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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방에 포탄 터지는 소리… 지뢰 폭발로 잃은 다정했던 친구 잊지 못해”

    “사방에 포탄 터지는 소리… 지뢰 폭발로 잃은 다정했던 친구 잊지 못해”

    일시 1999년 5월 16일 장소 인천광역시 남구 숭의동 부산식당 대담 유세원(북구지대 감찰부장) 이경종(인천학생6·25 참전관 설립자) 이규원 치과원장 (이경종 큰아들)1950년 6월 25일 6·25 사변 이전 나는 화수동 281번지에서 살고 있었다. 인천에 인민군이 들어와서 학생이나 젊은이들을 의용군(義勇軍)으로 막 잡아갈 때였다. 그때 나도 신변의 위험을 느껴 화수동에서 친구들과 지하에 숨어 지내게 되었다. 이렇게 인공(人共/인민공화국의 약자)치하때 어려웠던 지하 땅굴 생활로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친구들은 ‘유문길·사철순·문호영·이용운·허용환·김유득·이희중·신현남·정명돌·노영남·주억재·이상순·유세원’ 이었다. 이들이 후일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로 활동한 핵심 멤버들이었다. 1950년 9월 15일 어느 날 하루는 포탄 터지는 요란한 소리가 여기 저기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위해 인천 앞바다에서 쏘아대는 함포탄이 인천 시내에 떨어지면서 터지는 소리였다. 그날이 1950년 9월 15일이었다. 이날 UN군과 국군이 인천에 들어와서 인민군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 북구지대 우리들은 인민군 치하에서 너무 고생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호국활동을 하게 되었고, 인천학도의용대가 창설되어 북구지대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도 다 저무는 12월이 되면서 우리 인천학도의용대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단체로 남하(南下)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것이었다.1950년 12월 18일 남하(南下) 1950년 12월 18일 남하 행진에 참여한 우리들은 안양, 수원을 거쳐서 기차 화물차 지붕에 올라타서 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밀양을 지나 마산에 도착 하였다. 마산에 도착해서는 어느 민가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는 가지고 내려왔던 여비도 다 떨어졌었다. 그런데 “해병대모집이 있다!”라는 소식이 있는 것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그 해병대 모집에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들은 해병대 모집장소에 찾아갔다. 1951년 1월 3일 해병대 6기에 지원 해병대 모집 장소는 마산국민학교였다. 그때 시험관들은 우리들을 운동장에 쭉 세우더니 10명씩 조를 짜서 운동장을 한 바퀴 돌게 하고는 1등부터 3등까지만 뽑고 나머지는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때 간단한 학과 시험도 있었다. 이날이 1951년 1월 3일쯤이었으며 그때 나는 합격 되어 마산에서 진해로 걸어가 진해경화국민학교에 들어갔다. 1951년 1월 24일에 우리들은 정식으로 해병대 6기 입대식을 하였다. 1951년 2월 10일이 되어 우리들 6기생 전 훈련과정을 마쳤으며 6기생 중 반수는 보병으로 가고, 그 당시 처음으로 해병대에 생긴 포병과로 반이 가게 되었다. 이때 나는 포병과로 배치받아 당시 진해에 있던 육군포병학교로 포병교육을 또 받게 되었다. 이때 포병학교를 마친 나는 다시 미(美)해병대에서 또 포병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후 나는 강원도 최전방으로 배치받았다. 처음 우리 해병대 포부대가 올라가 전투한 곳이 김일성고지와 스탈린고지였다. 그 당시 이 2 고지는 적의 수중에 있었는데 이때 우리 해병대가 뺏는 큰 전과를 올렸다. 1956년 9월 21일에 가서야 만 5년 8개월 만에 나의 파란만장한 군 생활을 마감하고 명예제대를 하게 되었다. 6·25 전사 인천학생 윤운철 1933년생으로 인천송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영화중학교(현재 대건중고교) 4학년생으로 마산에서 해병6기 입대하여 1951년 7월 17일 입대한지 6개월 만에 17세로 전사하였다.전사한 동네 친구 윤운철을 추모하며 인천에서부터 같이 학도의용대원으로 내려와 6기생으로 같이 입대한 윤운철은 입대한지 6개월 만에 전사했다. 당시 나는 전포대가 돼서 포를 쏘는 직책이고 윤운철은 포를 수호하기 위해 포 전면에서 보초를 서면서 포를 지키는 임무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임무를 한 윤운철은 척후 임무를 띠고 전면 숲속으로 가다가 대인지뢰를 잘못 밟고 그 지뢰 폭발로 전사하였다. 윤운철은 성격이 유하고 온순하며 남하고 이야기할 때에는 말을 가려서 하는 아주 다정다감하고 배려 많은 친구였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런 온순한 사람이 왜 먼저 하늘나라로 가야 했는지 안타까운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다. 부디 이경종 이규원 2부자(父子)께서 하시는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역사 발굴사업이 유종의 미를 거두기를 바란다. 글 사진 제공 :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관유세원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감찰부장 1933년 8월 5일 인천 동구 화수동 출생 1950년 6월 25일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감찰부장(용산중학교 5학년생) 1951년 1월 24일 해병대 6기로 자원입대 군번 : 9210591 병과 : 해병대 포병 1956년 9월 21일 만기 명예 제대
  • 자택 현관에 부비트랩 설치한 60대 주인, 실수로 총탄맞고 숨져

    자택 현관에 부비트랩 설치한 60대 주인, 실수로 총탄맞고 숨져

    미국의 한 60대 남성이 자신이 직접 설치한 부비트랩으로 인해 숨지는 황당한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 1일(현지시간) 미국 AP통신 등 외신은 메인주 반 부렌에 사는 로널드 시르(65)가 자택 현관 앞에 설치한 총기에 맞아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주로 전쟁터에 많이 사용되는 부비트랩은 건드리면 수류탄·지뢰 등이 폭발하도록 만들어진 장치를 말한다. 보도에 따르면 시르는 지난달 28일 추수감사절 저녁 911에 총상을 입었다는 신고전화를 했다. 이에 곧바로 구조대와 경찰이 출동해 시르를 병원으로 후송했으나 결국 숨졌다. 놀라운 사실은 경찰 조사 과정에서 벌어졌다. 누군가 건드리면 권총이 발사되도록 하는 부비트랩이 현관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 또한 집 곳곳에 이와 비슷한 사제 장치들이 발견돼 폭탄물 해체팀이 출동하기도 했다. 현지 경찰은 "그가 어떤 경위로 이같은 부비트랩을 설치했는지는 명확치 않지만 침입자를 막기위한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이웃들이 사망한 그를 추모할 정도로 주위 평판을 좋은 편"이라고 밝혔다. 한편 미국에서 도둑 등 침입자를 막기위해 부비트랩을 설치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간혹 이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지난해 9월에도 일리노이주의 한 남성이 이웃집 창고를 열었다가 권총이 발사돼 숨졌다. 당시 이웃집 주인인 윌리엄 와스문드(48)는 1급살인 등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軍 공병부대 지뢰 폭발로 장병 2명 사상

    軍 공병부대 지뢰 폭발로 장병 2명 사상

    경기도 파주시 공병 훈련장에서 알 수 없는 지뢰 폭발이 발생해 장교 1명이 숨지고 병사 1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25일 육군에 따르면 이날 오전 11시 11분쯤 파주시 무건리 공병부대 폭파 훈련장에서 갑자기 지뢰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인근에 있던 A(25) 중위가 크게 다쳐 심정지 상태에서 헬기로 이송됐으나 결국 병원에서 숨졌다. B(21) 일병도 얼굴 등을 다쳐 이송됐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가 난 훈련장에서는 지난주까지 공병부대의 지뢰 설치 훈련이 진행됐던 것으로 전해졌다. 훈련이 끝난 후 공병부대가 굴착기를 이용해 훈련장 바닥을 평탄화하는 과정에서 굴착기가 의도치 않게 폭발물을 건드렸을 가능성이 나온다. 군 당국은 굴착기가 폭발물을 건드리며 파편이 튀었고, 주변에 있던 장병에게 피해를 입혔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현재 군 당국은 해당 폭발물을 훈련 간 설치해 놓은 대전차지뢰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지뢰가 폭발하게 된 원인과 장병이 위험지역 인근에 있었던 점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육군 관계자는 “다양한 사고 원인을 놓고 조사 중에 있다”며 “정확한 원인은 헌병 조사가 끝나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와우! 과학] 로봇 태우고 전장에…21세기형 무인 전투차량 립소우 M5 RCV

    [와우! 과학] 로봇 태우고 전장에…21세기형 무인 전투차량 립소우 M5 RCV

    무인기와 로봇이 전쟁을 수행하는 21세기 전쟁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인기의 경우 이미 정찰은 물론 무장을 장착하고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지상에서도 폭탄 및 지뢰 제거같이 위험한 임무에 로봇을 투입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미국 등 강대국들은 지상에서 사람 대신 전투를 수행할 전투 로봇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구체적으로 미 육군은 2028년까지 소형, 중형, 대형 로봇 전투차량(RCV, Robotic Combat Vehicle)을 개발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미국의 대표적인 방산 업체 가운데 하나인 텍스트론 시스템스(Textron Systems)는 올해 초 소형 궤도 차량 개발 제조사인 호우 앤 호우(Howe & Howe)를 인수했다. 이 회사는 리얼리티 쇼에 출연하면서 인지도는 있었지만, 사실 무기 시장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텍스트론 측은 이 회사의 소형 궤도 차량인 립소우 (Ripsaw)가 중소형 RCV 개발에 적합하다고 보고 이를 인수했다. 텍스트론은 상당히 빠르게 프로토타입을 제작해 최근 이를 공개했다.립소우 M5 RCV는(사진) 기존의 립소우 차량을 원격 조종이 가능한 무인 차량으로 개조한 것으로 차체 상부에 다양한 임무 모듈을 장착할 수 있다. 먼저 공개된 모듈은 기관포를 장착한 터렛으로 일반적인 전투 임무에 적합하다. 텍스트론은 FLIR 시스템과 협력해 소형 정찰 드론인 스카이레이더(SkyRaider)를 장착할 수 있는 옵션도 같이 제공할 예정이다. 이외에도 립소우 M5는 기관총과 재블린 대전차 미사일이 탑재된 무인 포탑을 탑재하고 다른 정찰용 모듈을 장착할 수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립소우 M5 차체 앞쪽에 소형 로봇을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로봇 전투차량에서 더 작은 로봇이 나오는 것인데, 덕분에 위험한 급조 폭발물(IED)을 안전한 거리에서 처리할 수 있다. 로봇 전투 차량이 실전에 배치될 경우 폭발물 처리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위험한 임무에 사람 대신 투입하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립소우 M5가 다른 경쟁자를 물리치고 미 육군에 정식 채택될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의 기술 발전을 생각하면 로봇 전투 차량의 실전 배치는 시간 문제로 생각된다. 비록 가까운 미래에 군인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전투 로봇의 숫자도 점점 증가할 것이다. 고든 정 칼럼니스트 jjy0501@naver.com
  • 보훈처 오늘 하재헌 중사 ‘공상’ 판정 재심의 결과 발표

    보훈처 오늘 하재헌 중사 ‘공상’ 판정 재심의 결과 발표

    2015년 비무장지대(DMZ)에서 수색 작전 중에 북한군이 매설한 목함지뢰가 터져 두 다리를 잃은 하재헌 예비역 중사에게 ‘전상’이 아닌 ‘공상’ 판정을 해 논란을 초래한 국가보훈처가 2일 재심의 결과를 발표한다. 박삼득 보훈처장은 이날 오후 5시 30분 서울 용산구 서울지방보훈청에서 하재헌 중사에 대한 재심의 결과를 발표하고 취재진과 질의응답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보훈처는 밝혔다. 국가유공자법(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전상’이란 전투 또는 이에 준하는 직무수행 중 부상을 당하는 경우를 가리키고, ‘공상’이란 국가의 수호·안전보장 또는 국민의 생명·재산 보호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직무수행이나 교육훈련 중에 다치는 경우를 뜻한다. 하재헌 중사는 2015년 8월 서부전선 비무장지대에서 수색 작전 중에 북한군이 수색로 통문 인근에 매설한 목함지뢰가 터져 두 다리를 잃었다. 부상 이후 국군의무사령부 소속으로 근무했으며 “조정 선수로 패럴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이 목표”라며 지난 1월 31일 전역했다. 육군은 하재헌 중사가 전역할 당시 ‘적이 설치한 위험물에 의해 상이를 입거나 적이 설치한 위험물 제거 작업 중 상이를 입은 사람’을 전상자로 규정한다는 내부 규정에 따라 전상 판정을 했다. 하지만 보훈처의 보훈심사위원회는 지난 8월 7일 하재헌 중사에 대해 공상 판정을 하고 이 결정을 같은 달(지난 8월) 23일 하재헌 중사에게 통보했다.현행 국가유공자법 시행령에는 ‘국가유공자 요건의 기준 및 범위’가 명시돼 있다. 보훈처는 “천안함 피격 사건은 국가유공자법 시행령의 ‘전투 또는 이와 관련된 행위 중 상이’를 기준으로 판단했고, 목함지뢰 폭발 사건은 국가유공자법 시행령의 ‘경계·수색·매복·정찰·첩보활동 등의 직무수행 중 상이’를 기준으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내용의 보훈처 결정이 언론에 보도되고 논란이 일자 문재인 대통령은 “법조문을 탄력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는지 살펴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고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이 지난달 17일 밝힌 적이 있다. 하재헌 중사는 지난달 4일 보훈처에 재심을 신청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하재헌 중사 ‘공상’ 판정 논란…보훈처 “곧 재심의 진행”

    하재헌 중사 ‘공상’ 판정 논란…보훈처 “곧 재심의 진행”

    2015년 비무장지대(DMZ)에서 수색 작전 중에 북한군이 매설한 목함지뢰가 터져 두 다리를 잃은 하재헌 예비역 중사에게 ‘전상’이 아닌 ‘공상’ 판정을 한 국가보훈처가 재심의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18일 밝혔다. 국가유공자법(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전상’이란 전투 또는 이에 준하는 직무수행 중 부상을 당하는 경우를 가리키고, ‘공상’이란 국가의 수호·안전보장 또는 국민의 생명·재산 보호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직무수행이나 교육훈련 중에 다치는 경우를 뜻한다. 김대원 보훈처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을 통해 “보훈처는 하재헌 예비역 중사의 이의신청에 대해 곧 재심의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라면서 “재심의 과정에서는 기존 국가유공자법 시행령을 탄력적으로 검토해 심도 있게 논의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하재헌 중사는 2015년 8월 서부전선 비무장지대에서 수색 작전 중에 북한군이 수색로 통문 인근에 매설한 목함지뢰가 터져 두 다리를 잃었다. 부상 이후 국군의무사령부 소속으로 근무했으며 “조정 선수로 패럴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이 목표”라며 지난 1월 31일 전역했다. 육군은 하재헌 중사가 전역할 당시 ‘적이 설치한 위험물에 의해 상이를 입거나 적이 설치한 위험물 제거 작업 중 상이를 입은 사람’을 전상자로 규정한다는 내부 규정에 따라 전상 판정을 했다. 하지만 보훈처의 보훈심사위원회는 지난달 7일 하재헌 중사에 대해 공상 판정을 하고 이 결정을 같은 달 23일 하재헌 중사에게 통보했다. 현행 국가유공자법 시행령에는 ‘국가유공자 요건의 기준 및 범위’가 명시돼 있다. 보훈처는 “천안함 피격 사건은 국가유공자법 시행령의 ‘전투 또는 이와 관련된 행위 중 상이’를 기준으로 판단했고, 목함지뢰 폭발 사건은 국가유공자법 시행령의 ‘경계·수색·매복·정찰·첩보활동 등의 직무수행 중 상이’를 기준으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내용의 보훈처 결정이 언론에 보도되고 논란이 일자 문재인 대통령은 “법조문을 탄력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는지 살펴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고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이 전날 밝혔다. 하재헌 중사는 지난 4일 보훈처에 재심을 신청했다. 김대원 대변인은 “법률 해석 논란이 재발하지 않도록 관련 법령 개정도 종합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이슬람국가(IS), 황소에 원격조종 폭탄 실은 신무기로 테러

    이슬람국가(IS), 황소에 원격조종 폭탄 실은 신무기로 테러

    수니파 테러조직 이슬람국가(IS)가 소를 이용한 새로운 무기로 테러를 저질렀다. 미국 뉴욕포스트 등 해외 언론의 3일 보도에 따르면 IS는 이라크 현지시간으로 지난 1일, 디얄라 주에서 황소 두 마리에 폭탄을 실어 적진으로 보낸 뒤, 원격 조종 리모콘을 이용해 폭탄을 터뜨리는 수법으로 테러를 저질렀다. 보도에 따르면 이슬람국가는 벨트를 이용해 소의 허리 짐칸을 연결했고, 짐칸에 폭발물을 숨겨두었다. 이라크 군인이 주둔하는 장소로 소를 가게 한 뒤 이를 본 군인이 공격하려 하는 순간 폭발물을 터뜨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라크 측은 이슬람국가의 이번 테러로 민간인 1명이 사망했다고 밝혔으며 부상자 수는 공개되지 않았다. 사망한 민간인은 폭발 당시 군사주둔지 옆을 지나던 행인으로 알려졌다. 폭스뉴스에 따르면 이번 테러가 발생한 디얄라주는 쿠르드족과 바그다드에서 동북쪽으로 약 60㎞ 떨어진 지역으로, 쿠르드족과 수니파 및 시아파 등이 섞여 존재하는 곳이자 각 종파간 소유권 분쟁이 격렬한 지역이다. 전문가들은 이슬람국가가 시리아정부군 및 연합군의 공격으로 점차 힘을 잃어가자, 소와 원격폭탄을 결합한 새로운 테러 전술을 이용해 과거 세력을 되찾으려는 것으로 분석했다. 테러와 전쟁에 동물이 이용돼 희생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3년 11월, 이라크 이슬람 시아파 민병대와 미국 주도의 연합군이 교전을 거읍하던 당시, 바그다드 인근에서 폭탄을 가득 실은 당나귀 수레가 폭발에 이라크인 10명이 사망하고 20명이 부상했다.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에는 양이 지뢰 제거용으로 투입됐고, 러시아는 돌고래를 해양 기뢰 탐지에 이용하기도 했다. 사진=123rf.com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백종우의 마음의 의학] 트라우마에 대한 감수성

    [백종우의 마음의 의학] 트라우마에 대한 감수성

    ‘미투’ 운동의 영향으로 더 자주 경험하지만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에는 성폭력, 성희롱, 강력범죄, 재난 등의 다양한 폭력과 사고 피해자가 적지 않게 찾아온다. 이분들이 겪은 것을 함께 보며 듣는 일은 때로 치료자에게도 매우 고통스럽다. 세상은 안전한지, 사람을 믿어도 될지 기본적인 모든 믿음이 부정된다. 그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게 바로 ‘트라우마’다. 때로 이들은 진료실에 무덤덤한 표정으로 들어온다. 지나친 과각성의 결과이다. 하지만 트라우마의 기억이 자극되면 폭발적인 감정반응을 드러낸다. 이들의 기억은 절대 완전하지 않다. 완전하다면 그것은 트라우마가 아니다. 깨진 기억의 조각이 온몸을 돌아다니며 비수처럼 생살을 찌르는 것이 트라우마의 고통이다. 이로 인해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무릎에 자해해 몇 년간 치마를 한 번도 입지 못했다는 재난생존자도 있었다. 수사관으로서는 ‘저렇게 중요한 일을 어떻게 기억 못하지’라고 의심할 수 있지만 조각조각 깨진 기억은 트라우마의 본질에 가깝다. 그래서 치료자는 첫 면담에서 환자에게 동의를 얻어 가며 한 걸음씩 트라우마에 다가가야 한다. 맹장염을 진단하는 의사가 맹장이 있는 우측하복부부터 만져서는 통증에 굳어버린 복부를 진찰하기 어렵다. 좌측상복부부터 천천히 세심하게 진찰해야 가장 아픈 곳을 알 수 있다. 이들에게 아직 우리 사회는 지뢰투성이다. 2, 3차 가해가 빈발한다.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위치의 사람이 기계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를 중립적으로 대해 상처를 준다. 용서를 못 하는 피해자를 죄인으로 만든다. 정당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피해자를 한몫 잡으려는 사람으로 여기기도 한다. 의지가 약한 사람, 이상한 사람, 조직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람이라며 낙인을 찍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가 치유를 위해 정의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치료자는 더 적극적으로 정의의 편에 설 수 있어야 한다. 때론 참혹한 현실에서 행복을 위한 차선을 선택할 때엔 그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지지해야 한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치유를 위해서는 트라우마의 기억을 ‘노출’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외상 후 성장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마저 때론 사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가지고 사는 방법을 배운 사람을 보면서 치료자도 배우게 된다.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디게 하는 힘은 주변의 따뜻한 공감의 시선이다. 미국 등에서는 최근 트라우마 기반 케어(trauma informed care)를 의료와 공공기관의 모든 서비스에 도입하려는 노력이 한창이다. 관료화되기 쉬운 거대조직이 트라우마에 대한 감수성을 갖고자 하는 노력이다. 이 과정에서 트라우마에서 회복된 동료상담가가 다른 아픈 사람에게 누구보다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고성장의 시대 속도에 밀려 뒷전이 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되찾아 우리 사회가 좀더 살맛나는 곳이 되기를 기대한다.
  • “땅굴 속에서 숨어 생활… 지뢰 폭발로 전사한 친구 잊지 못해”

    “땅굴 속에서 숨어 생활… 지뢰 폭발로 전사한 친구 잊지 못해”

    노영남 인터뷰 일시 1998년 2월 16일 장소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규원 치과 3층) 대담 이경종(인천학생 6·25 참전관 설립자) 이규원(치과원장 / 이경종 큰아들)6·25 사변과 우리 가족의 수난 내가 인천송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인천공업중학교 5학년 재학 중일 때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 당시 내가 살던 동네는 동구 화수동이었으며 그때 우리 형님이 인천경찰서 사찰계 형사로 있었는데 6·25사변이 일어나고 인천이 북한 공산 괴뢰군에 점령당했을 때 우리 집은 경찰 가족으로 감시 대상이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 나하고 아래 윗집에 붙어서 살았던 그림 잘 그리는 인천중학교 5학년인 이흥주와 같이 강화도로 피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화도도 지방 빨갱이들의 득세로 그곳에서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인천 집으로 돌아와 그때 친구들이 파 놓은 땅굴 속에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땅굴 속에서 9·15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복될 때까지 무사히 넘기고 햇빛을 보게 되었다.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으로부터 해방된 나와 친구들(임경선, 이희중, 노영남, 이광용, 이덕준, 이기한 등)은 인천 동구 지역에서 인천학도치안대(후에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지대장 : 류문길)를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가 인천축현국민학교에서 남쪽으로 출발할 때 같이 따라서 남하(南下)하였다. 인천학도의용대를 따라서 남하 이때 안양을 거쳐서 수원까지 걸어갔다. 수원에서부터는 각자 개인행동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였으며 그때 나는 친구들(임경선, 이희중, 이광용, 이덕준, 이기한 등)과 기차 곳간 차 지붕 위로 올라앉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몇 날 며칠을 고생하며 내려가다 들으니까 우리들의 마지막 행선지가 경상남도 아래 끝 통영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여러 날을 곳간차 위에서만 추위를 견디려니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와 친구들은 경상북도 청도역까지 와서는 일단 곳간차에서 내려 남쪽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걸으면서 통영 가는 길을 물으니까 통영으로 직접 가는 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청도에서 부산으로 내려간 대원들도 있었다. 내려가는 도중에는 남기라는 곳도 경유하게 되었는데 남기는 땅콩이 많이 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남기를 거쳐서 통영에 도착한 나와 우리 친구들(임경선, 이희중, 노영남, 이광용, 이덕준, 이기한 등)은 통영충렬국민학교에 수용하게 되었다.통영의 국민방위군 수용소에서 국민방위군 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경계가 심해 바깥출입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수용소에서 주는 식사는 날 김에 뭉친 주먹만한 밥 한 덩어리에 소금을 얹어주면 그것이 한 끼 식사였다. 그 당시 수용소 울타리는 철조망이 처져 있었으며 그 철조망 바깥에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우리들을 상대로 김밥을 팔려는 장사꾼들이 많았으며 그 김밥을 사 먹으려는 수용소 안의 우리들과 수용소 경비 간에는 실랑이도 많았다. 마산에서 해병 6기 신병 모집에 지원하여 합격 이렇게 수용소 생활을 하는 중에도 인천에서 같이 떠난 학도의용대원들은 계속 수용소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수용소에 들어오는 한 대원이 하는 말이 “지금 마산에서 해병대모집을 하고 있다.”라는 것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친구가 하는 말이 “해병대는 세라복도 입는 아주 멋진 군인인데 우리 해병대로 가자.”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 친구와 같이 4명이 방위군수용소를 탈출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단 수용소를 탈출한 우리들은 통영 부두까지 나와 마산 가는 배를 타려고 동정을 살피니까 배는 아침 9시에 출발한다는데 부두 근방에는 이미 방위군들이 수용소에서 탈출해 온 우리들을 잡으려고 순찰을 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는 다른 탈출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몸을 숨기고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9시가 되어 배가 막 고동을 울리며 떠나려고 할 때 숨고 있던 장소에서 막 뛰어 배에 올라타 통영을 무사히 빠져나왔다.해병대 5기 입대 통영을 빠져나와서 마산항에 도착한 우리들은 해병대 모집 장소인 어느 국민학교에 들어갔는데, 인천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들은 그곳에서 신체검사 받고 진해로 가서 해병대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교육이 끝나고 나는 다시 포병학교에 입교해 6개월 교육받고 해병대 포병이 되었다. 이후 나는 해병 1연대 3포대 소속으로 서부전선 장단전투 등 각종 전투에 참전한 후 1955년 11월에 만기 명예제대했다.전사한 친구 임경선(군번 : 9210577) 임경선은 나하고 친하게 지냈으며 같은 부대에서 복무했다. 하루는 부대 전방에서 ‘펑’ 하고 무슨 폭발물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나는 바깥에 얼른 나가 알아보았더니 지뢰가 터졌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전방 OP(관측소)에 있었다. 조금 있으려니까 누군가가 죽었다 하더니 좀 있으려니까 미공군 헬리콥터가 와서 실어 나르는 것이었다. 그때 임경선이 그 지뢰 폭발로 전사했는데 임경선은 그 지뢰로 몸체가 흩어지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던 것이었다. 그때 내가 있던 관측소와 사고지점과의 거리는 불과 100m 거리였다. 임경선은 키가 크고 얼굴이 잘생겼으며 나하고 친하게 지낸 사이이며 사고가 난 이후 지금까지 임경선 생각이 떠난 날이 없었다. 꽃다운 나이에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간 내 친구 임경선! 부디 편안히 지내기를 빌 뿐이다. 1933년 중구 전동 336번지에서 태어난 임 경선(林景善)은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소속으로 호국활동을 하다가, 인천영화중학교 4학년생으로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해병 6기에 자원입대하여 해병 제1 포병대대 3중대 소속으로 1952년 3월 31일 포병대 근무 중 지뢰 폭발로 전사하였다. (묘지 : 동작동 국립묘지 서16-971) 글 사진 제공 :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관 노영남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소속 ▲해병 5기 입대 (군번 : 9210583) 1933년 12월 4일 인천 중구 전동 출생 1950년 9월 18일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를 창립하고 호국활동 1950년 12월 18일 인천축현국민학교를 출발 1951년 1월 24일 마산에서 인천공업중학교 5학년 재학중에 해병 5기로 지원입대하여 해병대 포병으로 참전 1955년 11월 17일 입대 4년 10개월만에 만기 제대
  • 200만발 지뢰 제거 최소 200년… ‘냉전의 역사’로 남겨도 좋을 것

    생태계 파괴·예산·위치 파악 어려움 개발지 외엔 문화재 가치 부여도 가능 비무장지대(DMZ)의 평화지대화에 앞서 늘 제기되는 우려는 ‘지뢰’다. DMZ에 200만발가량의 지뢰가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DMZ를 생태·관광·역사 현장으로 개발하는 방안에 대해 전면 이용은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21일 국방부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유해발굴 작업을 위해 진행한 DMZ 내 화살머리고지 남측 지역(0.16㎢)의 지뢰 제거엔 20일이 걸렸다. DMZ 전체 면적(907㎢)은 이곳의 약 5668배이니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300년 이상이 걸린다. 실제 민간 지뢰제거업자들은 11개 공병부대를 전부 투입하는 경우에도 200년이 걸릴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무인 지뢰제거차를 대거 투입하면 속도는 빨라질 수 있다. 하지만 DMZ 내 거목이나 바위를 배제한다 해도 모든 땅을 뒤집으며 지뢰를 폭파시키면 생태계는 극심하게 황폐해진다. 또 막대한 예산도 든다. 기존 장비인 리노는 한 대당 28억원, 마인 브레이커는 17억 5000만원 정도다. 지난해 국제 민간기구 ‘국제지뢰금지운동’(ICBL)은 DMZ에 1㎡당 2.3개꼴로 지뢰가 매설됐으며 이는 세계 최고 수준의 지뢰 밀도라고 분석했다. 게다가 DMZ 내 전체 지뢰 지대 중 기확인지대의 비율은 2.7%뿐으로 사실상 모든 지역이 미확인지대다. 대전차지뢰는 100㎏ 이상의 압력을 받아야 터지지만 대인지뢰는 밟기만 해도 폭발한다. 6·25전쟁부터 1980년대까지 DMZ 인근에 묻은 대인지뢰만 90만발로 추정된다. 특히 이 중 약 40만발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발목지뢰(M14)는 플라스틱 재질로 무게가 9.4g에 불과해 폭우가 오면 유실되기 일쑤다. 북한의 대표적 지뢰인 목함지뢰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기확인지대마저 지뢰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금으로서는 DMZ 내 개발 지역에 대해 그때마다 군이 나서 해당 지역에 국한해 지뢰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지역의 안전만 확실하게 확보된다면 지뢰 역시 역사적 산물로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판문점을 지키는 캠프 보니파스 내 한 홀짜리 파3 골프 코스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코스’로 유명하다. 지금은 운영이 중단됐지만 잊을 만하면 세계적인 스포츠 잡지에 소개된다. 휴전선 인근 남북 감시초소(GP)도 가장 위험한 문화재로 등극할지 모른다. 이 외 지뢰를 포함한 냉전의 역사박물관 등도 아이디어로 제시된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여러분 셀피가 이렇게 위험합니다

    여러분 셀피가 이렇게 위험합니다

    2011~2017년 사망자 259명 상어공격 5배인도서만 159명... 뭄바이 16곳 사진 금지2위 러시아는 ‘안전셀피 안내서’ 발간하기도 스마트폰에 기능이 추가되고 ‘셀카봉’ 등 스스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여건이 좋아지면서 함께 증가한 수치는 뭘까? 바로 셀피(셀카)를 찍다 사망한 사람의 숫자다. 5일 AFP통신 등에 따르면 인도의 의학저널인 ‘가정의학과 1차진료’에 게재된 논문은 2011년 10월부터 2017년 11월 사이 전세계에서 셀피를 찍다가 숨진 사람은 259명에 달했다고 집계했다. 이는 같은 기간 상어 공격으로 숨진 사람(50명)의 다섯 배가 넘는 수치다. 논문은 여성들이 셀피를 훨씬 많이 찍지만 젊은 남성들이 셀피 사망의 4분의 3을 차지한다고 밝혔다. 상대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걸 즐기는 이들의 사망 원인은 익사, 충돌, 추락, 총격 사고 등이다. 13억 인구 중 8억명이 휴대전화를 쓰고 있는 인도는 전세계에서 가장 셀피 사망이 많은 나라다. 인도에서는 해당 기간 159명이 셀피를 촬영하던 중 사망했다. 러시아가 16명으로 뒤를 이었고 미국도 14명이 셀피를 찍던 중 숨졌다. AFP 통신은 인도 젊은이들이 단체 사진을 좋아하는 성향이 기록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인도에서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 배가 침몰하거나 열차에 치이는 등 사고로 젊은이들이 숨진 경우가 많다. 이런 사례가 너무 많이 나오자 인도 당국은 셀피 금지구역을 설치했는데, 뭄바이 시내에만 16곳에 달한다.불명예스러운 2위에 오른 러시아에서는 사람들 셀피를 찍던 중 고층 건물에서 떨어지거나 총상을 입고, 심지어 지뢰 폭발로 사망하기도 했다. 러시아 경찰은 2015년 안전한 셀피를 위한 안내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사망자 대부분이 보다 완벽한 셀피를 위해 포즈를 취하다 숨졌다. 미국 셀피 사망자 중 상당수가 그랜드캐니언에서 숨졌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최근 캐나다 관광객들이 플리트비체 호수의 75미터 높이 폭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뒤, 크로아티아 구조대원들은 트위터를 통해 “위험하고 멍청한 셀피를 찍는 걸 멈추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지난 1월엔 산꼭대기에 올라 수영복 차림으로 셀피를 찍어 소셜미디어에서 ‘비키니 등산가’로 유명했던 대만인 여성 기기 우가 협곡에서 떨어져 숨진 채 발견됐다. AFP 통신은 치명적이지 않더라도 부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찍은 셀피는 섬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014년엔 한 브라질 여성이 대선 후보였던 에두아르도 캄포스의 장례식에 참석해, 관 앞에서 웃으며 찍은 셀피를 올려 온라인에서 분노를 일으켰다. 폴란드 아우슈비츠의 옛 나치 수용소 직원들도 부적절한 셀피를 찍어서 구설에 오른 적이 있다. 브라질, 베트남, 독일 등에서는 교통사고 목격자들이 현장에서 찍은 셀피를 게시하기도 했다. 브라질에선 버스 밖으로 떨어져 당황한 승객들을 배경으로 셀피를 찍어 페이스북에 올린 사례가 있다.프랑스 파리 크레미외 거리 인근 주민들은 세계 전역에서 온 관광객들이 아무데서나 셀피를 찍어대는 통해 괴로워하다 못해 ‘clubcremieux’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다. 계정엔 셀피를 찍으며 가장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인 관광객을 찍은 사진들이 게재되고 있다. 홍콩 퀘리베이 아파트단지 주민들은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표지판을 내걸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빈 벨베데레 박물관은 최근 구스타브 클림트의 ‘키스’ 원본 근처에 대형 복제본을 준비하고 거대한 빨간 해시태그를 붙여, 관람객들이 복제본 옆에서 셀피를 찍도록 하는 디지털 디톡스 캠페인을 시작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국가와 사회를 위해 희생한 104명… 숨은 의인 찾는 LG

    국가와 사회를 위해 희생한 104명… 숨은 의인 찾는 LG

    “국가와 사회 정의를 위해 희생한 의인에게 기업이 사회적 책임으로 보답해야 한다”는 고 구본무 회장의 뜻에 따라 제정된 LG 의인상이 우리 사회 숨은 의인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고 있다. LG복지재단은 2015년 9월 첫 ‘LG 의인상’을 수여한 이후 지금까지 104명의 숨은 의인을 찾아내 LG 의인상을 수여했다. 의인들은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소방관 13명, 해양경찰 10명, 경찰 7명, 군인 11명 등 ‘제복 의인’부터 얼굴도 모르는 이웃을 위해 위험을 무릅쓴 크레인·굴착기 기사, 서비스센터 엔지니어 등 평범한 이웃까지 다양했다. LG의인상 수상자 중 일부는 상금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의로운 모습으로 더 큰 감동을 주기도 했다. 의인상 외에도 비무장지대(DMZ)에서 지뢰 폭발로 다리를 잃은 군 장병 2명에게 각각 5억원씩의 위로금을 전달하는 등 우리 사회의 귀감이 된 의인들을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 또 구인회 LG 창업회장의 독립운동 자금 지원으로 시작된 LG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 독립운동 시설 개보수 및 유공자 지원 사업에도 앞장서고 있다. LG하우시스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올해에도 사업 역량을 활용한 애국사회공헌 활동을 지속해 나갈 계획이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남북 경계선 없어지길”…처음 열린 고성 DMZ 평화의 길

    “남북 경계선 없어지길”…처음 열린 고성 DMZ 평화의 길

    “분단 이후 처음 열린 길을 밟게 돼 영광이죠.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든다고 하는데 남북의 경계선이 없어져 군사비용이 건설적으로 쓰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27일 일반인에게 처음 개방된 강원 고성 ‘DMZ(비무장지대) 평화의길’에서 만난 송해숙(73·여·서울 서초)씨는 탐방로 중간에 지뢰 폭발사고의 잔해로 남은 굴삭기가 인상 깊었다며 평화의길을 처음 걸은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분단 후 70년 가까이 민간인이 접근할 수 없었던 강원 고성 동해안 DMZ 일대가 4·27 남북 정상회담 1주년을 맞아 처음 공개됐다. 북한 초소와 불과 1.2㎞ 떨어진 금강산전망대(717OP)에서는 기존 통일전망대보다 한층 더 가까이 북녘 땅을 내다볼 수 있다. 해안철책을 따라 걷는 2.7㎞ 도보 코스가 포함된 7.9㎞ 길이 A코스는 1회 20명씩, 차량으로 금강산전망대까지 왕복 이동하는 7.2㎞ B코스는 1회 80명씩 하루 2차례 운영된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200명씩 평화의길에 다녀올 수 있다. 27일부터 다음달 7일까지의 A코스에는 벌써 5800여명의 신청자가 몰려 16대1이 넘는 경쟁률을 보였다.오전 10시 30분 통일전망대 인근에서 동해안을 향해 난 철문의 빗장이 풀리자 연두색 조끼를 입은 일반인 탐방객들이 안내요원을 따라 입장했다. 나무데크로 만든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높은 철조망 너머로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평화의길 도보 코스는 매끈하게 조성된 산책로는 아니다. 군인들이 경계 임무를 하며 오가던 길이 탐방객들을 위해 조금 다듬어졌을 뿐이다. 시멘트 벽돌과 보도블록이 얼기설기 놓인 길옆에는 모래에 뿌리내린 민들레가 곳곳에서 생명의 씨를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고라니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도망가기도 했다. 철책을 따라 내려가자 철로가 깔린 통전터널이 나왔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강원 양양~강원(북한) 안변 구간 철도는 남북 간 협의에 따라 2007년 한 차례 기차 운행이 이뤄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뒤로 다시 쓰임새 없는 철로가 됐고 2006년 준공된 남한의 최북단 기차역 제진역도 오가는 사람 없는 쓸쓸한 역으로 남았다. 이중으로 서 있는 해안철책을 따라 걷다 대리석 표지석과 파란 칠로 표시된 남방한계선에 다다랐다. ‘귀하는 지금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가 관할하는 비무장지대로 진입하고 있다’는 안내판이 보였다. 남방한계선을 넘어 북쪽으로 더 걸어가자 이번에는 ‘지뢰’ 주의 안내판 뒤로 널부러져 있는 굴삭기가 보였다. 2007년 해안초소에 전봇대를 설치하기 위해 온 민간의 굴삭기가 지뢰를 밟고 파괴돼 잔해로 남았다. 권성준 안내해설사는 “남북에 지뢰 200만발이 매설돼 있는데 10년간 56억원을 들였지만 그중 6만여발밖에 제거하지 못했다”며 분단의 비극을 환기시켰다. 전날 문재인 대통령의 방문을 기념해 설치된 소망 트리에 탐방객들은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글귀를 적어 걸었다. ‘평화가 경제다’고 쓰인 문 대통령 글귀 곁에 메시지를 건 김종연(30)씨는 “하루빨리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고 썼다”고 말했다. 약 1시간 도보 코스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 금강통문을 둘러봤다. 이어 버스는 ‘평화의 길’의 하이라이트인 금강산전망대에 닿았다. 북서쪽으로 머리에 눈을 인 금강산 채하봉이, 북쪽 바다 쪽으로는 아홉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구선봉과 선녀와 나무꾼 설화가 탄생했다는 감호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두 손을 꼭 붙잡고 평화의길을 걸은 김한주(49)·변주영(49·여)씨 부부는 “평화 분위기가 지속돼 많은 분들이 와서 봤으면 좋겠다”며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면 꼭 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평화의 길’ 예약 신청은 한국관광공사 웹사이트 ‘두루누비’, 행정안전부 DMZ 통합정보시스템인 ‘디엠지기’에서 받는다. 고성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김정은 경호 장갑차는 ‘메이드 인 코리아’

    김정은 경호 장갑차는 ‘메이드 인 코리아’

    국내 업체가 생산해 베트남에 수출한 장갑차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경호에 투입된 것으로 27일 확인됐다. 국내 특장차 제조업체인 S사가 수출한 차륜형 장갑차 ‘S5’는 지난 26일(현지시간) 김 위원장이 열차로 베트남 북부 동당역에 도착해 숙소인 하노이 멜리아 호텔로 이동할 때 김 위원장의 전용차와 함께 움직여 눈길을 끌었다. 베트남 당국은 해당 장갑차를 동원해 김 위원장을 호위하고 호텔 주변에도 배치해 삼엄한 경계를 폈다. S사 관계자는 “2014년 10월에 베트남 경찰청에 S5 6대를 수출했다”며 “독자 개발한 제품으로 철갑탄 방어가 가능하고 전파방해장치가 장갑차 안에 있어 사제 폭발물을 방지할 수 있으며, 지뢰 방어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대테러 작전에도 투입되는 S5는 장갑이 두꺼워 7.62㎜ 기관총 공격을 막아 낼 수 있고, 타이어에 구멍이 나도 기동할 수 있다. 장갑차 상부엔 12.7㎜ 기관총이 장착돼 있고 12명까지 탑승할 수 있다. 차량 속도는 시속 90㎞ 이상으로 알려졌다. 서울의 주한 미국대사관을 경비하는 경찰특공대 전술팀 장갑차도 S5로 알려졌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김정은 경호하는 장갑차, 알고 보니 국내업체 수출품

    김정은 경호하는 장갑차, 알고 보니 국내업체 수출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경호를 위해 베트남 당국이 투입한 장갑차가 국내 업체가 생산해 베트남에 수출한 제품으로 확인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 26일(현지시간) 전용 열차로 베트남 북부 동당역을 도착, 숙소인 하노이 멜리아 호텔로 이동할 때 김정은 위원장의 전용 차량과 함께 이동해 이목을 끈 장갑차는 국내 특장차 제조업체인 S사가 수출한 차륜형장갑차 ‘S-5’였다. 27일 S사에 따르면 2014년 10월 베트남 경찰청에 S-5 6대를 수출했다. 이 장갑차는 S사가 독자 개발한 제품으로 철갑탄 방어가 가능하고 전파 방해 장치가 장갑차 안에 있어 사제 폭발물을 방지할 수 있고, 지뢰 방어도 가능하다는 게 S사의 설명이다. 광화문 주한 미국대사관을 경비하는 경찰특공대 전술팀 장갑차도 S-5로 알려져 있다. 대테러 작전에도 투입되는 S-5는 장갑이 두꺼워 7.62㎜ 기관총을 막아낼 수 있고, 타이어에 구멍이 나도 기동이 가능하다. 장갑차 상부엔 12.7㎜ 기관총이 장착돼 있고 병력은 12명까지 탑승할 수 있다. 차량의 속도는 시속 90㎞ 이상으로 알려졌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사랑은 연탄을 품고~’ 연탄 나눔 봉사 이찬호, 하재헌 중사

    ‘사랑은 연탄을 품고~’ 연탄 나눔 봉사 이찬호, 하재헌 중사

    드디어 오늘, 첫 삽을 떴다.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라는 생각에 여기저기 알리지 않았다. 순수한 의도가 왜곡될까 봐 걱정도 됐다. 하지만 ‘첫 삽’의 결과치곤 꽤 ‘짭짤’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그 결과 몸 구석구석 똬리 틀고 있는 아픔의 흔적들은 반(半)으로 줄었다. 대신, 시나브로 몸속에 녹아든 기쁨이란 ‘따스한 감정’은 배(倍)로 늘었다. 오늘 하루는 그랬다. 2017년 8월 K-9자주포 폭발사고로 크게 다친 이찬호(24)씨와 2015년 8월 서부전선 비무장지대 수색작전을 펼치다 북한군이 설치한 목함지뢰로 두 다리를 잃은 하재헌 중사(24)가 그 ‘첫 삽‘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26일 오전 10시 20여 명의 자원봉사자와 함께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일대 난방 취약 가구에 연탄 1000장을 배달했다. 이씨는 “국민의 성원으로 국가유공자로 선정됐기에 뭔가 내 마음속 뜨거움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그 ‘뜨거움’을 ‘따뜻함’으로 조금이나마 돌려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결국 추운 겨울 경제적으로 어려운 5곳의 난방 취약가구에 연탄 1000장을 나눠 드리기로 결정했다. 이씨 자신이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찾아와 든든한 반석이 돼주었던 동년배기 하재헌 중사가 ‘행동대장’ 역할을 해주었다. 또 다른 두 명의 국가유공자 분들도 흔쾌히 참여했고 연탄 구입비용도 함께 마련했다. 이씨, 하씨 친구들, 이날을 위해 회사에 휴가까지 내고 내 일처럼 참여한 찬호씨 친형 그리고 형의 지인들 20여 명이 첫 삽의 기쁨에 연탄을 품었다. 아침 기온은 이들을 시샘하듯 보란 듯이 영하 7도까지 내려갔다. 의기투합된 이들의 뜨거움을 펼쳐보이기엔 비교적 ‘좋은 날씨‘였다. 찬호씨 형이 손수 준비한 비닐 옷과 장갑으로 무장한 봉사자들의 입가엔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이달 31일 전역 예정인 하재헌 중사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직접 연탄을 동료에게 전달해 주는 역할을 맡았다. 하중사는 “살면서 처음으로 연탄을 만져 본 거 같다. 연탄이 생각보단 꽤 무겁지만 이런 일을 할 수 있어 기쁘다. 조정 훈련으로 많이 바빠서 이런 생각들을 많이 못 했지만 앞으로 찬호와 함께 좋은 활동들 계속 해나갈 예정”이라며 “나는 몸이 ‘조금’ 불편하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힘든 분들에게 매섭도록 추운 겨울나기를 잘하실 수 있도록 미약하나마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니 설레고 기쁘다“고 말했다. 이들의 두 번째 삽은 어떤 걸까. 기대해 본다. 글 사진 박홍규 기자 gophk@seoul.co.kr 영상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아내의 맛’ 홍현희♥제이쓴, 시부모님과 역대급 효도여행 ‘만족도 100%’

    ‘아내의 맛’ 홍현희♥제이쓴, 시부모님과 역대급 효도여행 ‘만족도 100%’

    ‘아내의 맛’ 홍현희, 제이쓴 부부가 시부모님과 효도여행을 떠난다. 22일 방송되는 TV조선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아내의 맛’(이하 ‘아내의 맛’)에서는 홍현희, 제이쓴 부부가 2019년 새해를 맞이해 시부모님과 효도 여행을 떠나는 모습이 공개된다. 홍현희는 리무진을 직접 끌고 시부모님을 에스코트하는가 하면, 제이쓴은 호텔에 먼저 도착해 레드카펫을 깔고 대기하는 등 ‘희쓴 부부’는 결혼 후 처음으로 함께하는 여행에 최선을 다했다. 이에 ‘희쓴 부부’ 시부모님은 해외 유명 휴양지가 부럽지 않은 ‘럭셔리 숙소’를 보고 감탄을 연발하는데 이어,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집에 가기 싫은 기분’을 내비쳐 웃음을 자아냈다. 특히 홍현희는 시부모님과의 첫 여행을 위해 제약회사 출신 코미디언 며느리다운 특급 내조를 펼쳤던 터. 과연 시부모님의 만족도 100%를 달성한 홍현희의 선물은 무엇인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 뒤이어 ‘희쓴 패밀리’가 숙소 테라스에 위치한 프라이빗 풀에서 동반 수영에 나선 가운데, 홍현희가 커플 래쉬가드를 입고 먼저 입수한 시부모님 앞에 다시 한 번 의문의 가운을 입고 나타나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내의 맛’ 역사상 역대급 동영상 조회수를 기록했던 ‘1차 뱃살 공개’에 이은, ‘2차 뱃살 노출’을 감행한 것. 업그레이드 된 며느리의 자태를 목격한 시아버지는 ‘나라 잃은 리액션’을 넘어 ‘지구 잃은 리액션’으로 스튜디오를 웃음의 도가니로 빠지게 했다. 이후 시아버지가 며느리 홍현희에게 배영을 가르쳐주다 기운이 다 빠진 채 한숨을 내뱉는가 하면, 며느리 홍현희를 등에 업고 걷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등 사상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던 상태.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희쓴 부부’와 시부모님의 찰떡 케미를 자랑하는 효도여행이 ‘아내의 맛’을 통해 낱낱이 펼쳐진다. 제작진은 “이번 32회에서는 ‘희쓴 부부’와 시부모님의 케미, 특히 홍현희와 시아버지의 세상 어디에도 볼 수 없는 케미가 웃음을 폭발시킬 것”이라며 “역대급 리액션과 에피소드로 스튜디오까지 ‘폭소지뢰밭’으로 만들었던 희쓴부부의 ‘첫 효도여행기’에 많은 기대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TV조선 ‘아내의 맛’은 22일 오후 10시에 방송된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목함지뢰’ 하재헌 중사 전역…“조정선수로 패럴림픽 금메달 도전”

    ‘목함지뢰’ 하재헌 중사 전역…“조정선수로 패럴림픽 금메달 도전”

    비무장지대(DMZ) 수색 작전에 나섰다가 북한의 목함지뢰에 부상한 하재헌(25) 중사가 운동선수의 꿈을 안고 전역한다. 하재헌 중사는 1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1월 31일부로 군 생활을 그만하고 전역을 하게 됐다”면서 “짧았지만 길었던 약 5년의 군 생활 동안 많은 걸 배우고 겪었다”고 밝혔다. 하재헌 중사는 2015년 4월 서부전선 DMZ 수색 작전에 투입됐다가 북한군이 수색로 통문 인근에 매설한 목함지뢰 폭발에 휘말리면서 양쪽 다리를 잃는 큰 부상을 입었다. 사고 당시 쓰러진 하 중사를 구하러 간 김정원(28) 중사도 2차 지뢰 폭발로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하재헌 중사는 “사고 이후 3년이란 세월이지만 그날의 기억들은 생생하다”라면서 “양쪽 다리에 의족을 하고 있으며, 재활 후 군에 복귀해 국군수도병원에서 근무해왔다”고 근황을 전했다. 그는 “엄청난 고통과 힘든 나날이었지만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이 정도만 다친 것에 감사하며 지내고 있다”고 씩씩하고 밝은 모습을 보였다. 이어 “힘든 일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많은 국민분들의 응원과 저를 찾아와 격려해주신 덕분”이라면서 “군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도움을 받았기에 저도 많은 사람들에 힘이 되고자 노력하고, 앞으로도 봉사를 많이 할 예정”이라고도 덧붙였다. 하재헌 중사는 “전역을 하기로 마음 먹은 건 또 다른 꿈이었던 운동선수를 해보고 싶어서다”라면서 “장애인 조정 선수로서 패럴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게 목표이자 꿈”이라고 밝혔다. 하재헌 중사는 지난해 10월 전북 군산 은파호수공원에서 열린 제38회 전국장애인체육대회 남자 조정 개인전 1000m PR1(선수부) 경기에 참가해 5분56초64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 은메달을 따기도 했다. 하재헌 중사는 “많은 국민께 앞으로도 군 생활을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만두게 된 점을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린다”면서 “하재헌 중사가 아닌 메달리스트 하재헌이 되기 위해 노력할 테니 많은 응원을 바란다”고 했다. 또 “목함 지뢰 사건을 잘 기억 못하는 분들이 많다”라면서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뿐만 아니라 북한 목함지뢰 사건도 많이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했다. 이와 함께 장애인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하재헌 중사는 “양쪽 다리에 의족을 착용하고 생활하면서 가끔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데 많은 사람이 많은 사람이 저에게 오토바이를 타다가 다쳤냐, 교통사고냐 라고 물어보는데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장애인이라고 안 좋게 보시는 분들도 많은데 장애인이라고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 같은 사람이고 다 똑같이 감정이란 걸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면서 “내 가족이 생각하면 그렇게 행동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많은 장애인분과 어려운 사람에게 귀감이 되고자 공부도 하며 봉사도 많이 하고, 운동 분야에서도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 보여드리겠다”면서 “그 동안 군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고, 군 생활하며 고생하시는 국군 장병들 늘 존경하고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K9 자주포 사고피해자 이찬호 “괜찮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어도”(영상)

    K9 자주포 사고피해자 이찬호 “괜찮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어도”(영상)

    전역을 8개월 앞둔 2017년 8월 18일 강원도 철원에서 K9 자주포 사격훈련 중 폭발사고로 전신화상을 입고 올해 5월 전역한 이찬호 예비역 병장. 전역과 함께 치료비를 지원받지 못하게 된 사연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이어졌고 올해 9월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한 달 후 페이스북에 올린 화상 입은 팔 사진은 각 종 포털의 실시간 검색 순위에 오를 만큼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나라를 지키다 상처를 입은 부상을 걱정 어린 눈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반면에 ‘흉하다’라는 악플로부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댓글들도 이어져 그는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런 반응들은 충분히 예상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 자신이 당한 군 사고에 대해서 잊혀져 가는 게 싫었다. 알려야만 했다. 그것이 그에겐 가장 먼저였고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잊혀지기 싫었어요. 내 흉터는 죽을 때까지 나를 괴롭힐 거 같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씩 잊혀지더라고요, 뭐라도 했어야 됐어요. 사고가 난 후 1년 4개월이 지났는데 확실한 해결책이 나온 것도 아니고 제2의 피해자가 생기지 말란 법도 없고요. 악성 댓글 같은 건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그저 알려야 됐어요. 제가 당한 군 사고에 대해서요. 어찌보면 제 필살기를 꺼내 든 거죠. 이 흉터들은 그때의 온도, 공기뿐만 아니라 당시 제가 느꼈던 고통과 촉감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죠.“ 완치될 수 없는 그의 흉터들은 결코 중단할 수 없는 투쟁의 바탕인 된 셈이다.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대중으로부터 쉽게 잊혀져 가기 마련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들, 희대의 악인들, 우리를 슬프게도 기쁘게도 했던 수많은 세상 일들. 단 하나의 예외도 없다. 그저 잊지 않으려고, 잊히지 않으려고 애쓰는 힘겨움과의 싸움만 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14일 서울시 마포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이찬호(25)씨도 그런 힘겨운 싸움을 기꺼이 감당하기로 한 사람이다. 이씨는 자신이 당한 군 사고가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자신과 같은 제2의 피해자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알려야 할 사명감을 갖고 있어 보였다. 수도 없이 죽음을 생각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어 그것 마저도 포기해야 했던 그가, 다시 한번 대중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또 다른 ‘필살기’를 책으로 준비하고 있다. 상처를 당당히 드러내며 아픔의 치유 과정을 글과 사진으로 엮은 <괜찮아 돌아갈 수 없어도>란 제목의 책으로 말이다. 모금액 전액 또한 기부할 예정에 있다고 한다. 두 번째 삶을 새롭게 시작한 그와의 만남을 정리했다.(Q) 인터뷰 요청을 승낙한 이유가 있다면? 매번 안 좋은 소식으로 찾아뵀었다. 이번에는 좀 좋은 소식으로 찾아뵙고자 제가 1년 4개월 동안 사고 이후의 일들을 메모한 내용을 책으로 출판하게 됐다. 많은 분들에게 잊히지 않기 위해서 다시 찾아뵙게 됐다. (Q) 현재 몸 상태는 어떤지?총 5번 수술을 한 상태다. 화상치료라는 게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 이후에도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정신적 트라우마라든지 마음의 상처라든지 몸에서 지울 수 없는 흉터들이 상당이 많은데 지금까지도 병원에서 다양한 치료를 받고 있는 상태다. 추후에도 수술받을 예정이다. (Q) 사고 후 1년 4개월이 지났다. 보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이중보상금지법이란 게 있다. 제가 국가유공자가 됐기 때문에 나라에 보상이라든지 그런 부분에서 소송을 걸 수가 없는 법이 있다. 그런 부분 때문에 소송을 진행 못하고 있다. 아직 보상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진행 중에 있는 상태다. 일단 보훈처로 소속이 넘어가서 보훈처의 지정병원, 보훈처병원 혹은 위탁승인 절차를 거친 전문병원에서 다행히 치료를 받고 있는 상태다. (Q) 군 복무 중 사고는 전역 6개월까지만 치료받을 수 있단 말 듣고 심정이 어땠는지?처음에는 매우 우울하고 너무 힘들었는데 저는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많은 국민들이 일단 지켜보고 있고, 많은 국민들이 군대에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혹은 여성분들도 군대를 가는데, 사고 이후 복지라든지 관리가 안 된다면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없을 거 같다. 저는 아직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지만 잘 해결될 거라고 믿고 있다.(Q) 생각조차 싫겠지만 폭발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실 수 있는지?저도 실제 사격을 여러 번 해봐서 부담감이 없었다. 거기서 제일 고참이었고, 제일 많이 쏴봤기 때문에. 이것만 하고 바로 다음날 외박이어서 기분 좋게 끝내고 쉬려고 했다. 첫 번째 두 번째 발사에선 잘 작동이 됐다. 근데 세 번째 탄에서 격발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 탄이 나갔다. 그러면서 폐쇄기가 제대로 안 닫혀서 내부로 들어오지 않아야 될 연기와 스파크가 들어오게 됐다. 게다가 밀폐사격을 해서 문을 모두 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 불똥들이 밑에 있던 나머지 화약들을 연소시키면서 엄청난 큰 폭발을 일으켰다. 너무 뜨거웠다. 감각을 잃을 정도로 너무 뜨거웠고 너무 짧은 순간이었고 눈 떠보니깐 전투복이 제 피부에 다 붙어 있고, 제 눈은 섬광, 빛 때문에 하얗게 아무것도 안보여서 제가 그 뜨거운 쇳덩어리들을 만지면서 나왔다. 그래서 지금 지문도 없는 상태고 손가락이 제대로 펴지지도 않고, “사람 살려주세요. 사람 살려주세요” 정말 죽겠다 싶었다. 그때 당시에는 그때 전차 뚜껑이 다 찢겨 날아갔다. 40톤 규모인데 그게 두 동강 나면서 모든 문이란 문은 다 찢겨 날아가서 제가 몸으로 짚으면서 출구를 찾아서 다행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상태였다.(Q) 배우가 꿈이었는데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거 같은데사고 직후에도 포대장님한테 ‘제 얼굴 괜찮냐’고 먼저 물어봤다. 제 상태가 어떤지 그런 것보다도 얼굴이 가장 걱정이 많이 됐다. 죽기 직전까지 꿈에 대한, 연기자가 되기 위한 그런 꿈들에 정말 애착이 있었던 거다. 중학교 3년 때부터 꿈을 꿔 왔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연습실에서 살았고 개인관리를 매우 철저히 했다. 그게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니깐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Q) 사고로 인해 어떤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지?중환자실에 있을 때는 정말 악몽이랑, 환청 그리고 환영과 여러 가지가 겹쳐서 너무 힘들었다. 작은 소리에도 크게 민감해하고 남들보다 상당히 예민해져 있다. 폐쇄된 곳이라든지 소리가 상당히 큰 곳이라든지 아니면 풍선이 터진다는 그런 폭발 같은 형상을 보면 되게 겁부터 난다. 지금도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서 약물 치료를 병행하고 있는 상태다. (Q) 많은 응원의 글과 달리 부정적인 댓글로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들었는데이렇게 많은 분들이 응원을 해주시고 많은 관심을 해주실 줄 몰랐다. 댓글에 흉하다는 말을 또 보고 왔어요. 방금 전에도. 그런 분들이 계시는데 사실 강력 대응을 하고 싶다. 근데 지금은 그분들도 분명히 저와 같은 아픔이라든지 저와 같은 흉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분들의 (상처가) 잘 아물기를 흉터 없이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잊을 만큼 많은 분들이 정말 응원해 주시고 좋은 분들이 정말 많다는 거를 저는 다시 느꼈다. (Q) 병실에서부터 지금까지 함께한 가족에 대해 고마움이 클 거 같은데사고는 제가 났는데 피해 보는 건 저희 가족들이 너무 많은 피해를 봤다. 제가 붕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고 있었다. 어머니는 누가 누구 아들인지도 모르셨다고 한다. 그때 당시에. 그 정도로 너무 심각한 상태였고 병원에서 볼 줄을 꿈에도 몰랐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주신다. 제가 어린애가 된 거 같다.(Q) 왜 이런 고난이 나에게 왔을까 원망도 많았을 텐데처음에는 정말 원망을 많이 했다. 신께서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을, 이런 고난과 시험을 주셨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지금 1년 4개월이 지난 뒤에 생각해보니깐 그런 생각을 했던 게 후회가 된다. 정말 지금은 많이 의지하고 있고 기도도 많이 하고 있다. 그만큼 주시는 것도 많았고 믿음적으로 많이 단단해진 거 같다. (Q) 치료 과정을 담은 <괜찮아 돌아갈 수 없어도>란 포토에세이 출간 배경은?아직도 K9 자주포를 군에서 사용하고 있고 제2의 피해자 혹은 군대에서 많은 사건 사고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저는 책이라는 수단으로 잊히지 않기 위해서 책을 쓰게 됐다. 이 책은 나의 이야기이면서도 누구나의 이야기다. 흉터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상처 없는 사람도 없고 저도 그 흉터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1년 4개월 동안 제가 보고 느낀 것들을 메모한 것이 책으로 나오게 됐다. 화상 환자나 소방관이나 장애단체라든지 제 모든 수익금은 기부할 예정이다. (Q) 아픔을 같이 공유하고 응원해 준 국민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 주신다면인터뷰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고마우신 분이 너무 많다. 도와주시는 분도 많고 응원해주시는 분도 많고 그런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힘을 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고 그런 힘과 응원을 받아서 앞으로 제가 좀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Q) 앞으로의 계획과 소망이 있다면어떻게 하면 제 이 뜨거움을 나눠 드려서 따뜻함으로 전달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봤다. 혹시 목함 지뢰 사건을 아시나요. 그때 있었던 하재헌 하사가 동갑이기도 해서 많이 친해졌다. 그분이랑 아마 1월에 좋은 소식으로 찾아뵙지 않을까 싶다. (Q) 본인과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신다면화상 환자분들께는 어떠한 따뜻한 말을 해도 그분들의 뜨거운 고통을 위로해 줄 수는 없다. 사실 저도 많은 위로와 응원을 받았는데 많은 위로와 응원에 비해서 고통이 너무 심하다. 조심스럽게 말을 하자면 이번 겨울도 몹시 추울 거 같다. 화상 환자들은 건조해지면 더 악화될 수가 있다. 그래서 이번 겨울 따뜻하게 건강하게 잘 보내셨으면 한다. 글 박홍규 기자 gophk@seoul.co.kr 영상 박홍규,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포토] ‘스마트로봇 의족’ 국내 첫 상용화 성공

    [포토] ‘스마트로봇 의족’ 국내 첫 상용화 성공

    한국기계연구원 우현수 의료지원로봇연구실장(오른쪽)과 김정원 중사가 상용 로봇 의족 제품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15년 목함지뢰 폭발로 발목을 잃은 김 중사는 실험 착용 첫날, 1시간가량 적응을 마치고서 곧바로 보행 보조기구 없이 걸었다고 기계연구원 측은 12일 설명했다. 김 중사는 개선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해 기술 발전에 큰 도움을 줬다고 연구팀은 12일 설명했다. 한국기계연구원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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