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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사 중국의 한국전개입:5·끝

    ◎북경자료 분석통한 진겸교수의 추적/“장기전에 대비하라”…모,인해전술 지시/80만 병력 3조로 나눠 교대 투입/유엔 총공세에 12개군 지리멸멸/미의 휴전안 소 통해 전달받고 무력적화 포기 모택동은 중국지원군을 3개조로 나누어 교대로 한국전에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스탈린에게 전달했다. 유엔군을 상대로 조기승리를 거두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장기전에 대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모는 승리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는 않았다. 스탈린 앞으로 보낸 전문에서 모는 『앞으로 몇년이 걸리더라도 미군수십만명의 목숨을 빼앗아 승리를 거두겠다』고 다짐했다. 51년 3월중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팽덕회는 4월6일 중국지원군 당위원회확대회의를 소집,『단기전을 수행하되 장기전에도 대비하라』는 모의 교시를 전달했다. 팽은 이 자리에서 51년중 60만의 병력이 추가징발될 것이며 군사문제가 국가의 최우선과제가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유엔군은 중국군의 추가병력이 도착한 4월중순까지 반격을 계속,3월중순 서울을 재탈환하고 전선을 38도선으로 옮겨갔다.맥아더장군은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짓기 위해 중국본토를 공격할 것을 워싱턴에 건의했다. 그러나 트루먼대통령은 유엔군이 38도선으로 진격하자 전쟁을 그쯤에서 끝낼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의견차 때문에 트루먼대통령은 4월11일 맥아더장군을 유엔군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후임에 리지웨이장군을 임명했다. 미국이 전전 영토를 회복하는 것으로 전쟁의 목표를 줄여잡은 것과는 달리 중국은 완전한 승리의 욕심을 여전히 버리지 않고 있었다. 51년3월 중국군 제3,9,19군단이 지원군으로 도착하자 팽덕회는 제5차공세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4월6일 중국군당위원회에서 팽덕회는 총반격작전 개시일을 4월20일경으로 잡았다. 팽은 이때 미군이 북한지역의 동서해안에서 상륙작전을 개시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가졌으나 기선을 잡기 위해서 공격날짜를 서둘렀다. 중국군 사령부는 이 5차공세를 공격의 주도권을 회복하고 전쟁을 완결짓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5차공세는 4월22일밤 시작됐다. 유엔군 주방어군인 미제24,25사단을 일시에 포위,섬멸하고 서울을 재점령한다는 목표하에 북한인민군 제1군을 포함,총12개군의 대규모 병력이 작전에 투입됐다. 그러나 작전은 예상보다 어렵게 진행됐고 서울공격에 나섰던 제64,65군은 유엔군의 공습·포공격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모택동은 그러나 5차공세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번에는 서울을 공격하는 척하다가 병력을 돌려 동부전선을 칠 계획을 세웠다. 5월16일 재차공격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한국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으나 역시 대대단위 이상의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조금씩 남하하다가 5월21일 공격을 멈추고 말았다. 이틀 후인 5월23일 새벽 유엔군이 총반격에 나서자 중공군은 허겁지겁 퇴각하다 제60군 예하 1백80사단이 전멸하는등 「한국전 기간중 최대의 피해」를 입은채 5차공세를 실패로 끝냈다. 모택동도 마침내 완전한 승리 대신 휴전을 수락할 뜻을 비추기 시작했고 동시에 미국도 종전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미국무부는 당시 프린스턴대 교수로 국무부 고문이던 조지 캐넌을 유엔 주재 소연대사 야코프 말리크와 만나도록 주선,두사람은 5월31일 롱아일랜드에 있는 말리크의 관저에서 만났다. 캐넌은 전전경계선을 유지하는 선에서 협상을 통해 한국전을 끝내고 싶다는 미국정부의 뜻을 밝혔고 소연정부는 이를 즉시 중국측에 전달했다. 이 메시지를 받은 모택동은 6월초 북경으로 김일성을 불러 대응방안을 협의했다. 양자는 전전영토보장과 한반도 주둔 외국군대의 점진적인 철수를 약속한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51년6월23일 말리크소대사는 공식적으로 휴전을 제의했고 중국이 이에 동의했다. 이어 7월10일 중국·북한대표와 유엔군측 대표가 개성에서 첫대좌를 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휴전협정조인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2년의 세월이 걸렸다. 중국이 무력승리 정책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중국의 한국전참전 배경을 설명하면서 유엔군이 압록강을 넘어 중국땅으로 진격해 들어올 것에 대한 안보적 불안감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모택동과 중국지도부가 갖고 있던 공산혁명 이데올로기가 보다 중요한 동기였음을 지적하고 싶다. 모는 한국전을 아시아공산혁명의 한 단계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모는 중국이 한국에서 미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는 것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국제적 의무」로 생각했다. 이러한 혁명논리가 동원될 때 비로소 모가 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기 전부터 한국전참전준비를 했고,왜 그렇게 무모하게 뛰어들었는가가 보다 분명하게 해명된다. 한국전참전을 통해 중국은 군사전략과 외교면 등에서 몇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 현대전에서 무기·병참 등의 열세 속에서는 절대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가 원자탄 개발에 착수하게 된 것도 이와 관계가 있다.둘째 소연이 공군지원을 하겠다던 당초약속을 어긴 것은 그뒤로 모가 소연을 불신케 된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국은 한국전에서의 패배로 그때까지 추구해온 아시아혁명전략을 전면 재조정하지 않을수 없게 됐다.
  • 80일만에 37도선돌파…병참선 재정비(비사 중국의 한국전개입:4)

    ◎북경자료 분석 통한 진겸 교수의 추적/보급난 간파한 유엔군,대대적 기습 반격전/“한강이남 포기… 휴전 모색” 건의에 모가 반대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기 앞서 김일성은 12월초 비밀리에 북경으로 가 모택동을 만났다.두 사람은 이자리에서 중국·북한군 통합사령부를 창설키로 합의했고 팽덕회가 총사령관겸 정치장교로 임명됐다. 팽덕회는 공세작전의 성패는 병참에 달렸다고 판단,즉시 수송 및 보급망 개선에 주력했다.이와함께 중공당중앙군사위는 국공내전참전 용사 8만4천명을 추가동원하고 인민해방군 제19군단에 대해서도 51년3월까지 춘계대공세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공군의 3차공세는 50년12월31일 시작됐다.초기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돼 이듬해 정월 2일까지 중·북한합동군은 유엔군 방어선을 15∼20㎞정도 밀고 내려갔다.중국지원군 38군과 조선인민군 1군은 서울과 인천을 향해 진격했고 중국군 42군은 인민군 제2,제5군의 지원을 받아 홍천,횡성으로 밀고들어갔다. 이들은 1월4일 서울을 함락하고 1월8일에는 37도선까지 밀고내려갔다.그쯤에서 팽덕회는 전황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보급선이 너무 길어져 중공군들이 엄청난 곤경을 겪고있었기 때문이다.팽은 유엔군이 비록 후퇴를 거듭하고 있지만 전력의 우위와 반격능력을 갖고 있다고 판단,공격작전을 중지하고 현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전전선에 시달했다. 1월8일 중공군사령부는 「조정기 중 우리의 할일」이라는 지침을 각급부대에 하달,차기 공세에 대비할 것을 명령했다.팽은 공격중지로 유엔군이 반격할 여유를 얻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았지만 단시일내에 반격해오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택동은 팽의 건의대로 공격중지를 허락했지만 미군에게 반격능력이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51년1월14일 모는 팽앞으로 보낸 전문에서 미군은 최악의 경우 부산·대구지역에서 대규모 저항을 할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한국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월25일 중·북한군지도부는 춘계대공세를 위한 합동작전회의를 개최했다.같은날 유엔군은 김포,인천지역에서 대규모 반격작전에 나섰다.미8군사령관 월튼 워커장군이 불의의 자동차사고로 사망함에 따라 매튜 리지웨이장군이 대신 작전지휘를 맡았다.리지웨이장군은 중공군의 작전수행능력이 물자,전투장비의 보급난 때문에 1주일 단위로 제한돼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리지웨이장군은 유엔군이 화력·기동성·보급면에서 앞서기 때문에 최단시간내 공세로 국면전환이 가능하다고 보고 반격작전에 나섰다.갑작스런 반격에 당황한 중·북한 합동군사령부는 춘계공세계획을 일단 중지하고 유엔군 저지에 나섰다. 1월27일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내 미군의 작전목표가 『중국군을 한강 이북으로 밀어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탄약,식량의 부족 때문에 3월말까지는 이들의 공격을 저지하기가 힘들다고 보고했다.이와함께 팽은 『정치적으로 가능하다면』한강 이남지역을 포기하고 적당한 시점에서 휴전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했다. 그러나 모는 1월28일 저녁 팽에게 전문을 보내 반격할 것을 명했다.모는 이 전문에서 ▲4차공세의 목표는 미군과 이승만정권을 몰아내고 대전과 안동 이북을 점령하는 것▲중국군이 보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주공격을 원주·홍천방면에 집중시킬 경우 충분히 승산이 있고▲대전·안동이북을 차지하면 일단 2∼3개월 힘을 모은 뒤 마지막 5차공세로 전쟁을 끝낸다는 것을 재차 강조했다. 팽은 다음날 중·북한군 합동작전회의에서 모의 뜻을 전달하고 반격작전을 개시하기 위한 작전계획을 수립했다.전세로 보아 전면반격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동부전선에선 현위치를 고수하고 서부전선에서만 공세를 취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서부의 중국지원군 제50군과 38군예하 1백12사단은 현위치를 지키고 제39·40·42·66군은 횡성과 지평리에서 진격해오는 유엔군을 공격하도록 했다.동시에 북한인민군 제2군과 제5군은 평창에서 한국군 제7사단을 공격,남진활로를 뚫도록 했다. 전면공격을 요구한 모의 지시에 크게 미흡한 작전계획이었지만 팽은 사실 이 정도도 무리라고 생각했다.1월31일 팽은 모에게 전문을 보내 현시점에서 반격을 개시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강조했다.팽은 중국병사들이 식량·탄약·신발보급을 제대로 못받아 『눈길을 맨발로 걸어야 할』형편이라고 밝혔다.팽은 2월12일을 공격개시일로 잡았음을 알리고 이번 작전이 실패하면 한국전 전반에서 상황이 불리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공군의 반격은 2월 11일 횡성·원주지역에서 시작됐다.작전초기 한국군 제8사단을 상대로 잠시 승리를 거둔 중공군은 미제2사단의 우세한 탱크·포 화력앞에 많은 전사자를 내고 결국 지평리에서 공격을 멈추고 말았다.중·북한 합동군사령부는 37도선북쪽과 38도선 이남의 두곳에 방어선을 치고 둘 중 한곳에서만이라도 유엔군의 북상을 막아보려고 했다.그리고 팽덕회는 북경으로 가 3월말까지 머물며 모와 향후전략을 숙의했다. 팽의 보고를 받고 한국전에 대한 모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모는 3월1일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에서 1년안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당초의 생각을 바꿔 전쟁이 2년 정도 더 끌 것같다고 밝혔다. 모는 중국군이 심각한 병참문제에 시달리고 있고 단위부대 병력충원에 1개월 이상씩 걸린다고 말하고 『38도선 이북을 다시 적에게 내줄 가능성이높다』고 실토했다.이러한 난국을 벗어나기 위해 모는 마침내 전략상의 일대 수정을 가할 것을 결심했다. 그것은 바로 장기전에 대비,총병력을 3개조로 나눠 교대로 전선에 투입한다는 전략이었다.
  • 유엔군 평양점령…중공군,압록강 도강(비사 중국의 한국전개입:3)

    ◎북경자료 분석 통한 진겸 교수(미 뉴욕 주립대)의 추적/방어진지 갖출 시간 없어 기습공격 감행/국경전투 12일… 전선은 청천강으로 남하/초기 두 차례 전과에 들뜬 모택동,“38선 돌파하라” 명령 소련의 공군지원을 받지 못하게 됐기 때문에 중국은 당초 세운 전쟁목표의 축소조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10월14일 모택동은 주은래 앞으로 전문을 보내 한국전에 개입하되 방어자세를 유지하라는 초기작전 지침을 시달했다. 평양·원산 북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향후 공격작전에 대비하라는 것이었다. 소련이 공군지원에 대한 약속위반을 함에 따라 중국지도부는 소련과의 동맹관계에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됐고 중·소 분쟁의 씨앗은 결국 이때 뿌려진 것이다. 중국군의 독자참전 결정이 내려지자 팽덕회는 즉시 심양으로 돌아가 10월14일 인민지원군,동북인민해방군,동북지구당의 고위간부들을 불러 모아놓고 이같은 당의 결정을 통보했다. 10월19일 중국군은 마침내 압록강을 넘어 한국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하루 전날인 19일 팽덕회는 미리 북한으로 가 10월20일 아침 김일성·박헌영을 함께 만났다. 팽은 이 자리에서 소련군의 공군지원이 없더라도 반드시 적을 섬멸해 한반도의 혁명을 완결짓겠다는 중국지도부의 의지를 전달했다.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은 바로 그날 유엔군은 평양을 점령했다. 유엔군 선봉대는 각 방면에서 한·중 국경 30∼40마일 전방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중국군은 한국진입 즉시 방어진지를 구축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유엔군이 너무 빠른 속도로 진격해 들어왔기 때문에 방어진지를 갖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인 팽덕회는 유엔군 선봉대의 북진작전이 너무 서둘러 진행됐다는 점에 착안,10월21일 이들을 기습공격하겠다는 뜻을 당중앙군사위에 보고했다. 같은날 모는 답신을 보내 『당분간 방어진지 구축을 보류하고 공격준비를 갖춰 수일내 공격을 시작하라』고 팽의 건의를 수락했다. 팽은 적을 깊숙히 유인해 후면·측면을 친다는 전략을 세우고 2개군의 추가병력 파병을 당중앙군사위에 요청했다. 한국내 전중국지원군에게는 명령이 있기 전에 유엔군과의 교전은 피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동부전선에 2개 사단,서부전선에 5개군이 집중배치됐다. 중국군의 이 기습공격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10월25일 중국지원군 제40군 휘하 118사단이 운산지역에 진격한 한국군에게 첫 공격을 개시한 지 12일 만에 한국군은 압록강에서 청천강까지 후퇴했다. 중국측 자료에 따르면 이 첫 공세에서 한국군은 1만5천명의 전사자를 냈다. 맥아더 장군은 이같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중국군의 전력을 여전히 과소평가하고 추가공세를 취했다. 반대로 중국군은 30㎞를 다시 후퇴한 뒤 방어대형을 갖추고 계속 유인작전을 썼다. 11월25,27일 유엔군이 마침내 「덫이 놓인」 지점까지 진격해 들어오자 중국군은 동부·서부전선에서 동시에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공세에 당황한 유엔군은 치욕스런 패주를 거듭했고 12월5일 평양이 다시 북한군 수중에 넘어갔다. 12월 중순에는 북한영토 거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두 차례의 공세에서 성공을 거두자 모는 적을 완전 궤멸시켜 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낸다는 당초의 목표가 달성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적의 핵심전력은 건재했고 모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는 두 차례의 패배를 당한 미국이 휴전을 제의해 올 것이라는 계산을 했다. 모는 휴전에 앞서 미군을 38선 이남으로 패퇴시키고 서울을 수중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는 중요한 시기에 사태를 너무 낙관적으로 보았다. 전선총사령관으로서 팽덕회는 보다 신중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 팽은 초기공세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중국지원군이 안고 있는 몇 가지 취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첫째 2개월간의 공세결과 중국군의 전력이 크게 약화됐고 둘째 유엔군의 핵심전력이 건재하고 셋째로 미·영이 절대로 한국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그는 생각했다. 팽은 이 시점에서 38선을 넘기보다는 본국으로부터 추가 보급지원을 받고 전략위치를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팽은 자신의 견해를 솔직하게 모에게 보고하고 조기승리보다는 장기전에 대비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모는 사태를 군사적인 현실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보려고 했다. 그는 38선이 갖는 상징적인 경계선의 의미를 허물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는 12월21일 팽 앞으로 전문을 보내 『미·영은 38선 앞에서 휴전을 맺자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인위적인 경계선에 현혹되지 말고 끝까지 밀어붙이라』고 말했다. 본토 내전을 수행할 때도 그랬지만 모는 군사적인 고려와 정치적 목적이 서로 상충될 경우 항상 정치적 고려를 우선시키는 사람이었다. 팽덕회는 모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최고결정권자는 모였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팽은 모의 지시를 따라 3차공세 작전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팽은 38선을 따라 배치된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북한군 3개군과 중국지원군 6개군을 집중 투입시켰다. 임진강 동안에서 북한강 서안에 이르는 지역에 배치된 한국군 제8,6,2사단과 5사단 일부를 궤멸시키는 것을 주작전목표로 설정했다. 작전이 계획대로 진행될 경우 일거에 서울과 그 외곽도시들을 점령하고 다시 힘을 축적해 51년 봄 마지막 공세를 감행,전쟁을 끝낸다는 계산이었다.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내가 겪은 6·25」 하

    ◎혹한속 중공군 6개 사단의 포위 돌파/평양서 재편성… 「인해전술」과 싸우며 남하/51년 7월 대대장으로… 금성·금화서 공방전/저격능선 「고지쟁탈」 전투중 미 유학 명령 1950년 10월28일 하오 6시45분.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여서 벌써 어둠이 깔렸다. 제7연대 제1중대는 5대의 트럭에 분승,주둔지인 압록강변을 떠나 초산읍으로 철수했다. 다음날인 29일 새벽 5시쯤 제1대대 수색대를 태운 군용차 한 대가 초산읍에서 다시 남쪽을 향하여 떠났다. 제1대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북한공산군의 출몰이 염려되는 구용동 남쪽 고개를 수색·점령·확보하기 위해 먼저 떠난 것이다. 그날 아침 6시30분쯤 제7연대 제1대대는 군용트럭을 타고 초산읍을 출발,남쪽으로 내려가 고장에서 연대본부와 합류했다. 이때 중공군은 고장 남쪽에 있는 풍장 일대에서 아군이 남하하는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제2대대와 제3대대는 이들 중공군을 일제히 공격,돌파작전을 개시했다. 우리 공군 전폭기들이 중공군 진지를 강타하면서 제7연대의 돌파작전을 근접지원해주었다. 중공군은 남으로 좀 밀려나는 듯했으나 그들의 두꺼운 포위망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달이 없는 어두운 밤이 됐다. 지형은 폭이 50∼1백50m 가량 되는 좁은 계곡이 길게 남북으로 놓여 있고 계곡 양쪽의 산줄기들은 가파르고 높았다. 이날 밤 12시 정각,중공군은 야간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의 야간전투는 혀를 찰 만큼 아주 능숙했다. 얼마 안가서 제7연대의 전방부대가 무너지고,전방에서 흩어진 연대병력은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도로를 따라 북쪽을 향하여 달아나고 있었다. 후방으로 멀리 떨어져서 재편성을 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방에서는 이미 다른 중공군 부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숨 돌릴 새없이 달려들었다. 재차 흩어져서 다시 더 먼 후방으로 달려가 보아도 그곳에서도 전황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 제7연대는 중공군 제40군예하 1개 사단과의 첫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다. 중공군은 우선 병력면에서도 우리 제7연대의 약 3배나 됐다. 군용트럭 수백 대와 사단포병 야포 6문,대전차포,기타보급품을 버린 채 제7연대는 낭림산맥의 지맥인 유령산맥 깊은 산중으로 이리저리 흩어져 들어갔다. 중공군은 이 분산병력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악착같이 우리 부대를 추격하며 남쪽으로 통하는 길목을 모두 차단하고 있었다. 중공군과의 싸움에 들어가기 전 필자의 지휘하에 있던 병력은 제1중대원 약 1백60명,배속된 중기관총반원 약 10명,귀순 동화된 북한공산군 포로 남녀 약 25명,간호학생 2명,한국청년단원 약 10명 등 모두 2백명이 넘었으며 이 중 여자 등 비무장인원을 제외한 전투가능 인원은 약 1백85명 정도였다. 필자는 이 전투가능병력 중에서 약 60명을 잃은 채 잔여인원을 이끌고 유령산맥으로 들어갔다. 높은 산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그곳은 벌써 깊은 겨울이어서 뜯어 먹을 풀조차 없었다. 중공군을 만나면 싸우기도 하고 피해 달아나기도 하면서 남으로 남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포위망을 계속해서 뚫어봐도 눈에 보이는 것은 중공군뿐이고 아군은 도대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중공군과 만나 교전이 이루어질때마다 아군의 병력은 자꾸 줄어만 들었다. 중공군 6개 사단의 포위망을 뚫는 데서 우리 제7연대의 인명피해는 엄청났다. 당시 제7연대에는 8명의 영관급 장교가 있었는데 이 중 6명의 손실이 있었다. 부연대장 최영수 중령,제2대대장 김종수 중령,제1대대 부대대장 조현묵 소령,연대정보주임 김재강 소령 등 4명은 포로가 됐고 제3대대장 조한섭 소령은 전사했으며 연대작전주임 조윤재 소령은 무참히 학살당했다. 포위망을 뚫고 용케도 살아나온 사람은 연대장 임부택 대령과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 두 사람 뿐이었다. 그러나 김용배 중령은 그후 전사했다. 더욱이 장병들의 손실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내가 덕천지방 동쪽 송정리에서 대동강을 건너 남중리의 적군과 최후의 교전을 갖고 포위망을 뚫은 뒤 제6사단 사령부에 도착,사단장 장도영 준장에게 신고를 한 것은 그해 11월9일 오후 3시경이었다. 나는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나와 사단장에게 첫번째로 신고식을 갖는 장교가 된 것이다. 군악이 울려 퍼졌다. 군인 20명을 3렬 횡대로 하여 세워놓고 마지막에 서울적십자병원 간호학생 2명을 세웠다. 중대장인 나는 3렬횡대의 6보 앞 중앙에 섰다. 나는 사단장에게 다음과 같이 신고했다. 『경례! 바로! 제7연대 제1중대장,이대용 대위는 적포위망을 돌파하고 사병 20명,민간인 간호학생 2명을 지휘하여 1950년 11월9일 사단사령부에 도착했기에 이에 삼가 신고합니다. 경례! 바로!』 사단장의 위로와 격려사가 있었다. 군예대 여자 가수가 나의 목에 하늘색 머플러를 걸어주었다. 사단사령부에서 할당해주는 민중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서울적십자병원 간호학생 박태숙·정정훈양에게 하사관 1명을 딸려 서울로 떠나 보냈다. 깨끗이 보호하고 온 처녀들이 도중에서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든든한 하사관을 경호원으로 배정,서울까지 가게 한 것이다. 11월22일까지 제7연대장 임부택 대령과 김용배 중령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왔고 후방에서 신병들과 육군종합학교 출신 신임 소위들이 보충돼 제7연대는 11월25일 재편성을 했다. 병력숫자로는 제7연대가 제대로 모습을 갖춘 셈이었다. 재편성이 끝나기가 바쁘게 제7연대는 덕천 남쪽 북창으로 이동하여 중공군과 대결하게 됐다. 북창과 가창 사이에 있는 미럭고개에서 큰 접전이 벌어졌으나 신병들인 아군이 중공군의 공격을 견뎌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공군의 진격은 계속되었고 우리 제7연대는 평양 상원 서흥 시변리 삭녕 전곡을 거쳐 다시 38선에 배치되었다. 북한공산군이 남침한 1950년도 저물어 갔다. 그해 12월31일 밤이었다.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린 제7연대 제1중대는 동두천 의정부를 거쳐 서울 북방 창동에 배치되었다. 해를 넘겨 1951년 1월6일 경기도 광주를 거쳐 백암리로 가는 도중에 나는 제1대대 부대대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대대장 대리로 제1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영하의 매서운 바람이 살을 에듯이 불어댔다. 1·4후퇴라고 일컬어지는 설상의 피란민대열이 남으로 남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중공군도 각종 보급품들이 달리고 장티푸스까지 만연하자 지칠 대로 지친 모양이다. 중공군은 양지리 북쪽에서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제7연대는 그동안 중공군과 싸우면서도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처음엔 대단한 적군으로 생각했으나 나중에 알고보니 그들도 별것이 아니었다. 절대로 불패의 군대가 아니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그들과 싸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약 2개월간 제1대대를 지휘하고 나서 대대장이 새로 부임함에 따라 부대대장 직책을 수행하게 되었다. 용문산지구 전투,춘천지구 전투,구만리지구 전투,풍산리지구 전투,백암리지구 전투를 끝으로 나는 그해 7월9일 제7연대를 떠나 제2사단 제32연대 제1대대장으로 부임했다. 같은 해 10월27일에는 제32연대 제3대대장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금화지구 파조봉­이실골 전투,금성지구 전투를 하면서 제32연대 제3대대는 금성 바로 앞산인 424고지까지 1개 소대를 진출시켰다. 여기서 중공군과 매일같이 폭격전과 수색전으로 투덕거리며 한겨울을 보냈다. 미군과 교대하고 금화 쪽으로 빠져나왔다. 제32연대는 제3대대는 금화 동북방에 있는 저격능선에 배치됐고 한국군에도 임시계급제도가 도입되어 일선 보병대대장들에게는 1952년 3월부터 모두 육군중령 계급이 부여됐다. 저격능선은 지형상 항상 긴장상태에서 적과 공방임무를 수행해야 했달. 그러던 중 나는 미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2년여의 전진을 씻고 부산항에서 미국행 군용수송선을 탄 것이 1952년 9월2일이다. 이때의 군복은 카키색 군복이고 모자도 카키색 군모였다. 6·25가 일어났을 때,내가 춘천도서관으로 가던 때의 군복도 카키색 군복,모자도 카키색 군모였다. 카키색 군복으로 맞이한 나의 6·25는 카키색 군복으로 막을 내렸다.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내가 겪은 6·25」중

    ◎낙동강서 대반격… 두달 뒤 압록강 진격/“남북통일 축원” 강물 담은 수통 이 대통령에/국경 도착 이틀 만에 “중공군 침입”… 후퇴 명령 1950년 6월28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을 개시한 지 불과 4일 만에 수도 서울은 적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공산군은 빠른 속도로 남으로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무방비상태의 국군은 후퇴를 거듭해야만 했다. 서부전선의 아군 방어선을 조정하기 위해 중부전선의 제6사단을 남으로 철수시키는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은 계속해서 하달되고 있었다. 내가 지휘하는 제7연대 제1중대는 홍천의 삼마치고개,원주의 신림고개에서 남진하는 북한 공산군을 맞아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의 장갑차 5대를 파괴하거나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저들의 뛰어난 화력에는 어쩔 수 없었기에 결국 7월4일에는 전국과 멀리 떨어진 충주로 이동해야 했다. 우리가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피란민들의 행렬은 홍수를 이루며 지나갔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제7연대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이렇게 탄식했다. 『군인된 몸으로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군. 우리 연대 작전과에 있던 여자 타자수가 조금 전에 이 앞을 지나갔어. 춘천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모양이야. 그래도 짐보따리를 짊어지고 있어 정말 피란민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군. 그저 죄송할 따름이야』 그의 얼굴 표정은 군인의 국가에 대한 책임,국민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충주농업학교 교실에서 하룻밤을 지낸 나는 7월5일 아침 일찍이 제1대대 제1중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하여 음성으로 이동했다. 기름고개를 향하여 북쪽으로 전진하던 중 마침 북쪽에서 내려오던 북한 공산군과 조우하게 됐다. 전투가 시작됐다. 아군의 사기는 그런대로 중천하여 그들을 격파했다. 기름고개를 넘어서자 적군이 줄지어 다가왔다. 우리 부대는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해 적 대부대를 깨끗이 섬멸하고 계속 전진했다. 이때 나는 적탄에 맞고 쓰러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 몸 아홉군데에 총알이 박혔다. 중상중에 중상을 입은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살아났나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헐렁한 팬츠 하나만 걸친 채 담요에 둘둘 싸여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워낙 부상이 심해 결국 부산에 있는 제5육군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 4층에 있는 중환자실에 눕혀졌다. 대소변도 받아내는 형편이었다. 의정부가 고향이라는 간호장교 최 소위가 이를 맡아 해냈다. 입원 3일 만에 군의관 이경룡 대위의 집도로 수술이 시작됐다. 내 몸에 박힌 직사 포탄조각을 여러 개 빼냈다. 수술 후의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했다. 그때마다 간호장교 최 소위는 지극한 정성으로 나를 돌봤다. 고맙기 그지없었다. 나이팅게일의 정신이 아무리 투철하다 해도 최 소위의 헌신은 참으로 감사했다. 먼훗날 그녀가 수녀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까닭없이 그리고 한없이 가슴에 와닿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내가 제5육군병원을 떠난 것은 입원한 지 달포가 더 지난 8월24일이었다. 다시 나는 제7연대 제1대대 후방지휘소로 갔다. 8월26일 저녁 제6사단 지휘소에는 적의 박격포탄이 비오듯 날아왔다. 신령역 부근에도 적의 박격포탄이 무수히 떨어졌다. 북한 공산당이 낙동강 교두보의 일각을 뚫고 화산 일대를 점령한 뒤 퍼붓는 포탄들이었다. 제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제7연대 제1대대를 연대에서 빼내 사단직할로 하여 화산의 적을 공격케 했다. 이때 나는 제7연대 제1중대장으로 복귀하여 화산지구 탈환임무를 맡았다. 제1중대장으로 복귀해보니 내가 병원에 있었던 50여 일 동안에 중대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내가 부상을 당할 때 함께 적군과 싸웠던 소대장들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1소대장 한도선 중위는 내가 제1중대를 떠나자 나의 후임이 되어 중대를 지휘했으나 문경새재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임으로 제2소대장 강구석 중위가 중대장이 되었으나 그는 곧 부상을 입어 후방으로 빠져나갔고 다시 그 후임으로 제3소대장 손종구 소위는 낙동강전투에서 가슴에 적탄을 맞고 후송 도중 숨을 거뒀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제1중대에 장교가 한 명도 없어서 중대 선임하사관 이한직 상사가 중대장대행이 되어 부대를 지휘,전투를 했으나 또한 낙동강전투에서 전사했다. 다시 그 후임으로 제1중대장에 부임한 도진환소위는 내가 중대장으로 복귀하면서 제1소대장이 되었으나 며칠 후 화산전투에서 전사했다. 2개월도 채 안 되는 기간중에 제7연대 제1중대는 4명의 중대장이 전사하고 1명의 중대장이 중상을 입는 손실을 가져왔다. 세계 전쟁 역사상 불과 2개월 동안에 4명의 중대장이 전사한 예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1개 중대에서 중대장들의 소모가 이렇게 격심했으나 사병들의 소모는 말할 수 없이 대단했다. 이는 또 한국전쟁 기간중 가장 치열했던 격전기간은 1950년 6월부터 그해 9월 중순까지의 기간이었음을 입증해주는 전사자 통계숫자의 일부이기도 하다. 화산 옛 성터 일대에서 숨박히는 격전 끝에 우리는 북진을 시작했다. 문경 원주 홍천 춘천 화천 김화 평강 복계 세포 회양 원산 양덕 성천 순천 개천 희천 회목동 고장 초산을 거쳐 압록강변 신도장마을에 우리 제1중대를 선두로 제7연대 제1대대가 도착한 것은 1950년 10월26일 하오 2시15분이었다. 만주에 연결된 뗏목다리 위에는 수백 명의 피란민들이 가득히 차 있었다. 이미 만주로 건너간 수백 명은 줄지어 중국 마을 통천구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초산읍에 본부를 두고 재편을 시도하던 북한 공산군 제8사단은 사단장 오백룡 지휘하에 주로 위원읍 방향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모두 만주땅을 바라보면서 감개무량해했다.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의 지시로 나는 남북통일을 축원하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떴다. 그리고 제1대대에 배속되어 있는 57㎜ 대전차포 철갑탄으로 만주와 연결되어 있는 뗏목다리를 끊어버렸다. 강물에 군화를 적시고 손도 씻다가 하오 4시경 압록강에 먼저 도착한 제1중대를 제외하고 제1대대 전병력은 약 10리 서남쪽에 있는 초산읍으로 내려갔다. 나는 이장원 소위가 지휘하는 제1소대를 신도장분주소(경찰지서) 일대에 배치하여 위원읍으로 통하는 자동차도로를 차단한 뒤 만주로 건너가는 뗏목다리를 화력으로 엄호케 했다. 김덕출 소위가 지휘하는 제2소대는 제1소대 좌일선에 연결하여 강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며 강기슭에 길게 배치하고 박상호 상사가 지휘하는 제3소대는 제2소대에 연결되어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며 강 기슭에 배치했다. 중대 선임장교 직책을 겸하고 있는 서근석 소위의 화기소대 본부와 제1중대 본부는 제2소대지역내에 위치시켰다. 결국 제7연대 제1중대는 강건너 중국대륙을 바라보며 약 1천6백m에 달하는 거리에 늘어서서 국경 경비임무에 들어갔다. 1910년 8월29일. 격변하는 세계정세에는 눈을 감은 채 나라 안에서만 우물 안 개구리처럼 권력싸움에 눈이 멀던 우리 조상들. 병들고 무력해질 대로 무력해진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왜놈들에게 나라를 뺏기고 국경 경비의 권리를 그들에게 넘겨준 35년간,그 후 남북한 화합을 못 하고 이념의 갈등을 겪으면서 국토가 양단되어 5년,통틀어 40년의 세월을 한을 안은 채 고통 속에서 지내야만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통의 족쇄가 풀리는 첫날이다. 남북을 통일한 배달의 남아들이 압록강 국경선에서 타국땅을 바라보며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가슴은 감격에 벅찰 수밖에 없었다. 고요한 국경선에서 또 하룻밤을 자고 나니10월28일이 되었다. 이날 하오 5시경 초산읍에 있는 제1대대 본부로부터 제1중대에 다음과 같은 청천벽력과 같은 작전명령이 하달됐다. 『온정일대에서 제2연대가 중국군에게 패하여 후퇴중에 있다. 이를 구출하기 위하여 제1대대는 연대의 일부로서 온정으로 남하한다. 제1중대는 10월28일 하오 7시 초산읍에 집결하라』
  • 「6·25비화」 소 외교연 학자 본지 특별기고

    ◎“북침으로 꾸며라”… 스탈린,6개항 지침 시달/미 개입에 당황… “정면대결 피하라”/중국 파병따라 공군력 지원약속/「중국공산화」 미서 방관하자 남침 결심/종국엔 북한정권 지키기에 급급… 소,휴전 뒤 재도발 우려해 김일성 감시 서울신문은 6·25 41주년을 맞아 소련 외무부 산하 외교아카데미의 B 발레노프 박사(역사학·필명)가 특별기고한 「6·25는 스탈린의 작품」을 게재한다. 발레노프 박사는 외교아카데미의 최고급 간부 중의 한사람으로 중국문제와 한반도문제에 대한 소련내 최고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비밀문서들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활용,지금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는 외무부 보관자료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장 극비문서 등을 토대로 한국전 발발 배경과 책임소재 등을 규명했다. 발레노프 박사는 자신이 남북한 관계에서 운신의 폭이 넓지 않은 현역 외무부 관리신분임을 감안,필명으로 게재할 것을 요청해 왔다. 정확히 41년 전 한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그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뒤 이제 오랜 시간이 지났고 세계는 엄청나게 변했다. 소련은 그동안 이념적,정치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고 강대국들이 「냉전종식」을 선언했다.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변했는데도 한국전쟁의 진짜 비극의 역사는 여전히 숨겨진 채로 남아 있다. 소련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N 아닌이 밝혀낸 새로운 자료를 비롯,최근 필자가 어렵게 입수한 극비문서들은 비록 단편적이나마 어떻게 해서 그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됐는지를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45년 소련군과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한 뒤 스탈린은 한국에서 얄타협정과 포츠담협정의 조항들을 위반할 의사가 없었다. 1948년 주은래를 만났을 때도 스탈린은 『중국과 북조선 동지들은 절대 해방전쟁을 서두르지 말라』고 당부했다. 혁명세력의 무력이 결코 우위에 있지 않으며 미국이 개입하면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는 게 스탈린이 내세운 이유였다. 스탈린은 이렇게 모택동의 손발을 묶고 북조선 정부에 대해서도 38도선에서 무력도발을 삼가도록 단단히 지시를 내렸다. 『동유럽에서 제국주의세력과 싸우기에도 벅차다. 소련의 제1관심 지역은 유럽이다』는 게 당시 스탈린의 생각이었다. 스탈린의 이러한 생각은 그러나 1949년 중국공산당이 승리를 차지하자 바뀌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모스크바를 찾아온 모택동과 만난 자리에서 스탈린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그동안 아시아에서 공산혁명세력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했소. 저개발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기 힘들다는 내 생각이 틀렸소』 중국공산당의 승리,동유럽의 공산위성정권 수립과 함께 소련 경제가 꾸준히 성장추세를 보이자 스탈린은 관심을 한반도로 돌리기 시작했다. 북한의 소련대사관과 정보기관들은 한반도에서 혁명에 유리한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정보들을 지속적으로 보내오고 있었다. 『남한 정부는 붕괴 직전에 와 있고 경제는 침체됐으며 사회불안은 통제불능에 빠져 남한인민들은 한결같이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서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정보보고들이었다. 남한 인민들은 북조선에서 전개되는 변화들에 「자석처럼」 이끌리고 있으며 자신들의 비민주적인 정부를 지원하는 미국을 증오하는 반면 소련에 대해서는 최고의 기대감을 품고 있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소련 정보장교들도 한결같이 남조선에서 전개되고 있는 군사·이념적인 상황은 모스크바에서 지시만 내리면 권력을 탈취할 수 있다는 보고들을 울렸다. ○애치슨 성명에 안심 스탈린은 크게 고무돼 조만간 세계,특히 아시아국가들이 소련의 혁명모델을 뒤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서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들에서 혁명이 성공하도록 돕는 것은 소련의 당연한 의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한가지 우려되는 문제는 미국의 대응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중국에서 공산혁명을 수행할 때 미국이 적극 개입치 않았다는 사실에 유의했다. 모택동을 만나서도 그는 이 점을 상기시켜 주었다. 1950년 6월12일 한국은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성명은 스탈린으로서는 뜻밖의 선물이었다. 당시 소련 외무부에서 지도부에 제출한 보고서는 이 성명을 『미국이 한국의 군사분쟁에 무력개입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분석했다. 스탈린은 미국의 대한 의사와 군사능력을 보다 구체적으로 탐색토록 지시했다. 소련의 외교·군사·정보보고들은 남한내 미 군사력이 전혀 우려할 수준이 아니며 그나마 계속 감축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각국에 파견된 첩보원들로부터도 유사한 정보들이 올라왔고 그 가운데는 미 백악관에서 빼낸 정보들도 있었다. 이 정보들은 영국내 첩보원들에 의해 다시 「더블체크」됐다. 당시 영국 외무부와 정보기관의 고위직책에는 소련첩보 조직이 침투해 있었다. 영국정부가 미국정부에게 새로 수립된 중국 공산당정부에 대한 반대입장을 완화하도록 압력을 넣고 있다는 정보도 런던으로부터 보고됐다. 트루먼 행정부내에는 극동지역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사태에도 미국이 무력개입은 하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정보보고들은 한국에서 미국이 어떤 행동,특히 대응 행동을 취할 가능성에 대해서 거의 「제로」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이밖에 소군 지도부는 미국이 이승만 정부를 지켜줄 수 있을 만한 병력을 한국주변에 배치해 놓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유념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이승만의 독재정치를 크게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도 보고받았다. 스탈린의 의중을 어느 정도 감지한 북한 주둔 소군장성들은 김일성과 함께 한국에서 군사도발을 하는 문제에 대해 크렘린이 관심을 갖도록 분위기를 잡아나갔다.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소군사령관들과 김일성은 어느 주석에서 남한 괴뢰정부를 쳐부수자는 데 의기를 투합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계획은 여러 경로를 통해 스탈린의 귀에 들어갔다. 한국을 중국처럼 무력으로 통일시키자는 계획은 1949년말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 때 이미 구체적으로 검토됐고 스탈린은 이듬해 봄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최종결정을 발표하기 전 스탈린은 모택동의 의견을 물었다. 이웃 형제국의 「사회주의 해방운동을 종결짓는 일」에 모택동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전쟁계획이 가동되기 시작했고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전쟁의 주요지침들을 시달했다. 1,전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가 확보돼야한다. 2,소련이 전쟁에 개입됐다는 혐의를 피하기 위해 소군사 고문단은 전선으로부터 철수시킨다. 3,북조선 당국은 적과 세계 여론의 주의를 돌려놓기 위해 전쟁 개시 전 평화공세를 강화한다. 동시에 남한당국과의 그들의 앞잡이인 미국이 전면전쟁을 벌일 목적으로 북조선에 무력도발을 일으켰다는 각종 선전을 강화한다. 4,대남 전면공격을 시작하기 전 국지침투를 감행하고 적의 대응공격을 유보하기 위해 전 전선에서 부분공격을 감행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외부세계에 전쟁이 남측에 의해 도발된 것으로 믿게 하는 효과도 얻는다. 5,전면공격은 불시 기습적이고 가능한 한 신속하게 수행돼야 한다. 6,군대가 38도선을 넘는 즉시 남조선 전역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난다. 남조선내 「혁명진보세력」들은 북조선에서 군대가 당도하기 전에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 ○전전 평화공세 강화 전쟁 개시일인 6월25일 스탈린은 측근 참모들과 함께 자신의 별장(다차)에 앉아 전선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속속 낭보가 날아들자 스탈린은 희색이 만면해 이렇게 말했다.『세계혁명에 관한 레닌 동지의 예언이 현실화되고 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사업의 큰 공훈자들로 기억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각 한국의 마을과 도시들에서는 수많은 남녀,어린이들이 포탄에 맞아 목숨을 잃고 있었다. 한 늙은 독재자의 탐욕과 광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희생된 것이다. 초기 작전은 극히 순조롭게 진행됐고 평양 주재 소련대사관은 한달내에 한반도 전체가 해방될 것이라고 보고해 왔다. 스탈린은 측근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모신 지도자의 위대한 천재성에 새삼 경외심을 가졌다. 스탈린은 한국전에서의 조기승리를 이미 예견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엄청난 사태반전이 일어났다. 그렘린의 예상과 달리 미국이 반격에 나선 것이다. 미의 반격은 매우 효과적으로 진행됐다. 평양의 소련대사관에서 보내오는 전문들은 급전직하 비관적인 내용들로 바뀌었고 외교관들은 공포에 질려있었다. 외부의 도움없이 김일성 군대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판단들이 내려졌다. 스탈린의 측근 참모들은 김일성을 구하기 위해 소련군을 투입시키자는 주장을 계속 내놓았다. 흐루시초프 몰로토프,베리야도 소련군 투입을 지지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소련군이 미군과 맞서 싸울 만한 힘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끝까지 소련투입에 반대했다. 한국전에서의 완전한 패배를 사실상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였다. 바로 이때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중공군이 개입한 것이다.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나서지 않으면 미군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군대를 투입시키기 전 모택동은 주은래를 모스크바로 보내 소군과 중공군을 한국전에 보내자고 스탈린을 설득시키려 했다. 스탈린은 남부 휴양지에 있는 자신의 시골별장에서 주은래를 만났다.그는 주은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잘들으시오,동지. 미군은 우리보다 훨씬 강하오. 만약 우리가 끼어들면 미국은 사회주의 세계 전체를 모두 파괴시키려 들 것이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우리는 이 시점에서 과연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 결정을 내려야 하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할것이지 아니면 소를 지키기 위해 사회주의 세계 전체를 위태롭게 할 것인지』 주은래도 스탈린의 말에 수긍하고 북경으로 돌아갈 채비를 차렸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모택동이 보낸 전문 한통이 소련 주재 중국대사관에 입전됐다. 중공군을 한국전에 투입키로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전문은 스탈린에게 전달됐고 스탈린도 결국 이에 동의했다. 스탈린과 주은래 두 사람은 다시 만나 중공군이 지상병력을 파견하고 소련군은 북한의 공중방위를 책임진다는 데 합의했다. 전쟁을 치르면서 스탈린과 모는 두가지 목적을 염두에 두었다. 하나는 북한 공산정권을 지키는 것이고,또 하나는 미국과의 전면대결로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피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두 가지 목적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민들이 치른 인명과 물질적인 피해는 너무 끔찍했다. 1953년 휴전이 성립되자 새 소련지도부는 현상고착을 정책목표로 결정했다(스탈린은 그해 봄 사망했다). 이듬해 흐루시초프는 『한국문제도 독일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돼야 한다』고동료들에게 역설했다. 「두 개의 독일 두 개의 한국」 정책이었다. 흐루시초프는 이제 소련이 북한에 해줄 일은 북한동지들을 도와 북한을 근대화시켜 그 나라를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 진열장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제국주의 앞잡이 남조선과 무력전쟁이 아니라 경제전쟁에서 이기도록 하자』고 역설했다. 흐루시초프는 실제로 북한에 어마어마한 액수의 원조를 쏟아부었다. 이러한 원조를 바탕으로 북한은 점차 강성해져 갔다. 그런데 1950년대 후반 들어 소­북한 사이에는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동기는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통치를 비난한 것이었다. 김일성은 이 일을 계기로 소련이 이끄는 「사회주의 형제국」의 대열에서 이탈,외부세계에 빗장을 걸고 소위 「주체사상」을 펴나갔다. ○모,주은래 보내 설득 소련이 북한정권에 대해 갖고 있던 신뢰감은 점차 옅어졌고 흐루시초프,브레즈네프는 김일성의 평화의지에 의구심을 갖게 됐다. 브레즈네프와 그의 이념담당 보좌관인 수슬로프는 수시로 외무부에 『북한의 무력도발 움직임을 체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소련지도자들은 북한대표단과 만날 때마다 한반도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소련은 이와 함께 북한에 대규모 첨단공격무기르 공급하는 데도 신중을 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소련은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방식을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 캄보디아 등지에서 전통적인 팽창주의 노선을 추구했다.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 이렇듯 신중한 정책을 고수하려 한 것은 바로 미국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고부터 한국은 물론 기타 모든 문제에서 소련의 입장은 급격하게 변했다. 소련은 이제,첫째 모든 문제에 있어 군사적인 해결방식에 반대하고 있고,둘째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북한식 모델을 이제 더이상 지지하지 않게 됐다.
  • 41주년 맞아 찾아간 휴전선의 「태풍부대」

    ◎「6·25」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통일」과 거리 먼 대남비방방송 여전/긴장속의 대치… 분단의 아픔 실감/고 김만술 소위가 사수한 베티고지 눈앞에…/“동족상잔 다신 없어야”… 장병들,평화수호 다짐 올해도 또 6·25가 온다. 잊혀진 땅 휴전선에도 어김없이 온다. 1백55마일 철책선을 지키는 장병들에겐 41년전 그날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서울에서 65㎞,평양에서 1백40㎞ 떨어진 경기도 연천군 중면 횡산리 독수리고지. 중부전선 한복판인 이곳은 육군 태풍부대 주둔지이다. 저 아래 임진강이 흐르고 그 건너엔 6·25 최대격전지의 하나였던 베티고지가 보인다. 동족상잔의 비극조차 마다않고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모두가 고요히 잠든 일요일 아침 남녘으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의 만행을 증언하듯 그 땅은 거기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53년 7월15일 전쟁말기의 위대한 전쟁신화가 오늘까지 살아있었다. 휴전을 앞두고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던 남과 북의 군인들은 높이 1백20m의 한 평범한 야산인 베티고지를 두고 18차례나 주인을바꾸는 격전을 치렀다. 그때 국군 1사단 11연대 소속 김만술 소위는 특공대 34명을 이끌고 임진강을 건너가 적들이 점령하고 있던 베티고지를 탈환한 뒤 중공군 2개 대대를 섬멸시키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김 소위가 지휘하는 특공대원들은 임진강을 배수진으로 하여 인해전술로 공격해 오는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막아내며 3백94명의 적을 사살하는 놀라운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밤낮없이 48시간이나 계속된 처절한 전투에서 김 소위의 특공대원도 22명이나 전사,12명만 살아남았었다. 지난달 별세한 김 소위는 이 빛나는 전공으로 태극무공 훈장을 받아 전사에 길이 남았다. 육사 출신인 대대장 황유일 중령(37)은 『태풍은 특성상 시계바늘과 같은 방향인 왼쪽으로 돌면서 북상하기 때문에 우리 부대는 휴전선이 무너지면 제일먼저 질풍노도처럼 북상할 준비가 되어있다』면서 『그러나 태풍의 핵은 조용한 것처럼 우리 부대원은 평화시에는 충실하게 내실을 다지다가 유사시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는 용사의 위용을 보일 것』이라고 다짐했다. 장병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갑자기 북쪽에서 날카로운 금속성의 비명에 가까운 확성기소리가 터져나와 전선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북한군의 상투적인 대남비방 방송이 시작된 것이다. 제3사관학교 출신인 중대장 서수근 대위(28)는 곧 중대원들에게 완전무장을 하고 방탄조끼를 착용한 후 전투배치를 명령했다. 얼핏 잊혀진 듯했던 6·25. 그러나 그 6·25는 이곳 독수리고지에선 지금도 전투의 연장으로 남아있었다. 초병 배동인 상병(22·전남 나주)은 『10개월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날씨도 추운데다 적진이 바로 눈앞에 내려다 보여 여간 긴장하지 않았었다』고 밝히고 『그러나 이제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소대장 황거성 중위는 『후방에서는 남북한 유엔가입 전망과 함께 통일논의가 무성하지만 휴전선일대의 대남선전방송은 1년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전하고 『오히려 미국이나 우리 정부를 비방하는 강도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 「베티고지 영웅」 김만술씨 별세

    ◎6·25때 35명으로 중공군 2개 대대 격퇴 「베티고지의 영웅」 김만술씨(60)가 6·25 당시 전장에서 입었던 상이부위가 악화되어 28일 상오 서울 보훈병원에서 별세했다. 1953년 7월15일 국군제1사단 특무상사로 35명의 소대원을 이끌고 중공군 2개 대대 3백95명을 사살한 공로로 전쟁영웅이 됐던 김씨는 그 동안 상이군경의 복지향상을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헌신해왔다. 베티고지는 제1사단 전초기지로 임진강 건너 연천북방에 자리잡고 있어 휴전을 앞둔 유엔군과 공산군은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던 곳이다. 53년 7월15일 새벽 김 특무상사는 35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임진강을 도하해 하오 2시30분 베티고지에 도착,다음날 새벽까지 중공군과 18회에 걸친 접전 끝에 고지를 점령,태극기를 꽂았다. 당시 격전에서 국군은 21명이 사망,2명이 부상을 입고 12명이 살아남았다. 김씨는 이 공로로 미 제1군단장 클라크 장군의 표창장과 태극무공훈장을 받고 53년 9월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60년 대위로 예편한 김씨는 80년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이사,시흥용사촌 안흥합성공장 대표 등으로 상이군경 복지향상에 힘써왔다. 31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일본 오사카공고를 졸업한 김씨는 47년 국방경비대에 입대,여순반란사건과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등에도 참가했다. 김씨는 서울 강동구 명일동 주공고층아파트 907동 102호에서 1남2녀와 함께 생활해왔다. 연락처 서울보훈병원 영안실 482­0111.
  • 소 학자가 밝힌 중공군 파병 경위

    ◎모택동,사흘 밤샘끝에 6·25참전 결정/김일성 긴급요청 하룻만에 3개군에 동원령/주은래 모스크바에 급파,공군지원 설득 나서/“미군의 압록강 진격 우려”… 당중앙위,신중론 일축 한국전에 관해서는 지금껏 비교적 많은 양의 사료와 비사들이 공개되고 발굴돼 온 편이다. 그러나 1950년 10월 UN군측에 유리하던 전쟁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놓은 중공군의 개입에 관한 중국측 자료들은 좀체 공개되지 않았다. 한국전 참전 중공군 장성들이 쓴 회고록과 중국 내부에서 공개된 사료,중국 언론에 보도된 자료들을 토대로 중국의 한국전 참전배경을 밝힌 글이 최근 소련에서 발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소련 과학아카데미 산하 극동연구소에서 발간하는 격월간지 「극동의 제문제」 최근호에 실린 소련 역사학자 빅토르 유소프의 글 「누가 중국지원군을 한국에 보냈나」는 당시 한국전을 보는 모택동 등 중국 지도부의 시각과 파병결정과정에서 있었던 중소의 갈등 등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1950년 10월1일,모택동은 김일성으로부터 긴급 전문 한통을 받았다. 「미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남조선 괴뢰정부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자신에게 중공군을 보내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모택동은 즉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긴급회의를 소집했고 찬반 양론이 개진됐다. 임표은 파병 반대를 주장하며 『중국정부는 수립된 지 얼마 안됐고 전국 각지에서 지금도 반혁명 잔당들이 설치고 있다. 국내외에서 동시에 적을 상대하기엔 아직 벅차다』라고 말했다. 고강도 같은 의견이었다. 『우리는 20년 이상 전쟁을 했고 아직 정상생활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무기는 모두 낡았다. 미군은 대포 1천5백문을 실전배치할 수 있는데 비해 우리는 3백문밖에 배치할수 없다. 탱크도 우리가 훨씬 적다. 미군이 압록강 너머로 진격해 온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 것인가. 북동쪽 국경의 수비를 강화하고 자중하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생각한다』라고 고강은 주장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참전쪽을 지지,이튿날인 10월2일 당중앙위원회는 한국파병을 결정했다. 같은날 당중앙위는 모택동이 서명한 파병결정전문을 스탈린 앞으로 보냈다. 지원군의 지휘책임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를 놓고 회의가 열렸다. 처음에는 임표가 적임자로 지목됐으나 그의 건강이 문제가 돼 팽덕회에게 넘어갔다. 10월4일 모택동은 서안에 있는 팽덕회를 북경으로 불렀다. 모는 이렇게 말했다. 『덕회 동지,결정은 내려졌고,3개군에 동원령을 내렸고 수십만명이 움직일 것이오. 잘못하면 우리는 큰 시련을 맞게 될 것이오. 확대 정치국 회의석상에서도 모두들 신중론을 제기했소. 하지만 김일성이 지금 위기에 처해 있는데 우리가 이를 방관하면 사회주의국은 모두 한 진영이라는 말은 헛말에 불과하게 되오』 팽덕회가 소련과의 군사 협조에 대해 묻자 모는 스탈린이 공군지원 약속을 했으며 따라서 중공군이 지상작전을 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1950년 10월8일,모택동은 팽덕회를 중국지원군사령관겸 정치장교로 정식 임명했다. 팽덕회는 이튿날 회의에서 연설을 통해 『조선에 군대를 보내는 것은 의무이다. 미국은 압록강 너머에 군대를 배치하는 즉시 구실을 붙여 침략전쟁을 도발해 올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0월11일 팽덕회는 새벽 기차를 타고 안동으로 갔다. 그리고는 압록강을 넘는 병력수송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10월12일 하오8시,모주석이 보낸 긴급 전문 한통이 팽덕회 앞으로 날아들었다. 지원군의 월경작전을 중지하고 즉시 북경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팽덕회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소련이 당초 약속과 달리 공군을 한국전에 보낼수 없다는 내용을 모스크바 주재 중국대사관에 통보해 왔다는 것이다. 주은래는 이같은 사실을 즉시 모에게 보고했다. 그 보고를 받고 모는 안색이 변하면서 담배를 문채 10여분동안 방안을 서성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출정명령은 이미 내린 상태였다. 이틀뒤 모는 정치국회의를 열어 파병을 연기시킨뒤 주은래를 모스크바로 보내 중국이 처한 어려운 입장을 설명하기로 했다. 10월15일 팽덕회는 심양으로 가서 모주석의 교시와 정치국의 파병연기 결정을 알렸다. 10월16,17일 이틀간 팽덕회는 김일성이 보낸 특사를 만났다. 주은래는 스탈린을 찾아갔으나 아무런 소득도 얻어내지 못했다. 스탈린은 한번 내린 결정은 번복치 않는 사람이었고 소련 공군이 참전 가능성은 없었다. 모는 꼬박 사흘을 뜬눈으로 새웠고 수면제 수십알을 먹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모는 결국 파병키로 결정을 내렸다. 모스크바의 주은래 앞으로 모의 전문이 전달됐다. 소련 공군의 오든 안오든 중국은 싸운다는 내용이었다. 같은날 주은래는 다시 스탈린을 찾아갔다. 스탈린은 주를 보고 『아직 떠나지 않았던가』라며 딴청을 부렸다. 주은래는 결연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모주석으로부터 조선 파병결정을 내렸다는 전문을 받았습니다』 스탈린은 한동안 침묵을 지킨끝에 『중국 동지들이 정말 훌륭해』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1950년 10월19일 하오8시,팽덕회의 지휘아래 중공군 지원군은 마침내 압록강을 건넜다.
  • 투병 6·25 참전용사/노 대통령이 금일봉

    노태우 대통령은 2일 상오 서울 보훈병원에서 투병중인 한국동란 당시 베티고지 영웅인 김만술씨(60)에게 이상연 민정수석비서관을 보내 하사금을 전달하고 위로했다. 김씨는 53년7월 경기도 연천지방 베티고지에서 소대병력으로 중공군 2개 대대를 물리쳐 태극무공훈장을 받았으나 그후 척추부상으로 대위로 전역하여 치료해오다 최근 다시 악화되어 양다리 절단수술을 받고 입원 치료중이다.
  • 본지 창간기념일에 초대된 조성수화백의 “자화상”

    ◎“「애환 45년」 딛고 서울신문처럼 거듭 났죠”/“45년 11월22일생” 동갑내기의 「인생역정」/부산 피난시절의 역경 패기로 극복/「총 2백만부 성장」,오늘의 나와 비슷/“정상의 신문답게 사회 발전의 밑거름 되길” 조국이 광복되던 해인 45년 11월22일에 창간된 서울신문은 1만6천4백36일 동안 지령 14169호라는 굵직한 나이테를 새기면서 영향력 있는 장년신문으로 성장했다. 급변하고 소용돌이치던 지난 45년동안 서울신문은 갖은 풍상과 기복속에서 영광과 좌절,시련과 희망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어왔다. 서울신문과 같은해 같은달 같은날에 태어난 사람은 현재 전국에 6백27명(남자 3백57명,여자 2백70명). 그들도 서울신문과 똑같은 역사의 궤적속에서 혼란과 전쟁,가난의 아픔을 이겨내고 이제 우리사회의 성실하고 믿음직한 장년층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화가 조성수씨(45·서울 강동구 명일2동 240의4·소화미술학원장)는 21일 서울신문을 찾아 온갖 어려움을 딛고 최신시설과 영향력을 자랑하며 국내 정상에 우뚝선 서울신문의 성장에 흐뭇해했다. 서울신문이 해방을 계기로 새로 창간되었듯이 만주의 장춘에서 태어난 조씨는 이듬해인 46년 초 만주 철도회사에 근무하던 아버지 조석창씨(75)가 귀국하게 되어 서울에서 자라게 됐다. 조씨가 미처 철이 들기도 전인 6살일때 6·25가 일어나 조씨의 누나와 여동생 및 남동생 등 일가족 6명은 피란길에 올라 부산으로 갔다. 아직 서울생활에서 제대로 터전을 닦지 못한 조씨 가족들이 전쟁때문에 피란길에 올라 온갖 곤욕을 치른 것처럼 창간한지 5년이 채 못된 서울신문도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서울신문 직원들은 당시 북괴군의 포성이 코앞에서 울리고 있는데도 전쟁발발 3일째인 28일 새벽2시30분까지 무려 12차례나 호외를 발행하다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해 사회부장 이종석씨 등 7명이 납북되었고 유일한 한국의 종군기자였던 한규호씨가 인민군에 납치되어 살해됐다. 또한 인쇄시설 등이 2차례나 파괴·해체당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란살이 속에서 모진 고생을 겪었듯이 조씨 일가족은 처음 영도 남항동의 등대 근처 바닷가에서천막을 치고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지내야 했고 조씨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초량동과 부평동 등으로 옮겨 다니며 날품팔이와 행상을 하며 힘겹게 연명했다. 그러나 서울신문 사원들은 이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51년 4월3일 서울에 상경,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다시 전선이 밀리기까지 6일부터 24일까지 19일동안 아직도 한국언론사에 전설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는 진중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조씨는 피란지인 부산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60년 다시 서울로 상경했으나 조그만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61년까지 2년동안 온 식구가 굶기를 밥먹듯 하는 가난에 시달렸다. 서울신문도 60년 4·19 학생의거의 와중에서 윤전기와 사옥이 불탄 뒤 극심한 재정난으로 4월26일부터 7월25일까지 휴간할 수 밖에 없었고 계속되는 후유증으로 이듬해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기 1주일전부터 12월19일까지 장기간 휴간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서울신문은 60년 7월27일 조·석간제를 실시하고 67년 3월13일부터는 활자를 새로 교체하며 전면적인 지면개혁을 단행했으며 68년 11월22일부터는 모든 지면을 한글전용으로 제작했다. 또 창간 25주년을 맞던 70년에는 최신고속 자동윤전기 2대를 도입하여 종전의 시간당 5만부 인쇄에서 12만부를 인쇄할 수 있는 최신 시설로 끌어 올렸다. 서울신문이 이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사세확장에 땀흘릴 무렵 조씨는 그동안의 실의를 떨치고 중동고교에 수석으로 입학,장학금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으로 탈바꿈했다. 서강대 경영학과에 진학한 조씨는 전공보다는 어릴 때 부터의 꿈이었던 미술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 80년 초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5년동안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했다. 서울신문은 그 사이 발전을 거듭하여 80년 12월2일부터 조간신문으로 바뀌고 85년 1월에는 숙원이었던 지상 22층의 새 사옥을 마련,한국언론사상 최초의 컴퓨터로 신문을 발행하는 시스템(CTS)을 갖추었고 같은해 6월22일에는 자매지인 스포츠서울을 창간,더욱 사세를 떨치게 됐다. 서울신문이 제2의 도약을 하던 해인 85년 조씨는 미술공부를 마치고 귀국,명일동에 미술학원을 열고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으며 2년6개월 뒤에는 같은 동네에서 4층 건물을 짓고 새로 이사하여 학원운영과 창작활동을 하며 딸 셋과 부인 등 5가족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 조씨는 『서울신문의 발자취와 나 자신의 행로가 닮은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면서 『앞으로 더욱 발전하여 우리 사회를 밝고 살기좋게 만들어가는 횃불이 돼달라』고 기원했다.
  • 중국까지 가서 과소비 해야하나(서울시론)

    ◎한약등 마구 매입… 외화낭비 한심 말하기가 창피할 만큼 참 많은 사람들이 중국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가야 한국에서 못 만나던 사람들을 만난다』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그렇게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에 갑니다. 필자도 그중의 한사람이 되어 중국을 돌아본 연후 도무지 혼자 소화해 버릴 수 없는 어떤 위기같은 것을 느꼈기에,앞으로 계속 중국행 여행계획을 세울 사람들에게 당부해 드리고 싶어서 이 글을 몇번 쓰고자 합니다. 내가 상해로 가는 비행기를 타던 날 4백80명의 여객은 거의 전원이 한국인이었습니다. 비수교 국가요 사회주의 국가이며,저 한많은 6ㆍ25동란 때에는 중공군을 밀물처럼 투입시킴으로써 우리 조국의 40년 분단을 초래케 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우리가 왜 그렇게 정신없이 찾아가는 건지,이산의 슬픔속에서도 결코 가볼 수 없는 북한방문에의 그리움과 갈망을 중국여행이라는 것으로 대체해 보려는 감상적 보상심리같은 것이겠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정당화 해 보아도 우리가 뿌려놓는 막대한 여행비는 결코북한의 이산 가족에게 가는 것이 아니어서 슬픔과 분노를 달랠 길이 없었습니다. 더 우울했던 것은 강렬한 수치심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가진자가 갖지 못한 자에게 보이는 우쭐함과 으스댐 같은 것을 한국인 여행자들에게서 확인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쇼핑으로 뿌려지는 돈의 씀씀이가 마치 홍수진 한강물이 하류로 쏟아져 내리는 것을 연상시킬 만큼 엄청났습니다. 중국에서 내가 배우고 온 것은 중국에다 우리의 돈을 퍼부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쓰지 말고 아끼고 저축해서 어느날 북한을 방문할 때 돈을 홍수처럼 퍼부어 쓰자는 그 하나 뿐입니다. 중국은 그날이 오기 전에 선수를 쳐 개방을 내세우고 우리의 돈을 포크레인으로 미리 쓸어담고 있는 것입니다. 무섭고 걱정스럽습니다. 상해 공항에는 입국서류를 기입할 책상하나도 없었습니다. 공항 청사는 그나라의 경제수준을 말해준다는 차원에서 김포공항의 청결과 정돈을 가늠할 때 웽웽 소리를 내며 구차하게 돌아가는 상해 공항의 낡은 선풍기와 청사 천장의 더러운 얼룩이며 그을음들은 버틸 수 있는한 돈을 안 쓰고 외화를 벌어들이자는 정부시책을 잘 반영해주었습니다. 공항 화장실에는 오물이 가득하고 어디에도 휴지는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공항을 지키는 경찰관들의 가슴에 영어로 「폴리스」라 적혀 있으니 그들의 개방정책은 오직 외화를 벌어들임 그 하나임을 알만 합니다. 중국 여인 가이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60이 넘은 그 여인은 35년전에 북경대학교 동방언어학과를 졸업한 사람인데 함경북도 사투리로 우리말을 했습니다. 가이드의 첫 말은 중국에서의 화폐 사용에 관한 주의사항과 쇼핑해도 좋을 물건들의 명세였습니다. 중국은 두가지의 화폐를 쓰고 있습니다. 백성이 쓰는 인민폐는 미화 1백달러에 중국돈 팔백원까지 암거래로 얻을 수 있으나 다시 미화로 바꾸지 못하는 돈이고 호텔이나 백화점에서 외국인에게 바꾸어주는 태환권은 미화 1백달러에 4백59원25전인데 밖에 나가면 인민폐와 동일하게 사용될 뿐만 아니라 태환권을 주고 쇼핑했을 경우 상인들은 인민폐로 거슬러 주기 때문에 결국은 외국인의 화폐유통에서 중국정부가 부당 이득을 취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을 떠날 때 돈이 남았을 경우 인민폐는 아무 것이나 구입해 써야 하고 또 태환권이라 하더라도 즉시 미화로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일단 홍콩 달러로 바꾸어 준 후 다시 홍콩에 가서야 미화를 얻게 되니 그 2중3중의 횡포는 더이상 언어로 설명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관광버스를 타고 가는 거리에서 가이드여인은 쇼핑 안내를 했습니다. 일행중에서 어느 분이 특산물이 무어냐고 묻자 가이드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웃었는데,정말 그렇다고 수긍할 만큼 12억의 사람들이 중국을 지키며 인해전술의 위력을 어느 때고 행사할 저력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여자의 쇼핑 가이드 좀 들어 보십시다. 『비단,공예미술품,그리고 약을 사세요. 편자환ㆍ우황청심환은 간장보호치료에 좋습니다. 여러분의 나라가 우리 중국보다 공업발전국가이기는 하지만 공업으로 인한 숱한 폐기물이 여러분의 간장을 해쳐 모두 병들어 있습니다』 이쯤 되고 보니 복사판에 물감칠만 몇군데 했을법한 조잡한 그림들과,어느 가정에서 침을 탁탁 뱉으며 나무뿌리들을 갈아 섞어서 둥글게 빚었을 청심환이나,성분이 무언지도 모르고 간장에 좋다고 선전하는 편자환이란 정체불명의 가짜 약품을 사기 위해 너무 많은 한국인이 너무 많은 외화를 퍼붓게 됩니다. 중국의 10개 대도시의 상점에 있는 그 유명한 약이라는 것들의 포장이나 설명문이나 가격들이 모두 틀렸으니 하나도 진짜는 없는 것입니다. 중국약 안사기 애국운동을 전개할 때입니다. 윤봉길의사의 숨결이 담긴 옛 홍구공원을 돌아본 후 우리는 상해 임시정부가 있던 마당로 306의 4호에 있는 집을 살피고 그 댁의 주인과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집 주인도 여행객들이 주는 돈으로 치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정부가 그 집을 사서 옛 모습을 보존해야 할 시점에 우리는 와 있습니다. 옛날에 타국의 외교관이나 상인들이 쓰던 집들은 모두 압수되어 그 내부가 칸칸이 나누어져 방 한칸씩 인민들에게 배급되어 있는데 관광코스를 버스로 달리면서 들여다 보이는 단칸 방 방마다 마르고 더러운 몰골의 웃통 벗은 사람들이 처량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상해 정장」이라고 이름지어 주었습니다. 손가락으로만 세게 때려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더러운 집들의 거리,포로수용소 같은 집단거주의 가난이 풍기는 거리,옛날의 풍요와 서구세계의 위세를 자랑하던 유럽식 가옥의 모습들이 칸칸이 쪼개져 배급된 슬럼가의 세계,그것이 상해입니다. 전세계가 모두 눈부신 발전들을 했는데 오직 세계의 한 귀퉁이 중국만이 발전을 멈추고 깊이 잠자다가 이제 기지개를 켜며 깨나는구나 하는 위기의식과 공포를 주는 곳,그곳에 우리가 돈을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약 사지 않기,중국에서 돈 쓰지 말기를 결심할 때입니다.
  • 방북신청 노인의 설레임/오승호 사회부기자(현장)

    ◎“이번만은 꼭”… 마음은 벌써 북녘에 『북한에 있는 노부모와 네자녀를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왔습니다』 북한방문 신청을 받기 시작한 첫날인 4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 관악구청 4층 대강당. 무더위에 비지땀을 흘리며 관련서류를 넣은 손가방과 부채를 들고 북에 두고온 가족들을 만날 꿈을 안은채 차례를 기다리는 김성탁씨(69ㆍ관악구 봉천동 산133의15)는 희끗희끗한 머리와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에 눈물을 글썽였다. 김씨가 부모와 어린 4남매를 북에 두고 혼자 남쪽으로 내려온 것은 6ㆍ25다음해인 51년 1ㆍ4후퇴때였다. 이때 김씨는 30세였다. 고향인 평안남도 안주군 운곡면 용천리에서 당시 10살이던 장녀와 7세ㆍ5세ㆍ3세였던 4남매 및 환갑을 넘긴 노부모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살고 있던 김씨는 1ㆍ4후퇴하루 전날 무슨 장사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보기 위해 혼자 고향을 떠나 평양으로 나섰다. 김씨는 그러나 평양에 도착한 다음날 중공군이 갑자기 물밀듯이 밀어닥치는 바람에 고향에 남아있던 가족들에게 연락할 겨를도 없이 피난민들속에 묻혀 남쪽으로 내려왔다. 하루에 50리씩 20여일을 꼬박 걸어 서울에 도착한 김씨는 영등포역에서 피난민들과 함께 군용열차 지붕위에서 3일간을 보낸뒤 안동이 고향이며 일제때 징용돼 진남포제련소에서 일하는 한 피난민을 따라 안동으로 내려갔다. 안동에 다다른 김씨는 6개월동안 땔나무 등을 해주며 남의 집에 얹혀살다 독립하기 위해 공주등지를 돌아다니며 목공일을 배웠다. 『군용열차 위에서 3일을 머무는 동안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서로 비벼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김씨는 이같은 이산의 아픔말고도 또다른 비운을 겪었다고 했다. 6ㆍ25사변이 일어나 기전 강제로 평양부근에 있는 인민군내무소(경찰서)에서 3년동안 일했다는 것이 피난내려온 뒤 뒤늦게 밝혀져 공주교도소에서 3년을 복역하는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7ㆍ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을 당시에도 당장 통일이 돼 이북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만나볼 수 있으리라는 감격에 젖어 한동안 잠을 설쳤었다』고 회상한 김씨는 『이번에도 혹시 북한측의 거부로 고향방문의 꿈이 무산되면 또 어떻게 기다리나… 』는 걱정을 하면서도 벌써 마음만은 마냥 북의 고향에 가있는 듯했다.
  • 전쟁의 발발과 전개(새 실록 6ㆍ25 김학준:중)

    ◎“북한 남침은 소의 적화음모”… 미,1주만에 파병/중국,유엔군 38선 넘자 16개사단 급파/소선 항공ㆍ기갑사단 만주에 전진배치/7월에 대전서 새 한ㆍ미협정… 군지휘권 유엔군에 넘겨(서울신문 6.25 40주 특집) 한국전쟁은 전쟁의 국면의 전개양상에 따라 5개의 기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제1기는 50년 6월25일부터 50년 9월 중순까지의 시기로,남침을 개시한 북한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대구와 부산 일대를 제외한 남한 전역을 석권했던 시기이다. 제2기는 50년 9월 중순부터 50년 10월 하순까지의 시기로,국제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의 극적인 성공을 계기로 국련군이 반격을 계속해 한ㆍ만 국경으로까지 접근함으로써 북한정권이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던 시기이다. 제3기는 50년 10월 하순으로부터 51년 4월 초순까지로,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고 국련군이 다시 후퇴하던 시기이다. 제4기는 51년 4월 초순부터 51년 6월 중순까지로,국련군이 「대량보복」을 통해 전투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여 군사적 균형을 이룬시기이다. 제5기는 51년 6월 중순부터 53년 7월27일까지의 시기로,전쟁과 함께 휴전회담이 진행된 화전양상의 시기이다. 이번의 제2회에서는 제1기부터 제3기까지를 다룬다. ○3일만에 서울점령 ▷제1기◁ 50년 1∼2월 이후 38도선 주변에서 소규모의 군사력 충돌을 계속 일으켜오던 북한은 6월25일 새벽 드디어 전면남침을 개시했다. 북한의 공격은 빨라 6월27일 서울의 외곽인 창동과 미아리에 방어선을 설정한 한국군을 붕괴시켰다. 이에 따라 이 날짜로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했고 정부는 대전으로 천도했다. 6월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그런데 북한군은 서울 점령 3일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이 3일은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남한을 살려 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북한군이 남침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 여세로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남한으로서는 최악의 상태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북한군의 기습에 대한 놀라움 속에서도 트루먼 미국대통령은 즉각적인 응전을 결심했다.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세계적화 시도의 일환으로 보았으며,직접적으로는 미일 군사안보체제에의 대항조치로 인식하여 한반도가 공산화하는 경우 그것이 일본의 국내정치에 미칠 영향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곧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 대해 긴급회의의 소집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6월25일 일요일 하오 3시에 열린 안보리에서 미국은 북한이 남한에 대해 「무력공격」을 가했다고 주장하고 그 「무력공격」은 「평화파괴행위」라고 비난한 다음 북한군이 즉각적으로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군사력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킬 것을 요청했다. 미국의 제안은 9대0으로 가결됐다. 때마침 소련 대표는 장기결석중이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안보리의 결의는 북한의 군사행동을 정지시킴에 있어 아무런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리하여 6월27일 안보리는 『군사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결의했다. 이와 더불어 트루먼은 도쿄의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ㆍ공군의 지원을 개시하라고 명령하고,미 제7함대로 하여금 중공군이 대만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동시에 대만의 장개석정부가 중국 본토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조처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6월30일 트루먼은 맥아더 총사령관에게 ①해ㆍ공군뿐만 아니라 지상군을 투입할 권한과 ②군사상 필요한 경우에는 38도선 이북의 군사목표를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튿날 주일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미 지상군의 개입이 시작됐다. 바로 이날 안보리는 국제연합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국제연합 회원국들의 무력원조를 미국의 단일지휘 아래 둔다는 내용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 출신의 국제연합 사무총장 트리그브리는 국제연합기를 미국에 전달했으며 트루먼은 즉시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를 국련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미국의 단호하고 신속한 결정은 대한민국을 크게 고무시켰다. 비록 남침에 쫓겨 피난길에 들어선 형편이지만 국련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통일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6월29일 맥아더가한강전선을 시찰하고 곧바로 수원에 내려왔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협력을 약속했다. 실제로 7월14일 대전에서 맺은 협정을 통해 이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위임했다. 이어 7월19일 이대통령은 『국련군의 작전목표가 전전원상의 회복,즉 38도선에서의 진격정지에 그쳐서는 안되며 북진통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트루먼에게 전달했다. 한미간의 이러한 협력속에서도 전세는 계속 불리해 후퇴에 후퇴를 거듭 했다. 그리하여 맥아더는 한때 최악의 경우에는 한국에서 손을 떼고 한국정부를 괌이나 하와이로 후퇴시킨다는 계획마저 세웠다. 이대통령은 분노속에 강경하게 거절했다. 마침 9월5일부터 13일까지 경주와 영천일대의 사활을 건 전투에서 국련군은 북한군 제15사단을 궤멸시켰다. 국련군의 반격이 전개될 수 있는 상황이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소대사가 대화 제의 ▷제2기◁ 국련군 반격의 결정적 계기는 확실히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었다. 9월12일 극비리에 부산을 출발한 2백61척의 대수송선단은 9월15일 인천항에서의 작전개시와 동시에 곧바로 인천시 남부에 상륙했다. 북한군은 2개 사단병력으로 서울방위사령부를 편성했으나 한국군의 해병대가 9월27일에,이어 국련군이 9월28일에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이에 따라 9월29일 이대통령은 맥아더와 함께 공로로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을 대한민국정부의 관할아래 넘기는 수도 탈환식에 참석했다. 국련군의 성공적인 반격이 확고해지면서 서방진영 및 중립국가들의 일각에서는 전전원상의 회복이라는 조건아래 즉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키는 조건아래 국제연합군의 진격을 멈추게 하고 이 테두리 안에서 한국전쟁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제기됐다. 8월1일 안보리의 의장이 되는 것을 계기로 삼아 안보리에 복귀한 소련대사 말리크도 남북한 대표를 국제연합에 동시 초청하여 한반도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북한에 “항복”요구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확고하여 북한정권의 완전한 붕괴,즉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만이 국련군의 목표임을 선언했다. 대한민국 정부도 『38도선의 존재를 부인한다』고 선언하면서 국련군의 북진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을 강조했다. 이때 서방 7개국이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공동결의안을 제출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무력을 써서라도 국련군의 주도 아래 한반도를 통일시킨다는 태도를 밝혔다. 그러나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해도 좋다는 최종적인 결정은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0월1일 우선 한국군은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다. 이튿날 맥아더는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서도 좋다는 미국정부의 최종결정을 한국정부에 알리면서 북한정권의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국련군이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해도 좋다는 서방의 공동결의안이 아직 국련을 통과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막으려는 공산진영 외교적 노력이 시도됐다. ○주은래 “방관 않겠다” 우선 중국 총리겸 외무장관 주은래는 10월2일 깊은 밤에 주중 인도대사 파니카르를 외무부로 불러 『만일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는 경우 중국은 조선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그러나 한국군만이 38도선을 넘는 경우 중국은 그러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니카르대사는 주의 발언을 본국정부에 즉시 알렸으며,인도정부는 그대로 미국정부에 알렸다. 트루먼은 주의 발언이 국련군 북상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련을 협박하려는 「대담한 시도」로 판단하여 그것을 무시했다. 이에 따라 국련은 10월7일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하는 서방쪽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여기에 근거해 국련군은 7∼8일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중국이 주사위를 던질 차례가 되었다. 10월10일 주은래는 『조선전쟁은 처음부터 중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고 규정하고 이 전쟁에서 『중국인민은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주의 이 선언은 중국의 모든 유력지들에 보도되었는데 그것은 중국의 참전에 대비하여 중국인민들을 동원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되었다. 이처럼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커지자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트루먼은 10월5일 태평양의 웨이크도로 맥아더를 불렀다. 회담에서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대답했다. 이 무렵 국련군의 북진은 계속되고 있었다. 북한군이 곳곳에서 무너지자 김일성은 10월12일 스탈린에게 소련의 지원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과의 직접적 대결을 피하려는 자세만 보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김일성은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던 10월16일 새벽 2시 소련제 고급승용차 볼가를 타고 평양을 빠져 나가 10월26일 만주와의 접경지대인 평양북도 강계군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이날 이대통령은 원산시에 그 모습을 나타내 열광적인 원산시민들을 격려했다. 이어 10월30일 평양을 방문하고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공산당을 몰아내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고 호소했다. ○스탈린,중국에 찬사 ▷제3기◁ 이 무렵 중국의 군사적 개입이 극비리에 시작되고 있었다.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한 서방결의안이 10월7일 국련총회를 통과하자 모택동 중국공산당 주석은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팽덕회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마침 북한으로부터 파병을 요청하는 밀사들이 와 있었으며 그리하여 팽은 10월13일 북한으로 들어가 김일성을 만난 뒤 전투에 참가하여 전황을 살핀다음 그 결과를 모에게 보고했다. 그때로부터 엿새뒤 중국군은 마침내 은밀하게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이 참전을 최종 결정하던 어느 시점에 스탈린은 『김일성동지는 장래 중국 국경 안에 망명정부를 세울 것』이라고 모에게 알리면서 이처럼 위급한 상태에 빠진 북한정권을 구출하려던 중국이 적어도 6개 사단을 파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중국은 일단 행동을 개시한 뒤 16개 사단을 출동시켰다. 중국쪽 설명에 따르면 중국의 이러한 결정을 보고 『처음에는 우리들을 민족주의자가 아닌가 의심했던 스탈린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들이 가장 좋은 동지임을 인정했다』 중국군의 개입을 전혀 모르는 채 한국군은 10월25일 마침내 압록강변의 초산을 점령했고 미 제24사단은 북한의 임시수도 신의주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제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은눈앞에 닥쳐온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날에 있었던 한국군과 중국군의 첫 교전은 상황을 완전히 바꾸었다. 맥아더는 11월5일 중국군의 참전을 국련에 보고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중국군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한국전쟁은 국련군 총사령관의 권한 범위를 벗어나 국련과 세계 여러 나라들의 정치수뇌급에서 해결책이 제시돼야 할 전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중국 외무부도 11월11일 중국군의 참전을 공개적으로 처음 시인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취하면서 계속 남쪽으로 쳐내려 왔다. 이때로부터 약 2개월 동안 미군은 미군의 역사상 가장 장기의 후퇴를 경험하게 되었다. ○영서 종전모색 제의 그 결과 중국군은 12월26일 38도선을 넘고 12월말까지 38도선 이북의 북한 전역을 점령하고 51년 1월4일에는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따라 국련군은 평양철수(12월4일 완료)와 흥남철수(12월24일 완료) 및 서울철수(1ㆍ4후퇴)를 경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만주에 소련의 1개 항공사단이 배치되어 북한군과 중국군의 배후를 지원했고,전투상황의 악화에 대비하여 5개 기갑사단을 북한에 파견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서방세계의 일각에서는 휴전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미 중국을 승인한 영국은 국련 대표권을 대만에 줄 것이 아니라 중국에 준뒤 중국과 종전을 모색하자고 제의했으며,애틀리 총리는 12월4일 워싱턴에서 트루먼과 회담한 뒤 『두나라는 협상을 통해 종전을 추구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여기에 발맞춰 아시아ㆍ아랍권 13개국도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을 국련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미국 안의 반공분위기는 매우 높아 하원과 상원은 각각 51년 1월19일과 1월23일 국련이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련의 휴전 분위기에 실망하던 한국 정부는 다시한번 무력통일에 대한 기대를 걸게 됐다. 북한은 북한대로 다시 한번 적화통일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됐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출된 김일성은 12월4일 강계군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회의를 열고 「미제의 완전한 축출」을 다짐했다. 이와 동시에 무정을 비롯한 주요한 도전자들을 숙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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