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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형 힙스터, 그들을 아느냐

    서울 홍익대 앞이나 신사동 가로수길을 걷다 보면 쉽게 만날 수 있다. 삐쩍 마른 몸매에 스키니진과 요란한 문구의 티셔츠를 걸치고 중절모를 비스듬히 눌러쓴 채 스마트폰으로 누군가와 대화하는 젊은 남성들. 아니면 겨자색 카디건에 복고풍의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입고 컨버스 운동화를 신었으며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는 선글라스를 쓴 젊은 여성들. 이들 젊은이는 인도풍으로 꾸며진 노천카페에 앉아 수입 맥주를 마시고 ‘UV 프로젝트’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 픽시 자전거(고정 기어 자전거)를 끌고 있다면 근처에 부모님의 도움으로 얻은 원룸에서 월세로 살고 있을 것이다. ‘힙스터에 주의하라’(n+1 지음, 마티 펴냄)를 번역한 최세희씨가 규정한 한국 힙스터(Hipster)들의 모습이다. 1940년대 탄생한 용어인 힙스터는 당시엔 비밥 등의 재즈와 하위문화를 지향하던 사람들을 일컫는 속어였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주류 문화보다 인디 록과 독립영화 등을 선호하는 중산층 성인과 젊은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의미가 확장됐다. 최신 유행에 민감하면서도 대중의 흐름과는 거리를 두려는 힙스터 문화는 첨단 자본주의 시대의 새로운 하위문화란 긍정적인 평가와 구별 짓기에 예민한 중산층의 소비문화일 뿐이란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강남 좌파’의 원조인 힙스터의 본질을 규정한 ‘n+1’은 2004년 미국 뉴욕에서 창간된 정기 간행물로 뉴욕 뉴스쿨의 마크 그리프 교수 등이 참여하고 있다. 1950년대의 낡은 개념으로 여겨지던 힙스터의 재출현 계기는 1999년 시작된 반세계화 운동으로 여겨진다. 인터넷 발달과 트위터, 블로그 등에 힘입어 힙스터는 세계적 현상으로 번져 나갔고 각종 촌극도 낳았다. 페루의 전통음악이 뉴욕의 한 음반회사에서 발매되자 자국 전통음악에 전혀 관심 없던 페루 젊은이들이 느닷없이 이 음악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문화의 가치를, 우리 자신이 아닌 더 세련된 외국에서 재포장할 때에만” 알아차리는 현상은 비단 페루뿐만이 아니다. 뉴욕이나 런던의 하위문화가 아시아나 남미에서 외양과 스타일만 남아 최신 유행으로 수용되는 일을 우리는 매일 목격하고 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우리의 대중문화를 ‘한류’로 인정하고 재포장하기 시작한 것도 일본과 동남아시아, 유럽 등에서 한국 드라마와 가요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힙스터에 주의하라’는 X 세대, 88만원 세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긴 하지만 쓸만한 잣대가 부족했던 우리의 신세대 문화를 읽어낼 수 있는 의미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 1만 45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옛 모자·신발, 우리 민족 삶 엿보다

    옛 모자·신발, 우리 민족 삶 엿보다

    진정한 패셔니스타의 완성은 모자, 신발 등 작은 액세서리로 이뤄진다. 굳이 멋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짚신에 국화 그리기’, ‘개구멍에 망건 치기’ 등 속담들만 봐도 모자와 신발은 백성들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집에서는 정자관 또는 사방관을 쓰고 있다가 궁에 들어설 때는 사모를 챙겨 썼다. 눈이 펑펑 내리거나 비가 오면 가죽신에 털벙거지 또는 갓 위에 기름종이로 만든 갈모를 얹었다. 아이들은 앙증맞은 조바위로 귀여움을 뽐냈고, 스님들은 소나무 뿌리에 붙은 송라로 만든 승립으로 한껏 멋을 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20일부터 ‘머리에서 발끝까지’라는 주제로 모자, 신발 특별전을 연다. 오는 6월 13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전시는 남녀노소 또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의 전통 문화로 남겨진 ‘패션 장신구’들이 벌이는 한마당 잔치다. 조선 후기 지름 70㎝가 넘는 커다란 갓을 쓰던 시절부터 시작해 근대화의 상징과 같은 중절모를 거쳐 삐딱히 눌러쓰던 교련 모자까지 아울렀다. 또한 비단 위에 구름 무늬를 새긴 운혜, 당혜와 사슴 가죽으로 만든 녹비혜, 백목화 등의 명품 신발부터 비올 때 신는 나막신, 민초들이 신던 미투리, 산간지방의 겨울나기 필수품 설피, 저승길 발품 팔던 종이로 만든 지혜(紙鞋), 검정고무신 등까지 다채롭게 갖췄다. 양반들이 쓰던 갓의 시대적 변천사도 재미있다. 17세기 지름 72.3㎝에 모정(帽頂·갓모자) 19.5㎝의 넓은 갓은 64.5×19㎝로 점차 줄어들며 갓끈 등으로 멋을 부리던 것이 대원군 시절의 의관 개정을 즈음해 25×10.7㎝로 확 줄어든다. 1920년대 엘리자베스 키스와 1950년대 폴 자클레의 판화를 통해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갓, 방갓, 남바위 등 모자를 쓴 모습이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이와 함께 입자장 박창영, 화혜장 황해봉, 화관 족두리 박성호 등 중요무형문화재 장인들의 시연도 눈길을 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나와 통일] (8) 어희선 치과의사

    [나와 통일] (8) 어희선 치과의사

    2009년 금강산 이산가족상봉행사에서 작은할아버지를 만난 뒤 통일에 대한 나의 생각은 상당히 많이 달라졌다.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라는 것에 대해 이의는 없지만 통일이 나의 문제로 다가왔을 때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현실적인 관점에서 통일을 생각하게 됐다.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 대해서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로부터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다. 장남이었던 할아버지를 대신해 둘째, 셋째할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의용군으로 전쟁터에 나가셨다가 북에 남게 되셨다. 명절 때면 고작 5명 남짓한 식구들이 보내는 게 썰렁해 대가족에 대한 부러움이 늘 마음에 있었다. 이산가족 상봉단에 선발됐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신청을 한 지 몇년이 지나서였다. 마침 추석을 며칠 앞둔 시기여서 북한의 친척들을 만날 마음에 설레고 또 매우 분주했다. 우리는 가족들의 지난 수십년 동안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사진첩과 약품, 옷가지, 식료품 등을 챙겼다. 상봉행사에 참석한 가족들 모두 어린이 키만 한 이민가방을 두세개쯤 들고 버스에 올랐다. ●경제격차 커 통일돼도 갈등 클 것 상봉장에서 북측 사람들이 들어서는 순간 “아, 우리 작은할아버지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빼닮은 외모. 정정하신 발걸음. 본 적도 없는 작은할아버지를 본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면서 서로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금세 눈물바다가 됐다. 헤어질 때는 버스 유리창 너머 손을 맞대고 “잘 가라.” “잘 있어라.”라며 또 한번 눈물을 흘렸다. 2박 3일 동안 3번을 만났는데 기억에 남는 순간은 이 두번 정도다. 가족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보다 더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북한사람들에게서 느낀 이질감이었다. 상봉장에 나타난 가족들은 모두 똑같은 중절모에 양복 차림이었다. 작은할아버지는 별다른 얘기를 나눈 것도 아닌데 북측 요원들과 눈이 마주치면 움찔했고, 호텔방에서는 도청을 걱정해 늘 TV를 켜 두었다. 이들이 정말 나의 형제, 가족이고 민족일까. 떨어져 지낸 지난 60년 동안 우리는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이때 이후 통일에 대한 나의 생각은 많이 바뀌었다. 통일이 되면 우리들이 북한 사람들을 똑같은 국민이라고 인정하고 차별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금도 남한에는 지역감정이 남아 있는데 지금 이 상태로 통일이 된다면 갈등이 클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북한 사람들을 내가 먹여살려야 할 식구라고 생각하니 앞이 깜깜했다. 통일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 격차를 줄인 다음에 하지 않으면 같이 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량 지원 등 남북 교류 회의적 인도적인 차원의 남북교류에 대해서도 회의를 갖게 됐다. 이 행사도 이산가족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대가를 요구하기 위한 행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쌀을 보내는 사업도 지금은 찬성하지 않는다. 그 쌀이 북한 주민들에게 돌아간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장기적인 통일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5년 임기를 다 바쳐서 통일에 힘 쏟는다고 해도 될까 말까 한데 정권에 따라 너무 쉽게 변하는 통일정책으로는 통일은 불가능하다. 정권이 바뀌어도 누구도 손댈 수 없는 10년, 20년짜리 통일 프로젝트가 있어야 한다. 통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북한이 변하는 수밖에 없다. 북한 고위층이 생각을 바꿔 개방을 받아들이는 전향적인 자세가 되지 않는 한 통일은 어렵다. 북한은 진정으로 통일을 원하는가. 이 물음에 북한이 답을 보여 주기를 바란다. 정리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힙합의 대부’ 바비 킴

    [김문이 만난사람] ‘힙합의 대부’ 바비 킴

    이 세상에서 고독이라는 말보다 더 고독한 단어가 있을까. 어느 날 한 남자가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바다에 ‘풍덩’ 빠진다. 그러고는 고독하게 헤엄을 친다. 왜 그랬을까. 노래로 답한다. ‘파란 바다 저 끝 어디에선가 있는 꿈과 사랑을 찾아서~/하얀 꼬리 세워 길 떠나는 나는 바다의 큰 고래~’ 다시 까닭을 물었다. 돌아오는 답은 ‘나의 지친 몸짓은 파도 위를 가르네/나를 편히 쉬게 할 꿈인 걸 너는 아는지~’라는 진한 너울뿐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 남자의 꿈은 척박한 토양에서 싹텄다. 어린 나이 때부터 겪은 쓰디쓴 인종차별과 이방인의 외로움이 우선 그러했다. 오죽했으면 착해지는 자신이 나쁘다며 ‘오늘 단 하루만 착하지 말자.’고 외쳤을까. 그런 처절함에서 스스로 험한 바다를 택했고 한 마리의 ‘파랑새’에서 꿈을 찾아 떠나는 큰 고래가 됐다. 하여 아픔이 있어도, 그 어떤 고통이 가로막아도 ‘편히 쉬게 할 꿈’을 향해 거친 파도를 넘고 또 넘었다. 지금도 그렇게 ‘고래의 꿈’은 계속되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힙합 뮤지션 바비 킴(38). 그는 요즘 2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층으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팬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보면 대개 ‘고독과 처절함에서 나오는 특유의 창법이 심금을 울린다.’고 답한다. 특히 대표곡인 ‘파랑새’와 ‘고래의 꿈’에서 흘러나오는 바비 킴의 음악적 향기에는 세대를 뛰어넘는 신선한 냄새가 짙게 깔려 있다고 한다. 사실 그는 무명세월 11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다 2004년에 발표된 앨범 ‘고래의 꿈’으로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반응은 폭발적일 만큼 계속됐다. 그의 노래가 듣는 이에게 위안이 된다는 이유로 세대를 뛰어넘어 많은 마니아들을 탄생시켰다. 2009년부터 전국투어 콘서트에 나서면서 인기스타로서 바비 킴의 존재를 입증한다. 그해 3월부터 지난해까지 그는 30개 도시에서 50회 이상의 공연으로 9만여 관객을 모았다. 이는 불과 2년 만에 이룬 성과로 최고의 티켓 파워는 물론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가수임을 입증한 셈이다. 팬들은 바비 킴을 가리켜 ‘솔의 대부’ ‘힙합의 대부’라고 칭한다. 그는 오는 26일 경기 고양시 아람누리 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또 한번의 전국 투어 공연에 돌입한다. 상반기에 4개 도시, 하반기에 10여개 도시 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따라서 5월 중에는 누적 관객 1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객석 수가 한정된 공간에서 콘서트 3년차 만에 10만 관객을 채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번 공연에는 트로트를 ‘바비 킴’적으로 해석해 불러 볼 예정이어서 또 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동 한 카페에서 바비 킴을 만났다. 늘 그랬듯이 이날도 특유의 중절모를 쓰고 나타났다. 콧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속으로 ‘그래서 팬들이 힙합의 할아버지라고 하나.’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먼저 이번 공연의 의미와 공연을 앞둔 소감을 물었다. “올해로 단독 콘서트는 3년째입니다. 그 중간에 조인트 콘서트가 있었지만 말이죠. 그동안의 콘서트가 바비 킴이 살아온 인생을 담았다면, 올해 콘서트는 바비 킴이 할 수 있는 음악과 바비 킴이 하고 싶은 음악, 그리고 팬들과 같이 할 수 있는 여러 음악을 선보일 생각입니다. 말 그대로 팬들과 함께하는 ‘솔 투게더(Soul Together)’이지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좀 더 다양해진 콘서트 무대가 될 듯싶다. 어떻게 달라질까. “트로트곡을 제 스타일로 한번 소화해 볼 생각입니다. 물론 실험입니다. 사실 제가 아는 트로트곡은 하나도 없습니다. 트로트곡 10여곡을 선정해 하나 둘씩 들어가면서 선별할 예정입니다. 아직은 이거다 하는 것이 없지만 공연 때 2~3곡 정도 불러 볼 생각입니다. 제가 트로트를 부르는 것은 처음입니다.” 이런 시도는 그를 좋아하는 마니아 계층을 위한 팬 서비스 차원에서 ‘공연의 맛깔’을 더할 것으로 보여진다. 본인도 그런 차원에서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여기서 잠깐, 한국말은 어떻게 익혔을까. 두살때 미국으로 건너가 스무살에 돌아왔으니 말이다. “국내 모대학 어학당에서 1년반 동안 배웠습니다. ‘가, 나, 다’부터 배웠죠. 한국인이면서도 한국말을 몰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미국과 한국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이 상당히 컸죠. 한국어로 된 노래는 가사에 영어발음을 일일이 적어가면서 익히고 불렀습니다.” 한국에서의 적응은 힘들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영어 테이프 녹음, TV드라마 엑스트라, 유아 TV프로그램 영어 강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아울러 힙합 음악을 고집하면서 그룹활동을 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국인으로서 미국에서의 적응도 순탄하지는 않았을 터. 그가 미국으로 가게 된 계기는 MBC 관현악단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던 아버지 김영근씨가 미국에서 음악활동을 하게 되면서였다. 그의 가족이 처음 정착한 곳은 샌프란시스코. 바비 킴은 초등학교 때부터 적지 않은 따돌림을 당했다. 미국 아이들에게 ‘칭크’(Chink:중국인을 비하하는 속어)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이때마다 한국인이라고 해도 ‘동양인들은 다들 똑같지 않으냐.’는 대답을 계속 들어야 했다. “제가 살던 곳에는 필리핀과 중국인들이 살았어요. 또 백인과 흑인들도 많이 살았고요. 한국인은 별로 없었는데 어릴 때 미국인은 물론 똑같은 동양인 아이들에게도 왕따를 많이 당했지요. 화가 날 때에는 덩치 큰 선배들과 싸우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패배의식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강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바비 킴은 아버지의 음악적 영향을 받아 중학교 때 트럼펫을 몰래 배웠다. 또 학교 노래 발표회에도 솔로로 여러 차례 참가했다. 그때마다 성적은 아주 우수했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보고 혹시 음악 하는 것이 직업이 될까봐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원래 음악적 자질도 타고났지만 운동신경 또한 그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방망이를 잡기 시작해 고등학교 때는 학교 대표선수로 1번 타자와 포수를 맡았다. 특히 어깨 힘이 좋아 1루에서 2루로 도루하는 상대방 선수들을 거의 다 아웃시켰을 정도였다. 타격면에서는 3할대를 꾸준히 유지했다. 그러던 중 고 3때 한 스카우트로부터 ‘너는 동양인이어서 체격적으로 밀리기 때문에 서양인보다 3배 이상 훈련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포기했다. “그때 야구도 그만두고 좋아하던 미식축구도 그만두었습니다. 몇날 며칠 방황과 좌절의 연속이었죠. 그러던 중 음악을 취미가 아닌 진짜 인생의 승부수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고요. 미국에는 클럽 바에 가면 오픈 마이크라고 해서 누구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자주 갔지요. 또 원맨쇼 코미디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나이트클럽 래퍼로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1992년 미국 LA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나자 바비 킴 가족은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이듬해 한국에 온 바비 킴은 아버지의 묵시적인 허락하에 음반사 여러 곳에서 오디션을 봤다. 이때 단골로 부른 노래가 이승철의 ‘마지막 콘서트’였다. 하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리듬은 잘 타지만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바비 킴은 이에 대해 “어릴 때 흑인들과 자주 지내서 그런지 리듬을 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며 웃는다. 1994년 ‘닥터 레게’로 첫 앨범을 냈지만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터보, 젝스키스를 비롯한 여러 가수들의 코러스와 랩 피처링 등을 하면서 실력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저는 무명 11년 세월이 고맙게 여겨집니다. 만약 처음부터 성공했더라면 자만에 빠질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저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열심히 노력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또 깨달았지요. 이제는 공연 때마다 제가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을 얘기할 수 있고, 또 관객들과의 공감을 통해 하나하나 꿈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제가 (다른 가수들과) 음악의 색깔도 다르고 창법도 특이하다고 하지만 그런 것이 이제는 자신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바비 킴의 본명은 김도균이다. ‘바비’라는 이름은 세살 때 누나가 미국 TV시트콤을 보다가 바비라는 등장인물을 보고 그렇게 정했단다. 앞으로의 꿈에 대해 그는 “음악을 하다 보니 취미가 없어졌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데 그쪽 분야로 연구를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팬들과 함께하는 창조적 음악을 위해 열심히 꿈을 꾸며 살아가겠다고 강조했다. 결혼에 대해서는 “여자친구는 현재 없지만 나이 마흔이 되면 할 생각”이라며 웃는다. 중절모와 콧수염의 바비 킴. 특유의 애달프고 처절하고 고독한 창법이 앞으로 어떻게 깊어질지 기대된다. 편집위원 km@seoul.co.kr ◆바비 킴은 누구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두살 때 MBC 관현악단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초등학교 때부터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으면서도 음악과 운동을 병행한다. 음악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트럼펫을 배웠고 노래도 했다. 학교 발표회 때마다 우수한 성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야구와 미식 축구 선수로도 활약했다. 특히 야구는 포수와 1번 타자를 맡았는데 고교 때는 학교 대표로 출전해 3할대의 타율을 자랑했다. 고교 졸업 무렵 클럽 바에 가서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부르고 래퍼로 활동했다. 1993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가수가 되기 위해 음반사에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1994년 앨범 ‘닥터 레게’로 데뷔했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이후 터보, 젝스키스 등을 비롯한 여러 가수들의 랩 피처링 등을 하면서 실력을 쌓아 나갔다. 1999년 룰라 이상민의 14인 프로젝트 그룹 브로스의 멤버, 2000년에는 무브먼트 크루의 멤버, 다음 해 부가 킹즈를 조직하면서 활동범위를 넓혔다. 그러던 중 2004년 8월에 발표한 새 앨범 ‘고래의 꿈’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의 독특한 창법이 SBS 코미디 프로그램 ‘웃찾사’의 ‘나몰라 패밀리’를 통해 패러디되기도 했다. 지난해 세 번째 정규 앨범 ‘하트 앤드 솔(Heart & Soul)’을 발표했으며 ‘쩐의 전쟁’ ‘하얀 거탑’ 등 드라마 OST에도 참여했다. 2009년부터 전국 투어 공연에 나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 10만 관객 앞둔 힙합의 대부 바비킴

    10만 관객 앞둔 힙합의 대부 바비킴

     이 세상에서 고독이라는 말보다 더 고독한 단어가 있을까. 어느날 한 남자가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바다에 ‘풍덩’ 빠진다. 그리고는 고독하게 헤엄을 친다. 왜 그랬을까? 노래로 답한다. ‘파란 바다 저 끝 어디에선가 있는 꿈과 사랑을 찾아서~/하얀 꼬리 세워 길 떠나는 나는 바다의 큰 고래~’. 다시 까닭을 물었다. 돌아오는 답은 ‘나의 지친 몸짓은 파도 위를 가르네/나를 편히 쉬게 할 꿈인 걸 너는 아는지~’라는 진한 너울뿐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 남자의 꿈은 척박한 토양에서 싹텄다. 어린 나이때부터 겪은 쓰디 쓴 인종차별과 이방인의 외로움이 우선 그러했다. 오죽했으면 착해지는 자신이 나쁘다며 ‘오늘 단 하루만 착하지 말자.’고 외쳤을까. 그런 처절함에서 스스로 험한 바다를 택했고 한 마리의 ‘파랑새’에서 꿈을 찾아 떠나는 큰 고래가 됐다. 하여 아픔이 있어도, 그 어떤 고통이 가로 막아도 ‘편히 쉬게 할 꿈’을 향해 거친 파도를 넘고 또 넘었다. 지금도 그렇게 ‘고래의 꿈’은 계속되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힙합 뮤지션 바비 킴(38). 그는 요즘 2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층으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팬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대개 ‘고독과 처절함에서 나오는 특유의 창법이 심금을 울린다.’고 답한다. 특히 대표곡인 ‘파랑새’와 ‘고래의 꿈’에서 흘러나오는 바비 킴의 음악적 향기는 세대를 뛰어넘는 신선한 냄새가 짙게 깔려 있다고 한다.  사실 그는 무명세월 11년 설움을 견디며 온갖 고생을 하다가 2004년에 발표된 앨범 ‘고래의 꿈’으로 비로소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반응은 폭발적일 만큼 계속됐다. 노래를 듣는 이에게 묘한 위안을 준다는 공통분모로 세대를 뛰어 넘어 많은 마니아들을 탄생시켰다. 2009년부터 전국투어 콘서트에 나서면서 인기스타로서 바비 킴의 존재를 입증한다. 그해 3월부터 지난 해까지 그는 30개 도시에서 50회 이상의 공연으로 9만여 관객을 모았다. 이는 불과 2년만에 이룬 성과로 최고의 티켓 파워는 물론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가수임을 입증한 셈이다. 팬들은 바비 킴을 가리켜 ‘소울의 대부’ ‘힙합의 대부’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는 오는 26일 경기 고양시 아람누리 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또 한번의 전국 투어 공연에 돌입한다. 상반기에 4개 도시, 하반기에 10여개 도시 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따라서 5월 중에는 누적 관객 1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객석 수가 한정된 공간에서 콘서트 3년차만에 10만관객을 채우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번 공연에는 트로트를 ‘바비 킴’적으로 해석해 불러볼 예정이어서 또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바비 킴을 만났다. 늘 그랬듯이 이날도 특유의 중절모를 쓰고 나타났다. 콧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속으로 ‘그래서 팬들이 힙합의 할아버지라고 하나.’라는 생각을 잠시 떠올렸다. 먼저 이번 공연을 갖는 의미와 소감이 어떠한지 물었다.  “올해로 단독 콘서트는 3년째입니다. 그 중간에 조인트 콘서트가 있었지만 말이죠. 그동안의 콘서트가 바비 킴이 살아온 인생을 담았다면, 올해 콘서트는 바비 킴이 할 수 있는 음악과 바비 킴이 하고 싶은 음악, 그리고 팬들과 같이 할 수 있는 여러 음악을 선보일 생각입니다. 말 그대로 팬들과 함께 하는 ‘소울 투게더(Soul Together)’이지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좀 더 다양해진 콘서트 무대가 될 듯 싶다. 어떻게 달라질까.  “트로트곡을 제 스타일로 한번 소화해 볼 생각입니다. 물론 실험입니다. 사실 제가 아는 트로트곡은 하나도 없습니다. 트로트곡 10여곡을 선정해 하나 둘씩 들어가면서 선별할 예정입니다. 아직은 이거다 하는 것이 없지만 공연때 2~3곡정도 불러볼 생각입니다. 제가 트로트를 부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런 시도는 그를 좋아하는 마니아 계층들을 위한 팬 서비스 차원에서 ‘공연의 맛깔’을 더할 것으로 보여진다. 본인도 그런 차원에서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여기서 잠깐, 한국말은 어떻게 익혔을까. 두살때 미국으로 건너가 스무살에 돌아왔으니 말이다.  “국내 모대학 어학당에서 1년반 동안 배웠습니다. ‘가,나,다’부터 배웠죠. 한국인이면서 한국말을 몰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미국과 한국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이 상당히 컸죠. 한국어로 된 노래가사에는 영어발음으로 일일이 적어가면서 익히고 부르고 그랬습니다.”  한국에서의 적응은 힘들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영어 테이프 녹음, TV드라마 엑스트라, 유아 TV프로그램 영어 강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아울러 힙합 음악을 고집하면서 그룹활동을 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외국인으로서 미국에서의 적응도 순탄하지는 않았을 터. 그가 미국으로 가게 된 계기는 MBC 관현악단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던 아버지 김영근씨가 미국에서 음악활동을 하게 되면서였다. 그의 가족이 처음 정착한 곳은 샌프란시스코. 바비 킴은 초등학교때부터 적지 않은 따돌림을 당했다. 미국 아이들에게 ‘칭크(Chink:중국인을 비하하는 속어)’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이때마다 한국인이라고 해도 ‘동양인들은 다들 똑같지 않느냐.’는 대답을 계속 들어야 했다.  “제가 살던 곳에는 필리핀과 중국인들이 살았어요. 또 백인과 흑인들도 많이 살았구요. 한국인은 별로 없었는데 어릴 때 미국인은 물론 똑같은 동양인 아이들에게도 왕따를 많이 당했지요. 화가 날 때에는 덩치 큰 선배들과 싸우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패배의식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강해지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바비 킴은 아버지의 음악적 영향을 받아 중학교때 트럼펫을 몰래 배웠다. 또 학교에서 솔로로 노래 발표회에도 여러 차례 참가했다. 그때마다 성적은 아주 우수했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보고 혹시 음악하는 것이 직업이 될까봐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원래 음악적 자질도 타고 났지만 운동신경 또한 그랬다. 초등학교 3학년때 야구방망이 잡기 시작해 고등학교때는 학교 대표선수로 1번타자와 포수를 맡았다. 특히 어깨힘이 좋아 1루에서 2루로 도루하는 상대방 선수들은 거의 다 아웃시켰을 정도였다. 타격면에서는 3할대를 꾸준히 유지했다. 그러던 고 3때 한 스카우터로부터 ‘너는 동양인이어서 체격적으로 밀리기 때문에 서양인보다 3배 이상 훈련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포기했다.  “그때 야구도 그만 두고 좋아하던 미식축구도 그만 두었습니다. 몇날 며칠 방황과 좌절의 연속이었죠. 그러던 중 음악을 취미가 아닌 진짜 인생의 승부수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구요. 미국에는 클럽 바에 가면 오픈 마이크라고 해서 누구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자주 갔지요. 또 원맨쇼 코미디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나이트클럽 래퍼로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1992년 미국 LA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나자 바비 킴 가족은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이듬해 한국에 온 바비 킴은 아버지의 묵시적인 허락하에 음반사 여러 곳에서 오디션을 봤다. 이때 단골로 부른 노래가 이승철의 ‘마지막 콘서트’였다. 하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리듬은 잘 타지만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바비 킴은 이에 대해 “어릴 때 흑인들과 자주 지내서 그런지 리듬을 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며 웃는다.  그러던 1994년 ‘닥터 레게’로 첫 앨범을 냈지만 인기를 못얻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터보, 젝스키스를 비롯한 여러 가수들의 코러스와 랩 피처링 등을 하면서 실력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저에게는 무명 11년 세월이 고맙게 여겨집니다. 만약 처음부터 성공했더라면 자만에 빠질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저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열심히 노력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또 깨달았지요. 이제는 공연때마다 제가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을 얘기할 수 있고, 또 관객들과의 진실한 공감을 통해 하나 하나 꿈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제가 (다른 가수들과) 음악의 색깔도 다르고 창법도 특이하다고 하지만 그런 것이 이제는 자신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바비 킴의 본명은 김도균이다. ‘바비’(Boby)라는 이름은 세살 때 친누나가 미국 TV시트콤을 보다가 바비라는 등장인물을 보고 그렇게 정했단다.  앞으로의 꿈에 대해 그는 “음악을 하다보니 취미가 없어졌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데 그쪽 분야로 연구를 많이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팬들과 함께 하는 창조적 음악을 위해 열심히 꿈을 꾸며 살아가겠다고 강조했다. 결혼에 대해서는 “여자친구는 현재 없지만 나이 마흔이 되면 할 생각.”이라면 웃는다. 중절모와 콧수염의 바비 킴. 특유의 애닯고 처절하고 고독한 창법이 앞으로 어떻게 더욱 깊어질지 기대된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길섶에서] 모자/최광숙 논설위원

    겨울철 내내 가방에 장갑과 모자를 챙겨 다닌다. 그 전에야 칼바람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맨머리로 길거리를 활보해도 견딜 만했지만 요즘은 다르다. 모자를 쓸 때와 쓰지 않을 때의 그 ‘현격한’ 차이를 알고부터는 모자는 소중한 친구가 됐다. 계기는 미국에 잠시 머물 때가 아닌가 싶다. 워낙 춥다 보니 그곳 사람들에겐 모자 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심지어 정장 차림의 남자들도 털모자를 눌러쓰고 출근했다. 여성들이야 패션까지 겸하니 모자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실용주의가 뭐 별건가. 추우면 모자 쓰고 점퍼 입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사정이 좀 다르지 않나 싶다. 남의 눈을 의식하느라 추워도 외출길에는 가급적 모자 쓰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1월 수십년 만의 추위에 중절모를 쓴 한 중년 남성을 만났다. 연예인이나 쓸 법한 모자를 그는 용감하게 쓰고 다니는 것 아닌가. 유럽에서 오랫동안 생활했기 때문일까. 거리에서 모자 쓰는 멋쟁이들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한국공군 조기경보機 ‘피스아이 1호’ 美보잉사 첫 공개

    한국공군 조기경보機 ‘피스아이 1호’ 美보잉사 첫 공개

    “짧은 시간이라도 공중에만 떠 있다면 못 잡을 게 없다. 지난달 24일 미국 시애틀 공장에서 만난 랜디 프라이스 보잉 공중조기경보통제기(AEW&C) 사업 매니저는 한국 공군에 납품할 737 AEW&C 시스템에 대해 자부심이 넘쳤다. 그는 특히 “레이더 반사면적(RCS)을 최소화한 스텔스기도 잡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다국적 항공기제조업체인 미국 보잉사가 한국 공군의 첫 공중조기경보통제기를 이날 언론에 공개했다. 2006년 11월 한국의 공중조기경보기 사업자로 선정된 지 4년 3개월 만이다. ‘피스아이’(peace eye)로 이름 붙여진 공군 737 AEW&C 1호기는 오는 4월까지 시애틀에서 임무 비행 테스트를 마친 뒤 5월 한국에서 성능 적응 테스트를 거쳐 6월 우리 공군에 정식 인도될 예정이다. 공군의 평가가 끝나는 7월쯤이면 한반도 공중 감시 임무 활동에 본격 투입된다. 피스아이 2~4호기는 현재 경남 사천에 있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서 개조 작업이 한창이다. 내년쯤 공군에 전량 인도될 것으로 알려졌다. 변덕스럽기로 유명한 시애틀 날씨답게 눈발이 흩날리는 가운데 공개된 피스아이 1호기는 전날 야간까지 비행 성능시험을 하고, 지상에서 시스템 점검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보잉은 이번 언론 공개에서 공군의 최첨단 전략 물자라는 이유로 사진 촬영을 금한 것은 물론, 기체 내부 공개 때는 복잡한 전자기 시스템의 손상을 염려해 전자장비 소지를 일일이 단속할 정도로 철저히 관리·감독했다. 737-700 기종을 개조한 몸체는 다른 737 기종들과 비교해서도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한국의 모든 공군 비행장에서 이착륙이 가능하다고 프라이스 매니저가 설명했다. 하지만 동체 위에 올린 중절모 모양의 다기능 전자 주사 배열(MESA) 레이더 덕분에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노드롭 그루먼사가 만든 MESA 레이더는 전천후 기상 조건에서 360도 전방위로 공중과 지상을 탐지·감시할 수 있다. 공중의 전투기나 헬리콥터, 미사일과 해상의 고속정, 호위함 등 각종 함정도 탐지할 수 있다. 10초 이내에 360도를 커버하고 탐지거리는 360㎞에 이른다. 540㎞ 거리의 항공기나 선박이 아군인지를 알아내는 피아식별장치(IFF)도 장착되어 있다. 프라이스 매니저는 “기존의 기계식 레이더는 필요하든 그렇지 않든 360도가 돌아가고 이에 최소 10초 이상이 소요되지만, MESA는 동시에 전방위를 탐지할 수 있고 특정 부위만 주시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면서 “표적 추적 능력은 기존의 중앙방공통제소(MCRC)와 큰 차이가 없지만 10㎞ 상공에서 운영되는 MESA 레이더는 지형 장애의 한계를 뛰어넘는 한반도 공중 감시에 최적인 장비”라고 말했다. 항공기 내부에는 탐지·분석·식별 등 10개 임무를 동시에 수행해 지상으로 전달하는 10개의 임무 콘솔(컴퓨터를 제어하기 위한 계기반)과 6~10명의 승무원이 쉴 수 있는 8개의 휴게석, 조종실 등이 있다. 10개의 초단파(VHF)·극초단파(UHF) 채널, 위성통신 체계, 11~16개 채널의 링크가 가능한 통신체계를 탑재하고 있다. 조종사 2명, 승무원 6~10명을 태우고 마하(음속) 0.78의 속력으로 9~12.5㎞ 상공에서 임무 수행이 가능하다. 길이 33.6m, 높이 12.57m, 폭 34.77m, 항속거리 6670㎞, 최대 이륙중량 77t, 체공시간은 9시간이다. 공중급유 장치도 갖추고 있다. 보잉사는 피스아이 기체의 바탕이 된 737 기종에 대한 신뢰성을 강조했다. 프라이스 매니저는 “737 시리즈는 항공업계가 가장 선호하며, 신뢰도가 높은 기종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부품 및 지원 장비의 원활한 공급도 경쟁 기종과의 비교 우위로 꼽힌다. 다만 5t에 육박하는 특이한 모양의 MESA 레이더를 달아 기체를 변형시킨 게 다소 불안 요소로 보였다. 하지만 그는 “고도 10㎞ 이상에서의 비행은 기상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서 “MESA 레이더 설치에 따른 이착륙상의 어려움을 최소화하기 위해 기체 아래에 안테나를 겸한 2개의 보조 날개를 추가로 장착하고 탑재량 증가에 따른 체공시간 감소 우려를 감안해 기체 뒤쪽에 보조 엔진과 연료탱크를 추가했다.”고 설명했다. MESA 레이더는 비행 방식도 바꿔 놓았다. 일반 항공기는 체공 시 일직선으로 날아가지만 피스아이는 앞쪽으로 4도쯤 기울어 있는 MESA 레이더를 평평한 상태에서 운영하기 위해 기체 앞부분을 4도쯤 세워서 비행하게 된다. 내부에서 기체 벽에 붙어 있는 콘솔을 향해 돌아앉아 장시간 임무를 수행하는 승무원들에게는 척추에 무리를 줄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승무원석 역시 기체의 기울기에 상관없이 평평하게 조절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뒀다. 737 AEW&C 기종은 우리 공군에 인도되기 전 호주와 터키가 6대, 4대씩 구매해 실전 임무 활동에 배치하고 있다. 다만 호주 공군에 인도됐던 737 AEW&C는 일부 소프트웨어에 문제가 드러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그레그 렉스턴 보잉코리아 부사장은 “737 AEW&C에 장착된 250만개의 전자 코드 모두를 보잉이 개발한 게 아니어서 초기 오류가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해소됐다.”면서 “호주 AEW&C 시스템은 전자지원책(ESM)과 지상지원 업무의 경우 보잉이 담당하지 않아 생긴 문제도 있지만 한국 AEW&C 시스템은 모두 보잉이 맡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AEW&C의 시스템은 한국 공군뿐아니라 주한 미군과도 호환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시애틀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한국의 언더커버 보스들

    한국의 언더커버 보스들

    글로벌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일주일간 말단직원으로 가장해 소비자들의 요구를 직접 확인하는 미국 TV 프로그램 ‘언더커버 보스-회장님은 위장취업 중’이 국내에서도 인기를 얻으면서 한국형 ‘언더커버(암행감찰) 보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특히 고객을 현장에서 직접 상대해야 하는 유통업계에서 암행 감찰은 경영 실적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27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은 대표적인 암행형 CEO. 홀수 달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오는 신 회장은 늦은 저녁시간에 틈나는 대로 롯데백화점 본점과 롯데호텔, 명품관 ‘애비뉴엘’ 등을 돌며 점검에 나선다. 출국 전 부산지역 롯데백화점을 들르는 것도 일과 중 하나. 늘 중절모와 트렌치 코트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 그를 금방 알아보지 못하는 직원들도 있다고 한다. 신세계이마트 최병렬 대표도 수시로 암행감찰에 나서는 CEO 가운데 하나다. 출·퇴근 시간 혹은 업무 중에 잠깐씩 서울과 수도권 지역 이마트 매장을 하루 한두 곳씩 찾는다. 주말에는 혼자서 충남이나 강원 지역 매장을 직접 둘러보고 오기도 한다. 소비자로 위장해 매장 곳곳을 둘러보지만 호남형 외모에 20여년간 수영으로 다져진 몸매 때문에 직원들이 곧잘 눈치를 챈다고. 잘못이 발견되면 불호령이 떨어져 직원들 사이에 그의 별명은 ‘최틀러’. 그의 동선을 각 점포들이 미리 알고 준비하지 못하도록 자신만 아는 ‘이동 공식’이 따로 있다고 한다. 홈플러스 이승한 회장은 개인적인 식사 약속까지도 전국 각지의 홈플러스 매장에서 잡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반인처럼 접근해 한 번이라도 더 매장을 살펴보기 위해서다. 직원들이 발소리에 자신을 보고 알아챌까 봐 아예 구두 밑바닥도 고무로 만들어 신는다. 최근에는 불시에 잠실점을 방문해 점포를 둘러본 뒤 리모델링 수준의 매장 재배치를 지시하기도 했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CEO들도 현장 경영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대부분 얼굴이 워낙 잘 알려져 있다 보니 암행감찰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갸루 화장’ 보아, 민낯으로 180도 변신…‘순둥이 등극’

    ‘갸루 화장’ 보아, 민낯으로 180도 변신…‘순둥이 등극’

    가수 보아가 ‘갸루 화장’을 벗고 청순한 민낯을 공개해 네티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강하고 파워풀한 이미지를 선보이고 있는 보아는 정규 6집 앨범의 콘셉트에 맞춰 ‘갸루 화장’으로 컴백무대부터 이슈를 일으켰다. 특히 과장된 눈 메이크업으로 진한 인상을 만들어 냈다. ‘갸루’는 소녀를 뜻하는 girl의 일본식 발음으로 진한 화장법과 독특한 의상스타일을 하는 일본 여성들을 일컫는다. 하지만 지난 17일 방송된 MBC 라디오 표준FM ‘신동 박규리의 심심타파-보이는 라디오’에 출연한 보아는 노메이크업의 얼굴을 드러냈다. 특히 캐주얼한 평상복 차림에 중절모를 눌러써서 제 나이또래(1986년생) 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청순함을 뽐냈다. 이 모습을 본 팬들은 보아에게 ‘순둥이’라는 별명을 지어주며 뜨거운 반응을 나타냈다. 사진 = 보아 트위터, MBC ‘심심타파’ 동영상 캡처 서울신문NTN 뉴스팀 ntn@seoulntn.com 서울신문NTN 오늘의 주요뉴스▶ ’양악수술’ 김지혜, V라인 등극…’임혁필과 병원동기’▶ 손예진, 암스테르담의 ‘팜므파탈’ 변신…"고혹+요염"▶ 김신영, 경매서 10억 탕진..구매 물품은?▶ 포미닛, 인지도↓ 충격에 녹화중단 "이정도일 줄은.."▶ MC몽 ‘몽키펀치’ 법정분쟁 휘말려…’시끌시끌’▶ 문채원, 선글라스 민낯 셀카 공개...팬들 시선집중▶ 김정은, 매끄럽고 탄력있는 각선미 ‘아찔 매력’
  • 보아, ‘갸루화장’ 지우고 민낯 공개…“눈 어딨어?”

    보아, ‘갸루화장’ 지우고 민낯 공개…“눈 어딨어?”

    보아가 ‘갸루 화장’을 지우고 청순한 민낯을 공개해 주목을 끌고 있다.보아는 17일 방송된 MBC 라디오 표준FM ‘신동 박규리의 심심타파-보이는 라디오’에 진한 무대 메이크업을 지운 채 출연,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최근 5년 만에 정규 6집으로 컴백한 보아는 눈을 과장되게 커보이도록 강조하고 짙고 강한 인상을 주는 일명 ‘갸루 메이크업’을 선보이고 있다. 반면 이날 보이는 라디오에는 캐주얼한 평상복 차림에 중절모를 눌러쓰고 눈썹도 그리지 않은 생얼로 등장해 청순함을 뽐냈다. 이날 영상을 본 네티즌들은 “화장하나 안하나 진짜 예쁘다”, “화장 지우니 초절정 동안”, “순둥이 보아”, “보아야 눈 어딨니?” 등 뜨거운 관심과 반응을 보였다.사진 = 동영상 캡처서울신문NTN 오영경 인턴기자 oh@seoulntn.com 서울신문NTN 오늘의 주요뉴스▶ ’양악수술’ 김지혜, V라인 등극…’임혁필과 병원동기’▶ 손예진, 암스테르담의 ‘팜므파탈’ 변신…"고혹+요염"▶ 김신영, 경매서 10억 탕진..구매 물품은?▶ 포미닛, 인지도↓ 충격에 녹화중단 "이정도일 줄은.."▶ MC몽 ‘몽키펀치’ 법정분쟁 휘말려…’시끌시끌’▶ 문채원, 선글라스 민낯 셀카 공개...팬들 시선집중▶ 김정은, 매끄럽고 탄력있는 각선미 ‘아찔 매력’
  • 마이클 잭슨 장갑 19만달러에 낙찰

    마이클 잭슨 장갑 19만달러에 낙찰

    마이클 잭슨 사망 1주기를 맞아 실시된 그의 유품 경매에서 공연용 장갑이 19만달러(약 2억 3000만원)에 낙찰되는 등 사후에도 마이클 잭슨의 인기가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AP 등에 따르면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줄리엔 옥션이 지난 25일부터 27일까지 라스베이거스에서 잭슨의 유품 및 물품 200여개를 경매에 부쳤다. 이 경매에서 1984년 ‘빅토리 투어’ 때 낀 스와로프스키 크리스털 장갑은 예상가 2만~3만달러보다 훨씬 높은 19만달러에 팔렸다. 또 무대용 가죽신은 9만달러, 언론인 바버라 월터스와 인터뷰할 때 입었던 재킷은 12만달러, 흰색 중절모는 5만 6250달러, 사망 전날인 2009년 6월24일 그의 마지막 사인은 2만 1000달러에 낙찰됐다. 총 낙찰가는 약 100만달러에 이른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섹시남’ 브래드 피트는 어디로?

    ‘섹시남’ 브래드 피트는 어디로?

    세월의 흐름은 절대 막을 수 없다? 여러 차례나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 1위로 꼽혔던 브래드 피트가 최근 꾀죄죄하고 갑작스럽게 나이가 든 모습으로 등장해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지난 10일 피트는 미국 LA에 있는 한 영화스튜디오를 방문했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일상 모습과 패션 등이 연이어 화제가 되고 있는 트렌드와 달리, 피트는 덥수룩한 수염과 할아버지들이 즐겨 쓸 법한 크림색 중절모로 꾸민 모습을 드러냈다. 현지 언론은 “날이 갈수록 글래머러스한 여자친구 안젤리나 졸리에 비해 이제 마흔 여섯이 된 피트는 할아버지 스타일의 베이지 재킷과 바지를 입고 등장했다.”고 지적했다. 최근 들어 피트가 이렇게 ‘늙어진’까닭은 영화 촬영과 홍보차 바쁜 졸리를 대신해 여섯 아이들을 돌보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졸리는 현재 할리우드의 또 다른 섹시남인 조니 뎁과 함께 새 영화 촬영에 한창이다. 지난 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뒤 최근까지 이렇다 할 활동이 없던 피트는 오는 8월 숀 펜과 함께한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Tree of life)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팬들은 피트가 하루 빨리 예전의 섹시하고 스타일리시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란다는 뜻을 전하고 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영화리뷰] ‘나이트메어’

    [영화리뷰] ‘나이트메어’

    1984년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나이트메어’는 공포영화사(史)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현실이 아닌 ‘꿈’이란 가상 공간에 프레디 크루거라는 희대의 살인마를 등장시켜 색다른 공포감을 선사했던 까닭이다. 현실 공간에서는 숨거나 달아나면 되지만 꿈에 나타난 초탈적 살인마 앞에서는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관객은 이 지점에서 공포를 느꼈다. 프레디보다 더 힘이 세고 재빨라도 도무지 방법이 없겠다 싶은 공포. 그리고 26년이 흘렀다. 나이트메어의 성공은 시리즈 제작으로 이어졌고, 20일 9번째 ‘나이트메어’가 개봉됐다. 역시 전작과 설정은 같다. 친구들은 줄무늬 스웨터를 입고 중절모를 쓴 한 남자가 자신을 괴롭히는 꿈을 꾼다. 한 명씩 죽음을 당하는 친구들. 남은 이들은 잠에 빠져 꿈을 꾸면 안 된다는 사실을 터득한다. 각성제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보지만 며칠이 지나고 나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잠에 빠져버린다. 의식은 있어도 뇌의 일부가 잠들어버리는 ‘마이크로 수면’ 상태. 결국 살인마를 피해 달아날 방법이 없다. 나이트메어의 피해자들은 ‘13일의 금요일’,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과 같은 연쇄 살인 공포물처럼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당한다. 하지만 공포의 수위는 단순한 징그러움을 뛰어넘는다. 영화는 ‘수면’이란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최악의 공포 상황으로 바꿔 놓는다. 이들이 마이크로 수면 상태에 빠질 때면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관객들은 지금 나오는 인물이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닌지 도무지 판단이 안 선다. 공포 영화들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관객과 줄다리기를 하지만 나이트메어는 이 부분에서 잠시 숨을 놔도 되는 건지 헷갈리게 만든다. 영화 내내 숨통을 틀어 쥔 채 놓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공포 영화 시리즈물의 한계는 나이트메어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시리즈물은 기존 영화의 포맷을 전제로 한다. 시리즈물의 신작은 성공한 전작의 ‘공포 코드’를 다시 사용하기 마련. 이는 공포의 강도를 절감시킨다. 공포 영화에서 공포가 절감된다는 것은 치명적인 손실이다. 전작이 이미 신작의 스포일러(영화의 줄거리나 장면 등을 미리 말해서 영화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것)가 되는 셈이다. 나이트메어의 내용을 잘 알고 있는 관객들에겐 큰 새로움은 없을 듯싶다. 이번 나이트메어도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다만 이번 영화는 몽환적인 비주얼과 사운드로 기존 나이트메어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맛이 있다는 평가다. 프레디가 살고 있는 세계도 4차원을 연상시키는 신비로움을 보탠다. 원작의 마니아들에겐 이 정도 쯤이 반가울 수 있겠다. 95분. 청소년관람불가.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한채영·이병헌,구한말 화려한 패션 ‘눈길’

    한채영·이병헌,구한말 화려한 패션 ‘눈길’

    배우 한채영과 이병헌이 20세기 초 구한말의 귀족으로 변신해 화려한 패션을 선보였다. 디지털 블록버스터 영화 ‘인플루언스’(감독 이재규·제작 윈저엔터테인먼트)는 18일 주인공 한채영과 이병헌의 화려한 패션을 담은 스틸이미지를 공개했다. 두 사람은 섬세한 고전미와 우아한 서양 스타일이 공존했던 개화기의 의상을 입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변신했다. 먼저 한채영은 1900년대의 신여성으로 분해 ‘바비인형’이란 별칭에 어울리는 화사한 자태를 드러냈다. 화려한 레이스 드레스와 붉은 벨벳 재킷을 매치한 한채영은 글래머러스한 몸매로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또 깃털 장식의 실크햇과 양산, 레이스 장갑 등 디테일한 소품들은 조선 말기의 시대상황을 반영함과 동시에 신비로운 여인 제이의 매력을 극대화시킨다. 극중 한채영의 연인으로 분한 이병헌은 단정한 블랙 수트 차림의 W와 조선의 마지막 황족 이설, 다이아몬드 쥬빌리를 파괴하려는 악인까지 1인 3역을 소화했다. 이중 구한말의 한채영과 함께 패션 감각을 뽐낸 이설 역의 이병헌은 쓰리 피스 수트에 다양한 넥타이와 행커치프를 매치해 황족의 특유의 낭만적인 패션 감각을 자랑했다. 또 이병헌은 중절모를 쓰고 콧수염을 연출하는 등 자주 볼 수 없었던 스타일을 시도해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한편 지난 3일부터 공식 홈페이지(www.the-djc.com)을 통해 첫 번째 에피소드 ‘두 번째 시작’을 공개한 ‘인플루언스’는 오는 22일부터 영화의 또 다른 에피소드를 공개할 예정이다. 사진 = 윈저엔터테인먼트 서울신문NTN 박민경 기자 minkyung@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부고] ‘울고싶어라’ 이남이 폐암으로 숨져

    [부고] ‘울고싶어라’ 이남이 폐암으로 숨져

    1980년대를 풍미한 밴드 ‘사랑과 평화’ 출신으로 ‘울고 싶어라’를 불러 큰 사랑을 받았던 이남이(본명 이창남)씨가 29일 오후 2시14분 폐암으로 별세했다. 62세. 고인은 지난해 11월 말 폐암 선고를 받은 뒤 강원도 한림대 춘천성심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투병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1974년 그룹 ‘신중현과 엽전들’에서 베이스로 데뷔했으며, 1988년 사랑과 평화 재기 앨범이었던 3집에서 ‘울고 싶어라’를 직접 작사·작곡하고 불러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중절모와 동그란 안경, 콧수염을 트레이드마크 삼아 솔로 활동을 펼쳤다. 1991년 솔로 3집까지 발표한 고인은 연예계에서 모습을 감췄다. 의형제를 맺은 중광 스님, 작가 이외수씨와의 인연으로 2000년 춘천에 자리를 잡았다. 군부대, 교도소, 노인복지회관 등 주로 지역무대에서 공연을 겸한 봉사 활동을 펼쳤다. 빈소는 춘천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날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옥희씨와 두 딸이 있다. 한편 유족과 지인 등에 따르면 고인은 투병생활 내내 병문안을 온 지인들에게 흡연의 중독성과 위험성을 경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의 딸 단비씨는 “‘담배는 끊기가 어려우니 아예 배우지 말라.’고 한 말씀이 아직 귓전에 맴돈다.”고 밝혔다. 고인은 평소 하루에 2갑 이상의 담배를 피울 정도로 애연가였다. 담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고인의 생전행보는 이씨와 같은 나이로 작고한 코미디계의 황제 고 이주일씨를 연상케 해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콧수염 남장한 송혜교 ‘미모는 여전’

    콧수염 남장한 송혜교 ‘미모는 여전’

    지난 8월 현빈과의 열애를 공식적으로 밝힌바 있는 송혜교가 오랜만에 브라운관을 통해 남장 매력을 발산해 화제다. 송혜교는 최근 공개된 도토루 CM에서 5번이나 분장을 바꿔가며 색다른 모습을 선보였다. 특히 이 중에서 중절모에 콧수염을 붙인 송혜교의 남장이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 짧은 숏 커트 머리에 굵직한 목소리가 더욱 사랑스러워진 송혜교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해준 것. 이번 도토루 CM은 송혜교가 부드럽고 따뜻한 도토루 커피의 매력에 반해 공짜 커피를 얻기 위해 다양한 모습으로 변장, 여러 번 시음회를 찾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송혜교가 남장을 하게 된 이유도 도토루 커피를 한 잔 더 마시려고 한 때문. 송혜교는 30초 간의 짧은 CM을 통해 남장여자 외에도 풋풋한 소녀의 모습에서부터 스카프를 두른 햅번, 발랄한 여고생, 짙은 스모키 화장에 펑키룩을 입은 락커 등의 다채로운 모습을 연출했다. 광고를 접한 네티즌들은 “역시 혜교다. 남장과 능청스런 연기가 완벽하게 어울린다.”“5번의 변장 중 단연 최고는 남장 혜교다.”“뭘 입어도, 어떤 헤어스타일을 해도 예쁜 혜교가 부럽다.”는 등 송혜교의 남장에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다. 도토루 브랜드 매니저인 박형수 팀장은 “드립 방식으로 커피를 추출해 부드러운 맛이 일품인 도토루 커피의 특징을 현빈과의 열애로 더 사랑스러워진 모델 송혜교를 통해서 표현해 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송혜교는 강동원과 함께 한국, 일본, 태국 등 아시아 3개국 감독이 참여하는 옴니버스 영화 ‘카멜리아’의 출연을 확정하고 지난 15일부터 촬영에 들어갔다. ‘카멜리아’는 부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송혜교와 강동원의 출연으로 벌써부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사진=피알원 서울신문NTN 김진욱 기자 action@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타이거JK, ‘슈퍼스타K’ 조문근과 한솥밥 인증샷

    타이거JK, ‘슈퍼스타K’ 조문근과 한솥밥 인증샷

    힙합가수 타이거JK가 한솥밥을 먹게 된 ‘슈퍼스타K’ 출신 조문근과 함께 촬영한 사진을 공개했다. 조문근은 지난해 12월 타이거JK 소속 정글 엔터테인먼트의 러브콜을 받아 계약하고 정식 가수 데뷔를 준비 중이다. 타이거JK는 지난 12일 자신의 미투데이에 ‘정글식구들이 인사드린다. 비지, 팔로, 나 호랑이 그리고 문근이’라는 글과 함께 소속사 아티스트들끼리 다정히 찍은 사진을 선보였다. 이 사진에서 타이거JK, 비지, 팔로알토, 조문근은 나란히 서서 저마다 개성 있는 표정을 짓고 있다. 타이거 JK는 말끔한 갈색 수트와 중절모를 매치한 시크한 패션으로 눈길을 끈다. 또 조문근은 수줍은 듯 하지만 특유의 서글서글함이 느껴지는 웃음을 짓고 있다. 한편 타이거JK는 지난 7일 MBC ‘황금어장’의 인기코너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척수염으로 고생했던 사연을 들려줘 시청자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또 이날 아들 서조단(2)이 깜짝 등장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사진 = 타이거JK 미투데이 서울신문NTN 정병근 기자 oodless@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한·일 100년 대기획] “이웃 없인 자기나라 없다… 15년전 담화는 역사적 사죄”

    [한·일 100년 대기획] “이웃 없인 자기나라 없다… 15년전 담화는 역사적 사죄”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 정부가 내세우는 공식적인 역사 인식의 준거는 1995년 8월15일 발표된 ‘무라야마 담화’다.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이후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총리들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한·일 관계를 가장 험악하게 만든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도 똑같은 말을 했다. 지난 연말 의사당 부근인 도쿄 지요다구의 한 호텔 라운지에서 만난, 담화의 주역인 무라야마 전 총리는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지는 않다.”며 안타까워했다. 무라야마 전 총리로부터 1시간40분 동안 한일병탄 100년의 의미 및 평가, 양국 관계의 미래, 담화의 의의, 남북한 문제 등을 들었다. →한일병탄 100년의 해를 맞았다. 지난 100년간의 한·일 관계를 어떻게 보는지. -지금보다 더 나은 한·일 관계로 발전해 나가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1945년 일본은 패전을 선언했고, 한국은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전후(戰後)에 입장이 180도 달라졌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이 체결돼 형식적으로는 식민지시대를 마무리 짓고 새로운 한·일 관계를 열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렀다. 역사적 전환의 의미가 크다. →한국과 일본, 일본과 한국의 바람직한 관계는. -긴 역사 속에서, 또한 이웃 나라로서 식민 36년을 포함해 깊은 반성을 전제로 지금부터 긴밀히 협력하고 신뢰관계를 쌓아 나가야만 한다. 특히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 공동체를 확립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다행히 김대중 대통령 당시 문화개방이 있었던 덕분에 서로 문화적인 체험이 가능하게 됐다. 친근감이나 신뢰감이 형성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깊이있게 협조해야 한다. →한·일 관계의 미래 100년을 위해서는. -미래는 열려 있다. 20세기에는 다양한 형태의 전쟁이 반복됐지만 그런 전쟁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1세기에 유럽연합(EU), 미국이 각각 나름의 공동체를 구성했듯 아시아도 대응 차원에서 아시아대로 협력해 나가야만 한다. 총리시절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방문했을 때 가장 인상 깊게 느낀 점은 더 이상 자기 나라만 잘 살면 되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웃나라 없이는 자기 나라도 없다. 한국이 좋아지면 일본이 좋아지고, 일본이 좋아지면 한국이 좋아진다는 관계를 확실히 인식해야만 한다. 물론 역사, 독도 문제 등 풀어야 할 난제가 아직도 많지만 완전한 인식의 일치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서로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노력이 필요하다. 신뢰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의 역사인식의 한 획을 그은 무라야마 담화의 메시지는. -일본은 한국의 식민지화, 만주사변, 태평양전쟁 등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 국가들에게 큰 고통을 줬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솔직한 반성이자 사죄의 표명이다. 이 바탕 위에 한국, 중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신뢰를 구축하고 서로 공생해 나아가자는 취지였다. 더 이상 절대로 과오를 반복하지 말고 세계평화에 기여하기 위한 역사관을 확실히 세우자는 의미에서 발표했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 입장인 담화의 준수에 대한 평가는. -현 하토야마 총리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지켜지고 있다. 도중에 총리가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다든지, 역사 교과서 문제 등의 사건도 일어났지만 기본 노선은 유지되고 있다. 다만 철저히 지켜지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일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담화를 둘러싼 일본 내의 비판적인 언동도 적지 않다. 지금도 무라야마 담화를 인정하지 않고, 옳지 않은 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일본은 언론, 출판자유의 나라인 만큼 그것은 그것대로 인정해야 한다. 장기간에 걸쳐 해결해 나가야 할 일이라고 본다. 부정적인 의견은 일본 국민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대다수의 국민이 지지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8·30중의원) 선거를 보며 가장 기분이 좋았던 것은 일본 국민들이 자신의 힘으로 정권을 바꿀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한·일 관계에서도 긍정적인 면으로 작용할 것이다. →무라야마담화를 뛰어넘는 하토야마 총리의 새로운 담화의 필요성도 제기되는데.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 교수는 한일병합(무라야마 전 총리 표현) 100년을 맞아 이미 일본·한국, 일본·중국의 관계가 많이 바뀐 상태이므로 무라야마 담화에 새로운 비전을 더한 새 담화를 주장하고 있다. 좋은 의견이라고 본다. 하토야마 정권이 수용할지 모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뭐라고 의견을 제시할 수는 없다. 하토야마 총리를 취임 이후 만난 적도 없어서다. 덧붙인다면 한일병합조약은 역사적 배경으로 미뤄 ‘부당한 조약이다.’라는 사실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한일병탄 100년을 짚는 상황에서 북한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북한도 일본의 이웃나라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지 65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일·북 간의 국교가 회복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부자연스럽다. 어떤 형태로든 국교는 정상화돼야 한다. 납치문제나 핵문제 등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안들도 남아 있기는 하다. 다행히 6자회담이 있기 때문에 회담을 통해 해결해 나가는 게 바람직하다. 일본과 북한의 국교가 체결되면 한반도의 통일에도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이 성의를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 특히 병합100주년을 맞아 한국과 북한 간에도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왕을 한국에 초청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는데. -한국인들이 흔쾌히 받아들인다면 병합100주년을 맞아 관계전환에 큰 의미를 지닐 것이다. 실현된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정부간의 대화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한국 국민 모두가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국,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보내고 싶은 메시지는. -총리에서 물러난 뒤 김대중 대통령 재임당시 한국을 방문해 독립기념관을 찾았던 적이 있다. 한국인을 조그만 상자 안에 꿇어 앉히고 총으로 위협하는 모습의 밀랍인형들을 봤다. 일본군이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잔인성을 그대로 보여줬다. 역사적 사실이므로 추호도 부정할 수가 없다. 또 보여줘야만 한다. 과거의 반성과 사죄가 필요한 이유라고 본다. 그러나 미래지향적이고 협력하는 자세를 갖는 것도 중요하다. 젊은이들은 서로 문화를 공유했으면 한다. 이웃나라, 형제와 같은 나라인 만큼 많은 문제들을 극복하고 이해해 나가길 희망한다. 양국의 발전을 위해, 미래를 위해서다. 친구로서 만나고 서로 인정하는 관계를 꼭 만들어 나갔으면 한다. 이와 함께 젊은이들이 평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기를 바란다. 글 사진 hkpark@seoul.co.kr ■ 무라야마 담화(1995년 8월15일) 요약 “전후 50주년이라는 길목에 이르러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역사의 교훈을 배우고 미래를 바라다보며 인류사회의 평화와 번영의 길을 그르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머지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책을 그르치고 전쟁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커다란 손해와 고통을 줬다. 나는 미래에 잘못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같은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 또 이 역사로 인한 내외의 모든 희생자 여러분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바친다.” ■ 근황은 근황은 아침 6시 일어나 체조·걷기 가끔 한국 역사드라마 즐겨 두툼한 외투 차림에 중절모를 쓴 무라야마 전 총리는 평범한 노신사였다. 중절모를 벗고 앉았을 때에야 호텔 직원도 알아본 듯했다. 86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했다. 트레이드 마크인 눈을 덮을 정도의 짙은 눈썹은 여전했다. 인터뷰 내내 말투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건강의 비결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가난하면 머리를 써야 하고, 손발을 써야 한다. 호사스러운 음식은 먹지 않지만 하루 세끼는 꼭 챙겨 먹는다.”고 덧붙였다. 또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1시간 정도 걷고, 체조를 하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차는 자전거다. 웬만한 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며 웃었다. 가끔씩 한국의 역사드라마를 보고 있다. “때때로 강연을 다니지만 시민으로서 조용히 살고 있다.”면서 “그러나 평화헌법 제9조(전쟁 포기·군사력 보유금지)를 지키기 위해 가장 많은 힘을 쏟고 있다.”고 밝혔다. 고향인 규슈현 오이타에 생활하면서 한 달에 한두 차례 도쿄 요치야에 위치한 ‘일본·조선(북한) 국교촉진국민협회’에 들러 협회 사무국장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를 만나고 있다. ●약력 ▲86세, 규슈 오이타 출생 ▲1946년 메이지대학 정치경제학과 졸업 ▲1972년 중의원 첫 당선(사회당)~이후 8선 ▲1993년 사회당 위원장 ▲1994년 6월~1996년 1월 제81대 총리 ▲1996년 사민당 당수 ▲2000년 정계 은퇴 ▲현 사민당 명예당수
  • [NOW포토] 오지호, 모델 다운 ‘중절모’ 패션

    [NOW포토] 오지호, 모델 다운 ‘중절모’ 패션

    25일 서울 명동 리바이스 플래그쉽 스토어에서 열린 ‘헌 청바지 트리 완성하기’ 프로젝트 자선 행사에 참가한 배우 오지호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서울신문NTN 이규하 기자 judi@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옛 대우빌딩 세계최대 미디어아트 건물로

    옛 대우빌딩 세계최대 미디어아트 건물로

    오후 6시 사방은 깜깜한데 서울역 앞 서울스퀘어 건물(옛 대우빌딩)은 환하게 빛난다. 굵고 검은 선으로 단순화된 현대인들이 건물 외벽의 전면 위를 걸어다니고, 르네 마그리트의 ‘우산을 쓴 사람’이 줄줄이 외벽을 타고 내린다. 서울역에서 빠져나온 시민들은 한동안 발걸음을 멈추고 휴대전화 카메라를 꺼내 도시의 장관을 담는다. ●줄리언 오피·양만기 비디오작품 등 상영 서울스퀘어의 모든 공공미술을 시공한 가나아트갤러리 측은 23일 “작품을 선보인 지 약 일주일 됐는데 1시간에 10분씩 상영하는 시간을 더 늘려달라고 요청하는 등 시민들의 반응이 매우 좋다.”고 소개했다. 한국 근대화의 상징인 대우빌딩이 세계 최대의 미디어아트 건물로 새롭게 태어났다. 지난 18일부터 서울스퀘어 건물의 4층부터 23층까지의 외벽은 가로 99m에 세로 78m의 미디어 캔버스가 됐다. 발광다이오드(LED) 전구 6만개를 촘촘히 박아 1년10개월 동안 30억원을 들여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겨울에는 오후 6시부터 11시10분까지 정시마다 10분씩 LED로 줄리언 오피와 양만기의 비디오 작품이 서울스퀘어 외벽에서 상영된다. 영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줄리언 오피는 영국 록 밴드 블러의 앨범 ‘더 베스트 오브’의 표지 작업으로 친숙하다. 한국에서는 그의 굵고 검은 선으로 움직임이 강조된 인물이 등장하는 신용카드사 TV 광고로도 소개됐다. 앤디 워홀 이후의 팝 아티스트로 칭송받고 있지만 줄리언 오피는 자신의 작품을 ‘사실주의’라고 말한다. 인터넷 홈페이지(www.julianopie.com)를 통해 아기 턱받이 등의 예술 상품을 팔 정도로 대중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한국의 대표적인 미디어 아티스트인 양만기는 남산을 중심으로 시간과 계절별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서울의 모습에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적인 이미지인 중절모에 우산을 쓴 사람이 중첩된 환상적인 화면을 선보인다. 기네스북에도 오를 예정인 서울스퀘어의 미디어 캔버스는 건물 외벽을 대형 스크린처럼 꾸미는 서울시의 미디어 파사드 심의를 통과한 1호 작품이다. 서울시는 브뤼셀의 덱시아타워나 도쿄의 샤넬타워처럼 서울스퀘어가 서울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지만 빛 공해나 광고화를 우려해 두 달이 넘도록 신중하게 심의했다. 결과적으로 서울스퀘어의 미디어 캔버스는 반사체 표면의 밝기인 휘도가 적당해 야간 운전자의 시야에 빛 번짐 현상 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한 달 전기료는 아파트 두 채에서 쓰는 정도의 수준이라고 한다. 현재 서울스퀘어의 소유주는 미국 투자은행인 모건 스탠리다. 기차를 타고 상경한 지방 출신들에게 1970년부터 위압적인 서울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던 서울스퀘어는 대우그룹 ‘세계 경영’의 상징이기도 했다. 건물의 리모델링은 끝났으며 입주사들을 위해 내부를 정비 중이다. ●시민들 “상영시간 늘려달라” 뜨거운 반응 건물 5층에서 힐튼호텔로 이어졌던 구름다리와 한국을 대표하는 조각가 고(故) 김수근씨가 일부 설계한 외벽은 선컨 가든 형태로 여전히 남아 있다. 선컨 가든 입구에는 데이비드 걸스타인의 대담한 색상의 자전거를 타는 사람, 나무 등이 설치됐고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과 론 아라드, 지니서, 박선기, 김은주의 작품이 서울스퀘어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서울스퀘어에 설치된 미술 작품들의 총 가격대는 60억원 수준이다. 줄리언 오피의 작품을 시작으로 2010년부터 서울스퀘어에 미디어센터가 설치되어 서울시와의 협의를 통해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상영될 예정이다. 서울스퀘어에서 상영되는 줄리언 오피의 작품 속에서는 익명의 군중이 강처럼 걸어간다. 오피는 “인간에게 움직임은 매우 중요하다.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은 항상 움직이고 움직임으로 인해 살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그래픽 강미란기자 mrka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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