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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신 교수가 본 ‘식민지 조선의 희망과… ’

    우리의 근·현대의 역사는 대립과 갈등의 역사다. 이 시대를 살아야 했던 이들은 외세와 대립하고 그리고 우리끼리 갈등해 왔다. 그래서 이 대립과 갈등의 질곡을 지나온 이들이 당연히 지니고 있을 ‘한’이 이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해방된 후 우리의 근·현대사 연구가 본격화될 때‘식민사학 극복’이라는 기치를 높이 쳐든 ‘정의의 사도들’이 나타나 ‘우리’(我)와 ‘그들’(非我)을 구분하고, 친일과 반일, 순응과 저항, 식민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우리 편’과 ‘그들 편’ 사이에 굵은 줄을 그어대고 ‘재판의 한 마당’을 펼쳤다. 이들의 후예들은 군사독재시대를 지나면서 민주와 반민주, 통일과 반통일, 개혁과 반개혁이라는 잣대를 우리 역사와 우리 사회에 들이대었다. 이들은‘새로운 사회’를 갈망하고 모색하는 작업이 그들만의 사명인 듯이 때로는 이념의‘거룩한 사도’로서, 때로는 앞을 꿰뚫는 예언자로서, 때로는 신념에 가득 찬 혁명가로서 우리 역사를 읽어왔다. 다양하고 복잡한 삶의 마당이었을 우리의 근·현대 역사를 둘로 나누어 한 쪽은 선이고 다른 한 쪽은 악으로 인식하는 학문풍토를 만든 셈이다. 그런데 이들에 대항하려는 듯 또다른 ‘선 긋기의 학문하기’가 나타났다. 해방이후 나타난 ‘정의 사도들’이나 군사독재시대, 이른바 비분강개의 시대에 나타난 ‘혁명의 사도들’처럼 이들도 그들이 비판하는 ‘해방전후사의 인식’그룹이 그어 논 선의 다른 한 쪽에서 ‘정의의 사도들’인양 또는 ‘혁명의 사도들’인 양 복잡하고 다양한 우리의 근·현대사를 읽으려 하고 있다. 아무리 학문이 변증적으로 발전한다고 하지만 이들 또한 ‘우리 편’과 ‘그들 편’이라는 편 가르기를 하거나 이념의 다른 한 쪽에서 다양하고 복잡한 우리의 역사현상을 읽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양 쪽에서 벌이는 ‘이분법적 우리역사읽기’를 넘어서 복잡하고 다양했을 우리의 근·현대사를 인식하려는 새롭고 소망스러운 시도가 등장하였다. 우리의 학인들이 미국을 비롯한 서양나라나 일본에 줄지어 유학 갈 때, 반대로 좁다란 우물에 갇혀 우리 것 우리가 제일 잘 안다는 학문적 국수주의에 파묻혀 있을 때 홀연히 인도로 가 공부한 역사학자 이옥순이 이 작은 물결 그 한가운데에 있다. 그는 ‘여성적인 동양이 남성적인 서양을 만났을 때’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저술을 통해 이미 역사연구에서 ‘제국주의/민족주의’ 패러다임과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의 유용성을 보고, 그리고/그러나 이를 넘어서려는 ‘새로운 역사읽기’를 보여주었다. 이번에 그가 펴낸 ‘식민지 조선의 절망과 희망, 인도’는 그가 끈질기게 추구하고 있는 새로운 역사읽기를 더 발전시키고 더 구체화하는 작업의 산물이다. 일제 식민지시대 우리 지식인들의 인도 인식을 그 시대의 신문과 잡지에 나타난 수많은 인도에 대한 기사, 논설 그리고 기획 기사를 통해 담아내고, 당시 우리에게 인도는 어떻게 각인되었고 또 왜 그렇게 되었는가고 묻고 있다. 우리와 같은 처지의 인도를 바라다보는 당시의 ‘우리 마음’에는 동경·연민·동질성과 연대의식과 함께 문명화되지 못한, 서구가 만든 그 ‘타자’를 바라다보는 측은함과 내려다봄이 담겨져 있음을 실증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옥순은 바로 이 이중성과 모순성을 읽어낸 후 감히 이를 해석하고 설명하고 있다.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 1967~1975 외교문서 공개

    외교통상부는 30일 1967∼1970년대 중반까지 발생한 동백림 사건, 요도호 납북 사건, 주한미군 철수 논란 등과 관련한 외교문서 11만 7000여쪽을 공개했다. 공개된 문서에서 동백림 사건 마무리 시점인 1969년 1월 하인리히 뤼브케 서독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 특사파견을 통해 재독 음악가 윤이상씨 등 사건 관련자 6명을 석방 또는 감형한다는 비밀 합의를 했음이 밝혀졌다. 문서는 서울 서초동 외교안보연구원에서 열람할 수 있다. 1. 동백림 사건1967년 중앙정보부가 독일에서 활동 중인 지식인들을 간첩으로 지명, 납치한 ‘동백림’사건 당시 한국 정부는 시종 군색한 외교로 일관해야 했다. 서독 정부와 시민들의 비난·압박이 심해지자 최덕신(77년 미국 망명후 86년 월북) 당시 주독 대사는 7월1일 사표를 내고 최규하 외교장관에게 “특명전권대사로서 사태만 악화시키므로 귀국 하명 있기를 앙망한다. 인책 소환이나 면직시켜 단시일 내 국토를 떠나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장관은 “지금 떠나면 오해가 발생하니 더 머물라.”고 지시했다. 두 달 뒤 김영주 신임 대사가 부임했으나 빌리 브란트 외상은 한달 반 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면담을 기피하는 수모를 주기도 했다. 서독 정부는 ‘원조 지연’카드로도 압박했다. 68년 12월5일 밤 40여명의 독일 학생 시위대가 ‘동백림 사건’연루자 석방을 요구하며 한국대사관을 점거했고, 앞서 8월 김 대사가 슈레스비히-홀스타인주를 방문했을 땐 태극기가 나치 표식으로 칠해지는 사건도 있었다. 2. 주한미군정책 최근 한·미간 논란이 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개념이 31년전 미 행정부와 의회의 주한미군 철수 논란속에서도 제기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더몬드, 스콧 상원의원 등은 1974년 12월 한국과 일본, 타이완 등 아시아 9개국을 순방한 뒤 작성한 ‘아태지역의 병력과 정책’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미국은 (주한미군을)타 지역에 배치한다는 점과 한국에 영구 주둔시킬 수 없음을 한국인에게 경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미 2사단을 태평양군사령부의 비상 대기병력으로 지명하고 ‘때때로’ 사단 병력 일부를 훈련을 위해 타 태평양지역에 배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개념은 1974년 미 행정부에서 이미 제기됐다. 당시 우리 정부는 “한국을 동북아의 전진기지로 삼고 최소한의 거점을 확보, 주한미군을 기동예비군화한다는 의미”로 분석했다.75년 2월 민주당의 맨스필드 의원은 “미국의 대 중공 화해정책은 계속돼야 한다.”면서 미군의 과도한 한국주둔 등 ‘시대착오적’정책 개선을 촉구하기도 했다. 3. 요도호사건 “일본항공(JAL)기가 북괴로부터 돌아온 후 일본인들이 북괴에 감사하다며 친근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데 어불성설이다. 제3자인 미국이 일본에 충고해 달라.”(윤석헌 외무차관이 라스람 주한 미 공사에게) 1970년 일본 적군파 요원들의 항공기 납치 사건인 ‘요도호 사건’과 관련, 곤욕을 치렀던 우리 정부는 사건 해결의 ‘공’(功)이 북한에 넘어가자 극도로 경계했다.3월30일 하네다 공항을 출발, 후쿠오카로 향하던 요도호 여객기를 납치한 적군파 요원들이 김포공항에 착륙한 뒤 79시간을 대치하다 승객들을 풀어 주고는 승객들 대신 야마무라 신지로 당시 일본 운수성 차관을 싣고 4월3일 평양으로 떠난 것이 이 사건의 개요. 북한이 납치범 일행만 받아들이고 비행기와 승무원, 운수성 차관은 일본으로 돌려보내자 일 정부는 북한에 수차례 사의를 표했고 이에 정부는 일측에 강력 항의했다. 정부의 득실분석 자료에는 “일본의 대 북괴 접근 무드가 대두되고, 대북한 자세완화 가능성이 증대됐다.”고 돼있다. 4. 70년대 인권문제 70년대 중반 한국의 인권상황에 대한 미국의 공세, 특히 미 의회 ‘자유주의’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비판은 후반기 지미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와 인권문제 연계의 토대를 마련해준 것으로 나타났다. 1975년 프랭크 처치 상원의원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면서 “주한미군은 집권자의 압제정치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의회내에선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국가가 미국의 정치철학과 역행하는 관행을 유지하고 있을 때엔 이를 시정시키기 위해 직간접 압력을 행사해야 하고 이는 조용한 외교적 언사를 초월해야 한다.”는 주장도 쏟아졌다. 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35·끝) 에필로그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35·끝) 에필로그

    봄볕속에 하얀목련이 피었다. 하얀목련의 젖무덤 꽃망울속에 생명 존재의 향기가 피어난다. 너무도 신비롭고 고귀하기만 한 존재의 향기속에서 우리 삶의 온갖 애환과 연민을 맛본다. 노란병아리 솜털처럼 돋아나는 차싹속에 온 우주를 깨어나게 하는 봄향기가 묻어나고 있다. 그 설레이며 기쁜 봄속을 떠받치고 있는 차나무속에 수선이 무리지어 피어 있다. 금잔옥대(金盞玉臺), 제주도 모슬포 대정에 귀양간 추사가 그 작고 초라한 우거에서 한묶음 피어난 수선화를 보고 울었다는 그 꽃이다. 제주도에서 일지암으로 시집을 온 금잔옥대가 3년 만에 그 활짝 웃는 얼굴을 내보인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자연의 질서와 환경이라는 것이. 그 생명의 위대함에 절로 눈물이 난다. 우리는 이같은 자연의 흐름에 역행해 살고 있다.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고, 우주의 생명과 리듬을 뒤틀고 행복을 추구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속도의 포로가 되어 욕망의 포로, 즉 매달림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 삶의 끝은 허무와 허우적거림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같은 삶의 종착점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연의 질서와 사회의 질서가 파괴되며 인간의 근본적인 이성이 상실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차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같은 이성의 회복에 있다.18세기 초의·추사·정약용 등 당시대의 최고 지식인들이 차를 마시며 새로운 시대 변혁의 역사를 도모했던 것처럼 차를 통해 이시대의 정신성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차의 새로운 길인 것이다. 우리 차는 이제 막 발아단계를 벗어나 한 단계 성숙하기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각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먼저 차의 역사성 복원이다. 우리는 차에 대한 역사성의 복원에 서둘러야 한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이어오면서 우리곁에 자리했던 차문화의 복원은 매우 시급한 과제 중 하나다. 자료를 복원하기 위한 관련 전문가의 육성은 기본이다. 그같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차학회다. 열악한 조건과 환경 그리고 인력의 어려움 속에서도 차학회는 꾸준히 세미나를 개최하며 한국차의 역사성에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역사에서 차는 어둠속 깊은 창고에 갇혀 있었다. 먼지를 털어내고 빛을 쪼여주기 위해서는 과학적 세밀함과 학문적 규명작업이 서서히 이루어져야 한다. 인물사, 사상사, 문화사, 제다사, 그리고 육종사등 각 분야별로 세밀한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이같은 접근은 차가 단순한 전통문화라는 당위성을 벗어나 새로운 영역으로서 자리잡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서 말했듯이 관련 전문가를 위한 다양한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최근에 여러 대학에서 차학과가 신설돼 정식학과 과목으로 강의되고 있는 것은 그나마 긍정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그런 대학들에도 관련 전문가가 없어서 애를 태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사람의 전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예산이 투여되어야 한다. 향후 한국차를 위해 각 대학이나 관련단체들의 관심과 배려가 중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다도철학이다. 우리는 곳곳에서 다도, 이른바 차의 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행다 즉 차의 행위에 국한된 것이다. 물론 그속에 차의 철학이 깃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행다속에 깃든 차의 철학적 요소들은 아직 우리에게 모호한 상징적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그같은 다도철학은 마치 차가 일상에서 편하게 마시는 것이 아닌, 번잡한 일상사를 벗어나 먼 산속에서 고고하게 마시는 고급문화로 인식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그같은 인식은 일반대중들의 접근을 막을 뿐만 아니라 차를 차인들이라는 틀속에 고정시키는 폐해를 낳기도 한다. 다음은 육종의 문제다. 우리는 몇해 전 우리의 전통차는 야생차에 있다고 말하는 주장을 듣기도 했다. 현재 우리 차밭에 있는 대부분의 차들이 전통차가 아니라 일본에서 들여온 품종인 일본차라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그같은 주장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육종학에서 보면 모든 식물들은 여러 가지 교배를 통해 새로운 품종을 탄생시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 점에서 야생차는 우리의 전통차라는 당위성은 있지만 그것이 곧 우리차의 전부라는 사실은 맞지 않다.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야 하는 것은 하나의 산업으로서 생산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물과 식물이 그러하듯이 늘 우수한 품종이 탄생해 그 사회뿐만 아니라 종족들을 이끌어간다. 차나무 역시 마찬가지다. 육종학을 통해 좀더 우수한 차나무가 끝없이 개발 보급되어야 한다. 중국이나 일본 타이완은 이를 위해 수없이 많은 자본과 전문가들을 투입, 새로운 육종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 그같은 새로운 육종실험의 결과 획기적인 차나무 교배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리는 것을 보면 한사람의 차인으로서, 한사람의 차농사꾼으로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육종을 통해 탄생한 차나무는 수확뿐만 아니라 차맛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그 잠재적 시장가치가 무궁무진하다고 볼 수 있다. 차가 단순한 가내수공업을 통해 몇 사람만 나누어 마시는 것이라면 이같은 관점이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는 이제 세계적으로 농업산업의 한축으로서 주목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중국 일본을 비롯한 차 생산국들은 산업적 측면 즉 무역적인 측면에서 세계시장을 겨냥해 장단기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차의 소비량은 2003년 통계에 따르면 1인당 소비량이 40g이었으나 2004년에는 90g으로 늘어났다.2006년 현재 그 소비량이 얼마나 늘어났는지 모르지만 불과 1년사이에 배로 늘어난 것을 볼때 이미 차는 우리나라에서도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잡고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나라의 한해 차 생산량은 약 3800t이다. 그러나 수입도 만만치 않다. 약 3000t가량이 수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몇몇 대기업들이 중심이 되어 수입하는 차는 대부분 티백시장으로 대표되고 있으며 한국 차생산자들의 소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을 정도로 자라나고 있다. 우리나라 차 시장 규모를 돈으로 환산하면 약 6000억원, 일본의 경우는 약 10조원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중국은 그 규모를 환산하기 힘들 만큼 거대시장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차 생산을 위한 새로운 육종은 우리차 생산에 결정적인 영향를 미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을 들여다볼 때 차는 전남 경남지역 등지에서 농가산업을 대체할 새로운 분야로 주목받을 만하다. 국가차원에서 지원과 관심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시장가치로 발돋움하고 있는 차에 대해 국가의 지원과 관심은 절실한 문제 중 하나다. 대체농업으로서 차는 그 무한한 가치와 생산성을 잠재적으로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다에 있어서의 변화도 필요하다. 현재 전통차시장은 약 5%정도다. 이는 차농가들이 제다에 있어서 전통차생산에 몰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의 제다에 있어서 새로운 방향성에 눈을 떠야 하는 것이다. 최근 한 신문에 녹차샐러드가 개발되어 미식가들의 각광을 받는 것에 대한 기사가 실려있었다. 유럽에서 개발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차 샐러드는 차상품의 영역이 무한대로 확장돼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제다에 대한 관심도 변해야 한다. 차상품의 영역이 녹차요구르트, 녹차아이스크림 등 웰빙산업과 맞물린 제다의 변화가 시급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그것은 향후 차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논의하고 각성할 것은 차인들의 화해와 상생을 통한 차문화의 발전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수천개의 차 모임이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각 차인들간뿐만 아니라 차인회들간 불화와 반목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같은 현실을 보며 차에 관심이 있는 일반대중들은 “차인들이 왜그래?”라는 눈총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차계의 현실이다. 차의 근본정신을 망각한 불신과 반목이 우리 차문화를 병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같은 현실을 타계하는 것 역시 차인들의 몫이다. 차의 근본정신은 화합과 상생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화합과 상생을 통한 차인들의 결합은 한국 차문화의 발전을 한단계 끌어올리는 중요한 것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차인들은 차를 처음 대할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정신을 통해 이땅에 건강한 차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헌신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차문화에 대한 미래는 매우 밝고 넓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도 긴 역사속에서 향기와 자취를 잃지 않고 우리곁을 지켜온 것이 바로 우리의 차였기 때문이다. <일지암 암주> ■ 연재를 끝내며 차이야기를 쓰는 동안 여러 사람으로 부터 연락을 받았다. 차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써달라는 주문과 격려였다. 사실 그동안 다인들은 차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차에 관심이 있거나 입문을 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차에 대해 더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가까이 할 만한 이야깃거리들을 제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 연재는 그런 점에서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사회에서 차는 이제 하나의 문화로써 자리잡기 시작하고 있다. 앞에서 말했지만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대체농업산업으로써 각 분야에 응용되고 접목되고 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문화적인 가치와 내용을 동반해야 한다. 오늘의 한국차를 이끌었던 선배다인들은 각 분야에 일가를 이룬 분들이었다. 의재 허백련, 효당 최범술, 응송스님, 금당 최규용선생, 창선 한웅빈선생, 명원 김미희, 예용해, 청남 오제봉, 토우 김종희, 청사 안광석선생 등은 차가 한국문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매개체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웠다. 그분들은 차를 알게 하고 차의 효용성과 그 정신성에 주목했다. 우리에게 잃어버린 차의 다리를 놓아준 것이다. 선배다인들이 뿌린 씨앗은 지금 이땅에 발아를 하고 있다. 우리의 삶 이곳 저곳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아직 그같은 확대와 팽창을 담아낼 콘텐츠를 갖고있지 못하다. 차의 묘목, 차의 제다, 차의 문화성, 차의 사상성과 철학성 등 전분야에서 우리는 이제 막 그 씨앗을 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차인들에게 나침반도 지도도 없다. 누군가 앞장을 서서 그같은 지도를 그리고 이끌어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초의스님이 주석하며 잃어버린 한국차에 생명을 불어넣어준 일지암의 암주로서 차에 대한 사명감은 막중하기 이를데 없다. 초의스님은 차를 통해 당시대의 삶과 문화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냈다. 그리고 그속에서 우리차의 생명과 살림살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각인시켜주었다. 그런 점에서 일지암은 우리차 역사의 한복판에서 역사성과 사회성 그리고 창조성을 발휘해야 하는 중요한 매개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막 발아된 씨앗에 무슨 얼굴과 내용이 있겠는가. 아주 조심스럽게 사랑하며 그 씨앗이 잘자라서 아름다운 얼굴이 될 수 있도록 필요한 영양소를 듬뿍듬뿍 주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차에 대한 최소한의 심평기준을 세우기 위해 마련한 대한민국차품평대회, 반도의 끝머리 해남에서 지역차생산공동체인 남천다회와 함께 가꾸는 다원, 그리고 차 잡지에 연재하고 있는 차의 현대사 이야기들, 한발짝 더 나아가 국제규모의 문화대전에 손과 발을 내미는 것은 초의스님과 선배다인들의 다맥과 정신사를 이어가는 초석이 되기 위함이다. 이른 새벽 일지암 유천의 수곽소리에 잠을 깨어 한잔의 맑은 청수를 초의스님 영정에 올리는 다례의식에는 우리차의 정신성과 합리성을 통해 이땅의 다인들뿐만 아니라 중생들의 아픈 삶을 조금이라도 보듬어야 한다는 사명의식이 배어있다. 수없이 들려오는 소리들, 그리고 그속에 들어있는 아픈 생채기들이 이땅의 차인들속에 깊이 배어있다. 그같은 아픔속에서도 한발짝 한발짝 앞으로 나가는 것은 이시대를 살아가는 한사람의 승려로서, 다인으로서 차의 성지 일지암을 지키는 지킴이로서 할 수 있는 작은 소명의식이라고 믿는다. 앞으로 할 수만 있다면 이땅의 중생들 곁으로 차가 다가갈 수 있도록 기꺼운 마음으로 헌신하리라.
  • “보수·진보 北인권논쟁 모두 본질 외면”

    지난해 ‘국경을 세번 건넌 여자’란 자전 에세이로 주목받은 탈북 시인 최진이(46)씨. 그녀는 26일 보수와 진보세력이 벌이는 북한 인권 논쟁에 대해 “답답하기만 하다.”고 털어놨다. 양측 모두 정치적 도그마에 빠져 제대로 북한 문제를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흘전 벨기에 브뤼셀에서 막을 내린 유럽연합(EU)의 북한 인권청문회에서 양측이 장내외에 동시출연한 것과 관련해서도 “문제를 치열하게 제대로 보려는 노력들이 없이 이념·파벌 싸움으로만 몰고 간다.”고 비판했다. 한편에선 거시적 안목없이 무조건 김정일 타도로, 다른 편에선 실제 있는 북한의 인권문제를 아예 외면한다는 것. ●노대통령도 ‘요덕스토리´ 직접 봐야 그녀는 특히 최근 정치범수용소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요덕스토리’를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보고, 수용소 생활을 경험한 탈북자들과 터놓고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강조했다.“노 대통령이 일본의 역사 의식을 제대로 지적하기 위해 야스쿠니를 가보고 싶다고 말했듯 요덕 스토리를 보고 의사 소통 부재에서 오는 이념갈등을 깨뜨리자는 것이죠.” 북한 김형직 사범대 작가반 출신으로 조선작가동맹에서 시를 쓰다 평양 추방령을 받은 뒤 탈북한 최씨는 토론부재, 한(恨)풀이식 댓글 문화를 남한사회의 지나친 이데올로기 대립 원인으로 분석했다. 논쟁을 논쟁으로 보지 않고 상대방에 대한 분노, 인격 모독으로 여기면서 본질을 꿰뚫지 못하고 유치한 감정전으로 치닫는다는 것이다.‘북한알기’도 마찬가지. 최씨는 “학자들도 선민의식으로 무장한 채 자신이 이미 구축해 놓은 틀에서만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고 말했다. 북한사회 ‘386’의 고민을 제대로 들으려 하는 사람들도 없다고 했다. 최씨가 얘기하는 ‘386´은 70년대 후반 80년대 대학을 다닌 북한의 지식인들. 그는 “김정일 정권을 좋다고 얘기하는 북한사람들은 공포감에서, 한편으론 자신의 존재를 부정했을 때 생기는 혼란에 대한 자기 방어 차원에서 얘기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최씨는 “60년대 학번의 경우 세계문학전집도 봤고, 볼쇼이 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도 본 ‘누린 세대’이지만 그 이후 세대는 세상으로부터 갇혔다.”고 말했다. 정권으로부터 세상에 갇히게 되자 진실을 캐기 시작한 게 북한의 ‘386’세대라고 한다. 그는 “최근 386들이 돈벌이에 눈을 뜨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386세대가 북한 변혁의 동력이 될 수 있냐는 주장에 대해선 회의적이었다. 지난 50년 동안 스스로 일어날 줄 모르는 자들로 키워져 고민으로만 그친다는 진단이다. 한 교수의 경우 토속언어 연구를 명목으로 반란의 기미를 감지해 보고자 전국을 돌아다녔으나 전혀 찾을 수 없어 결국 탈북했다고 한다. 최씨는 그러나 남북, 북·중 경제교류 증가로 시장 경제의 기운이 북한사회에 스며들면서 큰 변화가 일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전했다. ●북한에 대한 인식 수박 겉핥기식 남한 사회의 북한 인식이 너무도 겉핥기식이고 각종 색깔로 덧칠돼 있는 게 안타깝다는 최씨.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에 낼 석사논문 ‘식량난 시기 여성 시인들의 여성주제 시쓰기 방식´도 최씨가 남한사회에 보내는 또 하나의 북한 알리기다. 작가동맹시절 염형미란 후배 시인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김수이 교수가 본 ‘자본주의의 매혹’

    김수이 교수가 본 ‘자본주의의 매혹’

    여기 679쪽 분량의 방대한 저서가 있다. 제리 멀러의 ‘자본주의의 매혹’(서찬주·김청환 옮김)이다. 미국 역사협회로부터 도널드 케이건 상을 수상한 이 책은 볼테르에서 하이에크까지 지난 2세기를 풍미한 16명의 사상가들의 자본주의관을 쉽고 치밀하게 망라한 역저이다. 단언하건대, 평생 보관할 묵직한 책을 선호하는 독자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명품’이다. 뿐만이 아니다. 멀러의 최종 관심은 자본주의를 현명하게 제어하고, 인간을 위한 자본주의를 만들 방법을 모색하는 데 있다.“자본주의는 현존하는 질서를 파괴하는 한편 새로운 체계를 창조해내고 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헤겔의 ‘법철학’, 마르크스의 ‘자본론’,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등의 난해한 사상서를 붙들고 곤혹스러워 한 이들에게는 반갑고 흡족한 ‘종합선물세트’가 될 만하다.(고백하건대, 나 자신에게 그러했다) 이 세계적인 책들을 읽고도 요점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던 이들에게 멀러는 깔끔하게 압축된 요약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멀러가 서구의 대표적 지성들을 ‘자본주의’의 팻말 아래 나란히 줄을 세우는 데 몰두하는 것은 아니다. 멀러는 ‘자본주의’의 개념이 선명해지기 전부터 많은 지식인들이 ‘시장’과 ‘인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펼쳐 왔는지를 거시적 안목과 미시적 감식안을 아울러 입체적으로 서술한다. 볼테르, 스미스, 버크, 헤겔, 베버, 지멜, 슘페터, 케인스, 하이에크처럼 시장을 지지한 지식인들과 마르크스, 루카치, 마르쿠제처럼 시장을 경멸한 반자본주의자들을 공정한 시선으로 통찰하는 것은 말할 것이 없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의 매혹’은 이들에 대한 평전이자 자본주의 형성의 역사서이며, 이념을 초월한 현대 서구지성사의 한 전범이 된다. 한마디로 이 책은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해 왔는가를 그린 ‘자본주의의 역사적·도덕적·문화적·정치적 서사’이다. 이 서사는 멀러의 광활한 문제의식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미래를 향해 뻗어나간다. 사실 자본주의는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의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멀러가 제기하는 질문들, 즉 자본주의는 인류에게 좋은 것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시장 가치는 존재하는가, 반(反) 시장 제도는 필요한가 등은 현대의 지성들이 무수한 각론의 장에서 설전을 벌이고 있는 그 문제들의 융합이다. 지적 모험에 가까운 멀러의 ‘자본주의의 서사’는 국가, 가족, 결혼, 공동체, 개인성, 문화적 다원주의 등의 현대의 아이템들을 흥미롭게 포괄한다. 이 책에서 멀러는 시장이 인간과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형해 왔는지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중점을 둔다. 물론 서로 다른 문화와 정체성을 흡수하는 자본주의의 친화력에 경의와 두려움을 동시에 가지면서 말이다. 하지만 멀러의 최종 관심은 자본주의를 현명하게 제어하고, 인간을 위한 자본주의를 만들 방법을 모색하는 데 있다.“자본주의는 현존하는 질서를 파괴하는 한편 새로운 체계를 창조해내고 있다.”는 그의 진단은 미래의 희망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멀러의 결론은 이렇다.“자본주의 시대에는 현세와 내세와의 해묵은 긴장 대신에 새로운 형태의 현세적 긴장들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긴장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현재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향해 가는지에 대한 풍부하고 개념적으로 진지한 안내지도를 제공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매혹에 빠져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안내지도’는 생존과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멀러는 ‘자본주의의 매혹’이라는 ‘은밀한’ 이름으로 그 한 장을 지금 우리에게 아낌없이 건네준다. <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 자전적 소설 ‘보이지 않는 손’ 펴낸 작가 복거일

    자전적 소설 ‘보이지 않는 손’ 펴낸 작가 복거일

    “지식은 내가 평생 추구해온 삶의 본질입니다. 지식인만이 세상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으며, 그것이 지식인의 행복입니다.” ‘자유주의 지식인’을 자처하는 소설가 복거일(60)이 또 한편의 ‘지식인 소설’을 냈다. 김대중 정부를 비판적으로 묘사해 논란이 됐던 ‘목성잠언집’에 이어 4년 만에 발표한 장편 ‘보이지 않는 손’(문학과지성사)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한국 정치·사회현실에 대한 지식인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고 있다. 전·현직 대통령을 실명으로 비판하는 대목이 등장하지만 “정치 소설이 아니라 지식인 소설”이라고 작가는 설명했다. 소설은 초기작 ‘높은 땅 낮은 이야기’(1988)에 등장했던 20대 후반의 포병 장교 현이립을 다시 불러낸다.50대 후반 지식인으로 성장한 그는 영화 제작사가 자신의 소설을 사전 양해도 없이 영화화하자 법정 소송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법과 정의, 개미사회의 집권화, 인간사회의 분권화 등 다양한 학문 영역을 넘나들며 특유의 지적 담론을 펼쳐놓는다. 작가 스스로 인정하듯 이번 작품은 자전소설에 가깝다. 경제연구소 실장을 거쳐 소설가이자 사회평론가로 활동하는 주인공은 실제 그의 이력과 겹친다. 소설의 주요 사건인 영화사와의 소송건(그는 2002년 영화 ‘2009로스트메모리즈’를 상대로 저작권 침해소송을 냈다가 패소했다.)과 현이립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신뢰를 담은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를 집필하는 대목도 닮았다. 작가는 올해 회갑을 맞았다. 서울대 상대를 나와 은행에서 근무하다 마흔 넘어 소설 ‘비명을 찾아서’(1987)로 늦깎이 등단한 그는 “바둑에서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듯 내 인생은 운이 아주 좋았다.”는 말로 소회를 밝혔다. 무명시절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준 평론가 김현 등 문학과지성사 동인들과의 교류를 가장 큰 행운으로 꼽았다.“영어를 공용화하고, 원화를 달러화로 바꾸자는 등 ‘이단적인´ 주장을 숱하게 했음에도 별다른 박해를 받지 않았던 건 그들의 후광”이라며 웃었다.“직장을 그만 둔지 올해로 24년 째인데 글로만 먹고 살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라는 그는 “문학이 예술의 꽃인 시절에 문학을 한 마지막 세대여서 행복했다.”고 회고했다. 젊은 작가들에 대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총 쏘는 솜씨는 훌륭한데 손에 쥔 건 새총”이라고 비유한 그는 “동서양의 위대한 작품은 전부 생존의 절박함을 다루고 있다. 삶은 행복이 아니라 생존인데 요즘 젊은 작가들은 개인의 행복에 너무 치우쳐 있다.”고 비판했다. 글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下放은 산업화과정의 경제적 조치”

    ‘하방(下放)운동’. 책상머리에 붙어있던 당 간부와 지식인들을 농촌으로 내쫓았던 중국 공산당 정책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평가가 있다. 문화혁명·홍위병 이미지와 겹치면서 전체주의 정권의 반지성주의 행패라는 비판과, 그 출발점은 지도층의 윤리를 강조한 중국 전통사상 ‘무일(無逸·통치자는 편안함을 버려야 한다)’에 있었다는 호의적 평가다. 이런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해석과 달리 하방운동은 중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피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경제적 해석이 소개됐다. 성장을 위해 독재는 어쩔 수 없었다는 최근의 박정희시대 평가를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다. 녹색평론 3·4월호는 일본 잡지 젠야(前夜)와 중국 경제개혁학회 부사무국장 원톄쥔(溫鐵軍) 중국인민대 교수간의 대담 ‘세계화의 중국농촌’을 실었다. 대담에서 직접 하방을 겪었던 원 교수는 하방운동을 “성숙한 국가의 공업화 추구로 인한 고난”이라 정의했다. 그렇기에 문화혁명을 고발한다던 70년대 말 중국의 상흔(傷痕)문학가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원 교수는 대신 중국 근현대사의 전면적인 재해석을 내세웠다. 서양은 식민지를 통해 산업화의 고통을 떠넘겼지만, 식민지 없는 사회주의 국가인 데다 소련과의 관계도 신통치 않았던 중국으로서는 내부의 식민지-농촌을 철저히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렇기에 하방이 지식노동과 육체노동간의 차별을 없앤다는 것은 “신문지상에서의 언설 혹은 선전”에 불과했고 모든 하방의 배후에는 경제위기가 있다. 경제위기가 오면 도시민들을 농촌으로 내려보냈다가, 경제가 회복되면 그들을 노동자로 다시 불러올리는 방식이다. 재미있는 점은 원 교수는 그렇기에 농촌의 기업화에 반대한다는 사실이다. 기업이 아닌 농민들의 농촌일 때 스펀지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FTA 대책이랍시고 ‘기업농’ 운운하는 우리 현실에 시사적인 주장이다.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기고] 훈센총리 방한, 韓·캄보디아 관계발전 기대/신현석 駐캄보디아 대사

    지난날 현재의 태국, 말레이반도, 베트남 지역을 아우르는 동남아 대제국을 건설해 600여년간이나 번영했던 앙코르 왕국의 찬란한 영화를 역사의 한 페이지에 간직하고 있는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통치기간(1975년 4월∼1978년 12월) 당시 인구의 약 4분의 1인 170여만명이 무참하게 희생됐다. 희생자들은 지식인과 부유층이 대부분이고,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비극이었다. 캄보디아의 평화는 지난 1991년 10여년의 내전을 벌인 각 정파들이 파리 평화협정에 서명하면서 찾아왔다. 당시 평화협상을 주도적으로 마무리하고 캄보디아의 사회주의를 의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로 과감히 변화시킨 훈센 총리가 20일부터 우리나라를 세번째로 공식 방문한다. ‘킬링필드의 나라’로 인식됐던, 아직도 1인당 연평균 GDP가 350달러에 불과한 캄보디아는 그러나 변화하고 있다. 연간 140만명 이상의 외국인 관광객이 찾아오고, 국제사회의 다양한 지원에 힘입어 사회·경제 발전에 매진하고 있는 ‘모범적인 최빈국’이다. 천혜의 자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태국·베트남에 낀 지정학적 위치로 끊임없이 외침을 받은, 지난 4반세기 내전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어온 캄보디아가 이제 웅비의 용틀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훈센 총리는,1975년 크메르루주의 집권과 더불어 단절된 한국과의 외교관계를 1997년 회복시키는 결단을 내렸으며 그 후 한국을 자국 경제발전의 모델로 삼아 양국관계를 급속도로 발전시켜 왔다. 우리 정부는 경제협력개발기금과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무상원조를 통해 캄보디아의 경제·사회 인프라 건설, 의료·보건부문 개선, 인적 자원 개발 등을 적극 도와왔다. 특히 현재 60여명의 KOICA 봉사단원이 캄보디아 전역에 파견돼 있다. 또 여러 NGO, 종교단체, 지자체 등이 캄보디아를 돕기 위한 다양한 협력활동과 교류사업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실로 자랑스럽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05년에 캄보디아를 방문한 우리 국민이 21만 7000명에 달해 2년 연속 이 나라를 가장 많이 방문한 외국 국민으로 기록됐다. 오는 12월에는 앙코르 와트가 위치한 시엠립에서 ‘2006 앙코르-경주 세계문화 엑스포 행사’가 개최될 예정이다. 내전이 끝난 1991년에 오랜 외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한 캄보디아 기업인은 당시 수도 프놈펜에 승용차가 10대 정도밖에 없었고 수돗물은 정수처리가 되지 않은 강물 그대로의 흙탕물이 나오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15년이 지난 오늘 프놈펜 거리는 수많은 차량과 오토바이로 북적대고 있고 여기저기서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오늘날 캄보디아는 대외적으로 과거 공산권 일부 국가와의 양자외교 중시 정책을 탈피해 동남아국가연합(ASEAN),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등 지역기구와 세계무역기구(WTO)에도 가입하는 등 국제사회로의 편입 노력을 가속하고 있다. 내부적으론 정부 개혁을 통해 경제·사회적 발전과 빈곤 감축을 적극 추진해 가고 있다. 캄보디아 국민은 과거 자기네와 마찬가지로 식민지 지배와 내전을 경험한 한국의 국가발전을 경이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한국의 경제개발 경험과 선진 기술의 전수, 그리고 더 많은 한국기업의 투자와 양국간 교류 증대를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다. 훈센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우리 국민의 캄보디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커짐과 동시에 양국관계 전반이 한 차원 더 높게 진전되기를 기대한다. 신현석 駐캄보디아 대사
  • [열린세상] “한자 공부 좀 해라”/박강문 대진대 통일대학원 초빙교수

    새학기가 시작되고 캠퍼스는 다시 활기를 띠었다. 학부 강의의 첫 시간에 하는 내 고정 메뉴 잔소리가 있다.“한자 공부 좀 해라.”“책을 읽어라.”“담배를 피우지 말아라.” 이 가운데 대학생의 한자 실력에 관해 말해 보자. 강의실을 꽉 채운 학생들에게 종이를 나눠 주고 ‘대한민국’을 한자로 쓰라 하면 두엇 빼고는 ‘큰 대’ 자 하나 써 놓고 더 나아가지 못한다. “읽을 수는 있지만 쓰는 건 어려운데요.” 그럴 수 있다. 한자를 열심히 배운 세대인 나조차도 하도 쓰지 않으니 막상 써 보려면 어떤 자는 가물가물하다.“그럼, 이것 한 번 읽어 볼까요?” ‘천자문’에 나오는, 비교적 쉬운 글귀 ‘知過必改’를 칠판에 써 놓고 읽혀 본다. 이 네 글자를 다 읽는 학생은 아주 드물다. 학자의 길을 걷겠다는 젊은 대학원생의 한자 실력도 그다지 낫지 않다. 은사를 모시는 과 동문회 신년하례식에 가서 봉투에 넣은 회비를 식장 입구 접수 데스크에 앉은 대학원생에게 디밀었다.“저, 선배님, 성함 가운데 글자가….” 그 학생이 ‘康’을 못 읽는다.“음,‘편안 강’,‘강’이지.” 결혼 축의금을 낼 때 접수처에 앉은 젊은이가 옆의 젊은이에게 슬며시 봉투의 이름 글자를 묻는 것을 몇 번 본 뒤로 나는 아예 봉투에 이름을 한자로 쓰지 않는다. 한글 전용, 해야 한다. 이제 글쓰기가 대부분 컴퓨터 등 전자기기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한자를 섞어 쓰는 것은 비능률적이다. 그러나, 한자를 쓰지 않는다고 해서 배우지도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글 전용과 한자 교육은 다른 문제다. 우리말에는 한자어가 많다. 이것들을 꼭 한자로 쓸 필요는 없다. 쓰기에 매우 불편하다. 그렇지만, 한글로 적힌 한자어를 보았을 때 머릿속에 한자가 떠올라야 그 낱말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이것이 중요하다. 한글로 적힌 낱말 뒤에 숨은 한자를 머릿속에 그리지 못하면, 그 낱말을 엉뚱하게 사용하기 쉽다.“국회 재정경제위원회는 7일 외환은행 매각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조사해달라는 고발장을 대검찰청에 접수했다.” 중앙 일간신문의 기자가 쓴 기사의 한 부분이다.‘접수’가 ‘接受’임을 알지 못해서 이런 이상한 글이 된다.‘접수’를 정반대의 뜻으로 쓰고 있는데, 신문에서 늘 보는 오류다.‘자문’(諮問)이라는 말도 한자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정반대의 뜻으로 쓰고 있다. ‘피살’이 ‘被殺’임을 생각하지 않기에 “피살됐다”고 쓰고,‘당선’이 ‘當選’임을 모르기에 “당선됐다”고 쓴다.‘임차’와 ‘임대’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賃借’와 ‘賃貸’임을 모르는 탓이다.‘언론고시’라 할 만큼 심한 경쟁을 거쳐서 뽑히는 신문기자는 최상층의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신문은 국민의 국어 교과서다. 수습기자 시험에서 한자 실력을 보는 신문사가 있는데, 아주 잘하는 것이다. 내가 대학 강단에서 한자 공부를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강의 때 나오는 용어들이 거의 모두 한자어기 때문이다. 신문방송학과 학생이 ‘신문고시’(新聞告示)를 “신문 기자 뽑는 시험”이라고 알고 있다면, 교수는 설명하는데 몇 마디를 더 해야 한다.“언어(言語)는 사고(思考)의 집”이라는 말을 듣는 학생이 ‘事故’를 생각한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는 교수는 그만큼 피곤하다. 학부 강의 때는 시간마다 ‘천자문’이나 ‘명심보감’ 등에서 “施惠莫念 受恩莫忘”(베푼 은혜 기억하지 말고, 입은 은혜 잊지 말라.) 같은, 비교적 쉬운 글자로 된, 교훈적인 글귀를 뽑아 하나씩 가르쳐 주고, 다음 시간에 확인해 본다. 학기말이 되면 고마워들 한다. 그러면,‘천자문에’ 있는 “得能莫忘”(능력을 얻었으면 잊어버리지 말라.)이 내가 하는 당부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서 이미 마쳤어야 할 한자 공부의 짐을 대학까지 끌고 오게 하는 교육은 잘못된 것이다. 박강문 대진대 통일대학원 초빙교수
  • 역사를 통한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김기봉 지음

    역사를 통한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김기봉 지음

    영화 ‘로마의 휴일’의 한 장면이 눈에 선하다. 신분을 넘은 로맨스를 뒤로하고 공주로 돌아와 기자회견장에 선 오드리 헵번.“연방제로 유럽경제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라고 물으니,“유럽의 긴밀한 유대를 이끄는 것이면 찬성합니다.”라고 답한다. 한반도에 포연이 자욱 하고 포성이 귀를 때리던 1953년에 만들어진 영화 속 대사는 1957년 로마에서 결성된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에 바치는 예언적 헌사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용감하다. 일제에 대한 저항과 협력을 기준으로 식민지시대를 산 이들을 애국자와 매국노 둘로 나누는 이분법의 주술에서 놓여나라고 충고한다. 그래야만 이 땅의 사람들도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 동아시아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는 용감하다. 일제에 대한 저항과 협력을 기준으로 식민지시대를 산 이들을 애국자와 매국노 둘로 나누는 이분법의 주술에서 놓여나라고 충고한다. 그래야만 동아시아는 과거의 갈등을 재생산하는 ‘기억의 터’가 아닌 미래의 희망을 위한 “기억의 장”이 될 수 있으며, 이 땅의 사람들도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 동아시아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이다. 아직도 제2차세계대전이 남긴 앙금이 채 가라앉지 않고, 냉전이 남긴 상처도 아물지 않은 동아시아를 사는 이들은 유럽공동체(European Community·1967)를 거쳐 유럽연합(European Union·1993)을 이룬 그들이 너무 부럽다. 하여 탈냉전과 탈근대의 시대를 맞아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는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앞 다투어 백가쟁명의 동아시아 담론을 토해 놓았다. 특히 미국 주도하의 세계질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 지식인들의 뇌리에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는 매혹적인 탈출구로 아로새겨졌다. 문학비평가가 문인들의 작품을 곱씹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 이라면, 역사비평가는 역사가의 역사서술을 되새김질하여 독자의 현명한 역사소비를 중개하는 이다. 이를 자임한 김기봉(경기대 인문학부 사학전공 교수)이 처든 붓끝은 동아시아 담론의 허점을 휘젓는다. 동아시아를 사는 이들에게 동아시아란 실재하는 역사 공간이 아니라 만들어야 할 미래 역사의 기획이므로 역사적 성찰을 뒤로하고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이다. “조선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지식인들과 정치가들은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 목표로 해서 동아시아를 수단으로 이용하려 한 역사를 성찰하지 않으면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공동번영과 평화의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자국 중심으로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상하는 민족주의를 폐기해야 한다.”는 그의 말이 동아시아라는 시공간을 함께하는 이들의 마음을 울리길 바란다. 그는 민족이라는 우물에 갇혀 구시대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국사학자들에게 장기지속(la longue duree)의 구조를 중시하는 아날학파의 방법론과 유럽 통합의 역사 경험을 빌려 공동체가 왜 만들어져야 할 역사의 당위인지를 설득한다. 민족이라는 초역사적 거대담론에 사로잡혀 있으면 동아시아라는 대안적 역사세계에 눈을 뜰 수 없으니 민족이라는 색안경을 어서 벗어던지고 공동체 만들기에 동참하라고 손을 잡아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을 탓하기 전에 국사교과서를 들여다보고 우리 눈 안의 들보를 먼저 없애는 데 힘을 기울이는 게 순리가 아니냐고 묻는다. 동화 백설공주에 나오는 ‘마녀의 거울’처럼 민족의 영광만을 노래하는 국사를 버리고 더불어 사는 평화로운 미래를 이야기하는 동아시아사라는 ‘공동의 거울’을 새로 들여놓으라고 말이다. 역사비평가 김기봉이 꼭꼭 씹어 놓은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를 위한 역사적 성찰의 성과가 담긴 이 책 한번 읽어 보길 권한다. <경희대 교양학부 교수·한국사>
  • KBS 드라마 ‘서울 1945’ 촬영장을 가다

    KBS 드라마 ‘서울 1945’ 촬영장을 가다

    “나는 내 꿈대로 살았으니 후회는 없다. 다시 그 시대가 오더라도 그렇게 살 것이다. 실체 없는 조국이 밥 한술, 누울 자리라도 줬단 말이더냐.” 8일 오후 KBS 수원 드라마센터 스튜디오. 주말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연출 윤창범·유현기, 극본 이한호·정성희)의 촬영이 한창이다. 극중 친일파 문정관 역의 김영철이 할복에 앞서 내뱉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무릎을 꿇고 할복해 쓰러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5분 남짓. 그러나 수차례 촬영에 임하는 그의 눈에서 친일파 인생을 후회하지 않는 의지마저 느껴졌다. 1930년대 광복 전부터 1945년 해방,1950년 한국전쟁 등 현대사를 다루고 있는 이 드라마는 18일 방송되는 21회에서 ‘해방’을 맞이하며 전환기에 접어든다.20회까지 주 무대를 이룬 일제강점기가 마무리되면서 해방공간에서 서로 다른 이념의 주인공들의 격정적인 인생과 사랑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이다. 윤창범 PD는 “당시 좌파 지식인들을 다루게 되지만 이데올로기가 아닌, 그 시대 젊은이들의 생각과 소망을 말하고자 한다.”면서 “해방 이후 순수한 열정과 정의감을 활기차게 그려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촬영현장에서 할복을 택한 문정관은 주인공 문석경(소유진 분)의 아버지로, 일왕으로부터 자작 칭호까지 받은 친일파의 거두. 해방이 되자 사회주의자인 동생 문동기(홍요섭 분)로부터 대국민 사죄를 요구받지만 일본의 패망을 받아들이지 못해 스스로 자결한다. 앞서 이뤄진 해방 신 촬영은 드라마센터 오픈세트에서 대규모 군중 신으로 이뤄졌다. 주인공 김해경(한은정 분)은 태극기를 들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며, 민족주의자 최운혁(류수영 분)은 소련군과 함께 함흥으로 들어온다. 그들을 맞이하며 태극기를 흔드는 군중 속에 오랫동안 아들을 기다려온 부모의 모습이 보인다. 소련군의 함흥 진주장면은 미군보다 먼저 들어온 소련군을 환영하는, 당시 혼란스런 시대상을 보여준다. 제작진이 밝혔듯이 드라마가 해방 이후에 초점을 둔 만큼 주인공들의 앞날에 관심이 쏠린다. 아버지의 자살로 몰락하는 문석경과 그녀가 사랑하는 최운혁, 김해경을 동시에 사랑하는 최운혁과 이동우(김호진 분) 등이 엮어갈 갈등과 사랑이, 시대적 아픔과 함께 어떻게 녹아들 것인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친일파·좌파 등에 대해 자칫 치우쳐 보일 수 있는 설정이 이념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10) 긍정적 사고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10) 긍정적 사고

    우리는 대개 긍정적 사고를 권력과 돈에 아부하는 사고처럼 생각하는 무의식적 관습에 젖어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지식인은 비판적 사고를 해야 하는데, 긍정적 사고는 지식인의 비판적 사고와 한 자리에 동거할 수 없는 현실 맹종적 사고로 여기기 다반사다. 그런 사고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까닭은 우리의 역사적 업이 그렇게 형성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부터 나라가 백성을 제대로 두루두루 아껴 보살핀 적이 거의 없이 경제적·안보적 위기에서 버림받았다는 기억이 그런 무의식적 업을 낳게 하였던 것 같다. 지금도 살아남기 위해 수단방법을 안 가리고 악착같이 무슨 수를 강구하려는 우리의 행태도 나라정치와 지도층의 인격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집단무의식과 깊은 연고를 갖고 있는 것 같다. 긍정적 사고는 아첨하는 사고와 다르다. 긍정적 사고는 모든 창조적 사고와 사기진작의 원동력이다. 쉽게 말하면 긍정적 사고는 자기의 운명 팔자를 수용하는 사고다. 예컨대 자기의 타고난 운명팔자가 나쁘다고 부모나 타인을 탓하고 비난한다고 자기의 운명이 개선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일생을 불운 속에서 헤매다가 임종을 맞을 뿐이다. 나쁜 운명의 여건을 좋은 것으로 바꾸는 사람은 그 운명을 사실로서 수용하고 거기서부터 인생의 설계를 세워 운명의 장애를 극복한다.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과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은 다르다. 수용성과 수동성의 미묘한 차이를 철학적으로 잘 해명한 이가 20세기 프랑스의 저명한 가톨릭 실존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이다. 그는 수용성을 수동성과는 달리 자기 내부정리를 통하여 새로운 미래를 창조할 준비가 된 열린 마음의 자세에 비유했다. 열린 마음은 불운에 임해 마음이 내성적으로 안으로만 접히지 않고, 불운의 사실을 새로운 가능성의 소재로 활용하는 것을 일컫는다. 불운이 자기의 마음을 접히게 하느냐, 아니면 새롭게 열게 하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마음의 활용에 달렸다. 열린 마음은 불운이 자기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불운에서 ‘너는 좋아지리라.’라고 자기의 마음에 희망의 빛을 예견한다. 그런 예견은 불운을 기회로 활용하는 마음의 자세와 직결된다. 받아들임은 이미 주어진 제약의 굴레를 자유의 발판으로 삼기 위한 적극적 사고를 도입하는 자세이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말한 운명애(運命愛=amor fati)가 초인적 창조의 원동력이라고 여긴 것은 창조가 자신의 어려웠던 처지를 오히려 지혜로 되돌리는 마음의 활용과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유신론자 마르셀이나 무신론자 니체가 다 같은 내용을 다르게 진술한 것이겠다. 이처럼 창조적 사고는 긍정적 사고에서 잉태된다. 불운한 운명의 시련은 개인적인 것을 넘어서 한 시공에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운명과 연관될 때에, 그 시공의 정신문화적 주제로서 등록된다. 대체로 정신문화의 필요성은 공동운명의 시련이 생기하였을 때에 일어난다. 그 공동운명의 시련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가난과 질병에 의한 고통이나 전쟁에 의한 죽음이나, 소외나 무상감이나 억압의 부자유나 박탈의 절망감과 같은 것이 실존적으로 비슷하게 느껴지는 경우, 또는 기존의 사상이나 지식으로 새 미래를 헤쳐나갈 자신이 없는 무지의 자각현상이 강렬한 경우에 생긴다. 고통의 느낌이나 무지의 자각은 전혀 다른 두 개의 문제가 아니고, 동일한 문제의 두 측면이다. 왜냐하면 공동운명으로서의 고통의 느낌은 우리 문화가 과거에 스스로 지은 말과 생각과 행동의 습관이 현재완료진행형으로 쌓여 지금까지 작용하고 있는 자승자박의 굴레를 말하고, 무지의 자각은 그 현재완료진행형 상태에 있는 습기(習氣)의 구속을 풀 수 있는 해방의 새 지혜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는 마음이 욕망이라고 앞 글에서 늘 말해왔다. 이번에는 그 마음이 습관이라고 말한다. 욕망과 습관은 같은 뜻을 달리 표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욕망의 기호가 반복되면 습관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정신문화는 사회생활을 하는 마음의 욕망이 어떤 습기를 이룩한 결과다. 정신문화는 공동운명이고, 이것은 또 공동습기를 뜻한다. 공동습기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도 하고, 고통을 주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에 사람들은 심각하게 생각한다. 이것이 정신문화의 문제의식이다. 그런데 긍정적 사고를 말하면서 왜 고통과 무지를 말하나? 바로 이 고통과 무지가 우리의 것이기에 그것을 공동운명으로서 감수하고 수용한다는 것이다. 운명애는 우리 것이니까 무조건 좋다는 감정적 편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감정적 편애는 자기 자식이므로 무조건 감싸는 지각 없는 부모의 편애와 다르지 않다. 운명애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부가 된 우리의 업장(業障)을 사실로서 인정함이다. 공동사실로서의 공동업장을 수용하면서 그 업장의 방해가 동시에 지혜의 원동력으로 변용될 수 없겠는가 하고 깊이 사유한다.12세기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의 시작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땅으로 넘어진 자는 그 땅을 밟고 다시 일어설 수밖에 없다.’는 구절이 운명애의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다. 공동운명의 업장이 우리를 넘어뜨리게 하였다면, 우리가 일어서기 위한 지혜가 다른 곳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현재완료진행형으로 흘러오고 있는 바로 그 공동운명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 긍정적 사고의 의미다. 그런 긍정적 사고에서 우리를 고통과 무지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창조적 사고가 움튼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봐도 자기를 저주하고 학대하는 이에게 우리는 그의 운명팔자가 개선되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기의 공동운명의 역사를 분노에 차서 누구의 탓으로만 돌리는 일도 현명한 지혜의 눈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기 것을 무조건 최상의 것으로 치켜세우는 자존망대의 국수주의적 행각도 우스꽝스럽다. 뱀의 독 속에 그 독을 치유할 수 있는 해독약이 있다고 한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게 이중적이다. 이것이 사실의 존재론적 법칙이다. 공동운명의 업장 속에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는 해독제가 있다는 것이 긍정적 사고의 의미다. 나는 16세기 율곡의 성리학에서 이통기국(理通氣局=理가 비록 보편적이나 특수적인 氣의 상황을 떠나서 실존하는 것이 아님)이란 철학적 언표를 아주 좋아한다. 저 언표 속에서 율곡은 주자학의 보편적 이치라도 조선의 역사적·사회적·자연적 상황을 떠나서 추상적으로 실존할 수 없다는 창조적 사고의 원리를 제창했다고 여긴다. 말하자면 주자학의 조선화를 겨냥한 사유가 거기에 배어있다고 생각된다. 주희도 이 이치를 깨치지 못한 데가 있다고 율곡은 그의 친구 성혼에게 호젓이 고백했다. 나는 율곡의 저 언표가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퐁티의 사상과 매우 닮았다고 여긴다. 이 세상의 어떤 진리도 구체적 살(肉)을 떠난 추상적 본질이 성립하지 않으며, 구체적 날짜와 장소를 여읜 무시공(無時空)의 철학적 사유도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이 메를로-퐁티가 ‘의미와 무의미’에서 남긴 말이다. 그런데 율곡이 저 유명한 ‘이통기국’의 언표를 남기고 그에 알맞은 형이상학과 심성론의 원리를 말하고 정책의 면에서 그 시대의 아픔을 혁파할 수 있는 정책방도를 개진했으나, 불행히도 공동운명의 질곡을 희망으로 치환시키는 길을 언명하지 안았다. 우리가 고통과 무지에서 구체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방도를 탐색하기 위하여, 율곡의 저 명제가 한 번도 진지하게 심층적으로 자기화되는 길을 가져보지 못한 것 같다. 그렇게 해 보지 못한 이유도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운명의 업보가 현재완료진행형으로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거의 예외없이 우리 고통과 무지의 자각으로부터 학문을 창조하지 못한 채 다만 서양의 인문사회과학은 서양의 이론을 소화하지 않고 소개하고, 동양학 내지 한국학은 옛 고전의 생각을 역시 소개하는 정도로 마감해온 것이 아닌가 자성한다. 이 땅의 인문사회과학은 우리의 풍토병과 아픔을 치유하려는 진단처방보다 ‘…에 관한 연구’로서 ‘호모 스펙탄스’(homo spectans=관람자)나 ‘호모 인트로두첸스’(homo introducens=소개자)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닌지? 그래서 대학의 학문과 현실이 따로따로 헛도는 인상을 주었던 것이 아닌가 자성한다. 나는 자기 것으로 숙성된 학문에 의해 세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나라가 어떻게 아류의 신세를 면할 수 있는지 모른다. 율곡이 말한 ‘이통기국’은 결국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같겠다. 실사구시는 긍정적 사고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을 아껴야 한다. 진선진미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현실의 구체적 인간들은 다 잡석(雜石)이다.8회의 글에서 왕양명의 말을 인용했다. 예컨대 거리의 사람들이 5%,20%,75%의 금을 지닌 잡석과 같은 성인이라는 것이다. 순금의 금괴는 추상적이고 가상적인 존재일 뿐, 자연적으로는 실존하지 않는다. 옥석혼효(玉石混淆)라 하지 않던가? 모든 인간은 다 자기의 장기를 타고났다. 이것이 자연의 존재양식이 아닌가? 각자의 특장(特長)을 잘 살려서 신바람나게 공동운명을 좋게 바꿔놓게끔 힘을 실어주어야지, 보석을 보지 않고 잡석만 자꾸 캐내려 하면 누가 그 인민재판 앞에서 버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역설적으로 옛 중국의 전국시대 제나라 정승인 맹상군의 삼천식객(三千食客)과 계명구도(鷄鳴狗盜)를 예사롭게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 계명구도하는 식객이 맹상군을 위기에서 구출해 냈다. 사법재판은 어느 나라에나 다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만인이 만인에게 사법재판 하듯이 옥석을 가린다고 따진다면, 옥석이 다 타버리는 옥석구분(玉石俱焚)의 손실을 우리가 아니고 누가 입을 것인가? 서로 나쁜 점을 헐뜯는 사회보다 서로 좋은 점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사회가 더 좋은 양질의 사회생활을 일구고, 우리를 더 행복스럽게 만들리라. 비밀의 열쇠가 우리 안에 있듯이,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공동운명 안에 깃들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32)선비들의 차 문화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32)선비들의 차 문화

    살랑거리는 바람에 온기가 실려 있다. 지저귀는 새소리에 깨어나는 햇살이 마치 솜털구름처럼 포근하다. 흐르는 물은 굳게 닫혔던 문을 활짝 열어젖히듯 포효하며 콸콸 흐른다. 어디선가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묵은 장작을 켜켜이 쌓아놓은 뒷간인가, 엊그제 하얀 명주수건으로 곱게 닦아놓은 차솥에서인가, 아니면 자우홍련사 작은 연못에서인가, 그렇다. 살아 있는 것들이 환희롭게 깨어나는 소리다. 바람과 햇볕과 물을 어미의 자궁으로 삼아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행복이다. 존재하는 것 역시 기쁨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존재로도 고귀한 것이고 축복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온 우주와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은 소중한 존재다. 자신을 바라보고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사랑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다. 굳었던 대지의 가슴에 불을 놓고 북으로 북으로 향하는 바람처럼, 그 어느 곳 하나 빠트리지 않고 골고루 내리쬐는 햇살처럼 자신을 환희롭게 행복하게 바라봐야 한다. 차의 살림살이 역시 마찬가지다. 간장종지보다 더 작은 찻그릇 속에서 우리는 온 우주를 담아내는 자신의 살림살이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같은 살림살이를 살아온 분들이 바로 한 잔의 차에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의 큰 도를 담아온 선비들이다. 이른바 군자다도이다. 선비다도의 핵심은 바로 수신과 수양의 길이다. 이색의 시 한구절은 그같은 선비다도의 핵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작은 병에 샘물을 길어/깨어진 노구솥에 노아차를 달이네/귓바퀴가 갑자기 밝아지고/코로는 차향을 맡네/별안간 눈에 가린 편견이 없어지니/밖으로 보이는 데는 티끌이 없구나/혀로 맛본 후 목으로 내려가니/살과 뼈가 똑발라 비뚤어짐이 없도다/마음은 한 뙈기 좁은 밭/밝고 깨끗하니 생각에 그릇됨이 없네/어느 겨를에 천하 다스리는 일에 생각이 미치겠는가/군자는 마땅히 집안을 바르게 해야 하리.” 선비들의 차 생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시다. 차를 끓이기 위해 손수 물을 뜨고 귀한 노아차를 달여 먹으며 밝고 깨끗하고 그릇됨이 없는 삶을 생각하는 선비들의 차 문화는 수신과 제가, 치국의 근본을 담아내는 또하나의 문화적 그릇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학을 공부한 선비의 개념은 지식인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알고 출발해야 한다. 유교문화에 대한 정서적인 거부감 속에 깃든 고리타분하고 현상유지적인 것이 아닌, 학식과 인품을 갖춘 지식인을 선비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비는 당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식인 그룹이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에 선비문화가 들어온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로 알려져 있다. 백제·신라도 건국 초기에 선진적인 사상과 문화 중 하나였던 유교를 받아들였다. 그런 점에서 선비문화는 우리 문화의 삶과 철학을 지탱해온 기둥 중 하나였다. 선비들의 차문화가 절정을 이뤘던 때는 고려 300년간 쯤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선비문화의 발판이 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무신란이다. 무신란을 지켜본 선비들은 도성을 떠나 산과 물이 좋은 곳을 찾아 은거하며 차 생활을 즐기게 된다. 무신란은 고려시대 선비 차문화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왕실과 귀족이 중심이 되어 이끌었던 화려한 차문화는 쇠퇴하게 되고 은거에 들어간 선비들을 중심으로한 차문화가 급속하게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변화는 음다 풍속에서부터 시작됐다. 귀한 단차를 갈아 말차를 마시던 음다 풍속에서 만들기 쉬운 잎차를 즐기게 된다. 그에 따라 다구도 변화를 했다. 유차를 담는 고급 찻그릇인 ‘다구’보다 맑은 탕차도 겸해서 담을 수 있는 ‘다완’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지배그룹으로부터의 소외는 물적 토대로부터의 소외로 이어졌고 당시 수입해 공유했던 값비싼 단차를 맛볼 수 없었다. 은거에 들어간 선비들은 우리나라에서 손쉽게 제조하고 구할 수 있는 아차(芽茶) 즉, 잎차를 선호하게 되었던 것이다. 잎차의 선호는 그에 따라 다구의 변화도 함께 가져왔던 것으로 보여진다. 고려시대 차인들은 좋은 찻자리에 초대받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다석(茶席)’‘다연(茶筵)’‘명석(茗席)’‘명연(茗筵)’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찻자리는 초대장을 미리 받아야 했으며 손님의 자격에 따라 앉는 자리도 달라졌다. 당시 찻자리의 손님 자격으로는 ‘청덕과 영명, 즉 명예를 갖춘 사람’이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유교적 규범에 따라 다례에도 철저하게 규범과 절도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 찻자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바로 ‘다담(茶談)’이었다.‘다담’이란 차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로 당시 사상적·철학적·정치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지식 기량과 수양 깊이를 나눠보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런 점에서 당시 찻자리는 자격과 규범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선비다도를 대표한 차인은 이색이다. 성균관 대사성·대제학 등을 지낸 이색은 차를 전문적으로 구해오는 ‘가동(家童)’과, 전다하는 전문 노비가 있었을 정도로 차의 명인이었다. 차의 불꽃을 잘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차를 끓이는 법을 공부하며 연구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색은 ‘다종(茶鐘)’‘화자’(꽃무늬 오지찻잔),‘노아’‘영아’‘다탑’(차마시는 평상)등 차 용어도 만들어 전파시켰다. 이색은 육우의 ‘다경´ 속 시들을 섭렵하며 차 문화 공부도 했다. 이색의 차생활은 당시 고려시대 선비차인들의 보편적인 차생활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좋은 찻자리에 초대받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차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 했으며 그에 따른 지식적 기반도 축적되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선비들의 차생활은 훗날 조선시대를 건국하는 이념적·물적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역사적 아이러니다. 선비들은 차의 청덕(淸德) 정신을 매우 애호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차 나무를 사람을 맑게 하는 청인수(淸人樹)라고 불렀을 뿐만 아니라 헌공하는 차를 청공이라 부를 정도로 차의 청덕을 중요시했다. 차의 청덕은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을 지향했던 선비들의 삶의 문화와 잘 부합되었다. 서거정은 그같은 삶을 실천한 대표적인 선비다인이다. 대사헌을 두번이나 역임하고 육조판서를 두루 지낸후 6대에 걸쳐 임금을 모시며 45년간 공직에 머문 서거정은 지붕에 구멍이 난 초가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선비 다인 중 차끓이는 일과 차 맛내기에 달인으로 불리는 서거정은 70편이 넘는 다시를 남길 정도로 깊은 차생활을 영위했다. 청빈한 공직자의 초상으로 불리는 청백한 삶을 산 서거정은 “비와 바람은 이미 지붕을 뚫었고/시와 글씨는 부질없이 집에 가득하네/조용히 가는 글씨를 쓰고/한가롭게 게 눈차를 끓인다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비와 바람을 피할 수도 없는 구멍뚫린 초가집에 살며 다리 부러진 쇠솥과 금 간 찻잔을 쓰며 청빈한 삶을 산 서거정 모습은 자신의 삶에 충실했을 때 만날 수 있는 최고의 행복과 차생활이 어디에 있음을 일깨운다. 참으로 멋스럽고 멋스러운 삶속에 자신의 삶을 최고로 극대화시킨 차인 서거정의 삶은 아련한 아픔과 경탄스러움을 던져준다. 선비 다인들의 검박한 차살림살이는 ‘다실’에서 볼 수 있다. 작고 소박한 초가집을 지어 그것을 ‘소실’‘소재’‘소려’‘소루’라 부르기도 했으며 기와가 아닌 억새나 짚을 엮어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초당’‘모옥’‘모암’‘초암’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다인인 허균의 ‘누실명’은 이같은 선비들의 차살림살이를 잘 말해준다. 작은 다실에서 청빈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이상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여긴 허균은 “사방은 아홉자 크기의 단칸방으로서, 책을 갖춰두고 차 마시고 향 피우며 지내는데, 남들은 누추하다고 하나 심신은 편안하다. 누추하다고 함은 몸과 이름이 썩어버림을 말하니 군자를 지향하는 내가 사는 방은 누추하지 않다.”고 적고 있다. 허균처럼 대부분의 선비다인들은 차에 그 어떤 부와 명리보다도 더 높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비차 문화의 핵심은 바로 청빈의 덕을 통해 개인과 가족, 국가의 경영을 영위하는 지혜를 쌓는 데 있었다. 자연과 벗삼으며 버림을 통해 세상을 얻는 미학을 터득한 선비들의 차 생활은 진정한 차의 살림살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오늘 우리들에게 잘 일깨우고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다인인 자하 신위는 “많은 여인을 거느리고 밥 먹는 것은 아무리 즐거워도 색·향·미가 뛰어난 차보다 못하다. 좋은 차는 좋은 사람과 같아 자신에게 웃음을 준다.”고 적고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끼니는 굶주림을 겨우 면할 뿐인데. 차를 병처럼 좋아하는 것이 부끄럽다.” 차는 좋은 삶의 양식과 같아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살찌게 한다. 그리고 그런 삶을 부끄럽게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한 혜안을 준다. 차가 우리삶에 있어서 우주처럼 넓고 광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지암 암주 ■ 조선시대 법정의 다례의식 우리 차문화사에 있어서 차례는 단순한 생활양식이 아니라, 철학적 깊이를 지닌 채 발전해왔다. 죄와 법을 다룰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왕과 신하들이, 또한 사헌부에서 사형 등 중형을 지닌 죄인들의 죄를 판결하거나 사면할 때 차를 통해 엄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고려시대에 왕과 신하들은 죄인을 사형시키느냐 아니면 섬에 유배를 보낼 것인가를 결정하기 전 함께 다례의식을 행했다. 그당시 실제로 행했던 다례의를 살펴보자. 다례가 시작되기 전 왕이 내전의 남쪽 행랑에 앉고 신하들이 재배한 후 제자리를 잡는다. 다례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차를 담당하는 다방참상원이 각종 다구들과 차를 보관하는 별채에서 차를 들고 들어온다. 칠품원의 관직을 가진 내시가 뚜껑을 연다. 집례가 전의 앞기둥 밖으로 올라와서 왕과 마주보고 절 한후 차를 권하고 놓은 뒷전 아래로 내려온다. 다음은 문무고관대작들에게 차를 올린다. 원방의 8품 이하 벼슬아치가 다례를 담당한다. 집례가 다시 전에 올라가 엎드려 차를 내어갈 것을 청한다. 붉은 붓과 먹을 든 주대원(임금의 물음에 대답하는 관원)이 들어와 “단필로 참형을 결정하시되 유인도에 들어갈 자를 제외하소서.”라고 아뢴다. 형이 결정된 후 왕과 문무 고관대작들에게 차를 권하고 신하들은 다시 재배를 한다. 다례가 끝난후 신하들은 왕이 술과 과일을 하사한다는 분부를 전달받고 차례로 나간다. 다례의에서 형을 결정하기 전 왕과 신하들은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탁한 말차를 마셨으며, 중형 결정 후에는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는 탕차(湯茶)를 마셨다. 고려시대에는 또 죄를 사면해주는 ‘사면다례’도 행해졌다. 고려 때 왕은 중요한 죄인을 사면할 때 죄를 사면하는 공식 의례를 행했다. 이때 의례에 동참하는 행렬에 행로와 휴대용 화로를 든 군인인 다담군사 4명이 함께한 것을 볼 때 중요한 사면의식 때도 차례는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행해졌던 사헌부의 다시(茶時)도 차를 단순한 행다를 넘어선 문화철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서거정은 ‘사헌부 제좌청중신기´에 “부의 청에서는 두 가지 일을 하였다. 그 하나는 다시이며 또 하나는 제좌이다. 다시란 다례의 뜻을 취한 것이다. 고려와 조선 초기에 대관은 다만 임금에게 간언하는 책임만 맡았고, 관청의 일반적인 일은 다스리지 않아서 하루에 한번 모여 차 마시는 자리를 베풀고 헤어졌다.”고 적고있다. 사헌부 감찰을 엮임했던 정극인도 “대관들이 다 모이지 않아서 임금을 뵐 때가 되지 않았으면 잠시 물러나 있기를 청하여 아뢰고 차를 점다하여 시장기를 메웠다. 그러므로 감찰은 다시라는 두 글자를 들고 들어가서 임금께 아뢰었다.”고 말한 것을 볼때 차를 마시는 일이 지금처럼 단순한 휴식이 아닌, 하나의 업무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태종실록´에서는 각 관청에서 사헌부의 검사를 청할 때 전날 다시에 통보하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에서도 간단한 업무를 처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흠흠심서´에서 “감찰이 다시라는 패를 가지고 앞에서 인도하고 가면 비록 대관을 만나더라도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고 적고있다. 이는 다시가 간단한 업무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시대 초기까지 다시는 모든 관아에서 철저하게 행해졌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서 다시의 본뜻이 상실되어갈 뿐만 아니라 행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우리민족은 매우 신중한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매우 중요한 죄의 결정을 신중하게 하기 위해 차를 마시며 지나온 판결을 되짚는 것은 올바름을 통해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되짚는 신중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차는 올바름을 뜻할 뿐만 아니라 엄정하고 평등한 정신을 내재하고 있다. 우리민족은 차를 단순한 음료의 도구를 벗어나 인간의 근원적인 평등성을 추구하는 삶의 철학으로 승화시켜낸 위대한 족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차는 민족공동체의 건강한 삶을 운용하는 삶의 뿌리로서 각인되고 있다.
  • [국제플러스] 루시디등 “이슬람 전체주의 위험”

    소설 ‘악마의 시’로 유명해진 살만 루시디 등 작가와 지식인 12명이 최근 마호메트 만평 파문과 관련, ‘이슬람 전체주의’의 등장을 경고했다.2일 BBC에 따르면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는 이들은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엡도에’에 성명을 내고 “마호메트 풍자 만화로 촉발된 폭력사태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성명은 “작가와 언론인, 지식인들은 종교적 전체주의에 저항하고 자유와 평등, 세속주의를 위해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 日새역모 회장·부회장 해임

    |도쿄 이춘규특파원|역사왜곡으로 비판받은 후소샤판 교과서를 간행하는 일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지난해 저조한 채택률 여파로 갈등을 겪던 끝에 지도부가 대부분 교체되는 등 심각한 내분사태를 겪고 있다. 1일 새역모와 후소샤교과서 채택 저지운동을 벌인 시민단체 등에 따르면 새역모는 지난달 27일 이사회에서 야기 슈지(43) 회장과 후지오카 노부카스(62) 부회장, 미야자키(56) 사무국장의 해임안을 가결했다. 새역모는 당초 이들이 사임했다고 발표했었다. 하지만 이날 회장 해임안에 대해선 찬성 6, 반대 5, 기권 3명 등 박빙의 표결전이 전개됐다. 이에 앞서 1월17일 이사회에서는 명예회장(니시오 초대회장)이 사임했었다. 야기 회장이 미야자키 사무국장과 함께 지난해 12월 중국을 방문, 현지 지식인 그룹과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토론을 벌였다가 뒤늦게 이러한 사실이 월간지에 보도된 사건이 해임 사태의 빌미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지난해 후소샤판의 채택률이 저조했던 것을 놓고 회장과 일부 부회장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결국 지도부의 해임을 가져왔다는 평이다. 후소샤판 교과서 채택저지 운동의 핵심 다와라 요시후미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21’ 사무국장은 “새역모가 대혼란을 통해 활동이 크게 후퇴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와해될 가능성까지 있다.”고 주장했다. 새역모가 내분을 겪는 것에 대해 다와라 국장은 “지난해 중학교 역사교과서 채택 때 ‘10% 이상은 확실하다.’고 새역모는 주장했었다.”면서 “그러나 참패(실제 채택률 0.39%)한 것에 대해 책임 소재가 추궁되면서 내분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후임 회장에는 가와사키중공업에서 20년간을 근무한 뒤 BMW 도쿄지사장 등을 지낸 다네가지마 오사무(71)씨가 선출됐다. 그는 역사·교육전문가는 아니고, 초대 니시오 전 회장과 가까운 사이다. 따라서 그의 회장 선출에 대해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여전하다. 부회장, 사무국장은 공석이다.taein@seoul.co.kr
  • 해병대 ‘장병기본권 전문상담관’ 최상용 씨

    해병대 ‘장병기본권 전문상담관’ 최상용 씨

    ‘일선 군부대 장병들과 함께 생활하는 민간인 보신 적 있나요?’ 해병대 병사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최상용(50)씨의 공식직함은 ‘장병기본권 전문상담관’이다. 이 직함이 생긴 것은 지난해 전방 전초기지(GP) 총기사건 이후. 병영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민간 전문상담가가 필요했다. ●육군 7명, 해병대 2명 시범 운영 국방부는 지난해 7월 전문상담관 9명을 공개선발해 육군에 7명, 해병대에 2명을 배치했다. 최씨는 요즘 서해안 최북단인 말도, 주문도, 볼음도, 서검도, 교동도에서 경계근무에 나서고 있는 청룡부대 병사들과 매일 만난다. 최씨는 24일 전문상담관의 역할에 대해 “병사들의 고민이나 갈등 등 부대생활에서 힘든 고충을 덜어줘 보다 즐거운 병영생활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임무”라고 소개했다. 그는 “처음엔 병사들이 어색해 하며 경계했지만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지금은 큰형이나 아버지처럼 생각하며 고민을 털어 놓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 불화 끝에 부모가 모두 자살한 것을 놓고 고민하는 병사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힘들었던 상담사례도 들려줬다. “갑작스러운 부모의 사망소식에 괴로워하는 병사의 마음을 잡아주기 위해 상담을 하는 과정에서 힘들게 살아온 병사의 이야기를 듣고 감정이 북받쳐 서로 부둥켜 안고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면서 “이 병사가 제대한 후에도 가족의 일원으로 후원자가 되기로 약속까지 한 상태”라고 했다. 그는 부대에 적응하지 못해 자살을 기도하려던 초임병의 마음을 간파하고 설득끝에 정상적인 병영생활을 하도록 도와준 일을 얘기하며 뿌듯해 했다. 최씨가 상담관으로 뽑힌 것은 군 경력과 사회에서 심리상담가로 활동한 이력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1977년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여 20여년 간 군 생활을 하다 1997년 소령으로 예편했다. 현역시절 고려대와 대학원에서 위탁교육으로 교육심리학을 전공했다. 예편 후엔 해병대 정신을 접목시킨 ‘불가사리 교육’을 창안, 청소년과 회사원들의 정신무장을 강화하는 전문강사로 활동했다. 이런 공로로 정부로부터는 ‘신지식인’에 선발되기도 했다. ●“병영은 심신수련의 도장 돼야” 최씨는 “군대라고 하면 예전엔 무작정 복종을 요구했지만 지금은 가정이나 학교처럼 인성교육의 장으로 바뀌고 있다.”고 달라진 병영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병영생활은 인생관과 국가관을 심어줄 수 있는 심신수련의 도장이 돼야 한다.”면서 “병사들의 입장에서 고민하고 멋진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정감 있는 상담관이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한편 국방부는 전문상담관제를 시범운영한 뒤 반응이 좋으면 전군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강화 유진상기자 jsr@seoul.co.kr
  • [데스크시각] 아이들이 읽을 교과서/황성기 문화부장

    고3 무렵이었다. 소설가가 되리라 작정했던 기자에게 고3이 주는 압박은 상당했다. 소설 공부도 제대로 안 되고, 그렇다고 학교 공부도 제대로 안 하던 기자는 사숙(私塾)하던 소설가 이청준 선생에게 편지를 냈다. 석 장쯤 되는 편지의 요지는 “세상경험도 모자라는 제가 어떻게 하면 소설을 잘 쓸 수 있을까요.”였다. 답신을 기대하지 않고, 한심한 꼬락서니를 한탄하듯 보낸 한 꼬맹이 독자의 그 편지에 선생은 파란색 잉크가 선명한 달필로 무려 다섯 장이나 답장을 보내주었다. 이메일 같은 간편한 통신수단이 있을 리 만무했던 그 당시 한국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던 소설가가 손수 쓴 편지를 받아쥔 감격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개봉한 편지에 담긴 선생의 가르침은 기대를 채우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했다. 답장을 요약하면 이렇다.“학생, 대학입학이라는 큰 일을 앞두고 있으니 잔말 말고 (학교)공부에 몰두하시오.” 사실을 말하자면 선생이 호된 채찍질을 해주길 바랐다. 책도 많이 읽고, 넓은 세상도 구경하고, 소설에 푹 빠져 지내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기자는 여느 부모의 그것과 다름없는 선생의 가르침에 다소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선생은 대학에 들어가면 다양한 세계가 열릴 터이니, 그때부터 온갖 경험을 해도 늦지 않다, 지금은 진학하는 데 집중할 때이며 소설은 그때 열심히 해도 될 것 같다며 낙담할지 모를 기자의 등도 두드려 주었다. 선생의 편지를 받고선 소설이 짓누른 강박에선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지만, 바라던 국문과에 들어가 선생의 가르침대로 소설 공부에 매달릴 수 있었다. 소설가의 꿈을 이루지도 못하고 ‘기자 나부랭이’가 되어있는 지금,26년이나 지난 옛이야기를 지루하게 늘어놓는 것은 길을 잡아줄 선생 같은 존재가 새삼 그리워서이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얼마전 한 강연회에서 “지금 우리 사회에는 어른들이 없다. 지식인도 있고, 과학자도 있고, 정치가도 있지만, 어른은 사라진 지 오래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그 강연의 말미에 “좌우를 조정시키는 키잡이가 없으면 배가 극단으로 치닫는다. 이것이 바로 어른들이 할 일이다. 균형을 잡는 키잡이가 없으면 배가 난파된다.”고 했다. 가족이건 국가이건 길을 잡아주는 키잡이의 실종은 불행이다. 이념도 좋지만 사회가 극단으로 갈려 언제 맞붙을지 모르는 대치는 바람직하지 않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넘어선다는 취지로 이달 초 발간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둘러싼 논란만 해도 그렇다. 어느 한쪽을 편드는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인식의 지평이 열리는 일은 나쁘지 않다.“내가 옳다.”는 주장은 할 수 있어도 상대를 제압하려는 “우리 것만이 진리다.”라는 양쪽 필진들의 다툼은 곧 지금의 짜증스러운 정치 공간을 연상케 할 뿐이다. 보수진영, 특히 뉴라이트로 지칭되는 이들이 지난해 ‘교과서 포럼’을 결성해 친북좌파사관의 색깔이 짙은 기존 역사, 경제 교과서를 손보겠다고 나섰다. 재계까지 반기업 정서가 강한 교과서 수정에 어떻게든 관여하려 들자 이번에는 진보진영이 깃발을 들었다. 지난달 20여개 진보쪽 학술단체로 구성된 학술단체협의회가 대안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결의한 것이다. 국정교과서가 폐지되고 검정교과서로 대체되는 2010년에는 어느 학교에서는 보수진영의 교과서, 어느 학교에서는 진보진영의 교과서로 공부하는 광경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것만은 막고 싶다. 친북좌파사관이건, 친미우파사관이건 이런 논쟁은 학계에서면 충분하다. 19세기 이론으로,20세기 교실에서 21세기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지금의 교과서로는 안 된다는 인식을 보수나 진보나 공유하고 있다. 어차피 새 교과서가 필요하다면 다양한 시각을 담아내는 균형이 요구된다. 이들을 조정하고 한쪽으로 쏠릴지 모르는 우리의 아들딸들이 난파하지 않도록 해주는 키잡이의 존재가 필요한 때인 듯싶다. 황성기 문화부장 marry04@seoul.co.kr
  • 평론가 유종호교수 헌정 비평집

    전후 문학평론가 1세대인 유종호(71) 연세대 특임교수가 23일 오후 3시 교내 알렌관에서 퇴임기념 강연회를 끝으로 강단을 떠났다.충주 사범학교에서 시작된 그의 교육자 이력은 공주사범대, 인하대, 이화여대 등을 거치며 무려 47년을 이어왔다. 퇴임에 맞춰 원로 평론가의 비평 궤적을 정리한 책 ‘유종호 깊이 읽기’(민음사)가 나왔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정과리 연세대 교수 등 23인의 필자가 참여했고, 기존에 발표됐던 평론들과 새로 쓴 에세이들을 함께 묶었다. 1957년 ‘문학예술’에 평론 ‘불모의 도식’‘언어의 유곡’을 발표한 그는 ‘문학과 현실’‘시란 무엇인가’등 숱한 평론집과 더불어 체험 산문집 ‘나의 해방전후 1940∼1949’, 시집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 등을 내기도 했다. 그는 어떤 작품, 어떤 평론이든 문체의 아름다움과 토착어의 능숙한 사용을 무엇보다 중요시한 평론가로 유명하다.“인문주의의 의상을 입고 있는 지식인이 아니라 토착적이고 육화된 인문주의자”(이광호 서울예대 교수)이며,“세상의 혼란과 불공정을 교정하기 위한 최선의 행동을 끈기있게 실행하는 조용한 실천가”(정과리)다. 책에는 유 교수와 후배 평론가들의 대담, 유 교수의 저서에 대한 서평들과 더불어 시인 신경림, 김광규, 소설가 이청준, 이문열 등이 쓴 회고담이 실려있다.2만 2000원.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코드로 읽는책] 중국 사상의 이단아 ‘이탁오’ 재조명

    “따라 짖는 한 마리 개는 되지 않겠다.”며 유교의 전제에 맞서 사상의 절대자유를 주장한 중국 명대의 지식인 이탁오(1527∼1602, 본명 이지). 그는 그 도저한 자유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시대와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2000여년 동안 만세의 사표요 지극히 성스러운 스승으로 추앙받던 공자를 정면으로 비판,16세기 ‘공자의 천하’ 중국을 뒤흔든 것이 그 한 예다.열 두 살 때 이미 공자를 비웃는 ‘노농노포론(老農老圃論)’이란 글을 써 지성의 싹을 보여준 그는 50대 중반엔 “배고픈 사람에게 좋고 나쁜 음식을 가릴 여유가 없듯, 도를 배우는 데도 공자와 석가, 노자를 구분할 여가가 없다.”고 선언하는 ‘경계 없는’ 사상가의 경지에 이른다. 마음과 수양을 중시하는 양명학자들 중에서도 과격한 편에 속해 양명좌파로 분류되지만 그는 사실 유학과 양명학, 불학을 넘나들며 어디에도 정주하지 않은 야생적 사고의 소유자였다. ‘이탁오’(신용철 지음, 지식산업사 펴냄)는 중국 사상사의 이단아 이탁오의 파란만장한 삶과 철학의 자취를 살핀 평전이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이탁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경희대 명예교수)가 평생 천착해온 이탁오 사상의 결정판이다. 그동안 ‘분서’(한길사),‘이탁오 평전’(돌베개)등 이탁오에 관한 번역서는 몇 권 나왔지만 그의 삶과 사상을 국내 학자가 본격적으로 조명한 연구서가 출간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중국 중세사회의 어둠을 뚫고 근대의 여명을 밝힌 시대의 횃불. 이탁오는 만세불변의 진리로 통하던 거대한 유교의 허위의식을 깨뜨리고 여성의 해방을 부르짖는 등 과감한 주장을 펼치다 체포돼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로부터 300여년이 지난 20세기 초 그는 중국의 5·4신문화운동 당시 ‘타공가점(打孔家店, 공자의 상점을 타도하자)’을 외친 오우 등에 의해 비로소 재조명되기 시작한다.자신의 책을 분서(焚書), 곧 태워버려야 할 책이라고 이름지을 만큼 도도했던 이탁오는 현대 중국에선 ‘비판의 성인’으로 추앙받으며 ‘중국 최초의 근대인’이란 평가를 얻고 있다. 책은 그동안 학계에서 논란이 돼온 이탁오와 동시대 인물인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의 사상적 만남 가능성도 짚고 넘어가 눈길을 끈다. 이탁오가 양명학 좌파인 것처럼 허균은 이퇴계 등 조선 정통유학의 좌파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국학자 고 이가원 교수는 허균을 아예 ‘한국의 이탁오’라고 부른다. 저자 또한 ‘홍길동전’이 사회부조리와 여성차별 문제를 다룬 것은 이탁오로부터의 사상적 세례와 무관치 않다는 견해를 밝힌다.국내 학계에서 이탁오가 ‘미치광이’나 ‘정신분열자’ 쯤으로 치부되던 30여년 전 일찍이 그의 사상에 주목한 저자의 이 책은 무엇보다 한국인의 처지에서 이탁오를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2만원.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儒林(541)-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1)

    儒林(541)-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1)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1) 서림사(西林寺)는 여산(廬山)에 있던 사찰로 한때 주자가 머물면서 학문에 정진하던 곳. 따라서 시 속에 나오는 ‘주자를 스승으로 삼아 도를 배우러 암자(禪林)에 들렀다.’는 내용은 퇴계 자신도 스승 주자의 도를 배우기 위해서 불교의 선림에 들었음을 암시하고 있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주자는 어째서 불교적 사찰에 머물면서 자신의 도를 이루었음일까. 실제로 퇴계가 스승으로 삼고자 하였던 주자는 한때 불교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연보에 의하면 ‘처음 선생(주자)이 배울 때 일정한 스승이 없이 경전에 드나들었고, 노자와 석가를 두루 넘나든 것도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주자 자신도 직접 ‘내 나이 15,16세 때 일찍이 선에 마음을 두었었다.’고 고백하고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주자가 살았던 송대에는 불교의 교의는 모두 쇠퇴하고 오직 선종만이 성행하고 있었다. 반야(般若), 유식(唯識) 같은 인도의 교의와 천태(天台), 화엄(華嚴) 등 중국불교의 교의는 모두 쇠퇴하고 중국인의 사유방식에 맞게 중국화된 선종만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시기였으므로 높은 벼슬아치와 모든 지식인들 중 선학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따라서 연보에 기록된 대로 뚜렷한 스승이 없었던 주자도 한때 선에 마음을 두어 불교에 정진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주자는 15세의 어린나이 때부터 선학에 심취하여 그 도리를 강구하였으며, 선학에 대한 이해와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이 비상하였다. 이러한 주자의 선에 대한 이해수준은 당대 최고의 선걸이었던 도겸(道謙)으로부터 선문답을 주고받은 후 다음과 같은 인증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주자의 선은 소소명명(昭昭明明)하다.” 소소명명. 모든 것이 밝게 드러나 한치의 의혹도 없이 명백함을 나타내는 말. 당대 최고의 선사였던 도겸으로부터 ‘소소명명’하다고 인증을 받았다면 이미 주자의 깨달음의 경지는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뿐인가. 주자는 도겸의 의견으로 유학의 교리를 불교적으로 풀이함으로써 과거시험에까지 합격하는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때 주자의 나이는 19세.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청년시절 주자는 가히 선의 천재였다는 점인 것이다. 주자의 선학에 대한 탐구는 주자의 나이 24세 때 이연평(李延平:1088∼1158)을 만나 가르침을 받을 때까지 거의 10년을 넘게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이연평을 만나게 된 이후로 주자의 학문의 방향은 불교적 선학에서부터 유학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주자의 사상형성 과정에서 이연평과의 만남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연평의 가르침을 통하여 젊은 시절 불교를 넘나들던 사상적 방향에 종지부를 찍고 유학에 관한 연구로 자신의 학문방향을 설정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연평은 주자에 있어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준 참스승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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