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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분해진 후세인

    집권 중 시아파 주민을 학살한 혐의로 기소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과 측근 7명에 대한 6차 공판이 모든 피고인이 출석한 가운데 21일 다시 열렸다. 이번 재판은 두 주일 만에 처음 열리는 공판으로, 후세인과 그의 이복동생으로 지난 1982년 두자일 마을 학살사건 당시 정보기관을 이끌었던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는 구금중 자신들의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는 법적 절차를 밟고 있다. 이번 재판의 검사인 자파르 알 무사위는 전날 전화를 통해 5명의 검사측 증인이 법정에 설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그는 “재판 재개를 위해 많이 준비했다. 증거가 있고 후세인이 서명한 자료들도 있다.”면서 “기소가 이뤄질 시점에서는 놀랄 만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세인은 이날 법정에 검은 양복을 입고 출두했으나 넥타이는 매지 않았으며, 재판 초기에는 피고인석에 조용히 앉아 특별한 제스처 없이 재판 절차에 집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등 차분한 모습을 유지했다. 후세인은 그간의 재판에서 반항적이고 때로는 투쟁적이며 이따금씩 법정을 장악하려는 모습을 보여왔다. 후세인 재판은 10월19일 첫 공판 시작 이래 지금까지 9명의 증인이 증언했다.바그다드 외신종합
  • [데스크시각] ‘양심적 병역거부’ 어떻게 볼까/김성호 문화부장

    오는 26일 열릴 국가인권위원회 전원위원회의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개신교를 비롯한 종교계는 물론 사법당국과 군, 일반인들까지 인권위의 판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우선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해 국가기관이 내리는 첫 결정이란 점이 예사롭지 않고 지난해의 사법부 판결 뒤집기 파장, 그리고 현실적인 적용의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가 관심의 초점이다. 우선 양심을 전제로 한 병역거부를 국가기관이 인정하는 첫 사례가 될 것인지의 여부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지난 2001년 불교신자 오태양군의 병역거부를 시작으로 공론화됐지만 사실상 1939년 여호와의 증인 신자 38명이 병역거부를 이유로 체포된 것이 그 시초로,66년에 걸쳐 지속돼왔다. 개신교 특정 교단에서 출발했지만 이후 각 종교에서 속출했고 비종교 거부자도 해마다 늘고있는 추세다. 그간 누적 인원이 1만명에 이르렀고 지난 9월15일 현재 수감된 병역거부자만도 1186명에 달한다. 아제르바이잔, 앙골라, 아르메니아, 싱가포르, 터키 등 7개국에 총 72명이 수감되어 있는 것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다. 전세계에 수감중인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94%가 한국에 있는 셈이다. 이런 수치를 떠나 국가인권위의 결정에 주목하는 이유는 ‘병역거부를 더이상 범죄영역으로 보지 않는다.’는 전향적인 측면에 있다. 소수자의 인권을 포함해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소수자를 인정한다는 열린생각의 수용차원이다. 두번째는 사법부의 판결 뒤집기와 관련한 실정법 충돌 논란이다. 지금 시점에서 지난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결과 상충되는 인권위 결정이 몰고올 파문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나 인권위의 판단은 사실상 상징적 변화로 봐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인권위의 결정내용은 대부분 권고형태로, 구속력을 갖고있지 않다. 물론 관계기관이 성실하게 노력할 의무를 갖는다는 규정이 있지만 인권위의 권고 수위도 일반인들의 우려와는 달리 ‘더 긴 기간의 대체복무제 도입에 관한 정책권고’쯤이 될 것이고 보면 세상이 뒤집힐 만큼의 큰 사안으로 걱정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특히 지난해 사법부 판결의 이면에 “양심의 자유와 국방의 의무가 충돌할 때에는 양심의 자유가 좀더 존중되고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대체복무제 도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번째는 병역거부 인정을 어떻게 현실적으로 적용할지의 어려움이다. 양심적 거부의 범위 판단과, 고의적 병역기피를 구분할 방법의 문제인데 이 부분 역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게 종교계와 인권단체들의 주장이다. 병역기간을 현재의 공익근무기간보다 늘리고 근무의 강도도 강화하면서 합숙하게 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대체복무자 수의 제한도 한 방법이다. 철저한 양심에 기초한 병역거부자라면 이같은 조건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여기에 우리의 실정법상 고의의 병역기피를 가려낼 수 있는 능력은 충분하다고 본다. 무엇보다 병역의 의미를 총을 들고 싸우는 의무에 국한할 게 아니라 좀더 넓은 의미로 확대시킬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종교계와 국가인권위 주변 인사들의 관측을 종합해볼 때 26일 인권위에선 일단 ‘인정’쪽으로 결론날 전망이다. 이같은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종교계와 인권단체는 당장 큰 변화를 기대하지는 않는 눈치다. 대신 남북대치란 특수한 상황에서 유지돼왔던 ‘병역기피=범죄 형성’이란 도식적인 인식 탈피가 환영받는 가장 큰 이유다. 지금처럼 이 도식이 존재하는 한 감옥행을 선택하는 행렬은 어쩔 수 없이 계속될 것이다. 유엔 인권위원회와 유럽의회는 양심적 병역거부권의 인정을 촉구해왔으며,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는 25개국에서 대체복무제를 인정하고 있다. OECD가맹국중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수감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라는 오명을 떠나, 다양성의 사회를 향한 또 한 걸음의 차원에서 인권위의 ‘열린 결정’이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김성호 문화부장 kimus@seoul.co.kr
  • [우리는 맞수 CEO] 한수길 롯데제과 사장 vs 윤영달 크라운제과 사장

    [우리는 맞수 CEO] 한수길 롯데제과 사장 vs 윤영달 크라운제과 사장

    수은주가 영하 10도 밑으로 뚝 떨어진 요즘, 제과업계는 날씨만큼이나 냉랭하다. 크라운제과가 올 초 해태제과를 인수한 뒤 업계 1위인 롯데제과와 치열한 혈투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점유율은 롯데제과가 40%, 크라운제과가 35% 안팎으로 긴장을 한치도 늦출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과자전쟁’은 한수길(64) 롯데제과 사장과 윤영달(60) 크라운제과 사장이 진두지휘하고 있다. ●실속파 CEO vs 활동파 CEO 제과업계의 ‘산증인’인 한 사장과 윤 사장은 모든 면에서 곧잘 대비된다. 한 사장은 지난 75년 롯데제과에 입사한 뒤 오랜 기간 경리 업무를 담당해 일처리가 매우 꼼꼼하다. 내성적인 성격에 실속을 챙기는 전형적인 롯데맨으로 제과업계의 ‘수성’에 매진하고 있다. 경영환경을 안전하게 이끌고, 제조업체 수익성을 결정하는 원가 구조 개선에 회사 역량을 집중하는 경영스타일을 고수한다. 반면 윤 사장은 크라운제과 창업주인 고 윤태현 회장의 장남으로 재벌 2세다운 화려한 경영기법으로 정평이 나있다. 크라운제과와 해외 제휴업체가 각각 대표 상품을 맞교환해 판매하는 ‘크로스마케팅’을 창안, 업계의 주목을 받는 동시에 등산경영으로도 회사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있다. 올 초 제과업계 2위인 해태제과를 인수, 만년 ‘꼴찌’라는 오명을 씻는 수완을 발휘해 업계를 또 한번 놀라게 했다. ●창과 방패의 양보없는 승부수 크라운제과 윤 사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해태와 크라운의 과자시장 점유율이 롯데에 5% 정도 뒤져 있지만 조만간 추월해 제과업계의 진정한 리딩 기업이 되겠다.”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그는 “주력 제품을 해태제과와 중복되지 않게 하고 원료 공동 구입, 공동 물류, 생산공장 공동 활용으로 최대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며 내년에는 시장판도가 바뀔 것임을 자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롯데제과는 당분간 수성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수길 사장은 “크라운제과는 당분간 해태제과의 부채 때문에 공격적인 신규 투자를 하기 어렵다.”며 “크라운과 해태간에 겹치는 제품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구조조정이 불가피해 매출 규모는 오히려 더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한 사장은 “회사의 매출과 수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대형 브랜드를 집중 관리해 불확실한 시장 상황에서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선두를 지킬 수 있다.”며 직원들에게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말 것을 당부한다. ●해외에서도 혈전 이어져 롯데제과와 크라운제과의 피말리는 싸움은 국내에서 그치지 않고 있다. 지난 69년 껌을 시작으로 수출전선에 뛰어든 롯데제과는 올해 중국, 인도시장의 폭발적인 신장세에 힘입어 1억 5000만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특히 인도의 패리스제과를 인수, 올해 450억원의 매출을 달성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사장은 “중국이나 인도는 인구가 많고 소비 수준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거대 시장”이라며 “롯데제과는 60년대 후반 제과시장의 변화를 장기적으로 예측했던 노하우와 향후 아프리카, 중동지역을 생산기지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수출을 독려하고 있다. 크라운제과는 ‘크로스 마케팅’으로 해외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윤 사장은 “전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가도 크라운의 경쟁사는 없고, 우리가 많은 이익을 나눠줄 ‘협력사’만 존재한다.”는 경영론을 펼치고 있다. 실제로 크라운제과는 타이완 제과업체 1,2위를 다투고 있는 ‘이메이’와 ‘콰이콰이’, 세계 1위의 쌀과자업체인 ‘왕왕’과 제휴를 맺었다. 이런 전략으로 호주, 중국, 이탈리아, 일본 등의 협력사들의 도움을 받아 해외판로를 열고 있는 중이다. 특히 상하이에 해태·크라운 공동 매장 5군데를 열고 해마다 5개씩 매장수를 늘려나가는 등 중국을 글로벌 경영의 본거지로 삼을 계획이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대림산업-이준용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대림산업-이준용 회장家

    대림산업은 지난 1976년 상장 이후 주주들에게 기업 이익을 돌려주고 있다. 건설업체 가운데 오랫동안 빠지지 않고 배당을 한 기업을 찾기란 여간 쉽지 않다.30여년 동안 배당을 거르지 않았다는 것은 부침이 심한 건설업계에서 대림이 오랜 전통을 지켜온 명실상부한 전문 건설업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업종으로 출발했던 현대건설이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늘린 것과 사뭇 다르다. 특히 단순 제조업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대림산업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수적인 기업 이미지를 떠올린다. 대림 스스로도 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는 아니다. 단지 정통 건설 기업에서 벗어나지 않고 조용하게 기업을 일구겠다는 것이 대림산업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1세대, 정미소에서 건설 명가로 성장 고 이재준(수암) 대림산업 창업주는 경기도 시흥(현재 산본 신도시 일대)에서 부친 이규응 옹과 모친 양남옥 여사의 5남4녀 가운데 차남(넷째)으로 태어났다. 고 이재형 전 국회의장이 이 창업주의 바로 손위 형이며 이재연(74) 아시안스타 회장이 막내 동생이다. 부친은 장남에게는 공부를 시켰지만, 사업 기질이 보였던 차남에게는 장사를 배우라면서 보통학교만 졸업시킨 뒤 자기 밑에 두었다. 수암은 이 때부터 부친이 경영하던 서울 서대문 한일정미소에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것이 오늘날의 대림을 키우는 원동력이 됐다. 대림의 태동은 1939년 부평에서 목재와 건자재상으로 문을 연 부림(富林)상회에서 출발했다. 초기 부림상회를 이끈 주인공은 3명. 이재준 창업주와 그의 고종 사촌형인 이석구 전 대림산업 사장, 이석구의 매제 원장희로 알려졌다. 사촌지간은 각각 1만 5000원씩 출자했고, 원장희씨는 1만원을 출자했다는 것이다. 이석구는 풍림산업 이필웅 회장의 부친. 결국 대림과 풍림의 뿌리는 부림상회로 같다. 부림상회는 원목을 개발, 사세를 키웠고 광복 이후 군정청으로부터 원목을 값싸게 인수해 교실을 짓는데 들어가는 목재 등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이후 사업이 번창해 1947년 건설업에 진출하면서 상호를 대림산업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평경찰서 신축 공사 수주는 건설업체로서 첫 걸음을 내딛는 계기였다. 주한미군 공사를 수주하기도 했다. 이즈음부터 우리나라 건설업이 시작됐다고 보면 된다. 당시 국내 건설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으로는 대림산업·현대건설·삼환기업 등이었다. 49년부터는 건설업이 목재업을 앞질러 주력업종으로 자리잡았다. 한국전쟁 중에는 피란민 수용소를 짓는 등 군 시설 공사를 맡았고, 한국경제 재건기를 거치면서 굵직한 공사를 따냈다.58년 시작된 청계천 복구공사와 청계고가도로 건설,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건설 등 굵직한 사회간접자본시설 현장마다 대림의 깃발이 나부꼈다. 60년에는 풍림산업을 인수, 자회사 형태로 두었다. 서울 영동·잠실·반포지구 개발과 광진교, 영동대교, 양화교 등 한강 다리 공사에도 대림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지하철 시대를 여는데도 대림은 처음부터 참여했다. 동시에 해외공사 수주를 늘리는 등 사세를 키웠다. 54년에 설립한 서울증권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99년 구조조정차원에서 소로스에 매각했다. 지금은 지분을 전혀 소유하지 않고 있다. 대림통상은 아예 동생 재우씨에게 떼어줘 형제간 사업 분리를 마무리지었다. 대림요업 역시 98년 매각하면서 지분을 대림통상에 넘겼다. 창업주가 생전 계열 분리를 통해 경영권 분쟁의 씨앗을 남기지 않았다. ●난형난제(難兄難弟)…운경 이재형 대림산업을 말할 때 흔히 고 운경 이재형 전 국회의장을 끌어들인다. 수암 이재준 창업자와 비교하기도 한다. 정계와 재계에서 각각 독특한 개성으로 주목받으며 거목으로 우뚝 섰던 인물이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고집스러운 면모,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말을 아끼는 점에서 같았다. 운경은 자유당·공화당 시절 내내 골수 야당을 했다. 그래서 동생이 운영하는 대림은 자주 곤욕을 치렀다. 대림에서 정치자금을 대주지 않나 하는 의심과 함께 야당 정치인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대림은 수시로 세무사찰을 받아야 했다. 민정당 시절에도 운경과 수암, 그리고 이준용(67) 회장은 형과 동생, 백부와 조카라는 혈연 빼고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았다. 운경이 정치한다고 자금을 요구하지 않았고, 대림 역시 운경에게 베풀거나 받지도 않았다. 서로 철저하게 독립된 길을 걸어온 것이다. ●2세대, 건설업에 유화부문 키워 양대축 형성 수암 이재준은 열아홉 되던 해 수원지역 대지주의 딸인 이경숙과 결혼했다. 이 여사는 그러나 장남 준용(현 대림산업 회장)을 낳은지 4년만에 세상을 떴다. 창업주는 박영복 여사와 재혼, 차남 부용(전 대림산업 부회장·61)을 얻었다. 단출하게 두 아들만 두어 경영권 이양 등에서 큰 불협화음이 없었다. 이 회장은 부친과 달리 정규 교육 혜택을 입고 착실히 경영 수업을 받았다. 경기고,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미국 덴버대에서 통계학을 전공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에도 영남대와 숭실대에서 잠시 강의를 맡는 등 학자풍의 엘리트였다. 그러면서 한경진 여사와 결혼하고 66년부터 대림산업 사무실에 출근했다. 경영 참여와 관련, 이 회장은 “본격적으로 해외 건설시장을 개척할 시기였는데 해외감각과 국제업무에 정통한 사람이 필요했고, 명예 회장의 강력한 요청도 있었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국내외 공사를 막론하고 창업주를 도왔다. 유창한 영어는 해외공사 수주는 물론 각종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됐다. 국내에서는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했다.78년 당시 부사장이었던 그는 건설업계 최초로 업무 전산화 작업을 추진하는 등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에 앞장섰다. 업계는 이 회장이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79년에는 사장에 오르면서 색깔을 내기 시작한다. 동생 부용씨는 상무로 승진했다. 건설과 양대 축을 이루는 유화부문의 틀도 이때 마련됐다. 창업주가 목재상을 건설업으로 키웠다면, 이 회장은 여기에 유화부문을 더해 건설과 석유화학의 양대 사업을 구축해 안정과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대림산업은 66년 베트남 진출로 국내 최초 해외건설시장을 개척한 이래 중동건설붐의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지금까지 해외건설 맥을 유지하고 있다. 잠실 종합운동장 주경기장, 포항제철 3,4호기 건설공사 등도 대림의 손을 거친 건축물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대림은 국내외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이미지가 실추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86년 개관 11일을 앞두고 독립기념관에서 화재가 발생,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87년 8월까지 당초보다 더 완벽한 복구공사로 전화위복의 계기를 삼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88년에는 이란-이라크 전쟁의 피해를 보기도 했다. 이란 캉간가스정제공장 현장에서 이라크 공군기의 무차별 폭격으로 13명이 죽고 19명이 부상을 당했다. 가장 큰 피해자는 대림이었다. 그런데도 대림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속죄양으로 몰리기도 했다. 대림 역사상 최대 위기였다. 대림은 그 뒤 국내 아파트 공사, 관공서 건물, 평화의 댐공사 등 굵직한 일감을 따내면서 덩치를 키웠으나, 사업 다각화 등으로 몸집을 불린 다른 업체와 달리 한 우물만 고집, 업계 순위에서 상대적으로 밀렸다. ●3세대, 건설·유화 오가면서 경영 보폭 확대중 이 회장의 장남인 이해욱(37) 대림산업 부사장은 건설과 유화부문을 오가면서 경영 수업을 쌓고 지난 7월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미국 덴버대 경제학과를 나와 부친과 동문을 이룬다. 컬럼비아대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고 95년 대림엔지니어링에 입사했다.2000년 건설부문 기획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2004년부터 전무를 맡았다. 지난 5월에는 대림산업 지분의 21%를 보유하고 있는 사실상 지주회사인 대림코퍼레이션의 공동 대표이사에도 취임했다. 대림산업은 계열사 12개를 거느린 재계 27위 규모의 대림그룹 모기업이다. 이 부사장은 현재 대림산업 0.47%, 삼호 1.85%, 비상장 종합물류 회사 대림H&L의 주식을 100%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지분 움직임이 없어 본격적인 경영권 승계라기보다 다양한 경험 축적 과정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혼맥 1세대는 평범,2·3세대는 화려 이재준 창업자는 조선 선조대왕 7번째 왕자인 인성군(仁城君)의 9대손이다. 가문이 번창했기 때문에 수암의 집안은 늘 북적댔다. 생가가 서울로 향하는 길목이라서 오고 가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500여섬지기 자작농 겸 지주였고 서울에서 큰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경영의 덕목을 키워나갔다. 창업주 세대는 대부분 평범한 가정과 연을 맺었다. 큰 누이는 평범한 가정으로 출가했고, 둘째 누이도 작은 사업가에 시집을 갔다. 형님 이재형 전 국회의장 역시 평범한 집안의 류갑경 여사를 아내로 맞았다. 수암도 예외는 아니다. 평범한 가정에서 배필을 맞았다. 아래 동생들도 일반적인 가문과 결혼을 올렸다. 하지만 막내 이재연 아시안스타 회장의 결혼에서는 국내 굴지의 재계와 혼인을 맺는다.LG그룹 구인회 창업주의 차녀 구자혜(68)여사와 결혼하면서 대림과 LG는 사돈의 연을 맺는다. 이를 계기로 이 회장은 줄곧 LG그룹 경영에만 참여하고 있다. 자녀들도 명문가문과 연을 맺었다.LG카드 부회장을 지냈으며 LG그룹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 회장은 장인이 강세원 전 희성금속 사장과, 박동복 전 금호전기 회장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어 이들과는 한다리 건너 사돈지간이다. 이준용 회장의 형제로 이어진 2세부터는 본격적으로 정·관계, 재계 혼맥이 형성된다. 이 회장은 1965년 연애끝에 이화여대 출신의 한경진 여사와 혼인했다. 장인인 한순성씨는 천안 사업가 집안 출신이었다. 처음에 양가에서 두 사람의 연애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결혼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차남 이부용 전 대림산업부회장도 경희대 출신의 이선희 여사와 결혼, 재계 인맥을 쌓는다.1970년 집안 어른의 중매로 만났으며 장인이 서울주철회장과 헌정회 이사를 지낸 이종수씨다. 이 회장의 백부인 이재형 전 국회의장은 은행간부 출신인 배상준씨 집안에서 큰 며느리를 맞았다. 이어 큰 딸은 원용덕 전 헌병사령관 아들에게 시집을 보냈다. 작은 사업가와 결혼했던 둘째 고모 고 이임출의 딸은 윤용구 일동제약 회장 아들과 혼인을 맺었다. 숙부 이재연 아시안스타회장은 오세중 세방회장과 추경석 전 건설교통부장관 집안에서 며느리를 얻었다. 3세에 들어서 재계 혼맥은 더욱 두터워진다. 이 회장의 장남인 이해욱 대림산업 부사장은 LG그룹 구자경 명예회장의 외손녀인 김선혜(34) 여사와 결혼했다. 장모가 구자경 회장의 큰 딸 구훤미 여사, 장인은 희성금속 회장을 지낸 고김화중씨다. 이들은 친지의 소개로 만나 연애결혼했다. 이로써 대림산업은 LG가와 두번째 혼맥을 만들었다. 차남 이해승씨의 부인 김경애 여사는 전 미국 미주리대 김현영 박사의 딸이다. 3남 이해창(34)씨의 부인 최영윤(30) 여사는 같은 건설업종인 삼환기업 최용권 회장의 큰딸이다. 초창기 우리나라 토목 건설산업을 일군 두 집안이 사돈을 맺게 된 것이다. 아는 사람이 소개해 연애결혼했다. 결혼 당시 양가 부모들은 청첩장에 결혼 일자만 표시하고 장소, 시간은 넣지 않았다. 친지들에게 두 사람의 결혼 사실만 알리고 식장 참석과 축의금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막내딸 윤영(33)씨 남편은 외국계 금융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현재 일본에 체류 중이다. 가족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요일마다 이 회장 집에서 모인다. 이 회장은 손자들이 보고 싶을 땐 아침 일찍 자식들 집을 찾곤 한다. ●전문 경영인, 업계 최장수 베테랑 대림산업㈜ 이용구(59) 사장은 6년 가까이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71년 대림에 입사, 해외·주택 영업 담당 임원, 기획조정실장, 행정본부장, 사우디 사업본부장, 공사본부장 등 주요 보직을 거친 정통 건설맨. 몇 안되는 해외건설 전문가로, 국제감각이 탁월한 국제신사로 알려져 있다.35년간 이 회장과 함께 하면서 임직원들의 맏형 역할을 하는 등 이 회장의 신임이 두텁다. 대림산업의 한 축인 유화사업부문을 이끌고 있는 CEO는 한주희(53) 대표이사 부사장.80년 입사해 관리, 기술기획 및 영업 핵심 업무를 맡았다. 대림 코퍼레이션 기획 담당 임원, 대림 H&L초대 대표이사를 지냈다. 중국 전문가로 바이어 협상에 있어 귀재로 평가받는다. 고려개발㈜ 오풍영(63) 사장은 95년 관리인 사장으로 임명돼 10년 넘게 장수하는 최고경영자.ROTC중앙회 부회장을 역임하는 등 대외활동도 활발하다. 대림산업에 근무하다가 87년 법정관리에 들어간 회사로 옮겨 기획·재무부문을 담당했다. 관리인 취임과 동시에 경영혁신에 드라이브를 거는 등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 당초 2007년까지 계획됐던 법정관리를 9년 앞당겼다. ㈜삼호 신일철(56) 사장은 현장중심 경영자.2001년부터 최고경영자를 맡고 있다.81년 입사하기 전 금융기관과 제조업체에서 근무한 경력으로 기획, 예산, 재경 등을 담당하다가 임원 승진 이후 인사, 자재, 안전 등 전분야에서 경험을 쌓았다. 업계 최상위 수준의 안전경영을 하고 있다. ㈜대림코퍼레이션과 대림 H&L을 동시에 맡고있는 박준형(53) 사장은 76년 대림 석유화학에 입사한 여천 석유화학단지 건설의 역군. 유화 부문 공장장, 구조조정 담당 임원, 석유화학사업부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대림코퍼레이션은 석유화학 주력 무역회사, 대림H&L은 유화 부문 물류 회사. 석유화학 산업 위기를 구조조정을 통해 슬기롭게 극복했다. 대림콩크리트공업㈜ 서봉삼(61) 사장도 장수 CEO.2000년부터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70년 대림산업 입사 이후 주요 건설 현장을 누볐다. 상·하 구분없이 조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합리적인 경영을 하는 CEO로 평가받는다. 지시와 통제보다 자율과 협력을 강조한다. 오라관광㈜ 김부경(57) 사장은 국내 최대 관광지인 제주에서 512실 규모의 특급호텔과 국제적 수준인 36홀 규모의 골프장을 운영하는 최고경영자.83년 오라관광에 입사, 국내·외 판촉, 객실 운영 등 회사의 주요 업무를 두루 거쳤다. 제주도 관광업계의 산증인. 제주관광협회 부회장, 제주지역골프협회장으로 활동중이다. 대림 I&S 김영복(46) 사장은 38세에 임원,40세 대표이사 등 대림그룹내 최연소 기록을 두루 갖고 있다. 늘 새로운 발상으로 주위를 놀라게 해 ‘아이디어 뱅크’로 소문났다.81년 대림산업에 입사,4년 6개월간 쿠웨이트 현장에서 전산업무를 담당한 것이 인연이 돼 대림그룹의 디지털 경영을 주도하고 있다. 대림자동차공업㈜ 박노균(57) 사장도 2000년부터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73년 대림산업에 입사, 사우디아라비아 현장과 대림엔지니어링 재무담당 이사 및 행정본부장을 역임했다. 현장경영을 중시해 수시로 지방 사업장을 둘러본다. 외환위기 이후 이륜차 산업의 극심한 침체로 인한 경영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냈다. 웹텍 창업투자 이대영(50) 사장은 금융 전문가.79년부터 94년까지 은행, 레이니어은행, 한미은행,JP모건, 한국신용정보에서 근무하고 화동창업투자 대표이사를 지내기도 했다.95년 대림엔지니어링 국제금융 이사로 인연을 맺어 대림산업 구조조정 담당 상무로 있다가 99년부터 웹텍 경영을 책임지고 있다. chani@seoul.co.kr ■ ’닮은꼴’ 창업주 父子 대림산업 창업주 이재준 명예회장과 이준용 회장은 여러 면에서 닮은 기업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곁눈질하지 않고 한 우물을 파는 고집쟁이라는 점에서 같다.66년 된 회사지만 건설에서 벗어난 적이 한번도 없다. 건설이 제자리를 잡을 즈음해서 확장한 분야라고 해봤자 유화 부문 정도다. 덩치를 키우는 것을 자제한 것도 닮았다.‘돌다리를 두드리고 건너라.’는 말이 있지만 대림은 돌다리를 두드려보고도 건너지 않는 회사다. 하지만 옳다싶으면 금방 정상 궤도에 올려놓을 정도로 강한 추진력을 발휘하는 장점도 지녔다. 청탁을 하지도 않고 받을 줄도 몰랐다. 창업주는 인사 청탁에 있어서는 매우 완곡해 부모님이 살아 돌아와 청탁해도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빽’이나 동창생을 찾아다니면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고 박정희 대통령 생전에 청와대에서 들어온 인사 청탁을 거절한 일화도 있다. 그는 대통령의 부탁을 감히 거절할 수는 없겠지만, 본인이 경영일선에서 물러서 있을 때면 몰라도 당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명예회장과 현 회장 모두 쉽게 권력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사업가로서 자기 일에만 매달렸다. 이런 분위기는 지금도 이어져 형제간 독립된 사업을 일구거나 아예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친인척이 배제된 전문 경영인 체제로 움직인다. 그래서 친인척들로부터는 ‘남남만도 못한 회사’라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이 회장은 “대림은 대주주라고 무조건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다. 본인의 의지와 그에 합당한 능력이 뒤따라야 경영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친인척 경영에 있어서 창업주와 똑같은 모습이다. 이 회장의 동생 부용씨는 대림산업 부회장을 지냈지만 지금은 대림산업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이 전 부회장은 대림통상 지분을 놓고 숙부와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다. chani@seoul.co.kr ■ 李회장 부부 ‘남다른 문화사랑’ 서울 종로구 통의동 경복궁 옆에 위치한 대림미술관. 화려하지 않지만 멋스러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대림미술관은 유난히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다. 대림산업 임직원들은 물론 점심 때는 주변 사무실 직장인과 공무원들이 단골 관람객이다. 대림 관련 업체들은 단체로 다녀간다. 회사 차원에서 직원들에게 문화활동을 적극 장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림이 문화예술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이준용 회장 부부가 문화예술에 갖는 관심의 크기와 비례한다. 이 회장은 94년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가 탄생할 때부터 부회장으로서 활발한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대외 직함을 좀처럼 갖지 않으려는 이 회장이지만 10년넘게 이 단체의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여기에는 문화예술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한경진 여사의 역할도 크다. 한 여사는 대림미술관을 맡아 대림의 문화공헌 사업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대림미술관은 대림이 120억여원을 출연해 문을 연 사진매체 전문 미술관.93년부터 대전에서 운영해 온 한림미술관이 모태인데 2003년 서울로 옮겨 한 단계 발전시켰다. 이 미술관은 프랑스의 미술관 전문 건축가인 뱅상 코르뉘와 루브르 미술학교의 장 폴 미당 교수가 설계했다. 대지 253평에 지상4층, 연면적 366평 규모다. 대부분의 기업은 미술관 설립 때 한번 출연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대림은 운영에도 적극적이다. 문화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은 현실에서 미술관이 자립운영을 해나가기에는 아직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이다. 대림은 전시가 바뀔 때마다 직원들에게 전시를 관람토록 장려하고 경영전략회의나 송년회 등 사내 각종 모임을 미술관에서 열기도 한다. 예술에 대한 친숙도는 직원들의 창의적 사고를 키워주고 제품의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대림이 개발한 아파트 외벽 디자인은 미술저작권 등록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건축조형물들이 건축분야의 저작권에 등록되는데 비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미술분야의 저작권을 얻기는 쉽지 않다. 이 외벽디자인이 적용된 역삼 e-편한세상의 경우 외관의 차별화로 주변 다른 아파트들에 비해 가격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다. 직원들은 문화적 소양과 미적 안목이 결국 다른 업체와 다른 품질 경쟁력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chan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후세인 법정출석 끝내 거부

    전날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다며 재판부를 향해 “지옥에나 떨어져라.”고 악담을 퍼부었던 후세인은 끝내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7일 바그다드 특별법정에서 속개된 5차 공판에서 리즈가 모하메드 알리 주심은 변호인을 통해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출석을 종용했으나 후세인이 응하지 않자 예정보다 4시간 늦게 심리를 다시 시작했다.변호인과 다른 7명의 피고는 출두했으며 10명의 증인 중 남은 2명에 대한 심리가 진행됐다. 이날 첫번째 증인도 신변 보호를 위해 장막 뒤에서 진술했다. 이라크 법률은 궐석 재판을 용인하고 있다. 전날 9시간이 걸린 공판 도중 후세인 전 대통령은 법정에 붙들려 있는 바람에 피고들이 매우 지쳐 있으며 샤워는 물론, 옷을 갈아입거나 담배를 즐길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며 이같은 부당한 처우가 개선되지 않는 한 법정에 나오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이번 재판은 15일 총선에 차질을 주지 않기 위해 휴정한 뒤 21일 속개될 예정이라고 AP 통신이 보도했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후세인 재판 속개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전 대통령이 “처형당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재판부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등 전날 파행이 빚어졌던 후세인 등 8명에 대한 특별 재판이 6일 속개됐다. 바그다드 특별법정에서 계속된 이날 4차 공판에는 ‘증인 A’와 ‘증인 B’라 불린 여성 증인 2명이 장막 뒤에서 목소리를 변조한 채 지난 1982년 두자일 마을에서 벌어졌던 학살극에 대해 증언했다. 당시 16세였던 증인 A는 지난달 암으로 사망한 정보장교 출신 와다 알 셰이크가 자신에게 옷을 벗도록 명령한 뒤 공포탄을 발사하는 등 끔찍한 가혹행위를 저질렀으며 전기 고문과 구타도 자행했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바그다드 소재 경찰학교에서는 여성 2명에 의한 자살 폭탄테러가 발생, 경찰 등 40명이 숨지고 75명이 다치는 등 11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후세인 재판 ‘난장판’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과 측근 7명에 대한 재판이 5일(현지시간) 욕설과 고함, 변호인단의 퇴장 등 파행속에 진행됐다. 이날 재판은 바그다드 특별법정에서 재개됐다. 개정 직후 변호인단이 특별법정의 위법성을 따지려다 제지당한 뒤 집단 퇴정해 증인신문이 지연됐다. 리즈가르 모함메드 아민 주심 판사는 변호인단이 퇴정하면 다른 변호인을 선임하겠다고 경고했고 이를 지켜보던 후세인 전 대통령은 벌떡 일어나 “재판부가 임명하는 변호인은 거부하겠다.”고 고함을 질렀다. 후세인은 “법률에 따라 재판을 진행한다.”는 주심판사의 설명에 “미국이 만든 법이고, 이라크 주권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소리를 지르는 등 재판부에 도전적인 태도를 보였다. 후세인의 이복동생이자 정보부장을 역임한 공동 피고인인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도 “이라크 만세, 아랍국가 만세”를 외쳐대면서 “우리를 빨리 처형하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한편 재판에서 두자일 마을 사건 관련 증인들이 나와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등 후세인과 측근들의 반인륜 범죄 행위 등 기소내용을 확인했다. 첫 증인으로 나온 아메드 하산 모하메드는 “남녀 할 것없이 14살부터 70살까지의 두자일 마을 주민들이 후세인의 안전요원들에게 잡혀가 살해당했다.”고 증언했다. 모하메드는 증언을 하다 후세인의 이복동생인 알 티크리티에게 “네가 14세 소년도 살해했다.”며 고함을 쳤고 그와 욕설을 주고 받았다. 두자일 사건은 82년 7월 후세인 암살미수사건이 발생했던 두자일 마을의 시아파 주민 140여명이 약식재판으로 처형된 것을 말한다. 칼릴 알-둘라이미 변호사와 램시 클라크 전 미국 법무장관 등 변호인단은 퇴정했다가 재판부와 협상을 벌여 90분 만에 재판에 복귀했다. 이번 재판은 지난 10월19일 첫 개정 이후 2차례 휴정을 거쳐 3번째로 열렸다. 지난달 28일의 2차 재판에서도 증언이 이뤄졌지만 비디오 녹화증언이었다. 현지 언론들은 증인 10명이 출석하게 될 3차 재판은 오는 15일의 총선을 앞두고 휴정할 때까지 3∼4일 계속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석우기자 외신종합 jun88@seoul.co.kr
  • 김은성씨 징역5년 구형

    안기부와 국정원의 불법도청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도청수사팀은 5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은성 전 국가정보원 2차장에 대해 징역5년을 구형했다. 검찰은 “김씨가 재직하던 30년 동안 이어진 국정원 불법감청은 원장의 결단없이 김씨의 힘만으로 근절하기 힘들었지만, 김씨는 원장들에게 진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김씨가 자신의 혐의를 자백했고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 점 등을 참작해 구형량을 정했다.”고 덧붙였다. 공판 끝무렵에 김씨는 “애초에 혐의를 부인하려고 했지만, 내가 고백하지 않으면 더 많은 직원들이 양심상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에 드러날 일이라면 내 선에서 책임지고 고백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최근 검찰에서 불법감청 사실을 진술하고 자살한 자신의 후임 차장인 이수일씨의 괴로움을 공감한다고 덧붙였다. 3차례의 심리를 거친 김씨의 재판은 오는 23일 선고를 끝으로 일단락된다. 하지만 불법도청 사건 재판의 2막이라고 할 수 있는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의 재판과정에서는 치열한 ‘법정공방’이 펼쳐질 전망이다. 검찰은 지난 2일 임씨와 신씨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임씨 등에 대한 공소사실에는 김대중 정부시절 이들의 지시로 국정원이 정치인·경제인·언론인·시민단체 관계자 등 1800여명에 대해 상시도청한 혐의 등이 담겨 있다. 하지만 전직 두 원장은 도청에 관여했다는 혐의에 대해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다. 증인소환 한차례 없었던 김씨의 재판과 달리 두 원장의 재판이 길어질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임씨 등의 혐의를 입증할 증인 대부분이 전·현직 국정원 직원이라는 점도 검찰에는 부담이다.정보기관의 생리상 직원들이 공개된 법정출석을 꺼릴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모시던’ 원장 앞에서 그들의 혐의를 털어놓는 것도 증인들에게는 부담이 된다. 실제로 두 원장이 구속되자, 김씨는 “원장 앞에서 혐의를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 사건을 병합하지 말아달라.”는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했다.홍희경 김효섭기자 saloo@seoul.co.kr
  • [어떻게 지내세요] 작곡가로 돌아온 김강섭 전 KBS 악단 지휘자

    [어떻게 지내세요] 작곡가로 돌아온 김강섭 전 KBS 악단 지휘자

    “요즘들어 우리 대중 음악이 너무 상업적으로 치우치고 있어요. 또한 유사표절 등 쉽게 쉽게 부르려는 경향도 많고요.” 대중음악 연주가 김강섭(73)씨. 지난 1985년 ‘KBS-TV 가요무대’를 제작한 이후 20년 가까이 상임 지휘자를 맡아 국내와 해외동포에도 많은 팬들을 확보했다. 그의 방송음악 인생은 올해로 45년째를 맞는다. 또 KBS 음악프로인 ‘열린 음악회’ 출범의 산파역을 담당했다. 특히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불나비’‘그 얼굴에 햇살을’ 등 200여곡의 히트곡과 ‘달려라 백마’ ‘팔각모 사나이’ 등의 군가를 작곡, 이래저래 우리나라 대중 음악사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이같은 공로로 지난 94년 연주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고, 최근에는 제12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연주인상을 수상했다. 지난 주말 서울 서초구 반포동 팔레스호텔에서 김씨를 만났다. 그가 일주일동안 중국을 다녀온 직후였다. 까닭을 물었더니 “연길과 백두산을 여행했다.”면서 “왠지 백두산만 다녀오면 기운이 펄펄 난다. 온천욕까지 하면 모든 스트레스가 싹 사라지고 기분이 무척 좋아진다.”고 크게 웃었다. 지금까지 백두산은 열두번정도 다녀왔단다. 하산하는 길에는 가끔 ‘연길예술단’ 관계자들과 만나 음악얘기를 꽃피운다. 지난 91년 연길방송국 개국 기념일에 초청된 것이 인연이 돼 여전히 끈끈한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 자연스럽게 ‘가요무대’ 얘기가 나왔다. 그는 “20년 전 당시 KBS 박현태 사장이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옛날로 돌아가더라, 좋은 프로그램 하나 연구 좀 해보슈.’라고 해 지금의 ‘가요무대’를 만들게 됐다.”고 회고했다. 또 “처음에는 담당 PD와 아나운서가 세번이나 바뀌는 진통을 겪다가 출범 3년째 김동건씨가 진행을 맡으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술회했다. 따라서 ‘가요무대’는 자신의 음악인생 가운데 가장 애정을 두는 대표작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 10월말 이런저런 사정으로 물러나게 돼 아쉬움과 섭섭함을 동시에 감추지 못했다. 이에 대해 “가수마다 음악의 넓이가 다르다. 지휘자는 그걸 맞추는 책임이 있다. 그런데 요즘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PD들은 그걸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고 그만두게 된 이유를 우회적으로 설명했다. 11월21일 방송된 ‘가요무대 20주년 특집’때 방송사측에서 감사패를 전달하겠다고 했으나 김씨는 단호히 거절했다.20년 동안 일해온 예우가 겨우 그것뿐이냐는 서운함에서였다. 김씨는 “해외연주를 하면서 수차례 기립박수를 받을 만큼 많은 감동과 에피소드를 안겨 주었다. 특히 일본의 경우 300여회의 연주기록을 세워 동포들에게 뜨거운 조국애를 심어 주기도 했다.”고 잠시 회상에 젖어든다. “우리가 얘기하는 트로트니 탱고니 하는 것은 리듬의 한 장르일 뿐입니다. 언론에서도 트로트 리듬 혹은 트로트 풍이라고 해야지요. 미국에서 유행한 이 리듬은 일본으로 건너와 ‘뽕짝’으로 바뀌었고 이어 우리 문화에 파고들었습니다. 세계 음악의 흐름을 간파하면서 우리식 가락과 리듬이 담겨 있어야 진정 대중음악이 발전합니다.” 미식가인 그는 요즘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과 서울 주변의 맛있는 집을 자주 찾는다. 슬하에 딸만 셋을 두었으며, 결혼한 딸 둘은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막내딸, 부인과 지낸다.“그동안 연주인생을 살아왔다면 앞으로는 작곡에만 전념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글 김문기자 km@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삐삐’로 문맹자 면허시험 부정행위

    운전면허 시험을 치르는 사람의 가슴에 ‘무선 송수신기’를, 허벅지에는 ‘진동 호출기’를 부착한 뒤 정답을 알려준 일당이 붙잡혔다. 서울 양천경찰서는 2일 필기시험 수험생을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자로 등록한 K운전학원장 김모(53)씨와 무선 장비로 답을 알려준 권모(43)씨 등 3명에 대해 공무집행방해 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또 부정행위를 한 하모(55)씨 등 15명을 불구속 입건하고 운전면허를 취소했다. 권씨 등은 2003년 3∼6월 응시자 5명으로부터 100만∼300만원을 받고 부정행위를 도왔다. 문맹자가 보는 필기시험에서 감독관이 마이크로 문제를 두 차례씩 읽어주는 점에 착안했다. 응시자의 가슴에 무선 송수신기를 달아 감독관이 읽는 문제를 외부에서 청취했다. 정답이 1번이면 응시자의 허벅지에 부착된 진동 호출기로 신호를 1차례,2번이면 2차례 전달했다. 학원장 김씨는 수강료 명목으로 1인당 25만∼500만원씩 받은 뒤 문맹자가 아닌 수험생 10명을 문맹자로 둔갑시켰다. 문맹자가 보는 필기시험은 일반 시험보다 복잡한 도표나 그림이 없고 문제가 단순해 쉽게 합격할 수 있어서다. 운전면허시험장에 제출하는 서류에 보증인 2명의 도장만 받으면 별다른 사실 확인 없이 문맹자로 인정하는 허점을 이용했다.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심혜진 ‘그 여자’로 정통 멜로드라마 컴백

    심혜진 ‘그 여자’로 정통 멜로드라마 컴백

    “치렁치렁한 가발과 검은 드레스만 벗어던져도 그게 변신이에요.” 심혜진이 정통 멜로드라마로 돌아온다. 오는 9일 시작하는 SBS 금요드라마 ‘그 여자’(연출 이현직, 극본 소현경)를 통해서다. 사실 돌아왔다는 말은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MBC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의 ‘긴 생머리+검정 옷+도끼+고스톱’ 이미지가 굳어져가는 동안에도 늘 다른 연기를 해왔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아트’를 통해 생애 첫 연극 무대에 올랐다. 또 북남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영화 ‘국경의 남쪽’과 내년 방송 예정인 드라마 ‘궁’의 촬영에도 땀을 쏟고 있다. 지난달 30일 경기도 일산에서 만난 심혜진은 “신인이라면 몰라도…. 시트콤을 하며 정극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놀랍다거나 새롭지는 않아요.”라면서 “둘 다 연기한다는 것 자체는 차이가 없잖아요.”라고 반문했다. “시트콤 이미지를 떨치려고 일부러 택한 것은 아니에요. 제작진에서 그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고 캐스팅하지도 않았을 거고요. 굉장히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이고, 저는 감정에 충실한 연기를 하려고 노력할 뿐이에요.” 연기 경력 20년을 채워가는 중견 연기자에게서 자신감이 뚝뚝 묻어난다. 하지만 세월에 대한 아쉬움도 드러냈다.“정말 오랫동안 연기한 것 같아요. 세월의 변화를 많이 느끼죠. 아줌마 연기를 해도, 할 때는 모르다가 휴식 시간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정말 아줌마가 됐구나.’하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도 예전에 발랄하고 예쁜 역할도 많이 해봐 위안이 되죠.” 이번에 맡은 배역은 현모양처였지만, 남편의 외도로 이혼하게 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지수. 게다가 나중에 사랑에 빠지는 연하 남자가 남편을 바람나게 했던 여자와 결혼한 사람이다. 뻔한 스토리에 관계를 꼬고 꼬는 드라마일 것 같았다. 이에 대해 심혜진은 “드라마 소재가 반복된다고 하지만, 사실 그게 우리가 사는 모습이기 때문이 아닐까요?”라면서 “처음에는 피해자였다가 나중에는 가해자로 바뀌게 된다는 점에서 해볼 만한 역할이라고 느꼈어요.”라고 설명한다. 불쑥 자신의 성격을 자기도 모르겠다는 말을 던진다. 숱하게 다른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실제 성격을 잊어버릴 정도가 됐다는 심혜진. 만큼 언제나 연기에 혼신을 다했다는 방증인 것 같다. 그녀의 또 다른 아줌마 연기가 겨울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구기를 기대해 본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후세인 “바르잔 지시로 주민 잡아가”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과 측근 7명에 대한 재판이 28일 바그다드 그린존 내의 이라크 특별법정에서 재개됐다. 후세인측 변호인단이 지난달 19일 변론준비 미흡을 이유로 재판일정 연기를 신청한 뒤 5주 만에 재개된 이날 재판은 그러나 오전 심리만 마친 뒤 또다시 다음달 5일까지 연기됐다. ●새달 5일까지 재판 또 연기 이날 오전에 진행된 재판에서 후세인과 측근 인사들의 기소범죄인 두자일 마을 주민 148명 학살사건에 관계된 증인의 첫 증언이 있었다. 이라크의 악명높은 정치범 수용소 책임자였던 와다 이스마일 알 셰이크는 비디오 증언에서 “바르잔(후세인의 이복동생 중 정보기관 책임자)의 지시로 군인들이 사람들을 잡아갔다.”고 증언했다. 셰이크는 지난달 첫 재판 직후 교도소 병원에서 비디오를 녹화했으며 그 후 얼마 안돼 숨졌다. 또 이날 심리에서는 1982년 당시 두자일 마을을 지나던 후세인 전 대통령이 암살시도 직후 차에서 내려 군인들에게 “(마을주민들을) 분리한 뒤 조사하라.”고 지시하는 육성이 담긴 비디오 장면도 증거물로 제출됐다. 두자일 학살은 1982년 7월 이 마을을 지나던 후세인이 암살공격을 받고 주민 148명을 약식재판을 통해 처형한 사건이다. 그러나 변호인단은 첫 재판 이후 변호인 2명이 피살되는 등 변호인단의 신변보장이 이뤄지지 않고 있고 변론준비가 덜 됐다며 재판을 3개월 다시 연기해줄 것을 요청했다. 아민 주심판사는 그러나 오전 휴회 직후 피고인중 한명인 타하 야신 라마단이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도록 재판일정을 다음달 5일까지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한편 양복을 차려입은 후세인 전 대통령은 코란을 들고 법정으로 들어섰으며 1차 재판 때와 마찬가지로 리즈가르 모함메드 아민 주심판사를 도전적인 태도로 몰아붙였다. 후세인은 특히 미군의 계호를 받으며 수갑과 족쇄를 찬 채 4층 계단을 올라왔다며 불만을 터뜨리는가 하면 펜과 종이를 압수하면 어떻게 스스로 변호할 수 있겠느냐고 큰소리를 쳤다. ●클라크 전 美법무 후세인 변호인으로 이날 재판에는 변호인단에 합류한 람시 클라크 전 미 법무장관이 처음으로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클라크 전 장관은 민주당 출신인 린든 존슨 전 대통령시절 법무장관을 지냈으며 최근 인권 변호사 및 운동가로 활동해 왔다. 후세인은 이 사건으로 유죄가 확정되면 사형선고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이라크 주재 미국대사관은 미국인 1명을 포함해 구호단체에서 일하는 외국인 4명이 바그다드에서 납치됐다고 확인했다. 김균미기자 외신종합 kmkim@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동양그룹-창업주 故 이양구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동양그룹-창업주 故 이양구회장家

    동양은 국내 재벌가(家)에서 최초로 사위가 승계한 그룹이다. 동양 창업주인 고 이양구 회장이 1945년 북에서 혈혈단신으로 월남한데다 이관희(76)여사 사이에 딸만 둘을 둔 것과 무관치 않다. 이 창업주의 차녀인 화경(49)씨가 일찍이 경영에 참여해 현재 오리온 사장직을 맡고 있지만 동양의 ‘경영 대권’은 맏사위인 현재현(56) 동양 회장과 둘째 사위인 담철곤(50) 오리온 회장에게 돌아갔다. 가족 구성원이 단출한 만큼 이 창업주가(家)의 혼맥도는 정·관·재계에 든든하게 뿌리를 내린 국내 여느 재벌가와 달리 단순하다. 또 이 창업주가 딸들의 통혼을 통해 사돈가(家)의 후광을 기대하기보다 자신의 유업을 이어갈 사위들의 ‘사람 됨됨이’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도 혼맥의 단순함을 더했다. 특히 오리온 담 회장의 집안이 화교 출신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설탕왕·시멘트왕’ 이양구 창업주 동양 창업주인 서남(瑞南) 이양구 회장은 1916년 함경남도 함주군의 작은 농가에서 부친 이교흠(작고)씨와 모친 김성자(작고)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25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면서 서남의 어린 시절은 힘겨운 생활로 점철됐다.15세의 늦은 나이에 보통학교 졸업장을 받은 서남은 상급학교 진학 대신 ‘함흥물산’이라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식료품 도매상에 취직했다. 서남은 훗날 이곳에서 ‘정직과 신용’이라는 상도를 배웠다고 밝혔다. 8년간 악착같이 돈을 모은 서남은 1938년 식품도매상인 ‘대양공사’를 시작으로 6·25전까지 수차례의 회사를 세우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그때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고향에 수십만평의 토지와 1억원에 가까운 거금도 삼팔선과 전쟁으로 잃었다. 그러나 그는 부산에서 설탕도매업을 기반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전시의 특수 경기와 생필품 부족이 거꾸로 그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서남은 부산과 마산, 대구 등에서 이른바 ‘설탕왕’으로 불렸다. 서남은 당시 국내 유일하게 설탕을 생산했던 고 이병철 삼성 회장, 고 조홍제 효성 창업주와 가까운 사이였다. 서남은 1955년 삼성 이 창업주와 풍국제과의 배동환씨 3인의 공동 출자로 동양제당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으며, 풍국제과의 경영에도 참여해 오늘날 오리온(옛 동양제과)의 기틀을 다졌다. 또 동양제당이 국내 최고의 역사를 지닌 삼척시멘트를 인수하면서 서남은 자연스럽게 시멘트 사업에 진출하게 됐다. 서남은 1957년 삼척시멘트를 동양시멘트공업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한 뒤, 노후시설 교체와 증산을 통해 한때 시멘트 왕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업 경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신규 업체의 대거 진입으로 시멘트가 남아돌았고, 정부의 금융 긴축정책으로 동양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서남이 훗날 ‘운명의 날’이라고 밝혔던 1971년 9월10일 법원에 회사보전신청을 제출해 세인으로부터 온갖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눈덩이처럼 불어난 사채에도 불구하고 동양은 살아났다. 정부의 사채동결조치가 사실상 동양의 구명줄이었으며, 평상시 쌓아온 정직과 신용도 큰 도움이 됐다. ●운명적인 만남 서남과 이관희 여사의 인연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6·25가 이들을 만나게 하고, 또 헤어지게 만들었지만 결국은 거제도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게 했다. 6·25 발발로 3년 5개월만에 공군 소속으로 귀향한 서남은 모친의 부탁에 이관희씨와 약혼했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관희씨는 당시 함흥의 명문인 영생고녀(永生高女)를 나와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전쟁 개입으로 두 사람은 결혼식도 못올리고 생이별을 하게 됐다. 부산으로 내려온 서남은 가족 소식을 알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다가 뒤늦게 피란선을 타고 월남해 거제도에 머물던 관희씨와 극적으로 만났다. 이 여사는 현재 서남재단 이사장으로 남편의 유업을 기리고 있다. 서남과 이 여사는 슬하에 장녀 혜경(53)씨와 차녀 화경씨 등 2녀를 뒀다. 이화여대 미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혜경씨는 평소 집안끼리 잘 알고 지내던 고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의 중매로 1976년 현재현 회장과 결혼했다. 현 회장은 당시 부산지검 검사로 재직중이었다.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으며, 대학 3학년 때 1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혜경씨는 현재 전공을 살려 동양매직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 회장의 집안은 전형적인 선비 가문이다. 고려대 초대 총장을 지내고 ‘유학계의 마지막 거두’로 알려진 고 현상윤 총장이 그의 조부이며, 이화여대 의대 교수를 역임한 고 현인섭씨가 그의 부친이다. 그는 고 현 교수의 3남2녀 가운데 셋째다. 첫째는 고려대 대학원장인 현재천(61)씨이며, 둘째는 현재민(59) KAIST 교수, 장녀는 현재희(51) 세종대 교수, 차녀는 현재란(49) 의사로 현재 이화의원 원장이다. 현 회장과 이 고문은 ‘정담(28·여)-승담(25·남)-경담(23)-행담(18)’ 등 1남3녀를 두고 있다.2세 모두 미국 스탠퍼드대를 다녀 현 회장과 동문이다. 첫째인 정담씨는 스탠퍼드대에서 심리학과 경제학을 복수로 전공한 뒤 지금은 MBA(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장남 승담씨는 컴퓨터 사이언스와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차녀 경담씨는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고 있다. 막내딸 행담씨는 스탠퍼드대 교양학부 1학년에 재학중이다. 서남의 둘째 딸 화경씨는 이화여대 사회학과 출신으로 1980년 뜨거운 열애끝에 담철곤 회장과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담 회장의 선친은 대구에서 한의원을 운영했으며, 타이완 국적으로는 한의원 경영이 쉽지 않아 일찍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화경씨와 담 회장은 슬하에 경선(20)씨와 서원(16·남) 1남1녀를 뒀다. 경선씨는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인문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서원군은 국내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서남가(家)의 혼맥은 이처럼 단순하지만 그나마 현 회장 집안을 통해 정·재계에 인연이 이어진다. 현 회장의 조부인 현상윤 전 총장은 6∼8대 국회의원이었던 김봉환 전 국회법사위 위원장과 사돈지간이다. 김 전 법사위원장은 손경식 CJ 회장과 사돈으로 연결된다. ●잉꼬 부부 이 고문과 현 회장은 중매로 만났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애틋하고 각별하다. 결혼 이후 경영수업을 위해 미국 스탠퍼드대에 홀로 유학한 현 회장은 이 고문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고, 편지 첫 머리에 늘 ‘사랑하는 당신’이라고 적었다. 담 회장과 이 사장은 서로가 첫 사랑이다. 대구에서 서울로 유학온 담 회장은 중학교 3학년 때 이 사장을 같은 반 친구로 처음 만났다. 이 때부터 서로에게 끌린 두 사람은 10년 이상 연애했다. 담 회장이 미국 조지워싱턴대로 유학간 4년이 유일하게 떨어진 시간이었다. 이 때도 두 사람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수백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하루가 멀다하고 비싼 국제전화를 하는 탓에 꾸중도 많이 들었다. 이제는 눈빛만 봐도 서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친구에서 연인, 다시 부부로 인연이 이어지기까지 두 사람은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오랜 만남을 지속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막상 결혼때는 집안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는 후문이다. 담 회장과 이 사장은 국내 재계에서 보기 드문 ‘부부 CEO(최고경영자)’다. 담 회장은 현재 이 사장이 총괄경영을 맡고 있는 오리온의 엔터테인먼트사업 아이디어를 추진한 주역이다. 이 사장은 “나는 다소 감성적인 반면 담 회장은 실용적이어서 상호 보완이 된다.”면서 “시간이 갈수록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져 이제는 이 세상에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시에 더없이 훌륭한 사업 파트너”라고 곧잘 언급한다. ●혹독한 경영 수업 서남은 사위들을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더 철저하게, 더 강하게 경영 수업을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내 딸, 내 사위라고 해서 특혜는 없다.”는 것이 서남의 ‘후계자론’이다. 현 회장은 75년 부산지검 검사로 입문한 뒤 결혼과 함께 경영자로 변신했다. 그는 77년 동양시멘트 이사로 재계의 첫 발을 내디뎠고, 초고속 승진을 통해 동양의 후계자로 대내외에 알려졌다. 그러나 후계자의 길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이 창업주는 타계하는 날까지 두 사위와 작은 딸에게 이론과 실전으로 혹독한 경영자 수업을 시켰다. 현 회장은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에서 국제금융을 전공한 이후, 이 창업주로부터 직접 경영수업을 받았다. 낮에는 현장을 같이 누비며 실전과도 같은 수업을 받았고, 밤에는 새벽까지 수십년동안 쌓아온 이 창업주의 경영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이 창업주의 경영수업은 이틀 정도 잠을 안재우는 일이 허다할 정도로 강도가 높았다. 이화경 사장은 동양제과(현 오리온)에서 인턴사원으로 일을 시작했으며, 담철곤 회장도 유학을 마친 후 동양시멘트 구매부 과장으로 입사했다. 이 창업주는 ‘경영자가 되려면 기본부터 충실해야 한다.’며 두 사람 모두 구매부로 발령냈다. 이후 이 사장은 영업부를 제외한 각 부서를 돌며 업무를 익혔다. 특히 마케팅담당 시절엔 획기적이고 신선한 광고로 광고담당자들을 놀라게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초코파이의 ‘정(情) 시리즈’ 광고다. 그는 입사 26년만에 오리온그룹의 외식과 엔터테인먼트사업을 담당하는 CEO에 올랐다. 이 사장은 최근 경제전문지 포브스코리아가 발표한 한국의 여성부호 50인 가운데 8위(1652억원)에 올랐다. 담 회장도 81년부터 동양제과로 자리를 옮겨 구매부장과 사업, 관리, 영업 상무 등을 거치며 89년 동양제과 CEO에 올랐다. ●동양·오리온의 분가 이 창업주가 1989년 타계한 이후 동양의 경영권은 가족간 협의를 통해 맏사위인 현 회장이 승계했고, 둘째 사위인 담 회장은 동양제과를 맡았다. 현 회장과 담 회장은 13년간 각각 시멘트·금융, 제과·엔터테인먼트 등의 사업영역에서 독자 경영을 해왔다. 이 때문에 사위간에 기업 분할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여기에 동양제과가 영상미디어 분야에 투자와 외자유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30대 기업집단으로 제한을 많이 받아 계열분리가 빨라졌다. 동양제과는 2001년 9월1일 동양에서 분가했다. 동양그룹 32개 계열사 가운데 제과와 엔터테인먼트 계열의 16개사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러나 동양과 오리온(옛 동양제과)은 여전히 그룹 CI(기업이미지)를 함께 사용할 정도로 뿌리에 대한 깊은 유대감을 이어가고 있다. 현 회장은 “동양과 오리온의 분가는 미래 지향적인 경영을 위해서이며, 한 뿌리에서 나온 두 그룹이 한국경제의 거목으로 성장하기 위해 가지를 펼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계열분리 이후 동양은 금융분야에 집중하고 있다. 동양종합금융증권은 증권·종금·투신업을 아우르는 종합금융사로 거듭났으며, 동양생명은 6년 연속 흑자를 내고 있다. 동양은 현재 제조업 6개사, 금융 7개사로 총자산은 15조원 수준이다. 지난해 매출액은 4조 300억원을 기록했다. 오리온그룹은 케이블 방송과 영화 등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집중해 계열사를 26개사로 늘렸다. 지난해 매출액 1조 5300억원을 올렸다. 특히 미디어플렉스의 극장사업체인 메가박스는 전국에 117개 스크린을 확보하며 최고의 영화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영화투자 배급사인 쇼박스는 ‘말아톤’과 ‘웰컴투 동막골’,‘가문의 위기’ 등을 잇달아 흥행시켜 설립 3년만에 업계 1위로 올라섰다. 여기에 베니건스를 중심으로 한 외식사업과 편의점 사업체인 바이더웨이 등도 견고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동양·오리온의 대표 CEO 노영인(59) 동양시멘트 사장은 30여년을 시멘트업계에 종사한 산증인이다.98년 동양시멘트 대표이사로 취임한 그는 외환위기 한파를 수출로 돌파했다. 그동안 시멘트 수출은 채산성이 안 맞고, 선진국의 품질검사가 까다로워 시늉만 내왔다. 그러나 노 사장은 특유의 카리스마로 밀어붙여 99년에는 창사이래 최대 물량인 171만t을 세계 각국으로 수출했다. 덕분에 579억원의 순익을 기록해 기나긴 적자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노 사장은 동양의 실질적인 지주회사인 동양메이저의 대표이사도 겸직하고 있다. 박중진(54) 동양종합금융증권 부회장은 금융업계에선 신사로 통한다. 친근한 말투가 트레이드 마크. 그는 조지워싱턴대 MBA 출신으로 미국 공인회계사(AICPA) 자격증을 갖고 있다. 탄탄한 이론을 바탕으로 동양증권과 동양생명, 동양종금을 거치며 10년이상 실전 금융을 익혔다. 윤여헌(57) 동양생명 사장은 행시 14회 출신으로 건설부와 재무부를 거쳐 95년 동양에 합류했다. 윤 사장은 겉치레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내실형’ 스타일이다. 철저한 손익 위주의 경영을 선호한다. 오리온그룹을 이끄는 전문 경영인으로는 김상우(48) 오리온 대표이사를 꼽을 수 있다. 김 대표는 1987년 오리온(옛 동양제과)에 입사한 이후 줄곧 마케팅 분야를 맡았다. 농심이 장악한 국내 스낵시장에 포카칩과 스윙칩 등을 출시해 오리온의 돌풍을 일으켰다. 오일호(53) 스포츠토토 사장은 1987년 오리온 마케팅부 과장으로 입사해 오리온그룹과 인연을 맺었다. 004년엔 스포츠토토 사령탑을 맡아 차별화된 마케팅으로 초기 난관을 극복했다. 특히 가라앉은 ‘토토´를 최근 ‘토토 붐´으로 확산시킨 것은 그의 공이 컸다는 평이다. golders@seoul.co.kr ■ 창업주 두딸 이혜경·화경씨 ‘닮은 듯 닮지 않은 두 자매.’ 이혜경(53) 동양매직 고문은 국내 ‘재벌가(家)의 딸’들이 그러하듯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전공(이화여대 미대)을 살려 동양매직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가정에 더 충실한 편이다. 그러면서도 장녀로서 모친인 이관희(서남재단 이사장) 여사를 도와 부친의 뜻을 기리는 서남재단의 이사로서 사회봉사 활동에 적극적이다. 반면 이화경(49) 오리온 사장은 1975년 동양제과(현 오리온) 인턴사원으로 입사해 밑바닥을 두루 거친 뒤 26년만에 오리온 사장에 올랐다. 약력에서 알 수 있듯 이 사장은 그동안 ‘경영자의 길’을 걸어왔다. 언니와는 다르게 ‘바깥 일’을 더 중시한다. 이 때문에 자매를 잘 아는 지인들은 보통 언니를 ‘살림꾼’으로, 동생을 ‘여장부’로 부른다. 이 고문은 소박하면서 다정다감하다. 살림을 손수 챙기며, 요리 실력이 수준급이다. 미술 감각을 살려 실내 장식과 정원 등은 손수 꾸민다. 또 혼자서 곧잘 동대문 시장에 나가 살림 도구나 가족 옷을 산다. 자녀 교육에도 각별한 정성을 쏟는다.1남3녀를 모두 미국의 명문 대학인 스탠퍼드대에 진학시킨 것은 이 고문의 노력과 관심 덕분이다. 이 고문은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때 사회활동을 극도로 자제했으며, 수년간 미국에 머물며 자녀 뒷바라지를 했다. 현 회장도 틈틈이 아이들의 영어와 수학을 직접 가르쳤다. 막내딸 행담씨가 올해 대학에 들어가면서 이 고문은 건강 관리를 위해 처음 골프채를 잡았다. 이 사장은 경영인, 아내, 엄마의 ‘1인3역’을 소화하느라 늘 시간에 쫓긴다. 그렇다고 어느 하나 소홀한 법이 없다. 자녀(1남1녀)와 함께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업무 외의 약속은 잡지 않는다. 경영인으로서 이 사장은 어떨까. 호탕하고 도전정신이 강해 부친을 빼닮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월간 현대경영이 2003년 8월 100대 기업 비서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신세대 여비서들이 모시고 싶은 CEO’에 뽑히기도 했다. 그만큼 업무상의 유연함과 직원 배려가 돋보인다는 것이다. 이 사장은 인턴사원으로 출발해 구매부, 조사부, 마케팅부 등 주요 부서를 거쳐 누구보다 현장 분위기와 실무진의 고충을 잘 알고 있다. 오리온의 외식 및 엔터테인먼트 계열사 직원들은 이 사장을 열정적인 CEO로 평가한다. 이 사장이 전담하는 계열사는 온미디어와 미디어플렉스, 외식 사업부문인 롸이즈온 등 3개사. 일주일을 나눠 각각의 회사에 출근한다. 이 사장은 현장 경영을 중시한다. 직원들과 직접 회의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며, 영화사업을 담당하는 CEO로서 때로는 서울 삼성동의 메가박스에서 하루종일 영화를 보기도 한다. 이 사장은 “내가 재밌고, 감동을 받아야 관객들에게 권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golders@seoul.co.kr ■ 두 CEO 경영스타일 비교 ‘외유내강 VS 실용주의’ 사위들이 경영권을 승계하다 보니 현재현(56) 동양 회장과 담철곤(50) 오리온 회장은 곧잘 비교의 대상이 된다. 재계 안팎에선 현 회장을 선 굵은 외유내강형으로, 담 회장을 철저한 실용주의형으로 분류한다. 기업의 성장세로는 담 회장의 오리온이 빠르다.1989년 매출액 1360억원에 불과했던 동양제과(현 오리온)를 지난해 1조 5300억원으로 10배 이상 키운 것은 신규 사업을 진두지휘한 담 회장의 공이 크다. 현 회장은 오리온이 분가한 이후 그룹 구조조정에 매진했다. 금융계열사를 통합, 매각하면서 부채비율을 낮추는 데 주력했다. 이 덕분에 1000%를 웃돌았던 부채비율은 어느 정도 안정궤도에 진입했다. 상대적으로 그룹의 외적 성장은 더디었지만 속은 눈에 띄게 알차졌다. 현 회장은 최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CEO 서밋’에서 유창한 영어 실력을 과시하며, 재계의 ‘스타 CEO’로 떠올랐다.CEO 서밋 의장으로서 각국 CEO(최고경영자)들과 토론 및 기자회견을 깔끔하게 소화해 화제가 됐다. 그는 이처럼 남들이 멍석을 깔아주지 않는 한 자신의 진면목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외유내강형 CEO로 불리는 까닭이기도 하다. 현 회장은 화를 내지 않는다. 늘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그룹 총수가 화를 내서 임직원들의 기를 꺾으면 차후 일 진행이 쉽지 않다는 생각에서다. 대신 원칙에 따라 결정된 내용은 남들이 주저해도 과감하게 추진한다. 현 회장이 경영자로서 평가받은 첫 사업은 1984년 일국증권(현 동양종합금융증권) 인수다. 당시만 해도 증권사는 대형사고와 부실경영의 대명사로 인식됐던 터라 임직원들의 증권사 인수 반대는 만만치 않았다. 그렇지만 현 회장은 자본금 20억원에 지점이 덜렁 하나뿐인 일국증권을 불과 5년만에 10대 증권사로 키워냈다. 이를 계기로 동양은 30년간 지속된 시멘트와 제과 사업에서 탈피해 금융업 중심으로 업종 다변화를 일궈냈다. 현 회장의 취미는 바둑. 중학교 시절 바둑을 배워 고등학교 때는 적수가 없을 정도였고, 대학 때는 교내 대회에서 수차례 우승을 했다. 장수영 9단에 2점으로 버티는 아마 고수다. 현 회장의 고교·대학 동기들은 그를 ‘티없는 친구’로 기억한다.“품성이 맑고 깨끗하며 원만할 뿐 아니라 일처리까지 깔끔하다.”는 것이다. 담철곤 회장은 실용주의자이자 ‘일벌레’라는 평가를 받는다. 요즘도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로 골프를 치지 않는다. 대신 스키 등 다이내믹한 스포츠를 좋아한다. 그렇다고 냉혹한 스타일도 아니다. 직원들은 잔정이 많은 CEO라고 얘기한다. 한 임원의 설명이다.“부장 시절에 기획안을 제출했다가 담 회장으로부터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회장으로부터 휴대전화가 왔습니다.‘다시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다’는 내용이었죠. 직원의 기를 꺾지 않으려는 회장의 배려였지요.” 담 회장은 인재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90년대 초반에는 20대 중심의 신규 사업팀을 구성한 뒤 수십억원을 투자했다. 그러나 여러 분야의 사업에 진출해 쓴맛을 많이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훗날 오리온의 케이블 TV사업과 극장·외식사업 등으로 진출해 현재의 그룹 규모를 갖추는데 일조했다. 담 회장은 위기를 기회로 잘 엮는다. 국내 제과사들이 90년대 안방시장에 안주하며 저성장의 어려움을 겪을 당시, 해외시장을 개척하며 오리온의 고성장을 주도했다.2003년엔 남들이 모두 망했다고 평한 체육복표 사업체 스포츠토토를 인수해 그룹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바꿔 놓고 있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美 달기지는 UFO 공격용”

    캐나다 전 국방장관이 지구보다 앞선 외계 문명 집단이 현재 지구를 방문하고 있을지 모른다며 이를 확인하기 위한 의회 청문회를 촉구하고 나서 논란이 되고 있다고 보도자료 전문 통신사인 PR웹이 최근 보도했다. 1963∼67년 레스터 피어슨 총리 시절 부총리 겸 국방장관을 지낸 폴 헬리어는 지난 9월 토론토대학 연설에서 “잦은 UFO 출현이 은하계 전쟁의 시작을 의미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 뭔가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면서 “로스웰 사건에 감춰진 비밀들은 일급 비밀로 분류돼 미국과 캐나다 국방장관에게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했다.1947년 뉴멕시코주 로스웰에 추락한 UFO에서 외계인 사체가 나와 이를 미국 과학자들이 부검했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미군은 외계인들에게 사용될 수 있는 무기들을 준비해놓고 우리에게 제대로 경고도 하지 않은 채 은하계 전쟁에 몰아넣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달에 전진기지를 세우려는 부시 행정부의 노력도 외계 방문객의 위치를 추적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저격할 수 있는 곳을 찾으려는 노력의 한가지라고 단정했다. 그로부터 한달 뒤 헬리어는 3개의 비정부기구(NGO)들과 함께 캐나다 군 정보기관, 로스웰 사건 등에 개입된 북미방공사령부(NORAD) 과학자 등을 증인으로 내세워 캐나다 상원에 청문회 개최를 압박했다. 그러나 상원은 이달초 다른 일정을 핑계로 올해 청문회 개최는 어렵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이들 NGO는 살상무기의 우주공간 배치를 줄기차게 반대해온 폴 마틴 정부의 입장을 근거로 내년 초 다시 상원 청문회를 밀어붙일 태세라고 PR웹은 전했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팔리지 않는 소금·사라져가는 염전 이중고에 한숨 영종도 염전 르포

    팔리지 않는 소금·사라져가는 염전 이중고에 한숨 영종도 염전 르포

    연간 소비량의 절반 가량이 김장철에 팔린다는 소금. 계절적으로 염부(鹽夫)들은 신명이 날만도 하련만 축 처진 어깨가 좀처럼 펴지지 않는다. 지난 2001년 소금시장 완전개방 이후 값싼 수입산 소금에 밀리더니 급기야 생산한 소금을 창고에 고스란히 쌓아둘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천국제공항이 위치한 영종도는 한때 ‘잘 나가는’ 소금 생산지였다. 지난 70∼80년대 이곳 염전은 300정보(1정보=3000평)에 달했다. 하지만 공항 활주로와 신도시, 골프장에 자리를 내주면서 지금은 절반을 밑도는 150정보도 되지 않는다. 소금이 팔리지 않는 데다, 사라져 가는 염전 때문에 ‘이중고(二重苦)’를 겪으며 시름에 젖어 있는 영종도 염부들을 만나봤다. ●8000가마 생산 6000가마 창고에 박병기(76) 금단염전 염부장(염전 관리자)은 “올 한해 동안 30㎏짜리 소금 8000가마를 생산했지만 6000가마가 창고에 쌓여 있다.”면서 “지난해까지만 해도 11월 중순이면 창고가 텅 비었는데, 창고에 소금이 남아 있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라고 털어놨다. 영종도는 일제시대 당시 금광이 많아 이북을 비롯한 외지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광산이 폐광되자 정부는 지난 1954년 ‘피란민 정착사업’의 일환으로 영종도에 제방을 쌓아 염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영종도 토박이인 박 염부장은 당시부터 지금까지 51년째 염전으로 출퇴근하는 ‘영종도산 소금’의 산증인이다. 다른 염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50정보로 영종도 염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금홍염전의 경우 올해 생산한 소금 5만가마 중 3만가마가 창고에 남아 있다. 소금 가격도 예년의 절반 수준이다. 지난 2003년까지 1가마당 1만 2000∼1만 3000원을 유지했으나 지난해에는 8000원대, 올해는 7000원대까지 떨어졌다. 강종진(59) 금홍염전 소장은 “12가구 가족들이 매달리다시피 해서 생산한 소금을 다 팔아봐야 떨어지는 돈은 가구당 3000만원 정도”라면서 “이마저도 소작료, 기름값, 마대값 등을 빼고 나면 절반밖에 남지 않는데 팔리지를 않으니 소작료조차 못 내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김주연(66) 금홍염전 염부장도 “서울 사람들이 직접 찾아와서 사가는 게 고작”이라면서 “쌀 추곡수매하듯이 정부가 비축염을 사들이기도 했는데 올해는 이런 것도 없어 도통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고 답답해 했다. 염부들에게는 팔리지 않는 소금 외에 더 큰 걱정이 있다. 염전이 폐쇄돼 일거리 자체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있다. 벌써부터 내년에는 ‘어느어느 염전이 문을 닫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박 염부장은 “땅도 논도 없고, 다른 곳에 가봤자 나이가 많다고 써주지도 않는다.”면서 “외국에서 수입하는 소금을 팔지 못하게 해달라는 게 아니라, 국산으로 속여 파는 행위만이라도 철저히 단속해 줬으면 좋겠다.”며 한숨지었다. ●“배운 도둑질이 이 것뿐인데…” 그나마 ‘옛날 얘기’가 염부들의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을 걷어냈다. 황해도 웅진이 고향인 김 염부장은 “1951년 ‘1·4 후퇴’ 때 이곳으로 건너왔어.”라면서 “1958년에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밀가루, 강냉이 먹어가며 염전을 만들었는데 벌써 48년이나 지났네.”라고 회상했다. 이곳 염부들은 70∼80년대만 해도 남부럽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소금을 만드는 순서는 바닷물을 저수지에 가둔 뒤 난치·늦태지역에서 바닷물을 증발시켜 염도를 높이고, 염판에서 결정이 만들어지면 창고에 저장한다. 당시만 해도 반장(염도 측정 및 감독)과 부반장(염판 관리),‘대빠또’라는 은어로 더 잘 불린다는 난치반장(바닷물을 염판까지 내려주는 역할), 경험에 따라 구분되는 상염부 및 하염부(고무래로 염판에 쌓인 퇴적물 제거) 등 5명이 한 조를 이뤄 이같은 작업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인건비가 올라가면서 소작 형태로 바뀌었다. 부족한 일손은 소작 염부들의 가족이 메웠지만, 전문성이 떨어지다 보니 1정보당 소금 생산량은 70∼80년대 연간 10t에서 3∼4t으로 줄었다. 강 소장은 “우리야 배운 도둑질이 이것밖에 없지만 젊은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없어.”라면서 “남아 있는 염부들은 50∼60대가 대부분이고, 영종도에서 가장 나이가 적은 염부도 43살이야.”라고 말했다. 이렇게 힘든 염전 일을 그만 둘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에 박 염부장의 답변은 단호했다.“잠만 따로 자지 평생을 같이 한 게 이 사람들이야. 염전에 둘러앉아 소주 한 잔 걸치는 게 유일한 낙인데, 그걸 버리라고?” 헤어질 무렵, 점심 때를 놓친 터라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기자의 말에 염부들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돌아섰다. 염전 일은 3월초에 시작돼 10월말이면 끝난다. 농부로 치면 지금은 농한기다.3시간 남짓 얘기를 나누는 사이 꾸깃꾸깃해진 염부들의 담뱃갑이 자꾸 눈에 밟혔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국산천일염 ‘미네랄 덩어리’ 국내 소금산업이 외국산 저가 소금에 밀려 ‘고사’ 위기에 처했지만,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산업자원부와 대한염업조합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소금 소비량은 320만t으로 추정된다. 비누와 폴리염화비닐(PVC) 등을 생산하는 화학공업용이 260만t, 식용이 60만t 정도다. 그러나 국내에서 생산되는 천일염과 기계염은 각각 35만t,15만t에 불과해 소비량의 85% 이상을 중국 등지에서 수입하고 있다. 소금은 지난 60∼70년대까지만해도 자급자족했다. 그러나 지난 2001년 소금시장 완전개방으로 국산 소금의 30∼50% 수준인 외국산 소금이 국내 소금시장을 점령했다. 이 때문에 국내 염전도 80년대 1만 2000정보(1정보=3000평)에서 지금은 4000정보로 대폭 감소했다. 소금은 바닷물을 증발시킨 천일염, 바위처럼 딱딱한 암염, 바닷물을 전기분해한 기계염, 소금을 재처리·가공한 제재염 등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국산 천일염은 농도가 80% 안팎이며 미네랄이 풍부해 김치, 젓갈, 장류 등을 담그는 데 적합하다. 반면 수입산은 국산보다 농도가 10% 이상 높아 김치의 경우 쉽게 물러질 수 있다. 이처럼 국산 천일염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식품’이지만 지난 63년 제정된 염관리법에 따라 ‘광물’로 규정돼 있다. 바닷물 증발 과정에서 불순물이 들어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소금을 다루는 정부 부처로 보건복지부가 아닌 산업자원부가 지정된 것도 이 때문이다. 산자부 관계자는 “소금은 수입자유화 조치 이후 시장기능에 맡기고 있다.”면서 “현재는 염전 폐쇄와 종사자 전직 등만을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정부는 지난 2003년 소금이 과잉생산돼 가격이 떨어질 경우 사들인 뒤 가격이 올랐을 때 되파는 ‘수매비축제도’를 폐지, 국내 소금업계를 지원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책마저 사라졌다. 염업조합이 이와 유사한 ‘자가비축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유명무실한 실정이다. 염업조합은 지난해 고품질 고가격의 ‘하얀금’ 브랜드 사업을 추진했으나 가격경쟁에 밀려 110억원어치,3만t의 소금이 그대로 쌓여 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염부들의 ‘족집게’ 일기예측 좋은 소금을 만들기 위한 염부들의 노력은 날씨를 예견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드는 데는 꼬박 2∼3주가 걸리는데 도중에 비를 맞으면 허사가 되기 때문이다. 요즘이야 일기예보가 정확하지만, 과거에는 어떻게 족집게처럼 날씨를 알아낼 수 있었을까. 40∼50년 경력의 염부들은 우선 일몰 무렵, 구름의 위치와 모양을 살피는 것을 중요한 일과로 꼽는다. 해가 넘어갈 때 구름이 해 주변에 끼어 있으면 2∼3일 뒤 비가 온다는 것이다. 염부들은 이를 ‘해가 집 짓고 들어간다.’고 표현한다. 또 동남풍이나 남서풍이 불면 하루나 이틀 후 비가 내리기 때문에 염판에서 소금을 걷어냈다고 한다. 아울러 개미가 줄을 지어 이동하고, 굳은 땅에서 지렁이가 올라오고, 밀물의 양이 많아지는 ‘물이 산 날’에는 틀림없이 비가 내린다고 강조했다. 박병기(76) 영종도 금단염전 염부장은 “날이 궂으면 온몸에 신경통이 도진다는 사실은 기본”이라면서 “일기예보를 몰라도 70∼80% 정도는 날씨를 맞힐 수 있다.”며 웃음지었다. 흔한 게 소금이지만, 로마시대에는 군인들에게 급여를 소금으로 지급해 샐러리(salary)의 어원이 될 만큼 귀한 존재였다. 지금도 좋은 소금을 고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선 좋은 소금은 맛부터 다르다고 한다. 좋은 소금은 부드럽고 단맛이 나며 뒷맛도 깨끗한 반면 나쁜 소금은 쓴맛이 난다. 또 국내산과 수입산 소금을 구별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입자의 크기와 경도를 살펴 보는 것이다. 국내산 천일염은 입자가 고르고 뚜렷하나 외국산 소금은 여러 유통 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마모도가 심하고 입자도 고르지 않다. 특히 국내산은 수분 함유량이 많아 손바닥에 잘 들어붙고 손으로 비비면 잘 부스러진다. 반면 외국산은 경도가 높아 손바닥에 잘 붙지 않고 비벼도 덩어리가 남게 된다. 김주연(66) 금홍염전 염부장은 “소금은 바닷물의 청정도, 일조량, 바람의 세기 등에 따라 차이가 나게 마련”이라면서 “소금 하나만 잘 먹어도 웬만한 성인병은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모교에 55억 쾌척한 송재성 성호그룹 회장

    모교에 55억 쾌척한 송재성 성호그룹 회장

    “공무원 20년, 사업 27년,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젠 그 결실을 우리 사회에 환원해야지요.” 요즘 같은 시기에, 나이 일흔셋이면 적어도 ‘은퇴’를 했어도 한참 했어야 할 나이로 얘기된다. 하지만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이 있다. 송재성(73) 성호그룹 회장. 지난 1960년 당시 건설부 말단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75년 해운항만청으로 자리를 옮겨 인천항을 건설하는 일을 주도해 우리나라 해운역사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그러던 마흔일곱에 공무원의 꿈인 이사관 승진을 코앞에 두고 퇴직과 함께 사업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그 다음 ‘열심’이라는 두 단어만 머릿속에 넣고 뛰고 또 뛰었다. 오늘날 일군 결실,5000억원 재산가가 됐다. 송 회장은 ㈜성호철관·성호케미칼·성호퍼라이트 등 9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그룹 총수. 나름대로 돈은 벌었지만 지금부터 진짜 고민이란다. 첫번째는 사회환원이고, 두번째는 여전히 체력이 왕성하기에 새로운 도전을 끊임없이 하고 싶다는 것. 아울러 기업인은 적어도 사회의 고마움을 알아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최근 모교(한양대)에 55억원을 쾌척해 화제가 됐다. 한양대는 이 기금으로 지난 18일 ‘재성토목관’ 기공식을 가졌다. 이와 관련, 한양대 관계자는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가 중요한 시기에 선뜻 기금을 내놓아 한양인의 소중한 귀감이 된다.”고 말했다. “돈 없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대다가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나이 마흔일곱에 공무원 그만두고 새로 시작했거든요. 두려움은 소심에서 나오는 얘깁니다.9개 계열사를 두고 있지만 하나 더 보태 열개를 채워야지요. 그런 다음 후배들이나 사회에 더 많은 보탬을 줄 생각입니다.” 송 회장은 전북 익산 출신.78년 해운항만청을 그만 둔 뒤 사업가로 변신했다. 뭔가 이름을 크게 남기고 싶다는 생각에서 결심했다. 그는 “직업군인은 세상과 담을 쌓아놓고 살았기 때문에 세상물정에 어둡고, 공무원과 기자는 대접만 받고 살아 남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못해 성공하기 힘들다.”고 전제한 뒤 “철저하게 배려하고 열심히 일한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며 웃었다. 현재 사업의 주 종목은 ‘수지파형강관’이다. 순수 우리 기술로 2004년 11월 세계 최초로 미국 재료시험학회(ASTM) 공인을 받았다. “항상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나이에 사업이 뭔지, 또 사회에 뭐를 남기고 돌려주어야 할지를 알게 됐거든요.” 매일 밤 10시 잠자리에 들어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아침형이다. 동네 주변 산책을 하며 사회와 인생의 의미를 늘 생각한다고 한다. 평생의 생활철학이기에 한번도 거른 적이 없다. 최근에는 한양대 겸임교수라는 명함을 받아 가끔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강의에서 늘 용인술(用人術)과 자기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호의적 보증 책임 덜어준다”

    “호의적 보증 책임 덜어준다”

    호의(好意)에 의한 보증의 법률적 효력을 제한하고 금융기관이 보증인에게 채무자의 재산 상태를 의무적으로 알려주도록 하는 등 보증제도가 대폭 개선된다. 이는 친분 때문에 서 준 연대보증이 연쇄파산을 부를 수도 있다는 우려에 따른 것이다. 민법 등 관련 법률들을 개정해서 보증제도를 바꾸되 법 개정이 어려우면 특별법을 제정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천정배 법무부 장관은 2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보증채무로 인한 서민들의 고통이 파산 등 도산절차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닌 만큼 민법에 규정된 보증 제도를 전반적으로 개선하도록 특별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금융기관이 큰 돈을 빌려줄 때 뿐만 아니라 소액 대출에서도 관행적으로 요구하는 연대보증의 절차가 까다로워지고 효력이 축소될 전망이다. 천 장관은 “우리의 보증 문화는 대부분 호의에 의한 보증인 만큼 이의 책임을 경감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면서 “신원보증도 전형적인 호의에 의한 보증이지만 오래전부터 책임을 경감하는 법률을 만든 바가 있다.”고 설명했다. 천 장관은 연구·검토중인 보증제도 개선안에는 서면주의를 통해 보증책임의 성립요건을 강화하고 보증채무가 변제되는 날까지인 보증 유효기간을 제한하는 방안 등도 들어있다고 밝혔다. 또 보증채무의 상속을 제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법무부 관계자는 이와 관련,“민법 개정은 기존의 법체계와 충돌할 우려가 있어 특별법이 효과적”이라면서 “보증의 법적 효력이 제한될 경우 서민 대출이 마비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어 이의 보완책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천 장관은 파산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와는 별도로 대부업법과 신용정보보호법으로 제재하는 채권추심 업체의 불법 추심행위뿐만 아니라 일반 채권자의 과잉채무 독촉행위도 특별법 제정 등을 통해 제도적 허점을 보완하고 관련 범죄는 강력히 대응하도록 지시하겠다고 밝혔다. 안동환 이효연기자 sunstory@seoul.co.kr
  • [파산자의 희망찾기] (4) 千법무에 듣는 파산

    [파산자의 희망찾기] (4) 千법무에 듣는 파산

    정치인 출신의 장관이자 유력 대선주자로 꼽히는 천정배 법무부 장관. 그는 인권과 민생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지론은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고 국민에게 고품질의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생 법무’. 천 장관은 개인파산과 회생제도는 주요 사회안전망으로 그 기능을 다하도록 지속적인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7일 천 장관을 만났다. ▶파산제도를 어떻게 평가하나. -채권자를 일방적으로 희생시키고 채무자에게 특혜를 주는 제도가 아니다. 경제적인 파탄에 빠진 사람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는 게 사회적 효용이 훨씬 크다는 합리적인 판단을 기초로 하고 있다. 두 가지 시선이 있다. 태만과 낭비 등 개인 책임론과 국가의 잘못된 정책 및 자본주의 시스템에 따른 불가피한 희생자라는 시선이다. 두 가지를 균형있게 봐야 한다. 신용불량자가 400만명에 이르고 빈부 양극화가 심해져 서민 생활이 어렵다. 가계부채를 급증시킨 정책 실패가 있었고 금융권의 카드 남발에 대해 감독 책임을 못했다. 이들에게 회생의 기회를 주는 것은 인권과 삶의 질을 위한 중요한 과제이다. ▶파산하면 180개 이상 직업의 차별이 생기는데 개선 방안은. -그동안 파산자를 도덕적 파탄자로 대우했다. 금치산자나 한정치산자와 같이 취급했다. 파산으로 인한 직업 차별은 거의 모든 직종에서 이뤄지고 있다. 특별히 고도의 윤리성이나 신뢰 관계가 요구되는 직업을 제외하고 폐지해야 한다. 국회에 의원 발의 법안이 있다. 미국은 파산자에 대해 어떤 차별도 해서는 안 된다는 조문이 있다고 들었다. 취업 장벽을 허물도록 개선이 필요하다. ▶불법 채권추심으로 고통받는 채무자가 많은데 대책은 없나. -불법추심은 파산과 개인회생제도의 기능을 크게 훼손시키는 범죄 행위이다. 형법상 강요죄·협박죄로 처벌이 가능하며 추심업체는 기존 법률로 제재가 가능하다. 은행 등 금융기관과 일반채권자들의 과잉채무 독촉행위는 효과적으로 규제할 법률이 미비하다. 이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 관련 기관과 협의해 제도적인 허점을 보완할 생각이다. 검찰에 강력하게 단속토록 지시하겠다. ▶도산 제도에 미국의 ‘오토매틱 스테이´를 도입할 계획은 없나. -내년 4월 시행될 ‘채무자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이른바 통합도산법의 제정 과정에서 파산을 신청하면 채권추심이 금지되는 오토매틱 스테이를 심도있게 논의했다. 도산절차 신청이 남용될 우려가 있어 보류됐다. 파산이 선고되면 면책 결정까지 강제집행이 금지 또는 중지되도록 하고 회생절차에서 법원이 모든 강제집행을 금지할 수 있는 ‘포괄적 금지명령제도’를 도입했다. 오토매틱 스테이가 도산 제도의 활성화에 유용한 만큼 연구를 하겠다. ▶보증 남용으로 인한 부작용을 개선할 대책은 없는가. -신용불량에 이르게 된데는 본인 과실도 있지만 친·인척과 지인의 보증으로 인한 것도 많다. 보증은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제도이지만 우리는 비자본주의적인 문화가 결합해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있다. 보증 채무로 인해 서민들이 받는 고통도 크다. 호의(好意)보증의 법률적 효력을 제한하고 보증책임 성립요건을 강화하며 보증채무의 상속제한, 보증계약시 금융기관이 보증인에게 채무자 재산상태를 의무적으로 고지하도록 하는 등 전반적인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국회와 협력해 특별법을 만들 수 있다. 파산 절차에서 보증인이 현저히 불이익을 받는다면 법원이 보증채무를 제한하거나 배당 또는 변제받지 못한 부분만 보증채권을 행사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파산 과정에서 면제재산 범위를 확대할 방안은 없나. -도산제도의 주된 목적은 채무자의 갱생에 있다. 합리적인 범위 안에서 면제재산을 결정하고 그 범위가 지나치게 좁아서는 곤란하다. 현행법은 압류가 금지되는 재산만을 면제재산으로 하고 있지만 서민 채무자에게 부족하다. 지역에 따라 1200만∼1600만원의 소액보증금을 보호하는 등 면제재산의 범위를 확대토록 하겠다. ▶개인회생제도가 담보채권을 구제하지 않아 장점이 반감된다는 지적이 있다. -일정한 소득을 가진 채무자는 개인회생을 이용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유용하다. 현행 도산제도에서 개인회생 절차를 이용하게 할 유인책이 부족한 편이다. 담보채권을 개인회생의 대상에 포함하는 건 좋은 방안이다. 우선 주택담보채권을 포함시킬 수 있다. 농촌 지역은 특수성이 있는 만큼 연구를 해야 할 부분이다. ▶파산 및 회생에 대한 법률적 지원이 미비하다는 지적이 많다. -대한법률구조공단을 통해 개인파산 및 회생에 대한 법률구조를 지원하고 있다. 파산·개인회생사건 구조가 활성화되도록 지시했다. 서울, 부산 등 7개 대도시에서 파산·개인회생 전담팀을 운영하고 있다. 앞으로 전담직원 89명을 확충해 매년 1만건의 파산 및 개인회생을 구조하도록 하겠다. 파산과 개인회생은 채무자 스스로 서류를 작성하고 신청할 수 있도록 ‘본인 신청 지원 전산프로그램’을 개발해 2006년 1월부터 배부할 예정이다. ▶도산 제도에 대한 홍보가 부족해 활용이 안 된다는 지적이 많다. -도산제도가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제도 자체를 잘 알지 못하거나 부정적인 시각 때문이다.‘법교육 시스템’을 통해 소비자 파산과 개인회생에 관한 교육을 강화하고 홍보할 생각이다. 사회적 약자와 서민들을 위한 법과 제도를 갖춘 나라가 선진국이다. 파산제도, 보증제도 등 민생과 밀접한 법과 제도는 선진국의 수준으로 개선할 방침이다. ●대담 손성진 사회부 부장급 ●정리 안동환·이효연기자
  • [파산자의 희망찾기] 땅·집 담보 구제 ‘농민회생제’ 도입을

    [파산자의 희망찾기] 땅·집 담보 구제 ‘농민회생제’ 도입을

    “우리 현실에 빚없는 농민 없고 이들이 파산을 신청하면 완전면책을 받지 못할 사람은 없다.” 개인파산을 담당하는 한 지방법원 A판사의 말이다. 농민 파산자는 전체 파산 비율 중 아직은 극소수이다.A판사는 “지금은 수면 아래에 있지만 연대보증으로 수많은 채무자들이 얽혀 있는 구조로 미뤄볼 때 농민 파산은 농촌 경제를 붕괴시킬 정도로 심각하다.”고 경고했다. 농촌 파산의 핵심고리는 ‘보증’이다. 도시 파산자가 ‘카드 돌려막기’로 빚을 불려갔다면 농촌 파산자는 대출 만기가 올 때마다 보증인을 세워 신규 대출을 받는 ‘보증인 돌려막기’로 빚을 키우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박준기 박사는 “2000년 이후 농촌 연대보증인들을 농수산 신용보증기금으로 대체해 연대보증 문제에 미약하나마 도움이 됐지만 현재 이 기금마저 바닥난 상태”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농민들의 채무와 연대보증 실태에 관한 면밀한 조사가 필요해 농협에 관련 자료를 수차례 요청했지만 공개하지 않아 농촌의 채무 실태마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지경”이라고 말했다. 특히 화훼·원예, 유리하우스, 축산 등 시설투자 비용이 많이 드는 농촌의 경우 고질적인 ‘어깨보증’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마을 전체가 한꺼번에 파산할 위기도 커지고 있다. 민주노동당 전북도당 서민경제운동본부 양규서 실장은 “전북의 한 화훼단지에서는 농민 한 사람당 2억∼5억원의 빚이 있으며, 대출금 만기가 돌아오면 어깨보증으로 그때 그때 위기만 모면하고 있을 뿐”이라고 밝혔다. 또 “농촌 채무가 수년간 해결되지 않고 고질적으로 쌓여온 것이라 파산하려는 농민이 채무 내용을 모두 챙겨 파산 서류를 작성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농민들의 연쇄파산을 막을 해결책으로는 보증인에 대한 재량면책 제도를 꼽을 수 있다. 법원이 주채무자의 파산 때 보증인의 면책을 재량 범위 내에서 허가하는 방식이다. 참여연대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 권정순 변호사는 “재량면책이 과격한 발상 같지만 보증이 남용되는 우리 현실에서 법원에 충분한 판단의 여지를 주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파산전문 김관기 변호사는 “보증 제도는 모든 나라에 있지만 우리처럼 남용하지 않는다.”면서 “대가 없는 보증을 무효로 처리하는 미국의 판례를 볼 때 우리 보증도 무효화할 수 있는 경우가 상당부분 있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보증 채무에 대한 심리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 광주지법의 한 판사는 “보증채무 외에 기타 채무가 많을 경우 면책 판단을 위한 심리 자체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황의식 박사는 “파산하지 않고도 도시 채무자를 살리는 개인회생제도처럼 농촌 현실에 맞는 농민회생제도를 마련해 연쇄파산을 막는 대책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 농촌 줄파산 ‘공포’

    농촌 줄파산 ‘공포’

    농촌 줄파산이 본격화할 조짐이다. 한 마을 사람들이 나란히 보증을 서는 ‘어깨보증´, 채무자가 잠적하면 보증인을 주채무자로 바꾸는 ‘엎어치기´ 등 농촌 사회에 퍼져 있는 편법적인 채무변제 방식이 연쇄파산의 원인이다. 전문가들은 파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도시 파산에 이어 연대보증으로 얽히고설킨 농촌의 줄파산이 심각한 수위로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한다. 농민들은 개인회생제도를 농촌 현실에 맞지 않아 꺼린다. 파산전문 박용석 변호사는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카드빚이 상대적으로 많은 도시 사람과 비교해 땅과 집을 담보로 잡힌 농민들이 많다는 점이다.1억원 농지에 근저당이 8000만원 설정돼 있다면 현재 개인회생제도에서는 이 8000만원을 빚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개인회생제도는 담보채권을 구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소득을 증명하기 쉽지 않다. 번 돈 중에 최저생계비를 뺀 만큼 갚아나가는 개인회생제도는 급여제가 많은 도시민과 달리 농민의 소득수준을 산출해 내기에 적절치 않다. 이런 점 때문에 파산을 택하는 게 맞지만, 농촌에서의 파산은 줄파산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구조에 놓인 일종의 뇌관인 셈이어서 이 또한 선택이 쉽지 않다. ●대부분 땅등 담보대출… 구제대상 안돼 전라북도 남원 인근의 한 마을에서 600평 규모의 비닐하우스를 경영하는 구재진(가명·42)씨. 구씨는 현재 파산 절차를 밟고 있다. 그의 빚은 2억 9000만원. 구씨는 지난 5년 동안 대출금의 만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보증인을 데리고 농협을 찾았다. 같은 마을 사람인 농협 직원은 그때마다 정책자금·가계대출·일반대출 등의 명목으로 500만∼2000만원까지 돈을 빌려줬고 이 돈은 곧바로 만기일이 돌아온 대출금을 갚느라 다시 농협으로 들어갔다. 구씨가 5년 동안 농협에서 받은 대출은 15차례. 대출을 위해 세운 보증인만 모두 6명이다. 동네 어른 3명, 마을 친구 2명, 친형까지 모두 구씨의 보증인이다. ‘보증인 돌려막기’방법으로 5년을 버텨 온 구씨는 지난 5월 6촌 형의 부도로 직격탄을 맞았다. 구씨는 지난해 6촌 형의 땅에 7000만원을 대출받아 비닐하우스를 세웠다.6촌 형은 부도 후 잠적했고 구씨의 비닐하우스는 경매로 넘어갔다. 그 뒤 농협에서는 더 이상 대출을 해주지 않고 있다. 매달 200만원 가까운 이자를 갚을 수 없게 되자 구씨의 선택은 파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구씨에게 보증을 선 지인 3명은 지난해 농수산신용보증기금으로 대체했지만 여전히 친형과 친구 2명은 그의 보증인이다. 구씨의 빚은 하우스를 짓기 위해 1998년 농협에서 3000만원을 대출받으면서 시작됐다.2001년 100년 만에 내린 기록적인 폭설로 하우스가 주저앉자 다시 대출을 받았다.2002년 11월 전기 누전으로 하우스에 불이 나자 보증인을 세워 대출을 받았다. 구씨는 “내가 파산하면 같은 농사를 짓는 보증인들도 줄줄이 파산할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일봉(가명·44)씨는 ‘어깨보증’을 섰다가 전 재산을 날렸다.2000년 함께 농민회 활동을 한 친구가 세운 미곡종합처리장의 보증을 섰다. 그러나 친구의 사업은 1년 만에 부도가 났고 이씨뿐만 아니라 ‘어깨보증’을 선 2명 모두 재산이 가압류됐다. 이씨의 전 재산은 7200여평 규모의 논과 밭이다. 이씨는 1995년 농업기반공사로부터 논과 밭을 매입한 비용 1억원 가운데 절반만 갚은 상태였다. 가압류는 청천벽력이었다.10년 동안 갚아 온 5000만원보다 당장 농사 지을 땅을 잃은 건 큰 충격이었다. 지난 9월 이씨의 땅은 경매로 처분됐다. 이제 빚을 갚기 위한 대출마저 불가능해졌다. 이씨의 현재 빚은 1억 7000만원.2000년 이후 태풍과 폭설, 폭우 피해가 날 때마다 이씨는 친구 2명을 보증인으로 세우고 농협과 신협, 축협 등에서 수십차례 대출받았다. 이씨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 2명에게도 맞보증을 서준 상태다. ●보증인이 주채무자로…엎어치기 파산 ‘어깨보증’을 선 보증인이 주채무자가 되는 ‘엎어치기’도 농촌 줄파산의 원인이다. 전북 순창에서 개인택시를 모는 정용석(가명·46)씨. 그는 7년전 보증을 선 친형이 잠적하면서 형의 빚을 끌어안게 됐다. 형은 순창에서 젖소를 키우기 위해 농협에서 98년 7000만원을 대출받았다. 이때 정씨와 형의 친구 2명이 보증인이 됐다. 그러나 젖소 농장의 적자를 견디다 못한 형은 잠적했다. 정씨는 가압류를 피하기 위해 형의 채무를 자신 명의로 돌려 이자와 원금을 갚고 있다. 농협 직원도 “압류를 당하면 금융거래가 원천적으로 봉쇄될 수 있다.”면서 “형을 대신해 정씨가 주채무자가 되는 것이 유리하다.”고 설득했다. 정씨는 꾸준히 이자와 원금을 갚고 있지만 오히려 빚은 8000만원으로 늘었다. 정씨는 “택시 운전으로는 대학에 다니는 두 아이의 뒷바라지마저 힘들다.”면서 “아이들에게 빚이 대물림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파산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안동환·남원 이효연기자 sunstor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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