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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군포로 2명 탈북 귀환

    국가정보원은 31일 국군포로 박기출(70)·이기형(75)씨 2명과 북한이탈주민 7명이 제3국을 경유해 입국,관계기관과 합동으로 탈북·입국 경위를 조사중이라고 밝혔다.박씨는 8사단 소속으로 53년 6월 강원도 김화전투에서 중공군 포로가 된 뒤 탄광노동자로 생활하다 지난해 10월 탈북했다.이씨는 3사단 소속으로 51년 5월 강원도 양구전투에서 인민군에 포로가 된 뒤 노동자로 생활하다 지난해 10월 장남 춘복(47)·손자 대형(16)씨와 함께 탈북,이번에 동반 귀환했다. 전경하기자 lark3@
  • 1월의 호국인물 김종식 해병대령

    ‘1월의 호국인물’로 김종식(金種植) 해병대령이 선정돼 오는 5일오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 헌양행사를 갖는다. 1926년 1월 중국 하얼빈에서 출생한 김 대령은 하얼빈 대도관 상업학교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했으며,중국에 머물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했다.1948년 3월 해사 후보생 특별교육대 2기생으로 입대,같은 해 9월 해군소위로 임관했다.이듬해 2월 해병대 창설요원으로 선발되어 49년 4월15일 해병대가 창설될 때까지 선발대 요원으로 활약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낙동강지역 진동리지구 전투에 참전,수류탄전을 전개하는 과감한 공격으로 적 정찰대대를 기습 타격해 마산으로통하는 요충지인 진동리를 확보하는 등 전공을 세워 전 대원이 일계급 특진했다. 1952년 3월 서울의 관문인 장단지구를 지키는 해병대 전투단 1대대장으로서 대원들을 삭발시켜 중공군과 결전을 벌였으며,전선으로 출동하기 전 묘지에 ‘고 해군소령 김종식 지묘’라고 쓴 팻말을 꽂아놓고 출전하는 일화를 남겼다. 전쟁기간 해병대가 수행한 모든 전투에 참전하여 귀신 잡는 해병대의 전통을 수립하는데 기여한 그는 휴전 이후 해병대 1연대장,헌병감을 역임했으며,1991년 4월 30일 세상을 떠났다.정부는 금성을지훈장과 금성충무훈장을 각각 수여했다. 한편 전쟁기념관은 2001년 호국인물로 김 대령과 함께 2월 권영도(權永道)경찰 순경,3월 김금성(金錦成) 공군준장,4월 임충식(任忠植)육군대장,5월 백재덕(白載德) 육군 이등상사,6월 장세풍(蔣世豊) 육군소령,7월 김용배(金龍培) 육군 준장,8월 변규영(卞圭瑛) 육군 일병,9월 김용식(金龍植) 육군 일병,10월 백마3용사 강승우 외 2명,11월신철수(辛鐵洙)공군 소령,12월 김동하(金東河) 해병중장을 각각 선정했다. 노주석기자 joo@
  • 11월의 호국인물 김용호 해병중위

    전쟁기념관은 ‘11월의 호국인물’로 6.25전쟁때 서울에서 불과 25마일(40㎞) 떨어진 전략적 요충지인 장단지구 사천강에서 중공군의대규모 가을공세를 격퇴한 김용호(金龍鎬·1929∼1952) 해병중위를 30일 선정했다. 함남 원산에서 출생한 김 중위는 52년 3월 해병소위로 임관,장단지구를 방어하고 있던 해병 1연대 11중대 3소대장을 맡아 그 해 4월부터 중공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같은 해 10월31일 야음을 틈타 대공세를 감행해오는 중공군을 맞아사천강 전초진지에서 1개 소대 75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병전을 벌이며 격렬한 사투끝에 중공군 115명을 격퇴시키고 진지를 지켰다. 그러나 전투가 끝난 뒤 소대원 70명이 전사한 것을 확인하자 “부하들이 많이 희생돼 중대장을 뵐 면목이 없어 대원들이 잠든 이 곳에서 죽음을 택한다”는 짤막한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당시 23세. 그의 책임감과 희생정신은 해병정신의 표상이 되어 존경과 추앙을받고 있다.정부는 1계급 특진과 함께 충무 무공훈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고려 문화재 100여점 개성에 묻었다”

    한국전쟁 당시 국립 개성박물관이 소장한 100여점의 고려시대 문화재가 국군이 후퇴할 때 후방으로 옮겨지지 못하고 현지에 매장됐다는증언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소속인 민주당 심재권(沈載權)의원은 당시 개성박물관장이었던 원로 미술 사학자 진홍섭(秦弘燮·82·) 박사로 부터 최근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20일 밝혔다. 심의원에 따르면 진박사는 박물관 소장유물을 안전하게 보전하기 위해 한국전쟁 발발 1년전인 1949년에 쌍영총 고구려 벽화조각 3점을비롯해 중요 유물 대부분을 서울로 후송했다. 진박사는 다음해 전쟁이 일어나고,그해 10월 함락됐던 개성이 수복되어 박물관에 복귀했으나 중공군 참전으로 다시 피난길에 오르게 되자곧 수복되리라는 생각에 마을사람 2명·수위 1명과 함께 개성박물관이웃에 문화재 100여점을 묻었다는 것이다. 진박사는 이때 매장한 문화재 가운데는 모양이 특이하고 우수해 가끔학술지에 소개되고 있는 민천사(旻天寺) 고려석불과 청자 다수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현재 개성박물관은 옛 건물을 헐고 1980년대에 신축한 것으로 알려졌으나,이 때 땅속에서 문화재가 나왔다는 소식이 없는 만큼 아직 그곳에 묻혀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서동철기자 dcsuh@
  • 집중취재/ DMZ지뢰 실태와 제거 대책

    통일로 가는 열차 경의선의 복원을 가로막고 있는 최대 복병은 비무장지대(DMZ)의 지뢰밭이다.DMZ는 ‘비무장’지대가 아니라 지뢰로 ‘중무장’한 죽음의 땅이기 때문이다.도처에 지뢰가 깔려 있다. ▲정부의 지뢰제거 종합대책 국방부는 지난 24일 비무장지대 임진강북단∼장단역 사이 4.1km 구간을 포함한 50만㎡에 3,000여명의 공병부대를 투입해 지뢰제거 작업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지뢰제거에 대한 통제와 지원은 선영제(宣映濟)육군참모차장을 위원장으로 육군본부의 모든 참모가 위원이 되는 ‘경의선 복구 육군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뤄진다.육군 1군단 산하 중(重)야전공병여단등 8개 대대가 구간별로 지뢰제거 임무를 맡는다. 지뢰제거의 첫 폭발음은 남북이 공동으로 경의선 복원의 첫삽을 뜨는 오는 15일에 울릴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는 비무장지대가 얼어붙기 전인 올 12월 이전에 ‘지뢰 청소’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매설지뢰의 위치와 숫자 ‘숨겨진 살인자’ 지뢰의 매설 위치와 정확한 개수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국방부가 지난해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자료에서 민간인통제선 북방과 비무장지대 안에 모두 105만발의 지뢰가 묻혀있다고 밝힌것이 전부다.후방지역에도 주요 기지 경계용으로 대인지뢰 7만5,000발이 매설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당국의 추정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묻혀있는 지뢰는 모두 112만5,000여발인 셈이다. 경의선 복원구간에는 10만발 가량이 묻혀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반도 전체의 지뢰 매설지역은 2억9,670만평으로 서울 여의도면적의 334배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지뢰 언제 누가 묻었나 한반도에서 지뢰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등장했다. 전방지역에 매설된 지뢰의 90% 이상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비무장지대 안에 뿌리다시피한 것으로 추정된다. 1953년 휴전협정체결 직전,중공군의 남하를 막을 목적으로 비무장지대 전역에 대규모 지뢰띠를 조성했다.당시 유엔군은 지뢰지도를 한국군에 전달하지 않았다.군당국은 이 지역을 ‘미확인지뢰지대’로 분류,철조망을 쳐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이후 군당국은 61년 쿠바사태,78년 판문점도끼만행사건,88년 서울올림픽 등 긴장시기를 전후해 엄청난 숫자의 지뢰를 추가 매설한 것으로 알려졌다.한국전쟁 이후 방어목적으로 매설한 지뢰의 경우 설계도와 지도를 갖고있으나 공개하지 않고 있다. ▲지뢰제거 6단계 작전 국방부는 경의선 복원구간에 묻혀있는 각종지뢰제거를 위해 모두 6단계의 구체적인 지뢰제거 방법을 제시했다. 우선 1,2단계로 15m 길이의 PVC 파이프 안에 38kg의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을 장착한 ‘간이급조 파괴통’을 제작,지뢰밭으로 밀어넣어 50년동안 우거진 수목과 겉으로 드러난 대인지뢰를 폭발시킨다. 3단계는 폭발되지 않은 대인지뢰를 찾아내기 위해 고압 살수차를 동원,물대포를 쏘아 미처 폭발되지 않은 지뢰를 지상으로 끄집어낸다. 드러난 지뢰는 철제상자로 운반돼 군 폭발물처리반이 해체시킨다. 4단계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발목지뢰의 경우 육안으로 잘 식별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강철판으로 무장한 개조 굴착기를 지뢰밭으로 들여보내 땅을 갈아엎는다.5단계는 지뢰제거용으로 특별개조한 불도저로 50cm 이상 깊게 파묻힌 지뢰를 찾아낸다. 마지막으로 휴대용탐지기와 지뢰덧신,보호헬멧,방탄복,방풍안경 등으로 완전무장한 지뢰탐지병을 들여 보내 최종점검한다. 국방부는 그러나 재래식 장비를 이용한 이같은 방법으로는 연말까지제거작업을 완료하기 어렵고 투입병력의 안전도 담보할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통로개척용 지뢰파괴장비인 미국제 ‘미클릭’을 비 롯 첨단장비의 투입 및 도입을 검토 중이다. ▲제거비용은 얼마나 들까 정부는 경의선 철도복원 및 8차선 도로 노반조성,지뢰제거 예산은 남북경제협력기금에서 충당할 방침이다.국방부도 지뢰제거에 예산이 얼마나 들지 아직 계산해보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통상적으로 지뢰 1발을 해체하는 데 드는 비용이 300∼1,000달러이므로 최소 3억달러에서 11억달러의 천문학적인 예산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국방부는 순수 군병력과 군 장비를 이용하기 때문에 이같은계산법은 터무니없다는 입장이다. 노주석기자 joo@. *한반도 지뢰 종류와 제거장비. 한반도에는 어떤지뢰가 묻혀있으며 이들 지뢰를 ‘청소’하는 제거장비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지뢰의 종류] 비무장지대에 묻혀있는 대인지뢰는 M3,M4,M16,부비트랩 등이 있다.대전차지뢰는 M15가 대표적이다. 폭풍을 일으키며 터지는 폭파형태와 발목을 자르는 특성 때문에 ‘폭풍지뢰’‘발목지뢰’라고도 불리는 M14는 플라스틱으로 제작돼 금속탐지기에 걸리지 않고 크기가 작아 쉽게 은폐된다.좁은 공간에 많이 매설할 수 있다.발목만 잘리도록 소량의 장약을 넣은 것으로 적군을 사살하기 보다는 부상시켜 후송 및 치료에 따른 소모를 노린다. M16은 위력이나 정교함에서 대표적인 대인지뢰로 꼽힌다.주장약 및파열체가 0.6∼2.4m 높이로 떠올라 터지면서 파편을 183m까지 날리기때문에 살상효과가 크다.퓨즈가 작동하는 최소 압력은 3.6∼9kg이다. M15 대전차지뢰는 전차,장갑차,자주포 등 전투차량을 파괴하거나 손상시키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재래식 대전차지뢰의 대표작이다.폭발을 일으키면서 차륜 및 궤도를 무력화시킨다. [지뢰 파쇄장비] 지뢰제거장비는 ▲쟁기형 ▲도리깨형 ▲롤러형 등농촌의 전통적인 경작장비를 변형시킨 장비와 폭파용 로켓운반장비로대별할 수 있다. 이중 미클릭(MICLIC)은 통로개척용 로켓.한번에 폭 6∼12m,길이 100m 지역의 지뢰를 청소한다.우리 군도 보유하고 있지만 1발을 쏘는데4,000만원이나 들어 너무 비싼 점과 산악 및 구릉지역이 많은 비무장지대의 특성상 맞지 않는다는 것이 흠.이스라엘제 포민즈2(POMINS)도유사하며 한발당 1,500만원을 호가한다. 수목과 지뢰를 동시에 제거할 수 있는 장비로는 독일제 ‘리노’와‘마인 브레커’가 있다.특히 리노는 리모컨으로 조종하는 무인지뢰장비로 매설된 흙을 파서 수거한 내부에서 폭파시키기 때문에 안전성이 높다.8시간에 1만5,000㎡의 면적을 제거할 수 있으며 대전차지뢰에도 견딘다.한대당 20억원선.마인 브레커는 농촌에서 사용하는 도리깨처럼 생긴 기구로 땅을 내리쳐 지뢰를 폭파시킨다.국산 K-200장갑차를 개조한 전투장갑불도저와 운전석 앞면에 강철을 댄 개조형 굴삭기 등이 있다. [기타 제품] 적외선이나 레이더를 이용한 공중탐지시스템의 개발이시도되고 있지만 아직 실용화되지 못한 상태이다. 최근 국내 한 업체는 지뢰보호용 안전전투화를 개발,특허출원중이다.소가죽에 탄소섬유 원단과 고탄성 라텍스,폴리우레탄 등을 소재로했으며 발목부문에 깁스형 방탄탄소섬유를 장치한 것이 특징이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 연구팀은 후각이 뛰어난 개의 코구조를 가진 지뢰탐지용 로봇개의 개발에 성공했다. 한국원자력연구소 최병호(49) 박사는 양성자를 이용,땅속에 매설된플라스틱지뢰를 전문적으로 탐지해내는 지뢰자동제거 장비를 개발했다. 노주석기자. *61개국에 1억1,000만개 묻혀.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는 최근 유엔 및 미국 국무부의 자료를 인용,한반도를 비롯한 지구상 64개국에 모두 1억1,000만개 이상의 대인지뢰가 묻혀있다고 보고했다. ICRC는 더 이상 지뢰가 매설되지 않는다는 전제아래 이들 대인지뢰를 제거하는데 1,100년이 걸리고 330억달러의 천문학적인 경비가 소요될 것으로 추정했다. 지뢰가 터져 해마다 2만6,000여명의 발목이 잘려져 나가는 등 불구자가속출하고 있다.피해자의 80%이상이 민간인이라는 사실도 경악스럽다. 문제는 분쟁지역을 중심으로 지뢰 1개가 제거될 때마다 20개가 새롭게 매설되고 있다는 점.99년 한해동안 전세계적으로 10만개가 해체됐지만 200만개가 새로 설치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세계 최대의 지뢰수출국은 미국.국제시장에서의 대인지뢰 판매가격은 개당 15∼30달러선이지만 제거에 드는 비용은 300∼1,000달러선이다.매설지뢰수와 맞먹는 수의 각종 지뢰가 재고로 군수창고에 쌓여있다. ICRC의 보고서 등에 따르면 ▲이집트 2,300만개 ▲이란 1,600만개▲앙골라 1,500만개 ▲아프가니스탄·이라크·캄보디아 각 1,000만개 ▲베트남 350만개의 지뢰가 묻혀있는 것으로 추산된다.ICRC는 한반도의 경우 수량 미상으로 보고했다.6.25전쟁중에 미군 등 유엔군에의해 무차별적으로 뿌려져 정확한 숫자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풀이된다. 국제사회는 ‘숨겨진 살인자’ 지뢰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다.전세계에 걸쳐 1,200여개에 달하는 지뢰금지운동단체들의 노력으로 지난 3월부터 대인지뢰의 생산과 사용 등을 포괄적으로 금지하는 ‘대인지뢰의 사용금지 및 폐기 등에 관한 협약(오타와협약)이 발효됐다. 당시 이 협약에 서명한 나라는 133개국이며 현재 국회비준을 마친나라도 65개국에 이른다. 우리 정부도 올해안에 대인지뢰의 사용을 부분적으로 제한하는 ‘비인도적 재래식 무기금지협약’(CCW)에 가입키로 했으나 오타와협약에는 2006년 쯤에야 가입할 방침이어서 국제사회로부터 임시미봉책에불과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국내에서는 지난 97년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KCBL)가 발족,오타와협정 조기가입운동을 펴고 있으며 이 회의에는 27개 민간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노주석기자.
  • 월남후 재혼 李善行·李松子부부 방북길에

    “여보,나는 괜찮으니까 기쁜 마음으로 북에 두고온 부인과 자식들을 만나요” “고맙구려,당신도 그렇게 그리워하던 의식이를 만날 수 있다니 잘됐구먼” 북한에 가족들을 남겨놓고 각각 월남한 이선행(李善行·80·서울 중랑구 망우2동),이송자(李松子·81)씨 부부가 이산가족 방문단에 모두 포함돼 오는 15일 나란히 방북길에 길에 오르게 됐다. 4일 대한적십자사가 확정한 방북 이산가족 인선 최우선 기준인 ‘부모,배우자,자녀가 생존해 있는 사람’에 이씨 부부가 모두 해당되기 때문이다. 평안북도 영변이 고향인 이선행씨는 지난달 27일 북에서 보내온 가족 생사확인 명단에서 아내 홍경옥씨(78)와 아들 진일(58),진걸씨(55)가 살아있음을 확인했고 함경남도 문천이 고향인 이송자씨는 아들 박의식씨(60)의 생존을확인하고 방북단에 포함되기를 손꼽아 기다려 왔다. 이선행씨는 “전쟁 당시 청천강 이북에서 중공군이 밀려온다는 소문에 모든 가족이 피란길에 나섰다가 대동강 철교가 끊기면서 생이별을 하게 됐다”면서 “당시 처는 임신중이었다”고 회상했다. 부인 이씨는 1947년 아들 형제를 북에 두고 서울에 있던 남편을 찾아 내려왔다가 38선이 막히면서 자녀들을 볼 수 없는 신세가 됐다. 남편의 아내를만나면 ‘살아 있어서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는 이송자씨는 “이번 방문에서 두 가족이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남편 이씨는 “아내를 두고 옛 아내를 만나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지만 아내가 이해해주니 고마울 뿐”이라면서 “명절과 어버이날이 찾아오는 것이 가장 두려웠을 만큼 외롭던 우리 부부에게 갑자기 너무 많은 자식이 생겼다”며 즐거워했다. “손자,손녀는 몇이나 될까,혹시 증손자가 있을지도 몰라…아들에게는 돋보기,손자에게는 양복,증손자에게는 장남감이 어울릴까” 이선행씨는 벌써 후손들의 선물 챙기기에 바빴다. 이송자씨도 “우리 아들들도 백발이 성성하겠구려,손주들에게는 탐스럽게익은 앞 마당의 복숭아를 따다 주는게 어때요”라며 화답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
  • 8월의 호국인물 이성가 육군소장

    전쟁기념관은 28일 6·25 전쟁 당시 경북 영천전투와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고 이성가(李成佳·1922∼1975) 육군소장을 ‘8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만주에서 태어난 이 소장은 중국 난징(南京)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소령때까지 중국군에 복무하다 해방후 귀국해 창군 작업에 참여했다. 1948년 10월 제4연대장으로 여수·순천반란사건을 진압했으며 1949년 9월에는 태백산지구 공비를 토벌하는 등 6·25전쟁 전까지 태백산지구 전투사령관을 지냈다. 전쟁이 일어나자 국군 8사단을 지휘,충북 단양지역에서 북한 인민군의 공격을 6일동안 지연시켜 소백산맥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영천지역에서 혈전 끝에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전세를 반전시키는 공을 세웠다. 반격작전 때는 북진의 선봉을 맡았고 1951년 9월 이후에는 7사단장으로서중공군과 혈전을 벌여 전술적 요충지인 백선산과 크리스마스 고지를 확보하기도 했다. 휴전후 5군단장,육본 정보참모부장,육군대학총장을 지낸 뒤 소장으로 예편했다.멕시코·터키·오스트리아대사를 역임했다.생전에 태극무공훈장과 을지·충무·화랑 무공훈장을 받았다. 노주석기자 joo@
  • 최고령 상봉후보 감격 눈물

    “제사까지 지낸 오마니가 살아 계시다니….믿기지 않습니다” 27일 109살 된 어머니(具仁賢)가 북한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한 장이윤(張二允·71·부산 중구 영주1동)씨는 복받치는 감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장씨의 어머니는 남측 이산가족 방문단의 상봉 대상자 중 최고령자가 됐다. 7남3녀의 막내인 장씨는 피난 당시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도연로해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큰 형(명택·84년사망)과 조카 3명 등 4명의상봉을 신청했으나 뜻밖에 어머니의 생존사실과 함께 조카 2명의 소재를 확인했다.다른 형제들은 모두 사망한 것으로 통보받았다. 장씨는 6·25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5일 서평양 인흥리 전매청 앞에서 어머니와 헤어져 단신으로 월남했다. 당시 20살 청년이던 장씨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젊은이들의 경우 막 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에 발각되면 총살당한다는 소문이 파다해 동평양의 친척아저씨 집으로 피신했다”고 말했다. 장씨는 “3일정도 지내다 돌아 오겠다”며 어머니를 위로했지만 “그것이마지막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친척집에 도착한 장씨는 피난짐을 꾸리는 것을 보고 함께 철길을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다 10㎞쯤에서 친척 아저씨와도 헤어졌다. 장씨는 어머니가 당시로서는 키가 큰 편인 165㎝정도로 평북 용천지역에서최고의 미인이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특히 막내인 장씨는 8살때까지 어머니 젖을 먹는 등 어머니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6살때 천자문을 다 뗐는데 엄마가 젖을 주지 않으면 서당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어머니는 과자나 떡 등이 생기면 숨겨두었다가 자신에게만 살짝 주곤 했다고 회상 했다. 평북 용천군 외산면 동석동이 고향인장씨의 아버지(張致道)는 일제치하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해방된 1945년 귀국,서평양에 정착했다. 장씨는 “월남후 10년만인 1960년 우여곡절 끝에 둘째형(文澤)을 만났지만돌아가셨다”면서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가 살아계시는데 만나지 못하다니…”라며 애통해했다. 장씨의 아들 준용(俊龍·36)씨는 “아버지는 앞서 북한에서 통보한 이산가족 상봉단 명단에 자신을 찾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내내 눈물로 지샜다”고 밝혔다. 장씨는 지난 70년 부산 수정동에 정착해 부인 박순이(朴順伊·62)씨와 결혼,2남1녀를 두고 있으며 이때부터 설·추석 등 명절때 어머니 제사를 지내왔다. 부산 이기철기자 chuli@
  • 6·25때실명 재미 이동은목사40년간 삶담은 책 국·영문출간

    [로스앤젤레스 연합]한국전쟁 때 포탄 파편을 맞아 두 눈을 잃은 재미교포 이동은(70) 목사가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적은 책 ‘어둠을 헤친 평화의파수꾼’(An Ambassador in Chains)을 출간했다. 한국전쟁 발발 50주년에 맞춰 국문과 영문으로 동시 출판된 이 자서전은 실명후 한 전도사의 권고로 점자를 배운 이목사가 성서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 목사가 되고 선교사 활동을 하기까지 40여년간을 담고 있다. 이목사는 23일 로스앤젤레스의 한 호텔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6·25한국전 당시 쓰러져간 젊은 외국용사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한국의 평화를 위해 함께 피흘려 싸웠던 16개국 전우들과 유족들에게 복음으로평화와 구원을 전해 그들의 죽음과 희생에 대한 빚을 갚고 싶다”고 말했다. 이목사는 전쟁이 한창이던 52년 가을 양구 화천지역에서 육군 보병 7사단 8연대소속 중대장으로 전투를 지휘하던 중 중공군 박격포탄 파편에 두 눈을실명하고 오른쪽 귀가 마비된 1급 상이용사다.60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학교 졸업후 목사안수를받은 이목사는 76년 도미,미 전역 172개 원호병원을순회하며 전장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전도하고 미국장로교 세계선교회 선교사로 일본에 파견돼 11년간 활동했다. 이목사는 선교사 은퇴후 작년 6월부터 LA 남부 롱비치 소재 재향군인회 병원에서 상이군인들을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하고 있다.
  • 홍성원 6·25대하장편「남과북」전6권으로 改作

    작가 홍성원이 23년전에 완간했던 ‘남과 북’(전 6권·문학과지성사)을 개작해 다시 내놓았다. 지난 77년초까지 월간 ‘세대’에 5년2개월동안 ‘6·25’란 제목으로 장기연재됐던 이 소설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4월부터 휴전이 성립된 직후의 1953년 9월까지 3년 반 기간을 다룬 6·25 대하드라마다.작가는 1만 장이 넘는 원고의 보완과 개작을 위해 꼬박 1 년 간의 시간을 투자했다고 개정판 서문에서 밝힌다.묵은 문장을 손질하고 냉전 시대의 ‘사나운 표현’들을 교체하고(북괴를 북한,괴뢰군을 인민군 등으로),새로운 주인공을 등장시키고,중복된 일부 내용은 과감히 삭제했다는 것이다. 작가 말대로 ‘남과 북’은 냉전 체제의 이데올로기가 서슬 푸르게 살아 있던 1970년대에 씌어진 작품이다.이미 77년 2월의 초판 후기를 통해 작가는북한에 대한 표현의 상한선이 ‘감상적인 민족주의 언저리거나 당국에 의해철저히 도식화된 반공 가이드라인 내’로 제한된 사실을 적시했었다.그후 20여년이 지나 “‘한국 전쟁’을 소재로 다룬 작품에서 전쟁의 절반을 담당한 북한 쪽 이야기를 빼버린다는 것은,표현상의 불평등 못지않게 공평하지 못한 일” 이며, “작품 ‘남과 북’이 한국 전쟁을 제대로 그리는 데 한계가있었다” 고 고백하면서 개작에 나선 것이다.작가는 북한 쪽 주인공을 작품에 새롭게 등장시킨 점을 이번 개작의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새로운 등장인물은 ‘자본주의 압제로부터 인민을 해방하여 사회주의 조국 통일을완수한다’는 북한측 전쟁 목표와 관련해 원래의 꿈을 잃지 않으려고 혼신의노력을 다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회주의자다. 그러나 이번 개정판의 이같은 보완은 말 그대로 보완일 따름이다.작가가 초판부터 언급한 ‘남과 북’의 본질적인 한계가 이 보완으로 극복되는 것은아니다.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장점과 매력은 이로 해서 훼손되지 않는다.변화의 급류가 굽이친 20여년이 흘렀지만 이 소설은 아직도 읽고 주목할 가치가 있다.비록 제목과는 달리 남한 쪽에 꽉 붙잡혀 있긴 하지만 홍성원은 6·25의 ‘전모’를 드러내고자 한다.작가라면 누구나 가질 것같은이같은 목적의식은 그러나 20년 전에도 드물었고 지금도 흔하지 않다. 6·25는 수많은 한국의 소설가에게 심연의 대광맥이지만 그 채광의 결과물을 보면 가치 이전에 너무 개인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편향성을 어쩌지 못한다.품위를 잃지 않아 온 최초의 전업작가라고 할 수 있는 작가 홍성원은이와 달리 요컨대 6·25를 휼륭한 이야기 소재로서 접근한다.물론 작가는 ‘남과 북’이 6·25를 졸업하기 위한 졸업 논문과 같다고 말하고 6·25는 하루속히 졸업해야 될 우리 모두의 고통스런 과제라고 덧붙이고 있다.그러나작가는 6·25를 우리의 역사적인 개별 사건으로서보다 폭력과 자기 파괴의극단적인 현장인 인간의 전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역사·이데올로기 우선시대에는 역사성이 부족하고 경박·통속적이라는 평을 면치 못해 왔지만 그런과잉시대가 지나간 지금 ‘전방위적 이야기꾼’이 하는 ‘남과 북’의 스토링텔링은 이번 개작을 맞아 다시 주목할 가치가 있다. 6·25에 대한 이 작품의 ‘총체적 조망’을 확신하는 작가는 “30여 명의주인공들이 등장하는데 국군·미군·중공군 등 각기 다른 국적의 여러 군인들을 비롯하여,한국 기자와 미국 기자·학자·상인·지주·의사·브로커·양공주·전쟁 고아·건달 등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저마다 전쟁에서 살아남기위해 자기의 최선을 다한다”면서 “영웅도 없고 승자도 없이 오직 패자만을 다량으로 생산한 이 전쟁은,바로 그 패자들의 눈을 통해서만 황량한 전체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전자책(e-book) 동시출간. 김재영기자 kjykjy@
  • 6월의 호국인물 김종오 육군대장

    6.25전쟁의 영웅 김종오(金鐘五·1921.5.22∼1966.3.30) 예비역 육군대장이전쟁기념관이 뽑은 ‘6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충북 청원에서 출생한 김 장군은 46년 군사영어학교 졸업과 함께 소위로 임관,50년 대령으로 제6사단장에 부임할 때까지 사직리전투에서 북한군 1개 대대를 유인,섬멸하는 등 큰 전공을 세웠다. 전쟁이 발발하자 춘천에서 인제까지 90km에 이르는 지역의 방어작전을 펼쳐 6월29일까지 춘천∼홍천지역을 지켜냈다.덕분에 서부전선의 부대들이 한강방어선을 구축한 것은 물론,유엔군이 증원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후 음성 무극리 및 동락리전투에서 적 15사단을 기습,2,186명을 사살하는전과를 거뒀으며,초산의 압록강변에 가장 먼저 태극기를 꽂았다. 그는 특히9사단장으로 52년 10월6일부터 15일까지 고지의 주인이 12번이나 바뀐 백마고지전투에서 8,000여명의 병력으로 중공군 제38군 예하 3개 사단 1만5,000여명의 공격을 격퇴시키고 1만4,300여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휴전 이후 1군단장,5군단장,육군참모총장을역임한 뒤 65년 육군 대장으로예편했다.현역시절 태극·을지·충무무공훈장과 미국 십자훈장을 받았다. 노주석기자 joo@
  • 국군포로 김기호씨 귀환

    북한에서 47년동안 억류돼 있던 국군포로 김기호씨(71)가 최근 제3국을 통해 귀환해왔다고 국가정보원이 31일 밝혔다.국정원에 따르면 김씨는 한국전당시 수도사단 1연대 소총수로 참전,53년 7월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가 된뒤 함북 아오지 탄광에서 광부 등으로 생활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석우기자 swlee@
  • 피의 능선등 격전지 6곳 6·25전사자 유해 찾는다

    6·25전쟁중 전사한 국군 유해발굴작업이 오는 3일부터 실시된다. 31일 육군에 따르면 6·25 격전지 29곳 가운데 올해 1차로 경북 다부동·안강지역과 경기도 김포 개화산을 비롯,강원도의 화천 마현리,양구 백석산,양구 피의능선 등 6개 지역에서 유해발굴작업이 이뤄진다. 발굴된 유해는 고고인류학자,유전공학자,치과의 등 20여명의 국내 전문가와청주 중원문화연구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을 통해 군번표,신발,탄약 등유류품과 DNA 유전자 감식으로 신원확인작업을 거치게 된다.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DNA 유전자 감식을 위한 시료채취가 불가능한 유해는 국립묘지 납골당에 합동 안장할 계획이다. 북한군과 유엔군으로 판명된 유해는 북한을 비롯해 해당국가에 인도하되,인수를 거부하면 경기도 파주군의 ‘북한군·중공군 묘지’와 부산 ‘유엔군묘지’에 안장할 예정이다. 육군은 오는 2001년과 2002년 9개 지역,2003년 5개 지역 등에서 유해발굴작업을 계속하며,이 지역에 최소한 10만여구의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노주석기자 joo@
  • [기고] 병역비리 척결 빠를수록 좋다

    지난 새해 첫날,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화두는 병역에 관한 것이었다.우리 근대사에서 요즘처럼 군 복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적은 없었다는 얘기들이다.남자는 이제 ‘국방의무’를 마치지 않으면 어디가서도 발붙이지 못할거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다.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군대를 가고 안 가는 걸 두고 ‘어둠의 자식’이니,‘신의 아들’이니,또는 ‘유전면제,무전입대’란 해괴한 자조어가 나돌던 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지난번 대선에서 ‘대쪽’ 이미지로 참신성을 내세우던 대통령 후보의 집안이 온통 병역미필로 밝혀져 국민의 따가운 눈총을 받은데 이어,수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병역미필자이고,그들의 자녀들이 병무 부정과 연루돼 매스컴의 도마 위에 오르면서 국민을 분노케 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군대 생활이 좋아서 하는 사람은 없다.적어도 직업군인을 제외하고선 말이다.자유분방한 젊은 날을 24시간 영내에서 통제된 생활을 한다는 것이 쉬운일이 아니다.먹는 것,입는 것,잠자는 것등 기본적인 생활에서부터 엄한 조직의 계획된 스케줄에 따라 명령과 복종의 상하관계 속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집단.한달에 1만원,2만원의 봉급을 받고도 영하의 설원을 달리며 호된 훈련을 받고,밤잠을 설치면서 전선을 지켜야 하는 고달프고 무거운 책임.뭍에서,바다에서,공중에서 조국을 보위하는 사명을 다하는데 한눈을 팔 짬이없다.그런 날이 910일간이나 쉼없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영국에서 케임브리지나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 주를 이루는 귀족이나 상류층은 전쟁이 나면 먼저 전장으로 달려간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지’,그리고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형 존 F.케네디1세가 공군조종사로 최전방에 나가 싸우다 전사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미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외아들을 한국전쟁에서 잃었으며,모택동의 아들도 중공군으로 참전해 사망한 사례는 널리 알려진 일이다. 우리에게 병역문제는 여러 갈래의 자취를 남겼다.고구려의 상무정신은 북방대륙을 우리 손아귀에 들게 했으며,신라 화랑도의 군사력은 3국을 하나 되게 하였다.그런가하면,조선조의 무반천시 풍조와 국방홀시정책,병역제도의 모순·비리는 나라를 망국의 길로 내몰았다.사대부나 양반의 자식들은 제외하면서 강아지와 절구까지 군적에 올려 군포를 받아내는 관리들의 가렴주구를견디지 못한 양민들은 토호들의 종이 되거나 중으로 신분을 바꾸어 군역을면했던 부끄러운 역사가 있다. 그러나 ‘호국의 얼’이 숨쉬는 자랑스런 일화도 있다.백제와 싸움에서 16세의 아들을 최후의 격전장인 황산벌에 내보내 전세를 역전시킨 신라 화랑관창의 아버지 품일장군이 있었는가 하면,임진왜란때 자식과 함께 목숨을 걸고 왜적을 물리친 고경명 같은 명장이 있다.낮은 시력으로 군 면제 판정을받았음에도 입영해 훈련을 마친 현역장군의 아들 얘기는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정보화시대에 시민을 분류하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는,‘병역을 마쳤는가’가 될 것이라 한다.특히 지도층이 되려는 사람,선거로 입신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는 2년반의 세월이 결코 헛된 시간낭비가 아님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헌법이 정한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수행하는 일이 건전한 시민,애국하는 국민의 기본요건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하물며 병역비리의 척결에 있어서는 어떠한 구실도 용납되어서는 안된다.선거철이라 피하고 정치적 탄압이라는 공세에 밀린다면 이 고질병은 어느 세월에 바로잡힐 것인가. 군입대 희망자가 몰려 입영원을 6개월 전에 내야 하고,입영이 선착순이 아니라 성적순이라는 말이 들리는 이즈음의 사회 분위기가 일과성이 아닌 건전한 병역문화로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그런 뜻에서 병역비리 척결은 엄정하고 빠를수록 좋다. 정영휘 수필가·예비역 육군준장
  • “美공군 6·25 피란행렬 공습”

    미 공군이 한국 전쟁중 피란행렬에 공습을 감행한 사실이 최근 비밀 해제된문건에서 확인됐다. AP통신은 28일 미 메릴랜드주 칼리지 파크 소재 국립문서보관소와 앨라배마주 미공군역사연구소에서 비밀해제된 한국전쟁중 미 공군 작전후 보고서에미 공군기들이 민간인 피란행렬에 지속적으로 공습과 기총소사를 감행,많은사상자를 낸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50년 7∼8월에 작성된 작전후 보고서의 경우 “유성 남쪽 강 근처에서 많은 군인을 발견,기총소사를 했으나 짐도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피란민 일 가능성이 높았다”고 적고 있다고 통신은 전했다. 그러나 보고서에서 밝힌 ‘유성’이 대전 부근의 유성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통신은 덧붙였다. 당시 AP통신 종군 기자는 “51년 1월 말쯤 용인근처에서 많은 시체가 발견됐는데 정보장교는 중공군 때문에 이들이 죽었다고 설명했으나 증거가 있느냐는 질문에 정보장교는 얼버무렸다”며 이들이 민간인일 가능성이 높다고증언했다고 AP는 설명했다. AP측은 당시 공습에 참여한 주일 미 공군기들은 연료부족으로 공습이나 폭탄 투하 후 곧바로 귀환했기 때문에 정확한 공습지점이나 인명피해 등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박희준기자 pn
  • 철원평야 일대 안보관광·탐조여행

    철새의 귀족 두루미.아침 햇살에 더욱 빛나는 고고한 자태의 두루미들이 철원평야 위를 유유히 난다.토교 저수지에서는 20여만 마리의 기러기떼가 굉음을 내며 비상한다.가을 걷이가 끝나 황량하던 철원 들녘이 철새들의 멋진 군무를 위한 거대한 야외 무대로 바뀐다.비행편대를 이루며 철원평야를 돌던철새들이 비무장지대(DMZ)로 날아간다.분단 반세기동안 문명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그 곳은 철새들의 낙원.철새들은 자유롭게 군사분계선을 넘나든다. 그러나 그 자유는 그들만의 자유다.DMZ는 분단의 아픔을 증언하고 있는 비극의 현장.강원도 철원에 가면 분단의 비극을 체험할 수 있는 ‘안보관광’도하고 겨울 철새들도 만날 수 있다.철새들의 합창을 들으며 안보관광을 떠나보자. ■철원평야와 비무장지대 철원평야의 아침은 철새들의 합창으로 열린다.철원은 겨울 철새들의 낙원.두루미·청둥오리·기러기·독수리 등 겨울 철새들이 가을이 깊어지면 철원으로 날아든다.겨울에도 얼지 않는 천연 샘물이 솟아나는 샘통지역(0.5ha)은 철새들의 도래지로서 73년천연기념물 245호로 지정됐다.겨울에도 얼지 않는 물과 늪,토교·동송 저수지 등 담수호,철원평야에떨어진 벼이삭,사람들의 출입 제한 등 철새들의 서식지로 천혜의 환경이 갖추어져 있다. 민통선 안에 있는 토교 저수지와 강산리에 있는 동송 저수지 등에는 수십만 마리의 철새들이 모여든다.그들이 한꺼번에 날아 오르는 모습은 어느 예술작품 못지 않은 감동적인 장관이다.그들의 힘찬 비상의 굉음은 철원평야의정적을 깬다.세계적으로 희귀한 두루미를 만나는 것도 큰 즐거움.우아한 모습의 재두루미와 흰두루미떼들이 날아다니거나,숲이나 논에 있는 것을 쉽게볼 수 있다.철원군은 탐조여행을 위해 하갈리에 있는 아이스크림 고지에 철새 전망대를 만들 계획이다.내년에 착공 2001년 완공 예정.늦가을부터 봄까지 철새를 만날 수 있다. ■제2땅굴 1975년 3월19일 발견된 북한의 남침용 지하 땅굴.북한의 서방산에서 시작된 땅굴은 3.5km.땅굴 입구에서 108m를 내려가면 북한이 화강암을 뚫고 만든 땅굴을 만난다.500m까지만 공개.땅굴속에는 먹고 자고 쉬던 ‘광장’이 있다.그 광장에 서서 북한쪽을 바라보면 땅굴을 팔 때 동원됐던 북한인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땅굴 저편에서 아직도 들려오는듯 하다. ■철의 삼각 전망대와 월정리역 남방 한계선에 인접한 전망대에 오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뜻밖에도 고라니 한쌍이었다.고라니 한쌍이 철책선주위를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다.6·25 때 격렬한 전투로 ‘죽음의 땅’이었던 비무장지대는 자연의 위대한 복원력으로 지금은 울창한 숲으로 바뀌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숲속에서 산새와 짐승들은 그들의 낙원을 이루고 있다.숲도 잔인한 비극의 역사를 모른 채 평화스럽다.그러나 그것은 긴장된 평화다.전망대에 오르면 김일성 고지와 피의 능선 등 북녘땅도한눈에 들어온다. 월정리역은 경원선의 남쪽 마지막 역.6·25때 폭격으로 부서진 열차의 잔해가 앙상한 골격만 남긴 채 누워 있어 분단의 아픔을 증언하고 있다. ■백마고지 전적비와 기념관 한국전쟁의 전설로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고 있는 백마고지 전투.12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뀐치열했던 전투의 상흔들이기념관에 전시돼 있다.너덜너덜한 철모가 전쟁의 비극성을 고발하고 있다.중공군이 심각한 타격을 입고 패한 백마고지는 비무장지내 안에 있다.전적비와 기념관은 지난 90년 철책선 근처 철원군 대마리에 만들어졌다. ■노동당사 해방후 북한이 공산독재의 정권강화와 국민통제를 위해 소련식공법으로 완성한 무철근 건축물.6·25전까지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 쓰이며 반공인사들을 탄압하던 현장.지붕이 없어지고 일부 벽도 무너져 내렸다.벽에 남아 있는 수많은 탄흔은 치열했던 당시의 전투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듯하다.참담한 모습의 노동당사는 분단의 슬픈 역사의 유산으로 이념의장벽처럼 서 있다. 철원(강원도) 이창순기자 cslee@ ■여행안내 탐조여행과 안보관광은 철원에 있는 고석정 국민관광단지에서 부터 시작.고석정에 있는 철의 삼각지 전적관 관리사무소 2층 접수실에서 신청서를 작성한후 접수시킨다.신분증 필요.외국인은 여권 또는 ID카드. 출입은 9시30분,10시30분,11시30분,13시,14시(3월∼10월은 마지막 출입시간이 14시30분) 등 하루에 5회.화요일 휴무.자동차나 관광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전적관에 있는 안내인의 가이드에 따라 고석정을 출발,6검문소를 통해 민통선 안으로 들어간다.(렌즈가 100mm 이상인 사진기는 검문소에 맡겨야 한다). 103초소를 지나 제2땅굴에 도착.제2땅굴을 본후 다시 103초소를 거쳐 철의삼각 전망대와 월정리역 도착.그 이후는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백마고지전적비를 거쳐 노동당사를 방문하는 것이 편리.오후 5시까지 여행을 마쳐야한다.식당이 없어 점심을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입장료는 어른 1,500원(단체 1,400원),청소년 1,200원(800원),어린이 800원(500원).주차료 소형 2,000원 대형 4,000원.관리사무소 (0353)455-3129,3577,450-5558,5559. ■가는길 43번국도를 타고 의정부-포천-운천-신철원-문혜리(좌회전)-승일교-고석정.
  • 北·中 62년 국경조약 체결 백두산 일대 국경선 확정

    불분명한 것으로 여겨졌던 백두산 천지 일대의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이 지난 62년에 확정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당시 체결된 ‘조-중 변계조약(邊界條約)’에서 북한은 백두산 천지의 5분의 3과 그 일대를 영토에 편입,1909년 청·일 간도협약 당시보다 서울시 면적의 45% 정도인 약 280㎢를 더 확보했다는 것이다. 백두문화연구소 이형석(李炯石)대표는 20일 “지난 여름 중국 옌볜대 동북아 지리연구소장으로부터 조약내용을 상세히 들었다”며 “이 조약은 62년 10월12일 평양에서 주언라이(周恩來) 중국총리와 김일성(金日成) 북한주석간에 체결된 비밀조약”이라고 주장했다. 이대표가 확인한 조약 내용에 따르면 북한과 중국은 천지 수면을 서로 공유키로 합의,천지 안에서는 양측 모두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규정했다.압록강 최상류지역으로부터 천지 주변을 거쳐 모두 21개의 국경 표지비를 설치했다. 이 조약에 따라 해발 2,750m로 백두산 최고봉인 백두봉을 비롯,쌍무지개봉향도봉 단결봉 제비봉 등은 북한측에,옥주봉 백운봉지반봉 금병봉 용문봉등은 중국측에 각각 속하게 됐다. 이대표는 “중국측은 당초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참전 대가로 삼지연까지할애할 것을 요구했으나 북측은 ‘천지 일대를 넘겨주면 대국인 중국이 형제국의 영토를 빼앗았다고 비난할 것’이라고 반박,중국측의 양보를 이끌어 냈다”고 설명했다. 오일만기자 oilman@
  • [독자의 소리] 적군색출 명분 미군의 피란민학살 규명을

    노근리사건을 계기로 다른 대량 양민학살도 밝혀야 한다는 김삼웅칼럼을 읽고 또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50년말 6·25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의 후퇴가 시작됐다.이때 자유대한의 품에 안기려고 국군을 따라 피난하는 피난민 대열속에 평복차림의 인민군이 침투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미군이 사리원에서 피란민대열을 막고 황해선을 따라 서진시키다가 해주 가까이에와서 갑자기 미군기가 나타나 피난민을 향해 무차별 기총소사를 했다.미군기는 폭탄까지 투하했고 여기서 우리가족도 희생됐다.목숨이 붙어있던 다른 사람들과 어린이들은 후송되지 않아 추위에 얼어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 참상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을 통해 실향민 사이에 알려진 일이지만 그 지역이 북한이다보니 오늘까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졌다.노근리사건을 계기로 잊혀진 해주피해자들도 기억해주길 실향민들은 바라고 있다. 황현성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세류2동]
  • [대한광장] 맥아더 음모설

    내년은 6·25 전쟁 발발 50주년이 되는 해이다.그래서 맥아더 기념관에서는 다채로운 행사가 착착 준비되고 있다.맥아더는 매우 매력적인 인물이었으며 그 나름대로 한국인을 좋아했고 또 당연히 한국인이 자신을 좋아할 것으로믿었다. 그런데 필자는 15년전 발표한 논문에서 맥아더의 정보기관이 6·25의 발발을 미리 알고도 방치한 것이 아닌가하는 문제를 제기했으며 나의 글을 건네받은 일본인 기자가 이를 자기 나름대로 계승한 일이 있으며, 요즘에는 맥아더의 중공군 개입 예지·방치설이 심심치 않게 돌고 있다. 나는 다시 이 문제를 재검토하기 위해 맥아더 사령부의 방문자 일일방명록을 보려고 여행을 떠났다.방명록을 통해 정말로 맥아더가 1951년 3월중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대사들을 만났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1982년에 출판된 굴든의 ‘한국전쟁비사’에는 ‘맥아더가 파면된 진정한 이유’라는 것이 나온다.맥아더는 이들 외국대사에게 “지금이 중국이 강대국이 되기 전에 전면전으로 때려 눕힐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워싱턴을 유도해 장개석의 재집권을 돕겠다”는 결심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대사들은 곧암호전문을 본국에 치고 해독전문을 본 트루먼은 면종복배하는 맥아더의 불충함에 격노했다는 것이다. 굴든에게 이 기밀사항을 흘린 장본인은 국무부 거물이던 닛체가 아니면 마셜인 것 같다.우선 닛체가 1989년에 나온 회고록에 약간 흘렸고,이 책을 본마셜이 상세하게 흘렸다.마셜기록의 존재는 정신문화연구원 정용욱교수가 귀띔을 해줬다. 그런데 1996년 나온 ‘정일권회고록’을 보면 맥아더가 웨이크섬으로 트루먼을 만나러 가기 전 이승만대통령은 그에게 편지를 써서 중공군이 개입할것이 확실한데 북진통일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트루먼에게 그 가능성을 긍정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이에 대해 맥아더는 10월 13일자 회신에서 “중공군은 반드시 개입할 것입니다.그러나 이 가능성을 아는체 할 수는 없습니다….나는 이것을 전혀 모르는 사실로 할 것입니다.…지금이야말로 중공의 잠재적인 군사력을 때릴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극비중의 극비문서는 굴든이 발굴한 위의 얘기와 통한다.그런데 이 ‘맥아더서한’의 발송날짜가 맥아더가 트루먼을 만나 중공군의 개입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 15일로부터 이틀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같은 달 3일 도쿄주재 영국외교관 개스콘이 맥아더와 면담한 후 본국에 보고한바에 따르면 중공군이 개입만 한다면 만주는 물론 베이징까지 맹폭격할 것이라고 맥아더는 장담했고 영국정부는 이것을 크게 우려했다는 기록도 있으니상황적으론 정일권증언을 나무랄 수 없다. 이 서한의 존재여부에 대해선 몇 갈래로 생각할 수 있다.하나는 정일권씨의 얘기는 굴든 비화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추측이다.이것을 정일권씨가 가공(加工)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회고록의 내용이 너무 구체적이다.또 정일권씨의 회고록이 그가 1994년 작고후 가필된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볼 수도 있다.그렇다고 쳐도 만의 하나 서한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세계적인 특종이 될 것이다.이화장이나 정부기록보존소 등에는 없는 것으로 드러났으나 외교통상부나 정보기관에서 문서를 인수했을 가능성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 국립공문서관에 기밀해제되지 않은 이승만과 미정부간의 왕래 극비문서들이 수두룩한 것을 감안한다면 4·19의 소용돌이중에 미 정보기관이 뽑아가지 않았을까하는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이 설에 대한 사실규명은 6·25의발발연구에,또 허구의 정설화 문제에 지대하게 공헌할 것이기 때문에 연구자나 기자 및 일반인들의 주의를 환기해본다. 方 善 柱한림대 객원교수 재미사학자
  • 한국전 참전 ‘英軍 만행’ 기록 공개

    6·25전쟁 기간중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영국군 등이 한국인 민간인을상대로 살인·방화·강도·강간 등의 만행을 저질렀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재미사학자 방선주(方善柱·한림대 객원교수)박사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6·25 당시 참전한 미 9군단 관련 자료를 조사하던 중 이같은 내용을 담은 문건을 입수,본사에 단독제공했다.방 박사가 입수한 문건은 1951년3월19일 미 9군단 민사처 소속 한국인 의사들이 작성한 것으로 3월15∼18일까지 경기도 이천군 신둔면 일대에서 자행된 31건의 만행을 기록한 내용이다. 문건에 따르면,3월16일 오후 10시경 영국군 3명이 경기도 이천군 신둔면 한 민가에 침입,당시 23세의 한국여성을 총으로 위협한 후 말을 듣지않자 구타하고는 윤간했다.피해 한국인 여성은 국부와 전신에 중상을 입고 이튿날 오후 5시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다.18일 오전 4시에도 영국군 7명이 이천군 신둔면의 한 민가에 침입,당시 31세의 한국인 여성을 ‘순차적으로 강간’한것으로 나와 있다.특히 17일 오후 3시에는 영국군 3명이 13세한국인 소녀를 윤간하면서 일행중 1명은 문앞에서 보초를 선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들은 또 민가에 침입,금전이나 가축을 강탈하거나 방화도 자행한 것으로나와 있다.한 예로 16일 오후 5시경 영국군 2명이 당시 60세의 남자집에 침입,가택을 수색하고는 현금 7,000원을 강탈했으며,14일에는 미국인(미군) 4명이 한 민가에서 시가 15만원 상당의 황우(黃牛) 1두를 강탈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또 18일에는 영국군 2명이 당시 50세의 한국인 남자 집에 침입하여부인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고는 ‘없다’고 하자 가옥에 총을 난사,3만원가량의 재산피해를 입힌 것으로 나와 있다.이들은 미 9군단 산하 영국군 제29여단 소속으로 추정되나 구체적인 소속 부대명과 신분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자료를 공개한 방 박사는 “영국·미국군 이외에도 38선 남하후 중공군의만행과 관련한 판결문 등도 찾아냈다”고 밝히고 “신사의 나라인 영국의 군대와 규율이 엄하기로 소문난 중공군이 이같은 만행을 자행한 것은 충격적인 내용”이라고 말했다. 국방군사연구소 나종삼전사부장은 “그같은 내용을 기록은 물론 소문으로도 들은 바 없다”고 밝히고는 “당시 물자보급이 충분했던 상황에서 금전탈취 등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영국은 6·25 당시 보병 2개 여단,해병특공대 1개 부대 등 지상군 1만4,198명과 항공모함 1척을 포함,함정 17척을 파견한 바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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