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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楊尙昆 前 中 국가주석 사망

    ◎天安門 시위 무력진압 장본인… 92년 실각 【베이징 AFP 연합】 중국 공산혁명의 원로인 양상쿤(楊尙昆) 전 중국 국가주석이 14일 향년 92세로 숨졌다고 신화(新華) 통신이 보도했다. 양 전 주석은 베이징(北京)에서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통신은 전했으나 구체적인 병명은 밝히지 않았다. 중국 건국에 공이 큰 8명의 원로중 한명인 양 전 주석은 지난 88년 국가주석직에 취임한 뒤 다음해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으며 92년 권력투쟁에서 밀려 실각했다. 지난 1907년 쓰촨(四川)성에서 태어난 양 전 주석은 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으며 3년간의 모스크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34∼35년의 대장정에도 참가했다. 양 전 주석은 지난 49년 중국 건국 이후 요직을 거쳤으나 66년 문화대혁명 기간중 반혁명 공상주의자로 몰려 숙청돼 12년간 권력에서 축출됐다가 덩샤오핑(鄧小平)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 78년 복권됐었다.
  • 親日의 군상:1­2/외국의 민족반역자 처벌(정직한 역사 되찾기)

    ◎佛,나치 협력자 15만명에 실형/대만­비밀경찰조직 軍統局서 명단 작성/중국­‘인민의 적’ 규정… 인민재판 통해 처단 2차대전 종전은 4년에 걸친 세계대전의 종막을 고함과 동시에 준엄한 단죄의 서곡이기도 했다.종전후 승전국들은 ‘전범재판’을 통해 패전국의 전쟁지도자들을 처단했으며,일부 피지배국가들은 자국내의 민족반역자들에게 준엄한 단죄를 하였다. 유럽의 ‘뉘른베르크재판’과 일본의 ‘도쿄재판’이 전범재판이라면,프랑스를 비롯한 일부 유럽국가와 중국 대만 등이 외세협력자를 처단한 것은 반민족행위자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이들 국가는 종전 직후 민족반역자들을 법정에 세움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암울했던 피지배의 역사를 극복할 수 있었다.반면 우리는 해방후 제헌국회에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친일파들의 방해로 도중에 와해,친일파 척결은 ‘미완의 역사’로 기록돼 왔다.외국의 반민족행위자 단죄의 실상을 알아본다. ○150만∼200만명 연루 ▷프랑스◁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처단은 1944년 드골장군이 나치협력자 처단은 전담재판소 개설과 ‘비(非)국민제도’ 창설을 골자로 하는 훈령 발포로 본격화됐다.저항작가 장 포랑의 연구에 따르면,이 숙청조치에 관련된 사람은 모두 150만∼200만명으로 추산된다.이들중 죄상이 경미한 99만명은 1개월 이내에 풀려났으나 15만여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나치에 협력한 비시정권의 원수격인 페탱을 포함,3부요인 등 고위인사를 특별심판한 최고재판소는 1960년까지 계속된 재판에서 총 108건을 처리,18명에게 사형,25명에게 징역형을 선고하고,15명에게 공민권 박탈조치를 내렸다. 페탱은 고령이라는 이유로 사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았으나 감옥에서 자살하였다. ○지식인 대부분 중벌 일반법원은 총 취급건수 14만건중에서 4만여건을 시민법정에 이송하고 나머지 5만7천건을 재판하여 6,763명에게 사형,2,777명에게 종신 강제노동형,2만6,529명에게 유기 강제노동형,3,678명에게는 공민권 박탈을 선고했다.사형선고를 받은 자 가운데 779명은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또 지방법원은 총 12만건을 재판에 회부,4,783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으며 이들중 3,000여명의 사형이 집행됐다.시민법정 역시 다수의 나치협력자를 처단하였다.11만5,000여건을 취급하면서 9만5,000명에게 ‘비국민 판정’을 내렸다.비국민 판정은 선거권 박탈,공직진출자격 박탈,무기 소유·휴대 금지 등 사실상 시민의 권리를 박탈한 준 사법적 조치로,이는 반역자들을 매장하고 그들의 재부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고안한 프랑스 특유의 ‘발명품’으로 불린다. 드골정부는 특히 나치에 협력한 언론인과 작가 등 지식인을 대부분 사형·무기징역 등 중벌로 다스렸다.나치지배하 비시정권에 협력한 원로언론인 6명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을 비롯해 저명한 작가·시인들도 예외없이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 ○2년5개월 漢奸재판 ▷중국·대만◁ 전후 중국과 대만은 각자 친일파를 처단하였는데 처단방식에서는 서로 차이가 있었다.우선 중국은 1946년 4월부터 2년5개월에 걸친 ‘한간재판’(중국에서는 친일파를 한간이라 부름)에서 ‘인민재판’ 방식을 취했다.피의자에 대해 검찰의 조사가 끝나면 민중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공개된 장소에서 민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판을 진행,군중들의 참여를 유도하였다.중국공산당 정부는 인민재판을 통해 민중들의 울분을 정화시키고 민심을 살 목적으로 이 방식을 취하였다.특히 중국공산당 정부는 친일파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한간재판을 통해 봉건세력을 제거하고 동시에 혁명의 기반을 닦는 계기로 활용하였다. ○‘유전무죄’ 유행하기도 한편 蔣介石의 국민정부는 국가가 공권력을 동원,피의자를 체포·기소·재판하는 ‘규문(糾問)주의’방식을 취하였다.국민정부는 비밀경찰조직인 군통국(軍統局)이 작성한 한간 명단을 근거로 ‘한간사냥’을 진행하였는데,가정부로 위장해 근무해오던 특무요원이 그 주인을 체포한 예도 있었다. 국민정부는 그러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유행어가 나돌 정도로 관련 공무원들의 부패가 심했던데다 1심판결로 사형을 집행하는 등 감정적 처리가 빈발했었다.또 재판관중에 친일파가 포함된 사실이 밝혀져 국민정부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데다 국민정부측이 汪精衛(일제의괴뢰정부인 남경정부의 주석)의 무덤을 폭파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민중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한국의 경우/친일파 청산 ‘용두사미’/반민특위 의욕적 출발… 사형선고 1명마저 석방 49년 1월 8일 화신백화점 사장 朴興植의 검거를 시작으로 본격 활동에 들어간 반민특위는 8월말 업무를 마감할 때까지 8개월동안 총 682건(여자 66명 포함)을 처리하였다. 이중 반민특위는 중추원 참의 등 당연범 198건을 포함,408건에 대해 영장을 발부하여 이들중 305명은 체포(자수 61명 포함)하였고 미체포자는 173명이었다.또 반민특위는 이들중 84건을 석방하고 559건을 검찰에 송치하였는데 221건이 기소되었다. 기소사건 가운데 특별재판부에서 재판이 종결된 건수는 38건으로 이중 체형선고는 12건이었다.최고형인 사형은 일제 고등경찰 출신의 金悳基가 유일하였는데 그는 6·25 직전 감형으로 풀려났고 나머지 유죄판결자 역시 이같은 경로로 전부 풀려났다.결국 반민법 해당자로 처단된 자는 아무도 없는 셈이다. 당초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자를 7천명 정도로 잡고 왕성한 의욕을 보였으나 친일파의 방해와 인력부족,중도에 공소기간 단축으로 친일파 청산은 결국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친일 문제 반드시 청산돼야/민족통일과 연결… 새 역사 출발점으로/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 해방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제 강점시대의 친일파들은 대부분 죽었다.따라서 아직도 친일문제가 논의되어야 하는가,친일파 문제가 과연 현실문제인가 하는 의문이 있을 법도 하다.그러나 친일문제는 엄연히 현실문제요,지금부터라도 반드시 청산되어야 할 문제다. 역사교육 및 사회정의 차원에서 친일파 문제는 청산돼야 하며 그것은 오늘의 현실적 과제이다.역사에서 李完用 등은 분명히 매국노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 매국행위로 얻은 재산은 고스란히 후손들에게 전해져 있는 게 현실이다.그밖의 친일행위자들도 그 자신이 단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친일행위로 얻어진 정치·경제·사회적 기반이 후손들에게 전해져서 그대로 누려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국재산 버젓이 상속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역사교육이란 것이 왜 필요하며,사회정의라는 말이 왜 있어야 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반세기가 아니라 1백년이 지났다 해도 반민족행위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 불가피함을 알게 된다. 친일파 문제가 청산되지 않음으로써 친일 논리가 청산되지 않은 또 다른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다.李完用을 비롯해서 크고 작은 친일파들은 그때 그때마다 저들의 친일행위를 합리화하는 논리들을 내놓았다. 그것을 요약하면,한 시대 한 민족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그 역사를 누가 주체가 되어 움직여 가는가,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전진해 가는가 하는 문제보다 주인이야 누구든,폭압통치가 자행되건 말건,그 사회가 물량적으로 ‘풍부’해지고 경제적으로 ‘발전’하기만 하면 역사가 발전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식의 논리라 할 수 있다.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던 시기,그들에 의해 조작되었던 이 되지 못한 논리가 이른바 한·일 국교 재개 이후 일본 학계에서 다시 살아나더니,어느 틈에 우리 학계의 일각에서도 동의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이렇게 된 원인의 하나는 해방 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친일파들의 자기합리화 논리를 우리가 이론적으로 극복하지 못한데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이래도 친일파 문제가 현실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친일 논리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언제나 현실문제로 되살아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친일문제 청산은 일본과의 문화교류 확대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도 중요한 문제다.지금 우리는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려 하고 있다.그런데도 일본은 아직 과거의 침략행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군국주의 찬양 문화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일본 대중문화에 대해 벽을 쌓고 지낼 수는 없다.우리의 문화적 주체성을 확립하려면 그 벽을 낮추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일본문화 개방 폭을 넓히는 전제조건으로서,또 우리의 문화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일제시대 반민족행위에 대한 역사적 청산은 불가결하다. ○日 문화개방 전제조건 친일문제 청산이 민족통일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통일이 어느정도 전망되고 있지만,통일의 시점이 바로 민족사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그 출발점에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부각될 일이 바로 식민지 잔재 청산일 것이다. 이미 교환된 남북합의서는 어느 한 쪽에 의한 흡수통일이나 우위통일이 아니라 분명 남북 대등통일을 약속하고 있다.통일이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분단시대 청산은 바로 일제시대 청산과도 연결될 것이며,이 점에서도 남북 양쪽이 대등한 조건을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이렇게 보면 친일파 청산은 현실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 “천안문 유혈진압 잘못 시인해야”

    ◎趙紫陽 前 총서기,당지도부에 촉구 【홍콩 연합】 자오즈양(趙紫陽) 중국 전(前) 중국공산당총서기(78)는 당 지도부에 89년의 톈안먼(天安門)광장 유혈진압이 과오였음을 시인할 것을 촉구했다고 홍콩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가 25일 보도했다. 톈안먼사태에서 시위학생들에게 동조했다는 이유로 실각한 후 현재까지 사실상 가택연금중인 자오 전 총서기는 이달초 당 중앙위에 서한을 보내 민주화를 요구한 톈안먼 시위대에 발포,수많은 사망자를 낸 유혈진압은 금세기 최대의 인권문제임을 선언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이같은 촉구는 클린턴 미 대통령의 중국 방문과 때를 같이해 나와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 겸 당총서기의 분노를 자아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 反民특위 강제 해체/‘6·6사건’의 의미(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파 ‘미완의 단죄’로 민족사 굴절/제헌국회,48년 반민족처벌법안 통과/화신재벌 朴興植 등 검거 재판대 세워/본격 활동 앞두고 李承晩이 강력 제동/조사대상 30%만 기소… 결국 흐지부지 일제 강점기 친일 행각을 벌인 반역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된지 50년의 세월이 흘렀다.그러나 이 특위는 李承晩 대통령의 집요한 방해로 활동에 제약을 받아오다가 마침내 이듬해 6월6일에는 강제 해산을 당하고 말았다.반민특위 활동의 미완성은 이후 49년 동안 우리 현대사 굴절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해왔다. 1949년 6월6일 아침 8시.서울 남대문로에 위치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경찰을 가득 태운 2대의 드리쿼터가 들이닥쳤다. 습격대 지휘자는 尹기병 당시 중부경찰서장.尹을 비롯한 40여명의 경찰은 장탄한 권총을 꺼내들고 출근하는 특위 직원들을 연행했다.반민특위 金尙德 위원장과 金相敦 부위원장이 “국립경찰이 헌법기관인 특위를 강점하고 직원을 불법체포하니 이게 무슨 행패냐”고 항의했으나 경찰은 막무가내였다.金부위원장은 책상을 치며 울분을 터트렸다.검찰총장 겸 특별검찰관장 權承烈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그 역시 안하무인의 경찰에게 권총을 뺏기는 수모를 당했다.“지휘권자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는 호통도 소용없었다. 연행된 사람은 모두 35명.특경대원 24명,직원 및 경호원 9명이었다.직원을 면회온 민간인 2명도 엉뚱하게 같이 끌려 갔다.연행자 중 22명이 입원할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날의 ‘6·6사건’은 해방후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분수령이었다.경찰력이 제헌국회가 설치한 반민특위를 사실상 해체,李承晩 독재의 길을 열었다.친일파 제거에 실패함으로써 헌정사 왜곡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입법부가 행정부의 들러리로 전락하는 순간이기도 했다.반민특위가 구성된것은 48년 9월29일.올해가 50주년이다.반민특위가 친일파를 제대로 정리했다면 李承晩 독재는 물론,이후 군사정권도 불가능했을 지 모른다. 제헌국회는 48년 9월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안을 통과시켰다.반민특위 위원은 각도 출신국회의원 중 선임됐다.金相敦(서울) 趙重顯(경기) 李鍾淳(강원) 朴愚京(충북) 金明東(충남) 吳基烈(전북) 金俊淵(전남) 金尙德(경북) 金孝錫(경남) 金庚培(제주·황해) 등이었다.金炳魯 대법원장을 재판관장으로 하는 특별재판부,權承烈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하는 특별검찰부,李元鎔 총무과장이 이끄는 중앙사무국이 각각 구성됐다.진용을 갖춘 반민특위는 49년 1월5일 공식업무를 시작했다.특위는 1월8일 화신재벌 朴興植을 검거하는 것을 필두로 전광석화같이 친일파 색출에 나섰다. 그러나 출범초부터 친일세력의 심한 반발이 일어났다.일제 경찰 출신들이 반발세력의 중심이었다.해방직후 발족된 새 경찰의 50%이상이 이들 출신으로 추산된다.친일파 세력을 집권 기반으로 한 李承晩도 반민특위가 눈엣가시였다.李承晩은 盧德述 崔燕 등 심복인 경찰간부들이 특위에 체포되자 특위 해체를 추진,‘6·6사건’에 이르게 된다. 결국 특위는 49년 8월31일 조사대상 682명 중 221명을 기소하는 것으로 활동을 끝냈다.이중 12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5명은 집행유예,나머지 7명도 형집행정지 등으로 석방됨으로써 친일파 단죄는 흐지부지 넘어갔다. ◎다른 나라의 사례/佛,나치협력 3만∼4만명 처형/시민법정 설치… 9만5천여명 시민권 박탈/中·대만 정부 친일파 漢奸 색출 상당수 처벌 2차대전 직후 독일과 일본의 전범처리가 있다.뉘른베르크재판에서는 22명의 1급 전범이 기소되어 나치군 원수 괴링 등 12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7명이 종신형∼10년의 금고형을 받았다.도쿄재판에서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7명의 전범에게 교수형이 내려졌다.기도 고이치(大戶幸一) 등 18명에게는 종신형∼금고 20년이 선고되었다. 우리의 친일파 문제와 비슷한 것은 유럽국가의 나치협력자 숙청과 중국·대만의 한간(漢奸·친일파)재판이다. 프랑스의 드골은 나치멸망 직후인 44년 6월부터 11월에 걸쳐 나치협력자 처리를 위한 4개의 훈령을 내렸다.이 훈령에 따라 조사받은 인원은 150만∼200만명.드골은 회고록에서 1만842명이 나치협력자로 처형됐다고 밝히고 있다.드골은 작가,언론인,학자 등 나치에 협력한 지식인들도 엄히 다스렸다.현대사가 로베르 아롱은 “3만∼4만명이 재판에 의했든지, 그렇지 않든 간에 민족반역자로 사형당했다”고 추정했다.프랑스는 형사재판권이 없는 시민법정도 설치,9만5,000명을 ‘비국민’으로 판정해 시민의 권리를 박탈했다. 덴마크는 1만4,000명,네덜란드는 4만명,벨기에는 5만명, 노르웨이는 2만명의 나치협력자를 각각 민족반역자로 무기에서 유기징역형에 처했다. 중국과 대만정부도 2차대전이 끝난후 친일파 제거에 나섰다.한간재판은 중국공산당 정부와 장제스(蔣계石)의 국민당 정부에 의해 46년 4월부터 48년 9월까지 따로 진행되었다.중국·대만정부에 의해 한간으로 판명된 상당수 인사들이 처형됐지만 개별처리 사실만 알려질뿐,전체적 통계는 아직 집계되지 않고 있다. ◎특위 총무과장 역임 李元鎔옹/“민족정기 바로서는 날 두눈 감기전 보았으면” “金大中 대통령이 명실공히 역사를 바로잡아 민족정기를 되찾아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반민특위 총무과장과 조사관을 역임했던 李元鎔옹(78)은 국민의 정부에 거는 기대가 컸다.반민특위에관계했던 인사들이 대부분 타계한 현실에서 그는 당시 특위의 고위 중앙요원으로는 유일한 생존자다.서울 공대 전신인 광산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48년 10월 반민특위 구성때 민간인 신분으로 행정실무를 주도했다.다음은 李옹과의 일문일답. ­현재의 심경은. ▲오늘 이 땅위에 사는 구세대 치고 일제의 학정과 인간 이하 대우를 받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이러한 일본의 관헌에게 우리 조국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던 애국지사를 밀고,또는 체포해 넘긴 반역자가 있었습니다.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피가 역류하는 분노를 금할 길 없습니다.두 눈을 감기전 바르게 처리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반민특위가 소기의 목표를 달성 못한 이유는. ▲국내사정에 어두운 李承晩 대통령이 친일파들의 간계에 현혹되어 경찰력을 동원,하루 아침에 반민특위를 와해시켰습니다.제헌국회의 결정에 따른 헌법기관이 불법적으로 무너짐으로써 헌정사에 크나 큰 오점을 남기게 됐지요. ­친일파 청산의 현주소는. ▲金泳三 정권이 들어선 뒤 역사 바로 세우기를 기치로 내걸어 혹시 하며 기대했습니다.그러나 실효없이 용두사미격이 되어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현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지금이라도 관계 각료나 관련 인사들이 모여서 기구를 만들어 과거에 처단치 못한 민족반역자를 처벌해야 합니다.그래야 이 나라의 기초가 탄탄해집니다.金대통령은 해박한 경제관과 탁월한 국제 외교력을 겸비했습니다.조국광복을 위해 순국하신 많은 선열들의 넋을 위로해주는 데도 힘써주실 것으로 믿습니다.그것이 경제 등 다른 난국의 극복에도 도움이 됩니다. □반민특위 활동 일지 ▲48년 8월5일=제헌국회,‘반민족행위 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구성 ▲9월7일=‘반민족행위 처벌법’ 국회 통과 ▲9월29일=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반민족행위 조사특위(반민특위)’구성동의안 국회 가결 ▲10월1일∼11일=반민특위 10명 조사위원 선임 ▲10월23일=반민특위 1차위원회 ▲49년 1월5일=반민특위 사무실 개소,업무 개시 ▲1월8일=화신재벌 총수 朴興植 1호 체포 기록 ▲1월13일=崔麟 검거 ▲1월25일=盧德述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검거 ▲2월7일=崔南善 李光洙 검거 ▲2월15일=李承晩 대통령,반민처벌법 개정 필요성 특별담화 ▲3월28일=李琦鎔 朴興植 등 반민자 첫 공판 ▲5월하순∼6월초=정부,1·2차 국회 프락치사건 발표 ▲6월6일=경찰,반민특위 습격,조사요원 불법체포,특경대원 무장해제 ▲6월26일=金九 선생 암살 ▲8월31일=반민특위 공식해체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 성루 썩고 물새고…/中 천안문 대대적 보수

    【베이징=鄭鍾錫 특파원】 내년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50주년을 앞두고 중국의상징인 베이징시 천안문 성루에 대한 대대적 보수공사가 곧 시작된다. 명나라 영락 15년(1417년)에 세워진 천안문의 원래 이름은 승천문(承天門).두차례 불에 탄 역사가 있으며 청나라 순치(順治) 8년(1651년)에 증축된 뒤천안문으로 이름을 고쳤다.원래는 황성의 정문으로 황제가 대전(大典)을 베풀던 곳이었다. 49년 10월1일 마오쩌뚱(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중국공산당 영도자들이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을 선언,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천안문은 그 이후 줄곧 중국의 상징이 됐다.61년 중국 국무원은 천안문을 제1호 중점보호건축물로 선정했다.88년 천안문 성루를 대외에 개방,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게 했다. 중국 고대의 건축물은 석조건물 일변도인 서양과는 달리 돌과 나무를 같이 사용한다.그래서 나무부분이 썩기 쉬운 천안문에 대한 보수사업은 끊임없이 계속돼 왔다.71년9월 성루가 재건된 뒤 제1차 검사에서 일부 목재가 건조해 갈라터지고 어떤도금주(圖金柱·금박이 기둥) 밑부분은 물이 스며들었다.또 어떤 철골은 헐거워지는 등의 현상을 발견했다. 중국정부는 71∼97년의 26년동안 모두 28차례나 천안문을 보수했다. 하지만 현재 나무가 썩고 함수량이 높으며 성루 양측에 빗물이 새는 상황이 발생했다.성대(城臺)에는 상대적으로 소금기가 돋아나 있으며 전원선로(電源線路)가 노화했다.배전·전기시설이 너무 노후화돼 문제가 발생했다. 중국정부는 지난해 12월부터 이미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불러 금수교(金水橋),동서화표(東西華表),쌍 돌사자(石獅)상 등 석질(石質)문물을 검측,보수공사의 기본자료를 확보했다. 지금은 국기대(國旗杆)와 기념비에 대한 종합평가에 들어갔다.천안문 성루를 본격적으로 보수하기에 앞서 정지작업이 착실히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 中 北京대학 새달 개교 100돌/세계유명대 총장 참석

    ◎江澤民 축사내용 관심 【베이징=鄭鍾錫 특파원】 중국의 명문 베이징(北京)대학이 오는 5월4일로 설립 100주년을 맞는다. 베이징대 100주년은 단순히 대학자체의 행사에 그치지 않고 중국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전체 중국차원의 축제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전 세계에서 활동 중인 5만여명의 동문들이 베이징으로 몰려오는 것은 물론 세계 유명대학의 총장들도 150명 가량이나 기념행사에 참석한다.우리나라에서도 金俊燁 전 고려대 총장 등 10여명의 전현직 대학총장들이 참석한다.현재 베이징시 서쪽하이디엔(海淀)구에 있는 베이징대 주변 호텔은 행사일을 전후해 모두 예약이 끝났다.개교 100주년 당일 베이징대학은 인민대회당에서 국가지도자 및 각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형 기념식을 갖는다.웨이후밍(未名湖)에서 열리는 기념행사는 중앙(CC)TV를 통해 중국전국에 생중계된다.중국체신부는 이날 기념우표를 발행한다.또 국제천문학회에서 최근 새로이 발견된 소행성을 ‘베이징대학 별’로 이름지음에 따라 이 명명식도 거행된다. 이번 100주년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5월4일로 예정된 중국의 최고통치자 장쩌민(江澤民) 주석의 축하연설.장 주석은 기념식에 참석해 베이징대 개교 100주년 기념축사를 한다.1898년 청조 말기 세워진 베이징대는 49년 중국공산당 창당위원 53명중 21명을 배출했다.중국현대화 교육의 개척지로 인식되는 베이징대는 19년 반제반봉건(反帝反封建) 운동인 ‘5·4운동’과 신문화 운동의 중심지였다.
  • “南北회담 좋은 성과 기대”/26일 來韓 胡錦濤 中 부주석 회견

    ◎한국지도자들과 우호증진·경협확대 논의 【베이징=鄭鍾錫 특파원】 “3년9개월 만에 재개돼 현재 베이징에서 열리고 있는 남북당국간 회담을 환영하며 적극적인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는 26∼30일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의 후진타오(胡錦濤·56) 국가부주석은 14일 방한에 앞서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주중한국특파원들과 기자회견을 갖고 “한반도의 정세는 점차적으로 완화추세에 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장쩌민(江澤民) 현국가주석 이후 21세기 중국을 이끌 유력한 ‘차세대 지도자’로 꼽히는 후부주석은 “한중수교 5년동안 양국의 우호관계는 전면적이고 신속한 발전을 했으며 각 영역에서의 관계발전이 현저한 성과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번 방한기간 동안 金大中 대통령과 金鍾泌 총리서리 등을 만나게 될 후부주석은 “21세기를 향한 한중 선린우호관계 및 경제무역협력방안,나아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한국지도자들과 깊은 의견교환에 나서겠다”면서 “한국 각계인사와 광범위한 접촉을 통해 옛 친구를 만나고 새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털어놨다. 남북한과 동시수교국인 중국의 한반도문제해결에 관한 역할에 관해 후부주석은 “중국은 항상 관련당사자들이 한반도의 정세완화를 위해 제기한 합리적인 주장과 제의를 지지하고 있다”면서 “남북쌍방이 담판과 협상을 통해 이해를 증진시키고 신뢰를 강화해 관계를 개선하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중국공산당권력서열 5위인 후부주석은 50대의 유일한 정치국상무위원.‘화해와 조정의 명수’로 제2의 저우언라이(周恩來)로 불리며,당서기처서기와 당중앙학교교장을 겸하고 있다.
  • 朱鎔基 총리의 행정신풍운동/베이징=鄭鍾錫(특파원 수첩)

    중국인들이 ‘영원한 총리’로 인식하는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총리시절 나들이할 때마다 국민의 불편을 생각해 ‘행차 3불허(不許)’원칙을 내걸었다. “첫째 차가 학교·병원·극장 등 공중장소를 지날 때마다 경적을 울리지 못한다.둘째 차가 사람이 많은 교차로에서 경적을 울리지 못하며 속도를 내지 못한다.셋째 비오는 날에는 차를 천천히 몬다”.자동차의 경적이 학교나 병원,극장과 같은 조용한 곳을 교란하고 국민에 피해가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지도자의 배려인 것이다. 72년 저우가 병으로 앓아눕게 되자 베이징시 관리들은 그가 거처하는 중남해의 안전과 소음방지를 위해 16번 버스노선이 중남해를 경유하지 못하도록 결정했다.하지만 이를 안 저우는 당장 이 조치를 철회하도록 명령했다.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이 16번 버스는 장쩌민(江澤民) 주석 등 고관대작들이 사는 중남해 서쪽을 거쳐다닌다. 덩사오핑(鄧小平) 등장 이후 개혁개방의 길에 접어든 중국은 지구상 어느 나라보다도 지금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지상과업에 매달려 있다.빈부와 지역격차 문제를 비롯해 사회생활의 모든 곳에서 부정부패와의 연결고리가 노정되고 있다.60년대부터 현재까지 단지 공금으로 먹고마시는 것을 금지한 정부의 공식문건만 해도 120여건이나 된다고 한다.그럼에도 부패의 규모는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주룽지(朱鎔基)총리가 최근 취임 뒤 제시한 ‘세가지 줄이기(三減) 지침’의 내용을 보면 행정개혁이 일상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첫째 국내시찰 때 차량과 수행인원.둘째 회의시간과 참석인원.셋째 접대와연회 등 세가지를 줄이라는 이 지침은 중국에서 얼마나 관리들의 행차에 드는 지불비용과 낭비가 많은 것인가를 반증한다.이를 받아 중국공산당 중앙규율검사위원회는 앞으로 정부기구 간소화를 계기로 공금으로 연회를 하거나,예물과 기념품을 증정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하기에 이르렀다.부정부패 발생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는 의미다. 중국의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위한 ‘주룽지개혁’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그가 제시한 행정지침을 보면서 같은 시기에새 정부가 출발한 우리나라의 고위관료와 공무원사회에 대해서도 ‘행정신풍운동’을 충고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 北風 파장­거명된 정치인들의 辯

    ◎“조작·왜곡” 李大成 파일 내용 부인/朴尙奎 부총재­북경에 가지도 않았는데 공작원 접촉이라니/趙萬進 위원장­허동웅씨는 단순통역일뿐 北 간첩 아니다/鄭在文 의원­安炳洙 우연히 만나… 360만불 전달 턱없어 검찰이 ‘李大成 파일’에 거명된 정치인들에 대한 본격수사에 착수한 가운데 당사자들은 24일 문건내용이 조작 또는 왜곡됐다며 관련사실을 전면 부인했다.이들의 변을 정리한다. ◇국민회의 朴尙奎 부총재측▲문건내용=97년 8월 북경에서 북측 공작원과 수차례 접촉.▲소명=문건은 조작된 것이다.97년 8월에는 북경에 가지도 않았다.북경은 10월24일 부인과 함께 당을 대표해 구신한국당 崔炯佑 고문을 문병하기 위해 단 하룻동안 다녀온 것이 전부다. ◇국민회의 鄭東泳 대변인측▲문건내용=97년6월 ○○○으로부터 ‘흑금성’ 朴采緖가 여의도 커피솝 등에서 9차례 鄭의원을 접촉.▲소명=제보자로 자처하며 당을 찾아와 북풍조작과 관련한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해 몇차례 만났다. 그가 준 일부 정보는 사실로 확인됐다.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金大中 후보의 친필서신을 요구하는 등 의도가 의심스러워 거리를 두게 됐다. ◇국민회의 金弘一 의원측▲문건내용=96년8월 중국 공산당 萬里 전 전인대상무위원장 아들의 방한때 金大中 후보의 일산자택에서 통역을 가장한 북측 공작원(허동웅)과 사진촬영.▲소명=萬里 위원장 아들 일행과 일산자택에서 사진을 찍은 것은 사실이나 통역원(허동웅)이 북측 공작원인 줄은 몰랐다.(안기부 조사결과 허동웅은 북측 공작원이 아닌 중국동포로 확인됨) ◇국민회의 千容宅 의원측▲문건내용=鄭東泳 의원의 소개로 97년 6월이후 여의도의 한 아파트등지에서 흑금성 朴采緖와 접촉.▲소명=북풍대책팀장으로서 朴씨가 안기부 직원임을 확인하고 몇차례 만났다.朴씨의 정보중 대우 金宇中 회장의 방북설이 사실로 판명되는 등 신빙성이 있어 양심선언을 유도했다. ◇국민회의 趙萬進 인천부평을위원장측▲문건내용=중국 조선족 허동웅씨를 金大中 후보 등에게 소개.▲소명=許씨는 96년8월 중국 만리 상무위원장 아들이 방한했을 때 단순한 통역으로 따라왔다.허씨는 간첩이아니다. ◇한나라당 鄭在文 의원측▲문건내용=지난해 11월20일 북한 安炳洙 조평통부위원장을 만나 金大中 후보에 대한 북풍을 일으켜주는 대가로 3백60만달러가든 가방을 전달.▲소명=말도 안된다.3백60만달러를 담으려면 가방이 적어도 3개는 있어야 한다.우연히 만나서 인사를 주고 받았을 뿐이다. ◇한나라당 李明博 전 의원▲문건내용=지난해 북경에서 북한측 인사와 수차례 접촉.朴采緖 “정재문과 이명박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고 언급.▲소명=지난해 8월 중국공산당 조직부장 초청으로 금강산개발사업 협의차 북경에 간 적은 있으나 북한측 인사를 만난 적은 없다.
  • 중 첫 조선족 장관 탄생/이덕수씨 국가민위 주임에

    【베이징=정종석 특파원】 중국에서 처음으로 우리 동포(조선족)장관이 탄생했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는 18일 열린 제6차대회에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장관급)에 조선족인 이덕수(55) 중국공산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을 선출했다.국가민족사무위는 중국내 55개 소수민족 관련사무를 관장하는 국무원산하 행정부처이다.
  • “중국판 뉴딜정책으로 경기부양”/주용기 중 총리의 경제정책 방향

    ◎실업대란 막게 SOC 확충·중화학 육성/새 내각 기술관료 중용… 산업전반 개혁 【베이징=정종석 특파원】 중국의 주룽지(주용기)국무원총리는 17일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선출이 확정된 뒤 장내의 2천900여 대표들로부터 대대적 환성과 함께 한참동안 우레같은 박수를 받았다.전날 장쩌민(강택민) 국가주석이나 후진타오(호금도) 국가부주석,리펑(이붕) 전인대상무위원장이 선출됐을 때 장내에서 의례적인 박수 만이 잠깐 나왔던 것과 비교하면 지금 중국의 국민적 영웅은 주총리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주총리가 요즘 가장 열심히 연구하는 분야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미대통령과 영국 경제학자 존 M.케인즈의 리플레이션정책이다.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한 중국의 수출 및 외국인투자 감소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경기부양정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앞으로 3년 동안 교량,도로,항만 등 사회간접자본(SOC)시설과 농업,중화학공업 등에 모두 1조달러를 투자,경제발전과 함께 대대적인 고용창출을 이루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중국판 뉴딜정책’을 시행하겠다는 복안이다. 중국에는 지금 흡사 ‘전쟁상황’과 비슷한 일들이 연일 벌어지고 있다.정부조직 축소로 8백여만개의 당·정 일자리가 4백여만개로 줄어들고 국유기업 개혁이 본격화하면 1천만∼2천만명의 노동자가 거리로 나온다.시장경제로의 이행에 따른 엄청난 홍역인 셈이다.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로 수출이 감소하고 소비자물가도 점차 오르고 있다.경제성장 목표 8%를 하향조정해야 한다는 논쟁도 한창이다.그래서 뉴딜정책식의 대대적 고용창출이 이뤄지지 않으면 ‘샤깡(하강·대량실업)’에 따른 천하대란 가능성마저 엿보이고 있다. 주총리가 18일 발표할 새 내각의 주요직책에 신진관료와 함께 기업인 출신들을 대거 발탁하는 것은 이런 배경을 깔고 있다.새 술을 새 부대에 부어 이제까지 시장경제원리를 무시해온 중국경제를 ‘환골탈태’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시다.특히 중국산업 전반을 이끌 국가경제무역위 주임(부총리급)에 관료가 아닌 성화런(성화인·63) 중국석유화학총공사 사장,국토자원부장에 주용캉(주영강) 중국석유천연가스총공사 사장같은 기업인을 기용하는 등 파격인사가 예상된다. 중국은 지난해 이미 국유기업민영화 조치로 1천만명이 일자리를 잃는 등 ‘샤깡’문제가 최대로 정치·사회문제화하고 있다.이번 전인대를 계기로 중국의 각종 개혁작업은 더욱 가속화하게 된다.그 전권과 책임을 주총리가 부여받은 것이다.따라서 12억 중국의 ‘경제대통령’이나 다름없는 그의 얼굴은 지금 영광보다는 고난과 시련의 주름살이 강하게 느껴진다. ▷주룽지(주용기) 총리 약력◁ △28년 10월 후남성(호남성) 창사시(장사시) 출생(70세) △칭화(청화)대학 총학생회장.전기공정과 졸업.고급공정사 △국가경제계획위 위원 겸 개술개조국장·부주임,청화대학 경제관리학원학장 겸임 △중국공산당 13기 후보위원 당선 △상하이(상해)시장 및 당위 서기(조자양 추천) △국무원 부총리(등소평 추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중국인민은행장 겸임 △국무원 상무부총리.
  • 강­주­호 중국 신 3두시대/호금도 부주석 선출 의미

    ◎최연소 발탁… 부주석 위상 강화/당·정 양날개로 후계자 본격 부상 【베이징=정종석 특파원】 1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단상 중앙에는 장쩌민(강택민) 국가주석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주룽지(주용기) 국무원 총리내정자,왼쪽에 새롭게 국가부주석에 선출된 후진타오(호금도) 공산당정치국 상무위원이 나란히 앉았다.불과 열흘 전 전인대 개막시 차오스(교석) 전 전인대상무위원장이 앉았던 왼쪽 자리를 후진타오가 차지한 것이다. 이날 자리배치는 중국의 권력핵심축이 장(강)­주­후(호) 체제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비록 리펑(이붕)전인대상무위원장이 남아 있지만 장주석이 이미 당·정·군의 실권을 장악한 채 주와 후를 두수레바퀴로 삼아 ‘새로운 행마’에 들어간 것이다.사실상 ‘신 3두마차 시대’가 시작된 셈이다. 이날 후의 국가부주석 선출은 특히 21세기 중국의 후계구도 가시화라는 점에서 각별하다.현재 72세인 장이 56세의 후를 부주석에 발탁함으로써 공산당혁명 후 제3세대가 제4세대에게 후계자 수업을 시키는 의미가 강한 까닭이다.장주석은 앞으로 2∼3년 내에 국가주석직과 당총서기직을 차세대지도자에게 물려주고 정치2선으로 은퇴할 복안이라고 한다.그래서 후를 국가부주석에 기용,대내외 활동영역을 넓히고 국제적 지명도를 높인다는 것이다.그동안 공산당 일만 해왔던 후에게 정치를 맡겨 당·정 양쪽의 날개를 모두 달아주고 후계자수업을 시키는 셈이다. 국가부주석 자리는 원래 명예직이었으나 중국의 대표적인 ‘50대 기수’인후가 선출됨으로써 위상이 높아졌다.50대 국가부주석의 탄생은 신중국 성립 이후 처음으로 국가지도부가 점차 세대교체의 길로 접어들 전망이다. 그동안 한국문제에 관심을 많이 표시했던 후의 국가부주석 취임은 한중관계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호금도 부주석은 누구 【베이징=정종석 특파원】 현재 당서열 5위인 후진타오(호금도) 중국공산당정치국 상무위원은 장쩌민(강택민)주석과 함께 당을 이끄는 양두마차의 한 축.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화해와 조정의 명수’로 제2의 초우언라이(주은래)로 불린다. 중국의 문호 후스(호적)의 일가친척인 그는 42년12월 샹하이 출생으로 명문 칭화(청화)대학 수리공학과를 졸업했다.정부나 국회보다도 당우위인 중국에서 줄곧 당직만을 맡아온 성골로 유일한 50대의 최연소 상무위원.현재 당서기처서기와 당중앙학교교장을 겸하고 있다.
  • 조남기 중국 정협 신임 부주석(뉴스의 인물)

    ◎최고위 공직 역임한 군 출신 조선족/중국군 원로 홍학지 측근… 당중앙위원 활동 14일 폐막된 중국 제9기 전국 인민 정치협상회의(정협)에서 부주석으로 선출된 조남기(71)씨는 중국 조선족 가운데 가장 높은 공직을 역임한 군인 출신의 지도자다. 길림성 영길에서 태어난 조씨는 충북 청원이 원적지며 중국군의 최고 계급인 상장과 총후근부 부장,군사과학원장 등 중국 인민해방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14차 중국공산당 대회때에는 중국 정치권력의 핵인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명실상부하게 중국내 조선족을 대표해 왔다. 조씨는 중국인민해방군의 최고 원로인 홍학지 장군의 측근으로 문화혁명때 홍장군의 목숨을 구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조씨는 길림성과 연변의 공산당 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해방군에 입대,군수분야에서 근무했다.문화혁명후 길림성과 연변 자치주의 각급 군부대의 정치위원회 고위간부를 두루 거쳤다. 그는 길림성 부성장과 당위원회 부서기에 이어 조선족으로서는 처음으로 길림성의 제1인자인 당위원회 서기를 지냈다.87년 인민해방군 총후근부장에 임명됐으며 88년엔 인민해방군의 최고 직급인 상장으로 승진했다.92년 이후 군사과학원장으로 재직하다 95년 일선에서 물러났다. 정협은 퇴임 원로 및 각계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통일전선기구다.공산당 및 정부의 자문과 여론 수집기능을 담당하며 주요 정책결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이번 회의에서 조남기씨는 부주석 31명의 가운데 서열 24위로 3명의 소수민족 출신 부주석중 한명으로 뽑혔다.
  • 21세기 초강대국 겨눈 대수술/중 정부기구개편 배경

    ◎11개 부처 없애 29개로… 정부수립후 최대 개혁/당정관료 50% 줄여… 경제관리 효율성에 초점 중국은 6일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1차회의 둘째날 회의를 열고 행정부가 제출한 국무원기구개혁방안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라간 국무원 비서장이 보고한 국무원개편안은 행정부의 ‘정예화·간소화(정간)’를 기본방침으로 삼아 현재 모두 40개에 이르는 행정부처를 29개로 대폭 줄이는 내용을 담고있다.이번 개편에 따라 당과 정부의 공식 직책 800여만개 가운데 400여만개를 줄이는 등 신중국 수립후 최대의 개혁이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중국지도부는 이처럼 획기적인 국무원개편을 결심하면서 먼저 ‘대도관부(큰 칼이나 도끼를 휘두름)’식 접근방법을 택했다.중요한 사안일수록 일을 과감하게 처리한다는 기본전략이다.이는 공산정권 수립후 그동안 16차례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공룡처럼 거대해진 중국의 관료조직을 혁파하지 않고서는 21세기 초강대국의 야망을 달성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배경에 깔려있다. 개편안을 보면 전체적으로 정부의 국가관리기능과 경제관리기능을 분리한 가운데 경제관리의 효율성 확보에 가장 중점을 두었다.이는 시장경제의 기능에 충실하지 않으면 국제화·개방화시대의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없다는 중국내부의 절실한 필요성을 반영한 것 같다. 중국지도부는 이 개혁이 앞으로 3년안에 완료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그러나 정부기구 인원의 재배치는 최대의 난점이다. 현재 국가의 재정에서 봉급을 받는 사람은 약 3천300만명이나 되며 주로 물러나야 할 사람들이 당정기관의 고급 간부들이기 때문이다. 이번 개편안은 특히 차기총리로 내정된 주용기 부총리와 중국공산당의 인사조직 전문가인 호금도 정치국상무위원이 전담해서 입안한 것으로 알려진다.따라서 국무원개편의 성패는 차기 정치실세들의 명운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3두체제 21세기 중국 견인” 천명/9기전인대 오늘 개막

    ◎상무위장 이붕·총리 주용기 선출 확실 【북경=정종석 특파원】 중국의 국회인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1차회의가 5일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32개 성·시·자치구 및 홍콩,인민해방군의 대표 2천979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된다. 중국은 이번 전인대를 통해 아시아 금융위기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21세기 초강대국’으로 발전할 강력한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다.19일까지 보름 동안 계속되는 이번 1차회의는 국가주석 및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강택민 현주석을 재선출 한다.전인대 상무위원장에 이붕 현총리를 새로 선출하며 주용기 현 상무부총리의 총리지명안을 승인한다. 이번 회의는 작년 9월 열린 중국공산당 제15차 전국대표대회(15전대) 이후의 후속 인사배치를 완료하고 21세기로 이어질 강주석을 핵심으로 한 강­이­주 ‘3두정치 체제’를 굳힌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국무원 부총리급 인사는 이람청이 상무부총리로 승진하고 전기침·오방국·강춘운이 각각 외교,공업·국유기업,농업을 분장할 것으로 알려졌다. ◇제9차 중국 전인대1차회의 주요 일정 △5일=이붕 총리 정부공작(업무)보고 △6일=나간 국무원비서장 국무원 기구개혁 방안 설명 △10일=국무원 기구개혁 방안 통과 △16일=제9차 전인대 상무위원장 및 부위원장 선출,국가주석 및 부주석 선출,중앙군사위 주석 선출 △17일=국무원총리 인선,중앙군사위 부주석 및 위원 인선,최고인민법원원장 및 최고인민검찰원검찰장 선출 △18일=국무원부총리,국무위원,각부 부장,각위원회 주임,중국인민은행장,심계장,비서장 인선 △19일=국가주석 연설 및 폐막.
  • 중 국무원 개혁태풍 예고/새달 전인대서 주용기 총리 체제 확정

    ◎이람청·오의 등 경제전문가 급부상 【베이징=정종석 특파원】 등소평 사후 중국에 새로운 ‘3두정치’ 시대가 열린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26일 교석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과 이붕 국무원총리를 교체하는 인사안에 최종 합의,등사후 강택민 주석체제의 후속 인사구도를 사실상 마무리했다.새 전인대상무위원장에는 이붕 총리,새총리에는 주용기 상임부총리의 기용이 확실시된다.이같은 인사안은 3월5일부터 보름동안 열리는 제9기 전인대에서 확정된다.그렇게 되면 중국은 당분간국가주석과 당총서기를 겸하고 있는 강이 당,이가 국회,주가 정부를 각각 맡는 삼두정치체제로 운영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총리체제의 출범은 국무원의 일대 개혁태풍을 예고하고 있다.탁월한 경제전문가인 그는 21세기 중국경제의 명운을 걸머지고 국유기업 및 금융제도 개혁을 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현재 중국이 안고 있는 산적한 경제현안을 타개하기 위해선 주만한 실력자가 없다는 것이 중론.그래서 강주석과 이총리를 비롯한 국가지도자들 가운데 주에게 경제총수의 권한을 맡기는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강주석의 라이벌이었던 교석은 은퇴 할 공산이 크다.그러나 그의 지지세력들은 교석이 국가부주석자리를 맡아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아직 미결의 과제로 남고 있다.지난해 15차 당전국대표대회(전대)때 중앙위원 명단에서 탈락,실각했던 교석은 전기운 전인대상무위 부위원장 등 측근들의 강력한 엄호를 받으면서 아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그래서 강주석은 새 국가부주석에 소수민족 출신인 포혁 전 내몽골지도자를 밀고 있으면서도 단안을 내리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이붕 총리의 거취문제에도 약간의 불안감은 없지 않다.89년 천안문사태의 피해자들이 학살의 원흉으로 이총리를 꼽으며 그의 전인대 상무위원장 진출에 반대,연판장을 돌리는 등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고 강주석과의 개인적인 관계도 다소 원만치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그러나 3월의 국무원개편을 통해 중국지도부는 대거 새로운 얼굴들로 채워질 전망이다.지난해 15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상무위원으로 진입한 이람청 부총리는 주용기 부총리가 맡아왔던 경제업무를 총괄하고,대외경제무역부 합작부주임 오의도 부총리 승진이 예상된다.
  • 두 거목 등소평과 주은래/북경=정종석(특파원 수첩)

    중국에서는 올 2월과 3월 한달을 사이에 두고 위인추모 열기가 뜨겁다.2월19일이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등소평 사망 1주기였고,3월5일은 60,70년대 냉전시대에 중국을 이끌었던 주은래 탄생 100주년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소용돌이치는 중국현대사를 이끌어온 장본인이다.사후에 똑같이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것도 닮은 점이다.다만 등의 1주기가 공식행사 없이 다큐멘터리 방송 등으로 비교적 단순하게 1회성 ‘침묵의 팡파레’로 끝난 반면 주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은 그의 고향 강소성에 4.2m짜리 대형동상이 세워지는 등 공개적·조직적인 점이 특징이다. 중국공산당 창당 당시부터 지도적 역할을 담당한 주는 평생을 모택동 밑에서 2인자로 처신하며 살았다.반면 등은 세번이나 숙청당하는 등 삼전사기의 오뚝이 정치역정을 겪으며 중국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했다.이 과정에서 주가 등을 45년,73년 두번이나 도와 복권시킨 것이 매우 흥미롭다.등은 주사후인 76년 세번째 숙청을 당했으나 모택동 사후 주자파들의 도움으로 화국봉을 실각시키고 78년12월 마침내 실권을 장악한다.등으로서는 주가 평생의 은인인 셈이며,주가 없었다면 오늘날 중국의 개혁개방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주가 모택동의 눈치를 보면서도 두번이나 등을 복권시킨 점에 눈길이 간다.주는 등의 프랑스 유학 선배였다.개인적인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보다는 주가 등을 일찍부터 ‘미래의 중국’을 위해 꼭 필요한 인물로 눈여겨 보고 사력을 다해 살려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 중국에서 구세주로 칭송받는 등은 빵문제를 해결한 난세출의 지도자로 중국인들에게 각인돼 있다.반면 89년 천안문사태 등 무자비한 정치탄압은 그가 사후에도 여전히 안고가야 할 숙제다.그러나 중국공산당 초기 당내에서 모보다도 더 권위가 있었던 주는 평생 한 여자(등영초)와만 사는 등 인간적이고 서민적인 체취,그리고 당과 국민에 대해 무한한 애정과 충성을 간직한 지도자로서 투영되고 있다. 지금 북경을 비롯한 중국 전역에서 부는 ‘백년은래(주은래 탄생 1백년)’의 열기는 중국국민들이 이제 빵문제를 벗어나 인간적 온기가 느껴지는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 등소평 사망/오늘 한돌 개혁 순조

    ◎‘신격화 거부’ 유지따라 공식행사 없어 처분/기념주화·우표 발매… 다큐물 방송으로 대체 【베이징=정종석 특파원】 19일 하오 9시8분.중국의 관영 중앙(CC)TV는 중국의 작은 거인 등소평 사망 1년을 맞아 90분짜리 대형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방송한다. ‘위대한 기념비’라는 제목의 이 프로그램은 등이 77년부터 20년 동안 살았던 천안문 밖 사저를 처음으로 공개한다.또 등의 유년과 프랑스 유학,모스크바 공산당 시절,국가지도자로서의 모습을 차례로 소개하고 강택민 주석과 이붕 총리의 회고담을 내보낸다.중국지도부는 공식추도 행사를 생략하고 다큐멘터리 방송으로 등의 1주기 행사를 마친다. 개혁개방의 설계사인 등은 비록 몸은 없지만 아직도 ‘살아서’ 중국을 통치하고 있다.등은 옛소련과 동구국가들이 해체되는 상황에서도 20세기말 중국의 번영과 안정을 달성한 ‘위대한 동지’로서 인민들로부터 추앙받는 가운데,후계자인 강택민이 등의 유지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이미 등을 추모하는 기록영화가 상해 등지에서 상영되고 있으며 19일에는 등사망 1년을 추념하는 기념우표와 기념주화가 발매된다.또 서점의 등코너에는 새로 출판된 관련서적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서방의 많은 중국전문가들은 애당초 등이 사망할 경우 중국대륙이 혼란에 빠지고 최악의 경우 유럽처럼 여러 국가로 분열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었다.또 강은 ‘제2의 화국봉’이 돼 물러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었다. 그러나 등의 1주기를 맞는 지금 중국대륙은 특별한 변화 없이 평온하다.중국공산당 총서기였던 강은 지난해 9월 제15차 당 전국대표자대회(전대)에서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주석에 연임되면서 당·정·군을 모두 장악한 채 1인체제를 굳히고 있다.강은 최대 라이벌이었던 교석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상무위원장을 실각시킨데 이어 오는 3월의 전인대에서는 후속 권력개편작업을 마무리한다. 등의 1주기를 맞는 지금 중국은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다.중국지도부가 특히 등의 1주기를 조촐하게 치르기로 한 것은 생전에 ‘신격화’를 거부한 등의 유지를 존중한다는 의미가 강한 것 같다. 초상화가아직도 천안문에 내걸리고 사체가 방부처리돼 천안문광장에 영구전시되고 있는 모택동과는 달리,등은 사망후 곧바로 화장돼 재가 바다 위에 뿌려졌고 중국전역에 그를 위한 기념관 또한 하나도 없다.여러 정황으로 봐서 개혁개방의 정신은 계승하되,모와는 달리 중국에서 등을 개인숭배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고 있는 셈이다.
  • “김대중 당선자가 제의한 6국 평화공동선언 지지”

    ◎강택민 주석 밝혀 【베이징=정종석·박대출 특파원】 강택민 중국국가주석은 11일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당선자가 제시한 남북한 당사국과 중국·미국·일본·러시아등 주변 4개국의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한 ‘6개국 공동선언’구상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강 주석은 이날 상오 중국공산당 초청으로 방중한 김종필 자민련명예총재의 예방을 받고,1시간55분동안 한반도문제 등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김 당선자의 대북 3원칙과 6개국 공동선언 구상에 대해 설명을 듣고 이같은 입장을 표시했다고 김 명예총재가 전했다. 김 명예총재는 예방이 끝난 뒤 북경주재 한국특파원들과 오찬간담회를 갖고 강 주석이 “중국은 한 민족인 남북한이 평화공존하며 잘 지내고 각자가 자기나라를 잘 건설하기를 희망한다.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유지를 위해 좋은일이라면 언제나 적극적인 대화에 나설 것”이라며 “김당선자의 생각과 방식이 좋다고 생각하며 중국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성심껏 하겠다”고 회답했다고 전했다. 김 명예총재는 강주석이 한반도안정을 위한 대북 영향력 행사문제와 관련,“대국주의를 지양하는 중국은 남의 나라 일에 이래라 저래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며 “중국으로서는 남북한 양쪽과 모두 우방으로 지내려 하며 한반도 안정과 평화를 위해 불리한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김 명예총재는 이 자리에서 김 당선자의 친서를 강 주석에게 전달,강 주석이 편리할 때 언제든지 한국을 방문해줄 것을 요청했고 강 주석도 김 당선자의 중국방문을 초청했다. 김 명예총재는 이날 3박4일 동안의 방중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 남·북 관계개선 중 협력 당부/김종필 명예총재

    【베이징=박대출 기자】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는 중국 공식방문 이틀째인 9일 “우리는 머지않아 평양에,미국과 일본의 외교공관이 설치되도록 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김명예총재는 이날 중국공산당 인민대회당에서 호금도 중앙정치국상무위원과 만찬회동을 갖는 자리에서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는 북한에 대해 무력불사용과 공작적 차원의 북한 흡수통일 반대,동질성 확인 등 세가지 원칙을 전제로 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김명예총재는 이어 “우리 위치는 남북통일을 해낼 수 있는 단계가 아니라 남북간 평화공존아래 신뢰 회복과 동질성을 확인해야 하는 단계”라며 중국측의 협력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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