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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믿었던 두바이油마저…

    믿었던 두바이油마저…

    중동산 두바이유가 이틀 연속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우면서 배럴당 50달러를 넘어섰다. 특히 석유 수요가 늘어나는 하절기가 다가오면서 국제유가 상승세가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어 경제회복에 기대를 걸었던 산업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5일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4일 두바이유 현물유가는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가 유가급등을 예측한 보고서의 영향과 투기자금 유입 등으로 전날보다 2.14달러나 오른 배럴당 50.51달러를 기록했다. 종전 사상 최고치는 지난 1일의 48.37달러였다.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도 장중 한때 사상 처음으로 배럴당 58달러를 돌파하는 등 강세다. 이날 뉴욕상품거래소(NYMEX)에서 WTI 선물유가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의장의 증산 관련 발언 여파로 전날보다 0.26달러 내린 57.01달러에 마감했다.OPEC 의장 겸 쿠웨이트 석유장관인 셰이크 아흐메드 알 파드 알 사바는 “50만배럴 증산을 위한 전화회의를 시작했다.”면서 “증산 여부는 2주 이내에 결정될 것이며 증산이행 시점은 5월”이라고 밝혔다. 국제유가 상승세로 수출업계는 에너지 비용 절감과 고부가가치제품 개발 등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전자업계는 채산성 악화를 우려, 항공을 통한 수출물량의 일부를 선박으로 돌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2) 변산에서 만난 정감록과 미륵신앙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2) 변산에서 만난 정감록과 미륵신앙

    ●부안행 버스 속에서 남사고는 먼젓번 내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내 책 ‘남격암’을 살펴보게나. 부안엔 호암(壺岩)이 있고 그 아래 변산 동쪽은 몸을 숨기기에 정말 적합하구나라고 했지.” 나는 이 기회에 변산의 길지를 직접 찾아 나서기로 했다. 서울서 부안까지는 고속버스 편을 이용했다. 서울남부터미널을 출발한 버스는 3시간쯤 지나 삼례를 지난다. 이 때부터 드넓은 호남평야가 눈앞에 가득하다. 지도를 꺼내 살펴보니 부안은 김제 만경평야의 서남쪽 끝에 있다. 그곳은 곡창지대이면서도 서해바다에 연해 있다. 며칠 전 우연히 부안 출신의 한학자 한 분을 만났는데, 그는 예부터 ‘생거(生居) 부안’이란 말이 있다고 자랑했다. 농수산물이 풍족할 뿐만 아니라 변산(邊山)이란 명산이 있어 부안은 무척 살기 좋은 고장이란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부안은 다소 엉뚱한 사건에 휘말려 국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다. 변산에서 군산까지 이어질 새만금방조제 공사로 인해 생태환경이 심각하게 파괴될 수도 있다는 염려가 적지 않다. 잠시 옛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송기숙의 대하소설 ‘녹두장군’이 시작되는 백산이란 지역도 지금은 부안군에 속한다. 갑자기 1984년 동학농민군들의 함성이 귀에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든다. 농민군들은 모두 흰옷에 죽창을 들고 있어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라고 했다던가? 이런 역사적 격랑의 한복판에 변산이란 길지(吉地)가 있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지난밤 나는 이중환의 ‘택리지’를 꺼내놓고 혹시 변산에 관한 설명을 찾아 볼 수 있을까 해서 좀 뒤적여 보았다.“노령의 한 줄기가 북쪽으로 부안에 이르러 서해 가운데로 파고들어간다. 서·남·북 3면은 모두 바다다. 이곳은 많은 봉우리와 허다한 골짜기로 돼 있는데 변산이라 부른다.” 맞는 말이다. 변산은 3면이 바다에 닿아 있고 봉우리와 골짜기가 유난히 많다. ●변산은 백두대간의 서자 그러나 이중환의 설명과 다른 점도 있다. 자세히 검토해 보면 변산의 멧부리는 노령에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다. 백두대간의 계보를 자세히 적은 ‘산경표(山經表)’에도 변산은 보이지 않는다. 다른 고지도를 보더라도 변산은 홀로 떨어진 외로운 산이다. 말하자면 백두대간의 서자인 셈이다. 정감록의 길지는 대부분 태백산과 소백산 줄기에 확실하게 능선이 닿은 적자(嫡子)들이다. 그렇다면 서자 격인 변산은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어 길지로 거론된 것일까? 누구도 이 문제를 직접 거론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아 답을 찾아내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난 변산의 지리와 역사를 좀더 자세히 조사해야 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버스는 서서히 부안읍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서울을 벗어난 지 4시간 만이다. 읍내 길거리엔 바다 냄새가 물씬하다. 남도의 봄 향기도 객을 반기는 듯하다. ●내변산 우동 정감록서 말한 길지 지인의 소개로 나는 읍내에서 지관 김철수(71·가명)씨를 만났다. 김 지관의 말을 들으니 변산은 길지에 필요한 외형적인 조건을 제법 잘 갖춘 편이란다. 변산의 산세는 용맥이 강이나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갑자기 멈춰선 경우에 해당해, 이른바 산진처(山盡處)의 명당이란다. 김 지관은 서남해안 일대에는 그런 명당이 몇 군데 더 있다며 가야산과 팔령산과 태안반도를 예로 든다. 그 말이 나온 김에 나는 변산의 지세를 좀더 알기 쉽게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 지관의 대답은 이러했다.“변산의 청룡, 즉 동쪽 산세는 사창재, 노승봉(상여봉), 바드재를 건너 옥녀봉으로 이어지다가 잠시 남서쪽으로 흐르는 듯하다가 내소사의 주산인 세봉을 건너서 월명암의 주산인 쌍선봉으로 반원을 그리며 내뻗어요. 그게 학치, 청림리 삼예봉에서 끝나지요. 변산의 백호, 즉 서쪽 산세는 개암사의 주산인 우금산에서 우슬재를 거쳐 의상봉으로 이어진다고 봐야지요. 이 두 흐름을 갈라놓은 것이 그 옛날 백천이었는데, 지금은 부안호가 돼 없어졌어요. 백천의 물길은 본래 우슬재에서 시작됐거든요. 백천도 그렇지만 변산의 청룡과 백호가 그려낸 형상은 결국 산 태극, 물 태극이오. 계룡산과 같다, 이런 말씀이지요.” -그럼 ‘정감록’에 나오는 변산 동쪽의 길지는 구체적으로 어딘가요? “아, 그것은 말이지요. 일단 내변산으로 통하는 입구인 우슬재나 바드재를 좀 잘 봐야 해요. 그저 그 길목만 잘 지키면 인근의 청림리와 중계리는 참 좋은 피난처가 돼요. 거 뭐더라, 정감록에 나오는 호암을 찾으려면 상서면 통정리에서 우슬재를 넘어가면 돼요. 우슬재를 살짝 넘어가면 쇠뿔바위라고 나오지요. 그런데 이게 변산 최고봉인 의상봉의 오른쪽에 있어요. 쇠뿔바위 동남쪽을 잘 살펴보면 산비탈에 실학자 반계 유형원이 우거하던 집이 지금도 있지. 몇 해 전에 복원됐지요. 그 산 아래 마을이 우동이야. 보안면 영전에서 30번 국도를 타고 곰소로 가다 보면 마주치는 동리인데 원래 이름은 우반동이란 말이오. 이 마을서 북쪽을 올려다보면 옥녀봉이 있고 멀리 그 산 끝자락에 굴바위가 보인단 말이지요. 바위 입구가 틀림없는 호리병 모양이에요. 호암이라 이거지요! 우동은 앞이 시원하게 터진 듯하면서도 천마산이 막아주고 있어 삼태기형 명당이 분명하고. 그러니까 뭐냐 하면, 난 우동이 바로 그 ‘정감록’에서 말하는 길지다, 그렇게 봐요. 안 그렇겠어요?” -김 지관님, 그런데요. 역사상으로 볼 때 길지가 있다는 내변산이 외변산보다 훨씬 더 큰 수난을 겪었습니다. 구한말이나 6·25 때도 그랬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변산의 우동을 길지라고 주장하시겠습니까? “그거야 잘 모르겠소! 누가 그걸 알겠어요? 그래도 옛 말이 조금도 틀린 게 없어요. 우리가 사는 이 변산은 아주 옛날서부터 미륵님이 나타나신 땅이고, 관세음보살님의 성지요. 원효, 진표, 진묵 등 큰 스님들도 많이 오셔서 도를 닦으신 것만 봐도 이게 보통 땅이 아닌 것은 틀림없어요! 근세엔 증산교를 세운 강일순이도, 원불교의 소태산도 다 여기 변산서 도를 닦았단 말이죠. 그 분들이 다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 분들인데 왜 다른 명당 다 놔두고 부안을 왔겠어요? 정감록에도 길지라고 나와 있단 말이에요. 미륵님이 현신하신 곳이니까 이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봐요.” 김 지관의 설명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내가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변산은 과연 미륵신앙의 발상이요, 불교의 성지였다. 왜, 그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 점이 중요하게 생각돼 난 서둘러 발길을 현장으로 옮겼다. ●변산의 옛 사찰들 부안읍에서 고등학교 교사를 하는 박재환(45·가명) 선생이 길잡이를 맡아주었다. 나는 박 선생과 함께 내변산 입구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대형 지도에서 변산의 유적지를 다시 점검했다. 변산은 제법 큰 산 덩어리여서 변산면(邊山面)·하서면(下西面)·상서면(上西面)·진서면(鎭西面)에 걸쳐 있다. 그런데 최고봉이라는 의상봉 마천대(508m)도 실은 야트막한 편이라 웅장한 느낌은 별로 없다. 이곳 사람들은 서해안을 따라 겹겹이 포개어진 산봉우리를 외변산이라 하고, 내륙으로 뻗은 골짜기와 봉우리는 내변산이라 부른다. 외변산에는 격포리(格浦里) 해안의 채석강(彩石江)과 적벽강(赤壁江)이 특히 유명하다. 이 두 곳의 명칭은 강이지만 실제는 해안의 바위벽이다. 채석강이니 하는 이름은 시선(詩仙) 이태백(李太白)과 대문장가 소동파(蘇東坡)가 노닐던 중국 지명을 본뜬 것이다. 그만큼 경관이 수려하다는 뜻이다. 변산의 해안풍경이 그처럼 절경이라 해도 정작 변산을 전국적인 길지로 만든 것은 산속에 위치한 옛 사찰들이었다. 박 선생이 승용차로 변산을 구석구석 구경시켜 준 바람에 모든 게 뚜렷해졌다. 외변산에 해당하는 상서면 감교리의 개암사(開岩寺)는 백제 무왕 35년(634)에 묘련왕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대웅전(보물 292호)이 참으로 볼 만하다. 개암사에 딸려 있던 원효방이란 암자는 신라 때 명승 원효가 수행한 곳이라 전한다. 그런가 하면 변산면 석포리에 위치한 내소사(來蘇寺) 역시 신라 때의 고찰인데 대웅보전(보물 291호)·고려 동종(보물 277호)·법화경절본사본(法華經折本寫本 보물 278호) 등 문화재가 많다. 내소사 경내의 전나무 숲은 울창하기가 전국 최고라 하고 이 절간의 저녁 종소리는 변산8경의 하나로 친다. 내변산은 나지막한 능선을 따라 깊은 계곡이 여럿이고 나무 또한 울창해 풍광이 곱다. 그 중 산내면 중계리(中溪里)에는 신라 때 창건됐다는 월명암(月明庵)이 있다. 변산의 제2봉인 쌍선봉(498m) 중턱에 자리잡은 월명암에서 바라보는 아침 바다의 물안개는 변산8경의 하나다. 암자 뒤편의 낙조대(448m)에서 서해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도 역시 변산8경으로 손꼽는다. ●불사의방과 영산사, 한국 미륵신앙의 성지 변산에는 위에서 말한 사찰들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중요해 뵈는 암자 하나가 있었다. 의상봉 꼭대기 있었다고 믿어지는 불사의방(不思議房)인데 이곳이야말로 미륵하생신앙의 진원지였다. 장차 미륵이 이 세상에 내려와 수많은 사람들을 불교적 이상세계로 인도할 거라는 하생신앙이 처음 뿌리를 내린 곳이 변산이라니 신기한 느낌이 든다. 따지고 보면,‘정감록’에 약속된 새 세상도 미륵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렇게 보면 미륵하생신앙은 정감록 신앙의 뿌리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불사의방에서 미륵신앙을 체험한 승려는 신라의 진표(眞表)였다. 그는 경덕왕 19년(760)부터 3년 동안 3업(身·口·意業, 몸뚱이·언어·의지의 작용)을 닦았다. 아울러 망신참법(亡身懺法·몸을 희생시키는 참회법)에도 힘써 5륜(두 무릎, 두 손, 머리의 5體)을 바위에 마구 부딪쳐 무릎과 손이 깨져 피가 비오듯 했다고 한다. 진표의 극진한 기도에 감동한 지장보상(地藏菩薩)은 진표에게 모습을 드러내 정계(淨戒)를 주었다. 그러나 진표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부근의 영산사(靈山寺)로 수행 장소를 옮겨 더욱 정진했다. 미륵보살을 친견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다. 마침내 미륵보살이 진표 앞에 나타나 그의 신심을 칭찬하고 점찰경(占察經) 2권과 증과간자(證果簡子·수행으로 얻은 果와 점치는 대쪽) 189개를 주었다. 진표는 미륵보살의 수기(授記)를 받은 셈이다. 경덕왕 21년(762), 진표는 신도들을 이끌고 금산사(전북 김제)에 16척이나 되는 거대한 미륵보살을 조성하기 시작했다.2년 뒤 마침내 미륵상은 완성되었다. 그 때부터 오늘날까지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중심지가 된다. 진표에 관한 설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변산에서 미륵신앙이 출범했다는 점이다. 그 뒤 우리 역사상 미륵신앙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 특히 난세에 고통을 당하는 민중들에게 많은 위로를 줘왔다. ●월명암, 또 하나의 종교적 성지 알고 보니 변산의 월명암(月明庵) 역시 종교적인 성지로 의미가 크다. 월명암은 관음보살을 모신 곳이라는데 대둔산 태고사, 백암산 운문암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영지라 한다. 월명암에 오르기 위해 나는 남여치에서 차를 내려 쌍선봉 쪽을 바라보며 가파른 산길을 올라갔다. 이 암자는 신라 신문왕 12년(692)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창건했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중건했다. 한말엔 의병들이 월명암을 근거지로 삼아 일본군과 싸웠는데 전투에 진 바람에 1908년엔 다시 잿더미가 됐다. 그 후에도 월명암은 몇 차례 심한 몸살을 겪었다. 지금 월명암 옛터에는 대웅전을 건립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월명암을 개창한 부설거사는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의 행적은 ‘부설전’이란 고소설에 상세하다. 경주에서 출생한 부설은 법우(法友)인 영조·영희와 함께 구도의 길을 떠나 변산(능가산)에 들어가 묘적암을 세우고 오직 수도에만 몰두했다. 뒷날 그들 3인은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으로 길을 떠나는데, 부설원(정읍군 칠보면)에 이르렀을 때 부설은 삼생연분(三生緣分)이 있는 묘화를 만난다. 두 사람은 반드시 부부가 돼야 할 운명이었다. 환속한 부설거사는 아들 등운(登雲)과 월명(月明)이란 딸을 두었는데 말년이 되자 변산에 등운암(登雲庵)과 월명암(月明庵)이란 두 암자를 지어 아들딸에게 각기 하나씩 맡겼다. 겉으로 보면, 부설과 묘화 부부는 속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은 일평생 남몰래 수도에 정진해 도력이 출중했다. 부설거사보다 한 수 낮았다는 묘화만 해도 환한 대낮에 조화를 부려 비나 눈을 내리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때로 묘화는 빗방울이나 눈송이를 단 하나도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했다고 전한다. 월명암을 중건한 진묵대사도 많은 이적을 남겼다. 진묵은 조선 중기 호남의 대표적인 선승(禪僧)이었는데, 어느 날 탁발을 나갔다가 매운탕 한 솥을 얻어 마셨다. 그 다음 진묵은 물가에 가서 토해냈는데 탕 속에 들어 있던 죽은 물고기들이 전부 살아났다는 전설이 있다. 근대에는 백학명(1867∼1929)과 같은 고승이 월명암에 주석했다. 학명은 불교개혁의 일환으로 선농(禪農)일치를 몸소 실천했다. 그는 참선과 농사를 같은 것으로 파악해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한 것으로 유명하다. 원불교를 개창한 소태산 박중빈도 세상을 구제할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해 월명암을 찾았다.1919년 소태산은 학명과 더불어 동안거를 했다. 이때 학명의 거처는 법당이었고 소태산은 그 옆방을 사용했다. 원불교의 2대 교조인 정산종사도 한때 학명의 상좌 노릇을 했다. 뿐만 아니라 증산교를 창설한 강일순(姜一淳) 역시 월명암을 찾았었다. 강증산과 소태산은 모두 새 세상을 열기 위해 부심했다고 한다. ‘부설전’을 보면 월명암에서 모두 4성인,8현자,12법사가 나온다고 했다. 월명암 스님들은 부설거사 가족 4명을 성인으로 간주한다. 옛날 이 암자에 주석했던 성암·행암·학명 스님은 3현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5현과 12법사가 더 나올 예정이라는 뜻인데 과연 그 말대로 될지 어떨지 나는 모른다. 장차 지켜볼 일이다. 요컨대 변산은 불보살과 깊은 인연이 있어 정감록이 손꼽는 길지가 되었다. 변산의 경우에서 보듯 때로 민중의 깊은 불심은 풍수조건을 능가하기도 한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고유가 2년 더간다”

    “고유가가 앞으로 2년은 더 지속될 것”이라고 로드리고 라토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19일(현지시간) 경고했다. 수요가 느는데 공급은 빠듯하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배럴당 56달러 수준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2년 동안은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란 진단이다. 앞서 18일 미국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4월 인도분 서부텍사스 중질유(WTI) 가격은 전날에 비해 배럴당 32센트(0.6%) 오른 56.72달러에 마감,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WTI 선물가격의 지난 한 주 동안의 상승폭은 4.2%로 1년 전에 비해 50%나 뛰어 오른 것이다. 영국 런던 국제석유거래소(IPE)에서 4월 인도분 북해산 브렌트유는 배럴당 53센트(1.0%) 오른 55.59달러에 장을 마쳐 역시 사상 최고의 종가를 기록했다. 이같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생산능력에 대한 회의와 이에 따른 공급불안 우려를 잠재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OPEC이 증산에 나선다고 해도 이 물량이 시장에 나오는 것은 5월 이후에나 가능하기 때문에 당분간 유가 강세가 불가피하다면서 배럴당 60달러대 돌파 여부에 주목하고 있다. 한편 미국의 회원제 자동차 서비스 업체인 ‘트리플 A(AAA)’는 18일 미국의 무연휘발유 평균 소매가격이 갤런(3.7853ℓ)당 2.061달러로 전날에 이어 연이틀 사상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고 발표했다. 국제유가의 고공행진에 따라 미국의 휘발유 가격도 천정부지로 치솟아 고유가의 경제적 여파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석우기자 swlee@seoul.co.kr
  • 국제석유시장에 투기세력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증산 합의 소식에도 불구하고 국제 유가가 고공행진을 계속해 우리 경제를 짓누르고 있다. 정부는 국제 유가 오름세가 계속되자 뒤늦게 예상 가격을 상향 조정하는 등 예측 능력의 한계를 드러냈다. 유가가 연일 치솟는 데도 이렇다 할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등 둔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국제 유가가 급등세를 보이는 원인으로 미국의 에너지 재고가 줄어드는 등 석유수급 여건이 악화된 점이 우선 꼽힌다. 미국 에너지부는 17일 휘발유 재고가 290만배럴 줄었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 9월17일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줄어든 수치다. 투기세력들도 유가 급등을 부채질하고 있다. 국제금융시장의 투기자본이 원유 등 실물시장으로 유입되고 있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에 따르면 투기적인 매수 포지션은 최근 4주 연속 증가했다. 당분간 국제 유가 급등세가 진정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이날 한국석유공사에서 열린 민관합동의 국제유가전문가협의회에서 전문가들은 “OPEC이 총회에서 석유시장 안정을 위해 생산쿼터를 하루 50만배럴 확대하기로 했지만, 산유국의 수출물량 선적 일정상 오는 5월1일 이전에는 실제 증산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협의회는 “계절적으로 비수기에 접어드는 2·4분기에는 유가가 안정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하반기 세계 석유수요 증대 및 공급능력 제약, 중동 정세불안 지속 등을 감안할 때 큰 폭의 유가하락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에너지경제연구원 이문배 박사도 “고유가 행진에도 불구하고 경기가 뚜렷한 둔화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도 유가 하락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라면서 “현재 45∼46달러선에서 등락을 보이는 두바이유는 2분기부터 상승세가 둔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이란과 이라크 등 중동지역에 불안요인이 상존하는 만큼 국제유가가 하락세로 전환되기는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OPEC 하루 50만배럴 증산키로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16일 이란의 이스파한에서 고유가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각료회의를 열고 회원국 산유쿼터를 하루 50만배럴 늘리기로 결정했다. OPEC 의장을 맡고 있는 셰이크 아흐마드 파드 알 사바 쿠웨이트 석유장관은 비공개로 열린 각료회의 직후 이같이 밝히고 50만배럴 증산 결정은 당장 적용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OPEC 회원국들의 하루 산유쿼터는 종전의 2700만배럴에서 2750만배럴로 늘어나게 됐다. OPEC 회원국들은 또 필요할 경우 올 5월부터 하루 50만배럴을 추가로 증산키로 합의했다. 알리 알 누아이미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은 배럴당 55달러를 웃도는 현재의 유가 수준은 지나치게 높으며 배럴당 40∼50달러가 적정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현재 OPEC 회원국들의 비공식 하루 생산쿼터가 2900만배럴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이번 증산 결정이 유가 상승세를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일 것으로 보고 있다. OPEC의 하루 50만배럴 증산 결정 소식이 전해진 직후 국제유가는 소폭 하락했다. 미국 서부텍사스중질유(WTI) 4월 인도분은 이날 개장전 전자거래에서 배럴당 44센트 떨어진 54.61달러로 거래가 이뤄졌다. 영국 국제석유거래소에서도 북해산 브렌트유 4월 인도분 가격이 전날보다 배럴당 45달러 떨어진 53.40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하지만 OPEC 증산 결정의 영향은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들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가 주로 수입하는 중동산 두바이유 가격은 지난 15일 현지에서 배럴당 46.49달러를 기록, 사상 처음으로 배럴당 46달러대에 진입했다. 김균미 장세훈기자 kmkim@seoul.co.kr
  • “산유량 50만배럴 증산가능성”

    고유가 행진으로 불안한 국제유가에 일단 파란불이 켜졌다. 16일(현지시간) 이란 이스파한에서 열릴 석유수출국기구(OPEC) 각료회의를 앞두고 주요 책임자들의 증산 계획 및 생산제한 해제 등 진정 발언이 잇따르면서 불안을 누그러뜨리고 있다. 또 유가 상승의 악재로 꼽혔던 미국 난방유 재고분의 감소 추세도 봄철 기온 상승으로 완화되고 있다. 진정 분위기는 셰이크 아흐마드 알 파드 알 사바 OPEC 의장의 발언으로 시작됐다. 알 사바 의장은 14일 “유가가 현 수준을 유지할 경우 회원국들은 산유량을 하루 50만배럴 증산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OPEC은 산유량 유지 입장을 고수해 왔다. 알리 알 누아이미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도 이같은 알 사바 의장의 발언을 뒷받침했다. 이스파한 각료회의에서는 OPEC 회원국들이 생산량을 하루 50만배럴 증산하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또 필요하다면 독자적으로 생산량을 늘릴 것도 시사했다.OPEC 경제분과위원회도 유가 안정에 의견을 모으고 16일 회의에서 생산제한 해제를 결의할 방침임을 밝혔다. 올들어 유가의 고공행진이 이어지자 OPEC은 국가별 생산제한량을 넘어선 초과생산을 눈감아주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도 하루 70만배럴가량을 초과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불안한 요소도 여전히 적지 않다. 우선 리비아와 알제리가 “앞으로 유가 하락이 예상된다.”며 증산을 반대하고 있다. 유가 급등이 계속되자 석유를 사서 차액을 챙기려는 투기자본이 석유 선물 및 현물시장에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1조달러에 달하는 외환시장의 투기자본이 석유 투기에 집중되고 있다고 외신은 전했다. 달러화가 약세여서 더욱 이런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국, 인도 등의 움직임도 시장불안 요소다. 중국은 이미 전략 비축 석유의 확대 의사를 밝혔다. 지난 14일 궈수칭(郭樹淸) 중국 외환관리국장은 “적정 수준을 초과한 외환보유액을 석유구매에 사용할 방침”임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주 석유시장의 불안이 장기화될 것을 지적하면서 석유의존도를 줄일 것을 권고했다.IEA는 “석유 소비가 이미 비축된 원유와 정유능력을 따라잡고 있다.”면서 “공급불안이 계속된다면 석유소비 효율화와 대체에너지 개발에 더욱 정책적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불안 요소를 반영하듯 15일 런던, 뉴욕의 원유 가격은 상승세를 이어갔다. 뉴욕 시장에서 4월 인도분 경질유는 배럴당 27센트 오른 55.22달러에 거래됐다. 최고가는 지난해 10월의 55.67달러였다. 이석우기자 swlee@seoul.co.kr
  • 우리가 먹는 지하수는 800년전 물

    우리가 먹는 지하수는 800년전 물

    지구상에는 13억∼14억㎦의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있지만, 지구의 질량과 비교하면 400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지구가 생성됐을 당시에는 바다는 물론 물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생명체의 중요한 삶의 터전이 되고 있는 물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오는 22일 세계물의 날을 맞아 물의 순환계를 알아본다. ●물의 기원은 지구 내부? 우주? 우선 화산 폭발과 함께 땅속의 물이 뿜어나와 바다를 만들었다는 학설이 지난 1894년 제기된 이후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화산가스 성분의 60%는 수분으로 여기서 나온 수증기가 공기 속에 섞여 있다가 지구가 식으면서 물방울로 바뀌어 지상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즉 지구상의 물은 지구가 화산 활동을 통해 토해낸 수분의 양과 일치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화산가스 속의 수분은 해저 지각의 틈을 통해 수분이 용암층에 흘러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일 뿐, 바다가 생기기 전에는 화산가스에 수분이 별로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물보다 용암층의 비중이 높아 물이 용암층으로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논리다. 이 때문에 미국 아이오와대 루이스 프랭크 박사는 지난 1986년 물이 유성에 실려 지구에 들어왔다는 학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학설은 처음에 비웃음의 대상이 됐지만,10년 후 미 항공우주국(NASA)이 많은 양의 물이 유성에 실려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주성분이 물인 집채만한 크기의 유성이 매일 몇 만개씩 지구 인력권으로 들어와 지구 상공 수천㎞에서 분해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수십억년간 우주로부터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면 바다를 채울 만도 하다. ●물은 ‘카멜레온’ 사해는 왜 물 위에 누워 책을 읽을 수 있을까. 백두산 꼭대기에 자리잡은 천지는 왜 물이 마르지 않을까. 그 해답은 물의 순환에 있다. 물의 양은 일정하게 유지되지만 증발·응결·강수·유수 등을 통해 물의 상태와 분포는 변하게 된다. 즉 사해는 건조하고 햇빛이 따가워 증발량은 많지만 유입량이 적어 소금 성분이 많이 남고, 천지 아래에는 흘러 나오는 화산 지하수가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 물의 97.2%는 지구 표면의 70.8%를 덮고 있는 바닷물이다. 바닷물은 태양에너지 등의 영향을 받아 증발하며, 위도 40도 이하의 저위도 해역이 증발량의 80%를 차지한다. 증발한 수증기는 응결돼 구름이 되고 다시 비나 눈으로 내린다. 이 중 90%는 바다에,10%는 바람에 의해 육지에 각각 떨어진다. 대기 중의 수증기를 모두 응결시킨 물의 양, 즉 전 지구의 가강수량은 지구표면을 25㎜ 정도 덮을 수 있다. 지상으로 떨어진 물의 65%는 증발해 대기 중으로 돌아간다. 또 일부는 식물에 흡수된 뒤 잎을 통해 증산되며, 일부는 지표면을 따라 바다로 흘러가는 하천물이 되고, 일부는 토양 속으로 침투돼 지하수가 된다. 물은 이같은 변화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물은 ‘굼벵이’ 빙하는 육지 넓이의 11%를 덮고 있으며, 육수 부피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물의 총량이 일정하기 때문에 빙하의 양이 증가하면 해수면은 낮아진다.1만 8000년 전 빙하기의 빙하는 지금보다 3배 정도 많아 지구의 평균 해수면이 130m 정도 낮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천물 등 지표수는 육지 넓이의 3%에 불과하다. 반면 땅밑에 드넓게 분포하는 지하수는 8만 3000㎦, 생명체 속에 포함된 물은 1000㎦로 각각 추정된다. 지하수의 속도는 지역이나 깊이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하루 수㎜에서 수m에 불과해 평균 체류시간이 800년에 달한다. 하천물과 달리 지하수의 체류시간은 길어 한번 오염되면 원상태로 회복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예를 들어 한방울의 기름은 25ℓ의 물을 마실 수 없게 만든다. 태양빛이 닿지 않는 수심 200m 이상의 바닷물인 해양심층수는 그린랜드에서 발원,2000년을 주기로 각 대양을 순환한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OPEC ‘유가 논쟁’ 팽팽

    오는 16일(현지시간) 이란의 이스파한에서 열리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정례회의를 앞두고 국제유가의 적정 가격 수준과 증산 결정 여부를 둘러싸고 회원국 사이에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OPEC 의장 겸 쿠웨이트 석유장관인 셰이크 아흐마드 파하드 알 아흐마드 알 사바는 7일 “(회원국들은) 시장에 충분한 양이 공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가격급등이 이어지고 있는 데 우려하고 있다.”며 생산여력으로 볼 때 연말까지 하루 300만배럴 이상의 증산이 이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현재 공식적인 OPEC의 하루 생산쿼터는 2700만배럴이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왕세자 외교정책 보좌관인 아델 알 주베이르 역시 유가가 비현실적으로 높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올루세군 오바산조 나이지리아 대통령도 “회원국이나 비회원국 모두 OPEC의 가격조정 제도에 따라 높은 유가를 완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호소했다. 반면 이란과 베네수엘라는 현 유가가 적정하다는 입장이다. 이란 대표인 호세인 가젬푸르 아르데빌리는 “회원국들은 현 유가 수준에 만족하고 있고 가격변동이 필요없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차기 사무총장이 유력시되는 그의 발언은 지난해 OPEC이 폐기한 배럴당 22∼28달러 가격대로의 복귀 가능성을 배제한 것이다. 라파엘 라미레즈 베네수엘라 석유장관도 “미 정유시설 가동 중단과 달러화 하락 등을 고려할 때 현 유가는 산유국들에 공정하다.”며 같은 입장을 나타냈다. 한편 뉴욕시장에서 미 서부텍사스중질유(WTI)는 7일 증산결정이 내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란 등의 전망 영향으로 전날보다 18센트 오른 배럴당 53.86달러를 기록했다. 반면 우리나라가 주로 수입하는 중동산 두바이유는 나이지리아 등의 전망이 뒤늦게 반영돼 4센트 떨어진 43.98달러에 거래됐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OPEC이 회원국의 증산 움직임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각에서 우려하는 고유가 지속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전문가들은 OPEC이 장기적으로 50달러를 상회하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고 분석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원로작가 송기숙씨 산문집 펴내

    요사이 작가들의 경향으로야 쉬어가기 삼아 써내는 글이 산문집이다. 그런데 ‘녹두장군’‘암태도’의 원로 작가 송기숙(70)씨에겐 그 일이 참 오래도 걸렸다.‘마을, 그 아름다운 공화국’(화남 펴냄)은 20여년 만에 내는 산문모음이다.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니 문단 이력이 올해로 40년. 수십년 곰삭혀온 속엣말들을, 그것도 ‘이쯤해서 산문집 한번 내보자.’는 출판사의 권유에 못이겨 책으로 묶었다. “작가로서, 우리 민족 설화의 다양한 이야기들에 대한 내 나름의 결말을 찾아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운을 뗀 작가가 힘겹게 꺼낸 얘기의 핵심어는 뜻밖에도 ‘공동체 문화의 복원’. 제목이 암시하듯 마을공동체를 뜻하는 ‘두레’정신을 돌이켜보고 이를 일깨워야 한다는 글들은 사뭇 웅변조를 띠기도 한다.“일제가 식민화 과정에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마을공동체인 ‘두레’와 당시 신흥종교로 불렸던 보천교 증산교 등 민족종교였다.”는 그는 “총독부는 농촌수탈의 최대장애가 두레라는 것을 알고 이를 파괴했다.”고 했다. 산문집에서는 박정희 정권이 국가주의 정책이념으로 제정한 ‘국민교육헌장’을 분석하고 일본 군국주의 교육의 폐해를 지적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붉은악마와 국가주의 시비’가 그런 요지다. 항일투쟁에 얽힌 비화를 담은 ‘섬, 섬사람들’ 등의 글들은 소설취재를 위해 역사현장을 더듬으며 체득해온 작가적 성취로 읽힌다. 또 만년 야인으로 살다간 경제학자 박현채, 시인 고은, 소설가 황석영 등과의 숨은 일화도 들어있다. 현재 작가는 대통령직속 광주문화중심도시조성위원장을 맡고 있다.95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8) 계룡산과 원불교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8) 계룡산과 원불교

    ●신종교의 개벽사상엔 정도령이 숨쉰다 이십일 쯤 전 나는 뜻밖의 전자우편을 받았다. 정감록 산책을 빠짐없이 읽고 있다는 원불교 교무 김정원(가명 53세)씨의 글이었다. 그 뒤 우리는 수십 차례 전자우편을 주고받았는데 그러는 사이 나는 김 교무가 계룡산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실을 알고 무척 놀랐다. 오늘은 김 교무와 주고받은 글을 대화체로 편집해 원불교와 계룡산의 관계를 정리해볼까 한다.‘교무’란 물론 원불교의 성직자다. 전자우편에서 나는 김 교무에게 이렇게 물었다.“원불교는 동학 및 증산교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신종교입니다. 그런데 제가 원불교의 경전 ‘대종경’을 읽어본 바로는 다른 신종교들에 비해 신비적, 주술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원불교의 그런 특성은 계룡산과의 관계에도 그대로 나타나겠지요?” 김 교무의 답은 이랬다.“먼저 우리 원불교에 대해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불교의 교조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은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 동학교조) 선생과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 증산교조) 선생과 한 가지로 구한말 일제하라는 그야말로 한국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대에 민중을 이끄신 분입니다. 이 분들이 세운 민족종교는 개벽사상(開闢思想)을 공유합니다. 개벽의 주체는 한국이요, 장차 세계의 도덕적·문명적, 그리고 정치적 중심지가 될 나라도 한국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는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교대하는 시기입니다만 곧 묵은 시대 지나가고 새 세상이 돌아옵니다.‘정감록’에서 말한 정도령 시대가 옵니다. 우리 원불교의 소태산 대종사는 새 시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바야흐로 동방에 밝은 해가 솟으려 하는 때이니, 서양이 먼저 문명함은 동방에 해가 오를 때에 그 광명이 서쪽 하늘에 먼저 비침과 같은 것이며, 태양이 중천에 이르면 그 광명이 시방 세계에 고루 비치게 되나니 그 때야말로 큰 도덕 세계요 참 문명 세계니라.” 우리가 좀더 수련해야 될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얼핏 보면 서양이 우리보다 나아 뵈지만 결국 동서양은 한가지입니다. 미국에 대해 기죽을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백:교무님이 말씀하신 대로 개벽사상이란 것은 원불교 고유의 사상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 땅에 예부터 전해온 미륵신앙 즉, 미륵불이 세상에 와 용화회상(龍華會上)을 연다는 그 신앙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미륵신앙은 ‘정감록’의 등장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된 것도 같습니다. 정감록에선 정도령이 계룡산 아래 새 세상을 펼친다고 했는데, 정도령이 바로 미륵 아닌가요? 많은 신종교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미륵불 또는 정도령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미륵과 정도령은 구별이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김:그건 옳은 판단이라고 봐요. 증산만 해도 후천개벽을 선언한 분인데 그 제자들은 증산을 미륵불로 보거든요. 그러나 우리 원불교의 입장은 다릅니다. 미륵불과 용화회상에 대해 소태산은 전혀 다르게 설명합니다.“미륵불이라 함은 법신불의 진리가 크게 드러나는 것이요, 용화회상이라 함은 크게 밝은 세상이 되는 것이니, 곧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의 대의가 널리 행하여지는 것이다.” 미륵불이란 특정한 인물이 아닙니다. 진리가 크게 밝혀져 곳곳에 부처가 가득 찬 세상이 용화세상입니다. 원불교의 2대 교조 정산종사는 ‘근실(勤實)한 세상’이 바로 용화세상이라고 했습니다. 백:착실한 사람이 많은 세상이 바로 용화회상이라고요? 그렇담 원불교에선 정감록에 나오는 진인왕을 무어라 설명할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원불교에선 정감록 자체를 엉터리라며 근원적으로 부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불교는 신비적·초월적인 존재를 모두 부정하는 것 같으니까요. 김:정감록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만 원불교의 해석은 독특합니다. 소태산은 정도령을 鄭씨 성을 가진 특정인물이 아니라 ‘바른 지도자’라고 보았어요. 정도령과 함께 전개될 이상세계란 것도 새 왕조는 아니고 ‘밝은 세상’이라고 했어요. 정감록의 예언은 장차 참되고 바른 사람들이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움직이게 된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백:교무님 말씀을 듣고 자료를 좀더 찾아봤습니다. 정산종사는 계룡산에 대해 아주 특이한 주장을 했더군요.“계룡산에 정씨 왕이 난다는 것은 닭이 울면 날이 새고 바른 법이 나타난다는 뜻이다.”라고 했던가요? 그렇다면 정산이 말하는 ‘바른 법’은 무엇일까요? 종교를 가리킨 것 같지요. 정산의 주장대로라면 민중이 염원한 계룡산 정진인은 바른 종교의 등장이고, 바른 종교란 원불교란 말씀입니까? ●‘불종불박(佛宗佛朴)’의 예언 백:교무님이 답을 안 하시는군요. 전 사실 이렇게 짐작했습니다. 원불교에선 미신이나 이적 같은 것을 조금도 안 믿는 것 같으니까, 계룡산 같은 것은 원불교의 입장에서 무의미할 것이라고요. 원불교 교리에 따르면, 착실한 사람들이 주도하는 밝은 세상이 바로 미륵의 용화회상, 개벽된 세상 아닙니까? 그렇담 계룡산이든 지리산이든 다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생각되는 거죠. 김:백 소장님은 이런 얘기 혹 들어보셨나요? 1936년 4월21일 소태산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계룡산을 찾으셨는데 그 때 각석(刻石) 하나가 화제가 됐습니다. 신도안 대궐 터에 있던 이상한 바위인데 기이하게도 ‘불종불박(佛宗佛朴)’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바위는 이태조가 신도안에 대궐 터를 닦으면서 운반해 놓은 것이라 하고, 거기 새겨진 글씨는 무학대사의 필적이란 전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글귀를 이렇게 해석합니다.“장차 불법이 주도하는 세상이 되는데, 그 때 주세불(主世佛)은 박씨”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신도안은 정치적 의미의 새 도읍이 아니라, 새 불국토의 중심이 될 곳입니다. 이런 이유로 원불교에선 계룡산 신도안을 특별하게 여깁니다. 백:소태산은 자신을 그 전설의 주인공으로 보았던 게 아닐까요? 그가 신도안에 수도 도량을 지으라고 명령했다면 그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네요. 김:소태산의 속성(俗姓)이 박씨여서 저희들은 그 바위를 신비롭게 여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쨌거나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계룡산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느 선배 교무는 이렇게 말했어요.“지구의 축이라는 계룡산, 일찍이 무학대사가 이곳에 도(道, 종교)의 도시(都市)가 열릴 것이라 예언했던 세계의 수도 계룡산, 그래서 그런지 지명조차 갑사(甲寺), 신원사(新元寺), 상도리(上道里)가 있는 계룡산. 그 곳에 원시반본(原始反本)하여 상원갑(上元甲)의 시대가 예고된 곳이 아닌가.” 계룡산은 세계의 수도, 지구의 축이 될 것입니다.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새 세상이 펼쳐질 곳, 세계종교의 중심으로 예정된 성지가 계룡산입니다. ●“어서어서 신도안으로 들어가라” 백:조사를 해봤더니 1959년 10월 정산종사의 주도로 당시 충남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 64번지 신도안 대궐터의 불종불박 바위 뒤에 있던 초가 1동을 원불교 측이 매입했더군요. 거기서 2㎞ 떨어져 있던 원불교 남선교당도 아마 그 곳으로 옮겨졌지요. 김:그건 그랬어요. 정산종사가 신도안 ‘불종불박’ 땅을 매입하라고 하셔서 그리 된 것입니다. 사실 원불교의 어른들은 모두 신도안에 다녀오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산종사는 직접 다녀오신 일이 없었지만 신도안의 역사를 환히 꿰뚫고 계셨습니다.1961년 10월 정산종사가 열반에 앞서 3대교조가 될 대산종사에게 “지체 말고 어서 어서 신도안에 들어가 터를 잡아라.” 하셔 대산종사는 신도안에 정양을 하며 삼동원의 터를 닦았습니다. 백:제자들에겐 신도안으로 들어가라, 명령했지만 정산종사는 신도안에 다녀온 적이 없었다는 교무님 말씀이 이상하게 들립니다. 정산은 신도안을 그저 하나의 상징으로만 생각했을 뿐 실지로는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일까요? 김:전혀 잘못된 추측입니다. 정산종사는 신도안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어요. 어느 땐가 풍수에 밝은 제자를 보내 신도안의 지세를 살펴보고 오라고도 했습니다. 신도안을 한 바퀴 돌며 살펴본 제자가 돌아와 보고했습니다.“제가 계룡산 상봉에 올라가 내려다 보니 신도안은 천하제일의 귀(貴)한 터였습니다. 정상에 올라 신도안을 굽어 보니 그 산세가 만조백관이 조공을 바치는 형국이었습니다. 다만 너무도 아쉽게 시루봉 하나가 휙 돌아서 있어 어떤 사람들은 역적봉이라 부릅니다. 시루봉을 싫어봉이라고도 합니다. 자세히 따져 보면 신도안은 농사도 잘 안 되고, 천하에 빈(貧) 터입니다.” 이 말을 정산은 몹시 못마땅해 했다고 합니다. 정산은 계룡산이 명산 중의 명산임을 굳게 믿으셨어요. 그래서 3대 교조 대산종사는 계룡산을 가리켜 정산의 높은 덕을 상징하는 산으로 보았습니다. 사실 정산은 구도 수행하던 시절 가야산에서 ‘격암유록’의 갑을가를 얻으셨다 해요. 그 가운데 “상도(上道)에 가야 큰 스승을 만난다.”는 구절이 있는데 그 상도란 지명이 계룡산에 있어요. 상도는 지명이자 진리의 시작이며 진리 그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대산은 그런 내력을 다 알아 계룡산과 정산종사를 연계시킨 겁니다. 백:저도 글에서 읽었습니다만 대산의 계룡산 사랑도 대단했더군요.“싫어봉이니 역적봉이니 그런 소리 당최 하지 마라. 성인을 맞이하려고 돌아선 형국이 아니냐. 영성봉(迎聖峯)이라 하거라.”라고 했다고요? 김:1962년 7월 대산종사는 계룡산 상봉을 오르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답니다.“억조창생개복처(億兆蒼生開福處) 천불만성발아지(千佛萬聖發芽地)” 즉, 계룡산은 억조창생의 복을 여는 땅이니 천명의 부처, 만명의 성인이 나올 곳이란 뜻입니다. 원불교에선 큰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받들어 신도안 경영에 힘쓴 결과 1970년대 원불교의 신도안 삼동수양원은 5만 8000평 정도로 규모가 확대됐습니다. ●불교부흥을 예언한 정감록 백:이쯤에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소태산 대종사 이래 원불교의 지도자들은 계룡산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이유는 계룡산이 장차 불교 부흥의 성지가 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고요. 김:맞습니다. 불교부흥은 ‘정감록’ 예언의 핵심입니다. 정산종사는 일찍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정감록에 이런 말이 있다. 왕씨는 나를 벗 삼고(王氏我友), 이씨는 나를 노예 삼고(李氏奴我), 정씨는 나를 스승 삼는다(鄭氏師我) 하였는데 이는 불교를 두고 한 말이다.” 아시다시피 고려는 친불, 조선은 억불이었는데 다가올 세상은 숭불(崇佛)이란 해석이 아니겠습니까? 정산종사는 정감록이 예언한 미래 세상을 불교 세상으로 보신 겁니다. 또 이런 말씀도 남기셨어요.“도교가 하늘이라면 불교는 땅이며 유교는 사람이다. 지금은 땅에서 올라오는 세상이다. 불교 세상이다.” 앞으론 불교가 세상 도덕의 중심입니다. 백:원불교에선 신도안에서 대규모 선교사업을 펼쳤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야학을 운영해 생활 개선, 문맹 퇴치, 미신 타파 운동을 했고, 그에 대한 지역사회의 반응도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보기에 따라선 마치 원불교가 신도안을 접수하려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김:접수라뇨? 나쁜 뜻으로 볼 일이 아닙니다. 원불교는 신도안에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새 운수가 되기만을 기다리는 정감록 신자들을 깨우치려 한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미신이고, 그런 미신으론 밝은 세상을 절대 일으키지 못합니다. 생활이 우선 근실해야지요. 신도안 주민 가운데 무려 850명이 처음 7년 동안 원불교의 야학에서 올바른 가치를 배웠습니다. ●“계룡대 옮기면 우린 다시 들어간다” 백:그러나 원불교도 결국 신도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1983년 7월27일 제5공화국 정부는 신도안의 전주민에게 이 지역에서 철거하라는 통고를 했지요. 이른바 ‘6·20사업’이었습니다. 신도안 일대에 군사기지 ‘계룡대’가 들어서기로 확정됐습니다. 그렇다면 신도안이 세계종교의 중심이 될 거란 정감록의 해석은 완전히 빗나간 것 아니겠습니까? 김:매사를 그렇게 성급하게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1959년 정산종사가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앞으로 30년 후에는 신도안의 판도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과연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89년,‘6·20사업’으로 신도안 주민들은 모두 철수했고 육·해·공군 참모본부가 들어섰습니다. 실제로 엄청 변한 거지요. 백:요컨대 원불교가 신도안에 건설한 삼동원의 꿈은 백일몽이 된 거죠. 김:성인의 말씀을 범부의 안목으로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 계룡산 신도안에 원불교도들의 염원이 실현됩니다. 천하를 뒤흔드는 권력의 위세도, 지금 여기 살아 숨쉬는 육신도 수명에 한계가 있으나 소중한 꿈은 한계를 벗어납니다.5공 정부의 무모한 계획으로 삼동원을 포기할 당시 원불교는 조건부로 매매계약에 서명했습니다. 언젠가 군사시설이 철거될 때 최우선 순위로 원불교 측에 반환해 달라고 명시했습니다. 백:신도안 땅은 이를테면 특정한 공간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거기 너무 집착하는 것도 일종의 미신이 아닌가요? 김:서산에 해가 지면 동산에 달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미륵불의 용화 세상에 대한 염원을 포기하지 않는 한 신도안의 꿈도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이제 통일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냉전시대의 음해와 대립은 반드시 물러갑니다. 저 하늘에 둥실 떠오르는 보름달처럼 부처님의 원만한 정법이 이 세상을 평화로 이끌 것이고, 계룡대도 물러날 것이 정한 이치입니다. 백:계룡산 신도안이 정법을 상징한다, 정말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한때는 그저 새 왕조의 도읍터로 인식됐고, 그러다가 대한독립의 상징, 나아가 세계 중심국가를 향한 염원, 후천개벽의 근원지로 풀이되던 신도안. 현실적으론 중요 군사시설이 위치한 곳인데 이곳을 원불교에서는 용화세계의 구심점으로 보는군요. 원불교에 이르러 정감록에 관한 해석은 그야말로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고 여겨집니다. 참, 요즘 계룡대를 이전하는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는군요. 부디 성불하십시오. (푸른역사연구소장)
  • 두바이유 1배럴 42.80弗

    중동산 두바이유가 이틀 연속 사상 최고가 행진을 이어갔다. 이런 가운데 국제유가는 공급 부족과 투기 확산 등의 영향으로 더 오를 것으로 전망됐다. 2일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지난 1일 현지에서 거래된 두바이유는 미국 동북부 지역의 폭설과 투기자금 유입 등의 영향으로 전날보다 0.12달러 오른 배럴당 42.80달러였다. 전날 기록했던 사상 최고가를 하루만에 갈아치웠다. 북해산 브렌트유도 현물가의 경우 0.11달러 오른 50.06달러로 50달러대에 재진입했다. 런던 국제석유거래소(IPE)의 선물가도 0.05달러 상승한 50.11달러에 거래됐다. 미국 서부텍사스중질유(WTI)는 단기 차익을 실현한 매물이 증가하면서 현물가와 선물가가 각각 0.03달러,0.07달러 내린 51.63달러,51.68달러에 장을 마쳤다. 석유공사 관계자는 “오는 16일 석유수출국기구(OPEC) 총회를 앞두고 OPEC 의장이 증산 가능성을 언급한 데 이어 고유가로 인해 감산 가능성이 낮아지고 있다는 관계자들의 발언이 잇따르면서 유가 급등을 상당부분 억제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날 2월 보고서를 통해 중국 등에서 수요가 늘어 올해 원유 수요는 1월 전망치보다 하루 평균 10만배럴 증가하는 반면 OPEC에 포함되지 않은 국가들의 원유 생산량은 20만배럴 감소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올 1분기에 하루 평균 60만배럴 초과 공급에서 10만배럴 공급 부족으로 전망을 재조정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7) 계룡산과 신종교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7) 계룡산과 신종교들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주체적 근대화운동은 함수관계 ‘정감록’과 나의 만남은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을 꺾기 위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과연 존재했느냐 하는 화두에서 비롯됐다. 이 문제를 풀려고 나는 서양의 종교사, 중국의 태평천국, 백련교 등에 관한 책을 읽으며 암중모색을 하던 중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그리고 주체적 근대화운동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믿게 됐다.“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 다양한 농촌운동을 전개한 천도교의 경우에서 보듯 신종교는 근대화운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았다. 뭉뚱그려 말하면,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생산·보급한 ‘정감록’은 동학·증산교 및 원불교 등 한국의 대표적인 신종교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들 신종교는 성리학에 대항한 새 이데올로기일 뿐만 아니라 근대화를 위한 대안의 구실도 할 만했다.19세기 말부터 이들 신종교는 민중의 입장에서 ‘제생의세’(생명을 살리고 병든 세상을 치료)와 ‘해원상생’(원한을 풀어 서로를 살림) 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은 평민 지식인들이 주도한 운동이란 점에서 한국사상사의 큰 결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신종교들이 기성 이데올로기를 대체하기 전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한국 사회는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애써 창안한 대항 이데올로기를 외면한 채 기독교,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을 수입하는 처지가 됐다. 새 이데올로기를 도입한 사회세력들은 신종교를 일괄 매도하는 경향이 심했다. 그들은 신종교를 ‘유사종교’라든가 ‘사이비종교’라며 무시하고 억압했다. 비유컨대, 수입상품을 팔아먹으려고 토산품에 대해 흑색선전을 펴는 격이었다. 간혹 일부 신종교 단체들이 물의를 일으켰다 해도, 그것으로 신종교 전체를 매도해서 될 일인가. 참고로 말하면 일제시기 신종교 단체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나 천주교보다 수십 배 신도 수가 많았다. 우리는 더 이상 냉혹한 비판자의 편향된 시각에서 신종교 단체들을 홀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수십년 전 수백만 민중의 지지를 받던 신종교는 ‘정감록’에서 영감을 얻었거나,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그런 점 때문에 ‘정감록’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히 신종교를 말하게 되고, 신종교를 논의하면 당연히 정감록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정감록이 신종교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부분은 ‘때가 되면 진인이 나와서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대목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신종교마다 일치하지 않아 여러 형태로 구별된다. 나는 편의상 그 형태를 청림교형·보천교형·원불교형 등 3가지로 구분해 부르겠다. 이들의 차이점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그리고 자주적 근대화운동의 상관관계라는 큰 주제에 접근하는 내 나름의 방법이다. ●전통적 정감록 신앙에 근접한 청림교형 신종교 단체들 가운데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정감록 신앙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띠는 것을 나는 청림교(靑林敎)형이라 한다. 엄밀히 말해, 청림교가 늘 그랬다는 뜻은 결코 아니며, 단지 1932년에 발생한 이른바 청림교 사건에서 드러난 그 교단의 모습에서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 형태를 재발견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자취 없이 사라진 청림교지만 본래 1920년 동학에서 갈라져 나올 때만 해도 그 세가 만만치 않았다. 교당이 만주와 지린에까지 세워져 한때 신도 수가 30만명을 오르내릴 정도였다. 청림교는 항일운동에도 열심이어서 일제가 눈엣가시처럼 여겼다고 하는데 마침 1932년 2월 말에 터진 청림교 사건이 결정적인 탄압의 구실이 됐다. 당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상상하던 정감록과 신종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사건의 내용을 개관해 보자.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정감록’을 빙자해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하는 신종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물론 언론에 밝혀진 사건의 상당 부분은 일제가 조작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봐야 한다. ●자하도 진인이 보내온 만병통치약 1932년 2월27일자 경성일보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청림교주 태두섭을 비롯한 30명을 긴급체포했다.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에게 금품을 갈취해 사복을 채운 혐의로 붙들려온 이 교단의 간부 11명에게는 결국 실형이 선고됐다. 청림교측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바야흐로 계룡산에 신국가 건설사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정감록’에 약속된 대로 곧 진인이 나와 국권을 손에 쥘 것이다. 진인은 이미 청림교 간부들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는 단계에 있는데 남해 자하도라는 무인도에 숨어 있는 칠성관이 바로 정감록에 예언된 진인이다. 누구든지 청림교를 제대로 믿기만 하면 이 다음에 크게 벼슬한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도 아무 걱정하지 마라. 청림교에는 자하도에서 몰래 가져온 신약이 있다. 이 약만 복용하면 만병이 통치되고 불로장생한다.” 청림교에서 말한 자하도와 칠성관은 물론 가공의 섬, 가공의 인물이었다. 다만 ‘정감록’에 남해의 어느 섬에서 진인이 나와 계룡산에 도읍한다고 돼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서 많은 정감록 신봉자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고 본다. 청림교측은 진인의 실체를 칠성관으로 파악하고 있던 데다가 진인이 머무는 남해의 섬을 자하도로 정확히(?) 밝혔고, 또 그 진인과 이미 왕래를 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하는 바람에 그럴싸하게 들렸던 것이다. 또한 청림교측은 진인이 직접 조제했다는 선약(仙藥)을 시판하기도 했다.‘정감록’에는 진인이 약을 만든다는 말이 전혀 없다. 그렇긴 해도 사람들은 세상을 구하러 나올 진인이라면 그 정도 능력쯤이야 있을 법하다고 믿었다. 진인이란 용어가 본래 도교적인 데다 도교는 장생술(長生術)을 추구하므로 진인과 선약의 관계는 누구에게나 밀접해 보였을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미뤄 볼 때 불치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청림교측이 파는 선약에 관심을 가진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만일 식민지 경찰의 수사 결과가 사실이었다면, 청림교 간부들은 이런 ‘황당한’ 거짓말로 ‘어리석은’ 농민들을 속여 사기행각을 거듭했던 셈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일제가 발표한 청림교 사건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다. 이 사건은 청림교를 탄압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었고, 수사 과정에 혹독한 고문이 있었다. 따라서 사건에 관한 보도 가운데도 일경의 왜곡과 조작이 섞여 있을 수가 있다.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 형태 어쨌거나 청림교 간부들의 언동에는 조선 후기에 널리 퍼져 있던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인 모습이 재발견된다. 계룡산 천도설의 주인공인 진인의 능력을 빌미로 신도를 끌어들이고 조직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방법 말이다. 비슷한 일이 18세기 정조 때도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진인이 해도에서 몰래 군대를 기르고 있다며 군인들이 입을 군복을 마련한다는 빌미로 금품을 거둔 사례가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해도에 있는 진인에게 물어 미래의 운세를 봐주겠다며 의뢰인에게서 복채를 챙기기도 했다. 묘향산 등지에 머무는 진인에게 부탁해 액막이를 하겠다며 제수용품조로 거금을 제공받은 이도 있었다. 청림교 사건에 투영된 신종교의 모습은 대강 이렇다. 이 단계의 신종교는 아직 기성 이데올로기에 대항할 만큼 뚜렷이 정제된 이념을 갖지 못했다. 그 단체의 수장은 스스로를 진인이나 새 세상을 건설할 주역으로 제시하지도 못하는 가운데 정감록에 언급된 진인을 내세워 교단의 조직을 보강하고 운용자금을 거두는 정도다. 이들 신종교는 그저 ‘정감록’을 시세에 맞춰 풀이해 현세적 이익을 도모하는 정감록 신앙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일제시기 계룡산에 난립해 있던 신종교 단체는 대체로 그 수준이었다. 각지로부터 계룡산에 이주해온 정감록 신봉자들 중에는 일인교단(一人敎團)에 머문 경우도 많았다. 계룡산을 처음 찾았던 1980년대 후반에도 나는 이런 형태의 정감록 신자들을 많이 보았다. ●국가적 차원에서 천지개벽을 바라본 보천교형 그와 다른 차원에서 정감록의 계룡천도설을 수용한 신종교 단체들도 있었다. 정연한 교리체계를 갖추고 국가나 민족의 입장을 내세운 경우인데, 그 대표적인 사례로 나는 보천교(普天敎)를 손꼽는다. 지금은 그 존재가 희미해졌지만 일제시기 보천교는 위세당당한 신종교였다. 보천교는 1911년 증산교에서 독립됐다. 창립자는 차경석(車京石·본명은 輪洪)으로 그는 증산교와 동학의 교리를 녹여내 나름대로 새 세상을 준비했다. 인의(仁義)의 실천을 기본교리로 정했고 경천(敬天)·명덕(明德)·정륜(正倫)·애인(愛人)을 4대강령으로 삼아 상생(相生)·대동(大同)을 강조했다. 한데 이 신종교의 가장 큰 특색이라면 교주 차경석이 ‘정감록’을 적극 원용한 점이다. 그는 천지운도(天地運度·새 세상)를 열 사람은 자기뿐이라며 진인을 자처했다. 새날이 오면 한국은 세계 종주국가가 된다던 차경석의 주장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1920년대 말 보천교는 동아시아가 한세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였지만, 보천교의 본래 모습은 그렇게 친일적인 것이 아니었다. 보천교 신도들은 일본 상품을 철저히 배격했고 토산품 자급자족운동을 했다.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끝난 뒤 허탈감에 빠져 있던 민중은 이런 보천교의 민족적인 성격에 호응해 교세가 급속히 팽창했다.1920년대 중반은 보천교의 전성기로 간부 수가 55만명을 헤아렸고 신도는 6백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곧이듣기는 어렵지만 1920년 당시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기독교 신자 총수 32만 3574명과 비교해 볼 때 보천교의 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보천교는 기독교의 20배쯤 되는 신도 수를 자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정감록’을 인용해 대한독립이 임박했다고 주장했으므로 일제는 보천교의 일거수일투족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세가 워낙 큰 데다 교주 차경석의 카리스마가 절대적이어서 감히 교단 해체를 명령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비유하면 당시 보천교는 구한말 동학이 누렸던 민중종교의 위상을 가졌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당국이 보천교의 활동을 방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설에 따르면 일경에 체포돼 곤욕을 치른 보천교 신도가 3만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는 보천교를 반국가적 ‘음모단체’로 규정해 놓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보천교의 ‘음모’는 대한독립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었고 그 핵심이 ‘정감록’의 계룡산 도읍설이었다.‘정감록’에 “계룡산의 돌이 하얗게 되고, 초포에 배가 다닐 때 세상일을 알 수 있다(鷄龍白石 草浦行舟 世事可知).”는 구절이 항상 문제였다.‘세상일을 알’ 거란 문구를 보천교측은 교주 차경석의 등극으로 풀이했다. 그런데 마침 1924년은 육십갑자가 새로 시작되는 갑자년이라 보천교 신도들은 그 해를 신국가 출범 시기로 보았다. 이른바 지상낙원인 후천세계(後天世界)가 시작될 갑자 원년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종교적 카리스마가 막강했던 차경석은 일반인들 사이에도 인기가 높아서 사람들은 동양을 지배할 권력자라는 의미로 그를 차천자(車天子)라고 불렀다 한다. 물론 비웃음을 담아 그렇게 부른 경우도 적지 않았을 테지만. 1929년 낙성된 보천교의 본부 건물 십일전(十一殿)은 보천교의 교세를 반영한다. 전북 정읍에 건립된 이 건물은 지붕을 덮은 기와가 황금빛을 뿜었으며, 경복궁 근정전보다 무려 2배나 컸다.1924년 등극설이 무위로 끝났기 때문에 보천교측에선 바로 그 십일전에서 기사년(己巳年·1929년) 기사월(己巳月) 기사일(己巳日)에 교주 차경석이 천자로 즉위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기(己)와 사(巳)는 글자의 생김이 서로 비슷한데, 두 글자는 10간과 12지의 중간으로 최상의 양기를 상징한다. 특히 뱀을 뜻하는 巳는 용(辰)과 더불어 성인(聖人) 즉 임금을 가리킨다. 따라서 “기사년 기사월 기사일”이라면 보통 임금이 아니라 전 세계를 뒤흔들 만큼 지도력이 강한 왕이 등장할 시점으로 해석된다. 이 소문으로 수백만 보천교도들은 대한독립의 임박을 믿었고, 그러자 식민지 당국자들은 행여 큰 소요라도 일어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차경석은 왕이 되지 못한 채 1936년 병으로 죽었다. 조선총독부는 그 소식을 환영했고 보천교 분쇄공작에 나섰다. 졸지에 지도자를 잃은 보천교는 사분오열돼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차경석이 죽은 뒤에도 보천교 신도의 상당 수는 여전히 ‘정감록’의 계룡산 도읍설에 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신왕조의 수도로 예언된 계룡산에는 후천개벽의 기운이 넘친다. 머지않아 계룡산 신도안에 도읍할 정진인은 차경석의 손자 정동영이 틀림없다.” 일부 신도들은 이런 말을 퍼뜨리며, 차경석의 어머니가 이웃의 정모라는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해 차경석을 낳았기 때문에, 그의 실제 성은 정씨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폈다. 1930년대 후반 총독부 관변 민속학자 무라야마 지준이 쓴 조사보고서를 읽어 보면, 당시 차경석의 손자는 행방불명이 되고 없었다. 그 점에 대해 신도들의 설명은 달랐다.“차천자의 손자 정동영은 깊은 산속에 숨어 밤낮으로 심신을 수련하고 있다. 이제 정동영이 다시 나타난다. 새 세상에선 정동영을 받드는 사람들이 신양반이 돼 요직을 차지한다.” 성폭행설까지 조작해 자기네 교주의 성까지 바꾼 것은 억지스럽고, 교주가 ‘천자’에 즉위한다고 했던 점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천교의 주장엔 긍정적으로 평가될 부분이 있다. 그들은 정감록 신앙을 대한독립, 지상천국인 후천세계의 관념과 결부시킴으로써 일제에 저항할 원동력을 제공했고, 단순히 항간에 떠도는 예언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탈바꿈시켰다. 비록 엉성하긴 했지만 큰 변화였다. 한편 원불교에선 계룡산을 무엇으로 이해했는가 하는 문제는 따로 살펴보겠다.(푸른역사연구소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6) 신도안은 대한독립의 소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6) 신도안은 대한독립의 소망

    ●신도안 사람 김씨 김철호(가명) 노인(78세)을 다시 만난 것은 금년 초였다. 옛날 신도안 사람들의 생활이 궁금해 거기 살던 이를 수소문하던 참에 그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1988년 봄, 먼지가 풀썩거리는 시골길을 따라 소형차를 몰고 간 곳이 충남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였다. 나는 종교사회학적 입장에서 신도안을 조사할 계획이었다. 부남리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유독 김씨가 기억에 가장 오래 남았다. 차분하면서도 다부진 말씨도 인상적이었지만 그 집안 내력도 독특했다. 김철호씨는 3대째 신도안에 살고 있는, 이를테면 신도안 토박이였다.19세기 말 그의 조부 김병선이 평안도 정주에서 문전옥답을 다 처분하고 식구를 인솔해 들어온 곳이 바로 부남리였다. 밥술이나 먹던 김씨의 조부가 하루아침에 고향을 등진 것은 ‘정감록’의 예언을 좇아서였다.‘머지않아 난리가 난다. 조선이 망하고 새 왕조가 계룡산에 들어선다.’ 김씨의 조부는 신도안에 들어가면 난리도 피하고 새 세상에서 벼슬도 할 수 있단 말에 귀가 솔깃해 마침내 고향을 등졌다고 했다. 구한말에는 외세의 간섭이 심해지고, 각종 민란과 갑오동학농민운동 등으로 사회가 몹시 혼란했다. 그 시절에 신도안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본격화됐던 것인데 이주민 중엔 수 백 년 동안 지역차별에 희생됐던 서북 출신이 많았다. 본래 살림살이가 유족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정감록’이 처음 출현한 곳도 서북지역이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김철호씨의 조부는 전형적인 초기 이주민이었다. 신도안의 토착인구는 19세기 초까지 수십 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부터 이주민이 점증한 결과,1918년 말 총 584호에 남녀 2667명으로 불어났다. ●신도안의 여러 뜻 ‘정감록’의 신봉자들은 누구나 새 도읍지를 신도안이라 믿었다. 이 태조가 대궐 터를 닦던 곳이고 계룡산에서 가장 빼어난 명당이기 때문에 거기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 신도안이란 지명엔 흥미로운 유래가 있다. 신라 때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계룡산에 왔는데, 그는 신라 사람들이 계룡산의 정상인 천황봉 아래 있는 제자봉(帝字峰)을 제도(帝都)라 일컫는 사실을 알고 격노했다. 엄연히 중국에 황제가 있는데 신라같이 작은 나라에 제도(帝都)란 말은 당치 않으니 당장 바꾸라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제도’의 ‘제(帝)’ 자에서 양편 획(劃)을 떼 신(辛)자로 고쳐 ‘신도(辛都)’라 불렀다 한다. 신도안이란 지명을 둘러싼 해석은 제각각이다.1988년 조사 당시 내가 현지서 만난 계통불명의 어느 신종교단체 교주는, 새 세상을 가져다줄 구세주가 도읍할 곳이므로 ‘신도안(新都案)’ 즉, 신도읍 예정지라고 했다. 단군을 모신다는 어느 신종교단체의 사제는 이곳은 신정(神政)이 베풀어질 곳이라 ‘신도안(神都案)’이라 해야 옳다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동학 계통의 어느 신종교인은 정감록에 예정된 정씨(鄭氏)의 도읍인 때문에 조선왕조의 도읍은 아니라는 뜻이 있어 ‘新都안’이라고 했다. 그는 ‘안’은 아니라는 부정의 뜻이라고 재삼 강조했다. 김철호 씨를 비롯한 현지 주민들은 ‘새로운 도읍지의 안쪽’ 즉, 신도내(新都內)로 이해했다. 이번에 다시 만났을 때 김씨는 21세기엔 드디어 신도안 시대가 열려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될 거라 했다. 그는 아직도 3대를 품어온 희망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지명에 대한 해석은 서로 달랐지만 신도안이 장차 일대변화를 불러올 중심지여야 한다는 믿음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정감록’의 신봉자들은 세상이 그냥 이대로 지속돼선 안 된다, 뭔가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확신을 가진 듯하다. 따지고 보면 이런 믿음은 기독교와 불교를 비롯한 이른바 모든 고등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정감록’ 신봉자들은 질적 변화의 진원지를 신도안이란 구체적인 장소로 못 박은 점이다. 신도안의 지리적 범위를 묻는 내 질문에 김철호씨는 이렇게 답했다.“계룡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한참 내려오면 암용추와 숫용추 두 폭포가 있어. 바로 그 아래 한 자락이 신도안이지. 충남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 석계리, 용동리, 정장리에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를 더한 5개 마을이 신도안이란 말이여. 일제 때부텀 행정구역으론 그랬어.” 지도를 펴놓고 보니 대략 동서 6㎞, 남북 7㎞ 정도 공간이었다. ●3·1운동으로 조성된 신도안 열풍 1919년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신도안을 향한 이주 물결이 한층 거세졌다. 엄밀한 의미로 독립만세운동은 실패가 아니었다. 그 영향으로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졌고 식민당국도 무단통치를 이른바 ‘문화정책’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수십만 명이 일경의 체포, 구속, 구타로 시달림을 겪은 터라 후유증이 몹시 컸다. 상당수 민중은 일종의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심리적 위안을 받는 일이 시급했다. ‘정감록’이 그 문제를 떠맡았다. 알다시피 정감록은 현재의 평안과 미래의 성공을 기약하는 길지(吉地)를 선사했다. 정감록을 믿었던 민중은 가족을 거느리고 이주대열에 섞였다. 무엇보다도 신도안이 가장 인기 있는 길지였다. 거기서 기도하면 소원성취 할 수 있다, 암수 폭포수가 흐르는 신도안 개울물에 서식하는 올챙이를 복용하면 만병통치 효과가 있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김씨가 부친 김연수에게 들은 바로,1920년쯤 3·4월이면 올챙이를 잡으러 개울가로 몰려드는 인파가 수천 명이나 됐단다. 김씨도 개구쟁이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올챙이를 꽤 많이 잡았다고 한다. 실제로 1919년 이후 4∼5년 동안 신도안의 인구는 급성장했는데 이 점은 통계로도 입증된다.1923년 말 1570호에 7008명으로 5년 전인 1918년에 비해 3배가량 늘어났다. 신도안은 이미 사람이 가득 찼기 때문에 그 주변 마을로 이주민이 몰려들 지경이었다. 그들은 대개 ‘정감록’을 신봉하는 신종교단체들에 속했다. 아예 그런 신종교단체가 수백 명의 신도들을 이끌고 이주해온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금강교가 그랬다.‘금빛 병풍 산기슭에 만 명이 살 수 있다’는 ‘정감록’의 구절을 근거로 금강교도들은 신도안에 근접한 충남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에 터를 잡았다. 하루아침에 100호도 넘는 큰 마을이 들어섰다. ●신도안에서도 꺼지지 않는 대한독립의 꿈 나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점이지만, 신도안 이주는 독립에 대한 열망과 맞물려 있었다. 이미 1910년대 중반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당시 증산교의 일파인 음치교와 태을교 측은 다음과 같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승리로 돌아간다. 정진인이 한국 출신 장교를 거느리고 독일편에서 싸우기 때문이다. 세계전쟁이 끝나면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나 인류가 모두 사멸하게 돼 있으나 음치교나 태을교를 믿는 신도들만은 재난을 면한다. 어쨌거나 세계전쟁을 마무리지은 정진인은 대한독립을 이룬 다음 계룡산에 도읍한다. 이때가 되면 음치교나 태을교 신도들은 신앙심과 포교성적에 따라 관직을 상으로 받는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흥미롭게도 그들 신종교단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할 것으로 점쳤고, 그 이유를 정진인에게서 찾았다. 당시 독일은 일본과 적대관계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심정적으로나마 독일편을 들었다고 풀이된다. 음치교나 태을교도 그랬지만 신종교의 대부분은 정감록을 믿었다. 그들은 진인왕의 등극을 기다렸는데 그것은 나라의 독립을 뜻하기도 했다. 진인왕은 어떤 경우에도 일본의 꼭두각시일 수가 없었다. 여러모로 허황된 예언이었지만 신종교 단체가 퍼뜨린 유언비어에는 대체로 독립을 열망하는 민중의 마음이 얼마간 담겨 있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뒤부터 민중은 국가의 독립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일단 나라를 되찾아야 개인의 평안과 출세도 가능하다는 인식이었다. 식민지 당국은 이들 ‘위험한’ 신종교단체를 탄압했다. 일제는 그런 단체들에게 사기, 폭력, 금품 갈취, 음란행위 따위의 죄목을 씌워 마음대로 탄압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들 단체의 특징이었던 민족주의 성향에 대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빌라도 총독이 신종교 지도자 예수를 처형할 때 파렴치범과 나란히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도 그 비슷한 이유에서가 아니었을까. 1920년대에도 신도안 이주를 부추기는 유언비어들이 계속해서 나돌았다.1921년쯤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에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유행했다.‘정감록’에 왜왕(倭王) 3년을 지내고 가도(假都) 3년이 되면 참된 정씨 왕이 나타나 계룡산 신도에 나라를 세운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왜왕 3년이란 총독 삼대(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이토 마코토)요, 가도 3년은 상해임시정부 3년이다. 요컨대 1921년쯤 계룡산 신도안에 임시정부가 도읍을 세운다는 예언이었는데, 그 말이 퍼지자 신도안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1921년 한 해 동안 모두 610호에 2443명이 신도안에 정착했다. 김철호씨는 고향마을 선배 중에도 그 때 이주해온 집안이 적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경기도 교하 지방에도 조선독립에 관한 유언비어가 널리 퍼졌다. 계룡산 바위틈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었다.‘음력 2월15일은 독립을 외치는 날이다.10번을 외치면 일가를 보존하게 되며,20번을 외치면 독립을 회복한다. 이 취지를 쓴 종이 두 장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 자기 한 몸이 보존되고,8장을 전하면 충신 효자가 된다. 만일 이를 남에게 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고 했다. 주술적 효과를 가진 종이 쪽지가 계룡산 바위틈에서 발견됐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것은 어느덧 계룡산은 독립을 실현해 줄 희망의 등잔이요, 신도안은 그 불꽃이 타오를 심지가 됐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어느덧 신도안은 민족의 성지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신도안의 명물 칠성교의 ‘지푸라기 북’ 1920년대 민중의 관심사는 신도안이 과연 언제 도읍이 되는가, 달리 말해 나라가 독립될 시기를 점쳐 알아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24년 신도안 사람들은 지푸라기 북(草鼓) 하나를 만들었다. 그 북은 김철호씨의 고향 부남리의 칠성각에 안치되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 마을에 있던 칠성교란 신종교의 보물이었다. 부남리에 관한 일이라 나는 김씨에게 그 북을 아는지 물어보았다. 뜻밖에도 김씨의 부친과 평안도 박천에서 내려온 부친의 친구 분이 모두 칠성교를 믿었다고 한다. 김씨 역시 어린 시절 부모의 손에 이끌려 칠성교당에 다녔단다. 1928년 그 북을 쳐 만약 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으면 한국 종교계의 우두머리로 삼는다는 소문이 원근에 파다했다. 이 소문을 듣고 각지에서 몰려든 구경꾼만 해도 무려 2만 5000명이었다. 당황한 식민지 경찰은 서둘러 지푸라기 북을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민중의 아쉬움은 수그러지지 않아 2년 뒤 북을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지푸라기 북이 소리를 낼 리는 없다. 하지만 ‘정감록’ 속의 정진인이 나온다면 그 정도 기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게 민중의 믿음이었다. 1989년 김씨를 포함한 신도안 주민들은 신도안에서 쫓겨났다. 이른바 6·20 사업으로 신도안 일대에 군사시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제5공화국의 시퍼런 서슬에 누구도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알고 보면 신도안의 ‘정감록’ 신봉자들은 1970년대를 거치면서 신앙이 약화되었다. 상당수는 생계의 어려움과 자녀들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로 떠나갔다. 김씨는 고집스럽게 신도안에 눌러앉았지만 그의 두 자녀만 해도 이미 오래 전에 서울로 나갔다고 한다. 지금은 지푸라기도 북도 없고,‘정감록’의 예언에 목을 매는 이들도 많지 않지만 때로 간절한 소망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다. 팔순을 바라보는 김철호 씨가 아직 신도안 시대를 꿈꾼다 해도 그 허망함을 탓하기만 해야할지 모르겠다.(푸른역사연구소장)
  • [시론] 반확산정책에 대비하라/전봉근 평화협력원장·정치학 박사

    [시론] 반확산정책에 대비하라/전봉근 평화협력원장·정치학 박사

    북한의 ‘만용’은 끝이 없다. 보통 비공식 핵개발 국가는 핵능력과 핵개발 의도를 감추기에 급급하나, 북한은 유례없이 공공연히 핵개발 의지를 드러낸 데 이어 지난 2월10일 마침내 핵보유를 선언했다. 핵폭탄급 선언에도 불구하고 한국, 미국, 중국, 일본 등 모두 놀랄 정도로 차분한 대응을 보였다. 지난 15년간 북한이 외치는 ‘늑대놀이’에 익숙해졌거나, 북한을 국제사회의 열외(列外)국가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양치기 소년’이 아니며, 핵무기는 ‘늑대’가 아니다. 북한이 실제 핵무기를 보유하였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핵무기 능력과 핵보유 의지를 가졌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지난 십수년간 한국, 미국과 국제사회는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하여 많은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무위로 끝나곤 하였다. 앞으로도 상당기간 상황이 호전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 이런 상황에서 대북 비확산정책이 실패하였을 경우에 대비한 정책을 심각하게 검토할 시기가 됐다. 흔히 비확산(nonproliferation)정책이 실패하면 반확산(counter-proliferation)정책으로 이행한다고 한다. 핵위협에 대비하고 핵확산 이전단계로 원상회복시키는 정책이다. 반확산정책은 핵무기 제거, 핵무기 이전 차단, 핵사용에 대한 대비, 정보활동 강화, 공세적 정치개입 등 정치군사적 조치를 동반한다. 그런데 북한의 경우, 아직 핵보유가 완전히 확인되지 않았고 외교적 수단이 소진되지 않아 현단계에서 군사적 조치에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북 반확산정책을 적극 검토하되, 현단계에서 외교적 수단에 의존하는 ‘외교적 반확산정책’이 필요하다. 상황은 심각하게 인식하되, 대응조치는 신중하자는 말이다. 이를 위하여 세가지 조치를 제안할 수 있다. 첫째, 다자 대응체제를 유지해야 한다. 북한의 ‘막가파’식 공갈에 홀로 대응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북한의 6자회담 ‘판깨기’ 전략에도 불구하고,6자회담과 한·미공조 코스를 수정할 이유는 없다. 판깨기를 시도한 것은 그만큼 6자회담이 효과적이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설사 북한이 핵을 보유했다고 하더라도 다자협상은 여전히 효과적인 협상틀이다. 필요시 유엔 안보리도 활용해야 한다. 둘째, 힘에 기초한 외교가 필요하다.2월10일 북한이 외교부 성명에서 ‘강력한 힘만이 정의를 지키고 진리를 고수한다.’고 주장했듯이 북한 지도부는 힘을 숭상하는 현실주의자이다. 북한은 힘 앞에서만 타협한다. 북한이 협상력 강화를 위해 ‘핵보유를 병행한 협상’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압박을 병행한 협상’으로 대응해야 한다. 북한의 핵위협을 내버려 둔다면 북한은 ‘도덕적 해이’에 빠지고 핵보유를 더욱 정당화할 우려가 있다. 우리의 힘은 한반도 비핵화의 명분이며 경제력이다. 북한이 핵에 의존할수록 우리의 비핵화 의지는 더욱 강해져야 한다. 그리고 북한의 핵위협과 대북 지원은 양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북한이 알게 해야 한다. 실제 핵위협은 국내의 대북 인도적 지원 분위기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비료는 식량증산을 위한 인도적 물품이지만, 그 양이 50만t에 이른다면 정치적 물품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만약 북한이 대북 지원의 정치적 분위기를 계속 해친다면 순조로운 비료지원도 어렵게 된다. 마지막으로, 한·미동맹을 중심으로 한 반확산정책을 본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북한의 핵보유가 현실화된다면 남북간 세력균형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북한의 행동은 더욱 대담해질 것이다. 반확산정책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평화를 위해 전쟁을 준비하듯, 북한의 비확산을 위하여 반확산도 준비해야 한다. 전봉근 평화협력원장·정치학 박사
  • 北 비료 50만톤 지원 유보 검토

    북한이 지난달 우리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던 비료 50만t이 한동안 전달되지 않을 전망이다. 정부는 이번 대북 비료 지원건에 모종의 ‘조건’을 달기로 방침을 세운 것으로 15일 전해졌다. ‘조건’으로는 북한의 6자회담 참가 등이 거론되지만, 남북 당국자 관련 회담 참여 등 우리 쪽에 대북 인도적 지원의 명분을 제공할 만한 사안이 포함될 여지도 없지 않다. 이에 앞서, 외교통상부의 한 고위인사는 비료지원 등 북한에 대한 지원 정책과 관련,“‘회담 개최에 도움이 된다면….’이란 조건이 붙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직 통일부의 고위 관계자도 이와 관련,“비료는 식량증산을 위한 인도적 물품이지만, 그 양이 50만t에 이른다면 정치적 물품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조치가 가시화될 경우 이날 끝난 한·미 외교장관회담을 통해 합의한 북한 핵무기 보유선언에 대한 ‘한·미 공동보조’의 한 방편으로 해석된다. 동시에 이는 북핵문제 해법과 관련한 일종의 대북 압박 성격을 띠고 있어 북한의 반응이 주목된다. 한편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장관에게 ‘최근 북한측의 50만t 비료 제공 요청에 대해 정부내에서 결정된 것은 없고, 모든 상황을 감안해 검토할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밝혔다. 반 장관은 “제한된 양의 식량과 비료를 북한에 제공해왔고 이것이 남북간 화해교류협력에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었다며 이같이 설명하자, 라이스 장관은 듣기만 했다.”고 전했다. 이지운기자 jj@seoul.co.kr
  • [北 核무기 보유 공식선언] 북한 핵보유 발언 일지

    ▲2003.4 이근 외무성 부국장,3자회담(미ㆍ중ㆍ북)에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에게 “우리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나 폐기할 수는 없다. 그것들을 실험할 것인지, 수출할 것인지, 증산할지 여부는 미국의 태도에 달렸다.”고 밝힘. ▲2003.4 외무성 대변인, 폐연료봉 8000여 개의 재처리 작업을 “마지막 단계에서 성과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발표. ▲2003.8 김영일 외무성 부상, 제1차 6자회담 첫날 전체회의가 끝난 후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에게 “우리는 핵무기를 갖고 있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다.”고 발언. ▲2003.10 외무성 대변인,8000여 개의 폐연료봉에 대한 재처리를 완료했고, 이를 통해 얻어진 플루토늄은 핵 억제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용도를 변경시켰다고 발언. ▲2004.9 최수헌 외무성 부상, 유엔총회 참가 기간 기자들에게 “이미 8000 대(개)의 폐연료봉을 재처리해서 무기화했음을 선포한 바 있다.”고 발언. ▲2005.1 김계관 외무성 부상, 북한은 핵무기 보유국이며 핵무기는 방어용이라고 주장.(커트 웰덴 미 하원의원이 워싱턴 한 토론회에서 전함) ▲2005.2 외무성,“우리는 이미 부시 행정부의 증대되는 대조선 고립압살 정책에 맞서 핵무기전파방지조약(NPT;핵확산금지조약)에서 단호히 탈퇴했고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공식 선언.
  • [책꽂이]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기원(김경일 지음, 홍면기 옮김, 논형 펴냄) 한국전쟁의 배경과 중국의 참전과정을 꼼꼼히 분석한 책. 그동안 논의의 사각에 있었던 한국전쟁과 중국 공산당 및 국민당 관계, 중국 동북지방의 움직임 등을 중국·일본·한국의 광범위한 자료를 통해 복원한다.2만5000원. ●한국인물사전(연합뉴스 펴냄) 국내외 주요인물 3만1000여명의 프로필을 수록했다.2004년 12월 기준으로 청와대를 포함한 정·관계와 교육·기업·문화예술·체육계 등 국내 각계각층의 주요인사 2만5000여명의 프로필과 주소,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 등을 담고 있다.15만원. ●증권거래법 강의(윤승한 지음, 삼일인포마인 펴냄) 우리나라 증권거래법 및 자본시장 규제체제 전반을 설명한 종합해설서.2001년 초판 발행후 있었던 국내외적인 여건변화에 따른 자본시장 규제시스템의 변화내용 등을 보충한 전면개정판이다.4만5000원. ●相生, 상생의 문화를 여는 길(안운산 지음, 대원출판 펴냄) 상생을 부르짖는 외침만 있고, 참된 상생의 실천이 없는 우리 사회에서 상생의 새 문화를 창조하자는 증산도 안운산 종법사의 상생 이야기. 상생은 하늘과 땅,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득한 원망이 사라질 때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9800원. ●수의 문화사(카를 메닝거 지음, 김량국 옮김, 열린책들 펴냄) 인류의 태동과 함께 시작된 수의 역사를 고찰한 책. 전 세계 다양한 민족이 사용하는 ‘수’를 가리키는 언어와 상징들이 어떻게 인간의 문화사와 함께 발전해 왔는지 살핀다.3만5000원. ●세상을 바꾼 전쟁(윌리엄 위어 지음, 이덕열 옮김, 시아출판사 펴냄) 마라톤 전투에서부터 니카 반란, 더블린 전투, 콘스탄티노플 전투, 쓰시마 해전, 미드웨이 전투, 페트라그라드 전투에 이르기까지 현대사에 영향을 끼친 전투중 가장 영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50개의 전투에 대해 짚어본다.2만2500원. ●문학속 우리 도시 기행2(김정동 지음, 푸른역사 펴냄) 한국 근·현대 건축물 보존운동에 앞장서온 지은이가 근대사 100여년 동안의 장·단편 소설, 시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뒤를 좇아 도시 건축을 섭렵하며 이야기를 풀어낸다.2001년 나온 ‘문학속 우리 도시 기행’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담았다.1만3000원.
  • 日 전기·전자업계 “아 옛날이여”

    |도쿄 이춘규특파원|디지털 가전 제품과 반도체의 가격하락으로 일본 유력 전기·전자 메이커들의 실적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소니에 이어 파이어니어·도시바·NEC·후지쓰·산요전기 등 업체들이 잇따라 3월말의 결산 전망을 하향조정하고 있다. 일본 전기·전자 업체들이 일제히 영업이익 목표를 하향조정한 것은 디지털가전제품 가격이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하락하면서 부품가격도 동반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박형 TV나 DVD레코더 등을 거의 모든 업체들이 증산, 재고가 지난해 가을부터 쌓이면서 판매가격도 큰 폭으로 하락한 것이다. 파이어니어는 지난달 31일 지난해 10월 8000억엔이었던 3월말 결산기 매출전망을 7300억엔으로 하향조정했다. 영업이익은 270억엔에서 20억엔으로, 당기손익은 100억엔 흑자에서 80억엔 적자로 각각 수정했다. 도시바도 지난해 10월 1900억엔으로 예상했던 3월말 결산 영업이익을 300억엔 낮춘 1600억엔으로 하향조정했다고 발표했다. 디지털 가전용으로 호조를 유지해온 반도체 등의 부품사업에서 10∼12월 기간에 수요가 급감, 플래시메모리의 가격이 그 기간 20%나 하락했기 때문이다. NEC는 지난해 같은 시점에서 1500억엔으로 예상했던 결산영업이익을 1350억엔으로, 후지쓰는 2000억엔으로 잡았던 영업이익전망을 1700억엔으로 각각 낮췄다. taein@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6) 김제 심포갯벌과 망해사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6) 김제 심포갯벌과 망해사

    고깃배 두어척이 심포항에 닻을 내린다. 어선이 겨우 닿는 자그마한 포구가 제법 커져서 민박집, 횟집이 즐비하지만 불황 탓에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김제땅에 들어서면 늘 찾게되는 곳, 바로 심포갯벌이다. 심포갯벌은 새만금 갯벌의 깊숙한 안쪽을 말한다. 사실 ‘억만금’을 발견이라도 하 듯 억지로 지어진 새만금이라는 명칭부터 작위적이고 거북스럽다. ●심포갯벌은 새만금갯벌의 깊숙한 안쪽 군산에서 김제를 거쳐 부안까지 망망대해로 이어지는 흑갈색의 ‘바다 들판’이 펼쳐지고,‘징게멩게 외야미들’의 누런 들판이 비슷한 넓이로 뭍을 덮는다. 17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최고의 치수시설인 벽골제가 지척이니 예로부터 쌀농사와는 불가분인 곳이다. 지평선 없는 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 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그러나 일제의 수탈적 농업정책에 의해 동진 만경강이 간척되고, 가난한 농민들이 피땀을 흘리면서 일본인 농장주와 척식회사의 채찍에 내몰리면서 개간한 들판이다. 전국 각처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리면서 개딱지 같은 집에서 짐승처럼 살면서 울부짖던 통한의 땅이기도 하다. 그렇게 생산된 쌀은 지금의 새만금을 빠져나가 군산에 집결돼 모조리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황금들판의 끝에 황금갯벌이 이어지다가 이윽고 갈색의 바다로 수렴되는 심포갯벌의 망해사를 찾아든다. 바다를 굽어보는 뛰어난 절이라면 으레 양양 낙산사, 여수 향일암 따위를 내세우리라. 바위 끝에서 그대로 부서져 내리는 낙산사의 씩씩하면서도 장엄한 우조, 미려청고(美麗淸高)하고 애원처절한 향일암의 계면조, 이 모두 빼어난 절창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망해사의 해조음(海潮音)도 그에 못지 않다. 이유는 단 하나. 망망대해로 펼쳐진 갯벌을 마주보고 있어 밀물 썰물에 따라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는 까닭이다. ●앞마당이 갯벌인 망해사 망해사에는 앞마당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없기도 하고, 무한히 넓기도 하여 무량(無量)이다. 무망한 갯벌이 모두 앞마당인 탓이다. 그래서 망해사 앞에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바다가 절을 부르고, 절이 바다를 부르나니!” 김제땅 진봉반도의 윗자락에 자리잡은 작은 암자, 처처불불(處處佛佛)인데 초가삼간이면 어떻고, 거창한 내력이 또한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곳에 눈발이 나부끼고 절집의 큰나무가 바다로 굽이쳐서 흔들린다. 눈발에 감싸인 낙서루에 앉아 눈을 감는다. 그 옆에는 청조헌(聽潮軒)이 있다. 말 그대로 물결의 소리를 듣는 곳. 소녀들의 시구에 등장하는 해조음보다도 청조음은 얼마나 걸찍한가. 가히 서해다운 표현이다. 계곡물이나 강물소리를 듣는 정자나 불당은 널렸지만 앞마당에서 밀물 썰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어디 흔하던가. 질퍽거리는 갯벌로 나간다.20분쯤 걸었을까. 북쪽으로 군산항이 손 끝에 들어오고, 서쪽으로는 고군산열도의 섬들이 줄지어 서 있는 그곳에 새만금간척지의 둑방이 멀리 시야를 가로지른다. 해가 지고 있다. 망해사 앞마당 갯벌에서 마주하는 일몰, 서해 낙조의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갯벌 위에 깔리고 있다. 끝내 갯벌이 사라지고, 아스팔트 포장이 깔릴지 모른다. 서해는 애초부터 바다가 아니라 중국과 연륙된 뭍이었다. 빙하가 흘러내려 서해가 창조되었다. 운동은 사물을 변화시켰다. 뭍에서 실려온 미세한 퇴적물이 쌓이면서 갯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전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8m에 이르는 조석간만의 차이는 드넓은 조간대를 형성했다. 오랜 조석운동의 결과는 질과 양의 변화를 가져와 바닷가에 변증법의 지평을 쌓았다. 그리하여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갯벌이 형성된 것이다. 인간에게는 억겁이지만 지구 나이로 보자면 이 갯벌의 나이는 청년기에 불과한 고작 8000년. 갯벌 생성은 서해안의 조석 변화를 끊임없이 반복해 온 ‘청년운동’이라고 표현함이 어떨른지. 너무 흔하면 소중한 줄을 모르는 법일까. 영국, 독일, 네덜란드를 포함한 북해 해안, 캐나다의 동부 해안, 미국 동부의 조지아 해안, 남아메리카 아마존 하구 등 일부 지역에서만 갯벌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배운다. 수차례 새만금을 찾았던 독일 홀스타인갯벌센터의 켈러만 박사는 새만금의 종다양성에 관해 “세상에, 이런 갯벌이 있다니….”라며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증산·수출·건설을 지고의 좌표로 삼고 자란 우리는 간척지가 우리를 먹여 살릴 유일한 해법인 줄로만 알았다. 소중함을 깨닫기 시작했을 때, 바다는 이미 결단이 나있었다. 갯벌이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동죽을 캐던 심포 아낙들이 부지런히 서두르는 것을 보니 물이 들어올 시간인가보다. 망해사 불빛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다. 흡사 등대처럼 느껴진다. 갯벌을 마구 없애버리는 혼돈을 일깨우는 등대 같다. 동죽을 하나 집어든다. 나이테가 분명하다. 나무만 나이테가 있는 게 아니다. 여름 나이테는 성기고, 겨울에는 촘촘하게 선이 그어져서 삶의 흔적을 분명히 보여준다. 연륜뿐 아니라 조석에 따라 물이 들어오고 빠질 때 나타나는 성장의 결과물인 일륜까지 온몸으로 보여준다. ●토양 정화시키는 수많은 게 구멍 물이 들고 나는 매일매일의 일기를 자신의 몸에다 직접 쓰는 셈이다. 고작 생년월일, 주민등록번호, 생일잔치, 출생신고 따위의 통과의례로 연륜을 확인할 수 있는 인간과는 그런 점에서 확연히 대비된다. 하찮은 조개같은 미물 하나에도 생명의 숨겨진 역사가 각인되어 있다. 물이 들어오자 갯벌의 수많은 구멍마다 난리가 난다. 먹이의 사슬 속에서 적자생존의 삶을 체득해 살아남기 위해 갯벌에 은신처를 마련한 게. 그 구멍 깊숙이 밀물이 채워지자 마침내 그 은신처에서 몸을 뺀 미물들의 시간이 된다. 그들이 죽도록 파헤치는 노동 덕분에 신선한 물이 구멍을 통해 갯벌 지층의 썩은 흙을 정화시킨다. 구멍들의 어마어마한 정화작용은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무심코 잡는 갯벌의 게, 별다른 경제적 이득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게들을 잡아다 파는 무심한 ‘살인’은 이제 그만 둘 일이다. 심포갯벌만 하더라도 게들이 정화공장 수십개 이상의 역할을 공짜로 해준다. 갯벌전문가 서울대 고철환 교수(지속가능발전위원회위원장)는 “찬반 논란을 떠나 생명체를 살리는 것은 인간이 자연에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정리한다. 서해안 갯벌 연구의 메카로 나아가고 있는 서해수산연구소 갯벌연구센터 조영조 소장은 “만경강 동진강은 탯줄, 갯벌은 태반”이라고 말한다. 탯줄과 태반, 그보다 적절한 비유가 있을까. 새만금 일대를 샅샅이 조사하면서 찬반 논란을 넘어서 실사구시적으로 데이터를 축적, 분석하고 있는 송재희 박사는 “해수 유통만 제대로 보장된다면 새만금을 충분히, 그것도 일시에 되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천만 다행이다. 마침 법원에서 선택을 요구하고 있으니, 새만금을 살리는 문제는 이제 국민 모두의 손으로 공이 넘어온 셈이다. 해수를 유통시켜 갯벌과 생명체들을 영구히 살릴 것인가, 아니면 갯벌을 땅으로 만들어 농사라도 지을 것인가. 환경운동연합의 장지영 갯벌팀장은 “쌀이 남아도는 마당에 갯땅으로 국가적 투기판이라도 벌일 것인가.”고 되묻고 있다. 반면에 ‘새만금완공연대’라는 지역조직에서는 ‘끝까지 밀어붙이기’를 선언하고 있다. 이제 새만금을 둘러싸고 각각의 다른 시각을 보였던 이들에게 마지막 답이 제시될 시간이 착착 다가오고 있다.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다. 모든 선택 권이 양측에만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법원도 사실 최종적 결정권한이 없다고 생각된다. 인간은 왜 갯벌의 ‘망둥이거사’와 ‘조개보살’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는가. 정작 그들이야말로 이 갯벌의 주인 아닌가. ●죽어가는 생태자원의 보고 완강하기만 한 ‘토건(土建)국가’에서 풍전등화의 석양을 지켜보는 망해사의 저 등대 불빛은 언제 꺼질까. 서해안의 8000년 청년운동사를 우리는 단 몇 년의 간척사로 대체시키고 있다. 법원 결정을 놓고서 사회적 논란이 재연되고 있으나 토론하고 동의를 구할 시간은 거의 없다. 죽어가는 ‘망둥이거사’와 ‘조개보살’들에게 남은 시간, 선택의 여지는 아예 없다. 문득 망해사와 인연을 맺은 진묵스님을 떠올린다. 비승비속처럼 살다간 그의 행장은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다산 정약용과 늘 마주하였던 대둔사의 초의선사가 편찬한 ‘진묵조사유적고’를 통해 겨우 세상에 알려졌을 뿐이다. 조선 중기에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한 소리를 남기고 떠난 거인. 초의는 그를 두고 ‘석가여래의 응신(應身)’이라는 헌사를 올렸다. 남은 기록이 몇 줄이라면 민중의 구전 역사책은 수십권이니 그를 생불(生佛)로 여기는 전설이 지금껏 유전되는 것 아니겠는가. 김제 만경의 심포에서 지척인 불거촌 사람으로 알려진 그는 “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을 잊는 법(得魚忘筌)”이라고 했다. 토건국가를 그만 지향해도 될 법한데 여전히 토건만이 살길이라고 믿는 우리 시대의 부끄러움에 관하여 그는 무어라 했을까. 끝내 바다를 굽어보는 망해사가 아니라 어처구니없는 ‘망륙사(望陸寺)’를 택할 것인가! 잘못되면, 훗날 이곳에 다시 와 관해기가 아닌 관륙기(觀陸記)를 써야할지도 모른다. 그 얼마나 참담하고 민망한 일이겠는가.
  • 80년 인생 회고록 펴낸 김광수 대한교과서 회장

    “문예월간지 ‘현대문학’을 50여년 동안 발행해 오면서 한번도 흑자를 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문단의 발전을 위한다는 신념 하나로 이끌어 왔지요.” ‘대한교과서’하면 우리나라 교과서 출판역사의 대명사처럼 통한다. 특히 최근에 ‘현대문학 600호’를 발행할 만큼 문단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60년대에는 현재 40∼50대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추억의 어린이 잡지 ‘새소년’을 발행했다. 대한교과서의 김광수(80) 회장은 최근 이같은 ‘역사’를 담은 회고록 ‘나의 뜻, 나의 길’(대한교과서刊)을 펴냈다. 그는 “원래는 회고록 발간을 생각하지 않았다.”면서 “하지만 현대문학 50년, 나이 팔순, 또 대한교과서 창립 60주년을 앞둔 상황에서 기록으로 남겨 달라는 주위의 권고가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고 피력했다. “6·25때 인민군에 의해 문을 닫았던 일, 부산에 피란 가 교과서를 찍어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전쟁 중에도 교육은 멈출 수가 없지요.” 그는 1925년 전북 무주군 무풍면 증산리 삭골(沙洞)마을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1938년 무풍공립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혼자서 ‘중학 강의록’을 공부하다가 가출,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 우석(愚石) 김기오 선생을 만나 부자의 연을 맺었다. 대한교과서는 1948년 양아버지 우석에 의해 설립됐다. 김 회장도 이때 대한교과서 창립사원으로 참여했다.6·25로 서울이 함락되자 ‘대한교과서’ 기능이 중단됐고 김 회장은 의용군으로 끌려가던 중 가까스로 탈출, 위기를 모면했다. 이후 국민방위사관1기로 임관, 참전했으며 육군경리학교 보급장교로 제대했다.52년 해군 당국의 도움을 받아 부산에 교과서 공장시설을 세워 부활했다. 서울로 돌아온 창업자 우석은 54년 ‘현대문학사’를 설립한다.1961년 김 회장은 창업주의 뒤를 이어 대표이사 회장에 올랐다. 이어 ‘어문각’사장,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한국잡지발행인협회 이사장 등의 직함을 가졌다.64년에는 ‘새소년’을 창간했다. 당시 ‘새소년’은 어린이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는 출판 인생 외에 국회의원을 다섯 차례나 지내 정계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73년 무소속을 시작으로 15대 국회의원까지 5선의원을 지내면서 한국국민당 부총재, 자민련 부총재 등을 역임했다. “정치가에서 욕심을 훌훌 털어버리고 초심의 각오로 다시 대한교과서 자리에 돌아왔지요. 앞으로 대한교과서를 상장할 계획입니다. 이제 기반을 닦아 놓았으니 출판계를 리드하는 것은 후배들의 몫이지요.” 그는 “나이 80을 넘는 동안 출판과 정치라는 험난한 두 길 가운데 부끄러움과 오욕의 흔적을 남겨왔다.”면서 ‘요가수련’이 건강유지의 비결이라고 귀띔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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