론의 오너이자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처남이기 때문이다.2년 가까운 집권기간 동안 줄곧 ‘코드 인사’를 강조해온 노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홍 회장을 주미 대사로 발탁한 것은 노 대통령 특유의 깜짝 승부수로 해석할 수도 있고, 언론관과 기업관 변화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이 밝힌 홍 회장 발탁의 배경에서 미국관의 변화도 감지된다. 김 비서실장은 지난 16일 “앞으로 대미관계를 공고히 해야 하고, 이는 정말 중요하다는 점을 노 대통령이 숙고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 비서실장은 “양국이 정부 차원의 관계는 매우 돈독해지고 있지만 아쉬운 점은 미국 사회의 여론과 지식인 중에 한국에 대한 인식이 다소 좋지 않은 것이고, 이를 바로잡고 고양시켜야 한다.”면서 ‘깜짝 놀랄 만한 빅카드’ 선택 배경을 설명했다. 노 대통령은 한·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17일 보도된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이툰부대 파병 연장 이유에 대해 “미국에 안보·경제면에서 도움을 받고 있다. 한·미간 특별한 관계를 염두에 두고 연장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연말에 산업공단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재래시장 방문을 ‘정치적인 쇼’라면서 거부했던 노 대통령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자이툰 부대를 ‘깜짝 방문’한 연장선상으로 풀이된다. 이런 일련의 변화가 노 대통령의 유럽 순방 이후에 ‘관용의 문화’를 강조하고 있는 가운데 일어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 13일 “대한민국이 관용의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면서 ‘관용정치’를 화두로 꺼냈다. 상대의 잘못을 용서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 ▲세상의 가치와 원리의 변화를 인정하는 것 ▲동시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관용의 의미를 정의했다. 홍 회장의 발탁 배경도 이런 범주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노 대통령은 다음날 CBS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도 “관용의 시대를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 많은 불안과 우려를 갖고 있다.”면서 관용을 강조했다. 노 대통령이 보여주고 있는 변화들이 두달 뒤 집권 3주년 진입 과정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지 주목된다. jhpark@seoul.co.kr
  • [儒林 속 한자이야기] (50)

    儒林 233에는 ‘明哲保身(밝을 명/밝을 철/지킬 보/몸신)’이 나온다. 이 말은 ‘聰明(총명)하고 事理(사리)에 밝아 일을 잘 處理(처리)해 자기 몸을 保存(보존)함’을 뜻한다. ‘明’자는 日과 月을 합친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明은 창문을 본뜬 ‘(빛날 경)’과 ‘月’을 합한 글자로 본 뜻은 ‘창문으로 비쳐드는 달빛’에서 추출한 ‘밝다’이다.‘明’의 用例(용례)에는 ‘明鏡止水(명경지수: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明分(명분:당연히 지켜야할 분수)’‘明若觀火(명약관화:불을 보듯 분명하고 뻔함)’ 등이 있다. ‘哲’자는 의미요소에 해당하는 ‘입 구(口)’와 의미요소인 ‘折(꺾을 절)’을 합하여 사리에 ‘밝다’는 뜻을 나타내었다.‘哲理(철리:현묘한 이치)’‘哲人(철인:어질고 사리에 밝은 사람)’‘哲學(철학: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등에 쓰인다. ‘保’는 ‘아기를 업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상형한 글자이다. 원래 뜻은 ‘업다’이며,‘보호하다’‘기르다’ 등은 파생된 뜻이다.‘保管(보관:물건을 맡아서 간직하고 관리함)’‘保守(보수: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반대하고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며 유지하려 함)’‘保障(보장:보호하여 위해가 없도록 함)’ 등에서 쓰인다. ‘身’의 字源(자원)에 대해서는 ‘배 나온 사람의 상형’이라는 설과 ‘사람의 몸에서 배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만든 指事字(지사자)’라는 설이 있다.身을 상형으로 보든 지사로 보든 본래의 뜻은 모두 ‘배’였을 것이고, 널리 알려진 ‘몸’은 파생된 뜻이다.身의 용례로는 ‘身邊(신변:몸과 몸의 주위)’‘身分(신분:개인의 사회적인 지위)’‘身言書判(신언서판:중국 당나라 때에 관리를 선출하던 네 가지 표준)’ 등이 있다. 殷(은)나라 武丁(무정)은 說(열)이라는 초야의 인사를 拔擢(발탁)하여 善政(선정)을 베풀었다.尙書(상서)에는 이러한 전후 기록이 보이는데, 그 가운데 ‘明哲’이라는 말이 나온다. 또 詩經(시경) 大雅(대아)편의 ‘蒸民(증민)’에서 尹吉甫(윤길보)는 周(주)나라 宣王(선왕)을 잘 보필한 명재상 仲山甫(중산보)의 덕을 이렇게 讚揚(찬양)하였다. “지엄하신 임금의 명을 중산보가 받들어 행하네(肅肅王命 仲山甫將之(숙숙왕명 중산보장지))/나라의 잘한 일 못한 일 중산보가 소상히 밝혔네(邦國若否 仲山甫明之(방국약부 중산보명지))/밝고 현명하게 처신하여 그 몸을 보전하였네(旣明且哲 以保其身(기명차철 이보기신))/밤낮으로 게으름이 없이 오로지 임금 한 분을 섬겼을 뿐인 것을(夙夜匪解 以事一人(숙야비해 이사일인)).” ‘明哲’은 천하의 事理(사리)에 通達(통달)하고 무리에 앞서는 사람이며,‘保身’이란 성급하게 時流(시류)에 휘말리지 않으며 매사에 法度(법도)를 지켜 온전하게 處身(처신)하는 態度(태도)를 말한다. 그러나 요즘 와서는 본래의 뜻과는 약간 달리 知識人(지식인)들이 자기의 명철함을 이용,大義名分(대의명분)에 비중을 두기보다는 시류에 迎合(영합)하며 一身(일신)의 榮達(영달)만을 追求(추구)하려는 傾向性(경향성)을 가리키는 말로 곧잘 쓰인다. 김석제 경기 군포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 전여옥·임태희 한나라 두대변인 두목소리

    “깜짝 놀랄 빅카드가 ‘권언유착’인가? ‘정경유착’인가?”(전여옥 대변인) “‘코드 인사’ 대신할 ‘실용 인사’ 환영한다.”(임태희 대변인) 한나라당 공동 대변인의 상반된 논평이다.17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주미대사 내정을 놓고서다. 전 대변인은 “정부 스스로 파격적인 깜짝 인사, 빅카드라고 인사 배경을 자가발전하고 있다.”고 깎아내렸다. 이어 “이해찬 국무총리가 ‘조중동’이 아니라 ‘조동’이라고 고칠 정도로 ‘조중동’의 동아리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홍 회장은 최근 큰 노력을 하기도 했다.”고 빗댔다. 전 대변인은 물론 “미국의 지식인 사회와 여론 주도층을 움직일 수 있는 제3의 인물을 내세운 모처럼의 ‘실용주의적 사고’는 우선 다행스럽다.”고 긍정 평가를 덧붙이기는 했다. 그러면서도 “홍 회장은 노무현 대통령과 달콤한 밀월관계로 널리 알려진 현직 언론사의 지배주주”라고 지적했다. 반면 임 대변인은 “실용주의적 인사로 국민이 기대해 왔던 바이며 환영하고 평가한다.”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임 대변인은 그러면서 “한승주 현 대사의 경우처럼 능력 있는 외교관이 현장에서 최선을 다한다 해도 정권 내부와 일체감을 갖지 못하거나 정략적 관점에서 정부 스스로 흔들어 대면 백약이 무효”라고 지적했다. 이어 “홍 내정자는 현직 주요 언론사의 회장에서 곧바로 현 정부의 중요 직책에 임명된 만큼 정치 권력과 언론의 유착관계라는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도록 정권이 아니라 국민을 보고 대미 외교에 최선을 다해 줄 것”을 당부했다. 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駐美대사로 내정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駐美대사로 내정

    노무현 대통령은 한승주 주미 대사의 사퇴 의사를 수락하고 후임에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내정한 것으로 16일 알려졌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이날 밤 “다양한 경력을 가진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주미대사로 최종 내정된 것으로 안다.”면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한미관계를 한층 강화하고 북핵문제를 슬기롭게 풀기 위한 노 대통령의 의지의 표현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미 행정부에 대한 공식 통보와 외교적 절차 등을 밟아 오는 24일 홍 신임 주미대사 내정자를 외교통상부를 통해 공식 발표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날 출입기자단과 송년만찬을 가진 자리에서 “한승주 주미 대사가 여러차례 사의를 표명했다.”면서 “노 대통령은 주미 대사가 (한국에 대한) 미국사회의 여론과 미국 지식인들의 인식을 고양시키는 중요한 자리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 비서실장은 “주미대사는 미국과의 관계와 여론을 좋게 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에 (신임 주미대사로) 빅 카드를 캐취해(찾아내) 점검중”이라면서 “여러분이 알게 되면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깜짝 놀랄 것”이라고 밝혔다. 김 비서실장은 개각에 대해 “달리는 말의 기수는 바꾸는 게 바람직스럽지 않다.”면서 “이헌재 경제부총리를 너무 흔들지 마라.”고 말해 이 부총리를 유임시킬 것임을 강하게 내비쳤다. 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씨줄날줄] 브나로드 운동/이기동 논설위원

    모스크바국제공항의 정식이름은 세르메체보국제공항. 세계 유수 여행사들이 서비스, 청결, 안전 등 모든 면에서 ‘최악의 국제공항’으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지만 그 이름만은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한량, 세르메체프백작을 딴 것이다. 모스크바 교외에 위치한 그의 저택은 일명 작은 베르사유궁이라고 불리는데, 지금도 18세기 러시아귀족들의 영화를 엿보는데 손색없는 화려함을 자랑한다. 저택 안내판에는 그가 거느린 농노가 20만명에 달했다고 하니 당시 농노제의 위세를 짐작케 한다. 백작인 그가 농노의 딸을 정식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기록은 그가 탐욕의 화신처럼 돼있는 다른 러시아지주들과는 자못 다른 유의 귀족이었음을 은근히 내비친다. 혁명 뒤 볼셰비키들이 모스크바국제공항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도 그가 신분, 계급을 넘어 러시아인들의 존경을 받았음을 짐작케 한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 때까지 제정 러시아는 철저한 농노국가였다. 따라서 19세기 러시아의 지식인들이 농민계몽을 혁명의 첫 단계로 삼고 ‘브나로드(V Narod·민중속으로)’운동을 시작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볼셰비키혁명의 성공도 사실은 브나로드운동에 힘입어 황제 차르와 대지주의 권위를 우습게 보기 시작한 계몽된 농민들 때문에 가능했던 셈이다. 일제하 이 땅의 젊은 지식인들이 브나로드운동에 눈돌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심훈의 ‘상록수’는 이광수의 ‘흙’과 함께 계몽형 브나로드 소설의 대표작이다. 다만 한국판 브나로드의 주인공들은 공산혁명가가 아니라, 농민계몽으로 식민시대의 질곡을 헤쳐보려던 젊은 남녀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적 또한 대지주가 아니라, 갖은 교활한 꾀로 이들을 괴롭히던 주재소 일본 순사들이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석연변호사가 주도하는 헌법포럼이 헌법 브나로드운동을 주창해 화제다. 급진세력의 개혁독점을 배격하고, 헌법정신이 국민의 구체적 삶에 파고들도록 만들겠다는 결의다. 일반국민 뿐아니라, 행정수도이전 위헌판결 이후 헌법재판소 때리기에 나섰던 여권 일각의 급진세력 또한 이들의 계몽대상이다. 어지러운 세상, 사실 헌법보다 더 좋은 나침반이 또 있겠는가. 반개혁, 반노(反盧)라고 성급하게 매도하기보다는 헌법바로세우기 운동쯤으로 받아들이며 어디로 가는지 지켜볼 일이다. 이기동 논설위원 yeekd@seoul.co.kr
  • 주미대사 홍석현씨 내정 안팎

    노무현 대통령이 16일 한승주 주미대사를 전격 교체하고 후임자로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내정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홍회장이 실제로 임명된다면 최초의 언론사 오너 출신 대사가 되는 셈이다. 홍 회장은 노 대통령의 취임 한돌을 앞둔 지난 2월14일 언론사 사장으로는 처음으로 노 대통령과 인터뷰를 가졌다. 중앙일보는 조선·중앙·동아일보 가운데 그래도 상대적으로 참여정부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보여줬다. 중앙일보와 참여정부의 관계에는 소설가인 황석영씨의 중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홍 회장은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세계은행의 경제개발연구소에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는 ‘미국통’이다.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이 16일 밝힌 ▲미국 지식인 사회와 여론을 잘 이끌 수 있는 인물 ▲깜짝 놀랄 만한 인물의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김우식 비서실장은 이날 출입기자들과 송년 만찬 자리에 ‘깜짝 놀랄 만한 뉴스’를 전하려고 작심하고 나온 것같다. 김 비서실장은 만찬이 끝날 무렵 최근의 개각관련 기사로 국정운영에 지장을 받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헌재 경제부총리를 흔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어 김 비서실장은 “노무현 대통령은 주미대사에 ‘깜짝 놀랄 만한 빅카드’를 캐치했다.”면서 “(만찬장에)나오기 전에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후임 주미대사에 대해)확인했다.”고 소개했다.“(대사 내정)당사자에게 통보됐는지는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노 대통령이 사의를 표시한 한승주 주미 대사의 후임을 구상한 지 얼마되지 않는다는 점을 짐작케 하는 발언이다. 일부 수석들은 홍 회장의 주미 대사 내정 사실을 감잡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청와대 관계자는 “김 비서실장의 발언은 유럽순방에서 돌아오는 길에 노 대통령이 자이툰 부대를 전격방문했던 것을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뒷골목 맛세상] 인천의 음식특화거리

    [뒷골목 맛세상] 인천의 음식특화거리

    1980년대 초였다.30대 중반으로 나이가 어슷비슷한 문인들 다섯 명이 소문 없이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 한 달에 한 번 번갈아 서로 살고 있는 곳을 찾아가 하루를 지내며 즐겁게 먹고 마시는 모임이었다. 마침 살고 있는 곳이 저마다 달라 찾아다니며 놀기에는 적격이어서, 선인(先人)들이 흔히 즐기던 세족(洗足)의 분위기를 본 뜬 느낌이 없지 않았다. 이제 와서 구태여 면면을 밝히기가 어딘지 모르게 쑥스럽지만, 문학평론가 최원식이 인천에, 소설가 김성동이 대전에, 시인 이동순이 청주에, 시인 이시영이 서울에 그리고 나는 경기도 팔탄의 월문리라는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었다. 소문 없는 작은 모임이지만 이름도 없지 않아 명이회(明夷會)였다. 명이는 지혜로운 최원식이 주역의 64괘 중 지화명이(地火明夷)란 괘에서 따온 이름이었는데, 한 마디로 암흑시대를 뜻하는 괘였다. 아니, 암흑시대라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암흑시대를 슬기롭게 살아남을까를 가르치는 괘라고 해도 좋았다. 명이괘는 태양이 지하에 잠겨 암흑이 오는 상(象)이며, 성인(聖人)의 밝은 덕이 지하에 묻히는 상이기도 했다. 또한 암군(暗君)이 위에 있어 지혜로운 현인들이 상하고 해를 입는 암군시대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는 어떤 간난노고가 닥치더라도 애오라지 바른 도를 굳게 지켜, 결코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기를 가르치고 있었다. 비단 지혜로운 최원식 뿐만 아니라 나머지 네 명에게도, 전두환씨가 대통령이 되어 서슬 푸르게 날뛰던 80년대란, 글을 쓰는 일은 물론 제 정신을 지니고 하루하루 살아내기마저 힘든 암군시대가 분명하였다. 그랬다. 우리뿐만 아니라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는 광주에서의 참혹한 학살을 나 몰라라 한 채, 눈 감고, 귀 막고, 입에 재갈을 물려, 스스로 자폐증 환자가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삶 자체가 치욕스러운 암군시대임에 분명하였다. 어쩌면 명이회란 한 달에 한 번 서로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자폐증을 치유하고자 한 나름대로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몰랐다. ●20년 넘게 아구와 다른 생선인줄 알아 당시의 정황을 부연하기 위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여기에 ‘꽃 피는 봄날’이라는 자작시 한 편을 인용하고 싶다. ‘어머니, 당신이 손수 물 주어 기르신 앵두나무, 사과나무, 배나무는 이 봄에도 어김없이 꽃을 피웠습니다. 밤이면 더욱 눈부신 저 꽃무더기들은, 어머니, 어찌 당신 혼자 오셔서 꽃 피우셨겠어요. 오늘밤 저렇게 많은 넋들이 함께 몰려와 잠든 자식을 깨워 눈부시게 할 때, 아직까지 미치지도 죽지도 않은 자식을, 어머니, 단 한번만 기뻐해주세요.’ 명이회의 모임이 어언 최원식의 인천에 이르러, 그날도 우리 다섯 명은 인천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먹고 마신 끝에 대취하였다. 그리고 새벽녘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깨어보니 최원식, 이시영, 나 이렇게 셋이서 무슨 은행건물의 계단에 쓰러져 자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다섯 중에서 김성동과 이동순이 어디에선가 먼저 떨어져 나가고 셋이서 다시 술집을 전전한 끝에 인사불성이 되어 은행건물의 계단을 베개 삼아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마침 추위가 닥친 무렵이라 취중에서도 셋은 서로 몸을 꼭 껴안아 체온을 아끼는 자세였다. 그런 우리를 출근길에 나선 직장인들이며 학생들이 바쁜 걸음의 와중에도 멈추어 서서 힐끔거렸고, 몇몇 여학생들은 유리알 구르듯 명랑한 목소리로 깔깔깔, 드러내놓고 웃음을 터뜨려댔다. 우리로서는 어찌 일말의 자괴가 없을 수 있으랴. 최원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가면 안 되는데….”. 이시영이 뒤를 이었다.“갈 데까지 간 모양이여.” 나도 한 마디 덧붙였다.“그래도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가슴 한 쪽이 시원하기는 하네.” 짧은 자괴 끝에 최원식이 말머리를 돌렸다.“어디 가서 해장은 해야지?” 최원식이 골목길을 한참 헤매더니 마침내 허름한 음식점의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그리고 처음 보는 기이한 생선매운탕으로 해장을 했다. 새벽까지 이어진 술끝이어서, 해장을 하자마자 머리 속의 명정(酩酊)은 물론 뱃속의 욕지기도 다시 맹렬하게 살아올라왔다. 그런 명정과 욕지기의 와중에서도 처음 대하는 생선매운탕의 맛이 참으로 시원하고 개운했다. 내가 생선 이름을 물어보자 최원식은 물텀벙이 하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날 아침의 물텀벙이탕은 나의 기억 속에 무슨 꿈결에서처럼 아련하면서도 선명하게 그 맛이 각인되어 남았다. 그런 내가 물텀벙이가 아구에 대한 인천식 사투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동안 나는 물텀벙이와 아구를 전혀 종류가 다른 생선으로 잘못 알고 지낸 것이었다. 나로서는 20년이 훌쩍 넘도록 둘을 다르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 숫제 불가사의할 지경이었다. 비록 인천은 아니지만 서울에서도 한 달에 두어 번 꼴로 즐겨 찾던 요리가 아구였던 것이다. 인하대학교 어름에 있는 용현동 네거리의 물텀벙이거리는 시쳇말로 음식특화거리의 하나이다. 인천에는 물텀벙이거리 외에도 화평동의 냉면거리, 인현동의 삼치거리, 차이나타운의 밴댕이회거리 등의 음식특화거리가 있는데, 인천시에서 10여 년 전부터 적잖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성진물텀벙’은 오늘날 용현동 네거리의 물텀벙이거리가 있게 한 원조이다. 구관(032-883-6690)과 신관(032-883-1771)이 한 건물에 나란히 있는데,1970년 1월 전병찬, 우금련 부부가 현재의 구관 자리에 비가 줄줄 새는 움막집을 월세로 얻어 인천에서는 처음으로 물텀벙이탕을 시작한 것이었다. 원래 신포동에서 왕대포집을 하다가 부부가 다 사람이 좋아서 외상만 잔뜩 주는 바람에 밑천까지 들어먹는 식으로 쫄딱 망하고, 우연히 물텀벙이에 생각이 돌아 까짓것하고 막가는 심정에서 시작한 물텀벙이탕이었다. 당시에 인천사람들은 물텀벙이 자체를 흉물스럽게 여겨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아, 그야말로 연안부두 바닥에 흔하게 굴러다니며 자칫 발에 걸리적거리는 천덕꾸러기가 물텀벙이였다. 물텀벙이라는 이름 자체도 어부들이 아무짝에 쓸모없이 흉물스럽기만 한 고기가 그물에 걸리면 당장 작살로 찍어서 바다에 버렸는데, 텀벙 하고 물에 빠지는 소리를 그대로 이름 삼아 물텀벙이라고 부른 것이었다. ●생김새 흉측해 연안부두의 천덕꾸러기 처음에는 물텀벙이탕을 작은 양은냄비 하나에 200원부터 시작하였는데, 무엇보다도 싸고 양이 많은데다가 막걸리에 곁들이는 술안주로는 그만이어서, 주로 연안부두의 부두노동자들로부터 입소문이 퍼졌다. 급기야 입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너나없이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물텀벙이탕을 처음으로 시작한 이 벤처 부부는 3년 만에 움막집을 헐고 이층집을 지을 정도로 떼돈을 벌었다. 그러자 이 부부의 성공에 힘입어 용현동 네거리 일대에 하나 둘 물텀벙이탕 집들이 늘어나게 되고, 마침내 물텀벙이거리까지 이루게 되었다. 물텀벙이탕은 한 마리에 4,5kg 나가는 큰 놈을 굵직굵직하게 잘라 바닥에 안치고, 미더덕이며 새우 같은 해물에 콩나물, 미나리, 쑥갓, 깻잎, 냉이, 목이버섯, 호박 등의 갖은 야채를 넣은 다음에 번줄이라고 부르는 말린 밴댕이를 고와낸 육수를 부어 끓여내는데, 한 입 뜨자마자 그 시원하고 개운한 입맛은 20여 년 전의 어느 날 아침에 무슨 꿈결에서처럼 아련하면서도 선명하게 각인된 기억이 당장에 살아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물텀벙이는 탕과 찜의 값이 같아 특대 4만원, 대 3만 5000원, 중 3만원, 소 2만 5000원인데, 특대며 대는 너댓 명이, 중은 서너 명이, 소는 두세 명이 족히 먹을 수 있는 양이다. 또한 탕과 찜은 각각 고기며 야채를 먹은 다음에 고소한 국물에 공깃밥을 볶아먹거나 쫄면을 넣어 쫄깃한 면발을 즐길 수도 있다. 동인천역 부근의 화평동 냉면거리는 철로의 굴다리에서 중앙시장 입구를 마주한 송월동 방면으로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소위 세숫대야냉면으로 더 알려진 냉면거리는 역시 인천시의 음식특화거리 중의 한 곳이다. 삼미소문난냉면, 웃터골냉면, 냉면천국, 화평냉면, 할머니냉면, 동그라미냉면, 일미냉면, 고향냉면, 옛날우리냉면, 아저씨냉면, 기와집냉면, 왔다냉면 등이 한꺼번에 몰려 있다. ‘삼미소문난냉면’(032-777-4861)은 화평동에 소위 냉면거리가 있게 한 원조 격으로 알려졌다.1980년 김중훈, 김현금 부부가 시작한 냉면집은 처음에는 백반도 함께 팔았는데, 둘 다 300원으로 값이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음식 인심 변함없어 동인천역 일대는 원래 동일방적, 이천전기, 대성목재, 동아제분, 대우중공업, 인천제철 등 큰 공장이 많아서 퇴근 무렵이면 젊은 남녀 노동자들이 우루루, 식당으로 몰려왔는데, 한창 젊은 나이의 노동자들은 너나없이 냉면 한 그릇이나 밥 한 그릇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결같이 하는 말은 ‘아줌마 냉면사리 하나 더 줘요.’ 아니면 ‘아저씨, 밥 한 그릇 더 줘요.’였다. 마음씨 좋은 부부는 밥그릇이야 그렇다 치고, 냉면그릇은 아예 그릇 자체를 바꾸어버렸다. 보통 냉면집보다 두 배는 커서 2ℓ의 물이 들어가고도 공간이 남는 커다란 양푼이었는데, 그러자 언제부터인가 손님들 사이에 소문이 돌아 냉면 자체가 숫제 세숫대야냉면이 되어버렸다. 물론 세숫대야냉면으로도 양이 모자라 하면 얼마든지 먹게끔 냉면사리를 시쳇말로 리필을 했다. 이들 부부가 20년이 훨씬 넘게 냉면을 팔면서 가장 많이 리필을 한 이는 일곱 번으로 기억하고 있다. 부부는 이 모든 것이 배고픈 시절의 이야기라면서 껄껄 웃었는데, 요즈음은 대부분이 세숫대야냉면 한 그릇을 비우는데도 벅차 하지만 이따금씩 세 번쯤 리필을 하는 이도 없지 않다고 했다. 세숫대야냉면이 소문이 나면서 주변에 하나 둘씩 냉면집들이 생겨나고,10여 년 전부터는 음식특화거리로 지정되면서 아예 골목 자체가 냉면거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삼미소문난냉면도 더 이상 백반은 중단한 채 냉면 하나만으로 메뉴를 고정시켰다. 그동안 냉면 값은 14년 전의 300원에서 3500원으로 껑충 뛰었지만, 냉면의 맛이나 양은 변함이 없다. 그렇듯이 손님들 또한 20년이 넘는 단골손님들이 수두룩하다. ■ 한 접시 5000원 ‘입맛대로’ 인천역 부근의 차이나타운 한 쪽에도 음식특화거리 중의 하나인 밴댕이회거리가 있다. 목포밴댕이, 제1호밴댕이, 수원집, 서산밴댕이, 터줏골밴댕이, 충남식당, 도은식당, 원조밴댕이, 포장마차밴댕이, 연화밴댕이 등이 처마를 나란히 한 채 사이좋게 늘어서 있다. 이중에서 ‘원조밴댕이’(010-0698-5023)가 이곳에 밴댕이회거리가 들어서게 한 원조 격인데,40여 년 전부터 가게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원래는 김완순씨가 주인이었는데 나이가 일흔이 넘어 일을 그만 두면서 딸인 한이정씨가 가게를 맡고 있다. 밴댕이회는 5월에 가장 많이 잡히면서 제철을 이루지만, 그 외에도 멸치나 전어잡이 등에 잡어로 함께 잡히기 때문에 철이 없이 아무 때나 밴댕이회의 고소한 맛을 즐길 수가 있다. 밴댕이회거리에는 밴댕이회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밴댕이회, 전어회, 오징어회, 병어회, 준치회 등이 한 접시에 5000원씩인데, 저마다 입에 감치는 맛이 달라서 밴댕이회 외에도 두세 가지를 함께 곁들여 술안주로 삼으면 하루저녁이 내내 즐거우리라. 이들은 횟감 이외에도 같은 값에 구이로 내놓아서 회를 싫어하는 사람도 역시 즐거울 수가 있다.
  • 전교조노선 교육현장중심으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지난 8∼11일 치러진 제11대 위원장·수석부위원장 선거에서 이수일(李銖日·51)·박경화(朴敬禾·45·여) 후보의 당선이 확정됐다고 12일 밝혔다. 전교조의 대중성 강화와 교육현장 중심으로의 변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이 후보의 당선으로 강경한 정치투쟁 중심의 종전 전교조 정책노선에 변화가 예상된다. 이 위원장은 1978년 서울 정신여중으로 발령받았으나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돼 해직된 뒤 10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전교조 정책위원장과 해직교사원상회복추진위원장, 참교육연구소장, 부위원장 등을 지냈고 1999년 서울 잠실고로 복직한 뒤 현재 서울 중화고에 근무하고 있다. 경남 신월중 교사인 박 부위원장은 1993∼2002년 지역사회학교인 ‘명서·안남문화마을’을 운영,1999년 ‘교사 신지식인’에 선정됐으며 성매매 퇴치 및 양성평등 등에 앞장서고 있다. 직접투표 방식으로 치러진 선거에는 전조합원 9만 9347명 가운데 7만 9050명이 참여해 79.6%의 투표율을 보였고 이 위원장은 투표자 중 59.2%(4만 6825명)의 지지를 얻었다. 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44)거문도의 역사와 삶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44)거문도의 역사와 삶

    ●英 침략행각 고스란히… ‘포트 해밀턴’ “186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해군 함정과 상선이 거문도에 드나들었고,1885년부터 1887년까지는 해군이 기지를 두었다. 그 동안과 그 후 몇 해 동안 해군 사병과 해병대원 10명이 이 섬과 근처 해역에서 사망하여 섬에 묻혔다.1886년에 사망한 2명과 1903년에 사망한 1명의 해군 병사의 기록은 비문에 새겨져 있으나 나머지의 묘지는 이제 알 길이 없다.” 거문도를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으로 병기한 거문도 영국군 묘지에 가면 ‘주한 영국대사관, 한·영협회, 영국부인회는 한·영수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1983년 이 패를 세웠다.’는 동판이 세워져 있다. 묘지의 주인공에만 관심을 갖는 위 기록으로 보면 워낙 표현이 온건하여 영국군이 잠시 나들이라도 나왔다 간 것 같은 인상마저 준다. 그러나 거문도 무단점령은 두 말할 것 없이 제국주의적 침략 행각이었다. 거문도는 남해안과 제주도의 중간에 있는 섬으로 대한해협과 대마해협의 문호에 해당한다. 영국은 일찍이 거문도를 주목,1845년에 사마랑을 보내 탐사를 한 뒤 해밀턴항으로 명명했다. 서구열강은 이곳이 동북아의 군함과 무역선 중간기착지로 적당하다고 판단했다.1866년 미국의 아시아함대 슈펠트 제독도 5일간의 정밀탐사 끝에 ‘해군기지로 손색이 없다.’고 결론내렸다.1878년에 이곳을 다시 찾은 영국 실비아호 선장 존은 아예 ‘영국이 이곳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동항을 찾던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한 대응이란 관점에서 무단점령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해석상의 명분일 뿐이다.35세에 외무차관,39세에 인도 총독, 후일 옥스퍼드대학 총장이 된 커즌은 소용돌이에 휘말린 조선에 관해,“블라디보스토크나 나가사키 사이에서 함부로 차는 축구공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거문도 점령은 동아시아에서의 거점확보가 핵심 의도였다.1885년 영국군은 거문도를 해군기지화하면서 22개월간 장기 점령한다. 김윤식 등 조선정부의 요인들은 보고를 받고도 섬의 위치조차 몰라 강화도 앞의 주문도와 착각하기도 했다. 조선정부의 무능이 이 정도였다. ●섬 3개 사이 만 숨어있어 군항에 딱 이 엄청난 국제적 사건을 이해하려면 한번쯤은 이곳에 들러봐야 한다. 거문도엘 가다 보면 뱃길을 따라 초도, 손죽도 등이 펼쳐져 이곳이 다도해임을 누구나 알게 된다. 동·서도가 삼산교라는 교각으로 연결되며, 그 가운데에 고도(현재의 거문리)가 자리해 삼산도(三山島)라 불렸다. 등대로 가다 보면 3개의 섬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늑한 만이 요새처럼 숨어 있어 군항으로는 그만인 곳이다. 초대형 선박의 입·출항은 어렵지만 중간 연락항으로는 그만이다. 영국이 욕심 낸 이유를 알 만하다. 제국주의의 살아 있는 전시장과도 같은 섬 거문도. 영국군 묘역 바로 아래 바닷가에는 중국과 통신하던 해저 케이블이 남아 있다. 당시만 해도 전선(電線)은 ‘제국주의 침탈의 동맥’이었으니, 이는 본국과 교통하며 우리나라를 삼키려 한 야욕의 증거이기도 하다. 집단취락의 흔적인 일본식 여관, 소화13년(1938)에 건립한 거문항 확충비, 삼도(三島)신사터 등 식민의 흔적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야마구치(山口縣)현의 기무라 추다로(木村忠太郞)가 무인도를 개척하여 거문리를 조성한 까닭에 왜인들 사이에서는 더러 ‘목촌(木村)의 거문도’라거나 ‘왜도(倭島)’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왜인 후손들이 일본에서 ‘거문도회’를 조직, 이따금 이곳을 찾아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한다니 그것도 참 우스운 일이다. 삼치와 고등어, 갈치잡이가 주업이다. 일본인도 예전에 이곳에서 주로 어업에 종사했다. 그 고등어가 이곳에 ‘거문도 파시’를 열었다.5월말에 시작,10월까지 파시가 이어졌는데, 이 전통은 일제시대부터 76년 무렵까지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60∼70년대에는 겨울 동안에 삼치파시도 이어 열렸다. 고등어와 삼치가 한창 들던 60∼70년대는 거문도의 전성시대였다. ●60~70년대엔 고등어·삼치 많이 잡혀 이곳에서 어획된 삼치는 모두 일본으로 수출됐다. 한창 삼치가 들 때는 배 한 척이 출어해 보통 2∼3t, 많게는 6t까지 잡아 올리기도 했다. 경남 통영이나 삼천포 등지에서 200여척의 배들이 몰려 장관을 이뤘다.17세부터 어업에 종사해온 정복래(81)씨는 ‘파시평(波市坪)’이란 역사적 용어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이 말뜻을 ‘온갖 장사치들이 모여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객선 터미널이 있는 곳에서 동·서도를 잇는 삼선교까지 이런 배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술집은 말할 것도 없고 옷과 비단, 신발가게에 강진 칠량에서는 옹기배까지 찾아들어 고기와 물물교환을 했다. 거나한 술판에 싸움 잘 날이 없었던 때도 이 무렵이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 유곽이 들어차 포구에 창녀들이 진을 쳤다. 당시 거문리에는 우물이 12곳이나 있어 수백 척의 배들이 몰려들어도 식수 걱정이 없는 곳이었다. 영국군이나 일본인이 동·서도를 마다하고 굳이 거문리로 몰려든 것도 풍부한 식수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거문도 사람들은 고등어보다 삼치를 더 가깝게 기억한다. 고등어 잡이가 경상도 선망배에 의해 독점되었고, 그 선망배들은 밤에 작업한 뒤 낮에 잠깐 항구에 들러 물만 얻어 싣고 떠나 주민생활과 깊은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고등어는 모두 부산에 모였다. 그렇지만 폭풍이라도 불라치면 이곳에는 인근의 고깃배들이 몰려들어 며칠씩 묵어가는 바람에 골목길이 흡사 장터 같았다. 한 척에 수십명이 타던 시절, 어선 수십 척만 들이밀어도 그들이 푸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 1970년대 중반을 지나며 거문도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어족자원이 고갈되면서 더 이상 어로선단이 몰려들지도 않았고, 많은 거문도 사람들이 원해나 원양어선을 타고 외지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로지 갈치잡이만 성해 대부분의 주민들이 말린 갈치나 생갈치 위판으로 생계를 잇고 있다. 여기서 솟구친 의문 하나. 왜 60∼70년대 초반까지 엄청난 어획고를 올리던 거문도가 한순간에 몰락하게 되었을까. 사실 답은 간단하다. 한·일어업협정이 발효되면서 대일 청구권자금에 의한 노후 선박과 그물이 대거 유입되었다. 이를 계기로 ‘기다리며 잡던 어업’에서 ‘쫓아가 잡는 어업’으로 변신, 단기간에 엄청난 어획량을 올렸으나 그만큼 어자원은 급감했다. 여수에 위치한 국립수산과학원 남해수산연구소 김진영 박사의 말을 듣자.“삼치나 고등어는 떼를 지어 움직이는 외해종(外海種)이다. 서식 공간은 정해져 있고 먹이도 제한돼 있어 이들 어류는 자기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고등어를 우리는 연간 20만∼40만t씩 잡아 올린다. 엄청난 양이다. 치어기의 생존 조건이 좋으면 일시적으로 급증하기도 하지만 어류 번성의 주기는 2∼3년이다. 확실히 우리의 ‘어획 강도’가 너무 높다. 샅샅이 뒤져 씨를 말리는 ‘완전어획’으로 연안을 찾아든 외해종 치어까지 모조리 잡아버려 결국 어자원 고갈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은 ‘느림의 철학’이 여기서도 문제가 되고 있었다. 한 마리라도 더 잡아들이고 싶은 욕망은 끝이 없을 터이니 작은 놈들까지 싹쓸이할 것이 뻔한 이치 아닌가. 자원이 고갈되면서 우리는 고작해야 1년생 고등어를 사먹고 있으니, 이덕무가 ‘청장관전서’에서 말한 바 ‘소년어’를 잡아먹고 사는 격이다. ●또 하나의 명물, 100년된 등대 거문도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곳이 또 있다. 바로 거문도 등대이다. 백도의 아름다운 절경도 소중하지만 이 섬의 역사를 알려면 이 등대를 찾는 게 훨씬 정확하다.1905년에 세워진 등대이니 내년이면 100년. 열강이 각축하던 100년 전에 등대가 세워졌다는 것은 거문도가 전략적 요충지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등대로 가는 바닷가 벼랑길은 지나치기 아까운 절경이다. 동백나무 터널을 수백m나 통과해야 한다. 등대가 없었더라면 지금까지 이만한 숲이 남아 있을 턱이 없다. 한준봉(56) 소장은 “등탑 자체가 문화유산 감인 데다가 숲조차 뛰어나서 연간 10만명에 가까운 관광객들이 몰려온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해양수산부에서 거액을 들여 새 단장을 하고 있다. 어디에서나 등대지기의 삶은 고달프다. 한 소장도 평생 오동도와 백야도, 소리도, 거문도 등 등대만을 돌아다녔다. 그는 아내의 출산 경험담도 털어놨다. 병원없는 절해고도에서 애를 낳는 바람에 자신이 직접 탯줄을 자르고 뒤처리까지 했다. 그렇게 아이를 키우다 앓기라도 할라치면 장장 6∼7시간이나 배를 타고 여수까지 나가야 했다. 이렇듯 등대지기의 애환은 끝이 없다. 이곳에는 한 소장 말고도 김계인(54)·한현성(29)씨 등 2명의 등대원 ‘홀아비’들이 더 있다. 이곳에 초임 발령을 받은 한씨는 총각이다.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묻자 “등대에서 살겠다는 아가씨만 있다면….”이라며 말꼬리를 감춘다. 농촌 총각 문제는 익히 알려져 있지만 남들 모르는 ‘등대총각’은 어쩌랴. 혹시라도 동백꽃 피고 지는 등대섬에서 살 뜻이 있다면 누구든 나서 보시라. 마침 관사도 비어 있어 새 삶에 운이 트이기도 할 것이니. 단, 등대의 삶이 결코 낭만이 아니라는 점은 알아둘 것. 영국군 묘지, 등대 100년, 일본인 어촌은 언뜻 무관한 항목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거문도 위쪽 손죽도에는 왜구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이대원 장군의 사당이 있으니 이 역시 외세와 관련된 역사의 일부이다. 구한말 거문도의 지식인이었던 귤은(橘隱)은 거문항의 만(灣)을 삼호(三湖)라 명명했다. 호수처럼 잔잔하다는 뜻인데, 실제로 거문도는 역사 속에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 [씨줄날줄] 김유정驛/이용원 논설위원

    “빙모님은 참새만한 것이 그럼 어떻게 앨 낳지유?(사실 빙모님은 점순이보다도 귓배기가 작다)”/장인님은 이 말을 듣고 껄껄 웃더니(그러나 암만 해두 돌 씹은 상이다) 코를 푸는 척하고 날 은근히 곯리려고 팔꿈치로 옆 갈비께를 퍽 치는 것이다./더럽다. 나두 종아리의 파리를 쫓는 척하고 허리를 구부리며 그 궁둥이를 콱 떼밀었다. 장인님은 앞으로 우찔근하고 싸리문께로 쓰러질 듯하다 몸을 바로 고치더니 눈총을 몹시 쏘았다. 이런 쌍년의 자식, 하곤 싶으나 남의 앞이라니 차마 못하고 섰는 그 꼴이 보기에 퍽 쟁그러웠다. 김유정(1908∼1937)의 단편소설 ‘봄봄’의 한 대목이다. 발표된 지 70년 가까이 지난 작품인데도 읽는 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끔 만드는 매력은 여전하다. 김유정은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학교를 다닌 그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지적인 오만함, 도회(都會)의 냄새가 스며들 틈이 없다. 고향마을에서 함께 산, 그리고 지금도 농촌 어딘가 있을 법한 인물들이 생생한 모습으로 살아 움직인다. 딸을 미끼로 어리숙한 노총각을 4년째 새경 없이 부려먹는 ‘장인님’이나, 멍청한 듯하면서 이악스러운 ‘장인님’에 끝까지 맞서는 ‘나’는 모두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김유정이 태어난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 실레마을에는 그의 생가가 복원돼 있고 ‘김유정문학촌’이라 이름 붙은 기념관이 있다. 게다가 4월 말에 열리는 김유정문학제를 비롯해 절기에 맞춘 행사가 잇따라 열린다. 이만 해도 으뜸의 대우를 받는다 하겠는데 경사가 하나 더 생겼다. 실레마을 앞 신남역이 1일 이름을 김유정역으로 바꾼 것이다. 역에 사람 이름이 붙기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경춘선에서 강촌역과 남춘천역 사이에 있는 신남역은 1996년 TV드라마 ‘간이역’의 무대가 돼 한때 유명해졌다. 하지만 지금도 하루에 일곱번 열차가 서는 작은 시골역임에는 틀림없다. 이제 김유정역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문학애호가들의 눈길을 끄는 명소가 되리라. 김유정역뿐이겠는가. 우리 문화·역사를 살찌운 이들의 이름이 방방곡곡에서 되살아난다면 우리의 삶은 그만큼 풍요로워질 것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숭산 스님 발자취 ‘세계일화’… 해외포교 한평생

    “언제나 이 순간 밖에 없다.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마라. 우리는 오직 모를 뿐이다! 공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과 같이 있는 것이다. 우리 생활과 떨어진,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 생활의 영향을 그대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숭산 스님의 가르침은 명명백백하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니, 본래 있는 그대로에서 깨달음을 구하라는 것이다. 스님의 삶은 그 자체가 그대로 커다란 가르침이자 귀감이었다. “다 걱정하지 마라! 만고광명(萬古光明)이 청산유수(靑山流水)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열반에 든 숭산 대종사. 스님은 철저한 묵언수행을 원칙으로 했지만 일주일에 한번씩 법회를 열고 제자들과 선에 관해 편지글도 주고 받았다. 숭산 스님과 제자들 사이에 오간 질문과 대답이 ‘공안 인터뷰’다. 수행의 정도가 제각각인 제자들의 질문에 상황에 맞게 답을 들려주는 숭산 스님의 가르침은 부처님의 대기설법과도 통했다. 숭산 스님은 무엇보다 한국 선을 세계에 알린 해외포교의 선구자로 이름을 남겼다. 열반 직전까지 스님이 조실로 주석한 화계사는 한국불교 세계화의 전초기지였다. 스님의 열성적인 포교 덕에 홍콩, 미국, 캐나다, 폴란드, 영국, 스페인 , 브라질, 프랑스 등 세계 곳곳에는 어김없이 한국식 선원이 들어섰다.1989년에는 한국 선지식으로는 처음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포교 활동을 시작했고,1994년에는 베트남을 방문해 지도자급 승려들과 법거량(法擧揚, 불가의 스승이 제자의 수행 정도를 문답으로 점검하는 것)을 나누기도 했다. 숭산 스님은 1964년에는 한국 불교 최초로 승려대학교육과 종단이 학비를 제공하는 종비생 제도를 실시하는 업적을 남겼다. 한국불교 전파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던 숭산 스님의 마음 속에는 한국 근대불교 중흥의 선지식인 만공 스님의 가르침이 자리잡고 있었다. 만공은 수덕사에서 주석할 때 ‘세계일화(世界一花, 세계는 한 꽃)’라는 말을 남겼고, 숭산 스님은 이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숭산 스님의 독특한 수행지도를 통해 배출된 서양인 제자는 5만여명. 외국인 승려 가운데 직계 제자만 해도 50명이 넘는다.‘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화계사 국제선원장 현각 스님, 미국 캘리포니아 모하비 사막에서 한국식 절 ‘태고사’를 짓고 있는 무량 스님 등도 숭산의 제자다. 현각 스님은 2001년 경북 영주 현정사 주지로 취임하면서 세인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숭산 스님으로부터 “오직 할 뿐(Only Do)”이라는 가르침을 받은 무량 스님은 “숭산 스님은 대단히 융통성있는 스승이다. 미국과 미국인의 현실에 맞게 다양한 가르침의 방편을 쓰시는 분이었다.”고 회고한다. 숭산 스님은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친구들과 함께 부모님으로부터 500원을 훔쳐내 만주 국경을 넘어 독립군과 합세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의 정치적 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깨달은 스님은 결국 출가의 길을 걷게 된다. 수행승으로서의 숭산의 구도행각은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스님은 계를 받고 10일이 지나 원각산 부용암에서 백일기도에 들었다. 식사로는 솔잎을 말려 빻은 가루로 벽곡( 穀)을 하면서 매일 20시간 동안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했다. 그런가 하면 하루에도 몇번씩 얼음을 깨서 목욕을 하기도 했다. 마침내 100일이 되는 날, 스님은 갑자기 자신의 몸이 떠나 무한한 공간에 있음을 느꼈다.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스님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었으며, 모든 것이 참다운 자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숭산 스님은 “선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스님의 가르침으로부터 큰 의심 덩어리 하나 챙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족하다. ●숭산 스님 행장 ▲1927년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읍 출생 ▲1947년 공주 마곡사 출가 득도 ▲1949년 수덕사에서 고봉 선사를 법사로 비구계 수지 ▲1958년 화계사 주지로 취임 ▲1960년 대한불교 신문사 설립, 초대사장 취임 ▲1966년 일본 홍법원 개설, 초대원장 취임 1992년 홍콩 국제선원 개설 ▲1997년 대한불교 조계종 원로스님 ▲2000년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개원 ▲2001년 대한불교 조계종 법계스님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中 “사회운동가 용어 없애라”

    “‘사회운동가’를 없애라!” 중국 정부가 경제발전과 개방의 물결 속에서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사회운동가(public intellectual)들의 영향력 차단을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고 미 일간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가 30일 보도했다. 중국에서 사회운동가는 공권력의 횡포에 반대하고 시민의 참여와 언론의 자유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독립적인 의견을 표명해온 사람들을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쓰인 지 3∼4년 정도밖에 안된 새로운 개념이다. 중국 정부와 관영 언론은 힘을 합쳐서 사회운동가를 공격하고 있다. 중국 선전부는 신문과 잡지들이 사회운동가들의 명단을 만들어 보도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관영 언론사들에는 당의 정책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에게 사회운동가라는 명칭을 쓰지 말도록 지시했다. 지난 23일 중국 해방일보는 사설을 통해 “사회운동가라는 용어는 당과 지식인, 대중과 지식인을 이간질시키기 위해 도입된 사악한 개념”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사회운동가들은 거만한 엘리트들이며, 자신의 관점을 대중에게 주입시켜 대중적 권력을 잡아보려는 사람들”이라고 공세를 퍼부었다. 이 사설 내용은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에도 그대로 실렸다. 지난 9월 광둥(廣東)성에서 발간되는 대중잡지 ‘서던 피플스 위크’가 ‘50인의 사회운동가’를 선정, 발표하면서 인기를 끈 것이 중국 정부를 움직이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50인 가운데에는 전통건물 철거에 항의해온 건축가 화싱밍, 허난(河南)성에서 불법 매혈에 의한 에이즈 확산 문제를 공개한 의사 가오야오제, 이민노동자 추방문제를 지적한 허웨이팡 베이징대 교수 등이 포함됐다. 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씨줄날줄] 자학사관/이기동 논설위원

    위태위태하게 대치하던 이 땅의 진보·보수진영이 엉뚱하게 ‘자학(自虐)사관’을 매개로 공개 일합을 겨루었다. 뉴라이트(New Right)운동을 내건 자유주의연대가 창립선언문에서 “노무현정권은 자학사관을 퍼뜨리며…과거와의 전쟁에 자신의 명운을 걸고…”운운하자, 한 친노(親盧)인터넷 매체가 곧바로 “자학사관 운운하는 자유주의연대는 일본 극우파와 쌍둥이…”라고 반격하고 나선 것이다. 자유주의연대가 자학사관을 언급한 취지에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과거사에 매달리지 말고 미래를 논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하나 ‘자학사관’이란 단어를 쓴 것은 분명 잘못이다. 일본 극우파들은 과거 일제가 자행한 난징학살, 위안부 등에 대해 사죄하자는 진보진영의 목소리를 자학사관이라고 반박한다. 자유주의연대는 자신들의 진의를 왜곡한 사이버테러라고 항변하나, 한치의 허점도 용납되지 않는 전장에서 이런 용어를 쓴 것은 큰 실수다. 신지호 교수 등 운동권 출신 486지식인들이 모여 극우와 극좌를 모두 배격하고, 여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다원주의 사회건설에 이바지하겠다며 나선 게 뉴라이트운동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지적풍토는 이들이 추구하는 중간을 용납하지 않는다.“내 눈에는 올드(old)라이트와 구분이 안 된다.”는 열린우리당 유시민의원의 반응은 일찍이 예견된 수순이었던 셈이다. 급기야 뉴라이트를 한국판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라고 부르는 목소리까지 등장하자, 자유주의연대는 인터넷 매체를 향해 이달말까지 공개토론에 응하라고 요구했다. 한바탕 이념전이 눈앞에서 벌어지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좌우와 진보·보수, 여기에 민족주의와 반미친북, 친노·반노까지 가세해 피아구분도 안 되는 일대 혼전이 벌어질 것 같다. 자유주의연대는 일제와 6·25를 겪은 이 땅에서 순수한 이념논쟁이 가능하다고 진정 믿는 것일까. 자유주의연대는 출범 일주일이 채 못돼, 이렇게 진보세력의 최대 공격목표가 되고 말았다.‘보수는 바꾸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치부하는 진보의 오만은 배격돼야 하지만, 이런 척박한 지적 풍토까지 포용하는 것은 뉴라이트운동의 과제다. 하지만 아직 이들의 내공이 여기에는 못 미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정치권 친위대들의 천박하고 비열한 궤변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다. 진지한 지적 토론속에서, 유연한 대안 이념의 출현에 대한 기대가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 이기동 논설위원 yeekd@seoul.co.kr
  • [시론] 체 게바라를 다시 읽는 밤/정끝별 명지대 국문과 교수·시인

    [시론] 체 게바라를 다시 읽는 밤/정끝별 명지대 국문과 교수·시인

    지난 12일 오후 3시. 카이로에서 30여만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야세르’를 연호하며 투쟁의 구호를 외치는 시간, 나는 신촌의 한 영화관에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보고 있었다. 아니 체 게바라와 아라파트와 빈 라덴을 떠올리고 있었다. 영화 상영을 기다리다 친구에게 문자 메시지를 날렸다.‘체 게바라, 아라파트, 그리고 빈 라덴의 공통점은?’ 응답 메시지가 즉시 달려왔다.‘잘 모르는 자들임! 약한 자들을 위해 노력하신 분들임!’ 내게도 그렇지만 특히 그 친구에게 체 게바라는 모택동, 호치민, 파농 등의 이름 한가운데서도 가슴 설레는 가장 빛나는 오라(aura)를 내뿜었던 인물이다. 꿈과 이상의 무한지점을 향해 가열차게 나아갔던 이름, 체 게바라. 그는 이제 우리에게 향수 어린 혁명가이자 몽상가이자 모험가이자 이상주의자이자 낭만주의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결국은 미완으로 끝날 그 무엇을 향해 한 시대의 억압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했던, 그리하여 시인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메시아를 기대한 마지막 세대’가 아니었을까? 21세기에 들어서도 지구촌 도처에서 전쟁과 테러와 납치와 암살과 음모와 억압과 착취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더욱 강력해지고 교묘해지고 있다. 명분 없는 이라크 전에서는 무수한 병사와 민간인들이 죽어나가고 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는 끊임없는 보복전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폭력에 총과 혁명으로 대항했던 게바라와 달리 비폭력으로 대항했던 간디는 ‘일곱 가지 사회적 악’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 바 있다. 원칙이 없는 정치, 노동이 없는 부, 의식이 없는 쾌락, 인간이 없는 지식, 도덕관념이 없는 거래, 인류가 없는 과학, 희생이 없는 신앙. 주변을 둘러 보라.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 아닌가! 우리는 바오바브나무와 같은 이 폭력과 악의 뿌리는커녕, 잎 혹은 가지들이라도 제대로 눈치채고 있는가. 긴 안목으로 우리 사회의 흐름을 앞서 볼 줄 아는 진정한 혁명가, 아니 지식인들조차 설 땅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은 아닌지…. 진정한 혁명 혹은 지식은 지금 체제순응주의로 개종중이다. 실용과 정보와 취미에 묻혀 상품으로 소비되고 향수로 추억될 뿐이다. 영화 밖에서 게바라는 내게 묻고 있었다. 우리가, 내가, 정말 한때 혁명적 삶을 꿈꾸기는 했던 것일까. 우리는, 나는 너무 쉽게 우리의 적(敵)을 닮아버렸다. 게바라는 이렇게 말했었다. 세계 어디서든 불의가 저질러지면 그것에 깊이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고. 이것이야말로 혁명가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고, 완전한 혁명에 도달하는 유일하고도 가장 확실한 길은 끊임없이 내부의 혁명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정직하게 분노할 줄 아는 한 우리는 여전히 혁명을 꿈꿀 수 있다. 정직하게 분노할 줄 알아야 나는 비로소 시인일 것이다. 혁명을 원치 않는 사회일수록, 시가 위기인 사회일수록 우리가 혁명과 시를 논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의 적은 늘 우리의 내부에 뿌리깊이 자리잡고 있고, 나는 나에게서부터 분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게바라를 다시 읽는 가을밤이 아련하고 소슬하다. 영화 속 젊은 게바라는 천식으로 쉴 새 없이 기침을 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김수영의 시 ‘눈’의 한 구절을 떠올리곤 했다.“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을 바라보며/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마음껏 뱉자.” 정끝별 명지대 국문과 교수·시인
  • 교수로 NGO 활동가로 되돌아 온 김성훈 前농림부장관

    교수로 NGO 활동가로 되돌아 온 김성훈 前농림부장관

    김성훈(65) 전 농림부 장관을 문득 떠올리게 됐다. 쌀시장 개방 협상의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이 분야의 전문가로 자타가 공인하는 그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증이 일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화를 넣어 만남을 청한 건 이 때문만은 아니었다.6년전 장관과 기자로 처음 만나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그는 다변(多辯)의 재담가였다.‘풀어놓을 이야기 보따리가 많겠다.’는 요량이 더 컸던 듯하다. 최근 서울의 한 호텔 라운지에서 그와 세 시간여를 마주 앉았다.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몰랐던 사실…‘농민가’를 쓰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반갑게 인사를 건넸는데 얼른 “예일대 교수지요.”란 대답이 나온다.(그는 중앙대 교수다.) ‘어, 그랬나….’ 순간 얼떨떨했다. 그러자 “예전에 하던 일, 그대로 하니 예일대 교수지요.”란 풀이를 붙인다. 어색하기 십상인 6년의 시차를 그는 이렇게 쉽게 뛰어넘는다.DJ(김대중) 정부의 첫 농림부 장관(1998년 3월∼2000년 8월)으로 30개월을 장수한 뒤 원래 자리인 중앙대 교수로,NGO 활동가로 되돌아왔다는 얘기다. 이전과 차이라면 직함이 더 많아지고 더 바빠졌다고 한다. 경실련·한국내셔널트러스트 등 NGO의 대표자리만 네 개이고, 여기에 고문이나 이사직함까지 더하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그는 지금껏 우리 농촌·농업문제의 이론가이면서 행동가로 진력해 왔다.1990년대 초반 UR협상 반대논리를 줄기차게 제기하며 정부를 맹렬히 공박하는 바람에 ‘신운동권 교수’란 별칭이 붙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행로가 학창시절(서울대 농경제학과 58학번)부터 본격화했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다. 서울 농대의 전통적 이념서클로 유명한 ‘한얼’을 조직한 이가 바로 그였다. “일화 좀 들려달라.”고 요청하자 잠시 뜸을 들이다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80년대 시위건, 집회건 모였다 하면 불렀던 ‘농민가’다.“다른 동기와 함께 작사했지요. 원래는 한얼에서 분화한 농사단(農士團)의 단가로 만들어 불렀던 노랩니다.2절 첫 가사가 ‘붉은 태양 솟아오르는∼’인데, 언제부턴가 ‘밝은 태양∼’으로 바뀌더군요.” 그랬나…. 고개를 끄덕이며 보니 그는 새삼 감회어린 표정이 되어갔다. ●허문도와의 인연 신군부 ‘3허(許)’씨 중 한 사람인 허문도(57학번) 전 통일원장관과는 학창시절 친구라는 얘기도 뜻밖이었다.“농대 도서관 책의 절반은 허문도가, 절반은 내가 읽었지요. 조용하고 그다지 말이 없었는데, 주로 역사와 철학쪽 책을 탐독한 걸로 기억됩니다.” 김 전 장관은 그로부터 20여년 뒤 전두환 정권의 실세로 부상한 그와 다시 만나게 된다.“80년 5·18 사건 이후 어느날 요정으로 부르더군요.‘청운의 꿈을 같이 실현하자.’고 합디다.” 김 전 장관은 “악어의 눈물이라도 좋으니 5·18에 대해 먼저 사과해야 한다.”고 뿌리쳤다고 한다. 그즈음 그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자로 ‘남산’에 끌려가 고초를 겪게 된다. 허씨가 자기 몰래 이름을 올렸던 국보위 농업분야 전문위원직을 끝내 마다한 데다,‘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에 서명한 일이 빌미가 됐다.“신병처리가 어떻게 될지 몹시 불안해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풀려나더군요. 아마 허문도가 힘을 썼던 것 같습니다.” ●가까스로 내던진 장관직 그는 장관직을 물러날 때 남다른 과정을 거쳤다. 떼를 쓰다시피 물러나겠다고 매달렸다. 김종필 총리와 이한동 총리에게 한번씩 사표를 제출했지만 “DJ가 아직은 생각없는 것 같다.”는 이유로 반려됐다고 한다.2000년 총선을 앞두고 축협통합 문제와 구제역, 동해안 산불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왔을 때다.“동가식 서가숙하며 뛰어다니는데 이빨이 몹시 아프더라고요. 그냥 진통제로 버티며 지냈는데 어느날 앞니 5개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러더니 4개가 더 빠지더군요.” 병원에서 찍은 이빨 사진까지 들고 가 “밥도 못 먹을 지경인데,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고 이 총리에게 호소하기도 했지만 “난 모르는 일”이라는 대답만 들었다.‘DJP 연합’이 재개되고 농림부장관직이 자민련 몫으로 조정된 뒤에야 ‘가까스로’ 장관직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고 한다. ●통상교섭본부 설치는 실정(失政) 쌀 시장 개방 협상으로 화제를 돌리자 김 전 장관의 얼굴빛이 달라진다.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과 목소리에 노기(怒氣)까지 서렸다. 그는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는 바람에 계속 잘못돼 가고 있다.”고 단호하게 비판했다.“외교력과 협상력의 부재로 중국에 지나치게 끌려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농민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국가이익을 챙기는 시나리오와 국내 농업대책 마련이 동시에 필요한데,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통상교섭본부 내에 농업 전문가가 없는 현실도 문제지요. 장관이 바뀔 때마다 통상문제와 관련한 멤버가 교체됐는데 이래서야 협상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그는 자기가 몸담은 DJ 정부에 대해서도 톤을 높였다.“그때 통상교섭본부를 설치한 것 자체가 잘못됐습니다. 대놓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건 실정이에요. 미국 무역대표부(USTR)처럼 힘이 막강하면 몰라도, 우리처럼 수세적 협상을 해야 하는 나라는 한 곳에 권한을 모아주는 것이 전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관세화 협상에 대해선 결연한 태도다.“지금 그걸 왜 합니까.DDA 협상에서 농산물 관세 한도설정 등 세부원칙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관세화 협상을 해서도 안 되고, 할 필요도 없는 겁니다.” 지난해 멕시코 칸쿤 WTO 각료회의에서 자결한 이경해씨와의 인연을 어디선가 들었다. 자결하기 하루 전날 유언을 남겼는데 김 전 장관에게 “둘째딸을 맡긴다. 결혼식을 잘 치러줄 것으로 믿는다.”는 내용이었다. 그해 가을 치러질 결혼식에 김 전 장관이 주례로 예정돼 있었던 것이다. 쌀 시장 개방 협상문제로 나라 안이 시끄럽다. 김 전 장관의 애정 어린 당부와 비판을 당국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했다.“저녁에 (서울 서초동)정토회관에서 강연 약속이 있다.”며 서둘러 일어서는 그의 표정은 만날 때와 달리 어두워져 있었다. 박은호기자 unopark@seoul.co.kr
  • [오늘의 눈] ‘시각 교정’ 필요한 노동장관/최용규 공공정책부 차장

    우리나라의 노동부장관은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고 한다. 노동계가 워낙 강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 투자자들도 한국의 노사문제를 가장 큰 걸림돌로 꼽는다. 실제로 양대 노총은 조합원 수에 비해 산업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하다. 김대환 노동장관이 최근 노동계에 대한 속내를 드러냈다. 그는 “민주화가 노동운동만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며 대기업 노조는 노력에 비해 과도한 과실을 따먹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그들만의 잔치’라고 깎아내리면서 도덕성 문제까지 걸고 넘어졌다. 노동계의 역할과 존재의미를 송두리째 부정했으니 노동계가 발끈했음은 물론이다. 민주노총은 즉각 ‘김대환 장관은 함부로 노동운동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논평을 냈다. 대중운동을 때리기 전에 지식인인 김 장관은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라는 충고도 곁들였다. 하지만 김 장관이 노동계를 비판하고 노동계가 이를 맞받아치는 선에서 문제가 끝날 것 같지 않아 걱정이다. 전공노 사태로 정부에 대한 불만과 반감이 극에 달해 있는 노동계는 김 장관을 진정한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다. 비정규직 법안, 노조 전임자 문제 등 노·정이 풀어가야 할 난제가 수두룩하다.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다. 그럼에도 김 장관은 참여정부가 현 노동계에 빚진 게 없고 오히려 노동계가 참여정부에 빚을 졌다는 시각을 숨기지 않았다. 또 현재의 노동운동이 권리를 찾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 유지쪽으로 변질됐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가 이런 생각을 기초로 노동계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이라면 시각교정이 필요하다. 노동계를 아우를 책무 역시 노동장관에게 있기 때문이다. 경색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현 상황은 김 장관이 앞장서 풀어야 한다.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할 때 길은 보인다. 바로 상생(相生) 해법이다. 최용규 공공정책부 차장 ykchoi@seoul.co.kr
  • [기고] 선열들의 희생정신 되새겨야/박유철 국가보훈처장

    서대문 형무소를 향하는 길은 아직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있다. 멀리서 보이는 건물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일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그 곳에 들어서는 순간, 잔악한 고문 광경에 민족의 비애를 느끼게 됨은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감정일 것이다. 지난 8월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하게 된 재 러시아 독립유공자 유족이 “서대문 형무소에 있는 일제의 고문 기구들을 보면서 우리 증조할아버지들이 얼마나 영웅적이었는지 알게 됐습니다.”라고 소감을 밝힌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립하기까지 조국 광복을 위해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일본의 온갖 잔혹한 고문으로 옥사했거나 이국의 황량한 들판에서 고군분투하다 순국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분들의 거룩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이 있는 것이다. 17일은 예순다섯 돌을 맞는 ‘순국선열의 날’이다. 지난 세기 초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지하에서 비운을 겪고 있을 때, 선열들은 이 나라 동천 하늘의 어두운 장막을 걷어내고 조국을 찾기까지 국내는 물론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풍찬노숙하며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었다. ‘순국선열의 날’은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방법은 각기 달랐으나 자주독립을 이루겠다는 염원 아래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하신 선열들의 위훈을 기리는 정부기념일로 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제정한 ‘순국선열공동기념일’이 그 기원이다. 의병들은 항일투쟁을 벌였으며, 학생들은 독서회 등을 결성하여 독립운동 역량을 키워나갔다. 온 겨레가 하나되어 일어났던 3·1독립만세운동, 상하이임시정부의 구국활동, 독립군과 광복군의 항일 무장투쟁은 우리 민족에게 자주독립의 의지를 심어 주었다. 지식인들은 계몽활동을 펼쳤고, 교육가들은 학교를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박은식 선생이나 신채호 선생 같은 분들은 고난의 망명지에서 생활하면서도 초지일관 민족사관에 입각한 빼어난 역사서를 저술하여 민족정신을 일깨워 주셨다. 이 두 역사학자들이 집필한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사’ ‘조선상고사’ 등이 나올 때마다 일제 당국은 금서로 지정했으나 이 분들은 대한인의 자존의지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처럼 선열들은 국내외에서 일본의 감시와 탄압을 받으면서도 항일투쟁에 신명을 바쳤다. 거기에 순국선열들의 희생정신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불굴의 의지로 기어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어려웠던 시대를 산 선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지고지순(至高至順)한 삶과 그 순정의 애국혼은 오랜 세월을 넘어 지금 우리들에게 소중한 정신적 가치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라고 한 안중근 의사의 유언은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동암 차이석 선생이 “우리는 권력, 재력, 시간, 환경이 모자라서 독립운동이 부족함이 아니라, 우리 겨레 모두의 단결이 부족했던 탓”이라고 하여 모든 독립운동 세력의 단합을 호소한 말씀은, 국민화합이 절실한 오늘날 우리 모두 교훈으로 새겨야 한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밝은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지난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 선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계승하는 일이야말로 희망찬 내일을 만들어 가는 지름길이다.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대의를 위해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오직 나라와 겨레를 위해 하나가 되었던 선열들의 위국헌신 정신을 되새겨 국가발전의 정신적 원동력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하겠다. 박유철 국가보훈처장
  • 儒林(223)-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23)-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자로가 공자를 수행하고 길을 가다가 뒤처져 스승의 일행을 잃어버렸다. 공자의 행방을 찾고 있던 중 막대기에 대바구니를 매달아 걸머지고 걸어가는 노인을 만나게 되었다. 자로가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께선 저희 선생님을 못 보셨습니까.’ 그러자 노인이 대답하였다. ‘선생이라니 도대체 누가 선생이란 말이오.’ 노인은 들고 가던 지팡이를 땅에 꽂아두고 풀을 뽑으며 말하였다. ‘사지를 움직여서 일도 하지 않고, 오곡(五穀)을 나누어 뿌리지도 않고 이를 분별하지도 못하는데 누가 선생이란 말이오.’ 자로는 손을 모아잡고 공손히 서 있었다. 노인은 자로를 집에 데리고 가서 하룻밤을 묵게 하고는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대접하고 또 자기의 두 아들을 만나게 하였다. 다음날 자로가 공자에게 돌아와 사연을 얘기하자 공자는 ‘숨어사는 사람이다.’라고 말하고는 자로로 하여금 되돌아가 그 노인을 찾아보도록 하였다. 그러나 자로가 가보니 노인은 이미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없었다.” 이 일화의 테마도 공자가 노자의 도가사상을 따르는 숨어 사는 사람들로부터 ‘사지를 움직여 일도 하지 않고, 오곡의 씨도 뿌리지 않는 게으른 지식인’으로 멸시를 당하였다는 내용이다. 이는 마치 공자가 같은 은자인 장저와 걸닉으로부터 ‘천하를 주유하면서 나루터도 모르는’,‘자기 마음에 드는 군주를 찾아 천하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멸시를 당한 내용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장면에서도 스승에게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낱낱이 고하면서 불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자로의 교활한 속셈이 엿보이는 것이다. 노인이 공자를 ‘사지를 움직여 일도 하지 않고 오곡도 구별하지 못하는 백면서생’으로 비웃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로가 그 노인이 자신을 데려가 하룻밤을 편안하게 재워줬을 뿐 아니라 두 아들까지 만나게 해주었다는 가족적인 인간애를 발휘하였음을 굳이 고백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공자가 주유열국을 시작한 지 벌써 7년, 그동안 제자들은 자기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정에 굶주려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공자도 마찬가지였다.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객지생활 동안 공자는 동가식 서가숙 하면서 아내 기관( 官)과 아들 공리(孔鯉)를 그리워하였을 것이다. 공자의 생애 중 그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아주 짤막하게 남아 있을 뿐이지만 아내 기관씨는 일찍 죽고, 공자는 외아들 공리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노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편하게 묵고 노인의 두 아들까지 만나고 왔다는 자로의 말은 가족을 그리워하는 공자의 마음을 갈갈이 찢었을 것이다. 그뿐인가. 자로는 공자에게 노인으로부터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대접을 받았다.’는 이야기까지 굳이 고백하고 있는 것은 갈갈이 찢긴 공자의 마음에 불까지 지르는 잔인한 행위였을 것이다. 그 무렵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궁핍한 생활에 지쳐 있었다. 불안한 정세에 이 나라 저 나라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도망쳐 다니기에 바쁠 뿐 먹고 사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였던 것이다. 이런 제자들의 걸인과 같은 모습을 보는 공자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생면부지의 숨어 사는 노인이 자신에게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대접’하였는데 평생을 믿고 따르는 스승 그대는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을 먹여주고 어떻게 재워주고 있는가를 따져 묻는 준엄한 질책이 바로 자로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불만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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