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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북방송 멈추자 北도 전파 방해 중단”… 김정은 APEC 초청 가능성도

    “대북방송 멈추자 北도 전파 방해 중단”… 김정은 APEC 초청 가능성도

    북한이 우리 측의 대북 방송을 막기 위해 내보내던 ‘방해용 전파’ 송출을 멈춘 것으로 파악됐다. 최근 국가정보원이 대북 라디오·TV 방송을 중단한 데 따른 조치다. 대북 유화 조치에 북한이 매번 상응하는 움직임을 보이며 정부는 대화 재개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모습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지난 23일 취재진과 만나 “지난 22일 밤 10시를 기해 북한이 내보냈던 10개의 방해 전파수 송출이 중단됐으며 2~3개만 남았다”고 밝혔다. 이어 “이같은 조치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며 “상대도 우리를 예민하게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평가했다. 국정원은 1973년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북한 지역으로 내보냈던 인민의 소리·희망의 메아리·자유FM·케이뉴스·자유코리아방송 등의 송출을 이달 들어 순차적으로 중단했고, 지난 14일 밤 12시 TV 애국가를 끝으로 모든 송출을 멈췄다. 이 고위 관계자는 “대남·대북 방송은 체제 대결의 상징”이라며 “기존 대북 심리전 방송 담당 조직은 앞으로 안보 위협 탐지와 조기 경보 및 우리 국익 현안에 대한 글로벌 공감대 확산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새롭게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 동서해상 표류 북한 주민 송환 등의 조치에 대해 북한은 직접적인 입장 표명은 하지 않으면서도 대남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거나 송환 주민들을 마중 나오는 등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도 당장은 아니더라도 남북 대화 재개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에 오는 10월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초청하거나 이를 계기로 북미 또는 남북미, 남북미중 정상 간 대화 등 ‘빅 이벤트’가 성사될 수 있다는 전망도 일부에서 나온다. 통일부 당국자는 24일 “논의 중인 사항이 없고 북한은 APEC 회원이 아니므로 원칙적으로 정상회의 초대 대상이 아니다”라면서도 “다만 최근 관례에 따라 의장국 주도로 비회원국을 초청해서 비공식 대화를 개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동맹국들에 중국 견제를 위한 역할 강화를 주문하고 있는 미국이 지속적으로 ‘동맹 현대화’ 논의를 제기하고 있어 정부도 입장을 정하는 데 고심할 것으로 보인다. 홍지표 외교부 북미국장과 지난 10~11일 방한한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국 케빈 김 부차관보 간 한미 국장급 협의를 비롯해 최근 주요 계기마다 미측 관료들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역할 재조정 등의 동맹 현대화 방안에 대한 구상을 거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정보는 국력이다’… 국정원, 김대중·노무현 때 원훈 다시 쓴다

    ‘정보는 국력이다’… 국정원, 김대중·노무현 때 원훈 다시 쓴다

    국가정보원이 기관의 지향점을 담은 원훈을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의 ‘정보(情報)는 국력(國力)이다’로 복원했다고 17일 밝혔다. 윤석열 정부에서 사용한 과거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 때의 원훈을 새 정부 들어 바꾼 것이다. 이날 복원된 원훈은 김대중 정부 시기인 1998년 5월 직원 의견 수렴과 국민 공모를 거쳐 채택됐던 원훈이다. 과거 중정과 안기부 시절을 통틀어 40년 가까이 썼던 ‘우리는 음지(陰地)에서 일하고 양지(陽地)를 지향(指向)한다’를 처음 바꾼 것으로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서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한 문구다. 국정원은 “국민주권정부 시대를 맞아 국민의 국정원으로 발전해 나가자는 의지를 반영하고, 실사구시 관점에서 국익·실용을 지향하는 정보의 중요성이 잘 담긴 해당 원훈의 복원을 결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원훈을 새긴 원훈석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를 바탕으로 당시 제작된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길이 5.6m, 높이 2.7m, 두께 1m 크기의 화강암 재질이다. 이종석 국정원장은 이날 열린 제막식에서 “이 원훈을 다시 세우는 이유는 자명하다”면서 “나라 안팎의 난관을 헤쳐 나갈 우리에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필요한 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정보 지원으로 안보와 국익을 뒷받침하는 국정원의 책무와 역할이 이 원훈 속에 다 담겨 있다”며 “직원 모두가 이 원훈을 마음에 새겨 정보 역량을 한층 강화하고 국익 수호에 매진하자”고 당부했다. 국정원 원훈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10월 ‘자유(自由)와 진리(眞理)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으로 바뀌었고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6년 6월에는 ‘소리 없는 헌신(獻身), 오직 대한민국 수호(守護)와 영광(榮光)을 위하여’가 사용됐다. 2021년 6월 문재인 정부 때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바뀌었다가 1년 뒤 윤석열 정부에서는 처음 썼던 원훈으로 되돌아갔다.
  • 국정원 원훈, 김대중·노무현 때 ‘정보는 국력이다’로 복원

    국정원 원훈, 김대중·노무현 때 ‘정보는 국력이다’로 복원

    국가정보원 원훈이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의 ‘정보(情報)는 국력(國力)이다’로 복원됐다. 국정원은 17일 원훈석 제막식을 개최했다고 밝혔다. 제막식에는 이종석 국정원장과 직원 대표들, 전직 국정원 직원 모임인 양지회의 장종한 회장이 참석했다. 복원된 원훈은 김대중 정부 시기인 1998년 5월 직원 의견수렴과 국민 공모를 거쳐 채택된 ‘2대 원훈’으로 국가발전 원동력으로서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옛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 때까지 ‘우리는 음지(陰地)에서 일하고 양지(陽地)를 지향(指向)한다’가 부훈으로 줄곧 쓰였다. 이후 국가정보원으로 개칭 후 김대중 정부에서 처음 바뀐 것이 ‘정보는 국력이다’였다. 국정원은 “‘국민주권정부’ 시대를 맞아 ‘국민의 국정원’으로 발전해 나가자는 의지를 반영하고, 실사구시 관점에서 국익·실용을 지향하는 ‘정보의 중요성’이 잘 담긴 해당 원훈의 복원을 결정하게 됐다”고 했다. 원훈석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를 바탕으로 당시 제작된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길이 5.6m, 높이 2.7m, 두께 1m 크기의 화강석 재질이다. 이 원장은 제막식에서 “이 원훈을 다시 세우는 이유는 자명하다”며 “나라 안팎의 난관을 헤쳐 나갈 우리에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필요한 말”이라고 했다. 이어 “정보 지원으로 안보와 국익을 뒷받침하는 국정원의 책무와 역할이 이 원훈 속에 다 담겨 있다”며 “직원 모두가 이 원훈을 마음에 새겨 정보 역량을 한층 강화하고 국익 수호에 매진하자”고 했다. 국정원 원훈은 이명박 정부에서는 ‘자유(自由)와 진리(眞理)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을, 박근혜 정부에서는 ‘소리 없는 헌신(獻身), 오직 대한민국 수호(守護)와 영광(榮光)을 위하여’를 각각 사용했다. 문재인 정부 중 5대 원훈에 해당하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다시 바뀌었으나 윤석열 정부에서는 중정·안기부의 원훈으로 되돌아갔다.
  • 김재규 재심 시작… 여동생 “10·26이 국민 100만명 희생 막았다”

    김재규 재심 시작… 여동생 “10·26이 국민 100만명 희생 막았다”

    “오빠(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가 막지 않았다면 우리 국민 100만명 이상이 희생됐을 겁니다. 10·26 사건은 내란이 아니라 국민의 희생을 막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0·26 사건’으로 사형당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형사재판 재심이 16일 시작됐다. 1980년 5월 김 전 부장이 사형당한 지 45년, 재심이 청구된 지 5년 만이다. 이날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 이재권)는 김 전 부장의 내란목적살인 등 혐의에 대한 재심 첫 공판기일을 열었다. 재판에는 재심을 청구한 김 전 부장의 셋째 여동생 김정숙씨가 출석했다. 김씨는 “10·26 재심 신청을 인용해 역사적인 재판을 시작하는 대한민국 사법부에 경의를 표한다”며 진술을 시작했다. 김씨는 “1980년 당시 오빠는 최후진술에서 10·26 혁명의 목표는 민주주의 회복과 국민의 큰 희생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며 “저는 지난 45년 동안 오빠가 남긴 이 말을 굳게 믿어 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저는 평생토록 김재규의 동생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다”며 진술 도중 울컥하기도 했다. 이어 “1980년 당시 재판은 사법부 재판의 치욕의 역사”라며 “통치 권력 앞에서 당시 사법부는 최소한의 절차적 정당성도 유지하지 못했다”고 원심 재판을 비판했다. 재심 재판의 쟁점은 김 전 부장의 살인이 내란 목적이었는지 여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 전 부장 측은 ▲1979년 선포된 비상계엄의 위헌·위법성 ▲김 전 부장의 살해 행위에 내란 목적이 없었다는 점 ▲유죄를 입증할 직접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항소 이유로 제시했다. 변호인단은 “당시 신군부는 정권 탈취 의도에서 내란 프레임을 씌우고 사건을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재심 재판부가 내란목적살인 혐의에 대해 다르게 판단한다면 역사적 평가도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김 전 부장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살해한 혐의로 다음날 체포됐다. 체포 한 달 만에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수괴 미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그는 그해 12월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대법원 확정판결을 거쳐 기소 6개월 만인 1980년 5월 24일 사형이 집행됐다. 유족은 김 전 부장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2020년 5월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 김재규 재심 시작…유족 “10·26은 내란 아닌 민주주의 위한 것”

    김재규 재심 시작…유족 “10·26은 내란 아닌 민주주의 위한 것”

    사형 45년만에 재심 시작...‘내란 목적’ 쟁점 “오빠(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가 막지 않았다면 우리 국민 100만명 이상이 희생됐을 겁니다. 10·26 사건은 내란이 아니라 국민의 희생을 막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0·26 사건’으로 사형당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형사재판 재심이 16일 시작됐다. 1980년 5월 김 전 부장이 사형당한 지 45년, 재심이 청구된 지 5년 만이다. 이날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 이재권)는 김 전 부장의 내란목적살인 등 혐의에 대한 재심 첫 공판기일을 열었다. 재판에는 재심을 청구한 김 전 부장의 셋째 여동생 김정숙씨가 출석했다. 김씨는 “10·26 재심 신청을 인용해 역사적인 재판을 시작하는 대한민국 사법부에 경의를 표한다”며 진술을 시작했다. 김씨는 “1980년 당시 오빠는 최후진술에서 10·26 혁명의 목표는 민주주의 회복과 국민의 큰 희생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며 “저는 지난 45년 동안 오빠가 남긴 이 말을 굳게 믿어 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저는 평생토록 김재규의 동생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다”며 진술 도중 울컥하기도 했다. 이어 “1980년 당시 재판은 사법부 재판의 치욕의 역사”라며 “통치 권력 앞에서 당시 사법부는 최소한의 절차적 정당성도 유지하지 못했다”고 원심 재판을 비판했다. 재심 재판의 쟁점은 김 전 부장의 살인이 내란 목적이었는지 여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 전 부장 측은 ▲1979년 선포된 비상계엄의 위헌·위법성 ▲김 전 부장의 살해 행위에 내란 목적이 없었다는 점 ▲유죄를 입증할 직접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항소 이유로 제시했다. 변호인단은 “당시 신군부는 정권 탈취 의도에서 내란 프레임을 씌우고 사건을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재심 재판부가 내란목적살인 혐의에 대해 다르게 판단한다면 역사적 평가도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김 전 부장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살해한 혐의로 다음날 체포됐다. 체포 한 달 만에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수괴 미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그는 그해 12월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대법원 확정판결을 거쳐 기소 6개월 만인 1980년 5월 24일 사형이 집행됐다. 유족은 김 전 부장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2020년 5월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 100년 만에 사라진 도시 ‘마산’…태양처럼 빛나던 인물은 남았네

    100년 만에 사라진 도시 ‘마산’…태양처럼 빛나던 인물은 남았네

    공기 좋고 물 좋아 ‘결핵 치료’ 메카김춘수·구상·서정주 등 명사 거쳐 가 불종거리엔 남겨진 사랑 이야기들골목골목마다 예술의 흔적도 가득일제강점기 광복·해방 흔적부터시·노래·건축 켜켜이 쌓인 역사들근현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딱 100년간 존속했던 도시가 있다. 경남 ‘마산시’다. 1910년부터 2010년 6월 30일까지 ‘마산시’였고, 그해 7월 1일부터는 창원시에 속한 ‘구’가 됐다. 마산엔 세월의 층위가 여러 겹이다. 근현대를 빛낸 인물들의 궤적이 겹겹이 쌓여 있다. 다른 도시라고 그렇지 않을까마는 마산은 남다르다. 신병 치료를 위해, 사랑을 찾기 위해, 일제강점기 조국 광복을 위해 여러 분야의 명사들이 마산의 거리를 오갔다. 그 흔적을 찾아간다. 짧지만 강렬했던 도시, 마산의 인물들을 톺아보는 여정이다. 노사연, 이만기, 황정민, 강호동 같은 내로라하는 현역 스타들 이전의 마산엔 바로 그들이 있었다.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찾는 과정에 ‘도시의 얼굴들’(허정도 지음·지앤유 펴냄)이란 책이 많은 의지처가 됐음을 앞서 밝힌다. ●결핵이 만들어낸 히트곡 ‘산장의 여인’ 레트로는 힘이 세다. 쇠잔하면서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마산이란 옛 도시에 급격히 관심이 쏠린 건 ‘하얀 나비’의 가수 김정호 때문이다. 광주에서 태어나 1970~1980년대를 풍미하다 마산에서 숨을 거둔 가수다. 결핵으로 서른셋 나이에 요절한 그의 생애를 따르다 보니 그 끝자락에서 마산결핵요양소(현 국립마산병원)와 만났다. 한데 김정호뿐이 아니었다. 그 자리를 거쳐 간 당대의 스타들은 무수히 많았다. 마산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결핵 치료의 메카’였다. 변변한 약이 없던 시절, 폐결핵에는 맑은 공기가 최고의 치료제였다. 물 좋고 공기 좋은 마산에 결핵 환자를 위한 병원, 요양소 등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나도향, 구상, 김지하, 서정주, 김춘수 등 문인과 계훈제, 함석헌 같은 사회운동가, 음악인 등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이 병원을 거쳐 갔다. ‘산장의 여인’이란 당대의 히트곡도 이 병원에서 탄생했다. 결핵 환자를 위한 위문 공연에 동행한 전설적인 작사가 반야월이 인근 요양소에 머물던 한 여인을 보며 한 편의 가사를 남겼다. 이 글에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등의 명곡을 만든 작곡가 이태호가 곡을 붙인 게 ‘산장의 여인’이다. 사연 많은 공간이긴 하나 여전히 결핵 환자를 돌보는 곳에 관광객까지 발걸음할 필요는 없지 싶다. 중요한 건 그들이 마산에 남긴 이야기니 말이다. ●옛 마산 명소들 모여 있는 ‘불종거리’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들으려면 불종거리로 먼저 가야 한다. 마산의 주요 도로 중 하나다. 창동예술촌, 상상길, 250년 골목길 등 옛 마산을 기억하는 여러 명소들이 불종거리를 중심으로 얽혀 있다. ‘불종’은 예전에 불이 난 것을 알리기 위해 친 종이다. 1977년 사라졌지만 이름만은 길 위에 고스란히 남았다. 마산이란 지명을 키워드 삼을 때 가장 앞줄에 세워야 할 이는 노산 이은상이다. ‘그리운 금강산’과 더불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가곡 ‘가고파’를 쓴 시조 시인이다. 불종거리 옆 상남동에서 태어난 그가 29세 때인 1932년에 고향을 그리며 쓴 시에 곡을 붙인 게 ‘가고파’다. ‘노산’이란 그의 호도 생가 뒤의 노비산에서 따온 것이다. 다만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정치 지형에 따라 극단으로 나뉘어져 아쉽다. 독립유공자이면서 한편으로 친일, 반민주 인사다. 이처럼 사뭇 다른 평가를 받는 이들은 마산에서 교편을 잡았던 시인 김춘수, 요양차 마산에 머물렀던 시인 서정주 등 꽤 많다. ●나도향의 작품‘물레방아’ ‘뽕’의 탄생 스물넷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나도향도 폐결핵 치료차 마산에 머물렀다. 경성의전(현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으나 의사의 길을 거부하고 ‘글쟁이’가 된 그가 마산에 온 건 1925년 여름이다. 그는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뽕’ 등 자신의 대표작을 모두 그해 마산에서 발표했다. 나도향의 원래 이름은 ‘경사스러운 손자’라는 뜻의 경손이다. ‘벼꽃 향기’란 뜻의 도향이란 이름은 월탄 박종화가 지어 선물한 것이다. 하지만 나도향의 집안에선 이 이름을 싫어했다고 한다. 잠시 떠돌다 사라지는 ‘향기 향(香) 자’가 싫어서다. 가족들의 우려가 맞았던 걸까. 그는 파릇한 나이에 너무도 허무하게 세상을 떴다. 그가 마산에서 만났다는 ‘영옥’이란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도 애틋하다. 그의 소설 ‘피 묻은 편지 몇 쪽’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무서운 행복’은 영옥과 만나는 것입니다. 만나면 만날수록 나의 가슴 속에는 오뇌와 번민이 고조될 뿐입니다. 아아! 안 만나겠습니다. 다시는 안 만나겠습니다./ 내가 참으로 영옥을 사랑하니까 그와 만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가지고 가지요. 나의 관 뚜껑을 덮을 때 나의 가슴에는 그의 사랑을 가지고 가렵니다.” 이는 실제 작가의 이야기다. 그가 내려올 때처럼 구마산역(현 육호광장)을 통해 마산을 떠날 때 영옥이란 여인이 남몰래 눈물로 배웅했다지. ‘사랑하기에 떠난다’는 삼류 신파극 같은 문장도 연원을 따지면 이처럼 기막힌 사연이 있다. 불종거리에 맺힌 사랑 이야기는 또 있다. ‘조선의 루돌프 발렌티노’(당시 할리우드 최고의 미남 배우)라 불리던 임화와 마산 지역 유지의 딸 지하련이 주인공이다. 둘의 이야기는 임화의 마산행에서 시작된다. 임화는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 문학단체인 ‘카프’를 이끌던 인물이다. 결핵에 걸린 그는 자신보다 과격한 사회주의자인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한 뒤 치료차 내려간 마산에서 지하련을 만난다. 지하련의 헌신적인 보살핌을 받고 회복한 임화는 그와 결혼해 현 산호공원 아래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다. 여기가 이른바 ‘지하련 주택’이다. 둘이 살던 집은 당시 최고급 주택이었다. 지금도 남아 있긴 한데 돌보는 이가 없어 거의 무너질 지경이다. 둘의 사랑 이야기도 해피 엔딩은 아니다. 임화는 6·25전쟁 뒤 북한에서 처형됐고, 그의 시신을 찾아 평양 거리를 헤매던 지하련도 평안북도 어디선가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남에선 월북한 빨갱이로, 북에선 반동분자로 둘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셈이다. ●통영 사는 여인 찾아 헤매던 시인 백석 예전 불종거리는 마산 바다에서 잡은 대구 등 해산물을 내륙으로 옮기는 중요한 통로였다. 싱싱한 해산물을 가득 실은 리어카가 신바람을 내며 해산물을 쏟아 내면 기차가 팔도로 실어 날랐다. 그 길 끝에 구마산역이 있던 것도 그런 이유다. 구마산역에 내려 불종거리를 걸으며 사랑을 찾아 헤맨 이 중엔 시인 백석도 있다. 1936년 백석은 통영에 사는 ‘천희’(‘처녀’의 사투리) 란을 찾아 불종거리를 걸었다. 당시 경성에서 통영까지 가려면 부산이나 마산을 거쳐야 했다. 부산은 한 번, 마산은 세 번 내려왔다는데 결국 그는 란을 만나지 못했고 결혼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가 조선일보 평기자로 일하던 시절, 노산 이은상이 같은 신문의 주간이었다니 인연의 얽힘은 참 상상을 뛰어넘는 듯하다. 그의 이름을 담은 ‘백석이 다녀간 작은 책방’이란 북카페가 육호광장 인근(천하장사로 109)에 있다. 북카페 뒤는 ‘노산동 문학마을’, 더 뒤는 마산문학관이다. 북카페에서 냉커피 한 잔 사 들고 백석을 생각하며 동네를 헤매는 맛이 각별하다. 1945년 해방 무렵, 마산엔 ‘귀환동포촌’이 폭넓게 형성됐다. 일본에 살던 동포들이 귀환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지상으로 소풍 온’ 시인 천상병도 이 무렵 마산에 정착했다. 오동동에 정착한 천상병은 6년제였던 마산공립중학교 2학년에 편입해 1951년 졸업했다. 이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뒤로는 오직 시로만 고향을 그리워했을 뿐 마산과 별다른 인연을 맺지 못한다. 사실 마산 사람들조차 천상병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독재 정권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그날은’) 고문을 당하고, 행려병자로 정신병원에 갇혔을 때도 그를 동향이라 여긴 이는 별로 없었다. 그나마 그가 다닌 중학교 후배들이 학교 담장 옆길을 그의 호를 따 ‘심온길’이라 부르고, 벚꽃 필 무렵에 그를 기리는 골목 음악회를 연다니 천상으로 돌아간 그가 흐뭇해하려는지. 천상병이 시인의 길을 걷게 된 데는 ‘꽃의 시인’ 김춘수의 역할이 컸다. 당시 국어 선생이자 천상병의 담임이었던 김춘수가 “모든 것이 그러하듯, 네가 그것에 닿아야만 네 것이 될 수 있다. 김춘수”라 적은 글이 담긴 ‘구름과 장미’라는 시집을 선물했고 이때의 감동이 천상병을 평생 시인으로 살게 했다고 한다. 김춘수는 통영 사람이지만 20대에서 30대 후반까지 마산에서 생활했다. 마산을 대표하는 독립지사 허당 명도석의 딸과 1944년 결혼해 살았다. 해방도 마산에서 맞았다. 당시 그는 러닝셔츠 차림으로 불종거리를 쏘다니며 해방감을 만끽했다고 한다. 그의 대표 시 ‘꽃’ 역시 1952년 6·25전쟁 당시 마산에 머물 때 썼다고 한다. ●마산의 긴자… 가요 오동동타령의 고향 불종거리를 중심으로 수많은 골목길이 실핏줄처럼 연결돼 있다. 창동예술촌, 상상길, 250년 골목길 등 이름도 다양하다. 창동예술촌은 ‘에꼴드 창동 거리’, ‘마산예술흔적 거리’, ‘문신예술 거리’ 등 세 테마로 나뉘어 있다. 조성된 지 오래돼 쇠락한 느낌도 있지만 차분히 둘러볼 만하다. 불종거리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오동동 문화의 거리다. 오동동은 대중가요 ‘오동동타령’이 태어난 곳. 통술집 골목으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부터 ‘마산의 긴자’라 불릴 만큼 화려했다니 통술 거리의 역사도 그리 짧지만은 않은 듯하다. 거리 안에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이 있다. 집안과 불화하면서도 한국 무용계의 태두가 된 김해랑, 동요 ‘고향의 봄’의 가사를 쓴 이원수 등도 오동동 일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원수가 상업학교 2학년이던 1929년, 일본에서 건너온 아이 하나가 마산보통학교(성호초등교)에 입학한다. 그가 마산이 낳은 세계적인 시머트리(좌우대칭) 조각가 문신이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다 돌아온 그가 추산 아래 정착해 조성한 공간이 현 창원시립문신미술관이다. 올해 타계 30주년을 맞아 그림, 조각 등 다양한 작품들을 전시 중이다. 그의 묘도 미술관 안에 있다. 문신미술관 아래엔 추산야외조각미술관이 있다. 각국 조각가 10명의 작품이 곳곳에 숨은 그림처럼 감춰져 있다. ●건축 거장 김수근의 벽돌 건축의 시작 양덕성당은 한국 현대 건축의 거장 김수근이 붉은 벽돌로 상징되는 종교 건축 시대의 서막을 연 공간이다. 서울의 불광동성당, 경동교회와 함께 그의 3대 종교 건축물로 꼽힌다. 양덕동은 1970년대 마산수출자유지역에 다니는 노동자들이 셋방을 얻거나 기숙 시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동네였다. 이들을 위해 지은 곳이 양덕성당이다. 당시 김수근이 책임 건축가로 지목한 이가 승효상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전설로 남은 건축가와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가 함께 만든 건축물인 셈이다. 양덕성당의 모티브는 ‘바위산에 핀 수정꽃’이다. 성당 꼭대기에 꽃봉오리가 있고 건물이 그 주변을 감싸는 형상이다. 마산역에서 10분 거리다. 마산은 언덕이 많은 해안 도시인데도 시원하게 바다가 조망되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접근성에선 문신미술관과 산호공원이 좋다. 다만 문신미술관은 오후 6시 이후 문을 닫아 야경을 볼 수 없는 게 흠이다. 문신미술관 뒤 회원현 성터의 정자에선 마산항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문신미술관에서 10여분 정도 걸어 올라야 한다. 술이 유명했던 마산에는 국내 최대 주류 박물관이 있다. 향토 주류업체 무학이 2015년 개관한 ‘굿데이뮤지엄’이다. 다양한 술을 대륙별로 나눠 전시했다. 장수암은 요즘 ‘신상’ 여행지로 주목받는 절집이다. 번다한 마산 도심에서 벗어나 적요한 남해를 응시할 수 있다.
  • 75년 만에… 6·25 참전 비정규군 24명에 무공훈장 서훈

    75년 만에… 6·25 참전 비정규군 24명에 무공훈장 서훈

    국방부가 6·25전쟁에 참전한 비정규군 공로자 24명에 대해 11일 무공훈장을 서훈했다. 이날 서훈된 24명 중 22명이 미군이 창설한 8240부대, 2명이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창설한 영도유격대 소속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이들은 정규군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동안 서훈 대상으로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전쟁 발발 당시 교사였던 고 이종학씨는 학생들과 함께 학도의용대를 결성하고 미 8240부대 예하 동키 제11부대에서 부대장으로 유격 작전을 지휘했다. 1951년 4월 황해도 옹진군 교정면에서 북한군 순찰대를 기습해 17명을 사살하고 피난민 1200명을 구출한 공로로 75년 만에 충무무공훈장(3등급)을 받았다. 영도유격대 소속 고 최제부씨는 1951년 9월 50여명의 대원과 함께 미 수송기로 함경도 혜산군 일대를 공중 침투해 적 14명을 사살하고 적의 주요 시설을 파괴한 공을 세워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5형제가 함께 활약한 사례도 있었다. 특히 차남인 고 이영이씨는 미 8240 예하 울팩 제1부대 대대장으로 1951년 3~12월 개성 탈환 작전에서 적 20여명을 사살하고 9명을 생포하는 등의 활약으로 화랑무공훈장(4등급) 수훈자로 선정됐다. 국방부는 6·25전쟁에서 공적을 세우고도 서훈이 누락된 공로자에 대해 심사를 통해 추가로 서훈하는 제도를 2011년부터 시행해 지난해까지 340명이 무공훈장을 받았다. 김선호 국방부 장관 직무대행은 이날 서울 용산구 국방컨벤션에서 열린 수여식에서 “위기에 처한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군번도, 계급도 없이 적 지역에 침투해 유격 작전 등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비정규군 무공 수훈자에게 국방부를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 개관 미뤘던 창원 ‘대한민국민주주의전당’ 드디어 문 연다

    개관 미뤘던 창원 ‘대한민국민주주의전당’ 드디어 문 연다

    민주주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는 공간이 문을 연다. 경남 창원시는 오는 10일부터 대한민국민주주의전당 시범 운영을 한다고 5일 밝혔다. 대한민국민주주의전당은 3.15의거, 부마민주항쟁, 6.10민주항쟁 등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계승·보존하고자 건립됐다. 전당은 지상 3층 규모다. 1층은 커뮤니티 문화 공간으로 민주홀·빛의 계단·교육영상실 등이 있다. 2층은 다목적전시실·지역특화전시실·도서관으로, 3층은 상설전시실·아카이브·함께가는길 등으로 구성했다. 시범 운영 기간 다채로운 교육 프로그램과 문화행사도 이어진다. 10일 민주홀에서는 ‘민주주의와 건축’을 주제로 설계자 특강을 연다. 어린이 독서 프로그램 ‘책으로 배우는 작은 시민’, 서평 프로그램 ‘오늘의 문장, 내일의 나에게’, 업사이클링을 주제로 한 ‘새로운 가치를 담다’, 전시 연계 교육 ‘꼬마 탐험대! 전시실 탐험!!’ 등도 진행한다. 시는 6월 말까지 임시 운영 기간을 거치고 나서, 창원시민의 날인 7월 1일 정식 개관할 예정이다. 민주주의전당 운영(예약·시간)과 관련한 자세한 사항은 대한민국민주주의전당 홈페이지(changwon.go.kr/k-democracy)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창원시 관계자는 “대한민국민주주의전당은 시민들이 일상에서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문화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조성됐다”며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민주주의전당 건립은 2001년 출범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해방 이후 민주화운동을 총망라한 전당을 짓기로 하면서 추진됐다. 같은 해 제정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의 ‘민주화운동기념관 건립 및 운영’ 조항도 전당 건립을 뒷받침했다. 애초 2011년 건립 목표로 추진된 이 사업을 두고는 서울, 창원, 광주가 유치 경쟁을 벌였다. 광주(2007년), 창원(마산·2013)은 유치위원회를 구성해 경쟁에 뛰어들었고 서울 역시 옛 중앙정보부가 있던 서울시청 남산 별관을 리모델링해 한국민주주의전당을 짓기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합의하는 등 건립 의지를 표했다. 2013년 11월에는 서울·광주·마산에 삼각 축으로 전당을 건립하는 협약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3개 도시 간 이뤄졌지만 2015년 12월 사업회 이사회는 ‘정부 동의를 얻지 못했다’며 협약을 무효로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8년 6.10항쟁 31주년 기념식에서 ‘옛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 민주인권기념관을 조성하겠다’고 언급하면서 전당 건립을 둘러싼 관심은 재점화했다. 광주는 민주인권기념관이 전당 역할을 하리라 보고 유치를 포기했고, 창원시는 유치위원회 등과 논의 끝에 ‘자체 추진’으로 방향을 바꿨다. 2019년 전당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한 시는 이후 3.15의거, 4.19혁명, 부마민주항쟁, 6.10항쟁이 창원(옛 마산 등)에서 일어났다는 점 등을 강조하며 민주주의전당 창원 건립 당위성을 알리는 데 집중했다. 국회, 기획재정부, 행정안전부 등을 여러 차례 방문한 끝에 2020년 지방재정중앙투자심사 통과·국비 40% 지원이라는 결실을 봤다. 2021년 시는 옛 마산세관 건물과 해양수산부 소유 터를 등가 교환해 건립지를 확보했고, 전국 설계공모로 건축 작품을 선정하고 착공에 이르러 준공 결실을 봤다. 건립 사업비는 국비 121억원·도비 45억원을 포함해 388억원이다. 지난해 9월 시는 시정조정회의를 열고 가칭 민주주의전당으로 불렸던 전당 명칭을 ‘한국민주주의전당’으로 정했다. 이후 올 3월 창원시의회는 조례를 개정해 ‘대한민국민주주의전당’으로 재차 명칭을 변경, 확정했다.
  • 이번엔 싱크로율 완벽… 솜털까지 살린 ‘스티치’

    이번엔 싱크로율 완벽… 솜털까지 살린 ‘스티치’

    보송보송한 파란 솜털에 장난기 가득한 큰 눈, 짓궂지만 마음 따뜻한 개구쟁이 외계 생명체 ‘스티치’가 23년 만에 돌아왔다. 21일 개봉하는 ‘릴로 & 스티치’는 2002년 개봉해 전 세계 2억 7000만 달러(약 3761억원)의 흥행 수익을 올리고, 그해 미국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 후보에도 오른 동명의 2D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한 작품이다. 파괴 본능으로 가득한 외계 실험체 ‘626’이 폐기 위험에서 도망쳐 나와 지구의 하와이섬에 불시착하게 되고, 그 후 외톨이 소녀 릴로와 만나 벌어지는 일들을 원작 그대로 옮겼다. ●애니 원작 구현 생생… 이야기는 더 탄탄 릴로는 유기견 센터에서 만난 626을 반려견으로 입양한 뒤 이것저것 마구 긁어 대는 통에 자꾸 꿰매야 한다는 의미로 ‘스티치’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스티치를 잡으려 외계인 점바 주키바와 플리클리가 지구에 파견되고, 외계인 활동을 감시하던 미국 중앙정보부(CIA) 요원까지 얽히면서 소동이 이어진다. 실사화 소식이 알려졌을 당시 스티치를 어떻게 구현하느냐에 가장 큰 관심이 쏠렸다. ‘스타워즈’ 시리즈로 유명한 감독 조지 루카스가 설립한 ILM은 파란색 털북숭이에다 격한 움직임, 다채로운 표정을 보이는 스티치를 컴퓨터그래픽(CG)으로 생생하게 구현했다. 각종 동물 생김새를 닮은 외계인을 비롯해 지구인으로 변장한 주키바와 플리클리의 모습도 실사와 잘 맞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스티치가 결혼 피로연장에서, 릴로의 집에서, 또 릴로의 언니인 나니가 일하는 리조트와 바닷가 등에서 벌이는 소동은 그저 유쾌하기만 하다. 악동이었던 스티치가 릴로와 나니의 사정을 점차 이해해 가는 과정도 무리 없이 이어진다. ●디즈니 실사판 논란 지운 ‘찰떡 캐스팅’ 앞서 디즈니가 흑인 배우와 라틴계 배우로 주인공을 바꾸면서 원작 훼손 논란을 빚었던 ‘인어공주’(2023)나 ‘백설공주’(2025)와 달리 원작 캐릭터와 배우들의 싱크로율이 그야말로 ‘찰떡’이다. 릴로 역의 마이아 케알로하는 이 영화가 첫 출연작인 신인 배우임에도 똑부러지는 연기를 펼친다. 릴로를 위해 대학을 포기해야 할지 고민하는 나니 역을 맡은 시드니 엘리자베스 아구동의 연기도 흠잡을 곳 없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서로를 이해하며 ‘오하나’(하와이어로 가족)가 돼 가는 원작의 메시지도 잘 머금었다. “너는 나쁜 짓을 가끔 하는 거지, 나쁜 게 아니야”라는 대사처럼 후반부로 갈수록 내면에 담긴 선한 마음과 따뜻함이 서서히 번져 간다. 피붙이는 아니지만 서로 의지가 되는 유연한 가족애에 대한 이야기도 2002년보다 오히려 지금 더 와닿는다. 108분. 전체 관람가.
  • 중극장 창작 뮤지컬의 매력… 실험성 강한 초연작 ‘더 퍼스트 그레잇 쇼’ 등 활발

    중극장 창작 뮤지컬의 매력… 실험성 강한 초연작 ‘더 퍼스트 그레잇 쇼’ 등 활발

    최근 공연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중극장 뮤지컬이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다. 300~800석 규모의 중극장에서 공연되는 뮤지컬에는 다양한 소재와 실험성을 강조한 작품들이 많다. 대극장에서 공연되는 해외 라이선스 작품들과 달리 창작 뮤지컬의 신선함을 느낄 수 있고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티켓 가격도 장점이다. 오는 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개막하는 ‘더 퍼스트 그레잇 쇼’는 1960년대 한국 최초의 뮤지컬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유쾌하게 그린 코미디다. 국가의 명령으로 북한에 맞설 웅장한 공연을 만들어야 하는 중앙정보부 문화예술혁명분과 유덕한 실장과 연출가가 된 배우 지망생 김영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국내 첫 뮤지컬 단체 ‘예그린 악단’의 계보를 잇는 서울시뮤지컬단의 신작으로 초연되는 작품이다. 상부의 끊임없는 지시와 검열로 대본이 거듭 수정되고 배우들은 방향을 잃은 채 즉흥 연기를 이어 가는데, 극중 인물들의 대응 방식이 웃음을 자아낸다. ‘차범석희곡상’을 수상한 극작가 박혜림이 극본과 작사를 맡아 예술가들의 치열한 고민과 도전을 그려 냈고 최종윤 작곡가가 1960년대 활기찬 멜로디부터 1990년대 감성적인 댄스까지 다채로운 음악을 선보인다. 뮤지컬 배우 조형균, 이승재가 김영웅 역을 맡고 박성훈, 이창용이 유덕한 역으로 출연한다. 열정적인 예술가 프리다 칼로의 생애를 독창적인 형식으로 담아 낸 창작 뮤지컬 ‘프리다’도 다음달 17일 600석 규모의 서울 NOL 유니플렉스 1관에서 개막한다. ‘프리다’는 ‘웃는 남자’, ‘베토벤’ 등 대형 뮤지컬을 주로 제작한 EMK뮤지컬컴퍼니의 작품으로 뮤지컬계 황금 콤비 추정화 연출가와 허수현 작곡가 겸 음악감독, 김병진 안무가가 의기투합했다. 프리다 역으로 김지우와 정유지가 출연하며 레플레하 역에 장은아와 아이키, 데스티노 역에 이지연, 메모리아 역에 유연정 등이 새롭게 합류한다. 13인의 여성 배우들이 멕시코 혁명가이자 당대 최고 여성 화가였던 프리다의 다채로운 삶과 고통 속에서 드러나는 열정 및 치유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현재 같은 무대에서는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 ‘너의 결혼식’이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3초의 운명을 믿는 승희와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진 남자 우연의 다사다난한 여정을 담은 작품이다. 첫사랑의 추억과 이별의 아픔, 성장 이야기를 현실감 있게 그려 낸 로맨스 코미디로 다채로운 무대 연출과 중독성 강한 넘버를 통해 다양한 세대 관객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9년 만에 돌아온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도 공연에 한창이다. 오는 6월 8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상연되는 이 작품은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영원한 아름다움과 젊음을 갈망한 영국 귀족 청년이 자신의 영혼을 초상화와 맞바꾸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도리안 그레이 역은 배우 유현석, 윤소호, 재윤, 문유강이 맡았고 이지나 예술감독이 대본 각색에 참여했다. 제작진은 “인간 내면의 갈등과 영원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을 다룬 작품”이라면서 “관객에게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라고 밝혔다.
  • 김동연, 16일 국립 5.18광주민주묘지 참배···경기도 출신 열사 묘소 헌화

    김동연, 16일 국립 5.18광주민주묘지 참배···경기도 출신 열사 묘소 헌화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제45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앞두고 16일 광주광역시를 방문한다. 김 지사는 16일 오후 광주 북구 망월동에 있는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최상필 열사를 비롯한 경기도 출신 열사와 문재학 학생 열사 묘소 등에 헌화할 예정이다. 최상필 열사는 김대중 선생의 강연집을 제작한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고문과 구타 등 오랫동안 고초를 겪었다. 문재학 열사는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 ‘동호’의 실존 인물로 알려져 있다. 김 지사는 2022년 경기도지사 취임 후 매년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했다. 지난해에는 경기도 전체가 5·18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자는 의미에서 행정1·2·경제부지사 및 주요 간부·기관장 30여 명과 함께 공동참배했다.
  • “난 결코 안 그렸다” 천경자 ‘미인도’…유족, 국가배상 2심도 패소

    “난 결코 안 그렸다” 천경자 ‘미인도’…유족, 국가배상 2심도 패소

    고(故)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 논란을 수사한 검찰이 해당 작품이 위작인데도 진품이라고 공표했다고 주장하며 유족이 소송을 냈으나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패소했다. 유족 측은 판결에 불복해 상고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1-3부(부장 최성수 임은하 김용두)는 18일 천 화백의 차녀 김정희(71) 미국 몽고메리대 교수가 국가를 상대로 1억원 배상을 청구한 소송 항소심에서 1심과 같이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검찰 수사 과정에 다소 미흡한 과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원고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수사가 위법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검찰이 수사 결과 발표를 통해 허위사실을 유포해 명예를 훼손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수사 과정과 그 결론의 위법이 인정되지 않는 이상 수사 결과 발표 역시 위법하다고 볼 순 없다고 봤다. 앞서 국립현대미술관은 1991년 소장하고 있던 ‘미인도’를 공개했으나, 천 화백은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나. 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고 주장해 위작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은 이 작품이 진품이 맞는다고 맞섰고 전문가들도 진품이라고 판단하자, 천 화백은 절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후 2015년 천 화백은 뇌출혈로 숨졌다. 김 교수는 프랑스 뤼미에르 광학연구소에 작품 감정을 의뢰해 2015년 12월 해당 작품이 진품일 확률이 ‘0.00002%’라는 결과를 전달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2016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 6명을 사자명예훼손 및 허위공문서 작성·행사,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진품이 아니라는 작가 의견을 무시하고 허위사실 유포로 천 화백 명예를 훼손하고, 국회 등에 관련 문건을 허위로 작성·제출했다는 취지다. 또 국립현대미술관 측이 위작인 미인도를 진품으로 주장하면서 전시하는 등 공표해 저작권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또 김 교수는 2017년 ‘미인도’가 위작임을 입증하는 근거를 정리한 책 ‘천경자 코드’를 출간해 “천 화백의 다른 작품에 있는 코드가 없으므로 명백한 위작”이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검찰은 X선·적외선·투과광사진·3D촬영 등을 통한 검증과 전문가 감정을 거쳐 같은 해 12월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감정위원들은 석채 사용, 붓터치, 선의 묘사, 밑그림 위에 수정해 나간 흔적 등에서 ‘미인도’와 천 화백의 작품 사이에 동일한 특징이 나타난다고 봤다. 또 소장 이력을 추적한 결과 ‘미인도’는 1977년 천 화백이 중앙정보부 간부에게 판매했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을 거쳐 1980년 정부에 기부채납된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이 같은 사정을 고려해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 5명을 무혐의 처분하고, 사실관계가 확정되기 전 언론 인터뷰에 응한 관계자 1명만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김 교수 측은 수사 결과에 반발하며 서울고검에 항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법원에 재정신청을 냈으나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됐다. 이후 김 교수는 2019년 “검찰이 감정위원을 회유하는 등 불법적인 수사를 통해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허위사실 유포로 천 화백과 유족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국가배상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2023년 7월 “원고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수사기관이 성실의무를 위반했다거나 객관적 정당성을 잃는 등 불법행위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고, 이날 2심 재판부도 원고의 항소를 기각했다. 유족을 대리한 이호영 변호사(법무법인 지음)는 이날 선고 뒤 상고 계획을 밝히며 “오늘 판결에서 ‘미인도’의 진위에 대해 진품 또는 위작으로 보인다는 판단을 한 건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 변호사는 특히 “검사가 감정인에게 ‘미인도 그냥 진품으로 보면 어때요?’라고 질문한 부분에 대해 1심과 달리 2심에선 해당 발언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검사가 수사 과정에서 통상적으로 할 수 있는 질문이라 판단했다”며 “결국 검찰의 수사가 경험칙, 논리칙에 위반되는지 아닌지는 대법원 판단을 받아야 할 상황이 됐다”고 전했다. 천경자 화백은 1924년 고흥군에서 태어났으며 독창적인 화풍으로 세계적인 화가로 성장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생태’, ‘초혼’,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조부’, ‘바다의 찬가’, ‘길례언니’ 등이 있다. 또한 ‘탱고가 흐르는 황혼’,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등의 저서를 남겼다. 지난해 천 화백의 고향인 전라남도 고흥군에서는 ‘찬란한 전설 천경자, 탄생 100주년’ 특별전이 개최되기도 했다.
  •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   청와대 습격한 北 무장공비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   청와대 습격한 北 무장공비

    1968년 공작원 31명 중 혼자 생포1997년 목사 안수… 반공교육 앞장 북한 무장공비로 우리나라에 침투했다가 귀순한 뒤 목회자 생활을 했던 김신조(83) 목사가 9일 별세했다. 서울 영등포구 성락교회는 김 목사가 이날 새벽 소천했다고 밝혔다. 1942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난 김 목사는 1968년 1월 21일 벌어진 ‘청와대 습격 사건’에 투입된 공작원 31명 중 1명이었다. 북한의 대남공작 특수부대 124부대 소속이었던 김 목사는 청와대 습격 지령을 받고 1968년 1월 17일 밤 군사분계선 철조망을 자르고 우리나라로 넘어와 21일 밤 청와대 뒷산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했다. 이들은 창의문을 통과하려다가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났다. 발각된 이후 무장공비들은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시내버스 4대에 수류탄을 던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소탕 작전을 벌이던 최규식 서울 종로경찰서장을 비롯해 7명의 경찰과 군인, 민간인이 희생됐다. 작전에 투입됐던 무장공비 31명 중 29명은 사살됐으며 1명은 북한으로 도주했다. 김 목사는 당시 유일하게 생포됐다. 그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왜 내려왔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라고 말해 충격을 주기도 했다. 김 목사는 이후 서울까지 침투한 경로를 밝히면서 나무꾼을 만난 것 외에는 검문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또 무장공비가 침투한 목적이 대통령 관저 폭파, 서울교도소 폭파, 서빙고 간첩수용소 폭파 후 북한 간첩 대동 월북 등으로 알려지면서 전방부대의 수색과 경계 소홀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김 목사는 북한 무장공비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제공하는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2년 뒤인 1970년 풀려났다. 대한민국에 귀순한 뒤 가정을 꾸렸으며 서울침례회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1997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귀순한 이후에도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감시를 지속적으로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성락교회에서 목사로 재직하며 신앙생활을 이어 온 그는 안보와 관련된 강연과 방송 인터뷰 등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무장 남파공작원의 대표 격으로 불리며 ‘반공교육’에도 자주 등장했다. 2010년에는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의 북한인권 및 탈북자·납북자위원회 고문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김 목사의 빈소는 서울 영등포구 교원예움 서서울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
  • K팝, K콘텐츠, K뷰티, K푸드… 그보다 먼저 ‘K정치’가 있었다[윤태곤의 판]

    K팝, K콘텐츠, K뷰티, K푸드… 그보다 먼저 ‘K정치’가 있었다[윤태곤의 판]

    美 압박·회유 등 한국의 능동적 외교 ‘K정치의 시발점’ 된 코리아게이트경제 부상·88올림픽 통해 질적 도약YS·DJ 거치며 도덕적 권위도 장착盧정부서 진화한 온라인 대중 참여정치 역동성과 함께 불안정성 키워 尹계엄 이후 혼란조차 선도성 담아 NYT, 한국인 유튜브 의존성 지적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부터 현재까지 한국 정치에 대한 외신과 해외 언론의 관심이 매우 뜨겁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인용 때도 외신 보도가 많았지만 양과 질 모두에서 지금이 압도적이다. 특히 과거와 다른 점은 레딧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 틱톡이나 엑스(X·옛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SNS), 주요 해외 언론 사이트나 유튜브 콘텐츠의 댓글 등으로 나타나는 일반 대중들의 관심과 반응이다. 구체적 통계를 찾긴 어렵지만 노무현,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에는 중국과 일본 등 주변국 시민들의 관심이 압도적이었다. 동북아 바깥 나라 시민들과 이들의 한국 정치와 사회에 대한 지식과 이해도, 관심도의 차이가 컸다. 그런데 지금은 유럽, 남아메리카, 동남아, 중동의 젊은이들이 한국 영화나 드라마 같은 K콘텐츠를 다루는 인터넷 커뮤니티나 K팝 아티스트 팬 인스타그램 혹은 K뷰티 화장품 사용법을 알려 주거나 K푸드 먹방을 내보내는 유튜브 댓글 창에서 한국 정치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낯 뜨겁기도 하면서 묘한 ‘국뽕’도 차오르는 장면들이다.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양 측면에서 세계 최상위권의 선진국으로 평가받는 나라의 정치가 몇 달 동안이나 출렁거리고 있으니 주목받을 만한 일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세계 속의 K시리즈 끄트머리에 슬그머니 붙어버린 ‘K정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물론 K정치나 한국 정치나 실체는 같지만 한국 밖에서 소비하고 반응하며 그 일부를 수용하거나 영향을 받기도 하는 한국 정치를 ‘K정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美에 한국 국력을 투사한 K정치 K정치의 맨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타임지 표지를 두 번이나 장식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20세기 초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미국통으로 공산주의와 맞서고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 낸 인물이지만 미국 정부와는 거칠게 충돌하며 불화했던 인물, 미국 지식인 사회나 언론과 직접 소통하며 미 정부에 대한 압박까지 시도했던 카리스마적 독재자의 입체적 면모는 당시에도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과 이 전 대통령을 겹쳐 보는 시각도 있으니 한국 정치뿐 아니라 K정치의 시원이라 할 만하다. 그다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쿠데타, 장기 집권, 북한과의 체제 경쟁, 눈부신 경제성장과 산업화의 존재감은 이 전 대통령보다 더 크다. 지난 1999년 타임지는 아시아의 20세기 인물 20인을 선정했는데 마오쩌둥, 쑨원, 간디, 호찌민 등과 더불어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반도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포함됐다. 경제적 무능력 상태에 있던 나라를 산업 강국으로 키운 것이 선정 이유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승만처럼 박정희도 재임 시에 북한과 맞서면서 미국과 불화했다는 점이다.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가 박동선 등을 통해 미국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건네 친한 분위기를 조성하려 한 스캔들이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에 대문짝만 하게 폭로되고 미 의회 청문회에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출석해 박정희를 맹비난한 것은 K정치의 중요한 챕터다. 이 전 대통령 때는 군사, 경제 양면에서 신생 대한민국과 이승만 정부에 대한 미국의 원조와 지원을 끌어내는 것이 갈등의 시작이자 끝이었고 북한에 우리나라가 먹히면 당신들에게도 손해라는 자해적 압박이 주된 전략이었지만 박 전 대통령 때부터 양상이 상당히 달라졌다.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나 베트남전 파병이라는 외교·군사적 레버리지를 미국에 사용했다. 코리아게이트 역시 한국 정부가 통일교 조직, 재미교포 등 미국 주류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거액을 들여 미국 정치인들을 설득, 회유, 매수한 사건이다. 도덕성을 떼놓고 본다면 소프트파워와 하드파워 양면에서 신장된 국력을 미국에 투사한 K정치의 능동적 면모의 시발점이 된다. 전두환 전 대통령 쪽은 경제성장과 단임제를 치적으로 내세우지만 K정치의 관점에서 보자면 5공화국은 12·12, 5·18, 대규모 시위와 진압으로 요약된다. 물론 그 이전의 폭압적 인권 탄 압에 비해 5공 시절에 대한 주목도와 ‘인지도’가 높은 것은 1980년대 한국의 위상, 경제력이 더 높아진 것과 연결된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나 냉전의 첨병으로서의 효용뿐 아니라 중진국 국민이 된 한국인 한 명 한 명의 값어치가 5공 시절에 많이 올라갔다. ●냉전 종식의 신호탄 된 88올림픽 K정치가 외교관과 군인 그리고 정보원, 국제정치·외교안보 전문가, 기자와 인권운동가라는 소비층을 벗어나기 시작한 분수령은 88올림픽이라 할 수 있다. 권위주의 세력과 민주 세력의 타협을 통한 직선제 실시, 평화적 정권 이양(정권교체는 아니지만), 사회의 전반적 민주화 직후 개최된 서울올림픽은 진영적 보이콧으로 반쪽짜리 신세였던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과 달리 말 그대로 세계의 축제였다. 한반도에 국한해서 보자면 남북 체제 경쟁의 종말, 글로벌한 관점에서 보자면 냉전 종식의 신호탄이었다. 서울올림픽은 ‘소련’이라는 나라가 참가한 마지막 올림픽이기도 하다. 인권을 탄압하는 권위주의 국가에 대한 유무형의 규제, 체제 경쟁의 상대 선수에 대한 사회주의권의 배제와 냉대라는 족쇄를 떼내고 경제력이라는 엔진을 장착한 K정치는 질적으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서구에서는 자유 진영의 똘똘하고 자랑스러운 막내 취급을 받았고 동구권에서는 기존 선진국처럼 젠체하지 않는 신흥 부자 대우를 받았으며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달리 국제적 원죄도 없는 ‘워너비’의 자리를 차지했다. 민주주의 리더들이 차례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시대가 되면서 K정치에는 도덕적 권위까지 장착됐다. 여야 갈등, 정치적 부패 등이 상존했지만 후진국형 국가 폭력이나 야당에 대한 정부의 일방적 우위 등은 사라졌다. YS 때부터 한국 대통령은 각종 인권상도 받는 존재가 됐고 노벨상 수상자인 DJ는 국제 정치무대에서 ‘구루’ 같은 존재였다. 당시 미국과 유럽의 정치인들 사이에선 “‘넬슨 만델라와 김대중을 존경한다’ 정도는 말해야 트렌드에 뒤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 이 시기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라는 타격이 있었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중국과의 수교, 남북 화해 모드, 일본 문화 개방, 반복적인 평화적 정권교체, 여소야대 정치 구도의 수용 등의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K정치는 선진국형 보편성을 획득해 나갔다. ●2002년부터는 세계 정치 트렌드 선도 21세기에 들어서면서 K정치는 선진성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선도성을 갖추기 시작했다. 정치의 새로운 트렌드들이 한국에서 시작됐고 전통적 선진국들이 한국의 뒤를 따르고 흉내 냈다. 2003년 2월 24일 영국의 권위지 ‘가디언’은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 로그온하다’(World’s first internet president logs on)라는 제목의 서울발 기사를 실었다. HTML로 구현된 웹사이트 코드를 이해하는 세계 최초의 대통령이라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개하면서 그의 취임과 더불어 한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발전된 온라인 민주주의 국가임을 주장할 수 있게 됐다고 보도했다. “웨보크라시(webocracy: 웹민주주의)의 등장은 이미 한국을 활기가 넘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변화의 나라로 만들었다”는 기사 속 문장은 지금까지도 효용이 지속되고 있다. 당시 ‘가디언’은 (2003년 당시) 영국에서는 5%에 불과한 일반 가정의 초고속통신망 보급률이 한국은 70%에 달한다고 전달하면서 온라인을 통한 대선 캠페인과 ‘노사모’ 조직, 온라인 신문 오마이뉴스, 여중생 두 명이 사망한 미군 장갑차 사고로 촉발된 촛불 반미시위 등을 웨보크라시의 실제 예로 소개했다. 전통적 정치 선진국은 물론이고 3세계에서도 정당 활동가와 선거 컨설턴트, 사회운동가들이 한국을 주목하고 따라 배우기 시작했다. 온라인을 통한 대중의 자발적 참여라는 한국형 정치운동이 세계로 퍼져나갔다. 미국의 진보적 정치운동인 무브온과 커피파티, 보수적 정치운동 티파티가 그 열매들이다. K팝보다 K정치의 ‘성취’가 오히려 더 빨랐던 셈이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소액 정치후원금 모금, 정치 리더 팬클럽, 정치 팟캐스트, 거대한 규모의 비폭력 촛불시위 등도 참여정부를 기점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진화한 한국형 웨보크라시, K정치의 산물들이다. ●편 가르기·선동 등 그림자도 짙어져 하지만 그 그림자도 점점 짙어졌다. 대중들이 강고한 정치 기득권을 길들이면서 정당정치의 구심력이 약해졌고 직접 민주주의라는 가치 아래서 대의제가 훼손됐다. 정치적 역동성의 다른 이름은 불안정성이다. 정권 교체는 곧 청산주의적 리셋을 의미하게 됐다. 상대 진영에 대한 악마화, 편 가르기와 선동, 특정 개인을 중심으로 한 결집, 유튜브 의존이 정치의 중심축으로 자리잡았다. 이런 면에서 보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야말로 K정치의 가장 충실한 제자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과 그 이후의 혼란조차도 K정치의 특성과 특유의 선도성을 담고 있다. 이 나라에서 가장 고급 정보를 접하는 대통령이 참모들이나 정보기관의 보고나 주류 언론의 보도를 불신하면서 유튜브에 심취하고 유튜버가 전파하는 부정선거론에 공감해 계엄을 선포했다는 것 아닌가? 뉴욕타임스는 지난 1월 ‘공포와 음모론이 한국의 정치적 위기를 부추긴 방식’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윤 대통령과 한국인들의 유튜브 의존성을 분석하며 계엄과 유튜브의 상관관계를 지적했다. 노벨문학상의 한강과 오징어게임2, 블랙핑크 같은 소프트파워에서부터 반도체와 방산, 조선업 같은 하드파워까지 K시리즈의 위상은 점점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K정치도 주목도와 영향력만큼은 뒤처지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K와 달리 지금은 워너비가 아니라 반면교사다. 윤태곤 공공전략컨설턴트
  • 임종국 서울시의원 “남산예장공원과 주변 연계 고려해야”

    임종국 서울시의원 “남산예장공원과 주변 연계 고려해야”

    서울시의회 임종국 의원(더불어민주당, 종로2)은 지난 10일 도시계획균형위원회가 주관한 ‘지속가능한 남산을 위한 정책토론회’ 주제발표를 통해 “남산의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해 친환경 곤돌라의 설치뿐 아니라 하부 승강장으로 조성하고 있는 예장공원과 주변 도심의 연계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시는 2017년부터 7년에 걸쳐 637억여원의 예산을 투입해 남산의 경관을 가리고 있던 옛 중앙정보부 건물과 교통방송 건물터를 남산예장공원으로 조성했다. 예장공원은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시절 아픈 역사를 기억하자는 의미로 메모리얼 광장, 조선총독부 관사터,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등이 들어선 역사생태공원으로 남산곤돌라의 하부승강장을 겸한다. 지난해 9월에는 이곳에서 남산곤돌라 착공식이 개최되기도 했다. 421억여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남산곤돌라는 올해 11월 준공해 내년 봄부터 운행을 시작할 계획이었으나, 지난해 10월, 서울행정법원이 남산케이블카를 운영하는 한국삭도공업이 제기한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면서 계획에 차질을 빚고 있다. 서울시는 2023년 7월, 친환경 곤돌라를 도입해 그 수익으로 남산의 훼손된 생태환경을 회복하고 자연경관 탐방로 등 여가공간을 조성한다는 ‘생태와 여가가 조화를 이루는 지속가능한 남산 추진계획’을 수립했다. 서울시의회도 2024년 5월, 남산곤돌라 운영수익 전액을 도시재생기금 남산생태여가계정으로 조성해 남산 생태환경 보전사업과 여가공간 조성사업에 활용하도록 한 ‘서울시 남산공원 보전 및 이용에 관한 기본 조례’를 의결·공포했다. 이는 1962년 이후 63년간 남산이라는 공공재를 사용하면서 아무런 공공 기여 없이 교통약자들의 불편을 야기하고 승강장 주변 교통 정체와 안전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된 남산케이블카의 독점을 끊어내기 위한 것이다. 또한 시민들이 남산을 더 이용하기 쉽도록 개방성과 접근성을 강화함으로써 남산을 찾는 시민들이 늘어나는 만큼 커지는 재원을 활용해 생태환경을 복원하고 여가공간을 조성함으로써 공공성이 강화되는 선순환구조를 위한 제도적 여건을 마련한 것이다. 임 의원은 “남산곤돌라에 그치지 말고 경복궁에서 종로, 명동역으로 연결되는 관광축과 종묘에서 세운상가, 충무로역, 남산한옥마을로 연결되는 녹지축을 걸어서 이동할 수 있도록 연결하고,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시민들이 이 공간에서 어떤 활동을 하게 될지 고민해 새로운 콘텐츠를 접목함으로써 보행친화 도시, 시민 협력 도시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환경, 경제, 사회적인 요소를 모두 고려한, 지속가능한 남산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 김재규 재심, 2심제로… 내란죄·수사기관 고문 여부 쟁점

    10·26 사건으로 1980년 사형이 집행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해 법원이 지난 19일 재심을 개시하기로 결정하면서 45년 전의 판결이 바뀔지 주목된다. 김 전 부장 재심은 2심제로 진행되며 내란죄 성립 여부와 수사기관의 가혹 행위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김 전 부장 재심 사건은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 이재권·송미경·김슬기)가 담당한다. 재심은 피고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법원에서 진행된다. 김 전 부장은 1, 2심에서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2심 법원이 법리적 이유로 1심 판결을 파기하고 새로 유죄 판결을 내렸기에 재심도 관할하게 됐다. 다만 당시 2심 법원이었던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가 현재 존재하지 않아 서울고법이 재심을 맡았다. 재심은 이미 확정된 판결을 다시 심리하는 절차다. 중대한 오류나 새로운 증거가 발견됐을 때 예외적으로 열린다. 재심 판결에 검찰이나 피고인이 불복하면 다시 재판을 청구할 수도 있다. 재심이 1심 법원에서 열렸다면 2심과 3심에 항소·상고할 수 있으나 김 전 부장처럼 2심 법원에서 진행된다면 대법원에만 상고할 수 있어 사실상 두 번의 재판만 받을 수 있다. 김 전 부장 재심에서 검찰 측은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1부 등이 맡는다. 김 전 부장 측 변호인단으로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 이상희·이영기·조영선 변호사 등이 참여한다.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수괴미수 혐의가 적용된 김 전 부장에게 실제 내란의 동기가 있었는지 ▲ 10·26 사건 수사 과정에서 법 위반이 있었는지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 과거 재판부는 김 전 부장이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판단했다. 김 전 부장 변호인단은 내란 목적의 살인이 아닌 자유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부득이한 살인이었다며 내란죄 구성 요건인 ‘국헌 문란의 목적’과 ‘폭동’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변호인단은 또 10·26 사건 수사가 법적 근거 없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에 의해 진행됐고 수사관으로부터 김 전 부장이 당시 구타와 전기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조 변호사는 “내란 목적이 아니었음을 확인받고자 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라면서도 “위법한 수사와 재판이었다는 판단을 받으면 (다른 혐의 역시) 무죄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재심은 판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과거 사건 기록이 부실해 입증이 어렵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된다. ‘친부 살해’ 혐의로 무기징역을 살던 김신혜씨도 구속된 지 24년, 재심 개시 결정 9년 만인 지난 6일 재심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아울러 무죄를 인정받은 피해자가 형사보상과 국가 상대 손해배상을 청구하려면 또다시 법적 다툼을 해야 한다. 서창효 법무법인 원곡 변호사는 “재심 사건을 신속히 처리할 수 있는 전담 재판부를 확대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 [씨줄날줄] 재심의 ‘효용’

    [씨줄날줄] 재심의 ‘효용’

    검찰이나 사법부의 판단 오류로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범죄예방과 처벌이라는 법 집행이 오히려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험의 불씨를 내재한 탓이다. 형사소송법에서 적법 절차 준수가 필요한 이유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 이런 원칙을 소홀히 하면서 억울한 피해자들이 적지 않았다. 수사기관은 고문 등 강압적인 수사로 무고한 사람들에게 죄 인정을 강요했고, 법원은 이를 충분히 따지지 않은 채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오판을 바로잡기 위한 제도가 재심이다. 재심은 확정된 판결에 중대한 오류가 있을 경우 이를 재심리해 실질적 정의를 추구하는 피해자 권리구제 절차이다. 판결이 확정되기 전에 제기하는 상소와 달리 판결 확정으로 더이상 다툴 수 없는 경우 동원되는 최후의 구제수단이다. 재심이 받아들여지면 그에 대한 피해 보상도 가능하다. 2000년 전북 익산 약촌오거리 사건이 대표적이다. 택시기사 피살 사건의 목격자가 살인자로 몰려 10년간 옥살이를 하다 재심으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25년간 복역했던 20대 여성이 재심으로 올 초 무죄 선고를 받기도 있다. 시국 사건 재심도 있었다. 전두환 정권에서 반국가단체로 처벌한 아람회 사건, 5·18 민주화 사건, 부마항쟁 등이다. 단순한 판결 번복을 넘어 역사적 평가를 새롭게 했다는 의미가 크다. 그제 서울고법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재심을 결정했다. 법원은 계엄사령부의 수사 과정에서 구타와 전기고문 등의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봤다. 김 전 부장의 여동생이 재심을 청구한 지 4년여 만의 일이다.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행위라는 김 전 부장의 주장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가혹행위에 대한 규명은 필요해 보인다. 재심은 사법적 오류 시정은 물론 공권력이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재차 일깨운다. 차제에 재심 제도의 보완도 기대한다.
  • ‘10·26 사태’ 김재규 재심 열린다… 사형 45년 만에 재평가받나

    ‘10·26 사태’ 김재규 재심 열린다… 사형 45년 만에 재평가받나

    ‘10·26 사태’로 사형이 집행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재심이 열리게 됐다. 사형이 집행된 지 45년 만, 유족이 재심을 청구한 지 5년 만에 나온 법원 결정이다.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 이재권)는 19일 김 전 부장의 내란목적살인 등 혐의에 대한 재심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재판부는 “당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단 소속 수사관들이 김 전 부장을 수일간 구타하고 전기고문을 가하는 등 폭행과 가혹행위를 했음을 인정할 수 있다”고 사유를 밝혔다. 법원 관계자는 “재심 첫 기일 지정은 재판부 재량”이라며 “이달 하순 재판부 구성 변경이 있을 수 있어 그 이후에 일정이 정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전 부장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차지철 당시 경호실장을 총을 쏘아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같은 해 12월 20일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5월 20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고, 나흘 만인 5월 24일 형이 집행됐다. 김 전 부장 유족들은 2020년 5월 “김재규라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 논의의 수준이 진화하고 도약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 청구 후 약 4년 만인 지난해 4월 첫 심문기일을 연 재판부는 10개월간 재심 개시 여부를 검토했다. 지난해 재심 개시 여부를 심리하기 위해 열린 심문에서 유족 측 변호인단은 “유신독재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항거한 행위임을 정확하게 평가해야 하기에 재심 청구를 하게 됐다”고 밝혔다. 또 ▲10·26 직후 발동된 비상계엄 자체가 위법했고 ▲10·26이 비상계엄 발동 전 범행임에도 민간인인 김 전 부장을 군법회의에서 수사하고 재판했으며 ▲변호인의 제대로 된 조력을 받지 못했다는 점 등을 재심 청구 사유로 제시했다. 과거 김 전 부장을 변호했던 안동일(85) 변호사도 직접 심리에 출석해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안 변호사는 “당시 재판은 절차적 정의가 철저히 무시됐다”면서 “아무리 군법회의라 해도 사법부인데 옆방에 차출돼 나온 검사와 판사 10여명이 앉아서 재판을 지켜보며 쪽지를 전달하고 코치를 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심문에선 김 전 부장의 최후진술 녹음도 일부 재생됐다. 녹음에는 “10·26 혁명의 목적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고 국민의 희생을 막는 것”, “유신체제는 국민을 위한 체제가 아니라 박정희 각하의 종신 대통령 자리를 보장했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 법원, ‘10·26 사건’ 김재규 내란목적 살인 재심 개시 결정

    법원, ‘10·26 사건’ 김재규 내란목적 살인 재심 개시 결정

    법원이 ‘10·26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재심을 개시하기로 했다. 1980년 김재규가 사형에 처해진 지 45년 만이다. 19일 법원에 따르면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 이재권 송미경 김슬기)는 이날 내란목적살인 등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재규의 재심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차지철 전 청와대 경호실장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6개월 만인 이듬해 5월 사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초유의 국가원수 피살 사건이었다. 첫 재판은 1979년 12월 4일 열렸는데, 보름 만인 20일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1980년 1월 22일 시작된 항소심 공판은 세 차례 열렸고 1월 28일 끝났다. 대법원 판결은 5월 20일에 있었다. 김재규 유족들은 지난 2020년 5월 “김재규라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 논의의 수준이 진화하고 도약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 청구 약 4년 만인 지난해 4월 첫 심문기일을 연 재판부는 10개월간 사건의 재심 개시 여부를 검토해왔다.
  •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 “요즘엔 갈대 검사만 있나” 검찰 비판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 “요즘엔 갈대 검사만 있나” 검찰 비판

    홍준표 대구시장은 25일 법원에 윤석열 대통령 구속 기간 연장을 재신청한 검찰을 향해 “요즘에는 어찌 ‘갈대 검사’들만 난무하느냐”고 비판했다. 홍 시장은 이날 오전 페이스북을 통해 “검찰은 면책적 기소할 생각 말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윤석열 대통령을 즉각 석방하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러면서 “내란죄 같은 중죄를 수사하지 않고 기소하는 전례를 남긴다면 그건 치욕의 검찰사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과거 검찰과 관련한 자신의 발언을 소환하며 “예전에 풀잎은 바람이 불면 눕지만, 검찰은 바람이 불기도 전에 미리 눕는다고 한 일이 있다”며 “지금이라도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일부 무지한 특정 법관들의 사법 만행을 바로잡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홍 시장은 또 “검찰이 살아나야 나라가 산다”며 “우리 검찰사에는 그 서슬 퍼렇던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도 중앙정보부의 압력을 물리치고 기소 거부한 강골 검사도 있었다”고 했다. 이는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 장원찬 검사 등이 중앙정보부의 압력에도 기소할 만한 물증을 찾지 못했다며 기소를 거부했던 일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홍 시장은 전날(24일) 밤 법원이 검찰의 윤 대통령 구속기간 연장 신청을 불허한 데 대해 “이재명의 명을 받들어 잽싸게 움직이더니 꼴좋다”며 검찰과 공수처를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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