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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파구, 14∼18일 문화제 개최‘한성 백제문화’ 재조명

    백제의 옛 도읍지였던 송파구(구청장 金聖順)가 문화의 계절을 맞은 주민들에게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14∼18일 찬란했던 한성 백제문화를 재현하는 문화제를 마련한다. 이번 문화제는 초기 백제의 풍속과 문화를 재현하는데 초점이 맞춰진 행사로 학술세미나,민속놀이 공연,먹거리 장터 등 볼거리가 많다. 15일 구청 강당에서는 국내외 전문가들이 찬란했던 한성 백제문화를 재조명하는 학술세미나를 갖고 16일에는 서울놀이마당에서 구민 노래자랑이 열린다. 구민의 날인 17일은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가장 풍성하다. 서울놀이마당에서송파나루장터 재현행사가 열리는 것을 비롯해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먹거리장터,풍물장터,한국문물장터,직거래장터 등 풍성한 장터가 곳곳에 마련된다. 송파민속보존회의 ‘풍장놀이’와 백제신검 시범단의 백제신검 시연회,제기차기,닭싸움,새끼꼬기,장구치기 등 다양한 민속놀이 경연도 함께 열린다.일본,뉴질랜드,하와이 등 6개국이 참여하는 국제민속축제도 곁들여진다. 18일에는 석촌동에서 백제초기 적석총에서 백제고분로를 거쳐 올림픽공원평화의 문까지 백제 의상을 입은 행렬이 펼쳐지고 백제 시조인 동명왕에 대한 제사와 전지왕 즉위식도 거행된다. 구는 이에 함께 14일과 17일 이틀동안 구민의 숨은 실력을 겨루는‘이색왕’선발대회도 갖는다.자전거를 가장 빨리 조립하는 ‘자전거조립왕’과 신문배달사원들을 대상으로 신문투입구에 신문을 가장 정확히 넣는 ‘신문배달왕’등 6개 종목의 이색왕이 14일 선발되고 17일에는 구두닦이왕,머리카락이 가장 긴 사람,몸무게가 제일 많이 나가는 사람, 제일 키가 가장 큰 사람, 팔씨름왕 등 8개 분야의 으뜸이를 선발한다. 구는 이번 행사에 1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조덕현기자 hyoun@
  • 돈버는 세종대왕? 문화부 즉위식 재현 관광상품화

    다음달 4일부터 매주 토요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세종대왕 즉위식이 재현된다. 문화관광부와 문화재보호재단은 23일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증진시키고특색 있는 관광상품을 개발하기 위해 ‘조선조 세종대왕 즉위의식’을 정례화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행사는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임금나들이와 문무백관의 행렬 등을진행하며 오후 3시부터는 세종대왕의 즉위 과정을 1시간에 걸쳐 보여 주게된다. ‘세종실록’‘국조오례의’ 등 철저한 문헌 고증을 거친 즉위식은 종친 문무백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어보(御寶)전달과 즉위교서 선포를 한 후 초엄(初嚴)을 알리는 세번의 북소리로 시작된다.원래 나흘동안 계속된 즉위의례를하례와 교서반포 과정을 중심으로 축약해 보여준다.출연진만도 340여명에 이를 전망이다. 행사 중에는 한·일·영어로 동시에 해설이 이루어진다.관람객들이 원하면출연진과 기념촬영을 할 수도 있다. 임병선기자 bsnim@
  • 국태공의 보은(비록 남가몽:2)

    ◎대원군,정권잡사 신세진 쌀장수에 관직/이조판서 홍종응 집서 무참하게 냉대받고/서 강사는 쌀장수 이천일 찾아가 사정하니/쌀 20섬·돈 1천냥 꾸러미·정육 100근 선뜻/아들 보위 오를던날 궁중잔칫상 차려 대접 고종이 즉위하자 아버지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고 세상사람들은 그를 국태공이라 불렀다.운현궁도 초가 삼간에서 대궐같은 기와집으로 탈바꿈했다.당시의 돈으로 1만7천830냥이나 들여 신축하였으니 만일 그 때가 IMF시절이었다면 즉각 공사중지 명령이 내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만에,실로 오랜만에 권좌에 오른 대원군이었던 만큼 그까짓 1만이나 2만냥 같은 돈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겼고 무엇보다 먼저 해야할 일이 나라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그동안 자기를 도와준 사람에게 보답하고 자기를 능멸했던 사람에 대해서는 응분의 불이익을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먼저 대원군이 손을 보려 했던 사람은 이조판서 홍종응이었다.이사람은 당대 유수의 대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보는데 안목이 없었고 세상일에 너무 각박했다.○하인폭거로 왼손에 유혈 1863년 임술민란(일명 진주민란) 직후의 경제는 특히 어려웠다.요즘과 같은 경제난국이 닥쳐 모든 사람들이 하루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는데,흥선군도 예외가 아니었다.그래서 하루는 흥선군이 홍판서 댁을 찾아가 구걸하게 되었는데,홍판서는 문전박대를 했다.문전박대 뿐만 아니라 그 댁 하인이 대원군에게 폭행까지 하여 손가락에 유혈이 낭자하였다. “국태공이 흥선군 시절에 너무 가난하여 늘 꾸워 먹고 살았다.임술민란이후에 인심이 점점 각박하여 먹고 살 길이 막막하였다.이조판서 홍종응의 집에 가서 입을 열고 싶었으나 여러 번 은혜를 입은 처지라서 쉽게 말하기도 어려웠다.그러나 염치를 불고하고 부득이 찾아가니 하인들이 나와서 말하기를 ‘우리 대감께서는 근래에 건강이 좋지 못하여 잠시 산정의 사랑에 쉬러 갔습니다. 소인들에게 분부하시기를 아무라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으니 다른 날 다시 오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고 했다.그러나 세모에 날씨가 너무 추운데다 배도 고프고 목마름이 심하여 일이 성사되건 안되건간에 한번 만나 얘기나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흥선군이 애걸하니 하인들이 차마 거절하지 못하여 협문을 열어 들어오게 하였다. 그러나 홍종응이 답하기를 ‘이왕에 몇번 청구하신 것은 즉시 봉행해 드렸습니다만 지금은 세모를 당하여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구걸하니 이들을 다 구제해주기 어렵습니다.얼마 안되는 이조판서의 봉급으로는 그 사람들을 다 기쁘게 해주기 어려우니 대감께서 금번에 청하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차차 형편을 보아 후일에 도와드리겠습니다’ 하고 흥선군의 청을 거절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흥선군이 그 집 문밖을 나설 때에 불상사가 생겼다.뒤를 따라 나온 홍종응의 하인이 발길로 협문의 판자를 찼다.그 조각이 흥선군의 손을 내리치니 다섯 손가락에 유혈이 낭자하였다.” 그러나 서강에 사는 쌀장수 이천일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홍종응의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흥선군은 손에 붕대를 감은 채 그 길로 이천일의 집을 찾아갔는데 맞이하는 태도부터가 홍종응과는 크게 달랐다. ○“집권자 되면 은혜 갚겠다” “부득이 서강에 사는 쌀가게 주인 이천일을 찾아갔다.흥선군을 맞은 천일은 크게 놀랐다.문안을 드린 후에 보니 흥선군의 왼손 다섯 손거락에 피가 엉기어 얼었고 상처의 흔적이 매우 심하였다.천일이 ‘어찌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하고 물으니 대원군은 ‘나귀를 모는 아이가 실수하여 빙판에 떨어져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다.천일이 약수로 피를 씻어낸 후에 손을 헝겊으로 싸니 조금 통증이 가셨고 정신이 들었다. 그런 뒤 천일이 ‘대감은 어찌해서 누한 곳(누지)에 행차를 하셨습니까.’고 물으니 대원군은 ‘다른 이유가 없고 몇년 전부터 내가 그대의 은혜를 입어 왔으나 지금 세모를 당하니 추운 절기에 살아갈 길이 막연하여 염치불고하고 찾아왔네’ 하고 답했다.이에 천일이 아뢰기를 ‘형편이 그러시다면 물건 보내라는 패지(메모지) 한 장이면 족하실텐데 대감께서 예까지 친림하셨습니까.송구할 따름입니다.염려하지 마시고 돌아가십시요.내일 아침일찍 조처하여 보내 드리겠습니다’고 황송해했다. 대원군은 집에 돌아왔으나 저녁을굶은 터라 추위가 더욱 혹독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천일은 약속대로 이튿날 아침 일찍이 물자를 보냈다.흥선군이 조반 후에 서강의 이천일에게서 보내 온 목록을 보니 쌀 20섬,돈 1천꾸러미,장작나무 50바리,정육 100근,서초(평안도에서 나는 담배) 30근이나 되었다.흥선군은 ‘이 은혜를 어찌 갚을꼬’ 생각하면서 ‘만약에 하늘이 도와 내가 집권자가 된다면 제일 먼저 그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하였다.” ○경상감사와 비슷한 녹봉 세상 일은 알 수 없는 것.거지 흥선군이 국태공이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1863년 12월8일 젊디 젊은 철종이 갑자기 승하하니 운현궁에 왕기가 서렸다. 아들이 임금이 되고 흥선군이 대원군으로 뜬 것이다. 즉위식 날 대원군이 서강의 쌀장수 이천일을 특별히 부르니 천일이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달려와 운현궁으로 들어섰다. 대원군이 친히 손을 잡고 인도해 가니 천일은 떨리고 황공하여 나아가지 못하고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몸을 굽히고 있었다.그 두터운 은혜를 이루다 헤아리기 어려웠다. 이 때 대원군의부인 민씨가 이천일이 온 것을 알고 궁중의 잔치상을 내어오게하니 천일은 손이 떨려 진수성찬을 다 먹을 수가 없었다.이에 대원군이 친히 천일의 손을 잡아 상에 앉게 한뒤 큰 은반에 홍로주를 가득 부어주니 천일에게 그렇게 큰 영광은 처음이었다.” 대원군은 왕실의 체면을 많이 떨어 뜨렸으나 그 정분은 잃지 않았던 것이다.뿐만 아니었다. “드디어 이천일이 선혜청 고직에 임명되니 그 수입이 경상감사의 봉급보다 못하지 않았다.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경사스런 일이 있다하더니 과연 헛말이 아니었다.” 지금도 홍종응 처럼 한치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천일같이 착한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 일은 두고 두고 후세 사람들이 명심할 일이라 할 것이다.
  • 격동의 대한제국 이면사/철없는 임금(비록 남가몽:1)

    ◎고종 첫 어명 “계동 군밤장수 처형하라” 대원군은 미친 사람 행세를 해가면서 와신상담 집권의 기회를 노리다가 1863년 마침내 둘째 아들 재황을 왕위에 올려 놓는데 성공하였다.이 분이 바로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인 고종이다.고종의 즉위식 날이 음력으로 12월13일이었으니 양력으로 따지면 대한민국 15대 대통령 취임식 날인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고종의 나이는 열두살 철없는 어린아이였다.만으로 따지면 10살 밖에 안되는 아이였으니 요즘 같으면 초등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다.그러나 고종 앞의 철종이 18살이었고 그 앞의 헌종이 8살,그 앞의 순조도 11살 나이로 등극하였으니 당시로서는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대원군 둘째 아들… 12세 즉위 왜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계속해서 왕위에 올랐느냐 하면 순조,헌종,철종 등 3대 60여년에 걸쳐 세도정치를 하던 안동 김씨가 의도적으로 어린 왕을 세워 권력을 전단하려 했던 탓이라 한다.그런 세도정치하에서 흥선군(흥선대원군은 고종 즉위 후에 부른 존칭)처럼 난처한 사람은 없었다.흥선군은 영조대왕의 현손(증손자의 아들)이었으니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였다.그러니 그는 안동 김씨들의 일급 요시찰 인물이었다.까딱하다가는 귀신도 모르게 죽는 몸이었다.말이 세도정치지 사실상 군사독재보다 더한 공포정치였다.그러니 철종 14년간은 대원군으로서는 살얼음 밟듯 조심하여 살아야 했던 눈물의 재야시절이었다. 흥선군의 사저는 최근 복원된 운현궁이다.말이 궁이지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흥선군이 거지나 다름없이 살았던 초가 삼간이었다.이 초가 삼간에 왕기가 서리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집터 때문이었다.터 좋은 데를 명당자리라 하지만 운현궁 자리는 그보다 더 좋은 왕후정승이 나는 터,대지였다. 운현궁 터에는 본시 관상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관상대는 일명 서운관이라 했으므로 서운관의 구름 운자를 따서 운현궁이라 했다는 것이다. 관상대라면 천기를 엿보는 기관이다.왕이 되는 것은 천운을 타고나야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천기를 엿보는 고개마루의 초가집에서 왕이 났다.운현궁에 왕기가 서린다느니 또 성인이 난다느니하는 소문은 벌써 철종 초년부터 났었다.그러면 그럴수록 흥선군의 처신이 더 어려워져 마침내 탁질양광,옛날 양녕대군이 그랬듯이 온갓 미친 짓을 다하며 정신병자처럼 행세하여 안동 김씨의 눈을 속였던 것이다. 고종이 왕좌에 오르게 된 데에는 집터 말고 고종의 관상이 좋았다는 설도 있다.경상북도 청도에 사는 박유붕이라는 애꾸눈 관상쟁이가 있었는데,어느날 운현궁에 와서 고종 얼굴을 보더니 옆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물리치고 난 뒤 “왕이 될 관상이니 이 말을 절대 누설하지 마십시요”라고 했다고 한다.이 사람은 그 공으로 고종이 즉위하자 이듬해 경기도 남양부사와 수사로 임명되었다고 하니 관상보는 것도 출세의 한 방편이었다. 1863년 말 강화도령으로 이름난 철종이 나이 32살의 젊은 나이에 후사도 없이 죽게 되니 흥선군은 극비리에 조대비와 내통하여 전격적으로 후계자를 자신의 둘째 아들로 결정해 버렸다.즉위식은 지금의 창덕궁 안에 있는 인정문에서 거행되었다. ○“운형궁에 왕기 서린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누가 대통을이을 것인지 논란이 많았다.중론이 분분하여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사슴(대권)이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이와같이 의론이 분분하게 갈려 있는 시점에 조대비가 특별히 처분을 내려 운현궁의 흥선군 제2자 재황으로 대통을 잇게 한다는 명령을 내리니 누가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그리하여 12월 길일 양신에 고종이 보위에 오르니 만조 백관들이 모두 축하하고 만세를 불렀다.한쪽에서는 철종의 장례를 치르고 한쪽에서는 즉위식을 거행하니 조정의 백관들은 눈코뜰새가 없었다.” 그러나 이게 웬 일인가.철없는데다가 평소 굶주리며 자라온 고종이었기에 옥좌에 앉자마자 제일성으로 하는 소리가 계동에 사는 군밤장사를 잡아다 죽이라는 것이었다. 놀란 대신들은 황급히 제지하였다. “전하가 지금 보위에 오르시어 성선의 덕으로써 정치를 하셔야 하는데 어찌해서 주살의 위엄을 먼저 보이십니까” 이에 고종은 반박하여 말하기를 “다른 이유는 없다.내가 여러 번 군밤 하나를 달라고 하였으나 한번도 주지 않았으니 이 어찌 인심이 그럴 수 있단 말인가.이같이 이익만 알고 의리를 모르는 자는 죽어 마땅하며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의 불선한 마음을 막아주어야 하는 것이다.어찌 내가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고 그를 죽이려고 하겠는가.” 이 말을 듣고 대신 한 사람이 아첨하여 말하기를 “훌륭하도다! 왕의 말씀이시여.훌륭하도다! 왕의 말씀이여. 다른 사람의 불선한 마음을 막는다는 교를 내리시니 과연 임금의 도량에 알맞습니다.그러나 일개 하찮은 군밤장사를 효수하라는 것은 전하께서 처음 등극하신 자리에서 혹 국가의 화평한 기운에 미안한 일인 듯 생각됩니다.” 이에 수렴청정을 하게 된 조대비(신정왕후)는 교를 내리기를 “대신이 말씀드린 것은 금석과 같은 말입니다.그 효수하라는 명령은 거두어 들이시는 것이 타당할 것 같으니 짐짓 그만두고 논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했다. 이 말을 한 대신이 다름 아닌 안동 김씨 핵심인물이었는데 그 아첨하는 말솜씨는 후세의 정치인들에게 으뜸 가는 귀감(?)이 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 영국 런던탑(세계 문화유산 순례:42)

    ◎템즈강변 우뚝솟은 도심의 ‘성벽’/1066년 영 침략 불 윌리엄이 권위 상징 축조/높이 27.3m 지하 4.6m 돌로 쌓아 요새로 런던탑(Tower of London)은 말이 탑이지 실상은 도심의 성채다.입구에 들어서면 빨간 제복의 수위인 요우맨(Yeoman)이 눈길을 끌었다.아침이면 문을 열고 밤이면 문을 잠그는 일을 맡은 요우맨은 지금부터 600여년전인 1321년에 창설됐다.그들은 수위임무 말고도 런던탑의 온갖 사연을 관광객들에게 들려주는 안내원 노릇을 즐겨 자청하고 있다. 지금도 런던탑 안에서 생활하는 요우맨은 런던탑의 명물이다.런던탑을 찾은 그날도 요우맨은 과장된 몸짓으로 런던탑의 유령얘기를 꺼냈다.“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 나가봤다.그러나 아무도 없었다”는 등 얘기러리는 무진장했다.회색빛의 고색창연한 템즈강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런던 탑의 유령 얘기에는 관광객 모두가 귀를 쫑긋거렸다.그럴 때마다 신바람이 난 요우맨들은 “아직도 귀신이 나온다”고 허풍을 떨었다.귀신이 있고 없고 간에 런던탑에 얽힌잔인했던 피의 역사를 떠올리면 요우맨들의 귀신이야기에 공감이 갈 것이다. ○수위·안내원 ‘요우맨’ 명물 그들이 지금도 귀신을 팔아먹는 런던탑에는 ‘스카폴드 사이트’가 있다.왕비와 귀족들이 처형을 당했던 비극의 장소이다.과부가 된 형수 캐서린과 결혼한 헨리18세는 그것도 모자라 모두 6명의 부인을 두었다.형수이자 아내인 캐서린은 대를 이을 왕자를 바랜 헨리 8세의 기대를 저버리고 여러번 유산끝에 공주 메리를 낳았다.실망한 헨리 8세는 시녀였던 앤 볼레인을 또 아내로 맞았다.그러나 앤 역시 공주 엘리자베스를 낳아 왕의 뜻을 거슬린 죄로 사형을 당한다.네번째 부인 캐서린 하워드도 간통죄로 스카폴드 사이트 단두대에 서고 말았다. 나중에 왕으로 등극한 메리여왕이 카톨릭 신자들을 무참히 살해한 곳도 이곳이었다.그 시신을 태우는 쾨쾨한 연기가 매일 런던탑을 뒤덮었고 처형은 도끼로 목을 자르는 잔인한 방법이 동원됐다.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앤의 마지막 소원은 “제발 사형할때 도끼 말고 다른 것으로 해주세요”라는 것이었다.그렇듯 도끼처형은 무시무시한 공포를 자아냈다. ○왕비·귀족 처형당한 장소 어쩌다 왕궁이 살육의 상징물로 바뀌었을까.런던탑은 원래 왕의 권위와 힘의 상징이었다.1066년 영국을 침략한 프랑스 노르망디의 정복자 윌리엄이 자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영국인들의 항복을 받아 낸 정복자는 그해 크리스마스날 웨스터민스터사원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성을 짓기 시작했다.멀리 켄트지방에서 날라온 돌로 쌓아 지었다.높이 27·3m,지하 4·6m의 화이트 타워를 주축으로 한 성은 외국인 정복자 윌리엄처럼 위용을 드러냈다.지상에서 높은 곳에 출입구를 만들어 성벽을 파괴하는 무기가 닿을수 없게 설계됐다.화재가 나도 불길이 닿지 않는 요새였던 것이다.1666년 런던 대화재때에도 시민들의 불길을 피해 런던탑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런던탑은 항상 하얗게 잘 닦여져 있다.‘흰 성’이라는 뜻의 ‘화이트 타워’로 부르게 된 것도 이때문이다.탑은 런던시내와 템즈강을 내려다 보면서 영국을 9세기동안 호령했다.그리고 왕권과 비례해 런던탑도 커졌다.윌리엄 사후 1백년뒤인 ‘사자왕’ 리차드때부터 확장이 거듭됐다.외국인 정복자의 직계이면서도 색슨계의 이름을 가진 영국왕 에드워드1세때는 외성을 갖추었다. 성 밖에다는 참호를 팠다.그제야 런던탑은 외부의 적들이 침입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철옹성이 됐다.적들이 쳐들어 온댔자 도개교와 성문 등으로 겹겹이 둘러 쌓인 성에 이르지도 못하고 화살세례를 받았다.게다가 1천여명의 군사를 수용할수 있던 워털루 타워는 늘 런던탑을 지켜주었다. 런던탑은 애초부터 많은 비극을 잉태했는지도 모른다.런던탑을 지어놓고도 왕은 사실상 사용하지 않았다.1100년 타워가 완공된뒤 왕의 고문이자 비열한 인격을 지녔던 라눌프 플램바드가 감금된 일이 있다.그런데 2층 창문에서 밧줄을 타고 탈출에 성공했다.그로부터 144년후 같은 장소에 갇힌 웨일즈의 왕자 그루피드도 같은 방법으로 도망하려다 밧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떨어져 숨졌다. ○‘화이트 타워’로 불려 런던탑에서는 한때 동물을 키웠다.헨리3세는 독일 황제와 노르웨이 왕으로부터 받은 표범과 북극곰,프랑스 왕이 보낸 코끼리 따위를 사육하는 라이언 타워를 만들었던 것이다.그러나 1834년 라이언 타워는 폐쇄되고 동물들은 리전트공원 동물원으로 보냈다.런던탑은 5백년동안 영국의 화폐를 찍어낸 역사도 감추어 두고 있다.
  • 김정일지도력 새로운 시험대에/장례식에 나타난 김정일의 위상

    ◎김 이어 오진우 강성산 등 서열 그대로/순탄한 대권장악 암시… 절차만 남은듯 19일 평양에서 치러진 김일성의 장례식은 북한에서 49년동안 이어진 「김일성 유일체제」를 마감하는 행사이다.김정일체제의 개막을 알리는 의식이기도 하다. 김정일은 이제 김일성의 「후원」 없이 북한을 통치할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시험대에 들어섰다.김일성 없는 김정일이 한 집단을 이끌 능력이 없다고 판단된다면 북한의 붕괴는 초읽기에 들어갈 것이다. 이날의 장례식은 김정일의 권력장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방송은 이날 장례식 참석자들을 언급하면서 김정일을 앞세우고 오진우 강성산 이종옥 박성철 김영주 김병식 김영남등을 차례로 열거했다.북한이 김일성 사망직후 발표했던 장의위원 서열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는 김일성 장례가 한차례 연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을 정점으로 한 북한의 새권력서열이 큰 무리없이 정착되고 있다는 시사로 받아들여진다. 북한방송은 또 장례식에 앞서 김정일이 당·정간부들을 대동하고 김일성 영구에 마지막으로 조문했다고 보도했다.김일성의 시신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김정일이 당·정의 중심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더해 북한 보도기관들은 김정일을 이날 「어버이수령」「국방위원장이며 군최고사령관인 우리 당과 인민의 위대한 영도자」라고 호칭했다.생전의 김일성에게 하던 경칭을 김정일에게 그대로 옮겨쓰고 있어 그가 김일성의 지위를 이어받았음을 안팎에 천명하고 있다.북한 관영 중앙통신은 「김정일의 사상과 영도를 충성으로 받들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북한 언론의 보도나 장례식 진행절차를 미루어 볼때 이제 남은 문제는 김정일이 어떤 공식절차를 거쳐 북한의 최고 권좌를 차지하느냐 일 것이다.일부 외신은 김정일이 지난주 비밀회의를 열어 이미 당총비서와 국가주석에 선출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국가원수에 해당하는 이들 직책에 오르기 위해서는 공식행사가 필요하다는게 다수 전문가의 풀이이다. 정부관계자나 북한전문가는 장례식에 이어 20일 열리기로 되어 있는김일성추도대회를 주목하고 있다.당초 장례식과 추도대회를 한꺼번에 하려다 따로 날을 잡은 것은 추도대회를 「김정일 즉위식」으로 이용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김일성 보다 카리스마나 지도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광을 업고 전 인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과시용으로 추도대회를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측이 맞는다면 김정일은 20일의 추도대회를 통해 인민의 지지를 과시한 뒤 곧이어 당중앙위와 최고인민회의를 열어 당총비서와 국가주석에 오르리라 예상된다. 북한에서 일단 김정일체제가 순조롭게 자리를 잡고 있다는 분석이 우세한 가운데도 몇가지 의문은 남는다.이날 장례식을 외부로 생중계하지 않은 것을 두고 일부에서는 김정일체제가 확고하지 못해 혹시 사고가 날 염려를 한 탓이라는 풀이도 하고 있다.김정일이 추도대회를 따로 가져 인민의 힘을 빌려야 할 정도로 권력 내부의 지지도가 약하다는 해석도 나온다.여하튼 이제 김일성은 갔고 김정일의 지도력은 시험받기 시작했으며 김정일체제가 얼마나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는게 정확한 얘기일 것이다.
  • 창경궁/사도세자가 뒤주서 숨진곳/궁궐:5(서울 6백년만상:42)

    ◎성종조에 창건… 일제가 창경원으로 격하/이괄의 난때 불타 명정전·홍화문만 남아 창경궁은 궁궐보다는 공원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 만큼 친근감을 주는 서울의 대표적인 쉼터다.하지만 창경궁 취선당에서 숙종의 총애를 받던 장희빈이 경종을 낳았고,보경당에서 무수리가 영조를 생산했으며 영조의 노여움을 산 사도세자가 통명전 앞뜰에서 뒤주속에 들어가 생을 마감한 「비극의 무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듯 싶다.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정책으로 한때 창경원으로 불렸던 창경궁은 고려때 남경(고려때 서울을 남경이라 불렀음)의 궁궐인 수강궁이 있던 곳이다. 태종 18년(1418) 왕위를 물려받은 세종이 수강궁을 보수,상왕 태종을 잠시 모셨으나 창경궁이 창건된 것은 성종때의 일이다.성종 10년 (1479) 대왕대비인 세조비(정희왕후)가 창덕궁의 내전을 성종과 중전에게 내주고 자신을 포함,3명의 대비가 수강궁으로 옮겼으면 하는 의사를 내비치자 성종이 궁 건설에 착공할 뜻을 밝혔다.그러나 왕비 윤씨폐출사건등으로 공역을 벌이지 못하다 성종 14년 2월에 공사에 들어가 1년만에 완공,이름을 창경궁이라하고 정문을 홍화문이라고 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창경궁을 중창한 임금은 광해군이다. 노산군(단종)과 연산군의 폐출사건을 두려워 한 나머지 창덕궁에 드는 것을 죽는 것보다 싫어했던 광해군은 『임금이 의지할 데가 어찌 한 곳이어야만 하겠는가.창경궁의 공역을 서둘러 마치도록 하라』고 창경궁 중창을 명했다.이렇게 해서 광해군 8년(1616)에 완공된 창경궁은 7년도 못된 인조반정때 일부가 불타고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으로 명정전과 홍화문만을 남기고 소실됐다.이때 화마를 면한 명정전은 조선조 궁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정전으로 남아있다. 창경궁 명정전은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처럼 중층이 아닌 단층이어서 더 친밀감을 느끼게한다. 명정전에서 인조가 즉위식을 올렸지만 창경궁이 정치의 주요무대가 된 것은 영조 27년(1750)에 이르러 서다.왕세자(사도세자)에게 대리를 명한 영조는 창경궁 환경전에,왕세자는 시민당에서 정사를 보았다. 그러나 영조는 세자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세자는 부왕을 두려워하여 부자간의 정이 멀어지면서 조선조 또하나의 비극은 싹텄다. 큰 화재가 나고 세자가 평안도 관찰사 정휘량등의 계교에 빠져 평양에 놀러갔다 오는등 기행을 일삼아 영조가 크게 노했으나 영의정 이천보,좌의정 이후,우의정 민백상등이 임금에게 사실을 고할수도 고하지 않을 수도 없어 차례로 자결하니 왕은 신하의 충성심에 감격,세자의 비행을 불문에 부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일이 있은지 얼마되지 않아 영조는 기우제를 올리면서 세자의 참석을 명했으나 세자가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참여하지 않자 왕은 세자를 폐위시키고 자결할 것을 명했다. 뒤주에 들어간 세자는 이레째 되는 날까지 뒤주를 흔들면 『어지러우니 흔들지 말라』고 했으나 여드레째 되는날 숨을 거뒀다.이를 「선인문의 변」이라 한다. 조선시대 이 땅을 살아간 여인들의 한 만큼이나 수많은 궁중비사를 간직한 창경궁은 또다시 일제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히는 운명을 맞는다.
  • 궁궐:1/“왕조 상징”경복궁 1395년 창건(서울6백년만상:38)

    ◎12만여평에 정전·행랑·누각 3백90간/선정·비극의 무대… 임란발발로 잿더비 『…위로는 천명이 무궁토록 베푸시고 아래로는 민생을 영원토록 보호하여 주시기 비나이다』 태조 이성계로부터 새 도읍지의 궁궐건설을 명받은 정도전은 1394년 11월3일 지성을 다해 천지신명께 올리는 고사를 지냈다.이튿날 전국 사찰에서 총동원된 승려들과 1만5천여 백성들이 휘두르는 곡괭이소리·정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면서 「왕조의 상징」이자 오늘의 서울을 있게 한 경복궁창건의 대역사는 시작됐다.공사는 강행군을 거듭한 끝에 10개월만에 완성을 보았다.궁궐의 규모는 12만6천여평에 이르렀으며 정전·침전·행랑·누각이 무려 3백90간에 달했다. 태조는 정도전에게 궁궐의 이름을 짓게 했다.정도전은 시경 대아편의 구절을 인용,큰 복을 누리라는 뜻으로 「경복궁」이라 했다.태조는 궁궐의 이름을 짓고난 뒤 길일을 택하느라 3개월뒤인 12월28일에야 경복궁에 입어했다.큰 축복속에 창건된 조선의 정궁 경복궁은 그러나 불과 3년이 지나지 않아 피비린내 나는대란에 휩싸였다.정안군 방원이 주동이 돼 이복동생이며 태조의 귀여움을 사고 있던 세자 의안군 방석을 제거하기위해 정도전·남은등 중신들을 죽이고 형 방과를 세자로 삼은 「왕자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경복궁의 골육상생은 정종으로 하여금 한양천도 4년6개월만에 서울을 버리고 개성으로 돌아가게한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정종을 이은 태종도 창덕궁을 지어 6년8개월만에 한양으로 환도했으나 5년이 지나서야 경복궁에 들었다고 하니 골육상쟁의 상처가 씻기는데만 무려 11년이 걸린셈이다. 세종조에 이르러서야 경복궁에 화창한 봄기운이 깃들었다.근정전에서 즉위식을 치른 세종은 경복궁을 무대로 선정을 베풀었다.이때 경복궁의 여러 문들이 비로소 이름을 얻어 광화문·홍례문·영추문·신무문으로 불리었으며 이 이름은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또 언문청이 들어서 나라말 훈민정음이 제정,반포되었다. 세종이 승하하고 8년뒤(단종3년·1455년)경복궁에선 또 다시 비감어린 통곡소리가 울려 퍼졌다.「지상의 선계」라는 경회루에 올라 권력과 세상사의 비정함에 눈물을 흘리고 있던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이 경회루아래 버티고 서서 압력을 가해오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예방승지 성삼문을 시켜 「옥새」를 가져오게 한다.왕명을 어길 수 없어 상서원에서 옥새를 가져 오던 성삼문이 비통한 나머지 연못가에 엎드려 목놓아 울부짖는 소리였다. 비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중종 14년(1519년) 11월15일 한 밤중에 북문인 신무문이 살며시 열리면서 경복궁은 정쟁의 중심무대로 변했다.정암 조광조에 대한 중종의 신임을 시기한 남양군 홍경주,예조판서 남곤등이 몰래 입궐,경복궁 후원에 있는 나뭇잎에 꿀로 「주소위왕」이라고 쓴뒤 벌레가 갉아 먹게한 나뭇잎을 들이대며 「조가 왕이 된다」며 조광조를 모함,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것이다.이 사건이 조선조 사화의 시초인 「기묘사화」였다.때로는 태평성대의 중심무대였고 때로는 비극의 무대였던 경복궁은 이로부터 73년이 지난 선조 25년(1592)임진왜란의 발발로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 캄보디아 국왕즉위/노로돔 시아누크(뉴스인물)

    ◎왕→망명자→주석→대통령→왕 캄보디아 제헌의회가 마련한 입헌군주제헌법에 따라 24일 캄보디아 국왕으로 즉위한 노로돔 시아누크공(70).70년 이후 반복된 쿠데타와 내전의 소용돌이를 거치면서도 망명생활을 빼놓고는 왕과 국가주석,대통령직을 오갔던 캄보디아의 정신적지주이다. 지난 41년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던 그는 70년 론놀의 우익 쿠데타로 쫓겨났으며 축출된지 23년만에 「왕정복고」를 이룬 셈이다. 캄보디아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크메르 루주파의 키우 삼판,크메르인민민족해방전선의 손산 등과 함께 82년 말레이시아에서 캄보디아련정을 주도했으며 이를 발판으로 90년 캄보디아 정부가 참여한 최고민족회의(SNC)의 의장을 맡으면서 실권자로 복귀. 즉위식은 경비절약을 이유로 생략하고 취임선서로 대체됐으며 왕정을 수행하면서 정부로부터 어떤 급료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지구촌 개혁시대에 동참하는 기민성을 보였다. 망명생활동안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매년 조건없이 각각 30만달러(한화 2억4천만원)와 8만달러(한화 6천4백만원)를 지원받아왔고 북한 전용여객기도 무료로 사용할 정도로 북한,중국,일본의 정계지도자와 가깝게 지내왔다.
  • 불 미테랑 13년 연속참석 신기록/도쿄 G7정상회담 이모저모

    ◎“일정치 변해야” 클린턴 언급 눈길/일언론,“홍일점” 캠벨가총리 집중취재 ○…제19회 선진7개국(G7)정상회담은 7일 하오1시45분 의장국인 일본의 미야자와 기이치총리와 회의장인 모토 아카사카의 영빈관에서 G7정상들을 악수로 맞이하며 시작. G7정상들은 회담간소화방침에 따라 간단한 기념촬영만 한후 바로 회의장으로 들어가 하오2시30분부터 6시경까지 세계경제활성화문제 등을 중심으로 제1회 정상회담을 가졌다.하오7시30분부터는 저녁을 먹으며 북한핵,지역분쟁등 정치문제를 중심으로 토의를 계속. ○…북한의 핵개발문제는 7일 도쿄에서 개막된 서방선진7개국(G7)정상회담에서 중요의제로 토의된데 이어 8일 채택될 정치선언에서도 북한의 NPT복귀를 강력히 촉구하는 내용이 포함될 예정이어서 명실공히 최대 이슈로 부상. 미국과 일본이 6일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핵개발 저지를 위해 공동대처키로 합의한데 이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있는 유럽국가들도 북한 핵개발 저지의 필요성을 강조. ○차기 정권대비 분석 ○…빌 클린턴 미대통령은 6일밤 도쿄시내 미대사관저에서 일본의 여야 등 정·재계 지도자들을 위해 베푼 리셉션에서 『세계는 지금 변화의 와중에 있으며 일본도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참석자들간에 희비를 불러일으켰다. 예정보다 약30분 늦게 리셉션장에 도착한 클린턴대통령은 참석인사들과 악수를 나누며 간단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는데 하타 쓰토무(우전자) 신생당 당수는 그에게서 『일본의 현 정치에 관해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고 있다』는 말을 듣고 매우 고무된 표정. 클린턴대통령이 이같이 차세대지도자와 만나 변화를 강조한 것은 일본정치변화에 대한 미국의 강한 기대감과 함께 신세대지도자에 의한 차기정권에 대비하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대두. ○콜총리는 7번째 ○…이번 G7 정상회담에서는 마거릿 대처 전영국총리의 최다참가기록(12회)을 깨며 13년 연속개근한 76세의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이 관록면에서 다른 정상들을 단연 압도. 반면 7번째 참가하는 헬무트 콜 독일총리를 제외하고는 5명 모두 첫 경험이거나 두번째라고. ○…일본언론들은 G7정상중 유일한 여성이자 거침없이 의견을 표명하는 태도로 유명한 캠블 캐나다 총리에 대해 「캐나다의 마돈나 총리」로 묘사하는등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높은 관심을 표명. ○…세르게이 야스트르젬브스키 러시아 외무부대변인은 6일 『이제 지원선언 같은 것이나 발표할 때는 지나지 않았느냐』며 서방측이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러시아 개혁지원을 위해 「말」이 아닌 「행동」을 보여줄 것을 강조. ○…지난 86년 G7정상회담에서 극좌 게릴라들의 로켓테러로 곤욕을 치렀던 도쿄경찰은 지난 90년 3만7천명의 경호병력이 동원됐던 아키히토왕의 즉위식 이래 최대규모인 3만6천여명의 경찰을 동원,보안망 점검에 분주. ○…미국과 독일을 제외한 각국 정상과 대표단들의 숙소이자 회담본부와 프레스센터가 설치된 뉴오타니 호텔은 영빈관에서 가까운데다 절반 가량이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는 등 경비가 용이하다는 점 때문에 사상 처음으로 3번째 G7 본부호텔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고. ○통역사 26명 확보 ○…일본외무성은 이번 회담에 대비,지난해 11월부터 국제회의 통역연맹을 통해 영·불·독·이·노어를 동시에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26명의 세계 톱클라스 통역사를 확보,5개국어의 부스별로 타언어권 정상의 발언을 담당언어로 즉시 통역하도록 했으나 정작 일본어까지 6개국어를 구사하는 통역사는 끝내 구하지 못해 일본어부스만 영어를 거쳐 재통역 한다고. ○…클린턴대통령은 지난해 10월 미국유학중 권총으로 사살돼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던 하토리 요시히로군의 부모에게 7일상오 전화를 걸어 위로하면서 총기류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약속. ○…클린턴대통령은 이날 와세다대 초청강연을 마친뒤 최근 미국의 이라크공격에 대한 비난시위에도 개의치않고 부인 힐러리여사와 함께 승용차에서 내려 도쿄시민들과 접촉하는 여유를 과시. 클린턴대통령 부부는 도쿄대 캠퍼스를 둘러보던중 시위대와 맞닥뜨렸으나 태연하게 인근 상가로 가서 상점들을 둘러보고 시민들과 악수하며 대화. ○…쾌활한 성격으로 알려진 헬무트 콜 독일총리는 이날 미야자와 기이치(궁택희일)일본총리가 약속시간보다 3분늦게 나타나자 『어째서 우리가 기다려야만 하지』라고 보좌관에게 화를 내며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 한·일 관계/“감정대립 지양,이해폭 넓혀야”

    ◎「분노의 왕국」파문 계기,바람직한 발전방향을 찾는다/일왕저격장면은 픽션… 흥분은 과민반응/과거앙금 씻고 아태시대 협력길 모색을 한일관계가 불편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연초 일본총리의 방한에 때맞춰 본격적으로 제기된 정신대문제와 최근 MBC에서 제작·방영중인 미니시리즈 「분노의 왕국」에 의해 표출된 한일양국의 반일·혐한감정이 외교갈등으로까지 번지고 있다.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민족감정의 대결은 한일 두 나라의 국가이익을 위해 어느쪽에도 바람직하지 않으며 과거청산을 위한 관점에서도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감정대립을 지양하고 문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좌담을 마련해 보았다. ▷좌담◁ 신희석·외교안보연 교수 이병훈·M­TV 제작부국장 이시즈카·신지 동경신문 서울지국장 ▲신희석=요즘 한일관계가 국교정상화 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있다고 합니다.미야자와 일본수상 방한후 긴장되기 시작한 양국간 관계가 최근엔 MBC미니시리즈 「분노의 왕국」에 대한 일본측 반응으로 더욱 어려운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는듯합니다.우선 최근 문제가 된 「분노의 왕국」제작동기와 배경 그리고 MBC의 입장에 대해 이국장께서 말씀해 주시지요. ○역사성 높아 드라마화 ▲이병훈=「분노의 왕국」은 지난해 MBC문학상 당선작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입니다.구한말 조선왕조 마지막 황제 순종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가설을 설정한 이 작품은 당시 일본의 침략분위기가 무르익고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던 때 우리역사가 자주적이기보다는 수동적이었음을 감안해 역사의 굴절되고 탈락된 부분이 있었음직하다고 보고있지요.거기서 순종의 아들 이하연이란 가상 인물이 왕족의 후손임에도 겪은 비참한 생활끝에 모든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고 일왕 즉위식때 저격을 기도하게 됩니다.MBC측으로선 이 작품의 역사성이 높다고 판단,드라마로 제작키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이시즈카신지=「분노의 왕국」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개인적으로 일본 천황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없지만 이 드라마를 보고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 걱정이 됐지요.앞으로 정상적인 한일관계를 위해선 서로가 양국입장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이번 MBC드라마는 일본사람들에게 있어서 천황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일에도 「국왕암살 영화」 ▲이=천황을 한 나라의 원수요 상징이라고 볼 때 당연히 존중해야지요.문제는 픽션드라마는 별개라는 인식입니다.실제로 영국 저격수의 드골대통령 암살기도를 다룬 영국작가 프레데릭 포사이스의 「더 데이 애프터 자칼」도 미국에서 영화로 제작됐고 일본의 경우에도 천황암살을 다룬 「벌거벗은 군대」라는 영화가 지난 87년 제작된 사례가 있습니다.국왕을 존중하는 심정이 없는 게 아니라 있음직한 가상의 세계를 다룬 픽션에 불과하다는 얘기죠. ▲신=MBC드라마 자체가 문제됐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저변엔 지배와 피지배로 구별된 과거역사가 깔려 있다고 보는데요.특히 정신대문제는 일본의 군국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에서 저질러진 한 수단이란 견해가 이 땅에선 지배적인데 일본 지식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이시즈카=정신대문제는 한일협정체결로 일단락됐다고 보는 게 일본의 공식적인 입장이지만 제개인적으론 근본적인 해결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봅니다.또는 과거 역사에 대한 일본의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한일관계를 다루는 양국의 언론이 조심스런 자세를 가져야 할 것만은 틀림없다고 봅니다.한국에선 정신대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을 때 한국의 신문들이 정신대=종군위안부라는 인식으로 몰아갔던 사실을 기억합니다. ▲이=정신대문제는 일본의 물질적 보상보다는 「비인간적인 행동을 했다」는 역사에 대한 일본인의 반성이 전달되고 받아들여지면 된다고 봅니다. 중요한 건 정신대=종군위안부라는 표현방식이 아니라 그것에 담긴 역사적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시즈카=현재 한일관계는 「싸움」의 관계에 있다고 봅니다.그 싸움의 관계는 나쁘다고만 볼 수 없습니다.유럽에서 프랑스­독일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지는데요.논쟁을 통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신=한국측의 언론책임을 지적하셨는데일본측 매스컴에도 문제는 마찬가지라고 봅니다.일본 언론의 한국관계 교양프로속에서 한국인들이 상당히 왜소하고 부정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을 보고 개인적으로 자존심이 상한 경험이 있습니다.이런 점에서 양쪽이 마찬가지 아닐까요. ▲이시즈카=맞습니다.일본매스컴도 사실상 같은 문제점을 충분히 갖고 있지요.정도의 문제지만 무언가 반성할 게 있다면 양쪽 모두가 반성해야겠지요. ○양국언론도 신중해야 ▲신=우리 사극에선 역사속의 일본인들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습니까? ▲이=과거 한일관계에서 우리쪽은 문화전수,일본쪽에선 침공의 주체로 인식되는 게 보편적이지요.그런 점에선 미래거향적이어야 한다는 견해에 긍정합니다.다만 이번 프로그램과 관련해선 젊은 사람들이 과거 한일역사를 잘 몰라 어느면에선 이 드라마가 과거 한일역사를 통해 미래지향적 시각을 심어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유쾌하지 않더라도 이해하고 느끼는 자세가 선진 민주주의 국민의 자세가 아닐까요.예를 들어 일본 문예춘추에서 한국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많이 다루지만 한국에서 그것을 문제 삼는다면 국제사회에서 우스꽝스런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신=상호간에 인식의 갭이 크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군요. ▲이시즈카=현재 한국인에게서 보여지는 일본에 대한 인식의 갭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고 봅니다.첫째는 역사적인 배경에서 잉태된 「미움」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으로 발전된 현재 일본의 모습에 대한 「동경」이지요. ▲신=「분노의 왕국」방영과 관련해 발생한 일본 극우파의 요코하마 총영사관 차량진입사건은 정신대·무역불균형·문화갈등문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양국간에 도움이 안 된다고 봅니다.곧 닥쳐올 21세기는 흔히 아시아태평양시대라고 합니다.아·태국가중 지정학·역사적으로 가장 인접한 한·일 양국이 앞으로 불편한 관계를 정리하고 바람직한 존재양식을 찾는다면 무엇이 될까요. ○일 근대사교육에 소홀 ▲이=서로가 과거를 잘 알고 화합한다면 바람직한 미래를 맞을 수 있다고 봅니다.3년전쯤 작품헌팅관계로 30대 중반의 일본 방송인을 현지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당시 「민비암살」이라는 일본인이 쓴 작품이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의외로 그 젊은이는 전혀 민비암살사건을 모르고 있더군요.이번 요코하마 총영사관 난입사건도 일본국민이 과거 역사를 잘 알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신=피해자의 상처가 더 오래가는 법입니다.과거와 현재를 무시하고 무조건 미래지향으로 치닫기는 불가능하지요. ▲이시즈카=전적으로 동감입니다.일본 우익단체의 요코하마 한국총영사관 난입사건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일본 역사교육과정에서도 근현대사가 다루어지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부족합니다.그래서 일본 젊은이들이 특히 한일 근대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게 사실이지요.저만해도 고교시절 몰랐던 역사적 사실들을 졸업후에야 알게 된 부분이 많지요.한일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교육이라고 봅니다.양국관계의 오해를 풀기 위해선 정부대 정부의 협상도 중요하지만 민간레벨,그 중에서도 청소년교류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고 있습니다. ▲이=그렇습니다.한일양국이 과거를 잘 알때 아·태시대속의 동반자관계를 무리없이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그런 측면에서 「분노의 왕국」과 관련된 이번 사태도 프로그램측면에서만 이해해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이번에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되면 양국관계에서 악순환이 계속될 게 불을 보듯 뻔합니다.이번 드라마가 일왕을 모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상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 한일과거사를 짚어보자는 뜻이기에 혐한감정의 빌미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시즈카=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현재 한일간 어려운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사회적 특성을 고려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노력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게 되겠지요. ▲신=어찌 보면 한일관계는 휴화산에 비유할 수도 있겠습니다.항상 불을 머금고 있지만 언제든지 내뿜을 수 있는 상태지요. 마지막으로 이번 드라마가 과거역사를 정확히 알자는 계몽의식을 담았다는 배경이해를 통해 더이상의 불상사가 없이 마무리되기를 바라며 양국이 서로의 이해를 통한 21세기 아·태시대의 동반자적 관계로 발전하기를 기원해 봅니다.
  • 가이후 방한과 한일 관계 발전(사설)

    일본정부가 지난 11월 아키히토(명인) 새 국왕의 즉위식을 전통의식으로 성대히 거행했을 때 세계의 이목은 다시 일본에 쏠렸었다. 종전의 폐허위에서 경제대국을 이룬 일본이 국부를 과시하면서 그들 국왕의 대관식을 거행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다만 당시 세계의 관심은 일본이 그런 행사를 계기로 그렇잖아도 고조되고 있는 신국가주의를 강화하지 않을까 하는데 모아진 것도 사실이다. 소위 「현인신」이었던 과거를 살려 다시 일왕을 중심으로 전전의 형태로 접근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기도 했다. 사실 일본의 대외정책 특히 한반도정책을 살피면 아직도 이같은 우려를 씻어내기에는 부정적이라는 시각을 우리는 갖고 있다. 일본과 북한이 예측을 앞지르는 속도로 수교협상을 갖는 것도 그러하다. 우리로서는 일·북한관계 개선을 반대하거나 배타적인 입장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한국이 추진하고 있는 북방정책을 뛰어넘는 일·북한간 관계 개선은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 균형이나 한반도문제 해결에 반드시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리라고 볼 수만은없는 것이다. 현재 한일간에는 일본측의 대한반도 전후처리 문제는 물론이고 무역역조 시정,첨단기술 이전 등 현안들이 상존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정부가 재일한국인의 지문날인 제도를 완전히 폐지한다는 사실이다. 일정부는 그러면서도 93년 1월부터 가족등록제를 실시할 방침이라고 한다. 지문날인제도가 갖고 있는 극단적인 외국인 차별대우 정책이 시정되는 것은 환영하지만 역시 가족등록제라는 제도적 장치를 남겨놓는 것은 일정부의 편협한 대외국인 정책을 다시 드러내주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최근 한반도 주변정세의 변화와 한일관계의 전개현실에 비추어 볼때 가이후(해부) 일본총리의 내년초 방한은 그런 점에서 시의를 얻은 결정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일본과 북한이 내년 1월중에 평양에서 수교협상 본회담을 열기로 돼 있는데 대해서도 주목하는 것이다. 이미 지적한바 우리는 한소 및 한중 관계 개선추세에 비추어 일·북한간 관계개선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일본이 북한과 관계정상화를 하는 것은 독립국의 주권행사이므로 그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다. 다만 일본정부는 그 이전에 한일 기본조약과의 모순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본다. 한일기본조약 제3조는 한국정부가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임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일본정부가 기본조약 해석에 있어 우리와 다른 견해를 갖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편의주의적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은 그 시기의 선택이나 속도에 신중을 기하며 한국과의 사전협의를 거쳐야 할 것이다. 또 북한이 현재로서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성원으로서의 자격을 갖고 있느냐에 대한 신중한 검증도 따라야 할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한국인 피폭자에 대한 실태조사와 원호사업은 물론 4만여 사할린 거주 한국인들에 대한 보상책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가이후총리의 방한이 단순한 선린우호 관계를 다지는 예방이 아니라 현안을 타결하는 중요한 계기가 돼야 할 것이다.
  • 대한교류 확대는 현명한 선택/노대통령 방소앞서 노보스티통신 보도

    ◎일은 영토요구로 협력에 장애 구축 【도쿄 연합】 소련 노보스티 통신은 지난달 29일자에 「대한 교류확대는 소련의 현명한 선택」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전재해 눈길을 끌었다고 일 도쿄(동경) 신문이 8일 전했다. 다음은 노보스티통신의 기사 전문이다. 오는 13일에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한다는 뉴스를 모스크바는 한소 관계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최근 수주일 동안 서구 여러나라 지도자들과 정력적으로 대화를 전개했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극동지역을 시야에서 멀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는 그 건설적인 의도가 아직 완전히 이해되지 않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크라스노야르스크 계획을 끈기있게 실현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욕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양국간의 실무교류에 대해서는 이미 그 전망이 명확하게 되고 있다. 소련측도 한국측도 대형 프로젝트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 대상으로서 시베리아·극동지역이 올라있으며 경제접촉의 전망이 밝다는 점에는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방소는 극동에서 소련 외교의 우선 항목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인가,특히 소일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정확히 극동에서 소련의 관심에 일정한 변화가 일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거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일본측이 일소 경제관계의 발전을 대소 영토요구의 실현과 직접 묶어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의해 상호 협력의 도상에 인위적인 장애가 구축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동남아국가연합(ASEAN)과 동등하게 한국과의 실무교류를 확립시키는 것은 소련의 무역관련 부처로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한 가지 더 첨언할 것은 일왕의 즉위식을 전후해 각국 수뇌가 접촉하는 가운데 싱가포르가 미 국방부에 새로 이 군사기지를 제공한다고 하는 합의가 이루어져 주목되고 있다. 이는 세계적으로 군사적 대치의 완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중에 긴장완화에 반하는 것임이 명확하다. 소련과 한국이 상호 이해의 달성과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의 결집 가능성을 찾는 이번 한소 수뇌회담은 평화를 원하는 아시아에 대해 이 지역에서의 외국 군사력 증강에 관한 어떠한 협정보다도 강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 박 민자 최고위원 귀국

    박태준 민자당 최고위원은 15일 하오 아키히토 일왕 즉위식 참석차 5박6일간의 방일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 미,“대한 무역보복” 경고/방한 솔로몬 차관보

    ◎「과소비」ㆍ금융시장 개방 등 저조 내세워/새달 무역위서 관세율 인하 제시키로/정부,긴급대책회의 미국의 대한 통상압력이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왕 즉위식에 참석한 뒤 방한한 리처드 솔로몬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차관보가 15일 이승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비롯,최호중 외무부 장관ㆍ김종휘 대통령외교안보보좌관 등과 잇따라 면담을 갖고 최근 과소비억제운동 등 한미 통상관계에 관한 미국정부의 불만을 강력히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미국은 오는 12월과 내년 1월에 워싱턴에서 각각 개최될 예정인 한미무역실무소위와 한미경제협의회를 통해 국내 금융시장 개방을 비롯,대대적인 대한 시장개방 공세를 펼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특히 최근 국내의 과소비추방운동이 결과적으로 반수입캠페인화,한미 양국간 자유무역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주장하며 한국에 대한 다각적인 무역보복조치의 가능성을 신중히 검토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의 한 고위소식통은 미국정부가 현재 제네바에서 열리고 있는 우루과이라운드협상과는 별도로 양국간 통상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쌍무적인 무역협상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고 전하고 특히 미국측은 한국내 과소비추방운동이 관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고 다각적인 대한 무역보복조치의 가능성을 전달해온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정부는 15일 하오 김삼훈 외무부 통상국장 주재로 경제기획원ㆍ재무부ㆍ상공부ㆍ농림수산부 등 9개 부처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미통상실무회의를 소집,앞으로의 대응방안을 논의한 끝에 내년 1월 중순쯤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한미경제협의회에 앞서 오는 12월 중순쯤 양국간 무역실무소위를 워싱턴에서 갖고 우리측의 입장을 설명하기로 했다. 이날 회의는 최근 국내의 과소비추방운동으로 말미암은 한미 통상마찰 문제와 관련,「새생활 새질서운동」이 수입억제운동이 아니라 건전한 국민생활운동이라는 점을 미국측에 적극적으로 설명,이해를 구하기로 했다. 회의는 또 우리측의 5개년 관세인하계획 연기문제에 대해서도 방위세 폐지에 따른 세수결함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오는 94년까지 1년 연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미측에 설득시키기로 하고 대신 현재의 평균관세율(11.3%)을 94년에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수준인 7.9%로 내릴 것을 미측에 제시키로 했다.
  • 가이후 일 총리 내년 1월 방한/아사히신문 보도

    【도쿄=강수웅 특파원】 가이후 도시키(해부준수) 일본 총리가 내년 1월초 한국을 방문,일ㆍ북한 국교정상화 문제 등 두 나라 공동관심사에 관해 협의할 것이라고 아사히(조일)신문이 14일 보도했다. 정부소식통을 인용한 이 신문은 가이후 총리가 내년 1월8일을 전후하여 방한,노태우 대통령과 일련의 수뇌회담을 갖고 일ㆍ북한 수교 교섭과정 등을 설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이후 총리는 아키히토(명인) 왕 즉위식 참석차 방일한 강영훈 총리와 13일 만나 그로부터 방문초청을 거듭 받았다고 아사히는 밝혔다.
  • 방일 강 총리 귀국

    강영훈 국무총리는 아키히토(명인) 일왕 즉위식에 정부사절로 참석한 뒤 14일 낮 부인 김효수 여사와 함께 귀국했다.
  • “대북한관계 남북대화와 맞춰”/강 총리,가이후 일 총리와 요담

    【도쿄=강수웅 특파원】 아키히토(명인) 일왕 즉위식에 참석키 위해 도쿄(동경)에 온 강영훈 국무총리는 13일 하오 영빈관으로 가이후 도시키(해부준수) 일본총리를 예방하고 한일 양국간의 문제 및 일ㆍ북한관계 등에 관해 협의했다. 강 총리는 일왕의 즉위를 축하하고 『내년중 적절한 시기에 가이후 총리가 한국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가이후 총리는 『형편이 허락하는 빠른 시기에 방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강 총리는 북한의 태도불변으로 남북대화에 별다른 진전이 없음을 지적하고,일본측이 남북한 관계의 진전상황을 염두에 두고 북한과의 관계를 남북관계와 균형을 이룬 방향에서 추진해줄 것을 당부했다.
  • 성항주둔 미 기지/해ㆍ공군력 증원

    【싱가포르ㆍ도쿄 AFP AP 연합】 미국과 싱가포르는 13일 미 해군 및 공군의 싱가포르내 군사시설 이용 증대를 허용하는 조약에 서명했다고 싱가포르 주재 미국 대사관이 발표했다. 미 대사관은 이날 성명을 통해 일본 아키히토(명인)국왕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에 온 이광요 싱가포르 총리와 댄 퀘일 미국 부통령이 이같은 조약에 서명했다고 밝히면서 미 공군은 이 조약에 따라 전투기를 1년에 몇차례 훈련목적으로 싱가포르에 몇주일 동안 배치할 수 있게 됐으며 미 해군도 싱가포르를 방문하는 군함의 수를 늘리는 한편 정박기간도 늘릴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이 성명은 이어 미 공군과 해군의 싱가포르 배치는 3∼6개월 이내에 이뤄질 것이라고 밝히고 『이같은 군함과 전투기 등의 방문 및 배치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은 1년단위로 싱가포르에 파견되는 해군과 공군병력을 약 95명으로 증원할 것이며 이외에 약 75명의 공군병력이 개별적 훈련계획에 따라 싱가포르에 순차적으로 파견될 것』이라고 말했다.
  • 가이후 방중 초청/이붕 총리

    【도쿄 연합】 일왕 즉위식에 참석차 방일중인 오학겸 중국 부총리는 13일 가이후 일본 총리를 예방,중국을 방문해달라는 이붕 총리의 의사를 전달했다. 이에 대해 가이후 총리는 『언젠가 기회가 있을때 중국방문을 검토하겠다』고 밝히고 『중국이 앞으로 계속 개혁ㆍ개방정책을 추진해 국제사회에서 한층 건설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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