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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테네 2004] ‘4년뒤 베이징’이 두렵다

    [아테네 2004] ‘4년뒤 베이징’이 두렵다

    ‘4년 뒤 베이징이 더 두렵다.’ 8월의 지구촌을 뜨겁게 달군 아테네올림픽의 성화가 30일 새벽(이하 한국시간) 꺼졌다.108년 만에 ‘신들의 고향’으로 귀환했던 올림픽은 4년 뒤 중국의 베이징에서 다시 열린다.아시아에서는 20년 만이다.지난 1964년 도쿄에서,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베이징올림픽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올까.아마도 ‘거대 중국’의 위용을 뽐내는 무대가 될 것이다.도쿄올림픽 이후 일본은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고,한국도 서울올림픽 이후 국제무대의 변방에서 벗어났다.13억 인구의 중국도 올림픽을 통해 그들이 오랫동안 꿈꿔온 ‘중화(세계의 중심)’로 나아가려 할 것이다. ‘부국강병’을 내세운 중국은 이미 2001년 WTO(세계무역기구) 가입,2003년 미국과 구 소련에 이은 세계 세번째 유인우주선 발사,2010년 엑스포 유치 등 일련의 성공을 통해 세계경제를 쥐락펴락할 정도로 급성장한 국력을 한껏 뽐내고 있다. 반면 한국 스포츠는 아테네를 통해 역동성에서는 중국에,치밀함에서는 일본에 밀린다는 것을 절감했다.베이징을 위해선 모자람을 분석하고 변화를 창조해야 한다.해답이 분명한 체육인들의 몫은 차치하더라도 현실에 바탕을 둔 국민들의 성원과 정부의 과감한 투자가 있어야 한다. 스포츠가 ‘국력의 바로미터’가 아니라는 것은 강변일 뿐이다.사상 처음으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202개 전회원국이 참가한 아테네올림픽에서의 중국은 위력적이었다.407명 가운데 323명을 올림픽 출전 경험이 없는 선수로 채우고,취재진만 2500명에 달한 데서 보듯 중국은 아테네를 베이징의 리허설 무대로 삼았다.4년전 시드니에서 미국 러시아에 크게 뒤진 종합 3위를 차지한 중국은 공포감을 느낄 정도의 기세로 러시아를 밀어내고 ‘유일무이한 슈퍼파워’로 자부해온 미국과 당당히 양강체제를 이뤘다. 아테네올림픽을 지켜 본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 4년 뒤엔 미국마저 제치는 모습이 뭉클하게 떠올랐을 것이다.지난 1984년 LA올림픽에 첫 선을 보인 중국은 이후 ‘빅4’로 자리매김했지만 아테네에서처럼 거의 전종목에서 위세를 떨치지는 못했다.세계의 주가를 좌우하고,‘세계의 지도자들이 잠들기전 후진타오의 건강과 개혁노선에 이상이 없기를 기도한다.’는 풍자가 나돌 정도로 훌쩍 커 버린 중국경제에 비견될 정도다. 이같은 강세는 경제력과 ‘스테이트 아마추어리즘’이 동시에 떠받치고 있어 더욱 위협적이다.개혁·개방 노선과 함께 흔들렸던 국가 주도의 스포츠 정책이 베이징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부활해 중국 스포츠의 엔진 역할을 하고 있다.여기다 경제력이라는 윤활유까지 부어지면서 질풍노도로 변한 것.“아테네올림픽에 나온 수준의 선수들은 무궁무진하다.”는 한 중국 코치의 말은 전율마저 느끼게 한다.비록 36년 만의 종합 3위 복귀에는 실패했지만 내용상으로 값진 결실을 거둔 일본도 4년 뒤에는 용틀임을 할 태세다.일본올림픽위원회(JOC)는 이미 지난 98년 베이징올림픽을 겨냥해 메달 획득률(메달수÷참가선수) 배가를 위한 ‘10개년 계획’을 세우고,2001년 국립스포츠과학센터(JISS)를 설립했다. 냉전시대 미국과 양강을 다툰 러시아 역시 권토중래를 노릴 것이 분명해 한반도를 둘러싼 4강이 베이징 대회전을 앞둔 셈이다.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존재의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 한국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탁구 유승민이 일깨워준 ‘대고구려 후예’의 기상을 베이징에서 재현하려면 지금 바로 나서야 한다.2008년은 이미 시작됐다. 오병남 체육부장 obnbkt@seoul.co.kr
  • 중국 각지 상인/천관런 지음

    중국 각지 상인/천관런 지음

    “중국 상인을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로 중국에서 성공할 수 없다.광둥(廣東)성의 인구만 해도 7800만,쓰촨(四川)성의 인구는 1억이 넘는다.이들은 서로 언어도 다르다.따라서 중국을 상대할 때 ‘하나의 국가’를 상대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수많은 민족,종교,문화를 상대한다고 생각해야 한다.각지 상인들의 독특한 성격과 기호,문화를 미리 파악해야 한다.” ●말도 물도 다른 중국… 상인들도 지역마다 달라 중국 신지식인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천관런(陳冠任·36)은 그의 저서 ‘중국 각지 상인’(강효백·이해원 옮김,한길사 펴냄)에서 이렇게 주장한다.기본적으로 다민족·다문화 국가인 중국 사람들,특히 중국 상인을 대할 때는 그 어느 나라보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아는 이른바 지피지기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이 책은 중국의 24개 주요 성과 대도시,경제특구,행정특구로 나눠 중국 상인의 기질과 관습을 소상히 밝힌다. 중국 속담에 “한 지역의 물이 그 지역의 사람을 키운다.”는 말이 있다.땅이 넓은 만큼 각 지역마다 지리적 환경과 역사가 달라 사람들의 기질 또한 다르다는 것이다.책은 먼저 중국의 경제 수도 상하이부터 다룬다.상하이는 ‘바다로 나아가자(上海).’라는 이름의 뜻대로 중국 대륙 1만 8000㎞의 해안선 한가운데에 있다.중국 사람들은 상하이라는 창문을 통해 서양을 바라보고,서양인들 또한 상하이의 눈을 통해 중국을 체험하고 인식해왔다.중국 전통문화와 계획경제의 흐름을 무시할 만큼 자유분방한 국제도시가 바로 상하이다.그러면 상하이 상인들은 어떤 기질을 갖고 있을까.서양 문물이 들어오는 창구 역할을 해온 상하이 상인들은 계산적이고 치밀한 성품과 실용주의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다.까다롭게 따지고 확인하지만 일단 계약이 성사되면 엄격히 지키며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는다.저자는 상하이 상인에게는 매판(買辦,외국 상관이나 영사관 등에서 중국상인과 거래할 때 중개역으로 고용한 중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말한다.그것은 오늘날 ‘신(新)매판’의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문벌과 신분을 중시하는 베이징 상인 ‘황궁의 발치’에 있는 베이징 사람들은 중국에서 가장 정치를 숭배하는 사람들이다.일찍이 중국 작가 라오서(老舍)가 “베이징의 일반 서민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벼슬에 눈이 먼 ‘관료광’이다.”라고 개탄했을 정도다.상인들도 관료적인 풍모를 띤다.정치에 민감한 베이징 상인의 특징은 협상 상대방의 문벌과 배경,신분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중국인들은 누구나 체면을 중시한다지만 둥베이(東北) 사람들의 체면의식은 남다른 데가 있다.둥베이 상인들은 전형적인 중국 북방 기질을 지니고 있다.체면이 서는 일이라면 터진 바지 밖으로 엉덩이가 보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호방하다.하지만 이곳에서 사업할 때는 자신만만한 그들의 ‘허풍’을 조심해야 한다고 저자는 충고한다.통이 큰 만큼 그들의 속임수 또한 대담하기 때문이다. 광둥 사람은 돈을 벌지 못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어떤 격식에도 구애받지 말고 돈을 벌라.”는 것이 그들의 격언.하늘을 흔들어서라도 돈을 벌 수 있다면 주저없이 그렇게 할 사람들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안후이(安徽) 상인은 유상(儒商)의 본고장답게 장사를 하면서도 유학에 정진하는 모습을 보인다.한 손으로 돈을 만지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붉은 관모’를 쓰려 한다.불이익은 참아도 불의는 용서하지 못한다는 옛 유상의 상도와 선비의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들은 낮에는 장사하고 밤에는 공부를 한다.‘주상야독(晝商夜讀)’인 셈이다.그런가 하면 쓰촨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을 천시해 경쟁 자체를 꺼린다.거래에서도 군자의 품위를 지키려 하며 한번 속인 사람은 절대로 믿지 않는다. 중국에는 “나라가 혼란에 빠지면 제일 먼저 후난(湖南)이 어지러웠다.”는 말이 있다.그만큼 후난 사람들은 시대의 흐름을 재빨리 읽어낸다.후난 상인들은 시장의 움직임에 매우 민감하며 반응도 빠르다.저자는 역사적으로 후난에는 상인은 있어도 동향 상인들의 친목을 다지는 상방(商幇)은 없다고 말한다.책은 이밖에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바닷나루’이자 관문인 톈진(天津) 상인의 선비 같은 기품,잔꾀를 잘 부리고 박리다매를 전략으로 내세우는 ‘중국의 유대인’ 원저우(溫州) 상인,한약재의 집산지로 유명한 산시(陝西) 상인 등의 면모도 소개한다. ●中상인 공략하려면 지역별 세분화 필요 중국의 상인들은 예로부터 ‘상인종(商人種)’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상술을 갖고 있다.책은 지금이야말로 중국 상인에 대해 ‘세분화’전략이 필요함을 일깨워준다.‘추상적이고 표준적인’ 중국인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지역화된’ 중국인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그들을 바로 알지 못하면 “잘 익은 오리가 하늘로 날아가버린다.”는 그들의 속담처럼 친분을 쌓을 수도,장사를 하기도 어려우며 애써 성사시킨 거래마저 자칫 허공으로 날려보내기 십상이다.이 책은 중국의 경제·역사 전문작가가 중국 전역 상인들의 특성과 기질을 분석한 최초의 조사 보고서란 점에서 우리로서도 참고할 만하다.1만 6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세계유산 등록이후 첫발-중국 고구려유적지를 가다] (하)두번째 도읍지 지안

    [세계유산 등록이후 첫발-중국 고구려유적지를 가다] (하)두번째 도읍지 지안

    ‘세계유산 등록 이후 지안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고구려의 북방개척의 전진기지인 나통산성과 고구려 첫 수도의 환런(桓仁)의 오녀산성에서 역사 왜곡을 확인한 우리 일행은 8월14일 지안(集安)으로 들어갔다.우리는 퉁화(通化)를 출발하고 얼마 가지 않아 지안에서 100㎞나 떨어진 곳에서 ‘세계문화유산 고구려 유적의 도시 지안’이라는 대형 광고와 마주쳤다.철기둥으로 만든 반영구적인 광고판이었다.중국이 고구려 유적에 쏟는 관심과 열기를 다시 실감했다. ●지안-고구려는 중국 지방정권 선전 가장 먼저 지안박물관으로 갔다.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 국내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지안박물관은 전시물의 90%가 바뀌었을 정도로 완전히 새 단장을 했다.박물관 가운데에 있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천장까지 닿는 대형 광개토태왕비 탁본이 걸려 있고 그 앞에는 1.5m쯤 되는 표지판에 박물관을 안내하는 인사말(前言)이 쓰여 있다.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방의 고대문명 발전과 생산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다.” 아마 이 한마디가 중국이 지안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던지는 핵심적인 메시지일 것이다.물론 중국어를 모르는 한국인 관람객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나갈 수 있다.그러나 이 문구는 한국인보다는 중국인을 목표로 한 것이다.고구려 역사를 알고 있는 조선족들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일반 중국인들이 입구에서부터 고구려를 자기 역사로 알도록 역사 왜곡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서쪽에 있는 방부터 관람을 시작하면 바로 눈에 띄는 것이 ‘고구려 역사에 대한 중요한 기술(高句麗歷史重要記述)’이다.제목은 ‘고구려 역사’이지만 모두 고구려 건국에 관한 내용이다.한서,후한서,삼국지,태왕비,위서 같은 유명한 사서들을 인용하여 ‘고구려는 한나라가 세운 현토에서 일어났으므로 중국 역사’라는 것을 부각시키는 말만 교묘하게 엮어 놓았다.현토군의 고구려현은 아직 추모(주몽)의 고구려가 성립되기 이전 역사인데 마치 고구려가 한(漢)나라의 한 현인 것처럼 왜곡해 모르는 사람은 고구려 전체가 중원의 한 현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했다. 동쪽 방에 들어가면 왜곡은 더 심하다.먼저 나타난 ‘고구려 조공·책봉 조견표(高句麗朝貢受封簡表)’에는 고구려가 중원의 각국에 조공을 바치고 벼슬을 받았던 14번을 표로 만들어 쉽게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고구려 역사 705년 동안 외교적 관례로,그것도 50년 만에 한번 정도 있던 행사를 가지고 마치 고구려는 항상 벼슬을 받아 행세한 지방정권처럼 왜곡해 놓았다.고구려 705년 동안 중국에서는 35개 나라가 망했으며 그 가운데 50년도 못 가고 망한 나라가 절반이 넘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소리다.도대체 705년이나 지속된 고구려가 35개 나라 가운데 어떤 나라의 지방정권이란 말인가? 또 있다.바로 ‘고구려 유민 천도 정황(高句麗流民遷度情況)’이라는 표이다.이것은 고구려가 멸망하고 대부분의 고구려인들이 중국 땅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기록들을 모아놓은 것이다.그러나 그 기록과 통계들도 고구려 땅에 그대로 남아 고구려를 이은 발해의 주민이 된 사람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음에도 교묘하게 짜맞춘 것이다. 유물을 관람하면서도 끊임없이 중국 연대를 생각하도록 해 놓았다.고구려 유물을 이야기할 때는 고구려의 초기라든가 후기,또는 무슨 왕대의 것이라고 고구려 연대로 표기해야 하는데,모두 한-왕망-후한-위-진-제-양-진-수-당 식으로 중국의 왕조로 설명하고 있어 이곳에 관람하는 중국인은 고구려가 중국의 소수민족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했다. ●박물관 밖-관광을 통한 역사왜곡 무거운 마음으로 박물관을 나오니 담벼락에 붙은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중국 지린성 지안 고구려 관광주간의 성대한 개최를 열렬히 경축한다(熱烈慶祝中國吉林·集安高句麗旅游節 隆重召開)’ 왜 박물관에 ‘세계문화유산 등재 축하’ 현수막이 아닌 관광축제 개최 축하 문구가 걸려 있는 것인가? 바로 이 현수막이 역사왜곡을 위해 진행되는 과정을 분명히 보여준다.첫째 세계유산 등록을 계기로 하여 관광산업을 극대화하여 수입을 올리고,둘째 현지를 찾은 관광객에게 고구려 역사가 중국의 역사라는 인식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지의 축하행사도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지린성 정부 부비서장을 주임으로 하는 ‘중국 지린·지안 고구려문화관광주간(中國吉林·集安高句麗文化旅游節)’은 지린성,퉁화시,지안시가 모두 참여하여 정부에서 지원하는 260만 위안(약 4억원)으로 여러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 첫 행사가 바로 ‘지안 중국 우수 관광도시 명명식(集安中國優秀旅游城市命名儀式)’이다.지난달 20일 지안시에서 열린 명명식에서는 전국의 유명 관광 도시에서 초청한 인사를 비롯하여 3만 명이 모인 가운데 시정부 앞에서 국가 관광국이 지안시를 중국우수관광도시로 선포했다고 한다. 7월9일 관광이 시작된 뒤 20일 만에 한국에서 학생,교사 등 5000명이 다녀갔으며,올해는 적어도 1만명이 넘을 것이라는 관광회사 사장의 즐거운 비명을 들으며 마음이 착잡했다.중국 관광객들도 예전에는 주변 도시에서만 왔는데 지금은 남방에서도 많이 온다고 한다. “지금 일본 관광객이 1000명이나 신청을 해왔는데,일본사람들이 왜 고구려 유적을 보러 오는 겁니까?” ‘준비된 역사왜곡’으로 돈을 벌면서 철저하게 교육장으로 활용하는 현장에서 필자는 잠시 대답을 잃었다.이제 우리 모두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
  • [열린세상] 상상력과 지혜/이정옥 대구 가톨릭대 사회학 교수

    시가를 물고 줄기차게 영국의 중무장을 외치는 윈스턴 처칠의 영화 속에서 우리를 본다.다른 정치인들이 입만 열면 평화를 이야기하던 상황에서 독일의 공격에 대비한 영국군의 무장을 주장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고집으로 야유의 대상이 되었다.독일이 선전포고를 하고 나서야 영국 정가는 처칠을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다. 호치민 역시 역사의 중요 고비에서 과감하게 인기없는 방향을 선택하였다.예를 들면 제2차 대전 말기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했을 때 프랑스와 협력해서 일본에 대항하기로 결정을 했다.당시 일본군은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우며 프랑스 식민지로부터의 해방군임을 자처하던 상황이었다.프랑스 식민지로부터의 독립이 목표였던 대다수의 독립투사뿐 아니라 일반 국민정서도 일본과 협력하여 프랑스와 싸우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유독 호치민만은 프랑스와의 협력노선을 선택하였다.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 줄기차게 그리고 간절하게 국민들을 설득하였다.인기없는 정책을 선택하고 나서도 국민의 마음을 흐트러지지 않게 묶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나라 사랑에 대한 지도자의 진정과 국민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위기를 공감하고 문제 해결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을 때에만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지혜를 구하고 손을 내밀 수 있게 된다.과감한 역사적 상상력 속에서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보이지 않는 미래를 열고자 하는 노력이 여기저기서 느껴진다.지금은 1000년 단위의 지각 변동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해리 포터’,‘반지의 제왕’ 같은 팬터지 소설들이 전 세계의 베스트 셀러가 되는 이유도 과감한 상상력을 구하는 신세대의 목마름 때문이다. 2004년의 문턱을 넘어서면서 이제는 팬터지 소설의 자리에 각 나라의 뛰어난 정치 지도자의 전기가 앞다투어 등장하고 있다. 인도 뭄바이의 서점가에는 간디와 네루의 전기가 가득했고 미국에서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이 서점가의 중심에 있었다.중국도 ‘영웅’이라는 영화를 통해 진시황 시대의 천하 통일을 현재로 끌어들이고 있고 강희제,옹정제,한무제가 소설과 영화로 오늘의 중국인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제는 정치지도자를 넘어,새로운 사상에 대한 현실 또는 상상의 리포트가 나오고 있다.일본에서는 사무라이 관련 책이 영화로,문고본으로 나오고 있고 미국에서는 예수 생존기부터 현재까지를 다루는 ‘다빈치 코드’가 기독교 문명과 르네상스 문명의 화해를 암시하면서 등장하고 있다. 우리도 독도 문제,고구려사 왜곡으로 이제는 천년 단위의 역사여행을 강요받게 되었다.멀리 갈 것도 없이 2004년에 1904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친러,친일,친청파의 당파적 주장 속에 몰두했던 정치 지도자 중에 영·일동맹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의 의미를 읽어내고 1905년과 1910년의 비극을 막기 위해 인기없는 외로운 입장을 취한 사람이 있었는지를 따져보자. 일본 국민문고인 이와나미 문고 제1권은 일본 외무성 관리였던 무쓰가 쓴 청·일전쟁 당시의 외교비사를 기록한 ‘건건록’이다.‘동양’과 힘을 합쳐 서세동점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청 왕조가 유능한 외교관인 리훙장을 대책 없이 전격 교체하는 것을 보고 같이 협력할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개인이나 사회의 운명을 바꾸는 카이로스적 시간에는 특히 외교문제나 국내의 갈등이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지금부터 100년 후 아니 5년,10년 후 지금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모두가 상상력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이정옥 대구 가톨릭대 사회학 교수
  • [메트로 라운지] 뜨는기업-(주)남이섬

    [메트로 라운지] 뜨는기업-(주)남이섬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방하리 198번지 남이섬.행정구역상으론 엄연히 강원도 땅이지만 뱃길이 경기도 가평에서 이어지기 때문에 경기도 땅으로 잘못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불과 몇 해 전까지만해도 먹고 마시고 노는 그저그런 유원지에 불과했던 남이섬이 한해 관광객 100만명이 드나드는 격조있는 관광명소로 탈바꿈했다. 가공하지 않은 경치에 운치를 더하고 소음을 리듬으로 바꾼 (주)남이섬의 기발한 경영전략이 관광객들을 끌어 들였기 때문이다.여기에 드라마 ‘겨울연가’ 촬영지라는 프리미엄까지 얹혀 일본·중국인들이 몰려드는 상승효과까지 내고 있다. ●3류 유원지에서 격조높은 관광명소로 하루 평균 3000명선을 웃도는 입장객이 들고 있어 연말까지 110만명 이상이 남이섬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이중 외국인 관광객은 20%선. 관광객 숫자는 4년전 27만명에서 이듬해 67만명,지난해 85만명으로 매년 급격한 상승곡선을 긋고 있다.매출액도 2001년 20억원,2002년 40억원,2003년 60억원을 벌어들인 데 이어 올해엔 80억원 이상이 예상된다. 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땅콩밭과 모래밭이던 북한강 상류의 조그만 섬이 황금알을 낳는 관광지로 떠오른 것이다.섬 전체 둘레 6㎞,면적 14만평인 섬이 외국인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한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자리매김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남이섬을 바꾼 튀는 아이디어 몇가지 이런 남이섬의 대박은 지난 2001년 그래픽디자이너 겸 동화작가인 강우현(康禹鉉·50)사장을 영입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강 사장의 톡톡튀는 아이디어 하나하나가 관광객들을 끌어 들였다.곳곳에서 술판이 벌어지고 확성기 소음이 귀를 울리던 ‘3류 유원지’에 식상한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남이섬을 ‘자연과 문화가 살아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우선 사진작가·화가·조각가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초청,무료 숙박시키며 머물던 자리마다 흔적을 남기게 해 돈으로 살 수 없는 관광자원으로 만들었다.강 사장 자신도 버려졌던 집을 수리,공방으로 꾸며 놓고 작품활동을 했다. 버려진 나무토막,벽돌 하나하나가 모두 작품으로 되살아나 관광객들을 맞게된 것이다.쓸모없던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예술가들의 손끝에서 손님맞이용 작품으로 변해 거리와 집안 곳곳을 장식했다. 길을 내고 화단을 만들어도 일부 시설만 해놓고 느긋하게 기다린다.관광객들이 이런저런 모습으로 이용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천천히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들어간다는 전략이다.몇개월 몇년이 걸리더라도 기다리면서…. ●전깃불이 사라지는 까막나라 관광객들이 직접 작품을 만들도록 배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버려진 벽돌과 돌을 군데군데 쌓아 놓고 동글동글한 자갈을 한 트럭 쏟아 놓으면 관광객들이 어느새 돌탑으로 쌓아 올린다.이런 것도 볼거리가 되고 촬영지가 되고 재밋거리가 된다. 술집과 당구장으로 이용하다 버려진 쓸모 없던 건물도 테마가 있는 전시장 등으로 되살아났다.타조와 토끼,사슴을 숲길 이곳저곳에 방목,사진 촬영지로 이용한 것도 독특하다. 도깨비집과 야구연습장을 없애고 유니세프와 YWCA,YMCA 등에 전시장 등 수익사업을 할 수 있도록 무료 대여해주면서 사회·시민단체들과의 관계도 자연스레 이어 나갔다.수익의 10%는 이들 단체에 기금으로 지원했다.NGO의 프로그램은 비수기 남이섬의 프로그램을 다양화하는 자양분이 됐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살려낸 것도 상품이다.일부 숙박시설에는 텔레비전을 없앴고 보름달이 떠오르는 날을 전후한 며칠은 전깃불이 없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전깃불이 사라진 까막나라 남이섬에서 숲속의 바람과 별빛과 달빛이 쏟아지도록 반짝인다.토담이 둘러진 초가집 방안에서 자연과 하나됨을 만끽할 수 있었다. 화장실에도 예술가들이 직접 구워낸 각양각색의 타일을 붙여 놓고 창문도 성기게 바느질한 문양의 천으로 대신했다.도시인들과 외국인들은 이를 신선해하고 반겼다.‘문명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테마가 상품으로 각광을 받은 셈이다. 남이섬측은 이같은 역발상의 테마상품을 더 늘린다는 장기 전략도 마련중이다. ●일본도시,“남이섬을 벤치마킹하라” 그러는 사이 흥청망청하던 놀이문화가 사라지고 가족과 연인이 찾아 숲길을 거닐며 문화를 체험하고 즐기는 관광지로 변했다. 일본에서는 남이섬을 벤치마킹하겠다는 도시도 생겨났다.오는 11월 일본 가가미가하라(各務原)시와 자매결연을 맺는다.남이섬의 경영기법을 배우고 겨울연가 축제를 열겠다는 취지다. 남이섬에서 판매되는 먹을거리 등의 가격도 서울시내 한복판 슈퍼마켓 가격과 같다.자장면과 콩국수가 3000원씩이고 식혜 등 차값도 1500원 수준이다.오히려 남이섬 배터 등 외곽지역 물가가 더 비싸다. ●경험많은 중·노년층 적극 채용 남이섬의 인력관리도 독특하다.100여명의 직원들은 가급적 토론을 하지 않는다.대신 톡톡튀는 아이디어를 요구하고 가감없이 받아들인다. 토론을 통해 얻은 의견은 평균치에 머물지만 직원들 개개인의 아이디어를 여과없이 반영하는 것이 효과가 더 크다는 발상에서다.돈이 될 것 같지 않은 아이디어,일상의 틀에서 벗어난 어처구니없는 아이디어도 모두 받아들여져 실행된다. 강 사장은 늘 노타이 작업복 차림으로 작품을 만들어 내걸고 부사장이 직접 소시지를 구워 파는 등 전직원이 현장에서 일을 하고 물건도 판다. 신입사원을 뽑을 때는 학력,나이,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정직과 부지런함만 본다.경험을 중요시하다 보니 60∼70살 먹은 노장 직원이 30명에 이른다.계약직과 일용직 사원들도 정식직원으로 전환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해놓았다. 강 사장은 “경영이 아닌 감동을 전파하면서 남이섬을 차분하게 디자인하는 중”이라면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자연과 벗하면서 즐길 수 있는 휴양지가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글 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15) 바다에 열린 ‘고속도로’ 격렬비열도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15) 바다에 열린 ‘고속도로’ 격렬비열도

    격렬비열도에 가면 왠지 ‘격렬’해질 것만 같다.신진도 외항에서 ‘충남202호’에 몸을 싣고 격렬비열도를 향해 2시간쯤 난바다로 나서자 조용하던 바다가 ‘격렬’하게 용틀임한다.멀고 험난한 바닷길이다.다도해에는 못 미치지만,태안반도 서쪽으로도 자그마한 섬들이 열병식을 치르는 병사들처럼 줄지어 자리를 잡고 있다.안흥항에서 신진대교를 건너면 연육교로 이제는 뭍이 된 신진도에 다다른다.신진도와 마도도 연륙되었다.신진도 외항에서 출발하면 가의도 정족도 옹도 궁시도 하사도 난도 우배도 석도를 거쳐 동격렬비열도와 서격렬비열도로 나뉘어 선 군도(群島)에 닿는다.여기서 좀더 서진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중국이다. 정기 연락선이 없어 일반인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섬들.‘바다가 육지라면’이라고 한 유행가가 읊조려지는 그런 섬들이다.가의도를 제외하면 살림집도 없다.옹도에 등대지기 몇 사람이 살고 있을 뿐이다.궁시도도 원래는 민가와 초등학교 분교까지 설치된 제법 번다한 섬이었으나 권위주의 시절,대간첩작전에 필요하다며 주민들을 다른 섬으로 소개시켜 빈 섬이 되었다.조선시대 왜구침략 때문에 빚어진 공도(空島)정책을 20세기에 들어와 다시 대하는 감회가 새삼 씁쓸하다. ●권위주의 시절 空島정책으로 주민 소개 온통 바위로 이뤄진 이들 ‘불모의 섬들’이지만 국제 해양교류사적으로는 대단히 중요하다.육로가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바다는 ‘국제 하이웨이’였으며,섬들은 휴게소나 나들목 구실을 했다.예나 지금이나 바닷길이 문명교류의 고속도로였던 셈.태안 마애삼존불이나 서산 마애삼존불이 근역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중국으로부터 바닷길을 통한 불교문화의 전래를 생각하지 않고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지도를 펼쳐 놓고 중국 산둥반도와 이곳 태안반도를 직선으로 연결하면 그보다 짧은 해양 항로는 없다.국제 통신망인 해저광케이블도 안흥 위의 천리포쯤에서 시작하여 격려비열도 북단을 거쳐 산둥반도 밑으로 간다.남양만의 당항성도 중요했지만 안흥성에도 국제교류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중국에서 뱃길을 열어 한참을 달려오자면 드디어 갈매기떼가 날기 시작한다.새가 날기 시작하면 어딘가 섬이 가까워졌다는 뜻.먼 수평선 위에 소금 몇 알을 뿌려놓은 듯 격렬비열도가 점점이 모습을 드러낸다.험한 뱃길에 지친 사람들에게 불현듯 나타나는 이 섬이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다.격렬비열도에서 직진하면 안흥항에 닿으며,그 사이에 흩어진 섬들이 ‘뭍으로 가는 길’의 길라잡이들이다.이걸 알고도 누가 무인도를 ‘쓸모없는 섬’이라고 폄하할 수 있으랴. 옹도에 배를 들이밀었다.선착장 공사가 한창인데,아직까지는 모선에서 보트를 내려야만 상륙할 수 있다.거센 파도가 일렁거려 보트쯤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함빡 물벼락을 뒤집어 쓰고서야 땅을 디딜 수 있었다.걱정이 태산 같아 말도 안 나오는데 경력이 20년이라는 항해사는 ‘이건 파도도 아니다.’라며 태연자약하다.집채만한 파도들이 줄지어 달려들며 보트를 삼킬 듯 물어뜯는다.필자 같은 문약한 책상물림은 가히 혼비백산이다.옷가지는 물론 카메라백과 기록노트가 온통 바닷물에 젖어 엉망이다.그러면서도 이런 곳에 사람이 산다는 사실이 반갑고 경이로웠다. 들여다보면 등대지기의 삶은 ‘낭만’과 한참 떨어져 있다.많은 문인들이 등대를 소재로 낭만의 꽃을 피우고 있지만 정작 등대는 거센 파도와 싸우는 처절한 싸움의 현장이기도 하다.옹도등대,정확한 명칭은 대산지방해양수산청 옹도항로표지관리소.1907년에 설치됐으니,근대 문화유산으로도 손색없을 이 등대가 100년이 가깝게 거친 바닷길에 불을 밝혀온 셈이다. 이곳 박선우 소장과 두 명의 직원은 보름 간격으로 섬과 육지를 오가며 교대로 근무한다.어찌 생각하면 ‘팔자 좋게’ 여겨지겠지만 사실은 그만한 고역이 없다.노도와 풍랑으로 기약없이 섬에 갇히기 예사다.생지옥이란 이를 두고 말함이렷다.그러한즉 등대의 낭만 운운은 그야말로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옹도등대지기는 세 가지 신호를 보낸다.통상적으로 불을 밝히는 광파표지,안개가 낄 때의 음파경고인 무(霧)신호,그리고 레이더를 발사하는 전파표시가 그것.바다가 해무에 젖어들면 10m 거리도 보이지 않는다.근대 이전의 국제 선박들이 어떻게 암초 많은 이곳을 통과했을지 되짚어 보는 것도 참 재미있는 연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사실,‘불이나 밝힐 뿐’이라는 식의 등대에 관한 생각은 그야말로 착각이다.인공위성의 전파정보를 받아 하늘과 바다를 하나로 잇는 이른바 DGPS 시스템을 활용하는 전천후 첨단 시스템을 활용한다.옹도등대는 대전 위성항법중앙사무소와 연계하며,여기에다 서산기상대의 위탁기상까지 떠맡고 있으니,뉴스에서 듣는 ‘서해안에는 풍랑이 몇 미터고,안개는 어떻고‘하는 정보도 알고 보면 옹도등대지기 같은 바다지킴이들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등대의 임무를 강조했지만,그래도 등대의 멋스러움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흰 배롱나무의 꽃무리가 은은한 향기를 뿜는 바다 저편으로 외항선 한 척이 지나간다.인천항이나 대산항,평택항으로 가는 배이리라.또 있다.그 등대에 다다르는 오르막 가파른 길을 빼곡하게 뒤덮은 동백나무 군락은 이곳이 남방계 식물의 영향권임을 말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육지에서는 얼어 죽고 마는 동백나무가 경기도의 울도에서 군락을 이룬 것을 본 적이 있다.북녘 자료를 보니,평안도 철산앞바다 대화도에도 군락이 무성하단다.구로시오 난류의 영향으로 해양성 기후가 형성돼 한반도의 바다는 육지와 전혀 다른 식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정족도에는 가마우지떼가 모여 산다.자그마한 난도는 온통 괭이갈매기 천지다.섬 곳곳이 하얀 갈매기똥으로 덮여 있다.난도 정상에도 동백나무 군락이 우거져서 겨울부터 봄까지 붉은 동백꽃의 자태로 섬 생활의 고독함을 물들이고 있다. ●새들이 만든 유채꽃밭 봄바다의 압권 역시나 격렬비열도와 궁시도의 압권은 봄의 유채꽃.제주도의 유채꽃이 푸른 바다와 겹쳐 환상적 풍경을 자아내 뭇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다면,이곳 유채꽃은 은자처럼 숨어 있어 간혹 발걸음을 하는 어부나 낚시꾼들만이 즐길 뿐이다.자연적으로 피었을 리는 만무하고,그렇다고 누가 철없이 절해절벽에 유채씨를 뿌렸을 리도 없으니,모르긴 하되 아마 새들의 작품이리라.배설된 유채꽃 씨앗에서 움튼 새싹이 해마다 번창하며 해중화(海中花)의 향연을 마련하였으리라.건너편 꽃지해수욕장에서 열리는 꽃박람회에 덧붙여 격렬비열도의 유채꽃밭은 그 자체로 가히 봄바다의 압권이다. 그러나 바다는 이런 따위의 아름다움이나 낭만과 무관하게 역시나 외롭고 험난하다.잠시도 빈틈을 허락하지 않는다.인근에서 가장 해류를 거세게 받는 곳이 안면 외해(外海) 안흥량이다.일명 관장목이라고도 부르는데,강화도 손돌목과 더불어 전국에서 가장 물살이 드센 곳으로 손꼽힌다. 예전,격렬비열도를 거쳐서 안흥으로 들어오던 중국 배들이 이곳에서 숱하게 수장됐다.지금도 안흥의 어부들 그물에는 심심찮게 청자 따위가 걸려 올라오곤 한다.거센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난파된 배들의 흔적이리라.이런 탓일까.가의도에 가면 아예 ‘중국에서 가의라는 사람이 귀양와 그 때부터 가의도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 전하기도 한다.실제로 태안군 남면의 가씨들이 얼마 전까지 가의도에 들어와 시향(時享)을 지냈다고 하니,가의도가 가씨의 본향인 셈이다.가의도의 오백년 묵은 은행나무가 중국인들이 베어낸 둥치에서 새롭게 자라난 새끼라는 전설 등은 중국과 안흥의 연계설을 증언하고 있다.안흥이나 가의도 사람들은 일제시대에도 중국 다롄까지 가서 밀무역에 종사했다고 전한다.바다를 길삼아 교류하고 교역한 역사가 상상보다 활발했다는 증거다. ●명나라 사신 왕래때 표지로 삼던 후망봉 신진도 외항으로 들어서자면 왼쪽에 마도 후망봉이 홀로 솟아 있는데,고려시대에 명나라 사신이 왕래할 때 표지로 삼던 곳이다.산 뒤에는 능허대(凌虛臺)가 있어 바다를 관해(觀海)하기에 그만이다.민간인 출입금지구역인 국방과학연구소 내에 안파사(安波寺) 절터가 있으니,풀자면 ‘파도를 잠재우는 절’이라는 뜻이다.예전 뱃사람들은 먼 항해에 앞서 이곳에서 공양을 올린 뒤 뱃길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들리는 얘기로는 이성계가 안흥성을 자주 드나드는 명나라 사신들에게 ‘잘 보이려고’ 성을 쌓았다는 설도 있다.설마 ‘잘 보이려고’ 성을 쌓았으랴만 높이 3∼4m,길이 1㎞가 넘는 석성을 쌓느라 10여년씩 부역에 시달렸을 민중의 고초가 손에 잡힌다.동서남북으로 돌문을 달고,그 안에 300채쯤 되는 ‘호화주택’을 지었던 안흥성은 명나라에 널리 알려져 ‘조선에 가거든 안흥성을 보고 오라.’는 말까지 생겼다.한때 영화로웠던 안흥성의 국제적 명성을 가늠해 봄직하다. 20여년 전,나룻배를 타고 신진도로 건너갔던 기억이 새롭다.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바다,마도는 물안개에 젖어 잠들어 있었다.그런 섬에 다리가 놓이고 1종 항구가 조성돼 지금은 횟집이 즐비하다.태안반도 해양관광 1번지로 손색이 없다. 차를 몰아 안흥성에 올랐다.수백 채의 집들은 동학혁명 때 모두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성벽만 남아 있다.안흥성문 코앞까지 배가 들어와 곧바로 사신과 무역상들이 성내로 들어왔다고 하는데,지금은 물길과 멀어져 있다.새우 양식장으로 쓰던 앞바다는 조만간 골프장으로 바뀐단다.국제교류가 활발하던 바다에 골프공이 난비하는 풍경을 생각하니 왠지 낯설고 거북하다. 여승들이 주석하는 안흥성 태국사에서 바라보는 안흥량 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격렬비열도의 그 모진 파도가 어디 갔을까 싶게 숨죽인 바다가 졸고 있다.빗방울 긋는 소리,물안개에 에워싸인 섬이 열 가지,백 가지로 변신하는 바다의 얼굴을 웅변해 준다.바다는 한 얼굴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곳이다.어찌 인간의 힘으로 바다가 가진 천의 얼굴을 이해할 수 있으랴. 관해의 으뜸 절창이 연출되는 안흥성에 오르니 그 옛날 국제 선단이 바닷길을 내달려 안흥성에 닻을 내리는 환상에 빠져들고 만다.무심결에 지나치는 무인도들조차도 이같이 역사문화적 뿌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니,섬이야말로 예전부터 국제 고속도로의 네트워크 아니겠는가.
  • 中·日 올림픽 열풍-中 역대 金100개 넘어 “美도 제친다” 들썩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중국 대륙이 열광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다.중국 올림픽 대표팀의 승전보가 연일 전해지자 2008년 베이징(北京) 올림픽을 앞둔 13억 중국인들은 자부심과 기쁨에 들떠있다. 아테네 올림픽 초반부터 메달 레이스에서 미국을 바짝 추격하는데다 21일 현재 중국이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 100개를 돌파하자 “미국을 잡을 수 있다.”며 밤잠을 설치며 TV중계에 매달리는 분위기이다. 전국의 관영 언론 매체들은 연일 중국의 금메달리스트들의 우승 장면을 반복 보도,‘역경을 딛고 일어선 인간승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위대한 조국’,‘중화부흥(中華復興)’ 등을 강조하면서 중화의 우수성과 55개 소수민족의 단결로 연결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일부 언론들은 아테네 올림픽에서의 선전을 덩샤오핑(鄧小平) 탄생 100주년과 연결시키며 “개혁·개방의 성과가 체육 분야에서도 발휘되고 있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올림픽 열기로 개혁·개방으로 인한 경제 급성장 이면에 있는 부정·부패,빈부격차,지역격차,실업자 증가 등의 그늘이 잠시 가려지고 있는 상황이다. 금메달 100개를 돌파한 주인공은 여자 역도 75㎏이상급의 탕궁훙(唐功紅).1984년 로스앤젤로스 올림픽에서 15개의 금메달을 시발로 시드니 올림픽까지 역대 하계올림픽에서 80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중국은 동계 올림픽 금메달 2개에 이번 아테네에서 18번째 금을 추가,100개 돌파의 금자탑을 세웠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미국,러시아에 이어 스포츠 3대 강국으로 발돋움한 중국은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포상금을 상향 조정하는 등 경기력 향상을 독려해왔다. oilman@seoul.co.kr
  • [씨줄날줄] 덩샤오핑 탄생 100년/이기동 논설위원

    중국인들은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중 누가 더 위대한가라는 우문에 절대 한 사람을 꼬집어 답하지 않는다.마오가 신중국을 건국했다면 덩은 중국인민들이 잘 사는 길을 열어 준 분이라는 모범 답을 내놓을 뿐이다.하지만 베이징의 지식인,심지어 거리에서 만나는 일반인들과도 잠깐만 이야기해 보면 덩에 대한 존경의 마음 저편에 마오시대의 악몽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22일로 덩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중국 전역이 추모 분위기에 휩싸였다는 소식이다.곳곳에 추모전시회가 열리고 쓰촨(四川)성 생가에는 중국 지도부와 일반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빈곤은 사회주의가 아니다.”“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책속의 사상에서 해방되라.”등등….어록만 봐도 개혁에 대한 그의 집념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만년의 마오는 중국인들의 의식속에 계급의 적이 만든 음모가 숨어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1966년 8월,그의 명령에 따라 시작된 문화혁명은 중국인들의 의식에 자리한 모든 기존관념에 대한 파괴작업이었다.역사와 상식을 뒤집는 것이었다.평등주의 슬로건 아래 모든 것이 파괴되고 재교육됐다.그 북새통에 덩도 고깔모자를 쓴 채 베이징시내를 끌려다녔고,그의 장남은 대학옥상에서 떨어져 반신불수가 됐다. 덩은 합리적인 인물이지만 자기가 당한 일들을 평생 잊지 않았다.1976년 마오가 죽고,장청(江靑)의 사인방 일파를 몰아낸 뒤에야 덩은 자신의 꿈을 펼치기 시작했다.부유한 중국건설의 꿈이었다.주자파(走資派)타도를 외친 홍위병들의 가르침 대신 덩은 ‘못 사는 게 사회주의가 아님’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그것은 마오와 홍위병들이 중국사회,중국인들의 의식에 단단히 박아놓은 평등주의의 못을 뽑아내는 힘든 작업이었다. 중국인들은 지난 이야기를 하면서 부끄러워하고,어떤 이들은 지금도 분노에 떤다.덩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그들의 마음에는 이렇게 과거의 악몽과 그 미몽에서 자신들을 구해준 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함께 담겨 있다.우리는 이웃나라 지도자를 통해 통찰력을 가진 지도자 한명이 이루어낸 힘을 본다.중국이 겪은 시행착오와,추모의 발길에 담긴 역사의 교훈을 다시 생각한다. 이기동 논설위원 yeekd@seoul.co.kr
  • 儒林(163)-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儒林(163)-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갈홍의 노자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또 어떤 이는 그의 어머니는 남편이 없었기 때문에 노자는 어머니 집안의 성을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또 어떤 이는 노자의 어머니가 마침 오얏나무 밑을 지나다가 노자를 낳았는데,나면서부터 말을 할 줄 알았고,그 오얏나무를 가리키며 이 나무로 나의 성을 삼겠노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또한 노자는 상삼황(上三皇) 시대에는 현중법사(玄中法師)였고,하삼황(下三皇) 시대에는 금궐제군(金闕帝君)이었고,….” 갈홍은 또한 노자의 생김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노자는 신장이 9척이었고,누런 얼굴에 새까만 입,높은 코와 긴 눈썹을 갖고 있었다.눈썹길이는 다섯 치였고,귀의 길이는 일곱 치였다.이마에는 세 가지의 무늬가 있었는데,위아래로 연결되어 있었으며,발에는 팔괘(八卦)가 새겨져 있었고,신귀(神龜)를 걸상으로 삼았다.금과 옥으로 된 집에 백은으로 섬돌을 만들고 살았으며,오색의 구름으로 옷을 삼고,중첩(重疊)의 관을 쓰고,봉연(鋒 )의 칼을 찼었다.황동(黃童) 120명을 거느리고,왼편에는 열두 마리의 청룡,오른쪽에는 스물여섯 마리의 백호,앞에는 스물네 마리의 주작,뒤에는 일흔두 마리의 현무를 거느리고 있었으며,앞에서는 열두 궁기(窮奇)가 길을 인도하였고,뒤에는 서른여섯 피사가 시종하였다.위에서는 우레와 번개가 번쩍번쩍하였다.” 노자의 탄생과 모습을 사마천의 사기와 달리 이처럼 신비롭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전국시대 때부터 유행된 신선사상(神仙思想)과 무관하지 않다.진(秦),한(漢)대에는 스스로 불로장생술을 익혔다고 내세우는 방사(方士)들이 수없이 나오는데,이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사상적 근거를 노자에 두었으므로 후세로 갈수록 노자의 생애에는 신비로운 여러 가지 전설들이 가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이러한 경향은 후한의 장릉(張陵)이란 사람에 의해서 도교가 창시되고,노자를 도교의 종주로,‘도덕경’을 그들의 기본경전으로 삼아 신도들에게 이를 외우도록 한 이래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노자를 만난 공자는 제자들이 노자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사기는 대답하고 있다. “다만 이렇다.내가 만나 뵌 노자는 마치 용과 같은 분이셨다.” 용(龍). 머리에 뿔이 있고,몸통은 뱀과 같으며,비늘이 있고,날카로운 발톱이 있는 네다리를 가진 동물로 춘분에는 하늘로 올라가고 추분에는 연못에 잠긴다고 여겨지는 중국인들이 상상해서 만든 영수(靈獸).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흔히 천자와 제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신령한 상징으로 현존되어 왔었던 전설상의 동물.공자는 노자를 용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함으로써 노자를 ‘용이 되어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면 나로서도 그의 행적을 알 길이 없다.’고 고백한다. 노자의 사상을 계승한 장자는 공자의 말을 들은 제자 자공(子貢)이 노자를 찾아뵙고,가르침을 청했다고 하는데,이 역시 진위를 알 수 없는 허구인지도 모른다. 사마천도 사기에서 노자의 존재 자체를 진위조차 알 수 없는 신비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다. “노자는 오직 숨어 살았던 군자이기 때문에 그 진위는 추측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한술 더 떠서 냉정한 사가였던 사마천도 노자에 대해서만큼은 이렇게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노자는 160세,혹은 200세를 살았다는 설이 있다.노자는 무위의 도를 몸에 지녔기 때문에 장수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 儒林(161)-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儒林(161)-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장차 나도 벼슬을 하겠습니다.’라고 양호의 예공을 슬쩍 피해버린 공자는 그 순간 아마도 노자를 만나기 위해서 주나라로 여행을 떠날 것을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극도로 혼란한 노나라에 머물러 있다가는 자칫하면 정치에 말려들어 근묵자흑(近墨者黑),즉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는 말처럼 나쁜 권력에 자신도 모르게 물들거나 이용당할 것을 염려하여 ‘벼슬을 하긴 하겠지만 미래에 그러하겠습니다.’라는 애매한 답변으로 얼버무린 뒤 그는 결심을 굳혔을 것이다. 실제로 양호 뿐 아니라 그의 정적인 계환자도 천종의 곡식을 공자에게 선물로 보내왔다고 ‘공자가어’가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무렵 노나라에서는 공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노자를 만나기 위해서 떠난 공자의 여행은 다목적 여행인 셈이었다. 오늘날 산둥성 가상현(嘉祥縣)에는 화상석(畵像石)으로 유명한 무씨(武氏)사당이 있다.화상석은 분묘나 사당의 평평한 내벽이나 석주,석관의 표면에 새겨진 장식 화상으로 표현방식은 음각에 의한 선묘(線描)를 기본으로 부조적(浮彫的)인 것도 있는데,그려진 것은 인물,신화,풍속 등 다채로우며 미술적으로 뛰어날 뿐 아니라 당시의 문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재료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것이다. 이 화상석들은 대부분 돌로 만든 분묘나 석조물들이 급격하게 발달한 후한시대(後漢時代)에 새겨진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 전의 작품들인 것이다. 청나라 건융(乾隆)연간에 프랑스 고고학자에 의해서 발굴된 무량석실은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화상석들을 끌어 모아 수천 점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특히 후석실의 3석에 4층으로 된 그림은 단군신화의 내용과 유사점을 갖고 있다하여서 우리나라 학자들 간에도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유적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이 사당에는 전국시대 때의 고사들이 간단한 명문과 함께 생생하게 새겨져 있는데,노자와 공자가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을 새긴 화상석이 수십 점이나 전시되고 있다.그 만큼 2000년 전에 벌써 노자와 공자와의 만남을 역사적으로 가장 신비한 사건으로 보고 있는 중국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 화상석에는 노자를 만나고 있는 공자가 한결같이 품속에서 새를 꺼내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이 새는 비둘기(鳩)로 공자가 노자를 예방할 때 비둘기를 선물로 준비하였던 것은 그 무렵 현명한 노인이나 스승을 만날 때면 으레 비둘기를 예물로 바치는 습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부터 구장(鳩杖)이라 하면 비둘기형상을 머리에 새긴 노인의 지팡이로,나라에서 공로 있는 늙은 신하에게 하사하던 상서로운 물건이었으며,또한 머리에 비둘기형상을 새긴 노인들이 쓰는 젓가락을 가리키는 것으로 비둘기는 모이를 먹을 때 목이 메지 않는데서 노인도 목이 메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비둘기는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노인에게 바치는 최고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노나라를 떠날 때부터 한 쌍의 비둘기를 예물로 준비하고 남궁경숙과 더불어 임금이 내린 수레를 타고 노자를 만나기 위해서 수만리의 먼 길을 여행하였던 것은 이렇듯 노자에 대해 최고의 경의를 표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 서울 하늘아래 異國지대 속으로

    서울 하늘아래 異國지대 속으로

    서울에 머물고 있는 외국인이 늘어나면서 ‘외국인 마을’이 곳곳에 들어서고 있다.동부이촌동,방배동 등 10여곳에 이른다.대외 접촉이나 거래가 늘어나는 등 서울의 국제화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내 ‘외국인 거리’에서 이국적 볼거리와 먹을거리 등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서울시민들의 ‘특권’이다.관광 목적이 아닌 취업 등을 이유로 서울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 수는 작년 말 기준으로 모두 10만 2882명이다.서울시민 100명 가운데 1명이 외국인인 셈이며,10년전인 지난 1995년(4만 5072명)과 비교할 때 2배 넘게 증가한 수치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서울의 외국인촌은… 지역별 외국인 수는 주한 외국공관들을 비롯,이태원이라는 ‘국제관광특구’가 있는 용산구가 전체의 8.6%인 8852명으로 가장 많다.또 중소기업들이 몰려 있는 서울 서남권의 영등포구(7625명)와 구로구(6593명),금천구(6131명) 등에도 조선족 동포를 비롯한 외국인 근로자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 국적별로는 중국이 전체의 절반이 넘는 5만 2572명이다.이어 ▲미국 1만 1484명 ▲타이완 8908명 ▲일본 6139명 ▲필리핀 3894명 ▲베트남 2052명 ▲몽골 1936명 ▲캐나다 1723명 ▲프랑스 1076명 등의 순이다. 이처럼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서울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모두 10여곳에 이르는 ‘그들만의 동네’가 있다. ●70년대부터 외인촌 형성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외국인 마을로는 용산구 이촌1동과 한남동,이태원동 등 3곳을 꼽을 수 있다. 우선 이촌1동은 70년대 한강외인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형성되기 시작,지금은 이 일대 아파트단지를 중심으로 일본인 1500여가구 5000여명이 모여 살고 있다.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 5명 중 4명은 이곳 주민인 셈이다. 60년대부터 주한 외국공관들이 속속 들어선 한남동은 400여명의 독일인을 포함,외교관 가족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다. 용산 미8군기지에 근무하는 군인과 군속 등이 많은 이태원동에는 최근 주말이면 이곳 이슬람사원을 찾는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 등의 노동자들이 부쩍 몰리면서 색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또 프랑스어 간판과 표지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서초구 반포4동 프랑스 마을(서래마을)은 지난 1985년 당시 한남동에 있던 프랑스 학교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지금은 상사 주재원과 외교관 가족 등 500여명의 프랑스인들이 둥지를 틀었다.‘맹모삼천지교’가 동양에서만 통용되는 이치는 아닌듯 싶다. ●90년대,‘코리안 드림’을 위한 보금자리 90년대 이후 ‘코리안 드림’을 품고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새롭게 만든 외국인 마을도 눈에 띈다. 구로공단이 디지털산업단지로 ‘업그레이드’되는 과정에서 공단 근로자들의 거주지였던 구로구 가리봉동과 영등포구 대림동 일대의 쪽방 형태의 속칭 ‘벌집촌’은 조선족 등 한국계 중국인들로 채워졌다.이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외국인들은 줄잡아 2만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또 90년대 후반부터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투르크메니스탄 등의 보따리상들이 동대문일대 의류시장을 찾기 시작하면서 중구 광희동 일대는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촌으로 급부상하고 있다.까닭에 이곳 골목골목에서 러시아어인 키릴문자를 접하기는 어렵지 않다. 게다가 최근에는 몽골인들이 늘면서 ‘몽골 타워’라 불리는 몽골 식품과 신문 등을 구할 수 있는 건물도 들어섰다. 이밖에 종로구 동숭동 혜화동로터리 동성고교 주변은 일요일 오후가 되면 필리핀 장터가 열린다.2년전쯤부터 혜화동 성당에서 필리핀인들을 위한 미사가 마련되면서 주말 나들이를 나온 이들이 좌판을 형성했다. 장세훈·이유종기자 shjang@seoul.co.kr ■구로구 가리봉동 ‘옌볜거리’ 서울시민들에게 자장면과 짬뽕이 없는 중국집을 상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그러나 이같은 한국식 중국요리가 없어도 ‘문전성시’를 이루는 중국음식점들이 서울 하늘 아래 존재한다.이른바 ‘옌볜 거리’로 불리는 구로구 가리봉동 가리봉시장 일대가 바로 그곳이다. 90년대 후반부터 조선족 등 중국인 노동자들이 타향살이의 설움을 달래기 위해 모여들면서 200m에 이르는 도로 양쪽은 중국식료품점과 중국노래방,환전소,국제전화방 등으로 가득 찼다.이곳에서 10년째 과일가게를 열고 있는 조한수(51)씨는 “최근 불법체류자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면서 이곳을 찾는 중국동포 수는 절반 이상 줄었다.”면서 “대신 중국 정통요리를 저렴한 가격으로 맛볼 수 있다는 소문이 번지면서 주말에는 내국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에 위치한 10여곳의 중국음식점에는 자장면과 짬뽕이 없다.대신 중국 본토에서나 맛볼 수 있는 류산슬,라조육,자라탕,해삼탕,궁보기정,건두부볶음 등을 내놓는다.음식을 우리 입맛에 맞도록 했으며,가격도 1만∼2만원 수준으로 저렴하다. 이 중 ‘삼팔교자관’(三八餃子館,02-856-3868)은 큼지막한 돼지고기를 납작하게 튀겨낸 ‘꿔보루’(1만 2000원)라 불리는 중국식 탕수육,식사 대용으로도 그만인 물만두(4000원) 등으로 유명하다. 중국 헤이륭장성 출신의 강용근(47) 사장은 “내국인 손님이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청량리·안양·일산 등지에서 오는 단골 손님도 상당수”라고 귀띔했다. 또 중국의 재래시장에 온 것같은 착각이 들 만큼 다양한 종류의 중국제품을 갖춘 가리봉시장은 ‘보는 재미’가 쏠쏠하며,해가 질 무렵 등장하는 노점상에서는 양고기 꼬치구이라는 별미도 접할 수 있다. 옌볜 거리는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3번 출구로 나와 200m 가량 내려오면 닿을 수 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중구 광희1동 러·중앙아시아촌 지하철 2호선 동대문운동장역 12번 출구에서 서쪽으로 20m쯤 지나면 남쪽으로 향한 거리를 좌우로 러시아·중앙아시아촌이 눈에 들어온다.이 일대 가게에는 러시어가 병기돼 있으며 행인들도 대다수 코가 높은 러시아·중앙아시아인들이다.이국적인 향취가 물씬 풍기는 이 거리의 주소는 중구 광희1동. 여기에는 아예 10층짜리 건물 한 동을 몽골인들이 사용하는 ‘몽골타워’도 있다.광희1동 143의2에 위치한 ‘뉴금호타워’에는 술집과 노래방인 1·2층을 뺀 나머지 3∼10층에 몽골 식당을 비롯,몽골식 미장원,화장품점,식료품점,국제전화카드점,무역회사,화물운송업체 등이 들어있다.몽골 신문과 방송테이프는 각각 1000원,5000원에 구입할 수 있다.3층에는 한국에 체류하는 몽골인들끼리 각종 정보를 교환하는 게시판까지 마련돼 있다. 5000원 정도이면 3층 몽골 식당에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몽골인 보이보 이나(23)는 “한국에서 번 돈을 몽골에 송금하기 위해 이 곳을 찾는다.”면서 “주말에 주로 오며 몽골식 생필품을 사거나 친구들을 만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우리 입맛에는 다소 맞지 않으나 러시아·중앙아시아의 현지 음식을 그대로 파는 가게도 있다.‘우즈베키스탄’과 ‘사마리칸트(02-2277-4261)’에서 쯔예플랴토를 비롯,타바카,플로브,슈르파 등 러시아 요리를 즐길 수 있다.음식값은 4000∼5000원 정도로 비싸지 않은 편이다.술은 1500∼2000원선.사마리칸트의 샤리오(34)는 “평일에는 러시아 음식을 즐기려는 한국사람들도 상당수 몰린다.”고 말했다.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서초구 반포4동 ‘프티 프랑스’ ‘프티 프랑스’(작은 프랑스)로 일컬어지는 서울 서초구 반포4동 서래마을은 이름에 걸맞게 와인 등으로 유명하다.이곳에서는 수백종의 와인을 백화점보다 10∼20% 저렴한 가격에 선보이고 있어 구입할 수 없는 와인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와인을 살 수도 맛볼 수도 있는 ‘와인숍&바’로는 ‘뚜르드뱅’(Tour Du Vin,02-533-1846)과 ‘비니위니’(Viniwini,02-592-9035)를 꼽을 수 있다.국내 최대 규모인 뚜르드뱅에서는 500여종의 와인을 소믈리에(Sommelier·와인전문가)의 추천을 받아 구입한 뒤 바에 앉아 직접 시음할 수 있다.비니위니는 300여종의 와인과 함께 100가지가 넘는 크라상과 델리 등을 갖추고 있어 출출함을 달래는 데 그만이다. 전문판매장인 ‘텐투텐’(Ten to Ten,02-3477-0303)은 200여종의 와인과 40여종의 치즈,냉동야채 등을 골고루 진열하고 있다.이혜진(23·여) 매니저는 “몇 천원에서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다양한 와인이 갖춰져 있다.”면서 “와인숍마다 특색이 있어 이곳에서 구하지 못하는 와인은 없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들 와인숍에서는 주문배달도 가능하다. 또 여느 와인바의 경직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아기자기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맘마키키’(Mammakiki,02-537-7912)를 들러보라.이곳을 운영하는 연극인 부부 정원경(37)·신리(46·여)씨는 “가격과 격식에 대한 부담을 없애고,선술집처럼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고 말했다.1만 5000원∼3만원 선의 와인에 와사비 소스를 곁들인 삼겹살(1만 6000원),마늘 소스를 얹은 훈제연어(1만 9000원) 등을 안주로 곁들이면 한 끼 식사로도 손색이 없다. 이밖에 프랑스 제빵사가 직접 만드는 ‘파리크라상’(02-3478-9139)의 빵맛도 일품이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용산구 이촌1동 ‘리틀 도쿄’ ‘리틀 도쿄’로 불리는 이촌1동 일대 아파트 단지는 외관상으로는 일본 냄새가 거의 풍기지 않는다.일본사람들이 5000여명이나 몰려 살지만 왜색(倭色)은 의외로 미미하다.그저 아파트 단지로만 보일 뿐이며 부동산에 내걸린 일어간판이 그나마 이 지역의 특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속살을 들여다 보면 사뭇 다르다.일본사람이 직접 운영하는 음식점이 더러 있어 왜색 먹을거리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상사 주재원으로 한국에 왔다가 16년째 체류중인 미타니 마사키(56)가 운영하는 우동집 ‘미타니(02-797-4060)’에서는 5000∼9500원에 정통 일본우동을 즐길 수 있다.시금치와 미역,대파에 튀김옷이 들어간 이 가게 특유의 미타니 우동을 비롯,유부우동,튀김우동,야마가케우동 등이 메뉴판에 올라있다.덮밥은 8000원∼1만 4000원.미타니는 “모든 일본사람들의 식성에 맞게끔 도쿄식과 오사카식의 중간형태로 우동을 내놓고 있다.”면서 “면과 주요 재료는 모두 수입해서 쓰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식 라면과 돈가스,중화·일품요리를 즐기려면 ‘아지겐(02-790-8177)’을 찾으면 된다.사또 에이지가 운영하는 이 가게는 3년전 이 곳에 자리를 잡았다.도쿄식이며 7000원∼1만 3000원선이면 일본 라면을 즐길 수 있다. 일본에서 직접 조리법을 배운 주방장이 음식을 만드는 ‘보천(02-795-8730)’도 우동전문점으로 인기가 높다.우동은 5000∼7000원선이며 초밥과 각종 덮밥도 있다.주인 용원중(45)씨는 “예전보다는 일본사람들이 크게 줄었다.”면서 “하지만 아직도 30%정도는 일본사람들이 고객”이라고 말했다.또 간장이나 소바소스 등 일본식 생활용품은 ‘모노마트(www.monomart.co.kr)’에 거의 모든 것이 구비돼 있다.종업원 김금옥(25·여)씨는 “고객 가운데 한국인과 일본인의 비율은 6대 4”라고 밝혔다.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종로구 혜화동 ‘필리핀장터’ ‘젊음의 거리’ 대학로와 지척에 위치한 서울 종로구 혜화동로터리는 일요일 오후가 되면 색다른 광경이 연출된다.동성중·고등학교 담장을 따라 100여m 남짓한 거리에는 생소한 물건을 사고파는 낯선 얼굴들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곳은 바로 서울과 수도권 일대에 거주하는 필리핀 노동자들의 일요 장터가 서는 곳이다. 필리핀 국민 절대 다수가 가톨릭을 신봉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들은 2년전쯤부터 혜화동 성당에 모여 일요 미사를 보고 있다.장터는 미사를 마친 필리핀인들이 이야기 꽃을 피우고,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인도 양쪽으로 늘어선 30∼40개의 좌판이 전부지만 없는 게 없다.화장품·샴푸·조미료·향료·소스 등 생활필수품부터 망고·코코넛·롱빈(콩류) 등 과일·야채류를 비롯,필리핀에서 건져올린 생선에 이르기까지 백화점이 부럽지 않다.또 필리핀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는 TV 드라마나 영화의 녹화테이프도 불티나듯 팔리고 있다.여기에 소형 트럭에 각종 조리기구와 음식을 싣고 나와 즉석에서 요리·판매하는 필리핀식 먹거리는 필리핀인 뿐만 아니라,이곳을 지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과 코를 자극하고 있다. 필리핀인 아내 알리스 큐(47)와 함께 이곳에서 노점을 열고 있는 박일선(55)씨는 “한때 장터를 찾는 필리핀인들이 2000∼3000명에 이르기도 했지만,불법체류자 단속이 강화된 이후 지금은 500명 수준으로 대폭 줄었다.”면서 “노점상에 대한 집중단속이 이뤄지고 있어 어려움이 많지만,필리핀인들에게는 유일한 나들이 공간이기에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그는 당뇨에 좋은 것으로 알려진 유자와 비슷한 ‘안빨라야’ 등 야채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자주 찾는다고 덧붙였다. 우리민족 고유의 시골장터와 분위기를 견줄 수는 없지만,이색적인 볼거리와 먹거리를 경험해보고 싶다면 이곳에 한번 들러봄 직하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차이나 리포트 2004] (15) 한류에 비친 중국의 모습

    [차이나 리포트 2004] (15) 한류에 비친 중국의 모습

    ■ ”한국스타 사랑이 곧 나의 행복” |베이징 이효연특파원|“희준이 오빠는 항상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어요.” 남녀 구분할 것 없이 모두 옆머리는 길게 늘어뜨려 볼을 가리고 주변머리는 짧게 잘라 비죽비죽 솟게 연출한 ‘리틀 문희준’들.통이 넓은 청바지와 박스 티셔츠를 입어 완벽하게 힙합 스타일로 코디한 학생 서너명이 그의 노래를 들으며 헤드뱅을 한다. 지난 6월12일 토요일 오전 10시 베이징 현대밀레니엄빌딩 5층 한국관광공사 베이징사무소.60평 남짓한 공간에 한국 가수를 사랑하는 중국 청소년 120여명이 가득 들어찼다.문희준,강타,장나라,베이비복스,신화,JTL,NRG 팬클럽 회원들이 저마다 자신의 스타 사랑을 뽐내고 있었다.한국관광공사 베이징사무소는 2002년부터 비정기적으로 매해 10∼15회 정도 팬클럽 모임 행사를 열어왔다.한국여행을 권장하는 홍보물과 한국가수의 최신 뮤직비디오를 보여주는 것이 행사의 전부이지만,팬클럽 회원들은 한국 스타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이를 공유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한국과 관련된 모든 것을 좋아한다.”는 신화 팬클럽 칭사이톈탕(靑色天堂) 회원 뉴팅팅(牛·17)은 “한국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이 별로 없어 답답하다.”며 한국과 중국의 더 활발한 문화교류가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정보미흡… 교류 왕성했으면” ‘사랑이 뭐길래’,‘별은 내가슴에’와 같은 한국드라마를 보고,HOT·NRG에 열광하며 10대를 보낸 한류(韓流)마니아들은 이제 고교 졸업반이거나 대학에 진학해 있다.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동경으로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은 이제 신체적·정신적으로 성장했고 이들의 팬클럽 문화도 그만큼 성숙했다. 지난 2001년 중국정부가 공식 인정한 한류 팬클럽 1호 도래미클럽 이후 중국의 팬클럽은 꾸준히 증가했다.한국관광공사 베이징사무소에서 관리하고 있는 팬클럽만 총 10개.팬클럽 규모는 천차만별이지만 한 클럽당 보통 온라인 회원 수가 1000∼2000명에 이른다.베이징과 톈진(天津)의 강타팬을 중심으로 지난해 결성된 N-Dream은 한 달에 1∼2번 패스트푸드점에서 정기모임을 열고 모임 때마다 100∼300위안(1만 5000∼4만 5000원)까지 회비를 걷어 강타 홍보활동에 사용한다.이들은 강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한국에서 생활하는 강타의 스케줄을 꼼꼼히 챙겨보며 그와 관련된 모든 문화상품을 적극적으로 소비한다.N-Dream 회장 류페이(柳佩·23)는 “강타의 음반,사진,잡지 등 그와 관련된 것은 우선 사고 본다.”며 “이제 강타의 라이프 스타일을 이해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인의 생활과 문화가 궁금해졌다.”고 말했다. 한류를 계기로 한국에 대한 적극적인 정보를 추구하는 중국 젊은이들을 단지 대중문화의 한 현상으로 파악하거나 중국내 한국문화 소비시장으로만 생각한다면 한류는 한때의 유행으로 머물 수도 있다. ●한·중 우호증진 디딤돌로 한국관광공사 베이징사무소 안용훈 지사장은 한류 팬들이 장기적으로 한국과 중국의 우호관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내년 안으로 중국에서 한류스타전집 발간을 계획하고 있는 안 소장은 “한류관련 사업을 진행하다 보면 한국 스타들의 초상권 문제나 수억원대의 개런티를 요구하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했다. belle@seoul.co.kr ■ ”성형문화 닮을까 우려” 안티한류도 확산 |베이징·상하이 이효연특파원|중국 대륙의 한류(韓流)돌풍에도 역풍은 분다.한국문화를 동경하고 한국인의 라이프 스타일에 흠뻑 젖어 사는 ‘하한쭈’(哈韓族)들은 중국정부의 노골적인 고구려사 왜곡 움직임과는 별개로 거침없이 한국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고 있다.반면 ‘한국’이라면 치를 떠는 ‘안티 하한쭈’들의 한국 대중문화 침투에 대한 반감도 중국사회 저변에서 번지고 있다.2000년쯤 중화권 인터넷에 얼굴만 예쁘고 노래 못하는 한국 댄스가수들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안티 HOT’라는 중국어 노래가 유포된 적은 있지만 아직까지 안티 하한쭈들의 중국내 공식적인 모임이나 활동은 확인된 바 없다.‘특정 대상에 반대하기 위해’ 단체를 만드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중국인들이지만 인터넷 포털사이트 소후(www.sohu.com)나 시나(www.sina.com)에 접속하면 한국에 반감을 가진 젊은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취재팀은 지난 6월11일 금요일 오후 6시∼10시 베이징 얼리좡(二里庄) 부근 PC방에서 베이징시전문대 영어과 2학년 재학생 3명과 함께 QQ에 접속,안티 하한쭈들과 대화를 시도했다.중국 젊은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QQ는 MSN 메신저와 비슷하지만 대화 상대자를 ‘친구’ 목록에 등록하지 않아도 접속 중인 모든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안티 하한쭈라고 자처한 세 명의 중국 젊은이들은 한국과 한국의 대중문화에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 이빙상하이대중자동차 인사부에 근무하는 류즈양(柳志陽·24)은 장사가 되는 모든 소재를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한국대중문화에 진저리를 쳤다.그는 지난 2월 신문에서 이승연의 위안부 누드사건을 접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드라마 ‘첫사랑’을 보고 이승연을 알게 됐다는 류즈양은 “이승연의 단아한 외모와 차분한 연기 실력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위안부 누드 소식을 접하자마자 그녀는 물론 한국이 싫어졌다.”고 말했다.중국에도 일본 종군위안부 피해자가 엄연히 살아 있는데 그들의 상처를 자극해 한몫 챙기겠다는 발상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더 나아가 한국은 일본과 역사분쟁에도 늘 큰소리치며 나서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하나도 내놓지 못하는 ‘나서기쟁이’라고 비난했다. 중국 안방극장을 강타한 한국드라마에 대해서도 비판을 퍼부었다.그는 “중국의 기성세대들은 어지럽게 머리를 흔들어대는 가수 이정현을 보고 풍기문란이라고 손가락질하지만 한국드라마는 좋아한다.”며 “한국여성은 드라마에서 순종적이고 가정적으로 그려져 중국의 기성세대에게 참한 이미지를 주지만 젊은이들의 시각에선 한국 사회는 지나치게 가부장적이고 가정내 여성의 지위가 매우 낮게 표현돼 드라마 보기가 짜증난다.”고 말했다. 지린성(吉林省) 창춘(長春)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는 조선족 샤위(夏雨·20)는 한국의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했다.그는 “한국 연예인들은 첫눈에는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가공된 아름다움에 금방 싫증난다.”며 “이런 성형문화가 중국에도 퍼져 여성의 외모만을 중시하는 풍조가 만연될 것이 걱정된다.”고 말했다.실명을 밝힐 수 없다는 또 다른 조선족 A(21)씨는 한국인의 거만한 태도를 질책했다. 현재 랴오닝성(遼寧省) 다롄경공전문대학에 재학중인 그는 “한국사람들이 이제 좀 잘 살게 됐다고 그들이 중국인보다 우월하다는 착각 속에 빠져 사는 것 같다.”며 “무의식적으로 조선족을 무시하는 한국인이 싫다.”고 말했다.그는 “한류는 유행처럼 지나가는 바람일 뿐 한국인의 문화적 우수성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라며 “한국인은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 경제를 보고 항상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belle@seoul.co.kr ■ 브랜드 가치 인기 편승 ‘짝퉁 한국산’ 기승 |베이징 이효연특파원|‘유흑복장’,‘날씬하미인’,‘홍미동 립그로스’.그동안 한국언론에 한류 열풍지대라고 소개돼온 베이징 시돤(西端)하웨이 빌딩 6층 한국시티와 우다우커우(五道口) 복장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가짜 한국 옷과 화장품 브랜드다. 한국대중문화의 영향과 한국상품의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면서 베이징 번화가 곳곳에는 한국상품을 판매하는 곳이 성황을 이루고 있지만 진짜 한국상품을 찾기는 어렵다. 시돤 하웨이 빌딩 6층 ‘르한(日韓)구역’.일본과 한국의 최신 패션을 모방한 상품을 팔고 있는 곳이다.오로지 한국상품만 취급한다는 T매장에서는 한국 최고급 브랜드라며 ‘유흑복장’의 ‘ATTRACT BATT 청바지’를 190위안(2만 8500원)에 판매하고 있었다. 우다우커우 복장시장도 사정은 마찬가지.한국에서 수입했다는 화장품들이 매장 곳곳에 진열됐지만 모두 가짜다.중국화장품 단품이 7∼20위안(1050∼3000원)선에서 거래되고 있는 반면 한글상표가 붙은 상품은 고가에 판매된다.‘한국직수입 에멀전 세기려인’이라고 표시된 로션은 20위안(3000원),‘아연미백분 BOB시로란 화장품’은 50위안(7500원),색이 곱고 지워지지 않아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에게 사랑받는다는 ‘홍미동 립그로스’는 60위안(9000원)에 거래되고 있었다. belle@seoul.co.kr
  • [문화마당] 묘청이 절실한 까닭/문흥술 서울여대 교수·문학평론가

    단재 신채호는 고려 후기 묘청의 자주파와 김부식의 사대파와의 싸움에서 김부식 파의 승리를 두고 한국 정신사상 최대의 비극이라 했다.단재는 사대파의 승리 이후 중국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다.중국의 역사왜곡과 관련하여,한 세기 전에 도출된 단재의 이 비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 소수 지방 정권의 역사로 왜곡하는 이유는 무엇일까.표면적으로 남북통일 후의 영토분쟁에 대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실상은 새로운 중화주의의 실현이라는 음험한 목표가 그 배후에 깔려 있다.아마도 중국은 중국만이 세계의 중심이고 나머지는 변방의 오랑캐들이라는 패권적인 중화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전략을 수립하고,그 일환으로 고구려사를 왜곡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구려가 중국 지방 정권의 하나라면,그 고구려에 뿌리를 두고 있는 현재의 한국도 중국 지방 정권의 하나라는 논리로 귀착될 수 있다.머지않아 왜곡된 역사를 배운 중국인들은 한국을 변방의 오랑캐 내지 속국으로 평가절하할 것이다. 따라서 역사 왜곡에 대해 전민족적 차원에서 체계적이면서 치밀한 대응이 필요하다.그러나 우리의 위정자들은 중국이 우리의 2대 교역국이라는 경제논리만을 앞세워 역사 왜곡을 단순하면서도 일시적인 문제로 치부하고 있다.그렇다면,일반 국민들의 결집된 힘에 기대어 이 문제를 정면 돌파할 수밖에 없다.그러나 이 역시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단적으로 우리의 문화 상황을 살펴보자.우리 문화의 대부분이 미국과 일본의 문화,그것도 ‘폐수문화’에 철저하게 감염되어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일제강점기에 임화가 한국문화의 식민지성을 제기한 이후,아직까지 한국문화는 서구문화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주변문화의 속성을 조금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들 한류열풍을 들어,한국문화의 우월성을 이야기하곤 한다.그러나 그 속내를 파고들면 사태는 전혀 딴판임을 알 수 있다.서구 자본주의 문화를 동경하는 중국인들이 반일감정으로 인해 일본문화를 배격하고,대신 서구 문화를 완벽하게 모방한 한국문화에 열광하는 것이 한류열풍의 본질이 아닐까.한류열풍은 한국의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문화에 대한 열풍이 아니라,한국문화를 지배하는 서구문화에 대한 열풍일 수도 있다. 중국인들은 한류열풍의 뒤편에서 서구문화를 무조건적으로 모방하는 한국문화를 비판하면서,한국과는 달리 서구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방법을 치밀하게 검토하고 있을 것이다.시간이 지나면 중국은 그 방법을 터득할 것이고,그 후 ‘위대한’ 중국문화를 자신들의 속국이라 생각하는 한국문화에 강요할 것이다.역사왜곡을 여기까지 연결시키면 지나친 억측일까. 묘청 같은 자주파가 절실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진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외부의 오랑캐가 아니라 내부의 적(아들)이라는 것을 중국인은 잘 알고 있다.그러기에 그들은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내부부터 철저하게 단속하는 것이 아닐까.한국을 망하게 하는 것은 외부의 적일 수도 있다.그러나 결정적인 적은 외래문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한류열풍의 허상에 휩싸여 한국문화가 우수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임을 분명히 자각해야 한다.역사왜곡에 대한 강력한 제도적 대응과 함께 우리의 주체적인 문화를 계승,발전하려는 마음 자세를 정립할 때,고구려사도 우리 민족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유산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질 것이며,중국의 의도도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문흥술 서울여대 교수·문학평론가
  • [국제플러스] 고이즈미 “내년에도 신사참배”

    |도쿄 이춘규특파원|한국과 중국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내년에도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를 강행하겠다고 10일 밝혔다. 특히 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중국인들이 야스쿠니 참배를 문제삼으며 노골적인 반일감정을 표출했음에도 불구,참배강행 의지를 밝혀 일본과 주변국간 감정싸움 양상도 보이고 있다.고이즈미 총리는 이날 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중국 관중이 보인 반일감정과 관련,자신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 “내년에도 참배하겠다.”고 말했다.
  • 儒林(155)-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儒林(155)-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제2부 周遊列國 제2장 老子와 孔子 신과 신이 서로 만나기 위해서 벌인 ‘신들의 만남’,인류가 낳은 3대 성인인 예수와 석가모니 그리고 공자는 시간적,공간적인 격차로 서로 만난 적은 없다.또한 인류가 낳은 최고의 철인들인 소크라테스와 마호메트도 서로 만난 적은 없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예외가 있으니 그것은 공자와 노자가 서로 인간의 모습을 지닌 채 기원전 506년에 극적으로 해후를 하는 것이다.인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하고 신비스러운 대사건 중의 하나이다. 이는 마치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로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나오는 명화 중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이 그림에는 천상의 하느님이 인류 최초의 사람인 아담을 창조하면서 서로 손끝이 마주 닿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이는 천상과 지상이 만남으로써 하늘과 땅이 비로소 하나로 결합되고,생명이 최초로 탄생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데,공자와 노자의 만남도 이에 못지않아 마치 낮을 지배하는 해와 밤을 지배하는 달이 서로 만나는 행성들의 대격돌인 것이다. 노자(老子). 공자와 더불어 중국이 낳은 최고의 사상가.공자보다 오히려 광범위하게 중국의 민간신앙을 움직여 사상적 기초를 닦은 수수께끼의 인물.그리하여 오늘날 중국의 정신을 지배하는 도교를 창시한 신비의 용(龍). 일찍이 톨스토이는 번역된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읽고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사상은 공자와 맹자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그러나 노자로부터 받은 영향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지대한 것이었다.” 그뿐인가. 칸트의 철학을 계승한 관념론의 대가인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도가사상을 강의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에게 지금 노자의 중요한 저서(도덕경)가 전해지고 있다.그것은 빈에서 출판된 것으로,나 자신도 그것을 읽은 일이 있다.도덕경에는 특히 자주 인용되는 말로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무명(無名)의 도는 하늘과 땅의 시작이며 유명(有名)의 도는 우주(만물)의 시작이다.’중국인들에게 있어서 만물의 근원이 되는 가장 고귀한 것은 곧 무(無)이며,허(虛)이며,전혀 불확정하고,추상적이며 보편적인 것으로서,그것은 또한 도(道)라고 불려졌었다.” 중국철학,그중에서도 특히 노자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헤겔은 또한 노자의 도가사상을 서양철학을 낳은 그리스의 헬레니즘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스 인들은 절대적인 것이 유일하다고 말하고 그것은 지상(至上)의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데 반하여,노자는 유일한 긍정적인 형식으로서 부정할 수 있는 오직 추상적인 무(無)만을 얘기하여 왔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헤겔의 관념철학은 노자의 무사상에서 사유방법이나 사상체계를 받아들여 완성되었던 것이다.이러한 사유방법은 야스퍼스로 이어져 야스퍼스는 ‘공자와 노자’라는 저서를 통해 주관과 객관의 한계를 초월하고 절대적 원리로서 도를 추구하는 노자의 사상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으며,특히 노자의 사상은 키에르케고르,니체로 이어지는 실존철학의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근세 분석심리학의 거장 융(C.G.Jung)도 현대인의 심리분석방법으로 노자의 무 또는 무의식 사상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리하여 유럽인들은 노자의 이름을 문자 그대로 ‘늙은 자식’으로 표기하여 라틴어로‘라오시우스’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인류 사상 최고의 롱 셀러는 ‘성경’이지만 두 번째의 베스트셀러이자 롱셀러는 바로 라오시우스,즉 노자가 지은 ‘도덕경’인 것이다.
  • [서울광장] 중국이 버려야 할 것들/이기동 논설위원

    [서울광장] 중국이 버려야 할 것들/이기동 논설위원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하지만 중국의 신문,방송은 며칠째 이 문제를 일절 보도하지 않고 있다.항의방문차 주말 베이징으로 건너간 박준우 외교부 아태국장은 중국 외교부의 왕이 부부장을 비롯,8시간 동안 4명의 당국자를 만나는 강행군을 펼쳤다.하지만 중국 언론은 톱뉴스가 될 법한 박 국장의 방중사실을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중국언론,중국민들에게 있어 고구려사 문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우리는 중국에 대해 극도로 상반되는 인식을 갖고 있다.하나는 베이징,상하이,광저우,선전의 발전상으로 대변되는 낙관론자의 견해다.조만간 선진 경제대국으로 자리매김할 중국이다.다른 하나는 각종 모순으로 얼룩진 정반대의 중국이다.이 비관론자들의 눈에 비친 중국은 부정부패,빈부격차,반체제 인사를 탄압하는 강권정치의 나라다.그리고 그 실상은 공산당의 입노릇을 하는 언론 덕분에 일절 보도되지 않는다.공식적으로는 어떤 사회문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전자의 중국을 믿고 싶어했다.평균 9%의 경이적인 GDP 성장률을 계속해온 나라,2020년이면 ‘초보적이나마 부유한 사회건설’을 완성한다는 나라,그리고 이를 위해 이웃나라와 평화를 추구하는 ‘화평굴기(和平掘起)’를 외교목표로 내세우는 나라로 믿어왔다.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 63%가 가장 중시할 외교통상 상대로 중국 63%,미국 26%를 꼽아 논란을 빚은 게 불과 엊그제다.그러나 이 견해를 접어야 할 때가 온 것만 같다. 이제 중국은 당·정부·언론·학계가 조직적으로 뭉쳐 남의 나라 역사왜곡에 나서는 게 가능한 나라,학술적으로 해결하자는 국가간의 약속을 깨고 외교부 홈페이지 한국소개란에서 고구려사를 제외시켜 버린 나라,그리고 이의 시정 요구에 대한 답으로 한국의 정부수립 이전 역사를 통째 삭제해 버린 나라로 다가온다.지난 주말 아시안컵 축구 결승전에서 일본팀에 가한 중국관중들의 폭력적 행동은 역사왜곡의 국가주의적 횡포에다 맹목적 민족주의의 행태까지 가세한 나라의 추한 모습이었다.아무리 일본 축구팀이 자신들의 상처난 자존심을 걷어찼다 해도 이것은 이웃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최소한 시상식 때 박수라도 쳐주는 게 개최국 관중의 도리가 아니냐는 관중석 일본인의 볼멘소리가 귓전에 남는다. 무엇이 중국,중국인들을 이렇게 내모는가.2008년 올림픽을 위해 온나라가 공사중인 나라다.한반도문제에서도 선량한 중재자로서 중국의 역할을 의심하지 않을 정도가 됐다.그러나 지금 중국의 모습에서 우리는 초기 자본주의와 결합된 전체주의,사회주의, 국가주의의 음습한 전통을 본다. 사석에서 중국 외교관들은 오래지 않아 자신들이 반드시 일본을 누르고 미국과 맞서는 일류국가를 이루어낼 것이라고 말한다.중국의 번영이 한국에도 이득이라 믿는 우리는 그 결의에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하지만 이런 행태로 중국은 결코 일류국가가 되지 못한다.조지 캐넌,새뮤얼 헌팅턴으로 이어져온 서구 황화(黃禍)론자들의 논리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같은 전체주의 지도이데올로기로는 아시아의 지도국 자리도 넘보지 못할 것이다. 도로를 파헤치고 건물을 도색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중국인들이 지금 할 일은 차라리 담배꽁초 안 버리기,교통법규 지키기 캠페인이다.그리고 그런 민주적 질서 지키기가 스스로에게도 유익하다는 점을 깨닫는 일이다.국가관계도 하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내치에 필요하다고 이웃나라의 역사를 억지 왜곡하는 정부,이웃나라 축구팀을 공포에 떨게 하는 국민들,그리고 이런 일에 침묵하는 언론과 시민정신을 가지고 세계의 지도국이 되는 길은 없다. 이기동 논설위원 yeekd@seoul.co.kr
  • [오일만특파원 베이징은 지금] 후유증 큰 中·日 축구전쟁

    ‘축구전쟁’으로 비화됐던 중국과 일본의 아시안컵 결승전이 별 ‘불상사’없이 끝났다.전세계 언론이 주시하는 가운에 중국인들의 내재된 반일(反日)감정이 행동으로 표출될 것을 우려했던 중국정부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결과였다. 7일 저녁 결승전이 벌어진 베이징 궁런(工人)체육관에는 ‘하나의 대회,하나의 목표,하나의 아시아(日項賽事,一個目標,一個亞洲)’라는,유독 화합을 강조하는 대형 글귀가 눈에 띄었다.‘질서의식을 지키는 관중이 되고,경기응원만 하자’(做文明觀衆,爲賽加油)라는 표어도 곳곳에 걸려 있었다.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전세계에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달라는 중국정부의 주문인 것이다. 경기장 안팎과 시내 곳곳에 2만여명의 무장경찰들이 배치된 것으로 알려졌다.1500여명의 일본 응원단이 집결한 관중석 앞에는 4마리 군견까지 동원해 ‘기선제압’에 나섰다. 이런 노력 덕인지 ‘판정시비’ 속에 1-3으로 중국이 일본에 패배했음에도 경기 종료후 경기장 앞에서 수십명의 관중들이 일본을 성토하고 외설스러운 욕을 내뱉는 정도로 울분을 표출했을 뿐이다.삼엄한 경비에 기세가 눌린 탓인지 6만여명의 ‘추미(球迷·축구팬)’들도 열광적인 응원전을 펼치지 못한 듯하다. 하지만 이번 아시안컵은 경기 결과를 떠나 다소의 문제점을 노출했다.일본 대표팀의 경기마다 ‘과거를 반성하라’는 현수막이 내걸리고 일장기를 태우는 격한 반일감정이 표출됐고 급기야 양국의 외교마찰로 번졌다.하루아침에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이 사그러지진 않겠지만 올림픽까지 유치한 상황에서 스포츠와 외교·정치를 구분하지 못하는 ‘체육문화’가 다소 걱정스럽다는 지적이다. oilman@seoul.co.kr
  • [오늘의 눈] 다시본 ‘中외교의 이중성’/오일만 베이징 특파원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기도가 양국 수교 12년 동안 어렵사리 쌓아올린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최대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더욱이 최근 중국이 자국 연안에서 500㎞ 해역에 대한 제해권 장악을 추진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역사전쟁이 영유권 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인들에게 ‘고구려’는 목숨처럼 지키는 소중한 우리의 역사다.숱한 외침 속에서도 단일민족을 유지한 힘과 뿌리가 바로 고구려 역사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다.고구려사 왜곡 문제를 놓고 한국인들이 범국민적인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은 결코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는 정체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중국 정부가 더욱 중시해야 할 것은 한국인들의 분노 뒤에는 일종의 ‘배반감과 실망감’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지난 92년 수교 이후 한국인들에게 중국은 급속하게 가까워진 ‘하오 펑유(好朋友·좋은 친구)’로 인식돼 왔다.급속한 경제협력 이외에도 서로 속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문화적 동질성과 북핵문제에 대처하면서 미국의 패권주의에 맞선,유연한 중국의 외교도 후한 점수를 주는 요인이었다. 친중파(親中派)로 자처하던 적지 않은 베이징의 한국인들도 “우리가 중국을 너무 몰랐다.”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허핑줴치’(和平起·평화속에 우뚝 일어선다.)의 선린외교를 표방해온 중국외교의 ‘이중성’을 새삼 주목하게 된 것이다. 6일 박준우 외교통상부 아시아태평양국장은 중국의 당정 책임자들과 6시간반 동안 교섭을 통해 역사왜곡 문제 시정을 요구했다.그러나 중국측은 지방정부의 움직임을 일일이 통제할 수 없다며 책임전가에 급급했다.또 중국 외교부는 홈페이지 원상 회복 요청에 대해서도 명백한 거부의사를 보였다. 이제 공은 중국정부에 넘어갔다.고구려사 왜곡의 목적이 어디에 있든 중국은 중국인들의 표현대로 ‘이샤오스다(以小失大·소탐대실)’의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패권주의라고 비난했던 중국은 국토유린보다도 더한 ‘역사유린’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바란다.아시아의 리더,나아가 국제사회의 지도국을 꿈꾸는 대국으로서 있을 수 없는 태도다.한국민들의 분노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중국정부가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성의 있고 진실하게 대처하는 것만이 양국간 우호를 되찾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일만 베이징 특파원 oilman@seoul.co.kr
  • 中·日 아시안컵 결승전 ‘역사전쟁’ 비화?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중·일 양국의 외교갈등으로 비화된 2004년 아시안컵 축구 결승전을 하루 앞둔 중국 대륙은 비장감마저 감돌고 있다.개최국 중국이 결승에 오른 일본에 대해 해묵은 반일(反日) 감정까지 표출하면서 외신들은 ‘축구전쟁’으로 앞다퉈 보도 중이다. 양국 언론매체 간의 언쟁으로 시작된 마찰이 양국 외교부의 갈등으로 확대되고 7일 결승전 승패 여부에 따라 어떤 사태로 흘러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중국 정부는 경기 당일 양국 축구팬들의 질서유지를 호소하고 있지만 중국 축구팬들의 정서는 이미 한계점을 넘어서 노골적인 반일감정을 드러내는 양상이다.물론 이같은 정서의 기저에는 갈등으로 점철된 양국간 역사와 이로 인한 중국인들의 혐일(嫌日)감정이 깔려 있다.네티즌들은 이번 중·일간 결승전을 110년 전에 발생한 청일전쟁까지 들먹이며 ‘제2의 청일 전쟁’으로 표현하고 있다.일종의 ‘역사전쟁’인 셈이다. 이런 분위기를 놓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스포츠는 우호의 제전이므로 일본과 외국 선수들이 따뜻하게 환영받아야 한다.”고 유감을 표시했고 가와무라 다케오 문부과학상도 스포츠와 정치는 별개라는 점을 강조했다.하지만 관영 신화통신은 문학평론가 리다이샹의 기고문을 통해 일본 언론의 보도태도와 정치인들의 발언을 문제 삼은 뒤 “일본인들은 어째서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르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청년보도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고 일본 정부의 과거사에 대한 애매한 태도가 중국 민중의 감정을 해치고 있다.”고 공격했다.중국 네티즌들은 한술 더 떠 ‘샤오르번(小日本·일본놈)은 꼭 이겨야 한다.’며 극단적 언사도 쏟아내는 형국이다. oilman@seoul.co.kr
  • [AFC 아시안컵 2004] 中·日 감독 7일 결승서 생존게임

    ‘제2의 히딩크’를 꿈꾸는 중국과 일본,두 외국인 감독의 생존경쟁이 뜨겁다. 아리에 한(56·네덜란드) 감독이 이끄는 중국과 ‘하얀 펠레’ 지코(51·브라질) 감독이 이끄는 일본이 7일 중국 베이징에서 아시안컵을 놓고 맞붙는다.결과에 따라 감독의 ‘목숨’에 영향을 끼칠 수 있어 더욱 긴장감이 감돈다.두 감독 모두 2006독일월드컵을 위해 영입됐지만 지금까지 이렇다 할 확신을 심어주지 못했다.따라서 이번 대회가 이들에겐 마지막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 특히 전임자들이 2002한·일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냈기 때문에 부담이 크다.중국은 보라 밀루티노비치(멕시코)를 사령탑으로 본선에 올랐고,일본은 필리프 트루시에(프랑스)를 앞세워 16강에 진출했다. 2002년 12월 부임한 한 감독은 최근 경질이 기정사실화됐을 정도.올해 치른 A매치(국가대표간 경기)에서 13승5무로 무패가도를 달리지만,지난 4월 유럽의 작은나라 안도라와 0-0으로 비긴데 이어 스페인 클럽팀 FC 바르셀로나 1.5군에 0-6으로 대패하며 실망감을 안겨줬다. 지코 감독도 사정은 마찬가지.올해 A매치 성적은 11승4무1패로 괜찮은 편이다.그러나 연 초 약체 오만에 1-0,싱가포르에 2-1로 신승하며 이후 끊임없이 교체설이 나돌았다.그나마 최근 유럽원정에서 체코를 1-0으로 꺾고,잉글랜드와 1-1로 비기는 등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여론은 좀 더 지켜보자는 쪽으로 돌아선 상황.따라서 지코 감독도 아시안컵 우승을 일본 국민들에게 안겨 자신의 입지를 넓히겠다는 생각이다. 전문가들도 결승전 결과를 쉽게 점치지 못한다.전력과 관록으론 두차례나 대회 정상에 오른 일본이 앞선다는 평가.그러나 홈 텃세를 앞세워 사상 첫 우승을 노리는 중국의 응전도 만만찮을 듯하다.특히 20년 만에 결승에 오른 데다 ‘반일감정’까지 겹치면서 중국인들의 관심이 극대화됐다는 점도 일본으로서는 부담이다. 박준석기자 pj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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