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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日 ‘新 방위협력’ 주변국 반응

    최근 일본 중의원을 통과한 ‘신(新)미일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을 놓고 주변국들의 ‘손익 계산’이 한창이다. 일본의 가상 적국(敵國)으로 분류된 북한은 극렬한 반응을 보였다.향후 북-일 관계의 급속한 냉각이 점쳐진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일본 반동들의 군사적 위협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것이며 일본의 재침 기도를 저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경고했다.북한 중앙통신도 “이번 일본의 주변사태법은 일본의 재침을 자극하는 전쟁법안”이라며 최고조의 비난을 퍼부었다. 당사자인 일본은 ‘경제력에 걸맞는 국제역할(보통국가론)’에 한걸음 전진했다는 분석이다.외교부의 한 관계자는 “일본내 보수파들의 주장이 점차 현실화되는 분위기”라고 평했다. 잠재적 위협국가인 북한을 직접 겨냥하면서 동북아 패권다툼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이중효과를 노린 것이다. 반면 중국과 러시아는 우려와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동북아에서의 미·일의 독주를 우려한 탓이다. 중국은 최근 외교부 대변인 정례브리핑을 통해 “미·일협력 강화는 시대조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중국 내정인 대만문제에 간섭함으로써 중·일 관계를 손상시켜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러시아도 최근 “미·일이 규정한 ‘주변 사태’에 러시아 문제가 들어가면안된다”는 의사를 일본측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미·일 동맹을 통한 ‘안정자 역할’이라는 세계 전략을 관철하면서 ‘비용경감’이라는 실익을 얻었다는 시각이다. 한국 외교부도 “한반도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평가했지만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선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분위기다.
  • ‘가이드라인’ 통과 이후 고개드는 日 헌법개정론

    미일안보협력지침(가이드라인)의 일본 중의원 통과직후 일본 정가에서 헌법 개정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개헌론의 요지는 헌법 9조를 고쳐 자위대가 교전권을 갖도록 하자는 것이어서 주변국들의 반발이 예상된다. 집권 자민당 야마사키 다쿠(山崎拓)의원은 28일 요미우리(讀賣)와 회견에서 “헌법 개정을 자민당 총재선거의 공약으로 내걸겠다”고 밝혔다. 자민당내 4번째 파벌인 야마사키파를 이끌고 있는 그는 9월 총재선거에 입후보할 예정으로 안보문제에 보수적 입장을 보여왔다. 그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통해 국제적 안전보장에 일본이 적극적 역할을 하는 길을 열어야 한다”면서 “이는 헌법해석의 확대가 아닌 개정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야마사키 의원이 개헌론을 들고 나온 것은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호헌(護憲)입장인 당내 2위파벌의 가토 고이치(加藤紘一)의원 등 유력 총재후보들과의 ‘차별화 전략’때문. 지난해 북한 미사일 발사와 3월 북한 것으로 추정되는 공작선 침범사건 등을 계기로 일고 있는 ‘강한일본만들기’의 여론을 등에 업고있다. 요미우리가 지난달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개헌하는 쪽이 좋다’가 53%로사상 최고지지율을 보인 것도 이런 일본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2차대전 패전뒤인 46년 제정된 일본 헌법은 9조에서 ‘육해공군의 군사력을 갖지 않고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점령군 지시로 제정된 헌법을 자주헌법으로 개정한다’는 내용을정강으로 채택하고 있는 자민당 등 보수세력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개헌론이제기돼왔다.최근 사민 공산당을 뺀 여야4당이 헌법논의를 맡을 헌법조사회의 국회내 설치에 합의하기도 했다. 미국이 개입하는 국제분쟁에 가담할 수 있도록 한 가이드라인 법안 통과 이후 군사대국화에 발맞춘 개헌논의,유엔평화유지군(PKF)파병,유사법제 제정논의는 한동안 봇물처럼 터질 전망이다. 황성기기자 marry01@
  • 오부치 日총리 오늘 訪美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가 29일 미국 방문길에 오른다. 지난해 11월 빌 클린턴 미 대통령 의 일본방문에 대한 답방(答訪)으로 일본 총리의 공식 미국방문으론 87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 이후12년만이다. 10여년만의 방미(訪美)인만큼 이번 방문은 21세기 양국의 결속을 다지는데초점이 맞춰져 있다. 5월3일의 정상회담에선 미일이 ‘공통의 가치관’을 갖는 동맹국임을 확인한다.공통의 가치관이란 미국이 세계에 전파하고 있는 자유주의,인권존중,시장경제 등 3대 이념이다. 이런 공감대에서 지구 환경보존과 군비축소,과학기술 발전 등 인류 공통의과제에 대한 정부 및 비정부기구(NGO)차원의 교류촉진을 표명한다. 미일 정상회담에서의 최대 현안은 안보와 경제다. 안보에 있어서 오부치 총리는 ‘선물’을 안고 간다.미국으로부터 조기통과 압력을 받아온 미일안보협력지침(가이드라인) 관련법안이 27일 중의원에 이어 5월중 참의원 통과가 확실시됐기 때문이다. 새 가이드라인으로 동북아에서 미국은 일본에 파수꾼으로서의 일정한 역할을 떠맡긴 셈이다. 한반도 정세도 주요이슈다.‘페리 보고서’가 나오기 전 대북(對北)정책을최종조율하고 한미일 3국의 긴밀한 공조와 협력을 천명할 것으로 보인다.일본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저지도 미국측에 요청할 것으로 점쳐진다. 경제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일본의 경기부양책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미국은 재정과 금융면에서 추가대책을 요구할 태세다. 일본은 추가경정예산에 경기대책을 반영한다는 방침이나 그 규모가 적을 경우 미국의 불만이 가라앉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오부치 총리는 올해 경제성장률 0.5% 달성과 산업구조개혁,규제완화 등도 클린턴 대통령에 약속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산 철강에 대한 미국의 잇따른 반덤핑제소로 빚어진 양국의 ‘철의 전쟁’을 두 정상이 어떻게 풀 지도 관심사다. 황성기기자 marry01@
  • [사설] 日의 방위관련법 주목된다

    새로운 미·일(美·日)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관련법안의 일본 중의원 통과는 여러 면에서 우려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의 안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데다 일본의 군사대국화가 염려되기 때문이다. 27일 중의원을 통과한 주변사태법 및 자위대법 개정안과 미·일 물품 용역상호제공협정 개정안등 3개법안은 일본 주변에 유사(有事)사태가 발생했을때 일본이 미국을 후방 지원하도록 명시하고 있다.지금까지 일본영토의 전수(專守)방위에 국한했던 자위대의 군사활동을 주변사태로까지 합법적으로 확대한 것이다.군사활동의 범위를 비록 탄약·무기수송과 미군의 수색·구조등 후방지원으로 한정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전후방의 개념이 모호한 현대전의특성상 군사개입의 가능성은 크다고 할 수 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 법이 동북아의 안보상황,그중에서도 특히 한반도사태를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군사지원이 가능한 유사사태의 범위에 무력분쟁이 발생했을 때만 아니라 무력분쟁이 임박하거나 내란·내전이 발생했을 경우,난민이 대량으로 발생했을 경우,유엔안보리가 경제제재를 결의했을 경우 등을 폭넓게 포함하고 있는 점도 한반도 유사시 미국을 돕기위한 일본의 개입 가능성을 뜻하고 있다. 미·일 신가이드라인 관련법안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안보에 일본의 역할분담을 겨냥한 96년의 미·일안보공동선언을 뒷받침하는 조치이다.미·일의안보협력 강화가 북한의 도발을 억지하고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그러나 일본의 군사력 강화가 중국등 주변국들을 자극하여 이 지역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킬 가능성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신가이드라인 관련법안은 군대와 전쟁의 영구적 포기를 선언한 평화헌법에위배될 뿐만아니라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꾀한다는 이유로 일본 국내에서도반대의 소리가 높은 실정이다.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을 추진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미국과 일본 등 주변국들과의 안보협력이 불가피하다.얼마전부터 시작되고 있는 일본과의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것도 바람직하다.아울러 신가이드라인 관련법이 한반도안보에 미칠 영향을 철저히 분석하여 우리의 입장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차제에 북한도 일본에게 군사력 강화의 빌미를 주는 도발행위는 중단해야한다.국내외의 반발로 1년이상 끌어왔던 가이드라인 관련법이 북한의 미사일발사와 공작선침투를 계기로 여론의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을 북한은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 美-日 방위지침 관련법안 가결 의미

    26일 일본 중의원 특위서 미일안보협력지침(가이드라인) 관련법안이 가결됨으로써 법안 제출 이후 1년여를 끌었던 가이드라인 논란은 일단락됐다. 자민 자유 연립여당 의석만으로는 참의원 통과가 어려웠으나 제2야당 공명당이 가세해 수적 우세를 확보,5월안 중·참 양원 통과가 확실시된다. 가이드라인은 일본 주변국에서 발생하는 비상사태 때 미국과의 협력을 담은 일종의 군사지침이다.중국과 한국 등도 일본의 군사 대국화와 연관시켜 일본이 내리는 주변사태의 정의나 미군 지원활동에 자위대가 얼마나 깊숙이 가담할 지 등을 예의주시해왔다. 이날 가결된 법안은 주변사태를 ‘방치하면 일본 직접 무력공격으로 이어지는 사태’로 규정했다.일본 열도 유사시에 버금가는 ‘준유사’의 개념으로끌어올려 미군에 협력하는 주변국 비상사태의 범위를 크게 넓혔다. 주변사태가 발생하면 자위대는 미군을 돕기 위해 탄약수송 등 후방지역 지원 및 미군의 수색구조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후방지원 지역에서 정당한 방위를 위해 자위대원이 무기를 사용할 수 있게됨은 물론이다.이러한 대미 협력의 기본계획은 일본 국회의 사전승인을 얻어야 하나 긴급할 때는 사후승인도 가능하게 했다.한편 자민 자유 공명 3당협의의 막바지 초점이 됐던 자위대의 선박검사 조항은 삭제됐다. 미국으로부터 ‘조기통과’ 압력을 받아온일본 집권 자민당과 정부는 29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의 미국 방문길에 큰 선물을 안겨준 셈이 됐다. 황성기기자 marry01@
  • [정직한 역사 되찾기](33)재일 친일파 거두 박춘금

    일제강점기 친일파는 조선내는 물론 일제의 영향력이 미치는 전 지역에서 활동하였다.만주사변 이듬해인 1932년 수립된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이나 일본 본토도 그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이들은 대개 군부나 행정기관 등 일제의 권력기관에서 일제통치의 수족으로 활동하였다.만주군관학교나 일본 육사를 나와 고급장교로 활동한 친일 군인들이 이에 속하며 또 일본이나 만주국의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고급엘리트 관료로 활동한 자들을 들 수 있다.한 단계 낮은 직급에서는 밀정이나 행동대원 등 앞잡이로 활동한 자들을 거론할수 있겠다. 일본 본토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친일파로 박춘금(朴春琴·1891∼1973)을 들수 있다.그는 조선인으로서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두 번씩이나 대의사(代議士·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이다.그의 친일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극력 친일파 가운데 일제말기 일제가 임명한 귀족원 의원을 제외하면 일제통치 전 기간을 통해 일본 국회에 진출한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박춘금은 여러 형태의 친일파 가운데서상당히 드문 유형에 속한다.친일파 가운데는 지식을 팔아 일제에 아부한 집단이 있는가하면,경제적 기반을 일제통치에 제공한 대가로 기득권을 보전하고 일제와 유착관계를 형성해온 부류도 있다.그러나 박춘금은 그도저도 없는 자였다.그는 오직 몸뚱이 하나로친일대열에서 성공한 자였다.그는 수하에 폭력조직을 거느린 소위 ‘정치깡패’ 집단의 우두머리였다.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하수인으로 폭력집단이 존재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식민지시절에도 이같은 집단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주먹으로 친일배의 정상에 오른 그의인생역정을 더듬어 보자. 박춘금은 1891년 경남 밀양 태생으로 본관도 밀양이다.부 박금득(朴今得)과 모 박차연(朴且連)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자세한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청년시절 그는 일본인 술집에서 심부름을 하며 일본말을 배운 것을 밑천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판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일본으로건너간 시기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자세하지가 않다.다만 그가 한 연설에서 토로한 말에 따르면,일본에 도착할 당시 수중에 가진 돈은 1원 49전뿐이었으며 당시 일본에는 관비유학생 50명인가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했다. 1920년경 그가 이기동(李起東) 등과 함께 도쿄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상구회(相救會)’라는 단체를 조직한 사실은 확인된다.이기동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 활동한 대표적인 재일 친일파다.상구회는 1921년말 ‘상애회(相愛會)’라는 사회사업단체로 개편되는데 23년 요코하마·나고야·오사카 등에 지부를 조직,조직을 확대하였다.그럴듯한 이름의 간판을 내건 이 ‘상애회’가 바로 박춘금 일당의 일본내 친일활동의 모태가 된다. 막노동판의 주먹패 박춘금이 일제로부터 인정을 받아 재일 조선인 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1923년 9월 1일 도쿄 인근 지역을 강타한 ‘관동(關東)대지진’이었다.수 십만 명의 인명피해는 물론 재산피해도 엄청났던 이 천재(天災)를 맞아 일제는 동요한 민심을 수습하고 조선인을탄압할 목적으로 당국의 개입하에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거나 방화를 일삼는다는 것이 그것이다(여기에는 미즈노(水野鍊太郞) 당시 내무상의 조선인에 대한 개인감정이 개입됐다는 지적도 있다.미즈노는 1919년 9월 사이토(齋藤實)총독을 따라 정무총감으로 조선에 부임하기 위해 서울역에 첫 발을 디뎠다가 강우규(姜宇奎)의사의폭탄세례를 받은 인물). 이에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관헌과 함께 조선인에 대한 무자비한 체포와 학살을 자행하였는데 최소 6,000명이 이때 희생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바로 이때 박춘금은 상애회 회원 300여명을 동원,‘노동봉사대’를 조직하여 조선인 희생자 시체처리와 복구작업을 자청하였다.이 무렵 박춘금 일당은이미 일제당국의 비호를 받고 있어서 상호 자연스레 교감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을 계기로 박춘금은 일제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상애회 본부 사무실을 마련하는 등 입지를 넓혀갔다.28년 박춘금은 상애회를 재단법인으로 만들고는 이사장에 총독부 경무총감 출신의 마루야마(丸山鶴吉)를 영입했다.회장에는 이기동을 앉히고 자신은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사실상 실권을 행사하였다.이 무렵 상애회는 일본내 주요도시에 지방본부를 설치하였고 회원수도 2만명을 헤아렸다.이듬해 29년 상애회관을 지어 사무실도 독립하였고 마루야마 취임 1주년때는 사이토를 기념식 행사장에 초청하는 등 그 위세를 과시하였다.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세력가로 부상한 그는 상애회 조직을 바탕으로 정계진출을 추진하였다.32년 2월 실시된 제18회 총선때 그는 도쿄 5구(區)에 출마,처음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놀라운 것은 조선인 유권자가 1,236명뿐인 이곳에서 6,966표를 얻었다는 점이다.그의 열렬한 친일성이 일본인 유권자들을 설득시킨 점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일본정계 실력자들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거직후인 2월 23일자로 그가 사이토 전 조선총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불초 이번에 중의원 의원에 당선의 영관(榮冠)을 얻게 된 것은 모름지기 귀대(貴台,손위사람의 높임말)의 두터운 정과 성원을 입은 것이라 여기며 깊이 감사드립니다…”라고 한데서 이같은 점을 엿볼 수 있다.이후 그는 한 차례 낙선했다가 40년 제20회 총선에서 재선하였으나 그의 정치인생은 여기서 막을 내렸다.이후 그는 활동무대를 조선으로 옮겨 친일대열의 선봉장을자처했는데 이 시기가 바로 그의 친일활동이 절정을 이룬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학도병 징집이 시작되자 그는 매일신보 주최 학병격려대연설회에 참석하여 “고이소(小磯)총독이 (조선)군사령관 시절 군사령부를 방문,내선일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도인에 대한 병역의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밝히고는 “(학도병)4천이나 5천이 죽어 2천5백만 민중이 잘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고 외쳤다(매일신보 1943.11.19). 당시 일제가 학도병을 전선으로 내몬 것은 그 이면에는 조선의 미래의 지식분자를 제거하려는 의도가 숨겨진 것이었다.그가 이같은 일제의 의도를 대변한 것인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그에게는 그런 혐의를 둘만한 사건이 하나 있다. 8·15 해방을 불과 50일 앞둔 1945년 6월 25일.그는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청사)에서 당대의 내로라하는 친일파들을 동원,대의당(大義黨)을 결성하고 그 자신이 당수에 취임하였다.당시 전세는 이미 기울어 일본은 패퇴를거듭하였고 미군의 일본 본토공격이 임박한 시기였다.대의당은 바로 이 때‘최후결전’의 자세로 결성된 것이다. 대의당은 ‘강령’에서 “모든 비(非)결전적 사상(事象)에 대해서는 단연이를 분쇄한다”고 밝혔는데 여기서 ‘비결전적 사상’이란 ‘반전·반일’의 총칭이다.해방후 친일파들의 죄상을 조사,폭로한 ‘민족정기의 심판’에따르면 대의당은 항일·반전 조선민중 30만명을 학살하려 했던 ‘살인단체’였던 것으로 드러났다.이는 당시 총독부 경무국이 세운 ‘요시찰인에 대한조치계획’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해방후 그는 살길을 찾기 위해 수하를 시켜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돈봉투를보내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일본으로 밀항하였다.이 때문에 그는 반민특위의 체포,조사를 피할 수 있었다.특위에서는 여러 경로를 통해 그를 송환하려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모두 3번 결혼했는데 첫째,둘째 부인은일본여자였고 66년 75세때 세번째로 결혼한 여자는 당시 60세의 한국여자(82년 사망)였다.두번째 일본인부인과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장남 박춘남(朴春男·89년 일본에서 사망)은일본 릿교(立敎)대학 3학년 재학중 자진하여 학도병에 출진했었다. 일제당시 일본에서 박춘금과 교류한 적이 있다는 한 일본군 장교출신 제보자의 증언에 따르면,그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은 마약중독으로 거의 폐인이돼버렸다고 한다.73년 3월 31일 박춘금은 일본 게이오대학 병원에서 사망,현지에 묻혔다.친일 반민족자 박춘금의 일생은 그제서야 막을 내렸다.죽어서도 그는 고국보다 일본을 택한 것인가,아니면 죽어서도 고국으로 올 수가 없었던 탓일까. 정운현기자 jwh59@
  • 日 강성 지방지도자 시대 예고

    일본 열도에 강성 지도자들의 부상과 함께 우경화 바람이 불고 있다. 11일 치뤄진 일본지방선거에서 카리스마와 ‘강한 일본’을 내세운 후보들이 당선돼 향후 일본 정계의 보수화와 강성 지방지도자 시대를 예고했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66)씨의 도쿄도(東京都)지사 당선은 이같은경향을 대표한다.극우성향의 보수파 논객인 그는 정책논쟁대신 “혁명을 일으키겠다”며 선거민들을 사로잡았다. 당장 도쿄 서쪽의 요코타(橫田) 미군기지를 반환받아 민간용 비행장을 건설하겠다는 그의 공약은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될 전망이다.한·일 외교당국간에 무르익고 있는 ‘재일 한국인의 지방참정권 부여’논의에도 비상이 걸린것은 물론이다. 미국 국채의 매각,아시아지역의 엔화 블럭형성,미군기지 반환,헌법 개정을통한 자위권 확보 등 그의 주장들이 앞으로 어떤 풍파를 일으킬지 주목된다. 그의 당선은 일본국민들사이에서 극우적인 논리와 주장이 더욱 힘을 얻고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우려된다.일본인들의 정서가 이런 지도자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는 점은 앞으로 중앙정계의 보수화와 우경화에 요인이 될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경제침체와 사상 최악의 실업률로 미래에 불안을 느끼고,파벌싸움으로 지리멸렬한 집권당에 염증을 내고 있는 일본국민들이 기존 정책권에 불신을 표시한 것으로도 해석된다.이번 선거를 계기로 집권 자민당이 차기 중의원선거를 앞두고 체제 정비를 앞당기는 될 것이란 진단도 이 때문이다. 도쿄도(東京都)를 비롯,12개 지방자치단체장 전원이 무소속 인사였다.이점은 주요 지방자치단체와 중앙정부와의 갈등 확대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 “日침투 괴선박은 北공작선”

    ┑도쿄 黃性淇 특파원┑일본 해역을 침범한 괴선박은 선체의 특징 등을 근거로 북한 공작선으로 확인됐다고 산케이(産經)신문이 일본 정부 소식통을 인용,25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또 “지난 21일 괴선박을 최초로 발견,이틀간 선박의 무선교신을 해독한 뒤 나포키로 결정했다”고 전하고 24일 오후 괴선박 1척이 북한 나진(羅津)항으로 입항한 사실이 미군 정보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일본정부는 괴선박을 인도받기 위해 베이징(北京) 주재 대사관과 뉴욕 유엔대표부를 통해 북한측에 접촉을 요청했으나 북측은 25일 밤까지 응답이 없었다. 노로타 호세이(野呂田芳成) 방위청장관도 이날 중의원 안전보장위원회에서“괴선박이 고도의 통신기능을 갖추고 있었다”면서 간첩행위 가능성을 지적했다. 산케이는 또 북한 공작선이 일본해를 침범한 목적에 대해 배 위에 덮개를씌운 화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에서 입수한 군수 기자재를 몰래 북한으로 운반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관측했다.한편 24일 오전 북한의미그 21 전투기와 일본 자위대의 F15기가동해상에서 공중전을 벌이기 직전상황까지 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아침 일본 해상자위대 호위함이 괴선박에 경고사격을 하고 있을 때 북한은 미그 21 전투기 2대를 출격시켰다. 일본 항공자위대는 이를 레이더로 포착,북한 미그기가 일본의 공중 방위경계선을 표시하는 방공식별권에 접근하고 있어 F15기 2대를 긴급 발진시켰으나 곧 미그기가 모습을 감춰 F15기도 귀환했다고 산케이는 전했다. marry01@
  • “日, 금창리 核사찰 참여 희망”오부치총리 밝혀

    ┑도쿄 黃性淇 특파원┑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는 18일 일본도미국이 실시하는 북한핵사찰에 참여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오부치 총리는 이날 중의원 방위지침 특별위원회에서 미국과 북한이 합의한 금창리 지하핵의혹시설의 사찰과 관련,“일본이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면일본 국민에게 북한 경수로 건설 지원에 대한 협력을 부탁하는 것이 손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외국의 사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채용하고 있는 대표적 나라는 일본과 독일이다.뉴질랜드와 이탈리아,러시아 등 적지않은 유럽 국가들도 비슷한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사표(死票) 양산 등 소선거구제의 단점을 보완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수렴하기 위해 활용하고 있다.전문화되는 사회 추세에 맞춰 각계의 전문가그룹을 국회로 진출시키려는 의도도 있다. 일본과 독일의 경우 1인 2표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비례대표제로 선출되는의원 비율이 높다는 공통점이 있다.독일의 경우 연방하원 총 656석 중 50%를,일본은 총 500석의 중의원 중 40%인 200석을 비례대표제로 선출한다. 양국은 또 ‘구속식 정당명부’를 채택하고 있다.유권자가 후보자 개인에게 투표하여 직접 순위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 정당이 사전에 우선순위를 정한 후보를 결정하는 식이다.군소정당 난립을 막기 위한 ‘봉쇄규정’을 둔점도 마찬가지다.지역구에서 3석 이상,총 유효득표의 5% 이상을 획득하지 못할 경우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받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동시에 소선거구와 비례대표에 동시 입후보가 가능한 ‘중복입후보제’를도입했다. 독일식과 일본식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의석배분방식이다.독일식은 비례대표병용식(竝用式)을,일본은 병립식(竝立式)을 채택하고 있다.병용식은 정당별득표율에 따라 총 의석수를 나눈 뒤 지역구 당선자를 제외한 의석수를 비례대표로 충원한다.병립식은 미리 지역구 의석과 비례대표 의석을 정한 뒤 권역별로 정당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는 방식이다.하지만 양국은 비례대표 의원 배분의 상한 규정을 두지 않고 있다. 吳一萬
  • 日, 새 환율制 창설 추진

    ┑도쿄 黃性淇 특파원┑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는 새 환율제도의 창설을 적극 추진해 나가겠다고 21일 밝혔다. 오부치 총리는 이날 중의원 본회의에서 “세계 주요통화간에 균형을 취할수 있는 새로운 환율제도의 실현이 중요하다”며 “구체적 방안을 놓고 각국 재무장관간에 협의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는 달러,유로,엔의 변동을 일정 폭으로 억제하는 새 제도에 대한 관계국들의 검토가 착수됐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 日 자민-자유 聯政 출범 보수세력 다시 뭉쳤다

    │도쿄 黃性淇 특파원│일본 자민당과 자유당의 연립정권이 14일 발족했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는 이날 자유당 노다 다케시(野田毅)간사장을자치상에 기용하는 소폭의 개각을 단행,연립정권을 출범시켰다. 집권 자민당은 97년 9월 사민당,신당 사키가케와의 연립해체 이후 16개월만에 연립정권에 복귀했다. 양당은 이에앞서 13일 자위대의 유엔 다국적군 참가,유엔평화유지군(PKF)법 개정을 통한 후방지원 활동,중의원 정수 50명 삭감,부(副)대신제 신설 등에 합의했었다. 개각에선 20명인 각료수를 18명으로 줄이기로 한 양당 합의에 따라 운수상이 홋카이도(北海道)개발청장관,문부상이 과기처장관,건설상이 국토청장관,관방장관이 오키나와개발청장관을 각각 겸무토록 했다. 이번 연립정권의 가장 큰 특징은 보수세력의 재집결.93년 자민당을 탈당했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당수를 비롯,보수 본류(本流)로 자처하는 인사들이 상당수 포진하고 있는 자유당과의 연립으로 집권 자민당은 보수의 ‘화학적 결합’을 이뤄낸 셈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8월북한 탄도미사일 발사를 계기로 초강경 자세로 선회한 대북(對北)정책도 보다 강경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이달초 방한한 노로타 호세이(野呂田芳成)방위청장관의 “북한이 미사일 실험발사를재실시하면 일본의 경수로지원을 중단하겠다”는 언급도 이같은 흐름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방위문제도 마찬가지.양당이 유엔 다국적군 참가나 유엔평화유지군(PKF)법개정 등에 합의,자위대의 해외 활동의 폭이 크게 넓어지게 된데다 군비증강논의도 보다 활발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다만 ‘자위에 필요한 최소한의 실력행사만 가능하다’는 헌법 9조의 기존 해석을 자민당이 끝까지 고수,자유당의 헌법해석 변경이나 헌법수정 주장을 잠재웠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marry01@
  • 日 공무원 20% 감축 추진

    ◎조직 슬림화·정부기관 독립법인화 병행 【도쿄 黃性淇 특파원】 일본 정부가 ‘조직의 슬림화’를 위해 중앙 공무원 20%를 감축키로 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22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또 ‘중앙 성청(省廳) 개혁추진본부’(본부장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현재 128개인 중앙 성청(한국의 부처에 해당)의 국·실을 96개로 줄이기로 했다고 전했다. 일본 정부는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내각 때 1부 20부처인 현행 중앙정부 조직을 1부 12부처로 줄이기로 한 바 있는데 이같은 구체안을 내년 4월 중의원에 법안으로 제출한 뒤 오는 2001년 1월부터 실시할 예정이다. 오부치 내각이 추진하고 있는 ‘작은 정부화’는 중앙 부처 슬림화 외에도 대학,병원,요양소,조폐·인쇄 등 국가가 설립한 기관의 독립법인화 추진이 특징이다. 누적 적자 등으로 국가 살림에 부담이 되고 있는 이들 기관을 독립법인으로 분리,인사 및 행정권을 준다는 취지로 현재 도쿄(東京)대 등 85개 기관이 대상으로 잠정 결정됐다. 중앙성청 개혁은 이밖에 총리의 발의권(發議權)등 내각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재량행정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 ‘권한규정’도 폐지할 방침이다.
  • 친일의 군상:18/명성왕후 시해 가담 禹範善(정직한 역사되찾기)

    ◎명성왕후 시해·시신 소각 등 지휘/‘씨없는 수박’ 만든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부친/무관 출신… 친일 개화세력과 돈독한 관계 유지/일 공사 미우라에 포섭돼 을미사변때 병력 동원/사건후 일 망명… 1903년 일 지방도시서 피살 일본인 여류저술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84)씨는 지난 90년 ‘나의 조국(わが祖國)’이라는 책을 출간했다.얼핏 책 제목만 보면 본인의 자서전 같다.그러나 부제를 보면 남의 이야기를 쓴 책임을 알 수 있다.부제는 ‘우박사(禹博士)의 운명의 씨앗(種)’.부제에 나오는 한국인 성(姓)을 가진 ‘禹박사’는 과연 누구인가?흔히 ‘씨없는 수박’을 개발한 주인공으로 유명한 육종학자 우장춘(禹長春·1898∼1959) 박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쓰노다 여사가 우 박사의 이야기를 책으로 쓴 데는 남다른 인연이 있다. 1914년 도쿄에서 태어난 쓰노다 여사는 1960년대부터 집필활동을 시작한 이후 한동안 일본 군인들의 전기(傳記)를 주로 집필하였다.그러다가 80년대 들어서부터 한일관계사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그 첫 작품이 87년에 출간된 ‘민비암살(閔妃暗殺)’이다.쓰노다 여사는 자료수집차 85년 한국을 방문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한 한국인 학생으로부터 민비(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한 조선군 대대장 우범선(禹範善)이 우장춘 박사의 부친이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쓰노다 여사로서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우 박사는 일본에서도 유명한 육종학자였던 데다 그동안 그런 얘기를 전혀 들어본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쓰노다 여사는 이후 3년간 한일 양국을 오가면서 우 박사의 흔적을 뒤지고 우 박사 유족들을 만나 증언을 들었다.‘나의 조국’은 이런 인연에서 탄생한 우 박사 집안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다. 1895년(을미년) 10월8일 새벽 5시30분경.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미명에 정체불명의 한 무리가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에 들이닥쳤다.일본군과 일본인 복장을 한 이 괴한들은 궁궐을 수비하고 있던 훈련대 연대장 洪啓薰 일행을 살해하고는 곧바로 근정전을 지나 건청궁(乾淸宮)으로 쳐들어갔다.이들은 국왕(고종)의 침전인 곤령전에 난입,난폭한 행동을 자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국왕은 옷이 찢겨지는 등 수모를 당하였다.또 왕세자는 일본군 장교복장을 한 폭도에게 상투를 잡힌 채 그가 휘두른 칼에 목을 맞고 쓰러졌으나 다행히 칼등을 맞아 목숨을 건졌다. ○시해후 시신능욕 만행도 이들중 한 무리는 인근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로 내달렸다.궁내부 대신 李景稙이 길을 막고 나서자 폭도들은 이경직을 총으로 사살하고는 고종이 보는 앞에서 다시 칼로 무참히 베었다.이어 왕비 침전에서 여인들의 비명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울려퍼졌다.궁녀 3명과 왕비(민비,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됨)의 비명소리였다.폭도들은 궁녀와 왕세자 李拓(순종의 본명)을 통해 피살된 자 중의 한 사람이 민비임을 확인하고는 민비의 시신를 홑이불에 싸서 인근 녹원(鹿園) 솔밭에서 석유불에 태워버렸다. 여기서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있지않은 비화 한토막을 소개하면,폭도들은 민비를 시해한 후 민비의 시신을 능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이다.일본인 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77년 작고)는 당시 구한국 정부의 고문으로 있던이시즈카(石塚英藏)가 사건 직후 본국으로 보낸 보고서 내용(‘…왕비를 끌어내 2∼3 군데 도상(刀傷)을 입히고 또한 발가벗겨 국부검사(局部檢査)를 했다…’)을 인용,“폭도들이 사체(死體)를 능욕했다”(‘日本の韓國倂合’·1966년 출간)고 폭로한 바 있다.이에 대해 崔文衡(한양대·사학과) 교수는 “시체에 대한 국부검사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며 ‘능욕’이란 표현도 적당치 않다”며 “왕궁침입에 앞서 이미 술에 만취한 자들이 시간(屍姦,시체를 강간함)도 서슴치 않았다고 봐야한다”고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다.일국의 왕비가 괴한 무리들에게 살해당하고 그 시신이 능욕을 당한 것이 바로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진상이다.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을미사변’은 비참하고 치욕적인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치욕스런 사건의 음모 단계에서부터 가담한 조선인이 한 명 있었다.바로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부친 우범선(禹範善·1857∼1903)이었다.당시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있던 우범선은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에게 포섭돼 이 사건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이 사건에서 그가 맡은 임무는 훈련대 병력동원.상황이 전개되자 당초 임무대로 훈련대 제2대대 병력을 차질없이 동원한 것은 물론이고 민비의 시신 ‘처리’도 맡았다.폭도들에 의해 시해된 후 불태워진 민비 시신의 타고 남은 재는 궁궐내 우물에 버려졌고 유해 일부는 우범선의 지시로 휘하의 尹錫禹가 땅에 묻어버렸다.증거인멸을 위해서였다. ○20세 되던 해 무과 급제 민비 시해에 적극 가담한 우범선은 어떤 인물인가.대한제국 시절에 군인으로 활동한 것은 분명하나 ‘대한제국관원이력서’나 ‘구한국 관보(官報)’ 등 공식자료에는 그의 출신·경력사항이 나와있지 않다.야사(野史) 몇 군데서 일부 확인될 뿐이다.‘풍운한말비사(風雲韓末秘史)’라는 책에 따르면 우범선이 (별기군의) 참령관(參領官)으로 근무할 당시 생도들이 그를 ‘자네’라고 불러 그가 반발했던 사실로 봐 출신성분은 그리 대단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송촌 池錫永이 尹雄烈에게 그를 추천하면서 ‘무위영(武衛營) 집사(執事) 우범선은 구세군교가(九世軍校家)에 병학(兵學)이 한숙(숙달됨)한 인물’이라고 평한 걸로 봐 무술에 능했음은 분명하다. 실지로 우범선은 무인(武人)집안 출신으로 20세가 되던 해(1876년) 무과에 급제하여 황해도 지방에서 근무하다가 별기군(別技軍)이 창설되자 여기에 참여했다.별기군은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의 건의로 1881년 한국군의 군제(軍制)개혁의 일환으로 창설되었는데 그가 친일로 나선 첫 실마리는 이로부터 시작된다.여기서 그는 친일 개화세력들과 교류하면서 개화정책에 눈을 떠 개화파에 가담하였다.1894년 6월 일본군이 무력으로 경복궁을 침입,민씨 정권을 몰아내자 그는 개화파들의 천거로 군국기무처 의원이 돼 갑오(甲午)개혁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4월 친일정권에 의해 훈련대가 창설되자 그는 제2대대장에 보임됐다. 훈련대는 나중에 일제의 친일세력 확장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이무렵 민비는 러시아와 손잡고 친일세력 축출을 기도하고 있어 친일세력으로선 궁지에 몰린 입장이었다.일본은 국면전환을 위해 공사를 이노우에(井上馨)에서 육군중장 출신의 미우라로 교체하였다.미우라는 부임직후 ‘여우사냥’ 운운하면서 민비시해계획을 세우고는 당시 한국에서 암약하던 일본인 낭인(浪人)패거리들을 끌어 모았다.낭인 가운데는 친일신문 ‘한성신보(漢城新報)’ 사장 아다치 겐조(安達謙藏)와 시바 시로우(柴四郞)등 일본의 대표적 명문대 출신의 지성인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이들 중 더러는 나중에 각료·중의원 의원 등을 지냈다). 미우라는 이들 외에 조선인 협력자를 물색하던중 평소 친일성향을 가진데다 당시 민씨정권의 훈련대 해산계획에 불만을 품고있던 우범선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였다.우범선은 미우라에게 “조선의 정치개선은 당우(黨羽)를 일소하지 않으면 어렵다”며 민비시해를 통한 친일정권 수립을 역설하였다.이어 훈련대 제1대대장 李斗璜(중추원 부찬의·전북 도장관 역임),제3대대장 李軫鎬(총독부 학무국장·중추원고문 역임) 등이 속속 포섭되자 미우라는 당초 계획날짜를 이틀 앞당겨 거사(?)를 결행하였다.결국 ‘을미사변’은 일본 공사관의 주도 아래 일본인 낭인무리와 조선인 친일군인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인 셈이다. ○일 여인과 결혼뒤 거처 옮겨 사건 후 우범선은 이두황 등과 함께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도쿄에서 망명생활 도중 사카이(酒井ナカ)라는 일본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한 그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1903년 구레시(吳市)로 거처를 옮겼다가 그 해말 자객 高永根에게 암살당하였다.그의 비명횡사는 일본으로 도망갈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현재 그의 묘는 살해된 구레시와 도쿄 두 군데 있다.도쿄 청산(靑山)묘지에 있는 묘는 일본인 후원자가 유골을 분골(分骨)하여 그의 사후 1년 뒤인 1904년에 만든 것이다. 우범선에게는 우장춘 이외에 유복자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차남은 명문 제1고등학교·동경(東京)제국대학 법과를 졸업,일본 유수의 회사에서 중역으로 근무하다가 지금은 은퇴하였다.그는 모계(母系) 집안에 입적돼 호적상으로는 완전한 일본인이 되었다.반면 우 박사는 6·25 와중에 귀국,일생을 조국의 농업발달을 위해 연구에 전념했다.우 박사로서는 그 길이 아버지의 과오를속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 미야자와 사임 의사 철회

    【도쿄 교도 연합】 내년도 예산안 편성을 끝으로 사임할 것이라고 밝혔던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일본 대장상은 2일 사임의사를 공식 철회했다.미야자와 대장상은 이날 중의원 재정개혁 특별위원회에 출석,“나는 총리에게 (사임)의사를 밝히지 않았다”면서 “앞으로 대장상으로서의 직무를 계속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총리 출신인 그는 지난 주 자민당내 ‘미야자와파’ 회장직을 다음달 가토고이치(加藤紘一) 전 간사장에게 물려준 뒤 연말쯤 사임할 것이라고 밝혔었다.
  • 日 자민당 대대적 세대교체 예고

    ◎소장파의원 목청 커져 파벌들 후계구도 서둘러/미야자와파­가토 前 관방 새달 회장직 인수/와타나베파­야마사키 등 32명 모레 분가/미쓰즈카파­모리간사장이 총수승계 넘봐 【도쿄 黃性淇 특파원】 일본 집권 자민당내 제 2파벌인 미야자와파 회장인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대장상이 물러난다. 그는 26일 가토 고이치(加藤紘一·중의원·9선) 전 관방장관에게 연말쯤 회장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뜻을 밝혔다. 임시국회가 끝나는 내달 14일 이후 대장상직에서도 사퇴할 뜻을 비췄다. 미야자와 대장상이 후계구도를 서둘러 밝힌 것은 가토 의원을 따르는 젊은 의원들의 성화 때문. 당내 젊은 층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세대교체 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는 것이다 내년 9월 자민당 총재선거를 겨냥한 ‘새 깃발 꽂기’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당내 파벌 간의 지각 변동도 예상된다. 의석 86석인 미야자와파를 인수받는 가토 의원은 ‘가토파’로 깃발을 바꿔달고 내년 총재선거에 출마할 예정. 파벌내 최대 정적인 고노 요헤이(河野洋平)가 가토 후계구도에 반발하고 있다. 그도 20명 안팎의 의원을 끌고 독립할 가능성이 높다. ‘근대미래연구회’의 수장인 와타나베(渡邊)파의 야마사키 타쿠(山崎拓·중의원·9선)의원도 30일 야마사키파를 발족한다. 62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와타나베파에서 야마사키파로 분가할 의원은 4∼5선 안팎의 소장파 32명가량. 야마사키 의원은 젊은 층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원로들의 반발로 회장진출이 번번히 무산되자 당권 도전을 위해 분가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와타나베파는 명예회장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파와 야마사키파로 분리된다. 의석 62석의 미쓰츠카(三塚)파도 모리 요시로(森喜郞·중의원·10선) 간사장이 회장 승계를 넘보고 뛰고 있다. 그러나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는 92년 다케시타(竹下)파를 물려받았다. 의석 91석으로 자민당내 최대인 오부치파 회장이 된 뒤 비교적 안정적으로 파벌을 이끌고 있다.
  • 金大中 대통령 訪中­이모저모

    ◎김 대통령 부부 ‘도라지’ 열창/강 주석도 중 민요 ‘夕歌’ 불러/격의없는 대화… 회담 1시간 길어져/이 여사,여성교류 확대 기대 【베이징 梁承賢 특파원】 중국 국빈방문 이틀째인 金大中 대통령은 12일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갖는 등 분주한 일정을 보냈다. ▷정상회담◁ ●金대통령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이날 오전 인민대회당동대청에서 가진 정상회담은 단독회담과 공식수행원이 모두 참석하는 확대회담으로 나눠 진행됐다. 정상회담은 당초 45분으로 예정됐으나 양국 정상이 흉금을 털어놓고 개인신상에 관한 말까지 주고 받는 바람에 무려 1시간 가까이 늦어지는 ‘마라톤회담’으로 진행됐다. 장주석은 회담에 들어가기 앞서 “金대통령은 연세가 나와 동갑내기인데도 훨씬 젊어보인다”고 金대통령의 건강미를 찬상했다고 林東源 외교안보수석이 전했다.이를 받아 金대통령은 “나는 감옥생활이 6년이고 연금 및 해외망명이 10여년이어서 인생의 단절이 있었다고 볼 때 그 기간만큼은 늙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대답,장주석의 웃음을 유도.장주석은 “金대통령은 재야시절 세차례 중국을 방문하는 등 중국사람들의 오랜 벗”이라고 친근감을 표시. ○강 주석 안내 의장대 사열 ▷공식 환영식◁ ●이에 앞서 金대통령은 부인 李姬鎬 여사와 함께 인민대회당 북대청에서 열린 공식환영식에 참석,장쩌민 국가주석의 영접을 받았다. 金대통령이 인민대회당에 도착하자 예포 21발이 발사됐으며 장주석은 현관까지 나와 金대통령을 반가운 표정으로 맞았다.金대통령은 장주석의 안내로 사열대에 올라 의장대의 경례를 받으며 애국가와 중국국가 연주를 들었다. 국가연주가 끝난뒤 金대통령은 중국 의장대장의 우렁찬 사열준비 보고를 듣고 장주석과 함께 붉은 카펫을 따라 이동해 의장대를 사열하는 등 환영식은 약 10분간 진행. ▷친분인사 오찬◁ ●金대통령은 이날 오후 정상회담을 마친뒤 부인 李여사와 함께 숙소인 댜오위타이 18호각으로 중국내 친분인사 13명을 초청,과거 야당시절을 회고하며 오찬을 함께 했다. 金대통령은 인사말에서 “야당시절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걱정하고 도와준 좋은 친구들을 대통령이 돼서 뵙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고 과거의 ‘은혜’에 감사의 뜻을 표시. 이날 오찬에는 우리측에서 徐錫宰 한중의원외교협회장,李榮一 한·중문화협회장,朴晟容 한·중우호협회장이 배석. ○강 주석 제의 받아 이중창 ▷국빈만찬◁ ●金대통령은 부인 李여사와 함께 이날 저녁 인민대회당 서대청에서 열린 장주석 내외가 주최한 국빈만찬에 참석,장주석과 흥에 겨워 서로 노래를 주고받는 등 보기드문 광경이 연출됐다. 만찬도중 金대통령과 장주석은 포도주를 곁들이며 많은 얘기를 나눴고,때로 호쾌하게 웃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고.그러다 한즈핑(韓芝萍)의 노래로 7번째 중국의 민요인 ‘저녁노래(夕歌)’가 연주되자 장주석이 식사를 하다말고 즉석에서 노래를 따라 불렀는데,만찬뒤 종업원들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저녁노래의 마지막 소절은 음이 높아 따라 부르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는 것. 그러자 金대통령은 “여기서 다시 하라”고 청했고,장주석은 즉석에서 노래반주를 요구한뒤 ‘직업가수 수준’에 가깝게 저녁노래를 열창. 이어 장주석은 金대통령에게도 노래를 청하자 부인 李여사와 함께 마이크를 잡고 지휘자에게 “무슨 노래를 할까요”라고 묻고는 지휘자가 청한 도라지를 李여사와 함께 역시 즉석에서 ‘이중창’을 했다. 노래를 끝낸 金대통령은 영어로 작별인사를 한뒤 헤어졌다.金대통령은 “장주석은 훌륭한 분으로 인간적으로도 모든 것을 얘기할 수 있는 관계가 정립됐다”고 평가했다. ▷정상회담 양국 평가◁ ●우리측은 정상회담이 끝난 뒤 중국의 외교적 형식이나 수사를 감안할 때 ‘상당한 성공작’이라고 평가. 金대통령과 장쩌민 주석간 회담도 자세히 뜯어보면 ‘총론’만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정상은 큰 원칙에 합의하고 구체적인 사항은 관계부처나 기관끼리 협의토록 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베이징에서 정상외교 말고 별도의 장관회담이 연쇄적으로 열리고 있는 것도 이같은 외교적 스타일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한·중정상회담이 끝나자 주장자오(朱邦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발표문을 내고 “양국관계와 공동관심사에 대해 심도있는 의견교환을 통해 광범위한 공동인식에 도달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 그는 ‘협력적 동반자관계가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양국관계에 진일보한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한 중요한 조치”라고 해석.그는 그러나 “이것이 동맹관계는 뜻하는 것은 아니다”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대통령 부인 동정◁ ●李여사는 이날 오전 중국의전국 부녀연합회를 방문,펑 페이윈(彭佩云) 주석 등 연합회 간부들과 환담. 李여사는 이 자리에서 “이번 중국방문을 계기로 양국 여성단체와 여성지도자들이 서로 교류를 좀더 활발히 해 우의를 증진하고 공동의 가치를 확대시켜 나가자”고 당부.
  • 日 검찰,정당교부금 유용 중의원 체포/자민당 나카지마 의원

    【도쿄=黃性淇 특파원】 일본 도쿄지검 특수부는 29일 정당교부금을 유용한 뒤 허위보고서를 제출한 나카지마 요지로(中島洋次郞·39) 자민당 중의원을 정당조성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했다. 일본이 95년 정치부패 방지를 위해 기업과 단체의 헌금을 폐지하고 국민의 세금을 재원으로 하는 정당교부금을 배분하기로 한 정당조성법을 도입한 뒤 국회의원이 이 법에 따라 체포되기는 처음이다. 검찰에 따르면 나카가와 의원은 자신이 대표자로 있는 군마현 제3선거구지부 명의로 96∼97년에 걸쳐 2,000만엔의 정당교부금을 받은 뒤 이중 1,000만엔을 유용했으면서도 전액 정당하게 사용한 것처럼 허위 보고서를 제출했다.
  • 金 대통령 “오와비→사죄로 표현 잘된일”/訪日 뒷얘기

    ◎국회 연설때 의원 527명 참석 대성황 이뤄/청와대측 “申鉉碻 전 총리 활동 큰힘 됐다” 3박4일간에 걸친 일본 국빈방문을 마치고 10일 귀국한 金大中대통령이 남긴 뒷얘기는 이번 방일의 성과와 의미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단초이다.그속에서 金대통령의 노력,그리고 일본 정계지도자를 포함,조야(朝野)의 반응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金 대통령 지지대회 방불 ○…金대통령이 이번 방문에서 가장 인상적인 행사로 여기고 있는 것은 지난 9일 도쿄를 떠나기 직전 일본 전직총리 및 주요 정당대표들과 가진 오찬 모임이었다는 전언이다.朴智元 공보수석도 “이 모임은 마치 金대통령의 한·일 파트너십 제안에 대한 일본 여야지도자의 지지대회 처럼 보였다”고 설명했다. 특히 金대통령은 나카소네 야스히로,다케시다 노보루 전총리 등이 서로 발언에 나서 공동선언과 행동계획을 높이 평가하자 매우 흡족해 했다는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金대통령은 10일 귀국전 수행원들과의 조찬자리에서 외교통상부가 일본어의 ‘오와비’를 우리말로 ‘사죄’로표현토록 한 노력을 두고 “아주 잘된 일”이라고 평가했다고 朴공보수석이 전했다.이어 “일본이 앞으로 잘해보자는 의지를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해석,실리에 비중을 둔 외교스타일을 가늠케 했다. ○…金대통령의 지난 8일 국회 연설에는 중의원 500명,참의원 251명 등 전체 751명 가운데 527명이 참석해 일부는 서있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이는 레이건 전미국대통령과 함께 일본 국회사상 가장 많은 의원들이 참석한 기록이다. 이날 방청석에 오부치총리 부인을 비롯해 전직총리 부인 5명과 여야의원 부인들과 대학생들이 다수 참석,눈길을 끌었다. ○…申鉉碻 전 총리는 이번 방일기간동안 金대통령이 일본 정·재계 인사들과 만나는 자리나 재일동포 간담회에 모두 참석했다. 청와대의 고위관계자도 “한·일관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申전총리의 활동이 金대통령의 방일성과에 큰 힘이 됐다”고 평가할 정도다.申전총리는 특히 “그동안 많은 일을 해봤지만 일본 국민이 이처럼 한국대통령을 진심으로 환영한 일이 없었다”고 격찬했다. 한편 金대통령은 일본어를 할 수 있음에도 공식통역을 통해 대화를 나눴으나 마지막 날이었던 10일 오전 일본 문화계 인사와 간담회에서는 출발시간이 촉박,통역없이 직접 일본어로 연설했다고. ○北 발사체 평가 엇갈려 ○…이번 정상회담 과정에서 한·일 양국은 북한이 지난 8월31일 쏘아올린 발사체에 대해 평가가 엇갈렸다. 일본측은 미사일 발사로 표현할 것을 주장했으나 한국측은 인공위성을 발사했으나 궤도진입에는 실패했다는 공식 입장을 고수했다고.金대통령은 발사체 명칭에 외교조정이 필요없는 8일 일본 국회연설에서 ‘인공위성 발사’라고 언급했다.
  • 눈길 끈 친분인사 다과회/과거 인연 知人들 ‘감회어린 만남’

    ◎납치사건 구명·민주화 지원 70여명 초청/金九·張俊河 선생 의문사 규명 의지 밝혀 【도쿄=梁承賢 특파원】 金大中 대통령의 방일 행사 가운데 눈길을 끌었던 것은 도쿄를 떠나기 앞서 9일 오전 일본내 친분인사들과의 만남이었다. 지난 70년대 유신 당시 金대통령이 일본에 체류하고 있을 때 음양으로 도왔던 인사들이다. 초청된 지인(知人)은 70여명. 일본 중·참의원과 교수,언론인,목사 등으로 金대통령의 일본 인맥으로 통한다. ‘DJ 도쿄납치사건’,구명활동,민주화 지원 운동으로 인연을 맺어왔다. 이 가운데 덴 히데오(田英夫) 참의원은 납치사건의 진상규명위원장,사사키 히데노리(佐木秀典) 중의원은 실무책임자로 활동했던 인사들이다. 재일동포인 趙活俊씨는 납치사건 당시 金대통령의 비서. 초등학교 친구 金鍾忠씨는 金대통령이 일본 망명 때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했다. AP통신 기자인 洪健杓씨는 납치사건의 진상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렸다. 지난 95년 金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납치사건기획물을 제작했던 호타 긴코(堀田謹吾) NHK프로듀서와 월간지 세카이(世界)를 발행했던 고(故) 야스에 료스케(安江良江) 사장 미망인과 오카모토 아쓰시(岡本厚) 편집장도 보였다. 또 도이(土井) 사민당당수를 비롯,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자민당총재,차기총리감으로 꼽히는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중의원 등 金대통령의 일본 정계인맥도 눈에 띄었다. 金대통령이 야당 지도자였던 시절,감시의 눈을 피해 꾸준히 지원한 사람들도 적지않다. 이를 감안한 듯 金대통령은 연설 전 먼저 사회자용 마이크에 서서 깍듯한 예우를 갖췄다. 참석자들을 ‘친구’라고 불렀다. 특히 金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정신대문제 해결을 강조하는 한편 국내문제에도 언급,“金九 선생,張俊河 선생 등 국내에서 의문사한 사건의 진상도 가려져야 한다”고 못박았다. 이에 무사코시 긴히테(武者小路公秀) 훼리스여자대 교수는 환영사에서 “여기 모인 우리는 일본정부가 피해가고 金대통령이 관용으로 넘어가려는 문제에 대해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金대통령의 도쿄 납치사건 진상규명 운동을 계속할 뜻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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