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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민족주의
    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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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언의 배경을 경계한다(사설)

    새일본정부의 법무장관이라는 사람이 일제의 태평양전쟁을 「식민지와 대동아공영권 해방」을 위한 정의의 전쟁으로 옹호하고 나섰다고 한다.수십만의 무고한 중국민간인을 살해한 「남경대학살」은 날조된 것이며 식민지 부녀자를 강제연행한 정신대도 일제만의 잘못은 아니라고 강변했다고 한다.정말이지 어이가 없고 기가 찬다고 밖에 달리 할말이 없다. 새삼 부정할 가치도 없는 망언이 아닌가 한다.침략전쟁등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는 그 주도자인 일왕자신이 이미 외국을 방문하거나 일본을 찾는 외국정상들을 맞을때마다 형식과 정도야 어떠했든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왔다.역대총리도 마찬가지다.특히 최근 연립여당의 호소카와 전총리는 보다 솔직한 침략전쟁 인정과 사과로 아시아 이웃나라들의 환영까지 받은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다는 이따위 부정의 오만불손하고 건방진 망언들이 일부 극우민족주의자들의 입을 통해서지만 왜 한두번도 아니고 기회있을때마다 계속 나오고 있는 것인가.그많은 인정과 사과및 반성에도 불구하고 일제의만행을 만행으로 생각치 않는 일본인이 많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는 이번 망언이 개혁정치를 표방하고 국제사회에 대한 일본의 적극적인 기여를 강조하는 신생당등 연립여당 정부 각료의 입을 통해 나왔다는 사실을 특히 주목한다.연립여당은 일본이 과거사를 솔직히 인정·사과하고 새출발 해야 한다는 것을 기본정책으로 삼고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이번 법무장관의 망언은 그것이 결국 말만의 사탕발림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본인은 발언을 취소했으며 연립여당정부는 일단 나가노장관의 단순한 개인적 실언임을 강조하고 있다.물론 그럴수도 있다.그러나 그는 일제침략전쟁에 앞장섰던 군국주의자였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망언에서 보듯이 조금의 반성도 하지 않고 있다.그런 그가 어떻게 새 일본연립정부의 그것도 법무장관에 기용될수 있었단 말인가.일본과 연립연정및 그 반성의 실체와 한계를 보는것 같은 느낌이다. 탈냉전이후 일본에서는 신일본민족주의가 크게 고개를 들고 있다.연립여당은 물론 일본정국재편을 주도하는 오자와 신생당 대표간사도 바로 그러한 신민족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그가 지향하는 일본「보통국가론」은 일본의 정치군사대국화를 위한 과거사인정과 반성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나가노망언도 따지고 보면 같은 맥락이라 할수 있다. 결국 새일본도 경계하지 않을수 없게 하는 망언해프닝이 아닐수 없다.우리는 그동안 과거사에서 해방된 미래지향적인 새한일관계의 구축을 위해 노력해 왔다.우리의 그러한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이번 망언의 뒤처리를 특히 지켜볼 것이다.
  • 도산 애국활동·사상 재조명

    ◎오늘부터 4일간 LA서 대규모 국제학술대회/강만길교수 등 국내외학자 30여명 참가 도산 안창호선생(1878∼1938)의 애국활동과 사상을 재조명하는 대규모 국제학술회의가 3일부터 6일까지 미국 로스앤젤스의 옥스포드팰리스호텔에서 열린다. 도산사상연구회(회장 김신일)와 로스앤젤스에 있는 태평양평화연구소(소장 김중순)가 함께 주최하는 이번 회의의 주제는 「도산:코리안 아메리칸」.국내에서 강만길(고려대)·조동걸(국민대)·윤병석(인하대)·신용하(서울대)교수,미주지역에서 박한식(조지아대)·방선주(뉴욕대)·최영호(하와이대)·루디실(남가주대)교수,샘플남가주대총장등 모두 30여명의 국·내외학자들이 참가한다. 김회장은 『도산선생은 폭넓은 독립운동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일반인들에게는 「애국교육사상가」정도로만 인식되어 왔고 특히 80년대 후반 이후에는 「개량주의자의 거두」쯤으로 낮추어 보는 시각까지 있었다』면서 『이번 회의는 그에 대한 본격적인 재조명을 통해 올바르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조교수는 이 회의에서 1920년대 중국에서 도산의 활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중국에서 도산의 독립운동」을 발표할 예정.그는 이 논문에서 도산의 「민족유일당」과 「한국독립당」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상세히 소개했다.도산은 1920년대 중반부터 만주지역에서 큰 세력을 형성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을 통합한 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민족유일당」을 결성하려 했으나 실패했다는 것.이에따라 도산은 1930년1월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세력만을 결집해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는 것이다. 유병용교수(강원대)는 「도산 안창호의 정치사상에 관한 재검토」에서 『전민족의 복지·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사로운 이익의 희생을 요구한 도산의 대표적인 사상 「대공주의」는 민족·정치·경제·교육평등을 핵심내용으로 하는 이상사회 건설의 설계도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회의에서는 이밖에도 1907년에서 1910년까지 도산과 관련된 국·내외의 보도를 모두 수집해 정리한 윤경로교수(한성대)의 「도산의 국내에서의 행적과 구국계몽활동」등 새로운 방법론을 채용한 연구성과의 발표도 있다.
  • 미 폴 케네디교수의 예진/KBS­TV 좌담

    ◎“21세기는 과기시대… 교육이 좌우”/핵확산·환경파괴 해결해야 공영/「세계적윤리관」 확립,종족벽깨야/비군사적 문제 UN통해 풀어야/한국은 한반도 특수상황 인식… 주변 강대국과 거리 좁혀야 『21세기를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은 물론 젊은이들이 진지하게 세계적인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고 또 가능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교육시켜야 한다』 세계적인 석학 폴 케네디교수(미예일대 역사학과)가 21일 하오 KBS­TV에 출연,「21세기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라는 주제로 사공일세계경제연구원이사장,이상우21세기위원회위원장(서강대교수)과 정담을 가졌다.「강대국의 흥망」 「21세기 준비」의 저자로도 유명한 케네디교수와의 정담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사공=세계에서 미국의 위치가 점점 잠식당하고 있는데. ­지난 5년간 세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특히 모두가 놀랐듯이 소련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미국은 상대적으로 세계무대에서 입장이 강화됐다.그러나 미국은 국내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예산및 무역수지적자,도시빈민문제,교육손실등은 매우 우려할 수준까지 와 있다.반면 유럽은 통합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으며 동아시아는 지속적으로 발전,성장하고 있다.이같은 요인들은 장기적으로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의 상대적인 쇠락을 가져올 것이다. ▲이=21세기 신세계질서에 영향을 미칠 기본적 변화는 무엇이라고 보나. ○초강대국 점차 쇠락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신속한 전파다.현재 지구에는 과거의 과학자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있으며 수없이 많은 연구실·학회·대학들이 있다.가히 지식의 폭발상태 중간쯤 와 있다고 여겨질 정도다.또 우리는 과학과 기술지식을 빠르게 전송할 수 있게 됐다.산업혁명 초기에는 기술이나 지식이 유럽전역으로 확산되는 데 20년이 걸렸고 미국까지 전파되는 데 30년,일본까지는 50년이 걸렸다.그러나 이젠 실리콘 밸리의 발명품을 6개월후면 서울이나 오사카에서 볼 수 있게 됐다.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다음 세기의 모습을 결정할 것이다. ▲이=다가올 21세기의 특징이라면. ­21세기에는과학과 지식이 정치적 지혜·윤리·교육제도등과 병행해서 발전해야 한다.21세기에는 과거보다 더 강렬하게 다른 문화와 문명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우리는 세계적인 윤리관을 개발해 상이한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한다.또한 자연을 파괴하거나 인간을 멸종시킬 수 있는 상태로까지 자연을 지배하려 해서는 안된다. ▲사공=21세기를 낙관적으로 보는가. ­역사학자로서 낙관적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물론 앞으로 불길한 현상이나 대재해가 일어날지도 모르지만 인류는 그런 재해를 극복할만큼 영리하다고 생각한다.그러나 21세기로 향하면서 이전에 없던 두가지 다른 요소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첫째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는 대량의 파괴적인 무기가 존재한다는 점이다.우리는 핵무기확산이나 핵통제에 대해 극도로 신경을 써야 한다.둘째는 인구증가와 환경파괴행위로 인한 지구의 온난화를 들 수 있다.이 두가지를 새로운 기술과 과학적 방법으로 해결한다면 인류는 커다란 재해를 막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UN을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가. ­UN을 보다 정교하고 비군사적인 형태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빈국과 부국의 환경협정문제나 개발도상국가의 여성과 어린이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문제등을 UN산하 기구들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이밖에도 전세계적인 문제가 많이 발생할수록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은 UN과 같은 국제조직을 통해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공=세계의 안정적인 경제환경을 위해 다국적기관을 강화시킬 필요는. ­21개 부유한 나라들이 호주머니를 털어 1백30개 가난한 나라를 도와주는 식의 국제기구는 현실적으로 존립하기 어렵다.우리가 국제기구에 희망을 건다면 좀더 효율적인 기구가 되도록 유도해야 한다.또 개인이나 기업가에게도 영리만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공공개발사업에 참여토록 해야 한다. ▲사공=경제적 다변화와 함께 지역주의 성향도 나타나고 있는데. ­우선 지역경제안에서 관세를 철폐하고 보호주의를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그러나 유럽공동체에서 보듯 이런 혜택이 대체로 역외국가에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경제권역간에 흥미로운 대립양상이 나타나게 된다.우리는 지역경제간에 블록이 형성돼가는 것과 동시에 산업·커뮤니케이션·서비스·아이디어등이 전세계화 추세로 가는 것을 볼 수 있다.이러한 상황에 대한 적당한 답을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이=냉전의 잔재가 여전히 존재하는 한반도에서의 생존전략은. ­한국은 북한이라는 어려운 상대와 대응하는 한편 강대국인 일본·중국·러시아·미국과 중요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따라서 한국은 가장 현명한 외교정책을 추구해야 한다.도쿄·북경·모스크바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즉각적으로 알고 대책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한국은 또 국민들을 계몽시켜야 한다.즉 지리적 위치 때문에 발생하는 특수한 상황을 국민들에게 인식시켜야 한다.이와 함께 한국의 정책들은 혁신적이기보다는 상황에 잘 적응하며 대처하는 성격의 것이어야 한다.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세계적인 안보협정이나 정기적인 안보및 협력회의를 외면하거나 경제개발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이=한국에서는 지금 세계화가 강조되고 있는데.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들이 세계화를 강조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세계화의 반대는 국수주의적인 정치와 민족주의의 대결을 뜻하기 때문이다.한국은 자국경제를 주변국가들의 경제와 통합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다각적인 투자,학생및 관광객의 상호교환등을 통해 한국이 주변국가들과 거리를 좁힐수록 다른 국가들과 대결할 가능성도 줄어들 것이다.모든 국가들이 남북한의 긴장관계를 이해하고 있다.하지만 그럴수록 더 개방해야 서로간의 증오와 긴장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권역 대결 지양 ▲사공=한반도주변 4강의 미래에 대한 견해는. ­미국은 계속적으로 동아시아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이다.국내개혁에 치중하겠지만 그렇다고 태평양 서쪽지역에 대해 무책임해지지는 않을 것이다.미국은 동맹국인 한국·일본을 계속 지원할 것이며 북한의 난폭한 행동을 억제할 것이다.이같은 미국의 정책은 계속될 것이다.러시아의 경우 매우 예측이 불가능하지만 러시아의 존재가 큰 도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러시아의 동아시아지역과 시베리아지역은 모스크바의 정치와는 분리돼 지방정부단위에서 직접 중국국경을 넘어 상거래를 할 것이다.일본은 엄청난 기술과 경제력을 갖고 있으며 야심도 갖고 있다.그러나 일본은 현재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도 곤경에 처해 있어 앞으로 4∼5년간은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이에 반해 중국은 수수께끼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지도자가 바뀔 경우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중국이 계속 평화적으로 나갈지 아니면 정치지도자들이 편을 갈라 대립하거나 나아가 여러 나라로 분리될지는 앞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개방해야 긴장해소 ▲이=한국이 세계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두가지를 제안한다.첫째는 독일의 경우처럼 외국의 많은 교수와 학생들을 초청,경제회복기에 원조를 해준 외국에 감사표시를 하는 것이다.이는 서로의 우의를 다지는 방법으로 한국도 현재 이런 일을 하고 있지만 더많이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둘째로 한국은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를 연결하는 독특한 역할을 할 수 있다.한국은 비서구적문명의 비유럽적 국가로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한국은 이제 동남아와 아프리카국가들을 어떻게 도와서 한국의 성공적인 예를 따라올 수 있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사공=한국이 21세기에 대한 준비를 적절히 하고 있다고 보는가. ­한국은 다른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교육에 대한 열의,가족존중의 가치관,직업윤리,다른나라를 배우고 따라가려는 의지,지역시장보다는 세계시장을 겨냥한 생산의지등 복합적 요소들을 갖고 있다.그리고 일본과 같은 특정모델을 모방하면서도 한국은 서아프리카나 남미가 할 수 없던 일들을 해냈다.한국은 이로 인해 지난 40년간 다른 어느나라보다도 성공을 거두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한국민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우리는 그동안 아주 어렵고 변화가 많은 20세기를 경험했다.어쩌면 우리는 21세기에 더 큰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지도 모른다.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우리자신과 특히 젊은이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또 정치가들은 진지하게 세계적인 문제들을 고민하고 그 해결책을생각해야 한다.그리고 우리는 아주 민감한 생태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21세기를 준비해야 한다.
  • 구주의 나고야성박물관(일본속의 한국문화:13·끝)

    ◎“조선정복” 풍신수길의 야욕 그대로 보는듯/섬뜩한 비문 “바다건너 섬들을 겨누어 보다”/“역사의 아이러니” 거북선·일 판옥선 나란히 임진위란이 아직 끝나지 않고 풍신수길이 살아 있을 때 어리석게도 우리나라 사신이 명나라 사신을 따라 강화조약을 맺자고 현해탄을 건너간 일이 있었다.1596년 8월.임란 발발 4년만의 일이었다. 일행이 대마도와 이키섬을 거쳐 구주 본토에 다다랐을 때 바닷가 언덕 위에 거대한 성벽이 치솟아 있고 한 복판에 5층 누각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이것이 바로 나고야(명호옥:낭고야)성으로서 풍신수길의 소위 「조선정벌」전진기지였다. 나고야성 5층 누각 위에 올라서면 멀리 일기·대마 그리고 조선본토까지 보인다는 곳이다.이곳에 최근 기념박물관이 섰다고 해서 가보았다.이름하여 명호옥성박물관.개관 2개월만에 3만명이 다녀갔다면서 서곡관장이 기뻐하고 있었다. 『반대도 많았습니다만 침략전쟁을 반성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지방민의 여론이 결국 이겼습니다』 ○군국주위자가 새겨 먼저 나고야성지 위에 올라서서 북쪽바다를 바라보았다.『한국이 보인다』는 소리를 듣고 바다를 건너다 보니 정말 두 나라는 가까운 나라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그러나 아직도 일제때 일본군의 해외정벌 성지로서 세워놓은 기념탑이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내놓고 있었다.어떤 광신적인 군국주의자가 새겨놓았는지 「태합께서 바다 건너 섬들을 겨누어 보시다」라는 글이 보인다.태합이란 바로 풍신수길을 두고 한 말이다.아무리 지난 일이라 하더라도 섬뜩한 글귀이다. 성지에서 내려오면 새로 완성된 박물관 건물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진열실을 둘러보고 느낀 소감이 『아직도 한일 두 나라가 보는 임진왜란의 역사적 의미에는 큰 시각차가 있다』는 것이었다.4백년이나 지난 옛날 사건이 이토록 오래오래 상흔을 남길 줄이야 아무도 몰랐으리라. 박물관 진열실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 거북선 모형이다.거북선 바로 옆에 똑같은 크기로 일본 수군 판옥선이 전시되어 있는데 두 배는 서로 싸우지 않고 나란히 사이좋게 서있다. 내용을 잘 모르는 제3국인이 이 진열실을 일별하면 어느 쪽이 침략자이고 어느 쪽이 피침략자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것이다.일본인들이 볼 때는 특히 불쾌하지 않게 잘 꾸며 놓았다.3만명이 다녀간 이유를 알것 같았다.만일 우리나라에 이런 박물관을 지었다면 이렇게 형편없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없이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복강(후쿠오카)에는 아직도 진주성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성지와 임란때 납치해온 당인(가라비토 즉 한인)정이 남아 있다.그들 한인들은 도공도 아니요,아무것도 아닌 무고한 농민들이었다.임란때 끌려간 우리 동포들 말고도 후쿠오카 땅에는 불과 50여년전 이곳 탄광에서 혹사당하다 죽어간 너무나 많은 한국청년들의 넋이 있는데 지금도 위령제 한번 지내주지 않은 채 한국관광객이 드나들고 있다. ○임란직전 국력 비슷 임란이 끝난 뒤 서둘러 국교정상화를 했다가 큰 손해를 본 조선정부.배상금과 송환인을 받기는 커녕 매년 30만냥이란 거액의 돈을 대마도에 지불하면서까지 평화를 유지하려 했던 가엾은 조선왕조의 국력과 외교력.그때를 생각하면 임란이 우리나라에 준 타격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간단히 말해서 15세기말 임란이 일어나기까지는 한일 양국의 국력은 비등비등했었다.그러나 난이 끝난 뒤 두나라 국력의 격차는 1대3으로 기울어지고 말았다.일제침략을 받은 뒤에는 그 격차가 1백분의1,2백분의1로 떨어져 오늘에 이르렀다.그런데도 한일관계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상하다 하겠는데 바로 신정초에 일본의 친지(정명으로 해 두겠다)로부터 이런 내용의 서신을 받았다. 『작년 일본의 호소카와(세천)총리가 한국을 방문하여 새삼스레 식민지지배에 대한 사죄발언을 했습니다.사죄발언 자체는 평가받을만한 일이나 다른 일면이 있다는 사실도 잊지마십시오.즉 금후에 예상되는,보다 대담한 (일본)자위대의 해외파견에 대한 다른 아시아 여러나라의 비판을 미리 막아 두려는 속셈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면서 호소카와내각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구자민당계세력이 왕년의 매파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장차 4,5년 안에는 꼭 일을 저지를 작자들』이라고 경고하였다.호소카와의 얼굴 생김새로 보아 전쟁을 일으킬 인물이 아니라고 속단할수 있다.그러나 한일관계라는 것은 그리 간단하고 달콤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임란이 끝난 뒤 2백년간 통신사라는 평화의 사절단이 현해탄을 건넜다.그러나 그것을 지금의 시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평화의 시대」였다고 회고하는 사람은 없다.1894년 갑오위란이라는 또하나의 침략전쟁을 준비하는 시대로 치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년으로 광복 50주년,일제패망 반세기를 맞는다.광복후 한 시대를 넘기면서 작금 돌아가는 국제관계의 변화를 주시해야 할 것이다.일본이나 중국에서는 민족주의가 강하다.한국에도 나름대로 강했다고 생각되는데 어찌된 일인지 최근에는 국제주의라고 하는 달콤한 슬로건에 현혹되어 이 나라는 동양 3국중 하나가 아닌 것처럼 착각하는 어른과 어린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명호옥 언덕 위에서 본 비문:『태합(풍신수길)이 바다 건너 섬들을 겨누어 보다』란 글귀가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필자만의 기우라 비웃을수 있는 것일까.
  • 서구/실업증가속 경제난 심화/AP통신이 본 올해 지역별 상황

    ◎중국 고성장기록속… 일 경기회복 난망/러 급진민족세력 대두로 옐친 난관 AP통신은 전세계의 특파원들을 동원,새해의 지역별 상황 변화를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유엔=유엔은 지난해 보스니아,아이티등지에서는 좌절과 실패를 겪었다.재정사정이 심각해졌지만 새해들어서도 개선될 전망은 보이지 않고있다.사무국의 낭비와 관리잘못이 계속 지적되고 있다.유엔 평화군은 주요 강대국이 모험적인 개입을 원치않고있어 갈등에 직면해 있다.보스니아에서도 유엔은 구호작업만을 계속하고 있을 뿐 분쟁 당사자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이다. ▲러시아=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은 새로운 헌법채택에 힘입어 급진적인 민족주의자들의 준동을 막으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옐친대통령은 앞으로 의회내에서는 강력한 극우 정파들,지방에서는 보다 많은 자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그리고 경제적 난관등에 직면할 것이다. 반면 지리노프스키가 이끄는 극우파들은 정책변경과 개각을 요구할 것이며 옐친으로서는 신헌법이 지방과 연방정부의 권한을 분명히 규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약점을 갖고있다. ▲동구=올해도 계속 새로운 민주체제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이들 국가들은 94년 한해도 경제침체,구 유고사태,서구식 경제체제에 대한 기대·좌절로 인해 어려운 시기가 될 것이다.발칸반도에 대한 최대의 우려는 분쟁이 다른 지역으로 번지지 않을까하는 것이다.폴란드,헝가리,체코 등은 세계경제만 좋아지면 성장국면으로 접어들 수도 있다. ▲서구=EC국가들은 1월1일을 기해 12개 회원국이 「중앙은행」격인 유럽통화기구를 개설함으로써 통화통일을 위한 첫 조치를 취했다.그러나 구유고사태 해결에서 보듯 외교,국방부문 공동정책 채택은 경제조치보다 더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올해 서유럽 국가의 최대의 과제는 경제문제.10여개 국가에서 실업률이 10%이상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독일의 실업률은 더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아프리카=수백만 아프리카인들은 올해도 전쟁,가난 그리고 질병에 시달릴전망이나 남아공,앙골라,모잠비크등 몇개 분쟁지역은 희망의 한해를 보낼 것으로 보인다.미군철수가 예정돼 있는 소말리아는 외국군이 철수하고나면 곧 군벌간의 전투가 재개될 것으로 관측된다. ▲중동=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회교원리주의자와 과격파의 반대에 계속 시달리고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아랍점령지의 반환에 반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제에 직면할 것이다.그러나 양측은 지난해 9월 맺은 팔레스타인 자치협정만은 이행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중동평화회담이 진전을 보여 팔레스타인에 이어 시리아,레바논,요르단이 이스라엘과 평화회담을 추진할 전망이다. ▲동아시아=미국과 북한간의 회담 결과에 따라 극동지역 국가들이 전면적인 무기경쟁에 돌입할 것인지 군비축소로 가는 세계적인 추세에 따를 것인지가 결정될 것이다.한반도의 긴장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문민민주화로의 빠른 전환을 계속할 전망이다.중국의 빠른 성장은 올해도 지속될 것이다.일본 경제는 2차대전이후 최장기 침체가 이어질 전망이다. ▲남미=대부분의 남미 민간정부들은 자유시장 개혁을 추진해 나갈 것이다.경제적으로 가장 앞선 칠레,아르헨티나,베네수엘라 3국은 NAFTA가입을 추진할 것이다.
  • 남북관계 새기류/최상룡 고려대교수/한완상 전통일부총리/전문가대담

    평화통일을 향한 우리의 진지한 남북대화노력은 지난해 북한핵의혹이라는 걸림돌때문에 커다란 좌절을 겪었다.한반도 정세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새해를 맞아 핵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것인지,그리고 이후 남북관계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통일정책을 총괄하는 한완상부총리겸 통일원장관과 최상용교수(고려대)의 대담을 통해 조망해본다. ◎통일 예상밖 빨리올 가능성/「열린 민족주의」로 북동참 유도/교류확대 거쳐 남북연합 진입/북측 다양한 체제고수 전술에 구체대응책 강구를/평양 개방물결 거역 못한다/「등소평 식」 개방징후도 엿보여/흡수통일 두려움 해소시켜야/지나친 목조르기식 접근땐 오판 유발… 공멸 위험성 ▲최상용교수=10여일 전까지 통일정책을 수행해오셨는데 지난해 북측과의 접촉에선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지요. ▲한완상전부총리=그렇습니다.해방이후 처음으로 정통성을 확보한 문민정부의 통일정책은 출발부터 시련을 겪었습니다.신정부 출범 이후 20일도 안돼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는 바람에 지난10개월은 남북관계 개선의 관점에서 보면 좌절의 기간이었습니다.남과 북이 특사교환을 위한 실무접촉을 진행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남북간에 대화마저 교착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런 악조건 가운데서도 새 정부는 통일정책을 3단계추진방안­3대추진기조로 재정립하여 신축성있게 운용해왔습니다. 그런데 현시점은 핵문제로 인한 국제적 긴장이 거의 정점에 이르렀고 남북간의 교착상태가 바닥국면에 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북한당국도 핵카드의 효용이 거의 소진되어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북한이 올바른 합리적 선택만 해주면 핵문제도 해결되고 남북관계도 좋아질 것입니다.그러나 만에 하나 북한이 비합리적 선택을 하게 되면 값비싼 대가를 치를 것으로 염려가 됩니다. ○국내냉정도 상존 ▲최교수=전세계적인 냉전체제 붕괴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반도 내부를 보면 대단히 어려운 현실입니다.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의 냉전지역으로 민족상잔의 이념전쟁까지 치른 한반도에는 아직도 남북간 냉전뿐만 아니라 이에 상응해 「국내냉전」도 존재하는 상황입니다.이 때문에 지난 10개월은 통일논의 과정에서 냉전의 멍에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안타까울 정도로 계속되는 기간이었습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새정부 10개월 동안의 통일정책은 시시비비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통일논의 자체의 민주화에 기여했습니다.나아가 통일논의에 있어 과거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던 「반공모럴리즘」을 극복한 것도 성과였습니다. 반면에 귀담아 들어두어야 할 비판도 있었습니다.이를테면 우리가 아무리 이성적으로 접근해도 상대방인 북한이 합리적이지 않는한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지적이 그것이죠.이것이야말로 안타까운 일인데 통일논의에 있어 가장 보수적인 층의 의견도 일리는 있습니다.상대인 북한이 좀더 성실성을 갖고 합리적으로 나왔더라면 남북관계도 좀더 진전이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한전부총리=최박사의 평가를 겸허히 받아들입니다만 한편으로 학자의 입장에서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럽습니다.신정부의 통일정책은 첫째 민족내부의 요청과 세계사의 3가지 큰흐름에 맞는 정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것입니다.어느 정부든 국내개혁이 안되면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 없고 둘째로 세계화에 발맞추지 않으면 또한 국제경쟁력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이 세계사의 큰 흐름이죠.셋째로 탈냉전도 세계사의 한 흐름입니다.신정부는 개혁에는 비교적 성공적이었고 세계화에도 얼마간 늦은 상황에서 현재 지향하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어떤 의미에서 냉전의 고도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남북관계 개선이 좌절을 겪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최교수=지난 10개월 동안의 통일정책에 대한 비판가운데 건설적으로 담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한두가지 덧붙여보겠습니다.우선 김영삼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 없다』고 밝힌 부분이 잘못 이해되고 있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민족문제를 민족자결로 해결하겠다는 것이지 국제관계를 소홀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었는지 모르겠으나 다소의 오해를 초래한 것 같습니다. 지금 개혁과 세계화를 강조하신 것으로 보아 오해인 듯하지만이에 대한 일관된 비판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북한의 현실에 대한 엄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비판도 반드시 기득권층이나 극단적인 보수층 뿐만 아니라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북한의 합리적인 응답이 없으면 이쪽의 주장이 공허해진다는 점에서 협상수단이나 방법 등 현실적인 문제도 중요하다는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한전부총리=많은 오해를 받았습니다만 새정부가 추구하는 민족복리는 국제화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화에 동참하는 「열린 민족주의」입니다.취임사의 그부분은 북한의 김일성주석에게 한 얘기였습니다.즉 어제의 북한 동맹국이 오늘의 동맹국이 아닐 수 있다는 의미에서 옛소련을 가리켰던 것입니다.그런데도 우리가 민족을 앞세움에 따라 마치 우리의 우방을 무시할 것이라는 식으로 악의적으로 해석한 측면도 있습니다. 관계개선을 이루려면 상대방에 대해 입장을 바꿔보는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탈냉전이 진행되면서 북한은 군사적·경제적 병참기지였던 주요 동맹국들을잃고 총체적 고립상태에 놓여있습니다.이같은 국제적 고립이 경제적 곤경과 연결된 상황에서 북한은 체제의 존망이 걸린 핵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그들도 탈냉전시대에 어제의 동맹국이 오늘의 동맹국이 될 수 없으며,대미협상을 통해서 관계개선을 이루는 것 이외에는 체제위기의 곤경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곤경에 처한 조그마한 나라가 미국과의 협상을 하기 위해서 미국의 아킬레스건을 잡아당겨야 한다는 전술적 판단을 하게 된 것이고 그 결과가 지난 3월 NPT탈퇴선언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죠.탈냉전시대를 맞아 미국도 NPT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갖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 아닙니까. 그러나 문제는 북한이 체제를 걸고 하는 게임에서 지면 몰락할 것이 뻔한데도 배수진을 치고 벼랑끝까지 가는 전략을 구사한다는데 있습니다.그 과정에서 때로는 우리를 화나게 하고 불쾌하게 하는 점도 있습니다.그러나 그 때문에 목조르기식으로 접근하면 북한은 엄청난 비합리적 결정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이는 주체사상에특정종교의 영생론까지 도입하는 북한 사회의 의사종교적 성격을 감안하면 이해가 가능합니다.북한의 비합리적인 측면은 외부압력이 강해질수록 증폭되게 마련이고 이로 인해 초래되는 무서운 결과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쪽은 바로 우리민족입니다.이런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동안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인내해온 것입니다. ○의사종교로 변질 ▲최교수=말씀을 듣고 보니 냉혹한 이성주의자가 통일지상적 감상주의자로 비판을 받고 있었다는 느낌이 듭니다.저도 북한의 상황을 한마디로 「의사종교적인 열광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저는 변화를 통해 유지하려고 한다는 의미에서의 보수는 지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건강한 보수는 별로 없습니다.통일논의에 있어 가장 보수적인 의견인 「북한은 근본적으로 변한 게 없다」는 명제는 엄청난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분석적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북한은 자기들의 체제를 유지한다는 목표는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선 어떠한 전술적 변화도 가능한 나라입니다.북한이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고 할 때 언제든지 필요하면 전쟁을 한다든가 통일전선전술을 편다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는 그것이야말로 북한에 대해 그러지말도록 강요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왜냐하면 현실인식을 제대로 하는 정권이라면 승산이 없으면 스스로 하지 않을 테니까요. ○경제적위기 자인 현시점에서 북한의 앞날에 대해 3가지 시나리오를 가상해 볼 수 있습니다.우선 급격한 북한체제의 붕괴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우리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북한상황을 공부한 사람들이 수없이 제기한 시나리오입니다.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북한은 앞으로 2∼3년이 고비라는 얘기도 있습니다.반공주의자뿐만 아니라 이런 분석을 하는 이들 가운데는 친북한계 인사도 많습니다.북한이 처한 긴박한 경제상황은 최근 북한이 경제 실패를 자인한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두번째 시나리오는 김일성부자체제가 붕괴해도 북한사회는 유지될 수 있다는 가정입니다.이는 서구적 합리주의자의 분석으로 보면현실성이 없습니다.마지막으로 북한이 고르바초프식이든 등소평식이든 체제유지를 위해 합리적 개혁을 하고 대외적으로 문을 여는 시나리오입니다.최근 열린 북한 노동당 중앙위와 최고인민회의를 보니 이 세번째 시나리오로 가려는 노력이 엿보입니다.때문에 우리 정부나 국민도 북한이 주민 생활의 기본 필요량이라도 충족시켜 3번째 시나리오로 가기를 바란다고 공식으로 얘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북한의 주체사상 생성 배경은 소련 점령치하의 압력과 유산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과 내부적인 엄청난 권력투쟁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해됩니다.그러나 이것이 수령론·지도자론 등 개인숭배로 변용되면서 체제경직성을 크게 심화시켰습니다. 북한체제의 붕괴 시나리오와 관련해 한가지 덧붙인다면 국내 일부에선 이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급격한 붕괴를 부담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등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정부의 공식 입장이나 지식인의 일반적 견해는 세번째 시나리오를 바라고 북한이 그런 노선을 걷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측이 비합리적 선택을 할 경우 체제붕괴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겠죠.최악의 경우 경제적 변수만 보면 공멸의 위험성도 있습니다. 어떤 측면에선 북한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바람이 어떻든 첫번째 시나리오는 여전히 현실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때문에 앞으로 우리는 통일에 대비한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하리라 봅니다.통일은 의외로 가깝게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점을 직시,통일에 대비해 철저하고 체계적인 준비를 하는 것이 향후 10년내의 시급한 과제가 아닌가 합니다. ○인내와 설득 필요 ▲한전부총리=우리가 원하든 않든 최박사가 말씀하신 첫번째 시나리오가 현실성이 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공감합니다.그러나 얼마전까지 공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이에 대해 말하기 어려운 측면도 많습니다.두번째 시나리오는 시민사회가 전혀 형성되지 않은 북한 사회에 안일하게 서구적 사고를 적용한 것으로 거의 현실성이 없습니다.세번째 시나리오와 관련해 덧붙이자면 고르바초프보다는 등소평같은사람이 나와 중국모델로 가는 게 더 현실성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현재 북한은 몇가지 객관적 모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개방을 해야하는 불가피한 상황임에도 대내적 경직성때문에 개방을 못하는 것이 첫째 모순입니다.둘째로는 군사력을 증강해야한다는 현실과 경제활력을 길러야 한다는 당위성간의 모순입니다.세번째는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데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정책수단이 없다는 모순입니다.족벌체제의 특성상 과감한 인사정책을 펼 수도 없고 페레스트로이카나 글라스노스트와 같은 과감한 개혁·개방정책도 시행할 수 없는 구조라는 것입니다.또 하나는 체제보존을 위한 비효율적 의식과 행사 등에 물쓰듯 하는 엄청난 「상징비용」의 부담으로 경제의 실용과 모순을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이를테면 서울올림픽에 대응하기 위해 세계청년축전을 개최한다거나 우리의 63빌딩을 의식해 유경호텔이라는 불필요한 고층빌딩을 건축하는 것 등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같은 객관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북한 지도층의 주관적 두려움를 염두에 두면서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북한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두려움은 미국으로부터 핵선제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라든가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에 대한 공포,국제사회로 부터의 「오해」 등을 들 수 있습니다.이러한 북한이 처한 객관적 모순과 주관적 두려움을 다 고려해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선택은 북한이 핵투명성을 보장하도록 인내심을 갖고 합리적으로 설득하면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최교수=핵투명성 보장이 어렵다는 얘기도 끈질기게 나도는데요. ▲한전부총리=북한의 핵투명성 보장을 위한 막바지 협상단계에 와 있습니다.북측이 7개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의 임시·통상사찰 등 전면적 사찰을 받아들이지 않고 남북대화에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우리나 미국 등 국제사회의 합리적 인내도 소진될 것이라는 것을 북한당국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새해 들어 우리가 남아있는 합리적 방법을 다 써 북한이 극적으로 핵투명성 보장을 선택해주면 남북관계의 엄청난 개선 뿐만 아니라 세계평화의 이정표가 마련될 것으로 전망됩니다.즉 우리 7천만 겨레가 다 함께 개혁과 세계화 및 탈냉전이라는 세계사의 3가지 흐름을 타는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강경책도 마련을 ▲최교수=냉전 시대에 미국이 소련을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사실도 우리에게는 좋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우리 쪽에서는 좌경의 경우 북한의 민족적 자세에 대해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우경의 경우는 북한의 공격능력이나 통일전선능력에 대해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둘다 지양되어야 할 것입니다.어쨌든 북한은 이제 한계상황까지 왔습니다.핵을 가지고 싶으나 가질 수 없고 그러면서 카드로서의 효과도 탕진했으며,개혁을 하지 않으면 흡수통일이나 체제붕괴로 이어진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개혁을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죠. 지금까지 진행된 우리와 국제사회의 노력이 북한의 핵투명성 보장으로 이어지기만 하면 남북관계가 급진전될 것이고 북한도 3번째의 낙관적 시나리오를 맞을 것으로 보입니다.그러나 북한이 끝내 핵투명성을 보장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개혁노선을 취하면서 핵과함께 체제를 유지하려는 태도를 취할 경우 국제제재로 이어진다고 봐야 합니까. ▲한전부총리=문자 그대로 완전한 핵투명성을 보장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북한이 이미 플루토늄을 추출해 이것을 몰래 숨겨놓고 있다면 이것을 찾아내다는 것은 어렵다는 얘기입니다.단지 앞으로 북한의 모든 핵개발 상황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미래지향적 핵투명성 보장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것입니다.그러기 위해선 북한의 7개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의 일반 및 특별사찰과 남북대화를 통한 상호사찰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최교수=정부의 통일방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한전부총리=북한핵문제가 늦어도 새해 봄까지 해결을 위한 구체적 조치가 강구된다면 신년도에는 신정부의 3단계통일방안의 첫단계인 교류협력단계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됩니다.그래서 경제교류를 위시해 각종 사회문화교류가 활성화될 경우 두번째 단계인 남북연합단계로 넘어 가게 되겠지요.첫단계 진입직전에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되고 ,결과 북한과 미국 등 자본주의 자유국가들과의 실질적 관계개선이 이뤄지면서 평화무드가 조성되고 북한의 체제붕괴라는 시나리오의 현실성이 없어지면 95년 정도에는 남북연합단계 진입이 가능하리라고 봅니다.그러나 우리의 온갖 합리적 설득에도 불구하고 핵문제가 해결이 안되는 상황이 오면 굉장한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북에 대해 명분있고 합리적인 강경책을 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이 경우 북한에게는 체제붕괴냐,문을 여느냐의 마지막 선택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그래서 새해는 핵문제나 남북관계에 있어 평화의 해가 떠오르냐,무서운 참화의 어둠을 맞느냐의 중대한 선택의 해가 될 것입니다.우리 모두 위험속에서 기회를 활용하는 용기와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계흐름 탔으면 ▲최교수=그렇습니다.북한의 태도에 따라 반세기동안 지속되어온 냉전의 마지막 고리가 풀리느냐의 기로를 맞고 있습니다.북한이 핵의혹을 씻고 개혁과 개방으로 방향을 전환,지난해 김영삼대통령이 밝힌 탈냉전선언에 대해 핵투명성보장으로 화답한다면 반세기에 걸친 한반도 냉전의 마지막 고리가 풀릴것입니다.즉 47년 트루먼선언으로 시작된 냉전선언이 한반도 평화선언으로 골인하는 엄청난 드라마가 전개될 것입니다.이와는 별도로 우리는 예기치않게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통일에 대한 치밀한 준비를 철저히 해두어야 할 것입니다. ▲한전부총리=끝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우리는 80년대의 민주화운동시대를 지나 90년대 들어 반부패·개혁의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8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민주화가 덜된 나라들에 국한됐습니다만 90년대의 개혁 움직임은 서방선진7개국(G7)을 포함한 전세계적인 흐름입니다.아무쪼록 북한도 개혁과 개방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직시하고 이를 과감히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남북한 모두의 개혁이 평화공존과 통일로 이어지는 필요조건이기 때문입니다.
  • “칭기즈칸 무덤을 찾아라”/몽골·일 공동탐사작업 4년째

    ◎옛수도 아우루그 위치 확인/위성·레이더 동원… “자원 노출” 땅파기 반대 13세기중 아시아와 유럽대륙을 관통하는 대몽골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즈칸은 과연 어디에 묻혀 있을까.소련의 개방화와 함께 불기 시작한 몽골의 「칭기즈칸 열풍」에 절정을 이룰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칭기즈칸 무덤찾기작업은 올해도 결실을 보지 못한채 해를 넘길 것 같다. 지난 4년여동안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아 사막과 초원을 누벼온 몽골·일본 두 나라의 공동탐사단은 최근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올 여름까지의 탐사결과에 대한 평가회를 갖고 사실상 칭기즈칸 무덤찾기작업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이번의 무덤찾기작업이 실패로 돌아간 지금 몽골과 일본 양측간에는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후속 탐사계획에 적극적이어야 할 몽골측은 심드렁한 표정이고 일본측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은연중 불만의 뜻을 비치고 있는 것이다. 일본측은 이번에 요미우리(독매)신문사가 경비를 부담,위성과 헬리콥터·지상 레이더장비 등 각종 최첨단장비를 동원했지만 지하유적 발굴의 기본이랄 수 있는 땅파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이는 문화사업을 빙자해 지하 광물자원을 속속들이 파악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몽골쪽의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일체 굴토작업을 하지 않기로 약속한데 따른 것이다. 조사단은 이같은 제약으로 비록 칭기즈칸무덤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수만㎦의 면적을 훑어오는 동안 약 3천5백기에 달하는 고분의 위치를 확인하고 많은 석기도구들을 찾아내는 등 큰 성과를 거뒀다.특히 몽골내 카라코람 이외의 다른 몽골제국 수도로 믿어지는 아우루그를 울란바토르 동쪽 2백50㎞지점에서 재확인했다.아우루그의 존재는 칭기즈칸이 이 부근에 묻혀있을 가능성을 가장 높게 해주는 실마리로 공동조사단은 드디어 그의 무덤에 가까이 접근했다는 확신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상황에서 몽골측이 소극적으로 나오자 일본측은 이제 자기들이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칭기즈칸의 무덤에는 역사와 문화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어 이의 발굴작업에 대한 주변국들의 관심은 지대했다.우선 내몽골 영토문제가 걸려있는 중국은 칭기즈칸무덤이 이곳에서 발견될 경우 몽골측이 이를 근거로 영토문제를 제기할 것을 우려,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더구나 칭기즈칸이 몽골인들에게는 영화와 자부심의 역사인데 반해 중국인들에게는 피지배와 굴욕의 상징이어서 그의 무덤 발견이 전혀 반가울리 없는 입장이다. 러시아도 마찬가지.구소련이 70년간에 걸쳐 몽골을 지배하면서 칭기즈칸의 거론조차 금지시켰던데는 민족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한 정치적 목적도 물론 있었지만 이면에는 슬라브족들의 뼈에 사무친 적개심도 작용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이처럼 칭기즈칸의 「부활」에 대해 마뜩치 않은 표정인데 반해 일본이 적극적인데는 또 그나름의 사연이 있다.일본인들 사이에는 칭기즈칸이 12세기 말 권력싸움에서 패배한뒤 대륙으로 탈출한 무사 요시쓰미 미나모토라는 설이 널리 퍼져 있다.본국에서의 패배자가 세계를 지배했다는 이같은 속설은 일본인들의 민족적 우월감을 만족시킬 수 있는 좋은 소재여서 이 사업을 추진한 요미우리신문에는 독자들의 호기심에 영합한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부어지고 있다.
  • “일본 곳곳에 「한글숭배」 신사”/부산외대 김문길교수 확인

    ◎자모만 일부 바꿔 위패등 새겨/“학문신”… 시험합격 기원 참배/“개국때 만들어진 신대문자… 한글이 되레 모방” 주장 일본인들이 한글을 변형시켜 만든 문자를 신사에 모셔놓고 복을 기원하는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실이 밝혀졌다.게다가 그들은 그 문자가 일본의 개국신화 시대에 만들어진 「신대문자」이며,한글이 오히려「신대문자」를 모방했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부산외국어대 김문길교수(일본어학과)는 8일 자신이 일본 현지에서 조사한 신사에서의 「한글숭배」실태및 『한글은 신대문자를 베낀 것』이라고 주장한 일본 학자들의 저서를 공개했다.이에 따르면 일본의 신사에서는 정문 윗부분과 위패등지에 「신대문자」로 신의 이름을 새겨놓아 참배객들이 그 문자에 대해 절을 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그 글자는 한글을 약간 바꾼 정도라는게 김교수의 지적이다.그는 오카야마현 나가오(장미)신사를 예로 들었는데 사진에서 보듯 정문에 쓰여진 신의 이름은 「□ㅏㄱㅏㄴㅏㅁㅜㄱㅏ」였다. 김교수는 일본인들이 이 문자를「가무나가라」라고 읽는다며,한국인이 이 글자를 오른쪽부터 읽으면 단지 한글의 자모를 풀어 써 「무」를 「ㅁㅜ」로 표기했을 뿐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고 말했다.다만 「라」가 「□ㅏ」로 쓰인 것은 일본인들이 한글을 모방하면서 「ㄹ」을 「□」로 바꾸는등 문자 몇개를 변질시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교수는 자신이 지난 7∼8월 일본의 일부지방을 돌아 본 것만으로도 1백여개의 신사에서 이같은「한글숭배」를 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또 일본인들에게 왜「신대문자」에 절을 하느냐고 물으면 한결같이『신대문자로 이름이 쓰여진 신은 학문의 신이어서 그 신사를 참배하면 각종 시험에 무사히 합격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일본인들은 「신대문자」를 언제,왜 조작했을까. 김교수는 「신대문자」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초 일본의 대표적인 국학자 히라다 아쓰다네(평전독육)가 1819년 2월 발간한 「일문전」이라는 책에서였다고 밝혔다.당시 일본에 서구의 문물이 밀려들자 이에 위기를 느낀 민족주의 학자들이 가장 일본적인 학문(국학)과 종교(신도)를 부흥시키자는 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중국의 한자,불교경전에서 따온 「가다카나」「히라카나」와는 다른 일본 고유의 문자를 조작할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이에따라 히라다가 『일본의 개국신인 천조대신이 만든 문자를 발견했다』면서 「신대문자」를 공표하자 이 문자는 국학·신도의 인기를 타고 급속히 번져나갔으며 이후 신사의 문자로 정착했다는 분석이다.당시는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일본학자들이 한글교본을 쉽게 접할 수 있었으리라고 김교수는 추정했다. 히라다가 만든 「신대문자」는 모두 47자로,그 모양새는 한글 자모를 풀어쓴「ㅁㅜ·ㄱㅏ」 형태와 「ㅏ·ㅓ」등을 자음 밑에 붙여쓴 「ㄱㅏ·ㄴㅓ」형태등 2종류이다. 김교수는 『일본의 국학자들은 「신대문자」를 고유문자라고 내세우기 위해 거꾸로 한글을 모방품으로 밀어붙였다』면서 그러나 1945년 종전이후 양식있는 일부 학자들은 그같은 주장을 부끄러워하고 있다고 밝혔다.
  • 민족주의자의 죽음/김삼웅 엮음(화제의 책)

    ◎장준하선생 관련된 글 모음집 민족민주운동과 통일운동의 선구자로서 일생을 바쳐온 고 장준하선생의 글,그리고 그의 삶과 의문의 죽음을 다룬 글들을 한데 모았다. 장준하선생은 일제 때 학도병으로 중국전선에 끌려갔다 탈출한뒤 광복군에 가담,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에 앞장섰으며 해방후에는 민중계몽과 반독재저항에 온 몸을 바쳤다.그러나 19 75년8월 등산길에 의문의 시체로 발견되었던 것.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아직도 완전히 해명되지 않고 있다. 1부는 함석헌 백기완 김준엽등이 인간 장준하의 삶에 관해 통찰한 글을,2부에는 장준하선생이 직접 쓴 「민족주의자의 길」등 선생 자신의 생각을 담았다.그리고 3부는 의문점 투성이인 장준하선생의 사인을 다룬 글들을 엮었다.학민사 6천원.
  • 5백만 해외동포(민족주의시대의 교민정책:하)

    ◎민족역량 결집 국가시책 펴야/“90개국 분산” 국력신장에 큰 재산/교포 보살피고 귀국 희망땐 받아줘야/이민 “외국진출 선도요원 새인식 필요 우리의 해외동포는 약5백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이는 우리나라 총인구의 10%가 넘고 남북을 합한 6천만 인구에는 10%가 조금 모자라는 수치이다.이렇게 많은 교포를 세계 90여개국에 갖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큰 힘이요 장점이라 하겠다. ○유리한 조건 갖춰 세계의 모든 나라가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복수민족국가 또는 다민족국가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지역분산민주으로 국가보다 상위개념으로 민족을 생각하여야 한다.무엇보다 다국적기업시대,국가의 개념이 희박해지는 시대,그리고 경쟁의 단위가 민족으로 바뀌는 시대를 맞아 우리는 어느나라보다 유리한 조건을 갖춘 것이 된다. 우리 민족이 어디에 살건 다같이 잘 살아야 되며 이를 위해 우리는 협력해야 한다.무엇보다 근접한 지리적 조건에서 외국에서 물자를 수입하여 가공을 하고 다시 외국에 팔아야만 살수 있는,생존조건이 동일한 일본과 숙명적인 경쟁을 하여야 하는 한민족은 세계의 모든 지역에 분산된 우리교포를 총동원하여 민족의 역량을 한곳에 집결해야 한다.국가의 정책도 이러한 민족적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재러한인의 자치주를 주장해야 하고 재중교포를 우대하여야 한다. 민족적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한다면 재일교포문제도 일본에의 귀화를 장려할 것이 아니라 민단과 조총연을 하나로 통합하는 문제부터 서둘러야 한다.우리의 국내법에 재일한인사회의 융합에 불리한 것이 있다면 이를 수정하여 조총련인사들이 민단과 협력하게 해야한다. ○민단·조총련 통합을 재미교포에 대해 우리는 흔히 도피이민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이것도 하루속히 불식하도록 해야한다.재미교포가 현지에서 생활하고 사업을 하는데 2중국적제도가 유리하다면 이를 허가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바꿔야 할 것이다. 이점은 남미나 유럽의 여러나라에도 적용될 문제이다. 우리는 월남에 7천명 정도의 한인 아버지를 둔 고아를 두고 있다.이들을 보호하고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어야한다.당장은 귀찮을지 모르나 월남에 한인의 후손이 있다는 것은 월남은 물론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등으로 우리의 국력을 진출시키는데 더없이 귀중한 재산이 될수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2세 도와야 구소련에서는 독일계 민족이 연간 10만명이나 독일로 귀국한다.구소련이 와해되면서부터는 독일을 포함,희랍 이스라엘계 민족들도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고 있다.이와는 달리 우리는 구소련내 한인들의 귀국을 꺼리고 있다.사할린교포도 겨우 기독교교회의 도움을 받아 수십명을 귀국시켰을 뿐이다. 무릇 하나의 국가라면 독일처럼 재외동포가 어디에 살건 귀국을 희망하면 수용해야 한다.한 민족으로 태어난 것이 영광스럽고 또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민족국가의 최대 최고의 의무라 하겠다. 남북문제도 이러한 민족국가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통일의 경비를 남쪽이 부담하고 흡수통일을 한다는 것은 북한 동포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남북의 통일은 한민주으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고 남한사회에 통합되는 것이 영광스럽다는 생각을 갖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영광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나라가 북한을 괴롭히더라도 민족적 차원에서 북한을 이해하고 북한을 대변 또는 감싸주는 차원높은 아량과 정책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한민족 자부심 심어 우리는 6·25의 동족상쟁이라는 깊은 상처와 냉전체제로 굳어진 불신의 벽이 너무 높기 때문에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데만 몰두할 뿐 그곳에 사는 주민들이 우리의 핏줄이라는 생각은 거의 못하고 있는듯하다.북한에 대한 대담한 의식 전환이 있어야 하겠다. 세계에 분산된 우리민족을 영광된 민족으로 만들 책임을 가진 대한민국은 세계 모든 지역에 사는 우리민족을 보살피고 이들을 선도할 의무도 있다.그리고 이들에게서 주재국의 장점을 빨리 익혀 우리민족의 경험으로 삼아 명실공히 세계를 지도하는 민족으로 성장해야 한다.
  • 중국지역(민족주의시대의 교민정책:중)

    ◎재중교포,남북교류 가교로/연 1만명 북한방문… 「개방」전파/한국 불법체류 2만명 포용해야/1860년대부터 이주… 연변 등 2백만명 거주 5백만의 재외동포가 우리에게는 더없이 귀중한 민족의 자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재외교포와 관련,우리의 가슴을 아프게하는 것이 재중교포에 대한 문제이다.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에는 약 6만명의 외국인 불법체류자가 있으며 이들 가운데 약2만명이 재중교포이다. 이들 재중교포가 한때 서울역과 서울시청앞 길가에서 한약장사를 했다.지금은 한약장사 대신 아침 저녁으로 품을 팔기위해 지하철 서울역에서 대우빌딩으로 연결되는 곳에 서있는 모습을 흔히 접할수 있다. 이들이 많이 모일 때는 역의 직원들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해산시키거나 멀리 쫓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한다.말하자면 우리 일반인은 재중교포를 귀찮은 존재로 여기고 있으며 출입국관리소에서도 추방의 대상으로 인식하는등 우리가 갖고있는 재중교포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부정적 인식 바꿔야 그러나 재중교포를 친척으로 둔 사람마저 그들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으며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또한 반성해본 경우가 없다. 현재 중국에는 2백만명의 교포가 살고 있다.두만강 건너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함경도사람이,압록강 건너의 요령성에는 평안도사람이,그리고 더 멀리 흑룡강성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사람이 많이 살고 있다. 재중교포는 1860년대부터 이주하기 시작하여 한일합방과 3·1운동이 일어나던 시기까지 대거 이주를 했으며 특히 1932년 만주국이 성립되면서 일본의 강제에 의하여 대거 이주한 사람들이다. 이들 재중교포는 북한과 왕래가 잦은 사람들이다.최근 재중교포들이 남한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북한이 자제하고 있지만 연간 1만명의 재중교포가 북한을 찾고있으며 7천여명의 북한인이 연변이나 요령성을 방문하고 있다.재중교포는 말하자면 남북대화를 실제 추진시키고 있는 사람들인 셈이다. 재중교포가 한국을 많이 찾는것은 한국이 중국이나 북한보다 경제적인 풍요를 더 누리고 있는 때문이다. ○월평균 수입 4만원 현재 중국은 우리의 60년대 이전과 유사해 재중교포의 월수입은 평균 4만원정도(중국화폐로 2백원)이다.이들에게 한국은 환상의 나라인 것이다. 그러나 돈벌이를 위한 한국방문이 그리 수월한 일은 아니다.현재 60세 이상만 친척방문 비자를 발급해주고 있는 때문이다. 따라서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국을 찾는 젊은 사람들은 관광비자로 입국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며 체류기간을 넘기기 일쑤여서 부득이 불법체류자가 되지 않을수 없는 실정이다. 또 중국교포 대부분은 특별한 기술이 없으며 기술이 있다고 해도 한국에 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무엇보다 오랜 세월 사회주의 사회에 젖은 근무태도가 한국에서는 고통이 아닐 수 없다.이러한 사정으로 재중교포는 단순노동에 종사하는게 통례로 돼있다.남자는 건설현장의 힘든 잡일을,여자는 식당일이나 재봉일을 한다.직장에서 좋은 주인을 만나는 사람도 있으나 개중에는 노임을 적게주거나 밀린 노임을 고의로 주지않는 악덕 고용주밑에서 가슴앓이를 하는 교포도 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재중교포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불법체류자로 적발되어 추방당하지 않나 하는 불안감이다.저녁이 되면 저녁대로 걱정,아침이면 아침대로 걱정이다. 일본이 재일한인을 포함한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비록 가혹하게 대하지만 브라질 아르헨티나등지에서 찾아오는 일본계 사람들에게는 체류기간을 넉넉히 주고 또 불법체류자라해도 구속하거나 추방하는 법이 없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방문목적이 돈벌이를 위한 노동일 경우에도 중국은 체류하는 교포에게 최선을 다한다. ○동포애로 감싸줘야 우리 민족만큼 자기민족에 대하여 아량이 없는 민족은 드물것 같다.이는 우리나라에 다른 민족이 살지 않기 때문이며,우리 민족이 단일민족으로서의 경험이 너무 길어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갖추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은 국제화시대에 결코 유리한 심성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자기민족을 아끼고 감싸고 사랑할줄 모르는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어떻게 소중히 여길수 있겠는가. 고국을 찾아온 중국교포 2만명도 제대로 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장차 어떻게북한에 있는 2천만 동포를 포용할 것인가.
  • 구소지역(민족주의시대의 교민정책:상)

    ◎중앙아 한인 연해주복귀 도와야/강제이주 56년… 회교권에 흡수 우려/원동에 재정착,자치주 실현 모색을 옛소련의 붕괴로 냉전체제가 끝나면서 세계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인「민족주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옛 유고연방이 무너진뒤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사이에 1년 넘게 전개되고 있는 전쟁,옛소련 연방국인 아제르비이잔내의 아르메니아인 처리를 둘러싼 유혈분쟁등 지구상의 곳곳에서 벌어지는 충돌은「민족문제」가 주원인이다.「민족주의」시대를 맞아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동포들에 대한 정책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사계의 권위자인 서울대 이광규교수의 글을 3회에 나누어 싣는다. 독일과 월남이 통일된 이후 우리는 한 민족이 분단된 두 나라에 살고있는 유일한 민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우리나라가 다른 민족을 국내에 갖지 않는 세계의 예외적인 민족인지는 모르고 있다.세계의 모든 나라가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복합민족국가임에 비해 우리 나라는 단일민족국가라는 예외의 나라이다.따라서 오늘날 세계의 최대과제인 민족문제가 도처에서 야기되고 있어도 이를 절실한 것으로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을 갖고 있다.이러한 불감증으로 인해 해외에 거주하는 재외동포에 대해서도 별관심이 없는 것같다. 현재 세계는 미소의 양극화냉전체제가 사라지면서 경제적 블록화와 민족의식의 고양으로 야기되는 분쟁현상을 보이고 있다.민족의식은 민족의 권익과 인권문제와 결부되어 있기에 경제문제까지를 포함하는 중요한 문제로 될 것이다.말하자면 포스트­양극시대는 민족문제가 주류를 이룰 것이고 인류경쟁의 단위가 민족이냐 국가냐 하는 시대가 오며,문제의 핵심은 민족이 될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따라 우리도 세계 도처에서 야기되는 민족문제를 심각하게 느껴야 하며 재외동포를 포용할 수 있는 민족의식을 가져야 한다. 현재 구소련 영내에는 45만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다.이중 우즈베크공화국에 18만여명,그리고 카자흐공화국에 10만여명이 살고 있다. 원래 이들은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영토인 연해주에 거주하고 있었다.이들은 1860년부터 1919년까지 이곳으로 이주하여 여러 지역에서 자연림을 개간하고 벼농사에 성공하여 삶의 터전을 이루었다.특히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신한촌은 초기 우리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LA의 코리아타운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곳이다. 연해주에 자리잡은 한인들은 스탈린의 명령에 의하여 1937년 현재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우즈베크공화국과 카자흐공화국으로 강제이주를 당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들이 겪었던 과거의 쓰라린 경험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중앙아시아의 한인들은 현재도 암담한 운명 앞에 놓여있다.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최근 구소련 중앙아시아를 다녀온 국회의원도 그곳에 그냥 살게할 방법밖에 없으며 그곳 한인들도 그렇게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다르다.이들은 연해주로 다시 이주해야 한다.이를 위해 구소련의 한인들은 연해주에 자치주를 얻어야 한다.한인이 이곳에 자치주를 얻게되면 재구소 한인들은 한인으로 남을 수 있다.그렇지 않고 현재의 우즈베크공화국과 카자흐공화국에 그대로 살게되면 이들은 한세대안에 소멸되어 버릴 것이 불을 보듯 자명하다. 우즈베크와 카자흐공화국은 현재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하는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다.그 작업의 과정은 첫째가 국어를 사용하는 것이고,둘째가 역사를 조작하는 것이며,셋째가 경제적인 독립이고,넷째가 종교의 강화이다.특히 이들 나라가 진행시키는 것이 둘째와 셋째이고 이것이 어느정도 확고해지면 다음 단계는 회교를 국교로 선포하는 것이다.회교는 예부터 칼과 코란밖에 없고 회교권에는 인권이나 민족은 별의미가 없는 개념들이다. 한인들은 이들 공화국이 담을 더 높이 쌓기 이전에 그리고 러시아가 금년 4월에 보인 것과 같이 국회에서 한인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금년 6월에 있었던 성명그대로 러시아가 한인에게 보상을 하겠다고 할때 연해주에 자치주를 요구하여야 한다. 연해주에 자치주를 이룩하면 우리 기업들이 이곳에 진출하여 러시아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그뿐만 아니다.두만강개발에 재러한인도 참가할 수 있어 함경북도,중국의 연변조선족자치주 그리고 연해주한인자치주가 우리 민족이 번영하는 활동무대가 되며 이에 따라 우리 한인 5만명이 거주하는 사할린도 한인의 무대가 될 수 있다. 45만 재구소 한인이 중앙아시아에서 소멸되어 버리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것인가.아니면 지구상에 모두 합하여도 7천만명밖에 안되는 우리 한인을 적절한 장소에 옮겨 한인으로 활력을 넣고,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를 확대할 것인가는 바로 눈앞에 있는 중요한 민족의 선택이다.
  • 이원규 대하소설 「거룩한 전쟁」(이작가 이작품)

    ◎항일의병 투쟁 다룬 본격 전쟁소설/문경대의병장 이강년 중심,10여년 활약 담아/2년동안 격전지 직접 답사 사실성 더해 이원규(46)의 대하역사소설 「거룩한 전쟁」(신구미디어간)은 유림주도의 항일의병투쟁을 소설화한 작품이다.한국근·현대사의 여명을 전쟁사적인 입장에서 파헤친 본격 전쟁소설이기도 하다. 전4부 12권 분량중 이번에 출간된 1부 3권의 소제목은 을미의병의 선봉장 이강년(1858∼1908)의 기병 격문 「누가 이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에서 따왔다.일천대가 넘었던 구한말의 의병진가운데 가장 극적인 투쟁을 전개한 이강년의 문경 의병진대를 중심축으로 잡아 최초 기병에서부터 10여년의 투쟁,그리고 간도독립군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극사실주의 시각으로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어느 역사가의 말처럼 역사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나는 소설을 쓰기 위해 역사속으로 찾아가서 독립전쟁의 탁월한 영웅들과 수많은 무명소졸들을 만났고 그 결과 이 시기의 역사가 패배와 굴종이 아니라 치열한 항쟁과 승리 바로 그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고 말했다. 「거룩한 전쟁」1부에는 이강년 유인석 홍범도 신돌석 김수민 이인영등 의병사에 빛나는 주역들이 200여명의 또다른 역사실존인물들과 함께 등장한다.여기에 이형재·노광등 가상인물들이 가세,18 95년 이후 15년동안 지속된 의병전쟁사에 대한 소설적 재미를 돋운다.제1부 전3권가운데 상권에서는 경북 문경의 사대부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한 이강년이 을미년(1895)고향에서 소백산 포수들을 규합,기병해 고모산성등지에서 전투를 전개하다가 제천의 유인석이 이끄는 호서의병대와 합류하는 과정이 전개된다.이후 관군연합부대에 의해 패퇴,유인석진이 서북지방을 거쳐 서간도로 들어가는 과정과 함께 만주유민들의 고난사와 수전개척이 다뤄졌다.중권은 북간도에 진출해있던 유민들이 자생적으로 간도의병대를 조직하는 과정이,하권에서는 정미년(1907)군대해산과 더불어 일본수비대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의 기세가 꺾이고 생존자들은 북간도와 연해주로 흘러 들어가 재기하는 의병사가 역사보다 더 흥미롭게 서술되고 있다. 이원규는 지난 84년 등단이래 88년 대한민국문학상신인상(침묵의 섬),90년 박영준문학상(황해),93년 동국문학상(천사의 날개)을 수상하면서 「우리 문단의 두터운 허리」로 각광받아 온 작가.이 작품집필을 위해 18년동안 몸담아온 고교교사직을 지난해 사직한뒤 배낭을 메고 중국으로 건너가 한달동안 만주일대를 배회하며 자료를 수집했다.91년 1차 답사에 이은 두번째 여행길이었다.작가는 또 이 소설을 쓰기 위해 2년동안 소백산을 중심으로한 호서의병대의 격전지를 답사했다.당시 의병토벌에 쓰인 일본군 작전지도등 19 00년대 지도 100여본을 입수하는등 소설의 사실성을 높이는데도 힘을 기울였다. 오는 95년 완간을 목표로 집필중인 제2부에서는 경술국치후 북간도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백두산정계비를 둘러싼 국경문제,홍범도의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어랑촌전투등 독립군의 투쟁을,3부는 임시정부계열의 민족주의파및 19 30년대이후 중국동북지역의 파르티잔투쟁을,마지막 4부는 해방과 분단을 거쳐 6·25발발까지의 숨가쁜 시기가 그려질 예정이다.역사소설의 공간적 지평을 넓힐 대작 「거룩한 전쟁」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맥을 대는 새로운 대하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 「보수다당」 일본의 변화 주시한다(사설)

    안정을 자랑하던 일본정치도 마침내 변화와 개혁의 격동에 휘말리고 있다.18일 실시된 총선결과 집권자민당이 과반수 획득에 실패했으며 제1야당인 사회당은 참패를 면치못했는가하면 자민당을 뛰쳐나온 제3의 신당들이 대단한 약진을 보였다.예상했던 일이지만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예고하는 것인가.우리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그점이다.55년이후 일본정치를 지배해온 보혁체제의 붕괴요 38년간에 걸친 자민당 1당독주시대의 종언이란 변화도 중요하다.그러나 그보다 더 주목되는 것은 그 변화의 내용이 아닌가 한다.우선 엄청난 부패와 분열에도 불구하고 과반수는 미달했으나 현상유지는 할 수 있었던 자민당의 선전을 주목한다.자민당에 못지않는 조직과 자금력을 자랑하는 사회당의 참패와 함께 그것은 일본유권자들의 변함없는 보수우경 성향을 잘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부패와 분열의 집권자민당 응징아닌 제1야당 사회당심판이 되고만 결과는 일본정치만의 아이러니라 해야 할 것이다.미일안보반대와 자위대 부정은 말할것도 없고 한국의 존재까지 부정해온 비현실적 정책노선에 대한 실망과 염증이 제3의 선택으로 마침내 폭발한 결과라 할 수 있다.세계적인 탈사회주의 분위기의 반영이며 탈냉전의 세계질서에 적응하는 일본유권자들의 주목되는 변신인 것이다. 정치개혁을 내걸고 자민당을 탈당한 신당세력의 놀라운 부상도 그 연장선상에서 봐야할 것이다.신당세력의 부상과 관련,우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자민당과 함께 앞으로의 일본정국을 주도할 그들이 지향하는 노선의 방향이다.하타,오자와,호소카와등 지도자들은 대부분이 자민당내서도 보수우파를 대표하던 세력이며 전전의 경험과 부담이 없는 신일본 민족주의 지향의 세대들이다. 평소의 소신은 물론 총선유세에서도 「신일본」「강력한 일본」「할말은 하는 일본」을 내세우면서 일본애국주의를 강조해 주목을 끌었다.「정치·군사·외교대국」일본을 신봉하고 주창하는 사람들이다.그들의 주장은 일반국민 특히 신세대 일본인들로부터 상당한 호응을 받고있다.이번 총선결과는 독일등 탈냉전의 세계적 유행인 민족주의바람의 일본상륙을 알리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본의 총선결과가 예고하는 정국불안은 물론 그 다음에 올 보수우경화가 강화된 일본의 변화 가능성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평화헌법의 개정과 군사력 증강및 해외파병 강화등 일본의 정치·군사·외교대국화 지향은 더욱 노골화될 것이 틀림없다.미국과 러시아를 대신하려는 중국과의 패권경쟁도 예상된다.남북한 분단의 상황을 일본국익 차원에서만 보려들 가능성도 높다.한일관계의 의미도 변할 수 밖에 없다.변화의 일본이 갖는 동아시아 한반도적 의미를 냉철히 음미하며 주시해야할 계기가 아닌가 한다.
  • 중국의 군비확장,다시 패권인가 (사설)

    오랜 사회주의정체에서 깨어난 중국의 급속한 군비확장노선에 대한 아시아제국의 관심과 우려가 고조되고있다.경제건설에 몰두하는 중국이 경제건설과는 상충될 수 있는 군비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이웃나라들이 우려와 경계심을 갖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것이다. 중국의 군비증강은 국방예산의 계속적인 대폭증액과 각종 최신장비 도입등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지난 5년간 두자리수 증가율을 기록해온 중국 국방예산의 금년규모도 75억달러로 작년비 14%나 늘어난 것이다.아직은 빈약한 규모이나 증액추세가 중요할뿐 아니라 중국군사비는 언제나 통상예산규모보다 4배정도 많은 것이 보통이며 장비도입은 다른 예산으로 충당되는 경우도 많다. 이같은 군사비증액등의 뒷받침속에 중국은 첨단장비도입등을 통한 해공군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특히 주목되는 것은 비교적 값싼 러시아 첨단장비의 도입이다.작전반경 1천4백㎞의 최신예 수호이27기 26대를 도입했으며 항공모함과 원자력잠수함에 공중재급유기와 공중관제지휘기등의 도입과 기술개발이 추진되고 있다.육군중심에서 해공군중심으로,병력중심에서 무기중심으로 그리고 대륙지향에서 해양지향으로의 전략변화가 두드러진다.그것이 실현되면 중국은 동아시아의 제해·제공권을 장악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옛소련 붕괴로 인한 가상적개념 변화에 영토분쟁의 남사군도등 해양이익보호가 당장의 동기로 지적되기도 하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명실공의 강대국지향에 목적이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국제적 지위에 걸맞는 강력한 군대를 건설해야 비로소 국가안전과 사회주의근대화를 보장할수 있다』는 것은 지난 3월 전인대에 참석한 강택민총서기의 천명이다. 그 정책적 구체화가 바로 동양적 치국이념인 「부국강병책」인 것이다.경제적으로 뿐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강대국다운 힘 말하자면 옛날의 「중화제국」같은 지위를 회복하자는 것이다.중국은 전통적으로 우세한 군사력과 전략태세로 싸우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을 상책으로 삼아왔다.대만문제등 오늘의 중국이 안고있는 많은 문제는 지난날의 국력을 회복하면해결된다고 보는 발상이다. 문제는 그것이 제기하는 위협성이다.부국강병의 중화민족주의가 주변국의 복촉을 요구할때도 문제지만 당장에도 그것은 많은 문제를 제기한다.때아닌 동남아의 군비경쟁을 유발했는가 하면 일본재무장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중국이 아시아의 새군사대국으로 미국이나 러시아를 대신하는 상황도 우려된다.클린턴의 신태평양공동체나 동아시아집단안보구상이 필요해진 이유다.중국과의 우호협력강화도 중요하지만 중국의 군확이 제기하는 문제도 우리의 심사숙고대상이 아닐수 없다.
  • 아·태 새안보·경협체제 구체화/클린턴 미대통령 국회연설의 함축

    ◎쌍무방위공약 지속·역내대화 등 역설/동북아지역서의 리더십 강화 포석도 클린턴 미대통령의 국회연설은 대체로 4가지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그것은 ▲한미동반관계의 발전의지 천명 ▲대한동맹관계의 재확인 ▲북한핵문제에 대한 강력한 입장표명 ▲지역안보,경제협력강화및 비전제시로 요약될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한반도를 중심으로한 동북아및 아시아·태평양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외교정책방향이 제시된 대목은 「신태평양공동체」에 관한 그의 구상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국회연설에서 제시된 신태평양공동체의 기본목표는 미국의 기존쌍무적 방위공약의 지속,무기의 확산방지를 위한 강력한 노력,공동안보노력에 대한 역내대화,역내 민주주의의 확산 등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구상의 밑바탕에는 미국이 아시아·태평양세력으로서 남아있는 것은 물론 이 지역에서 리더십을 확고히 견지하겠다는 의도가 깔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포괄적인 시각에서 보면 냉전이후 시대에 있어서 양자관계의 재정립 필요성,동북아지역의 세력경쟁 악순환의 예방 등의 차원에서 논의돼야 할 시점이 된것이라고 볼 수 있다.냉전구조의 종식에 따라 미방예산의 삭감은 불가피하고 이에따른 이 지역주둔미군의 감축은 장기적인 시각에서 힘의 공백을 초래하게 된다.더욱이 중국과 일본간의 잠재적 패권경쟁,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국가별 전략강화는 필경 지역 불안정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또한 지역경제적 측면에서도 아태지역,특히 동아시아가 세계에서 가장 성장이 빠르고 미국의 이 지역과의 무역고가 3천억달러 선으로 미·유럽간의 교역량을 약 30%나 앞서고 있다 동북아시아지역은 19세기때 이미 첨예하게 세력경쟁을 벌였고 냉전시대에서도 극한대치를 했기 때문에 안보대화나 협력의 경험이 전무한 상태다.따라서 지역안보협력의 방식도 역내 국가간 분쟁발생의 소지및 지역불안정요인의 사전제거 등 「예방안보」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특정 적과 위협을 상정하여 조직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같은 집단안보기구와는 전혀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결국 「다자간 안보협의를 위한 포럼」(윈스턴 로드 미국무부 동아태차관보)형식의 지극히 느슨한 형태의 기구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신태평양공동체의 초기단계는 역내 국가간의 분쟁요인이 될 수 있는 정치·경제·사회·환경·테러·마약문제 등 공동 관심사에 대한 다자간 협의형태가 될것으로 보인다.좀 더 구체적으로는 안보협력의 분위기조성으로 「정보교환·의도의 전달·긴장완화·분쟁해결및 신뢰증진」을 도모할 수있을 것이다.예를 들어 국방예산의 공개,군인사교류,군사훈련 사전통보및 참관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클린턴대통령과 김영삼대통령의 APEC(아시아·태평양각료회의)정상회담격상제의와 개최 지지는 신태평양공동체구상을 더욱 구체화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신태평양공동체 등 이 지역안보협력기구의 추진과 관련하여 우리 정부가 분명히 짚어야할 사항은 한미방위공약 등 기존의 양자관계를 잠식하지 않고 상호보완적으로 추진돼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안보협력체제는 한반도문제와 필연적으로 연계될 수 밖에없으므로 우리 정부는 이를 한반도안보체제구축,나아가서는 평화통일달성을 위한 국제적 동의확보의 기회로 적극 활용해야할 것이다.
  • 다변·세계화·미래지향의 신외교(사설)

    새한국 신외교의 방향이 구체화되어 가고있다.김영삼대통령의 24일자 「태평양시대와 한국의 신외교」연설이 신한국외교의 총론적 기본철학 제시였다면 「한국신외교의 기조」라는 한승주외무장관의 31일 외교협회연설은 그러한 대통령외교철학의 각론적 실체의 제시라 할수있다. 한외무는 신외교의 5대기조로 「세계화」「다변화」「다양화」「지역협력」및 「미래지향」을 제시했다.새정부의 신외교는 정책수립과 집행및 사고방식등 모든 면에서 한반도의 냉전상황을 탈피하고 미래세계형성에 적극 참여하며 주도적으로 기여해갈 의지를 천명하고있다. 세계화는 한국외교가 남북문제뿐아니라 도덕성등 대통령이 제시한 국제보편의 가치를 기초로 범세계적 문제해결에도 적극 기여한다는 것이며 다변화와 다원화는 그 연장선상에서 탈냉전의 상호의존시대에 맞는 전방위외교와 경제·환경·문화등 외교관심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되고있다.지역협력은 아시아 태평양 특히 동북아 안보·협력의 주도를 상정하고있으며 미래지향에서는 분단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통일외교의 지향이 강조되고있다. 한마디로 우리와 세계의 변화·발전을 반영하고 그에 걸맞는 신외교를 지향하겠다는 기조의 천명이라 할수있다.바야흐로 세계는 탈이념의 경제제일주의와 국익우선의 민족주의가 지배하고있다.그러한 세계환경과 시대정신의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고 그것을 주도해 나가기위해선 우리의 의식구조는 물론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 자신도 그동안 큰변화를 겪었다.오늘의 우리는 분명 어제의 우리가 아니다.세계도 무시할수없는 경제력을 쌓아가고있는 가운데 문민대통령의 등장과 개혁은 세계에 손색없는 민주한국의 모습을 과시하고있다.구소및 중국과의 수교와 유엔가입등으로 명실상부한 세계속의 한국으로 부상하고있다.그러한 변화에 걸맞는 신외교의 자신있는 모색은 너무도 당연한 일 일것이다. 통일외교도 예외일수 없다.세계와 우리자신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냉전적 분단상황은 여전히 극복되지 않고 남아있는 우리의 뼈아픈 현실이요 약점이며 극복해야할 도전이다.신외교가 풀어야할 중요과제의 하나인 것이다.그리고 그 돌파구는 개방과 개혁이라는 북한의 변화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미래지향의 통일외교를 천명한 신외교의 기조는 북한의 아태질서편입을 통한 통일실현을 강조하고있다.북한을 경쟁상대아닌 후원대상으로 보는 인식전환을 요구한다.북한이 개방개혁의 세계적 흐름에 동참하도록 돕는데서 실마리를 풀어야한다고 강조하고있다.우리통일외교가 지향해야할 다른대안이 있을수없는 유일의 방향이라 생각한다.중요한 것은 적극적이고도 과감한 실천일 것이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50)

    ◎길림시절:9/「유길학우회」 활동의 허구/“이준·안중근의 독립투쟁 비판” 주장/27년엔 공산당 영향력 없어 불가능/종교타파 주도자,자신서 여선생으로 바꿔 회고록에서는 길림소년회와 유길학우회가 한 사업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⑴조기회…아침마다 지구별로 열었다.일요일은 모든 회원들이 북산에 가거나 그 밑의 운동장에 가서 체육경기를 했고 가창행진도 하였다. ○“노동이 낫다” 인식케 ⑵종교타파…김일성이 조선인소학교의 여선생을 시켜 종교를 믿는 학생에게 하루종일 하느님에게 빵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였다.그 다음에 여선생에게 학생들을 데리고 밀 이삭을 주워 그것으로 빵을 만들게하여 먹을 것을 얻는 데는 「하느님」보다 노동이 낫다는 것을 인식시키도록 하였다.또 소년회원들이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보고 「소년 애국가」·「조선인 길림소년회가」같은 혁명가요를 보급하였다. ⑶국어강습…27년 여름에는 중국소학교에 다니는 소년 등 우리 글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20일동안 국어를 가르쳤다.「조선사람은 조선을 알아야 한다」란 구호를 내걸었는데 계영춘·김원우·박소심이 강의에 출연하였다. ⑷과외활동…용담산 원족,강남공원 야유회,문화유적 참관,강연회,토론회,학습회,웅변대회,독서발표회,노래보급,연예공연 등을 다양하게 조직하였다. ⑸비밀활동…강남공원·북산 등에서 야유회의 간판을 가진 비밀회의를 많이 하였다.북산의 약왕묘 지하실은 그들의 전용 회의실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⑹강연…오동진·이탁 등 정의부 지도자들은 국치일(8월29일),3월1일,단군 탄생일(10월3일)등 주요 기념일에 교포들과 청년학생들을 모아 놓고 강연회와 토론회를 자주 조직하였다.김일성도 연설했다. ⑺토론회…27년 여름에 손정도네 예배당에 유길학우회 성원들을 모아 놓고 이준의 방법이 옳은가,안동근의 방법이 옳은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회를 가졌다.이 토론회를 계기로 조선을 독립시키는 데는 테러나 청원의 방법이 아닌 새로운 진로가 탐구돼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⑻계몽사업…소년회원들까지 동원하여 강동·육대문·신안둔·대황구와 같은 농촌마을에 나가 농민들의 일손을 도와주면서 그들을 계몽하였다. 그러면 이상과 같은 「활동」의 실태를 분석해 보자. 첫째로 손정도의 예배당에서 당시의 학생들이 일제 요인을 향한 테러나 강대국을 위한 청원의 방법으로는 나라를 찾을 수 없다고 토론했다는 것은 민족주의운동 진영에 공산주의 사조가 침투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둘째로 종래는 김일성 자신이 한 것으로 선전하고 있었던 종교타파 문제가 이번 회고록에서는 그 주인공이 「조선인소학교」의 여선생으로 바뀌었다.이 학교는 일본기록이 말하는 「신개문 밖의 예배당에서 경영하는 유치원」이다.공산주의 사조는 당시 유치원 선생에까지 파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부 계통” 입증 따라서 이러한 일들은 29년 께가 아니면 생길수가 없다.김일성이 주장하는 27년 상반기에는 길림지방에서는 민족주의진영 세력이 압도적이었고 조선공산당의 영향은 아직 그 내부에까지 침투되지는 못하였다. 셋째로 국어강습은 회고록 본문을 읽어보면 김일성이 한 일이 하나도 없다.대신 조선공산당 재건파의 하나인 서울상해파의 간부 박소심의 이름이 보이는데 이 사실은 29년에 서울상해파가 국어강습을 지도했고 그들이 계영춘,김원우 등 정의부 좌경분자들을 강사로 끌어들인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넷째로 오동진,이탁 등 정의부의 지도자가 강연했는데 이런 강연을 김일성도 했다고 하고 있다.이것은 그가 국민부 계통이었다는 것을 실토한 대목이다.소년회장으로 있었던 29년 무렵 그가 소년들 앞에서 「강연」을 한 것 자체는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니다. 다섯째로 29년 당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는 여러 종파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과외활동,비밀모임,대중 계몽사업을 벌였다.그들은 민족주의 단체에 적극적으로 침투하여 서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갖은 방법을 다썼다. 이 때문에 국민부 인사들은 혹은 좌경화되고 혹은 「반동」으로 몰리고 동족상잔의 가지가지 비극이 연출되었다.정의부계통의 청소년들도 조선공산주의운동의 강력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김일성도 그런 소년의 한 사람이었다. 회고록의 기술을 분석해보면 이상과 같다.그러나 회고록은 이러한 진실을 계속 외면하고 29년 께에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선상에 나타난 일련의 현상을 27년에 끄집어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 총영사 질겁” 과장 『조선인길림소년회,조선인유길학우회,마르크스 레닌주의 독서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길림일대에서는 「ㅌ·ㄷ」성원들을 핵심으로 하는 새세대의 혁명역량이 급속히 자라나게 되었다. 길림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총영사까지도 이것을 간파하고 우리의 활동에 주의를 돌리게 되었다.길림 일대에서 새로운 혁명세력이 등장하여 그것이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는데 질겁한 총영사는 자기나라 외무대신에 보낸 공식 보고문에서 그 대오가 조직력이 강하다는 것과 장차 무서운 존재로 나타나게 될 위험성이 있으니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는 것을 경고하였다』 ①「세기와 더불어 1」241면 이하 ②같은 책 2백46면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8)

    ◎길림시절:7/조선인류길학우회사 날조/“27년 「유길학우회」로 개편 명예회장 취임” 주장/중1때 학생청년조직 최고간부부상은 불가능/안병기 등 지도자명단 일경기록서 삭제 김일성은 1927년 4월10일에 조선인 길림소년회를 조직하고,그 다음달인 5월8일 종래부터 있었던 조선인려길학우회를 조선인류길학우회로 개편했다고 주장한다.회고록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29년 유길학우회로 『우리는 조선인여길학우회 속에 들어가 본래의 합법성을 계속 유지하면서 점차 그 조직을 순수한 친목단체로부터 혁명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자고 하였다.공산주의자인 내가 명예회장으로 되었지만 표면상으로는 민족주의자들을 끼고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중국군벌당국의 주의도 덜 끌었다.나는 조선인여길학우회를 지도하면서 그것을 조선인유길학우회로 개편하였다.조선인 유길학우회는 조선인청년학생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단체라고 표방하였지만 실지로는 ㅌ,ㄷ의 이념을 실현하는 혁명적인 학생청년조직으로 활동하였다』「주①」 여길학우회는 1926년에 실지로 존재하고 있었다.「주②」그러나 이 친목단체가 유길학우회로 개칭된 것은 29년쯤일 것이며 이 조직에서 김일성이 「명예회장」으로 된 일은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이것보다 더한 것은 김일성의 이러한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북한이 일삼는 대대적인 문건 변조작업이다.이 작업은 우상화를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죄행인데 그 실태의 일단은 아래와 같다. 북한이 이용하는 유길학우회 문건은 1930년의 일본 길림총령사관 경찰기록이다.여기서는 이 기록을 편의상 3단락으로 나누어 분석해 보겠다. 1)「유길학우회.본회는 길림 지나중등학교 이상의 재학선인 등이 조직하고 있으므로,현재 회원수 등은 불명하나(길림대학생 안병기·김인기·박일파 등이 오이를 잡고①)3·1기념일·국치기념일(한국병합)등에는 기념식을 단독 또는 다른 불령단체와 공동 거행하며, 또 기회 있을 때마다 강연회를 개최하며(민족주의의 고취②),배일선전을 하고 있다」「주③」 이 기록에 필자가 고딕으로 쓴 부분은 「조선전사16」에 나오는 같은 경찰기록의 변조판에서삭제되어 있는 부분이다.「주④」 그런데 삭제된 부분 ①에 따르면 30년 당시 유길학우회의 책임자는 안병기·김인기·박일파였다.당시 안병기는 조선공산당 재건파인 서울상해파의 중앙간부였고 김인기·박일파도 같은 서울상해파의 고려공산청년회 중앙간부였다. 또 29년께,이 유길학우회의 임원으로는 김인기·박일파·신영근·이장청·이석옥등 5명이 문헌에 나온다.「주⑤」 이 중 신영근도 30년에 서울상해파에 들어간 전문학교 학생이고 이장청은 한인 여성교육사업에 종사한 정의부계통의 여성활동가였다.이석옥은 알 수 없으나 이 5명이 유길학우회의 최고지도자였다. ○고작 평회원 자격 그런데 조선전사는 대학생이나 전문학교 학생,그렇지 않으면 사회활동가인 이러한 간부들이 있었다는 것을 모두 은폐하였다.이번 회고록에서는 이러한 은폐작업 끝에 초급중학교 학생에 불과한 김일성을 「명예회장」으로 앉히는 것으로 그 변조작업을 마무리짓고 있는 것이다.그는 27년은 커녕 29년이라도 이러한 간부들을 누르고 학우회의 최고간부는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29년이라도 그는 중학 3학년으로 평회원 이상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②는 유길학우회가 조선공산당 재건파에게 휩쓸려 간 30년 현재라도 표면상은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전술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덮은 것이다. 2)『본년(1930년… 인용자)1월중 선내 학생소요사건에 대하여 지나인 일반의 동정을 구하여③ 대일반항운동을 유리케 전개할 「반일본 제국주의 선언」이라 제한 지나문이로서 과대·날조·중상적 문구를 나열하고④ 중한인 공동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할 취지의 불온 인쇄물(길림려길한인학우회 명의)을⑤ 지나측 관공서,학생간에 다수 배포하였다』 조선전사는 유길학우회가 중국에서 중국글로 삐라를 쓴 것을 「주체사상」에 걸리는 행동으로 해석하였는지 ③④를 삭제하고 있다. ⑤는 유길학우회가 30년 당시에도 「여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그런데 이것도 김일성이 27년 5월에 여길을 유길로 변경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삭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여길학우회란 명칭이 30년에도 사용되었다는 경찰문건을 가지고 생각하면 이 조직이 유길학우회로 변경된 것은 아마도 29년쯤일 것이다. ○중문전단 배포 은폐 3)『본년 3·1기념일에는 재만한인 반제국주의동맹이 발기하여 각 단체 합동기념일을 거행하였는데 이에 참가하였다.⑥』 ⑥은 1930년의 3·1절이므로 27년에 「유길학우회 명예회장」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김일성으로서는 삭제하지 않을 수 없는 기록으로 된다. 이상 일본기록 중에서 북한이 삭제한 부분만을 분석해 보았다.이 부분들은 유길학우회의 성격과 임무를 잘 보여주고 있고 아울러 이 조직에 망라되었을 때의 김일성의 보잘 것 없는 지위와 사상상태를 여러모로 암시하고 있다. 「주해」 ①「세기와 더불어 1」240면 ②「한국독립운동사 5」659면 ③같은 책 748면 ④조선전사 16,76면 ⑤「한국독립운동사 5」718면
  • 새정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7)

    ◎길림시절:6/「조선인 길림소년회」 조직설/민족주의자들이 28년경 만든 단체/“27년 결성주도”… 대조직가로 행세 김일성은 좌익문헌을 읽은 것이 자기 「혁명활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봉건군벌 장작상이 지배하는 중국의 오지 길림에서 그것도 1927년에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헌을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그런데 이 불가능한 일을 김일성은 전기에서 억지로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독서조 지도 억지 그는 한달에 열람료를 10전씩 내어 오마항거리에 있는 도서관에 갔고 또 육문중학교에서 두번이나 도서주임으로 되었다고 주장한다.나중에는 몸소 비밀독서조를 조직하고 독립운동가가 경영하는 정미소의 방 한칸을 독서실로 만들어 거기서 좌익서적을 탐독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그가 도서주임이 되었다 하더라도 부유층의 자제가 가는 육문중학교가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구입할 리가 없고 봉건군벌이 경영하는 우마항의 도서관도 그런 책이 있을 턱이 없었다.또 비밀독서조란 것도 29년에 상월선생이 한 독서모임을 자기가 조직한 것처럼 하고 있는데 불과하다. 회고록은 이와같이 별로 좌익서적에 접하지도 읽지도 않았던 그를 대독서가로 만들어 놓았다.그 다음에는 그를 대조직가로 변신시키는 차례인데 그 첫번째가 길림소년회 결성이다. 「우리가 길림에서 처음으로 내 온 조직은 조선인길림소년회였다.그 때 길림에는 민족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소년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름뿐이고 길림시내의 소년들은 그런 조직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우리는 1927년 4월에 손정도네 예배당에서 조선인길림소년회라는 합법적조직을 무었다. 나는 김원우·박일파와 함께 이 모임을 지도하였다.모임에서는 조직부와 선전부·문화체육부와 같은 소년회의 부서들을 내오고 학교와 지역별로 되는 반도 조직하였다」 여기서는 길림소년회의 조직자가 「우리」로 되어 있고 김원우·박일파의 이름도 보이지만 여태까지의 전기들은 한결같이 김일성 혼자가 길림소년회를 결성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시점조작 들통 조선인길림소년회는 여러가지 증거로 보면 27년이 아니라 28∼29년에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최형우는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서 김일성이 길림에서 「소년운동 지도자의 일인으로 일년유여의 시일」심혈을 짜냈다고 쓰고 있다.따라서 김일성은 28년부터 29년 5월에 퇴학할때까지 1년 남짓 소년회에 있었던 것으로 된다.또 이명영교수는 1917년생인 최진무씨가 13세가량이었을 때 길림소년회 회원이었다는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이 증언에 의하면 29년경 김일성은 길림소년회 회장이었다. 그런데 회고록은 이 기림소년회 이외에 길림에는 민족주의자가 만든 이름뿐인 소년회가 따로 있었다고 하고 있다.김일성이 참가한 소년회는 민족주의 조직이 아니라는 주장인데 이것은 사실을 정반대로 말하고 있다. 1930년 당시 길림에는 두가지 소년단체가 있었다.그 하나는 길성소년탐험대로서 공산당의 종파인 ML파의 표현단체 주중한인청년동맹 계열이었다.대장은 김일영,제1반장은 허성,제2반장은 진규삼이었으며 정미소 복흥태를 거점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회고록의 상기 인용문에 나오는 「독립운동가가 경영하는 정미소」란 김일성이 있었던 길림소년회가 아니라 이 길성소년회가 거점으로 한 복흥태를 말한다.그는 자기와 그 입장이 반대되는 이 공산주의 길성소년회의 거점을 제멋대로 「길림소년회의 독서실」로 둔갑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김일성은 29년 5월에 길림소년회를 떠났는데 이 조직은 29년 11월에 길림소년탐험대라 개칭하였다.30년의 일본기록은 민족주의단체 국민부산하인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의 지휘를 받는 이 소년조직에 대하여 그 본부도 구성원도 적지 않고 있다.그러나 회고록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조직의 본부는 손정도의 예배당이었다. 이 길림소년회에 대한 1930년의 일본기록은 다음과 같다. 「소년회.예년 5월 제1요일을 소년데이로 정하고 운동회 등을 열고 있다.본년(1930년)은 5월4일이 마침 소년데이에 상당하므로 당일 유길학우회원 김인기,박일파의 사회로 신개문 외 야소례배당에 소년 약20명을 모아서 간단한 기념식을 행하였다. ○29년경 “회원” 증언 그후 소년데이라고 쓴 지제의 수기를 하나씩 배급하여 오후1시부터 강남공원으로 가서 과자를 일동에게 분배하여 유희를 하고 동 5시경 무사히 철수,해산하였다.」 요컨대 조선인 길림소년회란 28∼29년은 정의부,29∼30년은 국민부에 속하는 소년단체였다.김일성은 이러한 소년회에 28년 무렵에 들어가 29년경에 회장으로 되었다.그리고 만약 길림소년회가 27년에도 있었다면 그가 이해 8월경에 입회하더라도 그것 자체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소년회가 「27년 4월 그가 결성한」조직일 수는 없다. ▷주해◁ ①「세기와 더불어 1」208면 이하 ②같은 책 238∼9면 ③평전 113면 ④평전 1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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