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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연섬유 전문 쇼핑몰 등장

    감촉이 깔깔하고 통풍이 잘돼 여름철에 알맞은 전통 옷감인 모시와 삼베. 손질하기 까다로운 것도 그렇지만 비싼 가격 때문에 일반인들이 엄두 내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화공약품으로 물을 들인 제품인 경우 예민한 피부에 좋지 않고 색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불만을 사왔다. 일반 취급점에서는 폭리에 울고, 또 전문적인 공방에서는 높은 가격에 울어야 했던 이들이라면 천연섬유 전문 쇼핑몰의 등장에 반색할 만하다.‘그린GS(www.gold1000.co.kr)’는 화학재료가 아닌 천연재료로 물을 들인 모시, 삼베, 명주 등 전통 섬유를 판매한다. 김동일 대표는 “천연 염색 제품은 가격이 비싸 작품 활동을 하는 디자이너들이나 소수 계층만 접근할 수 있었다.”면서 “하지만 여기에서 취급하는 제품들은 품질은 높으면서 시중가보다 30∼40% 정도 저렴한 게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김 대표에 따르면 시중에서 화공약품으로 염색한 모시로 저고리·치마 한 벌 해 입으려면 최소 60만∼70만원이 든다. 하지만 쇼핑몰에서 다루는 옷감의 가격은 1야드당 1만 3000∼1만 6000원. 모시로 한 벌 맞출 경우 17야드 정도의 천이 필요하니 원단 값은 22만원이다. 공임은 보통 8만∼15만원. 합쳐 봐야 시중가의 절반으로 전통 모시 옷을 입을 수 있다. 고객이 원하면 맞춤집까지 연결해 준다. 가격이 저렴한 이유는 중국에서 천을 들여와 염색 작업만 국내에서 하기 때문이다. 보통 ‘중국산’ 하면 선입견이 있는 것이 사실. 김 대표는 “중국에서 베틀을 이용한 전통 방식으로 직접 짰기 때문에 기계로 만들어 낸 것과 비교가 안 된다.”고 자신한다. 염색은 전라남도 벌교에서 천연염색으로 신지식인에 선정된 장인이 맡았다. 소나무, 대나무, 향나무, 은행나무 껍질, 버섯구름 등 자연의 색을 입은 옷감들은 은은하고 고운 자태로 전통 옷감에 도전하고 싶은 욕구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02)577-3375.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임지현·콘라트·워커 교수 발제 요지

    27일부터 29일까지 한양대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대회는 대중독재 연구팀의 6년 연구를 총정리하는 성격을 띤다.‘대중독재-사라지지 않는 과거’란 제목으로 9개국에서 29명의 학자가 참가한다. 임지현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맡은 기조발제(‘희생자의식 민족주의와 대중독재의 기억’)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 주목한다. 여기엔 두 개의 축이 등장한다.한국-이스라엘-폴란드로 이어지는 라인과 독일-일본으로 대표되는 라인이다. 임 교수는 두 축의 공통분모를 ‘희생자의식’으로 파악한다. 전자는 식민지와 독재, 침략과 학살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후자는 2차대전 패전국이란 점에서 희생자의식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전혀 다른 경험을 지닌 양자가 자신을 모두 희생자로 규정함으로써 피해와 가해가 서로 공모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지적이다.임 교수의 주장은 한국의 희생자의식이 박정희 독재를 선악 이분법으로 재단한 나머지 독재의 실상을 왜곡하고 있다는 대중독재론적 전제를 강하게 깔고 있다. 제바스찬 콘라트 이탈리아 유럽대학연구소 교수가 발표하는 ‘문화의 곤경-전후 독일과 일본의 전쟁, 독재 그리고 모더니티’도 임 교수와 유사한 논지를 전개한다. 전후 독일과 일본의 전쟁 및 독재 기억 방식이 미국의 점령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밝힌다. 바버라 워커 미국 네바다대 교수는 1960∼70년대 소련 인권운동가들의 정치범 구호활동 배경을 죄의식에서 찾는다(‘스탈린주의에 대한 반소비에트적 기억들-죄와 속죄에 대한 열망’). 소비에트 체제에 반감을 품으면서도 체제에 가담해 혜택을 누렸던 인권운동가들이 죄의식을 상쇄하려 구호활동에 헌신하게 됐다는 것이다. 연구소는 워커 교수의 분석이 박정희 시대 한국 엘리트 지식인의 모순된 내면세계를 이해하는 데 의미있는 시사점을 제공할 것으로 보고 있다.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실험노트 제출 논란’ 우희종 “표적 느낌 들어”

    ‘실험노트 제출 논란’ 우희종 “표적 느낌 들어”

    우희종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가 한나라당 손숙미 의원의 광우병 연구 실험노트 제출 요구와 관련,“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있느냐는 식의 표적이란 느낌이 든다.”고 말하며 외압 논란을 제기했다. 우 교수는 23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손 의원의 실험노트 제출 요구가 광우병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드러낸 것에 대한 탄압으로 느껴지는가.’라는 질문에 이같이 답하고 “필요하다면 당연히 (실험노트를)제출해야 되지만 (손 의원이)내 연구서를 인터넷에 올리고 모든 과학자들에게 검토 의견을 보내달라고 할 것이라던데,이것은 (연구 결과를)공개 석상에 올려놓고 모든 사람이 비판하라는 식”이라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손 의원이 실험노트를 제출하라고 한 이유로 우 교수의 ‘광우병 생체조기진단기법개발’ 연구가 연구 목적에 부합한 결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 그는 “손 의원측 보도자료 마지막 부분에 내가 제출한 연구 내용은 연구 목적에 부합된다는 식약청 주관 부서의 검토 의견이 들어있다.”며 “식약청이 손 의원의 문제 제기에 근거가 없음을 이미 밝히고 있는데도 일방적인 내용을 주장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손 의원이 착각한듯 하다.”고 반박했다. 우 교수는 “실험노트는 어떤 허위나 조작이 있을 때 조사위원회에서 요구하는 것이지,이렇게 전후 사정도 없이 요구하는 것은 절대로 이해 못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교수 출신 의원이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며 “30년 동안 대학에 있었지만 이런 사례는 국내·외적으로 듣도 보도 못했다.”며 불만을 터트렸다. 하지만 우교수는 “정당한 근거와 필요한 절차에 따라 요청이 오면 (실험노트 제출 요구를)받아들일 의사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손 의원 외에도 “(광우병 위험에 대한 문제 제기를)그만 좀 하라.”는 식의 압박을 받는 일이 있느냐는 질문에 “직·간접적으로 나를 염려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손 의원이 이렇게까지 하는 것도 그런 맥락 속에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든다.”고 답했다. 한편 손 의원측은 우 교수 등 서울대 소장 교수들이 제기하고 있는 ‘지식인 탄압’ 논란에 대해 “우 교수가 정책적 접근을 정치적 접근으로 매도하고 있다.”며 “관련법에 의해 발주처인 식약청이 실험노트 및 일체의 관련 자료를 요구하면 반드시 제출하도록 규정돼 있다.우 교수 실험노트만이 국가 1급 비밀인가.”라고 반박했다. 인터넷서울신문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25) 길 떠나는 상단(商團)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25) 길 떠나는 상단(商團)

    김홍도의 작품 ‘길 떠나는 상단(商團)’이다. 먼저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복색을 보자. 차림새를 보아하니, 모두 양반은 아니다.9명의 사내가 등장하는데, 맨 오른 쪽의 사내만 대우가 작은 갓을 썼을 뿐, 나머지 8명 중 두 사람은 방갓을 썼고, 두 사람은 건을 썼다. 네 사람은 맨머리다. 맨머리의 사내는 상투가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오른 쪽 부분의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맨머리의 총각은 어린 기색이 완연하다. 행색으로 보아 이들은 양반이 아니다. 맨 오른쪽 갓을 쓴 사람도 나이가 들었다 뿐이지 짧은 곰방대를 가진 품이나, 복색이 도포가 아닌 점으로 미루어 보나 양반은 분명 아니다. ●말·소 등에는 모두 ‘길마´가 얹혀 있어 이 그림의 원래 제목은 ‘장터길’이다. 내가 정한 것이 아니고, 그렇게 전해져 온 것이다. 단원이 원래 취한 제재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모른다. 하지만 장터와 상관이 없는 것은 물론 아닐 터이다. 이들은 한 패거리이거나 아니면 두 세 패거리로 짐작이 된다. 먼저 오른쪽의 네 사람을 보자. 네 사람이 네 필의 말을 타고 있다. 중간의 머리를 천으로 싸맨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곰방대를 물고 있다. 갓을 쓴 사내는 한창 곰방대를 손으로 누르는 참이다. 담뱃불을 세게 댕기려 압력을 가하고 있는 참이다. 아래의 더벅머리 총각은 이제 막 담배를 배우는 것인지 얌전하게 담배를 빨고 있다. 그 왼쪽의 돌아보는 자세의 사내는 담뱃불을 댕기려고 부싯돌을 치고 있다. 이 네 사람이 한 패로 보인다. 왼쪽의 세 사람은 세 필의 말을 타고 한 필은 끌고 간다. 상호간 거리가 좁은 것으로 보아 이들 역시 한 패로 보인다. 그리고 왼쪽 위의 언덕 건너편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더벅머리 총각으로 말을 타고 있고, 뒤를 따르는 사내는 걸어서 소를 몰고 가고 있다. 이들이 모두 한 패인지, 아니면 세 패인지는 단원이 다시 살아나거나 그림 속의 누가 그림 밖으로 나오기 전에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들이 같은 목적으로 같은 길을 가고 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무엇으로 아느냐고? 이 그림에는 말이 9마리, 소가 1마리 등장한다. 그런데 유심히 보면, 맨 오른쪽 갓 쓴 사내가 타고 있는 말만 제외하면, 나머지 말과 소의 등에는 모두 길마가 얹혀 있다.(길마 아래 얹은 것이 언치다). 길마는 안장이 아니다. 안장이란 사람이 말에 올라탔을 때 쾌적함을 누리기 위해 만든 장치다. 한데 위에 등장하는 것은 원래 말에 얹는 안장이 아니라, 주로 소 등에 얹는 길마다. 길마의 용도는 물건을 나르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위의 말들은 사람이 타는 승용마가 아니라, 물건을 나르기 위한 말인 것이다. 더욱이 승용의 말은 오직 양반만이 타는 것이었다. 따라서 위에 등장하는 양반 아닌 상것들이 말을 타고 다닐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인가. 맨 왼쪽의 더벅머리 총각을 보자. 오른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채찍이다. 채찍은 말을 몰고 가는 데 쓰이는 것이다. 이 총각은 원래 말을 몰고 가는 사람이다. 사람이 타는 승용마의 경우 양반네를 태우고 앞에서 말을 끌고 간다. 이 경우 그는 말구종이 된다. 말구종은 한자로 쓰면 견마부(牽馬夫)가 되고 ‘견마’가 입에 익으면 ‘경마’가 된다.‘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속담은 사실 말을 타면, 말을 끌고 가는 견마잡이를 두고 싶다는 말이다. 그림의 견마잡이는 물건을 싣지 않은 말을 타고 가는 참인 것이다. 또 그림 중간의 사람을 태우지 않은 말을 끌고 가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하나 같이 승용마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짐을 싣기 위한 빈 말을 타고 가는 중이다. 즉 어딘가로 짐을 싣기 위해 가고 있는 것이며, 아직 짐을 싣기 전이기 때문에 길마를 얹은 빈 말을 임시로 타고 있는 것이다. 이 길마를 얹은 8마리의 말과 한 마리의 소가 짐을 싣기 위한 운반용이라는 것은, 담배에 불을 댕기려고 부시를 치는 사내가 앉은 길마에 밧줄이 묶여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이 밧줄은 길마에 짐을 싣고 동여매기 위한 것이다. ●더벅머리 총각들은 견마부로 보여 등장인물 9명 중 더벅머리 어린 총각이 4명이다. 총각들은 모두 견마부로 보이고, 나머지 다섯 사람은 어른이다. 어른들 중 맨 오른쪽의 갓을 쓴 사내가 아마도 이 패의 우두머리로 보인다. 갓을 차려 쓴 것이라든지 또 이 사내만은 길마 위에 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고려하건대(사내가 타고 있는 것은 길마가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안장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안장이라면 앞에 손으로 잡을 수 있는 튀어나온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 단지 언치를 얹고 그 위에 앉기 편한 무엇, 예컨대 덕석 같은 것을 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이 패거리 중에서는 제법 행세를 하는 사람인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시장을 오가는 상인일 것이며, 이 사내는 상단(商團)의 행수가 아닐까 한다. 따라서 장터길이라는 제목도 썩 불합한 것은 아니다. 물론 상단이 아니라, 어떤 시골 사람들이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사려고 시장에 가는 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조선후기에 말이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상기한다면,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평범한 시골 농민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상단을 그린 그림은 이형록(1808∼?)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눈길을 걷는 상단’도 있다. 소를 앞세우고, 말에 짐을 지우고, 아니면 어깨에 지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 이 역시 상단을 그린 귀중한 그림이다. 조선이란 나라는 유교가 국가의 이데올로기다. 유교는 상업을 원래 가장 낮은 직업으로 본다. 사·농·공·상! 즉 지식인, 농민, 수공업자, 상인의 순서다.‘맹자-등문공’에 농가(農家)인 허자(許子)의 제자 진상(陳相)과 맹자의 논변이 나온다. 진상이 전하는 허자의 논리는 이렇다. 유가들은 왜 노동을 하지 않고 정치를 한다고 들면서 호의호식하는가. 이것이 허자의 문제 제기다. 이 말에 맹자는 허자가 농사를 지을 때 사용하는 쇠쟁기는 허자가 직접 만든 것인가, 허자가 쓰는 그릇은 허자가 직접 만든 것인가. 이에 진상은 이렇게 답한다. 아니다. 허자가 생산한 곡식과 바꾼 것이다. 그렇다. 허자는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생산할 수 없다. 이 사회에는 사람마다 각각 역할이 있다. 곧 지금으로 말하자면 사회적 분업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자신의 역할을 정치라고 말하고, 허자가 대장장이 일을 농사짓는 일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 정치 역시 다른 일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허자는 맹자의 사회적 분업을 말하는 논리에 패배하고 만다. 맹자의 논리가 맞는 것이라면, 상업이야말로 교환을 가능케 하는 가장 기초적인 수단이 아닌가. 하지만 맹자는 ‘공손추’에서 지역에 따른 가격차를 이용하여 이익을 보는 상인을 통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맹자의 눈에는 상인의 활동이야말로 구체적 생산물을 생산하지 않는 무용한 행위로 보였을 것이다. 그가 허자에게 말한 교환이란 이익이 없는 단순한 교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황당한 생각임은 여기서 굳이 변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맹자의 말이 전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 상업은 자본의 축적을 가져오고, 자본의 축적 규모가 커진다면, 그 자본은 필연적으로 생산자를 구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개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금융자본의 위력을 직접 경험하고 있지 아니한가. ●조선 후기 私商 활동 부쩍 활발해져 유가의 상인에 대한 이런 정의 때문에 유교를 국가이데올로기로 삼은 조선은 상업과 상인을 적극 장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장이 없을 수는 없다. 조선을 세우고 수도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긴 뒤, 궁궐과 종묘, 관청을 지었다. 아울러 지은 것이 관영 시장인 시전(市廛)이었다. 조선후기가 되면, 이 관영 시장의 상인 외에 개성상인을 위시한 사상(私商)의 활동이 부쩍 활발해진다. 이들은 국가의 감시를 뚫고 밀무역 루트까지 뚫는다. 이익이 나는 곳에 상인이 있었던 것이다. 또 역관이 주축이 된 북경과 한양, 동래와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이 제법 발달한다. 이번에 소개한 그림들은 아마도 이런 상업의 발달과 유관한 상단(商團)을 그린 것이 아닐까.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소통의 언어로 ‘주체적 철학’ 정립해야”

    “소통의 언어로 ‘주체적 철학’ 정립해야”

    한국 학계에서 선배 학자 비판은 금기다. 대학 내 권력 관계가 우선 장벽이고, 얽히고설킨 학맥도 부담스럽다. 서구 철학자와 수입 철학에만 권위를 부여해온 학문적 관행도 ‘드문 비판´에 일조해왔다. 선후배의 연구를 발전적으로 비판하는 ‘대화적 글쓰기’ 대신 서구 이론 주석 달기에 바빴다. 자생담론 부재를 한탄하면서도 자생담론 탄생의 필수작업인 ‘국내 철학 되돌아보기’엔 소홀했다. 철학자와 권력의 관계, 철학의 현실 개입 메커니즘 연구도 아울러 미개척지로 남았다. ●실존철학 거두 박종홍씨 공개 비판 김석수 경북대 교수(철학과)가 나섰다. 처음 입을 뗀 건 2001년 출간한 ‘현실 속의 철학, 철학 속의 현실’에서였다. 건드려도 박종홍을 건드렸다. 국내 실존철학의 거두였던 박종홍(전 서울대 철학과 교수,1976년 작고)은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하며 유신정권의 철학적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김 교수는 가난 극복에 대한 열망으로 ‘힘의 철학’을 추구한 박종홍의 오류와 한계를 지적했다. 입에 올리기 껄끄러웠던 학문의 대선배가 비판의 공론장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왜 박종홍을 비판하느냐.’는 의견과 ‘왜 더 세게 비판하지 못했느냐.’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철학과 철학자의 시대적 역할에 부단한 질문을 던져온 그가 최근 전작의 문제의식을 확장한 책 ‘한국 현대 실천철학’(돌베개)을 냈다. 탐구 범위도 지난 100여년간 국내 철학계의 사상 궤적 전반으로 보폭을 넓혔다.“언제까지 자생담론이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을 수만 없다. 정말 자생담론을 갖기 원한다면 우리 철학사를 반성적으로 정리하는 작업부터 선행돼야 한다.”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다. 김 교수가 지난 100여년을 꿰어내는 공통의 맥락은 ‘실천철학’이란 관점이다. 그가 정의하는 실천철학은 ‘이론철학’의 반대말이 아니다. 어떤 입론을 가진 철학이냐와는 무관하게 학문과 현실의 만남을 고민하는 철학은 모두 실천철학이다. 그가 철학 이론이 수용됐던 시대상황과 철학자의 수용태도에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권력의 옷 입은 무주체적 한국 철학 한국 철학사를 돌이켜 볼 때 이론과 실천의 내용이 늘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실천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색깔의 옷을 입었다. 때론 저항이, 때론 권력에의 복무가 실천이란 이름으로 행해졌다. 김 교수가 보기에 국내 철학의 무주체성은 과거 한국의 시대상황과 무관치 않다. 그는 18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시대가 빈곤하면 학문은 현실혁명적이거나 현실영합적이 되고 만다.”고 말했다. 엄혹한 현실은 저항하는 쪽이건 권력에 영합하는 쪽이건 학자들이 주체적 철학 정립을 위한 깊이 있는 성찰을 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얘기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일제 식민지 시기 안호상(1대 문교부장관)과 박종홍은 독일 이상주의와 실존주의를 민족주의 틀 속에서 재해석하며 현실을 극복하려 발버둥쳤다. 그러나 해방 이후 안호상은 이승만의 ‘일민주의’를, 박종홍은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합리화하는 이론적 토대를 놓았다. 전두환 정권에서 문교부장관을 지낸 이규호도 대학에 국민윤리과를 신설해 윤리교육을 이데올로기 비판 교육으로 전락시켰다고 김 교수는 지적한다. 그는 “유감스럽게도 우리 지식인들 중엔 자신의 학문을 권력 기반을 쌓기 위한 무기로 삼으며 ‘우리의 현실’에 맞는 옷이 아니라 ‘그들의 현실’에 맞는 옷을 입도록 요구한 측면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저항적 실천에도 한계는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와 네오마르크스주의, 프랑크푸르트학파 이론과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 등도 일본 제국주의와 군사독재 혹은 동구 사회주의권 몰락 후의 이론적 방황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수입·활용돼 왔다.‘우리 철학’으로서의 자기 정립 성격보다는 수단으로서의 학문 성격이 강했던 게 사실이다. ●철학의 위기 끊임없이 자문해야 김 교수는 ‘전국철학앙가주망네트워크’의 일원이다. 지난해 11월 삼성 비자금 비리 특검수사를 촉구하는 철학자들의 서명에, 올 4월엔 중국의 티베트 탄압을 비판하는 서명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철학의 무주체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위기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현재 이명박 정부가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면서 “철학자들은 각기 다른 목소리들이 충돌하는 이유를 치열하게 탐구해 소통의 언어를 생산해 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철학이 현실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그는 향후 노숙자를 위한 철학, 빈곤여성을 위한 철학, 이주노동자를 위한 철학 등으로 자신의 ‘실천철학’을 확장시켜 나갈 계획이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책꽂이]

    ●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데이비드 바사미언 인터뷰, 강주헌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 노엄 촘스키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사상을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풀어썼다. 전쟁기계로 전락한 미국을 비판하는가 하면, 마이클 무어와 밥 딜런 등 예술가의 역할까지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논의했다.1만 2800원.●기인 기사(奇人 奇事)(송순기 지음, 간호윤 엮음, 푸른역사 펴냄) 근대 유학자였던 송순기의 야담집 ‘기인기사록’에서 조선시대의 별난 사람, 별난 사건들을 추려 엮었다. 빼어난 미모로 본처를 기겁하게 만든 평양기생, 아버지를 대신해 전장에 나간 아들 등 24가지 별난 사연들이 흥미롭다. 서사의 재미는 물론, 한 시대의 진정성을 엿보게 하는 야담의 매력을 확인할 수 있다.1만 3900원.●두 남자의 산티아고 순례일기(전용성·황우섭 지음, 한길사 펴냄)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두 작가가 요즘 한창 새로운 여행지로 ‘뜨고’ 있는 스페인 산티아고를 현장안내하느라 35일 동안 작정하고 다리품을 팔았다. 산티아고 가는 길이 왜 ‘희망과 치유의 길’로 사랑받고 있는지를 짭짤한 글맛으로 일러주는 일기 형식의 여행기.1만 6000원.●저항의 인문학(에드워드 사이드 지음, 김정하 옮김, 마티 펴냄) 미국의 문화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생전 마지막 책으로, 인문학자들의 현실참여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서구 고전만을 진정한 인문학이라 치켜세우며 역사와 노동, 여성학과 젠더, 아프리카·아시아 문학의 존재를 외면하는 미국 신인문주의자들의 행태는 바람직한 인문학의 방향이 아니라고 지적한다.1만 5000원.●상식과 교양으로 읽는 유럽의 역사(만프레드 마이 지음, 장혜경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주요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유럽역사의 맥락을 짚는 교양역사서. 유럽의 정신적 고향인 그리스,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유럽연합에 이르기까지 유럽 변천과정의 이슈들을 핵심만 뽑아 간추렸다.1만 2000원.●시가 있는 골프(이종현 지음, 나눔사 펴냄) 시인이자 골프 전문기자인 저자가 시, 산문, 사진을 두루 곁들여 쓴 골프 에세이.“성공한 인생에는 남들보다 뛰어난 감수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골프그린에서의 단상들을 따뜻하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감성으로 풀어썼다.1만 2000원.●숲 속 그늘자리(이태수 지음, 고인돌 펴냄) 생태 세밀화가 이태수가 5년 동안 전국 곳곳을 뒤져 계절에 따라 순환하는 동식물들의 모습을 담았다. 세밀화와 나란히 해당 동식물의 핵심이 될 만한 정보들을 짧은 시 형식으로 서정넘치게 묘사했다.1만 4800원.
  • [내 책을 말한다] 조선시대 금서들의 수난사

    [내 책을 말한다] 조선시대 금서들의 수난사

    이 책은 내가 대학원 시절 조동일 선생의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 수업을 들으며 처음 서적중개상과 조우한 이후로, 미친 듯이 서적중개상의 세계를 찾아 헤매다가 도달한 회색지대의 언저리 어디쯤에 해당하는 저작이다. 아니 좀 더 솔직해 말하자면 내가 그토록 만나고 싶었지만 아직 얼굴조차 모르는, 치열하게 불꽃처럼 살다간 이 시대 마지막 서적중개상 송신용(宋申用·1884∼1962)을 짝사랑하던 열정으로, 오기로 완성한 우울한 레퀴엠에 가깝다. 목숨걸고 금서를 전하며 지식과 사상의 숨통을 터주던 서적중개상들, 역사 속에 가려져 왔던 이들을 역사 전면에 내세워 금서의 사회적 이중주를 들어보고자 한 것이 이 책을 쓰게 된 직접적 동기다. 궁극적으로 나는 이 책에서 독백의 사상사를 벗어나 대화와 투쟁의 사상사를 그려보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금서들의 사회사라는 형식을 빌려왔다. 사문난적으로 몰린 책과 저자들의 역사야말로 성리학에 포섭되지 않은 사유를 가장 잘 보여준다. 하지만 ‘마녀’들만으로는 조선의 불온한 사유들이 온전히 그려질 수 없다. 좀 더 내밀히 파고들라치면 무채색의 투명하고 평범한 책 속에서도 시대의 비의가 그려져 있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성리학으로 귀결된 책들 속에서도 은연중 그 시대의 현실적 삶과 대결한 흔적, 하지만 결국 권력의 논리를 따르고 만 타협의 고백이 발견되기도 한다. 나는 이 책에서 그들의 존재도 적극 끌어들여 자칫 ‘금서의 역사’가 빠질 수 있는 또 다른 획일성과 식상함을 넘어서고 싶었다. 탄핵받은 책들의 역사를 일별하면서 가장 강하게 받은 인상은 현실을 가장 잘 표현하는 책일수록 불행한 운명을 맞는다는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안팎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일에 지식인의 정책과제가 집중된 때가 있었다. 서계 박세당은 이 시기에 청요직을 역임하면서 신분제와 토지제도의 개혁, 왕과 신하의 역할구분, 경서의 실용주의적 재해석 등을 외쳤지만 사문난적으로 토벌되고 말았다. 또한 볼모로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 일행의 이야기가 담긴 ‘심양장계’에는 당시 청나라를 중심으로 재편성되던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가 세밀하게 관찰되어 있었지만, 조선의 조정은 이러한 현장보고를 무시한 채 소현세자를 친청론자로 몰아 숙청하고 불모의 북벌론에 빠져들었다. 시대와 불화한 책들의 역사는 불행함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하다. 이 책에서 나는 왜 시대와의 진정한 의사소통은 목숨을 담보로 한 모험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고민해 보았다. 이 책이 우리 시대의 결을 거스를 수 있는 지식의 생산과 공유를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더 바랄 게 없겠다.
  • [현장 행정] 강서구 ‘지식비타민 강좌’

    [현장 행정] 강서구 ‘지식비타민 강좌’

    강서구민대학, 평생학습홈페이지 구축 등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학습프로그램을 주민들에게 제공하는 강서구가 수준 높은 ‘강서지식비타민강좌’로 인기를 끌고 있다. ●둘째주 목요일은 ‘비타민’ 듣는 날 강서구는 지난해 3월부터 시작된 지식비타민강좌에 매회 700여명이 참여, 연인원 1만명이 넘는 주민들이 강의를 들었다고 3일 밝혔다. 또 정식회원으로 등록하고 강의 정보를 받아보는 마니아가 2500명에 이른다. 김재현 구청장은 “즐겁고 유익한 강좌로 지역사회의 ‘비타민’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강의 주제와 강사 선정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 강서구가 평생학습도시로 자리매김하는 발판으로 삼겠다.”고 강조했다. “기회는 균등하지 않고 준비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필명 시골의사로 잘 알려진 증권전문가 박경철 경북 안동 신세계연합병원장의 경제철학 열강에 강서구민회관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비판하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지식인이다’,‘투자는 본인의 책임이다.’,‘모든 것을 한 번쯤은 비판하라.’ 등 주옥 같은 말을 쏟아낼 때 마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지난달 8일 열린 제15회 강서지식비타민 강좌의 풍경이다. 매월 둘째주 목요일 다양한 주제와 뛰어난 강사진으로 주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 손정자(36·화곡7동)씨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의 가정통신문에서 지식비타민강좌를 알게 된 후 열혈팬이 되었다.”면서 “TV에서나 볼 수 있는 유명 강사를 통해 전해지는 경제, 문화, 인생살이 등의 이야기는 황폐해져가는 마음을 치유하는 비타민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성공·건강·자녀교육법 등 다양한 주제 다뤄 지난해 3월 처음 문을 연 지식비타민 강좌를 통해 주민들을 울고 웃게 만든 강사는 모두 15명. 이들은 성공이야기, 건강생활법, 나를 변화시키는 방법, 올바른 자녀교육법 등 다양한 생활지식은 물론 사회적 이슈를 현실감 있고 알기 쉽도록 전달했다. 한때 백발의 웨이터로 언론의 조명을 받았던 서상록(서상록 닷컴 대표이사)씨는 온갖 힘겨운 과정을 이겨낸 자신의 인생역정을 실감나게 이야기로 풀어내 눈물샘을 자극했고, 송은영(이미지메이킹 컨설턴트)씨는 성공을 부르는 밝은 표정 연출법을 소개해 인기를 끌었다. 이 밖에도 올바른 건강생활법을 알려준 윤방부 교수, 명심보감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를 설파한 김병조 교수, 행복한 인생 설계법을 제시한 고도원 아침편지문화재단 이사장 등 많은 강사들이 ‘마음의 비타민’을 선물했다. 첫 강의부터 한번도 빠짐없이 비타민 강좌를 들었다는 김정덕(61·발산1동)씨는 “어렵고 힘든 시기를 치열하게 살아온 이들의 모습에 가슴이 ‘찡’하다.”면서 “매월 둘째주 목요일은 친구들과 강의 듣고 점심식사를 함께하는 ‘특별한 날’이 되었다.”고 말했다. 구는 지난해 강의 내용을 수록한 ‘강서지식 비타민’ 책자 500부를 제작, 주민자치센터, 평생학습시설 등을 통해 주민들에게 무료로 나눠줬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리영희 前교수 ‘김대중 학술상’ 수상

    리영희(79) 전 한양대 교수가 2008년 ‘후광 김대중 학술상’ 수상자로 2일 선정됐다. 학술상을 제정·운영하는 전남대는 “리 전 교수는 냉철한 이성으로 진실을 탐구하고 지성인의 양심으로 시대를 일깨운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식인”이라면서 “그는 한국 현대사를 살아 오거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식인의 시대적 사명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귀감이 됐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 [내 책을 말한다] ‘위대한 기획가’ 정도전의 교훈

    폐업한 지 백년도 넘은 조선. 그 나라는 내게 무기력한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거기에서는 늘 허울뿐인 양반들이 내뿜은 퀴퀴한 방귀냄새가 났다. 그래서 나는 조선의 역사보다는 지중해의 바람 냄새가 좋았고, 인더스 강이나 황하의 물줄기에 더 매료되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조선의 역사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것은 서양제국을 일으킨 ‘총칼의 역사’에 염증을 느낀 결과였다. 세계관이 바뀌자 조선이 다시 보였다. 인류 역사에는 수많은 나라가 생겨나고 소멸하였다. 그 중에서도 조선은 장장 500년에 걸쳐 그 이름을 지킨, 보기 드물게 장수한 나라였다. 고려는 분열된 세력이 산술적으로 결합한 나라였지만, 조선은 철저하고 치밀하게 기획된 나라였다. 고려는 영토가 결합한 나라였지만, 조선은 영토만 빼고 모든 것이 새롭게 창조된 나라였다. 한 마디로 조선은 기획력이 빛을 발한 나라였고, 그 기획의 주인공이 바로 삼봉 정도전이었다. 무릇 통치자는 늘 개혁과 변화를 말한다. 하지만 정도전은 개혁의 한계를 알았다. 그리하여 낡은 체제를 폐업하고, 그 터 위에 유교적 이상 국가를 창업하였다. 나는 그 거대한 역사 프로젝트가 펼쳐지는 과정을 조선 건국 통사에 딱 들어맞게 구성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 보니 역사다큐멘터리와 같은 서술이 되었다. 한편, 이미 정도전의 생애에 대해서는 몇몇 선배 역사가들이 재조명을 시도하였고, 나름대로 성과를 남겼다. 그 과정에서 정도전이라는 이름 앞에는 정치가, 사상가, 문장가. 혁명가, 경세가 등등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었다. 그런데 이 모든 수식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그의 탁월한 기획력이다. 그래서 정도전은 ‘위대한 기획가’다. 기획가는 가치 지향적인 지식인인 동시에 현실 지향적인 정치가, 또는 경영자다. 현실을 저버리는 기획가는 몽상가가 되기 십상이고, 가치를 업신여기는 기획가는 영업자로 전락하기 쉽다. 그러므로 기획가는 실천적 지식인이다. 위대한 기획가는 긴 호흡으로 거대한 꿈을 꾼다. 오늘날 기업 경영에서도 갈수록 기획력이 빛을 발한다. 기업조직이나 공직사회에서 리더가 되려는 사람이나 또는 이미 리더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나는 이 책을 썼다. 또한 사회 출발을 앞둔 청년학생들의 꿈을 자극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더불어 철학도 없고, 고상한 꿈도 없는 천박한 출세주의자들에게는 과감히 ‘똥침’을 날리는 것. 그것이 내가 역사의 낡은 창고를 뒤적이는 궁극적인 이유인지도 모른다. 박남일 역사칼럼니스트
  • “환경위기, 지구적 대응 않으면 끝장”

    “환경위기, 지구적 대응 않으면 끝장”

    원유 가격이 연일 고공행진이다. 물가 상승으로 서민은 지갑을 닫고, 영세상인의 얼굴엔 먹구름이 짙다. 머릿속에서 추상적으로만 존재하던 환경위기가 각자의 삶에서 ‘나의 위기’로 구체화되고 있다. 각국의 식량·자원·에너지정책이 환경운동가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란 사실, 내 삶을 좌지우지하는 ‘매우 민감한 정치’라는 사실을 지금처럼 선명하게 보여준 때는 일찍이 없었다. ‘플랜 B 3.0’(레스터 브라운 지음, 황의방·이종욱 옮김, 도요새 펴냄)은 ‘환경위기는 공부가 아닌 실천으로만 타개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미국의 저명한 환경운동가인 저자(미국 지구정책연구소 소장)가 ‘플랜 B’라는 제목의 책을 낸 건 4년 전. 그는 환경훼손을 담보로 성장을 추구하는 현재의 경제시스템을 ‘플랜 A’로, 석탄과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에너지 경제를 ‘플랜 B’로 명명한다. ●재생가능 에너지 사용이 문명 살릴 길 저자는 2006년 ‘플랜 B 2.0’을 낸 데 이어, 지난해에는 ‘플랜 B 3.0’을 새로운 버전으로 내놓았다. 판을 거듭할수록 저자의 목소리는 다급함을 더해간다. 책의 부제만 봐도 알 수 있다.‘플랜 B 2.0’의 부제는 ‘곤경에 빠진 문명과 시련에 직면한 지구를 구하는 방안’인 데 비해,‘플랜 B 3.0’은 ‘문명을 구하기 위해 모두 나서자’라는 부제를 달았다. 저자는 “우리가 당면한 도전의 규모와 전쟁터와도 같은 급박함을 반영했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 문명은 생산이 곧 감소할 한 가지 자원(석유)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문명”으로 현재의 방식은 “대안 없는 위태로운 도박”이라는 것이다. ●그린란드 얼음 녹기 전에 바로 지금 시작! ‘플랜 B 3.0’은 이론서가 아니다.‘실천하지 않으면 끝’이라고 외치는 격문이자,‘이렇게 실천하자.’고 제안하는 ‘행동지침서’다. 저자는 거듭 묻는다.“그린란드 얼음이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녹기 전에 우리가 화력발전소를 없앨 수 있을 것인가?”“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아마존 삼림 벌채를 정지시킬 정치적 의지를 결집시킬 수 있을 것인가?” 플랜 B의 목표는 선명하다.202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80% 줄여 기후를 안정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최우선 실천목표는 기후안정과 인구안정, 빈곤퇴치와 지구생태계 회복이다. 요컨대 화석연료가 아닌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에너지 낭비를 막는 ‘재활용 경제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시스템 전환을 부르짖어온 지식인은 한두 사람이 아니나, 저자가 그들과 다른 점은 그의 생각과 제안이 매우 구체적이라는 점이다. 플랜 B는 전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을 지속 가능한 체제로 전면 개조하는 것을 뜻한다. 그는 전 지구적 공동노력과 예산투입을 부르짖는다. 플랜 B의 목표 달성과 지구 소생에 투입될 예산을 각 항목별로 계산해 연간 1900억 달러의 소요 예산을 산출하는가 하면, 예산 마련을 위해 각국의 군사비 삭감 비율까지 제시한다. 저자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세계 에너지 경제를 재편해서 기후를 안정시킬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당면한 도전은 그 기술을 실천하려는 정치적 의지를 구축하는 것이다. 문명을 구하는 것은 스포츠 관람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 각자가 직접 참여해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인기 록스타도 아닌 환경운동가 저자가 ‘플랜 B 월드투어’를 다니는 것도 전 세계적인 동참을 호소하기 위해서다. 한국도 투어 대상국이다. 그는 새달 9일 환경재단 기후변화센터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 강연과 포럼을 열 예정이다.2만 5000원.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지식의 최전선’ 업그레이드판 나와

    2002년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첨단공학, 예술 및 대중문화 등 29개 분야 학문의 새로운 쟁점을 소개했던 ‘지식의 최전선’이 6년 만에 ‘新지식의 최전선’(전4권, 한길사 펴냄)이란 이름으로 업그레이드판을 내놨다.현대 학문의 ‘성장판’에 해당하는 주제들을 망라한 현장 리포트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특색. 책은 인문·문화·사회·과학 등 네 분야에 걸쳐 ‘변하는 세상, 인문학의 가로지르기’‘문화와 예술, 경계는 없다’‘사회 공동체, 열린 세계를 향하여’‘나노에서 우주까지, 과학이 만드는 길’등 네 개의 주제를 다룬다. 필진으로는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유향숙 인간유전체기능연구사업단 단장, 한창완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등 현장과 학계를 아우르는 92명의 전문가가 참여했다. 학문을 다루는 글에는 흔히 난해함에 대한 우려가 따른다. 전문 용어와 난해한 이론의 연속,‘독단적인’ 주의주장 등은 대중과의 소통을 멀리하고 스스로를 자족적인 학문의 세계에 유폐시키기 일쑤다.‘新지식인의 최전선’의 미덕은 바로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 전문가들의 친절한 글쓰기와 개념 풀이 등을 통해 ‘대중을 위한 학술서’로 꾸몄다는 점이다.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논쟁의 장에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논쟁의 장에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왜곡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한국 내의 반체제운동을 선도했고, 직접적으로 민중혁명을 촉구하는 북한의 대남전략을 도왔으며, 전후 일본인에게 부정적 한국상을 심어주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한상일) “‘통신’은 학문적인 글이 아니라 저항의 글이다. 박정희 독재와 싸우기 위해 과장한 점이 없지 않지만, 그렇게라도 싸우지 않았다면 오늘의 민주화된 사회가 가능했겠는가.”(지명관) ‘한국으로부터의 통신’(‘통신’)이 마지막 편지를 띄운 지 20년 만에 논쟁의 장에 호명됐다.‘통신’의 필자는 ‘TK生’이다.‘TK生’은 1973년부터 88년까지 15년간 일본 잡지 ‘세카이’(世界)에 ‘통신’을 연재했다. 국내 언론이 침묵을 강요당했던 시절,‘통신’은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와 민주화운동의 현실을 일본과 세계로 알리는 창이었다.‘TK生’은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다.‘사상계’ 편집장을 지낸 그는 72년 10월 일본 유학을 떠나 20년간 망명과도 같은 생활을 하며 ‘통신’을 썼고, 올 2월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창비)을 책으로 묶어 출간했다. 최근 한상일 국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통신’을 비판하는 주장을 담은 책 ‘지식인의 오만과 편견-세카이와 한반도’(기파랑)를 내놓았다. 한 교수는 ‘세카이’ 창간호인 46년 1월호부터 89년 12월호까지 한국 관련 기사를 분석,‘세카이’가 ‘북한-선 남한-악’이란 흑백논리로 당시의 한국사회를 왜곡했다고 결론지었다. 한 교수는 ‘세카이’의 한국 인식에 ‘통신’이 결정적 악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그는 ‘통신’을 “황당무계한 유언비어를 통해 반정부 활동과 민중혁명을 촉구한 글”로 혹평하며,‘통신’이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팩트’의 부정확성을 지적했다.“민주화란 이름으로 거짓 정보, 근거 없는 소문, 반정부 집단이 의도적으로 조작한 유언비어 등을 진실인 양 전달”해 독자들에게 “추악한 한국의 정권, 그 밑에서 신음하는 국민이란 논리에 몰입하게 했다.”는 것이다.‘통신’과 달리 한 교수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을 ‘자립경제를 이루기 위한 민족주의 기획’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한 교수의 주장에 대해 ‘TK生’ 지명관 전 교수는 “논평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맞받았다. 그는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진실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폭압적 정권에 맞서느라 부정확한 정보가 확대 해석됐을 수 있다.”면서도 “학문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와는 별개로 ‘통신’은 긴급조치 하에서 달리 선택할 수 없었던 치열한 싸움의 수단이었다.”고 못 박았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한 교수의 긍정적 평가에 대해서도 지 전 교수는 “오로지 ‘경제성장’이란 잣대로만 시대를 논한다면 잔인한 인권침해와 억압적 통치를 간과하게 된다.”면서 “박정희 정권이 계속됐다면 오늘의 한국 사회가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기도 싫다.”고 반박했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문화마당] 미술관과 화랑의 구별법/ 정준모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문화마당] 미술관과 화랑의 구별법/ 정준모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우리사회가 압축 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얻은 것이 경제성장이라면 잃은 것은 가치와 문화라 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잘살고 보자는 국민적 합의는 ‘빨리빨리 문화’를 낳았고 원칙보다는 응용, 기초보다는 실속을 우선시하면서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기본, 원칙은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그 폐해가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시각문화의 기초이자 기본이라 할 미술관문화에 대한 천박한 인식이다. 사실 많은 정치인, 행정가, 지식인들은 물론 미술인들조차도 미술관과 화랑을 구분하지 못해 생기는 오류가 한둘이 아니다. 박물관은 크게 자연사, 역사, 경제, 생산 박물관과 민족, 사회 박물관 그리고 과학기술박물관과 미술관으로 구분된다. 즉 미술관은 박물관의 하나인 것이다. 이런 혼동의 뿌리는 깊다. 일제 강점기에 경복궁에 자리한 총독부 미술관이 박물관적 의미의 미술관으로 기능하기보다는 일종의 전시관으로 운영되었고 광복 후 국립미술관으로 다시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이어진 때문이다. 미술관과 화랑의 차이는 도서관과 독서실의 차이와 같다. 도서관과 미술관은 비영리, 공익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화랑과 독서실은 영리와 사익을 전제로 존재한다. 도서관에는 장서가 있고 해마다 새로운 도서들을 구입해야 하는 것처럼 미술관은 소장미술품을 보유하고 해마다 문화적 가치가 충일한 작품들을 소장해야 한다. 이렇게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호주와 캐나다 등 영연방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미술관을 ‘갤러리’로 표기하고 있어 간혹 혼란을 주기도 하지만 미술관은 분명 도서관의 장서처럼 미술품을 소장하고 이를 연구조사하고 그 결과를 관객들과 공유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일부로 전시하는 공간을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소장품 없는 미술관의 변종이 탄생했다. 우리말로 ‘미술전시관’정도로 새길 수 있는 쿤스트하우스, 쿤스트 할레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곳도 기본은 공익과 비영리를 전제로 하며 ‘모두를 위한 문화’‘시민의 문화권’ 향상이라는 원칙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상업적인 화랑과 구분된다. 미술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종종 코미디 같은 일이 생긴다. 수도 서울에 제대로 된 국립미술관 한 곳 없고 인구가 1000만명이나 되는 서울에 유일한 시립미술관은 자체 기획전이나 상설전시는 찾아보기 힘들고 흥행을 위해 민간업자들의 블록버스터 전시에 대관해주는 일에 더 열성이다.‘손 안 대고 코푸는 셈’인 임대료 수익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민간 상업시설인 화랑을 문화예술기관으로 취급하니 시각문화 공간은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지자체들은 미술관이나 전시관보다는 공연장 확충에 열을 올리고 그 결과 시설간 불균형 현상이 나타난다. 또 일부 미술관 관장들은 본인이 관장인지 큐레이터인지 구분을 못하고 오직 전시와 생색내는 일에만 몰두하는 형편이니 시각문화의 발전은 요원한 셈이다. 여기에 미술인들조차 화랑 오너를 관장이라 부르고 미술관이나 쿤스트 할레형 미술전시관이 창작자와 시민과 국민을 매개하는 조사연구기관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공공연히 전시를 요구하는 몰지각한 행동을 보이기 일쑤다. 최근 미술관, 박물관을 책임운영기관화 또는 민영화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서관의 운명은? 분명 유엔 사무총장까지 배출한 우리나라가 유네스코가 정한 미술관 박물관에 관한 권고나 협약을 무시하려는 것인가. 설마 유엔에서 탈퇴하려는 것은 아닐 텐데…. 이렇게 수치스러운 일들이 생기는 이유는 무얼까. 이는 정책을 세우고 집행하는 이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기본이 갖추어지지 않은 때문이다. 언제까지 그들에게 맡겨두어야 할지 답답한 노릇이다. 정준모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 박경리 선생이 잠든 통영

    박경리 선생이 잠든 통영

    지난 9일 ‘토지’의 작가 고 박경리 선생이 생전에 원했던 대로 고향인 경남 통영시 산양읍 미륵산 자락에 묻혔다. 한산도 등 아름다운 섬을 품은 통영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곳이다. 선생이 그토록 사랑한 통영의 풍경은 어떤 것일까. 수구초심(首丘初心)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선생이 나고 자란 ‘뚝지먼당’에서 소설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의 무대인 간창골, 해저터널 등을 거쳐 영면한 미륵산자락까지 하나하나 짚어봤다. #박경리 선생에게 통영이란… 통영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해군 사령부격인 ‘삼도수군통제영’을 줄인 말이다. 전쟁의 험악한 기운으로 가득찼던 통영은 그러나 근대로 들어오면서 예술의 향기 그윽한 도시로 탈바꿈한다. 통영이 고향인 시인 유치환은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중앙동 우체국에서 이영도에게 연서를 썼고, 그 우체국 앞길은 현재 ‘청마거리’로 명명돼 있다. 그뿐 아니다. 음악가 윤이상과 시인 김춘수, 화가 이중섭과 전혁림, 시조시인 김상옥 등 당대를 풍미했던 예술인들이 펜으로, 또 붓으로 통영에 대한 사랑을 읊고 그려냈다. 하지만 고 박경리 선생에게 고향 통영은 애증이 엇갈린 도시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김순철 통영시청 문화예술계장에 따르면 선생은 27∼28세 나던 해 고향을 떠난 후 2004년 처음으로 통영땅을 밟았다. 피보다 붉은 뚝지먼당 동백꽃이 50번도 넘게 피고 진 세월이다. 김 계장은 “몇몇 동창들과 감격적인 해후의 시간을 갖긴 했으나, 끝내 생가가 있는 뚝지먼당 등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가난에 시달렸던 유년기를 추억하기 싫어서였을까. 앞서 유방암과 싸웠던 1973년에는 토지 1부 자서를 통해 “내게서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단 말인가.”라며 심경의 일단을 내비치기도 했다. 선생의 생가에 대해서는 친구들간에도 견해가 엇갈리는데, 김 계장은 선생의 기억과 호적 등의 자료를 토대로 역추적한 결과 문화동 328의1번지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현지인들이 뚝지먼당이라 부르는 곳이다. 삼도의 수군통제사들 중 으뜸이 되는 원수의 깃발을 모신 사당을 ‘뚝사’라 하는데,‘뚝지’는 ‘뚝사’,‘먼당’은 ‘고개’의 사투리다. 즉 ‘뚝사가 있는 고개’가 뚝지먼당인 것.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배수지가 들어서면서 뚝사는 사라지고 말았다. #문단의 거목 키워낸 뚝지먼당 선생은 뚝지먼당에서 ‘박금이’(朴今伊)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다. 돈 있는 사람이 고갯길 골목에 사는 경우가 어디 흔한가. 뚝지먼당 또한 마찬가지. 굽어진 골목마다 가난의 냄새가 물씬 풍겨난다. 이웃들이 그러했듯 가난에 시달렸던 ‘문학소녀’의 생가는 이미 허물어졌고, 그 자리엔 붉은 벽돌집이 들어섰다. 골목길 입구의 ‘김약국의 딸들’ 작품비만이 그 시절을 웅변하고 있을 뿐. 선생은 통영공립보통학교(현 통영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강신연(84), 김천수 할머니 등과 자주 어울렸다. 강 할머니는 당시의 박금이를 비교적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금이는 작은 키에 예쁘장했제. 친구들도 잘 사꼬.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서도, 부산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전학을 왔다아이가. 원래 내가 있는 통영초등학교에 올라꼬 했는데 자리가 없었어. 그래가 산양읍에 있는 산양보통학교(현 진남초등학교)를 잠깐 다니다 4학년 때 다시 통영초등학교로 전학온기라.” 강 할머니는 선생이 어린 나이에도 소설책 읽기를 즐겼다고 전했다.“수업시간에도 책상 밑에다 소설책을 피놓고 봤다니께네. 공부를 열심히는 안 했지만서도, 그래도 잘한 편이었어. 그 가시나가 얘기도 참 잘했따꼬. 정신없이 금이 얘기 듣다가 밤 11시가 넘어서야 퍼뜩 정신차려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다니께네.” 뚝지먼당 아랫마을이 간창골이다.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주무대다. 작품 속 서문고개는 슬프고 기구하다.‘김약국의 둘째딸’ 용빈의 독백을 들어보자. 명망 높았던 한 가족의 몰락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저의 아버지는 고아로 자라셨어요. 할머니는 자살을 하고, 할아버지는 살인을 하고, 그리고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아무도 몰라요. 아버지는 딸을 다섯 두셨어요. 큰딸은 과부, 그리고 영아 살해 혐의로 경찰서까지 다녀왔어요. 저는 노처녀구요. 다음 동생이 발광했어요. 집에서 키운 머슴을 사랑했죠./하략”‘토지’의 시작이나 ‘김약국의 딸들’이나 하나같이 비극적인 이유가 혹시 뚝지먼당이 심어준 정서 때문은 아닐까. 뚝지먼당에서 보면 통영항은 물론, 세병관과 남망산 등 통영의 전체적인 윤곽이 잡힌다. 선생은 이곳에서 유년기를 보내다 진주여고에 들어갈 무렵 아랫동네 명정동으로 이사를 간다. 명정동 골목집 바로 앞은 윤보선 전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 여사의 생가로도 유명하다. #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잠들다 2007년 12월 선생은 세번째로 통영을 찾는다. 그곳이 산양읍 미륵산 자락의 양지농원이다. 선생이 통영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이자, 영원한 잠을 자게 된 곳이다. 양지농원 정대곤 대표에 따르면 원래는 현 묏자리 바로 아래에 선생이 거처할 집을 짓기로 했었다. 양지농원 내 2층짜리 전원주택풍의 펜션에서 하룻밤을 보낸 선생은 통영 앞바다의 수려한 풍경에 “왜 이제사 여기에 왔을까.”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생전에 집을 짓지는 못했어도 이제 영원한 안식처로 삼았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일까. 통영 읍내에서 차로 통영대교, 또는 충무교를 넘거나 혹은 걸어서 해저터널을 건너면 닿는 곳이 통영에서 가장 큰 섬인 미륵도다. 미륵산은 미륵도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다. 내친 걸음, 미륵산 정상까지 가보기로 했다. 등산로는 빽빽한 편백나무 숲 사이 고즈넉하게 들어앉은 절집 미래사에서 시작된다. 관광 케이블카가 수리 중인 탓에 가파른 산길을 40분쯤 걸어 올라야 했다. 정상에 서면 한려수도의 빼어난 풍경이 주르륵 펼쳐진다. 흰 거미줄을 뽑아내듯 바닷물을 헤치며 나아가는 어선들이 한산도 등 다도해의 섬들을 종횡으로 엮어 그림 같은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관광엽서에서 흔히 보는 한려수도 사진은 십중팔구 이곳에서 찍는다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의 풍광이다. 선생의 묘지가 있는 미륵도는 오후에 찾을 것을 권한다. 한 굽이 돌 때마다 해안절경을 토해내는 22㎞의 산양일주도로는 해질녘 달려야 제 맛이기 때문이다. 특히 해가 다도해의 섬들 뒤편으로 사라지고 난 뒤 만들어내는 붉은 기운은 그야말로 몽환적이다. 글 사진 통영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여행수첩(지역번호 055) ▶가는 길:경부고속도로→대전 분기점→대전·통영중부고속도로→통영. ▶주변 명소:통영 시내에 윤이상 생가, 청마문화관, 화가 이중섭이 머물렀던 집, 전혁림 미술관 등이 있다. 시민문화회관 부근에는 15명의 세계적인 조각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조각공원, 유치환의 ‘깃발´ 시비도 있다. 산양일주도로변 달아공원은 국내 최고의 일몰을 자랑하는 곳. 통영시청 문화예술계 650-4510, 문화관광과 650-4610. ▶맛집:울산다찌집(645-1350), 통영사랑 다찌집(644-7548), 만성복집(645-2140). #‘토지´ 속 또 다른 명소 ‘토지’ 4부에 등장하는 충무교 옆 해저터널은 한번쯤 걸어보는 것이 좋겠다. 항일독립운동에 뜻을 둔 유인실과 좌파 지식인 오가다 지로는 서로 사랑하지만 조선인과 일본인이란 처지 때문에 선뜻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데, 그들이 통영에 내려와 처음으로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곳이다.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로 통영 읍내와 미륵도를 연결한다.1932년 완공후 30여년 동안은 차들이 다니기도 했으나, 요즘엔 도보로만 오갈 수 있다. 세병관을 지나 서문고개 끝자락에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충렬사가 있다. 일본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불공대천의 원수’를 기리는 곳일 텐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도 별다른 피해 없이 용케 살아남았다.‘토지’5부에서 송영광(길상과 서희 부부의 수양딸 양현과 비극적 사랑을 나누는 색소폰 연주자)의 상념을 통해 잠깐 등장한다. 충렬사 앞의 명정우물(정당샘)도 가볼만 하다. 선생이 진주여고에 입학하면서 이사한 명정동 집에서 3분거리다. 일정(日井)과 월정(月井) 두 샘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월을 합해 명정(明井)이라 부른다.1670년쯤 우물을 하나만 팠는데, 물이 곧 탁해지고 말라버렸다. 두 개를 파자 그제서야 수량이 풍부해지고 맑아졌다고 한다. 인근 주민들에 따르면 예전엔 식수원이자 빨래터였다고 한다. 작품 속엔 등장하지 않지만, 선생도 여고시절 이곳에서 물을 긷거나 빨래를 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17) 헝가리 출신 청안 스님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17) 헝가리 출신 청안 스님

    2005년 입적한 숭산 스님은 생전 5만여명에 달하는 외국인을 제자로 삼았다. 한낱 공허한 말에 얽매여 머물지 않는 그의 실천행 법문에 감화된 많은 지식인들이 출가해 수행 중이거나 한국불교 포교에 앞장서고 있다. 헝가리 출신의 청안(42·淸眼) 스님도 그중 한 사람. 헝가리에 머물면서도 틈틈이 불교TV 강의와 법문집 ‘꽃과 벌´(김영사)을 통해 국내에 이름이 알려져 숭산 제자 중 가장 대중에게 인기높은 ‘스타 스님´이다. 출가 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무명에 흔들리는 사람들의 ‘본래불성(本來佛性)´을 찾아 주기 위해 고국 헝가리에 유럽 최초의 한국식 사찰 원광사(www.wonkwangsa.net)를 짓는 불사에 매달려 있는 청안 스님. ‘나의 마음이 깨끗해지면 세상이 하나가 된다.´는 숭산 스님의 ‘세계일화(世界一花)´ 사상을 몸으로 펴가는, 한국불교의 대표격 국제포교사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방하´ 한마디에 깨달음 얻어 하안거(夏安居) 결제를 사흘 앞둔 16일 오전. 수소문끝에 조계사 일주문에서 만난, 훤칠하게 키가 큰 스님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모았다. 나란히 찻집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스타 스님´을 알아본 신도가 거푸 인사를 하는 바람에 여러 번을 멈춰서야 했다. 지난해 11월 숭산 스님 3주기 행사 때 한국에 들어온 이후 6개월 만의 방한. “안거를 나기 위해 들어 왔느냐.”고 묻자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라며 헝가리 부다페스트 외곽에 짓고 있는 원광사 이야기부터 꺼낸다. “한국식 그대로 절을 지으려니 꼼꼼히 챙길 게 많아요. 벌써 두어차례 다녀갔지만 공을 들일수록 손볼 것이 생겨납니다. 이번엔 서까래와 기와 때문에 헝가리 와공들을 대동하고 절집들을 돌면서 전문가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양양 낙산사에서 대목장을 만나 ‘한 수´ 배웠지만 출국하는 23일까지 찾아야 할 사찰과 만날 사람들이 많아 바쁘단다. 헝가리의 신도 6명도 함께 들어와 부처님오신날 법요식을 백담사에서 지냈다. 백담사는 숭산 스님이 조실로 주석했던 곳. 스승의 흔적과 정신이 고스란히 스며 있으니 응당 여느 사찰과는 달리 각별할 것이다. 헝가리 중산층 가정, 의사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라난 그가 숭산을 만나 삶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무슨 말을 들었기에 그토록 자신을 괴롭혀 왔던 혼란을 단박에 털고 벼락 같은 깨침에 닿았을까. 숭산의 제자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청안도 그 유명한 법문 ‘방하(放下)´를 입에 올린다. “오직 모를 뿐, 그저 내려 놓아라. 그런 다음 그냥 하라(Just do it).” ‘내가 누구이고 무엇 때문에 이곳에 이렇게 살고 있느냐.´는 보편적인 의문이라면 누구나가 한번쯤은 품었을 터. 하지만 그냥 모든 것을 내려 놓으라는 ‘방하´ 한마디에 벼락 같은 해법을 찾았으니 예사 법기(法器)는 아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엘테(Elte)대학에서 영어와 헝가리어를 전공한 어학도. ‘내가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의문에 더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나쁘냐는 삶에 대한 고민과 의심에 끊임없이 시달렸단다. 이런저런 철학·심리학 책들을 뒤졌고 종교인들의 조언도 받았지만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절친한 친구로부터 소개받은 관음선종 선방을 다니며 참선을 하다가 선방을 찾은 숭산 스님 법문 자리에서 문답을 통해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고 한다. “실체가 아닌 나와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진짜 나를 보게 된다. 본디 내 안에 있는 이 불성을 닦게 되면 마음이 맑아지고 세상도 밝아지게 된다.” 헛된 생각에 휘둘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볼 때 나와 세상에 얽힌 매듭과 관계가 풀린다는 말은 당시 무슨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큰 충격이었다. 대학시절 영어 교생으로 있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친 뒤 무심코 학교 잔디밭에 환하게 쏟아지는 빛을 보면서 불현듯 ‘스님´될 생각이 들었고 참선 수행에 깊숙이 빠져 들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통역사로 일하던 중 숭산 스님이 세운 관음선종의 본산인 미국 프로비던스 선원 겨울 안거를 나면서 결국 출가를 결심, 해인사에서 행자교육을 받고 사미계를 받았다. 이후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고 서울 화계사에서 2000년까지 수행 끝에 고국 헝가리로 돌아갔다고 한다. ●숭산스님의 ‘세계일화´ 이어 유럽에 한국불교 전파 한국불교가 좋아 한국 비구가 되었으니 한국에 머무는 게 바른 길이 아닐까. 비구계를 받은 ‘한국 스님´으로 꼬박꼬박 안거도 참여했지만 굳이 헝가리를 택한 이유를 들려 준다. “비구계를 받고 나서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출가 전의 나같은 속인들을 위해 길잡이를 할까, 아니면 헝가리를 터전삼아 유럽 포교에 나설까를 놓고 많이 고민했습니다.” 1999년 숭산 스님으로부터 외국인 스님으론 사실상 최고 경지인 지도법사 인가를 받고 이듬해 결국 고심 끝에 헝가리를 택했다.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리투아니아, 체코, 폴란드 등 발닿는 대로 유럽 각지를 돌며 포교에 나섰다고 한다. “고국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는다는 뜻도 있지요. 헝가리서 받은 내 몸과 교육, 집, 음식…. 이런 것들을 부처님 법(佛法)으로 갚자는 것이지요.” 헝가리에서 처음 3년간은 집시들을 위한 작은 선원에서 기거했다. 그러던 중 숭산 스님이 세운 관음선종 사찰들이 유독 유럽에만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스님과 주민들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원광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대웅전이며 크고 작은 선방, 탑, 요사채 등 한국 전통사찰 양식 그대로 지으려니 공사가 더디다. 2006년 선방 상량식을 갖고 식당이며 목욕탕 같은 우선 필요한 부대시설을 갖추었지만 주 건물인 대웅전과 명부전, 선방을 다 세워놓기엔 아직 갈길이 멀다. 한국불교를 온전히 담고 알리려면 그 그릇(원광사)부터 제대로 만들어야 한단다. 불교 십이인연(十二因緣)의 하나로 모든 사물이 무상(無常)·무아(無我)함을 모르고 갈애(渴愛)를 일으켜 윤회(輪廻)의 원인이 된다는 근본적 번뇌 무명(無明). 24년간의 무명에서 깨어나 한 줄기 빛과도 같은 깨침을 얻었다는 뜻이 담겼을까. 스님이 그토록 애착을 갖는 원광사의 이름 뜻이 궁금해졌다. 이름은 누가 지었을까. “관세음보살이 이름을 점지해 주셨다.”며 웃음을 피우더니 이내 정색을 한다. “헝가리를 비롯한 유럽 사람들은 한국불교와 일본, 티베트 불교의 차이점을 모르지요. 그 모르는 상태에서 제가 숭산 스님에게 받았던 것처럼 한국불교를 통한 깨침을 얻게 해주는 게 제 소명입니다.” 예상대로 그랬다. ‘모든 사람이 각자 갖고 있는 불성을 닦아 지혜와 자비, 보시행을 이뤄 세상을 밝히자.´ 본래의 빛, 불성을 찾아가는 공간이다. 출가의 원을 세운 지 어언 20여년.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의문과 무명의 번뇌는 말끔히 소멸한 것일까. 오래 전에 제 이름을 잊어 버렸다는 청안 스님. 그는 스님의 본분은 끊임없이 수행하는 것뿐이라고 거듭 말한다. “끊임없이 버리고 내려 놓는 것이지요. 오직 모를 뿐 그냥 할 뿐입니다.” 한국불교를 삶의 또 다른 길로 선택한 푸른 눈의 납자가 가꾸는 ‘세계일화´의 꽃은 소문대로 튼실했다. 끊임없이 ‘스타 스님´을 찾는 손 전화의 울림들이 인터뷰를 힘들게 한다. 결국 스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누구인가의 전화를 받고는 서둘러 일어서며 한 마디를 남긴다. ‘Just do it´. 글·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청안 스님은 ●1966년 헝가리 출생 ●1990년 참선 수행 시작 ●1991년 숭산 스님 법문 듣고 불교 귀의 ●1992년 부다페스트 엘테(Elte)대학 졸업 ●1993년 미국 프로비던스 선 센터서 동안거 중 출가 결심 ●1994년 한국 입국 ●1995년 해인사서 사미계 수지, 이후 2000년까지 화계사서 수행 ●1996년 통도사서 비구계 수지 ●1999년 숭산스님으로부터 지도법사 인가 ●2000년 헝가리 귀국, 관음선원 주지 취임, 유럽 각지 돌며 참선지도 ●현재 부다페스트 외곽에 원광사 건립 불사 중
  • 자연과 인간의 조화 현실속서 대안 모색

    자연과 인간의 조화 현실속서 대안 모색

    격월간 ‘녹색평론’이 100호(2008년 5·6월호)를 냈다. 창간호를 찍은 게 1991년 11월이다. 동구 사회주의권이 무너진 직후였고, 강경대의 죽음으로 촉발된 분신정국이 전개된 해였다. 창간사 제목은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였고, 첫 문장이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였다. 녹색평론은 민주와 반민주, 성장과 분배의 이분법적 대결 속에서 생명의 가치를 이야기한 국내 최초의 잡지였다.‘고르게 가난한 사회’ 혹은 ‘공생공락(共生共樂)의 가난’을 외치는 녹색평론의 목소리는 ‘대박신화’를 꿈꾸는 사회에서 나직하면서도 강렬했다. 녹색평론이 한국사회에서 일군 성과는 독특하다. 지역(대구)에서 출발해 전국성을 확보한 유일한 잡지이고, 전국 주요 도시에 독자모임을 가진 하나뿐인 잡지다. 제대로 된 홍보 한 번 없이 입소문에만 의지해 정기구독자 5000명의 잡지로 성장했고, 창간 당시만 해도 생소하던 ‘지속가능한 사회’란 말을 일반명사화했다.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웬델 베리, 사티시 쿠마르, 리 호이나키 등 녹색평론이 아니었다면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을 필자도 부지기수다. 김종철(61) 발행인은 “100호란 숫자에 특별한 감회는 없다.”고 했다.“100호 발행을 평가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녹색평론의 가치는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주변적인 언어일 뿐”이라고도 했다.4년 전 영남대 영문학과 교수직을 그만 둔 뒤 잡지 만드는 일에만 전력해온 그를 14일 서울 필운동 ‘녹색평론 자료실’에서 만났다. 그는 “17년 전 창간 때보다 더 절박하다.”고 했다.100호 발행을 기념한 독자모임 대상 전국 순회강연도 ‘시국강연회’라 이름 붙였다. ●“17년 전보다 더 절박하다” ▶‘시국강연회’를 열 만큼 다급한 상황인식은 무엇인가? -“미국 쇠고기 수입 논란을 보면서 일부러 시국강연회란 표현을 골랐다. 지금 정부는 1%를 위한 정부이지 99%를 위한 정부가 아니다. 다수 국민이 재협상을 원하는 데도 못하겠다는 정부의 태도는 미국에 재협상을 요구하는 것보다 국민의 뜻을 억누르는 게 쉽다고 생각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번 사태의 결말이 어떻게 나느냐에 민주주의의 쇠퇴와 진전 여부가 달려 있다고 본다.” ▶쇠고기 협상 전에 발간된 지난해 11월 잡지(97호)에서 이미 광우병 논란을 예고하는 듯한 글(‘공생공락의 가난을 위하여’)을 쓴 바 있다. -“초식동물인 소에게 육골분이라는 이름으로 육식을 강요한 결과 광우병이라는 전례 없는 괴질이 발생했고, 광우병이야말로 이윤추구를 위해 생명을 무자비하게 다루는 오늘날 인류의 위기를 상징한다고 썼다. 사실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놓고 벌어지는 지금의 논란은 문제의 일부분만을 보는 것이다. 경제논리 때문에 벌어지는 생명에 대한 폭력이 진짜 원인이다.” ▶창간 때와 지금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달라졌나? -“동구 사회주의권 몰락 후 진보 지식인들이 사상적으로 방황하는 걸 보면서 보수든 진보든 성장논리로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새로운 사상논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녹색평론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이 왜 중요한가를 말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시작한 잡지다. 지금은 유사 매체가 많이 생겼고, 환경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없다. 이젠 당위적 논리를 되풀이하기보다 현실 속에서 실천적 변화를 도모해야 할 때다.” ▶원론적·영성적 성격의 글이 많았던 초기에 비해 첨예한 현안을 다루는 글이 많아진 것도 그래서인가? -“맞다. 오래된 독자일수록 영성적인 글을 원하는 게 사실이다. 현실 비판적 글이 많아지면서 구독을 중단하는 독자가 생기고 있지만, 지식인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안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녹색평론을 환경 또는 생태잡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녹색평론은 정론지를 지향한다. 정론지는 우리 삶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는 정치·사회·경제적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실천” ▶100호를 발행하는 동안 어떤 점이 특히 힘들었나? -“필자 기근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녹색적 관점에서 글을 쓸 수 있는 지식인이 여전히 드물다. 재정 문제도 심각하다. 너무 힘들어 휴간이나 폐간도 많이 생각했다. 오직 독자들 힘으로 버텼다. 중앙집중화된 사회에서 지역에 터를 둔 잡지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높디높은 장벽이었다. 조만간 녹색평론 사무실을 서울로 옮길 계획이다. 나도 17년 만에 서울에 항복한 셈이다.” ▶김 발행인을 근본주의자로, 녹색평론의 대안을 현실적합성 없는 주장으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칭찬으로 받아들인다. 어정쩡하게 생각해서는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한편으론 녹색평론처럼 현실적인 잡지도 없다. 자연이 사라지고 농촌이 붕괴되면 생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줄곧 해왔다. 그걸 비현실적이라고 하면 도대체 어떤 이야기가 현실적인가.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니까 근본주의자라고 하는 것 같다.” ▶향후 녹색평론이 나아갈 방향은? -“한 마디로 실천이다. 말과 이론만으론 이제 한계가 있다. 삶 속에서 대안 시스템을 실험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 절실하다. 지역통화운동부터 강화하려고 한다. 지역통화는 현재의 금융자본 지배질서에 의미 있는 틈새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수단이다. 실천의 연대를 위해 녹색평론을 중국과 일본의 뜻 맞는 사람들과 함께 펴내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독자모임도 독자들끼리의 단순 친목 모임이 아닌 무언가를 함께 실천하는 연대체로 바꿔볼 생각이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中 전위작가 아이웨이웨이 국내 첫선

    中 전위작가 아이웨이웨이 국내 첫선

    새둥지 모양의 2008 베이징올림픽 주경기장을 디자인해 더 유명해진 중국의 대표적 전위작가 아이웨이웨이(艾未未·51). 그의 작품전이 국내 처음으로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다. 새달 1일까지 이어지는 전시에는 1990년대부터 지난해까지 그의 주요 대표작 14점이 나왔다. 작품 수는 적지만, 아이웨이웨이의 스케일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기엔 충분하다. 개인전 참석차 최근 방한한 작가는 “중국에서는 올림픽 주경기장이 자금성, 만리장성 등과 나란히 시대적 건축물로 떠올랐다.”고 확신하며 “중국이 이를 계기로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상을 갖고 나아가 문화적으로 진보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시에는 2006년 6월 24시간 동안 1시간마다 변화하는 주경기장의 모습을 담은 사진 24장도 전시된다. 건축가, 전시기획자이기도 한 작가는 이미 만들어진 오브제를 활용해 전혀 새로운 형태의 전복적 의미를 끄집어내는 작업을 한다. 예컨대 도시화 과정에서 철거된 건물의 문, 가구 등을 작품화하는 방식이다.2007년 독일 카셀 도큐멘터(현대미술 전시회)에서는 명·청 시대의 의자 1001개와 중국인 1001명을 동원한 대형 프로젝트-‘동화(Fairytale)’-로 뜨겁게 주목받기도 했다. 작가는 암울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중국 현대 시인 아이칭(艾靑). 문화대혁명 때 지식인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가족 모두 신장으로 쫓겨나 17년 동안이나 강제노역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이번 전시에는 화제작 ‘동화’를 의자 수를 100개로 줄여 내놓았다. 톈안먼(天安門)광장과 백악관 등을 배경으로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고 찍은 ‘원근법 연구’도 꼭 챙겨봄 직한 사진작품이다.(02)734-6111.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지도층이 선비정신 계승을”

    “그 옛날 선비가 가장 먼저 자기를 닦고 솔선수범했듯이 지식인과 지도층이 수신제가(修身齊家)하는 것이 선비정신을 이어받는 길입니다.” 김병일(64) 전 기획예산처 장관이 선비정신 전도사로 나섰다. 김 전 장관은 7일 퇴계학진흥협의회가 서울 강남구 대치동 샹제리제 웨딩홀에서 개최한 월례 조찬모임에서 ‘21세기 한국사회와 선비정신’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선진사회의 덕목으로서 ‘선비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佛 저명 철학자 앙드레 글뤽스만 父子 인터뷰

    佛 저명 철학자 앙드레 글뤽스만 父子 인터뷰

    |파리 이종수특파원|68혁명 40주년을 맞아 그 의미를 되새기는 열기가 어느 해보다 뜨겁다. 최근 발간된 신간만 60여종에 이른다. 그 가운데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앙드레 글뤽스만 부자(父子)가 대담 형식으로 정리한 ‘사르코지에게 설명한 68혁명’(드노엘 출간)이 눈길을 끈다. 대표적 좌파 지식인이었던 글뤽스만은 지난해 사르코지 여당 후보를 공개 지원해 논쟁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출간 직후인 지난달 초 파리 10구 포부르 푸아소니에르 62번지 글뤽스만의 자택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인터뷰는 1시간 30분여 진행됐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43년의 터울을 둔 부자는 68혁명을 놓고 생각이 겹치기도 하고 달라지기도 했다. ●“사르코지가 68혁명을 왜곡…” 출간 배경이 궁금했다. 말문을 연 것은 아들 라파엘. 그는 “우리 집은 68혁명 뒤 권위주의가 없어진 가정이니까 내가 먼저 말하겠다.(웃음)”고 했다. 아들 (라파엘, 이하 아들) 지난해 여당 유세 현장에 참석했는데 사르코지 후보가 “68혁명의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고 도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몹시 거북했다. 순간 68세대인 아버지를 쳐다 보았다. 예상과 달리 웃고 있었다. 유세장을 나온 뒤 “왜 아까 웃고 있었어요?”라고 물었다. 아버지가 “사르코지 말은 당시 대학생운동의 리더였던 다니엘 콘-벤디트가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모순이어서 그랬다.”고 말했다. 그 뒤에도 질문이 이어져 아예 책으로 만들게 됐다. 아버지(앙드레, 이하 아버지) 책 제목 그대로 사르코지에게 68혁명을 설명해 주고 싶었다. 그가 68혁명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68혁명 이후 상대주의가 난무하고 도덕의식이 무너졌다는 그의 진단은 맞다. 하지만 핵심을 비켜갔다.68세대의 본질적 실수는 ‘교조주의적 마르크시즘’에 빠진 것이다. 사르코지 후보는 이를 알고도 정략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나중에 한 대담에서 본인도 ‘정략적 이용’이라고 시인했다. ‘정치적 책략’이었다는 말에 담긴 의미를 물었다. 아버지 당시 사르코지가 지지율이 높았다. 그래서 좌파는 물론 중도·극좌파 후보들이 ‘반(反) 사르코지 전선’을 형성했다. 그러자 사르코지가 그들의 ‘정신적 공통분모’인 68혁명을 건드린 것이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사회당 세골렌 루아얄 후보가 처음엔 ‘무관심’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30분 뒤 사르코지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말려들었다. 처음처럼 대응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러자 아들이 끼어 들며 반론을 제기했다. 아들 전략적 연설이었다는 분석에는 동의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사르코지의 도발은 좌·우파 양 진영에 남아 있는 보수주의를 겨냥한 비판이었다. 그는 ‘프랑스 병’의 핵심을 정체성 상실로 본 뒤 그런 혼돈의 책임을 묻기 위해 68혁명이라는 ‘허수아비’를 세운 것이다. 이민자 출신에 이혼 경력이 있는 사르코지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68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68혁명을 청산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자해행위’인데 이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프랑스 68혁명만이 공산주의 비판” 고정된 이념에 얽매이기보다는 탄력적 사유를 강조한 두 사람에게 68혁명의 본질은 어떻게 비칠까? 아버지 두 가지 의미에서의 ‘단절’이다. 하나는 프랑스의 전통적 정서, 특히 농촌에 뿌리를 내렸던 평온함을 중시하는 전통과 단절한 게 68혁명이었다. 그래서 ‘68의 아이들’은 뿌리가 뽑히고, 불확실해하고 미래에 대해서 늘 걱정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른 하나는 200년 동안 이어온 노동자·공산주의 중심 사상과의 단절이다. 당시 좌파 가운데 최대 정당인 공산당은 노동자를 ‘대안 사회’ 혹은 혁명을 담보할 주역으로 껴안고 있었다. 소련을 추종해야 한다는 생각도 강했다.68세대는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 아들 하나 더 추가해야 한다.68혁명은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이면서 전체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점이 프랑스의 독창성이다. 아버지인 앙드레 글뤽스만은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혁명의 가운데에 있었다. 그만의 경험이 담긴 ‘육성’을 들려 달라고 했다. 아버지 소르본 광장에 학생들이 운집, 연좌 시위를 하면서 치열한 논쟁을 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경찰이 겹겹이 에워쌌다. 그곳에 레지스탕스이자 공산주의 시인 루이 아라공이 찾아 왔다. 그는 “나는 공산당과 노선을 달리한다. 여러분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콘-벤디트가 “당신이 왜 스탈린을 칭송했는지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 말에 동의하겠다.”고 말했다. 대답을 못하고 돌아가는 아라공을 향해 콘-벤디트가 “당신의 흰 머리 위에 피가 묻어 있다.”고 확성기로 말했다. 이 장면은 당시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이 공개적으로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라파엘이 말한) 독일·이탈리아 등 유럽이나 일본의 68혁명과 가장 다른 프랑스만의 특징이었다. ●68혁명 이후 달라진 것들 68혁명이 이후 프랑스에 가져온 구체적 변화와 그에 대한 해석에서 두 사람은 조금 입장이 달랐다. 특히 라파엘은 68세대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아들 68혁명은 ‘수직의 세계’를 수평으로 바꾸었다. 문화·관습은 물론 사람과의 관계가 완전히 바뀌었다. 낙태도 허용됐고 여성이 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중·고교도 남녀 공학이 됐지. 아들 그러나 프랑스 정치는 여전히 수직의 잔재가 남아 있다. 정치에서는 68혁명의 정신이 스며들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나는 68세대를 비난한다. 프랑스는 여전히 중앙집권적이고 대통령에 집중돼 있다.. 이런 면에서 68세대라고 주장하려면 더 노력해야 한다. 아버지 그래도 사르코지가 대통령이 된 뒤 이민자 출신을 장관으로 임명하고 좌파를 등용한 것이 얼마나 열린 변화인가? 아들 아직 시작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 정국은 엘리트를 중시하는 전통적 의미의 정치집단과 사르코지가 갈등하는 형국이다. 이윽고 화제가 ‘68혁명의 현대적 의미’로 넘어 왔다. 아버지 앙드레 글뤽스만은 좌·우를 떠나서 인권과 자기 성찰, 유럽공동체 정신 등을 통해 민주주의를 튼실히 하면서 68혁명을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아들은 ‘68혁명의 재해석’을 강조했다. 아버지 68정신의 요체는 ‘감히 교수와 다르게 생각하기’다. 좌·우파를 아울러 한 진영에 종속되기보다는 항상 자신과 주위를 돌아 보면서 비판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내가 58년 부다페스트 사태 때 소련을 비판했다가 공산당에서 출당을 당한 것이나 70년대에 ‘배신자’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소련의 재야 인사들을 지지한 것도 그런 이유다. 아들 그러면 지금은 “우리는 티베트인”이라고 말해야겠다. 아버지 그렇다. 중국이 강국이라고 눈치를 봐선 안 된다. 아들 그런 의미에서 68혁명 지도자 가운데 한 명도 제도권 정치의 핵심에 들어간 사람이 없는 것도 흥미롭다. 다니엘이 속한 녹색당도 68년 이후에 생긴 당이어서 제도권 정당으로 보기 어렵고 베르나르 쿠슈네르 외무장관도 사회당원이었지만 당 내에서는 늘 변방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68정신은 늘 프랑스의 전통적 중심부와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두 부자는 68혁명 리더들이 각자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았다. 아들 그건 다행아닌가. 혁명의 리더들이 한 길을 걷지 않은 것은 진영 구분짓기를 끝냈다는 의미다. 아버지 말대로 ‘스스로 운명 선택하기’를 실천했다는 거다. 꼭 좌파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틀지워진 고정관념이다. 또 68세대가 깨고 싶었던 ‘벽’이 아닐까? 다시 물었다. 좌파 지식인으로 알려진 앙드레 글뤽스만이 지난해 사르코지를 지지한 것도 같은 맥락이냐고? 아버지 그렇다. 대선 후보 가운데 유일하게 외교정책의 핵심으로 인권을 부활하겠다고 말한 이가 사르코지였다. 좌파의 비판이 예상됐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vie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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