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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은 붕괴될 수 밖에 없다/박화진(정경문화포럼)

    북한이나 통일문제를 생각하거나 논의할때는 좀더 솔직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북한이나 통일문제는 있는 그대로 보고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외면이나 금기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보기 때문이다.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점이 부족하지 않았나 반성된다.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오늘의 북한은 어떤가.한마디로 건국이후 가장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있다.죽느냐 사느냐의 위기다.죽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보이는 사경에 빠져있다고 보는것이 보다 객관적이고 솔직한 관찰일지 모른다.북한이 놓여있는 여건을 살펴보면 당장 나오는 상식적결론이다.오랜 국제정치관측의 경험으로 볼때 국내외 정치흐름이 상식선을 벗어난 경우는 거의 없었다.국가명운도 마찬가지다.북한의 여건과 운명에 대한 솔직한 상식론은 어떤가. 오늘의 북한공산독재정권은 우선 존재해야할 이유와 명분을 상실하고 말았다면 지나친 주장일까.한반도의 분단은 미소 이데올로기냉전의 산물이다.북한정권은 구소련의 세계적화 전략에 따라 만들어진 정권이다.미소냉전은 민주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났다.사회주의에는 실패의 심판이 내린지 오래다.세계는 이데올로기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탈냉전시대다.사회주의를 지켜야 할 이유와 명분이 없어진 것이다.그런데도 한반도는 분단되어 있어야하고 북한이 사회주의를 고수하며 존재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말이다.난센스가 아닐수 없는 것이다.지나치게 단순화된 상식논리일지 모르나 원칙이 그렇다는 것이다.북한정권의 붕괴는 역사의 순서요 요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은 그것을 거부하며 실패할수밖에 없는 무의미한 저항으로 사회주의체제 고수를 고집하고 있다.사회주의는 북한의 국가존립 명분이기 때문일 것이다.그러나 사회주의는 선언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개방과 개혁이 필수과정인 것이다.구소련·동구 붕괴와 중국의 개혁에서 우리는 그것을 보지 않는가. 그러나 개방개혁을 통한 사회주의고수도 그렇게 쉬운일은 아니다.개방과 개혁이란 북한이 관심을 갖는 중국식의 경우만해도 시장경제도입과 대외개방을 전제로 한다. 북한이 어떻게 개방을 할수있단 말인가.개방없는 개혁이란 불가능한 것이며 개방은 북의체제에 대한 국민적 환멸과 불만 그리고 저항을 불러올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북한은 개방과 개혁을 할 수도 안할수도 없는 딜레머에 빠져있는 것이다.않고는 살아남을 수없고 하면 붕괴를 촉진할수 밖에 없는것이 북한의 개혁이요 개방인 것이다. 결국 북한의 체제붕괴는 명분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불가피하며 시간의 문제일뿐 필연이라 보는것이 가장 솔직하고 객관적인 관측이 아닐까 생각한다.북한은 우리가 원하든 않든 붕괴될수밖에 없고 붕괴되어야 하는것이 역사의 명령이라 할수있을 것이다.그런 기본인식이 북한이나 통일문제 생각과 접근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북한당국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그것은 거부할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며 핵개발과 보유를 체제유지의 담보로 삼으려는등의 저항은 성공할수없을 뿐아니라 불필요한 비극과 혼돈을 연장시키고 희생만 크게할 뿐일 것이다.이데올로기 아닌 민족주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남북대화합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한다. 북한의 붕괴는 바람직 스러운것이 아닐지 모른다.가장 바람직 스런것은 북한이 자발적인 정치·경제민주화 개방과 개혁에 성공하는 것이다.북한이 우리와 같은 민주국가가 된다면 통일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통일이 되지않더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한민족 두나라의 우호적이고 경쟁적인 이웃으로 공존공영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한번 솔직히 말해 그런 일이 일어날수 있을것 같지는 않다.결국 북한의 붕괴사태는 오고야 말것이며 그것은 분단의 우리가 겪지않으면 안될 홍역이라 해야할 것이다.그렇다면 그러한 북한의 붕괴는 가능한한 빨리 오는것이 좋지 않겠는가.준비도 안된상태에서 갑자기 북한이 붕괴될 경우 독일에서 보듯이 막대한 통일비용등 엄청난 부작용을 우려하는 소리도 있으나 최근 방한한 독일의 통일총리 콜자신이 한민주은 통일비용같은 것을 걱정해서는 안된다고 한 충고의 의미를 진지하게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북한의 붕괴는 언제 올지 모르며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솔직히 북한붕괴의 촉진이고 붕괴에 대한최선의 대비책을 서두르는 일일지 모른다. 분단은 한국병의 근본적인 병근의 하나다.김영삼대통령이 한국병을 치유하는 신한국건설의 궁극목표를 통일민주한국 실현에 둔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분단은 남북한이 안고있는 만병의 근원이다.김영삼대통령도 콜처럼 임기중의 통일대통령이 되어야하며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그것이야말로 김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소임의 하나라 생각한다.
  • “북한 NPT탈퇴·중국 군비증강 대응/미,아주안보체제 구축을”

    ◎NYT지 촉구 【뉴욕=임춘웅특파원】 미국 뉴욕타임스지는 19일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의 군비경쟁을 지적하고 미국은 아시아의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는데 부적절한 냉전시대의 안보조약에서 탈피,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해야한다고 촉구했다. 타임스지는 이날 사설을 통해 미국이 한국 일본 필리핀과 체결한 쌍무적 안보조약이 획일적으로 공산국가를 적으로 삼고있으나 앞으로의 분쟁은 보다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갖게될지 모르며 미우방국간에 터질 잠재력도 지니고 있다면서 미국이 아시아평화에 주도적 역할을 계속해나가기 위해서는 참여를 희망하는 모든 국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해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타임스지는 현재 동아시아에는 지역안보체제인 동남아국가연합(ASEAN)이 있고 미국과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는 아세안과 공식적인 대화파트너지만 이 지역의 여타 군사강국인 러시아 일본 베트남 대만은 제외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3)

    ◎길림시절:2/체류시기의 왜곡/육문중 재학기간 실제보다 1년 늘려/마적활동설 등 평단중시절 비행 은폐/27년 8월 입학을 1월로 주장 김일성이 길림 육문중학교에 들어간 것은 북한이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은 1927년 1월 17일이 아니라 사실은 그 해 8월이다.61년에 발간된 「조선근대혁명운동사」는 그가 「육문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26년8월 공산주의 청년동맹에 가맹했다」고 쓰고 있는데 26년이나 입학,공청동맹 가맹 같은 것은 다 사실이 아니지만 8월이란 날짜만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김일성의 27년8월 길림행은 3가지근거로 증명할 수가 있다. ○사실확인의 세 근거 그 첫째는 앞에서 말한 이선일 증언이다.그는 27년8월 심양 평단중학교 입학 때 그 직전 김일성이 이 학교를 중퇴한 소문을 들었다.그리고 그는 30년에 최덕현 오가자에서 김일성과 같이 있게 되었을 때 이 사실을 직접 본인으로부터 확인하고 있다.27년 당시 심양의 한인 인구는 적었으므로 중학생 김일성의 동향은 곧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둘째는 김일성이 29년 5월에 길림 육문중학교를 중퇴한 사실을 들 수 있다.이 때 허소가 만든 「조선공산청년회」란 조직에 길림의 정의부계통 청년들이 망라되고 있었다가 일본 길림총영사관 경찰에 발각되었다.그 속에 김일성도 있었는데 그는 도망쳐서 길림을 탈출하고 체포를 면하였다. 그는 이에 따라 육문중학교도 중퇴했다.최형우는 김일성이 다닌 중학교를 잘못 알고 있었지만 중퇴사실 자체는 다음과 같이 정확히 말하고 있다. 「…김일성은 졸업기를 목전에 둔 제오중학의 교문도,소년탐험대의 자리도 떠나서 단신 방랑에 가까운 여인이 되었다」 이상과 같은 일본 기록과 최형우의 서적으로 우리는 김일성이 29년 5월,3년제인 길림초급중학교 3학년을 중퇴한 것을 재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필자가 평단중학교 문제 때 소개한 중학교 학년학기 일정표이다. ○방학기간 이용 이동 이 일정표에 의하면 당시 중국의 2학기 마감은 6월 28일로 되어 있다.따라서 졸업식은 그후 며칠 안가서 진행되는데 김일성은 바로 「졸업을 목전에 둔」5월 중순에길림성성을 탈출하여 중학교를 중퇴한 것이다. 또 이 일정표는 1학기 수업개시가 8월 24일로 되어 있다.그래서 이 날짜를 가지고 그의 재학 가능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1926년 8월 24일 1학년 입학 1927년 8월 24일 2학년 진학 1928년 8월 24일 3학년 진학 1929년 5월 중순 3학년 중퇴 그런데 이상의 표에서 26년 입학 가능성은 그것이 길림 육문중학교 같으면 현재 김일성이 스스로 부인하고 있는 것과 같이 있을 수가 없다.그는 1학년 시절은 대체로 심양 평단중학교에 있었다.또 일정표를 보면 당시 여름 방학은 6월 29일부터 8월 23일까지의 약 2개월이었다.이선일의 증언과 같이 그는 이 방학기간에 심양으로부터 길림으로 이동한 것이다. 따라서 김일성의 길림시절을 사실대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가 중학교에 있었던 1927년 8월부터 29년 5월까지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그는 육문중학교에 가기 직전에 심양에서 길림으로 왔고 20개월 후 일종의 학생 비밀결사조직에 있었다가 일본 경찰의 검거를 피하여 길림을 떠났다.이 1년 10개월동안이 김일성이 길림에 있었떤 전 기간이었다. 그러나 지금 북한에서는 이같이 주장하지 않고 있다.그들은 김일성이 27년 1월에 무송에서 와서 29년 가을 길림감옥에 투옥될 때까지 길림에서 「혁명활동」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위해 길림체제기간을 27년 1월부터 8월까지의 6개월간과 29년 5월부터 가을까지의 약 6개월간씩 넓히게 되었다.모두 1년 정도 김일성이 길림에 더 있었던 것으로 꾸민 것이다. 여기서는 김일성이 넓힌 이 「활약기간」중 그의 길림 입성을 둘러싼 문제만 다루어 놓았다.그가 8월에서 1월로 반년이나 길림 입성을 앞당긴 것은 그의 전기 작성상 다음과 같은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⑴그는 평단중학교 시절의 진상을 철저히 은폐할 수 있게 되었다.그의 이 시기 생활이란 학생 기준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슨 상궤를 벗어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그가 일종의 마적떼에 있었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므로 학교생활도 짐작이 갈 것이지만 그는 이런 일들을 은폐한 것이다. ○「주체형 조직」강변 ⑵이 시절을 은폐하는 것으로 그는 26년 가을부터 27년 여름까지 10개월 정도 우상화를 위한 어떤 날조물이라도 집어넣을 수 있는 세월을 획득하게 되었다.그는 이 기간을 26년과 27년으로 양분하고 26년에는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새날소년동맹,반일부녀회 등 대체로 29∼30년에 있었던 민족주의단체 국민부의 하부조직이나 변두리조직을 「주체형」의 조직으로 제멋대로 왜곡,변형해왔다. ⑶따라서 육문중학교에 들어가기 이전인 27년 상반기란 텅 비운 시일도 김일성이 앞으로 거기에 무엇을 집어넣는가는 불문가지일 것이다. ①동서 232면 ②평전 212면 이하 ③29면 ④평전 107면종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2)

    ◎길림시절:1/의문투성이의 체류시점/“27년 육문중 전학”… 「26년 입학」 주장 수정/초기 혁명활동 근거마련 노려 이력 변조/주변선 “28년 무송서 만났다” 회고 김일성은 언제부터 길림에 있었는가. 북한에서는 그가 길림 육문중학교에 들어간 시기를 몇번이나 변경해왔다.해방후 60년대까지 그들은 그가 이 학교에 1926년에 입학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특히 61년에 발간된 「조선근대혁명운동사」에서는 그 입학시기가 「26년 여름」이었다고 암시하기까지 하고 있다. ○68년부터 연도변경 그런데 68년 전기부터 그들은 이 연도를 변경하여 1927년이라고 하기 시작하였다.그리고 이 무렵부터 입학이란 용어가 애매하게 되어 「전학」이 시사되어 나가더니 지금은 전학이 기정사실화 되어버렸다.그 전학시기도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에서 「봄」으로 되고 72년의 어떤 전기부터는 엄동설한인 27년 1월17일이라고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학에 들어간 연도가 26년이었다가 27년으로 바뀌어졌다든가 입학이 전학으로 되었다든가 그 시기가 여름부터 봄,봄부터 한겨울,한겨울이라도 특정된 날짜인 1월17일로 변경되어 나간다면 이것이 보통 서민들의 이력서 같으면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법적 문제로 될 것이다.그런데 북한에서는 일국의 최고지도자가 반세기란 장구한 세월을 이런 경력변조에 허비하고 있다. 김일성은 최근의 북한 주장 같이 27년 1월14일에 길림으로 가서 17일에 육문중학교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우리는 이런 날짜놀음에 놀아나지 말고 그가 27년 상반기에는 길림에 없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그가 이 무렵 길림에 없었다는 것은 북한 문헌을 분석해 보더라도 확실하다.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우상화를 위하여 조선노동당이 해방전에 그의 변두리에 있었던 인물들을 총동원하여 그가 어떤 시기 어떤 공적을 쌓았는가를 증언하는 「회상기」를 쓰게 하고 있다.그리하여 60년부터 이 회상기들을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란 표제 밑에 현재까지 6권을 출판하고 있다. ○경력위조에 반세기 또 이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는 70년부터 4권짜리 연대순으로 재편집되었다.그중 1932년까지의 그의 「초기혁명활동」을 회상한 제1권은 편집이 어려웠던지 77년에 와서야 겨우 출판되고 있다. 그런데 이 제1권의 권두를 차지하는 채규룡의 회상기 「인민대중을 교양각성시키기 위하여」에서는 그가 김일성을 무송에서 만난 날짜를 1928년 1월이라고 하고 있다.이 일은 그의 「초기혁명활동」목격자는 아무리 연도를 거슬러 올라가도 28년 1월보다 전에는 찾을 수가 없다는 말로 된다. 채규룡의 이 회상은 사실은 29년에 무송에서 결성된 국민부 계통의 소년동맹 활동을 노동당이 28년의 일로 왜곡하고 있는 글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왜곡된 사실은 차치하고 28년1월이란 날짜만을 문제로 삼아본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초기혁명활동」을 증언하는 증인을 정력적으로 찾고 있다.회고록에 실린 여성독립운동가 이관린을 예로 들면 그는 중국인과 결혼하여 손자까지 두고 있었고 민족주의자였던 경력 탓에 북한에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그는 20년대 후반,무송에서 만난 강반석의 아들 김성주가 북한 통치자 김일성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노동당은 초야에 파묻혀 살고 있는 이러한 이관린을 찾고 또 찾았다.그리하여 겨우 70년대 초에 찾아낸 그들은 그후 80년대 후반까지 기다린 끝에 가족을 떠날 결심을 한 그를 평양까지 데리고 와서 홀몸으로 살게 하였다.몇년 안가서 죽은 이관린을 그들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하였다. 이 경우를 보더라도 김일성은 자기의 우상화를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는 권력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이관린이 과연 26년에 만났는가 어땠는가는 객관적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유일독재를 확립한 후의 김일성은 20년대 후반에 자기와 만난 증인이라면 어떤 수작을 꾸미더라도 기어코 그를 증언대에 세우고야 마는 집념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어떠한 무리수도 마다하지 않는 김일성이 20년대 후반에 무송에 있었던 채규룡으로 하여금 회상을 쓰게 하였다.그리고 채규룡이 쓴 29년1월의 국민부 산하 소년동맹 활동을 일부러 28년1월로 끄집어 올리는 왜곡을 감행한 후에 이 「회상」을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연대순1」의 권두에 가져온 것이다. ○사실 증언자 전무 이러한 곡절을 알고 보면 우리는 누구라도 김일성이 1927년에 했다는 「초기혁명활동」에 대하여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그에게는 27년에 있은 일은커녕 28년에 있었다는 「일」조차도 29년에 실지로 있었던 일을 앞당겨 가져오지 않으면 「증명」해 줄 사람이 없다. 자기를 정당화하는데 있어서 김일성 같이 강한 집념을 가진 인물은 없고 또 그와 같이 이 일에 대하여 막강한 권력을 장기간 행사한 권력자도 없다.그런데도 27년 상반기의 길림시절을 회상해주는 증언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길림에 없었다는 강력한 반증으로 되는 것이다. ①동서 한국판 232면 ②「인류해방의 구성 김일성원수」백봉 저 인문과학사 간 21면 ③평전 255면 이하 ④「세기와 더불어 1」184면 이하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39)

    ◎소년시절:20/무송의 「새날소년동맹」/“모임 결성했다” 주장하는 26년 12월/무송지역에 김일성 간적조차 없어/마적단의 잦은 약탈 전기에 언급안해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화성의숙을 중퇴한 후 길림으로 가기 위한 준비로 모친 강반석이 있는 무송에 돌아 갔고 거기서 26년 12월15일 「새날소년동맹」을 조직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이 해 가을쯤부터 사실은 봉천(심양)의 평단중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다.당시 중국 동북의 중학교들에서는 8월24일부터 12월20일까지가 제1학기 전기수업기간이었다.따라서 북한의 주장을 따르면 평단중학교에서도 그는 1학년 1학기 도중에 학업을 버리고 있는 것으로 된다. ○봉천 평단중 재학 그러나 그는 무송에서 「새날소년동맹」을 결성한 일은 전혀 없었다. 26년의 안도·무송지방은 아래에 든 예와 같이 마적의 발호가 극심하였다. 전인의군과 마적 2백명이 무송·안도지방을 약탈하고 돌아다녔다. 함경북도의 경관 11명이 월경하여 안도까지 마적을 추격하였다. 봉길연합토벌대가 무송·화전방면으로부터 마적단을 공격하여 그들을 안도의 수림지대에로 압박하였다. 안도의 십오리지방에서 대두목 왕홍태가 중국군과 교전하여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두목 양광이하 1백50명의 마적이 안도현 양강구를 습격했다. 두목 점구주와 마적 80명이 안도현 고동하를 습격했다. 김일성은 이렇게 치안이 억망이고 살벌하기 짝이 없는 무송·안도지방에서 하필이면 「공산주의」소년조직을 만들었다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소년동맹」의 결성날짜를 12월15일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그것이 완전한 날조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이틀간 대규모 습격 안도·화전 현계지방에 분산행동중인 마적두목 양광,협해,점구주,상산호,남협등 연합마적단 약 1백50명과 유하,몽강 양현지방에서 행동중인 철뢰,사해,흑용,천순,신호산,양래호,점동 등이 거느리는 약 2백명의 마적단은 12월18일 하오5시쯤 돌연히 무송현성을 습격하여 방화를 했다.그리고 성내 경비군·경은 패퇴하여 보위단·경찰측의 사자 약 40명,관민의 사상자 약70명,가옥소실 약1백채에 달하고 또 경찰서장,학교생도 40명,성내 상인 20명이 납치됐다. 마적단은 19일 하오2시쯤 차마를 징발하여 약탈품을 탑제하고 무송현 서북 몽강현 방면으로 퇴거했다.」 이 기록은 북간도 연길현의 일본 경찰관이 안도현 지사로부터 들은 말이다.여기서는 연합마적단의 합계가 3백50명으로 되고 있지만 후에 정리한 바에 의하면 그 총수는 약 5백명이었다.또 이때 무송현지사는 호위병을 데리고 성외에 도피하였고 성내의 관공서,상가의 3분의1이 소실되었다. 무송현성 인구는 당시 이 지방을 여행한 일본 지리학자 야마다(산전구태낭)에 의하면 호구 7백,인구 2천8백정도였다 한다. 그런데 26년 12월에 5백명이나 되는 대규모 마적단이 7백호정도 밖에 집이 없었던 이 무송현성을 습격하였다.이 습격에 대항해야 할 군경은 수십명의 사상자를 낸 후는 현성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마적단은 18일 상오 5시부터 현성에 있었을 뿐 아니라 하루 밤을 거기에서 지내고 다음날 하오2시에 모든 약탈품을 수레에 싣고 유유히 퇴각하였다. 이것은 마적의 소굴이었던 당시의 무송·안도지방에서도 미증유의 약탈이었다.곳곳에서 일어난 화재는 이 도읍을 생지옥으로 만들었고 마적들이 겁탈과 약탈을 감행하는 와중에서 당하는 사람들의 아비규환이 주민들의 폐부를 찔렀다.7백호 중에서 재물이 있는 집을 가령 2백호 정도라고 하면 어느 집이나 2∼3명의 마적들이 총을 들고 밤새도록 털고 털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이 12월15일에 결성했다는 「새날소년동맹」이야기에는 「결성」된지 불과 3일 후에 있었던 이 참사가 「없었던 것으로」되어있다.이 이야기를 아무리 읽어 보아도 마적의 「마자」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민족주의 단체의 것이건 공산주의 단체이건 간에 소년단이란 조직이 무송현성에서 결성되었다면 그후 3일만에 터진 마적단의 무송 습격에 대하여 김일성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그리고 그러한 소년단이 있었다면 그들은 모든 힘을 다하여 불타다 남은 집을 치우고 주민을 돕고 하다못해 피난가는 사람들의 짐 하나라도 들어주어야 할 것이다.그러나 김일성의 모든 전기에는 그런 일을 했다는 서술은 단 한 줄도 없다. ○당시 정황과 불일치 따라서 이런 전기들은 거꾸로 김일성이 무송에 있었다고 하는 주장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그는 26년 12월 중순에는 무송지방에는 없었다. 당시 김현직이 사망하여 강반석과 김형권 그리고 김일성의 두 아우 밖에 없었던 무송의 약방도 마적단의 호개의 겁략 대상이었을 것이다.그러나 늙어서 잊어버린 탓인지 김일성은 자기 집이 이때 노략당했다는 것도 회상하지 못하고 있다.그만큼 당시의 무송지방에 대한 그의 기억은 희미한 것이다. ①평전 94면 ②평전 95면 ③만몽도읍전지 참조,평전 95면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38)

    ◎소년시절:16/화성시절 목격자의 최후/민족주의자 활동 비밀 아는 김시우/58년 입북하자 “우상화 걸림돌” 배척/벽지 귀양살이… 죽을때 “인연” 발설 종전의 김일성 전기에서는 김일성이 화성의숙을 중퇴한 일을 둘러싸고 아무말도 없었다.그런데 이번 회고록은 종전과는 달리 그의 퇴학을 가지고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그 내용이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생애 첫 대용단” 선전 ㈀독립군의 3중대장은 운영난에 빠지고 있었던 화성의숙을 위하여 모금한 돈을 몽땅 자기의 결혼식 비용에 써버렸다.김일성은 이러한 독립군에 경종을 울리기 위하여 「ㅌ·ㄷ」성원들과 협의한 끝에 각 중대에 성토문을 돌렸다.정의부를 비난하는 자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오동진까지도 이 성토문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그러나 한장의 성토문 정도로 독립군의 정치도덕적 타락을 막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화성의숙의 학생들은 모연공작에 나가면 경쟁적으로 재물과 양식을 거둬들였다.그들은 식사때 조밥에 시래기국만 준다고 밥타발까지 하였다.이런 학생들이 2년 후에 군관이 되어 독립군의 중대와 소대들을 거느리게 된다는데 김일성은 실망하였다. 이런 말을 하면서 회고록은 화성의숙은 김일성의 기대에 만족을 주지 못하였고 또 그는 화성의숙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고 하고 있다.그리하여 그는 사망한 김형직의 약방을 지키고 있는 삼촌 김형권대신 약방을 할것인가.아니면 번양이나 하얼빈이나 길림같은 도시에 가서 상급학교에 진학할 것인가라고 고민했다는 것이다.그는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길림에 가서 중학교에 다니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 그 결심은 그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되는 대용단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회고록의 말 속에서 어용작가들이 「심양」을 들먹이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김일성은 심양의 평단중학교에 한동안 있었기 때문이다.이 평단중학교 시절이 없으면 그의 길림중학교 전학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그가 이 학교에 있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전천협동농장 배치 그가 심양에 있었던 시기는 그가 화전이나무송에는 없었던 시기로 된다.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화전이나 무송에 발은 디딜 수는 있었다.그러나 그는 이런 지방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따라서 화전에서 있었던 이상의 일들은 김일성이 모친이 있는 무송현성과 심양을 오가는 사이에 이곳을 지나가다가 김시우 집에 들러서 들은 이야기들 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그가 김시우 집에 들른 일도 회고록에는 나오고 있다. 김일성은 화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김시우를 자기와 아주 가깝고 친한 사이로 묘사한다.그러나 이 일을 김시우쪽으로부터 보면 문제는 사뭇 다르다. 그는 해방후 오랫동안 중국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가 1958년에 가서야 비로소 북한에 돌아왔다.그런데 그는 김일성이 있는 평양에 가서 살지는 않고 북한에서도 아주 벽지인 평북 강계군 전천지방에서 숨어살다 싶이 했다.김일성이 전천을 현지지도해도 그와 만나지도 않았다.그는 죽을 때 자기 자식들에게 처음으로 자기와 김일성과의 인연을 말했다고 한다. 어용작가들은 이러한 김시우를 마치 김일성에게 충실한 것 같이 묘사하고 있다.그러나 회고록에서 뽑은 이상의 골자만으로도 북한에 돌아온 김시우의 절망은 엿볼 수가 있다.그는 귀국하지 말 것을 귀국하였다. 화전에서 문제아였던 김일성과 몇번이나 만나서 그의 성향을 익히 알고 있었던 김시우는 모택동치하의 중국에 버티고 있으면서도 김일성 곁에는 가지 않았다.그러나 58년 무렵의 중국에서는 「조국」이 융성발전하고 있다는 김일성의 허위선전이 그냥 먹혀 들고 있었다.아마도 귀국하고 싶어하는 자식들의 요구 때문에 그는 그들과 같이 북한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조국」이라고 돌아온 그들은 그러나 김시우가 북한에서 가장 문제로 삼는 출신성분에 걸렸기 때문에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그는 정의부,국민부계통의 민족주의자였다.남로당파,연안파,소련파 등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에게 「종파」란 딱지를 붙여서 한창 숙청하고 있는 58년에 이러한 김시우가 중국에서 넘어온 것이다.그들은 입국하자마자 첩첩산골인 전천의 협동농장으로 배치되어 거기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과거 민족주의 계통이었다는 사실은 철저한 비밀로 되어있다.그것은 지금 현재도 마찬가지이다.그는 철두철미 「공산주의자」였던 것으로 되어있고 또 그렇게 행세하고 있다. ○「종파」딱지 붙여 숙청 1920년대 김일성과 안면이 있었던 민족주의자들이 70년대 이후 북한에 가서 그와 만나는 일이 생겼다.그리고 때로는 사망한 인물도 노동신문에서 소개하고 있다.그런데 이러한 일은 김일성 우상화에 무슨 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그리고 김일성과 만나거나 노동신문에 게재되는 민족주의자들은 예외없이 그들의 언행이 우상화에 복무되도록 철저히 왜곡된다. 그런데 김시우는 이러한 우상화작업에 참여할 때를 놓친 인물이다.그러나 그는 적어도 자기 입으로는 김일성에 아첨하지 않았다는 공적을 쌓고 죽었다. ①「세기와 더불어1」177면 ②같은책 181∼182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35)

    ◎소년시절:16/「ㅌ·ㄱ」구성원도 조작/민족주의 단체 국민부소속 청년들/가공의 공산주의 조직멤버로 도용/일경기록,1명도 공산주의자로 분류 안해 김일성이 화성의숙에서 「김일성」했다고 날조한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은 ㅌ·ㄷ(트·드)이란 조직을 북한에서 선전하기 시작한 1968년부터 조선로동당을 김일성의 사당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68년부터 선전시작 김정일은 결성 56주년이 된다는 1982년부터 10월17일 「조선로동당은 영광스러운 「ㅌ·ㄷ」의 전통을 계승한 주체형의 혁명적 당이다」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거기서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나열되어있다. 「ㅌ·ㄷ」의 결성은 조선공산주의 운동과 조선혁명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역사의 선언이었다」 「ㅌ·ㄷ」의 결성은 우리나라에서 종전의 당과 구별되는 새 형의 당,주체의 혁명적 당을 위한 투쟁의 출발점으로 되었다」 「ㅌ·ㄷ」의 결성으로서 우리 인민의 혁명투쟁은 자기발전의 새로운 길에 들어서게 되었으며 우리당의 영광스러운 뿌리가 내리기시작하였다」 우리는 역사적 사실로서의 조선공산주의운동은 1920년대에 발생했지만 그것은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와 블라디보스토크,중국의 상해,일본의 동경 그리고 조선의 서울 등으로 그 중심이 옮겨지고 1925년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창건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리고 이 당은 그후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내부의 종파싸움으로 끊임없이 약화 되었고 28년에는 드디어 코민테른(국제공산당)에 의하여 그 승인이 취소되는 굴욕을 당한것도 알고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상해나 도쿄·서울같은 선진사상에 접하기 쉬운곳이 아니고 그와 정반대인 만주의 오지화전에서 「조선공산주의운동」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지는 못한다.비단 남한에 있는 우리들 뿐아니라 1968년에 「민족의태양 김일성장군」이란 허황한 전기가 나올때까지 북한의 최고위급 당간부들조차 우리 민족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이것이 순전히 김일성 혼자의 주장이었던 것은 이번 회고록에서 밝혀졌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화성의숙시절의 나의 동창생들 가운데 그 시절을 회고할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 김일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전혀 없었다.그가 「ㅌ·ㄷ의 조직원」이라고 이번 회고록에서 처음으로 거명한 최창걸·김리갑·이제우·강병선·김원우·박근원·이종락·박차석,그리고 계영춘 등은 단 한명도 해방후까지 살아남지 않았다.이러한 「ㅌ·ㄷ 성원」들은 지금 모두 자신이 「ㅌ·ㄷ」을 모른다는 아무런 증언도 못하는 저승에 묶여 있는 것이다. 이 청년들이 일본의 경찰기록에 나오는 것은 1929년부터인데 이 때 그들은 한사람 빠짐없이 민족주의단체 국민부 산하의 청년단체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의 간부들이었다.당시는 반공단체에도 조선공산당의 재건파가 잠입하고 있었고 국민부에서는 그들을 적발하고 있었다.그러나 위의 명단에 나오는 청년들은 한사람도 「조선공산주의자」로 간주되지 않았다.국민부는 그들을 모두 민족주의 진영의 청년들이라고 신뢰하고 있었다. ○중공당가입도 못해 물론 그들 중에서도 30년에 이르러당시의 시대적 조류에 따라 공산주의에 접근하려 한 이종락들도 있었다.그러나 이론 수준이 낮고 폭력배였던 그 일당은 끝내 중국공산당에 들어가지 못하였다.당시 이종락의 졸개노릇을 하고 있었던 김일성도 중공에 못 들어간 것은 마찬가지였다. 김일성이 거명한 청년들이 1928년까지에 조선공산당원이 아니었고 그후에 조선공산당 재건파도 아니었으며 30년에 코민테른의 1국1당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지도 못한 것이라면 과연 이들이 공산주의자이겠는가.공산당이 당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공산주의자」같으면 그것은 객관적으로는 「자칭 공산주의자」이거나 「사이비 공산주의자」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그런데 그들의 태반은 스스로가 공산주의자라고 자칭하지도 않았었다. 한편 최형우가 거명한 진정한 「ㅌㄷ」의 성원인 장기명,이정락(이종락),현균 등등은 30년 무렵에는 공산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이 회간의 ㅌㄷ」자체는 공산조직은 아니었다.또 이 「ㅌㄷ」에서는 김일성은 조직에 망라된일개 피동적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상을 보면 김일성이 날조한 「ㅌㄷ」을 가지고 김정일이 「종전의 당과 구별되는 새 형의 당,주체형의 당의 뿌리」라고 말한 것은 백번 지당하다. ○일개 구성원에 불과 김일성이 결성한 「ㅌㄷ」이란 실지로는 없었는데 없는 것을 있다고 한다면 「새형의 가공조직」이 아닐 수 없고 김일성이 제멋대로 만든 것이라면 「주체형의 날조 조직」이라고 할 수 밖에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조선로동당의 영광스러운 뿌리」를 내리게 하는 씨앗으로 되는 「26년제 ㅌㄷ」이란 사실은 유일독재를 실시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김일성의 머리 속에서만 1966년부터 움트기 시작한 새형의 조작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①82년 10월17일 당간 논문 1∼3면 ②「세기와 더불어 1」136면 ③평전7장4절 ④〃 10장 4절 ⑤〃 347면 기타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32)

    ◎소년시절:13/마르크스·레닌서적 탐독설/「자본론」 중국어판 30년에 첫 출간됐는데/“26년 15살때 이미 읽어치웠다” 억지선전/최근들어 “공산당선언만 봤다” 다소 후퇴 김일성이 화성의숙에서 느꼈다는 마지막 세번째의 환멸은 다음과 같다. (ㄷ)민족주의 운동… 상해임시정부의 인사들은 「자치파」니 「독립파」니 하여 서로 치열한 감투싸움이나 세력다툼을 하고 있었고 독립군은 군자금이나 거두며 돌아다녔다.임시정부는 미국등에 대하여 비굴한 「독립청원외교」를 벌이고 있었다. ○“임정인사 세다툼” 적지않은 자산계급출신 운동가들이 「애국지사」로부터 일제의 앞잡이로,민족개량주의자로 굴러 떨어졌다.그들은 「민족개량」「실력양성」의 보자기를 쓰고 「계급협조」「대동단결」「민족자치」를 떠들었다. 이때 김일성은 화성의숙에서는 불가능하였으므로 김시우 집에서 마르크스·레닌의 서적을 읽었다.그리하여 청년들이 찾아올 때 이들에게 새 사조와 소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착취와 압박이 없는 사회를 선전하였다. 이중 세력다툼이니 군자금 징수니,변절이니,타락이니 하는 것은 김일성이 민족주의를 비판할때 언제나 사용하는 딱지들인데 이러한 단어들은 앞으로 연구할 기회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그가 「김시우 집에서 마르크스·레닌의 서적을 읽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문제를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김시우란 임강시대에 백산무사단원으로서 김형직과 관계를 맺은 우익인사인데 김일성은 그로부터 「좌익서적」을 제공받은 것으로 허구를 꾸미고 있다. 화성의숙시대 김일성이 김시우 집에서 공산주의 서적을 읽었다는 선전은 1978년에 발간된 「불멸의 자욱을 따라」부터 시작되었다.그러나 이 책은 그가 「완고한 민족주의자들을 멀리하고 혁명적 출판물들을 많이 탐독하였다」고 썼을 뿐,그가 무슨 책을 읽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런데 82년에 나온 그의 전기에서는 놀랍게도 그가 이 시절 「공산당선언」과 「자본론」「임금노동과 자본」을 읽었다고 주장하였다. ○민족주의자 멀리해 여담이지만 필자는 대학생시절 자본론을 사 보았었다.그러나 마르크스의 문장이 너무 길어서 의미를 파악하는데 애를 먹고 몇 페이지 안가서 읽는 것을 포기하였다.또 최근 오길남박사에 물어 보았더니 『자본론은 독일의 대학교수들도 읽는데 1년 이상 걸릴 정도로 어려운 서적』이라고 하였다.이런 책을 북한에서는 15살짜리 김일성이 읽어치웠다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딴데 있다.김시우의 집에 이러한 서적이 있었더라면 그래도 우리는 이것을 「과대선전」정도로 볼 수가 있다.하지만 이러한 책들은 26년 당시,만주의 오지인 화전현 관가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일본경찰이 1925∼26년에 동남만에서 압수한 「불온문서」를 보면 그 중 1백권 이상의 것은 「선봉」「거화」「전만동포에게 호소함」「전만혁명동포에게」「노동기념선포문」「노동보」「선포문」「불온문서원고」「국제청년데이」「혁명」「농보」「농민회발기준비서」가 그 전부였다. 모두 팸플릿이나 신문에 지나지 않았고 학술서적이란 없었다. 또 김시우의 집에는 마르크스·레닌의 서적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도없었다. ①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은 1929년 초에 육문중학교에 부임한 김일성의 스승 상월이 중국에서 갈림에 가져온 가능성이 있다.그러나 이 책이 길림보다 훨씬 낙후한 벽지인 화전현 관가에 그보다 3년이나 이전에 들어올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②「자본론」은 중국에서는 겨우 1930년에 그 제1권 제1분책의 제3장까지가 진계수 등의 번역으로 상해에서 출판되었다.또 그 전역본은 38년이 되어야 나오게 된다.26년에는 읽어야 할 책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창덕학교 5학년 수준인 그의 일본어로는 일본어 번역판도 읽지 못할 것이다. ③마르크스의 「임노동과 자본」을 일본에서 대중이 볼 수 있게 된 것은 1928년이므로 이 책도 중국에서는 출판이 상당히 늦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북한에서는 중국말도 일본말도 잘 모르는 소학교 중퇴생인 김일성이 대학생도 익히 알아보지 못하는 마르크스·레닌의 서적들을,이러한 책이 번역 출판되기도 전에 「읽었다」는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해괴한 주장을 85·87년 양년에낸 「김일성 평전」에서 조목조목 분석비판하였다.그래서 그런지 이번에 나온 회고록에서는 화성의숙 시대에 「공산당 선언」단 한가지만을 김일성이 읽은 것으로 하고 있다.나머지 책은 길림시대에 읽은 것으로 약간 그 시기를 늦추고 있는데 이렇게 하여도 서로 상충된 거짓말들을 조절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상충된 거짓말 여전 1925∼26년에 걸쳐서 동남만에서 1∼2점 발견되어 일본경찰이 압수한 공산주의 선전 팸플릿 중에 「공산당의 선언」이란 것이 있다.그러나 소련에서 출판된 이 팸플릿이 공산주의의 침투가 늦었던 화전현에,그것도 우익이었던 김시우의 집에 날아 들어 올 가능성이란 역시 매우 희박할 것이다. ①「세기와 더불어1」154∼157면 ②「불멸의 자욱을 따라1」202면 ③「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전기1」31·32면 ④5·6·8 평전 127∼134면 ⑦하상조번역 「임노동과 자본」암파문고판
  • 일 오코노기 마사오교수의 분석/해외석학 특별기고

    ◎“김영삼정부,남북공존 틀 완성을”/「김 부자체제 존속」 보장받기 부심/평양 서울의 「남북연합안」 더 선호/북의 정치체제개혁 적극 유도/정권 정통성 바탕으로 선진민주정치 실현할때 ▷냉전종결후의 한반도◁ 5년전 한국에서 노태우대통령정권이 탄생했을때 세계는 격동의 시기를 맞고 있었다.미소가 중거리핵전력(INF)조약을 체결,두나라의 대립을 크게 완화했고 그 2년뒤에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냉전의 어두운 상징이었던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동유럽의 정치적 대변혁은 냉전의 시대가 사실상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있음을 나타냈다. 냉전의 종결로 전후수십년동안 계속된 「2극제체」의 세계질서는 역사의 뒷무대로 사라졌다.냉전체제를 대신해서 세계 각지에서는 새로운 지역질서가 모색되기 시작했다.한반도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그러나 한반도의 새로운 질서는 아직 그 윤곽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다.노대통령정권 발족당시에는 전두환대통령정권때의 험악한 남북관계로 서울올림픽의 평화적 개최가 위협을 받기도 했다. 동아시아에서는 냉전종결이 곧바로 공산주의체제의 붕괴를 초래하지는 않았다.그러나 동유럽에서의 사회주의체제붕괴는 아시아사회주의 국가들의 장래에 심각한 의문을 던졌다.천안문사건을 경험한 중국을 시작으로 북한·베트남 등 아시아의 공산주의국가들은 체제존속을 최우선하며 일시적으로 내부지향적 정책을 추진하지 않을수 없었다. ○지역질서 구축선도 그러나 1990년 9월의 한소수교는 천안문사건이후 정체되었던 동아시아의 냉전종결 움직임이 한반도를 무대로 재개되는 계기가 되었다.북한은 일본에 국교수립교섭을 제안하고 남북총리회담을 수락했으며 더욱이 91년 9월에는 남북한의 국제연합 동시가입이 실현되었다. 남북총리회담과 일·북한국교정상화교섭은 북한의 생존전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수 있다.김일성주석은 10월에 평양을 방문한 강영훈총리에게 「1민족 1국가,2정부 2제도」통일방식을 시사했다.이는 북한의 통일정책이 「대남해방」으로부터 「체제유지」로 전환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세를 분석하면 한중수교를 포함,노대통령정권의 북방외교가 큰 성공을 이룩했다는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노대통령은 격변하는 국제정세를 적극적으로 활용,냉전후 지역질서구축을 선도했다.바야흐로 한반도에도 이제 예상되는 지역질서가 명확한 윤곽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대통령정권의 이같은 성공은 한국외교역량에만 의존했다고 할수 없다.역설적이긴 하지만 북한을 포함한 아시아사회주의체제의 존속이 냉전종결후의 동아시아에 유럽과는 다른 평화를 보장하고 있다.이러한 역설은 소련의 붕괴와 「동유럽혁명」뒤에 나타난 유럽의 혼란을 볼때 명료해진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불안한 평화」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5년후에 아시아 사회주의정권이 내부로부터 붕괴되어 유고슬라비아의 비극이 동아시아에서 반복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존재하는가.만약 사회주의붕괴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면 동아시아의 민족·국경·빈곤·종교등의 대립은 유럽이상으로 심각해질지 모른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우려되는 것은 북한 김일성정권의 장래이다.북한은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채택하고 베트남도 도이모이(경제개혁)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여전히 체제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북한의 이같은 경직된 태도가 계속된다면 그 말로는 폭력적인 비극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북방외교가 성공을 거둔 지금 한국외교의 최대목표는 「남북공존의 제도화」와 그 이후 북한의 「점진적 체제개혁」유도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2천억달러 이상으로 추정되는 통일비용의 부담이라는 관점에서 볼때도 한국으로서의 최대위협은 북한정권의 갑작스런 붕괴가 아닐 수 없다. ▷남북공존의 제도화는 가능◁ 김일성의 「체제유지」전략은 비교적 단순하다.그 기본구상은 일·북한국교수립후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자본과 기술로 북한의 사회간접자본과 기간산업을 정비하고 남북경제협력을 통해 국민생활을 향상시키며 수출산업을 육성하는 등으로 한국과 장기적으로 공존하는 경제체제를 확립한 뒤 이를 아들인 김정일에게 이양하는 시나리오다. ○북한정권 장래 불안 북한지도부는 그러나 「남북공존의 제도화」가 완성될 때까지 이데올로기나 정치체제의 개혁에 착수하지 않을 것이다.그때까지 북한이 허용하는 것은 단지 체제유지전략상 불가피한 경제의 대외개방뿐일 것이다.북한의 경제개방은 체제개혁과는 다른 현정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북한은 투자관계 3법을 공포하고 총리를 경질했다.연형묵총리와 교체된 강성산신임총리는 사실 함경북도의 당책임자로서 자유경제무역지대 설치에 전력을 다한 인물이다.북한은 또 경제개방에 적극적인 김달현부총리겸 대외경제위원장과 김용순당서기겸 국제부장을 정치국원 후보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북한의 이같은 전략이 성공해 김일성 사후에도 북한의 사회주의체제가 장기적으로 유지될지에 대해서는 큰 의문이 남는다.북한의 경제난이 지금과 같은 개방정책으로 타개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며 중국과 소련에서 보는 것 같이 경제개방은 경제체제개혁을 위해 필요하지만 이는 정치체제개혁에까지 파급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북한의 핵무기개발도 당초는 체제유지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심중무기(삼손옵션)로서 보유할 목적이었음에 틀림없다.바꿔 말하면 북한이 필요로 하는 것은 미국의 전술핵무기에 대한 억지수단이 아니고 체제존속을 보장하기 위한 몇발의 초보적 핵폭탄과 그 운반수단이라고 하지않을 수 없다. 그러면 체제유지목적과 관련,북한은 어떤 형태의 국제환경을 바라고 있는가.북한은 「단일제도에 의한 통일의 길」,즉 한국에 의한 흡수통일을 우려하고 있다.따라서 그동안 그들이 주장해온 「연방제통일」보다 오히려 노대통령이 제안한 2개의 주권국가가 공존하는 중간적 통일형태인 「남북연합」을 선호하고 있다.왜냐하면 그것이 남북공존을 국제적으로 제도화시켜 북한의 체제유지를 보다 확실히 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흡수통일될까 우려 이같은 관점에서 볼때 북한은 유엔동시 가입이나 교차승인에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실제로 남북한 유엔동시가입후 전금철 조국평화통일위원회부위원장은 『동시가입은 비정상적인 면도 있지만 통일에 유리한 면도많다.남북이 대결로부터 화해로 전환,민족공동체를 이룩하는 기회도 된다』고 말했다.교차승인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베이커 전미국국무장관의 「2+4」회담발언에 대해서도 한국내에서는 여러가지 복잡한 반응이 있었으나 북한의 군축·평화연구소의 최우진부소장은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보장한다면 그러한 회담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김일성주석도 신년사에서 『조선통일은 역사적인 국제관계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남북합의서 이행에는 관계제국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영삼정권의 역사적 역할◁ 새로 탄생하는 김영삼 차기대통령정권은 대국적으로 볼때 1961년 박정희장군의 쿠데타 이후 30여년동안 계속된 커다란 정치사이클의 마지막 정권이라는 역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12·18대통령선거에 출마한 두 김씨는 박정권과 격렬한 투쟁을 벌이며 두각을 나타낸 야당지도자들이다. 그러나 민주화의 달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민주화는 이미 노대통령에 의해 시작되었다.「김영삼대통령」의 역할은 민주화의 완성을 통해 지금까지의 정치사이클을 최종적으로 마감하는 일이다.군출신 대통령으로부터 야당출신 문민정치가로의 단계적 인계에는 한국적 민주화의 큰 특징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김영삼정권의 역사적 역할은 그것만이 아니다.커다란 정치사이클의 마지막을 담당하는 자는 새로운 정치사이클의 「산파역」이 되지않으면 안된다.김영삼 차기대통령은 이번 선거에서 「3당통합」이 구국적인 행동이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그의 진가는 5년후에 평가될 것이다.김영삼 차기대통령은 선진국적인 민주정치 사이클을 여는 중대한 임무를 맡았다.그러나 쉽지만은 않다. 김영삼정권의 당면과제는 「정치」보다도 「정책」,그 가운데서도 경제정책에 있다.경제분야에 경험이 부족한 김영삼 차기대통령은 유능한 경제관료와 학자를 총동원,「경제재건팀」을 구성,그들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하겠지만 단기간내에 「한국병」의 치유에 성공할지는 의문이 남는다. 김영삼정권의 또다른 중요한 역사적 역할은 평화통일의 길을 여는데 있다.가장중요한 것은 북한의 체제유지노력을 어떤 방법으로 「남북공존의 제도화」와 「점진적 체제개혁」의 방향으로 유도하느냐 하는 점이다.북한의 변화는 회유나 협박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실현되어야 한다. ○대북위상 많이 강화 새로 탄생하는 한국의 문민정권은 정통성과 이미 달성된 북방외교의 성과로 북한에 대해 입장이 상당히 강화되었다.새정권은 인기를 위한 안이한 타협을 배제하며 북한의 정책적 변화를 참고 견딜 수 있다.그러한 자세가 견지된다면 5년간의 임기중에 남북대화에 획기적 진전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새정권의 이같은 노력은 주변국과의 긴밀한 협조를 필요로 하고 있다.미국의 클린턴정권 발족과 함께 동북아시아의 긴장완화와 신뢰조성을 위한 다국간 협의를 요구하는 소리도 적지않다.한반도의 안정적 지역질서형성은 최종적으로는 남북 당사자들의 대화만이 아닌 북한과 일본,북한과 미국의 국교정상화나 주변 6개국의 평화협력 노력이 동시에 진행될때 달성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과제는 대일정책이다.김영삼 차기대통령은 원칙을 전면에 내세우고 강경 대일정책을 추진해온 군출신 대통령과는 다를 것으로 여겨진다.김영삼 차기대통령은 국내의 민족주의와 반일감정을 달래며 실리중심의 외교를 전개할 것이 틀림없다.김영삼 차기대통령은 「이해조정형」대통령이라 할 수 있다.한국에 이같은 대통령이 등장한 것은 한·일 양국 모두에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일본도 과감한 양보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오코노기 마사오(소차목정부) ▲1945년생 ▲1969년 게이오(경응)대 법학부 정치학과졸업 ▲1985년 게이오대 법학부 교수 ▲1989년 연세대 객원교수 ▲1989년 소련과학아카데미 동양학연구소 객원연구원 ▲1989년 하와이대 조선연구센터 객원연구원 전공:국제정치론·조선정치론 주요저서:「조선전쟁」「냉전기의 국제정치」「기로에 선 북한」「일본과 북한­지금부터 5년」「조선문제전후자료」전3권(공저)
  • 김영삼 당선자에 바란다/전인영 서울대교수(특별기고)

    ◎외교정책 목표 다시 세워야/정치·여론에 동요 없도록 한국민들은 지난 12월18일의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후보를 선출함으로써 31년여만에 민간인이 국가수반이 되는 문민정치시대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험난했던 우리의 헌정사를 돌이켜 보거나 규범적 또는 실존적으로 볼때 이는 분명한 정치발전을 의미한다. 그러나 합법적이고 공정한 선거절차를 밟아 정통성이 강한 신행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의 앞날을 낙관하기에는 한국이 처한 국내외 환경이 너무 복잡하고 불확실하며 어렵다.내년 2월25일에 출범할 김영삼 정권은 국내의 다양하고 상충되는 요구와 항의 뿐만 아니라 국외로부터의 거센 요구와 압력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촌은 통신·교통등의 발달로 인해 「좁아지고」있으며,국가간의 상호의존및 협력관계도 갈수록 긴밀해지고 있다.일국의 정치현상이나 정책결정은 그 나라의 일로 국한되지 않고 타국의 정치와 경제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즉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의 구분이 약화되고 연계성이 강화되는것이 현시대의 특성중의 하나이다.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세계 여러나라의 관심사가 되었으며,한국의 제14대 대통령 선거결과를 미·일·중·러 4강과 동구및 동남아 국가들이 주시했었다. 1980년대까지만 하여도 한국의 외교는 비교적 단순했었다.한국은 냉전구조속에 안주하면서 미·일과의 반호·협력관계를 초석으로 하는 서방편향의 외교활동을 전개했었다.한국외교는 막강한 미국의 영향력하에서 제한적인 독자성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큰 원인중의 하나가 남·북한간 대결과 소·중·북한의 3각관계에 대처해야 하는 현실적 요구때문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985년 3월12일 소련에서의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1989년 동구에서 발생한 일련의 혁명및 1991년의 소연방 해체는 냉전을 종식시켰고 한국의 외교안보환경을 크게 변모시켰다.국제기류의 대변화는 한국으로 하여금 새로운 외교정책을 수립,추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으며 한국은 화해·협력시대의 정신에 부응하는 북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구소련 동구국가들 중국 베트남등과 수교하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남·북한간에도 화해와 불가침및 교류협력에 관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발효시키는 큰 진전이 나타났다. 한국의 북방외교가 치밀한 「기본구도」(Master Plan)에 따라 진행된 것은 아니고 주어진 기회와 상황에 적응하는 형식으로 추진되었다는 인상을 피하기가 어렵다.그렇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세심한 배려에 소홀했다는 평도 나왔고 추진과정에서 갈등과 혼란 및 불협화음이 노출되기도 했었으며,필요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지적도 나왔다.남·북한관계에서도 결과적으로 북한의 체제유지와 지도층만 유리하게 만들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다.이러한 비판과 지적은 신행정부의 외교정책 수립및 추진에 도움이 될수도 있다. 그렇지만 노태우정권하에서 이룩된 북방외교의 성과를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성급한 면은 있었으나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국외교를 전방위외교로 전환시켰다는 것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과거의 긴장되었던 남·북한 관계를 검토하여 볼때에도 불만족스러운 면은남아있지만 「남북기본합의서」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큰 의의를 지니며 동·서독보다 20년이나 지체되었음과 비교할 때에는 늦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행정부는 복잡하고 불확실한 환경을 목전에 두고 있으며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어려운 대외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대외관계를 무리없이 관리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신행정부가 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은 변화된 국제환경에 맞게끔 새로운 목표와 전략을 재수립하고 조정하며 이와 연관하여 정책결정 기구와 과정을 재점검하고 재정비하는 일일 것이다.기본구도에는 한국외교의 목표·전략·원칙및 신사고등이 포함되어야 하겠다.둘째로 신행정부는 우리의 능력을 감안하여 우선순위를 결정하여 중요한 사안부터 중점적으로 처리해 나가야 할 것이다.셋째로 한국의 대외활동은 외무부를 중심으로 추진하되 전문가들을 중시하여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며 필요한 부문의 전문가들을 양성해 나가야 하겠다.끝으로 신행정부의 외교정책은 미래상과 방향감각을 분명히 지닌채 추진하며 정치나 여론에 의해서 쉽게 동요되지 말아야 하겠다. 세계적 추세인 경제안보의 중시,경제블록화 현상의 심화,민족주의의 대두 등을 고려할 때 신행정부의 외교과제는 지혜와 능력 및 신중함을 필요로 한다.남·북한관계에 있어서는 통일이 목표인 동시에 「긴과정」임을 인식하고 세계적 조류와 북한의 현실및 우리사회의 요구를 감안하여 쉽게 중단하지 말고 꾸준히 추진해야 할 것이다.통일은 북한사회가 스스로 변화하고 호응하여 올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므로 착실히 통일기반을 조성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선결과제가 될 것이다.
  • 새 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김일성자서전연구:6)

    ◎“김형직이 반일·공산운동 접목” 주장/“감옥에서 선진사상 배웠다” 날조/대한국민회를 적색단체로 기술 김일성을 본격적으로 우상화하기 시작한 1968년의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에서 저자 백봉은 조선국민회를 김형직이 창시한 것처럼 왜곡하였다. 그러나 백봉은 적어도 김형직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과 그가 3·1운동이 있은 1919년 이전에 조선국민회로부터 멀어졌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3·1운동 이전 멀어져 그러나 김일성의 유일독재가 한층더 악화되어 그의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근본이 다른 것으로 되어 나가자 김형직에 관한 왜곡도 극단을 달리게 되었다. 김일성은 그의 부친이 「반일민족해방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을 전환시키기 위한 투쟁」을 벌인 인물이었다고 선전하기 시작하였다.김형직이 아들로부터 제공받은 방향전환의 활동무대는 중국료령성관전현홍통구회의이다. 그런데 김형직이 언제 공산주의자가 되었는가에 대하여 조선전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김형직은 옥중에서 러시아사회주의10월혁명의 소식을 듣고 이것으로 혁명적 신조를 굳히고 선진사상을 연구하게 되었다.그 결과 공산주의를 이해하고 민주해방운동의 방향을 구상하게 되었다」 필자는 전번 졸고에서 김형직은 평양감옥에 투옥된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그때 필자가 제공한 이유이외에도 김형직은 1919년의 3·1운동때 평북 중강진에서 운동의 선두에 섰던 것이 일본기록에 나오고 있다.전과자같으면 할수 없는 일일 것이다.이런 점과 그후 그가 갑자기 졸부로 된 점을 감안해 보면 옥고를 치렀다는 김일성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주장에 일단 따르고 김형직이 평양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가정해 보면 그는 옥중에서 러시아 사회주의 10월혁명의 소식을 듣는 것으로 된다.공산주의자란 없었던 그 때까지 그는 주변에 공산주의자를 「동지」로 두고 있었지 않았다.그에게는 당시 공산주의서적도 있을 리 없었다.「옥중」으로서는 공산주의자가 될 「계기」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세기와 더불어」는 김형직에게 공산주의자가 될 「계기」를 제공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듣지도 못한 「새로운 사실」을 양산하고 있다.그 날조항목을 여기에 열거해 놓는다. 1)「아버지는 1916년에 방학을 이용하며 간도에 다녀왔다.무슨 줄을 타고 갔는지 알 수 없지만 간도를 거쳐 상해에 가서 손문의 국민혁명파와도 연계를 맺었다」 이런 말은 북한주민도 처음 듣는 말이다.아마도 이것은 김형직을 「부르주아민족운동」도 국제적규모로 경험한 인물로 조작하기 위한 허구일 것이다. 2)㉠「그해(1919년­인용자)여름에 우리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다.…할머니는…혼자소시로 뇌이는 것이었다.『아라사에 갔는지 만주에 갔는지…이번에는 퍽이나 오래두 객지생활을 하는구나』」 ㉡「아버지가 무산동회의(1918년 11월)를 소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평안북도의 조선국민회 조직대표들과 각 지역의 연락원들이 참가한 이 회의에서는 파괴된 국민회조직들을 시급히 복구하며 광범한 무산대중을 조직에 튼튼히 묶어세울데 대한 활동방침을 밝히셨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만주소식과 함께 로씨야에 대한 이야기,레닌에 대한 이야기,10월혁명승리에 대한 이야기를 특별히 많이 하였다」 ㉠㉡㉢의 글은 이런 차례로 김일성이 말한 것을 발췌하여 실었다. 그런데 1919년의 일인 ㉠은 의당 ㉢에 직결해야 하는게 1918년의 청수동회의 문제를 그 중간에 삽입하고 있다.이것이 ㉡이다.이 세가지 문장은 문맥의 앞뒤가 바뀌어진 매우 부자연한 글로 되어있다. 김일성은 마치 소설과도 같이 부친을 1917년 가을에 평양감옥에서 「출옥」시켜 놓고 그해 11월에 「청수동회의」를 소집하게 하였다.옥중에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연발생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된 부친이 「무산민중」을 「조선국민회」에 묶어세울 방침을 제시하도록 조작한 것이다. ○거의 앞뒤 안맞는 내용 그러나 「옥중에서 혁명적 신조를 굳힌 아버지」를 막바로 그해 11월의 청수동회의에서 「무산민중」을 조직하는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것은 북한의 어용학자가 보더라도 너무 무리한 작업으로 보인 것 같다.이 때문에김일성은 이번 회고록에서 1917년11월의 청수동회의이후 부친에게 다시 만주와 러시아를 방황하도록 한 것이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만주소식과 함께 로씨야에 대한 이야기,레닌에 대한 이야기,10월혁명승리에 대한 이야기를 특히 많이 하였다.로씨야에서는 로동자·농민을 비롯한 무산대중이 주인으로 된 새 세상이 왔다고 부러움을 감추지 않는가 하면 신생로씨야가 백파도당들과 14개국 무력간섭자들의 공격으로하여 시련을 겪고 있다고 하면서 못내 안타까워하기도 하였다. 그 이야기들이 모두 생동한 세부와 사실들로 엮어졌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가 그동안 연해주에 갔다온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였다」 회고록은 이런 복종을 깔아 놓은 다음 아래와 같은 문장을 가져 온다. 「아버지는 1919년 7월,청수동회의에서 무산혁명의 역사적필연성을 논증한데 기초하여 8월,중국 관전현 홍통구에서 조선국민회 각 구역장들과 연락원들,독립운동단체 책임자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우리나라 반일민족주의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으로방향전환할데 대한 방침을 정식으로 선포하시였다」 전에도 말한바와 같이 역사에 실재하는 조선국민회는 3·1운동 이후 상해임정의 지시를 받는 대한국민회로 발전한다. 그런데 이 국민회에 대한 사료가 김일성의 손에 들어오자 이 「조선국민회」는 3·1운동 이후 엉뚱하게도 공산주의단체로 변해버린다.김일성은 이 날조의 주역으로 자기의 부친 김형직을 갖다 앉히고 있는 것이다. 〔주해1〕조선전사16,29면 이후 〔주해2〕같은책 동면 〔주해3〕졸저 김일성평전 35면 〔주해4〕「세기와 더불어!」23면 〔주해5〕같은책 44면 〔주해6〕같은책 45면 〔주해7〕같은책 동면 〔주해8〕같은책 45면 〔주해9〕같은책 48면
  • 새 전기 「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전연구:5)

    ◎서열4위 김형직을 회장으로 날조/조선국민회 실제 주도자 이름 삭제/“일제에 투옥” 주장 사실 아닐 가능성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의 우상화에는 조선국민회가 불가결이었다.그는 조선국민회의 결성자로 활약하게 되는 것이다. 일제의 경찰기록을 보면 조선국민회의 조직경위는 다음과 같다. …1914년 9월에 장일환이 하와이의 박용만을 찾아 가 같이 싸울 약속을 했다.그는 귀국하여 총독정치의 상황과 민심을 살피고 이를 박용만에게 통보하여 청년단체를 조직하며 국권회복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장일환은 1915년에 조선으로 돌아와서 1909년에 먼저 돌아와 있었던 전하와이 국민회회원 강석봉과 만났다.이해 겨울 그는 또 만주 안동현의 백세빈을 만나 조선국민회를 조직하도록 합의하였다.이들은 간도에 이주할 계획까지 하였으나 그 계획은 실현하지 못하였다. 1917년 2월.배민수,김형직이 조선국민회에 가입하여 장일환의 자택에서 회합하였다.거기서는 평양 장로파신학교에 조선각도 청년들을 모아 국민회를 조직할 것을 협의하였고 3월23일 13명이 모이도록 결정되었다. 그러나 결성 당일에는 6명이 결석하였다.이 때문에 9명이 이보식의 집에서 회합하고 장일환을 회장,배민수를 통신겸서기,백세빈을 외국통신원으로 선출하여 조선국민회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장일환이 우두머리 1917년6월,회원 배민수,김형직,노선경 등은 각기 자기의 식지를 잘라 「대한독립」이라고 혈서를 썼다.다른회원들 중에는 「결사」라고 혈서하는 이도 있었다.이 때 배민수는 중국의 무관학교에 입학할 뜻을 밝혔다.또 국민보를 발간하여 회원에서 보내는 계획도 있었다. 17년 7월,노선경은 간도의 동지들과 연락하는 통신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서간도로 갔다.그리고 김은현,조옥소는 양경수에게 돈 일만원을 내게 하며 그 일부로 권총을 구입하려고 하였다. 그후 조선국민회 회원은 일제경찰에 체포되었다.평양의 회원은 1918년 2월 장일환 이하 12명이 신병송검되고 기타 13명은 석방되었다…. 이상이 일제 경찰기록의 요지이다.이기록을 보면 조선국민회는 2년반동안 갖은 고생을 다한 장일환이 17년 3월 23일에 세운 결사이다. 그는 조선에서 강석봉,백세빈,배민수,김형직,이보식 등을 차례로 동지로 삼아 그중 백세빈,배민수를 간부로 뽑았다.나머지는 회원이 되어 각각 자기 맡은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북한이 이러한 일제자료를 입수한 후 착수한 것은 김형직을 제외하고는 자료에 나오는 인명을 모조리 은폐하는 작업이었다.은폐하기 위해서는 일본측 자료를 개찬하여야 하는데 개찬한 결과는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전사16에 사진 판으로 실려 있다. 이를 참작하면서 변조과정을 밝혀 본다. 일제자료에는 조선국민회 회원의 본적·주소·직책·이름을 회장 장일환(32세)외국통신계 백세빈(25세),서기 배민수(22세),서당 교사 김형직(34세),회원 서광조의 순으로 밝히고 있다.그러나 조선전사16은 이 일제기록 중에서 순번 제4위인 김형직의 본적과 주소,이름만을 사진판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책에 실었다. 일,회원씨명 본적‥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주소‥평안남도 강동군 정읍면 동삼리 서당교사 김형직 당삼십사년… 이와같은 기록은폐작업으로 당시 강동군 고읍면 동삼리 내동부락이란 시골에 있었던 김형직은 평양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다른 간부를 제쳐놓고 일약 「회장」으로 「출세」하는 것이다. 동지들을 없애 치운 이유는 그들이 기독교신자이고 대부분이 후에 상해임정과 연계를 가지게 되는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일성체제의 의사와는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회고록에는 여태까지 그렇게도 철저하게 삭제하고 은폐한 이름을 일부 복원시키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버지는 장일환 배민수 백세빈 등 애국적인 독립운동자들과 함께 1917년 3월 23일,평양 학당골에 있는 리보식의 집에서 조선국민회를 결성하였다.조선국민회에 망라된 청년투사들은 손가락을 잘라 「조선독립」「결사」라는 혈서를 썼다』 일본기록에 의하면 김형직은 「대한독립」을 혈서한 인물인데 이 혈서는 아마도 회장 장일환 앞에서 썼을 것이다.그러나 김일성은 맹원 김형직의 입장을 은폐하고 이상과 같이 그를 장일환을 지도하는 인물로 올려 놓았다.그러나 김일성이 한 말의 내용은 일본경찰기록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그는 지금도 여전히 경찰기록 이상으로는 조선국민회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일제기록 이상 몰라 조선국민회 회원은 1918년 2월 이전의 어느 날,25명이 일제경찰에게 체포되어 그중 12명이 감옥생활을 하였다.북한에서는 이것도 체포자가 백여명이었다고 과장하고 있지만 문제는 감옥에 간 12명중에 김형직이 들어 있었는가 어떤가이다.필자는 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①52년 전기에서는 김형직이 3·1운동이후에 평양감옥에 들어갔다 하였다. ②1961년에 발간된 「조선근대혁명운동사」로부터 3∼4년은 그가 1916년에 투옥되었다고 변경하고 있었다. ③그랬던 것이 조선국민회 자료를 입수한 후부터는 투옥이 1917년 가을부터 18년 가을까지로 다시 변경되었다. 김형직은 만경대에서는 그 부친 보현의 장남이었다.따라서 그 「혁명적가정」에서는 많은 일가친척들이 그의 일거일동에 주목하고 있었다.그런데도 그들은 김형직이 3·1운동 이후에 투옥되었다고 주장한 것은 그들이 그의 투옥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된다.투옥의 해가 세번이나 변경되는 추태를 보면 김일성 자신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사자료25,37면 같은책 38면 같은책 동면 조선전사16,22면 같은책 동면 세기와 더불어1,26면 1952년 4월 20일자 로동신문의 「김일성장군의 전기」참조 「조선근대혁명운동사」,북한 과학원역사연구소간 일본번역판,2백92면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15면
  • 한­러시아 밀월시대 예고/옐친 11월 방한결정의 뜻

    ◎동북아구도 중대변화 신호/경협진전땐 평양에도 영향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의 방한일정이 한차례 우여곡절끝에 11월 단독방한으로 결정됐다. 이번 방한은 일본방문이 연기됨에 따라 자동순연됐다가 다시 일정이 잡힌 것이어서 외견상으로는 특별히 새로울 게 없다고 할수도있다.하지만 옐친대통령의 이번 방한결정은 한·러시아의 관계를 증진시킴은 물론 여러 면에서 러·일 및 러·중국관계등 한반도주변국들의 관계에 중대변화를 미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지난 9일밤 옐친대통령이 청와대로 직접전화를 걸어 방한연기의 불가피성을 이야기하고 양해를 구했을 때만해도 일각에서는 방일과 방한이 별개사안이라는 점을 들어 방한연기의 당위성에 의문이 제기됐던 게 사실이다. 이런 점을 의식,우리정부는 곧바로 방일연기와 무관하게 오는 11월말∼12월초로 옐친대통령의 방한일정을 다시 잡아줄것을 러시아정부에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외무부의 한 당국자는 옐친대통령의 이번 방한결정을 놓고 러시아측이 우리정부의 의사를 존중하고 방한의의를 한층 높인 것으로 풀이했다.옐친대통령의 방한이 양국기본관계조약을 정식발효시켜 양국관계를 법적·제도적으로 한차원 높게 발전시킬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점에 양국간 견해가 일치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미 알려진대로 옐친대통령의 방일이 불투명해진 것은 ▲일정부가 북방영토반환과 대러시아 경제원조를 결부시키는 데 너무 집착함으로써 화를 자초했다는 지적과 함께 ▲러시아내 보수세력들이 영토반환을 담보로한 어떤 협상도 불가하다는 방침을 고수,옐친의 방일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라는 두가지 분석이 있다.따라서 옐친의 단독방한결정은 러시아내 보수세력들에서도 방한 나아가 한국과의 관계개선에는 아무 거부의사가 없음이 재확인됐다는 점에서 또다른 의의를 찾을수 있다. 지난 수개월사이 러시아정부는 「조소군사동맹」의 수정 내지 청산등을 요구하는 우리정부의 요구에 불분명한 입장을 보여왔었다.옐친대통령이 방한기간중 기본관계조약체결과 한반도 긴장완화·경제협력등에 관한 실질진전을 이룰경우 북한·러시아관계는 물론 남북한 관계에도 긍정적인 변화의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볼수있다. 옐친대통령의 단독방한으로 가장 충격을 받을 쪽은 역시 일본일 것이다.일정부는 외견상으로는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라며 애써 그 의미를 축소하려하고 있으나 정계일각에서는 대러시아 외교를 전면수정해야 한다는등 비판의 소리가 벌써 나오고 있다. 러시아정부내 민족주의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최근 실세로 부상하고 있는 겐나디 부르불리스 대통령궁 국무장관은 옐친의 방일연기 직후 『일본은 아시아서 러시아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대신 자신들의 역할은 과대평가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일본 도움없이도 아시아에서 러시아가 뛰놀 마당은 얼마든지 있다는 자신감의 일단을 피력한 것이다. 옐친은 11월 방한에 이어 12월 중국을 잇따라 방문키로 돼있다.러시아가 아시아의 주요 파트너로 한국·중국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물론 러·일 관계악화의 반사이익이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온다고 볼수는 없을 것이다. 옐친대통령의 방한은 한·러시아의 밀월시대를 예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임은 틀림없을 것 같다.
  • 외언내언

    「한마리의 요괴가 유럽을 배회하고있다.공산주의란 이름의 요괴다」.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최초의 과학적사회주의강령문서인 공산당선언의 첫머리에 나오는 대목이다.1848년 영국 런던에서의 일이다.이 요괴가 1917년 마침내 정착한 곳이 구러시아였다.공산요괴덕분에 소련으로 변했다가 지금은 다시 새러시아로 돌아간 곳이다.◆구러시아를 근거지로 동구를 삼키고 중국을 지배했으며 한반도도 절반을 장악하는 위세를 떨치던 공산요괴가 자기모순에 빠져 어느날 갑자기 떠나버린 자리에 혼돈이 끊이질 않고있다.공산요괴의 빈자리에 나타난 민족주의란 이름의 새요괴가 배회하고 있기 때문이다.◆공산요괴가 무리하게 만들어낸 공산대국 소련을 하루아침에 15개 독립공화국으로 붕괴시켜버린 민족주의요괴때문에 지금 당장 가장 심한 고통을 당하고있는 나라는 역시 공산요괴의 강압으로 만들어진 모자이크의 나라 유고.민족주의가 민족을 청산하는 유혈의 난센스까지 벌어지고있다.비슷한 운명의 체코는 양분되고.자연발생의 민족주의가 인공적인 공산요괴의 무이를 압도하고있는 결과다.◆하나 민족주의가 반드시 분열만 가져오는것은 아니다.공산요괴에 의한 무이·모순의 이합집산을 강요당했던 구공산권에서는 자연스런 원형복귀의 분열을 야기시키고있지만 예멘이나 독일의 경우엔 통일을 가져왔다는 사실도 간과해선 안될것이다.공산요괴에 의한 동일민족의 분열과 분단이 무리와 모순이었기 때문에 이 경우는 오히려 통일과 단합이 자연의 순리라 할수있을 것이다.◆우리는 여기서도 공산요괴가 마지막으로 버티고있는 한반도를 생각하게된다.한반도의 분열과 분단도 따지고보면 공산요괴의 이데올로기적 탐욕에 의한 자연거부의 무이에서 비롯된것.공산요괴만 떠나준다면 구공산권과는 다른 민족주의자연회복의 독일·예멘식통일이 한반도에서도 간단하지않을까 생각해본다.
  • 한국역사인가 중국주변사인가/발해사 소속문제 재론

    ◎송기호교수,한·중수교 계기 남북한·중·일·러 학계 입장정리/남북한/고구려 계승국… 한국사 편입 당연/중국/영토내 존재했던 지방정부 간주/러·일/역사규명보다 자국영향연구 초점 발해사는 한국사인가,중국주변사인가. 한중수교를 계기로 양국 학계가 견해차를 보여온 발해사의 소속문제를 놓고 학계의 논의가 다시 시작됐다.발해사를 둘러싼 남·북한과 중국·러시아·일본학계의 입장을 정리한 서울대 송기호교수(한국사)의 글이 「역사비평」가을호에 실린것. 송교수는 「발해사,남북한·중·일·러의 자국중심해석」이라는 기고문에서 발해는 중국만주,러시아 연해주,우리나라 북부에 걸쳐 존재했던 고구려계와 말갈계 사람들이 세운 나라지만 자체적으로 남겨진 사료가 전혀 없어 민족주의적 입장에 선 관련국들의 자의적 해석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한뒤 각국의 발해관을 요약·정리하고 있다. 송교수는 우선 중국이 역사의 범주를 현재 중국영토 안에 있었던 과거의 역사 모두로 잡고 있으며 이는 소수민족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이들의 분리독립의식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는 중국의 역사관을 소개하고 있다. 중국은 발해가 고대 중국 동북일대에 살았던 속말말갈족이 주체가 돼 세운 나라로 독립국이 아닌 일개 지방정권으로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비해 러시아학자들은 발해사를 독립된 역사로 보고 있다.이는 발해사를 중국으로부터 떼어내 자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깔고 있는 것으로 송교수는 보고 있다.또 러시아학자들의 연구는 발해 전체보다는 연해주지방으로 국한돼있고 발해사 자체의 규명보다는 연해주지방의 과거역사규명에 초점을 맞춰 중앙아시아로부터의 영향을 부각시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남북한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가임을 들어 한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남한에 비해 발해사에 대한 연구가 왕성한 북한학계의 경우 60년대 만주 발해유적의 직접답사·발굴을 근거로 고구려 계승성을 강조하고 있다.80년대이후 북한내의 유적조사에 착수한 북한은 『발해의 모든 것이 고구려적인 것이고 당나라로부터 영향받은 것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라는 주장을 아직까지 수정없이 일관』하고 있다는 것. 송교수는 또 북한이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고 대조영이 고구려 왕실출신이라는 점,그리고 발해멸망과정에 도식적인 계급투쟁설을 적용하고 있는데 이것이 북한의 주체사관과 어떻게 부합되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80년대이후 본격화된 한국의 발해사연구는 문헌사학분야에 집중돼있다.그리고 북한과 마찬가지로 최치원의 발언과 「삼국유사」의 기록만을 근거로 고구려 계승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일본의 발해사연구는 발굴조사와 지리고증,일본과의 대외관계에 집중돼있다.그러면서 발해와 일본의 외교관계를 천황제적 질서속에서 보고 역시 자국중심의 해석에 치우쳐있다. 송교수는 『민중사학이 고대사에 적용될 수 있다면 발해사는 말갈족의 다수성을 근거로 볼때 만주사에 속한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러나 이는 만주가 역사적으로 중원과 별개의 지역이었기 때문에 중국사의 일부는 분명히 아니다』고 부연하고 있다. 송교수는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관련국 학자들이 『발해사가 과연 어느 나라에 속하는가 하는 점보다는 그 실체 규명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그동안 일본인들의 식민사관을 교정하는 데 집착했던 우리학계도 이제 한중수교를 계기로 한반도 북부의 부여·고구려·발해등을 둘러싼 중국과 러시아학계와의 「학문적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미야자와총리 신사참배의 뒤안/이창순 도쿄특파원(특파원 수첩)

    미야자와(궁택)일본총리가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야스쿠니(정국)신사를 참배한다.미야자와총리는 9일 『적당한 시기에 개인적인 자격으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영령을 추도하겠다』고 밝혔다. 미야자와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지난 85년 8월15일(종전기념일)나카소네 당시 총리의 참배이후 총리로서는 처음이다.미야자와총리는 나카소네 전총리의 공식참배와는 달리 「개인자격」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을 대표하는 총리가 개인적이든 공식적이든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다는 것은 일본의 과거 군국주의적 민족주의에 대한 동경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20명의 각료중 13명도 참배를 밝혔다.일본은 더욱이 자위대의 해외파견을 합법화하는 유엔평화유지활동(PKO)협력법을 만들어 자위대를 곧 캄보디아에 파견하는 등 정치·군사대국화를 지향하고 있다. 일본의 총리및 각료의 야스쿠니신사참배가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2차대전 전몰자들의 영령이 봉안돼 있는 야스쿠니신사에 2차대전 A급전범 7명의 영령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전쟁희생자를 추도하는 것은 국민으로서 당연한 일이다.그러나 야스쿠니신사에는 전범 우두머리 도조 히데키(동조영기)등 7명의 A급전범의 위패가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때문에 일본총리나 각료의 참배는 과거 군국주의 지도자들의 아시아 주변국가 침략행위를 정당화하고 군사적 팽창주의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해석할수 있다. 중국·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이같은 이유때문에 일본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민감한 반발을 보여왔다.지난 85년 나카소네 전총리가 공식참배했을 때는 중국·한국 등 아시아국가들 뿐만아니라 구소련까지도 강력히 반발했다.나카소네 전총리는 해외의 강력한 반발로 그 다음해 부터 참배를 중단하고 다케시타·가이후 등 다음 총리들도 참배를 보류해 왔다.나카소네 전총리의 공식참배(공용차 이용,국비지출)는 더욱이 국내에서도 헌법위반이라는 판결이 났다.오사카(대판)고등법원은 최근 『나카소네 전총리의 공식참배는 헌법에 규정된 정경분리원칙에 위반된다』고 판결했다.이에 앞서 센다이(선대)고등법원도 지난해「위헌」판결을 내렸다. 미야자와총리는 공식참배의 위헌판결로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다시 논란이 되고 일왕의 중국방문을 앞둔 가운데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겠다고 밝혔다.미야자와총리의 참배발표는 일왕의 중국방문에 반대하는 자민당내 일부 의원과 2차대전 전몰유족회등을 배려한 행위라고 일본언론들은 분석한다.미야자와총리가 최근 공식참배를 하지않겠다고 밝히자 자민당 일부 의원과 유족회들이 강력히 반발했었다. 미야자와총리는 또 가장 민감한 반발을 보여온 중국이 일왕의 방중실현을 위해 자신의 참배에 강력히 반대하지 못할 것으로 계산했을 가능성도 있다.미야자와총리는 그러나 『각료시절에도 여러번 사적으로 참배했고 그같은 기분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미야자와총리의 이같은 발언은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나타낸다.미야자와총리는 9일 나가사키(장기)원폭희생자위령평화기념식에 참가한후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밝혔다.나가사키 하늘에는 이날 평화의 상징 비둘기가 날고 전쟁이 없기를 기원하는 「평화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러나 평화의 종소리가 채 멎기도 전에 일본총리는 군국주의를 회상케하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밝혔다.일본의 두개의 얼굴을 다시 본다.일본의 진정한 모습은 어느 것일까.
  • 외언내언

    구소련이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휩쓸고 있다.수영 체조 육상등 각 종목에 걸쳐 폐막 4일전인 6일까지 김35 은29 동20등 84개 메달로 김21 은29 동24개등 74개 메달의 2위인 미국을 크게 앞지르고 있다.국가는 붕괴되고 경제는 파탄이며 정치는 혼돈인데 메달은 쏟아지니 어찌된 일인가.의아하고 신기해하며 놀랍다는 세계의 반응이다.◆「국가주도로 인재와 돈을 아낌없이 투입해온 구소련의 유산이 마지막 꽃을 피운 것이다」「이제까지 해온 훈련시스템의 축적이다」「구소련은 붕괴되었지만 아직 1년미만이며 그 유산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정치목적으로 스포츠를 육성·이용해온 사회주의 체제유산의 요인을 강조하는 설명들이다.◆「이 메달은 나를 길러준 벨로루시에 대한 답례다」 「몰도바의 온국민도 저 국기게양을 보고 있을 것이다.하루속히 몰도바만의 팀을 만들고 싶다」이번 단일팀(EUN)은 독립국공동체(CIS)11개국과 그루지야로 구성되었다.개인경기의 경우 개별공화국 국기와국가를 게양·연주케한 것도 큰 자극제가 되었다는 설명이다.◆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선수개개인의 생활에 직결되는 경제적 동기인 것으로 지적된다.「특권계급에서 빈곤층의 한 시민으로 전락한 선수들의 장래에 대한 위기감의 결과다」「이 금메달 하나에 나의 장래와 내 형제의 생활이 걸려있다」「바르셀로나의 성적은 좋은 직장과수입원 확보의 열쇠다」감독 선수들의 말이다.◆결국 예상을 뒤엎은 EUN 선수들의 이번 올림픽 메달석권은 붕괴된 구소련 사회주의와 CIS의 민족주의 그리고 개인적 이익을 가장 중요한 행동동기로 삼는 자본주의의 합작품이라는 결론이다.중국이나 독일의 선전에도 비슷한 설명이 가능할지 모르겠다.북한의 위축은 무엇때문일까도 생각하게 된다.
  • 그 놀랍고 뜨거운 권역 순방르포(팽창하는 이슬람:1)

    ◎프롤로그/“제2부흥기” 중앙아에 재응집 바람/탈이념 물결·소몰락으로 압제 벗어나/아제르공등 6개국 회교세력 “뭉치자”/「무주공산」 연고권 노려 이란·터키 외교전 중앙아시아에 거센 이슬람바람이 불어닥치고 있다. 새로 탄생한 구소련내 회교공화국들은 새로운 구심점을 찾아 연대를 강화하고 있으며 이란·터키등 강국들은 소련의 퇴장으로 「무주공산」이 된 이 지역에서 맹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과거의 연고권을 내세우며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고 있다.서방에선 소련의 몰락이 가져온 일시적 「이념의 진공상태」가 이란식의 반서방 회교원리주의나 범터키 회교주의로 메워질 경우 소위 냉전후의 신세계질서는 예측불허의 위협에 직면할 것이라는 우려섞인 진단 이 대두되고 있다.본사 이기동모스크바특파원이 이란·터키와 구소련 중앙아 공화국들을 찾아 이슬람바람의 실체와 함께 변화하는 사회상들을 취재,시리즈로 보도한다. ○회교사원 수리 한창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세력들이 다시 「사라센의 칼」을 뽑아들고 있다. 예언자마호메트의 깃발아래 새로운 종교 이슬람교가 아라비아사막에 출현한 것은 서기 7세기초.그로부터 1천4백여년만에 당시 주변 3개 대륙으로 마치 「천지개벽하듯」뻗어나가던 바로 그 기세로 코란경전의 봉독소리가 이 일대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이 기세의 파장은 북아프리카 해안의 모로코에서부터 중앙아 초원지대를 이미 지나고 있다.아프가니스탄에는 13년만에 다시 이슬람깃발이 나부끼기 시작했고 군사쿠데타로 불발에 그치긴 했지만 알제리인들은 지난 1월총선을 통해 이미 회교국 수립의 의지를 내외에 과시했다. 이슬람「제2부흥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지각변동의 결정적 계기는 바로 이념대립체제의 붕괴와 소련방의 해체.지난 70년동안 공산 소련의 굴레에 묶여 겉으론 무신론자로 살아야했던 아제르바이잔·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등 6개 신생독립국들의 회교도들이 남쪽 카스피해 너머의 이슬람형제들을 찾아나서면서 부터이다. 아제르바이잔을 제외한 신생 5개국 5천 7백만 주민은 인종적으로는투르크계이며 7백년전 아시아대륙을 휩쓴 몽골인들의 후예로 타지키스탄을 제외하고는 모두 투르크계언어를 쓰고 있다.타지크인들은 이란인이 쓰는 파르시어를 쓴다.앙카라의 한 외교관은 『중앙아시아주민 대부분이 터키에 와서 2주일만 배우면 터키말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고 말했다. 독립한지 불과 반년이 채 안된 지금 알마아타·타슈켄트·사마르칸트·듀산베등 중앙아 각 도시들에서는 폐허가 된 모스크(회교사원) 수리공사가 한창이고 각급학교는 회교교리를 배우는 학생들로 초만원이다. ○미등 서방에 적대적 다시찾은 이들 이슬람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사역할을 맡은 선두주자는 바로 원리주의 회교를 표방하는 이란과 세속주의 회교를 앞세운 터키 두나라이다. 전세계는 이 지각변동의 파장을 우려와 의혹의 눈으로 예의주시하고 있다.서방의 몇몇 미래학자들은 소련제국의 멸망과 함께 앞으로 이슬람 원리주의가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위협세력이 될 것으로 경고하고 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동서이데올로기 대립이 사라지자세계를 지배할 유일한 이념은 바로 자유민주주의인 것처럼 보였다.그런데 테헤란의 한 서방외교관의 말처럼 『서방인들의 눈에 테러·보복·혁명수출이나 일삼고 시대착오적인 신정일치를 고수하는 이슬람원리주의가 기세를 더하고 있으니』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는 것이다. 서방국 중에서도 특히 이슬람의 부흥에 우려를 가진 나라는 바로 미국.미국의 우려는 바로 이슬람이 갖고있는 반미·반서방 목소리와 기질에 기인한다.이슬람이 「성전」을 외치며 본격적으로 정치세력화한 결정적 계기는 바로 지난 1979년 호메이니옹의 주도로 이룩된 이란혁명이라 할 수 있다.그리고 이란혁명의 주된 구호중 하나가 바로 「대악마」로 지칭된 미국과 서방에 대한 원색적인 적대감이었다.테헤란국제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대로변이나 테헤란시내 관광호텔 로비에는 지금도 「미국을 타도하자」는 대형 플레카드들이 내걸려 있다.이란혁명 직후 과격학생들에 의해 4백44일간 점거당했던 과거 테헤란주재 미국대사관 담벼락에는 「미국에 처절한 패배를 안겨주자」「미국이추구하는 힘은 정글의 법칙」등의 구호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미국에 대한 이란인들의 증오가 식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테헤란의 한 언론인은 『이슬람이 서방에 비판적인 것은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불만때문이다.서방제국주의는 이슬람의 전통을 왜곡시키려 했고 이슬람이 열등한 문화라는 인식을 전파시켰다.그들은 이슬람세계에 억압적인 세속정권을 수립했으며 이스라엘 건국을 통해 긴장을 조성했다』고 주장했다. 서방국뿐아니라 이집트·사우디 아라비아·요르단 등 억압적인 민족주의와 왕정을 고수하고 있는 「온건」아랍국들도 코란·종교전통에 바탕둔 회교 원리주의 정치적 바람에 놀라고 있다. 아프간의 무자헤딘 파벌들은 새 국가를 이끌 법률토대를 회교율법 「사리아」에 두기로 합의했다.중앙아 구소련 신생독립국의 회교원리주의자들 또한 아프간의 뒤를 따를 것을 다짐하고 있다.중앙아 지역서 회교부활을 위해 싸우는 타지키스탄 이슬람 복원회의 한 간부는 『우리사회의 모델은 예언자 모하메트가 제시했던 교리이며 모든 것은 알라신이 지시한대로 이루어질 것이며 탈선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중국 접경지역 영향 중국도 타지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 3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이슬람교도가 태반인 서부 신강자치주등에 이슬람 원리주의·민족주의의 여파가 미칠까 걱정이다. 이란·터키 정부관리들은 하나같이 중앙아 회교형제국들과의 관계개선은 오로지『형제국끼리의 우애와 경제적 도움을 나누기 위한 것일뿐이지 결코 외국인의 목을 자르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며 좀처럼 속마음을 드러내보이려 하지 않았다. 테헤란의 한 몰라(종교지도자)의 말처럼『이슬람은 기독교 못지않게 평등·사랑등 보편적 가치를 신봉하며 증오·보복을 일삼는다는 것은 서방,특히 미국이 퍼뜨린 편견』일지도 모른다. 중앙아 일대에서 일기 시작한 이슬람 바람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그리고 이 바람의 여파는 과연 우려할만한 것인가.
  • 새「김일성자서전」이념이 퇴색했다/미지,평양출간 「92년판」내용보도

    ◎“생모에 불효” 사죄… 이간적 면모 부각/대일경협등 겨냥,김옥균옹호 눈길 미국의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는 지난 2일 북한의 김일성주석이 지난 4월15일 80회 생일을 기해 펴낸 그의 자서전을 간단한 논평과 더불어 게재했다. 「김일성회고록,세기와 더불어」라는 제목의 이 회고록은 김일성생애의 전반기에 해당하는 1912년부터 1935년까지의 성장기록을 담고 있는데 현재까지 2권이 출판됐다. 이 회고록은 지금까지 출간된 김일성에 관한 어느 출판물 보다도 인간적이고 덜 우상숭배적이란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김일성의 우상화로 유지돼온 북한사회에서 이같은 출판물이 이 시점에서 왜 발행됐느냐에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는 이 의문에 대한 몇몇 전문가들의 논평을 곁들여 김일성회고록을 소개하고 있다.다음은 이 신문에 소개된 기사를 요약한 것이다. 『나는 나의 생애가 결코 남달리 특별했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김일성은 그의 회고록에서 적고 있다.그러나 이같은 겸손은 자신을 신과같은 존재로 선전해온 종전의 북한역사를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 이 부분에 대해 북한문제 전문가인 일본 게이오대의 오코노기 마사오교수는 『김일성도 그가 죽은후 그에 관한 역사가 뒤바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려하고 있는 것같다』고 논평했다.때문에 『그는 보다 현실적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오코노기교수는 덧붙였다. 이 책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보아 이제까지 공식적으로 밝혀진 김일성의 생애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부분적으로 색다른 것들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한 예로 그는 그의 생모에게 사죄하고 있는데 『나는 혁명에 뛰어든 이후 나의 어머님에게 특별히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쓰고 있다. ▲김은 또 구한말 친일개혁파 거두인 김옥균을 두둔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인정과 경제지원이 필요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이 코멘트도 항일·민족주의자임을 자처해온 김일성으로선 새로운 일면이다. ▲중국말을 썩 잘하는 김일성도 이책에서 항일투쟁 당시 항일게릴라들을 지원해준 중국공산당을 「선도자」라고 칭송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인민들에게 영웅적이고 불멸의 인간으로 신격화돼 있는 그의 생애에 하나의 오점이 될지도 모른다. 소설이든 아니든 북한에서 김일성의 생애는 모든 인민의 표상이다.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국내 정보와 다른 외부소식을 접할 수 있다.오코노기교수는 『김은 이책에서 보다 방어적이고 보다 솔직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마도 이책이 그의 마지막 기록일 것』이라고 단언했다.그 이유로 오코노기교수는 『김일성이 만약 더이상의 개인적 진실을 밝혔다간 47년간이상 북한을 통치해온 기틀이 기본적으로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라고 부연하고 있다. 김일성 정통성의 핵심은 그가 항일게릴라 투쟁의 지도자였으며 그것을 통해 1945년 해방을 이끌어냈다는 것인데 그의 이 정통성이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유지돼온 것은 철저한 세뇌교육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의 사후 소련의 스탈린처럼 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북한문제 전문가인 하와이대의 서대숙교수는 설명했다.김일성에 대한 북한의 과거 각종 간행물들에 비교하면 이번 책은 훨씬 덜 이념적이고 북한사람들이 읽기에 퍽 생소한 느낌까지 줄 정도로 사적내용이다. 이런 점은 김일성이 이미 황혼기에 있기 때문에 북한의 역사가들은 그의 사후 그가 거짓말쟁이가 되길 바라지 않은 나머지 그의 마지막 자서전을 보다 합리적으로 엮었을 가능성이 크다로 오코노기교수는 덧붙이고 있다. 한결 자유로워진 소련사람들이나 이웃 중국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진 북한사람들이 새로운 정보를 통해 김일성을 비하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북한밖의 학자들은 김일성의 자서전 제3권을 기다리고 있는데 다음 나올 책에서는 해방 전후사를 밝히지 않으면 안될 것이고 그 부분에선 소련군의 진주와 김일성이 괴뢰로 등장하는 과정이 취급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부분에서 김은 과거 보다 소련의 도움이 더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오코노기교수는 지적했다.
  • 6·25관련 구소 극비문건 공개/러시아 군사연 코로트코프박사

    ◎「남침 D­데이」 김일성이 선택했다/“인민군 서울 진격” 소대사 본국 급전/미군 인천상륙하자 김일성 “나는 실패했다” 당황/스탈린 수습책임 중국에 떠넘기며 김에 등돌려 다음은 러시아 국방부직속 군사연구소 책임연구원 가브릴 코로트코프박사가 비밀문건을 중심으로 밝혀낸 한국전쟁과 북한 김일성의 항일빨치산투쟁,집권과정등에 관한 내용의 요약이다. ▷한국전쟁 관련◁ 한국전쟁이 어느 편에 의해 발발됐는가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모스크바와 평양이 「해방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정을 내렸으며 다만 시기에 관해서는 김일성이 6월25일 단추를 눌렀을 뿐이다.당시 평양주재 대사 스티코프가 개전 당일 스탈린에게 보낸 긴급 전문에는『조선인민군이 강을 습격하고 아주 빠른 속도로 서울로 진격하고 있다.평양은 아주 조용한 분위기이며 사람들은 누구도 전쟁개시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씌어 있다. ○평양시민도 몰라 또 국방부 문서보관소에 있는 「작전계획 초안」에는 『6월25일,○○탱크연대는 ○○도시로 향한다.○○보병사단은 ○○방향으로 진출한다』는 식으로 연대급 이상 부대의 목표가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으며 이밖에 「서울점령 초안」도 포함돼 있다. 전쟁이 초기 승세에서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김일성은 크게 당황했다.당시 스티코프가 스탈린에 보낸 전문에는 『김일성이 쇼크를 받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그의 군대지휘와 국가지도는 엉망이 되고 있다.김은 지하사령부에서 본인에게 「나는 실패했다.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나는 또다시 빨치산투쟁을 하는 것외에는 다른 길이 없을 것같다.(미군의 진격이 너무 빨라서)상황이 긴박하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부탁해 나의 생명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돼있다. ○“김일성 무능” 불만 스탈린은 10월 전쟁이 실패했음을 느끼자 수습책임을 중국에 떠넘기기 시작함과 동시에 초기에는 매우 빈번히 김과 전문을 주고 받았으나 이때부터는 김에게 아무런 답신도 보내주지 않음으로써 실망감을 표시했다. 당시 스탈린측근으로 총참모부 작전부장이었던 스테멘코 장군은 후일 본인과의 인터뷰에서 스탈린이 『김은 아주 무능한 장군이다.그가 어려운 시기에 처해 의지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그러나 대체인물이 없으니 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털어놓았다.또한 본인이 극동군총사령관 말리노프스키원수 휘하에서 한국전 정보담당 장교로 재직시 그는 김일성을 한번도 이름으로 호칭하는 법이 없이 오직 「모자를 쓴 대위」라는 별칭으로 부르면서 『그는 진짜 군인이 아니다.군대지식도 적고 전쟁도 제대로 지도하지 못한다』고 불평했다. ▷한국과 관련된 소련군◁ 45년 8월 소련군의 북한 진주부터 53년 종전까지 한반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은 군인은 모두 약 1백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특히 한국전쟁과 관련,훈장을 받았거나 전사자·부상자 및 유가족들은 2차대전 심지어는 최근의 아프간전쟁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아무런 혜택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이러한 상황은 소련당국(지금은 러시아정부)이 한국전 개입사실을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본인 역시 한국전쟁과 관련해 적성훈장을 받았다.그러나 훈장증서에는이상하게도 「조선전쟁에서 주어진 과업을 수행했으므로 이 훈장을 수여함」으로만 돼 있고 구체적인 공적사항은 전혀 없다.이는 극히 이례적인 것이다. ▷항일빨치산투쟁◁ 김일성이 붉은 군대에 정식 입대한 것은 1942년 7월17일이었다.이같은 사실은 45년 8월30일 그가 적기훈장을 수여받은 훈장증서에서 명백히 나타나 있다.김이 훈장을 받게 된 공적사항으로는 항일빨치산투쟁을 훌륭히 수행했다고 돼 있다.그러나 이에 앞서 김이 소련군 대위로 진급시 승진 상신서에는 「진지첸(김일성)을 만주에서 빨치산대장으로 활동하도록 파견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이는 김일성이 북한당국의 공식 선전에서 처럼 스스로 빨치산부대를 편성,지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소련극동군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군이 항일 명령 특히 김일성이 45년 9월 중순 북한지도자로 선발되기 위한 면접을 하기 직전 심사위원격인 극동군 전선사령관 푸르가예프상급대장과 동 군사위원 슈킨대장 앞으로 제출된 김의 인물평가서에는 ▲동만주에서 빨치산활동 참가 ▲하바로프스크 군사학교에서 특수과정 수료 ▲수차 걸쳐 사령부로 부터 표창 ▲42년 입대,현재 대대장등 연대순으로 기록돼 있는데 입대 전에 이미 소련군 당국으로 부터 표창을 수차 받은 사실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이지도자로선택된과정◁ 45년 9월 모스크바는 승전의 축제분위기속에서 병력을 대폭 축소키로 함에따라 김일성은 아주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그가 소속된 88특수저격여단이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는데다 고등교육도 받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부대로의 전출이나 진급을 바라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이때 김은 『특별인터뷰를 위해 즉각 하바로프스크로 돌아가라』는 돌연한 명령을 받았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당시 극동군 전선사령관 푸르가예프와 군사위원 슈킨을 면접했다. 두 장군은 몇가지 경력을 물은 후 김에게 『소련정부의 결정에 따라 한국국적을 가진 전문가들이 북한에 보내지고 있다.현재 북한은 새 조국을 건설할 전사들이 필요하다.귀관은 가장 빠른 시일내에 특별임무를 받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들의 이같은 발언은 김일성이 이미 북한의 지도자로 결정돼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도자후보 분석 이에앞서 모스크바에서는 북한의 새 지도자감으로 많은 후보들이 심도있게 분석,평가되었다. 주로 장시우,박동홍 등 코민테른그룹과 박헌영,김두봉 등 자생적 공산주의자,김일성등 만주그룹,그리고 조만식선생등 비공산 민족주의자들이 대상이었다.그러나 스탈린은 이들이 군대지식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거부했다. 스탈린은 결국 그의 구미에 딱맞는 인물을 물색한 결과 김일성이 돌연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렇게 하여 지도자로 선택을 받은 김은 45년 10월2일 부터 「진지첸」이란 이름을 버렸으며 8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소련함정 푸가초프호를 타고 원산에 도착했다. 당시 원산시 소련 군정책임자인 크루지코프 대좌가 영접했는데 그는 후일 본인과의 면담에서 김일성 영접은 평양의 스티코프 대장의 긴급명령으로 행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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