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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포로(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36)

    ◎미­북한,송환방법 싸고 2년간 첨예 대립/이 대통령,반핵포로 2만여명 전격 석방 1951년 7월 8일 개성회담을 시작으로 2년간 지속된 휴전협상에서 가장 큰 쟁점은 포로문제였다.한국전쟁에서 독특한 양상을 표출한 포로문제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까지 비화됐다.그래서 휴전협상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됐던 이 포로문제는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줄곧 난항을 거듭했다. 북한은 포로문제를 불리해진 전황정비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또 전쟁 조기 종료를 바란 미국 주축의 유엔은 휴전회담에서 북한측에 끌려다니는 인상을 지우지 못했다.전세가 아군에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한국전쟁을 통일의 기회로 여겼던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부터 휴전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특히 포로문제에 있어서 유엔 협상대표들이 북한측의 요구를 수용하자 마침내 독단적인 결정을 내려 반공포로들을 석방해 버렸다. 그렇다면 한국전에서 포로문제가 복잡하게 꼬였던 이유는 무엇일까.여기에 대한 대답은 유엔군에 생포된 포로의 성분이다.생포된 공산측 포로중에는 북한에 의해 강제 징집된 수많은 남한출신과 함께 장개석의 국부군 출신 중공군이 끼어 있었다.이에따라 휴전회담에서 포로송환문제가 거론되자 이들이 북한과 중공으로 돌아가길 거부하면서부터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북·중 송환거부자 급증 미국은 휴전회담이 개막되기 전인 7월에 접어들어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당시 미 육군 심리전감 매클루어 준장은 콜린스 참모총장에게 정전이 될 경우 국부군 출신 포로들을 대만으로 보낼 것을 건의해놓고 있는 상태였다.워싱턴에서는 51년 가을내내 포로문제에 대한 논의가 계속됐다.그러나 자원송환과 강제송환,1대1교환과 전체대 전체 교환,인도주의적인 입장과 제네바협정 준수가 엇갈려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해 10월 판문점에서 협상이 재개됐으나 협상 벽두부터 북한측은 휴전협정 조인즉시 양측의 모든 포로들을 석방하자는 의견을 강력하게 들고 나왔다.그러면서도 북한측이 제시한 포로 숫자도 터무니 없게 축소돼 의혹을 불러일으켰다.유엔군은 공산군 포로 13만2천4백74명(중공군 2만7백명)의 명단을 제출하면서 민간인 수용자로 별도 격리 수용한 3만7천명이 더 있다고 미리 밝혀두었다. 반면 공산측은 한국군 7천1백42명과 유엔군 4천4백17명을 합쳐 고작 1만1천5백59명의 포로숫자를 제시했다.북한측이 한달전 평양방송을 통해 주장한 포로수가 6만5천명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너무나 큰 차이가 났다.유엔군측은 그 때까지 실종인원을 한국군 8만8천명,미군 1만1천5백명 이상으로 파악해 놓고 있었다. 휴전회담은 이렇다할 진전을 보지 못한채 51년을 마감했다.그러나 해가 바뀌면서 양상이 달라져 양측이 좀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나왔다.19 52년 1월2일 회담에서 유엔군측 대표 R E 리비 미 해군 소장은 자원송환 원칙을 강력히 담은 포로교환을 제안하고 나섰다.공산군측은 이를 즉각 거절했다.이무렵 워싱턴에서는 자원송환의 원칙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종전의 입장을 바꾸었다.반드시 고수해야 한다는 강경론으로 선회했던 것이다. 송환원칙으로 인해 협상이 교착되자 쌍방은 세부적인 사항의 타결을 시도해 어느 정도 성과가 보이는 듯 했다.3월5일 공산측은 전년도 12월18일 교환된 명단에 입각한 송환을 제의하면서 꼬리를 달았다.전선에서 석방했다는 유엔군측 포로 5만여명의 행방을 유엔군이 묻지 않는다면 유엔군이 억류하고 있는 3만7천명은 불문에 붙이겠다는 것이었다.유엔군측은 이미 명단을 제출한 공산군 포로 13만2천여명에 대한 조사결과 겨우 7만명이 송환을 원한다는 사실을 통고했다. 공산측은 이를 유엔군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고 맞서 회담은 또 교착상태에 빠졌다.4월28일 유엔군측은 일괄타결안을 제시하고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과 미 트루먼 대통령은 각각 성명을 내놓았다.유엔군측이 제시한 일괄 타결안에는 공산측이 통고한 송환가능 유엔군 포로 1만2천여명을 인정하고 송환을 희망하는 유엔군 억류 공산군 포로 3만여명과 교환한다는 조건이 포함됐다.당시의 분위기를 볼때 상당히 완화된 이 조건은 공산군측에 실리를 넘겨준 것이었다. ○공산포로,소장 인질로 이같은 분위기속에서 5월7일 거제도 제76포로수용소장 F T 도드 준장이 공산포로들에 의해 피랍되면서 공산측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도드 준장을 인질로 잡은 공산포로들은 포로수용소측에 ▲독가스 및 세균무기 사용,원자탄 실험중지 ▲불법 부당한 인민군과 중공지원군의 자원송환 즉각 중지 ▲수천명의 포로를 재무장시키려는 강제조사 중지▲포로대표단 구성 승인등을 요구했다.도드준장 후임인 새 포로수용소장 C F 콜슨 준장은 포로들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다.공산측은 콜슨 준장의 회신내용을 들어 유엔군측이 지금까지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를 학대하고 세균전까지 서슴지 않은 것으로 선전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유엔군측은 10월8일 마침내 최종안을 제출했으나 공산군측이 거부함으로써 협상은 끝이났다.이후 10월14일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포로문제를 다시 다루어 휴전문제가 유엔으로 옮겨갔다.유엔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스위스,스웨덴등 4개국으로 포로송환위원회를 구성해 본국송환을 원하는 포로는 본국으로 송환한다는 원칙을 세웠다.그리고 모든 포로가 선택의 권리를 갖고 90일의 시한을 넘기고도 결정하지 못한 비송환자들은 휴전회담에서 위임한 정치회담에 이양하자는 인도의 절충안이 채택됐다.그러나 공산군측은 기본적으로 자원송환을 지지하는 유엔결의안을 수락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런 와중에 1953년 1월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행정부가 들어서고 3월에는 소련수상 스탈린의 죽음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판문점 연락장교회의를 통해 병상포로교환에 우선 합의했다.이에따라 4월26일 판문점에서 양측의 대표단 전원이 만났으나 회담은 다시 교착상태에 빠졌다.미국정부는 5월25일 회담대표자회의를 통해 최종안을 전달했다. 이 최종안은 6월4일 회의에서 약간 수정됐지만 송환을 원하는 포로는 휴전조인후 2개월내에 송환완료하고 잔여포로에 대해서는 그후 90일간의 설득기간을 갖도록 한다는 내용을 일단 도출해냈다.또 30일이내에 송환거부 포로문제를 정치회담에서 처리하되 합의를 보지못한 해당포로는 민간인 신분으로 변경키로 합의했다.민간인이 된 포로들은 뒷날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의해 한국도 북한도 아닌 제3국으로향하는 운명이 결정되었다. ○첫 석방계획은 실패 그로부터 14일후인 6월18일 자정 남한에 수용됐던 반공포로 2만6천4백24명이 국군의 도움으로 수용소를 탈출했다.이른바 반공포로 석방으로 불리는 이 한국판 엑서도스는 이승만 대통령이 결정했다.유엔군과 공산군간에 휴전회담이 본격 진행되자 휴전반대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던 이승만 대통령은 10일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중장등 군 수뇌들을 불러들였다.이 자리에서 반공포로 석방문제를 검토하고 다음날 정오 이를 시행토록 명령했다.그러나 한국군 병력배치등 준비미흡으로 첫 계획은 실패하고 1주일뒤인 18일 북한행을 거부한 포로들이 미군 경비 수용소를 빠져나와 자유의 품에 안겼던 것이다. ◎미 힉컬슨 작성 문서/미,공산군포로 난동에 시종 곤욕/북·중서 강력 항의… 정전협상 불리/도드 수용소장 피랍사건 상세 기록 미군은 한국전쟁 기간내내 공산군 포로문제로 시달렸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MARA)에서 입수한 문서더미 가운데 국제정치관계철 북한 전쟁포로 관련 시리즈는 이같은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문서시리즈는 미 국무성 차관보 힉컬슨이 1952년 2월18일 「한국의 전쟁포로」라는 제목으로 작성해 극동과 간부 엘리손과 존슨에게 발송한 문서로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이 문서시리즈에 따르면 미군측은 공산포로로 인해 지휘체계 상부의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등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이 문서가 작성된 당일만 해도 한국인 포로를 조사하기 위해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제62동에 진입한 미군병력과 포로들의 충돌로 미군1명과 포로 77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했다.이밖에 미군 38명,포로 1백40명이 부상당하는 유혈사태를 빚었다.공산군측은 이사건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고 유엔군측은 「민간인이 관련된 내부사건」으로 일축했지만 결국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유엔군과 미군측은 협상에서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됐다고 분석했다. 리지웨이 장군이 이 시리즈 4월29일자 전문에서 수용소 상황에 대해 기술한 내용도 이같은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장군은 전문을 통해 『이들 수용소는 잘 조직돼 수용자들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힐 정도의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다스릴 수가 없다.하지만 위험한 폭동이나 유혈사태등의 모험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기술하는 등 포로문제로 고심한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이 문서 시리즈는 또 52년 5월7일 도드 거제도 제76포로 수용소장의 납치사건도 기록하고 있다.콜슨장군은 도드의 석방을 위해 포로들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이 사건으로 5월20일 도드와 콜슨장군이 모두 대령으로 강등하는 과정도 잘 드러내 보였다.
  • 미 「힉컬슨 문서」를 보고/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

    ◎포로처리 싸고 첨예대립 입증/한국측 일방적 북 포로 석방에 미 당황/반공포로 중립국 송환위 이양도 검토 한국전쟁 시기 북한군 포로관계 문서의 소개는 한국전쟁 연구의 실증성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서울신문 발굴 관련자료들에 의하면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북한군 포로문제는 중요한 관심사항이었다.1950년 7월4일 맥아더 사령관은 북한당국에 자신의 부대에 의해 포획된 북한인들은 『문명국가에 의해 인식되고 있는 인도주의적 원칙에 따라 대우받을 것』을 보증하는 성명을 발표할 정도였다.그는 포로가 된 그의 부대원들에게도 같은 대우를 기대하는 경고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1950∼19 51년간의 문서에는 북한군 포로명단,포로중 장교명단,포로사망자 명단등을 비롯해 북한군 포로에 대한 심문,중공군 참전 이후 포획한 중공군 포로 처리문제,1.4후퇴 이후 북한군 전쟁포로의 철수문제등이 주요하게 다루어졌다.아울러 공산군이 행한 포로잔학행위에 대한 항의문서,전쟁포로들이 유엔사무총장에 보내는 탄원서,전쟁포로 석방문제등까지 언급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시기 북한군과 중공군측도 미군과 유엔이 포로를 학대했다고 유엔에 항의했다.이에대해 미군측은 미군포로를 위한 국제 적십자활동의 강화,북한 점령지역내 한·미간의 항공수송협정,한일간의 어업분쟁,미군·유엔군 포로에 대한 구조,원호문제등을 검토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또한 공산군측의 포로학대 비난에 강력히 대처하기 위해 미국은 유엔군 포로수용소에 대한 중립국의 검사방안을 신중히 검토했고 이에따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다. 1952년 하반기가 되면서 포로문제는 정전협정과 맞물려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1952년 10월1일 발생한 제주도의 중공군 포로문제를 필두로 거제도포로수용소 폭동은 이들에 대한 처벌여부를 둘러싸고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정전협상이 궤도에 오르면서 전쟁포로의 송환,교환문제가 검토되기 시작해서 포로 전반에 대한 송환,교환문제가 제기되었다. 1953년 초반부터 판문점에서 벌어진 정전협상에서는 이들 포로에 대한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북한·중국 공산측과 미국·유엔군측이 날카롭게 대립했음을 문서들은 보여준다.한편 정전협상의 고비에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한 일방적 북한포로 석방으로 미국측이 혼비백산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이와함께 반공포로를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기는 문제도 적극 검토되었으며 특히 인도가 중립국 감시단에 참가하는 문제가 심도 깊게 논의되었다. 결국 이같이 한국전쟁기 북한군 포로문제를 둘러싼 양측의 대립은 전쟁이 전선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포로수용소와 포로문제를 둘러싼 선전전,심리전의 일환으로도 이용되었다는 것이 포로관계 문서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 「알렉시스 존슨 파일」을 보고/공군철수·중공군 개입때 파장 예측

    ◎트루먼 유엔연설 등 대한정책 입안과정 한눈에 미국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의 「알렉시스 존슨 파일」은 19 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한국상황과 주변 국제정세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이 파일은 전쟁시기 주한 미국인들의 철수문제는 물론 한국인 기독교인들의 구출을 논의한 기록으로 흥미를 끈다. 이 문서철에는 민간인 철수문제 이외에 중국 공산군의 침략에 따른 장래의 파장예측은 물론 유엔의 대처방안,한국에서의 미군철수,한국에서 미군과 유엔군 철수시 일본에서 발생할 사태예측등이 포함되었다.그리고 한국전쟁과 맞물린 제3차 세계대전 발발 가능성,휴전협상에 대처할 미국의 전략등이 눈길을 끈다. 한 예를 들면 1950년 11월에 작성한 비망록은 중공군의 참전문제를 둘러싸고 제기될 수 있는 여러 가정과 이에대한 미국의 대응방안을 진단했다.알렉시스 존슨은 여기서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면 개입하겠다는 중공의 반응이 뻥튀기가 아니라고 지적했다.다만 중공은 유엔군의 만주 공격을 두려워 한다고 밝혔다.특히 19 50년말맥아더의 대만 방문과 미국의 중국본토 공격의도를 표출한 중국 국민당 정부(대만)의 선전은 중공을 자극시킨 것으로 분석했다. 그리고 중공군은 북한정권이 자리잡을 수 있을만큼 땅을 확보하면 더 이상 남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함으로써 알렉시스의 파일은 적정한 평가를 내렸다는 결론이 나온다.어떻든 이 파일은 실무자의 정확한 시각이 반영되었다. 1951년 8월3일자 비망록에는 미 국무성 회의에 참가한 주미 프랑스 대사가 본국의 소식통을 인용,9월4일 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느냐고 미 국무성 담당자들에게 질문한 대목도 나온다.프랑스대사는 이 정보를 프랑스 코민포름 정보원으로부터 얻었다고 밝혔다.이에대해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공산주의자들이 언제라도 도발할 준비가 되어있지만,9월의 전쟁기미는 보이지 않는다고 답변한 기록이 보인다. 이 밖에 1951년 12월4일자 비망록은 신임 국무장관 덜레스의 일본 방문에 대비해 작성되었다.여기서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예하이긴 하지만 1만8천명 정도의 해안경비대 창설문제와 7만5천명에 달하는 자위대를 중무장화하는 안이 들어있다.또 일본 유구열도와 보닌스섬을 미국이 군사기지화 하기위해 신탁통치하는 안이 미일평화협정에 논의되고 있지만,17세기 이후 일본이 통합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분석했다. 서울신문이 입수한 알렉시스 존슨 파일은 이렇듯 미국의 대한정책 결정의 실무자가 당시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면서 사태변화의 추이를 정확히 진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서가 되고있다.특히 알렉시스 존슨은 4월20일 한국상황에 대해 트루먼 대통령이 유엔에 보고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는 그대로 실행되었다.미국의 대한정책의 입안 실상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 1·4후퇴뒤 혼란정국(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4)

    ◎거창학살­국민방위군 사건 잇달아 발생/이 대통령,국회와 마찰… 대통령 직선 추진 한국전쟁은 1951년 새해가 밝으면서 개전 2년째를 맞았다.미 공군은 설날에도 전폭기 편대들을 전선과 북한지역 깊숙이 발진시켰다.그리고 8백12회의 출격을 설날에 기록했다.전선은 남쪽으로 크게 밀려나 38도선 부근에 와 있었다.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은 전선이 압록강 한·만국경에 고착될 것으로 기대한 한국민의 희망을 깡그리 앗아갔던 것이다. 정부는 1월3일 임시수도를 부산으로 결정하고 다음날 서울을 비웠다.전해 9·28수복으로 환도했던 정부의 공식 서울 철수를 역사는 1·4후퇴로 기록하고 있다.서울시민 30만명이 피란길에 오른 가운데 5일에는 중공군 선발대가 한강을 건너 영등포까지 진출했다.주문진,홍천,양평,수원을 잇는 제2방어선도 곧 무너졌다.유엔군은 7일 오산을 포기해 버렸다. ○양민희생자 6백명 그 2월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경남 거창에서 양민학살 사건이 일어났다.공비토벌에 나섰던 육군 제11사단 9연대 제3대대가 2월11·12일에 거창군 신원면에서 저지른 이 사건의 희생자는 6백명이나 되었다.이유는 공비와 내통했다는 것이었는 데 일일전과 보고는 주민 희생자수를 1백87명으로 기록했다.국회가 이를 문제시하고 4월7일 현지조사에 나섰다가 공비로 가장한 군의 공격을 받고 철수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벌어졌다.주동자들은 구속되어 군법회의에서 실형을 받았다.그러나 모두 1년안에 풀려났다. 이 사건을 축소 은폐한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5월7일 해임되었다.그의 해임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거창 사건말고 새로 불거져나온 국민방위군 사건이 더 크게 작용했다.이 사건은 51년1월 국민방위군 집단후송과 수용과정에서 고개를 들었다.국민방위군 설치법에 따라 제2국민병에 해당하는 17∼40살의 장정들을 방위군에 편입시켜 경북지역 각 교육대에 수용했다.이를 계기로 방위군 고위 간부들이 막대한 돈과 물자를 빼돌렸다.그 부정규모는 당시 화폐 24억원,양곡 5만2천섬에 달했다. 국회는 4월30일 방위군 해산을 결의했다.이에따라 5월12일 방위군이 공식 해산되었으나 장정들의 귀향조치는 3월중순부터 이루어졌다.사건이 확대되고 희생자가 날로 늘어나자 정부는 진상조사에 나서 김윤근 사령관을 구속했다.다른 간부 5명과 함께 군법회의에 회부된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다.사형이 선고된 5명의 방위군 간부들에 대해서는 8월13일 대구 근교에서 총살이 집행되었다.숱한 청장년을 헐벗게 하고 굶긴 건국이래 최대의 비리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방위군 간부 5명 총살 1951년의 이 두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 임기 내내 따라붙은 불명예였을 뿐 아니라 정적들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특히 거창사건 주동자 가운데 김종원의 경우 뒷날 경찰총수인 치안국장으로 기용했다는 사실은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도덕성을 문제시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이 사건들은 이기붕을 권력의 주변으로 끌어들인 결과를 가져왔다.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신성모 후임의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던 것이다.이를 단초로 이승만 대통령을 핵으로 한 권력의 인맥이 새롭게 발전할 것이라는 장래를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기붕 기용에 앞서 거창사건의 책임을 물어 조병옥 내무장관,김준연 법무장관의 권고사직을 4월24일과 25일에 전격 수리했다.대통령은 조병옥을 오랫동안 못마땅하게 여겼다.당시 대통령의 업무일지에는 1951년1월 서울에서 내려온 이후 조병옥은 내무부가 있는 대구보다는 부산에 더 많이 머물러 있다고 기록했다.그 이유는 정치적 책략을 동원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그리고 대통령을 찾아오는 일이 없고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게 고작이라는 불만도 곁들였다. 조병옥은 사퇴서를 보내놓고 곧바로 이승만 대통령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그래서 4월24일자 대통령 업무일지는 「조병옥은 자신의 위치를 어느 정도 굳혔고 대통령에 반대해서 싸울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다.주한 미국대사 무치오는 조병옥의 사표수리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항의했다.이를놓고 이승만 대통령 쪽에서는 미국이 다음 대통령 선거를 좌지우지 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하고 무치오가 새로운 내무장관을 장면과 같은 온건한 인물로 꼽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장면에게는 이미 국무총리직이 수임되어 있었다.장면은 사실상 주미대사로 워싱턴에 더 머물기를 희망했다.그럼에도 이승만은 새해들어 그의 소환을 결심하고 1월5일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이시영 부통령이 5월9일 「시위」에 앉아 소찬을 먹는 격에 지나지 못했기 때문에 물러난다」는 서한을 신익희 국회의장 앞으로 전달했다.이와 더불어 부통령직 사임서를 피란국회에 보냈다.사임서가 국회에서 반려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본인의 고사로 3일후 국회 본회의가 이를 수리했다.국회는 두 차례의 보궐선거끝에 5월16일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뽑았다.그 역시 잔여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1952년 정치파동의 와중에 전격 사임해 버렸다. ○개헌 결심…자유당 창당 한반도를 아비규환의 전쟁으로 몰아붙인 그 6월이 또 다가왔다.4월11일 전격해임된 맥아더장군에 이어 리지웨이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은 6월19일 철원,김화,평강으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그러나 중공군은 금성지구 한국군 2군단 전면에서 춘계공세 이래 최대의 공격을 개시했다.공산군은 4월22일 제1차 춘계공세 이후 6월17일까지 21만5천9백명의 병력손실을 입었다.그럼에도 유엔군사령부는 아직 대공세 능력을 상실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이승만은 계속 국회와 부딪쳤다.일반적 여론은 국회가 대통령을 간선으로 선출할 경우 그가 대통령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었다.그래서 헌법개정을 결심했다.8월15일 그의 신당구상은 11월19일 자유당 창당으로 실현되었다.자유당 창당 이전인 10월17일 국무회의는 대통령 직선과 양원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의결하고 11월20일 이를 국회에 제출했다. ◎미 「알렉시스 존슨 파일」/미,한국전중 “기독교도 구출” 논의/전쟁 확산→한반도 포기상황 전제/북한측 박해 밝혀져 인권차원 거론 미국은 한국전쟁이 확산되어 한반도를 포기할 경우 한국민 가운데 기독교인들을 구출하는 문제를 토의한 것으로 밝혀졌다.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워싱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입수한 「알렉시스 존슨(Alexis Johnson)파일」을 통해 확인한 것이다. 이같은 기독교인 구출문제에 대한 논의는 1951년 11월2일에 작성한 미 국무성 회의비망록에 들어있다.회의에는 미 국무성 극동국의 러스크,동북 아시아과의 맥 크러킨이 참석했다.이는 미국 장로교인 트류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당시 미국은 다른 종교가 거의 들어오지 않는 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에 이 문제가 자연스럽게 논의된 것으로 보인다.특히 한국전쟁 이전에 북한 공산권 치하에서 기독교인들이 큰 박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유엔군 북진에서 드러나 더욱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전쟁 이전 북한의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철저하게 말살되었다.가톨릭의 경우 함경남도 덕원 면속구의 피해는 컸다.1945년 민족해방 이후 1949년 5월9일 이후 수도원은 몰수 당했다.사우어 주교를 비롯한 많은 신부와 수사,수녀들이 고난속에서 순교했음이 밝혀졌다.개신교에서도 많은 순교자를 냈다는 사실이 서방에 전해짐으로써 기독교인들의 구출은 인권 차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민 기독교인 구출은 한국에 살고있는 미국 민간인 철수작전과 더불어 제기되었다.한국전쟁 발발 당시인 1950년 서울은 물론 대전이 예상이외에 빨리 북한군에 점령되어 미국의 민간인들이 포로로 취급받은 데 따른 대비책으로 미 민간인 철수는 심도있게 논의됐다.그러니까 이 비망록을 작성할 당시도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위가 불투명했다는 추론이 나올 수 있다. 알렉시스 존슨은 1930년대 후반 한국에도 살았던 외교관으로 이승만이 미국에 망명해 있던 시절 그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인물이다.한때 미 국무성 극동아시아과에서 영향력을 가진 관리로 활약했다.
  • 한강 인도교 폭파(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3)

    ◎「임진강교 폭파 실패」뒤 서둘러 준비 지시/미 참전으로 예정보다 하루 늦춰 결행 19 50년 6월25일 일요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다음날 26일 월요일에 벌써 수도 서울을 혼란에 몰아넣었다.대한민국 정부와 국회는 26일 밤 각각 긴급 국무회의와 긴급국회를 열어 27일 새벽 수원으로의 천도를 결정할 만큼 전선은 긴박하게 돌아갔다.그리고나서 28일 상오2시30분쯤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해버렸다.한강다리를 폭파한 시간에 T33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 공산군은 아직 수도 서울의 중심부 밖에 있었다. ○개전 다음날 검토 착수 한강 다리 폭파계획은 전쟁 다음날 26일 상오부터 이미 검토되었다.전황이 매우 불리해지면서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불러들여 한강다리 폭파에 대한 여러 질문을 던졌다.이는 적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임진강 다리 폭파를 시도했다 실패한 과오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공병감은 공병학교 폭파교관 황원회 이창복 중위에게 폭파준비를 서둘러 지시했다.당초 폭파시각은 27일 하오4시로 결정되었다. 이같은 결정은 육군본부가 시흥으로의 철수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그러나 이날 하오2시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미군개입 가능성과 극동미군의 전방지휘소(ADCOM)가 한국에 설치될 것이라는 전문이 날아들었다.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이 소식을 미군사고문단(KAMAG)단장대리 W H 라이트로부터 전해들었다.그래서 시흥으로 나앉았던 육군본부를 다시 용산으로 복귀시켰다.이에따라 한강다리는 결국 하루늦게 폭파되었다.이시영 부통령 일행은 폭파직전 한강을 마지막으로 건넜다.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상오2시 특별열차편으로 한강를 건너 대전으로 내려갔다.그런데 이날 한강다리가 폭파되기 30분전에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이 전파를 탔다.그 내용은 『미국의 적극적인 군사원조가 있을 것이니 국민은 총궐기해 반란분자들을 퇴치하자』는 것이었는데,사실은 사전에 준비한 녹음방송이었다.한강다리의 폭파는 결국 수도 서울을 사수하던 국군장병 4만4천명을 낙오병으로 만들었다. ○국군 4만4천명 낙오 북한 공산군이 서울시내 중심부에 들어온 시각이 28일 하오3시쯤이었으니까 다리 폭파를 6∼8시간 정도 늦추어도 큰 무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비판이 뒷날 나왔다.이런 이유로 해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군사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다.그러나 폭파를 명령한 육국 참모총장 채병덕은 7월27일 하동전선의 180고지에서 북한군의 기습을 받고 전사했다.한강 다리가 끊겨나간 이후 육군 5개 혼성사단이 노량진 본동을 중심으로 모여 한강 방어선을 구축했다.서울에서 퇴각한 이들 부대는 명목상 사단편제였지 사실은 연대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개전한 시각에 한국의 우방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 대통령은 미조리주 인디펜던스 자기 사저에 머물고 있었다.그는 당장 워싱턴으로 돌아오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국무장관의 충고를 받아들여 다음날 백악관에 도착했다.미국은 국제연합(UN)이 「평화에 대한 침략적 행위」로 규정지어 주기를 바라면서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지않는 전략을 취했다.그리고 미국무성은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즉각개최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무렵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중공)대신대만의 자유중국이 중국을 대표하는 회원국으로 총회 안보이사회 의석을 차지하도록 결정한데 항의하여 유엔을 보이콧하고 있는 중이었다.소련이 불참한 안보이사회는 즉각적인 전투중지와 38선 이북 원위치로의 철수를 요구하는데 결의했다.이와 더불어 유엔 회원국은 이 결의의 집행을 위해 한국에 원조를 제공하고 북한에 대한 원조 자제를 요청하는 안도 결의안에 포함시켰다. 미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 공산군이 서울 근교에 접근하던 6월27일(워싱턴 시간) 미공군과 해군에 한국정부를 엄호지원하는 명령을 내렸다.이날 유엔 안보이사회는 소련이 여전히 불참한 가운데 「무력침략을 격퇴시키고 평화와 안전을 회복시키는데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다음날 28일 서울은 침략자의 손에 들어갔다.트루먼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미국은 한국에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유엔의 경찰행위를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개전 5일째가 되고 서울이 공산권 수중에 완전히 넘어간 다음날인 6월29일에는 맥아더장군이 자신의 전용기 바타안호를타고 동경에서 수원으로 비행해왔다.바타안호가 착륙하는동안 간이 활주로 한쪽 끝을 북한의 소련제 야크기가 공격했다.맥아더는 사태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꼈다.한편 임시수도 대전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적의 항공기로부터 요격을 피하기 위해 계곡을 따라 저공비행으로 수원에 와 닿았다.이들이 서울대 농과대학 캠퍼스에서 만나는 동안에 적의 전투기는 계속 기총소사를 해댔다. ○“미 해군 해안선 봉쇄” 맥아더는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는대로 한국을 지원하겠다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약속했다.트루먼은 6월30일 일본에 기지를 둔 미공군이 북한의 군사시설에 대한 폭격을 승인했다.이와함께 한반도의 전 해안선을 해군이 봉쇄하도록 명령하고 맥아더 장군으로 하여금 한국에서 상당한 지상군 지원부대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에따라 찰스 스미드 중령이 이끄는 미 지상군 선발대가 일본 사세보를 떠나 부산을 거쳐 7월5일 평택에 도착했다.그러나 이 미군부대는 한국군의 한강 방위선을 무너뜨리고 계속 남하하는 북한군 탱크앞에 속수무책이었다.이런 상황속에 UN안보이사회는 7월7일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는 회원국은 그 군대를 미국이 지명하는 사령관 휘하에 둘 것을 권고했다. 그 다음날 트루먼 대통령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주한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기에 이른다.개전후 뼈아픈 11일간이 지나가는 동안 유엔과 미국은 한국전쟁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그리고 16개국에 이르는 회원국이 한국을 지원하기로 한 결의를 행동으로 옮겼다.특히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의 지상전에 주동적 참전국이 된 것이다. 미국의 참전은 전선 주변에 위험한 그림자를 깔기 시작했다.그 위험은 한국군과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공산군 점령지역의 허리인 인천을 상륙한데 이어 낙동강 전선을 뚫고 북한 깊숙이 들어갔을 때 현실로 다가왔다.1950년 가을이 저문 10월19일 저녁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넜던 것이다.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은 전쟁양상을 또 한번 바꾸어 놓았다. ◎미 「국가정보평가서」/“소,「한국전 중 개입땐 대전 확산」 예측”/“유엔군 내분 조장… 전력약화 기대/필요땐 중에 소 의용군 지원 태세” 1950년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했을때 소련은 한국전쟁의 세계대전 비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그와같은 사태발전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당시 미국은 평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입수한 「국가정보평가서­11」(NIE­11)에 따르면 소련의 통치자들이 중공의 한국전 개입을 지시 혹은 재가하면서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위험성을 인지했다고 미국은 평가하고 있었다.NIE­11은 그러나 소련이 중공군 개입과 동시에 세계대전에 돌입할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NIE­11은 또 소련이 세계대전 발발여부와 상관없이 미국과 중공간의 전면전에 거는 기대가 크다고 적고 있다.▲우선 미국과 연합군대를 다른 전장으로 유인해 병력을 소멸시킬 수 있고 ▲미국과 그 동맹국간 알력을 조성할 뿐만 아니라 ▲한국에의 침공으로 유엔의 단결력을 좌절시킬 수 있다는 것이 소련의 판단으로 추정했다. 이에따라 소련은 중공에 대해 적절한 물자와 기술인력,심지어는 의용군까지 제공해 한국에서의 중공군 작전을 지원할 것으로 판단했다.특히 유엔군의 공중공격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중국내 거점 방위가 필요하다면 비행기와 대공포를 훈련된 요원도 함께 제공할 것으로 내다보았다.또 중국영토에 대한 미군(유엔)의 대규모 작전이 있을 경우 중·소조약에 근거해 중공에 대한 소련의 공개적 군사지원이 따를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NIE­11은 이어 사태추이를 볼때 중국 공산당의 개입목적은 유엔이 한국에서 발붙일 수 없도록 하는데 있다고 덧붙였다.NIE­11은 미 중앙정보부가 1950년 12월5일 국무성 및 육·해·공군의 정보관계자들을 참여시켜 작성한 1급 비밀문서다.
  • 「한국전쟁 기원」 논쟁(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2)

    ◎「이데올로기 잣대」 따라 남침­북침설 대립/본지연재 「모스크바 새증언」이 남침 입증 한국전쟁의 진행 상황은 본지 연재물 「6·25 내막 모스크바 새 증언」에서 이미 자세히 소개했습니다.따라서 「새로 쓰는 한국현대사」시리즈에서는 전황을 직접 다루지 않는 대신 한국전쟁 기간중 있었던 주요 사건·사고와 정치·경제·사회적 흐름을 주로 소개하겠습니다.독자 여러분께 배전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1950년 6월25일 상오 4시 38선 일대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짙은 안개가 드리워 있었다.일요일을 맞아 새벽 단잠에 빠진 한국군부대 막사 위로 한순간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더니 이어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 주력부대가 38선을 넘었다.이에 앞서 상오 3시30분쯤에는 북한 게릴라 3천1백여명이 해군 상륙선단편으로 동해안 옥계·삼척·임원 등 3곳에 상륙했다.동족상잔의 비극 「6·25」가 터진 것이다. ○북 군사력 한국 압도 북한군은 개전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7월 말에는 경상도·제주도를 제외한 국토 전역을 수중에 넣는 등 파죽지세로 대한민국을 유린했다.북한군이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공세를 벌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북한은 일찌감치 전쟁준비에 나서 개전 당시 군사력에서 한국을 압도했다. 개전 초기 양쪽의 전력을 볼 때 북한이 침략의도를 갖고 대한민국을 먼저 공격한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킨 쪽이 어디냐는,곧 「한국전쟁의 기원」을 따지는 논쟁이 오랫동안 끊이질 않았다.이는 한국전쟁이 단순히 한민족간에 벌어진 내전이나 국지전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세계가 미국·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서 양블록으로 갈라져 냉전체제로 돌입한 다음 벌어진 첫 대결의 장이었다.따라서 한국전쟁 기원에 관한 학설에는 전쟁 자체의 성격 분석을 전제한 이데올로기적 잣대가 작용하게 마련이었다. 한국전쟁을 해석하는 시각은 냉전 발생의 책임을 미·소 중 어느쪽에 두느냐에 따라 두갈래로 나뉜다.하나는 「소련의 공격주의적이고 팽창주의적인 대외정책이 미국의 단호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고 보는 전통주의 학파다.거꾸로 「미국이 월등한 군사·경제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하므로 소련이 불가피하게 대응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쪽은 수정주의 학파라고 부른다.기본적으로 전통주의자들은 「남침설」을,수정주의자들은 「북침설」을 지지한다. 전통주의자들은 한국전쟁을 일으킨 주범으로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자 수상인 스탈린을 대개 지목하며 그 동기는 다음 몇가지로 분석한다.첫째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유럽에서 압박을 가하자 이를 분산시키려고 극동에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압력분산설」이 있다.또 ▲세계 적화를 노리는 스탈린이 미국의 대응 의지를 떠보려고 도발했다는 「저항력 실험설」 ▲주한미군 철수,애치슨라인 설정으로 미국이 한국방위를 허술히 한데다 한국에서도 「5·30선거」에서 우익세력이 패하자 그 틈을 노렸다는 「허점공격설」 등이 있다. ○냉전발생책임에 무게 반면 수정주의 학설은 「맥아더와 이승만이 공모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가설에서 출발했다.미국의 좌파 언론인 스톤이 제기한 이 주장은 「이승만은 국내 정치위기를해소하려고,맥아더는 미 정부의 관심을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전쟁을 획책했다는 논지로 구성됐다.정확한 근거없이 단순한 추측에서 시작된 이 가설은 점차 미국·일본 등 서방국가 좌파 지식인사이에 널리 퍼져 수정주의라는 한 갈래를 이뤘다. 「6·25」를 겪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어처구니없어 할 「북침설」이 나름대로 세력을 이룬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먼저 전통주의자건,수정주의자건 한국전쟁을 지나치게 냉전논리로만 파악했다는 점이다.이들은 당시 남북한의 정세나 군사력 비교 등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다만 소련 또는 미국이 왜 전쟁을 일으켰을까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분석했다.또 한국전쟁 발발에 관한 북한·소련측 자료가 거의 공개되지 않은 점도 학자들의 연구를 제약한 큰 요인이었다.예컨대 북한군의 남침을 밝히는 한글 문헌은 1986년까지 한건밖에 공표되지 않았다. 이같은 학계 분위기는 80년대 후반 들어 반전한다.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 보관중인 「북한 노획문서」가 공개되면서 북한이 「6·25」를 철저히 준비했고,치밀한 계획에 따라 전쟁을 수행했음이 속속 밝혀졌다.「북한 노획문서」란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진에 나선 미군이 평양 등 북한 각지에서 압수한 각종 문서를 총칭하며 그 분량이 1백60만쪽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다.이 북한측 자료는,인민군 5개 사단이 6월23일부터 24일 밤사이 38선이북 수㎞ 안에 집결해 25일 새벽 선제공격을 가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가령 6사단 문화부가 6월13일 예하부대에 내려보낸 「전시 정치·문화사업」명령서를 보면 38선으로의 이동­공격 개시­점령지에서의 정치선전 활동에 이르기까지를 5단계로 구분해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북한 노획문서」의 공개와 이에 근거한 연구성과 발표는 어느쪽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느냐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다.그러나 이 단계에서도 전쟁을 계획하고 주도한 인물이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이를 결정적으로 확인시켜 준 자료가 서울신문이 올해 발굴해 「6·25 내막 모스크바 새 증언」이란 제목으로 연재한 러시아 소장 비밀문서 9백50여건이다.러시아 외무부·대통령궁·옛소련공산당 중앙위·국방부에서 각각 입수,이번에 처음 공개한 이 자료더미는 한국전쟁 준비에서 휴전에 이르기까지 풀리지 않던 많은 의혹들을 해명해 주었다. ○“3인 공동정범” 밝혀 이에 따르면 김일성·스탈린·모택동은 한국전쟁에 있어 각각 주요 역할을 했고 그에 따른 책임이 있다.김일성은 1949년 3월 스탈린을 만나 먼저 전쟁을 제의한다.이를 거부하던 스탈린은 50년 3∼4월 회담에서 남침을 허락했고,이후 53년 3월 사망할 때까지 전쟁을 주도한다.전쟁 계획을 확정하고,중공군을 끌어들였으며,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진 뒤에도 휴전을 거부하는 등 주요 결정은 모두 스탈린이 내렸다.한편 모택동은 초기에 참전을 주저하긴 했지만 막상 중공군을 투입하고 부터는 전쟁터를 책임진다. 러시아 비밀문서 발굴로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해묵은 논쟁은 사실상 끝난 셈이다.한민족에게 최악의 상처를 남긴 「6·25」에서 김일성·스탈린·모택동이 공동정범이라는 사실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로 증명됐다. ◎「당 7∼8월 사업계획서」/북,108군·1168면에 「인민위」 설치/도·시·군·면 행정단위 남노당위 “재건”/「평화옹호 서울위」,지지 서명 받아내 전쟁 개시 3일만인 6월28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 말에는 낙동강 동쪽을 제외한 국토 대부분을 점령한 북한은 점령지에서 당·정 기관의 건립,토지개혁,군지원을 보장하는 활동에 즉시 돌입했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비밀문건을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입수,국내 처음으로 공개한다.「당 중앙본부 7월∼8월 사업계획서」라고 이름붙은 이 문서는 「절대비밀」로 분류돼 있으며 등사본으로 50부만 찍은 귀한 자료다.이 문건은 전쟁 초기 승승장구하던 북한이 세운 전략을 알려준다. 사업계획서는 점령지 행정 중심방향으로 ▲옛 남로당조직 복구등 당세 강화 ▲군수품 생산 증대 ▲군·면·이 단위 인민위원선거 및 토지개혁 실시 ▲사회단체 활동 강화 ▲농촌에서의 증산 장려와 현물세 징수 등 5개항을 제시했다.또 10일마다 회의를 열어 이같은 지시사항을 점검하도록 했다. 이 문서에서 나타나듯 북한은 행정구역에 따라 중앙(서울)·도·시·군·면 단위로 각급 당 위원회를 재건하는 동시에 임시인민위원회와 사회단체들을 복구했다.당 위원회 재건작업은 북로당원으로서 파견된 공작대원,남로당 출신 월북자,형무소에서 출감한 남로당 간부 출신,빨치산 간부들이 맡았다.이어 두단계에 걸쳐 「인민정권기관」을 지체없이 세웠다.먼저 점령지에 지역 정권기관으로서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한 다음 곧바로 선거를 거쳐 인민위원회를 정식 설치했다.남한에서 인민위원회가 들어선 곳은 1백8개 군,1천1백68개 면이었다. 인민위원회는 북한에서 실시한 예에 따라 토지개혁을 실시했다.「무상 몰수,무상 배분」을 원칙삼아 일제와 한국 정부,지주 소유 토지는 모두 몰수해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자작농은 5∼20정보만 인정했다. 북한은 정치 선전·선동에도 힘을 기울여 7월14일 「평화옹호 서울시위원회」를 조직,북한을 지지하는 서명을 억지로 받아냈다.그 내용은 ▲유엔에 미국의 참전 중지를 요구하고 ▲이승만 대통령 등 대한민국 요인을 반역자로 지목,처형을촉구한 것이었다.
  • 한국전쟁 전야(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31)

    ◎비전투요원 472명 남고 미군 전원철수/6월17일 내한 덜레스 국무 “38선 이상무” 우리 민족이 가장 불행하게 맞은 20세기가 꼭 절반이 저문 19 50년 1월12일 워싱턴으로부터 달갑지 않은 소식이 날아들었다.한국은 미태평양방위선밖에 있다는 애치슨의 발언이었다.그토록 머물러 주길 희망했던 미군마저 철수한 위기상황 속에 날아든 애치슨의 발언은 한국민들에게 불길한 예감을 안겨주었다. ○“한국은 미 방위선 바깥” 한국에 남아있던 당시 미군의 병력은 4백72명에 지나지 않았다.전투병력이 아닌 미군사고문단(KMAG)자격의 비전투 요원들이었다.미군은 성급하게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20일뒤인 19 48년 9월15일부터 한국을 빠져나갔다.미안전보장회의가 대통령 H S 트루먼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이날부터 미군들이 극비에 철수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다.그리고 48년 12월말까지 완전 철수할 계획이었으나,중대한 모험이라는 여론에 따라 몇개월 연장되었다.미군은 결국 1949년 6월29일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철수를 끝냈던 것이다. 미국은처음부터 남한에 병력과 기지를 유지하는데 전략적 이익이 없다고 판단했다.이는 미 합동참모본부의 판단이었는데,극동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한국 주둔 미군은 오히려 장애가 된다는 것이었다.미국의 입장에서는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지상작전보다 쉽고 돈이 덜드는 미 공군의 활동에 더 기대를 걸었다.또 심각한 병력 부족현상을 겪고있던 미국은 남한에 유지하고 있는 병력 2개사단 약 4만5천명의 병력을 다른 지역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49년 3월22일 미국가안전보장회의는 그 전해에 만든 「한반도에 관한 미국의 입장」을 재검토하고 철군 건의안을 대통령 트루먼에게 제출했다.미군의 철수에 뒤따를지도 모를 공산주의 지배의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는 동시에 한국정부를 실행 가능한 한도에서 지원한다는 것이 골자였다.이는 한국에서 미국이 병력과 비용부담 의무를 줄일 수 있다는 국익과 맞물려 트루먼의 승인이 곧바로 떨어졌다. 어떻든 트루먼의 미 행정부는 철군 보상으로 한국에 미군 장비와 6개월분의 비축물자를 이양키로 했다.이와 더불어 미국 경제협조처(ECA)로 하여금 19 50년 회계연도에 1억9천2백만달러의 경제원조를 주는 방안이 고려되었다.그러나 중국 국민당 정부에 더 많은 원조를 주려는 하원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결국 한국정부는 50년 2월15일 이전에 사용할 수 있는 6천만달러의 원조금을 겨우 받아냈다. 한국군의 군비는 실로 말이 아니었다.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미국인 친지 R T 올리버(당시 펜실베이니아대 교수)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한국 육군의 탄약 비축량은 5일분에 불과했다.북한의 공격에 대응하지 않으면 5개월을 버틸 수 있다는 분량이라고 예측한 미국의 여론에 대해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불만을 품었다. 1949년 9월 한달 동안에 북한의 공격이 1천1백84회나 되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육지와 연결된 통로가 없는 옹진반도에서는 한국군이 매일 공격을 받은만큼 사실상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미군사고문단은 명목상 한국군을 위한 것일 뿐 실제 임무는 한국군을 통제하는 일이었다.항공기는 대공포화가 없는 지역에서 사용할 수있는 6대 이외는 허용하지 않았다.탱크나 장갑차 보유는 엄두도 못냈다.포병은 탱크를 격파하기에는 너무도 가벼운 바주카포와 화포에 국한시켰다. 그렇다고 영토보전을 위한 어떤 보장도,외부공격에 대한 지원약속도 없는 상태였다. ○탄약 비축량 5일분 불과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 1월 한국이 미태평양방위선 밖으로 밀렸다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발언이 전파를 탔던 것이다.정부수립 만 3년이 안되는 신생 대한민국으로서는 큰 놀라움이었다.한국은 참으로 고독했다.이승만 대통령이 19 49년부터 힘을 기울인 태평양 반공방위조약이 실현되었더라면 한국은 덜 외로웠을 것이다.자유중국·필리핀·인도·호주·캐나다·뉴질랜드 등이 참가하는 방향으로 구상한 이 조약은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도 매듭을 짓지 못했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 정권의 1950년은 의기양양했다.김일성은 1월1일 신년사에서 강력한 민주기지의 축성과 신속한 국토완정을 외쳤다.여기 나오는 국토완정은 얼핏 애매모호한 용어로 들리지만,실로 가공스러운 의미를 함축했다.국토의완전한 정리,다시 말하면 무력통일을 선언했던 것이다.그러면서 인민군대·경비대·보안대는 능숙한 전투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또 남한의 유격투쟁을 부추기는 내용의 발언을 덧붙인 김일성은 1949년에 이어 그해 3월에도 훈련된 빨치산 요원 1천50명을 남으로 보냈다. 김일성은 특히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발언에 고무되었다.북한은 한국과 대만을 미태평양방위선 밖에 둘 것이라는 애치슨의 내셔널 프레스클럽의 연설이 있기 그 이전에 이미 병력과 장비를 증강해놓은 상태였다.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만큼 전력을 증강한 것은 1949년 여름 이후였다.먼저 5만명에 이르는 중공군 출신 한인의용군을 중국으로부터 불러들였다.이로써 북한 정규군의 약 3분의 1이 실전경험을 갖추게 되었다.그리고 나서 1950년 봄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소련제 중화기와 T34형 탱크가 청진항으로 속속 입항했다. 미군의 철수와 소련에 의한 북한의 군사력 강화는 한반도에 대한 미·소의 정책차이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는 북한군 능력의과소평가와 동아시아 전략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일본에 기지를 둔 미공군의 활동반경은 한반도 전역을 커버할 수 있다는 미국의 판단은 한국군 무장의 불필요성과 한국포기를 정당화하는 이유가 되었다.이 시기에 미국은 직전의 적국 일본을 보호하기 위한 일본의 제한적 재무장을 심도있게 들고나왔다.국제정치는 그토록 냉혹한 것이었다. ○“5년 이내에 전쟁 없다” 한국의 위치는 계속 흔들렸다.1950년 5월5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 T 코널리는 미국의 전략에서 볼때 한국은 그다지 중요한 지역이 아니라는 발언을 했다.그의 발언은 파문을 일으켰지만,국내에서는 제2대국회를 뽑는 5·30선거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코널리 발언에 앞서 5월4일 미 대통령 트루먼은 전쟁이 일어날 위험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그러나 한국의 판단은 사뭇 달라 5월12일 신성모 국방장관이 북한군이 38선에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국기자들에게 밝혔다. 그리고 6월이 다가왔다.그 6월의 첫날 트루먼은 또 『5년 이내에 전쟁이 없다』는 말로 5월4일의 발언을 더 구체적으로 확신했다.이어 6월17일에는 신임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 서울로 날아들었다.38선을 시찰한 덜레스는 국회연설에서 한국을 물심 양면으로 돕겠다는 말을 남기고 19일 서울을 떠났다. 세계전사를 통해 가장 지루하고 긴 대규모의 국지전으로 치러야 했던 며칠후의 한국전쟁을 예측하지 못한채 극동의 화약고를 멀리했던 것이다 ◎미 CIA 정보평가 보고서/미 “북한은 전면전 펼 능력 없다”/“중·소의 적극지원 전제돼야 가능/대남투쟁 선동·유격전에 그칠것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은 19 50년 북한이 전쟁 수행능력 어느 정도 지녔던 것으로 평가했다.그러나 전면 남침이 가까운 시기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최근 발굴한 미 CIA 정보평가보고서(NIE)를 통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입증하는 문서는 CIA가 1950년 6월19일에 작성한 「NIE리포트­3」등으로 되어있다.이 문서에 따르면 북한은 탱크와 야포 등의 장비를 갖추었기 때문에 제한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있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했다.그 능력이란 단시일 내에 서울을 손아귀에 넣은뒤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한국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덧붙였다.북한의 군사적 우위성에 근거하여 이같이 판단한 NIE문서는 소련과 중공이 적극 지원하면 한국에서 전면전을 치를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남한에 대한 미국의 경제·군사원조가 대폭 삭감되거나 낭비되지 않는다면 남한 전체의 공산화는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다만 이 문서의 한계성이 있다면 미구에 닥칠 전면전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다.그래서 북한정권이 남한을 겨냥한 목표를 단순한 선동선전및 침투·사보타지·파괴공작·유격투쟁 등으로 예견했다.또 북한은 전적으로 소련에 의지하여 정권을 지탱하고 있으나 정권을 위태롭게 할 내부의 위협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은 이밖에 1950년 북한 상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북조선노동당 문서도 NARA에서 입수했다.6·25가 일어난 19 50년 5∼6월까지의 사업계획을 명시한 이 문서는 군사적 측면을 가장 밀도있게 강조했다.10부만을 등사물로 간행,극비문서로 분류한 조선노동당 문건은 미군이 평양에서 가져온 노획문서.이 문서 역시 서울신문이 국내에 처음 공개한 것이다.
  • 한국전참전 미언론인 베이런 로버츠 회고

    ◎42년만에 되살린 참전용사의 프라이드/기념비 제막계기 평가 새로이/「잊혀진 전쟁」서 이젠 「기념할 전쟁」으로 워싱턴에서 한국전 참전기념비가 제막되는 것을 계기로 이 기념비의 주인공인 참전미군에 대한 평가가 새로워지고 있다.미 보병25사단 일반병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현직언론인 베이런 로버츠씨(워싱턴 타임스)의 한국전참전회고문을 소개한다. 한국전 참전 미군들에게 이번주는 아주 큼직막한 주간이었다. 「사격 끝」의 기념일이었고 워싱턴 중앙국립공원안 「기억의 연못」 옆에서 한국전 참전용사기념비가 제막되는 주였다. 그림자가 어리는 「기억의 연못」? 얼마나 어울리는 배치인가. 1950년대,아니 정확히 1950년6월로 거슬러올라가자.거기서 한국전은 시작한다.처음엔 전쟁도 아니었다.경찰적 용무라고 불렸다.1차세계대전·2차대전 또는 남북전쟁과 비교해보면 전쟁이 아니었던 것이다.그런 전쟁과 비할 때 첫눈에 이 전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전쟁은 3년이 걸렸고 5만4천명의 미국인 목숨을 앗아갔다.이 숫자를 바탕으로하면 베트남의 악전고투,소위 걸프전쟁,그라나다 모험,파나마 조련 등은 감히 상대가 되지 못한다.베트남전은 미군 목숨을 이보다 수천명 더 앗아가긴 했지만 그러기 위해서 9년이나 더 총격전을 벌여야 했었다. 페르시아만에서의 전쟁? 글쎄,잘해야 1백시간이나 걸렸을까.파나마는 거기에도 아주 못미친다.그라나다는? 아예 말도 꺼내지 말자. 그런 한국전을 미국에선 잊혀진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은 아마 미국이 참전하고도 가장 잊혀져버린 진짜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는 세계대전의 발꿈치를 밟아 터졌고 그때 마침 거개의 미국인은 50년대와 60년대의 붐을 준비하기에 바빠 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공장들은 하이테크로의 경이로운 이행을 배태하기 시작했으며 텔레비전이 수백만 미국인의 넋을 홀릴 즈음이었다. 냉전은 유럽에서 열기가 오르고 있었다.미국 위에 아련히 드리우는 몹쓸 그림자는 소련 곰이었지 북한도 중공도 아니었다. 한국전 기사는 한 1년쯤 미국신문 1면에 올랐으나 곧 거침없는 후퇴를 기록,3면·7면·18면·20면으로 밀려났다.텔레비전은 초창기인 만큼 훗날의 베트남전같이 한국전을 커버하지 못했다.영화의 뉴스시간도 그저 다루는 시늉만 냈다.사람의 관심은 딴 데 있었다. 한국은 몸이 오그라드는 강추위와 숨이 턱 막히는 무더위 속에서 전쟁을 치렀다.쉬지 않고 쏟아지는 비와 세찬 눈보라,질식할 듯한 흙먼지와 무릎이 그냥 빠져드는 진창에서의 전쟁이었다. 또 교착상태의 기나긴 전선,축축한 벙커,가시철조망의 전진기지 등이 주요인상이었고 끊임없는 수색조 임무,적들의 미친 듯한 인해전술이 끔찍한 기억을 남겼다. 전쟁이 끝나자 싸웠던 미군은 다른 모든 전쟁의 참전용사가 그랬던 것처럼 행복감과 약간의 신경과민상태로 귀환했다.그러나 차이가 있었다. 1차대전의 귀환장병은 진정한 영웅으로 퍼레이드와 축하연에 파묻혔다.2차대전 참전용사도 마찬가지였다.베트남 참전용사는? 고향에 돌아올 때 퍼레이드는 없었지만 현충일·재향군인의 날·독립기념일 날 워싱턴의 베트남참전기념비 부근에 가보라. 걸프전의 「사막의 폭풍」에 참전한 미군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성대한 귀환 퍼레이드를 벌였다.단 1백시간만 싸우고도 슈발츠코프장군과 휘하 장병은 영웅대접을 톡톡히 받았다. 한국전 참전용사에겐 퍼레이드도 없었고 축하연은 더더욱이 없었다.옷가지를 쑤셔넣은 잡낭 하나만 달랑 들고 있었을 뿐이다.그리고 곧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몸소 참전한 전쟁에 대해서 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특히 외부인에게 그랬고,하더라도 같은 참전동료끼리 나지막한 소리도 주고받는 데 그쳤다. 베트남전이나 걸프전과는 달리 한국전 참전미군은 전쟁경험과 관련된 괴상하고 신비화된 후유증증상,혹은 그런 용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귀환해서 사회생활 속으로 융화되거나 표류해갔는데 기억과 참혹한 전쟁에 대한 상처는 혼자 말없이 간직했다.아마 그들은 중공군의 나팔소리와 뼛속을 파고드는 한기를 이따끔 머리에 떠올릴지 모른다.고지탈환을 위해 비명 같은 함성을 지르며 비탈을 지쳐오르는 장면을 기억할 수도 있겠다. 그렇더라도 그걸 장황히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전 참전미군이 이번 참전기념비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다.참전 퇴역군인은 말없이 참전비 옆에 서서 회상에 잠길 것이고 그새 눈물이 괴는 용사도 많을 것이다. 그들에겐 항상 이같은 조용한 위엄이 배어나온다.자신의 감정을 중인환시리에 떠벌리지를 않는다.말은 없지만 한국전 참전미군에겐 프라이드가 있다. 그렇다,42년이 지난 뒤이긴 하지만 이젠 기념할 때다.
  • 중국의 개입(6·25내막/모스크바 새 증언:13)

    ◎모택동,전쟁초기부터 중국군 파병 준비/미군 38선돌파 대비 목단지역에 병력 12만 집결/소에 “공중호위” 지원요청… 스탈린 “즉각제공” 통보 모택동은 전쟁준비단계에서부터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적극 지지했고 나아가 필요시 중국군을 직접 파병하겠다는 약속을 수차에 걸쳐 한바 있다.그러나 모택동은 김일성이 전쟁계획을 구체화시키면서 스탈린을 주의논 상대로 삼은데 대해 매우 섭섭한 감정을 가졌음을 알수 있다.이런 양상은 결국 모택동으로 하여금 중국군 파병을 여러 차례 거부하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다. 전쟁초기부터 중국이 한 역할을 살펴보자.전쟁발발 직후인 50년 7월 1일 북경주재 로신 소련대사는 스탈린 앞으로 다음과 같이 중국정부의 분위기를 보고했다.(로신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중략…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남조선 괴뢰들은 완전한 패배를 겪고 있음.남조선당국은 미국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음.트루먼이 조선에 대한 군사개입을 명령한 것은 심사숙고해 내린 결정이라기 보다는 좌절감의 표시임.극동에서 패배를 경험한미국은 유럽뿐 아니라 중근동에서 마저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는 데 우려를 표하기 시작했음.이런 점으로 미루어 미국은 소련이 이끄는 평화·민주진영과의 대규모 군사대결을 벌일 태세가 안돼있음을 알 수 있음』 ○김·스탈린 밀착에 불만 이튿날인 7월 2일 주은래는 로신 대사를 불러 한국전에 대한 중국정부의 입장을 전달했다.로신대사는 면담직후 곧바로 이를 전문으로 보고했다.(로신의 본부보고.전문번호N1112­1126)『중국정부는 미국이 막강한 일본점령군 12만중 6만명을 한국에 투입할 수 있다고 보고 있음.이들은 부산,마산,목포에 상륙한 다음 철도를 이용,북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음.따라서 인민군은 남진을 서둘러 이들 항구를 점령해야함. 모택동은 서울을 사수하기 위해 인천(제물포)지역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믿음.본대사는 주은래에게 일본군이 개입을 준비중이라는 게 사실이냐고 물었음.중국은 그런 정보를 갖고있지 않다고 답했음.주은래는 또한 만약 미군이 38도선을 넘을 경우 중국인민해방군이 조선군인으로 변장해의용군으로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고 말했음.이를 위해 중국지도부는 이미 목단 지역에 3개군,총12만 병력을 집결시켰다고 밝혔음.주은래는 소련공군이 이 병력을 위해 공중호위를 제공할수 있는지 물었음. 주은래는 한국전 상황에 언급하며 북조선이 미국의 군사개입 가능성을 과소평가했다고 강조했음.모택동이 49년 5월부터 개전당시까지 줄곧 이 점을 지적했는데 북조선이 이를 무시했다고 함』 한편 이 전문을 본 스탈린은 7월 5일 중국이 한국전에 병력을 파병할 경우 이들을 위해 공중지원을 제공하겠다는 답신을 보냈다.(스탈린이 주은래앞으로 보낸 전문.N3172)스탈린은 주은래에게 『귀측이 적군이 38도선을 넘을 경우 의용군으로 북조선에 투입시키기 위해 9개 중국군 사단을 중·조 국경에 즉각 집결시킨 것은 올바른 판단으로 생각됨.우리는 이 병력들에 공중지원을 제공키 위해 노력하겠음』이라고 밝혔다. 7월8일 스탈린은 모택동 앞으로 전문을 보내 평양에 중국대표부를 설치해달라는 김일성의 뜻을 대신 전달했다.(전문번호N3231).스탈린은 『조선동지들이 조선에 아직 중국대표부가 없다고 불평함.제반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고 통신을 원할히 하기 위해 중국대표부를 조속히 파견해줄 것을 희망함』이라고 밝혔다. 7월13일 스탈린은 로신대사에게 전문을 보내 중국군 9개 사단의 국경집결문제에 대해 재차 문의하고 소련공군 지원의사를 거듭 밝혔다.(전문번호N3805).『소련대사앞.다음의 전문을 주은래와 모택동에게 전달할 것. …중략…우리는 귀하가 9개 중국군사단을 조선과의 국경에 배치키로 결정했는지 모르고 있음.배치키로 했다면 우리는 제트전투기 1개사단,1백24대를 이 병력의 공중지원을 위해 보낼 준비가 돼있음.우리는 2∼3개월간 소련조종사들로 하여금 중국군 조종사들을 훈련시킬 계획임.그 다음 모든 장비를 귀측 조종사들에게 넘기겠음.상해주둔 항공사단에 대해서도 같은 조치를 취하겠음』 ○부산 등 항구점령 촉구 중국군 참전시 소련기의 공중지원뿐 아니라 중국군 조종사들의 훈련 및 공군장비 일체를 공급키로 약속한 것이다. 한편 로신 대사는 7월 13일 본국으로 보낸 정보보고를통해 당시 영국대사관의 브라이언 참사관이 한국전쟁에 대해 말한 견해를 보고했다.브라이언 참사관은 한국전쟁이 미국과 소련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합작으로 일으켰다는 황당무계한 분석을 한 것으로 이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브라이언 참사관이 『중국이 대만을 점령해 강대국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소련과 미국이 연합해 한국전을 일으켰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이 보고서는 적고 있다. 이런 가운데 모택동은 전쟁초기부터 미군의 본격개입과 그에 대비한 중공군의 참전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후일 형식적으로는 스탈린이 김일성의 요청을 받고 모택동을 설득,중국군의 한국전 참전이 이루어졌지만 실제로 모택동은 전쟁초기부터 스스로 중국군 파병에 대한 결심을 하고 그에 따른 준비를 진행시켰던 것이다. 8월19일 모택동은 소련과학아카데미 회원인 유딘과 장시간에 걸친 면담을 가졌다.유딘은 공식적인 방문목적이 모택동의 이론서를 집필하기 위한 준비라고 밝혔지만 사실은 스탈린의 지시를 받고 모택동의 의중을 탐지키 위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유딘은 후일 중국대사를 지냈다.로신대사는 두사람의 대화내용을 이튿날인 8월 20일 스탈린 앞으로 보고했다. 『한국전상황에 대해 모택동은 2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했음.(1)미군이 지금같은 전력으로 계속 전쟁에 임할 경우 그들은 조만간 남조선에서 밀려나 다시는 남조선문제에 개입하지 못할 것이다.물론 모택동은 이를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라고 강조했음. (2)미국이 한국전에서 승리하려면 최소한 30∼40개 사단이 필요함.그럴 경우 북조선군은 자기들 힘만으로는 현재의 전황을 지속시킬 수 없고 중국의 지원이 필요함.중국이 지원하면 미군 30∼40개 사단은 「분쇄할 수 있다」고 모택동은 말했음.그러면 3차세계대전은 뒤로 미루어지고 소련,중국 모두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는 것이라고 모는 강조했음. 모택동은 이와함께 미국이 한국전에 개입한 것에 대해 국제적으로 비난선전을 강화할 것을 주장했음』 ○미 참전 비난선전 강화 8월 29일 모택동은 유딘을 위해 만찬을 베풀었다.이 만찬석상에서 모는 한국전에 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소련대사관이 스탈린앞으로 보낸 전문.8월 28일) 『모택동은 최근 상황에 비추어 미국이 남조선파병 병력을 크게 증가시키기로 결정한 것같다고 말했음.모는 따라서 8월 19일 유딘과 면담시 언급한 시나리오중 두번째 시나리오의 실현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했음.미국은 이미 중·조국경지역을 공습,중국에 도발하고 있다고 모는 강조했음』 모택동은 8월과 9월 두차례에 걸쳐 북한대표단을 접견하고 그들과 한국전 상황에 대해 협의했다.여기서도 모는 한국전이 기본적으로 두가지 방향으로 전개될 것임을 전제,이에 대비할 것을 강조했다.9월 2일 주은래는 로신대사를 불러 모택동과 북조선대표단과의 회담내용을 설명했다.다음은 9월 3일 로신대사가 스탈린 앞으로 보고한 전문. 『모택동은 두가지 시나리오를 이야기했음.최상의 시나리오인 첫번째는 인민군이 미군을 패배시켜 몽땅 바다로 쓸어내는 것임.두번째는 장기전으로 가는 것임.이 경우 미국은 대구∼부산을 사수하기위해 총력전을 펼 것임.이렇게 되면 그들은 인민군 주력을 이곳에 묶고 상륙작전을 비롯해 다른 여러 지역에서 자유롭게 작전을 벌일수 있게 됨. ○김일성에 장기전 권유 모택동은 북조선대표단에게 이 두번째 유형에 대비,전력을 모으고 제물포∼서울,진남포∼평양지역의 경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주문했음.모는 이와함께 적군과 중국인민군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북조선군은 전략상 실책을 범했다고 지적했음.즉 작전의 목적을 적의 전력을 궤멸하는 데 두는 대신 전력을 전전선에 공평하게 배치,적을 밀어내고 영토를 점령하는 데 두었다는 것임.그리하여 적이 쉽게 이를 간파,반격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임. 덕분에 미군은 쉽게 후퇴,대구∼부산지역에 확고한 방어선을 구축했음.모택동은 인민군을 전전선에 배치하지 말고 필요하다면 신속한 후퇴도 생각해야한다고 강조했음.아울러 새전선으로 전력을 이동시키는 문제도 고려하자고 주문했음.결론적으로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음』 모택동은 미군의 대응이 심상치 않음을 간파,북한측에게 장기전에 대비할 것을 권유한 것이다.그러나 김일성은 이를 심각히 받아들이지않고 기존의 전면공세를 계속했다.그러던 차에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돼 전황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어놓은 것이다. ◎새로 밝혀진 사실/“중국군 조종사 훈련·장비양도 약속”/스탈린,중국참전 유도 끈질긴 노력 우리는 이번 회를 통해 전쟁이 모스크바­북경­평양의 긴밀한 협의하에 치러졌으며 그 협의의 중심축은 모스크바­평양,모스크바­북경의두 채널이었지 북경과 평양간에는 이에 준하는 협의가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북한에 중국대표부를 설치해달라는 북한측의 의사도 스탈린을 통해서 중국에 전달될 정도였다. 중국측은 이에대해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었음이 이번 자료에 밝혀져 있다. 다음 회에 보듯이 인천상륙작전조차 중국은 보도를 통해서 알 정도였다. 또한 중국의 참전의사가,50년 10월 참전 직전의 혼선과는 달리 전쟁 초기에는 의외로 확고하였으며,그것은 소련측의 확실한 공군지원의사로 인해 가능하였음이 밝혀져 있다. 스탈린은 처음부터 중국군참전시 공중 지원에 대해 분명하게 지원할 것임을 수차례 걸쳐 확인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스탈린은 소련공군의 지원확인에 앞서 중국군의 조·중국경 집결문제에 대해 거듭 확인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국의 참전의사가 어느 정도인자,실제로 병력을 국경지역에 이동시켜 놓았는지 확인하기 위한 스탈린식 조심성의 표현이었다. 스탈린이 『2∼3개월간 소련조종사들로 하여금 중국군 조종사들을 훈련시킬 것』이라든가 『그 다음에는 모든 장비를 중국에 넘겨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내용은 이번 자료에는 처음으로 밝혀진 사실들인데 이는 자신들은 참전치 않으면서 중국측으로 하여금 참전케하려는 그의 끈질긴 노력이었다. 또한 최초의 전쟁결정에서 처럼 그는 가장 깊숙이 개입하였으면서도 끝까지 소련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으려했음을 알 수 있다.
  • 소의 「북영토 포기」 시나리오(6·25내막 모스크바 새증언:12)

    ◎스탈린,「평양정권 중·소로 완전 철수」 검토/“계속 저항 무의미… 모든 병력·장비 후송” 전문/중군군 참전 결정따라 당일 철수명령 백지화 스탈린이 3번째로 생각한 대안은 보다 충격적인 것이다.바로 김일성정권 자체를 몽땅 철수시키겠다는 아이디어였던 것이다.50년 10월13일 스탈린은 김일성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10월13일 스탈린이 김일성 앞으로 보낸 전문) 『저항을 계속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함.중국동지들은 군사개입을 거부하고 있음.이런 상황에서 귀하는 중국·소련으로 완전철수를 준비해야 함.모든 병력과 군사장비를 모두 가지고 나오는 것이 매우 중요함.이와 관련한 활동계획을 상세히 보고할 것.향후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한 역량을 유지시켜야함』.슈티코프대사는 이 전문을 같은 날 즉각 김일성·박헌영에게 전달했다.슈티코프는 두사람과의 면담결과를 이렇게 보고했다.(10월14일 슈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 ○김일성,불만속 동의 『10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을 만났음.김일성과 박헌영은 이 전문내용을 전해듯고 의외라는 반응이었음.그러나 김일성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기는 하지만 스탈린 동지가 그런 충고를 한다면 이를 이행하겠다고 답했음.김일성은 스탈린의 충고를 다시한번 읽어달라고 요청한 뒤 박헌영에게 이를 받아적도록 지시했음.김일성은 이와 관련한 준비작업에 필요한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했음』 그러나 김일성정권 자체를 북한에서 철수시키겠다는 이 구상은 같은 날 잇따라 전달된 다른 전문에 의해 백지화됐다.바로 중공군의 참전결정을 알리는 긴급전문이었다.김일성에게 정권과 군대를 모두 데리고 북조선에서 철수하라는 전문을 보낸 직후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긴급전문을 슈티코프앞으로 내려보냈다. 『평양.슈티코프대사앞.김일성에게 전달할 것. 모택동으로부터 중국공산당이 상황을 재검토,조선동지들에게 군사원조를 제공키로 결정했다는 전문을 받았음.중국군의 불충분한 무기사정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결정을 내렸다고 함.본인은 모택동으로부터 상세한 정보를 기다리고 있음.중국지도자들의 새 결정에 따라 어제 날짜로 보낸 북조선군을 북조선 북쪽으로 철수시키라는 명령의 전문은 실행을 보류할 것. 1950년 10.13. 핀시(편집자 주:스탈린의 가명)』 중공군참전이 결정된 직후인 11월 2일 김일성은 스탈린 앞으로 다음의 전문을 보냈다.(전문번호 N60 06 03sh 50년 11월 2일.스탈린이 슈티코프에게 보내는 전문) ○군사고문단 잔류요청 『중국동지들과의 합의에 따라 인민군 병력이 향후 전투에 대비 만주영토로 이동배치됐음:9개 보병사단,1개 사관학교,1개 탱크연대,훈련비행연대 1개를 포함한 항공사단.아울러 6개 전투사단이 규모가 상향조정돼 조선영토에서의 전투준비에 임하고 있음.본인은 경애하는 핀시동지(스탈린의 가명)에게 위 병력의 훈련지도를 위해 소련군사고문단을 잔류시켜줄 것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한편 11월 11일 소련국방부 보고에 따르면 당시 인민군 병력현황은 다음과 같다.(쿠드리야초프 중장의 보고.11월 11일.대통령문서소.p.51) ⑴만주지방:제6군(제18·제68·제36 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씩.제7군(제13·제32·제37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제8군(제42·제45·제76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사관학교 병력 1만 5천명. ⑵조선지역:제1군(제8·제46·제47 보병사단.제17기계화사단).각 사단병력 1만명.제3군(제1·제3·제15 보병사단,제26보병여단,제105탱크사단,제10사단,제6여단).제5군(제1·제12·제38·제24 보병사단).그외 4개의 독립사단(제2·제4·제5·제7)등 총20여개의 사단. ⑶적의 후방에 잔류병력.제2군(제31보병사단,제27보병여단,그외 독립 해병여단). 종합하면 총병력 25만∼27만명.8개군.25개 보병사단,3개 보병여단,1개 탱크사단,1개 기계화사단,해병여단 1개,독립보병연대,1개 독립탱크연대,사관학교 1개등이다. 한편 4번째 시나리오인 향후전투준비편을 살펴보자. 50년 9월 9일 김일성은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 스탈린 앞으로 다음과 같은 서신을 전달했다.(슈티코프가 김일성의 서신을 첨부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전문번호 N60 03 82sh). 『미제국주의자들은 이제 조선영토 전역을 점령해 이를 향후 극동침략의 군사교두보로 만들기 위해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을 것임.독립·자유·국가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은 장기화되고 매우 어려워질 것 같음. 미군과 싸우기 위해 우리는 조종사,탱크운전요원,통신전문가,기술장교를 시급히 훈련시켜야 함.이와관련,다음 사항을 요청함. ⑴소련에서 수학중인 북조선학생중 2백∼3백명을 선발해 조종사로 훈련시키는 것을 허락해줄 것. ⑵재소한인중에서 1천명의 탱크운전요원,조종사 2천명,통신요원 5백명,기술장교 5백명을 양성토록 허락해줄 것』 바로 이튿 날인 10월 10일 모스크바주재 주영하 북한대사는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차관을 찾아가 소련에서 유학중인 북조선학생 전원(남학생 6백69명,여학생 69명)을 모두 항공학교로 전학시킬 것을 건의했다.다만 통신전문대학에서 수학중인 학생들은 군사무선학교로 전학시켜달라고 요구했다.(그로미코차관과 주영하와의 대화록.외교문서). ○북,공군1개 연대 창설 한편 10월 20일 그로미코차관은 스탈린에게 보낸 보고서를 통해 주영하 대사를 통해 받은 요청과 슈티코프 대사가 보내온 요청내용이 서로 다르다고 보고했다.(그로미코가스탈린에게 제출한 보고서.N255­GE.50년 10월 20일)즉 주대사는 항공학교와 무선학교 양쪽에 학생들을 보내달라고 한 반면 슈티코프가 전문으로 보낸 요청서에는 항공학교 한곳만 적혀있다는 것이었다.그로미코차관은 주대사가 이 경우 슈티코프 대사의 보고내용을 따르라고 말해 그대로 시행했다고 보고했다. 한편 11월 11일 소련군사고문관 자하로프 장군은 모스크바로 보낸 전문을 통해 11월 1일자로 훈련시킨 29명의 조선조종사들로 공군1개 연대를 창설했다고 보고했다.그리고 11월 1일 이 연대소속 전투기 8대가 완주방면으로 최초출격,B­29기와 무스탕등 2대를 격추시켰다고 보고했다.야크­9기를 타고 출격한 조선조종사들은 귀환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자하로프 장군은 안동지역에 리 파르트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인 혼성사단이 창설됐다고 이 보고서에서 밝혔다.(자하로프 장군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N26 416.50년 11월 11일) 11월 13일 모스크바 주재 주영하 북한대사는 소련국방부의 E 쿠르두노프 국장서리를 찾아가 소련유학중인 조선인 학생들에게무선훈련을 가르치는 문제를 재차 요청했다.주대사는 이밖에도 재소한인들중에서 조종사,탱크운전요원,무선요원을 선발해 교육시키는 문제를 김일성이 이미 요청했음을 상기시켰다.김일성은 이 문제를 서둘러 실행에 옮겨줄 것을 요청했다고 주대사는 전했다.(E 쿠르드노프 국방성국장서리와 주영하 북한대사의 대화록.50년 11월 13일) ○연해주서 조종사 훈련 11월 20일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조선인 조종사 훈련계획에 동의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전문번호 N75 835)『1.조선유학생 2백∼3백명을 선발해 훈련시키는 계획은 만주 양지에 있는 조종사학교에서 시행될 예정임.소련교육관을 파견하겠음.2.폭격기 2개 연대에 배속될 조종사 훈련은 만주주둔 소련군 사단중 한곳에서 실시할 수 있음.훈련은 미그­15를 이용하고 훈련을 마친 뒤 미그­15를 조선조종사들에게 제공하겠음. 폭격기 조종사 훈련은 연해주에 있는 조종학교에서 실시하는 것이 편리함.TU­2 폭격기가 폭격연대에 제공될 것임』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완전철수 위기에까지 몰렸던 김일성정권은 중공군의 참전결정으로 이렇게 다시 반전의 계기를 마련,대반격에 나설 준비를 갖추어갔다. ◎새로 밝혀진 사실/북한군 9개사단 만주이동 첫 공식 확인/재소한인·유학생 군사훈련→참전 드러나 전세가 결정적으로 기울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북한정권의 생존문제였다.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번 자료에서는 중요한 사실 한가지가 새로이 밝혀져있다.19 50년10월13일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면서 『중국·소련으로 완전 철수를 준비해야 한다』는 스탈린의 전문은 이 시점에서 소련이 북한영토를 완전히 포기하려하였음을 분명하게 증거한다.이 시점은 김일성과 북한정부가 평양을 막 탈출한 직후 시점이었다.전쟁을 일으키도록 동의,지원해 놓고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북한을 버리려 하였던 것이다.이는 스탈린식 이중전술이었다.이 사실은 앞으로 한국전쟁및 소련의 대북한정책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해석점을 재공해줄 것이다.물론 이러한 사실 자체는 기존의 연구와 자료에서도 일부는밝혀졌던 것이지만 그것이 자료를 통하여 자세하고도 구체적으로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일성은 이러한 스탈린의 제의에 대해 못마땅해하였으며,그러면서도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음도 처음으로 밝혀졌다.중국측의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전세 역전에 직면하여 산악으로 이동하여 빨치산 투쟁을 하려 계획하고 있었다.그러나 스탈린이 『지원불가­철수』를 통고하자 이를 이행하려하였던 것이다.이러한 철수계획이 중국군의 참전결정으로 당일날 변경되었다는 점도 아주 흥미를 끄는 새로운 사실이다. 한편 50년11월 현재 만주와 북한내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북한군의 병력 분포현황도 처음으로 공개되는 사실이다.만주지방으로 대규모의 북한군이 이동하였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주는 이 자료는 공산측 자료를 통해서는 최초로 공개되는 흥미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또한 이번 회에는 재소한인을 훈련시켜 참전케한 사실도 새로이 밝혀져있다.
  • 북 「38선 퇴각」 전후(6·25내막 모스크바 새증언:11)

    ◎김일성,전황 불리해지자 “소군 파병” 급전/“연합군 북진 저지할 공군력 지원 절실” 호소/소 국방,“서울이남 모든 병력 신속 철수” 명령 전선이 걷잡을 수 없이 밀리는 가운데 슈티코프 대사는 9월 30일 모스크바 본부에 대사관인원의 철수요청을 하기에 이른다.(N182sh.그로미코가 스탈린에게 제출한 보고서)『미군기의 공습으로 북조선내 거의 모든 공장이 파괴됐음.이런 상황하에서 업무를 계속할 수 없기 때문에 소련 군사고문단과 대사관 직원 거의 전부를 본국귀환토록 허락해주기 바람』 이에 대해 그로미코외상은 『평양에 불안감을 배가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철수는 불가하다』고 답했다고 보고서에 적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북한지도부는 마침내 소련의 직접개입 없이는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는 내용의 스탈린앞으로 보내는 서한을 준비했다.이 서한은 9월 29일자로 김일성·박헌영 공동명의로 작성돼 이튿 날인 9월 30일 슈티코프 대사에게 전달됐으며 슈티코프대사는 이를 같은 날 곧바로 스탈린에게 전문으로 보고했다.(19 50년 9월 30일 스탈린앞으로 보내는 슈티코프의 전문.전문번호 N60 03 08sh) ○박헌영과 공동명의 『스탈린 동지께. 조선노동당을 대신해 우리는 조선해방자이시고 전세계 노동자의 최고지도자이신 당신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당신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는 조선인민들에게 끊임없는 동정과 원조를 보내주셨습니다. 이 서한을 통해 우리는 조선민족이 미침략자들과 맞서 싸우는 해방전쟁의 전선상황에 대해 보고드리고자 합니다.인천(제물포)지역에 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는 상황이 우리에게 불리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인민군들은 진격하는 적부대를 맞아 용감하게 싸우고 있습니다.그러나 상황은 우리에게 매우 불리합니다.적의 공군은 약 1천대에 달하는 각종 비행기를 갖추고서 공중을 완전장악해 우리의 저항을 용납치 않습니다.전선에서는 적의 기갑부대들이 전투기 수백대의 엄호를 받으며 자유롭게 작전을 펴 우리 병사와 장비에 막대한 손실을 가하고 있습니다.동시에 적의 폭격기들은 철도,도로,전화·전신망,수송수단등 모든 시설을 자유자재로 파괴하고 있습니다.이로 인해 아군은 정상적인 보급이 안되고 제때 작전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런 어려움은 모든 전선에서 공통적으로 겪고 있습니다. 적이 서울을 완전장악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습니다.이 때문에 남조선 남부전선에서 싸우던 인민군은 북쪽에 있는 적에게 봉쇄당했습니다.남쪽전선에 있는 병력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탄약,무기,식량을 공급받지 못합니다.어떤 부대들은 부대간 통신도 안되고 적에게 포위됐습니다. ○보급로 끊겨 전선 마비 적들은 서울을 점령한 뒤 북으로 진격을 계속할 것이 분명합니다.따라서 우리는 이런 불리한 상황이 계속돼 미군침략자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으로 믿습니다.병력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적절한 공군력이 필요합니다.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훈련된 병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들이 우리에게 계획을 실행에 옮길 여유를 주지 않고 신속한 작전으로 북조선으로 진격해온다면 그 때는 우리 힘으로 적을 막을수 없습니다.따라서 경애하는 요시프 비사리오노비치,우리는 당신의 특별한 지원을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다시말해 적이 38도선을 넘는 순간 우리는 소련의 직접 무력원조가 정말 필요합니다. 만약 그게 여의치 않을 경우 중국을 비롯한 여타 인민민주국가의 군대내에 국제의용군 부대창설을 지원해 주십시요.그리하여 우리의 투쟁에 무력지원을 해주도록 하십시요.위의 요청에 대해 당신의 지시를 기다립니다. 존경을 표하며.조선노동당중앙위. 김일성·박헌영』 이 서한이 보여주듯이 김일성은 애당초 소련군 파병을 요청했다.이 요청을 받은 스탈린이 여러 구실을 달아 소련군파병을 거부하고 대신 중공군을 보내라고 모택동을 설득한 것이다. ○“6개사단 창설 지시” 한편 소련당국은 9월 27∼30일자로 마트베트 장군이 연이어 보낸 전문에 대한 답신을 9월 30일 평양으로 보냈다.마트베트 장군의 전문은 김일성이 인민군총사령관과 국방상직은 겸직하고 남조선 사람들로 6개사단을 새로 만들고 싶으니 필요한 지원을 해달라는 요청의 보고서였다.소련당국은 이 답신에서 김일성의 군직접통제를 위한 겸직과 남조선에서 데려온 사람들로 6개사단을 새로 만드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다.(소련공산당정치국 결정.전문번호 NP78­118).아울러 6개 사단창설에 필요한 무기,탄약,기타장비는 10월 5∼20일 사이에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그러나 이 전문은 중국 운전병을 파견해주도록 소련이 중국에 말해달라고 한 부탁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그런 부탁을 중국동지들에게 직접 하는 것은 무방하되 소련을 핑계로 되지는 못하게 하라』고 못박았다. 한편 이 시기에 소련은 전황이 크게 불리해짐에 따라 한반도 전략에 있어 몇가지 시나리오를 동시에 검토하기 시작했다.이 시나리오는 크게 5가지로 나누어진다.ⓛ북조선에 전술적인 충고와 지원을 계속하는 것 ②북조선의 소련대표부 철수 ③북조선공산정권과 북조선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는 방안 ⑤철수후 반격을 위해 북조선군을 훈련시키는 방법 ⑥중국이 전쟁에 개입토록 압력을 가하는 것.결국 마지막 ⑦의 방안이 채택되기는 했지만 당시 모스크바와 평양간 오간 전문들은 나머지 네가지 방안 모두 심각하게 논의됐음을 보여준다. 문서들을 근거로 이 방안들을 하나하나 재구성해본다. ⑧전술적 충고. 9월 28일 서울수복과 함께 소련은 서울 이남에 남아있던 인민군을 북으로 철수시키는 문제가 첫째 과제로 떠올랐다.이 전술적 충고에서 소련당정치국은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가능한한 신속하게 병력을 북으로 철수시킬 것을 군사고문단에 지시했다.50년 10월 2일 불가닌 국방장관은 평양의 마트베트 소련군사고문단장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포위된 병력을 철수시키는 일이 매우 중요함을 거듭 귀하에게 강조했음.남쪽에 포위된 인민군을 북쪽으로 철수시키는 일을 최우선 임무로 간주할 것.남쪽에 남아있는 병력들,특히 지휘관들에게 그룹이든 개별적으로든 어떤 수를 쓰더라도 북으로 돌아오라고 지시할 것.전선이 따로 없음.그들은 자기 영토에서 싸우는 것임.인민들도 그들을 지원하고 있음.중화기들도 미련없이 버리고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신속히 북으로 철수할 것.야음을 이용하고 적이 아직 점령치 않은 지역을 이용해 철수할 것.어떻게든 포위망을 벗어나 가장 귀중한 자산인 병력만은 빼내올 것.이 임무수행을 위해 모든 방안을 동원할 것』 ○소 개입사실 탄로 우려 그러나 슈티코프 대사는 10월 5일 상황이 긴박하니 대사관직원 및 그 가족,군사고문단등 소련에서 파견된 인원 모두를 본국으로 철수시키자는 긴급전문을 본부에 타전했다.이에 대해 당정치국은 같은 날 답신전문을 채택 이튿 날 이를 슈티코프 대사에게 보냈다.소련대표부를 철수시키라는 내용이었다.(당정치국이 슈티코프에게 보내는 전문.N14 05sh) 『①소련 대표부 파견 인원과 고문단들을 귀국시키는 결정은 10월 5일자로 보낸 전문 N18 909에 의해 이미 지시한대로임.②재소한인들의 가족을 귀국시키는 문제는 상황에 따라 대사가 결정할 것.③공군기술자 가족과 군사고문단 가족은 조선영토에서 반드시 철수시킬것.④필요한 경우 재소한인을 포함,모든 소련시민은 소련과 중국영토로 철수시킨다는 대사의 제안에 동의함』소련군의 개입사실이 탄로날것을 두려워한 결정이었다. ◎새로 밝혀진 사실/소,국군38선 넘기전 「평양공관 철수」 거론/중국군 개입등 다섯가지 시나리오 검토 먼저 50년 9월30일 슈티코프가 모스크바 본부에 평양주재 소련대사관 인원의 철수를 요청하고 있는 사실은 이번 자료에서 처음 밝혀진 것이다.10월1일에 국군이 38선을 넘었음을 생각할 때 매우 빠른 것임을 알 수 있다.이는 미군의 공습 때문이었다.그러나 평양의 불안감을 이유로 그로미코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처음 밝혀진 것이다. 전황이 크게 불리해지면서 소련이 다섯가지의 한반도전략 시나리오를 검토했었다는 사실은 아마도 이번에 밝혀진 많은 사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의 하나일 것이다.즉 여기에서 소련은 북한에 대한 지원의 계속,소련대표부의 철수,북한정권의 한반도에서의 철수,반격을 위한 북한군 훈련,중국의 개입압력 등의 다섯가지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었음이 최초로 밝혀진 것이다.이는 앞으로 전체 내용이 공개된다면 한국전쟁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점을 규명할 수 있게 해줄 것으로 보인다.이번 자료에서 우선은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우리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정보를 얻은 셈이다. 9월28일 유엔군의 서울수복과 함께 북한군이 위기에 처하자 소련 국방상 불가닌이 직접 명령을 내려 가능한한 빨리 전원이 북한으로 돌아 오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점도 처음 밝혀졌다.가장 귀중한 자산인 병력을 데려오기 위해 모든 방안을 동원할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10월1일 국군이 38선을 넘자 소련은 자국 소련대사관 인원과 군사고문단들을 철수시킬 것을 지시하고 있음도 처음으로 밝혀졌다.이를 통해 우리는 한국전쟁에는 소련 공산당이 최고위 수준에서 직접 개입하고 결정을 내려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회의 연재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전쟁이 「미소간의 전쟁」으로 넘어가면서 김일성과 박헌영을 비롯한 북한지도부는 소련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것 이상 군사적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확인하게 됐다.박명림
  • 스탈린­김일성/「남침 대화록」 최초 발굴

    ◎스탈린 「6·25승인」뒤 전쟁 전권행사/서울신문,소 「극비문서」 9백50건 입수/전황불리하자 평양정권 중망명 계획 【모스크바=이기동 특파원】 한국전쟁과 관련,러시아측에 보관돼 있는 방대한 양의 미공개 비밀문서가 최근 서울신문에 의해 입수돼 그동안 외부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6·25내막을 밝히는데 중요한 사료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총9백50건,3천여쪽에 달하는 이들 문서는 38도선에서 남북한간 잦은 충돌이 벌어진 47년초부터 전쟁을 거쳐 휴전협정체결에 이르기까지 평양·북경주재 옛소련대사관과 본국 사이에 오간 전문과 크렘린에서 이루어진 전쟁관련 회합의 기록문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그중에는 최초로 공개되는 김일성이 49년3월5일 모스크바를 극비방문했을 때 당시 스탈린수상과 나눈 대화록도 포함돼 있다. 이들 문서는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정부의 주요국가문서보관소인 대통령문서소·외무부문서소·옛소련공산당 중앙위문서소·국방부산하 군사문서소 등지에 보관돼 있는 미공개 6·25 관련문서들이 모두 망라된 것이다. 새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6·25를 일으키기 2년여 전부터 남침개시를 스탈린·모택동에게 계속 요구했으며 반면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과 준비미비등을 이유로 막판까지 남침에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그러나 일단 전쟁계획이 가동되기 시작한 뒤에는 전쟁준비·작전수립등 전쟁의 전과정에 스탈린이 거의 전권을 행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스탈린은 특히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북한군에 불리하게 바뀐 뒤 김일성·모택동이 요청한 휴전제의를 거듭 묵살,전쟁의 피해를 배가시킨 장본인으로 드러났다.스탈린은 6·25를 미국의 국력을 소진시킬 절호의 기회로 보고 무리하게 전쟁을 계속 끈 것으로 관련문서는 밝히고 있다. 스탈린은 또 52년8월 주은래와의 회담에서 주가 『북한지도부가 인명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전쟁계속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으나 『이 전쟁은 명분이 큰 전쟁이니 인내심을 갖고 계속하자』고 고집,최소한 1년이상 전쟁을 더 끌기로 합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소련의 입장은 53년3월3일 스탈린의 사망과 함께 휴전지지쪽으로 급선회했다. 김일성은 당초 황해의 옹진반도에서 국지전을 시작해 동남쪽으로 전선을 확대하는 계획을 세웠다가 작전개시 불과 나흘 전인 21일 작전계획이 남한에 누출됐다는 정보보고에 따라 이를 전면전으로 급전환한 것으로 밝혀졌다. 중공군의 참전도 스탈린이 모택동을 수차례 설득해 동의를 얻어낸 것으로 드러났다.모는 당초 수차례 무력지원약속을 김일성에게 했으나 막상 병력지원요청을 받고서는 이를 거부하다 스탈린의 끈질긴 요청을 받고서야 파병결정을 내린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새 자료에 따르면 스탈린은 모택동이 중공군파병을 계속 주저하던 50년10월13일 김일성에게 『저항을 계속하는 게 무의미하다』며 병력과 장비를 모두 가지고 소련·중국영토로 북한정권자체를 철수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김일성·박헌영도 이 지시에 대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나 스탈린동지의 뜻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다』며 철수준비에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이 정권철수계획은 바로 이튿날인 10월14일 모택동이 스탈린앞으로 중공군 파병결정을 통보해옴에 따라 긴급히 취소된 것으로 새 문서는 밝히고 있다. 한편 김일성이 50년5월 북경회담에서 모택동에게 처음 보고해 승인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오던 3단계 작전계획은 이보다 앞선 4월 모스크바회담에서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직접 지시한 것임이 이번 자료에 의해 밝혀졌다.
  • 탈북 조창호씨에 보국훈장 주기로

    정부는 21일 6·25전쟁 때 중공군에 붙잡혀 43년동안 북한에 억류됐다 최근에 탈출,귀환한 조창호 육군중위에게 보국훈장 통일장을 주기로 했다. 보국훈장은 군인이나 군무원등 국가안보관계자가 전투가 아닌 행동으로 안보및 국가이익에 기여할 때 주는 훈장으로 통일장은 그 가운데 1등급이다.
  • 한국전 참전용사 대표 접견/김 대통령(김대통령 순방여로)

    ◎「WTO총장」 김상공 지지확인/키딩총리 김영삼대통령은 호주 방문 사흘째인 18일 폴 키팅 총리와 정상회담및 공동기자회견을 가진데 이어 총리내외가 주최한 오찬과 하이든 총독내외가 주최한 국빈만찬에 참석하는 것을 끝으로 아·태경제협력체(APEC)정상회의 참석및 아·태지역 3개국 순방 공식일정을 모두 마쳤다. ▷정상회담◁ ○…김대통령은 이날 총리 집무실이 있는 국회의사당 현관에서 키팅 총리의 영접을 받고 방명록에 서명한 뒤 응접실에서 날씨와 호주의 한국전 참전을 화제로 잠시 환담. 키팅 총리가 『대통령께서 오셔서 날씨가 맑고 화창하다』고 말하자 김대통령은 『정말 그렇다』면서 『조금전 전쟁기념관에 헌화하고 왔는데 딴 곳보다 한국전 참전용사비 앞에 꽃이 가장 많아 인상적이었다』면서 두나라의 혈맹관계를 강조. 단독회담장인 총리집무실로 자리를 옮긴 두 정상은 기념촬영을 한 뒤 45분간의 단독회담을 시작. 단독회담에는 한승주 외무부장관,권병현 주호주대사,정종욱 청와대외교안보수석,유병우 외무부아태국장과 통역으로박진 청와대비서관이 배석. 단독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확대정상회담 배석자들은 회담장인 케비넷룸에서 대기하며 환담. 단독회담을 마친 두 정상은 곧바로 케비넷룸으로 이동,배석자를 소개한 뒤 60분 남짓 현안을 논의. 확대회담에는 단독회담 배석자 말고 김철수 상공자원부장관 김시중 과기처장관 이양호 합참의장 강재섭 총재비서실장과 청와대의 한이헌경제·주돈식공보수석과 김석우 의전비서관등이 배석. ▷공동기자회견◁ ○…정상회담 직후 국회의사당 회견실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는 60여명의 내외신기자들이 몰려 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 우리말과 영어 동시통역으로 약 30분동안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두나라 정상은 지난 6월 서울과 보고르 APEC정상회의에서 만난 뒤 이번이 3번째 회동이라고 언급,개인적인 친근감을 강조. 특히 키팅총리는 모두발언에서 김대통령이 그동안 보여준 민주적 열정과 개혁정책에 존경심을 표시. 김대통령은 『캔버라에 오기 전에 시드니를 방문,국토가 잘 가꾸어져 있고 친절한 국민,깨끗한 도시에큰 감명을 받았다』면서 『오늘 회담을 만족스럽게 생각한다』고 피력. 키팅 총리는 남북한관계에 대해서는 남북 당사자 사이의 대화를 통한 해결원칙을 강조.키팅 총리는 또 김철수상공자원부장관의 세계무역기구(WTO)사무총장 입후보에 대해 한국기자가 의견을 묻자 『아·태지역에서 WTO총장이 꼭 선출되길 바란다』고 지지를 표시. ▷총독주최만찬◁ ○…김대통령은 키팅 총리와의 정상회담과 공동기자회견을 마치고 휴식을 취한 뒤 숙소인 총독관저에서 하이든 호주총독 내외가 주최한 국빈만찬에 참석. 김대통령 내외는 숙소인 2층 거실에서 1층 접견부속실로 내려와 하이든 총독내외의 영접을 받고 잠시 환담을 나눈 뒤 만찬장에 입장,두나라 우호증진을 다짐하는 축배 제의로 만찬을 시작. 만찬이 끝난 뒤 김대통령은 하이든총독과 2층 거실 앞에서 작별인사를 나눴는데 김대통령이 묵은 곳은 총독내외의 거실과 복도를 사이에 둔 가까운 곳에 위치. ▷전쟁기념관 헌화◁ ○…김대통령은 한·호 정상회담에 앞서 이날 상오 켄버라시내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방문,그레이션 전쟁기념위원회 위원장및 켈슨 기념관장의 영접을 받으며 추념홀안의 무명용사비에 헌화. 김대통령은 이어 한국전 때 재3대대장을 지냈던 해셋 예비역 육군대장을 비롯한 한국전 참전용사 대표 5명을 접견하고 『한국이 가장 어려울 때 수고를 많이 해 줘 정말 감사하다』고 고마움을 표시. 김대통령은 전사자 이름이 새겨진 회랑을 돌면서 특히 3백48명의 한국전 참전 전사자 비명 앞에서 해셋 예비역대장으로부터 『당시 제3대대가 가장 용감했으며 압록강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에 밀려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때 후퇴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라고 언급.또 한국전 전시실에서 참전용사 대표들로부터 가평전투등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때의 상황을 상상하고도 남는다』고 피력.
  • “조소위 탈북은 조국애 실천의 표본”/김 대통령,조창호씨 위로방문

    ◎“자유의 소중함 일깨운 승전보” 격려/명예로운 전역식·생계보장 등 약속 김영삼대통령은 28일 상오 6·25사변 때 육군소위로 참전중 중공군에 포로가 돼 북한에서 억류생활을 하다 지난 3일 극적인 탈출에 성공한 조창호씨가 입원해 있는 국군수도통합병원을 찾아 조씨를 위문·격려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병원 특실에 들어가자 바로 병상에서 일어서 거수경례를 하는 조씨를 두손으로 뜨겁게 포옹하고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10여분동안 환담.김대통령은 조씨의 손을 따듯하게 감싸잡고 『건강이 어떠냐』고 물었고 조씨는 대통령의 방문에 감격한듯 눈물을 글썽이며 『많이 나았다』고 답변. 김대통령은 『조소위의 북한탈출은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인간승리의 표본이며 우리 국민들에게 조국과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고 높이 평가.이어 김대통령이 『조소위의 어머니께서 조국이 어려울 때 아들에게 군입대를 권유하고 평생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었다』고 고인이 된 조씨의 모친에 대해 언급하자 조씨는 『제가 살아서 돌아올 것으로 믿고 돌아 가셨을 것』이라고 눈물을 글썽. 김대통령은 조씨의 군적과 관련,『조소위가 아직 소위로 남아 있어 법적인 문제는 있지만 명예로운 전역식을 갖게 하라고 이병태 국방부장관에게 지시했다』면서 전역식 때 정부는 국가가 수여할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을 수여하도록 준비하고 있으며 생계나 모든 문제를 국가가 영원히 보장할 것이라고 약속.이에 조씨는 『바쁘신 중에 이렇게 와주셔서 뭐라고 얘기해야 될지 모르겠다』면서 『이처럼 발전한 조국의 건설에 저도 벽돌 한장이라도 쌓아야 하는데 아무 한일이 없어 마음이 무겁다』고 심경을 피력했다.그는 또 『북한에 있으면서도 가슴에 조국을 품고 있었으며 내가 조국이 아니면 어디에 묻히고 어디에 가겠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북한 억류생활을 회고. 조씨의 큰 누이인 창숙씨는 『어머니는 생전에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서 국가와 사회,그리고 아들을 위해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불렀다』면서 『창호의 귀국은 어머니의 이같은 기도 덕분으로 감사한다』고 어머니를 회고.조씨도 『북한에 있을 때도 어머니가 새벽 4시면 일어나서 기도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조소위의 조속한 건강회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조그만 선물을 마련했다』면서 홍삼 6백g과 손목시계를 전달하고 『이제 아무 걱정말고 빨리 건강을 회복하도록 해달라』고 당부. 김대통령은 병실을 떠나기에 앞서 조씨를 다시 한번 뜨겁게 포옹.김대통령의 이날 방문에는 이국방부장관과 김동진 육군참모총장이 수행.
  • 조창호씨/현역군인가 귀순동포인가/43년만의 생환… 군적 어찌되나

    ◎「포로」인정땐 원계급 회복,「최장수 소위」/단순 탈출… 「민간인」 간주땐 제대자 처리 6·25당시 포병소위로 참전했다가 중공군에 붙잡혀 북한땅에서 살아온 조창호씨(64)가 43년만에 북한을 탈출,생환해옴에 따라 조씨의 사망을 기정사실화하고 조치를 취했던 정부의 관련부처들이 조씨에 대한 대우등을 놓고 부심하고 있다. 국방부와 육군은 조씨를 「전사자」로 처리,중위로 1계급을 추서했으며 국립묘지측은 조씨의 위패를 봉안해놓고 있는 상태다.또 국가보훈처는 조씨를 국가유공자로 처리,가족들에게 일정액의 연금을 지급했었다. 조씨에 대한 처리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고 있는 부분은 조씨의 군적문제이다.즉,조씨에 대해 북한생활을 포로생활로 인정하고 지난 43년동안 군적을 유지한 것으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제대한 것으로 처리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이다.이 문제는 조씨가 앞으로 군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각종 혜택을 부여받을 수 있는지와 관련돼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조씨는 포로상태가 인정되면 사망후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지만 단순한 탈출로 간주되면 앞으로 실제 사망때에는 국립묘지안장이 불가능해진다. 현행 국립묘지령등에 따르면 현역군인등으로 20년이상 근무한 군인연금 수급권자등을 국립묘지안장대상으로 선정하고 있어 조씨는 자칫 생존시에는 국립묘지에 위패가 봉안됐다가도 실제 사망했을 때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하게 될 우려도 있는 것이다.군인연금수혜여부는 조씨가 정상적으로 근무하지 않아 매달 연금갹출료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연금수혜는 받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와 육군은 따라서 조씨에 대해 북한생활이 포로생활이었는지를 앞으로 조사할 방침이다.이 조사에서 포로로 인정되면 당연히 지난 43년을 현역으로 근무한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이 경우 조씨는 전사를 조건으로 1계급특진,중위가 된 만큼 다시 원계급을 회복,「최장 소위근무자」가 된다.그러나 조씨가 북한에서 결혼을 하는등 포로생활에서 벗어난 민간인이며 북한을 탈출한 동포로 단순하게 보면 조씨는 군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게 된다.이때 조씨는 전사처리된 51년 9월 자동제대한 것으로 간주된다. 육군에 따르면 조씨는 51년 4월14일 임관,5월 실종돼 4개월후인 9월10일부로 전사처리됐다.병역법과 군인사법등 관련법규에서는 「전투중 행방불명자에 대해서는 2년 경과시 전사처리하고 생환시 전사처리일부로 제대처리한다」고 규정돼있어 조씨는 이 조항의 적용을 받게 되는 것이다.육군의 한 관계자는 『조씨의 사례가 처음있는 일이라 관련규정이 정비돼 있지 않다』면서 『조씨의 처리결과가 선례가 된다는 점에서 철저히 관련법규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군적문제 다음으로 관심을 끄는 대목은 조씨의 가족들이 그동안 받았던 국가유공자연금의 환수여부다.국가보훈처는 조씨가 전사처리된데 따라 61년 8월 국가유공자등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조씨를 국가유공자로 등록,조씨의 부모인 조연국씨(사망)와 이곤옥씨(사망)에게 61년 당시에는 한달에 5백원씩을,연금수혜자인 부모가 모두 사망한 82년 8월에는 마지막으로 1만9천9백원을 연금으로 지급했었다.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국가유공자예우등에 관한 법률에서 본인이 거짓말을 하는등 본인의 귀책사유가 없으면 군기록이 변경되더라도 관계없다는 조항이 있어 조씨가 받았던 연금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와함께 조씨가 앞으로 정착금등을 받을 수 있을지의 여부도 관심거리다.보사부와 안기부등 관계당국은 조씨에 대해 귀순동포인지의 여부를 가리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현행 「귀순월남동포보호법」은 북한에서 출생해 귀순한 사람을 대상으로 최저임금의 15∼20배를 정착금으로 지급하도록 돼있어 조씨의 경우는 해석이 다소 다르다는 입장이다. 관계당국은 이에따라 국방부가 조씨를 현역군인으로 인정할 것인지를 지켜본뒤 조씨에 대한 처우를 결정한다는 생각이다. ◎“포병소위 무사귀환 신고합니다”/생환 조창호씨,방문한 이국방에 거수경례 북한을 43년만에 탈출,극적으로 조국의 품에 안긴 조창호씨(64)는 25일 하오3시쯤 이병태 국방장관이 위문을 위해 병실을 방문하자 불편한 오른팔과 다리에도 불구하고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크게 군번등을 외치며거수경례,군인정신을 보여줬다. 조씨는 당초 자신이 입원해 있던 서울중앙병원에서 이날 하오2시47분쯤 국군통합병원 5층 VIP실로 이송된 뒤 이장관이 자신을 방문하자 병상에서 일어나 부동자세로 『포병소위,군번 212966,국방장관님께 무사히 귀환했음을 신고드립니다』라며 신고한 것. 이어 이장관은 『선배님이 오랫동안 고생하시다가 돌아오시게 된 데 대해 우리국민과 국군이 환영하며 대통령께서 저를 대신 보내셨다』면서 김영삼 대통령명의의 꽃다발을 전했다. 한편 이장관의 조씨 방문에 동행한 군 관계자들은 『조씨가 귀환신고를 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콧등이 시큰했다』며 『신고를 하는 조씨의 눈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보니 조씨가 그토록 고생했어도 군인정신만큼은 살아 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 6·25포로 국군장교/43년만에 북한 탈출/당시 포병소위 조창호씨

    ◎목선타고 서해 건너와/연대재학중 자원입대… 중공군에 잡혀/52년탈출실패… 아오지등서 강제노역/중국대련거쳐 조국에… 서울형제 상봉 한국전쟁중 포로가 되어 전사자로 처리된 국군소위가 43년만에 북한에서 탈출,중국을 거쳐 23일 새벽 조국의 품에 안겼다. 국가안전기획부는 24일 6·25전쟁당시 강원도 인제전투에서 중공군에 붙잡혀 북한에 끌려간 당시 국군포병대소속 소위 조창호씨(64)가 북한을 탈출,서울에 도착했다고 발표했다. 안기부는 조씨가 중국 대련에서 작은 밀항선을 타고 해상으로 탈출,23일 새벽 1시쯤 군산항 서남쪽 80마일 해상에서 표류하던중 조업지도중이던 수산청 소속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조됐다고 밝혔다. 구출당시 조씨는 미리 준비한 횃불을 이용해 긴급 피난신호를 보냈으며 구조하러간 수산청직원들에게 『나는 43년만에 북한을 탈출한 전 국군소위』라고 신분을 밝혔다. 조씨는 북한억류중 27년동안 강제노역과 탄광노동으로 인해 심한 진폐증(2기)을 앓고 있는데다 북한탈출후 오랜 항해와 긴장 등으로 탈진상태에 빠져 현재 서울 풍납동 현대중앙병원으로 옮겨져 입원·치료을 받고 있다. 병원측은 조씨가 응급을 요하는 위급한 상태는 아니지만 규폐증과 언어장애,하체 신경마비등 뇌졸중 증세를 보이고 있어 당분간의 안정가료와 정밀검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안기부조사결과 조씨는 연희대 문과 1학년 재학중이던 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육군본부 직속 101포병대대 관측소위로 참전했으며 이듬해 5월 강원도 인제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혀 북한에 억류돼온 것으로 밝혀졌다. 조씨는 억류생활을 하면서도 남쪽으로의 탈출을 노리다 52년 2월 월남을 기도하다 북한공안당국에 적발돼 13년간 교화노동형을 선고받고 강제노역을 했으며 77년7월까지 다시 14년동안 지하 막장에서 광부로 일했다. 조씨는 남쪽으로 탈출하기 위해 2년전부터는 중국땅이 마주보이는 압록강변에서 숨어 지냈다.탈북 D데이인 지난 4일 새벽 2시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조선족 동포 이모씨(45)의 도움으로 고기잡이배를 타고 북한초병들의감시를 피해 압록강을 건널 수 있었다. 이후 중국 국경에 위치한 달라츠광산(4일)과 청구시(5일),심양시(6일)를 거쳐 7일 상오 대련항까지 달아 나는데 성공했다. 압록강을 넘어온지 17일 만인 20일 새벽 중국 어선을 타고 1차 밀항을 시도했다.그러나 악천후로 실패,대련항으로 되돌아 갔으며 22일 새벽 5시 2차 밀항을 시도,23일 새벽 서해상에서 우리측에 발견돼 귀환에 성공했다. 국내에는 건국대학교 가정대학장을 역임한 조씨의 누나 조창숙씨 등 형제4명과 이종사촌 형인 전리비아 대사 최필립씨 등 가까운 친척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둘째누나와 남동생등 2명은 미국에 살고 있다. 조씨는 귀순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온 조창숙씨 등 가족들과 극적으로 상봉,『가족을 만나게 돼 꿈만 같다.죽어서라도 조국땅에 묻히게 돼 여한이 없다.조국이 이렇게 발전했는데 나는 한일이 없어 면목없다』고 감격해 했다. 안기부는 조씨의 건강이 회복되는대로 구체적인 탈북경위 및 북한생활 등을 조사할 계획이다.
  • 「한국판 빠삐용」 조창호씨 탈출기/“그리운 조국으로” 파도와 사투

    ◎“중국 거치면 쉽다” 얘기 듣고 결행/비·바람 몰아 치던 밤 압록강 건너/목선 구해 남으로 남으로… 탈진 끝 구조 받아 그는 한국판 「빠삐용」이었다.22세때 「죽음의 땅」 북한에서 탈출을 시도,백발이 성성한 60대 중반의 나이에 탈출에 성공한 그의 삶은 자유가 목숨보다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51년 인제전투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된뒤 이듬해부터 43년동안 끝없이 탈출만을 꿈꾸다 마침내 가족들이 기다리는 조국의 품속에 안긴 조창호씨(조창호·64). 24일 서울 중앙병원 병실에서 푸르른 가을하늘을 바라보며 그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살아 돌아와 가족을 만나게 되다니 혹시 꿈이 아닌가요.이제 죽어서라도 조국땅에 묻히게 됐으니 여한이 없시요』.그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듯 맞잡은 큰누이 조창숙씨(전건국대 가정대학장)의 손을 자꾸 어루만지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52년 2월 첫 탈출의 실패는 그에게 너무나 혹독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북한 당국은 그에게 13년간의 「교화노동형」을 내려 덕천·서흥·함흥 등지의 수용소에 보냈다가 휴전부터 58년까지는 아오지,58년부터 64년 5월까지는 강계교화소에 수감했다. 만 12년 6개월동안 교도소에서 보낸 것이다. 조씨는 그후 자강도 화풍광산을 시작으로 14년동안 지하막장에서 채탄작업을 하다 75년 중강진 구리광산으로 다시 배치됐고 진폐증으로 건강이 악화돼 더이상 노동을 할수 없게 되자 77년 현업에서 풀려나 떠돌이 생활을 했다. 27년간의 강제노역은 그의 육신을 「걸레」처럼 황폐화시켰다.그러나 「절해고도에 갇힌 빠삐용」같은 그를 지탱시킨 것은 자유를 향한 끊임없는 집념이었다. 그러기를 꼭 15년 뒤인 92년 초 잘하면 중국을 통해 탈출할 수 있다는 얘기를 우연히 중국땅에 살고 있는 조선족 교포인 이선생(45)으로부터 들었다. 『가자.어떻게든 일단 중국으로 가자』 하루에도 수십번씩 다짐을 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린 것은 쌍둥이 아들(28)이었다.탈출계획을 털어놓으면 반대할 것이 뻔한데다 탈출후 이들에게 닥칠 신변위험도 막기위해 자살을 가장하려고 『죽고 싶다』는 말만 계속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지난 4일 새벽 억수같은 비와 세찬 바람이 삼엄한 감시망을 뚫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 것이다.그는 이날 밤 목숨을 걸고 압록강을 건넜고 그토록 그리던 중국땅을 밟았다. 중국에서 기회를 노리던 조씨는 19일 밤 9시 중국어부를 통해 80t급 어선을 얻어타는 행운을 얻었다.어선은 다음날 새벽 5시 서해바다로 나섰다.『살아 대한민국에 닿을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과 설렘으로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첫번째 탈출은 실패했다.가도 가도 바다이고 사방은 그저 어둠 뿐이었다.파도가 4∼5m씩 일어나 배가 가랑잎 처럼 흔들렸다.결국 17시간만에 배는 제자리로 회항했다. 22일 새벽 5시 두번째의 탈출을 시도했다.파도는 여전히 거세 조씨는 거의 탈진해 있었다.얼마를 항해했을까.희미한 의식 속에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조씨가 탄 배에 이름모를 선박이 접근했다.조씨는 『아픈 사람이 있어요』라며 「남쪽말」을 쓰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 “43년간 탈출생각 뿐이었다”/조창호씨 일문일답

    ◎2년전 압록강변 이주… 기회 노려/두아들 등 가족5명 북에 두고와 ­중공군 포로로 붙잡혔을때의 상황은. ▲51년 5월 중부전선 인제전투에 육본직속 포병 101대대 관측소위로 참전했다.아군측은 육군 9사단과 미군 7사단이 북한의 6사단·12사단및 중공군과 격전을 벌이다 후퇴,나도 모르게 주력부대에서 이탈됐다.부상을 입은 통신병과 함께 부상치료를 위해 찾아간 막사가 중공군 막사였다.이때 포로가 됐다. ­탈출동기와 탈출을 계획한 시점은. ▲내집에 가겠다는 생각뿐이었다.남한이 바로 내집이다.가다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마찬가지라 생각했다.일찍 용기를 못낸 것이 아쉽다.52년 월남을 기도했다 실패해 교화노동형을 선고받아 13년간 교도소에서 생활했다.64년 교도소에서 나와 지하 2백m에서 노동을 했다. 이후 내가 묻힐 땅은 이북이 아니라 남한이라는 생각으로 2년전부터 압록강 주변에 살면서 탈출을 결심했다.비가 내리는 10월 3일 하오2시쯤 쪽배를 이용,압록강을 혼자 건넜다.다 말할 수 없으나 중국땅에서 운좋게 돕겠다는 사람을 만나 어선을 타고 탈출하게 됐다.상세한 탈출경로는 나말고도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있어 밝히기 곤란하다. ­김일성사후의 북한생활은. ▲대를 이어 김정일을 모시자는 분위기다.김일성이 죽은후 별다른 동요없이 평온하다. ­북에 두고온 가족들이 있는가. ▲형제등 5명이 있다. ­전향을 종용받은 적은 없는가. ▲받은 적 없다. ­수용소생활은 어떠했는가. ▲하루에 규정된 노동시간은 8시간이나 주어진 과제를 마치지 않으면 밥을 주지않기 때문에 사실상 16시간 이상씩 해야 한다.신분은 크게 정치범과 일반잡범 2종류로 나눌 수 있다. ­김정일을 믿고 따르는 분위기인가. ▲유일독재를 반대하면 목을 자른다. ­귀국한 소감은. ▲마음이 안정되고 서울이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최루탄이 오가는등 정치적 혼란만 있다고 북에서 선전했는데 와서 보니 「천지개벽됐다」는 느낌이다.조국 발전에 아무런 일도 하지않은 나는 면목이 없다.마지막 소원을 푼 감격을 뭐라 말할 수 없다. ­가족들을 만났을때 알아볼 수 있었는가. ▲다 알아 볼 수있었다.말이 안나올 정도로 기뻤다. ◎북 탈출 조창호씨 주변/“죽은줄 알았는데”… 가족들 오열/13년 광원생활로 진폐증… 중풍에 걸려 ○…24일 하오 병상에 누워 비교적 깨끗한 얼굴로 보도진들과 첫대면한 조창호씨(64)는 발톱이 모두 심하게 깨져있어 북한 수용소에서의 강제노동및 비참했던 생활상을 반증. 조씨는 18층 특실병상에 스포츠형 머리에 마르고 초췌한 모습으로 반듯이 누워 보도진들의 질문을 받았으며 기력쇠진과 중풍의 영향으로 말을 제대로 못하는 상태이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하느라 애쓰는 모습에 주위의 안타까움을 사기도. ○…이날 하오3시20분쯤 조씨 남동생 창원씨(62)부부와 여동생 창윤씨(54)등 가족들이 뒤늦게 면회. 하루전인 23일 동생이 살아돌아왔다는 연락을 받고 면회를 하려했으나 당국에서 허락하지 않아 늦었다는 이들은 병실에 들어서자 마자 조씨를 알아보고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 창윤씨는 『살아있다니 다행이에요 오빠.얼마나 그리웠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고 창원씨도 『꿈인지 생시인지 믿어지지 않는다』며 『이렇게 기쁜 날이 또 있겠느냐』고 감격. 창원씨 부인 이애자씨(53)도 『생전 처음보는 아주버니의 기력이 너무 쇠약한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고 이에 조씨는 『잊어버리지 않고 나를 기억해주니 고맙다』는 말만 계속했다. 이들 남매는 1·4후퇴 당시 창호씨가 부산 동래 포병사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먼저 서울을 떠나고 자신들은 뒤늦게 열차편으로 부산에 가 잠시 광복동에서 만났던 일들을 얘기하며 회상에 젖는 모습. 창원씨는 『중공군에 납치된뒤 형이 죽었을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어머니만은 절대로 죽었을 리 없다며 돌아가실 때까지 형을 애타게 기다렸다』고 말해 분위기를 숙연케 하기도. ○…한편 조씨를 치료하고 있는 서울중앙병원 김철주씨(26·가정의학과 레지던트 1년)는 『조씨가 지난 7월쯤 중풍에 걸려 오른쪽팔과 다리가 불편한 상태이고 오랜 광산노동으로 규폐증 증세가 나타나고 있다』며 『고령으로 인한 노쇠현상과 탈출과정의 피로가 쌓여 탈진상태를 보이고 있으나 식사는 정상적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 담당간호사는 『조씨가 병원에 처음 들어온 24일 하오 한손에 쥔 지팡이에 의지하며 간신히 발걸음을 옮기며 직접 엘리베이터에서 병실까지 걸어들어갔다』고 전언.
  • “63빌딩 능가할 70층호텔 지어라”(「85년북한」극비보고서:중)

    ◎김정일,루마니아 석유 공급않자 불만/이철봉 사회안전부장 과음문책 해임/중공군 6·25참전 기념식 열어 유대 과시하라 김정일은 당중앙위 정치국 전체회의와 중앙인민위 합동회의 결과에 대해 공개된 정보외에 상세한 사항을 본 대사에게 알려주었음.당지도부 인사이동상황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음.정치국원이며 군수산업분야 담당 당중앙위 비서인 연형묵을 정무원으로 보냈다고 함.이는 행정부내 당의 원칙강화를 위해서라고 함.정치국 후보위원 이진모가 대신 군수산업 담당 중앙위 서기로 임명됐다 함.정치국 후보위원겸 당중앙위 비서인 안승학이 정무원 부총리겸 경공업위원회 위원장에 임명 됨.정치국 후보위원 계응태가 경공업 담당 당중앙위 비서로 임명 됨.이 결정사항은 차기 당중앙위 전체회의에서 채택되나 업무 인수인계및 새업무는 이미 시작됐다고 함. 북한경제에서 비철금속 산업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비추어 채광·비철산업 개발을 전담할 특수부서를 중공업분야를 관장하는 당중앙위 제1경제부로부터 독립시키기로 했다고 함.김하철이 이 새부서의 책임자로 임명 됐음.정하철은 50년대 소련에서 광산학을 전공했으며 현재는 당중앙위 총무부장,당중앙위 총서기국 비서장 임.그의 후임에는 최영림 부총리가 임명 됨.최영림은 이전에도 총서기국 비서장을 역임했음.최영림이 정무원 부총리라는 힘든 직책에서 벗어나 공공연히 기쁜 내색을 한데 대해 김정일은 그의 당성이 부족한 것이라고 비판.김정일은 조선노동당에서도 소련공산당과 마찬가지로 당중앙위에서 총무부를 조직부 다음으로 중요부서로 간주한다고 함.당중앙위 총무부장이 당총서기와 국가주석의 비서실장직을 수행한다는 점을 감안할때 최영림이 정무원 재직시 익힌 업무가 새직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함. ○지도부 인사 설명 김일성은 고령인 탓에 지방순시를 자주 못하고 대신 보좌관들을 지방에 파견해 현지사정을 보고서로 올리도록 하는데 현재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도 보좌관들은 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함.김정일은 얼마전 노동신문 주필 김기남을 당중앙위 선전부장으로 임명했다고 함.대신 이성복을 노동신문 주필에 임명.이성복은 노련하고 균형감각을 가진 노동자출신으로 한국전쟁시 인민군으로 낙동강까지 내려갔다고 함. 제대한뒤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노동신문 남한부장을 지냈으며 최근 15년간 당중앙위서 연구원·부서책임자로 근무했다고 함.75년부터 중앙위 선전부 부부장을 지냈음. 김정일은 이철봉 사회안전부장을 해임하고 정치국원이며 인민무력부 부부장인 백학림을 신임 사회안전부장에 임명한 배경에 대해 설명.김정일의 말에 따르면 이철봉의 경질이유는 과다한 음주때문.지난9월 중국인민경찰 대표단 일행을 위해 옥류관 식당에서 베푼 만찬에서 이철봉이 혼자 보드카 2병반을 마시고는 몸을 움직일수 없을 정도로 취했다 함.1967년 제4차 당중앙위 전체회의의 결정에 따라 잠수함근무를 제외한 모든 군에서 음주는 금지돼 있음. 국내사정에 관해 김정일은 일기불순과 태풍피해까지 겹쳐 금년도 작황은 흉작이라고 말함.그러나 국가전체로 볼때 수확량이 지난해 수준은 된다고 함.86년도 1월1일을 기해 농민들을 위한 사회보장제도가 실시된다는데 엄청난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강조함. 김정일은 또 현재 북한지도부는 자동차도로 건설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도로혁명을 완수하자」는 슬로건을 채택했다고 함.관련부서에서는 운전자들에게 지시사항을 많이 내렸으며 수송량 증대로 인한 도로정비의 필요성을 주지시키느라고 애쓰고 있다고 함.구역마다 교통법규강습회를 조직하고 트럭운전자 1만5천명을 평양시내 체육궁전에 모아놓고 특수교육도 시킨다 함.김정일은 그러나 기대한만큼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며 소련의 경험을 배우기 위해 소련 내무성의 「가이」(경찰)의 교류 필요성을 역설했음. ○도로건설에 박차 김정일비서는 또 외국관광객들을 위해 대규모 호텔건설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음.이미 평양에 45층짜리 호텔을 지었고 4,5개의 호텔을 더 지을 계획이라고 함.호텔건설은 88년도까지 완성할 계획이라 함.특히 대동강의 섬에 프랑스와 합작으로 70층짜리 호텔(유경호텔)을 지을 예정이라고 소개했음.김정일은 이에 덧붙여 『얼마전 남한에서 60층짜리 보험회사 건물을 지어 이를아시아 최고층 건물이라고 지랑하는데 이를 능가할 건물을 지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음.아울러 평양에 15만명을 수용할 대형 스타디움 1개와 5만∼6만명을 수용하는 스타디움 4개를 건설할 계획이라고 함.내주중 원산시 갈마반도의 군용비행장이 있는 자리에 국제호텔 기공식이 있을 예정이라고 함.원산을 휴양도시로 만들라는 김일성주석의 지시에 따라 일제때 건설된 이 비행장을 철거키로 했다고 함. 모스크바에서 열린 청년학생축전이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김정일은 말했음.그는 소련콤소몰(청소년동맹)이 행사준비를 비롯,행사전반에 걸쳐 많은 조언을 해준데 대해 매우 고마워했음.차기 청년학생축전을 평양에서 개최하겠다는 뜻을 소련측이 지지해준데 대해서도 사의를 표했음.조만간 있을 미소 정상회담과 관련,김정일은 레이건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의견을 밝혔음.레이건은 제국주의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고 제국주의의 요체는 변치않기 때문이라는 것임. 김정일비서는 또한 10월말 중공의용군의 한국전쟁 참전35주년 기념식을 가질 예정이라고 말했음.적들에게 북한과 중국의 유대가 긴밀함을 과시하기 위해 기념식을 갖기로 했다 함.소련대표단을 대규모로 초청해 해방40주년 기념식도 개최할 계획이라고 함.중국대표단은 10명으로 구성될 에정이며 초청받은 사람 모두가 초청을 수락했다고 함.당·정부 인사들로 구성될 이 대표단의 단장은 정치국원이며 중공당중앙위 서기인 이붕부총리가 맡을 것이라 함.이붕은 소련에 더 잘알려진 인물임. 소련에서 공부했고 지난3월 고르바초프와 면담했던 인물.여성 1명도 대표단에 들어있는데 중공당 중앙위 국제관계부 부부장이라고 함.이 여성도 소련서 공부해 러시아어를 잘 구사하고 주로 동구관계 업무를 다룬 인물이라 함. 지난 가을 김일성과 호요방의 신의주회담때 배석했다고 함.행사중에는 리셉션·매스게임·문화공연등이 들어있고 미국의 한반도정책 비난,주한미군철수등을 요구하는 연설이 있을 것이라고 했음.김정일은 중국대표들이 미국 비난연설을 할지 흥미거리라고 했음. ○소련 대표단 초청 차우셰스쿠 루마니아대통령의 북한방문과 관련,김정일은 두나라 정상이 사회주의 건설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국제정세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다고 했음.차우셰스쿠는 공산당·노동당 국제회의 개최와 구코민테른과는 다른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설을 제의했음.이 문제는 추후 추가검토와 논의를 갖기로 합의했음.아시아문제를 논의하면서 두 정상은 미국에 대응하는데 일본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는데 동의했다고 함.차우셰스쿠는 한반도 통일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적극 지지했으며 특히 고려민주연방창설 제의와 남북한·미국 3자회담개최를 지지했다고 함.차우셰스쿠는 또 88올림픽에 관한 조선노동당의 입장에 대체적으로 동의했음.루마니아측 요청으로 차우셰스쿠방문 결과를 양국공동 커뮤니케로 발표키로 결정했다고 함. 두 정상간 이견은 특별히 없었으나 경제문제에서 때로 첨예한 견해차가 드러났다고 함. 루마니아는 북한측에게 자국산 기계수입을 대폭 늘리고 이를 북한산 시멘트·비철금속·기타 원자재로 갚아줄 것을 요구.반면 북한은 예를들어 트럭의 경우 자체 생산분이 충분해루마니아산 자동차를 수입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더구나 루마니아에서 수입한 6∼7t짜리 트럭은 북한에서 1년만 쓰면 고장난다고 함.루마니아제는 아스팔트 도로용인데 북한은 이를 광산·군용등으로 사용할 목적임.북한에서 꼭 필요한 자동차는 루마니아도 전략물품이라는 이유로 수출을 거부했다고 함.전략물품의 경우는 루마니아 자체에서도 부족하다는 주장.북한이 루마니아산 석유를 수입하고 싶다고 하자 루마니아측은 자기들도 매년 소련에서 6백만t의 석유를 수입한다며 거절했다고 함.김정일은 루마니아가 자기들 석유는 앞날에 대비,비축하고 있다며 불만스레 말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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