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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청시비 국정원 견해 요약

    국가정보원에 대한 국정감사 과정에서 일부 정치인이 당원(국정원)에서 하지 않은 도청을 빙자하여 보안시설을 공개하라고 강요했다.당원의 조직과 인원 등 고도의 국가기밀을 누설,국가안보에 심대한 위해를 가하고 있다. 감청과 통신정보 자료 요청 등 통신정보 수집은 국가안전을 보장하고 국제범죄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정보기관의 고유기능이다. 통신정보 수집은 과거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계속돼왔으며 현재 국정원의 감청장비·시설은 과거 정권에서 사용했던 것을 그대로 인수한 것이다.인원은오히려 줄었는데도 마치 현 정부 들어 조직·시설·인원을 신설 또는 확충하여 불법 도청을 행하고 있는 양 호도하는 것은 개탄스럽다. 국정원은 올 상반기 255건의 합법적 감청활동을 통해 간첩 6명과 정보사범16명 등 총 22명을 검거하는 등 국가안보와 국민보호에 업적을 남겼다.99건의 마약 밀매조직,400억원 상당의 마약을 압수했다. 합법적 통신정보 수집은 미국 정보위원회에서도 정보기관의 활동목표,출처,활동기법에 대해 묻지 않는 게 관행이다.불법 감청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 은밀히 행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국민의 정부하에서는 이를 일체 중단했다.
  • [문명자 회고록] 비화3共의 실세들(8) 귀국 기내에서

    69년 8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정희-닉슨 한미정상회담이 끝난 후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동행 제의를 받아들여 그 일행과 함께 한국에 왔다.출발하는 날 아침 박정희는 인사하러 오는 사람들 때문에 아침 먹을 시간도 없는 것 같았다.전세기가 뜨는 미 공군기지 캐슬 에어 베이스로 가기 위해 각료들과 수행기자들이 모두 버스 한 대에 올라탔다.나는 기자들과 함께 앉았는데 앞쪽에 있던 김동조 주미대사가 내 옆으로 와 앉으면서 “우리 얘기 좀 합시다”하는 것이었다.평소 그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나는 일부러 비꼬아 말했다. “아니 저 앞에 부인도 앉아 계신데 왜 이러세요?” 그는 내가 대통령 전세기에 함께 타고 서울로 간다는 것을 알고 대통령에게 자신에 대한 얘기를 좀 잘 해달라고 부탁하러 온 참이었다.나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무슨 얘긴데요?” “대통령께서 만일 이 실장(이후락)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 물으시면 나는절대로 이 실장 측근이 아니라는 것만 전달해 주시오” 나는 내심 ‘아니 이 사람이?’ 싶었다.김동조는 이후락의 사람이었다.이후락 맏아들의 결혼식을 자신의 대사관저에서 치러주었다.그런 사람이 자신과이후락이 관계가 없다고 말해 달라니‘이제 이후락의 권세가 끝난 모양이다’싶었다. “이번에 HR(이후락)이 목 달아납니까?” 그는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없이 자기 부탁만 되풀이했다(실제로 3선개헌후이후락과 김형욱은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각각 물러났다).나는“김 대사께 들은 이야기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고 말하자 그는 “아이고,그러면 안되고…”하며 당황해했다. 김동조는 원래 일제때 일본 규슈(九州)제국대학을 나와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일제때 관리를 지내기도 했다. 일본제국주의에서 이승만에게로,이승만에서 박정희에게로,거기서 다시 이후락에게로 이어진 김동조의 ‘줄서기’는 또다시 누구에게로 계속될지.제자리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약속을 지키마”하고 중얼거렸다. 전세기에 올라 나는 다른 기자들과 함께 비행기 꼬리부분에 있는 수행기자실에 앉아 있는데 육 여사의 통역관 겸 비서 나은실이 찾으러 왔다. “각하께서 문 기자님을 접견실에 앉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박정희 부부와 몇 시간동안 마주보고 앉아 가게 되었다.얼마뒤 식사가 나왔다.포크,나이프를 갖다놓는데 보니 물론 도금을 한 것이겠지만온통 황금색으로 번쩍번쩍 한데 대통령 휘장이 박혀 있었다.내가 말했다.“이거 하나 째빌까요(슬쩍 집어넣는다는 경상도 사투리)? 이런 걸로 밥먹기는제 일생에 처음인데…” 육 여사가 웃으며 말했다. “다 세어 놓았을 거예요” 이번에는 메뉴판을 가지고 오는데 보니 그것도 대통령 휘장을 금색으로 박아 멋지게 만든 것이었다. “그럼 여행기념으로 이거 하나 주십시오”.그러자 박정희는 메뉴판에 ‘문명자여사를 위하여, 박정희’라고 쓰더니 나에게주었다.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오빠와 박정희가 대구사범 동기동창이었다. 박정희도 오빠를 기억하고 있었다.세상은 이렇게 좁은 것이었다.이야기 중에 김동조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나는 “세상에 별 웃기는 일도 많습니다”하고는 버스안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전했다.그말을 들은육 여사는 한숨섞인 소리로 “아휴”했다. 식사를 마치고 박정희가 담배 한 대를 피워 무는데 역시 신탄진이었다.칠이 벗겨진 지포 라이터를 쓰고 있었다.미국에서 지포 라이터는 주로 GI(미군병사나 하사관)들이나 쓰는 것이었다.그래서 물었다. “왜 하필 사병들이나 쓰는 지포라이터를 쓰십니까?” “옛날에 미국놈에게 선물 받은 것인데 바람이 불어도 불도 안꺼지고 참 좋아요” 박정희는 꼭 ‘미국놈’이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그러다가 박정희가 갑자기 물었다. “문 기자는 3선 개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구나 싶었다.나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안됩니다.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절대로 안됩니다.이승만 박사를 보십시오” 그러자 육 여사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제 생각도 그래요” 박정희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창쪽으로 돌리더니 담배를 피워물고 연기를길게 내뿜었다.그리고 다시 말했다.“그러니까 문 기자는 한국실정을 모른다는 말이요.이번에 가서 한국실정을 좀 잘 둘러보시오” “한국실정이 어떻든 저는 3선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샌프란시스코-서울 간을 나는 14시간의 비행동안 박정희는 비서실장 이후락을 단 한번 불러 물었다. “이 실장,이번 정상회담 성과에 대해 어떻게들 보고 있소?” 나는 이후락이 박정희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나 유심히 보았다.더없이 공손한 태도로,그러나 급한 성질은 어쩔 수가 없었던지 이후락은 말을 더듬으면서 듣기좋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가가각하,이번 한미정상회담은 모두들 대성공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대성공이라니.박정희는 주한미군 철수정책을 변경시키러 닉슨을 만나러 간다고 했지만 닉슨은 전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나는 하마터면 이후락에게 “도대체 누가 그렇게 평가합디까?”하고 소리칠 뻔했다.그 순간 박정희를 힐끗 쳐다보니 그 역시 이후락의 보고가 듣기좋은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
  • [문명자 회고록] 비화 3공의 실세들 (6)반대자들의 변신

    5·16 직후 워싱턴에 있던 한국학생·지식인·예비역 장성 가운데 5·16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백악관앞에서 연일 ‘5·16 반대시위’를 벌였다.이는 미국정부가 5·16을 인정하지 않도록 압력을 넣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일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5·16후 ‘한국인 정치망명 1호’를 기록한 내 남편 최동현(崔潼鉉)이었다. 5·16 반대시위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로는 당시 주미대사였던 장리욱(張利郁·작고)박사,주미대사관 참사관 신병현(申秉鉉)전 부총리,최경록(崔慶祿)·강문봉(姜文奉·작고)·김웅수(金雄洙)장군과 국회의원 양일동(梁一東·작고)씨 등이었다.강영훈(姜英勳)전 국무총리는 5·16직후 시골에 있어시위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워싱턴으로 온 뒤부터는 이 모임에 항상 참여했다. 5·16 당시 강씨는 육사 교장이었는데 쿠데타세력이 요구한 육사 생도들의5·16지지 시가행진을 거부했다.강씨와 처남 매부간인 김웅수 장군(전6군단장),장면(張勉) 정권에서 육참총장을 지낸 최경록씨도 5·16을 반대했다.당시 2군사령관이던 최씨는 자기밑에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朴正熙)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하극상 사태를 당한 셈이었다.최씨는 조선일보 등에 “군은 절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글을 발표하는 등 5·16을 반대했다.이 세사람은 5·16이 기정사실화된 후 미국측 배려로 미 국방부 장학생으로 미국에 왔다. 백악관앞 시위에는 워싱턴 조지타운대학에 재학중이던 한국유학생도 많이참여했다.당시 열심이던 학생으로는 오세응(吳世應·전 국회부의장)씨와 한광년이 기억에 남는다.그때 오씨는 워싱턴지역 한국학생회 회장이자 ‘한국인 택시운전사 1호’였다.한광년은 초지일관하지 못하고 70년대 들어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넘어가고 말았다. 5·16 직후 박정희는 민주당 정권이 임명한 주미 대사관 공관원들을 모두해임시켜버리고 그 자리를 온통 자신의 수족들로 채웠다.그가 특히 신경을썼던 주미대사 자리에는 당시 하버드대학 청강생으로 있던 정일권(丁一權)을 ‘미국통’이라고 해서 앉혔다. 정일권이 주미대사로 앉게 되자 백악관앞 5·16 반대시위 참여자 중 여러사람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남편 최동현부터 정일권의 하버드시절 그의 영어가정교사를 했던 사람이었다.영어선생과 학생이 데모대장과 진압대장으로만난 셈이었다.또 강문봉 장군은 정일권과 같은 함경도출신으로 현역때부터형님,동생 해온 사이였다.그런 그가 백악관앞에서 반(反) 5·16 시위를 하니 정일권이 닦달할만도 하였다.그때마다 그는 “골프치러 가려고 운동화 신고 나서는데 최경록이가 와 같이 가자고 해서 할 수 없이 따라갔어요”하는 식의 변명으로 모면하곤 했다. 한편 백악관 앞에서 5·16 반대시위를 벌인 사람들의 그후 행적을 살펴보면 여러가지 생각되는 바가 많다.박정희는 이들을 한 사람씩 회유해 한국으로불러들였다.민주당정권때 주미대사관 경제담당 참사관으로 있던 신병현씨는5·16이 나자 이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백악관앞 시위에는 그의 부인까지도 참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이후 미국에서 세계은행 이사로 있던 신씨는 그의 후배 김정렴(金正濂)이 박정희의 비서실장이 된 후 회유공작에 넘어가 귀국,청와대 경제특별보좌관을 거쳐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최경록장군도 “선배님,그러실 것 없이 한국에 와서 손잡고 일합시다”하는 박정희의 간청에 결국 귀국해 주영대사,교통부장관 등을 지냈다. ‘백악관앞 시위동지’들 중 가장 부끄럽게 처신한 사람은 강영훈이라 하겠다.강영훈도 초기에는 깨끗하고 꿋꿋하게 살았다.그의 부인은 미장원에서 일했는데 독한 파마액때문에 손가락이 모두 헐 지경이었다.그런 생활고 때문이었던지 70년대 들어 강씨는 결국 중앙정보부의 돈으로 ‘한국문제연구소’라는 것을 설립,미국 언론계·학계에 친박정희세력을 심는 역할을 담당했다. 백악관 앞 시위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5·16을 반대한다고 떠들던 사람들의 행적도 기억해둘 만하다.장면 정권하에서 민주당 원내총무를 지낸 이석기(李錫基·작고)씨와 나중에 야당 당수를 지낸 이철승(李哲承)씨가 그들이다. 이석기는 주미대사관 국정감사를 위해 워싱턴에 왔다가 5·16소식을 듣고는장리욱 대사 방에 달려와서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대사님,미군을 동원시켜야 합니다”하면서 열을 올렸다.그런데 5·16이 기정사실화되고 미 CIA부장 매쿤의 초청으로 당시 김종필(金鍾泌·현 국무총리) 중앙정보부장이처음 미국에 왔을 때의 일이다. 주미 대사관 중앙정보부 공사 김동환의 집에서 김종필 부장 환영파티가 열려 다른 특파원들과 함께 갔더니 뜻밖에도 이석기와 이철승씨의 모습이 보였다.나는 이석기에게 대뜸 물었다.“이의원,와이셔츠 걷어붙이고 미군 동원시키라던 분이 웬일이세요? 번지수를 잘못 알고 오신 것 아닙니까?” 이석기는 당황한 표정으로 변명했다.“김 부장하고 나는 한 고향 출신이라 옛날부터잘 아는 사이입니다.게다가 김 부장의 춘부장도 제가 잘 알고,김 부장의 형님도 내가 은행에 취직시킨 처지라 먼길 오셨는데 몰라라 할 수도 없고….” 뒷날 김종필이 정계에 진출할때 이석기는 자신의 지역구인 부여를 주고 자신은 서울로 옮겨갔다.그 점에선 이철승도 마찬가지다.그토록 열렬히 5·16을 반대한다던 그가 왜 그자리에 왔었겠는가.정리 정운현기자 jwh59@kdaily. com
  • [문명자 회고록] 비화 3공의 실세들(3)성판

    5·16직후 최고회의 공보실장을 거쳐 63년부터 대통령 비서실장직에 있던이후락(李厚洛)을 나는 공식석상에서 몇차례 만난 적이 있다.그런데 이후락에 대해 나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사람은 정일권 후임으로 63년부터 주미대사로 일했던 김정렬(金貞烈·전총리)이었다.그는 은퇴후 서울에서만났을 때 이런 말까지 했다. “문 기자,이후락이 같이 교활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다시 없을 거요.이후락과 김형욱이란 악당 손에 박 정권은 결국 몰락하고 말거야.3선개헌때 우리 공화당 의원들이 그 두사람 손에 어떻게 끌려갔는지 아시오? 깜깜한 어둠속에 앞 사람 허리띠를 붙잡고 소경처럼 질질 끌려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끌려간 곳이 제3별관(현 대한매일 주차장 자리)이야.가보니 촛불 몇개 켜놓고 개헌안을 통과시키는데 이효상 국회의장이 시간을 끈다고 장경순(張坰淳·당시 국회부의장)이가 이 의장 손에서 의사봉을 확 뺏더니 “왜 이렇게지체해요? 이건 이렇게 때리는 겁니다”하면서 땅땅 때리는데,개헌안 통과시키는데 1분도 안 걸렸어요.모두가 화적단같은 사람들이야.문 기자,내가 죽은 후에 언젠가 이것만은 역사에 밝혀주시오” “대사님,그러게 5·16 나고 나서 공화당 사전조직 의혹이다 뭐다 해서 모두들 들고 일어나 공화당 해체하라고까지 하는 판국에 무엇 때문에 공화당에 참여하셨습니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요.5·16이 났을 때 내무부장관(4.19 당시 법무부장관)으로 있던 홍진기(洪璡基·전 중앙일보 회장·작고)가 발포책임자의한 사람으로 잡혀들어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었거든.그런데 홍진기 하고 나하고는 일제 때부터 절친한 사이로 자유당때 각료도 같이 했고 해서 인간적으로 몰라라 할 수 없는 관계였어요.그런 판에 하루는 박 의장(박정희)이 나를 부르더니 ‘공화당 의장을 좀 맡으라’고 하더구만.그래서 나도 ‘부탁이 하나 있다.공화당에 갈테니 홍진기 좀 풀어달라’고 했지.나는 결국홍진기 살리려고 공화당에 간거야” 김정렬은 이후락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이후락이는말이오, 국군 창건 당시에 대위로 시작한 사람이오.그보다 나이도위고 계급도 위였던 박정희가 소위로 시작했는데 말이오.해방직후 귀국한 일본군 장교 출신들은 모두들 군사영어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거기를 수료하면 일본군 시절의 계급을 참작해서 국군 장교로 임관시켰거든.그런데 이후락이는 끝까지 자기가 일본군 대위였다고 우긴거야.하도 우기니까 미군측에서도 사실을 뻔히 알면서 대위로 임관시켰지.사실상 그때부터 이후락이는 미군측과 거래가 있었겠지만…” 공화당 정책위원장 박준규(朴浚圭·현 국회의장)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5·16후 감옥에 잡혀 들어갔을 때 이후락이가 내 옆방에 있었는데 이 사람이 얼마나 약던지 삽살개처럼 굴더니 먼저 빠져 나가더구만” 이때 이후락이가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CIA의 뒷받침 때문이었다.민주당 정권에서 장면(張勉)의 비서를 지낸 선우종원(鮮于宗源·변호사)은 그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당 정권때 이후락이가 중앙정보부의 전신이라 할 ‘정보조사국’을만들었다.당초 정보조사국 책임자로 이후락이가 추천됐을 때 여러 사람이 안된다고 했는데 결국 이후락이가 맡게 된 것을 보니 CIA 한국지부에서 그를민 것 같았다” 사실 이후락은 5·16 이후 CIA가 박정희 주변에 깊숙이 박아놓은 첩자였다고 할 수 있다.그는 최고회의 공보실장 시절부터 최고회의 정보를 미군측에보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미국으로서는 창군 초기부터 내내 미국 정보기관의 끄나풀이었던 이후락을 좌익전력을 가진 박정희 옆에 붙여 놓았으니까 박정희에 대해 자신만만할 수 있었다.그렇다고 박정희가 일방적으로 감시만 당했던 것은 아니었다.박정희는 박정희대로 이후락 같은 미국의 끄나풀을 자기 곁에 둠으로써 오히려 그를 자신이 미국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방편으로 써먹었던 것이다. 63년 이후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면서 이후락의 이른바 ‘떡고물’ 정치가본격화됐다.그것은 비단 국내에서만이 아니었다.이후락은 자신의 아들·딸·사위 등을 모두 미국에 보내놓고 미국에서조차 축재에 열을 올렸다.사위등은LA 현지에 은행을 설립해 주주로 참여했고 교포방송인 LA방송국을 설립하기도 했다.이같은 재력을 기반으로 그의 사위는 LA한인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는 또 LA의 부자동네인 윌셔 브루버드에 당시 돈으로 3,000만 달러를 주고 빌딩을 사들여 이것을 한국교포들에게 세를 놓았다.당시 교포들 사이에“이 빌딩은 실은 이후락 것이다”하는 소문이 나 현지의 민주화운동 그룹들이 “이후락의 부정부패와 해외 재산도피의 산 증거인 문제의 건물을 불태워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훗날 코리아게이트 조사과정에서 FBI가 조사에 들어갔을 때 그는 빌딩을 매각한 뒤인 것으로 확인되었다.70년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이후락은 그 해 12월 정보 무경험자인 사위를 중정 국제담당 2국장으로 앉히고 둘째아들도 자신의 비서로 임명해 72년 남북회담 당시 모두 북한까지 자신을 수행토록 했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알림] 문명자회고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연재물 제목을 문명자회고록 발췌 ‘비화,3공의 실세들’로 바꿉니다.이는 본지가 문씨의 회고록 중 일부를뽑아 정리,게재하기 때문입니다.
  • [문명자 회고록 내가 본 朴正熙와 金大中](1)

    대한매일은 미국 US 아시안뉴스 서비스 주필인 문명자씨의 미공개 회고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을 단독입수,내용 가운데 일부를 발췌하여 연재합니다.문씨는 지난 73년 ‘김대중납치사건’을 국내에 보도한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껴 미국에 정치망명을 선언한 이후 30여 년간 미국서 활동해온 현역언론인입니다.그동안 그는 국내에서 접할 수 없는 한국관련 고급정보를 목격하고 기록해 왔으며 이번 회고록은 이같은 내용들을 토대로 한 것 입니다.회고록에는 한국현대사의 ‘미스터리’는 물론 한·미관계의 이면사를 처음 공개한 것도 상당수 포함돼있어 ‘역사적 기록’으로서도 큰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73년 4월 15일 대만대학에 박사학위를 받으러 간다며 한국을 빠져나온 전중앙정보부장 김형욱(金炯旭)이 며칠후 미국에 나타났다.그것은 영락없는 도망길이었다. 5·16 쿠데타의 주동인물중 하나였던 그는 그후 출세가도를 달렸다.63년 5월 제4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한 김형욱은 박정희를 위해 별명처럼 ‘곰’같은 충성심을 발휘하는 한편 자기자신을 위해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치부를 했다.이같은 김형욱이 미국으로 도망온 이유는 자명했다.수십년간 충성해온 수하들을 하루 아침에 내치고 잡아넣는 박정희의 냉혹성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미국에서 김형욱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71년 공화당 전국구 의원 신분으로 남미를 방문하고 뉴욕에 들렀을 때였다.그때 나는 MBC 워싱턴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유엔 취재차 뉴욕에 있다가 당시 컬럼비아대학 연수생으로 와 있던 동아일보 기자 이웅희(李雄熙·현 무소속 국회의원)와 함께 김형욱과 뉴욕의 한 한국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김형욱이 미국으로 도망온 이후 나는 그와 수 차례 만난 적이 있다.73년 11월 내가 미국에 정치망명을 선언한 후 그는 내게 “문 여사,용감한 결심을존경합니다.우리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입니다”라며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그는 내가 망명을 선언한 후 부쩍 자주 전화를 걸어왔는데 “김대중 납치범 명단을 내가 다 가지고 있는데 때가 되면 가르쳐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77년 1월 김형욱은박 정권의 미국 의회 부정로비사건 조사를 위해 구성된프레이저위원회에 증인으로 채택되어 있는 상태에서 아들과 함께 유럽여행을한 적이 있다. 그는 뉴욕 케네디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여기서 낯뜨거운 사건이 발생했다.김형욱이 달러를 밀반입하다가 세관원에게 걸린 것이다.내가 그 사건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한 유태인 친구의 제보 때문이었다. 세관원은 오리걸음(덕 워킹)으로 걸어 들어오는 동양남자가 뭔가 숨긴 것이틀림없다고 확신,김형욱을 멈춰 세웠다.꼭 아편쟁이같이 생겨 마약밀수를 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헤이,유,스탑”(여보,좀 멈춰요). “미?”(나요?). “예스,유”(예,당신말이오). 더욱 한심한 일은 세관원이 그를 불러 세워 몸수색을 하려 하자 김형욱은 한국식으로 세관원을 협박했다고 한다.“내 몸을 수색해서 아무것도 안나오면너 그냥 두지 않겠다”.“오케이”.세관원은 보안관에게 명령했다. “데려가 발가벗겨”. 보안관이 김형욱을 방으로 데려가 발가벗겼는데 그는 무려 7만5,000달러의돈뭉치를 다리에 붕대로 둘둘 감고 그 위에 여자 타이즈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79년 10월 7일 김형욱이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후 나는 교토통신의 요코가와 워싱턴특파원과 함께 처음으로 뉴저지에 있는 그의 저택을 방문한 일이있다.그의 부인 신영순(申英順·在美)에게 주소를 물어 찾아간 그의 집은 웬만한 미국 부호의 집 못지않게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실종 직전 김형욱은 이른바 ‘회고록’ 출판문제로 박 정권과 막판 거래를하고 있었다.박 정권은 김형욱에게 “회고록을 출간하지 않는 대가로 500만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하고 이미 100만∼150만 달러를 먼저 지불했다고 한다.김형욱은 그 나머지 돈을 받으러 파리에 갔다가 결국 실종되고 만 것이다. 김형욱이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우선 중앙정보부가 파리에 온 김형욱을 납치,살해한 후 센강에 버렸다는 설도 있었고,또 산 채로 짐짝처럼 포장해 KAL기에 실어 서울로 데려갔다는 설도 있다. 그 무렵 우리 사무실에 프랑스어로 된 익명의 편지가 날아들었는데 그 내용은 김형욱이 KAL기 짐칸에실려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의 한 항공사 화물부에 문의를 해보았다.“사람을 짐짝처럼 싸서운송하는 것이 가능합니까?”.“산소가 부족해 호흡이 곤란하고 온도·습도가 낮아 사람이 짐칸에서 파리∼서울간 15시간을 버틴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이래저래 취재는 벽에 부딪쳤고 나는 김형욱의 사인규명을 거의 포기했다. 그런데 80년대초 나는 뜻밖의 루트를 통해 김형욱의 사인에 대한 상당히 정확한 정보에 접하게 되었다.발설자는 정일권(丁一權) 전 국무총리였다.그는유럽을 여행하던 중 파리에서 자신이 신뢰하는 모 인사(본인의 요청으로 신분을 밝힐 수 없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잔인하다 잔인하다 했지만 박정희가 이렇게 잔인할 수 있나.잘못했다고비는 김형욱이를 자동차에 실어 그대로 폐차장에 밀어넣어 버렸다네”그의 말에 따르면, 산 채로 서울로 납치해간 김형욱을 차지철이 경복궁에서청와대로 이어지는 지하벙커를 통해 박정희 앞에 대령했는데 김형욱이 박정희에게 “잘못했습니다.죽여주십시오”하고 빌었다는것이다. 정일권의 말대로라면 김형욱은 폐차장 압착기 아래서 최후를 맞았다는 얘기가 된다.정일권의 입장에서 보면 김형욱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려던 ‘이북파 최측근’이었으니 분개할만도 했을 것이다. 나는 이같은 사실을 정일권 본인을 통해 거듭 확인한 바 있다.지난 86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하얏트호텔에서 정일권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김형욱이가 서울로 잡혀와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으시다는데 사실인가요?”“예,내가 그런 애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그것은 사실입니다”. 정일권은 말년에 암에 걸려 고생하다가 94년 타계했는데 내가 그를 본 것은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 -文明子씨 일문일답 ■회고록을 출판하게 된 동기는. 역사를 위한 기록이다.한국사회는 가치의 혼돈시대를 맞고 있다.이대로 한세기만 지나면 한국사회에는 박정희를 미화하는 기록만 남을 것이다. 오랫동안 미국의 권부를 가까이서 취재하면서 나는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사실들을 많이 보고 들었다.우리 후손들의 역사인식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바람으로 그동안 보고 들은 박정희의 모든 것을 기록했다. ■회고록의 제목은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인데 박정희 전대통령에 관한 부분이 70% 정도를 차지하는 있는 것 같은데…. 61년 5·16쿠데타 때부터 시작해 82년 김대중씨가 사형수에서 사면을 받고워싱턴에 왔을 때까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박정희씨는 이미 관 뚜껑에 못을박은 사람이고 김대중씨는 아직 활동하는 현역 정치인이 아닌가. 김대중씨에대한 기록은 또다른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문 주필의 박정희 전대통령 비판에 대해 일각에서는 주관적이라는 지적이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박정희에 대해서 나는 한 언론인으로서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다.그러나독자들은 나의 책에서 사실만을 보면 된다.1961년 4월이후 현재까지 워싱턴에서 벌어진 한국정치 관련사건들을 사실에 입각해 기록했다.사실에 대한 해석과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문 주필의 회고록에는 특정인들의 실명이 거침없이 거론되고 있는데…내가 실명을 거론한인물들은 한국정치사에서 책임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다.그들은 공직에 취임함으로써 이미 역사의 심판대 위에 스스로 올라선것이다. 나는 그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남겼을 뿐이다.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언론의 익명문화다.육하원칙의 가장 첫번째 요소가 ‘누가’이지 않은가.한국의 언론인들은 혈연·지연·학연의 인간관계 속에 깊이 편입돼 있어 실명을 거론하지 못한다. 퇴직후에도 그 인간관계 속에서 살길을 찾아나가야 하므로 ‘익명의 문화’는 극복되지 않는다.내 경우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사회에서 떨어져 40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거칠 것이 없다. ■그동안 ‘반한인사’ 또는 ‘친북인사’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는데 이에대한 본인의 견해는? 유신정권때인 70년대까지는 ‘반한인사’로 불렸는데 80년대말 남북 고위급회담이 본격화된 후 북한취재에 나서면서 ‘친북인사’로 호칭이 바뀌었다. ‘반한인사’,‘친북인사’란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낸 용어로 전혀 타당하지않다.굳이 말하자면 ‘반박정희 인사’나 ‘반유신인사’라고해야 옳다.‘친북’도 그렇다.남북은 같은 민족이다.서로가 ‘친북’도 하고 ‘친남’도해야 한다.‘친미’나 ‘친일’,‘친중’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94년 김일성 주석 사망후 ‘100일설’부터 ‘3년설’까지 북한붕괴론이 대단했다.내가북한에 가보고 와서 북한은 붕괴하지 않는다고 했더니‘친북인사’라고 했다. 한반도 남북에 사는 사람들은 분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보는 시야도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스스로 외눈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두 눈으로 보는 사람이 편파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정운현기자] -文明子씨는 인가 문명자(文明子·70)씨는 38년째 미국 권부의 상징인 백악관을 출입하고 있는 현역 재미교포 언론인이다.73년 11월 당시 보도금지 사항인 ‘김대중납치사건’을 보도한 후 중앙정보부의 체포위협을 피해 미국에 ‘정치망명’을한 전력으로 그동안 국내에선 그의 활동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80년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의 초청으로 미국 여기자단 단장으로 중국을 방문,덩샤오핑을 인터뷰했으며 90년 남북고위급회담 이후방북취재를 시작한이후 92,94년 두차례에 걸쳐 김일성 주석을 인터뷰했다. 30년 대구 출생인 문씨는 숙명여고 졸업후 연세대 영문학과 1학년 재학중 6·25를 맞아 피란지 부산에서 일본으로 유학,메이지대 경제학부·와세다대국제법 대학원을 졸업했다. 61년 조선일보 워싱턴특파원을 시작으로 동아일보,경향신문,MBC 워싱턴특파원을 역임한 그는 73년 미국에 정치망명한 후 미국인 동료기자들과 함께 US아시안뉴스 서비스(통신사)를 설립,국제정치담당 주필로 일하고 있다. 동양통신 초대 워싱턴특파원을 지낸 남편 최동현(崔潼鉉)씨와 사이에 1남 1녀.그의 미국이름 주리 문(Julie Moon)은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가 지어준 것이다. [정운현기자]
  • [리뷰] MBC ‘이제는 말할수 있다’제2편

    MBC가 19일 밤11시35분 방영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2편 ‘끝나지 않은동백림사건’(김학영 PD)은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지난 67년 동베를린에 머물던 음악가,화가,유학생 등 200여명을 간첩혐의로검거한 동백림사건의 실체를 둘러싼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당사자들의 주장이 현격하게 대립하는데도 이를 오늘의 시각에서 화해시키고 좁힐 수 있는 대안이 제시되지 않은 탓이다. 제작진은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관련자들로부터 “실제로 북한대사관의 경제적 도움을 받았고 그 대가로 난수표를 받아오고 다른 한국인을 소개하는 등의 도움을 줬고 평양에도 다녀왔다”는 증언을 얻어냈다.이는 선거에서 진박정희정권에 의한 자작극이라는 막연한 시각을 교정할 것을 요구한다. 당시 중앙정보부 조사과장을 지낸 이용택씨는 “이들이 당당히 북한을 다녀왔다고 진술하며 한 동포로서 한 행동인데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대들었다”며 기막혀 했다.물론 박정권에 의해 의도적으로 부풀리고 왜곡된 부분도 있다. 민족주의 비교연구회라는 서울대 서클을 연루시킨 것,고 천상병 시인처럼 아무 관련없는 이들을 끌어들여 고문한 것,독일 등의 양해를 구하지 않고 연루자들을 납치해 데려온 것 등은 잘못이 분명하다.그러한 외교적 실수 때문에차관을 빌려온다는 명분하에 관련자들을 전원 석방한 것도 분명하다. 제작진의 어려움은 많았다.우선 사형선고를 받은 두명이 끝내 입을 다문 점,당시의 일에 대해 진술을 시작하다가도 카메라만 돌아가면 입을 다물어버리는 관련자들,47분이라는 제한된 시간이 제작진을 압박해왔다. 균형을 살리면서 사건을 종합적으로 그려내려다 보니 전체적으로 애매모호한 결론이 내려지고 말았다.사전지식이 없는 이들에게는 프로그램 자체가 한없이 어려운 ‘난수표’였을 것이다. 임병선기자 bsnim@
  • [클로즈 업] 67년 동백림사건의 진실

    1967년 7월 부정선거로 민심을 잃은 박정희정권은 교수 유학생 등 200여명을간첩 혐의로 검거한다.‘동백림 사건’이라 이름붙은 그 ‘사건’의 실체가공개된다. MBC는 19일 밤11시30분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2편 ‘끝나지 않은 동백림사건’을 방영한다.제작진은 중앙정보부 수사과장,사건을 촉발한 최초의제보자 임모교수,독일로 돌아간 뒤 국적을 바꾸고 다시는 고국을 찾지 않는광부와 유학생들의 증언을 청취했다. 증언 중에는 “당시 평양에 다녀왔다”는 광부 박성옥씨 것도 포함됐다.그럼에도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조서에는 이 사실이 전혀 적혀 있지 않았다.중정이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보다는 반정부 지식인들을 ‘엮는 데’만 관심을기울였음을 입증한 것이다. 김학준 인천대 총장이 서울구치소 교도관으로부터 들었다는 “동백림 관련자중 들것에 실려다니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충격적인 얘기도 전한다. 천상병 시인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 국가보안법 폐지 논쟁을 다시금 생각해보는기회를 갖는다. 임병선기자 **
  • 외교구락부, 정치 막후무대서 대학강의실로 탈바꿈

    한국정치의 막후 무대였던 ‘외교구락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오는 20일부터 서울 숭의여자대학(학장 黃德浩)이 강의실로 사용한다.지난5월 외교구락부를 구입한 숭의여대는 곧바로 강의실로 바꾸는 공사를 시작해15일자로 끝마쳤다.매입가는 100억원대로 알려졌다. 서울 남산 중턱에 있는 외교구락부는 1,200여평 규모의 2층 건물.지난 49년신익희(申翼熙)씨 등 4명이 공동출자해 문을 열었다. 문을 열 당시 조병옥(趙炳玉)·장택상(張澤相)씨 등은 지정석까지 두었다.그뒤 정계와 학계·문화계 인사들의 사랑방으로 이용됐다. 4·19 이후 허정(許政) 내각수반과 윤보선(尹潽善)전대통령이 단골손님이었다.5·16 후엔 김종필(金鍾泌)총리를 비롯,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김재규(金載圭)전중앙정보부장 등 당대의 실력자들이 이용했다. 75년에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함석헌(咸錫憲)옹 등이 모여 유신 반대성명을 내 민주화의 본거지가 됐다. 80년 ‘서울의 봄’ 때에는 민주세력의 회동 장소였다.84년에는 이곳에서민주화추진협의회가 결성됐다.87년엔 김대통령과 김영삼 전대통령이 후보 단일화 논의를 위해 자주 모였다.하지만 90년대부터 서서히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94년에는 서울 M호텔 주인이 사들여 ‘외교구락부’ 예식장으로 운영하면서 명맥을 유지해 왔다. 조현석기자 hyun68@
  • 李萬燮대행 취임一聲과 정치역정

    이만섭(李萬燮) 신임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은 12일 “십자가를 지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이대행은 “실타래처럼 얽힌 정국을 어떻게 풀어갈지 가슴이답답하다”고 털어놨다.그러면서도 “겸허한 마음으로 국민을 받드는,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와는 흉금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인간적으로 가까운 사이”라고 말했다.‘소원한 관계’라는 일부 보도를 간접 부인한셈이다. 이대행은 바른 말 하는 정치인으로 정평이 나있다.과거 공화당 시절부터의트레이드 마크다.이대행은 평소 “바른 말을 하는 정치인이 필요하다.그게국민과 당,대통령을 위하는 길이다”라고 말해왔다.상임고문 시절에도 그랬다.옷사건으로 김태정(金泰政) 전 법무장관의 경질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을 때 국민회의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하지만 이대행은 김장관의 사퇴를주장하는 ‘총대’를 멨다.지난 5월31일 확대 간부회의에서의 일이다. 그의 정계 입문은 고(故)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의 인연에서 출발했다.그는 5·16후 최고회의 의장인 박 전대통령을 만났다.모 신문사 정치부기자 시절이었다.그는 박 전대통령의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이라는 신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회고했다.63년 박의장을 찾아가 ‘옆에서 돕겠다’고 말했더니박의장이 매우 좋아했다고 전했다. 그해 박 전대통령의 대선 유세에 합류했다.대선 직후 만 31세에 전국구로금배지를 달았다.실제로 박 전대통령의 총애를 받았지만 69년 3선개헌을 하려고 할 때 반대하면서 박 전대통령과 틀어졌다.그해 공화당 의원총회에서권력형 부정부패의 핵심인 이후락(李厚洛)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과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의 해임을 요구하기도 했다. 정치인으로서의 36년간은 비교적 순탄했다.7선에다 한국국민당 총재,국민신당 총재,신한국당 대표서리 등의 이력이 말해준다.남에게 알리지 않고 자녀들의 결혼을 시킬 정도로 ‘청렴’ 이미지도 있다.하지만 정치생활의 대부분을 여당에만 머물렀다는 비판도 없지않다.한윤복(韓潤福·67) 여사와의 사이에 1남 2녀. ▲대구·67세▲연세대 정외과▲6·7·10·11·12·14·15대의원(7선)▲한국국민당 총재▲국회의장▲신한국당 대표서리▲국민신당 총재곽태헌기자 tiger@
  • JP와 李萬燮대행의 정치인연

    “알려진 것처럼 나쁘지 않다”12일 김종필(金鍾泌)총리가 이만섭(李萬燮)국민회의 신임총재권한대행을 향해 보인 반응이다.결코 짧지 않은 악연(惡緣)을 일부 인정하는 언급이다. 김총리와 이대행은 옛 공화당 동지였다.지난 63년 6대 국회 때 나란히 첫등원했다.김총리는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냈다.이대행은 무계파 소신을 폈다.정풍운동 과정에서 반대노선을 걸었다.그러나 이대행이 간접적으로 김총리를 도운 적이 있다.이대행은 지난 69년 3선개헌 때 이후락(李厚洛)청와대비서실장과 김형욱(金炯旭)중앙정보부장을 부정축재자로 규정,사퇴결의안을 냈다.두사람이 JP의 최대 정적이니 김총리 편을 든 셈이다. 두 사람이 등을 돌리게 된 계기는 지난 87년.JP가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이대행이 총재로 있던 국민당 의원들을 빼내간 것이 은원(恩怨)관계로 비화됐다. 국민당은 원내교섭단체 자격을 잃었고,결국 와해됐다.이후 이대행은 반(反)JP의 길을 걷게 됐다.지난 96년 16대 총선 때 신한국당 선대위 고문으로 JP를공격하는 선봉에 섰다. 대구·경북 지방에서 “JP가 64년 한일협상 때 독도를 폭파하자고 했다”는 등 직격탄을 쏘아댔다. 이런 관계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도 부담이 된 모양이다.김대통령은전날 김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이대행 기용의지를 전하고 ‘양해’를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총리는 이대행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이대행도 김대통령에게“걱정하실 것 없다”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서로가 악연을 덮어두고 전향적으로 나가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박대출기자 dcpark@
  • 김형욱씨 유족 재산찾기 ‘헛고생’

    지난 79년 반국가 활동을 하다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김형욱(金炯旭·당시 54세) 전 중앙정보부장의 가족들이 국가에 빼앗긴 김씨의 재산을 되찾으려다가 실패했다. 김씨는 지난 77년 미 의회에서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과 인혁당 사건 등이 조작됐다고 폭로한 데 대한 보복으로 박정희(朴正熙)정권이 김씨 한사람만을 겨냥해 제정한 ‘반국가행위자 처벌법’에 따라 기소돼 82년 궐석 상태에서 징역 7년형과 함께 전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지난 93년과 96년에 각각 이 법의 상소권 박탈과 궐석재판·재산몰수 조항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다. 김씨의 재산은 서울 신당동의 대지 582평,성북동 임야 3,700여평 등으로 96년 당시 시가 1,000억원대에 이른다. 위헌 결정을 근거로 김씨의 부인 신영순(申英順·68·미국 거주)씨는 97년서울 삼선동 땅 4,517평을 국가로부터 불하받은 사람으로부터 전매받은 황모씨 등 11명을 상대로 소유권이전등기말소 청구소송을 냈다. 대법원 민사2부(주심 鄭貴鎬대법관)는 1일 “위헌적인 법률에의해 이루어진 등기가 무효임에 분명하더라도 위헌임을 모르는 상태에서 시효취득 기간이 지났다면 소유권을 인정해야 한다”며 원고승소 판결을 내린 원심을 깨고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따라 김씨의 다른 재산 되찾기도 실패할 것으로 보인다. 임병선기자 bsnim@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한승헌의 ‘어떤 弔辭’(상)

    1975년 1월 19일,시인이자 수필가인 한승헌변호사는 색다른 사건으로 구속된 한 저명인사를 서울 구치소에서 접견하고 있었다.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사건의 대부로 현대 한국 필화사의 증인인 한변호사가 이날 접견한 인사의죄명은 간통죄였고 그 피의자는 당시 반유신독재운동의 집결체였던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이자 법조계의 원로인 이병린변호사였다.언론매체를 통해이변호사의 간통사건은 이미 기정사실로 유포되어버린 터여서 한변호사로서는 선배 법조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 진상을 듣고자 찾아간 자리였다. 아니나 다를까,운동권의 추리대로 이병린변호사는 반독재의 속죄양으로 필생의 명예를 더럽히게 되었음을 한변호사는 알게 되었다.사연인즉 중앙정보부로부터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직을 사퇴하라는 종용을 즉각 거절하자,일식점에 근무하는 이 아무개 여인의 남편이 간통죄로 고소하겠다는데 대표위원직만 그만 두면 그 사건을 해결해 주겠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분노와호통으로 맞선 이변호사는 바로 그 이튿날 구속되고 말았는데,격분한 한변호사는 법원 구내 기자실에서 ‘보도 불가’라는 묵인 아래 이 사건의 전말을은밀히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튿날 일부 신문들은 아예 ‘한승헌 변호인 전언’이란 부제까지밝혀 이병린 변호사 간통사건의 진상을 다뤄버렸고,이로써 정보부 요원이 진상 폭로 사건을 조사해 가는 등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돌았다.그리고는 1월 21일 밤 10시경 집앞에서 초인종도 누를 사이 없이 남산 중정 지하실로 연행,많은 인사들이 겪은 것같은 공포와 치욕의 2박3일간의 취조를 당했다. 이런 보복성 사건은 흔히 그렇듯이 뚜렷한 범법사실도 적시하지 못한 상태에서 범죄의 형체를 조형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일체의 사생활이 취조의 도마에 오르기 마련이다.한변호사에게는 당시로서는 최근에 낸 ‘위장시대의증언’(1973년 12월)이란 수상 시사평론집이 있었는데,수사당국은 이 책을‘반국가의 주범’으로 조각해 나가기 시작했다. 글이란 게 요상스러워 ‘위장시대’의 개념부터 따지고 들다가 다다른 곳이 바로 이 책에 실렸던 ‘어떤 조사’란 짤막한 사형폐지 주장의 수필 한 편이었다.‘어느 사형수의 죽음 앞에’란 부제가 붙은 이 글은 주류 출고량이줄었다는 가사가 2단에다,여자 면도사 해고 기사가 3단으로 난 지면에서 한인간의 죽음을 다룬 사형집행 기사는 1단으로 난 것을 본 필자가 사형제도의 비인간화 현상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더구나 이 글은 ‘여성동아’ 1972년 9월호에 처음 발표한 이후 아무런 말썽도 일으키지 않아 수상집 ‘위장시대의 증언’에다 재게재했었다.수사당국은 이 글의 주인공 ‘어느 사형수’를 7.4남북공동성명 직후 간첩죄로 처형당한 김규남(당시 집권당이었던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설정해 두고,간첩의사형을 애도하며 사형 폐지를 주장했다며 한변호사를 반국가사범으로 몰아갔다. 누가 봐도 억지임을 부인할 수 없는 이 부질없는 죄 뒤집어 씌우기를 당국은 사건화시키기 보다는 한변호사에 대한 향후 활동의 협박용으로 삼고자 함에서였던지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그는 일단 석방되었다.그러나 그로부터 꼭 두 달 뒤인 3월 21일 밤 한변호사는 시내에서 중정으로 연행,이틀만에 구속,서울구치소로 수감되었다.숱한 필화 중 수필가로는 첫 구속사건이요 강신옥·이병린변호사에 이은 현직 변호사의 구속사건은 이렇게 터졌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 [사설] 의문사규명은 역사적 과제

    국민회의는 69년 3선 개헌 이후 발생한 각종 의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특별법을 제정하기로 하고 곧 당정협의를 거쳐 법안을 국회에 제출키로 했다고 한다.이로써 의문사 진상규명과 고인들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며 6개월 넘게국회 앞 길바닥에서 천막농성을 벌여온 유가족들의 염원도 풀리게 됐다. 남북이 분단된 가운데 정부가 수립된 이후 권위주의적인 제1공화국과 군사정권 3·4·6공을 거치는 동안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은 곧잘 용공(容共)으로 몰려 탄압을 받았으며,노동운동 분야에서도 많은 희생자를 냈다.그런 희생이 쌓이고 쌓인 끝에 우리는 건국 50년 만에야 진정한 의미의 민주정부를갖게 됐다.국민의 정부가 들어선지 1년이 넘어서야 비로소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법률 제정에 나선 것은 오히려 때늦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특별법안에 따르면 대통령 직속으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고위원 9명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게 돼있다.위원회는 유족이나 관련자들이 진정하는 각종 의문사 사건에 대해 조사를 벌여 범죄 혐의가인정될 경우 즉시 검찰총장에게 고발하고,범죄 혐의의 상당한 개연성이 있는 경우 검찰에 수사를 공식 요청하도록 돼있다.또한 위원회가 실질적인 조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진정인과 참고인 및 사건관련자들에게 출석과 진술은물론 자료제출을 요구할 수 있고,강제구인장을 발부받거나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본격적인 수사를 검찰이 하게 돼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이는 검찰의 자세에 달린 문제다. 현재 유가족협의회는 70∼80년대 주요 의문사 사건을 42건으로 잠정 집계하고 있다.대학재학중 의문사한 사건 20건,군에 강제징집된 뒤 의문사한 사건22건 등이다.대표적인 사건으로는 73년 중앙정보부에서 의문사한 최종길(崔鍾吉) 서울법대교수 사건,75년 등산중에 의문사한 장준하(張俊河)씨 사건,89년 수배중 의문사한 조선대생 이철규씨 사건,89년 의문사한 중앙대생 이내창씨 사건,91년 입원중이던 병원에서 추락사한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사건을 들 수 있다.75년 인혁당사건의 진상도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민주와 통일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열사들의 의문사 진상을 규명하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은 ‘살아남은 자들’이 담당해야하는 역사적 과제다.눈을 감지 못한 채 우리 산야를 떠도는 원혼들을 달래고,다시는 그같은불의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국민적 다짐이기 때문이다.
  • [대한광장] 아버지의 눈물

    아버지 고향은 평안남도 강서다.1926년생 호랑이 띠,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넷이 되셨다.해방 직후,시절이 하수상하니 잠시 피하라고 등 떠다미신 당신어머니 모습을 뒤로 하고 혈혈단신 월남하신 지 올해로 반백년하고도 네해가더 지났다. 우리 아버진 평소에 말이 별로 없으신 분이다.당신 연애 시절 “우리 영화보러 가요”엄마가 청하면 “난 그 영화 봤으니 당신이나 보구려”했던 분이시다. 그런 우리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꼭 세 번을 우셨다.첫 번째 울음은 장남이원인이었다.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역시 엄마와 딸만큼이나 애증이 복잡하게얽혀있는 것이 우리 가족의 맛 아니겠는가.아버지의 기대주 장남이 내리 세번째 서울대 입시에서 낙방하고 돌아온 날 저녁,아버지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신 채 술병을 가슴에 한아름 안고 들어오셨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당신이 손수 사오신 술을 권하며 “그래,세상에는 안되는 일도 있지”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아버지의 두 번째 눈물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1972년 여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던 날,아버지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셨다.누군들 고향 떠나와 고생하지 않은 이 있으랴만,내리 석달을 끼니마다 ‘뜯어국’(수제비의 이북 사투리다)만 해 드신 통에 지금은 수제비만 보셔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아버지시다. 정말 일가친척 하나 없이 홀로 서울 땅에 발붙이고 사는 동안 세상살이가참으로 서러웠다는데,이제 당신 살아 생전에 어쩌면 부모님을 뵈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 눈물이 나오더라셨다.그 때만 하더라도 당시 실세였던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다녀왔다는 사실만으로,우리는 금방이라도 통일이 되어 이산가족의 감격적 만남이 이어지리라 한껏 기대에 부풀지 않았던가. 그로부터 어언 27년이 훌쩍 흘렀다.이제 아버지는 이산가족 상봉 운운해도별 기대를 하지 않으신다.지난 해 겨울 ‘역사적인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고 떠들썩했을 때도 두 분 금강산 가시려느냐 여쭈었더니 “금강산이나설악산이나 그게 그거겠지,고향땅 못 밟아보면 무슨 소용이야”하시며 고개를 저으셨다. 최근 남북한간에 진행되는 일련의 사태들-서해교전이다,금강산 관광객 억류다,이산가족 문제를 위한 남북차관급 회담 전망이 불투명하다 등등을 지켜보며 이번에도,혹시나 했던 기대가 역시나 하는 실망으로 끝나는 이 악순환을우리는 언제까지 참아내야 할 것인지 막막하기만 하다. 한데 이번에는 북한에 대한 분노만큼이나 우리 자신에 대한 실망이 커지고있음을 숨길 수가 없다.분단된지 벌써 54년,이제 북한이 어떤 상대라는 것쯤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을만큼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가. 북한은 지금까지 ‘일관성있게 비일관성’을 유지해왔다.고도 정보화 시대에 자신들의 정보 자체를 철저히 차단함으로써 자신들의 정보를 파워로 전환하는 대신 우리의 정보력을 무력화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알면서도 당하는 우리가,모르면서 당한 것처럼 보이는 미국보다 훨씬 한심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이산가족 문제만 해도 그렇다.실제로 가족만큼 정치적 쟁점을 불러일으키는 집단은 없을 뿐더러 가족만큼 자신의 정치성을 교묘히 숨기고 있는 집단도흔치 않다. 남북이 모두 이산가족 문제를 앞세워 자신들의 실리를 챙기고자 하는 한 이문제는 인도적 차원의 뜨거운 가슴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우리 아버지는 당신의 막내 아들이 부모 몰래 해병대 시험을 보고 훈련소로 향하던 날,그날 아침에도 우셨다고 한다.당신 인생이 분단의 희생물이거늘,부모형제를 지척에 두고도 못 만나는 설움에 더하여 아들을 군대에 보내야만했던 마음,그 아픈 마음이 어찌 우리 아버지뿐이랴. [咸仁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23)-남정현의 분지②

    1964년 12월에 넘겨진 소설 ‘분지’는 이듬해인 1965년 3월호 ‘현대문학’지(2월 중순께 발간)에 게재되었는데,당시의 한국문단 풍토에서는 충격적인 풍자였지만 의외로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그런데 그로부터 근 석달이 지난 5월 어느날 작가 남정현은 충일기업사란 곳으로 연행돼 상상할 수 없었던 심문을 당하기 시작했다.으리으리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일식 건물로연행된 그에게 던진 점잖은 첫 질문은 “이 소설은 당신이 쓴 게 아니라 북괴의 어떤 인사가 써서 당신에게 건내 주어 발표시킨 것이 틀림없으니 그 경위를 밝히라”는 것이었다.언제,어디서 누구로부터 전달받았느냐는 것만 털어 놓으면 당장 풀어주겠다는 신사적인 위협은 점점 닥달로 바뀌는가 싶더니 슬그머니 고성과 육체적인 학대를 겸한,말하자면 음악적인 효과와 체육적인기능을 겸한 고문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어떤 학대를 받았을까.그 고통의 상처는 너무도 혹독하여 심한 고문을 당한 사람들 누구나처럼 그 역시 지금도 쉬 공개를 꺼린다.기발하고 기상천외한심리적 육체적인 학대 속에서 남정현은 완전히 정지된 시간에 박제된 채 매달린 한 객체로만 존재했다.그는 가끔씩은 집에 가기도 했으나 오라면 가야했고,대개는 아예 그 기업사에서 자며 봄과 초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심문 기간이 길어지면서 ‘분지’가 북한의 ‘통일전선’(1965.5.8)과,‘조국통일’(7.8)에 전재된 것이 발단이었다는 낌새를 챘지만,1965년이란 해는5·16군부 세력에게는 워낙 넘기기 어려운 때이기도 했다.지식인과 문학인들이 앞장 서서 전개했던 한일협정과 국군 파월을 둘러싼 비판의 소리는 높아만 가고 있었다. 특히 1965년 7월 9일자로 발표된 재경 문학인 82명 연서로 된 ‘한일 조약의 즉각 파기와 국회 비준 거부를 요구하는 성명서’는 분단 이후 문인들이처음으로 집단적인 사회비판 운동에 나선 사건이었다.“일본측 일방에만 유리하도록 되어 있으며 민족적 자존과 현실적 이해,미래의 전망에 한결같이모욕과 재침 그리고 실질적인 예속을 초래하도록 되어있다”고 지적한 이 성명서는 전체 문학인이 더 이상 관망적인 자세를 버리고 “주권과 권익의 옹호를 위해 투쟁하는 대열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투지를 밝히면서,“한일협정 반대 데모로 구속된 애국 학생들을 즉시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서명명단에는 박종화 김광섭 모윤숙 곽종원 안수길 조지훈황순원 등 원로급과,조병화 김남조 김수영 홍윤숙 신동엽 유경환 성춘복 등시인,박경리 선우휘 최일남 한말숙 등 작가에다 전숙희 등 수필가들이 대거참여한 범문단적 면모를 띠었다는 점이다.문단의 유명인으로 이 명단에서 빠진 인사로는 서정주 조연현을 비롯한 소수였다(총 명단은 임헌영 ‘민족의상황과 문학사상’ 393쪽). 바로 이 성명서가 발표된 7월 9일에 작가 남정현은 중앙정보부에서 정식 구속돼 서대문 구치소로 이송,그 닷새 뒤인 14일 검찰로 송치(김태현 서울지검 공안부장)되었다.김부장 검사의 제자였던 시인 박재삼이 ‘대한일보’에 근무하면서 틈을 내어 검찰청으로 찾아가 “선생님,남정현은 착한 사람입니다. 당장 풀어주셔야 합니다”고 강변했던 일화는 60년대 문단의 한 삽화이다.그는 계속 ‘분지’ 공판에다녔는데 구형이 있던 날 법정에서 오랫동안 서 있다가 나가던 길에 쓰러져 그 뒤 일생을 고생하다가 작고했다.이 무렵에 또다른 어떤 일이 있었을까.‘현대문학’ 8월호(7월 중순 발매)가 광복 20주년 기념으로 ‘광복 후의 문예지 문학단체’ 특집을 냈는데,이 경하할 해방 기념 특집호의 ‘편집 후기’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본지 지난 3월호에 발표된 남정현씨의 소설 ‘분지’는 본지의 부주의로인하여 게재된 것으로서 이로 인하여 사회의 물의를 일으킨데 대하여 정중히사과하는 바이다” 이후 ‘남정현’이란 이름이 ‘현대문학’에 다시 등장하는데는 무려 33년이 걸렸다.‘현대문학’은 1998년 10월호에서 ‘현대문학의 문제작 재조명’이란 기획을 마련하여 ‘분지’를 재게재했는데,‘편집 후기’에다 이렇게쓰고 있다. “…최초로 문학작품을 반공법으로 문제 삼았던 남정현 선생의 ‘분지’를싣는다.외세로 인한 당대의 전도된 가치관과 민족의 정체성 부재의 문제를한 가정의 비극을 퉁하여 통렬한 풍자로 비판한 작품이다.강진호씨의냉철한 작품론에서 언급되었듯이 작가의 시대의식에 대한 인식의 깊이로써 전후문학을 한단계 끌어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던 이 작품은 33년이 지난 오늘날,극도로 혼란해진 사회적 현실을 숙고하게 만든다”[任軒永 문학평론가]
  • 국가정보원 1·2차장-기획조정실장 교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4일 국가정보원 1·2차장과 기획조정실장을 모두교체,해외담당인 1차장에 권진호(權鎭鎬)국제문제조사연구소장,국내담당인 2차장에 엄익준(嚴翼駿)전안기부3차장을 임명했다. 김대통령은 또 기획조정실장에는 최규백(崔奎伯) 국가정보원 대공정책실장을 승진,발령했다고 박준영(朴晙瑩)청와대대변인이 발표했다. 박대변인은 “이번 인사는 전문성과 국정원 조직의 활성화를 위한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국정원은 다음주초 본부 1,2급과 지부장 등 고위 간부직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할 예정이다. ◇최 신임 기획조정실장 약력 ▲광주·57 ▲국립체신학교·건국대 행정대학원졸 ▲국가정보원 대공정책실장양승현기자 yangbak@- 權鎭鎬1차장 프로필 차분한 학자 스타일로 “어떤 경우에도 부하 군기를잡는 일이 없다”는 게 주위의 평.수준급의 영어와 불어 실력을 갖춘 정보통.천용택(千容宅)국정원장과는 육사 후배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인연은 없다. 부인 이화용(李和鎔·57)씨와 2남2녀. ▲충남 금산·58 ▲용산고·육사 19기 ▲32사단장 ▲국군정보사령관 ▲중장 예편(95년) ▲세종연구소 연구원 겸 육사 교환교수- 嚴翼駿2차장 프로필 66년 중앙정보부에 첫발을 내디딘후 대공분야를 섭렵한 정통 정보맨.90년대초 남북고위급회담 상황실장으로 활약,치밀한 판단력을 인정받았다.94년 남북정상회담 예비접촉에 전념하느라 딸 결혼식에 불참한 일화도 있다. 98년초 조직개편 바람에 휘말려 면직됐었다.부인 임미자(林美子·57)씨와 1남1녀.▲전북 전주·56 ▲고려대 정외과 ▲안기부장 제3특보 ▲안기부3차장
  • 정부 조직개편 모두 48차례

    대한민국 정부가 48년 수립된 뒤,조직개편은 지금까지 모두 48 차례나 있었다. 이 가운데 현행 정부조직의 기본틀은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의 공화당 정부에 들어와서 마련됐다.중앙정보부가 신설되고 77년 12월 개편 때 경제기획원이 설치되는 등 2원·14부·4처·14청으로서 틀을 갖췄다. 제5공화국 때 몇 차례 기구개편을 했으나 기본골격은 그대로 유지됐다. 6공화국은 국토통일원을 통일원으로 개칭하고 부총리급 부처로 격상시켰다. 또 환경청을 환경처로 개편하고 문화공보부를 문화부와 공보처로 분리·개편했다.치안본부가 경찰청으로 바뀐 것도 이 때다. 문민정부 들어와서는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통합해 재정경제원으로,상공부와 동력자원부를 상공자원부로 통합,다시 통상산업부로 개편했다.또 건설부와 교통부를 건설교통부로 개편했고 해양수산부와 해양경찰청 및 중소기업청이 발족됐다. 국민의 정부에서는 모두 2차례에 걸쳐 조직개편을 단행했다.정부 출범과 함께 1차 개편을 단행,기획예산위원회 등을 신설하고 총무처와 내무부는 행정자치부로 통합했다. 그러나 정부개혁이 미진하다는 지적이 잇따르면서 2차 개편이 단행되게 됐다.2차 개편은 정부수립이후 민간전문가들이 처음으로 정부조직에 대해 진단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그러나 부처의 반발로 일부 개편안이 없었던 일로 되는 등 적지않은 진통을 겪었다. 박현갑기자
  •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끝)-리영희교수

    ‘진실을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오랫동안 주입되고 키워지고 굳어진신념체계와 가치관이 자기의 내부에서 무너지는 괴로움은 매우 큰 것이다.절대적인 것,신성불가침의 것으로 믿고 있던 그 많은 우상의 알맹이를 알게 된-잠을 캐우는-괴로움을 준다’(‘우상과 이성’(한길사)서문 일부). 70년대 중반부터 10여년동안 ‘지성의 전당’ 문턱을 넘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대했을 문구다.그 속에는 단숨에 책을 읽은 뒤,뿌옇게 밝아오는 창문을 보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부르르 떤 기억도 배어있을것이다. 리영희씨(70·한양대 대우교수)의 ‘우상과 이성’은 대학 새내기들에게 ‘껍데기를 벗는’ 아픔을 준 동시에 세상의 참모습을 보는 눈을 뜨게 해주었다.리교수 자신도 ‘전환시대의 논리’와 ‘8억인과의 대화’와 함께 가장아끼는 저서라고 말한다. “제 책을 읽은 많은 대학생들이 학생운동·감옥 등 예기치 못한 길로 접어든 사실에서 ‘도의적 미안함’같은 게 들 때가 있습니다.하지만 다시 그런상황이 오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겁니다” 경기도 군포시 수리산 입구에 자리잡은 한양아파트.정체성 없는 삶이 싫어아파트에 문패를 달고 사는 ‘당대의 논객’은 여전히 꼿꼿했다. ‘대쪽과 선비’.리교수의 삶에 잘 어울리는 말이다.기자와 교수로서 두번씩 ‘잘린’ 기이한 인생역정은 현대사에서 양심을 지키려면 당연히 거쳐야하는 ‘통과의례’였다. “무슨 거창한 이념이 있었다기 보다는 ‘거짓’이 태생적으로 맞지 않아서 이렇게 살아왔나 봅니다.특히 대중을 속이고 바보로 만들면서 개인적인 치부나 향달에 몰입하는 권력집단의 거짓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그들은 전 국민을 비인간화하고 인간다운 권리와 정체성을 박탈하는 집단이죠” ‘거짓과의 싸움’.아주 쉬워 보이지만,그러나 실천하기는 어려운 이 소신을 지키기 위해 리교수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64년 11월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가시밭길 인생길이 열린다.‘대기자’의 꿈을 품고 57년 ‘언론계 공채 1호’로 합동통신에 들어간 뒤 7년만에 부딪친 첫 필화(筆禍)였다. “‘아시아 아프리카 비동맹회의 외상들이 남북한 대표를 동등하게 대우하고 유엔가입 문제를 논의한다’는 기사를 썼는데 ‘반공법 위반’의 올가미를 씌운거죠.해설기사도 아니고 있는 사실만 다루었는데 죄가 되었던 것은박정희가 서서히 군부독재를 강화하려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감옥에서 몇 달을 보낸 뒤 선고유예로 나왔다.‘거짓’과 타협할 줄 모르던 ‘지성’은 마침내 68년 해직통보를 받았다.외신부장이던 당시 ‘베트남 파병’의 본질을 꿰뚫고 한국 언론계에선 유일하게 반대논리를 펴다가 회사와정부의 미움을 받았던 것. “정부의 압력으로 강제해직되었지만 사실 제 맘속에도 ‘염증’이 생겼습니다.신문사 간부라는 인텔리가 정권이나 체제의 앞잡이가 되어 국민을 속이고 진실을 가릴 능력을 박탈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리교수는 이후 1년 6개월 동안 애써 ‘인텔리의 옷’을 벗으려고 노력했다. 할 수없어 ‘책 보따리’장수로 나섰다.소설가 고 이병주씨와 출판사를 차린 뒤 책을 팔려고 서울시내 중·고교를 발이 터지도록 다녔다.그러나 지식인의 때를벗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우선 먹고 사는 일이 힘들더라구요.여러 시도를 해보았지만 ‘지식’으로 먹고 살던 놈이 딴 일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죠.어쩌면 그 역시 ‘관념론’이었다는 반성을 하고 합동통신사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어정쩡한 반지식인이 되기보다는 더 철저한 지식인이 되는 게 낫다고 판단하고 ‘극악한 권력’과 더 치열하게 싸우기로 한 것이다.결과는 두번째 옥고였다.71년 1월 박정희가 유신헌법의 고삐를 한창 조일 때 ‘지식인 64명서명’운동을 전개한 혐의다.다시 쫓겨났다.그러던 중 한양대에서 제의가 와 기사 대신에 강의로 양심의 소리를 이어갔다.비록 60만명의 독자는 없어졌지만 ‘우상’에 길들인 수많은 대학생들에게 ‘이성’을 들려주었다. 첫 결실이 ‘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 비평사 74년)였다.인식과 실천을 결합하려는 의지는 ‘8억인과의 대화’(창작과 비평사 77년) ‘우상과 이성’(한길사 77년)등 ‘화려한 금서’를 잇따라 터뜨렸다.감옥이라는 코스는 당연했다.만만하면 걸고 넘어지던 ‘반공법 위반’으로 2년을 쇠창살 속에서 보냈다. 당시 중앙정보부와 검·경찰의 합동작품인 ‘불온한 이념서적 30권’ 리스트에 리교수의 저서 3권 모두가 상위에 자리잡았음(전환시대의 논리’와 ‘8억인과의 대화’ 1,2위, ‘우상과 이성’ 4위)은 그의 위치를 증명한다. 그는 언변이 화려하지 않고 눌변이다.그러나 그 속에는 일관되게 ‘지성’을 지켜온 고집이 들어있다.더디지만 꾸준한 걸음이었기에 80년대 거세게 몰아닥친 ‘극좌’의 목소리에도 휩쓸리지 않았고 사회주의의 몰락과 더불어잽싸게 변신하는 ‘역풍’에도 초연했다.오히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강조하면서 버티고 있다. “자본주의가 승리했다지만 실제는 절반의 승리와 패배가 공존합니다.이기심에 근거한 동기부여로 물적 생산력을 극대화하여 현실 사회주의에 이겼지만 인간의 가치를 물질의 하위 범주로 만들었거든요.인간을 더 중요시하는사회주의라는 ‘마이신’을 만들지 못하면 타락·부패합니다” 자본주의 논리가 득세하는 현실에 뼈아픈 일침을 가한 그는 마지막으로개인적 소망을 들려주었다. “이제 지적 활동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후배들의 몫이라고 봅니다.평생고생한 아내와 함께 여행도 하고 즐겁게 책이나 읽고 싶습니다.무엇보다 노욕(老慾)을 피하는게 최대의 목표입니다.‘리영희’라는 지식인이 추하지 않고 올곧게 사는게 후학을 격려하는 자세라고 봅니다”이종수기자 vielee@'금지문화' 시리즈를 마치며 지난 해 6월 13일 시작한 기획시리즈 ‘금지문화 금지인생-이제야 말한다’가 23회로 끝을 맺습니다. 대중음악·출판·문학·연극·판소리 등의 다양한 문화판에서 ‘말도 안되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던 작품과 그것을 일군 삶을 조명하는 작업은 우리현대사의 기형적인 모습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드러난 ‘금지인생’의 사연은 절절했고 탄압의 빌미는 어쩌구니 없었습니다. 그저 좋아서 부른 서정적 노래(양희은),국토에 대한 사랑(조태일),올바른역사 기술(‘해방 전후사의 인식’),전통 춤이나 소리로 현실을 읊은 것(이애주,임진택,김명곤)이 모두 금지당했습니다. 검열의 잣대도 다양했습니다.“앨범표지가 장발이다”(이정선),“대통령찬가를 만들지 않았다”(신중현),“노래 제목이 물고문을 연상시킨다”(한대수)….공통점은 ‘어이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정권을 획득한 권력집단은 늘 ‘당근과 채찍’을 병행합니다.우리가 확인한 ‘금지인생’에는 정권의 당근을 거부하고 채찍을 자청한이들만이 뿜는 향기가 풍겨납니다. 시리즈를 연재하는 동안 ‘금지인생’이 가르쳐준 지혜도 많습니다.혹독한탄압으로도 ‘진실은 영원히 감옥에 가둘 수 없다’는 것과 역경을 헤쳐온이들이 결국 우리 시대의 문화주역으로 각자의 장에서 탄탄하게 뿌리를 내렸다는 것입니다.아울러 우리 사회가 진보했지만 여전히 다른 얼굴을 한 ‘금지’는 존재하고 우리의 주역들은 그것과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결국 이시리즈는 단순히 먼지 가득한 창고에서 케케묵은 과거를 들춘 게 아니라 오늘의 문제를 제기한 셈입니다. 그동안 바쁜 일상생활에도 취재에 협조해주신 여러 ‘금지인생’의 주역들과 시리즈에 관심을 표명해주었던 독자여러분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이종수기자
  • 새 영화-건축무한 육면각체의 비밀

    ‘건축무한 육면각체의 비밀’이 과연 ‘쉬리’에 맞먹는 흥행을 기록할 수있을까. ‘건축…’이 오는 5월1일 ‘쉬리’의 기록에 도전하기 위해 대장정에 오른다. 이 영화는 ‘쉬리’를 만든 삼성영상사업단이 투자한 영화.‘쉬리’가 남북관계를 소재로 삼았다면 이 영화는 과거의 한일 관계에 초점을 맞춘 가상역사 미스터리물이다. 96년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에서 당선작으로 뽑힌 이 작품은 탄탄한내러티브와 구성이 돋보인다.많은 컴퓨터그래픽을 활용,볼거리가 풍부하다. 제작비는 약 20여억원.‘김의 전쟁’의 시나리오를 쓰고 ‘피아노맨’을 찍은 유상욱 감독의 세번째작품이며 ‘접속’의 김태우와 ‘창’의 신은경이주연으로 나온다. 이 영화는 날개 오감도 등을 쓴 천재시인 이상의 실제생활이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특히 그가 총독부 건축설계사였다는점에 착안,1930년 2년동안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가 다시 나타난다는 가상상황을 설정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박정희라는 실명인물이나 이상의 비밀을추적하는 중앙정보부 요원,안기부 해킹,연쇄살인 사건 등 다양한 코드를 집어 넣어 영화의 긴장감을 극대화시킨다. 거대한 역사의 음모가 감춰져 있음을알아낸 젊은이들이 이상의 시 속에 그해결의 열쇠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목숨을 건 모험에 나선다.역사적 음모가 집약된 거대한 지하공간인 ‘육면각체의 방’은 직경 15m 높이 12m의 세트로 ‘창조’해냈다.특수촬영을 위해 미니어처 5개가 실제 세트의 20% 크기로 제작됐다.사실감을 살리기 위해 37억원짜리 디지털 시네시스템을 도입,SFX의 효과를 100%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박재범기자
  • 특별기고-국정 국사교과서는 유신잔재

    1970년대를 살아본 사람이면 박정희정권의 ‘유신’시대가 얼마나 암흑시대였는가 알고도 남을 것이다.오죽 했으면 독재권력의 핵심,중앙정보부장이 ‘유신’ 핵심부의 대통령과 그 경호실장을 살해했겠는가. 현대사회에서 정치의 영향력이 무엇보다 크다는 것을 잘 아는 일이지만 ‘유신’ 독재의 독소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유신’정권이 이른바 국적 있는 교육 운운하면서 그때까지 검인정이었던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를국정으로 한 것도 그 하나였다. 제국주의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괴뢰 만주국 장교 출신 박정희정권이 이른바 친일 콤플렉스를 감추고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민족주체성이니,국적 있는 교육이니,한국적 민주주의니 하면서 국사교육을 강화한답시고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하고 대학의 교양국사를 필수과목으로 했다.‘유신’정권의 이같은 횡포에 대해 학계의 극히 일부에서 반대가 있었으나 저지할 수 없었다. 생각나는 일이 있다.당시 문교부 편수관이 와서 국정화하는 국사교과서의한 부분을 집필하라기에내가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역사학자들도 모두 집필을 거부할 것이므로 국사교과서 국정화는 집필자를 못 구해서도 성사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그러나 얼마 후 국정교과서가 만들어져 나온 것을 보고 얼마나 세정에 어두운가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신’정권이 무너진 후 대학의 교양 국사과목은 필수과목에서 풀려갔지만,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김영삼 문민정부시대도 김대중 국민의 정부시대도 그대로 국정인 채로 있다. 일일이 조사를 해본 것은 아니지만 아마 민주주의 국가라 자처하는 나라치고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하고 있는 나라는 그 예가 거의없지 않은가 싶다.이웃 일본의 경우 역사교과서의 검인정마저도 거부하면서 투쟁한 학자들이 있었다.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크게 진전시키겠다는 김대중 국민의 정부 아래서도‘유신’ 잔재 국정 국사교과서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유신’ 잔재를 구시대의 유물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하고 있는 일은 더욱 어불성설이다. 조선왕조와 같은 전제군주시대에는 국가기관으로 춘추관이 있어 왕조사로서 국사를 편찬했다.잘 알다시피 조선왕조실록이니 하는 것이 모두 그렇게 해서 편찬된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시대에는 국가기관이 국사를 편찬해서는 안된다.역사를 객관적으로 연구하고 또 쓰는 일은 어디까지나 민간 학자들의 소임이다. 국사를 국가기관에서 편찬하는 일 자체가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뚜렷한 증거가 되지 않을 수 없다.국가기관은 다만 역사자료를 충실히수집하고 간행해서 민간 학자들이 이용하게 해주면 된다.국립사료관이나 문서관이면 된다는 말이다. 군사독재시대에는 그랬다 해도 김영삼 문민정부와 김대중 국민의 정부에 와서도 중·고등학교의 국사교과서가 국정인 채로 있고 그것을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하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 원인을말해 보면 무엇보다도 국사학계 그리고 집권층 및 교육 관료들의 의식 부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국사교과서를 국정화할 때 어느 역사학회도 반대성명 한 장 낸 일이없었다.그런 역사학회니까 ‘유신’정권이 무너진 지 20년이 넘도록 국사교과서가 국정인 채로 있을 수 있고,역사학계가 그러니까 집권층이나 교육 관료의 역사인식이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면 그만이겠지만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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