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중공군
    2026-05-30
    검색기록 지우기
  • 클라우드
    2026-05-30
    검색기록 지우기
  • 자율 단축
    2026-05-30
    검색기록 지우기
  • 제세동기
    2026-05-30
    검색기록 지우기
  • 무역대표부
    2026-05-3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59
  • “길고 긴 군악대 생활… 어머니는 함포탄에, 동생은 총탄에 목숨 잃어”

    “길고 긴 군악대 생활… 어머니는 함포탄에, 동생은 총탄에 목숨 잃어”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9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했다. 20년간 노력해 마침내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은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김탁수 인터뷰 일시 1997년 8월 11일 장소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이규원치과 3층) 대담 김탁수(인천학도의용대 군악대 대원) 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원장(이경종 큰아들)6·25 사변과 어머니의 죽음 1950년 5월 3일 6년제 공립 인천상업중학교를 졸업하였던 그해, 6월 25일 사변이 터졌다. 내가 당시 살던 곳은 금곡동이었으며 10남매의 장남인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들과 같이 살았다. 1950년 9월 15일 UN군 전함들은 인천 시내를 향해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 함포탄은 우리 집 근방에도 날아왔으며 급기야는 우리 집에도 함포탄이 떨어져 그때 피란을 안 가시고 홀로 집을 지키시던 어머니께서 그 함포탄 파편 때문에 돌아가셨다. 인천학도의용대 군악대 창설 이때 나는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나의 모교 인천상업중학교 밴드부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조직된 인천학도의용대의 군악대로 창설되어서 나는 인천학도의용대 군악대원으로 9월 말일부터 활동하게 되었다. 그때 군악대는 인천학도의용대 지대 창립식에 동원되었으며 위문행사와 선무공작 등으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통일이 되는 줄 알았던 우리나라가 갑작스런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또다시 시국은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그때 들리는 소식은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과 겨울철로 접어들어 우리 국군의 전투력 부족으로 인하여 국군과 UN군은 날마다 밀리고 있다는 뉴스만 들리는 것이었다. 1950년 12월 18일 드디어 인천학도의용대가 부산을 향해 남하(南下)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군악대원들, 윈자호 수송선 타고 남하 1950년 12월 24일, 전황은 더 급박(急迫)하게 움직여 군에서 마련해준 윈자호라는 수송선으로 우리 군악대 25명과 인천학도의용대 여학생 대원 150여명은 같이 지금 인천역에 있는 파라다이스(오림포스)호텔에서 가까운 부두에서 부산을 향해 출항하였다. 3박 4일을 배 안에서만 지낸 우리들은 1950년 12월 27일 부산항 부두에 도착했다. 이날 축 늘어진 모습으로 부산부두에 올라선 우리들은 부산극장 옆에 있는 어느 큰 창고에 여학생들과 같이 묵고 있다가 동대신동에 있는 육군통신학교 부속 건물에 입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잠자리는 해결이 되었는데 며칠 동안은 각자 가지고 간 돈으로 먹는 것은 해결하였지만 그 돈이 떨어지니까, 이제는 끼니를 때우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1951년 1월 초 그렇게 고생스럽게 부산 생활을 하던 중에 고향 인천은 또다시 북한 공산군에게 점령(占領)당하게 되었다.군악대원 모두 육군종합학교 군악병 입대 오갈 데가 없게 된 우리들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당시 부산 동래에 있던 육군종합학교 심유권 소위였다. 그때 심유권 소위가 말하기를 “지금 육군종합학교에는 군악대가 없어서, 군악대가 필요한데 너희들 인천학도의용대 군악대는 갈 곳이 없으니까 숙식(宿食)이 해결되는 육군종합학교 군악대로 입대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날이 1951년 1월 12일이었다. 그때쯤은 이미 고향 인천은 인민군에게 또다시 점령당해 돌아갈 수도 없어 군에 들어갈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육군종합학교에 입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인천에서 수송선을 타고 같이 남하했던 여학생 대원 150여명은 육군통신학교에 계셨던 인천상업중학교 은사님이신 신봉순 교육대장님 배려로 부산육군통신학교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동래 육군종합학교에서의 군악대 생활 육군종합학교로 간 우리들은 10여일 간 간단한 제식훈련만 받고 1951년 1월 23일 자로 군번을 받았다. 정식으로 군번을 받고 군인이 되어 바로 육군종합학교 행사에 동원되어 군악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때의 행사는 주로 장교후보생을 졸업시켜 소위로 임관시키는 임관식과 간부후보생 입교 행사였다. 당시는 전방에 장교가 부족해서였는지 매주 월요일에는 입교식이 있었으며 임관식은 토요일마다 있었다. 1951년 12월 육군종합학교는 전 부대가 부산에서 수송선을 타고 목포로 갔으며, 목포 송정리 후락산에 새터를 잡아 학교 명칭도 육군보병학교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광주 상무대에서 군악대 군악병 생활 목포 송정리 후락산에는 육군보병학교, 육군통신학교, 육군포병학교, 육군기갑학교, 77육군병원 등이 집단으로 주둔하였으며 이 5개 부대를 통틀어 상무대(尙武臺)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상무대는 육군의 교육을 총괄하는 기관으로 육군 교육총감부 직속하에 들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군악대의 명칭도 상무대 군악대로 바뀌었으며, 행사 범위가 커지면서 상무대 군악대의 바쁜 군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후 1955년 2월에 나는 상무대에서 서울 태릉에 있는 육군사관학교로 전속되었다. 그곳에서 2년 가까이 군악대 생활을 하다가 길고 긴 6년 8개월의 군 생활을 육사에서 마치게 되었다. 동생 김윤수, 무전기 찾아 나오다 전사 내 동생 김윤수(金潤洙·큰 사진 빨간 원안)는 1934년 5월 11일 용동에서 태어나서, 인천창영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때 부산까지 걸어가서 1951년 1월 10일 육군통신병(군번 0240856)으로 자원입대하였다. 무선통신병으로 강원도 전투지역인 5사단 35연대에 배치되었다. 그때 오대산 누그미 전투에서 609무전기를 등에 지고 전투하며 전진하던 중에 적의 기습으로 갑작스런 후퇴로 잠깐 땅에 내려놓았던 무전기를 미처 간수하지 못하고 후퇴하여 후방에 와서 보니까 지휘관이 큰 소리로 “군에서 전투 중 통신병이 통신기재를 분실하면 즉결처분으로 총살이다!”라고 고함치니까 내 동생 김윤수는 다시 그 지역으로 가서 그 무전기를 찾아가지고 나오다가 적의 총탄에 맞고 전사했고, 유해는 그만 찾지 못하고, 무덤도 없이 동작동 국립 현충원 봉안관에 위패(6-7-118)로만 봉안되어 있다. 감사의 말과 남기고 싶은 말 이상이 내가 걸어온 중요한 줄거리이다. 중학생으로 자원입대하여 채 피지도 못하고 강원도 산골에서 외롭게 하늘나라로 간 내 동생 김윤수의 넋이 편안하게 잠들기를 빌 뿐이다. 무덤도 없는 동생의 행적을 글로나마 남기게 해주어 무겁던 내 마음을 다소나마 덜어 준 이경종규원 2부자(父子)에게 고마울 뿐이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참전기 21회를 마치며 69년 전, 인천에 형과 아우가 살았었습니다. 해방이 된 지는 5년 만에, 정부 수립 3년 만에 국가 멸망의 위기가 닥쳐서 2형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형은 하인천부두에서 배를 타고, 동생은 인천축현국민학교를 출발하여 부산까지 20일간 걸어서 남하하여, 2형제는 부산에서 자원입대하였습니다. 동생은 중학교 3학년 16살로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어린 나이였지만 자원입대하여, 전사하였습니다. 중학교 3학년생으로 나라를 위하여 죽은 동생에 대한 형의 슬픔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 가 있겠습니까? 조국과 고향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던 김윤수는 이제 고향 인천에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에 전사(戰死) 학생(學生)으로 기록합니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 ‘DMZ 첫 6·25참전용사 발굴 유해’ 현충원 안장

    ‘DMZ 첫 6·25참전용사 발굴 유해’ 현충원 안장

    비무장지대(DMZ)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박재권 이등중사의 유해가 26일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육군은 이날 “지난해 10월 DMZ 화살머리고지에서 발굴한 유해 중 처음으로 신원이 확인된 박재권 이등중사의 유해가 66년 만에 조국의 품에서 영면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1931년 10월 경남 사천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박 이등중사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1952년 3월 22세의 나이에 국군에 입대했다. 박 이등중사는 육군 제2보병사단에 소속돼 1952년 10월부터 11월까지 강원 김화 저격능선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1953년 2월까지는 철원지구 전투에 참전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박 이등중사는 1953년 6월 29일부터 중공군의 공격을 맞아 시작된 화살머리고지 방어전투에 참전해 두 차례에 걸친 접전 끝에 고지를 사수했지만 전투가 끝나기 하루 전인 7월 10일 화살머리고지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박 이등중사의 유해는 지난해 10월 DMZ 화살머리고지에서 지뢰제거 작업 도중 발견됐다. 군은 함께 발견한 인식표를 토대로 부대 전사자 명부 등을 통해 박 이등중사의 신원을 확인했다. 이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박 이등중사의 유가족 DNA 시료를 채취해 유해의 신원을 최종 식별했다. 박 이등중사는 현재 두 명의 여동생이 생존해 있다. 여동생 박우복례(71)씨는 “어머니가 오빠를 그렇게 그리워했다”며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유해가 발굴돼 돌아왔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오빠를 찾게 된 것만으로도 감격스럽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이승만 전 대통령이 명명 ‘파로호’…강원도, 대붕호로 명칭 변경 추진

    강원도는 6일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의 뜻을 담고 있는 화천 파로호(破虜湖)의 명칭을 평화시대에 걸맞게 본래 지명인 대붕호(大鵬湖)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행정절차와 주민의견 수렴 논의에 들어갔다. 파로호는 면적 38.9㎢, 저수량 10억t의 인공 호수로 1944년 화천 간동면 구만리 북한강 협곡을 막아 축조됐다. 당시 주민들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전설 속의 큰 새가 날개를 펼친 것 같다는 의미로 대붕호라고 불렀다. 하지만 1951년 국군 6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을 패퇴시키고 3만명을 수장시킨 화천전투 승전을 기념해 이승만 전 대통령이 ‘파로호’ 친필 휘호를 내려 명칭을 바꿨다. 파로호라는 이름이 적대적이어서 ‘빛나는 냇가’(華川)라는 본래 지역 의미를 제대로 담지 못한다는 논란은 줄곧 있었다. 종교계 등에서는 대붕호 이름 되찾기 서명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더구나 지난해부터 남북 화해 국면을 맞으면서 명분이 힘을 얻으며 찬성론을 부풀렸다. 강원도 관계자는 “파로호의 명칭 변경안을 화천군지명변경위에 상정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으나 화천군과 주민 의견이 중요하다”며 “신중하게 여론을 수렴할 것”이라고 말했다. 화천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통영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만난 동생… 인제 전투서 생사 달리해”

    “통영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만난 동생… 인제 전투서 생사 달리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20회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9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했다. 20년간 노력해 마침내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은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송성환 어머니·친형 인터뷰 일시: 1999년 2월 15일 장소: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 271-5 장간란 씨 자택 대담: 장간란(전사학생 송성환 어머니) 송종환(전사학생 송성환 친형) 이경종(인천학생 6·25 참전관 설립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 ※송성환은 전쟁 중에 전사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와 친형의 인터뷰로 대신합니다.친동생 송성환에게 부모·집 지키라고 당부 6·25사변 때 나(송성환의 친형 송종환)는 철도공무원으로 철도국에 다녔다. 1950년 가을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하여 우리 인천이 또다시 북한괴뢰군에 점령당할 위기에 몰리자, 그해 12월 초에 국민방위군(제2국민병) 소집통지서가 나한테 왔다. 1950년 12월 17일 6년제 인천중학교(현재 제물포고교)에 모인 국민방위군(제2국민병)들과 같이 남하하였다. 나는 남하하는 전날 밤 내 동생 성환이에게 너는 아직 어리니까 부모님 모시고 집을 지키고 있으라고 당부의 말을 하였다. 하루 50㎞씩 걸어 국민방위군 수용소 도착 1950년 12월 17일 날 나는 인천에서부터 걸어서 내려가서 이듬해 1951년 1월 3일이 되어서야 경상남도 통영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민학교)에 도착하였다. 그때 하루에 120리(약 50㎞) 길을 걸었을 때도 있었는데 내려가는 도중에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때 굶거나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제2국민병)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문경새재도 걸어서 넘어갔으며, 고생고생하며 경상남도 통영에 도착하였다. 그때 통영충열국민학교에 들어갔는데 들어가 보니까 그곳은 국민방위군(제2국민병) 제3 수용소였으며 그곳이 마지막 집결지였다. 통영충열국민학교에서 친동생 송성환 만나 그때 막 통영충열국민학교에 도착하였는데 “형”하고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까 거기에는 생각지도 않게 내 동생 송성환이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면서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냐”고 물으니까 동생 성환이가 “형이 인천에서 내려간 이튿날 친구들과 같이 인천학도의용대를 따라 남하하여 여기 통영까지 오게 되었는데 와서 보니까 인천에서 떠난 국민방위군(제2국민병)이 여기 온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 형님이 이곳에 오지 않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내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때 이러한 내 모습이 안 돼 보였던지 성환이는 자기가 갖고 있던 양담배 채스타 한 갑과 끼고 있던 은반지를 내게 빼 주면서 “형, 나는 아직 쓸 돈이 남아 있으니까 염려 말고 이것 받아요. 우리들은 곧 부산에 있는 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들어가니까 형 몸조심하세요.”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친동생 송성환이 준 은반지 팔아 밥 사 먹어 그때 나도 동생에게 “군에 입대하더라도 몸조심하고 우리 다음에 다시 만날 때는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자”라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때 내 동생이 준 은반지를 팔아서 허기를 달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통영 방위군 제3 수용소(통영충열국민학교)에서 3월까지 수용되어 있다가 제주도로 건너가 육군 제1 훈련소에 입소하여 훈련받고 060 군번을 받고 육군이 되었다. 그 후 나는 육군 보충대를 거처 강원도 전투지역으로 배치되었다. 당시 5사단장은 민기식 준장이었다. 그때 내가 간 전투부대가 5사단 27연대 2대대였다. 이때 3대대에는 인천학도의용대로 인천에서부터 같이 온 내 아우 친구들도 많이 보였다. 그때 우리 5사단이 속해 있는 군단이 포위되면서 후퇴할 때 많은 병력 손실이 있었다. 인제 전투에서 당한 손 부상으로 명예제대 그때 포위당해 매일 걸어서 후퇴하는데 며칠 몇 밤을 잠을 못 자고 후퇴만 하니까 그때는 ‘잠 한번 실컷 잤으면…’ 하는 것이 제일 큰 소원이었다. 그때 내가 인제 전투에서 손에 부상 당해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게 되었을 때인데 며칠을 후퇴하면서 전투하느라 씻지를 못해 손을 치료해야 하는데 손에 때가 많이 묻어 있어 간호사한테 손 내밀기를 주저한 일이 있었다. 그 후 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그 해 1951년 10월에 그 부상으로 인하여 나는 상이 명예제대를 하게 되었다. 친동생 송성환의 전사 사실 뒤늦게 알아 이렇게 제대를 하여 인천 집에 돌아와 보니까 내 동생 성환이의 전사통지서가 와 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 동생 전사통지서를 받으신 우리 아버지께서 낙담하시는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 속이 상하셨던 우리 아버지께서는 전사한 동생 때문에 한이 되시어 상심하시다가 동생의 전사통지서를 받고 2년 뒤 44세의 젊은 나이에 그만 세상을 하직하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5사단 강원도 인제지구 전투에서 거의 같은 날에 동생은 전사하고 나는 부상당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제대한 후에야 알게 되었으며 제대하기 전 5사단에 있을 때 내 동생 친구들은 동생이 전사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나한테 숨기고 있었던 것이었다.송성환 어머니 “전사 아들 생각 때마다 눈물” 우리 성환이는 6년제 공립 인천공업중학교 3학년이었던, 사변 나던 해(1950년) 겨울 집을 떠날 때 전쟁에 나가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고 떠났어… 어렸을 때부터 전쟁놀이를 좋아했는데 전쟁놀이를 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시늉을 할 때는 쓰러지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면서 쓰러지곤 하였는데 끝내는 피어보지도 못하고 전쟁터에서 쓰러져 전사했어. 49년 전에 전사한 아들이지만, 그 전사한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요.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다음호에 21회 계속 ■ 참전기 20회를 마치며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중학교 3학년 16살에 자원입대 후 참전하여 전사한 아들을 49년간 그리워하면서 슬퍼한 어머님의 눈물이 이 나라를 지킨 것이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 [문소영 칼럼]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과 세계 평화

    [문소영 칼럼]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과 세계 평화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지난해 2월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하자 언론은 ‘6·25전쟁 이후 백두혈통의 첫 남한 방문’이라고 자주 표현했다. 전쟁 중이었으니 남한에 온 사람은 김일성이겠지, 남한 땅 어디어디를 밟았을까 궁금했다. 외교안보담당 기자들에게 출처를 물었더니 이런 보도자료를 낸 부처도 출처는 모른다고 했단다. 직접 출처를 찾고자 한국전쟁을 다룬 책들을 읽기로 했다. 미국 탐사보도 기자 출신인 데이비트 핼버스탬이 쓴 1082쪽의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를 지난해 봄 샅샅이 읽은 이유다. 부제가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였는데, ‘남침에 의한 골육상잔’이라는 상투적 이해를 훌쩍 뛰어넘는 외교안보 교재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맡은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이 ‘전쟁영웅’ 맥아더 유엔군 최고사령관과 벌이는 파워게임, 매카시 의원의 선동으로 시작된 반공의 광기 속에서 장제스의 중국 본토 수복을 도와야 한다는 친중 언론과 미국 국무부의 갈등 격화, 한국전쟁이 미국의 대중 관계에 미친 악영향 등 미국 정계와 외교 문제 전반이 수록돼 있다. 기대했던 북한군의 전투 동선은 거의 나오지 않았고, 전장은 미군이 많이 전사한 운산·장전호 전투가 중심이었다. 9월 인천상륙작전에 고무돼 오만해진 맥아더 전쟁지휘부는 겨우 2주 훈련으로 한국에 파견된 솜털 보송보송한 20대의 미군들을 여름 군복 차림으로 평안북도까지 내몰았다가 10월 말 추위와 공포 속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속절없이 전사하도록 노출시켰다. 이 20대 젊은이들은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지낼 기대에 잔뜩 부풀었는데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국방비와 해외 파병을 10분의1 수준으로 가파르게 축소하던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 발발로 그 정책을 포기해야 했으니, 미국 의회의 동의도 없이 참전을 단독으로 결정한 그에게도 한국전쟁은 뼈아픈 전쟁이었고, 대만을 도울 기회를 잃었다는 격렬한 언론의 비판에도 직면했다. 그 책에 지난해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뿐 아니라 하노이에서도 미군 유해 송환에 미국 정부가 그렇게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만한 대목이 있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은 3만 4000명 정도다. 한국전쟁은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잊을 수도, 잊어도 안 되는 전쟁이지만, 미군이나 유엔군의 이름으로 참전한 군인이나 북한을 도운 중공군조차도 영광도 명예도 없는 ‘잊힌 전쟁’에 불과했다. 남한 측의 피해가 막대하다고 해서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미국, 프랑스, 터키, 독일 등에서 참전한 젊은 군인들의 희생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지 않았다. 김일성의 남한에서의 행보 추적은 결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08년 펴낸 6·25전쟁사 4권 223쪽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김일성은 1950년 7월에 충주 수안보 인근까지 내려와 낙동강 전선을 어서 돌파하라고 독려했다’는 요지였다. 그 출처는 전쟁기념사업회의 ‘한국전쟁사´(1992) 3권 250쪽이었다. 공식 문서가 출처인 셈이다. 이것 외에도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이 쓴 회고록에도 ‘서울을 거쳐 충북 수안보까지 내려왔다’고 돼 있다고 했다. 북한군 사령관이던 김책은 항일 동지로, 백두혈통은 아니었다. 지난해 9월 1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 발표가 있었을 때 평양공동취재단 등에서 ‘북측 최고지도자의 서울 방문은 역사상 처음´이라고 표현을 바꾸었다. 살짝 달라진 것이지만, ‘6·25전쟁 이후 백두혈통의 첫 방문’과 같은 표현이 무의식적으로 유발하는 적개심과 분노, 경계심과 근심 등은 완화된 듯했다. 올봄 김 위원장이 서울 답방을 한다면 북미 정상회담과 같은 역사적 발걸음은 시작되는 것이다. 2017년 내내 한반도는 ‘제2의 한국전쟁’을 우려하며 불안에 시달렸다. 1년 2개월 뒤인 현재 하노이의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실시간으로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다. 평양과 워싱턴에 북미가 각각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두 나라가 종전을 선언하면 한반도뿐만 아니라 세계에도 더 안전한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다. ‘완전한 비핵화가 아니면 노딜’이라는 주장이나 ‘한국이 빠진 종전선언은 동의할 수 없다’는 발언은 비상식적이다. 더는 반공으로 세력을 키우고 생존할 수 없다. 그런 관성으로 버텨 온 진영이 한반도 냉전이 해체되는 새로운 시대를 직시하지 못한다면 미래는 없다.
  • ‘미드’서 언급된 文대통령 부모 화제…한국전쟁 피란 장면서

    ‘미드’서 언급된 文대통령 부모 화제…한국전쟁 피란 장면서

    문재인 대통령 부모가 한국전쟁 당시 피란한 사연이 미국드라마(이하 미드) ‘타임리스’(Timeless)에서 언급되면서 SNS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타임리스는 시간여행에 관한 내용으로, 온라인동영상스트리밍(OTT) 서비스 넷플릭스에서 선보인 미드이다.. 지난 9일부터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소위 문 대통령의 ‘미드 출연’ 사실은 10일 현재까지도 네티즌들의 눈길을 모으고 있다. 대다수 네티즌들은 “미드에 한국 대통령이 언급되니 신기하다”는 반응이다. 문 대통령이 언급된 타임리스 방영분은 시즌2 에피소드 11·12화(크리스마스의 기적 1·2부)로 알려진다. SNS상에서 공유되고 있는 주요 장면에 따르면 1950년 함경남도 흥남(극중에서는 North Korea로 표기된다)에서 부두로 향하는 장면이다. 주인공 중 한 남성이 함께 걷던 여성에게 “배에 탄 사람 중 중요한 인물이 있나요?”라고 묻자 여성은 “미래의 한국 대통령 문재인의 부모님이요”라고 답한다. 해당 장면은 시즌2의 11화 ‘크리스마스의 기적 1부’에서 러닝타임 40분쯤에 등장한다.청와대도 전날(9일) SNS에서 화제가 된 후에야 문 대통령이 미드에서 언급된 사실을 알았다고 전한다. 문 대통령은 국내외로 여러 번 흥남철수작전에 얽힌 가족의 사연을 밝혔었고 이를 타임리스 제작진들이 눈여겨본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 부모님은 6·25전쟁 당시 ‘흥남철수 배(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거제로 피란했다. 문 대통령은 2017년 6월 취임 첫 방미 때도 첫 번째 일정을 장진호전투 기념비 헌화 일정으로 잡아 눈길을 끈 바 있다. 장진호전투에서 중공군 남하가 막히며 당시 북한 주민들은 남한으로 피란(흥남철수작전)이 가능했다. 문 대통령은 이때 기념사를 통해 “장진호의 용사들이 없었다면,흥남철수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제 삶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6·25영웅 英스피크먼 부산 유엔공원에 영면한다

    6·25영웅 英스피크먼 부산 유엔공원에 영면한다

    6·25전쟁 때 중국군(중공군) 진지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육박전을 벌여 전쟁영웅으로 불렸던 영국군 참전용사 고(故) 윌리엄 스피크먼이 부산 유엔공원에서 영면한다. 3일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작년 6월 별세한 스피크먼의 유해가 고인의 유언에 따라 다음달 중 인천공항으로 봉환되어 부산 유엔묘지에 안장된다.스피크먼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1월 임진강 유역 마량산 고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스코틀랜드 수비대 1연대 소속이던 스피크먼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이용해 남하하던 중공군을 동료들과 수류탄 공격과 육탄전으로 저지했다. 스피크먼의 용맹스러운 활약으로 사기가 오른 부대는 진지를 4시간 넘게 사수하면서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영국 정부도 그의 공적을 인정해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수여했다. 그는 2015년 이 훈장을 한국에 기증했다. 영국에는 그의 이름을 본떠 맨체스터의 건물과 다리의 이름이 지어지기도 했다. 2010년과 2015년 한국을 방문한 그는 “영국 사람들에게 늘 한국의 발전상을 이야기하며 ‘내가 그곳에서 싸웠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며 “죽으면 재가 돼 마량산 고지(임진강 유역)에 묻혀 영면하고 싶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날 이에 대한 소식을 접한 뒤 국가보훈처에 “안장식 준비와 유가족 체류 일정에 소홀함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써 달라”고 주문했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도경수 “저도 몰랐어요, 춤출 때 그렇게 웃는지”

    도경수 “저도 몰랐어요, 춤출 때 그렇게 웃는지”

    살벌한 전쟁터에서도 청춘의 꿈과 내일의 희망은 자라는 법이다. 강형철 감독이 영화 ‘과속스캔들’, ‘써니’, ‘타짜-신의 손’에 이어 네 번째로 선보이는 장편 ‘스윙키즈’(19일 개봉)는 1951년 한국전쟁의 한복판에서 춤을 통해 행복을 찾고자 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주연을 맡은 배우 도경수(25)는 서로를 겨누는 총 대신 그저 리듬에 자신을 맡기고 싶었던 북한 병사 ‘로기수’를 연기했다. 북한군·중공군 등 포로들로 구성된 댄스팀 ‘스윙키즈’의 메인 댄서로서 ‘미제 춤’인 탭댄스를 배우며 춤의 매력에 흠뻑 빠져드는 인물이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와 영화 ‘카트’, ‘신과 함께’ 등에서 정서적으로 불안한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연기했던 도경수는 이번 작품에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아왔다. 포로들 사이에서 추앙받는 리더로서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이내 순수한 어린 아이처럼 환하게 맑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도경수는 “제 안에 있는 장난스러운 모습, 남자답고 호기로운 모습은 지금까지 보여드리지 않아서 그런지 ‘로기수’라는 캐릭터에 엄청 끌렸다”면서 “이상과 현실이 다른 상황에 처한 청춘이 내뿜는 열정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점도 이 영화를 꼭 하고 싶었던 이유”라고 설명했다. ‘스윙키즈’는 한국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시나리오의 3분의 1 이상이 음악과 춤 장면으로 이루어졌다. 도경수는 댄스단 ‘스윙키즈’의 멤버 중 가장 많은 분량의 탭댄스 장면을 선보인다. 특히 과거 브로드웨이 무대를 누비던 탭댄서이자 댄스단을 결성한 미군 하사 잭슨(자레드 그라임스)과 일대일로 탭댄스 실력을 겨루는 장면에서 고난도의 동작도 무리없이 소화한다. 아이돌 그룹 엑소의 멤버 디오(D.O.)로 파워풀한 칼군무로 단련된 그에게도 탭댄스는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다.“캐스팅 확정되고 촬영 하기 전 5개월간 탭댄스를 배웠어요. 극 중 로기수가 탭댄스의 리듬이 자꾸 떠올라서 쉽게 잠을 못 이루는 장면이 있는데 저도 자기 전에 탭댄스만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지금까지도 무의식중에 발을 두드리는 습관이 있는 걸 보면 ‘많이 연습하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직접 해보니까 탭댄스는 하나의 악기 같더라고요. 손으로 드럼을 치듯이 발로 바닥을 두드리고 스스로 박자를 만드는 게 매력 있어요. 유산소 운동으로도 제격이고요.(웃음)”도경수는 극 중 로기수가 영국 뮤지션 데이비드 보위의 ‘모던 러브’를 배경으로 춤추는 모습을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았다. 로기수가 수용소에서의 갑갑한 현실을 잠시 잊고 춤에 대한 끓어오르는 열정을 몸으로 발산하는 장면이다. “감독님께서도 제게 ‘너가 알아서 표현해보라’고 말씀하신 장면이에요. 촬영하면서 해방감을 느꼈고 스트레스도 진짜 많이 풀었어요. 제가 춤출 때 그렇게 웃는지도 처음 알았고요. 그동안에는 짜여진 안무를 선보였다면 이번에는 제가 잘 할 수 있는 춤을 춘 느낌이었어요. 예전에는 촬영장에서 긴장을 많이 해서 선배들 눈도 못 쳐다볼 정도였는데 지금은 뭐든 재밌어요. 이 영화를 찍으면서 제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의미겠죠.” 그간 다양한 배역을 맡으며 연기 경력을 차곡차곡 쌓아온 도경수는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을 계기로 중장년 팬까지 사로잡았다. “10~20대들이 엑소의 디오를 많이 알아본다면 이제는 어머니들도 저를 좋아해주시더라고요. 최근에 팬들께 사인을 해드릴 때 ‘누구누구 어머니’라고 쓰는 경험을 많이 해요. 행복한 경험이죠. 앞으로도 저의 연기를 보시는 많은 분들에게 에너지와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 나이대에 도전할 수 있는 캐릭터라면 어떤 것이든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멜로든 누아르든 휴먼드라마든 상관없이요.”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포로의 눈에 비친 전쟁… 평화의 이유 곱씹게 합니다”

    “포로의 눈에 비친 전쟁… 평화의 이유 곱씹게 합니다”

    美·英 등 세계 곳곳서 기록물 발굴 내년 1월 17일까지 100여점 전시 거제시,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전쟁포로 기록을 들여다보면 왜 전쟁이 아닌 평화를 선택해야 하는지 곱씹게 되지요.” 1950년 발발한 6·25전쟁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일시적으로 전투를 중단한 ‘정전’ 상태가 65년간 이어지고 있다. 최근 북한 비핵화 협상과 더불어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해 전쟁 상태를 끝내자는 ‘종전’ 선언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6·25전쟁 포로 아카이브 자료 공개 전시회 ‘전쟁포로, 평화를 말하다’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어 눈길을 끈다. 내년 1월 17일까지다.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가 있었던 수용소 유적이 남아 있는 경남 거제시의 의뢰를 받아 최근 3년가량 자료를 발굴해 온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ISPDR) 팀의 공동연구원 김민환 한신대 교수는 12일 “이번 전시회가 마지막 냉전의 땅인 한반도의 통일과 세계 평화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6·25전쟁은 1년여 만에 전선이 고착화됐지만 빨리 종결되지 못하고 2년 가까이 더 이어졌습니다. 전쟁포로를 둘러싼 여러 쟁점 때문입니다. 전쟁 후반은 사실상 포로들을 놓고 벌인 전쟁에 다름 아니었죠.”수용소 등에 대한 사진과 영상, 문서 자료 100여점을 전시회 현장과 도록을 통해 접할 수 있다. 대부분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자료들이다. 국내 육군기록정보관리단, 국토지리원을 비롯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영국 왕실 전쟁박물관, 네덜란드 국립기록관(NAN), 국제적십자위원회 등에서 수집한 6만여쪽에서 추렸다. 정규군 외에 비정규군인 빨치산, 심지어 일부 피난민까지 포로가 됐던 사연, 수용소에서의 삶, 어느 곳으로 돌아갈 것인지를 정하기 위한 ‘자발적이지만 강요된’ 포로들의 선택, 최종 선택지에서 발생한 차별 및 억압까지 조망할 수 있다. 포로수용소를 짓기 위해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살던 곳에서 쫓겨나 또 다른 수용소에서 살아야 했던 지역민들의 이야기도 곁들여진다. “미국은 체제 경쟁에 대한 자신감에 인도주의를 내세워 포로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가게 하자는 자원 송환 원칙을 세웠지만 포로 모두에게 폭력적인 결과를 낳았죠. 북한군 포로가 반공포로로 남쪽에 남아도 의심의 눈초리는 지워지지 않았고 북으로 돌아갔어도 경계 대상이 됐습니다. 그것은 남으로 돌아온 국군포로와 미국, 영국, 중국, 대만 등으로 돌아간 그 나라 포로들도 마찬가지였죠. 포로들에겐 눈에 보이지 않은 전쟁이 계속된 셈이죠.” 거제시는 이번 자료 발굴을 바탕으로 아카이브 센터를 구축하는 등 포로수용소 유적 공원을 재정비할 계획이다. 또 6·25전쟁 포로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도 추진하고 있다. “1949년 체결된 전쟁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이 처음 적용된 게 6·25전쟁이고, 당시 포로수용소는 다국적 공간이었죠. 국내에 국한된 게 아니라 국제적인 보편성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 나라에 남아 있는 자료들을 보태며 힘을 모으면 등재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글 사진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인민군 치하의 땅굴 생활… 헌병 된 후 참전해 무공훈장 받아”

    “인민군 치하의 땅굴 생활… 헌병 된 후 참전해 무공훈장 받아”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9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했다. 20년간 노력해 마침내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은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류문길 인터뷰 일시 1997년 10월 17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규원치과 3층) 대담 류문길 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내고향 평안남도 순천 나는 1933년 1월 15일날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8·15해방(解放)을 맞으면서 나는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인천에 살고 있는 이모님을 찾아 어머니와 나는 인천 화수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6·25 사변과 3달간의 땅굴 생활 6·25 사변이 터지고, 인민군은 인천에 쳐들어와서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던 좌익 학생들이 표면에 나서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청소년들과 중학생들을 인민의용군으로 강제로 잡아가는 일이 시작되었다. 그때 숨을 곳을 만들기 위해 허용환, 김유득, 정명돌 등의 친구와 나는 지금 자유 공원의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이 있는 곳에 땅굴을 파서 인민군 치하의 땅굴 생활을 시작하였다.9·15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심선택 해병 소위 1950년 9월 15일 UN군이 인천상륙작전 할 때 UN군의 함포사격으로 인천 시내가 많은 피해를 보았다. 9월 16일이 돼서야 우리 해병대가 참전하여 상륙한 것을 알게 되었고, 수색하면서 들어온 해병대에서는 아침 8시쯤에 지금 즉시 주민들은 남녀를 가리지 말고 송현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심선택 해병 소위가 중학생을 따로 집합시켜 놓고 전시하 학생들의 활동에 대한 훈시를 하였다. 심선택 해병 소위님은 1926년 인천에서 태어나시고,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모교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영어선생님을 하시다가 뜻한 바 있어 교직을 사직하시고, 해병 사관 2기로 시흥보병학교에 입교하여 1950년 7월 31일 해병 소위로 임관하여 9·15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신 분이었다. 심선택 소위님의 훈시 내용 (부탁의 말) ①학생들은 통일 조국의 장래를 책임져야 할 역군이기 때문에 절대로 보호되어야 한다. ②금번 통일전쟁은 우리 기성세대에게 맡기고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 공부하여야 한다. ③학생들은 학교가 정상화 될 때까지 자치 단체를 구성하여 호국활동을 하여야 한다. ④학생들은 경찰이 복귀할 때까지 군(軍)의 지시를 받아 치안 유지에 협조하여야 한다.심선택 해병 소위님의 전사 소식 나는 나중에 “심선택 소위님은 자원입대를 원하는 제자 몇몇을 해병으로 입대하게 하고, 같이 북진(北進)하다가, 1950년 11월 12일 함경남도 마한령에서 후퇴하는데, 제자 해병대원이 낙오한 사실을 알고 구하려다가 북한괴뢰군의 흉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전사하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북부지구 학도치안대의 창설 심선택 소위의 훈시를 들은 우리들은 그 즉시 모임을 만들어 명칭을 북부지구 학도치안대(學徒治安隊)라 짓고 본부는 송현국교 교실 하나를 이용하였다. 우리 학도치안대의 활동 지역이 경인선을 경계로 북쪽 지역이어서 북부지구 학도치안대라고 정하였다. 매일 인천 주둔 해병대 사령부에서 사용하는 암호를 전달받으며, 치안 유지 및 학생 선도 그리고 피난민 안내 등의 호국 활동을 하였다.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로 명칭 변경 그 후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가 창립되어서, 명칭이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로 바뀌었다. 이때가 1950년 10월 초였다. 이후 인천학도의용대 본부와 계속 연락을 취하면서 학교가 정상화 될 때까지를 기다리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학생들을 인천학도의용대 가입을 권유하면서 한편으로는 학생들의 탈선을 막는 데 주력하였다. 중공군 참전으로 헌병 10기 입대 10월에 들어서면서 중공군의 참전 뉴스는 나를 허탈하게 하는 소식이었다. 그것은 곧 남북통일이 되면 내 고향 평안남도 순천에 찾아가려고 한껏 부풀어 있었는데 허사가 된 것 같아 나는 어쩌나 하고 있을 때인 1950년 10월 중순에 서울에서 헌병(憲兵) 10기생 모집이 있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이때 나는 주억재와 같이 서울에 가서 그 헌병모집에 지원하여 1950년 10월 20일 합격하였다. 국군 제6사단 7연대 최전방에서 내가 헌병 10기생으로 전방으로 전속되어 간 곳이 강원도 전투지역에 있는 제6사단 7연대 최전방이었다. 그 6사단 7연대에 배치된 나는 많은 전투에 참전하여 무공훈장(武功勳章)을 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6사단 헌병대원으로부터 시작된 나의 군 생활은 최전방에서만 있다가 1963년 10월 1일 날 군 복무를 시작한 지 13년 11개월만에 명예제대하였다. 북구지대 중학생들의 자원입대와 참전 1950년 12월 18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천학도의용대 대원 모두가 부산을 향하여 20일간 걸어서 남하하여 1951년 1월 10일 우리 북구지대 지대원들도 거의 대부분 자원입대하고 참전하였다. 그중 몇 명은 전사하였다는 비보(悲報)를 전해 들었다.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출신 전사 학생 박명호 인천공업중 3학년 전사 이중수 인천영화중 4학년 전사 이화식 인천동산중 4학년 전사 조순범 공립인천중 1학년 전사 최춘국 인천상업중 4학년 전사 황하삼 인천해성중 2학년 전사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발굴 소식을 듣고 내가 6·25 사변 때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에서의 활동은 내 평생 최고로 보람된 일로 내 가슴 속에 곱게 품고 지내오고 있었지만 그 한쪽 구석에서는 늘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인천학도의용대의 호국활동이 전혀 기록으로 남아있지 못하여 늘 마음에 걸렸었다.이규원 치과 원장이 6·25 사변으로 인하여 청소년기에 고향을 지키기 위하여 참전한 아버지(이경종·16세 참전)와 아버지와 같이 참전했던 인천학생스승의 6·25 참전역사를 발굴기록하며,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를 편찬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감명을 받았다. 오늘 나는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창설배경과 활동 과정 그리고 자료를 들고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를 방문하여 이규원 치과 원장을 만나서 자료 일체를 기증한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 해병 소위 고 심선택은 해병 소위 심선택(위 큰 사진 빨간 화살표)은 1926년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모교 인천상업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있다가 교직을 사직하고, 해병 사관후보생 2기로 시흥보병학교에 입교하여 제주도에서 해병 소위로 임관했다. 9·15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고, 인천에서 현지 입대한 제자 해병대원이 낙오된 것을 알고 구하려다가 북한 괴뢰군의 흉탄을 맞고 24세의 젊은 나이로 1950년 11월 12일 함경남도 마한령에서 전사하였다.
  • DMZ 내 ‘전술 도로’ 연결…남북 군인들 함께 악수해

    DMZ 내 ‘전술 도로’ 연결…남북 군인들 함께 악수해

    남북은 22일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DMZ) 내 화살머리고지에서 전술 도로를 연결했다. 이 일대는 내년으로 예정된 공동유해발굴에 앞서 지뢰를 제거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굴착기를 이용해 수목을 제거하고, 지뢰 탐지 및 제거 작전 장비를 투입할 수 있는 진입로를 확보했다. 전술 도로의 길이는 북측은 1.3㎞, 남측은 1.7㎞로 총 3㎞가량이다. 이날 남북 도로 연결은 2003년 10월 경의선 도로와 2004년 12월 동해선 도로 개설 이후 14년 만이다. 올해 말까지 도로를 연결하는 작업을 완료하고, 내년엔 전기와 통신 선로를 설치하고 유해발굴 공동사무소를 개설할 예정이다. 연결 작업은 DMZ 내에서 이뤄지는 만큼 육군 공병대가 투입된다. 참여한 남북 군인들은 DMZ 내 군사분계선(MDL) 인근에서 서로 만나 악수를 하고, 공사 진행 상황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국방부는 “이번에 개설된 도로는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한반도의 정중앙인 철원 지역에 남북을 잇는 연결도로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가장 치열했던 전쟁터의 한 가운데에 남북을 연결하는 통로를 열어 과거의 전쟁 상흔을 치유하기 위한 공동유해발굴을 실효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역사적 의미도 있다”고 평가했다. 또 도로 이용과 관련한 구체적인 방안은 ‘9·19 군사합의서’에 명시된 대로 남북 군사 당국 간 추후에 협의해 결정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북 군사 당국은 DMZ 내 공동유해발굴지역에 대한 남북 연결도로 개설을 계기로, 내년 4월부터 10월까지 시범적 공동유해발굴 작업이 정상적으로 추진되도록 노력할 예정이라고 국방부는 덧붙였다. 화살머리고지는 6·25전쟁 당시 1953년 6월 29일과 7월 11일 두 차례에 걸쳐 연합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여 승리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국군 2·9사단, 미군 2사단, 프랑스대대와 중공군이 전투를 벌였다. 국방부는 이 일대에 국군 전사자 200여명, 미군 및 프랑스 전사자 100여명 등과 북한군, 중공군의 유해도 매장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곽혜진 기자 demian@seoul.co.kr
  • DMZ 화살머리고지서 전사자 유해 2구 추가 발견

    DMZ 화살머리고지서 전사자 유해 2구 추가 발견

    지난달 24일 국군 전사자 유해가 발굴된 강원도 비무장지대(DMZ) 화살머리고지에서 전사자 유해가 추가로 발견됐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은 남북 공동 유해발굴 작업을 위해 지뢰 제거 작업이 진행 중인 화살머리고지에서 최근 유해 2구를 추가로 발견했다고 6일 밝혔다. 앞서 국유단은 지난달 24일 고 박재권 이등중사(지금의 병장)의 유해를 발견한 적이 있다. 이번에 추가로 발견된 유해는 종아리뼈와 정강이뼈다. 종아리뼈는 지난달 29일 지뢰제거 작업 중에, 정강이뼈는 지난 5일 도로개설 작업 중에 각각 발견됐다. 이번 유해 2구는 모두 6·25전쟁 때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됐다. 그러나 국군 전사자인지는 정밀감식을 거쳐야 확인할 수 있다. 국유단은 추가 발견한 유해를 지난달 30일과 이날 각각 수습해 약식 제례(현장에서 유해를 수습해 봉송하기 전에 전사자에 대한 명복을 기원하고 유해가 발굴 현장을 떠남을 알리는 의식) 후 임시 봉안소에 안치했다. 향후 신원 확인을 위한 정밀감식과 DNA(유전자) 분석을 진행할 예정이다. 화살머리고지는 6·25전쟁 당시 치열한 고지전이 벌어졌던 철의 삼각지역 중 한 곳이다. 국군 전사자 200여명과 미군·프랑스 전사자 100여명의 유해를 비롯해 북한군과 중공군의 유해도 함께 매장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재권 이등중사의 인식표 등 유해와 유품이 처음 발견됐으며, 그 이후 지금까지 유품 5000여점이 수습됐다. 남북은 ‘9·19 군사합의서’에 따라 내년 4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화살머리고지 일대에서 남북 공동유해발굴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유해 발굴 사전 작업으로 지난달 1일부터 시작된 지뢰와 폭발물 제거 작업을 오는 30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역사의 아픔 보듬는 거제!

    역사의 아픔 보듬는 거제!

    ●한국전쟁 흔적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거제는 우리 역사의 아픈 상처를 되돌아보는 ‘다크 투어리즘’ 공간이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의 연전연승에 가려 주목받지 못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에게 대패한 칠천량 해전의 아픔이 서린 곳이다. 6·25 이후엔 북한 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를 수용했던 포로수용소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고현동 거제시청 인근에는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이 있다. 6·25 전쟁 초반 낙동강까지 밀리는 열세를 딛고 북으로 전진하면서 포로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전국 곳곳에 임시 수용하던 포로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대규모 시설이 필요했고 1951년 고현동 일대에 28개 수용동이 들어섰다. 당시 육지와 연결되지 않은 섬이었고 주변이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포로 관리에 유리한 지형이었던 탓이다. 인민군 15만명, 중공군 2만명 등 17만 3000여명이 이곳으로 이송됐다. 수많은 포로를 관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52년 5월에는 수용소 사령관이었던 돗드 미군 준장이 반란을 일으킨 포로들에게 납치되는 일이 발생했다. 한편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 사이에 갈등의 골이 점차 깊어지면서 포로들 간의 폭력이 잦아졌다. 친공 포로가 많은 구역에서는 인민재판이 횡행했고 수백명의 포로가 희생됐다. 폭동과 대립이 끊이지 않자 이념에 따른 포로 분리작업이 진행되기도 했다. 소란스러웠던 거제포로수용소는 휴전을 계기로 끝을 맞는다. 1953년 8월 5일부터 33일간 포로 송환 업무가 진행됐고 수용소는 곧 폐쇄됐다. 대규모 산업단지와 주거지 개발로 옛 수용소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유적공원 내부와 인근에 잔존유적이 일부 남아 있다. 공원 내 탱크전시장, 포로생활관, 유적박물관 등 여러 전시관에는 전쟁 발발부터 포로 송환까지의 역사를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가 전시돼 있다.●전투 과정 한눈에 ‘칠천량해전공원’ 거제도 중심부의 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차를 타고 30여분 북쪽으로 달리면 또 다른 아픔의 현장을 만난다. 거제도 부속섬 중 가장 큰 칠천도 남쪽 중앙부에 위치한 칠천량해전공원이다. 칠천량 해전은 임진왜란·정유재란 가운데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다. 1597년 조선을 다시 침범한 일본은 임진왜란이 실패한 것은 이순신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이간책을 꾸몄다. 당시 임금인 선조는 이간책을 눈치채고도 이순신을 하옥하고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원균은 삼도의 수군 160여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해 왜군의 본진이 있던 부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탐지한 적의 교란작전에 고전했고 가덕도에서 기습을 받아 400여명의 군사를 잃었다. 황급히 칠천량으로 후퇴했지만 거푸 기습을 당했고 여러 장수들이 전사했다. 육지로 탈출한 원균도 결국 추격을 받아 전사했다. 해전공원전시관은 당시 조선과 일본 수군의 전력과 전투 전개 과정 등을 보여 준다. 공원 중앙에는 바다를 향해 평온하게 앉아 있는 아이 형상의 설치물이 평화를 염원하고 있다. ●여행가방 →거제포로수용소 입장료는 어른 7000원이다. 계룡산 모노레일 탑승요금(왕복 1만 2000원)을 낸 경우 2000원에 수용소 관람을 할 수 있다. 칠천량해전공원전시관은 지난해 11월부터 무료입장으로 바뀌었다. →잘 곳 : 한화호텔앤드리조트가 지난 15일 거제시에 문을 열었다. 거가대교를 건너면 금세 만날 수 있는 농소몽돌해변 인근에 자리잡았다. 거제의 바다와 해변, 웅장한 거가대교 전망과 함께 럭셔리 리조트의 호화 서비스를 즐길 수 있다. 총 470실의 객실은 일반고객도 예약 가능한 벨버디어와 회원 한정인 프리미엄으로 나뉜다. 프리미엄 객실 이용객은 21층에 조성된 바다 전망 풀을 이용할 수 있다. ‘바운스 트램펄린파크’, ‘뽀로로 키즈카페’ 등 국내 최대 수준의 키즈 엔터테인먼트 존을 갖춰 가족 투숙객에게 추천할 만하다. ‘양지바위횟집’, ‘다리집’ 등 거제 맛집 8곳을 입점시킨 푸드코트도 눈길을 끈다.
  • 철의 삼각지서 찾은 ‘박재권 중사’… DMZ 긴장완화 첫 결실

    철의 삼각지서 찾은 ‘박재권 중사’… DMZ 긴장완화 첫 결실

    유해발굴감식단 허벅지뼈 등 찾아내 인식표 토대 박재권 이등중사로 확인생존 여동생에 DNA 일치 확인 예정발견된 수통 30여발 총탄 박혀 있어지난 24일 비무장지대(DMZ)에서의 첫 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은 지난달 평양 남북 정상회담 때 체결된 ‘9·19 군사합의서’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즉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3차례 남북 정상회담에 따른 획기적 군사적 긴장완화 조치가 없었다면 영영 발굴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평화’의 당위성을 무엇보다 선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라는 평가가 나온다. 남북은 9·19 군사합의서를 통해 내년 4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강원 철원의 화살머리고지에서 공동유해발굴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남북은 사전 작업으로 지난 1일부터 이 고지에서 지뢰와 폭발물을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22일 공병부대에서 지뢰 제거 작전을 펼치던 중 M1대검 등 다수의 유품이 발견됐고,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24일 해당 지역에서 허벅지뼈 유해를 발견해 추가 조사활동을 시작했다. 군은 함께 발견한 인식표를 토대로 부대 전사자 명부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 6·25전쟁에서 전사한 국군 2사단 31연대 7중대 소속의 박재권 이등중사(현재의 병장)로 나타났다. 박 이등중사는 1931년 10월 2일생으로, 1952년 3월 21일 국군에 입대해 1953년 7월 10일 현재 화살머리고지의 옛 행정지명인 ‘강원 철원 내문면 하덕검리’에서 전사했다. 박 이등중사가 소속된 국군 2사단과 미군 9군단이 참전한 화살머리고지 전투는 1953년 6월 29일부터 30일까지, 7월 6일부터 11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전개된 전투였으나, 박 이등중사는 안타깝게도 전투가 끝나기 하루 전인 7월 10일에 장렬히 전사했다. 화살머리고지는 6·25전쟁 당시 남북이 치열하게 전투를 했던 ‘철의 삼각지’ 전투지역 중 하나로, 1951년 11월부터 1953년 7월까지 국군 2·9사단, 미군 2사단, 프랑스대대와 중공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지역이다. 아군과 적군을 포함해 3400여명이 이 전투에서 희생됐다. 현장에서는 M1 소총과 헬멧, 수통, 탄두 등 아군과 적군의 전투 유품이 뒤섞여 발견됐다. 수통 중 하나에는 30여발의 탄이 박혀 있기도 했다. 국유단은 박 이등중사가 2남 3녀 중 장남으로, 현재 여동생 2명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유가족으로부터 DNA 시료를 채취해 식별된 유해와의 일치 여부를 확인할 예정이다. 25일 유해가 발굴된 현장에서는 전사자에 대한 명복을 기원하는 약식제례가 진행됐다. 군은 화살머리고지에 국군 전사자 200여명을 포함해 미군, 프랑스군 전사자 100여명과 북한군과 중공군의 유해도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DMZ 내에는 1만여구의 국군 전사자 유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국방부공동취재단·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DMZ에서 국군 전사자 유해 첫 수습…고 박재권 이등중사

    DMZ에서 국군 전사자 유해 첫 수습…고 박재권 이등중사

    비무장지대(DMZ)에서 국군 전사가 유해가 처음으로 수습됐다. 6·25전쟁 당시 국군 2사단 31연대 7중대 소속 고 박재권 이등중사(현재 병장)의 유해로 확인됐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은 남북 공동 유해발굴 작업을 위해 지뢰 제거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강원도 DMZ 화살머리고지에서 국군 전사자 유해를 발견했다고 25일 밝혔다. 지표면에서 허벅지 뼈가, 지표면 아래 약 20cm 깊이에서 갈비뼈와 두개골 편이 각각 발견됐다. 유해와 함께 나온 인식표 1개에는 ‘대한 8810594 PAK JE KWON 육군’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M1대검, M1탄도 발견됐다. 국유단은 6·25전쟁 당시 전사(戰史)와 매·하장 보고서, 부대 전사자 명부를 통해 박 이등중사의 유해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병적에 따르면 고인은 1931년 10월 2일 2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고, 1952년 3월 21일 입대했다. 하지만 1953년 7월 10일, 현재 화살머리고지의 옛 행정지명인 강원 철원 내문면 하덕검리에서 전사했다. 고인이 속했던 국군 2사단과 미군 9군단이 참전한 ‘화살머리고지 전투’는 1953년 6월 29일부터 30일까지, 7월 6일부터 11일까지 2차례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됐다. 고인은 안타깝게도 전투가 끝나기 하루 전에 전사했다. 국유단은 고인의 동생 2명으로부터 DNA 시료를 채취해 신원을 최종적으로 확인할 것이라고 설명했다.화살머리고지에는 국군 전사자 200여명과 미군·프랑스 전사자 100여명의 유해를 비롯해 북한군과 중공군의 유해도 함께 매장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유단은 이날 DMZ에서 수습된 유해를 관에 넣어 태극기로 감싸는 약식 제례를 진행했다. 약식 제례는 현장에서 유해를 수습해 봉송하기 전에 전사자에 대한 명복을 기원하고 유해가 발굴 현장을 떠남을 알리는 의식이다. 이들 유해는 부대 내의 임시 봉안소에 안치할 예정이다. 남북은 ‘9·19 군사합의서’에 따라 내년 4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화살머리고지 일대에서 남북 공동유해발굴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유해 발굴 사전 작업으로 지난 1일부터 시작된 지뢰와 폭발물 제거 작업을 다음 달 30일까지 이어갈 예정이다. 국유단 관계자는 “68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6·25 전사자를 기다려 온 수만의 유가족분들께 희망을 주는 사례”라면서 “DMZ 내에 1만여구의 미수습 국군 전사자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남북 공동유해발굴의 필요성과 절실함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文대통령 있게 한 ‘장진호 전투’ 추모식서 “한·미동맹 평화여정 계속”

    文대통령 있게 한 ‘장진호 전투’ 추모식서 “한·미동맹 평화여정 계속”

    문재인 대통령은 10일 “피로 맺어진 (한·미)양국 국민 간 깊은 인연과 우정이 평화를 향한 동행으로 이어졌고, 평화를 위한 한·미동맹의 여정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문 대통령은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제3회 장진호 전투영웅 추모식에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대독한 추모사를 통해 “저는 오늘 영웅들의 영전에 ‘이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가 다가오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며 다시 한 번 깊이 추모한다”며 이렇게 밝혔다. 장진호 전투는 6·25전쟁 당시 동부전선의 미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 7개 사단 규모가 포위한 장진호 계곡을 벗어나기 위해 1950년 11월 말부터 2주간 전개한 철수 작전이다. 중공군의 함흥 진입을 2주간 지연시키면서 흥남 철수가 가능했고, 미군 제공 선박을 통해 9만여명의 민간인이 남쪽으로 피난하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가능했다. 당시 흥남에 살던 문 대통령의 부모와 젖먹이였던 누이도 미군 LST(병력이나 전차를 상륙시키는 함정)에 타고 경남 거제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문 대통령은 “장진호 전투는 위대한 승리였고 수많은 피난민을 살려낸 인류애의 현장이었다”며 “고립된 가운데 10배에 달하는 적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10만여 피난민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함께했던 용기 있는 행군이 위대한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만들었고, 오늘 한반도 평화의 첫걸음이 됐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남북정상회담과 역사적인 미·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치러졌고, 지난 9월 평양공동선언을 통해 전쟁 없는 한반도의 시작을 알렸다”며 “조만간 열릴 2차 미·북정상회담을 통해 핵무기도 핵위협도 없는 한반도를 실현하고 영원한 평화를 선언한다면 장진호 전투의 희생이 얼마나 가치 있는 희생이었는지 전 세계에 보여주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취임 후 첫번째 미국 방문 때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워싱턴의 장진호 전투기념비에 헌화했다. 문 대통령은 당시 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연설에서 장진호 전투를 언급하며 “그야말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다”며 “2년 후 미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도착한 거제에서 제가 태어났고, 오늘 이렇게, 미군이 구출했던 피난민의 아들이 대통령이 되어 여러분과 만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오늘은 건군 70주년 국군의날···블랙이글스 야간 에어쇼도

    오늘은 건군 70주년 국군의날···블랙이글스 야간 에어쇼도

    건군 70주년을 기념하는 국군의 날 행사가 1일 열린다. 올해 행사는 이날 오전 성남 서울공항에서 ‘국군 유해 봉환식’으로 시작된다. 1996년부터 2005년까지 약 10년간 미국과 북한이 공동으로 함경남도 장진호, 평안북도 운산 지역 등에서 발굴한 유해 중 한미 공동감식을 통해 국군전사자로 판정된 64구가 봉환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현역·예비역 장병 등과 함께 국군의 날 경축연 오찬을 갖는다고 뉴스1이 전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강한 안보’를 강조하고 이를 위해 노력해준 군 관계자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언급을 할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이와 별도로 70돌을 맞은 국군의 날에 관한 공식 메시지를 낼 것으로 보인다. 메시지 키워드는 ‘평화’와 ‘자주국방’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이 매체가 전했다.이어 오후 6시 30분 서울 전쟁기념관 평화의 광장에서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기념식은 국군기수단 입장, 훈장과 표창 수여, 태권도 시범, 미래전투수행체계 시연, 축하공연 등으로 진행된다.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는 처음으로 서울 상공에서 야간 에어쇼를 펼친다. 또 5년 주기로 선보였던 군사 퍼레이드 대신, 가수 싸이 등 연예인들이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최현수 국방부 대변인은 “시민 여러분들께서는 항공기 소음이 들리시더라도 양해해 주시길 부탁한다”고 말했다. 한편으론 남북은 이날부터 비무장지대(DMZ)의 시범적 공동유해발굴지역인 강원도 철원의 화살머리고지에서 지뢰와 폭발물 제거작업을 시작한다.지뢰 제거와 함께 DMZ에 묻혀 있는 6·25 전사자 유해발굴도 첫 삽을 뜰 예정이다. 한국전쟁 휴전 직전인 1953년 중공군과 국군간에 고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진 화살머리고지에는 국군전사자 유해 200여 구, 미국과 프랑스 등 유엔군 전사자 유해 300여 구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남북, 1일부터 판문점 JSA·철원 DMZ 지뢰 제거 시작

    남북, 1일부터 판문점 JSA·철원 DMZ 지뢰 제거 시작

    다음달 1일부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과 강원도 철원의 비무장지대(DMZ) 일대에서 지뢰 제거 작업이 시작된다. 이들 지역에서 지뢰 제거 작업은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서명된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의 본격적인 이행을 의미한다. 군의 한 관계자는 30일 “내일부터 JSA 일대를 비롯해 시범적 공동유해발굴 지역인 강원도 철원의 화살머리고지에서 지뢰와 폭발물 제거 작업이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군사 분야 합의서에서 남북은 10월 1일부터 20일까지 판문점을 감싸고 있는 지뢰부터 제거하기로 했다. 같은 날 시작되는 화살머리고지 지뢰 제거는 11월 30일까지 끝내기로 했다. 군 관계자는 “JSA 지역은 그간 인원들의 왕래가 잦아 지뢰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일단은 군사합의서대로 지뢰 유무를 확인하는 작업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군은 남북 정상이 담소를 나눴던 도보다리 주변 습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통행이 불가능하고, 작업에 난항이 예상돼 별도로 지뢰 제거 작업은 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도 우리 군의 작업 시간에 맞춰 자체적으로 판문점 일대의 지뢰 확인과 제거 작업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고 이 이 관계자는 전했다. 지뢰 제거 작업이 진행되면 남·북·유엔사 3자 협의체가 가동되어 JSA 비무장화 이후 적용할 근무규칙, 양측 비무장 군인들의 근접거리 합동근무 형태 등의 규정 마련을 논의하게 된다. JSA 내 군사분계선(MDL)을 넘은 민간인과 관광객 등이 월북 또는 월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대책도 이 협의체에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군 관계자는 “3자 협의체 가동 날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면서 “3자 협의체를 빠른 시일 내 가동한다는 계획”이라고 전했다. 남북은 JSA에서 비무장한 남·북한군 각 35명(장교 5명, 병사 30명)이 함께 근무하는 공동경비 형태를 복원하기로 했다. 원래 JSA에는 정전협정의 정신에 따라 MDL 표식물도 없었고 자유롭게 양측을 넘나들 수 있었다. 남북 경비 초소도 혼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이후 MDL 표식물로 콘크리트 턱을 설치하고 남북 초소도 각각 분리됐다. 상호 대화도 금지됐고, 우리 경비병은 시선을 가리고자 진한 검은색의 선글라스를 착용한다. 양측 경비병들은 기본적으로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다. 북한군 경비병은 철모를 쓰고 권총을 찬다. JSA를 통한 탈북자가 발생하면 경비병들이 AK-47 등 화기를 꺼내와 대응하고 있다. 이와 함께 지뢰와 폭발물 제거 작업이 이뤄지는 DMZ의 화살머리고지에는 국군전사자 유해 200여 구, 미국과 프랑스 등 유엔군 전사자 유해 300여 구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지는 1953년 6월 29일과 7월 11일 두 차례에 걸쳐 중공군의 공격에 맞서 싸워 승리한 지역이다. 특히 남북은 원활한 유해 발굴을 위해 시범적 발굴 지역 내에 남북간 12m 폭의 도로 공사도 시작해 12월 31일까지 완료할 계획이다. 북한은 동해지구보다 2m가 더 넓은 면적의 도로를 DMZ에 건설하는 것에 처음에 난색을 표명했으나 한 발짝 물러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역의 지뢰 제거와 도로 공사에는 공병대 1~2개 대대가 투입될 것으로 알려졌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트럼프가 처음 공개한 6·25 참전 미군 유해 신원은?

    트럼프가 처음 공개한 6·25 참전 미군 유해 신원은?

    미국이 최근 북한으로부터 넘겨받은 6·25전쟁 참전 미군 유해 가운데 2명의 신원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0일(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최근 확인된 유해가 인디애나 버넌 출신의 찰스 맥대니얼(당시 32세) 육군 상사와 노스캐롤라이나 내시카운티 출신의 윌리엄 존스(당시 19세) 육군 일병이라고 밝혔다. 대통령의 ‘트윗 발표’ 이후 국방부도 이들의 신원을 확인했다고 AP 통신이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들 영웅이 집에 왔다”면서 “그들이 편히 잠들기를 바라고, 가족들의 고통도 끝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두 명 가운데 맥대니얼 상사는 녹슨 인식표(군번줄)가 발견돼 이미 이름이 알려진 전사자다. 그의 인식표는 지난달 두 아들에게 먼저 전달됐다. 하와이 지역매체 스타애드버타이저 등에 따르면 맥대니얼 상사는 육군 1기병사단 8기병연대 소속의 위생병으로 1950년 11월2일 북한 평안북도 운산 남서쪽에서 중공군과 교전하다 실종 신고됐다.존스 일병은 25보병사단 24보병연대 소속으로 1950년 11월26일 평안북도 구장에서 중공군과 싸우다가 역시 실종됐다. 그가 활약한 24보병연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병사들로 구성된 부대이며, 장교들만 대부분 백인이었다고 이 매체는 전했다. 미 국방부는 지난달 초 북한으로부터 55개의 유해 상자를 돌려받아 신원 확인 작업을 벌이는 동시에 아직 북한에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미군 유해를 추가로 찾기 위한 협상에 나설 계획이다.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 켈리 맥키그 국장은 이날 북한 내 미군 전사자 발굴작업 재개의 조건을 놓고 다음달 북한과 대면 협상을 시작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AP에 따르면 매키그 국장은 “북한에 대한 보상 금액 등의 조건에서 합의가 이뤄지면 내년 봄 발굴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날 ‘전쟁포로·실종자의 날’을 맞아 성명을 내고 “실종된 우리나라의 영웅들을 찾기 위해 정부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을 약속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싱가포르에서 열린 6·12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부터 미군 전사자 유해 송환 약속을 받아낸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 결과 실종된 전사자 2명의 신원을 확인했고, 아직 한국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미국인들을 최대한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다시 부풀렸다”고 강조했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글로벌 In&Out] 朝中의 역사에서 사라진 기념일, 조중우호월/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朝中의 역사에서 사라진 기념일, 조중우호월/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지난 9월 9일 북한 건국 7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리잔수가 이끄는 대표단이 방북하여 북한 고위간부들과 회담했다. 이 회담에서 북한과 중국은 양국 관계 발전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9월 10일 중국대표단은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여’를 기념하는 조중우의탑(朝中友誼塔)에 헌화하였다.평양에 있는 이 우의탑은 올해 정주년(整週年)이 되는 또 하나의 사건의 상징이다. 이 사건은 1958년 9~10월에 이루어진 중공군의 완전 철수이다. 중공군의 철수는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정치적인 이유로 장기간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지 않고 사료 부족으로 60년이나 흘러간 오늘도 그 원인과 진상이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상태이다.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도하한 중공군의 참전은 한국전쟁의 전세를 바꿨다.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 중공군의 대표가 정전협정에 서명해 전쟁은 끝났지만, 그 직후 군사분계선 이북에는 120여만명의 중공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중공 지도부에 한국전쟁 참전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웃이 자본주의 진영에 편입되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위신과 안보를 확보하는 데도 중요했다. 1953년 9월 중공군 사령관인 펑더화이는 회의에서 한국전쟁에 대해 “서방 침략자가 수백년 동안 동방의 한 해안에서 대포 몇 발만 쏴도 한 나라를 점령할 수 있었던 시대는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중공군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고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를 협의할 것을 건의한다’는 정전협정의 제4조 60항을 실현하기 위한 회의 소집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제네바 회의는 1954년 4월 26일부터 7월 20일까지 열렸지만, 성과 없이 끝났다. 중국은 100만 병력의 군대를 주둔시키는 부담과 극동지역의 긴장 상태를 완화하기 위해서 미국과 공동철수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국 공동철수는 포기하고 주둔군 규모를 조정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은 1954년 9월부터 1955년 말까지 3차례에 걸쳐 56개 사단을 철수하고 약 25만명의 병력만 남겼다. 김일성은 1953년 11월 중국을 방문해 참전에 감사하고 복구건설을 위한 원조를 요청했다. 중국은 북한과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전쟁 중 파괴된 북한 경제의 복구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규모 원조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1954년 3월부터 중공 지원군의 역할은 수리건설, 농업노동 등 경제의 복구로 바꾸었다. 1957년 11월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은 마오쩌둥과 만나 중공군 철수를 논의했다. 김일성은 이후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보내 철수에 대한 2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북한 정부가 외국군대의 한반도 철수에 대한 성명을 발표한 후 중국정부가 이에 응답하여 철수를 진행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한 최고인민회의가 유엔에 공개서한을 보내 소련의 지지를 받으며 중공군 지원군이 철수하는 것이었다. 중공 정치국은 소련과 상의한 후 12월 30일 중공군 철수의 계획을 세웠고 1958년 1월 24일 마오쩌둥이 김일성의 첫째 제안을 지지한다고 김일성에게 통지하였다. 북한은 1958년 2월 5일에 성명을 발표하고 2월 7일 중국도 이를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그해 2월 19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김일성은 ‘연합성명’에 서명해 중공군 철수를 공식화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마지막 부대들이 북한을 떠난 1958년 10월이 북한에서 ‘조중우호월’(朝中友好月)이 되었고 1959년 10월 25일 중공군 참전 9주년과 철수 1주년을 기념으로 우의탑이 건립되었다.
위로