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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거리 항공여행/물 자주 마시고 가볍게 운동하라

    ◎대한항공,바캉스철 맞아 「10대 건강수칙」 소개/기내 흡연은 지상보다 유해… 금연해야/시차극복하게 필요땐 「단기수면제」 복용 본격적인 바캉스시즌을 맞아 올 해외여행객수는 사상 최대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유럽과 캐나다·하와이·호주등 장거리 해외여행이 특히 강세를 보일 전망이다. 이같은 장거리 항공여행이 빈번해 지면서 해외여행에 나서는 관광객들이 자칫 건강을 소홀히 해 즐거워야 할 여행을 망치기가 일쑤다. 대한항공 항공보건의료원은 안락한 해외여행을 위한 「항공여행 건강안전 10대 수칙」을 발표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그내용을 알아본다. ■기내에서 충분한 수분 섭취하기=기내는 매 3분마다 환기가 이루어져 신선한 공기가 공급되나 습도는 10∼12%로 건조하다.따라서 장시간 비행할 경우 수시로 생수를 섭취,보충하는 것이 좋다. ■기내에서 가볍게 운동하기=제한된 좌석에서 고정된 자세로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경우 온 몸이 뻐근하고 혈액순환이 저하된다.신체의 하중이 하체로 쏠리면 양쪽다리의 혈관에서 정체현상이나타나 심할 경우 다리가 부을 수도 있다.목·어깨·허리·다리운동을 가볍게 반복,근육의 긴장을 풀고 혈액순환를 촉진시켜 피로와 시차극복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기내 금연하기=기내 흡연이 인체에 미치는 유해정도는 지상보다 높다.항공기가 순항중일때 객실내부는 한라산 높이인 6천피트내외의 기압상태를 유지하게 되는데 흡연으로 인한 혈액내 헤모글로빈의 산소운반량 감소는 저산소증에 대한 인체의 내성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이에따라 대한한공도 7월1일부터 비행 7시간이내의 구간에 대해 금연제도를 실시한다. ■시차극복을 위한 노력하기=기내에서 편안히 휴식을 취하며 도착지에서의 생활리듬을 고려,식사량이나 수면시간을 조절해 나간다.필요할 경우에는 의사의 자문을 받아 단기간 작용하는 수면제의 복용도 고려할 수 있다. 이와함께 끓인 물을 마시고 개인위생 실천하기,출발전 과음·과로 피하기,여유있는 준비와 계획으로 공항에서 서두르는 일이 없도록 하기,여행전과 같이 기내에서 충분한 휴식과 수면 취하기등이 요구된다.
  • 러,SS­25미사일 일부/민수용 로켓으로 개조

    【모스크바 AP 연합】 러시아는 군사적 효용이 다한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중일부를 위성 발사용 로켓으로 전용할 것이라고 러시아 전략미사일군의 유리 주라플로프 중장이 24일 밝혔다. 주라플로프 중장은 이타르 타스 통신과의 회견에서 『취역 기간을 끝낸 SS­25 미사일 일부를 개조,통신위성등의 발사에 사용할 것』이라고 밝히고『ICBM을 민수용 로켓으로 개조하는 작업은 경제난으로 어려움을 겪고있는 러시아 항공우주산업에 도움이 될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러시아가 이미 남아프리카 공화국및 다른 국가들과 수십억달러 상당의 인공위성 계약을 맺었다』고 밝혔다.
  • “나는 한국전에 이렇게 참전했다”/중국군의 증언

    ◎중국군 참전병사 2인 인터뷰 중국은 미국이 한국전쟁을 일으켰고 만주까지 넘봤다는 당시의 주장을 아직까지도 공식 입장으로 고수하고 있다.대부분의 일반 주민들도 그대로 믿고 있다.특파원이 만난 당시 참전 병사들도 그랬다. 이같이 한국전에 관한 정확한 재평가가 없어선지 고위 지휘관 출신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그래서 어렵사리 사병과 초급 지휘자 몇 사람의 체험만을 들을 수 있었으나 그 때문에 오히려 가식없는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었다.우리 땅에 왔던 「중공군」들의 40년후 회고담을 들으며 새삼스레 느끼는 것은 전쟁의 참혹함이었다. ◎“동홍각/“미서 중국 침략” 선전 믿고 압록강 도하/51년3월 터키군과 교전… 4명만 살아 『미국은 왜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일으켜 남북조선사람들에게 그토록 큰 괴로움을 줬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50년 11월 중순 중국인민지원군의 한 분대장으로 압록강을 넘었던 동홍각씨(66·가명)는 아직도 한국전쟁을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그는 미국이 49년에 나라를 세운 중화인민공화국을 넘어뜨리기 위해 조선북쪽을 삼키고 압록강까지 와서 중국땅 단동에까지 포탄을 퍼붓기 시작했으며,이는 일본이 조선반도를 거쳐 만주를 빼앗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것과 똑같은 수법이라고까지 주장했다.당시 중국에선 병사들에게 참전명분을 이렇게 선전했던 모양이다. ­당시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사실을 언제 처음 알았었나. 『1950년 10월초로 기억된다.당시 미군이 인천에 상륙해서 조선이 불바다가 되었다는 전쟁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었다』 ­이 전쟁은 6·25전쟁이라고도 한다.이는 6월25일에 일어난 때문인데 그로부터 4개월도 더 지난뒤에야 개전소식을 알았단 말인가. 『그렇다.우리는 군대에서 훈련 받느라 6월에 전쟁이 터졌다는 얘기는 못들었다.아무도 그런 얘기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북한군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그뒤 2∼3개월만에 낙동강이남을 제외한 한국 땅 대부분을 점령했다.그래서 미군을 비롯한 16개국 유엔군이 참전키로 했다.미군이 먼저 침략했다면 유엔깃발아래 16개국가의 유엔군이 어떻게 파견될수 있었겠는가. 『처음 듣는 얘기이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격전지는. 『51년3월에 우리 중국군 30명은 한 고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터키군 1백80여명이 한밤중에 산위로 진격해 올라왔다.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육박전까지 벌이다가 도망치듯 하산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고지에는 터키군도 보이지 않아 그들도 밤중에 퇴각해버린 것으로 생각했다.이 전투에서 받은 칼자국 상처가 아직도 내몸 여러곳에 남아있는데 당시 살아남은 사람은 우리쪽에선 단 4명뿐이었다』 ­전쟁중 고통스러웠던 점은. 『우리의 군장비나 무기는 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버린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유엔군에 비해 크게 낙후됐었다.그렇다고 북조선에서 물자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식량이나 의류등 모든것을 중국에서 가져 갔다.우리가 신세진 것은 먹는 물뿐이었다.이같은 장비의 낙후외에도 제공권을 완전 장악한 미군의 끈질긴 공습으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8노군때부터 군대생활을 시작해 국공내전과 이른바 6·25때의 항미원조참전을 거쳐 70년대 중반까지 현역생활을 했던 그는 『전쟁으로 손해보는 것은 인민들 뿐이다.인민들만 온갖 고통을 받는다』고 말하고 『전쟁중 부모형제를 잃고 넋이 나간채 울부짖던 고아들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내 머리속에 생생히 남아있다』며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만은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왕강/소속부대원 1천명중 2백여명 전사/보급물자 모자라 미군이 버린 약품써 『중국군 의무부대에는 당시 약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미군들이 버리고 간 의약품이 중국군 부상병을 치료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우리는 심지어 미군시신을 샅샅이 뒤져서 약품을 챙겨 쓰기도 했다』 한국전 당시 의무병 반장으로 참전했던 왕강씨(64)의 회고다.그는 당시 중국군은 물자가 너무 부족했지만 미군이나 기타 유엔군들은 보급물자가 풍족해서 부럽기 한이 없었다고 말했다.그래서 당시 중국군인들이 전투때마다 꼭 승리하려고 기를 썼던 이유중에는 승리한후 적군이 소지했던 맛있는 음식이나 약품등을 빼앗아 쓸수 있다는 희망도 꼽지 않을수없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군 의무부대에서는 어떤 약들을 보유하고 있었나. 『중국에서 제조한 서양의약품들로 진통제·지혈제·소염제가루에 붕대정도를 갖고 있었던게 전부였다.당시 한약은 가져가지 않았었다』 ­의무병이어서 당신은 비교적 안전하게 지냈겠다. 『그런 것도 아니다.내 몸에도 세군데나 상처가 남아있다.특히 내 오른쪽 가슴에는 탄환이 완전히 뚫고 나갔었다.천만다행으로 당시 미군으로부터 노획한 좋은 약을 써서 탄환 상처를 깨끗이 완치시킬수 있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한번 사용했던 붕대를 다시 쓰기 위해 냇가에서 빨래하고 있을 때 총탄을 맞았다고 했다.놀라운 사실은 그 당시는 총소리도 못듣고 아픈줄도 모르고 막사로 돌아왔는데 동료들이 등뒤에서 흘러나온 피를 보고 말해줘서야 총맞은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당시 가장 고통스럽던 기억은 무엇인가. 『먹을 게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우리는 밥이나 고기 채소류는 먹어보지도 못했다.강냉이를 먹거나 녹두 콩등으로 만든 미숫가루로 연명하는 게 고작이었다.워낙 영양가 없는 것들만 조금씩 먹다보니 야맹증에 걸려서 제대후에도 오랫동안 고생했다』 왕씨는 50년10월25일 66군 588단 위생반장으로 압록강을 건넌후 이듬해인 51년4월까지 불과 반년남짓 참전하고는 귀국했다.그후엔 중상을 입고 중국으로 후송돼온 병사들을 치료하느라 바삐 보냈다는 것이다. ­당신소속 부대는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는가. 『588단은 1천여명에 달했다.그중 2백여명이 전사했다.이들은 마대자루에 넣어 그대로 땅에 묻어버렸다.부상병도 수없이 많았는데 주로 민간주택에서 20∼30명씩 모아 치료를 하다가 어떤때는 미군의 공습으로 혼쭐이 나기도 하고 전투가 조용해지면 좀더 안전한 다른 지역으로 후송하기도 했다』 ­요즘은 전쟁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가. 『전쟁에서는 침략자든 피침략자든 어느쪽을 막론하고 피해를 보는 것은 인민이라는 생각이다.그래서 다시는 참전하고 싶지 않다.우리 자손들에게도 전쟁이 일어나면 불참하라고 권유하겠다』
  • 사회가 맑아진다 일기를 씌우자(박갑천칼럼)

    철학교수로 시집 몇권을 내고 잡지에 평론을 몇편 쓴 정도의 평범한 생활을 하다가간 사람이 H.F.아미엘이다.그는 고독한 생활에 젖어 결혼도 않은채 일생을 마쳤다.그런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죽은 다음에 발표된 「일기」때문이다. 『…일기는 고독한 사람의 마음의 벗이면서 위로의 손길이자 의사이기도 하다.날마다의 독백은 축도의 한 형식이기도 하고 영혼과 그 본체와의 대화이기도 하며…』.일기를 쓴다는 것은 꿈을 꾸기위한 방법이며 번잡하지 않은 놀이라고도 그는 말한다. 나날의 기록이 일기이다.나날이 일어난일,경험한일,생각한 일등에 대해 형식에 매임이 없이 적는 주관적인 글이다.원칙적으로는 남에게 보이고자 쓰는게 아니라는 점에서 자유롭다.고해적인 성격을 띠기도 한다.아미엘같이 거기에 모든걸 털어놓으면서 후련함을 느끼게도 되는 글이 일기이다. 하지만 그같이 사적인 성격을 띠는 것 말고도 적는 형식이 공적인 성격을 띠는 것도 있다.율곡 이이의 「석담일기」나 음애 이자의 「음애일기」같이 당시의 조정사정을 기록한 것이 그것이다.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같은 전쟁일기를 비롯하여 금남 최보의 「표해록」이나 각종 수신사일기·연행록… 따위도 사적이면서 『보이기 위한』공적인 성격이 짙다고 할 것이다. 그런 일기 가운데 특출한 것이 5대 1백17년 동안 하루도 거름이 없이 써내려온 경북 예천의 미산 박득령 집안 대하일기 「저상일월」이다.서울신문에 연재됨으로 해서 일반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된 「저상일월」은 한집안의 대물림 일기이면서 우리 근세사의 안팎을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이기도 하다.이렇게 대를 물려가며 쓴 일기는 아마 그유례를 다른데서는 찾기 어려울 듯하다. 「인간성회복 실천운동 추진협의회」에서 「사랑의 일기장」운동을 4년째 펼쳐오고 있다고 한다.전국의 국민학생 20만명에게 일기장을 무료로 보내어 쓰게 한다는 것인데 그것을 받아서 쓴 어린이들의 생활예절은 몰라보게 좋아져 간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보람이며 기쁨이다. 일기를 쓰면 무엇보다도 문장력이 향상된다.국민학교부터 대학 나올 때까지 쓴다면 틀림없이 훌륭한 작가로 될수 있을 것이다.그뿐 아니다.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게 트이면서 변별력이 성숙해 간다.날마다의 성찰은 영혼을 맑힘으로써 신에게 가까워지게도 할것이다.일기를 쓰는 사회의 혈행은 맑아진다.청소년을 포함한 국민모두가 일기를 써나갔으면 한다.
  • 「UR비준안 제출」타이밍 “저울질”/정부,임시­정기국회 놓고 고심

    ◎주요국 비준 지연 조짐에 일단 관망세/예산처리 부담 적은 「6월」 선택 가능성 정부가 우루과이 라운드(UR)협정안의 비준안 제출시기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6월 임시국회에 제출할 지,9월 정기국회로 넘길 지 저울질이 한창이다. 9월 정기국회는 예산안과 맞물리기 때문에 부담스럽다.예산안은 해마다 국회에서 밀고 당기는 단골 메뉴라,자칫하다간 예산안에 치여 UR 비준안이 해를 넘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연내 비준이 목표라면 6월 국회가 훨씬 부담이 덜하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 등 주요 국가에 앞서 비준절차를 밟을 경우 그 모양이 별로 좋지 않아 고민이다.미국의 경우 빨라야 7월,늦으면 연말이나 내년으로 넘어갈 공산이 있다. 정부 안에서도 서두를 게 없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내년 상반기에 비준을 받아도 늦지 않다는 주장까지 나온다.세계무역기구(WTO)발족 후 2년 이내에 비준을 받으면 된다는 소급조항 때문이다. 그러나 어차피 받아들여야 할 협정이라면 정면 돌파가 낫다는 견해도 많다.다른 나라의 추이를 지나치게 의식하다 오히려 일이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이는 UR 협상이 진행 중일 때는 반대여론이 많았지만 지금은 국민들의 수용도가 의외로 높아졌다는 점에 근거를 둔 것이다.민자당은 정기국회를 선호하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는 마라케시 회의에서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조기 비준의사를 밝히자 6월 임시국회에 비준안을 올린다는 방침을 세웠었다.그러나 최근 주요국의 비준이 늦어지자 관망세로 돌아섰다. 외무부를 중심으로 관계부처간 UR협정안의 번역은 이미 끝났고 최종 문안을 정리 중이다.시기만 결정되면 국무회의 의결 등 내각의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택일만 남은 셈이다. UR수용을 역설해 온 정부가 여론과 눈치를 살피며,비준의 당위성을 약화시키는 일은 피할 것 같다.「무조건 수용」이라는 판단이 내려진만큼 현재로선 부담이 적은 임시국회에서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
  • 육상자위대 신전략/일 「북방중시」 수정/수도권방위 강화

    ◎「러」 위협 감소로 북상황 초점/헬기·장갑차 등 기동력 확충 【도쿄 연합】 냉전후의 존립 방향을 연구하고 있는 일본 육상자위대는 현재의 극동 러시아군을 의식한 「북방중시 전략」을 북한의 중거리미사일 「노동1호」등의 사정권에 있는 규슈(구주)등 서일본을 비롯,수도권의 방위에도 중점을 두는 새로운 전략으로 바꿨다고 일본 아사히신문이 14일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일본 육상자위대의 이같은 전략변경은 구소련의 붕괴로 북방위협이 감소함으로써 자위대 정원의 삭감이 필요한 가운데 한반도의 긴장과 일본 정치·경제 분야의 중추를 중시,일본전국에 배치하고 있는 사단의 전략적 의의를 재검토한데서 나온 것이다. 일본 육상자위대가 마련한 신전략에 따른 「기본방침」은 전국 13개 육상자위대 사단중 제5사단(사령부 북해도 대광시)등 4개 사단을 여단으로 축소하는 한편 병력수송용 헬리콥터부대의 신설 등 기동력의 대폭강화 등을 골자로 담고 있다. 기본방침은 우선 방위상 관점에서 일본전국을 ▲아오모리(청삼)현 이북의 「북일본」▲북부규슈(구주)와 주고쿠(중국)지방의 서일본 ▲그밖의 「중일본」등 3개 지역으로 구분,영토문제,한반도정세의 영향,정치·경제의 중추 등과 관련해 각 지역을 동등하게 중요시하고 있다. 기본방침의 구체적인 내용은 제5사단과 제10사단(명고옥시),제12사단(군마현),제13사단(광도현 해전정)의 병력을 현행 7천명에서 4∼5천명으로 줄여 여단으로 하되 기능은 종전의 사단과 똑같도록 하고 있다. 기본방침은 또 전국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신방위 전략의 실현에 따른 기동력 강화를 위해 ▲제12사단에 헬리콥터를 배치,유사시 전국 어디라도 즉각 출동할 수 있는 공중기동여단으로 하고 ▲각 사단·여단의 장갑차를 대폭 늘리는 한편 핵심부대의 인원보충책으로 예비자위관 제도의 확충 등을 도모하기로 했다.
  • 일 법무,망언취소·사죄/3일만에/아주국들 반발… 파면 요구

    ◎한 외무,주한대사 불러 향의 한승주외무부장관은 6일 나가노 시게토(영야무문) 일본법무상의 망언과 관련,고토 도시오(후등리웅) 주한일본대사를 불러 우리 정부의 항의의 뜻을 전하고 일본정부의 시정조치를 요구했다. 한장관은 이날 상오 고토대사를 외무부로 불러 나가노법상의 태평양전쟁 관련 발언은 『한국 정부및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밝히고 『이는 왜곡된 역사관으로 크게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장기호외무부대변인이 전했다. 한장관은 이어 『일본정부는 진상을 규명하고 자국의 입장을 확실히 표명하는 한편 이같은 발언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긴급기자회견 자청 【도쿄=이창순특파원】 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며 남경대학살은 날조된 것이라는 망언으로 국제적 파문을 일으켰던 일본의 나가노 시게토(영야무문) 법상이 6일 긴급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발언을 전면적으로 철회하고 사죄했다. 나가노법상은 이날 자신의 발언이 중국·한국등 아시아국가들의 강력한 반발로 외교문제화됨과 동시에 국내에서도 정치문제화되자 이날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자신의 과거역사에 대한 발언은 부적절했다고 밝혔다. 그는 『남경대학살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며 대단히 불행한 사건으로 중국국민에게 사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해 3일만에 『남경대학살은 날조된 사건』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부인했다. 그는 자신의 진퇴문제와 관련,『책임을 통감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임명권자인 하타 쓰토무(우전자) 총리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밝혔다. ◎일 중진법조인들 나가노망언 비난 【북경=최두삼특파원】 중국을 방문중인 일본법조계의 중국사법제도조사단(단장 소전성광변호사)은 남경대학살의 조작설등 나가노 일법무상의 망언소식을 듣고 분개,6일 나가노장관의 즉각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한뒤 성명서를 주중일본대사관에 전달했다. 조사단의 한 관계자는 『방중활동중 남경대학살의 역사현장을 둘러본 우리들로서는 법률가적 양심에 따라 과거 침략의 역사적 죄과를 왜곡하려 한 나가노장관의 퇴진을 요구하게됐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변호사 법학교수등 18명으로 구성된 조사단은 지난달 28일부터 중국사회과학원 초청으로 방중,중국의 사법제도에 관한 조사활동을 벌이던중 나가노 망언소식을 듣고 5일밤 북경호텔에서 전체회의를 소집,이같은 내용의 성명문안을 작성했다. ◎나가노 망언 규탄/일 정부 사과 촉구/여야 논평 여야는 6일 나가노 시게토(영야무문)일본 법무상의 태평양전쟁 관련 망언을 규탄하는 논평을 각각 내고 일본정부의 사과와 책임있는 태도표명을 촉구했다.
  • 양기탁선생/대한매일신보 창간… 항일의식 고취(이달의 독립운동가)

    ◎신민회 결성… 만주서 독립군 양성 주도/의용군 국내에 파견,일제기관 등 습격 양기탁선생은 국운이 꺼져가던 대한제국말기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항일의식과 애국계몽의식을 고취한 언론인이자 신민회등 비밀결사를 통해 무장항일운동을 벌인 독립운동가이다. 1871년 4월2일 출생한 선생은 1938년 4월19일에 운명,이달로서 서거 56주기와 탄신 123주년을 맞게 됐다. 평양 출신인 선생은 소년 시절 영어를 배워 1895년 미국인 게일박사의 한영자전 편찬작업에 참여했다.사전인쇄를 하러 일본으로 건너간 길에 근대화된 일본을 보고 감명받은 선생은 귀국후 개화파들이 모인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8년 독립협회가 친러 수구파에 의해 해산되는 과정에서 체포돼 조사를 받고 나온 선생은 게일박사의 도움으로 도미,3년뒤인 1901년 귀국했다. 노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에는 대한제국 황실 외교담당부서인 궁내부 예식원 직원으로 임명돼 영어통역 일을 했다. 선생은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조선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는 등 침략을 본격화하자 이를 막기 위해서는 신문운영이 필요하다고 판단,고종으로부터 황실판공비인 내탕금을 지원받아 신문사 시설을 마련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일본헌병대의 출판물 검열을 피하기 위해 당시 영국 데일리 뉴스 임시특파원이던 영국인 배설(Earnest Bethell·1872∼1909)을 사장으로 1904년 창간됐다. 이 신문에는 박은식선생을 비롯,신채호·최익·장도빈등이 제작진으로 참여했다.외국인 명의로 발행돼던 이 신문은 일제 통감부의 검열을 피하면서 「일인입불가」를 출입문에 써붙였을 정도로 강한 반일감정을 나타냈다. 국한문혼용인 국내용 신문과 별도로 영문판을 발행한 이 신문은 통감부의 신문지법에 다른 신문들이 얽매여 의병활동을 폭도라고 표현할 당시 의병활동을 높이 평가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의 대변지역할을 수행,1만3천여부의 부수를 자랑했다. 일제는 눈엣가시 같은 이 신문을 폐간하기 위해 우선 사장인 배설을 영국영사재판소에 치안방해죄로 고소,중국 상해로 추방했다.배설은 형을 마친뒤 서울로 돌아와 옥고 후유증으로 숨졌다. 선생은 이런 가운데 안창호선생을 비롯한 이동휘·이동령·노백린·이시영·김구선생등과 함께 신민회를 창립,해외독립기지 건설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신민회본부는 대한매일신문안에 두었으며 지방지국은 연락망으로 활용됐다. 전국 8백여명의 애국세력이 집결한 신민회는 1909년 독립군 창건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선생의 집에서 전국대회를 열었다. 이날 대회는 해외에 독립군기지를 세우고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진입작전을 펼쳐 독립을 쟁취한다는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했다. 선생은 이 계획에 따라 군관학교를 세울 적당한 장소물색을 위해 만주를 답사했으며 1910년 이동령등이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이처럼 신민회의 활동이 뚜렷해지자 일제는 1911년 양기탁보안법위반사건을 꾸며 신민회 중앙간부 16명을 모두 체포,투옥시켰다. 이어 일제총독 암살사건(일명 105인 사건)을 날조해 신민회원 8백명을 전원 체포,선생은 징역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4년만에 석방된 선생은 평남 강남군 쌍용면 신경리에 유배됐다. 선생은 다음해인 1906년 유배지를 탈출해 만주신흥무관학교와 광복회에서 활동중 다시 일제에 체포,국내로 압송돼 전남 거금도에서 2년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유배에서 풀려난 선생은 동양을 순방중인 미국의원단이 서울역에 도착하자 독립만세운동을 펼쳐 또 투옥됐다. 모친 사망으로 일시 방면된 틈을 타 만주로 도피한 선생은 무장항일단체인 의성단을 결성,봉천의 만철병원 습격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24년에는 이청천·김동삼등과 함께 대한군정서·통의부등 만주내 무장항일단체를 통합,정의부를 결성하고 의용군을 국내에 파견해 일제기관을 공격하게 했다. 선생은 또 중국내 한국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도 추진,김규식선생등과 함께 1932년 한국대일전선 통일동맹을 구성했다. 1934년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으로 선임된 선생은 국무회의가 자신을 국무령으로 추대하자 이를 수락한뒤 한국독립당·대한독립단·의열단·조선혁명당·신한독립당등 여럿으로 갈라진 독립세력을 규합해 민족혁명당을 결성하는등 독립세력의 분열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선생은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미국과 중국내 독립세력의 재규합을 추진,남경에서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선생은 이 과정에서 과로로 병을 얻어 1938년 68세를 일기로 숨졌다. 정부는 선생에게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총무원장 8년… 「종단의 얼굴」/서의현원장의 면모와 행적

    ◎5공때부터 최고위급 인사와 교분/상무대 비리·사생활 관련 구설수도 5일 조계종 원로회 회의에서 전격 불신임된 서의현총무원장(58)은 한국불교 최대종단인 조계종의 종권을 9년동안 굳건히 지켜온 불교계 최대의 실력자다. 86년 8월 제25대 총무원장에 선출된 뒤 역대 총무원장 가운데 최초로 임기 4년을 다 채운데 이어 90년에는 재임에도 성공,종단 제1인자의 아성을 지켜왔다. 그러나 독선적이며 친정부적인 종단운영으로 개혁파들로부터 계속 도전을 받아왔으며 사생활과 관련된 구설수와 함께 최근에는 상무대 비리에까지 연루돼 3선연임을 목전에 두고 사면초가의 곤경에 빠진 상태였다. 게다가 자신의 3선연임을 결정할 중앙종회를 하루 앞둔 지난달 30일 터진 조계사 폭력사태를 배후 조정한 의혹까지 받게되면서 그의 거취가 관심의 초점이 돼왔다. 그는 36년 대구에서 출생했으며 52년 해인사에서 김상월화상을 은사로 득도한 뒤 같은해에 사미계(사미계),55년 비구계(비구계)를 수계했고 62년 해인사 대교과를 거쳐 67년 대승사 주지를 시작으로은해사와 동화사 주지를 역임했다 또 66년 2대 종회부터 현재의 10대 종회까지 중앙종회의원직에 오르는등 최다선의원으로 화려한 이력을 더해 왔다. 그는 종단내에서의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정계를 비롯,각계 최고위급 인사들과도 폭넓은 친분을 유지해 왔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정치로비자금을 동원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5공말기인 86년 행정수반격인 총무원장에 처음 선출된 당시 집권층의 다수를 이루던 소위 TK세력과의 친분등으로 인해 친정부적인 성향을 띠면서 실세였던 전경환씨와 가깝게 지냈으며 이때부터 호국불교를 외치며 정부를 위한 조찬기도법회를 여러차례 주선했다. 전두환전대통령이 퇴임후 백담사에 은둔중일 때는 일주일에 한두번씩 방문,전씨에 대한 「의리」를 은연중 과시하기도 했다. 또 91년 5월에는 서울롯데호텔에서 노태우전대통령 내외와 불교신자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원법회」를 갖고 법어를 통해 노대통령의 북방정책을 찬양하는 발언을 해 교계 일각에서빈축을 샀다. 91년 9월 종정추대를 둘러싸고 종권다툼이 벌어져 총무원이 강남과 강북으로 양분되는등 분종의 위기까지 치달으면서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으나 양측간의 극적인 화해로 위기를 넘기는 등 남다른 생명력과 위기관리 능력을 보였다. 하지만 거의 선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권력지향적인 그의 성향은 92년 3월 당시 김영삼민자당대표최고위원을 지지하는 발언으로 또다시 내부 반발에 직면했으며 퇴진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결국 상무대 비리와 관련,공사대금 80억원을 대선자금으로 유용했다는 의혹까지 받기에 이르면서 조계사 폭력사태로 이어지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 최익현의 상소와 농산물개방/지명관(시론)

    지난해 말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이 한창 진행중일 때 얘기다.1876년 한일수호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될 무렵에 최익현선생이 도끼를 들고 궁궐앞에 엎드려 이 조약을 반대하는 소장을 올렸던 일이 생각난다. 그는 다섯가지 불가를 말했지만 그안에는 일제의 경제적 침략을 우려하는 대목이 있었다.그들의 「물질」이란 「음사기완」하고 그 양이 「무한」하다는 것이었다.그들이 우리 강토를 상품시장화하려고 하는데 그 물건은 우리를 매혹시킬 기이한 노리개이며 그 생산이 무한하다고 한 것이다. 이에 비하면 우리의 「물질」은 「백성의 목숨이 달린 것」(민명소기)으로 그것은 「유한」한 것이라고 했다.우리의 생산품인 미곡을 비롯한 농산물이란 우리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것이며 또 한없이 생산되는 것도 아닌데 그것을 팔아 공산품을 산다면 나라의 장래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우려한 것이다. 그로부터 1백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 다시 우리는 「민명」이 달려있는 우리의 「물질」을 문제삼게 되었다.물론 오늘 20세기 말에 있어서는 그때와아주 다른데가 한두가지가 아니다.무엇보다 우리도 오늘의 국제정세 속에서는 「음사기완」하고 「무한」한 것을 생산해서 수출해야하므로 이제는 도리어 「백성의 목숨」이 여기에 달려 있는 셈이다.국제경쟁에서 이겨야 살 수 있다는 구호가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농업에 민명이 달려있다고 생각한 최익현 선생의 말은 오늘도 그대로 진리라고 해야 하겠다.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농촌과 산림이 황폐해 진다면 우리의 생명은 지탱할 도리가 없다.지금같은 인구의 도시집중이면 나라의 장래는 어둡기만 하다.도시에서 문화와 기술이 발전하고 도시가 인류의 번영을 이끌어온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사실이다.그러나 게오르크 짐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에 버스·철도·전차가 발달하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서로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서 몇시간 동안이나 마주보고 앉아있어야 하는 일이란 없었다』 사실 비행기 여행시 십여시간 동안이나 옆사람에게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고 묵묵히 앉아있는게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이것이 도시문화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무서운 고립이다.우리 모두가 남이 알아서는 안될 큰 비밀이라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우리는 모두가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고용주와 피고용인 또는 채권자와 채무자로 대립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도시속에서 심한 경쟁으로 치달으면서 우리는 서로가 경계하고 대화하기를 꺼리고 있는 것같다.그러니까 동일한 민족을 말하면서도 우리마음 속에서는 일체감이 결여돼있는 것처럼 느껴진다.이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전원 농촌 산간을 필요로 한다. 우루과이라운드 후의 농촌을 살린다고 농촌특별세를 신설하려 하고 있다.여기에 대해서 아마도 원론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줄로 안다.그러나 지금 외국 쌀이나 농산물이 들어오니까 우리농업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족하다고 할 것인가. 국토전체 국민전체를 안중에 두고 생각하는 비전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농사를 짓는 것으로 경제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면 그만이라고 만의 하나라도 생각해서는 안된다.지금도 고령화돼 있는 5백70여만명의 농민을 땅에 매어두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농촌이 경제적인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활성화되어야 한다. 지금은 국토전체의 균형을 생각하고 국민전체의 삶과 그 몸과 마음의 건강을 생각해야할 때다.농촌과 도시는 떼어 놓을수 없는 하나다.농촌에도 문화가 꽃피어야 하고 거기서 더욱 건전한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자라나고 있어야 한다.도시의 젊은이들을 거기에 유학보내고 싶어지도록 말이다. 예를 든다면 이런 꿈은 어떨까.저 산간 깊은 곳에 우수한 고등학교나 대학이 서게 되고 모두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그 고장 농산물을 애용하게 된다면….거기서 문화제나 때로는 국제적인 예술제전이 있어서 도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건전한 지방자치의 발전과 더불어 하루속히 이런 꿈도 펼쳐질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 「블루 시걸」/첫 성인 만화영화 해외진출 노린다

    ◎용성시네콤,새달초 촬영/세계수준의 기술인력 동원/제작비 15억원… 미·일 하청 탈피계기로/여성미 영상화… “대의와 사랑 보여줄것” 국내 최초로 성인용 만화영화가 제작된다.용성시네콤(대표 김종성)과 만화영화제작사 애니피아(대표 오중일감독)가 손을 잡고 제작에 착수한 「블루 시걸」(Blue Seagull)이 화제의 작품.직역하면 「외로운 갈매기」이지만 우리말로는 「고독한 영웅」이라는 뜻이다. 미국으로 밀반출된 조선시대의 보검을 찾기위해 마피아와 전쟁을 벌이는 하일이라는 청년과 웨딩드레스 디자이너인 그의 연인 채린이 주요 등장인물.이들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대의와 사랑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제작의도다. 오는 2월초부터 본격 촬영에 들어가 추석쯤 개봉하고 해외영화제에도 출품한다는 계획.제작비는 15억원 안팎을 예상하고 있다.작가 김경우씨의 시나리오를 기초로 수십차례 수정작업을 가졌으며,작품의 배경이 되는 미국 홍콩 일본 현지를 답사했다. 제작 초기단계부터 이 영화가 관심을 모으는 이유는 아무래도「성인용」이라는데 있다.이에대해 오중일감독(46)은 『상상력이 가미되는 만큼,일반영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신체의 아름다운 굴곡과 연인들의 품위있는 사랑을 볼수 있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포르노영화를 연상하면 곤란하다』고 밝혔다.또한 어린이용 만화영화에 엄청난 물량을 투입하는 미국·일본작품과의 경쟁이 어렵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또다른 이유는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수준있는 만화영화를 만들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때문인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오중일감독은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은 단지 자본뿐이었다』고 단언하고 있다.지금까지 우리는 세계수준의 제작기법과 실력있는 애니메이터들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자금이 없어 외국의 하청작업에만 참여해왔다는 것이 오씨의 설명이다.그는 사실 지난73년부터 20여년간 미국과 일본의 TV만화영화 제작에 참여해오면서 상당한 실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하튼 이 작품은 그 성공여하에 따라 우리 영화계가 해외시장 개척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2조8천억원 규모로 평가되는 만화영화시장은 일본이 65% 정도를 잠식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또 이처럼 일본이 시장점유율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은 동양인 배우가 출연하는 극영화로는 세계시장 개척에 어려움이 많다는 판단아래 만화영화제작에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때문에 우리도 이 분야에 정성을 쏟으면 세계시장에서 얼마든지 통할 수 있다는 것이 영화계의 중론이다.
  • 서방의 「중국 괴롭히기」/최두삼 북경특파원(오늘의 눈)

    영국은 오는 97년의 홍콩반환문제를 놓고 중국을 계속 괴롭히고 있다.반환전에 식민지 홍콩의 민주화를 이룩해놓겠다며 입법원(의회)선거문제를 놓고 중국과 협상을 해오다가 최근 협상포기를 선언,독자적인 민주화추진계획을 발표했다.그러나 민주화라는 명분뒤에는 『땅은 돌려주되 그 위에 이룩한 부를 송두리째 넘겨줄 수는 없다』는 속셈이 깔려 있는 것같다. 중국을 괴롭히는 것은 영국만이 아니다.특히 지난 89년 천안문 유혈사태이후 최근까지 거의 5년동안이나 서방 강국들은 경쟁적으로 중국을 질타해왔다.그중에서도 미국은 최혜국대우 부여를 비롯한 각종 문제에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왔고 올림픽개최마저 못하도록 훼방을 놓았었다. 서방세계의 중국괴롭히기는 아편전쟁으로부터 청일전쟁 중일전쟁등을 비롯,지금까지 1백50여년간 지속됐다.그동안 중국대륙을 침탈해오면서 끝없이 중국인들을 능멸해왔다.심지어 외국인 전용구역에 「개와 중국인은 출입을 금지한다」는 표지판을 내걸어두는가 하면 중국인들이 씻기를 싫어해 몸이 더럽다는 사실을 과장해서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도 만들어냈다. 『중국 한국 일본등 3나라 사람들이 모여 더러운 곳에서 얼마나 오래 견디는 지 인내력의 한계를 시험해보기로 했다.방법은 돼지우리에 들어가 돼지와 함께 얼마나 오래 견디는 지를 견주자는 것이다.일본사람은 불과 3∼4시간만에 손을 들고 뛰쳐 나왔다.은근과 끈기의 한국인도 만 하루를 넘기지 못한 채 돼지에게 욕설만 퍼부으며 빠져 나왔다.마지막으로 중국인이 들어간 지 한시간도 안된 때였다.이번에는 중국인이 아닌 돼지가 우리를 뛰쳐나오면서 「저런 인간과는 한시도 같이 지낼 수 없다」고 투덜거렸다』 이같은 서방측의 대중국 핍박이 있을 때면 생각나는 게 영국의 세계적인 석학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관이다.그는 서양측에 짓밟혀 온 중국이 잠에서 깨어 날 때 거대한 보복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며 황화론을 펴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미국과 영국은 마치 태평양시대의 도래를 촉구라도 하듯 자꾸만 중국을 짓밟으려 하고 있다.아무래도 요즘 서방 지도자들은 토인비의 역사관 따윈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 미,「북핵 포괄적 타결」 시사

    ◎클린턴/“한·중·일이 워싱턴 정책 지지”/강택민/“남북대화 통한 핵해결 희망” 【시애틀=특별취재반】 빌 클린턴미대통령은 19일 한국·일본·중국이 북한핵에 대한 제재조치가 역효과를 야기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고 말하고 북한과의 모든 견해차이를 해소하는 「보다 포괄적인 해결방안」을 여러 대안중의 하나로 검토중이라고 말했다. 클린턴대통령은 이날 강택민중국국가주석과 개별정상회담을 가진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한핵문제해결을 위해 시한을 설정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이같이 답변했다. 클린턴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은 북한핵과 수교문제의 일괄타결방안을 대안의 하나로 검토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클린턴대통령은 한중일 3국은 북한의 핵보유를 원하지 않고 있으며 그같은 사태를 막기 위한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클린턴대통령은 이들 3국이 대북한 제재조치가 역효과를 가져올지 여부를 우려하고 있다고 전제,『우리는 북한에 대해 남북대화재개와 핵사찰수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든 이견을 해소하는,아마도 보다 포괄적인 접근방식을 취하는 것 등 몇가지 다른 대안들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과 중국 일본 3개국이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아야 한다는데 큰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면서 『국제원자력기구가 더 이상 북한의 핵개발 여부을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와관련,강택민주석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한반도의 비핵화를 중국이 원하고 있으며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결을 희망한다고 말하고 특히 북한과 미국,북한과 IAEA,그리고 남북대화를 통해 북한핵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기침 중국외교부장이 기자회견에서 전했다. 클린턴대통령은 이에앞서 호소카와 일본총리와 개별정상회담을 가졌는데 호소카와총리는 북한핵문제를 첫번째 의제로 거론했다. 미일양정상은 또 북한핵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이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북한핵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노력의 중요성에 의견을 같이했다고 서방관계자가 전했다.
  • 이장영선생(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1920년대 만주항일투쟁 주도/청산리대첩뒤 10개 독립단체 통합/대한독립군단 창설… 초대 참모장 역임 무장독립단체의 통합체인 대한독립군단 참모총장을 역임한 백우 이장령선생은 1881년 5월20일 충남 천원군 목천면 서리에서 태어났다.어릴 때부터 결단력이 유달리 강했던 선생은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에 입학,1903년 육군부위로 승진했으나 1907년 8월1일 대한제국군해산령이 내려진 것을 계기로 해외에서의 조국광복투쟁을 결심하고 1907년 11월20일 중국 동북지방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했다.1905년 을사조약후 최초의 국외망명자가 된 것이다. ○충남 천안서 출생 선생은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목적으로 삼원보에 정착한 이회영형제를 비롯한 신민회 간부들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선생은 이씨형제와 신흥강습소를 창설하고 교관이 돼 애국청년들의 군사훈련과 독립정신 고취에 헌신한다.1920년 8월 일제의 강압으로 학교가 폐교될 때 까지 2천1백여명의 독립군이 배출된 데는 선생의 공이 컸다. 선생은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난 것을 기점으로 대종교의 지도자 서일·신규식·김헌·김성주를 중심으로 결성된 군정부(일명 대한군정서)의 참모장으로 임명됐다.대한군정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면서 북로군정서로 개칭된다. 북로군정서 소속 군은 북간도지방의 군사주력부대로서 군인을 모집,훈련시키고 무기를 구입하여 임전태세를 확립하는 한편 곳곳에 정보연락기관을 설치했으며 근거지는 왕청현 십리평 일대의 30여리에 걸친 심림지대였다. 북로군정서 군은 소련령의 블라디보스토크등으로부터 최신 무기를 구입,무장하고 전투훈련을 계속했으나 이 사실을 탐지한 일본군은 독립군 대토벌작전을 계획하고 중국에 은근한 협박을 가하기 시작했다.『중일 양국은 우호국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영토내에 독립군 대부대가 무장하고 일본에 항전하고 있는 것은 중국당국에서 독립군을 보호하는 결과이므로 일본은 중국을 상대로 무력을 행사할 수 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일본의 내정간섭을 불쾌하게 여겼으나 싸울 능력이 없었던 중국은 독립군을 공격하는 척 하면서 독립군에게는 산중피신을 권고하기도 했다.북로군정서 군은 좀 더 실력이 증강될 때 까지는 일본군과의 정면전쟁은 피할 생각이었다.그러나 1920년 9월20일 이범석을 단장으로 이동준비를 서두르던 중 예기지 않았던 훈춘사건이 발생했다. 일본군의 조종을 받은 마적 4백여명이 훈춘성을 공격하면서 일본영사관을 일부러 습격하고 일경간부 가족 부녀자 9명을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킨다.일본은 이 자작극을 구실삼아 중국당국의 양해도 받지 않고 연대병력을 전격적으로 출동시켜 한국인 부락을 모조리 습격했다.일본군은 북로군정서 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협공작전을 폈으나 북로군정서 군이 이를 인지,서로군정서와 합류하고 백두산지역에 새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안도현으로의 이동을 개시한다.그러나 일군의 집요한 작전으로 일전을 불사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르렀다.청산리 계곡은 동서로 25㎞에 달하는 긴 터널과 같은 계곡으로 좌우에는 울창한 삼림지대로 겨우 인마통행만이 가능할 정도였다. ○1천2백명 사살 북로군정서 군은 1제대장 김좌진장군과 2제대장 이범석장군의 지휘로 요충지에 군사를 매복시키는등 전투준비를 완료했다.1920년 10월20일 상오 9시 안천소좌가 이끄는 일본군이 지형정찰도 하지 않고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이범석부대의 매복지점에 들어서자 독립군은 일제사격을 가해 일거에 패퇴시켰다.일본군 본대까지 달려와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으나 유리한 지형을 이용,포진하고 있는 독립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10월20일부터 25일까지 10여차례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된 이 전투가 독립운동사에 가장 빛나는 청산리대첩이다.일본군은 연대장을 포함,1천2백여명이 사살됐으나 독립군은 불과 1백여명만이 전사했을 뿐이다. 1920년 12월 북로군정서 군의 주도아래 대한독립군·대한국민회·대한정의군정사등 10개 독립군단체는 대한독립군단으로 조직된다.선생은 이 단체의 참모총장으로 임명됐는데 병력은 3천5백명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은 이후 일본군의 예봉을 피하고 전력을 재정비하기 위해 소련영토로 이동,러시아혁명의 와중에 있던 공산계열인 소련군과「동상이몽」식이었으나 한동안 손을 잡는다.속뜻이 달라 소련군과 갈등관계를 유지하던 독립군은 소련과 캄차카반도연안의 어업협상을 벌이던 일본이 『소련영토에 한인혁명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 우호관계상 적절치 못하다』는 근질긴 항의때문에 무조건적인 무장해제를 통고받는다. 1921년 6월28일 소련군은 통보를 무시한 독립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독립군은 이 싸움에서 3백여명이 전사하고 2백50여명이 행방불명이 되는등 큰 피해를 입었다.흑하사변으로 불리는 이 참변후 선생은 중국 동북지방으로 피신했다. ○건국훈장 추서 대한독립군단 재편으로 1924년 3월 대한독립군정서군이 조직되자 선생은 다시 적극 참여했으며 7월 길림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를 열어 독립단체가 통합되려 할 때 윤각과 함께 참가,회의의 주비회장으로 추대되면서 신민부를 조직했고 신민부의 참의원으로 선임됐다. 일제의 압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더욱 가혹해졌으며 선생이 있던 중국 동북지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활동의 폭도 날이 갈수록 좁아지고 평생조국광복을 위해 같이 싸웠던 김좌진이 공산당원에게 살해당하면서 독립운동무대를 상해로 옮기려던 선생은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에게 피살되는 불운을 맞게 된다.선생의 나이 51세였다.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불,조선문화재 조직적 약탈”/로즈제독 행적 분석 최석우신부 증언

    ◎병인양호때 수집팀 설치,강화도 수색/선교사들도 중요자료 상당수 빼내가/불발표 2백97권은 일부… 개요 파악뒤 반환요청을 『프랑스에서 반환하겠다고 한 고서 2백97권은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는 우리 문화재 가운데 일부에 불과합니다.원론적으로 보면 프랑스가 가져간 우리 문화재는 전체적으로 그 개요가 파악된뒤 우리측의 요청에 의해 되돌려져야 합니다』 서울 가톨릭 교구의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최석우신부(71)는 최근 프랑스가 미테랑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되돌려 주겠다고 한 고서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견해를 피력하면서 『그들이 일방적으로 되돌려 주겠다고 한 문화재는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최신부는 1866년 강화도를 침략해 병인양요를 일으켰던 로즈제독이 당시 본국의 해군성 장관에게 보낸 편지 내용과 한글 번역문이 실려있는 「교회사 연구 제2집」을 보여주었다. 79년에 발간된 이 책에는 1866년 10월20일,11월 17일,11월30일 등 병인양요 당시 로즈제독이 정박중인 선상에서 쓴 것으로되어있다. 그 가운데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본인은 강화에 도착하자마자 위원회를 조직해 역사적 과학적 견지에서 관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물건들을 수색하고 수집하기 위한 일을 맡겼습니다.…청컨대 이것을 황제 폐하께 받쳐 주십시오…」 이 책은 또 로즈제독일행이 강화도에서 입수해 본국에 보낸 물건들의 목록을,가체된 큰책 3백권,가체된 작은책 9권,한중일 지도,평면 천체도,족자 7개,대리석판 3개,소상자 3개,은괴 19상자,3개의 갑옷과 투구,가면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프랑스에는 우리의 초창기 사회사와 교회사등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그것들은 대부분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넘어간것 들입니다』 예컨대 김대건신부가 프랑스 선교사들의 비밀입국 경로를 그린 「조선전도」라든가 직지심체요절,왕오천축국전등은 프랑스에서보다는 우리쪽에서 더 소중한 가치를 인정받는 유산이라는 주장이다.50년대 말부터 한국교회사연구를 위해 프랑스를 오가며 그쪽 사정에 정통한 최신부는 우리 정부의적극적인 대응과 프랑스 정부의 양해가 요구된다고 밝혔다. 당시 프랑스가 비정상적인 경로로 가져간 우리 문화재가 적지 않은데다 현재 우리 문화재 대부분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창고등에서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신부는 특히 『우리 정부로서도 외교적인 경로등을 통해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는 우리 문화재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문화적 가치에 따라 반환을 요청하는 것이 양국의 실질적인 우호증진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 도굴꾼들(외언내언)

    BC330년 알렉산더대왕은 부하장교들을 죽은지 2백년이 지난 사이러스대제의 무덤에 보내 보존상태를 살펴보도록 했다.그리고 그로부터 6년후에는 자신이 직접 그곳에 가보고는 무덤이 파괴된채 보물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것을 알았다.유골을 모아 다시 안치한후 자신의 문장으로 봉인했지만 그후 수차례 도굴로 무덤속은 완전히 텅비어 버렸다. 고대 이집트 왕들의 시신이 있던 피라미드도 마찬가지다.아무리 정교한 미로를 만들어도 도굴꾼들은 비장된 장소를 예외없이 알아내 부장품들을 발굴해갔다.파라오들은 그 방지에 고심한 끝에 BC16세기 투트메스1세는 1천7백년전부터 계속되어온 피라미드조영을 단념하고 산골짜기 암굴에 왕들의 시신을 매장했으나 도굴꾼들은 미소띠며 고분을 파헤쳐버렸다. 지난 76년 신안앞바다에서 1만여점의 주옥같은 보물이 인양되고 있을무렵 그곳 감시초소일지에는 선박통행이나 어로사실이 전무한 것으로 되어있음에도 도굴범들이 창궐하여 신안앞바다는 한때 「도굴범들의 황금어장」으로 불렸었다. 대체로 도굴범들의고분식별 안목은 전문가 뺨치는 실력이다.그들은 사냥개처럼 냄새맡고 번개처럼 파헤친다. 충남 당진 영탑사에 있던 금동삼존불상도난사건은 지난 68년 현충사 이충무공의 「난중일기」를 훔쳤던 거물급 문화재절도범이 배후조정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그는 대학에서 사학과 전공후 공주에서 미술교사를 지낸 인텔리로 문화재 식별안목이 「귀신같다」는 평이다. 이번 전남 함평에서 미발굴의 백제 신덕고분을 파헤친 도굴범들의 안목 또한 문화재 관련자들을 앞지른 결과가 돼버렸다.그들은 「전국 곳곳에 발굴되지 않은 고분이 널려있다」느니 「경주의 한 고분도 자신들의 도굴이 계기가 되어 발굴된 예」라고 큰소리치고 있다. 문화재가 한낱 도굴범들의 사유재산이나 문화재 발굴개가의 공적으로 치부될순 없다.만인 공유재산인 문화재를 좀더 철저히 지키고 가꾸는 효율적인 관리정책이 요구된다.
  • 조성기작 「욕망의 오감도」(이작가 이작품)

    ◎성폭력을 심리적으로 조감/어린이 추행·인신매매등 실상을 생생하게 묘사/“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성찰 촉구 종교적 인간,제도속의 실존등 인간내면을 무게있게 탐구해온 소설가 조성기(42)가 외도를 했다.강간,어린이추행,인신매매같은 이땅의 음지에서 발호하는 갖가지 성폭력을 심리적으로 조감한 4권짜리 성폭력 연작소설 「욕망의 오감도」를 통해 더이상 좌시할 수 없는 성폭행의 추악함을 폭로하고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우리시대의 가장 부끄러운 구석을 부끄러운 방식으로 펼쳐보이는 이야기』라며 『여기서 부끄러운 방식이란 소설의 형식을 가리킨다』고 털어 놓았다.그의 이야기들은 다양한 성폭력의 실상과 그 세계를 몸서리쳐질 정도로 냉혹하고 리얼하게 묘사함으로써 보는 이의 성찰을 촉구한다. 제목이 암시하듯 「욕망의 오감도」는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의 시「오감도」를 염두에 둔 작업이다.시대의 병적인 징후를 읽어낸 「오감도」의 시인이 오늘의 성폭력실태를 목격했다면 『더 충격적인 「오감도」를 썼을 것』이라는게 작가의주장이다. 『여자가 어둠속을 질주한다.어둠속에서 질주하는 것은 그 여자만이 아니다.…모두 남자들에 쫓기고 있다.제1의 여자가 무섭다고 그런다.제2,제3의 여자가 무섭다고 그런다.여자들이 질주하는 거리는 온통 공포로 뒤덮여 있다…』 소설의 첫째권 「질주와 공포」는 폭력배들로부터 윤간을 당한 주부가 「완전범죄」를 위장한 「완전복수」의 형식을 통해 법이 해결해주지 않는 보복을 스스로 집행해 나가는 내용이 남편의 또다른 타락상과 함께 맞물려 전개된다. 우리시대 아버지들의 타락상을 보여주는 둘째권 「아버지의 아버지들」은 더욱 끔찍하다.국민학교6학년때 친구의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처녀가 10년이상을 그 사슬속에서 고통받는 과정을 다중일인칭 전환기법으로 서술했다.이땅의 모든 추행하는 어른들과 고통받는 어린이의 이야기다. 세번째 주제인 인신매매편 「전락하는 몸들」은 작가의 빈틈없는 취재가 르포처럼 펼쳐진다.지금까지 나온 어떤 르포보다 인신매매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24살난 미모의 처녀가 납치돼 포르노영화촬영장으로 끌려가면서 일어나는 사건과 양공주로 전락하는 과정을 심리추적으로 고발했다. 조씨는 경기고,서울대 법대출신으로 등단이후 「라하트하헤렙」「우리시대의 소설가」「가시둥지」등 일련의 문제작을 통해 문단의 비중있는 작가로 자리를 잡은 지성파.그의 이번 성폭력 연작작업은 창작소재로서의 성폭력을 본격적으로 제기한다.작가의 소설적 방향전환으로까지 비춰지는 이 소설은 현상만 존재할뿐 정체를 드러내지않는 성폭력의 실체를 소설화함으로써 성폭력은 더이상 감춰질수도 덮여질수도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작가는 『소설이 타락한 시대의 타락한 거울이라고 할진대,이 시대를 살아가는 소설가라면 이와 같은 종류의 작업도 감당하여야할것』이라며 『시의 형식으로 형상화시키지 못하고 부끄러운 소설의 형식을 택한 것은 능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말했다.
  • 한·중,40년단절 단숨에 메우다/오는24일 수교1주년…평가와 전망

    오는 24일로 한중수교 1주년을 맞는다.냉전종식과 더불어 과거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동반자시대를 함께 연 지난 1년을 서울과 북경의 시각에서 회고·평가해보고 바람직한 양국관계의 발전방향을 주중·주한대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가늠해본다. ◎서울의 시각/임정요인 유해봉환 허가 큰 의미/항공협정등 미해결현안 과제도 최근 상해임정 요인들의 유해봉환이 있었다.유해봉환을 보는 외교전문가들의 시각은 남다르다. 한 외교전문가는 『상해임정 요인들의 유해봉환은 지난 80년대 초부터 북한이 중국측에 집요하게 요구한 사업』이라고 설명했다.이 작업은 상해임정의 법통을 북한정권이 잇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내외에 과시,우리보다 도덕적 우위를 점유하기 위한 전략에서 추진해왔다는 것이다.그런데도 한국전쟁 참전등 맹방관계를 유지해온 북한을 제치고 우리에게 봉환을 허가한 것은 『대단한 정치적 의미』라고 평가했다. 중국은 이에앞서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문제로 열린 유엔안보리에서는 기권으로 우리의 입장을 간접 지지한바 있다.냉전시대의 오랜 적국과 불과 수교 1년의 변화치고는 놀랄만한 것이 아닐수 없다. 중국과의 발빠른 유대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상호의존성의 증대와 오랜 역사관계에서 생긴 동질성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양국 외교사령탑인 한승주,전기침 외무장관이 새정부들어 짧은 기간인데도 벌써 3차례나 만나 회담을 가진 것도 이에서 기인한다.그러나 이것으로 올 접촉이 모두 끝난 게 아니다.지난 7월말 싱가포르에서 양국외무장관이 만나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앞으로 유엔총회 때,오는 10월 전외교부장의 초청으로 한장관이 중국을 방문할 때,아·태경제협의체(APEC)각료회의 때등 3번이나 더 만나게 되어있다』며 서로 웃었다 한다.물론 북핵문제라는 뜨거운 현안이 있긴했지만 미·일이 아닌 다른 나라 외무장관을 불과 10개월만에 6차례나 만난다는 것은 결코 흔치않은 일이다. 중국과의 정치·외교적 관계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무엇보다도 북경 주재 한국공관의 확대이다.노재원전중국대사가 한국을 대표해 부임한 것은 지난 90년초 무역대표부 대표 자격이었다.그뒤 공관의 규모는 급속히 팽창,수교전에 이미 16명의 공관원이 상주하는 중형공관의 모습을 갖추었고 수교 이후에는 30여명이 넘는 대형공관으로 성장했다.이는 워싱턴과 도쿄공관의 규모를 넘보는 수준이다.또 지난 7월에는 상해총영사관이 설치됐고 중국도 조만간 부산총영사관을 개설할 예정이다.여기에 올해안에 중국 심양과 광주 두곳에 총영사관이 새로 설치된다. 그래서인지 공관 선호경향이 뚜렷한 외교관들로부터 인기 있는 공관으로 급부상했다.이것은 한·중관계가 그만큼 비중있는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는 반증이며 앞으로의 역할,즉 할 일이 산적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될 대목이 있다.비록 상징적이긴 하지만 전부장은 영어에 능통한 것으로 전해진다.그런데도 중국어를 고집,통역관을 붙이고 그 통역관이 상대 장관의 대화내용을 중국어로 바꿔 전하는 동안 다음 답변을 생각한다는 것이다.외교전문가들은 이를 『중국의 무서운 일면』이라고 말한다. 아직 항공협정을비롯,2중과세방지협정및 환경협력협정,보건의료협정등이 체결되지 못한 것도 「무서운 일면」이라고 여기고 있는 전문가들이 많다.중국의 「타임스케줄」상 적기가 아니라는 판단에서 늦어지고 있다는 해석이다. 특히 중국은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 「대한반도 2분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자국의 전통적 이익을 효과적으로 확보할수 있을때 까지는 한반도의 분단현상을 타파하는 것 보다 현상유지를 통한 긴장완화에 우선 순위를 두고있는 것이다.우리의 「하나의 중국」 원칙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이는 수교 1년이 양국 관계에 많은 변화의 바람을 몰고왔지만 아직은 풀어야 할 숙제가 산적해 있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북경의 시각/최적 경협파트너 인식,교류 급증/올 교역규모 1백억불 돌파 기대 한국과 중국에 있어 지난 1년은 참으로 역동적인 한해였다.한중양국은 수교후 불과 1년만에 40년 단절의 역사를 단숨에 메우기라도 할듯 숨가쁘게 오가며 이해와 협력의 장을 다졌다. 교류와 협력이 이뤄진 분야는 문화·체육으로부터 과학기술·환경·교육·국제평화·예술·경협에 이르기까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활발했던 쪽은 무역·투자등 경제분야였다.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인들은 중국이 한국 경제가 뻗어나갈 「최후의 땅」이라는 인식이 기업인들 사이에 보편화 돼있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중국 역시 의식구조나 경제기술수준,지리적 인접성 등의 이유에서 한국을 최적의 경협 파트너로 생각하는 가운데 양국간 수교를 만시지탄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한국기업들은 중국행열차를 놓치면 영영 낙오자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듯 재벌총수들을 비롯,수많은 기업가들이 분주히 중국을 드나들었다.그래서 수교이전 한국에서 발붙이기 어려웠던 일부 한계기업들이 싼 임금을 찾아 중국을 찾아들던 시절은 이젠 옛날 얘기가 됐다.투자규모만 해도 85년부터 92년 6월말까지 7∼8년간엔 중소기업 위주로 약 3백건,2억5천만달러에 불과했으나 지난 1년동안에만 4백여건,4억5천만달러로 급증했다.지금 추진중인 사업만 해도 약 1억달러 규모의 대우산동시멘트공장을 비롯,현대의 대연자동차 생산공장,동아건설의 북경지하철·고속도로공사 등 수억달러의 대형 프로젝트가 수두룩 하다. 양국간 무역도 꾸준한 증가세를 보여 지난해 82억2천만달러를 달성함으로써 중국은 우리의 3대 교역국으로 성큼 다가섰고 우리는 중국의 7대 교역국에 올랐다.지난 수년간 지속된 한국의 대중무역적자가 지난해 7억6천만달러의 흑자로 돌아선데 이어 올 상반기 5억9천만달러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몇몇 전문가들은 양국교역 규모가 올해 1백억달러를 돌파한 후 2∼3년내에 2백억달러를 넘어 현재의 중일무역수준에 접근할 것으로 낙관하고 있기도 하다. 양국이 지난 1년동안 경협과 관련한 각종 제도와 장치를 거의 마무리 지은 것도 놀랄만한 변화이다.민간차원에서 체결됐던 무역협정·투자보장협정 등이 수교직후 곧바로 정부차원협정으로 전환된데 이어 지난 연초 건설협력 양해각서가 양국 건설장관에 의해 서명된 것을 시발로 해운협정,우편및 전기통신협정등이 뒤따랐고 한중무역실무회의를 비롯한 경제분야회의나 세미나,시찰단교류,각종 친선협회 결성등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북한을 의식해서인지 한국과의 접촉을 꺼리던 중국관리들도 수교 이후에는 아무 거리낌없이 접근해오고 있으며 중국의 업계 관계자,관리,학자들의 방한도 급증추세에 있다.수교이전 방한 중국인은 80%가 친지를 방문하는 조선족동포들이었으나 이제는 상용비자에 의한 방한비율이 70∼80%로 늘어나 완전 역전됐다고 주중한국대사관의 한 담당자는 밝히고 있다. 아쉬움이 있다면 우리나라가 아직도 중국을 특정지역국가로 묶어 방문시 특인절차를 밟도록 하고 있는 것과 중국이 국제민간항공기구가 규정한 관제이양점 수용을 거부하며 서울∼북경간 직항로개설을 미루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어쨌든 지난 1년동안 협력과 교류에 따른 제도적 장치들을 거의 매듭지은 상황이어서 이같은 틀을 바탕으로 양국간 교류와 협력을 일상화하고 정착시키는 일이 이제부터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 중국,대만에 「국­공 합작」 제의/강택민,이등휘에

    ◎통일 앞당기기 공동 노력 촉구 【홍콩 연합】 강택민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이등휘 대만 국민당주석에게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이 합작하여 빠른 시일내에 조국통일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자고 제의했다고 홍콩신문들이 20일 일제히 주요기사로 보도했다. 강택민은 중국공산당 총서기 명의로 이주석에게 19일 재선을 축하하는 전문을 보냈으며 이 축전에서 『우리 양당이 합작하여 해협양안 각계인사와 전국 동포와 더불어 중국을 진흥시키고 빠른 시일내에 조국통일을 완성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할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강택민 총서기는 또 『「일개중국」의 원칙을 견지하고 국제무대에서 「2개중국」 및 「일중일대」를 주장하는 활동을 반대하고 양안간의 경제합작과 교류를 가속화하고 통일대업을 추진하는 것은 중국민족의 근본이익에 부합된다』고 밝혔다. 한편 이에 대해 국민당을 비롯,총통부와 대륙정책 전문가들은 그간 국민당이 양안관계 개선을 위해 해온 노력을 중국이 긍적적으로 평가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며 커다란 환영의뜻을 표시했다고 대만의 관영 중앙통신이 대북발로 보도했다.
  • 혜봉스님,「친일 불교론」 상·하 2권 펴내

    ◎일제하 불교계 친일행위 고발/「승려의 도성 출입금지」해제후 본격화/징용권장 논설 발표·군용기 5대 헌납 일제 치하 조선불교계의 친일행각을 낱낱이 파헤친 「친일불교론」 상·하(민족사간)가 나왔다. 임혜봉스님(46)이 일제하 불교간행물과 신문등 각종사료를 토대로 2년동안의 노력끝에 펴낸 이 책은 불교계는 물론 종교계 전체에 자성의 계기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모두 6장으로 이루어졌다.1장에서부터 4장까지는 일제의 조선침략이 시작된 1876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조선불교계의 친일종적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했다.이어 5장은 이회광 이종욱 권상로 김태흡 등 친일 거두 승려 4인의 행적을,6장은 불교계의 창씨개명 현황을 공개하고 있다. 저자는 조선불교의 친일은 1895년 일본승려 사노(좌야전려)의 건의로 조선왕조의 「승려들의 도성출입금지」 규정이 해제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진단했다.이후 조선총독부는 1911년 사찰령을 반포,조선사찰을 30본사로 분할해 불교계의 힘을 분산시키고 본사와 말사의 주지 임명권을 총독에게 부여함으로써 종무행정과 불교재산은 물론 교리까지 철저히 예속시켰다는 것이다. 이 책은 조선불교의 친일행각은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본격화돼 1941년에서 1945년에 이른 태평양전쟁때 정점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당시 불교계 인사 30여명은 황도불교라는 말을 들먹이며 징병을 권장하는 논설을 171 편이나 발표했다.또 1942년에는 군용기 5대를 「조선불교호」로 이름붙여 일본군에 헌납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임혜봉스님은 『이 책을 쓴 것은 개인에 대한 단죄보다는 한국불교는 물론 한국민 모두가 이같은 모멸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아야되겠다는 뜻』이라고 집필이유를 설명했다. 한편 책을 낸 민족사측은 『지난해 7월 이책을 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해당인물들의 후손이나 관련 인사들의 격렬한 항의와 위협으로 업무가 마비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발간이 늦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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