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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와 차 한 잔] ‘오래된 지혜’ 펴낸 신화학자 김선자 교수

    [저자와 차 한 잔] ‘오래된 지혜’ 펴낸 신화학자 김선자 교수

    동양과 서양의 신화(神話)는 여러 면에서 차이점이 많다고 한다. 그리스·로마신화를 비롯한 서양의 신화들이 주로 인간의 근원적 탐욕을 비추고 있다면 동양의 신화는 대개 협력과 합심을 통한 공동체의 안녕과 질서를 담고 있다. 그 속성의 차이는 살아가는 환경과 사회적 배경의 다름이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화는 ‘옛 사람들이 후대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란 점에서 공통의 맥이 통한다. 연세대 김선자(55) 교수는 그 신화의 묘미에 흠뻑 빠져 사는 독특한 인물이다. 지난 10여년간 동아시아 소수민족들이 간직해 온 신화를 발굴해 그 속의 메시지를 건져내는 작업을 벌여 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화학자’다. 그 작업의 결실로 펴낸 ‘오래된 지혜’(어크로스 펴냄) 역시 요즘 사람들이 잊고 살지만, 되새김 직한 삶의 소중한 가치를 전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처음 신화에 흥미를 갖고 덤벼들기 시작했을 때는 문헌적 접근에 치우쳤던 것 같아요. 그런데 꼼꼼히 들여다보니 중국 소수민족의 신화들이 국가와 민족주의에 이용되는 경향이 짙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요.” 그래서 소수민족 사람들을 직접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지난 10여년간 그 현장을 돌며 체험해 오고 있다. “놀랍게도 그 신화는 박제된 옛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생활 속에 이어지고 있는 산 교훈이었어요. 그네들의 제의며 풍습, 일상에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많은 서양 신화 속 주인공들은 정복과 통치의 영웅으로 드러난다. 김 교수가 만나고 파악한 동아시아 소수민족들의 신화 속엔 그 정복과 압제의 다스림 대신 소통과 희생이 짙게 깔렸단다. 그리고 김 교수가 알아낸 그 소통과 희생의 바탕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공존의 철학이다. “척박하고 거친 땅에서 살아가면서도 그들은 자연과 생태를 훼손하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씁니다. 마을 뒷산의 나무 한 그루를 베어 낼 때도 경건한 의식을 치르고, 땅을 파헤칠 때면 꼭 다시 흙으로 덮어줘야 한다고 믿지요.” 현대인들은 그 노력을 미신이나 오래된 종교의 흔적으로 볼 수 있을 터. 하지만 김 교수는 그들의 몸짓과 습관을 오랜 세월 축적돼 온 배려와 공존의 지혜로 본다고 강조한다. “고대 그들의 먼 조상들도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차원에서 자연과 환경을 무시한 채 훼손하는 시행착오를 숱하게 겪었을 테지요. 그래서 돌아오는 재앙도 적지 않았을 것이고요. 그들의 신화는 그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교훈과 다름없다고 봐요.” 그들 소수민족이 지금도 새와 쥐에게 먹을 것을 남겨주는 배려의 풍습은 우리에게도 스며 있다. 감나무에 까치 몫으로 남겨두는 감이 그 배려와 닮았다. 그래서 소수민족들의 신화에 담긴 순기능과 역기능의 교훈은 우리도 눈여겨볼 대목이 많단다. “흐르는 물을 억지로 제어하기 위해 무리하게 댐을 쌓았다가 대 재앙을 만난 신화 속 사례는 벌써 후유증이 일고 있는 우리의 4대강사업을 다시 보게 만들지 않나요.” 타고 다니는 차와 살고 있는 집의 크기에 따라 능력과 수준이 저울질되는 세태. 그 무한경쟁의 살벌한 현실에서 ‘나눔과 배려를 보라.’는 외침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강의를 할 때 많은 학생들이 그 나눔과 배려엔 공감하지만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는 김 교수. 그래서 그 소수민족들의 신화에 담긴 ‘오래된 지혜’가 더 빛이 나는 것 아니냐며 웃는다. “아직도 미처 만나지 못한 소수민족 사람들이 많아요. 동아시아 소수 민족들의 신화에 담긴 추악한 인간 본성을 끄집어내 거꾸로 소중한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는 작업을 생각 중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런 사례를 별로 찾지 못한 것 같아요.”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日 우경화, 국력 약화의 증거”

    “日 우경화, 국력 약화의 증거”

    최근 일본 사회의 우경화 현상은 약화된 국력을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미국의 안보 전문가인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28일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에서 “진정한 문제는 일본이 지나치게 강력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약해지고 국내 지향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이같이 분석했다. 나이 교수는 현재의 여론조사 결과가 정확하다면 총선에서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에게 자리를 내줘야 할 것이라며 “일본의 대중 정서가 점점 더 국수주의적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의 일본은 1930년대의 군국주의 사회와는 전혀 다르다.”면서 “문제는 일본이 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지킬지, 아니면 2군으로 밀리는 것에 만족할지”라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이 세계 2위 경제국 자리를 중국에 빼앗긴 데다 200%를 넘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과 인구 노령화, 출산율 하락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바라봤다. 또 정치가 지난 20년간 정체 양상을 보이면서 젊은 층 사이에서 더욱 편협한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이 교수는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대신 국내로 몸을 돌려 반동적·대중영합적 국수주의를 추구한다면 이는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도 더 나쁜 일이 될 것”이라고 우려를 드러냈다. 이어 “온건한 민족주의가 제어를 통해 정치 개혁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국수주의적 분위기가 상징적이고 대중영합적인 입장으로 귀결되면서 주변국들의 적대감만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 또한 자국 내에서 국수주의의 부활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며 “양국의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서로를 먹여 살리면서 번영을 저해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게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위기의 한국호 해법 전문가에게 묻다] (5-끝) 한반도 생존전략

    [위기의 한국호 해법 전문가에게 묻다] (5-끝) 한반도 생존전략

    최근 미국과 중국의 권력 교체 등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환경이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과거사·영토 문제에 대한 역내 국가들의 민족주의적 성향 등으로 불안정성이 가중되는 가운데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주요 변수는 중국의 부상에 따른 미·중 강대국 관계의 향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아울러 남북 관계의 회복은 위기의 한국호에 또 다른 과제로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유력 대선 후보들에게 이 같은 과제에 대응하기 위한 외교안보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며 다양한 제언을 내놓았다. 우리나라는 분단 국가라는 특수상황과 동북아의 불안한 안보환경 때문에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발전한 중국의 부상과 이에 따른 미·중의 경쟁 및 갈등 가능성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 같은 도전과 위기의 극복을 위해 전문가들은 대체로 한·미 동맹과 더불어 한·중 간의 전략적 협력관계를 실질적으로 어떻게 조화롭게 발전시켜 나갈 것이냐를 주요 과제로 본다. 김열수 성신여대 교양교육원 교수는 19일 “미국이 미얀마와 라오스 등 동남아 국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등 전략적 경쟁이 심화되면 향후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에 긴장을 완화시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구본학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국제학과 교수는 “중국의 새로운 지도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다양한 초청·방문 외교를 통해 인적 관계 강화에 힘써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열수 교수는 “지난해 9월 서울에 마련된 한·중·일 3국 협력 사무국은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는 초보적 메커니즘”이라면서 “한·미·중 대화체를 만들어 안보협력을 논의 할 수 있는 틀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전재성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미·중 관계가 충돌보다 협력으로 갈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면서도 “한·미 동맹 일변도의 외교를 지양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뿐 아니라 시민사회까지 포함한 다차원적 교류를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제언했다.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에 대비해 정부의 위기관리 체제를 개편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김열수 교수는 “차기 정부는 2015년 군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대비해 상부지휘구조 개편 등 국방개혁을 완수하고 국내총생산(GDP)의 2.7% 수준인 국방비를 3.5% 수준으로 증액할 필요가 있다.”면서 “청와대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를 복원하고 위기관리실을 활성화시켜 전반적인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돈독한 한·미 관계를 차기 정부에서 이어 갈 방안도 제시됐다. 구 교수는 “미국은 재정적자로 인해 향후 약 10년간 5000억 달러의 국방비 삭감을 계획하고 있는 만큼 동맹국에 대한 방위비 분담과 국제평화유지 활동을 요구할 것”이라며 “이를 회피할 수 없기 때문에 국제평화유지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성호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미 FTA 재협상론 등 국내 정치 이슈를 한·미 관계에 끌어들이는 태도는 동맹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시진핑號 어디로] (1)강한 힘의 외교 펼친다

    [시진핑號 어디로] (1)강한 힘의 외교 펼친다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이 15일 드디어 중국의 1인자로 올라선다. G2(주요 2개국)의 한 축이 시진핑에게 맡겨진 것이다.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물려받았지만 그의 앞에는 세계 경기침체의 지속과 빈부격차에 따른 사회갈등 고조 등 안팎 도처에 해결해야 할 과제가 즐비하다. ‘시진핑의 중국’을 다섯 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평화로운 굴기(?起·우뚝 일어섬)는 불가능하다.” 중국 공산당은 지난 8일 시진핑 시대 10년을 여는 공산당 18차 전국대표대회(전대) 개막식 당시 밝힌 외교·군사 노선 보고에서 기존의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추며 힘을 기르다) 기조를 버리고,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패권 외교’를 펴겠다는 뜻을 공식화했다. “중국은 군비경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고, 어떤 국가에 대해서도 군사적 위협을 조성하지 않겠다.”(17차 전대 ‘정치보고’)던 메인 테마를 삭제하는 대신 “중국 국방건설의 목적은 국가 주권, 안전, 영토의 완전한 보존, 평화발전을 위한 보장에 있다.”(18차 전대 ‘정치보고’)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2020년 군 기계·정보화 예사롭지 않아 특히 “국제적 지위에 걸맞고 국가 안보와 발전 이익에 부응하는 강한 군대를 건설하는 것이 전략적 임무”라고 선언했다.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국가 주권’과 ‘핵심이익’ 개념이 군사 분야에도 등장했다는 점은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다. 중국은 과거 주권과 이익이란 개념을 시짱(西藏·티베트), 신장(新疆) 등 자국 영토에 국한해 사용해왔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필리핀·베트남 등과 분쟁 중인 남중국해, 일본과 대치 중인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등 영토분쟁 지역에까지 확대시켜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군대의 국가발전 수호 목표를 적시한 것은 중국이 패권 외교를 관철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 같은 점에서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미국과 협력보다 경쟁을 확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시 부주석이 연초 워싱턴을 방문하면서 내세웠던 ‘신형 대국관계 구축’은 ‘아시아·태평양 중시’를 선언한 미국의 ‘중국 봉쇄’에 맞선 개념이다. 당초 시 부주석이 내세웠던 신형 대국관계 구축은 ▲조화 추구 ▲선의 경쟁 ▲상호 공영 등 3원칙을 통해 서로 ‘윈·윈’하자는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중화 패권’을 꿈꾸는 중국으로서 경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으로 풀이된다. ●美 견제·영토갈등 심화에 부담 느낄 수도 실제 중국은 이를 위해 2020년까지 군 기계화와 정보화에 중대한 진전을 이루겠다며 일정표를 구체화했다. 군사력 강화 영역도 확대했다. 정치보고에서 항공모함 건설 등을 통한 원양 해군 육성과 우주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할 뜻을 강조한 바 있다. 세계적인 군비 절감 추세 속에 군의 현대화를 내세워 나홀로 확충에 나서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이 향후 10년간 4920억 달러(약 541조원)의 국방예산을 줄이겠다고 밝힌 것과는 달리 중국은 올해 국방비를 1000억 달러 이상으로 늘렸다. 첫 항공모함인 랴오닝(遼寧)을 진수시킨 데 이어 향후 5년 내 3척 이상의 항모군단을 배치한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시진핑이 튼튼한 군 배경을 가졌다는 점에서 군사력 강화 노선이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강한 군사와 외교를 강조한 18차 전대 정치보고의 초안을 시진핑이 작성했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실제로 그는 1979년 중앙군사위원인 겅뱌오(耿飇) 국방부장의 비서로 3년간 군을 경험했고, 푸젠(福建)성과 저장(浙江)성 등에서 근무할 때 군을 직접 지휘했다. 국내적으로 고조되는 민족주의 정서를 무시할 수도 없다. 다만 중국이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미국의 견제를 받고 주변과는 영토갈등이 잦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시진핑 체제가 강경 일변도로 가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베이징 주현진특파원 jhj@seoul.co.kr
  • [후진타오 10년의 명암] (중)군사력 바탕 ‘힘의 외교’

    [후진타오 10년의 명암] (중)군사력 바탕 ‘힘의 외교’

    “중국과 미국은 서로의 전략적 의도를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대하고, 각자의 이익을 존중하며 중대한 국제 및 지역 문제에 대해서는 협조를 강화해 21세기 새로운 대국관계와 국제관계를 건설해야 한다.”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은 지난 7월 8일 베이징 칭화(淸華)대에서 열린 세계평화포럼에서 ‘새로운 대국관계 건설론’을 들고나와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시대의 외교가 이젠 ‘도광양회’(韜光養晦·칼집에 칼날의 빛을 숨기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르다)를 뛰어넘어 ‘유소작위’(有所作爲·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한다)를 하겠다는 속내를 여과없이 드러냈다. 주요 2개국(G2) 반열에 올라선 중국이 미국과 대등한 협력자로서 세계 질서의 새판을 짜겠다는 것이다. 이 처럼 ‘후진타오 시대’는 한마디로 ‘힘의 외교’가 시작된 것으로 요약된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커진 덩치를 바탕으로 힘을 앞세워 자국의 이익을 챙기겠다는 얘기다. 일본과의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분쟁, 동남아 국가들과의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등에서 그런 실태가 이미 나타났다. 중국은 그동안 남중국해 분쟁 대상국인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국가들에게 공동개발 카드를 제시하며 대화와 협력을 강조했다. 분쟁은 당사국 간 양자협상으로 풀어야 한다며 무력을 배제하려는 듯한 ‘화해 제스처’를 보냈다. 중국이 평화로운 세계 속에서 발전하고 세계평화를 도모한다는 ‘화평굴기’(和平?起)의 외교 전략을 표방해온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지난 4월 이후 스카버러섬(중국명 황옌다오) 영유권을 놓고 필리핀과 해상 대치를 강행하는가 하면, 일본과의 센카쿠 분쟁에서도 강공책으로 일관하며 ‘힘의 외교’를 과시했다. 스카버러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중국 정부는 5월 필리핀과 해상 대치 사건이 발생하자 그 보복으로 자국민의 필리핀 여행을 제한하는 한편, 필리핀산 농수산물 검역 강화 등으로 기를 꺾었다. 앞서 2010년에는 자국 어선이 센카쿠열도 부근에서 일본 순시선에 나포되자 희토류 수출 제한 카드로 일본을 ‘굴복’시켰다. 중국 외교의 강경 일변도 정책은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전략에 맞서 남중국해 제해권(制海權)을 확보해야 한다는 조급증의 산물이고, 대내적으로는 고조되는 민족주의적 여론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환경 때문이라는 것이 베이징 정가의 분석이다. 진찬룽(金燦榮) 중국인민대 국제관계학원 부원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중국은 그동안 경제성장을 위해 외국과의 분쟁을 최대한 억제해왔으나, 지금은 그 틀을 벗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힘의 외교’의 동력은 경제력이 뒷받침된 ‘군사 굴기’에서 나온다. 중국은 1990년대 초반 인민해방군 전력 증강을 외치며 해마다 두 자릿수 이상의 비율로 국방예산을 늘려왔다. 올해 국방예산은 1067억 달러(약 116조 3500억원)를 기록, 사상 처음 1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이미 2007년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군사대국으로 도약한 바 있다. 특히 지난 9월 첫 항공모함인 ‘랴오닝’(遼寧)을 정식 취역시켰고, 스텔스기인 젠(殲)-20과 ‘항모 킬러’로 불리는 대함 미사일 둥펑(東風)-21,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둥펑-41 등 신종 첨단 무기를 선보이며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중국은 이와 함께 지난해 11월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산하에 장성급 전략기획부를 신설, 군 전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전까지 육·해·공군 각 병종별로 전략 부서를 가동했지만,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전략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통합 전략부서를 만든 것이다. 후 주석의 지시로 신설된 전략기획부는 중대 전략 연구, 군 건설 발전기획 및 개혁 방안을 마련하고 군 전략 차원의 배치와 통제 방안을 건의하는 등 군의 거시적 기획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경제발전으로 인민해방군이 업그레이드되면서 통합 전략의 필요성이 커진 때문으로 풀이된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일자리도 물가도 결국 외교와 직결… 이제라도 비전 밝혀야”

    “일자리도 물가도 결국 외교와 직결… 이제라도 비전 밝혀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치·경제 지형이 격동기를 맞고 있는데도 18대 대선의 주요 후보들이 외교 분야 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질타했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중국 등의 11월 초 권력 교체기 이후 연말 대선까지 시간 간격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외교안보는 우리로서는 강대국 사이에서의 생존 문제인데도 논의가 제대로 안 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입을 모았다. 전문가들은 또 “후보들이 외교 분야 문제를 제기해서 득 볼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면서 “실제로 그간 대선 후보들이 미래 외교안보 정책보다는 이념갈등을 촉발시키면서 이 문제를 대해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헝클어진 게 아니냐.”고 비판했다. “안보리 이사국에 재선돼 기뻐하지만 외교 안보에서 미국 쪽에 서느냐, 중국 편을 드느냐의 선택의 기로에 설 수 있다는 엄중한 현실을 유권자에게 인식시킬 책임이 후보들에게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신화 고려대 정외과 교수는 23일 “외교라는 것은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에 관계없이 매일 다른 나라와 대한민국으로서 부딪쳐야 하는 문제”라면서 “국민을 상대로 한 설득과 비전 제시도 문제지만, 외교 문제에서 굵직굵직하게 결정해야 할 것은 유보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들은 한국에 대선이 있다고 해서 중요한 결정이 필요한 일에서 기다려 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복지, 정의사회, 공정한 기회라는 세 가지 키워드가 대선 후보를 잡고 있다 보니 신경을 안 쓰는 분위기이지만, 능숙하게 외교를 다루려면 일찌감치 비전을 제시해야 하고 외국에 우리가 어떻게 하겠다는 신호를 줄 수 있어야 외교정책에 공백이 생기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최근 미국과 중국 간 갈등 국면 아래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정책을 내놓고 후보간 비교점과 차이점 등이 밝혀져야 하는데, 이제 겨우 대북 문제에 대한 언급을 내놓은 정도”라고 꼬집었다. 김기정 연세대 정외과 교수는 “특히 미국이 아시아로 외교의 중심축을 이동하려 하고 있고, 동아시아에는 영토·민족주의·군비경쟁 문제 등으로 여러 가지 불안정하고 잠재된 갈등 요소들이 있어 차기 정권 5년은 낙관과 비관이 동시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며 “불안정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어떤 예방 외교를 추진할 것인지를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요 대선 후보 3명 가운데 구체적인 ‘외교 정책’을 공식적으로 제시한 후보는 아직까지 없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미국 외교전문 격월간지 포린 어페어스 기고문에서 “남북한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성공적으로 신뢰 구축 방안을 제도화할 수 있다면, 아시아에서도 정치·경제적인 협력이 군사·안보적 경쟁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확대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문재인 민주당 후보는 ‘10·4 남북공동선언 5주년’에 맞춰 한반도 평화구상에 대한 로드맵을 내놓은 정도다. 전시 작전통제권 전환의 차질 없는 추진, 서해 북방한계선(NLL) 확고 수호 및 서해에서의 긴장완화 등 5대 국방 구상을 제시한 바 있다. 안철수 무소속 후보는 저서 ‘안철수의 생각’에서 “균형외교와 다자외교가 중요하다.”면서 “대미·대중 외교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31)서재필 vs 윤치호

    [선택! 역사를 갈랐다] (31)서재필 vs 윤치호

    서재필(1863~1951)와 윤치호(1865~1945) 두 사람은 개화파의 막내들로서 10대 후반부터 일본 유학을 거쳤고, 1884년 갑신정변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당시에 거의 유일하게 미국에서 정식 대학교에 진학해 근대 서구문명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근대적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들인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 크게 엇갈린다. 서재필은 독립유공자로서 국립묘지에 안장된 반면 윤치호는 친일파의 대표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무엇이 두 사람을 극단적으로 다르게 만들었을까. ●갑신정변 행동대장 vs 美 공사관 통역관 서재필은 19세였던 1882년 별시 문과에 합격했으나 무관으로 과감히 변신해 일본의 도야마(戶山) 육군학교를 나온 후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정변 과정에서 고위 대신들을 살해하는 행동대장이었다. 따라서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 망명 길에 올랐다. 한편 윤치호는 16세였던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의 수행원으로 파견되었다가 남아서 도진샤(同人社)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그는 영어 공부를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미국공사 푸트의 통역관으로 발탁돼 귀국하였다. 윤치호는 갑신정변 주도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정변에 반대했고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윤치호는 당시 김옥균 일파로 인식되고 있었기에 중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났다. 정변 실패 후 일본에서 냉대를 받고 미국으로 떠난 서재필은 홀로 서기를 감행하였다. 그는 워싱턴 DC에서 야간 의과 대학을 나와 마침내 1893년에 의사 면허를 받았다. 1890년에는 미국인으로 귀화해 이름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꾸고, 4년 뒤에는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는 미국 주류사회에 완전히 편입되어 살아가는 아메리칸 드림의 원조였다. 한편 윤치호는 1885년 초 중국 상하이 중서학원에서 유학을 시작했으며 1887년 세례를 받았다. 그는 1888년 미국 남감리교의 후원으로 밴더빌트와 에모리 대학에서 신학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였지만, 시민권 취득이나 국제결혼을 생각하지는 않았고 유학을 마친 후 중국 중서학원으로 돌아가 교사가 됐다. ●서재필, 의사 되며 ‘원조’ 아메리칸드림 이뤄 서재필은 1894년 갑오개혁 정권의 귀국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마침내 1895년 12월 귀국했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중추원 고문관에 취임하였고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또한 그해 7월에는 독립협회를 조직하는 데 고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1897년 후반 러시아의 만주 침략과 조선 진출 정책이 강화되자 반러적 입장을 드러내다가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됐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당시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행세해 이름을 서재필이 아닌 필립 제이슨으로 사용했다. 굳이 한글로 표현할 때는 제손 박사 또는 피제선(皮堤仙)이라고 하였다. 한편 윤치호는 갑오개혁 이후 귀국하여 학부협판이 되었다. 그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했으나 ‘정동파’로 분류됐고 을미사변으로 미국 선교사와 공사관에서 피신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던 중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그는 고종의 특사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다녀왔다. 따라서 독립협회 창립에 참가할 수 없었지만, 귀국 후 부회장에 취임하면서 독립협회를 계몽단체로 개조했다. 그는 서재필이 떠난 후 독립신문을 운영했고, 이완용에 이어 1898년 8월부터 독립협회 회장을 맡아 이후 전개되었던 정치개혁 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 달리 만민공동회가 폭력화되어 결국 강제 해산되자 지방관으로 떠남으로써 독립협회 회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간 후 대한제국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바탕으로 필라델피아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20년 동안 조선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서재필은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고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그 후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며 독립 의지를 표현하는 잡지, 책자를 발행했다.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 군축회의에서 조선 문제를 상정하려고 노력하였다가 실패하자 항일활동을 마감하였다. 윤치호는 대한제국이 보호국으로 전락한 후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계몽운동에 나섰다. 그는 대한자강회의 회장이었고 개성에 한영서원을 설립했으며 안창호와 협력해 대성학교 교장과 청년학우회 회장을 맡았고 YMCA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1912년에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당시 윤치호에 대한 조선인들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그는 3·1 운동을 전후하여 파리 강화회의 대표, 임정 참여, 워싱턴 군축회의 참가, 미국 망명 등 모든 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열강이 조선을 도와 일본과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이를 반대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일본의 통치정책에 대해서는 반감을 품었지만 조선인들이 독립을 쟁취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설령 독립되었다 하더라도 이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민족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형태의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민족성 개조를 통한 민족역량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국인으로 산 서재필 vs 일본인 된 윤치호 서재필은 1922~1927년 갑자기 국내 일간지와 잡지 등에 다시 등장하여 식민지배에 순응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식민지화의 책임을 전적으로 대한제국 지배층의 무능과 민중의 무지에서 찾았고, 독립운동과 같은 정치적 활동보다는 경제적 활동에 주력할 것을 권고했다. 아울러 그가 1937~1938년에 미주 한인 2세를 위해 ‘신한민보’에 영문으로 기고했던 ‘MY DAYS IN KOREA’(나의 조선 시절)를 보면 대부분 조선왕조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고 개화파를 정당화하면서 오히려 일본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러던 그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맞서 싸우는 미국 시민으로서 반일로 돌아섰다. ●윤치호, 日전쟁 승리를 백인인종차별 극복 간주 한편 윤치호는 일본의 대륙 침략이 시작되고 내선일체 정책이 강화되는 시기에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일본 국민’이라는 전제하에서 한국 기독교의 ‘일본화’를 주도했으며 대표적 친일단체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1945년에는 마침내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에까지 선임되었다. 그의 친일은 일제의 탄압에 의한 강요라기보다는 당시의 조건 속에서 조선 민족의 현명한 선택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본이 구미 열강에게 승리하는 것을 황인종이 백인의 인종차별주의를 이긴 것으로 열광하였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일본이 소련에 승리하기를 기원하였다. 나아가 내선일체를 통해 민족차별 정책이 철폐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서재필은 점령국 미국의 시민으로서 미군정 고문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대한민국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세력도 있었다. 그는 이승만의 단정 노선에 대해 반대하면서 통일국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결국 고국에 머무르기보다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윤치호는 더는 공적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죽기 몇 달 전에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한 노인의 명상록’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거기서 그는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며 공산주의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 그리고 조선의 해방은 항일민족운동의 결과가 아니라 연합국의 승리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며 친일파를 사면하여 민족단결을 이루자고 호소하고 있다. 윤치호가 1945년 12월 사망하여 1947년 7월 미군정 고문으로 귀국한 서재필과의 재회는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말년 볼 것인가 vs 인생 전체 평가할 것인가 서재필은 전 생애에 걸쳐 새로운 도전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는 어느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들 만큼 도전과 성취를 이루어낸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항상 자신은 안전지대에 머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투쟁과 희생을 요구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에게서 민족의 지도자가 지녀야 할 희생적 자세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사실 서재필이 서재필로 산 것은 불과 27세까지였고 나머지는 필립 제이슨으로 살았다.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버린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해방 후 부모의 묘소조차 참배하지 않았다. 그의 묘지명에는 분명히 필립 제이슨이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그가 스스로 택한 필립 제이슨의 유해를 억지로 국내로 모셔와 국립 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은 분명히 그가 원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반면에 윤치호는 모든 판단을 함에 지나치게 신중했고 근대 시민윤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국내에서 교육과 종교 활동을 통해 조선인들의 민족성을 개조하여 근대 국민으로 발전할 것을 희망했다. 그는 안창호를 누구보다 아끼고 후원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조선인들이 필요로 한 민족 저항의 지도자가 되는 길을 거부하고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통해 결과적으로 친일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활동했던 기간이 합해서 5년이 안 되지만 대체로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같은 입장에서 행동하였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살았지만, 두 사람이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는 시각과 일본에 대한 선망과 동경도 비슷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긴 세월을 자의에 의해 미국인으로서, 윤치호는 타의에 의해 일본인으로 살았다. 그 결과 오늘날 서재필은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반면에 윤치호에 대해서는 매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윤치호의 친일을 옹호할 마음은 없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인생을 단죄하기에는 안타까운 연민의 심정이 든다. 하지만 그의 친일을 ‘협력’ 또는 ‘친일 민족주의’라고 정당화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한 인물의 굴곡에 찬 긴 인생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역사학자로 살아가면서 점점 마음속으로 느끼게 된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 [서울광장] 일자리·먹거리, 외교에서 나올 수 있다/박정현 논설위원

    [서울광장] 일자리·먹거리, 외교에서 나올 수 있다/박정현 논설위원

    2000년대 초 글로벌 경제는 저물가 현상을 톡톡히 경험했다. 경제성장률이 5%를 넘는데 물가상승률은 3%를 밑도는 희한한 현상이 몇년 동안 지속됐다. 경제 관료와 경제학자들은 당시에 똑 부러진 설명을 내놓지 못했고, 중국발 저물가 탓이라는 분석은 나중에야 나왔다. 중국이 길러내고 찍어내는 값싼 농·축산물과 공산품이 세계를 먹여살렸고, 중국은 손색없는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해냈다. 세계 경제의 3대 축인 유럽·미국·중국 경제가 동반 불황을 겪고 있다. 저성장 터널에 진입한 우리 경제가 좋아질 날은 기약 없고, 기업과 자영업자들은 아우성이다. 다행스럽게도 명동과 동대문 시장이 그나마 활기를 띠고 있다. 백화점과 면세점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달 초 중국 국경절을 맞아 한국을 다녀간 중국 관광객, 즉 유커(遊客)가 10만명을 넘었다는 소식이다. 유커 한 명이 지출하는 비용은 110만원으로 일본인 관광객 42만원의 2.6배다. 이들 ‘큰손’이 쓰고 가는 돈은 2억 달러(한화 약 2200억원)로 추정된다. 많은 상인들과 젊은이들이 가뭄에 단비 만난 듯 유커 덕을 보고 있다. 경기가 좋을 때는 저물가로, 경기 침체기에는 유커들이 한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중국이 10여년 동안 우리를 먹여살리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이 차지하던 한국의 최대 교역국 자리는 2004년 중국으로 바뀌었다. 중국에도 한국이 미국·일본·홍콩에 이어 4위 교역국이다. 양국 교역액은 2206억 달러로 35배 늘었다. 제주도가 중국인들에게 넘어갈지 모른다는 걱정이 나올 정도로 중국인은 제주도 부동산 투자에 열중이다. ‘중공’을 중국으로, 한성을 서우얼(首爾)로 바꾼 것은 북방외교다. 북방외교는 노태우 정부가 여소야대와 중간평가 등 국내 정치적 난관을 벗어나려고 추진한 것이지만 동북아 긴장 완화에 기여한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1990년 한·소 수교,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에 이어 한국과 중국은 1992년 8월 24일 정식으로 수교했다. 당시 연간 13만명이던 양국 방문자는 20년 만에 660만명을 넘어섰고 이제 1000만명 시대 개막을 눈앞에 두고 있다. 외교의 힘은 지역의 정세와 지도를 일순간에 바꿔 놓는다. 동시에 먹거리·일자리 창출에 직결된다는 점을 중국과의 수교가 보여줬다. 그럼에도 대선 주자들은 경제민주화에만 올인한다. 새누리당은 ‘좌향좌’ 공약으로 총선에서 재미를 봤고, 민주통합당도 만회라도 하려는 듯 경제민주화에 집중한다. 경제민주화 공약은 넘쳐나는데 정작 외교·안보 공약은 보이질 않는다. 우리가 정말 분단국인가 의문이 들 정도다. 외교·안보·통일 국방 공약에서 대선 후보들은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북한 병사가 철책선을 넘어 ‘노크 귀순’을 하고 그 와중에 군 기강 해이 사실이 드러나도, 북한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도발을 해도 말이 없다. 대권을 잡겠다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통일세에 대한 의견이라도 공개해야 도리인 것 아닌가. 동북아 정세도 대선 후보들이 입 다물고 지켜볼 만큼 한가하지 않다. 동아시아는 지금 중국과 일본의 영토 팽창주의가 부딪치면서 요동치고 있다. 중화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중국의 영토 팽창주의와 일본의 패권주의로 동북아의 긴장감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차기 총리로 유력시되는 일본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는 집권하면 방위예산을 늘리겠다고 공언해 또 한번의 격랑을 예고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 10년 동안 동북아 외교에 사실상 실패했다. 노무현 정부는 설익은 동북아 균형자론을 펴면서 미국과 괜한 갈등만 일으켰다. 이명박 정부는 한쪽으로 너무 기우는 바람에 “중국이 섭섭함을 느끼고 있다.”(권병현 전 주중대사)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을 대상으로 한 동북아 외교는 통일을 향한 지렛대이자 수단이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북핵 해결과 남북 통일이어야 한다. 북한은 우리의 일자리와 먹거리가 나올 유일한 곳이다. 대선 주자들이 동북아 외교 비전과 통일 방안을 내놓아야 할 이유다. jhpark@seoul.co.kr
  • [열린세상] 대통령의 외교언어/장철균 서희외교포럼대표·전 스위스 대사

    [열린세상] 대통령의 외교언어/장철균 서희외교포럼대표·전 스위스 대사

    신라 선덕여왕이 즉위하자 당(唐) 태종이 모란 그림을 보내왔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여왕은 ‘그림에 나비가 없으니 이는 당제(唐帝)가 과인이 짝이 없음을 놀리는 것이다.’라 했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이는 당과 신라의 정상외교를 묘사한 것으로, 여기에서 모란 그림을 오늘날 넓은 의미의 외교언어(diplomatic parlance)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외교언어란 말과 글(문서)뿐만 아니라 그림과 같은 상징물, 독특한 몸짓이나 태도, 스타일과 같은 비언어로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외교 의사소통 방식이다. 미국 첫 여성 국무장관이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여사가 외국방문 시에 색깔이 다른 브로치를 사용해 의사표시를 한 것도 외교언어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 시에는 중국이 판다 곰을 선물해 ‘판다 외교’도 그 이름을 남겼다. 때로는 침묵도 외교언어가 될 수 있다. 은둔으로 일관하다가 필요할 때 잠시 등장해 세상의 주목을 유도한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의 행태를 ‘침묵 외교’라고도 한다. 2008년 2월 뉴욕 필이 평양에서 공연을 했다. 미국의 ‘콘서트 외교’는 1956년 미·소관계 정상화의 물꼬를 튼 이래 1973년에는 미·중관계의 해빙을 조성해서 공산권과의 외교에 단골메뉴가 되었다. 1946년 3월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가 야당 당수일 때 미국을 방문해 미주리 주의 웨스트민스터 대학 연설에서 언급한 ‘철의 장막’은 냉전 반세기 동안 외교언어의 대명사가 되었다. 1992년 5월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바로 이 대학을 찾아 ‘냉전의 종식’을 선언했다. 외교언어는 국가관계와 국제정치에 영향을 주고받는 외교의 중요한 소통수단이다. 그래서 국가정상의 외교언어는 언제나 주목을 받지만, 외교언어에 힘과 행동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진실성이 결여된 ‘구두선’(lip service)으로 또는 ‘그저 한번 해본 소리’(rhetoric)로 평가 절하되어 정상 개인뿐 아니라 나라의 신뢰에도 손상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서양에서도 ‘큰 대포는 잘 쏘지 않는다.’고 한다. 세치 혀는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지만, 천 냥의 빚을 질 수도 있다. 한국 대통령의 외교언어는 실패한 사례가 자주 거론된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의 ‘일본 버르장머리 고치기’와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의 ‘북한 핵 개발 일리 있다’는 발언이다. 정제되지 않은 외교언어였다. 지난 8월 이명박 대통령의 ‘일왕도 방한하고 싶으면 먼저 사과하라.’는 발언도 신중하게, 의도된 외교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독도문제나 과거사 문제에 대한 메시지는 약화되고 대일외교에 혼란을 초래했다. 학생과의 대화 중에 우연히 나온 실수라는 해명은 또 하나의 실패한 외교언어가 될 수 있다. 옛말에도 ‘왕의 말씀은 바꿀 수 없다.’고 했다. 한국 대통령의 외교언어로서 성공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1952년 1월 국제사회에서는 ‘리-라인’으로 회자된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이다. 6·25전쟁 중이었고 미국과 일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화선을 통해 우리의 영해를 넓히고 독도의 실효적 지배를 가능하게 했다. 외교언어를 잘 구사하기 위해서는 우선 의도하는 목표를 명확히 하고, 그 결과를 예측해야 한다. ‘결과를 잘 생각하라.’는 로마 속담도 있다. 결과를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결과가 불확실하면 아니함만 못하다. 그리고 행동할 때는 힘이 수반되어야 효과가 있다. ‘큰 몽둥이를 갖고 다니되 말은 부드럽게 하라.’ 외교의 정곡을 간파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 대통령의 말이다. 12월 19일 대통령 선거가 있다. 대통령의 외교언어는 곧 외교력이다. 세 후보의 외교언어 능력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아직 후보들은 인기가 없는 외교, 안보 이슈에 말을 아끼고 있다. 그러나 남북관계와 동북아의 영토분쟁, 민족주의, 정치 우경화, 군비경쟁 등 한국에 주어진 외교적 도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준엄하다. 한국의 미래는 외교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과 러시아의 지도자는 교체되었고, 중국과 미국·일본의 정상은 곧 선출된다. 이들과 상대하게 될 새로운 한국 대통령의 외교력을 기대해 본다.
  • [씨줄날줄] 붉은 작가들/최광숙 논설위원

    붉은 색은 중국을 상징하는 색이다. 세계 미술시장에 붉은 옷을 입은 작가들이 등장한 지 꽤 됐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주목받기 시작한 중국의 현대미술작가들은 이제 세계 미술시장에서 ‘블루칩’으로 대접받고 있다. 장샤오강·웨민쥔·쩡판즈 등의 작품은 경매시장에 나오기만 하면 고가에 팔려 나간다. 독특한 조형성과 유머러스한 사회풍자 등 예술적인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미술시장에서 중국인들의 구매력이 커지면서 중국 미술의 위상이 높아진 측면도 있다. 미술 시장을 넘어 문학계에도 중국 작가들이 약진하고 있다.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자인 소설가 모옌이 그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중국 국적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문화대혁명 등 자신이 경험한 중국 현대사의 격변을 다양한 인간의 삶 속에서 풀어놓는 이야기꾼으로 평가받아 왔다.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뜻의 모옌(莫言)을 필명으로 쓸 만큼 그는 글을 쓰는 데만 천착해온 인물이다. 중국 문단의 저력 있는 작가들의 작품은 한국에서도 인기몰이 중이다. 1996년 중국 3세대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는 출간되자마자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올랐을 정도다. 가난한 노동자가 자신의 피를 팔아 살아가는 인생 역정을 때론 눈물나게, 때론 경쾌하게 그려나가는 스토리 텔링이 대단하다. ‘붉은 수수밭’과 함께 장이머우 감독의 또 다른 영화 ‘홍등’의 원작자인 소설가 쑤퉁의 작품들도 중국은 물론 한국에서 잘 팔린다. 옌롄커도 폭발력 있는 작가다. 반체제 성향이 강해 그의 최신 장편 ‘사서’(四書)는 중국에서 출판이 거부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출판됐다. 그는 얼마 전 모옌과 함께 가장 강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혔던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중·일 간의 영토분쟁과 관련해 “값싼 술(민족주의)에 취해 영혼이 오가는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며 냉정을 촉구하자 “지식인들의 대화가 영토분쟁에 한 잔의 냉차가 될 수 있다.”며 화답했던 이다. 국공합작과 문화대혁명, 개혁과 개방 등 굴곡진 중국 근·현대사를 뚫고 나온 중국 작가들이 이제 미술에 이어 문학 분야에서도 그 역량을 펼치고 있다. 사실 우리 작가들도 식민 지배와 분단, 6·25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 등 중국 못지않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왔다. 세계적인 예술작품이 탄생할 수 있는 토양을 갖추었으니, 이제 작가들이 분발하는 일만 남았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朴, 대통합위·공약위 직접 챙겨… ‘국민통합’ 방점

    朴, 대통합위·공약위 직접 챙겨… ‘국민통합’ 방점

    11일 모습을 드러낸 새누리당 ‘박근혜호(號)’는 기능에 따른 수평적 결합이 가장 큰 특징이다. 선거대책위원회(선거 지원)와 100% 대한민국대통합위원회(갈등 해소), 정치쇄신특별위원회(정치 개혁), 국민행복추진위원회(정책 개발), 공약위원회(정책 이행) 등 5개 조직이 병렬 관계를 형성한다. 특히 박 후보는 대통합위와 공약위를 직접 챙기기로 했다. 국민대통합을 시대정신이자 자신의 정치 브랜드로 앞세우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대통합위는 앞으로 과거사 문제 등을 둘러싼 사회 갈등을 해소하는 데 초점을 둘 것으로 예상된다. 대통합위 인선에서는 호남, 민주화 인사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우선 수석부위원장에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 출신인 한광옥 전 민주당 상임고문을 임명했다. 한 전 고문과 안대희 정치쇄신특위 위원장과의 인선 갈등 해결을 위한 고육책 또는 생색내기용이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을 넘어설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부위원장으로는 미국 출신으로 5대째 우리나라에서 선교·의료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인요한 연세대 교수와 윤봉길 의사의 장손녀인 윤주경 매헌기념사업회 이사,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인 김중태 전 서울대 민족주의 비교연구회장이 선임됐다. 위원에는 광주시민사회단체연합 공동대표인 김규옥 목사와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특별사면된 김현장 광주국민통합2012 의장, 한경남 전 민청련 의장 등이 포함됐다. 박 후보가 공약위원장을 맡은 것은 향후 대선 가도에서 공약으로 상징되는 정책 대결을 펼치겠다는 뜻을 반영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정현 공보단장은 “공약위는 박 후보가 공약을 반드시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기구”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국민행복추진위가 정책 개발, 공약위가 정책 실천을 각각 담당하는 역할 분담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당 일각에서는 공약위와 국민행복추진위가 기능 충돌에 따른 불협화음을 낼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보단에서는 자유선진당(현 선진통일당) 대변인 출신으로 중국 정부의 탈북자 강제 북송에 항의해 단식투쟁을 벌였던 박선영 전 의원을 북한인권특보로 기용한 게 눈에 띈다. 다만 당내 비박(비박근혜) 진영의 ‘양대 축’ 가운데 정몽준 전 대표는 공동선대위원장에 이름을 올렸지만 이재오 의원은 선대위에 합류하지 않은 점 때문에 당내 화합이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는 지적이 나온다. 캠프 내에 지지 취약 계층인 젊은 층을 공략하기 위한 개혁 성향의 인사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도 한계라는 평가가 있다. 최근 인적 쇄신 논란을 겪으면서 박 후보의 리더십에 생채기가 난 것도 향후 극복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Weekend inside] 세계는 지금 분화중

    [Weekend inside] 세계는 지금 분화중

    스페인 카탈루냐, 캐나다 퀘벡, 영국 스코틀랜드, 중국 티베트의 공통점은? 이들은 모두 본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온 이른바 ‘분리주의’ 지역이다. 독립을 추진해 온 역사와 배경은 모두 달라도 본국에서 분리, 독립하고자 하는 의지는 서로에게 뒤지지 않아 보인다. 최근 들어 이들 지역에서 독립을 위한 시위가 거세지고, 국민투표가 추진되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주목된다. 지난달 11일(현지시간) 스페인 제2의 도시 바르셀로나에서 100만명 규모로 추산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 지역의 중심지로, 시위 참가자들은 카탈루냐 깃발을 흔들면서 ‘당장 독립을’, ‘새로운 유럽국가 카탈루냐’ 등의 구호를 외쳤다. 대규모 시위에 이어 카탈루냐 의회는 지난달 27일 중앙정부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국민투표 시행 결의안을 승인했다. 결의안에는 오는 11월 25일 지방선거 이후 760만명에 이르는 카탈루냐 주민들의 ‘공동의 미래’에 관한 협의가 이뤄질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카탈루냐 “중앙정부에 세금 뜯기느니 갈라서자” 카탈루냐의 최근 독립 요구 움직임은 경제적 이유가 가장 크다. 스페인이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스페인 국내총생산(GDP)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경제적 비중이 큰 카탈루냐도 직격탄을 맞게 된 것이다. 카탈루냐는 특히 중앙정부에서 걷어가는 과도한 세금 등으로 재정적자가 커져 400억 유로(약 58조원)의 부채를 안게 됐고, 지난 8월 부채 일부를 갚기 위해 중앙정부에 5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카탈루냐의 조세권과 재정지출권 요구를 거절했고 분리독립을 위한 국민투표도 막겠다는 입장이다. 고유 언어와 독자적 역사·문화를 가진 카탈루냐는 1714년 9월 11일 스페인·프랑스 연합군에 점령당한 뒤 이날을 독립 염원 기념일로 여길 정도로 오래 전부터 분리주의 전통이 강하다. 1936년 쿠데타로 스페인 정권을 잡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카탈루냐를 정치적으로 탄압하면서 독립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졌다. 카탈루냐의 독립 열망은 커지고 있지만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스페인 현지 언론 등에 따르면 카탈루냐가 독립할 경우 채무 증가, 재정수입 축소 등이 예상돼 경제적 측면에서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지난달 말 실시된 스페인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카탈루냐와 스페인 다른 지역 간의 공존 모색 가능성에 대해 카탈루냐 주민의 57%가, 다른 지역 주민의 74%가 ‘가능하다’고 응답했다. ●스코틀랜드, 민족주의 바탕 자치권 확대 추진 잉글랜드와 웨일스, 북아일랜드와 함께 영국을 이루고 있는 스코틀랜드는 지난달 초 분리독립 추진 일정을 공개했다.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는 2013년 말까지 분리독립 법안을 통과시켜 2014년 가을쯤 국민투표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다수당인 스코틀랜드 국민당(SNP)의 앨릭스 새먼드 당수는 내년 11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재가를 받는 것을 목표로 분리독립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새먼드 당수는 “스코틀랜드 의회가 결단의 시기를 맞고 있다.”며 “300년 만의 중대한 결정을 위해 분리독립 법안을 차질없이 추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지난해 5월 자치권 확대를 공약으로 내세운 국민당이 다수당에 오른 뒤 분리독립 문제가 다시 전면으로 부상했다. 역사적인 배경에서 시작된 분리독립 추진이 정치적으로 쟁점화된 것이다. 민족과 문화가 서로 다른 왕국이었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수백년간 전쟁과 협상을 지속하다가 1707년 단일 의회와 정부로 통합됐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왕으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지금까지 자신들이 하나의 독립된 세력이라는 뿌리 깊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전통과 문화를 고수해 왔다. 스코틀랜드 정부와 의회의 분리독립 추진 움직임은 빨라지고 있지만 현지 주민들의 정서는 미온적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4월 스코틀랜드 독립 관련 특집기사에서 “스코틀랜드의 독립은 이 지역의 신용등급을 낮추고 집값과 땅값 하락 등 큰 비용을 치르게 할 것”이라며 “그래서 주민들이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분리주의당이 집권한 퀘벡, 독립 호재?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불어를 공용어로 쓰는 퀘벡은 최근 분리주의 정당을 제1당으로 받아들였다. 지난달 4일 열린 주의회 선거에서 퀘벡의 분리독립을 요구해 온 퀘벡당(PQ)이 지난 9년간 집권해 온 자유당을 제치고 제1당에 등극한 것이다. 퀘벡당이 집권하게 됨으로써 분리독립 추진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되지만 퀘벡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하지 못해 당장 주민투표로 이어질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낮은 상황이다. 퀘벡당은 대신 캐나다 연방정부로부터의 자치권 확대를 위해 노력할 것으로 보이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주민들의 반발을 발판으로 분리독립 주민투표의 조기 실시를 모색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프랑스 옛 식민지로 프랑스계 주민이 80%를 차지하는 퀘벡은 영국령으로 편입된 뒤 캐나다 연방의 일원이 됐으나 소수민족 문제 등을 겪게 돼 1960년대부터 연방으로부터 분리정책을 추진해 왔다. 연방정부는 퀘벡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등 융화정책을 취해 왔지만 퀘벡은 1980년에 이어 1995년에도 연방정부로부터 분리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하는 등 대응해 왔다. 그러나 두 차례 주민투표는 각각 19%, 1% 표차로 부결됐다. 향후 주민투표를 다시 해도 주민들의 태도가 변수가 될 것으로 보여 가결될지는 미지수라는 관측이 나온다. ●티베트 독립 시위는 ‘현재 진행형’ 소수민족에 둘러싸인 중국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는 반세기 넘게 진행돼 온 티베트의 독립운동이다. 티베트에서는 최근까지도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시위와 중국 정부의 탄압에 항거하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쓰촨(四川)성 간쯔(甘孜)티베트족자치주 스취(石渠)현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지난 2월에 이어 지난 달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 대신 티베트기인 설산사자기를 게양하고, 티베트의 자유와 독립을 요구하는 전단이 뿌려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인도 다람살라의 티베트 망명정부에 따르면 2009년 이후 최근까지 중국의 티베트 정책에 항의해 분신한 티베트인은 51명에 이르고 이들 가운데 41명이 사망했다. 영국 BBC방송 중국어판은 지난달 25일 티베트 망명정부가 인도 다람살라에서 개최한 특별총회에서 “중국이 티베트를 사실상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했다고 보도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독립정부를 구성했던 티베트는 1950년 중국 군에 점령당한 뒤 1959년 봉기를 시작으로 분리독립을 시도해 왔으나 중국 정부의 억압 통치가 계속되면서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우려 속에서도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 분리독립을 철저히 억제하고 있어 양측의 충돌은 계속될 전망이다. 일각에서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이 지도자로 등극하면 티베트 정책이 바뀔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전망도 나온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기고] 동북아 영토분쟁 대비해야/장성호 배재대 정치언론학과 교수

    [기고] 동북아 영토분쟁 대비해야/장성호 배재대 정치언론학과 교수

    동북아시아가 영유권 분쟁으로 연일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동중국해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갈등으로 중국이 미사일과 항공모함을 동원한 무력시위를 하고, 일본 해상 자위대 호위함이 인근해역 순찰을 강화하는 등 영토패권을 둘러싼 사태가 악화되고 있다. 특히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 이래 맞이한 중·일 국교정상화 기념식을 중국 측에서 무기한 연기했다.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간의 해묵은 갈등 또한 동북아에 상존하는 영토분쟁이다. 독도문제는 영토문제라는 표면적인 이유와 이 사태가 함의하는 역사적인 의미가 특수하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일본의 독도병(病)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 발표한 2012년 일본 방위백서에는 “우리 고유의 영토인 북방영토와 다케시마(독도의 일본명) 영토 문제가 여전히 미해결인 채로 존재하고 있다.”고 기술돼 있다. 일본 정부의 이러한 주장은 올해 3월 독도 영유권 주장을 담은 교과서 검정 결과와 4월 외교 청서에 이어 일관된 태도다. 일본 정부의 확실한 저의는 향후 독도문제를 국제분쟁화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올해 들어 일본의 우경화 바람이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방위백서, 신문광고 등 정부 공식보고서와 언론에 독도문제에 대한 노골적인 주장을 연이어 하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한마디로 독도문제는 일본 국내정치의 제물이다. 최근 소비세 인상과 원자력 발전 강행 등으로 국민적 지지도가 낮아진 노다 요시히코 정부의 조급한 의도와 과거 제국주의 국가의 내부적인 난제를 외부적인 위기로 해결해 나갔던 통치 전형의 조합이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통치행위다. 그러나 이후 한·일 간의 관계가 경색됐다. 우려할 일은 일본의 독도 도발에 대한 정부의 대응 과정과 함께 국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할 중요한 시기에 독도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국내의 일부 언론매체와 단체들의 비상식적인 태도이다.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우리 고유영토에 대한 통치권자의 순시로서 대내외적인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제국주의를 표방하며 아시아를 비롯해 주변국들에 막대한 피해를 끼친 전범국으로서 보다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일본은 같은 전범국인 독일과는 다르게 반성은커녕 변명과 무시로 일관하고 있는 후안무치한 국가이다. 대표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만 봐도 그렇다. 계속된 일본 고위층의 망언과 역사인식은 이미 상식 이하의 수준이다. 따라서 한·일관계에 대한 보다 긍정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국가차원의 책임 있는 사과와 태도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국제사회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는 비정한 현장이다. 지금 동북아시아에서는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와 중국의 중화주의가 충돌하고 있다. 민족주의와 결부된 영토분쟁의 악령이 꿈틀대고 있는 중차대한 시점에 우리는 단단한 애국심을 바탕으로 국론 결집의 단합된 힘으로 대비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냉정한 국제정치의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강온전략의 세련된 외교력을 통해 외교전에서 승리하는 지혜도 발휘해야 한다.
  • “日 보고 있나”… 中 첫 항모 ‘랴오닝’ 공식 취역

    “日 보고 있나”… 中 첫 항모 ‘랴오닝’ 공식 취역

    중국 첫 항공모함 ‘랴오닝(遼寧)함’이 25일 정식으로 취역했다. 동북아 3국 가운데 전투기가 탑재되는 정규 항모를 보유한 나라는 중국이 처음으로, 아시아 안보 지형에 적지 않은 변화가 올 전망이다. 또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영유권 갈등 속에서 중국 항모가 취역한 것은 일본을 향한 경고 메시지라는 해석도 있다. 바랴크함으로 불렸던 항공모함의 이름은 랴오닝함으로 공식 명명됐다. 중국 국방부는 이날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오늘 오전 중국의 첫 항모인 랴오닝함이 정식으로 군 편제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중국 해군은 “항모가 취역함으로써 중국 해군의 종합 작전 능력 수준을 높여 국가의 주권과 안보, 발전 이익을 더욱 효율적으로 수호할 수 있게 됐다.”고 자평했다. 이날 오전 랴오닝성 댜롄(大連)조선소에서 열린 취역식에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궈보슝(郭伯雄)·쉬차이허우(徐才厚) 중앙군사위 부주석 등 당·정·군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랴오닝함은 지난 23일 해군에 인도됐으며 조만간 배속 부대로 이동할 것으로 예상된다. 배속 부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황해(서해)를 관할하는 북해함대에 배속된 것으로 관측된다. 랴오닝함 함장에는 구축함과 호위함 함장을 거친 장정(張?) 대교(大校·한국의 대령)가 임명됐다. 중국 항모는 아직 작전 능력을 갖추지 못한 ‘빈껍데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항모 전력의 핵심인 함재기의 이착륙 훈련도 이뤄지지 않는 등 실전 능력을 갖추려면 최소 2~3년은 걸린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모를 성급하게 취역시킨 것은 자국과 영토 분쟁을 겪고 있는 주변국들에 대한 심리적 압박용이란 게 전문가들의 평이다. 타이완 단장(淡江)대 국제전략연구소 리중빈(林中斌) 교수는 “랴오닝함이 전투력을 갖추려면 최소 2년 이상 걸리지만 주변국들에는 큰 압박이 된다.”며 “항모는 대국의 상징으로 민족주의를 수호하고 국민들의 정서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효과도 크다.”고 설명했다. 중국은 랴오닝함(6만 7500t)과 별도로 2015년까지 4만 8000∼6만 4000t급의 핵 추진 항모 2척을 자체 건조하는 등 2020년까지 적어도 5척의 항모를 운용하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 주현진특파원 jhj@seoul.co.kr
  • [시론] 동맹의 그늘 - 응답하라 한·미동맹 2012/최종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시론] 동맹의 그늘 - 응답하라 한·미동맹 2012/최종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취임 직후인 2008년 봄, 이명박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캠프 데이비드에서 첫 정상회담을 마치며 “더욱 강력한 동맹 구축에 합의했다.”고 선언했다. 이에 주요 언론들은 우리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의 ‘골프카트 1호’를 손수 운전하는 사진을 첨부하며 한·미동맹이 복원되었다고 대서특필했다. 그것이 4년 반 전의 일이다. 그후 후임인 버락 오바마는 공화당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경기 침체와 분투하며 이라크와의 전쟁 와중에도 자국 경제를 회복시켜야 하는 3년 반을 보냈다. 그는 이제 재선의 기로에 서 있고, 우리 역시 이미 대선일정에 돌입한 지 오래다. 국제정치 이슈가 더 이상 대선의 승자와 패자를 결정짓는 사안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북한을 억지함과 동시에 포용도 해야 하는 우리에게 안보협력국으로서 동맹인 미국이 갖는 중요성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부상하는 만큼 거칠어지는 중국, 경제 등 여러 분야의 침체를 맞아 우익화되고 있는 일본 사이에서 한층 의미 있는 관계를 재정립해야 할 대상 역시 미국이다. 그렇기에 동맹국인 우리로서는 이를 객관적이고도 냉철하게 바라봐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국익을 위한 최선의 길이 아닐까. 현재 미국의 경제 침체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큰 족쇄로 작용한다. 2011년 미국 연방정부가 사용한 예산의 48%가 외국에서 빌려온 자금이었다. 즉, 1달러 중 48센트는 갚아야 할 빚이라는 의미다. 국가신용도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는 곧 미국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의 신용도 하락을 의미하며, 미국 중앙은행(FRB)이 정부채권의 61%를 인수해야 하는 ‘재정의 화폐화’(Monetization) 현상까지 발생하고 있다. 더욱 참담한 것은 올 6월 말 현재 18~24세의 미국 청년 중 54%가 실업자라는 사실이며, 이는 1948년 이후 최악의 고용지표다. 따라서 ‘별일’이 없는 한 미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4%에 이르는 재정감축을 진행해야 한다. 이러한 미국이 지난 6월 동아시아로 돌아오겠다고 선언했다. 분명 부상하는 중국에 대한 견제이기도 하지만, 동아시아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경기침체로 국방예산을 삭감해야 하는 미국은 많이 허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이는 ‘복원된 동맹관계’ 속에 안락한 안보를 누리려던 한국에 상당한 도전이 될 것이다. 결국 미국으로서는 동맹국 한국에 이런저런 요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먼저 현재 비행 시험평가가 진행되고 있는 차기 전투기 사업에서 미국 기종이 선택되어야 한다는 외교적 압력이다. 향후 20년간 한·미동맹의 지속을 위해 한국이 미국 전투기를 선택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거나, 한국형 전투기를 생산하고자 하는 항공업계의 자생적 노력을 ‘기술민족주의’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또한 중국과 일본을 자극할 수 있다며 우리 정부의 미사일 사거리 확대 노력에 난색을 표하면서도, 중국을 직접적으로 자극할 수 있는 자국 주도형 미사일 방어(MD)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더욱이 미국이 2014년부터 5년간 소요될 주한미군 방위비(인건비를 제외한 주둔비용)의 한국 측 부담률을 42%에서 50%로 높여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미국은 자국 무기의 해외 판매량 가운데 43%를 한국에 수출하고 있다. 이쯤 되면 한국은 미국의 ‘봉’이 되어 버린 셈이다. 동맹은 계약이다. 미국의 요구에 안보와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양보만 하던 시대는 끝내야 하며 미국과의 각종 협상에 당당히 응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미국을 필요로 하는 만큼 중국이 부상한 이 시대에 우리도 미국에 필요한 존재다. 상호이익을 확대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한·미동맹은 우리에게 이익만큼 비용도 가져다 주는 계약관계다. 따라서 ‘가치동맹’을 위해 이 관계를 호혜적으로 진화시켜야 하며, 그것이야말로 동맹의 잘못된 그늘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 [글로벌 시대] 나쁜 국가, 착한 개인/장홍 프랑스 알자스주 정부개발청 자문위원

    [글로벌 시대] 나쁜 국가, 착한 개인/장홍 프랑스 알자스주 정부개발청 자문위원

    한·중·일 3국의 영토분쟁이 심상치 않다. 역사적으로 보면 전쟁은 주로 영토분쟁 때문에 발발했다. 굳이 남북 간의 긴장고조를 언급하지 않는다 해도, 현재 동북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전쟁 위험이 높은 지역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나친 민족주의와 이로 인한 케케묵은 역사인식, 선거를 앞둔 각국 정치 지도자들의 표를 의식한 단견,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 한·중·일의 경제적 역동성과 세계사의 위상 고조,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동북아 정책에 대한 한·일의 입장과 중국과의 미묘한 관계 등이 동북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주요 원인일 것으로 판단된다. 과거에 대한 해석, 현재에 대한 상호견제, 그리고 미래에 대한 주도권 문제가 모두 동시에 얽히고설킨 매우 복잡한 상황이다. 당연한 이치겠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분쟁은 거의 예외 없이 인접 국가들 간에 벌어진다. 그리고 분쟁이 발발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민중의 몫이다.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전쟁터로 불려나가 죽거나 죽이는 처참한 상황이 발생한다. 전사자들은 국가가 예를 갖춰 추모할 뿐만 아니라 많이 죽인 자는 영웅으로 추앙되기까지 한다. 이제 우리는 진지하게 자문해야 한다. 우리에게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 무조건적으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해야 하는 대상인가? 존 로크에 따르면 국가의 목적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고 보장하는 장치 혹은 수단이다. 과연 그럴까? 어떤 국가도 이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자유로운 합의에 의해 형성된 적이 없다. 무수한 전쟁을 거치면서 영토의 확장과 축소를 거듭해 온 결과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수단을 넘어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신성하고 절대적인 권력이 되어버렸다. 국가 속의 개인은 국가 권력의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따라서 국가의 명령이나 권위에 저항하고 도전하는 행위는 금기시되고, 더 나아가 강제적 법적 구속을 받을 수도 있다. 특히 이런 체제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온 개인은 국가란 이름 앞에 주눅이 들어 스스로 저항을 포기하고, 국가의 명령을 준수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구성된 주체’로 전락했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그렇다면 과연 국가가 지향하는 가치가 각 개인의 행복과 일치하는가? 나라를 빼앗긴 상황의 한 개인을 가정해 보자. 집에는 돌봐야 할 가족이 있지만, 찾아야 할 국가도 있다. 가족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독립운동에 뛰어들 것인가? 둘 다 한꺼번에 수행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가치는 개인의 가치와 상충하기 마련이다. 나아가 역사를 통해 우리는 국가 혹은 국가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엄청난 범죄를 무수히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개인은 나쁜 개인으로 돌변해 국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범죄의 공범자가 된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 스탈린의 공산일당독재정치, 일본의 군국주의, 유신독재 등에서 우리는 이런 경우를 헤아릴 수 없이 목격해 왔다. 나쁜 국가나 체제에서 착한 개인으로 남기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정말이지 어렵다. 나치 정권하에서 독일의 평범한 국민은 절대다수가 나치를 지지하고, 나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애국이고 충성이라 믿었다. 그리고 나치의 이름으로 형언할 수 없는 범죄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저질렀다. 이들 각 개인은 가정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남편이자 자상한 아빠였다. 유신독재의 추종세력들 중에도 개인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왜 그럴까? 우선 우리 스스로가 국가나 체제를 절대시 혹은 신성시하는 생각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다음으로 우리의 무사유 특히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 때문이지 않을까? 공약이 난무하는 대선을 앞두고 그리고 한·중·일 3국의 영토분쟁과 이에 대응하는 각국의 정치, 언론과 여론의 편협하고 과열된 반응을 지켜보면서,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구성하는 주체’로서의 개인의 역할 회복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 보인다.
  • [Weekend inside] 東아시아 갈등 부추기는 中좌파·日우익

    [Weekend inside] 東아시아 갈등 부추기는 中좌파·日우익

    일본의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국유화 조치를 비난하며 중국 베이징의 일본대사관 앞에 몰려든 1만여명의 중국 시위대는 마오쩌둥(毛澤東) 사진을 앞세웠다. 대열의 선두에는 ‘마오쩌둥 사상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마오쩌둥 시대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중국의 좌파가 반일 시위의 선봉에 선 것이다. 지난달 한국과 일본 간의 독도 분쟁이 한창일 때 일본 도쿄의 한국대사관 앞에서는 연일 우익단체들의 반한 집회가 개최됐다. 이들은 도쿄 신오쿠보의 코리아타운으로 몰려가 “한국인들은 한국으로 꺼져라.”라고 외치며 일본인들의 반한 의식을 부추겼다. 중국의 좌파와 일본의 우익이 동아시아 영토분쟁의 와중에서 동시에 득세하고 있는 사실은 아이로니컬하다. 중국 좌파와 일본 우익의 실체가 궁금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中, ‘민족’ 앞세워 反체제 결집 ●‘체제 불만’ 저소득층·젊은이들 관심 커져 좌파가 반일 시위의 선봉에 등장하자 중국 당국은 긴장하고 있다. 실제 이번 반일 시위에서는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내걸리고, 좌파의 아이콘인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시 당서기를 지지하는 구호가 터져나왔다. 마오가 농민과 노동자 계급을 지지기반으로 두었고, 보 전 서기가 ‘홍색(공산당) 캠페인’을 펼치며 분배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이번 시위를 통해 현 체제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좌파는 옛좌파, 극좌파, 신좌파 등으로 분류되지만 모두 개혁·개방 노선에 반대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빈부격차 확대 등 양극화 심화와 농민시위 빈발 등 사회문제 대두가 시장경제도입 등 개혁·개방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양극화와 실업난으로 고통받는 저소득층과 젊은층이 이들의 목소리에 차츰 귀를 기울이고 있다. 중국에서 좌파는 마오의 ‘홍위병’에서 시작됐다. 대약진운동 실패 등으로 마오에게 위기가 닥치고, 우파의 목소리가 득세하자 마오는 극좌파 홍위병들을 앞세워 체제를 유지했다. 개혁·개방 이후 꼬리를 감춘 좌파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우파를 맹공격하며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했지만 덩샤오핑(鄧小平)이 ‘흰 고양이’인 우파 개혁·개방론자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또 한 번 고배를 마셨다. 지난 15일과 16일 광둥(廣東)성 선전(深?)의 반일 시위는 일본의 중국영토 잠식에 대한 불만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회적 불만을 표출하는 반정부 성격의 장으로 비화됐다. 그리고 이를 통해 좌파가 민족주의를 앞세워 기득권에 불만을 가진 대중들을 결집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중국 개혁·개방의 1번지인 선전은 대표적인 수출 가공 기지로 각지에서 몰려든 농민공만 100만명이 넘는 만큼 빈부격차가 심하고 사회불만도 팽배해 좌파에 대한 지지 여건은 충분한 셈이다. ●당국서도 민족주의 고리로 영토분쟁에 활용 좌파의 주요 목적은 개혁·개방 저지이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를 공격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와 관련, 좌파 이념의 산실 역할을 하는 마오쩌둥 깃발(毛澤東旗幟), 오유지향 등의 인터넷포털에서는 지난달 원 총리의 파면을 요구하는 전·현직 공산당 간부들의 연대서한이 공개됐다. 이들은 원 총리가 개혁·개방이라는 미명 아래 국유기업을 축소, 해체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확대시켜 온 탓에 빈부격차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한 좌파 지식인은 “중국이 개혁·개방에 나서지 않았더라도 상당한 자산을 갖췄을 것”이라면서 “개혁·개방 이후 중국이 엄청난 성장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중국이 번 돈은 진짜 자산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통해서도 지금 못지않은 부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 좌파의 목소리가 주류는 아니다. 하지만 중국 지도부가 영토분쟁 국면에서 민족주의 카드를 꺼내들면서 개혁·개방을 공격하는 좌파와 민족주의라는 공통분모를 갖게 되면서 문제가 커지고 있다. 물론 중국 당국이 좌파를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보고 있으며, 이에 따라 앞으로도 민족주의 카드를 견지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하지만 좌파가 민족주의를 내세워 국민들의 반일, 반한 감정을 자극하고 이 과정에서 당국으로선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중국의 빈부격차와 공직부패 등 사회모순이 예전보다 훨씬 심각해졌으며, 3억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 계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 지도부는 대일 강경기조를 외치는 국내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중국 지도부가 좌파 기류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베이징 주현진특파원 jhj@seoul.co.kr 日, ‘독도’ 빌미 反韓의식 조장 ●네트워크 활동 탓 ‘인터넷 우익’ 파악 어려워 일본 우익의 기원은 1868년 1월 3일 메이지유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쿠가와 막부가 막을 내리고 왕정으로 복귀하면서 황국사관과 국수주의를 주창하는 정치가들이 조직적으로 활동하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현재는 전국적으로 지부를 설치하고, 광범위하게 활동하는 단체는 없다. 다만 자민당과 민주당 의원 가운데 보수의 목소리를 내는 일부 인사들을 지원하는 단체들이 적지 않다. 우익계의 시민단체는 유신 정당의 계보를 잇는 ‘잇수이카이’(一水會)가 대표적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밖에 우익단체 연합체인 ‘전일본 애국자 단체회의’ 등이 있다. ‘애국’이 포함된 단체명을 사용하면 십중팔구 우익단체가 분명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고용 불안이 심해지면서 ‘인터넷 우익’이라고 불리는 젊은이들이 등장했다. 실체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대부분 ‘외국인에게 일자리를 빼앗겼다’는 심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 등 재일동포 기업인이 대두하고, 한류 드라마가 인기를 끌자 “(재일) 한국인이 일본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과도한 위기감을 내세워 동조자들을 규합하고 있다. 전체 인터넷 이용자의 1∼3%에 불과하지만 ‘2채널’ 등 특정 사이트에 모여들어 발언력을 키워 왔다. 일방적인 주장을 늘어놓을 뿐 공개적인 논쟁을 꺼린다. 한국, 북한, 중국에 거부감을 보이고, 특히 한국에 대한 심한 적대감을 표출한다. 이들은 노골적으로 인터넷에 글을 올려 ‘한국인은 일본에서 나가라’라고 요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드라마 상영 시간이 길다는 이유로 민영 방송사인 후지TV에 몰려가 한류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기존의 우익단체들은 공안 당국에 의해 관리된 측면이 있지만 인터넷 우익은 네트워크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어 당국이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현황조차 파악하기 힘든 실정이다. ●보수층서도 극한적 배타의식에 비판적 우익단체들은 지난 2009년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 추진했던 외국인의 지방참정권 부여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여 일부 성과를 거뒀다. 최근에는 독도,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쿠릴열도(일본명 북방영토)를 둘러싸고 한국, 중국, 러시아와의 영유권 분쟁이 격해지자 상대국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일·한 단교 공투위원회’와 ‘유신정당 신풍’, ‘일본청년사’, ‘민족동맹’, ‘힘내라 일본! 전국행동위원회’ 등 인터넷 우익들이 요쓰야의 한국대사관과 도쿄 코리아타운인 신오쿠보의 반한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옆에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는 일본땅’이라고 적힌 말뚝을 갖다 놓은 스즈키 노부유키는 ‘유신정당 신풍’의 대표이다. 우익 시위대는 최근에도 한국 음식점과 한류 상품점이 즐비한 거리를 행진하며 “한국인은 한국으로 꺼져라.”, “역사상 최대 날조가 위안부 강제연행이다.” 등의 구호를 외치거나 한국 상품을 구입한 일본인에게 “왜 한국 물건을 사느냐.”고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배타주의적 목소리에 대해서는 일본 내 진보 인사들은 물론이고 보수층조차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다. 대표적인 우익 단체인 잇수이카이의 스즈키 구니오 고문은 최근 보수 성향 주간지 ‘사피오’ 기고문에서 “일본의 역사는 중국이나 서구 문명을 무제한적으로 수용해 가면서 발전해 왔다.”며 “한국인 등에 대한 차별 의식이나 배외 의식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고 비판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데스크 시각] 동아시아의 슬픈 자화상/박홍환 국제부장

    [데스크 시각] 동아시아의 슬픈 자화상/박홍환 국제부장

    4괘(卦) 대신 바퀴벌레가 그려진 태극기, 불타는 일제 전범기와 짓밟히는 일장기, ×표시가 선명한 오성홍기…. 지금 일본,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풍경들이다. 서로를 증오하고, 헐뜯고, 밟으려는 동아시아 각국 국민들의 적개심은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있다. 동아시아의 슬픈 자화상이다. 일본과 중국은 센카쿠열도, 한국과 일본은 독도 및 일본군 위안부, 중국과 한국은 역사문제와 탈북자 등으로 갈등을 겪고 있다. 어느 누구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영토와 역사문제라는 점에서 타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물론 3국 내부의 정치적 목적 때문에 민족주의로 포장되면서 확대된 측면도 있다. 지금 중국, 한국, 일본은 모두 권력교체를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중·일 간에는 전쟁이라도 불사할 태세다. 동중국해에서는 센카쿠열도 주변 해역에 중국과 일본의 관공선들이 몰려들고 있다. 중국이 군함을 파견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일본의 해상자위대가 맞대응에 나섰다는 보도가 꼬리를 문다. 중국의 제1호 항공모함 바랴크함이 오색깃발을 펄럭이며 취역하게 되면 첫 번째 임무는 일본 위협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곧 매캐하고 기분 나쁜 화약 냄새가 동중국해에 진동할 것이라는 불안한 전망들이다. 한·일 간의 상황도 만만치 않다. 한국이 일본 선박의 독도 해역 진입을 경계하는 가운데 일본은 한국 군의 독도 훈련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양측이 독도 해역에서 맞닥뜨리면 충돌은 불가피해진다. 한·중은 또 어떤가. 2010년 천안함 사건과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한국 군이 미군과 합동으로 항모를 동원한 대규모 서해 훈련에 나서자 중국은 그들의 ‘황해’ 상에서 대규모 맞불 훈련을 실시해 긴장감을 높였다. 중국인들은 그들 것이 조금이라도 다칠 수 있다는 판단이면 “몽둥이로 때려잡자.”며 상대국 성토에 나서고 있다. 돌이켜보면 100여년 전의 풍경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중·일 3국은 서로 상대국을 불신하면서 강자가 약자를 억압했다. 일본은 제국주의 야욕을 감췄고, 중국은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애썼으며, 그리고 ‘대한제국’은 먹잇감이 되지 않을까 떨었다. 중국 베이징에서 특파원으로 근무할 때인 2009년과 2010년 랴오닝(遼寧)성 뤼순(旅順)과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 100주년과 서거 100주기 취재를 위해서였다. 안 의사의 행적을 그대로 뒤쫓아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역에서 브라우닝 권총을 작렬시켜 막 플랫폼에 내려선 일본 군국주의의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했다. 이토가 쓰러지자 안 의사는 소리 높여 “만세”를 외친 뒤 저항 없이 러시아 경찰에 검거됐다. 안 의사는 곧바로 뤼순으로 압송돼 일제 형무소의 차가운 1평 남짓한 독방에 갇혔다. 그러곤 재판 과정에서 “이토 사살은 동양평화를 위한 의로운 전쟁”이라고 역설했다. 안 의사는 뤼순 감옥에 수감돼 있는 동안 비록 사형집행으로 완성은 못 했지만 자신의 구상이 오롯이 담긴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한·중·일 3국 간의 상설기구인 동양평화회의체 구성, 동북아 3국 공동은행 설립과 공용화폐 발행, 동북아 3국 공동평화군 창설 등이 핵심이다. 이 같은 선구적인 안 의사의 구상은 그러나 여전히 뤼순 감옥의 철창 안에 갇혀 있다. 3국은 여전히 불신하면서 언제라도 총구를 겨눌 태세이다. 가해자의 뼈아픈 과거반성이 없었고, 그래서 아픈 역사를 치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안 의사는 최후의 순간에도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어, 불신의 장막을 걷어내고 서로 보듬으며 동양평화를 이루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지막까지 동양평화를 희구했던 그의 처절한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들려오는 듯하다. “언제까지 적대적이고 슬픈 자화상만 그려대고 있을 테냐!” 그럼에도 여전히 희망이 보이지 않아 더 슬픈 동아시아의 살풍경이다. stinger@seoul.co.kr
  • [열린세상] 센카쿠 분쟁은 독도의 미래인가/이문기 세종대 중국통상학과 교수

    [열린세상] 센카쿠 분쟁은 독도의 미래인가/이문기 세종대 중국통상학과 교수

    일본의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 대한 국유화 조치 후 중국의 거센 반발이 계속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국내법적으로 댜오위다오를 자국 영토로 규정하는 영해기선을 선포했고, 주변 해역에서 군사적 긴장마저 고조되고 있다. 수만명의 인파가 연일 반일 시위를 하고, 중국 내 일본기업에 대한 공격과 불매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중·일 수교 40주년 기념일을 며칠 앞두고 양국관계는 최악이다. 최근 독도문제로 일본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던 우리 입장에서 중국과 일본의 극한 대립상태를 그저 남의 일로만 바라볼 일은 아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중국과 일본 간의 전쟁 발발은 곧 동아시아 전체를 화약고를 만들 가능성도 있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영토 갈등으로 분출된 한·중·일 삼국의 민족주의 정서는 동아시아 평화를 방해하는 갖가지 갈등 양상으로 표출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센카쿠 분쟁이 향후 독도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 갈등에 미칠 영향에도 깊은 주의가 요구된다. 현재의 센카쿠 분쟁이 자칫 독도의 미래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하는 말이다. 이 섬을 둘러싼 중· 일 간의 갈등 양상이 독도문제에서 한·일 간의 갈등 양상보다 대체로 10년 정도 앞질러 전개되는 추이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센카쿠 열도 문제로 양국 간에 본격적인 외교적 충돌과 시위가 전개된 시점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1995년 홍콩 청년들의 해상시위 중 한 명이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한 이후 양국 정부의 대응 수위도 점차 강경해지기 시작했고, 일본 우익단체의 활동과 중국의 반일 시위도 점차 과격해지는 양상으로 발전되어 왔다. 가장 최근의 사건은 2010년 10월 중국 어선과 일본 순시선 간의 충돌로 중국인 선장을 체포한 일이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독도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갈등 양상이 200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악화되는 추세를 고려하면, 센카쿠 갈등이 대체로 10년 정도 앞서가는 셈이다. 향후 센카쿠 분쟁의 양상이 더 격화되든 아니면 외교적 해법을 모색하든, 독도문제에 앞선 일종의 시범 효과로 작용할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독도문제와 센카쿠 분쟁은 기본적으로 그 역사적 배경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상호 영향을 줄 가능성은 더욱 크다. 센카쿠 열도는 1895년 청일전쟁 시기에, 독도는 1905년 러일전쟁 시기에 일본이 일방적으로 자국의 행정구역으로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영유권 주장의 논거로 한국과 중국은 고래(古來)부터 자국의 영토라는 점과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의한 무단점령을 주장하는 반면, 일본은 근대 국제법에서 영토 편입 규정의 하나인 주인 없는 섬(無主地)에 대한 선점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두 섬의 갈등구조에서 차이가 있다면 실효적 지배가 반대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독도는 한국이, 센카쿠 열도는 일본이 각각 실효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문제 해결 방법에서는 오히려 한·일 양국의 처지가 유사한 입장이다. 독도문제에서는 일본이, 센카쿠 열도에서는 중국이 도발적으로 분쟁지역화를 추구하려 했고, 반대편은 현상유지를 희망해 왔다. 그런데 최근 독도와 센카쿠에서 벌어진 갈등은 반대 양상이다. 방어적 입장을 취해야 할 나라가 먼저 문제를 야기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전격적인 독도방문이 문제를 키웠고, 센카쿠 열도에서는 일본의 국유화 조치가 중국의 반발을 부르고 있다. 갑자기 사태가 이렇게 발전한 데는 한·일 양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자국 내에서 추락한 정치적 입지를 만회하기 위한 내부 목적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정부 역시 권력교체기에 민족주의 정서를 활용하여 국내정치 안정을 꾀하고 있다. 두 사안 모두 평화적 문제해결을 위한 외교적 혜안은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자국 내 민족주의 정서에 기댄 포퓰리즘 정치행태만이 난무하는 상황이다. 그 결과 동아시아 지역의 긴장 고조와 퇴행적 민족주의의 폭발만을 가져왔다. 독도문제보다 10년을 앞서 진행되어 온 센카쿠 갈등의 격화 양상이 독도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 갈등에서 그대로 재현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 정치지도자들의 외교적 혜안과 지혜가 발휘되길 기대한다.
  • [사설] 중·일 갈등이 부른 동북아 먹구름 걷어내야

    중국과 일본 간의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영유권 갈등이 동북아시아 전체의 평화와 안정까지 우려하게 만들고 있다. 중국에서는 일본의 총영사관과 기업은 물론, 민간인까지 시위대의 공격을 받는 상황이 발생했다. 일부에서는 중·일 간의 무력 충돌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충돌의 가능성이 중·일뿐만 아니라 한·일, 한·중 간에도 잠복돼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와 영토 문제에서 시작된 동북아 세 나라의 갈등은 경제와 통상 분야로까지 전이되면서 무역 전쟁이 벌어질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동북아의 중심인 한·중·일 세 나라는 2010년 기준으로 전세계 인구의 22.3%, 국내총생산(GDP)의 19.6%, 교역량의 17.6%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 유럽연합(EU)과 맞먹는 규모다. 여기에 최근 시베리아 개발에 공을 들이는 러시아와 아시아로의 복귀를 공언한 미국을 감안하면 동북아는 전세계 정치·경제의 핵심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근 들어 중국이 이른바 G2로 부상하고,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이 하락세를 보이며, 한국의 경제적·문화적 역량이 상승하는 상황 등이 맞물리면서 동북아 정세는 더욱 요동을 치고 있는 것이다. 동북아의 안정은 한반도의 안정과 직결돼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해관계가 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동북아의 불안정성이 단기간 내에 해소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과거사와 영토에 대한 일본 극우세력의 막무가내식 태도와 중국 내에서 부상하는 대국굴기의 민족주의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보다 정교한 전략을 갖고 동북아 문제에 접근해 나가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미국과의 동맹을 계속 굳건히 유지해 나가는 것이 긴요하지만 중국과의 정치·안보 관계 강화, 일본·러시아와의 협력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해야만 우리가 동북아 정세의 균형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한·중·일을 포함한 동북아 국가들이 직접 머리를 맞대고 지역의 안보와 경제 문제를 조정해 나갈 수 있는 다국적 협의기구를 논의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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