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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주 승합차 추락사고…엠티길 충남대생 5명사망 5명부상

    무주 승합차 추락사고…엠티길 충남대생 5명사망 5명부상

    무주에서 승합차가 전복돼 추락, 차에 타고 있던 충남대 학생 5명이 숨졌다. 7일 오후 1시10분께 전북 무주군 적상면 구천터널 부근 도로에서 스타렉스 승합차가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전복, 5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대전 방향으로 주행하던 승합차가 급커브 내리막길에서 가드레일과 충돌한 뒤 2m가량 미끄러져 수풀지대로 전복됐으며, 안전벨트를 매지 않아 사상자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승합차 탑승자들은 충남대 무역학과 선후배 사이로 무주로 엠티(MT)를 왔다가 변을 당했다. 사망한 학생 5명은 무주장례식장에 안치됐고 중상을 입은 학생 3명은 충남대병원으로 긴급후송됐다. 경찰은 생존한 학생과 현장을 목격한 주민 등을 상대로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사망자 부상자 명단 ▲사망자=강원직(27), 김수홍(24), 임재무(20), 김진환(27), 박수진(20·여) ▲부상자=강진현(20·여), 김재유(20·여), 강진석(20·여), 김광섭(20), 임현석 서울신문 나우뉴스 nownews@seoul.co.kr
  • 술 취해 강제키스한 男, 영영 말 못하게 된 사연?

    술에 취해 여성에게 강제로 키스한 남자가 ‘천벌’을 받았다. 중국 지역일간지 양즈완바오 등 복수언론의 5일자 보도에 따르면, 안휘성 출신의 리(李)씨는 지난 달 31일 새벽 만취한 상태에서 여성에게 키스를 하다 혀가 잘리는 중상을 입었다. 술집 종업원으로 알려진 이 여성은 “강하게 반항했지만 리씨가 힘으로 위협하며 키스를 했다. 나 또한 취한 상태여서 뿌리치기가 힘들었고, 이를 모면하기 위해 리씨의 혀를 세게 물었다.”고 증언했다. 샤오춘(小春)이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성폭행 당하는 느낌이 들어 강하게 거부하다 혀를 물었는데, 혀가 잘려나갈 줄은 몰랐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리씨는 친구의 도움으로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고 있으며, 샤오춘에게 치료비와 입원비 등을 배상하고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는 협박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샤오춘은 경찰 조사에서 “협박을 받았지만 나는 목숨의 위협을 느꼈고 정당방위라고 생각해서 신고하게 됐다.”고 말했다. 의료진은 “리씨는 잘린 혀를 찾지 못해 봉합 수술을 받지 못하는 상태며, 중상임에도 불구하고 치료가 늦어져 앞으로 영영 말을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샤오춘은 리씨에게 치료비 및 손해배상금 6500위안을 지불하고, 대신 리씨는 샤오춘에게 사건 후유증 등에 대해 일절의 책임도 요구하지 않겠다는 합의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18) ‘마담 보바리’ 작가 플로베르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18) ‘마담 보바리’ 작가 플로베르

    1856년 프랑스 파리에서 에마 보바리라는 여인의 불륜을 다룬 소설이 발표되었다. 작품은 즉각 가족주의와 금욕적 도덕관을 내세우는 신흥 부르주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다음 해, 제2제국의 권위주의적 재판부는 풍기 문란과 종교 모독이라는 죄목으로 이 작품을 기소한다. 유부녀가 노골적으로 남자를 유혹하고, 불륜을 저지른 여인의 종부성사를 장님의 상스러운 노랫소리가 화답하는 등 작품 전체가 간통을 미화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마지못해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변호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렇게 ‘마담 보바리’와 작가 플로베르는 예술 창작을 암암리에 규제해 오던 부르주아적 도덕의 허위를 폭로했다. ●아버지, 나는 부르주아가 싫어요 플로베르는 1821년 소도시 루앙의 외과의사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문장력 있던 조숙한 소년은 자신의 재능이 문학으로 꽃필 것을 꿈꾸었다. 하지만 지방 부르주아였던 닥터 플로베르가 보기에 이 똑똑한 아들이 해야 할 일은 딴 데 있었다. 파리의 법대에 들어가 입신출세하고 부와 명예를 얻는 것! 1820년 왕정복고시대에 태어난 플로베르는 1880년 죽을 때까지 왕정, 공화정, 제정이라는 각종 정치 체제의 변혁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어떤 체제가 되었든, 사회의 주인공은 부르주아였다. 온갖 정치적 변혁의 한가운데에서 이 계급은 금융과 산업을 주도하며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갔다. 소년 플로베르는 루앙의 시민들이 각자의 이권과 보신을 위해 질투에 찬 중상모략을 일삼는 것을 지켜보았다. 겉으로는 다들 온순하고 근면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비정한 야욕이 도시에 넘쳐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부르주아거나, 부르주아를 지향하는 프롤레타리아트거나. 청년 플로베르는 부르주아라는 말을 특정한 계층에만 국한해서 쓸 수는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가장 돈이 없고 지위가 낮은 하층계급 안에서도 의사나 변호사 같은 번듯한 직업을 갖고, 돈 있는 가문과 결혼하고, 사교계에 나가 출세할 수 있으리라는 부르주아의 삶이 하나의 꿈으로 확실히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부르주아’란 재정상태가 아니라 정신상태의 이름이어야 했다. 그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르주아에 대한 증오는 미덕의 출발점이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부르주아’라는 말에는 프록코트를 입은 부르주아와 마찬가지로 작업복을 입은 부르주아들도 포함되어 있다.”라고 써 보냈다. 플로베르는 1843년과 1844년 연이어 일어난 치명적인 신경발작을 겪었다. 그때부터 자신의 건강을 위해 아예 부르주아적 삶과 인연을 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법대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포기하고 문학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학계 안에서도 부르주아적 태도가 판 치고 있었다. 작가들은 기존의 문학잡지나 아카데미를 부와 명예를 향한 도약대로 삼아 그 안에서 자족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의 격변기마다 부화뇌동하면서 사회문제, 대중의 교화, 진보, 민주주의 같은 판에 박힌 소리만 되풀이했다. 사실주의를 내세우면서 서민들의 대변자로 자처하고 하층민들을 동정할 뿐이었다. 플로베르는 이들을 보며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줄 수 있는 문학을 꿈꾸기 시작했다. 자신의 길은 분명했다. 부르주아적 세계관을 버릴 것! 시대를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창조할 것! 플로베르는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오직 문학에 자신의 삶을 다 바치기로 했다. 나중에 카프카는 이런 플로베르를 자신의 정신적 지주로 모시며 평생 그의 작품을 가까이 했다. ●“나는 보바리다”-자살 장면 쓰면서 구토 플로베르는 본격적인 첫 작품을 구상하면서 안토니우스라는 성인에게 끌렸다. 안토니우스는 250년 무렵 이집트 북부에서 태어난 기독교 초기의 성자다. 그는 사막에서 고행하며 각종 이교도의 신들과 자기 안의 탐욕, 질투, 회의에 맞서 신앙을 지켜냈다. 플로베르는 이 성인의 삶에서 자신의 운명을 보았다. 끊임없이 유혹을 마주하면서 수도해야 하는 성인처럼, 그 자신도 계속해서 부르주아적 태도와 취향을 마주하며 글을 써야 했다. 문학에 인생을 건다는 것은 그런 적극적 대결이 필요한 일이었다. “진주는 조개의 병에서 생기는 것이라지만 문체는 아마 그보다 더 깊은 고통을 통해 나오는 것일 거요. 예술가의 삶, 아니 예술 작품의 완성도 그렇지 않겠소? 거대한 산을 오르는 일처럼 말이오. 얼마나 집요한 의지가 필요하겠소! 그 산 정상은 창공 속에서 순수함으로 빛나고, 그 엄청난 높이는 공포를 가져다주지. 우리는 더듬더듬 바위에 손톱들을 찢겨가면서, 외로움 속에 눈물을 흘리며 계속 걸어가지. 우리는 욕망의 백색 고통 속에서 소멸하는 거요. 정신의 격류가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그리고 얼굴을 태양으로 향한 채!”(편지, 1853년 9월 16일) 제목은 ‘성 앙투안의 유혹’. 그는 3년에 걸쳐 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그의 이야기는 서정, 인물의 움직임, 구성 어느 것도 새롭지 않았다. 초고를 본 친구들은 상투적인 반복과 무질서한 구도에 진저리를 쳤다. 플로베르는 성 앙투안을 쓴다면서 결국 자신의 의식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자신도 타인의 삶, 다른 존재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한 여느 부르주아들과 다를 바 없었다. 플로베르는 작가의 개성과 정념이 지배하는 문학은 예술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플로베르는 예술이 제2의 자연과 같다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불가해한 것. 숲 속에 살아 있는 수많은 나뭇잎과 초록의 속삭임처럼 무한하면서도 준엄하게 존재하는 것. 그래서 아름다운 것. 작가란 자신의 경험과 정념을 지움으로써 이 제2의 자연을 창조하는 존재여야 했다. 플로베르는 인물의 말과 행동을 기술하는 글쓰기, 그것이 바로 작가 주체를 소멸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는 나밖에 모를 거요. 주제, 인물, 효과 등등 모든 것이 나의 바깥에 있거든. 우리가 쓰는 글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오. 예술과 예술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소”(편지, 1852년 7월 26일) 그렇게 해서 플로베르는 자신과는 출신도, 성(性)도, 교육 배경도 완전히 다른 시골 유부녀 에마 보바리를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그는 에마와 그녀 이웃들의 속물주의가 주는 혐오감을 견디며, 작품 속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날 수 있도록 6년 동안 쉬지 않고 세상을 관찰하고 연구했다. 에마가 비소를 먹고 자살하는 장면을 쓰다가 구토를 하기도 했다. 플로베르는 종종 “나는 에마 보바리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수도승처럼 철저히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정체성을 소멸시키고 에마 보바리라는 또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시대의 허위와 대결 생애 마지막에 플로베르가 도전한 것은 두 명의 필경사 이야기다. 최신의 근대 학문을 다 섭렵해 보기로 한 부바르와 페퀴셰. 하지만 저명하다는 원예학, 지질학, 의학, 고고학, 심리학, 교육학 안에는 논리적 모순이 너무나도 많았다. 게다가 각각의 지식들은 현실에 적용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정보를 추상적으로 나열하고 있었다. 부바르와 페퀴셰는 근대 지식의 한계에 대항하면서 진리와 미,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이 작품의 부제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백과전서’다. 플로베르는 이 작품을 위해 1500권이 넘는 학술서들을 철저히 검토했다. 근대적 학문에 맹종하면서 인류의 진보를 신봉하는 부르주아의 어리석음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자 한 것이다. 부바르와 페퀴셰의 인생에는 그 어떤 극적 드라마도, 감동적인 사건도 없다. 오직 실험과 논증이 백과사전처럼 한없이 펼쳐진다. 오락으로 읽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논리적인 대화의 연속이었다. 한가한 부르주아 독자들에게는 너무나 당황스러운 작품이었다. 그리고, 역사소설, 연애소설과 같은 소설의 전통적 구분은 이 작품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어리석음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플로베르는 미완으로 붙이게 된 뒷부분 개요에서 서술 방법과 작품 분석을 소개하기도 했다. 소설 안에서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직접 해석하다니! 상상물인 소설과 현실의 작가가 뒤섞여 버린 것이다. 이렇게 플로베르는 19세기 문학의 온갖 관습을 무너뜨려 버렸다. 이 최후의 싸움은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을 정도로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플로베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지우면서 근대 학문의 어리석음과 부르주아 문학의 허위와 대결했다. 오선민(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 병상이라던 원자바오, 웬 정상회담?

    “병 때문에 못 왔다고요? 그러면 그동안 이 많은 공식행사 참석은 뭡니까?” 중국 고속철도 추돌 참사의 여파가 ‘원예예’(溫爺爺·원할아버지)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서민 총리’ 이미지로 국민적 신뢰를 쌓아온 원자바오 총리에게까지 미쳤다. 사고 발생 엿새 만인 지난 28일 현장을 찾아 “11일 동안 병상에 누워 있어 오지 못했다.”고 한 해명이 오히려 부메랑이 돼 원 총리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흔들고 있다.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微博)는 29일 원 총리의 ‘늑장 방문’과 와병을 놓고 네티즌들이 하루 종일 갑론을박했다. 많은 네티즌들은 “병석에 있었다.”는 원 총리의 설명에 의구심을 나타냈다. 원 총리의 공식행사 참석 기록까지 등장했다. 실제 원 총리는 병석에 누워 있었다는 17~28일 외견상 정상적으로 업무를 처리했다. 지난 18일 누리 알말리키 이라크 총리와 회담하는 등 현장 방문 전날까지 외빈을 접견하고, 회의를 주재하는 한편 각종 행사에도 참석했다. 한 네티즌은 “올해 오스카상을 받으려는 것이냐.”며 원 총리가 ‘쇼’를 하고 있다고 힐난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병상에서 이라크 총리와 회담했느냐.”고 비아냥댔다. 하지만 원 총리에게 변함 없는 신뢰를 보내는 네티즌들도 적지 않았다. 한 네티즌은 “원할아버지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부디 건강하세요.”라며 응원을 보냈고, 또 다른 네티즌은 “너희들이 믿건 안 믿건, 나는 원 총리의 말을 믿는다.”며 절대적인 신뢰를 나타냈다. ‘자오선’이라는 필명의 한 블로거는 “이미 70세 노인인 원 총리는 육체적으로 약하지만 의지가 확고한 사람이다. 설사 아팠다고 하더라도 11일 동안 일을 멈추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원 총리는 2008년 쓰촨(四川) 대지진을 비롯해 대형 재해나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곧바로 현장을 방문해 구조활동을 지휘하고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모습을 보이며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아 왔지만 홍콩의 정치평론가 위제(余桀)는 자신의 저서에서 원 총리를 ‘정치 조작에 능한 중국 최고의 연기자’라고 혹평한 바 있다. 한편 이번 사고 중상자 가운데 한 명이 전날 밤 숨져 사망자는 40명으로 늘었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흉기로 女엉덩이 베는 ‘엽기남’ 공포 확산

    흉기로 여성의 엉덩이만 노리는 엽기남성이 있어 주의가 요망된다고 워싱턴포스트지 등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미국 버지니아주 경찰에 따르면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시 쇼핑몰에서 여성의 ‘뒤’를 면도칼이나 커터 칼로 그어 중상을 입히고 달아나는 남성이 수사망에 올랐다. 지난 25일에는 쇼핑몰에서 물건을 고르던 10대 소녀가 공격을 받았고, 지난 2월부터 현재까지 엽기남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는 총 5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소녀는 “뒷쪽 선반에서 옷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뒤돌아보려던 찰나에 엉덩이쪽에 날카로운 상처가 나는 느낌이 들었다.”고 증언했으며, 엉덩이에 4㎝가량 깊이 베이는 상처를 입었다. 경찰은 “용의자는 쇼핑몰이 가장 붐비는 오후 5시 반 정도에 범행을 해왔다. 흉기는 면도칼 또는 커터 칼로 추정되며 주로 여성의 뒤쪽, 특히 엉덩이를 노린다.”면서 “지금까지 피해자는 대부분 10대 후반이나 20대 여성이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이 남성이 날카로운 물건으로 타인의 몸을 찌르거나 베는 데서 성적 만족을 얻는 성도착·사도마조히즘의 일종인 피커리즘(piquerism) 환자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페어팩스시 경찰은 용의자의 몽타주와 사진 등을 확보하고 수사에 나섰지만 아직 검거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어 시민들의 공포가 커지고 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대형 살상무기냐” 고속철 사고… 충격의 중국

    “대형 살상무기냐” 고속철 사고… 충격의 중국

    중국은 24일 하루종일 북새통이었다. 관영 중국중앙(CC)TV는 사고현장을 직접 연결, 구조 및 부상자 현황, 사고열차 처리 과정 등을 생중계했고, 인터넷 사이트들에는 추모글이 폭주했다. 사고발생 21시간 만인 이날 오후 5시쯤 객차 안에서 중상을 입은 2살짜리 유아 한 명이 발견돼 긴급 후송되기도 했다. 211명의 부상자가 입원해 있는 저장성 원저우(溫洲)의 각급 병원에는 혈액 등이 크게 부족해 인근 지역인 타이저우(台州), 리수이(麗水) 등에서 1000단위의 적혈세포와 10만㎖의 혈장이 긴급공수됐다. 사망자 2명이 외국 국적자로 밝혀진 가운데 주중 한국대사관 측은 “아직까지 교민피해 신고는 접수되지 않았다.”면서 “해당 지역 공관에서 확인하고 있지만 교민 피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고 현장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지상 15m 교량 위에 위태롭게 객차 1량이 매달려 있었고, 추돌 충격으로 많은 객차가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다. 지상에는 추락한 객차들이 뒤집혀진 채 사고 당시의 참상을 짐작게 했다. 열차 운행은 빨라야 27일쯤에나 재개될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는 벼락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잠정결론이 내려졌다. D3115호 열차가 사고 직전 벼락을 맞아 동력을 상실한 채 정지해 있는 상태에서 뒤따라 오던 D301호 열차가 추돌했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철도부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중국 고속철도는 서로 일정한 간격 이상으로 접근하면 경보와 함께 정지하도록 설계돼 있지만 벼락으로 D3115 열차의 경보시스템이 고장나 10분 간격으로 뒤따라오던 D301호 열차에 위험신호가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고가 난 두 열차는 최고시속 250㎞로 설계된 CRH2 모델이다. 중국 최고지도부는 이번 사고로 전전긍긍하고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고속철도 건설을 밀어붙이는 와중에 대형사고가 발생해 ‘정책실패’로 인식될 가능성이 높고, ‘민심이반’을 부채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 총리가 사고 직후 “피해자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고 긴급지시하고, 공산당 서열 21위의 정치국 위원인 장더장(張德江) 부총리를 현장에 급파해 사고수습을 지휘토록 한 것에서도 위기의식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그토록 “안전하다.”고 강조했던 고속철도가 결국 ‘대형 살상무기’로 확인됐다는 점에서 충격이 커 보인다. 현재로서는 사고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짐작되지 않는다. 사고의 원인이 시스템 결함으로 밝혀진다면 고속철도 증설에 급제동이 걸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국 정부는 사고 노선을 관리하는 상하이 철도국의 당위원회 서기 등을 면직시키는 등 민심위무에 나섰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中 20대女, 5층서 투신시도 포착 충격

    ▶원문 및 사진 보러가기 20대로 보이는 한 여성이 5층 건물 높이의 창문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하는 모습이 포착돼 충격을 주고 있다. 중국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이 여성은 지난 21일 오후 2시께 상하이 거주지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했다. 투신한 여성은 다행히도 추락 도중 열려있던 창문에 부딪히면서 땅에 떨어질 때 충격 완화로 가까스로 목숨은 구했지만, 중상을 입었다고 전해졌다. 당시 목격자들은 이 여성이 누군가의 협박으로 투신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여성은 전날 병원에서 정신분열 진단을 받았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윤태희기자 th20022@seoul.co.kr
  • 제인 오스틴 희귀 원고, 17억에 낙찰돼

    제인 오스틴 희귀 원고, 17억에 낙찰돼

    ‘오만과 편견’으로 유명한 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초기 미발표 원고가 소더비 경매에서 우리 돈으로 17억원에 달하는 거액에 낙찰됐다. 14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이날 런던에서 열린 소더비 경매에 제인 오스틴의 원고 ‘왓슨가의 사람들’(The Watsons)이 애초 경매 최고예상가인 30만 파운드의 3배가 넘는 입찰가에 익명의 전화 입찰인에 낙찰됐다. 무려 99만 3250파운드(약 16억 9716만원)에 낙찰된 이 원고는 전체의 4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68쪽 분량의 필사본으로 1804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개인이 소장하다 옥스퍼드 대학 보들리언 도서관에 팔렸으며 이번 소더비 경매에서 다시 개인 수집가에게 팔린 셈이다. 특히 제인 오스틴의 완성된 소설 중에서는 ‘설득’과 ‘레이디 수잔’ 등을 제외하고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친필원고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지난해 오스틴 권위자인 캐스린 서덜랜드 옥스퍼드대 영어영문학 교수가 그동안 ‘문체의 여왕’으로 불렸던 제인 오스틴이 명성과 달리 문장이 엉망이어서 출판사 편집자가 문체를 다듬었다고 주장한 뒤, 이번 원고에 큰 관심이 쏠린 것으로 분석된다. 이에 대해 소더비 선임 전문가 가브리엘 히튼은 “이번 원고는 학자들에게 제인 오스틴이 어떻게 작업하고 수정했는 지뿐만 아니라 편집자에 의해 수정되기 전 다른 원고들과의 비교 역시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제인 오스틴은 섬세한 시선과 재치있는 문체로 18세기 영국 중상류층 여성들의 삶을 다룬 작품을 많이 썼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그의 작품 중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 ‘엠마’등이 수차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져 현대인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기고] 드디어 열린 유럽시장/고상두 연세대 유럽지역학 교수

    [기고] 드디어 열린 유럽시장/고상두 연세대 유럽지역학 교수

    구한말 서구 열강은 조선과 통상하고자 총과 대포로 문을 열었다. 오늘날 우리는 협상을 무기로 유럽의 문을 열었다. 유럽의 최대 교역국은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한국 등이다. 이 중에서 회원국끼리 똘똘 뭉쳐 성채라는 비난을 받아온 유럽 시장을 가장 먼저 연 나라는 한국이다. 100년 전 불평등 조약으로 개항을 강요당한 우리 선조가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감개무량할까.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이 우여곡절 끝에 7월 1일 발효되었다. 5년 이내에 교역액 기준으로 98.7%의 상품에 대한 관세가 철폐된다. EU는 소형차 유럽시장 점유율이 잠식될 것을 우려하는 이탈리아를 달래고자 협정의 발효를 반년 늦췄다. 한국은 유럽에 70만대의 자동차를 수출하고 유럽은 한국에 3만대를 수출한다. 자동차 부문의 경쟁력 차이를 보여준다. 단일 경제권을 이룩한 유럽에서는 각국의 자재와 부품이 무관세로 국제적 생산라인을 따라 이동하면서 상품이 조립 가공되고 있다. 한국 기업이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수출용 원자재를 조달하면서 관세를 물어야 하고, 부존자원이 빈약하여 타국의 원자재를 많이 썼다고 무관세 적용을 받지 못한다면, 유럽 기업과의 경쟁에서 열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통합의 차이에서 오는 불이익을 우리가 막은 것이다. 중국이 짧은 기간에 신흥 경제국으로 부상한 것은 세계 경제에 적극적으로 편입하는 개혁·개방 정책 덕분이다. 2001년에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고 나서 중국은 적극적으로 FTA 정책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유럽 시장을 열지 못한다. 톈안먼 사건, 티베트 문제, 인권 억압 등으로 유럽과 불편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자동차와 전자전기제품이 대유럽 주력 수출품으로 한국과 경쟁 관계에 있다. 가격경쟁에서 불리해진 일본이 뒤늦게 유럽과 FTA 협상 개시를 추진하고 있지만, 한국과 협상을 시작하고 나서 5년 만에 문을 연 유럽이 일본에는 더 신중한 태도를 보일 것이다. 개방은 교역 활성화로 국부의 증대를 가져오지만, 산업별 득실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생겨난다. 유럽과의 경쟁에서 밀리는 산업은 침체하게 된다. 하지만, 약체산업의 쇠퇴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 개방 정책은 관세장벽의 보호를 받아 온 약체산업에 외부 자극을 주어 경쟁력을 높이려는 적극적 산업정책이기 때문이다. 유럽이 강한 농축산물, 의약품, 서비스 분야 등에 대응하는 노력은 다가올 미국, 일본, 중국 등과의 FTA에 대한 대비가 될 것이다. 지난 200년 사이에 교역의 시대정신이 바뀌고 있다. 중상주의 영향을 받아 국내시장을 관세장벽으로 보호하던 시대에서 관세 장벽을 허무는 시대가 되고 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관세가 80% 제거되면서 세계 교역은 급성장했고, 이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국가는 큰 이득을 얻었다. 개방이 어렵고 두려운 것은 국가의 보호 장벽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구한말 우리는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하고 대문을 걸고 있으면 안전할 것으로 믿었다. 세계화는 경쟁이 지구적으로 확대되는 역사적 흐름이다. 인간은 역사의 조류를 피할 수는 있지만 거역할 수는 없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을 피한 대가는 항상 빈곤과 정체였다.
  • [글로벌 한국금융 해외서 길 찾다] ④ 신한크메르銀 캄보디아 현지화 비결은

    [글로벌 한국금융 해외서 길 찾다] ④ 신한크메르銀 캄보디아 현지화 비결은

    7월 초 찾은 캄보디아 프놈펜 중심가의 신한크메르은행. 은행 내부는 개방형이어서 탁 트인 느낌이었다. 경비원들이 많은 것을 빼고는 국내 신한은행 지점을 옮겨 놓은 듯했다. 하지만 현지 은행들은 신한크메르은행을 ‘별난 은행’으로 본다. 캄보디아 내 상당수 은행들이 과거 우리의 전당포와 같은 폐쇄적인 고객 창구를 운영하고 있는 데 반해 신한크메르는 개방형 창구이기 때문이다. 신한크메르 측은 “처음 오픈 창구로 시작했을 때 현지 은행들이 많이 놀라워했다.”면서 “하지만 고객들이 더욱 편안하게 느끼고 있어 개방형 창구는 신한을 대표하는 특징이 됐다.”고 밝혔다. 신한크메르은행이 캄보디아에 선진 금융노하우를 전수하며 ‘리딩 뱅크’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있다. 자산 규모로는 전체 상업은행 29곳 가운데 중상위권 수준인 8~9위지만 차별화된 서비스로 최고의 현지 은행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2007년 설립된 지 4년 만에 일궈낸 성과다. 신한은행은 신한크메르은행을 기반으로 인도차이나반도의 신한금융 벨트를 구축하고 있다. 신한은행은 캄보디아에 진출한 이후 손을 대는 것마다 업계에 화제가 됐다. 신한크메르는 인터넷이 드문 시절에도 인터넷뱅킹 서비스를 제공했다. 초기엔 느린 속도에 비싼 비용으로 쓸모없는 것 아니냐는 회의론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캄보디아 고객들이 입출금을 인터넷뱅킹으로 처리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현지 은행들도 벤치마킹해 인터넷뱅킹을 속속 도입하고 있다. 또 신용장 거래 등 무역금융에서도 현지 은행들을 압도하고 있다. 철저한 현지화 전략으로 캄보디아에 진출한 국내 금융기관의 부러움도 사고 있다. 신한크메르의 고객 90%는 캄보디아 현지 법인과 개인 고객들로 이뤄져 있다. 보통 한국계 기업 고객을 지원하는 여느 은행들과는 차별화된 부분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되레 전화위복이 돼 현지화에 성공했다. 신한크메르도 국내 기업들의 진출을 보고 캄보디아에 은행을 설립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로 국내 기업들이 투자를 축소하거나 한국으로 철수하는 탓에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생존을 위해 현지 소매금융에 매달린 것이다. 현지화에 성공하기까지 난관도 적지 않았다. 은행과 고객 간 거래의 기본인 신용정보공유시스템은 물론 은행 간 거래를 뒷받침해 주는 자금이체시스템도 없었다. 신한크메르 고객이 다른 은행으로 옮길 때마다 온라인을 통한 계좌 이체가 아닌 현금을 갖고 가야 한다는 의미다. 이재준 신한크메르 법인장은 “100만 달러를 찾기 위해 어른 8명이 은행을 찾거나, 은행에 많은 현금을 두는 게 아닌데 한때 돈이 없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며 금융에 대한 이해 부족을 설명했다. 낙후된 금융인프라 탓에 신용 대출은 위험 부담이 컸고, 담보 가치도 믿을 수 없어 신한크메르는 발로 뛰는 영업을 택했다. 대출 심사를 위해 사업장과 집 방문, 관상, 주변 탐문 등을 주로 활용했다. 원시적이지만 현지에서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또 현지 직원들을 대동해 세번 이상 방문하고, 2~3주에 걸쳐 담보 평가를 진행했다. 여기에 3개월에 한번씩 대출 모니터링으로 상환 스케줄을 확인하며 리스크를 줄여 나갔다. 이 때문에 대출 고객들은 “돈 한번 빌려 주고 생색낸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영업의 성과물은 짭짤했다. 진출 첫 해인 2007년 7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지만 2009년과 2010년엔 120만~130만 달러 규모의 흑자를 기록했다. 신한크메르 관계자는 “캄보디아의 평균 연체율이 5~6% 수준이지만 신한은 확인하는 영업을 하다 보니 연체율이 제로 수준”이라고 밝혔다. 캄보디아 금융시장은 현재 은행 간 경쟁이 치열하다. 시장 진입에 장벽이 없어 손쉽게 영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계 은행도 신한은행을 비롯해 국민은행, 저축은행 4곳 등 모두 6곳이 진출해 있다. 상당수가 캄보디아의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법인장은 “캄보디아는 중국계가 금융권을 지배하고 있는 데다 현지 국내 기업들의 금융 수요도 거의 없어 한국계 은행들이 정착하기가 쉽지 않다.”면서 “지금은 기회보다 위험이 더 큰 시장”이라고 말했다. 한편 신한금융은 현재 캄보디아와 싱가포르 등 14개국에 지점 7곳, 현지법인 10곳을 두고 있다. 프놈펜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강간당할 뻔한 7살 소녀 구한 슈퍼 할머니

    강간당할 뻔한 7살 소녀 구한 슈퍼 할머니

    독일 서부 듀이스브르크에서 강간 당할 뻔한 7살 어린 소녀를 85세 할머니가 구해 화제다. 7살 소녀를 강간하려던 사람은 27세의 남자로 최근 4년의 형기를 마치고 나온 전과자. 할머니는 이 남자와의 격투로 팔이 부러지고 온몸이 멍드는 중상을 입었다. 지난 주 금요일(현지시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할머니는 길을 가다 풀숲으로 한 7살 소녀를 강제로 끌고 가는 남자를 목격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할머니는 이 남성과 몸싸움을 벌였고 주변 사람이 몰려들어 결국 남자는 도망갔다. 몸싸움의 여파로 할머니는 중상을 입어 인근 병원에 입원했으며 소녀는 무사했다.     이 남자는 현장에서 도주했으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붙잡혔다. 이 사건은 현지언론에 대서특필 되었으나 할머니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자신의 신원 공개와 인터뷰를 거절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리얼 프로그램 운전중 PD와 카메라맨 치어

    리얼 프로그램 운전중 PD와 카메라맨 치어

    네덜란드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네덜란드 최악의 운전자’ 출연자가 방송 녹화중 진행자와 카메라맨을 차로 치는 아찔한 방송사고가 발생했다. ’최악의 운전자’(The worst driver)는 2002년 영국에서 시작된 리얼리티 쇼로 최악의 운전자들이 출연하여 운전 강습 받는 과정을 보여주는 인기 프로그램이다. 미국, 캐나다, 호주, 네덜란드등 각국버전이 방송되고 있다. 네덜란드 버전인 BNN채널의 ‘네덜란드 최악의 운전자’의 출연자인 핌은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앞자리에 교관과 뒷좌석에 친구를 태우고는 ‘고속 중에 브레이크 잡는 법’을 테스트 받는 중이었다. 출발을 한 핌은 속도가 올라가고 주행 중에 콘을 치면서 극도로 당황했다. 핌은 급정거를 할 포인트에서 그만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핸들을 우측으로 틀었다. 도로를 벗어난 자동차는 순식간에 촬영을 하던 카메라맨과 방송진행자인 루벤 니콜라이를 치고 나갔다. 방송에는 진행자가 차에 치여 차위로 넘어가는 장면도 공개됐다. 차안에서는 에어백이 터지고 출연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핌은 그 와중에 핸들에서 손을 떼고는 눈을 가렸다. 차에서 내려 쓰러진 진행자와 카메라맨에게 다가간 핌은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다행히 진행자인 니콜라이와 카메라맨은 큰 중상은 아니었다. 병원에 입원한 니콜라이는 “어깨와 발에 약간의 고통이 있을 뿐” 이라며 “누구나 살다보면 이런 충격적인 일을 경험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니콜라이는 프로그램 마지막 에피소드에 출연해 시청자를 안심시켰다. 물론 이런 대형방송사고를 낸 핌은 ‘네덜란드 최악의 운전자’로 당당히(?) 1등을 했고, 그의 운전면허증은 취소됐다. 사진=BNN ‘네덜란드 최악의 운전자’ 방송 캡처 서울신문 나우뉴스 해외통신원 김경태 tvbodaga@hanmail.net
  • 中10층 추락 아기 구한女 거액 격려금 받아

    中10층 추락 아기 구한女 거액 격려금 받아

    10층 건물에서 떨어지는 2세 아기를 지상에서 받아내 목숨을 구한 주부 우쥐핑(31)이 일약 중국의 영웅이 됐다. 중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화제가 된 이 사건은 현지언론들은 물론 중화권 연예인들까지 칭찬 릴레이를 펼쳐 큰 화제가 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을 이 여성을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라는 타이틀과 함께 ‘2011년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중국인’으로 추천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그녀가 근무하는 전자상거래 회사인 아리바바그룹(阿里巴巴集團)의 CEO 마윈(馬雲)은 우씨에게 아이를 구조한 공로를 높이 사 무려 20만위안(약 3300만원)을 격려금으로 내놨다. 마윈 대표는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 순간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며 “우씨의 빠른 회복을 기원한다.” 고 격려했다.  한편 우씨는 지난 2일 길을 걷다가 아파트 난간에 걸려있는 아이가 막 떨어질 듯하자 신발을 벗어던지고 팔을 벌리며 전력질주해 아이를 받아냈다. 우씨는 왼쪽 팔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지만 아이는 목숨을 건졌다. 우씨는 “내가 조금 다치기는 했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면서 “아이가 어서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한번 빈곤층은 영원한 빈곤층?

    한번 빈곤층은 영원한 빈곤층?

    사회적 계층 상승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가운데 소득 수준의 변화도 점차 고착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자는 부자로만 살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른바 ‘양극화 못박기’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 ●도시근로자 ‘소득 이동성’ 둔화… ‘빈익빈’ 심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보건복지 이슈&포커스’ 최신호에서 분석한 ‘소득이동성의 변화 추이’ 보고서에 따르면 1990년부터 2008년까지 도시가계 조사자료를 분석한 결과, 도시근로자 가구의 소득이동성이 빠르게 둔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이동성은 소득이 늘거나 주는 등 변화 가능성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한 가구의 사회적 지위 변화 가능성을 뜻하는 사회적 이동성을 소득에 국한해 분석한 것이다. 보고서는 통계청의 도시가계 조사자료를 토대로 전체 도시근로자 가구를 10분위로 나눈 뒤 소득분위 간 이동을 소득 지위의 변화로 정의했다. 이에 따르면 연평균 소득분위가 상승하거나 하락할 확률은 1990~1997년에 64.3%였던 것이 1998∼2002년에는 62.9%로 줄었으며, 2003∼2008년에는 57.7%로 대폭 감소했다. 소득분위가 2단계 이상 바뀌는 변화도 1990~1991년 30.6%이던 것이 2003~2008년 21.6%로 줄었다. 반면 소득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비율은 1990~1991년 34.3% 등 90년대에 30%대 중후반을 기록하던 것이 2004~2005년에는 42.3%로 40%대를 넘었으며, 가장 최근인 2007~2008년에는 무려 46.1%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가난한 가구는 뭘 해도 가난을 벗어나기 어렵고, 반대로 부유층은 뭘 해도 일정 수준의 부를 유지한다는 의미다. ●女가구, 男가구보다 소득이동 확률 9%P 높아 보고서를 만든 강신욱 연구위원은 “1997년 외환위기 직후 계층 간 이동성이 다소 증가했다가 2003년 이후 다시 하락해 1990년대 초반에 비해 계층 간 이동성이 둔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계층별로는 중산층은 2003년 이후 계층상승 비율이 높아졌지만, 빈곤층과 중하층은 계층하락 비율이 더 높아지는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시근로자의 계층 상승·하락 비율의 변화를 보면, 중상층은 1990~1997년 8.7%에서 2003~2008년 9.5%로 올랐지만, 빈곤층은 같은 기간 43.6%에서 31.1%로 크게 하락했다. 중하위층도 33.5%에서 28.2%로 빈곤층과 같은 추이를 보였다. 강 연구위원은 “소득이동성의 저하 효과가 특히 저소득층에 더욱 집중됐음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진단했다. 한편, 성별로는 여성 가구가 남성 가구에 비해 소득이동 확률이 평균 9%포인트 높았다. 또 연령별로는 20대와 60대 이상 가구의 소득이동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았고, 학력별로는 저학력 가구가 계층이동성이 높아 소득 불안과 저학력이 상당한 연관성을 가졌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안석기자 ccto@seoul.co.kr
  • 총격前 상담받은 관심해병이…강화서 총기난사 4명 사망·2명 부상

    총격前 상담받은 관심해병이…강화서 총기난사 4명 사망·2명 부상

    해병대 병사가 동료들이 자고 있던 생활관(옛 내무반)에 총기를 난사해 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해병대는 4일 “오전 11시 50분쯤 해병대 2사단의 강화도 해안 경계 부대 소초 생활관에서 김민찬(19) 상병이 부대 상황실에서 절취한 K2소총을 난사해 이승훈(25) 하사 등 4명이 사망하고 김 상병을 포함한 병사 2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총기 난사 직후 이 하사 등 3명이 생활관에서 사망했으며, 중상을 입고 국군수도병원으로 이송된 박치현(21) 상병은 수도병원 도착 직후 사망했다. 사망자는 이 하사, 박 상병과 이승렬(20) 상병, 권승혁(20) 일병 등이다. 부상자는 김 상병과 권혁(19) 이병이다. 김 상병은 사고 당일에도 소대장과 상담을 받는 등 관심사병으로 분류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숨진 권 일병의 사촌형 권욱(30)씨는 “사고 당일에도 소대장과 상담을 받으면서 ‘잘 하겠다’고 말했다고 들었다.”면서 “김 상병이 관심사병이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해병대는 1차 조사 결과 김 상병이 이날 오전 10시경 주간 근무자 교대 시 상황실 총기 거치대에서 총기와 탄약을 훔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 상병은 1시간 50분 뒤 훔친 K2소총으로 생활관에서 야간 근무 후 취침 중인 동료들에게 실탄을 발사했다. 권 이병에 의해 생활관 밖으로 밀려난 김 상병은 생활관 옆 창고로 이동해 수류탄 1발을 터뜨려 자살을 기도했다. 군은 현재 김 상병을 국군 대전병원으로 이송해 총기를 난사한 동기와 수류탄을 갖고 있게 된 과정 등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 해병대는 “김 상병이 병원으로 후송 도중 심하게 난동을 부려 진정제를 투여했다.”면서 “의식은 있지만 조사 과정에서 진술을 거부하고 있고 툭하면 난동을 부리려는 자세로 조사에 비협조적”이라고 밝혔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10층서 떨어지는 두 살배기 받으려 몸날린 주부

    10층서 떨어지는 두 살배기 받으려 몸날린 주부

    한 여성이 10층 건물에서 떨어지는 2세 여자아이를 지상에서 받아내는데 성공해 목숨을 구한 일이 알려져 화제를 모으고 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항저우시(市)에 사는 주부 우쥐핑(31·女)은 지난 2일 길을 걷다가 한 갓난아이가 위태롭게 아파트 난간에 걸려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아이가 막 떨어질 듯하자 우씨는 신발을 벗어던지고 팔을 벌리며 전력질주했고, 아이를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우씨는 왼쪽 팔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지만 아이가 바닥으로 곤두박질 쳐 급사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사건 조사 결과, 아이는 부모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발을 헛딛고 사고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치료를 맡은 병원 관계자는 “우씨는 매우 용기있는 행동을 했다. 만약 아이가 그녀의 머리나 등으로 떨어졌다면 함께 숨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면서 “전액 무상의 치료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우씨가 몸을 날려 아이를 받아내는데 성공했지만, 아이는 당시 충격으로 인한 내출혈 및 장기손상 등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우씨는 “비록 내가 조금 다치기는 했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면서 “아이가 어서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아이를 살린 우쥐핑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데스크 시각]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박찬구 국제부 차장

    [데스크 시각]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박찬구 국제부 차장

    묵묵히 제 임무를 처리하던 병사였다. 전역을 한 해도 채 남겨놓지 않은 그해 늦여름, 그는 느닷없는 굉음 속에 헬기로 후송됐다. 대인지뢰를 밟았다. GOP 철책선 너머에서 철조망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병사의 바로 옆에서 철조망을 끌던 중대장의 하계 전투복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육사 출신 대대장의 일성은 이랬다. “죽었어, 살았어?” 한 해를 훨씬 넘긴 뒤 민간인통제구역 바깥에서 그를 만났다. 묵묵한 표정은 여전했지만, 간혹 애써 짓는 미소와 음식점으로 걸음을 옮길 때 규칙적으로 무너지는 오른쪽 몸이 생경했다. 대인지뢰는 그의 오른쪽 다리 무릎 아래를 앗아가 버렸다. 그의 인생을 한순간에 바꿔버린 대인지뢰는 우리 측 공병이 북측의 남침에 대비해 설치해 놓은 것이라는 사실이 조사 결과 밝혀졌다. 여름철 빗물에 유실됐다고 했다. 인간이 발명한 무기 가운데 대인지뢰만큼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것은 없다고 감히 얘기할 수 있다. 목숨을 앗아가기보다 병사에게 중상을 입혀 다른 병사로 하여금 부축하게 만드는, 그래서 전투력을 곱절로 저하시키는 무기, 그것이 대인지뢰다. 총과 총을 맞든 전쟁터라면, 어떤 무기인들 못 쓰겠냐고 할 수 있다. 일견 수긍이 간다. 하지만 무고한 시민과 어린이, 나와 우리의 가족을 겨냥한 대인지뢰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것도 비인간적인 살상무기에 대한 경종이 울릴 만큼 울린 21세기에 말이다. 모하메드 투르고멘. 54세. 25년 전 그는 리비아 군대에서 폭발물 처리반으로 근무했다. 지금은 리비아 서부 지역에서 반군으로 활동하고 있다. 투르고멘은 리비아군과 반군이 치열하게 대치한 미스라타 교외에서 대인지뢰 550여개를 찾아냈다. 낙타가 지뢰를 밟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낙타의 불운으로 리비아군의 가장 큰 지뢰밭을 찾아낼 수 있었다.”라고 전했다. 금속탐지기는 소용없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지뢰였다. 투르고멘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당구 막대기를 사용해 지뢰를 하나 둘 탐지했다고 한다. 그러곤 경고 팻말을 남겼다. 흥밋거리로 넘길 수 없는 얘기다. 투르고멘은 “플라스틱이라니, 이전에 못본 지뢰들이다. 어린이와 가족들이 이 땅에서 지낸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라고 몸서리를 쳤다. 알자지라는 민간인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대인지뢰의 설치가 대다수 국가에서 금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앰네스티 인터네셔널도 발끈했다. 카다피군은 로켓 발사기에 반군이 접근하는 것을 막는다는 이유로 지뢰를 매설했다고 한다. 인간의 야만성, 전쟁의 몰가치성은 어디까지 흐르는 것일까. 알자지라를 읽어내려가다 1980년대 후반 한반도 중서부 지역 전방 부대에서의 기억을 떠올린 것은 대인지뢰가 지닌 야만성, 그리고 그 대인지뢰가 21세기 중동에서 민간인을 타깃으로 작심하고 있었다는 섬뜩함 때문이었을 테다. 리비아에서는 클러스터 폭탄을 만지작거리다 두 팔을 잃은 어린이가 병원에 실려가기도 한다. 지난해 오슬로 조약으로 사용과 제조가 금지됐지만, 리비아에서 이 폭탄은 리본까지 단 채 어린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고 외신은 보도한다. 시공(時空)에 따라 전쟁은 이상과 가치를 발현하는 무대가 될 수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반(反)파시스트 의용군에 참여한 경험을 담아 “나 또한 인류의 일부이니, 어떤 이의 죽음도 나 자신을 멸하는 것이다. 그러니 묻지 말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느냐고,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다.”라고 갈파했다. 사람과 세상을 죽이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인류와 이상을 살리기 위한 전쟁을, 실천적 지식인이 뛰어드는 전쟁을, 헤밍웨이는 장편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플라스틱 대인지뢰와 클러스터 폭탄이 난무하는 땅, 리비아에서는 야만의 전쟁, 전쟁의 야만을 뺀다면 무엇이 카다피를 기억할 것인가. 무고한 어린이와 민간인의 주검 위에서, 과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릴 것인가. ckpark@seoul.co.kr
  • 시간당 40㎜ 물폭탄

    시간당 40㎜ 물폭탄

    body{color: #3C3C3C;font: normal normal normal 14px/normal 돋움;letter-spacing: 0px;line-height: 180%;text-align: left;margin: 0px} td {font-size:9pt} .dialog { border-color: #F7F7F7 #666666 #666666 #f7f7f7; border-style: solid; border-top-width: 2px; border-right-width: 2px; border-bottom-width: 2px; border-left-width: 2px} .border { border-color: #E0E0E0 #e0e0e0 #e0e0e0; border-style: solid; border-top-width: 1px; border-right-width: 1px; border-bottom-width: 1px; border-left-width: 1px} .textBox {font-size: 9pt; border: #E5B98F; border-style: solid; border-top-width: 1px; border-right-width: 1px; border-bottom-width: 1px; border-left-width: 1px} .textBox2 { border: 1px solid; font-size: 9pt; background-color: #FFFFFF; border-color: #C0BD89 #c0bd89 #c0bd89; vertical-align: bottom} .custom { height: 22px;} #apDiv1 {position:absolute; left:542px; top:121px; width:216px; height:94px; z-index:4;} .style1 { color: #FFFFFF; font-weight: bold;}.view11 { font: 14px 돋움; color:#3C3C3C; line-height:180%; word-spacing:-1px}.teal { font: 9pt 돋움; line-height:130%; color: #005791} 기록적인 ‘8일간의 연속강우’로 지반이 약화되면서 산사태가 발생해 쏟아진 토사가 지나던 차량들을 덮치는 바람에 1명이 숨지고 3명이 중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지난 22일부터 29일까지 서울에 내린 연속강우는 1907년 10월 서울지역에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6월 연속강우로는 최장기록이다. 서울에는 새벽부터 물폭탄이 쏟아져 오후 11시 30분 현재 송파 209㎜, 영등포 199.5㎜ 등의 강수량을 기록했다. 가평 232.5㎜, 남양주 212.5㎜, 성남 189㎜ 등 경기 지역에선 시간당 40㎜ 안팎의 폭우가 쏟아졌다. 이번 비는 30일 서울과 경기 남부, 충청 지역으로 옮겨가 최고 150㎜ 이상 내릴 것으로 예보됐다. 집중호우로 지반이 크게 약해지면서 오후 1시쯤 서울 노원구 월계동 초안산 절개지에서 산사태가 발생, 1500t의 토사가 인근 2차선 도로로 쏟아져 지나던 차량 3대를 덮쳤다. 이 사고로 그랜저 XG 승용차 운전자 유모(46)씨가 숨지고, SM7 운전자 김모(48·여)씨와 아들 임모(22)씨, 스타렉스 운전자 오모(39)씨 등 3명이 크게 다쳐 인근 을지병원으로 이송됐다. 국철 1호선 성북역~도봉산역 구간의 전철 운행도 한때 중단됐다. 잠수교는 오전 11시 50분부터 수위가 6.2m를 넘어 차량 통행이 전면 금지됐다. 수도권에서도 크고 작은 사고가 잇따랐다. 오전 6시 5분쯤에 경기도 가평군 상면 덕현리 샘터유원지에서 직장 동료와 함께 놀러온 동모(36)씨가 조총천 급류에 휩쓸려 실종돼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날 오후 서울, 경기에 이어 충남 부여·서천군에도 호우주의보가 발령됐으나 저녁부터 빗방울이 잦아들면서 오후 11시를 기해 부여와 서천지역의 호우주의보는 다시 해제됐다. 기상청 관계자는 “서울을 비롯한 중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총강수량 300㎜ 이상의 매우 강한 비가 오겠다.”면서 “하천 범람, 산사태, 축대 붕괴 등이 우려되는 만큼 철저히 대비해 달라.”고 당부했다. 김동현·김소라기자 moses@seoul.co.kr
  • 국가보훈대상자 20명 포상

    김황식 국무총리는 24일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국가유공자 복지증진과 지역사회 발전 등에 이바지한 공로로 유양배(72·전상군경 1급)씨에게 국민훈장을 주는 등 모범국가보훈대상자 20명을 포상했다. 1965년 월남전에서 척추관통상을 입은 유씨는 중상이 상이군경이 모여 사는 십자성용사촌 대표로,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에서 위생재료를 생산하는 복지공장을 운영하면서 수익금을 용사촌 회원들의 생활안정에 지원,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또 2007년부터 3년간 한국전에 전투병을 파병한 유엔 16개국 전상자 75명을 초청, 한반도 안보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등 국제교류에도 이바지했다.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은 김성욱(62)씨는 1968년 월남전에 참전한 중상이 전상 국가유공자로, 월남전고엽제후유의증전우회 사무총장으로 일하면서 전우회 발전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는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이 수당지급, 취업, 교육지원 등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매월 지급되는 국가보훈보상금의 10%를 사회복지단체에 기증해 취약계층을 돕고 있다. 대통령표창을 받은 대한민국상이군경회는 1951년 6·25 전쟁 중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발족, 국가를 위해 희생한 상이군경 회원의 복지 증진에 기여해 왔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한국戰 전사자 유해발굴] “전우 잃은 기억 떠오를까 한국 방문 주저했죠”

    [한국戰 전사자 유해발굴] “전우 잃은 기억 떠오를까 한국 방문 주저했죠”

    모든 한국전쟁 참전용사는 자신의 공훈을 자랑하고 싶어 하고, 자신이 피 흘려 싸운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 할까. 18일(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 비에나시에서 만난 미국인 참전군인 앨 오티즈(82)는 그것이 또 하나의 편견임을 일깨워 줬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61년째를 맞은 지금까지도 당시의 기억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다. 적탄에 사랑하는 전우를 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공격에 적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전쟁의 비극을 논하는 것은 애당초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의 모습이 웅변했다. 61년 전 오티즈는 텍사스 앨파소에 사는 평범한 21세의 청년이었다.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 탓에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모자 가게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그는 1950년 11월 강제 징집명령을 받는다. 심경이 어땠을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죠.” 그는 솔직했다. 오티즈는 루이지애나에서 기초 훈련을 거친 뒤 1951년 5월 일본 홋카이도에 배치됐다. 한국의 추운 날씨에 적응하기 위한 혹한 훈련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해 12월 그는 인천항을 통해 처음 한국 땅을 밟게 된다. 한국군과 유엔군, 북한군과 중공군이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때였다. “불확실성과 두려움, 그런 감정이 지배적이었어요.” 그는 그때 감정을 그렇게 표현했다. 오티즈는 미 45보병사단 179연대 1소대 소대장으로 강원도 철원의 ‘포크찹 힐’(255고지) 전투에 배치됐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고지의 모양이 포크찹이라는 요리를 닮아서 붙은 별명이었다. 이름은 익살스러웠지만, 그곳은 아군과 적군이 빼앗고 빼앗기기를 거듭한 가장 격렬한 전장 중 하나였다. 오티즈 소대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협공을 받았다. “북한군은 사납고 잔인했어요. 총도 없이 호미 같은 것을 들고 우리한테 돌진하기도 했죠.” 중공군은 인해전술이었다. “마치 개미떼 같았죠. 수백명이 밀고 올라왔어요. 우리는 대포와 수류탄으로 맞섰어요. 특히 수류탄이 효과가 컸어요. 중공군도 나무로 된 수류탄을 던졌는데 우리는 그걸 다시 주워서 되던지기도 했죠.” 오티즈는 “한번은 중공군 포로를 잡고 보니 12살 정도밖에 안 되는 소년이어서 깜짝 놀란 기억도 있다.”고 했다. 실탄이 떨어진 양측 사이에 육탄전이 벌어지는 것도 예사였다. 오티즈는 검지와 중지로 적의 눈을 찌른 적도 있고 칼로 적의 목을 벤 적도 있다고 했다. 전쟁은 해맑은 청년을 야수로 바꿔 놓았다. “처음엔 중공군을 미워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곁에 있던 전우가 죽는 것을 보면서 피가 거꾸로 솟구쳤죠. 점점 그들을 증오하게 됐어요.” 그는 1952년 7월 박격포 파편으로 중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됐고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는 전쟁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1953년 5월 전역한 뒤 참전군인에 대한 정부 지원으로 텍사스주립대에 들어갔고, 국무부에서 일하게 되면서 버지니아로 이사했다. 그는 결혼해서 1남3녀를 뒀다. 그에게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한국이 엄청나게 발전해서 놀랐다.’는 답변을 겨냥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한숨과 함께 나온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한국에 먼저 다녀온 참전용사들은 한국이 엄청나게 발전해서 뉴욕같이 변했다고 했어요. 하지만 나는 한국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사랑하는 전우들을 잃은 기억이 떠오를까 봐 두려웠어요. 내가 이끌던 40명 중에 33명이 전사했죠. 그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기억이에요.” 그의 목소리가 떨렸고 눈에는 이슬이 비쳤다. 하지만 부상 미군 단체(Purple Heart)의 일원이었던 그는 이 단체의 방한 요청을 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2000년대 초 한국을 찾았다. 반세기 만이었다. 한국에 있는 사흘간 동료들은 판문점 등을 돌아다녔지만, 그는 서울을 벗어나지 않았다. 옛날의 기억이 떠오를까 두려워서였다. 그는 “같은 참전용사라도 나처럼 격렬한 전투에 참여한 사람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기 힘들다.”고 했다. “61년이 지난 지금도 악몽을 꾸죠. 육박전에서 내가 찌른 적이 죽어가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는 “우리가 그렇게 싸웠는데 남북한이 여전히 분단국가라는 점이 걱정”이라면서 “나는 북한이 다시 도발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했다. 그는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다르게 도와준 것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참전용사)한테 뭔가를 보답하려 한다.”면서 여러 차례 고맙다는 말을 했다. 준비해 간 질문 가운데 차마 꺼내지 못한 게 있다. ‘다시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때도 기꺼이 참전하시겠습니까.’란 질문이다. 그 질문을 준비해 간 게 미안했고 부끄러웠다. 글 사진 비에나(버지니아)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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