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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꽂이]

    ●쇼펜하우어 세상을 향해 웃다(랄프 비너 지음, 최흥주 옮김, 시아출판사 펴냄) 철학가 쇼펜하우어는 대표적인 염세사상사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플라톤과 인도 베다철학의 영향을 받은 염세관을 기조로 하는 그의 철학적 인식 방법은 19세기 후반 세기말 현상에 편승돼 널리 보급됐다. 그러나 이 책은 쇼펜하우어를 유머와 재치, 위트가 넘치는 재기발랄한 낙관주의자로 그린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논문인 ‘웃음론’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저서 전반에서 유머라는 정신적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1만 4000원.●고이즈미와 일본 광기와 망령의 질주(후지와라 하지메 지음, 황영식 옮김, 시대의창 펴냄) 외조부 마타지로, 아버지 준야 모두 정치인이었던 고이즈미 총리 집안 3대를 축으로 메이지유신 전후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 정치사의 추악한 이면을 다뤘다. 프리랜서 논평가인 저자는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다나카 마키코는 단지 정적인 하시모토파에 대한 자신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이즈미를 총리에 앉혔다고 주장하며 이를 악마의 향연이 시작된 좀비정치의 클라이맥스라고 냉소한다. 포퓰리즘으로 점철된 고이즈미 정권은 틈만 나면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하며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야스쿠니 유신’ 정권이며, 우정민영화는 공공선이 무너진 천민자본주의라고 비판.1만 5000원.●예수와 유다의 밀약:유다복음(로돌프 카세르 등 옮김,YBM Si-sa 펴냄) 인류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 가룟 유다. 그는 위대한 스승이자 절친한 친구인 예수를 배반한 후 죄책감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을 매 죽는다고 성서에 묘사돼 있다. 또 다른 성서에는 배가 터져 피투성이가 된 채 죽은 것으로도 나온다. 그런데 유다의 배신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동기가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은화 30닢에 눈이 멀어, 혹은 사탄의 꾐에 빠져 동고동락한 스승을 죽음으로 몰고갔다는 얘기는 어쩐지 설득력이 부족하다. 유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유일한 제자였으며, 그의 배신은 예수의 요청에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 담긴 고문서 유다복음 완역본.1만 1000원.●에드워드 사이드 다시 읽기(김상률 등 엮음, 책세상 펴냄)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으로 평생을 두 세계의 망명객으로 살았던 사이드. 그는 이슬람문화권에 대한 서구중심적인 재현의 폭력과 서구 지식체계와 담론의 관계를 파헤친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그 속편격인 ‘문화와 제국주의’를 발표하며 세계적인 학자로 떠올랐다. 탈식민주의의 선구자 사이드의 삶과 비평, 정치를 다룬 이 책은 구체적인 현실을 기반으로 한 사이드 비평의 진보적 성과를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비평이 지닌 담론적 한계도 날카롭게 지적한다. 특히 푸코의 이론에서 영향을 받은 결정론적 성격을 문제삼는다.1만 5000원.●달라이 라마와 함께 지낸 20년(청전 지음, 지영사 펴냄) ‘지구촌의 공인된 스승’ 달라이 라마를 20년간 모시며 인도 다람살라에서 수행하고 있는 청전 스님 이야기. 라닥에서의 의료봉사 활동이 눈에 띈다. 라닥은 인도의 오지로 티베트인들이 모여 사는 척박한 땅. 인도 영토이고 인도 국적이다 보니 라닥 사람들은 티베트 난민기금의 혜택도 받지 못하고 인도의 도움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형편이다. 라닥 주민들은 우리와 같은 몽골리언으로 혈통이 똑같다. 그래서인지 우리 약이 잘 듣는다는 것. 저자는 수행하면서 품었던 의문들을 풀기 위해 남방의 여러 근본불교 국가들을 방문한 뒤 다람살라에 정착했다.1만 3500원.●음식의 역사(레이 태너힐 지음, 손경희 옮김, 우물이있는집 펴냄) 동물로부터 먹을 것을 얻었던 유목민들은 새로운 방목지를 찾아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다. 그 결과 농경정착민과 유목민 사이엔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 스텝지대 유목민들은 유럽대륙을 휩쓸고 지나가기도 했고 중국과 인도에도 진출했다. 유목민들은 채소나 과일을 거의 먹지 않지만 동물 피와 비타민C가 모유의 2배, 우유의 4배나 들어있는 말젖을 먹음으로써 원기와 활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인류 음식문화의 서사시라 할 만한 책.1만 8000원.
  • [씨줄날줄] 한·일 악플 전쟁/이목희 논설위원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 당시 북한의 예상밖 선전에 우리 국민들은 의기소침했다. 이때 영웅으로 떠오른 선수가 포르투갈의 에우제비우.8강전에서 4골을 성공시켜 북한에 0-3으로 지고 있던 상황을 단숨에 역전시켰다. 대회 직후 박정희 정권은 ‘북한 타도’를 기치로 중앙정보부 밑에 양지팀을 급히 창설했다. 일류선수를 징집해 해외전지훈련 등 아낌없는 지원을 퍼부었다. 당시에는 남북 축구에서 지면 그야말로 ‘죽음’이었다. 실력이 북한에 못 미쳐 승산이 없으면 월드컵 예선전을 아예 포기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좀 대범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 영국의 한 언론사는 잉글랜드월드컵에서 북한,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의 활약을 역대 10대 이변으로 꼽았다. 이웃이 잘 나가면 배가 아플 수 있다. 하지만 지구촌 차원에서는 ‘동북아의 선전’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제 남북한 사이에는 스포츠 협력이 잘되는 편이다.6·15행사 참석차 광주를 방문한 북측 대표단장은 “남쪽이 월드컵 결승에 올랐으면 좋겠다.”고 덕담을 했다. 북한 대신 미운 오리로 떠오른 상대는 일본이다. 과거에도 한·일 축구전의 라이벌 의식은 대단했다. 그러나 일본팀의 다른 경기를 놓고 희비가 극명하지는 않았다. 요즘 들어 독도 논란으로 반일 감정이 끓어올랐다. 이것이 자연스레 스포츠로 옮아가고 있다. 일본이 호주에 1-3으로 역전패한 뒤 한·일 네티즌간 ‘악플(악의적 댓글)전쟁’이 벌어졌다. 히딩크 호주팀 감독이 한국을 위해 일본을 이기겠다고 언급, 양국민의 민족감정에 불을 질렀다.“일본의 패배가 고소하다.”는 한국 네티즌의 반응에 일본이 발끈했다. 야후 재팬 월드컵게시판에 ‘한국, 놀리지마’라는 별도 코너가 생겼다.“프랑스, 스위스가 한국의 코를 납작하게 해달라.”는 기원이 잇따르고 있다. 일본의 고집불통 지도자들이 미운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한국인이 속좁지 않음을 보여주자. 남북한 관계처럼 스포츠가 한·일 우호회복에 도움을 줘야 한다. 중국을 포함, 동북아 3국의 민족주의를 축구 경기와 응원을 통해 누그러뜨려야 한다. 월드컵에서 한국, 일본팀이 모두 잘 싸우는 게 좋다. 아시아지역의 국제 위상이 높아지고, 월드컵 출전권 확대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6)한국 최고의 목조 성당 강화읍 성당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6)한국 최고의 목조 성당 강화읍 성당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읍에 들어선 뒤 고려궁지로 향하다가 오른쪽 좁은 골목길을 끼고 구릉 정상에 오르면 만나게 되는 강화읍성당(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북산과 남산의 가운데 지점에 한옥으로 잘 지어진 이 성당이 바로 개항기 최대의 선교 거점이었음을 아는 이는 드물다. 전통 목조 중층 한옥의 성당은 정면 4칸, 측면 10칸의 총 40칸 규모. 팔작지붕을 얹고 목골 벽돌조로 외벽을 두른 한옥이지만 내부공간을 전형적인 삼랑식(三廊式) 바실리카 양식으로 연출한 동서양의 정교한 만남이 이채롭다. 지금은 관할 사제 1명에, 불과 100여명의 신자가 적을 두고 있는 작은 교회지만 1900년 세워질 때만 하더라도 강화에선 기독교를 통틀어 가장 먼저 세워진 큰 교회였다. 성공회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희준을 배출한 성당이고 서울대교구장을 지낸 정철범 주교도 이 성당 출신. 이 성당보다 조금 늦게 강화에 세워진 온수리 성당은 현재 강화에서 교세가 가장 크지만 여전히 강화읍성당은 이 지역 12개 교회와 기관을 대표하는 중심 성당이다. 성당의 모습은 세워질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남산을 향해 외삼문, 내삼문, 성당, 사제관이 늘어서 마치 배의 형상을 연상케 한다. 선교사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가 되자.”는 뜻을 세워 배의 모양으로 지었다고 한다. 우선 성당의 바깥 출입문인 외삼문은 뱃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강화읍내를 훤히 내려다보고 있다. 외삼문에서 3계단을 더 올라 내삼문을 지나도록 돼 있는데 여기에는 종각이 들어서 있다. 원래 이 종각에는 1914년 영국에서 들여온 종이 매달려 있었는데 서울대성당의 것보다 조금 작지만 음색이 아름답고 소리가 4방 30리까지 울려퍼졌다고 한다.1945년 일제에 의해 징발되었으며 지금의 종은 1989년 신자들이 모금해 다시 매단 것이다. 종각 중간에 서서 배의 선복에 해당하는 성당의 팔작지붕을 올려다보면 가장 먼저 ‘천주성전(天主聖殿)’이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성당이나 예배당에서 일반적인 ‘당(堂)’ 대신 성전으로 쓴 것이 독특하다.‘천주성전’ 현판 밑 4칸 벽면에 주련이 걸렸는데 이 주련 위에 연꽃 무늬를 장식한 것도 인상적이다. 출입구인 전실과 회중석, 통로, 지성소(대제대), 감실(소제대), 예복실로 구성된 성당의 내부는 바깥에서 보기와는 영 딴판. 모두 20개의 큰 나무기둥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데 전실에서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면 3번째 기둥 중간에 세례할 때 쓰이는 화강암 성천대가 있다.6번째 기둥부터 북쪽으로 지성소와 제대가 들어서 전체적으로 이 곳에 시선이 집중되도록 꾸몄다. 지성소 안에는 회중석 마루보다 높은 계단 위에 돌판을 깔고 그 위에 화강암 제대를 고정했다. 이 제대는 의식을 거행할 때 신자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신성한 곳으로 성당 전체적으로 가장 정성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제대 뒤 가운데 기둥에 하느님 야훼를 뜻하는 ‘만유진원(萬有眞原)’이라 쓴 현판은 당시 선교사들이 선교의 근원으로 삼았다고 한다. 지성소 북쪽 1칸을 2계단으로 높이고 제대를 놓은 후 정면에 성체를 봉안하는 성막을 안치했는데 이곳이 작은 예배가 이루어지는 집회공간. 성당의 구조상 미사때 사제가 신자들에게 등을 보인 채 집전하는 형식이 살아 있는 유일한 성당이기도 하다. 나름대로 초기 교회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유배지 강화에 이처럼 큰 성당이 세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초기 선교사들이 이곳을 영국의 이오나(Iona) 섬처럼 신앙의 성지로 삼으려는 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서안에 있는 이오나 섬은 6세기쯤 콜롬바(Colomba)가 들어가 교회를 개척하고 수도원을 세운 성공회의 뿌리. 유배지 강화도도 당시만 해도 소외와 핍박의 땅으로 교회가 전혀 없었다. 선교사들은 강화외성 출입문인 진해루 밖 나루터에서 한옥 한 채를 마련해 처음 선교를 시작했는데 바로 이곳이 강화 최초의 교회인 셈이다. 당시 조선정부가 해군을 육성하기 위한 해연총제아문을 설치해 그 직속으로 조선수사해방학당을 1893년 이곳에 설립했던 것도 성공회가 이곳에서 가장 먼저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던 요인. 당시 영국인 해군장교와 포병교관이 임명되고 통역으로 고용된 성공회 교인이 영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강화읍성당이 축성된 것은 성공회 3대 주교인 조마가(트롤로프) 신부때.1899년부터 터닦기를 시작,1년간의 공사를 거쳐 1900년 11월15일 축성식이 열렸다. 조마가 신부가 신의주에 직접 가서 백두산 원시림 적송을 뗏목으로 강화까지 운반했으며 도목수는 경복궁을 신축할 때의 도편수였다고 전해진다. 조마가 신부는 지금도 80세 이상의 고령자들에게 회자될 만큼 강화도 지역에서 그의 치적은 곳곳에 담겨있다. 기와와 석재는 모두 강화산을 썼으며 성당내 석물과 담장 기단은 인천에서 온 중국인 석공들이, 담장 미장은 강화 주민들이 맡았다. 강화읍성당이 축성된 뒤 감리교, 장로교 등 개신교와 천주교가 앞다투어 선교에 나서 교회들을 세우면서 그야말로 강화는 종교 각축장이 되어갔다. 지금 강화읍성당 주변에 감리교 중앙교회, 장로교 성광교회, 천주교 강화성당 등 강화지역에선 가장 큰 교단의 중심 건물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어 당시 선교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강화읍에선 지금 이 교회들과 주변의 고려궁지, 용흥궁 등을 연결하는 문화벨트 조성공사가 추진중이다. 강화읍성당 관할사제이자 성공회 강화교무국 총사제인 김준배(57) 신부는 “성공회는 구한말 열강의 각축과 맞물려 경쟁적으로 진행됐던 기독교 선교양태와는 사뭇 다르게 한국문화와의 접목을 시도했고 강화읍성당은 그 토착화의 전형”이라면서 “기독교계에서 한국 초기 선교의 역사와 토착화된 교회 양식을 담고 있는 이 성당을 원형대로 보존할 것”이라고 밝혔다. kimus@seoul.co.kr ■ 강화도 의병운동과 교회 1907년 강화도에서 기독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번졌던 정미 의병운동은 지금까지 큰 아픔으로 남아있다. 정미 의병운동이란 정미조약 직후 강제해산당한 군대 출신들이 의병을 조직해 무력투정을 전개한 사건. 이동휘 연기우 지흥윤 유명규 등이 주도한 의병들이 일본인 순사와 일진회 강화지부 총무였던 강화 군수 정경수를 살해했는데 이와 관련해 일본군 수비대가 의병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교인과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강화 의병운동의 핵심인 이동휘는 강화 진위대장 출신으로 1905년 강화읍에서 감리교로 개종한 인물. 강화읍교회의 권사로서 강화 지역을 순회하며 선교사들로부터 ‘강화의 바울’이란 별명을 얻었다. 이동휘가 감리교 권사였다는 사실 때문에 감리교회는 민족주의 단체로 인식됐고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에 비해 성공회는 직접적인 무력투쟁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중도적인 입장을 택해 많은 주민들을 구한 공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 주민들이 전란을 피해 강화성공회 성당이나 수녀원에 모여들었는데 성공회 단 아덕(터너) 주교가 일본군 대장과 두차례 담판하여 일군을 물러나게 함으로써 화를 면했던것. 성공회는 “일군의 공격을 사전에 막아 주민들의 희생을 줄였지만 일본군의 무력행동에 대한 비판없이 사태수습에 나선 것은 아쉬움”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 “동아시아 인식의 공동체 만들자”

    요즘 지식인들의 화두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한·중·일 시민사회의 연대’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동북공정 문제 등으로 한·중·일 3국간의 역사전쟁이 불거져서다. 이렇게 가면 대립과 갈등밖에 남지 않으니 국가나 민족의 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시민사회공간을 찾아보자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행동’이라기보다 ‘목소리’에 가까웠다. 목소리를 행동으로 바꾸기 위해 계간 ‘창작과 비평’(편집인 백낙청)과 ‘세교연구소’(이사장 최원식)가 자리를 마련했다.9∼1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동아시아의 연대와 잡지의 역할’을 주제로 국제심포지엄을 연다. 주제에서 알 수 있듯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중국과 일본·타이완에서 영향력이 큰, 진보성향의 잡지 13개사에서 16명의 편집위원이 참가한다. 중국 ‘두수(讀書)’의 왕후의 편집주간,‘민젠(民間)’의 주젠강 편집위원, 타이완 ‘인터아시아 문화연구’의 천쾅싱 편집위원, 그리고 일본 ‘젠야’(前夜)의 서경식·고화정 편집위원,‘세카이’(세계)의 오카모토 아쓰시 편집장,‘겐다이시소오(現代思想)’의 이케가미 요시히코 편집장 등이 참가했다. 한국에서는 ‘시민과 세계’ 이병천 편집인,‘황해문화’ 김명인 편집주간,‘창작과 비평’ 백영서 편집주간 등이 나선다. 이들은 미리 배포된 발제문을 통해 동아시아에서의 민족주의 분출에 대해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나가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특히 동아시아 경제블록화와 같은 식의 ‘이익’을 좇는 방식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인식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교류방안을 집중적으로 논의한다. 구체적으로 각 국의 잡지사들이 콘텐츠를 교류하는 방안 등을 의논한다.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문화마당] 1987, 2002, 2006, 시청 앞마당/심규호 제주산업정보대학 관광중국어과 교수

    그것은 갈망이 활화산처럼 분출하는 모습이었다. 어디로 튀어나갈지 알 수 없는 청춘의 마음보가 물 만난 고기처럼 높이 솟구침이거나, 무언가에 억눌려 기가 막힌 이들이 돌연 가슴을 열고 내지르는 함성, 출렁이는 물결 따라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이었다. 그것을 우리는 미치도록 뜨거움이라고 했고, 미묘하여 알 수 없는 그러나 도무지 참을 수 없는 기쁨이라고도 했다. 사실 그러한 경험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다.2002년 6월의 시청 앞에서 1987년 7월(연세대생 이한열군 장례식), 그 날을 떠올린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2006년 6월. 조금 어수선하다. 태평양 건너 한쪽에선 자유무역협정(FTA)을 저지하기 위해 악 쓰느라 목이 다 쉬고, 다른 한쪽에선 행여 협상이 잘못될까 이를 악물고 있는데, 머리에 뿔 달고 희희낙락하는 모습이나 벌겋게 핏발 선 눈으로 새벽을 맞이하는 이들의 멍한 얼굴을 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디 그뿐이랴. 미군기지 이전 문제로 소란한 평택 대추리 주민들의 눈물 젖은 마을 잔치에 어디 꼭짓점 댄스가 어울리기나 하겠는가? 하여 누군가는 언론·방송매체의 과열 경쟁과 편향적 보도로 인해 국내외 현안이 가려지는 것에 대해 나무라기도 하고, 그 이전의 순수성이 결여된 모습이나 지나친 상업주의를 질타하기도 한다. 게다가 세계인의 축제라고 떠들어 대는데 엄청난 지진으로 수천명이 사상한 인도네시아는 물론이고, 여전히 총성이 멈추지 않고 있는 여러 나라 백성들에게도 그 말이 통할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서울시가 시청 앞마당을 방송사와 신문사가 동참한 무슨 컨소시엄에 팔아넘겼다는 말도 들리고, 치우천황(蚩尤天皇)이 그려진 티셔츠는 독점계약을 맺은 업체만 제작·판매할 수 있다고 하니, 상업주의가 극성하여 급기야 민족주의를 이용하여 돈 벌기에 급급하다고 타박하는 것도 옳다. 오로지 국가 대항전에만 총력을 기울여 국내 아마추어팀이나 프로팀은 물론이고 다른 종목은 아예 지원조차 제대로 못 받고 있다는 말도 분명 사실이다. 한정된 재화가 한쪽으로 몰리면 당연히 다른 한쪽은 텅 비게 되니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남들은 열광하든 말든 내가 싫다는데 무슨 말이냐고 하는 이들 또한 적지 않을 것인데, 다른 나라처럼 별도의 안식처를 마련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이른바 세계배(世界杯)라는 것이 원래 상업주의의 화신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들만의 돈 잔치로 끝난다는 것을. 그래서 제안컨대 이렇게 말하면 안 될까? 그래 돈은 그대들이 챙겨라! 누구는 앞마당을 팔아먹고, 누구는 광고를, 또 누구는 제품을 팔아먹겠지. 그래 많이 드시도록 하여라! 그 대신 우리는 우리의 열정을 사겠다. 우리의 뜨거운 가슴에 펄펄 끓어 슬프기까지 한 기쁨을, 평생 몇 번 외쳐보거나 고백해보지 못한 내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을, 내 이웃의 심장에서 전해오는 벌떡이는 정열과 시린 아픔을 보듬어 함께 어울리겠다. 그리하여 그대들 또한 우리가 안겠다. 여전히 계몽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러나 더 이상 계몽을 요구받거나 강요당하지 않는다. 더디다 못해 짜증이 날 때도 있고, 잘못된 길로 나아가 후회할 때도 있지만, 뜨겁게 달아오르다 식을 때도 있고, 아예 모른 척 얼굴을 돌릴 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근하게 근기(根機)를 지켜나가 우리는 우리를 스스로 계몽하고 있나니, 정객과 상인이여, 그대들은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시라. 움베르토 에코, 그대의 말은 틀렸다. 혁명은 스포츠의 열기가 식지 않은 일요일에 터지는 법이니. 그대 시청 광장으로 오라! 그대는 저 물결이 무엇으로 보이는가? 나는 그것이 각자의 꿈을 이루기 위한 열망으로 보인다. 혁명은 꿈을 이루는 것 아니던가? 심규호 제주산업정보대학 관광중국어과 교수
  • [시네드라이브] 중국의 영화 배짱

    문화가 국력이란 엄연한 사실을 새삼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 스크린 안팎에도 많다. 할리우드 최대의 잠재소비국 중국이 할리우드를 대하는 태도가 그렇다. 최근 중국 당국은 ‘미션 임파서블 3’의 상영을 무기한 연기하기로 했다. 주인공 톰 크루즈가 여자친구를 구하려고 찾은 상하이 뒷골목이 대나무 빨랫줄에 속옷들이나 걸쳐놓은 남루한 장면으로 묘사됐다는 이유에서이다. 국제도시의 체면을 구겨놨으니 괘씸죄를 묻겠다는 얘기이다. 중국의 할리우드 딴죽걸기는 지난 2월에도 요란하게 외신을 장식했다. 장쯔이 주연의 스필버그 대작 ‘게이샤의 추억’이 심기를 건드렸다. 장쯔이가 게이샤가 된 것도 불쾌한데 일본인 남자의 정부로 묘사된 장면들은 도저히 국민적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한다는 이유였고, 끝내 영화는 상영금지됐다. 사전 검열제도가 없는 지구촌 국가들이 볼 때 이런 뉴스는 거의 코믹 해프닝에 가깝다. 상하이라고 뒷골목이 없을 리 없고 그곳 사람들이 대나무 빨랫줄을 쓰지 말라는 법 없으니, 중국의 제스처는 대책없는 민족주의로 꼬집히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 태도를 ‘영화 미개국’의 촌극으로 우리까지 고민없이 재단해버릴 일은 아닌 듯싶다. 스크린은 총알 없는 문화전쟁터이다. 누가 뭐래도 할리우드는 힘이 세다. 그들 입맛대로 조합된 이미지들이 세(勢)를 얻어 현실을 압도하는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향신료처럼 자주 등장하고 있는 ‘스시 바’만 해도 그렇다.2,3년 전까지 할리우드는 젓가락질 서툰 주인공을 클로즈업하며 웃기는 식사도구나 쓰는 나라로 일본을 희화화하곤 했었다. 그런데 지난해 개봉한 할리우드산 로맨틱 드라마에선 사정이 180도 바뀌었다. 스시 바에 노련한 포즈로 앉은 남 주인공은 어느새 “진정한 뉴요커라면 반드시 와봐야 하는 곳”이란 대사를 날린다. 할리우드가 스시바의 나무젓가락을 동양문화의 대변자로 일방적으로 가치 재평가한 셈이다. 스크린쿼터 축소로 의기소침한 극장가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독식하고 있는 현실이다. 중국발 외신을 할리우드와 똑같이 코믹 가십으로 즐기기엔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무래도 심상찮다.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열린세상]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 도미노/이성형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중남미의 좌파 정부 도미노 현상이 새삼 새롭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아르헨티나의 키르츠네르, 브라질의 룰라, 우루과이의 바스케스, 파나마의 토리호스, 도미니카의 페르난데스, 칠레의 바첼렛,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정부는 모두 중도좌파적 지향을 내걸고 권좌에 올랐다. 곧 결선투표가 시행될 페루 선거와 7월의 멕시코 선거에서도 중도좌파 후보가 당선되리라 하고, 연말에는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이 다시 권좌에 복귀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세 나라의 경우는 좀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현재 시점으로도 중도좌파 정부는 넘쳐 난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을까?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지난 20년간의 신자유주의 개혁이 남긴 사회적 위기 상황이다. 개혁과 개방은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빵과 일자리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눈물의 계곡’을 그렇게 오랫동안 견뎠건만, 여전히 실업자는 넘쳐나고, 고용의 불안정은 심화되었으며 사회치안도 말이 아니다. 정치적 부패도 여전하다. 선거에서 좌파들이 연전연승을 거두는 까닭은 대중들의 사회적, 정치적 불만이 배경에 깔려 있다. 둘째, 좌파의 승리는 다양한 세력을 결집시킨 실용주의적 중도파 지향의 반영이기도 하다. 중남미 좌파의 대다수는 지난 20년간 대의민주제와 시장경제, 그리고 세계화의 대세를 수용하며 중도파로 이동하였다. 여기에 지난 10년간 강력하게 부상한 신사회운동의 동력이 결합하여 선거승리란 결과를 창출한 것이다. 중남미에서 칠레를 제외한다면 계급정치의 힘은 허약하다. 대개의 경우 다양한 세력을 결집시키는 민족적-민중적 담론이나 민중주의적 호소가 선거정치에서 더 잘 먹힌다. 물론 좌파정권의 내부사정도 나라마다 다르다. 대체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나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가 민중주의 좌파에 해당한다면,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우루과이·파나마 등의 좌파 정권은 개혁좌파에 가깝다. 전자는 석유나 가스가 풍부한 에너지 자원을 배경으로 자원민족주의를 내세우며 가끔 급진적인 반미 자주화 구호를 외치기도 한다. 요즘 유가가 고공행진하는 시기이므로 베네수엘라는 사회빈민층에 대한 지원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볼리비아는 차베스주의를 모방하려 하지만 국내사정이 달라 쉽지만은 않다. 지난 5월1일 가스와 석유 자원을 국유화했지만 국제사회와의 협상도 생각만큼 순조로울 것 같지 않다. 반면 개혁좌파 정부들은 세계화의 제약조건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며 그 한계 내에서 신자유주의 개혁이 남긴 사회적 상처를 치유하려 한다. 따라서 예산지출 삭감에는 과감하고, 사회정책에는 굼뜨고 이전 정부의 정책을 답습한다는 비난이 인다. 심지어 원칙을 저버렸다는 지적까지도 있다. 이들이 주로 목소리를 높이는 분야는 대외정책 분야이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고,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를 강화하여 미국과 블록 협상을 추구한다든지, 제3세계의 이익을 옹호하는 다자주의 협상 태도를 취한다. 좌파로서의 정체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정부의 붐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국제정세도 이런 상황이 유지되는 데 한몫을 한다. 미국은 중동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아시아에 풀 베팅을 하고 있기에 중남미에 힘을 행사할 여력이 많지 않다. 게다가 세계경제의 다극화로 유럽연합과 아시아의 역할이 중남미에서도 강화되어 왔다. 특히 중국이나 인도의 부상도 중남미 좌파정부로서는 호재이다. 아시아의 달러가 원자재와 식량 공급처의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면서, 가격도 오르고 수출물량도 크게 증가하는 혜택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좌파 정부의 금고에도 다소 여유가 생겼고, 국정운영과 인기도 유지가 수월해졌다. 이성형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노대통령 독도 특별담화] 광복이후 최악 한·일관계 될수도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라는 감성적 화법으로 시작한 노무현 대통령의 25일 특별담화 이후 한·일간 사활을 건 외교전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특히 일본의 독도도발을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부정하는 행위로 규정, 이를 세계 여론과 일본 국민에게 고발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향후 ‘국제무대’에서 양국간 크고 작은 갈등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대북 금융조치로 교착된 6자회담 등 북핵 문제에서 한·일 공조 부재로 이어지고, 일본 내부 우익세력의 반작용도 거셀 것으로 보여 광복 이후 최악의 관계가 펼쳐질 것이란 분석도 없지 않다. 물론 노 대통령 담화 이후 일반 국민들은 인터넷 등에서 “속이 시원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전문가들도 단순한 영토문제가 아닌 역사문제로 각인시킨 적절한 조치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실질 성과를 찾기 어려운, 그래서 외교적 입지만 좁히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우려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지난 23일 한·일 차관급회의에서 ‘적절한 시기에 추진한다.’고 합의한 동해 해저지명 문제와 관련,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정부는 준비가 되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가장 이른 시기에 해저지명 변경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변경 추진시 수로조사를 재개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은 일측과의 마찰은 물론,5∼6월께 실시될 동해 배타적경제수역(EEZ)협상에서도 상처만 남긴 채 헤어질 게 예견되는 사안이다. 전문가들은 최근 일련의 사태로 국제사회에서 독도가 센카구(중국명 댜오위타이) 열도나 북방 4개섬처럼 동아시아의 분쟁영토로 인식되고 말았다는 점에선 대체로 공감하고 있다. 평가는 다양하다. 김경민 한양대 교수는 “노 대통령이 독도문제를 영토와 상관없는 식민지 지배의 연장선이라는 역사문제로 연결한 것은 매우 적절했다.”면서 “양국간 충돌이 올 수도 있겠지만 일본이 양식 없는 도발을 해온 만큼 강하게 대처할 때가 왔다.”고 강조했다. 반면, 다른 전문가는 “이제까지 조용한 외교를 해온 게 아니다. 그동안 독도에 접안시설을 만들고 군인도 상주시켜 왔다.”면서 “이렇게 공격적으로 한다고 해서 영토문제가 해결될 게 아니다.”고 주장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도 “외교는 상대가 있는 것”이라고 전제한 뒤 “올바른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의 대응은 21세기 동아시아의 민족주의를 자극시킬 수 있고, 이 경우 상대적으로 (국력이)약한 한국이 불리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진 교수는 영토의 소유권 문제는 일본 내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라는 점을 전제로 할 때 일본의 향후 도발에 우리측이 내놓을 다음 카드가 소진되고 없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고이즈미 총리가 제시하는 ‘정상회담’재개 카드 역시 명분쌓기용으로, 전문가들은 ‘양측 모두 대화를 통해 해결할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고 진단했다.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네팔 국왕, 권력이양 선언

    네팔 국왕, 권력이양 선언

    히말라야 산맥에 수천년 은둔해온 네팔 왕국이 드디어 ‘피플 파워’의 감격에 휩싸였다. 지난해 2월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내각을 해산한 후 직접 국정을 장악했던 갸넨드라 국왕이 21일 대국민 연설을 통해 권력을 국민에게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총파업 16일만에 백기 투항 갸넨드라 국왕은 이날 미리 녹화된 연설에서 “입헌군주제와 다당제를 향한 신조에는 변함이 없다.”면서 가능한 한 빨리 7개 야당이 총리를 지명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특히 “행정 권력은 오늘 이 시간부터 국민에게 돌려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왕은 또 “이른 시간안에 선거를 통해 정통성 있는 기구들이 가동됨으로써 민주주의의 실천이 담보될 것”이라며 “현 각료협의회는 새 총리가 임명될 때까지만 운영될 것”이라고 밝혔다. 평화와 질서가 회복되길 희망한다는 말도 보탰다. 그러나 그는 선거 일정이나 권력 이양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전날에 이어 이날도 수도 카트만두 시내 진입을 시도하던 15만명의 시위대는 외곽지대로 물러나 국왕 연설을 경청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연설이 끝난 직후 일부 시민은 거리를 행진하며 “민주주의 만세!갸넨드라는 이 나라를 떠나라!”고 외치고 있다고 통신은 덧붙였다. 대체로 시위대는 국왕 연설을 환영하는 것으로 전해졌지만 정치 일정이 구체화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헨드라 슈레스타는 “싸움에서 이겼지만 아직도 이겨내야 할 전투가 남아있다.”고 말했다. 주요 정당 지도자도 연설 직후 회합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내용은 즉각 전해지지 않았다. 이로써 지난 6일 국왕 하야를 요구하는 전국적인 총파업에 돌입한 지 16일만에 국왕의 투항으로 네팔은 새로운 민주주의 역사를 쓰게 됐다. ●“평화 티켓을 놓친 것이 결정적 실책” 갸넨드라 국왕은 7개 야당 연합의 총파업에 맞서 지난 6일 통금령을 발포한 데 이어 20일에는 사살령까지 내리는 강압 조치로 일관했으나 결국 무릎을 꿇게 됐다.16일 이어진 반정부 시위로 모두 14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명이 다쳤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날 “갸넨드라 국왕의 도박은 사실상 실패했다.”고 전했다. 신문은 “국왕의 ‘권력 배후’인 보안군의 가족들까지 시위에 동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업인과 전문직, 공무원까지 시위에 참여하거나 지지를 보냈다. 마지막 외부 지원세력인 미국과 중국, 힌두 민족주의 세력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미 국무부는 최근 “(전제정치가) 모든 분야에서 실패했다.”고 밝혔으며 제임스 모리아티 네팔 주재 미국 대사는 이날 “그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는 말로 결정타를 날렸다. 일부 전문가는 갸넨드라 국왕의 가장 큰 실정(失政)으로 ‘평화 티켓’을 놓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마오이스트 반군이 제안한 평화협정도 거부했다. 그렇다고 사회적 갈등을 봉합한 것도 아니었다. 경제 안정과 도덕성 측면에서도 국민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1999년 50만명이었던 해외 관광객은 지난해 27만명으로 크게 줄었다.3주째 접어든 총파업으로 생필품 가격은 폭등했다. 국왕은 왕자 시절부터 뺑소니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또 왕실 총기 사건을 직접 일으켰다는 의혹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동안 왕실 예산은 6배가 늘었고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정책은 민심을 돌려세웠다. 국토의 40%를 점유한 마오이스트 반군은 가난한 농촌을 중심으로 꾸준히 세력을 키웠다. 피폐한 현실에 절망한 농민들이 마오쩌둥(毛澤東)의 혁명 이론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시론] 로마의 개방적 국적제도 배워야/양창영 호서대학교 해외개발학과 교수·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사무총장

    [시론] 로마의 개방적 국적제도 배워야/양창영 호서대학교 해외개발학과 교수·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사무총장

    1963년 해외이주법이 제정된 이후 40여년간 300여만명의 대한민국 국민이 해외로 진출하여 현재 150여개국에 700여만명의 해외동포가 조국의 경제부흥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우리민족의 자산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20세기가 이념을 근간으로 한 국가간의 대결시대였다면 21세기는 중국‘화상’의 역할이나 인도의 ‘해외인교’의 역할, 이스라엘의 ‘유대인조직’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이 ‘민족간의 경쟁시대’라고 할 수 있다. 세계속에 흩어져 살고 있는 ‘민족간의 결속’이 민족우열의 바로미터인 것이다. 1960,70년대는 3.7%의 인구증가율을 둔화시켜 인구의 적정을 기한다는 목적으로 신중하지 못한 이민정책을 펴왔다. 이제 노동력 부족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를 대거 받아 들여야 하고, 농어촌지역의 노총각들이 외국인 신부를 맞는 지금, 제대로 된 수민(受民)정책을 세울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해외이민으로 이루어진 미국을 비롯하여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심지어 남미 여러 나라들까지도 자국의 필요에 의하여 외국으로부터 이민을 받아들이면서도 언어구사능력, 학력, 경력, 기술력 등을 전제로 수년간의 기간을 필요로 하는 까다로운 수민절차를 밟아 왔고, 그 결과 원만한 이민정착을 유도할 수 있었다. 세계가 하루 생활권이 되고 다민족사회의 형성과 복합문화시대가 도래하는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한민족 정체성을 유지할 것인가가 향후 민족생존전략의 최대과제가 될 것이다. 배타적·폐쇄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거주국의 온전한 국민으로 적응하고 융화하면서 가슴에 ‘우리는 한민족이다.’라는 긍지를 가지는 정체성(identity)만 견지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5000년 역사속에 단일민족의 혈통을 자랑해 오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시대에 서로 얽히고 설키고 살아야 할 다민족 다문화사회에 부합되는 통합적인 국가 수민정책이 수립되어 있지 않은 것 또한 현실이다. 유엔의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경제활동인구 3660만명을 유지하려면 2020년대 이후에 640만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필요하다고 예측했다. 다민족 복합문화사회로 가는 것은 필연인 것이다. 한국사회의 단일민족개념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지만 혼혈인에 대한 사회문화적 차별과 편견은 여전하다. 이런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단일민족전통을 강조하는 교과서를 개편하고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조기교육을 통해 혼혈인도 우리민족이라는 인식을 가지도록 하여야 한다. 브라질의 ‘인종차별금지법’ 같은 법을 제정해서라도 혼혈인에 대한 처우를 개선함과 동시에 같은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유라시아 대륙을 평정했던 몽골제국이나 막강한 해군력으로 전세계에 위세를 떨쳤던 대영제국 같은 나라들은 타민족과의 접촉과 교류를 통해서 융화와 상호의존의 관계를 심화시키고 문화를 진화시킴으로써 세계적 강국으로 역사에 남을 수 있었다. 쇄국은 자폐요, 개국은 도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세계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아테네인만을 고집했던 아테네와 달리 로마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누구든 로마인이 될 수 있도록 한 개방적 국적제도가 작은 로마를 큰 로마제국으로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는 일본인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국적문제·민족문제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한국사회 한민족의 국제경쟁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는 수민정책이 시급히 필요하다 하겠다. 양창영 호서대학교 해외개발학과 교수·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사무총장
  • [씨줄날줄] 황제 헌원/이용원 논설위원

    우리가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여기듯 중국인은 시조로 황제(黃帝) 헌원(軒轅)을 꼽는다. 중국 최초의 역사서인 사마천의 ‘사기’는 첫장 첫머리를 ‘황제는 소전(少典)의 아들이다. 성은 공손(公孫)이고 이름은 헌원이다.’라고 장식한다. 역사의 시작인 것이다. 사기를 뒤이은 중국 정사가 전한 시대(서기전 202∼서기 8년)를 다룬 ‘한서’인데, 그 중에 ‘지리지(地理志)’라는 부분이 있다. 중국 영토의 범위와 각 행정구역의 변천, 산과 강의 이름·위치 등을 처음 정리해 그 가치가 높다. 그 ‘한서 지리지’ 역시 첫 문장에서 ‘옛날에 황제가 있었다. 배와 수레를 만들어 백성에게 천하를 돌아다닐 수 있게 했다.’라고 밝혔다. 이어 ‘주역’과 ‘서경’에 나오는 문구를 빌려, 황제 헌원이 중국의 모든 나라(작은 제후국을 말한다)를 건설했고 이에 따라 천하가 평화로워졌다고 칭송했다. 곧 중국이라는 국가의 틀을 정하고 백성을 다스린 실질적인 시조로 황제 헌원을 인정하고 있다. 그 황제 헌원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제사가 청명인 지난 5일 산시(陝西)성 황링(黃陵)현에 있는 황제릉에서 열렸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자리에는 중국 본토는 물론 타이완·홍콩 등 전세계의 중국인 대표 5000명이 참석해 그들의 공동조상 앞에 머리를 숙였다고 한다. 아울러 중국 정부와 사회단체·재계·지역 대표들이 두루 참석해 제사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다민족 국가인 중국에 민족주의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19세기 말 청나라를 타도하고 한족(漢族) 중심의 새 나라를 세우자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그 개념은 공산당 정부 아래서도 계속 발전해 지금은 현재 중국 땅에 사는 한족과 모든 소수민족, 거기에 역사상 중국 땅에 산 적이 있는 모든 이민족(고대민족)을 중화민족이란 틀 안에 구겨넣고 있다. 이에 따르면 부여·숙신·읍루 등 우리의 고대국가·민족이 1980년대 이미 중화민족에 편입됐고 고조선과 고구려·발해도 저들이 가져가려 하고 있다. 섬나라에 이어 대륙에서마저 불어오는 민족주의의 광풍에 우리는 흔들리기만 하는가. 국민 모두가 두눈 똑바로 뜨고 살아야 할 시대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월드이슈] ‘격동의 조짐’ 발칸 재조명

    [월드이슈] ‘격동의 조짐’ 발칸 재조명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지난 11일 옥중에서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발칸반도에 새삼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오랜 민족간 각축에다 종교 갈등, 강대국의 개입까지 겹쳐져 1990년대 옛 유고연방 해체 이후 코소보 내전 등으로 피와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세계는 그의 죽음이 또다른 분쟁과 갈등의 불씨가 되지 않을까 주시하고 있다.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발칸반도의 어제와 오늘을 문답 형식으로 짚어본다. ▶옛 유고연방 이전의 역사는 어땠나요? -7세기부터 이곳에 정착한 세르비아인은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14세기 초 발칸반도 남부를 거의 장악할 정도로 강대해졌어요. 그러나 1389년 코소보 싸움을 계기로 400년 이상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지요. 이것이 1990년대 후반 코소보 비극과 무관하지 않아요. 1830년 자치공국을 거쳐 1878년 독립됐지만 곧바로 오스트리아와 관계가 나빠지면서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지요. 종전 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을 거쳐 2차대전때 나치에 항전한 요시프 티토의 영도 아래 46년 유고인민공화국으로 재탄생했어요. ▶1990년대 옛 유고연방의 해체 배경은? -티토가 80년 사망하자 문제가 터져나오기 시작했어요. 여러 민족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던 집단 지도체제는 그런대로 버티다가 민족주의에 자리를 내주게 됐지요. 밀로셰비치가 89년 집권한 뒤 코소보 자치권을 박탈하면서 해체의 길을 걸었어요. 여기에는 티토가 크로아티아 출신이라 세르비아인들이 핍박받은 설움을 만회해야 한다는 식으로 밀로셰비치가 교묘히 부채질한 측면이 강하지요. 그래서 뉴욕타임스 같은 신문은 밀로셰비치를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기회주의자라고 폄하했어요. ▶‘인종 청소’란 말은 어떻게 나왔나요? -여러 민족의 주류 종교가 다른 데다 이들 민족이 오랫동안 물고 물리는 각축전을 벌여온 탓이에요. 그러나 그보다는 ‘종교 청소’라고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많아요. 왜냐하면 코소보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이슬람 지역이고 세르비아는 그리스 정교, 크로아티아는 가톨릭을 각각 믿어요. 전쟁은 이 세 종교끼리 서로 밀쳐내고 죽이는 과정이었어요. ▶피의 역사는 어떻게 진행됐나요? -옛 유고연방의 중심이자 군사력이 가장 막강했던 세르비아는 91년 가장 먼저 독립을 선포한 슬로베니아와 전쟁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90%가 슬로베니아인인 이 나라 독립을 막을 명분이 없어 열흘 만에 접었지요. 그러나 마케도니아에 이어 크로아티아가 독립의 길을 걷자 세르비아는 2차대전때 세르비아인 수만명을 학살한 크로아티아인들의 파시스트 집단 ‘우스타샤’를 응징한다며 침공, 전쟁이 시작됐어요. 밀로셰비치는 또 92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독립을 선언하자 이번에는 소수로 몰린 세르비아계의 무장을 도왔어요.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는 1000일간 포위돼 극심한 고통을 당했지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군대는 95년 이슬람 거주지인 스레브레니차에 진입, 닷새동안 어린이와 남성만을 골라 8000명이나 살해했어요. 이때의 잔학상은 세계인의 눈을 집중시켰어요. 또 99년에는 코소보 알바니아계가 무장노선으로 전환하자 밀로셰비치가 또다시 세르비아계를 지원했고,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45일간 신유고연방을 공습하기도 했어요. ▶그럼 밀로셰비치와 세르비아만 문제였나요? -그렇지는 않아요. 프라뇨 투지만(99년 사망)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세르비아에 맞서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인들에게 무기를 지원했고 그래서 전쟁이 95년까지 이어졌지요. 다른 나라에서도 세르비아인에 대한 보복이 있었어요. 그러나 미 중앙정보국(CIA)이 2000년대 초 조사한 결과, 인권 유린의 90% 이상이 세르비아인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거예요.3년 동안 보스니아 내전에서만 25만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옛 유고연방에는 200만명 이상의 난민이 생겨났지요. ▶밀로셰비치의 죽음이 세르비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물론 의문에 싸인 죽음 때문에 서구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는 이도 있고 그가 주창했던 대(大)세르비아에 대한 향수도 존재하는 게 사실이지요. 그러나 이제 세르비아인들도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고 해요. 밀로셰비치가 죽기 전까지 총재를 맡았던 세르비아 사회당의 지지도는 높지만 의회 의석은 전체 91석 중 9석에 지나지 않아요. 특히 세르비아 정부는 현재 유럽연합(EU) 가입을 추진 중이에요. 실업률이 40%를 넘나들 정도로 형편없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EU에 가입하는 게 필요하다고 보고 있어요. 당장 다음달 5일 EU 가입의 전초전 격인 안정제휴협정(SAA) 체결을 위해서도 밀로셰비치 장례식을 말썽없이 치르는 게 필요하지요. 오히려 베오그라드 시민들은 인구 200만의 코소보 자치주가 완전 독립을 실현하느냐에 관심이 많아요. 또 5월21일 주민투표가 실시되는 몬테네그로의 독립, 라트코 믈라디치와 라도반 카라지치 등 나머지 전범들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세르비아인의 자존심을 지켜내면서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에 넘겨주느냐에 관심을 쏟고 있어요. 이 세 문제들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어요. 미국과 러시아,EU 등 강대국의 개입을 어떻게 조절하느냐도 관건이지요. ▶몬테네그로와 코소보 독립이 새로운 불씨가 될까요?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아요.EU는 몬테네그로 주민투표를 받아들인 ‘베오그라드 협정’을 세르비아와 맺으면서 찬성이 55%를 넘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어요. 몬테네그로 여론도 찬반이 엇비슷하대요. 또 몬테네그로의 경우 그동안 세르비아인들과 혼인 등으로 피가 많이 섞여 독립하더라도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는 거예요. 지난달부터 본격화한 코소보의 지위 협상도 러시아와 중국이 독립을 가로막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 무난히 타결지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에요.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15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지난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에게 이런 뜻을 전달했으며 중국 관리들도 이견이 없었다고 보도했어요. 러시아와 중국은 코소보 독립을 용인할 경우 각각 체첸과 티베트·타이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입장을 바꾼 것 같지요?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밀로셰비치의 유해 베오그라드 묻힐듯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의 유해가 15일 밤 조국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지난 2002년 체포돼 조국을 떠난 지 4년여만이며 지난 11일 갑자기 옥사한 지 나흘 만의 일이다. 세르비아 정부 관리들은 그의 유해가 16일 오후 6시(한국시간)부터 베오그라드의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연방의회 앞에서 일반에 공개될 것이라고 밝혔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이 관리들은 18일 베오그라드에서 남동쪽으로 50㎞ 떨어진 고향 마을 포차레바치의 가족 묘역에 안장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장지와 장례 일정에 대해 유가족들도 동의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앞서 그의 사인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추가 검시를 요구해왔던 러시아 의료진도 네덜란드 법의학연구소측의 심장마비 소견에 동의했다고 현지 언론들이 전했다. 밀로셰비치가 죽기 전까지 총재를 지냈던 세르비아 사회당은 베오그라드에서 장례식이 거행될 경우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의 결집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극우 혁신당은 그의 유해를 영접하기 위해 베오그라드 공항에 10만명의 인파가 운집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앞서 세르비아 정부는 그의 장례가 국장으로 거행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보리스 타디치 세르비아 대통령도 “밀로셰비치가 돌아오는 것을 막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국장은 부적절한 일”이라고 밝혔다. 한편 보스니아의 국제평화유지군 소속 150여명이 북부 프룬야보르에서 밀로셰비치, 라트코 믈라디치와 함께 주요 전범으로 지목된 라도반 카라지치를 체포하기 위해 그를 돕는 것으로 알려진 기업과 가옥 등에 대한 수색을 벌였다고 BBC가 전했다. 그는 보스니아의 한 수도원에 은신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일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는 밀로셰비치의 사망에 따라 그에 대한 재판을 공식 종료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역사를 통한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김기봉 지음

    역사를 통한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김기봉 지음

    영화 ‘로마의 휴일’의 한 장면이 눈에 선하다. 신분을 넘은 로맨스를 뒤로하고 공주로 돌아와 기자회견장에 선 오드리 헵번.“연방제로 유럽경제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라고 물으니,“유럽의 긴밀한 유대를 이끄는 것이면 찬성합니다.”라고 답한다. 한반도에 포연이 자욱 하고 포성이 귀를 때리던 1953년에 만들어진 영화 속 대사는 1957년 로마에서 결성된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에 바치는 예언적 헌사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용감하다. 일제에 대한 저항과 협력을 기준으로 식민지시대를 산 이들을 애국자와 매국노 둘로 나누는 이분법의 주술에서 놓여나라고 충고한다. 그래야만 이 땅의 사람들도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 동아시아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는 용감하다. 일제에 대한 저항과 협력을 기준으로 식민지시대를 산 이들을 애국자와 매국노 둘로 나누는 이분법의 주술에서 놓여나라고 충고한다. 그래야만 동아시아는 과거의 갈등을 재생산하는 ‘기억의 터’가 아닌 미래의 희망을 위한 “기억의 장”이 될 수 있으며, 이 땅의 사람들도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 동아시아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이다. 아직도 제2차세계대전이 남긴 앙금이 채 가라앉지 않고, 냉전이 남긴 상처도 아물지 않은 동아시아를 사는 이들은 유럽공동체(European Community·1967)를 거쳐 유럽연합(European Union·1993)을 이룬 그들이 너무 부럽다. 하여 탈냉전과 탈근대의 시대를 맞아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는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앞 다투어 백가쟁명의 동아시아 담론을 토해 놓았다. 특히 미국 주도하의 세계질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 지식인들의 뇌리에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는 매혹적인 탈출구로 아로새겨졌다. 문학비평가가 문인들의 작품을 곱씹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 이라면, 역사비평가는 역사가의 역사서술을 되새김질하여 독자의 현명한 역사소비를 중개하는 이다. 이를 자임한 김기봉(경기대 인문학부 사학전공 교수)이 처든 붓끝은 동아시아 담론의 허점을 휘젓는다. 동아시아를 사는 이들에게 동아시아란 실재하는 역사 공간이 아니라 만들어야 할 미래 역사의 기획이므로 역사적 성찰을 뒤로하고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이다. “조선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지식인들과 정치가들은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 목표로 해서 동아시아를 수단으로 이용하려 한 역사를 성찰하지 않으면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공동번영과 평화의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자국 중심으로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상하는 민족주의를 폐기해야 한다.”는 그의 말이 동아시아라는 시공간을 함께하는 이들의 마음을 울리길 바란다. 그는 민족이라는 우물에 갇혀 구시대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국사학자들에게 장기지속(la longue duree)의 구조를 중시하는 아날학파의 방법론과 유럽 통합의 역사 경험을 빌려 공동체가 왜 만들어져야 할 역사의 당위인지를 설득한다. 민족이라는 초역사적 거대담론에 사로잡혀 있으면 동아시아라는 대안적 역사세계에 눈을 뜰 수 없으니 민족이라는 색안경을 어서 벗어던지고 공동체 만들기에 동참하라고 손을 잡아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을 탓하기 전에 국사교과서를 들여다보고 우리 눈 안의 들보를 먼저 없애는 데 힘을 기울이는 게 순리가 아니냐고 묻는다. 동화 백설공주에 나오는 ‘마녀의 거울’처럼 민족의 영광만을 노래하는 국사를 버리고 더불어 사는 평화로운 미래를 이야기하는 동아시아사라는 ‘공동의 거울’을 새로 들여놓으라고 말이다. 역사비평가 김기봉이 꼭꼭 씹어 놓은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를 위한 역사적 성찰의 성과가 담긴 이 책 한번 읽어 보길 권한다. <경희대 교양학부 교수·한국사>
  • ‘바이칼’이 위험하다

    ‘바이칼’이 위험하다

    나날이 격화되는 에너지 확보 경쟁이 지구촌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지구의 허파’ 아마존강에 이어 이번엔 북반구의 마지막 청정지대로 꼽히는 바이칼 호수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중앙아시아의 바이칼호수 인근을 관통하는 대규모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가 최근 러시아 정부 산하 환경감시기구의 승인을 얻음에 따라 상반기 중 공사 착수가 가능해졌다고 8일 보도했다. ●아시아 시장 원유공급 위한 대역사 프로젝트는 러시아 정부가 최근 국제 석유시장의 큰손으로 떠오른 중국과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에 원유를 공급할 목적으로 국영 파이프라인 기업인 트랜스테프트와 함께 수년 전부터 구상해온 것이다. 송유관은 동시베리아에서 시작해 중·러 국경지대를 거쳐 연해주까지 장장 4000㎞에 걸쳐 이어진다. 예정대로 완공되면 2009년부터 하루 160만배럴의 원유를 중국과 한국 등에 공급하게 된다. 문제는 송유관이 통과하는 지점이 바이칼 호수와 불과 8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수심이 가장 깊은 담수호다. 수량이 빙하를 제외한 전세계 담수량의 20%나 된다. 세계에 하나뿐인 민물표범과 100여종의 토종 동물이 서식하는 까닭에 10년 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환경재앙 우려” 처음엔 국가자원부도 반대 환경운동가들은 송유관이 파괴되면 생태계의 보고인 바이칼 호수에 돌이킬 수 없이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해왔다. 주무부서인 러시아 국가자원부와 프로젝트를 심의한 환경기구도 처음엔 이 지역에 빈번한 지진피해를 우려해 반대했다. 하지만 아시아 원유시장 진출에 적극적인 크렘린의 강력한 의지가 확인되면서 입장을 뒤집었다. 국제 환경단체 그린피스는 송유관 사업에 자금을 대는 미국과 유럽, 일본의 은행들에 재정지원 중단을 호소하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국영 파이프라인회사 트랜스테프트의 사이먼 바인시토크 회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바이칼호수 인근을 지나는 파이프라인을 3배 이상 두껍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환경단체들을 향해 “중국의 러시아산 석유 확보를 두려워하는 국외 세력들에게 조종당하고 있다.”고 맹비난 했다. ●‘지구의 허파’ 아마존도 위험 환경단체들은 국가간 자원확보 경쟁이 ‘에너지 안보’를 표방하는 민족주의적 열정과 결합, 생태계 파괴에 면죄부를 남발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앞서 남미에서는 지난 1월 베네수엘라와 브라질, 아르헨티나 3개국 정상이 아마존 밀림지대를 관통하는 8000㎞의 가스관 건설에 합의하면서 환경파괴 논란이 가열됐다. 가스관 프로젝트는 에너지를 매개로 남미 대륙을 정치·경제적으로 통합하려는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정치적 구상에 의해 마련됐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가스관이 지나는 아마존 열대우림에 심각한 피해를 유발할 것”이란 환경운동가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해 있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3·1절 발굴] 고려혁명군 2인자 최호림 연해주 항일투쟁기 ‘햇빛’

    [3·1절 발굴] 고려혁명군 2인자 최호림 연해주 항일투쟁기 ‘햇빛’

    3·1운동 87주년을 맞아 러시아 연해주 등 해외 항일무장투쟁을 기록한 독립운동가의 자필문서가 공개됐다. 이를 기록한 사람은 1920년대 독립군 무장투쟁을 이끌었던 최호림(崔虎林·1893∼1960) 선생으로, 그동안 사회주의자라는 이유 때문에 묻혀 있던 그의 활동상도 확인됐다. 독립운동을 하며 언론인·극작가·소설가로도 활약한 최 선생의 기록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군 및 비밀결사단체의 활동과 조직구성이 상세히 소개돼 해외 독립투쟁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신문은 27일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한국학과 반병률 교수로부터 최 선생의 ‘원동변강 고려인 생활역사 초록’(遠東邊疆 高麗人 生活歷史 抄錄) 제1권을 단독 입수했다. 46배판 97쪽 분량으로 된 초록은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자필로 쓴 것으로 선생이 39세 때인 1932년 9월15일 탈고됐다. 반 교수는 지난해 8월 하바로프스크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이 자료를 입수, 현재 우즈베키스탄 아쿠르간에 살고 있는 선생의 둘째 동생 최주옥(93) 옹을 통해 진본임을 확인했다. 초록은 1919년 3·1운동 직후 불길처럼 번진 연해주 한인들의 항일무장투쟁을 다루고 있다.1893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3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선생은 중국 베이징 등지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뒤 1919년 5월 연해주 라즈돌리노예에서 허제명·박명천 등과 함께 빨치산 독립의용군을 창설했다. 선생은 당시 자신의 활동상과 함께 혈성단 강국모 군대, 우리 동무군 등 인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의 병력규모, 장비, 조직도 등을 초록에 기록했다. 이밖에 북한 김일성이 ‘항일 신화창조’의 모델로 삼았다는 의혹이 있는 김경천 장군의 군대를 비롯해 조맹선의 독립단 군대, 이범윤의 의군부 군대, 안훈의 자유시독립군, 한창길 군대, 황하일 군대, 최 니콜라이 군대, 김병극 군대 등 당대 연해주와 만주를 주름잡았던 독립군들의 활동상도 망라했다. 이 부대들의 일부는 1922년 8월 1542명 규모의 고려혁명군으로 통합됐으며 최 선생은 이곳의 2인자격인 군정위원장을 맡아 사상교육을 담당했다. 이청천 장군이 사관학교장, 이범석 장군이 기병대장을 맡았다. 최 선생이 직접 그린 편제안을 보면 고려혁명군은 사령부 휘하에 ▲정치부(서무과, 통계과, 통신계, 선전선동과) ▲경리부(재무국, 피복국, 재봉국) ▲치중대(전투) ▲기병대(〃) ▲특립대(〃) 등 틀을 갖추고 있었다. 선생이 이끈 ‘최호림 부대’는 처음에 부대원 35명, 장총 35정, 탄약 3000여발로 시작해 석달 만에 부대원 120명, 장총 124정, 탄약 3만여발 규모의 대규모 의용군으로 성장했으며 시베리아에 출정한 일본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번 초록을 통해 연해주와 만주에서 독립운동 비밀결사단체로 활약했던 광복단(1911년 결성)과 철혈단(1914년)의 주요 구성원 명단도 최초로 공개됐다. 광복단은 이동휘·오주혁·장기영·백규삼·황병길·김동한·이종호·계봉우·김하석·김하구·오영선·구춘선·김립 등 13명을 발기단으로 출범, 이명순·오병묵 등이 핵심역할을 했다. 철혈단의 중요인물로는 김철훈·김진·최의수·최이준·한강일·정순철 등을 꼽았다. 선생은 1920년대 후반부터는 무장투쟁을 일단락하고 사상과 문학을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 활동에 투신했다.1928년부터 3년간 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한 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지역 한인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한글신문 ‘선봉’의 책임주필로 활약했다. 사회주의자이면서도 러시아의 민족주의적 공산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는 글로 명성을 날렸다. 이때 가극 ‘녀자대표’와 장편소설 ‘시비리 철도행’, 우화소설 ‘숙기거는 토끼’ 등을 창작하며 작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하지만 소련 스탈린정부의 한인 탄압이 본격화하면서 1936년부터 3년,1941년부터 4년,1948년부터 6년 등 3차례에 걸쳐 13년간 옥고를 치렀다. 최 선생은 1960년 가족들이 강제이주된 우즈베키스탄 아쿠르간에서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해방전후사 재인식’ 대담

    ‘해방전후사 재인식’ 대담

    ‘해방전후사의 인식’(이하 ‘인식’)을 비판하겠다며 지난 8일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을 놓고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와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무릎을 맞댔다. 이 책의 출간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두고 10일 서울신문 회의실에서 열린 대담에서였다. 이 교수는 ‘인식’‘재인식’ 모두에 글을 실었고, 김 교수는 ‘인식’의 집필은 물론 기획에도 깊숙이 관여했던 학자다. ●“‘인식’에 대해 정당한 대우를 해달라” 이완범 ‘재인식’뿐 아니라 ‘인식’의 집필에도 참가한 사람으로서 두 책을 동등하게 봐달라고 하고 싶다. 우선 ‘재인식’은 뉴라이트가 아니다. 책임편집을 맡은 박지향 교수는 민족에 기댄 반지성주의적이고 운동만능주의적인 풍토를 비판하는 것이지 ‘뉴라이트’라는 이름까지 동의하지는 않는다.‘인식’ 역시 민족중심적이기는 해도 민족지상주의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김명섭 ‘인식’이 좌쪽에 가깝긴 하다. 그러나 당시 시대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렇기 때문에 인식을 넓혀줄 수 있었다.‘현대사에 대한 인식의 사보타주’를 끝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렇다고 당시 집필에 참가한 사람들이 지금도 그때의 생각에 머물러 있지는 않다. 계속해서 후속 연구결과를 내면서 변화·발전하고 있다. 또 한 가지는 미국에서도 끝난 ‘수정주의’를 아직도 한국에서 하고 있느냐는 식의 얘기다. 참 어이가 없다. 수정주의가 옳다는 게 아니라, 미국이 끝내면 우리는 더이상 연구하면 안 되나? 정말 주변적인 사고다. ●“재인식 주장에 이의 있다” 이 ‘인식’이 북한의 일제청산을 완벽하다고 평가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재인식’은 300만명을 남으로 내쫓았으니 북의 청산은 청산이 아니라는데 나는 그것도 어쨌든 청산이라 생각한다. 또 일제 천황제가 북한의 수령제로 연결되기 때문에 북에서 일제청산이 안 됐다는 대목에도 이의가 있다. 카스트로의 독재가 스탈린의 독재에서 보고 배웠다 해서 카스트로가 청산을 안 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기에다 에커트는 박정희가 만주 모델을 베껴 와서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뤘다고 말하는데 흥미로운 주장이며 검증해볼 주장이다. 그런데 만주 모델 때문에 박정희한테 친일잔재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에커트 주장에 대한 확대해석이다. 오히려 만주국군 출신 정일권을 국무총리에 앉힌 것에서 친일파를 등용했다면 모를까. 김 스탈린의 세계전략으로 한국전쟁이 발생했다는 ‘재인식’의 주장은 정말 세계학계에 안 먹힐 주장이다. 스탈린의 세계전략이 원인으로 꼽혔던 것은 유럽중심적 연구 때문이었다. 서구 연구자들이 김일성과 북한은 잘 모르니 소련과 스탈린에다 초점을 맞췄고, 그러니 스탈린의 세계전략으로만 모든 걸 설명하려 든 것이다.‘인식’은 그게 아니라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이니셔티브를 쥔 전쟁이라는 점을 처음으로 명확히 했다. 사실 당시 대학가에는 북침설과 미국에 의한 남침 유도설 등이 번지고 있었을 때였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식’이 외려 남침설을 가장 확실하게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앞뒤도 안 맞다. 분단 초기에는 스탈린이 한국에 관심도 없다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전쟁을 키웠다고 설명한다. 김 그것도 중요한 결점이거니와 스탈린의 심경변화를 드러낼 자료를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비교사·문명사·미시사적 연구? 아무 내용 없다” 김 ‘재인식’의 가장 큰 문제는 ‘인식’을 일국사·민족사로 폄하하면서 비교사·문명사를 얘기하는데, 정작 비판에 걸맞은 연구성과물은 없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이분법적인 친일·반일구도를 비판하기 위해 조선어학회가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발굴한 것까지는 좋다. 그렇다면 일제가 동남아지역을 침략하면서 동남아 원주민 언어를 되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사실과 비교해야 비로소 비교사가 된다. 특히 인도·미얀마 같은 지역은 영국과 일본의 침략을 동시에 받은 경우인데 이런 경험에 대한 이해가 전혀 드러나지 않아 ‘재인식’이 비교사적 작업인지 회의가 든다. 또 이영훈 교수는 문명사 얘기를 하는데, 참 좋은 얘기다. 주목할 점은 문명사 바람이 불고 있는 프랑스에서 지금 쏟아져 나오고 있는 책이 주로 노예무역을 다룬 책이라는 점이다. 문명 건설과정에서 팽창과 확대만 보는 게 아니라, 숨어 있는 검은 그림들까지 다 드러내보자, 명(明)뿐 아니라 암(暗)까지 함께 보자는 것이다. 왜 이런 측면은 무시하는지 모르겠다. 동시에 일반인의 생활상을 드러내는 미시사·문화사적 접근도 좋다. 그런데 1930년대 이후를 다루면서 어떻게 그 관점만 고집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1937년 중·일전쟁으로 완전한 전시체제가 들어서는데 이 틀은 무시한 채 모던 보이, 모던 걸만 얘기할 수 있나. ●‘인식’,‘재인식’보다 더 흥분한 언론들 이 어떤 기자는 뉴라이트로 쏠린 보도에 자기는 책임 없다는 식으로 해명전화를 했다. 원래 처음 책 출간 소식을 알린 신문은 그 뉴스를 특종으로 생각하고 다른 신문은 이미 예전에 다 나왔던 기사로 생각하더라. 그런 것들을 보니 특종 욕심 속보 욕심에 싸움 붙이고, 그런 것에 언론이 더이상 집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 학문적 논쟁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인식’과 ‘재인식’ 필자들이 무슨 원수진 것도 아니고…. 그런데 언론에서 차분하게 따져 보기보다 그냥 ‘인식’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니까 문제다. 더구나 ‘인식’의 저자들은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이런 식으로 ‘인식’을 매도하면 ‘인식’의 저자들은 모두 ‘천박한 프로파간다나 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인식’은 기본적으로 몇몇 학자들이 동원되다시피 해서 쓴 책이 아니다. ●생산적 논의로 이어져야 이 어쨌든 기존의 틀에 박힌 현대사를 재인식한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다만 평행선을 달리는 것처럼 논쟁을 벌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재인식’은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인식’이 가지고 있던 사회사적인 의미나 학술운동적인 의미 등을 받아들이고 제대로 평가해 주는 바탕 위에서 ‘재인식’이 진행돼야 한다. 왜 선학들의 고민이 쌓인 책을 ‘빨갱이 책’으로만 몰아가야만 하나. 김 어떤 분들은 사회가 한쪽으로 쏠렸을 때 지식인들이 반대쪽 얘기를 해서 ‘물타기’를 해야 한다는 말씀도 한다. 그래서 ‘인식’과 ‘재인식’이 자꾸만 맞물려서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다만 프랑스와 비교할 때 한국사의 경계가 더 넓어져야 한다. 프랑스는 ‘어디까지가 프랑스의 역사냐.’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프랑스사가 아니라 역사를 가르친다. 이에 반해 우리는 한국사와 서양사간의 골이 너무 깊다. 넘나드는 역사인식이 필요할 듯하다. 대담 김종면 문화부차장 jmkim@seoul.co.kr 정리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이광수 친일적 민족주의자 평가도 모순” ‘재인식´ 출간에 대한 진보쪽 인사들의 평가는 냉혹하다. 한국 근·현대사 박사학위 1호인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는 “한국사의 몇몇 특징적인 계기만 잡아내 확대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 전반에 대해 깊이있는 연구를 했는지 의문”이라면서 “결국 양측이 앞으로 계속 내놓을 논문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또 일제시대·북한문학 연구자로 유명한 원광대 김재용 교수는 춘원 이광수를 ‘친일적 민족주의자’라고 평가한 ‘재인식’의 주장을 “형용모순”이라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문인들의 경우 외형적으로 어떤 직위를 차지했느냐 안 했느냐, 무슨 글을 발표했느냐 안 했느냐와 같은 단순잣대를 들이대지 말고 그 개인의 내면논리로서 친일 여부를 봐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한다.”면서 “그러나 기본적으로 민족주의는 식민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일제를 용인하는 민족주의’,‘친일적 민족주의’란 존재할 수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박정희시대 평가를 두고 재인식의 책임편집자 가운데 한 명인 서울대 이영훈 교수와 논쟁을 벌여왔던 경상대 장상환 교수 역시 ‘재인식’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부풀려졌다고 봤다. 장 교수는 “일례로 ‘농지개혁’문제를 다룬 성균관대 김일영 교수의 글은 ‘인식’의 글과 큰 차별성이 없다.”면서 “좌파적인 ‘인식’을 우파적인 ‘재인식’이 뒤집었다고 단순하게 평가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인지 일부는 기존 우익의 역사인식을 그대로 따온 데다 대부분 특별히 진전된 내용이 없다는 점을 들어 ‘재인식’이라기보다 ‘재탕’에 가깝다는 혹평도 나오고 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도약 2006-우리는 이렇게 뛴다] (5) 포스코 이구택 회장

    [도약 2006-우리는 이렇게 뛴다] (5) 포스코 이구택 회장

    이구택 포스코 회장은 요즘 기회 있을 때마다 올해 닥쳐올 철강업계의 ‘위기’에 대한 대응책을 주문하고 있다. 신년사에서는 “중국이 예상보다 빨리 피할 수 없는 위협으로 다가오는 등 기로에 서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고 지난 6일 철강업계 신년 모임에서는 “과잉 생산되는 중국 철강재의 상당량이 일본보다 한국 시장으로 들어오는 이유는 우리가 중국과 확실히 차별화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포스코는 글로벌 포스코로 가는 초석을 놓았다. 포스코 인디아를 설립해 인도 진출의 첫 발을 내디뎠고, 국내기업 최초로 일본 도쿄 증시에도 상장했다. 매출(21조 6950억원)과 순이익(4조 130억원)도 사상 최대를 달성했다. 하지만 올해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불황의 골짜기로 들어가고 있다.”는 이 회장의 말처럼 사정이 다르다. 증권사들은 지난해 5조 9120억원에 달했던 포스코의 영업이익이 올해 3조원대로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단순한 경기순환이 아니라 세계 철강업의 경쟁 패러다임이 바뀌는 과정에서 찾아온 구조적인 변화로 인한 불황이어서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철강 원료를 보유한 나라들의 자원민족주의 경향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고, 특히 중국은 최근 설비 확장을 거듭해 올해 철강 공급량이 4억 3400만t으로 3100만t의 공급 과잉이 발생할 전망이다. ●파이넥스(FINEX)공법 상용화 등 철강 신기원 포스코는 올해 차별화된 전략 제품을 만드는 기술 리더십의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 투자액을 지난해보다 5.4% 많은 3조 9000억원으로 확대하는 등 2008년까지 모두 11조 7000억원을 투자키로 했다. 우선 2008년까지 고급 자동차강판 등 전략제품 생산을 2400만t으로 늘리는 작업이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지난해 48%였던 전략제품 비중을 올해 52%로 끌어올리고 2008년 80%,2010년 85%로 대폭 늘릴 계획이다. 새로운 철강주조기술인 스트립 캐스팅(Strip Casting) 공정 개발도 가속화한다. 포스코는 오는 6월 경북 포항에 연산 60만t 규모의 데모 플랜트를 완공해 2007년까지 스트립 캐스팅 상용화 기술개발을 완료할 계획이다. 스트립 캐스팅 기술은 기존의 두꺼운 슬래브를 얇은 강판으로 제조하는 데 필요한 가열공정과 열간압연공정을 생략할 수 있어 에너지 및 공해물질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고 제조공정과 납기도 단축할 수 있다. 2004년 8월 개발에 성공한 파이넥스 공법도 연말쯤 상용화된다. 연산 150만t 규모의 파이넥스 상용화 설비가 준공되면 세계 철강사가 새로 씌어질 전망이다. 파이넥스 공법은 가루 형태의 철광석과 일반 유연탄을 사전에 가공하지 않고 직접 사용해 쇳물을 제조하는 기술이다. 따라서 원료의 사전 가공을 위한 설비 투자가 필요없고 제조 원가도 83%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 포스코는 2007년 착공하는 인도 제철소에도 파이넥스 공법을 우선 적용,200만t 규모의 파이넥스 2기를 설치키로 했다. ●영일만 신화, 벵골만으로 지난해 말 이 회장이 2주간 현지에 머물며 진두지휘한 인도 프로젝트가 올해 경영의 핵심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이 회장은 “다른 경쟁사에 비해 인도측 분위기가 우호적이어서 3월이면 광권 탐사권을 획득하고 9월까지 부지매입을 완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포스코는 2010년까지 37억달러를 들여 인도 오리사주에 슬래브 150만t과 열연 코일 250만t 등 400만t을 생산하는 1단계 제철소를 준공할 계획이다.1단계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2020년까지 120억달러를 투자해 연산 1200만t 규모의 대형 제철소로 거듭난다. “창업 세대들의 열정과 도전 정신을 되살린다면 영일만·광양만에서 일군 신화를 인도 벵골만으로 이어갈 수 있다.”는 이 회장의 자신감이 실현되면 포스코는 현재 세계 5위 철강업체에서 ‘톱3’로 도약할 수 있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데스크시각] 중국과 일본 사이/ 이석우 국제부 차장

    외교관의 자살, 혼외정사, 외국 공안 당국의 협박과 회유…. 첩보영화에나 나옴직한 사건으로 새해 벽두부터 중국과 일본관계가 시끄럽다.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직원이 중국 기관원에게 약점을 잡혀 기밀유출 요구와 협박에 못이겨 자살했다는 게 일본 외무성의 주장이다. 중국 여인과 관계를 맺어온 이 외교관은 두 나라의 소유권 다툼 대상인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 등에 관련된 기밀 유출을 요구받고 고민끝에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28일 일본 외무성이 공식 유감을 표시하며 사건을 공개한 뒤 두나라 외교부간의 반박과 비난성명이 새해로 이어지면서 양측 국민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다. 자살한 외교관은 상하이 총영사관과 일본 외무성 사이에 오가는 암호의 조합과 해석을 담당하는 ‘전신관’. 민감한 정보를 다루던 자리다. 냉전시절 옛 소련과 미국과의 첩보전을 그린, 흑백 영화라도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사건 전개는 근년 들어 꽁꽁 얼어붙고 있는 중·일 관계의 현주소를 보여 준다. 냉전종식 후 내리막길을 걷던 중·일관계는 지난해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중국내 대규모 반일시위로 이어졌고 잠복해온 두나라의 첨예한 대결 양상을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강행과 일본관광객들의 중국내 ‘기생관광’ 등이 베이징·상하이 등에서 대규모 반일 시위를 촉발시킨 것이다. 지난 4월 중국 시위자들에 의해 깨진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의 유리창들은 중·일 당국간의 책임소재와 관련한 이견으로 여태껏 깨진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도 양측의 감정싸움을 엿보게 한다. 한류에 앞서 1980년대 중국을 휩쓸던 ‘일류(日流)’, 즉 영화와 드라마, 음식과 복장 등 일본 문화에 대한 열광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자리는 “너희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채워졌고 일본은 오직 규탄 대상일 뿐이다. 과거 일본의 기술·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중국정부가 취했던 조심스럽고 우호적인 태도도 이제는 “할 말은 한다.”는 자세로 바뀌었다.“힘이 생기니 숨겨온 의도와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오만하고 거친 중국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일본인들의 분개한 목소리도 커졌다.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미국이 중·일을 견제·경쟁시키는 이이제이(以夷制夷)로 동아시아 패권을 유지하려 한다.”는 신중론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집단 최면에 걸린 듯 양측 모두 불붙고 있는 민족주의 속에 힘의 대결로 달려가는 듯한 모습이 대세를 이룬다. 유럽연합(EU)과 같은 공동체 건설 가능성이나 21세기 새 국제관계의 모습으로 기대됐던 동반상승의 노력은 고사하고 동북아는 영토 분쟁과 안보 불안, 과거사와 자존심 등이 뒤범벅된 채 불신의 벽을 높여가고 있다. 중국은 미·일이 미사일방어체제(MD)를 빌미로 중국을 겨냥한 군사동맹을 강화해 숨통을 죄고, 타이완을 중국서 영원히 떼내려 한다고 분개하고 있다. 전쟁을 금지한 평화헌법을 뜯어고치며 재무장의 길로 나가려는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걱정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구매력평가(PPP)로는 이미 세계 2위에 올라선 중국이 경제적 역량을 패권확보를 위한 군비강화에 쏟아붓고 있다며 세어진 중국의 완력을 걱정한다. 방위청서는 중국을 가상 적으로 올려 놓았다. 양측의 불신은 동북아를 세계에서 가장 빠른 군비증가 지역으로 만들고 있다. 이런 모습은 100여년 전의 동북아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한반도를 싸움터로 삼고 으르렁대던 청·일의 패권 다툼, 시계의 초침을 돌려놓은 듯한 상황속에서 한국은 부상하는 중국과 재무장을 향해 ‘보통국가’로 변신하고 있는 일본의 틈바구니 속에 끼어 있다. 한 외교관의 애정 행각이 자살이란 파국으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혹여 현재 중·일 관계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중·일이란 두 거인의 각축이 동북아의 더 많은 보통사람들의 비극으로 확대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는 그런 불안정한 동북아 구조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석우 국제부 차장 jun88@seoul.co.kr
  • [외국인 1%시대] 외국인 6인의 바람

    [외국인 1%시대] 외국인 6인의 바람

    ●존 맥과이어(40·캐나다·교수) 한국에서 처음 겪은 차별은 휴대전화나 신용카드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 일부 대학이 아무리 잘 가르쳐도 외국인 교수는 3년 후에 해고한다는 규정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한국이 다문화 사회로 가려면 변화가 필요하다. 우선 원한다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 교육적으로는 단일민족 등 민족주의를 강조하기보다는 다원화의 가치를 가르쳐야 한다. ●하와 건(여·24·터키·유학생)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상대편인 터키 선수들을 열렬히 응원하는 한국인들을 TV로 보고 ‘형제의 나라’로 유학오기로 결심했다. 친절한 한국인들 덕분에 내 선택이 옳았음을 새삼 느낀다. 그러나 외국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부족한 것 같다. 특히 히잡(이슬람 여성의 머릿수건)을 들추면서 ‘이런 것은 여기선 안 써도 된다.’고 말하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타문화에 대한 이해을 돕는 교육이 필요할 듯 싶다. ●로넬(가명·23·필리핀·노동자) 산업연수생으로 안산에 들어온 지 6개월이 됐다. 지금은 실리콘 제조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생활은 힘들지만 행복하다. 사계절이 너무나 아름답고, 필리핀에 비해 치안이 훌륭한다. 물론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 작업 반장이 밤에 술을 먹고 와서 마구 때린다. 아무런 잘못 없이 맞은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치료비를 줄지도 걱정이고…. ●리처드 판즈워스(56·미국·선교사) 선교를 위해 2년간 한국에 머물고 있다. 미국에선 소아과 의사로 일했다. 대학생이었던 1969년에도 한국에 온 적이 있다.35년 만에 다시 찾은 한국은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대부분 미국을 좋아했다. 지금은 일부 젊은이들이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도 옷차림이나 음악은 미국문화를 그대로 수용한다. 한국은 어디 출신인지, 누구와 친한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를 중시하는 것 같다. 그보다는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 평가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장 셸 타리에(53·프랑스·회사원) 1981년부터 프랑스와 한국을 오갔고, 현재 고속전철 신호파트에서 일하고 있다. 한국에 머문 게 모두 합쳐 10년쯤 된다. 부인과 결혼, 한국에 왔다. 결혼을 한 뒤에도 나는 프랑스 국적을, 아내는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 처음에 외국인과 결혼한 아내를 특이한 사람으로 취급해 놀랐다. 거리를 걸을 때도 따가운 시선이 느껴질 정도였다. 외국인이 꾸준히 늘고, 다양한 국제행사를 치르면서 한국은 다문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다. ●정현숙(가명·여·42·중국·식당 보조) 5년전 친척을 만나기 위해 들어와 한국에 주저앉은 조선족이다.‘불법체류자’ 신세지만 같이 사는 친구들도 대부분 불법체류자여서 견딜 만하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어투와 단어 때문에 무안을 당한 적이 많았다. 돈을 떼인 경험도 몇번 있다. 하지만 이제는 조선족만 찾는 식당도 많이 있을 만큼 여건이 좋아졌다. 정은주 서재희 고금석기자 ejung@seoul.co.kr ●등록 외국인이란 90일 이상 우리나라에 체류하기 위해 체류지 관할 행정관청에 외국인 등록을 마친 사람을 말한다. 한국 남성과 국제결혼한 여성도 귀화전까지는 외국인으로 분류된다. 불법체류자나 한미주둔군지위협정 등 특별 조약 등에 해당하는 사람은 포함돼 있지 않아 실제 외국인 수와 큰 차이가 있다.
  • [열린세상] 아세안 정상외교의 성과와 과제/안인해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

    ‘동아시아 공동체’ 실현을 위해 아세안 정상외교가 주목을 받고 있다. 아세안+3(한·중·일) 협력으로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동아시아의 지역협력체 형성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이 지역에서 행해지는 무역이 이미 전세계 교역량의 약 20%를 차지하는 비중에 비추어 역내 다자간협력기구는 한국의 경제·외교적 이익에 부합한다. 이러한 시점에 이뤄진 이번 아세안 정상외교는 향후 한국의 다자외교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아세안은 올해 상반기 기준으로 총 교역액이 253억달러를 넘어 중국·미국·일본·유럽연합(EU)에 이어 우리의 제5위 교역대상 지역으로 1992년 이래 우리의 대외 총교역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한국이 투자액 기준으로 올해 7월까지 누계 120억달러(총해외투자의 약 15%)를 투자, 중국·미국에 이어 3위에 이르는 해외투자 대상지역이기도 하다. 아시아 지역은 중동과 더불어 우리의 2대 건설수주 시장으로서 전체 건설시장의 32.3%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중 아세안 지역은 아시아지역 중 60.4%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과 아세안 10개국 정상들은 지난 13일 정상회담에서 ‘한-아세안 FTA 기본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기본협정에는 상품, 서비스, 투자, 분쟁해결, 경제협력 등 분야별 FTA 협정간의 관계와 범위 등을 담았다. 한-아세안 정상들은 내년 상반기까지 상품협정 체결을 추진하며, 하반기에는 서비스·투자 분야 협정 교섭에 착수할 예정이다. 내년 중으로 한-아세안 FTA 타결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아세안 국가들은 그만큼 한국에 중요한 교역 상대국이다. ‘동아시아 공동체’를 위해 16개국 정상들이 12월15일 동아시아 정상회담 공동선언(쿠알라룸푸르 선언)에 합의함에 따라 이를 현실화할 가능성이 열렸다. 상호 많은 대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동아시아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여 그 역사적 의의는 크다. 다만 ‘동아시아 공동체’참가국의 성격이 아직까지도 불확실하고 강대국간의 주도권을 둘러싼 세력경쟁이 장애가 되고 있다.‘동아시아 공동체’에 포함될 국가를 정하기 위한 기본 방향에 대해 ‘아세안+3’ 창설 10주년인 2007년까지 결정하기로 함으로써 향후 치열한 외교전이 예상된다. 이는 동아시아 지역구도와도 연계된다는 점에서 향후 한국의 역할에 대한 심층적 연구가 필요하다. 아세안, 아세안+3, 동아시아 정상회담이 동심원 구도를 형성하게 된 만큼 누가 주도권을 잡는가에 따라 역내 역학구도가 바뀔 수 있다. 이에 따른 대립 구도가 이미 드러나고 있다. 미국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중국·말레이시아 등은 아세안+3에 한정하기를 원한다. 반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인도네시아 등은 호주·인도를 비롯하여 미국도 포함하자고 주장한다. 이번 정상회담이 보완적 역할에 머물면서도, 호주와 인도·뉴질랜드가 정식으로 참가하게 된 것은 이러한 양측의 상반된 주장의 타협의 산물이다. ‘동아시아 공동체’의 성공을 위해서 한·중·일간의 협력이 중요하다. 그러나 각국의 국내문제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가 고조되는 가운데 3국의 공조는 점점 어려워져 가는 형국이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운 시기일수록 균형된 감각으로 지역외교를 강화해야 한다. 중국인들이 즐겨쓰는 ‘구동존이(求同存異)’는 서로 동일함을 추구하지만 또한 상이함을 인정함으로써 공존의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다. 갈등을 통합으로 이끄는 지혜이다. 한·중·일간의 협의체 운용을 상설화함으로써 상호대립을 극복해 나가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다자외교의 장일수록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포용의 자세를 보일 때 오히려 외교주체로서의 입지가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안인해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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