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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北 집필정지 명령·교도소 수감설… 최근엔 월북보다 납북설 유력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北 집필정지 명령·교도소 수감설… 최근엔 월북보다 납북설 유력

    여운형 계열 좌우 합작 노선에 가까워 자본주의적 퇴폐풍조 모더니즘 작품 함께 월남한 가족들 두고 홀로 北으로김기림은 해방 공간에 북한으로 간 것으로 돼 있다. ‘간 것으로 돼 있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1908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난 그가 해방 이후 스스로 북행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에 의해 납치돼 북으로 끌려갔다는 설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납북설이 유력하다. 그는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 가입 건으로 좌익으로 분류되면서 초·중·고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해금된 1988년 이전까지는 자진 월북한 문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김기림 연구자인 서울대 국문과 김유중 교수는 “최근 여러 증언과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월북이 아닌 납북이라는 게 다수 의견”이라는 학계 분위기를 전한다. 좌익단체에 몸담은 것은 사실이나 순수 좌익이라기보다는 여운형 계열의 좌우 합작 노선에 가까웠던 점, 가족과 더불어 월남했고 북으로 갈 때도 가족과 동행하지 않은 점, 이미 북한에서 지주 계급이라는 이유 등으로 옥고를 치렀다는 점, 북에서의 행적을 확인할 길이 없고 다른 월북 문인들과는 달리 조금이라도 대우받은 흔적조차 없는 점, 결정적으로 임화나 김남천 등 좌익 문인들이 남로당 불법화 이후 북행길에 올랐을 때 여러 차례 기회가 있었는데도 월북하지 않았던 점 등이 그 이유라고 김 교수는 강조한다.김 교수는 신문 보도, 탈북자 정보, 김기림을 아는 지인의 얘기 등을 종합할 때 그의 북한 행적에 관한 두 가지 설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가 1958년 한국일보에 보도된 내용으로 간첩죄로 체포된 북한군 정치부사단장 출신의 증언이다. 증언에 따르면 김기림, 정지용은 북한에 가자마자 당국으로부터 집필활동 정지 명령을 받았다. 김 교수는 이 내용이 현재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신빙성 있다고 본다”고 했다. 북한 출신으로 해방 후 월남했으며, 자본주의적 퇴폐풍조로 분류되는 모더니즘 계열의 시 창작활동을 한 그를 북한 당국이 좋게 봤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가 김기림이 북한에 가자마자 교도소 수감 생활을 했는데 친척, 지인, 제자들이 탄원서를 내 풀려났다는 설이다. 그렇지만 한 차례 숙청을 당한 몸이라 좋은 보직을 얻지 못하고 평양에 있는 극장의 말단 직원으로 허드렛일을 했다고 한다. 이때 남편과 별거 중인 극장 아나운서와 눈이 맞아 연애를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자숙해도 못마땅할 놈이 부화뇌동해서 연애질이나 한다”고 당국의 눈총을 받고 재수감되었다는 그럴 듯한 스토리까지 붙어 있다. 김기림은 7살 때인 1915년 임명 보통학교에 입학, 서울로 와서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가 중퇴한 뒤 1930년 일본의 니혼대학 문학예술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조선일보 사회부에서 기자 활동을 하였으며, 이 시기에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시와 시론들을 집중 발표했다. 문인과 기자로서 한창 명성을 얻던 1936년, 신문사를 휴직한 그는 28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홀연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호쿠제국대학 영문과에 들어갔다. 깊이 있는 학문에 대한 열정과 갈망이 그를 그렇게 이끌었을 것이다. 졸업 이후 조선일보에 복직한 그는 학예부로 소속을 옮겨 보다 왕성한 활동을 한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개시를 전후하여 신문사가 폐간되고, 총독부의 감시와 억압이 심해지자 그는 고향인 성진으로 가 한동안 인근의 경성(鏡城)고보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한편 ‘무곡원’(武谷園)이라는 과수원을 운영하며 간간이 지면을 통해 작품을 발표한다. 해방과 더불어 문단에 복귀한 그는 모더니즘의 실질적인 청산을 선언하며 근대를 넘어선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주장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감행한다. 서울대, 중앙대, 연세대, 조선대 등에서 강의했다. 1930년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를 신문에 발표하면서 시단에 진출하였고, 시집 ‘기상도’(1936), ‘태양의 풍속’(1939), ‘바다와 나비’(1946), ‘새노래’(1948)와 수필집 ‘바다와 육체’(1948), 시론집 ‘시론’(1947)과 ‘시의 이해’(1949) 등을 냈다. 상당 기간에 한국에서는 ‘월북’이라는 딱지가 붙어서 그의 시집의 소지조차 금기시됐으나 1988년 해금 조치되면서 출간이 잇따르고 연구도 활발하게 됐다.
  •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날 죽여달라” 부탁받아도 촉탁죄 아닌 살인죄 적용

    법은 자살방조나 촉탁살인을 인정하는 데 보수적이다. 자칫 산 자들의 진술에 따라 실체적 진실이 조작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다. 자살방조죄는 누군가가 자살하는 과정에 조력자의 역할을 한 사람에게 묻는 죄다. 수면제나 밧줄처럼 자살에 쓰일 수 있는 도구를 건네주거나 장소를 알아봐 줬다면 방조죄가 성립할 수 있다. 자살방조죄가 인정되면 형법 제252조 제2항에 따라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 단 결과적으로 누군가의 자살을 도왔다고 해서 무조건 자살방조죄가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죄가 인정되려면 자살자와 방조자 모두 ‘고의성’이 있어야 하는데, 피해자가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이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A가 건네준 번개탄이 B의 자살도구로 이용됐다고 치자. 하지만 번개탄을 건네준 A가 용도를 모르고 줬다면 죄가 성립하기 어렵다. 반대로 A가 번개탄을 피워 놓고 떠나는 등 자살을 도운 정황이 뚜렷하지만 정작 B에게 자살하려는 의사가 분명치 않았다면 A는 자살방조가 아닌 살인죄로 기소되는 경우가 많다. 촉탁살인(형법 252조 제1항)이 인정되는 경우는 더 드물다. 역시 피해자가 사망한 상태에서 그 진의 파악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신문이 분석한 간병살인 판결문 108건 가운데 8건에서는 피해자가 자신을 죽여 달라는 말을 했지만, 재판 과정에서 촉탁이 인정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촉탁살인의 처벌 수위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으로, 최소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는 살인죄보다 형이 낮다. 천주현 형사전문변호사는 “간병살인처럼 가족 간 발생한 사건에선 다른 가족들이 ‘고인이 죽기를 원했다’고 증언을 하더라도 재판부는 해당 진술을 믿지 않는 경우가 많다”면서 “피해자가 정말 죽고 싶어 한다고 생각해 죽음을 도와준 경우일지라도 재판부는 촉탁살인죄보다는 일단 살인죄를 적용한 뒤 형을 감해 주는 식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선의로 가족이나 타인의 죽음을 도와줬다가는 말 그대로 큰코다친다고 입을 모은다. 강민구 변호사는 “평소 죽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산 사람이라도 이는 고인의 진의라기보다는 푸념 정도로 여기는 것이 통상적인 법원의 시각”이라면서 “사건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록한 동영상이나 음성파일 등이 아니라면 증거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궁중족발 사건’ 가해자에 중형 구형…“임차인권리 보호 자리 아냐”

    ‘궁중족발 사건’ 가해자에 중형 구형…“임차인권리 보호 자리 아냐”

    상가 임대료 문제로 극심한 갈등을 겪다가 건물주에게 망치를 휘두른 ‘본가궁중족발’ 사장에게 검찰이 징역 7년의 중형을 구형했다. 5일 이틀째 열린 국민참여재판에서는 건물주 이모(60)씨가 사건이 일어난 지 석 달 만에 궁중족발 사장 김모(54)씨와 법정에서 마주했다. 다만 두 사람 사이에는 가림막이 세워졌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부장 이영훈) 심리로 이틀째 열린 김씨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에서 검찰은 “피고인은 상가 임차인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지만, 분쟁이 있다고 해서 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법이 정한 절차를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사적인 복수가 가능하지 않아 법이 있는 것인데 그걸 피고인은 무시했다”며 김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배심원들에게 요청했다. 앞서 이날 재판에서는 건물주 이씨와 김씨의 아내 윤모씨 등이 차례로 증인으로 나왔다. 이씨는 서로 깊은 감정싸움을 하던 김씨와 가림막을 둔 채 “무서웠다”는 말을 거듭 되풀이했다. 김씨가 자신의 자녀를 언급하며 “대를 끊어놓겠다”는 등의 협박 메시지를 보냈고, 망치를 들고 쫓아왔을 때, 폭행했을 때 등 김씨와 얽힌 상황에 대한 심정을 묻는 검사의 질문에 잇달아 “무서웠다”고만 했다. 특히 김씨가 망치를 휘둘렀을 땐 “살아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가림막 뒤에 있던 김씨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이씨의 증언을 듣기만 했다. 반면 김씨의 아내인 윤씨는 “이씨가 애아빠(김씨)에게 끊임없이 문자와 연락을 해왔다”면서 “나중에 합의를 할 일도 있기 때문에 건물주와 임대인 사이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해서 차단할 수 없었다”며 또 다른 공포심을 언급했다. 윤씨는 특히 이씨와의 명도소송에서 패한 뒤에도 가게에서 나가지 않은 이유를 검사가 묻자 “건물주가 정당해서 얻어진 결과가 아니라 형평성을 잃어버린 법 때문”이라면서 “판결문이 건물주에게 너무 과도한 권한을 줬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평생 모은 재산이 가게 하나인데 그냥 나갈 수가 없었다. 법에서도 외면받고 보호받지 못해 저희는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었다”며 북받쳤다. 2009년부터 서울 서촌에서 궁중족발을 운영하던 김씨 부부는 2016년 1월 이씨가 족발집이 입점한 건물의 소유권을 취득한 뒤 기존보다 4배 높은 임대료를 요구하면서 이씨와 갈등을 빚게 됐다. 이씨는 보증금을 3000만원에서 1억원으로, 월세를 297만원에서 1200만원으로 올렸다. 김씨는 이씨에게 건물명도 소송을 냈지만 지난해 11월 패소했고, 12차례 강제집행이 이뤄졌다. 강제집행 과정에서 김씨는 건물에서 빠져나가지 않기 위해 조리대 밑을 붙잡고 버티다가 경비 용역들에게 강제로 끌려나오는 과정에서 손가락 4개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지난 6월 6일 12번째로 이뤄진 강제집행이 모두 완료된 날이었고, 이씨와 김씨의 갈등은 더욱 극에 달했다. 맘상모(맘편히 장사하고픈 상인모임) 등 소상공인, 자영업자들과 시민단체가 연대해 궁중족발 앞에서 집회도 가지며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을 촉구했다. 6월 7일 오전 8시 20분쯤 김씨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이씨를 망치로 폭행해 어깨와 손목 등을 다치게 하고, 이에 앞서 골목길에서 자신이 운전하던 차량으로 이씨를 들이받으려다가 지나가던 행인 염모씨를 차로 쳐 전치 12주의 상해를 입도록 한 혐의(살인미수), 이씨가 사용하던 차를 들이받아 손해를 입힌 혐의(재물손괴)로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다. 국민참여재판에서 검찰과 변호인들은 처음부터 배심원단을 향해 신경전을 벌였다. 검찰은 재판이 시작되자마자 “이 법정은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의 분쟁을 논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임차인의 권리를 어디까지 보호해줘야 할지를 논의하는 게 아니라, 피고인이 과연 사람을 죽이려고 했는지를 밝히는 자리입니다”라고 밝혔다. 김씨가 이씨에게 망치를 휘두르다 폭행한 6월 7일 그날의 현장만 증거에 의해 판단해 달라는 것이었다. 반면 변호인들은 “피고인의 입장에선 99를 가진 사람이 1을 빼앗는 듯한 억하심정이 있었다는 것을 좀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라면서 “피고인이 전혀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지은 죄 만큼만 처벌해 달라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김씨의 살인미수 등의 혐의에 대한 재판의 핵심 쟁점은 과연 김씨에게 살인의 고의가 있었냐는 것이다. 검찰은 “미리 준비한 길이 40㎝ 쇠망치를 들고가 이씨에게 여러 차례 휘둘렀고 이씨가 필사적으로 피하는데도 끝까지 추격해 머리 부위를 겨냥해 망치로 때렸다”며 김씨에게 고의가 있었음을 강조했다. 반면 변호인은 “자신을 괴롭힌 임대인을 혼 내주려고 한 것일 뿐 살인의 의도는 전혀 없었다. 살인할 생각이 있었다면 피고인이 더 자주 사용하는 칼을 갖고 밤에 은밀히 불러내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라며 팽팽히 맞섰다. 이틀간 재판을 지켜본 국민배심원단 7명의 평의 결과를 바탕으로 6일 김씨에 대한 선고가 이뤄진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결심 앞둔 MB, 피고인 신문에서 ‘진술거부’ 묵묵부답

    오는 6일 결심공판을 앞둔 이명박 전 대통령이 검찰 측 피고인 신문의 진술을 거부하면서 연속된 검찰 측 질문에 입을 굳게 닫았다. 검찰은 “수긍할 수 없다”며 이 전 대통령의 태도를 기록으로 남겨달라고 요청하는 등 반발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 정계선) 심리로 4일 열린 이 전 대통령의 재판에서 이 전 대통령의 변호인인 강훈 변호사는 검찰 측 피고인 신문에 앞서 “대통령은 검찰 모든 신문에 대해 증언을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 의사는 오늘도 변동없다는 점을 확인시켜 드린다”고 밝혔다. 이 전 대통령은 “이상은 다스 회장이 주도해서 다스를 설립했다는 주장이 맞느냐”는 검찰의 첫 질문에서부터 “이상은 명의로 돼 있던 도곡동 땅 매각 대금 중 논현동 사저비로 확인된 돈은 피고인이 이상은에게서 빌린 돈인가“ , “다스 설립 관련 비용은 누가 김성우 다스 사장에게 준 건가” 등 질문을 이어갔지만 이 전 대통령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가끔 기침을 하거나 물을 마시기만 했다. 10가지 질문에 모두 이 전 대통령이 답을 하지 않자 재판장은 “(피고인의) 진술 거부 의사가 명확한 것 같은데 여기까지 하면 어떻겠느냐”고 검찰에 물었지만 검찰은 “피고인이 법정에서 말한 내용이 검찰 조사와 다른 내용이 있어 묻고 싶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피고인이 (법정에서) 손 들고 여러 번 말을 했다가 이제 와서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는데 상식적으로 수긍이 안 간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검찰은 “전직 대통령인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하면서 본인 진술과 배치되는 수백 명의 진술이 다 허위라고 주장하는 사건”이라면서 “피고인이 답변하지 않는 태도 자체가 의미있기 때문에 신문을 그대로 진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재판장이 양해하자 50분 남짓 동안 핵심 공소사실 관련 질문을 더 이어갔다. 결국 이 전 대통령은 끝내 한 마디도 답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오는 6일 오후 2시 결심공판을 갖고 심리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검찰은 이 전 대통령의 혐의가 16개로 방대한 데다 모두 부인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중형을 구형할 것으로 예상된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궁중족발 사건’ 첫 국민참여재판…‘살인 고의’ 여부 쟁점

    ‘궁중족발 사건’ 첫 국민참여재판…‘살인 고의’ 여부 쟁점

    상가 임대료를 약 300만원에서 1200만원으로 4배나 올린 건물주를 둔기로 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업주의 첫 국민참여재판이 4일 열렸다. 검찰은 김씨에게 살인의 고의가 있었다고 주장한 반면, 변호인은 검찰이 김씨를 살인미수 혐의로 무리하게 기소했다고 비판했다.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부장 이영훈) 심리로 서울 종로구 서촌에서 10년 동안 ‘본가궁중족발’을 운영한 업주 김모(54)씨의 국민참여재판이 이날 열렸다. 김씨는 지난 6월 7일 오전 8시 20분쯤 서울 강남구 한 골목길에서 임대료 인상 문제로 약 2년 동안 갈등을 겪던 건물주 이모(60)씨를 망치로 폭행해 어깨와 손목 등을 다치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김씨가 이씨를 살해하려고 결심하고 망치를 미리 준비했다. 이씨가 필사적으로 피하는데도 끝까지 추격해 머리 부위를 겨냥해 망치로 때렸다”면서 김씨에게 살인의 고의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범행 목적은 살인이었는데 경찰에 체포되면서 목적 달성을 못 한 것”이라면서 “임대인과 임차인의 분쟁 등이 아닌, 오로지 김씨의 행위가 살인미수에 해당하는지를 따지는 자리인 만큼 증거에 의해서만 판단해 달라”고 배심원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김씨의 변호인은 “(피고인은) 본인을 괴롭힌 임대인을 혼내줘 분을 풀려는 의도였다”면서 “살인 고의가 있었다면 출근 시간의 공개된 골목이 아니라 밤에 이씨를 1대1로 불러 칼을 사용하는 것이 (살인의)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고 맞섰다. 상해죄만 인정돼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변호인은 또 “김씨는 한 번도 (망치로) 이씨의 머리를 맞춘 사실이 없다. 이씨 머리는 골절이 전혀 없고 두피만 찢어졌다”면서 “언론 보도가 자극적으로 나가다 보니 검찰이 무리하게 살인미수로 기소한 것”이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날 김씨의 범행 장면이 담긴 폐쇄회로(CC)TV 영상, 실제 범행에 사용된 망치 등에 대한 증거 조사를 진행했다. 오는 5일에는 피해자 이씨가 법정에 나와 증언하고, 검찰의 구형 및 변호인의 최종 변론이 이뤄진다. 배심원은 이를 바탕으로 김씨 혐의에 대한 의견(평결)을 재판부에 내게 된다. 재판부는 배심원 평결을 바탕으로 오는 6일 오후 2시 김씨에 대한 선고를 한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캐나다 최고의 발레단 ‘미투’로 발칵

    캐나다 최고의 발레단 ‘미투’로 발칵

    60명 집단소송… ‘로열’ 칭호 명예 실추영국 연방 가운데 여왕으로부터 ‘로열’ 칭호를 받은 캐나다 ‘로열위니펙발레단’ 소속 발레학교가 성폭력 스캔들로 인한 집단소송에 휩싸였다. 전 발레학교 교사 겸 사진작가였던 브루스 멍크가 거의 30년에 걸쳐 학생들의 도발적인 나체 사진을 찍고 일부를 온라인에서 판매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고 가디언이 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1990년대 로열위니펙 발레학교에 재학했던 사라 두셋 등 피해자들은 최근 멍크와 학교 측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시작했다. 당시 16~17세였던 두셋은 처음에는 스튜디오에서 포트폴리오 사진을 몇 장 찍은 멍크가 개인 사무실로 자리를 옮긴 후 끈질기게 자신의 어깨끈을 내릴 것을 요구했다고 증언했다. 두셋은 상반신이 드러난 사진을 몇 장 찍었으며, 자신의 발레 경력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멍크의 요구를 거부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2015년부터 이 같은 증언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자 위니펙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멍크가 찍은 학생들의 누드 사진 일부가 온라인에서 판매된 정황도 드러났다. 하지만 멍크의 성폭력 의혹은 검찰에서 불기소 처분됐다. 멍크가 누드 사진을 찍은 행위가 입증되더라도 1993년 이전에는 불법이 아니었다는 것이 검찰의 설명이었다. 두세 등 피해자들은 멍크에 대한 형사처벌이 여의치 않자 학교를 포함한 민사소송에 돌입했고, 지난 7월 온타리오 법원은 발레학교 출신들이 참여한 집단소송을 허가했다. 원고 측 변호사에 따르면 1984~2005년에 재학했던 집단소송의 잠재적 참가자는 60명에 달한다. 로열위니펙 측과 2015년 해고된 멍크는 관련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포토 다큐] 녹슨 포탄서 꽃망울 터져요…매향리로 평화 소풍 갈래요

    [포토 다큐] 녹슨 포탄서 꽃망울 터져요…매향리로 평화 소풍 갈래요

    “영화 동막골에서 주민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을 모르지만, 매향리에서는 한국전쟁이 끝났는지를 모를 정도로 54년 동안 폭격이 쉼없이 계속되었습니다.” 11대째 매향리에 살고 있는 전만규(62·매향리 평화마을 추진위원장)씨는 무자비했던 폭격의 참상을 증언했다. 54년간의 폭격이 멈추고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상처는 온전하게 치유되지 못하고 마을 곳곳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 매화향기 가득했던 경기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梅香里)에 미 공군 폭격 연습이 시작된 것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이다. 이후 1955년 매향리의 옛 지명인 고온리의 미국식 발음 ‘쿠니사격장’(Koo-ni Range)으로 공식 명명되었다. 사격장은 1968년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행정협정(SOFA)에 따라 2277만㎡의 해상사격장과 125만㎡의 육상사격장으로 확장됐다. 2005년 8월 폐쇄될 때까지 미군은 연간 250일 하루 12시간씩 15~30분 간격으로 포탄을 퍼부었다. 해안에서 750m 떨어져 있던 해상사격 표적물로 사용된 구비섬은 이미 형체가 사라지고 이후 표적물이 된 해안 1500m 지점에 위치한 농섬도 일부만 남아 당시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결혼 후 서울에서 매향리로 이주한 지 28년째라는 김미경(55)씨는 “매일 폭격기가 낮게 날아 폭격하는 모습과 그때 들리던 소음을 생각하면 소름 끼친다”며 몸서리쳤다.마을 초입에 자리잡은 매향리역사관은 얼마나 많은 폭격이 마을에 쏟아졌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수거한 크고 작은 포탄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가 하면 목표물이 된 차량에는 벌집 같은 구멍이 나 있다. 녹슨 포탄은 전쟁의 아픔을 알리는 작품으로, 한편으론 생활용품으로 바뀐 모습으로 전시돼 당시 매향리 사람들의 아프고 힘든 일상을 알려주고 있다.평화를 외치는 구호가 여전하지만 2005년 미군 사격장이 폐쇄된 이후 매향리에서는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각종 문화 활동과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쿠니사격장 내에 있는 관제탑은 경기도 제1호 현대건축물 우수문화재로 2016년 등재됐고 부대시설이 있던 일대는 평화기념관이 조성돼 아픈 역사의 교훈장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8면의 야구장을 갖춘 화성드림파크는 2017년 완공돼 국내 최대 유소년 야구의 메카로 자리잡고 있다. 주민들의 꾸준한 해안 정화작업으로 농섬에는 검은머리물떼새, 저어새 등 희귀새들이 날아들고 갯벌에서 수확하는 바지락 수입이 작년 50억원을 넘어섰다. 생태계가 복원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폐허가 된 매향교회는 매향리 스튜디오로 탈바꿈해 문화복합공간으로 각종 전시회와 문화 행사가 줄을 잇고 있다. 다음달 8일부터 주민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평화가 허락해준 소풍 in 매향리’란 평화축제가 화성드림파크와 매향리 일대에서 열린다. 올해 5월에 착공한 매향리 평화생태공원은 사업비 1100억원을 투입해 2020년에 완공을 앞두고 있다. 이곳에는 역사박물관, 야외조각공원, 평화기념관, 평화정원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45년째 매향리에서 살고 있는 박순자(71) 할머니는 “평화생태공원이 지역민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무분별한 개발로 아름다운 자연이 훼손되지 않는 방향으로 조성됐으면 한다”고 앞으로의 기대를 내비쳤다. 매향리는 아픔과 상처를 넘어 평화와 생명의 땅으로 변모해 가는 중이다. 글 사진 김명국 선임기자 daunso@seoul.co.kr
  • 법 위에 권력자… 아프간의 비극 불렀다

    법 위에 권력자… 아프간의 비극 불렀다

    부패권력은 어떻게 국가를 파괴하는가/세라 체이스 지음/이정민 옮김/이와우/314쪽/1만 6000원 저자가 10여년간 취재한 ‘부패 보고서’ 주택 개발로 차익 챙긴 대통령 가족 등 정치인 도덕적 붕괴가 경제 붕괴 원인 내전 종식 후 아프간 상황 생생한 증언‘예절, 절제, 그리고 옮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의 부재는 경제적으로도 대재앙을 일으킨다.” 2008년 파탄 직전까지 갔던 아일랜드 사태를 색다른 시각으로 분석해 주목받은 아일랜드 칼럼니스트 핀턴 오툴의 유명한 일갈이다. 공직자와 은행 고위간부, 그리고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똘똘 뭉친 부패정치 네트워크를 파헤친 오툴은 이렇게 경고한다. “시민들은 자신을 둘러싼 명백한 범죄에 정면 대응하길 꺼린다. 그 경향은 부패와 연관될 때 더욱 심해진다.”#1.아프가니스탄 고위 공직자가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체포된 뒤 검찰이 관련 혐의 증거와 함께 거액의 현금 다발까지 확보했지만 현직 대통령이 석방을 지시하고 TV에까지 등장해 무고를 주장한다. 이후 사건을 수사한 검사는 보직 해임되고 체포 영장을 승인한 검찰 부총장은 스파이 누명을 쓴 채 해임된다. #2.세관, 부패한 관리와 기업가들이 결탁해 불법으로 물건들을 들여오고 값싼 수입품들을 무한한 가격 경쟁력으로 시장에 깔아 놓는다. 권력에 줄이 없는 지역 상품 생산자며 수입업자들은 경쟁력을 잃고 도산한다…. 1996년 탈레반의 카불 점령으로 시작해 5년간 지속된 아프가니스탄 내전.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은 이 내전은 종전 이후의 비참한 양상 탓에 더욱 회자된다. 책은 10여년간 폐허가 된 아프가니스탄에 살면서 건져낸 ‘부패 고발서’로 눈길을 끈다. 부패권력이 국가를 망쳐 가는 과정과 암묵적 동조가 부른 비극상이 생생하다. 아프간의 부패상은 지독하다. 내전 종식과 함께 탈레반이 떠난 칸다하르에는 폭력이 난무했다. 폭력을 피해 시민들이 모여든 공유지에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서고 주택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대통령의 형과 그 형제들이 공유지를 헐값에 사들여 주택단지를 개발, 시민을 상대로 비싼 가격에 집을 팔아 엄청난 차익을 거둔 것이다. 탈레반 수감자들의 말을 전하는 관리들의 증언이 충격적이다. 탈레반 가입 동기가 민족적 편견이나 이슬람교 무시, 미군 영구 주둔에 대한 우려, 민간 사상자들에 대한 원한 때문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프간 정부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부패했고 부패가 확산되다 못해 제도적으로 자리잡자 비폭력적 방법으로는 아프간 정부의 근본적인 문제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물론 당시 아프간과 탈레반의 국제, 정치적 역학 관계는 슬쩍 비켜간 진단일 수 있다. 하지만 아프간 관리들과 시민, 탈레반 수감자들의 생생한 증언은 그 부패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고스란히 입증한다. 특히 아프간과 연결해서 소개한 이집트, 튀니지, 나이지리아의 부패 사례는 우리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인문주의자로 통하는 에라스무스는 일찍이 간파했다. “그렇게 입이 쩍 벌어지는 소득 격차는 우연히 생기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권력층에게 유리하도록 온갖 법을 개정하고 특혜를 몰아준 결과다.” 600년 전 에라스무스가 경고한 부패의 문제는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경제평론가 알다 지그문트 도티르의 말을 결론삼아 전한다. 정부 관리들과 은행 간부들이 결탁한 부패정치 탓에 2008년 경제 붕괴를 맞은 아이슬란드를 꼬집은 말이다. “아이슬란드의 붕괴는 경제적 붕괴일 뿐 아니라 도덕적 붕괴이기도 하다. 수십년간 우리 사회의 표면 아래서 꿈틀댄 광범위한 정치부패와 방치를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재판은 반드시 필요하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멕시코서 멸종위기 바다거북 또 떼죽음…한달간 410마리 죽어

    멕시코서 멸종위기 바다거북 또 떼죽음…한달간 410마리 죽어

    멕시코에서 바다거북이 또 떼죽음을 당한 채 발견됐다. 죽은 바다거북들은 대부분 멸종 위기에 몰린 올리브각시 바다거북이다. 28일(현지시간) 현지 언론에 따르면 바다거북들은 멕시코 남부 오아사카주 해안에서 발견됐다. 콜로테페크라는 어장으로 아침 일찍 조업을 나간 어부들이 죽은 채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바다거북들을 발견하고 동물보호국에 신고했다. 현장에 출동한 동물보호국이 죽음을 확인한 거북이는 약 300마리였다. 오아사카주 해안에선 전례 없는 규모다. 동물보호국 코디네이터 엘리오도로 디아스는 "오아사카주 해안에서 거북이들이 죽은 채 발견되는 일이 가끔 있었지만 이런 규모로 떼죽음을 당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현지 언론은 어부들의 증언을 인용해 "참치잡이를 하는 어선에서 내린 어망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동물보호국은 사고를 인재로 보고 있다. 참치잡이 어선이 어망을 내렸다가 실수로 걷지 않은 어망이 거북이의 떼죽음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한 어부는 "어선이 어망을 제대로 걷지 않은 것 같다"면서 "정상적인 조업을 했다면 이런 사고는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멕시코 검찰은 사건이 인재인지, 어떤 배가 어망을 뿌렸는지 수사에 나섰다. 멸종이 우려되는 올리브각시 바다거북이 멕시코에서 떼죽음을 당한 건 이번 달에만 벌써 두 번째다.앞서 멕시코 치아파주의 해안에서도 바다거북 113마리가 죽은 채 발견됐다. 당국은 사인을 조사 중이지만 아직 정확한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현지 언론은 "독초를 먹었을 가능성, 어구에 걸려 사망한 가능성 등이 열려 있지만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치아파주에 이어 오아사카주에서도 올리브각시 거북이들이 무더기로 죽은 채 발견되면서 이번 달에 멕시코에서 떼죽음을 당한 바다거북은 최소한 413마리로 늘어났다. 올리브각시 거북이는 매년 5~6월 산란을 위해 멕시코 태평양을 찾는다. 보통 9월까지는 멕시코 태평양에서 지낸다. 사진=영상캡처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전주 숙박업소 주인 분신 중태

    전북 전주의 한 숙박업소 주인이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질러 중태에 빠졌다. 29일 전북지방경찰청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6시 50분쯤 전주시 전동 한 숙박업소 앞에서 조모(61·여)씨가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당국은 조씨를 병원으로 옮겼다. 조씨는 온몸에 3도 화상을 입어 위중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목격자들은 “조씨가 술을 많이 마셨다. 갑자기 몸에 휘발유를 끼얹더니 불을 붙였다”고 진술했다. 경찰 관계자는 “조씨가 최근 돈을 빌려준 종업원과 심하게 다퉜다는 증언이 있었다”며 “목격자와 이웃 주민을 상대로 사건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독립운동 남편 옥바라지한 부인도 유공자입니다”

    “독립운동 남편 옥바라지한 부인도 유공자입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202명 발굴 사업 주관 투옥된 가족 보살핀 박애신 여사 찾아 “부족한 기록·증언으로 인정 쉽지 않아”“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을 위해 옥바라지를 하며 평생 희생한 부인은 어떤 포상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은 남성과 여성이 함께한 겁니다.”정부는 지난 15일 202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찾아내 이 중 26명에 대해 서훈을 수여했다. 발굴 사업을 주관한 이정은(64) 사단법인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이사장은 28일 “남편이나 시아버지를 포함한 독립운동가를 위해 밥을 하고 옷을 기웠으며, 독립운동을 떠난 남편 대신 만주땅을 개간한 여성의 노력이 독립운동의 중요한 부분”이라며 “한평생 희생한 여성을 독립운동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면 ‘위대한 여성상’을 마련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발굴을 넘어 독립운동을 지원하느라 희생한 여성도 사각지대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이사장은 이번 발굴 작업에서 찾아낸 박애신(1900년생) 여사를 대표 사례로 들었다. 박 여사는 1919년 3월 9일 독립운동가 김태규 선생과 혼인했다. 파리평화회의에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데 관여한 시아버지 김병농 목사와 남편이 서대문 형무소에 연이어 갇히면서 옥바라지를 했다. 출옥한 남편은 몇 개월 후 상하이 임시정부의 안동교통부(국내 거점과 비밀 연락 업무)에 들어갔다. 의열단 등에서 활약하면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이 이사장은 “부부의 마지막 만남은 김태규 선생이 갓난아이가 보고 싶으니 미상의 역 플랫폼에 아기를 안고 서 있으라고 기별을 했던 것”이라며 “김 선생이 기차를 타고 가며 먼발치에서 부인과 아기를 바라봤다고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여사는 독립운동가 인정 기준을 충족하지는 못한다. 그는 정부가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에 나선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 이사장은 보훈처의 용역공모사업에 따라 연구진을 꾸려 지난 1월 12일부터 4개월간 발굴을 진행했고 202명을 찾아냈다. 정부는 지난 15일에 훈장과 포장을 받은 26명 외에도 향후 검증을 통해 오는 11월 순국선열의 날, 내년 3·1절 등에 차례로 서훈을 수여할 계획이다. 이 이사장은 발굴 과정에서 애로사항으로 상대적으로 적은 여성 독립운동 기록을 들었다. 그는 “문헌이나 증언을 찾고자 4개월 발굴 기간에 2개월은 족히 헤맨 것 같다”며 “전체 독립 유공자 중 여성이 2%에 불과했던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다행히 보훈처가 3개월 옥고를 치러야 한다는 독립유공자 기준을 ‘실질적인 독립활동 여부’로 변경하면서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빛을 보게 됐다”고 설명했다. 독립기념관 내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에서 수석 연구위원을 지낸 이 이사장은 2012년 퇴임을 하면서 대한민국역사문화원을 설립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홍콩 요가볼 모녀 살인사건의 전말

    홍콩 요가볼 모녀 살인사건의 전말

    요가 볼에 독성물질을 주입해 대학교수가 아내와 딸을 살해한 살인사건의 전말이 재판 과정을 통해 드러나 충격을 던지고 있다.  27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홍콩에 거주하는 말레이시아 교수 코킴선(53)은 지난 2015년 5월 아내와 16살 난 딸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사망 당시 코의 아내와 딸은 가족의 노란색 미니 쿠퍼 자동차 안에 있다 달리기를 하며 지나가던 행인에 의해 발견됐다. 목격자는 비가 오지 않았음에도 자동차 앞유리 와이퍼가 계속 작동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경찰에 신고했다. 코의 아내 옹슈핑(47)과 딸 릴리 리링 코(16)는 병원에 도착하자마 마자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 진단을 받았다. 코는 홍콩 중문대학의 마취 및 집중치료과의 부교수로 그의 동료는 코가 요가볼에 살인 사건 발생 전날 일산화탄소를 주입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요가볼은 코의 아내와 딸이 사망한 미니 쿠퍼의 트렁크에 있었다. 코는 토끼 실험을 위해 일산화탄소를 주문했다고 주장했으나 재판에서 검사는 실험 명목은 거짓말일 뿐이라고 밝혔다.  코의 가정부는 그가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식사 및 수면도 따로 하고 각자 다른 차를 몰았다고 증언했다. 게다가 사망한 코의 아내는 남편과 자녀들의 과외교사였던 사라 리의 불륜 관계를 알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라 리는 코 교수의 제자로 토끼실험의 조수이기도 했다. 코의 첫째 딸 메이링(22)은 재판정에서 부부 관계는 좋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자애로웠다고 증언했다.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어머니는 2013년 남편의 불륜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자신은 무죄라고 내세우는 코는 “아내는 요가볼로 자살을 시도했다”며 결백을 주장했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전두환 측근 민정기 “회고록 ‘조비오 신부는 사탄’ 표현 내가 썼다”

    전두환 측근 민정기 “회고록 ‘조비오 신부는 사탄’ 표현 내가 썼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의 핵심 측근인 민정기 전 공보 비서관은 28일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서 고 조비오 신부를 ‘사탄’이나 ‘거짓말쟁이’로 쓴 것은 바로 나”라고 주장했다. 전 전 대통령은 지난해 4월 낸 의 회고록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사격 사실을 증언한 조 신부에게 이같이 표현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민 전 비서관은 이날 뉴스1과의 통화에서 “전 대통령으로부터 초고를 받고, 구체적인 문장 표현은 나중에 내가 다 정리해서 한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민 전 비서관은 또 28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조 신부를 가리켜서 사탄, 거짓말쟁이라고 한 것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워딩이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아니다. 확실히 기억은 없는데 막판에 내가 마지막 작업할 때 그런 표현을 쓴 것 같다”고 말했다. 민 전 비서관은 “지난 2000년부터 전 대통령이 회고록을 준비했다”며 “고 조비오 신부가 헬기 사격을 했다는 주장이 허위라는 것은 수사기록이나 재판기록 등 과거 자료를 통해 전 대통령이 초고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정확한 날짜는 기억을 하지 못하지만 2013년에서 2014년쯤 전 대통령이 초고가 다 됐으니 마지막으로 원고를 만들어 발매하라고 했다”며 “당시 전 대통령은 문장을 가다듬고 목차를 구성하고, 출간하는 것까지 온전히 민 비서관이 책임지고 알아서 하라고 했다”고 덧붙였다고 뉴스1이 전했다. 그는 “초고를 받은 후에는 내 책임하에 원고가 완성됐고 출판이 이뤄지게 됐다”며 “‘사탄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짓말쟁이다’라는 표현 등 구체적인 문장 표현은 나중에 제가 정리할 때 다한 것”이라고 밝혔다.전씨가 원고 완성 후 봤는지에 대해서는 “이순자 여사에게 원고를 전달해드렸고, 이 여사는 원고를 봤지만 전 대통령이 봤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며 “원고를 작성하고 완성하는 것은 내 책임하에 이뤄졌다. 구체적인 표현도 제가 작성한 것이 맞다”고 재차 강조했다. 한편, 법원은 전날 전씨의 불출석에도 정식으로 재판부에 요청받은 게 없다며 재판을 열었다. 다음 재판은 10월1일 오후 2시30분 광주지법 법정동 201호 대법정에서 진행된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사설] 법치주의 근간 흔드는 전직 대통령 잇단 재판 거부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어제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다. 재판은 피고인이 공소장에 기재된 인물인지를 확인하는 ‘인정 신문’조차 못 하고 끝났다. 전 전 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는 그제 입장문에서 “2013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전 전 대통령이 지금까지 약을 복용하고 있다”면서 건강상 이유로 법정에 출석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전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고 조비오 신부의 증언이 거짓이라고 주장했다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지난 5월 불구속 기속됐다. 전 전 대통령은 두 차례 재판을 연기했으며 “광주에서 재판받을 수 없다”며 재판부 이송 신청을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 전 대통령 측 입장문에 따르면 그의 인지능력은 소송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어도 금세 기억을 하지 못하는 정도다. 그런 전 전 대통령이 어떻게 지난해 회고록을 써 출판할 수 있었는가. 변호인은 발병 전부터 써왔다고 하지만 납득하기 어렵다. 그의 근황 보도에 따르면 전 전 대통령은 현재 건강에 큰 문제 없이 독서와 서예를 하며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하니 처음부터 재판받을 의사가 없었던 듯하다. 게다가 입장문은 5·18 민주화운동을 ‘5·18 광주사태’라 폄훼하는가 하면 “형사사건을 광주의 검찰과 법원이 다룰 때 ‘지방의 민심’에 영향을 받지 않고 공정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시작도 하지 않은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전 전 대통령까지 재판을 거부하는 것은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행위이자 전직 대통령답지 않은 처신이다. 조 신부 증언을 거짓이라고 판단할 능력이 있다면 당당히 재판에 나와야 한다. 법원은 구인장이라도 발부하고 그를 법정에 세워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전쟁엔 무능·권력엔 교활…유재흥·김종원 등 ‘똥별 뿌리’ 출세가도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전쟁엔 무능·권력엔 교활…유재흥·김종원 등 ‘똥별 뿌리’ 출세가도

    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전시내각을 이끈 조르주 클레망소는 말했다. “전쟁은 군인들에게 맡겨 놓기엔 너무나 중요한 문제다.” 전쟁에는 무능하고 권력에는 교활한 지휘관들에 대해 클레망소가 진저리치며 한 말이었다. 한국의 장군들에게도 흔히 적용되는 경구다. 조갑제씨가 쓴 전기 ‘박정희’에 나오는 이야기다. 여순사건 때 반란군으로 체포되자 남로당원이라며 200여명의 명단을 건네 처형을 면한 뒤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박정희가 1951년 4월 중공군의 공세에 직면한 육군 9사단 참모장으로 있을 때의 일화다.9사단은 3군단(사령관 유재흥 중장)에 배속돼 3사단과 함께 강원 인제군 현리 일대를 관할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서울 점령을 위한 5차 공세(춘계공세)에 실패한 후 중동부 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현리에서 북쪽으로 12㎞ 떨어진 소양강 건너엔 대규모의 중공군이 집결해 있었다. 4월 27일 9사단 신임 사단장이 부임했다. 일본군 소위 출신으로 불과 5년 만에 장군이 된 최석이었다. 최석은 부임하자마자 심지어 ‘뽀마드’까지 상납을 요구하며 참모들을 들들 볶았다. 참모부는 사단장파와 참모장파로 나뉘어 암투했다. 다음은 정훈부장 이용상의 목격담. “당시 헌병대장 김시진은 최석의 ‘밥’이었다. 어느 날 최석의 입에서 ‘살아 있는 싱싱한 것…’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김시진은 그제야 무릎을 치며 강릉으로 차를 몰아 싱싱한 생선회 두어 접시와 초장을 푸짐하게 장만해 사단장 막사로 들어갔다. 잠시 후 헌병대장이 얼굴에 초장을 뒤집어쓰고 나왔다. ‘야, 이 새끼야, 내가 살아 있는 생선 먹고 싶다고 했지, 죽은 생선 먹고 싶다고 했나. 눈치도 없는 놈이 헌병 한다고….’ 군대 안에선 유명한 ‘생선 사건’이다.” 며칠 뒤 박정희는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출근하지 않더니 사단 의무부장으로부터 진단서를 끊어와 대구 집으로 정양을 가겠다고 우겨 9사단을 떠났다. 일촉즉발의 전투부대가 아니라 개그무대의 봉숭아학당이었다. 그로부터 10여일 뒤인 5월 16일 오후 4시 중공군의 총공세가 시작됐다. 오후 5시 30분 소양강을 도하한 중공군 선발대가 오마치(오미재)에 도착하고 대대 병력이 주변을 장악한 것은 17일 새벽 5시였다. 오마치는 상남리, 방내리, 율전, 창촌, 하진부로 이어지는 7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이자 유사시 퇴각로였다. 군단장 유재흥의 주재로 이날 오후에야 열린 작전회의는 간단히 끝났다. 하진부로 ‘퇴각’. 유재흥은 정작 중요한 오마치 탈환 및 철수 작전은 사단장들에게 맡긴 채 급히 경비행기를 타고 하진부로 ‘탈출’했다. 3군단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최석은 오마치 탈환을 포기했다. 모든 중화기와 운송장비 등을 파괴하고 방태산 너머로 퇴각했다. 부득이 3사단도 그 뒤를 따랐다. 다음은 9사단 군수참모 김재춘이 회고한 ‘7군단의 패주 장면’. “최석은 아예 제복도 벗어버리고 앞장서 튀었다. 주변에서 총소리만 나면 꽁지 빠진 닭처럼 혼비백산했다.” 장교들도 계급장을 떼거나 겉옷을 벗어버린 채 도망쳤고 사병들은 공용화기는 물론 개인화기, 무전기까지 버렸다. 19일까지 방태산을 넘어 창촌 광원리 을수재를 거쳐 집결지인 하진부에 도착한 병력은 3사단 34%, 9사단 40%에 불과했다. 밴 플리트 미 8군사령관은 25일 7군단을 해체했다. 유재흥에게는 ‘다른 보직을 찾으라’며 전선에서 내쫓았다.해체된 유재흥의 부대는 3군단만이 아니었다. 개전 초 유재흥의 7사단은 덕정, 의정부, 창동 등 서울로 이어지는 축선을 책임지고 있었지만 사흘 만에 북한군에 내주고 궤멸했다. 이승만은 그런 유재흥을 2군단장으로 영전시켰다. 미8군에 배속되어 북진했던 2군단은 미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내달려 2연대와 7연대 일부 병력이 압록강변의 벽동, 초산까지 진출했다. 당시 선봉 2연대 연대장은 일본군 지원병 출신으로 제주 4·3사건의 민간인 학살자로 유명한 함병선 준장이었다. 2군단의 허장성세는 딱 거기까지였다. 이미 덕천 영원의 산악지역에 매복해 있던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2연대를 시작으로 7연대, 6사단, 8사단이 차례로 무너졌다. 7군단 전체 병력의 60%가 사망, 실종, 포로가 되었다. 연대장 3명이 생포되고 1명이 전사했다. 군단은 해체됐다. 하지만 유재흥은 육군참모차장 등을 거쳐 1957년엔 합참의장이 됐다. 그의 군 생활은 4·19혁명과 함께 끝나지만, 5·16쿠데타와 함께 그의 인생 2막은 화려하게 펼쳐졌다. 태국·스웨덴·이탈리아 대사, 대통령 특별보좌관을 거쳐 국방부 장관이 되었다.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이수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로 편입한 박정희는 일본육사 3년 선배인 유재흥을 끔찍하게 챙겼다. 이승만은 광복군은 배제하고 일본군 출신을 중용했다. 재임 중 육군참모총장은 모두 일본군 출신이고 백선엽(일제 만주군관학교)과 송요찬(일본군 지원병)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 육사 출신이었다. 그러나 역시 모두 비전투병과여서 전장 경험이 없고 전투에는 무능했다. 대표적인 게 참모총장 채병덕이었다. 도발 가능성을 번번이 묵살했던 채병덕은 남침 당일, 새벽 2시까지 술에 절어 있었다. 미국 관리들이 이승만에게 “왜 저렇게 뚱뚱하고 둔한 장군을 총장에 임명했소”라고 물으면 이승만은 “나의 채 장군은 날씬한 장군이 가지지 못한 기민함이 있다오”라고 대답했다. 채병덕은 일본 육사 27기로 일본군 출신 최고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경찰 인사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임명한 치안국장(지금의 경찰청장) 15명은 모두 일제의 검사, 경찰 간부, 일본군 출신이었다. 홍순봉과 문봉제는 간도특설대 출신이고 김종원(오장), 이성우(대위)는 헌병 출신이었다. 1960년 3·15 마산의거 때 ‘배후는 공산당’이라고 발표했던 치안국장 이강학은 일본군 소위 출신이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 김종원이었다. 일본군 자원입대자로, 해방 후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여순사건 때부터 잔혹한 민간인 도살자로 악명을 떨쳤다. 빨치산 토벌대였던 23연대장 시절 그의 부대가 지나간 자리엔 빨치산이 아니라 민간인의 주검이 널려 있었다. 그런 김종원을 이승만은 총애했고 김종원은 충성을 다했다. 거창양민학살사건 때 그는 예하 부대를 공비로 위장시켜 국회의 합동조사단을 습격하도록 했다. 그가 군법회의에서 3년형을 선고받자 이승만은 특사로 3개월여 만에 석방했다. 이후 경찰로 옮긴 김종원은 전북, 경남, 경북, 전남 경찰국장을 거쳐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치안국장이 되어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을 일으켜 이승만의 은혜에 보답했다. 이승만은 김종원을 이렇게 평가했다. “김종원은 애국 충정이 대단한 사람으로서 충무공 이순신과 견줄 만하다.” 육사 8기생들의 평가도 있다. “학살에는 귀신, 전투에는 등신!”(‘노병들의 증언’ 중에서) 미 군사고문단 보고서는 좀더 구체적이다. “부하에게는 가혹했고 전투에는 비겁했다. 전술적 두뇌가 없었고 부하들로부터 원성이 자자했다.” 전투에선 무능하고 권력에는 교활하던 ‘똥별’들, 그 연면한 전통은 지금도 군사주권 환수엔 반대하며 자주국방은 외면하고, 골방에서 댓글 공작이나 지휘하고, 내란 수준의 계엄령이나 모의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발본해야겠지만 이들은 수구언론, 수구정치권과 함께 여전히 우리 사회의 주류를 이룬다. 날은 어두워지고, 갈 길은 멀다. 논설고문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국정농단 외척·임금에도 비판의 칼…격동 구한말 ‘붓끝 의병’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국정농단 외척·임금에도 비판의 칼…격동 구한말 ‘붓끝 의병’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의 시대는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 상층과 하층의 다양한 지층들이 충돌하는 지각변동의 시기였다. 1876년의 개항에서부터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개혁, 을미사변, 을사늑약, 한일합병으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변역(變易)과 위망(危亡)의 시대’였다. 그 질풍노도 속에서 매천은 어떻게 해야 지식인으로서의 시대 소임을 다할 수 있는지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격변의 구한말을 예리한 눈으로 기록하고 비판하며 개혁하려 했던 그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그 시대의 격랑 속으로 들어가 보자.#도깨비 나라에 미치광이는 되고 싶지 않다 전남 광양의 시골 청년 매천은 약관의 나이에 대학사들이 모여 있는 서울로 상경했다. 그는 강위(姜瑋), 김택영(金澤榮), 이건창(李建昌)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면서 시재(詩才)를 인정받았고 이후 전국적으로 문명을 떨쳤다. 하지만 서울에서 그가 목격한 현실은 도깨비 나라에 미치광이들이 판치는 요지경 속이었다. “초시(初試)를 매매하던 당초에는 그 가격이 200냥 혹은 300냥으로 일정치 않다가 갑오년 직전의 몇 차례 식년시(式年試)에는 천여 냥씩 해도 사람들이 놀라지 않았고, 회시(會試)의 경우는 대충 만여 냥씩 하였다./ 임금은 군수를 임명함에 있어 자주 팔면 돈이 많이 생긴다 여겨 1년도 못 되어 금방 교체시켰다. 돈을 바치고 임명을 받은 자들은 그런 사실을 이미 알아서 부임하자마자 즉시 수탈을 일삼았다.” (‘매천야록’(梅泉野錄)권1 상) 무엇보다 공정해야 할 과거시험과 관직 임용이 검은돈으로 거래되고 어처구니없게도 임금이 그 일에 앞장을 서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귀족 자제들을 합격시켜 주기 위한 시험이 따로 있을 정도였고 종친이면 촌수를 안 가리고 무조건 합격시켰다. 이런 현실을 목도한 매천은 마침내 청운의 꿈을 포기하고 “도깨비 나라에 미치광이는 되고 싶지 않다”며 미련 없이 낙향했다. #매화는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지난해 봄에 집을 짓게 되었는데, 담도 치지 않고 울타리도 하지 않았으며 대나무를 쪼개 창문을 만들었다. 그렇게 겨우 세 칸의 집을 완성하고는 동쪽 방을 책 읽는 서실로 삼았다. 그래도 안으로 들어가면 겨울에는 구들이 따뜻하고 여름에는 대자리가 시원하였다. 나는 비좁다거나 누추하다는 생각은 잊어버린 채, 충분히 편안하게 지낼 만한 곳으로 여겼다.” ‘매천집’ 권6에 나오는 ‘구안실기’(苟安室記)의 한 대목이다. 전남 구례의 산골 만수동으로 들어간 매천은 작은 집을 짓고 직접 농사지으면서 책도 읽고 여행도 하며 은둔자로 살았다. 이른바 ‘소확행’을 즐겼던 셈인데, 그때가 그에게는 “세상 근심 잊어서 꿈이 담박하고 가난을 먹고살아 시가 고상하던” 참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매천의 붓끝 아래 온전한 사람 없다 그러나 때때로 들려오는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 소식에 언제까지 초연할 수는 없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발표되자, 매천은 여러 날 아무것도 먹지 않고 통곡만 하였다. 그리고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한 지사들의 자결 소식을 듣고는 눈물로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그 숭고한 뜻을 기렸다. 비분강개의 마음으로 우국시를 쓰고, 의병장들을 애도하는 시를 짓고, 호양학교(壺陽學校)를 세워 신교육에 나섰으며, 또 보고들은 바를 토대로 계속 ‘매천야록’을 집필해 갔던 것이다. “이등박문은 이번에 올 때 300만 원을 가지고 와서 정부에 두루 뇌물을 주어 조약을 성사시키고자 도모하였다. 적신(賊臣) 중 약삭빠른 자는 그 돈으로 넓은 장원(莊園)을 구입하고 귀향하여 편안하게 지냈는데, 권중현 같은 자가 그러했다. 이근택과 박제순 또한 이 때문에 갑자기 거부가 되었다./ 7월 14일, 이등박문이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이용원은 성묘를 간다 핑계 대고 앞서 출발하여 대전까지 가서 이등박문을 전송하였다.” ‘매천야록’ 권4(1905)와 권6(1909)의 기록이다. 당시의 무책임하고 몰염치한 위정자들의 행태와 일본의 간교한 술수를 적나라하게 적고 있다. 그 직필(直筆)의 대상에는 예외가 없었다. 국정을 농단하던 권세가와 외척들, 무능한 위정자들, 심지어 임금과 왕비까지도 서슴없이 비판했다.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자 “왕(황)후는 기민하고 권모술수에 능했는데, 정치에 간여한 20여 년 동안 점차 망국에 이르게 하더니 마침내는 천고에 없는 변을 당하였다”고 평했다. ‘매천의 붓끝 아래 온전한 사람이 없다’(梅泉筆下無完人)는 말이 실감 난다. #사진을 보며 55년의 인생을 돌아보다 “일찍이 세상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비분강개를 토하는 지사도 못 되었네. 책 읽기 즐겼으나 문원에도 못 끼고 먼 유람 좋아해도 발해를 못 건넌 채, 그저 옛사람들만 들먹이고 있나니, 묻노라, 한평생 그대 무슨 회한을 지녔는가.” (‘매천집’ 권7 ‘오십오세소영자찬’(五十五歲小影自贊)) 1909년 가을, 매천은 상해에서 잠시 귀국한 친구 김택영을 보려고 상경했으나 그가 출국하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다. 귀향하던 길에 천연당 사진관에 들러 사진을 찍고 시를 짓게 되는데, 위의 사진과 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시는 매천이 자결하기 한 해 전에 썼고 사진과 함께 남아 있어 그 의미가 더해진다. 상념에 잠긴 모습과 55년을 회고하는 시를 보노라면 왠지 모르게 최후를 준비하는 듯한 쓸쓸함이 느껴진다. #인간 세상에 식자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 “난리 속에 어느덧 백발의 나이 되었구나. 몇 번이고 죽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네. 오늘 참으로 어쩌지 못할 상황되니 바람 앞 촛불만 하늘을 비추네.” “금수도 슬피 울고 산하도 찡그리니 무궁화 세상은 이미 망해 버렸네. 가을 등불 아래서 책 덮고 회고하니 인간 세상 식자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 (‘매천집’ 권5 ‘절명시’(絶命詩)) 매천이 자결하기 직전에 쓴 ‘절명시’ 가운데 두 수이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 조약이 공표되고, 나라를 양보한다는 조서(詔書)가 구례에 도착한 날, 매천은 조서를 절반도 읽지 못하고 기둥 위에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9월 9일 새벽 4경, 문을 닫아걸고 앉아서 절명시 네 수와 자제들에게 남기는 유서를 쓴 다음 조용히 음독 자결을 시도하였다. 얼마 뒤에 급히 연락을 받고 온 동생 황원이 아이 오줌과 생강즙을 올리자, 그릇을 밀쳐 엎어버리고는 “세상일이 이리 되면 선비는 의당 죽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의식이 점점 혼미해지더니 9월 10일 새벽닭이 두 번째 울 때 운명하였다. 내일, 29일이 한일합병의 치욕이 있었던 날이다. “나라가 망한 날, 선비로서 죽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느냐”며 매천이 자결한 뒤, 절의를 가슴에 새긴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투쟁과 헌신으로 어렵게 나라를 되찾았다. 그러나 1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국정 농단과 부정부패로 시끄러운 현실을 볼 때, 비애를 금할 길이 없다. 이제 다시는 같은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다 함께 결연히 매천의 정신을 되새겨 보고 어떻게 해야 각자의 시대 소임을 다할 수 있는지 고민할 때이다. 이기찬 한국고전번역원 고전문헌번역실장■ ‘매천집’은 일제 검열 피해 유고는 상해로 원집은 매천이 서거한 이듬해에, 속집은 1913년 중국 난퉁(南通)의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에서 간행되었다.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상해의 김택영에게 유고가 보내졌고, 그의 편정(編定)을 거쳐 간행한 뒤 비밀리에 국내에 보급하였다. 이렇듯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문집이 간행된 것은 매천의 동생과 제자들이 적극적으로 모금 활동을 벌였고 그 뜻에 호응한 영호남의 인사들이 정성을 합한 결과였다. ‘매천집’의 번역은 그의 성인(成仁)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고전번역원에서 2010년에 네 권으로 펴냈다. 강위, 김택영, 이건창과 더불어 한말 사대가로 평가받는 매천은 맑고 강건한 시와 예리한 필치의 산문을 다수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매천야록’은 그의 날카로운 비판 정신이 빛나는 불후의 명저이다.
  • 필리핀서 한국인 또 총격사망… 올해만 3번째

    필리핀에서 한국인이 총격으로 숨지는 사건이 또 발생했다. 올 들어 벌써 세 번째다. 외교부 당국자는 “26일 오후 필리핀 세부의 프린스코트 모텔 2층 복도에서 우리 국민인 20대 남성 1명이 권총을 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27일 밝혔다. 피해자 A(25)씨는 머리와 가슴, 손 등에 8발의 총상을 입고 현장에서 숨졌다. 관광객 신분은 아니었고 지난해 5월 필리핀에 입국해 장기 체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경찰은 총성을 듣고 시신을 발견한 모텔 경비원의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했다. 경찰은 “A씨와 알고 지내던 필리핀인 1명이 사건 발생 전 복도에 함께 있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의 증언에 따라 사건 직후 사라진 현지인을 유력 용의자로 보고 추적 중이다. 경찰 관계자는 “청부살인 가능성은 극히 드물다”며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근래 들어 필리핀에서는 한국인 대상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5월 마닐라 주택가에서 한국인 1명이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숨졌고 7월에도 한국인 관광객이 총격을 받아 다쳤다. 앞서 2월에는 세부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40대 한국인이 운전 중 오토바이를 탄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필리핀에서 총기 등에 의해 살해된 한국인은 2012년 이후 53명에 이른다. 외교부에 따르면 세부 지역에서만 지난 2월 이후 총기에 의한 사망자가 112명 발생하는 등 안전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전두환, 알츠하이머인데 회고록 어떻게 썼나” 묻자 변호인이 한 답변

    “전두환, 알츠하이머인데 회고록 어떻게 썼나” 묻자 변호인이 한 답변

    “이해가 안되는 게 있습니다. 알츠하이머를 2013년 전후로 앓았다고 하는데, 회고록은 2017년 4월 출간했는데 모순 아닌가요.”(재판부) “증세가 더 악화하기 전에 준비하다 보니까 급하게 출간했습니다. 일부는 이전에 초본 작성한 부분 있었습니다.”(변호인) 27일 전두환(87) 전 대통령이 법정에 나오지 않은 상태로 5·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사격’을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사건 첫 공판기일(재판)에서 전 전 대통령이 불출석 사유로 밝힌 알츠하이머가 논란이 됐다고 연합뉴스와 뉴스1 등이 보도했다. 재판을 맡은 광주지법 형사8단독 김호석 판사는 이날 오후 2시30분부터 진행된 심리에서 전 전 대통령 주장대로 2013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면, 2017년 출간한 회고록을 쓸 수 없었지 않았겠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전 전 대통령 대신 법정에 나온 정주교 변호사는 회고록은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은 2013년 이전부터 준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 변호사는 “회고록을 준비한 것은 오래전이다. 회고록을 준비하면서 2013년 가족들이 이상 증세를 보고 병원에 가서 검진했더니 알츠하이머를 확인했다. 증세를 보인 것은 2013년보다 몇 해 전이다”고 밝혔다.회고록이 이미 알츠하이머 증세가 나타나기 전부터 쓴 것이고, 최근 증세가 심각해지자 집필을 서둘러 마치고 출간했다는 것이 정 변호사의 주장이다. 정 변호사는 알츠하이머를 이유로 앞으로 재판에도 전 전 대통령이 불출석하겠다고 밝혔지만, 재판부는 다음 공판기일(10월 1일)까지 출석해달라고 요구했다. 전 전 대통령 주장에 신빙성이 있는지를 다시 확인해보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전 전 대통령 측은 “전 전 대통령이 대학병원에서 알츠하이머 증세라는 진단을 받았다”며 “적절한 치료로 인해 증세의 급속한 진행은 피했지만 90세를 바라보는 고령 때문인지 최근 인지능력이 현저히 저하돼 방금 전의 일도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고 뉴스1이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바디프랜드 “언론 제보자 색출·징계 안 했다”

    바디프랜드 “언론 제보자 색출·징계 안 했다”

    안마의자 등 헬스케어 제품을 제조·판매하는 기업 바디프랜드가 공익 제보자를 색출해 징계했다는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27일 바디프랜드에 따르면 이 회사 박상현 대표는 지난 9일 사내게시판에 11명의 직원을 징계한다고 밝혔다. 박 대표는 “소중한 내부 문건과 왜곡된 정보를 외부인과 언론에 유출해 회사가 11년간 어렵게 쌓아온 브랜드 가치를 일거에 훼손하는 일이 벌어졌다”며 “내부 직원을 모욕하고 우리 제품을 폄하하며 일부 직원이 성희롱을 일삼는다는 등의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해사 행위를 했다”며 이유를 밝혔다. 박 대표는 “해사행위를 한 직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므로 이번에 한하여 관용을 베푼다는 마음으로 인사위원회는 총 11명에 대해 징계(정직 2명, 감봉 2명, 견책 4명, 서면경고 3명)를 단행한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바디프랜드가 회사의 갑질 행위를 고발한 직원들을 찾아내 징계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앞서 지난 6월 바디프랜드가 사원 건강관리라는 명목으로 ‘과체중인 직원이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간식을 뺏어 다른 직원을 주고 다이어트 식단을 먹으라며 이름을 적어가는 등 공개적으로 모욕했다’, ‘예고 없이 소변검사를 해서 금연학교에 보냈다’는 등의 내부 증언이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 바디프랜즈 측은 이번 징계가 당시 언론 보도와 무관하다고 밝혔다. 바디프랜즈 관계자는 “건강증진 프로그램과 관련한 내부 제보와 언론 지적에 대해서는 조직 문화를 개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며 “언론 제보자를 찾으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다. 이번 징계는 SNS 채팅방 등에서 동료 직원과 회사, 제품을 근거 없이 비방한 직원들이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전두환, 재판 하루 전 “알츠하이머”…법원 “불출석 사유 안돼”

    전두환, 재판 하루 전 “알츠하이머”…법원 “불출석 사유 안돼”

    법원이 재판을 하루 앞두고 ‘건강상 이유’를 들어 재판에 불참하기로 한 전두환(87)씨의 재판을 예정대로 진행한다고 밝혔다. 전씨의 부인 이순자씨는 26일 민정기 전 비서관 명의로 입장을 내고 알츠하이머 진단 사실을 공개하며 법정 ‘출석 불가’ 방침을 밝혔다. 전씨가 옥중 단식으로 인한 후유증, 검찰의 압수수색과 재산 압류 등으로 충격을 받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고, 진료기록을 법원에 제출해 출석이 어렵다는 사실을 미리 알렸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전씨가 언론에 불출석 의사를 밝혔지만 재판부에 공식적으로 제출된 서류가 없는 점 등을 이유로 재판을 예정대로 진행할 방침이다. 27일 열리는 재판은 피고인인 전씨가 불출석하는 만큼 실질적인 심문은 이뤄지지 않고 다음 공판기일을 정하는 정도에서 재판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전씨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사격’을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받는다. 지난해 4월 고 조비오 신부의 조카인 조영대 신부는 전씨가 회고록에서 사자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고소장을 제출했다. 전씨는 회고록에서 헬기사격을 부인하면서 “조비오 신부는 거짓말쟁이다”고 주장했다. 이에 검찰은 헬기사격 등에 대한 조사를 진행, 전씨를 불구속 기소했다. 전씨측이 건강상태, 관할 위반 등을 이유로 재판부 이송 신청을 했지만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광주에서 재판이 열리게 됐다. 사자명예훼손죄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돼 있지만, 인지 절차를 진행해야 하는 만큼 공판기일에는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 법원의 설명이다. 광주지법 관계자는 “공판에서는 추후 기일을 정하는 정도에서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형사재판인 만큼 피고인이 출석을 해야하는 재판이 진행된다”고 말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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