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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시각] 의문사 의문으로 남길텐가

    활동시한 만료를 눈앞에 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가 큰일을 해냈다.1975년 10월15일 수감중 사망한 장석구씨 사건을 조사하다 74년 발생한 ‘인민혁명당 재건위’사건 자체가 중앙정보부의 조작임을 확인했다고 12일 발표한 것이다.지난 30년 가까이 의혹을 받아온 사건에 대해 국가기관이 공식적으로 조작이라고 밝혔으니 그 의미가 작지 않다. 그러나 의문사위의 조사가 항상 명쾌한 결론을 이끌어 낸 것은 물론 아니다.‘서울대생 김성수군 의문사’사건을 예로 들어 보자. 1986년 6월18일 서울대 지리학과 1학년생인 김성수군이 실종됐다가 사흘 뒤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몸에 시멘트 덩이를 매단 변사체로 발견됐다.수사를 담당한 검찰과 경찰은,김군이 내성적인 데다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아 고민하다 스스로를 사회부적응자로 판단해 자살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 사건을 조사 중인 의문사위는 지난달 27일 1차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김군이 타살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김군이 물에 빠지기 전 뇌손상을 당한 상태였으므로 스스로 자살을 택할 가능성은 희박하며 오히려 가사 상태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아울러 ‘자살’동기에 관해서도 이견을 내놓았다.실종 당시에는 성적표가 아직 나오지 않았기에 성적 고민을 할 이유가 없으며,김군의 고교 담임교사가 사망 일주일쯤 전에 받은 편지에서 김군은 “학교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썼다는 것이다. 오는 16일이면 의문사위의 활동기간이 끝나므로 추가조사가 정밀하게 이루어지기는 불가능하다.따라서 김군 사건은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론날 수밖에 없다. 꽃다운 열여덟 나이,국내 최고의 명문대에 갓 입학해 활발하게 연극 활동을 하던 젊은이가 과연 자살을 했을까? 아니면 유족들의 믿음대로,공안기관이 수배자의 소재를 캐는 과정에서 고 박종철군에게 한 것처럼 고문을 해 죽음으로 몰고간 것일까? 2000년 10월 출범한 뒤 의문사위는 모두 85건을 접수해 30여건을 마무리지었다.김성수군 사건을 비롯한 나머지 50여건에 대해 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법을 개정하지 않는 한 조사는 중단되고 진상은 영원히 미궁에 빠지게 된다.김군 사건뿐 아니라 장준하 선생과 이내창·이철규·박창수씨 등과 관련된 의혹을 우리 사회는 앞으로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국회는 관련법 개정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다.소속 정당에 상관없이 많은 국회의원이 뜻을 모아 개정안을 최근 냈지만 아직 법사위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았고 일정조차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16일이 시한인 의문사위가 활동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가동하려면 13일 중으로 법사위 심사를 거쳐 본회의까지 통과해야 한다.국회가 14일부터 22일까지는 본회의를 열지 않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국회는 마땅히 의문사위의 활동기간을 연장해 주고 조사가 실질적인 성과를 얻어낼 수 있게끔 권한도 대폭 강화하는 쪽으로 법을 개정해야 한다.의문사위가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을 개정해 의문사위가 제 구실을 충분히 해내고,그 결과 ‘의문사’라는 사전에도 없는 단어를 역사의 갈피 속에 가둬 두어야 한다.의문사를 의문인 채로 남겨 둔다면 역사는 일차적인 책임을 이 시대 국회의원들에게 물을 것이다. 이용원 문화팀장 ywyi@
  • 의문사委가 밝힌 인혁당 재건위 사건 조작 전모/ 유신 ‘공작살인’ 국가서 첫 인정

    의문사규명위원회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 발표 내용을 수사부터 재판까지 부문별로 간추린다. ◆조직결성의 증거 유·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1차 인혁당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조직결성과 관련한 증거가 없다.트랜지스터 라디오,공식 출판 서적,학생들 선언문,민주수호국민협의회 관련 자료 등이 있을 뿐 강령,규약,조직문서,감청 기록 등 지하당 결성과 관련된 물증이 없다.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가한 고문의 실상- 중정 수사관들과 중정에 파견된 경북도경 등의 경찰관들은 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구타,몽둥이(야전침대봉 등)찜질,통닭구이고문,물고문,전기고문 등의 고문을 자행했다고 당시 서울구치소 교도관들은 증언했다. 서울시경 소속 경찰 전○○는 국방색의 야전용 전화기로 피의자를 전기고문하였다고 진술하고 있다.경북도경 경찰 이○○은 물고문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며 지하 보일러실은 고문을 하는 장소라고 진술했다. ◆각본에 의한 수사- 수사 마무리 단계에서 중정에서 갑작스럽게 조사했다.당시에 중정간부가 1차 인혁당 관련 기록을 보고 있었으며 중정에서 짜놓은 각본에 맞춰 조사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수사팀장인 윤○○이 수사관들에게 “물건(조직사건)을 만들라.”고 지시한 일도 있다고 진술했다. ◆고문을 통한 피의자 자백 강요- 수사관 이○○,신○○는 중정의 지시가 사실관계 및 상식과 어긋나는 것이 많이 있었지만 윤○○이 지시하면 무조건 조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다.피의자들이 처음에는 혐의사실을 부인하더라도 중정 수사팀이 고문을 한차례 하면 그 다음에는 별다른 저항 없이 시인조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 ◆검찰관 조사 때 중정 수사관이 참여- 피의자들을 고문 당시 수사관들,검찰서기,피의자들은 검찰관 조사 과정에 중정의 수사관들이 수시로 입회하였으며 “혐의를 부인하면 6국 지하보일러실로 끌려나가 고문을 당하였고 검사가 물으면 예라고 답할 것을 강요당했다.”고 진술하고 있다.서울시경 소속 경찰 나○○은 “대구팀이 중정에서 검찰관과 같이 조사를 한 것은 중정에 있었던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고,그 목적은 혐의사실을부인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공판조서 허위 작성- 재판을 지켜본 변호사들 교도관들,피고인의 가족들은 공판기록에 나타난 허위기재 사실은 크게 두 가지라고 입을 모은다.첫째는 부인한 혐의 사실을 정반대로 기록하는 것이고 둘째는 불법적인 고문 수사에 항의하는 발언을 기록에서 누락시키는 것이다. ◆위법한 재판과정- 변호인들이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결정적인 증언을 해줄 증언자를 재판부에 신청을 해도 재판부에서 받아준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더구나 피고인들이 고문당한 사실을 증언하면 재판부에서 막는 경우도 있었다.임구호 피고인의 경우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하고 난 뒤 법정 밖으로 끌려나가 검찰관들로부터 집단구타를 당하기까지 했다.피고인 가족도 방청이 한 피고당 1인으로 제한됐으며 기자들도 방청이 제한되어 보도하지 못했다. ◆전격적인 사형집행- 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형수들의 형 집행은 19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다음 날 법무부장관의 지시에 의해서 새벽에 전격적으로 집행됐다.일반적으로 사형수들은 최소한 몇개월,길면 2∼3년 지난뒤 집행된다. ◆유언의 허위작성- 사형수들은 사형장에서 최후진술을 할 수 있고 사형집행명령부 비고란에 기록된다.그런데 사형집행명령부에는 도예종이 “조국이 하루 속히 적화통일 되기를 바랄 뿐이다.”고 말했다고 기록돼 있고 8명의 비고란 가장 아래에는 모두 종교의식을 거부한다고 기록돼 있다.그러나 당시에 사형 장면을 목격했던 교도관 김○○은 도예종이 “통일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억울하다.”는 단 한마디만 했다고 진술했다. ■조사과정 이모저모/ 18개월간 400명 진술받아 조작 관여자 “시키는 대로” 의문사진상규명위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지난 75년 옥중에서 병을 얻어 사망한 장석구씨 사건을 직권 조사하기로 지난해 3월 결정한 뒤 1년6개월에 걸쳐 수사와 재판에 관여했던 400여명의 진술을 들었다.이 가운데 120여명은 정식으로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규명위 관계자는 “대부분이 현직에서 퇴직한 상태였으며 치매로 조사가 어려운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참고인들은 고문과 사건 조작에 관여한 사실을 강력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규명위측이 유족과 관련자의 진술을 토대로 추궁을 하자 조금씩 사실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규명위 조사관들은 당시 중앙정보부에 파견돼 수사에 나섰던 경북도경 소속 경찰관들은 대체로 고문과 강압수사 사실을 시인했다고 밝혔다.그러나 중정 직원과 간부들은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거나 “중정은 경찰 수사에 관여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수사과정에서 파견 경찰관과 중정 직원간의 갈등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규명위 관계자는 “경찰관 중에는 ‘공은 중정이 가로채고 나중에 문제될 일은 경찰에 떠밀고 있다.’며 불만을 표시한 사람도 많았던 것으로 조사됐다.”고 전했다.심지어 중정 간부들이 헌병을 동원해 반발하는 경찰관을 감금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구속하겠다.”고 협박한 사실도 밝혀졌다. 당시 검찰 관계자들도 책임을 부인하기는 마찬가지였다.규명위 관계자는 “대부분의 검찰 수사관들이 ‘우리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상부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며 발뺌했다.”고 전했다. 일부는 “빨리 사건을 끝내주는 것이 피의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사형 당할 수 있는 중대한 혐의사실도 너무 쉽게 시인해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하지만 당시 재판부 판사들은 현재 해외에 체류중이거나 소재 파악이 안 돼 규명위로서도 접촉이 쉽지 않았다. 규명위 관계자는 “어렵사리 연락이 닿아 진술을 요청해도 ‘아직 밝힐 단계가 아니다.’거나 ‘협조는 하겠으나 조서에는 남기지 말아달라.’며 답변을 회피했다.”고 밝혔다. 이세영기자 sylee@ ■재심 어떻게 - 최초 판결 법원 다시 재판 시작 재심은 법원에서 이미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에서 사실 오인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은 피고인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이다.원심의 판결을 뒤집을 명백한 증거가 확보되거나 새로운 사유가 생겼을 때 구제받는 비상절차로 현행 형사소송법은 사법 판단의 안정을 위해 그 요건을 엄격히 한정하고 있다. 재심청구 신청서가 제출되면 재심 사유가 있는 심급의 법원이 심리에 착수,사건 관련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을 검토하게 된다. 1974년 “북한의 지령을 받아 국가 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가 이듬해 4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선고받은 다음날 곧바로 사형이 집행된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자 8명의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지면 최초 판결을 내린 법원에서부터 다시 재판을 진행해야 하다. 당시 관련자들이 1심인 보통군사법원을 거쳐 2심인 고등군사법원과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통해 형이 집행된 만큼 재심 판단은 군사법원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안동환기자 sunstory@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인혁당 조종받는 민청학련 정부전복기도””/사형선고 20시간만에 핵심8명 전격 형집행 유신시절인 1974년 정부가 발표한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은 제2차 인혁당사건으로도 불린다. 도예종씨 등 23명이 인혁당 재건위를 결성한 뒤 북한의 지령을 받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배후 조종,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것이 정부의 발표 내용이었다.당시 구속기소된 23명 가운데 75년 4월 대법원에서 8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20시간 만에 가족들도 모르게 형이 집행됐다.나머지 15명도 무기징역에서 징역 15년까지 중형을 선고받았다.일부는 수사 도중 구속정지 등으로 풀려났으며,구속기소된 인사 가운데 현재 9명이 생존해 있다. 민청학련 사건은 73년 8월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을 계기로 반유신 체제운동이 가속화되자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이용됐다.당시 박 대통령은 “반체제운동을 조사한 결과,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는 확증을 포착했다.”고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학생들의 수업거부와 집단행동을 일체 금지시켰고,위반자를 잡아들였다. 앞서 64년 8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이 사주한 대규모 지하조직에 의해 국가 전복기도가 있었다.”고 발표한 사건이 제1차 인혁당 사건이다.그러나 인권단체에 의해 고문사실이 알려지고 담당 검사들이 사퇴하는 등 홍역을 치르면서 13명이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세영기자
  • [사설] 인혁당 사건 진상 재조사하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 중간 발표 결과를 보며 우리는 다시 한번 역사 앞에 엄숙하게 서야 함을 느낀다.역사는 스스로 진실을 밝히는 위대한 힘이 있다.그래서 역사가 무서운 것이다.여야의원들이 소속 정당을 떠나 진상규명위 활동을 계속하도록 뒷받침하고 권한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아가고 있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규명위에 따르면 인혁당 사건은 애초부터 실체가 불분명했다.1964년 8월 중앙정보부는 대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커지자 인민혁명당이 북한 중앙당의 지령을 받아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발표했으나,재판 과정에서 일부에만 실형을 선고했을 뿐이었다. 74년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철저하게 조작됐다.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후 긴급조치를 발동해 민청학련 소속 1024명을 검거하는 한편 인혁당 재건위가 북한의 지령을 받아 조종한 것으로 만들었다.이 과정에서 중앙정보부는 각종 고문에 의한 증거 조작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당시 사형을 선고받은 8명이 대법원의 확정판결 뒤 불과 20시간만에 전격적으로 집행된 점에서도 용공조작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그 때문에 국내외로부터 ‘사법살인’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과거 암울했던 시대에 인혁당 관련자들이 무참하게 인권을 침해당하며 숨지거나 옥살이를 했다는 것은 분명하게 밝혀졌다.그러나 그 진상이 다 밝혀진 것은 아니다.어찌 보면 시작에 불과하다.74년 이후 28년간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과 가족들이 겪은 고통과 어려움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정부는 이제인혁당 사건을 재조사해 진상을 밝혀야 한다.그리고 억울하게 숨진 원혼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한다.이 과정에서 해당 기관들은 진실 규명에 최대한 협조해야 하며,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의 길도 열어 주어야 할 것이다. 인혁당 사건처럼 공권력에 의한 용공조작 및 심대한 인권침해 사건의 경우,과연 공소시효가 적용되어야 하는지 의문이다.반인륜적 인권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배제 문제도 공론화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 인혁당 재건위사건 유족들 “명예회복 다행…재심 청구”

    “지난 1974년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은 유신 반대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당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이라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공식 입장이 발표되면서 피해 유가족의 재심청구와 명예회복 요구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사건 관련자와 유가족들은 12일 규명위의 발표 직후 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조사내용을 바탕으로 재심을 청구해 법원에서 관련자의 무죄를 입증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건 발표 1년 만인 75년 사형당한 하재완씨의 아내 이영교(68)씨는 “30년 가까이 ‘간첩의 아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왔다.”면서 “늦었지만 진실이 밝혀져 죽은 남편과 가족의 명예가 회복된 것만도 다행”이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씨는 남편이 붙잡혀 간 뒤 재야·종교단체를 찾아다니며 억울함을 호소하다 중정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고 했다. 이씨는 “중정 수사관들이 이틀 동안 잠도 재우지 않고 ‘남편이 공산주의자임을 시인하라.’고 강요했다.”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천주교인권위원회의 문정현 신부의 감회도 남다르다.문 신부는 지난 75년 4월9일 인혁당 관련자들의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서울 서대문 구치소에 가장 먼저 달려간 사람 중 하나다.문 신부는 “당시 구치소 근처 응암동 로터리에서 사형당한 송상진씨의 시신을 빼앗아 가려는 경찰들과 싸우다 무릎을 다쳐 5급 장애인이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대통령 소속 규명위원회가 사건의 진실을 밝혀준 지금 순간이 너무나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사건 관련자와 유가족들은 지난 98년 11월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공동대표 이돈명)를 결성한 뒤 꾸준하게 추모행사와 명예회복 운동을 벌여 왔다.99년 4월에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촉구하는 1000인 선언을 갖고 25주기 추모문화제와 영화제 등을 열었다. 이세영기자 sylee@
  • ‘인혁당 재건위’ 사건 중앙정보부서 조작

    지난 1974년 당시 유신정부가 발표한 이른바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은 재야와 학생운동권의 유신 반대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이라는 사실이 국가기관에 의해 처음으로 인정됐다.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韓相範)는 지난 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돼 서울구치소에 수감중 사망한 장석구(당시 48세)씨 사건을 조사한 결과,“고문에 의한 증거조작,피의자 신문조서와 진술조서 변조,공판조서 허위작성,정부의 허위사실 유포 등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12일 밝혔다.이는 그동안 출판물과 언론보도 등을 통해 간간이 언급됐던 인혁당 사건의 조작 가능성을 국가기관이 공식 인정한 것으로 파문이 예상된다. 규명위는 이날 발표문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수사과정을 총괄한 것은 당시 중앙정보부”라면서 ‘중앙정보부장이 비상군법회의 관할사건의 정보수사와 보안업무를 조정 감독한다.’는 대통령 긴급조치 2호 10항에 따라 “수사 지휘는 중정 6국이 하고 조사는 경찰이 담당했다.”고 밝혔다.수사과정에서 잔혹한 고문이 가해졌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규명위는 “중정 수사관들과 중정에 파견된 경북도경 경찰관들이 몽둥이 찜질,물고문,전기고문 등을 가했다는 사실을 당시 수사관들과 구치소 교도관들을 통해 확인했다.”고 밝혔다. 규명위에 따르면 중정은 피의자 신문조서와 진술조서의 내용뿐 아니라 조사 장소와 조사일시를 허위로 기재했으며 검찰 조사 때도 수사관을 참여시켜 피의자를 협박·고문한 것으로 드러났다. 규명위는 또 당시 재판부가 피고인이 부인한 혐의사실을 정반대로 기록하거나 고문에 항의하는 피고인의 발언을 기록에서 누락시키는 등 공판조서를 허위로 작성한 사실도 밝혀졌다고 설명했다.당시 사건이 중정 수뇌부를 거쳐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됐다는 사실도 새롭게 드러났다.이와 관련,규명위는 “이 사건과 관련해 박 대통령의 서명이 담긴 문서를 직접 목격했다.”는 수사팀장 윤모씨의 진술을 공개했다. 이세영기자 sylee@
  • 국정원 표정/ “특별한 입장없어 적극 협조할 것”

    국가정보원은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가 인혁당 사건을 국정원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조작했다는 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하자 곤혹스럽다는 분위기다.국정원측은 진상규명위 발표 직후 긴급 회의를 갖고 언론 논평을 낼지 여부 등을 포함,대책 마련에 착수했으나 국정원측이 내놓은 결론은 “특별히 밝힐 입장은 없다.”는 것이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정원은 그동안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요청한 자료를 모두 제출하는 등 전적으로 협조했다.”면서 “의문사규명위원회가 이를 토대로 조사한 내용에 대해 국정원측이 별도 입장을 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향후 의문사 규명위원회가 관련자 주소 파악 등 추가 협조를 요청할 경우 적극적으로 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수정기자 crystal@
  • 활동종료 앞둔 한상범 의문사규명위원장 - “진실규명 막는 惡의 세력 있다”

    “여전히 진실을 감추고 왜곡하려는 세력이 있습니다.”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한상범(韓相範·68)위원장은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사무실에서 기자를 만나 “과거 부당한 권력을 행사했거나 권력에 기생해 부와 권세를 누렸던 ‘악의 세력’이 진실 규명을 막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64년 한일협정반대 교수단 서명을 주도한 이래 40년 가까이 법학자와 불교인권운동가로서 사회 참여에 앞장 섰다.지난 4월 양승규(梁承圭)위원장의 뒤를 이어 2대 위원장을 맡은 그는 “각계 인사를 만나 규명위 기한연장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한연장이 왜 필요한가. 기한 내에 모든 사건을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의문사처럼 중대한 사안을 미결로 방치하는 것은 의문사 특별법의 취지에도 어긋난다. ◆조사가 지지부진하다는 지적도 있는데. 보통 살인사건 하나가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3년이 걸린다.1년 9개월 동안 85건의 사건을 처리하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규명위에 접수된 사건들은발생한 지 상당한 기간이 경과했거나 발생당시 국가기관들이 은폐한 사건들이다.여건을 감안하면 그동안 30건을 해결한 것도 실망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가장 어려운 점은. 국가기관의 비협조도 문제지만,더 심각한 것은 국민의 의식이다.진실규명이 우선이고 화해와 용서는 그 다음이다.하지만 우리 국민은 권력자가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너무 쉽게 잊는다.‘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그 시절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상황논리를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인다.규명위조사를 거부하는 세력은 이같은 맹점을 잘 알고 있다.규명위의 조사시한까지만 버티면 영원히 진실을 묻어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허원근 일병 사건 관련 규명위의 발표내용을 부인하는 진술이 일부 언론에 실리고 있는데.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출현과 유지에 협력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사회 각 부문의 요직에 남아 과거청산을 방해하고 있다.이들은 과거 자신들이 비호했던 권력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는 규명위가 고사(枯死)하기를 바란다.하지만 규명위가 200여명의 참고인들을 대상으로 1년 넘게 조사한 사건을 불과 며칠 동안의 취재로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의문사특별법이 개정된다면 방향은. 3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다.첫째,규명위를 해체한 뒤 인권위법을 개정,인권위 안에 의문사 문제를 다루는 기구를 신설,조사를 맡도록 하는 것이다.둘째,의문사뿐 아니라 이에 준하는 모든 미결사건을 조사하는 새로운 기구를 만드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셋째,규명위를 존속시키되 압수수색이나 강제소환을 가능케 하는 등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방안이 있다. ◆의문사 규명의 역사적 의의는. 권위주의 정권의 치부를 청산하고 역사의 왜곡된 물길을 바로잡는 것이다.여기에 반발이 없을 리 없다.‘악의 세력’까지도 만족시키는 객관적 잣대란 없기 때문이다.악의 세력과의 비타협적 싸움은 계속돼야 한다. 이세영기자 sylee@ ■의문사규명위 활동 성과 - 故최종길교수 간첩누명 벗어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지난해 1월 공식 출범한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지금까지 85건의 의문사 사건을 접수,이 가운데 30건을 마무리지었다. 규명위는 그동안 최종길·김준배 사건 등 베일에 싸였던 사건의 진상을 밝혀냈지만 유족단체와의 마찰,내부의 불협화음 등으로 위원장과 임원들이 교체되는 진통도 겪었다. 규명위는 전국 민족민주 유가족협의회와 추모단체 연대회의 등이 지난 98년 11월부터 420여일 동안 의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국회 앞 천막 농성을 벌이는 등 오랜 산고를 거친 끝에 출범했다. 하지만 규명위 조사는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검·경을 비롯한 국가기관들이 “보존연한이 지나 자료가 폐기됐다.”,“국가기밀과 관련된 사항이다.”며 관련자료 제출과 참고인 조사에 불응했기 때문이다.강제구인과 압수수색등 강제 수사권이 없는 규명위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조사기간이 짧은 점도 계속 문제로 지적됐다.당초 의문사특별법이 규정한 조사기간은 불과 9개월.수사기관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은폐됐고,오래전에 발생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엔 터무니 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조사가 난관에 봉착하자 일부 유가족은 국가를 상대로 직접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등 불만을 드러냈다.규명위의 위상 등을 둘러싸고 정부 파견 조사관들과 갈등을 빚던 민간 출신 조사관들이 잇따라 사표를 내는 등 불협화음도 표면화됐다.이로 인해 초대 양승규(梁承圭)위원장 등 일부 위원과 조사관이 교체됐고,조사기간도 두 차례 법개정을 통해 올해 9월까지 연장됐다. 한편 지금까지 종결 처리된 30건 가운데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인정된 것은 박영두·최종길·김준배 사건 등 6건이다.지난 73년 유럽거점 간첩단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다 숨진 최종길 전 서울대 교수 사건과 97년 한총련 투쟁국장으로 경찰에 쫓기다 아파트에서 떨어져 숨진 김준배씨 사건은 규명위가 당초 조사결과를 뒤집고 사건의 전모를 밝혀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달 중간발표에서 군 당국의 자살결론을 뒤집은 허원근(許元根) 일병 사건도 군 의문사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새롭게 한 계기로 인정받고 있다.현재 조사가 진행중인 55건 가운데조사결과 보고가 끝난 것은 최석기·박융서사건 등 23건,보강조사중인 것은 허원근 사건 등 12건이다.그러나 장준하·이내창·박창수 사건 등 18건에 대해서는 관계기관의 비협조 등으로 아직 1차보고 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세영기자 ■민변등 의문사법 개정 촉구 - “권한 강화·활동기한 늘려야” 오는 16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시한을 앞두고 조사기간 연장과 위원회의 권한 강화를 요구하는 각계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규명위에 접수된 85건의 의문사 가운데 55건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이른바 ‘의문사 빅 5’가운데 장준하·이내창·이철규·박창수 사건은 국정원과 검·경의 협조거부로 진상규명 작업이 지지부진하다. 지난달 관련 자료가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규명위 위원과 조사관들이 잇따라 국정원과 기무사를 상대로 실지조사를 시도했지만 이들 기관의 완강한 거부로 조사가 무산됐다. 규명위 관계자는 “현행 의문사특별법이 규명위에 압수수색권,계좌추적권,강제구인권 등을 부여하지 않아 조사에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 “과태료 1000만원을 부과할 수는 있지만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한상범(韓相範)위원장은 최근 국회 공청회에서 “현재 진행 상황으로는 기한 내에 사건을 마무리지을 수 없다.”며 기한연장과 권한강화를 위한 3차 법개정을 촉구했다.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이덕우(李德雨)변호사도 위원회의 활동기한 삭제와 특별검사 조항 신설,재심청구 허용과 과태료 인상 등을 담은 의문사법 개정안 시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유가족 및 시민·사회단체도 이에 가세하고 있다.민주화운동 정신계승 국민연대와 의문사 유가족 대책위,민주노총 등은 지난달 20일 성명을 통해 의문사법 3차 개정을 요구했다. 박형규(朴炯圭)목사와 김삼웅(金三雄) 전 대한매일 주필 등 규명위 자문위원들도 최근 전체회의를 열어 기간연장과 권한강화,반(反)인권적 국가범죄의 공소시효 배제 등을 담은 건의문을 대통령과 정당 지도부에 전달했다. 그러나 정작 정치권에서는 김원웅(金元雄)·이창복(李昌馥) 국회의원 등이 긍정적인의사를 밝혔을 뿐,뚜렷한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고 있다. 이세영기자
  • “폭력범 동원 장기수 전향공작”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는 20일 지난 1970년대 유신정권 초기 중앙정보부 주도로 이뤄진 교도소 내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전향공작 과정에서 수감 중인 폭력사범을 동원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규명위 관계자는 “당시 정부 차원에서 ‘전향공작 전담반’을 만들어 같은 교도소에 수감된 폭력사범 등을 동원해 장기수들을 고문,전향을 강요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규명위에 따르면 73년 3월 법무부가 광주·대전·대구·전주의 교도소에 수감된 500여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전담반 50여명을 선발,같은 해 8월 각 교도소에 배치해 장기수들을 조사했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 중앙정보부가 전향공작 과정을 보고받고 이를 토대로 최종 전향여부를 판정해 시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세영기자 sylee@
  • 전前대통령 내일 출석 통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88년 사업주의 친인척 비리에 항의하다 구사대에 맞아 사망한 문용섭씨 사건과 관련,당시 사건 담당검사로서 규명위의소환에 불응해온 명동성(明東星) 인천지검 1차장 검사에게 동행명령장을 발부했다고 8일 밝혔다. 규명위는 “명 검사가 당시 회사측의 교사 사실을 알고도 고의로 입건하지않았는지,다른 공안기관과 협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등을 조사하기 위해지난 6월 두 차례에 걸쳐 출석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명 검사는 “합리적인 범위 안에서 규명위의 활동에 최대한 협조했다.”면서 “현직 검사에게 동행명령장까지 발부한 것은 명백한 월권행위”라고 반발했다.규명위는 이날 지난 75년 의문사한 장준하씨가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위해분자’로 분류됐으며,프락치를 통해 밀착감시를 당했다는 사실이 당시 중정 문서를 통해 드러났다고 밝혔다. 규명위는 또 당시 장씨를 담당했던 중정 6국5과의 박모 계장이 75년 3월31일 작성한 ‘위해분자 관찰계획 보고’라는 보고서에서 장씨를‘현 정책을비방하고 반체제 활동을 조장하는 인물’로 묘사하며 범법자료를 모아 처벌하겠다고 보고했다고 설명했다.한편 규명위는 5공화국 시절 강제징집 대학생에게 프락치 활동 등을 강요한 ‘녹화사업’과 관련,전두환 전 대통령을 불러 조사하기로 하고 10일 오전 9시30분 위원회 사무실로 나와달라는 출석요구서를 지난 6일 보냈다고 밝혔다. 이세영기자 sylee@
  • 北 서해충돌 유감표명/ 北 과거 유감 표명 사례

    그동안 북측이 군사적 긴장상황과 관련해 ‘유감’을 표명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았다.간접적인 유감 표명까지 포함해 대여섯 차례에 불과하다.특히 이번 김령성 북측 상급(장관급)회담 대표단장은 남측에 직접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해 2000년 남북정상회담 뒤 진전된 남북관계를 반영했다.그동안 북측의 대남 유감 표명 사례는 대부분 간접적 형식 또는 낮은 수준에서 이뤄졌었다. 다음은 그간 북한이 남한에 유감을 표명했던 사례들이다. ◇68년 1월21일 무장공비 침투사건= 72년 5월 김일성 주석이 방북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만나 이에 대해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었으며 우리 내부의 좌익맹동분자들이 한 짓으로 결코 나나 당의 의사가 아니었다.”고 유감 표명. 이후 올해 5월1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방북한 한국미래연합 박근혜 대표에게 “극단주의자들이 일을 잘못 저지른 것이다.미안한 마음이다.그때 그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응분의 벌을 받았다.”고 말함. ◇76년 8월18일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사흘 뒤 군사정전위 북한측 수석대표가 북한인민군 최고사령관의 “공동경비구역내에서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메시지를 유엔군 사령관에게 전달. ◇95년 6월27일 시아펙스호 인공기게양 사건= 전금철 북측 수석대표가 7월21일 이석채 남측 수석대표에게 전문을 보내 “아래 일꾼들의 실무적 착오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데 대해 유감을 표한다.앞으로 호상 그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데 대하여 언명하는 바이다.”라고 유감 표명. ◇96년 9월18일 동해안 잠수함침투사건= 12월29일 중앙통신과 평양방송을 통해 “막심한 인명피해를 초래한 잠수함 사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고 공개 발표. 박록삼기자
  • “진승현 자금 국정원서 썼다”국정원 前과장 증언 파문

    서울지검 특수1부(부장 朴榮琯)는 15일 MCI코리아 부회장 진승현(陳承鉉)씨로부터 5000만원을 받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의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 민주당 고문 권노갑(權魯甲) 피고인에게 징역 3년,추징금 5000만원을 구형했다. 서울지법 형사10단독 박영화(朴永化) 판사의 심리로 열린 이날 결심공판에서 권 피고인은 최후 진술을 통해 “중앙정보부에서 국정원까지 이어지는 악연 속에서도 유혹과 회유를 물리치고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면서 “얼굴도 모르는 진씨에게서 단 한푼도 받지 않은 만큼 진실에 따라 판단해달라.”고 말했다. 이날 공판에서는 ▲여권 실세의 국정원 인사청탁 ▲국정원의 ‘최규선 대책회의’ ▲진씨 자금의 국정원 특수사업 전용 등의 주장이 제기돼 파문이 일었다. 증인으로 출석한 국정원 정성홍(丁聖弘·수감 중) 전 경제과장은 “여권 실세들의 인사청탁이 국정원 김은성(金銀星·수감중) 전 2차장에게 철마다 들어왔고 그중에는 권 전 고문의 청탁도 있었다.”면서 “김 전 차장은 인사청탁을 참모들과 상의해 선별적으로 수용했다.”고 주장했다. 정 전 과장은 “2000년 7월 당시 최규선씨가 무기사업에까지 손을 뻗쳐 김전 차장등 간부들에게 골칫거리였다.”면서 “당시 국정원 간부들이 최씨처리를 위한 대책회의를 열었고,보고를 받은 국정원장은 김 전 차장에게 처리를 일임했다.”고 진술했다.또 “진씨는 국정원 특수사업을 위해 끌어들였고 사업이 잘 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권 전 고문과 민주당 김방림(金芳林)의원을 연결시켜준 것”이라고 밝혔다. 안동환기자 sunstory@
  • 이병형 前합참본부장이 회고하는 秘史/ 北 73년 “NLL 불인정”…해상 무력시위

    지난 6월29일 발생한 서해교전은 북방한계선(NLL)으로 빚어졌다.북한은 지난73년 ‘NLL은 무효이며 서해5도 지역을 통과하는 모든 선박은 북한당국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처음 주장,NLL논쟁의 불을 지폈다.이때부터 20년동안 NLL을 둘러싼 남북간의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73년 당시 이병형 합참본부장을 만나 NLL과 관련된 비화를 들어봤다. 1973년 11월초 국방부 합동참모본부장 바로 옆 작전회의실에는 예정에 없던 긴급 비상회의가 소집됐다. 한신(韓信·육사2기·작고) 합참의장을 비롯,이병형(李秉衡·76·육사4기)합참본부장,그리고 배옥광(裵玉洸·74·해사4기) 작전국차장 등 합참의 수뇌부들이 모두 모여 북한의 일방적 북방한계선(NLL) 파기선언에 따른 대응책을 긴밀히 논의했다. 이보다 1시간 전.평양방송은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내용을 전격 발표하면서 우리 군당국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서해5도가 북한군 통제하의 해역에 있으므로 앞으로 우리 영해에 있는 5개도서 출입시 사전 승인과 임검을 마땅히 받아야 하며,위반시에는 응당한 조치를 취할 것임을 남조선 당국에 엄중히 알린다….” 53년 정전협정 이후 그동안 묵시적으로 인정해왔던 북한이 서해상의 군사분계선이나 다름없는 NLL은 무효이며,앞으로는 자신들이 주장한 새로운 해상분계선에 의해 서해질서가 재편돼야 한다는 실로 엄청난 내용이었다. “당시 평양방송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하나는 NLL을 파기하자는 것이었고,다른 하나는 한강하구에서 서해상으로 향하는 일직선이 새로운 분계선이라는 것이었지요.이는 휴전 이후 잠잠했던 서해바다에 전쟁선포를 하는 것과 다름 없었습니다.” 이병형 전 본부장은 당시 상황을 ‘서해사태’라고 줄곧 표현했다. 이날 비상회의를 끝낸 이 본부장은 곧바로 유재흥(劉載興) 국방장관에게 올라갔다. “장관님,저들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서해5도를 당장 요새화해야 합니다.저들의 속셈은 서해5도를 고립화시켜 결국에는 자기네 영토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맞아,나도 그렇게 생각하네.어쩌면 좋겠나.” “제가 지금 당장 서해5도를 다녀오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73년 11월27일 배옥광 합참작전국차장과 김영찬(金泳燦·74·육사5기)국방부동원국장 등과 함께 해군의 고속수송함(APD) 2300t급 ‘81함’을 타고 백령도,대청도,연평도 등 서해5도 순시에 나섰다. 아,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전혀 예상치 못한 위급 상황이 벌어졌다.이 본부장 일행을 태운 APD함이 연평도에 잠시 들른 뒤 이날 저녁 백령도로 막 향하는 순간이었다.연평도 서쪽 약 6마일 해상쯤이었다. APD 함상 곳곳에 설치된 비상벨이 갑자기 울리더니 “전원 전투배치부터.”라는 함장(정현경 대령)의 다급한 목소리가 계속 하달됐다. 저녁식사 후 함장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이 본부장도 깜짝 놀라 일어났다.이때 함장이 뛰어들어왔다. “본부장님,위급상황이 벌어졌습니다.CIC룸(레이더실)으로 지금 빨리 가줘야 하겠습니다.” “함장,도대체 무슨 일인가?” “적함 출현입니다.포문을 우리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 본부장은 함장의 안내로 서둘러 레이더실로 올라갔다.동행했던 배 제독과 김 장군 등 합참 고위장성 10여명도 이미 도착해 전방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레이더 화면에는 NLL을 표시하는 선이 가운데에 그어져 있고 그옆에 APD함의 예정항로가 표시돼 있었다.그런데 APD함 예정항로 양쪽 옆에적 함정 6척씩,모두 12척의 북한 군함이 배치돼 있었다. “틀림없는 북한 군함들인가?” “예 그렇습니다,본부장님.” 아니 이럴 수가.저들이 어떻게 알고….위기일발이었다.북한군 함정이 이미 우리측 영해로 깊숙이 내려와 있는 데다 이 본부장 등 합참의 수뇌부들이 승선한 APD함을 완전히 포위한 것이 아닌가. “함장,이런 경우가 있었나?” “아닙니다.처음입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일단 인천쪽으로 항로를 돌린 뒤 백령도로 돌아가는 우회항로를 택하겠습니다.” “알았네.함장인 자네 의견에 따르겠네.” 이 본부장은 다시 함장실로 돌아왔다.제발 무슨 일이 없어야 할 텐데 하는 조바심으로 몸을 뒤척이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얼마쯤 지났을까.다시 비상벨소리가 들리고 “전원 전투배치부터.”라는 함장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시계를 보니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함장이 또다시 헐레벌떡 달려왔다. “본부장님,백령도 항구 앞쪽에 적함 두 척이 나타났습니다.” 우회항로를 통해 연평도 해상의 적함 12척은 따돌렸지만 백령도에 가까워지자 다시 새로운 적함들과 조우했다는 것이었다. 이 본부장은 다시 레이더실로 올라가 상황을 주시했다.함장의 말대로 북한군함 2척이 항로를 가로막고 있었다.불과 1마일도 안된 해상에서 기동시위를 벌이며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함장,비상조치는?” “우선,우리 구축함 1척을 백령도 근처에 출동시켰습니다.” “어떻게 할 셈인가?” “저들의 함포가 우리쪽으로 향해 있습니다.이대로 가면 전쟁으로 이어질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은?” “비상용 항구가 있습니다.지금 저들이 가로막고 있는 항구는 용기포항입니다.남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장촌부두가 있습니다.함선을 남쪽으로 향하는 척하다가 장촌 부두쪽으로 돌리겠습니다.” 이 본부장은 함장의 조치내용을 옆에서 들으며 가만히 밖을 응시했다.뇌리에 번개 같이 뭔가 스쳤다.‘세상에 이게 웬일인가.저들이 NLL파기선언을 일방적으로 하더니 이제 와서 우리를 어쩔 셈인가.납치?전쟁? 우리 일행의 서해5도 방문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 (나중에 밝혀진 일이었지만 이 본부장일행이 서해5도 지역을 방문할 때 관련 도서부대에 암호화하지 않은 평문으로 무전을 타전,북한 군당국에 도청당했다.) 잠시 후 새벽이 밝아오면서 어슴프레 함교 좌측 전방쪽에 큰 물체가 시야에 들어왔다.한국군 구축함 91함(충무함)이었다. 당시 해군 관계자에 따르면 “APD함의 비상 지원요청을 받고 공해상에 있던 구축함 한 척을 급파했다.”고 말했다. 당시 APD함에 동승했던 배옥광(전 동서울컨트리클럽사장) 제독은 “세월이 지나 생각은 잘 나지 않지만 북한 경비정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우리 측 구축함도 출동,서로 교전 상황까지 벌어진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전도봉(全道奉) 전 해병대사령관은 당시 백령도 해병부대 정보정찰 장교로 근무중이었다.그는 마침 이날 새벽 백령도 관측소(OP)에서 북한군 경비정이 우리측 APD함을 가로막고 시위기동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찰하고 있었다.이와 관련,전 전 사령관의 회고. “그날 새벽녘에 81함이 잠시 시야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대신 북한군 고속정 4∼5척이 갑자기 나타나 흰 물보라를 일으키며 백령도 앞바다를 고속 선회 항해했다.당시 백령도와 대청도 일대에는 즉각 비상이 걸렸으며 백령도에 설치된 각종 포문도 모두 열렸다.” 결국 APD함은 이날 아침 우회항로를 통해 장춘항에 도착했다.백령부대장 김치현(사망·해군간부 8기) 대령이 이 본부장 일행을 맞이했다. “본부장님,휴전 이후 이곳에 첫 공습경보가 내려져 있습니다.” “부대장,그게 무슨 말이오?” “적기 4∼5대가 백령도 상공에 출현했습니다.1,2초 간격으로 선회비행하다가 돌아가곤 합니다.” 해상의 적들을 피해 겨우 왔는데 이번에는 공중에서 위협하는 것이 아닌가.이 본부장은 레이더기지에 직접 가서 이를 확인했다.부대장의 말대로 백령도 상공 고공에 적기 3대가 떠 있었다.결국 우리측 공군기의 추가 발진으로 적기들이 돌아가면서 상황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와 관련,해군 기록에 보면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기술하고있다. “73년 11월27일부터 29일까지 이병형 합참본부장외 장성 10명이 서해 도서지역을 시찰하다가 북한 경비정 수척과 조우했다.81함은 2130t이며 정현경(전 해군참모차장) 대령이 함장이었다.81함은 2000년 12월 패함됐다….” 서울로 돌아온 이병형 본부장은 이튿날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임시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참석했다.이 자리에서 이 본부장은 서해5도의 요새화 필요성을 강조했다.그러자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이 “만약 서해5도가 요새화한다는 것이 저들에게 알려지면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논리로 반대하고 나섰다.결국 장시간 회의 끝에 이 본부장의 주장대로 서해5도의 요새화 계획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보고하기로 하고 일단락지었다. 이튿날 박 대통령은 이 본부장과 마주한 자리에서 ‘서해5도의 요새화는 NLL을 굳건히 유지시키는 것과 다름 아니다.’는 요지의 보고를 받고 흔쾌히 수락했다.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경제기획원장관을 불러 예산 40억원을 즉시 지원해주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탄생된 것이 ‘81프로젝트’였다.81함에서 입안됐다고 해서 이렇게 명명됐다.그런데 이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주한미군측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 본부장이 청와대에 다녀온 몇 시간 뒤 주한미군사령부 참모장이 찾아와“백령도를 굳이 요새화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이에 이 본부장은 “만약에 러시아가 하와이를 위협하면 가만히 있겠느냐.”는 논리로 맞섰다. 이 무렵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서해의 NLL을 인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서해 5개도서는 북한의 영토”라고 주장하곤 했다.그러던 차에 북한 군부는 한국군 고위 장성인 합참본부장 일행의 백령도 방문 사실을 미리 알고 기습적으로 고속정을 발진시켜 서해 5도가 자신의 영토임을 주장하는 무력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김문기자 km@
  • 美 ‘7·4테러’ 초비상

    미국 행정부가 독립기념일인 4일을 앞두고 경계강화에 들어갔다.미 전역이 축제준비에 들어간 가운데 테러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CBS의 ‘국민과의 만남’에 출연,“축제기간에 경계해야 한다는 보고가 많이 있다.”며 “그래도 모든 미국인들이 축제를 즐기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뉴욕타임스도 “독립기념일이라는 정치적·문화적 중요성 때문에 추가 경계가 필요하다.”고 보도했다. 미국민들도 테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전국 18세 이상 성인 1000명을 상대로 지난달 27∼28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과반수가 독립기념일에 추가테러 공격이 벌어질 수 있다고 대답했다. 응답자의 12%는 테러 가능성이 ‘매우 크다.’,45%는 ‘어느 정도 있다.’고 대답했다.테러가능성을 우려하면서도 응답자의 75%는 테러위협 때문에 워싱턴이나 뉴욕 같은 대도시를 피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일단 미 연방 및 주 정부 산하 대테러기관들은 테러취약지역과시설물에 대해 워싱턴에 준하는 보안경계조치를 내렸다.미 전역에 산재한 핵시설물,대형 구조물과 아파트,경기장,대형 선박과 항공기,유조차 등에 대한 보안경비가 강화됐다.해외 미 외교공관들에는 불꽃놀이와 미국인들이 모이는 장소로 알려진 곳에서의 기념행사는 자제하라는 주의가 내려졌다. 가장 경계가 강화되는 곳은 워싱턴이다.백악관,의사당,연방대법원,국무부,국방부,법무부,연방수사국(FBI),중앙정보부(CIA) 등 국가 주요기관이 운집해 있기 때문이다.또 독립기념일에 수십만명이 모인 가운데 퍼레이드,독립선언서 낭독식,독립기념 민속행사,대규모 야간 불꽃놀이 등이 실시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축제 동안 백악관과 인근 공원의 출입은 완전 차단된다.또 국회의사당에서 워싱턴 기념탑,링컨 기념관으로 이어지는 간선도로도 교통이 통제된다.축제가 열리는 국회의사당과 링컨 기념탑에 이르는 워싱턴 국립공원에는 20군데 특별 출입구가 설치되며 보안검색대와 함께 경찰요원만 2000명이 투입된다.워싱턴 외에 사람이 많이 모일 것으로 예상되는 곳에도 보안조치가 강화됐다.연방항공당국(FAA)은 뉴욕 자유의 여신상과 사우스 다코타주러슈모어산 국립추모관,세인트루이스의 게이트웨이 아치 등 3개 명소의 상공에 대해 일시적 비행제한조치를 내렸다.자유의 여신상은 오는 9월까지며 러슈모어산과 게이트웨이 아치는 2∼3일간 비행이 금지된다. 전경하기자 lark3@
  • “백악관도 9·11위험 알았다”

    [워싱턴 백문일특파원] 백악관도 9·11테러 관련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다고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보도,9·11 테러 방지 소홀 책임에 대한 불똥이 백악관으로까지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타임 최신호(6월17일자)는 백악관 대테러안보팀(CSG)은 9·11 테러 발생 8개월 전인 2001년 1월 이미 중앙정보부(CIA)로부터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알카에다 비밀 테러회의 사실을 브리핑 받았다고 대테러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그러나 CSG가 이같은 브리핑을 받은 시점이 클린턴 행정부 말기 때인지 또는 부시정권 초기였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이와 관련,클린턴 전 행정부와 부시 행정부 등 두 정권에서 모두 CSG를 이끌었던 리처드 클라크가 이번주 의회 합동청문회에서 증언한다. 2000년 1월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회의에는 9·11 테러범인 나와즈 알 하즈미와 할리드 알 미드하르 등이 참석,테러를 모의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은 테러를 모의한 후 미국에 무사히 입국한 것은 이들을 추적해온 CIA가 두 테러범의 이름을이민귀화국(INS)의 테러감시 대상에 올리지 않았기 때문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CIA는 2000년 1월 연방수사국(FBI)에 콸라룸푸르 테러회의를 통보했다며 FBI에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9·11테러 방지 실패 책임에 대한 합동청문회를 실시중인 의회의 한 정보관계자는 “백악관 CSG 요원들이 9·11테러 이전에 테러범들의 행동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 최교수 유족, 국가상대 손배訴

    지난 73년 중앙정보부에서 의문사한 고 최종길(崔鐘吉)서울법대 교수의 아들인 경희대 법대 교수 최광준(崔光濬)씨 등 유족들은 29일 국가와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씨와 수사관들을 상대로 1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지법에 냈다. 이들은 소장에서 “이 사건의 민사배상책임 소멸시효 5년이 지났지만 국가기관의 책임을 국가 스스로가 인정한 만큼 소멸시효의 완성을 내세워 배상 책임을 회피해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
  • “”73년 유럽간첩단사건은 조작”” 의문사규명위 재조사 발표

    지난 73년 옛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가 의문사한 고 서울대법대 최종길 교수가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던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사건'은 중정이 조작한 것이라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29일 밝혔다. 의문사진상규명위는 이날 “”유럽거점 간첩단 사건을 재조사한 결과, 이 사건은 한명의 간첩도 없는 '조작극'임이 드러났다.””며 “”조직총책으로 지목된 이모(네덜란드 유학생)씨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증거가 없어 유럽거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 사건은 유럽유학이나 출장을 다녀온 학자,공무원 등 54명이 유럽에서 북한 공작원과 연계,간첩활동을 했다고 중정이 발표한 사건으로 당시 최 교수 등 3명이 구속되고 17명이 불구속 입건됐다. 진상규명위는 “”이 사건에 연루된 인사 대부분이 67년 간첩단 사건인 '동백림사건'의 미체포자인 이씨와 관계 있는 이들로 중정은 이들을 모두 '간첩조직'으로 조작했으며 최 교수도 이씨와 중·고교 동창생이라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이 사건에 연루시킨 것으로 밝혀졌다.””고 덧붙였다. 이창구기자
  • 최종길교수 ‘공권력에 의해 희생’

    지난 73년 간첩혐의로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숨진최종길(崔鍾吉·당시 42세) 서울법대 교수는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위법한 공권력에 의해 희생됐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韓相範)는 27일 기자회견을 갖고 “최 교수는 강제로 간첩자백을 받아내려던 중정의불법수사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면서 “적극적 항거 외에도 불법적인 공권력 행사에 순응하지 않은 소극적인 저항 역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한 활동에 포함되는 만큼 최 교수의 죽음은 민주화운동과 관련이 있는 의문사”라고 밝혔다. 진상규명위는 또 “최 교수는 고문으로 의식불명인 상태에서 수사관들에 의해 7층 비상계단에서 내던져져 사망했거나 고문으로 사망한 뒤 수사관들에 의해 자살로 위장되는 등의 수법으로 타살됐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비록직접적인 타살이 아니라 하더라도 수사관들의 고문이 죽음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숨졌다.”고 덧붙였다. 진상규명위는 조사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 최 교수와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를 요청했다. 진상규명위는 진정사건 85건에 대한 조사를 벌여 지금까지 모두 16건을 결정했다.이 가운데 최 교수 사건 외에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공권력에 의해 발생한 ‘의문사’로 인정된 경우는 84년 청송감호소에서 재소자 처우개선을 요구하다 숨진 박영두씨 사건과 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보안사에서 조사를 받다 숨진 임기윤 목사 사건 등 2건이다. 이창구기자 window2@
  • [씨줄날줄] 아! 최종길 교수

    1973년 중앙정보부에서 사망한 최종길(서울법대) 교수가29년 만에 명예를 되찾았다.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한상범)가 “위법한 공권력의 직·간접 행사로 숨졌음이인정된다.”고 최종 결론을 내린 것이다.하나의 진실이 밝혀지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억울한 누명을쓰고 죽은 피해자와 그 가족을 위해서도 그렇고 역사를 위해서도 그렇다. 진상규명위는 “최 교수가 중정의 고문과 협박 등 불법수사에도 불구하고 사망 때까지 강요된 간첩자백을 하지 않았다.”며 “의식적·적극적 항거 외에도 권위주의적 공권력 행사에 순응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행위 또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한 활동’에 포함된다고볼 수 있는 만큼 최 교수 죽음의 민주화운동 관련성이 인정된다.”고 말했다.그리고 “고문으로 의식불명인 상태에서 수사관들에 의해 7층 비상계단에서 내던져져 사망했거나 고문으로 사망한 뒤 수사관들에 의해 자살로 위장되는등의 수법으로 타살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최종 판단을내렸다. 그나마 다행이다.어렴풋이 진상이 밝혀지고 고인의 명예가 회복됐으니 말이다.하지만 국외자의 이런 말이 피해자가족에게는 정말 야속하게 들릴지 모른다.어디론가 끌려가 돌아오지 않은 아들을 기다리는 노모,“아버지는 간첩이었고 양심의 가책으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에 어린 아들이 받았을 충격을 새삼 들먹일 필요도 없으리라.그 노모가 29년을 기다리다 생때같은 아들이 주검으로 돌아온 까닭을 모른 채 한달 전인 지난 4월에 타계했다지 않은가.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것은 다름 아니다.멀쩡한 대학교수를 고문해서 죽이고,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그에게 간첩의 오명을 씌운 범인들을 형사소송법상 공소시효(15년) 때문에 처벌할 수 없다고 하니 나온 말이다.자식을가슴에 묻은 노모,‘간첩의 아들’이라는 시선 때문에 주눅이 들어 자랐을 아들(광준·38세·경희대 법대 교수),형의 사인을 밝히기 위해 30년 가까이 뛰어다닌 동생 등 가족은 일찍이 범인들을 용서했다니 논외로 치자.반인륜 범죄의 공소시효를 없애야 한다는 비등한 여론을 가볍게여겨서는 안된다.반드시 범인들의 처벌만을 위해서가 아니다.이웃이 당하는 억울함을 외면하고 권력의 압제에 소극적으로 동조해온 양심의 피고인 우리 모두에게도 경종이 필요한 것이다. △ 김재성 논설위원 jskim@
  • 최교수 타살 인정 의미/ ‘독재폭력’ 국가차원 입증

    ‘의문사 1호’로 꼽혀왔던 최종길 교수의 죽음이 민주화 운동과 관계가 있고,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발생했다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은 독재정권의 폭력성·부도덕성을 국가기관이 직접 입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진상규명위는 그러나 구체적인 타살 방법 및 경위,죽음을 자살로 위장·은폐한 중정의 지휘체계와 책임자를 명확하게 규명하지는 못했다. 최 교수가 숨진 1973년은 박정희 정권이 장기독재를 위해 제정한 유신헌법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운동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진상규명위는 체제수호를 담당하던 중앙정보부가 명망가였던 최 교수를 ‘간첩 공작대상’으로 선택하고 중정에소환했다가 여의치 않자 고문을 자행했으며 이것이 죽음의 원인이라고 판단했다.또 최 교수가 비록 반체제 활동에적극 가담하지 않았지만 죽음에 이른 과정 자체가 유신체제에 항거한 민주화 운동이었다고 포괄적으로 해석했다. 진상규명위가 민주화운동을 넓게 인정함에 따라 결정이임박한 한총련 투쟁국장 출신 김준배씨 사망사건 등 다른진정사건도 ‘의문사’로 인정될 가능성이 커졌다. 진상규명위는 과거 중앙정보부와 검찰이 발표했던‘최 교수는 자살했다.’는 수사결과를 모두 뒤엎었다.그러나 누가 최 교수를 ‘공작 대상’으로 선정했는지와 사건의 최정점에 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규명하지 못했다. 민주화정신계승국민연대 이은경 사무처장은 “최 교수 사건의 핵심은 타살 및 사건 은폐에 대한 중정의 조직적인개입을 밝혀내는 것”이라면서 “총체적인 규명없이 의문사 인정 여부만 결정한 것은 미흡하다.”고 말했다. 진상규명위는 또 고문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당시 중정요원들에게 상해치사,폭행,허위공문서작성 등의 범죄 혐의가 있다고 인정했으나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고발 및 수사의뢰를 하지 않기로 했다. 이와 관련, 한상범 위원장은 “공권력이 저지른 반인륜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적용배제의 필요성을 담은 권고안을 낼 방침”이라고 밝혔다.최 교수의 아들 최광준(38) 교수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낼 예정이어서 반인권적 범죄에대한 공소시효 적용배제가 공론화될 전망이다. 이창구기자 window2@
  • “최종길 교수 자살 아니다”

    지난 73년 간첩 혐의로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던 중 의문사한 서울대 최종길 교수 사건과 관련,당시 최 교수를 조사했던 대부분의 중정 수사관들은 “최 교수가 간첩임을자백하지 않았고,자살하지도 않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는 30일 “최 교수를 직접 담당했던 차모씨와 김모씨 외에 10여명의 수사관들은 이같이 진술했으며,고문 사실도 인정했다.”고 밝혔다. 진상규명위는 또 “검찰 송치에 필요한 피의자신문조서,긴급구속영장,첩보보고서,수사보고서 등 모든 서류는 최교수가 사망한 뒤 12시간만에 중정 수사과 주도로 허위 작성됐다.”면서 “중정 수사관이 사고 직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찾아가 최 교수의 부검 원장을 강제로 빼앗으려 했다는 진술도 확보했다.”고 말했다. 진상규명위에 따르면 중정 수사관들은 최근 조사에서 “당시 경비가 철저해 최 교수 혼자 7층 화장실에서 뛰어내릴 상황도 아니었고,뛰어내리기 위해 밟고 올라갔다는 변기에 발자국도 없었다.”고 진술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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