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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난징대학살 주범을…日 ‘A급 전범’ 기리는 위패 봉안한 中 사찰 폐쇄

    中 난징대학살 주범을…日 ‘A급 전범’ 기리는 위패 봉안한 中 사찰 폐쇄

    중일전쟁 당시 30만 명의 중국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일본군 전범들의 위패를 봉안해 온 사찰이 논란이 있은 지 하루 만에 사찰 현판이 내려졌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관찰자망은 23일 관할 난징시 정부가 최근 일본군 위패 문제로 논란이 된 난징의 쉬안짱(현장사)사의 주지 스님과 책임자, 담당 공무원 전원을 면직하는 징계를 내렸다고 보도했다. 전날 한 누리꾼의 폭로로 난징대학살의 주범인 마쓰이 이와네 등 일본군 전범 4명의 위패가 사찰에 봉안돼 있던 사실이 공개된 지 단 하루만에 나온 발 빠른 조치다. 그는 1937년 12월 1일 난징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12일 오후 5시경 국민당 난징 수비 부대가 도시를 버리고 탈출한 직후 난징에 남겨진 주민들을 대상으로 대량학살을 명령한 인물이다. 곧 일본군의 무자비한 대학살로 최대 35만 명이 희생된 난징대학살의 주범을 현지 사찰이 위패로 모신 셈이다. 이와 함께, 사찰에 돈을 내고 일본 전범 위패 봉안을 의뢰한 인물로 ‘우야핑’이라는 실명의 한 남성이 지목됐다. 관할 경찰 측은 우야핑이라는 남성이 지난 2018년 수백만 원의 봉안비를 지불해 위패 봉안을 의뢰했다는 점에 주목해 그를 추적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난징시 역시 해당 인물을 색출해 철저한 추가 진상 조사를 이어갈 것이라고 설명했다.뿐만 아니라, 관할 정부와 현지 매체들은 이번 사태의 주요 책임자로 지목된 사찰 주지 촨전스님의 각종 부당 이득 혐의도 연이어 공개했다. 현지 매체는 ‘사찰 주지인 촨전스님은 과거 난징시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위원 출신이라는 점을 악용해 고위 관료 출신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친분을 과시해왔다’면서 ‘하지만 그가 금전 문제로 여러 차례 송사에 휘말렸으며, 서화를 고가에 판매한 혐의로 관광객들로부터 고소를 당하는 등 구설수가 있는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보도에 따르면, 촨전스님은 난징의 또 다른 사찰의 주지로 이름을 올린 인물로, 여행사와 엔터테인먼트회사, 식품공장 등 총 4곳의 민간 업체를 직접 운영하며 일부 업체에는 고위 임원으로 이름을 올린 상태다. 한편, 논란이 된 사찰 쉬안짱(현장사)사는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온 당나라 고승 현장법사의 사리를 봉안한 곳으로 확인됐다. 이 때문에 난징시와 장쑤성은 쉬안짱사를 제1청소년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지정해 청소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왔다. 하지만 이번 사태 발생 단 하루 만에 관할 정부는 쉬안짱사의 ‘제1청소년 애국주의 교육기지’로의 기능을 폐쇄한 상태다. 
  • 中 난징대학살 사찰에…日 ‘A급 전범’ 기리는 위패 발견 논란

    中 난징대학살 사찰에…日 ‘A급 전범’ 기리는 위패 발견 논란

    일본군의 무자비한 대학살로 최대 35만 명이 희생된 중국 난징에 일본 전범을 기리는 사원이 몰래 운영되고 있던 사실이 발각됐다. 난징대학살은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인을 대상으로 강간, 방화 등을 자행한 학살 사건이다. 중국 장쑤성 난징시 동북부의 쉬안우구 미족종교사무국은 공식 웨이보 채널을 통해 사찰인 쉬안장사에 봉안된 위패 중 일본 전범의 것 5개가 있었던 것을 확인했다고 22일 공개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미 일본 전범을 기리는 위패가 있다는 신고는 지난 2월 이미 한 차례 관할 경찰서에 신고된 바 있다.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에 의해 해당 사찰 측은 시정 조치를 받았지만, 이번에 또 한 번 전범 위패 논란을 불러 일으키면서 중국인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확인된 바에 따르면, 이 사찰은 난징 지우화산 공원 안 쉬안장사로 총 4명의 일본군 전범의 위패가 보기 좋게 봉안된 상태다. 4명의 일본 전범 중 한 명은 난징대학살의 주범인 A급 전범 마쓰이 이시네로 알려졌다. 마쓰이 이시네는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 육군 대장으로 1937~1938년 일본군을 이끌고 난징을 침략해 난징대학살의 주범으로 지목된 전범이다.그는 1937년 12월 1일 난징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12일 오후 5시경 국민당 난징 수비 부대가 도시를 버리고 탈출한 직후 난징에 남겨진 주민들을 대상으로 대량학살을 명령한 인물이다. 당시 잔혹했던 상항과 관련해 중국 매체 관찰자망은 ‘일본군의 칼에 무참히 학살당했던 난징 주민들의 시신을 쌓으니 작은 산을 이루었다. 난징에서 살인 경진대회가 열렸다’는 내용의 1938년 1월 25일 외신 기록을 보도했다. 또, 이 매체는 ‘난징대학살 명령이 내려진 지 불과 72시간 만에 무고한 난징 주민 3만 구의 시신이 도심 일대에서 발견됐으며, 셀 수도 없이 많은 여성들이 일본군에게 강간 당한 뒤 살해됐다’면서 ‘당시 일본군은 난징에서 총 28건의 대학살을 벌여 19만 명의 중국인을 학살했고, 산발적인 규모로 학살을 자행한 것만 858건에 달한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위패들의 주인은 2급 전범 야타니 히사오, 노다 다케시 가즈미, 다나카 군요시 등으로 전해졌다. 이번 사안에 대해 쉬안우구 민족종교사무국은 사찰을 정비하고, 민족 감정에 위배되는 행위를 끝까지 추적해 조치할 것이라고 강력한 고발 의사를 밝힌 상태다. 한편, 난징대학살의 현장인 난징시의 한 사찰에 일본군 전범 위패가 모셔진 사실이 공개되자 현지 누리꾼들은 크게 분노하는 분위기다. 한 누리꾼은 "대체 누가 그들의 위패를 절에 모시는 것을 허락했으며, 얼마 동안 위패가 있었는지, 또 이 사찰을 최종 관리 감독하는 기관과 담당자는 누군이지 반드시 찾아내서 그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야 한다”며 격분했다. 
  • “앵글 밖에서도 장군님 기운 담아 전 세계 관객에 충무공 알리고파”

    “앵글 밖에서도 장군님 기운 담아 전 세계 관객에 충무공 알리고파”

    “이순신 장군을 알아갈수록 흠결이 없으신 분이어서 저는 점점 초라해지더라고요. 배우로서 간극을 좁히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베테랑 배우 박해일에게 영화 ‘한산: 용의 출현’(오는 27일 개봉)은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한국 영화 역대 흥행 1위 ‘명량’의 후속작인 데다 국민 모두가 아는 성웅 이순신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21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해일은 “흥행적인 측면보다 이순신이라는 이름의 무게감이 더 컸다”고 털어놨다.●이순신 3부작 중 두 번째 이야기 “첫 촬영 때 한여름에 무거운 갑옷을 입고 판옥선 위 장루에 혼자 올랐는데, 전 스태프가 저를 주시하고 있더라고요. 어깨가 너무 무거웠지만 최대한 정중동하면서 이 작품을 잘 견뎌 내고 싶었죠.”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 중 두 번째인 ‘한산’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상대로 압도적 승리를 거둔 한산도대첩을 다뤘다. 7년 전 ‘명량’에서 최민식이 카리스마 넘치는 용맹스러운 리더 이순신을 연기했다면 ‘한산’에서 박해일이 맡은 이순신은 냉정한 시선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차분히 지략을 펼쳐 내는 지장으로 그려진다. ●최민식 선배와 다른 모습 선보여 “최민식 선배님을 따라갈 역량도 안 되고, 저와는 기질적으로 다른 배우이기 때문에 가장 차분한 방식으로 저만의 이순신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주도면밀하게 전략을 짜서 압도적인 승리의 쾌감을 선사하는 지혜로운 장수이자 덕장으로서의 이순신 면모를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이 때문에 ‘한산’의 이순신은 대사가 거의 없는 절제된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 자체의 톤도 신파나 감정의 과잉을 덜어 내고 인물이 버텨 내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박해일은 “이번에 호흡과 눈빛, 바닥에 서 있는 자세가 대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면서 “카메라가 안 보이는 곳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그림자와 기운을 구현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난중일기 등 관련 서적 탐독하며 준비 박해일은 ‘난중일기’를 비롯해 한산도대첩을 다룬 역사책을 탐독하고, 촬영 전 경남 통영 한산도 제승당(이순신 사적지)도 직접 찾았다. 그는 “7년간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 가족들과의 왕래도 자제한 것을 보면서 이순신이 확실히 보통 장수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특히 이순신의 핵심 전술인 학익진과 거북선이 왜군을 물리치는 후반 51분 분량의 초대형 해상 전투 장면은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산에서 벌어지는 육지전뿐만 아니라 팀플레이가 강조된 것도 전편과의 차별점이다. 바다가 아닌 크로마키 앞에서 해상 장면을 촬영을 했다는 박해일은 “마치 무대에서 연극하는 느낌으로 연기했다”며 웃었다. ●할리우드 영화처럼 즐겨주셨으면… 영화 ‘헤어질 결심’에 이어 한 달여 만에 다시 관객 앞에 선 박해일은 “이번 작품을 통해 이순신 장군이 해외에 더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아무래도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보실 테지만 관객분들이 ‘한산’을 할리우드 영화처럼 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순신 장군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른 나라의 해군 제독에 견주기 충분한 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전 세계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으로 다가가고 싶습니다.”
  • 22차 한중고위지도자포럼 지상중계 3주제-조태열 발제문

    22차 한중고위지도자포럼 지상중계 3주제-조태열 발제문

    21세기한중교류협회(회장 김한규)와 중국 인민외교학회(회장 왕차오·王 超)가 연례 개최하는 제22회 한중고위지도자 포럼이 21일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호텔 31층 모차르트홀에서 화상회의 방식으로 진행됐다. 주제는 당연히 ‘한중수교 30주년을 계기로 안정적 장기적 양국 관계 촉진’으로 잡혔다. 발제 및 토론은 세 부분으로 진행되는데 모든 사회는 박준우 21세기한중교류협회 부회장(전 세종재단 이사장)이 봤다. 제3 주제는 인문교류. 주제발표는 뉴린제(牛林杰) 산동대 교수와 조태열 외교부 차관(전 유엔대사)가 맡고, 김창범 전 유럽연합(EU) 대사와 팡신원(房新文) 중국 송경령기금회 국제협력교류부 부부장이 지정토론자로 나선다. 이어 리제(李 杰) 중국인민외교학회 부회장 사회로 대표단 자유토론이 이어지는데 신원식 국회의원, 추궈훙(邱國洪) 전 대사, 최대석 전 이화여대 부총장, 공커위(恭克瑜) 상해국제문제연구원 아태연구중심 부주임, 김태준 전 동덕여대 부총장(전 금융연구원장), 장젠핑(張建平) 상무부 국제무역경제협력연구원 등이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같은 호텔 19층 아이비홀로 옮겨 폐회사와 오찬이 이어진 뒤 이태식 21세기한중교류협회 수석부회장(전 주미대사)와 리제 부회장이 폐회사를 했다. 조태열 외교부 차관의 발제문을 게재한다. 약간의 편집을 거침을 양해 바란다. 한중 고위지도자 포럼 ‘인문교류’ 주제발표 조태열 외교부 차관(전 주유엔 대사) 작년에 이어 한중고위지도자포럼에 다시 참석해 양국관계의 현황을 점검하고 바람직한 발전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기회를 갖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화상으로나마 추궈훙 대사님을 오랜만에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2013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1차 한중 공공외교포럼에 우리 정부 대표로 참석해 리자오싱 당시 중국공공외교협회 회장님과 함께 축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축사에서 저는 한중 양 국민이 서로를 더욱 가깝게 느끼고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양국간 역사적 유대의식의 근간이 되고 있는 인문교류와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 교류를 통해 신구세대가 함께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영역을 발굴해 나갈 것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그것이 그날 포럼의 주제였던 ‘심신지려’(心信之旅), 즉 ‘마음과 믿음을 얻기 위한 여정’을 알차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신뢰 없는 우정은 깨지기 쉽고 지속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양국은 오랜 교류의 역사를 통해 우의를 다져온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사에 겪었던 여러 요인으로 인해 아직 극복해야 할 인식의 장벽이 적지 않게 남아 있습니다. 수교 이후 30년간 빛의 속도로 발전한 양국 관계에 힘입어 서로에 대한 오해와 인식의 차이를 많이 극복하고 꾸준히 우정과 신뢰를 키워 왔는데 유감스럽게도 최근 몇년간은 어렵게 쌓아온 우의와 신뢰가 급속히 무너져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미국 여론조사업체인 퓨리서치의 설문조사 결과는 중국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인식이 빠르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동 조사결과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대중 비호감도가 2002년 31%에서 사드 사태가 터진 2017년에 61%로 치솟은 이후 2020년 75%, 2021년에 77%, 금년엔 80%를 돌파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점은 한국의 30세 이하 젊은 세대의 중국 비호감도가 장년층보다 22% 포인트나 더 높다는 점입니다. 양국관계의 미래를 위해 심히 우려되는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국민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도 계속 나빠지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며칠 전 모 일간지의 주베이징 특파원이 쓴 한 칼럼에 의하면 평소 자주 들르던 편의점에서 인기 한국 과자들이 모두 사라져버려 주인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요즘 한국이 우리를 적대시해 기분이 나빠 다 치웠다”고 하더랍니다. 예전 같으면 서로 눈감아주던 사소한 법위반조차 이제는 모두 당국에 신고돼 수시로 공무원이 출동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 된 데 대한 책임으로부터 양국 정부와 언론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측 제의로 이번 포럼의 토론 주제에 인문교류가 추가된 것은 양국관계 침체기에도 인문교류가 지속적인 발전 동력으로 작동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 때문일 것입니다. 작년 회의 때도 강조한 바 있습니다만, 2013년에 발족한 한중인문교류공동위와 한중공공외교포럼을 양국간 인문교류 활성화를 위한 양대 전략 축으로 삼아 활동을 더욱 강화하고 내실화할 것을 다시 한번 제안합니다. 한중공공외교포럼은 2013년 9월 1차 회의 이후 매년 빠짐없이 개최되어 다양한 행사를 기획, 추진해 온 반면, 2013년 11월 발족한 한중인문교류공동위는 2015년까지 3차례 회의가 열린 후 활동이 중단되었고 2017년 중국측 제의로 이름을 한중인문교류촉진위로 바꾼 후 한동안 사무국만 운영하다가 2021년 9월 왕이 외교부장 방한 시 6년만에 처음으로 회의를 재개한 것으로 압니다. 다행히 작년 회의에서 ‘문화교류의 해’로 지정된 2021-2022년까지 2년간 ‘문화로 나눈 우정, 미래를 여는 동행’(文化增友誼, 同行創未來)이라는 슬로건 아래 총 160개의 사업을 추진하기로 합의하고 다채로운 행사를 추진해 오고 있습니다만, 기대만큼 큰 관심을 끌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행사들만이라도 양 국민의 관심과 성원 속에 성대히 치러질 수 있도록 함께 지혜를 모으고, 그 이후에도 서로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확산시켜 나가는 노력이 계속 이어지길 소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양 국민간 상호인식이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공공외교와 문화교류 협력을 활성화하고 코로나 19로 급격히 감소한 인적교류를 코로나 사태 진정 이후 최대한 빠른 속도로 회복시키기 위해 양국이 지금부터 함께 준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대내외환경이지만 양국이 함께 노력해 수교 30주년인 올해를 한중 문화교류 전면회복 및 미래발전 기반 강화 계기로 삼아야 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유념 또는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항을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정치, 외교, 안보, 경제 문제에 관한 정부간 이견이 양 국민간 갈등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현안을 관리하고 대외 메시지를 발신함에 있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 정부의 정책방향과 대내외환경적 요인들이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피할 길은 없지만 정부가 어떻게 이를 관리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에 언급한 퓨리서치 조사에 의하면 우리 국내정치에 대한 중국의 간여를 우리 국민이 가장 큰 문제로 보고 있고 그 비중도 54%로 조사대상국 중 최고라고 합니다. 우리의 ‘대중 적대정책’ 때문에 한국과자를 매대에서 다 치워버렸다는 중국 편의점 주인의 반응도 같은 맥락에서 들여다봐야 할 문제입니다. 정치, 외교, 안보, 경제 현안을 다루는 양국 정부와 언론의 태도에 문제가 없는지 되돌아볼 시점이라고 봅니다. 둘째, 역사문제에 대한 양국민간 상이한 관점이나 인식이 상호 불신과 오해로 비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동북아 역사 문제에 대한 양국간 소통과 협력이 필요합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인문교류가 양국간 역사적 유대의식의 뿌리를 깊게 해 온 만큼 앞으로 추진할 인문교류의 핵심도 역사문제에 초점을 맞춰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한중인문교류촉진위 추진사업에 ‘동북아 역사에 대한 공동연구사업’을 포함시킬 것을 제안합니다. 상이한 동북아 역사 인식으로 인한 양국간 갈등은 학계를 넘어 시민사회로까지 확산돼 오고 있습니다. 동북아 역사 문제를 상호 존중의 정신 아래 미래지향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한 공동연구는 수교 30주년을 맞는 올해에 양국이 적극 검토해 볼만한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한 작업이 되겠지만 시작이 중요하고, 일단 시작하면 의미 있는 결실이 맺어질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추진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 세대가 향후 인문교류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악화된 젊은 세대의 상호 인식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한중관계의 밝은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한중인문교류촉진위 뿐만 아니라 한중공공외교포럼에도 청소년들을 참여시켜 상호 이해를 깊이 해 양국간 신뢰와 우의의 뿌리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추진사업도 미래지향적인 사업을 중심으로 청소년들의 창의와 혁신이 맘껏 발휘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양국의 청년 파워블로거, 유튜버들의 활약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국이 보유하고 있는 빛나는 공공외교 자산을 미래지향적 인문교류사업과 청소년교류사업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2019년에 있었던 ‘한중우호캐러번’ 행사는 의미 있는 행사였다고 생각합니다. 넷째, ‘21세기한중교류협회’와 같은 민간기구의 역할을 더욱 활성화하고 이를 위한 양국 정부의 지원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인문교류는 본질적으로 민간이 주도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민관파트너십(Public-Private Partnership)이 핵심 역할을 하게 될 때 한중 인문교류는 지속가능한 발전 기반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 한중일 3국간 인문교류를 병행 추진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한중일 3국은 장구한 세월에 걸친 인문교류를 통해 폭넓은 역사적 유대의식을 키워왔습니다. 그러한 유대는 정치, 경제, 외교, 안보 분야에서의 부침에 상관없이 축적돼 온 동북아 3국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서울에 본부를 둔 ‘한중일협력사무국’이 한중 양국간 인문교류를 한중일 3국간 인문교류에 접목시킬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한중 관계가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데 상호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한중일 협력에 인문교류가 중심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앞에 말씀드린 동북아 역사 공동연구에 한중일 3국이 합의할 수 있다면 더욱 뜻깊은 작업이 될 것입니다. 지난주 한중일 3국에 미국이 추가되어 개최된 ‘신진한반도전문가연구모임’과 같은 행사를 중국과 일본이 주관하는 유사한 행사와 연계하여 3국 공동으로 기획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도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 국내 섬 정책 컨트롤타워 한섬원… “섬은 6차 산업 최적 공간”

    국내 섬 정책 컨트롤타워 한섬원… “섬은 6차 산업 최적 공간”

    지난해 10월 국내 섬 정책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기 위해 출범한 한국섬진흥원(이하 한섬원)이 설립 2년차를 맞아 본격 활동에 나서고 있다. 전남 목포시 삼학도에 자리잡은 한섬원은 전국의 섬 육성, 정책개발과 보전·관리에 관한 연구·조사를 수행한다. 정부 부처별로 분산된 섬 정책을 책임지는 행정안전부 산하 국책 연구기관이다. 코로나19로 ‘건강’과 ‘안전’이 핵심 키워드로 떠오르면서 섬이 대표적인 청정, 자연친화형 명품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어 한섬원의 역할은 갈수록 커질 전망이다. 이에 한섬원은 많은 섬을 보유한 우리나라의 장점을 살려 ‘미래를 잇는 섬, 세계로 나가는 섬’이란 비전 아래 세계적인 섬 연구기관으로 발돋움한다는 포부를 다지고 있다. ●새 정부 ‘지방시대’ 선언, 섬 핵심영역 14일 한섬원에 따르면 21세기 섬은 섬이 지닌 고유의 생태자원과 문화·관광 등으로 우리나라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유례없던 코로나19 상황 장기화로 섬이 주목받고 있다. 섬은 청정 에너지 자원의 보고이자 6차산업의 공간이다. 우리나라는 ‘섬 자원국’이다. 3383개의 섬(유인도 464개, 무인도 2919개)을 보유해 아시아에서 네 번째, 세계에서는 10대 섬 보유국이다. 섬 자체가 한국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핵심 자원이자 국가브랜드로서 미래 먹거리로 꼽힌다.새 정부가 지방시대를 열겠다고 밝힌 가운데 유인도가 무인도화되는 등 섬도 지방 소멸 문제에서 화두가 되고 있다. 게다가 섬은 가기 어렵고 살기 불편한 소외와 낙후의 상징이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신라·고려시대에는 해상강국의 시대였고 섬들의 시대였다. 그러나 해상왕 장보고 대사의 활약상은 모두가 잘 알지만, 국제적인 교류거점 역할을 했던 거문도나 벽란도, 흑산도의 모습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이처럼 섬은 어느 때부터인가 사람들에게서 잊혀 왔다. 이를 해결하는 게 한섬원의 역할이다. ●섬 교통체계 혁신 방안 11월까지 수행 섬은 영토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도 불린다. 그래서 섬은 영토자원으로서 또 국가 간 국경선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호시탐탐 독도를 노리는 이유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독도뿐만 아니라 독도 근방 해역은 한중일 3국의 해양·공중 활동권이 교차하는 곳이자 주변국들이 역내 세력 유지를 위해 거쳐야 하는 전략적 길목으로 가치가 높다. 실제로 지난 2014년 중국인들이 ‘서해의 독도’라 불리는 우리나라 최서단 섬인 충남 태안 격렬비열도의 매입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이에 정부는 뒤늦게 안보와 어업 분쟁 등을 우려해 이 섬을 외국인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하고 규제에 나섰다. 외국인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된 지역에서 법인과 외국인이 주택이 포함된 토지를 취득하려면 의무 이용 기간, 실수요 등을 고려해 관할 지자체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영토자원 차원에서 섬의 중요성을 인식한 정부는 마침내 지난달 격렬비열도를 국가관리연안항으로 지정했다.한섬원의 출범은 우리나라 섬 정책의 큰 변화가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내 섬이 ‘새로운 기회와 도전의 시간’에 진입한 셈이다. 2020년 12월 1일 ‘도서개발촉진법’이 ‘섬발전촉진법’으로 개명됐다. 여기에 한섬원의 설립을 명시하는 법률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행안부, 해양수산부, 국토교통부, 환경부 등 부처별로 분산해서 추진했던 섬 관련 정책을 통합적이고 체계적인 관점에서 관리할 수 있게 됐다. 섬에 대한 가치가 날로 더 중요해지고 있지만 연구와 정책적 노력은 매우 부족했던 게 현실이다. 가장 기초적인 섬의 정의에서부터 학자마다, 국가마다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고 국내 섬이 몇 개인지 통계 수치도 제각각이다. 이처럼 섬이 갖는 일반적 특성과 섬들의 지리·문화적, 경제적, 생태학적 특성 등을 깊이 있게 파악하기 위한 연구의 중요성이 날로 부각되고 있다. 또 한섬원은 섬 지역 교통체계 실태를 분석, 섬 주민 교통 기본권 보장을 위한 혁신방안 도출을 위해 ‘섬 교통체계 혁신방안연구’를 오는 11월까지 수행한다. 섬 지역 교통체계 관련 법·제도·정책 등 분석, 섬 지역 내부 운송 및 교통수단 등 교통체계 실태를 중심으로 연구를 한다. 여객 및 물류비 인하, 교통약자 배려 등 이슈 점검, 섬 주민 교통 기본권 강화 방안 등도 담겼다. ●섬 정보 연계 통합 플랫폼 구축 ‘대한민국 섬의 미래를 여는 국제적인 섬 전문 연구기관’이 되는 게 목표인 한섬원은 먼저 섬에 대한 기본 통계와 정보들을 정비해 섬 정보 통합 플랫폼을 만들고 ‘섬 전문 연구개발(R&D)센터’를 구축하는 데 주력할 예정이다. 한섬원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조사로, 다른 연구기관들과 지속적으로 연구성과를 공유하고 협업해 나간다는 구상이다. 아울러 행안부를 비롯해 정부의 각 부처가 추진하는 섬 정책들을 평가하고 진흥사업들을 개발·관리하는 ‘섬 정책 싱크탱크’로 한섬원을 발전시켜 나간다는 복안이다. 이어 섬 발전·진흥사업 전문기관으로 자리매김해 섬 관련 사업개발을 추진하고 정책 전문 컨설팅 등을 통해 평가 전문기관으로 거듭날 계획이다.
  • 80대 부모가 면회 안 왔다고 “맞아야지” 때린 아들

    80대 부모가 면회 안 왔다고 “맞아야지” 때린 아들

    교도소에 면회를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부모를 폭행한 40대 남성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남성은 경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도 “말을 안 들으면 맞아야지”라며 뻔뻔한 모습을 보였다. A씨는 지난 4월 전북 전주시의 자택에서 80대 아버지와 70대 어머니를 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A씨는 아버지를 솥단지로 폭행하고,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아 내쳤고, 이를 말리며 경찰에 신고하려는 동거녀를 추가로 폭행한 혐의도 받고 있다. 사기죄로 실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서 복역 중일 때 면회를 오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형법에 따르면, 본인의 부모 등 자신의 직계존속에 대해 상해를 가하는 경우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된다(제257조 제2항). 여기에 위험한 물건을 이용해 범행을 저질렀다면 가중처벌 된다.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이다(제258조의2 제1항). 결국 특수존속상해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씨는 다시 교도소로 들어가게 됐다. 전주지법 형사4단독 김은영 부장판사는 A씨에 징역 7년을 선고했다고 지난 12일 밝혔다. 김 부장판사는 “A씨가 노인과 여성을 상대로 폭언 및 폭행을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이어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으나, 동종 범죄로 여러 차례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는 점을 고려해 형을 정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 아베 사망 관련 “1937” 언급에 좋아요 21만개…일부 중국인은 왜 기뻐할까 [클로저]

    아베 사망 관련 “1937” 언급에 좋아요 21만개…일부 중국인은 왜 기뻐할까 [클로저]

    아베 신조 전 총리 사망에중국 일부 네티즌, 왜 유독 기뻐할까일각 반응에 외신도 집중 보도역사 속 중일 분쟁, 어떤 연관있길래아베 신조(67) 전 총리가 사망한 8일 후 외신에선 중국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반응을 집중 조명하는 보도가 쏟아졌습니다. 미국 블룸버그 통신은 8일(현지시간) “중국 SNS 플랫폼 웨이보에 아베 전 총리의 사망을 기뻐하는 댓글이 가득했다”며 “1937년 이후 85주년이 된지 하루 만에 아베 전 총리가 사망한 것”이라는 게시글도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매체에 따르면 이 게시글은 좋아요 21만개를 받았습니다. ● “기뻐하는 댓글 가득하다” 중국 관영 CCTV 소셜 미디어 계정에 전해진 아베 전 총리 사망 소식에도 이를 기뻐하는 댓글이 가득했다고 매체는 보도했습니다. 이외 “축하하자”는 글이 올라온지 30분만에 좋아요 15만개 이상을 받았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어요. 매체는 그러면서 “아베 전 총리는 집권 당시와 후에도 중국 민족주의자들을 화나게 한 부분이 있다”며 “일본이 방위비 지출을 늘리고 평화헌법 개정을 하도록 했던 것 때문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지난 2013년 그가 일본 도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이 중국 측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고도 전했죠. ● “역사적 논쟁 탓 반응 달라” 미국 지역지 뉴질랜드헤럴드는 중국의 일부 네티즌이 아베 전 총리 살해범에 대해 영웅이라고 칭한다고 9일 보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연설 중 가까운 거리에서 두 발의 총격을 맞았다”며 “중국과 한국의 일부 대중들은 아베의 정책과 역사적 논쟁 때문에 애도가 아닌 사뭇 다른 반응을 보인다”고 전했어요. 매체는 “중국의 민족주의자들은 ‘파티를 시작하라’는 글을 SNS에 올렸고, 한국서는 소수만이 아베 전 총리의 명복을 빌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베 전 총리는 중국과 특히 군 문제 관련해 대립각을 세웠다”며 “2013년 그가 2차세계대전 전범자들을 포함한 이들에게 도쿄 신사서 참배한 것도 그랬다”고 설명했어요. 8일 이후 보도된 외신의 중국 반응 조명은 대부분 이러한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중국 일부 네티즌의 원색적인 아베 전 총리 사망에 대한 일부 반응과 달리 한국 네티즌의 SNS 비난 증거는 찾지 못한 모양새죠.● “1937년” 언급에 주목한 이유 “1937년 이후 85주년이 된지 하루 만에 아베 전 총리가 사망한 것이다.” 앞서 미국 블룸버그통신이 주목한 중국 한 네티즌의 SNS 글입니다. 1937년은 중국에게 어떤 해일까요. 제2차 세계대전은 1931년 일본의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입니다. 이후 1937년엔 중국, 1941년엔 미국이 방어했던 전쟁이죠. 1937년 7월, 루거우차오에서 생긴 중일간의 충돌은 전면전으로 커집니다. 루거우차오는 마르코 폴로가 ‘세계 최고의 다리’라고 평했던 오래된 석조 다리입니다. 이 곳을 점령하면 철도를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죠. 1937년 7월 7일, 일본은 이 곳에서 야전훈련을 하던 중 기관총으로 공포탄을 쐈고, 실탄 한 발이 대응 사격 됩니다. 일본 측에서는 공포탄에 대응하는 이유로 일본 병사를 중국 측이 잡아 갔다고 추측합니다. 이에 중국 측에 수색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죠. 여기서부터 기습 공격과 대응 사격이 이어집니다. 다소 사소한 것으로 여겨졌던 기관총의 공포탄은 이후 8년간 이어진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됩니다. 아베 전 총리가 공격당한 날은 7월 8일입니다. 중국 측의 일부 도를 넘은 축하 SNS 글의 이유,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겠나요. ● “중국인은 축하 기회 놓치지 않는다” 인도 ABP뉴스는 9일 “중국은 왜 아베 전 총리의 사망을 축하하나”라는 보도를 통해 중국 네티즌들의 웨이보 게시글을 소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일부 네티즌은 “오늘(8일) 일본 전 총리가 죽어 기쁘다”며 “축하하자. 우리 가게에 오는 손님은 누구든 할인받을 것이다. 오늘만이다”라는 공지를 게재했죠. 또한 웨이보에는 “그가 괜찮지 않아 기쁘다”는 글도 게재됐다고 매체는 소개했습니다. 또다른 네티즌은 “중국은 축하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며 “아베 전 총리가 피격받은 것을 축하하자”는 이벤트 글을 올렸죠. 이 방송에는 “사람들은 카르마를 말한다”며 “아베 전 총리가 그렇게 죽은 건 그의 조상들 탓이 아니라 카르마일 것이다”라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 “아베 죽음 축하”…‘밀크티 1+1’ 현수막 내건 中상점들

    “아베 죽음 축하”…‘밀크티 1+1’ 현수막 내건 中상점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지난 8일 총에 맞고 사망한 가운데, 중국 현지에서 일부 상점들이 ‘아베의 죽음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을 걸고 할인행사를 벌여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10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트위터에서 일본어로 ‘아베 사망 중국’ 키워드로 검색하면 해당 사진이 제일 많이 검색된다”는 글과 함께 중국의 현수막 사진 여러장이 공유됐다. 공개된 사진 속 한 상점에는 “아베의 죽음을 축하한다”면서 “3일간 밀크티를 하나 사면 하나는 덤으로 준다”는 현수막이 크게 붙어있다. 다른 매장은 중일전쟁의 발단으로 거론되는 ‘7·7 사변’과 아베 전 총리의 사망을 언급하며 “모든 손님에게 맥주 추가 제공 행사를 한다”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또 다른 음식점은 현수막에 “주말 3일간 모든 손님에게 40% 할인 행사를 한다”고 썼다. 실제로 아베 전 총리가 총을 맞은 후 중국 웨이보에서는 조롱 글이 쇄도했다. 아베 전 총리가 숨을 거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웨이보에는 ‘축하행사를 시작합시다’라는 제목의 글이 게재됐고, 게시물이 공유된 지 단 30분 만에 15만 건 이상의 ‘좋아요’를 기록하기도 했다.일각에서는 고인을 조롱하는 것은 중국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짓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중국 관영매체 환구시보의 후시진 전 편집장은 중국 소셜커뮤니티 ‘바이쟈하오’를 통해 “여론의 장인만큼 여러 목소리가 나오는게 정상”이라면서도 “외부에서는 우리의 발언을 이용해 중국을 먹칠할 수 있다는 걸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후 전 편집장은 앞서 지난 8일 아베 전 총리의 사망 소식이 발표된 후 웨이보에 “동정을 표한다”며 “지금은 정치적 갈등을 내려놓을 때라고 생각한다”고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한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9일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피격 사망과 관련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에게 조전을 보냈다. 중국 중앙(CC)TV은 시 주석은 중국 정부와 국민을 대표해 개인 명의로 보낸 조전에서 “아베 전 총리가 변을 당한 데 대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고, 유족에게 위로의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
  • 충무공 흉탄 맞자 대신 함대 지휘…진중 온갖 일 논의 참모 중의 참모[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충무공 흉탄 맞자 대신 함대 지휘…진중 온갖 일 논의 참모 중의 참모[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방답진첨절제사 이순신(李純信)의 부임 인사를 받은 것은 1592년 1월 10일이다. 그런데 1월 16일자 ‘난중일기’에는 ‘병선(兵船)을 수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답진의 군관과 관리에게 곤장을 쳤다’는 내용이 보인다. 훗날의 충무공(忠武公)이 역시 무의공(武毅公)이 되는 신임 첨사의 군기를 단단히 잡은 모양새다. 무의공은 이후 충무공의 가장 충실한 참모가 되어 모든 해전의 선봉에 섰고, 노량에서 충무공이 흉탄에 맞아 쓰러지자 대신 수군 함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무의공 이순신(1554~1611)은 태종의 세자이자 세종대왕의 큰형인 양녕대군의 6대손이니 조선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종친이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과 우리말 이름이 같지만 무의공은 전주, 충무공은 덕수로 본관부터 다르다. ●임기 초 긴장관계 빠른 시간에 극복 조선시대에는 남자가 성인이 되면 이름이 아닌 자(字)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충무공의 자는 여해(汝諧), 무의공의 자는 입부(立夫)다. ‘난중일기’에는 ‘이(李)입부가 다녀갔다’거나 ‘입부와 무엇무엇을 했다’는 글귀가 140차례나 나온다. 무의공이 임기 초의 긴장관계를 빠른 시간에 극복하고 충무공의 ‘측근 중 측근’으로 떠올랐음을 알 수 있다. 경기 광명시 일직동에 있는 무의공의 무덤은 KTX가 서는 광명역에서 가깝다. 입부의 집안은 양녕대군의 3대손인 증조할아버지 이윤의 때부터 당시의 시흥땅에 살았다. 입부는 아버지 이진과 어머니 복주 김씨 사이 다섯 아들의 막내로 태어났다. 입부 형제의 이름은 순서대로 이순인·이순의·이순례·이순지·이순신이다. 맹자가 인간 본성의 네 가지 덕(德)이라 지칭한 인(仁)·의(義)·예(禮)·지(智)에 믿음을 뜻하는 신(信)을 보탠 것이다. 입부의 넷째 형 비변랑 이순지는 충무공이 한성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나왔을 때 옥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난중일기’에 적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무의공도 거쳐 간 비변랑(備邊郞)은 비변사의 종6품 무관이다. 입부의 두 아들 이탁과 이숙도 1603년 계묘 정시에서 무과에 급제했다. 미수 허목(1595~1682)은 입부의 묘갈(墓碣)에 ‘공은 젊었을 때에 유학에 전념했으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25세에 알성시 을과에 급제했다’고 했다. 무의공도 처음에는 문과 급제를 꿈꿨지만 여의치 않자 무과로 선회한 것 같다. 무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지 않았던 조선 중기까지는 양반사회에서 이런 현상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무의공의 둘째 아들 이숙이 아버지만큼이나 충무공의 측근이었던 흥양현감 배흥립의 사위가 됐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을 정점으로 하는 조선수군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는 충무공의 리더십에 무의공과 효숙공 같은 참모진의 서로에 대한 신뢰가 더해지면서 ‘화학적 결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효숙(孝肅)은 배흥립의 시호다. 무의공은 충무공보다 아홉 살이 적다. 충무공은 31세이던 1576년(선조 9), 무의공은 24세이던 1577년(선조 10) 각각 무과에 급제했다. 두 사람의 ‘관계 개선’은 부임 다음달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2월 8일자 ‘난중일기’에는 ‘우후 이몽구가 방답에서 돌아왔는데, 첨사가 방비에 진력하더라고 극찬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우후(虞侯)는 수군절도사나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이다. 충무공은 2월 19~27일 전라좌수사 휘하의 순천·광양·낙안·보성·흥양과 방답진·사도진·여도진·발포진·녹도진에 대한 검열에 나섰다.방답진 검열은 5관 5포 가운데 마지막으로 26~27일 이루어졌다. 충무공은 ‘장편전(長片箭)은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걱정했으나, 전선(戰船)은 어느 정도 완전해서 다행이었다’고 했다. 장편전은 긴 화살인 장전(長箭)과 작은 화살인 편전(片箭)을 가리키니 ‘화살 준비가 매우 불충분하다’는 표현이다. 충무공은 검열을 마치고 북봉(北峯)에 올라 진성 안팎의 지형을 살펴보고는 ‘외롭고 위태로운 섬이라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안의 연못 또한 지극히 엉성하여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첨사가 애는 썼으나, 미처 시설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하랴’고 했다. 한 달 전 부임한 첨사가 진성의 방어 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출 수는 없다는 것은 충무공도 잘 알고 있었다. 방답진은 여수 앞바다 돌산도에 있었다. 방답진성 자리는 이제 어항(漁港)이자 여수시의 돌산읍 소재지로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다만 방답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옛 진성 주변은 군내리로 불린다. 그러니 동헌과 군관청, 비석 등이 남아 있는 방답진의 흔적을 둘러보려면 내비게이션에 ‘군내리’를 입력해야 한다. 미수의 묘갈에는 ‘공은 처음에는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김성일 공이 한번 보고는 그의 현명하면서도 재능이 뛰어난 것을 알아 극력 추천한 것’이라고 했다. 학봉 김성일이라면 1590년 조선통신사의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뒤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해 왜란 발발 이후 파직되기도 했지만, 이후 경상도초유사로 전란 수습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참모장으로 충무공 출정명령 하달 그해 4월 13일 왜군선이 부산포 앞바다에 몰려오면서 무의공의 존재는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출정 직전인 5월 1일자 ‘난중일기’에는 ‘진해루에 앉아 방답첨사 이순신, 흥양수령 배흥립, 녹도만호 정운 등을 불렀다. 그들은 모두 매우 분하여 격동했으며, 자기 한 몸을 잊어버릴 정도였으니, 과연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할 만하다’고 했다. 행간에서 한시라도 빨리 전선으로 나가자고 재촉하는 참모들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마침내 5월 3일 녹도만호 정운과의 대화에서 결심을 굳힌 충무공은 중위장인 방답첨사 이순신을 불러 다음날 새벽 출정한다는 명령을 전군에 하달토록 한다. 중위장(中衛長)이라면 참모장이다. 당시는 순천도호부사 권준이 전라좌수영의 중위장이었으나 전라도관찰사가 호출하는 바람에 자리를 비워 무의공이 대신한 것이다. 도호부사와 첨절제사는 종3품으로 품계는 같지만 순천부사는 광양·낙안·보성·흥양을 모두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던 만큼 전라좌수영에서는 선임이었던 듯하다.무의공은 옥포·합포·적진포로 향한 1차 출전에서 왜적의 대선(大船) 1척씩 모두 3척을 깨뜨리는 눈부신 전과를 거두었다. 사천·당포·당항포로 2차 출전한 5월 29일에는 권준이 중위장으로 복귀함에 따라 무의공은 전부장(前部將)으로 나선다. 6월 5일 당항포해전에서 조선수군은 26척으로 이루어진 적 함대를 공격해 25척을 가라앉혔다. 무의공은 남은 한 척이 도주할 것으로 예상하고 다음날 새벽 잠복하고 있다가 적선을 침몰시키고 100명 남짓한 왜적을 몰살시켰다. 무의공은 직접 활을 쏘아 왜장을 사살했다. 무과 시험장에서 선조의 눈에 들었던 그의 활쏘기 실력은 충무공을 앞섰다. 7월 6일 3차 출전은 한산대첩으로 이어진다. 충무공은 조정에 올리는 장계에 ‘방답첨사 이순신은 왜적의 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아 왜군의 머리 4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데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2척을 쫓아가서 일시에 불살랐다’고 썼다. 당시 전공을 평가하는 기준은 적의 머리, 곧 수급의 숫자였다. 그런데 충무공은 적을 사살하고 적선을 분멸(焚滅)하는 데 초점을 맞추되 공로를 인정받고자 무리하게 접근해 적의 머리를 베는 데 급급하지 않도록 했다. 이렇듯 무의공은 충무공이 제시한 전투 원칙에도 가장 충실한 장수였다. 무의공은 1594년 4월 충청수사에 오른다.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로 줄곧 충무공을 지원한 이억기와 더불어 충무공이 가장 신뢰하는 무의공이 서·남해 방비를 책임지는 지휘부가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 환상의 지휘 체계를 깨뜨린 원균이 칠천량에서 처참하게 패한 것은 우리가 모두 안타까워하는 사실이다. 무의공은 통제사에 복귀한 충무공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하고 두 달 남짓 지난 1597년 11월 다시 경상우수사에 임명됐다. 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은 1598년 11월 19일 새벽 시작됐다. 통제사 이순신을 잃었지만 조선과 명나라 연합수군은 200척 남짓한 적선을 쳐부수는 대승을 거뒀다. 무의공은 1604년 선무공신 3등에 올랐고 1607년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다. 전라도병마절도사 시절 군영에서 세상을 떠났다.
  • 바이든 ‘조기 게양’ 시진핑 ‘개인 조전’

    바이든 ‘조기 게양’ 시진핑 ‘개인 조전’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각국에서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일본의 최우방인 미국은 조기를 걸어 슬픔을 표시했다. 10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 8일 “그는 미일 양국 동맹을 심화했고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을 위한 공동의 비전을 발전시켰다”며 “그는 피격 순간까지도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다”고 평가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빈소가 마련된 주미 일본대사관저를 찾아 조화를 건넨 뒤 “10일 일몰 때까지 미국 내 정부기관과 해외 대사관·해군선박 등에 조기를 게양하라”고 지시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에게도 전화로 조의를 표했다. 주요 20개국(G20) 외교장관회의 참석차 동남아 국가를 순방 중인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11일 일본을 방문해 조문한다고 미 국무부가 전했다. 중국 정부도 일본과의 관계 악화 분위기를 뒤로하고 가장 높은 수준의 조의를 표명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9일 기시다 총리에게 개인 명의로 조전을 보내 “아베 전 총리가 중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고 유익한 공헌을 했다”며 “그가 갑자기 사망해 깊은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두고 일본과 대립각을 세운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역시 조의를 표했다. 크렘린궁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아베 총리는 좋은 이웃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많은 일을 했던 걸출한 정치인이었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손실을 견뎌 낼 힘과 용기를 찾길 기원한다”고 전했다. 일본과 함께 쿼드를 구성하는 회원국인 미국·호주·인도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아베 총리는 쿼드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에 대한 비전을 발전시키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 노량해전에서 경상우수사로 ‘충무공의 최후’ 지키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노량해전에서 경상우수사로 ‘충무공의 최후’ 지키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방답진첨절제사 이순신(李純信)의 부임 인사를 받은 것은 1592년 1월 10일이다. 그런데 1월 16일자 ‘난중일기’에는 ‘병선(兵船)을 수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답진의 군관과 관리에 곤장을 쳤다’는 내용이 보인다. 훗날의 충무공(忠武公)이 역시 무의공(武毅公)이 되는 신임 첨사의 군기를 단단히 잡은 모양새다. 무의공은 이후 충무공의 가장 충실한 참모가 되어 모든 해전의 선봉에 섰고, 노량에서 충무공이 흉탄에 맞아 쓰러지자 대신 수군 함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무의공 이순신(1554~1611)은 태종의 세자이자 세종대왕의 큰 형인 양녕대군의 6대손이니 조선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종친이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과 우리말 이름이 같지만 무의공은 전주, 충무공은 덕수로 본관부터 다르다. 조선시대에는 남자가 성인이 되면 이름이 아닌 자(字)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충무공의 자는 여해(汝諧), 무의공의 자는 입부(立夫)다. ‘난중일기’에는 ‘이(李)입부가 다녀갔다’거나 ‘입부와 무엇무엇을 했다’는 글귀가 140차례나 나온다. 무의공이 임기 초의 긴장관계를 빠른 시간에 극복하고 충무공의 ‘측근 중 측근’으로 떠올랐음을 알 수 있다.   경기 광명시 일직동에 있는 무의공의 무덤은 KTX가 서는 광명역에서 가깝다. 입부의 집안은 양녕대군의 3대손인 증조할아버지 이윤의 때부터 당시의 시흥땅에 살았다. 입부는 아버지 이진과 어머니 복주 김씨 사이 다섯 아들의 막내로 태어났다. 입부 형제의 이름은 순서대로 이순인·이순의·이순례·이순지·이순신이다. 맹자가 인간 본성의 네가지 덕(德)이라 지칭한 인(仁)·의(義)·예(禮)·지(智)에 믿음을 뜻하는 신(信)을 보탠 것이다. 입부의 넷째 형 비변랑 이순지는 충무공이 한성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나왔을 때 옥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난중일기’에 적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무의공도 거쳐간 비변랑(備邊郞)은 비변사의 종6품 무관이다. 입부의 두 아들 이탁과 이숙도 1603년 계묘 정시에서 무과에 급제했다. 미수 허목(1595~1682)은 입부의 묘갈(墓碣)에 ‘공은 젊었을 때에 유학에 전념했으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25세에 알성시 을과에 급제했다’고 했다. 무의공도 처음에는 문과 급제를 꿈꿨지만 여의치 않자 무과로 선회한 것 같다. 무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지 않았던 조선 중기까지는 양반사회에서 이런 현상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무의공의 둘째 아들 이숙이 아버지 만큼이나 충무공의 측근이었던 흥양현감 배흥립의 사위가 됐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을 정점으로하는 조선수군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는 충무공의 리더십에 무의공과 효숙공같은 참모진의 서로에 대한 신뢰가 더해지면서 ‘화학적 결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효숙(孝肅)은 배흥립의 시호다.  무의공은 충무공보다 9살이 적다. 충무공은 31세이던 1576년(선조 9), 무의공은 24세이던 1577년(선조10) 각각 무과에 급제했다. 두 사람의 ‘관계 개선’은 부임 다음달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2월 8일자 ‘난중일기’에는 ‘우후 이몽구가 방답에서 돌아왔는데, 첨사가 방비에 진력하더라고 극찬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우후(虞侯)는 수군절도사나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이다. 충무공은 2월 19~27일 전라좌수사 휘하의 순천·광양·낙안·보성·흥양과 방답진·사도진·여도진·발포진·녹도진에 대한 검열에 나섰다. 방답진 검열은 5관 5포 가운데 마지막으로 26~27일 이루어졌다. 충무공은 ‘장편전(長片箭)은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걱정했으나, 전선(戰船)은 어느 정도 완전해서 다행이었다’고 했다. 장편전은 긴 화살인 장전(長箭)과 작은 화살인 편전(片箭)을 가리키니 ‘화살 준비가 매우 불충분하다’는 표현이다. 충무공은 검열을 마치고 북봉(北峯)에 올라 진성 안팎의 지형을 살펴보고는 ‘외롭고 위태로운 섬이라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안의 연못 또한 지극히 엉성하여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첨사가 애는 썼으나, 미처 시설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하랴’고 했다. 한달 전 부임한 첨사가 진성의 방어 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출 수는 없다는 것은 충무공도 잘 알고 있었다.  방답진은 여수앞바다 돌산도에 있었다. 방답진성 자리는 이제 어항(漁港)이자 여수시의 돌산읍 소재지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방답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옛 진성 주변은 군내리로 불린다. 그러니 동헌과 군관청, 비석 등이 남아있는 방답진의 흔적을 둘러보려면 내비게이션에 ‘군내리’를 입력해야 한다.  미수의 묘갈에는 ‘공은 처음에는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김성일 공이 한번 보고는 그의 현명하면서도 재능이 뛰어난 것을 알아 극력 추천한 것’이라고 했다. 학봉 김성일이라면 1590년 조선통신사의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뒤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해 왜란 발발 이후 파직되기도 했지만, 이후 경상도초유사로 전란 수습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해 4월 13일 왜군선이 부산포앞바다에 몰려오면서 무의공의 존재는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출정 직전인 5월 1일자 ‘난중일기’에는 ‘진해루에 앉아 방답첨사 이순신, 흥양수령 배흥립, 녹도만호 정운 등을 불렀다. 그들은 모두 매우 분하여 격동했으며, 자기 한 몸을 잊어버릴 정도였으니, 과연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할 만 하다’고 했다. 행간에서 한시라도 빨리 전선으로 나가자고 재촉하는 참모들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마침내 5월 3일 녹도만호 정운과 대화에서 결심을 굳힌 충무공은 중위장인 방답첨사 이순신을 불러 다음날 새벽 출정한다는 명령을 전군에 하달토록 한다.  중위장(中衛長)이라면 참모장이다. 당시는 순천도호부사 권준이 전라좌수영의 중위장이었으나 전라도관찰사가 호출하는 바람에 자리를 비워 무의공이 대신한 것이다. 도호부사와 첨절제사는 종3품으로 품계는 같지만 순천부사는 광양·낙안·보성·흥양을 모두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던 만큼 전라좌수영에서는 선임이었던 듯 하다.  무의공은 옥포·합포·적진포로 향한 1차 출전에서 왜적의 대선(大船) 1척씩 모두 3척을 깨뜨리는 눈부신 전과를 거두었다. 사천·당포·당항포로 2차 출전한 5월 29일에는 권준이 중위장으로 복귀함에 따라 무의공은 전부장(前部將)으로 나선다. 6월 5일 당항포 해전에서 조선수군은 26척으로 이루어진 적 함대를 공격해 25척을 가라앉혔다. 무의공은 남은 한 척이 도주할 것으로 예상하고 다음날 새벽 잠복하고 있다가 적선을 침몰시키고 100명 남짓한 왜적을 몰살시켰다. 무의공은 직접 활을 쏘아 왜장을 사살했다. 무과 시험장에서 선조의 눈에 들었던 그의 활쏘기 실력은 충무공을 앞섰다.  7월 6일 3차 출전은 한산대첩으로 이어진다. 충무공은 조정에 올리는 장계에 ‘방답첨사 이순신은 왜적의 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아 왜군의 머리 4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데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2척을 쫒아가서 일시에 불살랐다’고 썼다. 당시 전공을 평가하는 기준은 적의 머리, 곧 수급의 숫자였다. 그런데 충무공은 적을 사살하고 적선을 분멸(焚滅)하는데 초점을 맞추되 공로를 인정받고자 무리하게 접근해 적의 머리를 베는데 급급하지 않도록 했다. 이렇듯 무의공은 충무공이 제시한 전투 원칙에도 가장 충실한 장수였다. 무의공은 1594년 4월 충청수사에 오른다.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로 줄곧 충무공을 지원한 이억기와 더불어 충무공이 가장 신뢰하는 무의공이 서·남해 방비를 책임지는 지휘부가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 환상의 지휘 체계를 깨뜨린 원균이 칠천량에서 처참하게 패한 것은 우리가 모두 안타까워하는 사실이다.  무의공은 통제사에 복귀한 충무공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하고 두 달 남짓 지난 1597년 11월 다시 경상우수사에 임명됐다. 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은 1598년 11월 19일 새벽 시작됐다. 통제사 이순신을 잃었지만 조선과 명나라 연합수군은 200척 남짓한 적선을 쳐부수는 대승을 거뒀다. 무의공은 1604년 선무공신 3등에 올랐고 1607년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다. 전라도병마절도사 시절 군영에서 세상을 떠났다.
  • 시진핑 ‘개인 조전’ 바이든 ‘조기 게양’… 아베 사망에 각국 정상 애도

    시진핑 ‘개인 조전’ 바이든 ‘조기 게양’… 아베 사망에 각국 정상 애도

    9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아베 전 총리 피격 사망과 관련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에게 조전을 보냈다고 중국 관영 CCTV가 보도했다. 시 주석은 중국 정부와 국민을 대표해 개인 명의로 보낸 조전에서 “아베 전 총리가 총리 재임 중 중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고, 유익한 공헌을 했다”며 “나는 그와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중일 관계 구축에 관한 중요한 합의를 했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깊은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썼다. 시 주석과 부인인 펑리위안 여사는 아베 전 총리 부인인 아키에 여사에게도 같은 날 조전을 보내 애도와 위로의 뜻을 전했다고 CCTV는 소개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주미일본대사관저에 마련된 빈소를 방문한 데 이어 기시다 총리에게 위로 전화를 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양국 정상은 이날 오전 9시부터 약 10여분간 통화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베 전 총리의 서거에 대해 미국을 대표해 진심으로 위로를 전한다”고 조의를 전달했고, 기시다 총리는 “폭력에 굴복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켜낼 것”이라고 답했다.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전날 아베 전 총리의 빈소가 마련된 워싱턴DC 주미일본대사관저를 찾아 조문했다. 그는 조문록에 “바이든 가족과 모든 미국인을 대신해 아베 가족과 일본 국민에게 진심 어린 조의를 표한다”고 적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조문과 별개로 미국 정부 기관에 조기를 게양하라고 지시했다. 조기 게양 기간은 오는 10일 일몰 때까지다.일본과 대립각을 세웠던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조전을 보내 유가족에게 조의를 전했다. 크렌린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아베 총리는 좋은 이웃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많은 일을 했던 걸출한 정치인”이라고 평가하며 “무겁고,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손실을 견뎌낼 힘과 용기를 찾길 기원한다”고 전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망연자실하고 깊은 슬픔을 느낀다”며 “우리는 일본의 곁에 가까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역시 트위터로 “나라를 위해 그의 삶을 바치고 세계의 안정을 위해 일한 정치인”이라며 “일본이 훌륭한 총리를 잃었다”고 애도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소식”이라며 “미지의 시대에 그가 보여준 세계적 리더십을 많은 이들이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는 “쿼드(미국·일본·호주·인도)와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은 많은 면에서 그의 외교적 리더십의 결과”라면서 “아베는 세계 무대의 거인이었다”고 평했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이번 범행을 규탄하며 “국제사회가 중요한 지도자를 잃었다”고 밝혔다.한편 윤석열 대통령도 전날 아베 전 총리의 유족인 아키에 여사에게 조전을 보냈다고 대통령실이 전했다. 윤 대통령은 “일본 헌정 사상 최장수 총리이자 존경받는 정치가를 잃은 유가족과 일본 국민에게 애도와 위로의 뜻을 전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베 총리를 사망케 한 총격 사건은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라며 깊은 슬픔과 충격을 표했다. 아베 전 총리는 전날 오전 11시 30분쯤 일본 나라현 나라시 야마토사이다이지역 앞에서 참의원 선거 유세를 벌이던 도중 7∼8m 떨어진 거리에서 총격범이 쏜 총에 맞고 쓰러진 뒤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과다 출혈로 같은 날 오후 5시 3분에 숨졌다. 아베 전 총리의 장례식은 오는 12일 치러진다.
  • “매국노냐?”…아베 피살 보도하며 오열한 中 여기자 신상 털렸다

    “매국노냐?”…아베 피살 보도하며 오열한 中 여기자 신상 털렸다

    선거 유세 도중 총격을 받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숨진 가운데 이 사건을 보도하던 일본 주재 중국인 기자가 오열한 것에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중국 관영매체 관찰자망은 생방송 중 아베 전 총리 소식을 전하며 오열하던 한 여성 기자의 개인 정보가 노출되는 등 추가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누리꾼들의 관심이 집중된 이 기자는 중국의 한 매체에 소속돼 일본 소식을 전달했던 특파원 정잉 씨로 확인됐다. 정 기자는 일본 소셜미디어에서 1700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인플루언서이자 일본동도문화주식회사의 CEO로 재직 중이다. 논란이 된 것은 이날 오후 아베 전 총리가 사망한 것과 관련해 현지 소식을 전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방송 시작 무렵부터 울먹이기 시작하더니, 아베 전 총리의 피살 장소를 비추는 항공 촬영 장면이 방영된 시점부터 심하게 오열하며 마치 친한 친구가 세상을 떠난 것처럼 우는 장면이 그대로 노출됐다. 실제로 이 기자는 생방송 도중 울음을 참지 못해 진행자의 질문에 수차례 대답하지 못할 정도였다. 당시 방송은 중국 전역에 생방송으로 송출됐는데, 모바일 방송에는 무려 1637만 명이 접속했을 정도로 관심이 집중된 상태였다.정 기자는 방송을 통해 “아베 총리가 중일 우호에 크게 기여했다”면서 “중일 우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일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20% 가량의 할인 쿠폰을 발행하는 등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솔선수범했다”고 밝혔다. 또, 그는 “아베 총리는 살아 생전 외국인이 일본 여행을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비자 요건을 완화한 인물”이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의 발언이 보도된 직후 웨이보 등 중국 소셜미디어에서는 지나친 아베 찬양적 입장을 전달하며 오열한 기자의 방송 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다수 제기됐다. 한 누리꾼은 “저널리스트로 객관성을 잃은 보도를 했다는 점이 매우 실망스럽다”면서 “진정한 기자라면 보도에 본인 개인의 감정을 실어서는 안 된다. 감정 제어 능력은 기자가 갖춰야 할 가장 객관적인 능력인데 아쉽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누리꾼은 “아베는 일본 군국주의를 되살리려 한 일본의 지도자였을 뿐”이라면서 “그는 중국인의 친구가 아니다. 이 기자의 정신은 온전히 일본에 예속돼 있는 일본 제국주의의 산물이며 집에서야 아무리 울어도 상관없지만 중국 언론을 통해 일본 우익에 대한 공감을 사려한 행동은 터무니 없다”고 비난했다.
  • [여기는 중국] 中 네티즌, 日 아베 죽음에 ‘좋아요’…언론들은 자제 촉구

    [여기는 중국] 中 네티즌, 日 아베 죽음에 ‘좋아요’…언론들은 자제 촉구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직후 중국 누리꾼들 사이에 축하와 조롱의 반응이 이어지자 중국 관영매체가 나서 자제를 촉구하고 나섰다. 아베 전 총리가 숨을 거뒀다는 소식이 전해졌던 8일 오후, 중국 소셜미디어 웨이보에는 ‘축하행사를 시작합시다’라는 제목의 글이 게재됐고, 게시물이 공유된 지 단 30분 만에 15만 건 이상의 ‘좋아요’와 공유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현지 매체들은 아베 전 총리의 외할아버지였던 기시 노부스케(일본의 56~57대 총리) 역시 지난 1960년 7월 14일 총리 관저 리셉션장에서 허벅지를 찔려 중상을 입었던 과거를 꺼냈다. 이에 중국 누리꾼들은 ‘아베가 사망한 이날이 1937년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한 지 85주년 기념일 즈음’이라면서 ‘중국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수많은 의인들에게 그들(기시 노부스케와 아베)의 목숨을 바친다고 생각하면 더할 수 없이 기쁜 일이다’, ‘아베 집안은 피습과 암살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저주받은 집’이라고 적었다. 이 게시물 역시 게재 직후 21만 건의 ‘좋아요’를 기록했다. 이 같은 분위기가 계속되자 중국 공산당의 ‘입’으로 불렸던 언론인 후시진이 직접 나서 ‘지금은 정치적 분쟁은 제쳐둘 때’라면서 자제를 촉구했다. 후시진은 중국 공산당 기관지 글로벌타임스의 전 편집장이자 현재는 관찰자망 등에 칼럼을 기고하는 인플루언서로 활동 중이다. 또, 런민대 국제관계학 진칸룽 박사는 SNS를 통해 ‘오늘 일어난 일은 비극적인 사건이며 이와 관련한 논평을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고 적었다. 진 박사는 최근 2027년에는 중국이 대만을 무력으로 점령할 준비가 돼 있을 것이라고 발언하는 등 극단적인 시진핑 주의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주일 중국대사관 역시 성명을 통해 ‘아베 전 총리가 재임 기간 중 중일 관계 발전에 기여했다’면서 유족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 [씨줄날줄] 늦깎이 수학자/문소영 논설위원

    [씨줄날줄] 늦깎이 수학자/문소영 논설위원

    필즈상(Fields Medal)은 수학자 존 찰스 필즈의 유산을 기초로 1936년부터 4년에 한 번 수상자를 선정하는데, 노벨상에 수학 부문이 없는 탓에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인식된다. 이 상은 4년에 한 번 발표되는 데다, 40세부터 수상 자격이 제한돼 노벨상보다 더 까다롭고 영예로운 상이다. 지금까지 수상자가 68명에 불과하고,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해결한 앤드루 와일스가 41세에 특별상을 받았다.  이 ‘필즈상‘’을 한국계 미국인 허준이(39)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가 그제 받았다. 허 교수는 아버지 허명회 고려대 통계학과 명예교수와 어머니 이인영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명예교수가 미국에서 유학 중일 때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2살 때 귀국해 석사까지 한국에서 공부했다. ‘사실상 한국인’으로서 첫 필즈상 수상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이유이다.  보통 수학은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이 드러난다지만, 허 교수는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다. 중3 때 수학경시대회에 나가려다가 담당교사가 “너무 늦었다”고 만류해 포기도 했다고. 야간자습이 싫어 고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로 서울대 물리천문학과에 진학했으나 학점이 낙제 수준이었단다. 인생의 전기는 1970년 필즈상 수상자인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토대 명예교수의 서울대 초빙교수 시절 강의를 들으면서였다. 대수기하학에 빠져들면서 같은 대 수학과학부 대학원에 진학했다. 히로나카 교수가 추천했지만 11개 대학에서는 입학을 거절당한 끝에 일리노이대 박사 과정에 가까스로 들어갔으니 늦깎이 수학자다.  어렵게 박사 과정에 들어간 그는 2010년 50년간 수학계의 난제였던 ‘리드의 추측’을 해결했고, 2018년에는 ‘로타 추측‘’도 해결했다. 허 교수의 필즈상 수상은 한국인으로는 첫 번째다. 일본인은 히로나카를 포함해 3명, 그 밖의 아시안계는 허준이까지 6명째다. 기초과학 분야가 척박한 한국에서 ‘허준이 키즈’도 나올 듯하다. 그러려면 뒤늦게 발동이 걸리는 슬로 스타터들에게 기회를 주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 “시작하기에 늦은 건 없다”는 허 교수의 수상 소감이 큰 울림으로 남는다. 국화빵 찍어 내는 듯한 현행 교육시스템을 개편하고 기초학문에 투자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 文정부 청와대 행정관, 필로폰 투약 혐의로 기소

    文정부 청와대 행정관, 필로폰 투약 혐의로 기소

    문재인 정부 청와대 행정관이 재직 중 마약을 구매해 투약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4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동부지검 강력범죄전담부(부장 이곤호)는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위반(향정) 혐의로 지난달 30일 전직 청와대 행정관 A씨를 불구속기소 했다. A씨는 지난 1월 청와대에 재직 중일 때 텔레그램을 이용해 마약 판매업자로부터 필로폰 0.5g을 구매한 뒤 서울 강남구의 한 호텔에서 투약한 혐의로 지난 4월 경찰에 입건됐다. 당시 그는 판매업자가 필로폰을 숨겨두고 떠나면 이를 가져가는 방식인 이른바 ‘던지기 수법’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경찰 수사를 받으면서 혐의를 인정한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마약 거래에 쓰인 계좌와 입금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A씨의 범행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지난 5월 23일 A씨를 검찰에 송치됐다. 사건 당시 청와대 행정관으로 재직 중이던 A씨는 지난 4~5월쯤 일신상 이유로 청와대를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 방실이, 16년째 뇌경색 투병 중인 근황 “칼로 찌르는 듯 아파”

    방실이, 16년째 뇌경색 투병 중인 근황 “칼로 찌르는 듯 아파”

    가수 방실이가 16년째 투병 중인 근황을 공개했다. 지난 26일 방송된 TV조선 시사교양 프로그램 ‘스타다큐 마이웨이’에서는 방실이의 근황이 공개됐다. 방실이는 2007년 뇌경색 판정을 받은 후 16년째 투병 중이다. 방실이의 동생 방화섭 씨가 방실이의 요양병원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누나를 보살피고 있다. 방화섭 씨는 방실이의 현 상태에 대해 “더 나빠지진 않았는데 며칠 전에 망막 실핏줄이 터졌다더라. 강화에 있는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에 가라더라”며 걱정했다. 방실이는 활동하던 시절 사진을 벽 한켠에 걸어놓았다. 그 사진을 보며 금방 일어나겠다 다짐했지만 시간은 어느새 16년이나 흘렀다. 방실이는 “1년 지나면 다시 저렇게 될 거라 생각을 했다. 근데 너무 길더라. 너무 힘든데 주변 사람들한텐 말도 못했다. 내가 실망하게 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더 정신을 차렸다”며 “움직일 때마다 칼로 찌르는 듯이 아팠는데 그게 지나가니까 그것만으로 감사하다”고 털어놨다. 방화섭 씨는 “누나가 목소리는 어눌하지 않아서 어느 정도 알아 듣고 소통은 할 수 있다. 처음엔 몸 전체, 성대도 마비가 왔다더라. 말도 못할 거라 했는데 그나마 다행이다. 통화를 하면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갖다 준다”고 밝혔다. 방실이의 부모님은 방실이가 투병 중일 때 돌아가셨다. 방실이는 부모님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고. 방화섭 씨는 “누나는 (산소를) 한 번도 못 왔다. 아버지가 진짜 누나는 최고라고 하셨다. 누나가 집안의 버팀목이 되어줬으니까. 그래서 결혼도 안 했고 집안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연예계 생활을 했다”고 밝혔다. 방실이는 “돌아가셨다는 게 거짓말인 줄 알았다. 엄마도 더 살 수 있었는데 놀라서 더 빨리 돌아가신 거 같다. 부모님 입장에서 저는 불효다.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그렇게 돌아가실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답답하다”며 눈물을 쏟았다. 이후 후배 양하영을 만난 방실이는 “바빠도 아픈 데가 없었다. 느닷없이 어떤 징조도 없었다. 내가 쓰러지면서도 ‘말도 안 돼. 내가 왜 이러고 있어’ 싶었다. 그런데 아무런 움직임도 안 된다. 나 혼자 왜 이러나 싶고 인정을 못했다. 힘드니까 내 자신이 포기가 되더라. 4년, 5년, 6년되니까 다른 거 없다. 이대로 죽고 싶었다. 너무 아프니까. 어떻게 내가 16년째 이러고 있냐”며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 [사설] 나토 정상회의서 한일 정상회담 무산, 유감이다

    29~30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에 대한민국 정상으로선 처음 윤석열 대통령이 참가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 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미국과 유럽 중심의 다자 안보 기구인 나토에 윤 대통령이 참가하는 것은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글로벌 공급망 등 경제안보 패권을 다투는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 간 대립이 심화하는 신냉전 국면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쪽에 한 걸음 더 바싹 다가간다는 점에서 우리 외교의 큰 전환이라 할 수 있다. 나토 정상회의가 다른 이유로 주목받은 것은 새 국제질서를 논하는 자리에 한국이 참가한다는 점 말고도 한일 정상이 3년 만에 만날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윤 대통령 당선 이후 마드리드에서의 한일 정상회담은 일찍부터 기대돼 온 외교 이벤트였다. 한일 정상은 2019년 12월 중국 쓰촨성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의 때 만난 이후 3년 가까이 양자 회담을 하지 않고 있다. 2018년 10월 대법원이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을 확정한 뒤 이듬해 일본이 반도체 부품의 대한국 수출 규제 등 외교적 보복을 가하면서 한일 관계는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을 달리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한일 정상회담을 부인한 것은 7월 10일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한국에 유화적인 자세를 보이기 어려운 국내 정치적 상황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실도 어제 한미일 정상회담은 열리지만 한일 회담은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가 곧 강제동원 배상을 논의할 민관 협의체를 출범시키는 등 이 문제에 전향적인 모습을 보이는데도 내민 손을 잡지 않는 것은 지극히 유감이다. 이런 협소한 자세의 일본에 과연 한일 관계 개선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 이순신의 연승 이끈 ‘싸움 길잡이’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이순신의 연승 이끈 ‘싸움 길잡이’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1532~1594)은 왜란이 발발했을 때 이미 환갑 나이였다. 종6품 현감(縣監)은 조선시대 지방수령으로서는 품계가 가장 낮은 외관직이다. 과거 합격자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방목(榜目)에 따르면 그는 1564년(명종 19) 갑자 식년시에서 무과에 급제했다. 그런데 급제 이전에 전라좌수영 소속 수군진 여도의 종4품의 만호를 이미 지냈다. 어영담은 30년 안팎이나 서·남해안 일대에서 수군 지휘관과 고을 수령 자리를 이어 간 것이다. 어영담이 광양현감에 임명된 것은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직후인 1591년 3월이다. 60세에 왜적의 대규모 침략이 기정사실이었던 시기 군사와 행정을 겸해야 하는 남해안 최전선 고을 수령 자리에 앉은 것이다. 오랜 수군 경력으로 남해안 물길을 훤히 알고 있었던 전라좌수영의 맏형 어영담은 왜수군과의 싸움에서 언제나 길잡이이자 선봉장이었다. 이순신은 조정에 올린 장계에 어영담을 두고 ‘경상, 전라 두 지역의 변장을 지내며 물길의 형세를 잘 알고 계책이 뛰어난 사람’이라면서 “호남이 보전될 수 있었던 데는 이 사람이 한몫을 했다’고 적었다. 어영담을 다룬 역사기록은 매우 소략하다. 광양문화원에서 ‘광양 어영담 현감 사료조사 심포지엄’을 열기도 했지만, 여전히 ‘어영담의 일생’은 완전히 재구성되지 못하고 있다. 방목에 거주지가 함안으로 돼 있는 만큼 고향은 같을 것으로 보지만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니 ‘어영담 스토리’를 제법 길게 소개한 조경남(1570~1641)의 ‘난중잡록’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남원 출신의 조경남은 13세 때인 1582년 12월 난리를 예견하고 매일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1610년까지 이어진 기록은 인조시대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는 데도 크게 참고가 됐다. 그럼에도 이 기록의 기본적 속성은 야사(野史)다. 전장에서 벌어진 상황이 남원까지 전해지는 과정에서도 적지 않게 변개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당대 보통사람들의 시각이 투영된 사료라는 뜻이다.‘난중잡록’은 어영담을 1592년 5월 20일자에 다루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이 경상도 해역으로 처음 출정해 왜수군을 궤멸시킨 5월 7~8일 옥포·합포·적진포 해전은 물론 5월 29일~6월 5일 사천·당포·당항포의 대승 소식도 전하고 있다. 조경남이 기록을 그날그날 정리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난중잡록’은 다른 기록들과 달리 경상좌수사 원균의 지원 요청에도 출정을 주저하던 이순신의 결심을 이끌어 낸 인물로 어영담을 지목한다. ‘광양현감 어영담이 팔뚝을 걷어올리고 이순신 장군에게 크게 소리치기를, “영남은 왕의 땅이 아닌가. 이 왜놈은 나라의 적이 아닌가.… 우리가 여기서 관망이나 하면서 구원을 청하는 말을 듣고도 걱정 않고, 왜적이 온 것을 보고도 마음이 태연한 채 앉아 영남 바다의 군사를 오늘 다 없어지게 만든다면, 내일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남의 위급한 것을 구해 주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왜적을 기다린다면 겁 많고 나약한 게 아니오. 장군께서 헤아려 하시오” 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면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하기 직전 전라좌수영 참모진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5월 1일자에는 ‘수군이 모두 앞바다에 모였다. 진해루에 앉아서 방답첨사(이순신·李純信), 흥양현감(배흥립), 녹도만호 정운 등을 불러들이니 모두 분격하여 제 한 몸을 잊어버리는 모습이 실로 의사(義士)들이라 할 만하다’고 했다. 이순신 장군이 신뢰한 전라좌수영의 핵심참모들이 한결같이 울분을 곱씹으며 사령관에게 출정을 재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 역시 결심이 확고했다는 사실은 이튿날 일기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오정 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속을 하니,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군수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으니 한탄스럽다. 그러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게 될 법한 일인가.’ 출정을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단호히 목을 베겠다는 뜻이다. 낙안군수 신호는 하지만 첫 출전에서부터 전라좌수군의 좌부장으로 나서 이순신이 승리를 알리는 장계에 첫 번째로 이름을 올릴 만큼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난중일기’는 5월 3일 정운의 진언이 출정 명령으로 이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난중잡록’은 어영담을 출정 결정을 이끈 최대 공로자로 부각시킨다. 당연히 어영담도 한시라도 빨리 바다로 나가 왜적과 싸워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참모의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팩트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전투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들의 ‘희망사항’이 녹아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당시 사람들에게 어영담은 매우 영웅적 인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난중잡록’은 수군의 연승을 두고 ‘어영담의 귀신 같은 지도(指導)를 얻어 전후의 전공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도 했다. 어영담을 ‘물길 귀신’으로 부르는 근거가 됐다. ‘어영담은 무과 급제 이후 영남 바다 여러 진의 막하에 있었는데, 이 때문에 바다의 얕고 깊음과 섬 지역의 험하고 수월함, 나무하고 물 긷는 편의와 주둔할 장소 등을 빠짐없이 가슴속에 그려 두어 수군 함대가 영남 바다를 드나들며 수색하거나 토벌할 때면 집안 뜰을 밟고 다니듯 궁박하고 급한 경우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593년 12월 19일 선조가 비변사 및 삼사와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류성룡은 ‘어영담은 수로(水路)에 익숙한 사람이니 일을 위임시켜야 합니다’라고 했다. 어영담은 공인된 ‘물길 전문가’였다. 그에 대한 ‘난중잡록’의 서술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수군의 전공은 어영담이 가장 높았는데도 당상관에 올랐을 뿐, 선무공신이 되지 못해 남쪽 사람들은 다들 애석히 여겼다’ 마지막까지 애정이 담겨 있다. 이순신의 모든 해전에서 공을 세운 어영담이지만 1593년 10월 광양현감에서 파직된다. 명나라 주둔군에 군량미를 조달하는 독운어사(督運御使) 임발영이 광양현에서 장부보다 600석 많은 양곡을 보관하고 있음을 찾아낸 것이다.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어영담은 독운어사가 양곡을 임검할 때 바다에 있었다. 그러니 문제는 현감 업무를 대신한 유위장(留衛將)에 있다. 또 약간의 과실이 있더라도 국가적 위기에 의로움을 떨치고 있는 장수를 잃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파직을 막지는 못했다. 전라좌수영은 5개의 수군진과 5개의 연해 고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방답 첨사진, 사도 첨사진, 녹도 만호진, 발포 만호진, 여도 만호진과 순천도호부, 보성군, 낙안군, 흥양현, 광양현 등이다. 연해 고을을 수군에 편제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병력 충원과 군량미 보급, 전선(戰船) 건조 때문이다. 그러니 연해 고을 수령은 수군진 지휘관보다 더욱 어려운 과제를 짊어지고 있었다. 전쟁 상황에서 수군 소속 고을 수령이 전투에 나설 수군의 군량미를 충분히 비축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직분이 아닐 수 없다. ‘난중일기’에는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휘하 군사나 관원을 군율로 처단하는 장면이 수도 없이 나온다. 이런 이순신이 어영담을 감싼 것은 개인적 비리가 아니었다는 방증으로 봐야 할 것이다. 임발영은 임발영대로 명나라 군대에 군량을 제때 공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들 군영에 끌려가 수모를 당하기도 했으니 광양현의 ‘장부외(外) 양곡’에 제재를 가하는 것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어영담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이순신의 잇따른 상소로 1594년 2월 전라도 주사조방장으로 복귀한다. 주사(舟師)는 수군을 가리키는 조선시대 용어다. 하지만 다음달의 제2차 당항포해전은 어영담의 마지막 싸움이 됐다. 수군 진영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어영담의 병세가 악화했고 결국 4월 9일 눈을 감았다. 이순신은 이 날짜 ‘난중일기’에 ‘이 애통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라고 했다.
  • 한미일 29일 나토회의서 정상회담… 한일회담은 무산

    한미일 29일 나토회의서 정상회담… 한일회담은 무산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가 개최되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오는 29일 한미일 정상회담이 열린다. 한일 정상회담은 사실상 무산됐다. 대통령실은 26일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참석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나토 정상회의 순방 일정을 알리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의 한미일 정상회담 확정 사실을 함께 밝혔다. 윤 대통령은 27일 스페인으로 출국한다. 윤석열 정부 첫 한미일 정상회담의 최대 현안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북한 핵·미사일 도발에 대한 3국의 공동 대응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역내 안보 정세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더불어 미국이 한일 관계의 복원을 강조하고 있는 만큼 바이든 대통령이 양국 정상 사이에서 한일 관계와 관련한 발언을 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다만 촉박한 일정으로 30분 이상 회의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미일 정상회담은 문재인 정부 때인 2017년 7월 독일 함부르크에서 주요 20개국(G20) 회의를 계기로, 같은 해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를 계기로 각각 열린 이후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다. 함부르크에서는 북핵 관련 한미일 공동성명이 처음으로 채택됐고, 뉴욕에서는 북한에 대한 최대 강도의 제재를 추진하는 데 3국 정상이 뜻을 모은 바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서울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 이어 한 달여 만에 다시 바이든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기시다 총리와의 만남은 처음이다. 한일 정상의 가장 최근 만남은 문재인 정부 때인 2019년 12월 중국 청두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담이었다. 반면 관심을 모았던 한일 정상회담과 관련, 대통령실 관계자는 “별도의 계획이 확정되지 않았다”며 “아마도 열릴 확률이 희박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기시다 총리도 25일 도쿄에서 기자들과 만나 나토 정상회의 기간에 한일 정상회담을 개최할 것이냐는 질문에 “현시점에서는 양자 회담 예정이 없다”고 밝혔다. 현재로서는 한일 정상 간 ‘풀 어사이드’(약식 회동) 형태의 회동도 없을 것으로 보여 양국 정상이 가장 길게 마주할 수 있는 기회는 한미일 정상회담뿐일 것으로 관측된다. 한일 정상회담 무산은 다음달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는 일본 내 정치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다만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스페인 국왕 주최 만찬, 나토 정상회의, 한미일 정상회담 등으로 최소 3차례 만날 수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29일 김포~하네다 노선 재개로 일단 민간 교류가 다시 재개되고, 일본 참의원 선거 후 한일 외교장관 회담 논의가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면서 “이후 실무 레벨에서 한일 현안을 풀어 가는 모멘텀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고, 그 이후에 중단돼 있던 한일 셔틀 정상외교가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재 나토에서 한일 정상이 단독으로 만나 적극적으로 얘기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한일 간에 문제가 있다고 비쳐지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초 개최가 유력했던 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 4개국 회담의 경우 다른 현안이 우선시되며 개최가 불발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초청국들이 함께 만나서 대화할 별도의 의지가 있는지 현재는 불확실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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