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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大學출신 아내는 離婚을 좋아한다

    大學출신 아내는 離婚을 좋아한다

    [선데이서울 73년 7월1일호 제6권 26호 통권 제246호]  ●이 기사는 38년전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된 느낌. 부부의 갈등을 이혼으로 해결하려는 아내가 오히려 남편들을 능가하고, 그것도 신혼기에 속하는 결혼 1~3년 사이의 주부에 많다. 특히 학력이 높을수록 더욱 그러하다니 배운 아내를 가진 남편들을 아찔하게 하는 「쇼킹」한 정보-.  이 놀라운 사실은 한국부인회 법률상담소가 부인들의 상담을 통해 조사·분석한 것. 조사 기간은 작년 7월부터 12월까지 약 5달 동안. 상담 인원은 모두 7백45명이며 상담기록 「카드」와 대화를 토대로 조사했다.  상담 건수를 사건별로 나누면 형사 1백8, 민사 4백12, 그리고 가사 사건이 2백25건. 그런데 전체 상담 건수의 약 33%를 차지하는 가사 사건이 바로 「이혼」과 관련된 문제들.  『더이상 함께 살 수 없어 갈라서야 겠다』『이혼을 하려는데 위자료를 받을 수 있겠나』는 주장이었다.  이혼 상담을 해온 부인들의 나이 분포는 30~40살.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의 대부분이 결혼하고 3년이 못 된 30살 안팎이고, 사유야 어떻든 여자쪽에서 이혼을 먼저 제의한 경우가 70%에 이르는 1백50여명이었다.  이들을 학력별로 살펴보면 50%인 1백10여명이 대학 졸업자로 가장 많고 고교 졸업이 25%, 나머지가 중학교 이하의 학력을 가졌다.  이 가운데 여자쪽에서 먼저 이혼을 제의한 것은 대부분 고교 이상의 졸업자들이며 중학 이하의 학력을 가진 아내들은 『주인이 헤어지자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오히려 남편과 헤어지기가 싫어서 한 상담이었다.  상담에서 나타난 이혼 사유를 보면 당연히 이혼을 제의할 만큼 중대한 문제도 있으나 웃지 못할 사유도 허다하다.  크게 몇가지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 인격 침해 79건(35%) ▲ 부정 때문에 54건(24%) ▲ 의처증 때문에 45건(20%) ▲ 무능력 27건(12%) ▲ 타인의 간섭(5%).  이 통계는 옛날처럼 자식이 없어 부부가 파경에 이르는 경우는 거의 없음을 입증.  『현대여성은 결혼생활에 있어서 적어도 기본적인 인권이 존중된 그런 부부관계에 놓이기를 추구한다』는 게 이곳 배성심(裵成心) 상담부장의 실명이다.  상담한 대개의 사건들이 내세운 이혼사유(조건)는 무엇이라고 내세울이(내세울)만큼 서로 비슷한 것이었지만 기본권·인권이 침해되었다는 한 예를 보자.  남편 李모(32)씨는 서울 D고등학교 교사. 결혼은 했으나 아내는 시골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게 했고 줄곧 서울에서 하숙생활을 하면서 철새처럼 방학때만 아내를 찾아왔다.  3년동안 따로 살면서 참다 못한 아내는 서울로 남편을 찾아왔다.  남편은 그동안 같은 학교의 여교사와 눈이 맞아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분통이 터진 아내는 두 사람을 간통으로 고소하려 하자 둘은 학교를 그만 두고 도망치고 말았던 것.  또 의처증이 빚은 다른 예-.  4자녀를 둔 崔모씨(40)는 변태적일 만큼 무서운 의처증이 있었다.  공연한 트집을 잡아 히루에도 몇 차례씩 아내를 두들겼다. 결혼 뒤 줄곧 이런 두려움에 시달려 끝내 아내는 정신이상을 일으켰다. 매정한 남편은 자기 때문에 이 꼴이 된 아내를 이웃 보기가 창피하다고 친정으로 쫓아 보냈다.  또 다른 한 예는 아들을 낳지 못한 아내가 남편에게 2호부인을 얻어주는 대신 남편의 재산을 송두리째 차지하기로 했던 사건.  결혼 20년이 된 중년부부 였다. 아내는 딸만 여섯을 낳았다. 아내의 잘못일 수도 없었는데 남편은 아들을 낳기 위해 2호를 얻겠다고 고집.  아내는 2호를 집에 들이기로 하고, 대신 집의 명의를 자기 앞으로 돌려 달라고 했다. 이것이 합의되어 집의 소유권은 아내에게로 넘겨졌다. 2호부인은 바로 임신, 그토록 남편이 바라던 아들을 낳았다.  아내는 2호가 낳은 아들을 자기의 소생으로 입적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2호부인은 그럴 수가 없다며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고, 남편은 아내를 두들겨 재산권을 도로 빼앗고 내쫓았다.  남편의 잘못으로 빚어지는 이런 별난 사건들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양상.  아내들은 이런 횡포를 숙명적인 것으로 돌리고 감수했었다.  그러나 오늘의 여성들은 이를 참지 못하고 강경한 저항을 보이고 있으며 반드시 응징하거나, 차라리 헤어져 혼자 자유롭게 살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진 현상이라는 것.  이같은 사고 방식은 최근 고조된 여성의 사회참여 의식, 그리고 늙기 전에는 여자도 벌이를 할 수 있어 재정적으로 굳이 남편에게 얽매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관계자들은 풀이한다.  남편들에게 더 많은 원인이 있는 이면에는 자신들의 잘못으로 파경을 부르는 아내들도 적지않은 실정.  어떤 부인은 성품이 남자보다 더 괄괄하고 고집이 대단했다. 심한 표현으로 바꾸면 남편을 장악하려는 아내였다.  그리고 이들 부분이 남편의 사회적인 교제에 이해가 부족하여 늦게 집에 돌아오는 것을 퍽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으며 밖에 쏘다니기를 좋아하고, 신문 한장을 읽지 않는 게으럼을 피우면서 허영에 들뜬 부인도 있었다니 한심스럽다.<燦>
  • “날 좀 놔줘요” 유명 여가수 발버둥

    “날 좀 놔줘요” 유명 여가수 발버둥

    [선데이서울 73년 7월 8일호 제6권 27호 통권 제 247호] ●이 기사는 38년전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명예훼손 우려가 있는 곳은 부득이 익명 처리했음을 양지바랍니다.  매력적인 야성미를 물씬 풍기는 인기「팝 싱어」A모양(26)이 40대 중년에게서 끈덕진 청혼을 받고 있다. 그러나 A양은 『제발 날 좀 놔줘요.』다. 왜? 40대는 늙었단 말인가···. 첫사랑의 쓴맛이 아직 안가신 탓일까···?  A양의 측근에서 새어나온 소문에 따르면 A양은 모 약사와 은밀히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는 것.  이에 대해 A양은 『약사라구요? 호호···.』다소 당황한 듯한 표정에 웃음을 날리며 『약사는 아녜요···.』라고 해명.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연예계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비듬약의 광고 「모델」이 된 적 있었죠.』  비듬약 광고라 묘하게 A양의 뒤통수만 찍힌 것이었다. 그때 중간 역할로 알게 된 사람이「피아르」 관계 회사의 李모씨.  『그분이 나를 퍽 귀여워 해주어 나도 따랐던 편인데 이성적인 것은 아니었죠.』  그 후 A양은 미8군 연예단체서 1년간 노래하다 한 여성「보컬·그룹」의 「멤버」로 2년반 동안 동남아 공연을 돌고 귀국. 거의 3년이란 세월이 지났는데도 李씨는 A양을 잊지 않고 찾아왔다,  『그 분은 여전히 나를 귀여워해 주었죠.』  종종 극장 구경도 함께 가는 등 그들의 「데이트」는 자주 눈에 띄어 결혼설까지 나돌았을 정도. 이때부터 李씨를 알게 된 어머니도 과히 싫은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고. 그런데 A양은 69년 말에 또다른 「보컬·그룹」의 「리더· 싱어」로 다시 미국으로 떠나게 됐다.  미국서 1년을 보내고 「캐나다」로,「캐나다」에서 3년간 연예활동을 하다가 72년 1월에 귀국했다. 그녀가 돌아오자 李씨는 목마르게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A양의 집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  『내가 없을때 어머니에게 종종 찾아와 청혼한 것 같아요.』  A양의 실토에 따르면 李씨가 어머니를 통해 상당히 「치근덕」거리며 접근전을 벌이는 것 같다.  그러나 A양은 李씨가 40대로 나이 차이가 많아지고(많고) 경제적 기반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  『이씨가 집을 자주 드나들곤 한 것이 약혼 상대가 있는 것처럼 소문난 것같아요.』라는 게 A양 나름대로의 추측이다.  어머니를 설득시켜 딱 잘라 거절해 李씨는 1개월전부터 발길을 끊었다고 하는 데 또 언제 나타날지 알겠느냐고.  『나는 그 분을 친척같은 기분으로 따랐었지, 이성관계로 대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결국 李씨는 김칫국만 마신 사랑을 해 온 것일까?  『나의 애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따로 있었어요. 지금은 헤어졌지만...』  A양이 연예계에「데뷔」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 같은 「보컬· 그룹」에 있었던 S군과 눈이 맞았다. (이어진 S군의 활동내용 문장은 싣지 않았음) A양이 동남아 공연을 떠나기 전인 20살 되던 무렵이었다.  『순진한 때의 첫사랑이어서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심각한 사랑이었어요.』라는 고백.  처음엔 몰랐으나 사귀다 보니 S군은 이미 결혼한 몸이어서 결국은 이루 수 없는 첫사랑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얘기다. 그런 첫사랑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남성 관계에 퍽 신중을 기하다 보니 어느 틈에 노처녀 위험선에 서게 됐다는 A양은 2~3년 뒤에나 서너살 위인 경제력 있고 「와일드」한 남성과 결혼하겠다며 씁쓸히 웃었다.<杰>
  • [길섶에서] 모자/최광숙 논설위원

    겨울철 내내 가방에 장갑과 모자를 챙겨 다닌다. 그 전에야 칼바람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맨머리로 길거리를 활보해도 견딜 만했지만 요즘은 다르다. 모자를 쓸 때와 쓰지 않을 때의 그 ‘현격한’ 차이를 알고부터는 모자는 소중한 친구가 됐다. 계기는 미국에 잠시 머물 때가 아닌가 싶다. 워낙 춥다 보니 그곳 사람들에겐 모자 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심지어 정장 차림의 남자들도 털모자를 눌러쓰고 출근했다. 여성들이야 패션까지 겸하니 모자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실용주의가 뭐 별건가. 추우면 모자 쓰고 점퍼 입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사정이 좀 다르지 않나 싶다. 남의 눈을 의식하느라 추워도 외출길에는 가급적 모자 쓰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1월 수십년 만의 추위에 중절모를 쓴 한 중년 남성을 만났다. 연예인이나 쓸 법한 모자를 그는 용감하게 쓰고 다니는 것 아닌가. 유럽에서 오랫동안 생활했기 때문일까. 거리에서 모자 쓰는 멋쟁이들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미녀와 야수’커플, 실패확률 높다”

    “‘미녀와 야수’커플, 실패확률 높다”

    아름다운 여성을 아내로 맞는 건 거의 모든 남성들의 로망이 아닐까. 하지만 ‘미녀와 야수’ 커플의 결과는 기대와는 반대라는 주장이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 외모가 자신에 비해 훨씬 뛰어난 여성 배우자를 맞을수록 둘의 관계가 실패로 끝날 확률이 더 높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영국 체스터 대학과 리버풀 대학의 공동 연구진은 “자신의 외모에 비해 뛰어나게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한 부부는 실패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남자의 외모가 여성보다 월등할 경우에는 반대의 경향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연구진은 영국의 남녀 커플 100쌍 이상을 심층적으로 관찰했다. 여기에는 결혼한 지 몇 달된 신혼부부와 수십 년이 된 중년부부 등 다양하게 포함됐다. 연구진은 이들의 외모를 객관적 기준에 따라서 평가해 매력지수를 점수로 매겨 분석했다. 연구 결과 흥미로운 현상이 드러났다. 동등한 매력지수를 가진 커플들에 비해서, 남성보다 여성의 외모점수가 현격히 높은 일명 ‘미녀와 야수’ 커플의 경우 결혼생활이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눈에 띄게 잦은 것. 로브 버리스 박사는 “외모가 뛰어난 여성들은 이성에 대한 자신감이 뛰어나고, 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관계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통제하려는 경향을 보여 갈등을 빚는 경우가 있을 것”이라고 이유를 분석했다. 또한 다른 남성들의 유혹이 비교적 더 잦고, 남성들의 질투심도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남성의 외모가 여성보다 훨씬 뛰어난 경우, 관계가 평탄하게 유지되는 현상을 보이는 등 뚜렷하게 대조됐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한편 이 같은 내용은 학술지 ‘성격과 사회심리학 회보(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에 실렸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트위터(http://twitter.com/newsluv)
  • 딸 샤워영상 공개한 母…“애인 만들어 주려고”

    딸 샤워영상 공개한 母…“애인 만들어 주려고”

    중년의 중국 여성이 20대 딸이 샤워를 하는 장면을 촬영해 인터넷에 공개해 논란이 되고 있다. 남자친구를 사귀어 본 적 없는 딸에게 애인을 만들어 주려고 했다는 설명이 중국 네티즌들을 더욱 황당하게 했다. 중국의 유명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최근 문제의 동영상이 올라 네티즌들의 눈길을 끌었다. “요즘 인터넷으로 남녀가 만나는 일이 많다는데, 내 딸을 소개하고 싶다.”는 중년여성의 설명으로 영상은 시작한다. 설명이 끝나자 화장실에서 샤워 중인 젊은 여성이 나타났다. 26세 루루라고 알려진 이 여성은 앞서 등장한 중년 여성의 친딸로, 몸 대부분을 가렸지만 상의를 탈의한 상태로 짐작됐다. 1분 여 영상은 모녀의 자유로운 대화도 담고 있다. “어떤 사윗감이 좋냐.”고 딸이 묻자 중년 여성은 “특별히 바라는 조건은 없다.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면 거지라도 상관 없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의 억양으로 미뤄 많은 네티즌들은 이들이 허난성 출신으로 추측했다. 일부에서는 관심을 얻으려고 일부러 설정한 영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딸의 개인적인 모습까지 인터넷에 공개하면서 남자친구를 구하려는 어머니의 자식사랑은 상식 밖”이라고 입을 모았다. 사진=영상 캡처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 [세대공감] 추억의 졸업식 속으로…

    [세대공감] 추억의 졸업식 속으로…

    “3년간 가슴앓이를 했던 걔한테 고백을 해야 하는데…” 하지만 끝내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교문을 나섰다. 18살 소년의 안타까운 졸업식은 그렇게 끝났다. 마치 깊은 바다에 소중한 반지를 빠트린 기분이었다. 좋아했던 그녀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아 마음이 더욱 쓰라렸다. 그 소년, 지금은 50대 중년이 됐다. 졸업 시즌이다. 정들었던 학교를 떠나는 아쉬움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은 어느 세대나 다르지 않다. 또 졸업식 하면 누구나 추억 한 조각씩은 갖고 있다. 애틋한 사랑 얘기도 있고 슬픈 추억도 많다. 졸업식 뒷풀이 때 술 마시며 어른 흉내를 냈던 추억은 애잔하기까지 하다. 최근에는 ‘알몸 졸업식’이 사회적 문제로까지 부상했다. 졸업 시즌을 맞아 세대별로 졸업에 얽힌 추억 앨범을 펼쳐본다. ●눈물의 추억-안녕, 첫사랑…빼앗긴 우수상 서울 성북동 송근석(52·자영업)씨는 40여년 전, 초등학교 졸업식을 잊지 못한다. 첫사랑 때문이다. 송씨는 한 여학생을 좋아했다.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덕분에 반에서 1등까지 해 봤다. 하지만 그녀 앞에만 서면 부끄러워 말조차 붙이지 못했다. 졸업식 날. 그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용기를 내 그 여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잘 지내라.”는 단 한마디였다. 송씨의 수줍은 인사에 그 여학생도 “너도 잘지내.”라며 화답했다. 그 한마디에 송씨는 날아갈 듯 기뻤다. 하지만 그는 고등학교 진학 후 뜻밖의 비보를 듣게 됐다. 첫사랑이었던 그 여학생이 남자 친구와 헤어진 아픔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었다. 송씨는 “당시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면서 “그녀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게 한 그녀의 남자 친구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고 회고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초등학교 졸업식 날을 더더욱 잊지 못한다. 좋아했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가슴 한편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어서다. 제주에서 요식업을 하는 강정희(54·여)씨는 졸업식을 생각하면 금세 눈시울이 젖어든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전교 회장이었던 강씨는 연단에 올라 졸업사를 낭독하다 눈물을 쏟아 냈다. “가족같이 지낸 선생님, 친구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 눈물을 닦으며 간신히 졸업사를 마친 강씨에게 박수 세례가 쏟아졌지만 기쁨보다 슬픔이 더했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도 그의 눈물은 계속됐다. 반에서 항상 3등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던 강씨는 졸업식 날 시상하는 학력 우수상을 자신이 받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그 학력 우수상을 얼마 전 전학 온 친구한테 내주고 말았다. 졸업식이 끝나고 그는 분한 마음에 엉엉 울고 말았다. 친구들과 모여서 “선생님이 상을 편파적으로 줬다.”며 흉을 보기도 했다. 강씨는 졸업식 후 이틀 동안 선생님을 찾아가 따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그까짓 상을 못 받았다고 내 인생이 어떻게 되겠는가.’ 하고 생각하며 잊으려고 애썼단다. 강씨는 그때를 생각하면서 “고등학교 때부터 나름대로 인생을 논했던 것인가.”라며 멋쩍게 웃었다.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자란 이미자(48·주부)씨에게 졸업식은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다가온다. 초등학교에 함께 입학한 친구가 190명이었는데 졸업할 때는 130명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3, 4학년 때 학교를 중퇴했다. 한글만 깨우치면 농사짓고 소를 키우는 데 문제가 없다는 게 중퇴의 변이었다. 그런데 그는 친구들의 이러한 사정을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됐다. 철없던 그 시절, 친구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된 이유를 몰랐던 이씨는 친구들을 이상한 눈으로 봐라봤다. 가끔 밥을 먹지 않는 친구가 있으면 왜 밥을 안 먹느냐고 놀렸다. 특히 졸업식 날엔 상장과 선물로 받은 벼루, 먹을 들고 학교를 그만둔 친구들 앞에 가서 눈치 없이 자랑까지 했다. 이후 그는 동문회 모임 때마다 졸업을 못 한 친구들을 수소문해 초대하곤 했다. 그러나 중퇴한 친구들은 처음에 한두번 나오다가 그다음에는 나오지 않았다. 이씨는 “어색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어린 시절 졸업식 날 잘난 척했던 제 모습이 성인이 되어서도 잘난 척하는 걸로 보일 수 있었을 테니까.”라며 안타까워했다. ●쓸쓸한 식장-맞벌이 부모님 모시기 힘들어 경기도 부천에 사는 대학생 김경은(22·여)씨에게도 졸업식은 아픈 기억이다. 부모의 불화로 중·고 졸업식을 모두 망쳤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만 해도 괜찮았다. 그때는 부모님 모두 졸업식에 왔다. 꽃다발도 받고, 사진도 찍고, 돈가스도 먹었다. 그런데 중학교 때는 어머니만 왔다. 아버지 사업이 최악의 상황에 빠져 한시도 자리를 뜰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어머니는 생화가 비싸다며 싸구려 조화를 사 왔다. 그는 그 조화를 땅바닥에 내던지며 펑펑 울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도 아버지는 돈에 쪼들렸다. 결국 부모님은 별거를 택했다. 고등학교 졸업식에도 어머니만 왔다. 그때 어머니가 주신 꽃다발은 조화는 아니었지만 값싸고 흔한 것이었다. 김씨는 섭섭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평일에도 일하느라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딸을 위해 일을 잠깐 쉬고 오셨다는 게 슬프면서도 기뻤다. 김씨는 “대학교 졸업식 때는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것이 소망”이라면서 “그때는 울지 않고 기쁘게 졸업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기 시흥에 사는 대학생 조윤미(24·여)씨는 졸업식만 생각하면 서럽다. 세 살 터울의 언니 때문이다. 비켜 갈 수도 있는 졸업식이 공교롭게도 초등학교, 중학교 두 번이나 겹치고 말았다. 게다가 맞벌이하는 부모님은 항상 바빴기 때문에 졸업식에 참석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부모 중 한 사람만 시간을 내도 감지덕지였다. 졸업식 날, 겨우 시간을 낼 수 있었던 쪽은 어머니. 하지만 어머니는 겹친 두 번의 졸업식 모두 언니에게로 갔다. 큰딸이라는 점과 고등학교 졸업이라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조씨는 “둘째로 태어나 가장 서러웠을 때가 바로 졸업식 날”이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시절 조씨에게 부모님은 항상 바쁜 분들이었다. 운동회, 학예회 때도 부모님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졸업식도 그렇게 상처가 되진 않았다. 하지만 중학교 졸업식 때는 달랐다. 다른 친구들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꽃다발을 들고 사진을 찍을 때 옆에서 멍하니 서 있기만 했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서러웠다. 졸업식 날인데도 손에 꽃 한 송이 들려 있지 않았다. 빈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돌아온 조씨를 맞이한 것은 어머니의 따뜻한 포옹이었다. 어머니는 “미안하다, 윤미야.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했다. 조씨는 그때 또 한번 눈물을 쏟고 말았다. 조씨는 “그땐 어린 마음에 섭섭할 만도 했어요. 지금은 부모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죠.”라며 환하게 웃었다. ●충격의 현장-70년대도 알몸 뒤풀이 있었죠 공무원 김종욱(53)씨는 “최근 사회문제로 불거진 알몸 졸업식이 70년대에도 있었다.”고 깜짝 고백을 했다. 친구들이 축하의 의미로 밀가루를 뿌리는 것은 물론 알몸이 훤히 드러나도록 교복을 찢어 대는 친구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김씨는 졸업식을 마치고 친구들과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을 먹고 고량주도 마셨다. 뒤풀이의 마지막은 당구장이었다. 김씨는 “이 같은 어른 흉내 내기 졸업식 뒤풀이가 당시에는 파격적이었지만 사회문제화되진 않았고,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낭만적이고 순수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졸업식의 알몸 뒤풀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과거에 비해 정도가 너무 심하고 적나라하다는 것. 이 때문에 요즘 아이들의 졸업식 뒤풀이는 그에게 여전히 낯선 풍경이다. 8일 고등학교를 졸업한 오지수(19·여)양은 3년 전 친구의 아찔한 중학교 졸업식이 떠올랐다. 친구인 조모(19)양이 바로 알몸 뒤풀이를 한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조양은 졸업식 전날 밥을 굶었다. 옷이 찢어질 것에 대비해 조금이라도 날씬하게 보이기 위해서라고 했다. 졸업식 날, 조양은 고등학교 1학년 선배들로부터 밀가루·까나리액젓·케첩·계란 세례를 받았고 옷도 찢겼다. 알몸 상태로 거리에 나가 애국가를 불렀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공짜로 얻어 오라는 벌칙도 받았다. 친구 조양의 이런 행동에 당시 오양은 충격을 받았다고 기억했다. 오양은 “아무리 선배들의 강압에 못 이긴 행동이라 해도 거부하지 않고 모두 행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면서 “인터넷 미니홈페이지에 친구 사진이 오를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10일 중학교를 졸업하는 서주영(16)군은 졸업식이 그렇게 기대되지 않는다. 특별할 게 없어서다. 서군은 내심 알몸 졸업식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서군이 다니는 학교의 졸업식은 올해부터 사복을 입고 진행된다. 교복을 찢으려는 학생들이 많아 이를 막기 위한 학교의 조치였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알몸 졸업식 등 ‘막장 졸업식’을 하지 말라고 학생들에게 통지문을 보낸 상태. 밀가루, 토마토 케첩, 소화기 등은 졸업식장 반입 금지 품목이 됐다. 서군은 이번 졸업식을 가족들과 조촐하게 보내기로 했다. 기념 사진을 찍고 좋아하는 쇠고기를 먹으러 갈 예정이다. 서군은 “요즘 졸업하는 아이들은 졸업식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서도 “어떻게 단속하든 ‘노는 애들’은 무리를 지어 자기들만의 졸업식 뒤풀이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서울 화곡동 전수현(29·여·회사원)씨는 졸업식 하면 틀에 박힌 의례가 떠오른다. “뻔한 재학생의 송사와 졸업생의 답사를 들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은 진정성이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또 “가족들과 사진 찍고, 똑같이 자장면 먹으러 가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조언을 듣는 일은 초·중·고·대학 내내 반복된 것이어서 식상했다.”고 기억했다. 그랬던 전씨는 지난해, 모교 졸업식 날 후배들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밀가루, 케첩 등을 온몸에 뿌리고 교복을 찢고 찍은 사진이 동창회 온라인 카페에 오른 것. 전씨는 “물론 천편일률적인 졸업식이 식상하기도 하고, 해방된 기분을 맘껏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건 좀 지나친 것 같다.”며 혀를 찼다. 전씨는 “졸업식이 알몸 졸업식으로까지 극단적으로 흐르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야 재발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졸업식은 의미 있게 석별의 아쉬움을 달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동현·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 대작실종 춘추전국 극장통일 누가 할까?

    대작실종 춘추전국 극장통일 누가 할까?

    1980~90년대 설과 추석엔 무조건 청룽(成龍)이었다. 웬만한 미국 할리우드 대작들도 명함을 못 내밀었다. 1978년 ‘취권’을 시작으로 20여년을 장기집권했던 청룽은 이제 케이블 TV에서나 만나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서운해할 필요는 없다. 연휴를 앞두고 배급사들은 ‘극장전’(劇場戰)을 준비해 놓은 터. 화끈한 블록버스터부터 모두가 함께 볼 수 있는 가족영화, 혼자라도 괜찮을 예술영화까지 골라 보는 재미가 있다. 올 ‘극장전’의 승자는 예측불허다. 2000년대 이후 설 대목에는 전년도 12월에 개봉한 영화가 파죽지세를 이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실미도’(2003)와 ‘왕의 남자’(2005), ‘미녀는 괴로워’(2006), ‘과속 스캔들’, ‘쌍화점’(2008)이 그랬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이후 극장가에는 뚜렷한 승자가 없는 상태다. 전쟁은 이제 시작인 셈이다. 휴먼·코미디… 온가족 나들이 어느 때보다 온 가족이 함께 즐길 만한 영화가 많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을 영화화한 ‘걸리버 여행기’(전체 관람가·87분)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든 연령대가 부담 없이 즐길 만한 작품. 짝사랑하는 여행칼럼니스트에게 허풍을 떨다가 버뮤다 삼각지대 여행기를 떠맡게 된 걸리버(잭 블랙)가 소용돌이에 휘말려 소인국에 표류하게 된다. 뉴욕의 ‘찌질남’에서 소인국 릴리풋의 영웅으로 거듭나는 걸리버 역은 국내에도 골수팬이 있는 할리우드 코미디 연기의 달인 블랙이 맡았다. ‘스타워즈’ ‘타이타닉’ ‘아바타’ 등을 패러디한 대목은 큰 웃음을 안겨 준다. ‘1000만 감독’의 훈훈한 가족영화 대결도 볼 만하다. 강우석 감독의 ‘글러브’(전체 관람가·144분)는 청각장애 야구부의 도전기를 소재로 한 작품. ‘충무로의 승부사’ 강 감독은 전작 ‘이끼’에서 잔뜩 들어갔던 힘을 빼고 적시에 터지는 코미디와 가슴 한편이 찡해지는 감동을 잘 버무려냈다. 명절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코미디를 찾는다면 이준익 감독의 평양성(12세 관람가·117분)이 제격이다. 2003년 ‘황산벌’의 속편으로 지나치게 사연 있는 캐릭터가 많다 보니 산만해진 측면은 아쉽다. 하지만 감독 특유의 풍자와 해학은 물이 올랐고, 투석기와 고구려 신무기를 등장시킨 전투장면 등 볼거리도 풍성해졌다 애니메이션 ‘가필드 펫포스 3D’(전체 관람가·73분)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먹는 게 취미이고 잠자는 게 특기’인 게으른 고양이가 아니라 슈퍼 악당으로부터 우주를 지키는 영웅으로 거듭난 가필드의 모험극을 그린다. 예술영화… 도심속 우아한 연휴 황금연휴를 여유롭고 우아하게 보내고 싶다면 예술영화를 조용히 음미해 보는 것은 어떨까. ‘아이 엠 러브’(18세 관람가·120분)는 모처럼 만나는 이탈리아 수작이다. 부유한 중년 여성(틸다 스윈튼)이 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는 멜로드라마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이면에는 자본주의의 병폐와 남녀 간의 불평등 문제 등을 밀도 있게 다뤘다. 각본, 연출, 연기, 음악 등 흠잡을 데가 없다. ‘윈터스 본’(18세 관람가·100분)은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드라마 부문 심사위원상과 각본상 등 각종 영화제의 상을 휩쓸며 평단의 호평을 받은 작품. 아빠의 실종을 둘러싼 진실을 찾기 위해 냉혹한 세상에 맞서는 소녀의 사투를 그린 스릴러물로 여성 감독 데브라 그래닉의 탄탄한 연출과 할리우드의 신성 제니퍼 로렌스의 열연이 돋보인다. 사랑과 인생에 대해 조용히 반추해 보고 싶다면 우디 앨런 감독의 유쾌한 코미디 ‘환상의 그대’(18세 관람가·98분)를 추천한다. 언제나 더 나은 삶과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는 인간 군상에 대한 감독의 통찰력이 빛을 발한다. 앤서니 홉킨스, 나오미 와츠, 젬마 존스, 조시 브롤린 등 명배우들의 연기 열전도 볼 만하다.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18세 관람가·93분)는 인생에 닥쳐온 변화를 거치면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중년 여성의 심리를 차분하고 세밀하게 다룬 영화다. 로빈 라이트는 복잡한 캐릭터의 주인공을 맡아 다져진 연기 관록을 보여준다. 키애누 리브스, 위노나 라이더, 모니카 벨루치, 블레이크 라이블리 등 조연으로 출연한 배우들도 영화의 놓칠 수 없는 보너스다. 충무로·할리우드 명배우 연기열전 액션 대작들이 실종된 올 설 극장가에서 단연 돋보이는 영화는 ‘타운’(18세 관람가·124분)이다. 박스오피스 전문사이트인 박스오피스 모조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미국 개봉 당시 평단의 호평 속에 제작비(3700만 달러, 약 420억원)의 2.5배(9200만 달러, 약 1100억원)를 벌어들였다. 어린 시절 친구인 맷 데이먼과 달리 재능을 낭비하던 벤 애플렉이 감독과 공동각본, 주연을 맡아 모처럼 ‘한 건’을 했다. 보스턴의 은행강도단을 소재로 한 영화의 곳곳에 마이클 만 감독의 걸작 ‘히트’의 흔적이 엿보인다. 물론 ‘히트’를 보지 않았어도 영화에 몰입하는 데 지장은 없다. 갱 영화의 관습을 전복시킨 엔딩은 호불호가 엇갈릴 듯하다. 영화적 재미만 놓고 보면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12세 관람가·115분)도 빠지지 않는다. 탐정 사극의 외피를 썼지만, 관객들이 단서를 쫓으려고 머리를 쓸 필요는 없다. 김석윤 감독은 탄탄한 코미디와 속도감 있는 액션에 방점을 찍으려는 듯하다. 셜록 홈스·왓슨 콤비에 견줄 만한 김명민(명탐정)과 오달수(개장수)의 연기는 ‘명불허전’(名不虛傳). 진주만 폭격을 앞둔 1941년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로맨틱 스릴러 ‘상하이’(15세 관람가·103분)는 배우들의 이름만 생각한다면 설 차림 상의 메인요리로 손색이 없다. 저우룬파와 궁리, 존 쿠삭, 와타나베 겐 등 미·중·일 톱스타가 출동했다. 다만 재료에 대한 기대치를 고려하면 음식은 다소 심심하다. 슈퍼히어로물 ‘그린호넷’(15세 관람가·118분)은 세스 로건의 머저리 연기에 대한 선호에 따라 미친 듯이 좋아하거나 내내 따분할 수도 있다. 임일영·이은주기자 argus@seoul.co.kr
  • 전통·퓨전 한복 디자이너가 말하는 설빔 트렌드

    전통·퓨전 한복 디자이너가 말하는 설빔 트렌드

    우리나라 여성의 92%가 갖고 있지만 지난 일년 동안 한번도 안 입은 옷은 뭘까. 바로 한복이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지난달 20~30대 여성 6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한복에도 유행이 있는 걸까. 60년간 한복지를 만든 집에 시집 가, 자연스럽게 한복 디자이너가 된 이현숙(오른쪽) 디자이너는 전통 한복을 충실하게 재연한다. 젊은 남성 한복 디자이너인 이서윤(왼쪽)씨는 한국 무용을 하다가 군 복무 중 바느질의 매력에 빠졌고, 이제 퓨전 한복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전통 한복과 퓨전 한복을 대표하는 두 디자이너에게 설을 앞두고 최신 한복 경향에 대해 물었다. 이현숙씨는 “한복에도 유행이 있고 지금도 변화가 진행 중”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한복의 유행은 크게 색상과 소재, 형태를 들 수 있는데 저고리 길이, 깃과 동정의 너비, 치마 길이, 장식 기법 등이 시대에 따라 바뀐다.”고 설명했다. 한복을 가장 많이 마련하는 때는 명절이 아닌 결혼이다. 혼주가 입는 한복 색도 유행을 탄다. 시어머니는 푸른 계열, 친정어머니는 주로 분홍 계열 한복을 입었으나 최근 들어서는 다양한 색상이 등장하고 있다. 치마와 저고리를 다른 색으로 입는 경향도 두드러진다. 천연염색에서 볼 수 있는 치자색, 대황색과 잇꽃으로 물들인 부드러운 분홍색 등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색상이 대세라고 이현숙씨는 귀띔했다. 서양의 레이어드 룩(겹쳐 입기)과 비슷한 유행이 한복에도 있다. 얇게 비치는 옷감으로 만든 홑(한겹)옷을 겹쳐 입으면 안에 입은 옷의 색상이 보색으로 은은하게 비쳐 나와 색상의 묘미를 살려준다. 이현숙씨는 “명절 특집 프로그램이나 드라마에서 연예인들이 잘못된 한복을 입고 나오면 이를 유행으로 착각하는데 이는 안타까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머리가 제대로 나지 않은 어린 아이가 하는 배씨 댕기가 중년부인이나 왕비의 머리에 버젓이 얹혀 있다. 성인 남자들이 간편복으로만 입던 배자(조끼)를 입고 어른들께 세배를 올리기도 한다. 이서윤씨는 “한복은 서양 패션과 달리 유행의 전환이 빠르지는 않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한복의 세계화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퓨전 사극의 영향으로 퓨전 한복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고 소개했다. 새틴이나 면처럼 양장에서 주로 쓰는 소재를 한복의 팔이나 몸통 등 일부에 쓰는 식이다. 지난해 가을 미국 뉴욕 패션 위크에서는 디자이너 캐롤리나 헤레라가 한복의 영향을 받은 드레스를 대거 선보여 큰 화제를 낳기도 했다. 헤레라의 웨딩드레스는 ‘케네디 가문’의 여성들이 주로 입었고 재클린 오나시스(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 부인)도 유명한 고객이었다. 헤레라는 동정과 고름을 단 원피스, 갓 모양의 모자에 드레스를 입은 스타일을 선보여 ‘한복의 세계화’란 동기를 부여했다. 이서윤씨는 “한복은 얼마 전까지 전통적인 수나 금박으로 화려함을 부각시켰지만 최근에는 여백의 미를 활용하거나 자연적이고 소박한 느낌을 주는 문양 장식을 주로 한다.”며 “이는 세계적인 유행을 반영한 것으로 앞으로 한복에 현대적 요소가 가미되면 젊은 층과 외국인에게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XXXX야 너가 뭔데 XX야”…이번엔 ‘지하철 고딩 폭언남’

    “XXXX야 너가 뭔데 XX야”…이번엔 ‘지하철 고딩 폭언남’

    패륜녀, 반말녀에 이어 이번에는 남고생 폭언남이다. 각종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지하철에서 한 남자 고등학생이 승객들에게 마구잡이로 욕설을 퍼붓는 동영상이 올라왔다.  네티즌 김모씨는 한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지하철 고딩 폭언남, 제가 직접 당한 일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동영상과 함께 올렸다. 46초 분량의 이 영상은 모자이크 처리가 된 데다 음성이 제대로 녹음되지 않아 정확한 분별이 어렵다. 하지만 김씨는 이 영상에 남학생이 중년 남성에게 욕설을 하는 장면과 이에 화가 난 중년 남성이 “너희 부모 좀 만나봐야겠다.”며 역무실로 데려가는 장면이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자신을 25세 여대생이라고 밝힌 김씨는 “노약자석에 다리를 꼬고 게임을 하던 남학생에게 ‘어른들도 많이 계시니 자리를 양보하라’고 말했다.”면서 “그러자 그 학생이 나를 노려보면서 ‘XXXX야, 너가 뭔데 XX야. 꺼져’라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이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던 어르신이 ‘누나에게 무슨 말버릇이냐’라고 하자 ‘저 XX가 누나냐. XX놈아. 니 XX에는 저 XX가 누나로 보여?”라고 또 욕을 했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옆에 있던 아저씨가 학생을 역무실로 데리고 갔지만 지구대 경찰이 오기 전까지도 다리를 꼬고 앉아서 계속 게임만 했다.”며 “정말 황당하고 무서운 세상”이라고 한탄했다.  이 영상이 퍼지면서 대부분의 네티즌들은 학생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동영상을 올린 김씨 역시 “남학생의 신상명세를 원하면 개인적으로 보내주겠다.”는 글을 남기는 등 부적절한 행동을 해 비난을 받고 있다.  앞서 지하철에서 할머니와 싸움을 벌인 ‘패륜녀’, 할머니에게 거친 욕을 퍼부은 ‘반말녀’, 여성을 폭행한 ‘폭행남’,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여성을 추행한 ‘성추행남’ 등 사고 영상이 인터넷을 통해 퍼져 파문을 일으켰다.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 대한민국은 지금 ‘까도남 앓이’

    대한민국은 지금 ‘까도남 앓이’

    요즘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주인공 김주원(현빈)이 장안의 화제다. 연말 연시 한파로 불어닥친 감기 바이러스는 간신히 피했지만 ‘주원 앓이’만큼은 피할 수 없다고 토로하는 20, 30대 여성들이 많다. 40대 이상 여성들에게도 주원은 그들만의 아이돌, 그 이상이다. 여성뿐인가. 극 중 현빈의 패션스타일을 추구하는 젊은 남성들은 물론, 트위터와 페이스 북 등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인기 드라마 속 ‘까도남’(까칠하고 도도한 남자) 캐릭터를 논하는 중년 남성들이 크게 늘었다. 바야흐로 까도남이 대세다. ‘시크릿 가든’의 현빈은 물론, 수목극 ‘역전의 여왕’의 재벌 상속남 박시후와 ‘마이 프린세스’의 엘리트 외교관 송승헌(이상 MBC), ‘아테나’의 첩보요원 정우성과 미국 국토안보국 동아시아 지부장 차승원, ‘싸인’의 천재법의학자 박신양 등이 까도남 캐릭터로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인기리에 끝난 KBS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가랑 박유천도 아름답지만 까칠한 선비였다. 왜 대중은 이렇듯 까도남에 열광하는가.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시대별 남성 트렌드의 종합선물세트 ▲신데렐라 증후군(언젠가 신데렐라 같은 인생 역전이 본인에게도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현상) ▲캐릭터에 대한 동경 등을 꼽았다. 주창윤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는 11일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에 유행했던 남성 트렌드인 메트로섹슈얼(세련된 남성), 짐승남, 훈남, 나쁜 남자 캐릭터의 종합선물세트가 까도남”이라고 정의했다. 주 교수는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까도남은 세련된 외모와 자신감, 사회적 지위, 재력, 짐승남의 성적 매력까지 두루 지녔다.”면서 “그러면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에게만은 순종적인 훈남의 이미지마저 완벽하게 갖춰 치명적 매력으로 다가온다.”고 풀이했다. ‘아테나’의 정우성만 하더라도 작전 수행 중에는 냉혹한 킬러이지만 사랑하는 여자(수애) 앞에서는 바보스러울 만큼 순정남으로 돌변한다. 길라임(하지원)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시크릿 가든’의 현빈도 마찬가지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대중들의 잠재 심리인 ‘신데렐라 증후군’에서 까도남 인기 비결을 찾았다. 황 교수는 “능력있고 부유한 남성 캐릭터는 까칠함도 매력이라는 심리가 대중들에게 존재한다.”면서 “특히 드라마를 보며 까도남이 사랑하는 여자 주인공에게 잠재적으로 자신을 그대로 투영, 타인에게 까칠한 능력남 까도남이 자기 자신에게만 매달린다는 대리 감정을 느끼고 만족해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도 “여성이 까도남을 좋아하는 데에는 캐릭터 자체가 매력적인 이유도 있지만 너무 (극에) 몰입한 나머지 까도남이 사랑하는 여성에게 하는 행동을 마치 자신에게 하는 것마냥 착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남성의 경우도 나이대를 떠나 까도남이 지닌 사회적 능력과 매력에 대한 욕망 및 동경 차원에서 관심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까도남의 인기 이면에는 대중의 지나친 감정이입도 자리한다는 지적이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이용철의 영화 만화경] ‘윈터스 본’

    [이용철의 영화 만화경] ‘윈터스 본’

    2008년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프로즌 리버’를 나란히 호명하련다. 2년 뒤 같은 영화제에서 같은 상을 받은 ‘윈터스 본’(winter’s bone)과 ‘프로즌 리버’가 여러모로 닮은 까닭이다. 동년배의 중년 여성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추운 겨울과 미국의 외딴 마을을 배경으로 삼았으며, 빈곤층의 여성(과 가족)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들의 생활을 보노라면 그곳이 과연 미국인지 의심스럽다. 야생동물이나 탄산음료로 끼니를 대신하는 그들의 삶에선 최소한의 안락함이나 희망조차 느끼기 힘드니, 그녀와 주변인이 생존을 위해 설령 범죄에 빠지더라도 이해해 줘야 할 판이다. 주목할 부분은, 극 중 문제가 공히 아버지 혹은 남편의 실종에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두 영화는 가족을 지키는 전통적인 아버지상을 부정하는 자리에서 강인한 두 여성을 내세운다. 미국 미주리주 남부의 산악지대에 위치한 벽지가 ‘리 돌리’네 가족이 사는 곳이다. 정신질환을 앓는 엄마와 어린 두 동생은 17세 소녀가 책임지기에 버거운 짐이지만, 리는 억센 성품으로 헤쳐 나간다. 어느 날 보안관이 찾아와, 아빠가 법정에 출두하지 않으면 집과 땅을 잃을 거라고 통보한다. 아빠가 보석으로 풀려나고자 부동산을 담보로 잡은 탓이다. 단호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찾겠노라고 대답했지만, 아버지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친구, 친척, 이웃을 방문해 도움을 요청하고 아버지의 뒤를 파헤치던 리는 폐쇄적인 산골마을의 특성으로 인해 난관에 부딪힌다. 그러나 차가운 시선과 외면을 받으면서도 포기할 줄 모르는 소녀는 범죄에 동조했던 어른들이 수치심을 느끼도록 만든다. ‘윈터스 본’을 감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대니얼 우드렐의 원작을 각색하고 연출한 데브라 그래닉은 스릴러 장르라는 쉬운 방안보다 험한 길을 선택했다. 그녀는 드라마와 감상을 배제한 채 담담한 톤으로 영화를 전개시키고 있으며, 소녀가 진실에 이르는 과정을 아주 느린 속도로 뒤따른다. 더욱이 디지털 카메라가 포착한 사실적인 영상은 시각적으로 예쁜 할리우드영화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도무지 꾸밈이라곤 없어서, ‘윈터스 본’은 옛 서부영화에 나올 법한 원시적이고 황량한 공간을 목격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보는 각도에 따라 아주 불편하고 지루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유수의 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환호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대다수는 주연을 맡은 제니퍼 로렌스의 뛰어난 연기를 거론한다. 물론 그녀는 영화를 지탱하는 큰 기둥이다. 하지만 ‘윈터스 본’의 진정한 중요성은 서부의 역사를 새로 쓴 데서 나온다. 영화는 서부 역사와 문화의 근간인 공동체를 불러내고 그 속에 스민 비도덕성과 죄악을 지시한다. 그런데 구원자로 우뚝 선 존재는 영웅성을 과시하는 남자가 아닌 어린 소녀다. 소녀는 살아야 한다는 기본적이며 소박한 권리를 굳게 믿기에 지옥 같은 상황을 묵묵히 통과한다. 그녀의 저항하는 몸짓이 거의 신화적 단계로 나아갈 즈음, 억눌러온 감동이 마침내 폭발한다. ‘윈터스 본’과 2010년의 또 다른 걸작 ‘소셜 네트워크’는 어떤 면에서 대구를 이룬다. 전자가 공동체를 이루는 물질적 토대의 도덕성을 다룬다면, 후자는 가상의 토대 위에 건설된 공동체의 소외와 공허를 이야기한다. 어느 쪽이 진짜 현실에 가깝다고 말하기란 어렵다. 다만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두 영화에 대한 지지가 나뉠 것이다. 영화평론가
  • [서울신문 2011 신춘문예-희곡 당선작] 아빠들의 소꿉놀이/오세혁

    [서울신문 2011 신춘문예-희곡 당선작] 아빠들의 소꿉놀이/오세혁

    ●등장인물 꾸부정 지금 막 해고된 초보 해고자. 40대 후반. 키 크고 꾸부정하다. 대머리 해고된 지 1년이 넘은 베테랑 해고자. 40대 후반. 키 작고 대머리다. 단발 꾸부정의 아내. 40대 초반 파마 대머리의 아내. 40대 중반 *연출에 따라 남편들이 부인들의 역할을 겸하는 2인극이 가능하다. ●시 간 현대 ●무 대 놀이터. 놀이터를 구체적으로 꾸밀 필요는 없다. 그네 두 개만으로도 연출이 가능하다. 바닥에 모래가 깔려 있으면 좋다. #1 해가 질 무렵의 저녁, 놀이터. 양복 차림의 남자가 힘없이 놀이터로 걸어 들어온다. 고개를 푹 숙이고 꾸부정한 모습으로 보아 무언가 고민이 있는 듯하다. 꾸부정한 이 남자, 그네에 주저앉는다. 멍하니 한참을 앉아 있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벌떡 일어난다. 꾸부정 (어색하게) 여…… 여보… … 나 오늘, 해, 해, 해고……. 고개를 흔들며 그네에 주저앉는다. 그러다가, 다시 벌떡 일어난다. 꾸부정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여보, 훌쩍, 나 오늘 해고당했어. 머리통을 때리며 그네에 주저앉는다. 그러다가, 다시 벌떡 일어난다. 꾸부정 (호탕하게 웃으며) 사랑하는 여보! 나! 오늘 짤렸어! 멋지지? 하하하!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저앉는다. 한참을 그렇게 쥐어뜯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결연히 일어나 열정적인 독백을 시작한다. 꾸부정이 열심히 말하는 동안, 양복 차림의 대머리가 천천히 걸어 들어와 옆에 있는 그네에 앉아 시계를 들여다본다. 자기 상상에 빠진 꾸부정은 대머리를 눈치채지 못한다. 꾸부정 여보. 우리가 결혼한 지 이십 년이 넘었구나. 단칸방으로 시작해서 전세를 거쳐서 우리 집을 갖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어. 비록 평수는 작지만 우리 집이라는 게 중요하지. 애들도 건강하게 잘 컸어. 얼마 안 있으면 큰애는 대학에, 작은애는 고등학교에 가겠지. 이 정도면 우린 잘 산 거야 그렇지? 당신,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아니? 뭐라고? 내가 제일 고생 많았다고? 십오 년을 변함없이 회사에 다녀주어서 고맙다고? 때론 가기 싫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했을 텐데 가족을 위해서 고생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고? 아이, 당신도 참 부끄럽게…… 뭐라고? 이제 나이도 먹고 간도 안 좋을 텐데 생각 같아서는 한 몇 년 푹 쉬었으면 좋겠다고? 이럴 수가, 당신이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다니! 정말 고마워 여보! 하하하하……말이 나와서 말인데 여보……사실……내가……오늘……회사에서. 대머리 (불쑥) 소용없을 겁니다. 꾸부정 (화들짝)네 넷? (돌아본다) 아니, 언제부터 거기? 대머리 죄송하군요.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닙니다만. 꾸부정 괘 괜찮습니다. 그런데 방금……소용없다고……. 대머리 (단호) 네, 소용없습니다. 불쌍하게 말하든 호탕하게 말하든 부드럽게 말하든 소용없습니다. 해고라는 단어가 입에서 나오는 순간 부인께서는 엄청난 쇼크를 받으실 겁니다. 부인이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휘청거리거나 털썩 주저앉거나 뒤로 넘어가게 될 겁니다. 부인이 건강하신가요? 꾸부정 아……아니요, 혈압이 조금. 대머리 혈압이라, 뒤로 넘어가겠군. 꾸부정 새……생각해보니 골다공증도. 대머리 뒤로 넘어져서 뼈가 부러지겠군. 꾸부정 얼마 전부턴 심장이 답답하다고. 대머리 뒤로 넘어져서 뼈가 부러진 다음 호흡 곤란을 일으키겠군. 꾸부정 뭐……뭐라구요! 대머리 집이 몇 층이죠? 꾸부정 시……십오층인데? 대머리 완벽하군요. 해고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선생의 부인은 혈압이 높아져서 뒤로 넘어지고 골다공증으로 뼈가 부러진 다음, 심장 이상으로 호흡 곤란을 일으킬 겁니다. 놀란 선생은 어떻게든 해보려 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혈압과 뼈와 심장이 동시에 문제를 일으켰거든요. 우물쭈물하다가 선생님은 119에 전화를 하겠죠. 119 요원들은 잽싸게 아파트에 도착하지만 선생님의 집은 십오층입니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맨 꼭대기 층에 있군요. 요원들이 계단을 뛰어올라 옵니다. 일층 이층 삼층 사층 선생의 부인은 점점 호흡이 가빠집니다. 오층 육층 칠층 더더욱 가빠집니다. 팔층 구층 부인의 의식이 점점 없어집니다. 십층 십일층 선생이 말합니다. 여보, 조금만 참아. 십이층 십삼층 선생이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여보, 제발 조금만 더 참아. 그렇게 십사층을 지나고 십오층에 도착해 마침내 선생의 집으로 왔을 때 선생의 부인은 이미……. 꾸부정 (이야기에 몰입해 있다가)아……안 돼! 안 돼! 여보오! 꾸부정, 털썩 쓰러진다. 대머리 그렇다고 말을 안 할 수는 없겠죠. 해고는 해고니까요. 이왕이면 부인의 컨디션이 최상일 때, 119가 바로 올 수 있는, 뒤로 넘어가도 뼈가 부러지지 않을만한 장소에서 하시죠. 부드러운 모래라든가……이 놀이터가 딱이로군요. (다시 그네에 앉아 시계를 들여다본다) 한참의 정적. 꾸부정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죠? 대머리 사실 저도 해고잡니다. 꾸부정 동업자…… 아니…… 동반자셨군요. 대머리 벌써 1년이 넘었습니다. 꾸부정 고참…… 이시네요. 혹시……선생님 부인께서도 뒤로? 대머리 아니요. 꾸부정 뼈가? 대머리 전혀. 꾸부정 호흡 곤란이라든가. 대머리 천만에요. 멀쩡합니다. 멀쩡함을 넘어 건강하죠. 김치찌개에다 밥을 두 그릇이나 비운 다음, 남은 찌개를 밥통에 넣고 비벼먹으니까요. 꾸부정 ……대단하군요. 대체……비결이……. 대머리 간단합니다. 해고됐단 얘기를 안했으니까요. 꾸부정 그, 그럼? 대머리 계속 다니는 줄 압니다. 꾸부정 아니 그게 일 년 넘게 가능한가요? 대머리 보통 사람은 불가능합니다. 꾸부정 하지만 선생님은? 대머리 전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영특, 기특,똑똑, 비범이란 말을 달고 다녔으니까요. 한마디로 머리가 좋았죠. 꾸부정 (대머리의 머리를 한참 쳐다본다) 대머리 지금, 대머리 주제에 머리가 좋아봤자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셨죠? 꾸부정 그……그럴 리가. 대머리 어쨌든, 저 정도의 두뇌라면 충분히 속이는 게 가능합니다. 분명한 원칙 규칙 법칙만 확립한다면 말이죠. (시계를 가리키며) 이 시계도 그런 원칙 중의 하납니다. 퇴근시간 여섯시, 전철 타고 내리면 여섯시 삼십분, 역 앞에서 버스 타고 동네까지 오면 여섯시 오십분, 동네에서 아파트까지 오는 데 여섯시 오십오분, 아파트에서 우리 집까지 오면 딱 일곱시, 그렇지만 시간을 너무 딱 맞춰 오면 이상하니까 적당하게 일곱시 삼분 정도……마침 지금이 일곱시 삼분이군요. 더 늦으면 어색합니다. 그럼 이만. 대머리, 일어나서 가려고 한다. 꾸부정 (벌떡 일어나며) 자……잠시만요. 대머리 ……. 꾸부정 저한테도 그……원칙 규칙 법칙을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대머리 (위아래로 훑어보며) 딱 보니 보통 사람이시군요. 불가능합니다. 꾸부정 (앞을 막아서며) 부탁드립니다. 대머리 일반인이 범접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꾸부정 스승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대머리 미안합니다. 늦으면 의심합니다. (가려고 한다) 꾸부정 (바짓가랑이에 매달리며) 제발요, 제발. 이렇게 빕니다. 우리 집사람이 뒤로 넘어가고 뼈가 부러지고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 사람은 저 같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이랑……결혼을 해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그렇게 되는 건 절대 안 됩니다. 조금이라도, 일분일초라도 더 웃게 해주고 싶습니다. (무릎 꿇으며) 허락하실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겠습니다. 무릎 꿇은 꾸부정을 계속해서 지켜보는 대머리. 꾸부정, 점점 다리가 저려온다. 대머리 다리 저리죠? 꾸부정 ……조금. 대머리 이쯤 되면 좀 봐주지 저 대머리 진짜 독한 놈이다,라고 생각하셨죠? 꾸부정 그……그럴 리가요? 대머리 다리 저리면, 꼼지락하세요. 꾸부정 아……아닙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대머리 괜찮습니다. 꼼지락하세요. 꾸부정 그럼……조금만 꼼지락을. 꾸부정, 슬며시 꼼지락거린다. 대머리 (시계를 들여다본다) 시간이 꽤 지났군요. 어중간한 시간입니다. 지금 들어가면 뭔가 부조리합니다. 이럴 때는 회식을 한 것처럼 아예 늦게 들어가는 게 좋은 방법이죠. (전화를 건다) 나야, 별일 없지? 부장님이 딱 한잔만 하자고 하시네. 당신도 알잖아 부장님이 회사일 힘들면 나한테 털어놓는 거. 일찍 갈 테니까 밥은 먼저 먹어. (전화 끊자마자 가방에서 반병 정도 남은 소주를 꺼내 한 모금 마신다) 회식이라고 했기 때문에 입에서 술 냄새가 나야 됩니다. (오징어 다리를 꺼내 우물우물 씹는다) 술 냄새만 나면 이상하니까요. 자, 그럼, 훈련을 시작해 볼까요? 꾸부정 (기쁨) 저……정말이십니까? 대머리 시간이 없으니까 3단계로 요약 학습을 하죠.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꾸부정 (차렷 자세로) 옛! 대머리 가장 중요한 1단계는, 변화입니다. 꾸부정 변화? 대머리 많은 해고자들이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만 대부분 들킵니다. 왜일까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떠한 행동의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한숨을 쉰다든가, 소파에 푹 주저앉는다든가, 밥 먹다가 숟가락을 멈추고 한참을 멍하니 있는다든가, 밤이 깊도록 식탁에서 소주를 마신다든가, 아들한테 사립대 말고 국립대로 가는 건 어떠냐고 한다든가, 잠자리에서 등을 돌린 후 웅크리고 잔다든가, 자다가 자기도 모르게 흐느낀다든가. 이런 변화들이 해고를 들키는 가장 큰 이유죠. 꾸부정 (감탄) 그렇군요. 대머리 변화되지 않는 것. 일상적인 평범함을 유지하는 것.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꾸부정 (감탄의 연속) 으음……. 대머리 이론만 가지고는 감이 안 옵니다. 실전훈련을 해보죠. 이 놀이터가 집이고 제가 부인이라고 설정을 해봅시다. 선생은 회사 일을 마치고 막 퇴근한 상탭니다. 바깥에서 벨을 눌러보세요. (꾸부정이 멍하니 있자) 시간 없습니다. 빨리. 꾸부정 (얼떨결에) 예…… 옛! (바깥으로 달려 나가) 띵동! 대머리 (부인 흉내) 당신 왔어? 밥은? 꾸부정 (대머리를 한참 바라보다가) 풉……. 대머리 ……. 꾸부정 그게……집사람이 대머리라고 생각을 하니까 너무 웃겨서……. 대머리 ……. 꾸부정 죄……죄송합니다. 제대로 하겠습니다. 띵동! 대머리 당신 왔어? 밥은? 꾸부정 아, 먹었어. 대머리 (손을 잡으며) 고생 많았지? 꾸부정 …… 흐흑. (흐느낀다) 대머리 뭡니까? 왜 울죠? 꾸부정 (흐느끼며) 집사람이 손을 잡아주니까 갑자기 미안하고, 고생만 시킨 것 같고, 젖은 손이 애처롭고……. 대머리 어허, 이러니까 들키는 겁니다. 마음을 강하게 먹으세요. 돌부처처럼! 꾸부정 네……넷! 돌부처! 다시 하겠습니다. 띵동! 대머리 당신 왔어? 밥은? 꾸부정 (과장되게) 밥? 먹었지! 아주 많이! 대머리 (손을 잡으며) 별일은 없었어? 꾸부정 (더더욱 과장되게) 별일은 무슨, 평소랑 또오오옥 같았어 하하하하! 대머리 잠깐, 왜 이렇게 들떠 있죠? 회사에서 좋은 일이 있었나요? 꾸부정 아니요. 대머리 월급날입니까? 꾸부정 아니요. 대머리 부인 생일인가요? 꾸부정 아니요……별일 없었는데 대머리 그런데 왜 그렇게 오버를 합니까? 별일 없었는데 그렇게 오버 하면서 별일 없었다고 하니까 마치 별일이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꾸부정 아……거기까지는 차마. 대머리 자, 눈을 감으세요. 상상을 해봅시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고 반복적인 회사의 하루, 위에서 눌리고 밑에서 치이고 정리해고의 소문이 뒤숭숭하게 들려오고, 선생은 그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하루를 버티고 퇴근을 합니다. 지하철이 붐빕니다. 버스가 막힙니다. 심신이 지쳐있습니다. 터덜터덜 걸어옵니다. 그 상황에서 초인종을 누릅니다. 띵동! (부인 목소리) 당신 왔어? 별일 없었지? 꾸부정 (상상하다가 정말 지친 듯, 무심하게) 뭐, 똑같지 뭐. 대머리 나이스! 그겁니다! 하니까 되잖아요? 꾸부정 아? 정말? 정말 되네? 환호하는 꾸부정. 대견한 듯 지켜보는 대머리. 대머리 (느닷없이) 당신 왔어? 별일은? 꾸부정 (재빨리) 뭐, 똑같지 뭐. 하이파이브 대머리 당신 왔어? 별일은? 꾸부정 (능숙하게) 뭐, 똑같지 뭐. 하이파이브 대머리 당신 왔어? 별일은? 꾸부정 (완전 능숙) 뭐, 똑같지 뭐.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대머리. 대머리를 부둥켜 안는 꾸부정. 암전. 암전을 감싸는 작은 멜로디. #2 불이 켜지면 꾸부정이 초조한 듯 그네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이상하게도 잠옷 차림. 그의 발밑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들. 대머리가 체육복 가방을 들고 놀이터로 들어온다. 그네에 타고 있는 꾸부정을 의식 못한 채 양복바지와 윗도리를 벗는다. 아아, 그 속에 입고 있는 축구 유니폼. 대머리 (부인에게 전화하는 듯) 나야. 사내 축구대회가 이제 끝났어. 오늘은 두골밖에 못 넣었어. 부장님은 후보였지 뭐. 밥?……부장님이 같이 먹자고는 했는데…… 정 그렇다면 집에서 먹지 뭐. 금방 갈게. 전화를 끊고, 곧바로 모래밭에 뒹굴며 유니폼을 더럽히는 대머리. 만족한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꾸부정을 발견하고는 놀란다. 대머리 뭐……뭡니까? 꾸부정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대머리가 꾸부정을 잡아채어 그네 밑으로 숨는다.(숨어질 리가 없으니 웃기다) 대머리 오랜만? 헤어진 지 하루 만에 만났는데 오랜만이라구요? 꾸부정 오랜만은……아니네요. 대머리 이 놀이터는 제가 찜했으니까 다른 놀이터에서 시간을 때우라고 몇 번을 말했습니까? 꾸부정 그건……알지만. 대머리 대체, 40대의 못생긴 남자 둘이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다는 게 주민들이 봤을 때 얼마나 평범하지 않은 일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꾸부정 ……. 대머리 방금, 솔직히 이 대머리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는데 라고 생각하셨죠? 꾸부정 그……그럴 리가. 대머리 (쌓여있는 담배를 본다) 맙소사, 이 아까운 담배. 이 담배값이면 김밥이 두 줄이거늘…… 왜 이런 비행을 일삼는 겁니까? 혹시…… 걸린 겁니까? 꾸부정 ……. 대머리 세상에, 하루 만에 걸리다니……시키는 대로 안 했죠? 꾸부정 아…… 아닙니다. 배운 그대로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변수가 있었어요. 대머리 변수라니요? 꾸부정 스승님께 배운 1단계를 계속 되뇌면서, 심호흡을 하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대머리 순간? 꾸부정 첫째 둘째가 쪼르륵 달려오더라구요. 그러고는 갑자기……. 대머리 갑자기? 꾸부정 아빠 생일을 축하한다면서 첫째 놈이 어깨를 주무르고 둘째 놈이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이러면서 .(갑자기 목이 멘다) 대머리 세상에……본인 생일인지도 몰랐나요? 꾸부정 저는 집사람이랑 애들이랑 부모님이랑 장인 장모랑 부장님 상무님 전무님 사장님 생일밖에 모릅니다. 대머리 ……. 꾸부정 자식들이 생일노래를 불러주는데 어떤 아빠가 목이 안 멥니까. (흐느낀다) 대머리 잠깐, 이상하군요. 선생 말대로 대한민국의 모든 아빠들은 자녀들이 생일을 챙겨줄 때 웁니다. 자녀들의 생일 축하에 감동한 아버지가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운다. 이건 튀는 게 아닌데? 평범한 건데? 꾸부정 조용히 운 게 아니라……. (갑자기 바닥에 뒹굴며 통곡한다) 대머리 음 ……그렇게 울었군요. 꾸부정 (끄덕이며 계속 통곡) 대머리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나 할 법한 울음을 생일 축하를 받는 자리에서. 꾸부정 (더 크게 통곡) 대머리 가족들은 가장의 뜬금없는 대성통곡에 당황했을 테고. 꾸부정 (그야말로 대성통곡) 대머리 그래서……그 다음 행동은? 꾸부정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도망치듯 안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대머리 도망치듯 이라, 이런. 꾸부정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안방 문을 잠그고. 대머리 맙소사. 꾸부정 밖에서 두들겨도 열어주지 않다가 . 대머리 하느님. 꾸부정 눈을 떠보니 아침이더군요. 대머리 ……부인은? 꾸부정 ……거실에서. 대머리 ……. 꾸부정 눈을 뜨자마자 너무 당황스러워서……몰래 집을 나왔습니다. 대머리 씻지도 않고, 드라이도 안 하고, 더군다나……잠옷 차림. 꾸부정 공원에 계속 숨어 있다가 시간 맞춰서 나온 겁니다. 스승님…… 저 어쩌죠? 대머리 일반인이 범접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고 그렇게 얘기했거늘. 꾸부정, 흐느낀다. 대머리, 눈을 감은 채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가 천천히 축구 유니폼을 벗는다. 속옷 차림으로, 꾸부정에게 축구 유니폼을 건네는 대머리. 대머리 회사원인 남자가, 씻지도 않고 드라이도 안 하고 나왔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러나 체육대회를 했다면 알리바이가 생기죠. 입으세요. 꾸부정 ……하지만……스승님도……. 대머리 저는…… 심판 봤다고 하겠습니다. (가방에서 호루라기를 꺼내 목에 걸며) 이건……다음 달에 쓸 거였는데……. 꾸부정 이 은혜……잊지 않겠습니다. 스승님. 대머리 들어가자마자 아버님 사진을 꺼내세요. 꺼내자마자 사진 부여잡고 우세요. 어제 선생은, 돌아가신 아버님 때문에 울었던 겁니다. 꾸부정 (경이로움) 과연……스승님은……. 대머리 이제, 뒹구세요! 꾸부정, 열심히 모래바닥에 몸을 뒹군다. 암전. 암전을 감싸는 작은 멜로디. #3 불이 켜지면 단발머리를 한 여성이 놀이터에 서 있다. 그녀는 양손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다. 단발 (냉랭하게) 여보, 솔직히 말 안 하면 나, 집 나갈 거야…… 짤렸지? 그네 위에 주저앉는다. 다시 벌떡 일어난다. 단발 (울먹이며) 당신 나 죽는 꼴 보고 싶어? 빨리 말해? 짤렸지? 그네 위에 주저앉는다. 다시 벌떡 일어난다. 단발 (화통하게) 호호호호! 괜찮아 여보! 딱 보니까, 짤렸네? 호호호호!! 힘없이 주저앉는 단발머리.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나 차분하게 독백을 시작한다. 단발머리가 독백을 하는 동안 파마머리를 한 여성이 조용히 들어온다. 그러고는 옆 그네에 앉아 벼룩신문을 보기 시작한다. 단발 (이성적으로) 여보, 나 당신과 지금까지 함께 했고 앞으로도 함께할 거야. 당신도 알겠지만 우린 부부야. 부부가 뭔데? 비밀이 없는 게 부부야. 내가 열을 셀 동안 당신이 끝까지 비밀을 말 안 해준다면 나……집 나갈 거야. 이게 당신의 마지막 기회야. (눈을 감고) 하나, 둘, 셋, 넷……. 파마 (불쑥) 대답 안 할 거예요. 단발 (화들짝) 네 넷? 파마 그쪽 아저씨한테 짤렸냐고 추궁해도 대답 안 할거라구요. 단발 ……. 파마 오히려 추궁하면 추궁할수록 그쪽 아저씨는 위험해질 거예요. 단발 위험해……진다구요? 파마 남편 성격이? 단발 조금……소심해요. 파마 소심하다라……열을 세자마자 바로 집을 뛰쳐나가겠네. 단발 약간 다혈질이기도. 파마 다혈질이라……바로 옥상으로 올라가서 뛰어내릴 수도 있겠네. 단발 조금 고전적인 면도. 파마 고전적이라……고전적으로 약국마다 돌면서 수면제를 살 수도 있겠네. 단발머리, 비틀거리다가 그네에 주저앉는다. 파마 너무 걱정하진 말아요. 뛰쳐나가면 잡으면 되고 옥상 문은 잠가놓으면 되고 약 먹어도 응급실이 있으니까. 그래도……상처는 남겠죠. 돈 없어도 살지만 자존심 없으면 못사는 게 남자니까. (일어나며)그럼 이만. 단발 저……저기……. 파마 ……. 단발 어떻게……그렇게……잘……. 파마 우리 아저씨도 짤렸거든요. 그것도 1년째. 단발 그쪽 아저씨가 혹시……뛰쳐나가셨나요? 파마 전혀. 단발 혹시 옥상에서? 파마 전혀. 단발 혹시 약을? 파마 전혀,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건조하고, 재미없고, 대머리고. 단발 그게 어떻게 …… 가능하죠? 파마 모르는 척 했거든요, 해고당한 걸. 단발 모르는 척……그게……그렇게 쉽게……. 파마 평범한 주부들은 안 돼요. 어느 정도 비범해야만 가능하죠.(시계 본다)늦었네요. 잠시 후면 우리 아저씨가 이 놀이터로 올 거예요. 항상 여기 들렀다가 시간을 맞춰서 퇴근한 척하거든요. 파마머리, 벼룩시장을 챙겨서 집으로 걸어가는데. 단발 사모님! 파마 ……. 단발 저도……저도 비범하게 만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파마 일반 주부가 범접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에요.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단발 (무릎 꿇으며) 부탁이에요, 사모님. 저희 남편이 때때로 소심하고 때때로 한심하고 때때로 답답하기는 하지만……좋은 사람이에요. 오로지 집이랑 애들이랑 저밖에 모르는……그 사람이 옥상으로 올라가거나 약을 사러 돌아다니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그 사람이 계속해서 맘 편히 집으로 오게 만들어주고 싶어요. (무릎 꿇으며) 부탁드려요! 한동안의 정적. 파마 제자로 받아주면……가끔 소금 설탕 간장 같은 거 빌려줄 수 있어요? 단발 그럼요! 파마 맛있는 반찬 하면 나눠줄 수도 있고? 단발 그럼요! 파마 그쪽 애들 통닭이나 피자 시켜주면 우리 애들도 불러 먹일 수 있고? 단발 그럼요! 파마 좋은 마음가짐이에요. 제자님이 그렇게 해주면 나도 제자님한테 그렇게 해주겠어요. 서로 서로 나눔으로써 감소된 경제력을 최대한 이겨내는 거예요. 단발 방금, 제자라고? 파마 그래요. 제자로 받아주겠어요. 단발 (큰절) 스승님! 파마 (대머리에게 전화하는 것일까) 여보, 퇴근하는 중이지? 미안한데 올 때 계란 좀 사다줘요. 동네 슈퍼 말고 꼭 유기농 파는 데로 가서, 그래 큰길가에 있는, 고마워요. (전화 끊는다) 우리 아저씨가 놀이터로 오는 시간을 지연시킨 거예요. 수업을 해야 하니까 단발 그런 깊은 뜻이! 그럼 저도 전화할까요? 파마 비싼 거 말고, 계란이나 당근처럼, 싸면서도 깐깐하게 골라야 하는 걸로, 그래야 남편에게 부담이 안 가면서 시간도 벌어지니까. 단발, 꾸부정에게 열심히 전화한다. 파마, 대견하게 지켜본다. 통화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수업에 들어가는 두 사람. 파마 상태 체크부터 해보죠. 그쪽 아저씨가 해고당했을 거라는 판단을 하게 된 이유는? 단발 그게……집에 왔을 때만 해도 평소랑 똑같았어요. 별일 없었냐고 물어보니까. 파마 “뭐, 똑같지 뭐.” 라고 했죠? 단발 (놀란다) 그걸 어떻게? 파마 그게 1단계니까요. 단발 그런데 그날이……남편 생일이었거든요. 그래서 애들이 노래를 불러줬어요. 그런데. 파마 그쪽 아저씨가 한참을 가만있다가 대성통곡을 한 거죠? 단발 맞아요! 파마 그러다 울먹이면서 안방으로 뛰쳐들어갔을 테고. 단발 맞아요! 파마 문을 잠가놓고 밤새 안 열어주다가 다음 날 아침에 잠옷 바람으로 나갔는데 들어올 때는 축구 유니폼을 입고 들어오더니 아버님 사진을 꺼내놓고 울지는 않던가요? 단발 맞아요! 그것도 멀쩡히 살아계신 아버님을……. (흐느낀다) 파마 분석을 해보니, 짤린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나오는 증상이네요. 지금이 가장 위험할 때에요. 걸릴까 말까 말할까 말까 집에 들어올까 말까를 가장 고민할 때죠. 단발 그……그러면……어떻게? 파마 제자님이 실력을 발휘할 때인 거예요 일명 ‘모른 척’의 실력을. 단발 모른 척의 실력? 파마 생각해봐요. 남편들이 “아, 걸릴지도 모르겠구나.”라는 생각을 언제 하게 될까요? 단발 글쎄……. 파마 바로 ‘눈빛’이에요. 단발 눈빛? 파마 가장들이 고달프고 괴로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힘이 뭘까요? 그건 바로 가족들의 눈빛이에요. 힘들게 일을 마치고 돌아 왔을 때,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가족들의 애정 어린 눈빛. 그럴 때 가장들은 힘을 얻는 거예요. 단발 아! 그렇다면, 앞으로 그 눈빛을 더 열심히 보내주면 되겠네요? 파마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요. 그건 그 사람들이 ‘일’을 할 때잖아요. 단발 ……. 파마 지금은 일을 못 하고 있는 상태죠. 일을 못 구해서 미안하고 돈을 못 버니까 미안하고, 그런 가슴 아픈 상태에서 집에 들어왔는데 가족들이 애정 어린 눈빛을 보낸다고 생각해봐요. 어떻겠어요? 단발 (서서히 깨달음을 얻는다) 아아……. 파마 애들이 노래를 불렀을 때 그쪽 아저씨가 왜 대성통곡을 했는지 알겠죠? 단발 (깨달음) 이제야 알겠습니다. 스승님. 파마 그렇기 때문에 그 1단계가 바로 ‘눈빛 돌리기’ 인 거예요. 단발 눈빛 돌리기! 파마 시간이 없으니 바로 실전으로 들어가 봐요. 남편이 퇴근한 척하고 집에 들어왔어요. 대꾸를 해 보세요. “여보, 나 왔어.” 단발 (눈빛을 의도적으로 피하며) 으……응……별일 없었어? 파마 그렇게 어색하게 눈빛을 돌리면 의도적으로 피한다는 느낌이 바로 오잖아요. 단발 그렇네요. 파마 다시 한 번 해봐요. “여보, 나 왔어.” 단발 (처음부터 딴 데를 보며) 응, 별일 없었지? 파마 그렇게 처음부터 딴 데를 보면서 얘기하면 냉랭해져 있다는 느낌이 들잖아요. 단발 아아…… 어렵네요. 파마 눈빛을 피하되, 의도적이지도 냉랭하지도 않게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피해야 되는 거예요. 상상을 해봐요. 남편이 집에 왔을 때 눈빛을 돌리고 있을만한 자연스러운 무엇. 단발 자연스러운 무엇이라……. 파마 시범을 보여주죠. 역할을 바꿔 봐요. 단발 (남편 흉내) 여보, 나 왔어. 파마 (뒤돌아 요리하는 척) 왔어? 계란 사왔어? 단발 (계란 건네주는 척) 응, 여기. 파마 (계란 받자마자, 다른 곳으로 가며) 빨래가 다 됐나? 당신은 빨리 씻어. 단발 (씻으러 가는 척) 응, 그래. (씻으러 들어갔다 나온 듯) 다 씻었는데? 파마 (식탁을 가리키는 듯) 밥 차려놨어. 단발 당신은? 파마 당신 기다리다 배고파서 먹었어. 아이고, 내 정신? 드라마 녹화해 놨는데. (거실로 달려가는 시늉) 단발 (껄껄 웃는다) 허허 당신도 참! (편하게 밥을 먹는 시늉을 하다가) ……어머? 한 번도 안 마주쳤어요! 파마 그리고 자연스럽죠? 단발 남편 입장에서도 정말 자연스럽고 편하겠어요! 파마 이 1단계를 여러 가지로 조합해서 써먹으세요. 요리-빨래-드라마, 드라마-요리-빨래 같은 식으로. 여기서 중요한 건, 요리가 맨 마지막에 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밥을 같이 먹게 되고, 같이 먹게 되면 눈이 마주치게 되니까. 단발 (경이로움) 스승님……. 파마 통닭 시키면, 꼭 우리 애들 불러줘요. 단발이 파마를 껴안는다. 암전. 암전을 감싸는 작은 멜로디. #4 불이 켜지면, 꾸부정이 한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대머리를 기다리고 있다. 대머리가 생일 때 쓰는 고깔모자를 쓰고 천천히 걸어온다. 꾸부정 스승님! 대머리 (고깔모자가 부끄러운 듯) 오늘, 생일이거든요. 오늘 컨셉은 직원들이 해준 생일파티 컨셉입니다. 1년에 한번밖에 못 써먹는 게 아쉽긴 하지만…… (꾸부정의 상태를 보고) 좋아 보이는군요. 꾸부정 그럼요! 집사람이 완전히 속아 넘어갔습니다. 우연의 일치이긴 하지만 집에 갈 때마다 빨래를 하거나 요리를 하거나 드라마를 보고 있더라구요. 눈이 안 마주치니까 더더욱 마음이 편합니다. 하하하하! 대머리 참으로……대단한 우연의 일치로군요. 꾸부정 네? 대머리 아닙니다. 그런 우연이 겹칠 때가 있죠……저도 그랬으니까. 어쨌든 다행입니다. 꾸부정 (비닐봉지를 내밀며) 저어……이거……. 대머리 이건? 꾸부정 스승님 생신 선물입니다. 대머리 ……해고자들끼리는……경조사를 모른 척 하는 게 불문율인데……. 꾸부정 그건 알지만, 스승님의 생신이니까요. 자판기 커피를 서울역에서 영등포 쪽으로 옮기니까 50원이 절약되더라구요. 그걸 두 달 동안 모아서 산 겁니다. 대머리, 천천히 봉지를 열어본다. 그 안에는 소주 한 병이 들어있다. 꾸부정 한 달 치 회식 아이템입니다. 대머리 ……직원들도……챙겨준 적 없었는데……선물……. 꾸부정 ……약소합니다. 한동안 말없이, 소주병을 만지작거리는 대머리. 대머리 (분위기 전환) 흠흠, 두 달이 지났으니 2단계로 들어갈 차례로군요. 꾸부정 그 생각을 하니까 두근거려서 잠이 안 왔습니다. 대머리 배우고 익히면 때때로 즐겁지 아니하죠. (선물 받은 소주를 따서 권하며) 일단, 한 모금 하시죠. 꾸부정 하지만……이건 스승님의 대머리 오늘은 제 생일이니까 특별히 보름치만 마시죠 (오징어 다리 네 개를 꺼내며) 안주도 사치스럽게 1인당 무려 두 개씩. 소주병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맛있게 소주를 마시는 두 남자. 대머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뭐라 생각하십니까? 꾸부정 글쎄요, 명함? 대머리 (고개 흔든다) 꾸부정 그럼, 양복이나 작업복? 대머리 이렇게 물어보죠. 직장에 다니는 이유가 뭡니까? 자아실현 같은 뻔한 답 말고. 꾸부정 돈을 벌기 위해서죠. 돈을 벌어야 가족들 먹여 살리고 집도 사고. 대머리 그렇습니다. 돈, 바로 월급이죠. 직장을 다닌다는 가장 큰 증거는 바로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입니다. 꾸부정 (이마를 치며) 아아 그렇구나. 대머리 선생이 그 어떤 실수나 튀는 행동을 하더라도 월급을 꼬박꼬박 가져다주는 한 쉽게 의심받지 않습니다. 1단계보다 더 강력한 2단계는 바로 ‘월급’입니다. 꾸부정 월급이라……무슨 수로 월급을……. 대머리 퇴직금과 저축과 비자금을 포함하면 얼마나 됩니까? 꾸부정 한……삼천 정도……. 대머리 적군요. 꾸부정 당겨쓰는 바람에……. 대머리 월급은? 꾸부정 이백이 조금……. 대머리 적군요. 꾸부정 성과급제 인지라……. 대머리 봅시다, 재취업의 목표를 일 년으로 잡았을 때, 총자본 삼천에서 하루 용돈 만원 곱하기 365해서 빼면 2635만원. 중간 중간 부인과 아이들 생일 선물 챙겨주고, 가끔 부모님 외식도 시켜드리고, 아프면 병원 가야되고, 친구 만나면 술 한잔도 해야 되니까 100만원 빼면 2535만원. 이걸 열두 달로 나누면 211. 25만원. 딱 맞아떨어지는군요. 꾸부정 이럴 수가! 이토록 맞아 떨어지다니! 대머리 아직 감탄은 일러요. 변수를 따져봅시다. 올해 안에 큰돈 들어갈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 뭐가 있죠? 꾸부정 음……올해 봄에 어머니 금니를 해드리기로. 대머리 돈 더 모아서 내년에 임플란트 해드린다고 하세요. 꾸부정 음……올해 여름에 가족들하고 제주도를. 대머리 돈 더 모아서 내년에 하와이 가자고 하세요. 꾸부정 처제가 연애를 하는데 가을쯤 결혼하고 싶다고. 대머리 어떻게든 둘이 깨지게 만드세요. 꾸부정 겨울에 큰애가 수능을 보는데 그럼 대학 등록금을. 대머리 어떻게든 재수하게 만드세요. 꾸부정 이럴 수가! 이토록 쉽게 해결되다니! 선생님은 천재예요! 대머리 지금 당장, 은행으로 가서, 입금 하세요. 꾸부정, 대머리를 부둥켜안는다. 암전. 암전을 감싸는 작은 멜로디. #5 불이 켜지면, 단발과 파마가 그네에 앉아있다. 단발은 통닭을, 파마는 장조림 통을 들고 있다. 그들의 발밑에는 반쯤 남은 소주병(남자들이 마신)이 남아있다. 단발 다 먹으면 살찐다고 애들한테 강제로 뺏어 온 통닭이에요. 파마 우리 애들 좋아하겠네. 이건 우리 엄마가 보내준 장조림이야. 단발 이 귀한 걸. 파마 미국산일 거야. 단발 찬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죠. 두 여자, 웃는다. 단발 (소주병을 내려다보며) 회식을 보름치나 빠뜨려놓고 갔네요. 불쌍한 그이. 파마 남은 보름은 축구대회로 때우겠지. 모래판에 뒹굴고 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파. 단발 이번 달엔 월급을 두 번이나 입금했더라구요. 파마 우리 아저씨는 실수로 우리 딸한테 입금한 적도 있어. 두 여자, 웃는다. 파마 월급날이니까 당당하게 들어오겠네. 오랜만에……하자고 할지도 몰라. 단발 어머, 스승님도. 파마 안 좋아도……좋은 척해 줘야지 뭐. 단발 난 그냥……좋은데. 파마 역시, 젊구나. 두 여자, 웃는다. 파마 (소주병 집으며) 이 회식 보름치는, 우리가 마시자구. 곗날이었다고 하지 뭐. 단발 곗날이라……짤린 지 1년 넘은 곗날. 파마 난 2년. 두 여자, 한참을 웃다가, 사이좋게 소주를 나눠 마신다. 파마 그 아저씨들…… 앞으로 1년 버티기도 간당간당할 거야. 퇴직금은 한계가 있지. 단발 우리 남편은…… 당겨썼을 텐데. 파마 중간에 큰돈 들어갈 일 있으면 알아서 짤라줘. 어머니 금니라든가 제주도로 떠나는 가족 여행이라든가 자식들 학자금이라든가 동생 결혼식 같은 것들 있잖아. 단발 어머?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파마 사는 게 비슷비슷하니까 돈 들어가는 것도 비슷비슷하겠지 뭐. 단발 정말이지……스승님은. 파마 대놓고 짜르면 의심하니까 자연스러워야 돼. 나 같은 경우는 뉴스를 많이 활용해. 요즘 뉴스에 경제 어렵다는 얘기 많이 나오잖아. 등록금에 목숨 끊고 효도 못 해 목숨 끊고 결혼 못 시켜줘서 목숨 끊고……그런 뉴스 나올 때마다 호들갑을 떠는 거야. “어머머머, 저걸 어떡해? 우리라고 안심하면 안 되겠네. 여보, 경제도 어려운데 당분간 허리띠 좀 졸라맵시다.” 그럼 남편이 그러겠지. “그래도……할 건 해야 되잖아?” 그럼 이러는 거지. “그거 안 한다고 당장 죽어? 다 내년에 합시다. 금니는 임플란트로, 제주도는 하와이로, 그리고 첫째 너는 조금만 더 공부하면 ‘인 서울’ 가능해. 그냥 재수해. 그리고 동생 결혼식은……으이그 나 그 남자 맘에 안 들어!” 두 여자, 배꼽을 잡다가, 다시 기분 좋게 마시는 소주. 파마 자기도…… 빨리 일을 구해야 돼. 단발 ……그래야죠. 파마 일을 구할 때도 튀지 말아야 돼. 집에만 있으니까 갑갑하다, 옆집 엄마들이 마트에 가서 일하니까 돈도 벌어 좋고 심심하지도 않아서 좋지 않느냐, 일도 엄청 편하다더라…… 물론 편하지는 않지……자존심도 많이 상하고……. 단발 ……. 파마 그래도 마트를 구하면 다행이야. 술집을 돌면서 전병을 파는 아줌마들도 있어. 단발 ……. 파마 더 심하면……도우미로 나서는 거지. 단발 ……. 파마 남자들도 마찬가지야……일을 도저히 못 구하면 아빠방 같은 데로 가기도 하거든. 알지? 그, 남자 도우미 같은……. 단발 ……. 파마 대단한 거야……그렇게 해서 가족이 유지되니까. 단발 대단하네요……저로서는 엄두도 못 낼……. 파마 더 지나면……엄두가 날 거야……. 단발 ……. 파마 ‘뭐든’이라는 단어가 중요해. 뭐든. 단발 ……뭐든. 파마 2단계가 바로 그 ‘뭐든’ 이야. 단발 ……. 파마 (벼룩시장을 건넨다) 생일 축하해. 선물이야. 단발 ……고마워요. 파마 꼼꼼히 읽어 보면 일을 구할 수 있을 거야. (소주병을 들고) 마시자고……곗날인데 말없이, 소주를 마시는 여자들. 암전. 암전을 감싸는 작은 멜로디. #6 불이 켜지면, 꾸부정이 축구 유니폼 차림으로 모래판에 열심히 뒹굴고 있다. 잠시 후,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대머리. 그러나, 대머리가 아니다. 윤기 흐르는 리젠트 헤어스타일에 삐까번쩍한 양복, 광나는 구두. 그러나, 왠지 어색한.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운. 꾸부정 스승님! …… 머리가? 대머리 가발입니다. 꾸부정 결혼식이라도? 대머리 (대답 없는 미소) ……이제, 완벽하게 홀로서기를 하셨군요. 꾸부정 스승님 덕분이죠……덕분에 집사람이 뒤로 자빠지지 않을 수 있게 되었네요.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어머니 금니도 가족들 여행도 다 내년으로 미뤄졌어요. 처제는 결혼 상대가 갑자기 마음에 안 들고 아들놈은 갑자기 ‘인 서울’을 노리겠다더군요. 4년제도 힘든 놈이……. 대머리 그건 정말로……완벽한 행운이군요. 꾸부정 예……그야말로 완벽한……. 대머리 ……. 꾸부정 집사람이 일을 시작했어요. 집에만 있으니까 심심하다면서. 대머리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겠군요. 꾸부정 전병을 팔고 있더라구요……술집을 돌아다니면서. 대머리 ……. 꾸부정 심심하다고 할 만할 일일까요……전병을 파는 게……. 대머리 ……. 꾸부정 ……심심해서겠죠……분명……. 좋은 건지, 씁쓸한 건지 모를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네를 타는 두 남자. 대머리 마지막 3단계를 배울 차례로군요. (양주를 꺼낸다) 양주 한잔 하시죠. 꾸부정 양주가……어디서? 대머리 (대답 없는 미소) 졸업 선물입니다. 어떠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양주를 받아 마시는 꾸부정. 대머리 3단계는 ……시간입니다. 꾸부정 ……시간. 대머리, 그네에서 일어나 놀이터를 천천히 거닌다. 대머리 어릴 때 놀이터에서 소꿉놀이를 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꾸부정 ……. 대머리 의사도 됐다가 선생님도 됐다가 과학자, 대통령, 경찰관, 소방관, 백화점 사장, 옷가게 사장, 슈퍼마켓 사장……그렇게 소꿉놀이를 하면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시간이 더 많으면 나는 더 많이 놀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생각했죠. 시간이 많다는 게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는 걸……이제야 깨닫게 되는군요. 꾸부정 ……. 대머리 선생님이 해고된 순간부터 선생님에게는 엄청난 시간이 생겼습니다. 이제 선생님은 직장을 구할 때까지 평범함을 연기하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시간과 싸워야 합니다. 늦잠을 잘 수 없습니다. 출근 하는 척해야 되니까요. 밖에서 시간을 때워야 합니다. 퇴근 시간이 되어야 집에 갈 수 있으니까요. 밥도 혼자 먹어야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직장에서 먹으니까요. 비싼 걸 먹으면 안 됩니다. 돈이 없으니까요. 꾸부정 ……. 대머리 동네 주변에 있으면 안 됩니다. 아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요. 극장도 있고 피씨방도 있고 커피숍도 있지만 갈 수 없습니다. 돈이 드니까요. 아침이 되면 꾸역꾸역 밖으로 나가서 저녁이 될 때까지 아는 사람 없는 곳에서 돈 안 드는 방법을 택해서 시간을 죽여야 됩니다. 시간이 많다고 책을 읽어서도 안 됩니다. 취직을 위해서 교차로 벼룩시장 가로수만 죽어라 읽고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매일매일 그런 시간과 싸워야 됩니다. 그게……마지막 3단계입니다. 꾸부정 ……. 대머리 (놀이터를 둘러 본 후) 어릴 때는 이 놀이터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습니다. 놀이터에서 대머리의 어른이 미끄럼틀을 타고 있으면 웃기잖아요……어른이니까……. 꾸부정 ……. 대머리 (시계를 본다) 이제 가야겠군요. 저도 오늘은 축구대회라고 한지라 ……. 대머리, 가발을 벗고, 비까번쩍한 양복을 벗으면, 그 안에 입혀져 있는 유니폼. 그 상태로 모래바닥에 사정없이 뒹굴고, 꾸부정도 말없이 뒹굴고. 꾸부정 (뒹굴면서) 스승님……우리…… 소꿉놀이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죠? 어릴 때처럼? 대머리 (역시 뒹굴면서) 우리 같은 중년의 가장에겐……조금은 괴로운 소꿉놀이군요. 그런데……어릴 때 소꿉놀이 할 때는 왜 한번도……회사원 역할을 안 했을까요. 꾸부정 ……. 대머리 시시해서였을까요? 꾸부정, 말없이 더욱 열심히 뒹굴고, 대머리도 그런 꾸부정을 보며 더더욱 열심히 뒹굴고……. 암전. 잠시 후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 그리고, 동시에 들려오는 두 남자의 목소리. 목소리 나 왔어…… 별일은 무슨…… (심호흡을 한번 하고) 뭐, 똑같지 뭐. 작은 멜로디. -막-
  • [씨줄날줄] 로엘족/이춘규 논설위원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참 많은 족속들이 명멸한다. 무슨 무슨 족(族)은 시대상을 반영한다. 족은 일정한 집단을 지칭한다.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사회 현실이 담겨 있다. 여피족·미시족은 한 시대를 풍미했다. 통크(Two Only No Kids)족은 자녀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려는 노부부, 중년부부들이 그리는 미래상이다. 족은 대체로 생성과 소멸이 빠르다. 빠른 사회 변화상을 반영한다. 결혼은 싫고 아이는 원하는 여성들은 싱글맘(Single mom)족. 경제적으로 능력 있는 당당한 이혼여성은 신디스(Sindies)족. 부모에 의지해 사는 젊은 캥거루족과 휴학으로 사회 진출을 미룬 모라토리엄족은 이 시대의 아픔이다. 사회로 나갔다가 학교로 다시 돌아오는 유턴족. 편입학을 거듭하며 몸값을 올리려는 계단족. 경제구조의 급변과 학력 인플레이션 시대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다. 특정 족속은 경영과 마케팅에도 중요하다. 최첨단 물품을 추구하는 이노베이터족이나 얼리어댑터족은 기업들의 표적이 된다. 과시욕이 강한 지름족은 얼리어댑터족의 변형이다. 21세기는 디지털노마드족의 시대. 휴대전화와 PDA, 노트북 등 디지털기기로 무장해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돌아다니는 유목민 성향을 지녔다. 한 사람이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는 잡노마드. 통근·통학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는 MP3플레이어·노트북·스마트폰·태블릿PC 등으로 무장한 이동족이 많다. 지구촌 곳곳에서 불황이 맹위를 떨치며 계절에 관계없이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패션을 선호하는 시즌리스(Seasonless)족도 화제다. 웹시(Websy)족은 웹과 미시를 합친 말이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고 쇼핑을 즐기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주부들을 지칭한다. 불황 속 합리적인 소비를 추구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족도 낯설지 않다. 가격 대비 효율을 중시한다. 소득은 적지만 직장생활을 즐기며 삶의 만족을 찾는 다운시프트(Downshift)족은 당당하다. 외모에 관심이 많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투자에 적극적인 로엘족이 화제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50대 중년남성과 대비된다. Life of Open-mind, Entertainment and Luxury의 약자를 따 로엘(LOEL)족이라고 칭했다. ‘미중년’을 추구하는 로엘족이 올해 백화점의 큰손이 됐다고 한다. 자신을 위한 투자에 적극적인 남자주인공이 대표인 로엘백화점을 다룬 한 방송 드라마가 관심을 끌면서 유명 백화점이 차용한 용어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2010 베스트&워스트 어워즈 (6) 패션] 가장 옷 잘입는 사람 ‘신민아·김연아’

    [2010 베스트&워스트 어워즈 (6) 패션] 가장 옷 잘입는 사람 ‘신민아·김연아’

    ‘2010년 가장 옷을 잘 입은 사람은 김연아와 신민아’ 내로라하는 5명의 국내 디자이너들은 각자의 개성을 반영하듯 올해 베스트 드레서에 골고루 표를 던졌다. 그 중에 ‘유이’하게 2표를 받은 이가 피겨 스케이팅 선수 김연아와 배우 신민아였다. 삼성가(家) 3세들이 베스트 드레서로 1표씩 받은 점도 이채로웠다. 배은영 코오롱 쿠아 디자인실장은 22일 김연아 선수에 대해 “김 선수가 입은 패션은 모두 화제가 됐다.”며 “공항에서 선보인 뒤 몇 시간 만에 그가 든 가방이 매진됐고, 고려대를 방문했을 때 입은 재킷도 모두 팔렸다. 과감한 스케이팅 의상은 물론 상황에 맞게 입는 평상복 스타일의 감각도 뛰어나다.”고 칭찬했다. 드라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로 큰 인기를 누린 배우 신민아를 베스트 드레서로 꼽은 뮈샤의 김정주 보석 디자이너는 “순수하면서도 관능적인 이미지가 공존하는 신민아는 극과 극인 패션을 잘 표현한다.”고 평가했다. ●‘모테루 오야지’ 정용진, ‘도도 패션’ 부진·서현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손주들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도 베스트 드레서로 1표씩을 받았다. 이 창업주의 아들이자 부진·서현 자매의 아버지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옷 잘 입는 남자’로 뽑혔다. 이현정 제일모직 갤럭시 디자인실장은 “공항 패션으로 스타 못지않은 사진 세례를 받는 이 회장은 은은한 파스텔 핑크와 멜론 빛깔 초록색 재킷도 멋지게 소화해낸다.”며 “비공식 자리에서는 넥타이 없는 블레이저(콤비 상의)를, 공식 석상에서는 세련된 느낌의 감색 정장을 즐겨 입는다.”고 소개했다. 제일모직이 삼성 계열사인 점을 감안해도, 이 회장이 웬만한 젊은 최고경영자(CEO)들보다 패션감각이 앞선다는 데 이의를 다는 디자이너들은 별로 없다. 부진·서현 자매는 올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 때부터 종종 공식석상에 등장, 검정과 흰색을 적절히 활용한 패션으로 깔끔하면서도 도도한 감각을 드러냈다. 정용진 부회장은 트위터에 “‘모테루 오야지’(멋진 중년 남성을 뜻하는 일본어)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겠다.”고 할 정도로 패션에 관심이 많다. 일본 남성 패션지 ‘레옹’도 즐겨 본다. 줄무늬 정장에 빨강 또는 보라색의 타이로 큰 체격을 보완하는 패션 감각을 곧잘 선보인다. ●원빈, 박지성, 오바마 등도 ‘옷 잘 입는 남자’ ‘아저씨’ 열풍을 일으킨 영화배우 원빈과 드라마 ‘프레지던트’의 최수종도 베스트 드레서에 이름을 올렸다. 여자 중에서는 배우 이민정, 김민희, 고현정, 김남주와 모델 장윤주가 꼽혔다. 스포츠 스타로는 염색한 파마 머리에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주장의 ‘포스’(기)를 내뿜은 축구선수 박지성이 패션감각을 인정받았다. 외국인으로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찰스 영국 황태자가 ‘이 시대 리더의 패션 스타일’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워스트 드레서는 5명의 전문가가 모두 각자 다른 사람을 꼽았다. 배우 중에서는 서우·구혜선·황정음, 가수 중에서는 아이유·존박·가인, 방송인 중에서는 김제동이 거론됐다. 방빈 신원 베스띠벨리 디자인실장은 “드라마에서 서우의 모습은 귀엽고 여성스럽지만 레드 카펫에서의 드레스 선택은 언제나 실패였다.”며 “체형과 분위기에 맞는 드레스를 고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서우, 황정음, 가인 ‘옷 못 입는 여자’ ‘인민복’ 차림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워스트 드레서로 꼽은 이도 있었다. 외국의 유명인사들도 혹평을 비켜가지는 못했다. 팝스타 레이디 가가, 스티브 잡스 애플 CEO,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가 패션 감각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특히 트레이드 마크가 된 잡스의 ‘검정 터틀넥(목까지 올라오는 스웨터)과 청바지 패션’은 한 남성 패션잡지에서 그의 옷장을 상상한 그림을 만들 정도로 비웃음을 샀다. 그림 속의 옷장에는 수십 벌의 터틀넥과 청바지만이 빽빽하게 걸려 있었다. 일각에서는 잡스의 틀에 박힌 옷차림이 고도로 계산된 비즈니스의 산물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하지만, 한 디자이너는 “최첨단 디자인의 전자 기기를 창조해내는 사람 치고는 패션에 지나치게 무관심하며, 이는 묘한 아이러니”라고 잘라 말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심사위원 방빈 신원 베스띠벨리 디자인실장, 배은영 코오롱 쿠아 디자인실장, 이현정 제일모직 갤럭시 디자인실장, 김수백 EXR 디자인실장, 김정주 뮈샤 보석 디자이너
  • ‘젠틀남’ 강재원 女心 사로잡다

    ‘젠틀남’ 강재원 女心 사로잡다

    여자는 분위기에 약하다고 했다. 운동경기도 분위기가 승패를 좌우한다고 했다. 그래서 여자 스포츠팀에는 분위기가 정말 중요하다. 한번 흐름을 타면 무서운 게 없지만, 한번 침체되면 끌어올리기가 너무 힘들다.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6연패가 좌절된 여자핸드볼팀. 분위기가 안 좋아야 정상이다. 그런데 어쩐지 분위기가 괜찮다. 아시안게임의 아쉬움을 아시아선수권 우승으로 설욕하겠다는 비장감도 있지만 그게 주가 아니다. 그보다는 여유가 넘친다는 표현이 알맞다. 살짝 삐끗했을 뿐 “실력으로 아시아에 적수가 없다.”는 자신감이 여전하다. 선수단엔 적당한 긴장감과 여유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중심에 신임사령탑 강재원(45) 감독이 있다. 강 감독은 지난달 30일 여자국가대표팀 사령탑에 올랐다. 훈련 때는 직접 트레이닝복을 챙겨입고 코트를 누빈다. 패스와 슈팅을 함께 하고 패턴과 수비포지션은 발로 짚으며 가르친다. 개인별로 몸상태를 체크하는 건 기본이다. ‘아픈 건 참고 뛰는 게 당연한 줄 알았던’ 선수들에게 획기적인 변화다. 훈련장에선 엄격하지만 그 외엔 너그럽다. 휴식시간엔 선수들과 어울려 과자도 먹고 수다도 떨고 오락도 한다. 운동할 때도, 먹을 때도, 차에 오를 때도 선수가 우선이다. ‘미중년’인 것도 플러스. 40대 중반이지만 ‘똥배’도 없다.‘욘사마’를 떠오르게 하는 곱슬머리와 뿔테안경, 긴 목도리까지 장착했다. 최연소(17세) 국가대표 기록에 유럽리그(스위스 그라스호퍼) 득점왕 출신인 것도 믿음직스럽다. 1995년 한국남자팀 코치부터 미국여자대표팀(1999년)-일본 다이도스틸(2005년)-중국여자대표팀(2007년) 감독을 거치며 쌓인 내공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강 감독은 20여일 만에 여심(女心)을 사로잡았다. 선수들은 “힘들게 훈련하다 보면 감독님이 야속하기 마련인데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든다. 합리적이고 세련된 분이다. 10점 만점에 10점”이라고 입을 모았다. 강 감독도 신나긴 마찬가지. “중국팀을 2년 가르쳤는데, 걔들 가르치다가 한국 맡으니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다. 개인기술도 좋고 정신력도 훌륭하고 영리하다.”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분위기가 좋으니 출발도 좋았다. 한국은 20일 카자흐스탄 알마티 발루안샬락경기장에서 열린 선수권 첫 경기에서 태국을 38-11로 완파했다. 강 감독의 데뷔전 승리다. 글 사진 알마티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장애인AG 양궁 안태성 감독…중학생때 50 m 한국신 ‘신동’

    장애인AG 양궁 안태성 감독…중학생때 50 m 한국신 ‘신동’

    1977년 6월 각 신문에는 ‘촛불 연습 궁도 안태성 50m 한국신’이란 제목의 기사가 큼지막하게 체육면을 장식했다. 한밤에 촛불을 켜놓고 훈련한 중학생 안태성이 남자 개인 싱글 50m에서 한국신기록을 세웠다는 것. 궁도(양궁) 1년 반 만에 저지른 이른바 ‘사건’이었다. “5개월 동안 매일 6시간씩 맹훈련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는 과녁 옆에 촛불을 밝혀 집중력을 키웠다. 모스크바올림픽 출전이 꿈”이라는 인터뷰 내용도 소개했다. 33년이 흐른 지금 그는 중국 광저우에 와 있다. 아오티 양궁경기장에서 만난 그는 더 이상 까까머리 중학생이 아니라 연륜이 묻어나는 중년이 됐다. 선수가 아니라 지도자다. 그런데 가르치는 이들은 장애인 선수들. 그 자신도 장애인이다. 장애인아시안게임 양궁대표팀 안태성 감독. 30년 남짓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신기록을 세운 이듬해 안태성은 운동 도중 오른쪽 다리를 다쳐 못쓰게 됐다. 불구가 된 이후에도 활시위를 당겼다. 이를 악물었다. 비장애인들과 악착같이 경쟁했다. 그러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1987년 육사 화랑양궁장에서 열린 88서울올림픽 대표선발전에서 떨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작심했죠. 장애인양궁으로 갈아타기로요.” 이후 20년 넘게 장애인 세계선수권, 장애인올림픽에서 수많은 메달을 쓸어담은 그는 지도자로서 장애·비장애 가릴 것 없이 모든 양궁 선수들의 형이자 오빠였다. 지난해까지 20년 넘게 장애인 선수를, 최근까지 비장애인 국가대표 코치를 ‘겸업’하며 그는 보란 듯이 장애의 벽을 뛰어넘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서향순, 1988년 서울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윤영숙을 동생처럼 가르쳤다. 1993년 터키 안탈리아세계선수권 2관왕 김효정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성공한 지도자의 길을 걸으면서 그 자신도 지난해까지 선수로서 시위를 당겼다.올해는 그의 장애인 대표팀 감독 첫해다. 비장애인 선수로 출발, ‘중도 장애’의 쓰디쓴 경험까지 겪으면서도 끝까지 활을 놓지 않은 안 감독은 “장애인의 앞을 가로막는 건 장애 자체가 아니라 ‘장애가 있다’는 생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도전에 필요한 건 사지 멀쩡한 몸뚱이가 아니라 용기”라면서 “비장애인들과 같이 장애인들에게도 도전과 용기는 삶의 동력”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광저우 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열린세상] 중년기와 인생계절/방은령 한서대 아동청소년복지학 교수

    [열린세상] 중년기와 인생계절/방은령 한서대 아동청소년복지학 교수

    중년이 되면, 외모는 물론 감각기관과 신체 내부 기능 및 생식 기능에서 노화의 징후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신체 변화는 중년기 위기와 같은 심리적 문제를 동반하기도 하는데, 그래서 중년기를 사추기(思秋期)라고도 부른다. 청소년들이 겪는 사춘기(思春期)와 대비시킨 말이다. 젊은이들은 봄날과 같이 피어오르는 일만 있고, 중년에겐 그저 저물어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사회가 조명하는 중년의 모습은 거의 그렇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08년도에 수행한 한국인의 행복 결정 요인과 행복지수에 관한 연구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는 40대와 50대가 20대와 30대에 비해 행복지수가 낮은 것으로 나와 있다. 연령이 낮을수록, 그리고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높은 행복지수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성인 남녀 중 중년이 20, 30대보다 덜 행복하고, 그중에서도 50대 남자들이 가장 행복하지 못하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세세한 영역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런 결론이 난다. 지난달 한 학회에서 한국 중년의 행복과 삶의 질에 대한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날 난, 중년 남성의 행복에 대한 내용을 다루면서 100명이 조금 넘는 중년 남성들의 진솔한 이야기들을 전했다. 그중 하나는 인생 계절에 관한 것이었는데, 중년 남자들 중 자신의 인생 계절을 봄이나 여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여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정점’ 혹은 ‘가장 왕성하게 일하는 시기’로 생각하고, 봄이라고 말한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거나 ‘지금부터가 내 인생의 시작’ 혹은 ‘삶이 봄날처럼 새롭고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인생 계절을 가을로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도 삶 속에서 결실을 맺거나 ‘가을과 같은 안정감을 가져서’라고 진술한 경우가 많았는데, 흔히들 생각하는 쓸쓸한 가을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많은 중년들은 중년기를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꿈을 펼치는 시기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사회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시기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50대가 느끼는 주관적인 행복지수가 40대보다 조금 더 높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50이 되면서 욕심을 많이 버리고 더 행복해졌다는 이야기도 했다. 에릭슨은 중년기의 발달적 위기가 생산성을 이루는 중요한 문제라고 하였는데, 중년기엔 자녀 양육에 박차를 가하고 능동적으로 직업에 몰두하며 사회의 발전에 큰 관심을 가지는 시기라는 것이다. 이 발달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침체성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개인의 생산성은 사회 존속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능력이 된다. 정신없이 쏟아져 나오는 정보 속에서 당황해하는 중년들을 사회는 그저 무능하게 바라볼 때가 많다. 중년 자신들도 이럴 때마다 스스로 몹시 위축된다. 그러나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정보만이 아니다. 기존의 정보들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하며, 이것은 발달적으로 필요한 과정들을 겪어야만 쌓이는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혼과 카텔도 지혜와 같은 결정성 지능은 중년기 이후에 더욱더 증가한다고 하였다. 중년기 사람들은 여자든 남자든 봄과 여름처럼 살길 원하고 또 그렇게 살 수 있다. 감정이 섬세하고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는 점에서 청소년들의 특성과도 많이 닮았다. 중년은 마음의 안정을 찾고 보다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니, 어찌보면 자원이 더 많은 셈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중년기에 나타나는 약점들만 들추어낸 경향이 없지 않다. 이제부턴 단순한 수치로 중년을 판단하지 말고 중년이 지닌 에너지에 초점을 맞추었으면 한다. 그래서 인생에서 봄과 여름을 맞은 중년들이 더욱더 그 계절을 즐길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겨울 속에 파묻혀 있는 중년들도 봄과 여름 들판으로 나오게끔 하면 좋겠다. 중년의 생산성을 극대화시키면 그 이익은 고스란히 사회로 환원될 것이다.
  • 산부인과에 생후 55일 친아들 버린 엄마 논란

    산부인과에 생후 55일 친아들 버린 엄마 논란

    “그래도 양심은 있다 vs 파렴치한 엄마일 뿐” 한 여성이 태어난 지 55일밖에 안된 친아들을 산부인과 병동에 몰래 버리고 나가는 모습이 병원 CCTV에 잡혔다. 중국 랴오닝성위성TV의 7일자 보도에 따르면 지난 6일 밤 9시 45분경 랴오닝성의 한 산부인과에 중년의 여성이 갓난아기를 안고 병원 복도를 지나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됐다. 평상복 차림의 이 여성은 아이를 안고 유유히 복도를 서성이며 여러 방들을 꼼꼼히 살폈다. 몇몇 병실을 들여다보던 이 여성은 3분 뒤, 처음과 달리 빈손으로 왔던 복도를 총총걸음으로 되돌아 나갔다. 버려진 아기를 처음 발견한 병원 직원은 “방에 아이가 덩그러니 놓여있어 가까이 가서 살펴봤지만 아무리 찾아도 아기의 엄마를 찾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의사와 간호사 등 병원 관계자들이 살핀 결과, 아이를 감싼 이불보 안에는 아이의 생년월일과 생활고 때문에 더 이상 아이를 키울 수가 없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가 들어있었다. 아이는 태어난 지 갓 55일밖에 되지 않은 남자아이로 건강에 전혀 이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의사는 “아이에게서 어떤 지병도 발견되지 않을 것으로 보아, 단순히 아이를 키우기 어려워 버리고 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여성이 아이를 산부인과에 버리고 가는 모습은 CCTV에 모두 녹화됐지만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아 신원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지 네티즌들은 “이렇게 추운 날 남의 집 문밖이 아닌 산부인과에 버릴 생각을 하다니, 그래도 양심은 있다.”, “100일도 되지 않은 친아들을 매정하게 버린 엄마는 자격이 없다.” 등의 의견을 남기는 등 이 사건에 관심을 보였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경악스런 구글 맵스 ‘자동차 알몸男’ 찰칵

    경악스런 구글 맵스 ‘자동차 알몸男’ 찰칵

    실제 길거리를 촬영한 웹지도로 사생활 침해 시비가 끊이지 않는 구글 맵스의 스트리트뷰가 이번에는 옷을 입지 않은 듯한 모습으로 자동차 트렁크에 들어가는 독일 남성의 기이한 행동(?)을 포착, 인터넷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영국 대중지 더 선에 따르면 이달 초 공개된 구글 스트리트뷰 사진에 독일 남서부 만하임에 있는 주택가에서 중년 남성 한명이 옷을 입지 않은 채 자동차 트렁크에 들어가는 모습이 찍혔다. 이 사진은 ‘구글맵스에 찍힌 나체남자’란 제목으로 인터넷에서 큰 화제를 일으켰다. 특히 이 남성이 알몸으로 메르세데스-벤츠 자동차 트렁크에 들어가고 자동차 앞에 쭉 뻗어있는 검은 개의 모습이 이상해 보인다며 네티즌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변태적인 취미생활 아니냐.”는 의심마저 불거졌다. 이 남성의 신원과 당시 하고 있던 행동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최근 기술과학 사이트 씨넷에서 한 네티즌은 “짧은 바지를 입었는데도 나체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냐. 자동차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자동차 트렁크 쪽을 손 보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사기도 했다. 이 사진이 어떤 상황이었는지에 대한 의견은 부분한 가운데 남성의 자동차와 집 주소는 물론, 흐릿하지만 얼굴도 나온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생활 침해라는 의견이 제기됐다. 구글 스트리트뷰 측은 문제가 불거지자 이 사진을 삭제조치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구글 스트리트뷰가 사생활 침해 논란을 일으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3월 타이완 화롄에 사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20대 여성은 집 창문에서 알몸으로 서 있다가 사진이 찍혔고, 이 때문에 신변이 노출돼 집을 옮겨야 했다. 또 지난 8월 영국 우세스터 주에서는 10세 아주라 비비잔이란 소녀가 친구들과 죽은 척 놀이를 하는 모습이 찍혔는데, 이를 실제 상황이라고 본 네티즌들이 경찰에 신고해 출동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스트리트뷰로 인한 사생활 침해 사건들이 연거푸 일어나자 많은 네티즌들은 이 같은 불상사가 더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자체 필터링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진=더 선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 ‘이층의 악당’으로 건재함 알린 한석규

    ‘이층의 악당’으로 건재함 알린 한석규

    한국 영화 남자 배우사(史)의 궤적을 논해 보자. 1980년대가 ‘안성기의 시대’, 90년대 초반이 ‘박중훈의 시대’였다면 90년대 후반은 ‘한석규의 시대’였다. 한국 영화의 황금기였던 2000년대, 지금의 ‘빅3’인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가 바통을 이어받기 직전까지 한석규는 그 기반을 닦았다. 비록 최고 배우의 자리는 내줬지만 역시 전설은 전설이었다. 손재권 감독의 영화 ‘이층의 악당’은 한석규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최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는 영화와 배우 한석규에 대한 평을 던지고 이에 대한 한석규의 부연설명을 듣는 식으로 재구성했다. #‘2층의 악당’은 유머 코드에서 성공한 듯 보인다. 다른 건 차치하고 일단 재밌었다. 왠지 ‘한석규’ 하면 고지식하고, 때론 심각한 이미지라 코믹 연기가 어울릴지 의구심이 들었는데 방향은 정말 의외였다. 한석규 하하. 그렇다면 다행이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받는 순간 ‘이 영화다!’ 싶더라. 알다시피 요즘 내 성적표가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손 감독이 함께 하자니 고맙기도 했다. 손 감독의 시도는 참 신선했다고 생각한다. 유머 코드가 두드러지는데 일단 등장 인물들이 다 쓸쓸하고 슬픈 사람이다. 내가 맡은 창인은 돈만 좇다 인생 망친 경우다. 우울증에 걸린 미망인 연주(김혜수), 외모 콤플렉스에 걸린 연주의 딸 성아(지우), 늙어가는 걸 믿고 싶지 않은 옆집 아줌마와 키가 작아 웃음거리가 되는 손 실장, 먹고살기 위해 후배 등치는 성식 등 나름의 사연이 있다. 재미있는 건 이 우울한 인생들이 모여 웃음의 시너지를 낸다는 거다.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억지 웃음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끔 억지스러운 상황이 있긴 하지만 내용히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요즘 코믹 영화는 과도한 욕설이나 상대에 대한 무시, 여성 외모 비하 등에서 웃음 코드를 꽤 많이 가져온다. ‘이층의 악당’은 다소 절제되면서도 깔끔한 재치로 승부수를 띄운다. 한석규 고민이 많았다. 창인이 하는 행동은 일단 웃겨야 했다. 하지만 원색적인 웃음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진솔하고 선을 넘지 않는 연기가 필요했다. 뭐랄까. 과장을 빼내고 자연스럽게 하려고 했다. 물론 연주 역의 김혜수가 대단했다. ‘닥터 봉’ 이후로 15년 만에 함께 연기했다. 김혜수는 지금껏 다양하게 변신하며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배우다. 이번엔 기존의 화려한 이미지를 벗고 우울한 이미지의 연기를 잘 소화해 냈다. 그걸 보는 재미도 맛깔나다. #영화 가운데 연주의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중년 남성인 창인을 겨냥해 “한국 남자는 나이 먹으면 남의 일 참견하는 자격증이 나오느냐.” 하는 말인데, 위계 서열의 정점에 있는 중년 남성과 소통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아랫사람과 소통하자고 해놓고, 아랫사람이 1분 말하면 1시간 훈계를 한다. 나이건, 남녀건, 지위건 대한민국 서열 문화가 소통을 가로막는다. 중년 남성들이 이말 듣고 뜨끔했으면 좋으련만. 한석규 하하. 나도 40대 중반 중년 남성이니 잘 안다. 영화는 불우한 인생들의 단면 외에도 이들의 소통 문제도 다루고 있다고 본다. 다들 듣는 척만 하지 들으려고 하질 않으니까. 그냥 “알았어, 됐어, 그만해.” 이런 말만 한다. 그런데 알긴 뭘 알아. 하하. 영화에는 세대 간의, 남녀 간의 소통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새로운 웃음 코드를 만들어 내고 있다. 소통 문제, 요즘 얼마나 이슈인가.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그것도 함께 가져갔으면 좋겠다. #안성기가 어느 색과도 어울리는 무채색이었다면 박중훈은 좀 더 밝은 빛깔을 냈다. 하지만 2000년대 빅 3는 원색에 가깝다. 지금의 관객들은 배우들에게 보다 선명한 컬러를 원한다. 하지만 한석규는 뭐랄까. 한지의 느낌이다. 절제의 미덕이라는 한국적 정서의 이면에 시대에 역행한다는 위험성도 있어 보인다. 한석규 한국인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인내가 미덕이고 낯도 많이 가리는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들이다. 나는 여기에 초점을 맞춘다. 좀 더 과해 버리면 현실성이 없어지지 않을까. 나를 한지에 비유한 건 참 적절한 것 같다. 나는 이런 이미지에 ‘만만함’을 더하고 싶다. 뛰어 봤자 벼룩인 그런 캐릭터. 참담한 상황을 벗어나려고 아등바등 애는 쓰지만 그래 봤자 제자리에 돌아오는 인물 말이다. 이런 연기에서 관객들이 쾌감과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 #한석규는 신인 감독과 작업하길 좋아한다. 영화 ‘은행나무침대, 초록물고기, 넘버 3,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등의 감독도 당시엔 모두 신인이었다. 이번 손 감독은 신인까진 아니지만 ‘달콤 살벌한 연인’(2006) 이후 첫 작품이라 좀 더 검증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한석규 신인 감독들의 절박함이 좋다. 영화에는 늘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 에너지를 무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게 신인 감독들이다. 사실 매너리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수도 없이 연기를 반복하다 보면 대충 하자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신인 감독들은 날 고무시킨다. 고민하고 공부하는 감독들의 모습에서 많은 걸 배운다. 이번에도 그랬다. 손 감독의 열정을 보면서 얼마나 뜨끔했는지 모른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사진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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