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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법조업하다 잡힌 중국어선 처리 골치

    한·중 어업협정 이후 우리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침범,조업하다 붙잡힌 중국 어선들이 새로운 골칫거리로 등장했다. 19일 전남 목포와 여수해양경찰서에 따르면 불법조업으로검거된 중국 어선들은 목포 해경 전용부두에 7척 51명이 현재 붙잡혀있다.또 여수항 전용부두에는 중국측의 138t급과 280t급 각 2척 등 4척에 선원 64명이 억류돼 있다. 이에 앞서 지난 18일 13척 104명이 입국 미통보로 벌금 250만원을 내고 강제 추방됐다.이들 불법조업으로 억류된 어선은 선박 t수에 따라 500만∼2,000만원의 벌금(담보금액)을내야만 풀려난다. 억류 선원들이 선상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감시하는 데 경찰 10여명이 고정 배치돼 있다.특히 선원들의 안전문제와 탈출 등에 대비,선상순찰 등 24시간 감시활동을 펴고 있다. 게다가 이들 선박이 장기간 해경 전용부두에 정박하면서 수시로 드나드는 경비정 운항에도 걸림돌이 되고있다. 특히 지난 16일자로 중국측의 금어기가 풀리면서 중국 어선들이 대거 우리 연안에 몰려올 것으로 예상돼 이같은 불법조업선박이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해경 관계자는 “최근 중국인 밀입국자 수장사건이 터지면서 배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선원들의 안전문제에 적잖은 신경이 쓰인다”면서 “벌금을 낼만한 형편이 안된 이들 선박이 장기간 억류될 가능성이 높아 고민거리”라고 밝혔다. 목포 남기창기자 kcnam@
  • [씨줄날줄] 張學良

    1936년 12월 12일,장쉐량(張學良)은 홍군(紅軍) 섬멸을 독려하기 위해 산시성 시안(西安)에 온 장제스(張介石) 총통을 연금해 버렸다.새벽 5시,시안에서 10마일 떨어진 온천휴양지에 머물고 있던 장제스는 26세의 쑨(孫銘九) 대위 손에 붙잡혔다.경호원들이 약간의 저항을 하는 사이 탈출한장 총통은 그러나 멀리 가지 못하고 호텔 뒷산 눈덮인 바위틈에서 잠옷 차림으로 발견 됐다. 신문기자 에드가 스노우는 종군기 ‘중국의 붉은 별’에장 총통의 체포 순간을 이렇게 적고 있다.“귀관이 내 동지라면 나를 사살하고 모든 것을 끝내게”“우리는 각하를 쏠생각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각하가 조국을 이끌고 일본에 대항하기를 요청할 뿐입니다.”그리고 쑨 대위는 장 총통을 업고 산을 내려왔다. 장 총통을 연금한 장쉐량은 ‘정치범 석방’‘내전중단과항일투쟁’‘집회자유 보장’‘손문박사 유지 이행’등 8개항의 요구조건을 내 걸었다.장제스가 구금돼 있는 동안 ‘홍군이 소녀들을 납치하고 있으며 여자들은 공동소유가 됐다.’‘장쉐량은 장 총통의 몸값으로 8,000만원을 요구하고있다’는 등 유언비어가 떠돌아 다녔다. 유언비어의 진원지는 주로 중국에서 발행되는 일본어 신문들이었다. 결국 장 총통은 항일 무력투쟁을 위한 8개항에 서명 했다. 2차 국공합작이 성사된 후 장쉐량은 자신의 전용기 편으로남경까지 장제스와 동행 했다.사태 수습후 장쉐량은 곧바로장 총통을 찾아가 “제가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을 받기 위해 각하를 따라 왔습니다.그래야만 기율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라며 처벌을 자청 했다.홍군에 가담하면 영웅이 될수도 있었고 장 총통을 죽이고 그가 국민당 정권을 장악할수 도 있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장쉐량은 군법회의에 회부 돼 10년 금고형을 받았다.장쉐량이 장제스를 죽이지 않았던 것처럼 장제스도 장쉐량의 목숨을 뺏지는 않았다.장쉐량은 국민당 정부가 패주할 때 함께 타이페이로 끌려가 연금생활을 하다가 1977년 5월에야하와이에서 노후를 보낼수 있도록 허용됐다.그리고 지난해4월 그의 100세 생일 때는 중국과 타이완 양쪽으로부터 축전을 받았다.12일 그의 부음을 접한 전세계 중국인들이 애도의 눈물을 흘리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김재성 논설위원 jskim@
  • 美, 탈북 김순희씨 망명심사 청문회 10월로 연기

    [로스앤젤레스 연합] 지난 5월 미국에 망명을 신청한 탈북자 김순희(37)씨에 대한 이민법원의 망명심사 청문회가 8월에서 오는 10월로 연기됐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 샌디에이고에서 김씨를 보호중인한청일(54.개인사업)씨는 19일 “김씨 변호인과 연방수사국(FBI) 심문내용 및 해석상의 차이 등으로 망명 허용 여부가 불확실하다고 판단해 청문회를 10월 중순으로 연기해 달라고 지난 7일 이민판사에게 요청했다”고 밝혔다. 샌디에이고 이민국과 FBI 수사관들은 그동안 여러 차례 심리검사와 직접 면담 등을 실시하는 등 첫 밀입국 탈북자 망명 처리에 신중을 기했다.수사관들은 김씨가 북한을 탈출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널 당시 물의 높이까지 까다롭게 묻는등 탈북자 진위를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씨는 “청문회에 대비해 변호인을 교체하든지 관선 변호인을 선임할 계획”이라며 “FBI는 그간 김씨 통역을 맡아왔던 딸(24.대학생) 대신 다른 통역을 고용할 정도로 철저하게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함경북도 무산 출신인 김씨는 지난 94년 아들(현재 11세)을 데리고 북한을 탈출,6년간 중국 옌볜(延邊)에 숨어살다지난해 11월 홍콩,필리턴,멕시코를 거쳐 지난 4월6일 샌디에이고-멕시코 국경을 통해 밀입국하려다 검거됐다.
  • ‘홍콩 엑소더스’…“물가 싸서 좋다” 본토행 러시

    홍콩인들의 본토를 향한 대거 탈출(?)이 줄을 잇고 있다.지난 49년 중국 공산화 뒤 일어난 본토 중국인들의 홍콩행 엑소더스와는 정반대 현상이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은 20일 ‘굿 바이 홍콩,헬로 매인랜드’란 제목의 기사에서 중국의 경제특구이자 홍콩 접경 지역인 광둥(廣東)성 선전(深 )에서 나타나고 있는 신조류를 소개했다. 홍콩인들의 본격 선전행 러시가 시작된 것은 지난 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뒤부터다.90년대 초반 선전이 경제특구로 지정되고 국경무역이 허용된 뒤 시작된 무역업자들의 소규모 이동이 최근 4년새 급류를 타고 있다.선전에 아예 주거지를 마련한 홍콩인은 4만명으로 추산된다.여기에 5만명이주말 및 휴가 별장을 선전에 갖고 있다.매일 선전과 홍콩 경계를 오가는 유동 인구는 25만명.세계 최대 규모다. 홍콩인들이 선전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다름아닌 값싼 물가 때문이다.홍콩에서는 엄두도 못 낼 크기의 집을 선전에서는 보유할 수 있다.선전에서는 한달에 400달러만 내면 방 3개 짜리 주택을 얼마든지 임대할수 있다.하지만 홍콩에서는 4분의 1정도 규모의 집을 세배나 더 비싸게 줘야 겨우 구할 수 있다. 따라서 홍콩인들을 겨냥한 각종 주거 단지개발 사업도 한창이다.주장강을 따라 조성된 ‘모닝 스타 빌라’는 수영장과테니스 코트,요트장을 갖춘 최고급 주거지이다.입주자의 절반 이상이 홍콩인이다. 세관 통과 규제 완화에 대한 여론도 거세져 현재 오전 6시30분부터 오후 11시30분까지로 돼 있는 왕래 허용 시간을 공휴일에 한해 30분 늘였다. 홍콩인들의 선전행 러시가 계속되면서 중국 반환 뒤 동북아 경제 중심축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홍콩은 그 역할을 본토에 뺏기고 예전의 활기마저 잃을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 (4)식민지 저항적 지식인

    근대 여성작가 중 가장 치마폭이 넓었던 최정희는 유파와연령을 초월하여 문우들과 교유했는데 그 중 소중한 것으로는 국제 입찰에 부칠만한 중량급 서간문도 포함되어 있다. 바로 김사량(金史良,본명 時昌,1914∼1950)의 편지이다.일본에서 더 유명한 김사량은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이 어떻게 살아야 했던가를 일깨워 준 근대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한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평양에서 1914년에 태어난 그는 평양고보 재학 중 배속장교와 일본인 교사 및 그들에 동조하는 조선인 교사 배척을 위한 동맹휴학을 주도해 퇴학처분을 받고는 형 시명(時明,교토제대 법학부 졸업 후 사법·행정 양과 합격,홍천·평창 군수,조선인 최초의 전매국장,8·15 후에는 중앙산림조합연합회 이사장 등을 지냄)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밀항했다.학창시절에는 연극에 관심이 많아 신협(新協)극단과 연계,장혁주(張赫宙)가 각색한 ‘춘향전’의모국 순회공연에도 참여하는 등 많은 활동을 펼치다 여러이유로 경찰에 자주 구금 당했다. 결혼 직후 하이네에 관한 논문으로 도쿄제대 독문학과를졸업(1939)한 그는 잠시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서울의 하숙집에서 출세작 ‘빛 속에서’를 썼다.이 무렵에 아마 서울의 잡지사와 문인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을것인데,최정희와의 인연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도쿄제대 대학원 입학허가를 받은 그는 6월 아내와 도일,일본과 한국 문단을 잇는 가교 역할을 맡게 된다.편지에서 김사량은 매우 조심스럽게 최정희의 ‘지맥’을 추천했으면 싶었으나,이미 일본의 다른 출판사(赤塚書房)가 추진하고 있던조선문학 선집에 관여하는 장혁주가 손을 댔기에 ‘흉가’로 하는 게 어떠냐고 묻는다.몇 차례 오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편지는 최정희가 자신의 소설을 일본에 소개되기를 희망한데 대한 답신 내용이 대부분이다. 장혁주는 누구였던가.김사량보다 먼저 등단한 그는 잡지사,문인 등을 후배에게 소개시켜 주는 역할을 했던 재일조선인 문단의 대선배였다.1905년 대구에서 출생한 그의 본명은 은중(恩重),창씨개명은 노구치 가쿠주(野口赫宙,첫 창씨명은 野口이었음)로,불륜사건에 연루되어 도일,본처와 이혼,일본여자와 재혼,8·15후 아예 일본으로 귀화해 버린 인물이다. 그는 초기의 민족적인 성향과는 달리 친일화 정도가아니라 아예 혈통까지도 일본인화 해야된다는 각오로 일본여자와 결혼을 감행한 친일문학인 가운데서도 발군의 활약을 보여주었다.1952년 10월,6·25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변장한 채 일본 ‘부인구락부’ 특파원 신분으로 입국하여 취재활동을 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 한국을 힐난하는 글을 써서 당시 문학단체가 법석을 떨게 했던 장본인이다.그는 아예 일본문학보국회에 가입하여 활동에 열을 올렸던 인물로한국을 영원히 등진 조국상실자가 되었다. 최정희의 ‘지맥’은 평론가 한식(韓植)이 번역을 맡은 것으로 드러나며,편지에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김사량은 ‘모던 일본’에다 이광수의 ‘무정’을 번역했는데,아마 이 사실은 고의로 언급하지 않은 것 같다.김사량은 ‘조광’에장편 ‘낙조’(1940.2∼1941.1)를 연재하면서 모국어 문제에 대하여 매우 겸허하게 최정희의 조언을 구하고 있지만사실 그는 ‘양국어 작가’로 손색이 없었다.그가 ‘삼천리’에 발표한 글로는 잡문 ‘조선문학과 언어문제’(1941.1)와 소설 ‘지기미’(1941.4)인데,이 두 사실을 편지에 대입해 읽으면 그와 최정희의 교유가 대략 1939∼1941년임을 알 수 있다.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짚고 넘어가자.‘문예춘추’는 1935년 일본최고의 아쿠다가와 (芥川)문학상을 제정했는데,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김사량이 이 상의 후보작으로 뽑혀 일약 일본문단의 유망주가 되었다(1940.2).1941년12월 9일 새벽 진주만 기습에 따른 사상범예방구금법으로감금당했고,유명세만큼 그에게 부하되는 역사적인 책무도커서 친일을 강요받았으나 거절했다. 일본 문학인들의 구명운동으로 이듬해 1월29일 석방된 그는 이내 귀향,조용히 지내려 했지만 강제동원을 피할 수 없었다.이효석(1942년 작고)이 있었던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사가 된 건 1944년 4월.강제 친일에 동원되면서도 일본문인들과의 술자리에서 격렬하게 식민통치를 비판하던 이투사는 1945년 2월 조선출신학도병 위문단으로 중국에 파견,일정을 마친 뒤 탈출,화북조선독립동맹에 참여하여 떳떳하게 해방을 맞았다.이때의 탈출 투쟁기는 ‘노마만리(駑馬萬里)’란 제목으로 남아있다. 1945년 11월 서울에서 그의 희곡 ‘호접’이 단성사에서 공연되는 등 광복 후 한국 좌익문단의 정화에 일조했던 그는이듬해 평양으로 돌아가 6·25때 종군작가로 참가,후퇴 도중 원주 부근에서 지병인 심장병으로 낙오된 채 행방불명된 게 그의 최후다(안우식 지음,심원섭 옮김 ‘김사량 평전’ 참고).김사량은 자신의 친일행각이 강제에 의한 것임을 문학인들에게 공공연하게 실토했던 점과 모험을 무릅쓴 극적인 탈출로 민족해방투쟁에 나섰던 문학인이었다는 점에서식민지시대 저항적 지식인의 전형으로 세계 저항문학사에손색이 없는 작가이다. 극적인 생애는 한설야(韓雪野)도 마찬가지다.기생 이름 같은 낭만적인 필명과는 달리 1900년 함주(함흥)에서 태어난그는 1976년 북한에서 사망할 때까지 영욕을 두루 겪은 비극적인 문학인의 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인물인데,유명한 한의학자 이제마(李濟馬)의 제자로,홍범도(洪範圖)등의 의병활동을 무마시키라는 일제의 강요를 거절코 고향을 떠나 피신했다.한설야는 경성제일고보에다니다가 서모(庶母)와 불화로 귀향,함흥고보로 전학,3·1운동에 관련되어 구금 체험을 한다.중국,일본 등지를 떠돌거나 유학 한 뒤 ‘조선문단’으로 등단한 그는 서울에 머물렀다가(1925∼1926),아버지가 많은 빚을 남기고 죽자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했다가 이듬해(1927) 귀국하여 카프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문학과 사상 연구회,‘한설야 문학의 재인식’).한설야가 조선일보에 입사한 것은 1932년경인데 함남지역에 특파됐다가 본사에 왔을 때는 경영권 문제로 매우 복잡 미묘할 때였다.창간 초기부터 경영진의 시국 순응 성향과 편집진의 민족의식 지향이 갈등관계를 유지했던조선일보는 계속 사주가 바뀌면서도 반일논조 때문에 정간과 필화가 잇따랐다.신간회(新幹會)운동으로 안재홍(安在鴻)사장이 구속되는 등 혼란을 틈타 고리대금업을 하던 채권자 임경래(林景來)가 조선일보 경영권을 주장하여 조병옥(趙炳玉)·주요한(朱耀翰)의 정통 편집팀과 대결,두 개의 조선일보 발행이라는 희극이 연출되다가 방응모(方應謨)가 참여,부사장을 거쳐 발행인이 된 것이 1933년 7월(사장은 조만식).이 혼란 속에서 한설야는 학예부에 근무하며 노동 현장소설의 신기원이란 평가를 받은 이북명(李北鳴)을 발굴하여 ‘질소비료공장’을 연재 중단 당하는 등 카프노선에 충실한 언론인으로 활동한 것 같다. 당시 정황을 한설야는 단편 ‘세로(世路)’에서 너무나 자세히 언급하여 한국언론사의 충실한 증인 역할을 해주고 있다.소설은 자신이 회사로부터 해직 통고서를 받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왜 그렇게 됐는가에 대한 자초지종을 회상하고있다.등장인물은 모두 실명이지만 사정상 이니셜을 썼는데,쉽게 알만한 인물들이 그대로 나온다.새 경영진은 기구와인사 개편을 통하여 그때까지 신문사의 주류였던 M일파(투옥 경력자 등으로 묘사)를 약화 시키는데,이 과정에서 인간적인 배신감과 사회적인 공분이 폭발한 한설야는 술자리에서 변절한 동료의 뺨을 후려친 게 화근이 되어 권고 사직을 당했다. 조선일보 사사(社史)에 의하면,1934년 1월 1일자로 대폭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는데,특히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가된 M(문석준)의 좌천도 바로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미뤄 볼 때 한설야의 퇴직도 이 무렵일 것이다.이 문석준은 1943년 함흥에서 한설야와 함께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한설야는 1944년 5월 석방) 당하는 주인공이다.1934년은 그에게 매우 불행한 한 해였다.해직 후 8월 그는 카프 2차사건으로 구속됐기 때문이다.달필인 한설야의 편지는 함흥에서보낸 것인데,아마 1941∼2년초 경 ‘삼천리’가 ‘대동아’로 개제하기 직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최정희가 한설야에게 잡지에 재수록할만한 짧은 작품을 추천해 달라는 청탁에 대한 회답 형식인 이 편지에서 그는 ‘강아지’와 ‘능금’을 천거했다.앞의 작품은 ‘한설야 단편집’에 실려 있는데,그게 1941년 7월에 나왔으며,뒤의 것은 1940년 간행 단편집 ‘귀향’에 게재된 것으로 볼 때,그리고 ‘대동아’개제가 1942년 3월부터였음을 감안하면 이 편지가 씌어졌던 시기는 밝혀질 것이다.이 무렵 그는 함흥에서 서점·극장·인쇄소 등에 손을 대는 등 생업과 창작에 전념하면서 해방의 날을 준비하고 지냈다.여담이지만 한설야는 광복 후북한에서 ‘김일성장군 전기’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쓴 한편 소련(1947),평화옹호 세계대회 참석차 프랑스(1949) 등지를 방문하는 등 중추적인 역할을 하다가 1962년 비판당한 후 불행한 최후를 마치고 작품도 판금,아직도 전면적인 해금이 안된 상태에 있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대한광장] 기업활력 살려야 경제 산다

    수출의존 비율이 높은 우리 경제의 대외환경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지난 3월 이후 연속 4개월째 수출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그나마 올들어 회복세를 보이던 소비지출도3·4분기 이후에는 위축될 조짐이다.당연히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그동안 정부는 경기진작을 위해 전방위의 경기활성화 대책을 내놓았으나 정책 내용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수출증대를 외치지만 미국 경기의 회복을 기다리는 수동적인정책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마치 하늘만 바라보는천수답(天水畓)을 가진 농심(農心)과 같다. 내수 진작을 위한 추경예산과 감세는 여야간에 이견을 보이고 있으며,설령 의견접근이 이루어진다 해도 이들 정책은 미래의 자원을 오늘 미리 끌어다 쓰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단기적인 경기부양은 현상을 다소 진정시킬수는 있을지언정 경제를 근본적으로 강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또한 경제의 불확실성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의저금리 정책은 투자와 소비를 촉진시키지 못한 채, 물가상승 압력을 높여 자원배분의 왜곡을가져올 공산이 크며 금리생활자의 생계를 위협할 뿐이다. 최근의 경기침체의 가장 큰 문제는 극심한 투자부진이다. 투자는 미래의 성장잠재력을 키우는 경제활동이기 때문에투자부진은 소비위축과 수출부진보다 더욱 경계해야 한다. 설비투자 증가율은 이미 지난해 4·4분기이래 올 2·4분기까지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이런 와중에 창사 이래 최대 영업실적을 올린 현대자동차가 지난 15일 긴축경영을발표했다.하반기부터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한 삼성,LG,포철에 이은 현대자동차의 선제적 긴축경영으로 이들 그룹의설비투자 조정이 불가피해져 가뜩이나 위축된 투자심리가더욱 얼어붙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투자는 기대심리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경기침체기일수록 투자지출은 비관적 전망이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는 ‘머피 법칙’의 지배를 받기 쉽다.따라서 경기활성화 대책의 초점은 투자심리를 진작시켜 투자를 촉진하는데 맞춰져야 한다.지난 7월 삼성경제연구소가 증권거래소에 상장된모든 기업을 대상으로 투자활동에 대해 설문 조사한 결과투자부진요인으로 경기침체 이외에 기업활력 부족,투자재원조달 애로,정부규제 등이 지적됐다.투자촉진을 위해서는투자의 발목을 잡고 있는 이들 ‘구조적’ 애로 요인에 정책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 투자재원조달 애로와 관련하여 최근 한국은행이 발표한은행권의 대출 양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6월말 현재 작년말 대비 기업대출 증가율은 2.2%인 반면 가계대출 증가율은 17.5%에 이른다.물론 기업의신용위험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기업대출이 이토록 부진한 것은 은행들의 신용위험 관리 역량이 향상되지 않았거나 은행과 기업 관계가 아직도 정상화되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활성화 대책은 기본적으로 구조조정의 토대위에서 추진되어야 한다.또한 투자촉진을 위해서는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에 보다 많은 경제자유를 허용해야 한다.규제완화는 기본적으로 시장경제로 가는 길이지 기업에 특혜를 주는 것이 아니다.최근 진념 부총리의 발언으로 화제가되었던 ‘한국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중국’도 그 요체는중국의 실사구시(實事求是)적 경제관과 기업인에 대한 우대,그리고 중국관료의 전문성과 서비스 정신에 기초한 기업지원을 의미한 것이다. 투자촉진의 관건은 기업 스스로 기업활력을 되찾는 것이다.미래를 투시하며 모험을 무릅쓰고 시장 기회를 찾아내는 ‘기업가 정신’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장하는 것이며,기업가 정신은 경기침체기에 더욱 필요한 것이다. 우리 경제의 유일한 탈출구는 단기적인 경기부양이 아니라 보다 장기적인 시각에서 기업가 정신과 기업활력을 회복하고 경제의욕을 되찾는 것이다.끝없는 정쟁과 잦은 정책변경으로 국민의 경제의욕을 떨어뜨리고 기업의 발목을잡는 풍토에서는 기업의 활력이 되살아 날 수 없다.긍정적기대가 성공을 낳는 경험법칙을 ‘샐리 법칙’이라고 한다. 요즘 같은 때일수록 이같은 성공예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 조동근 명지대 투자정보 대학원장
  • [데스크 칼럼] 8·15에 돌아본 한·중·일 민족성

    30여년전,중학교 시절 국어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서울 대연각 호텔 화재사건이 화제에 올랐다. 선생님은 투숙객들이 화재현장을 탈출하는 방식을 두고 한·중·일 3국의 국민성을 재미있게 비유했다. 외교관이었던 중국인은창문 앞에 서서 구조될 때까지 기다리다 가망이 없자 홀연히 연기속으로 사라지고,일본인은 재빨리 침대시트를 찢어만든 줄을 타고 내려왔다는 것이다.우리는 침대 매트에 대충 몸을 의지해 창밖으로 뛰어내렸다고 했다. 중국인의 대국 기질과 일본인의 치밀함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정신’의 표상이었다는 자조섞인 분석도 곁들였다. 기자가 돼 중국과 일본을 취재할 기회를 여러차례 가졌다.그 가운데 지난해 9월 한일정상회담이 열렸던 아타미(熱海)가 인상깊다.숙소인 호텔 고층에서 내려다 본 아타미시가는 조그마한 어촌인데도 그렇게 정갈할 수가 없었다. 어촌 특유의 비릿한 냄새 대신 신선한 바닷바람이 앞섰고,길다랗게 펼쳐진 해변가에는 우리네와 달리 과자봉지나 음료캔을 찾아볼 수 없었다.건물 옥상의 깨끗함에서는 감탄이 절로 우러 나왔다.‘질서와 청결면에서 우리를 앞서 있구나’ 기자생활을 하면서 동북아 3국을 비교할 때면 중학교 시절 들었던 은사의 평가가 원류(源流)가 되어 떠오른다.또다른 차이를 찾으려 무던히 애썼지만,은사의 분석은 너무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일본이 패전 56년이 지난 오늘,왜곡 역사교과서를 통해극우경향을 강화하고 13일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기습적으로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를 강행했다.어렵사리 일궈낸 ‘21세기 한·일 공동 파트너십’복원은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당초 계획했던 15일을 이틀앞당긴 외교적 절충점을 모색했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경제강국으로서 일본의 오만함이 깔려있다. 또 분,초를 다투는급박한 화재현장에서 천을 찢어 줄을 만드는 ‘영악함’의다른 표현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중국 개방 초창기에 직장을 그만두고 퇴직금을 털어 중국으로 진출한 사람들이 많다.치밀한 사전 준비없이 넓은 시장만을 보고 무작정 건너갔고,대개가 갖은 고생만을 하다돌아왔다.그러나 척박한 환경에서 우리 특유의 친화력과부지런함으로 성공한 사람도 더러 있다. 당시 주중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던 한 외교관이 “10명 가운데 2∼3명은 성공했다”며 “일본인은 엄두도 내지 못할일”이라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그러면서 무모한 듯보이지만 부딪쳐 보고 이를 극복해내는 끈질김이 없었다면,즉 우리가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똑같았다면 벌써 역사에서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공공질서와 깨끗함에서는 일본에뒤질지 모르지만, 우리 민족을 지탱하는 특장이 있다는 것이다. 불이 난 고층호텔에서 침대 매트를 붙들고 뛰어내리는 저돌성도 그 중 하나라면 지나친 국수주의적 시각일까. 일제 35년 치하에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독립운동을 한민족을 지구상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우리 아니면 누구도따라 할 수 없는 끈질기고,고난도 마다하지 않은 대장정이었다.‘우리 스스로에 대한 칭찬’-8·15 광복 56주년를맞는 단상이다. ▲양승현 정치팀장
  • [씨줄날줄] 환각파티

    인간이 마약을 사용한 것은 기원전 1500년대부터다.당시지중해 연안의 파피루스에는 “심하게 울어 대는 어린이에게 양귀비 즙을 먹였다”고 적혀 있다고 한다.그 뒤 마약은육체적 고통에서 탈출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마약을뜻하는 영어 ‘나르코틱스(narcotics)’는 고대 그리스어로 ‘무감각,마비’를 의미한다.그리스인들은 양귀비꽃에서뽑아낸 아편을 진통제로 썼는가 하면 옛 중국의 전설적 의사인 화타(華陀)는 마비탕이란 것을 병자에게 마시게 한 뒤수술을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마약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변질된 것은 19세기 말이다.당시 미국 약국들은 ‘진정시럽’이란 이름의 마약을 공공연히 팔았으며,프랑스 문인들은 대마초 피우는 것을 멋으로 여겨 빅토르 위고나 보들레르와 같은 작가는 환각상태에서 집필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국내에서는 마약류가 1980년대 후반부터 유흥업소와 조직폭력배를 중심으로 급속히 퍼졌다.정부의 단속이 강화되면서 밀수출 경로가 막혀 재고량이 급증한 탓이었다.1980년 740여명에 불과하던 마약사범은 1999년 1만명을 웃돌아 그숫자가 19년만에 14배나 늘었다.말 그대로 독버섯처럼 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마약 투약계층도 회사원·주부는물론 의사까지 확산되는 가운데 급기야 지난해에는 한 유명사찰의 주지스님마저 마약복용 혐의로 적발되기도 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마약 복용장소가 날로 공공화되고 있다는 점이다.최근 서울 신촌과 이태원을 중심으로 엑스터시등 신종 마약을 복용한 채 광란의 ‘테크노파티’를 벌여온 재미교포와 대학생들이 검찰에 적발된 것은 충격적이다. 이들은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 채 마약흡입을 춤과음악을 즐기기 위한 ‘통과의례’로 여겼다니 말문이 막힌다.3,000명 입장 규모의 한 대형 파티장에서는 60∼70%가환각상태에서 춤을 췄다는 파티 참가자의 진술 앞에서는 아찔한 느낌이 든다. 내년 월드컵대회를 맞아 서울 한복판에서 외국의 훌리건까지 가세한 가운데 춤과 마약이 결합한 독일의 ‘러브 퍼레이드’와 같은 대형 행사가 열리지 말라는 보장이 없으니이를 어찌 해야 하는가.악성 종양은 조기에 제거하지 않으면 목숨까지 앗아간다는 점을 당국이 모를 리 없을 터인데말이다. 박건승 논설위원 ksp@
  • 中, 북한 탈출 난민 강제송환

    중국 정부가 지난 5월부터 북한을 탈출한 난민들을 북한으로 강제귀환시키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국제자선단체인 ‘국경없는 의사회’의 보고서를 인용해 23일 보도했다. 국경없는 의사회는 중국의 강제귀환 조치는 지난달 장길수군 등 북한 출신의 난민 가족 7명이 베이징 UN난민국 사무실에서 망명을 요청한 이후 절정에 달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지금까지 수천명의 북한 난민들이 강제귀환됐으며 북한에서 심문과 재교육,수감,체형 등의 보복조치로 죽는 경우까지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과 북한의 국경지역에서는 중국 공안들이 집집마다돌아다니며 신분을 확인하고 있으며 북한 난민들을 도와준중국인들에겐 500달러에서 최고 4,000달러의 벌금을 물리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이번 강제귀환 조치는 중국 전역에서 일어난 ‘범죄추방 캠페인’과 맞물려 북한 난민들에 대한 편견으로까지이어지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이들에 대한 체포와 강제귀환에 캠페인의 초점이 맞춰졌다고 강조했다. 국경없는 의사회는 중국의 이번 조치는 중국이 서명한 UN의난민보호규정에 위배되는 일이라며 2008년 하계 올림픽을 유치한 중국을 강력히 비난했다. 워싱턴 백문일특파원 mip@
  • [사설] 왜 대기업이 한국 떠나나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잇달아 계열사 본사의 해외 이전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다.지난달 LG전자가 세계 최대의 브라운관 생산업체인 ‘LG필립스 디스플레이’의 본사를 네덜란드에 두기로 한 데 이어 하이닉스반도체는 본사 핵심조직을 미국으로 옮기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어느 4대 그룹은 특정지역이나 제품에 경쟁력이 있는 계열사 본사를 해외로 이전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기업들의 한국 탈출 바람은 글로벌 경쟁시대에 살아 남기 위해 대변신을 꾀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다.지구촌 경제의 통합추세에 비춰 볼 때 현지화를 통해 세계 시장 공략에 나서는 것은 바람직한 방안이 될 수있다.게다가 본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찾아 다니는 것이기업의 생리이고 보면 대기업 계열사 본사의 해외 이전은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국내의 기업경영 현실을 감안할 때 대기업들의 그러한 움직임이 단지 세계시장 공략을 위한 의도에서만 비롯됐다고 보기에는 아무래도 미심쩍은 점이 있다.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지난 5월 발표한 ‘기업하기 좋은 나라’ 조사 결과에서 한국은 조사대상 25개국 가운데 18위에 그쳐중국보다 순위가 낮았다.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의 ‘기업하기 좋은 정도’ 순위에서도 세계 49개국 중에서 31위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그만큼 국내 기업환경이 여전히 열악하다는 얘기다. 우리는 30대 기업집단제도 등이 존속되어야 하는 현실적당위성을 인정한다.그렇더라도 이러한 제도 때문에 파생되는 불필요한 규제나 시대변화에 동떨어진 규제는 과감하게철폐하거나 완화하는 것이 옳다.또 금융특혜를 받고서 살아남아 시장질서를 깨뜨리는 기업은 하루 빨리 퇴출시켜 우량기업이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그래야 국내 설비투자가 자연스럽게 늘어나고 산업 공동화(空洞化)도 막을 수 있게 된다.
  • 뉴스피플 7월12일자 소개

    대한매일신보사가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뉴스피플’ 최신호(7월3일 발매 7월12일자)는 벼랑 끝 대결로 치닫는 노·정 관계를 커버스토리로 다뤘다.‘6·12 연대파업’을 계기로 강경책으로 선회한 정부의 노동정책 문제점과 정권퇴진운동에 나선 노동계,노·정 대립을 바라보는 재계의 속셈등을 정밀 분석했다. 개발독재 시대 이후 수출입국의 첨병 역할을 해오다 디지털 시대에 접어 들면서 생사의 기로에 선 종합상사의 영광과 그늘을 특집으로 엮었다.또 세무조사로 촉발된 ‘신문파동’을 집중조명했다.검찰에 고발된 사주와 신문사에 대한수사 방향,정치권의 대결,조선·중앙·동아일보의 움직임등을 밀착취재했다. 최근 무세제 세탁기를 내놓을 것이라고 발표한 일본 산요전기보다 훨씬 앞서 무세제 세탁기 기술을 개발하고도 상품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 업체들의 속사정과 10만원권 등 고액권 발행을 둘러싼 논쟁을 살펴보았다.북한을탈출한 장길수군 가족 일행의 극적인 ‘한국 망명 드라마’를 중국 현지에서 실감나게 취재했다. ‘문학마을’에서는 우리 문단의 진정한 리얼리스트인 이성부 시인을 초대해 그의 시 인생을 들어 보았으며 ‘스타스페셜’에서는 1인극 ‘셜리 발렌타인’에서 연기력을 아낌없이 뿜어내는 배우 김혜자씨를 만날 수 있다.안충준 장군이 들려주는 ‘신(新)장군의 비망록’은 94년 홀 준위 월북사건 당시 급박했던 한미연합사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 조선족등 107명 밀입국 도주

    북한 동포와 조선족 등 100여명이 서해안으로 밀입국한뒤 내륙으로 달아나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하지만 군과 해경은 이같은 사실을 주민 신고가 있기 전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2일 충남 당진경찰서와 국가정보원 등 합동심문조에 따르면 지난 1일 오후 10시15분쯤 서해안을 통해 당진군 송산면 유곡리로 밀입국한 북한동포 김 모(37.함남 장진군)씨가 다리가 부러진 채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을 주민 이모(42)씨가 발견,경찰에 신고했다. 김씨를 조사한 합심조는 김씨가 지난달 24일 오후 9시쯤중국 다롄(大連)에서 일행 107명과 함께 3척의 소형 어선에 나눠 타고 바다로 나가 모선에 옮겨탄 뒤 29일 새벽 와우도(지역 미상)에 도착,휴식을 취하다가 이날 오후 9시쯤서해안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하선 뒤 대형버스 1대와 봉고 승합차 3대에 나눠타고 3시간여 동안 달려 당진군의 한 고층아파트에 도착한뒤 안내원에게 1인당 1,340만원씩을 지불, 승용차에 2∼3명씩 나눠타고 도주했다. 김씨는 지난 90년부터 94년 4월까지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벌목공으로 생활했으며 94년 2월엔 블라디보스토크에있는 한국영사관에 찾아가 한국으로의 탈출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
  • [사설] 길수네 가족 입국 이후

    북한을 탈출해 중국 등지를 떠돌던 장길수군 가족 7명이지난달 30일 서울에 무사히 도착했다.이들은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의 권고대로 난민지위를 부여받지는 못했지만 중국이 제3국으로 추방하는 형식으로 싱가포르와 필리핀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길수네가 베이징의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에 망명을 요청한지 불과 나흘만에 뜻을 이루게 된 데에는 중국 정부의 배려가 큰 도움이 됐다.우리는 길수네 문제가 인도적 차원에서 잘 해결된 데 대해 중국정부에 감사하며 정부의 보이지 않은 노력에도 격려를 보낸다. 길수네 가족은 북한을 떠나 길게는 4년여,짧게는 2년 가까이 공포와 굶주림에 떨며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왔다.길수네가 한국에서 따뜻한 환영과 정부의 보살핌 속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란다.그러나 길수네의 운명과는 달리 아직도 중국 등지에는 25만∼30만명에 이르는 북한이탈주민들이 있다고 한다.이들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도적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이 조선중앙통신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는형식으로 “장길수 가족은 피난민이 아니라 명백히 비법 월경자이며 조국의 형편이 좋아지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려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면서 “이 사건은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 음모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비난했다.이렇듯 길수네 문제는 분명히 북한과 중국,한국과 중국,남북관계에서 서로를 불편하게 하는 사안이었다.벌써 길수네 가족문제가 남북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느니,중국에있는 북한이탈주민들의 처지가 어려워 질 것이라는 등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중국정부도 국제비정부기구(NGO)들이 중국사회의 안정을 해치고 있다며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우리는 북한이탈주민 문제는 인도적 차원에서 다뤄야 함을 다시한번 강조한다.개개인이 스스로 살 땅과 체제를 선택하는 것은 기본권리이며 세계는 이들에게 난민의 지위를 인정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길수네 처리과정에서 몇가지 선례와교훈을 찾아야 할 것이다.이번에 중국과 한국이 선택했듯이 북한이탈주민 문제는 정치적으로 대처할 것이 아니라 인도적 정신에 따라 차분하게 처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누구를 자극하고 도발하는 성격의 사안이 아닌 것이다.북한도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인권이 보장되고 있지 않은현실에 대해 반성해야 할 것이다.우리 정부는 대부분의 북한이탈주민들이 한국행을 원하는 현실을 감안해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탈북자 대책’을 세워 실천해 나가기 바란다. 언론도 북한이탈주민 문제를 냉전적 사고나 흥미위주로 다뤄 사태를 어렵게 만들 것이 아니라 차분하고 조용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 장길수가족 제3국행/ 中정부 입장

    [베이징 김규환특파원] 중국 정부가 29일 전격적으로 장길수군 가족 일행 7명을 싱가포르로 보내기로 결정한 데는 대내외적으로 여러 요인들을 고려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우선은 이들을 북한에 되돌려 보내지 않음으로써 대내외에 중국이 인권을 보호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제고하고 이를통해 가까이는 올림픽 유치를 위한 효과를 극대화하려 한것으로 풀이된다. 베이징의 한 외교소식통은 “이번 사건을 지연시켜봐야 중국 정부가 인권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나쁜 이미지를 심어줄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압력이 거세질 가능성이 높아 전격적인 싱가포르 출국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중국이 전력을 투입해 추진중인 2008년 하계올림픽 유치여부는 오는 7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결정된다.중국정부는 2008년 올림픽 유치를 21세기 세계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데 있어 국운을 좌우할 결정적인 국가대사로 보고 이의 유치를 위해 총력을경주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이들 일행 7명의 건강을 문제 삼아 싱가포르를 택하게 한 것은 이들 일행을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출국시키기 위한 외교적인 고려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난민으로 인정해 이들이 가기 원하는 행선지인 한국으로 곧바로 보낼 경우 당장 전통적인 우방국인 북한과의 관계에 큰 부담을 안게 된다. 또한 이들 일행에게 난민지위를 인정해줄 경우 탈북자들의 UNHCR로의 탈출 러시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중국당국은이번에 이들을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제3국인 싱가포르로 출국시키기 위해 신병치료라는 절묘한 묘안을 찾아낸것이다. 이번 사건이 중국에 있는 많은 탈북자들의 해결에 하나의선례가 아니라 ‘매우 예외적인 케이스’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중국당국이 노력한 흔적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따라서 이번 사건 해결에 중국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성의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유사사건이 다시발생했을 때 중국이 또다시 이번과 같은 결정을 내려 줄지는 미지수다. 현재 중국내 탈북자는 적게는 10만명에서 많게는 30만명에 이른다는 게 관련 단체들의 통계다.앞으로 줄줄이 이어질지 모르는 유사사건에 대비에 한·중·UNHCR등 3자가 지속적으로 적용가능한 해결모델을 찾아야한다는 게 이곳 전문가들의 충고다.
  • [사설] 길수네 가족을 한국으로

    26일 베이징 소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에 들어가난민 지위 인정과 한국 망명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탈북자 장길수군(17) 일가족 7명의 신병 처리문제가 한국과 중국간의 외교 현안으로 등장했다. 정부는 사태가 발생하자 곧바로 주중 한국대사관과 제네바대표부를 통해 중국 정부와 UNHCR측에 이 문제의 인도적 해결을 당부하고 이들 7명의 한국 수용 의사를 밝혔다.27일에는 외교통상부 등 관련 부처들로 긴급 대책반을 구성하는등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지난해 초 중국을 거쳐 러시아로 탈출한 탈북자 7명이 한국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이들이 북한에 송환된 낭패를 겪은 바 있는지라 정부는 우선 길수네 일가족이 북한에 강제 송한되지 않도록 하는 데외교적 총력을 기울일 방침이라고 한다. 길수네 일가족은 현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에서 보호를받고 있지만,난민 지위를 인정하는 주체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이 아니라 체류국인 중국 정부다.따라서 사태 해결의열쇠는 중국 정부가 쥐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 정부는 탈북자들을 국제법상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식량난 등 경제적사유로 밀입국한 불법 체류자로 보고 북한과의 ‘변경 지역 관리에 관한 협정’에 따라 탈북자들을 북한에 강제 송환해 왔다.길수네 가족들의 신병 처리와 관련해서 우리가걱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중국 정부로서는 길수네 일가족에 대한 난민 지위 인정이 다른 탈북자들에게 선례가 된다고 판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 정부에 호소한다. 1999년 1월 북한을탈출한 길수네 일가족은 모두 17명이었다.이 가운데 5명은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한으로 송환됐고,그중 2명은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돼 있으며,중국에 있던 가족들 가운데 3명은몽골로 넘어 갔고 나머지는 행방불명 상태에 있다.길수네는한가족으로서 겪을 수 있는 비극을 이미 겪을 대로 겪었다.이들이 북한으로 송환됐을 때 어떤 일을 당할지는 중국 정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길수네 가족들의 사연은 이미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세계는 지금 인권문제와 관련해서 중국의 결정을 주시하고 있다.중국 정부는 인도적 차원에서 길수네가족들이 한국으로 올 수 있도록 특단의 결정을 내리기 바란다.
  • 탈북 장길수가족/ 농성 UNHCR현장 주변

    북한에서 탈출한 장길수군 가족 7명이 26일 첫날밤을 지낸베이징의 유엔 난민고등판무관(UNHCR) 사무소 주변은 27일부터 공안 차량들이 목격되고 취재기자 수도 부쩍 늘어나는등 하루 전보다 긴장이 높아졌다. ■‘길수 가족’이 UNHCR 사무소에 들어간 이틀째인 이날공안차량이 최소 5대나 목격됐고,정·사복 공안원들이 건물안팎에 크게 증가, 중국이 장길수군 가족 7명에 대한 체포작전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공안과 공안 차량은 26일 밤부터 이 주변에 배치되기 시작,한때 장길수군 가족도 크게 긴장한 것으로 전해졌다.이들은 난민 지위 인정 등 사태가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지 UNHCR 지역에서 나오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유지하고 있다고 소식통들이 전언. ■UNHCR 사무실은 한국총영사관이 100m 거리에,중국주재 한국대사관이 약 1㎞ 떨어진 곳에 있는 등 각국 대사관과 대표부가 들어서 있거나,외교관·준외교관들이 거주하는 외교단지 지역.콜린 미첼 중국주재 UNHCR 대표도 26일 밤 이곳은 치외법권 지역으로 중국 공안이 넘어들어 올 수 없다고경고성 발언을 했다. ■UNHCR 사무실에는 27일 아침 일찍부터 외국 기자들 수가부쩍 증가,TV 카메라 등을 들고 1층 복도 바닥에 진을 치고앉아 사태 진전 소식만 기다리고 있는 모습.그러나 전날 친절했던 중국 요원들은 기자들이 2층 1-2-1호실 UNHCR 사무실로 들어가려 하자 엄숙한 표정으로 “모른다”는 대답으로 일관,달라진 중국측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오전 10시35분께 김일성 배지를 단 북한대사관 관리 2명이 UNHCR쪽으로 가려고 1층 로비로 들어섰다가 외신기자들이 집중적으로 사진을 찍고 질문을 퍼붓자 복도 중간에서도망치듯 돌아가기도.감청색 양복을 입은 1명은 오른손에서류파일 등을 넣을 때 쓰는 갈색 가죽 케이스를 들고 있어그 내용물이 무엇인지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나 기자들이 채 질문할 틈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베이징 김규환특파원 khkim@
  • 탈북 장길수가족/ 정부 발빠른 대응

    정부는 장길수군 등 탈북자 7명의 망명 신청과 관련,이들의 북한 강제송환을 막는 데 외교적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정부는 이번 사태가 기본적으로 중국 정부의 주권과 관련한문제라는 점에서 기민하게 대응하되,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한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현재 지난해 러시아로 탈출한 탈북자 7명이 중국을거쳐 북한으로 송환됐던 사례가 결코 되풀이돼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이에 따라 사태 발생 이틀째인 27일 서둘러 외교부 담당국장을 반장으로 긴급대책반을 구성하고,주 제네바 대표부와 주중 대사관에 긴급 훈령을 보내 중국 정부와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측과 물밑 접촉을 벌이는 등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정부는 탈북자 7명이 유엔의 면책특권이 인정되는 UNHCR사무소에 머물고 있어 중국 정부가 강제로 신병을 인도하는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중국이 내달중순 올림픽 개최지 선정 투표를 앞두고 있는 만큼 국제적여론을 의식, 탈북자의 자유의사를 최대한 존중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제3국 추방후 한국 입국’이라는 절충안이 거론되는 것도 중국과 북한 등 관련 당사국들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다. 박찬구기자 ckpark@
  • 탈북 장길수가족/ 탈북자 망명 해외반응

    미국과 일본, 홍콩 등은 중국이 장길수군 일가족의 망명요청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국은 최근 북한과의 대화 재개를 위한 물밑 대화가 진행중인 가운데 발생한 이번 사건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미국은 최근까지 대북대화 의제와 관련,북한과 상당한 신경전을 벌여왔는데 이번 사건이 북한내 인권 개선 요구로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특히 공화당 일각에서는 이전부터 북한 탈북자 인권문제를 부각시키려 해왔기때문에 매우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최근 중국과 정찰기 충돌사건 이후 냉랭해진 상황을 의식,국무부나 다른 정부기관에서는 일체 이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하지만 중국 정부의 인권에 대한 시각과 관련지어 탈북자들이 긍정적으로 처리되길 바라는 시각을 강하게 내비쳤다.최근 중국이 세계무역기구 가입과 올림픽 유치를 위해 국제여론 무마에 애쓰고 있는 점을 감안,지난해 1월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이 난민으로 인정한,러시아에서 붙잡힌 탈북자를 북한에 송환해 비난받았을때와는 달라진 태도를 보여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마이니치(每日),도쿄신문 등은 국제면에 이들을 사진과 함께머리기사로 보도하며 중국측이 어떻게 대응할지에 비상한관심을 나타냈다. 아사히(朝日)신문은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베이징에있는 유엔 기관에 직접 호소한 것은 드문 일”이라면서 “중국 정부와 UNHCR 모두 향후 대응에 고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신문은 “북한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는 중국 정부는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면서 “이들의한국행에는 중국 정부의 협력이 필요하지만 그럴 경우 북한의 반발이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홍콩의 일간 명보(明報)는 27일 이번 사건이 지난 97년 황장엽 노동당 비서 망명 때처럼 심각하지는 않지만 중국 정부에는 진퇴양난에 빠질 만큼 두통거리가 되고 있다고 논평했다. 워싱턴 최철호·도쿄 황성기특파원 marry01@
  • 장길수군 탈북서 망명요청까지

    26일 베이징 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사무소를찾은 ‘길수 가족’의 지난 4년은 처절했다.주린 배를 채우려고,한 조각 자유를 얻으려 차디 찬 두만강을 건넌 이들은 함께 숨어 살던 피붙이가 체포돼 북한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길수(17) 가족의 탈북행렬이 시작된 것은 지난 97년 3월. 길수의 외할머니 김춘옥씨(68)가 먼저 두만강을 넘었다.이어 99년 1월까지 길수의 어머니 정선미씨(45)와 이모 등 일가족 17명이 중국에 숨어 들었다.이들은 중국 공안과 북한공작원들의 눈을 피해 중국 동북 3개 성(省)을 떠돌며 피말리는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이들에게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사연이 국제사회에알려지면서부터다.지난 99년 10월 서울 비정부기구(NGO) 세계대회 그림 전시회에 길수가 북한의 참상을 묘사한 그림을 내보낸 것.중국과 무역업을 하던 문국한씨가 길수 가족의애끓는 사연을 듣고 99년 8월 결성한 ‘길수가족구명운동본부’의 노력 결과였다. 이 그림은 서울뿐 아니라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 앞에서도전시돼전세계인들에게 북한 난민의 인권문제를 환기시켰다.2000년 5월에는 서울에서 ‘눈물로 그린 무지개’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다.국내는 물론 뉴스위크,영국 채널 4TV,가디언,텔레그래프 등에 집중 소개됐다.최근에는 북한의공개처형과 인육을 삶은 그림 등이 추가로 공개됐다. 99년 6월 공안에 체포돼 북송된 길수의 이모 정명숙씨(43)가 지난해 1월 재탈출에 성공,가족과 합류했다.그러나 기쁨도 잠시.같은 해 3월 길수의 어머니 정선미씨와 정씨의 조카 김광철씨,외할머니 김춘옥씨 등 5명이 공안에 적발돼 북한으로 강제 송환됐다.정씨와 김광철씨는 지난 5월 ‘해외에 공화국 실상을 폭로한 죄’로 함경북도 정치범 수용소에 이감됐다.이 가운데 외할머니 김춘옥씨가 고령을 이유로,김광철씨의 부인 이성희씨가 젖먹이를 달고 있다는 배려로석방됐다. 지난 5월 김춘옥씨와 이성희씨는 북한 재탈출을 시도했다. 이씨는 실패해 북한 당국에 체포됐다.이들에 대한 북한 당국의 심문 과정에서 중국에 남은 가족의 은신처가 알려지고,나머지 사람도 북한 당국에 의해 반국가 행위자로 지명수배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구명운동본부측은 곧바로 베이징 주재 UNHCR를 재차 방문,강제송환 사실을 알리고 난민지위 인정을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가족 가운데 3명은 몽골로 탈출했고,탈출을모색하던 다른 3명은 행방불명 상태다.길수군과 외할아버지 정태전씨(69)와 외할머니 등 남은 가족은 7명.베이징 UNHCR 사무소 문을 두드린 이들은 온몸을 줄로 엮고 ‘송환되면 자결하겠다’고 버티고 있다.난민 요청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길수 가족 구명운동본부 관계자는 “이들에게는 이번이 생존의 기로에 선 마지막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김수정기자 crystal@. ***도피일지. ◆1999년 1월 김봉수 일가족 17명 두만강 건너 탈북◆10월11∼15일 ‘99서울 NGO 세계대회’에서 장길수군 그림전시회 개최◆11월13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 앞거리 그림 전시회 개최◆2000년 3월20일쯤 길수군 어머니 정선미,김춘옥 등 5명강제 북송◆5월5일 길수군 ‘눈물로 그린 무지개’(문학수첩) 출판◆6월25일∼2001년 4월30일 서울 전쟁기념관 특별전시실에길수군 그림 전시◆9월21일 ‘길수가족구명운동본부’측이 베이징 주재 UNHCR 방문,난민 지위 인정 요구,거부당함◆2001년 3월26일 ‘운동본부’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 방문 면담,길수군 일가족 현황보고◆5월15일 정선미,김광철 2인 반국가행위죄로 함경북도 정치범 수용소로 이송◆5월21일 김춘옥 재탈출 성공◆5월22일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에서 길수군 가족 소개.‘운동본부’ UNHCR 재차방문,강제송환·중국거주 가족들신변보호 요청◆6월26일 베이징 주재 UNHCR에 난민 신청
  • 탈북 7명 中서 한국망명 요청

    [베이징 김규환특파원·박찬구기자]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머물러 왔던 북한 주민 7명이 26일 오전 베이징(北京) 차오양취(朝陽區) 소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에 전격적으로 들어가 난민지위 부여와 한국 망명을 요청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UNHCR 안에서 이 기구와 상담을 진행중이나별 진척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초 이들이 99년 북한을 탈출했을 때는 모두 17명이었으나 5명은 옌지(延吉) 등 동북지방에서 은신중 중국 당국에 체포돼 북한으로 송환됐다가 1명은 재탈북해 13명이 됐으며이중 3명은 몽골로 달아났고,3명은 행방불명인 상태다. 탈북 주민이 북한으로의 강제송환을 우려해 베이징 소재 UNHCR를 찾아가 난민지위 인정과 망명을 요청한 것은 처음이어서 국제적으로 주목된다. 론 레드먼드 UNHCR 대변인은 이날 “탈북자들이 모두 안전하며 현재 중국 정부와 이들의 난민허용 문제 및 망명문제를 논의중”이라고 밝혔다.레드먼드 대변인은 이들이 난민자격을 취득할 자격이 충분하며 이들을 받아줄 정부와 접촉중이라고 덧붙였다. 이들은 그간 다롄(大連)에 머물러 있다가 22일 4명,23일 3명이 베이징으로 와서 24일 UNHCR로 들어갔다. 망명을 요청중인 7명은 ▲어머니가 중국에서 강제송환돼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있는 장길수군(17)과 ▲장군의 외할아버지 정태전(69) ▲외할머니 김춘옥(68) ▲정씨 부부의둘째 딸 정순희(44) ▲그 남편 이동학(49) ▲이들 부부의차남 이민철(14) ▲장녀 이화영(17)이다. 길수가족구명운동본부에 따르면 길수군 일가족은 지난 99년 8월 이후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숨어 살던 중 올해 3월이중 5명이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에서 중국 공안당국에붙잡혀 북한에 강제송환됐다. 한편 정부는 이들이 북한으로 강제송환돼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주제네바대표부를 통해 UNHCR에 전달했다. 이와 함께 이들이 희망할 경우 한국행을 수용하겠다는 뜻을밝히는 등 사태해결을 위한 긴급 협의에 나섰다. kh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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