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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 경단련 “자민당에 100억엔 정치헌금”

    ◎93년 선거 융자금 상환… 총선 앞두고 파문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 재계의 총본산인 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는 자민당이 지난 93년 중의원선거 당시 은행들로부터 융자받은 1백억엔(약 7백50억원)을 상환할 수 있도록 정치헌금을 알선하기로 결정했다고 요미우리 신문이 2일 보도했다. 경단련의 이같은 정치헌금 결정은 곧 실시될 것으로 보이는 총선거를 앞두고 야당은 물론 일반 국민에게도 적지않은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앞서 경단련은 자민당 일당지배가 무너지고 호소카와 모리히로(세천호희) 연립정권이 발족했을 때인 93년 가을 일체의 정치헌금 알선을 중지하겠다고 밝혔었다. 경단련은 정치헌금 중단을 발표한 직후 93년 총선 당시 사실상 상환보증을 섰던 1백억엔(상환만기 96년6월)에 대해서는 예외라는 방침을 표명했으나 총선이 임박한 시기에 자민당이 갚아야 할 빚을 재계가 대신 갚아주는 것은 자민당의 총선자금 조달에 실제로 협력하는 결과를 초래해 정경유착을 또 심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경단련의 이 방침은 최근보수·우익을 표방하고 있는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낭) 자민당 총재 등장 이후 자민당 인기가 상승하고 있는데다 현재 정치역학상 다음 총선 후 자민당이 단독 또는 연립해서라도 차기 총리를 맡을 것이 확실하다는 정세 분석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 한일합방 일본 정부 해석의 양면성

    ◎협약은 유효­정부간 배상문제 사전차단 포석/불평등 인정­비판여론 잠재우기… 일단 “진일보” 한일합방조약이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됐다고 말해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던 일본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총리가 사태 수습에 나서고 있다. 무라야마 총리는 13일 중의원 예산위 답변에서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입장은 고수하면서도 당시 상황으로 보아 평등·대등한 입장에서 체결된 것은 아니라고 한발 물러서는 자세를 보였다.그는 16일 고노 요헤이 외상 및 노사카 고켄 관방장관과 만나 입장을 다시 정리할 예정인데 13일 발언과 비슷한 맥락으로 정리될 것으로 보인다. 노사카 장관도 이날 『한일합방조약은 남북한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강제적인 것』이라고 말했다.노사카 장관은 무엇이 강제적이었느냐는 물음에 『조약 그 자체.전반적으로』라고 답하면서도 『조약이 체결된 사실은 사라지지 않으며 실효력이 있었다고 풀이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모두 사회당 소속.그들의 말을 「유효함을 재강조했다」는 측면에서 볼 수도있고 「불평등성,강제성을 인정했다」는 점을 주요하게 볼 수도 있다. 무라야마 총리의 발언은 일본정부의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그의 답변 뒤 외무성 조약국장이 보충답변에 나서 『국제법상 조약의 체결을 무효로 하는 위협 협박이 있었는 지는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일본정부는 합방조약의 강제성이 인정되면 조약 그 자체의 유효성은 물론 정부간 배상 문제로까지 비화될 것을 우려,강제성 인정을 외면해 왔다.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뒤 당시 사토 에이사쿠 총리는 합방조약이 평등하고 양측의 자유의지에 따라 조인됐다고 주장했었다.일본 외무성은 『총리는 역사인식을 보인 것일뿐 법적인 견해를 말한 것은 아니다』며 강제성 인정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두 사람의 발언은 진일보한 측면도 있다.일본 각료로서는 처음으로 불평등성과 강제성을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법상 조약이 무효로 되는 것은 국가에 대한 강제가 아니라 조약 교섭 당사자에 대한 위협과 협박이 있는 경우다.우리 입장은 을사보호조약이 이들당사자에 대한 위협 속에 체결됐으며 그에 근거해 맺어진 정미7조약,합방조약이 모두 무효라는 것이다.물론 전권위임장이 있었느냐 여부,비준 여부 등도 무효와 관련돼 근거로 제시되기도 하지만 이 주장은 국제법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이제 일본측에 의해 강제성이 인정된 만큼 교섭 당사자에 대한 구체적인 위협 증거 등을 확보하고 일본측이 「원천무효」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도록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는 일이 과제로 남게 됐다.
  • “한­일 합방 합법” 되풀이/무라야마 일 총리

    ◎체결과정은 불평등 【도쿄=강석진 특파원】 한일합방조약이 합법적으로 체결됐다고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총리의 발언에 한국과 북한이 강력히 반발하는 가운데 무라야마총리는 13일 『합방조약이 형식적으로는 합의에 의해 성립돼 조약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해 법적으로 유효함을 되풀이 강조했다. 무라야마총리는 이날 중의원 예산위 답변을 통해 그러나 『체결과정에서 양측의 입장이 평등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실질적으로는 불평등조약이었음을 인정했다. 한편 하시모토 류타로 자민당총재(통산상)는 이와 관련,『한·일 양국간 마찰을 논하기 이전에 나 자신 창씨개명을 요구당했다면 참을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부당한 조약이었다는 한국측의 인식에 이해를 표시했다. ◎한일조약 대해석 심각하게 수용을/공 외무 일본에 촉구 공로명 외무부장관은 13일 『한·일 양국이 역사적 사실에 관해 공동인식을 갖지 않으면 미래지향적 관계발전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면서 『우리정부가 전달한 한·일기본조약의 재해석문제를 일본측이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바란다』고 말했다. 공장관은 이날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외신기자들과의 오찬회견에서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총리의 한일합방과 관련한 망언과 관련,이같이 밝혔다.
  • 무라야마 「퇴진시기」 파문/일 정가 갖가지 해석

    ◎“올 11월초” “내년 4월” 예측 엇갈려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 일본총리가 중동을 방문중인 지난 17일 예루살렘에서 금명간 퇴진할 뜻을 시사한 발언이 일본 정가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무라야마 총리는 기자간담회에서 『신당이 결성되면 당수와 총리를 분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사회당은 10월말까지 신당을 결성하기로 결의한 바 있다.따라서 11월초에는 총리를 그만둘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일본 정국의 초점은 늘 무라야마 총리가 언제 퇴진하고 중의원선거가 치러지는가다.무라야마정권은 지난해 6월 출범 당시 과도내각으로 비쳐졌지만 용케도 오래 버티고 있다.늘 위태위태하면서도 그럭저럭 꾸려나가고 있다.여당 안에서도 무라야마정권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쪽과 이제 퇴진할 시기가 임박했다는 쪽이 나뉘어져 있다. 신당 결성에 적극적인 구보 와타루(구보선) 사회당서기장은 최근 무라야마 총리가 퇴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을 여러번 내비쳤다. 그러나 자민당과 총리 지지세력은 곤혹스런 입장을 보이고 있다.노사카 고켄 관방장관(사회)은 즉각 「일반론」일 뿐이라고 파문 확산을 차단하고 나섰다.자민당과 정부 고위층에서도 「국민의 기대는 경기의 불투명성 제거」라고 말해 총리직 고수를 희망했다. 이들이 이같이 해석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무라야마 총리는 조기퇴진 시사 발언과 함께 「연내에는 퇴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소 모순되는 발언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무라야마 총리의 생각은 도대체 어떤 걸까.연내 신당 결성이 어려울 것으로 예측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또 총재 선거가 치러지고 있는 자민당에 「중의원 해산권을 가진 총리는 나」라는 점을 재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무라야마 총리의 모순된 발언대로는 안되고 결국 당수와 총리를 분리해 신당 결성 후에도 총리직을 계속 수행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견해도 있다. 퇴진 시기도 11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회의(APEC)가 끝난 뒤,연말연시 예산편성 후,내년 4월 예산성립 후 등으로 예측이 엇갈리고 있다. 여하튼 오는 22일 자민당총재선거가 끝나 새 체제가 출범하면 정국의 눈길은 더욱 무라야마 총리의 퇴진과 연립정권의 유지 여부 등에 쏠릴 것으로 보인다.
  • “한·일 경제마찰땐 정치적 긴장 초래”

    ◎제3차 한·일포럼 주요 논의내용/“왜곡된 민족주의 대두 공동대처/「월드컵 축구」 공동개최 검토할만” 제3차 한·일포럼은 ▲한·일 양국 국내정치·경제·사회 ▲아·태지역에서의 양국 안보 ▲아·태지역에서의 양국 경제 ▲범지구적 문제에 관한 협력 ▲학술·문화교류 등 모두 5개 섹션으로 분과를 나눠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 논의는 비공개가 대원칙이다.이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허심탄회하게 의견이 개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그러나 발언은 무기명으로(한국·일본 등 국명만 표기) 빠짐없이 기록돼 추후 회의록으로 작성된다.특히 양측 회장은 토론된 안건 가운데 참석자들이 공감한 내용을 정부에 정책건의 형식으로 전달하게 된다. 각 섹션에서 다루는 주요 내용을 요약한다. ▷양국의 정치·경제·사회◁ 한·일 양국은 똑 같이 커다란 정치적 변혁기를 맞고 있다.한국에는 96년 총선거와 97년 대통령선거가 예정돼 정치권의 이합집산이 가속화 되고 있다.일본도 중의원 소선거구제 도입에 따라 야당이 통합되고,혁신세력이 뭉치는 등 신당 창당 움직임이 활발하다.이런 상황은 불가피하게 양국에서의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할 것이다.이 과정에서 주의할 것은 양국민이 정치인들에 의해 오도된 민족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일본의 과거 반성을 외면하는 일부세력은 왜곡된 민족주의를 표출하는 것이다.양 국민간·사회간 이해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역시 민간의 교류가 늘어야 한다.물론 지난 30년간 민간 교류는 양적으로 크게 늘었다.그러나 이제 이를 질적으로 심화시켜야 한다.이런 취지에서 청소년간의 교류를 위한 특별기금을 조성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지난 30년간 한·일 관계 증진을 반영한 한·일 우호협력조약의 체결도 검토할만 하다. ▷안보관계◁ 냉전이후 동북아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한반도에 지속적이고 안정된 평화체제를 확립하는 일이다.북한이 동북아 질서에 편입하도록 일본을 비롯한 관계국은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핵문제 해결 과정에서 한·일간의 협조관계는 평가할만 하다.한·일 양국은 또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최근 긴장상태에 있는중국과 대만·미국과 중국 관계가 조속히 정상화되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경제관계◁ 무역을 중심으로 양국 경제관계는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그러나 수평적인 산업협력관계라는 차원에서 보면 아직 만족스럽지 못하다.특히 최근들어 한국의 대 일본 무역적자가 확산되고 있다.불균형적인 경제관계는 정치적 장애로 발전할 위험이 크다. ▷범지구적 문제 협력◁ 한국은 국제적인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전환한지 오래다.또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원조를 하는 국가다.한·일 양국은 이미 개발원조나 마약퇴치·환경분야에서는 상당한 협력 실적을 쌓고 있다.이제 인구·식량문제·테러·에너지 등에 대해서도 협력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학술·문화교류◁ 편견과 오해가 남아있는 한·일관계에서 굴절된 민족주의는 상당한 긴장요인을 제공한다.따라서 객관적인 역사교육을 통해 전후세대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한·일간 역사연구위원회를 설치,공동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작업을 해볼만 하다.또 양국이 유치경쟁을 벌이는 2002년 월드컵을 동시에 개최하는 것도 검토할만 하다.
  • 일 자민당 총재/하시모토 확정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 자민당의 차기 총재에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낭)통산상이 사실상 확정됐다. 오는 9월22일 실시될 예정인 총재선거를 앞두고 하시모토통산상과 치열한 경합을 벌일 것으로 예상돼 오던 고노 요헤이(하야양평)총재가 28일 총재선거 입후보를 공식으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고노 총재는 이날 당내 알력과 혼란을 막기 위해 총재선거 입후보를 단념한다고 밝혔으며 외상직 잔류문제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판단에 맡긴다고 말했다. 고노총재의 입후보 포기는 이미 총재선거 출마를 발표한 하시모토 류타로 통산상의 당내 지지도가 앞서고 있다는 분석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다. 하시모토통산상은 총재선거에 입후보하면서 현 연립정권 구도의 유지를 표명해 왔으나 그가 보수 우익의 지지를 받아온 만큼 사회당과의 연립정권 유지여부 및 중의원해산 등이 일본정계의 초점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 “전쟁은 정당” 일 극우단체 시위/종전 50주년… 일·미·태 표정

    ◎워싱턴 공식행사 전무… 언론도 침묵­미국/10만여명 희생된 콰이강서 위령제­태국/일 각료 9명 전범위패 안치된 야스쿠니신사 참배 ○8천여명 추도식 ▷일본◁ ○…일본에서는 「종전기념일」로 불리는 15일 정부주관하에 「전국전몰자추도식」이 도쿄 기타노마루공원 무도관에서 일왕부처,무라야마 도미이치총리와 도이 다카코 중의원의장등 정부·국회관계자,유가족등 8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조선인·대만인 등을 포함한 군인·군속 2백30만명,일반인 85만명등 3백15만명을 추도한다는 이날 행사에서 무라야마총리는 『그 전쟁에서는 많은 나라,특히 아시아 여러 국민에 커다란 고통과 슬픔을 주었다.이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 깊이 반성과 애도를 표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무라야마내각의 각료 9명이 전범들이 봉사되고 있어 늘 말썽을 빚고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 올해 참배각료는 14일 미리 참배한 우라노 야스오키 과학기술처 장관을 포함,10명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7명의 각료가 「개인」 자격으로 참배한데 비해 올해는수가 늘어났을 뿐 아니라 통산상,방위청장관등은 「공인」 자격으로 「공식참배」. 특히 히라누마 다케오 운수상은 이날 참배시 다른 각료들이 머리만 숙인것에 반해 「2례 2바교수 1례」의 신도식으로 참배해 「정교분리」를 규정한 헌법 규정과 관련해 물의 무라야먀 총리 등 연립여당 3당 당수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참배하지 않았으나 자민당의원 1백32명(대리참배 73명),신진당의원 36명(대리 20명)등 국회의원들도 대거 참배대열에 합류,정치권의 분위기가 지난해보다 「참배」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보여줬다. ○배상 등 요구 시위 ○…오사카(대판)에서는 15일 한국유족,중국남경대학살 생존자,일본시민등 4백7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일본의 전쟁책임을 추궁하는 집회가 열렸다고 교도통신이 보도. 이날 집회에서 일제징용으로 남편을 잃은 유족 이김주(74·전남 광주)씨는 『일본인은 한국인을 소모품처럼 사용하고 버렸다』면서 사죄와 배상을 일본정부에 촉구. ○안보리 기념성명 ▷미국◁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는 태평양전쟁승리 50주년이 「망각」된 채 지나갔다.현지시간 14일인 승전일에 미국정부의 전승기념 공식행사는 물론 이에 대한 언급도 전무했다.이를 다룬 신문사설조차 없었다. 미국에서 태평양전쟁 승리는 일본의 미 진주만 기습(41년12월7일) 기념행사때 함께 축하되지만 언제나 종속적인 신세를 면치 못한다.진주만기습 50주년 기념행사는 4년전 미전역에서 성대하게 치러진 바 있다. 미국인에게 정작 8월은 원자폭탄 투하의 달로 더 기억된다.미국언론은 지난 6일 원폭 투하 50주년 당시 히로시마에 대한 연민의 정을 담은 대대적인 기획기사를 다뤘다. 한편 유엔 안보리는 이날 아시아지역 2차대전 종전 50주년을 맞아 3개항의 기념성명을 채택,국가간 신뢰구축과 협력을 통한 단결이 전쟁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길이 된다고 밝혔다. ○생존포로 등 참석 ▷태국◁ ○…2차대전당시 일본군의 포로로 잡혀 태국에서 철도부설을 위한 강제노역에 동원됐다가 숨진 연합군장병 1만6천여명과 아시아인 10만여명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를겸한 종전50주년 기념식이 15일 연합군 생존포로및 전일본군 병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콰이강의 다리가 있는 방콕서쪽 칸차나부리에서 거행됐다.
  • 외교·안보(21세기 한­일 새 지평:2)

    ◎양국의 발전적 미래를 위하여/세계화 시대… 일본과 적극 손잡을때/지난일 얽매여 무조건 기피 곤란/국제문제 협력,공동이익 추구를/윤정석 ▲중앙대 교수(59세) ▲서울법대졸 ▲법학박사 한일간에 참다운 미래가 있으려면 두나라 국민 사이에 신뢰와 협력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일본의 제국주의 압박이 이 땅을 떠난지 5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는 그 쓰라림과 괴로운 경험을 잊지 못하고 미움과 불신으로 저들,일본사람들을 대할 때가 많다. ○신뢰·협력 있어야 요즈음에도 부끄럽게 느껴지는 것은 일본을 놓고 두가지의 강력한 입장에서 자기의 위치를 유지하고 그리고 자기의 존재를 넓혀가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한편에서는 일본을 욕하고 일본사람에 대하여 분노하고 그리고 이 철천지 원수와 협력하는 것을 철없고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어떤 자리에서라도 앞장서서 일본을 자극하는 이가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없이는 한국의 앞날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일본이 가지고 있는 기술자본 그리고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일본과 협력하여야 된다고하며 기회있을 때마다 이같은 주장을 하고 앞장서서 일본을 수용하는 이가 있다.이러한 두가지 사람들은 지식인이나 언론인 속에 더욱 많은 것 같이 보여 참으로 부끄럽게 느껴진다.왜냐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놓고 두갈래 세갈래 갈라져 서로 삿대질을 하는 모습이 아직도 흔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이런 일은 일본에 관한 연구 토론회에 참석해 보면 더욱 심하게 드러나 보인다. 왜 보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한일관계를 볼수 없을까.내가 창씨를 했고,일본말을 쓰지 않아 벌을 받았고,친척누이가 정신대에 끌려갔고,형은 학병에 나가 전사했고… 등과 같은 일들과 지금의 나 자신과의 관계를 냉철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지금 내가 할 일은 과거에 매달린 감정표현이 아니라 미래를 보며 나의 정열을 쏟는 극일·배일·반일의 엄연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엄연한 이웃나라 지난 1백50년동안은 일본으로부터 건너온 정신과 문명을 가지고 우리는 살았으나,그보다 훨씬 전 수백년동안은 우리가 일본에 정신·문화 그리고 삶의 방식을 일깨워주고가르쳤지 않은가.앞으로 우리는 예전과 같은 가르칠 영광을 되찾아야 하리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과 경쟁할 수밖에 없고,함께 어울려 서로 도와가며 살 수밖에 없다.한차례의 씨름판에서 힘을 겨루듯이 앞으로의 1백년을 내다보는 한일양국의 건전한 경쟁과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신뢰하며 함께 이끌어 갈 수밖에 없다. 엄연하게 가장 근접해 있는 일본을 없는 것같이 태연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예를 들면 지난날 우리의 모든 국제항공노선이 도쿄의 국제공항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도쿄를 통해서 세계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이제 김포공항을 통해서 우리는 아시아 대륙과 직접 연결될 수 있고 유럽과 미국대륙에도 직접 건너갈 수 있게 되었다.그래서 우리는 이제 도쿄,말하자면 일본을 거치지 않고 세계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결국 일본은 없다는 것이 된다.그러나 여기까지 올 때 우리는 일본에 많은 신세를 졌고 일본으로부터 배웠으며 이제는 일본과 경쟁하고 있다. 현재 일본은 안간힘을 다해서 미국·유럽과 과학기술을 놓고 경쟁하고있다.통신 정보는 물론 전자·신소재산업 등에 있어서나 생명과학 등의 첨단분야에 있어서 일본은 끊임없이 경쟁을 통해서 새로운 문명을 찾아가고 있다.여기에 우리는 또다시 일본의 신세를 지고 그들을 통해서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으로 보는가. ○서로 알아야 도움 일본의 국내정객이 일본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한국을 알아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어려움이 많다.한국을 등지고 한국에 대하여 별 관련이 없이 지내온 일본정객은 국내정치에 어려움을 겪는 법이다.적어도 한반도의 정세에 능한 통찰력이 필요한 것이다.이것은 한일관계에 있어서 얽혀진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일본의 국무총리는 한반도와 무관하게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 고 있다. ○함께 이뤄 나가야 국제정치외교분야에서 일본과 협력하는 것을 마치 친일파들이 하는 짓으로 보는 이도 많다.지금의 세계사정에서 볼 때 국제정치 외교분야는 어떤 한나라가 주도적으로 국가이익을 챙길 수 있게 되어 있지 않다.적어도 함께 이루어 놓고 그 결과를 나누어서 향유하는 것이 국제정치의 현실이고 특히 탈냉전이후의 국제관계라고 할 수 있다.동북아시아에 있어서 한국 단독으로 평화와 번영을 이룩할 수는 없다.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이루어나가야 한다고 본다.이런 분야에 있어서 우리는 일본을 믿고 협력할 수밖에 없다.이제는 우리에게 일본은 그렇게 해도 될 만한 나라가 되었다고 본다.다만 우리의 안보문제에 있어서 군사력이 필요한 경우에 일본은 분명히 제외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된다.일본은 아직도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여 국제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일의 바람직한 대북한 정책/“「대북한 개방유도」 공동사업 인식 필요”/점진 변화 이끌어 돌발사태 예방/식량 지원문제 등 긴밀 협조해야/오코노기 ▲일 게이오대교수(50세) ▲게이오대 정치학과졸 ▲법학박사 올해가 전후 50년인데도 한일 양국이 여전히 「역사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일본국회의 「50년 결의」및 몇몇 정치인의 무신경한 발언에서 보듯이 최근 감정마찰의 「잘못」은 분명히 일본측에 있다.이것이 김영삼·호소카와회담에서 나타난 우호적 분위기를 파괴해 버리고 말았다.그 책임은 중대하다. ○우호분위기 파괴 북방외교를 추진했던 노태우 정권과는 달리 김영삼 정권은 미·일 양국과의 우호관계를 중시하는 정권이다.한편 과거의 전쟁책임을 명확히 하고 싶어한다는 점에서는 무라야마 정권도 호소카와,하타 정권 못지않게 적극적이다.자민당의 고노 요헤이(하야양평) 총재,신당사키가케의 다케무라 마사요시(무촌정의) 대표도 여기에 이의가 없었다.사실 연립정권 발족 당시 여당 3당은 「과거의 전쟁을 반성하고 미래의 평화에의 결의를 표명하는 국회결의」를 채택하기로 합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비둘기파 노선」이 보수파 의원을 자극했던 것 같다.그들은 「종전 50주년 국회의원연맹」을 결성해서 국회결의의 채택에 반대했다.그러나 한국내에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 그룹은 확실히 소수다.최후까지 국회결의에 반대한 의원은 50명,즉 전체 중의원 5백2명의 10%에 지나지 않는다.그들은 오히려 「자기방어」를 위해 일어섰던 것이다. 따라서 「50년 결의」의 내용이나 몇몇 정치인의 발언을 과대평가해 과민반응을 보일 것은 없다.사실 그들은 일본국민의 다수파의 지지를 얻을 리가 없다.유감이지만 시간의 경과 이외에 이러한 상태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처방전은 존재하지 않는다.그러나 세대가 교체됨에 따라 그들은 점점 고립화돼 나갈 것이다. ○정책적 협조 유지 그런데 이러한 감정마찰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한일양국 정부는 대외정책,특히 북한과 관련된 정책 분야에서 정책적인 협조를 유지하는데 성공하고 있다.냉전 종결에 따라 「공통의 적」의 소멸이 한일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지 않을까라는 예상과는 달리 북한의 핵문제라고 하는 「공통의 위협」이 양국에 긴밀한 협력을 요구한 것이다.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발족및 쌀원조에서의 한일협조가 이를 상징한다. 그러나 대국적으로 보면 냉전종결및 제네바 합의가 북미,북일관계 개선을 자명한 것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북한의 「친미」정책에 반대하면할수록 일본과 한국의 대북한정책은 경직화하지 않을 수 없다.만일 (북한의 친미정책을) 전면적으로 반대하면 우리는 크로스 승인이라고 하는 본래의 목표조차 상실하게 될 것이다. ○북 경제체제 위기 바꿔 말하면 한일양국에 요구되고 있는 것은 북한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국제체제에 끌어안는 것이다.따라서 우리의 최대 과제는 한일협력을 토대로 어떠한 국제체제를 여하히 형성하는가이다.북한이 북미 평화협정의 체결을 고집해 「새로운 평화보장체제」의 수립을 요구한다면 우리도 새로운 다국간평화구상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콸라룸푸르와 쌀원조 교섭의 과정에서 북한이 그 내부적인 약점,즉 심각한 에너지·식량·외화부족을 드러낸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거듭되는 「동결 해제」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북한지도부는 미국과의 교섭을 단념할 의사를 갖고 있지 않으며 국내의 식량사정도 교섭의 장기화를 허용하지 않았다.즉 우리는 겨우 북한의 「배수진」 정책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중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쌀원조 문제로 상징되는 북한의 경제위기가 그것이다.궁지에 빠진 경제를 재건하기 이전에 북한은 긴급하게 식량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나 그 전망은 밝지 않다.후계 문제에 관한 이러저러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서기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정치체제의 위기보다도 오히려 경제체제의 위기인 것이다. 경수로및 쌀원조를 둘러싼 북한의 태도에는 비판받아 마땅한 점이 적지 않다.하지만 폭력적 사태를 피하면서 북한의 점진적 변화를 촉진해 한반도 통일에 따라는 유형무형의 코스트를 분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지 않으면 안된다.한일 양국은 이것이 공동사업이라고 인식해 북한의 개방·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 과거 청산(21세기 한­일 새 지평:1)

    ◎바람직한 이웃관계를 위한 제언 광복 50년은 한국과 일본간에 아직도 완결되지 않은 여러가지 문제들을 매듭짓고 바람직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계기가 돼야 할것이다.과거청산,외교·안보,경제협력,문화교류등 주요 분야별로 두나라 전문가들로부터 바람직한 한일관계의 미래상을 연재로 들어본다. ◎“일은 수억 아시아인 고통 외면 말아야”/일의 과거사 인식 자세의 문제점/아직도 침략전쟁 책임 회피 급급/굴절된 역사 직시… 참된 자성 필요 지금으로부터 10년전인 85년5월 당시 서독의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독일 연방의회에서 『과거에 눈을 닫는 자는 현재도 볼 수 없게 된다.비인간적인 행위를 마음에 새겨두지 않는 자는 또다시 그러한 위험에 빠지기 쉽다』며 나치즘과 제2차대전의 교훈을 상기시켰다.같은해 8월 일본의 당시 나카소네총리는 A급 전범 7인의 위패가 모셔진 정국신사에 현직 총리로는 처음으로 참배를 감행하였다. ○독일과 인식 큰 차 일본 각료들의 참배는 해마다 계속되고 있다.금년 일본 각 지방자치단체 의회에서는제2차대전에 참전하였다가 죽은 일본군의 넋을 추모하는 결의가 무성하였다.과연 오늘의 독일에서 현직 각료가 나치 수뇌의 묘소를 참배하는 사태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똑같은 제2차대전의 추축국이었지만 일본과 독일의 이같은 차이는 과거사에 대한 양국 인식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일제의 침략주의에 대한 책임추궁제도로는 인적책임에 대한 전범재판과 물적책임에 대한 샌프란시스코조약체제로 요약될 수 있다.그러나 제2차대전 후의 냉전구도 속에서 일제의 과거사에 관하여는 인적 책임과 물적 책임 그 어느편도 철저히 규명되거나 추궁되지 못하였다.전후 국제질서를 주도한 미국은 전후처리 과정에서 일본의 과거사 책임을 단죄하기보다는 아시아에서의 대공방벽 구축에만 심혈을 기울였다.아시아 피해국에 대한 일본의 배상보다도 일본의 경제부흥과 재군비를 더욱 강조하였다.그 결과 일본에서는 침략전쟁의 책임자들이 전후의 집권세력으로 재등장하였으며 죄의식이 없는 이들에게 전후처리가 맡겨졌다. ○가해자 인식 부재 이러한과정속에서 진행된 일본의 전후처리 태도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부각되었다.첫째,일본의 가해자 의식의 부재이다.수억의 아시아인이 일본의 침략주의로 인하여 장기간 막대한 고통을 당한 사실은 외면되었고,오히려 일본은 세계 유일의 원자폭탄 피해국이라는 점만이 강조되었다.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한 것이다. 둘째,가해자 의식의 부재는 전쟁책임의식의 부재로 연결되었다.일본인 스스로가 피해자의 대열에 섬으로써 과거 침략행위의 진상이나 피해 파악을 외면하였고 역사에 대하여 특별히 책임질 일이 없다고 강변하였다.패전 50주년을 맞아 일본 국회차원에서 추진하던 사죄결의가 속빈 강정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배상의무도 회피 셋째,전쟁책임의식의 부재는 자연히 대외적 배상의무 회피를 조장하였다.전후 일본이 구군인 등 자국민 피해자에게 지불한 보상액의 누적합계가 근 40조엔에 육박하고 현재도 연간 2조엔에 상당하는 지불이 계속되고 있는데 반하여 일본이 25개국과 체결한 29개 전후처리조약을 통하여 대외적으로 지불한 금액의 합계는 1조엔을 약간 넘을 뿐이다.제2차대전의 희생자란 그릇된 나치즘의 피해자라는 성격 규명을 분명히 하고 있는 독일과 달리 일본에서의 전쟁희생자란 군국주의 정책수행에 앞장서다가 피해를 당한 자국민이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현재 일본 각지의 법원에서는 한국인을 비롯하여 필리핀인·중국인·네덜란드인·홍콩인 등 각국 외국인이 일본을 상대로 과거사 책임을 추궁하는 소송이 무려 30건 가까이 진행중이다.대부분이 70을 넘은 고령의 피해당사자가 그들 살아 생전에 끝나기나 할지조차 전망이 불투명한 소송이라는 수단을 선택한 심정을 일본은 되새겨야 할 것이다. ○대일 소송 잇따라 금년 5월 유럽에서는 제2차대전 종전 50주년을 맞아 런던에서 모스크바까지 성대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파리에서는 독일군의 시가행진도 있었다.금년의 독일군이 50년전과 다른 점은 더 이상 침략자가 아닌 유럽 번영의 동반자로서 행진하였다는 점이다.일본은 현재 자신을 구적국으로 규정하고 출범한 유엔체제 내에서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그러나 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기념하여 서울이나 남경 아니면 마닐라에서 일본자위대가 시가행진을 하는 모습을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않는 가운데서는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그에 합당한 지도력을 확보하기가 어렵다.과거사에 대한 인식 전환­이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일본 자신이 될 것이다. ▲정인섭 방송통신대 교수(41세) ▲서울 법대졸 ▲법학박사 ◎“왜곡된 역사 교과서 바로잡는 일부터”/과거청산과 한­일 미래를 위하여/위안부 보상문제 등 적극 나설때/「불전결의 불발」 같은 추태 없어야 지난 6월9일 채택된 전후50주년 결의를 둘러싸고 일본 국회(중의원)가 보인 추태는 「50년 결의」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이웃나라에의 국제공약이었던 만큼 대외적으로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일 국민 기대 배신 그것은 또 전후50년 결의가 아시아 여러나라와 진실로 화해하고 미래지향의 관계 수립을 향해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을 마음으로부터 바란 많은 일본인의 기대를 배신하는 것이었다. 하타 쓰토무(우전자) 전총리(신진당 부당수)는 『전후50년이라는 고비를 살리지 못하고 결의를 끝내게 되면 세계 여러나라로부터 대단히 엄한 반발을 받을 것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그 신진당은 「50년결의」 채택의 본회의를 보이콧했다.여당 3당으로부터도 다수의 결석자가 있어서 5백2명의 중의원중 채택에 참가한 것은 겨우 과반수인 2백52명으로 이례적인 사태였다. 가이후,미야자와,호소카와,무라야마등 역대 일본총리가 방한시 행한 불행한 과거에 대한 반성발언을 알고 있는 한국인으로서는 나라를 대표하는 역대 총리의 발언을 없었던 일과 마찬가지로 만들고 만 일본국회의 어처구니없는 전후결의의 결과는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찬물 끼얹는 행위 그런 가운데 일본인을 구해 준 것은 『일본의 국회결의는 대단히 유감스럽다.새로운 불신으로 연결되는 것을 우려한다』면서도 『좋은 내용의 결의를 향하여 노력해온 사람들의 노력을 평가하고 싶다.그 사람들은 이 결의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앞으로의 노력에 주목하고 싶다』라고 말한 김태지주일대사의 적절한 발언이었다.(아시히신문·통일일보 인터뷰) 한일기본조약 체결 30주년에 즈음하여 일본의 유력지들은 나름대로 특별기사를 게재하였으나 국교30년의 양국의 현재위치를 가장 단적으로 표현한 것은 「깊어가는 상호의존」,「아직 두꺼운 마음의 벽」이라는 제목을 붙인 닛케이신문 6월 20일자였다.앞서 언급한 추태의 극을 보인 일본국회의 전후결의가 마음의 벽을 없애기 위한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이었다는 사실은 더 말이 필요없다. 하지만 소걸음과 같지만 역사교과서 기술의 개선,종군위안부 문제의 구체적 해결등 불행한 과거의 청산을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한 사실을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다. 일본의 문부성이 6월28일 발표한 국민학교 6년생의 사회과 교과서에는 일본어의 강제,창씨개명,토지의 몰수,손기정선수의 일장기 사건등 식민지 지배에 관한 기술이 대폭 늘어나 국민학생도 잘 알수 있도록 됐다. 90년 5월 방일한 노태우전대통령은 일본 국회연설과 일본 기자클럽 회견을 통해 역사의 진실에 대한 인식의 공유를 호소했다.일본 문부성이 한일 신시대의 개막을 향해 양국간의 역사에 대해 국교·중학교의 수업중 꼭 다루도록 지도를 거듭 내린 것도 이 때부터였다. 미야자와총리의 방한 이래 3년 넘어 보상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해서도 보상사업을 추진하는 임의단체로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 설립돼 7월27일에는 전참의원의장 하라 분베에(원문병위)씨가 이사장으로 취임,한국 중국 필리핀등 1천명을 넘는 것으로 보이는 전 위안부에게 일시금을 보상함과 아울러 복지와 의료면의 지원사업에는 일본정부로서도 일부 책임을 지는 형태로 됐다. ○청산 움직임 일어 관계의 긴밀도를 재는 사람의 왕래는 30년전의 1백20배.지난해는 2백69만명을 헤아렸다.필요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사람의 왕래의 확대다. 미래지향의 관계도 따지고 보면 한일 쌍방이 필요로 하는 관계의 심화와 발전인 것이다.앞에서 말한 닛케이신문은 「깊어지는 상호의존」의 관계를 묶는 키워드를 「공통의 이익」이라고 하고 있다. 최근 현실화하려 하고 있는 한일간 수평분업체제는 또한 공통의 이익을 위해 상호 필요로 하는 관계 자체다.엔고현상으로 생산거점을 대폭 해외이전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일본기업의 움직임은 98년 생산개시를 목표로 하고 있는 삼성자동차 부산공장에의 닛산자동차의 전면적인 참가에서도 나타난다. ○협력관계 불가피 관련부품 메이커 1백15개사의 부산유치와 함께 삼성자동차를 중심으로 기타큐슈를 한국 남부와 결부,국경을 넘는 경제권의 성립이 예상되는 것이다. 「국제무대에서 한일 양국이 이인삼각으로 보여지는 것은 양국민의 뿌리깊은 감정마찰과는 별도로 세계의 외교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기존사실로 돼 있다」라는 닛케이신문의 지적은 한일 양국의 미래지향적 관계를 앞서 짚어보는 것으로서 매우 시사적인 것이다. ▲하야시 다케히코 일본 동해대 교수 61세 ▲나고야대 졸
  • 일 연정 대폭 개각/관방 노사카·건설상 모리 임명

    ◎핵심각료 3명 제외 17명 교체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 무라야마 도미이치총리가 8일 개각을 단행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이날 각료 20명 가운데 17명을 새로 임명하는 등 수적으로는 대폭 개각을 단행했지만 관심을 모아온 외상과 대장상에 고노 요헤이 외상(하야양평 자민당총재)과 다케무라 마사요시(무촌정의 신당사키가케대표)를 유임시킴으로써 연립정권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날 개각에서는 또 현행 내각과 마찬가지로 자민당 13,사회당 5,신당사키가케 2의 배분비율이 유지됐다. 오는 9월로 예상되고 있는 자민당 총재선거에 고노외상에 맞서 출마할 것으로 예상되는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낭)통산상도 유임됐다. 이날 개각에서는 모리 요시로(삼희랑)자민당 간사장은 건설상에 임명됐으며 관방장관에는 무라야마총리의 측근인 노사카 고켄(야판호현)건설상이 기용됐다. 또 경제기획청장관에는 민간경제인인 다이와종합연구소 이사장인 미야자키 이사무(궁기용)씨가 기용됐다.그는 신당사키가케의 몫으로 간주됐다. 한편 모리간사장의입각으로 공석이 된 자민당 간사장에는 총재선거에서 고노외상을 지원하는 미쓰즈카 히로시(삼총박)전정조 회장이 기용됐다. 이날 개각은 17명이 새로 임명되고 입각경험이 없는 13명이 입각하는 등 대폭 개편의 의미를 살리는 면도 있으나 선거패배 책임 및 자민당 총재선거와 관련,초점이 돼 온 외상 대장상 통산상등 주요 각료직이 유임됨으로써 부분개각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와 관련,개각과정에서 3당간 이해가 엇갈림으로써 정권기반이 취약해지는 한편 총리의 우유부단한 결정에 대해 자민당등으로부터 비판이 제기되고 있어 향후 정국운영에 부담을 줄 전망이다. ◎일 개각배경과 전망/수적으로는 「대폭」 내용에선 「부분」/분위기 쇄신 못하고 3당 「나눠먹기」 일본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내각이 8일 「대폭」 개편됐다.이날 개편은 수적으로는 대폭이지만 내용면에서는 부분개각적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개각의 폭을 보면 17명이 새로 임명됐으며 입각경험이 없는 13명을 기용,새롭게 출발하는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내용면에서 보면 무라야마내각이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주요 포스트,즉 총리 외상 대장상 통산상 등은 모두 유임됐다.바꿔 말해서 기본 골격은 그대로 두고 부품만 대폭 교체했다고 볼 수 있다. 지난달 23일 참의원선거에서 연립여당이 참패한 뒤 내각총사퇴나 중의원해산등을 대신해 내각의 대폭개편으로 심기일전의 분위기 쇄신을 꾀하겠다던 당초의 의미가 충분히 살지 못한 개각이었다. 개각의 초점은 자민당 총재인 고노 요헤이(하야양평)외상과 신당사키가케의 대표 다케무라 마사요시(무촌정의)대장상의 거취였다.다케무라대장상은 선거패배등의 책임을 놓고 지난달 이미 당대표 사의를 표명했다가 철회했다.고노 외상은 9월 자민당 총재선거를 놓고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낭)통산상 지지파의 거센 도전에 맞서기 위해 외상을 내놓고 「무임소 국무위원」을 맡아 총재선거에 전념하려 했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개각에 미온적이었다가 대폭 개편을 주장하는 고노외상의 주장에 따라 대폭개각에 합의했지만 개편의 칼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대폭 개각에 이어 당인사까지 행함으로써 총재선거에서 기선을 잡으려는 고노외상과 총재선거후 개각을 주장하는 하시모토파 사이에서 어느 쪽도 편을 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또 다케무라 대장상을 교체할 경우 선거패배의 책임을 둘러싸고 총리에게도 따가운 눈길이 쏠릴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에 따라 무라야마총리는 먼저 다케무라 대장상을,다음에는 고노외상을 각각 제자리에 주저앉히는데 주력했다.또 고노 외상이 그만두면 자신도 통산상을 그만두겠다는 하시모토 통산상을 설득했다.결국 8일까지 개각의 초점이 되는 주요 각료직 3인 모두가 유임으로 결정됐다.
  • 일 내각 “대폭 물갈이”/연립여당 3당수 전격합의

    ◎고노,「총재선거 기선잡기」위해 개편 선회/무라야마 정권 위태… 자민­사회갈등 심화 일본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 총리내각의 개편작업이 하루는 개편한다고 했다가 다음날에는 유보하는 쪽으로 의견이 기우는 상황이 되풀이되던 끝에 결국 대폭개편으로 방향이 잡혔다. 무라야마총리,고노 요헤이(하야양평·자민당총재) 외상,다케무라 마사요시(무촌정의·신당사키가케대표) 대장상은 4일 총리관저에서 3당수회담을 열고 개편을 실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그러나 참의원선거후 「총리직 선양」을 둘러싸고 거리가 다소 벌어졌던 무라야마총리와 고노외상의 관계는 더욱 멀어질 것같다. 당초 6월에도 내각개편으로 진용을 가다듬어 참의원선거에 임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혹시 분란을 자초할까 우려돼 참의원선거 뒤로 미뤘다. 지난달 23일 참의원선거는 연립여당의 패배로 귀착됐다.당연히 내각총사퇴라든가 중의원선거 등 책임지는 조치가 나올 것으로 기대됐으나 어물어물 내각개편만 하는 것으로 정국대처방안의 골격이 잡혔다. 그러나 다케무라대장상이 지난달 28일 대표직 사퇴를 발표한 것이 흐름을 바꿨다.그가 선거에 책임지고 사퇴하면 대장상 교체가 불가피하고 정권유지에도 상당한 타격이 가해질 가능성이 있다.또 패장인 무라야마 총리와 고노 외상의 입장도 난처하다.파문이 확산되자 무라야마 총리는 내각개편에 소극적 입장으로 돌았다.사퇴극은 하루만에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내각개편은 물건너간 것처럼 보였다. 사회당의 구보 와타루(구보선) 서기장도 3일 「정권의 과제는 경기와 지진대책을 적극 추진하는 것이다.내각개편은 그 다음」이라고 거들었다. 그러나 고노 외상은 2일부터 대폭개편을 주장해 무라야마 총리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하고 싶지 않은 개편으로 자칫 정권이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때문이었다.4일 당수회담을 마친 무라야마는 무거운 표정이었다. 고노외상의 개편주장에는 9월 자민당총재선거를 앞두고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낭)를 옹립한 반대파의 거센 공세에 맞서 대폭개편을 실시하고 그에 따라 당내 인사도 실시함으로써 총재선거를 앞두고 기선을 잡자는의도가 배경에 깔려 있다. 물론 반고노파는 총재선거이후로 개편을 미룰 것을 주장하고 있다.무라야마총리로서는 개편을 단행해도,연기해도 정권에 대한 영향을 면키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리더십을 발휘하지 않은채 그때그때 상황에만 대처하다 자민당과 사회당 사이에 틈이 생기고 자민당 내부의 힘겨루기에 말려버린 것이다.이를 두고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은 4일 「총리의 존재감이 없다」고 큼직한 제목을 붙여주었다.
  • 일 사회당/「신당」 서두르기로/중집위 결정/새달 임시전당대회 개최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 사회당은 3일 참의원 선거 패배 후 처음으로 중앙집행 위원회를 열고 오는 9월 임시당대회를 열어 신당 결성을 서두르기로 결정했다. 이날 사회당은 참의원 선거가 「전망없는 패배는 아니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다음 당대회에서 보수세력과 대항이 가능한 새로운 정치세력 결집을 바라는 유권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당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신당 결성을 서두른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사회당 중앙집행위는 또 자민당과 신진당과 함께 하지 않는 정치세력을 다음 중의원 선거까지 결집해 3백 소선거구에 후보자를 내기로 하는 한편 「신정치세력이 구심력을 발휘하기 위해 새로운 리더를 내세우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말해 세대교체의 실현을 강력히 제창했다. 사회당은 그러나 참의원 선거 패배의 책임에 대해서는 선거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전망없는 패배가 아니었다」는 점을 내세워 분명한 언급을 피했다.
  • 일 사회­사키가케 “신당 결성”/양당 대표 합의

    ◎“온건·리버럴” 표방… 제3정치세력 겨냥 【도쿄 연합】 참의원선거 패배후 일본 사회당위원장인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 총리와 사키가케 대표인 다케무라 마사요시(무촌정의) 대장상은 지난 27일 가진 회담에서 양당이 「온건 리버럴 신당」을 결성키로 합의했다고 요미우리신문이 31일 보도했다. 신문은 양당의 소식통들을 인용,양측은 현행 체제가 계속되면 다음 중의원선거에서 자민당과 신진당에 끼어 고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제3의 정치세력 형성을 서두르기로 했다고 전했다. 양당은 빠르면 이번주중 구체적인 협상에 착수하며 정계재편을 겨냥해 자민·신진당내 온건·진보세력도 폭넓게 흡수한다는 전략이라고 신문은 전했다. 두 대표는 회담에서 신당은 ▲공평·평등을 기초로 한 정책 ▲헌법의 평화이념을 존중해 군사대국을 지향하지 않고 비군사적인 국제공헌을 지속 추진하며 ▲유엔 안보리 진입에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는 입장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이 신당 결성 원칙에 합의한 것은 이대로 가다가는 자민·신진 대립이라는 보수 양당제로 고착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라고 신문은 분석했다.
  • 일정계/「보수양당」 개편 전망/참의원선거 여당패배 파장

    ◎신진당 등 야권 승세몰아 총선 강력요구/진보진영 위축… 보수강경 목소리 커질듯 지난해 6월 연립정권 출범이후 처음으로 23일 치러진 일본 참의원선거가 연립여당의 참패와 통합야당인 신진당의 대약진으로 끝남에 따라 향후 연립여당 내부는 물론 전체적인 일본정치판도에도 일대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에서 자민·사회·신당 사키가케등 연립 여3당은 전체 개선의석 1백26석 가운데 과반수를 간신히 넘는 65석을 차지하는 신승을 거두었다.큰 관심을 모았던 사회당은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총리가 유세기간중 장담했던 22석을 훨씬 밑도는 16석을 차지하는데 그쳤으며 자민당 역시 목표치인 50∼55석에 크게 못미치는 46석 확보에 그쳤다. 반면 지난해 12월 신생·공명·민사·일본신당등 9개 중도보수정파가 모여 결성한 통합야당인 신진당은 도쿄 등 대도시에서 강세를 보여 40석을 차지하는 대약진에 성공했다. 이같은 신진당의 급부상은 일본의 정치판도가 기존의 자민­사회당에 의한 「보수­혁신체제」로부터 자민­신진당의 이른바 「보수양당체제」로 개편될 것을 예고해주고 있다. 연립여당은 또한 향후 정국운영에 있어 적지않은 파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신진당이 선거승리의 여세를 몰아 중의원 해산,총선 실시등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설 경우 무라야마 내각으로서는 마땅한 대응책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연정 내부에서는 정국돌파를 위한 무라야마총리 사퇴 및 자민당 총리 옹립,현 연정하의 개각등 몇가지 해법들이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다.그러나 여3당 대표들은 24일 연립여당의 의석수가 참의원 2백52석의 과반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일단 현 체제를 유지하되 민심쇄신을 위해 다음달초 일부 내각을 개편하는데 의견을 모았다. 따라서 이번 선거결과가 당장에 일본정국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그러나 지난 4월의 지방선거에 이어 이번 선거에서도 사회당의 퇴조가 확인됨으로써 일본내 진보진영의 목소리는 더욱 위축되고 대북관계 및 자위대·헌법문제등에 있어서 보수강경의 목소리가 커질 것으로 보인다.
  • 일 정계 재편·총리 진퇴 갈림길/내일 참의원선거 전망

    ◎사회당 득표 따라 무라야마 재집권 결정/93년 연정수립후 첫 선거… 126명 선출 일본 참의원 선거가 23일 실시된다. 93년 중의원 선거로 자민당 단독정권이 무너지고 연립정권의 시대로 들어선 이후 처음 실시되는 선거다. 이번 선거는 일본정계의 재편과 맞물려 관심을 모아왔으나 막상 선거에 들어서서는 사회당이 얼마나 득표할지,그에따라 무라야먀 도미이치(촌산부시)총리가 퇴진하게 될 것인지 여부로 의미가 축소돼 버렸다. 일본 정계의 재편과 진로탐색이라는 과제는 중의원 선거로 넘어가는 형국이다.이번 선거에서는 정책상의 뚜렷한 쟁점도 부각되지 못한 상태다. 참의원은 6년임기인 전체 2백52명 가운데 3년마다 절반씩 개선한다.이번 개선대상은 89년 당선된 1백26석이다.그 당시 사회당은 도이 다카코위원장(현 중의원의장)의 이른바 「마돈나 선풍」으로 일거에 약진,41석을 차지했다.자민당은 33석으로 참패했었다. 지난해 신진당 창당뒤 정당별 의석수는 자민당 개선 33석(비개선 61석),사회당 41석(22석),신진당 19석(16석),신당사키가케 1석(0석),공산당 5석(6석) 기타등이다. 이번 선거에서 제일 확실하게 전망되고 있는 것은 사회당이 크게 쇠퇴할 것이라는 점.사회당은 여론조사에서 역대 최저인 15석 전후에 머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문제는 15석조차 못 건질 경우 무라야마총리가 계속 집권할 수 있겠느냐는 점.연립여당 특히 자민당안에서는 당장 대안이 없다는 점을 들어 연립여당 전체로 과반수인 64석을 넘으면 계속 집권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사회당이 15석 이하를 얻게 될 경우 「무라야마 이후의 내각」에 대한 논의가 무성하게 될 것이다.또 사회당안에서는 구보 와타루 서기장의 퇴진등이 모색되면서 다시 한번 진통을 겪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에서는 또 지난 4월 지방선거의 무당파 돌풍이 재현될 것이냐는 점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유권자들은 기성정치권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요미우리신문 여론조사에 따르면 선거에 관심이 있다는 응답이 80년이후 처음으로 50%이하로 떨어졌다.그러나 무소속의 난립과 정당간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무소속 돌풍보다는 유권자의 투표기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번 선거가 지나면 다음은 중의원 선거다.여야가 모두 중의원 선거에 대한 대비가 부족해 선뜻 총선거를 치르려 하고 있지 않지만 아무래도 일본 정계는 2년이상 표류하고 있는 데 대한 국민의 본격적인 심판을 앞둔 「정치의 계절」로 진입할 것이다.
  • 일 중의원 출신작가 하마다 “옴교테러 외국인 관련” 운운

    【도쿄 UPI 연합】 일본의 한 전의원은 12일 옴진리교가 일본사회 전복을 노리는 외국 세력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자민당 지도자였다가 현재 작가로 활동중인 하마다 고이치(빈전행일) 전중의원의원은 이날 니폰 TV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최소한 2명의 정치인이 외국세력과의 국제적 음모에 연루돼 있다고 말했다. 옴진리교 스캔들이 발생한 이후 일본 언론에서는 여러가지 「음모설」에 대해 보도하고 있으나 아직 그 어느 것도 구체성을 띠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음모설 중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복수하려는 일단의 한국인들이 관련됐다』,『일본이 한국·미국과의 북한 핵개발 저지노력을 포기하도록 하기위해 북한이 옴진리교를 이용,일본을 공격했다』는 것 등이 포함돼 있다.
  • 후쿠다 타계/전 일총리… 향년 90세

    【도쿄=강석진 특파원】 후쿠다 다케오(복전규부) 전일본총리가 5일 낮 12시6분 도쿄도내 도쿄여자의대 아오야마 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향년 90세. 후쿠다 전총리는 대장상과 외상 및 자민당 간사장을 역임한 뒤 76년 미키 다케오(삼목무부) 전총리에 이어 67대 총리로 취임해 약 2년간 재임하면서 중국과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하고 도쿄 국제공항 개항 등 현안을 처리했다. 86년 중의원 14선을 역임한 뒤 후쿠다 전총리는 파벌을 고 아베 신타로(안패진태랑) 의원에게 인계하고 지난 90년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음으로써 정계를 은퇴했다. ◎김 대통령 조문 김영삼 대통령은 5일 별세한 후쿠다 전일본총리의 유가족들에게 위로전문을 보내 『우리나라의 오랜 친구인 고인의 서거에 대해 더없이 애석하게 생각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고인은 생전에 총리대신으로,또 전직 정부수반협의회의 명예회장으로서 인류평화와 번영을 위해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면서 『또한 오랫동안 일·한의원연맹회장과 일·한협력위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한·일관계의 발전을 위해 진력해온 훌륭한 업적은 양국 국민의 가슴속에 길이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 가깝고도 먼 이웃(한·일수교 30년)

    ◎수교 19년뒤에야 한국정상 “공식 방일”/66년 무역협정 서명… 경제협력 “물꼬”/빈번한 교류속 일 지도층 잇단 망언 65년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한일 양국간에는 모두 17차례의 정상간 왕래가 있었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첫 공식 방일이 추진된 것은 72년이다.박정희 대통령이 11월23일 공식 방일하기로 예정됐었으나,국내의 반일감정이 수그러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취소됐다.박대통령은 18년에 이르는 재임기간동안 한번도 일본을 공식방문하지 않았다. 우리 대통령의 공식 방일이 성사된 것은 12년 뒤인 84년에 이르러서였다.이 해 9월6일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히로히토 국왕을 만났다.이후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도 90년과 94년 각각 일본을 방문했다. 수교전에도 대통령의 방일은 있었다.이승만 대통령은 48년과 50·53년 등 세차례 일본을 비공식 방문,요시다 총리 등과 면담하기도 했다.또 61년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경로에 일본을 비공식 방문,이케다 총리와 면담을 가졌다. 우리나라에 처음 온 일본 총리는 사토 총리로 67년 6월30일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했다.공식방한한 첫 일본 총리는 나카소네 총리로 83년 1월11일 서울에 와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이후 88년 다케시타,91년 가이후,92년 미야자와,93년 호소카와 총리의 방한이 이어졌다. 비공식과 실무 방문을 포함하면,한국의 대통령은 모두 7차례 일본을 방문했으며,일본의 총리는 10차례 방한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66년 3월 한일간의 무역협정이 서명,발표됨으로써 본격적인 경제 관계도 시작됐다. 이 해 9월 서울에서 처음으로 장기영 전부총리와 후지야마 일 경제기획청장관이 참석하는 한일경제각료 간담회가 열렸다.이후 양국간 경제교류는 80년대 말까지 크게 확대되어 왔으나,90년대초에 들어 무역·투자·기술협력 등의 분야에서 감소세를 보이다 최근 회복세를 찾고 있다. 그 과정에서 무역불균형 심화가 지속적으로 양국간 현안이 됐는데,65년 1억 달러였던 대일 무역적자는 80년대 후반에 50억 달러를 초과하기 시작했으며,92년에는 79억 달러를 기록했다. 경제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67년 정기 각료회의가 시작된 뒤,양국 외무장관 회담,고위외교정책협의회,한·일 어업공동위원회,문화교류실무자회의 등의 한·일 정부간의 정기회담으로 자리잡았다. 또 한일의원연맹과 한일친선협회,한일협력위원회,한일경제협회,한일협회,한일여성친선협회,한일문화교류기금 등의 민간 친선단체가 발족되기도 했다. 65년 1만명에 불과하던 양국간 인적교류는 지난해 2백70만명으로 늘어났다.일본이 거주하는 재일 한국인은 68만8천명이다.최근에는 재일교포와 일본인과의 결혼이 늘어나는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90년 통계에 따르면,재일교포의 총혼인건수 1만3천9백34건 가운데 동포간 혼인은 15.8%에 불과하며,일본여자와 결혼한 교포남성이 19.5%,일본남자와 결혼한 교포여성이 64.2%였다.일본에 귀한한 재일교포는 50년이래 17만명인 것으로 집계된다. 이러한 관계 발전의 한편에서는 일본측의 망언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일본의 고위각료급에서만도 해마다 일일이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의 망언을 쏟아냈다.대표적인 것이 82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과 그에 대한 86년 후지오 문부상의 망언으로 양국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됐다.정부는 이해 9월 예정된 한일 외무장관 회담을 연기하며 후지오의 망언에 엄중항의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또 올해 한일 국교정상화 30주년을 맞아서도 어김없이 와타나베 미치오(도변미지웅) 전 외상이 한일합방과 관련한 망언을 함으로써 양국간의 미래지향적인 관계 발전에 찬물을 끼얹었다. ◎도쿄의 평가와 과제/“국교정상화 한국발전에 크게 기여”/위안부 등 개인배상문제 불씨 잠복/재일동포3세 법적지위개선도 현안 한국과 일본은 22일로 한·일기본조약 서명 30주년을 맞는다. 국교가 정상화된 지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일본에는 한국에 대한 우월감이,한국은 일본에 대해 피해의식이 남아 있다.또 「김대중납치사건」 「문세광 사건」 망언파동 등으로 한일관계는 곡절도 많이 겪었다. 한일관계는 양국 정치에 있어 「늘 쉽게 구사할 수 있는 정략적 카드」로 악용당한 사례도 많이 있다. 하지만한일국교정상화가 냉전체제하에서 동아시아지역의 안정과 한국의 경제발전,일본의 이 지역에서의 영향력 행사를 위한 안정적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양국에 크게 공헌한 점이 있다는 데 대해 의견이 대체적으로 모아진다.특히 일본에서는 국교정상화가 한국에 보다 많은 플러스가 됐다고 말하는 학자,평론가들이 많다. 초대 주일대사를 지낸 김동조전외무장관은 한일국교정상화와 관련,『냉전구조하에서 정치적으로 아시아,넓게는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하면서 『한국으로서도 피폐해진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조약체결로 얻은 자금이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도쿄신문 20일자). 일본으로부터의 자금이 한국경제 발전에 대해 도움이 됐다는 점에 대해서는 재일사학자 강재언교수도 높이 평가한다.하지만 강교수는 강조하는 점이 조금 다르다.그는 우선 일본으로부터 무상공여 3억달러 등 모두 8억달러의 자금은 식민지 피해에 따라 당연히 받을 몫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강교수는 또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들도 배상을 받았지만 많은 나라에서 특권층을살찌운 반면 한국은 깨끗하게 경제건설에 활용됐다』고 말해 자금이 들어온 일본보다는 활용한 한국의 노력에 비중을 두었다. 그는 반면 「식민지지배 책임문제」 등이 분명하게 밝혀진 위에 국교정상화가 됐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돈이 급하고 일본은 과거를 반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부분이 애매하게 처리된채 기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여러가지 문제들이 남게 됐다고 말한다.남은 문제들 가운데는 일본의 진정한 과거반성,한일기본조약의 해석,재일동포 3세이하의 법적 지위 문제,식민지배 피해자에 대한 개인적 배상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한·일기본조약 서명 이동원 전외무/“국력 길러 일 우월의식 극복을/과거에 매달려 역사흐름 놓치지 말길/패전 극복 일의 창조적 노력 본받을만 한·일기본조약을 서명한 이동원 전외무장관(현 국제학술원이사장)은 21일 국교정상화 30주년에 즈음한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말고 일본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수 있는 국력을 키워야한다고 강조했다.다음은 인터뷰 내용. ­한·일기본조약을 서명한 당사자로서 30주년을 맞는 감회와 기본조약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한·일 국교정상화회담은 거의 15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전후 세계사에서 가장 길었던 외교협상이었습니다.그만큼 양국간의 적대감과 갈등이 깊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약에 서명한 것은 역사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기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냉전이라는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식민지지배에 대한 청산을 분명히 하지않고 경제협력을 우선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만. ▲역사는 변화하는 것입니다.변화없이는 발전도 없습니다.한·일기본조약은 그 시대의 역사적 변화의 흐름을 활용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당시 미국의 지원하에 새로운 일본이 만들어지고 있었으며 한국도 새로 태어나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과거의 역사는 물론 잊어서는 안되지만 과거에만 머물러 있을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의 전후청산은 끝났다고 생각합니까. ▲어느정도 이루어졌다고 봅니다.그러나 중의원의 「전후50년국회결의」 채택과정에서 나타났듯이 과거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독일과 같은 자세가 부족합니다.일본은 국수주의적 환상에서 깨어나 이웃국가들과 함께 공존·번영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그러나 불행히도 아시아의 후진성을 이용,우월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움직임이 여전히 강합니다.공존의 시대에 배타주의적 우월의식을 고집한다면 일본의 미래는 어둡다고 봅니다.일본도 중국·한국·아세안등 아시아 이웃국가들의 역동적인 변화를 잘 인식하지않으면 안됩니다. ­국교정상화후에도 일본지도층의 망언이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그 배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주변국가를 멸시하는 일본의 배타주의적 우월의식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일본인들의 의식속에는 아시아를 깔보는 경향이 강하게 배어있습니다.그러나 우리들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일본인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하는 창조적 노력과 국력배양을 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2차대전후 일본은 전쟁폐허의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일본은 그러나 미국에 머리숙이며 열심히 기술을 배우고 경제부흥을 위해 많은 땀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특히 선진기술을 그대로 모방하지않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일본적인 알파」를 추가하려고 노력했습니다.그러한 「창조적」 노력이 오늘과 같은 경제대국을 이루는 원동력이 됐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일본것을 그대로 모방하는데 그친 경우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 결과 일본에 대한 경제적 예속이 점점 깊어져왔습니다.작은 것이라도 「한국적 알파」를 추가하려는 창조정신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한국을 보는 일본의 시각이 변했다고 봅니까.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시각이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한국을 얕보는 본질적인 인식은 크게 변하지않은 것 같습니다. ­식민지지배를 배경으로 한 한·일간의 특수관계에서 이제는 보통의 이웃국가관계로 바뀌어야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만. ▲그렇습니다.과거가 미래를 구속하는 상황이 더이상 되풀이되어서는 안됩니다.광복 50주년이 됐습니다.일본에도 한국에도 식민지이후 세대가 중심이 되고 있기때문에 한국도 이제는 냉정한국제정치논리에 대비하여야합니다. ­앞으로의 한·일관계를 어떻게 전망합니까. ▲양국은 경제뿐만아니라 정치·문화등 각분야에서 더욱 밀접하고 복잡한 관계로 발전할 것입니다.그러나 한국은 반일감정을 극복하고 기술·정보등 경제분야의 발전을 통해 일본과의 격차를 줄여야합니다.물론 일본과는 경제규모에서 대등할수는 없습니다.그러나 질적인 대등함을 유지할수 있는 국력을 키워야합니다.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국력이 뒷받침되는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장진홍 의사(이달의 독립운동가)

    ◎대구 조선은행 폭파 “미완의 거사”/일제만행 철저히 조사… 국제사회 고발시도/동경경시청 테러 모색중 붙잡혀 순국자살 『육체는 죽는다해도 영혼은 한국의 독립과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지하에 가서라도 싸우겠다』 창려 장진홍 의사(1896년 6월6일∼1930년 6월5일)가 일제에 의해 사형이 확정된뒤 대구 옥중에서 일제총독에게 보낸 서한문의 한 대목이다. 의사는 35년의 짧은 생애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쳐 싸운 독립투사였다. 경북 칠곡 출신인 의사는 19세때인 1914년 조선보병대에 입교,2년동안 군사지식을 배우고는 제대해 곧바로 독립운동단체인 광복단에 가입했다. 국내에서 일경의 감시가 심해지자 의사는 1918년 만주 봉천(심양)을 거쳐 연해주로 건너가 광복단 동료들과 함께 한인 청년 80여명을 규합,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시베리아출병으로 훈련이 어렵게 되자 다시 귀국,국내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맞았다. 의사는 일제가 독립만세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제암리 학살사건등을 저지르자 일제의 만행을 철저히 조사,국제사회에 고발코자 전재산을 정리해 한국인 피해조사작업을 펼쳤다. 서적행상으로 가장해 전국곳곳을 돌아다니며 일제의 학살·방화·고문사실등을 기록한 「조사문」을 작성,인천함대에 근무중인 친구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이후 의사는 국내 독립운동이 미약해지자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제에게 타격을 가할 기회를 기다렸다. 마침내 1927년 4월 의사는 동료의 소개로 한국의 독립에 우호적인 일본인 폭약전문가 굴절무삼낭을 만날 수 있었다. 의사는 굴절로부터 폭탄제조법을 배웠으며 만주와 국내에서 다이너마이트·뇌관등을 구입했다. 의사는 이어 1927년 8월 시험적으로 제조한 2개의 폭탄을 칠곡 산중에서 터뜨리는 폭파시험을 가졌다. 폭파위력을 확인한 의사는 혼자 거사하기로 결심하고 폭탄투척장소를 경북도청·경찰부·조선은행 대구지점·대구 부호가등 5곳으로 선정하는등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의사는 거사를 위해 다시 6개의 폭탄을 제조,1927년 10월18일 거사에 나섰다. 이날 상오 9시쯤 자전거에 폭탄을 싣고 대구시내 덕흥여관으로찾아온 선생은 『길전상점 점원인데 이 여관에서 며칠간 묵게 됐다』고 신분을 위장하고 투숙했다. 선생은 이어 상오 11시30분쯤 폭탄을 4개의 벌꿀상자속에 넣어 싼뒤 여관점원에게 『이웃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이 선물상자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점원은 대구지점의 한 일본인 은행원에게 이 상자를 전달했으나 이 은행직원이 폭탄폭발 직전 상자를 열어보는 바람에 폭탄임이 들통났다. 은행원들은 서둘러 폭탄 도화선을 자르고 다른 3개는 길옆으로 내다놓았다. 그러나 11시50분쯤 길옆의 폭탄 3개가 폭발,신고를 받고 쫓아온 일경등 5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은행창문 70여장이 부서졌다. 이 거사로 대구시내는 심한 혼란상태에 빠졌고 일경은 총비상이 걸렸다. 의사는 미리 여관을 나와 선산군의 한 동지집으로 피신해있었다. 일경은 범인을 찾을 수 없자 전에 독립운동을 벌였던 이정기등 8명을 검거,고문으로 거짓조서를 받아 공판에 회부했다.민족저항시인 육사 이원록 선생(건국훈장 애국장)도 이 때 사건에 연루돼 무고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의사는 이어 1928년 다시 영천경찰서등에 폭탄을 투척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경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아예 일본땅에서 거사를 할 생각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에서 11개월동안 이곳저곳 폭탄투척장소를 물색하던 의사는 동경 일제 중의원과 경시청을 가장 좋은 곳으로 선정하고 거사후 일본을 탈출할 계획까지 치밀하게 짰다. 그러나 일제는 의사에게 이미 혐의를 두고 검거작전을 비밀리에 진행중이었다. 일제는 거사를 며칠 남겨둔 1928년 2월13일 의사가 묵고있던 대판시내 안경점을 급습,의사를 체포했다. 체포된뒤 대구로 압송된 의사는 일경의 심문과정에서 『조선은행 폭탄사건은 혼자 한 일』이라고 강조하고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동포들의 가슴을 뜨겁게 울렸다 의사는 사형이 확정되자 자결순국했다. 정부는 의사의 공을 기려 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 「전후50년」 결의/일 참의원 보류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 참의원은 14일 운영위를 열어 앞서 연립여당이 중의원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전후 50주년 국회결의 채택문제를 논의했으나 여야간에 의견차가 커 결의채택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통합야당인 신진당은 중의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수정안을 냈으나 연립여당측은 이를 거부했다. 특히 자민당측은 중의원에서 결의를 채택했을 때도 반대하는 의원들이 70여명이나 불참한데다 참의원에서도 반대세력이 적지 않은 점을 감안,참의원 채택을 강행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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