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중국 민족주의
    2025-12-1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129
  • 가고 온 사람들(두만강 7백리:5)

    ◎광복­6·25이후­문혁때 귀향 줄이어/60년대말까지 쉽게 도강… 65% 다시 연변에/“지금은 갈수 없는 땅”강 건너 바라보며 눈물 ○보따리 이고 강 건너 끼룩 끼룩 끼루룩…. 한떼의 기러기가 일찍 얼음이 녹은 강 한구석을 박차고 북한땅을 멀리 돌아 날아간다.걸음을 멈추고 강 건너 마을을 바라보았다.한낱 짐승들도 자유로이 넘나드는 강.그렇지 못한 우리에게 두만강은 늘 한을 던져준다. 「기러기 갈 때마다 일러야 보내며/꿈길에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이 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 옛날 선조들이 불렀다는 「월강곡」을 되뇌어 보았다.나라의 독립을 위해 개척민에 뽑혀 산길을 찾아 나선 선조들은 밀물처럼 강을 건너왔다.그리고 또 광복 후 이주 당사자들과 후손들은 고국이 그리워 피땀으로 일군 삶의 터전을 버리고 다시 강을 되건너 썰물같이 대거 고국으로 돌아갔다. 첫번째 귀향은 광복 당시였다.일제의 말발굽에 짓밟혔던 나라가 독립을 맞자 조선족들은 보따리를 싸지고 두만강을 건넜다.당시 귀향민들은 두가지 부류다.대부분의 사람들은조상들이 묻힌 땅을 찾아 귀향했다.어떤 사람들은 북한의 고향을 찾았지만 살수가 없어 이남으로 곧장 월남했다.광복이 되자 연변과 북한의 공산당 정부는 일제주구 청산부터 시작했다.훈춘의 대지주이고 대동아전쟁때 비행기를 헌납하고 동경에 가서 천황의 접견을 받은 한희삼은 물론 다른 지주와 친일파들은 처단 당했다.항일부대 토벌에 공로가 있는 용정의 박도끼는 북한으로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청진에서 잡혀 총살당했다고 한다. 화룡현 신선대 대장 김일로는 일제가 연길공원에 동상까지 만들어 세웠던 김동환 다음으로 가는 주구였다.1940년 3월25일 일본인 산림경찰대장과 함께 자기의 병졸들을 휘몰아 독립군을 추격하다가 홍기하에서 매복습격을 받아 1백20여명의 졸개를 잃었다.김일로도 졸개들을 호령하다가 벌린 입으로 탄알이 꿰뚫고 지나갔지만 요행히 목숨은 건졌다.이남으로 건너간 그는 여생을 편히 보내다가 수원에서 일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진다. 두번째 대 귀향은 1956년부터 1962년까지였다.한국전쟁(6·25)이후의 일인데 전후복구 지원을 위해 많은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들어갔던 것이다.화룡시 용화향 상화촌에서만도 49호가 나갔다.그리고 인민공사가 시작되면서 굶어 죽게 되자 다시 살길을 찾아 북으로 건너갔다.용정시 삼합진 북흥촌의 최태경 일가는 19 62년에 함경북도 연사군으로 이사했다.최씨의 막내 딸 최해옥은 연사에서 소학교를 다니던 중 5학년 때 평양으로 뽑혀갔는데 현재 유명한 영화배우로서 「꽃파는 처녀」에서 주인공 꽃분이 역을 맡고 있다고 한다. 인재들이 많이 갔다.중국에서의 반우파투쟁이 지식인들을 잡는 운동이나 다름이 없고 민족심을 가진 사람들은 반동적 민족주의자로 되는 판국이라 떠나들 갔다.유명한 시인 주선우,작곡가 정진옥,소설가 김동구,아동문학가 채택룡 등 문학예술계 인사들도 떠나갔다.용정시 삼합향 승적 신재룡은 길림성 공업학원 학생이고 축구를 잘 했다.지금 그는 조선체육대 교수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건너왔다 도로 가고 용정시 삼합향 북흥촌 이기희(54)는 연변대학을 다니다가 2학년 때인 1961년 7월 북한에 들어가 만 6년을 살고 다시 돌아왔다.그의 말을 들어보면 북한에 살다가 다시 연변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많다. 『당시 회령의 사탕공장건설은 연변에서 건너간 귀향민이 대부분이였댔습니다.나는 대학을 다니던 사람이라 공무직장에 배치 받았디요.직장장의 이름을 딴 김희진작업반에 배치합데다.그때 국가 철도상이자 함북도 건설사업소 소장으로 파견나왔던 김주봉이 하루는 우리 공장에 와서 연설을 하면서 「중국에서 하루에 백오십명씩 건너오고 또 매일 백여명씩 되넘어갑니다.조국에 왔으면 참답게 살아야지 이것이 뭡니까」라고 비판을 했디.어떤 날 출근하면 많은 사람이 없어집데다.알아보면 중국으로 돌아간거디요.67년 7월에 나도 가정을 데리고 도강을 했으니 아마 이튿날 내 자리가 비어 야단이었을 것이 뻔합데다.이북으로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중국에서는 호구를 붙여주지 않다가 67년 9월 정부에서 한꺼번에 복적시켰댔시요』 세번째 귀향은 문화대혁명시기이다.용정시 대소과수농장만 해도 항일에 참가했던 사람들 70여명 모두가 귀순 분자로 투쟁을 맞았으니 2백50호 중에 70호가 적이된 셈이었다.그중 10여호가 북한으로 도망갔다.용정시 백금향 백금촌 차덕균은 일제시기 동경대학을 나온 지식인이었다.일본에서 공부한 사실이 간첩조건이 되어 투쟁을 맞았다.모진 매를 견디다 못해 온 가족이 북한으로 갔는데 떠나던 날 큰 딸이 친척 집에 가고 없어서 두고 간것이 생이별이 되었다. 용정시 개산툰진 선구촌 사이섬에서 총 사격을 받고 수백명이 종성으로 집체도주 한 일이 대표적 사건이다.선구촌 문영기(54)씨도 그 사건에 끼었던 한사람이다.캉다(강대)요 홍색이요 하는 조직간에 말로하던 시비질이 주먹질,돌팔매질,몽둥이 싸움으로 번졌다. ○“북에 남아라”만류도 1967년7월29일 연길 캉다에서 개산툰에 와 개산툰 캉다와 합세하여 홍색을 쳤다.싸움은 공장울안에서 일어났는데 쌍방은 돌멩이를 던지고 창으로 찔렀다.홍색에서는 열세에 몰리자 해관의 총을 내다 불질을 해댔다.캉다패들은 결국 선구 대안 두만강 복판 사이섬으로 쫓겨나고 말았다.8월2일 홍색은 사이섬을 포위하고 투항하라고 공포를 놓았는데 총소리를 들은 북한땅 종성 사람들이 강변으로 나와 어서 건너오라고 소리를 쳤다.3백여명이 모조리 강을 건너갔으나 여자 하나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북한에서는 대우를 제법 해주었다.그러면서 돌아가면 잘못 된다고 북한에 남으라는 선전을 했지만 몇사람 이외에 모두가 두달 후 되돌아왔다.주모자들은 감옥에 들어가 1년씩 구류를 사는 것으로 그쳤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이 이루어지면서 당시의 일들이 억울한 것으로 판명되었다.그때 북한으로 건너가 거주하는 사람들이 중국에 와서 손해배상을 받아갔다.용정시 삼합진 승지촌 김광진은 지방 자위단에 있었다는 죄로 투쟁을 당하다 죽었다.그래서 온 가정이 야간 도주하여 회령으로 건너갔다가 지난 92년에 아들 김상연이 와서 용정시 민정국에 상소,3만원(인민폐)을 보상받았다고 한다. 현재 화룡시 덕화진 남평촌의 내 숙부(유인상·77)는 낮이면 두만강가에 나가 건너 쪽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을 지으시기 일쑤다.내 고모가 60년도에 조선 청진으로 간 이후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다.조카들은 60년대 초에 다녀갔고 몇해전까지는 편지라도 오갔는데 벌써 5년째 소식조차 모르고 있다.앞길이 멀지 않은 숙부는 생전에 단 한번이라도 만나보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다.부친(유민상·84년 별세)께서도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을 말끝마다 외우시다가 한많은 세상을 뜨셨다.
  • 주변아시아국 해군 게속 증강/분쟁 대비 기동함대 확보해야

    해군은 최근 중국 등 아시아각국이 해군력을 대폭 증가,우리나라 수출입물량의 99.9%가 오가는 해상수송로의 확보와 아시아 지역의 해양분쟁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대양해군의 건설이 시급하다고 6일 밝혔다. 해군은 이날 60쪽 분량의 「21세기를 향한 해군」이라는 홍보책자를 발간,『아시아 각국은 민족주의적 국익우선정책과 해양주권수호를 위해 경제력을 바탕으로 잠수함·구축함·항공모함 등 해군력을 증강시키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우리해군력의 증강 필요성을 주장했다. 해군은 대양해군건설을 위해 ▲유도탄방어 이지스급(8천t급) 구축함 ▲함재기 탑재 다목적 전투함 ▲장기수중작전용 중형잠수함 ▲전략상륙함 ▲해상작전지원을 위한 함재기등으로 구성된 입체작전용 기동함대를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미­중 지재권 “마지막 협상”/전문가들 비관·낙관 엇갈려

    ◎오늘부터 이틀간/캔터 “중,유연한 반응 보일것” 【북경 AFP 연합】 지적재산권문제를 둘러싼 분쟁으로 무역전쟁의 위기에 몰려 있는 중국과 미국은 분석가들의 조심스런 낙관적 전망 속에 14일부터 무역전쟁을 피하기 위한 마지막 절충에 들어간다. 13일 북경에 도착하는 미국협상팀은 미국의 중국상품에 대한 1백% 보복관세 부과 실시 예정일을 불과 12일 앞둔 14일 열리는 중국측과의 예비회담과 15일 본회담에서 무역전쟁을 피하기 위한 막바지 절충을 기울일 예정이다. 미국측의 요구에 대한 중국의 민족주의적 태도 표명이나 서로 상대방에게 양보를 요구하고 있는 경직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현지 외교관들과 사업가들은 회담의 재개 자체가 양측 모두 무역전쟁을 원치 않고 있다는 표시라고 분석하면서 회담타결에 대해 조심스럽게 낙관론을 펼치고 있다. 서방의 한 외교관은 『중,미 양국은 당장의 피해보다는 상호무역관계에 미칠 영향에 더 큰 관심을 쏟고 있는 것같다』면서 『양국이 이번 회담에서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한다』고 말했다. 서방의 한 소프트웨어 제조업자도 『양쪽 모두 무역전쟁에 휘말려드는 것을 원치않고 있다』면서 『중국도 높은 이윤을 안겨주고 있는 미국시장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키 캔터 미무역대표부 대표도 『중외무부가 이번 분쟁에 대한 책임을 미국측에 떠넘기려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중국이 이번 협상에서 유연한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징후들이 포착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회담의 재개가 파국을 향한 전주곡이 될 수도 있다는 비관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는 분석가들도 있다. 이번 협상에 정통한 한 분석가는 『회담의 재개가 합의점의 도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의 서곡」이 될 수도 있다』면서 『이번 양국 무역분쟁이 원만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 미­중 무역분쟁/배경과 전망

    ◎양국 입장과 영향/총교역액의 2%… 효과보다 “힘겨루기”/중,신용실추… 투자유치 차질을 더걱정 미국이 4일 중국에 대해 무역 보복조치를 발표하고 중국도 즉각 역보복조치를 천명한 가운데 이달중 양국이 무역전쟁에 본격 돌입할 경우 중국은 최대 수출시장의 일부를 잃게 될 뿐아니라 신용마저 떨어져 외국 투자유치에 상당한 지장이 있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이 저작권·특허권·상표권등 지적재산권 보호를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있지않다는 이유로 연간 10억8천만달러 상당의 중국산 수입상품에 대해 26일부터 1백% 보복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중국도 즉시 미국에 대해 이에 상응하는 보복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세계 최대 무역파트너인 양국간에 무역전쟁을 피하기 위해 협상을 할 시간은 아직 남아있으나 중국의 통상 관리들은 5일 미국의 추가협상 제안을 수락할지의 여부를 밝히지 않았다. 사실 미국의 보복조치는 양국간 전체 교역량의 일부에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지난해 양국간 무역규모는 미국측 추산에 따르면 4백50억달러에 달했으며,중국의 지난해 총 수출량 1천2백40억달러중 문제가 되는 것은 1%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부 중국및 미국 업체들이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되나 경제에 미치는 전반적인 효과는 비교적 적을 것이며,비록 미국이 중국의 최대 수출시장이라 하더라도 이번 제재조치가 중국에 대규모 실업사태를 초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워싱턴대 중국경제전문가 니콜라스 라디가 전망했다. 미국의 이번 조치로 인해 저작권을 비롯한 지적재산권 보호를 위한 기존의 협정을 중국이 지켜나갈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중국은 지난 92년 미국과 지적재산권 보호에 관한 양해각서를 교환한 바 있다.이 협정에 따르면 중국이 이를 준수하지 않을 경우 업체들은 중국과의 계약에 대해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되어있다. 미국은 또한 연간 7천5백만장의 해적판 콤팩트 디스크를 생산해내는 29개 중국공장을 폐쇄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이를 위해 중국정부는 먼저 이들 공장을 승인한 지방정부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들 공장들은 로열티를 한푼도 지급하지 않고있고 단지 생산비용만 부담하고있어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중국은 새로운 지적재산권법을 시행하는데 상당한 진전을 보고있는 마당에 미국관리들이 무리한 요구를 하고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중국 외교부는 5일 성명을 통해 『중국이 지적재산권보호를 위해 법률을 제정하고 이를 시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제재조치는 중국산 플라스틱제품·무선전화기·자동응답기·스포츠제품및 자전거등이 주로 해당된다. 또한 이들 제품이 주로 홍콩,대만,싱가포르등 외국 투자자들이 설립한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이번 조치는 이들에게도 타격을 주게된다. 홍콩정청은 이번 조치가 시행될 경우 올해 홍콩 경제성장이 0.1%포인트 하락하며,3천8백명의 실업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중국은 지금까지 외국인 투자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전망을 회피하고 있다. 중국의 관영 언론들은 5일 미국의 이번 조치가 양국관계를 손상시킬 것이라고말한것 외에는 예상되는 무역전쟁의 영향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있다. 이날 오의 중국 대외무역경제합작부장은 홍콩 기자들에게 중국의 시장이 이미 다양화 되어있기 때문에 미국이 보복조치를 취한다 해도 『큰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현재 중국은 총수출품의 약 3분의 1을 미국에 수출하고 있다. 오부장은 높은 관세로 일부 중국제품의 가격이 높아져 미국에서 팔수 없게 되더라도 다른 국가들이 이 기회를 이용,중국과의 무역을 확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등이후」 미·중관계/개혁파 기반 취약… 군·보수파 득세할듯/인권·대만·무기수출 등 갈등확산 소지 미국과 중국간의 지적재산권문제를 둘러싸고 무역전쟁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향후 양국관계는 중국의 권력이양시기로 인해 무역 뿐만 아니라 인권,대만 문제할 것없이 전분야에 걸쳐 악화될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5일 워싱턴 포스트지가 미행정부의 중국관계전문가들과 정보분석가들을 집중 취재하여 종합한 바에 따르면 이번 무역전쟁의위기도 그 배경에는 중국의 국내정치권력의 대변화를 바탕에 깔고있다는 것이다. 중국이 미국의 보복조치가 발표된지 불과 1시간 만에 역보복조치를 발표한것은 「신중하고 까다로우며 등소평 보다 미국의 압력에 둔감한」지도자들이 지금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데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등소평의 건강악화 이후 사실상 거대한 중국을 이끌고 있는 새 지도자그룹들은 미국에 대해 비타협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을 띠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미행정부는 더 이상 등소평이 이미 중국의 정책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맡지않고 있으며 강택민주석이 이끄는 전문기술관료와 군부지도자들에게 권력이 넘어가 있는 것으로 보고있다.특히 강주석은 등에 비해 권력기반이 약하고 답답해 타협을 통해 현안을 해결할 능력이 부족하고 이로 인해 민족주의자나 보수주의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등소평 이후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들은 정치개혁은 후퇴하고 오히려 인권탄압을 계속할 가능성이 많고 자칫 사태가 악화되면 가혹한 정치적탄압이나 대만에 대한 새로운 군사적 위협,또는 이란이나 파키스탄에 미사일을 수출하는 등 미국과 더욱 대결적인 자세를 취할 가능성도 없지않다. 등소평 이후 불확실성을 더해주는 것은 강택민이 얼마나 권좌에 남을수 있으며 그 이후에 권력을 계승할 지도자가 과연 어떤 정부를 탄생시킬 것인가에 따라 중국이 미국에 평화적인 세력이 될 것인지 아니면 전략적인 적이 될 것인지가 결정될 것이라는 점이다. 중국전문가들로 구성된 미국방부의 한 위원회는 작년말 중국의 후계구도와 그 전망에 관한 분석을 했는데 급진개혁파가 집권하여 미국에 우호적인 강대국으로 출현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반면 13명의 전문가중 3분의 1은 비교적 안정된 집단지도체제의 구축으로 지금과 같은 개혁과 군사력을 점진적으로 증강하되 대만이 독립을 선언하지못하도록 군사적 간섭을 하고 남사군도의 유전지대에 대한 영유권 관철을 위해 전쟁불사의 강경책도 구사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절반 이상은 호전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하는 권위주의적인 강자의 출현으로 내부마찰이 증대되거나 아니면 연안지방과 내륙지방간의 경제격차로 중국이 결국 분열될 것으로 전망했다. 등이후나 또는 강이후에 누가 권력을 잡든 군부의 영향력은 증대될 것이며 이같은 조짐은 이미 해군총장 류훠킹이나 인민해방군의 사실상의 총수라 할수 있는 양상곤과 같은 극보수주의자의 영향력에서도 알수 있다. 이같은 사실에 비추어 등의 후계자는 군의 지지확보를 위해 군의 영향력을 수용할수 밖에 없을 것이며 전통적으로 강한 반서방적 시각을 갖고있는 중국군부의 기류가 결국 앞으로의 미국과의 관계에도 상당한 파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87년 미·일 반도체분쟁/일서 굴복… “짭짤한 재미”/미의 무역보복 전례 미국은 과거 「신앙」처럼 떠받들고 있는 불공정성이 침해받고 있다는 판단이 서면 이의 시정을 위해 보복관세등의 무역보복 조치를 취해왔다.특히 불공정한 무역관행이 미국의 대외 무역역조의 주범이라는 확신이 설 경우 이같은 보복조치는 목적달성을 위해 가장 애용됐던 수단이었다. 미국은 지난 87년에도 일본에 대해 3억달러 규모의 무역보복조치를 내려 톡톡히 재미를 봤다.86년 7월말 양국간에 체결된 반도체협정을 일본이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데 따른 보복조치였다.당시 미정부와 업계는 일제 반도체의 수출가격 덤핑중단 조치와 일시장내 미업체 점유율을 5년내 9%에서 20% 수준으로 확대하겠다는 일본측의 약속이 이행되지 않을 경우 보복조치가 따를 것임을 분명히 했었다. 미국은 일본이 성의를 보이지 않자 이듬해 4월 ▲컬러TV ▲회전용 천공기구 ▲동력공구 ▲탁상용계산기 ▲자동정보처리기구등에 1백%의 관세를 물리기로 공식발표했다.물론 미정부는 일본측이 확실한 무역역조 개선조치를 취하면 이같은 보복조치는 즉각 해제된다는 점을 빠뜨리지 않았다.일본에서는 무역전쟁 불사의 강공기류도 흘렀지만 일본은 부랴부랴 슈퍼컴퓨터등 10억달러어치의 미국산 제품을 긴급구매하는등 미국을 달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결국 일본시장의 미 반도체 점유율은 미국이 목표했던 수준에 도달했고 작년에는 세계반도체 시장에서 처음으로 일본을 근소한 차이로 따돌리는데 성공했다. 당시 미국의 이같은 협박이 먹혀들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대일무역 역조가 섬유를 제외할 경우 총 무역적자의 47%인 데다 일본은 총무역 흑자의 86%를 의존하고 있어 일경제가 미국의 볼모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이번에 중국에 대해 강공을 가하는 것도 중국과 미국의 무역액이 지난해 11월 기준으로 약 4백50억달러에 이르고 중국의 대미 무역흑자가 무려 3백억달러를 넘어 중국은 미국없이는 「성장」을 생각할 수 없다는 미측의 계산이 깔려 있다. 결국 중국은 미국과의 타협을 통해 실리 쪽을 선택할 것이다.10억달러를 챙기려고 몇십배의 중요한 시장을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 해방정국의 혼란(새로쓰는 한국현대사:6)

    ◎송진우,「건준」 맞서 「국민대회준비위」결성/여운형 내세운 우익의 「합작」노선 반대/“「임정」지지”표방… 고하 피살로 좌익 타격/하지, “「인공」은 소련과 밀접한 관계… 활동 중지”명령 1945년 해방정국은 아주 혼란스럽게 저물어갔다.당시 사회상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있다면 미 국무성이 J R 하지 중장에게 파견한 정치고문 H M 베닝호프의 보고서일 것이다.미군이 진주한 이후 9월15일에 작성한 이 보고서는 「조금만 불똥이 튀어도 폭발할 화약통,그것이 남한의 상황」이라고 기술했다. 그의 말대로 남한은 과연 화약통이었을까.어쨌든 1945년이 세밑에 다가선 12월30일 상오6시 송진우를 저격한 서울 원서동 76의 총성을 시발로 정치테러가 잇따랐다.뒷날 여운형·장덕수·김구로 이어진 암살사건은 해방정국의 혼란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송진우는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하자 이에 맞섰다.그래서 건준이 인공을 선포한 다음날인 9월7일 우익지도자 3백80명과 함께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아직 중국 중칭(중경)에서 돌아오지 못한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를 지지하고,국민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모임이었다.송진우의 죽음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다만 건국대회준비위원회는 9월16일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 해방정국의 판도를 선점한 인공의 실체를 먼저 딛고 넘어가는 것이 당시 사회상을 돌아보는 수순이 될 것이다.인공이 병아리라면 달걀 격이기도 한 건준은 194508월15일 발족되었다.여운형은 8월14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으로부터 일본 패전소식을 들은데 이어 다음날 15일 아침에는 정무총감 엔도(원등륭작)의 방문을 받는다.행정권을 이양할 테니 맡아달라는 부탁을 해온 것이다.이를 수락한 여운형은 그날밤 자신을 위원장으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부위원장은 안재홍이 맡았다.이와 더불어 5개의 부서를 두고 2천여명의 청년·학생으로 건국치안대도 조직되었다. 건준에 송진우·장덕수등은 불참했으나 안재홍·김병로·이인등 우익및 중간노선의 인물과 박헌영계열의 좌익세력,정백 중심의 장안파 공산당계열이 들어왔다.말하자면 좌우합작성격을 띤 건준은 지방조직도 확대,8월말까지 1백45개의 지부조직이 이루어질 정도였다.그러나 건준은 건국에 실패하고 말았다.좌익계열이 재빨리 조직을 확대,건준을 장악하고 미군이 진주하기 이틀전인 9월20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한 것이다.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이후 9월12일 하지장군이 시공관에서 정치인들과의 대화를 모색할 때 33개 정당대표가 등록한 것으로 되어 있다.이렇듯 복잡다단한 정치상황은 하지의 정치고문 베닝호프가 9월15일 미 국무성에 보낸 보고서에 나타난다.그는 9월말에 가서 이들 정당을 두 집단으로 분류했는데,민주적 보수집단과 급진 또는 공산주의가 그것이다.특히 미군정은 급진주의 주요세력으로 인민공화국을 주목했다. 그래서 미군정은 인민공화국을 도전세력으로 간주하게 되었다.이는 공식명칭에 국가를 상징하는 「국」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유일한 정부를 표방했기 때문이다.더구나 인공은 1946년3월1일 총선거 실시를 골자로 하는 특별조치까지 마련해놓은 상태였다.이에 대해 군정장관 아놀드는 10월10일 한국언론과의 기자회견에서 『군정이 남한의 유일한 정부』라고 못박고 『군정은 다른 형태의 모든 정부를 통제할 권한을 갖는다』고 선언했다. 인공은 이에 맞서 11월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에서도 공화국명칭을 여전히 사용했다.하지는 맥아더에게 보낸 보고서(미 외교문서시리즈 제6·1945년)에서 「인공은 가장 강력한 공산주의 지지세력이고 소련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전했다.그리고 골수 공산주의자가 아닌 상당수의 좌익세력이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였다.인공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 옳겠다고 판단한 하지는 맥아더에게 이 대목에 대한 평가도 구했다. 맥아더로부터 「어떠한 결졍을 내려도 지지할 것」이라는 회신이 돌아왔다.하지는 마침내 인공에 대한 활동중지명령을 내린다.이에따라 주한미군 방첩대(CIC)는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간판을 떼어버렸다.이렇듯 인공은 미군정 아래서 좌익세력규합 이외에 다른 의미를 거두지 못한 채 사실상 종말을 고한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인공중앙인민위간판이 내려지기 얼마 전에 귀국했다.이승만은 10월16일,김구는 11월23일에 각각 돌아왔다.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귀환문제,특히 이승만문제는 워싱턴·토쿄(맥아더사령부)·서울(미군정) 사이에 사전조율되었다(미 육군작전국문서 한국편 1945년10월).하지는 한국인의 정서를 고려,이승만·김구·김규식의 귀환을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미 국무성은 중국 중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망명지로부터 귀환이 허가되었음을 통보하면서 어디까지나 개인자격 귀환임을 강조했다.여기에는 이승만도 포함되었다.미 국무성은 귀환자들에게 「38도선 이남지역에 머무는 동안 군정당국의 법과 규칙을 준수한다」는 서약서를 받도록 하는 조치도 잊지 않았다.이승만은 귀국 2주만에 반소(반소)논쟁을 벌였다.이에 국무성은 서약을 유의토록 환기시키면서 곧 소련과 가질 교섭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반응을 즉각 보였다. 국제간에 이해가 엇갈린 정치전략은 변화무상한 것인가.철저한 반공주의자에다 항일운동가라는 점을 들어 서둘러 귀국시킨 미국이 이승만에게첫 제동을 건 것이다.김구 역시 이승만과 같은 이유로 여의도 군용비행장을 거쳐 조국땅을 밟았으나 그다음 12월2일 군산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은 고국의 산하조차 바라보지 못하는 미군 장갑차에 실려 서울에 왔다.이승만과 김구의 환국은 다른 정치판도의 변화를 예고하는 서막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이승만의 존재는 하지로 하여금 각양각색의 정치단체통합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겨주었다.당시 이승만의 명성은 대단해서 모든 정당이 거의 다 의장직 수락을 제의해올 정도였으니까….이승만은 귀국한 지 1주일도 안되는 10월23일까지 50여개 단체대표를 만났다.그 결과는 독립촉성중앙회 결성으로 나타났다.그러나 인공과 공산주의자들이 등을 돌려 좌우익 골은 더욱 깊어갔다. 한편 38도선 이북 소련군 점령지역 평양에서는 9월3일 국내파 공산주의 중심인물의 하나인 현준혁이 암살되는 것으로 정치투쟁조짐을 드러내고 있었다.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위원장 조만식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그의 죽음은 한반도 해방정국의 암살1호로 기록된다. 이에 앞서 소련군사령관 치스차코프의 명령에 의해 10월8∼10일 평양에서 북조선 5도대회가 열린데 이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립(10월13일)되었다.그리고 김일성이 모습을 드러낸 평양시민대회(10월14일)가 열렸고,들러리정당 조선민주당이 창당되는등 소련의 의도대로 착착 돌아갔다. 역사에는 결코 가정이 없다고 한다.하지만 이런 명제를 무시하고 남북한의 많은 세력이 구심점을 갖추었거나 연합전선을 폈더라면 외세에 의한 분단이 없었을지도 모른다.해방정국은 건국의 옷을 입기는커녕 첫단추부터 잘못 끼우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뒤 「첫 정치희생자」는 현준혁/「사회장사진」국내 첫 발굴/「송진우 저격」 3개월여전 평양서 적위대에 피살/「9월3일 암살」 묘비서 확인… 「소관련」시사 논문도 우리는 해방정국에서 암살1호하면 45년 12월30일에 숨진 송진우를 흔히 떠올린다.그러나 사실상의 첫 희생자가 이보다 3개월이나 앞서 9월3일 평양에서 소련 민정당국과 결탁한 반대파에 암살된 공산주의자 현준혁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흔치않다. 그는 1906년 평남 개천의 소지주 집안출신으로 경성제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서 교수를 지낸 인물.8·15해방을 서울에서 맞아 장안파공산당의 평안남도 책임자로 임명됐다.그달 18일 평양에 도착한 직후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와 적위대를 조직했다.소련군이 진주한 무렵 다른 공산주의 세력을 압도하고 8월27일 조직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될 정도였다. 당시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남의 공산주의 세력은 소련파·화요파·적색노조파등이 복잡하게 얽힌 형국.소련에 대해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곤 하던 그는 소군정과 관계가 좋지 못했고 이를 빌미로 반현준혁파들은 그를 반소분자나 부르주아로 몰아세웠다. 그가 심하게 마찰을 빚었던 상대는 평양 보안서장을 거쳐 평양시 적위대장에 임명된 송창겸과 일제때 포목조합 이사장을 지낸 장시우등 소련파.김일성 영입 계획을 추진하던 소련 민정당국은 결국 송창겸과 장시우등 친소적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현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9월3일하오1시 소련 민정사령부서 회의를 마치고 소련제 스리쿼터를 타고 돌아가다 적위대 복장의 괴한에게 총을 맞고 숨졌다. 그의 죽음에 대해 일본 도쿄대 와다 하루키(화전춘수)교수는 자신의 논문 「소련의 대북한 정책」에서 「암살범이 누구이든 현준혁의 죽음은 소련측으로는 좋은 일이었던 것 같다」고 기술했다. 현준혁의 암살날짜가 지금까지는 9월28일로 알려졌으나 최근 하와이대 서대숙교수가 평양에서 촬영한 묘비 기록을 통해 9월3일로 확인되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소련당국이 의도적으로 현준혁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러준 당시의 사진도 긴급 입수했다. 이날 암살에 대한 또 다른 설은 당시 민족주의 진영의 거목인 조만식 휘하의 반공주의자들의 거사란 주장도 있다.그러나 현준혁은 당시 조만식을 신뢰하는 사이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는 반론이다.
  • 중국/등 사후 집단지도체제 가능성/미 국방부 「단기적 장례」보고서

    ◎2년내 분열 50%·현상유지 30%/완전붕괴 되면 북한 체제도 위험 중국은 등소평 사후 분열될 가능성이 있으며 중국의 분열은 북한의 장래에도 큰 영향이 미칠 것이라고 미 국방부보고서가 내다봤다. 미 국방부가 국방부·의회·학계·금융및 산업계 인사 17명에게 위촉·작성해 지난 24일 공개된 등 사후 중국의 장래에 관한 보고서 「단기적으로 본 중국」는 등 사후 중국에 집단지도체제가 들어서고 경제개혁과 제한적 정치자유화를 강조해온 등의 기본노선도 큰 변화없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 군부도 기득권 유지를 위해 과도기의 집단지도체제를 선호할 것이라고 내다본 보고서는 그러나 이같은 과도체제가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보여 미국의 이해와 상충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등 사후 2년 사이 중국이 ▲기존노선을 유지하거나 ▲보다 적극적인 자유화 개혁을 추구하든지 ▲옛 소련과 유사하게 분열되는 3개 시나리오가 가능하다면서 이중 분열 확률이 50%로 가장 높고 기존노선 유지는 30%,자유화 개혁 쪽은 20%의 확률 밖에없는 것으로 진단됐다. 보고서는 중국이 갈라지면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비공산 인사가 막강한 배경을 안고 전면에 나서거나 ▲지역 분권화 또는 ▲완전한 붕괴중 하나가 실현될 것으로 내다봤다. 비공산 인사가 부상하면 군부의 입김이 더욱 강해져 중국군의 현대화가 촉진될 것으로 전망됐다.보고서는 이와 관련해 중국군의 ▲예산 대폭 증액 ▲해군 대양 진출 본격화 ▲해·공군 기동력 강화 ▲핵무기 개발및 ▲지상병력 증강이 추구될 것으로 덧붙였다.중국은 이 경우 한반도에 대한 전략으로 북한을 지지하고 주한미군의 철수도 요구할 것으로 관측됐다. 보고서는 중국에서 지역 분권화가 이뤄지면 옛 소련과 비슷한 『느슨한 연방』이 나타날 수 있다면서 그렇게 되면 지역별로 새로운 통화가 나오고 토호 세력과 연계된 신흥 지배층이 형성될 것으로 분석했다.이때의 한반도에 대한 정책은 「불개입」이란 기조로 이뤄질 것이라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보고서는 중국의 완전붕괴가 최악의 시나리오라면서 중국이 붕괴되면 극도의 혼란 속에 대규모 난민이발생하고 「북한도 무너지는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보고서는 미국이 등 사후 중국의 장래와 관련해 ▲미·일 안보조약을 유지하는 등 기본 대 아시아 전진 배치 전략을 고수하고 ▲내정 간섭을 피하면서 중국과 경제·안보 협력을 활성화하는 한편 ▲대만의 독립과 이 나라에 대한 미제무기 판매 문제를 둘러싼 워싱턴의 방침을 보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 총리실,김진현 세계화위장·김윤형 교수 초청 특강

    ◎“세계화는 새역사 창조위한 과제”/“내부갈등 줄이고 대외경쟁력 키워/경제적 민족주의·세계주의 조화를” 국무총리실은 24일 김진현 세계화추진위원장과 하와이대에서 2년동안 세계화에 관해 연구한 외국어대의 김육형 국제경제학과교수를 초청,각 부처 파견 직원등 모두 2백92명의 직원들에게 세계화를 추진하기 위한 특별교육을 했다. 이홍구 총리는 인사말을 통해 『세계화 추진과제는 각 부처의 업무를 총괄해 유기적 정책으로 만드는 총리실의 업무에 주어진 동력이며 세계화추진위원회의 결정을 구체적 전략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바로 총리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고 『총리실은 세계화의 중추신경』이라고 강조했다.강연 요지는 다음과 같다. ▲김진현 위원장=우리나라에서 민족주의를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역으로 세계화가 필요하다.세계화란 우리 국민들이 정치·경제·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독립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세계화는 우리에게 있어 새로운 역사창조의 과제이자 문명사 창조의 과제다.따라서 우리는 세계화 전략을 민족공동체의 수단으로서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김육형 교수=우리도 이제는 세계적 대기업을 육성해야 한다.그리고 새로운 국제경제질서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물론 질서 형성에 능동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내의 구심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우리사회의 내부 갈등을 극소화하고 대외 경쟁력을 극대화 해야 한다.특히 일본 중국 러시아등 동북아는 물론 우리와 같은 한자문화권인 베트남까지 포함하는 경제권의 구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경제적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물결을 어떻게 적절하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 「일본개조론」의 표와 이(일본 「21세기 야망」:2)

    ◎「보통국가」 내세운 군사대국화 집념/“군 없는 경제력은 허상” 자위대 위헌론 종식/“「평화헌법의 구속」 벗어나자” 민족주의 대두/“힘 있을때 밝으로 뻗어야”… 섬나라 본색 드러내 일본의 21세기 구상.대학에서 첨단 과학·기술연구소에서, 정치판에서 열띤 논쟁으로 때로는 은밀한 전략으로 논의되고 있는 21세기 일본개조론.일본은 21세기를 앉아서 기다리지 않는다.경제신화로 세계정상에 올라서며 민족주의적 주체성과 자신감을 되찾은 새로운 일본은 21세기로 다가가 이를 자신들의 세기로 만들겠다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다. 일본의 이러한 국가개조론은 밖으로는 냉전의 종언이라는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과 안으로는 38년간의 자민당 일당지배가 막을 내린 중대한 정치적 전환기를 맞아 활발해졌다.세계사 변화에 대응,새로운 일본을 만들어야한다는 대합창이다.그 대표적인 일본개조 구상이 주목받는 뉴리더 오자와 이치로 신진당 간사장의 「보통국가론」이다. 『세계의 평화와 안정에 공헌하지 않으면 안될 일본이 안전보장을 국제공헌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안전보장면에서도 오늘의 일본에 어울리는 국제공헌을 할수 있도록 체제를 정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자와가 그의 저서 「일본개조계획」에서 말하는 보통국가론이다.일본도 평화헌법의 구속에서 벗어나 국익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군사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논리다.경제력뿐만이 아니라 군사력도 외교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 변화하는 일본의 실체다. 그러나 국가개조론은 오자와의 전유물만은 아니다.「일본개조계획」은 그의 이름으로 발간됐지만 오자와는 서문에서 각 부문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책이 완성됐음을 밝히고 있다.보통국가는 많은 지식인·전문가들이 그리는 21세기 일본의 새로운 모습인 것이다.「일본개조계획」은 더욱이 정치서적은 팔리지 않는다는 출판계의 불문율을 깨고 베스트셀러가 되어 일반국민들에게도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이 입증되고 있다.일본서점에서는 그밖에도 「책임있는 변혁」,「21세기비전 일본의 개혁」,「하이테크국가 일본의 선택」등 일본의 대변혁을 역설하는 많은 책들이팔려나가고 있다. 일본개조론은 93년8월 자민당정권이 무너지고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의 연립정권이 들어서면서 일본열도의 거대한 흐름으로 나타났다.일본은 마치 국가개조라는 거대한 용광로로 빨려들어가는 듯했다.그러나 지금은 잠시 숨을 돌리고 있다.오자와가 창출해낸 연립정권이 무너지고 지난해 6월 자민·사회당 연립정권이 등장하면서 보통국가를 지향하는 국가개조론은 잠시 잠복하고 있다.평화주의를 강조하는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위원장이 총리가 되고 「작은 일본」을 지향하는 고노 요헤이 자민당총재가 외상을 맡게 되자 일본은 마치 평화주의 유토피아로 회귀하는 듯하다.일본내에는 실제로 자위대가 해외에서 피를 흘리는 것보다는 「1국 평화주의」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게 현실이다. 그러나 무라야마 총리의 등장은 일본내에서 가장 강력한 평화주의 집단인 사회당의 몰락을 역설적으로 예고하고 있다.사회당은 학교에서 국가를 부르거나 국기에 대한 경례조차도 군국주의 망령의 부활이라고 강력히 반대했었다.그러나 무라야마 위원장은 총리가 되자 그토록 반대하던 자위대 존재에 대해서도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사회당은 전후 반세기 동안 맡아온 평화주의 지향의 역사적 임무를 마치고 이제 역사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평화주의는 일본을 약하게 만들었다』 국가개조의 이론 제공자인 지식인들과 변혁의 선두에 선 정치인들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다.그러나 전후 일본의 시대적 흐름이었던 평화주의에도 그 밑바닥에는 민족주의가 면면히 흘러오고 있었다.평화주의와 「군사력 없는 경제발전」 모델은 일본의 궁극적인 국가 목표가 아니라 시대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에 지나지 않았다. 군사력 없는 경제발전 모델을 선택한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그의 저서 「세계와 일본」에서 『당시 일본이 재무장하는 것은 경제적·사회적·사상적으로도 불가능했다.그러나 국가의 안보를 언제까지라도 외국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전후 일본이 경제부흥에 에너지를 집중투자하는 전략을 선택했듯이 전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세계에 퍼져있는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국가전략으로 대전환하고 있다.냉전후 지구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민족분쟁은 일본 안보와 자원 확보및 시장 접근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뉴리더들의 공통된 현실인식이다. 뉴리더들은 그러나 밖으로만 눈을 돌리는 것은 아니다.그들은 내부개혁도 병행하고 있다.자민당 장기집권아래 구축된 관·민협조체제의 이른바 「일본주식회사」의 부정적인 면을 개조하고 있는 것이다.생산자 중심의 관·민협조체제는 냉전시대에는 매우 유효한 냉전대응형 구조였다.그러나 막대한 무역흑자를 가져온 관·민협조체제는 냉전이 끝나고 경제가 세계질서의 중심이 되면서 일본 폐쇄성의 상징으로 미국을 비롯한 무역적자국으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철저한 실용주의자들인 뉴리더들은 미국등과의 더이상의 마찰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 좀더 열린 「일본주식회사」를 지향하는 몸짓을 하고 있다. 일본이 추진하고 있는 내부개혁은 더욱 강력한 세계전략을 위한 준비라 할 수 있다.일본은 힘이 있을 때마다 밖으로 눈을 돌렸음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일본의 외부지향 움직임은 미국이 경제적 자신감 상실로 국내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과 맞물려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일본은 미국과의 전략적 동맹관계를 중시하고 있지만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뉴리더들은 미국을 지원하는 지금까지의 「2차적 역할」에 만족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한 뉴리더들이 그리는 일본 개조의 완결편은 21세기 대국이다.국가개조는 일본이 아직은 강대국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새로운 일본은 급변하는 세계변화에 대응할수 있는 기동력 있는 국가건설를 지향하고 있다.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일본은 21세기 어느때 아시아에서 중국의 가장 중요한 대항세력이 될지 모른다.그때 일본은 오자와가 구상하고 있는 보통국가가 될 것이다』라고 예측한다.일본의 보통국가는 군사대국으로 가는 길이다.
  • 한국의 발전이끈 50인

    1945년 광복 이후 지금까지 50년 동안 어떤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이끌어 왔는가.서울신문이 광복 50년을 이끌어온 각계인사 50인을 선정,소개한다.북한사람과 외국국적을 가진 사람은 선정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승만◁ 1875.3.26∼1965.7.19.황해도 평산출신.배재학당졸업·미국 프린스턴대학 철학박사·초대∼3대 대통령,독립협회등의 간부로 개화운동.일제때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는등 광복때까지 해외에서 독립운동.해방직후 미국에서 귀국해 민주진영 최고지도자로서 건국준비에 매진.48년 제헌의회의 국회의장에 이어 초대 대통령에 당선.장기집권을 위해 불법적 개헌을 감행한끝에 60년 4·19혁명으로 하야 한뒤 하와이로 망명했다. ▷김구◁ 1876.8.29∼1949.6.26.황해도 해주출신.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국무령 주석·한국독립당 집행위원·민주의원 총리·국민의회 부주석.일제때 신민회 황해도총감을 시작으로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친 민족주의자.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의사 등으로 하여금 일본왕등에게 폭탄을 던지게 했다.임시정부 주석으로 광복군을 창설했으며 해방뒤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병로◁ 1887∼1964.전남순창출신.1913년 일본메이지대졸업.일제시절 경성법전·보성전문교수 거쳐 변호사로 활약하면서 광주학생운동,6·10만세운동,원산파업사건 등 민족운동관련사건 무료변론.항일단체인 신간회중앙집행위원장역임.46년 남조선과도정부사법부장을 맡았고 건국후 초대·2대 대법원장을 거치며 우리나라의 사법제도의 기틀을 다졌다. ▷조병옥◁ 1894.3.21∼1960.2.15.충남 천안출신·미국 콜럼비아대 대학원 수료·1929년 광주학생사건으로 3년 복역·조선일보 전무·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복역.해방뒤 우익의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미군정아래서 경무부장을 역임했으나 이승만정권의 독주에 반발,52년 반독재구국선언을 주도.54년 보수야당을 묶은 민주당을 창당,60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입후보했으나 신병으로 선거 한달전에 미국육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신익희◁ 1894.6.9∼1956.5.5.경기도 광주출신.한성공립외국어학교졸·1919년 상해 망명·임정 내무총장·법무총장·48년 초대 국회의원·국회의장·대한국민당 위원장을 역임.54년 자유당정권이 4사5입 개헌등 횡포를 부리자 야당세력을 묶어 민주당을 창당.56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한강 백사장유세에 수십만 인파를 모으는등 지지를 받았으나 이틀뒤 전주유세장으로 가던 야간열차에서 사망했다. ▷최현배◁ 1894.10.19∼1970.3.23.호 외솔.경남 울산출신.일신학교·한성고등학교·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경도제국대학졸업.연희전문 교수·문교부 편수국장·한글학회 이사장·학술원 회원역임.국어학 연구·국어정책의 수립·국어운동 추진에 공헌.「우리말본」으로 20세기 전반의 문법연구를 집대성.한글전용을 주창해 각종 교과서에 한글 가로쓰기 체제를 확립했다. ▷백낙준◁ 1895∼1985.평북 정주출신.22년 미국 파크대졸.27년 연희전문교수.46∼60년 연세대총장을 역임한 것을 비롯,대한소년단총재·문교부장관·국사편찬위원·국토통일자문회의장·외솔회이사장과 학술원 명예회원 역임.교육자로서 후진 양성에 헌신하면서 한국기독교 발전을 위해 「한국개신교사」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유일한◁ 1895∼1971.평양출신.19년 미미시건대 졸업.26년 제약회사인 유한양행 창설.42년 미육군성고문.44년 로스앤젤레스·뉴욕한미상공회의소회장을 역임.해방 이후에는 대한상공회의소회장을 맡아 우리나라의 산업부흥에 기여했다.또 전재산을 털어 한국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한데 이어 유한학원을 설립,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본보기가 됐다. ▷윤보선◁ 1897.8.26∼1990.7.18.충남 아산출신.영국 에딘버러대 졸업.대한임시의정원 의원·대한적십자사 총재·제4대 대통령·신민당 총재.이승만대통령 시절 비서실장·서울시장과 상공장관을 지냈으며 「4·19」로 60년 대통령에 취임.그러나 1년만에 「5·16」에 성공한 박정희에 의해 하야당했다.3대국회 이후 야당에 몸담으며 반독재·반군정투쟁을 벌였다. ▷최규남◁ 1898.1.26∼1992.4.27.황해 개성출신.연희전문 수물과·미웨슬리안대·미시건대학원졸.서울대교수·서울대총장·문교부장관·민의원·학술원회원 등 역임.국내 물리학계의태두이자 교육행정가로 큰 업적을 남김.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시건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 취득.서구의 신물리학을 국내에 도입,한국 물리학계의 초석을 다졌고 원자력발전과 과학기술교육의 기초를 다졌다. ▷우장춘◁ 1898.4.8∼1959.8.10.일본 도쿄태생.동경제대 농학과졸(1919).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채소종자의 육종합성에 성공하고 씨없는 수박을 개발하는 등 해방후 국내 농업발전에 기여.대학졸업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서 18년간 근무하면서 육종학연구.36년 종의 합성설로 동경제대에서 박사학위 취득.50년 정부 초청으로 귀국.농업연구소장·학술원회원 등을 역임했다. ▷장면◁ 1899.8.28∼1966.5.14.인천출신.미국 맨해튼 가톨릭대 졸.제헌의원·초대 주미대사·60년 부통령입후보 낙선·60년 4·19로 제2공화국 국무총리·60년 당시 민주당 신파의 영수로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결과로 촉발된 「4·19」로 총리에 취임.그러나 구파출신 윤보선대통령과 권력암투를 벌인데다가 불안정한 정치로 5·16정권에 쫓겨났다. ▷김활란◁ 1899∼1970.인천출신.이화여전·미웨슬리언대학졸.25년 이화여전교수로 임용돼 해방직후부터 61년까지 이화여대총장을 역임.대학을 운영하면서도 한국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회재단이사장·공보처장·대한적십자사부총재 등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개화기와 해방이후 신여성 교육에 헌신하고 기독교를 통한 사회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함석헌◁ 1901.3.13∼1989.2.4.평북 용천출신.동경고등사범졸.28∼38년 오산학교교사.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교육자·종교인·언론인등으로 활발하게 사회참여를 하며 성서와 노장철학을 바탕으로 비폭력 저항운동을 편 사상가.자유당 및 군사정권시대에는 반독재자유민권투쟁에 앞장.「뜻으로 본 한국역사」등 저서와 「씨알의 소리」등을 발간했고 민권운동에도 헌신했다. ▷한경직◁ 1902.12.29.평남 평원출신.숭실대·미국 프린스턴대졸.영락교회 목사·숭실대학장·기독교1백주년 기념사업협의회총재·대한예수교 잘로회 총회장 역임.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한국 개신교 부흥에 불을 당긴 성직자.평생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이나 저금통장 하나없이 청빈한 삶으로 일관하면서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로 활동해왔다. ▷이상백◁ 1904∼1966.서울출신.일본 와세다대학 사회철학과 졸업.서울 대학교 문과대교수(47).한국사회학회장(57).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서울신문사 체육공로상 수상.일제시대에 일본 농구협회를 창립하고 제11회 올림픽 때는 일본선수단 총무로 참가.광복직후 조선체육동지회를 결성해 대한체육회 발족에 디딤돌을 놓았으며 64년 대한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64년 한국의 제2대 IOC위원으로 한국체육의 근대화를 이루었다. ▷유진산◁ 1905.10.18∼1974.4.28.충남금산 출신.보성고보졸.일본와세다대학 정경학부중퇴.만주에서 중경임정 연락원활동.46년 대한청년단 창립·자유당정권의 사사오입개헌파동뒤 민주당 창당에 참여.신파로 출발했으나 뒤에 구파로 변신,민주당 원내총무를 거쳐 분당뒤 신민당 간사장·대표위원을 지내는등 정통야당의 맥을 이었다.너무 타협적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현실을 감안한 정치력의 달인이었다는 평가가 높다. ▷이병철◁ 1910.2.12∼1987.11.19.경남 의령출신.중동 중학 4년 수료.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과 2년 수료.38년 삼성상회 서립.삼성물산·제일제당·제일모직 설립.61년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 전신)초대 회장.삼성그룹의 창업주로 해방 이후 궁핍했던 시절 소비재산업 중심으로 한국 경제를 일으킨 경제계의 선구자다. ▷이범석◁ 1900.10.20∼1972.5.11.서울 출신.운남육군강무학교기병과졸.만주 청산리전투사령관·한국광복군참모장·초대국무총리·주중국대사·원외자유당부당수·내무부장관·참의원·국민의당 최고위원.항일독립투사로서 해방이후에도 활발한 정치활동을 했다.초대 국무총리로서 국방부장관을 겸임하면서 건국과 건군에 큰공.52년에는 이승만대통령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하기도 했다. ▷윤석중◁ 1911.5.25∼.서울 출신.일본 상지대졸.새싹회 회장·난파기념사업회 이사장·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위원장·방송윤리위원회 회장·한국방송협회 회장 역임.예술원회원.일제하 소학교시절 일본말 노래가 싫어 우리말 동요에관심을 가진후 평생을 어린이 운동에 몸바친 아동문학가.「초생달」「굴렁쇠」「바람과 연」등 20여권의 동요·동시·동화집을 냈다. ▷성철스님◁ 1912.4.10∼1993.11.4.속명 이영주.경남 산청출신.진주중학 졸업.35년 지리산 대원사에서 수행.68년 해인사 초대방장,81년 조계종 종정 취임.수행의 깊이와 경전의 섭렵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로 한국 불교계의 정신적 사표가 됨.16년간의 생식과 8년간의 눕지않는 수행자세,「중답게 산다」는 생활철학등으로 원효 이래 한국불교의 최대 거목이라고 칭송받고 있다. ▷김용기◁ 1912∼1988.경기도 양주출신.농촌계몽등을 통한 민족운동을 위해 40년 양주군에 봉안이상촌 건립.52년 광주군에 가나안 농장을 설립한데 이어 62년 가나안농군학교 설립.73년 강원도 원성군에 신림 가나안 농군학교설립,82년 가나안 농군사관학교설립 등을 통해 농촌의 젊은 일꾼을 양성하고 농촌발전에 큰 업적을 세웠다. ▷김동리◁ 1913.11.24∼.경북 경주출신.경신중 중퇴.청년문학가협회회장·예술원회장·한국문인협회 이사장·서라벌예술대학장·국정자문위원 역임.예술원회원.3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화랑의 후예」당선으로 등단.단편소설「무녀도」「바위」「황토기」「밀다원시대」「등신불」과 장편 「사반의 십자가」「을화」등 발표.신·인간·자연을 주제로 삼아 특유의 순수문학 세계를 가꾸어 온 한국문단의 대부(대부)이다. ▷김기창◁ 1914.2.18∼.호 운보·서울출신.1930년 승동보통학교 졸업 및 김은호 문하입문.31∼36년 선전 연입선.37∼40년 선전 연4회 특선.69년 국전 심사위원 부위원장.71년 3·1문화상.예술원 회원.근대 한국화의 추상화작업 선도,전통수묵산수를 뛰어 넘어 특유의 바보산수와 청록산수로 한국화의 새로운 미술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서정주◁ 1915.5.18∼.호 미당.전북 고창 출신.고창 고보 중퇴·중앙불교전문학교 명예졸업.동아일보 사회부장·문교부 예술과 초대과장·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동국대 부교수 역임.대한민국 예술원 회원.「귀촉도」「신라초」등 시집 14권,「서정주 문학전집」「서정주 시선집」등에 시8백수 수록.「동천」을 비롯,수많은 절창을 통해 민족어를 연마하고 민족심성을 계발한 한국 서정시의 대가이다. ▷정주영◁ 1915.11.25∼.강원도 통천 출신.송전소전학교 졸업.현대그룹 회장·명예회장·대한체육회장·전국경제인연합회장·명예회장·국회의원·국민당 대표.47년 맨손으로 출발,기발한 아이디어와 불도저같은 추진력으로 현대를 국내 최대의 기업군으로 키운 「현대신화」의 주역.92년 국민당을 창당,대통령선거에 나섰다 실패하고 그룹경영에서도 손을 뗐다. ▷장기영◁ 1916.5.2∼1977.4.11.서울출신.선린상고졸.한국은행 부총재·한국일보 사장·IOC위원·한국일보 회장·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남북조절위원회 위원장대리·국회의원.금융계 언론계 정계등 여러방면에서 활약,「불도저」로 불리기도 했다.54년 한국일보를 창간했으며 초창기 한국체육을 궤도에 올려 놓았다.경제기획원장관으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고도 경제성장의 기반을 구축했다. ▷박정희◁ 1917.11.14∼1979.10.26.경북 구미 출신.대구사범·육사졸.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제5∼9대 대통령.61년 「5·16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을 종식시키고 군사통치.64년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72년 10월 유신을 거쳐 79년 10·26으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18년동안 장기집권.몇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한국경제의 기적」을 창출하고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했다. ▷정일권◁ 1917.11.21∼1994.1.18.연해주 추풍출신.만주국 군관학교·일본 육사졸업.육군총참모장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육군대장·육군참모총장·국무총리·국회의장·해방직후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경비대가 국군으로 개편된 뒤에는 군요직을 두루 역임했다.박정희대통령 시절 국무총리·국회의장으로 장기재직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얼굴마담」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김소희◁ 1917.12.1∼.본명 김순옥.전북고창출신.전남여고보 2년 수료.송만갑 정정렬 신호렬로부터 창악 가야금 서예 배움.한국국악협회 이사장 역임.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감성에만 치우치지 않는 품위있는 소리로 판소리의 격을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살아있는 최고의 명창.전통 국악의 맥을 오늘에 잇고 많은 해외공연으로 전통예술이 국제적으로평가받는데도 기여했다. ▷김승호◁ 1918.7.13∼1968.12.1.서울출신.보성고등보통학교졸.39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영화배우 생활 시작.59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63년 제10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시집가는 날」「박서방」「역마」「혈맥」등 2백5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중년의 서민적 아버지상을 탁월하게 연기,한국영화 붐을 조성하는데 공헌했다. ▷장준하◁ 1918.8.27∼1975.8.17.평북 의주출신.44년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중국에서 탈영한뒤 광복군에 가담.45년 김구 비서로 귀국.53년 「사상계」창간.67년 국가원수모독죄로 투옥.제7대 국회의원에 옥중당선.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 논조의 「사상계」가 폐간된 뒤 75년 등산중 의문의 실족사.6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막사이사이상(언론부문)을 받았다. ▷김수환◁ 1922.5.8∼.대구출신.일본 상지대 철학과·성신대학 신학부졸.51년 천주교 신부서품,69년 47세로 최연소 추기경에 서임.아시아주교회의 상임위원장·서강대 재단이사장 역임.천주교 서울대교구장·70년대 유신독재체제하에서는 민주화와 인권운동,80년대에는 인간성회복과 제도의 민주화를 외치면서 양심의 대변자 역할을 맡아 명동성당을 「한국민주화의 성지」로 만듦.천주교는 물론 한국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조남철◁ 1923.11.30∼.전북 부안출신.국수 9연패·패왕 4연패·최고위 7연패등 50∼60년대 각종 기전 석권.83년 9단·37년 도일,바둑수업을 받은 뒤 43년 귀국해 걸음마단계의 현대바둑 보급에 힘쓴 한국바둑의 선구자.84년 일본 대창상,89년 은관문화훈장수상.현재 한국기원 명예이사장으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남덕우◁ 1924.10.10∼.경기 광주출신.국민대 정치학과.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경제학박사)졸.서강대 교수·재무장관·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국무총리·무역협회 회장.69년부터 10년간 경제각료로 일하며 부가가치세를 신설하는 등 경제개발정책의 기틀을 다짐.71년의 외환위기와 74년의 오일쇼크를 극복,연10%의 고도성장을 이룬 주역이다. ▷김대중◁ 1925.12.3∼.전남 신안출신.목포상고졸업.6선 의원.신민당 대통령후보.80년 내란혐의로 사형선고.87·92년 야당 대통령후보.아시아 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70년대와 80년대 20년동안 낙선과 투옥을 거듭한 강력한 반정부운동 지도자.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으며 92년 대통령선거에서 패한뒤 정계를 은퇴.아태재단을 통해 평화·통일을 연구하며 「야당의 후견인」역할을 하고 있다. ▷김종필◁ 1926.1·7∼.충남 부여출신.육사 졸.초대 중앙정보부장·6대 국회의원·공화당 의장·국무총리·공화당 총재·민자당 대표최고위원.「5·16」의 막후 실력자로 중앙정보부및 공화당의 산파역할과 한·일 회담의 주역을 맡았다.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에 반대해 공직을 사퇴하고 외유에 나서면서 「자의반·타의반」이란 말을 남겼으며 반대세력에 밀려 실각도 했지만 결국 박정희의 18년 장기집권을 도왔다. ▷김준◁ 1926.4.25∼.전남 영광출신.49년 서울대농대졸.전남대 농대교수를 역임,62년 재건국민운동 경북지부장,64년 농협대교수 등을 맡으며 새마을 운동의 선구자로 활약.입법회의의원·새마을운동중앙본부회장·명예회장 등을 역임.건국이래 최대의 국민운동을 이끌며 「잘살아 보자」는 기치아래 피폐된 농촌 부흥과 사회발전에 기여했다. ▷박경리◁ 1926.10.28∼.경남 충무출신.진주고등여학교 졸.56년 현대문학에 단편 「흑흑백백」이 추천완료돼 등단.작품집 「불신시대」「환상의 시기」,장편 「시장과 전장」「김약국의 딸들」등.69년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한 5부16권의 대하소설 「토지」를 26년만인 지난해 완결.치열한 작가정신으로 격동기 우리민족의 삶을 다양한 인물묘사와 섬세한 필치로 표현한 이 작품으로 한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박태준◁ 1927.9.29∼.경남 양산 출신.일본 와세다대.육사졸.최고회의 비서실장.대한중석 사장.포항제철 사장·회장·명예회장.민정당 대표위원.민자당 최고위원.황량한 모래벌판이었던 포항에 세계 2위의 조강능력을 지닌 포항제철을 건설한 「포철 신화」의 주인공으로 「철의 사나이」로 불린다.민자당의 민정계 관리자로 정계에 나섰다가 실패,포철에서도 손을 뗐다. ▷김영삼◁ 1927.12.20∼.경남 거제출신.서울대 철학과 졸.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뒤 9선·신민당 원내총무·신민당 총재·제14대 대통령.최연소·최다선 의원이며 최연소 제1야당 총재.93년 31년만의 문민 출신 대통령으로 취임.한때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와 정계에 파문을 일으켰고 84년 전두환대통령시절 4주일동안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대통령취임후 특유의 결단력과 정면돌파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전두환◁ 1931.1.18∼.경남 합천출신.육사졸.예비역 육군대장.국보위상임위원장.제12대 대통령.79년 국군 보안사령관으로 「12·12 사태」를 주도.박정희대통령 서거이후 공백상태이던 권력의 중심부를 장악.80년 「5·18」로 권력의 정상으로 등장한 뒤 그해말 대통령에 취임.재임 7년동안 엄격한 물가관리로 경제안정성장 주도.1인당 국민소득 2배이상 상승.평화적 정권교체 실현. ▷김운용◁ 1931.3.19∼.서울출신.미국 텍사스웨스턴대·연세대 정치외교과 졸.미국 메리빌대 법학박사.주미대사관 참사관(63),IOC부위원장·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세계태권도연맹 총재·국제경기연맹 총연합회 회장.국제 스포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세계 스포츠계의 제2인자.태권도를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도록 막후 조정해 한국 스포츠의 이미지를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렸다.현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유력한 후임후보로 꼽히고 있다. ▷노태우◁ 1932.12.4∼.대구출신.육사졸.예비역육군대장.제13대 대통령.「12·12」를 주도.권력핵심부에 진입.제5공화국 때 체육·내무부장관 역임.87년 「6·29선언」으로 민주화의 물줄기를 텄고 그해말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고 「북방외교」로 공산권국가들과 국교수립.지방자치제 일부 실현.90년 여소야대 국면에서 3당통합으로 안정기반 구축. ▷임권택◁ 1936.5.2∼.전남 장성출신.광주 숭일고 중퇴.61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영화감독 데뷔.「만다라」「씨받이」「길소뜸」등 90여편 연출.89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93년 「서편제」로 제1회 상해국제영화제 최우수감독상.94년 「태백산맥」을 베를린 영화제 본선에 진출시킴.우리영화의 세계화와 한국영화 중흥에 크게 공헌했다. ▷김우중◁ 1936.12.19∼.서울출신.연세대졸.축구협회 회장·한국기원총재·대우그룹 회장·전경련 부회장.샐러리맨(한성실업)에서 연간 매출 35조원의 재벌 총수로 성장.기업인의 노벨상인 국제 기업인상(84년)수상.발로 뛰는 비즈니스로 아프리카등 수출 사각지대를 개척.기업 인수와 부실기업 재건의 명수로 알려져 있다. ▷김지하◁ 1941.2.4∼.전남 목포출신.서울대졸.64년 「서울대한일굴욕회담반대투쟁위원회」일원으로 학생운동에 참여.6·3사태 관련 첫구속자가 됨.이후 80년대 초반까지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질곡에 맞서 「오적」「타는 목마름으로」등 문제 시를 잇따라 발표하며 투사 시인으로 활동.최근엔 생명의 본질에 대한 통찰과 함께 생명왜곡 현상을 염려하며 「생명사상」에 몰두하고 있다. ▷이미자◁ 1941.10.30∼.서울출신.문성여고졸.67년 무궁화훈장 받음.대중가수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공연.59년 데뷔이래 1천6백여곡을 부르고 이 가운데 4백여곡을 히트시켜 「엘레지의 여왕」으로불림.왜색시비에도 불구하고 60년대부터 30년 가까이 대중의 정서를 트로트 노래로 대변하며 한국 가요계를 대표해 왔다. ▷김수현◁ 1943.3.10∼.본명 김순옥.충북 청주출신.고려대 국문과졸.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87년∼).67년 라디오 드라마 「저 눈밭에 사슴이」로 데뷔한 이후 「새엄마」「사랑과 야망」「배반의 장미」「사랑이 뭐길래」「작별」등 수많은 TV드라마 집필.솔직담백한 표현과 인간심리를 꿰뚫는 듯한 대사처리로 안방극장을 휘어잡은 「언어의 마술사」이자 대중문화시대의 선두주자였다. ▷황영조◁ 1970.3.22∼.강원도 삼척출신.삼척 근덕중·강릉 명륜고·고려대.91유니버시아드(쉐필드).92바르셀로나 올림픽대회.94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마라톤 1위.한국 마라톤을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린 주인공.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씨의 우승 이후 56년만인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우리 국민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주고 마라톤 재건의 계기를 만들었다.
  • 남·북긴장 완화돼야 북해체 당겨진다/브레진스키박사의 예진

    ◎미 지도력 약화… 세계질서 불확실성 여전/북경·평양서 권력다툼땐 「아·태시대」 도래 지연/경제블록화 가속… 동아경협체 등장 시간문제/보스니아내전 등 냉전유산 다음세기까지 문제로 □대담=이경형워싱턴특파원 1995년의 세계도 여전히 불확실성의 시대에 놓여 있다.석학이자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역임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박사에게 새해의 국제정세와 한반도 장래에 대한 전망을 들어본다.브레진스키 박사는 현재 존스 홉킨스대 폴니체 국제정치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미전략문제연구소(CSIS)고문직도 맡고 있다.지미 카터대통령 시절인 지난 77∼81년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역임하면서 미·중국 국교수립에 크게 공헌했으며 50년대는 미하버드대 교수로,60년초부터 89년까지 30년간은 컴럼비아대 교수로 재직했었다. ­90년대 초반부가 탈냉전이 시작한 시대였다면 90년대 후반부는 냉전시대의 유산이 사라져가는 시대로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이러한 시대의 조류속에서 95년 한해는 어떻게 전개될 것으로 보십니까. ▲1995년은 「어려운 한해」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보스니아 문제,구소련지역에서는 러시아의 입지와 그들의 야망,극동지역에서는 등소평이후 중국의 권력승계 물론 북한체제의 안정 여부와 그들의 진로 문제도 모두 미해결의 사안들입니다. ­다음 세기에도 냉전유산이 지속 될 것으로 보신다는 뜻입니까.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아마 다음 세기에도 계속 될 것입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이데올로기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분쟁보다는 인종적·종교적 상이성에서 오는 지역분쟁이 크게 늘어나고 있습니다.이같은 경향은 금세기말까지도 계속 확대될 것으로 보십니까. ▲산업혁명이나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던 이데올로기적인 투쟁은 더이상 현대적 의미가 없으며 그런 시대는 거의 끝났다고 믿습니다.이러한 혁명들은 모든 사회문제들이 인간의 본성이나 역사성에 관한 교조주의적 가설에 따라 해결된다고 보는 소위 「강압적인 유토피아」 사회로 나가는경향이 있었습니다.이같은 이데올로기적인 도식은 더이상 성립될 수 없습니다.그러나 종교적 감성에 의해 촉진되는 인종적·종교적 분쟁은 훨씬 뿌리가 더 깊고 특히 언어나 문화,역사에서 연유되는 국민의 심정적 정체성과도 많이 연관되어 있습니다.이같은 분쟁은 아마 계속될 것으로 봅니다. ­오늘날은 과거에 세계를 이끌었던 진정한 의미의 초강대국이 없다고 생각됩니다.미국이 계속 세계의 지도자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봅니까. ▲최근까지 초강대국은 미국과 소련 뿐이었고 이 둘중에서 이제 미국만 초강대국으로 존재합니다.미국이 과거에 비해 일관성이 부족하고 전략적으로 지향하는 목표가 불분명하다는 지적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미국은 분명히 세계의 지도국이고 또 지도국으로서 중심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예를 들어 미국은 핵확산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이지만 과거처럼 목표가 분명하고 정교한 방식으로 그리고 확고하게 지도력을 구사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미국의 이같은 변화는 지도자 개인의 속성에서도 일부 연유하나 현재 대통령의 외교보좌팀도 그렇게 강하다고는 할 수 없으며 외교적으로도 전략적인 초점이 없는 것같습니다.클린턴 대통령도 외교문제보다는 미국내 문제 우선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유엔 평화역할 한계 ­보스니아 사태에서 보듯이 유엔이 국제사회에서 평화유지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봅니까. ▲유엔이 평화유지자로서 역할이 점차 사라진다는 명제는 잘못된 도식입니다.언제 유엔이 진정한 평하유지자였던 때가 있었습니까.그렇지 않습니다.유엔이 한국전쟁에서 싸웠을 때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주도 아래 싸웠습니다.우리가 유엔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면 어떤 면에서는 과거보다 평화유지자로서의 기능을 더욱 발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캄보디아가 바로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유엔은 주요국가들이 이해를 달리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이에 해당하는 예가 바로 보스니아 문제로 미국과 러시아간에만 견해가 다른 것이 아니라 미국과 영국·프랑스와도 의견이 다르지 않습니까.이러한 상황 아래서는 유엔이 효과적인 평화유지 기능을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새해부터 새로운 세계무역기구(WTO)체제가 출범합니다.이러한 신국제무역질서가 통상을 촉진하고 국제사회를 통합시키는데 기여할 것으로 봅니까.또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나 유럽공동체(EU) 등 지역경제협력체가 세계를 지역경제세력으로 분할하지는 않을까요. ▲WTO가 자유무역을 증진시키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그 속도는 느릴 것으로 봅니다.무역장벽을 제거하는데는 앞으로도 수년이 걸릴 것입니다.이러한 장벽 가운데 법률처럼 명시적이고 공식적인 사항은 빠르게 제거될 수 있을 것이지만 이들중에 특정국가의 문화나 고유한 관행,전통에 뿌리박고 있는 비공식적이고 간접적인 장벽은 쉽게 제거될 수 없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WTO가 정착되면 무역자유화는 분명히 촉진될 것입니다.그리고 경제의 블록화는 세계무역의 자유화를 위한 필수적 과정의 하나라고 봅니다.지역적 협력에 바탕을 둘 때 범세계적인 협력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EU는 더욱 확대되고 있으며 동아시아에서도 지역적 경제협력체가 나올 것으로 봅니다.그리고 NAFTA도 AFTA(미주자유무역지대)로 확대되는 것은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한가지 중요한 것은 이들 지역경제협력체도 외부에 대해 개방적일 때만 세계자유무역 신장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급진적 경제성장에 힘입어 무기경쟁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특히 중국과 일본의 군사대국 가능성이 없지 않은 가운데 앞으로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 문제를 어떻게 봅니까. ○자유무역 촉진될듯 ▲극동지역이 경제적으로 급성장하고 있으나 열강들간의 경쟁도 심한 지역입니다.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 주요한 열강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이는 일본과 한국으로 하여금 안보문제에 더욱 신경을 쓰도록 할 것입니다.이러한 틀에서 볼 때 주한미군의 유지는 지역안정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입니다.만약 미군이 철수한다면 아시아 열강들간의 세력경쟁 움직임은 크게 촉진될 것이며 다른 아시아국가들의 안보도 위협하게 될 것입니다. ○안보협력 강화해야 ­동아시아지역에서도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와 같은 안보협력기구의 형성이 가능할 것으로 봅니까. ▲유럽과 동아시아는 서로 여건이 다르다고 봅니다.유럽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같은 통합된 군사조직을 갖고 있지요.그리고 약간 느슨한 기구이지만 CSCE도 있지요.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안보기구는 아닙니다.만장일치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정치적·군사적으로 일정한 방향이 결여되어 있습니다.동아시아의 현 상황에 비추어 기껏해야 유럽안보협력회의 같은 기구가 형성될 수는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그러나 그것이 실질적인 안보협력체제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그리고 이는 열강들의 패권정치에는 효과적인 억제책이 될 수 없습니다.지역안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역안보 문제에 관해 특수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나라들끼리 즉 미국과 일본·중국 그리고 한국을 포함한 여타 국가들간의 더욱 긴밀한 안보협력을 증진시켜야 할 것입니다.그러나 그같은 안보협력이 이뤄진다 해도 오늘날 유럽과 같은 안보기구를 만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중국과 아세안국가들을 포함한 동아시아지역은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지역의 하나로 되고 있습니다.21세기는 동아시아·태평양의 시대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무엇보다 경제기적으로 불리는 아시아의 성장에 관한 얘기는 많은 부분이 공허한 신화라고 생각합니다.아시아는 경제수준이 매우 낮은데서부터 출발했고 자본과 값싼 노동을 효과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고도의 성장을 유지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도 선진산업국가들의 과거 개발단계와 비교하면 그다지 높은 것은 아닙니다.일본에서도 침체가 나타나듯이 한국도 아마 과거보다도 훨씬 많은 성장의 어려움을 맞을 것입니다.지금까지 보호속에 누려왔던 특수한 지위는 이제 더이상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중국의 경우 지금과 같은 성장을 지속한다면 오는 2020년까지는 강대국이 될 것입니다 만 국내에 심각한 정치적 위기가 발생한다면 과연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또 동아시아에 중요한 안보 문제가 발생한다면 이 지역의 높은 성장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동아시아가 현재와 같은 높은 성장률을 지속할 것이며 21세기가 동아시아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가설은 변수를 무시한 독단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 한반도 문제로 질문을 옮겨 보겠습니다.미국과 북한간의 핵합의가 남북한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리라고 봅니까. ◎국제사회 멀지않아 핵위협 직면/독·베트남과 달리 점진적 흡수통일 가능할것 ▲한반도의 안정화에 기여할 것입니다.남북한 관계의 안정은 궁극적인 한반도 재통일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라고 봅니다.북한체제는 이미 실패했습니다.그 체제는 또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그러나 그들이 위협을 느낄 경우 이를 방어할 충분한 힘을 갖고 있지요.역설적이긴 하지만 보다 긴장이 완화되고 협력적인 분위기를 만든다면 종국적으로 통일을 촉진하는 북한의 해체를 앞당길 것입니다.남북한의 통일은 동서냉전에 의해 분단된 다른 두 지역과는 전혀 다른 방식과 단계로 이뤄질 수 있을것입니다.베트남의 경우는 어느 일방의 군사적 승리에 의해 통일이 달성되었고 독일은 전쟁을 치르지 않고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대한 정치·경제적 경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통일이 성취되었습니다.한국의 경우 제 3의 방법인 남한의 북한에 대한 우호와 협력에 의해 점진적 흡수 방법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미국과 북한간의 관계개선 전망을 어떻게 보며 새해에는 정식외교관계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합니까. ▲1∼2년 사이에 외교관계 수립이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만 시기를 구체적으로 적시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미북한간의 합의가 북한의 약속위반이나 미의회의 클린턴행정부에 대한 합의이행 유보 강요나 아니면 한국이나 일본이 경수로 제공에 따른 재정부담을 떠맡지 않으려 하는 등의 이유로 이행이 지연되지만 않는다면 미국과 북한간의 외교관계는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답변과 관련하여 새해부터 공화당이 장악하게 되는 미국의회가 북미 합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지 않습니까.▲공화당으로부터 북미 합의에 대한 일부 반대가 나올 수 있을 것이나 합의 전부를 거부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일부 공화당 의원들이 그 합의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 해석이나 합의를 더 엄격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한반도의 통일이 달성되었을 때 동북아의 세력 균형은 어떻게 될 것으로 봅니까. ▲무엇보다 통일한국이 핵을 보유하고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만약 핵보유국이라면 동북아지역의 안정을 저해할 것이며 일본의 핵무장을 고무시킬 것입니다.둘째는 등소평 이후 중국의 권력승계가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이뤄지고 또 중국이 국제적인 체제에 얼마나 참여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으로 봅니다.그러므로 여기에는 많은 불확실성이 개재되어 있다고 봅니다.적어도 중국의 권력경쟁에 있어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보다 확고한 민족주의적 대국주의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될 것으로 봅니다.이같은 경향은 이 지역의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이같은 요소가 중국내부의 권력이양 과정으로 국한되고 이 과정의 갈등이 외부로 확산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을 위험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따라서 한반도의 재통일이나 중국의 권력승계나 이를 싸고 발생할 수 있는 권력투쟁은 이 지역에 불확실성을 가져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새해는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투하한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핵확산금지조약(NPT)체제는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요.핵기술 획득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일부 국가들은 결국 핵보유국이 되리라고 봅니까. ▲핵확산을 전면 중지시킬 수는 없다 하더라도 완화는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일부 국가들은 적어도 핵무기의 잠재능력을 보유할 것으로 보며 현재보다는 더많은 국가들이 핵무기를 보유할 것으로 봅니다.여러가지 가능성으로 볼 때 장래 어느 시점에 가서는 핵무장한 지역 세력국가들간의 핵무기 분쟁이 어떤 형태로든 있을 것으로 봅니다.그러한 의미에서 앞으로 국제사회는 실질적인 핵위협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94년은 세계난민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르완다를 비롯,곳곳에 5천5백만명의 난민이 발생했습니다.유엔이나 국제사회는 더이상 내전이나 이같은 난민 발생에 대처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유엔이 캄보디아에선 잘 대처했으며 소말리아나 르완다에서도 합리적으로 대처했거나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약 지역적 내전의 참화에 강대국간의 이해가 대립되어 있을 때는 유엔이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없으나 그렇지 않을 때는 유엔이 거기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 민족적 항일투쟁이 독립 이끌어냈다/구한말서 해방까지 광복운동사

    ◎상해임정 19년 출범… 독립운동 주도/독립군부대 1920년 1∼3월 국내진공 24회/윤봉길의사등 의거 잇따라 일본인 간담을 서늘케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라는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그래서 암울했던 질곡의 시대는 더욱 길고 지루했다.그 칠흑 같은 어둠의 세월에서 맞은 19 45 년8월 15일 광복은 민족의 새로운 탄생이고 부활이었다.실질적으로 국권을 빼앗긴 19 05 년을사조약 부터 기산하면 40년만의 일이다.또 19 10년 8월 29일 국치일로 시작해서는 정확히 34년11개월 보름만에 이룩한 민족의 해방이었다.그리고 나서 올해로 광복 50주년.격동의 시대로 흔히 회자되는 그 현대사를 살아온 우리에게 지금 광복의 의미가 희석되어 있다.그리하여 더러는 민족해방을 연합군 승리가 안겨다 준 선물 정도로 여긴다.이는 당치 않은 판단이다.광복은 일제침략에 저항한 민족독립운동이 이끌어낸 자존의 역사인 것이다. 광복은 일제침략에 저항한 민족독립운동이 이끌어 낸 자존의 역사인 것이다. 광복을 성취하기까지의 반일독립운동은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이른바 국치일 때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 이어진 민족주의 운동이다.1919년의 3·1운동은 민족독립운동의 큰 전환점을 마련했다.3·1운동은 「독립선언서」가 보여주는 것 처럼 목적이 현대국가 건설에 있다.그리고 이 운동에 2백만명의 민중이 직접 뛰어들어 일본으로부터 독립,국민국가를 세우겠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세계에 전달한 것이다. 그러나 3·1운동은 일본의 무력에 의해 탄압되어 현대적 국민국가를 마련할 수 있는 터전이 사라지고 말았다.이에 따라 독립정신의 실체적 형태를 갖춘 여러 임시정부가 주로 해외에서 태어났다.그 대표적 임시정부가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정부(3월17일)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4월10일)다.거기에 국내 한성임시정부(4월23일)가 하나 더 늘어났다.이 임시정부들은 민족지도자들의 협의를 거쳐 1919년9월 상하이에서 하나의 정부로 출범하기에 이른다. 임시정부는 3·1운동에 의해 집약된 민족의지가 깔린 주권국민의 대표기관이기도 했다.상하이 시기(1919∼1932년)에는 외교활동과 독립전쟁을 지도하는데 주력해왔다. 주권국민의 대표기관으로 민주공화제를 임시헌장에 도입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의지는 강했다. 임시정부의 수립은 반일민족독립을 통해 장차 조국광복이 오리라는 확신을 어느 정도 심어주었다.그리고 중국을 비롯,만주·노령지역을 향한 망명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독립은 동 단체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독립군의 창설과 재편성이 이루어져 북간도와 서간도에 만도 34개부대가 포진했다.노령지역에도 이와 맞먹는 독립군 부대가 생겨났다.북간도의 대한독립군과 복로군정서,군무도독부,서간도의 배산무사단과 태극단 등이 그것이다. 그 독립운동의 힘은 때로 국내로 역류되었다.일본군 쪽의 자료에 의하면 1920년1∼3월까지 3개월 동안 독립군부대의 국내진공은 24차례에 이르고 있다. 항일독립전쟁 중 가장 빛나는 전투는 1920년10월 김좌진·나중소가 지휘했던 일군과의 청산리싸움이다.청산리대첩으로 불리는 이 싸움에는 북로군정서(북로군정서)독립군 1천6백명이 나서 6일동안 10여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였다. 독립군부대들은전략상 러시아영토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이동 중에 밀산에서 독립군부대들을 통합,3천5백명 병력의 대한독립군단을 탄생시켰다.서일을 비롯,지청천·홍범도 등의 독립군 중진들이 모두 망라되었다.이들은 소비에트 적군의 안내로 자유시에 집결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독립군은 1921년6월22일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적군의 공격을 받는다.적군의 배신으로 얼룩진 이 참사가 흑해사변으로도 불리는 자유시사건이다. 이렇듯 나라를 잃고 유랑한 항일독립군의 전열이 한때 일그러지지만,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은 계속되었다.그 하나가 1932년4월 윤봉길의거인데,이 사건은 침체해 있던 임시정부를 회생시키는데 기여했다. 광복군이 창설된 것은 1940년9월17일.김구주석이 이끄는 임시정부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침략군에 쫓겨 상하이로부터 근거지를 7번째 옮겨 마지막 기착한 중칭시기(중경시기·1940∼1945년)의 일이었다.때마침 일어난 태평양전쟁에 맞추어 대일선전포고를 한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중국·인도·버마전선에 참전시켰다.미군의 특수부대 OSS와 합동작전을 펴기도 했던 광복군은 국내에 투입할 계획이었으나,일본이 서둘러 항복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민족해방의 광복을 성취한 데는 중국대륙에서의 임시정부나 독립군의 항일저항이 크게 뒷받침되었다. 광복은 결코 타율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민족독립운동에 의한 광복의 빛이 지난 시대에 오랫동안 가리워졌지만,오늘의 민주주의 헌법은 국가의 정통성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찾았다.그래서 광복50년 이후의 현대사는 독립정신을 바탕으로 세계 한 가운데 우뚝한 자존의 역사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독립운동 연표 ▲1910년8월29일:한일합병 조약문 발표. ▲1911년12월19일:이상설등이 블라디보스토크에 근업회를,서일등은 북간도에 독립운동단체 중광단조직. ▲1913년5월13일:안창호등이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창립. ▲1919년2월8일:동경유학생 6백여명이 동경 YMCA에서 독립선언서 발표. ▲1919년3월1일:민족대표 33인(4인 불참)이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낭독.탑골공원을 비롯,전국으로 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됨.▲1919년4월10일:상해에서 제1회 임시의정원을 개원하고 의정원법 통과 및 내각을 조직함으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920년10월20일:북로군정서 김좌진·이범석부대가 청산리에서 일군과 싸워 대승. ▲1921년1월:만주 독립군부대들이 통합,서일을 총재로 대한독립군단조직. ▲1929년11월3일: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 ▲1932년4월29일: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이 상해 홍구(강구)공원에서 열린 상해사변 축하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사령관(백천의칙)등 10명을 사상케 함. ▲1945년7월:광복군이 이범석 휘하의 국내정진군총지휘부 설치,국내진입작전 결정. ▲1945년8월15일:일제의 강점으로부터 광복.
  • 등 사후 중국공산당 붕괴/미 국방부/승계 싸고 권력분열 심화

    ◎반미 민족 독재 출현 가능성 【도쿄 연합】 미국방부는 중국 최고지도자 등소평이 늦어도 내년말까지는 사망할 것으로 보고 등사망 이후 중국정세에 대한 보고서를 마련했다고 일본의 산케이신문이 17일 보도했다. 국방부와 민간연구기관 중국전문가 20명이 작성한 이 보고서는 등사후 약 7년간 현 공산당이 지배하는 정치체제가 내부분열 과정을 가져 그 뒤에는 민족주의자의 독재지배 또는 지방분권화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예측했다. 「중국 중기전망」이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특히 등소평이 사망하면 곧 권력계승을 둘러싼 심각한 마찰이 불가피하며 설령 공산당체체가 계속되더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의 중국이 될 것이기 때문에 미국의 중국정책은 근본부터 수정해야할 것으로 지적했다. 보고서는 공산당 붕괴로 분열될 경우 정치형태로는 민족주의적 독재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고 이 경우 비공산주의 지도자가 대중의 광범한 지지및 인민해방군,공안조직의 묵인아래 권력을 행사하며 애국주의,대중화주의,옛영토 회복,반미·반일 노선을 취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 비정한 권력투쟁가… 유례없는 반세기 독재/김일성 82년의 인생역정

    ◎유년 평양·만주 전전… 20세에 빨치산 활동/해방후 구소점령군 배경업고 권력장악/도전세력 가치없이 제거… 1인체제 구축/민족통일 빙자 6·25남침… 「전범」 낙인/67년 주체사상 만들어 사회주의 통치도구로 활용하기도 김일성.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집권을 누린 독재자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난 45년 소련군을 등에 업고 한반도의 절반인 북한땅의 통치자가 된 뒤 거의 반세기동안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둘러왔다.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과 당총비서라는 사회주의 체제 특유의 어마어마한 권력집중적 직책도 모자라 북한주민들에게 「위대한 수령」,「민족의 태양」으로 부르기를 강요한 전제군주적 독재자였다. 김은 어찌보면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주처럼 전지전능하고 무오류의 존재로 인식되도록 주민들을 세뇌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먹을 것이 모자라 하루 두끼 먹기운동을 벌이면서도 철저한 사상무장과 외부 정보통제로 주민들로 하여금 지상낙원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믿도록 만드는능력을 갖춘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기 때문이다. 김은 1912년 4월15일 평양의 한 농가에서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을 부모로 하여 철주와 영주를 동생으로 둔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본명은 성주였으나 만주에서 빨치산활동을 할 때 일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우상화과정에서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엄청나게 날조되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그의 출생지가 평남 대동군 룡산면 하리 칠골에 있는 외가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을 거쳐 다시 일성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김일성의 「공식」생가는 평양 대동강변 언덕에 자리잡은 지금의 만경대이며 이른바 「혁명의 요람」으로 북한의 모든 주민들에게는 참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김은 어린 시절 한때 외할아버지가 개신교 장로를 지내는 등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외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강반석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그는 만경대에서 짧은 유년시절을 보낸 뒤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그후 김은 만주의 중국계 소학교인 모예산소학교,팔도구소학교와 평양근교 외가인 칠골에 있는 외조부 강돈욱이 교감으로 있던 창덕학교 등을 전전하며 파란많은 소년기를 보내다 26년 역시 중국계인 무송소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32년 유격대활동에 적극 가담하기까지의 기간은 뚜렷한 활동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다만 북한에서 나온 그의 전기들은 이 기간중 장춘과 길림 사이에 있는 가륜에서 한인농민들에게 사상교화작업을 했다고 쓰고 있다. 그는 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32년 중순부터 중국 공산당 산하의 항일 빨치산집단에 참여한다.이때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김의 항일투쟁경력은 그가 북한정권을 장악한뒤 유일체제를 강화하면서 그에 대한 우상화를 합리화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과장·미화되었다.북한의 선전용 김일성 전기들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32년 그가 조선공산당을 창설했다고 하지만 당시 불과 19세였던 그는 당시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양세봉이라는 한인이 이끄는 유격조직에 들어감으로써 항일빨치산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후 그는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사병으로 들어가 활동하다 우수한 중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나중에 대대장급으로 승진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만주 일대에서 소규모 유격활동을 벌이던 김은 37년 유격대원 2백명을 이끌고 국경 마을인 함남 보천보를 습격했다.일본경찰지서와 우체국 등을 방화하고 추격해오는 경찰서장을 비롯한 일경 7명을 살해한 이른바 「보천보전투」를 벌여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김은 이 전투가 자신이 참여한 빨치산 전투중 가장 성공적인 전투였다고 자랑하며 보천보에 자신의 동상과 혁명박물관까지 세우고 북한 주민들에개 참관을 강요했다.하지만 보천보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김일성이 아니라는 소수 의견을 내는 학자들도 있다.즉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은 그해 11월 죽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사람이 소련으로 도피한 뒤 그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보천보사건 이후 일본이 중국 본토 침략의 전초전으로 만주의 빨친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전에나서는 바람에 동북항일연군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때문에 김도 41년 8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으로 피신해야 했다. 소련은 이 무렵 만주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중국인과 한인유격대원들을 모아 블라디보스토크 근교 등지에 「88독립저격여단」이라는 부대를 창설했다.김도 김책,최용건,이동화 등 빨치산 동료들과 함께 이 부대에 들어가 43년에는 대위급으로 진급한다. 김은 여기서 만주에서 함께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김정숙과 결혼했다.그녀는 16세 때인 35년에 김일성의 빨치산부대에 가담해 주방일 등 잡일을 보았던 여자였다. 김은 42년 그녀와의 사이에 첫아들인 정일(소련명 유라)을 낳았다.하지만 그녀는 49년 평양에서 사산아를 낳다가 사망했다. 해방과 함께 무명의 소련군 장교로 평양에 입성한 그는 이후 소련의 절대적 후원과 타고난 권모술수로 재빨리 권력을 장악한다.소련 점령군은 친소세력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의 필요성에 따라 자신들의 협조자들 가운데 하나를 북한지도자로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고 김이 바로 그같은소련의 의도를 기민하게 포착한 것이다. 소련점령군이 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지명하면서 정치지도자로서의 그의 기반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에서 4월까지 한달동안 자신을 도와준 소련에 감사를 표시하기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인 6월 24일 북로당과 남로당 중앙위원회연석회의를 열어 당 위원장자리를 차지했다.이 회의에서 당의 명칭도 북조선노동당에서 조선노동당으로 바꾸었다. 당과 정부기관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김일성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을 가차없이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그는 자신에게 협력했던 인사도 자신에 도전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숙청 또는 암살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는데 심지어 자신과 유격대활동을 함께했던 빨치산대원들까지 가차없이 제거하기도 했다. 그는 조만식과 같은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박헌영,김두봉등과 같이 자신에게 협력했던 수많은 인물들을 한국전쟁에 대한패전책임을 덮어씌우거나 종파주의를 부추키고 있다는등의 갖가지 죄목을 걸어 제거함으로써 결국 북한정권을 족벌체제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소련의 힘을 빌려 48년 북한정권의 초대수상에,49년 조선노동당 초대위원장에 오른뒤 도전세력들을 가차없이 제거하기 시작했다.그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는 물론 현준혁 등 국내파,박헌영 등 남로당계,김두봉을 위시한 연안파,허가이 등 소련파를 차례로 숙청해 결국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김은 자신의 권좌가 어느 정도 다져진 50년 6월25일 한반도의 적화통일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마침내 무력 남침을 감행한다. 그 자신이 식은죽먹기라고 여겼던 적화통일이 유엔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음에도 그는 전혀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김일성이 무력 적화통일이라는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47년부터였다.그는 신년사를 통해 『단합된 민주조선의 건설은 남한에 있는 반동적인 매국노들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군과 보안대를 강화시켜야한다』고 역설했다. 김일성은 모든 상황이 유리하다고 판단,밤도둑처럼 새벽야음을 틈타 남침을 했으나 유엔군이 참전하고 중국의용군이 자신을 도와주러 왔을때는 이미 전쟁이 자신의 관리능력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었다.국제정세를 너무 단순하게 보았던 판단착오의 결과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실수로 엄청난 결과가 빚어지자 동료들을 숙청했다.그는 1950년 12월 21일 강계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그의 빨치산 동료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을 공격했으며 그 가운데서 김일,최광,임춘추,김열,무정등은 당에서 축출해버렸다. 김일성은 뒤이어 당의 재조직문제를 놓고 자신과 이견을 보인 소련파의 거두 허가이를 숙청했으며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들도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미국을 위해 스파이활동을 했다는등의 죄목으로 체포해 사형에 처하는등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더이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세력은 여지없이 제거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김일성은 50년대 중반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도전하는 세력들을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래 67년에 「주체사상」을 만들어 냈으며 72년에 와서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에 통치이념으로 명문화시켜 통치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체사상과 김일성에 대한 극단적인 우상화가 맞물리면서 북한정권이 안에서부터 서서히 허물어지는 요인이 됐다. 북한의 선전매체들이 김일성에 대해 『가랑잎을 띄우고 대하를 건너가는 만고의 영웅이며 그가 한번 노려보기만 하면 원쑤도 가을 풀같이 쓰러진다』고 보도할 정도로 북한은 이후 유사종교집단적 사회구조를 띠면서 경직적인 김일성 1인체제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70년대 이후 김일성은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밀리면서 철저한 폐쇄체제로 주민들을 통제하면서 다른 한편 아들인 김정일에게로 후계세습작업을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나름대로의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 72년 12월 비공개리에 당중앙위 전원회의를 거쳐 김정일을 자신의 후계자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그도 소련의 스탈린 등의 전례를 보고 자신의 사후에 대해 대비를 시작한 것이다.다시 말해 스탈린 사망후 대대적인 격하운동에 충격을 받은 김이 사후 안전판으로 세계사에 유례없는 부자간 권력승계라는 희화적 구도를 상정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 이상으로 김정일에 대한 상징조작을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가면서 권력을 하나씩 아들에게 이양하기 시작했다.김정일에 대한 호칭을 「당중앙」에서부터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향도의 별」 등으로 격상시켜나가면서 노동당 조직비서(73년),노동당 정치 상무위원회 위원(80년),인민군 최고사령관(91년),국방위원장(93년) 등 핵심요직을 하나하나 물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에게 「살아있는 신」으로 우상화작업을 펴온 김일성도 끝내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한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그 자신도 70년대 이후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 건강유지에 발버둥쳐온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김일성의 질환은 지난 73년께부터 확인된 뒷머리의 혹에서부터 고혈압·당뇨·난청·신경통·뇌일혈을 비롯해 그를 8일 새벽 마침내 죽음으로 몰고간 심근경색 등 10여가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그는 분단 반세기만에 초유의 역사적 사건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급사했다.그를 갑작스런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이 그의 일생일대의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상회담에 대한 준비과정에서의 과로 때문인지,아니면 경제난과 대외적 고립에 따른 누적된 스트레스 탓인지는 아무도 모른다.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북한주민들에게 영생불사의 존재로 신격화된 그도 죽음 앞에 아무도 예외일 수가 없다는 철리를 그의 맹목적인 추종세력들에게 마침내 일께워 준것이다. 그의 공과는 후세의 사가가 엄정하게 평가해줄 것이다.그가 역사의 장에 어떻게 기록되든 과대망상에 빠진 권력의 화신이었다는 사실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이미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연표◁ △1912.4.15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출생(본명은 김성주) △1923 만주 장백현 팔도구 소학교 졸업 △1926 만주 길림 육문중학 중퇴,재학중 공청 가입 △1930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개명 △1931 중국공산당 입당 △1932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장 △1935 김일성으로 재개명 △1936 조국광복회 조직 △1937.6 함남 보천보 습격 △1937.9 함남 증평리 습격 △1940말 소련으로 망명 △1945.8 소련군 소좌 △1945.9 소련점령군 비호하 입북 △1945.10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참석 △1945.10 「김일성장군」환영 평양시군중대회에 등장 △1945.1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1946.2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7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장단 의장 △1946.8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1947.2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 △1948.8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48.9 수상(제1차 내각) △1949.3 경제문화 협정체결차 소련방문 △1949.6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0.6 군사위원회 위원장 △1950.7 인민군 최고사령관 △1953.2 원솔칭호 △1953.7 영웅칭호 △1956.4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7.9 수상(제2차 내각) △1957.11 당 및 정부 대표단장으로 소련 10월혁명 40주년 기념식 참석 △1959.1 소련 제21차 공산당대회 참석 △1959.9 중국 정권창건 10주년 기념식 참석 △1961.7 우호협조 및 상호 원조조약 체결차 소련 중국 방문 △1961.9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및 정치위원회 위원장 △1961.10 소련공산당 제22차대회 참석 △1962.10 수상(제3차 내각) △1966.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67.1 소련방문 △1967.12 수상(제4차 내각) △1970.11 노동당 총비서 겸 정치위원 △1972.12국가주석 △1972.12중앙인민위원회 위원겸 국방위원회 위원장 △1975.4중국방문 △1975.5루마니아·알제리·모리타니·불가리아·유고 순방 △1977.11국방위원회 위원장 △1977.11인민군 최고사령관(원수) △1977.12 국가주석 △1980.5 유고 티토대통령 장례식 참석 및 루마니아 방문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총비서·군사위원장 △1982.4 국가주석 △1982.9 중국 방문 △1984.5 소련등 동구권 8개국(소련·폴란드·동독·체코·헝가리·유고·불가리아·루마니아)순방 △1986.10 소련 방문 △1986.12 국가주석 △1988.6 몽골 방문(중국·소련 경유) △1989.11 중국 방문 △1990.5 국가주석 △1991.10 중국 방문 △1992.4 대원솔 칭호 △1993.4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발표 △1994.4.8 사망
  • 북한전문가들이 말하는 의미와 전망(남북 정상회담)

    ◎분단·적대 50년… 「만남」 자체가 새역사/순조로운 진행땐 민족화해 향한 디딤돌/공산당 기본전략 고려 정치적이용 대비/북의 서울회담 확약않는 의미도 새겨야/대좌에만 집착땐 시간낭비 우려… 성급한 낙관은 경계해야 □좌담 참석자 이명영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용필 서울대 교수 박화진 서울신문 논설위원실장 남북한이 다음달 25일부터 3일동안 평양에서 김영삼대통령과 김일성주석의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함에 따라 국내외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 전문가인 이명영성균관대명예교수와 이용필서울대교수,박화진서울신문논설위원실장의 좌담을 통해 정상회담의 의미와 전망을 짚어본다. ▲박화진실장=분단 50년만에 남북한 정상이 만난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특히 문민 대통령이 처음으로 평양땅을 밟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6·25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면 이번 정상회담은 가장 긍정적인 사건이 될 것으로 봅니다.대통령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북한동포들의 심정이 어떨는지도 매우 궁금한 대목입니다.김영삼대통령의 첫 방북이 남북화해와 공존공영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어야 할것입니다. ▲이명영교수=회담에 앞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북한 노동당의 기본원칙과 협상전술입니다.김일성주석은 공산당의 기본전술에다가 30년대 만주에서 익힌 중국공산당의 유격전 원칙에 따라 적진아퇴,적퇴아진을 철저히 구사하고 있습니다.지금은 특히 한국과 미국이 강력한 제재태세로 밀어 붙이니까(적진) 한걸음 물러서서 대화를 추구하는(아퇴)국면으로 볼수 있습니다.카터의 방북을 통해 미국과 협상국면을 유도해 수세국면에서 탈출하고 이를 위한 보조축으로 남북간 대화무드를 조성하려는 것같습니다. ▲이용필교수=분단 반세기가 지난 적대적인 체제의 정상끼리 만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잘되면 민족화해를 위한 중요한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동시에 동북아 국제정세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의미는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 아래서 어떤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가와연관시켜 봐야 할것입니다.성급한 장미빛 낙관은 금물입니다.북한이 회담에 응한것은 몇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볼수 있습니다.우선 북한은 핵개발에 따른 국제적 압력과 긴장고조에 따른 내외적인 불이익을 해소하려는 것입니다.그들은 정상회담을 남북한 최고위급회담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김대통령을 남한의 여러 정치,사회단체 가운데 하나의 장으로만 본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정상회담 개최논의가 어제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여러번에 걸쳐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북한이 진심으로 만나고자 하는 의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이번에 정상회담의 일시와 장소가 합의되었다고 해서 남북문제가 일시에 해결될 것이라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될것입니다. ▲박실장=회담에 상당히 회의적인 시각도 있는 것 같습니다.북한측이 이번 정상회담을 비록 체제유지등 사회·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카드로 쓰고 있다해도 우리로서는 대화를 유도,통일에 유리한 국면을 촉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물론 북한은 시간벌기와 제재완화라는 목적에서보면 이미 상당한 재미를 보고 있는 셈이죠.그러나 북한이 대화에 나선데는 카터의 역할보다 더 깊은 곳에 북한핵을 무한정 나몰라라 할 수 없는 중국의 설득과 한·미의 강경한 제재태세등이 작용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금은 대화가 제재보다 효과적일 수 있을 것입니다. ○수세 벗기 전술일수도 ▲이명영교수=북한은 어찌보면 우리의 정책 흐름을 간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우리정부가 반개의 핵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으로 분석할수 있습니다.또 미국은 북한에 핵이 한두개 있다한들 문제있겠느냐고 생각하는 것 같고요.이 때문에 북한은 대화로 위기 상황을 빠져나가도 되겠다고 판단했고 그에 따라 정책을 변화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용필교수=물론 용의주도한 준비와 경계로써 회담에 임한다면 냉전을 해소하고 통일로 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김대통령은 이미 지난 2월 북한핵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김주석을 만날 수 있다는 조건부 제안을 했습니다.그러나 북한은 평양에서의 1차회담 이후의 일정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유보하고 있습니다.우리가 만남에만 집착할때는 과거처럼 소득없는 시간낭비만 하게될 우려도 있습니다. ▲박실장=평양과 서울에서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획기적인 사건이 되겠지만 일부에서는 오히려 우리정부가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조심스런 의견을 제기하기도 합니다.또 실제로 그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할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이용필교수=북한당국은 김대통령이 북한에 가면 이인모노인이 송환됐을 때나 카터전미국대통령이 방북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북한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몰아가려 할 것입니다.우리측은 회담시기를 8월중순으로 하려는 북한의 의도를 간파,7월말로 시기를 잡았습니다.그러나 일시보다는 장소가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독일 통일전에 동서독 정상이 만날 때도 장소를 양쪽 수도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동서독통일때와 달라 ▲이명영교수=북한은 정상회담에서 틀림없이 통일을 강조할 것입니다.그러나 북한의 통일이란 김일성 주권 아래서의,다시말해 주체의 통일을 의미합니다.따라서 북한은 하나 하나 요구조건을 내걸다가 충족되지 않으면 회담을 결렬시키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박실장=북한이 일방적으로 회담을 결렬시킨다면 우리에게도 북한핵에 대한 제재등 강경책을 쓸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지 않을까요.사실 김주석이 서울에 오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손실이 있다고 보는 것은 너무 소극적 견해인 것 같습니다.우리측이 서울방문에 집착하지 않은 것도 북한의 진의가 어디에 있건 북한의 핵무장을 막고 개방과 개혁을 유도하며 교류 협력을 통한 통일기반의 확대를 위해 김주석을 만나는 자체에 의미를 둔 것으로 보입니다. ▲이용필교수=북한이 정상회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만 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역량을 정비한다면 이 회담을 건설적으로 끌고갈 수 있습니다.또 우리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고 봅니다. ▲박실장=충분한 의심이 손실을 최소화하고 성공의 가능성을 높일수 있습니다.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북한의 한계를 단정짓고,실패를 전제로 회담에 소극적으로 임할때 북한은 더욱 소극적으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우리로서는 북한의 핵개발포기와 핵투명성보장등이 첫번째 관심사이며 이산가족재회,남북교류확대등도 중요 관심사이지만 북한이 이들 문제에 쉽게 호응하고 나오리라는 기대는 하기 어려울것 같습니다.특히 북한은 핵문제와 관련,앞으로의 개발계획중단만을 미국에 통보했을 뿐 과거는 불문에 부치자는 미국의 약속을 얻어내는데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는 느낌입니다.우리가 남북회담을 통해 남북상호사찰과 한반도 비핵화,남북합의서의 이행을 강력히 촉구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화해전제조건 촉구를 ▲이용필교수=지금 북한을 대화의 문턱으로까지 끌고 나온 것도 남한과 미국의 북한핵을 저지하겠다는 태도가 확고했기 때문입니다.우리에게는 동독을 조금씩 흡수해나간 서독의 높은 경제력도 없고 상대는 동구의 막스­레닌주의보다 가부장적인 민족주의적 단일지도체제를 가진 북한입니다.우리의 목표를 분명히하고 저지선을 분명히 하는 것만이 북한을 한걸음이라도 움직이게 하는 길일 것입니다. ▲이명영교수=김대통령은 중요한 사안을 영수회담을 통해 결정짓는 스타일입니다.김일성주석이 제아무리 능수능란하다 해도 직접 만나 얘기해보면 문제가 풀릴 수 있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그러나 김주석은 수십년에 걸쳐 혼자 북한을 통치해왔지만 정책을 추진하는데 몇가지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노동당과 정무원,최고인민회의등에서 결의한 기본노선을 변경하지는 않습니다.그 원칙이라는 것은 남한정부가 괴뢰정부라는 것,미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것,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등입니다.그러므로 북한은 앞으로 실무접촉등을 통해 이러한 사항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하는 쪽으로 분위기를 조성하려 할 것입니다.그들은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받아들이자니 곤란한 조건들을 계속 내세우려 할 것이 분명합니다.우리측도 마찬가지로 그런 제안을 북한측에 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우리가 양보하면 북한도 양보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것이 좋습니다.그들은 오히려 또 다른 것을 양보하도록 요구할 것입니다.득촌진척,담담정정가 바로 그들의 전술입니다. ▲이용필교수=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핵문제에 대한 성의를 보이는 대가로 평화협정체결을 통해 국제사회의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습니다.우리는 북한측이 소극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은 남북한 공동합의서및 비핵화선언을 성실히 이행하도록 촉구해야 합니다.북한의 정치공세에 핵문제의 해결을 역으로 촉구함으로써 북한으로부터 실질적으로 이행이 가능한 약속들을 얻어내야 하는 것입니다.북한은 「회담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노력」등 비록 애매한 수준에서나마 주한미군철수,팀스피리트훈련중지등을 요구할 수 있는 카드를 마련하려 할 것입니다.미국에 대해는 주장을 펴기위한 사전준비작업이라고도 볼수 있죠.심각한 북한의 경제난도 미국의 북한 목조르기만 벗어나면 극복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고 있을 겁니다. ▲박실장=상호주의 원칙에 의해 김일성주석이 서울에 올 가능성은 아직 점치기 힘듭니다.모처럼 이루어진 남북정상회담을 결렬시킨다는 것은 북한이 바라는 미국­북한간 관계개선에도 곤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봅니다.우리가 철저히 대비하되 줄 것은 주면서 설득에 나서고 실현가능한 대북지원계획을 제시하기 위한 준비를 해나간다면 북한의 딴 생각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입니다. ○대화위해선 강경책도 ▲이용필교수=북한은 애매모호한 상태에서 미국과의 관계,우리체제와의 역학등을 고려하면서 회담을 끌고갈 것으로 보입니다.우리는 독일과 예멘의 경우를 다각도로 검토하면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서독은 체제의 우월성을 앞세워 동독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 했는데 한반도에서는 오히려 북측이 남측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최근 북한이 어렵고 곧 무너질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북의 체제관리능력을 과소평가한 측면이 있습니다.그들은 정치선전에 매우 능란하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이명영교수=28일자 예비회담 합의문도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북한에 관한한 포괄적 또는 원칙적 합의가이루어졌다는 것은 아무것도 합의되지 않았다는 것과 같습니다.예비회담합의문은 그 자체가 실천의 아무런 담보도 되지 못합니다.북한의 의도에 대한 99%의 경계와 1%의 낙관만이 실제적인 회담성과를 가져올 수 있는 태도라고나 할까요. ▲이용필교수=언론등에서 북에 대한 경계론을 펴는 것이 오히려 정부에 유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정치지도자와 국민이 단결해서 지혜를 짜내야 합니다.파업이 계속되고 남한사회가 뒤죽박죽이 되면 북한이 오판하게 되고 상황은 더 어려워질지 모른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 YS의 통일경쟁력/최평길(시론)

    북한지도부는 한국과 러시아 및 중국의 수교로 3백60도 외교포위를 당한데다 바닥이 드러난 경제,서독식 흡수 통일에 대한 위기의식,정권승계의 부담 속에서 가장 경제적이며 가장 파괴력이 있는 방편으로 「핵」을 선택하게 되었다.최근 평양주재 러시아대사관 공사로 근무하다 귀국한 제니소프 러시아 외무부국장은 한달전 필자에게 『북한 정부의 과장급 이상은 남한 주도의 현실성있는 통일에 일종의 공포감을 느끼고있다』고 북한의 내부사정을 말한 바 있다. 이에반해 한국은 북한핵 개발에 미국이 무력대응을 할 때 발생가능한 전쟁공포감에 시달리고 있다.6·25에 대한 연상과 최신의 무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은 더욱 공포감을 느끼는 듯 하다.그러나 체제붕괴,흡수통합,전쟁 공포의 삼중 공포감에 시달리는 북한이 보다 어려운 위치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시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북한의 제의로 추진되고 있다.북측의 경우 안병수·백남준 회담꾼 말고 이번 예비회담에 나오는 김용순은 실세 중의 하나이다.김일성대학 출신으로 해외유학이나 재외공관근무경험이 없는 국내파이긴 해도 노동당 국제부장이였으며 해외감각이 있고 불어에도 능통한 김용순 최고인민회의통일정책위원장이 예비대표로 온다니 무게는 다소 실리는 것 같다.1990년말 루마니아 차우세스쿠가 무너지고 체코의 무명 지하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이를 감지하지 못한 구 소련 KGB나 외무부,당 외교 계통에서는 대경실색하여 다음의 민주화 대상국은 북한으로 보아 고르바초프의 직접 명령으로 소련 공산당 국제부 극동본부의 트카첸코 본부장은 김일성 이후 차세대 지도자 후보 1백인 리스트를 만들었는데 10위권 이내에 김용순이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민족주의자 조만식·국내 공산파 현준혁·소련파 허가이·연안파 김두봉·자기식구 박금철·심지어 신세대 이용무 장군까지 서로 이간시켜가며 숙청의 무대에서 방어자로 자란,그리고 중국과 러시아의 비위와 수모와 권력이동을 교묘히 이용해 오며 북한의 예수로 자처하는 80고령의 김일성은 중학교육을 받았으며 일제하의 민족 게릴라출신의 노쇠한 우회 돌파형의 정치술수가이다. 해방세대의 대학교육을 받고 야당의 정적을 처리하고 정보정치속에서 줄기찬 도전자로 성장한 투사형 김영삼대통령은 정면돌파의 정치전략가이다. 체제붕괴와 세습체제 종말,남한에 의한 흡수통합,핵무기제조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공포의 3중고에 시달리는 김일성에게 김영삼대통령이 주저하거나 일말의 불안감을 가질 하등의 이유가 없다.따라서 가능하면 판문점이나 개성 정도에서 7월중에 북미회담과 맞물린 정상회담을 하되 시간과 장소에 너무 구애받을 것이 없다.오히려 느긋한 쪽은 남한이며 김영삼대통령 쪽이다. 그러나 반드시 관철해야 될 일은 회담의제이고 처음 만남에 간결하고 정확한 메시지가 담겨야 하는데 여기서는 다음의 다섯가지 의제를 제시하고 분명히 설명해야 될 것이다. 첫째는 북한이 핵무기제조를 중단하고 그간의 경위를 소상히 IAEA는 물론 남한에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이 불이행될때 남한도 단시일내에 북한보다도 더 빨리 핵무기제조를 할 수 밖에 없음을 통고해야 할 것이다.특히 제조능력은 갖추고 있더라도 만들지는 않는다는 메시지를 주어야 한다.둘째 정권승계나 경제난·대중봉기 등 북한의 혼란이 있다해도 경제원조 등은 있어도 남한이 먼저 의도적으로 흡수통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현재의 남한경제여건과 남한 국민이 통일비용부담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밝혀야 한다.셋째 무슨일이 있어도 남북한 관계는 전쟁이 아닌 평화적 해결이며 그 실질적·상징적 표상으로 남북한 정상 핫라인을 개설하여 항시 두 정상이 전화로 통화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넷째는 이렇게 될때 북미간의 외교수립이나 국제관계에서 남한이 협조해야 할 것이며,다섯째는 군축·남북경제·사회·문화교류,특히 북한이 원하는 식량·원유원조·남북교역·두만강 특구 등 모든 경제교류 협조의 일대 물꼬를 트는 대담한 큰 정치 회담을 이끌어야 될 것이다. 통일시대의 YS와 IS의 대좌가 임박한 이때 YS의 국제경쟁력 향상,국내 정치 주도권 장악에 이어 자유민주체제를 위한 통일정국의 장악력을 기대해 본다.
  • 구소 한인의 수난/이호철(일요일 아침에)

    구소련 해체와함께 불어닥친 민족주의의 회오리에 휘말려 현지의 우리 동포들이 또다시 수난을 겪고 있다고 한다.전체 고려인의 75% 정도인 35만여명이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크와 카자흐에 밀집되어 살고 있는데,각 공화국이 소련방에서 벗어나 독립하면서 고려인들은 어느 나라에서도 괄시를 받는 소수계로 전락,집단농장이나 교단에서 줄줄이 쫓겨나고 있다는 것이다.특히 이 지역은 전통적인 회교권이어서 「이제 우리 나라는 독립국가이니 카자흐어로 강의하라.그렇지 못하면 강단에서 내려오라」는 지시를 내리고 이런 식으로 쫓겨난 교수도 한두명이 아니라고 한다.그리하여 그들은 오갈 데없이 옛날의 고토인 연해주 쪽으로 몰리며 떠돌이신세가 되고 있고 동족끼리 모여사는 신한촌 건설에 기대를 모으고 있다.지난번 김영삼대통령의 러시아방문 때도 현지의 고려인 동포들은 새로운 정착지에 관해 어떤 형태로든 건설적인 소식이 나오길 기다렸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들 태반은 지난날 어떤 형태로든 항일독립투쟁에 가담했던 선열의 후예들이거나 일제 식민치하를 거부하고 유랑을 했던 지사들의 후예들이다.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홍범도장군도 여직 그곳에 묻혀 있거니와 1937년 어느날,스탈린의 명령 한마디에 그곳 연해주 쪽의 동포들은 한사람 예외없이 쓰고 살던 집과 세간살이 일체를 그냥 고스란히 둔채 남녀노소 전원이 밀봉화차에 실려 몇날 며칠 대소변도 제대로 가리지 못한채 낯선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내팽개쳐졌던 것이다.그때 스탈린일당은 연해주의 동포들을 몽땅 일본첩자로 보았던 것이다.그리하여 그들은 얼어죽고 굶어죽고,그러나 우리 민족 특유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새 삶의 터전을 잡고 고려인의 기상을 떨치었다.특히 농사일에 들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지금까지 주위의 이민족과 잘 융화하고 근면한 민족이라는 호평을 받아왔다. 그런데 별안간에 이들은 오갈데 없는 신세로 떨어져 그 옛날의 고토인 연해주 쪽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연해주의 하바로프스크시와 주변지역 한인사회도 중앙아시아출신,사할린출신,북한출신 등으로 분열되어 있어 새로 떠돌이신세로 쫓겨오는 중앙아시아의 동포들은 온전하게 기댈 곳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딱한 처지를 도와줄 길이 없을까. 현지 고려인들은 러시아정부로부터 1937년의 강제이주에 대한 사과도 받아냈다고 하며,러시아정부는 현지의 떠돌이신세가 된 고려인들의 정착을 위해 25㏊의 부지도 제공하겠다는 의사도 내비쳤다고 한다.다만 돈이 없는 러시아정부로서는 더 이상의 경제적인 지원에는 난색을 드러내고 있다. 우즈베크에서 경리담당 공무원이었던 한 중년여자는 두 자녀를 둔채 혼자 연해주쪽으로 쫓겨와 보따리장사를 하면서 언제쯤에나 가족들을 데려올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다음과 같이 푸념을 하더라는 것이다. 『자치공화국이 있는 독일민족,유대민족은 모두 그곳으로 갔지만 한인들은 갈곳이 없으니 천상 부모들이 살았던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다』 그나마 친척이나 연줄이 있는 사람은 하바로프스크 변두리에 단칸방이나마 얻었지만 우수리같은 소도시나 시골로 흘러들어간 사람은 어떻게 됐는지 생사 소식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자,러시아 현지의 우리 선열들의후예가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것에 우리는 어떤 구원의 손길을 뻗칠수가 있을까.「25㏊의 부지」! 그것이 확 눈에 들어온다.러시아정부가 지난날의 죄과도 있어 고려인의 정착을 위해 25㏊의 부지를 제공하겠다는 뜻을 내비쳤지만 그것을 제대로 받아낼 「기구」같은 것은 아직 없는 것 같다.LA의 한인들처럼 그곳의 한인들도 몇갈래로 찢겨져 으르렁거리고만 있는것 같다. 이참에 우리 정부도 이 문제에 적극성을 보여야 할 것이다.심지어 북한에서조차 두고 있는 해외교포문제 전담기관이 우리 정부 안에는 아직 없다는 사실. 연해주 고려인 정착촌이 마련되면 북한 벌목공문제도 훨씬 쉽게,자연스럽게 풀릴 길이 열리지 않을까. 정부기구를 늘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만 러시아·중국·미국·일본 등의 교포문제를 다루는 「교민청」같은 것도 한번 생각해 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 한·러 협력의 새지평 열다(사설)

    국가관계를 긴밀히 하는 데는 정상외교를 능가할 방법이 없다.김영삼대통령의 러시아방문을 보면서 하게 되는 생각이다.모스크바 도착에서부터 정상회담과 공동선언,의회및 대학연설등 김대통령의 정상외교는 한마디로 주춤하던 한·러관계의 신전개를 예고하는 것이었다.러시아가 새로운 우방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러시아는 역시 무엇보다도 먼저 안보·통일차원에서 대단히 중요한 나라다.대통령의 러시아 정상외교는 우선 그런 시각의 집중적인 노력을 보여주었다.북핵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적극적인 협력,특히 제재동참의 다짐등 공조체제구축은 중요한 성과라 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일방적 연료봉교체 강행으로 대북제재가 임박한 시점에서 미·일에 이은 유엔안보이사국 러시아와의 제3의 공조체제는 대북압력면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닐 수 없다.수교에서부터 그랬지만 북핵문제에 있어서도 중국보다는 한발 앞선 러시아의 적극적인 협력자세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대통령의 공항도착및 공식환영행사등은 특별한 감회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모스크바공항의 태극기와 애국가,그리고 의장대사열은 도쿄나 워싱턴에서의 그것과는 또다른 새로운 무엇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45년여에 걸친 단절과 대결의 역사와 거리를 청산하고 좁히는 중요한 순간들이었다.재러시아 40만동포의 감회가 어떠했을까.시베리아 벌목공들도 볼 수 있었을까.정상의 교환방문은 빈번할수록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래지향적인 동반자적 우방관계의 발전을 가장 잘 보여준 합의는 청와대와 크렘린간의 비상전화연락선인 핫라인을 설치키로한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그것은 우호협력의 상징이다.그리고 한반도 유사시 러시아의 북한지원 자동개입을 규정하고 있는 북·러조약의 사실상폐기선언도 불만스러운 면은 없지 않지만 환영할 일이라 생각한다.선언에 그치지 않는 구체적 조치의 강구가 따라야 할 것이다. 김대통령은 「새로운 한·러 1백년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러시아의회 연설을 통해 오랜 역사와 상호보완적인 경제환경등 양국의 특별관계를 강조했다.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공통의 가치관에 입각한 개혁협력도 다짐했다.보수민족주의 회귀경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러시아의회와의 첫대면이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연설이었다. 러시아와의 관계는 당장보다는 장기적인 차원에서 보고 생각하며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민주통일의 협력자요 21세기 동반자로서의 우방러시아를 만들어가는 것은 15억달러차관의 당장 회수보다 중요한 일일지 모른다.김대통령의 북방려로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새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 김영삼대통령 방러 등정(사설)

    우리가 한반도에서 나라를 경영하는한 생존과 발전,통일에있어 주변 4대강국의 협조와 지지,그리고 보장은 필수적이다.김영삼대통령이 취임이후 그동안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등을 대상으로한 4각외교에 소매를 걷고 나선것은 이지역의 평화와 우리의 안보를 보장하는 환경을 자주적으로 개척하겠다는 구상에 따른것으로 이해해야할것이다.새로운 세기,아시아 태평양시대를 열어가는 동반자들인 이들 이웃들과 공고한 경제적 협력관계를 구축하려는 노력이기도하다. 오늘 대통령이 장도에 오르는 6박7일간의 러시아 공식방문은 바로 그 4각정상외교의 마무리부분이다.작년 11월의 미국방문,그리고 금년 3월 일본과 중국방문에이은 이번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공식방문은 21세기를 내다보는 4각외교의 틀을 완성하는 북방외교일정이다. 우선 당장에는 옐친 대통령과의 두차례 정상회담에서 논의되고 공동입장으로 천명될 북한핵의 해결을 위한 협력방안이 관심을 끌고있다.그만큼 우리의 통일 안보 외교차원에서 러시아는 중요한 나라다.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일뿐아니라 아직도 미국 다음가는 군사대국이며 구 소련으로서 맺은 북한과의 군사 경제관계를 상당부분 유지하고있다. 세계최대의 국토에,석유에서 다이아몬드에 이르기까지 세계최대의 자원보유국이 러시아다.단단한 기초과학과 고도의 첨단기술을 가져 경제적 측면에서도 무한한 잠재적 의미를 가지고있다.어업협력에 이르기까지 우리와의 상호보완적인 협력분야는 매우 넓다.우즈베키스탄도 정세가 안정되고 자원이 풍부해 우리와 경제협력의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안보와 경제협력의 동반자로서 러시아에대한 우리의 접근자세는 발전적인 방향으로 재정립될 필요가 있다.무엇보다도 어려움에 처해있는 오늘보다는 내일을 보는 장기적인 안목과 그들이 필요로 할때 적극 협력하는 과감한 발상이 요청된다.경협문제나 시베리아개발문제에있어 그런 태도가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런점에서 김대통령의 모스크바대학연설등 학술 예술 교류촉진은 진정한 양국간 이해증진을 위한 올바른 방향의 노력이라 할것이다.더욱이 러시아는 최근 보수민족주의 경향을보이고있다.외교에서는 대러시아주의의 강대국지향적 변화가 나타나고있다.이러한 변화에 대처하고 보다 장기적인 유대를 다지기위해서는 교류의 분야와 대상을 다원화해야 할 것이다. 김대통령이 귀로에 하바로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 들러 동포들을 격려하는 의미도 결코 작지않다.독립투사들이 활동했던 연해주방문은 민족사재정립뿐 아니라 우리경제의 러시아 극동지역진출에도 튼튼한 기반이 될것이다. 이번 김대통령의 북방려정이 한·러관계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 큰 성과를 거두기를 기대한다.
  • 우즈베키스탄/김 대통령 방문 계기로 본 경제현황(현장/세계경제)

    ◎공업도약 꿈꾸는 자원부국/92년 CIS국중 유일한 GNP성장/사유화작업 착착… 항공산업은 수준급/실크로드 중심지로 명성… 내륙수송에 의존 약점 금과 면화의 나라 우즈베키스탄.과거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중앙아의 이슬람문명을 찬란히 꽃피웠던 우즈베키스탄이 사회주의 소련방의 구각을 벗고 시장경제국가로의 빠른 변신을 꾀하고 있다.한반도 면적의 두배에 달하는 44만7천㎦에 2천2백만의 인구를 포용하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은 파미르고원에서 아랄해에 이르는 중앙아의 한복판에 길게 누워있는 지리적 이유로 중앙아국가들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 해 왔다. 특히 금(연70t생산,세계8위)·우라늄·석유·천연가스·동·텅스텐등 주요 광물자원의 세계적인 매장량으로 세계 유수의 공업국으로의 도약이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우즈베키스탄은 그동안 면화가 전체 수출액의 84%를 차지하는 농업위주의 단일 경제체제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구소련 붕괴의 와중에서 지난 92년 러시아가 1인당 국민소득이 전년도의 59%로 하락하는등 대부분 독립국가연합(CIS)국가들이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때 우즈베키스탄만은 1백12%로의 증가를 나타내는등 비교적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구축 해 왔다. 소련붕괴와 함께 91년12월 첫 자유선거에서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이슬람 카리모프대통령은 공산주의 대신 민족주의적이고 시장경제원칙에 충실한 정책을 펴 왔다.급격한 개혁보다는 정치적 안정에 큰 비중을 두며 점진적으로 정부개혁을 추진 해왔다. 그러면서도 카리모프는 이른바 「우즈베키스탄식 사유화 프로그램」으로 불리는 ▲국유재산의 사유화 ▲기업의 탈국유화 ▲군수산업의 민수용 전환등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국내총생산(GDP)의 85%를,또 국내고용의 80%를 국영기업이 차지하고 있는 고도의 중앙통제경제를 시장경제화 하기 위해서는 사유화 촉진이 필연적이었다.의회도 사유재산,토지임차,외국인투자등에 관한 새법률을 통과시켜 이를 뒷받침했다.그 결과 이미 국유주택의 83%가 사유화 됐으며 금년말까지는 전체를 사유화할 계획이다.또 무역및 공공서비스 분야의 60%와 관개된 토지 1백만㏊도 직접 농경을 전제로사유화 됐다. 카리모프는 또 국내 공업생산의 60%가 구소련기업들에 의해 이뤄질 정도로 공업분야가 구소련의 생산 네트워크에 전적으로 의존돼 있다는 사실을 중시,취임후부터 줄곧 구소련에의 의존을 줄이기 위한 경제의 구조적 개혁을 추진 해 왔다. 우즈베키스탄 공업제품의 질을 국제수준에 맞추고 시장구조와 가격을 국제적 조건에 따를 것을 강조해온 결과 지난해부터 농업관련산업과 산림가공업,건축자재분야등에서는 구소련 생산네트워크와의 단절이 가능케 됐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 경제의 큰 약점은 중앙아 내륙에 깊숙이 들어앉은 지리적 위치에 있다.가장 가까운 흑해연안의 항구까지 3천㎞,중국의 항구까지는 5천㎞가 떨어져 있어 수송로 확보는 항상 중요한 목표가 돼 왔다.따라서 인접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대외경제협력이 더욱 중요시 돼 92년초 대외경제정책수립및 수출입활성화,해외정보수집등을 위해 부총리급을 장관으로 하는 대외경제부를 신설했다.또 6월부터는 모든 수입관세를 폐지하기도 했다. 이 부서 산하에는 11개의 각종 단체및 회사들이 소속 돼 있어 우즈베키스탄에 투자를 원하는 외국기업인들에게 광범위한 서비스를 제공해주고 있다.대표적인 단체는 우자그로임팩스로 면화수출및 농산물 수출입을 주로 맡고 있다.또 우즈프로매쉬임팩스는 기술및 기계 수출입을 전담하고 있으며 이노바트시아는 종합적인 대외무역상사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아말리크 마이닝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생산되는 금과 동의 제련을 맡고 있으며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는 항공기산업을 주도하고 있다.셀코즈매쉬그룹은 산하에 34개의 공장을 거느리고 있으며 농기구제작부터 국민차 생산에 이르기까지 연간 1억달러 이상을 생산,그 가운데 1천만달러 이상을 수출하고 있다.스레다즈카벨 공업협회는 중앙아 최대의 케이블 생산업체로 구소련 두번째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내화물질 처리공장인 인티그레이티드 플랜트는 구소련에서 최대규모로 코발트·니켈·티타늄·텅스텐등의 가공수출을 맡고 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이 추진중인 대형프로젝트는 트랜스아시아­유럽통신망,2000년까지 전체 철도의 전철화및 4백㎞ 신규부설,관개시설 확충,아랄해 사막화 방지등 다양하다. 내달 4일부터 6일까지로 예정된 김영삼대통령의 우즈베키스탄 방문은 시기적으로 구소련의 영향력 탈피를 추구하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에 새로운 경협파트너로 한국의 중요성을 더욱 높여줄 적기로 평가되고 있다.실제로 한국의 앞선 기술및 자본과 우즈베키스탄의 풍부한 자원이 결합된다면 가장 이상적인 협력의 모델을 창출할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뿌리 깊은 일 국수주의/되풀이 되는 망언의 저변

    ◎“군사주의 정당화” 보수세력 공통된 인식 일본의 군국주의 「정당화」 망언으로 국제적 파문을 일으켰던 나가노 시게토(영야무문) 법상이 7일 사임했다.그러나 그가 사임했다고 해서 일본의 왜곡된 역사인식이 바뀌는 것은 아니며 이번 사건을 통해 일본에 대한 국제적 불신은 더욱 높아졌다. 하타 쓰토무 총리는 나가노의 망언이 심각한 외교문제화되고 야당의 정치공세가 강화되자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그의 사임은 한국·중국등 아시아국가들의 반발을 무마하고 국내의 정치공세를 약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취임 10일만에 물러나는 나가노법상의 사임은 소수연립정권으로 불안한 출범을 한 하타정권에 중대한 정치적 타격이 아닐수 없다.더욱이 야당이 하타총리의 책임론을 주장하고 있어 하타정권의 정국운영은 매우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사회당등 야당은 하타정권이 헌법으로 금지된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등 군사적 역할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호소카와정권과는 그 성격이 바뀌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가노법상은 사임했지만 일본의 왜곡된 역사인식에는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다.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은 오늘의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보수세력의 공통된 역사인식이다.나가노 법상은 6일의 기자회견에서 『남경대학살이 정말로 많은 사람을 죽인 대학살인지 의문을 갖고 있다.1천명이나 2천명을 죽인것도 대학살이라고 정의할수 있다는 의미에서 대학살이라고 말할수 있다』고 밝혀 1천∼2천명 정도만 희생됐다는 뉘앙스를 나타냈다.그러나 남경대학살은 수십만명이 희생된 역사적 사실이다. 일본의 보수우익을 대표하는 산케이(산경)신문은 더욱이 6일 석간에서 「남경대학살」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희생자수가 확실치 않기때문에 「남경사건」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고 보도했다.일본교과서에 「대학살」이라고 표기된 것은 정부의 실책이라고 이 신문은 지적했다.일본의 보수세력은 태평양전쟁도 식민지해방과 대동아공영권 확립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합리화」하기 위해 「대동아전쟁」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강하다.그러나 더욱 섬뜩한 것은 일본의 두개의 얼굴이다.나가노법상이 자신의 망언을 3일만에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철회하듯이 일본은 망언과 사죄라는 편리한 이중행동을 반복해오며 국민들에게 우월의식과 국수적 민족주의를 심어주고 있다.일본을 더욱 신뢰할 수 없는 것도 이러한 이중성때문이다. 일본은 힘이 있을때마다 밖으로 눈을 돌렸다.그것이 일본의 실체다.일본은 지금 전후 축적한 경제적 힘을 정치·군사적 영향력으로 전환시키는 실험을 하고 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