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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나라, 대통령 중임제 추진

    한나라당 뉴밀레니엄위원회(위원장 金德龍)는 14일 전체회의를 열고 대통령의 4년 중임제와 정·부통령제 도입을 추진키로 합의했다.위원회는 이날 합의된 사항을 이회창(李會昌)총재에게 건의키로 했다. 박준석기자
  • 李총재, 金德龍의원 ‘월권’ 제동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와 김덕룡(金德龍)부총재 사이에‘세(勢)싸움’조짐이 보이고 있다. 김부총재는 지난달 당내 ‘뉴밀레니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이후 본격적으로 세확산을 시도하고 있다.당초에는 이총재도 ‘제2창당’을 이끌 선두주자로 평가,상당한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위원회가 ‘월권(越權)’ 움직임을 보이자 이총재가 바로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이총재는 8일 총재단·주요당직자 연석회의에서 경고성 일침을 가했다.위원회가 얼마전 대통령중임제 등 개헌문제를 논의한 것과 관련,“어떤 논의든할 수 있지만 그것이 마치 당론으로 결정된 것처럼 보도되는 것은 곤란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부총재를 직접 겨냥하진 않았지만,‘월권’에 대한 자제를 요구하면서 그 권한 범위를 명확하게 획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총재측은 또 위원회의 자체적인 영입활동에 대해서도 걱정스런 눈초리를보내고 있다.김부총재는 최근 방송인 L씨를 비롯,K·P·S씨 등 대학교수와전문가그룹을 꾸준히 접촉하며 영입의사를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영입대상자가 확답을 하지 않아 총재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 아니겠느냐”며 애써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경계심은늦추지 않고 있다. ‘차세대주자’로 거론되는 김부총재의 세확산 움직임은 다른 여러 곳에서도 감지된다.지난달에 단행된 당 인사에서 김부총재는 자신의 계파로 분류되는 맹형규(孟亨奎)·이사철(李思哲)의원을 각각 총재비서실장과 대변인 등요직에 앉혔다.잦은 계파모임을 통해 당내 어느 중진보다 확실하게 ‘자기사람’을 챙긴다는 평이다. 박준석기자 pjs@
  • 취임18개월 맞은 金成勳농림

    김성훈(金成勳) 농림부장관이 3일로 취임 1년6개월을 맞았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래 최장수 장관이다.교수 출신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일정도로 탁월한 행정능력을 인정받은 셈이다.김장관은 “과분할 정도로 자리를 누리고 있다”면서 “새 천년 농업기반의 틀을 다진 데 무엇보다 보람을느낀다”고 말했다.기존 농업기본법을 지난 2월 새 시대에 맞게 농업·농촌기본법으로 바꾼 것을 말한다.농업을 경제적·공익적 기능을 하는 국가기간산업으로 새삼 자리매김한 데 뜻이 있다.오는 2004년 쌀시장 개방에 대비,농민에게 소득보상을 해주는 ‘직접지불제도’의 내년도 도입이 정부의 의지를 가늠하는 사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이달 말까지 기획예산처와 협의해 2,500억원의 예산을 반영토록 하고,여의치 않으면 국회에서 이를 관철시키겠다는 각오이다. 김장관은 또 50년만에 농·축협을 통합하는 기틀을 마련한 개혁입법이야말로 농민을 위하는 농정의 이정표를 세운 것이라고 강조했다.오는 10일쯤 통합설립위원회를 구성,통합에 따른 실무작업을 차근차근 추진할 계획이다. 통합에 반대한 축협도 이제 통합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협조가기대된다고 말했다.특히 김장관은 “그동안 대통령으로부터 질책을 많이 받다가 통합법 처리가 끝난뒤 처음 ‘수고했다’는 칭찬을 들었다”고 털어놨다.그는 농·축협 통합을 공정하게 추진하기 위해 1급 이상 간부에게 받았던 사표를 이날 되돌려줬다.세계무역기구(WTO) 협상에 공을 세운 국·과장을한 직급 승진시키는가 하면 자택에 찾아와 인사청탁을 하던 과장은 전보조치하는 신상필벌을 엄격히 적용하고 있다. 김장관은 “태풍이 다 물러간 뒤인 10월5일에 작황전망을 발표키로 했다”고 말을 아꼈으나 올해 쌀 3,600만석 수확이 무난할 것으로 기대했다.또한주곡자립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과 관련,“준농림지역의 확대가 러브호텔의 난립과 채소·과실류값 폭락 등 영농환경을 해치고 있다”면서 농지의52%에 달하는 준농림지역의 축소방안을 검토중임을 내비쳤다. 김장관은 재임중 일일명예장관,이동장관실 운영 등 실천하는 농정을 펼쳐농정의 신뢰성을 크게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최근 조용히 회갑을 치른그는 “끝나면 학교로 되돌아갈 것”이라며 정치권의 영입설을 일축했다. 박선화기자 psh@
  • [義烈 독립투쟁](4)송학선 의사

    일제에 맞서 국권수호와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한 의병·독립군·광복군·의사·열사 가운데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분들이 의외로 많다.신돌석(申乭石)의병장을 비롯해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洪範圖)장군,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李奉昌)의사 같은 분이 그런분들이다.1926년 순종(純宗) 승하 직후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앞에서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송학선(宋學善)의사 또한 그러한 인물 가운데한 분이다. 1893년 서울 천연동에서 출생한 송 의사는 13살 때 보통학교를 1년 다닌 것 외에는 별다른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다.또 극심한 가난 때문에 어려서는가족이 흩어져 방랑생활을 하였으며 일본인이 경영하는 농구상점·사진관 등을 전전하며 호구(糊口)를 해결하기도 하였다.말년에는 영양실조로 각기병까지 걸려 고생한 송 의사였지만 조국에 대한 애정은 배운 사람 못지않았다. 1926년 ‘금호문 의거’로 체포된 후 일본인 판사가 “피고는 어떤 주의자(主義者)인가,사상가(思想家)인가?”라고 묻자 송의사는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총독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고 답변하였다.송 의사는 사상·주의는커녕 배후세력이나 후원자조차 없었다.굳이 송 의사를 평가하자면 순수한 애국심에서비롯한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송 의사의 의거는 1926년 4월 26일 조선왕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승하가직접적인 계기가 됐다.대한제국의 마지막 임금으로 망국의 쓰라림을 경험한순종의 승하 소식은 많은 조선인들에게 망국의 슬픔을 절감하게 했던 것이다.이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전국 곳곳에서 머리를 풀고 엎드려 궁성을 향해망곡(望哭)하였으며 서울에 거주하던 백성들은 창덕궁으로 몰려들어 통곡하기도 하였다.고종 승하후 3·1의거를 경험한 일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군경(軍警) 총동원 채비를 갖춘 채 창덕궁 일대에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평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안중근(安重根)의사를 흠모해오던송 의사는 사이토 총독을 처단키로 결심하고 의거에 사용할 칼을 구입,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그러던 차에 4월 26일 순종이 승하하자 송 의사는 사이토가 조문차 순종의 빈소가 있는 창덕궁을 찾을 것으로 확신하고창덕궁 입구에서 처단키로 작정하였다.이튿날 송 의사는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앞에서 군중들 틈에 끼여 사이토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사이토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장소를 바꿔 돈화문 서쪽 금호문 앞에서 사이토를 기다리고 있던 송 의사는 오후 1시 10분경 고관 차림의 일본인 3명을 태운 자동차가 창덕궁으로 들어가자 그 중 1명이 사이토일 것이라고 판단하였다.얼마후 그들이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나오자 송 의사는 비호같이 자동차에 뛰어 올라 왼쪽에 앉은 자의 오른쪽 가슴과 왼편 허리를 찌른 후 다시 중앙에 앉아 있는자의 가슴과 배를 찔렀다.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송 의사는 차에서 내려 인근 재동(齋洞) 방면으로 내달렸다.현장을 목격한 일경들이 추격하여 송 의사를 에워쌌으나 이들은 송 의사를붙잡기는커녕 오히려 육탄전에서 여러 명이 중상을 입었다.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송 의사는 결국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당시 신문보도에 따르면,일경 5,6명은 칼을 빼들고는 달려들지도 못한 채 한참 서서 송 의사를 바라보다가 돌멩이를 집어던졌다고 한다(‘동아일보’,1926.5.2).송 의사는 일경 수 명과 대치 와중에도 의연한 기개를 잃지 않았다. 한편 송 의사가 처단한 자들 가운데 사이토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그들은경성부 평의원 다카야마 다카유키(高山孝行)·사토 도라지로(佐藤虎次郞)·이케다 조지로(池田長次郞) 등 3인이었다.이들 가운데 칼을 맞은 다카야마는 즉사하고,사토는 중상을 입었다.또 육탄전 와중에 송 의사의 칼을 맞은 조선인 순사 오환필(吳煥弼)과 일본인 기마경찰 1명도 중상을 입었다. 일제에 피체된 송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고 거사 이듬해인 1927년 5월 19일서대문형무소에서 3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송 의사의 의거는 비록 목표로삼았던 사이토를 처단하지는 못했지만 그 반향은 실로 대단했다.3·1의거 이후 급격히 활성화되었던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일시 소강상태에 빠져 있었다.또 일부 조선인들은 사이토의 교활한 ‘문화정치’ 전략에 일시적으로 말려들어 현실에 안주하고 있던 상황이었다.바로 이러한 때 서울 한복판에서 한 순박한 애국청년의 의거를 계기로 조선민족은 다시 민족의식을 회복하게 되었고 비록 3·1의거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이는 다시 6·10만세 의거로 불타오르게 된 것이다. 1962년 정부는 송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였다.송 의사피체 후 보도된 신문기사에는 가족으로 부모와 동생 2명만 언급돼 있을 뿐처자에 대한 얘기는 없는 것으로 봐 의거 당시 송 의사는 미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현재 송 의사 관련 기념사업회나 추모모임이 없는 것은 물론 보훈처에서 유족의 근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나라를 위해 목숨을바친 순국선열이 가신 지 한 세기도 채 못돼 벌써 잊혀지고 있으니 안타깝고 부끄러운 노릇이다. 채영국 독립기념관 연구원·문학박사*의거 현장 금호문 앞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좌우에는 작은 문 두 개가 있다.오른쪽으로는 단봉문(丹鳳門),현대그룹 사옥쪽인 왼쪽으로는 금호문(金虎門)이 있다. 바로 이 금호문 앞이 송학선 의사가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현장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왕조 궁궐 가운데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지켜본 궁궐이라고 할 수 있다.이는 조선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망국을 맞았기 때문이다.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은 순종은 황제 즉위 후 덕수궁에서 이곳 창덕궁으로 옮겨 기거하고 있었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일제는 순종을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시킨 후 ‘이왕(李王) 전하’ 혹은 창덕궁에 기거한다고 해서 ‘창덕궁 전하’라고 부르곤 했다. 일제는 ‘망국의 임금’인 순종을 위로한다는 미명하에 망국 이듬해인 1911년부터 인근 창경궁에 동물원·식물원을 조성하면서 궁궐을 훼손하였다.창경궁이 창경원으로 격하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송 의사의 의거 현장인 금호문 앞 일대는 창덕궁 관광객들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현재 이곳에는 송 의사의 의거현장임을 알리는 표지석은 물론안내판 하나도 서 있지 않다.창덕궁 관계자는 “최근 일본인 관광객이 부쩍늘었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사이토총독 어떤 인물인가 일제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처단 대상으로 지목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일본 해군대장 출신으로 제3·5대 조선총독을 역임했다.재임기간은 10년 1개월로 역대 조선총독 가운데 중임한 사람은 사이토가 유일하다.1856년 일본 이와테(岩手)현에서 태어난 사이토는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25세인 1882년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이후 해군에서 승승장구,41세인 1898년에는 해군차관,1906년에는 49세의 나이로 해군의 수반인 해상(海相)에 올라 8년여 동안 자리를 지켰다.이어 1919년 8월부터 두 차례나 조선총독을 역임했고,1932년 5월 일본 내각의 수상에 취임하였다. 일본 군국주의 체제하에서 정치엘리트로 내각 수반직에까지 오른 사이토는두 얼굴을 지닌 대표적인 인물이었다.사이토는 3·1의거 후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이 가장 고조되어 있을 때 조선총독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그는 총독 취임 후 소위 ‘문화통치’라는 슬로건 아래 문관(文官)총독제허용,헌병경찰제 폐지,지방자치제 실시,산미증산계획 등을 내걸었다.그러나이러한 사탕발림식의 제도는 그의 재임기간 내내 거의 실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강화된 무단통치로 나타났다.즉 문관출신 총독은 해방이 될 때까지 단 한 사람도 임명된 적이 없고,경찰은 이름만 바뀐 채 이전보다 더 늘었으며 증산된 쌀은 한국인의 입으로 들어가는 대신 모두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한편 사이토는 부임 초부터 한국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처단 대상으로 지목됐었다.경성(현 서울)에 부임하는 날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64세의 노 투사 강우규(姜宇奎)의사로부터 폭탄세례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1924년 5월에는만주의 독립군단인 참의부(參議部) 대원들이 압록강을 순시하는 그와 그의일행을 공격,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는 결국 귀임 후 1936년 2월 26일 소위 ‘2·26사건’때 후배 청년장교들에게 암살당했다. 채영국 연구원
  • 金대통령,동강댐건설에 ‘부정적’ 견해 피력 안팎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6일 개인적인 생각임을 들어 영월 동강댐 건설에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사견임을 전제했지만,지난 3월 모 방송이 환경단체의 주장을 빌려 일방적으로 동강댐 건설 반대 특집보도를 했을때 ‘격노’했던 것에 비하면 입장이 달라지고 있음이 감지된다. 김대통령은 이날 강원지역 4개 지방MBC와의 공동회견에서 현재 숙고중임을전제,“개인 의견으로는 안할 수만 있다면 건설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환경보전 입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일을 정부가굳이 할 필요가 없다”며 과학적인 조사결과를 통해 최종결론을 내겠다고 밝혔다. 김대통령의 이같은 자세 변화는 정부 정책의 급격한 전환을 의미하는 것은아니다.김대통령이 그동안 환경단체나 건설론자,어느 일방의 주장에 따르지말고 종합적이고 과학적인 검토를 지시했다는 점에서 그렇다.다만 5·24 개각 이후 신임 장관들의 업무보고때 이건춘(李建春)건교부장관으로부터 종합적이고 객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는 보고를 받고나서부터 부정적인 생각을갖기시작한 것으로 관측된다. 이기호(李起浩)청와대경제수석도 “김대통령의 생각은 처음부터 물 수급과홍수조절에 대한 대처방안이 있으면 동강댐을 건설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앞으로 물부족,홍수 등 제반문제를 원점에서 검토,연말까지(6개월 이내에) 최종결론을 내릴 계획”이라고 말했다.이어 지난달 말 총리실 수질개선기획단 산하에 환경단체와 시민단체가 참여한 ‘영월댐 건설 타당성 종합검토를 위한 공동조사단’을 구성,작업중이라고 전했다. 실제 정부는 물 수급에 대한 대처방안은 마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우리나라 1인당 물소비량은 하루 409ℓ로 미·일보다 훨씬 많은 편이어서 절수를 통해 물부족 현상을 극복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김대통령도 “절수방법은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동강이 남한강 수계지역이어서 집중호우때의 수도권 홍수조절기능이 관건이다.김대통령은 이에 대한 조사단의 결과가 나오면 최종결론을 내린다는 생각이다. 양승현기자 yangbak@
  • 金대통령, 코언 면담…휴가지서 이례적 접견

    북한이 미사일 재발사 기미를 보이면서 ‘미사일 공조’문제가 한·미간 초미의 과제가 되고 있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29일 하계휴가중임에도 코언미 국방장관을 접견한 데서 분위기가 읽혀진다.면담은 이날 오전 이례적으로대통령 휴가지인 청남대에서 우호적 분위기 속에 1시간40여분간 진행됐다. 김대통령과 코언장관은 두가지 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북한 미사일재발사 억지와,한국산 미사일의 사거리 연장문제가 그것이다.북한 미사일문제가 주된 토픽이었다.북측이 일을 저지르기 전에 억지하는 방안은 물론 사후문제도 거론됐다. 배석한 박준영(朴晙瑩)청와대대변인은 김대통령이 한·미·일 3국의 긴밀한공조를 역설했다고 전했다.즉,“북한의 위협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은 발사전은 물론 발사 후에도 3국이 철저히 공조하는 것”이라는 취지였다. 물론 강조점은 발사를 사전에 막는데 있었다.김대통령은 이를 위한 당근과채찍을 제시했다.“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할 경우 북한에도 이익이 되지 않을것이며, 발사를 하지 않을 때는 많은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한것이다.코언장관도 이에 동의했다. 박대변인은 그러나 북한이 미사일을 쐈을 경우 한·미의 구체적 제재방안에대해선 절제된 자세였다. 다만 그는 “한국의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지지는물론 미국의 확고한 ‘대한 안보협력’을 확인한다”는 코언장관의 발언을소개했다.대북 제재국면으로 갔을 때 한·미 공조 ‘방향’의 일단을 내비친것이다. 한·미간 미묘한 현안인 한국산 미사일 사거리 연장문제에 대해서도 박대변인은 언급을 자제했다.다만 사거리 500km 연구개발문제는 양국의 실무전문가들이 가급적 빨리 협의해 나가기로 하는 선에서 조율이 이뤄졌을 것이란 관측이다.김대통령의 최근 방미시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논의한 내용과 같은 맥락이다. 접견에는 한국측에서 조성태(趙成台)국방장관과 황원탁(黃源卓)외교안보수석이,미국측에서 보스워스 주한 미대사,존 틸럴리 한미연합사령관 등이 배석했다. 구본영기자
  • 北 앉기전 시비‘가시밭 對坐’예고

    베이징 구본영특파원 난산(難産)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21일 베이징 남북 차관급회담은 북한측의 두차례 연기 통보로 초반부터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향후 험난한 ‘회담 파고’를 예고하는 대목이다. 북한측은 우리측이 제시한 회담시간(오전 10시)에 대해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돌연 오전 8시쯤 오후 3시로 회담 연기를 요청해 왔다.회담이 임박한오후 2시20분쯤엔 추후 회담 시간도 정하지 않은 채 다시 연기를 통보,우리측 대표단을 아연 긴장케 했다. 북한측은 권민 참사관 명의로 전화통보를 통해 “남측이 회담전 20일까지인도키로한 10만t 비료수송약속을 안지켰기 때문에 회담을 할 수 없다”고일방통보했다. 이에 우리측 수석대표인 양영식(梁榮植) 통일부차관은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비료 2만2천t을 실은 11항차 수송선이 오후 1시10분 여수항을 출발,저녁8시30분 북방한계선을 지나 내일 새벽 2시께 북한 남포항에 도착할 예정”이라면서 “비로 수송선 출발이 다소 지연됐다는 설명을 했음에도 북한측이 회담을 연기시킨 것을 이해할수 없다”고 밝혔다.그는 이어 “북한측이 회담에 즉각 응할 것을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북한측은 회담연기를 통보하면서 “비료 10만t이 도착한 이후 적당한 시기에 회담을 한다”고 밝혀 회담을 완전 무산시키지는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양영식(梁榮植) 남측 수석대표는 이날 오전 “북측이 공식으로 회담일정에 관한 입장을 알려오면서 오후 3시에 회담을 개최할 것을 요청해왔다”고 가자들에게 전했다.그는 이어 “이산가족 문제는 반백년동안 기다려 온 사안인데 몇 시간 기다리지 못할 입장이 아니다”며 수용의사를 밝혔다.그러나 오후 다시 회담을 연기해오자 “북측이 회담일정에 대해 언급이 없었다”고 다소 난감해했다.양수석대표는 “주재관을 통해 북측과 계속 연락을 유지하겠다”고만 말해 비공개 접촉라인은 정상가동중임을 시사했다.다른 한 당국자는 북측이 회담 개최 시점을 미룬 것과 관련,“부정적으로 해석하지 말아 달라”고 주문했다.북측의 변칙 움직임이 회담 파국의 예고편은 아니라고 애써 강조한 것이다.그러나 일부 관계자는 서해 교전 사태 이후 북한의 대남 자세 경직화와 무관치 않다며 우려하는 표정이 역력. 북측이 회담을 오전에서 오후로 연기하면서까지 대표단 명단을 통보해주지 않자 우리측 대표들은 황당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통일부 베이징 주재관을 통한 비공개 채널로 박영수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이 수석대표로 정해진 사실만 겨우 전해들었을 뿐이었다.우리측은 북측 박영수 일행이 베이징역에 도착할 때 찍은 스틸 사진을 입수,북측 대표단에 대한 역추적 작업까지 벌이기도 했다.그러나 뚜렷한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는 후문.다만 권민 아·태평화위 참사가 회담 대표로 나올 가능성을 주목.그는 지난 97년부터 중국을 여러차례 드나들면서 99년 3월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축구대회 준비회담 북측 대표를 맡았었다. 권씨의 나이는 40세 가량으로 베이징에서 일부 국내언론사의 방북 사업을성사시키는 거간꾼 역할도 했으나 해당언론사들도 정확한 신원을 파악하지못하는 베일속의 인물.99년 4월 엄대우 국립공원 관리공단 이사장과 금강산솔잎 혹파리 방제 대책협의를 논의하는 등 남북 민간급 교류에 폭넓게 참여해 온 인물로만 알려져 있다. 실향민들은 흥분감을 감추지못하면서 베이징 남북회담 전개과정을 초조히지켜보다가 회담이 계속 지연되자 실망스럽다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김성재(金成在) 이북도민회 황해도지부 사무국장은 “회담이 잘돼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간절히 희망한다”고 말했다. kby7@
  • SBS ‘그것이 알고 싶다’…‘비소실험’소개도

    지난 5일 방송된 SBS ‘문성근의 다큐세상 그것이 알고 싶다’는 수년전 ‘기적의 암치료제’로 화제를 모은 ‘천지산’을 중심으로 암치료의 새로운경향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부제는 ‘기적의 암치료제인가,신물질 X’. 이 프로는 3년전 ‘천지산’을 처음 만들었던 배일주씨가 약의 성분이 ‘비소의 변형물’임을 확인하는 데서 시작됐다.배씨는 당시 무면허 의료행위로구속됐었다.또 ‘천지산’을 복용하고 암이 치료됐다는 사람과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켰다는 사람 등 양쪽의 증언을 고루 다뤘다. 이어 미국 의료계의 비소실험 장면 등을 보여주면서 외국에서 비소의 암치료효과를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 프로는 천지산의 효능을 무어라고 정확히 밝히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비소로 만들어진 천지산의 효능을 일정부분 인정한 셈이 됐다. 이 프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미국의 저명한 의학잡지에는 ‘비소,옛 독에서 새 생명을’이란 워렐박사팀의 연구논문이 실렸다.워렐박사팀은 비소로백혈병을 치료,특정암에서 효과를 보았다고 밝혔다. ‘천지산’이 화제를 모을 당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뒤 국내 의료계의 반발에 부딪혀 미국으로 자리를 옮겨 비소를 연구하고 있는 어느 박사를 전화인터뷰하기도 했다.그는 자신의 이름을 익명으로 처리할 것을 주문,TV에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아울러 현재 국내의료진의 입을 빌려 국내에서도 비소 실험이 한창 진행중임을 시청자에게 알렸다. 이 프로는 암치료의 작은 가능성만 있어도 크게 관심을 기울이는 미국의 의학계와 국가적 차원의 지원과 비교, 국내 의료계와 정부차원의 의식·제도의 변화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 프로를 만든 장경수PD는 “두달 후 비소실험 결과가 논문으로 나올 전망”이라면서 “그 때 후속프로를 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허남주기자 yukyung@
  • 스크린쿼터 어긴 극장 처벌 진통

    스크린쿼터(국산영화 의무상영일수)를 어긴 극장에 대한 처벌여부를 놓고전국극장연합회 등 극장측이 처벌의 유예를 정부에 요청하자 스크린쿼터 감시단 등 영화계가 강력히 반발하고 나서는 등 진통이 예고되고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스크린쿼터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처벌수준을 융통성있게 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며 처벌수위의 조정을 검토중임을 시사해 자칫 지난연말 스크린쿼터 축소 움직임에 따른 대대적인 반발이 재연되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이같이 스크린쿼터 위배 극장에 대한 처벌문제가 영화계의 현안으로 대두된 것은 지난해 스크린쿼터를 어긴 극장이 사상 최대에 이른 탓이다. 문화관광부에 따르면 지난해 스크린쿼터를 어긴 극장은 전국 527개 스크린가운데 18.5%인 98개 스크린에 이른다.96년에는 55곳,97년에는 33곳에 머물렀다. 극장 측은 “지난해 스크린쿼터를 지키지 못한 것은 사상 유례없는 제작편수의 감소 탓”이라면서 “작년에 지키지 못한 일수를 올해 스크린쿼터에 포함시켜 운영하도록 행정처분을 유예해달라”고 문화관광부에 요청했다. 지난해 국산영화제작편수는 전년의 59편에 비해 16편이나 줄어든 43편. 현행 영화진흥법에 따르면 전년말까지 스크린쿼터를 지키지 않은 극장은 위배일수가 20일 이하이면 그 날짜만큼,20일을 초과할 경우 다음해 그 두배만큼 관할 시도로부터 영업정지처분을 받도록 돼있다. 스크린쿼터 감시단은 극장측의 ‘처벌유예’주장에 대해 “상황논리에 따라 법 적용을 달리 하면 그 법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관광부는 극장측의 불가피한 사정을 양해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한 관계자는 “관객의 영화향수권,극장측의 불가피한 사정,처벌 유예 때의 법의 일관성 훼손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면서 “지난 94년 금융실명제가 시행됐을 당시 스크린쿼터 위배에 따른 처벌을 규정의 4분의 1수준으로 감경해준 선례도 있어 이같은 점을 모두 감안해 처벌수위를 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부는 극장에 대한 처벌을 확정할 경우 극장가의 비수기인 4∼6월과 11월을 택하되 가급적 빨리 매듭지을계획이다. 현재 스크린쿼터는 원칙상 146일이지만 각종 경감조치로 극장측은 106일동안 한국영화를 상영토록 돼있다.
  • [제2공화국과 張勉]- (9) 신구파 대립과 分黨(상)/비교

    李承晩독재체제에 맞선 통합야당 민주당은 1955년 9월19일 탄생한다.이날서울 태평로 시공관은 하루종일 민주주의를 희구하는 열기로 들끓었다.전국에서 모여든 민주당 대의원 2,000여명이 오전에는 발기인대회를,오후에는 창당대회를 잇달아 열었다.오전 대회에서 鄭一亨의 경과보고에 이어 張勉의 인사말이 장내에 울려퍼졌다. “대한민국을 구하고 우리의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우리는 일체의 독재를 배격한다고 정강의 서두에 내걸었습니다.우리는 진실한 민주주의를 살려나가기 위해 공정한 선거와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후의 창당대회에서는 申翼熙가 민주당 출범의 의의를 밝히는 인사말을 했고 朴順天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우리는 민주세력의 집결 강화만이 국정쇄신의 방도임을 확신한다”고 선언문을 읽어내려갔다. 창당대회 다음날 민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최고위원 선거에 들어갔다.대표최고위원 투표에서 申翼熙는 234표를 얻어 49표에 그친 張勉을 누르고 선출됐다.이어 연기명으로 실시한 최고위원 투표 결과 趙炳玉(282표)·張勉(278표)·郭尙勳(262표)·白南薰(111표)이 뽑혔다. 이들 가운데 제헌의회 의장을 지낸 申翼熙,내무장관을 역임한 趙炳玉,민국당 최고위원 출신인 白南薰은 구파였고 총리를 지낸 張勉,국회부의장인 郭尙勳은 신파였다.이밖에 중앙상무위 의장은 成元慶(신파)이 맡았다. 집행기구 16부 부장은 尹潽善(원내총무격인 의원부장)·柳珍山(노동부장)·鄭一亨(섭외부장)·玄錫虎(조직부장) 등으로 구성됐다.구파는 대표최고위원을 포함한 최고위원 세 자리와 부장 7석,신파는 최고위원 두 자리에 상무위의장과 부장 9석을 차지해 신·구파는 처음부터 팽팽한 균형을 이루며 출발했다. 민주당 창당후 처음 맞은 큰 이슈는 다음해 치르는 제3대 정·부통령 후보를 뽑는 일이었다.당시 민주당에서 대통령후보로 거론될 만한 인물은 申翼熙·趙炳玉·張勉 세 사람 정도였지만 대세는 申翼熙에게 기울어 있었다.초점은 부통령후보였다.신파는 張勉을 대통령후보로 민다고 공표했으나 내심은부통령후보를 노리고 있었다.구파는 구파대로 ‘대통령후보 申翼熙’를 기정사실로하는 한편 趙炳玉을 부통령후보로 세우려고 물밑작업을 벌였다. 이 문제는 郭尙勳이 적극 나서 해결됐다.郭尙勳은 趙炳玉을 찾아가 “이번에는 당신이 양보합시다.이번에는 누가 보아도 해공(申翼熙)이 적격이니 그를 시켜야 할 것이 아니오? 차후에 입후보하면 내가 적극 지원하겠오”라고설득한다(郭尙勳 회고록에서). 이에 趙炳玉은 “운석(張勉)이 대통령후보 경쟁에 나서지 않도록 책임져라”라는 조건으로 받아들인다.전당대회에서 申翼熙·張勉을 정·부통령 후보로 뽑은 민주당은 신·구파 구분없이 힘을 합쳐 선거운동에 매진한다. 56년 정·부통령 선거는 민주당이 李承晩정권을 누르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할 절호의 기회였다.52년의 ‘발췌 개헌’과 56년의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어진 李承晩의 영구집권 음모와 자유당의 폭정(暴政)에 이미 많은국민이 염증을 느끼는 상태였다.게다가 申翼熙·張勉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민주당이 내건 선거구호 ‘못살겠다 갈아보자’도 돌풍을 몰고 왔다. 56년 5월2일 한강백사장에서 열린 유세에는 당시로서는 짐작도 못할 30만∼40만 인파가 몰려들었다.그러나 민주당의 손에 들어온 듯하던 대통령 자리는한강백사장 유세 3일 후에 그만 손아귀를 빠져나간다.호남 유세에 나선 申翼熙가 5월5일 열차칸에서 급서한 것이다. 대통령후보 부재에도 불구하고 張勉은 李起鵬을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된다. 이로써 민주당은 창당 9개월 만에 수권 능력을 가진 야당으로서 당당히 자리잡는다.이같은 자리매김은 58년의 제4대 국회의원 선거로 연결돼 민주당은 78석을 확보한다.창당 때의 33석에 비하면 2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민주당 위상 강화와 비례해 신·구파 대립도 점차 심해져 갔다.첫 충돌은정·부통령선거 직후에 찾아왔다.56년 7월 金度演·金俊淵·蘇宣奎 등 구파중앙위원 60여명이 연명(連名)해 최고위원 불신임안을 제출한다.이에 최고위원 전원이 사표를 내고 후임자 선출을 논의하게 된다. 신파는 “국민에게서 압도적 지지를 받은 張勉부통령이 당연히 대표최고위원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구파는 표대결을 요구한다.투표 결과 대표최고위원에는 趙炳玉이,최고위원에는 郭尙勳·張勉·金俊淵·金度演이 뽑힌다. 일부에서 분당을 거론할 정도로 사태가 악화된 끝에 신·구 양파는 다음해부터 대표 및 최고위원을 중앙상무위가 아닌 전당대회에서 선출한다는 등 몇 가지에 타협하고 수습한다.이후 구파는 부통령인 張勉에게 당의 주도권을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그를 더욱 견제하게 됐고,신파는 張勉을 중심으로 더욱 똘똘 뭉치게 됐다. 59년 11월 전당대회에서 신·구파는 다시 한번 격돌한다.60년 정·부통령선거에 나갈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趙炳玉은 483대480 단 3표차로 張勉에게 신승한다.다음날 대표최고위원 투표에서는 거꾸로 張勉이 趙炳玉을 70여표차로 물리친다.최고위원에는 郭尙勳·白南薰·尹潽善·朴順天이 올랐다. 이 전당대회는 신·구파 사이에 메우기 힘든 골을 파놓았다.대회를 몇달 앞두고부터 양쪽의 경쟁은 한계를 넘어서 각종 추태가 난무했다. 趙炳玉이 대통령이 돼서는 안된다고 인신공격한 ‘결격사유 10개조’라는 괴문서가 전국 지구당에 배포되는가 하면,경남도당대회가신·구파 당원 간의난투극으로 중단되기도 했다. 신·구파의 격한 대립 속에서도 민주당은 趙炳玉대통령후보,張勉부통령후보 겸 당 대표최고위원 체제로 1960년을 맞는다.56년 申翼熙의 급서로 이루지못한 정권교체의 꿈을 이번에는 꼭 이룬다는 각오와 함께였다. 李容遠 - 신구파 내력과 특징 비교 민주당(民主黨)창당은 자유당의 ‘사사오입’개헌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자유당(自由黨)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重任)제한을 철폐’하는 내용의 제5차 개헌안을 마련한다. 李承晩에게 영구집권의 길을 터주려는 이 개헌안은 1954년 11월27일 국회에서 찬성 135,반대 60표로 부결된다.그러나 이틀뒤 자유당은 수학의 ‘사사오입’규정을 적용하면 개헌 정족수를 통과한 것이라는 궤변으로 헌법개정을공포한다. 이후 열달동안 반(反)李承晩세력은 통합야당 결성에 노력한다.한민당(韓民黨)의 후신인 민주국민당(민국당,民國黨)과 무소속 의원들은 호헌동지회를 결성해 원내교섭단체로 등록한다.여기에는 자유당을 뛰쳐나온 ‘탈당파’의원12명도 가세한다. 당시야당으로서는 민국당이 가장 컸지만 원내의석이 15석에 불과해 다른 야당 세력을 흡수,통합하지는 못했다.따라서 민국당의 발전적 해체를 전제로 55년 12월 신당촉진위원회가 구성된다. 그러나 신당추진 세력은 곧 의견대립에 부딪친다.민국당의 申翼熙 趙炳玉과재야의 張勉 등 ‘자유민주파’는 좌익에서 전향한 자,독재 또는 부패혐의가 짙은 자 등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명분으로 혁신계인 曺奉岩과 족청계 李範奭을 배제하려고 한다.반면 張澤相 徐相日 등 ‘민주대동파’는 범야세력의총결집을 주장하며 맞선다. 결국 민주당은 ‘자유민주파’만으로 출발하는데 당시 원내 의석은 33명이었다.이에 비해 자유당은 120여명,무소속은 40여명이었다.‘통합야당’을 표방했는데도 무소속으로 남은 의원이 40여명이나 된 사실은 야당의 분열상을 보여주는 증거이자,민주당의 포용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창당후 민주당은 다시 신·구파로 갈린다.구파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申翼熙 趙炳玉이 중심인물이었다.한민당을 실질적으로 이끈 金性洙가 55년 2월별세한 뒤여서 구파의 대표성은 申翼熙가 갖고 있었다. 반면 신파는 張勉을 지도자로 鄭一亨 朱耀翰 등의 흥사단계(張勉은 흥사단계로 알려졌지만 흥사단에 가입한 일이 없다),吳緯泳 金永善 李相喆 등의 원내자유당계,玄錫虎 李泰鎔의 자유당 탈당파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됐다. 한마디로 구파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구세력’이고 신파는 이를 제외한,새로 야당에 가입한 ‘신세력’이었다.하지만 더욱 중요한 차이점은 신·구파가 출신 배경,사회활동,이념적 지향에서 어느정도 구분지어진다는 점이다. 구파는 대부분 지주집안 출신에 독립운동가나 지사형이었고 상당히 보수적이었다.이에 견줘 신파는 관료·법관·금융계 출신의 전문인이 주류였다.韓昇洲 고려대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구파 지도자 가운데 80%는 처음부터 정계에나섰으나 신파 지도자는 오히려 60%가 행정·관료직으로 출발했다.韓교수는또 “연령을 보아도 구파 지도층은 평균 51세,신파는 48세로 차이가 없는 듯하지만 신파의 지도력이 사실상 명확히 젊었다”고 평가했다. 정치행태에서도 달라구파는 비조직적이고 점잖아 “하나하나가 모두 장성같았지만”,신파는 조직적이고 투쟁적이어서 상부의 명령에 일거수일투족이 움직였다.(구파 출신 閔寬植 회고록에서)민주당 신·구파는 이처럼 이질적인 요소가 강한데도 ‘李承晩정권 타도’라는 공동목표아래 힘을 모았다.초기에는 그래도 단합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59년 정·부통령 후보 선출을 놓고 대립이 심해졌다.4월혁명이후 정권장악이분명해지자 그때부터는 치열한 정권쟁탈전에 들어간다. 李容遠
  • 石吾 李東寧선생 오늘 59주기 일대기

    “선생은 재덕(才德)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최후의 한순간까지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사람이었다.”김구선생이 ‘백범일지’에서 石吾 李東寧선생을 기리며 쓴 내용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석오만큼 폭넓고 헌신적이며 종시일관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친 분도 흔치 않다. 그에 비해 평가와 관심이 크게 뒤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는 석오의 애국심과 포용력으로 유지된 바 크다고 하겠다. 8·15해방까지 임정이 유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은 석오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후계자’백범은 석오에 의해 발탁되고 지도되었다. 두사람은 7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혈맹의 義’관계에서 항상 석오가 백범을 발탁하고 지도하는 입장이었다. 석오가 아니었다면 백범의 존재는 나타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04년 석오는 항일청년단을 만들면서 무명청년 백범을 상동교회 청년회에 가입시켰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혈맹의 동지가 되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지 며칠후 백범은 임정의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석오를 찾았고 그의 노력으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안창호 밑에서 경무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利)를 보면 겸양을 생각하고 의(義)를 보면 위험을 무릅쓰는” 석오의 인품을흠모해온 백범은 항상 그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해방후 백범은 아들 信을 시켜 중국땅에 외롭게 묻힌 석오의 유해를 고국으로봉환하여 서울 효창공원에 안치하였다. 석오의 생애는 국내에서 선각적 개화운동의 전기와 임정을 이끌면서 망명생활로 생애를 마친 후기로 나눌 수 있다.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나서 잘못된정치를 탄핵하다가 이준·이승만과 함께 옥고를 치루고, ‘제국신문’논설위원, YMCA운동, 을사조약 반대 결사대로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 안창호·양기탁등과 신민회조직, 안창호·이회영과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발행 지원, 상동학교 설립 등 37세때까지 국내에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한일합병 뒤 만주로 망명,서간도에서 이회영·이시영 등과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와 신흥학교를 설립한데 이어 한국군관학교를 세우다가투옥되는 등 만주지역의 항일투쟁을 주도하다가 3·1항쟁후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석오는 망명길에 나서면서 자식들에게“우리가 이제 합병의 참변을 당하였으니 왜놈들은 우리를 금수와 같이 다룰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아버지를따라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자. 나라없는 백성은 어디를 가나 서럽고 비참한 것이다. 만리타향 객지에서 고생할 각오를 한 몸, 그러나 내가 죽기 전에 조국이 광복되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이상의 더 큰 소망이 없겠다.”고 당부하면서 다시 못올 고국을 떠났다. 석오는 임정의 내무총장, 대통령직무대행, 국무령, 주석 등 요직을 지내고 백범과 함께 임정을 이끌었다.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로 추대되어 항일 구국투쟁을 지도하였다. 1940년 3월 13일 중국 사천성 기강현 임시정부 청사의 초라한 이층방에서한 많은 생애를 접을 때그의 나이 72세였다. 임정은 간소한 국장으로 그의장례를 치렀다. 해방은 그러고도 5년 뒤에야 찾아왔고 석오의 유해는 3년 뒤에야 그리던 고국에 안장되었다. 뒤늦게나마 석오선생의 독립정신과 애국혼이 선양되어 정직한 역사가 쓰였으면 한다. 김삼웅주필kimsu@- 李東寧선생 연표 ●1869년 충남 천안서 출생●1892년 국가고시 응제진사에 합격●1897년 독립협회 활동으로 7개월간 옥고 치름●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항의,연좌데모로 2개월 옥고치름●1907년 신민회 조직에 참여●1910년 만주서 신흥학교 설립,초대소장 취임●1919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국무총리,내무총장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1929년 한국독립당 이사장·의정원 의장●1935년 임시정부 세번째 주석 취임●1939년 임시정부 네번째 주석 취임,전시내각 구성●1940년 급성폐렴으로 치장서 타계,임시정부 첫 국장(國葬)지냄●1948년 유해봉환,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 - 손자 李奭熙씨 및 후손 근황 “어릴 때부터 조부님께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셨다는 얘기를듣고 자랐습니다만 그동안 기업경영에 전념하느라고 손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죄스럽습니다.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으니 조부님의 기념·현창사업에 여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석오 이동녕 선생의 손자인 李奭熙(67)(주)대우 상담역은 석오 선생 기념사업에 관한 포부로 말문을 열었다.경기고·서울대 법대를 졸업(55년)후 중소기업체에 근무하다가 68년 대우실업에 입사한 그는 대우개발 사장·대우자동차 회장·대우 부회장·경총 부회장·대우증권 회장·대우통신 회장·대우일본법인 회장 등 대우그룹 주요계열사의 최고경영자를 두루 거친 ‘대우맨’이다. 그의 부친,즉 석오 선생의 아들 李義植씨(1900년생)는 유명한 내과전문의였다.일제때 보성전문학교의 교의(校醫)를 지낸 그의 부친은 미군정 당시 민주의원·한독당 조직부장 등 정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또 반민특위의 특별검찰관으로도 활동했으며 이듬해 6·25 와중에 납북됐다. 2남3녀의 형제 가운데 그는 차남이다.그의 형 喆熙씨(75년 작고)는 경기고·보성전문 출신으로 보사부장관비서관,문교부 편수국장·기획관리실장,서울교대 학장 등을 지냈다. 그동안 그는 석오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널리 알리기위해 소리없이 많은일을 해왔다.우선 그는 ‘이동녕연구’의 일어판(94년)·중국어판(98년)을사재로 출간했다.89년에는 ‘백범일지’의 필사본을 책으로 출간,앞서 출간된 ‘백범일지’가 원본의 상당부분을 누락시킨 사실도 밝혀냈다.또 작년에는 석오 선생이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현 국회의장격)을 지낸 사실을 토대로 국회의사당 내에 석오선생의 흉상을 건립하였는데 그는 이를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정운현- '臨政 의 거인' 李東寧 석오(石吾) 李東寧(1869∼1940) 선생은 임시정부 탄생의 주역이자 임정의‘기둥’이었다.임시정부가 공식출범하기 직전인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국호(國號)와 임시헌법·관제(官制)를 제정,3일후인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선생은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비롯해 의정원 의장 3회,주석(主席) 4회 등 무려 일곱 차례나 임정의요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임시정부사를 통털어 선생만이 유일한 기록이다. 석오 선생이 임정내 이념·계파간의 갈등 속에서도 별다른 ‘잡음’없이 요직을 중임한 것은 선생이 공명정대한 업무처리와 온후한 인품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은 때문이다.이 때문에 선생은 임정이 내부갈등이나 일제의 탄압으로 난국을 맞을 때마다 중책을 맡아 임정을 위기에서 구하곤 했다.일제는 이러한 선생을 회유,이용하기 위해 조선인 관리 洪承均을 시켜 선생에게 추파를 던졌으나 이를 즉석에서 일축,이 일로 선생의 부친이 원산에서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뤘다. 합리주의자였던 선생은 출신지역·계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기호(畿湖)지방의 양반출신들이 주축을 이루던 신민회(新民會)에 황해도 출신의‘무명인사’ 백범 金九를 추천하여 가입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다.이 일로두 사람은 남다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백범은 ‘백범일지’ 곳곳에 선생의 행적과 개인적인 친분에 대해 언급해놓고 있는데 이는 평소 백범이 선생을 독립운동계의 선배 이상으로 예우한 것으로 보인다.48년 ‘남북협상’차북한을 다녀온 백범이 아들 信을 시켜 모친(곽낙원)과 처자(최준례·김인)의 유해를 봉환해오면서 이 때 같이 봉환해온 분이 바로 석오 선생과 임정 국무위원겸 비서장 출신 車利錫 선생이었다.62년 선생은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는데 이를 두고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이 많다.임정 정부수반급은 대개 1등급을 받았으며 심지어 李承晩의 비서 출신 임병직씨도 1등급을 받았다. 임정요인 출신 趙擎韓 선생은 생전에 “선생은 지위나 돈 따위를 탐내지 않는 순결무구한 분으로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으뜸이었다”고 회고했다. 정운현- 李東寧 선생 효창공원 묘소서 오늘 추모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지낸 石吾 李東寧 선생의 ‘제59주기 추모식’이 13일 오전 11시 서울용산구 효창공원 석오선생 묘소에서 열린다. 석오선생 기념사업회(회장 姜英勳)가 주최하는 이 추모식은 추모기도와 석오선생 약사보고,추모사·추념사,추모가 제창,헌화분향의 순으로 진행된다. 행사 진행을 맡은 석오기념사업회 金錫營 부회장(69)은 “3·1독립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80주년을 맞아 거행하는 올해의 추모식은 감회가남다르다”고 말했다.60주기인 내년에는 추모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재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장학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추모식에는 崔圭鶴 국가보훈처장, 高建 서울시장,尹慶彬 광복회장,朴維徹독립기념관장,국민회의 張在植·李錫玄·鄭漢溶의원,자민련 李東馥의원,한나라당 李漢東·吳世應·徐廷和·朴明煥의원,李奭熙 석오선생 유족회장,李元範 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李榮載 대종교 총전교,金信 백범선생기념사업회고문을 비롯한 각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상록
  • 페리 방한결과 보도문

    월리엄 페리 미 대북정책조정관은 99년 3월8∼9일 한국을 공식 방문하였다. 아스톤 카터 특별보좌관과 국무부 아·태국 필립 윤 보좌관이 페리 조정관을 수행하였으며,페리 조정관은 金大中대통령을 예방하고 洪淳瑛외교통상부장관 및 林東源외교안보수석을 면담하였다. 방한기간 중 페리 조정관은 미국의 대북정책 전반에 관한 검토와 관련하여자신의 잠정적인 구상을 설명하였고,양측은 이에 관하여 심도 있고 포괄적인 협의를 가졌다.양측은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개발 계획으로 야기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포괄적인 접근방법이 필요하며,그 과정에서 한·미간 긴밀하게 공조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이러한 접근방법은 한국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을 기초로 한 것이 될 것이다.클린턴 미 대통령은 金大中대통령과가진 두 차례의 정상회담에서 포용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바 있다.페리조정관은 본인의 정책 검토가 아직도 진행중임을 강조했다.한·미 양국은 앞으로 페리 조정관이 자신의 대북정책 검토를 완료할 때까지 계속 긴밀히 협의해 나가기로 하였다.
  • 對北 포용정책 韓-美 철저 공조

    한·미 양국은 9일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키기는 데 대북(對北)포용정책이 유효하다고 보고 계속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金大中대통령과 윌리엄 페리 미 대북정책조정관은 이날 오후 청와대 면담을마친 뒤 ‘페리 조정관의 방한 결과 보도문’을 발표,한·미간 철저한 공조속에 포괄적 접근방법으로 북한 핵 및 미사일개발 계획에 대처해 나가기로의견을 모았다고 밝혔다. 보도문은 “양측은 북한의 핵 및 미사일개발 계획으로 야기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포괄적 접근방법이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한·미간 긴밀하게 공조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고 밝혔다.보도문은 이어 “이러한 접근방법은 한국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기초로 한 것이 될 것이며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金대통령과 가진 두 차례의 정상회담에서 포용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바 있다”고 지적했다. 보도문은 또 “페리 조정관은 본인의 정책 검토가 아직도 진행중임을 강조했으며 대북정책 검토를 완료할 때까지 계속 긴밀히 협의해 나가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金대통령은 포용정책을 바탕으로 포괄적 대북 접근방식만이 한반도의 냉전체제를 해체,대북 현안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임을 강조했다. 페리 조정관은 이에 대해 대북 포용정책의 중요성에 인식을 같이하고 자신의 보고서도 이같은 기조 위에 작성될 것임을 밝혔다.페리 조정관은 그러나포용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현안인 북한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의비확산문제도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洪淳瑛외교부장관과 林東源청와대외교안보수석은 이날 오전 한남동 외교부장관 공관에서 페리 조정관과 조찬모임을 갖고 대북 정책보고서의방향과 최근 북한 정세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미 의회 대북 강경파를 의식,페리 조정관이 2단계조치를 보고서에서 거론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그러나 구체적이지 않고원론적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 여·야 총재회담 내주 예상…徐의원 체포동의안 절충

    金大中대통령과 李會昌한나라당총재 간의 청와대 총재회담이 다음주중 열릴 전망이다. 金正吉청와대정무수석은 4일 “이번 주말 여야협의가 충분히 되면 다음주여야총재회담 성사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말했다. 金수석은 “회담 성사에는 한나라당측이 공식적으로 전제조건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徐相穆의원 체포동의안 처리 문제가 마지막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이 문제도 여야 총장·총무회담 과정에서 매듭이 풀리지 않겠느냐”고 전망했다. 金수석은 “우리는 徐의원 문제가 전제조건이 될 수 없으며 총재회담과 분리돼야 한다는 입장”이라면서 “그러나 머리를 맞대고 얘기하다 보면 풀릴것”이라고 말해 이 문제에 관해 여야간 집중적 절충이 진행중임을 시사했다.
  • 金대통령 취임1주년 기자회견

    金大中대통령은 24일 “북한이 석방된 남파간첩 17명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는데 대해 이해하지만 우리 역시 북한에 있는 국군포로나 납북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다”면서 “북한과 우리 사이에 서로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공정한 대화가 있기를 바란다”고 미전향 장기수 북송과 국군포로 및 납북자 송환문제를 함께 논의할 것을 북측에 제의했다. 金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취임 1주년 내외신기자회견을 갖고 “지금까지 북한과 공개·비공개 접촉은 없었지만 남북한 양측의 의견이 맞아가고 있는 과정이어서 북한과 정부 레벨의 대화가 이뤄지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또 “북한에 식량과 비료를 지원하고 싶으며,이는 적십자사를 통해 인도적으로 하는 방법도 있다”고 전제하고 “상호주의 원칙을 버리지 않지만 융통성 있게 적용하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개각여부에 대해 “지금 당장 개각을 서두를 생각은 갖지 않고 있다”고 전하고 “그러나 청와대 비서실의 사회복지분야는 둘로 나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노동복지수석 신설을 분명히 했다. 金대통령은 “지역감정은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최근에 생긴 것으로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며 국민통합에 자신감을 피력했으며 “금년에는 반드시 정치를 안정시키고 국회,선거,정당조직 등의 개혁을 실현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특히 정국정상화에 대해서는 “야당을 국정의 동반자로 인정하고,의원도 빼내오는 일이 없을 것이므로 야당도 책임있는 야당으로서 모든 것을 원내에서 다뤄나가도록 하고,지역감정 조장행위를 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주문했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문제에 대한 질문에 金대통령은 “정당명부식이냐,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역정당화를 막는 길이 중요하다”면서 “모든 정당이 전국정당으로 나갈 수 있는 제안을 한다면 정당명부제가 아니더라도 토론할 수 있다”고 야당의 동참을 촉구했다. 金대통령은 국가인권위원회 설치에 대해서도 언급,“대통령과 법무부가 관여하지 않는 자유로운 민간기구로 구성하는 방향으로 정리돼 가고 있으며,인권위원으로 명망과 능력을 겸비한 인물을 선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가보안법 개정에 대해 金대통령은 “정부와 공동여당 내에서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에 있으며,멀지않아 태도를 밝힐 것”이라고 말해 개정작업이 진행중임을 시사했다.
  • 대한항공 한장석감독 챔프전 필승 카드

    한장석 감독의 전술이 빛을 발할수 있을까-.대한항공과 삼성화재가 맞붙는99한국배구슈퍼리그 남자부 최종결승전(24일부터 5전3선승제)의 관심은 대항항공이 얼마나 분전하느냐에 모아진다.대한항공은 86년 팀 창단후 처음 최종결선에 오른데 반해 삼성화재는 대회 3연패를 노린다.올시즌 두 팀간 5차례의 맞대결에서 대한항공이 모두 패했다.전문가들도 ‘대한항공이 1승을 건질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할 만큼 삼성화재의 승리를 예견한다. 그러나 대한항공의 한장석 감독은 이길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다.그는 독특한 전술로 팀의 경기력을 배가시겠다고 이를 악문다. 한 감독이 가장 중시하는 전술은 서브의 강화.박희상 등이 상대편 주포를향해 강력한 스카이서브로 목적타를 날리고 때로는 길고 짧은 서브로 삼성화재 세터의 정확한 토스를 원천봉쇄한다.이는 삼성화재의 강점인 조직력을 흔들지 않고서는 승산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한 감독은 상대 공격을 둔화시키기 위해 삼성 신진식을 철저히 봉쇄키로 했다.김석호에게 신진식을 전담 마크토록하고 여기에 센터들로 하여금 블로킹을 거들도록 한다는 것.삼성화재의 주공격수 신진식(188㎝)은 스윙동작이 빠르고 방향을 틀어 때리는 기술은 좋지만 김세진(200㎝)보다 타점이 낮기 때문에 더블 블로킹으로 맞서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김세진에 대한 수비는 박희상에게 맡기기로 했다.김세진과 마주보게 될 박희상은 탁월한 공격능력 외에 블로킹에서도 장신 센터 최천식에 버금가는 성적을 내고 있다. 한장석 감독은 “이같은 수비를 바탕으로 박희상·김석호의 좌우공격과 팀의 최대강점인 중앙속공을 골고루 구사해 공격루트를 다양화한다면 충분히승산이 있다”고 말한다.한 감독은 특히 무릎 부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주사를 맞아가며 투혼을 불사르고 있는 박선출의 속공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박해옥 hop@
  • 독립의 봄 찾아 수십년간 피의 투쟁/지구촌 민족·종족 분쟁

    *쿠르드 4,000년간 나라없는 유랑민족 터키정부의 쿠르드인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의 체포로 쿠르드인 문제가 국제사회의 초점이 되고 있다.4,000여년동안 나라없는 슬픔을 겪고 있는 쿠르드인은 지구촌 최대의 유랑민족.‘중동의 집시’라는 별명에 걸맞게 2,200만명으로 추산되는 이들은 터키(1,200만명)를 비롯,이란(400만명)·이라크(400만명)·시리아(100만명)·아르메니아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쿠르드어를 사용하고 있으며,99%가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다. 해발 3,000m의 고원·산악지역에 위치한 쿠르드인 집단거주지 ‘쿠르디스탄’의 대부분이 터키 영토에 속하는 탓에 이들의 독립 요구는 터키 정부의 최대 현안이었다.수천년동안 오스만 터키제국 등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온 쿠르드인은 1차대전 이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희망을 가졌다.1920년 연합국과 오스만제국이 맺은세브르조약에서 쿠르디스탄을 국가로 승인한다고 규정한 탓이다. 그러나 23년 터키가 다시 군사강국으로 부상,이 조약은휴지조각이 돼 악연이 시작됐다.터키는 쿠르드인을 ‘산악 터키인’으로 부르며 쿠르드어 사용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주요 도시에서 쿠르드인의 고유의상을 입는 것까지도금지하는 등 철저히 탄압,쿠르드인의 증오심을 키웠다.이 때문에 74년 오잘란을 중심으로 쿠르드노동당(PKK)이 결성돼 반(反)터키 독립투쟁을 벌였다.PKK는 84년 이후 본격 무장투쟁을 전개,이 과정에서 3만명 이상의 희생자와 30만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쿠르드인의 끈질긴 추구에도 불구하고 독립국가 건설 전망은 밝지 않다.쿠르드인 내부적으로 분열된 데다 열강들도 자국의 이익에 따라 쿠르드인을 교묘하게 이용할 뿐,독립국가 건설에 미온적이다. *코소보 '분리독립'요구에 학살로 대응 새해 들자마자 신유고 연방의 세르비아 공화국은 남쪽 코소보주에서 분리독립을 외쳐온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수십명의 무고한 양민이 처참히 살해된 이 사건은 지난해 10월 가까스로 체결됐던 세르비아 정부측과 알바니아계 주민 간의 휴전협정을 일거에 무효화하면서 코소보 ‘피의 역사’가 진행중임을 여실히 입증했다.발칸반도의 새화약고 코소보 민족분쟁은 138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당시 막강 대국의 오스만 터키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의 근원지인 코소보를 점령,이곳에 이슬람교도인 자국내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정착시켜 인구의 90%를 차지하게 했다. 그러나 20세기초 터키 제국의 지배가 끝난 뒤 코소보는 다시 기독교 신앙의세르비아에 편입됐고 이때부터 끊임없이 인종·종교 갈등을 겪게 됐다. 특히 지난 89년 ‘대(大)세르비아’를 주창한 밀로셰비치(현 신유고 대통령) 당시 세르비아 대통령이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알바니아어 사용까지 금하자 이곳 주민의 분리독립운동도 거세지기 시작했다.96년 알바니아계 무장단체 코소보해방군(KLA)의 등장은 이후 세르비아 정부군과의 유혈충돌을불러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국제사회의 ‘무력 중재’로까지 이어진 코소보 사태는 지난 한해에만 2,000여명의 알바니아인들을 희생시켰는가하면 수십만명을 난민으로 떠돌게 하는등 참혹의 도를 더해갔다.방관적이던 국제사회도 프랑스 랑부예로 양측을 불러들여 평화회담을 벌이도록 종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 티모르,印尼서 내년 1월 독립허용 시사 23년간 인도네시아의 압제에 신음했던 동티모르에 최근 봄 소식이 잇달았다.그러나 독립의 진짜 봄이 올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지난 10일 인도네시아 정부는 92년 수감했던 동티모르 독립운동 지도자 사나나 구스마오를 석방했다.이어 11일 하비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2000년1월에는 더 이상 동티모르 문제로 시달리기 싫다”면서 동티모르 독립허용을 시사했다.석방된 구스마오는 가택연금 상태지만 인도네시아 정부와 독립문제를 협상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동티모르가 독립을 달성하기까지는 아직도 넘어야할 산이 많다.인도네시아 내에는 야당지도자 메가와티를 비롯한 강한 정치세력이 동티모르 독립을 반대하고 있어 인도네시아의 정세에 따라 현재의 분위기가 급변할 수있다. 인도네시아 동쪽 끝에 있는 동티모르는 400년 동안 포르투갈 식민지배를 받아오다 1975년 독립했으나 1년도 안돼 인도네시아의 27번째주로 강제 합병됐다. 이때 동티모르인 70만명 중 20만명이 학살당했다.인도네시아 정부의 심한인권유린이 자행되는 가운데 91년 180명이 희생된 ‘산타크루즈 대학살’과같은 독립투쟁이 이어졌다. 지난 96년 인도네시아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고발한 카를로스 벨로 주교와호세 라모스 호타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계기로 국제사회는 동티모르에 주목하게 됐으며,지난해 수하르토정권 축출 후 독립운동이 한층 거세졌다. *세계 주요 민족 분쟁 지역 [티벳]90년대부터 중국 자치구에서 분리독립하려는 움직임 표출.클린턴 미 대통령98년 중국방문 중 망명중인 달라이 라마와 대화를 할 것을 장쩌민 주석에게호소. [카슈미르]47년 인도,파키스탄 분리 후 귀속을 둘러싸고 2번 전쟁.89년후 분쟁격화 1만2천명 사망. [스리랑카 내전]인도 남부에서 이주한 힌두교의 타밀족 83년부터 분리독립 무장투쟁.5만명사망. [보스니아]4년간 20만명 사망한 내전이 95년말 협정체결로 종식됐으나 세르비아계 강경파 지도층 득세중. [바스크]이민족 스페인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요구해온 과격파 ETA(바스크 조국과 자유)가 지난해 말 30년만에 무기한 정전 선언. [체첸]러시아 정부와 분리독립 전쟁으로 3만명 사망.96년말 2001년까지 정전 합의. [나고르노·카라바흐]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안에 섬처럼 있는 아르메니아족 거주지역.88년부터 아르메니아 공화국 귀속 투쟁. [키프로스]그리스계 80%,터키계 20%.83년 북부에 터키 승인한 독립국 생긴 후 그리스,터키 긴장고조. [르완다]94년 후투족 50만명 투치족 학살.200만명 난민. [브룬디]93년 이후 다수파 후투족과 소수파 투치족 항쟁 격화.97년 투치족 군사쿠데타 집권.
  • 현장-외롭지 않은 마지막 길

    “정구,정말 잘 살았다.자네와 인생의 길을 함께 걸었던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이 한마디는 꼭 하고 싶네”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 앞 광장.고(故) 諸廷坵 의원의 영결식이 국회장으로 엄숙하게 치러졌다. 朴浚圭 국회의장은 영결사에서 투병중임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면질의를 통해 ‘병상 국감’을 펼친 고인의 투철한 책임감을 회고했다. 이어 諸의원과 ‘30년 지기’인 벽안(碧眼)의 鄭日佑 신부가 떨리는 목소리로 조사를 읽어내려갔다. “73년 12월 한양대 뒤 청계천 둑방에서 29세의 서울대 제적생인 자네를 처음 만났지.도시빈민을 위한 자네의 뜨거운 정열이 국적,연령,사회적 위치 등모든 벽을 녹여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네.이제 여기 자네와 뜻을 함께 했던사람들이,특히 젊은이들이 이렇게 조문객으로 많이 모여있는 것을 보니 자네가 정말 잘 살았다는 것이 확인되는군….” 鄭신부의 조사가 이어지는 동안 경기도 시흥 두레마을 주민 등 諸의원이 내몸처럼 아꼈던 도시빈민 300여명은 숨죽여 흐느꼈다. 갑작스런 한파에 찬바람까지 몰아쳐 살속까지 추위가 파고들었지만 누구 하나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 諸의원의 후원회장인 두레마을 金鎭洪목사가조사를 이어갔다. “그가 청계천 빈민촌에 나를 찾아온 이후 우리는 친구가 되었습니다.그는젊은이들을 모아 넝마주이팀의 총무가 됐습니다.청계천 가족들은 그를 정말사랑했습니다.이제 당신이 남긴 사람과 사람사이의 정과 의리를 우리가 이어나가겠습니다.마음 놓고 떠나세요” 金壽煥 추기경은 분향예절로써 천주교 신자인 ‘제정구 바오로’의 마지막가는 길을 기렸다.민주화와 정치개혁에 대한 열정을 담은 고인의 육성녹음이 식장에 울려퍼지자 부인 申明子여사 등 유족들과 추모객들은 더 이상 눈물을 참지 못했다.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던,그러나 초라하지는 않았던 한 정치인의 마지막 길은다행히 외롭지는 않았다.
  • 특검제 반대 입장 단호

    대전 李宗基변호사 수임비리사건이 터지자 사회·시민단체와 야당은 기다렸다는 듯이 특별검사제(특검제) 도입을 다시 요구하고 있다.현직 판·검사를대상으로 하는 검찰의 수사는 공정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특검제를 도입할 수 없다는 朴相千 법무부장관의 견해는 단호하다.무엇보다 13대 국회 야당시절 朴장관이 특검제 도입을 요구했을 때와는 상황이 판이하다고 지적한다.당시 야당이 12·12사건,5·18사건,5공비리 수사 등 3가지 사건에 대해 특검제 도입을 요구한 것은 사건의 핵심에 현직 대통령이 연루됐기 때문이었다고 상기시켰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야당이나 사회·시민단체가 특검제 도입 필요성을 제기한 정치인 수사는 야당의 ‘방패막이용 국회’ 때문에 문제가 될 뿐 관련 정치인의 혐의내용에 대한 시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법조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 역시 전례 없이 단호하고도 철저하게 진행중임을 강조했다. 朴장관은 특히 특검제 도입의 신중론을 제기한 미국 상·하원 몇몇 의원들의 충고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미국 의원들은 지난해 朴장관에게 특검제를 섣불리 도입했다가는 ‘국가적인 재앙’이 된다고 조언했다는 설명이다. 특정사안만 수사하는 특검제는 특별검사의 공명심 때문에 무리한 수사와 정치적 파장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으며,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성추문사건이 단적인 사례라는 것이다.클린턴 대통령 부부의 금융부정사건(화이트게이트)을 담당한 스타 특별검사는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하자 명예욕 때문에 성추문 스캔들을 뒤졌기 때문이다.에스핀 농무장관 비리사건 수사를 담당한 특별검사 역시 본안 수사에 실패하자 별건 30건을 모아 기소했으나 3개월 전무죄 평결이 났다.에스핀 장관의 정치생명은 끝난 뒤였다. 朴장관은 이같은 사례를 들면서 연방검사가 대통령에게 예속돼 있고 법무장관이 검찰총장을 겸하는 미국에서도 특검제의 문제점 때문에 영구 폐지를 결정한 마당에 검찰청이 별도의 외청으로 독립된 우리 현실에서 이를 도입하려는 것은 잘못된 접근방법이라고 지적했다.검찰의 독립성·중립성을 보장한우리 제도의 장점을 살려 검찰의항구적인 독립보장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보다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朴장관은 26일 대한매일과의 인터뷰에서 구체적인 대안으로 검찰내에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의 비리수사를 전담하는 준(準)독립기구로 ‘공직자 비리조사처’를 신설하겠다고 밝혔다.禹得楨 djwootk@
  • 유럽중앙銀 금리인하 시사

    ┑프랑크푸르트 AP 연합┑ 유럽중앙은행(ECB)이 19일 금리인하 가능성을 시사했다.ECB는 유로 출범 후 처음 내놓은 월례 보고서에서 “세계 경제의 불안으로 단기적으로 유로권 성장이 둔화될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유로권의 침체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수입 및 소매가격 유지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우려,금리인하를 검토 중임을 시사했다. 전문가들은 ECB가 월례 보고서에서 브라질의 경제위기에 대해 언급을 피하고 있지만 중남미 국가들의 경제위기 심화로 ECB의 금리인하 시기가 더 빨라질 것으로 분석했다.유럽 대형은행들도 ECB가 2∼4월중 주요 자금 조달금리를 현재 3%에서 2.5%로 0.5%포인트 인하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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