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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 경제위기 4대원인 있다/ESCAP 진단

    ◎①경상수지 적자 증대 ②재정불균형 심화 ③금융시장 급속개방 ④환율유지정책 고수 【자카르타 안타라 연합】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 산하 아·태 경제사회위원회(ESCAP)는 아시아 경제위기의 원인을 검토한 ‘98 아·태 경제사회조사’ 보고서를 오는 8일 발표할 예정이라고 유엔 공보국이 4일 밝혔다. 이 보고서는 경제위기의 원인을 진단하고 장차 대란 발생 위험을 막기위한 정책들을 제안한 것으로 오는 16∼22일 방콕에서 개최될 제54회 ESCAP 회의에서 주요 논의자료로 이용될 예정이다. 보고서는 1997년 ESCAP 소속 개도국들의 성장이 동남아의 심각한 경제위기로 인해 분명히 위축됐다고 진단하고 있다. 다행히 동아시아와 서남아시아는 강력한 성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 90년대초부터 겪어 온 장기침체에서 상당히 회복한 것으로 확인됐다. 보고서는 동남아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경상수지 적자 증대 ▲재정불균형심화 ▲금융부문에서 적절한 통제체제나 효과적 감독을 위한 제도적 장치 없이 급속한 규제철폐및 개방 ▲개방 자본계정 상태에서 안정적 환율 유지에초점을 맞춘 정책 등을 꼽았다. 한편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은 보고서 서문에서 아·태 지역이 당면한 경제위기 속에서 공평한 성장이라는 근본적 장기 발전목표가 경시돼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말미에서 소득 분배 및 빈곤율의 추이를 다루면서 그 해결책으로 빈곤층의 대다수가 생계를 의존하는 농업생산성 제고와 함께 인력자원 개발,중소기업 진흥,여성 교육,어린이 보건 등에 보다 많은 노력을 집중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세계 문화유산 순례:66)

    ◎중앙아 실크로드에 핀 이슬람의 꽃/전성기땐 사원 360여개/도시전체가 거대한 성채로 우뚝솟은 50m 칼얀첨탑 압권 중앙아시아는 실크로드가 있어 항상 우리에게 미지와 낭만으로 다가온다.그러나 그 곳에도 찬연한 도시문화가 있었고,가장 수준높은 인류의 지혜가 번득이던 곳이다.황량한 스텝위에 개화한 문화이기에 더욱 눈부셨고,너무나 독특하고 당당하여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부하라가 바로 그런 곳이다.동서를 관통하는 실크로드의 요충지에서 온갖 문물과 종교,사상과 신화를 머금은채 성숙해 갔고,급기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가장 중앙아시아적인 성곽도시 문명을 이룩해 내었다.1997년 10월에는 유네스코가 주관한 부하라 도시성립 2천5백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행사가 치러졌다.부하라 도시문화의 장구한 역사적 의미와 그 중요성이 다시 한번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때 칭기스칸에 정복 부하라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성채를 이루고 있다.광활한 사막의 교역로에 터를 잡은 도시는 처음 4.2㎢의 면적이었으나,시대에 따라 부침을거듭하면서 크기는 수시로 변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따라서 고고학적 발굴을 해보면 20m의 문화지층이 다양하게 중첩돼 있다.가장 두터운 하층은 기원전 4세기에서 서기 4세기에 이르는 고대문화층이고 상층은 9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화려한 중세문화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이곳에서 만난 우즈벡 학자들은 유네스코가 부하라의 역사를 2천5백년으로 잡는 것에 불만을 표하면서 성채 바깥의 고대 유적지를 근거로 3천년으로 올려잡고 있었다. 이미 당나라때 이곳을 방문한 구법승 현장은 그의 ‘대당서역기’에서 부하라를 그 크기가 1천7백리에 이르고 동서는 넓고 남북은 좁은 장엄한 도시로 묘사하고 있다.역사상 부하라를 최초로 수도로 정한 나라는 9세기의 사만조였다.사만조를 이어 터키계 왕조인 카라한조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하라는 터키인의 도시문명으로 확연히 자리잡게 된다.이때 부하라는 상업과 수공업이 번성하고 학문과 과학이 크게 발달하여 당시 세계문화의 한 축을 이룰 정도였다.그러나 부하라는 1220년 봄 운명의 날을 맞았다.정복자 칭기즈칸에게 복종을 거부하며,끝까지 하레즘샤 제국의 자존을 지키려던 부하라는 침략자의 철저한 약탈과 파괴,대량살육이라는 가혹한 응징을 받았다.붉은 사막이 끝없이 펼쳐지는 황량한 대지위에 회생불능의 폐허만이 남았다.한 시대,한 문화의 종말은 이처럼 너무나 비극적이었다. 부하라가 제2의 운명을 개척한 것은 14세기 티무르시대였다.중앙아시아의 새로운 패자 티무르의 정열과 넘치는 신앙으로 부하라는 그 폐허의 잔해위에 다시 찬란한 이슬람의 도시로 새롭게 탄생하였다.거대한 성채와 성벽이 축조되고 동서남북으로 곧게 뚫린 도로를 중심으로 엄밀한 계획도시가 들어섰다.왕궁와 이슬람사원(모스크),학교,병원,도서관,공중목욕탕,주거지 건물 하나하나가 예술작품이 되어 되살아 났다.성채 바깥에도 시장과 대상들의 숙소인 캐러밴사라이,종교학교인 메드레세들이 군데군데 즐비하게 줄지어 서있다.전성기에는 360여개 모스크와 113개의 메드레세가 도시를 채웠다 한다.이것이 오늘날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부하라 도시유적의 중심을 이루고있다. 도시 유적지는 쉐이크 잔달 출입문에서 시작된다.세계 각국 상인들과 외교관들이 세금을 내고 일정한 절차를 거쳐 이 문을 들어서면 비로소 부하라 문화의 수련생이 된다.그러면 도시의 상징인 높이 50m의 칼얀 첨탑이 정중앙에서 이방인을 맞이한다.이 첨탑은 예배시각을 알리기 위해 꼭대기에서 코란구절을 육성으로 낭송하는 기능 이외에도 낮에는 높이로 밤에는 불빛으로 지평선에 지쳐있는 캐러밴의 등대 구실을 했다.칼얀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간다.불로 구워낸 단순한 벽돌을 색과 모양을 달리하여 기하학적으로 처리하고,들죽날죽하게 배열해 놓았다.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데,벽돌을 쌓아 놓은 것이 한 치의 비뚤어짐도 없이 하나의 정교한 직선면을 이루고 있었다. ○종교학교도 113곳이나 선명한 쪽빛 하늘에 솟아있는 무작위의 벽돌건축이 만들어내는 조화의 극치였다.칼얀 첨탑을 끼고 칼얀 모스크와 미리 아랍 메드레세 건물이 또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1만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는 모스크는 당시 최대 종교건물이었으며,입구의 색색 벽돌모자이크 장식과 다층 돔식 건축양식은 부하라 건축학파라는 새로운 예술적 사조를 만들어 내었다. 성채 바깥의 시내를 돌아본다.어디를 가도 중세 분위기가 그득하다.골목마다 들어찬 집들은 모두 진흙을 햇볕에 구워만든 벽돌을 사용하였고,벽면은 다시 진흙으로 매끈하게 발랐다.똑같은 집의 모양과 사람들,걸친 옷가지와 음식들,군데군데 모이는 양담배와 코카콜라 병들만 없다면 우리는 분명 고대 부하라에 서있는 것이다.한 골목을 지나면 모스크가 나타나고 또 한 골목을 지나면 메드레세가 나타난다.아무렇게 지은 허술한 건물들이 아니다.혼과정성이 배어있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더욱이 흙과 사막이 딩구는 침침한 분위기에 유적들은 하나같이 채색 모자이크와 벽화를 통해 선연한 색깔을 담았다. 시내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는 나디르 디반베이 메드레세와 라비 카우즈 메드레세는 특히 인상적이었다.자그만 호수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메드레세는 중세 중앙아시아 학문의 중심지였다.이슬람 세계 최고의 종교학자 이맘 부하리,유럽 의학의기초를 다진 이븐 시나(아비켄나),자신의 업적으로 자신의 이름이 학문명칭이 되어 버린 연산법(algorism)의 개발자 알고르즈미 등과 같은 대학자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여행 가이드/타슈켄트서 항공편 40분/면제품·토기·공세공 인기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까지 아시아나와 우즈벡 항공이 직항로를 개설하여 여행이 편리해졌다.타슈켄트에서 국내선으로 부하라까지는 40분 소요. 자동차로는 타슈켄트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목화 밭을 따라 약 8시간을 달려야 한다.“부하라 투리스트”라는 관광회사(전화:3652­232276)가 가장 큰 부하라 전문여행업체이며,부하라 호텔이 최근 개관되어 관광객의 불편을 덜었다.세계적인 목화산지답게 면제품이 뛰어나며,토기,인형,동세공 제품도 인기가 있다.
  • 유라시아 한인의 역할(중앙아시아를 가다:16·끝)

    ◎“21세기 동서교류의 주역 한민족”/경주∼파리 로마 철도 고속도로가 실크로드 구실/중앙아시아 교민이 유럽∼아시아 교이 연결고리 그 동안 우리는 세계사의 중심지역인 중앙아시아를 통하여 세 가지 문제를 살펴보았다.그 하나는 중앙아시아를 통해서 일어난 동서문화교류의 흐름이었고 다음은 문화교류의 세계사적 과정에서 우리 민족문화의 뿌리를 찾아보는 일이었다.그리고 중앙아시아에 사는 우리 교포의 문제를 미래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는 일이 마지막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끝맺아야 할 단계에 왔다. 동서문화교류의 주통로는 물론 중앙아시아였다.이 지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고대로부터 정복전쟁이 연이어 일어났다.대규모 정복전쟁은 기마술의 계발로 가능했다.19세기말까지 기마술은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였다. ○19세기엔 비단길 끊겨 중앙아시아의 대초원을 무대로 대규모 민족이동과 정복전쟁이 전개되었다. 그 영향은 필경 동서문화의 활발한 교류로 이어졌던 것이다.아리안의 동진과 기마족의 출현,그 영향아래서 요원의 불길과 같이 일어난 흉노와 투르크 제국의 형성,8세기 이슬람의 팽창,13세기 몽골제국의 형성.실로 숨막히는 사건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나 세계사를 가름하였다. 몽골제국은 특별히 비단길에서 상품교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하여 교류를 방해하는 지방관리를 중벌로 처벌했고 갖은 수단을 써서 교류의 안전을 보장했다. 그러나 몽골제국 이후에는 포르투갈이 선두로 개발한 해상루트를 통하여 중국으로 직접 서양문물이 들어왔다.그래서 여러 번에 걸친 중개상을 통하여 이루어진 멀고 먼 비단길의 상품교류가 그 빛을 잃게 되었다.그리고 동투르크스탄과 서투루크스탄이 각각 청나라와 러시아에 의하여 점령되던 19세기에는 비단길이 완전히 막을 내렸다. 그러나 20세기초에 철도가 개설되면서 전체 유라시아가 철도로 새롭게 하나로 묶여질 수 있었다.유라시아의 동쪽 끝,서울에서 짐을 실은 기차가 시베리아를 거쳐 파리에서 하역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세계 제1차대전 직후 동서 투르크스탄이 공산권에 편입되면서 이지역이 모두 철의 장막속에 들어갔다.그리고 철의 장막은 1991년 고르바초프가 공산주의를 포기함으로써 역사에서 그 막을 서서히 내리고 있다. 이를 계기로 유라시아 대륙이 새로운 동서교류와 교류질서를 기다리는 단계에 왔다.그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21세기에 맞이할 유라시아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한민족은 이 역사적 과제에 어떤 사명과 역할이 주어진 것인가. 그 하나가 길고 긴 동서문화교류의 과정에서 한국이 지닌 역사적 역할을 살펴 보는 일일 것이다.한국사회에는 유교·불교·기독교와 같은 전형적인 세계종교들이 모두 들어와 공존하고 있다.유교는 한문문화권의 세계관을,불교는 인도문화권의 세계관을,그리고 기독교는 유태교와 이슬람과 한 형제로서 유일신관의 세계관을 대표한다.이처럼 세계문화권을 형성한 중요한 고전문화들이 모두 한국에서 공존한다. ○세계 고전문화의 창고 그러나 더욱더 중요한 사실은 이미 다른 곳에서는 사라진 고전문화가 한국에 아직도 살아 기능한다는 점이다.예컨대 유교의 고전적인 모습은 중국에서는 이미청대에 사라졌다.이때문에 중국이 개방되면서 공자에 대한 춘추 제사인 석전제를 한국의 성균관 유학자들이 공자묘가 있는 산동성 곡부에 가서 복원시켜 주었다.대승불교는 당대에 그 고전적 꽃을 피웠었는데,고전적 대승불교는 중국에서 송대에 이미 사라졌다. 밀교화한 티베트 불교는 처음부터 고전적 모습에서 벗어났었다. 다만 한국의 대가람에서 아직도 당대의 고전불교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늦게 해상루트를 통해 들어온 기독교의 경우만 해도,한국교회는 매일 새벽 4시 예배를 드린다.이런 예는 기독교 2천년사를 통해서 한국밖에 없다. 그만큼 한국기독교는 고전적 신앙의 열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이처럼 한국사회에는 동서 고전문화가 모두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그 고전적 모습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다. 마치 한국은 세계 고전문화의 창고와 같은 역할을 한다. 고대 비단길을 타고 서방의 문화가 한반도에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을 석굴암의 불상이 말해준다.알렉산더 대왕이 인도 서북부까지 원정하면서 희랍의 조각양식이 간다라지방에 전해졌다.이 지방의 미술형식이 대승불교가 전파된 모든 지역으로 펴졌다.석굴암의 불상 역시 간다라 미술의 대표적인 한 예이다.다만 간다라 조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걸작이 석굴암의 불상이다. 그 중후하면서도 부드러운 어깨의 곡선으로 생명과 화평이 흘러내리고, 모든 것을 수용하는 미소가 중생을 자비의 품으로 안아준다.그것은 간다라 미술형식이 한국인의 감각으로 재구성된 결과이다.멀고 먼 서방,희랍의 예술이 비단길을 따라 동쪽으로 와서 유라시아의 동단 토함산의 불상으로 현신하여 동해의 일출을 바라보고 앉았다.석굴암은 한국이 동서문화의 보고이며 동시에 앞으로 올 새로운 동서교류의 동방기지라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이다. 21세기에는 동서문화가 다시 한번 더 새로운 형태로 활발하게 교류할지도 모른다.경주에서 로마와 파리까지를 철도와 고속도로를 통해 문물을 교류할 것이다.그 통로는 중앙아시아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다음 세기에 우리민족이 필요한 모든 자원이 그 지역에 있다.그리고 그 방대한 중앙아시아 전지역에 골고루 퍼져사는 우리의 교포 고려인들은 한국의 대외교역의 현지교두보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런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중국과 일본은 그런 조건을 갖지 못하고 있다.19세기 말에 국운이 쇠하여 북방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고,다시 멀리 중앙아시아까지 실려갔어야 했던 그들이다.우리 형제 고려인들은 이제 전형적인 세계인으로 성장해서 동서문화교류에 크게 공헌할 수 있게 되었다.이 얼마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세계사 중심은 유라시아 그리고 한국사회는 동서문화의 보고라는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역할을 넘어서 동서문화의 동방기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여건이 국내외에서 익어가고 있다.세계사의 중심무대는 유라시아 곧 구대륙이었으며,21세기에도 이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세계인구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유라시아인들은 동서교류가 본궤도에 오를 때 세계교역량을 주도할 것이 자명하다. 그때 유라시아의 동방기지가 어디일 것이며,그 주역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 현해탄은 교역통로를 위해서는 너무 수심이 깊고,중국은 동서문화유산의 수용이라는 세계화의 수순에서 한 발짝 우리보다 늦다.역사는 우리 민족에게 천운을 허락하여 새로운 희망과 각오로 21세기를 맞이할 것을 촉구하고 있지 아니한가.
  • 동서문화의 북방 통로(중앙아시아를 가다:15)

    ◎고구려,만리장성 북로 이용 서역과 교류/외교사절·통신 등 비밀 유지 위해/비단기 요충지 중원 피해 왕래/서역선 만리장성 남로 따라 고구려로 청동기 이전부터 유라시아 대륙에는 민족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그이동 통로는 한대 이후에는 비단길이라고 부른 고대 상업유통로였다.교역 상품들은 멀리 한국에서 영국까지 유통되었다.그러나 몽골제국 시대를 제외하고는 이 교역품들은 한번에 비단길의 끝에서 끝까지 간 것이 아니었다.여러 번 되팔리면서 여러 차례의 단거리 운송 끝에 유라시아 대륙의 끝까지 전해졌던 것이다.그 주 통로가 두말 할 필요없이 중앙아시아였다. 그리고 무역은 엄청난 이익을 안겨주었다.이때문에 중앙아시아의 고대 및 중세 도시는 타지역과 비교할 수 없는 굉장한 부를 누릴 수 있었다.지역적부를 차지하기 위하여 중앙아시아에 세계사적 대정복전쟁들이 일어났던 것도 그 지역의 부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다.알렉산더 대왕,한나라,이란의 사산 왕조,당나라,티베트 왕조,위구르 왕조,몽골제국,또 청나라가 각각 중앙아시아의 비단길을 장악하려는 전쟁을 일으켰다.그러나 역사적으로 제국의 관심을 샀던 비단길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열강국 ‘비단길 장악’ 전쟁 청나라가 동투르크스탄 곧 신강성을 점령할 즈음,유럽의 열강이 해양을 통해 직접 중국으로 들어왔다.따라서 비단길은 급격하게 고립되고 그 기능이 상실되었다.이어 19세기에는 러시아가 서투르크스탄을 정복하면서 동서교류의 통로인 비단길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일정구간의 물품유통은 당연히 인구가 밀집된 대도시나 오아시스를 거쳐서 이동되었을 것이다.그러니까 서역에서 온 상품들은 신강성에서 하서주장을 따라 난주를 지나 서안에 이르러 집하되었다.이 상품들 가운데 얼마가 고구려까지 전달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남북조시대는 많은 소국들이 중원에 난립한 때다.그 상품들이 중원을 지나자면 여러 번 통관세를 내는 번거로움을 치르고 나서야 고구려의 영토인 만주와 한반도에 전달되었을 것이다.이익을 위한 순수 상품의 유통일 경우에는 그런 과정을 밟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이익을 위한순수상품이 아닌 경우에도 반드시 중원을 거쳐서 고구려에 왔을까 하는 의문이 간다.예컨대 고구려와 돌궐 칸 사이의 외교사절이나 중요한 통신같은 경우는 오히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중원을 피해서 서역에 갈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그리고 고구려에서 전교할 것을 이미 결정하고 전교행을 떠난 서역의 스님들 역시 그렇다.도중에 중원을 관광하기를 원하지 않는 한,중원을 우회할 수 있는 통로를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어떤 이유에서든지 서안에서 낙양과 북경을 거쳐 요동에 이르는 통로,곧 만리장성 남로를 피하여 고구려에 오는 길을 택한 동서교류가 있었던 것이다. 이를 가장 잘 웅변해 주는 사건이 양무제때의 삼론종의 조사 승랑이었다.승랑은 원래 도사였기 때문에 저술을 남기지 않아 결국 송나라때의 ‘송고승전’에 빠졌다.그러나 그의 손자벌 제자인 가상 대사 길장이 그가 지은 ‘대승현론’과 ‘삼론현의’에서 다음과 같이 거듭거듭 강조한다.승랑은 요동에서 온 고구려 승려로서,양나라 무제때에 화남의 섭산으로 내려왔다.그가 가르친 공사상의 핵심이 진속합명중도인데,이는 대승불교의 공사상을 가장 온전하게 전하는 논리로서 길장 자신은 물론이고 삼론종의 사상적 근거를 이룬다.이러한 주장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사상은 대승불교의 사상적 근거이기 때문에 삼론종은 중국에 대승불교를 건설하는 이론적 초석의 역할을 했다.다시 말해서 삼론종은 당나라의 대승불교를 유도한 안내자였다.이처럼 중요한 삼론종의 조사가 승랑이었다는 사실을 길장이 주장하는 것이다.그런데 승랑은 이미 요동에서 명성을 쌓고,화남으로 내려왔던 것이다.그리하여 양무제가 그를 모시려 해도,이를 뿌리치고 승랑은 산간에서 공사상의 진정한 뜻을 제자들에게 전하여 삼론종의 논학을 일으켰다.그리하여 공사상은 극동의 불교문화를 변화시키는 효시의 역사적 역할을 감당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승랑만큼 큰 역사적 역할을 했던 한국 사상가가 또 있었던가.우리는 어째서 그를 잊고 있는 것인가.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중원의 불교문화를 전환시킬 만큼 큰 힘을지닌 승랑과 같은 사상가는 결코 본인 당대에 나타날 수 없다.그만한 인물이 나타나기 위해서는,그를 성장시킬 수 있었던 불교 사찰이나 문화센터가 있어야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다.그런데 요동의 불교문화센터는 중원의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랑은 요동에서 성장했다.이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미 투르크의 오르혼비문과 사마르칸트의 고구려 사신도를 거론하면서 고구려는 한문이나 한문문헌지식과 관계없이 멀리는 로마의 사절들과도 교섭했다는 사실을 앞에서 이야기했다.이런 맥락에서 승랑이 성장했던 요동의 불교문화센터는 중원을 거치지 않고 직접 요동으로 들어온 서역의 승려들에 의하여 용수의 중관론이 전해졌을 것이라는 상정이 가능하다.고구려에서 중원을거치지 않고 투르크의 세계,곧 서역으로 직접 이어지는 통로는 두 길이 가능하다. ○고구려 벽화에 서역인 등장 하나는 신강성까지 와서 고비사막을 직접 건너는 이른바 만리장성 북로이다.다른 하나는 신강성도 거치지 않고 천산북쪽 현재의 카자흐스탄의 대초원을 가로질러 알타이산맥과 바이칼호수 사이의 계곡을 타고 몽골로 들어와 만주로 닿는 대스텝 통로이다.아마도 신강성의 동투르크스탄과는 장성북로가 더욱 편리했을 것이고,서투르크스탄의 서쪽 중앙아시아까지 가는 데는 스텝통로가 더 유리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북방방통로를 통해서 고구려인들은 서역인들과 직접 교섭을 했기 때문에 고구려 벽화에는 코가 큰 서역인들과 씨름도 하고 격기도 하는 풍습을 그릴 수 있었다.그 뿐 아니라 신라인들은 위구르조각과 같은 서역과의 문화교류의 흔적들을 남겼다.이제는 서역과의 교섭사를 개방된 시각으로 접근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 이란 「페르세폴리스」(세계 문화유산 순례:61)

    ◎대평원 열주로 남은 페르시아수도/2,500년 전 다리우스대제가 세운 관성대도시/‘182년 영화’ 알렉산더대왕 말발굽에 폐허로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2천500여년 전에 건설된 페르시아제국의 수도이다.인도­아리안계인 「파르스」족의 아케메네스 가문이 이룬 국가라 하여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남쪽으로 2시간을 날면 고대 도시 시라즈에 도착하고,다시 자동차로 동쪽으로 1시간을 달리면 ‘타크트 에 잠시드’에 도착한다.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 페르세폴리스의 현지명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선 셀 수 없는 열주와 초석, 궁전터와 성벽계단,건물의 잔해들,궁전의 규모라기 보다는 궁성 대도시였다.고도 1500m의 황량한 평원에 끝없이 펼쳐지는 폐허의 잔해에서 묻혀지고 잊혀버린 페르시아 제국의 위용을 떠올리기는 힘들었다.역사의 상처마저 풍화되어 보는 이의 가슴을 친다.페르시아는 고대 아시아의 마지막 자존심이었고, 힘만 믿고 서양을 통째로 동양에 실어 날랐던 알렉산더의 도도한 물결에 정신적 가르침을 준 마지막 스승이었다. 페르세폴리스는 바로 그 동양적 정신의 심장부였다. ○각 국어로 새긴 ‘세계의 문’ 장엄한 도시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518년 다리우스 대제에 의해 건설되었다.그리고 그 도시의 완성은 그후 100년이 더 지난 후였다.세계정부가 있던 곳이며,당시 지구상에 번성하던 모든 문화의 집결지였다.외국사신이 빈번히 내왕하고,동서양의 상인이 북적거렸다.중앙아시아에서 연결되는 육상 실크로드와 인도에서 건너오는 해로의 요지에 위치하여 풍부한 물자와 다양한 외국의 문물이 페르세폴리스를 살찌웠다. 사치와 향락,호화로운 파티가 연일 계속되었다. 그러나 페르세폴리스의 운명은 그렇게 길지 못했다. 기원전 330년 페르세폴리스에 도착한 알렉산더는 이 놀라운 아시아의 번성을 감당할 수 없었다.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웠다.182년간의 짧은 생애였다.그리고 2천260년 동안 망각속에 있었다. 1931년 부터시카고 대학의 동양연구소 고고학 팀이 본격적인 발굴과 복원을 시작하면서 서서히 페르세폴리스의 역사적 의미는 되살아 났다. 페르세폴리스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아파다나궁이다.왕들의 대접견장이었던 이 건물은 다리우스 대제때 시작하여 세르케스 왕때 완성되었다.지금은 72개의 기둥 중에 13개만 남아 있다.기둥과 벽면에는 부조가 조각되어 있어 당시의 역사적 편린을 엿볼 수 있다.상대적으로 조그맣게 새겨진 외국사신들이 손에 진상품을 가득 들고 커다랗게 묘사된 페르시아 왕들앞에 서있는 조각은 정말 사실감을 준다.사신들의 공손한 표정이며 왕의 근엄한 태도,날리는 옷자락에서 공물로 바쳐지는 동물들의 몸부림에 이르기까지 역동적인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가 전개된다. 어떻게 돌을 쪼아 저토록 선연하고 감동어린 조각을 만들 수 있을까?항상 그러하듯이 수천년전의 한 역사 유물에서 인간은 숙연함과 겸손을 배우게 된다. 페르세폴리스 건물 중 또 빼놓을 수 없는 가장 화려한 건물은 세르케스궁이다. 19m 42㎝ 높이의 1백개의 열주로 꾸며졌으나,이제 몇몇 기둥만이 그 흔적을 전해줄 뿐이다. 입구의 대문을 받치는 두 개의 큰 기둥에는인간의 모습을 한 황소가 조각되어 있다.11m 높이의 대문 위에는 엘람어와 아시리아어,페르시아어로 각각 ‘전세계의 문’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세계의 중심이라는 페르시아 국의 위용을 엿 볼수 있다.이곳의 기둥마다에도 쐐기문자로 새겨진 역사가 숨쉬고 있다.왕은 주로 세 가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불을 모신 신전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옥좌에 앉아 있는 모습,또는 걷고 있는 모습들이다.부조의 양식들은 아시리아의 니네베 조각의 양식을 많이 닮아 있다.그러나 자세히 보니 약간의 차이도 보인다.권력과 신분에 따라 인물조각의 크기가 다르다.커다란 왕의 위엄앞에 보일락 말락하는 이름없는 백성의 표정이 인상적이다.특히 옷자락의 묘사에서 니네베 양식은 옷이사람 몸에 찰싹 들러붙어 있으나,이곳 페르세폴리스 양식은 옷이 살아 펄럭펄럭 날리고 있다.최고의 예술적인 조각기법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아파다나관 대표적 건물 신전은 불의 신인 아후라마즈다를 모셨다. 빛과 어둠,선과 악이 엮어내는 페르시아 사람들의 이원론적인 민간신앙이 조로아스터교로 성장했다.그리고 유대교에 직접 영향을 주어,오늘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종교사 이야기이다.기원전 6세기말,페르시아의 창건자인 키루스는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그곳에 포로로 잡혀있던 유대인을 무사히 이스라엘로 돌려보냈다.나아가 재정지원을 통해 예루살렘사원을 재건축하게 해주었다.그래서 히브리 성경에는 유대인 지도자에게도 좀처럼 부여하지 않았던 각별한 존경을 키루스에게 표하고 있다.신과 악마의 대결,천국의 보상과 지옥의 응징개념 등이 바빌론 유수 이후에 매우 뚜렷하게 나타난다. 페르세폴리스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마케도니아의 20대 청년 알렉산더의 광풍을 견딘 세력은 아무도 없었다.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운 알렉산더는 전군을 풀어 다리우스 3세를 추격했다.카스피해 연안까지 쫓긴 다리우스 3세는 박트리아 총독이었으며,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베소스의 배반으로 비참하게 죽음을 맞는다.온 몸이 열 군데 이상 칼로 찔린 아시아의 대왕은 마케도니아의 한 병사의 눈에 발견된다.포로로 잡힌 다리우스는 그 병사로부터 한모금의 물을 받아 마신 후,조용히 눈을 감는다.기원전 330년 7월,막 해가 지는 시각이었다.대페르시아 제국도,그 수도였던 화려한 페르세폴리스도 이렇게 하여 기나긴 망각의 역사 속으로 묻혀갔다. ◎여행 가이드/테헤란∼인근 시라즈까지 비행기로 2시간 엄격한 이슬람 국가라 여행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지만,의외로 친절한 이란 사람들의 인간미와 철저한 치안으로,오히려 외국인들에게는 관광의 안전지대이다. 테헤란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시라즈로 가서 그곳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페르세폴리스가 있다.현지명이 타크트에 잠시드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시라즈에는 호마호텔이 유명하다.관광안내는 이란 관광국 안내(892212)나 이란 관광정보센터(227072)로부터 얻을 수 있다.
  • 몽골 흩어진 부족(중앙아시아를 가다:14)

    ◎영웅담으로 남은 ‘칭기스칸 후예’ 자긍심/유라시아 석권했던 대제국 소멸/인구 250만명의 가난한 나라로/당대국 중국·러시아 영향력 경계/‘무지개 나라’ 한국엔 우호적 태도 몽골의 올게이는 알타이 산맥에 가까이 있는 도시다.인구 약 2천명이 살아가는 이 도시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큰 분지에 펼쳐진 드넓은 초원의 한쪽 풀밭에 2발통 프로펠러 비행기가 요란하게 내렸다.하도 낡아서 실밥이 다 드러난 낡은 바퀴로 활주로도 없는 비행장에 내린 것이다. 이 도시에 단 하나 뿐인 호텔을 찾았을 때 유럽에서 온 손님들이 5, 6쌍이 있었다.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스위스 등지에서 몽골을 찾아온 사람들이다.여행을 오기 위해서 미리 짝을 맞추어 떠났거나 아니면 이곳에 와서 짝을 찾은 사람들인데 이미 알타이 산맥과 고비사막을 돌아오는 길이란다.단 둘이서 말을 사서 타고 한 달 또는 두 달씩 알타이산간과 고비사막을 야영을 하면서 누비고 다니는 이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모험적이고 당당한 여행객들이었다. ○내몽골 1,100만명 분리 이들은 전문적인 특수목적을 갖고 떠난 사람들도 아니고 은행원이나 일반 회사원들이라는 것이다.서양인들의 도전적 태도에 한번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나 기원전 2천년쯤에 이들 선조들이 도전적인 태도를 지니고 이곳으로 흘러들어 왔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이들에 비해 한국과 일본인들은 단체여행을 어떻게 즐기는지도 모른다.그래서 몽골 대초원에서는 모험을 즐기는 동양인 여행커플을 만나기는 참으로 어려웠다.울란바토르에서 열린 한국학국제회의에 참여한 어느 한국 여교수가 현지의 회의장 조건이 열악하다고 공개적으로 불평을 털어놓은 일이 있다. 이를 본 한 몽골교수가 “이곳 사정이 좋지 않다는 사실도 모르고 왔는가”고 사석 술자리에서 꼬집는 것을 목격하고 부끄럽게 여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몽골은,칭기즈칸의 땅이고,사람들은 칭기즈칸의 후예이다.어디를 가나,누구를 만나나 칭기즈칸을 그 주인으로 떠올렸다.그러면서도 오늘의 몽골인들은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의 역사 후광에 가려 버거운 부담감을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그 많은 사람들이 술에 의지하고,독한 가루담배를 코로 들이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그들은 저음의 사설조 일박자 음악으로 자랑스러운 몽골제국 영웅들의 무용담을 노래하며 말등에서 사막의 먼 거리를 오갈 뿐이다.세계를 제패하면서 그 어떤 제국이나 왕조도 감히 대항할 수 없었던 군사력의 주체 몽골제국에 비하면 오늘날 몽골인들이 처한 현실은 너무나 참담했다. 오늘의 몽골공화국은 전 세계에서 16번째로 큰 영토를 가지고 있다.그러나 1천5백65만 ㎢나 되는 넓은 영토에 불과 2백50만의 인구가 퍼져 산다.그리고 내몽골에도 1천1백만에 이르는 몽골족이 따로 있다. 몽골족은 남으로는 중국의 황하에서부터 북으로는 바이칼 호수에 이르는 스텝지역에 분포되었다.몽골족이란 말은 대체로 세가지 의미로 쓰여왔다.그하나가 칭기즈칸이 태어났던 부족을 몽골족이라고 한 사실이다.이 태도가 오늘도 몽골인들이 스스로 칭기즈칸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전통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다.스텝의 유목민들은 대외 공동적을 맞이할 때마다 부족연합을 이루었다. 칭기즈칸 이전에는 타타르 또는 달달족이 몽골지역의 유목 부족연합을 주도했었다.칭기즈칸 역시 이 연합에 속한 한 부족에서 태어났다.그러나 그는 후에 타타르와 싸워 이기고,타타르족을 포함한 새로운 부족연합을 형성함으로써 거대한 정복전쟁을 감행할 수 있었다.그런데 칭기즈칸의 서방 대정복이후 러시아와 유럽에선 몽골 부족연합체를 그들이 전부터 알고 있던 대로 타타르라 불렀다.그러므로 타타르는 부족연합의 처지에서는 특정한 부족명칭이고,서방의 시각에서는 몽골부족연합의 명칭이다.몽골어를 쓰는 민족을 몽골족이라 불렀다.이는 대체로 몽골에 대한 학문적인 기준이 된다. ○샌드위치 중압감 부담 몽골어족에는 몽골어의 방언을 쓰는 부리아트족·칼무크족·다굴족·오르도스족,그리고 타하르족이 있는데 이들은 주로 몽골공화국의 북쪽·서쪽,그리고 남쪽 지역에 살고 있다.몽골어는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데,그 어족 안에 몽골어의 형제들인 투르크어와 퉁구스·만주어가 있다.투르크어를 쓰는 민족은 주로 서쪽에,그리고 퉁구스·만주어를 쓰는 민족은 주로 동쪽에 퍼져 살았다. 18세기 중엽 내몽골지방에서 중가르족이 일어나 청나라를 위협하기에 이르자,청은 내몽골을 점령하고 이를 몽골과 분리시켰다.이로써 몽골은 자국민의 2배가 넘는 인구를 지닌 내몽골과 분리된 상태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만주족들은 청국 그 대제국을 건설해서 오늘도 북경 자금성의 영광을 과시하고 있다.멀리는 신강성과 티베트까지 함락시켰다.그러나 청국이 망하자 만주족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한족은 이웃나라 몽골까지 거세하고 말았다.역사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오늘의 몽골 지성인들은 러시아와 중국을 대단히 경계한다.1921년 몽골공산혁명정부가 들어섰고 24년 몽골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그러나 1945년까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몽골은 이후 소련의 그늘 아래 들어갔다.1961년 유엔에 가입했으나 현재 2백50만의 인구로서는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에서부터 독립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아득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그들은중국과 러시아라는 거대 세력의 가운데 낀 샌드위치의 중압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일본이 허수아비 만주제국을 만들어 몽골까지 위협했던 기억을 아직도 지니고 있다. ○진정한 우리의 이웃친구 그런 입장에서 대한민국은 몽골인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정말로 신선한 이웃이다.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양 국민 사이의 유구한 유대를 그들은 반가워 한다.그들은 한국을 무지개의 나라,솔롱고스라 부른다.전하는 바에 의하면 몽골인들은 근대국가의 국경이 없던 시절에는 가축 떼를 이끌고 만주벌판을 지나 백두산까지 와서 그 영산에 걸린 무지개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면서 그 너머 남쪽나라를 솔롱고스라 불렀던 것이다.세계에서 가장 우리를 반겨주는 사람들이 몽골인이다.그들은 세계사회에서 우리의 진정한 이웃이며 친구이다.
  • 카레스키 농장(중앙아시아를 가다:13)

    ◎사막­갈밭에 일군 ‘고려인 옥토’/37년 극동서 강제이주한 역경 딛고 정착/억척스런 생활력·자긍심으로 터전 가꿔 오늘날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은 스텝지방에 광범위하게 퍼져 살고 있다.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원동지방에서 기차에 실려 이들이 중앙아시아로 이주하는 데 한달 이상이 걸렸다.강제 이주 지역은 중앙아시아사막 가운데 갈밭이었다.열악한 조건의 기차여행 도중에 이주민의 3분의 1이죽었다. 또 갈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3삼의 1이 죽어나갔다.거기서 살아 남은 고려인 카레스키들은 그 갈밭에서 기적을 만들었다. 1960년대에 이르면 카레스키들이 갈밭에 일군 집단농장 콜호스들이 소련연방공화국의 전체 콜호스들 가운데 생산성이 가장 높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놀라운 일이다.소련영토 안에는 예컨대 세계적인 곡창으롤 자타가 공인하는 우쿠라이나가 있다.이처럼 세계적 곡창지대의 농장들을 제치고 갈밭을 일구어 만든 사막 농장의 높은 생상성을 자랑하게 한 일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그 기적의 주인공이 카레스키이다.○세계적인 목화 주산지로 갈밭에 관개수로를 만들어 물을 대고 쌀농사를 지은 사람들이 카레스키이고,끝없는 목화밭을 일구어 세계적인 목화산지로 만든 사람들도 역시 카레스키이다.더 나가서 150개 민족들이 살던 소련에서 가장 높은 교육수준을 자랑하던 민족 역시 카레스키였다.중앙아시아 어디를 가나 카레스키는 주위사람들 보다 잘 살고 있다. 이처럼 고려인들이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민족적 정체감과 문화적 자긍심을 잃지 않았던 데서 비롯된다.이러한 사실은 카자흐스탄 공화국 쿠즐오르다시의 국립대학 대학도서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이 도시는 저 유명한 독립투사 홍범도 장군이 생을 마감하고 무덤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이 도서관에는 블라디보스토크 근교의 해삼위라는 한인지역에 설립했던 사범학교의 도서관에 있던 한문서적들 가운데 20여책이 아직도 남아있다.그 고서들을 살펴보면서 가슴이 메이는 감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지금은 아무도 보지 않고 서고에 쌓여 있는 이들 책에는 연필로 책의 제목과 내용을쓴 목록들이 있었다. 한문서적들이 카자흐스탄의 두 도시의 도서관에 있다는 소식은 이미 1991년 알마타의 원로 철학자 박일 교수로부터 들었다.강제 이주 당시 해삼위의 한인사범대학도 함께 쿠즐오르다로 옮겼다.그 경황 없는 와중에서 대학도서관에 있던 한문책들을 한인들이 각자 몇권씩 나누어 지니고 기차에 타고 쿠즐오르다에 도착했던 것이다.도착지에 오니까 소련정부가 유태인계 러시아인 빠삐옹씨를 사범대학의 새로운 학장으로 임명했고,그 학장은 한문서적을 모두 불태우라고 명령했다.당시 이병국 수학교수가 우여곡절 끝에 극적으로 이를 몰래 빼돌려 알마타로 보냈다.그 책들이 지금은 푸슈킨도서관에 잘 보관되었다. 이 도서관에 있는 400여책은 박일교수가 도서목록을 장성했다. 알마타의 푸슈킨도서관의 책은 박일교수가 직접 정리했지만,쿠즐오르다대학의 도서관 책은 아마도 한문을 아는 마지막 세대의 그 어느 고려인이 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 자료를 정리하는 동안 무었을 생각했을가.그들은 고려인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우리민족의 문화를 저린가슴으로 느끼고,소중하게 여기면서 그 책들을 하나하나 정리했을 것이 틀림 없다. 카자흐스탄의 도서관의 서가에 조용하게 남아있는 한문책들은 우리에게 한가지 사실은 분명하게 일깨워준다.고려인은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몸은 끌려왔지만,정신까지 끌려온 것은 아니었다.강제 이주를 당하면서도 정신적주체의식을 잃지 않코 한국인의 전통문화를 지켰던 것이다.그리고 강제이주 동안에 그 많은 서적을 싫고왔던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문화민족으로서의 자존심을 잃지 않았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그런데 고려인들은 한문을 더이상 배울 기회가 없어서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문헌 전승을 이을 수 없었다.이점은 유태인들이 10세기 이후 슬라브세계에 들어와서 오늘날까지 탈무드의 문헌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과 다르다.그러나 고려인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억척스러운 생활력과 관용 그리고 헌신을 통하여 고려인의 삶의 가치를 전승받았다.말하자면 고려인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문자없는 탈무드였다.그 전승은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었다. ○다민족중 교육수준 상위 고려인들은 바로 도전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다.강제이주를 당한 고려인들 가운데 그 누구가 미래를 보장받았고 안심할 수 있었겠는가.그럼에도그 누구 하나 아주 포기하고 주저앉은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어려운 러시아말을 속히 익히고 배워 전문가들이 되었다.그래서 150개 민족 중에서 가장교육수준이 높은 민족으로 일어섰다. 지금은 공산권의 몰락으로 육로를 통하여 동서 교류가 가능해졌다.그리하여 고려인들은 자동차로 유럽에 가서 물건을 사오고,또 원하면 언제라도 한국에서 상품을 사올 수 있다.이처럼 고려인들은 남달리 동서를 넘나들면서 교류를 할 수 있게 되었다.아마도 고려인 많큼 폭넓게 동서를 넘나들고 있는 민족은 없을 것이다. 고려인은 한마디로 전형적인 세계인이다.그들은 한국인이면서,러시아 문화를 가슴 깊이 받아들이고,중앙아시아의 스텝의 정서에 익숙해졌으며,그 모든조건들을 넘나들면서 주체의식을 갖는 생활경헙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진정한 세계인이다.예컨대 미국인이나 유럽인은 세계적인 활동무대를 자랑할수는 있어도,결코 동양과 슬라브의 문화와 감정을 이해하는 것 조차 어렵다.그럼으로 그들은 그저 오만한 미국인이며,유럽인일 뿐이다.일본인은 아직 개인차원에서 동서를 넘나들면서 교류는 한다지만 생활감정까지는 갖지 못했다.중국인은 아직도 중국인일 뿐이다.이제 다시 고려인들을 보자. 그는 진정한 세계인이다.그들이 사는 삶의 터전,비단길에 사는 여러민족 가운데서도 두두러지게 동서를 넘나들 수 있는 문화적 역사적 여건을 지닌 것이다.
  • 까레스키 식품의 확산(중앙아시아를 가다:12)

    ◎유목민족의 식탁 점령한 김치/“입맛을 산뜻하게 하는 별미”/양고기·양젖 위주 식사에 적합/신강성­카즈흐­티베트까지 ‘침투’/우루무치 교포 절반이 김치장수 그 끝 없이 멀고 먼 서역에도,어디를 가나 우리 교포들이 살고 있다.그들은 한국의 음식을 먹고 전통식생활에서도 전통을 지킨다.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유학온 카자흐스탄 학생이 밥을 물말아 먹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던 기억이 생생하다.그 학생은 고려인인 자기 할머니도 늘 그렇게 잡수신다고 했다.그들의 식생활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것은 물론 김치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도시 큰 바자에 가면 의례히 고려인 까레스키 여인들이 김치와 고사리를 비롯한 각종 나물과 샐러드를 판다.이들은 본래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브스크 지역의 원동에 살던 사람들이다.그러다 1937년 스탈린이 강제로 이주시켜 중앙아시아 곳곳에 고루 퍼져 살게 되었다. 그래서 중앙아시아에서 김치는 까레스키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공산권에 여행이 가능해지던 80년대 말부터 이러한 소식을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터이다. ○88년 봉급자의 20배 수입 그런데 이번에 신강성의 수도인 우루무치에 가서 김치가 지닌 경제적 잠재력에 크게 놀랐다.1986년 중국에서 자영업을 허용하기 전까지 우루무치의 조선족은 불과 20호 정도밖에 없었다고 한다.우루무치의 조선족은 자영업을 허용한 이후 늘어났다.심양에서 처음으로 김치장사에 나섰던 한 아주머니가 하루아침에 큰 거부가 되었다는 소문이 나고 부터다.중국의 동북삼성에 사는 조선족들은 우리의 전통식생활을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김치장사는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자영업이다.그런 점을 고려한 조선족들이 김치장수로 나서 옛날 서역이라 불렀던 신강성까지 왔다. 제일 먼저 우루무치에 온 사람들은 88년과 89년경에는 하루 중국돈으로 약 200원 이상을 벌었다.월수입도 6천원정도나 되었다. 월봉급이 많아야 500원이었던 시절 당시의 수익은 월급의 10내지 20배에 달하는 거금이었다.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90년에는 약 100세대의 김치장수가 우루무치로 몰려들어 조선족이 모두 120세대로 늘어났다.그러나 100여 세대 김치장수가 우루무치시에 있는 네개의 바자에 모여들었기 때문에 각 세대의 수입이 급속히 줄었다.그래서 그들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전업을 하든가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지금도 100세대 가운데 약 50여 세대가 김치장사를 하고 있다.월 1천여원 이상의 수익을 쉽게 올린다.이 정도면 중국에서 괜찮은 수입인데도 그들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다.우루무치를 떠나 세계의 지붕 티베트 라사까지 진출했다.조선족 김치장수들의 생활태도는 참으로 놀랍도록 도전적이다.지금도 김치가 지닌 확실한 상품성을 딛고 일어서서 기적을 현실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신강성에 우리민족이 처음으로 들어간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19세기 중엽 이전에 중국에 이주한 한국인들은 거의 중국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오늘의 조선족들은 그 이후에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또는 일제의 수탈에 못 이겨 떠난 사람들의 후예다.그 가운데는 1959년 신강성 해방군 자격으로 현지에 주둔하다가 제대하고 주저앉은 사람도 있다.1960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파견되어 의사와 병원장으로 근무하다가 몇년 전에 정년퇴직한 원로 의사 한분도 신강성에 자리잡았다. 조선족 의사는 처음으로 우루무치에 올 때,난주에서 트럭을 타고 왔는데,17일이나 걸렸다고 한다.그 때 나이 21세의 총각이었다.우루무치 초행길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가 물었더니 “다시는 못 돌아갈 것같았다”는 이야기를 했다.그 길에는 김치장사를 하기 위하여 멀리 만주에서 온 조선족 네명이 동행했다는 것이다.어떤 이는 이런 말을 되뇌었다.“집 떠난 사람들이니까 선생님의 그 말을 알지,집 떠나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를 거야”라고…,모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입에 밴 음식 기름기 제거 신강성에는 위글족 이외에 몽골과 카자흐족 등 많은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다.모두 양고기를 주식으로 하고 낭이라 불리우는 빵을 먹는 민족이다.이러한 식생활은 신강성을 포함한 전 스텝 지역,다시 말해서 투르크와 몽골의 모든 지역이 같다.스텝의 유목민족들은 말이나 양젖으로 치즈와 요구르트는 물론이고,술까지 빚어서 먹는다.이런 점은 곤륜산맥과 에베레스트 산맥으로 연결되는 고원 티베트에서도 마찬가지다.한마디로,유목민들은 양고기와 우유만을 먹고 마시며 살아간다. 유목민족들이 왜 김치를 사먹느냐고 물어보았다.우루무치의 조선족들은 “김치가 산뜻하기 때문”이라고 하나같이 자랑스럽게 말한다.고기와 우유,그리고 치즈만을 먹고 사는 유목민들이 순식물성 발효식품이기도 한 산뜻하고 시원한 김치맛을 한번 보고나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치즈나 마유주도 발효식품이다.하지만 이들 낙농식품은 우유기름 맛을 그대로 담아 입에 밴 육식의 기름끼를 가셔주지는 못한다.그러나 무배추와 파마늘과 고추가루와 생강 등 온갖 양념을 고루 삭혀 발효한 김치는 입맛을 산뜻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시원한 맛은 정신까지 맑게 해준다.김치에는 고추 매운 맛의 톡 쏘는 자극과 파마늘의 짜릿하고 알딸한 뒷맛,무배추의 살에 양념들이 배여서 숙성될 때 나오는 산뜻한 신맛이 모두 어울렸다. ○개방정책 타고 번져 김치는 어느 육류와도 잘 들어맞는다.미국 카우보이들이 즐기던티본 스테이크와 가장 갈 어울리는 식품은 뭐니 뭐니 해도 김치다.한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미국인들의 주장이 그러하다.다만 김치는 가벼운 음식에는 그 양념 맛이 너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육식만 하는 유목민족에게는 안성마춤의 별미인 것이다. 세계의 오지 타클라마칸 사막과 티베트 고원지대에까지 밀어닥친 개방정책은 시장경제를 열었다.김치도 그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김치는 오래지 않아 유목민들 식생활의 총아가 될 수 있다.김치 없이는 못사는 한국교포들이 도전적으로 김치를 팔고 있는 한은 그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 대제국과 기마민족(중앙아시아를 가다:11)

    ◎보편 가치에 동화된 유목민 팽창주의/흉노·투르크족 점령지 문화말살 한때 일뿐/불교·이슬람교·기독교문화권에 편입­소멸 중앙아시아에서 시작한 기마술은 제국의 형성에 없어서는 안될 요인이었다.따라서 인류역사상 가장 방대한 대제국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그 첫번째가 스키타이 세력이다.그러나 스키타이인들은 아직도 베일에 싸인 구석이 많다.그들은 도전적인 기마 집단으로서 여러 지역을 국지적으로 점거하면서 황금문화를 전파했다.그래서 하나의 통일된 정치체제로서의 제국이라고 부르기에 미흡한 점이 있다. 진정한 대제국은 흉노제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그 흉노라는 민족은 서양에서는 훈(Hun)으로 기록된다.기원전인 BC 318년 춘추전국시대 주나라의 5개국이 흉노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는 협정을 맺었다는 기록도 보인다.그리고 기원후인 AD 447년 유럽 훈제국의 아틸라 칸이 발칸반도에 제2차 원정을 시도한 일이 있다.그러자 동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는 그의 재상 아나톨리우스를 보내서 이른바 ‘아나톨리우스 협정’을 맺었다.이 협정에는 ‘투나강 남쪽 5일 거리에 비잔틴(동로마제국) 병력을 두지 말고,양국 무역시장은 훈의 변경도시인 나이수스에 설치할 것’이 명시되었다. ○흉노의 강대제국 설명 또 비잔틴은 ‘전쟁 배상금으로 금 6000지브레(악 2천700㎏),그리고 연공을 3배 인상하여 금 2천100리브레(약 945㎏)를 낸다’는 조항도 들어갔다.이 협정내용은 흉노가 얼마나 강대한 제국이었는가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흉노와 같은 종족의 뿌리를 두고 그 뒤를 이은 제국이 투르크 또는 돌궐이다.‘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하나의 깃발 아래 복속시키겠다’는 것이 투르크의 정복 의도였다.따라서 그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물밀듯이 제압하면서 공전의 대제국을 이루었다.그러나 그 통치영역이 워낙 방대하고 다양한 지정학적 조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분열되기도 하고 다양한 제국으로 이어지기도 했다.그 대표적인 제국이 세계 제1차 대전까지 지속된 오늘의 터키공화국의 전신인 오스만 터키제국이다.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투르크족은 언제나 하늘님 텡그리를 신앙했다.그리하여 돌궐비문에 ‘나의 부친 카간과 모친인 하툰(카간의 비)은 하늘이 권좌에 앉혔다’.그리고 ‘하늘이 명하고,쿠트(하늘의 뜻)를 주었기 때문에 카간이 되었노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투르크의 생득적인 팽창주의는 이슬람 세계의 형성과 12세기 몽골 정복에 의하여 일대 도전을 받아자체 변용이 이루어진다. 몽골 제국역시 투르크의 기마제국이 지닌 전형적인 팽창주의 태도를 그대로 전수받았다.따라서 흉노,투르크,그리고 몽골 제국들은 한마디로 기마제국이다.항가리를 복속시키고 폴랜드를 함락시키던 몽골의 바투 칸의 다음 공격목표는 게르만이었다.이에 전 유럽이 풍전등화의 공포에 휘말렸다.그러나 1242년 초 몽골 황제 오고데이의 사망 소식을 들은 바투가 황제후계자 선출에 참여하기 위하여 몽골 수도 카라코룸에 가기 위해서 군대를 철수했다.이에 유럽은 뜻하지 않게 몽골의 침략을 피할 수 있었다.누가 역사를 예측할 수있단 말인가. ○생존차원서 영토 확장 흉노,돌궐,그리고 몽골 곧 원나라는 전형적인 유목민족의 기마 제국이었다.이들만큼 방대한 통치 영역을 가졌던 왕조나 국가는 아직 없다.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의 정복지역이나 로마제국은 비교가 될 수 없다.유목 기마민족은 방대한 초원을 차지하지 않으면 안된다.유목에 필요한 초원은 자주 가물기 때문에,더 넓은 초원이 필요했다.따라서 넓은 땅과 방대한 영토를 확보하는 것은 일종의 생존적 충동다.정복이라는 공간적 팽창주의는 그들의 생존을 위한 이념고,그 이념은 곧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이러한 팽창주의 꿈이 군사력으로 분출히여 공전의 대제국을 이루었다. 그처럼 강대했던 제국을 탄생시켰던 이념과 세계관들은 미구에 사라졌다.오히려 피정복민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정복 유목민들이 받아들이게 되었다.그래서 정복유목민들이 역사에서 마치 사라진 것과 같이 보인다.예컨대 중국 중원에 들어온 서역인이었던 북위나 몽골 민족은 오래지 않아 중국의 길을 걸었으며,고창이나 구차국과 같은 위글 왕조는 조로아스터교나 불교에 개종했었다.그러나 대부분의 중앙아사아의투르크족은 후에 이슬람 국가가 되었으며,유럽에 정착한 훈과 쿠르크족은 기독교로 개종했다.따라서 오늘날 흉노나 투르크족은 이슬람이나 기독교 문화권으로 편입되어 외견상으로는 민족이 사라진 것 같이 보일 수도 있다. 불교,기독교,그리고 이슬람과 같은 고전종교들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과,그 안에서 살만한 가치가 있는 이상사회를 이루는 방향을 제시했다.시대와 지역을 넘어선 보편적 이상과 꿈을 제시하는 것이다.이 보편적 이상과 세계관 앞에서 유목민족의 그 것은 너무나 소박하여 그 빛을 잃고 만다.투르크의 각 민족들은 보편적 세계관인 이슬람에 편입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팽창주의 이념 역사 파괴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가장 잘 보여준 종교는 불교가 아닌가 한다.불교는 어떤 군사력이나 정체세력에 기대지 않고 비단길을 따라 전세계로 퍼졌다.그리하여 불교의 이상과 세계관을 당나라와 멀리 신라에서 꽃을 피울 수 있었다.그러나 불교가 지나가던 비단길의 길목을 장악하고 교역을 주관하던 서역인 자신들은 그들의 고대 문화를 잃고 말았다.고전적 가치관이 팽창주의에 비해 역사에 보다 더 큰 힘을 실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비단길의 대 초원에 부는 모래 바람은 오늘도 우리에게 들려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21세기에 온 인류가 당면할 ‘무한 경쟁’은 기마제국의 공간적 팽창주의 이념을 재현한 것인지 모른다.팽창주의 이념은 인류역사를 파괴했을 뿐이다.그것은 인간의 삶과 사회에 대한 진정한 가치관 속에서 빨리 사라져야 할 것이다.
  • 한반도 세계 7위 분쟁 위험지/USA투데이지 보도

    ◎올 지구촌 30∼35곳서 분쟁 예상… 작년의 2배/최대 위험지 카스피해… 대만·보스니아도 대상 【워싱턴〓김재영 특파원】 미국의 USA 투데이지는 최근 98년에도 세계는 수십 곳에서 분쟁이 터질 가능성이 있어 실질적인 평화의 도래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전망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세계 인권과 분쟁을 자체 감시하는 민간단체인 프리덤 하우스는 올해 30∼35 곳에서 상당한 크기 이상의 분쟁이 일어날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상황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확대 해석한다는 비판이 없는 것이 아니나 이 단체의 분쟁 가능지역 숫자는 지난해 전망치의 갑절에 해당된다.또 이 분쟁가능 지역은 대부분이 내전적 성격을 띠었다.아프가니탄,알제리,방글라데시,브룬디,캄보디아,콜롬비아,동티모르,카시미르,쿠르디스탄,미얀마,북아일랜드,르완다,시에라레온,소말리아,스리랑카,수단,투르크멘니스탄 등등… 한편 이 신문은 자기들이 보는 잠재적인 분쟁폭발 10대지역을 꼽았는데 한반도는 7번째에 올랐다.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신문이 집중 거론한 분쟁폭발 가능지에서는 빠졌다.이 신문이 최대로 우려하는 지역은 의외로 중앙아시아의 카스피해.중국은 카스피해의 에너지공급을 장악하려고 기도해 미국기업과 마찰을 빚을 수 있다.러시아는 이곳을 뒷뜰로 여기고 있어 석유에 관한 양보를 얻을려고 옛 소련 공화국이었던 이곳 나라들에 경제압력과 군사시위를 할 수 있다.뿐만 아니라 이 공화국들 사이에 벌써 종족분쟁 조짐이 내연하고 있다.세계 석유시장에 급변이 생긴다면 이 지역은 21세기의 중동으로 변한다는 우려인 것이다. 대만이 계속해서 독립을 추구한다면 중국은 군사행동을 벌일 가능성이 있다.남미 콜롬비아는 벌써 20년째 공산주의자 세력과 마약밀매단이 합력해 정부와 대항하고 있는데 이 나라의 절반이 현재 이들의 장악 아래 있다.보스니아 지역은 클린턴 미 대통령이 미 평화유지군을 계속 주둔시킨다고 결정하긴 했지만 과연 평화가 정착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특히 유고에 속한 코소보지역이 위험하다. 이라크는 언제라도 사고가 터질 가능성이 확실한 지역.거기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준동하고 있다.아프리카 중앙부 여러나라가 지난해에 이어 전쟁에 휩쓸릴 수 있다. 이밖에 인도­파키스탄­중국 접경지역, 아프가니스탄,알제리아 등이 분쟁폭발 가능지로 지목됐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시(중앙아시아를 가다:10)

    ◎중앙아 최고의 도시… 동서문화 교류 요충지/8세기 아랍군에 점령… 투르크족 점차 이슬람화/사마르칸트궁전 벽화엔 고구려인 조문사신이… 오늘날 사마르칸트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주의 주도다.그러나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역사에 등장한 중앙아시아 최고도시의 하나였다.그 고도에서는 옛 고려인을 그린 벽화를 만날 수 있다.멀고도 먼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을 만나다니…….그럴만한 사연을 지닌 고도가 바로 사마르칸트인 것이다. 그러한 역사속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동서문화의 교류가 중앙아시아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그리고 동서문화 교류를 통해 세계문화사가 전개되었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다.따라서 세계문화사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중앙아시아역사를 한 차례쯤 들여다 보는 일일 것이다. ○대규모 민족이동 첫 파장 중앙아시아 일대 대초원의 역사에서 파상적으로 일어난 사건은 대규모의 민족이동이다.그 첫 파장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분명치 않다.다만 파장의 주체가 수메루족이 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해볼 수 있다.기원전인 BC3500년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고대문명을 이룩한 수메르족은 오늘의 터키족이 속하는 알타이어족의 한 갈래다.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를 연구한 앗시리아학자들이 분명히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원주민들과는 생활습관 뿐 아니라 언어마저 다른 수메르족이 이 지역에 나타났다.그 수메르족은 뒷날 지금의 중동인종인 셈족에게 흡수되면서 수메르어도 사라졌다.이들 두 사건,다시 말하면 수메르족의 출현과 소멸은 알타이어계의 동양족이 서남쪽으로 이동한 뒤 메소포타미아에 고대문화를 다시 이룩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그것은 민족의 서방이동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BC2000년쯤 알타이와 내몽골,시베리아로 코카시안 또는 백인들이 들어왔다.그들이 만들어놓은 문화가 바로 지난번에 말한 아파나시에보문화다.그 다음 8세기쯤에는 스키타이가 기마병을 이끌고 이 지역에 제2진으로 도착했다.그러니까 백인의 동방이동은 중앙아시아가 두번째 맞은 파장이었다. 스키타이의 기마술은 카스피해안에서 몽골과 만주에 이르는 대초원 전지역에 충격을 안겨주었다.보병을 한꺼번에 밀어치울 수 있는 기마전은 당시로서는 가공할 전술이기도 했다.그리고 말은 여러 가축을 이끌고 장거리를 이동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기마술은 결국 본격적인 유목생활을 재촉한 생활수단으로 정착했다.토착의 동양족들은 이를 재빨리 받아들였다.이에 따라 민족혼합이 급속히 진행되는 가운데 새롭고 강력한 정치집단도 나왔다.BC3세기 몽골에서 발흥한 흉노가 그 집단이다. ○흉노 저지 만리장성 축소 그 시기에 중국의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았다.북쪽의 흉노족을 막기위해서 였다.BC221년에 시작하여 기원후인 AD220년에 끝난 전한과 후한이 기를 써서 막아야 했던 세력은 흉노다.서방의 흉노인 훈제국의 아틸라 칸은 AD445년에 등극했다.그리고 아시아에서 중부유럽에 이르는 지역을 손아귀에 넣었다.동·서 로마를 포함한 어떤 세력도 흉노에 대항하지 못했다. 동로마의 황제 데오도시우스가 아틸라 칸을 살해하려다 발각된 일이 있다.그러나 죽음을 맞을뻔 한 아틸라 칸은 데오도시우스 앞에서 당당했다는 것이다.그 사실을 기억한다면 서방의 사가들이 흉노를 얼마나 질시하고 두려운 눈으로 보았는지를 잘 알수 있다.중국의 정사도 마찬가지다.중국은 흉노에 비해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겉치례옷을 걸쳤을 뿐 질시와 두려움은 여전했던 것이다. 동방의 돌궐제국은 한때에 와해되었다.그러나 6세기에 돌권의 후예들이 투르크라는 이름으로 부족연맹을 결성했다.돌궐 또는 투르크제국시대가 다시 열린 것이다.흉노와 마찬가지로 돌궐 역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대제국들로 나누어졌다.비록 다양한 세력들이기는 했으나 투르크는 같은 문화와 언어,종교 만큼은 서로 공유했다. 그런 투르크에도 변화가 왔다.8세기 초에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부하라와 사마르칸트가 아랍 이슬람군에 점령된 것이다.이들 지역의 투르크족은 이슬람교도가 되었다.그 뒤에 이슬람지역의 투르크족들은 여러 이슬람투르크왕조를 세웠다.그리고 AD751년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탈라스로 원정한 고선지장군이 이슬람 투르크 세력에게 패했다.중국은 이를 계기로 중앙아시아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슬람 투르크의 왕조들은 13세기 몽골의 말발굽에 짓밝히는 비운을 맞았다.투르크는 패자이기는 했으나 이슬람문화는 끝까지 지켰다.그리고 유럽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오스만 터키제국(AD1340∼1922년)은 제2차 세계대전까지 투르크의 영광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듯 흉노와 돌궐의 민족이동은 BC3세기에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그 사이 몽골의 군사적 제압이 뒤따랐다.그러나 민족이동의 주역들은 이슬람이나 기독교에 편입되었다.이슬람화한 각 지역의 투르크족들은 나름대로 문화적 정체성을 지금도 강하게 지니고 산다.오늘날 중앙아시아 5개 공화국에 남아서 사는 투르크족이 그들이다. ○‘해뜨는 나라 고구려’ 기록 중국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관심은 탈라스 패전 이후 시야를 벗어났다.우리의 역사도 그 지역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벽화속의 그림이기는 하나 사마르칸트에서 고구려의 사신을 만났다.그 벽화는 아프레시압박물관에 소장되었다.그런데 오르콘 돌궐비문은 카칸의 조문 사절단들이 누구누구인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해가 뜨는 나라 베클리(고구려),타브카즈,티벳,아바르,로마,키르키즈,오츠 쿠르칸,오트우즈 타타르,기단(거란),타타비 등 여러 민족들이 신음하고 울기위해(주문하러)왔다.”고 기록했다. 투르크제국 공식비문에 ‘해뜨는 나라 고구려’가 첫 국빈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 공식기록은 고구려 사절단이 어떤 국가의 사절단들과 조우했는지를 일러주는 자료다.고구려 사절단은 천산아래 탈라스를 지나와서 세계의 끝에서 온 여러나라 사절들을 만났다.그런 중국 영향권 밖에 사는 사람들과 교류를 하기위해서는 한문이나 한자문헌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 카자흐 수이강변의 암각화(중앙아시아를 가다:9)

    ◎석·청동·철기 시대별 형상 다양/사슴·말·소·양 등 동물부터 기마병의 전투·출산장면까지/부족 경사·비극 등 기록 도형화/중앙앗시아 거쳐 한반도까지 전래 바위에 새긴 신비로운 그림 암각화는 세계 도처에 있다. 다양한 민족들과 오랜 역사를 간직한 유라시아 구 대륙 곳곳에서 발견된다. 구 대륙에 속한 한국에서도 암각화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몽골과 시베리아 해안지역그리고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등지에서는 한국의 암각화와 유사한 암각화들이 보인다. 이 지역은 지난번 지적한 바와 같이 기마민족의 통로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카자흐스탄 암각화 지역에 대한 답사를 여러차례 시도했다. 그럴 때마다 공교롭게도 현지에 눈이 쌓이거나 기후가 나빠서포기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번에는 일부러 건기를 택하여 현지를 찾았다. 알마아타에 있는 카자흐스탄 국립과학원 고고학연구소장인 바이파코프 교수와 암각화연구에 한평생을 바치고 지금은 정년퇴직을 한 노교수 마라아쉐프가 동행했다. 알마아타에서300㎞나 떨어진 암각화 사이트를 두 곳이나 며칠을 두고 답사한 것은 행운이었다. 칼디쿠르간이라는 도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수이강가의 암각화 사이트를 먼저 찾았다. 이 사이트는 한국의 울주 반구대와는 달리 산 전체 바위 모두가 암각화였다. 사방 40㎝ 이상되는 평면의 검은 바위들이 거대한 산 계곡에 가득히 깔려있고,그 바위마다에는 예외없이 그림이 새겼다. 그러니까 산전체가 선사문화유산이자 미술자료라 할 수 있다. 그림의 주제들은 다양했다. 이를 정리하면 첫째 사슴과 멧돼지·소와 양 등을 표현한 동물의 세계,둘째 동물의 사냥,말과 마구 및 마차와 마차바퀴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셋째 전쟁과 기마병,넷째 성기와 남녀의 성교 및 여인의 분만장면 등 생식에 관한 그림도 있다. 암각화는 후기 신석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중세 몽골시대까지 그렸다. 그렇듯 수이강가의 암각화는 수천년을 두고형성되었다. 암각화의 시대는 석기,청동기,그리고 철기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석기시대 암각화의 주제는 주로 수렵의 대상이 되는 동물들과,소와 양 같은 가축들이다. 그 스타일은 투박하여 미학적으로 다듬어진 세련된 솜씨는 아니다. 그렇다고 정형을 갖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는 동물들의 스타일이 대단히 정형화한 형상을 보여준다. 그가운데 사슴이 가장자주 나타나거니와 사실적이다. 청동기의 사슴은 한마디로 스키타이 미술이다. 잔인한 스키타이인들은 모든 동물이 생명의 위협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전율을 화면에 연결시킴으로써 얻는 극적인 역동성을 화면에 잘 표현했다. ○산전체가 선사문화유산 이는 생명이 스러지는 전율앞에서 승리의 희열을 만끽하는 잔인한 성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승리자는 건강한 패자의 극적인 죽음에서 생명력을 획득한다고 믿었다 .지난 번에 지적했듯이 처음 죽인 적의 피를 마시고,그 해골을 차고 다녔던 스키타이의 풍습에서도 그런 성정이 엿보인다. 암각화의 사슴그림도 예외가 아니다. 앞으로 내달리던 사슴이 당황한 나머지 네다리를 앞으로 내밀고 급정거하는 동작을 세련되게 표현했다. 청동기 후기에 오면 말이나온다. 사람이 자기의 의사대로 말을 조절할 수있는 통제수단이 있어야 말을 기마용으로 쓸 수 있다. 사람과 말이 예민하게 의사소통을 하지 않으면 기마술은 불가능하다. 그 통제수단은 바로 청동제 재갈이다. 그러므로 청동기에 들어와서 말 그림이 나타났다. 그것도 기원전 15세기를 훨씬 지나서 동부 중앙 아시아 카자흐스탄의 스테프에 말그림이 비로소나타나기 시작했다. 말이 등장하고나서 처음에는 바퀴 두개의 전차를 그렸다. 그 다음으로 바퀴 네 개 짜리 짐차를 그려 인간의 지혜가 점차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군사 필요 출산을 신성화 청동기시대에 나타나는 또하나의 주제는 남성성기를 자랑하는 무사와 그들의 전투장면,그리고 성교와 출산장면이다. 흥미있는 점은 성교장면 근처에 출산장면이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들 그림은 청동기라는 신무기를 가진부족사회와 무관치 않다. 한 부족이 이웃 부족들을 복속시켜서 바야흐로 부족연합체인 고대국가 단계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이 때 무사가 정치적 영웅이되고,그 영웅의 영도하에 대규모 군사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출산을 전에 없이 신성화하는 가운데 다산을 기원했다. 그런 내용을 암각화에 담아낸 것이다. 그리고 철기시대가 도래하면 끌과 같이 날카로운 도구를 가지고 가늘고 깊은 선을 파서 기마병들의 갑옷과 깃발까지 그려냈다. 그 시대에 맞는 그림들이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런 그림들을 그리고,그림은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 암각화들을 그린 여러바위가 모여서 이루어진 수이강가 언덕 한 곳에는 가지마다 헝겊을 묶어 둔 나무가 서있다. 그러니까 이 지역 카자흐인들은 이 언덕에 와서 아직도 제사나 고시레를 지낸다는 이야기다. 이 그림들은 단순히 개인 화가가 와서 그린 것이 아니라 부족의 의례행사의 하나로 그린 그림이다. 사냥과 전쟁,부락의 경사와 비극,출산과 영웅의 죽음 등 그들이 영원히 기억해야 할만한 의미가 있는 사건을 부족의 행사 차원에서 도형화 했다. 그것은 성스러운 기록이었다. ○주 암각화에도 나타나 남근을 자랑하는 전자와 그의 무기에 관한 것을 그린 청동기시대의 그림들은 어떤 정형의 틀을 분명히 지녔다. 주목할만한 일이다.그 정형화한 그림은 울주 반구대의 암각화에도 나타난다. 성스러운 그림은 정형을 바꾸는 법이 없다 .여기서 우리가 두가지 점을 시사받는다. 첫째는 대부분의 반구대의 그림이 청동기를 넘지 않는다는 사실이고,둘째 반구대의 문화는 멀리 중앙아시아까지 관계를 맺는다는 점이다. 그 신비로운 암각화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시사한다. 그것은 새로운 안목으로 상고사를 올려 보라고 채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모스크바 115년만의 혹한/영하 38도/일부지역 대중교통 올스톱

    ◎기상관측 이후 최저 【모스크바 연합】 모스크바에 지난주 말부터 영하 20도를 밑도는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14∼15일 밤 사이 모스크바의 기온은 섭씨 영하 27.3도로 기상관측이 이뤄진 지난 1882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러시아 기상청이 15일 발표했다. 기상청은 또 이같은 추위가 며칠 계속돼 모스크바의 기온이 15일 밤엔 영하 32도를 기록한 뒤 밤 사이에 영하 33도를 고비로 16일 낮엔 영하 23∼25도를 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아르한겔스크 지역의 경우 15일 상오 기온이 영하 35도를 기록,버스와 전차 등 대중교통 수단의 운행이 전면 중단돼 출근길 시민들이 모두 집으로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기상청은 우랄지방에서 옮겨온 고기압대가 중앙아시아 전역을 덮으면서 이들 지역과 모스크바 근교는 15일 밤 영하 38도까지 떨어진다고 전했다.한편 이번 추위로 14~15일 사이에 모스크바시내 병원을 찾은 동상환자만 37명에 이르는 등 지난주 동상 등 각종 추위로 인한 질병으로 병원을 찾았던 사람은 140명에 달했다고 모스크바시 비상의료지원팀은 밝혔다.
  • 아프간 내전에 문화재 수난/세계최대 석불 폭격받아 흉물로 변신

    아프가니스탄의 세계적인 고대 문화유적들이 크게 훼손되는 등 심한 수난을 당하고 있다.지난 92년 무자헤딘의 이슬람 혁명 이후 간단없이 계속되고 있는 내전으로,아프간인들의 귀중한 고대 문화유적에 대한 의식이 희박해지며 문화유산의 훼손 행위가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프가니스탄 중부 배미안 계곡에 있는 사암으로 된 한쌍의 거대 석불.서기 300년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한쌍의 석불은 높이가 각각 55m,38m로 세계에서 가장 큰 석불로 알려지고 있다.특히 이 거대 석불은 옷의 모양과 섬세한 조각기술 등이 그리스·인도·중앙아시아 등의 전통기법을 골고루 융합하고 있는 만큼,동서양의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잘 나타내 줌으로써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존가치가 매우 높다고 고고학자들은 설명한다. 한쌍의 거대 석불을 비롯,아프간의 고대 문화유적들을 크게 훼손하고 있는 가장 큰 ‘주범’은 바로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내전.옛 소련군의 침공으로 시작된 아프간의 내전 사태는 정치적 적대성과 종교적 반목이 서로 뒤엉켜,정부군과 반정부군의 입장이 수시로 바뀌면서 피의 보복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지난 5월 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탈레반과 반탈레반 연합세력들간에 벌어지고 있는 내전은 고대 문화유적을 훼손시키는 정도가 극에 달하고 있는 실정이다.세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탈레반에 쫓긴 반탈레반 연합세력 대원들이 한쌍의 거대 석불 인근의 배미안 계곡에 땅굴을 파고 숨어들었다.탈레반은 이들을 섬멸하기 위해 전투기까지 동원,베미안 계곡은 물론 인근지역에까지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다. 이 때문에 거대 석불의 상호(얼굴)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오랜 비바람의 세월에 시달려온 탓인지 몸체마저도 흉물스럽게 변해 옛 선인들의 숨결을 느낄수 조차 없는 안타까운 처지가 된 것이다. 이에 안타까움을 느낀 고고학자 및 문화재 애호가들은 세계적인 고대 문화유적인 이 거대한 석불을 복원·보존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기술적·경제적 지원을 요청하는 등 석불 보존에 발벗고 나섰다.유네스코 문화유산 보존국의 모하메드 자와 사파씨는 “나는 이 귀중한 문화유적을 잘 보존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기를 원한다”며 “더욱이 이 석불이 단지아프간 고유의 유적이 아니라,세계인들의 유적이라는 사실을 전세계 사람들이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 스키타이족의 동진(중앙아시아를 가다:8)

    ◎BC 331년 ‘올비아전투’ 대승… 세력 확장/원래흑해 볼가강유역의 종족/중앙아·시베리아·몽골까지 점령/원정지마다 청동·황금공예 전파/고대 동방문화 일대 변혁 불러 중앙아시아 역사는 대단위 기병들이 장거리 원정을 통하여 정복전쟁을 거듭하던 이야기의 연속이다.그 역사의 첫 머리에 혜성처럼 등장한 기마족이 스키타이다.이 호전적이고 잔인한 기마족을 희랍인들은 스키타이,이란과 페르시아인들은 사케 또는 사카라 했다.그리고 중국인들은 색족이라고 불렀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쓴 AD 450년쯤 기록에 의하면 스키타이족은 용감하고 잔인한 전사들로 이름이 높았다. 적의 피를 마시고,해골을 기념으로 차고 다녔다고 한다.또 팔의 가죽을 벗겨서 화살통으로 쓰는 등 참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잔인성을 보여주었다.이처럼 잔인한 스키타이 기병들은 가는 곳마다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흑해와 소아시아지방은 물론 광활한 중앙아시아가 그들 말발굽에 밟혔다.그리고 동쪽 멀리 시베리아의 바이칼호수까지 달려 갔다. ○호전적이고 잔인한 기마족 스키타이인들은 원래 흑해 북쪽 볼가강 유역에 살던 종족이다.인종적으로는 이란 또는 아리안이라 불리우는 인도유럽족이었다.언어로 볼때는 고대 페르시아어에 가까웠다.흑해 지역에 있던 스키타이 세력은 기원전인 BC 331년 올비아 전투에서 알렉산더 대제가 이끄는 3만명의 강력한 마케도니아 군을 격퇴시켰다.그들이 얼마나 조직적인 군사력을 가졌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그 이전의 아시리아 기록에 의하면 BC 680년대에 스키타이와 아시리아 사이의 혼인동맹을 맺었다.이는 스키타이인들이 당시 가장 발달한 메소포타미아의 문화와 직접 교류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그 뿐 아니라 멀리 이집트와도 교역을 했다. 스키타이 기병들은 가는 곳마다 발달한 청동기와 찬란한 황금공예 문화를 소개했다.이 스키타이에 앞서 고대 메소포타미아는 인접 지역에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그래서 주위에 발달한 위성문화를 많이 잉태시켰다.그 중의 하나가 스키타이 문화이다.스키타이는 역사에 등장하면서부터 찬란한 청동 및 황금문화를 과시했다.스키타이는 메소포타미아와 그 영향을 받은 희랍의 고대문화를 자신들의 유목생활 감각에 담아 정리하여 빛나는 예술문화를 창조했다.그리고 그 문화를 그들의 기마에 싣고 BC 7세기쯤에 이미 멀리 동쪽시베리아와 몽골지방까지 달려갔다. 그들의 동진은 마침내 스키토시베리아라는 동물형태의 미술양식을 만들어냈다.그들이 싣고온 청동·황금문화와 기마문화는 동방문화에 일대 변혁을 불러 일으켰다.고고학적 연구를 종합하면 이런 결론이 나올수 있다.스키타이의 도래 이전 그러니까 BC 2000년전쯤에 이미 서양인종이 시베리아와 몽골에 먼저 도달했다.이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3만의 마케도니아군 격퇴 우리 민족의 먼 고향으로 이해되는 곳이 알타이지방이다.이 지역에는 초기 청동기 문화를 보여주는 아파나시에보 유적이 있다.이미 발굴한 이 유적의 문화를 아파나시에 보문화라 부른다.그 문화의 담당자들은 유럽족이다.그들은 최소한 BC 2000년 이전에 아파나시에보 언저리로 들어왔을 것이다.이밖에 알타이 북부의 삼림 스페프 지역에는 청동기와는 다른 볼세미문화 유적이있다.그 문화의 담당자는 몽골족이다.이 볼세미 유적은 청동기 이전의 문화를 주로 내포했다.그리고 산지 알타이지역인 카라콜에는 아파나시에보문화와 볼세미문화가 복합한 이른바 카라콜문화가 하나 더 형성되었다.그 카라콜문화는 BC 2000∼1700년쯤에 해당하는 시기의 문화인 것이다. 이들 세 문화유적은 동서양의 문화와 인종이 어떻게 섞였는가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그러니까 스키타이는 유럽족의 동방이동에 따른 제2차 파장이었다.스키타이는 물론 기마병을 이끌고 왔다.말에 대한 이야기는 BC 15세기 메소포타미아인들 입에서 나왔다.그로 미루어 적어도 BC 2000년 훨씬 이전에 동으로 간 유럽족은 말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므로 BC 15세기무렵에 중앙아시아에 기마술이 등장했고,그 기마술은 결국 스키타이의 동방원정 길을 열어주었다. 제1차 인도유럽인들의 동방이동은 세갈래 길로 이루어졌다.첫째 흑해지방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이란을 거쳐 인도로 가는 남로와,둘째 카시카르를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고비사막으로 이어지는 사막로가 그것이다.그리고 셋째 중앙아시아에서 알타이 산맥을 우회하는 초원로가 있었다.이들 길은 뒷날 비단길 통로의 기초가 되었다. 스텝과 사막 루트는 주의하여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왜냐하면 이들 두 길을 통해서 시베리아와 신강성,몽골지역에 혼혈민족과 민족연합체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그리고 강력한 기마세력 형성을 재촉했다.이와 더불어 흉노족이 등장하여 공전의 대 제국을 창건했다.중국과 동서로마제국을 위협한 흉노에 뒤를 이어 돌궐이 나타났다.기마족으로서의 흉노와 돌궐은 여러가지 면에서 스키타이의 기마문화와 미술을 자기들 품으로 끌어들였다. ○강력한 기마세력 형성 재촉 고구려와 신라는 먼 북방의 흉노와 돌궐의 제국들과 관계를 맺었다.그리고 북방의 기마민족문화를 받아들였다.그보다 앞서 우리민족이 그들과 교류한 흔적이 언어와 인종적 특성에서 어렴풋이 보인다.우리의 선사문화가 알타이 청동기문화와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각저총에는 코가 큰 서역인과 씨름을 하는 장면이 그려져있다.스키타이인들이 즐겨 쓰던 각배가 신라무덤에서도 나온다.신라 금관은 기마민족들이 신성시하던 사슴뿔을 기하학적으로 정리한 황금관이다.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마제석검은 그 형식이 스키타이의 청동검이나 희랍의 칼과 너무많이 닮았다.우리는 청동기 초기에 청동검을 모방하여 마제석검을 만들었거니와 귀한 청동검 대신에 마제석검을 부장품으로 썼다.우연이 아니다.
  • 동서문화 장벽 ‘천산’(중앙아시아를 가다:7)

    ◎당,751년 ‘천산전투’ 이슬람에 패배/중의 중앙아 포기,이슬람화 가속 천산을 넘었다.우루무치를 떠나 알마아타로 오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설산은 장관이었다.사막을 풍요로 가꾸어주는 만년설을 인 설산 준봉들이 끝없이 늘어섰다.그 천산은 알마아타공항에 내렸을때도 마치 군림하는 자세로 여전히 우뚝했다.카자흐말로는 티엔산이다.옛 소련연방시절에도 그랬지만,자연풍광이 수려한 천산을 넘으면 늘 푸근한 감회가 안겨왔다. 그것은 천산너머 첫 도시 알마아타에 사는 사람들 때문인지도 모른다.그들 카자흐인들은 우리민족과 아주 가까운 친연관계의 문화를 지녔다.그래서 문화에서는 친근감이 우러나고 사람들은 정겨웠다.처음 알마아타를 찾았을때 당혹스러웠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전화교환원과 영어로 대화를 하면서 그들은 ‘차이나(중국)’가 무슨 뜻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위구르족도 불교서 개종 그들은 중국을 러시아말로 ‘기타이’라 했다.이말은 알고보면 우리말에 뿌리를 두었다.우리말의 거란을 중국식으로 발음한 ‘기단’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다.그러니까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는 중국인을 요나라 사람들인 거란족으로 알고 있었다.우리 역사속에서 비중있게 조우한 중국 동북지방의 그 거란족이다.중국인들이 회홀 또는 회골이라 부르던 위구르족들의 종교라는 뜻에서 이슬람을 회회교라 했다는 것은 지난번에 밝혀 두었다.그러나 위구르족이 불교에서 실제 이슬람으로 완전 개종한 시기는 14세기의 일이다. 이들 두가지 사례는 참으로 놀라운데가 있다.중국은 한대이후 22세기 동안의 역사 가운데 절반 이상을 유목기마민족의 침략을 받았다.그렇다면 중국은 기마민족의 주무대인 서역의 정보를 언어체계 안에제대로 반영했을 법도 하다.하지만 중국의 언어문화체계는 이러한 상식적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기마민족들 역시 22세기동안 교역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던 중국역사의 실체에 무지했다.얼마나 몰랐으면 중국인을 거란족으로 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문화의 장벽은 천산에서 비롯되었다.그래서 천산을 넘으면 중국은 없었다.751년 고구려의 고선지 장군이 이끈 당나라 군대와 지아드 이븐 살리히 휘하의 이슬람군이 천산 서북쪽 탈라스강에서 맞붙었다.닷새간 벌어진 치열한 싸움에서 당군이 패배했다.이는 중국세력이 천산너머의 중앙아시아 대초원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그리고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를 부추겼다. 그렇듯 탈라스전투는 세계사의 한획을 그었고 또 천산의 문화장벽을 한층더 높였다.중앙아시아에 가면 한문은 실제 신화에 나오는 문자에 불과했다.중국문화가 배어들어 온 흔적이 없는 것이다.다만 한무제가 서역정벌에서 남긴 차를 마시는 습관만이 있을뿐이다.그 천산너머의 사람들은 건조한 기후조건을 이겨내기 위해 발효한 검은차를 마셨다.검은차를 마시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 옛날 몽골이나 알타이,또 중국과의 국경지대가 아니면 중국과 직접 교역하던 민족의 후예다.그들 문화가 얼핏 이슬람 일색인듯 하면서도 문화전통과 인종학적 혈통이 다른 까닭도 여기 있다. ○한문은 신화속의 문자로 중앙아시아의 민족과 문화는 참으로 혼돈스럽다.그 혼돈의 문제를 중앙아시아 종교사로 이해하려는 의도에서 나름대로 가닥을 잡아보았다.인종과 문화가 복잡하게 얽힌 가장 두드러진 까닭은 기마민족 탄생에 있다.청동기시대에 나타난 기마민족은 기마술을 이용한 민족의 대이동을 재촉했다.기원전인 BC 13세기쯤 인도유럽족의 한 갈래인 힉소스족의 기마병이 이집트를 쳤을때 이집트인들은 기마병을 처음 목격했다.그래서 말을 괴물로 여겼다. ○기마술로 민족의 대이동 인도유럽족이 기마술을 선도했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이보다 앞서 BC15세기말에 말을 처음 보고 산에서 자란 큰 당나귀로 여겼다는 것이다. 어떻든 BC2000년쯤 알타이와 남부 시베리아에 와서 아파나시에보 청동기문화를 이룩한 인도유럽족은 일찍 기마술을 터득했다.이는 정착농경이나 반농경생활로 삶을 꾸려오던 스텝지역 주민들에게 충격으로 작용했다.농경 대신에 가축으로 부를 가늠하는 유목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이 때문에 활동무대도 차츰 넓어졌다.그리하여 그리스어로 스키타이,이란어로 사카라는 왕조들이 BC8세기부터 기원후인 AD4세기까지 스텝지방과 북인도를 지배했다.그무렵 동서인종의 혼혈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몽골지역에서는 BC4세기부터 흉노가 일어나 서쪽으로 나갔다.AD5세기 중엽에는 아틸라왕이 중부유럽 전역을 완전히 휩쓸어 동서로마제국을 기진맥진한 상태로 몰아넣었다.흉노의 서진은 결국 게르만의 대이동을 가져왔다.이어 6세기 이후에는 돌궐 또는 투르크제국이 등장하고,오스만터키는 세계1차대전까지 유럽을 위협하는 대제국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흉노의 후예가 돌궐이다.이들은 여러 종족이 혼합한 정치세력이어서 인종적으로 매우 복잡하다.그러나 언어만큼은 동양어족의 말인 투르크어를 썼다.그러니까 인종으로 보아서는 복합적이었지만,문화적으로는 동질성을 지녔던 것이다.투르크족이 8세기쯤부터 이슬람화하면서 얼핏 투르크민족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특히 중국과 유럽 양쪽 눈에 비친 투르크는 더욱 더 그러했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언어로,때로는 인종적 혈연을 매개로민족의 정체성을 끈끈하게 이어오고 있다.그들 투루크족들에게는 아직도 같은 기마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 3천여년전의 여인(중앙아시아를 가다:6)

    ◎얼굴·옷·장신구까지 위구르족과 비슷/죽음의 사막 신강성 타클라마칸/해뜨면 45도가 넘는 건조한 기후/이곳 묻힌 주검은 완벽한 미라로 중앙아시아를 몇차례 여행한 경험에 비추어 타클라마칸사막을 찾는 일이마나 어려운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사막에 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만한 어려움쯤은 이미 각오를 해둔 터였기 때문이다. 막상 사막에 도착했을때는 그 결연한 의지가 흔들리기 시작했으나,다시 이를 악물었다.사막에서 죽으면 안된다는 생각은 투루판의 아시타나 고분군과 코알라박물관을 보고 나서 더욱 절실했다. 코알라박물관 진열장에는 3천년 세월을 뒤로한 미라가 잠을 자듯이 누워있다.해가 뜨면 45도를 웃도는 건조한 사막에 묻힌 주검은 곧바로 탈수되어 완벽한 미라로 변한다. 만약 나 자신이 사막에 묻힌다면 미라가 될 것이다.그리고 수천년 후에 세인의 구경거리가 될지도 모른다.사막에서 죽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된 연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우루무치박물관에서도 또 다른 미라를 보았다.이른바 ‘누란미인’라는 미라다.누란미인은 약 3천800년전에 죽었다. 그 여자는 인도 유럽족 곧 서양인이다.지금도 금발에 높은 코를 했고 깊은 눈의 속눈썹이 완연했다.서양여인이 분명한 여인은 고대 누란고성에서 발굴되었다.고고학자들은 이 미라를 누란미인이라는 뜻으로 ‘키쿠란 쿠잘리’라 명명했다. 누란미인이 처음 세상에 공개되었을때 위구르족의 반응은 대단한 것이었다.첫 대면의 순간 위구르족들은 ‘우리 민족의 어머니’라고 찬탄했다.그리고 ‘키루란 쿠잘라’는 바로 대중음악으로 작곡되어 위구르족들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지금도 시중에서 카세트를 쉽게 살 수 있다.누란미인과 함께 박물관에서 깊은 잠을 자는 미라들은 3천년전,다시 말하면 기원전인 BC1000년쯤의 사람들이다. 박물관의 미라들은 가죽세무옷을 입고 아직도 신발을 신고 있다.장신구는 물론이고 몸에 새긴 문신까지 생생했다.입고 걸친 옷과 쇼올,사슴가죽 부츠는 오늘날 위구르족 차림새 그대로다.얼굴 생김새 역시 위구르족인 미라 그들은 누구인가.BC1000∼2000년 아직 위구르족이라는 민족명칭이 생기기 이전사람들이 아닌가 한다.기원후인 AD 3세기 중국 기록은 몽골지방에서 내려온 여러 갈래의 유목민족 가운데 하나가 위구르족이라고 썼다.또 오르혼비문에는 717년 돌궐제국의 빌카칸이 셀렝가강변의 돌궐을 평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투루크에 대한 최초의 자료인 것이다. 어느 쪽이든 위구르는 돌궐의 세력을 이어받은 투루크계의 왕조였다.그들은 돌궐의 본향이었던 알타이산맥과 내몽골 어딘가에서부터 오늘날 신강성지역으로 들어왔을 것이다.그리고 9세기 이르러 왕조의 영광을 누린 위구르는 소그드문자를 근거로 한 위구르문자를 사용했다. 그들은 14세기 회교로 개종하고 나서 아랍문자를 사용했지만, 그 이전까지는 위구르문자를 썼다. ○‘키쿠란 쿠잘리’로 명명 흉노와 위구르족의 고향인 알타이지역에는 우코크라는 데가 있다.그런데 우코크에서는 1993년 ‘파지리크 여사제’라고 명명한 미라가 발견되었다.지난 1995년 서울 경복궁으로 나들이를 나왔던 이른바 ‘얼음공주’가 그 미라다. 파지리크는 BC6~2세기 산지 알타이지역의 철기문화다.그런데 얼음으로 얼린 ‘파지리크 여사제’는 피부가 흰 백인이었음을 기억한다.고고학 자료들은 이미 청동기 시대에 백인종들이 시베리아 바이칼호반과 몽골,신강성일대에 들어왔다는 여러 정황을 밝혀낸 바 있다. 우리 청동기문화도 인종과 문화의 동서교류에 의한 파장의 하나로 일어났다.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동양인이 아닌 서양인 모습의 오늘날 위구르족에게서 우리는 더욱 많은 역사적 비밀과 인류의 역동성을 읽을수 있다.그러니까 고대로부터 서양인은 저 멀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였다. ○몸에 새긴 문신까지 생생 지금까지 위구르족 기원을 선명하게 정리하는 작업을 모두가 꺼렸다.그러나 이번 중앙아시아 현장답사와 역사적 지식을 근거로 감히 이런 결론을 내려보았다.적어도 BC2000년쯤 인도 유럽 어족인 이른바 아리안 또는 이란족이 카스피안지역에서 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그들은 우선 바티칼호와 알타이지역까지 진출하여 자신들의 청동기문화를 아시아대륙 깊숙이 퍼뜨렸다.물론 아시아에도 청동기문화가 없지는 않았으나,아리안의 영향은 아시아 선사문화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그리고 인종도 섞여들었다. 위구르족은 결국 아리안편에 동양이 끼어들어 형성한 민족이다. 그렇듯 아리안의 피가 주류를 이룬 위구르족은 역사진행 과정에서 급기야 동양의 터키계 언어를 받아들였다.그들이 마치 위구르문자를 버리고 아라비아문자를 쓰는 것처럼 언어와 문자를 피보다 먼저 바꾸어 나갔던 것이다. ○알타이 지역까지 진출 우루무치로 가는 만원버스에서 마이라(마의랍)라는 위구르족 여인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그녀는 우루무치석유화학공단 병원에 근무하는 30대의 여의사였는데 미모가 뛰어났다.그녀의 집으로 초대되어 가서 만난 고등학교교장 출신의 그녀의 아버지 역시 잘 생긴 노신사였다.그 집에서 저녁을 먹는 동안 마치 러시아 가정에 초대 받은 착각을 여러 차례 느낄 정도로 가족모두가 서양인 인상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부러 추어준 것인지는 모르나 한국사람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예절이 바르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자신들이 늘상 만나는 중국사람들과는 다른 동양인을발견했다는 말이 분명했다.그와는 반대로 중국인들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개방적 인상을 그녀로부터 받았다. 그러니까 중국인들 사고속의변방인 위구르인과 한국인은 제각기 중국적인 가치를 매개로 상대방을 보았던 것이다. 중국 중심의 고정된 안목으로 마이라씨와 그 가정,곧 위구르족의 정체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들 위구르족은 우리를 중국 중심의 폐쇄적 사고 바깥으로 떠밀어 내기에 충분했다.
  • 위구르족의 땅 신강성(중앙아시아를 가다:5)

    ◎중국면적의 17%… 사막과 산맥으로/예부터 세갈래 무역통로의 교차로·요충지/상술 뛰어나 친구사이도 흥정하는 장사꾼 중국 신강성 타크라마칸 사막을 흔히 ‘죽음의 사막’이라 했다.그 죽음의 사막에 이르면 대자연에 압도되어 인간은 왜소해질 뿐이다.타크라마칸사막이 있는 신강성은 북으로 천산산맥,남으로는 곤륜산맥이 에워쌌다.그리고 서쪽은 카라콜룸산맥으로 막혀있다.이들 높은 산자락을 빼고나면 온통 사막인 신강성의 크기는 중국 전체면적의 6분의 1이나 되었다. 그 넓은 땅에는 위그루족과 카자흐족,기르키스탄족과 몽골족이 퍼져 산다.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위그루족이 신강성의 주인이다.투루판에서 신강성 수도 우루무치까지 두번씩 갈아탄 고장난 버스에서 만난 사람들도 거의가 위그루족이었다.차내 온도가 40도를 웃도는 만원 버스에서 그들과 꼬박 6시간을 함께 지냈다.그들은 불평 한마디가 없다.털털거리는 버스안에서 놀랍도록 인내심을 발휘하는 그들은 외국인에게 더 없이 너그러웠다. ○산자락 빼면 온통 사막 그 버스에는 일곱살 짜리 꼬마 승객이 탔다.로신이라는 사내아이였는데,차안이 덥고 지루한 탓인지 멋대로 딩굴었다.몸을 엄마한테 맡긴 로신이의 몸부림은 대단한 것이었으나 후덕한 엄마는 그 떼를 다 받아주었다.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보였던 그 사내아이의 조상은 본래 투루크의 한 갈래로 몽골지역에서 들어온 위그루라는 설이 있다.투루크,또는 돌궐은 흉노의 후예들로 모두 몽골 알타이산맥이 기원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그루족은 몽골족과 다르다는 사실이 외모에서 드러난다.흉로와 투루크는 제 나름대로 각각 대제국을 세웠던 강력한 세력의 민족이다.그토록 큰 힘을 지녔던 민족이 몽골에서 왔다면,지금 몽골에 상당수의 투루크족이 살아야 할 것이다.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로신이의 선조가 아직은 불분명하다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비단길 한 목을 맡은 것은 분명하다.중국 서안에서 비단을 싣고 비잔틴에서 짐을 내리자면 반드시 타크라마칸사막을 거쳐야 했다.또 비잔틴과 로마의 공산품과 호탄의 옥을 서안으로 실어가는 길도 타크라마칸사막이었다.그렇듯 대상들이 동서를 오가는 목 좋은 길가에 살았던 위그루족의 상술은 뛰어났다.그것은 가히 체질적이었다. 위그루족을 장사속으로 만나지 않으면 무척 관대하다.그러나 일단 상업적인 거래라면 무자비할 만큼 안면을 바꾼다.친구 사이에서도 이익을 챙긴 흥정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라는 것이다.이슬람이 지닌 공통점이기도 한 위그루족의 상술은 물론 비단길에서 비롯되었다.농업생산에 삶을 의족한 전통적인 경사회 사람들 정서로는 헤아릴 수 없는 대목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타크라마칸은 중요한 전략요충지였다.서역의 유목민들로부터 중원을 보호한다는 것과 중국산 비단의 대외무역 주통로를 지킨다는 두가지 목적이 함축되었다.그래서 한대에 이미 신강성 장악을 서둘렀다.천산북로에는 중앙아시아로 넘어가는 길이,천산남로에는 오늘의 중동으로 가는 페르샤통로가 존재했기 때문에 타크라마칸을 중시했다.남쪽 사막을 따라 인도로 가는 길을 합하면 신강성은 세 갈래 무역통로를 거느린 물물의 교차로였던 것이다. ○동서문화매개자 역할 세계에 위용을 떨친 징기스칸의 몽골제국 뒤에도 위그루족이 숨어 있었다.그렇듯 위그루족은 동서문화의 매개자 역할을 했다.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동양인들은 위그루족이 이슬람을 대표하는 민족인 것으로 생각했다.중국과 더불어 우리는 옛날에 위그루족을 한문으로 회홀 또는 회골이라 썼다.그리고 이슬람을 지칭하는 회회교라는 말은 위그루족이 믿는 종교를 뜻하는 것이다. 이들이 사육한 말은 중국에서 첫 손가락을 꼽는 명마였다.한대나 당대에 마(천마)라고 한 명마는 위그루말을 의미했다.그 품종을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나 비단길을 거쳐 들어온 아랍종 혈통의 말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오늘날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말은 아랍종 피를 받지않은 말이 없다고 할 정도이고 보면 고대 중국인들 역시 위그루말을 선호했을 것이다. 중앙아시아 일대가 이슬람으로 편입한 중세 이후 이 지역은 투르크스탄이라는 통합적 개념으로 호칭되었다.그리고 신강성의 위그루는 동투르크스탄이라 불렀다. 볼세비키혁명 이후 스탈린은 범투르크주의운동을 아주 싫어했다.그래서 위그루의 땅 신강성은 급기야 소련과 중국 공산정권 사이의 주도권다툼에 휘말렸다.신강성의 석유와 광물이 두 공산세력의 각출을 유도했던 것이다. ○55년 자치지역으로 선포 그것은 20세기에 재현한 비단길 분쟁이었는지 모른다.1949년 모택동의 대장정은 신강성까지 이어졌다.1955년에는 신강위그루족자치지역으로 선포되었다.어떻든 공산정권의 중국은 1959~60년 사이에 이른바 ‘신강성 해방’을과감히 단행하고 소련과의 국경분쟁을 마무리지었다.오늘도 위그루족의 땅신강성을 가면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민족분열을 절대 반대한다’는 붉은글씨 구호가 곳곳에 널렸다.위그루족의 독립운동을 반대하는 내용이다. 그 표어는 이방인에게 혼돈을 안겨주었다.단일민족으로 살아온 우리에게는 조국과 민족이 얼핏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떼를 내놓았던 위그루족 꼬마 로신이가 어느 틈에 잠이 들었는지 조용하다.로신이가 자라 중국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알게 되는 순간 지금처럼 행복할 것인가.유구한문화와 선천적 상술을 지니고 태어났을 위그루족 장래가 자못 궁금했다.
  • ‘사막의 오아시스’ 고도 투루판(중앙아시아를 가다:4)

    ◎지하수로 5천㎞… 중 3대토목 대역사/관정 1천여개… 포도밭 등 드넓은 농경지가 중국인들은 이런 말을 한다.“신강성을 가보지 않고 중국이 얼마나 넓은지 말하지 말라”고….이 말을 “투루판을 가보지 않고 신강성을 말하지 말라”고 바꾸고 싶다.한자로 토로번이라 표기하는 중국 신강성 투루판은 그렇듯 경이로운 지역이었다. 투루판까지는 돈황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정거장 유원에서 열차를 타고 밤을 새워 꼬박 11시간을 달렸다.투루판에 내렸을때 대지는 온통 불덩어리였다.사방으로 눈을 돌려도 사막만이 펼쳐지기는 했으나 그 사막 가운데로 풍성한 농경지가 들어앉았다.섭씨 45도의 고온에 이글거리는 사막과는 달리 싱그럽다. ○인근엔 75도 화염산이 투루판은 도시가 이국적이거니와 사람들도 그랬다.투루판사람들,다시 말하면 위구르족은 동양인 골상과 사뭇 다르다.그들이 입은 옷과 살아가는 건물에서 발산하는 강렬한 색깔로 해서 동화의 나라에 온 착각이 든다.어린아이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면,마치 꼬마모델이나 되는 것처럼 척척 포즈를 취했다.미국이나 유럽에서도 그런 투루판 아이들처럼 마음을 활짝 열고 나오는 태도를 본 적이 없다. 근교에는 손오공의 이야기에 나오는 화염산이 있다.해가 뜨면 75도라니 과연 화염산이다.극한적 자연조건속에 풍취 어린 문화가 숨쉬는 투루판은 타클라마칸사막에서 보면 동쪽이다.그리고 고비사막의 서쪽이니까 오아시스 도시이기도 한 투루판은 비단길의 주통로였다.천산북로의 주요 거점으로,동서문화교류의 징검다리 구실을 해온 역사도시인 것이다.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 사람들이 다 그렇지만,투루판 사람들도 눈 녹은 물을 마시고 산다.천산의 만년설이 녹아내려 생긴 물이다.그 천산의 물은 지하로 스며들기 때문에 이른바 감아정이라는 수직 물구멍을 30m간격으로 파고나서 이를 지하수로와 연결시켜 끌어왔다.물구멍만 1천개가 넘고 지하수로의 길이는 5천㎞에 이른다고 한다.실로 놀라운 대역사의 고대 토목공사 현장이 투루판에 있다.이 엄청난 지하수로 건설공사는 한무제가 서역을 경영하면서 시작되었다.만리장성 및 대운하와 더불어 중국 3대 토목공사의 하나가 투루판 지하수로다.한해 강수량은 고작 16㎜인데 비해 증발량은 300㎜나 되는 건조한 열사에서 물 한방울은 바로 생명수였다.그 생명의 젖줄 지하수로는 지금까지 2천년동안 사막속의 경작지에 습기를 불어넣고 사람들 목을 축여주었다. ○실크로드의 주루트 역할 예부터 투루판은 포도의 도시다.포도는 본래 메소포타미아가 원산지였으나 차츰 이웃으로 번져 먼저 그리스로 들어갔다.그리고 동으로 인도와 타클라마칸을 거쳐 투루판으로 확대되었다.중국의 포도는 물론 투루판에서 전파된 것이다.투루판의 포도주는 일찍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당나라 시인 왕한(678∼726년)은 야광채 백옥잔에 부어 마시는 서역 포도주를 이렇게 노래했다.‘야광배에 가득한 맛있는 포도주/마시려하니 마상의 비파소리 흥취를 더하네/취하여 사막에 두어버려도 그대 비웃지 마오/고래로 전쟁에서 돌아온 이 몇 사람이오’서역정벌에 나섰다가 포도주에 흠뻑 취한 중국인들 모습이 눈에 선하다.오늘도 여기저기 널린 포도구가 투루판 여행객을 유혹한다.양고기 꼬치구이 샤슬릭과 위구르족의 빵인 낭을 굽는 드넓은 포도밭 유원지를 찾으면 투루판 포도주가 반드시 식탁에 올랐다.그리고 천산의 찬물,뜨거운 햇볕에 달게 익은 수박과 하미,참외가 따라 나왔다.거기에 동화속 요정처럼 아름다운 무희의 춤과 전통음악을 곁들이면 오아시스에는 늘 낭만이 넘친다. 고대로부터 비단길 국제무역으로 상술을 다진 탓일까.투루판 사람들은 관광객을 놓칠 리가 없다.포도구에서 전통기념품을 파는 것은 상식이고 별의별 것을 다 내놓았다.그리고 씨가 없다는 백포도에서부터 100가지가 넘는 포도가 좌판에 즐비했다.‘투루판의 포도가 익었네/아나이칸의 마음도 벌써 취했다네…’그 노래가 들릴 듯한 포도구의 풍경은 한껏 풍요롭다. 그 유명한 고창고성은 투루판에서 50㎞ 떨어진 사막에 있다.2백만㎡에 이른다는 폐허의 고성은 뜨거운 태양을 머리에 인 채 고창왕조의 영화를 잃어버린지 오래다.한 도시이자 성채인 고창성은 9세기 중엽 투루판 위구르국 고창왕조가 세운 도읍지였다.그 무렵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일어났다.천하를 수습하러 나선 북송은 신흥 티베트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위구르국을 재빨리 끌어안았다.이를테면 북송으로부터 왕권을 승인받은 고창왕조는 정치세력을 급속히 확대했다. 이 왕조는 정치역량뿐 아니라 문화적 주체기반도 차근차근 다져 나갔다.비단길 교역의 매개자로 마니케이즘과 네스토리우스 기독교파가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하는데도 도움을 주면서 이슬람을 받아들였다.이와 함께 불교를 수용하여 토착문화와 융화시켰다. ○포도주 명산지로 유명 그렇듯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 언어는 터어로 통일했다.이는 다양한 주민을 터키화하는데 성공한 요인이 되었다.고창왕조는 결국 위구르족문화의 주체성을 확립했던 것이다. 투루판 위구르족은 13세기 징기스칸 정복하에서도 오히려 몽골제국 건설에 힘을 실어주었다.그들은 ‘박시’라는 서사계급과 문자체계를 몽골제국에 제공했다.그래서 몽골제국은 급기야 행정체계를 세우고 몽골문자를 만들었다.그럼에도 위구르족은 15세기부터 이슬람화하면서 자신들의 문자와 불교를 잃어버렸다.이유는 문화주체의식이 위구르족 마음속을 떠난데 있다.지금은 스스로를 위구르인이 아닌 투루판 사람이라고 부른다.그들은 역사의 온갖 애환을 포도밭에 묻어두었는지 모른다.
  • 힐러리 탄 비행기 기체결함 불시착/중앙아 순방일정 연기

    【워싱턴 AP 연합】 빌 클린턴 미 대통령 부인 힐러리 여사를 태우고 중앙아시아를 향해 출발했던 보잉 707기가 9일(현지시간) 워싱턴 인근 앤드류 공군기지를 이륙한 직후 기체결함이 발견돼 비상 착륙했다고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 소식통들은 항공기 이륙후 10분쯤 엔진과 연결된 조종실 경고등이 꺼졌으며 조종사들이 문제를 일으킨 엔진의 가동을 중단하고 연료를 비운뒤 앤드류 기지로 다시 회항했다면서 “부상자는 없었다”고 말했다.힐러리 여사의 중앙아시아 구소련 5개국 순방 출발 일정은 10일 하오로 연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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