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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전면허 정기 적성검사 폐지/인수위

    ◎면허 경신기간은 10년으로 연장/제주도 무비자 입국 30일로 대통령직 인수위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외국인에 대한 제주도 무비자 입국기간을 현행 15일에서 30일로 확대하고 단체관광객에 한해 중국인들의 제주도 무비자 입국을 허용키로 했다. 인수위는 또 특진의사의 자격요건을 현행 ‘10년 경력 이상의 의사’에서 ‘10년 경력 이상인 전문의’로 제한하고,신용카드를 통한 진료비 수납을 확대하기 위해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를 현행 1.5∼4%에서 1.5∼2.5%로 인하하기로 했다. 인수위는 7일 총리실과 행정쇄신위원회,공정거래위원회 등 관계부처와 합동회의를 열어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국민생활 불편해소를 위한 14개 실천과제’와 ‘경제회생을 위한 6개 외국인 투자활성화 방안’ 등 모두 20개 규제개혁방안을 마련,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 보고한 뒤 이를 시행키로 했다고 8일 밝혔다. 이날 회의에서 확정된 ‘국민불편 해소방안’은 현행 5년마다 받도록 돼 있는 운전면허 정기적성검사제도를 폐지하고 운전면허 갱신기간을 현행 5∼7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하도록 했다. 국민불편 해소방안은 또 공중위생업소 위생교육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법령위반자에 한해 위생교육을 실시토록 하고,전역자의 예비군대원 신고제도도 폐지하기로 했다.
  • 중국에 귀 기울인다(미래를 보는 세계의 눈)

    ◎서구사회 팽배한 ‘중국 위협론’ 반박/자국의 가치·배경 바탕으로 국가건설 강조/미­일 신안보체제 국제평화 위협 강력 비판 【북경=이석우 특파원】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중국을 세계는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가. 뜨거운 갈채와 환영인가,아니면 경계와 두려움으로 대하고 있는가.강택민 중국 국가 주석의 미국 공식방문,백악관에서 열린 클린턴과의 역사적인 정상회담 등에도 불구,중국의 빠른 성장에 대한 의구심과 걱정의 눈길은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광동 인민출판사가 최근 펴낸 ‘중국에 귀기울인다’는 냉전종식 이후의 국제정세의 변화·발전에 대한 중국의 입장 및 시각,그리고 중국 위협론에 대한 중국의 반박과 변명을 담고 있다. 이 책은 하덕공,포위충,김용 등 3인의 공동 저서다.하덕공씨는 관영 신화통신이 펴내는 시사 일간지 ‘참고소식’의 국제시사문제 편집담당자이고 포위충 박사는 중국공산당 중앙 직속 교육기관인 북경 청년정치학원의 교수.김용 박사는 ‘중국부녀보’의 기자며 홍콩문제 전문가다.저자들의 신분에서도 이책이 중국측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이 책을 통해 중국측의 논리와 주장,대외관계등 정책 방향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은 중국이 서양의 질서와는 다른 사회가치와 정신적 배경을 갖고 있으며 중국의 국가건설은 ‘서구와는 다른 중국적인 가치와 배경’에 따라 진행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인권문제,소수 민족지역에 대한 입장,홍콩문제 등과 관련,이 책은 단호하게 서구의 여러나라와 서구적 가치의 침투를 거부하고 있다.중국은 중국적 잣대로,중국공산당과 중국인들에 의해 통치하고 경영해 나갈 것임을 강조한다. 중국적인 방향으로 국가를 건설해 나가는 방법과 관련,전통문화의 재해석을 통해 문화적 토대를 마련하고 민족주의 및 애국사상을 고취,국가 건설의 기본 정신으로 삼을 것을 제시한다.민족주의 및 애국사상에 대한 강화는 강택민 등 현 중국 지도부의 국가건설의 핵심 사업중 하나고 이 책은 그 의의를 재강조한 것이다.애국주의와 민족주의가 21세기 중국 국민들을 하나로 단결하는 끈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특히이 책은 ‘새로운 권위주의 이론’으로 대표되는 중앙집권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어 눈길이 간다.강택민을 정점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 중앙의 권위를 강화하는 것이 국내외적인 도전을 극복하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물질·정신 건설을 완성하는 길이란 주장을 강력하게 펼치고 있다.“개혁초기 중앙의 권력을 하부에 이행하는 것은 경제의 활력을 위해 필요하고 효과있는 조처였다.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작용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국민총생산액에서 중앙정부가 차지하는 몫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고 반면 지방재정수입은 눈에 띄게 올라가고 있다.지역간 격차를 줄이는데 필요한 수단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중앙의 거시 조정·통제 능력도 떨어지고 있다. 안정은 일체의 것을 넘어서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중국적인 발전 방법 및 목표,그를 달성하기 위한 강력한 중앙정부의 권한에 대해 이 책은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이와함께 이 책은 일본의 우익화 경향 및 군사 대국화 등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미국과 일본의 신안보체제확립,이를 통한 일본의 유사시 동북아시아지역에서의 군사활동 영역의 확대 등에 대해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진정 동북아시아와 세계 평화의 잠재적 위협은 일본의 우익화 경향과 미국·일본의 신안보체제라고 꼬집는다. 냉전이 끝난뒤 21세기를 바라보는 다극화 시대에 대해서 이 책은 ‘포탄과 연기는 없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며 서구세력의 ‘문화침투’ 정책 및 각종 압력 행사에 대해 경계와 함께 비판을 가하고 있다.“미국은 지난 96년9월 ‘자유아시아 방송’을 개국하고 뉴스매체를 통해 아시아 국가들의 내정에 간섭하며 정치 및 사회 안정을 흔들어 대고 있다.이는 아시아 국가들의 안전에 대한 위협이다”. 이 책은 중국의 성장을 위험스럽게 바라보는 서구 시각은 중국 문화와 현상을 잘못 이해하는데서도,또 서구의 패권주의적·냉전적 발상에서도 기인한다고 공격했다.특히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 충돌론’이 중국 위협론의 배경이론이 되고 있다면서 문명 충돌론의 오류를 지적했다.“문명 충돌이론의 개연성은 인정될수 있다. 그러나 헌팅턴씨는 일부 단면을 갖고 일반화하려는 오류를 범했다.금세기의 주요한 충돌은 문명간의 충돌이 아닌 같은 문명안에서의 갈등이었으며 자국의 이익을 확대하려는 국가 이익간의 부딪침이었다”. 저자들은 냉전종식 이후 국제무대에서 독주하고 있는 미국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시하고 미국의 독주가 국제갈등의 원인중 하나라고 공격한다. “미국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 등은 미국과 러시아의 새로운 대립을 부추기고 있다.미국의 패권주의는 쿠바 등에 제재를 가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같은 문명권에서 프랑스 등과 갈등을 빚고 있다”.반면 중국은 현재 경제건설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고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국제환경을 중요시 하고 있다고 강조한다.중국은 등소평 시대에 ‘세계 혁명’전략을 버렸으며 세계를 적과 동지로 나누는 냉전적 사고에서 벗어났다는 논조다. 또 “중국은 개혁개방 이래 3백여건의 법률을 제정했고 4천여건의 지방 법규를 만들었다.또 공무원제도를 개혁하는 한편, 직접 선거의 확대 등 풀뿌리민주주의를확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중국도 국민 개개인의 잠재력과 창조력을 최대한 발현시키고 민주적이고 안정된 사회확립을 위해 노력해 나가고 있다는 설명이다.중국을 독재국가의 전형으로 생각하거나 침략적인 위험한 국가로 보는 것은 착오라고 이책은 재삼 강조한다. 원제 경청 중국:신랭전과 미래전략.광동 인민출판사.22위안. 하덕공·포취충·김용 공저
  • 스키타이족의 동진(중앙아시아를 가다:8)

    ◎BC 331년 ‘올비아전투’ 대승… 세력 확장/원래흑해 볼가강유역의 종족/중앙아·시베리아·몽골까지 점령/원정지마다 청동·황금공예 전파/고대 동방문화 일대 변혁 불러 중앙아시아 역사는 대단위 기병들이 장거리 원정을 통하여 정복전쟁을 거듭하던 이야기의 연속이다.그 역사의 첫 머리에 혜성처럼 등장한 기마족이 스키타이다.이 호전적이고 잔인한 기마족을 희랍인들은 스키타이,이란과 페르시아인들은 사케 또는 사카라 했다.그리고 중국인들은 색족이라고 불렀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쓴 AD 450년쯤 기록에 의하면 스키타이족은 용감하고 잔인한 전사들로 이름이 높았다. 적의 피를 마시고,해골을 기념으로 차고 다녔다고 한다.또 팔의 가죽을 벗겨서 화살통으로 쓰는 등 참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잔인성을 보여주었다.이처럼 잔인한 스키타이 기병들은 가는 곳마다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흑해와 소아시아지방은 물론 광활한 중앙아시아가 그들 말발굽에 밟혔다.그리고 동쪽 멀리 시베리아의 바이칼호수까지 달려 갔다. ○호전적이고 잔인한 기마족 스키타이인들은 원래 흑해 북쪽 볼가강 유역에 살던 종족이다.인종적으로는 이란 또는 아리안이라 불리우는 인도유럽족이었다.언어로 볼때는 고대 페르시아어에 가까웠다.흑해 지역에 있던 스키타이 세력은 기원전인 BC 331년 올비아 전투에서 알렉산더 대제가 이끄는 3만명의 강력한 마케도니아 군을 격퇴시켰다.그들이 얼마나 조직적인 군사력을 가졌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그 이전의 아시리아 기록에 의하면 BC 680년대에 스키타이와 아시리아 사이의 혼인동맹을 맺었다.이는 스키타이인들이 당시 가장 발달한 메소포타미아의 문화와 직접 교류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그 뿐 아니라 멀리 이집트와도 교역을 했다. 스키타이 기병들은 가는 곳마다 발달한 청동기와 찬란한 황금공예 문화를 소개했다.이 스키타이에 앞서 고대 메소포타미아는 인접 지역에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그래서 주위에 발달한 위성문화를 많이 잉태시켰다.그 중의 하나가 스키타이 문화이다.스키타이는 역사에 등장하면서부터 찬란한 청동 및 황금문화를 과시했다.스키타이는 메소포타미아와 그 영향을 받은 희랍의 고대문화를 자신들의 유목생활 감각에 담아 정리하여 빛나는 예술문화를 창조했다.그리고 그 문화를 그들의 기마에 싣고 BC 7세기쯤에 이미 멀리 동쪽시베리아와 몽골지방까지 달려갔다. 그들의 동진은 마침내 스키토시베리아라는 동물형태의 미술양식을 만들어냈다.그들이 싣고온 청동·황금문화와 기마문화는 동방문화에 일대 변혁을 불러 일으켰다.고고학적 연구를 종합하면 이런 결론이 나올수 있다.스키타이의 도래 이전 그러니까 BC 2000년전쯤에 이미 서양인종이 시베리아와 몽골에 먼저 도달했다.이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3만의 마케도니아군 격퇴 우리 민족의 먼 고향으로 이해되는 곳이 알타이지방이다.이 지역에는 초기 청동기 문화를 보여주는 아파나시에보 유적이 있다.이미 발굴한 이 유적의 문화를 아파나시에 보문화라 부른다.그 문화의 담당자들은 유럽족이다.그들은 최소한 BC 2000년 이전에 아파나시에보 언저리로 들어왔을 것이다.이밖에 알타이 북부의 삼림 스페프 지역에는 청동기와는 다른 볼세미문화 유적이있다.그 문화의 담당자는 몽골족이다.이 볼세미 유적은 청동기 이전의 문화를 주로 내포했다.그리고 산지 알타이지역인 카라콜에는 아파나시에보문화와 볼세미문화가 복합한 이른바 카라콜문화가 하나 더 형성되었다.그 카라콜문화는 BC 2000∼1700년쯤에 해당하는 시기의 문화인 것이다. 이들 세 문화유적은 동서양의 문화와 인종이 어떻게 섞였는가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그러니까 스키타이는 유럽족의 동방이동에 따른 제2차 파장이었다.스키타이는 물론 기마병을 이끌고 왔다.말에 대한 이야기는 BC 15세기 메소포타미아인들 입에서 나왔다.그로 미루어 적어도 BC 2000년 훨씬 이전에 동으로 간 유럽족은 말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므로 BC 15세기무렵에 중앙아시아에 기마술이 등장했고,그 기마술은 결국 스키타이의 동방원정 길을 열어주었다. 제1차 인도유럽인들의 동방이동은 세갈래 길로 이루어졌다.첫째 흑해지방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이란을 거쳐 인도로 가는 남로와,둘째 카시카르를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고비사막으로 이어지는 사막로가 그것이다.그리고 셋째 중앙아시아에서 알타이 산맥을 우회하는 초원로가 있었다.이들 길은 뒷날 비단길 통로의 기초가 되었다. 스텝과 사막 루트는 주의하여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왜냐하면 이들 두 길을 통해서 시베리아와 신강성,몽골지역에 혼혈민족과 민족연합체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그리고 강력한 기마세력 형성을 재촉했다.이와 더불어 흉노족이 등장하여 공전의 대 제국을 창건했다.중국과 동서로마제국을 위협한 흉노에 뒤를 이어 돌궐이 나타났다.기마족으로서의 흉노와 돌궐은 여러가지 면에서 스키타이의 기마문화와 미술을 자기들 품으로 끌어들였다. ○강력한 기마세력 형성 재촉 고구려와 신라는 먼 북방의 흉노와 돌궐의 제국들과 관계를 맺었다.그리고 북방의 기마민족문화를 받아들였다.그보다 앞서 우리민족이 그들과 교류한 흔적이 언어와 인종적 특성에서 어렴풋이 보인다.우리의 선사문화가 알타이 청동기문화와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각저총에는 코가 큰 서역인과 씨름을 하는 장면이 그려져있다.스키타이인들이 즐겨 쓰던 각배가 신라무덤에서도 나온다.신라 금관은 기마민족들이 신성시하던 사슴뿔을 기하학적으로 정리한 황금관이다.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마제석검은 그 형식이 스키타이의 청동검이나 희랍의 칼과 너무많이 닮았다.우리는 청동기 초기에 청동검을 모방하여 마제석검을 만들었거니와 귀한 청동검 대신에 마제석검을 부장품으로 썼다.우연이 아니다.
  • 동서문화 장벽 ‘천산’(중앙아시아를 가다:7)

    ◎당,751년 ‘천산전투’ 이슬람에 패배/중의 중앙아 포기,이슬람화 가속 천산을 넘었다.우루무치를 떠나 알마아타로 오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설산은 장관이었다.사막을 풍요로 가꾸어주는 만년설을 인 설산 준봉들이 끝없이 늘어섰다.그 천산은 알마아타공항에 내렸을때도 마치 군림하는 자세로 여전히 우뚝했다.카자흐말로는 티엔산이다.옛 소련연방시절에도 그랬지만,자연풍광이 수려한 천산을 넘으면 늘 푸근한 감회가 안겨왔다. 그것은 천산너머 첫 도시 알마아타에 사는 사람들 때문인지도 모른다.그들 카자흐인들은 우리민족과 아주 가까운 친연관계의 문화를 지녔다.그래서 문화에서는 친근감이 우러나고 사람들은 정겨웠다.처음 알마아타를 찾았을때 당혹스러웠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전화교환원과 영어로 대화를 하면서 그들은 ‘차이나(중국)’가 무슨 뜻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위구르족도 불교서 개종 그들은 중국을 러시아말로 ‘기타이’라 했다.이말은 알고보면 우리말에 뿌리를 두었다.우리말의 거란을 중국식으로 발음한 ‘기단’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다.그러니까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는 중국인을 요나라 사람들인 거란족으로 알고 있었다.우리 역사속에서 비중있게 조우한 중국 동북지방의 그 거란족이다.중국인들이 회홀 또는 회골이라 부르던 위구르족들의 종교라는 뜻에서 이슬람을 회회교라 했다는 것은 지난번에 밝혀 두었다.그러나 위구르족이 불교에서 실제 이슬람으로 완전 개종한 시기는 14세기의 일이다. 이들 두가지 사례는 참으로 놀라운데가 있다.중국은 한대이후 22세기 동안의 역사 가운데 절반 이상을 유목기마민족의 침략을 받았다.그렇다면 중국은 기마민족의 주무대인 서역의 정보를 언어체계 안에제대로 반영했을 법도 하다.하지만 중국의 언어문화체계는 이러한 상식적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기마민족들 역시 22세기동안 교역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던 중국역사의 실체에 무지했다.얼마나 몰랐으면 중국인을 거란족으로 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문화의 장벽은 천산에서 비롯되었다.그래서 천산을 넘으면 중국은 없었다.751년 고구려의 고선지 장군이 이끈 당나라 군대와 지아드 이븐 살리히 휘하의 이슬람군이 천산 서북쪽 탈라스강에서 맞붙었다.닷새간 벌어진 치열한 싸움에서 당군이 패배했다.이는 중국세력이 천산너머의 중앙아시아 대초원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그리고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를 부추겼다. 그렇듯 탈라스전투는 세계사의 한획을 그었고 또 천산의 문화장벽을 한층더 높였다.중앙아시아에 가면 한문은 실제 신화에 나오는 문자에 불과했다.중국문화가 배어들어 온 흔적이 없는 것이다.다만 한무제가 서역정벌에서 남긴 차를 마시는 습관만이 있을뿐이다.그 천산너머의 사람들은 건조한 기후조건을 이겨내기 위해 발효한 검은차를 마셨다.검은차를 마시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 옛날 몽골이나 알타이,또 중국과의 국경지대가 아니면 중국과 직접 교역하던 민족의 후예다.그들 문화가 얼핏 이슬람 일색인듯 하면서도 문화전통과 인종학적 혈통이 다른 까닭도 여기 있다. ○한문은 신화속의 문자로 중앙아시아의 민족과 문화는 참으로 혼돈스럽다.그 혼돈의 문제를 중앙아시아 종교사로 이해하려는 의도에서 나름대로 가닥을 잡아보았다.인종과 문화가 복잡하게 얽힌 가장 두드러진 까닭은 기마민족 탄생에 있다.청동기시대에 나타난 기마민족은 기마술을 이용한 민족의 대이동을 재촉했다.기원전인 BC 13세기쯤 인도유럽족의 한 갈래인 힉소스족의 기마병이 이집트를 쳤을때 이집트인들은 기마병을 처음 목격했다.그래서 말을 괴물로 여겼다. ○기마술로 민족의 대이동 인도유럽족이 기마술을 선도했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이보다 앞서 BC15세기말에 말을 처음 보고 산에서 자란 큰 당나귀로 여겼다는 것이다. 어떻든 BC2000년쯤 알타이와 남부 시베리아에 와서 아파나시에보 청동기문화를 이룩한 인도유럽족은 일찍 기마술을 터득했다.이는 정착농경이나 반농경생활로 삶을 꾸려오던 스텝지역 주민들에게 충격으로 작용했다.농경 대신에 가축으로 부를 가늠하는 유목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이 때문에 활동무대도 차츰 넓어졌다.그리하여 그리스어로 스키타이,이란어로 사카라는 왕조들이 BC8세기부터 기원후인 AD4세기까지 스텝지방과 북인도를 지배했다.그무렵 동서인종의 혼혈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몽골지역에서는 BC4세기부터 흉노가 일어나 서쪽으로 나갔다.AD5세기 중엽에는 아틸라왕이 중부유럽 전역을 완전히 휩쓸어 동서로마제국을 기진맥진한 상태로 몰아넣었다.흉노의 서진은 결국 게르만의 대이동을 가져왔다.이어 6세기 이후에는 돌궐 또는 투르크제국이 등장하고,오스만터키는 세계1차대전까지 유럽을 위협하는 대제국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흉노의 후예가 돌궐이다.이들은 여러 종족이 혼합한 정치세력이어서 인종적으로 매우 복잡하다.그러나 언어만큼은 동양어족의 말인 투르크어를 썼다.그러니까 인종으로 보아서는 복합적이었지만,문화적으로는 동질성을 지녔던 것이다.투르크족이 8세기쯤부터 이슬람화하면서 얼핏 투르크민족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특히 중국과 유럽 양쪽 눈에 비친 투르크는 더욱 더 그러했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언어로,때로는 인종적 혈연을 매개로민족의 정체성을 끈끈하게 이어오고 있다.그들 투루크족들에게는 아직도 같은 기마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 3천여년전의 여인(중앙아시아를 가다:6)

    ◎얼굴·옷·장신구까지 위구르족과 비슷/죽음의 사막 신강성 타클라마칸/해뜨면 45도가 넘는 건조한 기후/이곳 묻힌 주검은 완벽한 미라로 중앙아시아를 몇차례 여행한 경험에 비추어 타클라마칸사막을 찾는 일이마나 어려운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사막에 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만한 어려움쯤은 이미 각오를 해둔 터였기 때문이다. 막상 사막에 도착했을때는 그 결연한 의지가 흔들리기 시작했으나,다시 이를 악물었다.사막에서 죽으면 안된다는 생각은 투루판의 아시타나 고분군과 코알라박물관을 보고 나서 더욱 절실했다. 코알라박물관 진열장에는 3천년 세월을 뒤로한 미라가 잠을 자듯이 누워있다.해가 뜨면 45도를 웃도는 건조한 사막에 묻힌 주검은 곧바로 탈수되어 완벽한 미라로 변한다. 만약 나 자신이 사막에 묻힌다면 미라가 될 것이다.그리고 수천년 후에 세인의 구경거리가 될지도 모른다.사막에서 죽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된 연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우루무치박물관에서도 또 다른 미라를 보았다.이른바 ‘누란미인’라는 미라다.누란미인은 약 3천800년전에 죽었다. 그 여자는 인도 유럽족 곧 서양인이다.지금도 금발에 높은 코를 했고 깊은 눈의 속눈썹이 완연했다.서양여인이 분명한 여인은 고대 누란고성에서 발굴되었다.고고학자들은 이 미라를 누란미인이라는 뜻으로 ‘키쿠란 쿠잘리’라 명명했다. 누란미인이 처음 세상에 공개되었을때 위구르족의 반응은 대단한 것이었다.첫 대면의 순간 위구르족들은 ‘우리 민족의 어머니’라고 찬탄했다.그리고 ‘키루란 쿠잘라’는 바로 대중음악으로 작곡되어 위구르족들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지금도 시중에서 카세트를 쉽게 살 수 있다.누란미인과 함께 박물관에서 깊은 잠을 자는 미라들은 3천년전,다시 말하면 기원전인 BC1000년쯤의 사람들이다. 박물관의 미라들은 가죽세무옷을 입고 아직도 신발을 신고 있다.장신구는 물론이고 몸에 새긴 문신까지 생생했다.입고 걸친 옷과 쇼올,사슴가죽 부츠는 오늘날 위구르족 차림새 그대로다.얼굴 생김새 역시 위구르족인 미라 그들은 누구인가.BC1000∼2000년 아직 위구르족이라는 민족명칭이 생기기 이전사람들이 아닌가 한다.기원후인 AD 3세기 중국 기록은 몽골지방에서 내려온 여러 갈래의 유목민족 가운데 하나가 위구르족이라고 썼다.또 오르혼비문에는 717년 돌궐제국의 빌카칸이 셀렝가강변의 돌궐을 평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투루크에 대한 최초의 자료인 것이다. 어느 쪽이든 위구르는 돌궐의 세력을 이어받은 투루크계의 왕조였다.그들은 돌궐의 본향이었던 알타이산맥과 내몽골 어딘가에서부터 오늘날 신강성지역으로 들어왔을 것이다.그리고 9세기 이르러 왕조의 영광을 누린 위구르는 소그드문자를 근거로 한 위구르문자를 사용했다. 그들은 14세기 회교로 개종하고 나서 아랍문자를 사용했지만, 그 이전까지는 위구르문자를 썼다. ○‘키쿠란 쿠잘리’로 명명 흉노와 위구르족의 고향인 알타이지역에는 우코크라는 데가 있다.그런데 우코크에서는 1993년 ‘파지리크 여사제’라고 명명한 미라가 발견되었다.지난 1995년 서울 경복궁으로 나들이를 나왔던 이른바 ‘얼음공주’가 그 미라다. 파지리크는 BC6~2세기 산지 알타이지역의 철기문화다.그런데 얼음으로 얼린 ‘파지리크 여사제’는 피부가 흰 백인이었음을 기억한다.고고학 자료들은 이미 청동기 시대에 백인종들이 시베리아 바이칼호반과 몽골,신강성일대에 들어왔다는 여러 정황을 밝혀낸 바 있다. 우리 청동기문화도 인종과 문화의 동서교류에 의한 파장의 하나로 일어났다.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동양인이 아닌 서양인 모습의 오늘날 위구르족에게서 우리는 더욱 많은 역사적 비밀과 인류의 역동성을 읽을수 있다.그러니까 고대로부터 서양인은 저 멀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였다. ○몸에 새긴 문신까지 생생 지금까지 위구르족 기원을 선명하게 정리하는 작업을 모두가 꺼렸다.그러나 이번 중앙아시아 현장답사와 역사적 지식을 근거로 감히 이런 결론을 내려보았다.적어도 BC2000년쯤 인도 유럽 어족인 이른바 아리안 또는 이란족이 카스피안지역에서 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그들은 우선 바티칼호와 알타이지역까지 진출하여 자신들의 청동기문화를 아시아대륙 깊숙이 퍼뜨렸다.물론 아시아에도 청동기문화가 없지는 않았으나,아리안의 영향은 아시아 선사문화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그리고 인종도 섞여들었다. 위구르족은 결국 아리안편에 동양이 끼어들어 형성한 민족이다. 그렇듯 아리안의 피가 주류를 이룬 위구르족은 역사진행 과정에서 급기야 동양의 터키계 언어를 받아들였다.그들이 마치 위구르문자를 버리고 아라비아문자를 쓰는 것처럼 언어와 문자를 피보다 먼저 바꾸어 나갔던 것이다. ○알타이 지역까지 진출 우루무치로 가는 만원버스에서 마이라(마의랍)라는 위구르족 여인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그녀는 우루무치석유화학공단 병원에 근무하는 30대의 여의사였는데 미모가 뛰어났다.그녀의 집으로 초대되어 가서 만난 고등학교교장 출신의 그녀의 아버지 역시 잘 생긴 노신사였다.그 집에서 저녁을 먹는 동안 마치 러시아 가정에 초대 받은 착각을 여러 차례 느낄 정도로 가족모두가 서양인 인상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부러 추어준 것인지는 모르나 한국사람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예절이 바르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자신들이 늘상 만나는 중국사람들과는 다른 동양인을발견했다는 말이 분명했다.그와는 반대로 중국인들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개방적 인상을 그녀로부터 받았다. 그러니까 중국인들 사고속의변방인 위구르인과 한국인은 제각기 중국적인 가치를 매개로 상대방을 보았던 것이다. 중국 중심의 고정된 안목으로 마이라씨와 그 가정,곧 위구르족의 정체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들 위구르족은 우리를 중국 중심의 폐쇄적 사고 바깥으로 떠밀어 내기에 충분했다.
  • 위구르족의 땅 신강성(중앙아시아를 가다:5)

    ◎중국면적의 17%… 사막과 산맥으로/예부터 세갈래 무역통로의 교차로·요충지/상술 뛰어나 친구사이도 흥정하는 장사꾼 중국 신강성 타크라마칸 사막을 흔히 ‘죽음의 사막’이라 했다.그 죽음의 사막에 이르면 대자연에 압도되어 인간은 왜소해질 뿐이다.타크라마칸사막이 있는 신강성은 북으로 천산산맥,남으로는 곤륜산맥이 에워쌌다.그리고 서쪽은 카라콜룸산맥으로 막혀있다.이들 높은 산자락을 빼고나면 온통 사막인 신강성의 크기는 중국 전체면적의 6분의 1이나 되었다. 그 넓은 땅에는 위그루족과 카자흐족,기르키스탄족과 몽골족이 퍼져 산다.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위그루족이 신강성의 주인이다.투루판에서 신강성 수도 우루무치까지 두번씩 갈아탄 고장난 버스에서 만난 사람들도 거의가 위그루족이었다.차내 온도가 40도를 웃도는 만원 버스에서 그들과 꼬박 6시간을 함께 지냈다.그들은 불평 한마디가 없다.털털거리는 버스안에서 놀랍도록 인내심을 발휘하는 그들은 외국인에게 더 없이 너그러웠다. ○산자락 빼면 온통 사막 그 버스에는 일곱살 짜리 꼬마 승객이 탔다.로신이라는 사내아이였는데,차안이 덥고 지루한 탓인지 멋대로 딩굴었다.몸을 엄마한테 맡긴 로신이의 몸부림은 대단한 것이었으나 후덕한 엄마는 그 떼를 다 받아주었다.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보였던 그 사내아이의 조상은 본래 투루크의 한 갈래로 몽골지역에서 들어온 위그루라는 설이 있다.투루크,또는 돌궐은 흉노의 후예들로 모두 몽골 알타이산맥이 기원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그루족은 몽골족과 다르다는 사실이 외모에서 드러난다.흉로와 투루크는 제 나름대로 각각 대제국을 세웠던 강력한 세력의 민족이다.그토록 큰 힘을 지녔던 민족이 몽골에서 왔다면,지금 몽골에 상당수의 투루크족이 살아야 할 것이다.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로신이의 선조가 아직은 불분명하다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비단길 한 목을 맡은 것은 분명하다.중국 서안에서 비단을 싣고 비잔틴에서 짐을 내리자면 반드시 타크라마칸사막을 거쳐야 했다.또 비잔틴과 로마의 공산품과 호탄의 옥을 서안으로 실어가는 길도 타크라마칸사막이었다.그렇듯 대상들이 동서를 오가는 목 좋은 길가에 살았던 위그루족의 상술은 뛰어났다.그것은 가히 체질적이었다. 위그루족을 장사속으로 만나지 않으면 무척 관대하다.그러나 일단 상업적인 거래라면 무자비할 만큼 안면을 바꾼다.친구 사이에서도 이익을 챙긴 흥정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라는 것이다.이슬람이 지닌 공통점이기도 한 위그루족의 상술은 물론 비단길에서 비롯되었다.농업생산에 삶을 의족한 전통적인 경사회 사람들 정서로는 헤아릴 수 없는 대목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타크라마칸은 중요한 전략요충지였다.서역의 유목민들로부터 중원을 보호한다는 것과 중국산 비단의 대외무역 주통로를 지킨다는 두가지 목적이 함축되었다.그래서 한대에 이미 신강성 장악을 서둘렀다.천산북로에는 중앙아시아로 넘어가는 길이,천산남로에는 오늘의 중동으로 가는 페르샤통로가 존재했기 때문에 타크라마칸을 중시했다.남쪽 사막을 따라 인도로 가는 길을 합하면 신강성은 세 갈래 무역통로를 거느린 물물의 교차로였던 것이다. ○동서문화매개자 역할 세계에 위용을 떨친 징기스칸의 몽골제국 뒤에도 위그루족이 숨어 있었다.그렇듯 위그루족은 동서문화의 매개자 역할을 했다.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동양인들은 위그루족이 이슬람을 대표하는 민족인 것으로 생각했다.중국과 더불어 우리는 옛날에 위그루족을 한문으로 회홀 또는 회골이라 썼다.그리고 이슬람을 지칭하는 회회교라는 말은 위그루족이 믿는 종교를 뜻하는 것이다. 이들이 사육한 말은 중국에서 첫 손가락을 꼽는 명마였다.한대나 당대에 마(천마)라고 한 명마는 위그루말을 의미했다.그 품종을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나 비단길을 거쳐 들어온 아랍종 혈통의 말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오늘날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말은 아랍종 피를 받지않은 말이 없다고 할 정도이고 보면 고대 중국인들 역시 위그루말을 선호했을 것이다. 중앙아시아 일대가 이슬람으로 편입한 중세 이후 이 지역은 투르크스탄이라는 통합적 개념으로 호칭되었다.그리고 신강성의 위그루는 동투르크스탄이라 불렀다. 볼세비키혁명 이후 스탈린은 범투르크주의운동을 아주 싫어했다.그래서 위그루의 땅 신강성은 급기야 소련과 중국 공산정권 사이의 주도권다툼에 휘말렸다.신강성의 석유와 광물이 두 공산세력의 각출을 유도했던 것이다. ○55년 자치지역으로 선포 그것은 20세기에 재현한 비단길 분쟁이었는지 모른다.1949년 모택동의 대장정은 신강성까지 이어졌다.1955년에는 신강위그루족자치지역으로 선포되었다.어떻든 공산정권의 중국은 1959~60년 사이에 이른바 ‘신강성 해방’을과감히 단행하고 소련과의 국경분쟁을 마무리지었다.오늘도 위그루족의 땅신강성을 가면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민족분열을 절대 반대한다’는 붉은글씨 구호가 곳곳에 널렸다.위그루족의 독립운동을 반대하는 내용이다. 그 표어는 이방인에게 혼돈을 안겨주었다.단일민족으로 살아온 우리에게는 조국과 민족이 얼핏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떼를 내놓았던 위그루족 꼬마 로신이가 어느 틈에 잠이 들었는지 조용하다.로신이가 자라 중국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알게 되는 순간 지금처럼 행복할 것인가.유구한문화와 선천적 상술을 지니고 태어났을 위그루족 장래가 자못 궁금했다.
  • 미 시시평론가 허츠가든 미지 기고 요지(해외논단)

    ◎중국 환경오염은 지구촌 문제 오늘날 중국은 지구환경을 변화시킬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일 행위자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심각한 환경문제는 전인류차원의 관심사로 다뤄져야 한다고 시사평론가인 마크 허츠가드가 주장했다.미국 시사월간지 애틀랜틱 먼슬리에 게재된 ‘중국의 진정한 문제’라는 그의 글을 요약 소개한다. 중국의 인권문제 못지않게 환경위기 또한 국제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중국은 96년말 현재 자국의 인구가 12억2천만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는 그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그러나 공식발표 숫자만으로 보더라도 인류 4명중의 하나는 중국에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중국의 경제규모는 현재 집계방법에 따라 세계 3위에서 7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2010년에는 1위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국민소득은 79년 등소평이 시장경제로의 개혁을 주도한 이래 두배로 뛰었다.그러나 환경측면의 효과는 더욱 악화돼가고 있다.적어도 중국의 5개도시가 세계에서 공기오염이 가장 심한 도시에 속하고 있다.중국 경제부흥의요람인 광동성에 내리는 비의 60∼90%가 산성비이다. ○광동성 비 90%가 산성비 중국에서 사망자 4명중의 하나는 공기오염과 흡연에서 비롯된 폐질환으로 죽고 있다.도시의 기형적 성장과 토양침식으로 50년부터 90년까지 40년간 독일·프랑스·영국의 농지면적을 다 합한 것과 같은 크기인 8천6백만 에이커의 농지가 사라졌다.농지훼손은 90년대 들어서도 계속됐고 이는 중국의 식량자급능력의 문제점까지 제기하고 있다. 중국의 새로운 부는 단지 국민들의 기호를 자극,엄청난 수의 중국인들로 하여금 자동차와 에어콘,화려한 의복,해외여행 등을 갖춘 지구적 중산층 대열에의 동참을 바라게 하고 있다.치솟는 소비 욕구는 이미 광범위하게 만성적인 전력부족을 야기시키고 있다.따라서 중국은 다음 10년동안 100개 이상의 새로운 발전소를 건설,매년 미국 루이지애나주의 전체 전력생산과 맞먹는 1만8천 메가와트씩을 증가시켜나갈 계획이다. 그러므로 2020년까지 석탄 소비는 두배,혹은 세배가 될 것이다.이 모든 현상들은 중국의 산성비와 공기오염문제를 더욱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이 이미 진행중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지구온난화를 가속화시켜 전인류의 재앙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중국의 환경을 위협하는 또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인구문제 이다.70년대말 정부주도로 추진되었던 한자녀정책은 전통적인 남아선호사상 등으로 인한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불과 5년만인 84년부터 완화되었고 요즈음은 도시를 제외한 농촌지역 등에서는 유명무실한 상태로 있다.중국정부 추정대로 여성 1인당 2.0명의 출산수를 그대로 인정한다 해도 연간 1천5백만의 증가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인구 증가로 파급력 확대 거대한 인구와 중국인들의 엄청난 경제적 욕구는 오늘날 중국을 세계에서 단일 요소로써 미국과 함께 가장 중요한 환경 행위자로 만들고 있다.즉 중국 혼자서 기후변화,오존감소,기타 재앙을 전세계인들에게 현실로 만들수 있다.결국 중국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가 우리 시대 많은 문제들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연간 10%대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중의하나가 부적절한 환경보호에서 오는 것이다.예를 들면 중국에서 산성비는 매년 28억달러 가치의 숲과 농업과 공업의 손실을 가져온다.공기오염은 건강 관련 비용을 증가시키고 근로자의 생산성을 저하시킨다.또 숲파괴는 홍수를 악화시켜 매년 수천명의 인명을 앗아가는 원인이 되는 등 그 예는 얼마든지 있다. ○개발·보존의 딜레마 재연 관영 차이나 데일리는 중국의 환경피해 비용이 GDP의 7%가 된다고 추정하고 있다.한편 중국환경문제 연구가인 캐나다 마니토바대의 바클라브 스밀 교수는 10∼15%로 잡고 있다. 중국의 지도자들도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그리고 여러가지 환경관련 법규도 제정해놓고 있지만 이를 강력히 적용할 수도 없고 또 적용 의지도 없다.그 이유는 환경관련 법규를 충실히 지켰을 경우 수십만개의 공장이 문을 닫아야 하고 수천만명이 실업자로 내몰리게 된다는데 있다.이 점이 바로 중국 환경문제의 딜레마인 것이다.〈정리=나윤도 워싱턴 특파원〉
  • ‘사막의 오아시스’ 고도 투루판(중앙아시아를 가다:4)

    ◎지하수로 5천㎞… 중 3대토목 대역사/관정 1천여개… 포도밭 등 드넓은 농경지가 중국인들은 이런 말을 한다.“신강성을 가보지 않고 중국이 얼마나 넓은지 말하지 말라”고….이 말을 “투루판을 가보지 않고 신강성을 말하지 말라”고 바꾸고 싶다.한자로 토로번이라 표기하는 중국 신강성 투루판은 그렇듯 경이로운 지역이었다. 투루판까지는 돈황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정거장 유원에서 열차를 타고 밤을 새워 꼬박 11시간을 달렸다.투루판에 내렸을때 대지는 온통 불덩어리였다.사방으로 눈을 돌려도 사막만이 펼쳐지기는 했으나 그 사막 가운데로 풍성한 농경지가 들어앉았다.섭씨 45도의 고온에 이글거리는 사막과는 달리 싱그럽다. ○인근엔 75도 화염산이 투루판은 도시가 이국적이거니와 사람들도 그랬다.투루판사람들,다시 말하면 위구르족은 동양인 골상과 사뭇 다르다.그들이 입은 옷과 살아가는 건물에서 발산하는 강렬한 색깔로 해서 동화의 나라에 온 착각이 든다.어린아이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면,마치 꼬마모델이나 되는 것처럼 척척 포즈를 취했다.미국이나 유럽에서도 그런 투루판 아이들처럼 마음을 활짝 열고 나오는 태도를 본 적이 없다. 근교에는 손오공의 이야기에 나오는 화염산이 있다.해가 뜨면 75도라니 과연 화염산이다.극한적 자연조건속에 풍취 어린 문화가 숨쉬는 투루판은 타클라마칸사막에서 보면 동쪽이다.그리고 고비사막의 서쪽이니까 오아시스 도시이기도 한 투루판은 비단길의 주통로였다.천산북로의 주요 거점으로,동서문화교류의 징검다리 구실을 해온 역사도시인 것이다.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 사람들이 다 그렇지만,투루판 사람들도 눈 녹은 물을 마시고 산다.천산의 만년설이 녹아내려 생긴 물이다.그 천산의 물은 지하로 스며들기 때문에 이른바 감아정이라는 수직 물구멍을 30m간격으로 파고나서 이를 지하수로와 연결시켜 끌어왔다.물구멍만 1천개가 넘고 지하수로의 길이는 5천㎞에 이른다고 한다.실로 놀라운 대역사의 고대 토목공사 현장이 투루판에 있다.이 엄청난 지하수로 건설공사는 한무제가 서역을 경영하면서 시작되었다.만리장성 및 대운하와 더불어 중국 3대 토목공사의 하나가 투루판 지하수로다.한해 강수량은 고작 16㎜인데 비해 증발량은 300㎜나 되는 건조한 열사에서 물 한방울은 바로 생명수였다.그 생명의 젖줄 지하수로는 지금까지 2천년동안 사막속의 경작지에 습기를 불어넣고 사람들 목을 축여주었다. ○실크로드의 주루트 역할 예부터 투루판은 포도의 도시다.포도는 본래 메소포타미아가 원산지였으나 차츰 이웃으로 번져 먼저 그리스로 들어갔다.그리고 동으로 인도와 타클라마칸을 거쳐 투루판으로 확대되었다.중국의 포도는 물론 투루판에서 전파된 것이다.투루판의 포도주는 일찍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당나라 시인 왕한(678∼726년)은 야광채 백옥잔에 부어 마시는 서역 포도주를 이렇게 노래했다.‘야광배에 가득한 맛있는 포도주/마시려하니 마상의 비파소리 흥취를 더하네/취하여 사막에 두어버려도 그대 비웃지 마오/고래로 전쟁에서 돌아온 이 몇 사람이오’서역정벌에 나섰다가 포도주에 흠뻑 취한 중국인들 모습이 눈에 선하다.오늘도 여기저기 널린 포도구가 투루판 여행객을 유혹한다.양고기 꼬치구이 샤슬릭과 위구르족의 빵인 낭을 굽는 드넓은 포도밭 유원지를 찾으면 투루판 포도주가 반드시 식탁에 올랐다.그리고 천산의 찬물,뜨거운 햇볕에 달게 익은 수박과 하미,참외가 따라 나왔다.거기에 동화속 요정처럼 아름다운 무희의 춤과 전통음악을 곁들이면 오아시스에는 늘 낭만이 넘친다. 고대로부터 비단길 국제무역으로 상술을 다진 탓일까.투루판 사람들은 관광객을 놓칠 리가 없다.포도구에서 전통기념품을 파는 것은 상식이고 별의별 것을 다 내놓았다.그리고 씨가 없다는 백포도에서부터 100가지가 넘는 포도가 좌판에 즐비했다.‘투루판의 포도가 익었네/아나이칸의 마음도 벌써 취했다네…’그 노래가 들릴 듯한 포도구의 풍경은 한껏 풍요롭다. 그 유명한 고창고성은 투루판에서 50㎞ 떨어진 사막에 있다.2백만㎡에 이른다는 폐허의 고성은 뜨거운 태양을 머리에 인 채 고창왕조의 영화를 잃어버린지 오래다.한 도시이자 성채인 고창성은 9세기 중엽 투루판 위구르국 고창왕조가 세운 도읍지였다.그 무렵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일어났다.천하를 수습하러 나선 북송은 신흥 티베트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위구르국을 재빨리 끌어안았다.이를테면 북송으로부터 왕권을 승인받은 고창왕조는 정치세력을 급속히 확대했다. 이 왕조는 정치역량뿐 아니라 문화적 주체기반도 차근차근 다져 나갔다.비단길 교역의 매개자로 마니케이즘과 네스토리우스 기독교파가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하는데도 도움을 주면서 이슬람을 받아들였다.이와 함께 불교를 수용하여 토착문화와 융화시켰다. ○포도주 명산지로 유명 그렇듯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 언어는 터어로 통일했다.이는 다양한 주민을 터키화하는데 성공한 요인이 되었다.고창왕조는 결국 위구르족문화의 주체성을 확립했던 것이다. 투루판 위구르족은 13세기 징기스칸 정복하에서도 오히려 몽골제국 건설에 힘을 실어주었다.그들은 ‘박시’라는 서사계급과 문자체계를 몽골제국에 제공했다.그래서 몽골제국은 급기야 행정체계를 세우고 몽골문자를 만들었다.그럼에도 위구르족은 15세기부터 이슬람화하면서 자신들의 문자와 불교를 잃어버렸다.이유는 문화주체의식이 위구르족 마음속을 떠난데 있다.지금은 스스로를 위구르인이 아닌 투루판 사람이라고 부른다.그들은 역사의 온갖 애환을 포도밭에 묻어두었는지 모른다.
  • 불교문화의 보고 돈황(중앙아시아를 가다:3)

    ◎동서문화 교류의 루트… 굴마다 불상·불화/‘사막의 오아시스’ 막고굴은 대상들 휴식처/유목민족 중국 넘나들면서 대중불교 전파 오늘날 중국 감숙성 땅 돈황은 멀고먼 비단길을 오가던 대상들의 영원한 오아시스이자,동서문화교류 루트의 빛나는 금자탑이다.만리장성 서쪽 끝 요새인 가욕관에서 하서주랑의 넓은 계곡을 따라 400여㎞를 달려가면 벌써 모래바람이 일고 곧 돈황에 이른다.돈황 계곡 남쪽에는 장족 말로 ‘하늘에 닿는다’는 뜻의 기련산이 우뚝했다.돈황에서 서쪽으로 100㎞를 가면 옥문관과 양관이 사막 한가운데 서있다.고대로부터 유명한 호탄의 옥을 싣고 대상들이 중국으로 들어오는 관문이 바로 옥문관이었다.옥문관과 양관은 한무제가 개통한 비단길의 중국측 전초 기지였다.이곳을 지나면 신강성의 ‘죽음의 사막’ 타클라마칸이 기다렸다. ○옥문관 비단길 전초기지 이와는 반대로 대상들이 험난한 타클라마칸을 지나 옥문관에 이르면 한숨을 돌렸다.눈 앞에 나타난 돈황에서 쉬어갈 참이어서 마음의 위안을 얻게 마련이었다.그리고 장안을 떠나 서역으로 가는 대상들은 이 오아시스 도시에서 죽음의 사막을 지날 채비를 단단히 차렸다.대상들은 험난한 사막과 끝없는 초원을 지나는 길에서 닥칠 온갖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으레 무리를 이루어 떠났다.그들을 대상이라 한 이유도 여기에 있거니와 사실상 군단이었다.대상은 비단을 싣고 중앙 아시아를 지나 서쪽 멀리 콘스탄티노플까지 갔다.동서를 오가는 대상의 편대에는 불교인들이 자연스럽게 끼여들었다.그리고 중국에 불교를 전했다.비단길의 여울목,돈황이 불교문화의 보고가 된 것도 이때문이다. 돈황은 주변 사막마을들과는 달리 흥청거린다.그 유명한 막고굴을 찾고 명사산에 오르기 위해 온 관광객들로 해서 시장과 거리는 활기에 차있다.막고굴은 명사산 동쪽 벼랑에 있다.기련산맥의 한 자락,삼위산을 마주보고 늘어선 단애에 천불동 석굴을 파고,그 안에 무수한 불·보살의 소상을 빚고 불화를 그렸다.그렇듯 돈황의 명성은 막고굴에서 비롯되었다. 석굴에 안치한 불상과 벽화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대작들이다.처음에는 이 거대한 불사의 규모와 작품의 정교함에 경탄을 금치 못하다가,이내 그런 작업을 한 인간의 도전적인 노력에 경외감이 들었다.누가 이처럼 놀라운 일을 했고,어째서 이런 일을 했단 말인가.외경스러울 뿐이다. 막고굴은 가히 중국 불교사의 박물관이다.대략 3세기에 시작한 막고굴 조성은 북위(442∼534년)때에 이르러 더욱 활발해졌다.이어 당대(618∼906년)들어서는 돈황 불교마을이 극치를 이루었다.비단길이 쇠락한 송대(960∼1035년)에는 막고굴 불사도 한풀이 꺾였다.그이후 청대까지는 주로 보수와 개조를 거듭했다. ○당대 불교문화 꽃피워 막고굴의 초기,다시 말하면 북위의 그림들은 어느 모로나 서역의 그림이다.검정선으로 이미지를 정리한 화법과 강력한 색상은 중국의 감각과 전혀 다르다.인도의 산악 라다크지방 알치의 불화를 보는 듯하다.그것은 아리안의 미적 감각이다.그러나 당대에 오면 중국적인 기법으로 불보살을 표현했다.중국불화로 바뀌는 것이다.그러니까 중국불교의 변천을 보여주는 실체가 막고굴 불교미술이기도 했다. 대승불교가 당대에 왜 꽃을피울수 있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돈황유적은 던져준다.불교는 기원 전후해서 중국에 들어왔다.유교사회였던 한대의 불교는 대수롭지 않았다.그러나 한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일어서기까지(220∼618년) 약 4세기는 유목민족들이 중국을 넘나들면서 여러 왕조를 세우던 시대였다.이 시기 비단길을 지배한 세력은 유목민족들이었다.이들 유목민족은 자신들과 친숙한 불교를 널리 전파했다.그래서 불교가 중국에 차츰 든든하게 뿌리를 내렸고,당나라에 오면서 중국적인 대승불교로 훌쩍 날개를 폈다.다시 한족이 세운 송대에는 신유학에 의해 문화가 쇄신되면서 불교가 사양의 길을 걷게 되었다.천불동은 이런 역사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돈황 막고굴 불사에는 왕실과 귀족들의 기복적인 동기가 깔렸다.그런 맥락에서 막고굴 유적을 깊게 들여다보노라면 고차원의 교리에 대중불교의 요소가 습합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그래서 더욱 다채롭다.또 중국인들은 막고굴유적에서처럼 자신들의 감성을 통해 대승불교의 문헌전통을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그리고 당나라예술을 불교와 더불어 더욱 꽃피웠다.문헌전통의 주체적 수용이 문화를 한단계 높게 끌어올린 것이다.
  • 강택민 중국주석 미 아시아소사이어티 연설 요지

    ◎“인권은 국가발전 따라 진화”/대만 ‘하나의 중국’ 견지·외세 불개입땐 양안평화 미국을 방문중인 강택민 중국주석은 30일 워싱턴 아시아소사이어티에서 행한 오찬 연설에서 앞으로 중국에서의 민주주의를 더욱 확대하고 ‘법에 의한 통치’를 구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다음은 연설내용의 요약. ▲경제:우리는 국가경제를 보다 빨리 시장경제로 진입케 하기 위해 국영기업들의 개혁을 촉진시킬 것이다.그리고 경제구조를 재조정하고 효율성을 높이는 일을 계속하면서 과학과 교육과 지속 가능한 개발을 통한 국가의 소생전략을 강력히 전개할 것이다.또한 개방의 양상을 더욱 개선하여 모든 방향에서,다양한 수준에 걸쳐,광범위하게 개방경제를 발전시켜나갈 것이다.이것이 우리 국민들이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혜택을 받고 점차적으로 공동번영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이다. ▲민주주의:우리는 민주주의를 더욱 확대시켜서 중국을 법을 따르는 국가,법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주의국가로 변화시킬 것이다.2천여년 전 초기에 고대 중국인들은 “국민들에 대한 통치가 규정된 법들을 따라 이뤄질 때 국민은 국가에 필수 존재가 된다”는 민주주의와 법치의 단순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이같은 생각들은 더욱 발전되어 새로운 시대에 투영되고 있다.우리는 민주주의없이 현대화는 이룰수 없다고 믿는다.국민들이 민주적 선거제도를 갖고,정책결정을 민주적으로 하고,민주적 경영과 감독을 행하며 보다 확대된 권리와 자유를 즐기도록 보장할 것이다.우리 정치 재건의 전반적인 목표는 우리의 기본적인 정치체제를 받들고 개선하면서 중국적 특성의 사회주의를 이룩하는 것이다. ▲인권:오늘날 중국인들에 의해 누려지고 있는 인권은 결코 포괄적인 것은 아니다.세계의 많은 국가들에서 사실로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권의 이해는 각국의 노력에 기초하고 있슴이 틀림없다.그러므로 인권문제는 필연적으로 한 국가의 주권 내에 종속되는 문제다.인권은 역사의 산물이고 그들의 완전한 이해는 한 국가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수준과 부합하는 진화적인 과정을 필요로 한다. 집단적 개별적 인권과,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와,시민적 정치적 권리는 서로 떨어질 수 없다.중국정부는 법에 따라 인권보호를 위한 업무를 수행하고,시민의 법률적 권리를 파괴하는 모든 행동은 반대한다.중국시민은 종교적 신앙의 자유를 갖는다. ○티베트 개혁은 농노해방 ▲티베트:나는 여기서 중국 사회주의 체제의 설립과 발전이 일부 종족에게 그들의 사회발전 단계를 뛰어넘는 것을 가능케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한 예로 1959년의 민주적 개혁 때까지 티베트는 봉건 농노국으로 노예제에 가까운 신권정치하에 있었다.주인에 예속된 하인과 농노들은 인권을 갖지 못했다.1백만에 달하는 농노와 노예들을 평화적 방법으로 해방시킨 것이 바로 우리의 민주적 개혁이다.이는 미국역사에서 흑인노예해방과 비슷한 것으로 커다란 사회 변화와 진보를 나타냈다.오늘날의 티베트는 번창하고 있으며 그곳의 주민들은 행복과 만족속에 살고 있다. ▲대만:중국과 미국이 외교관계를 수립했을때 미 정부는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키로 결정했다.그것은 현명하고,정치적으로는 양국의 이익과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결정이었다.대만문제는 중국과 미국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단일문제이고 예민한 감정적 문제다.일단 문제가 생기면 양국관계는 언제나 정체상태에 놓이고 심지어는 과거로 돌아가기도 한다.홍콩,마카오와는 달리 대만은 중국공산당과 국민당간의 투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그 해결은 전적으로 중국 국내문제이며 양안의 중국인들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대만문제의 해결을 위한 중국정부의 기본적 정책은 ‘하나의 국가,두개의 체제를 바탕으로 한 평화적 통일’이다.우리는 이미 상대방에 양측이 단지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 아래 적대관계를 공식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한 협상을 개최할 것을 제의한바 있다.그 기초 위에 양측은 중국의 주권과 영토적 통합을 공동으로 유지하고 양안관계의 미래적 발전을 위한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대만당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으로 돌아오고,대만독립을 위한 분열행동을 자제하는한,그리고 외국세력이 중국의 재통일에 개입하지 않는한,대만해협의 상황은 안정되고 양안관계는 순조롭게 나아갈 것이다.
  • ‘더 내셔널 인터레스트’편집인 해리스 NYT칼럼 요지(해외논단)

    ◎미 ‘중국 포용정책’ 지속해야/인권문제 제한말고 포괄적 관계 유지 필요 중국의 인권문제가 미국인들에게 중요한 이슈이지만 미국은 세계무대에서 점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중국에 대해 포용정책을 계속 추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오웬 해리스 ‘더 내셔널 인터레스트’(미국의 정치 계간지) 편집인이 주장했다.해리스 편집인이 최근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을 요약한다. 인권문제는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언제나 중요한 이슈다.중국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진 올해 인권문제는 특히 중요한 이슈가 돼왔다.강택민 중국국가주석의 미국 방문으로 중국에 대한 관심이 절정에 이르고 있는 지금 인권문제도 그만큼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세계의 자유·정의·민주화를 증진시키는 일은 미국의 의무이자 권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 전통적으로 인권옹호론자들은 사물을 직선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그들은 인권을 절대적이고 일관된 가치로 생각한다.개인이나 특별한 이익단체들은 자유롭게 인권을 절대적이고 최우선의 가치로 볼수 있다.그러나 정부는 그렇지 않다. 인권옹호론자들에게 인권은 정의다.그러나 인권이 정부의 외교정책과 결합될 경우 인권문제는 많은 이해관계중의 하나에 불과하다.인권문제는 다른 이해관계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인권이 여러가지 이해관계 순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경우에 따라 다양하다.인권유린이 자행되고 다른 중요한 이해가 위험에 처해있을 경우 인권은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된다.그러나 환경의 다양성과 특이성은 인권정책의 적용을 복잡하게 만든다. ○다른 이해관계와 균형을 현재 중국의 경우 환경적 요인을 생각해보자.첫째,중국의 인구는 북미,유럽,러시아의 인구를 모두 합친 것 보다 많다.한곳에서 북미,유럽,러시아와 같은 거대한 3개지역을 통치하는 일을 상상해 보라.그러면 중국을 통치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중국은 또 시대에 뒤떨어진 정치관과 왜곡된 이데올로기로 가득찬 원로들의 문제도 안고 있다.중국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일부 통계를 참고로 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인권운동가들에 따르면 중국의 정치범은 현재 3천여명이라 한다.그 숫자는 전체인구의 0.00023%이다. 둘째,중국은 금세기 전통적인 정치체제의 붕괴,군벌주의,내전,침략,기근,대규모 공포 등을 경험했다.단지 4반세기전만 해도 중국은 격동의 시대를 겪고 있었다.그러한 격동의 경험을 갖고 있는 나라는 특히 사회안정과 질서유지에 우선권을 둔다.그리고 그러한 목표달성을 위해 다른 일들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지난 20여년 동안 중국은 아마도 가장 빠른 경제성장과 인류역사의 큰 변혁을 경험해오고 있다.등소평은 1970년대 말 중국의 경제 규모는 이번 세기말까지 4배로 증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그당시 등의 선언은 중국공산주의자들의 허풍인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중국은 이미 그 목표를 넘어섰다. ○중국의 복합적 요인 고려 중국의 이러한 엄청난 발전의 효과는 복합적이다.많은 중국인들은 현재의 중국을 황금기로 인식하고 있음이 확실하다.중국에는 지금 질서와 평화가 있고 전례 없는 번영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급진적 발전은 심각한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기도 하다.그중에도 광범위한 부패,환경파괴,국영기업에서의 실업증가,은행등 새로운 경제제도 정착의 실패 등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중국의 이러한 문제들은 지배 엘리트들이 추구하는 사회안정에 심각한 도전과 불안요인이 되고 있다.이러한 급박한 국내문제와 기회등이 가까운 미래를 대비한 중국지도자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중국지도자들의 행동은 외부 영향에 크게 좌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세계적으로 중요시되고 있는 중국에 대한 정책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미국의 중국정책은 봉쇄(Containment)와 포용·관여(Engagement)전략중 선택의 문제였다.미국은 지난 반세기동안 양쪽 모두를 시도해왔다.1949년부터 1972년까지 미국은 봉쇄정책을 썼다.당시 중국은 계속되는 재난과 궁핍의 시대였다. 미국은 1972년 부터 적극적인 포용(관여)정책으로 전환했다.약간의 굴곡은 있었지만 중국은 그 기간동안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며 인권도 개선됐다. 미국의 포용정책과 중국의 발전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것은 물론 아니다.그러나 미국의 정책과 중국의 발전이 완전한 별개의 문제만도 아니다.클린턴 대통령이 “미국은 중국에 대한 포용정책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발언은 타당하다.〈정리=김규환 기자〉
  • 중국문화의 실체(중앙아시아를 가다:2)

    ◎한문과 대통일주의의 융합체/중국문화의 중심지는 서안서 낙양으로 갔다가 오늘의 북경으로 옮겨졌다 중국의 역사지도를 보면 중국문화의 중심지는 서안에서 황하를 따라 낙양지역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오늘의 북경으로 옮겨왔다.몽고인들이 북경을 원나라(1206∼1368)의 수도로 정한 이후,명과 청조를 거쳐 북경이 오늘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그러니까 북송(960∼1127년)이전에는 서안과 낙양이 여러 왕조의 중심지였다.낙양과 인근에 있는 개봉은 중국 중세문화의 중심지였다.중국문화의 특성을 살펴보기 위하여 북경을 거쳐 이 지역을 찾았다. 한족이 세운 왕조는 전한(BC202∼AD8:195년간),당(289년간),남북송(322년간),그리고 명(276년간)나라 뿐이다.그 통치연한을 합하면 1079년이다.따라서 2천200여년동안의 중국역사 가운데 절반은 한족이 지배했고,나머지는 이민족 왕조의 시기였다.그러나 왕조를 누가 세웠는가에 상관없이 중국문화와 관계되면 모두 중국역사에 포함시킨 것이 중국적 태도이다.무엇이 그러한 포용성을 가능하게 하는가.그것은 한문이라는 문자와 문헌전통이다. 화북과 화남인 사이에 언어소통이 잘 안되는 것이 오늘의 중국 실정이다.그러나 그들은 문자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는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다.표의문자인 한문은 그 융통성 또한 크다.예컨대 한국과 일본인들은 각각 그들의 언어체계안에서 한문을 쓰고,또 그를 통해서 중국인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마찬가지로 이민족이 중국을 지배하는동안 한문을 쓰면서 한문체계에 동화되곤 했다.한문이 지닌 그 포용력이 유목민족을 이른바 문약에 빠지도록 한 힘이었고,다양한 민족을 하나로 묶는 끈이었다.만약 한문이 표음문자라면 오늘의 중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문이 다양성을 하나로 묶는 수단이라면,그 수단을 운영하는 이념이 이른바 대통일주의이다.중국은 세계의 중심이며,중국문화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것이다.그래서 고구려도 그 활동무대가 만주이기 때문에 중국역사에 예속한다고 해석한다.이러한 대통일주의는 한대에 무르익었으며,그 이후 다양한 이질적인 요소들을 중국의 것으로 포용하는 기틀이 되었다. ○중세문화의 중심지 개봉 한문이라는 수단과 대통일주의라는 이념이 합해서 중국역사의 실체를 이루었다.따라서 그것은 민족개념을 넘어선 문화적 실체로서의 복합성을 지닌다.낙양의 근교에 유명한 용문석굴이 있다.다른 석굴과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남북조시대를 거쳐 당대에 화려한 불상들이 조성되었다.남북조는 이민족이 지배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서역에서 온 불교가 쉽게 융성할 수 있었다.그리고 다음 왕조인 당대에는 비록 유학자들에 의하여 훼불하는 사례가 있었으나,중국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시대이다.중국은 이민족의 군사적 침략뿐만 아니라 불교라는 외래종교마저도 그 품안에 넣어 자기 것으로 포용했다. 낙양에서 두시간 거리에 중국무술의 본고장으로 알려진 소림사가 있다.웅장한 산으로 둘러쌓인 소림사 주변 계곡의 크고작은 무술학교에서는 젊은 학생들이 무술을 연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남북조때 세워진 이래 1천500년을 지나온 소림사의 역사를 말해주는 많은 석조 비문들이 경내에 즐비했다.또 무술시범 조각들도 잘 조성되었다.이곳에선 중국무술의 신화가 일어나고,또 중국 선의 한 가닥이 잡혔다. 선은 모든 의식과 행동을 거두어 마음을 적멸의 상태로 이끌어가는 수행의 방법이다.무술은 의식을 고도로 집중한 상태에서 행동하는 수련방법이다.이들은 원리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는 두개의 다른 행위이다.그러나 소림사는 이들을 하나로 묶은 수행체계를 전수한다.진정으로 중국적이 아닐수 없다.이러한 적극적 포용주의는 중국에서 오래전에 순수한 참선전통을 없어지게 했던 것이다. ○포청천 고장으로 유명 낙양과 개봉 가운데 정주가 있다.정주역에서 두시간 남짓 달리면 개봉에 이른다.개봉은 북송의 수도로서 우리에게는 명관 포청천의 고장으로 알려진 곳이다.송나라는 이민족의 훼손으로부터 중국문화를 재건하려던 중세의 왕조이다.그러나 이 왕조는 군사적으로는 이민족의 위협앞에서 전전긍긍했다.이러한 개봉시 한쪽에는 유태인 청진사,곧 시나고그건물의 주춧돌을 모아둔 곳이 있다.그리고 개봉시 박물관에는 유태교 청진사의 중건비가 소장되었다.이 금석문 자료에 따르면,송나라 효종 융흥 원년(1163년)에 청진사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유태인들의 12세기는 바그다드와 코르도바에서 탈무드 전통을 크게 발전시키고 국제활동을 할때이다.이 시기에 유태인들이 중동의 면화를 중국에 유통시켰다.고려시대의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면화씨를 몰래 개성으로 가져왔을 정도로,면화는 송과 원나라가 엄격히 통제하던 귀한 무역품이었다.이 비석은 12세기에 활발한 도서문화의 교류를 말없이 입증해준다.중국유태인들은 이제는 그 모습이 중국인으로 변했을뿐만 아니라,그들에 대한 접근마저도 당국이 달가워하지 않는다. ○문자풀이 한계 넘어설때 흑룡강성의 하얼빈에서부터 신강성의 카시카르까지는 적어도 4시간 이상의 시차가 있다.그러나 중국 각 지역의 시간은 북경시간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이러한 대통일주의를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않는 곳이 중국이다.중국의 역사감각은 역사의 주체인 민족과 그 강역의 개념이 매우 유동적이다.그래서 단일민족으로 한반도라는 제한된 지역에서 오래 살아온 우리에게는 그 실체를 파악하는 일이 쉽지않다.따라서 중국 사서의 기록은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삼한에 관한 중국쪽 기록에서 그런 경우가 보인다.‘삼한의 각국에는 별읍이 있는데,이를 소도라고 이른다’는 기록이 그것이다.여기서 소도의 위치가 읍밖이냐 읍안이냐는 연구가들의 논의는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사료자체를 먼저 비판하지 않고는 기사내용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한 것이다.우리는 이제 중국기록에 매달려 문자풀이만을 일삼는 한계를 넘어서야할 때가 되었다.
  • 중 가구당 연평균소득 114만원/갤럽조사

    ◎TV보유 89%… 생활양식 서구화 【북경 AP 연합】 중국이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외국자본에 문호를 개방한 80년대이래 중국인 생활양식이 크게 바뀐 것으로 갤럽조사에서 밝혀졌다. 대표적인 예는 가장 인지도가 높은 외제 상표로 일본의 히다치를 제치고 미국의 코카콜라가 올라선 것.코카콜라 인지도는 81%로 94년 1위였던 히다치의 67%를 크게 앞질렀다.또 두발미용 제품을 사용하는 중국남성의 비율이 3년전보다 2배인 21%로 급증한 점도 생활양식의 서구화추세를 말해준다. 갤럽이 중국 전역에서 실시한 최대규모의 이번 조사에 따르면 중국인들의 가구당 연평균 소득은 1만400원(약1백14만원)으로 94년의 5천960원(약65만원)보다 무려 75%나 증가했고 94년 23%에 그쳤던 연간소득 960달러 이상 가구가 절반으로 늘어났다. 더운물이 나오는 가구는 아직도 2%에 불과하나 TV보유 가구는 89%로 증가했고 도시민의 경우 칼러TV 보유율이 88%에 달했다.냉장고,전화 등의 보유가구도 증가추세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전역에서 추출된 3천727명을 대상으로 5∼6월 실시된 조사에서 삶의 질은 1부터 10까지의 급수중 5.09로 나타나 5년전보다 약 33% 향상됐으며 앞으로 5년에 걸쳐 또다시 32% 정도 개선될 것으로 전망됐다. 구매습관에서는 73%가 국산품,27%가 외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나 외제선호 비율이 종전조사의 22%에서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김교각스님 청동불상 고향품에

    ◎탄생 1300주년… 새달 4일 불국사 한·중 합동봉안식/신라 성덕왕 태자… 중국서 지장보살로 추앙/높이 4m 무게 3톤… 작년 5월 남경서 제작 중국에서 지장보살(지장보살)로 추앙받는 신라 왕자출신의 김교각스님(696∼794)이 1천300년만에 고향인 경주로 동상이 되어 돌아왔다. 경주 불국사(주지 설조스님)는 11월4일 불국사 대웅전 뒤 무설전(무열전) 앞에서 ‘지장보살 김교각상 한중 합동봉안식’을 갖는다. 올해 불교계 가장 큰 행사인 이날 봉안식에는 중국측에서 회량옥(회양옥)안휘성성장과 중국 구화산(구화산) 방장 인덕(인덕)스님,한국측에서는 월하(월하)조계종 종정,송월주(송월주) 총무원장,중앙종회의장 설정(설정)스님,이의근(이의근) 경상북도지사,김종호(김종호) 경주 김씨 대종친회장과 신도 등 5천여명이 참석한다. 불국사에 봉안될 김교각상은 높이 4m,무게 3톤의 청동불상으로 중국 남경 성상조성소(성상조성소)에서 2년에 걸쳐 제작된 것이다. 김교각스님의 귀향은 지난해 중국 안휘성에서 탄생 1천30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한 뒤 교각스님을 모국인 경주로 모셔야한다는 한국스님들의 주장에 따라 이뤄진 것.지난해 5월 중국에서 동상이 제작되자 그곳 안휘성 성장은 경주를 방문,불국사 스님들과 봉안에 합의했으며 스님동상은 지난달초 중국을 출발,선박편으로 부산을 통해 들어와 현재 불국사에 도착해 있다. 696년 신라 성덕왕의 태자로 태어난 교각스님은 성덕왕 18년(719) 당나라로 구도의 길을 떠나 6년간 공부하다 불교에 귀의(귀의),양자강 남쪽 안휘성 구화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화성사(화성사)를 창건했다. 794년,세수 99세에 앉은 자세로 열반한 스님의 육신은 장례용 옹관(옹관)속에서 3년이 지나도록 썩지않은 기적이 일어나 몸에 금칠을 한 뒤 등신불(등신불)로 모셔졌다. 구화산 화성사에 ‘신라대각(신라대각)’이라는 등신불로 모셔진 김교각스님은 중국인들에게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으며 구화산은 중국 4대 불교성지가 됐다. 석가여래 당시 비구인 지장보살은 높은 곳에 앉아서 중생들의 공양을 받는 보살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고통받는 중생들과 아픔을 함께하는 보살로 서민의 신앙이며 민중의 신앙이다.김교각스님은 백토(백토)에 쌀을 섞어 죽을 쑤어 먹으면서 중국인들에게는 낯설었던 지장보살의 신앙을 가르쳐 민중불교를 전파했다.안휘성 6천여만명의 주민들은 한국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신라의 김교각스님은 모두 알고있을 만큼 스님을 추앙하고 있다. 불국사주지 설조스님은 “이번 김교각스님의 청동불상 봉안은 한 중 양국의 종교적인 교류를 넘는 국가적 경사”라며 “스님의 동상 봉안으로 불국사는 관광사찰에서 세계적인 고승을 모신 수행사찰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칼럼리스트 티머만 미지 기고문 요지(해외논단)

    ◎캘리포니아가 중국 22번째 성인가/통제완화 틈타 대거 유입… 불법거래·안보위협 심각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중국의 22번째 성인가.컬럼니스트 케네스 티머만은 클린턴 행정부 들어 중국에 대한 유연한 정책은 캘리포니아에 엄청난 중국 자본과 기업을 불러들였고,이들의 합법적인 첨단기술 유출과 무기 반출은 미국의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할 정도가 됨은 물론 캘리포니아를 중국의 돈주머니로 전락시켰다고 주장했다.이달말 중국 강택민 주석의 미국방문을 앞두고 미시사월간지 아메리칸 스펙테이터 최신호에 기고한 그의 ‘중국의 22번째 성’이라는 글을 요약 소개한다. 미국인들에게 풍요의 상징으로 알려진 캘리포니아가 곧 중국의 22번째 성으로 분류될 날이 올지 모른다.확실히 중국이 최근 캘리포니아를 다루는 방법은 자국의 성을 다루는 것과 흡사하다. 클린턴 행정부 출범이래 캘리포니아는 중국 권력층 자녀들의 교육장소이자 유흥을 위한 도피처가 되었다.이들 귀공자들은 스탠포드와 캘텍(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학위과정을 마치고 LA로 이주해왔다.이 가운데서 가장 돈많은 행운아는 등소평의 딸이다.그녀는 개인적 비지니스 상담을 위해 수백만달러의 별장을 사들인바 있다.캘리포니아는 중국 부패관리들의 부정한 재산을 돈세탁하는 천국으로도 알려져 있다. ○인민군 자회사 수백곳 또한 중국인민해방군(PLA)과 방위산업체들은 수백개의 자회사및 지사들을 설립했다.미국인과의 합작형태 혹은 미국변호사들을 고용,교묘하게 위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미정부도 그들의 수와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이 PLA 직영이거나 중국 정보기관에 의해 운영되는 이들 회사들은 클린턴 행정부 들어 현저하게 수출통제가 완화된 93년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으며,주임무가 미국의 첨단기술을 훔쳐가고 중국군의 운영자금을 조달하는 것이다.이들 중국계회사들의 합법을 가장한 불법 행동은 미국안보의 새로운 형태의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매일 캘리포니아 항구들에서는 엄청난 양의 미국 기술과 부품 등이 이들 중국계회사들을 통해 중국으로 빠져나가고 있으나,세관이나 상무부 수출담당사무소 등 관계당국은 이같이 위험한 거래에 대해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 한 예로 최근 이들 회사중 하나는 미국방부 자재창에서 F117A 스텔스기의 방향유도장비 37세트를 구입,‘scrap’(잡동사니)로 분류해 중국으로 선적했다.또 한 회사는 브로커를 통해 컴퓨터 디스켓 등이 포함된 암호화장비 2만6천세트를 빼내 역시 ‘잡동사니’로 분류,중국에 수출했다. ○무기 빼내 적성국 수출 더욱이 위험한 것은 중국당국이 이같은 중국계회사들의 합법적(?) 활동을 십분활용,지난 80년부터 미국무기 수출이 금지돼 있는 이란과 같은 부랑아국가에 미국무기를 팔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방부 범죄수사국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이들 중국계회사가 플로리다 펜사콜라의 해군박물관에서 F14전투기 완성품 몇대와 부품으로 가득찬 콘테이너들을 구입,중국으로 수출하려는 것을 적발했다.LA세관이 갖고 있는 또다른 케이스로는 F14기의 무기체계에 활용되는 전자튜브 500개가 역시 ‘잡동사니’로 분류돼 중국으로 선적되려는 것을 압수한바 있다. 이들장비및 부품이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 세계에서 F14기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국가는 이란 밖에 없으므로 이들이 중국으로 넘어가고,그다음에는 이란으로 갈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중국인들의 무역활동은 자체 조달업자와 선박회사,자체 운송업자,심지어는 자체 은행까지 철저하게 중국네트워크에 의해 움직여지기 때문에 어떤 불법거래가 한사람의 미국인을 통하지 않고도 충분히 이뤄질수 있다.운송은 중국최대 선박회사인 COSCO(중국국영대양선박)와 자매회사인 해외중국해운 두회사가 맡고 있으며,은행은 중국계 동서은행과 국영중국은행의 지점들이 있다. LA에서는 이같이 간판을 내건 중국계 대형회사들 이외에 간판도 없이 우편함 하나만 갖고 있는 수천개의 이른바 ‘사서함회사’(mailbox company)들이다.이들이 사실상 첨단기술 절도와 무기 밀수 등을 자행하고 있으며,적발될 경우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돈세탁위해 회사 설립 중국군이 직접 운영하는 회사도 미국내 12개중 11개가 캘리포니아에 있다.또한 부패 권력층들이 돈세탁을 위해 세운 회사들도 많다.그러나 이들은 대부분이 중국 최고권력층과 선이 닿아 있기 때문에 미당국은 미·중관계 악화의 두려움 때문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달말 클린턴 대통령과 강택민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도 이같은 문제는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은 이같이 과도한 중국의 행위에 제동을 걸것인가,아니면 캘리포니아 뿐아니라 전 미국을 중국에 더 내줄 것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다.〈정리=워싱턴 나윤도 특파원〉
  • 중국반환 3개월/홍콩이 달라지고 있다:하

    ◎공평가 고정환율제 붕괴 시간문제/대중 교역량 늘어 인민폐유통 날로 증가 홍콩에는 암달러상이 없다.금융센터인 홍콩섬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인들이 많이 사는 구룡반도 쪽 뒷골목에서도 달러를 은밀히 거래하는 모습은 찾기 어렵다.백화점이나 시장,은행 어디를 가도 환율은 똑같다.다른 동남아 국가에서와 같이 물건을 구입할 때 현지 통화가 없어 환차손을 보는 낭패는 당하지 않는다.홍콩달러의 가치가 그만큼 안정됐다는 뜻이다. 홍콩 당국은 지난 83년 이래 홍콩달러를 미국 달러화에 연동시켰다.시장에서 외환의 수급에 따라 환율이 결정되는 변동환율제가 아니라 달러화에 페그된(peg) 고정환율제다.미국 달러화의 가치가 오르면 홍콩달러화의 가치도 함께 오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96년 이후 미화 1달러에 대한 환율은 7.74홍콩달러를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중국반환 이후에도 이같은 페그 시스템이 과연 유지될 수 있느냐는 점이다. 홍콩의 금융전문가들은 단기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본다.태국에서 비롯된 동남아 외환위기는 기본적으로경제가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통화당국이 시장에 무리하게 개입,환율절하를 억제하려다 일어났다. 그러나 홍콩은 다르다.무역수지 적자가 95년 이후 꾸준히 개선되고 있고 경제성장률도 올해 5.5%,내년 6.1%로 선진국치고는 꽤 높은 수준이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콩달러의 위기를 점치는 금융전문가들이 적지 않다.당장은 현 통화체제를 유지할 지 모르나장기적으로 홍콩달러는 인민폐와 혼용되고 결국 2중 통화체제가 붕괴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홍콩의 경우 중국인과 인민폐의 유입을 차단한다고 하지만 원천적으로 봉쇄하기는 불가능하다.지금도 상당 규모의 홍콩달러가 중국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으며 인민폐가 홍콩에서 유통되고 있다.더욱이 홍콩과 중국과의 교역이 갈수록 증대될 경우 홍콩 금융시장의 일부는 중국에 점차 대체될 수 밖에 없다. 국민은행 노재선 홍콩사무소장은 “현지 금융기관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3∼5년뒤 통화체제가 변동환율제로 갑자기 바뀌는 경우”라며 “중국과 홍콩당국이 현행 2중적 통화체제를 유지한다고 호언하지만 중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홍콩 통화당국의 조셉 얌 국장은 “중국과 홍콩의 통화시스템은 상호 독립적”이라며 “하나의 주권국가 안에 서로 다른 사회·경제체제 아래에서 두개의 통화체제와 통화당국이 존속할 것”이라고 현체제의 유지를 강조했다. 그러나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듯이 홍콩달러의 가치가 적절하게 재평가되지 않으면 홍콩도 통화위기의 안전지대로만 남지는 않을 것이다.
  • 중국인 보험가입 ‘열풍’

    ◎시장경제 도입 기업 파산 늘자 “너도나도”/1억명 가입… 작년 7조6천억원 보험사로 중국인들 사이에 보험 열풍이 불고 있다.시장경제 도입 심화로 부실기업의 파산과 실직이 늘고 국가의 사회보장에 대한 투자 감소로 불안해진 민초들이 경쟁적으로 보험들기에 나선 것이다. 보험 열풍이 본격화 된 것은 부실 국영기업에 대한 파산 조치가 실시되면서 퇴직이후의 생활과 직장과 의료,교육과 주택 등에 대해 국가가 무조건적으로 부담하던 근로자들의 사회보장부문 비용을 이제는 개인등 수익자에게 돌리면서부터. 즉 ‘철밥통’(철과반·평생직장)을 보장해주던 사회주의 계획경제 시대가 끝나면서 실직과 파산이 일반화되고 체제 변화속에 적자생존의 경쟁에 불안해진 사람들이 미래의 안전을 위해 보험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다 중국 정부가 보험법을 지난 지난95년초부터 실시하면서 길을 연것도 증가의 한 요인. 지난해 보험으로 몰린 돈은 7백56억위안(7조5천7백억원상당).전년도에 비해 25%가 늘어났다.이미 모두 1억여명의 중국인이 실업보험,생명보험 등 각종 보험에 가입,중국은 이제 세계 최대의 보험시장으로 성장하고 있다. 심천 특구보 최근호는 95년도의 보험 가입비가 10년전의 20배나 늘었고 2천년초에는 2천억에서 2천5백억위안(20조∼25조 상당)으로 늘 것으로 전망했다.특히 퇴직이후 불안한 노년기를 대비한 양로보험과 의료·상해보험 등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보험회사로 돈과 사람이 폭발적으로 몰리자 부작용도 적잖이 증가하고 있다.회사들 사이의 과다 경쟁으로 보험조건을 속여 보험에 가입하도록 하는가 하면 보험조항에 대한 해석차이로 송사도 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인민은행은 최근 보험회사에 대한 감독·관리규범 등 감독강화에 나서기 시작했다.현재 중국엔 외국과의 합자회사 9개소등 모두 22개의 보험회사가 있지만 향후 10년내 회사수가 최소 10배로 늘 것으로 보인다.
  • “2차대전은 아주국 자유 위한 일의 은덕”

    ◎일 우익단체,거주 외국인 초청 영화 상영/일군 미화 내용에 참석자 집단퇴장 소동 일본의 한 민간단체가 최근 중국대사관의 후원을 얻어 재일 아시아인들과의 교류를 넓히기 위해 개최한 국제교류회에서 2차대전중 일본군의 행동을 미화하는 영화를 상영,내빈으로 참석중이던 중국외교관등 중국인 50여명이 퇴장하는 소동이 벌어졌다고 도쿄신문이 7일 보도했다. 이 교류회는 도쿄에 사무국을 두고 있는 ‘국제문화경제교류협회’가 지난달 28일 중·일 국교정상화 25주년을 기념해 주최한 것으로,문제가 된 영화는 우익조직인 ‘종전50주년 국민위원회’가 2년전 제작한 ‘자유아시아의 영광,인도·미얀마 독립사’였다. 이 영화는 전쟁관계자들의 증언등을 담은 40분짜리로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시아제국을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으며 인도등은 감사하고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이날 교류회에는 많은 중국인들을 포함 수백명의 외국인들이 참석했다. 참가자에 따르면 영화 상영도중에 중국대사관의1등서기관 등 아시아인 참가자의 대부분이 퇴장했고 중국유학생의 연설 등도 취소됐다. 이에 대해 단체측은 ‘배려가 부족했다.중국대사관에 사정을 설명하겠다’고 말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 침체되는 변경무역(김정일의 북한:10)

    ◎북 교역물자 바닥… 통상구 11곳 거래 줄어/민둥산 천지에 목재수출도 한계 맞아/민생투자 확대… 경제복구만이 해결책/“사올 물건이 없다” 조선족 보따리장수 발길 끊어 중국 임강에서 시장의 안내로 민간인 통제구역인 임강시­북한 중강진시를 연결하는 다리 중간까지 갈수 있었다.아래에는 압록강이 도도히 흐르고 건너 초소에는 북한군 병사가 쌍안경으로 경계하면서 어디엔가 전화하는 분주한 모습이었다. 이곳 임강­중강진 통상구는 중국과 북한간에 자유시장 원리에 따라 상호간에 교역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압록강·두만강을 따라 1천406㎞의 국경지대에는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통상구 11개가 설치돼 있다. 시장의 설명에 따르면 북한에서 매일 약 200여대의 트럭이 목재를 싣고 이 다리를 건너 임강에 와 식량과 교환하는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대부분 민둥산인 북한에서 계속 목재를 수출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니,그런 이유 때문인지 최근들어 점차 거래가 줄어들고 있으며 한계가 있지 않겠느냐고 자문자답(자문자답)하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시장은 꼭 안내하고 싶은 곳이 있다고 말했다.함께 간 곳은 압록강에 있는 조그만 모래섬으로 위락시설을 갖춘 공원이었다.김일성과 모택동간의 회담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의 국경지대에 있는 모든 섬들은 북한령으로 합의했기 때문에 모든 섬들은 북한령이다.그러나 이 섬만은 중국령이 됐다는 것이다.그것은 이곳이 본래 섬이 아니라 모래톱이어서 김일성­모택동 합의사항에서 제외돼 중국령으로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중국령이 된 뒤 임강시에서 이를 개발해 공원으로 조성했다고 한다. ○작년 교역액 260억원 조그마한 위락시설이지만 요모조모 갖춰져 저녁이 되니 가족 동반객,남녀 데이트족,놀러나온 선남선녀들로 제법 북적거리기 시작하면서 썰렁하고 캄캄한 북한과 대조를 이뤘다.특이한 것은 공원 중앙에 커다란 야외 무도회장(입장료 1인당 1원·한화 100원)이 있는데,동네 미남미녀 10여명이 파트너를 기다리고 있었다.필자 일행도 들어가 보라고 해 잠깐 구석에 앉았다.아무에게나 춤을 신청해 춰보라고 하지만 춤문화에 깜깜한우리 일행은 꿀먹은 촌놈처럼 어정쩡하게 앉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행중에 춤에 자신이 있다는 한두사람이 함께 간 안내양과 춤을 추기 시작했다.그러나 중국인들과 비교해 보니 그건 춤이 아니라 그냥 끌어안고 왔다갔다하는 모습이다.얼마 안돼 안내양이 안되겠다는 듯이 춤을 멈추고 돌아왔다.발을 너무 자주 밟아서 안되겠다는 것이다. 중국의 춤문화는 익히 정평이 나 있지만,이런 오지에서도 여전해 자유스런 중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수십리 밖에 사는 사람들도 이곳에서 춤을 추기 위해 화려하게 차려 입고와 호흡이 맞는 파트너와 춤을 추려고 기다리고 있었다.춤을 추고 있는 몇쌍은 직업적인 댄서만큼이나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춤을 추고 있어 보는 이들에게도 아름답게 보여 춤하면 퇴폐적으로 흐르는 우리 문화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다음날 하루종일 압록강을 따라 비포장도로를 달려 장백현에 도착했다.임강­중강진시와 마찬가지로 장백현­북한 혜산시 통상구로 지정된 곳이다.이곳에서도 북한에서 목재를 싣고와 식량과 교환한다고 한다.작년 교역액은 중국돈으로 2억6천만원(한화 2백60억원)이었다고 장백현의 한 공무원이 알려줬다.이러한 거래는 공식거래로 이뤄지는 것으로 물물교환의 형태로,당일거래로 이뤄지기 때문에 지점이나 지사를 두고 있지 않다고 한다.교환비율은 어떻게 정하느냐는 질문에 국제시세에 맞춰 사전에 정해 놓은 교환비율을 적용한다고 한다. 그 외에도 사적거래나 밀무역은 얼마나 되는지 포착하기 어렵지만 당국에서 통제는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한다.사적거래는 고향방문의 형태가 일반적인데,북한에서는 중국으로 오기 어렵지만 장백현에 사는 사람들은 비자없이 혜산시에 30일동안 체류할수 있기 때문에(혜산시 이외의 곳을 방문하려면 비자를 받아야 한다고 함) 고향방문 신청을 하고 식량을 가져가 인삼·명태 등과 교환해 돌아온다고 한다.그러나 요즘은 북한에서 교환해올 만한 상품이 거의 없어 사적거래나 밀무역이 크게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시장경제 도입 실험대 옛 소련과 동구의 사회주의 체계가 일시에 시장제도를 채택하면서 사회주의 체제가붕괴된데 비해 현재까지 중국은 시장경제를 점진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잘 조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따라서 체제유지가 우선인 북한은 중국의 점진적 개방정책 노선을 견지할 것이라는 것이 예견됐다. 전환되고 있는 사회주의 체제를 보면서 북한 체제도 개방과 시장제도의 도입이 필연의 수순임을 감지할 수 있지만 체제유지라는 절체절명의 명제에 빠져 개방과 시장제도의 도입을 망설이고 있는 것 같다. 북한은 이미 84년 합영법을 제정해 제한적으로 자력갱생을 통한 자립적 민족경제 노선을 수정,문호개방을 준비했으며 91년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 설립안을 발표해 시장경제의 제한적 도입과 세계시장을 상대로 한 개방정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다른 한편으로는 북·중 변경무역을 통해 인접지역간에 필요한 상품들을 초급적인 국제무역방식으로 상호교역함으로써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는 기능을 보완하면서 시장제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현재 북·중 변경무역은 양국 정부가 지정한 통상구(구안)안에서 이뤄지고 있는데,1류 통상구는 중국 도문­북한 남양,집안­만포,삼합­회령,단동­신의주의 4곳에 설치돼 있고 2류 통상구는 중국 권하­북한 원정리,고사자­샛별,개산둔­종성,남평­노덕리,숭선­무산,장백­혜산,임강­중강진의 7군데 설치돼 총 11곳에 통상구가 설치돼 있다. 북한의 개방정책이 현실화되고 있는 두가지는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와 통상구라고 할 수 있다.이 두가지 정책이 성공되도록 돕는 것은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고 북한 경제를 돕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올수 있는 방안이 될 것이다. ○통상구 활성화 시급 그러나 북한에서 교환해 올 상품이 거의 없는 상황이므로 통상구를 활성화시키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것같다.이는 북한의 산업 복구와 발전이 선행돼야만 하기 때문이다.현재 중국에서 북한으로 문호가 개방돼 있으므로 시장 메카니즘 형성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되며,물물교환의 형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국제통화로 거래되는 형태로 바뀔 것으로 예견된다.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북한은 상반기에도 민생에 필요한 투자는 안전에도 없이 금수산기념궁전 성역화 사업,김일성 부자 현지 지도비 및 사적비 사업 등 정치선전 상징물 건설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세계 청년학생 축전에 500명을 파견한다느니,전세기를 낸다느니 하고 있다.북한은 정치도 중요하지만 산업이 발전하고 통상구가 활성화돼야 인민이 먹고 입을수 있도록 하는데 힘써야만이 체제도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 미 뉴리퍼블릭지 주디스 논설위원 ‘대중국 강경론’요지(해외논단)

    ◎대중 봉쇄론 경계… 개입정책 지속해야 세계 및 동북아 안보에서 미·중 관계는 핵심 요인이다.미 정치주간지 뉴 리퍼블릭의 존 주디스 논설위원은 최근 미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대 중국 봉쇄론을 반박하면서 개입정책의 지속을 강력히 주장했다.계간지 ‘미국의 전망’에 실린 그의 ‘대중국 강경론’이란 글을 소개한다. 냉전이 끝난뒤 중국에 대한 ‘건설적인 개입정책’에 대한 불만의 소리가 일부에서 높아지고 있다.예전에 소련에 대항해 썼던 봉쇄 전략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옛 냉전때의 보수주의자들이 목청을 높이는 것이다. 봉쇄 노선 주창자들은 중국을 독일,일본,소련 등 제 뜻을 세계에 강요한 20세기 ‘수정주의자’ 세력의 최신판으로 여기고 있다.이들이 보기엔 미국과 중국은 분쟁을 피할수 없는 것이다.그들은 “중국 지도층은 한 세기 전 빌헬름 2세가 세계를 보는 것과 거의 비슷하게 오늘날 세계를 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중국이 무자비한 공산 독재국으로 남아있는 한 우리의 사고와 정책은 분쟁의 불가피성에 기반을 둬야한다”고 말한다. ○시대변화 모르는 발상 중국에 대한 최혜국대우도 그들로부터 특정한 몇몇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장기 전략의 일환으로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중국과의 경제·군사적 유대를 철회하고 중국의 세력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나토와 같은 동맹체제를 구축할 때 중국은 공산주의를 포기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예전 일본,독일,소련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위협에 대한 유일한 효과적 해결책은 정권의 변화,정치적 민주주의로의 변화 뿐이다”고 강조한다. 이같은 주장과 태도는 중국이 과거의 ‘수정주의’ 세력들과 얼마나 다르며 1945년 이래 세계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한 데서 나온다.금세기 초반 빌헬름 황제및 나치의 독일,차르 러시아,영국,일본은 전쟁으로 식민지의 분배를 바꾸고자 한 제국주의 열강이었다.중국은 이 제국주의의 희생자였다.홍콩,대만 등을 회복하려는 중국의 열망은 독일의 폴란드 합병이나 소련의 동구 지배와 동일시 할 수 없는 것이다. ○소련·나치 경우와 달라물론 중국도 제국적 과거를 갖고 있다.그러나 그 야망은 인근 지역에 한정되었다.중국인들은 19세기때의 미국인들처럼 자신들을 다른 나라들이 본받아하는 우월한 문화의 국민들로 여겼다.문화혁명 초기 임표의 급부상 시절을 빼곤 중국인은 소련과는 달리 세계 공산주의의 리더로서 메시아와 천년 왕국의 나라라는 그런 생각은 품지 않았다.그리고 중국의 현 공산주의는 ‘만국적’이란 허식에서 해방되어 있다.야망이 있다면 아시아의 대국으로서 제국주의 이전의 위세를 회복하는 것이다.이 야망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 및 미국과 갈등을 빚을수 있지만 소련이나 나치 독일의 세계 지배욕과 같게 봐서는 안된다. 설사 중국이 그런 야망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 나라는 아시아 대륙을 너머서는 거대 군사력을 유지할 능력이 없다.빈약한 장비의 육상군대가 주류를 이룬채 진정한 해군력은 거의 없는 셈이다.핵무기를 가지고 있으나 최근의 미 국방부 보고서가 지적한 것처럼 중국의 공군력은 ‘쇠퇴해가고 있는’ 것이다.또 중국의 경제력은 심하게 과대 평가되어 있다. 중국은 스프랫틀리 군도를 둘러싼 동남아 국가들과의 분쟁에서 보듯 분명 아시아에서 심대한 군사 문제를 야기할 수 있지만 이로 해서 미국이 소련에 대항해 추진한 봉쇄정책 같은 것이 요청된다고 할 수는 없다.대신,중국으로 하여금 군사 모험을 못하도록 하는 지역적 전략이 요망되는 것이다. ○군사모험 방지 전략을 이같은 제한된 전략은 미 해군력의 배치와 일본의 보다 적극적인 군사 역할을 포함할 수 있다.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건설적 개입 정책 옹호자들이 선호하는 적극적인 인센티브를 아우르는 것이다.여기에는 홍콩 등에 대한 영유권의 적법성 인정과 중국으로 하여금 지역적 및 국제적 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하는 유도책이 포함된다.이런 접근은 중국을 고립시키고,포위하며,타도코자 하는 봉쇄 전략과는 전적으로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중국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따질때 미국은 나치 독일이나 스탈린의 소련 망령을 떠올리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낯선 냉전이후,제국주의 이후 미래의 어슴푸레한 윤곽을 채워가는 그런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정리=김재영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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