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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마당] 왜 우리 지폐엔 ‘조선 얼굴’만 보이나/허동현 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조지 워싱턴, 엘리자베스 2세, 쑨원, 마하트마 간디, 마오쩌둥, 호찌민, 체 게바라, 에밀리아노 사파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베니그노 아키노, 후쿠자와 유키치, 넬리 멜바, 에드먼드 힐러리, 폴 세잔, 그리고 가우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지폐에 얼굴이 실린 인물들이 답이다. 물론 이들은 한 나라가 그 삶을 기리거나 세계에 내세워 자랑할 만큼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기도 하다. 미국은 독립전쟁을 이끈 워싱턴을, 영국은 입헌군주 엘리자베스 2세를, 타이완은 국민혁명을 이끈 쑨원을, 인도는 영국에 맞서 싸운 간디를, 사회주의 국가 중국·베트남·쿠바는 민중 혁명가들을, 멕시코는 농민을 위해 일어선 사파타를, 칠레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미스트랄을, 필리핀은 민주화를 이끈 아키노를, 일본은 근대계몽사상가 후쿠자와를, 호주는 세계적 프리마돈나 멜바를, 뉴질랜드는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발밑에 둔 힐러리를, 그리고 유로화 통용 전 프랑스와 독일은 세계적 화가 세잔과 수학자 가우스를 자국의 상징 인물로 내세웠다. 이처럼 국민국가 시대를 사는 지구마을의 나라들마다 근현대의 시공간을 살다가거나 아직도 살아 있는 국민적 영웅들의 모습을 자국의 지폐에 아로새겨놓았다. 그러나 우리 지폐에 담긴 인물들은 조선시대 사람 일색이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소리글자 한글을 창제했다 해도 세종대왕은 전제군주일 뿐이며, 이황과 이이도 양반지배질서의 사상적 기반을 닦은 유학자에 지나지 않는다. 철지난 봉건시대의 위인들을 주권재민의 공화정을 국체로 하는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인물로 지폐에 새겨 기리는 것은 세계의 보편적 기준에 합치하지 않는 난센스다. 왜 우리는 근현대를 산 아니 살아 있는 인물들을 지폐에 담아놓고 기리거나 자랑하지 못할까? 그 이유는 자주적으로 국민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근대사와 분단·동족상잔·독재로 점철된 현대사의 질곡이 우리 근현대 인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국의 오랜 민주주의 전통을 상징하는 엘리자베스 2세와 달리 우리들의 눈에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입헌정치를 요구한 독립협회 운동을 탄압한 전제군주이자 일제에 나라를 앗긴 망국의 군주로 비친다. 워싱턴에 비견되는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도 분단 고착화의 주범이자 독재자로 기억된다. 개화사상가 김옥균, 민족지도자 김성수, 문호 이광수, 애국가를 지은 안익태, 민족의 정서를 담은 가곡을 남긴 홍난파, 그리고 귀가 들리지 않는 장애를 이긴 입지전적 한국화가 김기창 같은 이들도 친일파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마도 조선시대의 인물들로 우리의 지폐를 장식한 이유는 고난의 근현대를 살아오며 갈가리 찢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줄 만한 당대인물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잘 찾아보면 세계에 유례가 없는 짧은 기간에 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을 함께 이룬 우리의 현재를 잘 대변하며, 앞서 남녀동권(男女同權)과 타자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꾼 선각자들이 분명 있었다. 우리가 남북이 하나되는 국민국가 만들기와 아시아와 더불어 살기를 소망한다면, 분단을 막기 위해 애쓴 김구와 동양 삼국 사이의 진정한 평화를 꿈꾼 안중근이 다가설 것이요. 양성 평등 사회를 바란다면, 가부장권에 맞서 내 몸의 주권을 찾으려 한 신여성 나혜석이나 김일엽이 도드라져 보일 것이요. 노동자와 기업가가 함께 사는 세상을 일구려 한다면,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해 나눔의 정신을 실천한 유일한과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꽃다운 생명을 바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도 눈에 가득 들어 올 것이다. 우리 지폐에서 이들의 얼굴을 볼 날이 어서 오길 바랄 뿐이다. 허동현 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 서해안 경계망 ‘구멍’

    중국어선과 북한선박이 잇따라 해군과 해경의 감시망을 뚫고 인천시 옹진군 섬까지 접근해 해안 경계체제에 허점을 드러냈다. 지난 달 30일 0시10분쯤 옹진군 연평도 북쪽에서 불법으로 꽃게잡이를 하던 중국어선 ‘요동어 558호(8t)’가 연평도에 접근, 선장 쑨톄핑(38)이 부상당한 선원 창징핑(36)을 들쳐업고 섬에 들어와 구조요청을 해 주민들이 119구조대에 신고했다. 부상 선원은 북방한계선(NLL) 북쪽에서 꽃게잡이를 하던 중 전날 오후 7시쯤 다른 중국선원과 술을 마시며 채무관계로 말다툼을 하다 흉기에 배를 찔린 것으로 밝혀졌다. 이 선원은 인천으로 긴급후송돼 인하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다. 하지만 중국어선이 북방한계선을 넘어 연평도에 상륙하기까지 3시간가량 걸렸지만 군경은 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더욱이 군과 행정기관이 경비정과 어업지도선을 집중투입해 중국어선의 불법조업을 단속하던 시기여서 경계망에 허점을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이에 앞서 지난 25일 오후 1시30분쯤 북한 주민 A(42)씨와 부인(39), 아들 2명(16,13세) 등 일가족 4명이 목선을 타고 옹진군 울도 인근 해상까지 들어왔다. 이 목선은 어선들이 발견해 해경에 신고하는 바람에 관계당국에 적발됐다. 인천 남서쪽 72㎞에 있는 울도는 북방한계선에서 깊숙이 내려온 지점임에도 군과 해경은 어선이 신고하기 전까지 목선의 이동경로를 파악하지 못했다. 해경은 “중국 어선과 북한 목선은 작아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데다 안개가 끼는 등 기상상태가 좋지 않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5) 국내최초 서양식 약현성당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5) 국내최초 서양식 약현성당

    한국 최초의 성당을 들라면 많은 이들이 대뜸 명동성당을 꼽는다. 명동성당이 갖는 한국 천주교의 얼굴이자 심장의 이미지 때문이다. 그런데 명동성당보다 무려 6년이나 앞서 세워진 성당이 있다. 서울 중구 중림동 149번지, 서울역 서쪽 맞은 편 언덕에 보일듯 말듯 앉아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약현성당(현 중림동성당, 사적 제252호)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14년 전인 1892년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 성당으로 건립되어 이후 한국 성당건축의 모델이 된 유서깊은 건물. 한국교회사상 첫 서양식 건축물이란 의미에 더해 1984년 성인 반열에 오른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무려 44위의 성인을 낳은 한국 최대의 순교지인 옛 ‘서소문 네거리’를 품 안에 두고 있는 성지이다. 숭례문에서 서울역 쪽으로 방향을 잡아 걷다가 염천교를 건너 바로 산등성이를 오르면 만나게 되는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조의 작은 건물. 성당 초입의 큰 길 표지판엔 ‘천주교 중림동(약현)성당 한국최초의 고딕성당’이라 쓰여 있고 정문의 돌기둥에 ‘약현천주교회’라 새긴 글씨가 또렷하다. 약현(藥峴)은 원래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곳에 위치한 고개였는데, 약초 밭이 많아 약전현(藥田峴)으로 불리다가 지명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 성당이 들어선 것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아호 반석)의 집이 있었기 때문. 반석골이라 불렸던 현재의 중림동에서 태어난 이승훈은 중국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귀국해 교회 창설의 주역을 맡았던 인물.‘한국 천주교회의 베드로’로 통하며 본명(반석)대로 교회에서 반석의 역할을 톡톡히 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최필공, 정약종,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 등과 함께 체포되어 성당 아래쪽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참수당했다. 참수될 당시 남긴 “월락재천 수상지진”(月落在天 水上池盡,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구쳐도 연못에서 다한다.)이란 말은 지금도 한국 천주교회의 명언으로 남아 있다. 약현성당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약현 본당은 본래 1887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g)주교에 의해 수렛골(현 순화동)에서 한옥 공소로 출발한 역사를 갖고 있다.1891년 종현(명동)본당에서 분리되어 서울에서 2번째, 전국에서 9번째로 설립된 본당인 셈이다. 당시 명동본당은 4대문 안쪽에 있다고 해서 ‘문안본당’, 약현본당은 ‘문밖본당’으로 불렸다고 한다. 신자 수가 ‘문안본당’ 즉 명동성당보다 훨씬 많아지면서 조선교구가 새로 지은 것이 바로 약현성당이다.1891년 10월 건축을 시작, 착공 1년만인 1892년 공사를 마무리지었다.1898년 종현에 우뚝 섰던 명동성당보다 무려 6년이나 먼저 세워진 셈이다. 한국에선 처음으로 들어선 서양식 성당에서 하루 세번씩 울려퍼지는 종소리는 당시 장안에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축성식을 집전한 뮈텔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낸 서한을 통해 이렇게 소감을 밝히고 있다.“이제 서울 문 밖 중심에 성당이 우뚝 솟았다. 그것은 아담하며 또한 성당다운 성당으로서는 한국 최초이고 유일하다.” 건립 당시의 규모는 길이 약 32m, 폭 12m, 종탑 높이 22m, 넓이 120평으로 목조 마룻바닥이었다.1905년 종탑 꼭대기에 첨탑이 올려진 데 이어 1921년에는 성당 내부의 칸막이가 철거되고 벽돌 기둥이 돌 기둥으로 바뀌었다.1974년부터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거쳐 1977년 국가 문화재(사적 제252호)로 지정되었으나 1998년 2월 한 행려자가 저지른 방화로 성당 안이 거의 전소되고 지붕이 내려앉는 비운을 맞았다. 벽돌 구조물과 앙상한 잔해만 남았으나 1년 6개월여에 걸친 공사를 거쳐 2000년 9월 옛 모습을 찾았다. 시내쪽인 동측에 정면 출입구, 남북향의 측면 출입구 각 1개씩을 갖춘 성당은 표지판에 적힌 대로 전체적으론 고딕성당이지만 고딕보다는 로마네스크 양식이 강하다. 몸채에 곁채 2개가 딸린 라틴십자형 삼랑식(三廊式) 구조인데, 요란한 장식들이 없어 오히려 더 장중한 느낌을 받는다. 가운데 두 줄의 돌기둥이 늘어섰고, 기둥 바깥의 양쪽 신자석 창은 둥근 아치로 장식되어 있다. 가장 높은 가운데 부분 주위로 점차 낮아지는 하늘 형상의 둥근 천장은 성당의 가장 독특한 부분이다. 제대 좌우 신자석 정면에 성 모자상과 성 요셉상이 모셔져 있으며 그 좌우 벽에 14처가 걸려 있다. 정면 제대 뒤쪽을 장식하는 3개의 유리화를 통해 들어오는 빛줄기가 성전 안을 환하게 비추도록 돼 있는데 이 때문에 교계에서는 ‘전국의 성당 중 가장 밝은 성당’으로 통하기도 한다. 약현성당은 사적 252호로 지정된 성당건물 말고도 서소문순교자기념관, 가톨릭종교음악연구소, 가톨릭출판사 등이 자리잡아 명실상부한 한국 가톨릭문화의 중심지.1991년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세운 서소문순교자기념관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자랑거리이다. 기념관 전면에 1996년 조광호 신부(베네딕토수도회)가 제작한 유해및 위패 봉안실이 들어 있는데, 이곳에는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목숨을 잃은 남종삼, 허계임 등 44위의 순교성인을 비롯해 아직 시성(諡聖)되지 못한 순교자 58위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현재 약현성당의 신자는 3500여명, 약현본당에서 분리된 본당만 해도 90여개나 된다. 천주교 전체적으로 신자수가 감소하고 있지만 이 성당의 면모는 사뭇 다르다. 성당이 갖는 역사적 전통 때문인지 몇대에 걸쳐 성당을 다니고 있는 ‘대물림 신자’들이 많은 게 특징. 다른 지역으로 이사간 뒤에도 성당을 옮기지 않고 꾸준히 이 성당을 찾는 신자도 전체의 3분의1이나 된다고 한다. kimus@seoul.co.kr ■ 최대의 순교지 서소문 내려보며 약현성당에서 내려다보이는 지금의 서소문공원 부근, 즉 당시의 서소문 밖 네거리는 신유(1801년)·기해(1839년)·병인(1866년)박해를 거치면서 천주교 신자가 가장 많이 처형을 당한, 한국 최대의 순교지이다.1984년 성인반열에 오른 순교자 103위 가운데 44명이 바로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서울 지역 순교지 중 절두산이 병인박해 때의 집단 처형장소, 새남터가 국사범·지도자급 인물들의 형 집행처였다면 서소문 밖 네거리는 주로 일반 평신도들의 처형장이었다. 포졸들은 처형할 신자들을 태운 우차를 울퉁불퉁한 서소문 언덕길을 내리달려 신자들을 피투성이로 만든 뒤 아래쪽 네거리에서 처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신자들이 순교한 지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현고가도로와 의주로가 교차하는 서소문공원 근처로 추정된다.1984년 한국 순교자 103위의 시성을 기념해 이곳에 순교자현양탑이 세워졌다. 서소문은 191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1984년 세워진 순교자 현양탑은 1996년 5월 공원을 재개발하면서 철거되었는데, 약현성당이 머릿돌과 동판 석재를 되살려 성당 안으로 옮겼다.
  • 2008년 중국어마을 탄생

    영어마을에 이어 인천시 중구 영종도 경제자유구역에 중국어마을이 들어선다. 23일 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인천국제공항 인근 운북지구 8만평 부지에 오는 2008년까지 중국어마을을 조성키로 했다. 중국어마을은 연면적 1만평 규모의 건물을 지어 하루 숙박 기준으로 300∼500명의 학생들을 수용할 예정이다. 이곳에는 어학교육시설뿐 아니라 전시, 체험, 생활 등의 기능을 두루 갖춘 종합시설을 만들어 생활속의 중국어권 문화공간으로 운영할 방침이다. 인천경제청은 최근 이런 내용의 기본계획안을 확정하고, 오는 8월 용역 심의회를 열어 사업타당성에 대한 용역을 발주키로 했다. 인천경제청은 내년 말 용역이 끝나는 대로 중국어마을 조성사업에 들어가 2008년 말 문을 열 계획이다.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백두산 호랑이’ 베이비 붐

    |베이징 이지운특파원|‘백두산 호랑이’가 베이비 붐을 맞고 있다. 세계 최대의 동북호랑이(東北虎) 인공사육 기지인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동북호림원(東北虎林園)에서 올해 100여마리의 새끼가 태어날 예정이다. 신화통신은 22일 호랑이 개체 수의 지속적 증가로 2005년부터 ‘베이비 붐’을 맞고 있으며 그 수가 연간 30% 가까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동북호림원이 사육하는 전체 호랑이 수는 올해 700마리를 넘어 중국 전체의 절반을 넘게 될 전망이다. 중국이 ‘동북호’로 부르는 호랑이는 시베리아호랑이, 만추리호랑이, 아무르호랑이 등의 이름을 갖고 있으며 북한은 ‘고려범’, 한국은 ‘백두산 호랑이’로 부른다. 왕리강(王立剛) 호림원 총경리가 밝힌 현재 출산 적령기에 이른 암호랑이는 200여마리. 올해 50마리의 수호랑이와 짝짓기를 하면 100여마리의 새끼가 태어날 것으로 보인다. 전체 백두산 호랑이는 700마리를 넘어선다는 설명이다.1986년 건립된 동북호림원의 호랑이 수는 8마리로 시작했다. 인공사육 20년 만에 개체수가 620여마리에 달해 중국 전체 백두산 호랑이 1300마리의 절반에 육박하고 있다.jj@seoul.co.kr
  • 美소비물가 0.1%P가 부른 나비효과

    “풍부한 유동성에 숨어 있던 글로벌 불균형 문제가 불거졌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우려에 대한 지나친 과민반응이다.” 국내를 포함한 세계 주요국 증시가 폭락한 18일 전문가들은 “주가조정은 불가피하지만 낙폭이 지나치게 크다.”는 반응을 보였다. 폭락을 가져온 미국의 4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월 대비 0.6%로 시장의 예상보다 0.1%포인트 높은 것에 불과하다. 주택이나 원자재에 국한됐다고 믿어왔던 인플레이션이 숫자로 나타나면서 그동안 눌려왔던 우려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전 세계에 퍼진 미국발 인플레이션에 대한 심리적 우려가 얼마나 빨리 진정되느냐가 변수다. 다음달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까지는 금리인상 여부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국제유가와 원자재값 급변까지 겹쳐 코스피지수는 당분간 1300선 중반대에서 박스권이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금리 인상설에 위험자산 서둘러 처분 주택경기 급락으로 인한 미국 경기둔화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있지만 그 영향은 크지 않다고 본다. 우리투자증권 김정환 차장은 “유로, 일본, 브릭스(인도·중국·브라질·러시아) 등으로 세계 경제의 성장동력이 다양화된 만큼 미국의 경기둔화로 한국 증시가 붕괴될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라면서 “성장세가 멈춘 것이지 하락세로 들어선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푸르덴셜투자증권의 이영원 실장은 “금리인상은 미국뿐 아니라 모든 시장에 부담”이라며 “위험자산인 주식에 대한 투자비중을 줄이는 전략적 차원에서 외국인들이 신흥시장만이 아니라 주요국에서 주식을 팔아치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우증권 조재훈 부장은 “그동안 수급의 힘 때문에 가려져 있던 악재인 글로벌 불균형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면서 “당분간 미국 인플레이션 우려 등의 문제가 해소되는 과정에서 국내 증시도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일 것”으로 내다봤다. 한 애널리스트는 “정부가 불을 댕긴 부동산 거품붕괴론이 미국발 악재와 겹쳐 증시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꼬집었다.●당분간 주가하락은 불가피 ‘검은 목요일’의 충격은 곧 진정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하지만 중·장기간의 조정이 점쳐지는 가운데 주가 등락폭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점이 걱정스럽다. 예전보다 국내 요인보다는 해외 요인, 외국인의 매매추이 등에 더욱 끌려다닐 것으로 전망된다.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 寒流? NO 열풍 넘어 일상이 되다

    寒流? NO 열풍 넘어 일상이 되다

    |도쿄 김미경특파원·서울 홍지민기자|한류(韓流)는 한류(寒流)인가. 아니다. 일본 속 한류는 진화하고 있었다.‘겨울연가’로 집약되는 드라마와 스타 중심적인 유행으로서의 한류는 쇠퇴하고 영화, 음악, 방송, 문학, 생활 문화 등 개별 장르로 분화하면서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한국 것에 대한 일본인의 호기심이 다양해진 결과로, 좋으면 즐기고 받아들이는 ‘보통 문화’로서 한류가 자리잡을 조짐이다. 지난 3월11일 도쿄 한복판의 롯폰기에 문을 연 아시아전문영화관 ‘시네마토 롯폰기’는 한국 영화를 핵심 콘텐츠로 한 극장이다.52∼165석의 스크린 4개를 보유한 이 영화관이 오픈 기념으로 한 달간 내건 ‘한류 페스티벌’에 예상을 훌쩍 넘어선 3만명이 몰리자 이달 19일까지 연장했다. K-POP(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관심도 커져 한국의 음악 전문채널 Mnet이 지난 3월 일본에 진출해 개국한 위성 채널 Mnet재팬에 한 달간 1만 3000명이 가입했다. 올해 1만 7000명으로 잡았던 Mnet 재팬은 두 배에 가까운 3만명으로 회원 목표치를 수정했다. 한국 것에 쏠리는 호기심은 엔터테인먼트를 넘어서 한국인의 일상생활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첫 출간 이후 6호를 낸 문화 월간지 ‘슷카라’(한국 정보를 푸는 숟가락의 뜻)는 한국의 보자기, 새우젓 담그기, 선물 문화 등 한국에 관심이 있는 일본인들이 궁금해하는 정보를 담고 있는데 매월 5만부씩 팔린다. 일본 최대의 민방인 후지TV는 한국의 엔터테인먼트는 물론 한국문화의 생생한 정보를 다루는 ‘간타메DX!’가 시청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자 지난해 10월부터 월 1회이던 방송을 2회로 늘렸다. 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학풍으로 유명한 국립 교토대 대학원에 지난 4월 한류 강좌가 개설됐다. 이 대학원 인간환경학연구과는 내년부터 한국문화를 연구하려는 석·박사 학생을 모집한다. 아직까지 번역 등에 어려움이 있어 초보적인 단계이지만 한국의 문학에도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등을 엮은 ‘최영미 시선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지난해 가을 일본 출판사에서 나왔다. 또 NHK 위성채널 프로그램 ‘주간 북 리뷰’는 최근 소설가 신경숙씨를 초대, 그의 작품 ‘외딴 방’ 등을 소개했다. 올 1월 한국을 찾은 가와이 하야오 일본 문화청장관은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을)더 알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으며 드라마·영화에서 시작된 한국에 대한 관심은 소설이나 역사까지로 넓어질 것”이라고 한류를 전망했다. 지난 2∼3년을 한류 1기로 본다면 이제는 일본인에 일상화하고 뿌리내리는 한류 2기에 접어든 것으로 분석된다. 일본에서 한류 잡지 ‘프로포즈’를 발행하는 아리스글로벌의 손덕기 사장은 “스쳐지나가는 뉘앙스의 ‘한류’를 지속성의 의미를 담은 ‘한국 문화’라는 말로 대체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한류가 아시아권에서 폭넓게 수용되기 위해서는 화류(華流·중국문화)든 일류(日流)든 활발한 교류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한국사회에 밝은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는 “한국인들이 겁낼 힘이 일본 드라마에는 없다.”고 말했다. chaplin7@seoul.co.kr
  • [한류통신] “한국어로 말거는 홍콩인 더 이상 낯설지 않아요”

    홍콩의 전철 안에서 한국어 책을 펴들고 앉아있다 보면 사방에서 힐끗대는 현지인들의 눈길과 만난다. 한국어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동그라미와 네모가 유난히 많은 한글을 보면서 피식 웃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와 앉으며 자신의 한국어 실력을 과시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한 술 더 떠 한 마디라도 더 나누기 위해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는 필자를 따라 내리기도 한다. 1990쯤만 해도 ‘한국인’ 이라고 말하면 북조선에서 왔느냐는 질문을 먼저하고, 한국은 자기네와 꼭 같은 중국어를 사용하는 줄 알던 홍콩인들이 이제는 한국의 마니아가 되어 현지에 사는 교포들보다 한국의 대중문화나 경제문제 등에 대해 해박함을 자랑하니 격세지감과 함께 한국의 위상변화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한국에 대한 홍콩인들의 인식 변화를 주도한 요인으로 드라마와 영화, 대중가요 등 대중문화를 꼽을 수 있지만, 한국에 대해 막연한 동경심을 유도해 친한국 인사로 만든 이들은 현지에서 한국어와 더불어 한국 전통문화를 가르치는 문화전도사들이다. 현재 홍콩에서는 씨티대학의 교양학부에 한국어학과 한국학 과정이 개설돼 있고, 홍콩 중문대학교와 홍콩대학교, 침례대학교 등의 부설평생교육원에 한국어 과정이 있다. 또 홍콩 한인상공회에서는 회원사의 현지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그 외 사설 한국어 학원과 홍콩 RTHK 라디오 방송에서 진행하는 한국어 강좌도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달 홍콩한인상공회는 홍콩 씨티대학(City University of Hong Kong)의 한국학 과정 학과장과 한국어 강사, 재홍콩경제인들을 초빙해 한국학발전 포럼을 개최했다. 이날 제공된 자료에 따르면, 홍콩의 대학 내에서 중국학이나 일본학과 비교해 한국학은 절대적으로 열세하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 정부와 기업의 대규모 지원을 받아 활성화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급속도로 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지원 부족과 기업들의 미진한 참여로 많은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민간인 주도로 조성된 한류를 이제는 정부와 기업이 과감히 앞장서 확산시켜야 할 때이다. 한국의 문화와 언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 예산지원뿐 아니라 산업연수생 프로그램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면 한류확산은 물론 대중문화를 넘어선 진정한 한류문화를 창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권윤희 위클리홍콩 교민신문 대표
  • [中 문화대혁명 40주년] 사회부조리가 부른 마오의 부활

    |베이징 이지운특파원|‘당신의 검색어는 관련 법률에 위배될 수 있습니다.’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라는 단어에 대한 중국 최대 검색사이트 바이두(百度)의 반응이다. 문혁에 대한 호기심이 여전히 법률로 제한돼 있다는 얘기다. 아예 ‘관련 내용을 찾을 수 없다.’는 안내어가 뜨는 곳도 많다. 신화사 등 주요 언론사 홈페이지나 다른 포털 사이트도 마찬가지다.16일로 발발 40주년을 맞는, 문화대혁명의 현주소다. ●16일 40주년… 기념식·정치행사 없어 올해 문혁과 관련, 국가차원의 특별한 기념식이나 정치행사가 준비된 것은 없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도 올 초 전국인민대표대회 등에서 공산당의 역사를 말하면서도 문혁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물론 어떤 움직임조차 없는 건 아니다. 문혁을 재조명하자는 주장도, 간헐적이나마 끊임이 없다. 대문호 바진(巴金)을 비롯,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의 비서를 지낸 리루이(李銳) 전 공산당 조직부 부부장 등이 대표적이다.“마오는 위대했으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못해 문혁과 같은 참상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게 주장의 실질적 핵심이다. 이같은 ‘전통적인’ 문혁 재조명론 외에 양극화 문제 등 일련의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제2의 문혁론’ 등 문혁 재조명론의 이유도 양분돼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한 주요인사는 최근 한 사석에서 “저마다 나름대로의 잣대가 있다.”는 표현으로 공식적인 문혁의 재조명 가능성을 일축했다. 평가에 대해서는 저마다의 시각이 있지만, 그것과 재조명과는 별개의 일이란 얘기다. 그는 “지금 문혁을 드러내놓고 떠들어봐야 중국 사회에 득 될 게 없다는 사실에 지도부와 지식인 사회에서 이미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문혁 재조명은 중국이 전면적 발전단계에 진입하는 2020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면서 “경제의 성장 정도가 그 여부를 가름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당의 부패·빈부격차에 불만 팽배 이런 가운데 정작 문혁의 주역 마오쩌둥 전 주석은 이미 문혁의 ‘어두운 그림자’을 떨쳐냈다는 데 별 이견이 없어 보인다.‘건국 이후 역사 문제에 관한 약간의 결의’(1981)를 통해 “마오 전 주석이 오류를 저질렀으되, 공과(功過) 비율은 7대3”이라는 ‘체면치레’ 평가를 넘어선 지 오래다. 이와 관련, 중국의 한 전직 언론인은 “90년대 중·후반부터 ‘차라리 그 때가 좋았다.’며 마오를 추억하는 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고 소개했다.“당의 부패, 빈부 격차, 사회적 불평등에 따른 불만이 마오를 다시 불러내고 있다.”며 사회 분위기를 전했다. 외신들은 “급격한 변화에 따른 사회적 역기능이 심화될수록 옛날에 대한 향수와 동경은 더 깊어간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른바 ‘신좌파 지식인’의 문혁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평가는 이런 분위기와 맞물린 것이다. ●“지도부 실질적 재산공개하라” 베이징의 한 주요 대학에 재직중인 A교수는 마오 신드롬의 한 요인을 ‘솔선수범’에서 찾아냈다.“마오는 전쟁터에 아들을 보냈고 그 아들은 죽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의 지도층의 자제는 모두 외국에 나가 있거나 유학에서 돌아와 떼돈을 벌고 있다. 마오 이후의 당과 지도부는 솔선수범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실질적 재산 공개 없이 현 지도부와 당은 결단코 마오 시대와 같은 신망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 지식인도 있었다. 그는 “법에 따라 재산신고를 할 때 어느 성(省)의 성장(省長)은 비서가 월급봉투에 적힌 액수만을 적어낼 뿐 예금이나 부동산 등은 숨기고 있다.”고 지적하면서,“그나마 국가 최고 지도자급은 그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신랄히 비판했다. 어떤 이들은 후진타오 주석을 비롯한 4세대 지도부가 반부패를 강조하고 ‘팔영팔치(八榮八恥)’ 등을 선전하는 배경을 이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찾고 있기도 하다. 중국 사회가 다시 문혁을 들춰낼 기미는, 현재로선 보이지 않는다. 마오에게만 조용히 손짓만 하고 있을 뿐이다.‘사회 부조리’는 마오를 부르는 주문(呪文)인 셈이다. jj@seoul.co.kr ■ 성장이냐 분배냐 中 지도부 딜레마 |베이징 이지운특파원|‘가난이 걱정이 아니고 균등치 못한 게 근심이다.’(不患貧而患不均) 중국에서 평등 의식을 제고시키며 마오쩌둥을 불러내고 있는 논어(論語)의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동시에 인터넷 토론방이나 블로그 등을 통해 중국 사회 전체에 ‘효율과 균형(또는 공평)’, 즉 ‘성장과 분배’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화두이기도 하다. 나아가 ‘물질재부가 적은 게 두려운 게 아니고 분배가 고르지 못한 게 두렵다.’(不物質材富少,而是分配不均)는 말은 현재 중국이 안고 있는 사회 문제를 적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네티즌들의 사회 진단은 ‘분배 불공평’(分配不公平)으로 집약되고 있다. 이같은 사회 분위기를 감안, 일각에서는 “후진타오 정권은 분배를 선택한 마오쩌둥의 정책 노선을 택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다.2006∼2010 5개년 경제규획 등에서 성장 일변도 경제 정책을 조정한 데 대해 “중국이 성장보다 분배를 중시하며 좌파 성향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분석도 곁들인다. ●‘부의 획득 단계, 우파 논리 그대로’ 그러나 당의 동향에 밝은 전문가들은 이런 분석을 일축한다. 이들은 “현 정권은 마오쩌둥식 분배 정책을 실현할 수도 없을 뿐더러, 절대 그런 식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권력 핵심부 및 싱크탱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효율과 균형’ 논의는 사회 일반에서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다. 예컨대 균형, 즉 분배에 관한 논의가 사회 일반에서는 뭉뚱그려져 있으나, 당 내부에서는 세분화돼 있다. 즉 ‘생산과정 또는 부의 획득 과정’에서는 여전히 효율이 중시돼야 한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분배 여력 많지 않아’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남은 ‘균형(분배)’은 교육, 의료 등에 있어 기회의 평등이다. 나아가 엄청난 부를 축적중인 기업 등의 사회기부나 각종 기금 조성, 공적부조를 통한 분배도 거론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당 또는 정부가 균형, 분배에 역량을 쏟더라도 실질적인 분배 효과를 내기에는 여력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우선 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농민·저소득층의 제반 문제를 ‘혜택’으로 해결하기에는 재정이 감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의 사회기부나 각종 기금 등이 보조 역할을 해야 하지만, 기업의 사회적 의식이 현저하게 낮은 중국에서 크게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혹 부의 획득 과정에서 정부가 개입할 여지가 있다면 ‘부패 및 각종 경제범죄 척결’을 통한 간접적인 ‘기회 조정’ 방식 정도가 꼽힌다. 그러나 이마저도 뿌리깊은 관행을 뽑아내기엔 갈 길이 멀다. 중국 싱크탱크 집단의 한 전문가는 “지금의 사회 갈등과 문제점들은, 교육·의료·양로 등 모두 국가가 책임져 오던 것들이 시장경제 도입 이후 개인 부담으로 전가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면서 그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은 고충을 토로했다. 시대가 마오를 찾으나 마오로도 시대를 아우르기 쉽지 않은, 문혁 40주년 중국의 현실이다. jj@seoul.co.kr ■ 아직도 금지단어? |베이징 이지운특파원|‘츠부바오(吃不飽).´ ‘그 시절´에 대한 물음에 돌아오는 가장 일반적인 답변은,“배부르게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립적이되 다소의 ‘판단´이 가미된 이 표현은, 중국 사회가 문혁에 대해 암묵적으로 내리고 있는 대체적인 ‘평가’다. 지식인, 예술인 그룹을 중심으로는 “전통이 사라졌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안타까움이 배어 있는 답변이다.“한국은 전통을 잘 유지했다….”는 부러움도 종종 접할 수 있다.“한류(韓流)의 배경에는 ‘전통’에 대한 동경이 깔려 있다.”고 평하는 중국인들도 적지 않다. 중년의 교수부터 유력 언론사의 중견 간부, 택시기사에까지 어려서라도 그 시절을 경험한 이들의 답변은 의외로 담담해 보인다. 답변도 길지 않다. 물론 ‘문혁’은 묻지도 못하고,‘어려웠던 당시’라는 표현으로 에둘러 물었을 때의 얘기다. 가까운 사이에서라면 간혹, 억눌린 시절에 대한 울분을 들을 수도 있다.“문혁은 정치 투쟁의 산물일 뿐이며 당과 국가에 의해 명백히 과오로 인정된 일 아니냐.”는 단정적인 반응도 접하게 된다. 젊은이들에게서라면 확실히 국수적인 태도를 확인할 때가 많다. 베이징 모 대학의 한 4학년생은 “결과적으로 당과 사회의 모순을 한번에 들춰내 개혁·개방을 가속화하는 순작용이 있었던 것 아니냐.”고 한껏 긍정론을 폈다. 칭화대(淸華大)의 한 중견교수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이같은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 많다.”며 또 다른 사회 분위기를 전했다. 유력 방송사의 30대 초반의 PD는 사회 금기에 대한 외국기자의 호기심이 못마땅한 듯,“도대체 뭘 알고 싶은 게냐, 서점에 가면 책도 많은데…”라는 신경질적이고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는 한 3학년 여대생의 대답 역시 젊은 부류의 또 다른 반응이다. 한편 많은 중국인들은 문혁이란 단어가 인터넷 사이트에 검색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아해했다.“아직도 금지 단어냐?”는 반응인 셈이다. jj@seoul.co.kr
  • 日, 美와 군사협력 강화 추진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 정부가 자국과 주변국이 공격받는 유사시나 주변사태시 미·일 군사협력 방식을 전면적으로 바꾼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5일 보도했다. 미국과의 주일미군 재배치 최종합의로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군사동맹을 구체화하기 위한 조치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다음달말로 예정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유사시와 주변지역의 긴급사태시 자위대와 미군의 협력관계를 각각 정한 ‘미·일공동작전계획’ 및 ‘미·일상호협력계획’을 구체화할 것을 제안하기로 했다. 빠르면 내년 여름 새 계획이 윤곽을 드러낼 전망이다. 이 계획이 실현되면 한반도나 타이완해협 유사시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북한이나 중국의 반발이 예상된다. 또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의 사실상 용인에 따른 군사대국화를 의미, 한국측도 반발할 공산이 크다고 신문은 지적했다. 작전계획은 비공개로, 이 계획이 착착 진행되면 제3국들은 집단적자위권에 저촉되는지 검증할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이 이를 제안하는 것은 대북(對北) 억지력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중국과 타이완의 무력충돌 등에 대비하는 군사협력 방식의 세부사안을 정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은 유사시나 주변사태시를 대비해 미국과 ‘미·일공동작전계획’ 및 ‘미·일상호협력계획’을 맺어 두었으며 자위대법과 유사법제, 주변사태법 등을 제정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taein@seoul.co.kr
  • 최치원 기념관 中 양저우에 세운다

    |양저우 이석우특파원|최치원 기념관이 오는 2007년 하반기 그가 활동했던 장쑤(江蘇)성 양저우시 당성유지(唐城遺址) 지역에 들어선다. 김한규 21세기 한·중교류협회 회장은 19일 “양저우시 최고책임자인 지젠예(季建業) 공산당 서기는 ‘2007년 하반기 한·중 우정의 해와 두 나라 수교 15주년을 기념해 최치원 기념관을 준공할 계획으로 부지에 대한 지질조사 등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최치원 기념관은 중국 중앙정부가 보기 드물게 승인한 외국인 기념관이다. 양저우시는 그동안 최치원이 당나라 때 관료생활을 했다고 전해지는 당성유지에 있는 박물관에 ‘최치원 사료 진열관’을 마련해놓고 있었다. 협회 대표단을 이끌고 지난 9일부터 1주일 동안 양저우시 등을 방문했던 김 회장은 “한·중 두 나라 교류사에 큰 공헌을 해온 대표적인 도시인 양저우시가 한국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말했다. 또 청나라 때 양저우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소금 거상이던 한국인 안치를 기념, 양저우시 당국이 시내에 안가항(安家巷)이란 거리를 조성했다고 전했다. 최치원 기념관의 총 대지는 3000평, 건평 1000평이다. 진열관과 연구센터 등이 들어서게 된다. 양저우시 정부는 예상 건축비 52억원 가운데 절반인 26억원을 자체 조달할 계획이다. 지젠예 서기는 지난 10일 21세기 한·중교류협회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도 “양저우시는 한나라와 수·당 때 이미 인구 50만명이 넘어 지금의 상하이 같은 역할을 하던 번화한 도시”라면서 “당시에도 양저우는 한반도 서해지역으로 가는 직항이 여럿 있었던 한·중 교류의 역사적인 공헌을 한 곳”이라고 교류강화를 강조했다. 또 지 서기는 “최치원은 후이난(淮南) 절도사 등 양저우(당시는 도시개념이 아닌 지금의 중국의 성과 같은 광역지역 개념)에서 관리생활을 하던 뛰어난 문필가로 그의 작품인 계원필경은 당시 당나라 역사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장쑤성 TV는 한류 열풍 속에 한·중 수교 15주년 및 양국 우호의 해 등을 기념해 2007년도에 방영할 10시간짜리 다큐멘터리 최치원을 준비 중이다. 장쑤성 TV 다큐멘터리부 장장성(張强生) 프로듀서는 “최치원은 한·중 교류의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한 상징적인 인물”이라며 “오는 2007년 한·중 수교를 기념해 방영할 ‘실록 최치원’ 10부작의 촬영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jun88@seoul.co.kr
  • 터키 파묵칼레·카파도키아를 가다

    터키 파묵칼레·카파도키아를 가다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상큼한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 아직도 하얀 모자를 눌러 쓴 채 위엄있는 눈초리로 내려다 보고 있는 거대한 산, 인간의 유한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수 천년을 넘게 버티고 있는 신전의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푸른 밀밭위에 한가로이 거니는 목동과 양떼들… 동·서양 문명이 교차하고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오랫동안 공존해온 터키.6·25 참전, 또 2002년 월드컵때 한국과 3,4위전을 치르며 ‘형제의 국가’로 인식되는 친숙한 나라이다. 온천으로 유명한 ‘파묵칼레’와 자연이 빚어낸 신비로움으로 가득찬 ‘카파도키아’로 떠나 보자. 글 터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석회질 사이로 생명수 꿈틀꿈틀화산 폭발과 지진이 많았던 터키는 전국에 300여 개의 크고 작은 온천이 산재해 있는 화산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발전했던 목욕 문화가 이어져 역사 깊고 물 좋은 온천들이 많다. 고대시대에는 온천이 휴양보다는 치료의 개념으로 쓰여 유명하다는 온천에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남서부에 있는 휴양도시 데니즈리에서 약 20㎞ 떨어진 곳에 위치한 ‘파묵칼레’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온천과 유서 깊은 고대도시 유적이 어우러진 곳이다. # 신이 그려놓은 한 폭의 그림 이스탄불에서 버스로 10시간을 넘게 달려 도착한 파묵칼레. 갑자기 하얀 눈으로 뒤덮인 듯한 야트막한 산이 눈에 들어온다. 이게 무슨 일인가. 우리나라의 봄처럼 따뜻한데 눈이 쌓여있다니 말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 제일 먼저 산이 보이는 곳을 달려갔다. 산 밑에는 하얀 산을 그대로 담고 쪽빛 호수와 퍼런 물이 밸 듯한 하늘이 자리잡고 있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여행의 고단함이 말끔히 사라진다. 도대체 저 산의 정체는 무엇일까 너무 궁금했다. 수 천년 동안 지하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온천수가 산의 경사면을 따라 흐르면서 지표면에 수많은 물웅덩이와 종유석, 석회동굴 등을 만들었으며 물에 포함되어 있는 미네랄 성분이 지표면을 부드러운 백색 석회질로 덮어 버려 이렇게 특이하고 아름다운 지형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이다. 또한 멀리서 보면 꼭 목화에 덮인 산 같다고 해서 터키어로 ‘목화의 성’이란 뜻의 파묵칼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래도 믿기지 않아 버스를 타고 파묵칼레의 정상으로 향했다. 정상에서 거대한 하얀 산을 내려보았다. 마치 고행을 떠나는 수도자 행렬처럼 맨발의 여행객들이 줄을 지어 하얀 산을 조심스럽게 걷고 있다.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지고 그들과 함께 했다. 발바닥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진다. 정말 온천수가 흐르고 있다. 아니 딱딱하게 굳어 버린 하얀색의 석회질 사이로 파묵칼레의 생명수가 수 천년을 이어 아직도 그 숨을 쉬며 이어졌다. 여기에 온천이 생긴 것이 문헌상 B.C 2세기이니까 족히 2000년을 넘어 흐르고 있는 셈이다. 수 천년 동안 고대 로마시대의 황제들과 클레오파트라 등 수많은 사람들이 즐겼던 그 곳에, 그 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사실에 시대를 넘어선 감흥이 가슴을 벅차 오르게 한다. 이런 파묵칼레의 모습은 낯선 이방인에게 아름다움을 가르쳐 준다. 너무도 신비하다, 자연의 힘이. 그리고 그 위대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80년 후반까지 수영복을 입고 신이 만든 온천에서 직접 온천욕을 즐길 수 있었다고 하는데 1988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서 보존때문에 목욕을 금지시키고 신발도 벗고 걷게 만들었다. # 터키에서 맛보는 터키의 목욕탕 우리나라에서 80년대 퇴폐 문화의 상징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 터키탕이 정말 터키에 있을까.’라고 많은 사람들의 궁금해 할 것 같아 ‘터키탕’을 찾아 보았다. 결론은 중국에 자장면이 없고, 인도에 카레가 없듯 터키에도 터키탕은 없었다. 다만 ‘하맘’이란 공중목욕탕이 있다. 목욕 문화가 발달한 로마를 거쳐 오스만제국에 이르러 절정에 맞았다는 터키의 하맘은 우리의 목욕 문화와는 좀 달랐다. 일단 대리석 벽돌로 웅장하게 지어진 건물 내부에는 탈의실과 넓은 휴게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우리나라 목욕탕과는 격이 달랐다. ‘옷을 다 벗고 나가야 하나.’며 터키인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노라니 그들은 커다란 수건을 몸에 두른다. 나도 재빨리 따라하며 하맘으로 들어서려 하자 터키말로 뭐라 뭐라 하며 제지를 한다. 뭐 여자들이 하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 같다. 목욕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라 시간을 정해서 남·여가 돌려쓰는 것 같았다. 10여분 흐르고야 들어섰다. 그런데 ‘에이 이게 뭐야.’ 겉모습은 무엇인가 근사한 시설이 있을 것 같았는데 정작 내부에 들어서자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나 일본처럼 목욕탕에 몸을 담글 수 있는 ‘탕’이 없고 대신 대리석으로 50㎝정도 쌓아 올려 만든 4∼5평 정도의 평상 같은 것이 있는데 사람들이 거기서 누워 땀을 낸다. 샤워기도 몇 개 되지 않고 말이다. 나도 중요 부위는 가리고 누웠다. 우리 찜질방처럼 아주 뜨겁지는 않지만 몸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신기하네. 갑자기 건장한 청년이 들어오더니 옆에 누워 있는 터키인의 때를 민다. 마치 우리나라처럼 말이다. 짧은 영어로 그를 불러 똑같이 해달라고 했다. 재미(fun)와 기술(technology)을 모두 잡은 ‘퍼놀로지(funology)’는 떨쳐버리기 힘든 문화 코드다. 재미를 추구하는 감성에 딱 들어맞으면서 기능을 놓치지 않는 상품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봄 햇살이 짱짱하게 내리쬐는 상쾌한 날에는 더욱 경쾌하게, 황사가 불어와 하늘이 뿌옇게 되면 마음이라도 신나게, 재미있는 소품으로 패션에 즐거움을 더해 보자.
  • [인천의 원조] (1) 한국최초의 호텔 ‘대불’

    [인천의 원조] (1) 한국최초의 호텔 ‘대불’

    인천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들어선 시설이 많다. 조선 말 이후 인천항이 서양문물이 들어오는 통로 역할을 한 데다 인적 교류 또한 왕성했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음식, 제품, 문화, 생활사 등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같은 사실을 인천시민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알면 알수록 흥미진진한 ‘인천이야기’를 시리즈로 풀어본다. 1883년 인천항 개항과 함께 인천에는 구미 각국의 외교사절, 선교사, 여행객들이 밀려들었다. 이들 대부분은 목적지가 서울이었기 때문에 인천에 도착하면 서둘러 출발해야 했다. 그러나 철도가 놓이기 전이어서 교통편이라고는 조랑말이나 가마 정도가 고작이었다. 걸어서 가려면 하루종일 걸렸다. 또 배의 도착시간에 따라 하루를 묵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자 자연스레 숙박시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숙박시설의 정결함을 유난히 따지는 서양인들을 주막에 재울 수는 없는 일이어서 근대적 숙박시설인 호텔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 효시가 1888년 인천시 중구 중앙동에 세워진 ‘대불호텔’이다. 이 호텔은 1902년 서울시 중구 정동에 들어선 ‘손탁호텔’보다 14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대불호텔은 일본조계 입구에 벽돌식의 3층 건물로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에 의해 1887년 착공돼 다음해 완공됐다. 당시 일본조계 첫집이 호리씨 자택이었고, 두번째가 대불호텔이었다. 이 호텔은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구라파인이나 미국인들을 겨냥해 서양식으로 설계됐다. 대불호텔 건너편 2층 건물에서 중국인 이타이라는 사람도 외국인 상대로 장사를 했는데,1층에는 잡화상점을 차렸고 2층에는 ‘스튜워드 호텔’을 개업했다. 대불호텔은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맞았으며 침대가 딸린 객실 수는 11개, 다다미 수는 240개에 달했다. 숙박료는 당시 화폐로 상급 객실 2원 50전, 중급 2원, 하급 1원 50전이었다. 같은 시기 일본식 여관인 ‘수월루’의 상급 객실 숙박료가 1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무려 2배 이상 비쌌음을 알 수 있다. 호텔 내에서는 외국인들의 입에 맞는 서양요리도 제공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불호텔은 일제시대 때 중국요리집인 ‘중화루’로 바뀌었다. 중화루는 공화춘, 동흥루 등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3대 중국요리집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 건물은 1978년 헐린 뒤 현재는 나대지로 방치돼 있다. 대불호텔에 대한 또다른 기록은 우리나라에 처음 온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의 서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1885년 4월 5일자 비망록에는 “끝없이 지껄이고 고함치는 일본인과 중국인, 그리고 한국인들 한복판에 짐들이 옮겨져 있었다. 다이부츠 호텔로 향했다.”라는 구절이 있다.‘다이부츠’는 대불호텔의 일본식 발음이다. 따라서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가 1888년 대불호텔을 건립하기 이전에 이미 같은 이름의 서양식 호텔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펜젤러는 “호텔방은 편안하고 넓었으나 약간 싸늘했다. 식탁에 앉았을 때는 잘 요리되어 먹기 좋은 음식이 나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씨줄날줄] 골프회원권/오풍연 논설위원

    우리나라의 골프 역사도 100년을 훨씬 넘는다. 조선골프소사는 “구한국 정부시대에 외국인들이 개항도시인 원산의 세관 구내에 6홀의 골프코스를 건설했다.”고 전한다.1880년 원산항 개항 이후 시작된 듯 하다. 당시 원산 세관에 있던 영국 고문들이 공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 최초의 18홀 정규코스는 청량리 육림 골프장. 이 골프장은 1924년 개장했다. 그러나 1929년 제1회 조선골프선수권대회를 여기서 치른 이후 문을 닫았다. 그 뒤 1964년 한양,66년 태릉컨트리클럽이 개장되면서 한국 골프의 견고한 뿌리를 내리게 된다. 전 세계 골프장 수는 3만 1000여개. 골프인구는 5800만명에 달한다. 현재 세계인구는 62억명. 그 중 0.94%가 골프를 치는 셈이다. 미국 골프전문 월간지인 골프다이제스트의 조사 결과다. 미국의 골프장 수는 1만 5400개로 영국·일본·캐나다·호주·중국·한국 등 81개 나라의 골프장을 합친 것과 비슷했다. 영국이 2645개, 일본이 2440개로 그 뒤를 이었다. 한국은 196개, 북한은 2개에 불과했다. 인구 1000만명 이상인 나라 가운데 우크라이나·수단·예멘·말리·벨로루시 등은 골프장이 한 곳도 없다. 우리나라도 몇년 전부터 골프 붐이 일고 있다. 이를 입증하듯 실내외 골프연습장이 우후죽순격으로 들어선다. 시골도 예외는 아니어서 전국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다. 업계는 골프인구를 대략 300만∼500만명으로 추산한다. 골프 관련 사업은 불황을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수도권의 경우 주중에도 예약을 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다. 골프장을 많이 짓고 있다지만 덩달아 골프인구도 늘어나 예약난이 당장 해소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때문인지 골프회원권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강남의 웬만한 집 한 채 값인 10억대 이상의 회원권도 적지 않다. 초고가 회원권의 경우 한 달 사이 1억원 이상 뛰는 게 보통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지난해 정부가 ‘8·31’ 부동산 대책을 내놓은 이후 골프회원권은 2배 가량 올랐다. 부동산을 죄다보니까 시중의 여유자금이 골프회원권에 몰린 탓이다. 수억씩 이익(?)을 챙겼는데도 과세대상은 아니다. 그래서 보유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일까. 오풍연 논설위원 poongynn@seoul.co.kr
  • “피랍 선원 모두 무사”

    “피랍 선원 모두 무사”

    소말리아 공해상에서 조업중 해적으로 추정되는 무장괴한들에게 납치된 동원수산 소속 참치잡이 원양어선 제628 동원호(361t·선장 최성식) 선원들은 5일 오후 현재 모두 무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동원수산 부산지사에 따르면 인근 해역에서 같이 조업을 하던 제619동원호 문영근(가명) 선장이 이날 오후 5시40분쯤 부산지사에 전화를 걸어와 ‘최 선장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연락을 직접 받았다고 전했다. 문선장은 “최 선장이 오후 5시20분쯤 자신의 배로 전화를 걸어와 “선원 모두가 안전하며, 이들이 폭력 등 위협적인 행동은 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또 배가 최초 정박지인 오비아항 6마일 해상에서 남서쪽으로 5마일가량 이동해 정박해 있으며 피랍 당시보다 2명이 더 승선, 모두 12명의 괴한이 타고 있다고 현지상황을 설명했다. 또 선원들은 라면 등을 끓여먹는 등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괴한들이 통신실을 감시하고 있어 최 선장 등 선원들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피랍 이후 10여차례 회사와 가족 등에게 전화 연락을 취해 자신들의 안부를 알려왔다. 회사측은 억류된 선원 석방을 위해 정부협상 채널과는 별도로 무장괴한들과 협상을 벌이고 있으나 이들의 요구사항이나 협상내용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하고 있다. 동원수산은 케냐 대리점에서 동원호가 억류돼 있는 오비항 인근 마을 촌장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현재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날 오전 이준규 외교부 재외국민영사국장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해양수산부, 해양경찰 관계자들과 동원수산의 송장식 사장이 참석한 가운데 관계부처 실무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다. 정부는 동원호에 승선중인 선원들의 소속국인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정부에도 피랍 선원의 신원을 통보하고 공조를 당부했다. 나포어선인 628동원호에는 선장 포함 한국인 선원 8명과 중국인 3명, 인도네시아인 9명, 베트남인 5명 등 모두 25명이 승선하고 있으며, 같은 회사소속인 619호,630호와 소말리아 해상에서 함께 조업을 하다 변을 당했다. 한편 부산 사하구 신평동 동원수산 부산지사에 설치된 사고대책본부에는 피랍소식을 전해들은 선원 가족들의 사고확인 전화가 잇따랐다. ●동원수산은 어떤 회사? 국내 굴지의 원양수산회사인 동원수산은 창업주인 왕윤국 회장이 1954년 세운 신흥냉동이 전신이며 김재철 회장이 이끄는 동원산업과는 다른 회사다. 현재 19척의 원양어선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중 16척은 참치 연승어선으로 태평양과 인도양, 아프리카 연안에서 어획활동을 하고 있고 트롤어선 3척은 뉴질랜드 근해에 투입돼 있다. 부산 김정한기자 김수정기자 jhkim@seoul.co.kr
  • [北·中 신밀월과 6자회담] 2004투자 130배 폭증 중국에 경제종속 심화

    [北·中 신밀월과 6자회담] 2004투자 130배 폭증 중국에 경제종속 심화

    북한과 중국이 ‘신(新) 밀월관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관측이 강하게 제기된다. 경제협력 규모와 내용뿐 아니라 상호간 고위급 인적교류도 심상치 않은 수준이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미묘한 정세변화가 우리에게 ‘기회이자 도전’이라고 진단했지만, 북·중 신 밀월관계가 중국에 대한 북한의 ‘종속 심화’를 뜻한다면 우리에게 심각한 도전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가 지배적이다. 자칫 분단고착화의 동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다. 북한의 중국 경사는 한반도를 완충지역으로 중국을 견제한다는 미국의 전략과 상충되기 때문에 새로운 갈등으로 증폭될 소지도 있다. ●작년 상반기 北·中무역 7억달러 돌파 5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 따르면 중국의 대북 투자는 2004년에 1억 7350만달러로 2003년의 130만달러에 비해 130배 폭증했다. 교역규모는 2003년에 처음으로 10억달러를 넘어선 데 이어 2004년에는 13억 8521만 달러로 35% 증가했다. 지난해 상반기 북·중 교역규모는 7억 4157만 달러로 전년 동기에 비해 43% 늘었다. 북한의 대외 교역에서 중국의 비중은 2000년 23.5%에서 2004년에는 39.0%로 두배 가까이 커졌다. 남한의 비중이 20.5%에서 19.6%로 오히려 줄어든 것과는 대조적이다. 칫솔·옷·옥수수 등 생필품의 90%가 중국산인 것으로 알려진다. 게다가 지난해 3월 북한과 중국은 ‘대북 투자 촉진 및 보호 협정’을 체결했고 10월에는 ‘경제기술 협조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KIEP는 랴오닝성·헤이룽장성·지린성 등 동북 3성의 기업들이 주로 북한에 투자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중국 정부와 지방 정부 차원의 대북 투자 증가 조짐으로 해석하고 있다. 지난 1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중국 방문에 이어 김정일 위원장의 매제인 장성택 노동당 제1부위원장이 지난달 18일부터 28일까지 중국을 찾았다. 차오강촨 중국 국방부장이 지난 4일 북한을 방문해 경제협력에 이어 군사협력도 강화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최근 북한 경제의 대중 의존 심화 현상은 중국을 제외한 한반도 주변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가볍게 지나쳐 버릴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고 경고한다. ●中 원자재난·北 미국 제재 탈피하려 밀착 1949년 수교 이후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 맺어졌던 북·중간 혈맹관계가 1992년 한·중수교로 악화됐다가 갑자기 밀월관계로 전환되는지에 관심이 모아진다. 중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원자재 난에 직면했기 때문에 북한의 비교적 풍부한 원자재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텅스텐과 마그네사이트 등 광물의 북한 매장량은 세계 1위와 4위로 알려져 있다. 북한내 주요 자원의 잠재가치는 2287조원으로 추정된다. 정치적으로는 북한체제의 붕괴방지, 북한에 대한 영향력 확보라는 이익을 얻을 수 있고, 북한으로서는 국제적 고립과 미국의 제재에 따라 중국과의 밀착이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북·중간 급격한 경제협력 관계 강화가 북한의 ‘동북아 4성화’라는 우려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조명철 KIEP 통일국제협력팀장은 “북한 경제가 중국의 예속경제, 중국의 동북 4성이 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양문수 경남대 북한대학원 대학교 교수는 동북 4성화 가능성을 낮게 봤다. ●“대안은 남·북·중 3각협력” 북·중 신 밀월관계는 우리나라의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조명철 실장은 “북한의 대중국 무역의존도 편중현상은 구조적으로 고착화할 수도 있으며, 다른 나라가 북한과의 무역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낮추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양문수 교수는 “북한이 정치군사적으로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매운 높은 상황에서 경제적으로도 의존도가 심화된다면 남북 경제공동체 형성과 통일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전망했다.‘남·북·중 3각협력’ 등의 다양한 사업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학원 뺨치는 외국어 ‘올인’

    학원 뺨치는 외국어 ‘올인’

    신입생 지원율 하락과 정원 미달 확대로 위기의식을 느낀 사립 초등학교들이 본격적인 생존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학교에 기숙형 영어체험마을을 만들고 중국어 원어민 수업도 하는 등 외국어 교육에 사활을 걸고 있다. ●사립 같은 공립·조기유학에 위기감 90년대 중반까지 사립초등학교들은 최소 3∼4대1을 훌쩍 넘는 경쟁률을 보였지만 최근들어 경쟁률이 점차 떨어지고 있다.2005학년도와 2006학년도 서울 39개 사립초등학교의 지원율은 1.9대1. 올해 6개 학교는 정원이 미달돼 추가 모집을 했다. 1차 원인은 공립학교의 시설과 교육 프로그램이 좋아지고 있는데다 취학 아동 수가 감소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공립인 서울 대치초등학교에는 실내 골프장, 서울 돈암초등학교에는 수영장이 있다. 서울 대곡초등학교 등 3개 학교는 영어체험센터를 만들었다. 서울 4개 공립 초등학교에서는 일반 교과를 영어로 가르치는 영어 이머전(몰입교육) 수업을 시범 운영 중이다. 사립학교의 위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영어권 국가로 유학을 떠나는 사립학교 재학생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9월 교사를 새로 지어 시설이 좋은 서울 청량초등학교에는 이웃 사립학교 학생들이 옮겨오고 있다. ●초등학교에 기숙형 영어체험마을 사립학교들이 선택한 생존책은 ‘외국어 올인’. 이르면 내년 상반기 한양대 부설 초등학교에는 기숙사형 영어체험마을이 들어선다. 기숙형 초등학교는 이 학교가 처음이다. 부지 1000평, 건평 1400평 규모로 지자체의 영어체험마을과 비슷한 형태다.3∼6학년은 졸업까지 8개월 동안 방과후 체험마을로 가서 생활영어를 배운다. 오덕규 교장은 “조기 유학으로 지난해에만 학생 30여명이 자퇴서를 내 이런 대책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중국어 이머전 등장 유명 사립학교의 전유물인 이머전 수업은 서울뿐만 아니라 읍단위 지역에서도 생존책으로 도입하고 있다. 충남 홍성군 광천읍의 작은 사립학교인 서해삼육초등학교는 이머전 교육으로 부활을 꿈꾼다. 그동안 광천읍 인구가 1만 2000여명에 불과해 정원 20명조차 채우지 못했지만 이머전 수업을 도입한 뒤 홍성과 대천, 청양 등 공립에서 옮겨온 학생만 20여명이나 된다. 태강삼육초등학교는 지난 3월 국내에서 처음으로 중국어 이머전 과정을 도입했다. 현재 1학년 2학급 학생들은 중국어 원어민 교사가 진행하는 중국어 기초회화를 비롯해 수학, 중국역사 등을 주 5시간씩 배운다. 대학처럼 학기 중에 교환학생을 파견하는 학교도 처음 등장했다. 경복초등학교는 지난해 9월부터 4학년 희망자에 한해 한달씩 미국 오클라호마주 킹크리스천스쿨 등 2개 자매학교에 보내고 있다. 이선형 교감은 “지난해 4회에 걸쳐 한 학년정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80여명이 참가했으며 올해도 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중국어와 일본어도 정규 과정에 포함시키는 학교도 늘고 있다. 경희초등학교는 4학년부터 주당 1시간씩 일본어, 계성과 매원·유석초등학교 등은 중국어를 가르친다. ●골프와 국악도 가르쳐 ‘1인 1악기’로 대변되는 사립학교의 예체능 교육도 다양해지고 있다. 경기 남양주시 심석초등학교는 3학년 이상 학생에게 주1시간씩 골프를 가르친다. 한양과 성동, 화랑, 세종, 한신초등학교도 골프를 교과과정에 추가했다. 추계초등학교는 주 한두 시간씩 국악을 배우며, 동북과 광주 살레시오초등학교는 영재교육반을 특별 편성했다.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 어선 포항앞바다 침몰 8명 실종

    19일 오전 3시50분쯤 경북 포항시 구룡포읍 북동쪽 3.5마일 해상에서 감포선적 51t급 저인망 어선인 화창호가 침몰해 선장 한영길(57)씨 등 선원 8명이 모두 실종됐다. 인근에서 조업중이던 1.5t 어선 청진호의 선장 허인행씨는 “조업중이던 화창호가 높은 파도로 침몰했다.”고 포항 해양경찰서에 신고했다. 해경은 “사고 어선이 다른 어선 2척과 함께 조업을 하다 기상이 나빠 조업을 중단한 뒤 감포항으로 돌아오던 중 높은 파도 때문에 침몰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해경과 해군은 사고 해역에 헬기 1대와 경비정 등 10여척을 동원해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으나 풍랑이 심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화창호는 보험에 국내 선원 9000만원, 외국 선원 5000만원, 선체 6000만원에 가입했으며 중국인 선원 2명이 타고 있었다. 실종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한영길 ▲신영우(65·울산시) ▲김용이(61·기관장·속초시) ▲이형룡(52·포항시) ▲김홍창(46·부산시) ▲김창룡(45·울산시) ▲중리화(36·경주시) ▲유유화(37·경주시)포항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WBC] “대타면 어떠랴” 빅초이 마침내 3점포

    [WBC] “대타면 어떠랴” 빅초이 마침내 3점포

    ‘스타는 큰 경기에서 더욱 빛났다.´ 그동안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던 메이저리거 최희섭(LA 다저스)이 14일 미국과의 경기에서 통렬한 3점 쐐기포를 쏘아올려 구겨졌던 ‘빅초이’의 자존심을 회복했다. 한국이 3-1로 앞서가던 4회 2사 1·2루에서 김태균 대타로 들어선 최희섭은 볼 카운트 1-1에서 상대 두 번째 투수 댄 휠러의 시속 140㎞ 직구를 힘껏 잡아돌렸고, 높이 치솟은 공은 우측 담장을 살짝 넘어갔다. 최희섭은 아시아라운드를 포함해 전날 멕시코전까지 슬럼프에 허덕이며 마음고생을 했다.4경기에 출전해 14타수 3안타, 타율 .214. 기대됐던 홈런포는커녕 메이저리거의 위용은 찾을 수 없었다. 지난 시즌 메이저리그에서 15개의 홈런을 쏘아올렸던 그에게 코칭스태프는 대회 초반부터 기대를 걸었지만 심리적 부담이 그를 짓눌렀다.1라운드 중국과 일본전 그리고 2라운드 멕시코전에서 4번타자의 중역을 맡았지만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자, 김인식 감독은 미국전에서 아예 대타로 주저앉혔다. 이승엽(요미우리)이 연일 홈런포를 쏘아올리는 것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다. 자칫 조연으로 대회를 마칠 경우 메이저리그에서도 그 여파로 부진할 것으로까지 점쳐졌다. 그러나 최희섭은 마음속으로 미국전을 준비해 왔다.2라운드 시작 전 홍성흔(두산)과 김태균(한화) 등 국내파에게 4번타자 자리를 내줄 위기에 처했을 때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잔뼈가 굵은 미국에서 이미 수차례 상대해 본 미국 투수들과의 대결에서 능력을 과시하겠다.”며 마인드컨트롤을 거듭했다. 결국 승부처에서 김인식 감독은 ‘빅 초이’를 믿고 내보냈고, 최희섭은 한국의 4강 진출과 2006시즌을 향한 ‘희망포’를 힘차게 쏘아올렸다. 박준석기자 pjs@seoul.co.kr
  • [화제 2제] 홍어 선물받은 해양청장

    올해도 흑산도 홍어가 대풍이다. 홍어 풍어에 해경의 역할이 큰 것으로 알려지면서 전남 흑산도 수협에서 이승재 해양경찰청장에게 홍어 두마리를 선물로 보낸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화제가 되고 있다. 해양경찰에 따르면 지난 2일 홍어 2마리가 든 스티로폼 상자 1개가 이청장앞으로 배달됐다. 상자 안에는 7㎏은 될만한 커다란 홍어 2마리와 편지 1통이 들어 있었다. 홍어와 편지를 보낸 사람은 전남 신안 흑산도수협 조합장 박종순씨. 박씨는 “해경의 중국어선 불법조업 단속으로 홍어 조업이 대풍을 이루고 있다.”며 “감사의 뜻으로 홍어를 보낸다.”고 적었다. 최근 흑산도에서는 3∼4일 조업에 한 척당 200∼300마리의 홍어를 걷어올릴 정도로 풍어를 누리고 있다. 박씨는 편지에서 “예전에는 해경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몇년전부터 우리의 바다를 지켜주는 파수꾼이라는 믿음이 생겼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홍어를 받은 해경은 되돌려줄까 고민하다 성의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3일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서 직원들에게 반찬으로 제공했다. 해경 관계자는 “어민들의 고마운 뜻이 담겨 있어 그런지 지금까지 먹어본 홍어 중 제일 맛있었 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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