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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정원 개혁방향은/ 정부 부처 출입관행 사라질듯

    노무현 대통령이 26일 새 정부의 초대 국가정보원장에 고영구 변호사를 지명함에 따라 국정원 개혁도 급물살을 탈 것으로 예상된다. ●개혁적인 국정원장 고 국정원장후보자는 개혁적인 법조인으로 꼽힌다.그는 변호사들이 잘 나서지 않던 때에 부천서 권인숙씨 성고문 사건의 변호를 맡았다.또 지난 1988년 출범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초대 회장을 지냈다.민변의 전신(前身)인 정의실천법조인회의 멤버이기도 했다. “앞으로 국정원을 어떻게 이끌어나갈 것이냐.”는 질문에 고 후보자는 “국회 청문회가 남아있다.”고 피해갔다.그는 노무현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같은 민변 창립 멤버지만,노 대통령은 주로 부산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자주 만난 사이는 아니다.”면서 “대선 이후에는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국정원장 지명사실은 이날 낮 12시쯤 이석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 통보했다고 한다. 고 후보자가 이헌재 전 재경부장관을 제치고,낙점된 것은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상징하는 ‘개혁 코드’를 맞추려는 뜻이 담겨 있다.재야 법조인을 통해 국정원의 개혁성을 부각시키고 불법 사찰과 도청 의혹 등 온갖 시비에 휘말려온 국정원을 정상화하겠다는 의도다.같은 민변 출신인 문재인 민정수석이 고 후보자를 적극 추천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국정원의 개혁방향 국정원은 국내정치쪽에 대한 정보수집은 거의 하지 않고,해외정보·대북·경제에 치중하는 쪽으로 역할이 바뀐다.이렇게되면 5·16 직후 국내 사찰 중심으로 설치된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바뀔 것으로 청와대는 기대하고 있다. 그동안 노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국정원 개혁 방향을 설파해 왔다..노 대통령은 지난 7일 장관과 수석들의 워크숍에서 “국정원은 동북아중심국가 건설을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연구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앞서 지난달 27일 장관인선 배경을 설명하는 자리에서도 “국정원은 한국의 비약적인 변화를 위해 여러가지 정보들을 새롭게 수집하고 해외차원에서의 이런 역할을 열심히 해서 국가이익을 높이는 데 봉사해야 한다.”고 언급했다.그러면서 “국정원은 권력이 아닌 국민을 위한 일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노 대통령은 또 지난 12일 박희태 대표대행을 비롯한 한나라당 지도부와 만찬을 하면서 “국정원은 앞으로 정치와 담을 쌓을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노 대통령은 당선된 이후 지금까지 국정원의 국내정보는 물론 국정원장의 주례보고도 받지 않았다.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국정원 직원들이 정부부처와 언론사를 출입하거나 담당해온 시스템도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그동안 국내정치 정보를 수집했던 직원들은 해외정보와 경제파트에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곽태헌기자 tiger@
  • 요즘 어떻게/“박상범 前 청와대 경호실장

    주말 TV드라마 ‘무인시대(武人時代)’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고려무인 이의방은 직책이 견룡행수(牽龍行首)다.대궐을 지키는 수장,즉 지금의 청와대 경호실장격이다.일부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을 지난 79년 당시 10·26에서 12·12사건으로 이어지는 파란의 역사에 비유한다.보현원(궁정동) 참살사건후 군인들끼리 좌충우돌하다 중방(30경비단)에서 정치판을 새로 짜는 장면이 흡사하기 때문이다. 10·26사건 때 궁정동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측이 쏜 M16 총탄 4발을 맞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나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은 박상범(朴相範·62)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두번의 군사정권과 김영삼 전 대통령 등 5명의 ‘청와대 어른’을 모시면서 최초의 문민 ‘견룡행수’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지난 98년 공직을 떠나 쭉 야인으로 지내온 ‘버릇’ 때문일까.그는 드라마 ‘무인시대’보다 오히려 ‘야인시대(野人時代)’를 즐겨본다고 말했다. 박씨는 야인생활 5년만에 최근 배재대학 겸임교수로 강단에 섰다.과목은 ‘인간관계론’이며 강의대상은 학부 3학년이다. 16일 오전 서울 방배동 평통장학회 사무실에서 만났다(그는 현재 재단법인 평통장학회장직을 맡고 있다). “매주 수요일 오후 2시간씩 대전으로 내려가 강의를 하게 됩니다.지난 주 첫 강의는 했지만 매 강의때마다 공부하는 심정으로 강단에 섭니다.요즘 젊은 학생들이 얼마나 명석합니까.” 2년전 환갑을 넘긴 박씨는 대통령 경호의 달인답게 머리에 핀 ‘세월의 꽃’을 제외하곤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는 몸가짐이었다.때문에 주변에서는 대통령 경호를 소재로 한 영화 ‘사선에서’의 냉혈적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곧잘 비유하곤 한다. 배재대학과의 인연은 지난해 여름 배재대학 초청으로 최고경영자과정에서 2시간 동안 ‘통일론’ 특강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강의과목이 ‘인간관계론’이라 처음에는 거절을 했지만 박씨의 ‘경험’만 풀어놓아도 훌륭한 강의가 될 것이라는 학교측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였다. 실제로 박씨의 경험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심장부에서 실타래처럼 무수히 얽혀져 있다.10·26과아웅산 사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을 비롯,박정희 대통령 시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경호실 주변의 비화 등 25년 가까이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경호했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한 산증인으로 꼽힌다. 공직 은퇴 후 5년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는 질문에 그는 “욕망을 털어버리려고,또 게으른 자신과 무던히도 많이 싸워왔다.”고 말해 산전수전과 공중전을 겪은 뒤 인생의 특수전을 치르는 달인을 연상케 했다.은퇴 후 골프를 배운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부언했다.골프 실력은 핸디13 정도.라운딩 멤버는 영원한 해병동지인 해군 간부후보 33기 동기생들이다.정치섭 고속도로 안성휴게소사장,이석호 서울대교수,정기인 한양대교수,강대인 방송위원장 등과 가끔 ‘필드 회동’을 한다.이때마다 재미를 돋우기 위해 타당 1000원짜리 내기를 한다고 귀띔했다. 최근 임명된 김세옥 신임 청와대 경호실장에 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그는 “김세옥 실장은 매사에 치밀하고 워낙 경호업무에 밝은 사람”이라면서 그와의 특별한 인연을 잠깐 공개했다.박씨는80년대 중반 청와대 경호처장 당시 22특경대,101경비단,수도방위사령부 관계자 등 경호실무자들의 모임인 ‘기러기회’를 주도했다.코드1(대통령) 행차 때마다 양 옆으로 기러기처럼 차들이 쭉 늘어서 경호를 한다고 해서 박씨가 고심 끝에 명명했다.이때 김 실장은 치안본부 경호경비과장으로 참여했다. “경호실장 자리는 한마디로 ‘고난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언제 어느 때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24시간 긴장해야 합니다.” 그는 현역시절을 잠시 회고하면서 “국가원수 다섯분의 성품이 모두 다르듯 경호 스타일도 조금씩 달랐다.”고 말했다.예를 들어 박 전 대통령은 무장한 경호실장이 늘 옆에 있는 것을 좋아했고 군사정권 때는 2∼3겹의 군경호,김영삼 정권 때는 수행과장 정도만 지근거리에 있게 했다고 귀띔했다.경호실장은 최소 한달 이내에 대통령의 성품을 세밀히 간파한 뒤 그에 맞는 경호기술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불사조’ ‘경호의 달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역사의 한가운데에 살면서 박씨가 얻은 별명들이다.자세가 워낙 흐트러짐이 없어 인상이 차갑다고 하지 않느냐고 하자 그는 “얼마전 나를 ‘경호하던’ 백구가 죽었을 때 집 앞마당에 직접 염까지 하고 묻었다.”는 말을 꺼냈다.마음은 차갑지 않고 정이 많다는 얘기였다. 박씨는 현재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83세의 노모와 부인,큰딸(의류디자인 박사과정),막내 아들(스포츠마케팅 박사과정)과 함께 지내고 있다. 하루 40분씩 헬스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으며 오래전에 선운동을 그만두어 가부좌 자세에서 공중에 ‘붕’ 뜨는 것은 할 수 없다며 웃었다. 김문기자 km@
  • 고건 총리지명자 지상청문회

    대한매일은 오는 20·21일 이틀간 예정된 고건(高建) 국무총리 지명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국회에서 선정한 청문회 증인들로부터 고 지명자를 둘러싼 의혹들에 대한 증언을 먼저 들어봤다.또 고 지명자의 직접 해명도 청취했다.증인들의 설명으로 그동안 제기됐던 갖가지 의혹들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그러나 차남 휘씨의 병역 문제 등 몇몇 사안에 대해서는 증인들이 취재에 응하지 않아 명확한 사실 여부를 가리는 데는 어려움이 따랐다. 1. 병역 의문점 ●본인의 병역문제 고 지명자는 1958년 갑종 판정을 받은 뒤 1960년 3월 대학을 졸업했다.이어 61년 12월 고등고시에 합격했으며,62년 5·16 군사정부에서 수습 사무관 발령을 받았다.문제는 고 지명자가 갑종 판정을 받았음에도 대학 졸업 뒤 왜 입영을 하지 않았으며,병역을 마치지 않고 어떻게 공무원에 임용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고의로 병역을 기피한 것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병적기록에 ‘미하령(未下令)’이라고 적힌 문구에 대한 해석도 영장이 발부되지 않았다는 의미와,발부됐으나 본인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엇갈린다. 이에 대해 고 지명자는 “영장이 나오지 않았으며,공무원 임용때는 군사정부여서 병역기피 사실이 있었다면 신규공무원으로 임용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증인으로 채택된 이상호 전 병무청장은 이와 관련,“4·19와 5·16 직후 병무당국이 병역 기피자들을 상대로 자수기간을 주면서 대대적인 색출작업을 벌였다.”면서 “그 때문에 당시 징집 자원이 한꺼번에 몰렸다.”고 말했다.그는 “98년 5월 국방위에 참석하기 위해 고 지명자의 병역 관련 서류를 검토한 결과 미하령(未下令)으로 확인됐다.”면서 “영장이 발부됐으나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는 추측도 있으나 고 지명자의 경우 영장이 발부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차남 병역문제 증인으로 채택된 주치의나 군의관,심지어 논문 지도교수까지도 차남 휘씨에 대해 함구하고 있어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지 않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휘씨의 병역문제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84년 7월26일 신체검사를 받아 현역판정을 받았고,85년 입영을 연기했으며,87년 5월2일 5급판정을 받아 제2국민역에 편입됐다는 것이 전부다.국회 인사청문회에 제출한 지명자 직계비속의 병역사항에 고 지명자는 ‘질병명 비공개’를 요구했으나 추후에 의혹이 잇따르자 ‘현대사회병’이라고 밝혔다. 고 지명자는 “차남이 11개월 동안 입원 치료를 했으며 이에 따라 재신검을 통해 현역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면서 “가장으로서 최소한의 프라이버시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다 구체적인 병명을 공개하고 싶지 않으며 의문을 제기한다면 주치의만큼은 알려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치의인 이승민(신경정신과 전문의)씨는 언론과의 접촉을 피했다.당시 군의관으로서 신검 소견서를 냈던 정남진씨도 “당시 자료를 봐야 기억이 날 것 같다.”며 즉답을 피했다. 차남의 논문지도교수였던 김종상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교수의 부인은 “(남편이) 내가 직접 가르친 아이인데 그때 몸이 아팠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 전했으나 김교수의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다. 최광숙 조승진 박승기황장석기자 bori@kdaily.com 2.10.26때 행적 고 지명자는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할 당시 정무2수석비서관이었지만 10·26 직후 3일 동안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의혹이 지난 98년 지방선거 기간 중에 제기됐다.특히 당시 국방장관을 지낸 노재현씨는 “장례를 치를 때까지 고 지명자를 보지 못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당시 고 지명자의 비서관이었던 백형환씨는 “고 후보자는 당시 본관에서 장례 준비를 하고 있었다.”면서 “잠적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백씨는 “청와대 본관과 신관이 분리돼 있었기 때문에 신관에 있던 사람들이 본관에 있던 사람들을 못 봤을 수는 있다.”면서 “고 지명자는 그때 3일동안 잠을 못자고 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나는 비표가 없어 신관에 있었고,본관에 가지를 못해 고 지명자를 본관에서 직접 볼 수는 없었다.”면서 “고 지명자는 거의 매일 한차례 이상 나와 직접 통화를 했으며,퇴근 무렵 사무실에 별일 없느냐고 전화를 했다.”고 증언했다. 아울러 그는“당시 정무 2수석은 총무처를 관장하는 자리여서 본관에서만 일했다.”면서 “노재현 국방장관처럼 가끔 청와대에 한번씩 들른 사람이 못봤다고 해서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고 지명자는 이에 대해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장이 직접 장의차 모델을 그려 보내줘 현대자동차에 장의차에 대해 문의하는 등 본관에서 가족들의 결정사항을 총무처에 지시하는 등 장례 준비를 했다.”면서 “워낙 경황이 없어 기억하는 사람이 적을지는 몰라도 터무니없는 의혹 제기”라고 밝혔다.(장의차는 현대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한자동차가 만든 것으로 확인됐다.이에 대해 고지명자는 “현대자동차에 조립중인 버스가 있는지 여부를 직접 확인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큰딸인 박근혜 의원은 “그 당시 경황이 없었다.”면서 “옆에 누가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고 지명자에게 어떤 지시를 한 기억이 있을 리 없다.”고 말했다.박 의원은 또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누구 보고 있으라 마라 지시를 했을 리도 없다.”고 말했다. 고 지명자 주변인사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10·26 이후 3일동안 고 지명자를 본관에서 직접 봤다는 증언은 나오지 않았다.따라서 청문회에서 고 지명자가 이를 직접 입증해야 할 것으로 보여 논란이 예상된다.한편,노재현 전 국방장관은 외유중이어서 직접 본인으로부터 증언을 듣지 못했다. 강동형 박정경기자 yunbin@kdaily.com 3.5.17이후 거취 청와대 정무수석이었던 고 지명자가 ‘비상계엄 확대는 군정’이라고 판단,사직서를 내고 집에서 칩거했다고 밝힌 데 대해 신두순 당시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최광수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해 비서진 가운데 누구도 그의 사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반박,논란이 되고 있다. 당시 고 지명자의 차를 운전했던 신판근(현 개인택시 운전기사)씨는 “17일은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비서는 일찍 퇴근했고 내가 밤 9시쯤 이송용 비서실장 비서관에게 사표서를 전달했다.”고 증언했다.신씨는 “당시 고 지명자는 미리 비서실에 이야기해뒀으니 하얀봉투를 갖다주라고 했다.”면서 “기사가 혼자 청와대에 들어갈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이 비서가 연락을 받고 사무실 입구에 나와 있었다.”고 증언했다.그는 “처음에는 봉투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나중에 그것이 사직서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황호항 경찰발전연구소 이사장(당시 치안비서관)은 “17일 퇴근해 집에 있었는데 고 수석이 전화를 해 청와대로 들어오라고 했다.”면서 “수석실에 도착하니 고 수석이 ‘계엄확대 비상국무회의가 열리는데 나는 참석하지 않고 김유후 법무담당 비서관을 대신 보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김유후 비서관은 비상 국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청와대로 가던 중 길이 막혀 참석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짐) 고 지명자는 그때 “백형환 비서의 책상서랍에 내 도장이 있는데 문이 잠긴 상태라 못 꺼내고 있다.”고 도움을 청해 황씨가 직접 드라이버와 망치를 가져다가 책상을 부수고 도장을 꺼냈다고 한다.그는 “내가 고 수석에게 도장을 주면서 보니 탁자 위에 사직서가 놓여 있었다.”면서 “내용은 못 봤지만 도장을 힘들게 꺼낸 것으로 봐 ‘사직서를 쓰는구나.’하는 생각을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고 지명자는 그 다음날부터 출근하지 않았으며,보안사·중앙정보부·경찰청에서는 ‘고건이 DJ와의 밀약 때문에 출근하지 않는다.처벌해야 한다.’는 정보보고가 올라왔다.”고 전하고 “며칠후 직접 고 수석의 집에 찾아가서 정보보고 이야기를 해줬더니 ‘어떤 말이 오가도 상관없다.내가 알아서 하니까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고 말했다. 고 지명자는 이에 대해 “당시 수석들은 국무회의에 잘 참석하지 않았으나 비서실장이 참석하라고 해 거부했다.”고 말했다.의혹을 제기한 신씨의 직접 증언은 듣지 못했다. 강동형 박지연기자 yunbin@kdaily.com 4. 재산.업무 스타일 고 지명자가 신고한 직계존비속의 재산 35억 6100만원(본인과 부인명의 13억 9000여만원)에 대해서는 국회에서 증인 선정도 하지 않았다. 취재 결과 장남과 차남 부부가 소유하고 있는 아파트와 연립주택 등은 모두 이들이 성인이 된 뒤에 구입한 것으로 확인됐다.한 측근은 “고 지명자가 공직자로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청렴성”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업무 스타일에 대해서는 “행정의 달인”이라는 찬사와 “중요한 것은 절대 결정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엇갈리고 있다.김진애 서울포럼 대표는 “서울시장 시절 고 지명자는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현안이 있을 때 반드시 당사자들을 모두 설득시킨 뒤 업무를 추진하는 치밀함을 보였다.”면서 “일부에서 ‘면피주의’라는 불만이 있었으나 이는 공무원의 일방적 시각에서 벗어나 여론 중심으로 가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고 지명자를 옹호했다. 김 대표는 그러나 “아쉬운 대목을 꼽으라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해 반대에 부딪히더라도 밀어붙였으면 했던 몇몇 사업들을 마무리짓지 못한 것”이라면서 서초구 원지동 추모공원이나 주거환경 개선 사업을 예로 들었다. 6·10민주화 항쟁 당시의 행적과 관련,최인기(호남대 총장) 당시 내무부 차관보는 “고 지명자는 시위대에 대한 공권력 투입의 경우 충돌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마련하도록 했고,그 맥락에서 명동성당의 공권력 투입도 반대했다.”면서 “시위대에 공권력을 투입하면 정부의 부담이 더 커질 것이라고 주장했었다.”고 회고했다. 최광숙 송한수 조현석기자 onekor@
  • ‘민청학련’ 관련자 盧, 잇따라 중용

    노무현 당선자가 ‘민청학련 사건’관련자를 거듭 중용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 내정자와 6일 청와대 인사보좌관에 내정된 정찬용 광주 YMCA 사무총장은 1970년대 대표적 민주화운동 중 하나인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이다.민청학련 사건이란 유신시대인 지난 74년 4월 중앙정보부가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전국적 민중봉기를 획책했다.”는 혐의를 씌워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중심으로 180여명을 구속·기소한 사건이다. 노 당선자 주변에는 민청학련 사건의 ‘핵심인물’이었던 유 정무수석 내정자를 비롯해 이철 전 의원,이강철 민주당 개혁특위 위원,부산지역 운동권의 ‘맏형’격인 김재규 부산민주공원 관장(부산 국민참여운동본부장) 등이 있다.민주당에는 노 당선자의 중국특사로 파견될 예정인 이해찬 의원과 장영달 국회 국방위원장,심재권 의원,원혜영 부천시장 등이 있다. 노 당선자가 인재등용에서 ‘개혁성’에 중점을 두겠다는 언급을 자주 하면서 이들의 중용 확률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문소영기자
  • [씨줄날줄]안하무인

    만약 조직에서 한 사람이 남이야 어찌 되든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어떻게 될까.한마디로 ‘왕따’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이 때문에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선인(先人)들은 남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방자한 태도를 ‘안하무인’(眼下無人)이라는 말로 경계했다. 제갈공명이 조조를 가벼이 본 것은 조조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허황된 공명심과 탐욕을 간파했기 때문이다.로마 공화정 말기의 최고 관직인 콘솔(집정관)에 오른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저)가 개혁정책을 밀어붙이다가 공화정 옹호파인 브루투스와 롱기누스에게 살해된 것은 1인 지배에 따른 오만과 오해가 직접적인 이유였다. 근자에 와서도 정치 깡패를 등에 업고 ‘부부통령’으로 호가호위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경호책임자 곽영주 역시 월권과 독선을 일삼다가 4·19 혁명 때 ‘발포 책임자’로 지목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그는 대법원 판결에서징역 3년을 언도받았으나 훗날 제정된 소급입법의 적용을 받아 다시 사형이선고됐다.안하무인이었던 그의 태도가 재심의 빌미가 됐던 것으로 알려졌다.또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불러온 10·26사건도 차지철 경호실장의 ‘방약무인’(傍若無人)했던 태도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방아쇠를 당기게 했다. 이런 탓에 인력 컨설턴트들은 한결같이 면접시 가장 경계해야 할 자세로 안하무인을 꼽는다.면접관들에게 불쾌감과 불안감을 준다는 것이다. 교수들이 올해 한국 사회를 상징하는 사자성어로 ‘이합집산’(離合集散)을,국제 사회를 가장 잘 묘사한 사자성어로 ‘안하무인’을 선정했다고 한다.‘텍사스 카우보이’ 부시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일방주의식 외교 행태를 빗댄 말로 볼 수 있다.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고 이후 전국적으로확산되고 있는 촛불 시위에서도 미국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이같은 정서가깔려 있다.지난해 뉴욕을 강타한 9·11테러도 따지고 보면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서 ‘차’‘포’를 휘두르며 독주하다가 ‘졸’에게 외통수를 당했다는 인식이 아랍권에서 광범위한 동의를 얻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팍스 아메리카니즘’의 기본 철학인 ‘잘된 것은내 탓’,‘잘못된 것은 네 탓’이라는 인식을 버리지 않고 있다.미국의 안하무인이 언제쯤 타협과 공존으로 바뀌게 될까.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
  • 중앙일보 정운경 화백 은퇴‘왈순아지매’ 퇴장 시사만화 1세대 막내려

    중앙일보에 장기연재되던 정운경(67)화백의 4칸 시사만화 ‘왈순아지매’가24일 자로 끝났다.이로써 김성환 화백의 ‘고바우 영감’,고 안희섭화백(1994년 타계)의 ‘두꺼비’ 등으로 대표되던 시사만화 1세대가 실질적으로 마감됐다.정 화백의 심정은 어떨까. “긴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그네가 툇마루에 앉아 신발끈을 푸는 심정입니다.” 24일 오후에 만난 그는 신문사 편집국 회의에 더 이상 참석하지 않아도 돼 점심때 반주를 한잔 했다고 밝혔다.말마따나 얼굴에는 엷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그는 ‘왈순아지매'로 승부건 자신의 인생을 “함경도 포수는 쌍발 엽총을 쏘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했다. ‘왈순아지매’는 1955년 그가 월간지 ‘여원’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국내최장수 연재를 기록한 시사만화.대한일보(63∼67년)와 경향신문(67∼74년),중앙일보(74∼현재)로 옮겨다녔지만,30대 중반의 괄괄한 아줌마를 통해 세상에 대한 촌철살인의 비판을 잃지 않았다. 경북 안동 출신인 정 화백이 만화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중학교 시절 노트를 온통 4칸 만화로 채웠던 그다.어렵던 시절 동국대 경제학과에 입학해선 책값이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만화를 여러 잡지에 싣기 시작했고,51년 ‘코주부’ 김용환 화백의 문하생이 되어 본격적으로 만화를 그렸다. 그는 시사만화가로 이승만 정권부터 김대중 정권까지 8개의 정부를 모두 경험했다.가장 그리기가 어려웠던 시절은 박정희 정권이었고,전두환 정권은 ‘박통 시절’에 버금갔다.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간섭이 적어 편안해졌고,문민정부시절에는 만화의 소재가 다양해지는 등 상상력을 넓힐 수 있어서 좋았다.국민의 정부에선 정부로부터 전화 한통 받아본 적은 없지만,우회적이고 지능적인 간섭들이 적잖았다고 한다. “중앙정보부 등 권력기관의 압력을 피해 만화를 그려놓고 도망가기도 했는데,석간 신문이 나온 뒤 난리통이 되는 바람에 한때 위장병을 앓기도 했다.”며 웃음지었다.만화 소재를 얻기 위해 퇴근길에 여의도의 집까지 1시간남짓 걸어다니며 건강을 되찾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만평이 창문 1개로 세상을 내다본다면,4칸 만화는 세상을 더 넓게 보는‘만화 수필’”이라는 정 화백은 “지금은 4칸 만화가 신문에서 사라지는추세지만,사회적 필요성마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라도,아니 곧 부활할 것으로 믿는다.”고 자신했다. 글·사진 문소영기자 symun@
  • ‘인혁당 사건’ 재심 청구/한승헌씨등 변호인단 78명

    유신시절 대표적 인권침해 사례로 국내외적으로도 ‘수치스러운 재판’으로 기억되고 있는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의 당사자와 유가족들이 명예회복에 나섰다.[대한매일 11월23일 23면 보도]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공동대표 이돈명)는 10일 기자회견을 갖고 ‘인혁당 사건’과 관련,사형이 집행된 도예종씨등 8명에 대한 재심청구서를 서울지법에 냈다. 이번 재심청구에는 74년 당시 ‘인혁당 사건’ 변론을 맡았던 한승헌 변호사를 비롯,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천주교인권위원회 소속 변호사 등 모두 78명이 변호인단으로 참여했다. 대책위가 제출한 재심사유의 증거로는 ▲증거없이 중앙정보부의 주도로 사건이 조작된 점 ▲관련자들이 고문에 의해 자백을 했다는 점 ▲공판조서가허위로 작성된 점 등이 있다. 홍지민기자 icarus@
  • 이라크 “알루미늄 튜브 수입 시도”/핵폭탄 우라늄 원심분리에 필요한 재료

    이라크 정부 관리들이 재래식 로켓 제작에 사용할 목적으로 알루미늄 튜브를 수입하려고 시도했음을 유엔 사찰단에게 처음으로 시인했다고 미국 CNN방송이 2일 보도했다. CNN은 이같은 사실을 지난달 19일부터 바그다드에 체류해온 유엔 사찰단 선발대의 한 고위 간부가 이라크측 관리들로부터 직접 전해들었다고 소개했다.이 이라크 관리는 6차례나 알루미늄 튜브를 구입하기 위해 시도했다고 구체적인 횟수까지 들었다고 CNN은 전했다. 알루미늄 튜브는 핵폭탄 제조 공정의 우라늄 원심분리에 꼭 필요한 재료로,이라크 정부는 이를 손에 넣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는 것이 그동안 미국이 꾸준히 주장해온 내용이었다.따라서 이라크 정부의 실토는 오는 8일 대량살상무기 보유 현황 자진 공개를 앞두고 앞으로 만만찮은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전망된다. 이라크측은 그러나 이같은 알루미늄 튜브 구입 노력은 좌절됐으며,이 튜브가 핵무기 제조 프로그램에 사용될 수 있다는 미국의 주장도 사실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다. 하지만 이라크가 알루미늄 튜브 구입을 시도한 것은 유엔 경제제재안을 위반한 사실을 시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유엔은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를 풀면서 이라크가 무기 개발과 제작을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며 이를 적발당하면 어떤 제재도 달게 받겠다는 협약을 맺은 바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이라크가 왜 이 시점에서 알루미늄 튜브구입 노력을 시인했는지는 의문이다. 이 관리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간부에게 이 튜브가 핵무기 제조 프로그램의 우라늄 원심분리를 위한 것이 아니며 다만 재래식 로켓 프로그램을 제조하는 데 필요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미 중앙정보부(CIA) 분석가 출신인 켄 폴락은 “이라크인들은 유엔 제재안을 위반했다고 실토하는 편이 핵무기나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려 했다는 점을 시인하는 것보다 훨씬 ‘덜한’ 위반행위라고 여긴 것 같다.”며 “그들은 미국이 전쟁에 돌입할 만한 명분을 갖지 못하게 만들어야겠다는 희망 하나 때문에 기꺼이 유죄 청원을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CNN은 이라크 관리들이 주장해온 정도의 규모라면 우라늄 원심분리에 쓰일정도는 아닌 것으로 무기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사찰활동 재개 닷새째를 맞은 이날 바그다드의 알 카라마 군수업체 등에서는 미사일·생화학무기 등이 제조되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사찰했다. 그러나 1일 미국과 영국 전투기들이 비행금지구역 안에 있는 남부 바스라의 한 석유회사 시설을 공습해 4명의 민간인이 숨지고 27명이 부상한 사건과관련,사찰단과 이라크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고 CNN은 전했다. 나지 사브리 이라크 외무장관은 이날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미·영 전투기의 비행금지구역 내 폭격은 “야만적이고 테러리스트적인 침략”이라고 비난하면서 “안보리가 (유엔)헌장 39조에 따른 의무를 수행해줄 것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영국 외무부는 그러나 이날 후세인 정권이 그동안 저지른 고문과 강간,인권유린 행위를 폭로하면서 비행금지구역이 ‘깡패정권’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임병선기자 bsnim@
  • 선택2002/국정원 대수술 ‘예약’/李.盧.權폐지.개편론 주장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가 2일 “대통령이 되면 국가정보원을 폐지하겠다.”고 발언함으로써 유력 후보들이 한결같이 국정원 폐지 또는 개편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어느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도 불법 도청 의혹과 국내 정치사찰 의혹을 받고 있는 국정원 기구 등에 대한 전면적인 수술이 불가피해진 셈이다. 이 후보는 도청 의혹을 받고 있는 국정원에 대해 “규정된 직무 외 기능을모두 없애겠다.”고 단언했다.대신 국가이익을 위한 ▲해외정보 수집 및 테러방지 기능 ▲간첩수사 기능 등 두가지 업무에 전념하도록 중립적이고 경쟁력있는 첨단 정보기관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것이다.감사원 감사 등을 통한견제도 받게 하겠다고 공약했다.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도 지난달 30일 국정원의 도청 논란이 거듭 제기되자 국정원의 명칭을 ‘해외정보처’로 바꾸겠다고 다짐했다. 임채정(林采正) 정책위의장은 “새로운 국정원의 위상은 해외정보에 치중하고 국내 정보는 대공·산업 정보에 국한한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민주노동당 권영길(權永吉) 후보도 국정원을 폐지하는 대신 해외정보수집기구를 신설하고 국내 수사기능은 검찰과 경찰이 맡으면 된다고 강조했다.국민통합21 정몽준(鄭夢準) 대표는 후보 사퇴 이전에 국정원을 전면 개편,대통령직속 대외정보국과 총리실 산하 국가수사국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정원은 1961년 5·16쿠데타가 발발한 뒤 김종필(金鍾泌) 현 자민련 총재의 주도로 신설된 중앙정보부가 그 전신이다.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81년 전두환(全斗煥)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나쁜 이미지를 벗고자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정치 사찰 등악명은 여전했다. 98년 현 정부들어 국가정보원으로 세번째 개명하고 국내·보안 기능을 해외·국내·대북 기능으로 확대,개편했으나 다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역대 집권자들이 모두 정보기관의 대수술을 약속했으나 결국 이름만바꾸는 수준에 머물렀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김경운기자 kkwoon@
  • [사설]유엔사 남북교류 막아선 안돼

    판문점 장성급회담의 유엔사측 대표인 제임스 솔리건 미군 소장이 28일 “정전협정 규정상 군사분계선(MDL) 통과는 반드시 유엔사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면서 “북측이 유엔사의 승인을 계속 배제하려 든다면 금강산 육로관광 등 남북 교류협력 사업이 제대로 될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성 발언을 했다.솔리건 소장의 말대로라면 12월 중 시작될 금강산 육로 시범관광이 차질을 빚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한반도가 아직 정전협정 체제하에 있으므로 솔리건 소장의 주장이전혀 일리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한다.그러나 솔리건 소장의 언급은 정전협정의 정신이나 관례,현재의 상황 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또 발언의 의도가 북한에 대한 경고용이거나,최근 남한의 반미감정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MDL 통과문제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다.1953년 발효된 정전협정 제1조는 ‘군사정전위의 허가없이 군사분계선 월선 금지’를 규정하고 있지만,서언에는 ‘규정들의 의도는 순전히 군사적 성질에 속하는 것’이라고 못박고 있다.금강산관광 등 경제협력을 위한 MDL 통과는 분명히 군사적 성질이 아니다. 솔리건 소장의 발언은 그동안의 관례도 무시한 것이다.1972년 남북적십자요원들,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박성철 전 북한총리,김일철 북한 인민무력부장 등 수많은 인사들이 MDL를 통과해 남북을 오갈 때도 명단만 통보했고 유엔사가 받아들인 것이 관례였다.20여년 동안 ‘허가나 승인’이 없었던 것이 관례였다.더욱이 군사정전위는 1991년 이후 한번도 열리지 않았고,1994년북한과 중국대표 철수로 사실상 그 역할이 축소된 상태다.이런 점들을 고려해 남북 당국과 유엔사는 남북교류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MDL 통과 문제를 마찰없이 전향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 ‘이문동 국정원’ 역사속으로

    음지의 ‘정보사관학교’로 알려진 국가정보원 소속 국가정보대학원(구 정보학교)이 이달 말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현 위치에서 경기도 성남시 분당지역으로 이사를 한다. 이에 따라 1966년 12월 중앙정보부 본청이 이문동에 들어서면서 시작된 ‘이문동 정보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5일 관계당국의 고위 관계자는 “그동안 국가의 기간 정보요원을 양성해온 정보학교를 이달 말까지 새로운 곳으로 옮길 예정이다.”면서 “이전을 앞두고 전·현직 직원들을 대상으로 7.4공동성명 발표장소 등 역사의 현장을 관람케 하고 있다.”고 밝혔다.정보대학원 관계자는 “주로 야간을 이용,통신시설 등 비밀장비와 서류 위주로 이삿짐을 우선 옮기고 있으며 예정대로 이말 말까지 이사를 다 마칠 계획이다.”고 말했다. 이사 후 정보대학원 부지(8000여평)와 건물은 원래의 주인인 문화재청에서 인수,내부 수리 등을 거쳐 내년부터 3년 동안 예술종합학교 미술관으로 사용된 뒤 본래의 모습인 능역지역으로 복원된다. 이 일대는 조선 20대 임금 경종의 계비인‘선의왕후’의 묘 ‘의릉’이 자리해 정부가 지난 70년 사적 제204호로 지정했다. 김문기자 km@ ■국가정보대학원은 어떤 곳/ 국가 정보맨 양성 ‘음지의 사관학교' 서울 이문동의 국가정보대학원 주변에는 요즘 새벽마다 007작전을 방불케하는 이삿짐 수송작전이 긴밀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문동의 정보대학원은 1972년 이후락(李厚洛)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북한을 다녀온 뒤 7.4공동성명을 발표했으며,또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과 수교하기 전 언론인은 물론 각 부처 공무원들이 안보교육을 받았던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이사를 앞두고 주목을 받고 있다. ◆현 정부 들어 정보학교 출신들 대거 약진 98년 2월 이종찬(李鍾贊)씨가 국가안전기획부장에 취임하자 전현직 안기부 직원들은 “드디어 정보사관학교 1기 출신(공채 정규과정)이 정보기관 최고의 수장에 올랐다.”고 의미있게 한마디씩 했다.또 이구동성으로 앞으로 정보학교 정규과정 출신들이 대거 약진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같은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이종찬 국정원장에 이어 인사권을 이어받은 임동원(林東源) 국정원장은 2000년 6월 정기인사때 김은성 제2차장을 비롯해 비서실장,감찰실장 등 원내 요직에 정규과정 8기 출신들을 포진시켰다.이를 두고 국정원에서는 처음으로 검찰과 비슷하게 기수도입 인사를 단행했다고 평가했다.올 6월 인사때에도 8,9기 출신에 이어 국정원 주요 직책에 정보학교 10∼11기 출신들이 속속 차지했다. 전직 국정원 관계자는 “다른 조직과 달리 정보학교의 정규과정 출신들이 상대적으로 눌려 왔었던 것은 군 등 특채출신,그리고 일부 정치권 인사들이 발탁됐기 때문이다.”면서 “그러나 최근 들어 정보사관학교 출신인 정규과정 기수별로 인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고 말했다. 정보학교는 66년 12월 이문동 본청사와 함께 중앙정보부 조직편제(교장은 1급)중 하나로 출발했다.1기생은 이종찬씨를 비롯,20명가량 입교했는데 대부분 현역군인이었다.지금까지 정보학교에서 배출된 정규과정만 40기가량 배출됐으며 현역에서 떠난 사람도 약 2000명에 이른다. ◆정보학교에서는 어떤 교육훈련을 받나 국정원의 일반직 공채시험(7급)은 1년에 한번꼴로 시행된다.매년 8월을 전후해 해외,북한,국내,수사,외사·보안,통신,전산,어학 등에서 적정인원을 뽑는다.서류전형,필기시험,면접시험 등을 거쳐 합격되면 정보학교에서 1년동안 정해진 교육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교과목에는 필수 기본과목외에 정보요원이 되기 위한 엄격한 체력훈련도 받아야 한다.태권도,유도,합기도 등 최소한 2∼3개의 유단자 자격을 따야 하고 특등사수에 준하는 사격훈련까지 받는다.특히 공수부대에서 일정기간의 위탁훈련을 통해 고공낙하 훈련과정도 무사히 통과해야 한다.교육훈련은 합숙과 출퇴근을 병행한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무사히 마치면 국가정보원 직원법(제15조)에 따라 국정원장 앞에 가서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신고하면서 정식 기간요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본인은 국가안전보장 업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으로서 투철한 애국심과 사명감을 발휘하여 국가에 봉사할 것을 맹서(盟誓)하고,법령 및 직무상의 명령을 준수·복종하며,창의와 성실로써맡은 바 책무를 다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같은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중앙정보부 시절에는 교육과정을 마친 신입 직원을 어두운 암실에 집어넣고 선서를 하게 했다. ◆정보학교에서 국가정보대학원으로 변경 97년 국가정보대학원 설립법안이 제정되면서 기존의 국정원 편제조직중 하나였던 정보학교를 국가정보대학원으로 문패를 바꿔 달았다.기간요원 훈련 및 교육을 전담했던 수준에서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정보 보안 및 범죄수사 분야에 대한 연구,국정원 직원에 대한 직무교육,국가기본 정보정책 및 전략의 연구·분석 업무를 관장토록 범위가 넓어졌다.정보학교가 ‘군사관학교’라면 정보대학원은 ‘국방대학원’의 기능과 비슷하다. 정보학교는 원래 65년 1월 김형욱(金炯旭)중앙정보부장과 김윤호(金潤鎬)비서실장 등 중정 고위간부들이 미 중앙정보부(CIA)를 처음 방문했다가 정보요원 아카데미를 견학한 뒤 한국에도 비슷한 학교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출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문기자 km@ ■이문동청사 건립 비화/ 美CIA ‘미로' 벤치마킹 공사중 긴급 설계변경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이문동청사는 남산분실이 세워진 지 5년뒤인 1966년 12월에 준공됐다.행정구역상 성북구 석관동과 이문동 일부를 포함,모두 10만 2000여평의 부지위에 본청을 비롯,정보학교와 여러 동의 부속건물 등이 들어섰다. 이 가운데 정보학교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은 95년 현재의 내곡동 본부로 모두 옮겨갔다. 이문동청사 설계와 관련,당시 중정부장 비서실장 등을 지낸 김윤호(예비역장성)씨는 “이문동청사는 64년말 완성된 설계도를 토대로 65년 1월부터 공사에 착수했으나 65년 2월 CIA건물을 참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돼 부랴부랴 설계를 변경하게 됐다.”고 술회했다. 그는 또 모든 정보기관의 건물은 전문화된 스파이들조차 쉽게 파악하지 못하도록 미로형식의 구조물로 신축하는 것이 관례라면서 만약 당시 CIA관계자의 귀띔이 없었다면 이문동청사는 보안이 허술한 일반 사무실처럼 건축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시 중정의 고위간부로 청사신축을 직접 지휘했던 김모(예비역 장성)씨도 “65년초 김형욱 중정부장 일행이 미국에 다녀온 뒤 기존의 설계를 갑자기 변경하고 서둘러 공사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이같은 배경에는 당시 김 부장과 김윤호씨 등 3명이 65년 1월초 월남파병 막후교섭을 위해 미국의 CIA를 방문했다가 우연히 관련정보를 얻은데서 비롯된다. 이때 이들은 콜비 극동국장(베트남의 CIA책임자를 지낸 뒤 70년대 중반 CIA국장을 지냄)과 미 국무부 관계자 등을 만나 1억 4000만달러의 군사원조 등 월남파병에 대한 최종 협의를 마쳤다.그런 다음 김씨가 CIA 건물을 따로 견학하면서 곳곳의 특징을 깨알같이 메모했고,결국 한국에 돌아와 김 부장과의 논끝에 막 공사중인 기존 설계를 수정·변경하게 됐다는 것이다. 김문기자 ■국정원 자리 ‘요상하네' 서울 내곡동에 있는 국가정보원으로 가다 보면 ‘헌인릉’이라는 입간판과 마주치게 된다. 풍수지리학자들은 국가정보원 자리는 이상하게도 옛날부터 ‘무덤’과 인연이 많다고 말한다.1966년 이문동에 세워진 중앙정보부 건물은 경종 임금의 계비 ‘선의왕후’가 묻힌 ‘의릉’에 자리잡았고 95년 신축된 내곡동 건물은 태종 이방원의 무덤인 헌인릉을 바로 옆에 끼고 있다. 공교롭게도 새로 들어설 국가정보대학원 주변(분당구 석운동 야산)에도 개인묘지 2∼3개와 조선시대때 양반가문의 묘지 1개가 인근에 위치해 있다고 풍수학자들은 전한다. 이와 관련,풍수연구가 오모씨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길이 다를진데 서로가까이 있거나 길이 얽힐 경우 복잡한 일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면서 “산소 옆에 주택을 짓지 않는 것은 예부터 불문율로 내려오고 있다.”고 지적했다.정보기관의 특성상 외진 곳에 있는 무덤가가 보안에는 용이하지만 집터로는 적합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난해 각종 ‘벤처게이트’가 터지면서 김은성 전2차장,김형윤 전 경제단장,정성홍 전 경제과장 등 국정원 간부들이 줄줄이 구속되기도 했다. 김문기자
  • 박근혜 한나라 돌아가나

    정몽준(鄭夢準) 의원의 ‘박근혜(朴槿惠) 모시기’ 구상에 적신호가 켜졌다.거듭된 구애(求愛)에도 박 의원의 냉담한 반응이 요지부동인 탓이다. 경보음은 지난 20일 정 의원측의 접촉 시도가 또다시 무산되면서 보다 뚜렷해졌다.오후 정 의원측 국민통합21의 강신옥(姜信玉) 창당기획단장이 전화를 걸어 박 의원과 통화를 시도했으나 무위에 그쳤다.박 의원이 받지 않은 것이다.물론 답신도 없었다. 이에 따라 박 의원과의 연대를 낙관하던 정 의원측도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김재규(金載圭) 전 중앙정보부장을 변호한 강 단장의 거취만 정리되면 매듭이 풀릴 것으로 기대하며 강 단장 스스로 백의종군 의사를 밝혔으나 박의원이 꿈쩍도 않자 “연대는 물 건너간 게 아니냐.”는 분위기가 팽배해지고 있다.강 단장은 21일 “아무래도 박 의원의 마음이 한나라당쪽으로 기운듯 하다.”며 당장 뾰족한 수가 없음을 토로했다. 박 의원 주변에서는 박 의원이 한나라당 복당(復黨) 결심을 굳혔고,한나라당과도 이미 얘기가 끝났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한나라당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와 주요당직자들은 오는 26일 부산지역 후원회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10·26 23주기를 맞아 동작동 현충원을 찾기로 일정을 바꾼 것도 박의원과의 관계개선 차원이다. 진경호기자 jade@
  • 서울대 ‘최종길 추모교실’ 만든다

    1973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다 숨진 고(故)최종길(당시 42세) 교수를 추모하는 ‘최종길 교실’이 서울대 법대에 생긴다. 한인섭 서울대 교수는 17일 서울 을지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관에서 열린 최종길 교수 29주기 추모식에서 “그동안 진상규명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점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추모교실과 고인의 얼굴을 담은 동판을 제작해 설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 교수는 이어 “내년 30주기 추모행사는 서울대 법대가 주도적으로 나서 과거 독재정권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을 함께 기리는 합동 추모제 형식으로 치르기로 했다.”면서 “이같은 방안을 최근 법과대 교수회의를 통해 확정했다.”고 덧붙였다. ‘최종길 교수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모임’(대표 이수성)과 ‘최종길 교수명예회복 추진위원회’(공동대표 김승훈)가 마련한 이날 행사에는 아들 최광준 경희대 교수 등 유가족과 국민대 이광택·서울대 안경환 교수 등 제자 20여명,한상범 의문사진상규명위 위원장과 박형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민주당의 김근태·조순형의원 등 지인들이 참석했다. 추모식 직후 열린 추모문집 발표회에서는 최 교수를 애도하는 제자와 지인들의 글과 지난 5월 의문사진상규명위가 발표한 결정문이 공개됐다. 김수환 추기경은 발간사를 통해 “의문사진상규명위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진실은 드러나지 않았다.”면서 “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관련자들의 양심의 목소리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세영기자 sylee@
  • 연대 걸림돌 강신옥 퇴진시사 - 鄭·朴 이젠 손잡을까

    정몽준(鄭夢準) 의원과 박근혜(朴槿惠) 한국미래연합 대표의 연대에 걸림돌이 돼온 강신옥(姜信玉) 전 의원이 16일 백의종군 의사를 밝혔다.정 의원이 추진하고 있는 신당 ‘국민통합21’의 창당기획단장을 맡고 있는 강 전 의원은 이날 “박근혜 의원을 존경하며,같이해야 할 분으로 생각한다.”며 “정의원과 박 의원의 연대에 있어서 내가 문제가 된다면 자리도 내놓겠다.”고 말했다. 강 전 의원은 과거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金在圭) 전 중앙정보부장의 변론을 맡았던 인물로,그동안 박 대표는 그를 핵심측근으로 둔 점을 문제삼아 정 의원과의 연대를 거부해 왔다.특히 지난 15일에는 기자간담회를 통해 “아버지를 시해한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을 핵심측근으로 둔 정 의원의 국가관이나 정체성은 도대체 뭐냐.”며 노골적인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강 전 의원의 백의종군 의사표명에도 불구하고 박 대표는 여전히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본인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언급할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고 측근이 전했다.그는 또 “강 전 의원 문제는 연대에 있어서 한부분일 뿐”이라고 말해 정 의원의 보다 적극적인 입장표명을 요구했다. 진경호기자 jade@
  • 오피니언 중계석/ 분단의 벽 넘어 새관계 정립을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가 17일 한국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하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전개와 국제적 위상’을 주제로 한 국제 학술심포지엄에는 당초 재독 학자 송두율 교수도 발제자로 선정돼 참석할 예정이었다.그러나 송 교수는 국가정보원이 요구한 준법서약서 작성을 끝내 거부해 이번에도 입국하지 못했다.그가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에 미리 보낸 주제 발표문 ‘분단과 민주화의 변증법’을 요약해 소개한다. 지난 74년 발표한 ‘인혁당사건’이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날조된 사건이었음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확인됐다. 그동안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폭력의 진상이 이렇게나마 밝혀질 수 있는 상황이 온 것은 분명 민주화의 중요한 징표라고 본다. 당시 권력집단에 의해 자행된 대부분의 사건은 분단 상황을 빙자한 반인륜적 범죄였다.이런 점에서 분단은 ‘구조적 폭력’의 기본요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분단을 매개로 해 성립한 이런 폭력 구조는 공권력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특별히 눈여겨 살펴야 할 문제는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거시적 관점에서 미시적 분석으로 폭력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옮겨가는 분위기다. 오늘날 가정·학교·직장 등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폭력이 모두 분단에서 뿌리내렸다는 식의 환원주의적 논리도 문제지만,‘우리 안의 파시즘’과 같은 논리를 근거로 전개되는 또 다른 의미의 환원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상황은 마오쩌둥(毛澤東)의 ‘모순론’의 주(主)모순과 부(副)모순 관계처럼 서로 천이(遷移)할 수도 있고,응축돼 고정될 수도 있다. 작은 매듭도 있고 큰 매듭도 있다. 우리의 분단 상황도 세대가 지나면 자연적으로 사라질 이산가족의 슬픈 이야기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석 달 전 서해교전의 사례처럼 앞으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긴장과 때로는 피를 흘리는 갈등 속에서 살아야 할는지 모르는 큰 매듭이다. 지역적 공간의 의미를 별로 중시하지 않는 ‘세계체제론’의 관점에서 보면 휴전선은 일국주의적 시각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상징처럼 보인다. 그러나 존재는 결국 나를 위한 존재라는 현상학적 또는 실존적 의미에서도 분단은 한민족에게 기본적인 ‘몸의 철학’으로 남아 있다.분단은 구체적 체험이다. 이같이 큰 매듭을 어떻게 푸느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쾌도난마 식이냐,아니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풀어야 하느냐의 주장은 계속 맞서 왔다. 사실 분단이 갖는 문제의 복잡성을 하나의 요소로 환원하기에는 무리가 많다.그러나 수없이 많은 요소들을 가능성의 영역 안에 제한하려는 체제가 본질적으로 지니는,이른바 ‘복잡성의 환원’ 때문에 선택은 필수적이다. 분단이라는 경험공간 속에 갇혀 사는 제한성 때문에 결국 불완전한 선택을 하겠지만,이제 우리는 선택하고 결정할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체제와 주체가 갖는 상호배타적인 인식을 통합하려는 노력이 헛수고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흡사 업(業)이 숙명론이나 결정론이 아니라,인간에게 도덕적 행위를 권하는 적극적인 측면을 지닌 것처럼,분단이라는 우리 민족의 업도 분단극복을 위한 행위주체의 적극성을 발양하는 계기로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한반도의 내부 조건과 주변 상황은,남북 민중에게 분단을 넘어 삶의 새로운 관계 체계를 수립할 수 있는 귀중한 전화(轉化)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심재억기자 jeshim@
  • 鄭 “박근혜대표 연대1순위”

    정몽준(鄭夢準) 의원 진영에서 한국미래연합 박근혜(朴槿惠) 대표와의 선(先)연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잡음이 날 소지가 많은 민주당‘후단협’ 등과의 다자(多者)협상에 앞서 박 대표와 연대,대세몰이에 나서자는 구상이다. 정 의원 진영의 한 전직 의원은 9일 “정치권 밖 얘기를 들어보면 ‘정몽준-박근혜 카드’만큼 파괴력이 높은 방안도 없다.”며 “박 대표와의 연대문제를 본격 추진할 단계”라고 말했다. 정 의원도 9일 후단협측에 대해 “지향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개인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박 대표에 대해서는 대화의 문을 열어 놓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정 의원측은 지난 8일 박 대표가 “정 의원 진영의 면면을 볼 때 나와는 정치관이나 국가관이 많이 다른 것 같다.”고 말한 데 대해서도 연대를 거부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연대를 위해 정 의원의 ‘결단’을 요구한 것으로 보고있다. 정 의원 측근은 “박 대표와의 연대가 성사된다면 지지율 상승을 바탕으로 상당한 흡인력을 갖게 돼 후단협등과의 연대협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며 “문제는 연대를 성사시킬 공약수인데 앞으로 이를 집중 논의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박 대표와의 연대는 그러나 난제도 적지 않다.우선 최근 들어 정 의원의 ‘모호한 태도’에 대한 박 대표측의 불신이 높아가고 있다.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金在圭) 전 중앙정보부장의 변호를 맡았던 정 의원측 강신옥(姜信玉) 신당추진위원장에 대한 박 대표의 감정의 골도 여전하다. 정 의원도 이를 의식한듯 “박 대표와 만나면 이것저것 얘기해야 하는데….”라며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정 의원측은 10일 정 의원이 부산 방문을 마치고 귀경하는 대로 주말쯤 지도부 회동을 통해 진로문제를 최종 조율할 예정이어서 결과가 주목된다. 진경호기자 jade@
  • ‘한국인권상’ 공동수상 조지 오글목사 “”인혁당사건 조작사실 처음부터 알아””

    “실제 존재하지도 않았던 ‘인민혁명당’이라는 용어 자체를 쓰지 말아야 합니다.” 30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한국인권문제연구소(소장 裵泰一)로부터 ‘제5회 한국인권상’을 받은 조지 오글(73·한국명 오명걸) 목사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조작된 것이란 사실은 처음부터 모두 알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70년대 이후 한국의 인권신장을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은 오글 목사는 이날 인권변호사 이덕우(李德雨·45)씨와 공동 수상했다. 74년 고문조작설을 처음 제기했던 오글 목사는 행사 직전 기자들과 만나 당시 ‘남산’으로 일컫던 중앙정보부에서 17시간 동안 심문을 받던 상황을 자세히 소개했다.그는 “‘공산주의자’라고 자백하라.”는 중정의 요구를 거절하자 “인혁당 주동자들을 위해 기도했지만 그들이 공산당원인 줄 몰랐다.”는 거짓 조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았다고 회고했다. 결국 유신정권은 ‘선교사가 강의를 하면 비자법에 위배된다.’는 군색한 이유로 그를 미국으로 쫓아냈다. 이날 행사에 함께 참석한 부인 도로시오글 여사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韓相範)의 조사기한이 종료된 것과 관련,“수많은 사람이 독재정부 때문에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히거나 목숨을 잃어 그 가족과 친지가 평생 고통을 겪고 있다.”면서 “조사기한이 반드시 연장돼 그들의 마음 속 아픔을 달래주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오글 목사는 북한의 인권상황에도 관심을 보였다.그는 “과거 남북한이 ‘안보’라는 이유로 인권탄압을 자행했다.”면서 “인권신장을 위해 평화적 접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해 현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지지했다. 오글 목사는 전날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직후 기자를 만났을 때보다 한국어를 한층 능숙하게 구사했다.하룻만에 한국어 실력이 되살아날 정도로 오글 목사의 애틋한 한국 사랑은 남달랐다.“6·25전쟁 직후 강가에서 빨래하던 한국이 이렇게 변하다니 딴 세상 같다.”는 방한 소감에서도 그의 소회를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최근에는 미국에 살고 있는 젊은 한국인들이 고통스러웠던 한국근대사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도록 8편의 단편소설로꾸민 ‘20세기 한국이야기’를 출간했다.얼마 전에는 인터넷을 통해 한국 소식을 접하고 ‘태풍 루사가 전국을 강타해 걱정’이라는 이메일을 지인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오글 목사 부부는 고(故)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영길 장로등 국내 지인들을 만나고,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마련한 해외 민주화인사 초청 행사에 참석한뒤 다음달 21일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박지연기자 anne02@
  • ‘인혁당 구명운동 추방’ 美시노트 신부 새달 방한 “27년 옥살이 끝낸 느낌”

    “마치 27년 동안의 억울한 옥살이에서 풀려난 느낌입니다.” 지난 75년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의 고문 조작설을 제기하고,구명운동을 벌이다 유신정권에 의해 강제 추방당한 제임스 시노트(73·한국명 진필세)신부는 24일 대한매일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지난 세월을 ‘옥살이’에 비유했다. 그는 추방 이후 10년 남짓 미국,일본,유럽 등지의 교계 지도자들과 만나고 강연활동을 벌이며 사건의 진상을 알렸다.지금은 현직에서 은퇴,미국 텍사스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중앙정보부가 사건을 조작했다는 의문사진상규명위의 발표는 실로 놀라운 뉴스”라면서 “TV를 통해 소식을 전해듣고 ‘사필귀정’이라는 한국의 고사성어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시노트 신부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뛰어든 것은 74년 각계 인사를 방문,구명운동을 벌이던 수감자의 부인들을 만나면서부터다.이들과의 만남을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으로 기억하는 그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라는 영감을 불어 넣어준 사람들”이라고 돌아봤다.이후 1년 남짓 사형수 가족들과생사고락을 같이했다. 75년 4월10일 사형수들의 사체 인도를 거부하는 경찰과 시노트 신부가 벌인 실랑이는 너무나 유명하다.경찰은 고문사실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사체를 유족에게 넘기지 않고 벽제 화장터로 직행하려 했다.이에 격분한 시노트 신부가 장의차 바퀴 밑에 누워버리자 경찰은 그를 발길질하며 마구 끌어낸 뒤 화장터로 차를 몰았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시노트 신부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고,75년 4월 ‘비자갱신 거부’라는 카드를 꺼냈다.그는 “관계 당국에 따졌지만 소용이 없었다.”면서 “한국을 떠나기까지 단 이틀이 주어졌다.”고 전했다.주한 미대사관측이 한국의 실정법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면 추방은 면하게 해주겠다며 회유했지만,시노트 신부는 이를 일축했다. 그는 출국 직전 사형수 가족들을 만나 “끔찍한 범죄행위를 목이 쉬도록 알리겠다.”고 다짐했다.이역만리에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 두 차례나 경찰에 체포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그러나 그는 “어찌 사형수와 그 가족들의 고통에 비길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시노트 신부는 미국 메리놀 신학교를 졸업한 뒤 61년 인천 답동성당의 보좌신부로 부임,섬주민을 위한 의료활동을 벌이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그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초청으로 다음달 14일 방한하면 함께 눈물을 흘렸던 유족들부터 만나겠다고 밝혔다. 이세영기자 sylee@
  • JP “인혁당사건과 무관”

    자민련 김종필(金鍾泌) 총재가 1974년 인혁당 사건에 자신이 연관된 것처럼 일부 언론 만평 등에 묘사되자 “사실과 다르다.”면서 적극 해명에 나섰다.김 총재는 13일 “인혁당 사건 당시 국무총리를 지내고 있었으나,당시 사건은 대통령 직속인 중앙정보부가 맡아 처리한 것으로 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김총재는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조차 나중에 알았다.”면서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잡도록 지시했다고 유운영(柳云永) 대변인이 전했다.김 총재는 또 무소속 정몽준(鄭夢準) 의원과의 연대설에 대해서도 “식사를 한번 같이한 것일 뿐인데도 마치 합당을 약속한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며 사실무근이라고 강조했다. 유 대변인은 “인혁당 사건 당시 김 총재는 비록 총리였지만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는 다소 소원한 관계였던 것으로 안다.”며 “인혁당 사건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에게 안타까운 심경을 갖고 있던 터에 마치 자신이 연루된 것처럼 보도되자 크게 상심해 있다.”고 전했다.앞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韓相範)는 1974년 유신정부가 발표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은 재야와 학생운동권의 유신반대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지난 12일 발표했다. 진경호기자 jade@
  • ‘인혁당재건위’ 죄없는 옥살이 7년 임구호씨/“뒤늦은 규명 땅속 선배에 죄송”

    “오로지 민주화와 통일을 외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선배들이 오늘 너무나 그립습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죄없이’7년10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던 임구호(林久鎬·54)씨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임씨는 12일 28년만에 국가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을 독재정권의 조작사건으로 인정하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를 들었다.그리고 길고 긴 터널을 지나온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국가가 진실을 인정할 때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당시 숨진 민주화운동 선배들과 모진 고문과 수감생활을 견딘 동지들의 한이 이제야 풀리나 봅니다.” 1974년 4월30일 오후 3시쯤 대구에서 학원강사를 하던 임씨의 집에 중앙정보부 요원 3명이 들이닥쳤다.영문도 모른 채 중정 대구분실에서 끌려간 임씨는 간단한 기초조사를 받은 뒤 다음날 서울 남산의 중정 분실로 이송됐다. 중정 요원들은 임씨에게 강요한 범죄사실은 단 두가지였다.하재원이 작성한 북한의 대남방송 청취 노트를 보았느냐는것과 데모를 사주했느냐는 것이었다.경북지역의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하재원씨는 당시 서도원,여정남씨 등 8명과 함께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75년 4월9일 사형당했다. 자백을 거부한 임씨에게는 표현할 수 없는 공포와 고통을 몰고오는 ‘전기의자’ 등의 고문이 뒤따랐다.결국 고문을 견디다 못해 요구하는 대로 자백했다.재판과정에 이를 다시 부인했지만 재판정에서 최후진술은 채택되지 않았다.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죄목조차 제대로 모른 채 수감생활을 하던 임씨는 공소장을 보고서야 ‘인혁당 재건위’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붙잡히기 직전에 나왔던 인혁당 사건 중간발표 때만 해도 내 이름이 빠져 있었고,당시만 해도 후배들에게 시위를 자제하라고 당부하는 입장이어서 내가 사건에 연루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경북대 재학 시절부터 인혁당에 연루된 희생자들과 민주화운동을 벌여온 임씨는 “당시에는 아무리 정당한 민주화운동이라도 지하운동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이어 “순수한 민주화운동선후배의 인간관계를 체제전복 조직으로 엮고,사법 살인까지 감행했던 우리의 어두운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도 잠이 오지 않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임씨는 82년 3월 당시 전두환 대통령 취임 1주년 기념 특사로 풀려나왔다.출소 직후 사형당한 선배 서도원씨의 딸 서전희(50)씨와 결혼,다시 민주화운동에 투신해 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다. 해마다 사법 살인이 일어난 날이면 악몽에 시달린다는 임씨는 “이제 이 악몽에서 풀려난 것 같다.”면서 “그러나 아직 청산하지 못한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생각하면 웃을 수만은 없다.”며 씁쓰레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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